본문 바로가기

Books

아몬드

728x90
 
아몬드
영화와도 같은 강렬한 사건과 매혹적인 문체로 시선을 사로잡는 한국형 영 어덜트 소설 『아몬드』.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해진 공감 불능인 이 시대에 큰 울림을 주는 이 작품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의 특별한 성장을 그리고 있다. 감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열여섯 살 소년 선윤재와 어두운 상처를 간직한 곤이, 그와 반대로 맑은 감성을 지닌 도라와 윤재를 돕고 싶어 하는 심 박사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전한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년 선윤재. ‘아몬드’라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 분노도 공포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는 타고난 침착성, 엄마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에 별 탈 없이 지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이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벌어진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는다. 그렇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윤재 앞에 ‘곤이’가 나타난다. 놀이동산에서 엄마의 손을 잠깐 놓은 사이 사라진 후 13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곤이는 분노로 가득 찬 아이다. 곤이는 윤재를 괴롭히고 윤재에게 화를 쏟아 내지만, 감정의 동요가 없는 윤재 앞에서 오히려 쩔쩔매고 만다. 그 후 두 소년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고, 윤재는 조금씩 내면의 변화를 겪는데…….
저자
손원평
출판
창비
출판일
2017.03.31

 

일러두기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은 1970년대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이다. 아동기에 정서 발달 단계를 잘 거치지 못하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 혹은 선천적으로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는 감정 중에서도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 다만 공포, 불안감 등과 관련된 편도체의 일부는 후천적인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감정표현불능증 :: 정신신체 장애나 중독, 또는 외상 후 상태로 인해 고통을 겪는 환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인지 및 정동 장애. 이 증상의 특징은 정동이 불완전하게 분화되고 불완전하게 언어화되어 신호 기능을 적절히 수행할 수 없는(효과적으로 의사소통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예를 들어, 정신신체 장애 환자는 무표정하고 때로는 경직된 자세와 굳은 얼굴 표정을 보임으로써, 심리적 및 신체적 위험 신호를 무시한다. 중독 환자는 특히 정동이 신체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특히 약물을 사용하여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외상 후, 환자는 종종 쾌락을 경험하지 못한다(쾌락 불감증으로 알려진 상태).
감정표현 불능증으로 고통당하는 개인들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고, 현실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리치료에서, 환자는 하찮은 일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정확한 순서를 따르는 행동 그리고 삶의 사건들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말하는 경향성을 통해 자신에게 인지 능력과 관련된 장애가 있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개인들은 특히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상력, 직관, 공감 능력 그리고 욕동-성취에 대한 환상이 부족하다. 그 대신 그들은 사물에 주의를 집중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로봇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그들은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통해 치료 효과를 얻는데 심각한 한계가 있다; 이러한 개인들이 정신신체 장애나 약물 남용의 문제를 갖고 있을 경우에 심리치료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이 용어는 1967년에 시프너스(Sifneos)가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1970년에 느마이어(Nemiah)와 시프너스가 더욱 명료하게 정교화하였다. 정신분석 문헌에서, 어떤 학자들은 일차적인 결함인 정신해부학적 문제로 인해 이것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일차적인 문제들과 함께 이차적인 결함인 다양한 심리적 문제들을 지적한다. 맥두걸(McDougall)과 다른 학자들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이 현상이 부인(denial)과 분열(splitting)과 밀접하게 연관된 일련의 발달적 방어라고 본다. 1963년 프랑스의 마티(Marty)와 그의 동료들이 유사한 방어 집단에 대해 기술했는데, 그 명칭을 생각에 의해 사는 사람(la pensée opératoire)이라고 붙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감정표현 불능증 [ALEXITHYMIA] (정신분석용어사전, 2002. 8. 10., 미국정신분석학회, 이재훈)

 

 

 

프롤로그

아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

그저 그것이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끝이 비극일지 희극일지를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다. 첫째, 결론을 말하는 순간 모든 이야기는 시시해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둘째, 그렇게 해야 당신을 이 이야기에 동행시킬 가능성이 조금은 커지기 때문이다. 셋째,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변명을 하자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1부

그는 정신없는 칼부림의 마지막 대상으로 스스로를 선택했다. 자신의 가슴 깊이 칼을 찔러 넣은 남자는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숨이 끊어졌다.

 

그렇게 엄마의 사랑이 완전히 끝맺어지는 그 순간에, 철없는 사랑이 가져다준 불청객인 나는, 철저히 잊히고 있었다.

 

한 아이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작은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 위로 검은 그림자가 정신없이 드리워졌다 거둬졌다 하길 반복했다. 아이는 맞고 있었다. 짧은 외침은 그 아이가 내는 게 아니라, 그 애를 둘러싼 그림자들에게서 기합처럼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그들은 아이에게 발길질을 하고 침을 뱉었다. 나중에서야 그들이 고작 중학생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 내 눈에 비친 그림자들은 다 큰 어른처럼 길고 거대했다.

아이는 이미 맞은 지가 너무 오래된 듯 저항을 하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그저 헝겊 인형처럼 이쪽저쪽으로 내팽개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무서운 얘기를 참 태연히도 하는구나. 거짓말하면 못쓰는 거야.

나는 한동안 아저씨를 설득할 말을 찾느라 침묵했다. 하지만 어린 나는 아는 단어도 별로 없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했던 말보다 더 진짜 같은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죽을지도 몰라요.

했던 말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할멈, 사람들이 왜 나보고 이상하대?

할멈은 내민 입을 집어넣었다.

—네가 특별해서 그러나 보다. 사람들은 원래 남과 다른 걸 배기질 못하거든. 에이그, 우리 예쁜 괴물.

 

모순된 개념을 연달아 붙여서 의미를 낳는 ‘역설’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뒤에도 할멈의 방점이 ‘예쁜’에 찍혀 있는지 ‘괴물’에 찍혀 있는지 잘 몰라 헷갈리곤 했다.

 

물속에서 본 것처럼 아른아른하다가 때때로 선명해지는 장면.

 

바로 이때다. 와드득, 깨문다. 그러면 아그작 소리와 함께 멀고 먼 캘리포니아에서부터 날아든 햇빛이 입 안으로 퍼져 나간다.

 

편도체 :: 편도체는 정서적인 정보를 통합하는 피질하 구조물의 집합인 변연계 중 해마의 끝 부분에 위치한다. 편도체는 10개 이상의 핵으로 이루어졌으며, 크게 기저외측핵(basolateral nuclei), 피질내측핵(corticomedial nucle), 중심핵(central nuclei)으로 나뉜다. 각각의 핵은 다른 경로에서 들어온 감각 신호를 받아들이며 뇌의 다른 부분 및 신경계로 전달한다. 기저외측핵은 신체 감각 기관을 통해 수용되는 정보들을 받아들이며, 이를 대뇌 피질로 전달하여 감정적인 경험을 구성하게 한다. 피질내측핵은 후각 신호를 수용한다. 중심핵은 편도체로 들어온 감각 신호를 수용하여 자율 신경계로 신호를 전달한다. 시상하부로 전달된 신호는 자율신경 반응에 의해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 및 신체적 각성 등의 생리적 반응을 유발한다.
편도체는 정서적 처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공포와 관련된 감정을 처리하는데, 뇌의 다른 부분에 공포와 관련된 정보를 전달하여 도전 또는 회피 반응을 유발한다. 따라서 편도체가 손상될 경우 감정 표현 인식, 특히 공포 및 혐오와 관련된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장애를 보인다. 측두엽이 손상된 원숭이의 경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 변화를 보이며, 인간의 경우 시각 및 청각적 자극에 포함된 정서적 단어를 인식하지 못해 위협적인 표정 및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편도체 [amygdala, 扁桃體]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아스퍼거 증후군 :: 전반적 발달 장애(PDD)의 한 유형으로 사회적 상호교류나 행동 장애 등과 같은 자폐성 장애는 보이지만 언어 및 인지발달은 비교적 정상적인 특징을 보이는 질환
1944년 오스트리아 의사인 아스퍼거(Hans Asperger, 1906~1980)가 처음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아스퍼거인은 사회적 상호교류에 어려움을 겪고 관심사가 제한되어 있으며 행동에 장애가 나타나지만, 다른 자폐성 장애와는 달리 언어지체나 인지발달 지연은 발생하지 않는다. 구체적 증상으로는 변화를 싫어하거나 불편해하며, 동작이 서툴러서 몸놀림이나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 소리나 맛ㆍ냄새ㆍ시각 또는 감정에 예민하거나 둔감한 경향을 나타내고, 특정한 주제에 흥미가 생기면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외관상으로는 언어발달 지연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억양에 문제가 있고 현학적이거나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실제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다. 사람과 눈을 맞추지 않고,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사만 하고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많다. 사교력이 떨어져서 또래의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스퍼거증후군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편도체가 작으면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공포심을 잘 모르는 거다. 용감해서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모르는 소리다. 두려움이란 생명 유지의 본능적인 방어 기제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건 용감한 게 아니라 차가 돌진해도 그대로 서 있는 멍청이라는 뜻이다.

 

의사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흥미로운 고깃덩이로 바라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의사들이 나를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일찌감치 접었다. 고작해야 이상한 실험을 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인 뒤 내 반응을 관찰해서 학회에 가서 뽐내는 게 다겠지.

 

엄마는 임신 중에 겪은 스트레스나 몰래 피웠던 한두 개비의 담배, 막달에 못 참고 몇 모금쯤 홀짝인 맥주 따위를 후회했지만, 사실 내 머리통이 왜 그 모양인지는 너무 뻔하다. 그저 운이 없었던 거다. 생각보다 운이라는 놈이 세상에 일으키는 무지막지한 조화들이 많으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습득할 ‘본능적인’ 규범들을 나는 그렇게 하나하나 암기했다.

 

—튀지 말아야 돼. 그것만 해도 본전이야.

그 말은 들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걸. 그걸 들키면 튀는 거고 튀는 순간 표적이 된다.

 

화내야 할 때 침묵하면 참을성이 많은 거고, 웃어야 할 때 침묵하면 진중한 거고, 울어야 할 때 침묵하면 강한 거다. 침묵은 과연 금이었다. 대신 ‘고마워.’와 ‘미안해.’는 습관처럼 입에 달고 있어야 했다. 그 두 가지 말은 곤란한 많은 상황들을 넘겨 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엄마는 모든 게 다 나를 위해서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엄마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하려는 몸부림에 더 가까웠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사랑이라는 건, 단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한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 따위는 주지도 받지도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할멈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허락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랑은 누가 허락하거나 허락하지 않는 결재 서류가 아니라고 엄마는 받아쳤고 그 결과 뺨을 맞았다.

 

엄마는 더더욱 할멈한테 연락할 수가 없었다. 사랑을 찾아 집을 나갔다가 불행을 짊어지고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칠 년이 흘렀다.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못 버틸 때까지. 엄마 혼자서는 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엄마의 시선은 출입구를 향해 있었는데, 누군가가 들어올 때마다 눈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상반신을 곧추세웠다가 숙였다가 하길 반복했다. 나중에 엄마에게 물었더니 그건 두려움과 안도감이 뒤섞일 때 나타나는 행동 중 하나라고 했다.

 

마지막 프렌치프라이 한 조각까지 다 사라진 뒤에도 모녀 사이엔 말이 없었다. 나는 손끝에 침을 묻혀 밤색 플라스틱 쟁반 위에 흩어진 프렌치프라이 부스러기를 하나씩 집어 먹으며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굳게 팔짱을 낀 할멈 앞에서 엄마는 입술을 깨문 채 자신의 구두 끝만 바라보았다. 더 이상 쟁반 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드디어 엄마가 두 손으로 내 양어깨를 잡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예요.

 

엄마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인생에 불어닥친 풍파를 털어놓았다. 내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훌쩍이는 울음에 간간이 섞인 코 푸는 소리로만 들렸지만 용케도 할멈은 엄마의 말을 모두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빗장 잠그듯 팔짱을 끼었던 팔은 어느새 풀려 무릎 위에 얹혀 있었고 얼굴에 흐르던 윤기는 말라 버렸다. 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할멈의 표정은 엄마와 비슷해 보이기까지 했다. 엄마의 얘기가 다 끝난 뒤에도 할멈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할멈에게는 이른바 활자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랬기에 없는 형편에도 어린 엄마에게 책을 많이 사 주었고 엄마가 ‘글자깨나 읽는 가방끈 긴 여자’가 되길 원했던 거다. 사실 할멈은 엄마가 작가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더 나아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고독하되 멋있게 늙을 ‘여류’ 작가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건 사실 지난 세월을 되돌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멈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이었다.

 

현실적인 엄마가 내린 가장 비현실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인생이 할퀴고 간 자국들을 엄마는 차마 글로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팔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고, 그건 작가의 깜냥이 아닌 거라고 했다.

 

나도 그곳이 편안했다. 다른 사람들의 언어로는 ‘좋았다’라거나 ‘맘에 든다’가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단어로는 ‘편안하다’가 최대치다.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 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 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 겪어 보지 못한 사건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속의 세계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더 이상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영상 속의 이야기는 오로지 찍혀 있는 대로, 그려져 있는 그대로만 존재했다. 예를 들어, ‘갈색 쿠션이 있는 육각형의 집에 노란 머리의 여자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책의 문장이라면 영화나 그림은 여자의 피부, 표정, 손톱 길이까지 전부 정해 놓고 있었다. 그 세계에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 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 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일단 반쯤 성공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겠노라.

그것이 죄가 될지 독이 될지 혹은 꿀이 될지 영원히 알 수 없더라도 나는 이 항해를 멈추지 않으리.

 

의미는 전혀 와닿지 않지만 상관없다.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책의 향을 느끼며 한 글자 한 글자, 모양과 획을 눈으로 천천히 좇는다. 그건 내겐 아몬드를 씹는 것만큼이나 신성한 일이었다.

 

계속 계속, 외울 때까지 계속. 같은 말을 여러 번 되뇌면 말의 뜻이 흐릿해지는 때가 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자는 글자를 넘어서고, 단어는 단어를 넘어선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계어처럼 들린다. 그럴 때면, 내가 헤아리기 힘든 사랑이니 영원이니 하는 것들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계절은 도돌이표 안에서 움직이듯 겨울까지 갔다 다시 봄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늙지 않는 뱀파이어 엄마와 거인 할머니를 둔 소년인 나만이, 변하지 않는 두 여자 사이에서 홀로 쑥쑥 자라났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틀렸다. 엄마에게 늙을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육수에선 누린내가 났고 왕만두에선 탄내가, 냉면에선 사이다 맛이 났다. 냉면을 처음 먹어 보는 사람이라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공들이지 않은 가벼운 맛이었다.

 

때로는 맛보다 분위기가 식욕을 돋게 하나 보다.

 

생일 축하해. 태어나 줘서 고마워. 어딘지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는 거다.

 

노엘 :: 생일을 뜻하는 라틴어 '나탈리스'(natalis)에서 유래한 말. '탄생', '성탄절',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쁨의 외침', '(기쁜) 소식'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서, 주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찬송가 123, 128장).
[네이버 지식백과] 노엘 [Noel]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2013. 9. 16., 가스펠서브)

 

그러는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저 멀리 얼어 있는 전경들이 보였다. 마치 남자와 엄마와 할멈이 한 편의 연극이라도 벌이고 있다는 듯 모두들 꼼짝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모두가 관객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남자의 일기장에는 그가 세상을 증오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즐거울 것 없는 세상에서 미소를 띤 채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살의를 느낀다는 암시도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었다. 남자의 삶과 기록들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자, 대중의 관심은 사건 자체보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사회학적 조명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삶이 자기네들의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중년 남자들은 비탄에 빠져 탄식했다. 남자에 대한 동정 여론이 퍼지기 시작했고, 초점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대한민국의 현실로 옮겨 갔다. 누가 죽었는지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건은 얼마간 뉴스를 장식했고 기사엔 ‘누가 이 남자를 살인자로 만들었나’, ‘웃으면 죽어야 하는 나라, 대한민국’ 따위의 표제가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꺼지듯이 그마저도 사람들의 입에 더는 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열흘이었다.  

 

하루에도 수만 번씩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원점으로 회귀해 처음부터 되풀이됐다. 하지만 내가 아는 답은 하나도 없었다.

 

 

 

2부

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건 사실 그 시간에 정말로 생각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저 시간을 달라는 뜻이다.

 

종일 몇 마디 내뱉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상황에 맞는 대화를 짜내려고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손님에겐 예, 아니요, 잠깐만요 정도면 충분했다. 그 외에는 카드를 긁거나 거스름돈을 헤아려 주거나 기계처럼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하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침묵은 금. 그 속담을 참고하기로 했다. 웬만한 질문엔 답하지 말 것. 그런데 그 웬만함의 기준도 헷갈린다.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요 이상으로 긴 대답이었다.

 

—글쎄. 초면에 말이 잘 안 나오겠지만, 네 쪽에서 필요한 거라든가 부탁할 건 없을까?

아까부터 심 박사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딱딱 두드리고 있었다. 버릇인 것 같은데 계속 듣고 있자니 거북했다.

—그 소리를 안 내 주셨으면 좋겠네요.

박사가 안경 너머로 날 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디오게네스라고 들어 봤니? 그 얘기가 떠오르는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뭐든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대왕의 그림자가 태양을 가리니 비켜 달라고 했지.

—전 선생님을 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떠오르진 않는데요.

 

디오게네스 ::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라고도 한다. 가짜 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고향인 시노페에서 쫓겨나 아테네에 와서 안티스테네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으며,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反)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몸소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自足) 생활을 실천하였다. 노미스마(nomisma:通貨)의 개주자(改鑄者)는 노미스마(관습)의 개혁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찾아와 곁에 서서 소원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그곳을 비켜 달라고 하였다는 말은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은 “내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오게네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따금씩 엄마와 할멈이 여행을 간 건 아닐까 하는 헛된 공상을 하곤 했다. 물론 결코 끝날 수 없는 여행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 세계의 전부였다. 하지만 할멈과 엄마의 부재로 알게 된 건 세상에 다른 사람도 존재한다는 거였다. 한 명씩 천천히,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등장한다.

 

여기서는 선생님이지만 어쩌면 집에선 귀염받는 막내딸쯤 될지 모른다.

 

몸집이 작은 아이였다.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들에게 말대답을 자주 하고 자기의 행동으로 좌중에 어떤 분위기가 생겨나길 바라는 아이. 그런 아이들은 어딜 가나 있다.

 

할머니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본 기분은?

그 애가 다시 물었다. 주변에서 여자아이들이 어우 야, 뭐야, 하면서 야유했다.

—왜 그래, 너희도 다 알고 싶잖아.

그 아이가 양쪽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어깨를 들썩하며 말했다. 조금 전보다 목소리의 크기가 줄어 있었다.

—알고 싶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창문을 닫고 교실로 들어갔다. 주변은 금세 다시 소란해졌지만 일 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모두들 ‘평범’이라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입에 올리지만 거기에 담긴 평탄함을 충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게는 더욱 어려운 일일 거다. 나는 평범함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으니까.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이상한 아이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평범해지는 것에.

 

따지고 보면 예감이라는 게 ‘그냥 문득 느껴지는’ 건 아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은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조건과 결과로 나뉘어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무의식적으로 결과를 예측하게 된다. 그러니까 예감이란, 사실은 매우 인과적인 데이터다. 과일을 믹서에 갈면 주스가 될 것을 아는 것처럼.

 

난 너한테 부탁을 하려고 온 거거든.

—뭔데요?

그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부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 부탁을 말씀하시면 돼요.

—듣던 대로 넌 참, 명료하구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그렇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나같이 뭔가가 고장 난 사람이나 죽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을 마음에서 떠나 보낸 사람들만이 그럴 수 있다. 아저씨는 후자였다.

 

진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조금 더 불행했을까.

 

사람들을 침묵하게 한 건 그 눈빛이었다. 해칠 생각이 없는 사람 앞에서 먼저 이를 드러내고 제 새끼를 죽여 버리는 맹수 같았다.

 

사람들은 남 얘기를 할 때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자주 잊어버린다.

 

곤이가 내게서 어떤 반응을 원하는지는 뻔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괴롭힘당하는 아이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 상대방이 울면서 제발 그만두라고 빌기를 바라는 아이들. 그 애들은 대부분 힘을 써서 자기들이 원하는 걸 얻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곤이가 원하는 게 내게서 어떤 자그마한 표정의 변화라도 보는 것이라면 그 애는 영원히 나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럴수록 힘이 부치는 사람은 곤이 자신이라는 것도.

 

—내가 왜 널 피해야 되는데? 난 다니던 데로 다닐 거야. 거기 네가 없다면 볼 일이 없을 테고,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곤이가 짓고 있는 표정은 조금 복잡했다. 화가 났다고 보기엔 입술을 꽉 물고 있었고, 슬프다고 하기엔 눈꼬리가 너무 위로 뻗어 있었다. 이 표정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나도 모르는 사이 곤이는 의미 없는 풍경처럼 나를 스쳐 지나갔다.

 

—네가 원하는 걸 하려면 나는 연기를 해야 해. 그건 나한테 너무 어려운 거야. 불가능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겉으론 무서운 척해도 속으론 다들 널 비웃고 있을 테니까.

곤이가 주변을 돌아봤다. 순간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곤이의 등이 적개심을 품은 고양이처럼 위로 솟았다.

—썅, 다들 죽어 버려!

그러더니 곤이는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같이 욕이었다. 저주, 욕, 그것만으론 표현할 수 없는 광기.

 

창틀 바로 앞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후추 통이 놓여 있었다. 완만한 곡선으로 빚어진 후추 통은 광각 렌즈처럼 주변을 비추었다.

 

곤이가 후추 통을 낚아챘다.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가 손톱이 하얘졌다.

—왜? 여기서 또 난장판이라도 벌이려고?

—그럼 안 될 이유라도 있냐?

—아니, 궁금해서 물어봤어. 미리 알면 나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

 

잠들기 직전 윤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자꾸만 말을 멈췄고 침묵과 한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형수 출신의 미국 작가 P.J. 놀란이 한 말이다.

 

책의 대부분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분노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을 적나라하게 그려 내고 있다. 사람에게 칼을 찔러 넣거나 강간을 할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어떤 방식이었는지가 너무 상세하게 적혀 있어 일부 주에서는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는 마치 음식을 분류해 냉장고에 넣거나 서류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봉투에 넣는 방법을 설명하듯 그런 과정을 담담히 묘사했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

 

—난 누군가를 쉽게 재단하는 걸 경계한단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 네 나이 때는 더 그렇고.

 

—근데 잠은 잘 와? 학교는 어떻게 다녀? 망할, 가족이 네 앞에서 피 흘리면서 죽었는데.

—그냥. 살게 돼. 나보다 오래 걸릴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도 얼마 안 돼 먹고 자고 다 할걸. 사람은 살게 돼 있는 존재니까.

 

탁 소리가 나게 문이 닫혔다. 한 줄기 바람이 가게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옅은 여름 향이 묻어 있는 바람이었다.

 

공식적으로, 그러니까 아이들의 분류에 따르면 우리는 ‘적’이었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만 보더라도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래서, 누가 그러자고 정한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 곤이와 나는 서로 모른 척했다. 말을 섞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우리는 칠판지우개나 분필처럼 그저 학교를 구성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거기서는 누구도 진짜가 아니었다.

 

엄마는 자신의 고상한 취미가 조롱 섞인 언어로 재단된 것에 분노했다.

 

—사람은 숨 안에 웃음이 실려 있는데 유인원은 내쉬는 숨에 한 번씩밖에 못 웃어. 복식 호흡하듯이 하, 하, 하, 하, 하고 말이야.

 

브룩 실즈는 젊었을 때 알고 있었을까? 늙을 거라고. 지금이랑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이 들어 있을 거라는 거. 늙는단 거, 변한다는 거, 알고는 있어도 잘 상상하진 못하잖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지금 길 가다 보는 이상한 사람들, 그러니까 뭐 지하철 안에서 혼자 중얼대는 노숙자 아줌마라든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다리가 양쪽 다 없어서 배로 땅을 밀면서 구걸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젊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

 

—그러니까 너랑 나도 언젠가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럴 거야. 어떤 방향이든. 그게 인생이니까.

 

계절은 어느덧 5월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5월 정도면 많은 게 익숙해진다. 신학기의 낯섦도 사라진다. 사람들은 계절의 여왕이 5월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려운 건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거다. 언 땅이 녹고 움이 트고 죽어 있는 가지마다 총천연색 꽃이 피어나는 것. 힘겨운 건 그런 거다. 여름은 그저 봄의 동력을 받아 앞으로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온다.

그래서 나는 5월이 한 해 중 가장 나태한 달이라고 생각했다. 한 것에 비해 너무 값지다고 평가받는 달. 세상과 내가 가장 다르다고 생각되는 달이 5월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게 움직이고 빛난다. 나와 누워 있는 엄마만이 영원한 1월처럼 딱딱하고 잿빛이었다.

 

그만두라고 외치는 걸까, 끝까지 살고 싶어서 그런 걸까. 그저 본능일 거다. 감정이 아닌, 감각이 주는 본능.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이 눈싸움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게임이다. 먼저 눈을 감는 쪽이 지는 것뿐이다. 그런 종류의 싸움에서 나는 언제나 승자다. 사람들은 눈을 감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만, 나는 애초에 눈을 감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스케이트에 전혀 소질이 없는 사람이 백날 연습을 한다고 해서 최고의 스케이터가 되지는 못할 거다. 타고난 음치가 오페라의 아리아를 멋들어지게 불러 청중의 갈채를 받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연습을 하면 말이다, 적어도 비틀거리며 얼음 위로 조금 나아가는 것 정도는, 서툴게나마 노래 한 소절쯤 부르는 것 정도는 가능해진단다. 그게 바로 연습이 허용하는 기적이자 한계란다.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아니다. 어떻게 하면 더 단순하고 쉽게 얘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자, 핵심만 말하마. 그 앤 너한테 관심이 많다. 널 알고 싶어 하고, 또 너와 같은 느낌을 느끼고 싶어 해. 그런데 얘기를 들어 보니 늘 그 애 쪽에서 네게 다가간 것 같다. 한 번쯤 네가 먼저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

—어떻게요?

—한 가지 질문에도 백 가지 다른 답이 있는 게 이 세상이란다. 그러니 내가 정확한 답을 주기는 어렵지. 특히 네 나이 땐 세상이 더 수수께끼 같을 거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 되는 때거든. 그래도 굳이 조언을 원한다면, 질문으로 대신하마. 그 애가 너한테 제일 많이 한 행동이 뭐지?

—때린 거요.

심 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깜박했구나. 그건 패스하자. 그다음으론?

—음.

잠깐 생각했다.

—찾아온 거요.

박사가 테이블을 가볍게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할 수 있는 방법 하나는 찾은 것 같구나.

 

곤이가 살고 있는 곳은 학교와 무척 멀었다. 윤 교수의 집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깨끗하고 화려한 아파트의 꼭대기 층이었고 거기에선 서울을 상징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곤이는 자신이 그렇게 높이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어떤 애들과 어울렸는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일로 절망했는지…….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시멘트를 쫙 들이붓고 그 위에 자기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지을 생각만 해. 난 그런 애가 아닌데…….

 

삶이 장난을 걸어올 때마다 곤이는 자주 생각했다고 한다. 인생이란, 손을 잡아 주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잡으려 해도 결국 자기는 버림받을 거라고.

 

솟아올라 굳어 있던 곤이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그 애의 얼굴이 쭈글쭈글해졌다. 그 얼굴은 천천히 아래로 향했고 이어서 무릎이 툭 꺾였다. 고개를 푹 숙인 몸이 들썩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그 애는 울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곤이를 내려다보았다. 쓸데없이 키가 커진 느낌이었다.

 

곤이는 그저 자신의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버려지고 헤집어지고 때로는 지저분하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인생을, 십육 년의 삶을 말이다. 나는 운명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 거라고 말해 주려다가 그만뒀다. 그거야말로 책에서 읽은 구절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이따금씩 엄마가 내게 불러 준 노래들을 떠올렸다. 엄마는 낭랑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지만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음색이 낮았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고래의 노랫소리 같기도 했고 그저 바람 소리나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같기도 했다. 귓가를 떠돌던 엄마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곧 엄마의 목소리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알던 모든 게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3부

도라는 곤이의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아이였다. 곤이가 고통, 죄책감, 아픔이 뭔지 알려 주려 했다면 도라는 내게 꽃과 향기, 바람과 꿈을 가르쳐 주었다. 그건 처음 듣는 노래 같았다. 도라는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꿔 부를 줄 아는 아이였다.  

 

개학이었다. 교정의 풍경은 비슷한 듯 달라져 있었다. 짙은 나뭇잎들이 더더욱 짙어져 있는 정도의 변화. 그런데 냄새가 달랐다. 아이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계절이 무르익은 만큼 진해져 있었다. 여름은 힘을 다해 가고 있었다. 나비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췄고 죽은 매미들이 길 위를 뒹굴었다.

이른 가을이 오면서 내게도 묘한 변화가 생겼다. 설명하기 힘든, 변화라고 하기도 힘든 변화들. 알고 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고 쉽게 쓰이던 단어들이 혀끝에서 꺼끌꺼끌하게 맴돌았다.

 

그날따라 의문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저렇게 흔하게 쓰여도 되는 걸까.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다 결국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떠올려 봤다. 사랑이 변했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학대를 가한다는 뉴스도.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용서한 이들의 이야기도.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상처받고 아파하는 거 말고 차라리 내가 상처 주는 쪽을 택하는 거.

 

수업 중엔 창밖의 운동장만 내다보았다. 우리에 갇힌 표범처럼.

 

내 앞에 놓인 안경을 줍고 얼굴에 얹었다. 신비한 눈이 안경 뒤로 사라졌다.

 

무엇보다 두 여자가 없는 책방은 무덤 같았다. 책의 무덤. 잊혀진 글자들의 무덤. 그때쯤 결심했던 것 같다. 이제 그만 이 공간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고.

 

심 박사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묻는 대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걸 말할 때 사람들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낸다. 도라가 그랬다.

—달려서 뭐하려고?

의미를 담은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도라의 눈빛이 확 꺼졌다.

—너 방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 한 거 알아? 그런 말은 엄마 아빠한테 듣는 걸로 족해.

—미안. 비난한 게 아니고 목적을 물은 거야. 네가 달리려는 목적.

 

책방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칸칸이 꽂혀 있던 이 많은 생각들, 이야기들, 연구들. 한 번도 보지 못한 숱한 저자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들이 나와는 너무도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 보는 생각이었다. 그 전까진 그들과 가깝다고 생각했다. 비누나 수건처럼,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곳에.

 

도라는 뭐가 우스운지 까르르 웃었다. 수백 개의 작은 얼음 조각이 바닥에 흩어지는 것 같은 웃음이다.

 

도라는 나한테 설명을 더 요구하는 대신 거기서 교집합을 발견해 냈다.

 

갑자기, 바람이 목적지를 바꾸었다. 도라의 머리칼이 천천히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애의 냄새를 실은 바람이 내 코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맡아 보는 냄새였다. 낙엽 냄새 같기도 하고 봄날 새순의 냄새 같기도 했다. 모든 반대되는 것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냄새였다.

 

내가 말하는 동안 심 박사의 얼굴은 점점 더 부드러워지더니 이윽고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커다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음이 아니라 머리겠죠. 뭐든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뿐이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린 마음이라고 얘기한단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앞질러 버린 몸이 여름에 입은 봄 외투처럼 불필요하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벗어 버리고 싶을 만큼.    

 

그 애는 어디에서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거북이의 등딱지에서도, 황새의 알이나 가을 늪지대의 갈대에서도 대칭과 자연의 놀라운 손길을 찾아냈다. 도라는 아름답다는 말을 참 자주 했다. 나는 그 단어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 찬란함까지 생생히 느낄 수는 없었다.

 

묵묵히 들어 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차라리 말이야, 내가 더 나쁜 짓을 저질러 버릴까? 어쩌면 다들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자기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했다.

 

—너 지금 왜 심박 수가 높아진 건지 알아?

—아니.

—내가 너한테 가까이 다가가니까 심장이 기뻐서 박수 치는 거야.

 

—넌, 착해. 그리고 평범해. 근데 특별해. 그게 내가 널 이해하는 방식이야.

 

무릎에 힘이 풀려 천천히 주저앉았다. 생각이 사라진 머리에 맥이 뛰었다. 몸 전체가 북이 된 것처럼 울렸다. 그만해. 그만. 그렇게까지 안 해도 살아 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온 힘을 다 실은 마지막 말이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곤이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의미를 모를 웃음을 머금은 입이 빠르게 실룩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여기저기서 여자아이들의 꺄악, 하는 소리와 남자아이들의 어어어, 하는 소리가 음역대를 나눈 합창처럼 귀를 찔렀다.

 

—그래서. 강해질 거야. 내가 살아온 인생답게. 나한테 제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기고 싶어. 상처받는 걸 멈출 수 없다면 차라리 상처를 줄 거야.

 

 

 

4부

—고맙구나. 그렇게 생각해 줘서 말이야.

—그런데 왜 우세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게 미안해서. 그리고 그 애를 착하다고 말해 주는 걸 고맙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이 얼토당토않아서…….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윤 교수는 곤이를 낳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까? 그랬더라면 그들 부부는 그 애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거다. 아줌마는 죄책감에 병이 걸리지도 않았을 거고, 회한 속에 죽지도 않았을 거다. 곤이가 저지른 골치 아픈 짓들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역시 곤이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 애가 아무런 고통도 상실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목적만 남는다. 앙상하게.

 

도라가 중얼거렸다.

그런 애.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곳의 바닷바람은 짜고 배릿한 내가 났다. 계절도 방향도 지워 버리는 냄새였다. 나는 바람에 내몰리듯이 시장 안으로 숨어들었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삐걱대는 소리 같기도 했고 갓 태어난 강아지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그 사이로 몇 개의 음성과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건물의 입구가 반쯤 열려 있는 게 보였다. 허술한 철제문이 건들거리며 바람결에 움직였다. 시시덕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묘한 기운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것의 정체가 뭔지, 그걸 뜻하는 단어가 뭔지 기억하려 애썼다. 전에도 본 것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단어를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보이는 아이들이 낄낄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또다시 익숙한 기운이 엄습했다.

 

—그렇게 웃지 마. 안 어울려. 웃는 거 같지도 않고.

 

그건 강한 게 아니고 그냥 센 척하는 거야.

 

희미하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어느새 문 앞까지 도착했다.

 

—누구.

철사가 곤이에게 물었다. 뱀이 말을 한다면 그런 목소리일 것 같았다. 곤이는 입술을 깨물었고 내가 대신 대답했다.

—친구예요.

철사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이마에 가로줄이 두세 개쯤 생겨났다.

 

그가 낮게 이죽거렸다. 내용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언뜻 호의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부드러운 말투였다.

 

칼날에 빛이 닿을 때마다 은빛 섬광이 날카롭게 번득여 눈이 부셨다.

 

철사가 씩 웃으며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순간 많이 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떠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나 미술 시간에 교과서에서 본 수많은 미의 상징들. 그것과 똑 닮은 모습이 철사의 얼굴 안에 펼쳐져 있었다. 피부는 새하얗고 입술은 장밋빛이었다. 옅은 갈색에 가까운 머리칼과 직선으로 뻗은 정교한 눈썹. 깊고 투명한 눈. 신은 이상한 곳에 천사의 얼굴을 주셨다.

 

철사는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우거나 사회에 섞이는 것 따윈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독자적으로 설계한 세상이 있었다. 남들은 가 보지 못한 정점에 이르는 것. 내겐 와닿지 않았지만 그 이상한 세계에 매료된 아이들이 철사 밑으로 모였고 곤이도 그중 하나였다.

 

—그게 강한 거라고 생각해?

 

몇 살에 절도를 시작했는지, 언제 여자와 놀아 봤는지, 무슨 일로 소년원에 갔는지 따위를 자랑거리로 삼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유의 조직에서 인정받으려면 그럴듯한 무용담, 혹은 훈장이 필요하다. 곤이가 아이들에게 맞으면서 버틴 것도 그런 통과 의례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모두 약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강한 것을 동경하며 생기는 나약함의 표현.

내가 아는 곤이는 단지 철이 덜 든 열일곱의 남자아이일 뿐이었다. 약해 빠진 주제에 강한 척하는, 물러 터진 놈.

 

—버티지 못해도 자책하진 마라. 너도 보통의 인간이라는 증거일 뿐이니까.

곤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철사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지 않고 내게 다가온 현실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을 껐다 켰다 하듯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 하길 반복했다. 정신이 들 때면 고통의 강도가 세졌다. 사람의 몸이 왜 이런 감각을 견디도록 설계됐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의식이 왜 아직도 꺼지지 않는지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팠다.

 

—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다 못 느꼈으면 좋겠어…….

 

고통을 내지르는 숨소리가 모두 허연 입김으로 나오는 지금과는 달리 한여름이었다, 그때는. 그때 우리는 여름의 정점에 있었다. 여름. 과연 그런 때가 있기나 했던 걸까. 모든 게 푸르고 무성하고 절정이었던 때가. 우리가 함께 경험한 게 정말로, 진짜였을까.  

 

심 박사를 찾아간 어느 날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다.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관한 뉴스다. 화면을 보고 있는 심 박사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 시선은 미소 띤 박사의 얼굴 뒤로 떠오른 소년에게 향해 있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 일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거리였다.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 기세가 너무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고.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네가 상처 입힌 사람들에게 사과해. 진심으로. 네가 날개를 찢은 나비나 모르고 밟은 벌레들에게도.

 

나를 부둥켜안은 곤이의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어느 순간 그 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이 천천히 감겼다. 깊은 물에 몸을 맡긴 것처럼 온몸이 노곤했다. 이제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내던 태고의 곳으로 간다. 머릿속에서는 영화를 튼 것처럼 아득한 한 장면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피가 튄다. 할멈의 피다. 눈앞이 붉어진다. 할멈은 아팠을까. 지금의 나처럼. 그러면서도 그 아픔을 겪는 게 내가 아니고 자신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톡. 내 얼굴 위에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뜨겁다. 델 만큼. 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가 탁, 하고 터졌다.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아니, 밀려드는 게 아니라 밀려 나갔다. 몸속 어딘가에 존재하던 둑이 터졌다. 울컥. 내 안의 무언가가 영원히 부서졌다.

—느껴져.

내가 속삭였다. 그것의 이름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외로움인지 아픔인지, 아니면 두려움이었는지 환희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무언가를 느꼈을 뿐이다. 구역질이 났다. 떨쳐 내고 싶은 역겨움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멋진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울고 있는 곤이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은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탕, 어디선가 출발 신호가 공기를 울린다. 우리는 지면을 밀어 내며 달리기 시작한다. 시합이 아니라, 그저 달리기다. 우린 그냥 몸이 공기를 가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우리 힘으로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더 멋졌겠지만 어른들의 눈에 우린 아직 애들일 뿐이었나 보다.

 

그는 자기가 치르게 될 대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고서도 시종일관 미소를 띤 채였다고 한다. 그의 마음속은, 아니 대체 인간이란 건 어떻게 설계된 걸까. 그가 다른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날이, 그런 기회가 그의 인생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머리란 생각보다 묘한 놈이거든.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자란다는 건, 변한다는 뜻인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나쁜 방향으로든 좋은 방향으로든.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

진심,이라는 단어 뒤에 찍힌 마침표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 마침표가 곤이의 삶을 바꾸기를 바랐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랐다. 진심. 으로.

 

 

 

에필로그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작가의 말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명체가 세상에 던져져 허공을 향해 버둥거리고 있었다.

 

매일매일 아이들이 태어난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축복받아 마땅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누군가는 군림하고 명령하면서도 속이 비틀린 사람이 된다. 드물지만 주어진 조건을 딛고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핍 없는 내면을 선물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한때는 내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난 것이 작가가 될 깜냥이 못 되는 거라 생각해 부끄러웠던 시절도 있다. 세월을 거치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평탄한 성장기 속에서 받는 응원과 사랑, 무조건적인 지지가 몹시 드물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 세상을 겁 없이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주는지, 부모가 되고서야 깨닫는다.

 

아직도 가능성이 닫혀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 내미는 손길이 많아지면 좋겠다. 거창한 바람이지만 그래도 바라 본다. 아이들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랑을 주는 존재들이다. 당신도 한때 그랬을 것이다. 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내게 더 많은 사랑을 준 사람의 이름을 첫 장에 싣는다.

728x90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문학은 밥이다  (0) 2023.07.12
미움받을 용기  (1) 2023.07.11
시간을 파는 상점  (0) 2023.07.09
이 모든 걸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0) 2023.07.08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1) 2023.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