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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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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밥이다(양장본 HardCover)
매일 힘이 되는 진짜 공부 『인문학은 밥이다』. CEO 대상 인문학 강좌들이 꾸준히 개설되는 등 인문학이 열풍이다. 이렇듯 인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기대와 우려에 일갈하는 이 책은, 30년간 문학과 철학을 배우고 가르친 김경집이 ‘인문학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를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소명의식을 갖고 집대성한 인문학 입문서이다. 철학·종교·심리학·역사·정치·경제·환경·젠더 등 12개의 인문학 분야에 걸쳐 인문학 입문자들이 꼭 알아야 할 맥락과 배경지식을 소개한다. 또한 각 학문이 추구해야 할 사회적 목적에 대한 제언도 덧붙임으로써, 인문학의 진짜 매력을 발견하고, 인문학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보탬이 되어준다.
저자
김경집
출판
알에이치코리아
출판일
2013.10.11

 

0. 프롤로그 - 인간성의 회복과 인격의 완성을 위하여

 ο 인문학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영어로 humanities로,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43)가 교육 프로그램을 짤 때 원칙으로 삼았던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교양교육의 의미로 확장된 건 2세기 무렵, 로마의 수필가 겔리우스(Aulus Gellius, ?~?)에 와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미국 대학의 교양과정을 일컫는 리버럴 아츠 (Liberal Arts)와도 상통하는데, 중세에 리버럴 아츠는 자유학문(liberal arts)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중세에는 트리비움(trivium, 3학=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쿼드리비움(quadrivium, 4학=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을 묶어 자유학문이라 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정신과 신체의 통합적인 완성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기존 7과목에 고어와 고문예를 더했다.

 

 동양에서 인문학은 인문(人文), 즉 천문(天文)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상과 문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인문학 하면 자연과학에 대립하는 영역이며 가치 탐구와 표현 활동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분류한다. 그보다 더 시야를 좁혀 문(文), 사(史), 철(哲)이라고 간략하게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ο 인문학은 밥도 되고 떡도 준다

 인문학이 위축된 것은 사회가 오로지 효율과 생산성 등 ‘당장의’ 실용성만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활용될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사회 전체의 각성이 필요하다. 그게 수용되면 학계도, 학교 현장도 근본적으로 바뀐다. 제도만 탓할 게 아니다. 순서를 바꾸면 된다. 교육의 제도와 방식이 바뀌어서 인문학이 융성하고 사회가 발전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학의 발흥이 사회적 반성과 텍스트 추종에 대한 비판을 불러오고 교육 제도와 방식을 바꿀 수 있다.

 

 ο 질문은 힘이 세다!

 텍스트를 추종하는 것은, 답만 던져주고 따라오라는 독재적 발상이다. 텍스트 추종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다양성 그리고 자유를 제약한다. 텍스트를 쥐고 있는 자들이 자기 뜻대로 사회를 휘두를 수 있다. 결국 텍스트 추종은 기존 체제나 권위에 순응하는 태도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타율이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은 비주체성을 내면화한다. 그래서 텍스트는 자칫 독이 되기 쉽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의 정답을 찾고 그걸 텍스트로 삼아 추종하는 데 있지 않다. 해결책은 바로 질문하는 힘을 기르는 데에서 온다. 인문학은 질문하는 힘을 길러주는 바탕이며 텍스트 추종을 깰 수 있는 밑거름이다.

 

 

 

1부 마음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

1. 철학

 1 왜 철학인가

 ‘개똥문학’이나 ‘개똥법학’은 없는데 하필이면 ‘개똥철학’은 사전에까지 나오는 일반명사가 되었을까?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다. 합리성은 논리나 이성의 적합성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합리성은 철학적 사유를 통한 궁극성과 상통한다. 철학은 모든 학문이나 사유의 최종적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ο 논리학 아내와 형이상학 남편의 이야기

 철학(Philosophy)이라는 말의 어원은 사랑(Philos)과 진리(Sophia), 즉 ‘진리를 사랑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철학의 수많은 분야가 개별 학문의 영역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철학의 영역에 논리학, 형이상학쯤만 남았다.

 철학은 삶과 세상에 대해서, 일과 사람에 대해서 의미와 존재가치를 따지고 또 따진다. 당장의 실용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건 아니지만, 철학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인생이라는 시간 속으로 떠밀린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이야말로 자신을 주체적으로 만드는 지적 통찰이고 반성이다. 철학이 없는 대통령, 철학이 없는 대기업 총수에 우리는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러나 철학이 빈곤하면, 사람도 삶도 개똥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ο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실용주의적 지식이란 현실에 순응해서 돈벌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처한 한계에 도전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창조적 지식이다. 진정한 실용은 돈 몇 푼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자기 가치의 인식과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은 위대한 철학자만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고의 대전환이다. 내가 먼저 생각하고 고민하고 따지면서 그에 맞는 답을 누가 알맞게 제시하고 있는지 검토하면 된다. 그들을 똑같이 따라가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그들이 따라오게 해야 한다. 그러니 굳이 한 사람의 이론에만 집중할 것도 없다. 자신이 먼저 의문을 두지 않거나 질문을 던지지 못했기에 남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간다. 그러면서 이해하지 못하면 절망하고 자신을 탓하거나 그 철학자를 저주하며 등을 돌린다. 반대로 우연히 자신의 기질에 맞거나 그의 지식을 이해하면 교조처럼 섬긴다. 그건 참다운 철학의 태도가 아니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질문 속에 이미 답의 반은 들어 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으면서도 스스로는 ‘방법론적 회의’조차도 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데카르트의 위대함은 바로 질문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질문은 누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고 따라서 질문 자체가 이미 주체적이다. 철학은 사유를 통해 주체적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철학의 핵심 요소다.

 

 철학의 역사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질문은 크게 서너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이다. 둘째는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로 흘러가는가이다. 그리고 셋째는 나의 도덕적 자아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이다. 넷째는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이다. 결국 압축하면 나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고 치열한 문제제기들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명제들은 단순히 그냥 내뱉는 말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합리적 해명이었다. 그들은 신화적 서사를 세계에 대한 합리적 논리로 대체했다. 진정한 실용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차를 끄는 것은 말이다. 마차가 말을 끌고 가는 걸 막는 게 철학 본연의 역할이다. 철학을 하면서 그런 주체성을 마련하지 못하면 사물의 종이 되거나 객체가 되어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을 끌고 가는 것이 사람이어야 한다. 돈이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을 막는 게 철학인 것이다

 

 ο 철학이 어려운 건 철학 때문이 아니다

 심포지엄 :: 강단식 토의법이라 하여 학회 등에서 많이 쓰이며 사회자와 강사와 청중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테마에 관해 여러 가지 각도에서 강사(2-4인 정도)가 의견이나 문제제기를 하고 이것을 받아서 참가자 전체가 토론을 한다. 포럼과 다른 점은 강사 간에 반드시 대립된 의견제시가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포지엄에서는 각 강사의 발언내용이 중복되지 않도록 사전조정이 필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포지엄 [symposium] (사회복지학사전, 2009. 8. 15., Blue Fish)

 

 우리말에는 감각어와 관념어가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말은 감각어가 풍성하다. 색깔만 해도 노랗다, 누렇다, 누리끼리하다, 노르스름하다 등 다채롭다. 반면에 관념을 다루는 말은 제한적이다.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많지 않다. 사고하다, 사유하다, 사색하다, 숙고하다 등의 관념어는 대부분 한자말에서 빌려온 말들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관념어는 별로 없다. 그러니까 관념어는 책에서나 만나는 말이다.

 철학책은 어떤가? 대부분이 개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관념어 일색이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책은 이해도 어렵고 느낌도 잘 전달되지 않고 내용도 재미없다.

 아마도 비일상적 관념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분야가 바로 철학일 것이다. 그런데도 철학자들은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언어에만 갇혀서 대중들로 하여금 철학적 사유를 삶으로 연결하도록 하는 작업에 소홀했다.

 

 1808년 나폴레옹 시대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시험인 프랑스의 대학입학자격시험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대학의 전공 분야에 따라 계열별로 시행되지만, 계열과 상관없이 불어, 외국어, 역사와 지리, 수학, 철학은 공통 필수 과목이다. 그런데 그 시험 가운데 유독 철학 과목에 프랑스 국민 전체의 관심이 쏠린다고 한다. 국민 전체가 철학 문제를 각자 한 번씩 생각해보는 사유의 화두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칼로레아에서 철학은 비중이 가장 높은 과목 중 하나다. 4시간 동안 3개 주제 중 1개를 선택해서 논문 형태로 작성해야 하는 철학시험의 논제는 프랑스의 지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인식될 정도다. 시험이 끝나면 모든 언론에서 중요한 뉴스로 다룰 뿐 아니라 사회단체들에서는 유명인사와 일반 시민을 모아놓고 다양한 토론회를 개최한다. 프랑스의 지성과 문화를 떠받치는 힘은 바로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일반화에 기인한다. 프랑스에서 철학적 문제는 주요 관심사 범위 안에 들어온 일상의 고민이다.

 

 2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칼 포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492~479) ::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Darius I, BC 522~ BC 486)은 스스로를 '왕 중의 왕'으로 칭할만큼 막강한 세력을 보유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 침공을 계획하게 된다. BC 499년 때마침 이오니아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에 밀레투스의 왕 아리스타고라스는 아르타페르네스에게 낙소스 원정을 제안하게 되는데 아르타페르네스는 다리우스와 상의하여 원정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오니아는 그리스와 같은 민주주의 반란을 시도하게 된다. 이에 대해 아테네는 이오니아의 반란을 지지하고 나선다. BC 507년에 아테네가 클레오메네스의 공격을 받자 페르시아에 원조를 요청한 바 있었으나 페르시아가 이를 거절한 전력이 있으며, 발칸 반도 및 이오니아의 인종 분포가 유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BC 494년에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의 항복을 받아내고, 마케도니아도 점령하게 되었다. BC 491년 다리우스의 조카 마르도니우스가 그리스 지역에 흙과 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자 많은 그리스 국가들은 이러한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사절단을 처형하는 등 반발하자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적대시 하게 된다.
결국 BC 490년 아르타페르네스의 아들과 다티스가 아테네 원정을 나서고, '마라톤 평원'에서 최초로 격돌하게 되는데, 이 싸움에서 아테네의 중장보병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페르시아 대군을 무찌른 아테네군은 사기가 한층 높아지게 되었고, 페르시아 지역에서는 크세르크세스가 새로운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재침공을 준비하게 된다.
아테네는 이 시기에 함대를 마련하고 그리스 지역의 연합을 촉구한다. 헬라스 동맹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연합에서 스파르타가 지휘권을 가지게 된다. 레오니데스와 군인들은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방어하고 나머지 연합군은 아테네 시민들을 살라미스로 이주시키고 대기한다. 그러나 에르피아르데스라는 현지인의 도움으로 페르시아가 다른 진로를 통해 침공하게 되고 스파르타의 주력군이 패배하게 된다.
그러나 BC 480년 페르시아가 살라미스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펠로폰네소스와 코린트인들은 우회로를 제안했으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 제안을 거절하고 해협에서의 백병전을 시도하였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패배하게 된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시(市)를 파괴하는 등 역습을 계속하였으나, 아테네는 끈질기게 저항하고, 스파르타 연합군과 함께 아소포스 강 주변에서 플라타이아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는 바빌론으로 후퇴하고, 이후 안정기를 갖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르시아전쟁 [Greco-Persian Wars]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ο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만물의 근원은 물(水)’이라고 말한 탈레스(Thales, 기원전624?~545?)를 철학사에서는 밀레토스 학파의 시조라고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 ‘학파’는 아니다. 학파가 성립되려면 스승과 제자가 있어야 하고, 학교가 있어야 하며, 체계적 학문과 전승된 이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밀레토스에서는 물질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엘레아에서는 형상과 존재에 대한 관심이 컸다. 어쨌거나 모두가 근원성(arche)에 대해 천착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 점은 그리스 문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水)이라고 한 데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물활론(物活論: 물질 그 자체에 생명과 활력이 있다고 보는 견해)에 의존해 설명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물활론은 훗날의 유물론처럼 이론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일종의 환유법 혹은 대유법적 설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론 체계가 미비하고 사실적 논거가 부족하니 그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철학자들은 사물의 본질 혹은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함으로써, 철학의 ‘제1원리’를 획득하고자 했다. 최고의 원리란, 그 원리 하나로 하위에 속한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면서도 본질을 품고 있다.

 예를 들어 계절은 변하지만 시간의 흐름이라는 법칙은 불변하고 확실하다. 상황에 따라 존재 방식은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 대표적 사물을 찾게 된다. 그게 바로 물이었던 것이다. 물은 액체 상태지만 얼면 고체가 되고 끓이면 기체가 된다. 물은 형태는 변해도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기원전 540?~480?)는 ‘만물은 불(火’)이라고 했다. 탈레스와 마찬가지로 일원론이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490?~430?)는 ‘만물은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로 되어 있다’고 했다. 다원론이다.

 세상 모든 것을 하나의 물질로 환원하거나 그 속성으로 설명하려 했던 일원론은 경제적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다른 하나를 끌어들인다. 이원론의 등장이다. 둘이 셋 되고 넷이 다섯 된다. 결국 자연스럽게 다원론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다원론으로 나아가다 보니 처음의 질문, 즉 세상의 근원적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발견은 오리무중이 된다. 그러면서 특정한 구성 요소를 따질 게 아니라 본질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명제에 있다며 물길을 바꾼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철학이 마감된 건 도대체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회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였다. 여러 차례의 전쟁도 철학의 주제를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옮기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기원전 485?~410?)가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주장한 것은 그런 발로였다. 노예나 여성을 제외한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일반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체제도 관심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끌어오는 데 한몫했다. 이후 그리스 사회는 철학의 시대에서 정치의 시대로 넘어갔다.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언변과 수사법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논리학이 발전했다. 궤변에 가까운 억지 논리도 많았다. 귀족주의자 플라톤(Platon, 기원전428/427~348/347)은 그런 면이 못마땅해서 억지 논리를 일삼는 정치인들과 철학자들을 소피스트, 즉 ‘궤변론자’라고 불렀다. 원래 소피스트라는 말은 ‘현자’라는 뜻이다.

 기존의 자연철학이 제1원리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절대론에 가깝다면 소피스트의 철학은 철저하게 상대주의에 충실했다. 절대론은 플라톤의 경우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처럼, 대부분 기존의 권력자들이 선호한다. 절대성에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포함된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결정과 판단을 모든 다른 사람들이 따르기를 원한다. 그래서 절대성의 유혹에 흔들린다. 독재의 싹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이때 개인의 독립성은 무시된다. 그러나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고 있었다. 따라서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가가 중요했다.

 상대주의는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거부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나친 상대주의는 불가피하게 부정적 태도를 갖게 되기 쉽다. 바로 회의주의나 무책임으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객관적 판단의 근거도 거부하는 상대주의는 도덕적 타락을 불러올 수 있다. 소피스트들의 폐해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런 도덕적 무정부 상태에 분노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470?~399)였다.

 

 ο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왜 죽었는가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구하기 위해 두 차례나 전쟁에 참가했던 인물이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운 조국 아테네가 얼치기 철학자와 사악한 정치인의 야합으로 망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소크라테스 입장에서 아테네 타락의 주범은 상대주의였다. 당시는 공포정치를 자행하던 과두정치가 끝나고 민주정이 들어섰을 때였다. 민중파 인사들을 엄청나게 살육한, 공포정치의 주범인 크리티아스(Kritias, 기원전460~403)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고, 플라톤의 숙부였다. 그뿐 아니라 아테네의 장군으로서 조국을 배반하고 스파르타를 도와서 펠레폰네소스 전쟁(기원전431~404)을 스파르타의 승리로 이끈 부역자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기원전450?~404)도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페리클레스(Pericles, 기원전495?~429)의 조카였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리클레스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았으나 그 정직성은 물려받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지만 그 도덕성은 배우지 못했다’는 조롱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정치의 중심인물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가 법정에 고발된 것도 그런 관계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 두 사람은 전체주의 혹은 귀족정치를 지지했던 셈이었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기원전 450?~388)의 <구름 Nephelai>은 바로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소크라테스를 풍자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를 ‘악법도 법이다’라는 신념의 인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플라톤의 일방적인 해석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는 상대주의의 폐해나 도덕적 타락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거나 절대주의를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다.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자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의 힘이다. 철학의 본질은 나와 세상의 문제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철학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최초의 철학자였다.

 델포이 신전에 쓰였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자신의 격언 명제로 삼은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논쟁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망가들에게 물음을 던지고 그의 대답에 거듭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통해 상대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대화’ 혹은 ‘산파술’이다.

 별거 아니다 싶은 물음에 쉽게 대답하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묻는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지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한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광장의 사람들은 허위와 무지를 숱하게 목격했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지배세력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을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다면적인 요소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한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의 사형이 배심원들을 무시하고 모독해서 자초한 판결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베르나르-앙리 레비(Bernard-Henri Lévy, 1948~ )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아예 속임수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언제나 미리 예고된 한 가지 말뿐, 두 가지 관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잘 짜인 각본과도 같다고 할까. 소피스트가 어느 정도 고집을 부리다가 마음을 바꿔 소크라테스의 말에 찬동하고 소크라테스가 승리한다는 예고된 결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 의해 정정되고 수정되고 거세되었으며 진짜 소크라테스, 유일한 소크라테스는 희석되고 말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ο 가장 오랫동안 가장 절대적으로 숭배된 철학자

 플라톤이 보기에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권력은 상대주의로 무장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사명은 상대주의와의 대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바로 절대주의다. 그리고 절대주의의 알파요 오메가가 바로 이데아다. 플라톤에게 진리란 변하지 않고 보편적이며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것을 이데아로 그려냈다. 따라서 이데아는 결코 물질 속에 있거나 물질의 속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물질은 필연적으로 변화하고 궁극에는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데아는 물질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그 물질의 본질을 형성하며 지배하는 것이어야 했으며,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것이어야 했다. 감각은 형상에 대해 신체가 반응하는 메커니즘이다. 감각은 늘 가변적이다. 그러니 감각으로는 이데아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이 아닌 이성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인식론적 측면에서 복잡다단한 지엽들에서 벗어나 그 전체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으니 경제적이다. 존재론적 측면에서도 일원론의 단순성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간결하다. 윤리적 측면에서도 상대주의의 속성인 책임회피에서 벗어나 절대적 가치와 그에 따른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에 유리하다.

 플라톤은 절대적 이데아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기계론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한계에 봉착했을 때 직관과 유추나 비유를 사용한다. 초월적 일원론은 플라톤의 귀족주의적 성향에 부합되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사상의 위대한 스승으로서도 중요하지만 훗날 그의 사상이 유럽 문화의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유럽은 다신교 문화였다. 로마는 피정복민들의 신앙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판테온(Pantheon) 신전이 그 대표적 사례다. 판테온이란 말 그대로 모든(pan) 신(theon)의 집이다. 모든 신들을 로마에 모아놓은 것은 로마가 관대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동시에 그 신들을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무언의 과시였다. 그러나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그리스도교는 대표적인 유일신 종교다. 313년에 종교로 공인되기 전까지 그리스도교는 핍박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탄압을 받을 때 죄목은 ‘무신론’이었다. 이때의 무신론이란 로마의 신들을 부정한다는 의미였다. 당시만 해도 신학을 정립할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교가 된 이후에는 신학적 정립이 필수적이었다. 국교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미 종교가 정치적 산물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필수적이다. 

 로마제국은 군사와 법률(로마법)의 통치보다 훨씬 근원적인 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종교적 통일성에 큰 매력을 느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최초의 공의회를 소집한 주체는 교황이나 교회 지도자가 아니라 바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80?~337)였다. 거대하고 다양한 피정복국가와 그 민족을 통치해야 하는 황제에게 사해동포주의를 내세우는 그리스도교는 정치적으로 매우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는 기존 유럽 다른 민족의 특정 종교도 아니고 완전히 외부에서 새로 들어온 ‘독립적인’ 종교였다. 고트족의 신을 로마의 신으로 선택하면 게르만족이 반대할 수 있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제3의 것은 중립적이다. 그런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문제는 다신교 문화에서 어떻게 유일신 신학을 정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은 구세주와도 같았다. 최고의 이데아에 유일신을 대입해 신학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물며 이데아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이다. 신의 속성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를 비롯한 교부들에게 플라톤은 철학적으로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은인이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물질적 요소를 하위로 취급한 반면 정신적 요소는 불멸의 것으로 설정했다. 그것을 육체와 영혼으로 대입하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일치했다. 

 

 ο 플라톤과 그 적들 

 그리스도교에서는 오로지 플라톤만을 정통한 철학과 신학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게 플라톤이 서양문화를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의 실체였다.

 상대적으로 플라톤의 제자였고, 이데아론에 맞서 개체론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384~322)는 초기 교회에 의해 ‘이방인의 철학자’라는 낙인이 찍혀, 13세기에 알베르투스(Saint Albertus Magnus,1200?~1280)와 그의 제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1225~1274)에 의해 부활할 때까지 철저하게 억압받았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 )의 《장미의 이름》에서 금서로 제한되어 몰래 읽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문제의 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a)》이었다. 오직 플라톤만이 유럽의 중세를 장악한 ‘유일한’ 철학자였다.

 어떠한 권력자든 자신의 힘에 대한 절대적이고 불변한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런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사상으로 플라톤의 철학만 한 것이 없다.

 

 현대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의 절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포퍼는 올바른 학문이란 그것의 절대성이 아니라 반박 가능성이라고 보았다. 실증적으로 반박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반박되고 있지 않을 때 그 이론은 한시적으로 존중받는 것이며 바로 이런 이론들의 역사가 과학사와 사상사를 이룬다고 본 포퍼에게 플라톤은 위험한 사상가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그리스도교의 신처럼 경험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것은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 이론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없으며 단지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포퍼의 생각이다.

 

 3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데카르트(RenéDecartes, 1596~1650)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완전하게 성직자 독신제도가 정립된 것은 교회의 타락이 주교좌성당의 세습 때문이라는 판단에 의해 성직자 독신주의를 명문화했던 11세기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1020~1085)의 교황칙령부터다. 교회는 세속의 정치와 대결하고 또는 타협하면서 교묘하게 권력을 유지하기도 했다. 

 정치와 달리 지식의 경우는 완전히 교회의 독점 체제였다. 모든 책은 수도원에 보관되고 검열되었다. 흔히 색인으로 사용되는 index는 금서목록을 의미했다. 원문은 Index Librorum Prohibitorum이다.

 중세의 신학과 철학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완전한 속성의 진리를 스스로 알 수는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진리를 알거나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자인 신의 은총을 입는 것뿐이었다. 인간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리는 오직 교회의 전유물이었다. 중세에 교회가 누린 무한 권력의 근원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독점에 반기를 든 게 데카르트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의 대표적 명제는 인식의 전제조건으로 의심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도 위험했다. 그 의심이 성서나 스콜라 철학을 통해 해소되는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ο 데카르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다

 데카르트 자신도 교회에 맞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던 데카르트는 1633년 자신의 첫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즈음에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출간을 포기했고, 상당 부분을 폐기했다. 4년 뒤 《방법서설》을 익명으로 출간한 것도 혹시 모를 위험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그는 곧바로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의 증명을 꾀했다. 그는 신 존재 증명을 통해 자신의 견해가 교회의 가르침이나 태도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다른 이론에 비해 초라할 만큼 빈약했던 증명으로는 교회를 안심시킬 수 없었다. 교회는 데카르트를 이단으로 여겼으며, 그가 죽은 뒤 13년 후 그의 저서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으로 거론하기에는 매우 위험한 인물로 취급되기도 했다.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 이탈리아 르네상스 기의 자연철학자, 스콜라 철학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대자. 프랑스, 영국, 독일을 유랑한 후, 1591년 이탈리아에 귀국, 체포되어 종교 재판에 의해 1600년 로마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상은 유물론을 포함하여 고대 그리스의 철학 사상, 특히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범신론적 세계관을 지녔고, 무한히 넓은 세계는 우주 영혼에 의해 인도된다고 하였으며, 모든 것은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활동력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계는, 즉 자연이라고 하여 유물론적 견해를 보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브루노 [Bruno, Giordano]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데카르트는 ‘의심’이라는 우회적 공략 전술을 택했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하고 확실한(clara et distincta) 것에 도달하는 것이 학문의 시작이고 바탕이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흔히 ‘방법론적 회의’라는 데카르트의 의심은 이미 그 자체가 혁명의 씨앗이라고 봐야 한다. 

 이전까지는 교회라는 가장 강력한 권위가 모든 지식의 위계를 결정하는 순간 그것은 결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것을 의심하겠다고 나섰다. 이미 그 자체가 도전이었다. 이런 사실을 제쳐두고 방법론적 회의에서 ‘방법’에만 방점을 찍으면 철학이 시대의 큰 물줄기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깨닫지 못한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결과, 데카르트가 얻은 건 아주 사소한(?) 결론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의심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의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짧은 문장 하나는 그렇게 중세를 상대로 한 결별통보’가 되었다. 기도로 얻은 것도, 은총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생각하는 나(res cogitans)’에 의해 얻어진 진실이다. 교회의 권위가 개입할 수 없는 인식의 출발이었다. 그게 바로 확실성(certainty)이다.

 근대정신의 독립선언과 같은 이 선언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 및 현대 정신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1905~1995)는 데카르트의 지나친 자아 주체성이 타자의 존재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지만, 그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다.

 

 ο 영국의 경험론이 이뤄낸 것

 비로소 ‘자아’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 사람들이 현실을 깨우치고 여전히 권력의 절대성에만 집착하는 기득 세력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게 된 것이 프랑스혁명이다. 물론 당시의 여러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작동되었지만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발아되고 계몽주의로 각성된 시민의 사유가 혁명의 간과할 수 없는 동인이다. 그러니 철학이 부재한 시대와 민중은 결코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영국의 경험론을 배운 사람들은 대륙의 합리론과 비교되는 대비적 특징을 먼저 그려보며,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제1성질’이니 ‘제2성질’이니 하는 것, 그리고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의 ‘관념의 다발’이니 흄(David Hume, 1711~1776)의 ‘회의론’이니 하는 개념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봐야 하는 것이 있다.

 경험론은 합리론의 생득관념(innate idea)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사태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험론으로서는 합리론의 생득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백지설 (또는 ‘빈 서판’, theory of tabura rasa)’이다. 흔히 로크의 백지설로 알려져 있는데, 이 용어를 주요하게 사용한 사람은 로크가 아니라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였다. 백지설은 대륙의 합리론에 대한 정면 비판이기도 했고, 영국 특유의 발생론적 시각과 인과론적 사유의 발로이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로크의 《인간오성론》을 풍자하는 《인간오성신론》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현재는 경험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백지설에 따르면 모든 관념은 후천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태어날 때는 아무런 지식도 없는 백지 상태다. 경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그 위에 경험한 것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는 게 백지설의 골자다.

 

 경험은 감각을 통해 수용된다. 물론 오성에 의한 범주가 작동되기는 하지만 그 시원은 분명 감각을 통한 경험이다. 경험의 주체는 감각기관이고 감각의 주체는 나 자신이다. 경험론은 합리론과 완전히 다른 철학적 사유의 방법과 태도였지만, ‘보편적 이성’을 지닌 ‘보편적 자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나 자신이 사유의 주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게 바로 시대정신이고 근대사상의 핵심이다.

 합리론은 이성에 의한 보편적 인식을 도출한다. 그것은 강자에게 매우 매력적이다. 나의 인식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마땅히 나의 견해에 동의해야 한다는 권력의지가 작동되는 경우 자칫 획일성과 독재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경험론은 그런 보편적 인식을 거부한다. 심지어 흄은 인식과 주체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면서도 그 본질은 포기하지 않았다. 인식의 출발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독립적 존재인 나 자신이다. 영국에서 입헌군주제가 먼저 싹튼 것은 여러 요인들의 결과물이지만 무엇보다 경험론적 인식의 바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ο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보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먼저다

 경험론은 공리주의를 낳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가 영국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프레임과 딱 맞아떨어진 사회윤리라는 점도 맞다. 그래서 자칫 공리주의는 오로지 효용성만 강조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공리주의의 폐해를 지적한 핵심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공리주의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라는 선언이다. 귀족들만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쾌락을 느끼는 것은 감각기관인데 누구나 똑같은 감각기관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일찍이 경험론이 이끌어낸 결론이었다. 공리주의의 모토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정치학자인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의 구호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 맥락이 바로 보통선거권(General Suffrage)의 요구였기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이런 사상들의 결합이고 호응이다.

 생각이, 철학이 혁명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그저 선언적 구호가 아니다! 어떤 사상과 철학을 갖느냐 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모든 철학은 명제와 반명제 혹은 액션과 리액션의 관계로 이어진다. 합리론에 대한 반명제가 경험론이었고, 이 둘에 대한 종합적 리액션이 칸트의 비판철학이었다. 또한 헤겔의 변증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밀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논리체계를 뒤엎는 혁명이었다. 토마스 쿤은 과학 또한 그런 혁명의 연속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철학이 다양해진 것은 그만큼 인간의 지성이 발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가 빠른 속도로 다변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이상 주류적 사상이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의 사상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양한 사상의 진화가 결국은 다양한 세상의 독법(讀法)이다.

 

 4 왜 동양철학인가

 최근 동양철학의 열풍은 왜 불어왔을까? 하나는 서양문화와 서양철학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의 부상이다.

 

 ο 춘추전국 시대의 철학

 공맹과 노장에만 머무는 동양철학은 마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만 천착하는 서양철학과도 같다. 거기에만 갇혀 있는 서양철학을 상상할 수 있는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동양철학에 매료되는 것도 현대서양철학처럼 복잡하고 난해하며 다양한 갈래로 나뉘어서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고전의 정체성(正體性)이 주는 안정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자백가(諸子百家)는 기원전8세기에서 기원전3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동양철학이 이 시대에 머무는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 싸움에만 몰두하던 서양의 군주들과는 달리 동양의 군주들은 싸움이 한창일 때도 꾸준히 공부했다. 

 둘째로, 춘추전국 시대가 막을 내리고 통일왕국이 세워지면서 단일한 학설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통일왕국의 통치철학으로 잡다한(?) 이설(理說)을 택할 수는 없었다. 한나라는 유가와 묵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압축했고 유가를 최종 선택하였다. 사상과 정치가 일체되었다는 점은 분명 서양과 다른, 뛰어난 문화의 결과물이다. 유럽은 종교로 통합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사상이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나의 학설로 통일되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학설에 대한 불관용 혹은 탄압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한나라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는 유가의 가르침을 따랐다. 심지어 이민족이 세운 왕조들조차 그랬다. 따라서 유가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부동의 가치였고 조금만 벗어나도 제재를 받아야 했다.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오명을 뒤집어쓸 학자는 그리 많지 않았고, 설령 그들이 소신껏 자신의 사상을 개진했다 해도 뒤따르는 사람들이 적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공자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를 능가하는 어떠한 사상도 통일왕국 이후 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상의 통제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주희(朱熹, 1130~1200)는 남송 시대의 학자였다. 송나라는 무(武)보다 문(文)을 노골적으로 강조한 왕조였다. 그래서 문화적으로는 성숙했지만, 결국엔 이민족의 침입으로 황제가 잡혀가고 양쯔강 남쪽으로 도망치듯 수도를 옮겨 반쪽짜리 왕조를 겨우 유지했다. 현실의 힘은 없지만 이민족보다 자신들의 문화가 훨씬 낫다고 자위하는 것이 유일하게 남은 자존심이었다.

 공자의 유연한 철학은 주희에 와서 엄격하고 치밀한 논리와 학설로 강화되었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해석에서 벗어나면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함을 지워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중국 유학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양명학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18, 19세기 잠깐 발흥했던 실학조차도 그 맥을 이어가지 못했다.

 

 ο 공자를 죽여야 공자가 산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공자에 대한 해석들 가운데서도 가장 엄격하고 정밀한 주자의 해석을 거의 유일한 텍스트로 삼았기에 그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화를 당했다.

 아무리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에서 배울 게 많다 해도,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그 한계는 뚜렷하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20세기 동안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줄곧 공자를 죽여왔다(?). 5·4운동 기간 중의 “공자의 사상을 파는 상점을 거꾸러뜨리자(打倒孔家店)”던 구호도 그렇고 문화운동 때 “임표와 공자를 비판하자(批林批孔)”던 운동이 그렇다. 개방 이후 서양의 다양한 사상을 접한 많은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추종하는 동시에 마오이즘을 마르크스주의의 탈을 쓴 유교적 봉건사상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던 속내를 읽어보면 역설적으로 중국의 사상과 문화에 공자의 사상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작동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철학이 근대적 시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펑유란(馮友蘭, 1895~1990)의 《중국철학사》부터다.

 

 1978년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재해석해, 현대에서는 노동운동을 소비자운동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노동자에서 소비자로의 입장 전환이 그런 주장을 가능케 했다는 점은, 공산주의가 무너졌다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무턱대고 덮어버렸던 우리의 오류를 반성하게 한다. 단순한 것 같은 입장 전환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서양사상을 극복하는 과정이었으며, 동양정신을 내재화하는 여정이었다는 것을 곰곰이 음미해봐야 한다. 

 

 5 철학하라! 

 3대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 :: 인라인 스케이팅, 스케이트 보딩,바이시클 스턴트

 

 누구나 쉽고 편한 걸 원한다. 그러나 그 편안함과 편리함은 자신이 전적으로 주체가 되는 것을 막기도 한다.

 철학은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정답도 없고, 스승도 없다. 임제선사(臨濟禪師, ?~866/867)의 말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하는’ 엄중한 승부다. 위대한 사상가가 암벽일 수 있고, 심오한 철학자가 태풍일 수 있으며, 해박한 스승이 무서운 파도일 수 있다. 철학은 그런 치열함을 통해 성장한다.

 공자는 일찍이 《논어》 <가인>편에서 ‘아침에 도를 만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확언했다. 흔히 도 道에 방점을 찍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난다는 사실이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만나주는 게 아니다. 그래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다잡는다. 공자도, 맹자도, 데카르트도, 칸트도 철학에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쳤다. 남들은 문제를 단순하고 실용적으로 해결하며 쉽고 편하게 사는데, 철학자는 치열하게 매달리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장좌불와(長坐不臥) :: 눕지 않고 늘 좌선함. 특히 선승들의 경우에는 몇 날 또는 몇 달을 눕지 않고 용맹 정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장좌불와 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자칫 쓸데없는 고행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수심결》에 “종경진겁(縱經塵劫)토록 소신연비(燒身燃臂)하며, 고골출수(敲骨出髓)하며, 자혈사경(刺血寫經)하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에서 나오는 구절로, 해석하면 “티끌 같은 긴 세월동안 몸을 태우고 팔을 태우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고 몸을 찔러 피로써 경(經)을 쓰며 오래도록 앉아 눕지 않고”의 내용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좌불와 [長坐不臥]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철학의 있고 없음은 단순히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격을 나눈다. 그게 진정한 ‘국격’이다. 그러니 국격을 갖추려면 철학을 먼저 세워야 할 것이다.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또한 철학적 사유는 자아를 사회와 세계와 연대시킴으로써 이기적 자아에 스스로 갇히지 않고 보편적 존재로서 세계시민 의식을 실현하게 한다.

 

 

 

2. 종교

 1 새뮤얼 헌팅턴과 비판자들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은 《문명의 충돌》에서,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1952~ )가 《역사의 종말》에서 체제와 이념의 대결로 공산주의는 패배할 것이라고 단언한 것을 비판하면서, 체제의 대결보다 문명, 특히 종교의 대결 국면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제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오랜 갈등과 투쟁의 역사를 지닌 것은 바로 종교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문명 충돌이 세계의 정세를 지배할 것이며, 문명 간의 ‘단층선’이 미래의 전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헌팅턴은 서구 대 비서구 문명들 간의 충돌을 예견했다. 유교와 이슬람의 비서구문명이 서구문명에 도전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 문명이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근대 성격에 맞게 부활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서구에 도전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는 서구와 이슬람에 경계선을 그은 헌팅턴의 이분법적 사고를 공박하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서구문명이 가장 야만적인 관행으로 타락한 경우라고 경고했다. 사이드는 결론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명 사이에는 우리들 대부분이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한 유대 관계가 있다’며, ‘문명충돌론은 일종의 방어적 자존심을 강화하기 위한 술수’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랄트 뮐러(Harald Müller, 1949~ )는 《문명의 공존》에서 헌팅턴의 편견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헌팅턴의 논리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이분법적 도식에 억지로 끼워 맞춘 조야한 퍼즐에 불과하며, 패권주의 야욕에 사로잡힌 미국 정부의 논리를 대변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은 복잡한 현실세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고 일축한다.

 뮐러는 세계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원거리 이동통신을 매개로 한 전지구화의 추세에 주목할 것을 권하며 낯선 것에 대응하는 적절한 방법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강자는 약자에게 다가갈 때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으므로 강자가 먼저 약자에게 손을 내밀고 다가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상생의 원리로 세계를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원래 유럽의 문화와 예술에서 나타난 동방취미(東方趣味)의 경향을 나타냈던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나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고정되고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개념이 ‘서양의 동양에 대한 인식’이라는 폭넓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adie Said, 1935~2003)가 발간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이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사이드는 서구 국가들이 비(非)서구 사회를 지배하고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만들어져 확산되었는지를 분석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식론적인 구별에 근거한 사고방식'이자,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제도 및 스타일'로 정의한다. 서구 국가들은 동양은 비합리적이고 열등하며 도덕적으로 타락되었고 이상(異常)하지만, 서양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하고 정상(正常)이라는 식의 인식을 만들어오면서 동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해왔다. 이러한 인식은 문학 등의 예술 작품이나 여행기, 동양(東洋)의 언어와 역사, 지리, 문화에 관한 학문과 연구를 통해 형성되고 확산되었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수단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식민지 지배를 낳고 정당화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과 동양의 경계와 차이를 끊임없이 확장한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매체와 문화양식들을 통해 동양을 열등하고 착취 가능한 대상으로 파악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근대의 학문과 지식들을 통해 동양인에게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로써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을 구별짓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기능을 한다.
한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대한 반작용으로 동양의 관점에서 서양(Occident)을 적대시하거나 비하하는 인식과 태도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라고 한다. 옥시덴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과는 반대로 서양은 비인간적이고 천박하며 물질적이지만, 동양은 인간적이며 고상하고 정신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구별을 통해 서양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와 편견을 형성한다. 옥시덴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의 뒤집힌 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동양과 서양을 구별짓고 대립시킨다는 점에서 동일한 특징을 지닌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두산백과)

 

 2 편협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종교는 인간의 내적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때로는 논리와 합리성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철학으로부터는 멸시를, 시대착오적으로 간섭했다는 까닭에 과학으로부터는 모순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무한성에 대한 원초적 희원을 지니고 있다.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는 이유다. 신의 초인간적 행동이 신화로 전해지고 숭배의 형식인 의례가 행해진다. 종교는 또한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초월적 존재와 연결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도덕적 가치를 구축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거나 해결할 수 없는 죽음과 그 이후의 문제 등을 신을 동원해 해결하려 한다. 죽음에 대해 아는 게 없기에 누구나 죽음은 두렵다. 그 공포를 떨쳐내기 어렵다. 근원적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인간은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 역시 떨칠 수 없다. 결국 종교는 죽음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다.

 

 ο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지 않고,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상

 지금 우리 사회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고 있는 형국이다.

 

 종교란, 신성하고 거룩하고 영적이며 신적인 것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한다. 많은 학자들조차 종교라는 낱말의 어원이나 유래만 갖고 종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정의를 내리는 경향이 많다. 캐나다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1916~2000)에 따르면, 서양에서 종교(religion)는 이론적인 신학 체계, 역사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종교, 즉 제도화된 전통으로서의 종교, 그리고 제도적 문화의 하나로 이해되는 종교 일반을 지칭한다. 즉, 서구의 시선에서 종교는 어떤 특정한 예배 행위와 연관되거나, 신과 인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용어에 제한된다. 본디 종교(宗敎)는 불교 용어다. ‘가장 높은(宗) 가르침(敎)’, 즉 부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종교에는 교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종교와 예배 의식을 중심으로 한 종교가 있다. 강력한 교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종교는 창시자가 있고 기원이 선명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얻은 종교로, 말하자면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 등이 그렇다. 예배 의식을 중심으로 한 종교는 부족 종교다. 부족의 정체성과 일치감을 준다는 점에서 내부적으로 매우 강력한 힘을 갖는다. 한편,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종교도 있다. 이 종교는 의식이나 교리 대신 명상이나 황홀경을 통한 영적인 체험을 중시한다. 최근에는 신비주의와 과학주의가 결합된 종교도 등장했다.

 

 ο 유일신 종교는 과연 우월한가

 유일신 종교가 고등 종교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유일신이 종교적 우월성의 근거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하등 종교에서 고등 종교로 진화된다는 진화사회학적 종교 연구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유일신 종교라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정도다.

 이 종교들은 모두 발원지가 유사하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을 중심으로 발생한 종교라는 공간적 공통점이 있다.

 서남아시아 지역은 사막이 넓게 분포한 곳이다. 기후는 아열대성이고 토양은 척박하다. 높은 산, 울창한 숲, 뚜렷한 계절의 변화와는 무관한 곳이다. 죽음과 불모의 땅 사막 또는 광야와 생명과 번영의 오아시스로 크게 나뉠 수 있는 지리적, 기후적 조건의 땅이다.

 삶의 형태는 자연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런 환경에서는 굳이 신이 여럿일 까닭이 없을 것이다. 복잡다단한 환경의 문화 또는 문명이라면 유일신 종교를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를 보면 이들이 모두 유일신 종교를 신봉한 것은 아니다. 유태인들조차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다양한 신을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일신 종교로 수렴되었다. 

 그에 반해 아마존 강 유역 부족의 종교를 살펴보자. 다양한 기후와 토양, 자연 조건, 종족 등 복잡한 요소들이 산재한다. 그 다양한 삶과 세상을 재고 따질 때 단 하나의 신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아마존의 밀림에서는 거의 고립된 상태의 각 종족들이 각기 다른 신들을 섬기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는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초월적 존재인 절대자는 하나면 족했다.

 그렇다면 알래스카처럼 생존 환경이 빙원인 곳은 오히려 유일신 종교가 더 보편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다른 문화와 교류가 거의 없는 곳에서는 아주 소박한 신앙 행위만 있을 뿐이다. 다른 종족과 어울려 살며 복합적인 사회를 구성하지 않은 이상 체계화된 종교 자체에 대한 필요나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종교가 확산됐던 것은 세계 4대 문명 발생지로 동양과 서양의 가교 역할을 하던 지역이었으며, 알래스카 등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인구와 정치체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일신 종교가 태동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정치적 권력이나 민족적 정체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도의 힌두교의 경우, 하나의 종교 안에서도 아주 다양한 신들과 복잡한 층위가 존재한다. 수많은 신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지형과 종족의 다양성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기원전 1370년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son of Hapu, 기원전1379?~1336)는 ‘신은 단 하나다’라고 선언했다. 이집트에서는 본디 매우 많은 신을 섬겼다. 그런데 아멘호테프는 태양이 유일무이한 신이라고 선언했고 그 태양신을 아톤(Aton)이라고 지칭하고는 자기 이름도 아케나텐(Akhenaten)이라고 천명했다. 자신을 유일신인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셈이다. 그는 기존의 신전을 폐쇄하고 아톤을 기리기 위해 아케트아톤(Akhetaton)이라는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그러나 아멘호테프의 정치적 의도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이집트 사람들의 반발을 사 제국이 사분오열된 것이다. 

 유일신 종교가 발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통일성과 체계성을 갖출 수 있다는 장점에 있다. 유일신 종교가 태동한 지역의 고대사회에서도 유일신 종교를 철저하게 지향한 건 지배계층이었고 일반 대중은 다양한 신을 섬겼다. 이스라엘조차 초기에는 마치 일본의 가마다나(神棚)처럼 집집마다 자신들의 작은 신전을 마련하고 숭배했다.

 통일된 제국일수록 하나의 가치로 통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 왕국이나 제국은 나라를 세운 뒤 항상 법전을 만들고 도량형을 통일하며 하나의 통치 이념을 마련한다.

 유대교는 유일신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자민족 중심적이었으니 팽창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고,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몰락과 함께 이슬람교에 흡수되면서 이제는 소수의 신자들만 남았을 뿐이다. 제국의 종교는 이미 그 자체가 거대한 권력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본다면, 그들이 유일신 사상을 엄격하게 고수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세의 성인숭배사상이 한 예다. 순교자나 성인의 무덤을 순례하거나 유골과 유품에 경배하면 병이 낫고 죄를 덜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은 성인의 유골 쟁탈전을 야기했고, 그 소유가 곧 권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자 그 제자들이 서로 뼈를 나눠 갖기 위해 그 시신을 삶았다. 또한 교회의 많은 기념일들도 기존의 다신교 문화권에서 따르던 것들의 변형적 수용이다.

 

 3 신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신화는 정말 허황된 이야기일 뿐일까? 적어도 신화에는 그 신화를 배태한 민족의 문화가 서려 있다. 

 단군신화의 배경이 아프리카였다면, 호랑이 대신 사자가 나올 것이고, 곰 대신 하이에나가 나올지 모른다. 마늘과 쑥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배경이 멕시코라면 고추를 먹었을 것이다.

 

 ο 왜 호랑이와 곰이었을까?

 왜 하필 호랑이와 곰이었을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맹수 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호랑이와 곰이다. 용맹하고 힘센 존재에 대한 동경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호랑이와 곰의 등장은 그런 바람과 희망이 투사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는 강한 존재에서 비롯되었다는 자부심이 표현된 것이다. 아주 먼 옛날 호랑이 부족과 곰 부족, 달리 말해,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는 부족과 곰을 토템으로 삼는 부족이 천신족과의 연합에서 주도권 경쟁을 벌였는데 호랑이 부족이 패배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예로부터 마늘과 쑥은 삿된 것을 물리치는 힘을 지녔다고 여겨졌다. 이른바 벽사(辟邪, 나쁜 귀신을 물리치는 것) 또는 재앙을 예방하거나 물리치는 것의 주술적 도구로 많이 쓰였다.

 남을 돕고 더불어 모두 유익한 세상을 위해 살고 싶다는 바람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가치다. 앞에서 말한 호랑이 부족과 곰 부족으로 보자면, 천신을 섬기는 부족과 곰을 토템으로 삼는 부족이 연합해서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느 민족이나 나라와 겨레의 뿌리가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하나로 묶일 수 있다. 민족정체성이 없으면 위기에 처했을 때, 당해내기 어렵다.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가 쓰인 시기는 13세기 후반, 즉 고려 충렬왕(1236~1308) 때다. 이 시기는 원나라의 침략 이후 고려의 자존심과 독립성이 크게 훼손된 때였다. 충렬왕은 원나라의 황제, 즉 칭기즈칸(Chingiz/Genghis Khan, 1162~1227)의 손자인 원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였다. 무신정권에 의해 정치, 경제, 문화가 무너진 상황에서 몽골 즉,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그들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독립적인 나라로서의 체면을 크게 훼손당한 처지였다. 그런 형편에서 보각국사 일연은 신라, 고구려, 백제와 가야의 역사를 쓰면서 단군신화를 중요한 꼭지로 다루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자칫 잃어버릴지도 모를 민족의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ο 신화의 의미와 역할에 대하여

 신화를 앞뒤 맥락을 살피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읽으면 역사와 사회, 인간관계가 총망라되어 있는 지혜의 보고다. 신화에는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 상징적인 의미로 담겨 있다. 이 경험은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상징을 걷어내고 신화를 읽으면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신화를 ‘비과학적인 이야기’로 규정하려는 과학적 합리론의 태도에 반기를 들고 신화의 큰 틀을 새롭게 해석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제임스 프레이저(Sir James George Frazer, 1854~1941)와 조지프 캠벨(Joseph John Campbell, 1904~1987) 같은 학자를 들 수 있다. 신화의 오류 과정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신화를 긍정적으로만 해석하지는 않았던 프레이저와 달리, 조지프 캠벨은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다. 신화는 은유일 뿐이다’라며 현대적 해석의 길을 마련했다.

 대부분의 신화는 ‘낯익은 기이함’을 통해 인간의 ‘공통적 경험’을 드러낸다. 현재의 우리와 신화 속 주인공들이 놀랍게도 닮았다는 것을 비일상적인 인물과 풍경을 통해 깨닫게 한다. 또한 신화에는 인간과 세계의 원형으로서의 본질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신화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대인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내재되어 있다. 신화는 인간의 원초적이며 생물학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자아를 실현하며, 나아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추구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현대인에게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신화는 후세 작가들에게 상상력과 영감을 선사한다. 《반지의 제왕》J.R.R. 톨킨이나 《해리포터》조앤K. 롤링도 바로 신화의 산물이다.

 《삼국유사》처럼 신화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유전자’를 느낄 뿐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다양한 상징으로 나타난다. 캠벨이 ‘은유’라고 했던 것들 말이다.

 신화는 낯설고 기이하면서도 ‘권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신화가 그냥 옛날의 기록으로만 닫혀 있었다면 지금처럼 재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화의 권위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는 태도를 지닐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4 종교의 문제는 곧 현대사회의 문제다 

 조작된 신화는 인간을 왜곡시키고 폭력마저 정당화한다. 이른바 고등종교는 신화를 미신적 이야기로 폄하하지만, 스스로 근본주의에 빠져 오히려 새로운 신화를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조작된 신화는 반문명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적인 신념의 문제에 국한할 게 아니다. 역사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는 바로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ο 기독교 근본주의의 경향

 기독교 근본주의는 1870~1910년대에 열린 일련의 성경회의에서 태동한 신학적 경향이었다. 1920년대 미국 개신교 내에서 벌어진 보수적 신학운동에서 구체화되었다. 1910~1915년에 걸쳐 12권으로 구성된 《The Fundamentals》라는 소책자가 출간되었고 1920년경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미국에서 천년왕국운동이나 신앙부흥운동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근본주의는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종교운동으로 성경의 영감설(靈感設)과 무오설(無誤設)을 강조했다. 이들은 성경 이외의 권위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전천년왕국주의(Premillenialism)를 신봉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근대에 따른 합리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다원화의 물결 속에 있었고 기독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수용되었다. 19세기말부터 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들 중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들은 대부분 가톨릭이었고, 유대교 신자들도 상당했다. 또한 미국 곳곳에서 유사 기독교들이 생겨났다. 미국은 새로운 종교양식, 특히 기존의 기독교를 변형한 유사종교의 낙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존의 미국 기독교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개방적인 입장인 자유주의 신학은 이전의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성서 해석을 비판하고, 기술문명의 발전과 사회 전반의 근대화에 따라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근본주의는 그런 해석은 교회의 존립 근거를 무너뜨리고, 신앙의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최대의 적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근본주의는 반 세속적, 반 과학적, 반 근대적 성향을 더욱 짙게 드러냈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으로 알려진 1925년 테네시 주 데이턴의 한 공립학교 교사에 대한 재판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고소당했고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승리감을 만끽했으나 일반 대중에게는 오히려 독선적인 종교에 대한 혐오와 반감을 야기했다.

 

 근본주의자들의 태도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공산주의, 노동문제, 인종문제, 폭력 등이 불거지면서부터다. 본디 근대화에 따른 합리주의와 세속주의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요소를 위태롭게 한다는 입장이었던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 진화론, 사회주의를 이러한 문제들의 원인으로 규정하며 미국과 기독교를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전쟁이 끝나 투쟁의 대상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근본주의는 미국 사회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근본주의의 호전성과 배타적인 태도는 애국주의로 변형되기도 했다.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은 새로운 에덴이고 따라서 미국의 성공은 신의 축복이며, 백인 기독교 혹은 복음의 승리라는 등식을 강조했다. 이런 성향을 가장 짙게 강조한 것이 복음주의 교회였다.

 실제로 20세기 중엽 이후 미국 종교에서 활력을 유지해온 곳은 주류 교파가 아니라 남침례교회, 하나님의 성회, 나사렛교회 등 새롭게 등장한 보수적 개신교 교단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선교 매체로 TV를 선택했고 미국의 정체성과 성장을 강조하면서 정치에 관여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오순절교회 :: 방언이나 병고침 등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강조하는 기독교 종파. 이들은 초대 오순절의 역사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다. 1932년에 설립된 〈서빙고교회〉가 최초의 오순절교회라 할 수 있다. 오순절교회에 속한 교단으로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The Assembly of God of Korea)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순복음교회〉로 통한다. 오순절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해 전도와 부흥에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도 받지만 신앙을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한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五旬節敎會 , Pentecostal Church ]
오순절교회 [五旬節敎會, Pentecostal Church]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오순절 (Pentecost) :: 오순절은 그리스도교도와 유대인이 공통으로 가진 유일한 축일이다. 레위기 23장에 설명이 있다. 마침 그 시기는 보리 수확기와 겹친다. 신약의 시대에 이르면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신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율법을 준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는 오순절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와 방언을 사용하는 능력을 부여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도교도들은 오순절을 신도들에게 성령이 내린 날로 여긴다. 또한 오순절은 '교회의 탄신일'이라고도 말해진다.
사도행전 2장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불의 혀'가 각자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했는데, 초점은 바로 '불의 혀'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였다. 신약성서는 성령의 '은사'가 기적을 일으키고, 예언을 하고, 방언으로 이야기하는 능력을 준다고 말한다. 또한 신약성서는 신도들이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한다.
20세기에 일부 그리스도교도들은 예배를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만약 진정으로 성령의 힘을 느낀다면 예배가 더 생생하고 감동적일 테고 성령의 은사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오순절파'라는 집단을 이루었다. 20세기 후반에는 오순절교회가 크게 성장했다. 오순절교파의 하나인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는 세계에서 가장 급속히 성장하는 중이다.
영국에서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Whitsunday)이라고 부른다. 'White Sunday'라는 뜻인데, 갓 세례를 받은 사람이 부활절부터 오순절까지 흰 옷을 입은 데서 유래한다.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는 음악적인 느낌을 가진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1200명의 남성 합창곡으로 「사도들의 애찬(愛餐)」을 썼으며, 에드워드 엘가의 오라토리오 「주의 왕국」도 오순절을 다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순절 [Pentecost] (『바이블 키워드』, 2007. 12. 24., 도서출판 들녘)

 

 근본주의가 반 근대주의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창했던 이유로, 이념적 공백 상황에서 소련 붕괴 이후 급속히 약화된 좌파의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 교회의 상당수는 근본주의 또는 복음주의적 성격이 짙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성장모델이 바로 미국 교회, 특히 근본주의로 무장한 복음주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ο 종교는 또 하나의 기회다

 무슬림과 함께 식사를 할 때 크로와상이나 베이글을 피하는 것도 예의다. 크로와상은 유럽인들이 무슬림 전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 자신들의 상징인 초승달을 빵으로 빚은 것이고, 베이글은 유태인들의 누룩 없는 빵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 헝가리에서 유래되어 오스트리아로 전해졌고, 마리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 전했다.

 

 라마단 :: 이슬람력(曆)에서의 9월. 아랍어(語)로 '더운 달'을 뜻한다. 천사 가브리엘(Gabriel)이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가르친 신성한 달로 여겨, 이슬람교도는 이 기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날마다 5번의 기도를 드린다. 여행자·병자·임신부 등은 면제되지만 대신 이후에 별도로 수일간 금식해야 한다. 이러한 습관은 유대교의 금식일(1월 10일) 규정을 본떠 제정한 것인데, 624년 바두르의 전승(戰勝)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달로 바꾸어 정하였다. 신자에게 부여된 5가지 의무 가운데 하나이며, '라마단'이라는 용어 자체가 금식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 물, 성관계도 금지된다.
라마단의 마지막 10일간은 가장 최고로 헌신하는 시간으로 이슬람교도들은 그 기간 사원 안에서 머물게 된다. 보통 27번째 되는 날을 '권능의 밤(Laylatul-Qadr 또는 Lailatul-Qadr)'이라고 하여 밤새워 기도한다. 라마단이 끝난 다음날부터 '이드알피트르(Eid-al-Fitr)'라는 축제가 3일간 열려 맛있는 음식과 선물을 주고받는다.
라마단은 해마다 조금씩 빨라진다. 윤달이 없는 이슬람역은 12개의 태음력으로 이루어져 있어 태양력보다 11~12일이 적기 때문이다. 해마다 라마단이 다가오면 전문가단이 구성되어 초승달을 관측하고, 최고종교지도자가 초승달을 육안으로 관찰한 후 라마단의 시작날짜를 공포한다. 이 날은 같은 이슬람국가라도 교리에 따라 하루 정도 차이가 나기도 한다. 많은 이슬람교도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달의 모양을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라마단을 시작하지만, 지역에 관계없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초승달이 보이는 날짜를 따르는 신자들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마단 [Ramadan] (두산백과)

 

 종교는 개인의 신앙과 신념의 문제를 떠나 이미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사회적 삶이자 사고방식이다. 이미 하나의 문화고 환경이다. 종교는 모든 문화의 기저에 깔린 본질적인 문양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어떤 문화권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지식을 탐구할 때 종교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3. 심리학

 1 데카르트와 분트, 그리고 프로이트

 교회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모두 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단언했기 때문에 각 개인이 자신의 사유와 행동의 주체가 될 수 없었으며, 당연히 ‘마음의 문제’ 또는 ‘심리’라는 주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인간의 심리 가운데 중요한 요인인 욕망을 백안시하던 종교적 태도로서는 이 문제를 억압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종교의 시대를 지나 17세기 이후부터 로크, 흄 등 철학자에 의해서 연상 심리학, 경험주의 심리학 등으로 일컬어지는 초기 심리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 주제를 중요한 이슈로 꺼내든 사람은 데카르트였다. 그는 인간을 몸과 정신의 결합체로 보았고 그 속성을 연장과 사유로 규정했다. 그의 심신이원론은 본격적으로 마음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이해한 근대심리학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심으로 한 현대심리학의 입장과는 다르지만 심리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심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빌헬름 분트(Wilhelm Maximilian Wundt, 1832~1920)가 187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심리학 실험실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심리학 연구는 1899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을 통해서 현대 심리학의 지평으로 확장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의식의 틀 속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심리 현상을 탐구했다. 마침내 인간의 의식 너머 무의식의 영역이 있다는 발견을 했고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억압된 감정이나 욕구야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해석하며 그동안 굴레에 갇혀 있던 욕구를 해방시켰다. 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이란 바로 그런 무의식 속에 감춰진 또 하나의 자신에게서 오는 메시지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자신’은 그동안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되던 대상에서 당당하게 주체적 자아의 한 축으로 부상했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것들을 수면 위로 드러냄으로써 환자의 불안과 신경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자유연상 기법을 통해 꿈에 숨어 있는 욕망과 불안을 발견했다. 꿈은 잠을 잘 때 의식 활동이 잦아들면서 깨어 있을 때 억압되었던 욕망이나 불안이 변형된 의식의 모습으로 떠오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꿈의 해석》에는 특히 성적인 문제에 대한 깊은 탐구가 담겨 있다. 꿈의 성적 특성,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성욕(리비도), 소원충족 이론, 억압 이론 등을 통해 인간의 욕망은 각 개인의 도덕적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의식의 심층에서 비롯된다고 밝혀냈다. 그래서 더 이상 음산하거나 억압된 형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건강한 욕망으로서 성을 논의할 수 있는 성 담론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2 새롭게 세상보기, 칼 융

 프로이트가 ‘무의식(Unconsciousness)’을 개인적 차원에서 다뤘다면,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무의식을 인류 보편의 문화적 속성으로 확장했다. 그는 세계 곳곳의 신화, 종교, 민담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관념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개인이 아닌 인류에 보편적인 무의식이 존재함을 밝혀냈다. 이를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혹은 ‘보편적 무의식(이하 집단무의식)’이라 명명했다. 특히 융은 무의식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면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분명히 다른 입장이었다. 융은 보편적인 무의식을 통해 내면의 신비한 세계를 밝혀낸다면, 종교가 지향하는 영적인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ο 집단무의식과 원형은 무엇인가

 꿈에 대해서도 융은 프로이트와 다른 견해를 전개했다. 프로이트는 꿈을 개인의 무의식이 억압된 결과로 해석하고 과거 행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한정한 반면, 융은 꿈의 예시적 기능을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이 상호 작용하는 관계라는 관점에 머물렀지만, 융은 의식과 무의식이 합일하는 삶을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융은, 의식이 인식하지 못하는 삶의 진실이 집단무의식에 있고, 그것이 꿈을 통해 삶의 목표를 일러준다고 말한다.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는 더 극명하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콤플렉스에 의한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해석하지만 융은 종교를 집단무의식에서 발현했다고 보았다. 융은 종교적 심성이 자아의 분열을 막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판단했다.

 프로이트는 심리성적발달이론에서 성의 발달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바 있다. 구강기, 항문기를 거쳐 제3기인 남근기에 도달하면, 아이들은 성의 기초가 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경험한다고 했다. 융은 콤플렉스를 심리적인 생명의 핵이자 인간의 감정, 지각의 원형이라고 보았다.

 융이 프로이트의 개인적 무의식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무의식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은 두 사람이 일치했다. 그러나 융은 무의식을 프로이트와 달리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갈래지음으로써 프로이트를 극복하려 했다. 그는 집단무의식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닌 유전된 무의식으로 작동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융의 입장은 문학을 위시한 다양한 예술에서 사고와 분석을 확장시키는 데 공헌했다. 특히 신화에 관한 그의 해석은 이후 신화에 대한 재조명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세계의 여러 신화들을 조사해서 줄거리나 등장인물에 유사성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유전적으로 계승되어 인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무의식의 영역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억압하려는 것과 무의식을 겉으로 표현하려는 것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신화, 전설, 문학, 연극과 같은 예술이라고 설명한 것과 대조적이다.

 

 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원형은 집단무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된 개념으로, 집단무의식이 이미지나 상징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발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모성성에 대한 잠재적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거의 전 인류에 존재하는 원형이다. 모성성은 또한 생명의 탄생이라는 근원적 문제와 연관된다.

 제우스의 아버지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와 그녀의 아들이자 남편인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의 열두 신 가운데 막내인 크로노스였다. 그는 장차 자식들에 의해 내쫓길 운명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통째로 삼켜버렸다.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는 여섯 번째 아이인 제우스가 태어나자 산기슭의 동굴에 숨기고 강보로 싼 돌덩이를 남편에게 주었다. 크레타 섬 이다 산에 사는 님프들이 염소의 젖을 먹여 키운 제우스는 장성하여 지혜의 여신 메티스가 준 약을 크로노스에게 먹여 형과 누이들을 토해내게 했다. 이들은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유폐시켰다. 어머니 레아는 남편보다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선택했다. 이 신화는 어미로서 생명에 대한 근원적 선택을 상징한다. 크로노스의 폐위와 유폐는 존재의 상실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의 빈자리는 제우스가 채운다. 이렇듯 대부분의 신화에서 생명의 상실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보충되고 이로써 거대한 근원적 역사성 또한 이어진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맹상군(그의 아버지 전영은 아이가 성장하여 문설주에 닿을 정도가 되면 아비를 해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을 쫓아내라 명령했으나 어미가 몰래 키운 아들 문(文)은 후에 큰 정치가가 된다) 이야기와도 흡사하다.

 

 맹상군 ::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정치가로 성(姓)은 전(田), 이름은 문(文)이다. 맹상군(孟嘗君)은 시호(諡號)이며, 설(薛, 지금의 山東省 滕州) 지역에 봉지(封地)를 두고 있었기에 설공(薛公)이라고도 불린다.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 ∼ BC 250), 위(魏)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 ? ∼ BC 244), 초(楚)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黄歇, ? ∼ BC 238)과 함께 이른바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로 불린다. 
제(齊) 선왕(宣王)의 서제(庶弟)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는 그 부모를 해치게 된다는 속설 때문에 장성할 때까지 아버지 몰래 키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40여 명의 형제가 있었으나 그 총명함을 인정받아 후계자로 인정되어 전영(田嬰)이 죽은 뒤에 설(薛)의 봉지(封地)를 물려받았다. 
맹상군은 재산을 털어 천하의 인재를 후하게 대우하여 수천의 식객을 거느렸으며, 현명함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그래서 진(秦)의 소왕(昭王)이 그를 초빙하였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두 번째 초빙에는 응하여 진나라의 재상(宰相)이 되었다. 하지만 진의 신료들이 그가 제(齊) 나라 사람이므로 진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모함하여 감옥에 갇혔다. 맹상군은 식객의 도움을 받아 진을 탈출하여 제나라로 돌아가 제의 재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성어(成語)가 비롯되었다. 
그러나 맹상군은 제 민왕(湣王)이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설(薛) 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 민왕이 송(宋)을 멸망시키고 그를 제거하려고 하자 위(魏) 나라로 가서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진(秦), 조(趙), 연(燕)과 연합하여 제(齊)를 공격하여 민왕(湣王)을 몰아냈다. 새로 즉위한 제(齊) 양왕(襄王)은 맹상군을 두려워하며 가깝게 지냈으나, 그가 죽은 뒤에 아들들이 자리를 다투자 위(魏)와 연합하여 설(薛) 땅을 정벌하여 맹상군의 후손을 제거하였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설(薛) 지역의 풍속을 경험한 바를 적으면서 “세상에 전하기를 맹상군이 손님을 좋아하고 스스로 즐거워하였다고 하니 그 이름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世之傳孟嘗君好客自喜 名不虛矣)”고 하였다. 여기에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성어가 비롯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맹상군 [孟嘗君] (두산백과)

 

 이런 예는 실존주의 소설의 대표작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이방인》에서도 나타난다.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 협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다. 검사는 뫼르소가 패륜적 인물이며 따라서 어떠한 도덕성도 없기 때문에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뫼르소가 얼마나 비윤리적인 인간인지를 설명하는 핵심 부분에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정부와 정사를 나눴다는 사실이 거론된다.

 융의 집단무의식과 원형성의 개념으로 접근해보면, 어머니의 죽음은 자신의 존재 근거에 대한 상실을 의미한다. 그 부재를 채울 것은 어느 것도 없다. 유일한 가능성은 새로운 생명의 잉태다. 섹스는 생명 잉태의 구체적인 행위이며 이것은 뫼르소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단무의식이 발동된 것이고 생명에 대한 원천적 갈망이라는 원형성의 생생한 사례다.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과 원형성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죽음과 잉태 혹은 새로운 시작의 대표적 예는 ‘우로보로스(Ouroboros)’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로보로스는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뜻으로 머리가 제 꼬리를 문 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원의 형상인 우로보로스는 영원히 자신을 삼켜서 성장을 반복하는 순환을 상징한다.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때론 윤회를 상징하고 때론 영원성을 상징한다. 통합과 분할, 재통합, 진화와 퇴화, 성장과 퇴행, 생과 사의 과정 등 영원한 시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로보로스가 탄생과 죽음, 혹은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정사는 바로 어머니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이어주는 상징이다. 따라서 우로보로스의 연속선상에 놓인다. 융은 이런 것들이 모두 집단무의식과 원형에 바탕에 둔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신화와 종교에서 죽음과 잉태의 관계가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ο 페르소나, 아니마, 아니무스, 그림자...

 융은 집단무의식에서 비롯한 원형의 핵심을 신화와 꿈에서 나타나는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페르소나(Persona),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그림자(The Shadow), 대지의 어머니(The Mother), 현명한 노인(The Wise Old Man), 장난꾸러기(Trickster) 등이 그것이다.

 어느 민족이든 가면과 가면이 지닌 상징이 존재한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쓰고 있는 가면으로 나약한 존재인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쓰고 있는 원형이다. 페르소나가 의식과 다른 것은 성격과는 전혀 관계없이 무의식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르소나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다. 동시에 사람의 외적 성격을 결정한다. 원시 부족들의 가면이나 우리나라의 전통 탈도 이런 특성을 공유한다.

 남성 속의 여성성인 아니마, 여성 속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는 이전까지 철저하게 닫힌 채로 억압된 성 역할이 가져온 산물이다. 그러나 누구나 반대 성의 본질을 조금씩은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을 명확하게 규정한 융의 이론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또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자신의 원래 성과 감춰져 있는 또 하나의 성 사이의 충돌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생명력이나 창조적인 활동 에너지를 발현할 수 있다. 물론 그 둘이 충돌하기만 하여 비생산적이며 비사회적인 성향을 노출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그림자는 억압된 단점, 약점, 본능 등으로 이루어진, 그러나 숨겨져서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다. 그림자는 페르소나 깊숙한 곳에 숨겨둔, 인간이 사회에 원활하게 적응하고 사람들과 협조하며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어두운 측면이나 열등감 같은 것이다.

 그림자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고,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이성 파트너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다. 투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융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신성한 짝을 인간 정신의 원형이라 강조하면서 남자와 여자를 서로 이끄는 것은 섹스 이상의 것, 즉 이런 원형성에 있다고 분석한다.

 자기(self)는 현명한 노인(남성) 또는 대지의 어머니(여성)의 원형이 활성화된, 높은 수준의 개성화 과정이다. 장난꾸러기는 내면에 감춰진 해방자의 기질 또는 사기꾼의 기질을 뜻한다. 흔히 예술가들이 가진 중요한 성격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융은 인간의 인격 전체를 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아가 인정하지 않은 경험이 머무는 곳은 개인 무의식이고, 개인 무의식은 의식적인 개성화 과정과 조화되지 않는 정신적 활동과 내용을 저장한다. 그리고 그 특징은 콤플렉스로 발현된다.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은 인류가 축적해온 상징과 이미지의 잠재적인 저장고다. 그것의 내용인 원형성은 인류의 보편적인 개성이다. 개인과 종족에 따라 조금씩 변형될 수는 있으나 출생, 재생, 죽음, 마법, 영웅, 신, 악마, 어머니, 대지, 자연물 등의 다양한 원형성은 인간이 전인격적인 정신적 완성체로 성장하는 데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한다. 자아는 다양한 원형성과 콤플렉스 등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조화시킴으로써 인격을 통일하고 일체성과 불변성의 감각을 유지한다.

 융은 프로이트를 전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개별자인 개인을 보편적 개인으로 확장시켰다. 또한 콤플렉스나 억압기제 등에 긍정성과 창조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했다.

 

 3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라, 게슈탈트 심리학

 언행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심리학은 그 변화를 연구하면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며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를 향해 나아간다.

 심리학이 지나치게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것들에 매몰되어서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비판을 불러오기도 했다. 융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고립적 개별성을 벗어난 보편성을 추구했기에 협소한 관점을 비교적 탈피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요소주의적 측면이 있다는 점까지 부인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행동을 어느 한 요소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합된 반응으로 보는 심리학, 바로 ‘게슈탈트 심리학’이 생겨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게슈탈트(Gestalt)란 형태 혹은 형상을 뜻하는 독일어로 형태심리학의 핵심적 개념인데 홀로 잘 쓰이지 않고 ‘게슈탈트 심리학’이나 ‘형태주의적 접근’과 같은 말 앞에 붙여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형태주의는 부분 혹은 요소의 의미가 고정적이지 않고 부분들이 모여 이룬 전체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는 입장이다. 전체는 또한 부분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에 형태주의는 전체와 부분의 통합성을 강조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심리 현상을 몇 개의 구성요소로 분석하고 그 요소들의 결합으로 모든 심리 현상이 구성된다는 요소주의 심리학 혹은 구성주의 심리학에 반대한다. 그리고 형태주의의 명제인 ‘전체는 부분의 합과 다르다’라는 입장에서 지각적 조직화의 원리를 찾아내는 데 초점을 둔다. 심리 현상이 여러 요소들을 합친 결과가 아니라 전체성을 갖는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을 창시한 사람은M. 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 1880~1943)이다.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난 독일의 심리학자로 미국에서 왓슨이 행동주의 심리학을 제창할 무렵 그와 정반대로 통합적 형태주의를 주장했다. 게슈탈트 개념이 과학자, 철학자, 수학자들의 이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 무렵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는 특정한 공간과 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으며, 공간과 형태 그 자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석을 거듭하여 더 분화된 요소를 찾아내 그것에서 본질을 찾으려 하는 태도를 비판한 셈이다. 철학자 에렌펠스(Christian Freiherr von Ehrenfels, 1859~1932)와 카를 슈툼프(Carl Stumpf, 1848~1936)도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 감각요소 이상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게슈탈트 개념을 확립시켰다. 훗날 코프카(Kurt Koffka, 1886~1941)와 콜러(Kaufmann Kohler, 1843~1926)는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여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 연구했다. 그게 바로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Gestalt organizing principles)’였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연속성, 폐쇄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슈탈트 이론을 설명할 때 흔히 쓰이는 예가 바로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전구의 점멸이다. 여러 전구를 연결하면 빛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전구가 켜지고 꺼지는 것은 독립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따로 독립된 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본다. 서로 가까이 있는 것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근접의 원리라고 한다.

 비슷한 무리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고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도 하나의 덩어리로 보인다. 폐쇄성과 연속성에 대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 별자리를 보는 방식을 보자. 우리가 북두칠성을 볼 때 그냥7개의 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리로 파악해서 국자 모양으로 인식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각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자극들을 따로 떼어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통합된, 즉 하나의 덩어리 전체로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게슈탈트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단순한 요소의 집합체가 아니라 전체를 통합적으로 받아들이는 반응이라고 보기 때문에 행동의 각 요소들을 분석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행동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베르트하이머는 모든 심적 현상은 결코 그 요소로 환원되지 못하고 전체성을 띤다고 본 것이다.

 

 사회심리학의 창시자인 레빈(Kurt Lewin, 1890~1947)은 ‘장이론(Field Theory)’을 통해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거론하며,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사람 모두라고 주장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개별적 심리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도록 할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그리고 그 관계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학문이다

 

 4 ‘어? 내가 왜 이러지?’ 억압과 방어기제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란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심리적 상처를 회피하려는 심리다. 프로이트는 끔찍한 충동이나 죄의식을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게끔 방어기제가 작용한다고 보았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불안에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지 못할 때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차용되는 방법이다. 기제(機制)란 원래 ‘기계 장치’라는 뜻으로 사물의 작용 원리 또는 구조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심리학 용어로는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를 뜻한다.

 두려움과 공포 혹은 그것을 일으키는 욕구나 기억을 무의식 속으로 떠밀어넣고 의식의 문으로 닫아버리는 억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방어기제다. 억압과 억제는 다르다. 억압은 무의식적인 작용이고 억제는 의식적인 작용이다. 억압을 통해 우리는 위험한 욕구나 생각, 기억 등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무의식 속에 고스란히 존재한다. 그래서 꿈으로 나타나거나 신경증 현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기제들은 따로 하나씩 존재하지 않고 대개는 여러 방어기제들이 동시에 작동되기 때문에 고치기 어렵다.

 

 인간은 어떻게든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써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이때 무의식의 충동이 의식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은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충동은 다양한 증상으로 변형되어 표출될 수 있다. 갈등을 겪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미성숙하거나 신경증적인 방어기제를 주로 동원하면, 대인관계에서 심각한 갈등이나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

 

 5 왓슨과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

 행동주의 심리학은 심리학의 원조인 분트의 방식과 정면으로 맞서고, 게슈탈트 이론과도 대척점에 서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 이론을 주창한 사람은 J. 왓슨(John Broadus Watson, 1878~1958)으로, 심리학에 자연과학의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실험 방법을 도입했다.

 행동주의 심리학이란 자극이 주어졌을 때 어떤 반응 혹은 결과가 나타날 것인지를 예측하고 그 반응에 유효한 자극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내는 방식의 심리학이다. 왓슨은 심리학의 목적이 마음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보았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나 동물의 행동이 ‘관찰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과 동물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고 따라서 연구 방법에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쥐의 행동을 오래 관찰했다(이 부분이 행동주의가 비판받는 지점이기도하다).

 왓슨은 과학적 측정과 실험의 결과치에 토대를 두고 이론을 전개해야 보편적 사고에도 맞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과학적 측정에 의한 행동 분석이면 족하다고 여겼다. 그는 심리학이 과학이 되려면 과학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왓슨의 이런 성향은 전형적인 미국의 실용주의적 태도와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 연구자는 개인과 환경 가운데 환경 조건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그런 점에서 행동주의 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가장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에 둔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을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로 보고, 학습이란 인간의 행동에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적절한 자극과 그 반응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파블로프의 조건화 반응에 대한 실험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래서 행동주의 심리학은 행동은 모두 생득적인 반사와 습득적인 조건반사의 복합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태도는 심리학을 과학적 심리학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웠지만 극단적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곧 수정되었다.

 

 스키너(Burrhus F Skinner, 1904~1991)는 모든 행동은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던 심리학자다. 미국의 대표적 행동주의자인 스키너는 일명 스키너상자 Skinner Box를 고안했다. 스키너는 이를 ‘실험공간’이라고 불렀는데, 상자 안쪽 벽에 지렛대가 있고 통 안에 있는 동물이 지렛대를 누르면 저절로 먹이가 나오게 되어 있다. 그 원리를 학습하게 된 동물은 지렛대를 반복적으로 누른다. 동물의 행동이 먹이에 의해 강화되는 구체적인 사례다. 유기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유기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이런 강화(Reinforcement)는 조작적 조건화 과정에서 부여하는 보상 방식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사실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과학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스키너는 과학주의에 입각한 심리학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스키너는 인간을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동물로 인식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인간은 단순한 반사기계가 아닌, 행동의 결과로 자신의 행동까지도 바꿀 수 있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설의 구성이나 설명보다도 조작주의적 분석을 통해 선행 조건과 귀결과의 관계만을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감이 넘쳤던 스키너는 자기에게 맡긴다면 그 어떤 바보도 천재로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고 자신의 원리를 그대로 교육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분명 그에게는 ‘행동공학’으로 인간을 탈바꿈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티칭머신을 만들기도 했고, 교육이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스키너는 우리나라 교육이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교육학자들이 특히 스키너의 방식을 차용했다. 무엇보다 간결하게 이해할 수 있고 직접 실행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을 기계적으로만 작동하는 행동인으로 본다는 점에서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에 빠지거나 기능주의적 혹은 도구주의적 입장에 갇히기 쉽다.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에 토대를 두어서는 자칫 기능주의적 교육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런 교육으로는 개성, 잠재성, 상상력, 창의력이 부재한, 오로지 잘 훈련된 지식 수용자만 양산할 뿐이다.

 행동주의 심리학 모델은 최소의 투자로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기업 경영 방식에 매우 충실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6 심리학에 대한 오해와 진실

 요즘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에 심리학과 관련된 책들이 다수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심리에 관한 문제들은 마케팅 등 실용적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현대의 심리학은 누구나 자기 분야에 응용할 수 있다는 실용성에 매력이 있다.

 둘째,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고민도 많다. 이에 심리학은 형이상학적 이론을 전혀 다루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쉽고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해주었다.

 셋째, 관계성에 대한 불안감이 크게 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잠재력의 계발’에 대한 열망 또한 심리학과 관련한 저술들이 꾸준히 팔리고 있는 원인에 덧붙일 수 있다.  

 

 20세기 후반 들어 심리학은 인지과학의 발달과 유물론적 심리철학 등의 영향으로 인간의 내적 의지, 감정, 일반적 사유에 관한 심층적 연구를 간과하고 외적 상황을 단순하게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면이 강해졌다. 그러면서도 정작 정합적 체계를 갖춘 정신과학 혹은 정신의학의 방식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순도 드러냈다. 현상을 관찰하여 얻은 결과를 나열하는 게 전부인 학문으로 머문다면 마음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본연의 의미는 퇴색되기 마련이다.

 심리학이 빠지기 쉬운 또 하나의 위험성은 지나치게 인간을 도식화하거나 왜곡된 형태로 단순화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더불어 유사한 심리 현상을 근거로 인간을 고정화된 존재로 간주하는 경향도 경계해야 한다. 자칫 인간을 물리적 운동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간주하기 쉽기 때문이다. 

 

 바넘효과(Barnum effect) :: 어떤 일반적인 점괘가 마치 자신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현상을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즉, 오늘의 운수에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오늘의 고난은 내일의 행복이다"라는 문구가 나올 경우 많은 사람들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넘효과라고 한다.
이것은 서커스에서 교묘한 심리조작을 잘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P. T. Barnum에서 유래하였다.
심리학 용어에서 사용되는 바넘효과는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일단 정확한 정보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점술에 관련돼서 설명하면 점술이 제공하는 정보가 정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점술이 정확하다는 마음의 준비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거짓말로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그 정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오랜 기간 진실로 인식되는 경향이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넘효과 [Barnum effect]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아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고 전제했다. 정신분석이 자아를 완전히 해방시킬 수 없으며 다만 불행한 삶의 조건을 어느 정도 버티고 견뎌내는 데 도움을 줄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미국의 자아심리학은 심리학이 인간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낙관주의와 실용주의에 젖었다. 라캉(Jacques Marie Emile Lacan, 1901~1981)이 미국 심리학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로 돌아가라고 말한 맥락이 여기에 있다.

 

 7 새로운 심리학의 탄생

 인지심리학은 감각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저장하고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과정을 연구한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심리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심리학의 새로운 영역이다.

 

 ο 진화심리학의 한계

 진화심리학의 주된 연구 대상은 인간이지만, 그 바탕에는 신경계를 갖고 있는 모든 동물에 적용할 수 있다는 범용성을 깔고 있다. 진화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뇌의 기능적 메커니즘이다. 이 메커니즘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된 심리학적 적응 혹은 ‘진화된 심리학적 기작(evolved psychological mechanism)’이다. 진화심리학은 합리성이 이상적인 견해라는 전제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다.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 1955~ )은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큰 소화관과 큰 두뇌 사이에는 일종의 진화적 교환이 이루어진 것 같다고 진단한다. 이 둘은 음식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전략이다. 유칼립투스 잎만 먹는 코알라는 한정된 먹이만을 먹도록 진화하면서 뇌의 크기가 작아졌지만, 인간 같은 영장류는 훨씬 더 다양하고 질 높은 음식을 먹도록 진화하면서 소화관은 점차 짧아지고 다양한 음식에 대한 데이터를 저장해야 하는 뇌는 커졌다는 것이다.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것을 먹어서는 안 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감각 수단과 인식 수단이 진화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의 머리가 그토록 커야 했던 이유는 생각을 깊이 혹은 많이 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다.

 진화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 1948~ )은 《요리 본능》에서, 인간이 채식이든 육식이든 불에 익힌 음식을 먹도록 진화했다는 사실을 통해 진화심리학의 입장을 지지한다. 음식을 불에 익혀 먹는 행위는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변화로 이어져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진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진화론의 파생적 학문이다. 그래서 진화론에서 적용하는 몇 가지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우선, 인간은 동물이며 인간의 뇌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인간의 뇌는 인간이 성공적으로 살아남아 번식하도록 돕기 위해 적응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화했고, 이는 동물의 뇌와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전제는 인간의 본성은 타고나는 것이며, 인간의 행동은 타고난 본성과 환경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진화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논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진화심리학에 맞서는 주장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화심리학은 경험적으로 반증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시간을 되돌려서 그 원형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게 문화인류학적 입장에서 제기하는 반론이다. 둘째, 진화심리학이 유전자 결정론에 토대를 둔 것 아니냐는 오해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sborne Wilson, 1929~ )이나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 )등의 유전자 결정론과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토대가 일치하는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셋째, 인간의 행동은 생물학적 진화보다는 학습에 의해 더 잘 설명될 수 있다는 반박이다. 이 점은 뇌과학에서 강조하는 부분이다. 뇌의 물리적 현상으로 심리의 변화를 설명하는 뇌과학은 물리적 환원에 빠질 우려가 있지만 대다수 뇌과학자들은 이에 단호하게 반대하며 후천적 학습과 훈련에 의해 뇌의 기능과 작용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집단 간의 차이는 생물학이 아니라 문화로 설명된다는 반론이다. 이 점은 선천적 요인보다는 환경적 요인이 인간 심리에 더 중요한 요소로 작동된다는 문화론자 혹은 환경론자 등 후천적 요인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주로 제기되는 반론이다. 이런 오해와 반론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은 진화적 시각이 단편적인 사실들을 매끄럽게 통합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그뿐 아니라 진화심리학은 아직 모르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믿을 만한 예측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유용한 도구라고 강조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범주의 오류에 유의해야 한다. 즉 ‘~이다’라는 사실 판단을 곧바로 ‘~해야 한다’는 윤리 판단으로 이끌어내서는 안 된다. 당위에서 사실을 도출하려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화심리학은 기존의 심리학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나 입장을 견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물학적 방법을 통해서 인간 심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진화심리학은 사회생물학, 인류학, 인지과학, 심리학이 한데 모여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일종의 통섭형 과학이다.

 

 ο 인지심리학의 행보

 인지심리학은 인간이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며, 산출하는지의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인지심리학은 톨먼(Edward Chace Tolman, 1886~1959)이 기틀을 마련한 기호학습이론에서 출발하여 1960년대에 그 세력이 확대된 것으로 본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1920년대 이후 행동주의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기존의 실험심리학은 정신적인 면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상을 외면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러나 1950년대로 접어들어 정보 개념이 도입되고 이에 따라 통신공학, 정보처리공학, 언어학 등이 발달하면서 마음의 내부 구조와 과정을 직접 논하려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 태동했다. 인간의 뇌와 마음이 컴퓨터와 같은 정보처리 체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인지과학의 핵심은 다름 아닌 심리학이었다. 이후 다양한 발전이 인지 분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인간 능력 향상을 목표로 하는 미래의 융합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인지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지심리학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인지심리학은 실험 심리학의 전통을 계승한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실시하여 거기에서 얻은 결론을 토대로 예상 가능한 모델을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특히 인공지능 연구 등의 도움을 받아 기호 조작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지과정을 기호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8 심리학, 변신의 끝은 어디인가

 2002년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경제학 부문에서 엉뚱하게도 비경제학자가 선정된 것이다. 주인공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1934~ )이었다. 심리학자이면서 행동경제학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카머넌은 300년 전통의 경제학 프레임을 완전히 뒤엎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카이먼 이후 경영학은 심리학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졌다. 미국의 경영학이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미국의 국력 특히 경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리학을 응용해 현장에서 공감하고 응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갖췄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리학이 다른 학문과 교류하는 까닭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은 한 학문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해, 다른 학문과 연계하지 않고서는 그 기능이나 행동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20세기의 예술은 가시적인 대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는 확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심리는 단순히 심리학의 영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9 새로운 강자의 대두, 뇌과학

 프로이트 식의 정신분석 중심의 의식심리학과 달리 행동심리학은 과학적이고 실험적인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심리학을 유기체의 행동과학이라고 규정했다. 

 1970년 초까지 심리학의 주도 세력이었던 행동심리학은 그러나 1970년대에 인지심리학이 등장하면서 예전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인지심리학은 인간이 어떻게 지각하고, 기억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했고,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에 빗대어 알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인지기능을 강조한 나머지 정서를 인지기능의 방해요소로 간주했다.

 정서가 심리학의 영역에 정식으로 입성한 것은 1990년대 중반 뇌과학자들의 연구와 발견 덕분이다. 감각, 인지, 감정, 운동조절 등 인간의 모든 정신작용은 뇌로부터 산출된다. 뇌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핵심적이며 유일한 접점이다. 인지신경과학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뇌의 작동 원리를 파헤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최근까지만 해도 인간의 정신적 측면은 고유할 뿐 아니라 인간 정체성의 근간이며 가치라고 여겨졌다.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이성의 자율성에 둔 것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정신은 결코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로 인정되었다. 과학적으로 심리 현상을 해석하는 심리학에서조차 그런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견고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신경생리학의 발달은 우리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측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상은 다양하고 복잡하며 아주 빠른 속도로 반응하는 물리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드러냈다. 이른바 뇌과학의 대두다. 예전에는 뇌가 정신활동을 수행하는 양상을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 뇌의 외양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살아 있는 인간의 뇌를 직접 관찰함으로써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뇌과학의 세계적 권위자 조장희(1936~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사례를 소개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딸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범인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온화한 성격으로 평판이 좋았던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엉뚱하게 나쁜 일을 하는 불일치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어떻게 이 현상을 설명할 것인가? 2년 전까지 좋은 사람이었던 그는 왜 살인자가 되었을까? 최근 그는 감정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살인 역시 화를 참지 못해 벌인 일이었다. 아마도 심리학에서는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여러 심리 현상들을 수집하여 정합적 관계를 설명하려고 했을 것이다. 의식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의식의 발로라거나 하는 등의 설명이 수반되었을 수도 있다. 반면 뇌과학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뇌에서 화를 컨트롤하는 부분이 편도체인데, 암이 자라면서 편도체를 눌렀기 때문에 화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살인범은 암 수술을 받고 예전의 온화한 상태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처럼  베일에 가려있던 뇌의 문제와 심리 문제가 결합한 것이 뇌과학이다.

 

 뇌과학(Brain Science)이란 뇌의 ‘신비’를 밝혀냄으로써 인간의 물리적, 정신적 기능을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응용학문이다. 뇌과학은 과학, 의학, 교육, 산업,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응용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뇌과학과 더불어 신경과학(Neuroscience)의 발전도 심리학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신경과학은 신경계의 구조, 기능, 진화, 유전학 등을 연구하는 광범위한 분야로 생물학의 한 분파를 넘어 인지심리학, 신경심리학, 컴퓨터공학, 의학 등 많은 영역과 관련된 학제적 학문으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전부일 수 없는 것처럼 뇌 또한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설령 뇌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간의 심리나 다른 여러 가지 비밀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관념이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습관을 바꾸며 습관이 관념을 바꿀 수 있다는 생명과학자들의 주장도 중요하다. 사실상 지난 10여 년간 뇌과학 및 신경과학이 인간에 관한 그 어떠한 새로운 사실도 밝혀내지 못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뇌를 이해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지나친 낙관이다. 그것은 자칫 위험한 환원주의를 불러올 수 있다. 우리 뇌의 뉴런들이 생각을 발화한다는 기계론적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뇌에 종속시킨다면 인간은 단순히 뇌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뇌과학자들도 현재의 뇌과학으로는 인간에 대한 어떠한 비밀도 밝혀낼 수 없다는 점에 조심스럽게 동의하고 있다. 알바 노에(Alva Noe, 1964~ )의 《뇌과학의 함정》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과학과 철학의 성배라 일컬어지는 의식 자체를 신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10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교과서는 자아를 발달심리학적 측면에서 설명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자아에 대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철학적 자아를 가장 처음 제기한 이는 소크라테스다.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 소크라테스는 자아 성찰이 없는 앎은 무의미함을 깨우쳐주었다. 그러나 자아가 철학적 주제가 된 것은 인간의 주체성이 확립되는 근세 이후의 일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생각하는 나(res cogitans)’가 핵심 주제다.

 구체적이고 좁은 의미에서 실질적 자아에 대한 인식은 자아의 실현을 이룰 수 있는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인식으로 깨우친 자아와 그것을 실현 가능하게 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독립 가능성이 온전하게 주어지지 않으면 자아는 언제나 위축되고 억압된다. 독재국가나 경제적 착취의 구조에서는 자아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아 인식과 실현의 불일치는 개인을 파멸시킨다.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 1902~1994)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는 것을 ‘자아정체감의 형성’이라고 말했다.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나는 타자와 다르게, 다양한 욕구와 동기,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간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 ‘나’가 질서, 균형, 통합으로 실현될 수 있어야 자아정체감 혹은 정체성이 확립된다.

 

 자기인식과 분석의 최대의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약점이 나만의 것이거나 정말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옥 안에 스스로 갇혀서 지낼 수도 있다. 심층 심리를 통해 자신을 분석하는 것은 그런 불필요한 자기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심리학자들에게 빚을 졌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에 발을 내디딜 용기를 주었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였다. 심리학은 그 해법을 통해 자기를 정확히 인식하고 불필요한 자기억압과 도피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나를 정립할 수 있게 해준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우리의 행동은 뇌의 구조 때문에 일어난다는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 1939~ )의 명제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다른 동물보다 단지 뇌가 크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독특한 모듈로 구성되어 있는 뉴런들이 다양한 자극에 대해 다채로운 방식으로 반응해서 스스로 복잡한 구조를 조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원동력이 사회활동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려는 능력, 누군가에게서 인정받고, 존경을 받고 싶은 욕구 등에 의해 갈수록 뇌가 정교하게 발달해왔고 이것이 다른 동물과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가자니가는 뇌의 상태가 어떻든 인간이라면 대부분 사회적 규칙을 따르며, 자유의지와 책임은 개인의 뇌 자체가 아니라 둘 이상의 뇌가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나오는 가치라는 사실을 꼼꼼하게 증명함으로써 단순히 뇌과학에만 의존할 경우 자칫 큰 오류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결국 뇌과학의 눈으로만 인간을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교학, 사회학, 심리학, 의학,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과 기술 등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인간의 고유한 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반응한다. 인간의 심리와 뇌 현상에 대한 심층적 연구는 결국에는 ‘인간이란 정말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갈 것이다.

 

 

 

2부 진보하는 인류와 인문학

4. 역사 

 1 누구의 시선으로 쓴 역사인가

 세계사 교과서 대부분은 고대 이집트문명을 본격적인 역사의 시작, 또는 역사의 본류인 것처럼 서술한다. 말로는 세계4대문명이라 하면서 철저하게 이집트문명 중심이다. 원인은 일반적인 세계사들이 유럽 중심적 시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서구의 눈으로 볼 때 인도 인더스문명나 중국 문명 황허문명은 자신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적다. 그래서 은연중 문명사의 출발을 이집트로 삼는다. 그들에게 ‘해 뜨는 곳 오리엔트’는 곧 이집트다.

 

 ο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기원전 1세기말 제정을 수립한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5현제 시대까지 약 200여 년간 지속된 평화를 뜻한다. 변경의 수비도 견고했고 이민족의 침입도 별로 없었다. 여러 도시가 번창했으며 물자와 인적의 교류도 활발했던 시기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마땅히 ‘로마의 평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로마가 정복하고 지배한 나라나 민족의 입장에서도 팍스 로마나에 동의할 수 있을까? 단지 역사를 기술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록된 게 없었을 뿐, 그 시기의 세계사를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볼 수만은 없다.

 지금도 나이 든 세대들은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조선을 ‘이씨들의 왕조’라는 뜻의 ‘이조’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동아’라는 말은 일본이 영미귀축(英美鬼畜)을 물리치고 아시아의 번영을 이끌겠다는 해괴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끔찍하고 비참한’ 기간이었을 뿐이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그것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전쟁은 국가 대 국가의 대립과 투쟁이다. 전쟁의 당사자는 배달민족과 왜인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이라는 국가다. 그러므로 ‘임진년 조일전쟁(朝日戰爭)’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정유재란은 ‘정유년 제2차 조일전쟁’이라 부를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이 자민족의 자존감을 살리는 점도 중요하지만,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냉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왜란이라는 명칭에 자칫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개입된 것이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1636년의 병자호란도 ‘병자년 조청전쟁(朝淸戰爭)’이라고 불러야 한다. 병자호란이라는 명칭도 ‘병자년에 오랑캐(胡)가 일으킨 난리’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인조반정(1623, 광해군 15년)이라고 기록하지만 이 역시 승자의 논리일 뿐 엄격하게 따지자면 ‘정변’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Mt. Everest, 8848미터)다. 그 산은 아시아에 있다. 그런데 왜 서양 이름일까? 네팔어로 그 산의 이름은 초모랑마(Chomolangma)다. ‘세계의 어머니 신’이라는 뜻이다. 영국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에 위세를 떨치던 시절 앤드루 워(Andrew Scott Waugh, 1810~1878)가 이끄는 영국 측량단이 산의 높이를 측정하고 전임 단장이었던 에버리스트 경의 이름을 붙였다. 1865년의 일이다. 

 영국인들은 당시 그 산에 이름이 없었다고 변명을 했다. 하지만 거짓이었다. 영국 측량단이 이름 붙이기 전인 1733년 프랑스 예수회에서 간행한 지도에도 분명히 산의 이름이 초모랑마로 기록돼 있다. 이후 스웨덴의 지리학자 겸 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 1865~1952) 등이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원래 이름인 초모랑마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페인은 필리페 왕을 기려 필리핀이라 이름 짓고, 적도가 지나간다고 에콰도르라고 불렀다. 영국은 미국 땅에 처녀왕 엘리자베스를 기려 버지니아라는 주명(洲名)을 붙였다.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의 이름을 따서 대륙명을 사용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라니! 그 말 속에는 라틴족이 점령한 대륙이라는 패악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굳이 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부른다면 ‘남미’가 타당하다.

 

 ο 오리엔탈리즘, 그릇된 인식의 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바탕에는 ‘서구는 우수, 비서구는 열등’이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역사관은 동양을 열등한 ‘타자’로 고착화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구의 동양주의 담론의 핵심은 동양을 지배하려는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세계사가 무늬만 세계사일 뿐 실제로는 유럽사에 불과하다. ‘서아시아’를 유럽인들은 ‘중동(中東)’이라고 불렀다. 아시아 대륙 남서쪽에 있는 지역이니 서남아시아 혹은 서아시아가 맞다. 예전 유럽인들에게 동양은 터키에서 인도까지였다. 그 중간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곳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중동이다. 이집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근동(Near East)’이라고 부르거나 터키와 시리아, 요르단을 묶어 ‘소아시아(Asia the minor)’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국계 하버드대학 교수였던 레이 황(Ray Huang, 1918~2000)은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는 저서에서 서양이 동양을 능가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야 16세 후반부터 그러니까 본격적으로는 17세기부터라고 규정했다. 

 유럽은 중국과의 교역에 매달렸다. 큰돈이 생기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중국에 내다판 것은 별로 없다.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거의 수입만 했다. 문명적 우열이 확연하게 드러나니 갖다팔 게 없었던 것인데 그래도 교역이 가능했던 건 서양인들이 남미 등 식민지에서 대규모로 은을 약탈해서 지불수단으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교역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인들이 일본에 거의 유일하게 팔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머스킷(musket), 즉 조총뿐이었을 것이다(반면 ‘빵’이나 ‘덴뿌라’ 같은 음식은 자연스럽게 일본에 전파되었다.

 1570년 나가사키를 개항한 이후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계절 초입의 사흘 동안 고기 대신 생선을 먹는 그들의 음식 전통, 라틴어로 quatuor tempora라고 부르는 전통이 일본에 전해졌다. 주로 새우를 튀겨먹었는데 튀김 음식을 먹지 않던 일본인들은 이때부터 음식을 튀겨 먹기 시작했고 라틴어의 tempora는 음식 이름인 덴뿌라가 되었다). 실제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과 무역하면서 총을 거래했고, 일본은 그 총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면서 도공보다 은광업자와 은 제련사를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 그들에게는 당시 중국과의 교역에 필요한 은을 채굴하고 가공할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 덴뿌라 라는 조리방식 자체를 음식 이름으로 알아들었다 설, 생선이 아닌 콩 꼬투리를 생선 모양으로 만들어 조리 했다는 설

 

우리가 마시는 다즐링(Darjeeling)이라는 차도 영국과 중국의 대립과 갈등의 산물이다. 영국은 중국에 무역적자를 겪고 있었다. 산업화된 영국은 중국에 많은 물산을 수출해서 그 불균형을 깨야 했는데 중국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영국에 차문화를 전파시킨 건 찰스 2세에게 시집온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였다. 그게 1662년의 일이었다. 귀족들 사이에 차문화가 퍼지고 18세기에는 서민들도 차를 즐겼다. 그런 차를 모두 중국에서 수입했다. 영국은 중국에서 차를 사들이지 않으면 중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식민지로 삼은 인도 다즐링이 중국의 차를 재배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어서 대규모로 차 플랜테이션(Plantation, 자본과 기술을 지닌 서구인들이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서 현지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특정 농산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경영 형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른바 대체재로서의 차였다. 스리랑카(예전의 실론)의 내전과 정쟁 불안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타밀족 문제도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당시 실론에 대규모 차 플랜테이션을 개발하면서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타밀족을 데려다 고용한 데에서 기인한다. 제국주의의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까지 대량으로 재배해 중국에 몰래 팔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18세기에 이미 동인도회사가 몰래 아편과 담배를 밀수해 짭짤한 수입을 챙기고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아편을 재배하고 판매한 것은 중국과의 무역불균형을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그게 아편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을사늑약’이 일반화되기 전 우리는 이 사건을 ‘을사보호조약’이라고 지칭했다. ‘보호’는 일본이 자신들의 강제성을 감추기 위해 붙인 수식어에 불과했다. 그래서 ‘보호조약’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강제적 힘을 동원하여 억지로 맺게 만든’ 조약이라는 점에서 ‘늑약’이라는 말이 퍼진 것이다.

 

 ο 일본, 중국과의 관계와 역사

 ‘일본군 전쟁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 by Japan)’ 문제를 ‘종군위안부’라 하는 것은 정당한 용어가 아니다. ‘정신대(挺身隊)’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 노동인력으로 징발되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왜곡된 말이다.

 우리는 일본에게 ‘보상’받아서는 안 된다. 보상(報償)은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는데 재산상의 손해가 생겼을 때 이를 채워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배상 賠償을 해야 한다. 배상의 전제조건은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다. 그런데도 1965년 한일회담으로 우리 정부에 돈을 건네며 ‘독립 축하금’이라고 했다.

- 報償, 남에게 진 빚이나 받은 것을 갚음. 이라는 뜻이 있음

 

 ο 붕당정치의 진실은 어디에?

 붕당정치를 구시대 정치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나 당파, 혹은 정파를 대단히 진보적인 선진 정치 형태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당파 싸움이나 당쟁이 아니라 정쟁(政爭)으로 말이다.

 선조는 조선 최초의 방계(傍系)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세자 수업을 받지도 않았고 당연히 정치 세력도 없었다. 왕권이 약화되면 신권(臣權)에 휘둘리기 쉽다. 그래서 선조가 선택한 것이 신권의 분화였다.

 당파가 나뉘면서, 각 당파는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직면해야 했다. 주먹다짐이 아니라 논리와 지식으로 그리고 대의와 명분으로 상대 당파를 제압해야 했다. 그러니 공부하지 않으면 못 배겨났다. 그건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최종 결정권자는 바로 임금이었다. 붕당정치 형태를 효율적으로 지탱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지적 능력이 따라야만 한다. 모든 논쟁과 토론에서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임금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야 한다. 임금은 경연(經筵)을 통해 지식을 쌓았고 세자는 서연(書筵)을 통해 꾸준히 공부했다. 반면 무능한 군주가 집권하면 무고와 사화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국정이 혼란에 빠졌다. 혹은 일당독재가 되어 이른바 세도정치로 빠져들었다.

 당쟁이 사라진 것은 정조 사후였다. 정조 사후 당쟁이 없어지고 노론의 일당독재가 이어졌다. 흔히 세도정치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외척들의 발호가 문제였다기보다 노론 일색으로만 정권이 계속된 탓이었다. 또한 자신의 지식과 판단력을 과신한 정조가 많은 일에서 매우 권위적이고 절대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까닭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조가 죽은 뒤, 정쟁은 사라졌고 수구적인 정치 성향만 남아 자정능력과 국제정치의 감각을 상실한 채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흘렀고 결국 조선의 국권 수탈을 불러왔다.

 붕당정치의 원래 의도는 권력의 균형적인 분배와 정당한 정권 교체, 정치적 도덕성 유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파가 바뀌는 것은 큰 변고를 일으키는 이른바 환국(換局)과 사화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스럽고 아주 세련된 일종의 정권교체였다. 16세기에 조선에서 그렇게 세련된 정권교체 시스템이 성장하고 있었다고 본다면 이것은 자랑스러울 일이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ο 두려워하지 않는 자, 사관

 연산군조차 “임금이 두려워한 것은 사서뿐(人君所畏者 史而已)”이라고 했을까.

 

 난신적자(亂臣賊子) ::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을 일컫는 말.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천하에 몹쓸 사람이나 역적의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하〉 '부자호변장(夫子好辯章)'에 나온다.
맹자의 제자 공도자(公都子)가 맹자에게, 사람들이 맹자를 가리켜 논쟁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 까닭을 알고 싶다고 하였다. 맹자는 자신이 논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이라고 대답하고, 이어 선대(先代)의 우(禹)임금과 주공(周公), 공자(孔子) 등 세 성인(聖人)을 계승하는 것이 자신의 뜻임을 밝히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우임금이 홍수를 막으니 천하가 태평해졌고, 주공이 오랑캐를 아우르고 맹수를 몰아내니 백성들이 편안해졌고, 공자께서 《춘추(春秋)》를 완성하니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昔者禹抑洪水而天下平 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 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난신적자는 윗글의 '공자성춘추이난신적자구'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춘추시대로서,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세상이 쇠해 각종 사설(邪說)이 들끓어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어버이를 해치는 일이 생겨났는데, 공자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천자(天子)의 일을 다룬 《춘추》를 완성함으로써 비로소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맹자는 말한 것이다. 이처럼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을 가리켜 난신적자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난신적자 [亂臣賊子] (두산백과)

 

 조선시대에는 임금도 사관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태종이 사냥을 즐기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무안해진 그는 “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사관은 태종을 이미 보았고 그 말까지 기록했다. 그리고 태종은 이를 평생 알지 못했다. 사초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 때의 일이다. “전대의 제왕들이 선왕의 실록을 보지 않은 사례가 없는 것 같다. 유독 태종께서 태조실록을 보지 않으셨던데, 이때 하윤 등은 이를 보는 것이 옳다 하고 변계량은 보지 않는 것이 옳다 하여 태종께서는 변계량의 논의를 따랐다. 이제 춘추관에서 태종실록을 편찬했으니 내가 한 번 보려는데 어떠한가?” 세종도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맹사성은 주저하지 않고 간했다. “전하께서 만약 이를 보신다면 후세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 고칠 것이며 사관도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사실을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세종은 그의 말을 따랐으며 이후 임금은 실록을 볼 수 없다는 원칙이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현대사회에서 사관의 역할을 하는 게 언론이다. 따라서 언론인은 이 시대의 사관 史官으로서의 마음가짐이 필요한 사람이다. 오죽하면 리영희 교수가 그런 언론사에 종사하는 자들을 언론인이 아니라 ‘언롱인 言弄人’이라고 비판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기록자가 아니라 ‘선수’라고 착각하고 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펜을 쥐게 하면 칼 든 망나니보다 위험하다.

 

 2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 

 동양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기전체, 편년체, 기사본말체, 강목체가 그것이다.

 

 ο 동서양의 역사 서술방식

 기전체(紀傳體)는 본기(本紀), 열전(列傳), 지(志) 등으로 나눠 짜서 서술하는 역사 서술방식이다. 기전체라는 명칭은 본기와 열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기전체의 대표적 역사서가 바로 사마천(司馬遷, 기원전145?~86?)의 《사기》로, 이후 중국의 정사(正史)를 서술하는 모범이 되었다. 고려시대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와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기전체는 한 왕조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서술되며 왕과 신하들의 전기, 통치제도, 문물, 경제 실태, 자연현상을 두루 다룬다. 왕조 전체의 체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정사 체제로 자리 잡았다.

 편년체(編年體)는 시간의 흐름, 즉 연월에 따라 기술하는 역사편찬의 방식이다. 흔히 통사(通史)라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 역사서로는 《춘추》, 《좌씨전》, 《한기(漢紀)》가 있다. 기사본말체의 역사서라고 규정하는 《자치통감》은 동시에 편년체를 따르고 있다. 편년체의 연월을 따르면서 생기는 기사의 분단을 보충하기 위해 기사본말체를 함께 적용했다.

 기사본말체 (事本末體)는 동양의 전통적 역사 서술방식으로 사건별로 제목을 앞세우고 관계된 기사를 모아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런 서술방식의 장점은 사건의 원인과 발단, 전개의 과정과 이후의 영향까지 일관되고 일목요연하게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역사서가 송나라 때의 학자 사마광(司馬光, 1019~1086) 등이 편찬한 《자치통감》이다. 완전한 기사본말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8세기말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도 기사본말체에 입각한 서술을 따랐다고 평가된다. 이 서술방식의 매력은 어떤 시대를 전체적으로 개괄하기보다는 특정한 문제를 연구하고 서술한다는 점이다.

 강목체(綱目體)는 강(큰 글씨로 쓴 줄거리 기사)과 목(작은 글씨로 쓴 구체적 서술)으로 구성된, 일종의 편년체에 대한 보조적인 역사 서술의 형식이다. 강은 연대를 따른다는 점에서 편년체를 따르지만 주요 사건을 큰 제목으로 씀으로써 편년체를 보완한다. 목은 그 구체적인 사례를 꼼꼼하게 다루면서 의미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큰 제목과 소제목의 방식이 아니라 강은 시간의 흐름을, 목은 사건의 의미를 중심으로 기술되는 것이다. 주희가 《자치통감》을 자료로 활용하여 쓴 《자치통감강목》, 조선 안정복(1712~1791)의 《동사강목》이 대표적이다. 강목체는 춘추대의(春秋大義)의 명분과 전통을 중시하여 진리와 의리를 높이고 거짓과 불의를 비판하는 강과 목의 구별로 성리학적인 도덕적 평가가 기준이 된다. 이런 점에서 해석의 의도가 개입된 역사 서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역사서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484?~425)는 그리스-페르시아전쟁(흔히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부르는)을 다룬 《역사》를 썼다. 이 책은 다양한 지역의 역사를 묶어놓은 일종의 세계사이며 ‘민속지’이자 ‘박물지’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사실을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고 다양성과 객관성에 바탕을 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물론 그리스의 서사시와 비극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술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헤로도토스가 서양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건 신화와 전설로 윤색된 서술을 최대한 벗어나 사실에 기초하여 역사를 서술하고자 한 최초의 역사가였기 때문이다.

 로마는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과 태도가 달랐다. 대표적인 경우가 플루타르크(Plutarch, 46?~120?)다.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역사를 영웅 중심으로 기술했다. 《영웅전》은 다분히 정복자의 시선을 지녔던 로마의 문명을 토대로 삼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운명적 순환사관을, 중세는 그리스도교의 종교사관을 따랐다. 르네상스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역사도 객관성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역사관이 비로소 정립되기 시작했다.

 

 ο 랑케와 실증주의 사관, 그리고 카의 비판

 그 결실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에서 맺어졌다. 랑케는 원 사료에 충실하면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역사관을 주창했다. 이른바 실증주의 사관이다.

 역사가의 생각과 주관에 따라 역사가 달라지는 상대주의 사관과 달리 랑케는 정치, 신학, 철학으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독립시킴으로써 객관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즉 이전의 자의적인 역사 연구와 서술을 부정하고 엄격한 사료 비판에 근거한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여 역사학을 과학의 경지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서양의 역사학은 그에 의해 비로소 독자적인 연구 시야를 확보했다.

 그러나 실증주의 역사관은 사료의 객관성과 절대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에 오히려 비판받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즉 역사가의 가치와 신념에 따라 사료가 선택되거나 부정될 수 있고 랑케의 사관도 사료를 선택함에 있어 원천적으로 주관성에 빠지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비판이다.

 

 랑케의 입장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에는 콜링우드(Robin Collingwood, 1889~1943)와 E. H.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가 있다. 콜링우드는 역사적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과거는 역사가에 의해 구성되고 그 의미 또한 역사가에 의해 부여되기 때문에 역사는 자료를 수집하고 탐구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과학과 거리가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항상 오염되어 있어서 과학적 객관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콜링우드는 역사는 역사가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될 뿐이고, 명백한 증거를 기초로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파악되는 경우는 없다고 주장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라고 주장한 카는 현재의 시각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역사가는 ‘가위와 풀의 역사’, 다시 말해 단순히 과거 사실을 기계적으로 편집하거나, 현재의 목적을 위해 과거 사실을 주관적으로 왜곡하는 오류를 모두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는 랑케의 역사관이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료의 가치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편집할 수 있는 역사관이라고 비판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역사의 진보성 문제였다.

 랑케는 시대를 개별적으로 구분했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랑케는 설령 외연의 진보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역사가 진보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에 반해 카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하며, 그에 따라 현재의 지식이 증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카는 역사가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ο 아날학파, 아래로부터의 역사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랑케와 카 사이에는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랑케나 카 모두 역사를 주류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술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위로부터의 역사’다. 이에 반대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추구한 역사학자들이 있었다. 바로 ‘아날학파’다.

 아날(annales)이란 명칭은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 1878~1956)와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가 공동으로 창간한 <경제사회사 연보>에서 유래했다. 그들은 지배자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지 않고 사회경제적 구조와 변동, 계층, 계급의 개념을 역사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아날학파는 기존의 역사에서 무시된 과거의 일상사에 관한 소소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분석함으로써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중세 후반기 당시의 사회구조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파헤쳤다. 그래서 르 고프(acques Le Goff, 1924~ )는 《연옥의 탄생》에서 연옥은 12세기의 사회적 종교적 배경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죄인 취급당하던 고리대금업자들의 위상이 강해지자 교회가 그들을 이용해먹을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의 대기공간인 연옥이었다는 것이다. 죄인인 고리대금업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이다. 즉 연옥이 만들어지는 데에 고리대금업자의 로비가 작용했고 연옥이 자본주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해석했다. 아날학파는 정치, 영웅이나 지배자로서의 개인, 연대를 극복해야 할 세 가지 우상으로 여겼고, 이들 우상의 타파를 목표로 새롭게 역사를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ο 미시사와 거시사

 기존의 역사학이 주로 거시사를 다루었다면, 당대의 사회구조를 분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했던 아날학파는 미시사의 단초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미시사의 등장은 역사의 주체를 시민이나 민중으로 봐야 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미시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탈리아 좌파 역사가들을 통해서였다. 이단 신앙과 농촌 구전문화 간의 관계를 미시사적으로 추적한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 1939∼ )의 《치즈와 구더기》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시사는 역사 주제를 새로운 각도로 다뤄 일반화된 해석을 뒤집는 경우도 많고 이런 경우엔 논란의 여지가 생기게 마련이다.

 

 ο 하워드 진과 파세리니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은 거시사에서 ‘잊힌 사람들’을 역사의 무대로 이끌어낸 대표적인 역사가다. 그는 역사를 거시사와 미시사의 대립항으로 보기보다는 민중의 힘으로 일궈낸 풀뿌리 역사의 시각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관했다. 이른바 민중사관 혹은 진보사관이라 불린다.

 

 민중사관에 새로운 방법론을 들고 나온 사람이 루이자 파세리니(Luisa Passerini, 1941~ )다. 그녀는 기록해야 할 민중문화를 구술사로 확장시켰다. 구술사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학문으로 무장하고 자료의 수집과 분류, 분석과 해석 등을 앞세운 학자들이 아니라, 역사를 현장에서 목격한 이들의 생생한 진술이라는 점이다. 직접 겪은 이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긴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또 하나의 의미는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 무시해왔던 민중의 경험을 살려낸다는 점이다. 역사학이 과거의 사실이 어떠했는가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구술사는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학이 사실과 해석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과거에 대한 담론 체계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구술사는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실험으로 평가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 E. H. 카

 

 “역사는 과거의 행위를 궁구(窮究)하고 그 성공과 실패, 흥기와 쇠망의 배후에 가로놓인 원리를 탐구하는 것”

- 사마천

 

 3 문학에서 역사 읽기

 흥부는 첫 번째 박을 탔다. 그 박에서 나온 건 풀뿌리와 나무껍질 같은 것들이었다.

 두 번째 박을 탔다. 책이 나왔다.

 세 번째 박에서 온갖 재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하인과 노비까지 나왔다. 흥부가 탄 박은 모두 네 개였다.

 흥부 처도 네 번째 박에서 뭐가 나올지 알았다. 그래서 남편이 박을 타지 못하게 극구 말렸다. 그것은 ‘당신의 욕심을 유도하는 폭탄’이라고, 그래서 지금 나온 모든 귀한 것들을 도로 빼앗아갈 것이라고. 하지만 흥부 역시 뭐가 나올지 대충 짐작했기에 끝내 우겨서 마지막 박도 탔다. 양귀비가 나왔다.

 

 ο <흥부전>에 담긴 행복의 우선순위

 첫째 박에서 나온 풀뿌리는 귀한 약재였다. 그러니까 첫째 박은 무병장수의 바람을 담고 있는 셈이다. 둘째 박에서 나온 책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한 것들로 공부해서 과거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라는 상징이다. 그러니까 명예를 의미하는 셈이다.

 흥부의 박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꿈꾸던 행복의 우선순위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하게 여긴 행복은 무병장수하고 명예를 누리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보면 세 번째 박은 물질적 풍요고 네 번째 박은 쾌락을 상징한다.

 그런데 우리는 흥부의 박 하면 그냥 부자만 떠오른다. 그야말로 ‘대박’인 것은 거두절미 오로지 물질적 풍요로만 연결될 뿐이다. 우리가 꿈꾸는 가장 큰 행복이 돈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여기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흥부전>은 동생들의 분노가 담긴 작품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부모의 유산은 자식들에게 골고루 돌아갔다. 딸들에게도 재산을 나눠주었다. 당시의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엄청난 전쟁을 겪고 나니 상황이 바뀌었다. 토지는 황폐해졌고, 가문을 잇는 것 자체가 급선무였다. 그래서 장남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거나 따로 큰 몫을 챙겨주었다. 폐허가 된 전쟁 이후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동생들의 분노와 좌절이 바로 이 소설의 배경적 혹은 심리적 구조다. 그래서 놀부는 집안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는 고약한 장남을 빗대 욕심꾸러기로 설정한 것이다.

- 조선 후기 부농을 빗댄 것이라는 설

 

 ο 인문학의 묘지에서 <조침문>을 읽다

 조선 순조 때 유씨부인이 지은 <조침문(弔針文)>은 한 개의 바늘을 27년 동안 쓴 조신하고 알뜰한 여심을 그린 고전수필이다.

 왜 그 여인은 27년이나 바늘을 알뜰히 간수하며 살아야 했을까? 이 작품이 쓰인 시기는 19세기 중엽쯤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우리의 공업 수준으로는 바늘 생산이 용이하지 않았다. 전혀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것이 오히려 더 경제적인 점, 혹은 외국산에 대한 선호로 국내에서는 바늘을 거의 생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바늘은 수입품이었다. 그러니 여인에게 바늘은 그냥 단순히 수를 놓거나 옷을 깁는 도구로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국내 생산이 되지 않으니 여인에게 필수적인 바늘에 쏟는 마음은 지금 우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알뜰하고 심성 고운 여인이었으니 그 값에 상관없이 27년 동안 바늘과 동고동락한 시간이 애틋해서 제문까지 썼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시 우리의 공업 수준도 함께 읽어낼 수 있으면 의미가 더 커질 것이다.

 

 ο 살아 있는 역사를 위하여

 “위험한 것은 자기 글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지독하게 편파적인 경우입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보다 자신이 양이라고 착각하는 늑대가 더 위험한 법이다.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나중 일의 스승이 될 수 있다(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

- 사마천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비시에 세운 괴뢰정부를 맡았던 페탱(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1856~1951) 대통령은 자신이 프랑스를 위해 역사의 짐을 맡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 국민들은 독일에 부역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4년간 점령군 독일에 협력했던 이들을 엄단했다. 무려 7,03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르노자동차는 독일군에 무기를 만들어 제공했다는 이유로 전후 국유화되었고 사장은 옥중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공직 추방이나 공민권 박탈자의 수는 굳이 언급할 것도 없다.

 거다 러너(Gerda Lerner, 1920~2013)는 “역사를 아는 것이 당신 자신의 인생과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길이며, 자신의 과거에 무지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아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다”라고 강조했다.

 

 4 역사를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1999년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적 경제 통합 실험이라고 할 유럽연합 경제체제가 출범했다(유럽단일통화가 출범하고 장부상 통화로 은행간 거래가 개시된 것은 1999년이었고, 본격적으로 유로화가 통용된 것은 2002년 1월 1일부터였다).

 

 ο 그리스 경제위기와 우리 사회의 오해

 위기의 가장 큰 요인은 유로화 통일에 따른 통화가치 팽창의 위험성을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이 제대로 경고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고 오히려 그 거품에 빨대를 꽂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던 데에 있었다. 통화가치 팽창으로 인한 국부의 증가를 미래와 국력 증강을 위한 교육과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그리스 경제위기의 주범은 복지가 아니라 정치인과 경제인의 부패와 무능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리스는 국가부채율이 100퍼센트가 넘어 유로존(Euro Zone)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골드만삭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회계를 분식하고 파생상품을 조합해서 유로존에 가입했다.

 

 ο 유럽의 단일화, 그 문화적 맥락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Maastricht Treaty)이 체결되고 1993년 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유럽연합 EU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1950년 프랑스의 로베르 쉬망(Robert Schuman, 1886-1963)과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구상을 발표한 지 40여 년이 지난 뒤 마침내 하나의 유럽이 탄생한 것이다. ECSC는 독일의 재무장을 억제하려는 프랑스와 전후 상실된 국제적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한 독일의 결합이었다. 여기에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이 가세했다.

 이후 1957년 로마조약(Treaty of Rome)에 의해 유럽경제공동체(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가 출범하면서 회원국들은 상호관세를 철폐하고 대외공동관세 정책을 마련함으로써 관세동맹을 맺는 등 주로 경제적 목적을 지향했다.

 1973년에는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가입했고,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은 1980년대,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은 1995년, 이후 10년 동안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이 줄을 이었다. 1975년부터는 유럽정상회담을 정기화했고, 1978년에는 유럽통화제도를 마련하여 통화정책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착실하게 유럽의 통합과 연대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스트리히트조약에 의해 유럽단일통화에 이르러 유럽은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된 것이다.

 

 유럽의 단일화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이다. 물론 유럽공동체의 시발은 1950년대였으니 소련의 붕괴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럽의 국가들이 냉전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소련의 붕괴와 유일한 슈퍼파워로서의 미국의 등장은 이전까지 유럽이 누려온 여러 반대급부를 잃게 만들었다.

 미국은 유럽의 공산화나 친공산화를 막기 위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럽 어느 국가도 미국의 힘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미국의 독주를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실제로 1990년대에 이르러 빠른 속도로 유럽공동체가 틀을 완비한 것은 이와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냉전시대 서유럽 각국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협력체제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물론 나토는 군사적 연합체였지만 정치 및 경제도 자연스럽게 연동되는 조직이었다. 그리고 유럽공동체의 전신인 ECSC나 EEC의 경험도 축적되어 있었다.

 셋째가 가장 중요한 원인인데 바로 문화적 동질성이다. 유럽은 오랜 동안 기독교 문명이라는 하나의 문화로 묶여 지냈다. 물론 각국은 나름의 정치경제적 구조와 목적을 갖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하나의 종교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갈등의 요인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기껏해야 1517년의 종교개혁으로 신구교로 나뉘었을 뿐, 기독교 문명권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은 1967년 동남아시아 각국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 확립을 목적으로 출범했다. 초기 5개국이 참여했지만 지금은 10개국으로 늘었다. 아세안도 유럽연합처럼 정례적인 정상회담, 각료회의, 상임위, 전문위, 각국 사무국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경제와 문화 등 비정치적인 분야의 협력에 주력했지만 베트남 공산화 이후 미국이 공산화 확장을 막기 위해 군사적 연대를 요구해서 지역발전과 안전보장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아세안은 유럽연합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파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각기 다른 문화,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종교적 차이로 참가국들은 화학적 융합이 불가능하고 느슨한 협력체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ο 중국의 한시 외교

 장쩌민(江澤民, 1926~ )전 중국 국가주석은 2006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두 편의 시를 읊었다. 중국 상공인들과의 오찬에서는 이백(李白)의 <행로난(行路難)>을 인용하면서 중국의 경제에 대한 기대와 낙관을 피력했고, 백악관에서 부시와의 오찬에서는 건배 답사로 두보의 <망악(望岳)>의 한 소절을 읊었다. 그중 ‘반드시 정상에 올라/ 저 낮은 산들을 둘러보리라’라는 대목은 강대국 미국을 넘어서겠다는 굴기(崛起)의 기세가 담겨 있었다.

 1990년 타이완의 한 단체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장쩌민은 조식의 칠보시(七步詩)를 읊으며 맞았다. 조식은 조조의 아들이다. 조조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놓고 형제들끼리 패권을 다투었는데, 이 와중에 형 조비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조식은 “콩깍지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은 솥에서 눈물 흘린다/ 본디 한 뿌리에서 났거늘/ 어찌 이리 서로 급하게 들볶아야 하는가”라고 시를 읊었다. 그러니까 장쩌민은 중국과 대만이 서로 형제끼리 싸울 게 아니라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둔사(遁辭) :: ①관계(關係)나 책임(責任)을 회피(回避)하려고 억지로 꾸며서 하는 말 ②모순(矛盾)으로부터 피(避)하여 나가려고 꾸며대는 말

 

 2010년 천안함 사건이 발발했을 때 한국 정부는 중국의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은 외교부 부부장 추이톈카이(崔天凱)가 천영우 당시 외교통상부 2차관에게 글귀를 선물하며 속내를 내비치는 것으로 갈음했다.

 천하의 크게 용기 있는 자는 (天下有大勇者)

 갑자기 큰일을 당해도 놀라지 않으며 (卒然臨之而不驚)

 이유 없이 당해도 노하지 않는다 (無故加之而不怒)

 이는 그 품은 바가 심히 크고 (此其所挾持者甚大)

 그 뜻이 심히 원대하기 때문이다 (而其志甚遠也)

 송나라의 문호 소동파의 <유후론 留侯論>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소설 《1984》에서 조지 오웰이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5 경제민주화, 역사로 곱씹어보기

 ο 애덤 스미스는 당신들 편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는 오히려 당대 관점에서는 좌파, 그것도 극렬 좌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18세기 중반 당시의 중상주의 체제를 비판했다. 중상주의자들은 국내로 유입되는 재화의 총량을 극대화함으로써 국부를 신장해야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스럽게 절대군주와 상공인들이 야합했다.

 상공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했고 각종 보호무역 장치를 마련했다. 군주는 더 나아가 국내 상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상공업자들에게 각종 독점적 면허를 부여했다. 애덤 스미스가 비판한 것은 바로 상공업자의 이익과 국익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었다. 그가 《국부론》에서 주장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 즉 약자를 억압하고 상공인들의 배를 불려서 국부를 증대시키려는 국가의 개입에 대한 비판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아무리 재화의 총량이 증가한다 하더라도 시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국부는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민 복지를 실질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강조한 것은 ‘선의의 공정한 경쟁’ 이었다. 그게 바로 시장의 합리성이다.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 1943~ )는 그 ‘보이지 않는 손’ 조차 보이지 않는다며 사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판했고, 1981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토빈(James Tobin, 1918~2002, 토빈세의 창안자)은 ‘보이지 않는 손’에도 ‘손’이 필요하다며 정부의 적극적이고 강력한 개입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전제를 확립할 수 있어야만 애덤 스미스의 시장경제가 제대로 성립한다.

 《도덕감정론》에서 그는 사려분별을 강조하며 사려분별이 한편으로는 이성과 오성, 다른 편으로는 자제력이라는 두 능력의 결합이라고 주장한다. 그 자신이 스토아학파 문헌에 대해 광범위하게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가 말한 자제력이라는 관념이 자기이익 또는 그가 자기애라고 부른 개념과 결코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스스로를 고립되고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한 시민으로서 자연이라는 광활한 공동체의 한 구성으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거대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은 이익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스토아학파의 가치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사려분별이 자기이익 극대화를 뛰어넘어 ‘모든 덕목 중에서 개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가치라고 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인류애, 정의, 관대함, 공공정신은 다른 이들에게 가장 유용한 자질이다.”

 

 ο 데이비드 리카도와 차액지대설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는 유태인이었으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바 없는 그는 자수성가하여 최고의 경제 이론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자산가이기도 했다. 그는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에서 경제학의 핵심은 바로 소득 분배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주식 투자와 부동산 폭등으로 축적된 불로소득을 망국의 징조라고 경계했다. 그게 바로 유명한 차액지대설(differential rent, 差額地代說)의 핵심 개념이다. 더 나아가 그는 1815년 제정된 영국의 곡물 수출입 규제 조례인 곡물조례에도 반대했다. 자신의 자산이 대부분 곡물 수출입 규제에서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기모순이라는 비난에도 그는 일관된 입장을 고수했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에게 영국은 반드시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 1805)에서 패배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대륙봉쇄령(1806)이었다. 영국은 무역국이니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을 경제적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공업 발달로 농업의 비중이 줄고 식량을 대륙에서 수입해야 하는 처지에서 대륙봉쇄령은 치명적이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 농지의 땅값이 급상승했다. 곡물 값이 오르고 임대비도 올랐으니 귀족들로서는 이중으로 이익이 생겼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땅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패망하고 대륙봉쇄령도 자연스럽게 소멸될 상황이 되자 엉뚱하게 그 소멸을 거부한 집단이 생겨났다. 바로 지주 귀족들이었다. 해괴하게도 귀족들은 자기 나라를 괴롭혔던 봉쇄령의 해제를 반기기는커녕 오히려 정부를 움직여서 스스로 새로운 대륙봉쇄령을 만들어냈다. 그게 바로 곡물조례(1815)다. 대륙으로부터 영국으로 곡물이 수입되는 것을 금지하겠다는 조례였다. 의회를 장악한 지주 계층은 이 조례 도입을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법안을 통과시켰다. 곡물이 수입되면 곡물 가격이 떨어지게 될 것이고 농지는 매력을 상실할 것이며 그러면 이익이 이중으로 축소될 터였다. 지주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리카도는 애당초 이중으로 이익을 본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마땅히 원상태로 환원하는 것이 옳으며 불로소득이 없어야 건전한 경제가 가능하고 이를 토대로 안정된 사회와 국가가 마련된다고 보았다. 곡물 가격이 상승한 것은 땅값이 비싸기 때문이 아니라 대륙봉쇄령으로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곡물 수입을 재개하면 곡물가도 떨어지고 땅값도 떨어질 것이다. 

 

 요즘 경제학을 주도하는 건 수학이다. 오로지 수학적으로 정교한 이론을 만드는 데에만 열중한다. 그런 수학이 경제학에서 맡는 역할은 주로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의 개발이다. 모든 것을 수학적 계산과 확률로 마른 수건 쥐어짜듯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내기 위해 금융 시장 바닥을 훑는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건 그런 수학자들이고 그 수학자들을 고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주주들이다. 경제학을 수학자들이 쥐고 흔드는 순간 경세제민(經世濟民)으로서의 경제학은 사라진다. 거기에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엄청난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그 때문에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경제학에서 인간에 대한 가치와 공공성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6 역사는 나의 삶이다 

 당 태종(太宗, 599~649)은 구리로서 거울을 삼으면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일로써 거울을 삼으면 흥망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잃고 얻음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역사를 읽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간다.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과거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모른다면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셈이다. 과거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늘 지식의 유아기에 머무를 것이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말이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의 자기발전으로서 단일하고 합법칙적인, 그 자신에 내재적인 과정으로서 역사를 설명했다. 그가 역사철학을 다룰 때, ‘개인의 자유’를 중심으로 일정한 법률이나 제도의 핵심을 찾으려 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 세계사를 관통하는 정신이 결국은 자기의식으로 귀환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런 인식의 귀환은 놀랍게도 자신이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고 하는 절대적 확신이다. 따라서 그는 역사철학이 역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인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흑인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1924~1987)은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5. 과학

 1 1543년, 믿음이 무너졌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이전에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os, 2세기 중엽)의 우주론적 세계관을 정설로 믿었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태양과 행성이 궤도를 따라 지구 주변을 움직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지구의 중심에 교황의 거처인 로마가 있었다. 신학이 모든 학문의 중심이던 시절이었다.

 

 ο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프톨레마이오스는 연구를 거듭하면서 행성들의 궤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심지어는 후진하는 경우도 관측되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하면 명쾌하게 해결될 일이었지만, 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경한 일이었기에 그는 지구를 고정시켜놓은 채로 태양과 다른 천체들의 회전 궤도를 만들기 위해 무려 81개의 가상 궤도를 그렸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과학적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 of samos, 기원전3세기)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1년에 한 번씩 돈다고 주장했고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Minneus Felix Capella, 4세기말~5세기초)는 수성과 금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주장했지만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진리는 단순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명료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존재는 필요 이상으로 수를 늘려서는 안 된다’는, 즉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혹은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이른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은 그렇게 증명되었다.

 마르틴 루터조차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이 멍청이가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께서 지구를 향해 멈추어 서 있을 것을 명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그 복잡한 가상 궤도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우주의 현상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으로 일거에 해소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과학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교회와 학계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문제제기만으로도 교회의 권위는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정의는 오로지 신과의 관계와 신에의 종속성을 토대로 한다는 주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히 천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고 개인의 역할이 강화되는 대전환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전환이 없었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며 자아의 독립성을 주창한 데카르트의 철학도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인간이 사유의 중심이 라는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세상이 객체가 아닌 주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과학은 인간의 사유방식, 즉 인문학적 사고와 그 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셈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옮겨놓았고 철학자들은 인간을 사유의 중심으로 바꿔놓았다. 둘은 그렇게 나란히 손잡고 근대의 지평을 활짝 열었다.

 

 ο 새로운 과학의 시대, 아이작 뉴턴

 1637년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이 출현했다.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 한 권의 책이 과학의 실체를 본격적이고도 실제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1642~1727)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이다. 그는 이 책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옳다는 것을 입증했고 밀물과 썰물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제시했으며, 중력의 법칙과 운동의 법칙을 세웠다.

 “자연현상에서 추론할 수 없는 사실은 반드시 가설로 명명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적 가설이 되었든, 물리학적 가설이 되었든 간에 가설은 경험을 토대로 한 철학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이념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지, 신에게서 부여받는지, 아니면 백지상태(Tabula Rasa)로 태어나는지 여부는 데카르트에서 로크까지 이어지는 철학적 논쟁의 핵심이었다.

 

 과학을 통해 인류는 중요한 가치를 얻었다. 바로 자유다. 과학이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ο 또 하나의 기념비 《종의 기원》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도 일찍이 진화의 이론을 지지했던 진보적 학자였다.

 당시에 제법 과학에 조예가 깊다고 자부하던 대주교 제임스 어셔 (ames Ussher,  1581~1656)는 신이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월요일 오전 9시라는 성스럽고 완벽한 순간에 중단 없이 신속하게 천지를 창조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천동설이 위력을 잃은 후였지만 어셔의 주장이 먹혀들 만큼 종교의 가르침은 막강했다. 그러나 어셔의 주장은 1859년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을 발표함으로써 무력화되고 말았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었고, 발전 속도만큼 금속과 석탄의 수요가 급증했다. 광업이 발달했고, 철도나 운하 공사 때문에 지층을 깎아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지층을 파헤칠 때마다 멸종생물이나 지금과는 다른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전 같으면 파볼 일이 없었으니 모르고 지나쳤지만 눈앞에 나타난 다양한 증거들은 기존의 창조설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신대륙’도 아니고 ‘발견’도 아니다. ‘원래 있던 대륙’이었고, ‘늦은 방문’일 뿐이다)한 이후 유럽 밖에서 속속 발견되는 새로운 생물이나 지층 구조에 대한 보고들은 기존의 세계관을 흔들기 시작했다.

 1628년 당대의 의학적 세계관을 무너뜨린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논고》 이후 본격화한 해부학의 발달도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발했다. 멘델(Gregor Johan Mendel, 1822~1884)이 《식물 잡종에 대한 실험》을 통해 유전의 법칙을 발견한 건 1865년, 그러니까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지 6년이 지났을 때다.

 다윈은 무려 50년 가까이 연구에 매달렸다.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섬에서 만난 새로운 생물들은 그에게 영감과 확신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해서 1859년 마침내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중들이 다윈을 지지한 주된 이유는 다윈이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심리였다.

 

 ο 다윈의 진화론과 히틀러의 나치즘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의 《죄와 벌》도 넓은 의미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초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초인의 행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범죄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인류의 진보를 가져올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사회악을 일소하는 과정일 뿐이다. 니체의 철학은 철저하게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전개되었다.

 니체 철학은 본질을 전혀 모르던 전쟁광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 의해 엉뚱하게 차용되었다. 청년 시절 히틀러는 다윈 사상의 저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열등한 인종을 멸종시키면 앞으로 오는 세대들은 인종청소로 얻은 진보를 두고두고 고마워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그는 《나의 투쟁》에서 “게르만족은 보다 고등한 인종으로서 영광된 진화의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 이 이유만으로도 유태인종은 게르만족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그걸 못했을 때는 혼합 결혼이 발생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보다 고등한 진화 단계의 존재로 태어나기 위한 자연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강변했다.

 결과적으로 나치 사상의 중심 강령 중 하나는 진화론이었다. 나치는 모든 생물학적 주체들이 상향 진화한다고 생각했고, 더디게 진화한 유형들은 실질적으로 멸종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다윈의 진화론에 한층 고무된 우생학까지 덧붙이면서 자신들의 인종관념과 전쟁의 당위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아리안인(Aryan) :: 아리아라는 말은 '고귀한'이란 뜻으로 그들이 자칭하는 말이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은 펀자브 지방에 들어가 원주민을 정복하고 혼혈을 장려하였다. 이 무렵은 청동기문화의 단계로, 가부장적(家父長的) 대가족의 집합으로서의 부족이 정치경제의 단위였다. 신앙은 다신적으로,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여러 가지 신을 숭배하였다.
그들의 일부는 BC 1000년 무렵부터 비옥한 갠지스강 유역 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상류 각지에 작은 촌락을 형성하고 농경을 주로 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철기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하였으며 바라문을 정점으로 하는 사성제도(四姓制度:카스트)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또한 BC 1000년에서 BC 700년 사이에 《리그 베다》로 이어지는 3개의 성전이 성립되었는데 이들 성전은 지금도 브라만의 근본 성전으로서 존중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아인 [Aryan, ─人] (두산백과)

 

 적자(適者, the Fittest)는 거대하고 강한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변화하는 존재다. 그런데도 적자생존을 마치 약육강식의 프레임을 정당화하는 것쯤으로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할 일이다.

 

 2 인터넷은 휴머니즘이다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은 《기술결정론》에서 모든 매체는 인간의 오감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맥락에서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명제를 도출한다. 그 미디어가 어떤 기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이 결정된다. 미디어의 메시지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는 우리가 도구를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도구가 우리를 만들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1928~ )는 《제3의 물결》에서 정보혁명을 예견했다. 그런데 그가 컴퓨터를 언급할 때만 해도 인터넷 혁명은 없었다.

 마이클 하임(Michael Heim, 1944~ )이 《가상현실의 철학적 이해》에서 “궁극적으로 가상현실은 철학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아마도 최상의 신비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ο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의 불, 디지털

 데이비드 와인버거(David Weinberger, 1950~ )는 웹브라우저 탄생 10주년에 맞춰 내놓은 《인터넷은 휴머니즘이다》에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리는 새로운 인간이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지식인 불을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혹독한 처벌을 감내해야 했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그 결과를 몰랐을까? 아니다. pro는 ‘미리, 앞서’를 의미하고 metheus는 ‘생각하다’는 뜻으로, 그의 이름에서 보듯 그는 자신이 엄한 처벌을 받을 것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우스의 불을 훔쳤다. 신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데 대한 도전이었다. 불은 끊임없는 인간의 지식 탐구 본능을 상징한다. 물론 인간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형과 달리 epi 즉 ‘나중에 깨닫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동생 에피메데우스(Epimetheus)의 아내 판도라(Pandora)가 그 악역을 맡았다. 판도라는 위험한 상자를 열었다. 온갖 질병이며 고통들이 튀어나와 그 이후 인간은 괴로운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인간의 지식 탐구 본능을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인터넷 실명제니, 인터넷 종량제니 따지면서 익명성과 접근성에 시공간적 제재를 두려는 시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보의 통제와 독점은 그것이 권력의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권위적 발상이다.

 인터넷이 지닌 영향력은 현실세계의 억압하는 힘에 비례하여 증폭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ο 인터넷에 자유를 허하라

 기업 총수와 음식점 배달원이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 있는가? 그 둘이 함께 같은 자리에 앉는다거나 대등한 발언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같은 ‘관심’으로 동일한 온라인 공간에서 평등하게 소통한다.

 또한 인터넷의 정보 개방성은 다른 모든 사람이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가진 양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제공한 정보에 대해 다른 사람이 보충하거나 비판함으로써 나의 정보가 수정 보완되고 정보의 내용과 양이 증가할 수 있다. 기존의 제로섬(zero-sum) 프레임을 깨는 새로운 패러다임인 것이다.

 

 와인버거는 “인터넷 공간에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특성이 담겨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의 말은 그 낙관적 신세계에서 어떤 인간을 창조해내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 현실세계가 그렇듯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세계 또한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3 당신에게 수학은 무엇인가

 ο 수학이 재미없는 이유

 가감승제(加減乘除) ::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의 네 가지 셈법.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80?~500?)는 수학을 역동적인 사고방식이라 주장하며 수를 자연의 언어라고 보았다. 플라톤도 자신의 아카데미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을 걸었다.

 

 ο 미적분 속의 인생

 직선이라면 미적분이 없어도 암산으로 구해질 수 있지만, 곡선일 때는 절대로 암산으로 구해질 수 없고 미적분을 적용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미분은 복잡한 것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을 때 그 성질을 함유한 최소 단위 부분으로 쪼개어 그것의 기본값을 구하는 것이다.

 시간에 대해 위치를 미분하면 속도가 되는 것이고, 속도를 미분하면 가속도가 된다. 반대로 속도를 적분하면 위치가 된다.

 

 선형대수학 :: 즉, 벡터공간에 대해서 부분공간, 직합(直合)의 문제, 원소 사이의 1차변화·1차종속·차원·기저(基底) 등을 생각하고, 다시 사상(寫像:함수)을 정의하여 선형사상이나 선형교환 고유값의 문제 등 많은 내용을 고찰한다. 역사적으로는 1850년경의 행렬 및 행렬식론에서 발생하고, 1940년경에 이르러 통일적인 체계가 이루어졌다.
문자 그대로 대수학의 한 부문으로도 생각되나, 벡터를 다루는 데서 기하학이나 역학과도 관계가 있다. 여기서 정의되는 벡터란 널리 선형연산(線形演算)이 가능한 것을 말하며, 미분방정식·적분방정식·함수공간 등 해석학의 여러 부문을 비롯하여 수학의 각 분야에 걸쳐 기초적인 개념이 되었으며 선형대수학은 수학의 각 부문에 걸쳐 기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형대수학 [linear algebra, 線形代數學] (두산백과)

 

 4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플라스틱이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든 건 194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전에는 빗 같은 제품을 만드는 원료를 고래나 코끼리에게서 얻었다.

 최초의 플라스틱 셀룰로이드는 점점 비싸지는 상아를 대체할 물질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발명됐다. 뉴욕의 당구공 업자들이 상아 대체 물질에 대해 공모전을 열었는데, 인쇄공 존 웨슬리 하이엇(John Wesley Hyatt, 1837~1920)이 바로 그 물질을 발명해냈던 것이다. 그게 1863년의 일이었다. 이후 서민들도 값싼 빗을 구할 수 있었고 귀족 스포츠였던 당구도 즐길 수 있었다.

 

 ο 플라스틱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소비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플라스틱이 대중민주주의의 확산에 촉매가 되었다. 많은 천연물질을 대체함으로써 멸종 위기에 몰린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었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 제품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적어도 상아를 구하기 위해 코끼리를 남획하던 일은 멈추게 했다. 

 

 조야하다(粗野--) :: 1. 천하고 상스럽다. 2. 물건 따위가 거칠고 막되다.

 

 교회는 연금술사들을 탄압했다. 탄압의 근거는 그들이 엉터리 마법으로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이었겠지만 본질은 종교적 이유였다. 금이 없는 데에서 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연금술사들의 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의미였고, 창조는 오로지 신의 몫이었다고 믿었던 교회는 연금술사들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정립한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794)는 처음으로 화학에 정량적인 방법을 도입하였고 비체계적인 화학물질에 이름을 붙이는 명명체계를 마련함으로써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ο 과학의 딜레마, 가치중립성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의 제자인 엘레퇴르 뒤퐁은 군수회사 뒤퐁을 세우고 세계대전에 무기를 공급한다. 경제학자 F. 케네의 제자였고 중농주의자였던 피에르 뒤퐁의 아들 엘레퇴르 뒤퐁은 프랑스혁명 때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그들 가족은 델러웨어 주 윌밍튼에 화학공장 뒤퐁을 세웠고 대영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큰 화학회사가 되었다. 1912년 셔먼법에 의해 뒤퐁, 허큘리스, 아틀라스로 나뉘었고, 이때 분할된 뒤퐁사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이 사용한 탄약의 40퍼센트를 공급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원자폭탄을, 전후에는 수소폭탄을 제조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에 대해 가치를 판단하는 주관성을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1920)였다. 그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세계관 혹은 가치관이 사회과학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비판했다.

 달리 말하자면 과학은 참과 거짓을 다루는 인식론적 판단일 뿐 선과 악의 도덕적 판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문제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며, 윤리는 가치철학의 문제이지 경험과학의 방법론이 될 수도, 그 판단의 기준도 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ο 생물학적 결정론과 유전자 환원주의

 유기체의 선천적인 자질이 행동의 원인이 된다는 생물학적 결정론과 유전자 환원주의는 개체를 유전자의 탈것 정도로 여긴다. 한 개체의 생물학적 동일성은 게놈(genome) 때문인데, 이 게놈은 유전자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유전자로 개체를 해체한다면 생물학적 동일성은 사라지고 만다.

 생명체의 삶은 생명체 내부의 구조와 기능으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맺는 다양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런 관계성을 통해 각각의 생명체가 살아간다. 따라서 변화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과학은 또한 속성상 환원주의에 의존하기 쉽다. 복잡한 자연현상을 설명할 때 분해한 단순한 몇 개의 요소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과학이 지닌 매력적인 요인이다. 부분을 알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환원주의는 근대 과학이 생겨난 이래 과학계의 가장 대표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원자를 규명하면 물체를 이해할 수 있고, 유전자를 규명하면 생명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이런 환원주의는 전존재적인 인격으로 대해야 하는 인간조차 기계론적으로 이해하고 다루게 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심지어 생명체를 조작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환원주의는 더 나아가 복잡한 생태계를 단일 구성요소로, 그리고 다시 단일 구성요소를 단일 기능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자연의 유기적 과정과 리듬, 그리고 재생력을 파괴할 수 있다.

 

 ο 과학혁명과 패러다임

 1643년 플로렌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물에 설치한 진공펌프로 물을 긷던 중 한 기술자가 물이 10미터 위로는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발견에 그칠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진공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는 현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는 이론으로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마땅히 물이 10미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진공이 해제되는 지표면 위까지 올라와야 했다. 그러니까 이 현상은 당대를 지배하던 보편 이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플로렌스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현상은 나중에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 1608~1647)가 대기압을 연구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현상이 토리첼리로 하여금 새로운 이론을 찾아내도록 한 셈이다.

 과학은 그냥 관찰된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과 충돌하는 새로운 이론 체계이며 사실에 대한 의미화라고 할 수 있다. 발견된 사실과 기존의 이론 체계가 서로 충돌했을 때 과학은 비로소 진보한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과학은 탄압이나 억제 등의 반시대적인 수단을 거부하고 객관적으로 우월한 체계를 따를 수 있다. 그것이 과학의 힘이다.

 

 과학의 귀납성은 과학적 사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그런 과학조차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과학은 항구불변하지 않으며 점진적으로만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도약에 의해서도 발전한다고 지적했다.

 토마스 쿤은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한 시대에 보편적 통념으로서 이해되고 있는 과학을 가리킨다. 그리고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개념도 주장했는데, 정상과학이 통용되는 해당 시기에 ‘과학자 사회’가 채택한 일반적인 이론적 가정과 법칙, 그리고 적용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바로 패러다임이다. 달리 말하자면 일정한 시기, 일정한 공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인식, 가치, 평가 등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패러다임이다.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동, 즉‘ 패러다임 전이(Paradigm Shift)’를 강조한 것은, 과학에서의 가설이 자연현상에 대한 합리적이고 예측적 해석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충돌하면서 진보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과학의 귀납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과학은 사실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도출된 가설들을 축적함으로써 발전하는 게 아니다. 과학은 위기에 의해 발전한다. 한 패러다임이 진화하는 게 아니라,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이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쿤이 말한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핵심이다.

 

 ο 아인슈타인, 시간과 공간도 상대적이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특수상대성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에서, 다른 등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게 지각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항구불변으로 생각했던 시간과 공간 모두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질량이 속도의 터널을 지나면 거대한 에너지로 변한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뉴턴의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혁명이었다.

 과학이 이렇게 끊임없이 기존의 지식체계나 통념과 충돌하면서 유의미한 결실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삶에 적용해보라. 우리가 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단순히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에 머물고 마는 것은 결국 또 다른 낡은 텍스트에 갇히는 것이다. 과학의 진정한 의미는 의심하고 도전하며 낡은 텍스트의 틀을 깨고 나오는 자유정신이다.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 편협해지고 남을 재단하고 평가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자신의 지식을 강요한다면, 스스로 지식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셈이다.

 

 모든 과학자는 문제를 해결하려 들 때 사회적 선입견, 그리고 편견에 치우친 사고방식을 적용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세상을 알아가는 방식은 이런 것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는다. 개별 과학자들이 논리 로봇처럼 완전히 이상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론’을 구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자기만족적인 미신에 불과하다. 완전한 공명정대는 바람직한 것이기는 해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학자가 자신이 완전한 중립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조차 위험한 짓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선호와 그 영향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그럼 정말 편견에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선호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료를 공정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조작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 고생물학자 진화생물학자)

 

 ο 파인만, 굴드, 정재승과 최성일

  쿼크 :: 소립자의 복합 모델에서의 기본 구성 입자의 한 종류이다. 대부분의 물질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다시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쿼크는 6가지 종류가 있으며 물리학자들은 이들을 up/down, charm/strange, top/bottom 등 3개의 쌍으로 분류하고 있다. 쿼크는 특이하게 분수 전하를 갖고 있다. 쿼크는 또한 색소 전하라는 또 다른 종류의 전하도 갖고 있다. 가장 발견하기 어려웠던 쿼크인 top 쿼크는 이론적으로 예측된 지 20년만인 1995년에 발견되었다. 양성자는 up 쿼크 2개와 1개의 down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중성자는 2개의 down 쿼크와 1개의 up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쿼크 [quark] (Basic 고교생을 위한 물리 용어사전, 2002. 4. 15., (주)신원문화사)

 

 CERN(Conseil Europeen pour la Recherche Nucleaire, 유럽공동원자핵연구소) ::  유럽입자물리연구소는 스위스 제네바 인근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걸쳐 있는 입자가속기 연구소이다.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 연구소 중 하나이다. 1954년 설립됐다. 유럽핵공동연구소라고도 한다. 약어는 CERN이다. CERN이라는 이름은 1952년 임시로 운영된 유럽원자핵연구협의회(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의 약자에서 비롯됐다. 1949년 12월 프랑스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rogile)가 스위스 로잔(Lausanne)에서 열린 유럽문화콘퍼런스에서 유럽연구소 설립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1951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회의에서 유럽원자연구협의회 설립안이 채택됐고, 한시적으로 유럽원자핵연구협의회가 설립됐다. 1953년 7월 CERN 조약이 제정되고 유럽 12개국이 초기 가입국이 됐다. 1954년 9월 29일 유럽원자핵연구협의회를 해산하고 유럽입자물리연구소를 공식 설립했다.
순수 기초 원자핵 연구에 관한 유럽 국가 간 협동연구, 여러 실험실과 연구소 과학자 간 상호교류를 촉진하는 국제 공동 연구 조직과 지원, 기술이전과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통한 정보 확산, 연구자들의 최신 훈련 제공 등을 목표로 활동한다. 우주의 구성 요소와 작용 방법에 관한 기초물리학 분야를 주로 연구한다. 연구 실험으로는 거대강입자충돌가속기(LHC∙Large Hadron Collider)를 활용한 실험과 그 외 다른 가속기와 시설들을 활용한 실험 등을 수행한다. 1989년 월드와이드웹(WWW)을 개발하기도 했다. 펠릭스 블로흐(Felix Bloch), 샘 팅(Sam Ting), 시몬 판데르메르(Simon van der Meer), 잭 스타인버거(Jack Steinberger), 카를로 루비아(Carlo Rubbia), 조르주 샤르파크(Georges Charpak), 난부 요이치로(Nanbu Yoichiro) 등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조직은 유럽 20개 가입국의 각 2명의 대표들로 구성된 협의회, 과학정책위원회, 재정위원회, 사무국, 물리학부, 정보기술부, 빔부, 엔지니어링부, 인적자원부, 재정 및 조달부, 총무부, 자문위원회, 과학위원회, 상임위원회, 연금기금 등으로 이뤄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럽입자물리연구소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粒子物理硏究所, Organisation Européenne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종합, 굿모닝미디어)

 

 하나의 학문 분야의 내용과 결실이 이제는 더 이상 그 분야에만 해당되거나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이 인문학이 이끌어내야 하는 접점이다.

 

 

 

3부 감성을 깨우는 인문학

6. 문학

 1 최고의 인문학 교재는 무엇인가

 그 일로 해서 내가 죽는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 고귀한 죄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그분과 함께할 수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섬기는 동안이 더 길단다. 나는 저세상에서 영원히 살겠다.

-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296~406)《안티고네》

 

 연극의 3요소 :: 무대, 배우, 관객

 연극의 4요소 :: 무대, 배우, 관객, 희곡

 희극의 3요소 :: 해설, 대화, 지문

 

 ο 인문학의 총체적 경험, 연극개론 수업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정작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지만 제대로 된 음악은 그의 귀와 손을 통해 만들어진다.

 

 2 시는 삶과 세상의 압축파일이다

 시인 반칠환은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라고 노래한다. 우리는 땅 한 뼘이라도 더 갖기 위해 기꺼이 내 인생관이나 세계관도 바꿀 용의를 갖고 있다. 그 한 뼘의 땅을 위해 새벽에 출근해서 한밤중에 퇴근한다. 심지어 그 소유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몹쓸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칫 내 삶이 송두리째 망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평소 눈길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는 보잘것없는 제비꽃은 지구 전체를 제 화분쯤으로만 여긴단다.

 

 ο 시는 모국어의 글밭이다

 동서양 모두에서 시가 그 어느 문학 장르보다 우월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는 신성하고 산문은 저속하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호메로스(Homeros, 기원전8세기경)의 문학을 숭배한 것은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가 서사시로 쓰였다는 점도 한몫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시가 더 우월한 장르라고 여겼다. 그는 《시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는 운문을 사용하느냐 산문을 사용하느냐가 아니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을 운문으로 고칠 수 있고, 운문으로 쓴 것도 산문으로 쓴 것만큼이나 역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역사는 실제 사건들을 다루고, 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룬다. 그러므로 시가 역사보다 철학적이고 고상한데, 시는 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반면에 역사는 특정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ο 하이쿠를 맛보다

 일본의 하이쿠(俳句)다. 하이쿠는 5, 7, 5의 음수율을 가진 겨우 17자로 짜인 일본의 정형시다. 그 짧은 시에 반드시 ‘계절을 나타내는 낱말(季語)’이 들어가야 한다.

 

 하이쿠를 우리의 시조와 비교해보자. 유사한 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유사한 점은, 모두 정형시이고 조일전쟁(임진왜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7년의 길고 끔찍한 전란을 견디고 가까스로 버텨낸 조선에서는 전쟁 이후 사회와 제도를 풍자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조가 출현했다. 바로 사설시조다. 사대부들이 즐겼던 기존의 정형시 형태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정형시라는 것은 엄격한 형식성을 통해 기존의 질서와 체제에 순응하게 하는 사회적 기능을 가졌다. 그런 점에서 정형시의 파괴는 그 자체로 기존 제도와 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저항 어린 민심을 반영했다. 기존 시조가 사대부들의 작품이었다면 사설시조는 신분을 감춘 사대부나 선비들, 심지어 일반 평민들까지 지은이가 다양해졌다.

 본격적으로 사설시조가 나타난 것은 숙종 이후였다. 전쟁 이후 바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꽃을 피운 것은 서민문학이 일어났던 영·정조 시대였다.

 사대부들의 정형시조가 충성이니 효도니 하는 추상적 관념을 다뤘다면, 사설시조는 일생생활을 소재로 재담, 욕설, 심지어 음담과 애욕 등도 대담하게 묘사하고 풍자했다.

 사설시조는 형식적으로 중장이 마음대로 확장됐다. 민요나 가사, 그리고 대화 등이 섞여서 통일성보다는 희롱에 가까운 자유를 만끽했다고 볼 수 있다. 생활의 실상을 담고 있어서 민중들의 호응도 높았다. 그리고 동물을 비유해서 제도와 사대부들의 위선을 고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죽은 뒤 새로운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가 세습적 군사 독재체제인 바쿠후(幕府)를 새로 열면서 기존의 계급구조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무사 계급도 변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이전과 같은 대규모 전투도 점차 줄었기 때문에 무사들의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무사와 승려 계급은 문자속이 있던 계급이었다. 이들 가운데 시인으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면서 전쟁 이전의 정형시인 렌카(連歌)가 에도 시대에 단가 형태로 바뀌었다. 그것이 바로 하이쿠렌카(俳句連歌), 즉 하이쿠였다. 

 감흥에 따라 단편적으로 창작되었던 조선의 시조와 달리 하이쿠는 전문작가들이 일본 곳곳을 순례하면서 지속적으로 지어냈다. 그래서 한 작가가 수천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들은 일종의 음유시인과도 같았다. 그런 전통은 그대로 근현대까지 이어져 일본 문화에 그야말로 전문가객으로 자리 잡았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 전기의 하이쿠(徘句, 5ㆍ7ㆍ5의 17음절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짧은 시) 작가. 이가국(伊賀國, 현 삼중현 三重鉉) 출생. 아명 긴사쿠[金作], 본명 무네후사[宗房]. 호는 처음에 도오세이[桃靑], 후에 바쇼라 하였다. 고오즈케 성주[上野城主]의 아들 도도 요시타다[藤堂良忠]의 근신이 되어 하이쿠에 뜻을 두게 되었다. 한때는 교토[京都]에서 기타무라기깅[北村季吟]에게 사사(師事)하였고 그 후 에도로 나아가 당시 신흥의 담림풍(談林風)을 익혔으며, 1678년에는 하이쿠의 스승으로서 독립하였다. 그리고 단링풍의 산문성(散文省)ㆍ비속성(卑俗性)을 초월하여 하이쿠에 높은 문학성을 부여한 쇼풍[蕉風]을 창시하였다. 그 동안 전국 각지를 여행하여 많은 명구와 기행문을 남긴 바쇼는 1694년 나가사키[長崎]로 가던 도중 오사카[大坂, 현 大阪]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시는 그가 죽은 뒤 시쿠마 류틴[佐久間柳居]이 1732년에 간행한 《하이카이 시치부슈[徘諧七部集]》에 수록되어 있다. 문학성은 여정(餘情)을 중시한 중세적인 상징미를 근세적인 서민성 속에 살린 것으로, 하이쿠의 예술성을 높인 공적은 매우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쓰오 바쇼 [松尾芭蕉]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조선에서도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18세기초 같은 시조집이 있었지만 그것은 한 작가의 선집이 아니라 영조 때 가인 남파(南坡) 김천택이 고려 말엽 이후부터의 여러 고시조들을 엮어낸 시조집이었다. 이렇게 일본과 우리는 시의 창작자 집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하이쿠는 일본 문학 전체를 특징짓는 경향이 되었고 심지어 현대의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소단박(輕小短薄), 즉 가볍고 작고 짧으며 얇은 것은 전 세계를 석권한 일본 가전제품의 개성이 되었다.

 

 ο 감정과 이성의 눈을 틔우는 시

 하이쿠와 시조의 차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도 비교될 수 있다. 우리의 사설시조는 통쾌한 야유를 담고 있다. 기존의 시조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짜릿함이 있다. 일탈의 즐거움도 있다. 매우 직설적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감성적이고 즉발적인 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일본의 하이쿠는 감정의 절제와 극도의 단순화를 내면화한다. 이것이 일본인의 사고와 감성을 이룬다. 어쩌면 이런 차이가 한일 간 문화적 감성의 차이를 더 벌려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런 차이가 서로 다른 시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소설은 당신의 이야기다

 ο 스토리텔링의 힘

 스토리텔링에 왕도는 없다. 최고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많이 읽는 것이다. 읽지도 않으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양에서 소설이 제대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쯤의 일이다. 앞서 말했듯 서양이나 동양이나 모두 시를 소설보다 우월한 장르로 생각했다. 소설이 시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한 것은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사이의 일이다. 원래 소설이라는 낱말에는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서양에서 로망(roman)이란 말은 민중들이 쓰는 로만어를 뜻하는 고대 프랑스의 로만즈(romanz)에서 비롯됐고, 이는 고전적 품위를 지닌 라틴어와 대비되는 언어였다. 그러니까 소설은 저급한 민중의 허튼 이야기쯤의 의미였다. 그런데 오히려 바로 그 점이 소설의 힘이었다. 민중들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읽고 때론 들었다. 이른바 고급 언어인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된 것이 바로 소설이었다.

 

 ο 톨킨,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문장 하나를 끌어올리다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과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옥스퍼드대학 영문과 교수였다. 톨킨은 고어(古語)를 연구하다가 다양한 신화를 만났다.

 

 칼레발라 :: 이교시대(異敎時代)부터 그리스도교 시대에 걸쳐 핀란드 각지에 전승되는 전설 ·구비(口碑) ·가요 등을 집대성, 이를 선택하여 한편의 서사시로 만든 것이다. 칼레발라란 칼레바의 나라라는 의미인데 소재(所在)는 분명치 않다. 편자 엘리아스 뢴로트는 청년시절부터 전승문학에 흥미를 가지고 의학에 종사하면서 국내를 여행하여 그것을 수집, 한 편의 서사시로서 이를 재창조하였다.
1829∼1831년에 우선 《칸텔레》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 1835년에 《칼레발라》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 결정판은 1849년에 완성되어 핀란드문학 최초의 일대 금자탑이 되었다. 《칼레발라》에는 일관된 줄거리는 없고, 약간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연작적 시편(連作的詩篇)이다. 주인공으로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는 것은 음유시인(吟遊詩人) 베이네뫼이넨, 대장장이 일마리넨, 연애하는 청년 레민케이넨 등 3명인데, 이 3명이 사는 칼레발라에 대응하는 것이 포욜라의 땅으로, 이 양자의 대립이 시편의 큰 줄기가 된다. 여기에 더하여 이교 ·그리스도교 혼합인 갖가지 전설적 인물이 등장하나 농부와 포수 ·어부 등 고대 일반인의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또한 서정적으로 읊은 것도 다른 유럽의 고대서사시와 다른 점이다.
《칼레발라》의 전신인 《칸텔레》라는 이름은 핀란드 고유의 현악기의 이름이며 이 칸텔레를 창조한 것이 베이네뫼이넨이다. 풍부한 모음(母音)으로 새긴 시구(詩句)는 간결하고 힘차며, 두운(頭韻)과 각운(脚韻)의 고상한 가락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현대 핀란드의 대작곡가 시벨리우스는 《칼레발라》에서 영감을 받아 많은 작곡을 하였다. 또 미국의 롱펠로는 《칼레발라》의 시법(詩法)과 인물에서 암시를 받아 《하이어워서》(1855)를 썼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칼레발라 [Kalevala] (두산백과)

 

 일리아드 :: 1만 5,693행, 24권. 각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순(順)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옛날에는 각권마다 그 내용에 부합되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알파벳순으로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BC 3세기에 처음으로 쓰인 권별법(卷別法)이었다. 《일리아스》는 도시 트로이의 별명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10년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왕비로 절세의 미인인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유혹해 간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지휘로 1,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트로이 성(城)은 함락되지 않는다. 자신을 섬기는 사제 크라이세스의 딸 크라이세이스가 아가멤논에게 잡혀가자 격노한 아폴론 신(神)이 벌로 액병(厄病)을 내린다.
이 수습책 때문에 벌어진 말다툼에서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그리스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가 노하여 싸움에서 손을 뗀다. 이 아킬레우스의 이탈이 바로 《일리아스》의 주제이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간청으로 주신(主神) 제우스는 신(神)들에게 양군을 원조하지 말도록 명하여 그리스군을 패배케 한다. 
패배한 그리스군의 참상을 좌시할 수 없어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와 전차를 빌려 그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패주(敗走)시켰으나 그는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에게 살해된다. 이 소식에 접한 아킬레우스는 복수하기 위하여 헤파이스토스가 특별히 만들어준 갑주를 입고 출전하여 헥토르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욕보인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은 신들의 비호(庇護)로 야음(夜陰)을 틈타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체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일리아스》는 비극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여, 트로이 공방 50일 동안의 이야기 속에 10년의 전망을 담았으며,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암시함으로써 비극성을 강조하였고, 여러 가지 비유로 자연계와 인간계의 관계를 특색 있게 묘사하였다. 무용(武勇)을 노래하고 그리스 기사도를 찬양한 이 시는 방랑 시인 호메로스에 의해 BC 900년경 쓰여진 작품이다. 그리스인들에겐 오디세이아(Odysseia)와 함께 그리스 민족의 단일성과 영웅적 자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유럽인의 정신과 사상을 낳은 원류가 되고 있다. 이 시는 사고하는 방식에 있어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함으로써 인간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작품이며, 냉혹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인해 플라톤은 일찍이 아이들에게는 금서로 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유럽 서사시의 모범으로서 라틴 문학을 거쳐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리아스 [Ilias] (두산백과)

 

 니벨룽겐 :: <니벨룽겐의 노래>는 12세기에 중세 고지독일어로 쓰인 영웅서사시다. 700년 동안 서사시 낭독자(가수)에 의해 구전으로만 이어져 온 이야기가 여러 번 변형되어 1180년에서 1210년경 사이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서사시의 저자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끊임없이 분분하다. 다만 작품의 생성 배경 지역의 하나인 옛 파사우와 빈에 대한 상세한 지리적 지식, 그리고 이 지역 관할 주교였던 볼프거 폰 헤를라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저자는 파사우 주교의 관할권에 속했던 지식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어쨌든 <니벨룽겐의 노래>는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트리스탄>, 그리고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의 <미네장>과 더불어 독일의 고전문학 전성기의 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마지막 구절 “이것이 니벨룽겐의 노래다(daz ist der Nibelunge Liet)”에서 따온 듯하다. 여기서 마지막 단어인 ‘Liet’가 노래로 번역된 것 같다. 그러나 중세독어 ‘Liet’는 연(Strophe) 또는 서사시(Epos)라는 의미로 밝혀졌다. 손실되었다는 원전(장 갈렌 필사본)에는 “diz ist der Nibelungen Not”라고 기록되어 있다는데, ‘Not’는 비탄(탄식, 애도)이라는 뜻이다. 퓌만의 개작 끝부분에도 ‘Not’로 쓰여 있어 번역자는 마지막 끝 부분을 “니벨룽겐의 슬픔”이라고 번역했다.
1ㆍ2부로 나누어지는 작품은 영웅서사시 형식이며 각 4행의 운문으로 이루어져 마지막 2379연까지 탁월한 언어적 기교를 유지하고 있다. 이 연들은 길이가 각각 다른 39개의 장으로 나뉘는데, 각 장마다 제목이 붙어 게르만의 전설적인 영웅들의 이야기들이 절대봉건주의 시대의 궁전 생활 그리고 기사도 정신과 더불어 묘사되어 있다.
1부 크림힐트와 지그프리트의 이야기, 2부 크림힐트가 훈족 왕의 왕비가 되어 부르군트족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 줄거리는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하는데, 407년 민족 이동 시기에 부르군트족이 보름스를 정복하고, 437년에 훈족의 에첼(아틸라)왕이 437년에 서유럽에 침입하여 부르군트족을 굴복시킨 역사적 배경이 작품에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화려하고 장대한 분위기와 다른 한편으로는 비통하고 침울한 분위기가 서로 교차되는 이야기 <니벨룽겐의 노래>가 계몽주의 시대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독일인들이 이 이야기 소재에서 민족적 동질성 내지 국가의 본질을 찾게 되면서부터 보다 큰 의미가 부여된 국민서사시로 승격되었다.
제3제국 시대에는 니벨룽겐의 영웅들이 보였던 절대 충성처럼 게르만족의 투쟁 정신과 절대 복종이 민족적 이념을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기도 했다.
권력자들의 정치적 목적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1854∼1874)에도 적용되었다. 작품의 소재와 게르만 신화 그리고 음악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열광과 도취적인 분위기로 말미암아 바그너가 민족주의에 이용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때 바그너는 새로운 민족 신화의 대변자이자 예언자로 추앙되기도 했다.
1945년 이후 이 작품의 소재가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기도 했다. 동시에 외국에서 밀려들어온 판타지 문학의 영향으로 니벨룽겐 전설의 몇몇 요소들(반지 모티프가 새로 추가)이 다양한 시각에서 새롭게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작품에 대한 시각이 시대마다 다르게 수용되고 있는 가운데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필사본의 모순적인 내용들은 상당히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구전으로 전해오던 작품이 즉흥시와 문학작품이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대와 문화의 간격을 극복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게르만 선사시대의 신화적 소재를 기독교 문화의 영역에서 수용해야 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게다가 니벨룽겐족과 부르군트족 사이의 구분이 없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마치 니벨룽겐족이 부르군트족으로 편입되는 것 같은 인상도 준다.
작가 퓌만도 이런 특수한 문제점들을 여전히 인식하고 있는 가운데 <니벨룽겐의 노래>를 청소년들의 수준으로 개작하고자 했다. 비록 중세독어가 우리에게 낯선 언어지만 그래도 오늘날의 번역에 중세독어의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번역과 개작을 동시에 감행했다. 그러나 작가가 니벨룽겐의 전설을 새롭게 이야기하고자 했을 때 제일 우선시한 것은 100년간 이어져 온 소재에 대한 전통적인 이념과 해석을 허물고 다시 실제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취지에서 퓌만은 작품 속 영웅들의 형상을 보다 더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내용 면에서는 동화적인 것들이 현실적인 것에 적당히 스며들도록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지그프리트가 품은 세계 지배에 대한 갈망을 정당한 것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벨룽겐의 노래 [Das Niebelungslied] (고전해설ZIP, 2009. 5. 10., 지만지)

 

 땅에 난 구멍 속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톨킨의 고백에 따르면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갑자기 아무 생각 없이 이 문장을 쓰게 되었고, 이것이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이클 화이트(Michael White, 1959~ )가 분석한 톨킨의 성공 사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융의 원형 심리학에 대한 본능적 이해였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인류의 사고형태이자 생각인 동시에 감정’인 원형은 융이 20세기초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무의식 속에는 문화적 배경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원시적 이미지들이 들어 있다고 주장한 개념이다. 마치 인류에게 유전인자처럼 이어져 내려온 개념인 이 원형들은 언젠가 활성화되어 의식 속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잠재적인 형태’다.

 

 ο 소설의 의미를 찾다

 린 헌트(Lynn Hunt, 1945~ )는 《인권의 발명》에서 프랑스혁명이나 미국의 독립선언이 당시의 대중소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니엘 디포(Daniel Defoe, 1659~1731) 등의 소설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그리고 세상에 대해 성찰과 공감 그리고 분노와 저항을 싹트게 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쌓여 인권에 대한 보편적 의식을 형성했고 마침내 도도한 선언으로 발현된 것이다.

 

 말은 숨의 길이에 제한될 수밖에 없지만 문장은 길이에 특별한 제한이 없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사고를 담고 있다고 본다면, 글 안에서는 사고의 길이 또한 무한대인 것이다. 짧은 호흡에만 익숙해진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일부러 호흡이 긴 글을 읽을 필요도 있다. 그래야 더 깊은 호흡의 사고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4 수필은 삶의 진정성이다

 국제적인 문학단체인 펜클럽(The P. E. N Club)은 극작가와 시인(Playwright and Poet), 수필가와 편집자(Essayist and Editor), 그리고 소설가(Novelist)의 머리글자를 따온 말이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수필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이다.

 수필은 중수필(Essay)과 경수필(Miscellany)로 나눌 수 있다. 에세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다. 《수상록(隨想錄, Les Essais)》이 바로 그것이다.

 에세이는 어느 정도 지적, 객관적, 사회적, 논리적 성격을 띠는 소평론으로 간주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수필이라고 지칭하는 경수필인 미셀러니는 그에 반해 감성적, 주관적, 개인적, 정서적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이제는 둘을 엄밀히 나누기보다는 총칭하여 에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한 것은 중국 남송의 홍매(洪邁, 1123~1202)가 쓴 《용재수필(容齋隨筆)》 서문에서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써두었으므로 수필이라고 한다’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홍매가 이런 말을 남긴 건 작가로서 겸양의 태도였다고 봐야 한다. 두서없는 글이 수필이라는 건 아니다.

 수필의 또 다른 매력은 영국의 시인 겸 평론가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수필은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 즉 불규칙하고 소화되지 않은 작품으로, 규칙적이고 질서 잡힌 작문이 아니다”라고 정의했다. ‘마음의 산책.’ 좋은 수필은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하고 너그럽게 만든다.

 중국의 시인 겸 수필가인 자오리홍(趙麗宏, 1951~ )은 수필이 정(情), 지(知), 문(文)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즉, 작가의 진정 어린 태도(情)와 사물에 대한 작가 고유의 인식과 견해(知), 그리고 작가만의 개성 있는 표현방식인 문체(文)를 갖춰야 한다. 

 

 5 사조는 필연적 흐름이다

 대부분 학문은 일정한 이론을 토대로 다양한 사실적 근거와 논리적 확실성을 축적하면서 형성되고 성장한다. 그 틀을 벗어난 발상은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이론적 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예술이다.

 

 지질리다 :: 1. ‘지지르다(1. 기운이나 의견 따위를 꺾어 누르다)’의 피동사. 2. ‘지지르다(2. 무거운 물건으로 내리누르다)’의 피동사.

 

 사조(思潮)는 말 그대로 ‘한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이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바로 ‘한 시대’다. 시대는 단순한 시간적 기간이 아니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삶과 사회의 양식, 가치관, 세계관 등이 녹아 있다.

 

 ‘고-낭-사-자-초’(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초현실주의)

 

 ο 고전주의, 전범을 따르다

 “17~18세기에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사조로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작품을 모범으로 하여, 단정한 형식미를 중요시하고, 이지(理智), 조화, 균형을 추구하였다.”

 고전(古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옛날의 의식이나 법식을 말하는 것이고, 의미로 풀어보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예술작품을 지칭한다.

 

 유럽인들은 그 전범(典範)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설정했다. 유럽인들이 그리스와 로마를 모범으로 삼은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리스 로마가 유럽 문명의 뿌리라는 점이다. 그리스 로마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들의 문화가 유럽 문명의 본류와 연결돼 있다는 의미였다.

 둘째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 자신들이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의 후예이며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계승자라고 자처했다. 이 타이틀만 차지하면 주변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껍데기에 불과한 신성로마제국이 19세기 초까지 명맥을 유지한 사실도 같은 이유에서다.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Franois-Marie Arouet, 1694~1778, Voltaire는 필명이다)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적이지도 않으며 제국의 기운도 전혀 없다”고 빈정댔고,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어 “신성로마제국이여, 어찌 아직도 합쳐져 있는가!”라고 탄식했다. 그만큼 ‘로마’라는 이름의 권위가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문장(紋章, 상징적인 표지)에 독수리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로마의 상징이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유럽 문명의 지각생 러시아는 열등감 때문인지 국가 문장을 적색 바탕에 대가리가 둘인 금색 독수리로 삼았고, 로마와 아무 상관도 없는 미국은 대통령 휘장에 독수리를 사용한다. 로마와 그리스는 유럽인들이 따라야 할 ‘위대한 유산’으로 작동되었으며 차지해야 할 정치적 헤게모니였다.

 세 번째 이유는 르네상스의 유산이다. 근대의 입구에 놓인 보따리였던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를 선언한 중요한 지점이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분제도는 그대로 존재했으며, 시민혁명의 정신을 자각하지도 못했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발아되기만 했을 뿐 아직 구체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대정신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이상은 높았지만 고민과 갈등을 해소할 능력이 아직 부족했기에, 따르고자 하는 표상으로 그리스 로마를 삼았다. 즉, 고전주의를 표방했다.

 

 17, 18세기가 되자 후기 고전주의의 특성인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가치를 구현하려는 열망이 사회적으로 대두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17, 18세기의 고전주의에는 상반된 가치가 내재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따라야 할 모범, 즉 텍스트로서의 고전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의 몰개체적 자아에서 벗어나 멋지게 자아를 실현하는 모범으로서의 고전이다.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의 고전의 주인공은 마땅히 ‘고상하고, 우아하며, 지적이고, 균형 잡힌’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유명하고 본을 받을 대상이어야 했다. 그러니 주인공은 대개 왕족이나 귀족, 혹은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므로 고전주의에서 개인은 평범하지 않다.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끼친 영향도 있다. 오랫동안 유럽 예술의 전범이 된 이 책은 카타르시스(Catharsis, 정화)를 강조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비범해야 하고 명망이 있어야 하며 행복에서 불행으로 이르는 데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래야 추락의 폭도 크고 이를 극복해내는 과정도 훨씬 드라마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카타르시스가 생겨난다. 그러니 주인공 대부분이 여신이거나 왕족 혹은 귀족쯤 되는 고귀한 사람들이어야 했다.

 이런 보편적 모범으로서의 고전은 불가피하게 전형, 즉 규정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규정성이 강조되면 형식성이 도드라진다. 중세 때 공고해졌던 미술에서의 황금분할 법칙성이 여전히 작동하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 그들이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었다. 17, 18세기에 프랑스가 유럽의 고전주의를 주도했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는 뜻이고, 그만큼 그들에게 지켜야 할 권위와 위엄이 필요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나친 보편성과 그에 따른 법칙성은 르네상스에서 발아된 ‘자유로운 개인’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고전이나 규범성은 ‘자유롭고 싶지만 아직은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래서 규범을 벗어난 자유로움이 떠올랐는데, 그게 바로 낭만주의다.

 

 ο 낭만주의, 개인의 가치를 말하다

 낭만주의의 본질은 기존의 법칙, 질서, 보편 등의 힘에 대한 ‘저항’이다. 그래서 낭만주의 예술은 자유, 탈 규범, 개성 등을 주제로 다뤘다.

 낭만주의 시대의 영국시는 소네트(Sonnet)라는 형식성에서 벗어나 시심을 자유롭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각운(rhyme)을 사용하는 건 여전했지만, 이전의 형식과 주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시가 등장했다. 키츠(John Keats, 1795~1821),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7~1851),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650) 등이 대표하는 영국 낭만주의 시를 보면 소재의 변화가 확연하게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새, 하늘, 바람, 흐르는 강물’이 많이 등장한다. 시인 자신이 땅이라는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맘껏 떠다니고 움직이는 것들을 시의 소재로 삼은 건 자유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낭만주의는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성향이 강해서 자신의 뿌리를 캐내는 것에 파고든다. 초기 독일 낭만주의는 생명이 고갈된 계몽주의와 형식, 조화를 존중하는 고전주의에 반대하며, 혼돈과 몽환을 찬미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찾으려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중시했다. 이른바 질풍노도(Sturm und Drang)가 바로 그것이다. 특이하게도 이들의 현실도피는 중세문학을 부활시키고 변화시켰으며 동양의 신비에 이끌리기도 했다. 과거의 민중문학이 부활한 것은 바로 독일 낭만주의의 특성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낭만주의는 게르만 문화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나타났다. 그 결과, 국가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점에서 영국이나 프랑스의 낭만주의와는 달랐다.

 독일 낭만주의가 저물자마자 19세기 중후반 독일은 이전의 분열을 극복하고 새로운 제국으로 나아갔다. 그 와중에 자유로운 개인의 실현은 좌절되었다. 독일인에게는 프랑스혁명과 같은 시민혁명의 가능성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국(帝國) 출현 이전의 독일 낭만주의는 분열된 제국(諸國)에 절망했지만, 그 이후는 제국의 국가주의에 휘둘려 낭만주의 정신의 본질인 자유와 희망조차 외면당했다. 그 점이 영국이나 프랑스의 문학 흐름과 다른 차이였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낭만주의 정신의 핵심은 ‘자유로운 개인’이며 그것이 근대정신의 본질이다.

 

 낭만주의의 치기(?)에 대한 반발이 바로 사실주의였다. 사실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다. 그 묘사의 대상인 현실은 암울하고 절망적이다. 사실주의의 배경에는 산업혁명이 자리하고 있다.

 

 종획운동(Enclosure Movement) :: 15세기 중엽 이후에 유럽, 특히 영국에서 영주나 대지주가 목축업이나 집약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개방지·공동방목지·황무지 등을 돌담·벽·울타리 그밖의 경계표지로 둘러막아 사유지 경계를 뚜렷이 한 것을 말한다.이로 말미암아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도시에 나가서 노동자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클로저운동 (매일경제, 매경닷컴)

 

 19세기 런던 시민의 평균수명이 채 스무 살에도 달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삶은 불안했고 곤궁했다. 운이 좋아서 성공하는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술작품이 외치는 자유와 희망은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메시지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타난 게 사실주의다. “야, 헛꿈 꾸는 짓 하지 말고 지금 네 주변의 삶이 어떤지 정직하게 똑똑히 바라봐!” 그게 사실주의 정신이다.

 영국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의 소설만 읽어봐도 그런 세태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어린이 노동력의 착취를 고발한다. 이 작품은 1834년 시행된 신빈민구제법에 대한 비판과 풍자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한 박자 늦게 전개된 사실주의 문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존 스타인벡 (ohn Ernst Steinbeck, 1902~1968)의 《분노의 포도》나 《에덴의 동쪽》에는 대공황의 미국 현실에서 무너져내리는 개인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배어 있다.

 프랑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이른바 벨에포크(la belle époque), 즉 ‘아름다운 시대’라고 했던,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파리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산업혁명의 추세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와 같은 노골적 착취와 비인격성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파리는 예술과 문화가 번창했고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의 신사와 숙녀가 넘쳐흘렀다. 그들에게는 사실주의적 분노와 고발보다는 과학적 정밀성에 기초한 사조가 만들어졌다. 그게 바로 자연주의다. 모파상(Henri Rene Albert Guy de Maupassant, 1850~1893),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플로베르는 사실주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등의 문학이 대표적이다.

 사실주의 정신은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61년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사실주의는 이상에 대한 부정이다”라고 선언했고 “사실주의는 민주적인 예술이다”라고 덧붙였다. 나중에 현대미술의 거장이 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가 파리 생활 초기에 그린 그림들, 이른바 ‘청색시대’의 작품들은 바로 사실주의, 즉 음울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고뇌의 표현을 바탕에 두고 있다.

 

 ο 초현실주의 그리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19세기의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딛고, 상징주의, 탐미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아방가르드, 모더니즘 등 다양한 문예사조가 앞을 다투며 쏟아졌다. 그런 흐름 속에서 초현실주의가 출현했다. 전체적으로 통찰하자면, 이전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방법의 모색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초현실주의는 말 그대로 현실을 뛰어넘는, 그래서 현실과 다른 모습을 파고들었다.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을 탐구하여 기존의 미학과 도덕에 관계없이 표현을 혁신한 것이다. 1917년 시인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에 의해 명명된 이 사조는 이성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위적 문예활동이 일어났다. 시대는 일체의 선입견과 논리와 도덕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신으로 예술을 표현하기를 요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합리성이나 도덕성을 스스로 무너뜨린 충격적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가치들을 고수한다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또 하나의 배경은 바로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이다. 초현실주의가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된 그야말로 초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프로이트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성의 지배를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것, 그리고 의식 아래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의 뿌리를 제공한 것은 바로 다다이즘(Dadaism)이었다. 다다이즘은 기존의 전통과 질서에 대한 파괴운동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1916년 유럽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192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문예운동인 다다이즘은 분명히 초현실주의의 조류를 거세게 만들어준 동반적 사조였다고 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고전이란 제목은 알지만 내용은 모르는, 혹은 제목은 들어봤지만 정작 읽어보지는 않은 책”이라고 정의했다.

 스티븐슨(Robert Louis Balfour Stevenson, 1850~1894)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출간된 것은 1886년이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전 세계에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만국박람회를 개최한 게 1851년이었다.

 사람들은 이전까지 주로 이성적 도덕관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당연히 교회의 영향력이 지대했다. 그런 상황에서 욕구를 실현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감히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1859년 다윈이 진화론의 횃불을 지피면서 교회의 권위는 흔들렸고,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부를 구가하게 된 세력이 기존의 도덕에 저항하고 싶어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자유로운 개인’의 실현을 누리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도덕적 억압이나 종교적 제재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욕망은 실현가능성이 없을 때는 포기하고 체념하지만 조건이 형성되면 언제든 그 실현을 충동한다. 그건 본능이다.

 스티븐슨은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 지킬 박사는 의식의 세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합리적이며 자기통제적 인격을 갖춘 인물이다. 말 그대로 모범이다. 그에 반해 하이드 씨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상징한다. 문제는 그 두 인물이 한 사람 안에 내재한다는 점이다.

 하이드 씨는 욕망의 주체성은 인식했지만 아직은 의식의 주체로서의 인격을 뛰어넘지 못하는 당대인의 속내를 표상한다. 즉 이전의 전범이었던 의식의 주체로서의 인간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새롭게 발견된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중성에서 갈등하는 존재다. 두 인물은 결코 동시에 한 인물 안에서 작동하지 못한다. 만약 동시에 나타난다면 그건 다중인격이거나 미친 작자일 뿐이다. 그게 19세기말의 한계이고 당대를 살았던 인간의 비극이다.

 

 이 갈등을 해소한 것은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의 출현이었다. 《꿈의 해석》이 출간된 건 1899년이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의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심층심리, 즉 일반적으로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이성이나 논리로 이해될 수도 작동될 수도 없음을 밝혀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이후 문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장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절규>(1893)도 그 한 예다.

 뭉크의 그림은 이전의 심리 표현과는 전혀 방식이 달랐다. 그 불안은 예술적으로 스티븐슨의 불안을 능가하는 것이었으며 도식적으로 본다면 스티븐슨과 프로이트를 이어주는 끈과 같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스티븐슨이 개인의 갈등과 분열을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로 분리하여 드러내려 했다면 뭉크는 한 인물 속에서 조형적으로 통일시켜 표현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유일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복합적으로 어울리면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게 사조이고 사상과 문화의 흐름이다. 문학, 더 나아가 예술은 한 시대가 겪고 생산한 삶의 방식이며 다른 사상이나 사조의 영향을 받으며 진화한다.

 

 6 이야기의 힘, 해리포터 

 《해리포터》는 조앤 롤링이 24세 때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서 영감을 얻어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8세에 이혼한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와 동생이 사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일자리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던 그녀의 주 수입은 정부보조금뿐이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교사자격인증 석사학위 과정을 밟으며 적은 수입으로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롤링은 그때쯤에는 스코틀랜드 예술위원회의 신인작가 창작지원금도 받았고 근처의 학교에 교사로 취업한 상태여서 경제적으로는 숨통이 조금 트였지만 여전히 곤궁했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기 위해서는 복사본이 필요했는데 복사비가 없어서 중고 타자기로 모두 다시 타이핑했다고 한다.

 그녀는 대행사를 찾았다. 그런데 그 대행사는 아동문학을 다루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거절했어야 했는데,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롤링의 샘플 원고를 묶은 검은색 커버가 운명을 바꿨던 것이다. 특이한 그 커버 때문에 원고를 집어 훑어본 비서 브리오니 이븐스는 원고에 흥미를 느꼈고, 하퍼콜린스, 펭귄 등 영국의 유수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결과는 아쉽게도 모두 퇴짜였다. 그렇게 거절당한 출판사가 무려 열두 개였다.

 열세 번째 출판사는 별볼일없는 소규모 출판사 블룸즈버리였다. 그런데 블룸즈버리의 편집자 배리 커닝햄은 원고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이것은 마술이다!’라고 판단했다. 위험을 고려해서 초판을 500부만 찍었다. 바로 《해리 포터와 현자의 돌》, 시리즈 첫 권이었다.

 불을 지핀 건 엉뚱하게 미국에서였다. 스콜라스틱 출판사의 편집이사 아서 레빈이 이탈리아의 볼로냐아동도서전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읽고서 판권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레빈은 미국 판권을 무려 10만 5천 달러에 사들였다.

 그 때문에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고,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이 된 셈이었다. 그는 ‘현자’라는 단어가 어린 독자들에게 너무 어려울 것 같다며 제목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로 바꿨다. 스콜라스틱은 초판으로 무려 5만 부를 찍었다. 해리포터 열풍의 발화점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야기의 힘이다.

 어렸을 때는 재미있다고 느꼈던 이야기도 자라고 나서는 말도 되지 않는다며 손사래 치는 경우가 많다.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논리적으로만 이해하는 의식구조가 형성된 까닭이다.

 여기서 두 번째 지점에 닿는다. 기존의 아날로그 세상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의 구조 안에서 ‘1:1’ 대응관계를 통해서만 현실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의 발달로 서서히 그런 세계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바로 디지털 프레임이다.

 그 디지털 프레임이 빚어낸 새로운 시공간이 바로 가상현실이다. 거기에서는 이전의 ‘1:1’ 대응구조가 ‘1:다(多)’의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 실제로는 ‘1:1’ 대응관계이지만 빠른 처리 속도 능력으로 ‘1:다’의 방식으로 느껴지는 세계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해리 포터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의 힘뿐 아니라 이렇게 변신한 새로운 세계의 구조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학수첩’이라는 출판사에서 판권을 확보했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문학수첩’의 기획자는 1999년 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수입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미 한국에서도 판타지소설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 기획자는 출판사 대표의 딸이었는데 아버지에게 “혼수 비용은 필요 없으니 제발 이 책의 판권은 사라”고 졸랐다고 한다.

 

 7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해의 세계는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는 우리가 객관적인 세계를 직접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통로를 통해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이규호(1926~2002)는 《말의 힘》에서 말은 단순히 현상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고 현실을 창조하며 일상의 도구로서 우리의 삶을 유도해주고 있다고 언명하면서 훔볼트를 수용한다. 말은 삶을 유도하고, 삶을 창조하는 힘을 지녔다는 것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서구의 전통적인 언어관을 반박했다. 서구에서 언어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언어가 의사소통의 매체라는 것이었지만, 하이데거는 말하는 주체가 언어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존재가 머무는 집이다. 즉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인간이 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 중에서 가장 고유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언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거처가 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어떤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물이, 더 나아가 세계가 구성된다. 그러므로 국어교육의 근본은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말의 올바른 사용이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더 나아가 사람과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그러니 결코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닌 것이다.

 

 언론인 강상헌은 병원(病院)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것이라며 비판한다. 병원은 말 그대로 풀어보면 ‘병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란다. 그래서 암센터도 암이 중심이고 주인인 곳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는 ‘항암(抗癌)센터’라고 해야 맞다고 주장한다. 말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름대로의 힘을 갖고 있다.

 국어학자 김창진은 ‘자동차협회’와 ‘자동차산업협회’를 예로 들면서 그 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오마이뉴스>, 2012년 8월 6일자). 자동차협회는 자동차가 모여서 만든 모임이란 뜻이다. 따라서 ‘자동차인 협회’가 맞다. 자동차산업협회도 ‘자동차산업인협회’로 해야 옳다. ‘시인협회’지 ‘시협회’가 아니지 않은가. 김창진은 그 말 속에 우리가 사람을 주인으로 삼지 못하고 사물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의식구조가 담겨 있다고 비판한다. 그만큼 우리가 물신주의적이고 비인격적인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는 우리나라 국어를 연구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국립국어원’의 주인이 왜 ‘국어’냐며 반문하고는, 국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이고 연구하는 대상이지 섬기고 모셔야 하는 주인이 아니며, ‘국립국어연구원’쯤으로 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례는 극단적인 것 같지만 사실 본질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다.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언어 습관에서 인격성이나 자아의 주체성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말과 글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고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것은 단순히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고리가 아니라 나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7. 미술

 1 현대미술은 불친절하다

 추상표현과 색면회화의 대표적 인물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이렇게 말했다.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 작품에 어떤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2 재현미, 인식미, 표현미

 피카소는 평생 2만 점 가량의 작품을 생산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보면 하루에 두 점쯤 그렸다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평론가들은 그 가운데 10분의 1, 즉 2천 점 가량을 괜찮은 작품으로, 그리고 다시 그 가운데 10분의 1, 즉 200점 가량을 걸작으로 꼽는다.

 

 ο 사진 같은 그림, 그림 같은 사진

 동료 화가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조차 피카소의 그림을 폭력적이라고 힐난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현대미술은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일까?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 변화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미술사,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 나는 프랑스혁명이라고 생각한다.

 

 1879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된 그림은 구석기 후기의 벽화로 추정된다. 점묘법은 물론이고 벽면의 요철을 이용하여 빨강과 검정의 농담(濃淡)으로 입체감을 살린 효과가 보이기도 했다.

 들소, 사슴, 멧돼지 등이 등장하는데 크로마뇽인들이 그렸을 거라고 짐작된다. 아마도 주술적 목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네들이 포획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가졌다. 그걸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게 미술이고 청각적으로 구현하는 게 음악이다. 문명이 발달하여 거대한 부족을 형성하거나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계급이 형성되었고, 정치나 종교를 장악한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위해 혹은 학습을 위해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제는 훨씬 숙련되고 전문화된 화가라는 직업군도 양성되었다.

 교회에서 그림은 문맹자가 대부분인 신도들에게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는 수단이었다. 신성함과 존엄성이 최대한 드러나야 했다. 화가는 주문대로 그림을 그려주고 생계를 꾸렸다. 주문자가 요구하지 않는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전적으로 인물과 사건이 주요 대상이었다. 당연히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릴 일이 거의 없었다. 이 점은 산수화나 조충도 등을 구가한 동양미술과 크게 다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렸는데 새들이 진짜 나무인 줄 알고 날아들었다가 벽에 부딪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그 그림은 사실적 채색화였을 거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 미적 판단의 기준은 재현미(再現美)가 된다.

 

 ο 프랑스혁명이 몰고 온 변화

 재현미는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지녀온 미적 판단의 기준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적 판단이 달라진 것은 전적으로 사회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을 감행한 세력은 왕을 처형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수많은 성직자를 처형했다. 전 유럽이 충격에 빠졌다. 왕족과 교회는 당장 제 코가 석 자인 형편이 되었다. 그림 주문하는 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으니 화가들로서는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신흥 부르주아들은 미술의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돈 쓰는 것을 아까워했다. 화가의 입지가 좁아졌고 실제로 화가들의 수가 급감했다. 그들은 가까스로 주로 초상화를 그려가면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후에 다시 왕정복고가 되었지만 예전 같은 호경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산업혁명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이전의 신분 사슬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신의 노동을 제공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1827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éphore Niépce, 1765~1833)가 사진을 발명하고, 1835년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Jacques-MandéDaguerre, 1787~1851)가 현대적 의미의 사진을 개발하면서 카메라는 겨우 살아남은 초상화가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상황이 좋아지자 사람들은 본능적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 사람들은 상당수는 전문화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화가들이었고 딜레탕트(dilettante)들이었다.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는 세관원이었고,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증권거래소 직원이었으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탄광촌 순회전도사였다.

 화가들이 정물화를 새로운 미술 장르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플랑드르, 즉 지금의 독일 북부와 네덜란드에서는 무역과 상공업의 발달로 축적된 부를 토대로 허영과 사치가 극에 달하면서 정물화나 풍경화가 유행했다. 이는 이 지역이 일찍이 기존의 계급구조에서 벗어나 있었고, 더치(The Dutch, 네덜란드인)들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서양미술사에서 본격적으로 정물화와 풍경화가 출현한 것은 17세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인물화에 등장하는 모델도 이전의 왕이나 성인(聖人)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었다. 주문자의 눈이 아니라 ‘화가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기존의 법칙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미적 판단의 기준은 ‘재현’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뀌었다. 표현미(表現美)의 시대가 온 것이다. 동시에 미적 판단이 객관에서 주관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그리는 사람’이 주체가 된 것이다.

 표현미에 가장 충실했던 그림들이 바로 ‘인상파 미술’이다.

 

 ο 추상화, 그 자유로움

 피카소는 회화의 평면성을 벗어나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고, 마티스는 원근과 농담 등의 방법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대담한 생략과 강조로 단순화시키는 그림을 시도했다. 칸딘스키는 아예 대상을 해체하여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봄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의 화가들은 봄꽃을 그리거나 봄의 들판을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내가 그려내고 싶은 것은 그런 대상이 아니라 봄에 대한 나의 느낌 그 자체다. 대상을 그려내면 화가도 감상자도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그 대상에서 벗어나야만 나와 세상 혹은 대상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해체하거나 재구성해서 그 관계성을 표현해야만 한다. 우리가 추상화 혹은 비구상화라고 부르는 그림들의 정신은 그런 것이다.

 해석은 반드시 감상자와 공유될 필요는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해석일 뿐이다. 그림에 대한 미적 판단의 기준은 더 이상 재현미나 표현미가 아니라 인식미(認識美)로 전환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현대미술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며, 때론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녔던 통상적 이해나 가치가 전도되는 당혹감 때문이다. 그림 하나를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 방식을 인식할 수 있고 게다가 나의 이성과 감성을 발동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 아닌가? 표현미의 시대가 ‘화가의 눈’, 즉 그리는 사람을 주체로 세웠다면 인식미의 시대는 ‘관람자의 눈’으로 해석하면서 모든 개인이 각자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3 《행복한 눈물》이 가르쳐준 것들

 전후 미국은 전 세계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전쟁을 피해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건너왔고 미국의 국력이 상승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예술에 있어서는 유럽에 대한 열등감을 감추지 못했다. ‘돈 많은 양키’는 되었지만 고상한 예술가는 아니라는 시선을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미국의 화가들은 파리에 유학하고 와야 대접을 받았고 유학을 못가면 하물며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했다.

 추상표현주의의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등이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잭슨 폴록은 유명한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1949년 <라이프>지에 “그가 미국의 가장 뛰어난 화가인가?”라는 타이틀의 특집을 게재하면서 갑자기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폴록은 그 기사 이후 심리적 부담을 크게 느꼈다. 자신의 작품에 회의를 느꼈고, 모든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그린버그도 폴록의 작품이 부자연스러워졌다고 비평했다. 결국 폴록은 방황하다가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폴록에 대한 이런 일화들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자국 문화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작가가 바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었다.

 본디 팝아트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영국에서는 시작과 동시에 사그라졌다. 그걸 받아들여 자신의 예술로 표현한 인물이 앤디 워홀이었다. 그는 지식과 정보가 대중미디어에 의해 집합적으로 소비되는 현실에서 미술작품도 대량 생산 혹은 복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예술이라고 뭐 대단하고 거창할 게 있겠냐’는 반감도 적당히 작용했다.

 앤디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이 활약하던 전성기인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은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소비문화와 대중문화가 만연했다. 이들은 그 상황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급속한 도시화로 비개성적이고 반복적인 생활 패턴으로 돌아가는 뉴욕의 모습은 이들의 주요 타깃이었다. 인스턴트의 경박함과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만화적 낭만은 묘한 향수를 자극했다. 이들 작가들이 성가를 높인 데에는 분명히 미국 자본주의의 힘과 예술의 독창성에 대한 미국의 오랜 열등감이 한몫했다. 영국에서 잠깐 반짝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팝아트였지만 그것을 되살려 자신들의 예술로 삼았다는 사실이 미국의 자존심을 살려준 것이다. 이전까지의 유럽 콤플렉스를 벗어나 완전히 미국적 독창성과 고유성을 발견한 셈이었고, 거기에 미국의 자본이 힘을 발휘했다. 예술도 국력과 상관관계를 갖는 건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4 백남준, 시간과 움직임을 품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백남준은 1960년대 ‘플럭서스 운동(Fluxus)’의 중심으로 활동했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연과 전시로 매번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새롭게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백남준은 예술을 순수한 ‘장난’으로 마음껏 유희한 인물이었다. “예술은 사기다”라거나 “종이는 죽었다”는 그의 말은 가벼운 듯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철저히 기존의 틀을 거부했다. 샬럿 무어맨(Sharlotte Mooreman, 1933~1991)이라는 첼리스트에게 반라의 상태로 무대 위에서 연주를 벌이도록 했던 해프닝을 보며 기존의 예술계는 경악했다. 피아노를 도끼로 난도질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예술가 가운데 경찰서에 가장 많이 불려간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험정신은 결국 위대한 예술로 인정받았다.

 

 백남준 이전의 예술을 보면, 추상미술은 하나의 객체에 갇힌 틀을 벗어나 나와 세상을 제한 없이 그려냈다. 입체파 미술은 비록 평면에 갇힌 회화지만 그 평면성을 벗어나 이전까지 보여줄 수 없었던 측면과 배면을 끌어냄으로써 정면성이라는 한계를 깨려고 했다. 심지어 현대미술에서 한동안 회화가 부조(浮彫)에 가깝도록 다양한 마티에르(matiére, 질감적 표현) 사용을 시도했던 것도 결국은 평면성을 깨려는 시도였다.

 추상표현주의를 내세운 액션페인팅은 ‘순간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난 우연성의 효과를 새로운 미의식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단 화폭에 표현되는 순간 그 행위는 멈춘다. 미술은 그 고정성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각에서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Stirling Calder, 1898~1976)는 이른바 움직이는 미술인 키네틱아트(Kinetic Art)를 통해 몬드리안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구현했다. 조각을 대좌(臺座, 조각을 올려놓는 대)와 양감에서 해방시킨 그의 움직이는 조각은 공간의 예술인 미술이 시간과 동작을 담았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사건이다. 그러나 모빌이 구현하는 시간과 동작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해야 했다.

 

 백남준은 새로운 표현방식을 통해 기존 미술의 한계를 벗어났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를 패러디한 “종이는 죽었다”는 선언은 캔버스에 머물러 있는 미술에 대한 선전포고와 그가 선택한 캔버스는 바로 TV였다. 미술이 뛰어넘지 못했던 시간의 표현과 보관이 가능해졌다.

 모빌이 우연적 동작을 드러낼 뿐이라면 비디오아트는 철저하게 나의 의도에 따라 어떤 동작이나 표현도 가능할 수 있다. 시간과 움직임의 한계를 이렇게 단 한 방에 날려버린 경우는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예술 창작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장시킨 선구자다. 그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1974년 발표한 은 정원 곳곳에 TV를 설치함으로써 설치미술 장르에 새로운 가능성을 더했다.그는 1960년대 독일에서 플럭서스 초기 전시회 때 브라운관에 자석을 대고 움직이면 전자 왜곡이 일어나는 현상을 활용해 다양한 모양들을 표현했고,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6년 <바이 바이 키플링>,1988년 <손에 손 잡고>의3부작 시리즈로 지구촌 여러 도시를 한꺼번에 연결시키는 위성작품을 선보였다. 세계에 단 하나뿐인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는 루브르박물관에 가야 했지만 백남준의 작품은 굳이 미술관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TV를 통해 감상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이전의 미술은 꿈도 꾸지 못했다.

 

  유럽 비교사 교수인 도널드 서순(Donald Sassoon)은 자신의 방대한 저서 《유럽문화사》에서 ‘의도적으로’ 미술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제한된 엘리트, 그러니까 수집가나 화랑주, 박물관장과 미술비평가들에게만 한정된 예술로서의 미술은 대중적이라기보다는 ‘투기적인’ 시장의 물건이라고 본 것이다.

 미술시장이 주식시장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과는 별도로 일반 대중에게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어려워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다.

 문학이나 음악은 누구나 언제든, 그것도 일정한 가격에 감상하거나 소비하고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품은 감상이나 소유도 제한적이고 이해마저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난다. 그런데 백남준의 예술은 감상과 소비의 틀을 일정 부분 깨뜨렸다. 기존의 미술이 갖는 공간적 한계를 넘어섰다. 전 세계 사람이 동시에 그의 예술을 감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예술을 혁명으로 보는 것이다.

 

 5 미술과 돈, 그리고 국력

 장샤오강(張曉剛, 1958~ ), 위에민준(岳敏君, 1962~ ), 왕광이(王廣義, 1957~ ), 팡리준 方力钧, 1963~ ). 이른바 중국 미술의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작가들이다.

 지난 10년간 이들의 작품 매매가는 무려 100배 이상 치솟았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자연스럽다. 재력이 된다면, 자국 문화에 최대한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전후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일본인들은 전 세계 미술시장에서 소비국 2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들은 많은 미술품을 수집했다. 후쿠시마 현의 고작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에 있는 모로하시근대미술관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그림만 무려 332점을 소장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들이 선호한 그림은 주로 인상파였고, 그 가운데 특히 고흐와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작품이 인기가 높았다는 점이다. 이는 인상파 미술이 일본의 풍속화인 우키요에(浮細繪)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을 열광케 한 이른바 자포니즘(Japonism)의 영향으로, 고흐나 모네의 경우는 아예 일본 미술을 모사하거나 집안 장식마저 일본식을 따랐으니 이들 작가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감도 이해가 간다. 그 가운데 고흐의 <해바라기>는 1987년 크리스트 경매에서 무려 3990만 달러에 거래됐다. 구입한 사람은 일본인 야스다(安田)였다. 그래서 이 작품을 아예 ‘야스다 해바라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 미술의 ‘4대 천왕’의 작품을 초기에 집중적으로 선택하고 수집에 나선 이들은 중국 애호가가 아니다. 서구 컬렉터들이다.

 인상파 작품들은 미술사적 대전환점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보다 더 높은 가격을 형성한다. 같은 이유로 중국 미술 역시 현대미술 애호가들의 시선을 붙든다.

 중국은 아주 빠르게 자본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 혼돈과 전환을 현장에서 목격한 이들이 중국의 예술가들이다. 더군다나 이들 중 다수는 문화혁명(1966~1976)까지 직접 경험했다. ‘4대 천왕’ 작가들을 비롯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은 어렸을 때 문화혁명을 겪은 당사자들이다.

 컬렉터들은 화가의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한다. 그들은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는 중국 화가들을 보고 그림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2007년 기준으로 중국 미술시장에서 거래된 총액은 2억 5천만 달러를 넘어서 그 규모가 프랑스를 추월하여 세계 3위에 올랐다. 중국 미술의 부흥은 중국 경제의 급등, 신성 부호들의 부상 그리고 격변의 예술가를 주목하는 컬렉터들의 속성이 모두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그림, 그 이면에 세계 정세와 돈의 흐름이 살아 움직인다.

 

 청화백자가 비쌀 뿐 아니라 작품성이 높은 것도 그 안료인 코발트가 워낙 비싸 일반인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따라서 도화사들이 그리고 관요에서 구워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중세의 성화에서 성모 마리아는 푸른색 옷을 입은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도 경제성과 희소성이 작용했다. 푸른색 안료인 울트라마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입한 광물인 청금석에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결코 흔하지 않았고 엄청나게 비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화에 고귀하고 성스러운 느낌을 부여한다는 만족감을 높였고 성모의 옷에 사용된 것이다. 이른바 한계효용의 가치 판단이 개입한 사례다. 

 그림은 인간이나 사회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경제 현상이 투영되는 경우가 많다.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청과 메디치 가문이 경제권을 독점한 까닭에 로마와 피렌체가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 19세기에 도시가 재건되고 돈이 모이면서 파리가 세계 미술의 중심이 된 것도 그런 배경이다. 지금 미국이 현대미술의 중심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6 우리 미술, 이 얼마나 멋진가!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씨름도>는 보물 527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이 그림은 지본담채화(紙本淡彩畵)다. 즉 비단에 그린 게 아니라 종이 그것도 막종이에 그렸다. 크기도 39.7×26.7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화첩 중 일부다. 그래서 낙관이나 수결(手決, 자필로 글자를 써넣음)이 없다. 그러니까 크게 공들였거나 왕실이나 고관대작이 따로 돈을 대서 그린 게 아니었을 것이다. 덕분에 단원의 활달하고 유쾌한 필치가 거침없이 살아 있다.

 이 그림은 원형 구도이면서 중심점을 갖고 있다. 이 작은 종이에 22명이나 되는 인물을 채워 넣었음에도 답답함이 들지 않는 것은 씨름꾼 두 사람과 관객들 사이에 충분히 확보한 여백 때문이다. 게다가 그 22명의 인물 하나하나의 표정이 모두 달라 생동감이 넘친다. 그저 붓으로 쓱쓱 톡톡 그렸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단원의 필력과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아래보다 윗부분에 사람이 더 많은데도 답답하거나 눌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대각선 반대편인 오른쪽 아래로 두 사람을 배치해서 답답함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위쪽의 맨 오른편 남자는 망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럭저럭 양반의 태가 난다. 그런데 바로 옆 비스듬히 누운 남자는 앞에 놓은 모자로 보아 가마꾼쯤으로 보인다. 평소에는 감히 그렇게 삐딱하게 누워있을 수 없을 텐데 단오의 축제 분위기로 이쯤은 애교로 넘길 수 있다는 단원의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다.

 더욱 특이한 것은 그 뒤에 있는 아이들을 그린 붓놀림이다. 흔히 원근에서 가까운 것은 진하게, 먼 것은 연하게 그리는 게 일반적인데 단원은 의도적으로 이것을 뒤집었다. 각각의 표정을 살리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일부러 아이들을 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왼쪽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동네 유지쯤 되었을 것이다. 입성이나 자세로 보아 주류 양반세력으로 보인다. 사실 조선시대처럼 위계질서가 분명한 사회에서 이렇게 반상(班常)이 어울리는 것은 극히 드물다. 그 예외 중 하나가 바로 단오였다.

 그런데 이 씨름에서 과연 누가 이겼을까? 아마도 등을 보이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이겼을 것이다. 상대를 번쩍 들고 있어서 그럴까?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들배지기를 되치기로 맞서면 역전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돌아선 남자의 앙 다문 각진 턱, 튀어나온 광대뼈, 날카로운 눈매도 그렇거니와 등이 만들어낸 선을 봐도 그의 힘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오른팔의 근육을 보라.

 상대적으로 나이는 어리고 지체는 높은(바지의 품새나 오른쪽에 벗어놓은 가죽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상대방의 표정은 당혹스러움과 낭패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왼손은 상대의 허리가 아니라 가까스로 옆구리춤을 잡고 있을 뿐이다. 힘을 쓸 도리가 없다.

 왼쪽 위의 신발을 벗어놓은 선비는 다음 선수일 텐데, 무릎에 깍지를 끼고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경기를 바라본다. 그 뒤에 있는 인물이나 옆에서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오른쪽 아래 인물들을 보라. 왼쪽 위의 사람들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 데에 반해 오른쪽 아래의 인물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고 있다. 들린 사람이 자기네 쪽으로 팽개쳐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원의 <씨름도>는 세 개의 시점(視點)을 갖고 있다. 화가는 전체적으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구도를 잡았다. 또한 이 그림은 일종의 부감(俯瞰: 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보는 촬영 각도) 시선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만약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하나의 시점에만 맞췄다면 나머지 두 집단의 표정은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씨름하는 두 주인공의 경우 부감 시선으로만 처리했으면 납작한 형태가 되겠지만 단원은 슬그머니 구경꾼의 눈높이로 처리했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이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크게 보이도록 한 것은 다시 그림 안에서 또 하나의 시선을 마련한다. 이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를테면 심판의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 그림에는 세 개의 시선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하지만 여러 시점을 설정한 것이 눈에 보이면 대단히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각각의 시점을 병행한 것은 단원의 뛰어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이 원형구도를 취한다고 했는데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구성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답답하지 않고 생동감이 넘치는 것은 인물 하나하나의 표정과 몸짓이 살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씨름꾼과 구경꾼 사이의 공간을 넉넉하게 마련했기 때문이고 오른쪽 위에 있는 여백과 왼쪽 아래의 여백이 서로 통하며 마치 바람길처럼 트여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맞바람이 아니라 사선(斜線)으로 이루어져서 자연스럽고 리듬감 있게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왼쪽 아래에 있는 엿 파는 소년도 크게 한몫을 한다. 특히 그는 그림에서 유일하게 시선이 반대로 향한 인물이다. 모든 시선이 중앙으로 몰리면 집중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지루하고 답답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년의 시선 하나로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그뿐 아니라 씨름꾼이 벗어놓은 신발코가 안쪽으로 향하지 않고 바깥쪽으로 향한 것도 절묘한 구도다.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는 단조로움을 이 신발들이 상쇄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림을 감상하는 순서가 딱 한 가지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먼저 자유로워져야 한다. 도대체 고정된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저장할 거라면 무엇 때문에 그림을 본단 말인가?

 

 7 미니멀리즘으로 삶을 돌아보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을 총칭한 이름이다.

 1937년 처음 소개된 미니멀리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시각예술 분야에서 출현하여 음악, 건축, 패션, 철학 등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미니멀리즘이 대중화된 건 미학자 리처드 월하임(Richard Arthur Wollheim, 1923~2003)이 1966년 한 잡지에 ‘미니멀 아트론’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1960년대를 풍미한 미니멀리즘은 명칭 그대로 최소화된 형태와 내용을 추구했다. 당시 각광받던 팝아트와 나란히 주목을 받았는데, 팝아트가 대중문화에 관심을 두었다면 미니멀리즘은 예술을 사물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달랐다.

 

 앵포르멜 :: 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표현주의나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들여 기하학적 추상(차가운 추상)의 이지적인 측면에 대응하여 서정적 측면을 강조, 색채에 중점을 두고 보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갖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로 나타났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1년 프랑스의 평론가 M.타피에는 이러한 경향의 화가들의 그룹전을 기획하고 소책자 《또다른 예술:un art autre》(1952)을 발간, 이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앵포르멜(非定形)이라 했다. 선묘(線描)의 오토메티즘, 산란한 기호, 그림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석회를 쳐바르는 기법 등을 구사, 구상 ·비구상을 초월하여 모든 정형을 부정하고 공간이나 마티에르에만 전념함으로써 또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려는 것으로 그것은 기성의 미적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조형의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으나, 무정형 ·무한정한 자유가 오히려 표현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로 포트리에, 뒤뷔페, M.마튜, G.마티외 등이 있으며,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앵포르멜 [Informel] (두산백과)

 

 회화를 최소 구성요소로 환원시키려고 노력한 미니멀리즘은 앵포르멜(informal)의 과도한 정신주의(앞서 언급한 로스코와 같은)적인 태도와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앵포르멜은 기존의 미학을 폐기하고 동력학, 위상기하학, 집합론적 극미(極微)와 극대 등의 개념을 도입하여 ‘별개의 예술’을 창조하려고 했던 흐름이다. 앵포르멜은 기하학적 추상의 필수적인 것만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팝아트와도 완연하게 달랐다.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은 시원하고 단순한 색채를 사용하며 화폭의 자율성과 숭고미를 추구했다.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단순과 반복이라는 특징을 띠었다. 즉 가장 핵심적인 주제를 담은 선율과 리듬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고 반복함으로써 결정적인 이미지와 감성만을 전달하려 했다.

 미니멀리즘이 1960년대를 풍미한 것은 시대정신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1960년대 말은 비판의 시대였다. 기존의 질서가 감춘 허위를 고발하는 시대였다. 반전운동이 그랬고 인종차별 반대운동이 그랬고, 68혁명이 그랬다. 1965년 이후 미니멀리즘이 급진적 행동을 택해 회화적 수단을 최소화했던 것도 시대적 흐름에 대한 공감이었다. 미니멀리즘의 극단적 환원주의는 테크놀로지가 만연한 세상에 맞서 원시주의의 한 형태로 원 재료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어떤 의도도 개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군더더기를 제거하여 기호에서나 가능한 원형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갔다. 미니멀리즘이 작가의 예술적 개입을 배제하고 기성의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태동한 새로운 경향으로 형식상의 대칭, 전통적 의미에서 구성의 결여, 무채색 등의 회화적 특성을 지닌, 단순하고 텅 빈 기하학적 오브제를 총칭하는 미술로 정의된다. 미술작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어떤 문화적 가치를 기대할 것인지, 예술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등을 관객이 자각하도록 유도한 ‘최소한’의 미술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미니멀리즘의 효시는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미니멀리즘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만을 주장하는 금욕주의 철학이나 복잡한 의식을 없애고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종교적인 흐름 등 많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니멀리즘은 또한 음악에서도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1937~ )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합주곡처럼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박자에 반복과 조화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니멀리즘은 문학에서도 대두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소설가 존 바스(John Barth, 1930~ )는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을 전제와 도드라짐 그리고 경제성을 토대로 그려냈다. 그의 작품은 1970년대의 에너지 위기와 그에 따른 과소비에 대한 비판 등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과 문화적 상황을 반영한다. 바스는 이야기를 일부는 작게 만들고 일부는 크게 만드는 굴절된 거울을 통해 전개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선택과 집중, 과도함과 소홀함의 절묘한 리듬으로 사건과 독자를 대립시킨다.

 미니멀리즘은 또한 디자인 분야에서도 소재와 구조를 단순화하면서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으며, 패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식적인 디자인을 가능한 제거한 심플한 디자인이나, 직선적인 실루엣의 선정적인 옷, 또는 최소한의 옷으로 훌륭한 옷차림을 연출하는 방법 등이 모두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1931~ )가 1961년 발표한 미니멀리즘 작품 <두 기둥>은 구성주의와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 )의 영향을 받은 환원적인 기하학적 입체를 선보였다. 그는 작가일 뿐 아니라 미니멀리즘의 주요 이론가였는데, 현대조각의 특성을 공간성으로 해석하고 관람자에게 수용과 경험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조각의 영역을 확장했다.

 이 작품을 보면, 직육면체 이외에는 어떤 형상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커다란 두 개의 기둥을 하나는 세우고 다른 하나는 눕혀놨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모든 형상의 기본적 형태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칼 안드레(Carl Andre, 1935~ )는 조각의 수직성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깨고 아예 수평조각을 끌어들임으로써 조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는 바닥에 납작한 사각형을 나열하거나 두세 개를 겹쳐 쌓아 옆으로 죽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공간의 바탕을 지면으로 환원함으로써 우리의 공간적 인식 자체가 달라야 한다고 촉구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대세계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며 그런 세상에서 삶이 지닌, 감당할 수 없는 변화와 다양성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추상미술이 반드시 인식미(혹은 추상미)에 의해 결정될 까닭은 없다. 추상(Abstract)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한다는 뜻이고, 영어(abstract)나 라틴어(abstractio)라는 단어도 ‘떼어놓음’이나 빼냄’을 의미하는 낱말이라는 점을 생각하자. 불요한 것들을 떼어놓고 빼내면 긴요한 본질이 남는다.

 

 

 

8. 음악

 1 하이든과 베토벤의 음악이 다른 이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작곡가로보다는 위대한 오르간 연주가로 존경받았으며, 교회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감독으로 일한 27년 동안 작곡한 칸타타가 무려 295곡이었다. 한편, 바흐의 위대한 음악적 유산인 <평균율>도 본디 친척과 제자들에게 건반 연주기법과 음악적 기교를 가르치려고 작곡한 것이었다.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이지만, 살아 있을 때 그의 사회적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음악가라는 직업 자체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던 탓이다.

 

 ο 하이든의 음악은 경쾌하다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음악은 거의 장조(長調, Major)로 구성되어 있다. 천성이 명랑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하이든이 살았던 시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교향곡(안토니오 반 호보켄이 분류한 것에 따르면 104곡이다)을 작곡했다. 그가 활약했던 18세기 중기의 교향곡은 악기 편성에 있어서 18세기 후반 이후의 교향곡과는 달랐다. 18세기초의 교향곡은 실내악(Chamber Music)에 가까웠다. 현악기와 목관악기 중심의 소규모 편성이었다.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조금씩 금관악기가 배치되더니,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대규모 편성의 교향악이 완성되었다. 하이든의 교향곡도 이 흐름에 따르고 있다.

 하이든의 초기 교향곡은 현악기(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와 목관악기(오보에, 혼) 중심이었다. 목관악기도 오보에와 혼 각 두 개 정도만 사용하는 소규모 편성이었다. 그러다 교향곡 32번(다장조, 1766) 부터 금관악기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두 개의 트럼펫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그의 후기 교향곡에는 목관파트에 클라리넷이 추가되어 더욱 화려한 음향을 이뤄냈다.

 

 18세기에 유행했던 실내악은 귀족주의의 산물이었다. 자신들의 공간이라고 여겼던 극장에 시민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들의 저택과 궁정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당시 악단이나 작곡가를 직접 고용하고 후원한 사람들이 바로 패트론(patron)이다. 하이든이 활동하던 시기 유럽 최고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던 인물이 에스테르하지(Nikolaus I. Joseph Esterházy de Galantha, 1714~1790)였다. 하이든은 바로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악장으로 ‘취업’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향곡의 악기 편성이 실내악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음악을 이해하는 수준이 상당이 높았던 에스테르하지와 하이든이 1779년 새로 맺은 계약은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경우든 전하의 호의에 따라 전하가 명하는 음악을 만드는 것”을 하이든의 의무로 확실하게 규정했다.

 음악사의 뒷이야기 중에 이 고용관계와 관계된 ‘작품번호’라는 게 있다. 작품번호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매기기 시작한 것은 베토벤부터다. 바흐 작품의BWV(Bach Werke Verzeichnis)는 독일 음악학자 볼프강 슈미더가 정리한 것이다. 헨델 작품의 HWV(Handel Werke Verzeichnis)와 하이든의 Hob(호보켄), 모차르트의 K(쾨헬), 슈베르트의 D(도이치), 리스트의 S(설) 등은 훗날 음악학자 등이 악보를 정리하면서 매긴 번호다. 그런가 하면 비발디의 RV(리용번호)도 마찬가지다. 작곡가가 작품번호를 매기지 않은 것은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이 곡 저 곡을 왔다갔다하면서 작곡해야 했고, 작곡가 자신이 자기 작품의 일련번호를 매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귀족이 원하는 음악은 밝고 명랑한 것들이었다. 연회나 무도회 등에서 주로 장조의 음악이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이든의 음악 색채는 전적으로 그의 의지가 아니라 고용한 주문자의 용도였기 때문이다.

 

 ο 모차르트에 얽힌 오해와 편견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불과 여덟 살에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은 준 것은 1763~1766년 사이의 유럽일주 여행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흔히 그의 아내 콘스탄체의 낭비벽이 심각했다고 언급되는데, 이는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나온 편견이다. 오히려 모차르트의 낭비벽이 심했다. 그는 황실과 교회 등 권력의 중심에 드나들었던 탓으로 눈높이가 높았고 훗날 황실과 교회와 결별한 뒤에도 사륜마차를 타고 다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모차르트가 황실과 교회 등 당시 권력자들과 결별한 것은 1786년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이듬해의 <돈 조반니>가 결정적 계기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과도기였다. 봉건제는 무너졌고 종교적 권위는 퇴색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권리가 존중되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점진적으로 번지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자유의 흐름이 대세임을 일찍이 유럽 여행을 통해 확인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바뀐 것은 더 이상 궁정의 음악이 아니라 근대정신에 부합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셰(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1732~1799)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 보마르셰는 자신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를 1775년 초연하여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었다.

 1781년에는 걸작 희극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을 썼고, 1784년에 초연했다. 이 작품은 기지에 찬 종복이 주인인 귀족과 연적이 되어 대결을 펼치다 마침내 이기는 주제로 사회 풍자를 담고 있다. 프랑스혁명 전야의 시민정신과 딱 맞아떨어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작품과 더불어 3부작을 이루는 희곡 《죄 있는 어머니》가 1792년에 완성되었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는 보마르셰의 삼부작 중 첫 번째 희곡인 《세비야의 이발사》를, 그리고 모차르트는 두 번째 희곡인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 그러니까 연대상 앞선 모차르트가 2편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먼저 오페라로 만들었고, 나중에 로시니가 1편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어서 줄거리 자체가 다른 것이다.

 어쨌든 보마르셰의 희곡은 프랑스에서도 귀족을 조롱하는 내용 때문에 곧바로 상연금지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겠다고 나섰으니 황실과 교회는 그가 귀족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의 오페라 <돈 조반니>는 비엔나에서 공연하지 못하고 비엔나와 베를린의 중간쯤에 있는 프라하에서 초연해야 할 정도였다.

 경제학에 ‘세이의 법칙(Say’s law)’이라는 게 있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여 국민총수요가 항상 총 공급과 일치하게 된다는 법칙이다. 모차르트는 신흥 중산층의 구매력을 믿었다. 프리메이슨의 멤버였기에 더욱 확신했던 것 같다. 귀족의 지원 없이도 음악 활동으로 돈을 벌었고 심지어 자신의 극장까지 소유하게 된 헨델의 사례도 이미 여행을 통해 확인했던 차여서 그는 중산층을 상대로 해도 충분히 자신의 상품(?)이 소비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세이의 법칙은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에 의해 깨졌다. 구매력을 수반하지 않은 욕망은 단지 잠재적 수요일 뿐이다. 당시의 신흥 중산층이 근대정신에 눈을 떴고 자본을 축적하고 있기는 했지만 과거 왕이나 귀족들이 독점했던 음악은 아직 그들에게는 선뜻 구매하기 어려운 상품이었다. 공연장 마련도 어려웠다. 오페라하우스는 여전히 귀족의 손에 좌우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마음껏 자기가 하고 싶은 곡을 작곡했다. 고전파와 낭만파 음악에서 다양한 악기의 협주곡을 작곡한 최고의, 더 나아가 전대미문의 작곡가로 모차르트를 꼽는다.

 엄밀히 따지면, 다양한 악기의 협주곡을 작곡했다는 점에서 최고로 꼽히는 음악가는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다. 그러나 가장 많이 연주되는 것은 모차르트이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연극 <에쿠우스>의 작가인 극작가 피터 셰퍼(Sir Peter Levin Shaffe, 1926~ )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실제로 그가 영화 시나리오 각색도 맡았다) 모차르트의 죽음은 전적으로 피터 셰퍼의 해석일 뿐이다. 또한 프리메이슨이 암살했다는 그럴싸한 후문도 있고 심지어 애인이었던 막달레나의 남편인 호프데멜이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생전에 신장병, 천연두, 편도선염 등 질병을 자주 앓았으며 비타민D의 결핍으로 생기는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병약한 몸에 과로가 겹쳐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ο 프랑스혁명이 없었다면, 베토벤의 음악이 지금과 같았을까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았던 사회를 살펴봐야 한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세 사람은 음악적 성향이 달랐다. 개인적인 기질 문제도 있었겠지만, 각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가로질렀던 중요한 사건이 바로 프랑스혁명(1789)이다. 왕이 처형되고 교회가 무너진 현실을 목격한 지배계층이 한가롭게 예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패트론십(patronship)은 사라졌다(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멘델스존 등처럼 후원이나 급료를 받는 자리에 기대지 않고 출간된 작품의 판매만으로 잘살았던 첫 작곡가로 꼽히는 이가 바로 브람스다).

 베토벤은 이 와중에도 후원자를 두고 있던 음악가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전과 같은 패트론십은 누리지 못했다. 그의 음악이 철저하게 자기 위주의 음악으로 전개된 것은 그런 상황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친한 대공들의 배려와 작은 지원이 전부였다.

 

 베토벤은 프랑스혁명 정신에 열정적으로 호응한 음악가였다. 그의 교향곡 3번 <영웅>은 본디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에게 헌정하려 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개혁과 변화의 주도자로 여겼다. 비단 베토벤만 그렇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괴테 역시 나폴레옹을 숭배했고 1808년 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유럽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나폴레옹을 흠모한 것은 그가 공화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이었다. 곡의 길이, 구조, 직설적인 표현과 박력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를 담았다. 예를 들어 하이든의 교향곡에 비하면 길이가 반 이상 길었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미뉴에트 (Minuet)로 채워지던 제3악장은 당시로서는 아주 낯설게 활기찬 스케르초(Scherzo)였고 4악장은 하나의 테마와 그 변주곡들로 채웠다. 특히 제2악장은 장송행진곡 형식으로, 이전의 교향곡들과 완전히 달랐다. 1805년 이 곡이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이 몹시 당혹스러워 할 정도였다.

 베토벤의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나폴레옹의 공화정과 프랑스혁명 정신의 이상과 완전히 부합되었다. 낭만의 시대가 바로 이 교향곡 <영웅>에서 열린다는 평가는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이 곡은 프랑스혁명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대변동을 반영하는 예술계의 새로운 사조인 낭만주의 운동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1804년 5월 스스로 황제가 되자 화가 난 베토벤은 헌사가 적힌 제목면을 찢어버리고 교향곡을 “위대한 이에 대한 추억”에 재헌정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빈에 보관돼 있는 악보 표지에 ‘보나파르트’라는 글자를 북북 지워버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베토벤에게 원형적 영웅은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에게 불울 가져다주고 끝없는 형벌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였다. 베토벤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새로운 도덕과 질서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만큼 공화주의자의 이상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실제로 <영웅> 교향곡을 쓰기 몇 해 전에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이라는 발레음악을 작곡한 바 있었다.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귓병 때문에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베토벤은 삶에 대한 고뇌와 통찰이 깊었다. 그의 작품에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달리 단조 음악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이든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미 노년이었고 평생을 궁정의 악장으로 살았기 때문에 혁명은 그의 삶과 예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누구보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근대정신을 직접적으로 목격하고 도박에 가까울 만큼 과감한 선택을 하였지만 삶이 너무 짧았다. 그는 혁명이 일어난 지 두 해 뒤에 세상을 떠났다. 본격적인 변화를 목격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차르트가 근대정신을 예민하게 감지했고 음악가로서 자신의 생활에 이를 반영했다는 점이다. 베토벤은 혁명이 일어났을 때 뜨거운 피의 청년이었으며 혁명정신에 호응한 영혼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앞의 두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산 것은 혁명의 여파를 가장 직접적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시대정신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시대에 대한 통찰력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읽어내고 공감해야 한다.

 

 2 존 케이지, 침묵도 음악이다

 존 케이지(John Milton Cage Jr., 1912~1992)의 <4분 33초>는 1952년 8월 뉴욕의 우드스탁에서 초연되었다. 곡은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소나타 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1악장은 33초, 2악장은 2분 40초, 3악장은 1분 20초 동안 연주(?)된다. 악보에는 단지 ‘조용히(TACET)’라는 악상만 적혀 있다.

 청중이 내는 다양한 소리와 침묵도 어엿한 음악이라는 것이다. 모든 소리와 소리 없음 자체도 음악이라는 케이지의 해석은 멜로디, 리듬, 화성이라는 전통적 이해를 거부한다.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긴장, 당혹스러움, 수근거림, 야유, 웃음, 기침소리 등 모든 것이 음악이다.

 케이지의 의도는 청중은 음악의 단순한 수용자나 소비자가 아니라 음악의 생산자이며 유통자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기존의 형식에 함몰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20세기 초반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는 조성의 법칙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조와는 다른 구성 원리를 찾으려 노력한 결과 이른바 무조음악을 내놓았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음악은 기존의 정형적인 음계(Scale)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기본음계인 7음 이외에 1옥타브 내의 12 반음들이 부단히 나타나고 또한 심한 조바꿈에 의해 조성의 윤곽이 점차 애매해졌다. 화성학적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으뜸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중심음에 결부되는 필연성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경향은 조성과 음계의 파괴로 이어졌고, 그 결과 나타난 실험적 음악 세계가 바로 무조음악이었다.

 쇤베르크의 제자 베베른(Anton von Webern, 1883~1945)은 아예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조성감을 배제한 음악을 작곡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낯선 이런 음악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나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 등이 부분적으로 차용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3 랩의 바탕은 저항정신이다

 음악은 그 시대의 사회 변화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현대의 대중음악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전보다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변화가 이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ο 차별, 분노, 저항, 그리고 랩

 랩(rap)은 1970년대 말 뉴욕 외곽의 브롱크스의 흑인과 히스패닉 10대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노래 한 곡의 시간은 대략 3~5분가량 된다. 그런데 전주, 간주, 후주, 후렴 빼면 정작 노래에 얹은 가사는 지극히 짧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주 축약적인 가사가 된다.

 가수의 경우 마이클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2009)이 유색인종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메이저가 된 인물이다. 1982년에 발표한 앨범 <스릴러(Thriller)>는 아홉 곡의 싱글 중 일곱 개가 톱 10에 들었으며, 전 세계에서 1억400만 장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졌고,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KKK(Ku Klux Klan) :: 1866년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부군 퇴역 군인 6명이 장난삼아 조직한 것에서 시작됐는데, 당시 노예해방 반대와 지주의 권익회복 등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이들은 얼굴에 흰 복면을 쓰고 십자가를 불태우며, 위협과 협박, 흑인과 흑인해방에 동조하는 백인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이같은 폭력행위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1870년 무렵 이들을 단속하기 위한 연방법이 제정되어 KKK단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이민자가 늘어 일자리가 급감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재결성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흑인인권운동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재등장하여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KKK [Ku Klux Klan]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이런 상황에서 흑인들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 랩이다. 선율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이 랩이었기 때문이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외침은 기존의 가사로는 꿈도 꾸지 못하던 메시지였다. 초기에는 클럽에서 음악을 틀어주던 디제이들이 트랙을 바꿀 때 스크래칭을 곁들이며 날려대던 멘트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그 자체로 훌륭한 음악이 되고 자신들의 억눌린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ο 한국 랩의 시작, 서태지

 서태지(본명 정현철, 1972~ )가 천재적인 뮤지션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는 음악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음운론적인 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태지는 대학 국문과에서 언어학이나 음운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공고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그룹 시나위에 들어가 일찌감치 음악을 했던 뮤지션이다.

 서태지 전까지 우리 언어는 랩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ㄱ, ㄷ, ㅂ, ㅈ’으로 끝나는, 즉 무성음으로 끝나는 말들은 발음을 짧고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연음에 적절하지 않다. 영어의 경우는 유성음들이 많아서 이어서 발음하는 데에 매끄럽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의 대표작 <난 알아요>의 가사에는 무성음으로 끝나는 단어들이 별로 없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 울잖아요.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면 Yo!”

 그의 음악은 진화를 거듭했다. 2집의 대표작 <하여가>는 강렬한 기타 연주에 전통악기를 조합하는 파격을 선보이며 음악적으로 진보했다. 여전히 가사는 유성음 받침으로 끝나는 낱말들이 많았다. 다만 조금씩 무성음 받침이 사용되었다.

 “너에게 모든 걸 뺏겨버렸던 마음이 다시 내게 돌아오는 걸 느꼈지. 너는 언제까지나 나만의 나의 연인이라 믿어왔던 내 생각은 틀리고 말았어…….”

 3집은 사회 비판적인 가사로 화제가 되었다. 비로소 랩의 근본정신인 비판과 저항의 싹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음악적으로도 이전보다 헤비메탈(Heavy Metal)의 요소가 두드러졌다. <교실 이데아>가 그것이다. 그리고 무성음 받침으로 끝나는 가사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됐어(됐어), 이제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반복이 따르는 가사의 첫 글자가 모두 무성음 받침이서 자연스럽게 그 말에 강세가 들어가고 그게 반복되면서 저절로 리듬이 된다. 점점 더 랩의 본질에 가까워진 작업이다.

 그룹이 해체되기 직전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된 4집은 힙합 계통에 갱스터랩 스타일이 가미되며 변화했다. 그 가운데 <시대유감>의 경우는 사전심의제도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아 아예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 되기까지 했다.

 

 갱스터 랩 :: 랩 중에서도, 특히 "과격하고 공격적인 가사를 이용하는 랩"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는 닥터 드레, 스눕 독, NWA, 투팍등이 있다.
[위키백과] 갱스터랩[Gangsta rap]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 :: 줄여서 얼터너티브라고도 한다. 1980년대에 생겨나 1990년대 말에 기존 록 음악의 평범한 구성 방식에서 탈피한 록 밴드들이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너바나,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등의 록 밴드의 음악만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최근에는 기존의 메탈적 성향을 벗어난 모든 록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쓰이고 있다. 얼터너티브 록은 1980년대 그런지, 브릿팝, 고딕 록, 인디 팝 같은 독립 음악의 다양한 하위장르로 구성되어 있다.
[위키백과]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

 

 하드 록(Hard Rock) :: 로큰롤보다 그 주제가 무겁고 음악적 다이내믹은 강하고 직설적인 음악으로서 로큰롤에서 진보된 형태이다. 하드 록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1956년에 발표한 로커빌리 스타일의 'Hound Dog'이었다. 그 후 점차 강한 록 음악이 성장하게 되어 'Summertime Blues'로 유명했던 에디 코크런, 리틀 리처드 등도 하드 록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황금기를 맞은 하드 록은 이름 그대로 일반적 록 뮤직보다 한층 변이된 사운드의 음악을 지칭한다. 전기 기타의 매우 거칠게 긁어대는듯한 광폭한 사운드와 드럼셋트를 때려 부술 듯한 드럼 연주, 미쳐 울부짖는 보컬을 거대한 음량으로 증폭시켜 한꺼번에 많은 이들에게 들려 주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드 록은 그 파괴적이고 폭발적인 사운드가 스트레스 가득하여 불만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하여 크림, 제퍼슨 에어프레인, 마운틴,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의 스타 그룹을 탄생시켰다.
하드 록은 로큰롤적 리듬으로 블루스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음악이다. 하드 록은 메이저 스케일의 7음계 중 5개 음정만(4도,7도 제외)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이 음계는 전형적인 블루스 음계이다. 옛 블루스의 요소들을 받아들인 로큰롤과는 달리 하드 록은 "영국적" 블루스의 성질을 차용한다. 이 형식의 블루스는 전자 기타, 드럼, 전자 키보드, 베이스 기타와 같은 현대적인 악기를 더 많이 사용한다. 하드 록은 12나 16마디 블루스에 자주 쓰이는 I, IV, V 화음에 묶여있지 않고 전통적인 블루스 양식에서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단조 음계의 음색을 갖는 장화음 등의 다른 화음들은 받아들였다.
[위키백과] 하드 록[Hard Rock] 

 

 랩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면서 오히려 무성음 종결어미가 많아서 딱딱하다는 한국어의 속성은 랩에서의 강점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다. 발상의 전환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무성음 받침으로 끝나는 말은 연음에 적절하지 않으며, 격음화되기 쉽다. 처음에는 그게 약점이라고 여겼으나 일단 랩이 친근해지자, 랩의 특징인 리드미컬한 비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고 무성음이 자연스럽게 강한 비트를 만든다는 사실을 저절로 체득할 수 있었다.

 일본 대중음악은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고 있지만, 의외로 랩은 미국이나 한국처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최근에 힙합이 성장 추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이른바 갱스터랩의 범주에 드는 랩은 크게 유행하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일본어의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본인들은 좁은 구강구조의 특성상 ‘ㅡ’ 모음이 어렵다고 한다. 경음이나 격음도 어렵고 무성음 받침도 여의치 않다. 그런 까닭에 랩에서의 핵심인 리듬, 즉 비트가 약해진다.

 이와 달리, 서태지는 처음에는 무성음을 피해서 매끄럽게 랩을 구사하다가 점차 격렬한 비트감을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기성세대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은 서정성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사의 내용도 감성적이고 시적이다. 그에 반해 젊은이들의 노래는 역동적이고 직설적이다. 우회하거나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내재된 분노와 외침을 그대로 드러낸다.

 저항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이해며 도전이다. 이는 젊은 대중의 시대정신이다.

 

 4 왜 FM 라디오에서 팝송이 사라졌을까?

 미8군 무대 출신의 뛰어난 가수들과 작곡가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팝 음악을 맛볼 수 있었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다. 마침내 1960년대에 방송에서도 팝송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1962년 MBC 라디오 <한밤의 음악편지>는 방송 최초로 팝 리퀘스트를 도입했고, 1963년에는 동아방송(DBS)이 개국하면서 <탑튠쇼>를 개설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팝 음악의 전성기는 1965년 FM방송이 개국되면서부터다.

 

 1970년대 들어 대학가에서 싱어송라이터들이 대거 출현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치적 암흑기의 청년들은 팝송과 포크송을 통해 울분을 해소하고 연대감을 형성했다. 그러면서 음악은 크게 ‘어른들의 음악’과 ‘젊은이들의 음악’으로 세대 간 구별이 생겼다. 자기 세대의 음악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자신들만의 감성의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고 그 세대가 세상과 호흡하고 호응하는 방식을 독립적으로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5 피아노는 ‘가구’가 아니다!

 《바이엘》은 19세기 때 만들어진 교본이다.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는 베토벤의 제자였고 리스트(Franz von Liszt, 1811~1886)의 스승이었던 인물이다. 뛰어난 피아노 교습자였고 작곡가이기도 했던 그의 교본은 그 자체로 뛰어난 작품이다.

 《하농》은 이른바 ‘4번 손가락’을 집중적으로 연습시키는 교본이다. 다른 손가락과 달리 4번 손가락은 뼈의 연결이 독립적이어서 자유롭게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 연마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만큼 뼈와 근육의 연결 관계상 부자연스럽고 어렵다. 그래서 그 손가락만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기 위한 교본이 《하농》이다.

 외국에서는 《바이엘》이니 《체르니》니 하는 교재가 희귀도서란다. 그럴 법도 한 게 이전 세기에 사용하던 교본이고 현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19세기만 해도 음악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교양과 즐거움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의 직업으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교본도 즐거움보다는 음악적 훈련 자체를 위한 것들이었다. 당연히 대위법과 화성학을 익히기 위한 구조일 수밖에 없다.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 네덜란드를 모범으로 삼았고 거의 대부분 독일의 제도와 내용을 수용했기 때문에 《바이엘》과 《체르니》도 그때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통해 교육받았던 한국의 초기 음악가들도 《바이엘》과 《체르니》를 별 저항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6 국악에 대한 단상 

 공자는 《논어》 <태백편>에서 “시는 사람을 계발하고, 예는 사람을 성립시키며, 음악은 사람을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했다. 시가 사람을 계발한다고 할 때 시는 ‘생각’이다. 시는 성정을 계도하고 심지를 계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인성의 길을 갈 수 있게 하고, 예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위의 규범을 얻고 인성을 구체적으로 함양하고 인격을 수양하여 집단의 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한다. 그리고 음악은 인성의 완성에 도달하게 해준다. 리쩌허우(李澤厚)는 그 이유를 《논어금독》에서 음악을 통해 사람다운 정서와 인생의 경지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인성의 완성이 가능하며 그래서 음악이 사람을 완성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음악은 늘 모든 종교와 의식, 그리고 제례에 사용되었다. 서양의 음악이 기독교 교회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듯 불교의 범패, 그리고 일반 대중의 무속음악 등도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학파는 음악을 종교적, 수학적 차원에서 이해했다. 실제로 서양의 화성은 일찍이 피타고라스가 만들었다. 고대 인도의 브라만은 종교적, 철학적 음악 문화를 발전시켰고, 힌두스타니 음악은 11세기 이후 이슬람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브라만교의 《베다》는 고대 창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서 음악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료의 의미를 갖는다.

 노래를 뜻하는 낱말인 악(樂) 은 무녀가 방울을 흔들면서 춤추는 형태를 형상화한 것이다. 훗날 공자가 주창한 유교의 예악사상 중에서 음악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발전했다.

 

 정간보(井間譜) ::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종전의 율자보(律字譜)·공척보(工尺譜) 등은 음의 시가(時價)를 나타내지 못하는 결점이 있어 이러한 결점을 없애기 위하여 세종 때 창안한 악보이다. 세종 때의 정간보는 1행 32간(間)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놓고, 한 칸을 1박으로 쳐서 음의 시가를 표시한 것이다. 그 정간(井間) 속에 음의 고저를 나타내는 율자보 · 오음약보(五音略譜) · 합자보(合字譜) 육보(肉譜) 등을 써 넣었다. 
황종(黃鐘:C)·협종(夾鐘:D#)·고선(姑洗:E)·중려(仲呂:F)·유빈(萊賓:F#)·임종(林鐘:G)·이칙(夷則:G#)·남려(南呂:A)·무역(無射:A#)·응종(應鐘:B)과 같은 율명(律名)을 기입하고 있고, 각 칸은 시가를 나타내고 12율명은 음의 높이를 나타낸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악보로서 서양 음악의 5선보(五線譜)와 함께 유량악보(有量樂譜)라고 한다. 세종이 창안한 이 유량악보는 지금도 궁중음악에서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간보 [井間譜] (두산백과)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는 조선 세종 때 창안된 뛰어난 발명품으로, 음의 높이와 길이를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이 악보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놓고 1칸(一井間)을 1박으로 쳐서 음의 시가를 표시하고, 그 정간 속에 음의 고저를 나타내는 여러 보(譜)를 넣는다.

 

 일반적으로 국악은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 곧 향악(鄕樂)을 모두 포함하며, 전통음악과 최근의 한국적 창작음악까지를 포함하는 우리나라 음악을 뜻하는데 국악이라는 용어가 대한제국이 몰락하고 일본에 완전히 강제 합병되기 직전, 당시 통감부에 파견된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가 일본의 전통음악을 뜻하는 고쿠가쿠(國樂), 곧 국악의 명칭을 소개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 용어를 과연 계속 써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가 엇갈린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국악’과 구별하는 의도로 국악이라는 말 대신에 아악(雅樂) 또는 조선음악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국악이란 이름은 일본의 침략 이전 조선 말기 고종 때 장악원(掌樂院)에서 처음 사용된 까닭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있다.

 

 흔히 음악의 3요소를 멜로디, 리듬, 화성이라고 하는데, 우리 전통음악에서는 화성이 빠진다. 화성악기라야 생황 정도이다.

 

 

 

4부 인문학은 관계 맺기다

9. 정치

 공자는 정치를 덕으로 하는 것이며, 진심의 문제이고,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정치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며, 관료들이 솔선수범하는 것이고, 작은 허물을 용서해주며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논어》의 <자로>편을 보면 초나라 대부 섭공이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近者悅遠者來)”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데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한 셈이다.

 

 20세기 후반에 대두된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 즉 스스로 조절되는 하나의 생명체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성 사회학자 거다 러너는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 그것은 차이다. 그 차이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게 열등감을 부여했다. 그게 이데올로기가 되면 차별이 된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인문학은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의 시작이어야 한다.

 

 1 정치는 삶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회를 작동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 바로 정치다.

 정치가 현실이라는 점에서, 현실이 이상적인 조건과 환경 속에 있지 않는 한 결코 최선을 실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이상적이라고 치부할 건 아니다. 최선과 이상이 있어야 차선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방향성을 잡아준다. 그것을 현실 불가능한 것이라고 애당초 포기하면 정치는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마련이다.

 

 2 민주주의는 인간회복이다

 민주주의가 왜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정설은 없다.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한 몇 가지 상황은 있다. 우선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열등한 환경 덕택(?)이다. 물론 솔론(Solon, 기원전640?~560?)같은 위대한 개혁가가 출현한 것도 역할을 했겠지만, 인구도 물산도 부족한 아테네가 자신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같은 조건에 처한 다른 나라들이 똑같이 민주주의를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아테네의 정치제도는 분명히 독특하고 현명한 선택의 결과였다.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스파르타다. 스파르타가 끝내 군사 국가의 형태를 포기하지 못한 것은 그리스에서 보기 드물게 드넓은 평야 지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적 조건과 경제적 요인 때문에 스파르타는 군사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높았다.

 어찌 보면 지리적 조건이니 경제적 요인이니 하는 것들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의 핑계일 수 있다.

 

 ο 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가

 아테네도 기원전 7세기까지 귀족들이 돌아가며 통치했다. 그러나 폴리스의 방비를 농민과 장인 계급에서 자원하는 군대에 의존했기에 귀족들은 언제든 그들에 의해 권력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급속한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평등주의 의식이 싹텄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농민은 다른 지역에 비해 급속히 증가했는데, 아테네의 젊은 귀족 킬론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이들이 막아낸 것도 결정적으로 민주주의의 정착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솔론이 있었다. 그는 농민의 채무를 탕감해 빚으로 저당잡힌 농지를 풀어주었고 빈민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또한 부채로 인해 아테네인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금지해 노예가 되었던 시민들을 해방시켰다. 또한 솔론의 개혁(기원전594)으로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부유층은 경우에 따라 권한을 제한당했다. 그렇게, 고등평의회, 400인 평의회(훗날500인 평의회로 발전), 민회, 배심원 법정 등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마련됐다.

 이 토대는 향후 700년간 작동되었다. 솔론 이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시 세 번의 시도 끝에 참주 자리를 차지해 개혁을 보장하고 빈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그의 자리를 이은 아들 히피아스는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 of Athens, 기원전570?~508?)에 의해 쫓겨났다.

 클레이스테네스 치하에서 아테네는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다. 거의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패퇴한 상태였는데, 아테네는 그런 페르시아를 격퇴하였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10년 뒤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Xerxes, 기원전519?~465)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다. 그러나 아테네는 살라미스 해전(기원전480)과 마라톤 전투(기원전490)에서 승리했다. 육군과 달리 해군은 상당수가 최하급 시민인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이 노를 젓지 않으면 배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해전의 승리는 이들 노동자 계급의 자신감을 높였고 권리를 넓혔다. 이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격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들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다수 노동자 계급은 개혁안을 통과시켰고 마침내 평등한 체제를 구축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발전시킨 인물이 페리클레스(Pericles, 기원전495?~429)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전쟁 전몰자 추도사’에서 자유를 찬양하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우리의 헌법은 이웃 나라의 법률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의 것을 베끼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귀감이 되는 민족입니다. 아테네의 정치는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것입니다. …… 우리의 법률은 개개인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정의를 실현해줍니다. 국가에 봉사할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신분 조건에 구애받는 일이 없습니다.

 

 ο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언명한 민주주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도 이런 배경에서 마련되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질서와 자유라는 폴리스의 지향과 개인의 욕구 간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해소하고 해결하는 것을 정치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정립해서 경영하는 정의로운 정치체제를 구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 보니 플라톤은 모든 이들이 엄격하게 규칙을 준수하는 국가를 강조했다. 이는 귀족주의에 입각한 정치 모색으로 이어졌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시민에게 발언권을 주고 참주들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지식과 덕성을 갖춘 자들로 시민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플라톤의 노골적 귀족주의보다는 진일보했지만 여전히 귀족 중심의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기원전485?~410)는 사회구성원의 갈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이를 제거할 수 없고 제거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정치는 갈등을 수용하고 공개적으로 토론함으로써 해결하는 과정이며 장치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격언도 철학적 명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한 정치는 모든 시민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동시에 집단적 자기절제를 통해 질서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아를 실현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기원전460?~370?)는 정치란 아무리 골치 아프고 헷갈려도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투키디데스(Thucydides, 기원전 5세기 후반)는 정치가 인간의 갈등을 인식하고 해소해주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전쟁이나 독재로 흐르게 된다고 경고했다.

 

 우리가 철학자라고만 알고 있던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정치에 대해 관심이 높았고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그들이 마련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개인의 인격을 평등하고 자유롭게, 즉 정의롭게 보장했다는 점이다.

 

 ο 로마의 민주주의

 로마도 기원전 6세기부터 공화정을 시행했다. 후기 공화정에서는 시민 등급 간 이동도 가능했고, 심지어 원로원까지 진출할 수도 있었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115~53),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기원전106~48)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공화정의 대표적인 관직이 호민관이다. 호민관이 되려면 늘 심한 경쟁을 겪어야 했고, 그래서 눈과 귀를 열고 시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했다. 이른바 인기에 영합한 대중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가 종신 독재관이 되고 황제의 자리까지 노리면서 공화정은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그는 살해되었지만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us, 기원전63~기원후14)가 아우구스투스 황제(Caesar Augustus)가 되면서 로마의 공화정도 막을 내렸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정치체제의 모델로서 영감을 주었다.프랑스혁명의 결과로 국민의회가 발표했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문’은 다음의 구문으로 압축된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주권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유래한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명백히 국민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런 선언을 이끌어내는 데에 아테네 민주주의의 몰락 이후 무려 2200년이 걸려야 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바로 자유로운 개인의 완전한 실현을 향한 지속적인 투쟁과 타협, 갈등과 화해의 연속이었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삶의 표현이다. 달성되고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권력 집단이 민주주의가 유리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3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

 독일 출생의 프랑스 사회운동가인 스테판 에셀(Stephane Frederic Hessel, 1917~2013)은 《분노하라》에서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고 경고한다. 

 정치계, 경제계, 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구성원 전체가 주어진 사명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분노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정치와 사회를 발전시킨 힘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체념의 내재화다. 에셀은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행동은 바로 투표다. 그래서 그는 투표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 찬동자라고 비판한다.

 

 ο 저항의 역사

 16세기 초반의 인물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는 ‘지도자 없는 군중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나 다름없다’거나 ‘힘이 없는 선은 악보다도 못하다’면서 권력의 효율성을 강조했다.

 17세기 후반의 사상가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리바이어던》에서 ‘권력이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이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전제군주국가를 이상적인 국가형태로 보았다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권력이 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매우 대담한 주장은 대단히 획기적이었다.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저항권을 주장했다. 계약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무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서 계약의 내용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마땅히 파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양에서 로크를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범으로 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로크의 주장은 17세기 말의 산물이었지만, 동양에서 이미 기원전 4세기에 맹자(孟子, 기원전372?~289?)가 역성혁명을 주창했던 것을 고려하면 동양의 정치가 낙후되었다고 가볍게 폄하할 일은 아니다. 맹자는 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해치는 자는 이미 군주가 아니며 일개 야인에 불과할 뿐이고, 그런 일개 야인인 걸왕과 주왕을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군주를 반역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폭군방벌(暴君放伐), 즉 ‘폭군을 쫓아내고 무찔러야 한다’는 사상의 핵심이다.

 묵자 또한 인간평등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상이 일반 대중의 생각으로 전파되거나 일반화되는 과정이나 절차로 이어지지 못하고 지배계층 혹은 지식인 계층의 논리에만 머물렀다는 점이다.

 

 ο 그래도 분노하라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이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라고 갈파했던 말은 언제나 유효하다.

 솔론은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설파했다.

 

 4 정의란 무엇인가

 ο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가 되지 않기 위해

 예전 잠수함에서는 남은 산소의 양을 측정할 수 없어서 토끼를 태웠다고 한다. 산소 결핍을 예민하게 느끼는 토끼가 반응하면 수면 위로 올라가야 했다.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1992)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을 일컬어 ‘잠수함 속의 토끼’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나치 시대를 비판한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1892~1984는 <그들이 왔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유태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가톨릭 신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 신자였으니까.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ο 존 롤스의 정의론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는 《정의론》에서 공리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그릇된 공리주의는 다수를 위해 소수의 피해를 불가피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른바 ‘공리적 처벌’이다.

 그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방도는 그 사회의 최소수혜자(The Least Advantaged)에게 우선적으로 분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존 롤스가 주창한 정의는 정당한 절차가 결과의 정당성을 담보한다고 보는 철학적 성찰이며 동시에 방법론이기도 하다. 올바르고 정당한 절차는 특정한 결과를 얻어내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의 바탕은 서양에서 17세기에 대두된 사회계약론의 정치원칙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모여서 계약한 대로 정치를 운영한다는 사회계약론은 계약의 당사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는다는 대전제 아래에서 정당하며 구속력을 갖는다. 절차주의 정치철학의 바탕은 로크 이후 굳건하게 자리 잡은 자유주의 정치의 전통에 있다.

 

 ο 법과 정의, 그리고 에밀 졸라

 함무라비 법을 예로 들어보자.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표되는 이 법에 대해 잔인한 복수법이라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왜곡된 이해다. 여기서 말하는 복수법이란 복수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복수의 한계’를 설정하였다는 의미다.

 권력자의 아들과 노비의 아들이 칼싸움 놀이를 하다가 실수로 권력자의 아이가 눈에 찔려 실명했다고 치자. 권력자는 길길이 뛰며 노비의 아들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죽여서 분을 풀지도 모른다. 그런데 법은 거기에 제동을 건다. 실명한 경우 복수할 수 있는 한계는 상대를 실명하게 하는 것까지다. 실제로 눈을 뽑거나 하는 복수를 한다고 다시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현실적으로는 일정한 배상을 하게 하는 것이 함무라비 법의 집행 방식이다. 법은 그런 힘센 자들의 폭력의 남용을 막는 것이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것은 불의를 지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 모두 침묵했지만, 에밀 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는 의연히 일어나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로 불의를 고발했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와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저는 진실을 말할 것입니다. 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은 사법부가 완전무결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제가 말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이것은 제 의무이기도 합니다. 공범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세상을 잃어버린 먼 곳에서 결코 저지르지 않은 범죄의 대가로 고통을 겪고 있는 저 불행한 자의 망령이 밤마다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결국 3천 프랑의 벌금과 1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영국으로 잠시 망명해야만 했다.

 

 5 좌파와 우파에 대한 이해

 우리가 흔히 쓰는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소집된 국민의회에서 의장석에서 볼 때 오른쪽은 왕당파가 앉고 왼쪽은 공화파가 앉은 데서 유래했다. 공화파가 장악한 1792년 국민공회에서도 왼쪽에 급진파인 자코뱅파가 오른쪽에 보수적인 지롱드파가 그리고 가운데에 중간파인 마레당이 앉았다.

 

 용공 (容共) :: [명사] 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일.

 

 6 국제정치는 힘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사회론은 정치보다는 경제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담론에는 이미 정치와 경제가 하나의 묶음으로 담겨 있다.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체제의 모색이기 때문이다.

 세계사회는 각 국가 혹은 지역사회의 국지적 기반에 토대한 독립된 시민사회들이 지구 전체로 확장되어 상호 연결된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 경우 개인의 생활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국가 간 체제에 제한받지 않는다. 그래서 대두한 개념이 바로 세계시민주권이다. 좁게는 유럽연합의 경우를 참고할 수도 있겠지만 세계사회론은 그런 결합조차 국지적 연대 혹은 집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간주한다.

 근대화론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한 나라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즉 일국적 접근이다.

 

 ο 변화의 방아쇠, 68혁명

 68혁명은 기성 체제에 대한 반감과 저항에서 비롯되었고, 자연스럽게 반체제운동으로 번졌으며 미국과 소련의 양극 체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68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이다. 그해 3월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여덟 명의 대학생이 체포된 데에서 발단했다.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진행됐다. 총 400만 명이 파업과 공장 점거,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

 

 ο 세계사회론의 대두

 세계체제를 분석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월러스틴의 주장이 국가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국가권력은 개별국가가 세계경제와 사회에서 어느 진영 혹은 구역에 속하는가에 의해 명확하게 분류되고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한 가지,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세계화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월러스틴이 지적하는 문제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기존의 보편주의라는 것이 사실은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편파주의였다는 점이다.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객관성의 정치적 함축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지식의 파편화를 거부한다.

 세계사회론은 분명 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이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세계사회론을 내놓은 것은 1980년대 스탠퍼드대학을 중심으로 한 신제도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사상적 연대성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의 이론에 가깝다. 즉 목적의 추구가 아니라 각 지역사회간의 이해를 제공하여 발전시키면서도 그것이 보편적 가치의 실현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가장 잘 반영하는 집단이 바로 다양한 국제적 NGO들이다. 이들의 연대의 결실이 바로 INGO(International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국제민간기구)다.

 

 7 새로운 정치적 대안, 거버넌스 

 국정관리, 국가경영, 공공경영 등 다양하게 번역되는 거버넌스(Governance, 協治)는 아직은 생소하다. 통치나 지배라는 의미보다는 경영의 뉘앙스가 강하다. 이는 통치기구 등의 조직체를 뜻하는 정부(Government)와 구별된다. 거버넌스는 전통적인 국정 운영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한계를 인식하면서 정부를 대신할 역할과 기능을 찾다가 도달한 ‘잠정적’ 해법이다.

 거버넌스는 정부보다 포괄적이고 유연한 관리 시스템으로, 본질적 측면에서 보면 문명화된 방식을 통한 질서 창조와 갈등 해소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거버넌스는 정부와 민간부문과 시민사회를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고, 지속가능한 인간개발을 위해 참여와 협력을 요구한다. 거버넌스를 ‘국가경영’ 혹은 ‘공공경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이처럼 거버넌스는 정부와 준정부, 그리고 반관반민, 비영리, 자원봉사 등의 다양한 조직이 연대하여 공공활동을 수행한다. 즉 공공서비스의 공급체계를 구성하는 다원적 조직체계 내지 조직 네트워크가 상호 작용하는 패턴으로서, 인간의 집단적 활동을 의미한다.

 거버넌스는 상호독립적인 구성원들로 이뤄진 네트워크다. 정부는 전통적 정부처럼 우월하지 않으며 동등한 입장에서 전체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네트워크 구조의 영향에 따라 정부와 사회의 역할분담의 균형점도 변한다. 전통적인 하향적이고 권위적인 정부의 집권적 조정 방식을 탈피한 사회의 자기조향능력이 강조된다. 또한 공동규제, 공동조향, 공동생산, 공동지도 등 상호 협력과 견제가 수반된다.

 일반적으로 거너번스는 네 가지 목표를 지향한다. 첫째, 정부나 정부 이외의 제도 및 조직들의 조화를 통해 정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둘째, 문제해결 및 위기관리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셋째, 국가체제와 관련된 문제와 집단 의사결정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넷째, 전통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만 제한되었던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를 확대시킨다. 이런 목표를 지닌 거버넌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

 거버넌스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사회의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경제

 1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

 고딕건축은 12세기말에 발생한, 그러니까 로마네스크 건축과 르네상스 건축 사이에 있는 건축양식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고딕건축의 시작은 파리의 생드니수도원 원장이던 쉬제르(Suger, 1081~1151)가 생드니수도원의 대성당(바실리카)을 재건하면서 처음 선을 보였다. 쉬제르는 새로운 양식(Post Modus)이라고 명명했다. 요즘 식으로 해석하자면 포스트모던쯤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거대한 건축물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고딕(Gothic)이다. 우리식으로 풀어쓰자면 ‘오랑캐풍’쯤 될 것이다.

 고딕 양식은 고트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로마 이후 당시 유럽인들이 가장 야만적 종족으로 폄훼한 것이 바로 고트족과 반달족이다.

 사람들은 고딕 성당에 그럴싸한 의미를 부여했다. 즉 하늘을 찌를 듯한 뾰족한 첨탑은 상승감을 느끼게 하며 그것은 곧 하늘을 향한 신자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포장했다.

 고딕양식의 교회 건물은 과시욕의 산물이었다. 물론 첨두아치, 리브볼트(Rib Vault),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등 새로운 건축 기술의 발달과 유리 공업의 발달이라는 환경적 요인도 작용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동인은 돈이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의 건축에는 상당한 재원이 소요되었다.

 실제로 고딕 성당은 대부분 큰 도시에서만 볼 수 있다. 그것은 도시의 부가 아니면 불가능한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영국과 중남부 독일 등의 대도시에서 고딕 성당이 경쟁적으로 지어진 것은 도시의 부와 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1517년의 교회의 분열과 종교개혁도 따지고 보면 돈 문제 때문에 생겨난 사단이었다.

 

 ο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인가

 1776년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해야 할 연대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해이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했던 해이기 때문이다.

 책의 정확한 제목은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즉 ‘국가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고찰’이다. 그것으로 인해 경제학이 비로소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부론》은 단편적인 정책 주장만을 해오던 이전의 저술들과는 달리 최초의 체계적이고 획기적인 저작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정작 이 책보다는 《도덕감정론》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도덕철학자이기도 했다. 사실 ‘보이지 않는 손’도 이 책에서 먼저 언급했던 개념이었다.

 경제학이란 학문이 생겨난 것은 전적으로 산업혁명 덕분이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서 개신교의 근검금욕 정신이 자본을 축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최근에는 개신교 윤리 때문에 자본이 생긴 것이 아니라 스위스의 시계공업이 이미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고, 개신교는 그것을 뒷받침했을 뿐이라는 주장들이 나오기도 한다. 베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본의 축적은 대규모 대량생산과 노동착취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자본이 생겼고 시장이 변모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사회도 변했다. 심지어 윤리도 바뀌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공리주의가 생겨났다.

 자본주의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 혹은 생산수단을 사유화한 상태에서 상품생산이 행해지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애덤 스미스 등의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마르크스 등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다. 그들은 근대경제체제의 구조와 그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그 폐해에 대해 비판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18세기 후반 이후 산업혁명의 발전에 따라 서구사회에서 일반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

 

 ο 자본주의와 노동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은 바로 기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분배를 해주기 위함이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삶, 더 나아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조건을 마련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자본, 토지, 노동의 3대 요소에서 앞의 두 가지는 위험부담을 안아야 하는 것이지만, 노동은 미리 임금을 계약했으니 위험부담이 없고, 따라서 그 결과에 상관없이 계약한 만큼의 대가만 지불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상품 생산이 이루어지며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점을 꼽았다.

 노동력의 상품화는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하고 자본가는 이들을 고용하여 상품을 생산한다. 상품화되면서 노동 역시 자유처분의 원칙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긴장이 늘 존재한다.

 

 ο 자유방임은 방종이 아니다

 자유방임(Laissez-Faire)은 그냥 내버려두라는 게 아니라 인간의 합리성을 토대로 최적화 가능성을 시장 스스로 실현할 수 있으므로 불필요한 간섭을 배제하라는 요구였다. 자유방임주의의 진정성은 바로 개별적 인간, 즉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신뢰와, 권력의 비인격적이고 불합리한 억압과 간섭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전의 관행이던 왕권과 귀족의 억압과 독점의 폐단을 배격하라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상황을 고려하는 이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의 자율성을 주장한 것은 문맥과 상황을 올바르게 고려해서 해석해야 한다. 즉 이전에는 모든 것을 정부가 관여하고 관리해왔던 것을 비판했던 것이다.

 정부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합리성을 강조하여 당연히 자신들이 관여하고 관리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여겼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편견에 대항하여 인간의 보편적 합리성을 강조했고 불필요한 간섭과 규제 따위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정부도 그렇거니와 시장은 강자의 논리가 아니라 합리적 판단 능력을 가진 보편적 인간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게 애덤 스미스 사상의 철학적 바탕이다.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당대의 사회에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이른바 ‘작은 정부’의 수립이 요구되었다. 독점이나 과점처럼 어느 세력의 일방적 주도로 이끌어질 때 합리성의 보편성은 깨지고 작은 정부론 또한 힘을 상실한다.

 경제학자들마저 그것을 몰랐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고 모른 척했다면 직무유기를 한 셈이었다.

 

 경제학은 부의 축적에 관한 연구인 동시에 인간에 관한 연구의 일부다.

 19세기 후반 신고전학파를 창시한 영국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 1842~1924)이 그의 대표적 저서 《경제학원리》 첫 페이지에서 했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케인즈와 프리드먼

 고전주의경제학이 시장의 기능을 중시하고 자연가격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면, 거기에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힘인 효용을 중심으로 한 가치체계를 경제학에 도입한 것이 바로 신고전주의경제학이다. 신고전주의경제학은 시장경제의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탐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30년대에 학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신고전주의경제학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등 이른바 경제 선진국들의 주요한 경제적 입장을 대변했다. 아마도 미국이 신고전주의경제학의 메카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여러 나라에서 미국으로 유학한 인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 전도사가 된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시장경제학자들의 자유방임주의에 뿌리를 둔 고전경제학은 불황과 실업도 자연스러운 경제 순환의 일부이며 자동수정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부가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으며 1930년대 전후의 경제위기에 대해 아무런 처방도, 대안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 바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의 경제학이었다.

 케인즈는 세계대공황 시기에 공황 발생의 원인을 경제 전체적 시각에서 관찰했다. 이른바 거시경제학이다. 그는 경제 전체의 소득수준은 개인만 관찰해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집단 속에서 사람들의 성향을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경제 전체의 유효수요를 결정하는 소비와 투자는 사회심리적 성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한 번 위축된 경기는 시장경제를 통해 저절로 조정되거나 회복되지 않는다. 즉 전통적인 미시경제학적 믿음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효수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시장의 합리적 조정 능력에 의존할 게 아니라 정부지출을 늘려서 대공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처방을 제시하였다.

 케인즈를 따르던 경제학은 1, 2차 석유파동을 겪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동력을 잃었다. 석유파동은 세계 각국에서 실업과 인플레이션이 공존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불황 속의 인플레이션, 즉 스태그플레이션이 다발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케인즈경제학에 대한 믿음은 희석되었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게 바로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신고전경제학의 부활이었다.

 

 그 대표적 자유주의자가 시카고학파의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이었다. 프리드먼은 케인즈의 거시경제학은 시장의 합리성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거나 조작함으로써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부의 지출을 늘리더라도 소비와 투자의 증가는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그런 지출의 증가는 이자율을 상승시킬 뿐이며 그것은 민간소비투자를 오히려 위축시킴으로써 경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었다. 시카고학파는 개인이 미래를 예상하는 데에 모든 정보를 동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합리적 선택을 하게 된다는 믿음을 견지했다. 그들은 어떤 거시경제정책도 일시적 효과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정부는 시장이 잘 작동되도록 하면 된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은 케인즈의 국가의 재정을 통한 총수요의 조절을 비판하면서 그것은 단지 통화량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에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준칙을 정해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모든 자유를 침해하는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폐해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된 것은 앞서 역사를 다룬 장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미소 냉전이 붕괴된 1989년부터였다. 그리고 그에 앞서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당면한 경제적 난관을 헤쳐 나가는 방법으로 선택한 처방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면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ο 신자유주의의 맹점

 대니얼 카너먼이 주창한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심리에 작동되는 어처구니없는 비합리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헌혈을 활성화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자발적으로 헌혈하는 사람들에게 50크로네(약 8,500원)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헌혈지원자가 현저히 감소했다. 좋은 뜻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데에 돈을 주겠다는 것은 합리성을 넘어 자신의 자발적 가치에 대해 모욕감을 주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처럼 인간의 의사결정이 복잡한 개인적 특성과 사회적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요구한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이 완전히 합리적이고, 자제적이며, 이기적이라는 점을 부정한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자제적이며 이기적이라는 점만 강조한다.

 

 ο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통제하기 어렵다

 미제스(Ludwig von Mises, 1881~1973) ::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경제학자. 그는 오스트리아학파에 속하나 화폐이론가로서의 그는 철저한 자유주의자로서도 유명하다.
그의 최대의 공헌은 뵘바베르크(Böhm-Bawerk, F. v.) 등의 근대경제학의 선구자들이 충분히 개척하지 못하였던 화폐이론체계를 완성한 데에 있다. 그의 화폐이론은 한계효용학설의 입장을 취하며 화폐의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신용이론은 은행의 신용구조가 생산구조와 경기상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음미함으로써 강제저축, 자연이자율과 화폐이자율과의 괴리, 신용의 불안정성에 의한 생산재가격과 소비재가격과의 상대적 변화 등의 현상을 추구하여 화폐적 경기이론의 전개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계획경제론의 분야에 있어서도 그는 '사회주의의 이론적 불가능성'(theoretical impossibility of socialism)을 입증한 점에서 유명하다. 개인의 자유는 인위적 경제계획과 양립될 수 없으며 다만 자동적 제력(諸力)에 의하여서만 보증된다고 보고, 이러한 제력의 운영에 필요한 제제도(諸制度)가 배제된 여하한 계획도 유해하다고 보았다. 금본위제도를 자동적 제력의 운영에 필요한 하나의 제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상은 후기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상당히 많이 수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제스 [Ludwig Edler von Mises] (경제학사전, 2011. 3. 9., 경연사)

 

 하이예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 :: 189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식물학자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의 아들로 출생했다. 빈 대학교에서 법학ㆍ심리학ㆍ경제학 등을 수학했고, 192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경기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1931년 런던으로 이주한 뒤 런던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8년에는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1950년부터 시카고 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말년에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었다.
하이에크는 신자유주의의 입장에 서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비판하였다. 그는 저서 <노예의 길>에서 사회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였으며,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는 경제 계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 개입이 결국 국가적 재앙을 야기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화폐이론과 경기순환론 등에 있어 케인스와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70년대 유럽의 경기침체 속에서 재조명되었고,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에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주요 저서로는 <법, 입법, 자유>, <노예의 길>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리드리히 하이예크 [Friedrich Hayek]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시장경제에서는 경쟁을 통해 이기적 행동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지만 정부부문은 그런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매우 독선적이고 위험한 측면이 있다.

 

 4 다시 애덤 스미스로

 애덤 스미스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자임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대학에서 논리학 교수와 도덕철학 교수를 지냈다.

 사실 18세기 영국에서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경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당시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경제 질서에 도덕성을 부여할 필요가 강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철학자, 특히 윤리학자로서의 면모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책이 바로 《도덕감정론》이다. 당시의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사회철학에 해당한다.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강의가 책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도덕감정론》이다.

 

 ο 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그는 물리세계의 일반 원리를 체계화한 뉴턴을 모범으로 삼아 사회 세계의 일반 원리를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공감(共感, Sympathy)에 근거해 도덕적 행위의 원리를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부론》에서 정치경제학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자연적 자유 체계를 인간사회의 현실적인 이상으로 설정했다. 자연적 자유 체계의 사회란 모든 구성원이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을 자유롭게 표현했을 때 이루어지는 사회의 모습을 말한다.

 그는 한 사회가 인위적 통제 체계에 가까울수록 도덕적 능력이 부패하여 생산력이 위축되고, 반대로 자유 체계에 가까울수록 도덕적 능력이 건강하여 생산력이 증대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자연적인 자유 체계의 사회 안에서 공감에 바탕을 둔 도덕적 행위와 경제적 생산력은 상호보완적이다.

 

 그렇다면 인위적 통제는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권력이다. 

 유럽에서 17~18세기는 절대왕정이 성행하던 시기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비합리적이며 오히려 부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을 말살할 것이라는 점을 통찰했다. 국가는 개인과 사회의 일, 특히 경제적 행위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의 현실로 비춰본다면 아주 대담한 발언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적 행위는 풍요로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제공하고, 또 이로 말미암은 풍요로운 부는 도덕적 행위를 더욱 강화하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선순환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바로 이런 생각에 근거해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행위 원리는 《도덕감정론》에서,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의 정치경제학 원리는 《국부론》에서 탐구하였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철저한 경험론자라는 사실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경험론은 인간의 모든 지식이 인간의 감각 경험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경험론은 인간이 유한하고 불완전하므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애덤 스미스도 이런 경험론을 따라 인간을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로 보았다.

 

 경험론은 공리주의라는 윤리학을 만들어냈다. 공리주의는 흔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원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진정성이다. 즉 감각의 주체인 모든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이며(심리적 이기주의), 선은 곧 쾌락 혹은 행복이다. 따라서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공리주의의 진정성이다.

 산업화와 그에 따라 발생한 자본주의도 인간의 이기심과 효율성의 제고라는 바탕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론과 공리주의와 ‘자유로운 개인의 욕구의 실현’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효율은 단순히 전체적 행복의 합 이전에 각 개인의 행복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의 자율적 기능을 강조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것(사실 그의 저술 전체에서 세 차례 언급될 뿐이며, 《국부론》에서는 단 한 차례만 나온다)은 각 개인의 합리적 판단능력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한다.

 

 그는 개인의 합리적 판단능력이 결코 욕망을 전적으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경제를 도덕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건 행복의 추구, 즉 쾌락의 향수라는 도덕적 가치의 실현뿐 아니라, 공공의 규범적 가치의 설정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형태의 사적인 이익 추구를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경제적 집중과 독점적인 이익에 반대했다. 경제적 집중은 자유시장의 본질적인 능력을 왜곡시킨다.

 

 ο 공감, 도덕의 출발점

 애덤 스미스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의 일반 원칙이 다른 모든 일반 원칙들과 마찬가지로 감각 경험에 대한 관찰로부터 도출된다고 보았다. 도덕의 일반 원칙은 매우 다양한 사례들에 대한 관찰하여 그 결과를 일반화하는 귀납적 논리로 확립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의 일반 원칙이 도출되는 인간의 경험을 공감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것이 몇 가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심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종류의 감정이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흔히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를 들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는 자연적인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제3의 입장에서 타인을 평가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강조한다.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일깨우고, 자기 행동의 도덕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회관계가 도덕적 판단과 행동의 근원이라고 보는 셈이다.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경제학의 비극은 경제학이 도덕철학으로부터 유리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즉,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의 세계로부터 도덕철학을 버리고 《국부론》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1759년 저술한 《도덕감정론》은 그 자체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국부론》에 앞선 저술로서 그의 경제학 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인간관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를 사회 전반적인 맥락에서 보았으며, 그 때문에 그의 경제학은 도덕철학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17~18세기 영국 도덕철학의 논쟁점 가운데 하나는 도덕적 선악을 판단하는 인간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옳고 그름과 선악을 비판하는 능력이 이기심도 이성도 아니고 도덕감정이라는 특수한 감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개인에 내재하는 상식적인 도덕감정에서 사회질서 원리를 끌어내고 있다.

 

 5 경제와 정치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의 애리조나 주의 노갈레스(Nogales) 시이고, 다른 하나는 멕시코의 소노라 주의 노갈레스 시다.

 이 도시는 본디 멕시코의 영토였다. 1846~1848년 미국과 멕시코가 전쟁을 치렀고, 1853년 주 멕시코 공사 제임스 개즈던(James Gadsden, 1788~1858)이 멕시코로부터 지금의 애리조나 남부와 뉴멕시코 남서부를 사들이면서 운명이 갈라졌다.

 

 ο 노갈레스의 운명

 인공위성에서 남북한의 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북쪽은 거의 암흑이다. 그에 비해 남쪽은 대낮처럼 밝은 빛으로 나타난다. 남북한은 기껏해야 60년 남짓 서로 나뉘었을 뿐 민족도 문화도 동일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을 통해 이토록 달라질 수 있는가?

 

 ο 시장과 정부라는 두 개의 바퀴 

 남미와 아프리카의 정치와 경제를 탐구하는 세계적인 권위자인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 1967~ )는 정치학 교수인 로빈슨(James A. Robinson, 1932~ )과 함께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경제적 번영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포용적 사회가 필수적이라고 역설한다.

 제도를 만드는 것이 정치이고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정치를 마련하느냐, 그리고 어떤 사람이 정치를 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경제적 상황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제도적 포용성이 밑받침되어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영국과 미국이 부유해진 것은 시민이 권력을 쥔 엘리트층을 무너뜨려 정치권력을 고르게 분배했고, 시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했으며, 일반 대중이 경제적 기회를 균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시민이 투쟁을 통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획득했고 그런 권리를 사용해서 경제적 기회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ο 한국 경제의 그늘

 노동 3권 ::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말하며, 근로 3권이라고도 한다. 노동자의 권익(權益)과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으로서 생활권(생존권 또는 사회권)에 속한다.
한국 헌법 제33조에서는 노동 3권을 보장하고 있으나,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로 인정된 자(예:단순한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 등)를 제외하고는 근로 3권이 인정되지 않으며, 국가 ·지방자치단체 ·국공영기업체 ·방위산업체 ·공익사업체 또는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동3권 [勞動三權] (두산백과)

 

 6 열린사회의 초석이 되어야 하는 경제 

 ο 열린 사회와 경제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의 이데올로기 혹은 도그마에 의해 지배되는 전체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열린사회’야 말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혹은 살아야 하는 유일한 사회로 규정했다.

 열린사회의 적은 전체주의다. 그리고 역사주의는 전체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 포퍼가 플라톤을 비판하는 이유도 아테네의 민주정을 위협하는 폐쇄적인 역사주의적 시각을 고수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헤겔의 역사적 법칙론이나 마르크스의 유토피아주의가 열린사회의 적이 되는 것은 바로 개인의 가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열린사회는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토대로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적 사회로 규정된다.

 포퍼는 플라톤의 철인정치조차 자기 자만심의 발로였다고 간주했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과 공론화 절차를 무시한다면, 필연적으로 독선과 독단에 빠지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개체는 희생되고 전체의 가치만 난무한다.

 열린사회의 힘은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더불어 계층의 이동이 자유롭게 보장될 때 비롯된다.

 

 ο 인문학의 눈으로 본 경제 

 매판자본 :: 발전이 더딘 국가에서 들여오는 자본에서 발생한 이윤의 일부를 착취하는 자본. 일반적으로 후진국이나 식민지 등에서 들어오는 외국자본의 앞잡이 노릇을 통해 착취한 반(反)민족적 자본이다. 당초에는 외국자본과 자국의 시장을 중개하는 무역상인이나 외국상사의 대리업자를 의미했으나, 중국 청나라 말에 서구 열강의 자본과 결탁해 폭리를 취한 중국 상인을 가리키는 것에서 지금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매판자본이라는 단어는 사회변혁론을 주장하는 이론적 배경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부여하였고, 개발도상국에서 정치ㆍ경제의 지배를 장악한 매판자본을 착취하는 자들이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지배집단과 수직적으로 야합하여 교역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 국가로부터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착취를 조장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매판자본 [買辦資本, comprador capital]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적 계층관을 ‘사적 이익이 가져오는 폐해’라는 시각에서 반성적으로 살펴볼 필요도 있다. 장사(商)를 가장 낮게 평가한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는 사회적 안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업은 농업보다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위험부담도 있고 자본이 들기는 하지만 부가가치가 더 크다. 게다가 돈은 사람의 욕망을 흔들 수 있는 요물이어서 돈 맛을 보면 관리들이 부패할 수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둘째는 이익을 좇는 상업인들은 아무래도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낮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상인들에게는 국익보다 사익이 더 중요하다. 불가피하게 이동이 잦은 상인들의 경우 다른 곳과 정보를 교환하다가 자칫 국가의 기밀마저 넘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위기 상황에서 언제든 국가를 저버리고 이익을 선택할 수 있어서 경계했을 수 있다.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1~기원전 235) ::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이었다. 그는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으며 이를 통해 거금을 모은 전국시대 대부호였다. 특히 여불위는 수완이 뛰어나고 이재에 밝았다. 여불위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만났다. 자초는 진나라의 소왕(昭王)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安國君)의 가운데 아들이었다. 여불위에게는 여자가 있었는데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그 여자를 자초에게 주었다. 여불위는 자초가 진나라로 귀국할 수 있게 도움을 제공하였고 후일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다. 그 공로에 의해 여불위는 진나라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즉위한지 3년만에 죽자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始皇帝)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진시황제이다.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며 태후(太后:진시황의 모후이자 여불위의 첩)와 밀통관계를 유지하였다. 여불위는 이 관계가 들통날까 두려워 노애라는 사내를 태후에게 보내어 정을 통하게 하였다. 태자 정이 성장하여 이 관계를 눈치채자 노애가 태자를 제거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극형을 당하였다. 여불위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되어 촉 땅으로 귀양을 가게되었다. 여불위는 점점 압박해오는 진왕 정의 중압감을 못이겨 마침내 자살하였다(BC 235).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여불위가 3000여 명의 빈객들의 학식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불위 [呂不韋] (두산백과)

 

 

 

11. 환경

 1 자연은 더 이상 재화의 대상이 아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천지창조 사건이 나온다. 엿새 동안의 창조의 일정을 보면, 신은 닷새 동안 자연계를 창조했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위의 <창세기> 1장 28절은 신의 천지창조가 자연계와 우주의 독립적인 창조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창조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ο 탈공포와 풍요의 이상향, 파라다이스

 인류문명사에서 자연은 양가적 대상이었다. 하나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재화로서의 가치다.

 이상적 삶의 공간을 뜻하는 낙원은 ‘행복한 정원’이라는 개념이었다. 정원은 집도 아니고 숲도 아닌, 동시에 집의 연장이고 숲의 내현이었다. 그것은 집의 안전과 숲의 풍요를 동시에 담은 곳이었다. 실제로 파라다이스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페르시아어 아피리다에자(Apiri-Daeza)인데 그 말의 뜻은 ‘벽으로 둘러싸인 과수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벽으로 둘러싸인’ 곳은 안전한 곳이고 ‘과수원’은 풍요로운 곳이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곳이라는 이상적인 공간이 바로 낙원이었던 것이다. 이 페르시아어가 고대 히브리어에 받아들여져서 파르데스가 되었고 구약 성서에서 파라데이소스(Paradeisos)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양의 낙원관은 달랐다.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물 위에 떠내려 오는 복숭아 꽃잎의 향기에 취해 따라간 곳이었고, 계곡 밑 작은 동굴을 간신히 빠져나와 발견한 확 트인 밝은 세상이었다.

 중국인들이 꿈꾸던 낙원은 바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동화하고 일치하는 세상이었다. 실제로 동양화에서 수많은 산수화들은 바로 그런 꿈의 표현이었다. 또한 노장사상에서 보듯 최상의 경지는 바로 물아일여의 상태이고 그것은 곧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경지다.

 

 ο 현대의 파라다이스, 유리 건물

 자연을 여전히 재화의 대상으로 보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살고 싶어하는 태도를 반영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유리 건물(Glass Tower)이다.

 차단된 실내공간은 이제 안정감이 아니라 답답함으로 바뀐 상황에서 유리는 공간의 장소적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시각적으로는 외부 혹은 자연과 차단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했다.

 예전에는 유리는 시야는 확보해주지만 단열과 보온 등 에너지 효율이 지극히 낮을 뿐 아니라 중력 등의 문제 때문에 파괴의 위험이 있어서 유리창문 이외에 외벽을 유리로 두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이전의 건물이 자연과의 차단을 통한 보호 기능을 담당했다면 이제는 자연 속에서 그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2 환경에서 생태로

 환경의 환(環)은 고리라는 뜻이다. 즉 무엇을 에워싸고 있다는 뜻이거나 둘레를 뜻한다. 무엇을 둘러싼다는 것인가? 바로 인간이다. 따라서 환경은 중심에 놓인 인간이라는 주체에 종속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혹은 객체로 규정된다. 영어(Environment)도 마찬가지다. 그 낱말도 무엇을 에워싼다는 뜻이다.

 ‘환경’이라는 단어가 품은 세계관은 기술문명의 세계관이며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다른 것을 가장자리로 내모는 것이다.

 그에 반해 생태는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각각의 주체로 파악된다. Ecology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eco의 어원인 그리스어 OIKOS는 집을 의미한다. 생명이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생태는 자연과 분리되어 인간 중심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의 인간,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생태는 유기체가 생존을 유지해가는 데 미치는 환경이다. 인간도 그 유기체의 한 종일 뿐이다. 따라서 환경보다는 생태라는 개념이 더 널리 쓰이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의 동식물 가운데 최소한 5,400 종의 동물과 4,000종의 식물이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3 환경 문제의 핵심은 돈이다

 과거에 자연이나 환경을 대하던 태도는 카우보이 경제(Cowboy Economics)였다. 서부개척 시대의 카우보이처럼 임자 없는 땅을 마음대로 개척해서 지배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을 그저 무한한 자원의 보고로만 여겼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우주선 경제(Spaceship Economics)로 바뀌고 있다. 이 말은 지구를 우주선에 비유한 것으로, 자원이 유한한 우주선이 인류를 태운 채 우주 대항해를 하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우주선 내부는 한정된 공간이므로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쓰레기로 인해 삶의 터전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세계의 자연을 파괴하는 각종 오염의 80퍼센트는 산업화에 성공한 기술 선진국에 의한 것이다.

 

 교토의정서 :: 산화탄소(CO2), 메탄(CH4), 아산화질소(N2O), 불화탄소(PFC), 수소화불화탄소(HFC), 불화유황(SF6) 등 6가지 온실가스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국제협약. 1992년 6월 리우 유엔환경회의에서 채택된 기후변화협약(UNFCCC)을 이행하기 위해 1997년 만들어진 국가 간 이행협약으로, '교토기후협약'이라고도 한다. 정식 명칭은 Kyoto Protocol to the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다.
지구온난화가 범국제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 세계 정상들이 1992년 브라질 리우에 모여 지구온난화를 야기하는 화석연료 사용을 제한하자는 원칙을 정하면서 이를 추진하기 위해 매년 당사국 총회(COP)를 열기로 하였다. 이후 1997년 12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총회(COP 3)는 선진국으로 하여금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 기준으로 5.2% 줄이기로 하는 교토의정서를 만들어냈다. 이산화탄소 최대 배출국인 미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반대하다 2001년 탈퇴를 선언, 이후 러시아가 2004년 11월 교토의정서를 비준함으로써 55개국 이상 서명해야 한다는 발효요건이 충족돼 2005년 2월 16일부터 발효되었다.
교토의정서는 감축목표의 효율적 이행을 위해 감축의무가 있는 선진국들이 서로의 배출량을 사고 팔 수 있도록 하거나(배출권거래제), 다른 나라에서 달성한 온실가스 감축실적도 해당국 실적으로 인정해 주는(청정개발체제, 공동이행제도) 등 다양한 방법을 인정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토의정서 [京都議定書, Kyoto Protocol]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1997년 일본 교토에서 개최되어 기후 변화 협약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을 목표로 합의한 이 의정서는 지구온난화를 규제하고 방지하는 국제협약의 구체적 이행 방안이었다. 협약국들은 2012년까지 이산화탄소, 메탄, 이산화질소, 불화탄소(PFC), 수소화불화탄소(HFC), 불화유황(SF6) 등 여섯 가지 감축대상 가스에 대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정책과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 분야에는 에너지 효율을 향상시키고 온실가스의 흡수원과 저장원을 보호하며, 신재생에너지를 개발 연구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2001년 3월에 탈퇴했다.

 

 4 지속가능한 성장과 분배 정의로 바라본 환경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또는 지속가능한 성장(Sustainable Growth)의 개념이 있다. 환경과 경제가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며, 공멸의 한계점을 비켜가보자는 의미다.

 

 ο ‘지속가능한’의 역사, 세계 환경 회의

 1992년에 열린 리우회의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관련된 배려의 중심에는 바로 인간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발전에 대한 권리는 현세대와 후세대 모두의 발전 및 환경과 관련된 필요를 공정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정의했다.

 1972년 인류의 미래 문제를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모인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통해 화석 원료는 곧 고갈될 것이기 때문에 ‘제로성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같은 해 6월에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유엔인간환경회의(일명 스톡홀름회의)에서도 막연한 불안감은 감지되었다. 참석자들은 산업의 발전이 자연계 파괴의 주범이라며 제로성장 개념을 언급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손대지 않은 곳은 더 이상 개발을 명목으로 파헤쳐서는 안 되는 신성한 곳으로 남겨두어야 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손이 타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1971년 스위스 푸넥스에서 열린 한 심포지움에서 탄생했다. 거기에 모인 과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부의 창출 및 재화의 생산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 양립할 수 있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수립했다.

 다소 추상적으로 자연을 신성시했던 스톡홀름선언은 1984년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간 인도의 보팔참사와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사건 등을 통해 구체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긴박감으로 변화했다.

 1987년 유엔의 주문에 따라 구성된 부룬틀란의 위원회는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통해 후세대를 위한 성장을 생각해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중단기적으로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칠 위험요소로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의 변화와 프레온 가스 등으로 인한 오존층의 심각한 훼손에 대한 대책을 촉구했다.

 이후 부룬틀란보고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명명되었다.1992년의 리우회의는 바로 그런 시도의 1차적 결실이었다. 리우회의에서 채택된 의제21(Agenda21)은 경제, 환경, 그리고 사회적 진전의 영역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ο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제언

 자원은 좁게 보면 사적 재화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공적 재화인 이중적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자연은 공적 재화일 뿐 아니라 이미 재화라는 개념 자체가 탈색되는 상황이다. 분배 정의는 사회윤리적 측면과 사회경제 구조의 측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절차적 정의를 강조한다. 완전한 절차적 정의,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 그리고 순수한 절차적 정의다. 완전한 절차적 정의는 공정한 분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독립된 기준뿐 아니라 공정한 분배를 도출할 수 있는 절차도 지닌다. 그에 반해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는 올바른 결과에 대한 독립된 기준은 있지만 그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지 못한다. 아무리 올바른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도 적용되는 절차가 그것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정의로울 수 없다.

 순수 절차적 정의는 올바른 결과에 대한 독립된 기준은 없지만, 공정한 절차가 있어서 누구나 그 과정의 절차에 따라 결과의 내용에 관계없이 그 결과를 공정하게 간주할 수 있다. 롤스는 그런 순수 절차적 정의에 따라서만 분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원의 공정한 분배라는 측면에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순수 절차적 정의에 입각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은 언제나 기존의 약자의 피해를 정당화시키거나 혹은 이전까지의 피해에 대해 배상과 보상의 가능성조차 막아버리기 쉽다.

 

 5 천부적 권리와 자연의 권리

 근대 이후 문명사는 바로 천부적 권리(Natural Right)로서의 인권의 가치를 선언하고 쟁취한 과정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권리와 가치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왔을 뿐이다.

 근대 문명이 인권 확립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자연의 권리(Right of Nature)를 인정해야 한다.

 천부적 권리로서의 인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만 다뤘다. 사람은 목적인 동시에 주체다. 자연의 권리는 자연을 목적인 동시에 주체로 보라고 요구한다. 자연의 보편적 권리 속에서 인간의 권리는 박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인적 인격의 권리로 존중된다. 사람과 자연이 주체 대 객체가 아니라 주체 대 주체의 관계를 맺는다면, 억압받고 권리가 제한된 약자도 더 큰 거대한 주체인 자연의 일부를 간주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의 보편적 평등성도 보다 전향적인 방향으로 확립할 수 있게 된다.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과 자연은 이전의 ‘나와 그것(Ich und er/es/sie)’이 아니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 즉 인간과 자연이 서로의 본래의 모습을 존중하는 인격적 관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ο 웰빙과 유다이모니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완벽한 목적(Telos)의 완성을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규정했다. 그 말은 최선을 다해야 할 곳에 최선을 다하고, 그 탁월함에 대한 대가를 거둔다는 의미로서의 행복을 뜻한다.

 그리스어 유다이모니아를 문자 그대로 풀면 ‘잘 존재함(Well-Being)’이다. 그것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으로서의 ‘행복’이다. 영어 Well-Being은 복지라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서구에서 새로운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물질적 가치에만 함몰되었던 삶을 반성하고 정신적 영역과의 조화로운 균형을 되찾기 위한 자각이었던 것이다.

 90년대에 들어설 무렵, 일본에서 이것을 고령화 사회에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용어가 되었다.

 

 자연(自然)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 그런’이라는 뜻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과 원인이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있음을 함축한다. 그 말 속에는 자연이 인간의 의미나 가치보다 더 포괄적이고 또한 상위에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영어 Nature의 어원인 라틴어 NATURA는 ‘앞으로 태어날 자’라는 뜻이다. 거기에는 모든 생명의 과정이 담겨 있다.

 

 6 세계시민권으로서의 환경 문제 

 ο 대안세계화운동과 글로벌 거버넌스

 대안세계화운동(Alterglobalization)은 세계화라는 것이 명목상 허울뿐이고 실제로는 격차를 더 견고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일방적 효율성에만 의존하는 것임을 비판하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해서 또 다른 세상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12. 젠더

 1 섹스와 젠더의 미분화

 아직도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Gender)’의 구별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녀가 다르며, 유별하고, 따라서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사실은 후천적으로도 남녀의 가치를 구분했다.

 

 ο 사회적 개념의 성, 젠더

 젠더라는 개념이 출현한 것은 1960년이다. 사회적 성을 지칭하는 젠더는 사실 ‘성별 구분이 아주 모호한 상태로 태어난 사람’ 즉 출생 시 남녀의 판명이 어려운 상태의 사람을 지칭했다. 

 1955년 존스홉킨스 의대의 머니(John Money, 1921~2006)가 이 단어를 응용하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머니는 생물학적 성별을 남, 녀, 그리고 젠더로 구분했다. 젠더가 오늘날처럼 사회적 성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은 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부터다. 

 젠더로서의 여성은 없고 섹스로서의 여성만 존재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배제된 삶’을 강요받게 된다. 섹스로서의 남녀의 차이는 염색체 배열에 의해 구별되는데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전환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젠더로서의 남녀의 차이는 사실상 어떤 구별도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남자로서의 ‘일’ 혹은 ‘역할’과 여성으로서의 그것이라는 구별은 이미 그 자체 차별의 시작이다.

 

 2002년 개정된 선거법(현 공직선거법)에 따라 여야 정당은 광역의회 비례대표의 50% 이상을 여성으로 공천하도록 의무화했고 지역구 공천의 30% 이상을 여성을 권장했다. 

 이후 2005년 8월 개정된 공직선거법 제47조에 따라 정당은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 비례대표의 50% 이상을 여성으로 공천하되 후보자명부 순위의 매 홀수에 여성을 올리도록 했고, 지역구 공천은 총 전국지역구 수의 30% 이상을 여성으로 하도록 권장했다. 나아가 2010년부터는 각 정당이 지방의회의원 지역구 공천에서 군 단위 지역을 제외한 지역구마다 1명 이상의 여성을 공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ο 주디스 벝틀러의 젠더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은 젠더가 태생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획득된 문화적 구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뜻이었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처럼 그런 이분법 자체를 거부하는 여성학자들도 있다. 

 그녀는 페미니즘이 반드시 여성이라는 집단적 범주를 가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실상 모든 정체성이란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고, 사회가 이상화하고 내재화한 규범이 반복적으로 수행되어 몸에 각인되는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섹스나 섹슈얼리티도 그런 의미에서 결국에는 젠더가 아니냐는 반문이 버틀러의 비판이다. 

 그녀가 문제시하는 것은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을 나누기 이전에 그것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성의 구분 자체를 규범적 범주로 규정해서 그 한 쪽의 범주, 즉 남성성에 부합하는 이들에 한해서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한 쪽의 성은 삶의 영역에서도 배제시키며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성을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으로 나누는 것이 버틀러의 말처럼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구분이 무의미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그런 이분법을 통해서 어떻게 여성이 억압되고 통제되어 왔는지를 인식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차이는 섹스의 문제고, 차별은 젠더의 문제다. 

 

 2 차별의 역사, 불평등의 문화

 성경에 의하면 신이 창조의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들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를 동시(코란에는 남녀가 함께 만들어졌다고 쓰였다)에 만들지 않고 남자만 만들었다.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숨을 불어넣어 여자를 만들었다. 

 이 구절이 갖는 의미는 딱 한가지뿐이다. 바로 성서를 남자가 썼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ο 아르마니, ‘뽕’을 제거하다

 누구나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남성과 여성의 근육은 다르다. 고대인들에게는 전쟁과 생산 활동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으니까 그 역할을 담당한 남성들이 권력을 차지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근육 의존도가 낮아지니 여성들도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 남녀의 평등에는 근육의존도가 높으냐 낮으냐에 따라 변화해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여전히 근육이 작동되고 있다.

 

 사고의 전환은 패션에서도 나타난다. 명품 남성복 아르마니는 확실히 입으면 옷태가 난다.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1934~ )가 꿰뚫어본 것은 남성수트에서 어깨패드를 제거한 것이다. 어깨에 패드를 덧대는 것은 어깨를 넓어 보이게 하고 근육성을 과장하기 위해서다. 아르마니는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근육이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른바 ‘메트로 섹슈얼’이 바로 그것이다. 그랬더니 어깨선이 우아하게 살아났다. 그래서 아르마니의 옷을 입으면 키도 커 보이고 맵시가 나는 것이다. 

 아르마니는 남성에게 강요된 남성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할 뿐 아니라 남성도 아릅답고(‘잘 생긴’이 아니라!) 싶은 본능이 있음을 이끌어냈다. 그런 본능을 스스로 억압한 것이 바로 근육의 과시에 대한 맹신이었음을 알고 그것을 타파한 것이다. 패션은 시대를 반영한 철학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남자들은 머릿속에 그 가짜 ‘뽕’을 잔뜩 붙이고 산다. 더 웃기는 것은 그걸 멋이라고 착각하는 남자들도 많다는 점이다. 

 

 ο 결혼을 허하라

 이화여대는 1996년 처음으로 두 사람의 기혼여성 졸업생이 탄생했는데 그 당시에도 ‘금혼학칙’은 여전히 있었다. 사실은 그 두 사람이 재학 중 제적된 후 93년에 시행된 ‘제적학생 구제를 위한 특례’ 조치로 재입학하여 예외 규정의 덕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금혼 규칙이 공식적으로 깨진 것은 2003년이었다. 그것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화여대 학칙에서 입학과 졸업 자격으로 기혼여성을 금지하는 것은 평등권 침해라는 진정에 대해 조사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마지못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니까 학교당국도 그 조항이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던 셈이다. “미혼을 입학과 졸업의 요건으로 정한 이유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기에 열악한 여성 고등교육 환경 하에서의 조혼 등을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해명은 구차하게만 들렸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성은 억압되지 않았다며 오히려 선동과 증대의 역사로 해석했다. “권력은 도처에 있다”면서 권력의 속성을 정의한 푸코는 성의 문제는 바로 권력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의 논변은 성을 단순히 억압의 구조로만 이해했을 때 그 억압만 제거하면 될 것이라는 착각을 경고한 것이다.

 

 3 억압에서 자유로

 성 해방은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이 그 기폭제가 되었다. 근현대의 핵심 주제였던 ‘자유로운 개인’의 마지막 억압기제였던 성에 대한 왜곡과 억압이 깨뜨려진 것은 필연이었다. 

 

 하버드대학의 아동심리학 교수 댄 킨들러(Dan Kindler)는 《새로운 여자의 탄생, 알파걸》에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재능 있고 성적이 우수하며, 리더이거나 앞으로 리더가 될 가능성이 있는 10대 소녀 113명을 인터뷰하고 900여 명의 소녀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미국 여학생들의 20퍼센트 가량이 모든 면에서 남학생을 능가하는 엘리트 소녀로 성장하고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킨들러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 계층의 출현’으로 평가하며 그녀들을 알파걸이라고 명명했다. 

 알파걸들이 이전의 페미니스트들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이들은 그런 감정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그녀들의 부모 세대에서 이미 상당히 남녀 차별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벗어나 있는 상태로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이다. 물론 예쩐과 달리 자녀가 많지 않은 까닭에 성별로 차별할 까닭이 없어진 것도 한 몫을 했다. 

 

 ο 생물학적 성, 섹스의 해방

 여류작가 이 말 또한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그럼 ‘남류작가’도 있더냐.

 생물학적 성으로든 사회적 성으로든 더 이상 억압과 왜곡의 유산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미 남자와 여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ο 성에 대한 고정관념들

 옷 입은 사람 입장에서 볼 때 남자의 단추는 오른쪽에 달려있고 여자의 단추는 왼쪽에 달려있다. 남자들은 제 손으로 옷을 입고 벗으니 오른손에 단추가 닿는 게 유리하고 여자들은 누군가 입고 벗겨주는 사람이 있으니 왼손에 닿는 게 편리해서 그렇다.

 단추는 초기에 귀족들만 달 수 있었다. 그러니 여자들에겐 그런 하녀가 딸렸다. 그리고 기사도의 전통에 따라 하녀가 없을 때는 남자들이 그것을 도와주었다. 남자와 여자 옷의 단추의 위치가 다른데도 별로 의식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건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너무 익숙해서 차별되고 불평등한 일상사들이 얼마나 많을까.

 문란과 자유는 다르다. 자연스럽고 당당한 일인데도 문란하다고 낙인찍는 건 부당한 일이다. 

 결혼식에서 남자는 혼자 당당히 걸어 들어가고 여자는 왜 아버지 손을 잡고 들어가는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중간에 신랑이 내려오고 아버지는 딸을 그에게 건네주는 장면이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이 이미 120년도 훨씬 이전에 《인형의 집》에서 노라를 통해 비판했던 것을 왜 아직도 반복할까? 퇴장할 때도 손을 맞잡고 나가지 않고 여자가 남자 팔에 팔짱을 두른다. 

 

 4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허하라!

 사포(Sapphō) :: 고대 그리스 최대의 여류시인. 에게해(海) 레스보스섬[島]의 미틸레네 출생. 귀족 명문 출신으로 당시의 정치적 분쟁을 피하여 한때는 시칠리아섬에 살았으나, 생애의 대부분은 레스보스섬에서 지냈다. 레스보스섬의 아이오리스 방언으로 시를 짓고, 그녀 자신의 이름도 그 방언으로 프사포라고 불렀다. 때때로 아름다운 사포라고 형용되고 있으나, 사실은 추한 여인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에 견줄 만한 미인으로 이상화된 모습이 전해져 내려왔다. 게르퀴라스와 결혼하여 딸 크레이스를 두었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소녀들을 모아 음악·시를 가르쳤으며, 문학을 애호하는 여성 그룹을 중심으로 활약한 것 같다. 또한 형제인 카라쿠소스가 이집트의 매음부를 사랑하여 돈을 탕진한 일을 책망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사포가 미틸레네의 선원 파온과의 비련으로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는 말은 후세에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이외의 그녀 생애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시인 아르카이오스와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시를 서로 교환하였다고 한다. 사포는 다작 시인으로, 그녀의 작품이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는 운율에 의하여 9권(또는 8권, 7권)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제1권에 1,320행이 수록되어 있었다니까 그의 전 작품의 양은 방대하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2편뿐이고, 다른 것은 모두가 인용이나 단편(斷片)에 불과하여 총계 약 700행이다. 1900년 이집트에서 상당한 분량의 단편이 발견·추가되었다. 제1권 서두의 노래는 유명한 여신 아프로디테에 바치는 찬가이고, 마지막 권은 혼례의 축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는 서정시·만가(挽歌)·연가·축혼가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솔직·간명·정확한 표현으로 개인적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그녀를 10번째의 시여신(詩女神)이라 칭송하며 호메로스와 더불어 대표적 시인으로 생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포 (두산백과)

 

 고대 그리스에서 흔했던 남성의 동성애에는 관대했으면서도 시인 사포(sappho, 기원전 610~?580?)의 동성애에는 모멸과 냉소를 쏟아 부었다. 레즈비언이라는 용어는 그녀가 살던 레스보스 섬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5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Marie Steinem, 1943~ )은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에서 만약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분명 월경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생리량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댈 것이다”라고 비꼬았다.

 

 20세기 초중반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41)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자들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자신이 세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혁명은 그저 남성의 특권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성별 간의 차이 자체르 ㄹ없애는 데 그 목표가 있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다. 

 

 

 

+.

 에필로그 - 나에게 인문학이란

 ο 1) 인문학은 레고다

 ‘진짜 레고’의 가치는 엉뚱하게 레고묘지에서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심심해지면 레고를 담요에 쏟아 놓고 멋대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인문학이라는 게 결국은 레고 놀이와 같다. 우리가 배운 것들은 생각보다 꽤 많다. 다만 그것을 다양하게 엮고 짜는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은 까닭에 오로지 하나의 조립 공정도만 따라할 뿐이다. 이는 텍스트 추종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지식이나 경험이 쌓여도 제 힘으로 엮어낼 줄 모르면 주인이 될 수 없다. 레고 통에 아무리 많은 유닛이 있다한들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그건 그냥 레고묘지에 불과할 뿐이다. 

 레고만도 못한 인문학이어서야 되겠는가!

 

 ο 2) 인문학은 흐르는 강물이다

 강물은 잠깐 모여 큰 물을 확보해도 끝내는 흘러야 한다. 그게 강물의 본질이다. 

 

 세계최대의 백과사전이라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조차 CD 두 장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안의 지식들이 살아 움직이고 현실에 조명되고 해석되면 수 십장의 CD로도 감당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지식들이 ‘나의 지식’이며 삶의 자산이 된다. 

 

 ο 3) 인문학은 요리가 아니라 요리법이다

 인문학의 식탁이 풍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음식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하나의 재료일 뿐이다. 그저 하나의 채소, 고기에 불과할 뿐 그것이 어떻게 다른 재료들과 섞여 새로운 음식이 만들어지는지는 전혀 모른다. 아무리 많은 식재료가 있어도 다른 것들과 섞여 조리되지 않으면 그저 냉장고에 보관된 채소요 고기일 뿐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경험이 있어도 그것이 서로 소통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지 못하면 그것은 그저 지식의 냉장고일 뿐이다.

 정체성도 없고 어설픈 퓨전의 결과는 콘퓨전(confusion)으로 끝나기 쉽다.  

 

 매파(媒婆) :: 혼인을 중매하는 여인으로 ‘뚜쟁이’라고도 함. 대체로 중년 이후의 노파들이었으므로 파(婆)·온(媼)이라는 자가 붙었다. 혼인적령기의 자녀를 둔 집을 연줄관계로 찾아다니면서 직업적으로 중매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남녀 두 사람의 자유의사에 의한 결합은 야합이라 하여 배격하였으므로 매파라는 중간역할이 필요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업적 매파가 개입되지 않는 수도 있다. 즉, 서로 잘 아는 집안일 경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혼인에는 반드시 중간역할이 필요하므로, 이와 같은 경우는 일가친척 중에서 매파를 대신하게 된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를 자유롭게 만났다 하여 부모의 내침을 받은 것도 “중매 없이 남자를 따랐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유교적 예의를 숭상하던 조선사회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정인지(鄭麟趾)가 젊었을 때, 옆집 처녀의 짝사랑을 거절하는 구실로 “내일 중매를 세워서 정식으로 통혼할 것이니 참아달라.”고 달래서 보내고는, 다음날 어머니와 의논하여 이사를 해버렸다는 일화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중매를 업으로 하는 사람은 상민계급의 여인들이다. 내외법이 엄하여 양반 부녀자는 가마가 아니면 쓰개치마를 쓰고 다니던 시절에, 남의 집 안방까지 드나들면서 일이 성사되도록 언변을 토한다는 것은 신분이 천한 여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양쪽 집의 문턱이 닳도록 다녀야 하는 까닭에 매파노릇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변죽이 좋고 설득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 성실하여 신용이 있어야 한다. 또한 성사시킨 경력이 많을수록 매파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그 대가는 속담에 ‘고무신값’이라 하였으니, 신랑과 신부집 형편에 따라 주는 인정의 범위였을 것이다.
고대소설 ≪사씨남정기≫는 무대를 중국으로 잡고 있지만, 신부감 집에 드나드는 매파는 여승이다. 오늘날 매파라는 호칭은 사라졌으나 그 구실은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중매를 직업으로 삼는 부인들도 없지 않으나, 요즈음은 대체로 친구·은사·이웃·친척 혹은 혼인중매단체·기업 등이 그 구실을 대신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매파 [媒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ο 4) 인문학으로 사고를 쳐라!

 텍스트를 깨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한 질문은 끝이 없다. 어쩌면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답을 찾는 과정인 질문 그 자체가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질문 속에 답이 이미 들어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깨우침을 얻는다. 

 질문하는 힘이 바로 상상력과 창의력의 시작이고 텍스트의 울타리를 깨고 콘텍스트(Context)로 확장하는 동력이다. 

 모든 학문은 인간이 주체고, 인간이 목적이며, 인간이 주제다.  

 

 ο 5) 인문학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가르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아마 이 말을 듣고 성철(性徹) 스님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말은 본디 당나라 때 고승 청원선사(靑源禪師靑源)의 시에서 유래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니구나(山不是山 水不是水) 

 산이 곧 물이요 물이 곧 산이더라(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첫 행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보자. 산의 정의는 융기되어 다른 곳보다 솟은 지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은 산의 반대 즉, 꺼진 지형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산은 산이요’라고 했을 때 앞의 산은 대상으로서의 산이고 뒤의 산은 정의로서의 산이다. 이것은 현상적이고 상식적인 지식을 뜻한다. 본 대로 느낀 대로 받아들인다. 거기에는 어떤 의도나 목적이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르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게 바로 상식이다.  

 상식이 진리는 아니다. 상식은 언제든 진리와 어긋나면 그 역할을 멈춰야 한다. 

 

 둘째 행을 보자. 산은 산이 아니다? 상식에 반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산이라고 모두 뾰족하게 솟은 건 아니다. 봉우리도 있고 능선도 있지만 골짜기도 있다. 그 산의 어느 한 부분, 가파르게 솟은 부분이 아닌 평지 능선이나 푹 꺼진 골짜기의 경우를 좁혀놓고 보면 산의 정의에 어긋난다. 그런 경우 산은 산이 아니다. 우리가 상식 너머에 있는 것을 알고 싶어 탐구를 이어가면서 기존의 지식이 서로 충돌하거나 어긋나는 경우를 가끔 혹은 흔히 만날 수 있다. 그럴 경우 ‘정의에 따라(by Definition)’ 판단한다. 

 논리적으로 따질 수도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다. 그런데 전체의 정의는 맞는데 부분의 어떤 건 그 정의에 어긋날 수 있다. 이런 경우 전체의 진리치(眞理値)는 보장되지 않는다. 합으로서 뿐 아니라 그 합을 이루는 각 부분들 모두가 완전하게 진리치를 가져야만 진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파고들면서 기존의 지식 체계가 더 이상 버팀목이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이게 뭐야? 헷갈리잖아” 그러면서 원상태로 돌아간다. 일찌감치 포기한다.

 다른 하나는 “어라?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게 잘못된 거야? 오호, 이거 참 재미있는데? 그럼 다음에는 뭐가 있을까?”하면서 호기심과 경이로움을 맛본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반쯤은 의구심이 남는다. 그러나 새로움을 발견하는 힘이 더 크다. 여기에 약간의 지적 허영도 작용할 수 있다.

 

 셋째 행은 아예 황당하다. 산이 곧 물이라니! 여기서 말하는 산이 물이라는 건 산 한 부분인 골짜기에 못이 있는 그런 부분 현상의 착시가 아니다. 정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좁은 틀이고 경계다. 그 틀과 경계를 허물면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경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경지다. 그러나 현상에 머무는 데에 익숙한 시선으로 보면 무의미하고 무모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일찌감치 첫 행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은 자신의 빠른 원상복귀를 다행스러워한다. 

 표피적 실용과 현상적 인식에만 머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혼동이다. 셋째 행의 단계까지 나아간 사람들도 속으로 의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셋째 행은 혼돈과 갈등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경계와 울타리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맛본 사람은 그 안에서 아주 행복하다. 둘째 행이나 셋째 행의 단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은 바로 교만이다.

 교만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지식은 얻었는지 모르지만 지혜는 찾지 못한 경우다.

 

 이제 마지막 결론인 넷째 행이다.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그렇게 고생하고 헤맸단 말인가?

 하지만 넷째 행은 첫째 행과는 전혀 다르다. 생각이 다르면 삶도 다르다. 현상도 본질도 모두 꿰뚫고 상식과 진리도 아우를 수 있으면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다. 

 청원선사나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한 것은 첫째 행이라기보다는 넷째 행을 말한 것이다. 

 이문학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첫째 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넷째 행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첫째 행과 더불어 넷째 행을 동시에 아우르는 선언이다.

 

 작가후기 - 나처럼 인문학을 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모든 학문의 목적도, 주체도, 대상도 인간’

 

 교학상장(敎學相長) ::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 진보시켜 준다는 뜻으로, ①사람에게 가르쳐 주거나 스승에게 배우거나 모두 자신의 학업(學業)을 증진(增進)시킴 ②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이 서로 자신의 공부(工夫)를 진보(進步)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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