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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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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삶의 한가운데, 기대를 잊고 실망에 지쳐가는 우리에게, 웃음과 위로를 찾아주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이 전환점을 돌면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난 그 뒤엔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 초록지붕 집의 꿈 많은 수다쟁이 소녀, 앤 셜리, ’주근깨 빼빼머리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언제 들어도 가슴 뛰는 노래의 주인공, ‘빨강머리 앤’이 소설가 백영옥과 함께 돌아왔다. 캐나다의 소설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08년에 발표한<그린 게이블의 앤(ANNE OF GREEN GABLES)>은 지금까지 명작으로 추앙받으며 고전으로 읽히고 있으며, 그 영향력에 힘입어 1979년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손끝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빨강머리 앤’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후지TV의 〈세계명작극장〉편에 방영되었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1970~1980년대 한국에서도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어디에서나 가장 좋은 것을 상상하는 역대 최강 ‘밝음’의 아이콘이 되었다. 〈스타일〉, 〈다이어트의 여왕〉, 〈아주 보통의 연애〉, 〈애인의 애인에게〉까지,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많은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는 작가 백영옥에게도 빨강머리 앤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속 앤이 아니라 TV 애니메이션 속의 ‘빨강머리 앤’이었다. 작은 기쁨부터 큰 슬픔까지, 소녀시절을 수놓는 마음들을 쉴 새 없이 나누었던 앤과의 추억, 그리고 인생의 가장 힘겨웠던 고비마다 뜻밖의 위안과 웃음과 눈물을 선물한 앤의 이야기들을 이제부터 어른으로의 삶을 헤쳐가야 할, 일과 연애와 꿈의 좌절에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할 날들을 다독이는 격려의 말로 되살려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터무니없을 만큼 희망에 차 있던 앤을, 그 시절 마음에 깊이 새겼던 앤의 모습들과 함께 추억하는 일은, 우리가 한 번뿐인 삶을 사는 동안 가장 소중한 때를 놓치지 않고, 어쩌면 바로 지금쯤 돌아보아야 할 따뜻한 이야기들을 모아보는 일이다.
저자
백영옥
출판
아르테(arte)
출판일
2016.07.15

 

프롤로그 -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나의 앤에게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것은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는 시대에 일어난 지극히 개인적인 기적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1장. 우연을 기다리는 힘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아주 특별한 능력

‘버킷 리스트’를 갖지 않겠다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해보지 않아서 생기는 후회 없이 살겠다는 희망이었다. 사람은 해보지 못한 일에 대해 회한을 갖는다. 하지만 해본 일에 대한 후회는 (실패하더라도) 비교적 짧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 :: 구릉성 지형으로 최고점은 해발고도 약 150m, 해안은 굴곡이 심하다. 섬의 남해안 일대에서는 농업이 성하며, 낙농 ·임업 외에 여우 사육과 굴 ·새우 어업도 성하다. 1534년 프랑스인 탐험가가 발견하였으며 당초에는 프랑스로부터 이민이 많았으나 19세기 이후 스코틀랜드 이민이 급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Prince Edward Island]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앞으로 알아낼 것이 많다는 건 참 좋은 일 같아요! 만약 이것저것 다 알고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럼 상상할 일도 없잖아요!”

 

기다리고 고대하는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게 실제 우리의 하루다.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다는 걸.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이라는 걸. 그 꽃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거라고.

 

우연을 기다리는 힘

내 콤플렉스는 내 눈에만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었다.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힘 아닐까. 시간은 느리지만 결국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나는 그것이 시간이 하는 일이라 믿는다.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조금씩 너그럽고 상냥하게 키운다고 말이다.

 

그럭저럭,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아······.

 

삶은 편도야, 앤

행복 설정값이란 고유한 행복의 기본 수준으로, 어떤 사람이 큰 좌절을 겪든, 크게 성공하든, 결국 행복지수가 처음의 설정값으로 되돌아가는 탄력성을 말한다.

 

사고 때문에 비록 다리 하나를 쓸 수 없다고 해도, 낙천적인 사람이라면 낙천적인 장애인이 된다는 이야기.

 

행복의 50퍼센트는 유전적 설정값에 의해 결정된다. 이 말은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건 겨우 10퍼센트 정도이고, 행복감을 느끼는 능력의 50퍼센트는 운 좋게 타고난다는 것이다. 뭔가 억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머지 40퍼센트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하니 포기는 이르다.

 

“인간의 행동 중 일부는 감정 없이, 의식적인 목적 없이, 자아와 목표 사이의 진정한 동화 없이 그저 습관처럼 이루어진다. 의미 없는 행동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진심을 갖고 행동할 때 행복을 경험하고, 감각을 깨울 수 있다.”

 

“나이와 행복의 관계를 조사하면 늘 60~70대 노인들이 더 행복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다. 왜? 노인들이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면서 좋은 일, 나쁜 일을 모두 겪었다. 좋은 소식을 들어도 지나치게 요란 떨지 않고,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는 말을 되새기며 기다릴 줄 안다.”  

 

살아갈 시간이 1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시간 시야는 확실히 좁아진다. 노인들이 행복한 건 그 때문이다. 시간 시야가 좁아진다는 건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꽃이 보여주는 건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은 그토록 빠르게 사라진다는 사실이라는 것 말이다.

 

나와 포옹하는 법

팔삭동이 :: 
1. 제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여덟 달 만에 태어난 아이.
팔삭둥이를 낳다.
2. 똑똑하지 못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네이버 국어사전] 팔삭-둥이 [八朔둥이]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식 처방전

적당한 결핍은 쾌락을 증폭시킨다.

 

사실 쾌락주의는 절제를 통해 그것을 깊게 체험하라는 말과 같다. 꿀을 좋아하는 곰돌이 푸우가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은 사실 ‘꿀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꿀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꽃은 활짝 피기 전이, 꿀은 먹기 전이 가장 달콤하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결과를 떠나 과정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오히려 만끽이라는 말은 이 설렘 뒤에만 따라오는 충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각보다 불행에 강하다

희망으로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시절을 산다는 건 어떤 일일까. 사랑을 사랑으로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의 맨 앞에는 어떤 단어들이 놓여야 하는 걸까. 그때 내가 발견한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 고통, 고독 같은 단어들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사건처럼 벌어지고, 그것이 먼 사람이었다가 가까운 사람으로 되돌아오는 모든 과정이 원근법이 사라진 풍경처럼 내겐 낯설고 두려웠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이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싸움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회사원 10년차쯤, 나는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었다.

 

앤은 마릴라와 매튜가 원하던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파양을 당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꿈꾸던 초록지붕 집의 아이가 아니라, 달아나고 싶었던 고아원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앤은 말한다.

“전 이 드라이브를 마음껏 즐기기로 작정했어요. 즐기겠다고 결심만 하면, 대개 언제든지 그렇게 즐길 수가 있어요!”

 

내일 벌어질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봄이 왔음을 알아차리는 능력, 현자들은 그것을 현재를 살아내는 능력, 즉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이라고 불렀다.

 

행복은 지속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해지는 방법은 ‘큰 행복’이 아니라 ‘작은 행복’을 ‘자주’ 느끼는 것이라고.

 

마음을 물어보는 시간

“내 말을 믿어라! 존재의 가장 큰 수확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산의 산기슭에 그대들의 도시를 건설하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이렇게나 열심히 하는데 이렇게나 되는 일이 없어도 될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나의 20대는 그런 시간이었다. 싹이 나든 나지 않든 무조건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뿌리고, 또 뿌리며 싹이 나오길 기다리던 막막한 시간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보다 중요한 건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삶을 야구에 비유하면, 나는 이제 홈런을 치겠다는 야망보다는 출루율을 높이기 위해 연습을 거르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

 

아침이라는 리셋 버튼

글이란 건 어쩌면 맛없는 건강식을 먹듯 ‘꾸역꾸역’ 메우며 쓰는 것이다. 만일 작심삼일을 반복하며 체념하는 성격이라면, 3일마다 새로 시작하면 된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만 천천히 변한다. 어떤 것도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아침이 있다는 건, 매일 새로운 시작을 다짐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말. 위안이 되는 말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내일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아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래도 싫은 사람’ 패키지 투어

거리낌 없이 직설을 퍼붓는 린드 아줌마 같은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게 건강하다고 믿는 부류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게 ‘나는 뒤끝은 없다’라는 것인데, 사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는 사람들에게 뒤끝이 있을 리 없다.

 

화를 내지 않는 게 매너를 넘어 약자들에게만 요구되는 부당한 감정 노동이 된 세상이다. 별것도 아닌 것에 참았던 화가 폭발하는 ‘분노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제대로 화를 낼 수 없는 세상이 만든 부작용이다.

우리는 분노의 건강한 기능을 거세당하거나, 상실한 채 살아간다. 마음의 응어리를 풀지 않고 놔두면, 그것이 남기는 무의식의 상처는 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힌다. 화를 내야 할 상대에게 분출하지 못한 짜증은 마치 중금속처럼 우리 몸속에 차곡차곡 불순물로 축적된다. 짜증이나 신경질의 화살은 결국 나를 향하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화를 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중요하다.

 

너는 꽃!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도 스타벅스의 카페라테처럼 테이크아웃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시대에 혁명이란 몸 사이즈가 66에서 44로 줄어들거나, 키가 160에서 170으로 늘어나는 일뿐이다······. 만약 여자들에게 진짜 혁명이란 게 일어난다면 그건 이 지구상에서 빌어먹을 ‘다이어트’ 따위가 영영 사라져버리는 일뿐일 거다. 그래서 뚱뚱한 여자들이 득세하거나, 납작한 가슴을 가진 여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가슴 큰 여자들은 가슴 작은 여자들을 질투하다 성형외과 의사에게 이렇게 외치겠지. 제발. 무식하게 큰 제 C컵을 예쁘고 아담한 A컵으로 바꿔주세요!”

 

마놀로 블라닉 :: 유명 패션 디자이너이자, 해당 디자이너의 이름을 따서 창립한 영국의 명품 구두 브랜드이다.
여성화를 주력 상품으로 생산하며, 여성들이 가장 신고 싶어하는 선망의 신발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는 다른 브랜드의 슈즈도 좋아하지만, 특히 이 마놀로 블라닉에 반쯤 미쳐있는고로(..) 6시즌 내내, 심지어 영화판에서까지 줄기차게 나온다. 실제로도 섹스 앤 더 시티 이후로 매출 볼륨도 상당히 커지고, 유명세를 탔다. 여성들이 결혼할때 자주 신는 신발인 웨딩슈즈로도 유명하다. 물론 남성 신발도 생산하며 대부분 100만원대 이상의 가격을 자랑한다. 여러 디자인이 많지만, 여성 슈즈로는 특히 스틸레토 힐이 예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나무위키] 마놀로 블라닉 [Manolo Blahnik]

 

나는 한때, 미인이 되는 건 예쁜 꽃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장미나 튤립처럼 우아하고 청초한 꽃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아름다움이 그렇게 완성되는 게 아니란 걸 안다. 어떤 꽃이 되느냐는 사실 생각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들어빠진 장미나 말라버린 튤립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중요한 건 할미꽃이든 호박꽃이든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민들레고 제비꽃이라도 그것이 시들고, 활짝 피고는 자신에게 달려 있어요. 닭이 독수리가 되는 게 아니고, 새장 속을 나와 하늘 높이 나는 게 나는 구원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장미가 아니라고 왜 슬퍼합니까? 어쨌든 꽃이잖아요. 꽃이라는 자부심을 갖는 게 중요한 거죠. 우리 같은 신부들이 하는 일은 그 꽃이 뭔지 알려주고 사람들을 꽃 피우게 해주는 거예요.”

 

 

 

2장. 고독을 좋아한다는 거짓말

고독을 좋아한다는 거짓말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같이 있음을 전제하기에 가능한 말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진화생물학 교수인 로빈 던바는 진짜 친구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고 여러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던바의 수’다.

 

던바의 수 :: 던바의 수(Dunbar's number)는 영국의 문화인류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의 이름에서 명명된 것으로, 아무리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은 150명 정도라는 그의 주장을 가리킨다.
로빈 던바는 1970년대에 아프리카에서 수년 동안 야생 원숭이의 집단생활을 관찰했으며, 1992년에는 원숭이, 유인원 등 영장류의 뇌를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의 정보처리 능력은 대뇌 신피질의 크기에 달려 있는데, 이를 고려할 때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의 최대 수치는 150명이 한계라고 추정되었다.
그는 전 세계의 여러 원시부족 사회의 구성원 규모가 평균 153명이었다는 점, 영국 시민이 연말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낼 때 받는 사람의 숫자는 가족을 포함해 평균 150명이었다는 점, 로마시대에는 로마군의 기본 전투 단위인 보병 중대가 약 130명이었고 현대사회에서는 군대의 중대 단위가 130~15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이 이론을 주장했다.
던바의 수 혹은 던바의 법칙이라고 알려진 이 숫자는 공공기관이나 여러 기업에서 150명을 기준으로 조직을 구성하는 등 사회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던바의 이론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많은 후속 연구와 반박이 이어진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던바의 수 [Dunbar's numbe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하는 능력과 그것을 지속시키는 능력은 사실 전혀 별개의 능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든 우정이든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떠날 필요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어쩌면 그것은 진짜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기적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가장한 욕망, 우정으로 포장된 필요가 아니라 진짜 감정 말이다. 나는 종종 그런 관계를 꿈꾼다. 모든 곳에 있고, 어디에도 없는 관계. 그리하여 우리 각자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관계를.

 

고백의 여왕

어쩌면 고백은 ‘말’보다 ‘태도’가 더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면 ‘사랑한다!’는 메시지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 진심을 담아 상대에게 전달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 ‘미안하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태도는 곧 행동이다. 고백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진심을 다해서!

 

사랑에 빠진다면

삶은 내가 원하던 것과 늘 다른 식의 선택을 요구했다.

 

어차피 사는 건 상처를, 굴욕을, 멀어지는 꿈을 감당해내는 일이다.

 

레스토랑 담당 기자였지만 정작 즉석밥과 컵라면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삶이었으니, 말을 말자.

 

이빨가게 내 친구

부모는 종종 자기 불안을 아이에게 투사하고, 자신이 풀지 못한 인생의 숙제를 아이가 반드시 풀어주길 바란다고, 그래서 아이에게 자신이 지고 있던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의도치 않게 넘겨준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조건 없는 사랑처럼 보이는 부모의 사랑조차 폭력이 될 수도 있단 얘길 하면서 그녀는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전직 어린이였다

우리가 사랑이란 명사에 ‘빠졌다’는 조금 특별한 동사를 쓰는 건 사랑이 ‘젖어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망측, 주책, 주접 같은 말은 사랑에 붙이는 주홍글씨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나이나 인종, 성별의 차별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에 대한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 이외의 차별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전직 어린이였다.

 

내 마음의 안전지대

선물이 분에 넘치는 사치품이든, 본인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든, 중요한 건 나를 생각해준 누군가의 관심을 아는 일이다.

 

사랑만이 애착관계를 만드는 건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에 생긴 결핍 때문에 평생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가장 나쁜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제의 카레

습관은 카레향처럼 천천히 몸에 배고, 전염성이 강하다.

 

봄이면 나도 모르게 발가락부터 말랑해진다.

 

마릴라의 엄마 수업

<빨강머리 앤>은 앤의 성장기이면서, 마릴라의 양육일기이기도 하다.

 

사진에는 없는 사람, 아빠

아빠의 시선이 담긴 딸의 사진 속에는 옛 기억들이 띄엄띄엄 담겨 있다. 그 느릿한 시간의 간격들은 이 책의 맥박처럼 아주 천천히 뛴다. 지금처럼 사진들이 넘쳐나고, 너무 많은 현재의 순간이 전시된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보기 힘든 기적 같은 호흡이다. 감정이 메마르고 가족이 그리워지는 밤이라면 나는 이 사진집을 처방전으로 써주고 싶다.

 

아버지란 어쩌면 그런 존재가 아닐까. 자신이 평생 찍은 아이들의 사진 속에, 정작 자신은 등장하지 못하는 사람.  

 

여행이란 끝없이 집으로 되돌아 오는 일

“제게 여행은 늘 도돌이표 같아요~!”

 

여행을 떠나면 역설적이게도 내가 (지겹다고 생각해왔던) 나의 일상을 얼마나 좋아했는가를 훨씬 더 극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 내 여행은 사후적이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방식으로 그때, 그 시간, 그 사람들을 회고하는 형식인 것이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건 예측 밖의 일을 끝없이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여행이란 어쩌면 예상 밖이라 한결 더 즐거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내겐 이런 즐거움의 전제가 있다.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나는 당신의 집을 떠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이제 나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내게 있어 여행이란 끝없이 집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끝없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일이다. 내게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되돌아오는 일이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집에 보고 싶은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 앤에게 마릴라와 매튜가 있었던 것처럼.

 

 

 

3장. 슬픔 공부법

넌 내일도 실수를 저지를걸?

프로이트는 이런 실수를 ‘무의식의 요청’이란 어려운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새로운 실수를 한다는 건 부주의한 탓도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새로운 실수는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앤의 말처럼 중요한 건 한번 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지, 실수 자체를 안 하는 건 아닐 거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잘 안 되는 거다. 중요한 건 실수를 자기 몫으로 감당해내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 위로 받는가

H의 어린시절 얘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썰매에 관한 얘기였다. 겨울이면 한강이 얼던 시절, 초등학생이던 그는 친구와 함께 썰매를 타러 갔다. 친구는 새로 산 썰매를 자랑하며 얼음 위를 신나게 달리다가,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곧 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새 썰매를 자랑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있는 대로 풀이 죽어 있었다. H는 친구를 바라보다가, 미끄러진 듯 물에 빠졌다. 사실 일부러 물에 빠져준 것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친구의 얼굴이 밝아졌다. 심지어 “으하하하!” 웃기까지 했다. 두 친구는 홀딱 젖은 옷을 툭툭 털며 사이좋게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H에게 일부러 물에 빠진 이유를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 나로선 의문이었다. 그때, H가 하는 말이 이랬다.

“인간이 언제 위로받는 줄 알아? 쟤도 나처럼 힘들구나! 바로 비극의 보편성을 느낄 때야.”

 

누군가의 성공담에는 교훈이 있지만 위안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실패에서 위로받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여유’와 ‘자유’를 구별하고, ‘쉬는 것’과 ‘노는 것’, ‘외로움’과 ‘고독’을 세심히 구분해야 한다.

 

앤솔로지 ::  그리스어의 안솔로기아(anthologia: 꽃을 모아놓은 것)에서 유래된 용어로, '선집(選集)'을 의미함
한마디로 '선집(選集)'이다. 서적이라면 편집자가 잡지나 책 등 발표되었던 명작ㆍ걸작 등을 모아 다시 수록한 작품집이다. 음반이라면 그 동안 발표되었던 곡 중에서 좋은 것들만 다시 모아 실은 음반으로 꼭 한 사람의 작품만 모아 놓은 것은 아니고 여러 사람의 작품을 모은 것도 앤솔로지에 해당한다.
앤솔로지는 이 밖에도 장르가 비슷한 서로 다른 프로그램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TV 앤솔로지 프로그램을 52분 드라마라고 칭하는데, 이는 1시간 드라마에서 광고문 등을 뺀 나머지의 방송시간이 52분이라는 데서 생긴 또 다른 명칭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앤솔로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여행을 가고 싶은 건지, 달아나고 싶은 건지, 쉬고 싶은 건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내 상태에 대해 S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셋 다야. 여행을 빙자로 달아나서 쉬고 싶은 게지. 너 번아웃된 거 같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광고 속 유해진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자유란 실질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돈을 버는 이유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 시니컬한 후배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녀에게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사는 건 100퍼센트의 삶이 아니며, 또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 맞추면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해지기 힘들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행복은 완결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 중에 일어나며,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심리학에는 ‘행복의 평균값’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 말은 인간의 행복이 적정선을 넘어서면 더 이상 증폭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행복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 중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것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우리가 의도적으로 해야 할 것은 ‘뭔가 하기 위해’ 달리는 게 아니라, ‘뭔가 하지 않기 위해’ 때때로 멈춰 서는 것이다.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다가 사라지고 남은 쓸쓸한 풍경은 늘 내 마음을 끌었다.

 

길은 소실점까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내 눈앞에서 사라지곤 했다. 그 길의 끝에는 하늘과 땅이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을 것 같았다. 한 시간을 달려도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이런 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내가 도시에서 체득한 시간들이 무의미해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시간은 모든 것을 천천히 바꾼다. 하지만 공간은 많은 것들을 빠른 시간 안에 뒤바꾼다.

사막을 달리다가 충동적으로 차를 세워놓고 길가에 누워 있거나 그저 서 있었다. 방전된 핸드폰 같은 내 몸이 거대한 태양을 집열판 삼아 충전되고 있다고 느꼈다.

 

내 몸 여기저기에 박혀 있던 지독한 고단함은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텅 빈 길을 달리는 동안, 어느 사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의 진짜 의미

꿈과 현실. 그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두부를 자르듯 명확히 잘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살면서 어떤 종류의 고통을 참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을 원한다는 건 그것에 따른 고통도 함께 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이다. 소설가 김훈이 말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지 않고 낚싯밥을 먹을 수는 없다.”

모든 선택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이 선택의 본질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다.

 

지금 이별 때문에 울고 있다면……

한 선생님을 유독 미워했던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 그땐 내가 어려서 선생님의 속마음을 정말 몰랐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내가 그땐 너무 어려서 내 분노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걸 표현하지 못했구나!”란 생각이 먼저 든다. ‘이해할 만하다’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이고 보니, 한결 더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마음속 깊이 ‘방어기제’라는 걸 만든다.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란 말의 본래의 뜻은 ‘누구와도 쉽게 헤어질 수 있다’란 말과 같다.

 

사람은 헤어져야 만난다.

지금 이별 때문에 울고 있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일

“제가 원해서 이 직업을 택한 건 아닙니다. 먹고 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경찰이 된 거예요······. 제가 이 일을 하는 건 유별난 소명의식 때문이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도움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좋아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아닐까.

 

나는 직업을 꿈과 연결시켜 내가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치 실패자인 것처럼 좌절하게 만드는 요즘 세태를 생각했다. 그리고 직업이란 ‘내’가 아니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는 일이란 생각에 이르자, 사람들이 느끼는 ‘자아실현’과 ‘직업’ 사이의 괴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공무원이, 프로파일러가, 아이돌 가수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아이들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이라도 꼭 해주고 싶다. 꿈과 멀어졌다며 사표를 ‘꿈’꾸는 수많은 회사원들에게, 후배와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그것은 너만의 고민이 아니라고. 어쩌면 그것은 이 시대가 만든 병일지도 모르겠다고, 무엇보다 자아 성취는 일이 끝난 후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나는 버리고 떠나는 삶을 존중하지만, 이제는 버티고 견디는 삶을 더 존경한다.

이 시대가 너무 ‘나’를 강조하다 보니 그것이 자기애적인 강박으로 작용하는 것 같단 생각 역시 끝내 지울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의 꿈이 이루어질 수도 없지만, 만약 모든 사람들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아마 이 세상은 엉망이 될 것이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어느 것을 직업으로 선택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조심스럽게 ‘잘하는 일’을 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기 때문이다. 잘하는 것을 오래 반복하면 점점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에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다. 일이 점점 많아진다는 건,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것 이외에 자신의 일에 대한 특정한 태도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태도’란 그 일을 좋아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한때의 빛나는 재능이 훗날의 아픈 족쇄가 되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자신의 꿈을 직업적인 성취로 이루지 못했다고, 꿈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실패자란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으면 한다. 믿거나 말거나 나로 말하면,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꿈을 자기 직업으로 갖게 된 사람들의 지독한 불행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꿈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이 세상에 ‘삶’보다 강한 ‘꿈’은 없다. 인간은 꿈을 이룰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꿈꿀 수 있을 때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약이 아니다

추억이 기억과 다르다면, 그런 것 때문이리라. 추억 속엔 ‘나’ 아닌 ‘너’도 있다. 추억은 ‘우리’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비는 그칠 것이다. 눈은 잦아들고, 바람은 지나갈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조차, 좌표를 바꾸며 끊임없이 변한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바꾼다. 하지만 지금의 앤에게 슬픔을 참으라고 말하지 않겠다. 슬픔은 참아서 잊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약이란 말도 하지 않겠다. 아직 슬프다면 더 울어야 한다. 눈물이 더는 흐르지 않는 시간이 되면, 얼마간 담담해진 얼굴로 피어 있는 꽃도 보고, 반짝이는 달도 별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처가 회복된다고 해도, 인간에겐 흔적이 남는다. 우리는 그것을 흉터라 말한다. 흉터를 안은 채, 죽지 않고 살아내는 것, 견디거나 버티는 것, 어쩌면 삶은 그런 것에 보다 가까울지 모른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는 건 어쩜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일는지도······. 벚꽃이 바람에 비처럼 흩날린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4월이다.

 

마릴라가 이해되는 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들 속에서도 낡아가는 시간의 주름을 본다고. 눈에 보일 리 없는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리 없는 것들이 들리기 시작하면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고 말이다.

 

사람을 빠르게 치려다 오타가 나면 삶이 된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들은 실은 사람들이 수없이 내고 있는 오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린 시절에 열심히 보던 종이접기의 달인 김영만 아저씨가 텔레비전에 나와 하는 말을 듣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어린이 여러분! 참 잘 자라주었어요. 걱정 말아요.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앤은 꽃처럼 피어났고 마릴라는 낙엽처럼 저물었다. 나의 앤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오늘은 마릴라에게 더 눈물나게 고마운 밤이다.

 

슬픔 공부법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은 익숙하고 사랑하던 무언가를 잃었을 때다.

인간은 수익으로 얻는 기쁨보다 손실로 얻는 슬픔을 훨씬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수치로 계산해 ‘손실 이론’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이론에 의하면 뭔가 얻었을 때 느끼는 기쁨에 비해 손실에서 느끼는 슬픔이 인간에게 2.5배 정도의 충격을 더 준다.

 

그러므로 살면서 슬퍼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슬픔을 슬픔 이외의 것으로 회피하는 게, 정신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 자주 봐왔다.

 

슬픔을 슬픔 이외의 것으로 뒤섞지 말아야 한다. 슬픔을 분노로 바꿔 왜곡시키면 스스로 애도의 시간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슬픔은 제대로 다뤄졌을 때에만 시간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진다. 자기 안에 있는 감정들을 분리해 다독인다는 건, 나 자신을 아끼고 돌보는 행위이다.

 

기운이 날 것 같지 않고, 나게 하고 싶지도 않다면, 슬픈 채로 있는 게 낫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이고, 울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무게는 덜어내는 게 아니다. 흘러 넘쳐야 비로소 줄기 시작한다. 그래야 친구들이 다가오고, 함께 슬퍼할 수 있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에야 슬픔은 끝난다.

 

눈물을 멈출 수 있는 건 나 자신 뿐

자기 몸 움직여 밥 먹을 정도의 힘만 있어도, 사람은 어찌 됐든 살아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그 옆에서 밥을 씹어 삼킬 수 있는 게 어쩌면 삶이다. 나는 이제 ‘절대’라거나 ‘결코’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잘 믿지 않게 되었다. 절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이럴 수도 있는 게 인생이었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간신히 이해한 삶이다.

 

 

 

4장.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철벽녀와 B형 남자가 만났을 때

적지 않은 사랑이 오해에서 시작되는 건 왜일까. 특히 문학과 영화는 처음의 오해가 이해가 되는 순간의 기적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사랑의 불가해성과 위대함을 속삭인다.

 

사랑에 빠진 이유와 결별의 이유가 같을 때

내가 아는 가장 큰 사랑의 기적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좋아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두 사람이 연애를 한다 해도, 언제나 시차와 낙폭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외톨이로 초등학생 시절을 보낸 후, 나는 사는 게 지루하고 외로워서 거울을 보고 웃는 연습을 했다. 그 시절의 부작용이라면, 슬플 때조차 웃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정도. 웃음은 오랫동안 가면처럼 내 얼굴에 들러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사후적인 고백이란 뒤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얼마나 난감한가. 차라리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게 나은 편지도 있다.

 

연애란 인간관계의 압축판이고, 그것의 본질은 끊임없는 질문이다.

 

함께 있을 때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지 않아도 좋은 사람. 조금 더 정확히 말해, 함께 있지 않음이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은 사람이 내겐 최고의 상대다.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결핍을 누군가가 끝내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결핍 안에서 공기가 되어 서로를 옥죄지 않고, 숨 쉬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위성처럼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힘이 되고 따뜻해지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그들을 보며 세상에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연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수긍했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애인이 될 만큼의 강렬함은 아니었지만, 타이밍 때문에 어쩌다 연인이 되어버린 사람들.

연애에 있어 타이밍은 얼마나 중요한 걸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 걸까, 아니면 그 순간 그 사람이 우연히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걸까.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거의 전부가 아닐까. 시간은 죽도록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게도 만들고, 정말 싫어했던 사람을 좋아하게도 만든다. 사랑이 타이밍이 아니다. 타이밍 자체가 사랑이다. 누가 더 많이 사랑하고, 누가 더 오래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많은 연인들을 시작하게도, 이별하게도 만든다.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어째서 우리는 이기적이고, 못되고, 나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걸까? 더 씁쓸한 건 이런 못된 사람들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가장 강렬한 교훈을 남기며 떠나간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마음 아픈데, 인생 교훈까지 독점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어째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들은 이리도 이기적이고 못됐을까.

 

우리가 나쁜 사람과 종종 사랑에 빠지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다. 사랑이 끝나야 비로소 그 시작을 가늠해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처음으로 나란 사람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정말 중요한 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물러나야 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나에게 결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 말이다.

 

싫다고 거부해도 슬픔과 질투를 빼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듯.

 

19세기와 21세기 연애의 공통점

2009년 구글의 수장이었던 ‘에릭 슈미트’는 기억에 대한 기념비적인 말을 남겼다.

“당신한테 아무도 모르길 바라는 일이 있다면, 애초에 그걸 하면 안 되는 거겠죠.”

 

당신은 나를 사랑하면 안 됩니다?

그루밍 ::  「몸치장・옷차림」또는 「손질」이라고 하는 의미로서 「단정한 몸가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그루밍 상품이라고 한다면 손질을 위한 화장품이나 도구 등을 말하며, 매니큐어 세트나 손톱깎기, 코털깎기, 면도칼 등이 포함된다. 정확히 그루밍 에이드라고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루밍 [grooming] (패션전문자료사전, 1997. 8. 25., 패션전문자료편찬위원회)

 

“여보! 함께 별을 보아요.”

하지만 그가 육아에 지친 아내를 위해 자신의 자동차 지붕 위에 담요를 깔 때, 나는 감사했었다. 하늘이 무너질 듯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그가 아직 별을 헤아리는 남자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것은 20년 전, 누구도 보지 못한 ‘한 남자의 반짝거리는 한때’를 지켜봤던 내 청춘과도 맞닿아 있었다.

 

마음먹는 게 힘든 사람은, 그 마음을 거두는 것에도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다.

 

싫다고 해서, 견디기 힘들다고 해서, 만약 사랑에 외로움이나 질투 같은 감정을 뺀다면 그게 여전히 사랑일 수 있을까?

첫사랑이 너무 잘 살면 배가 아프다. 하지만 첫사랑이 너무 못 살면 가슴이 아프다. 배 아프면 먹을 약이라도 있지만, 가슴 아픈 데 장사 없다. 첫사랑, 당신이 잘 살아서 다행이다.

 

실연 수당

만나는 건 아주 가끔 쉽게도 만나지는데, 어째서 헤어지는 건 이렇게 매번 힘이 드는 걸까.

 

만약에 말이다. 회사에 실연 수당 같은 게 있다면 어떨까. 뭐, 많은 액수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영화 한 편 보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조용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혼자 점심을 먹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오전 업무를 마치면 오후에 반차 휴가를 주는 거다. 무엇보다 내 이별을 회사도 공식적으로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좀 덜 외롭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는 소설가 트루먼 커포티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세상의 모든 일들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는 말이다.

 

아주 지루한 연애, 결혼!

결혼도 연애다. 아주아주 지루한 연애다. 우린 삶의 지루함을 즐겨야 한다.

 

나는 세상 그 어떤 연애도, 연애를 하지 않는 쪽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실패에서 배운다

 

나는 어릴 적 한 남자를 만나, 그 남자만 바라보며 일평생을 사는 연애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연애가 첫사랑의 변주로 진행되는 연애 말이다. 한 남자를 통해 우주를 느끼고, 한 여자를 통해 인류의 보편성을 보게 되는 위대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인간은 다양한 실패를 통해서 성숙한다고 믿는다.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내 아이에게 실패할 기회를, 그래서 그것을 가슴에 새길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이다. 아이에게 실패에서 배울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는 부모만큼 잘못된 사랑은 없다고 믿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불이 뜨겁다고 말한들, 직접 손을 데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불은 그냥 불일 뿐이다. 설혹 그때 운이 좋아 불을 피한다 해도, 언젠가 그 불은 자식의 손에 치명적인 화상을 남길 재앙이 된다. 차라리 어릴 때 겪는 편이 낫다. 훨씬 더 낫다. 10대와 20대의 실패는 실수일 뿐이다. 정말이다. 그러니까 연애해라. 그냥 사랑하게 놔둬라. 우리 엄마 식으로 말하면 헤어질 사람들은 ‘지들이 다 알아서’ 헤어진다.

 

앤에게 주는 주례사

결혼은 왜 할까? 판단력이 부족해서.

이혼은 왜 할까? 이해력이 부족해서.

재혼은 왜 할까? 기억력이 부족해서.  

 

“결혼이란 건, 말하자면 앞으로 저 사람이 네게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온갖 고통을 주게 될 텐데, 그 사람이 주는 다양한 고통과 상처를 네가 참아낼 수 있는지, 그런 고통을 참아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네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될 거야. 살아가는 동안 상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누가 주는 상처를 견딜 것인가는 최소한 네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해야만 해. 그러니까 이 남자가 주는 고통이라면 견디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혼해. 그러면 최소한 덜 불행할 거야. 물론 행복을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은,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라면, 때때로 견디는 일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될 거란 얘기야!”  

 

“네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이 뭔지 아는 게 중요해. 왜냐하면, 그것만은 피해야 하니까! 그게 인생의 마지노선이 되는 거야. 그걸 알고 나면 최선이 아닌 차선도 견딜 만해지거든.”

 

에크하르트 툴레가 한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

“불행해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 것이다.”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길버트가 ‘홍당무’라고 앤을 놀린 사건 이후, 이들은 5년 동안이나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듯 스쳐지나간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철저히’라는 말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좋든 싫든 그것이 관심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백만이 용기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사는 건 정말 못나고 틀린 방식의 사랑인 걸까? 언제부터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시간이 무르익길 견디는 것을 시간 낭비며 용기 없음이라 규정하게 된 걸까.

여행을 자주 다니던 한 남자가 내게 고백에 대한 흥미로운 얘길 해준 적이 있다. 그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고백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은 관계에 필요한 시간을 비용으로 치를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고백으로 그 사람의 시간을 빨리 선점하고 싶은 마음이 쉽게 고백하게 한다는 것이다.

고백의 반대편에는 어떤 말이 놓여 있을까? 나는 그것을 ‘포기’라고 말하는 대신,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다림은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라, 사람을 천천히 성숙시킨다. 우리가 밥을 지을 때 반드시 뜸을 들여야 설익지 않는 것처럼 그들 역시 시간을 견뎌낸 것이다.

 

앤과 길버트가 서로의 마음을 알기까지 걸린 시간이 5년이라고 해서, 그것이 답답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득 좋아하는 누군가를 마음으로 기다리는 일은 어쩌면 인생을 걸고 해볼 수도 있는 멋진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침묵의 기술

그때의 앤이 그리운 건, ‘영원히’란 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순간, 우리의 서정 시대 또한 끝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앤은 이제 침묵이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대화의 가장 아름다운 형식이란 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가 『침묵의 세계』에서 말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항상 제삼자가 듣기 마련이며, 그 제삼자가 바로 침묵이다.”라는 말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어둠이 없으면 빛이 없고,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깊다. 쓸쓸한 마음이 든다는 건 고독을 알게 되었단 뜻이다. 하지만 고독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랑 또한 알게 될 것이란 점에서, 그건 정말이지 좋은 일이라는 것.

 

 

 

5장.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한다

디지털 디톡스

하지만 그런 일은 결국 ‘벌어지고야’ 만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때론 멋지다.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들기도 하고, 오독이 더 멋진 해석을 낳기도 한다.

 

안 되는 걸 하려니까 슬펐던 날

소치 동계 올림픽 때 내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었던 건, 김연아의 아름다운 트리플 점프가 아니라 아사다 마오의 트리플 악셀 실패였다. 나는 마오가 얼음판에 크게 엉덩방아 찧는 장면을 유심히 살펴봤다. 스포츠 경기의 특성상 ‘마오의 엉덩방아 영상’은 몇 번이고 반복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결국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만’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마오의 트리플 악셀은 실패율이 높았다. 모 아니면 도. 그런데도 마오는 무모할 정도로 그것에 집착했다.

그러다가 스케이터 이규혁의 인터뷰를 봤다. 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매번 실패하고, 은퇴를 번복했던 그가 기자에게 했던 말이었다.

“안 되는 걸 하려니까 슬펐어요.”

안 되는 걸 하려니까 슬펐던 경험.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매번 문학 공모에서 떨어졌지만 그래도 소설을 써야만 살아지던 시간 말이다. 13년이니까 올림픽을 세 번 나가고도 1년이 더 남는 시간이었다. 간절한 꿈이 악몽이 되는 건 아마도 이런 순간이 아닐까. 그때의 삶은 ‘산다’가 아니라 ‘견딘다’쯤으로 치환된다.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답한다. 아마 다음 번 월드컵 때, 나는 골을 넣으며 환호하는 선수보다 상대편 골키퍼나 선수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될 거라고. 악전고투 끝에 내가 작가가 된 건 그런 삶의 이면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기쁨보다 슬픔에, 성공보다 실패에 먼저 접속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어쩌면 별 쓸모없는 능력 말이다.

누군가의 성공 뒤엔 누군가의 실패가 있고, 누군가의 웃음 뒤엔 다른 사람의 눈물이 있다. 하지만 인생에 실패란 없다. 그것에서 배우기만 한다면 정말 그렇다. 성공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이지만,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성공인 실패도 있다. 나는 이제 거창한 미래의 목표는 세우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란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작고 소박한 하루하루.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나. 오늘도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 조금씩, 한 발짝씩, 꾸준히······.

 

어른의 시간

앤이 앨런 부인에게 입시 합격 발표에 대해 불안감을 토로하며 조언을 구할 때, 이 우아한 목사 부인이 하는 말들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혹은 ‘너만 힘든 거 아니야!’ 같은 말이 아니라 좋았다. 그녀의 조언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란 점에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했다. 가령 “합격 여부가 신문에 났는지 확인하러 우체국에 가는 걸 그만두는 건 어때?” 같은 충고가 그렇다. 전문가들은 나이 들어서 꼰대가 되지 않는 지름길 중 하나가 앨런 부인처럼 ‘권유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자든 편집자든 카피라이터든 텍스트를 오랜 시간 반복해서 읽고 쓰다 보면 행간의 느낌들을 잘 읽게 된다. 그런 전문가들이 가장 쉽게 하는 실수가 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한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혹독하게 평가하는 것.

 

좋게 말해 전문성이지만, 나쁘게 말해 결벽증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믿고 맡겨야 할 일에 시시콜콜 참견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좋은 관리자나 좋은 부모의 특징은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덜 참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디테일에 집착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나 균형을 바라보면서, 꼭 나서야 할 곳에만 나서는 중용의 묘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실수에서 배우고, 그 실수가 혹독할수록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옥상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떠들어봐야, 떨어져본 사람만이 그 높이를 몸에 새기는 것이다.

 

충고는 그것을 청한 사람에게만 하자. 나이 운운하면서 섣불리 내 경험을 일반화시키지 말자. 조언을 한 뒤에는 그냥 잊자. 충고를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는 그것을 듣는 사람 마음이다. 말하는 것보다 점점 듣는 즐거움을 깨닫자. 옛 말 틀린 거 없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하느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한다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하는 거구나.

 

사람은 변할까. 변하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사람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은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변하지 않아서 좋았다’는 말보단, ‘변해서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변했다는 건 뭔가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얘기일 거다. 발음이 괴상한 외국어 배우기를 시도하고, 낯선 나라의 음식을 먹어보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보는 것 말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것들

자본화된 세상에서 이동은 결국 돈의 문제일 가능성이 많다. 거주 이전의 자유라는 말의 이면에는 줄어드는 직장이나, 치솟는 집값 때문에 쫓겨가야 하는 누군가의 현실이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경은 효율성이다. ‘시간관리’는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다. 하지만 시간을 단축해주는 많은 도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시간 부족 현상에 시달린다.

 

중요한 건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에 대한 개인의 느낌이다. 6시간을 자도 충분히 잤다고 느끼는 사람과 10시간을 자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물리적인 시간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해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그즈음이었다.

 

학자들은 우리가 어떤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그 시간에 대해 우리가 갖는 느낌이라고 강조한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곧 우리의 현실이다.

 

스티브 잡스는 집중을 ‘다른 좋은 아이디어 수백 개를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역할의 과부하든, 시간의 파편화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가 잃는 건 몰입의 즐거움이다. 그네를 타고 놀거나 흙장난에 집중하는 아이는 시간을 잊는다. 피아니스트는 시간을 잊고, 발레리나는 춤 속에서 자신조차 잊는다. 우리는 순수하게 몰두해 시간이 사라지는 감각이 무엇인지 점점 잃어가고 있다.

 

열심히 노력했으나 진다는 것

원인과 결과는 대부분 퍼즐처럼 맞춰지지 않는다.

 

가수가 되거나 연기자를 바라는 아이들의 꿈 너머에는 수많은 보컬 학원과 연기 학원들이 있다. 바리스타 학원, 항공승무원 학원, 미술학원······. 꿈꾸는 청춘들 뒤에는 늘 그들의 꿈과 열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앎’을 ‘공부’로 ‘공부’를 다시 ‘교육’으로 바꾸면 벌어지는 일이다.

누군가의 꿈이 다른 누군가의 밥벌이가 되는 구조. 어른이 되며 내가 목격한 꿈은 그렇게 퇴색되어갔다. 적어도 그것이 ‘꿈=직업’이란 의미를 갖게 되는 순간 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건 분명 문제가 있었다.

 

재능은 균등히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회는 우연에 의지할 것이다. 

꿈이 악몽이 되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간절하면 할수록 악몽의 내용은 더 끔찍해질 것이다. 

예술은 불공정과 불공평의 세계이다.

 

한때 나는 노력이 의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늘 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의지박약이란 말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이젠 노력이 일종의 ‘재능’이라는 걸 안다. 노력은 의지가 아니다. 노력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재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특별한 재능 말이다.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 대체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걸까. 왜 이 세계의 멘토들은 ‘그래서 죽도록 노력해봤냐?’라는 질문을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던지는 걸까. 제아무리 애쓰고 노력했는데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왜 말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알아야 것은 노력 이후의 삶이다.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노력해서 가장 좋은 건 이기는 게 아니다. 노력해서 가장 좋은 건 지지 않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20년 안에 현존하는 직업의 48퍼센트가 사라질 것이라 예상한다. 나는 이토록 빠르게 변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는 ‘지속 가능한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면서 언제나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이긴다는 건 지속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이기는 법이 아니라, 지지 않는 법에 대해서 익혀야 한다. 더 나아가 ‘지는 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막연한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을 선택하는 편이 옳다. 실패도 잘해야 다음 성공의 초석이 될 수 있다. 지는 것 역시 그렇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무엇이 인간답고, 무엇이 나다운 마지막일까. 일본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간 이후,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을 가장 열심히 살아간다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은 정확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장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잘 웃는 할머니로 늙는다는 것

“나는 일본 아줌마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다. 선전에 휘둘린 것도 아니고 잘난 평론가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아줌마들은 스스로 한국 드라마를 발견했고, 땅속 마그마처럼 쓰나미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한류를 띄웠다. 그러고는 창피고 체면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흠뻑 빠져서 일본을 바꾸어놓았다. 아줌마는 자각이 없다. 미처 다 쓰지 못한 감정이 있던 자리가 어느새 메말라버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서야 그 빈자리에 감정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 드라마를 몰랐다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인생이 다 그런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브라운관 속, 새빨간 거짓말에 이렇게 마음이 충족될 줄 몰랐다. 속아도 남는 장사다!”

 

사노 요코가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를 사는 장면이다. 마치 슈퍼마켓에서 좋아하는 초콜릿 한 봉지를 사는 기분으로 말이다. 물론 산 지 일주일 만에 재규어는 주차 미숙으로 여기저기 긁히고, 줄기찬 새똥의 공격으로 똥차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암이 생기자 그녀는 해보고 싶었던 일을 죄책감 없이, 마음껏 해버린다.

 

언니는 길을 걷거나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느닷없이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는 뇌혈관 질환과 다르게 암은 최소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암이 착한 병이라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젊음을 삶의 맨 마지막에 놓을 수 있다면

죽는 슬픔이 있으면 태어나는 기쁨이 있다. 늙음이 있어야 젊음도 있다.

 

길이 달라진 우정은 이제 멀어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제야 버나드 쇼의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라는 말을 납득한다. 젊음은 스스로 너무 반짝여서 다른 존재들의 반짝거림을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봄에 피어나는 꽃이 얼마나 예쁜지, 가을의 단풍을 보는 기쁨이 얼마나 가슴 아린지······. 젊음은 스스로 너무 심각해서, 삶이 때때로 농담을 던지듯 가벼워야 하는 무엇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젊음이 인생의 처음에 놓여 있는 건 아무래도 인간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가 아닐까. 톨스토이의 말이 맞다. 내가 신이라면 나 역시 청춘을 인생의 맨 마지막에 놓겠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토록 푸릇한 청춘이 놓여 있다면, 삶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만약 12월 31일에 창문을 열었는데, 창밖으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고, 눈보다 하얀 벚꽃이 피어 있고, 그 위로 애벌레에서 나비가 된 호랑나비들이 날아다닌다면 우리는 그 해의 마지막을 따뜻한 희망 속에서 마무리 짓지 않을까.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 더 깊게 빠져들자

나는 행복을 ‘다행’이라 바꿔 부르는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돈을 버는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안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안다. 불과 몇 년 전의 나는 불행해지지 않는 것보다 행복해지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젠 어쩌면 꼭 그런 게 아닐지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행복’이 ‘행운’과 관련 있는 말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종종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해야 하지만 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 말하게 된다.

 

나는 이제 ‘결핍’을 채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과잉’을 덜어내는 쪽이 아닐까란 생각도 한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면 사는 게 한결 편해진다. 실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뀐다. 시간이 하는 일은 대개 속도가 느려서, 다만 자신도 모르게 바뀌어 있을 뿐이다.

 

헤어짐을 감당해내는 순간, 우리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 어차피 헤어질 테니까 대충 사랑하자가 아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 더 깊게 빠져들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의 달콤함은 현실의 쓰디씀에 대한 인정과 감당 안에서 꽃피는 것이라고.

 

 

 

에필로그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이 전환점을 돌면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난 그 뒤엔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

 

“누구에게나 두 개의 인생이 주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 인생은 삶이 한 번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We all have two lives. The second one begins when you realize we only have one).”

 

“앤, 내가 살아보니 꼭 그런 건 아니야······.”

살아보니 앤의 말이 다 맞는 건 아니었다. 그건 소녀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된 내가 같지만 다른 사람이기도 하단 반증이었다. 그러나 앤의 말은 내게 언제나 ‘간절히!’ 맞길 바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다고,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과거도 바뀔 수 있다는 걸 이젠 안다. 정확히 말해 과거의 ‘의미’는 내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변한다. 나는 과거가 뒤바뀐 사람들을 줄곧 관찰해왔다. 성취가 실패로, 상처가 성숙으로, 행운이 불행으로, 분노가 기쁨으로 말이다. 내가 SNS의 자기 소개란에 곧잘 작가란 말 대신 ‘상처 수집가’, ‘눈빛 탐험가’라고 쓰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사는 이유다.

 

인생이 딱 한 번뿐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 정말 중요한 건 어떤 일을 그냥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읽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난 이후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길 바란다.

 

나는 앤이 스테이시 선생님께 보내는 감사의 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사람의 앞길엔 언제나 구부러진 길모퉁이가 있기 마련이군요. 새로운 길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 앞에 무엇이 보일는지, 전 거기에 희망과 포부를 품고 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듯이 보이는 이 길을 꼬불꼬불 꼬부라지면서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하자, 넓은 지평선을 향하여 힘차게 내달리던 시절에 비하여 주변의 아름다움이며 흐뭇한 인정을 맛보는 일이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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