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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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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어릴 때부터 성격이 어두워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할지, 그는 오늘도 고민이다. 이런 그의 고민에 “인간은 변할 수 있고,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알프레드 아들러다.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일본의 1인자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베스트셀러 작가인 고가 후미타케의 저서로, 아들러의 심리학을 ‘대화체’로 쉽고 맛깔나게 정리하고 있다.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한 철학자와 세상에 부정적이고 열등감 많은 청년이 다섯 번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행복한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첫 번째 밤부터 다섯 번째 밤까지의 순서로 진행되는 동안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는 점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재미를 더한다. 특히 철학자의 주장에 이어지는 청년의 반박은 공감대를 한껏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시대를 읽는 유쾌한 문화심리학자이자 《남자의 자격》, 《에디톨로지》의 저자 김정운 교수가 감수를 맡아 내용의 깊이까지 더해졌다.
저자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출판
인플루엔셜
출판일
2014.11.17

 

0.

 감수 및 추천의 말 –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에 현재의 내 인생을 맡길 수는 없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 187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헝가리계 유대인인 아들러는 어렸을 때 폐렴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고 동생 또한 병으로 죽자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95년 의사가 되었다. 190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주최하는 정신분석학회 '수요모임'에 초대되어 프로이트, 융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 수요모임은 훗날 '빈 정신분석학회'로 발전하였고, 아들러는 1910년 학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학설 상의 이견을 보여 결별하고, 1912년 '빈 정신분석학회'에서 8명의 회원들과 탈퇴하여  '개인심리학회'를 결성하였으며 연구 활동의 결과물로 만들어낸 저서 《신경증 기질 The Neurotic Constitution》을 발표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빈을 중심으로 아동 정신병원 22곳을 열었으나 1932년 아들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폐쇄되었다. 1927년 이후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초빙교수를 역임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여러차례 대중 강연을 한 경력이 인정되어 이후 미국의 롱아일랜드 의과대학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성(性)본능을 중시하는 프로이트의 설에 반대하여,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존재에 보편적인 열등감 ·무력감과 이를 보상 또는 극복하려는 권력에의 의지, 즉 열등감에 대한 보상욕구라고 생각하였다. 나폴레옹은 키가 작았기 때문에 위대해졌고, 색약(色弱)은 간혹 대(大)화가를 만들어 낸다는 '열등콤플렉스'라는 용어를 고안해 내기도 하였다. 신경증의 생성, 가정에서의 인간관계, 경쟁을 본질로 하는 현대문화 등에 관하여서도 고찰하였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개인의 성격의 형성은 힘이나 개인적 강화욕구, 사회적 감정과의 일치욕구라는 두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 개개인은 두 가지 요소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독특한 성격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주요 저서로는 《신경쇠약의 특색에 관하여 Über den nervö sen Charakter》(1912) 《개인심리학의 이론과 실제 The Practice and Theory of Individual Psychology》(1924) 《삶의 과학 The Science of Living》《의미있는 삶 What Life Could Mean to You》《인간 본성의 이해 Understanding Human Nature》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프레트 아들러 [Alfred Adler] (두산백과)

 

 트라우마와 같은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특정 한 사건만을 선택해 현재 자신의 복잡한 문제를 합리화하려는 아주 ‘저렴한 시도’라는 것이다. 어떻게 과거의 트라우마적 경험이 현재의 내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도록 놔둘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주장 또한 명확하다. 한마디로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의 꿈과 목적을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다가 만약 미래의 꿈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도 던진다. 설사 미래의 꿈이 이뤄진다고 해도 그 꿈을 위해 희생한 그 숱한 ‘오늘’은 내 인생이 아니냐는 물음이다.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점(點)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이라는 주장이다. 지금, 현재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에 춤추듯 즐겁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시작하며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테제(These) :: 정립(定立).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인식이나 사물은 ‘정(定)-반(反)-합(合)’이라는 3단계를 거쳐 전개된다고 했다. 테제는 이 중 ‘정(定)’에 해당하는 것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명제 또는 사물 발전의 최초의 단계를 뜻한다.

 

 ‘세계’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자네’가 세계를 복잡하게 보고 있기 때문일세.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물물의 온도는 1년 내내 18도를 유지한다네. 이것은 누가 측정하든지 간에 똑같은 객관적인 수치지. 하지만 여름에 마시는 우물물은 차갑게 느껴지고, 겨울에 마시는 우물물은 따뜻하게 느껴진다네. 온도계는 늘 18도를 유지하지만 여름과 겨울에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이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하는 착각이 아닐세. 그때 ‘자네’가 우물물이 차갑다거나 따뜻하다고 느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네.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거지. 문제는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자네가 어떠한가 하는 점이라네.

 

 어쩌면 자네는 선글라스 너머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상태에서는 세계가 어둡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다면 세계가 어둡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선글라스를 벗으면 되네. 맨눈에 비치는 세계는 강렬하고 눈이 부셔서 절로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르네. 다시 선글라스를 찾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선글라스를 벗을 수 있을까?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그게 관건이지.

 

 

 

1. 첫 번째 밤 -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알려지지 않은 ‘제3의 거장’ 

 개인심리학 :: 아들러가 직접 붙인 명칭으로, 아들러는 인간을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로 보고 각각의 개인은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들러와 프로이트는 대등한 연구자로서 관계를 맺었네. 이 점이 프로이트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던 융과는 다르지. 보통 심리학이라고 하면 프로이트와 융의 이름만 거론되는데, 세계적으로는 프로이트, 융과 나란히 3대 거장으로서 아들러의 이름도 반드시 언급된다네.

 

 상식(common sense, 공통감각) :: ‘common sense’는 원래 ‘공통감각’이란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했다. 공통감각이란 ‘모든 감관에 공통되는 감각’을 말하며 라틴어로는 센서스 코무니스(Sensus Communis)라고 한다. 이후로는 내적 감각, 사회적 감각, 연대성 감각, 공동 정신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는데, 공통된(communis) 판단력(sensus)이라는 의미의 ‘상식’ 혹은 ‘양식’이란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의 사건이 인간의 ‘현재’를 규정한다면,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해보게.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란 사람은 모두 자네의 친구와 같은 결과, 즉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야 앞뒤가 맞지 않겠나? 과거가 현재를 규정한다, 원인이 결과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런 거라네.

 과거의 원인에 주목해서 상황을 설명하려 든다면, 모든 이야기는 저절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되네. 즉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는 전부 과거 사건에 의해 결정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지.

 

 현재와 미래는 과거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이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본다네.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히키코모리 친구는 ‘불안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세. 거꾸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바깥에 나갈 수 없다’라는 목적이 먼저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불안과 공포 같은 감정을 지어내는 거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목적론(目的論)’이라고 한다네.

 그렇다고 그것은 꾀병이 아닐세. 그 친구가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진짜니까. 하지만 그런 증상도 마찬가지로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어낸 거라네.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카운슬러나 정신과 의사는 그저 “당신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과거의 그 일에 원인이 있다”라고 지적할 뿐이야. 나아가 “그러니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라고 위로하는 걸로 그치지. 쉽게 말해 트라우마 이론은 원인론의 전형일세.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하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 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가령 ‘나는 부모에게 학대받아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네. 

 밖에 나가지 않고 내내 방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부모가 걱정을 해주지. 하지만 집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외 다수’가 돼.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눈에 띄지 않는 ‘나’, 남보다 못한 ‘나’가 되는 거지.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네.  

 

 인간은 분노를 지어낸다 

 어제 자네가 우연히 흉기를 소지했는데 화가 나서 상대를 찔렀다고 해보지. 그런 경우에도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극단적이지 않네. 자네 논리대로라면 화가 나서 저지른 범행은 전부 ‘화’ 때문이지. 당사자의 책임이 아닐세. 

 자네는 ‘화가 나서 큰소리를 낸 것’이 아닐세. 그저 ‘큰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이지. 다시 말해 큰소리를 내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 걸세.

 일부러 큰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로 설명하면 웨이터는 정중하게 사과했을 테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주는 등 조치를 취했을 것이네. 아니면 세탁소에 옷을 맡겼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자네는 그가 그렇게 하리란 것을 마음속으로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지만 자네는 큰소리로 화를 냈지. 말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서 저항하지도 않는 상대를 더 값싼 수단으로 굴복시키려고 한 것일세. 그 도구로 분노라는 감정을 동원한 것이고.

 

 어느 날, 엄마와 딸이 큰소리로 말다툼을 벌였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지. “여보세요?” 엄마는 당황해서 수화기를 들었는데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의 감정이 남아 있었지.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딸의 담임선생이었네. 그걸 안 순간 엄마의 목소리는 정중한 톤으로 바뀌었지. 그리고 그대로 격식을 차린 채 5분가량 담소를 나누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네.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딸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요컨대 분노란 언제든 넣었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라네. 전화가 오면 순식간에 집어넣었다가 전화를 끊으면 다시 꺼낼 수 있는.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해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야. 그저 큰소리로 딸을 위압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 자기의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한 걸세.

 목적론이란 그런 걸세.

 

 과거에 지배받지 않는 삶 

 누구나 감정은 있어. 당연하지. 하지만 만약 ‘인간은 감정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다’라고 한다면, 그 의견은 결코 수용할 수 없네. 우리는 감정에 지배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닐세. 그리고 인간은 ‘감정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또한 ‘과거에도 지배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들러 심리학은 허무주의와 대치되는 사상이자 철학이라네.

 

 문제는 ‘무엇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

 과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유효한 수단도 써보지 못한 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 결과 어떻게 될까? 나를 둘러싼 세계에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하며 살다가 결국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pessimism)에 빠지게 되겠지. 트라우마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형태만 다른 결정론이자 허무주의의 입구일세.

 가능성을 생각하게.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원인론에 근거한 가치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연히 목적론에 입각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일세.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아들러 

 답이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쓴 책은 한 권도 남기지 않았지. 아테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과 노상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벌였을 뿐. 그의 철학을 저작이라는 형태로 후세에 남긴 사람은 제자인 플라톤이었어. 마찬가지로 아들러도 저술활동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네. 대신 빈의 카페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작은 토론모임에서 의견 나누기를 즐기던 인물이었지.

 

 당신은 ‘이대로’ 좋습니까? 

 그 친구처럼 되면 행복할 것 같다. 그 말은, 자네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거로군?

 나는 적어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이런 나’임을 받아들이고 있네.

 아무리 Y처럼 되고 싶어도 Y로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네. 알겠나? 자네는 Y가 아니야. 자네는 ‘자네’로 살면 되는 걸세. 하지만 ‘이대로의 자네’로 살아도 괜찮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네.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대로’ 괜찮을 리가 없지. 그 자리에 있지 말고 한 발짝 앞으로 나가야 하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가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나의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것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집착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나? 우리는 교환이 가능한 기계가 아닐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야.

 자네는 지금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네. 삶이 힘들게 느껴지고, 심지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하지만 지금 자네가 불행한 것은 자네 손으로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일세.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 하나 악을 원하는 자는 없다”

 

 역설(Paradox) ::  ‘모순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진술’이다. 소크라테스는 모순되거나 해결 불가능한 역설 등을 통해 상대방이 논리의 모순이 있음을 자각시키는 논의를 즐겨했다. 즉 상대방을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의 상태’에 빠뜨린 다음 논리의 모순을 자각하게 했다. 그리스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다만 소크라테스 본인이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란 말은 사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후에 제자들이 붙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분명히 행위로서의 악은 숱하게 존재하네. 하지만 어떤 범죄자든지 순수하게 나쁜 짓을 하려는 의도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네. 모든 범죄자에게는 범행을 저지를 만한 내적인 ‘마땅한 이유’가 있지. 가령 금전에 얽힌 원한 문제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세. 이것도 당사자에게는 ‘마땅한 이유’이자 ‘선(善)’의 수행이라네. 물론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선이지만.

 그리스어로 선을 뜻하는 ‘아가톤(agathon)’이란 단어에는 도덕적 의미 외에도 ‘득이 된다’라는 의미도 있네. 반면 ‘악(惡)’을 뜻하는 ‘카콘(kakon)’이란 단어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있고. 이 세계에는 부정이나 범죄 등 각종 악행이 만연해 있지.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악’, 즉 ‘득이 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네.

 

 아가톤(agathon) ::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의 개념을 넓게 보아, 좋은 행위와 의지를 뜻하는 도덕적 기준 말고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선택과 행위를 모두 포함했다. 즉 좋아 보이는 것, 사용하기에 좋은 것, 내게 좋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위까지도 선으로 여겼다.

 

 카콘(kakon) ::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악의 개념도 폭넓게 보았다. 올바르지 않은 일을 당하는 것, 화를 입는 것, 상대적인 불행 등도 악으로 여겼다.

 

 자네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선가 ‘불행한 상태’를 택했어. 불행한 운명으로 태어나서 그런 것도, 불행한 상황에 처해서 그런 것도 아닐세. ‘불행한 상태’를 자신에게 ‘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자네는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그런 성격이나 기질을 ‘생활양식(life style)’이라는 말로 설명하네.

 삶에 대한 사고나 행동의 경향을 가리키지.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미 부여 방식’을 집약시킨 개념이 생활양식이라고 생각하게. 좁게는 성격에서부터 넓게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인생관까지 포함하는 말일세.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생을 사는 방식’이라고 할까. 자네는 기질이나 성격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본다네.

 

 물론 의식적으로 ‘이런 나’를 선택한 것은 아닐세. 맨 처음 선택은 무의식적이었을지도 몰라. 게다가 선택하는 데에는 자네가 여러 번 말한 외적 요인, 즉 인종과 국적, 문화, 가정환경까지도 크게 영향을 미치니까. 그럼에도 ‘이런 나’를 선택한 것은 자네일세. 

 대략 열 살 전후라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이지.

 생활양식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

 

 인간은 언제든, 어떤 환경에 있든 변할 수 있어. 자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자네는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어. 지금 당장 변하고 싶다고, 심지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하소연했네. 그럼에도 왜 변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네가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결심해왔기 때문이지.

 조금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긴 해도, 지금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니까. ‘이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경험을 통해 추측할 수 있어. 하지만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즉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변하고는 싶지만 변하는 것이 두렵다.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택할 테지.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자네는 “만약 Y처럼 될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말했네. 그런 식으로 “만약 ~였더라면”이라고 하는 가능성 속에서 사는 동안에는 절대 변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자네는 변하지 않을 핑계로 “만약 Y처럼 될 수 있다면”이라고 말한 거니까.

 사실은 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 환경만 허락된다면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싶은 걸세. 아마 그는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면 “이제는 젊지 않으니까” 혹은 “가정이 있어서”라는 다른 핑계를 대기 시작하겠지.

 어쨌거나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네. 지금의 생활양식을 바꾼다는 것은 그런 거야. 시도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어.

 단순한 과제―해야 할 일―를 앞두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이리저리 찾는 게 더 고달픈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는 ‘자네’인 채로 그저 생활양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걸세. 잔인할지는 모르지만 간단하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2. 두 번째 밤 -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가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네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라고 결심했기 때문이야. 자신을 좋아하지 않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에만 주목하는 걸세.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자네에게는 ‘선’인 셈이지.

 

 여학생은 왜 적면공포증(赤面恐怖症)에 걸린 것일까? 왜 적면공포증이 낫지 않는 걸까? 그것은 여학생이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세.

 여학생에게 가장 두려운 것,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물론 그 남자에게 차이는 걸세. 실연으로 인해 ‘나’의 존재와 가능성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 사춘기의 실연에는 그런 측면이 강하게 있으니까. 그런데 적면공포증을 앓는 한 그 여학생은 “내가 그 남자와 사귀지 못하는 것은 적면공포증 때문이야”라고 할 수 있어. 고백할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고, 설령 차인다고 해도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지. 마침내는 “만약 적면공포증이 나으면 나도……”라는 가능성 속에서 살 수 있다네.

 “만약 내가 적면공포증을 고쳐주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으면 너는 어떻게 할까? 아마 너는 이곳에 다시 찾아와 ‘적면공포증에 도로 걸리게 해주세요’라고 떼를 쓰겠지.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담이야.”

 적면공포증을 고치고 싶다는 환자가 나타났을 때, 카운슬러는 그 증상을 고쳐서는 안 되네. 그러면 스스로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어지거든. 아들러 심리학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본다네.

 일단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라네. 이러한 접근 방식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적면공포증에 걸린 여학생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차이는 것을 두려워하듯 자네는 남에게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무서워하지. 그런 상황에 휘말리느니 처음부터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걸세. 즉 자네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이라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해. 자신의 단점을 찾아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되네. 그렇게 자신의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거절을 당했을 때도 이유를 댈 수 있지. 나는 이런 단점이 있어 거절당했다고, 이런 단점만 없으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단점으로 똘똘 뭉친 ‘이런 나’로 사는 것은 자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 즉 득이 되는 셈이지.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고독을 느끼는 것은 자네가 혼자라서가 아닐세. 자네를 둘러싼 타인사회공동체가 있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독한 거지. 우리는 고독을 느끼는 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네. 즉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되는 걸세.

 정말로 혼자라면, 다시 말해 우주 공간에 단 한 명만 존재한다면 ‘개인’도 아닐뿐더러 고독도 느끼지 않는다.

 아마 고독이란 개념조차 없을 걸세. 말도 필요 없고, 논리나 상식(공통감각)도 필요 없게 되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비록 무인도에 살지라도 머나먼 바다 저편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지. 혼자 있는 밤일지라도 누군가가 새근새근 자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네. 어딘가에 누군가가 있는 한 고독이 닥치게 되어 있어.

 

 아들러는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단언했으니까.

 만약 이 세계에 인간관계가 사라진다면 그야말로 우주 공간에는 단 한 사람만 존재하고, 다른 사람이 사라진다면 온갖 고민도 사라질 걸세.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하네.

 개인에 국한되는 고민, 이를테면 내면의 고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어떤 종류의 고민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열등감이란 단어를 현재 통용되는 맥락으로 처음 쓴 사람이 아들러라고 알려져 있네.

 아들러는 열등감을 ‘민더베르티히카이트게퓔(Min-der-wertigkeitsgefühl)’이라고 했네. 독일어로 ‘가치(Wert)’가 ‘더 적은(minder)’ ‘느낌(Gefühl)’이라는 뜻이지. 즉 열등감이란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과 관련된 말이지.

 

 가치판단 :: 판단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개입되는 판단으로 객관적인 진위 판별은 어렵다. 즉 주관적인 의미가 강하다. 미에 대한 기준이 대표적이다.

 

 가치전환 :: 니체가 만든 용어로 지금까지의 도덕적 가치, 지금까지 금지하였거나 업신여겼던 가치를 긍정하는 태도를 뜻한다.

 

 중요한 것은 155센티미터라는 내 키가 열등하지 않았다는 점일세.

 실제로 뭔가가 결여되었거나 뒤처진 것이 아니었다는 뜻일세. 분명히 155센티미터라는 키는 평균보다 작아. 게다가 객관적으로 측정된 숫자라서 언뜻 보면 열등하게 느껴지지. 하지만 문제는 그 키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어떤 가치를 주느냐 하는 점이지.

 내가 내 키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었네. 만약 비교해야 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키가 작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네도 지금 이런저런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열등성(劣等性)’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등감(劣等感)’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

 나는 “너한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네. 내 키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장점이 된다는 것을. 물론 이는 주관적인 해석일세.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점이 하나 있네. 자신의 뜻대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 내 키를 장점으로 볼 것인가, 단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주관에 달린 문제라서 나는 어느 쪽이나 선택할 수 있지.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움직이지는 못해. 하지만 주관적 해석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가 있지. 우리는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네.

 다이아몬드 같은 건 관점을 바꾸면 한낱 돌멩이에 불과하지.

 가치란 사회적인 맥락에서 성립하는 거라네. 1달러짜리 지폐에 주어진 가치는 상식(공통감각)의 하나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가치가 없지. 인쇄물로서 원가를 고려해도 1달러어치의 가치도 없다네. 만약 이 세계에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1달러짜리 지폐를 난로에 던져 넣고 불을 지필 걸세. 코를 풀지도 몰라. 그와 같은 논리로 내 키에 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변명으로서의 열등 콤플렉스 

 아들러도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인정했네. 열등감 자체는 조금도 나쁜 게 아닐세.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네. 그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지. 아들러는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했네.

 간단히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예를 들어 아장아장 걷는 아기는 두 발로 서게 되고, 말을 배워서 주변 사람들과 자유로이 의사소통을 하게 되지. 우리는 모두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더 나아지길 바라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네. 인류사 전체를 보자면 과학의 진보도 ‘우월성 추구’라고 할 수 있고.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열등감일세. 인간은 누구나 더 나아지길 바라며 우월성을 추구하지. 그래서 어떠한 이상과 목표를 내걸고 그것을 향해 전진한다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내가 뭔가 모자라다고 느끼게 돼.

 아들러는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라고 말했네.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현하면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는 거지.

 인간은 내면에 자리한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더욱 전진하려고 하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더 행복해지려고 하네. 열등감이 이런 방향으로 나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콤플렉스’라는 말이 열등감과 같은 말처럼 쓰이고 있지. 원래 콤플렉스란 복잡하게 얽힌 도착(倒錯)적인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로 열등감과는 관계가 없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제기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 봐도 동성 부모에 대한 도착적인 대항심이라는 맥락으로 파악되지.

 마찬가지로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도 혼동하지 말고 정확하게 구분해서 써야 하네.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네.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이미 열등감의 범주를 벗어난 걸세. 그건 열등 콤플렉스지.

 

 아들러는 ‘무늬만 인과법칙’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네.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한다고 말이야.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봐야겠지.

 간단히 말해 한 발 앞으로 내미는 것이 무서운 거지. 현실적인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 지금 누리고 있는 즐거움―예를 들면 놀거나 취미를 즐기는 시간―을 희생해서까지 변하고 싶지 않다. 즉 생활양식을 바꿀 ‘용기’가 없는 거라네. 다소 불만스럽고 부자유스럽지만 지금 이대로가 더 편한 거지.

 

 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 

 학력에 열등 콤플렉스가 있어서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거꾸로 말해 ‘학력만 높으면 나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하는 논리가 되기도 하네.

 그것이 열등 콤플렉스가 지닌 또 다른 측면이라네. 자신의 열등 콤플렉스를 말이나 태도로 밝히는 사람,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A만 아니면 나는 유능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셈이지.

 열등감에 관해 아들러는 “열등감을 오랫동안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지적했네. 누구나 열등감을 갖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 상태를 참고 견딜 수는 없다, 그만큼 압박감이 큰 것이라고 했지.

 열등감이 있는 상태, 그것은 현재 상황의 ‘나’에게 어떤 모자람을 느끼는 상태라네.

 문제는 모자란 부분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하는 점. 가장 건전한 형태는 노력과 성장을 통해 채우려는 걸세. 하지만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열등 콤플렉스에 빠지게 돼.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학력만 높으면 쉽게 성공할 수 있다’라는 뜻이 되기도 하지. 자신의 유능함을 암시하는 거야. 지금은 학력이라는 덮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진정한 나’는 우월하다고 말일세.

 

 열등 콤플렉스는 또 다른 특수한 심리 상태로 발전하기도 한다네. ‘우월 콤플렉스’라고 하지.

 심한 열등감에 괴로워하면서도 노력과 성장 같은 건전한 수단을 이용해서 보완할 용기가 없어. 그렇다고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는 열등 콤플렉스도 더는 견뎌낼 수 없지. ‘못난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그러면 인간은 더 값싼 수단으로 보상하려고 한다네.

 마치 자신이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며 ‘거짓 우월성’에 빠지는 걸세.

 가까운 예로 ‘권위 부여’를 들 수 있지. 예를 들어 자신이 권력자―학급 반장에서부터 저명인사까지 광범위하지―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짐짓 어필하는 걸세. 그를 통해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지. 경력을 속이거나, 옷이나 장신구 등 브랜드 제품을 과시하는 것도 일종의 권위 부여이자 일부분 우월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지. 어떤 경우든 ‘나’라는 존재가 우월하다거나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닐세. ‘나’와 권위를 연결시킴으로써 마치 ‘나’라는 사람이 우월한 것처럼 꾸미는 거지. 즉 거짓 우월성일세.

 그 밑바닥에 강렬한 열등감이 있다.

 권위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맞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되지.

 일부러 말로 자랑하며 뽐내는 사람은 외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네. 아들러도 분명히 지적했지. “만약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열등감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아.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걸세.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고 하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거든.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라네.

 

 마지막으로 자랑에 관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네.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라네. 구체적으로는 ‘불행 자랑’이라고 하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는 사람, 타인이 위로하거나 변화를 권하면 “너는 내 심정이 어떤지 몰라”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을 가리킨다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한 것을 ‘특별’하다고 여기고,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 하지. 가령 내 키가 작은 것. 이에 대해 마음씨 고운 누군가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인간의 가치는 그런 걸로 정해지지 않아”라고 위로했다고 치세. 하지만 여기서 내가 “네가 키 작은 사람의 고민에 대해서 뭘 알아!”라고 받아친다면 이제 누구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을 걸세. 주변 사람들은 마치 상처 난 부위를 어루만지듯 나를 조심스럽게―아니, 신중하게―대하겠지.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고 ‘특별’해지는 거지. 병에 걸렸을 때, 다쳤을 때, 실연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태도를 취하며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네.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놓고 마치 무기처럼 휘두르는 것이다.

 불행을 무기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 사람들―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지. “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다”

 “오늘날 누가 가장 강한지 자문해보라. 갓난아기가 논리적인 답이 될 것이다. 갓난아기는 지배하지만 지배받지 않는다.”

 자신의 불행을 ‘특별’하기 위한 무기로 휘두르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네.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아들러는 더 뛰어난 존재가 되려고 하는 ‘우월성 추구’에 관해서는 보편적인 욕구라고 인정했습니다. 반면에 과도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대해서는 경종을 울리죠.

 ‘우월성 추구’라고 하면 남보다 우월하려는 욕구, 다른 사람을 넘어트려서까지 위로 올라가려는 욕구를 떠올리기 쉽네. 남을 밀어내고 계단을 오르는 이미지랄까. 물론 아들러는 그런 태도를 긍정하진 않았어. 그렇게 하지 않고 평평한 땅에 앞서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뒤를 걷는 사람도 있지. 그런 장면을 상상해보게. 걸어온 거리와 걷는 속도는 다르지만 다 같이 평평한 길을 걷는 장면을. ‘우월성 추구’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딛으려는 의지를 말하는 거지, 남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경쟁하려는 의사가 아닐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그저 앞을 보고 걸으면 되는 거지. 물론 다른 사람과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네.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

 

 모든 인간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존재일세. 

 인간은 누구나 달라. 그 ‘차이’를 선악이나 우열과 엮으면 안 된다는 걸세. 어떤 차이가 있든 우리는 대등하니까.

 지식이나 경험의 양, 그로부터 주어지는 책임의 양에는 차이가 있겠지. 하지만 그런 걸로 인간의 가치를 정할 수는 없어.

 어른으로 대하라는 것도, 아이로 대하라는 것도 아닐세. 쉽게 ‘인간 대우’를 하라는 거지.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 진지하게 대하라는 걸세.

 앞서 걸으나 뒤에서 걸으나 관계없어. 쉽게 말해 우리는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는 평평한 공간을 걷고 있네.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승부를 다투는 장소에서 물러났다는 표현이 맞겠지.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네.

 라이벌이 자네에게 ‘친구’라고 불리는 존재라면 자신을 연마할 기회가 되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쟁 상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네.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나뿐이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경쟁의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이 남으니까.

 경쟁이나 승패를 의식하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열등감이야. 늘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이 사람에게는 이겼어, 저 사람에게는 졌어,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네. 열등 콤플렉스나 우월 콤플렉스는 그 연장선상에 있지. 그렇다면 이때 자네에게 타인은 어떤 존재가 될까?

 언제부터인가 자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적’으로 느끼게 된다네.

 경쟁의 무서움이 그걸세. 설사 패자가 되지 않아도, 경쟁에서 계속 이긴다고 할지라도 경쟁 속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이 편할 새가 없어.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늘 이겨야 하지. 남을 믿을 수도 없어.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그들이 늘 경쟁 속에서 살기 때문이지. 그들에게는 세계가 적으로 넘쳐나는 위험한 장소니까.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걸세.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세계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질 걸세. 더는 세계를 위험한 장소로 보지도 않고, 불필요한 시기심이나 의심에 눈이 멀지도 않을 걸세. 대신에 세계가 안전하고 쾌적한 장소로 보이게 되겠지.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도 눈에 띄게 줄어들 걸세.

 

 권력투쟁에서 복수로 

 과거에 일어난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그것이 ‘지금의 자네’에게 주어진 과제일세.

 사회적인 문제에 분노를 느낄 때가 있지. 하지만 그것은 돌발적인 감정이 아니라 논리가 뒷받침된 분노지 않은가? 사적인 분노(私憤)와 사회의 모순 및 부정에 대한 분노(公憤)는 종류가 다르네. 사적인 분노는 금세 식지. 반면 공적인 분노는 오래가네. 사적인 분노는 타인을 굴복시키려는 도구에 불과하네.

 공적인 분노는 자신의 이해(利害)를 넘어선 것이니까.

 

 만약 면전에서 욕을 먹었다면 그 사람이 숨겨놓은 ‘목적’이 뭔지 생각할 걸세. 면전에서 욕을 먹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언동으로 진짜로 화가 났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예를 들어, 아이가 어른에게 짓궂은 장난을 칠 때가 있네. 대개 그런 장난은 자신에게 주목하게 만들려는 심산이라서 어른이 진짜로 화를 내기 직전에 그친다네. 하지만 만약 이쪽이 정말로 화를 낼 때까지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 목적은 ‘싸우는 것’ 자체에 있네.

 이기고 싶은 거지. 이겨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은 걸세.

 상대방은 그저 자네를 비난하고 도발하고 권력투쟁을 함으로써 평소 못마땅했던 자네를 굴복시키고 싶은 걸세. 여기서 자네가 화를 내면 상대가 의도한 대로 두 사람은 권력투쟁에 돌입하지. 그러니 어떠한 도발에도 응해서는 안 돼.

 싸움에서 진 상대는 바로 다음 단계에 돌입할 걸세.

 ‘복수’ 단계일세. 일단은 물러나지만, 상대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형태로 뭔가 복수를 계획하고 보복에 나선다네.

 

 리스트컷증후군(wrist-cut syndrome) :: 손목자해증후군. 상습적으로 칼 등으로 자신의 손목 안쪽이나 팔뚝 등을 긋는 행위를 말한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한 강박적인 행동이다.

 

 프로이트의 원인론에서는 이를 ‘부모가 아이를 잘못 키워서 이렇게 됐다’라고 단순한 인과법칙으로 설명하네. 화초에 물을 주지 않아서 시들어 말랐다는 식이지. 이해하기 쉬운 해석임에는 분명해. 하지만 아들러의 목적론은 아이가 밝히지 않은 목적, 즉 ‘부모에 대한 복수’라는 진짜 원인을 놓치지 않네. 비행을 저지르고, 등교를 거부하고, 스스로 손목을 그으면 부모는 곤혹스러워 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위에 구멍이 날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네. 아이는 그것을 알고 문제 행동을 하는 걸세. 과거의 원인(가정환경)에 등 떠밀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부모에 대한 복수)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관계가 복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걸어왔을 때는 절대 응해서는 안 되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참는다’는 발상은 자네가 아직 권력투쟁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일세.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그리고 그것이 권력투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서둘러 싸움에서 물러나게.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게.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우게.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니까.

 

 분노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고 아울러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나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네.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분노의 감정도 나오지 않을 걸세.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걸세.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욱해서”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 분노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거지.

 

 언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말게.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지.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되네.

 나는 옳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일세.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어. 자네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하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권력투쟁에 돌입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그러니까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네.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우월성 추구란 타인과 경쟁하는 것과는 상관없네.

 

 ‘인생의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왜 자네가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고 ‘친구’로 여기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용기를 잃은 자네가 ‘인생의 과제(task)’로부터 도피한 탓일세.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지.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했네.

 그리고 이러한 목표는 아들러가 제시한 ‘인생의 과제’를 직시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네. 

 

 아들러는 인생의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관계를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라는 세 가지로 나누고 이를 합쳐 ‘인생의 과제’라고 불렀네.

 과제란 오로지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해주게. 인간관계의 거리와 깊이에 관해서. 그것을 강조하려고 아들러는 ‘세 가지 유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네.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 그것이 인생의 과제네.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말 그대로 ‘과제’인 셈이지.

 

 먼저 ‘일의 과제’부터 생각해보세. 어떤 일이든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해낼 수는 없네. 예를 들어, 평소에 나는 책을 내기 위해 이 서재에서 원고를 집필하며 하루를 보내지. 집필은 누구에게 맡길 수 없는 자기 완결적인 작업이야. 하지만 책을 내고 파는 일은 편집자와 북 디자이너, 인쇄업자, 그리고 유통업자와 서점 직원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네. 타인과 협력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어.

 단 거리와 깊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업무상 인간관계는 관계 맺기가 비교적 수월한 편이라네. 성과라는 알기 쉬운 공통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다소 마음이 맞지 않아도 서로 협력할 수 있거나 협력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지. 그리고 ‘일’을 매개로 하는 관계라서 일을 그만두거나 일터를 옮기면 남남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 단계의 인간관계에서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 니트족이나 은둔형 외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일세.

 

 NEET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로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신조어다.

 

 히키코모리(引き籠り) ::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병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다.

 그들이 일하고 싶지 않은 것도 노동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과 얽힌 인간관계’를 피하고 싶어서라네.

 

 붉은 실과 단단한 쇠사슬 

 ‘교우의 과제’란 일을 벗어난, 더 넓은 의미에서의 친구관계일세. 일처럼 강제성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 것도,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어려운 관계지.

 학교나 직장처럼 ‘장소’가 있으면 그런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죠. 그 자리에서만 유효한 표면적인 관계이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거기에서 개인적인 친구관계로 발전하는 것이나, 학교 혹은 직장과는 별개의 장소에서 친구를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렵죠.

 친구와 지인의 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네. 이는 사랑의 과제와도 연결되는 내용인데, 중요한 것은 관계의 거리와 깊이라네.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일세. 타인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닐세. 자네가 첫발을 내딛기를 기다리고 있지.

 

 사랑의 과제는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네. 하나는 흔히 말하는 연애관계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족관계, 특히 부모자식 관계라네. 일, 교우에 이은 세 가지 과제 중 사랑의 과제가 가장 어렵지. 예를 들어 친구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을 때, 친구 사이에서는 허용되는 말이나 행동이 연인이 된 순간 허용되지 않기도 하네.

 아들러는 상대를 구속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는 것. 그게 사랑일세.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는 결국 깨지게 되어 있어.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애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연인 사이나 부부관계에서는 ‘헤어진다’는 선택지가 있네. 그런데 부모자식 관계는 원칙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해. 부모자식 관계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네.

 설령 끝내 가위로 끊어내더라도 일단은 마주 볼 것.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상황, ‘이대로’에 멈춰 서 있는 것이라네.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며,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만 ‘개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자립’과 사회에서의 ‘협조’를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아들러는 여기서 ‘일’, ‘교우’, ‘사랑’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넘어서라고 말한다.

 

 ‘인생의 거짓말’을 외면하지 말라 

 A의 결점을 용서 못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에게는 ‘A를 싫어한다’는 목적이 앞서고, 그 목적에 맞는 결점을 나중에 찾아낸 거니까. A와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지.

 연인 사이나 부부관계에 있어서 어느 시기가 지나면 상대가 하는 행동에 사사건건 화가 날 때가 있어.

 그건 그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고 결심하고, 관계를 끝내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세. 상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네. 자신의 ‘목적’이 변했을 뿐이지. 사람은 그럴 마음만 있으면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기적인 생물이네. 그렇기에 세계는 언제든 위험한 곳이 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볼 수 있는 거라네. 

 

 아들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한다. 남 탓으로 돌리고, 환경 탓으로 돌리고,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친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의 거짓말’은 잔인한 말이라네.

 생활양식, 인생을 사는 방식을 결정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 자신이라는 사실. 

 생활양식이나 타인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하네. 책임 소재는 명확하지. 

 아들러는 인생의 과제나 인생의 거짓말을 선악으로 구분해 말하지 않았네. 지금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선악도 도덕도 아닌 ‘용기’의 문제일세.

 설사 자네가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고 인생의 거짓말에 의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네가 ‘악’에 물들어서가 아닐세. 도덕적으로 규탄 받아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는 걸세.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아들러 심리학은 ‘소유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용의 심리학’일세.

 무엇이 주어지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엔 결정론으로 귀결돼. 반면 아들러 심리학은 ‘사용의 심리학’이고 결정은 자네가 하는 걸세.

 우리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닐세. 목적론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손으로 고르는 걸세.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있네.

 

 

 

3. 세 번째 밤 -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인정욕구를 부정한다 

 “화폐란 주조(鑄造)된 자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란 곧 화폐다’라고는 말하지 않겠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네.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도리어 인정받기를 바라서는 안 되네.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라 

 자네가 직장에서 쓰레기를 치웠다고 하세. 하지만 동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해. 혹은 알고 있지만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고 인사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어.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으면 그만둘지도 몰라요.

 인정욕구의 위험함이 거기에 있네. 대체 왜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걸까? 대개의 경우 그것은 상벌교육의 영향이라네.

 칭찬받고 싶은 목적이 있어서 쓰레기를 치운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칭찬받지 못하면 분개하거나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딱 봐도 이상한 얘기지.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을 기울이면, 끝내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된다네.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지. 즉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네. 기억하게.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세.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돼.

 “신이 보고 있으므로 선행을 쌓는다”라는 생각. 그러나 그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악행이 허용된다”라는 허무주의와 등을 맞대고 있는 사상이라네. 우리는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신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네. 오히려 신이 없는 허무주의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지.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정말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행복을 실제로 느끼고 있을까?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을 수단으로 삼네.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받는다는 상벌교육의 흐름에 따라서 말이지. 하지만, 가령 업무의 목표 자체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되면 그 일을 하기가 괴로울 걸세. 늘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전긍긍하느라 ‘나’라는 존재를 억누를 테니까.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내담자 중에 성격이 제멋대로인 사람은 별로 없네. 오히려 타인의 기대, 부모와 선생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괴로워하지. 쉽게 말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걸세.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닐세. 이를 이해하려면 아들러 심리학의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네.

 

 ‘과제를 분리’하라 

 눈앞에 ‘공부한다’라는 과제가 있을 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네.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세. 거기에 대고 부모가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비유하자면 흙투성이 발을 들이미는 행위일세. 그러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타인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뿐일세.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네.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히 달라질 걸세.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이를테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지망하는 학교에 불합격하는 등―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아이란 말이지.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일세.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게 아닐세.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라네.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걸세.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상담 시에 내담자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는 카운슬러의 과제가 아니라고 여기네.

 상담을 받은 결과, 내담자가 어떤 결심을 했는가. 생활양식을 바꿨는가, 바꾸지 않았는가. 이는 내담자 본인의 과제고 카운슬러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물론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기는 하지. 하지만 끝까지 개입하지는 않아. 어느 나라에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네. 본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변하는 것’을 강요해봤자 나중에 반발심만 커질 뿐이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방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빠져나오지 않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이는 원칙적으로 본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일세. 부모가 개입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생판 남도 아니니 어느 정도 지원은 필요하겠지.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는 대개 ‘아이의 인생은 곧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요컨대 아이의 과제까지도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떠안는 걸세. 그렇게 늘 아이만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인생에서 ‘나’는 사라지고 없지. 하지만 어느 정도 아이의 과제를 떠맡았다고 한들 아이는 독립적인 개인일세. 부모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타인은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령 내 자식이라도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믿는다는 행위 또한 과제의 분리일세. 알겠나? 상대방을 믿는 것, 이것은 자네의 과제일세. 하지만 자네의 기대와 신뢰를 받은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인 걸세. 그 선을 긋지 않은 채 자신의 희망만 밀어붙이면 그건 스토커나 다름없지. 그것이야말로 하지 말아야 할 ‘개입’이라네. 비록 상대방이 내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믿을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들러가 말하는 ‘사랑의 과제’에는 그런 질문까지 포함되어 있다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과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네.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그 고민은 인간관계에 있으니―먼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라고 경계선을 정하게. 그리고 타인의 과제는 버리게.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일세.

 

 인간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하는 방법 

 도서관 사서라니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형과 함께 가업을 잇지 않으면 부모자식 간의 연을 끊자, 라고 압박했지. 하지만 여기서 ‘인정할 수 없다’는 감정과 어떻게 타협할 것이냐는 자네의 과제가 아니라 부모님의 과제네. 자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지.

 “부모가 얼마나 슬퍼하든 관계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신의 삶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뿐이야.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세.

 상대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상대의 과제이지 내 과제가 아니다.

 분리란 그런 걸세. 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까? 본래는 타인의 과제여야 할 것까지 ‘내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지.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다”라고 한 할머니의 말을 떠올려보게. 그 말에는 과제 분리의 핵심이 담겨 있어. 다른 사람이 자네의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건 그 사람의 과제야.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이 자네가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일’인가? 회사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게 일은 아니지 않은가? 상사가 자네를 싫어한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런다, 그러면 더는 다가서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네.

 그 또한 아들러가 말한 ‘인생의 거짓말’일세. 상사의 눈 밖에 났으니 일할 수 없다, 내가 일을 잘 못하는 것은 상사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개 ‘잘 풀리지 않는 일’에 대한 구실로 상사의 존재를 든다네. ‘싫어하는 상사’의 존재가 필요한 걸세. 그 사람만 없으면 나는 더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말이야.

 “저 상사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누가 봐도 원인론이지. 그러지 말고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상사를 싫어하기로 했다”라거나 “내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싫어하는 상사를 만들어냈다”라고 생각하는 걸세. 목적론적인 발상을 하는 거지.

 상사가 아무리 부당하게 화를 내도 그것은 ‘나’의 과제가 아닐세. 상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지. 자네가 먼저 다가갈 필요도 없고,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어. 자네가 할 일은, 내 인생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내 과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

 

 먼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으라  

 고르디우스의 매듭 :: 프리지아에 내란이 끊이지 않았을 때 이륜마차를 몰고 오는 사람이 나라를 구하고 왕이 되리란 신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바로 고르디우스였는데, 당시에는 이륜마차가 흔하지 않았다. 신탁에 의해 왕이 된 고르디우스는 마차를 신전에 바치고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복잡하고 단단하게 묶어놓았다. 이를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라고 하며,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운명이란 전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실타래’는 더 이상 기존 방법으로는 풀 수 없네. 완전히 새로운 수단으로 끊어야 하지. 나는 ‘과제의 분리’를 설명할 때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떠올린다네.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야. 오히려 입구라고 할 수 있지.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상대와 마주보고 얘기조차 할 수 없네. 그렇다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도 안 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네.

 어떤 이는 과제의 분리가 상대의 호의를 짓밟는 것이라 생각하지. 그것은 전적으로 ‘보상’에 얽매인 발상이네. 타인에게 뭔가를 받으면 거기에―설사 그것이 바란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보답해야 한다는. 이는 호의에 답한다기보다는 보상에 연연하는 것뿐일세. 상대가 내게 어떻게 행동하든 내 행동을 정하는 것은 나일세.

 보통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의 밑바탕에 있는 것이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그건 과제의 분리와는 동떨어진 발상이지. 우리는 보상을 바라서도 안 되고, 거기에 연연해서도 안 되네.

 개입이 되풀이되면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인생의 과제를 직시할 용기를 잃게 돼. 아들러는 말했네. “곤경에 직면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아들러 심리학에는 상식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라는 측면이 있네. 원인론과 트라우마를 부정하고 목적론을 추구하는 것,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 나아가 과제의 분리까지 모조리 상식에 대한 안티테제일세.

 

 안티테제 :: 반정립(反定立).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인식이나 사물은 정(定)-반(反)-합(合)’이라는 3단계를 걸쳐 전개된다고 했다. 이 중 ‘반(反)’에 해당하는 것으로 최초의 단계(定)를 부정하는 둘째 단계를 뜻한다. 처음의 주장인 정립에 대립하며, 그 최초의 명제를 부정해 새로운 주장이 세워진다.

 

 인정욕구는 부자유를 강요한다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었던 시대라면 ‘신이 보고 있다’라는 믿음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규율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신에게 인정받는다면 굳이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겠죠. 하지만 그런 시대는 아주 오래전에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라는 믿음에 기대어 스스로를 다스릴 수밖에 없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반듯한 삶을 사는 것, 타인의 시선이 내게 이정표가 되는 겁니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을 택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사는 인생, 다른 사람이 소망을 이룰 수 있게 거들면서 사는 인생. 자네 말대로 이정표가 될지도 몰라. 하지만 너무 부자유스러운 삶 아닌가? 그러면 왜 그런 부자유스러운 삶을 택하는 것일까? 자네는 자꾸 인정욕구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걸세.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밖에 없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만약 주변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 명 전원에게 충성을 다하는 거지. 그러면 당장은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지는 않을 걸세. 그런데 여기에는 큰 모순이 기다리고 있어.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열 명 전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마치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진 정치가처럼 하지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거나, 책임지지 못할 일까지 떠맡게 될 소지가 있네. 물론 그 거짓말은 머지않아 발각될 테고. 그리고 신용을 잃고 인생은 더욱 고달파지겠지. 물론 계속된 거짓말로 인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도 상상을 초월하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살면, 그리고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자신에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야.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

 부자유스러운 삶을 택한 어른은, 지금 이 순간을 자유롭게 사는 젊은이를 보고 향락적이라고 비판하지. 물론 이는 자신의 부자유스러운 삶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인생의 거짓말일세. 스스로 진정한 자유를 택한 어른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자유롭게 사는 것을 응원하겠지.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타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충동일세.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트는 그러한 욕망을 가리켜 ‘경향성(傾向性)’ 이라고 했지.

 

 경향성(傾向性) :: 습관적인 감성적 욕망을 이르는 말이다. 이성적인 사고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성향을 뜻한다.

 

 본능적인 욕망, 충동적인 욕망이라는 뜻일세. 그러면 그런 경향성에 이끌린 채, 다시 말해 욕망이나 충동에 이끌려 사는 것,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돌멩이처럼 사는 것이 ‘자유’일까? 그렇지 않지. 그런 삶은 욕망과 충동의 노예가 될 뿐이라네. 진정한 자유란 굴러 내려가는 자신을 아래에서 밀어 올려주는 태도가 아닐까?

 우리는 경향성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야. 굴러 떨어지는 자신을 멈추고 비탈길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거야.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비탈길을 계속 굴러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완성된 모습을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네.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일세. 자유를 행사하려면 대가가 뒤따르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어.

 자네는 아마 ‘조직에서의 해방’을 자유라고 생각했겠지. 가정이나 학교, 회사, 또는 국가에서 뛰쳐나오는 것 말이야. 하지만 실제로 조직을 뛰쳐나와도 진정한 자유는 얻을 수 없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일세.

 

 그저 과제를 분리하라는 거지. 자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네의 과제가 아니야. 역으로 “나를 좋아해야 한다”, “이렇게 애를 썼는데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과제에 개입하는 보상적 발상이라네. 미움을 살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비탈길을 굴러가듯이 살지 않고 눈앞의 언덕을 올라간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세.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물론 전에도 말했듯이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 노력은 할 걸세. 하지만 거기서 물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지.

 

 인간관계의 카드는 ‘내’가 쥐고 있다 

 ‘어릴 때 아버지께 맞아서 사이가 틀어졌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일세. 아들러가 주창한 목적론의 입장에 서서 보면 원인과 결과가 완전히 역전되네. 즉 나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내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은 아버지 탓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었으니까. 그게 내게는 ‘선(善)’이었네. 어쩌면 봉건적인 아버지에 대한 ‘복수’라는 측면이 있었을지도 몰라.

 

 자기분석 :: 자신의 무의식을 스스로 이해하는 일을 뜻하는 심리 용어.

 

 ‘아버지에게 맞아서 아버지와 사이가 나쁘다’라는 원인론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하지만 ‘아버지와 잘 지내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냈다’라고 생각하면 관계를 회복할 카드를 내가 쥐게 되지. 내가 ‘목적’을 바꾸면 그걸로 문제가 간단해진다는 뜻일세.

 내가 관계를 회복하기로 ‘결심’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생활양식은 무엇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다가서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조금도 관계가 없었네. 상대방이 나와 관계를 회복할 의사가 없어도 상관없었지. 문제는 내가 결심하느냐 마느냐 하는 거지.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내’가 쥐고 있다는 말일세.

 사람들은 대개 인간관계의 카드는 다른 사람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타인이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는 삶을 산다네.

 나는 아버지를 달라지게 하려고 변한 것이 아닐세. 그것은 타인을 조종하려는 잘못된 생각이야. 내가 변해도 달라지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어. 그 결과, 상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이것도 과제의 분리라네. 물론 내가 변화하면서―나의 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상대가 변하기도 하네. 대개는 변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그것이 목적은 아니라네.

 타인을 조종해서는 안 되고, 조종할 수도 없다.

 인간관계라고 하면 보통 ‘두 사람의 관계’ 혹은 ‘다수와의 관계’를 떠올리지. 그런데 자기 자신이 먼저라네. 인정받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남이 가질 수밖에 없어. 인생의 카드를 남에게 맡길 것인가, 내가 쥘 것인가의 문제라네. 과제의 분리, 그리고 자유에 대해 한 번 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보게.

 

 

 

4. 네 번째 밤 -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심리학과 전체론 

 개인심리학은 영어로 ‘Individual Psychology’라고 하네. 그리고 이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의 어원을 살펴보면 ‘분할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네.

 그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라는 뜻일세. 아들러는 정신과 신체를 나누어 생각하는 것, 이성과 감정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 등의 모든 이원론적 가치관에 반대했네.

 

 그녀는 왜 적면공포증에 걸린 걸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신체의 증상을 마음(정신)과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네. 마음과 몸은 하나이고,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 보았지. 마음이 긴장하면 손발이 떨리거나 볼이 빨개지거나 혹은 공포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는 식으로.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도 마찬가지일세. 평소에 냉정한 사람이 화가 난다고 해서 쉽게 이성을 잃지는 않아. 우리는 감정이라는 독립된 개체에 자극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거든. 인간은 통일된 전체인 셈이지. 

 물론 마음과 몸이 별개라는 것, 이성과 감정이 다르다는 것,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예를 들어 화가 나서 타인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그것은 ‘전체로서의 나’가 소리 지르는 것을 선택한 걸세. 결코 감정이라는 독립된 개체―말하자면 내 의향과 관계없이―악을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네. 여기서 ‘나’와 ‘감정’을 따로 떼어놓고 ‘감정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감정에 치우쳤다’라고 생각하면 쉽게 인생의 거짓말에 빠지게 되지.

 그렇게 인간을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존재로 파악하고 ‘전체로서의 나’를 생각하는 것을 ‘전체론’이라고 하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도 곤란하다.” 과제의 분리는 타인을 밀어내는 발상이 아닐세.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개념이지.

 인간관계는 과제를 분리하는데서 끝나지 않지. 오히려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출발점이야.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한 것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감각(共同體感覺)’이라고 할 수 있지.

 공동체 감각은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의견이 분분한 이론이기도 하네. 

 만약 타인이 친구라고 한다면, 그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가 ‘있을 곳’을 찾게 돼. 나아가서는 친구들―즉 공동체―을 위해 공헌하는 것도 고려하게 되겠지. 이렇게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일세.

 아들러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인류 등을 포괄한 전체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축, 나아가서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고 했네. 

 다시 말해 ‘공동체’라고 했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존의 범위뿐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 그리고 우주 전체를 아우른, 글자 그대로 ‘만물’을 공동체라고 역설한 걸세.

 아들러 스스로도 자신이 말한 공동체에 대해 ‘도달하지 못할 이상’이라고 인정했을 정도니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한다네. 불행의 근원은 인간관계에 있다. 거꾸로 말하면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공동체 감각이란 행복한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일세. 

 공동체 감각을 영어로는 ‘social interest’라고 하네. 즉 ‘사회적 관심’이지.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의 최소 단위가 뭐인 줄 아나?

 ‘나와 너’일세.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사회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탄생하네. 

 ‘나와 너’를 기준점으로 자기에 대한 집착(self interest)을 타인에 대한 관심 (social interest)으로 바꾸는 것 일세. 

 

 왜 ‘나’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가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란 ‘과제의 분리’를 하지 못하고 인정 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이라 할 수 있지.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지 않아.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지. 즉 자기중심적이라네. 

 ‘나’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자기중심적일세. 자네는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걸세.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집착이나 다름없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지.

 그래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네.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기에 속해 있네. 공동체 안에서 내 자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느끼는 것. 즉 소속감을 갖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네. 이를테면 학업, 일, 친구, 그리고 연애와 결혼도 어떻게 보면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여겨지는 장소와 관계를 찾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것,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지.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면서도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원이자 전체의 일부란 말이야. 

 자기 자신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본인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이런 사람들에게 타인이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사람’에 불과해. 

 그들은 ‘인생의 주인공’을 넘어 스스로를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믿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 그것만을 생각하지. 그 기대가 번번이 깨질 거야. ‘타인은 나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들은 크게 실망하고 심한 굴욕감을 느끼게 되지. 그리고 분개하네. “저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저 사람은 내 기대를 배신했어.”, “저 사람은 이제 친구가 아닌 적이야.” 하고 말이야.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머지않아 ‘친구’를 잃게 되네. 

 모든 장소가 중심이면서 또 중심이 아니지. 보는 사람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중심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네. 

 자네는 공동체의 일부이지 중심이 아닐세.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갖기를 원해.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네.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걸세. 즉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만약 자네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걸세. 모든 타인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니 굳이 내가 나서서 행동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도 나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commit)하는 길일세.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으라 

 인간관계의 입구에는 ‘과제의 분리’가 있고, 목적지에는 ‘공동체 감각’이 있다. 공동체 감각이란 ‘타인을 친구로 간주하고, 그곳을 자신이 있을 곳이라 느끼는 것’이다.

 공동체의 범위를 ‘무한대’라고 생각해 보게.

 이를테면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생기를 잃는 사람이 있네. 회사라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지위도 명함도 이름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즉 ‘보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식간에 늙는 거지. 하지만 이는 단순히 회사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에 불과해. 보다 큰 공동체에 여전히 속해 있지. 지구라는, 우주라는 공동체에 말이야.

 눈앞의 공동체에만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다른 공동체, 더 큰 공동체, 이를테면 지역사회나 국가에 속해 있고, 그곳에서도 어떠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을 얻기를 바라는 걸세.

 빵 한 조각을 사고 그 대가로 동전 한 닢을 지불했다고 하지. 그 지불한 동전은 빵가게 주인에게만 돌아가는 게 아니네. 밀과 버터의 생산자들, 그리고 밀과 버터를 운반한 유통업자들, 연료를 판매하는 업자들, 나아가서는 산유국 국민들까지 여러 사람에게 돌아갈 걸세. 줄줄이 엮여 있지.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 ‘홀로’ 될 수도 없거니와 ‘홀로’ 살 수도 없어.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란 가정이나 회사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까지 포함한다네. 

 

 가령 자네가 ‘학교’라는 공동체만이 자네가 있을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치세. 즉 학교야말로 전부고 나는 학교가 있기에 존재한다, 그 이외의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문제에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까? 집단 괴롭힘을 당하거나, 친구를 사귀지 못하거나,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애초에 학교라는 시스템에 맞지 않거나 등. 다시 말하면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을 생각해보자는 거지.

 그럴 때 학교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자네는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더 작은 공동체, 이를테면 가정으로 도피해 그곳에 틀어박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집 안에서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어. 그렇게 해서라도 소속감을 얻으려고 할 걸세. 그런데 이때 ‘다른 공동체가 있다’, 무엇보다 ‘더 큰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떨 것 같나?

 학교 바깥에 더 큰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그 세계의 일원이다. 만약 학교에 내가 있을 곳이 없다면 학교 ‘바깥’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으면 된다. 전학을 가도 되고, 자퇴를 해도 상관없다. 자퇴서 한 장으로 인연이 끊기는 공동체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다. 만약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학교에서 느꼈던 고통이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찻잔 밖으로 나오면 거칠게 몰아치던 태풍도 실바람으로 변할 테니까.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찻잔 안에 머문 채 비좁은 피난처로 대피하는 것이네. 잠시 비를 피할 수는 있지만 태풍은 가라앉지 않지. 

 

 간단하지는 않지. 그럴 때 염두에 둬야할 행동원칙이 있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원칙이네. 

 학교라고 해서 학교라는 공동체의 상식(공통감각)으로 사리판단을 하지 말고, 더 큰 공동체의 상식을 따르라는 거지. 가령 자네 학교에서는 교사가 절대적인 권력자라고 하세나. 그런데 그런 권력이나 권위는 학교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만 통용되는 상식에 불과하지. ‘인간 사회’라는 공동체로 생각하면 자네도 교사도 대등한 ‘인간’일 뿐이야. 교사가 부당한 요구를 한다면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해도 상관없네. 

 ‘나와 너’의 관계에도 해당되는데, 만약 자네가 이의를 제기해서 무너질 정도의 관계라면 그런 관계는 없느니만 못하네. 이쪽에서 끊어버리면 그만이지.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야.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게. 보다 다른 ‘나와 너’,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하네.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중요한 건 그거지. 과제를 분리하면서 어떻게 원만한 관계를 만들까, 즉 어떻게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시킬까 하는 점.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수평관계’라는 개념일세.

 아이를 기르거나 부하직원을 가르칠 때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쓰네. 야단치는 방법과 칭찬하는 방법.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양육을 비롯한 타인과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칭찬은 금물이다’라는 입장을 취한다네.

 물론 체벌은 당연히 금지고, 야단치는 것도 인정하지 않네. 칭찬도 금물이고, 야단도 금물이네. 그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일세.

 칭찬한다는 행위의 속내를 따져보세. 예를 들어, 내가 자네의 의견을 듣고 “잘했어”라고 칭찬을 했네. 그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왠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나? 

 ‘잘했다’라는 말에 내포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뉘앙스가 불쾌합니다.

 칭찬한다는 행위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지. 저녁식사 준비를 돕는 아이에게 엄마가 “엄마를 도와주는 거야? 착하기도 해라”하고 칭찬을 했네. 하지만 남편이 같은 행동을 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즉 “장하다”, “잘했다”, “훌륭하다”라고 칭찬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무의식중에 상하관계를 만들려는 걸세. 동물 훈련 사례는 그야말로 ‘칭찬’의 배후에 있는 상하관계, 즉 수직관꼐를 보여주는 거지.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라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일체 없지.

 우리가 남을 칭찬하거나 야단치는 것은 ‘당근을 쓰느냐, 채찍을 쓰느냐’ 하는 차이에 불과해. 배후에 자리한 목적은 조종에 있지. 아들러 심리학이 상벌교육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도 아이를 조종하려는 측면 때문일세.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일세. 자네가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은 수직관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

 대등은 곧 ‘수평’이네. 경제 사정은 인간의 가치와는 무관하네. 회사원과 전업주부는 일하는 장소와 역할만 다를 뿐이지. 그야말로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관계라네.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보고, 자기를 아래로 볼까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즉, 강한 열등감을 숨기고 있는 거라네. 

 어떤 의미로는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우월 콤플렉스에 빠졌다.

 열등감이란 원래 수직관계에서 생기는 걸세. 모든 사람이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수평관계에 있다면 열등 콤플렉스가 생길 여지가 없지. 

 

 ‘용기 부여’를 하는 과정 

 과제의 분리에 대해 설명할 때 ‘개입’이라는 말을 쓴다네.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드는 행위를 뜻하지. 그러면 왜 인간은 개입을 하는 걸까? 그 배경에는 사실상 수직관계가 있지.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하네. 상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끈다,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믿고 있지. 물론 여기서 개입은 조종이나 다름없네. 어린아이에게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부모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 본인은 선의로 그렇게 말했는지 몰라도, 결국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남의 일에 불쑥 끼어들어서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조종하려고 하는 거지. 

 수평관계를 맺으면 개입도 사라진다.

 

 아픈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 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럴 때에는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네.

 아이가 공부하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지, 부모와 교사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네. 개입이란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들어 “공부해”라고 하거나 “그 대학에 가야 해” 하고 지시하는 걸 뜻하네. 반면에 지원이란 과제의 분리와 수평관계를 전제로 하지. 공부는 아이의 과제라는 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거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부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거라네.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과제를 분리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게 지원하는 거야. 그야말로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일이지. 과제를 하는 것도 본인이고, 과제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도 본인이지.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않네. 이러한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지. 

 인간은 칭찬을 받을수록 ‘나는 능력이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네. 

 만약 자네가 칭찬을 받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나는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네. 칭찬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이기 때문이지.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타인의 가치관에 맞춰 삶을 선택하게 돼. 

 먼저 과제를 분리할 것, 그리고 서로가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대등한 수평관계를 맺을 것. ‘용기 부여’란 그 과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네.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면 

 일을 도와준 파트너에게 “고맙다”라고 인사하겠지. 아니면 “기쁘다”, “도움이 됐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전하거나. 이것이 수평관계에 근거해서 용기를 부여하는 방법일세.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네.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일세.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나 존경, 기쁨의 인사같은 더 순수한 말이 나오겠지. 

 칭찬받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걸세. 그리고 그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기준이고. 칭찬받고 싶다면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어. 자신의 자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네. 반면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아들러 심리학에서 ‘공헌’이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일세.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나는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과제에 직면할 용기를 얻게 될 걸세.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하면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라네.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네.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지금까지 논의했던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되네.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 수평관계를 맺고 용기 부여의 과정을 거치는 것, 이는 모두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고, 돌고 돌아 인생을 살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준다네.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 반대로 말하면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그런 뜻 아닙니까? 

 자네는 지금 타인을 ‘행위’이ㅡ차원에서 보고 있네. 즉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말이지. 그런 관점으로 생각하면 자리에 누워만 있는 노인은 주변 사람에게 폐만 끼치고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 하지만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지.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걸세. 

 존재의 차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네. 

 존재의 차원에서 감사한다는 것은 그런 거라네. 위독한 상태의 어머니는,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자네나 가족에게 큰 위안이 될 걸세. 직접적인 행위가 없어도, 그저 무사히, 지금 이곳에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거라고. 자신을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먼저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이상적인 모습’을 멋대로 지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린다네. 예를 들면 부모님 말에 일절 말대꾸를 하지 않고,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큰 회사에 취직한다. 그런―있을 수도 없는―이상적인 아이를 만들어놓고 자식과 비교하며 불평을 하고 불만을 갖지. 이상적인 모습을 100점으로 놓고 천천히 점수를 깎는다네. 이거야말로 ‘평가’라는 발상이지. 그러지 말고 아이를 누구와 비교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그저 거기에 있어주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네. 이상적인 100점에서 감정하지 말고, 0점에서 출발하는 거지. 그러면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을 걸세. 

 예를 들어,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가 밥을 먹은 후에 설거지를 도와줬다고 하세. 이때 “그런 건 안 해도 되니까 학교에나 가”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정해놓고 점수를 깎는 부모나 할 법한 행동이지. 그런 말은 아이의 용기를 꺾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야. 하지만 순순하게 “고맙다”라고 표현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아이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을지도 몰라.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인간은 ‘나’를 구분할 수 없다 

 “인간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나’든 ‘다른 누군가’든 ‘기계’든 상관없습니다. 아무도 ‘이런 나’를 원하지 않죠. 그런 상태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스스로에게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아들러 심리학에서 내놓는 답은 간단하네. 일단 다른 사람과, 한 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을 것.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걸세.

 

 수직관계를 맺느냐, 수평관계를 맺느냐. 그것은 생활양식의 문제이고, 인간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상황에 따라 이리 바꿨다 저리 바꿨다 할 만큼 임기응변에 능한 존재가 아닐세. 요컨대 ‘이 사람과는 대등하게’, ‘이 사람과는 상하관계로’라는 식이 안 된다는 거지.

 수직관계인지 수평관계인지, 어느 한쪽만 고를 수밖에 없다고요?

 만약 자네가 한 사람이라도 수직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파악하고 있는 걸세. 

 친구조차도 수직관계로 파악하고 있다고요?

 상사나 부하직원처럼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A는 나보다 위지만 B는 나보다 아래다”, “A의 의견에는 따르지만 B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C와의 약속은 없던 것으로 해도 괜찮다”라는 식이지.

 반대로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 수평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자네의 생활양식에 대전환이 일어나겠지.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모든 인간관계는 ‘수평’이 될 걸세.

 분명히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은 중요하지. 회사 조직이라면 직책의 차이가 있는 것도 당연해. 누구와도 친구처럼 지내라,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행동하라는 게 아닐세. 의식상에서 대등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 

 그 자리의 분위기를 보고 수직관계에 종속되는 것은 잣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한 행동이네.

 만약 자네가 상사의 지시에 따른 결과, 그 일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보세. 

 자네에게는 거절할 여지가 있었고,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할 여지도 있었지. 자네는 그저 거기에 얽힌 인간관계의 알력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절할 여지가 없었다’고 둘러대며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거라네.

 이런저런 어려운 점은 생각 말고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라네.

 사랑에서도,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도 나이는 관계없네. 교우의 과제에 일정한 용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일세. 나와의 관계에서는 조금씩 거리를 좁히면 된다네. 밀착될 정도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고, 손을 뻗으면 서로의 얼굴에 닿는 정도의 거리면 되겠지.

 

 

 

5. 다섯 번째 밤 -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과도한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건다 

 ‘나에 대한 집착’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하라.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혐오하는 리얼리스트(realist)입니다. 자기를 혐오하기 때문에 자기만 바라보는 것이죠. 자신감이 없으니까 자의식 과잉에 빠지는 거고요.

 ‘이런 질문을 하면 웃음거리가 되겠지’, ‘주제를 벗어난 의견이라고 바보 취급을 당할지 몰라’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손 드는 것을 망설이게 돼요. 아니, 그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가벼운 농담을 날리는 것도 주저하고요. 늘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걸어서 일거수일투족을 얽어맵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제 자의식이 허락하지 않는 거죠. 언제나 그렇듯 “용기를 가져라” 하고 말씀하시겠죠. 하지만 그런 말은 제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건 용기 이전의 문제니까요.

 

 자기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을 하라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걸어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한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자네의 ‘목적’을 생각해보자고. 자네는 자연스러운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걸까?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얼뜨기 같은 놈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이겠지요.

 즉 자네는 자연스러운 나,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말이로군?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인 채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회피하고 있지. 자네도 방 안에 혼자 있으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기세 좋은 말을 내뱉을 텐데 말이야.

 혼자 있으면 누구나 왕처럼 행동할 수 있다네. 요컨대 이 또한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생각해볼 문제이지. ‘자연스러운 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뿐이니까.

 결국 공동체 감각이 필요하지. 구체적으로는 자기에 대한 집착(self interest)을 타인에 대한 관심(social interest)으로 돌리고, 공동체 감각을 기르는 것. 이에 필요한 것이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네.

 

 일단은 ‘자기수용’부터 설명하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우리는 ‘나’라는 내용물이 담긴 그릇을 버릴 수도, 교환할 수도 없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지. ‘나’에 대한 견해를 바꾸는 것, 쉽게 말해 사용 용도를 바꾸라는 거네.

 자기긍정이 아니라 자기수용을 해야 하네.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걸세.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칫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지. 한편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걸세.

 인간은 누구나 ‘향상되기를 바라는 상태’에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100점 만점인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일세.

 ‘긍정적 포기’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 《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 :: 미국의 수필가이자 소설가이다. 풍자, 블랙코미디, 공상과학의 장르를 한데 엮고 삽화를 곁들이는 작가로 유명하다. 소설 《제5도살장》과 《챔피온들의 아침식사》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수필 《나라 없는 사람》은 그의 유작이다.

 

 니버의 기도 ::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가 쓴 기도문으로, 평온을 비는 기도(Serenity Prayer)라고도 한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네. 그저 ‘용기’가 부족한 거지.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라네.

 

 신용과 신뢰는 어떻게 다른가 

 포기라는 말에는 원래 ‘명확하게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네. 만물의 진리를 단단히 확인하는 것. 그것이 ‘포기’라네. 비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

 긍정적 포기로 인해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공동체 감각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네. 그건 사실이야.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릴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번째 키워드, 바로 ‘타자신뢰’라네.

 

 ‘믿는다’라는 말은 신용과 신뢰로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네. 먼저 신용에는 조건이 따르지. 영어로는 ‘credit’지.

 인간관계는 ‘신용’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이네.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걸세. 비록 신용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 근거가 없더라도 믿는다, 담보가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그것이 신뢰라네.

 

 성선설(性善說) ::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다고 보는 맹자(孟子)의 학설.

 성악설(性惡說) ::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순자(荀子)의 학설.

 

 속아서 이용만 당할 때도 있겠지. 하지만 자네가 배신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자네가 배신을 해도 무조건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 무슨 짓을 해도 신뢰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자네는 몇 번이나 배신할 수 있겠나?

 신뢰의 반대가 회의(懷疑)라네. 반대로 자네가 인간관계에 ‘회의’를 품고 있다고 하지. 남을 의심하고, 친구를 의심하고, 가족과 연인을 의심하며 살고 있다고 말이야. 거기에서 어떤 관계가 싹틀 수 있을까? 자네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상대방은 바로 알아채지. “이 사람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네. 거기에서 어떤 발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겠나? 우리는 조건 없는 신뢰를 가져야 하네. 그래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지금 ‘누군가를 무조건 신뢰해봤자 배신당할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배신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그것은 타인의 과제지. 자네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네. “상대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도 주겠다”라는 건 담보나 조건이 달린 신용관계에 불과해.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생은 놀랄 만큼 단순한 상태로 돌아간다네.

 아들러 심리학은 도덕적 가치관에 기초해서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아닐세. 조건 없는 신뢰란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한, 수평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만약 자네가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면 단칼에 끊어버려도 상관없네. 끊느냐 마느냐는 자네의 과제니까.

 자네가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바람을 피우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고 하세나. 그리고 상대가 바람을 피운 증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결과가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나?

 어떠한 경우라도 바람 피운 증거를 산더미같이 찾아낼 걸세.

 상대방의 아무렇지 않은 말과 행동, 누군가와 통화했을 때의 어조, 연락이 되지 않는 시간. 이런 것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모두 ‘바람을 피운 증거’로 비칠 걸세. 설사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자네는 지금 ‘배신당한 상황’에만 사로잡혀 있어. 그럴 때 받을 상처에만 주목하고 있다고. 그런데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

 얕은 관계라면 깨졌을 때의 고통이 작겠지. 하지만 그런 관계에서는 맛볼 수 있는 일상의 행복 또한 작을 걸세. ‘타자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인생의 기쁨 또한 늘어나게 되는 거지.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뛰어넘을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다는 겁니까?

 자기수용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배신이 타인의 과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걸세.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하게. 고통이나 슬픔을 피하려고 하니까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걸세. 이렇게 생각해보게. 우리는 남을 신뢰할 수 있네. 의심할 수도 있지. 또한 우리는 타인을 친구로 생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네.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선택은 명백하지 않은가.

 

 일의 본질은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 

 교환 불가능한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것이 자기수용이라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신뢰하는 것이 타자신뢰고.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타인을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네. 친구라서 신뢰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만약 타인이 친구가 되면, 자네는 자네가 속한 공동체에서 있을 곳을 찾을 수 있게 될 걸세.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얻게 되는 거지.

 타인을 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수용도 하지 못하고, 타자신뢰도 하지 못한다네.

 

 물론 공동체 감각이란 자기수용과 타자신뢰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세 번째 키워드, ‘타자공헌’이 필요하다네.

 친구인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 주는 것, 공헌하려는 것, 그것이 ‘타자공헌’일세.

 타자공헌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며 경종을 울리기도 했지. 우리는 자신의 존재나 행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즉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저는 위선으로 뭉친 선인(善人)보다 자기 욕망에 정직한 악인(惡人)을 믿습니다!

 가장 알기 쉬운 타자공헌은 ‘일’이라네. 사회에 나가 일하는 것, 또한 집안일을 하는 것. 노동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야.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나아가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받아들이게 되지.

 평생 다 쓰지도 못할 재산을 모은 부자들도 대부분 지금 바쁘게 일하고 있다네. 타자공헌을 위해, 나아가서는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확인받고 싶어서라네. 엄청난 부를 쌓고 자선활동에 매진하는 부자들조차도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고,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거지.

 

 젊은 사람은 어른보다 앞서나간다  

 어느 가정에서 저녁식사를 마쳤는데, 식탁 위에 그릇이 고대로 놓여 있네.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어. 아내(나)가 뒷정리를 시작했지. 그런데 가족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도와주려는 시늉도 하지 않아. 그러면 보통은 “왜 도와주지 않는 걸까?”, “왜 나만 일해야 하는 거지?”라고 불만을 갖게 되지. 그럴 때 그릇을 치우면서 ‘나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보라는 걸세. 설령 가족들로부터 ‘고맙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는 걸세. 그렇게 공헌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눈앞의 현실은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게 될 거야. 사실 그 순간 짜증을 내면서 설거지를 해봤자 본인도 마음이 불편하고 가족들도 선뜻 다가오지 못할 거야. 반대로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즐겁게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팔을 걷어붙일지도 몰라. 적어도 돕기 쉬운 분위기는 만들어지겠지.

 

 왜 그 순간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 가족을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그렇지 않으면 “왜 나만?”, “어째서 다들 돕지 않는 거야?”라는 억울함만 생기겠지.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 채로 하는 공헌은 어쩌면 위선일지 몰라. 그런데 다른 사람이 ‘친구’라면 어떠한 공헌도 위선이 아니라네.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 이 세 가지는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말하자면 순환구조로 연결되어 있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수용’을 한다 → 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 →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공헌’을 할 수 있다 →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

 

 행동의 목표

 ① 자립할 것

 ②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①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②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즉 각 ①항의 ‘자립할 것’과 ‘내게 능력이 있다는 의식’은 자기수용에 관한 얘기네. 반면 ②항의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과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은 타자신뢰와 타자공헌으로 연결되지. 

 아들러도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개인심리학은 아마도 모든 심리학 중에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힘든 학문일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자네는 아직 젊어. 그만큼 인생의 빠른 시기에 배우고, 빨리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네. 빨리 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네는 세상의 어른들보다 앞서고 있네. 자신을 바꾸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간다는 의미에서 나보다 앞서고 있어. 길을 잃어도 좋고 헤매어도 좋아. 수직관계에 종속되지 말고,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 말고, 자유롭게 앞으로 나가게. 만약 모든 어른이 ‘젊은 사람들이 앞서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세계는 크게 달라질 걸세.

 

 일이 전부라는 인생의 거짓말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는 때도 적지 않지. 하지만 이때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어떤 경우라도 공격하는 ‘그 사람’이 문제이지 결코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란 사실일세. 신경증적인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은 걸핏하면 ‘모두’, ‘늘’, ‘전부’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네. “모두 나를 싫어해”, “늘 나만 손해를 봐”, “전부 틀렸어”라는 식으로. 만약 자네가 이런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다면 주의해야 하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것으로 본다네.

 유대교 교리 중에 이런 말이 있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열 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때 나를 싫어하는 한 명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혹은 남은 일곱 사람에게 주목할 것인가? 그게 관건이야.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한 명만 보고 ‘세계’를 판단하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말을 더듬는 걸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투’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열등감과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네. 덕분에 자의식이 과잉되어 점점 더 말을 더듬게 된다고 말이야.

 말을 좀 더듬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웃거나 바보 취급을 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방금 전에 한 말에 비유하자면 ‘열 명 중 한 명’ 꼴일걸? 게다가 그런 태도를 드러내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면 이쪽에서 관계를 끊어도 상관없지. 그런데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그 한 사람에게만 주목하고 ‘모두 나를 비웃고 있어’라고 생각한다네.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은 말을 더듬어서도 적면공포증에 걸려서도 아니네. 실제로는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지. 아무래도 좋을 아주 작은 일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세계 전체를 평가하려고 한다, 이 얼마나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잘못된 생활양식인가.

 

 일에 빠진 사람들도 확실히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들이지. 

 말 더듬는 사람들은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지. 이에 비해 일중독자는 인생의 특정한 측면에만 주목한다네. 아마 그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다”라고 변명할 것이네. 그런데 이는 인생의 거짓말이지. 일을 구실로 다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거든. 원래는 집안일에도, 아이 양육에도, 혹은 친구와 교류하는 것이나 취미에도, 전부 관심을 가져야 하네. 어느 한 가지만 돌출되는 삶의 방식을 아들러는 인정하지 않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인생의 과제를 배제한 삶이지. ‘일’이란 회사에서 일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야. 집안일, 아이 양육,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취미 등 모든 것이 ‘일’이라네. 회사 업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회사 일에만 몰두하는 것은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삶을 사는 거라네.

 “누구 덕에 밥 먹고 사는지 알아!”

 아마도 그런 사람은 ‘행위의 차원’에서밖에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러는 걸 거야. 나는 이만큼 시간을 들여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돈을 번다,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내가 가족 중에 제일 가치가 높다. 하지만 누구나 은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네. 이를테면 정년퇴직을 하고 연금이나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하는 때가 오지. 혹은 젊더라도 다치거나 병에 걸려서 일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겠지. 이럴 때 ‘행위의 차원’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치명타를 입게 될 걸세.

 나를 ‘행위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이는 ‘행복해질 용기’와 관련된 문제일세.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행복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네. 이런 현실에 대해 아들러는 간단하게 대답했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고.

 타자공헌이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경우의 타자공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점이지.

 자네의 공헌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네. 그건 타인의 과제이지 자네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진짜로 공헌을 했는지 아닌지는 원칙적으로 알 수도 없고. 즉 타인에게 공헌할 때 우리는, 설사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곧 ‘공헌감’을 가지면 그걸로 족한 걸세.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이게 행복의 정의라네.

 

 이전에 말씀하셨던 “행위의 차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도 존재의 차원에서는 도움이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행복하다는 논리잖아요!

 모든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렇다고 이 말이 ‘모든 인간은 행복하다’라는 뜻은 아니라네. 행위의 차원에서든 존재의 차원에서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즉 공헌감이 필요하지.

 

 인정욕구에 관해 설명했었지. 내가 “인정받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자 자네는 “인정욕구는 보편적인 욕구다”라고 반박했지.

 인간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네. 인간은 자신을 좋아하고 싶다, 자신이 가치 있음을 느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공헌감을 원한다. 그리고 공헌감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원하는 거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서요? 선생님은 “행복이란 공헌감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행복으로 직결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라면 결국 남이 의도한 대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네.

 행복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진정으로 공헌감을 갖는다면 뭐 하러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겠나. 일부러 인정받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할 수 있는데 말이야. 즉 인정욕구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직도 공동체 감각을 갖지 못하고,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을 하지 못한 거라네.

 공동체 감각만 있으면 인정욕구가 사라진다.

 타인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인간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단 그때의 공헌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즉 ‘공헌감’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즉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픈 사람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인간은 ‘우월성 추구’라는 보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네.

 쉽게 말해 ‘향상되길 바라는 마음’,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마음’을 뜻하죠.

 많은 아이가 첫 단계부터 ‘특별히 잘한다’네. 구체적으로 부모의 지시를 잘 따르고, 사회성 있게 행동하고, 공부와 운동을 열심히 하고, 학원도 부지런히 다니지. 그렇게 해서 부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말이야. 그런데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 경우―예를 들면 공부나 운동을 잘 못하는 경우―에는 태도를 180도 바꿔서 ‘특별히 못되게 군다’네.

 특별히 잘하는 것도, 특별히 못되게 구는 것도 목적은 같아. 남들로부터 주목받고 ‘평범한’ 상태에서 탈피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목적이네.

 

 원래 공부든 운동이든 어느 정도 결과를 내려면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네. 그런데 “특별히 못되게 굴어야지” 하고 결심한 아이, 즉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는 그러한 건전한 노력은 외면한 채 주목만 받으려고 하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그를 일컬어 ‘안이한 우월성 추구’라고 하네. 예를 들어 수업 중에 지우개를 던지거나 큰 소리를 내서 수업을 방해하는 문제아들이 있지. 그러면 분명 반 친구들이나 교사들이 주목할 거야. 그런 자리에서라면 잠시나마 특별한 존재가 되겠지. 하지만 그건 ‘안이한 우월성 추구’이자 불건전한 태도일세.

 비행을 저지르는 아이들도 ‘안이한 우월성 추구’를 하는 거라고요?

 모든 문제 행동, 예를 들어 등교 거부나 자해, 미성년자의 음주나 흡연 등도 전부 ‘안이한 우월성 추구’에 해당되네. 아이가 문제 행동을 저질렀을 때 부모나 주변 어른들은 야단을 치지. 야단맞는 것은 아이에게 스트레스야. 그런데 설령 야단을 맞더라도 아이는 부모가 주목해주길 바라네. 어떤 식이라도 좋으니 ‘특별한 존재’이고 싶은 거지. 아무리 야단을 쳐도 아이가 문제 행동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해.

 야단을 치니까 문제 행동을 그만두지 않는다.

 부모나 어른들은 야단을 치는 행위를 통해서 주목하고 있으니까.

 문제 행동에 대해 그 목적은 ‘부모에 대한 복수’라네.

 ‘복수’와 ‘안이한 우월성 추구’는 쉽게 연결된다네. 상대를 난처하게 하면서 동시에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심리 상태니까. 

 

 평범해질 용기 

 이 세상에 천재는 극히 적어요. 누구나 우등생이 될 수는 없다고요. 그렇다면 패자는 전부 ‘특별히 못되게 굴 수밖에’ 없죠.

 “누구 하나 악을 원하는 자는 없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역설이 딱 맞는 경우지.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폭행이나 도둑질조차 ‘선(善)’을 수행하는 셈이니까.

 이럴 때 아들러 심리학이 중요하게 내세우는 것이 ‘평범해질 용기’일세.

 왜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실패로 돌아가면 극단적으로 ‘특별히 못되게 구는’ 상태로 빠르게 넘어가는 걸세. 그런데 보통인 것, 평범한 것은 정말로 좋지 않은 걸까? 어딘가 열등하다는 뜻인가? 실은 누구나 평범하지 않나? 그 점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네.

 자기수용은 그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일세. 만약 자네가 ‘평범해질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거야.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네.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는 것뿐이야.

 선생님의 논리대로라면 나폴레옹 같은 영웅은 한 사람도 탄생하지 못했을 거예요.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인생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등산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途上)’에서 보내게 되네. 즉 산 정상에 오르는 순간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은 ‘가짜인 나’가 지나온 ‘가짜 인생’이 되는 거라네.

 가령 자네가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면 자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건가? 사고나 병이 나서 오르지 못할 수도 있고, 등산 자체가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있지 않나? ‘길 위’에 있는 채로, ‘가짜인 나’인 채로, 그리고 ‘가짜 인생’인 채로 인생이 중단되는 거지. 그러면 그 삶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線)’으로 파악하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선이 크고 작은 굴곡을 그리면서 정점에 다다르다 그대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맞이한다고. 하지만 인생을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이자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는 사고방식일세.

 

 인생은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지금’이라는 찰나의 연속이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

 만약 인생이 선이라면 인생을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런데 우리 인생은 점의 연속이라네. 계획적인 인생이란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가능한 일일세.

 

 춤을 추듯 살아라 

 선생님의 지론은 계획성 있는 인생을 부정할 뿐 아니라 노력까지도 부정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고 맹연습해 마침내 동경하던 악단에 들어가 활약하는 인생이요. 아니면 열심히 공부한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인생이라든지. 모두 목표와 계획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인생이라고요!

 그 사람들은 산 정상을 목표로 묵묵히 전진했다는 말인가?

 그 사람들은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았던 건 아닐까? 즉 길 위에 있는 인생이 아니라 항상 ‘지금, 여기’를 살았던 거지. 이를테면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꾼 사람은 늘, 당장 연습해야 할 악보를 보면서 한 곡, 한 소절, 한 음에만 집중했을지 모르지.

 이렇게 생각해보게. 인생이란 지금 이 찰나를 뱅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라고.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봤을 때 “여기까지 왔다니!” 하고 깨닫게 될 걸세. 바이올린이라는 춤을 춘 사람 중에는 그대로 전문 연주자가 된 사람이 있을 거야. 사법고시라는 춤을 춘 사람 중에는 그대로 변호사가 된 사람이 있을 테고. 집필이라는 춤을 추고 작가가 된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 어쨌든 저마다 다른 장소에 다다를 거야. 단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의 삶도 ‘길 위’에서 끝났다고 볼 수는 없어.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지금을 즐기면 그걸로 충분하다.

 춤을 출 때는 춤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춤을 추면서 어디론가 가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 그래도 춤춘 결과 어딘가에 도달은 하겠지. 춤추는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인생은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네. 그에 반해 내가 말하는 춤을 추는 인생은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키네시스(kinesis) :: 키네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운동’을 말한다.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 사물(뒤나미스, 잠재태)이 목적을 완전히 실현한 상태(엔텔레케이아, 완전현실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정해진 목적을 향해 가는 운동이다.

 

 에네르게이아(energeia) :: 에네르게이아란 현실태(現實態)라고 하여 키네시스 중 목적의 완성보다는 ‘실현해가는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 실현이 되어가고 있는 상태, ‘과정의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실행되고 있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로 완전한 가치를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인용해보겠네. 일반적인 운동―이를 키네시스라고 하네―에는 시점(始點)과 종점(終點)이 있네. 그 시점에서부터 종점까지 이르는 운동은 가능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급행열차를 탈 수 있다면 일부러 역마다 정차하는 보통열차를 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목적지가 있다면 되도록 빨리, 되도록 효율적으로 거기에 도달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여정은 불완전하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말이야. 그것이 키네시스적 인생일세.

 

 반면 에네르게이아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가리키네. 

 하고 있는 것이 이루어졌다고요?

 달리 말하면,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 할까. 춤을 추는 것이나 여행처럼 말이야. 

 여행을 하는 목적이 뭐지? 예를 들어 자네가 이집트로 여행을 갔네. 그때 자네는 되도록 효율적으로, 되도록 빨리 쿠푸 왕의 거대 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에 도착했다가 그대로 최단거리로 돌아올 텐가? 그런 건 여행이라 부를 수 없지.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이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야. 물론 어떤 사정이 생겨 피라미드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그것이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야.

 

 쿠푸 왕의 거대 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 :: 기원전 2560년경에 지어진 거대한 피라미드로, 기원전 2589~2566년경에 재위한 이집트의 파라오 쿠푸의 무덤이다. 이집트 전 지역에 현존하는 70여 개의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등산의 목적이 ‘정상에 오르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키네시스적 행위라고 할 수 있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가 5분가량 머무르고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도 상관없지. 물론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경우 그 등산은 실패고. 하지만 목적이 산 정상이 아니라 등산하는 그 자체라면 에네르게이아적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산 정상에 올랐는지는 관계없다네.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라 

 극장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그때 극장 전체에 불이 켜져 있으면 객석 구석구석까지 잘 보일 거야. 하지만 자네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바로 앞줄조차 보이지 않게 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겠지. 아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네의 ‘지금, 여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걸세.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서게 되면 인생을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하나의 큰 이야기로 보게 된다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떤 학교를 나와서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고, 미래의 내가 있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야. 확실히 인생을 이야기에 비유하면 재미있고 이해하기도 쉽지. 그래봤자 그 이야기 끝에는 ‘흐릿한 미래’가 보일 뿐이야. 그럼에도 그 이야기에 따라 살려고 하지. 내 인생은 이러니까 이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쁜 것은 내가 아니라 과거인 환경이다. 이렇게 과거를 들먹이며 탓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면죄부를 주는 걸세. 인생의 거짓말과 다름없지. 하지만 인생이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더는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 걸세.

 아들러가 말한 생활양식도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생활양식은 ‘지금, 여기’에 관한 이야기이며,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있다네. 직선처럼 보이는 과거의 삶은, 자네가 ‘바꿀 수 없다’는 결심을 번복한 결과로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하지.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은 완전히 백지 상태에 놓여 있네. 쭉 뻗은 레일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야기는 없어.

 하지만 그건 찰나주의(순간주의), 아니 보다 더 나쁜 향락주의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 ‘지금, 여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나가는 것을 뜻한다네.

 

 인생 최대의 거짓말 

 대학에 들어가고는 싶은데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태도가 아닐세. 물론 대학 입시는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매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수식을 풀고 단어를 외운다, 즉 춤을 추는 거지. 그러면 반드시 ‘오늘 해낸 일’이 있을 거야. 오늘이라는 하루는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거네. 절대 먼 장래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아버지도 날마다 일이라고 하는 춤을 진지하게 춰왔을 걸세. 큰 목표가 있다거나 그 목표를 달성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산 거지. 그렇다면 아버지의 삶은 행복했을 걸세.

 억지로 인정할 필요는 없네. 단지 어디에 도달했는가만 보지 말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 찰나를 보라는 걸세.

 먼 장래에 이룰 목표를 설정하고 지금은 그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걸 하고 싶은데 아직 때가 아니니 그때가 되면 하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건 인생을 뒤로 미루는 삶의 방식이네. 인생을 뒤로 미루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단색으로 칠해진(monochrome) 따분한 나날만 보내게 될 걸세. ‘지금, 여기’는 준비 기간이고 참는 시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지금, 여기’도 이미 내 삶의 일부라네.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심각해질 필요 없어.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말게.

 

 인생은 언제나 단순하지. 심각한 게 아니라네. 각각의 찰나를 진지하게 살면 심각해질 필요가 없지.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언제나 완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사 자네나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친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할 것까진 없네. 스무 살에 마친 삶도 아흔 살에 마친 삶도 모두 완결된 삶이며 행복한 삶이니까.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았다면 그 찰나는 늘 완결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거지. 자네는 지금까지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춰왔어. 자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던 거야.

 이제 인생의 거짓말에서 빠져나오게. 그리고 두려워 말고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게. 자네에게는 그럴 힘이 있어.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금에 대해 얘기하세나. 결정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네. ‘지금, 여기’지.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라 

 이제 논의는 물가에 도달했네. 물을 마시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자네에게 달려 있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했네.

 전화(戰禍, 전쟁으로 입은 재앙과 피해)나 천재지변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네. 전와(戰渦, 전쟁으로 야기된 혼란)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 ‘인생의 의미’ 같은 걸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뜻에서 인생에 일반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하지만 그와 같은 부조리한 비극을 앞에 두고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일어난 비극을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무엇인가 행동을 취해야 하네. 칸트가 말한 경향성을 직시해야만 해.

 

 부조리 :: 철학적인 의미에서 ‘부조리’란 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뜻한다.

 

 엄청난 천재지변을 당했을 때 원인론에 입각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라고 과거를 돌아보며 따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는 곤경에 처했을 때야말로 앞을 보며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네.

 그래서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하고는, 이어서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아들러의 말은 결국 이런 뜻이지. 인생에 있어 의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자유를 선택하려고 할 때 인간이 헤매는 것은 당연하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길잡이(引導) 별’이라는 것을 제시했지.

 여행객들이 북극성에 의지해 길을 나서듯 우리 인생에도 ‘길잡이 별’이 필요하네. 그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사고방식이지. 그 별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지침이자, 이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절대적인 이상향이라네.

 그 이상향은 타자공헌에 있네.

 자네가 어떠한 찰나를 보내더라도, 설령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유롭게 살면 되네.

 그리고 찰나인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추고, 진지하게 사는 걸세. 과거도 보지 말고, 미래도 보지 말고, 완결된 찰나를 춤추듯 사는 거야.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목적지도 필요 없네. 춤추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란 그런 걸세.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아무리 돌이켜봐도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찰나를 춤춰온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 자네한테 인생의 의미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췄을 때에만 명확해질 걸세.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말고.”

 제가 변했는지, 그로 인해 보이는 세계가 달라졌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환하게 빛나고 있다고요! 내일의 일 따위는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하게!

 

 세계는 단순하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 책을 마치고

 무심코 집어든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주기도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만 개인이 된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변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용기다”

 

 기시미 선생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플라톤이었어요. 나는 아들러에게 있어서 플라톤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듣고 제가 불현듯 “그러면 제가 기시미 선생님의 플라톤이 되겠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한 발을 내딛는 ‘용기’, 그것뿐입니다.

 

 “나 자신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목적론’이라는 이론은 아들러가 살던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이미 나온 것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은 그리스철학과 같은 선상에 있는 사상이었던 겁니다. 나아가 플라톤이 남긴, 소크라테스와 청년들의 대화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상담의 원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전문용어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철학이 전문가들끼리만 통하는 말로만 해석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철학의 본래 의미는 ‘지(知)’가 아니라 ‘지를 사랑하는 것’에 있고,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과 지에 이르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결국 지에 도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아들러는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면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며 살게 되거나,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단념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아마도 주변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많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적을 겁니다. 대신에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이 『대화편』이란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을 그대로 따라 적지는 않았습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올바르게 이해한 덕분에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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