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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학교: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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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학교: 세상
작은 실천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 『인생학교: 세상』.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마주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전하는 책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존 폴 플린토프의 《세상》편에서는 지금 당장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이들에게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법부터 198가지 비폭력 저항운동소개까지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세상을 어떻게 더 변화시키고 싶은지, 더 나아가 어떻게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는’ 것도 역사를 만든다는 것, 주변 사람들과의 연결망 지도를 그려 가진 것을 현명하게 나누는 방법, 문 닫을 위기에 처한 동네 도서관을 재치 있게 지켜내는 방법 등을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해준다. 독재자를 쓰러뜨리거나 이웃을 변화시키거나, 친구 사이를 화해시키거나, 우리 스스로가 변화에 대한 공포와 타성, 무력감, 고정관념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전한다.
저자
존 폴 플린토프
출판
쌤앤파커스
출판일
2013.01.11

 

머리말

인생학교의 전공필수와 같은 이 여섯 권의 책들은, 심장은 뛰지만(생존하고 있지만), 가슴이 뛰지 않는(존재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대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심폐소생술과 같다.

 

중동을 휩쓴 아랍 민주화 항쟁에서 99%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월스트리트 시위까지 제가 현장에서 느낀 것은 바로 개인 한 사람의 의견이 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시작이 되어 수억 명의 의견으로 발전해 세상을 바꿉니다.

 

“세상은 비정하지 않다. 다만 상상력이 모자라고 매우 바쁠 뿐이다.”

 

저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고통을 줄이거나, 기쁨을 늘리거나. 나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본다. 세상의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은 결국 스스로에게도 기쁨을 주는 일이다.

 

내가 꿈꾸는 미래는 혼자서 만들 수 없고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만 합니다.그런데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Part 1. 들어가는 글

완벽함은 목표일 뿐, 결과는 오직 불완전함이다. - 아이버 커틀러Ivor Cutler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단지 간디, 테레사 수녀, 넬슨 만델라와 같은 ‘위대한 영혼‘들만의 책무가 아님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Part 2. 이 세상에서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Chap 1. 어차피 세상을 바꾸기란 불가능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세계 전체를 거시적으로 보려 하지 말고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데 초점을 맞춰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다음번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거나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따라가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의 행동은 모두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각자 그에 따른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는, 역사란 평범한 개개인들이 일상적으로 벌이는 수많은 작은 일들(“무한히 많은 극미한 행동들”)의 영향이 한데 결집함으로써 더 정확하게 인식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하는’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지 않는’것도 역사를 만든다.

 

베를린 장벽 :: 1945년 5월 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그해 2월에 있은 미국·영국·소련의 3국 정상 얄타회담에서 이미 독일의 처리방법을 결정한 대로 프랑스까지 합하여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되었다. 이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수뇌회담에서 나온 ‘포츠담선언’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에 당분간은 중앙 정부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정치·경제적 통일성의 유지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非)나치화, 즉 민주화에 있어서는 4개국이 제각각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점령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이런 상황하에서 1946년 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함으로써 1947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km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이 장벽을 쌓은 후로는 브란덴부르크문을 통해서만 허가를 받아 왕래가 허용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에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 장벽 [Berlin Wal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강력한 힘을 지닌 왕이 있는 상황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그런 왕의 모습을 그려보라. 당신은 어떻게 그가 막강한 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커다란 왕관 때문인가? 황금으로 치장된 왕좌? 아니다. 이런 것들은 그가 단지 왕이라는 사실만을 말해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막강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납작하게 엎드려서 떨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다. 왕의 막강함을 보여주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동거지이다. 만약 사람들이 얼굴을 치켜든 채 왕에게 등을 돌리고 농담을 주고받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졸고 있다면 똑같이 왕관을 쓰고 황금 왕좌에 올라 있는 왕일지라도 더 이상 막강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 삶에서도 우리는 평범한 역할을 벗어던지고 뭔가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런 사실을 잊곤 한다.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믿는 한, 그들은 정말 그런 존재들이 된다.

 

실제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막강한 불의(이는 통치자나 고용주,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인 경우도 있다)와 맞대면했을 때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결과가 어찌 되든 간에 그러한 복종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함으로써 해방감을 느낀다.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무척 당황해했다. 그는 차르의 군대에 동원된 평범한 러시아 농민들이 자신들의 아버지이자 형제와도 같은 다른 러시아 농부들을 왜 죽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단지 차르의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 예속을 설명하면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썼다.

“한 상업회사가 2억 명이 살고 있는 한 국가를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이성적인 사람에게 말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운동선수들도 아니고 그저 나약하고 평범한 3만 명의 사람들이, 쾌활하고, 영리하며, 자유를 사랑하는 2억 명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수치는, 영국인이 인도인을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 스스로 노예가 되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톨스토이와 편지를 주고받은 인도 청년은 다름 아닌 간디였다. 간디도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특권을 누리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간디 역시 어두운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남아프리카행 기차에 실려 보내졌을 때 부당함에서 비롯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억압에 저항하는 데 자신을 헌신했다. 영국에 점령된 조국 인도로 다시 돌아온 간디는 자유를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간디는 복종과 타협을 변화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의지의 변화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수동적 복종에서 자기 존중과 용기로의 정신적 변화. 둘째, 자신의 협조가 체제를 유지한다는 주체적 인식. 셋째, 복종과 타협을 멈출 수 있다는 의지의 강화. 간디는 이런 변화들이 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신중하게 착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예가 자기 자신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고 결심하는 순간, 그의 족쇄는 끊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노력이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시도는 해봐야 한다는 것.

 

Chap 2. 무엇이 우리를 행동으로 이끄는가?

놀랍게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역설에 갇힌 우리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간절하게 뭔가를 하고 싶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업적에서 영감을 찾으려는 것이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의 가장 일반적인 효과 중 하나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그렇게도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막상 성공을 이루고 난 뒤에는 평범한 것처럼 보인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천국에서의 보상이나 지옥에서의 징벌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가 목적인 의무론을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욕망이나 성향에서 비롯된 모든 동기들을 제쳐둘 때만이 온전히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재판을 앞둔 상황에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자신이 칸트의 도덕법칙, 특히 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에 따라 평생을 살았다고 갑자기 주장했다. (…) 이따금 자신이 가스실로 보낸 유대인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기는 했지만, 자신의 책무가 동정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확고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나치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유대인 학살 임무를 맡은 나치스친위대SS 연설에서 그들이 ‘혐오스런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만약 그런 임무를 기꺼이 수행한다면 좋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아돌프 아이히만 :: 졸링겐 출생.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및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 ·지휘하였다. 독일의 항복 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 공장 기계공으로 은신하고 있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비밀정보 모사드에 의해 체포당하여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대전 중에 나치스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600만 명의 학살 책임을 추궁당한 끝에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6월 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돌프 아이히만 [Otto Adolf Eichman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칸트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는 뭔가를 하기 위한 모든 이유가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려면 욕망이나 감정과 관련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흄이 옳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는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과 우리가 남긴 것들은 결국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란 사실을 잘‘알고’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인 것처럼,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습관적으로 행동한다.

 

자신감 넘치고 잘생기고 부유한 젊은 귀족 세 사람이 숲속에서 말을 달리다가 세 구의 시체와 마주쳤다. 시체들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지금 모습은 우리들의 과거 모습. 우리들의 지금 모습은 너희들의 미래 모습이다.“

 

사문유관 :: 사문출유(四門出遊)라고도 한다. 즉 동문 밖에서는 늙은이를 보고, 남문 밖에서는 병든 이를 보고, 서문 밖에서는 사자(死者)를 보고, 북문 밖에서는 승려를 보고, 마침내 출가할 뜻을 굳히게 되었는데, 이것은 태자의 출가를 재촉하기 위하여 제천(諸天)이 변화한 것이라고 해석한다.《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 경전에 따라서 그 전기에 약간의 차이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문유관 [四門遊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다.”라는 말로 우리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사르트르의 이 유명한 말은 《존재와 무》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란 의미가 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의미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무대에 아무런 시나리오 없이 던져진 존재이기에 인생의 모든 것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며, 이에 무한한 책임을 진다. 이것이 자유를 선고받은 까닭이다.

 

한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우리의 삶을 시지푸스의 실존적 고난에 비유했다. 시지푸스는 그리스 신들에게 벌을 받아 무거운 돌을 언덕 위까지 밀어올리고 굴러 내려온 돌을 다시 밀어올리기를 평생 반복한다.

 

시시포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코린토스의 왕이다. 이에 따르면 시시포스(Sisypos, Sisyphus)는 인간 가운데 가장 교활한 사나이인데, 그만큼 교활하기로 소문난 아우톨리코스를 속인 이야기로 유명하다. 아우톨리코스는 소를 훔친 뒤 소의 빛깔과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꿔놓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들키지 않았는데, 시시포스는 자기 소의 발굽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두었고 이에 도둑맞은 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제우스가 사신(死神)을 시시포스에게 보냈을 때 시시포스는 사신을 속여 꼼짝못하게 묶어 놓았고,  이에 군신(軍神) 아레스가 사신을 구출할 때까지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이 신들을 기만한 행위를 많이 저질러 시시포스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게 됐는데, 산꼭대기에 이르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그 형벌은 영원히 되풀이되었다. 
한편,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작품인 《일리아스 (Iliad)》에서는 시시포스가 에피레(훗날의 코린트)에 사는 인물로, 아이올로스(아이올리아족의 원조)의 아들이자 글라우코스의 아버지로 나온다. 호메로스 이후 시대에는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로 불렸으며, 이스트미아 경기의 창시자로도 유명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시포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피터 싱어가 주장했듯이, 삶이 무의하다는 주장은 오늘날 더 이상 놀라운 발견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분해하는 10대들은 매일 같이 이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우리 방식대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심지어 시지푸스조차도 진심으로 노력했다면 만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카뮈는 믿었다.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면“문제 해결의 실마리로서 숨김없이 꺼내놓아야 할 불만스러운 의식을 차단하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왜’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어떤’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이유를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극복할 수 있다.

 

빅터 프랭클 :: 1905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슈타트의 유태인계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3년에 비엔나 대학에 입학하여 신경과와 정신과를 전공하면서 우울과 자살에 대하여 연구하였고 이후 실존주의 심리학인 의미치료를 발전시켜나갔다.
1933년에서 1937년까지 비엔나의 슈타인호프 정신병원에서 신경과와 정신과의 수련을 받았고, 자살 연구를 담당하면서 3,000명 이상의 자살 위험이 있는 여성들을 치료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비엔나 종합병원 신경과에서 근무하면서, 1948년 《무의식의 하나님》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5년에는 비엔나대학에서 신경과와 정신과 정교수가 되었고, 이후 하버드대학교,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 피츠버그의 듀케인 대학교에서 방문교수직을 역임하였다. 전 세계에서 세미나와 강의를 진행한 그는 29개의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또 사회적인 활동도 병행하였는데, 1924년에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진행된 ‘사회민주주의청년운동’의 대표가 되었고, 의대에 재학했던 1928년부터 1930년까지 고등학생들을 위한 무료 정신 상담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초기 프로이트와 아들러에 의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빅터가 연구하고 제안한 의미치료는 그의 출신과 성장환경, 시대 배경에서 영감을 얻었다. 유태인이었던 빅터는 가족들과 함께 나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가족 대부분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직계가족 중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는 그와 호주로 이주한 여동생 스텔라(Stella)뿐이었다. 1942년 나치에 의해 유대인 거주지역의 한 곳인 체코의 테레친 게토로 이송된 프랑클은 정신과 의사로서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살피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수용된 사람들의 정신적 충격과 슬픔을 완화하고 도움을 주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고 자살 예방에도 힘을 썼다. 1944년에는 아내 틸리와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후 다시 다카우 수용소로 옮겨져 5개월간은 강제 노역을 하고 1945년 3월부터4월 27일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는 의사로서 근무하였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그가 2차 세계대전 전부터 발전시켜온 의미치료에 더 많은 확신과 영감을 주었다.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는 수용소 안에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사람들과 반대로 절제되지 않고 무질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삶에 대한 태도와 의미 추구가 중요함을 강조하게 되었다.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그의 책은 1946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심리학자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으로 출간되었고, 1959년 영문판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으로 번역되었다. 이후 다시 제목을 바꾸어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으로 출판되었다.
심리학과 정신의학, 신학 분야에 대한 공로로 많은 상을 수상하였으며, 대표적으로 1985년 미국심리학회(APA)에서 수여하는 오스카 피스터 어워드(Oskar Pfister Award)가 있다. 그 밖에도 1956년 대중교육 증진 공로상(오스트리아 교육부), 1995년 비엔나 명예 시민상, 1995년 오스트리아 의사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빅터 프랭클 [Viktor Frank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의미를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주어진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가장 최근이나 과거에 정말로 살아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나 관계를 기록해보는 것이 있다. 그런 다음 그 이유를 분석해보는 것이다(이것이 중요하다).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가치 있는’ 답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골프를 치면서 정말로 살아 있는 기쁨을 느꼈다면 그대로 적어라.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하라. 그 이유가 야외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스포츠를 통해 경쟁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람들과 어울리며 수다를 떨 수 있는 기회를 좋아하기 때문인가? 그조차도 아니라면 또 다른 무슨 이유가 있는가? 일단 이유를 확인 했다면 왜 ‘그것을’ 즐기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라. 답을 적고 그것을 좋아하는 ‘궁극적’ 이유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이 느끼는 기쁨을 분류하라. 그런 다음 그와 똑같이 궁극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일은 무엇일지 묻는 것이다. 이런 훈련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_골프.

“왜?”_친구들을 만나는 게 좋으니까.

“왜?”_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는 개방된 느긋한 분위기가 좋으니까.

“왜?”_나는 사교적인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왜 하게 되 는지 알아내는 것을 좋아하니까.

...

이런 연습을 거치면 당신은 아마도 숙련된 상담사처럼 자원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은, 아무리 작은 변화일지라도 우리가 변화를 만들어냈던 순간을 이따금씩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 비평가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렇게 물었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목숨을 구한 사람에게는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단번에 상을 주면서 오랜 세월 동안 아이를 양육하는 데 헌신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지 않는가?” 제 아무리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동일지라도 넓은 관점에서 보면 그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타인을 가장 먼저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취하는 모든 태도, 우리가 뱉는 모든 말,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정립해준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인식, 감정 속에서 우리는 혼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세상은 수많은 타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의미를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에 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로 타인을 돕는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편협한 시선에 사로 잡혀 자기 이익만을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Chap 3.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전략

관심을 갖지 않으면 실천할 수 있는 영감도 얻지 못한다.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운동가들은 노예들에 대한 처우 개선 등과 같은 단편적인 개선안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노예제도 자체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예매매에 관여하는 회사가 300개나 되었다. 그들은 노예제도 폐지가 일자리 상실로 이어질 것이며 국민은 노예제도를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노예제도 폐지에 맞서 강력히 저항했다. 그들은 노예의 처우개선을 약속하면서(잠자리에 신선한 건초를 깔아준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시장은 자율적으로 규제되도록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노예제도는 폐지되었고, 노예 매매를 위해 지급되던 보조금은 다른 더 좋은 취지의 사업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그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노예를 매매하던 영국 회사들은 차나 도자기와 같은 더 수익성이 높은 소모품을 거래하게 되었다.

 

희망은 수동적인 생각이 아니다. 희망은 행동을 필요로 한다.

 

미국의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희망이란 없다고 말한다. “희망이란 소파에 앉아서 당첨되기만을 꿈꾸며 손에 꽉 쥐고 있는 복권이 아니다. 희망이란 문을 깨부수는 도끼이다. 희망은 행동을 필요로 한다.”

 

단지 뭔가를 금지하고 법제화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변화를 만드는 것은 결의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의 결심이다.

 

만약 자신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기력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며, 필연적이고 유익한 책임감을 박탈하는 것이다.

 

자신조차도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으면서 무슨 권리로 남들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뤼시스트라타 :: 기원전 410년에 쓰인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뤼시스트라타》는 펠로폰네소스전쟁 당시 아테네 여성들의‘성性 파업’(남편과의 잠자리 거부 운동)을 주도해 남편들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선택하도록 이끈 여성의 이야기다. 여러 반전운동과 여권신장운동에 인용되었다.

 

리시스트라타 :: BC 410년에 쓰인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피해를 본 아테네 여성들이 성 파업을 일으켜 남편들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선택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반전사상과 여권을 강조하는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실제로 베트남전 반대운동이 일어났던 1960년대 미국에서는 교내 연극 무대에서 해당 작품이 공연되기도 했다. 
젊고 아름다운 아테네의 여성 리시스트라타는 모든 그리스 여성을 일치 단결시켜 섹스 파업을 감행함으로써, 남자들이 벌이고 있는 전쟁을 종결시키려고 한다. 이후 수일간의 농성이 지속되면서 파업에서 빠지려는 여성들이 속출하지만, 그럴 때마다 리시스트라타는 그들을 다시 설득해 파업에 계속 참여하도록 한다. 결국 이렇게 행해진 파업의 결과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 대표들은 리시스트라타 앞에서 화해를 이루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시스트라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이로쿼이족 :: 이 지방의 종족 가운데 가장 조직화되고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한때 세력 범위가 허드슨만(灣)에서 캐롤라이나강(江), 코네티컷강에서 미시시피강까지 미쳤다. 형질(形質)은 아메리카 인디언으로서는 키가 크고 근육질이며, 피부는 황색기가 도는 담갈색이다. 모발은 직모(直毛)이며 보통 크기의 머리에 코는 큰 매부리코이고 몽골인종과는 다른 점이 많다. 인구는 약 1만 6000으로 알려졌으나 백인과의 혼혈이 많아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현재는 주로 뉴욕주(州)에 많이 살고 있다. 사회구성은 씨족―포족(胞族)―부족(部族)식으로 정비된 조직을 가지고 있고 수렵·어로 외에 옥수수·고구마·콩 등의 재배로 정착농업을 하였다. 각 부족의 사회·경제생활의 최소단위는 개개의 확대가족으로, 이것을 기초로 한 모계씨족 50~150명으로 이루어졌다. 씨족 내의 일을 지휘하는 사람은 나이 든 여성이다. 1개 또는 몇 개의 확대가족이 목조로 된 길다란 집에 살며 모처혼제(母處婚制), 모계외혼(母系外婚), 토템씨족제가 행해지고 있다. 일군(一群)의 모계 씨족이 모여 모이어티(반쪽이라는 뜻)를 이루고, 이 모계 모이어티 2개가 합쳐 한 부족을 구성한다. 모이어티는 정치적 기능은 가지지 않으며 경제적·사회적 기능만을 가진다.
부족은 공통적 영역을 가지는 정치적 단위인데 이 부족을 구성하는 여러 씨족의 대표자, 즉 남자 추장들이 모여 회의를 열어 중대한 일을 결정한다. 부족은 자립성을 가지는데, 여러 부족이 공통적인 이해를 가지는 전쟁 등과 같은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 5부족이 합동하여 이로쿼이 연맹을 조직하고 있다. 이 연맹은 각 부족의 추장 50명으로 이루어진 대추장회의에 의해 운영된다. 현재는 근대화하여 정착농업이나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샤머니즘·가면무도 등의 유습(遺習)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종교행사나 제사에서 여자는 남자와 거의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또 종교적인 비밀결사가 발달되었으며 남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로쿼이족 [Iroquoi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어떤 도서관이 예산 삭감으로 인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자 지역 주민들이 합심해서 도서관 선반에 남아 있는 모든 책을 대여한 것이다(재치 있게도 주민들은 마지막으로 대여할 책이 메리 노튼Mary Norton 의《바로우어즈The Borrowers 》 가 되도록 일을 꾸몄다).

 

바로우어즈 :: 1952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영국의 아동문학가였던 메리 노튼의 대표적인 판타지 동화이다. ‘바로우어즈’는 인간과 똑같은 생김새를 지닌 작은 종족으로, 필요한 것이 생길 때마다 사람들의 물건을 가져다 쓰지만 정작 자신들은 ‘빌려borrow’쓰는 것이라 주장한다. 국내에는 《마루 밑 바로우어즈》로 출간되었고,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마루 밑 아리에티’란 영화로 제작되었다.

 

Chap 4. 우리 주변에 있는 변화의 실마리들

목격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언제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는 베스트셀러가 된 자기계발 안내서 《인간 관계론》에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것에 관해 토론을 시작하지 말고,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으로 토론을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 예’라고 대답하게 함으로써 결국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일단 ‘아니오’라고 말하게 되면, 그 생각을 바꾸는 것이 체면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상대방의 관심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들에게 ‘예’라고 말하게 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카네기는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이나 상황을 보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라고 덧붙인다.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심이 아닌 것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일즈맨들이 일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또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대답을 할 가능성이 높은 질문들을 던졌다. 그리고 계속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부했던 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주체감(sense of agency) :: 심리치료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스스로 의지를 세우고 실행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주체적 자각.

 

영국의 철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의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절망감을 앞세워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 말고 희망의 가능성을 내세워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급한 윌리엄스의 본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급진주의자는 절망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능하게 만든다.”

 

Chap 5. 나와 내 주변의 상황을 이용하는 방법

반달족(vandals) :: 반달족은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을 침범한 게르만족의 일파를 말하는데, 이들의 무자비한 파괴 행위에서 유래되어 예술문화나 공공시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도 사용한다.

 

반달족 :: 1세기 무렵 오데르 강(江) 상류에 거주하였으며, 3세기 후반 도나우 강(江) 중하류로 이동하였다. 4세기경 이후에는 로마의 주권하에 있는 판노니아로 들어가 정착하였고, 409년 민족대이동기 때 왕 고데기젤이 부족을 거느리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들어가 에스파냐를 침략하며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에스파냐를 침략한 서고트 족의 압력으로, 429년 왕 게이세리쿠스가 전부족을 모아 북아프리카를 침입하여 로마 총독 보니파키우스를 살해하고 아프리카 정복을 완성한 뒤,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왕국을 세웠다. 게이세리쿠스은 다시 지중해에 진출하여 제해권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하였으며 로마를 약탈하는 등 맹위를 떨쳤다. 뒤를 이은 군다문트 ·트라사문트는 평화정책을 취하였고, 5대왕 힐데릭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극단적인 친(親)로마 정책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자의 반감이 폭발하여 왕위를 사촌 겔리메르에게 빼앗겼다.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달 왕국 내의 세력 대립을 이용, 534년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보내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달족 [Vandal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삶의 가치를 인식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변하게 될 우리의 자원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가장 큰 시련을 이겨낸 사람이라고들 말한다(니체는 이것을 두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아주 오래된 불교의 ‘좌선 노래’에서 하쿠인 에카쿠白隱慧鶴 선사는 이렇게 썼다. “물속에서 목마르다고 울부짖는 사람처럼 가까운 곳의 진리를 모르고 먼 곳의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러시아와 미국이 우주 진출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을 때 폴 피셔Paul Fisher라는 한 미국인이 사재를 털어서 우주에서도 쓸 수 있는 펜을 개발했다. 당연히 미항공우주국NASA은 그 펜을 구입해서 우주 비행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에서는 임시변통으로 대체품을 선보였는데, 그것은 너무도 평범해서 나사조차도 간과해버린 물건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필이었다.

 

Chap 6. 세상을 위한 아주 작은 첫 발걸음

누군가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의도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왜 꼭 우리여야 할까? 필요한 일에서 한 발 물러서는 한 가지 이유는 ‘누구도’ 그런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바로,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 옳게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모든 획기적인 변화는 누군가가 새로운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 선구자의 행동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할 수 있도록(단,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도 하고 싶어 했던 것이라는 조건에서) ‘허락해준’ 것이다.

 

티핑 포인트 :: 균형이 깨어지고 특정한 현상이나 세력이 한 순간에 퍼지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196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토머스 셸링(Thomas Schelling)의 논문 《분리의 모델 Models of Segregation》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1970년대 백인 거주 지역에 흑인들이 비율이 증가하면, 백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현상인 화이트 플라이트(white flight)를 연구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백인들 거주 지역에서의 흑인 비율이 20%에 다다르면 백인들의 이주가 시작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것이 화이트 플라이트에서의 티핑 포인트라고 볼 수 있다. 티핑 포인트는 전환점, 터닝 포인트로도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다른 사람들이 ‘하게 될’일을 생각하기보다 자기 자신이 ‘해야 할’일에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 남부에서 흑인은 2류 시민이었다. 흑인들은 수많은 차별을 받았다. 백인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백인들과 같은 공공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백인 전용 식수대에서 물을 마실 수 없었고, 백인 전용 식당에 앉거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이런 모욕적인 행위들에 불만을 표출해봤자 곤란해지기만 할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1955년의 어느 날,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버스 안에서 늘 그랬듯이 네 명의 흑인들이 방금 버스에 오른 백인 승객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서 있을 것을 강요받았다. 세 명의 흑인은 자리를 내주었지만 재봉사였던 로자 파크스Rosa Parks는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그 한 순간에, 그녀는 간디가 말했던 노예정신을 벗어던졌고 그 후로 일어난 흑인 민권운동에 막대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처음으로 행동하고 영감을 주었다고 해서 그녀가 ‘지도자’까지 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솔선수범한다는 것이 반드시 뒤따라 발생하는 모든 일을 책임지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체포되고 며칠 후, 여성정치위원회Women’s Political Council가 하루 동안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제안했다.

이런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흑인에게도 권리가 있다. 흑인이 버스를 타지 않는다면, 버스는 운행될 수 없다. 버스 이용객의 4분의 3이 흑인이다. 그런데도 흑인들은 자리 양보를 거부해서 체포되거나, 아니면 빈 자리를 두고도 서 있어야 한다. 이런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저들의 행위는 계속될 것이다. 다음 차례는 당신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의 딸일 수도 있으며 어머니일 수도 있다. 이 여성의 재판은 월요일에 열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흑인들에게 월요일에는 이번 체포와 재판에 항의하는 뜻으로 버스를 이용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하고 계속 항의할 것을 결심했다. 처음 목표는 단지 차별적인 제도를 조금만 수정해서 흑인들이 자리가 비었는데도 서 있어야만 하는 일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 동안의 버스 승차거부 운동이 성공하자 사람들의 자신감이 커졌고, 이는 결국 더 광범위한 개혁으로 이어졌다. 그후 몇 달 동안 흑인들은 모두 단결해서 버스를 타지 않았다. 대신 택시를 타거나 걷거나 자가용을 함께 탔다(주로 교회 단체를 중심으로 대규모 카풀이 조 직되었다).

흑인들의 저항에 보복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절감된 요금으로 택시를 이용해 여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흑인 운전기사들이 말도 안 되는 경미한 교통위반죄로 체포되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도 포함돼 있었다. 100여 명의 민권운동가들이 체포되었고, 죄목은 보이콧 금지법 위반이었다. 보험회사들은 카풀에 동참한 차량에 대해서 보험을 취소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을 거쳐 결국 승리의 순간을 맞이했다. 미국 대법원은 버스 승객에 대한 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 법은 내슈빌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선포되었다. 시위자들은 법이 시행되고 차별이 정말로 끝날 때까지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지속하기로 했다.

백인우월단체인 KKK단이 말을 타고 흑인 거주지역을 달리면서 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이런 위협도 이전 같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불을 끄고 문을 잠근 채 공포에 떨면서 집 안에 숨죽이고 있던 흑인 주민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집 앞으로 나와 앉아서 KKK단을 지켜보았다. 그중에는 그들을 향해 손까지 흔드는 흑인도 있었다. 

판결 후 첫째 날 버스들은 법에 따라 평등하게 운행되었다.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구타와 총격을 수반한 백인우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시작되었다. 교회와 집이 폭파되었다. KKK단이 다시 거리를 활보하며 십자가를 불태웠다. 그러나 시위자들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지역 신문사, 교회 목사, 지역 기업가 협회 등 백인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일으킨 다른 백인들을 대신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돌연 테러가 멈췄다. 몽고메리를 포함한 미국 모든 지역에서도 버스 안에서의 차별이 끝났고 모든 사람들이 사태를 인정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자 파크스 :: 1913년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백인과 유색인종 분리를 규정한 짐크로우법(Jim Crow Law)에 따라 흑인은 학교, 공원, 극장, 식당, 대중교통 등 거의 모든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분리되어 차별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1955년 12월 1일 몽고메리 페어백화점의 재단사이자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몽고메리 지부의 간사로 활동하고 있던 로자 파크스는 평소와 같이 퇴근길에 버스를 탔다가 버스 자리를 백인 승객에게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지시를 거부하였다. 당시 몽고메리시의 조례에 따르면 버스 내에서의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버스기사는 흑인이 앉아야 할 자리를 지정하거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운전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자 파크스는 체포되어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55년 12월 5일부터 모든 흑인들이 버스 승차를 거부하기로 하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Montgomery Bus Boycott) 운동이 시작되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가 동참하게 되면서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고자 하는 흑인 민권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마침내 1956년 6월 19일 법원은 버스의 흑백분리를 규정한 몽고메리시의 조례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 1956년 12월 21일부터 흑백 통합버스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로써 381일 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종결되었다.
이후 로자 파크스는 1957년부터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각지를 돌며 연설하였다. 그리고 1965년부터 아프리카계인 하원의원의 비서로 고용되어 1988년까지 근무하였다. 그녀는 1996년 미 행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으며 2005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자서전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Rosa Parks: My Story)》(1992)와 회고록인 《조용한 힘(Quiet Strength)》(1995)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자 파크스 [Rosa Park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로자 파크스는 저항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에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사명으로 여기고 더 이상 차별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란, 그 단어가 정의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지도자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Part 3. 세상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

Chap 7. 아름다움과 기쁨을 조금씩 늘려나가기

너무도 자주, 우리는 미술을 사치라고 생각하거나 ‘미술가’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술가와 우리를 구분하는 것은 틀렸다(반 고흐가 미술가였던가? 그가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장 어려운 작품을 연주하는 모차르트에서 첫 번째 피아노 레슨을 받는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각각 창조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의 빈곤을 퇴치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의 관심과 기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성격에 맞는 일을 하게 된다면 가장 높은 효율성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미적인 부분에 관여한다는 것은 유명해지려고 노력한다든가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미술로 성공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런 욕구가 있을 뿐이다. 만약 그것을 즐겁게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남들과 나누고 싶어서 못 견디게 될 것이다.

 

좋은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중요성’이라는 외부적인 틀에 맞춰 전 지구적인 문제에 골몰하는 세상이 아니다. 좋은 세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특별한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세상이다. 그것은 또한 아름 다움과 창조와 놀이를 위한 자리가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

 

Chap 8. 당신이 가진 것을 현명하게 나누는 법

나는 또한 개발도상국에서의 NGO활동이 솔직히 무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존경받는 유명한 개발도상국 NGO들이 자신들의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가끔 1달러씩을 주곤 한다는 것이다. 이 돈을 받은 사람들은 본부로 돌아가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왔고 대성공이었다는 보고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지역 경제가 왜곡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을 하는 것보다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더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데도 돈이 지불되지 않는 행사에는 참석하 지 않으려 한다.

 

‘정명正命’ :: 불교에서 수행의 요건인 여덟 가지 정도正道, 즉 팔성도八聖道의 하나로, 정법正法을 좇는 ‘바른 생활’을 말한다.

 

틱낫한 :: 한자 이름은 석일행(釋一行)이다. 1926년 베트남 중부의 행정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16살 때인 1942년 선불교에 입문해 승려가 되었다. 이후 불교사상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모든 불교는 삶에 참여한다"는 참여불교(engaged Buddihsm) 운동을 주창하고,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는 실천적 사회운동을 펼쳤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컬럼비아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강의하였다. 베트남전쟁 때는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한 사회청년봉사학교를 열어 계속 봉사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불교 평화 활동으로 인해 베트남 정부에 의해 귀국 금지 조치를 당한 뒤, 1973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이어 베트남전쟁 후 프랑스로 들어오는 보트피플을 위해 수용소를 세워 봉사활동을 하였고, 1975년 파리 근교에 '스위트 포테이토'를, 1982년 보르도에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를 각각 세우고 명상 공동체 활동을 통해 세계 각국의 비구·비구니들과 평화 및 참여불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에는 미국 버몬트주(州)에 승원(僧院) '단풍림'과 수행원 '그린 마운틴'을 설립하고, 이후 프랑스·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을 오가며 계속 강연 및 저술 활동을 하였다.
불교의 명상법을 일상 생활과 접목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쓴 8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해 일명 '평화를 노래하는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리며, 그 외에 '참여불교의 주창자',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 '인류의 영적 스승' 등 여러 별칭으로 불린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귀향》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틱낫한의 평화로움》 《거기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 《화》 《틱낫한의 사랑법》등이 있다. 1995년과 2003년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틱낫한 [Thich Nhat Hanh, 釋一行(석일행)]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지 알고 나서 무척 놀란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부를 단지 친구나 동료하고만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부자이다. 우리가 이런 위치를 ‘노력으로 얻은’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노력으로 우리의 수입을 증대시킨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부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부를 누릴 만한] 적시적소에 태어났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공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도 언젠가 자선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Chap 9. 이보다 더 매력적일 수는 없다

환경운동이 혹시라도 죄를 짓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행한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들을 낙담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을 낙담하게 만드는 것, 주체감을 심어주지도 않고 위험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사람들을 우울하고 반항적이고 무관심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를’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의무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더 추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위대한 과제는 의무를 개인적 이익과 일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너무 많은 채소가 자랐는가? 그것들을 당신의 이웃집 현관에 놓아두라. 그러면 이듬해 그것들은 스스로 자라 있을 것이다.

 

Chap 10. 사랑하는 마음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것은 우리의 힘을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보살핌과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은 언제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Chap 11. 인류 전체를 위한 작은 행동의 시작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된다. 그럴 때 대개 우리는 그들을 '적', 우리의 순수성과 대조되는 완전한 악마로 분류함으로써 대응한다.

 

이언 스미스 :: 세르쿠웨에서 출생했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농민의 아들로 남아프리카연방 그레이엄즈타운에 있는 로데스대학교에 들어간 후 학업을 중단하고, 1941∼1946년 영국 공군에 복무하였다. 남로디지아입법의회 의원(1948∼1953), 로디지아-니아살란드연방의회 의원(1953∼1961)을 역임하였다.
1962년 백인우파 정당인 '로디지아전선(RF)'을 결성, 그 부의장·의장을 지냈다. 그간 자치정부 부총리 겸 재무장관·국방장관을 거쳐 총리(1964∼1979)을 지냈다. 종주국 영국이 주장하는 다수 지배하의 독립을 거부하고 소수백인이 지배하는 독립을 주장하였으며(1965), 1970년 3월 공화국 이행(移行)을 선언하였다. 1977년 총선거에서도 승리하였으나 1979년 5월 짐바브웨-로디지아 정부의 탄생으로 수상직에서 물러나 새 정부의 무임소장관이 되어 1987년까지 의회활동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언 스미스 [Ian Douglas Smith]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로베르 무가베 :: 북서부의 쿠타마 출생.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195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포트헤어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짐바브웨의 남로디지아, 잠비아의 북로디지아, 가나 등지에서 교원생활을 한 후 1960년 귀국, 국민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61년 국민민주당이 비합법화되자 J.은코모와 함께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동맹(ZAPU) 창설에 참가하고 부서기장이 되었다. 1962년 한때 체포되었으나 1963년 탄자니아로 도피, N.시톨레와 함께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ZANU)을 창설하고 서기장이 되었다.
1964∼1974년 다시 체포 ·구금된 후 루카사회의 출석을 이유로 다른 흑인지도자들과 함께 가석방되었으나, 회의에 출석하지 않고 ZANU 의장에 취임하여 게릴라투쟁을 지도하였다. 1970년대 후반 로디지아에 평화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계속 무력해방을 주장하고 1976년 애국전선(PF)을 결성, 은코모와 공동의장이 되어 해방세력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런던에서의 제헌회의 후 독립선거에서 당을 압승으로 이끌고, 1980년 초대 총리에 취임, 1987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17년까지 집권했다. 2019년 지병 치료중 싱가포르에서 95세의 나이로 숨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베르 무가베 [Robert Gabriel Mugab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80년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재탄생하던 해에 확인할 수 있다. 로디지아에서는 흑인과 백인 간의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이언 스미스Ian Smith가 이끄는 백인 소수정권이 1965년 영국으로부터 로디지아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영국과 유엔의 제재조치가 뒤따른 가운데, 흑인들의 게릴라전으로 로디지아는 내분으로 치닫고 있었다. 살인, 고문, 강간, 약탈이 흔하게 목격되었고 흑인 6명 중 1명이 거주지에서 쫓겨났다. 당사자들의 동의하에 런던 회의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20여 개의 정책이 이미 만들어진 상황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거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평화가 올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 최고 지휘자는 백인 소수정권이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은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눈에 보이 는 백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훗날 고백했다.

다행스럽게도, 일어날 수도 있었던 재앙을 가장 간단하게 모면하게 되었다. 백인 총리 이언 스미스와 흑인 지도자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가 같은 방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백인과 흑인 시민단체는 선거 후에 발생할 위기를 고려해 스미스에게 무가베의 본부로 찾아가 만날 것을 촉구했다. 무가베의 본부로 들어선 스미스는 중무장한 50여 명의 경비병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중 한 명이 “당장 그를 제거하자!”고 외치며 스미스에게 총을 겨눴지만 이내 동료 경비병에 의해 제압당했다.

얼마 후 방 안에서는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때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무가베는 자신의 적을 옆자리에 앉히고 몇 시간 동안 자신과 조국에 대한 사랑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 모두가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무가베가 선거에서 승리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무가베는 자신이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을 설명하고 백인들의 신임을 얻고 싶다는 열망을 강조했다. 그는 스미스에게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물었고 그에게 각료 자리 두 개를 제안했다. 무가베가 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스미스는 결과에 승복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나본 무가베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고 응원해주었다. 스미스는 자신이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다른 백인 국민도 이에 따라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저녁 무가베는 대국민 연설을 했다.

“여러분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나는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나와 함께 새로운 시대에 참여해주십시오. 그리고 음울했던 우리의 과거는 잊어주십시오. 용서하고 잊읍시다.”

간단한 말처럼 들리지만, 무가베나 스미스 모두 체면을 잃지 않고 그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통합을 위해서 서로에게 속하지 않는 제3자의 시선이 필요했다.

 

모든 당사자들이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한 그 어떤 갈등도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최소한 어느 한 쪽이라도 자기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우리의 옳고 그름을 가장 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이성적인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통해서이다. 만약 우리가 상대방을 그들만의 진정한 이해관계와 약점을 가진 한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 다면 갈등 해소를 위해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할 것이다.

 

보르다 투표 :: 콩도르세와 같은 시대를 산 수학자 보르다(Jean-Charles de Borda)는 유권자의 선호도를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후보에게 순위를 매겨 점수를 부여토록 했다. 예를 들어 1위는 10점, 2위는 9점을 주는 식이다. 1위를 많이 획득한 사람의 점수가 높은 것은 분명하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MVP를 선정할 때 이 방식이 적용된다. 투표권이 있는 기자들은 1등부터 10등까지 순위를 매긴다. 1등에겐 14점, 2등에겐 9점, 3등에겐 8점, 4등에겐 7점을 주며 10등에겐 1점을 부여한다. 최고 총점자가 MVP를 받는다. 하지만 이 경우 1등 수가 적어도 MVP가 된다. 1999년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이반 로드리게스보다 1위 표를 많이 받고도 총점에서 졌다. 순위의 편차가 큰 데 따른 결과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르다 투표 (한경 경제용어사전)

 

투표자들은 단순히 1등에서 꼴찌까지 다양한 범위 안에서 참가자들에 대한 선호도를 나타낸다. 우승자는 어떤 투표자의 투표에서도 1위를 기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참가들보다 전체적으로 높은 점수를 인정을 받은 것이다. 반면 탈락자는, 어떤 투표자들에게 1위를 받았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여러 번의 선택이 가능한 선호도 투표는 개인 선거나 정당 간의 선거에서 사용될 수 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사람들은 다만 우선순위가 다를 뿐 대체로 비슷한 기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선호도 투표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들은 서로의 첫 번째 선택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선택에 선뜻 동의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 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을 동료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선호도 투표에서는 누구도 반대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당신의 선호도에 따라 모든 선택지에 투표한다. 투표자가 아무리 강하게 반대할지라도, 최소한 1점은 주어야 한다.

 

누군가 특별한 정책을 채택하고 싶다면 그는 온건한 지지자들을 좀 더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도록 설득해야 한다(6, 7점을 주는 대신 9, 10점을 주도록 설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이 좀 더 자신의 생각을 누그러뜨리도록 설득해야 한다(1, 2점을 주는 대신 6, 7점을 주도록 설득해야 한다).

이미 우리 쪽으로 넘어온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기보다는, 이전에 정치적 반대자들이었던 사람들을 끌어옴으로써 더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합의 시스템은 세련된 토론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뒤이은 결의안 채택에서도 그 자체로 의견일치를 촉진시킬 것이다.

결국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함에 따라 사람들은 이전에 그렇게 크게 보였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TED :: 일종의 재능 기부이자 지식 · 경험 공유 체계다. 주제를 제한하지 않고 모든 지적 호기심을 함께 충족하는 게 목표다. 매년 미국 롱비치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각각 열린다. 18분 안에 강연을 마무리해야 하는 게 특징이다. 1984년 리처드 솔 워먼이 미국에서 시작했고, 2001년 크리스 앤더슨이 넘겨받아 ‘세상에 퍼뜨릴 만한 아이디어’를 표어로 내걸었다. 제인 구달, 빌 클린턴 등이 강연자로 나서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2006년부터 강연 내용을 인터넷에 올려 누구나 열어볼 수 있게 했다. ‘TED엑스(x)’ 형태로 세계 곳곳의 개별 단체가 여는 강연회를 돕는가 하면 2만여 번역 자원봉사자가 활동하는 등 인류 공동의 지식 자산으로 발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테드(TED)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ICT 시사용어 300, 2013.02.05)

 

동정심은 단순히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암스트롱은 종종 이런 실수를 목격했다). 동정심은 다른 사람과 함께 견뎌내고, 그의 입장이 되고,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양 느끼고 그의 주장을 관대하게 이해해주는 것이다.

 

유명한 불교철학자 잭 콘필드Jack Kornfield 는“우리는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인류애humanity ’와 같은 추상적인 실체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우리 자신에게 선언한다.”고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것은 우리가 대하기 껄끄럽고 불쾌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제한 것이다.

 

무가베와 스미스에게 제3자의 도움이 필요했던 이유는, 각각 거대한 무리의 수장으로서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하는, 체면을 구기는 모험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들 간의 분쟁은 다르다. 누군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의 그런 행동 덕분에 나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칭기즈 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같은 사람들의 업적과 같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일들은, 실제로 우리 모두가 매일매일 하고 있는 작은 일들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Part4. 결론

 

당신이 행동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경고할 것이 있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 심지어 이롭지 못한 결과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수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 역시 같은 일을 했을 것이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우리를 칭찬하 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시간적·공간적으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볼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일도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판단해버릴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구도자 같은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때, 우리는 어느 정도의 인류애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이 우리의 행동을 멈추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지금 바로 여기’의 중요성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뭔가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일의 크기에 겁먹지 않을 수 있다.

 

아일랜드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할 수 있는 일이 단지 조금밖에 없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큰 실수는 없다.”고 말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종착점이 목표는 아니다. 어떤 선율의 끝이 반드시 그 음악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테레사 수녀도 같은 생각을 가졌다. “나는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나는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나는 4만 2,000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수피교(Sufis) ::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분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절대 끝나지 않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일’이라기보다는 ‘정신상태’에 더 가깝다. 있는 상황 그대로에 관심을 갖는 것, 변화에 대한 책임감을 기꺼이 나누는 것, 절망감으로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희망으로 가능하게 하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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