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s

인생학교: 시간

728x90
 
인생학교: 시간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는 법 『인생학교: 시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마주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전하는 책이다. 작가이자 시사평론가인 톰 체트필드의 《시간》편에서는 삶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을 되새기며 디지털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격을 잃지 않는 법에 대해 생각해본다. 상상불가의 속도로 질주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제대로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며, 디지털 시대에도 깊고 농밀한 사유가 가능한지 고찰한다. 멀티태스킹의 함정, 프라이버시 문제, 가치와 권위에 대한 판단과 포르노, 게임, 새로운 정치 형태 등의 다양한 분야를 살펴보며 디지털 시대에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고민하는 이들에게 앞으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며 다 같이 잘 살아남기 위해 어떤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지 깨달음을 전한다.
저자
톰 체트필드
출판
쌤앤파커스
출판일
2013.01.11

 

머리말

미래의 변화가 내 생활의 변화를 압도하는 시대다.

 

세상은 스마트하게 돌아가지만, 나는 점점 더 무능해지는 것 같다. 세상은 글로벌하게 돌아가지만, 나는 점점 더 고립되어만 가는 것 같다.

 

내가 숲으로 들어간 이유는 삶을 마음먹은 대로 살아보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오직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마주하면서,

삶이 가르쳐주려는 것들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깨닫고 싶어서였다.

산다는 것은 그토록 소중한 일이기에

나는 진정한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가 않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도 했다.

나는 깊이 있는 삶을 살며 삶의 모든 정수를 빨아들이고 싶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중에서

 

 

 

들어가는 글

더 이상의 불가능은 없다

우리가 사는 요즘 시대는 기적이 흔하디흔하다. 기적조차 그저 일상의 일부로 여기기 십상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믿도록 나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 20년 전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내가 합리적이고 배울 만큼 배운 청중들에게 강연을 하면서 20년 후에는 지금과 같이 된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개인 휴대폰으로, 그것도 공짜로, 전 세계의 거리지도와 위성지도뿐 아니라 수많은 도시의 스트리트뷰street view까지 보게 될 거라는 얘기를 청중들이 믿도록 납득시킬 수 있었을까? 아니, 나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 서비스들이 어떻게‘무료’이용이 가능할지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을 제시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것은 그 당시 기준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우리 생활 속에 출현한 지는 100년이 넘었고, 인쇄기가 발명된지는 50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대중에게 개방된 이후, 이용자가 20억 명 이상으로 늘기까지는 불과 2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상업적 휴대폰 서비스가 처음 개통된 뒤에 가입자가 50억 명을 돌파하기까지도 겨우 30년이 걸렸을 뿐이다.

 

가능성의 탐험은 새로운 도시나 대륙을 탐험하는 일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인간 본성은 다를 바 없지만 체제가 다른 새로운 땅으로 들어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애와 타인과의 교감 측면에서 양쪽 다 지금껏 유례없는 기회를 품은 지금 이 시대에서 말이다.

 

 

 

Part 1. 디지털 세상 속 우리의 시간, 어떻게 쓸 것인가?

역사상 유례없는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잡지〈와이어리스 에이지The Wireless Age〉는 1921년 8월호에 ‘세기의 대결’로 관심을 모은 복싱 관련 기사를 실었다. 무려 11페이지에 걸친 흥분조의 보도였다. 해당 시합은 그 전 달에 뉴저지 주 저지 시티Jersey City에서 열린 헤비급 세계타이틀전이었다. ‘매너사의 주먹The Manassa Mauler’으로 불리는 미국의 잭뎀시Jack Dempsey가 프랑스의 도전자 조르쥬 카르팡티에Georges Carpentier를 4회전에서 KO시킨 경기였다.

현장 입장권 판매액이 100만 달러가 넘었을 정도로 대단한 시합이었다. 그런데〈와이어리스 에이지〉가 이 시합에 지대한 관심을 쏟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1921년 7월 2일은 방송 역사상 아주 뜻깊은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바로 이날은, 대중의 관심이 쏠린 대단한 행사를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관람객보다 생중계로 접한 사람의 수가 더 많았던 최초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시합 당일 저지 시티 경기장에는 9만 명에 달하는 관중으로 꽉꽉 들어찼다. 하지만〈와이어리스 에이지〉추산에 따르면‘적어도 3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고 숨죽인 채로’경기장 멀리에서 시합의 상황을 경청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최대 크기의 무선 안테나에 긴 전선으로 전화를 연결시킨 덕분이었다. 이 안테나로 말하자면, 뉴저지 주 호보컨 Hoboken의 이리-라카와나 기차역Erie-Lackawanna Railroad Terminal 위에 세운 207미터짜리 안테나였다. 그리고 여기에 연결된 전선은 미국아마추어무선연맹ational Amateur Wireless Association의 회장대행이자, 흥분에 들떠 있던 J. 앤드루 화이트 J. Andrew White에게로 이어졌고, 그는 링 주변에서 시합의 실황을 해설했다. 그런데〈와이어리스 에이지〉가 다소 유감스러운 논조로 언급한 바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에 중계 계획이 변경되는 바람에 화이트의 해설은 기차역의 또 다른 중계자가 그대로 따라 말하게 되었고, 결국 전파를 탄 것은 그 두 번째 중계자의 목소리였다고 한다.

〈와이어리스 에이지〉는 선례를 만드는 일의 힘을 제대로 인식한 듯했다. 그 방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기록에 남을 일이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이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그래 왔듯 활자가 찍혀나오면 그제야 눈으로 시합 소식을 확인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때 라디오가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기대에 들떠 있는 대중의 귀를 통해 세계적인 시합이 지체 없이 바로바로,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 이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이제는 미래를 예측할 때 신나고 흥미진진하게, 무한대에 가까운 추측을 펼쳐도 될 만한 시대가 열린 듯하다.”

 

청소년에게 매일 8~9시간의 수면이 필요한 점을 감안할 때, 2009년의 이 수치대로라면 아이들이 깨어 있는 시간 중 반 이상을 미디어 사용에 보낸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이 수치는 학교 수업 중에 사용되는 미디어 사용은 제외한 것이었다.

 

우리의 행동 습관만이 아니라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의 디폴트(기본값)를 어떻게 맞춰놓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최소한 한 가지의 개인화 미디어에 ‘와이어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혁신이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도 채 안 되는 과거만 해도 라디오 방송 생중계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 있는 시대부분을 개개인 각자가 실시간으로 세계와 연결된 채로 있으니 말이다.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장소에서 미디어가 더 많이 사용되리라는 것, 이것은 단기적인 시각에서의 답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시각에서 볼 때 우리가 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이제 이런 추세들에 내포된 의미를 헤아려봐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새로운 방법을 고민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미디어로부터 벗어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의 기본 상태default state가 아닐 뿐만 아니라, 확고한 의지 없이는 경험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열차 안의‘정숙 객차’표시, 미술관, 식당 등 공공장소에 붙은 휴대폰을 꺼달라는 표지판들을 생각해보자. 이 표지판들은 지금 우리 시대를 대변해준다. 지금은 특별한 요구, 확고한 의지에 의해서만 디지털 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본적으로‘두 가지’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주변 세상으로부터나 상호간에 최상의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연결된 상태wired state’와‘연결이 끊어진 상태 unwired state’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둘 중 어느 한 방식을 비난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에게 신과 같은 능력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다면, 먼저‘나 자신’에게 보호할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 자신과 내가 지켜야 할 가치,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확실하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쓸 것 없이 우리 자신의 생각을 펼쳐볼 시간도 필요하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반응까지도 배제한 채 말이다. 명심해야 한다. 그런 시간을 잘 다루고 지키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으면, 기술이 우리에게서 그런 시간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시적인 실시간 연결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자기성찰 측면의 중요한 물음은 그 방향이 서서히 옮겨 가고 있다.‘ 나는누구인가?’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쪽으로. 하지만 연결에 아무리 목마른 상태라 하더라도, 잘 살아남으려면 이 상시적 소통의 능력으로부터 의식을 어느 정도 분리시킬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현재가 아닌 다른 시제時制, 즉 다른 본질의 시간도 필요하다.

컴퓨터 공학자 재론 레니어Jaron Lanier도 2010년 3월에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outh by Southwest 페스티벌의 강연에서 이점을 기가 막히게 지적했다. 강연에서 그는 청중에게 자신이 말을 하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듣기만 해달라고 요구하며 말했다. “이렇게 멀티태스킹을 중단시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존재하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귀 기울여 듣고, 나중에 글로 써보십시오. 또 그다음엔 어떤 내용이든 그 써놓은 것을 머릿속으로 걸러서 시간을 가지고 사색에 잠겨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을 존재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레니어가 30분 동안‘전기기기와 단절된’집중을 요청한 것에서 시사되듯, 우리 삶 속에 ‘언와이어드unwired’된 시간을 만드는 것은 산 속 오두막에서 살거나 평생 이메일과 담쌓고 지내기로 선언하는 식의 거창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언와이어드 시간이란 그런 거창한 방식보다는 일상생활의 일부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 이를테면 오전 중에는 이메일을 보내지 않기, 회의나 식사 중에는 전화기 꺼놓기, 며칠이나 몇 시간 동안 전기기기를 사용하지 않는 시간 마련하기, 누군가와 20통의 이메일을 주고받기 보다 직접 만나기, 이런 결심이 좋은 예이다.

 

디지털 기술의 존재를 순간순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그 역할을 규정하려는 것이다.

 

뉴미디어의 어마어마한 정보력 덕분에 시간은 이제 그 어느 시대보다도 아주 값진 자원이 되었다. 시간의 양은 전 세계의 기술을 총 동원한다 해도 아주 조금의 양도 늘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에 의해 점차 긴장과 불안, 제어력 상실감까지 느끼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그렇게 끝나고 말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분명 사회집단으로서나 개인으로서 시간의 경험 속에서 이런 변화에 저항하는 동시에, 그 변화 안에서 적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기술에 대해‘yes’만이 아니라‘no’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Part 2.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한 변화들

혁명을 뛰어넘는 혁명

인간과 디지털 기술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꾸준하고 점증적으로 친밀해진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차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이다. 이무렵부터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출현과 더불어 연구소가 아닌 일반 가정 안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컴퓨터 시장의 규모는 아마 다섯 대쯤에 불과할 것이다.”이 말은 IBM의 사장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이 1943년에 했다는 말로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다(위키피디아에서도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증거는 불충분하다’고 밝히고 있다시피, 신빙성은 떨어진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인간과 디지털 간의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융합되어가는 여정의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성능 향상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이 있으니, 바로 이런 기기들이 제공하는‘경험’이다.

 

그 시절 그때, 엄두도 못 냈던 일들

모든 기술은 우리가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이에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도구를 만들고, 또 그 도구는 우리를 만든다.’캐나다의 미디어 연구의 선구주자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의 말이다.

 

교통기술은 우리의 이동성을 변화시키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바꿔놓았다. 우리 인간은 기술적 동물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를 증강시키는 것, 즉 한계를 뛰어넘고 적응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세계는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의 말마따나‘지적 기술intellectual technology’에 의해 변모해왔다. 지적 기술이란, 무기와 의복이 신체적 힘을 확장시켜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성을 확장시켜주는 기술을 의미한다. 지도에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만드는 도구들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고 학습능력과 의사소통능력을 확장시켜주며 지식과 착상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게 해준다.

 

범용 튜링 기계 Universal Turing Machine :: 튜링 기계는 그가 25세 때 고안한 것으로, 실제 기계가 아니라 이론상의 계산 기계다.

 

튜링기계 :: 튜링은 1936년 발표한 논문에서 추상적인 기계(이론상의 계산기계)를 정의하였는데, 이 기계는 유한상태의 기계로서 테이프를 가지고 있고, 테이프에는 부호를 기록하여 이를 다시 읽을 수 있으며, 또 이 부호를 변경할 수도 있고, 테이프를 앞뒤로 움직일 수도 있는 간단한 기계이다. 따라서 다음의 입력은 다른 장소에 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기계는 초보적인 외부기억장치와 각 상태에 따른 내부기억능력을 보유하고 있다.이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으나, 상당히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다. 튜링기계의 종류는 다양하며, 이 중에 다른 어떤 기계의 조작도 흉내낼 수 있는 기계가 존재한다. 컴퓨터 자체가 유한의 기억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무한기계를 연구하는 이유는 우선 유한상태의 기계에서도 기억장치가 현실적으로 커지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일을 하려면 점차적으로 이를 확장해야 한다.그러므로 우선 튜링기계가 무한정의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유한하다고 생각한 후에 테이프가 모자라면 추가한다고 생각하면 실제의 경우와 부합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현재의 컴퓨터와 이론적인 기초를 생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은 컴퓨터나 로봇의 설계 등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튜링기계 [Turing machin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컴퓨터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범용 매체로서, 유연성이 무제한에 가까운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문자에서부터 이미지, 영화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는 다른 모든 매체를 흉내낼 수 있다. 적절한 소프트웨어만 설치하면 소리, 영상, 이미지, 문자를 자유자재로 재현해낼 수 있다. 더군다나 이런 소리, 영상 등을 보내거나 받는 비용과 시간으로 말하자면 지난 과거의 역사와 비교 자체가 가소로울 만큼 적은 비용과 빠른 시간이 소요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매체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요구가(정말로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지적 기술들이)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을 통해 제공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술을 통해 우리는 전에는 엄두도 못 냈던 수준의 통제력을 누린 다. 이런 통제를 떠받쳐주는 토대는, 무게도 없지만 정보 자체를 무 한대로 재생산할 수 있는 구조에 있다. 즉, 이‘디지털’언어의 가능 성은 궁극적으로 1과 0이라는 전기신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역사를 아울러 지성 증대 기술의 힘은 줄곧 현실의 물리적 한계에 부닥쳐왔다. 가령 인쇄술의 발명 전까지만 해도 책을 만들기 위해서 는 숙달된 장인들이 수백 시간을 매달려 필사해야 했다. 인쇄기가 발 명된 이후에도 종이의 부피와 비용이 문자언어의 활용에 제약을 가 했다. 소리의 녹음은 처음 출현 후 1세기 동안 밀랍이나 염화비닐 같 은 소재에만 물리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한계를 떠안고 있었다. 영 화와 사진은 값비싸고 제한된 물리적 소재들에 의존했고, 그나마 조 심조심 다룬다 해도 필름에 불이 잘 붙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현재는 이 모든 한계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2008년 기준으로 보면 월드와이드웹의 웹 페이지는 대략 1조 개 였다. 3년 후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리는 것조차 무의미하지만 어쨌든 수조 개에 이르렀다. 번역본과 각 출판 판별까지 고려하면, 인쇄술의 발명 이후 500년 동안 1,000억여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는 현재 웹에 업로드되고 있는 컨텐츠로 환산 하면 한 달분도 채 못 된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디지털 기기는 정보를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정보를 재생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정보에 '생명을 불어넣어' 바이트와 알고리즘에 생기를 부여하는 능력도 갖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는 책을 쓰거나 그림 을 그리거나 지도를 제작하는 것처럼 단순히 어떤 물체를 만드는 것 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상호작용하고 탐험하도록 시스템을 활성 화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기적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또 한 인간의 노력, 관심, 감정, 경제활동, 혁신이 디지털 기술 쪽으로 지속적으로 이주하고 있는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근거일지도 모른다. 지난 몇백 년에 걸쳐 도시가 자석처럼 세계의 수많은 인구를 끌어당겼듯, 지금은 디지털 영토가 그 어마어마한 가능성 안으로 사 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것도 단순히 실제 경험으로 그치고 마는 것들보다 더 호소력 짙은 가상의 세계 속으로.

 

컴퓨터로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사용하는 각각의 기기들이 아니라 이 기기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는 지능의 기술이자 경험의 기술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기술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기술이 가능케 해주는 경험에 대해 집중해야만 디지털 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종이책을 읽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독서라는 경험의 본질에 비추어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읽고 얼마나 오래 읽느냐이다.

 

이것은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다르지 않다. 게다가 페이스북을 이용할 때는 나는 혼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공공의 공간으로 들어가 시시각각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대상들에 반응한다.

 

이러길 1시간쯤 후에‘페이스북을 했다’고 말하고 만다면, 그 사이의 내 경험의 본질이나 속성은 나타내지 못한다. 정작 필요한 핵심은 ‘내가 어떤 식의 만남과 상호작용을 겪게 되었는가’이다. 내가 그 시간 동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동기로 그런 일련의 과정을 이어 나갔는지에 대해 알 수 있어야 한다. 내가 1시간 동안 온라인상에서 다른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소식과 의견을 나누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느낀 감정은 그날 나머지 시간까지 나의 기분에 영향을 끼치기 십상이다.

 

내 경험을 판단할 때의 최선의 기준은, 삶에서 겪는 다른 사회적 경험이나 상호작용에 적용하는 그런 기준과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가령 내가 얼마나 많은 교훈을 얻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과 어떤 소통을 나누게 되었는가, 타인에게 어떤 공감을 느꼈는가, 그 상호작용으로 내 삶이 얼마나 풍부해졌는가, 이런 기준들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기술은 우리의 본성을 자극하는 일종의 증폭기인 셈이다. 게다가 최악의 경우, 다른 사람들을 사물화시키고 말수도 있는 그런 무시무시한 증폭기. 그래서 자칫 상대를 물건 다루듯 멋대로 대하고 존중과 성실함을 우습게 여기게 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우리에게 지속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돈독한 유대관계나 스스로와의 준엄한 자기성찰 관계와 요원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30년간의 온라인 활동을 사물화와 피상적 자기만족의 증거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2011년의 디지털 동향을 살펴보면 그 공공의 공간에서 더 심오한 깊이를 끌어내려고 안간힘 쓰는 면면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Part 3.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깊이 있는 삶은 가능하다

온라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과 개인이 맺는 인간적 유대, 그리고 뜻밖에 느끼게 되는 기쁨이다. 이 두 가지는 기술의 미래 기반을 다지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살아 숨 쉬는 개개인이 지금의 젊은 세대처럼 기술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세계란 여전히 꿈만 같은 일이다. 하지만 존재하는 온갖 차이와 개성들이 저마다 오늘날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은 가능하다. 지역, 세대의 벽을 넘어 가족과 친구들이 나이를 막론하여 한결 더 자유롭고 더 빈번히 상호작용하는 그런 세상도 가능하다.

 

오늘날의 디지털 영토는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인간의 경험과 가치관에 의해 팽창되고 있다. 페이스북이 공식 출범한 지 불과 5년여 만에 7억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신상을 거리낌 없이 업로드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게임을 비롯한 여러 소셜사이트의 아바타나 제2의 자아는 현실에서의 도피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새로운 유형의 관계를 향해 길을 터주기도 한다. 온라인상에는 소문, 거짓말, 증오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주목할 만한 새로운 형태의 신뢰가 넘쳐나기도 한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 수십억 명이 이베이eBay를 통해 물품을 거래하는 것은 물론이요, 알리바바닷컴Alibaba.com 같은 기업간 전자상거 래 서비스를 통해 6,000만 명 이상의 소기업 종사자들이 서로가 원하는 기술과 수요를 찾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디지털 영토는 어지럽게 돌아가는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때때로 상당히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 다양한 경험을 하는 주체는 인간애를 지닌‘우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에 대한 생각, 감정, 가치관을 오랜 시간에 걸쳐 자리 잡은 인도주의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깊이 있는 삶’을 살길 바란다면 말이다.

 

멀티태스킹의 함정

디지털 미디어는 놀라울 만큼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기에는 복잡성뿐만 아니라 그에 대응하는 ‘단순화의 압박’또한 수반되고 있다. 즉,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한 압박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문자 메시지는 지금껏 정보의 홍수 시대를 위해 발명된 도구 중 가장 완벽한 도구라 할 수 있다. 순전히 숫자와 문자로만 이루어진 문자 메시지보다 더 단순한 디지털 상호작용 형태는 찾기 힘들다. 보내는 사람 자신의 상태에 따라 썼다가 수정하여 다시 써서 보내면 그 최종 발송 메시지에는 글이 쓰여진 과정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망설임이나 실수의 흔적도, 무의식중의 암시나 주의산만함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즉각적인 동시에 비동시적이며, 필요로 하지만 주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용자들에게 가능한 한 적은 요구를 할 뿐이다.

문자 메시지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은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어떤 진실을 부각시킨다. 궁극적으로 따져봤을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편리함이지 통제력이나 기술의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진실에는 편리함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늘어날수록 여타 다른 통제력을 희생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경고가 내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단순함과 편리함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모든 디지털 업데이트가 그러하듯 수시로 들어오는 그 수많은 문자 메시지들은 우리 사정에 맞춰 시간과 장소를 가려주는 법이 없다. 조지 클루니 영화 속 정치가들처럼 어쩌면 우리는 우리 기계의‘필요’를 우리 자신의 필요보다 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를 가장 잘 대변하는 단어로 꼽히는 ‘멀티태스킹‘에는 현대생활의 토대가 되는 가정들이 내포되어 있다. 기술이 가져다준 최고의 혜택 중 하나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가정과, 이런 능력 덕분에 우리가 여러 가지 일련의 활동을 병행하며 최대의 효율을 끌어낼 수 있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2007년 3월,〈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에 이런 가정을 주제로 삼은 기사가 실렸다.‘ 속도를 늦춰라, 겁 없는 멀티태스커여, 차 안에서 이 글을 읽지 말 것’, 글의 요지를 암시하는 이런 타이틀 아래 기사는 인지과학자이자 미시건 주립대의 뇌·인지·행동연구소Brain, Cognition and Action Laboratory 소장인 데이비드 E. 메이어David E. Meyer의 조언을 인용해 명백한 결론을 내렸다. 사소한 일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엔 거의 예외 없이‘멀티태스킹은 오히려 속도를 둔화시키고 실수할 가능성을 늘린다. (…) 정보처리 능력의 관점에서 볼 때 주의산만과 방해의 소지는 불리한 요소다.’라고.

 

우리 인간은 기계와는 달라서, 다수의 복잡한 일들 사이에서 주의력을 쉽게 이리저리 옮기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기는커녕 그 일들 사이에서 갈팡질팡 산만해져서 작업들을 동시에 수행한다기보다는 내내 주의력을 조각조각 분산시켜서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만다.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 정도면 멀티태스킹으로 무리 없이 거뜬히 처리해낼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정신력을 요구하는 일에 이런 분산된 주의력 ‘조각’을 결합시키면 우리의 다재다능함은 순식간에 퇴색하고 만다. 한 예로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인터넷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이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에 답한 후에 ‘중대한 정신적 업무’로 복귀하기까지 평균적으로 25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그렇게 한번 방해받고 나면 다른 메시지나 웹을 둘러보느라 한눈을 파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1998년에 미국의 작가 린다 스톤Linda Stone은 동시에 여러 가지 정보를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탐색하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지속적인 주의력 분산continuous partial attention’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러한 피상적이고 오락가락 오가는 주의력에 대한 개념은, 우리 대다수가 멀티태스킹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냥 시간만 더 소비하고 마는 그런 일을 설명하는 데 더 적절한 것 같다. 지속적으로 나오는 수많은 정보들에 걸쳐 포괄적인 정신작용을 일으키고 있긴 하지만, 그 어떤 정보에도 분산된 각각의 주의력이‘업무’의 총체적 요구에 맞춰주지 못하는 그런 일 말이다.

 

주의력 분산도 정보가 넘쳐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이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에 온 주의력을 기울여야 할 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무를 수행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심혈을 기울이는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기차 안에 앉아 이메일, 문자 메시지, 트위터를 확인하고 음악을 듣는다고 치자. 이때의 나는 그 자리에 있는 동시에 없는 셈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세상과 사람들은 내 스크린상에 펼쳐지는 일들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내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파편적으로 분산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분산된 주의력을 중심으로 사람들 사이에는 새로운 행동양식이 생겨났다. 헤드폰을 쓰고 있다든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통화를 한다든지, 주변을 촬영한다든지, 이런 방식으로 디지털 생활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상투적 역할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소리와 시각, 친구들을 통해 답답한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숨 쉴 구멍을 찾는 자급자족적 시민이 되는 셈이다.

우리가 이런 상투적 역할을 존중하는 부분적 이유는, 그것이 현대의 삶을 이루는 하나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변과의 격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꼭 필요한 고립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런 역할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역할이 임시적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어느 순간 슬그머니 영구적 존재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이런 위험성을 회피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떤 관심을 받아야 합당할까? 혹은 그들에게 어떤 관심을 되돌려줘야 할까? 그리고 우리가 충만한 의미에서의 ‘우리가’ 되려면 나 스스로에게 어떤 관심을 받아야 하고, 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우리는 점점 우리 기억의 여러 부분을 컴퓨팅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우리는 그런 부분의 기억에 대해서는 결핍되어 있다거나,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된다. 전화번호에서부터 사진, 서류, 일기, 메모, 스케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 삶 속의 중요한 기억들을 점점 더 많이 기계 속에 담아놓고 생활한다.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했으며 그때 어떤 감정이 일었는지, 가족과 어떤 친밀한 교류를 했는지, 그 순간까지도 기계 속에 담아놓는다.

 

내 전화기가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생생한 기억을 담고 있다. 전화기에 보관된 지난 몇 년간의 문자 메시지를 쭉 살펴보니 친구들의 출산 소식을 담은 메시지가 6개나 있고, 그중 몇 개는 출산 후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보내준 소식들이다. 서로 짠 것처럼 내용들이 비슷비슷하다. 갓 태어난 아기의 이름, 출생시간, 감격스러운 감상과 체중을 알려주는 것하며 사진을 첨부한 것까지 비슷하다.

그 문자 메시지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흐뭇하다. 하지만 그렇게 메시지를 훑어보다 보면 가슴 한쪽에 거북한 느낌이 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내가 그 메시지들을 왜 보관해놓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들에 기대지 않으면 친한 친구들의 첫아이의 이름이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할 게 뻔하니까. 나는 메시지들을 받고 나서 답장을 보냈고 카드나 선물도 함께 보낸 적이 있지만, 그 후엔 그 일에 대해선 까맣게 잊곤 했다. 블로그, 페이스북 사진, 네트워크 업데이트 같은 것들이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생아 소식은 내 의식에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편인 것 같다.

누가 나에게 어떤 이의 전화번호를 물어봤을 때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한 후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검색한 후 알려준다. 내가 핸드폰을 통해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맥락에서 따지자면, 나는 이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셈이다. 그 정보를 소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가 물으면 핸드폰에 저장된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해줄 수도 있다. 사실 어느 때고 켜져 있고 어느 때고 내 주머니 속에서 꺼낼 수 있는 장치에 이런 정보들을 기록해두는 것은 누구에게나 더없이 편리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기억’이라고 말한다면 자칫 근본적인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즉, 어떤 기억이 인간으로서의 나에게 중요한지에 대한 오해. 그리고 그 어떤 정교한 기계에도 위탁할 수 없는 기억들에 대한 오해다.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라고 해도, 우리 인간에게는 당연하고 중요한 어떤 것이 결핍되어 있다. 바로 이야기다. 우리는 자연의 산물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만들어낸 저마다의 독특한 경험의 산물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억력은 특이하게도 생각, 느낌, 자아와는 따로 떨어진 존재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행동하고 배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사건, 사람들, 개념을 내재화하면서, 생각을 돌이켜보고 고쳐서 잘못 기억하여 과거를 현재의 지속적 일부분으로 간직한다. 느낌이나 믿음을 다른 곳에 위탁할 수 없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기억을 외부에 위탁할 수는 없다. 또한 기억을 ‘우리’에게서 분리시킬 수도 없다.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가 2010년에 펴낸《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피력한 말이다.“ 기억의 본질은 그 미스터리와 취약성, 우연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풍요로움과 개성에 있다. 기억은 시간 속에 존재하며 육체와 더불어 변해간다. (…) 그런데 개인적 기억의 대체물로 웹을 이용하며 내적 통합의 과정을 무시하면서, 우리는 기억의 풍요로움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운영체제OS가 버벅대는 증상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기계에게 과거 따위는 방해만 될 뿐인 짐이다. 오히려 정보를 정렬시키고 기억장치에서 운영체제 영역을 정리해주는 편이 원활한 작동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다.

 

내 생각들에게 자유를 허하라

우울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꼭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위기에 처한 것은 단순히 달라진 주의력과 기억의 방식이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변화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고란 우리 인간이 놀라운 적응력을 가진 영역이자,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당당히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패스트포스츠PastPosts라고 불리는 이 서비스는 디지털 세계 속의 발자취를 더듬어 정확히 1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페이스북을 이용해 정확히 1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상기시켜’ 주는 것.‘ 1년 전 오늘 당신은 페이스북에서 무엇을 했을까?’라는 슬로건 하에 운영되는 이 서비스는, 정말 단순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획일적인 전자기록 속에서 개개인의 인생사를 구현시키기가 얼마나 쉬운지 부각시켜주는 한 사례이다.

결국 데이터는 우리가 그대로 내버려두면 시시한 것으로 남을 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육성시키기 가장 힘든 정신 상태는, 분산된 주의력에 대응하려 속사포처럼 발생하는 반사적인 반응과도 상관없고, 온 주의력의 절대집중과도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창의적 통찰력과 개인적 평온함과 관련된 것, 즉 자유로운 상념이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녹아들면서 그 자유로운 상념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계몽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의《인간오성론》에 담긴 표현을 빌자면, ‘이해를 위한 숙고나 집중 없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 일종의 자유가 부여된다.

 

인간오성론 :: 영국의 철학자 J.로크(1632~1704)의 주저(主著).
4권. 1690년 간행. 서론(序論) 및 제 1권에서는 인간학적인 인식론적 시점(視點)을 설정하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천성적인 원리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여 형이상학적 의론을 배격하였다. 제2권에서는 오성의 직접대상은 관념이고, 관념은 모든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며,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 종래 지배적이었던 신학적 형이상학의 기본개념을 이루던 실체개념은, 인간의식에 의하여 지향되는 대상개념으로 전화(轉化)하게 되었다.
제3권은 언어를 논하고, 언어를 관념의 외적 기호(外的記號)라고 생각하였다. 제4권에서는 지식을 관념의 일치 ·불일치의 지각(知覺)으로서 논하였으며, 직각적(直覺的) 지식, 논증적 지식, 감각적 지식을 음미하였고, 나아가 개연성(蓋然性)을 벗어나지 않은 판단에 대하여 논하였다. 더욱이 이 저서를 축조적(逐條的)으로 비판한 것에는 독일의 철학자 G.W.F.라이프니츠의 《인간오성 신론(新論)》(1704)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간오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人間悟性論]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나는 원고 초안을 쓸 때면 대개 펜을 들고 종이에 글을 쓰는 편인데, 그렇게 꾸준히 글을 쓰다 보면 펜이 미처 따라가기도 전에 단어들이 술술 풀려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습관적으로 이렇게 느린 글쓰기를 해보면 글이 생각뿐만 아니라 소리와 사물처럼 느껴지면서 그 글이 떠오르는 순간 공감각共感覺적이고 감각적인 쾌감이 일어난다. 이런 방식으로 종이에 신중히 글을 쓰다 보면, 내 경우엔 글쓰기와 상념이 한데 어우러지기도 한다. 그것도 곧잘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러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어느 순간 퍼뜩 문장과 구절이 떠올라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땐 얻지 못했던 좋은 결과물을 얻게 된다.

나는 종이책을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를 하며 착상을 얻고자 한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들고 다니며 틈틈이 읽으면서 슬며시 착상이 떠오르길 기대한다. 그런 책들을 다시 넘겨보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이 퍼뜩 집중되는데, 바로 그때 책장을 넘기다 말고 글을 막 휘갈겨 쓴다.

 

우리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어야만 한다. 또한 이와 동시에 환경이 우리의 관찰력, 사고, 감정 전반을 수용하도록 촉구함으로써 환경도 우리에게 적응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주의력을 분배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즉 어떤 생각이나 나 아닌 다른 사람, 그리고 배제됐던 모든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밖의 자유를 위한 시공간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작동할 때만 그 당위성을 획득하게 되는, 바로 그런 자유를 누리는 우리를 위한 시공간도 함께 존재해야만 한다.

 

 

 

Part 4.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쓰고 제대로 살 수 있다

결국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구글은 직원들을 ‘어른처럼’ 대우해준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놀면서 각자 자유로운 시간에 알아서 자기 일을 하도록 믿고 맡긴다. 달리 생각하면, 이는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다루고 있다고, 아니면 정중한 온정주의 조직의 일원으로 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더 잘 배우고 더 잘하게 하기 위해 일상적인 걱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셈이니 말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아무 곳에도 없다.

 

유기적‘풍경’이나‘생태계’의 일부분이다.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서비스는 내 발에 신겨진 신발처럼, 혹은 내 주머니 속의 휴대폰의 경우처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의식적으로 여기기는 쉽지 않다. 그런 탓에 내 주변의 물질세계를 보는 방식대로 그것들을 비평하고 해석하고‘볼’줄 아는 능력이 위축되어버린다. 그래서 이내 비평적이기보다는 습관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디지털 서비스와 기기들을 다루는 습관, 즉 그것들을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습관에 대한 비난이다. 역사나 인간적 실수와는 무관하게 그저 미디어‘풍경’속에 존재하며, 단지 우리가 최대한 잘 찾아가면 되는 것으로 보는 그 습관 말이다. 구글과 아마존은 어느 모로 보나 청바지나 듀라셀 건전지처럼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겉보기로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존재같이 느껴져도 그 이면엔 진지하게 이야기할 만한 역사적, 인간적 맥락이 무르익어 있기도 하다.

 

모르는 줄도 모르는 무지

‘모르는 줄도 모르는 무지unknown unknowns’가 수두룩했다. 다시 말해, 십대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스마트해져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한 행동의 결과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라.”

나는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디지털 미디어의 공부와 토론이 전 세계 교육제도에서 언어, 수리, 과학과 마찬가지로 의무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잃는 것들

재론 레니어가《디지털 휴머니즘》에서 강조했다시피, 음반 저장물같이 간단해 보이는 것조차 특정한 기술적 포맷과 기기에 의존하고 있다. 즉 컴퓨터 파일로 저장된 책, 영화, 노래는 물리적 기록과는 달리, 그 데이터를 소리나 영상으로 전환시켜줄 적절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없으면 시체란 얘기다.

이런 기술들은 접근성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쉽다. 하지만 이해하는 차원의 문제에서는 줄곧 더 어려워지기만 하고 있다. 이것은 수많은 제조자들도 잘 알고 있을뿐더러 암묵적으로 조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구매 후 곧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작동되는 기기와 서비스를 팔아, 사용자가 자신의 경험에 맞게 설정하거나 그 안에서 어떤 작동이 일어나는지 알 기회를 거의 주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기기의 매력은 무엇보다 편리함과 보안성이니, 특정한 통제력 상실 정도는 치를 만한 대가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도 구매자들 이 대가가 치러지고 ‘있음을’ 의식하는 경우에 한해서일 텐데, 하드웨어는 물론 소트프웨어에서도 이런 식의 의식은 부족한 편이다. 읽지도 않고 넘겨버리는 최종사용자 이용약관의 장황한 페이지에는 우리가 이런저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순간 어떤 권리들을 양도하는지 명시되어 있다. 구매동의서를 보면, 수많은 디지털 상품은 사실상 구매자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용 인가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특정 서비스나 상품이 해약되는 순간에 남는 것이라곤, 사용할 수도 없는 무용지물의 정보들뿐이다.

 

우리가 이용하는 그런 도구 속에 암호화된 의도와 제약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발전의 기회는 그만큼 적어지고 남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단지 기계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태환경과 맞먹는 서비스와 기기들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시대 분위기에 맞추어 우리가 제조자들까지도 그런 식으로 똑같이 취급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디지털 세계의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 뒤에 숨겨진 역사와 복잡성을 파악하지 못하겠다면, 그것을 파악해낸 이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의 비평, 경고, 추천, 대안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Part 5. 권위의 종말

디지털 세계에서 ‘최고’란 무엇일까?

1998년 스탠포드대생 두 명이 ‘대규모 하이퍼텍스트 웹 검색엔진 해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딱딱한 제목 뒤에는 훗날 디지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판명될 만한 글이 실려 있었다. 바로 세계적으로 점점 방대하고 다양해지는 온라인 정보의 창고를 위한 새로운 식별원칙이었다.

논문의 저자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누구든 원하는 것을 뭐든 올릴 수 있는, 제어되지 않은’미디어를 정말로 마음에 딱 드는 검색결과와 조합시킬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검 색자에게 정보의 탐색 위치뿐만 아니라 가장 정확하고 필요할 만한 정보까지도 알려주는 그런 검색결과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논문의 해답이, 그리고 그 해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수십억 개의 문서 처리에 확대 적용될 수 있다는 저자들의 믿음이, 그 뒤로 10여 년 사이에 세계 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논문의 저자는 바로 세르게이 브린Sergei Brin과 래리 페이지Larry Page였고 두 사람의 제안은 Google이라고 명명한 검색엔진을 위한 것이었다. 이 이름은 ‘googol(10의 100제곱)’이라는 수학용어를 재치있게 비튼 것이다. 웹 검색엔진이야 1990년 초부터 있었다. 그러나 브린과 페이지는 검색결과의 품질 향상을 위한 시도에서 연구가 미비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두 사람이 이룬 혁신에서 가장 의미 깊은 부분을 꼽는다면, 학술연구의 방법론 자체에서 이런 품질 문제의 해결책을 엿본 통찰력이다.

오래전부터 학계에서는 연구의 권위가 ‘얼마나 많이 인용되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왔다. 즉, 어떤 연구 논문이 발표된 이후에 다른 논문 100여 개에서 인용되면, 단 한 번도 인용된 적 없는 연구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된다. 브린과 페이지는 바로 이와 유사한 논리에 따라, 인터넷상에서 어떤 페이지가 다른 페이지들에 링크된 횟수를 그 페이지의 중요성과 우수성을 따져볼 만한 효과적인 척도로 판단했다. 게다가 이런 링크 횟수에 따른 평가는 상당히 정교한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실행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논문에서 개략적으로 설명되기도 한 이 알고리즘은 일명 ‘페이지 랭크PageRank’로 명명되었다. 세계에서 단연 독보적이고 가장 유력한 디지털 서비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의 구글 검색엔진에서, 이 페이지랭크는 여전히 핵심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페이지랭크는 초창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 어마어마하게 정교해졌고, 정확한 공식은 사내기밀로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구글에서 변함없는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것이 있다. 아주 정확하게 대중을 관찰하는 것이 품질 자체에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런 대중 관찰은, 개발자들이 온라인 자원의 품질을 직접 평가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페이지랭크 같은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으로 모든 사람들의 웹 이용과 구성 동향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관찰의 핵심 변수에는 어떤 웹사이트 외부로부터의 링크 수, 방문자 수, 업데이트 빈도, 컨텐츠의 종류 등이 포함된다. 이 외에 어떤 사이트의 방문자 성향, 방문자의 방문 시간과 호감도, 연결된 다 른 사이트들의 상대적 권위,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인위적 시도를 벌인 듯한 수상한 행동의 유무 여부를 비롯한 정교한 다단계 지표들도 있다.

 

권위는 이제 대중에게로

영어에서 ‘권위authority’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3세기 초로, 학문적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 고대 프랑스어에서 들어왔다. 당시에는 보통 ‘auctorite’라는 철자로 쓰였던 이 단어는 신뢰할 만한 원전原典이라는 뜻이었다. 문화적이거나 신앙적인 주장의 토대로 삼을 만한 원전이라는 의미도 있었는데, 이런 원전 중의 최고봉은 추앙받는 고전작가와 종교작가 들로부터 신봉되었던 성경이었다. 이런 원전들은 작가들에게 정확성의 보증수표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파악하여 그것을 세상에 적용할 경우엔 높은 학식과 비판적 사고를 인정 받는 보증수표이기도 했다.

권위에 대한 경의는 단순히 관습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 체계와 지적 체계 전반의 기반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권위’는 존경받을 만한 학자, 혹은 영주, 군주, 대수도원장같이 지위상 다른 사람들의 복종을 받을 만한 사람을 지칭하는 뜻도 갖게 되었다. 둘 중 어떠한 의미이든, 그 경의의 행위 속에는 일종의 신뢰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런 경의가 사회적 선善이자 문화적 선이라는 관념 속에는 그 무 엇 못지않게 신뢰가 깃들어 있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구매자들 사이의 비평적 의견과 견해차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널리 퍼뜨릴 수도 있는 환경이라면, 단순히 개개인이 전문적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그 속이 뻔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얄팍해 보일 여지도 있다.

 

산의 높이나 어떤 국가의 인구수 같은 정보가 경험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은 인정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피카소가 20세기 최고의 화가인가?’같은 의문도 마찬가지로 점 차 경험적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 지금은 인터넷에 이런 질문을 올리면 전 세계에서 올라온 답변이 연관성에 따라 분류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아닌가. 종합적으로 취합된 정보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달랑 답변 하나가 달리는 형태가 아니라,‘피카소가 20세기 최고의 화가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뭐라고 말할까? 그리고 그런 말들 중에 가장 권위 있는 의견은 뭘까?’라는 은연중에 품어볼 만한 의문도 함께 풀어줄 그런 구체적인 형태로 말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과거까지만 해도 비평가들에게 의지해오던 판단이다. 아니, 비평가들만이 아니라 출판업자에서부터 편집자와 교육자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정보통제자들에게도 기대던 것이다. 과거 수세기 동안 일반인은 어느 누구도 세상의 지식을 한 조각이라도 개인적으로 소유하거나 소비하지도, 제대로 탐색다운 탐색도 하지 못했다. 그런 탓에 조언을 구하고 자신에게 맞는 자료를 고르는 것은 물론, 애초에 그런 영구적 기록물을 접할 방법까지 늘 다른 사람들에게 기댔다.

오늘날에는 뭔가를 선택할 때, 선택하고 나서 공표하는 순서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외부에 아웃소싱되어 진행되는 비즈니스처럼 되었다. 다시 말해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이 세상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정보통제자들만이 아니라 대중의 기호에 의해서도 엄밀히 걸러진다. 사실, 이것은 대다수 디지털 비즈니스 모델을 돌아가게 하는 심장이다. 이제는 먼저 선택하고 나서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공표하고 나서 세상 사람들의 선택에 따라 반응한다. 즉, 대중의 마음을 얻는 것들은 아주 중요시하고 그러지 못한 것들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앞서 말한 현상을 가치와 권위의 위기라고 한다면, 여러 모로 볼때 상당히 자비로운 위기이다. 과거에는 위압적이기만 하던 성채의 문이 열린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의 새로운 추세 속에서 그저 표류하는 것 이상을 목표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유독 우려스러운 영역이 두 가지 있다. 바로 지적 영역과 경제적 영역이다.

지적인 관점에서는 평준화가 하나의 우려사항이 될 수 있다. 탁월성의 개념이 붕괴되면서 아마추어리즘과 자기홍보로 뒤덮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디지털 기술의 홍수로 인해 책과 잡지에서부터 음악, 영화, 정치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논쟁의‘초점’을 제공해줄 만한 중요한 능력이 저하되고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사소한 것과 심오한 것 사이를 변덕스레 이리저리 건너뛰면서 가장 소화가 잘 되는 것 주위에서 가장 오래 서성거린다.

킨의 주장은 과거 민주화에 대해 가졌던 우려와 비슷한 맥락이다. 킨은 전문가의 여과 대신 대중의 접근이 활발해지면서 인터넷이 인간의 본성에 군중적 힘을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나 남들과 다른 목소리는 묻어버리고, 쉽게 소화되는 주장들을 내세워 수종적인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중문화에 영합하면서 말이다.

 

“전통적 미디어 기업들은 소비자들에게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지 못해 곤경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런 사업을 통한 수익을 거둬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곤경에 빠져 있다.”

 

디지털 미디어에서 수용하는 ‘공개open’나 ‘무료free’같은 개념은 원칙적으로는 반박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 개념 속의 실제적 의미를 따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개설자들에게 컨텐츠에 대한 통제력을 내주는 대가로 그런 특권이 부여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게 돈벌이를 시켜주는 대가는 말할 것도 없을 테지만.

 

사실, 지금 우리에게 진짜 위급한 문제는‘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기보다는‘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이다.

 

문화적·지적 작품의 창조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지녔던 영향력은, 모든 미디어와 아이디어가 한꺼번에 세차게 들어가는 인프라의 지배자들에게로 이동했다. 온라인 권위가 점차 전문가의 지식으로부터 분리되어왔듯이, 문화적 산물 또한 재능으로부터 분리되어가는 듯한 상황이다.

이것은 양뿐만 아니라 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라면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 세계의 불편한 역설 하나도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인해 다양성과 개방성이 소수 주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증대시켜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전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대상이 수천 개였다면, 이제는 그 수가 수백만 개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지털 환경은 그게 누구이든 확실한 틈새를 점유한 이들에게라면 새로운 기회로 넘쳐나는 곳으로 다가온다. 한마디로‘롱테일법칙Long Tail theory’이 지배하는 환경이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변화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영향은 다양성이 아니라, 유력한 소수가 유례없이 높은 자리로 올라서게 된 대목이다. 아마존이나 이베이 같은 기업이 온라인에서 디지털 시대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세계적 우위를 획득해낸 것을 생각해보자. 이런 기업의 사례처럼 문화와 아이디어의 투쟁 역시 대중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한 소수가 어느 때보다 막강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롱테일 법칙 :: 파레토법칙은 20%의 상품이 총 매출의 80%를 창출하고, 20%의 충성스러운 고객들이 총 매출의 80% 차지한다는 식으로 '결과물의 80%는 조직의 20%에 의하여 생산된다'는 이론이다. 이같은 '80 대 20 법칙'은 비즈니스 분야에서 황금률로 받아들여져 마케팅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 인기상품을 고객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하여 판매하거나 소수의 우수고객 또는 우량고객을 우대하는 등의 마케팅 기법은 모두 이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롱테일법칙은 파레토법칙과는 거꾸로 80%의 '사소한 다수'가 20%의 '핵심 소수'보다 뛰어난 가치를 창출한다는 이론으로서, 이 때문에 '역(逆) 파레토법칙'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온라인 서점 아마존닷컴의 전체 수익 가운데 절반 이상은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서가에 비치하지도 않는 비주류 단행본이나 희귀본 등 이른바 '팔리지 않는 책'들에 의하여 축적되고, 인터넷 포털 구글의 주요 수익원은 《포춘》에서 500대 기업으로 선정한 '거대 기업'들이 아니라 꽃배달 업체나 제과점 등 '자잘한' 광고주라는 것이다.
이 용어는 2004년 10월 미국의 인터넷 비즈니스 관련 잡지 《와이어드 Wired》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 처음 사용하였다. 앤더슨에 따르면, 어떤 기업이나 상점이 판매하는 상품을 많이 팔리는 순서대로 가로축에 늘어놓고, 각각의 판매량을 세로축에 표시하여 선으로 연결하면 많이 팔리는 상품들을 연결한 선은 급경사를 이루며 짧게 이어지지만 적게 팔리는 상품들을 연결한 선은 마치 공룡의 '긴 꼬리(long tail)'처럼 낮지만 길게 이어지는데, 이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상품들의 총 판매량이 많이 팔리는 인기 상품의 총 판매량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의 발달에 따른 현상으로 분석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상에서는 서점 서가에 비치되지도 않는 책들까지 모두 소개할 수 있는 등 전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에 따라 전시비용이나 물류비용이 매우 저렴해져서 유통구조가 혁신되었으며, 소비자들은 검색을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상품 정보를 찾을 뿐 아니라 다른 소비자들과 소통하여 제품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선택의 폭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이 결합되어 종전에는 비용대비 저효율로 소비자의 눈에 띌 기회조차 갖지 못하였던, 외면당하던 제품들이 전체적으로는 인기상품을 압도하는 결과를 낳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떠오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롱테일법칙 [Long Tail theory(The Long Tai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책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이 이 책을 디지털 버전이 아닌 종이책으로 읽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단 하나의 목표만을 가진 물건을 들고 있는 것이다. 즉, 책은 오로지 이 글을 독자에게 전해주기 위한 목표 외에는 다른 목표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아이패드 같은 기기의 스크린상에서 읽고 있다면, 이 글은 다른 디지털 문서들만이 아니라 음악, 영화, 뉴스, 블로그, 게임 등의 다른 컨텐츠들과 같은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디지털 시대의 본질상 이런 컨텐츠는 우리에게 같은 경로를 통해 밀어닥쳐서 동시에, 혹은 끊임없이 연이어 소비되고 있으며, 그 정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강한 것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강하냐 약하냐를 판단하는 데에는, 불멸성의 가치로 판단한다는 등의 엄밀한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고전으로 평가 받을 만큼 어떤 분야에서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작품들조차도, 힘의 근원은 그런 엄밀한 시선이 아닌 다수 대중을 척도로 삼게 된다. 이제 그런 새로운 권위가 탄생한 것이다.

 

공유의 시대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

이들의 주장을,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러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이 파멸을 맞을 운명일지 모르겠지만, 탁월성, 비판적 통찰, 번득이는 창의적인 재능에 대한 개념들이 쉽게 내팽개쳐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행동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결집시킬 수 있다. 이것이 알고리즘의 유용성과 힘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인간 개개인으로서의 규모 상실은 알고리즘의 최대 태만일 뿐만 아니라, 2004년의 페이스북 설립과 2006년의 트위터 창립 이후로 두 서비스의 사용자만 총 10억 명 이상에 이르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의 얼굴 없는 소비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대중문화와 지적 산물에 적극 참여하는 개인으로서의 인터넷 사용자들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시사 잡지〈애틀랜틱Atlantic〉의 편집자인 알렉시스 마드리걸Alexis Madrigal은 2010년 9월 호에 게재한 글에서 트위터에 대 해,‘그 안에서 내가 알고리즘인, 일종의 인간 추천엔진’이라고 말했다. 나는 소셜미디어가 인터넷의 역학을 극적이고 빠르게 변모시킨 원인에 대해 이 글만큼 시사적인 해석을 본 적이 없다. 이 해석이야말로 알고리즘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어떤 필요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이런 명백한 의사표현의 영향력에 대해, 소문과 반쪽짜리 진실, 그리고 특수이익집단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학자인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의 말을 빌자면, 대중의 공유의 미래는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과 선입관을 강화시키는 ‘반향실’이 될 공산 이 크다는 것이다.

 

반향실 :: 방송에서 연출상 필요한 에코 효과를 만들어내는 방

 

이런 트위터상에서는 마지막 맺음말 따위는 없었고, 전통적 뉴스의 사건 보도처럼 깔끔한 마무리멘트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그다음 달에 트위터에서 해시태그(hashtag, 트위터에 주제어 달기) #TroyDavis로 다시 들어가 봤더니 1분쯤 간격으로 여전히 업데이트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라이브 사건이라기보다는 수천 가 지 방식으로 계속‘생명이 이어져 가는’사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런 방식으로 전 세계에 걸쳐 개개인들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권위에 대한 부분, 그리고 통계적 분석보다는 비판적 통찰에 의해 매겨지던 탁월성 개념에 대한 부분은, 정보통제자들이 대중의 기호를 보호하고 형성하던 디지털 시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검색엔진과 집단의 조직체 바깥으로부터 점진적으로 과거에 존재했던 통찰력을 찾아내고 전파할 수 있다. 이는 사소한 사건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도 열광하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가치들의 증거까지도 공유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디지털 영토는 모든 계층에게 보고寶庫와도 같은 곳이다. 물론 지금은 구시대적 전문가나 미디어 제작 측면에선 힘겨운 시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열정적인 아마추어나 떠오르는 인재, 그 누구를 가릴 것 없이 그 어느 시대보다 기회가 많다. 비록 확실성이 희박할지라도 말이다.

 

예약출판 :: 간행에 앞서 구독자를 모집하고, 그 예약 신청자만을 대상으로 서적을 출판하는 일. 18세기에 들어 대형 세트 판매의 예약출판이 행해지게 되었는데, 1768년에 간행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그 최초의 예였다

 

이런 방식의 공유와 문화적 투자의 행위에서 중요한 덕목은 신뢰와 존중이다. 두 덕목은 곧 공유의 시대에서의 권위 획득의 토대이다. 400년도 더 전에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속의 핫스퍼Hotspur가 이미 알고 있었듯, 덕망 있는 사람의 말 한 마디가 보증서와 다름없는 시대에서는 평판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이후 수 세기에 걸쳐 기업가 기질이 다분한 작가들이 주도면밀하게 대중의 비위를 맞추며 고급과 저급의 문학문화를 동급으로 확립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평판의 가치에 대한 교훈을 다시 한 번 배우고 있다. 세계는 그 어느 시대보다 전문가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전문가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탁월성 자체를 강조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과거와는 달리 서로 대등해져 있다. 즉, 어떤 단체나 지위에 의해 부여된 권위는 믿지 못하고, 서로의 신뢰에 의지하면서 논쟁의 장에서 획득된 권위를 믿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지금은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문화에 관심을 갖기에는 빈약한 시대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분별의 능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가 주는 혜택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닌, 서로 함께 분별할 수 있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Part 6. 인간으로서의 격을 상실해가다

성욕이 지배하는 신세계

“포르노는 픽션 중에서도 가장 정치적이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더없이 집요하고도 무자비하게 이용하고 착취하는지 측면에서 보면 말이다.” J. G. 발라드J. G. Ballard가 1973년작 소설 《크래쉬Crash》의 머리말에 쓴 글이다. 그는 이런 착취를 기술과 노골적으로 결부시키면서 자신이 쓴 소설들 중 가장 충격적인 이 소설을 통해 하나의 의문을 던졌다. 이 의문은 그 후로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더 예리하게 와 닿는다. “자동차 충돌 사고를 통해, 우리는 기술과 우리 자신의 성욕과 악몽 같은 결합에 대한 불길 한 징조를 보는 것은 아닐까? (…) 여기에서는 일탈적 논리가 이성에 의해 규정된 논리보다 더 강한 힘을 행사하며 전개되는 게 아닐까?” 

기술과의 동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욕을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그리고 기술과 성욕의 융합에 대한 ‘일탈적 논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디지털 네트워크상에서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범람하는 포르노를 빼놓을 수 없다.

대중의 생각과는 달리‘섹스’는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입력되는 검색어가 아니다. 구글에서‘섹스’와 관련된 검색어를 입력하면 15억개에 육박하는 검색결과가 뜬다. 이 정도면 대다수의 질문이 해결될만하지만, 70억 개가 넘는 ‘사랑’연관 검색결과에 비하면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용 가능한 자료의 양이 아니라 접근의 용이성이다. 온라인에서는 검색과 클릭 한 번이면 쉽게 포르노를 접할 수 있다. 한때는 금기였던 것이, 그래서 전문 판매업자를 찾아가야 했고 나이에 따른 접근 제한도 있었던 것이, 이제는 평범한 것이 되었다.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포르노를 구해 볼 수 있다. 그것도 그 즉시, 익명으로, 금전이나 감정적 대가 없이 말이다. 게다가 포르노를 인터넷 서비스 중 하나일 뿐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포르노 역시 디지털 영토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과 별다를 바가 없다.

포르노는 인터넷의 영향으로 그 자체가 변했다. 우선, 옛날에는 그래도 순진함이나 부끄러움 같은 것이 남아 있었지만 요즘의 포르노는 아니다. 다른 오락산업들과 마찬가지로 포르노도 이제는 같은 포르노끼리나 다른 부문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말하자면 이 민망할 만큼 저속한 비즈니스는 전반적으로 더 저급하고 추잡해졌으며 전작을 넘어서는 후속을 내는 방면으로 점점 더 기발해졌다. 또한 소비와 참여의 구분이나, 연출과 실제의 구분이 더 모호해졌다.

온라인에서는 어떤 생각이든 클릭 한 번이면 웬만한 건 뚝딱 해결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경우든 외톨이가 될 일도 없다. 취향이 아무리 별나거나 비정상적이거나 자유분방하더라도, 심지어 불법적이더라도, 온라인 공간에서는 같은 취향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도 조언과 의견교환, 정모의 장이 마련되어 있고 필요에 따라 별도의 보안체계도 갖추어진 환경에서 말이다. 세상에 원하는 것을 밝히면, 그리고 세상 속에 그것을 제공해주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대개는 온라인 기술이 그 사람들을 연결시켜준다.

 

다른 모든 것도 대부분 그러하듯, 유비쿼터스 기술의 시대에서는 디지털 섹스가 단순히 눈요기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상대를 구하고, 접속하고,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혹은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한 더 이상 혼자라는 사실에 따분해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원하는 순간, 원하는 것을 바로 얻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포르노와 섹스의 경쟁력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돕는 것은 크게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것이 반드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이 생기는 경우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 가지 우려를 낳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타인에 의해 해를 당할 가능성이다. 이런 가능성은 두려움을 유발하는 동시에 확실히 도덕적인 측면에서 해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약점을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부정한 어떤 것의 거래에 이르기까지, 디지털상에서 원거리, 익명, 은폐가 서로 조합되면 독이 될 수 있다. 특히 성폭행, 부정하고 불법적인 형태의 포르노는 디지털 네트워크의 어두운 면 중 하나일 뿐이지만, 헤드라인 뉴스감이 될만큼 아주 위험하고 우려스러운 현상들이어서 법으로 금지되고 경계 되어야 한다. 하지만 도리어 기술로 인해 더욱 자극되고 조장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식의 악용들은 끔찍하긴 하지만 비교적 드문 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우려는 더 만연되어 있는 데다 도덕적으로도 모호하다. 즉, 수많은 사람들이 착취적이고 저급한 데다 중독의 위험성마저 있는 디지털 행위를 거리낌 없이 쉽게 이용한 덕분에 삶의 질에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성욕은 더 크고 더 모호한 두려움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스크린상에서의 우리의 능력, 즉 서로를 사물화시키고, 감수성을 형편없이 떨어뜨리고, 보다 전인적인 관계가 가져다주는 모험과 보상을 등한시하게 되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2010년에〈뉴아틀란티 스The New Atlantis〉지의 한 기사에서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은 이렇게 ‘스크린 뒤로 숨는 ’과정에 대해 인상 깊은 묘사를 했다. “소외의 과정이며, 그 속에서 사람들은 삶을 장난감 다루듯 하며 완벽한 통제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 통제력은 어떻게 보면 아주 허울 좋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크러턴은 모든 디지털 상호작용에서 그런 부작용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으나,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 특유의 모험, 갈등, 책임을 떠안게 마련인 (…) 인간관계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면 자칫 전인적 인간으로 살아갈 자유가 손상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확실히, 쉽고 즉각적인 욕구충족은 사람을 도취시키는 위험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저속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디지털 문화에 접근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가령, 일반적이고 성실한 관계 맺기가 가벼운 섹스상대로서의 관계 맺기와는 반대 입장이라 할지라도, 현재 온라인 데이트 사업이 디지털 프리섹스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더 인기가 있다는 사실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온라인 데이트나 디지털 프리섹스 모두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넓은 선택의 폭과 상대적으로 적은 자기노출이 이용자들의 동기 요인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게토 :: 중세 이후의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
역사적으로는 1179년 제3회 라테라노공의회에서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교도와의 교류를 금지한 데서 발단하였다. 1280년 모로코에서 회교도들이 유대인을 분리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게토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4세기에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자 유대교도에 대한 차별정책은 더욱 심해져 일반적으로 유대인 거주지역은 그리스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게토라는 말은 이탈리어이며 어원(語源)은 히브리어 ‘절연장(絶緣狀)’을 뜻하는 ‘get’에 유래한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게토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지역과 분리되어 있었다. 또 그 내부사회는 유대인의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가 허용되었으나, 시민권은 허용되지않았다.
중부 유럽에서는 특히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체코의 프라하 등지의 유대인 거주지역이 전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 ‘게토’라는 말은 당시까지는 사용되지 않고, 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설치된 유대인 거주지역에 처음으로 사용되고 1555년 로마에 게토가 설치된 후 일반화되었다. 18세기 말 이래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유대교도 해방과 더불어 이 차별주의는 붕괴되었으나, 러시아·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존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40년 이후에는 나치스 독일이 폴란드 등 그들의 점령지 곳곳에 게토를 설치하고 유대인들을 강제로 수용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바르샤바의 게토는 유명하다. 나치스의 게토는 중세의 게토를 부활시킨 것처럼 보였으나, 인종론(人種論:안티세미티즘)에서 발상한 것이어서, 중세의 게토와는 다르다. 이 유대인 거주지역은 보통 벽이 둘러지고 그 바깥 지역으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외출할 때는 특정한 모자 또는 두건을 쓰고 윗저고리에는 황색의 표지를 하였다.
한편 20세기 후반의 미국에도 흑인 게토가 형성되었다. 흑인 게토가 설정된 지역은 ‘내부도시’ 또는 ‘중앙도시’ 등으로 불리는 뉴욕 등 대도시의 중앙부에 있는 흑인 밀집거주지역으로, 빈곤·실업, 열악한 주택, 그밖에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불균등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슬럼가(街)와 같다. 그러나 중세 유대인 게토와는 달리, 흑인 게토는 법률에 의해 강제로 격리된 것은 아니며, 남부 농촌에서 이주해서 도시화한 흑인노동자 계급이 그 중심을 이루고 이들 외에 부유한, 또는 중산계급적인 흑인도 살고 있어, 반드시 슬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는 종래에 있었던 흑인의 소거주지를 핵으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계급적 지배와 인종적 편견에 대한 흑인의 자립과 단결을 위해 북부·중서부의 대도시·공업도시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 후에도 남부농업의 기계화 등으로 토지를 떠난 흑인의 도시화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게토 [ghetto]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인터넷 역사상 옛날 옛적이던 1993년에, IT 전문지〈와이어드〉가 섹스를‘신기술을 맨 처음 감염시킨 바이러스’라고 과감히 꼬집었다. 그러곤 이어서 주장하길, 미디어가 차츰 더 대중화되고 성숙하면서 처녀지이던 디지털 풍경에 삽시간에 퍼졌던 섹스는 결국엔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 말했다.

 

포르노와 음란물 대다수가 웹의 주류에서 빠져나와 개인 네트워크로 옮겨간 것이 그 한 원인이다. 즉, 파일 공유를 희망하는 사람들끼리 직접 나서서 조심스럽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 지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우리가 기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그 이상의 것을 바랄 줄 알게 된 것 역시 또 하나의 원인이다. 또한 세상에 점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디지털‘커뮤니티’들이 서로를 이용하는 것 이상의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들을 포기하고 말 것인가?

매년 전 세계적으로 나나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발송되는 수천억 통의 이메일 중 스팸메일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내용상이나 경험상으로 대다수의 포르노는 온라인상에서의 적극적 관심을 끌기 위한 경쟁에서 무기력한 게 당연할 만큼 따분하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선택하고 사용한 후에는 버리고 마는 그런 것일 뿐이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뭔가를 알게 해주거나, 우리가 미처 모르던 뭔가를 깨우쳐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단지 기호의 수준에서 기계적으로 흥미를 갖게 될 만한 그런 것일 뿐이다. 그 자체로 상투적인 반복이 되풀이되는 빈약한 세계이다. 솔직히 터놓고 말하면 거의 모두가 방문해본 경험은 있겠지만, 그곳에서 필요 이상의 시간이나 힘을 쓰고 싶지는 않은 게토와 같은 곳.

 

2003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TED 컨퍼런스에서 과학전문 저자 스티븐 존슨도 연설에서 월드와이드웹은 그 자체가 도시와 같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말하자면 도시처럼‘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완벽히 통제되지 않으며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수많은 독립 부품처럼 작동하는’존재라는 것이다.

존슨의 예시는 우리가 서로에게서 최대의 성과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이 새로운 세상의 효과적 치안을 위해 유익한 작용을 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해준다. 지금 세상은 중앙통제로도, 아무리 강도 높은 전국민 교육으로도 제어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이 신세계는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형태의 수많은 커뮤니티의 기능에 그 번영이 달려 있다.

 

온라인 행동의 가장 심각한 위험은 소수자들에 대한 학대를 부추기는 동시에 다수자들을 천박하게 전락시킬 잠재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성과 성욕만이 아니라 남을 깎아내리고 이용하고 모욕하며 그 과정에서 쾌감을 얻으려는 모든 행동들에 이르기까지, 정말 심각한 위험이다. 이런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과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디지털 모델은 이것이다. 바로, 도시의 효과적 치안 모델을 그대로 따르면서, 더 나아가 구성원들이 내부에서 강요된 외부기준에 따라 서로를 배려해주는 커뮤니티의 정신을 갖는 것.

 

“직접 마주보고 하지 못할 말이라면 온라인에서도 하지 말라.”

 

“나는 예의가 전염되는 것이듯, 무례도 전염된다고 믿는다. 그냥 너그럽게 봐주면 무례는 더 악화될 뿐이다. 대도시에 하나의 커뮤니티만 있는 것이 아니듯, 블로그 커뮤니티도 하나만이 아니다. (…) civil(예의바른)이 civilization(문명)의첫두 음절이기도 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디지털 영역에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성향들을 자유롭게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 대다수는 때때로 그 자유를 기꺼이 누린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또 다른 것도 필요하다. 서로에게 사물화되지 않고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할 필요.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어디에서든 똑같이 ‘실재’하는 사람으로, 예의를 지켜야 할 상대방으로 인정받을 필요이다.

 

온라인상에서든 직접 대면하든 간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준 딱 그만큼의 인간이 된다.

 

 

 

Part 7. 오락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았나?

게임에 중독된 외계인들

페르미 패러독스란, 1950년대 말 이탈리아계 미국인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처음으로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의문이다.“우주의 방대한 크기와 나이를 감안할 때, 또 우주 안에 쾌적한 환경을 가졌을 가능성을 지닌 행성의 수를 감안할 때,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가 존재할 법도 한데 어째서 그런 외계 생명체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걸까?”

 

페르미 역설 :: 외계인의 존재를 논할 때 주로 거론되는 이론이며,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가 처음 언급했기 때문에 페르미 역설이라고 함.
페르미는 1950년 과학자들과 식사를 하던 중 우연히 외계인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고, 방정식을 계산해 무려 100만 개의 문명이 우주에 존재해야 한다는 가설을 도출했다. 하지만 수많은 외계문명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인류 앞에 외계인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들은 어디 있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를 '페르미 역설'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르미 역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우리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기보다는 언젠가 현실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 인류 전체가 전자게임에 보내는 시간은 주 당 30억 시간이 넘는다. 더군다나 이 수치는 증가일로 추세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노력, 관심, 관계, 정체성이 대거 이주하면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려 특별히 설계된 인위적 환경으로 말이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가상세계 연구가인 에드워드 카스트로노바Edward Castronova가 만들어낸 신조어를 빌어 말하자면, 가상의 활동과 삶의 만족도는 서로‘치명적 몰입의 딜레마’에 직면할 소지를 가진 관계이다. 이것은 가상공간에 몰입함으로써 얻게 되는 짜릿한 쾌락과 이런 몰입이 삶과 사회 전반에 미치게 될 잠재적 악영향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딜레마를 일컫는 말이다.

 

2011년 8월, 카스트로노바는 독일의 경제학 교수 게르트 G. 바그너Gert G. Wagner와 공동으로 국제 사회과학학술지〈키클로스Kyklos〉에 ‘가상생활의 만족도Virtual Life Satisfaction’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을 게재했다. 이 연구는 2005년도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자료를 가상현실 게임‘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의 이용자들에 대한 2009년도 조사와 비교하여, 직업을 잃는 일 등 삶의 실제 사건들에 따른 삶의 만족도 변화와, 가상세계 참여에 따른 삶의 만족도 변화를 서로 대조 해본 것이다.

카스트로노바와 바그너가 얻어낸 연구결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세컨드 라이프 이용으로 삶의 만족도가 향상되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 정도야 이 게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목적이 재미를 주려는 것임을 감안하면 예상할 만한 뻔한 결과이니 말이다. 오히려 더 주목되는 부분은 그 게임을 통해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 ‘정도’이다. 행복을 주제로 삼는 학술연구들에서 나타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연구결과 중 하나는 바로, 실업 상태와 낮은 삶의 만족도 사이의 상관관계다. 그런데 세컨드 라이프를 통해 얻는 삶의 만족도 수준은 일자리를 구해 실업에서 벗어남으로써 얻게되는 삶의 만족도와 엇비슷했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현실 세계를 향상시키는 것인지, 가상세계의 유혹을 막기 위해 개입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여야 할지에 대한 의문에도 답해보도록 유도해준다.

 

내 옷과 아바타의 옷, 어느 것이 가치 있는가?

사실 유튜브에서부터 트위터,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대다수 온라인 서비스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게임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첫째로, 이용자들의 노력에 대해 친구 수, 접속 수, 메시지 수 같은 확실한 측정기준을 상으로 주는 면이 유사하다. 둘째로, 흥미를 끄는 연속적 행동과 반응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여기에 협력과 경쟁의 기회까지 덤으로 갖추게 된다는 면에서 게임과 비슷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개념은 바로‘플레이버playbour’이다. 이 단어는‘오락play’과‘노동labour’을 결합시킨 말로, 가상세계 안에만 존재하는 물자에 쏟는 실제 노동을 가리키는 확장된 경제 개념이다.

이 경우에 ‘존재하다exist’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내와 나는 온라인 판타지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첫 출시 이후로 쭉 해왔다. 우리의 게임 속 캐릭터들은 거기에 쏟아 부은 수천 시간을 대변하고, 캐릭터들의 아이템은 몇 주에 걸쳐 모험하고 탐험하고, 다른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과 함께 대담한 공격을 치른 끝에 얻어낸 결과물이다. 하지만 픽셀 이미지일 뿐인 이 아바타들의 세상 속 실재가 게임을 운영하는 회사의 컴퓨터 시스템 내부 디스크상의 전하電荷에 불과하다면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존재’하는 걸까?

이 의문을 풀어줄 의미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집단적 믿음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 사실, 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캐릭터의 가치는 내 은행계좌에 든 돈의 가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믿음과 동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둘은 똑같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이용권을 구매한 사람은 전 세계에 걸쳐 1,000만 명이 넘는다. 미국에서 이 플레이어들 중 한 명이 게임에 수백 시간을 투자할 필요 없이 자신의 캐릭터에 놀라운 아이템을 얻게 해주고 싶다면, 다른 누군가의 노력의 가치는 그 사람이 아이템의 대가로 기꺼이 지불할 만큼의 가치가 된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특별한 캐릭터를 꾸미려 한다면 그 최고가가 미화 1,000달러가 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욕구를 채워주는 아이템 거래는 대체로 게임 회사들에서 허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억 달러에 상당하는 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가상환경에 투자되고 있는 신뢰, 시간, 노력의 규모를 증명해주는 사례인 셈이다. 게다가 가상 인공물에 수백 달러, 아니 심하면 수천 달러를 지불함으로써 유발되는 별 희한한 괴리에도 불구하고(현재 가상의 물건에 대한 최고가 기록은 2010년에 33만 달러에 팔린 엔트로피아 유니버스Entropia Universe라는 게임의 우주정거장이다), 최고 인기의 게임들이 사람들에게 그 게임에서 열심히‘일할’마음이 들게 해주는 정서적 경험을 감안하면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긴 하다.

가령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를 끄는 게임 세상들 상당수가 목가적 소박함(농장, 중세의 성, 이상화된 초원 풍경 등)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또한 게임 속 세상에서는 고된 일과의 과정이 등골 빠지는 지독한 노동 없이도 능숙하게 농작물을 수확하거나 작업을 수행하는 식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사실 제품을 창조한 뿌듯함에서부터 공통 과제를 잘 협력해서 풀어낸 기쁨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현실 세계 속 근로생활은 대부분 정서적 만족 면에서 그다지 ‘실질적’이지 못하다. 반면에 비록 가상세계일지라도, 유용하기도 하 고 마음먹은 대로 결과를 바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게임 세상 속 목가적인 삶에서의 수고로움은 나무 사발을 만들거나 빵을 굽는 것 못지 않게 그 나름대로의 만족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집단적 믿음이 왕처럼 군림하는 곳에서는 이용자들의 신뢰를 끌어내는 경제적 구조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가상의 자산을 수많은 ‘현실적’자산보다 더 솔깃한 투자로 만들어줄 만한 그런 구조 말이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당신의 속내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는《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공상과학 소설 속의 조크 중 백미로 꼽힐 만한 상상을 풀어놓았다. 소설 속에서 슈퍼컴퓨터가‘삶, 우주, 그리고 모든 만물의 궁극적 의문에 대한 궁극적 대답’을 내놓는데 그 답은 바로 숫자 42. 이 조크는 하나의 숫자로 답해질 수 있는 그런 문제와, 그와는 차원이 아주 다른 삶과 같은 문제 사이의 터무니없는 부조화를 꼬집은 것이다. 즉, 우주와 만물은 고사하고 삶이 체스나 앵그리 버드 같은 식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유쾌한 난센스라는 것.

 

가상 세계의 역할

실제로는 잘 짜인 디지털 서비스 내부이지만, 어쨌든 디아블로 같은 게임 세상 속에서는 가장 다루기 힘든 생존의 문제들이 잠깐이나마 더 순한 경험들에 의해 대체되기도 한다. 게다가 제인 맥고니걸 같은 작가와 이론가들의 주장처럼, 최고의 게임과 기술들을 교훈 삼아 현실 자체를 ‘더 좋게’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런 원칙을 한 차원 더 높게 이용할 수도 있다. 즉, 게임과 기술이 지닌 행동관련 데이터 등의 자원을 활용하여 현실 세상의 보상, 참여, 교육, 팀워크 등의 과정을 개선시켜보려 시도할 수도 있다.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용어이긴 하지만 이런 시도를 한마디로 ‘게임화gamific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임화 :: 게임화(Gamification)는 게임(Game)과 접미사 ‘화(化, fication)’를 합친 신조어로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보상·경쟁 등의 요소를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기법이다. 게임화는 ‘사람들은 재미를 느끼면 어떠한 활동이든 기꺼이 한다’는 재미 이론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재미를 즐기려는 것은 사람들의 원초적 본능인데, 사람들이 재미없어하거나 혹은 번거로워하는 일에 게임 요소를 도입해 더욱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게임화의 가장 널리 알려진 성공 사례는 포스퀘어(foursquare.com)다. 포스퀘어는 자신이 위치한 장소에 ‘체크인’할 수 있게 해주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메이어(Mayer)와 배지(Badge)라는 두 가지 보상 시스템으로 사람들을 유인하고 있다.
자주 체크인할수록 더 많은 포인트를 획득하고 다양한 배지를 얻을 수 있다. 기업들은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마케팅·광고 활동에 게임화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독일 자동차 회사인 BMW는 2010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BMW 미니’를 경품으로 내건 신차 출시 행사를 했으며, 삼성전자는 2012년 열린 런던올림픽 기간에 스마트폰을 이용한 ‘골드러시’라는 이벤트를 진행해 톡톡한 재미를 봤다. 소비자가 오프라인 매장에서 다양한 제품을 흥미롭게 접해보도록 쇼핑 체험을 개선해 이미 쌓아놓은 포인트로 매장에서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마케팅인 숍킥(Shopkick)도 게임화의 사례다. 숍킥 이용자는 매장을 방문할 때마다 포인트를 얻을 수 있으며, 매장에서 추천 제품을 보물찾기하듯 찾아내 추가 포인트를 활용해 가격을 할인받을 수 있다.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인 메이시·타깃·베스트바이 등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제품을 살펴본 뒤 구매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하는 쇼루밍족을 겨냥해 숍킥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게임화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피시 등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비즈니스에서 주목받고 있다. 2012년 12월 불황기를 맞아 속속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용돈 벌이식 보상형(리워드) 앱이 대표적이다. ‘10분만 투자하면 라테 한 잔’이라는 콘셉트를 무기로 광고를 시청하고 퀴즈를 풀면 포인트가 적립되고 적립된 포인트를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애드라떼’, 간단한 설문 조사에 참여하면 적립금을 쌓아주는 ‘오베이’, 간단한 광고를 보고 퀴즈를 풀면 적립금이 쌓여 통신 요금에서 해당 금액을 할인받을 수 있는 ‘폰플’ 등이 그런 경우다.
‘돈 버는 놀이터’, ‘메디라떼’, ‘마이앤엠’, ‘애즐’ 등도 비슷한 형태다. 참여도가 떨어질 수 있는 설문 조사나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광고에 대해 소비자들에게 소정의 포인트를 보상해주면서 설문조사 참여도와 광고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김민수는 “앞으로 스마트폰 등 게임을 접할 수 있는 디바이스가 다양화되면 게임화 경향도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10초 내외의 짧은 게임 시간 때문에 많은 페이지뷰가 발생해 앱이 새로운 광고 공간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게임화 기법은 교육·경제·금융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지루한 학습이나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보기술 전문 조사 회사 가트너는 2014년까지 전 세계 상위 2,000개 기업의 70퍼센트가 게임화를 적용할 것으로 예측했다. 마케팅 차원에서 기업이 게임화를 사회공헌과 연계시키는 때도 있는데, 이를 일러 사회공헌 게임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게임화 [Gamification] (트렌드 지식사전, 2013. 8. 5., 김환표)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입증된 바에 따르면,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전기계량기를 실시간으로 전력 소비량을 보여주는 계량기로 바꾸면 사람들이 가정의 여러 가전에서 사용되는 에너지에 대해 더 신경 쓰게 된다고 한다. 일부 게임 설계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인기 있는 게임들의 개발 과정에서 획득된 노하우를 이용해 이런 식의 피드백을 더욱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방면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

가령 사람들에게 시간에 따라 단계적으로 다양한 과제와 목표를 할당해주면 장기적인 동기 부여와 참여 촉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웃과 함께 데이터와 피드백을 공유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하거나 더 좋은 전략을 선택하도록 격려해주는 것도 같은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게다가 여러 가지 노력과 성취에 대해 포상점수를 주고, 또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포상점수를 다른 곳에 이용할 수 있게 해주거나, 랭킹보드를 만들거나, 교육 및 관련 제도에 연계시킨다면 더 효과를 높일 수도 있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가 1876년에 이미 터득했다시피 울타리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도 기분 좋은 경험으로 바꿀 수 있다. 그 일에 숙달되는 것을 특별한 성취로 여길 줄만 안다면 말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심리적인 교훈은 본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이란 이런 통찰들을 이용하는 세련되고 자동화된 디지털 기술의 한 단계이며,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디지털 게임과 서비스들의 영향력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현실적 사례이다.

 

리버스엔지니어링 :: 개발이 완료되어 유지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시스템의 구성요소를 알아 내고, 구성요소들 간의 관계를 식별하고, 대상(object) 시스템을 분석하는 과정이다.
즉, 소프트웨어 생명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얻어지는 프로그램이나 문서 등을 이용하여 생명주기 초기 단계의 생성물에 해당하는 정보나 문서들을 만들어 내는 일로서, 설계부터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공학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역공학이라 한다.
처음에는 하드웨어 분야에서 완제품으로부터 제품의 설계사양을 추출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으며, 리코프(M.G.Rekoff)는 이를 "복잡한 하드웨어 시스템의 견본을 분석하여 일련의 설계명세를 개발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소프트웨어 공학이 널리 소개되면서 기존의 정보시스템을 소프트웨어 공학의 방법으로 재정의하여 시스템의 품질을 향상하고 유지보수와 관련된 업무를 개선하려는 요구가 생겼고, 이를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역공학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역공학은 시스템을 이해하여 적절히 변경하는 소프트웨어 유지보수 과정의 일부이다. 대상 시스템을 변경시키거나 새로운 시스템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시스템을 분석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소프트웨어 유지보수 단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직간접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을 지원하기도 한다. 기존 시스템에 역공학을 적용하여 설계구조를 뽑아 내고, 이를 이용해 시스템 분석과 설계를 향상시키는 일이 그런 예이다. 또한 역공학된 설계 정보는 새로운 시스템 설계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며, 수정되어 새로운 시스템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역공학은 다분히 한시적인 기술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순공학의 자동화기술 분야가 발전하면 역공학의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또한 현재 개발되어 있는 역공학의 도구와 기술이 많은 부분 통합되어 있지 않아 실제로 도입하여 적용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버스엔지니어링 [reverse engineering]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우리의 잠재력에는 취약성이 있으며, 우리가 망각할 수 없는 사실도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그런‘유순한 영역’에서는 삶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앵그리버드 같은 게임 속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완벽함이 가능하다.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전 세계 3억 5,000만 명의 유저들 중 누구라도 매 스테이지마다 별점 3개를 다딸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완벽하지도, 완벽할 수도 없다. 만일 완벽함을 기대하도록 배운다면 곤경에 빠지고 말거나, 다루기도 힘들고 보상도 없고 기회라곤 단 한 번뿐인 삶을 이끌어 나갈 전략도 세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최첨단 기술을 통해, 그리고 인간의 행동과 경험을 평가·개선·증대시키는 것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통해 여러 가 지 기적을 발견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그런 순한 시스템의 쾌락과 휴식을, 성가시고 완벽하지 못한 일인 전인적 인간이 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Part 8. 정치가 삶의 일부로 녹아든 시대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

티파티 :: 정부의 건전한 재정 운영을 위한 세금감시 운동을 펼치는 미국의 보수단체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높은 세금을 거둬 경기부양을 달성하겠다는 이른바 큰 정부 전략에 대항해 시작된 단체다. 이후 세금을 늘려 큰 정부를 만들고자 했던 오바마 행정부의 국정운영에 반대하는 보수성향 유권자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됐다. 이들은 세금 인하 외에도 건전한 재정 운영, 작은 정부, 국가안보 등 보수적인 가치를 내걸고 있어 공화당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공화당 정치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티파티의 가장 큰 특징은 중앙 조직이나 대표 없이 철저히 분권화돼 있다는 것으로, 대형 단체들을 포함해 수천개 소속 단체들이 티파티 연합을 구성한다.  
한편 티파티라는 명칭은 1773년 영국 식민지 시절, 무리한 세금 징수에 분노한 보스턴 시민들이 수입되려던 홍차를 모두 바다에 던진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party)」에서 따온 것이다. 또 TEA라는 말은 「이미 충분한 세금을 냈다(Taxed enough already)」라는 뜻도 담겨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티파티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자 렌 레이놀즈Ren Reynolds는 이런 정치 트렌드를 강물의 물결에 비유했다. 그런 트렌드를 존재하게 해주는 본질, 즉 흐르는 물결 자체가 디지털을 통해 서로 연결된 시대의 새로운 정치인 셈이다.

 

실제로〈타임〉지는 2011년도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들Protester’을 선정하며 ‘구식의 기술에 최신식 기술을 결합하여 (…) 과거에 비해 더 민주적이지만 가끔은 더 위험스럽기도 한 지구를 21세기에 맞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공로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서로 다른 경험들 간의 경계 또한 신기술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뀌어왔다. 디지털을 통해 수천 명, 아니 수백만 명 단위의 결집에 관심 갖거나 참여하는 것 모두가 가능한 21세기 시민들에게‘정치’는 별개의 선택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삶의 일상적 흐름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참여를 의식하든 안 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관심도 행동주의 못지않게 나름의 정견이 있는 셈이니까. 지방자치에서부터 과세, 투표, 개인정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전 세계의 디지털 네트워크로 꾸준히 이동하면서 정치적 관여에 대한 적극성과 소극성 모두 꾸준히 늘고 있는 실정이다.

 

어디까지 보호하고 보호받아야 하는가?

가장 위험한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뭘 모르는 순진함일지도 모른다.

 

웹은 맥가이버 칼이 아니다

‘인터넷의 정치적 지배와 통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미디어에 비해 그러기가 훨씬 어려울 뿐이다.

 

“인터넷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무한정 늘어나는 유령이 아니다. 오히려 휘거나 끊어질 수도 있는 사실상의 물리적 실체이다. 그 이유는, 네트워크는 이용자 누구나 다른 어느 이용자들과도 대등한 자격에서 연결되도록 설계된 것이지만, 언제나 제한된 수의 물리적 연결과 스위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 운영도 제한된 수의 회사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모든 것이 그 회사들의 선한 행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의 가능성을 가장 열렬히 환영하는 이들은, 디지털 시대의 개척자는 아니지만 이전 기술시대의 세대를 뛰어넘을 기회를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인도의 경우를 예로 살펴보자.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나 영국의 국민보험제도 같은 것이 없으며 12억 인구 중 3,300만 명만이 소득세를 내고 6,000만 명만이 여권을 가진 나라가 바로 인도다. 주간지 〈뉴요커〉지가 2011년 10월호에서 보도했다시피, “인도인 가운데 수 억 명은 국가에게는 거의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다. (…) 그들은 은행계좌를 개설하거나 휴대폰 유심카드를 사는 것도 쉽지 않고 국민으 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국가의 서비스도 누리지 못한다.”

 

믿음의 정치

방글라데시의 모바일 폰 접속률을 예로 들어보겠다. 1999년까지 최신식의 모바일 네트워크라는 것은 구경할 수도 없었던 이 나라는 2010년엔 그 보급률이 ‘사실상’ 100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시 말해, 방글라데시인들은 거의 누구나 가족, 친구, 혹은 공동체를 통해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현재 모바일 폰 이용자가 6억 명이 넘어, 그 수에서 미국이나 유럽을 능가하고 있다. 

이런 사례에서 볼 때 디지털 기술은 영향력과 유연성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그 속도가 무척 빠르고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한다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갖춰야 할 조건과 필요 가운데 아주 기본적인 요소들과도 쉽게 융합된다. 이것은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신기술의 정치적 영향과 관련되는 사치, 방종, 소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즉, 정치가 위에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닌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상이며, 정치에 대해 훨씬 더 적극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이다.

 

 

 

맺는 글

다 같이 잘 살아남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라·

디지털 기술은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들에게 거리낌 없는 방종의 욕구를 채워주기도 하지만, 이미 입증되고 있다시피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한 놀라운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2,000년도 더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번영이나 번성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라는 개념으로 풀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물질적 성공이나 육체적 쾌락보다는 가능한 최대한 인간적 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어원상 ‘선善’과 ‘수호신’을 뜻하는 두 단어에서 유래된 만큼, 신령의 보살핌을 받는 것과 비슷한 상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도 하다.

 

아레테(Arete) ::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사물이 가지고 있는 탁월성, 유능성, 기량, 뛰어남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발이 빠른 것은 발의 아레테이고, 토지가 비옥한 것은 토지의 아레테이다.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덕목이나 덕성(德性)에 이 말을 적용하였으나 그들의 경우에도 물론 일반적인 의미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레테 [arete] (철학사전, 2009., 임석진, 윤용택, 황태연, 이성백, 이정우, 양운덕, 강영계, 우기동, 임재진, 김용정, 박철주, 김호균, 김영태, 강대석, 장병길, 김택현, 최동희, 김승균, 이을호, 김종규, 조일민, 윤두병)

 

현재와 미래의 기술 상태를 주목해보건대 우리의 가장 훌륭한 성취와 잠재성이 여전히 정신적 영역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정신적 영역에서의 탁월함은 어떠한 것이든 모두 이성과 덕이라는 두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728x90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모든 걸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0) 2023.07.08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1) 2023.07.07
인생학교: 세상  (0) 2023.07.05
인생학교: 정신  (0) 2023.07.04
인생학교: 돈  (0) 2023.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