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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학교: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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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학교: 섹스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법 『인생학교: 섹스』.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마주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전하는 책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유쾌한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섹스》편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섹스의 난관들뿐 아니라 욕정, 페티시즘, 불륜, 포르노그래피, 발기부전 등 광범위한 주제를 넘나들며 모던 섹슈얼리티의 딜레마를 거침없이 살펴보고 있다. 첫 만남에서 섹스까지 보통의 연애의 점진적인 발전단계를 따라가며 섹시함의 본질을 밝히고자 했고 각기 다른 성정 취향 속에 담긴 개인의 내밀한 심적 내력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저자는 섹스에 관한 철학적 사색으로 위로와 혜안을 주며 스스로가 비정상이라고 느끼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섹스 자체와 섹스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에 관해 아주 섹시하고 파격적인, 그러나 여전히 철학적이고 지적이며 유쾌하고 담백한 대안을 펼치며 모던 섹스의 리얼리티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전한다.
저자
알랭 드 보통
출판
쌤앤파커스
출판일
2013.01.11

 

머리말

이제까지 배운 것이 ‘지식’이라면, 지금은 ‘지혜’를 배워야 할 때다.

 

인생학교의 전공필수와 같은 이 여섯 권의 책들은, 심장은 뛰지만(생존하고 있지만), 가슴이 뛰지 않는(존재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대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심폐소생술과 같다.

 

“이제는 섹스에 대한 욕망과 사랑에 대한 욕망이 평등한 지위를 갖고, 도덕적 허식을 걷어치울 때다. … 섹스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사랑 앞에 얌전히 앉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사랑도 믿고, 일도 믿지만, 사랑을 위한 일의 가치는 믿지 않는다.”는 말은 알랭 드 보통이 소설 《사랑의 기초》에 쓴 첫 번째 문장이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주사바늘을 쥔 병원 의사가 아니라 자애로운 얼굴의 호스피스 자원봉사자일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은 작가들을 좌절시키는 작가다. 그의 시선은 늘 신선하며 그 신선함은 곧 명쾌한 해법이 된다. 관습을 반복하던 작가들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천지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 몸과 마음은 ‘사랑’보다 ‘섹스’에 쉽게 반응한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쉽게 인정하지 않았던. 연애와 결혼의 교집합 ‘섹스’, 그것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캄캄한 밀실에 있던 그것이 알랭 드 보통을 통해 환한 광장으로 나왔다. 심리학에서 철학, 사회학, 종교, 연애와 결혼의 본질을 독특한 관점에서 풀어낼 줄 아는 그라 더욱 기대된다. 사실 섹스에 관한 이런 ‘관심’과 ‘열심’도 나의 그(그녀)를 위함이다. 결국 섹스도‘사랑’이라는 종착역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이기 때문에.

 

 

 

Part 1. 들어가는 글

제1차 세계대전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의 발사 사이의 어느 무렵부터 상황이 차츰 개선되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비키니를 입게 되었고, 자위행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또 ‘쿤닐링구스cunnilingus’ 같은 말을 입 밖에 꺼내도 될 만큼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포르노 영화도 보기 시작했다.

또한 이전까지는 대다수의 인류사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신경증적 욕구좌절의 근원이었던 섹스가, 이제는 아주 편안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성관계 자체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도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섹스를 하려고 할 때 큰 혼란과 죄책감을 느꼈다면,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오히려 기대감과 자신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섹스가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고 신체적으로도 활력을 주는 유익한 유희로서, 이를테면 테니스와 비슷한 정도의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현대인의 삶에서 유발되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누구나 가능한 한 자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섹스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사랑 위에 얌전히 앉아 있길 거부한다. 아무리 길들이려고 애써도 평생토록 자꾸자꾸 말썽을 일으키곤 한다.

 

당혹스러운 성적 충동에 좀 더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기보다는, 섹스가 본래부터 다소 이상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섹스에 대해 좀 더 현명해지기를 기대한다는 게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섹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난관들을 완벽하게 이겨내길 기대할 수 없을 뿐이다. 제멋대로이고 무분별한 그 열정을 정중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다.

 

우리는 가장 운 좋은 경험을 하는 그 순간에, 정작 자신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르고, 감탄도 감사도 없이 지나쳐버린다. 나이가 들어 지난날의 짜릿했던 순간들을 거듭거듭 돌이키며 향수에 잠길 때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성을 주제로 삼은 자기계발서라면, 고통을 철저하게 제거하는 것보다는(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 고통을 제어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편이 더욱 유익할 것이 다. 말하자면 병원이 아니라 호스피스처럼 고통을 덜어주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Part 2. 섹스의 기쁨

Chap 1. 에로티시즘과 외로움

성문제에 관한 한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론이 하나 있다. 진화생물학에서 뻗어 나온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성욕과 섹스에 대해 설명할 때 다른 무엇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 이 이론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종족을 번식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리고 섹스의 쾌감은 배우자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데 쏟아붓는 뼈 빠지는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부분은 종족을 발전시킬 특정 요소의 상징에 불과하다. 가령 어떤 사람의 지성에 마음이 끌린다면 후손의 생존을 보장하는 데 그것이 중요한 자질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을 보고 좋아하는 것도, 그의 활력과 에너지가 다음 세대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암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솜씨가 아무리 젬병인 사람이라도, 첫키스를 떠올리며 그(혹은 그녀)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입술이 맞닿게 되었는지를 털어놓을 때만큼은 따분하게 말하기 힘들다.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점차 우리의 존재 자체에 흐뭇해하는 마음이 시들해지고 우리가 뭔가를 잘해야 열광해준다. 이제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우리가 ‘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셈이다. 예전의 선생님들은 뭘 그린 건지 알아보기도 힘든 무당벌레 그림이나, 아무렇게나 휘갈겨놓은 만국기 그림을 보고도 아주 잘했다고 칭찬해줬지만, 이제는 시험성적이 잘 나와야만 칭찬해준다.

 

안토니 가우디 :: 스페인의 건축가로 타라고나 레우스에서 출생하고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건축교육을 받았다. 고딕과 이슬람 건축양식을 발전시켜, 자연의 유기성을 강조한 곡면과 곡선이 풍부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형태, 도자기 타일을 이용한 모자이크 등 다채로운 특징을 지닌 독자적인 아르누보 양식을 창출하였다.
카사비센스(1878~1888), 팔라시오 궤르(1884~1889), 산 코로마 데 세르베리오성당(1898~1914), 구엘공원(1900~1902), 카사 바틀리오(1905~1907), 카사밀라(1905~1910) 등 대표작의 대부분이 바르셀로나 및 그 근교에 집중되어 있다. 1883년 이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주임건축가로 되어 저명한 동쪽 수랑 외측을 건립하였으나 교통사고로 죽어 미완성에 그쳤다. 그러나 설계와 모형은 완료되어 있어서 현재도 공사중에 있으며, 카사밀라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í, Antoni Gaudí i Cornet]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당연한 얘기지만, 평소에 우리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와 섹스를 하는 데 별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질색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개인영역을 침범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 언제나 사람들과 60센티미터, 혹은 가급적 90센티미터쯤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갑자기 키스의 순간이 찾아온다. 입 안의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 다시 말해 치과의사가 아니면 아무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어둡고 촉촉한 공동이자, 혀의 지배를 받으며 고래의 뱃속처럼 고요함에 싸여 있는 그 미지의 소우주가, 이제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열어주려 한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짝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기대조차 못했던 혀가 조심조심 그 짝에게 다가간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땅에 최초로 발을 디딘 유럽 탐험가를 맞는 남태평양 제도의 주민들이 가졌을 법한 경계심과 호기심을 품고 점점 가까이 다가간다. 여태껏 혼자라고 생각해왔던 혀는 이렇게 해서 자신이 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혀는 서로 얽혀 조심스레 춤을 춘다. 한 사람이 상대의 이를 자기 이라도 되는 양 핥기도 하면서.

 

반감이 없다면 짜릿함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반감이 바로 에로틱한 순간을 더더욱 강렬하게 만들어준다. 반감이 절정에 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상대로부터 환영과 허락을 받아낸다. 그뿐 아니라 두 사람만이 가진 배타적 결합의 특권성도 단단하게 봉인된다. 만약 지금 이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혹은 그녀)가 두 사람 모두에게 반감을 느끼게 할 만한 어떤 행동을 했다고 가정해보면, 그 싫은 행동에 대한 반감이 크면 클수록 두 사람의 결합은 더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사실, 키스에서 느끼는 흥분의 상당 부분은 육체적 행위의 차원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을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깨달으면서 흥분이 생겨난다. 이런 메시지는 키스가 아닌 다른 매개를 통해 전해지더라도 마찬가지의 황홀감을 준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키스 자체가 아니라 키스에 담긴 의미이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보면, 조물주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큰 벌을 내렸는데, 그 벌 가운데 하나가 육체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 여호와는 두 사람을 괘씸하게 여겨 영원히 벌거벗은 몸을 창피해하며 사는 운명을 주었다. 이런 식의 성서적 기원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자유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은 단지 비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맨살을 내보였다가 남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킬까 봐 두려워서이기도 하다. 어쩌면 후자가 더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난교파티와 항문섹스를 상상하는가 하면, 눈에 불을 켜고 포르노 영화를 구해 봤고, 수학 선생님과 성관계를 하는 음탕한 공상에 빠져들기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품행이 단정한 모범생으로 지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남자의 수치심이 남자의 내면에 누구에게도 절대 소개시켜주기 두려운 자아를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뜨개질과 승마를 즐기고, 엄마와 바나나빵 만들기를 좋아했던 여자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단 한 가지 오락거리에 빠지게 되었다. 바로 욕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바닥에 누워 바지를 내리고 전신 거울 앞에서 자위를 하는 것. 여자는 생각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이러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내 이런 모습까지 다 용납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르가슴에 달한 후에 기운이 빠지고 죄책감에 휩싸인 여자는, 신에게 벌을 받은 이브가 에덴동산을 떠날 때 느꼈을 법한 고통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따라서 지금 침실에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각자가 내밀하게 간직해온 성적 자아들이 마침내 죄스러운 고독에서 벗어나, 서로를 받아들이는 행위인 셈이다. 두 사람은 무언의 합의를 한다. 각자의 신체형상과 육체적 열망이 놀랍도록 별나더라도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그리고 한때 너무나도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들을 수치심 없이 받아들이기로.

두 사람은 애무를 통해, 별나긴 하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순순히 나아간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문명세계로부터 기대되는 행동과는 뚜렷하게 대립된다. 가령 할머니 세대의 사람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애무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망측하거나 괴상한 짓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마침내 커플은 몸이 바라는 여러 가지 놀랍고도 미친 듯한 일들에 자신들을 온전히 내맡기게 된다.

 

발기와 애액은 의지력과는 전혀 무관하며, 따라서 흥미의 지침으로서 그 무엇보다 진실하고 솔직한 신호다. 거짓 열정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를 진짜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의무감 때문에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런 세상 속에서, 애액으로 젖은 질과 뻣뻣하게 선 페니스는 진심을 모호하지 않게, 아주 확실히 전해주는 매개물인 셈이다.

 

카페에서 두 사람은 겉으로는 분별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마음속으로는 서로 다음 단계의 흥분으로 나아갔다. 표면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앞질러 몸은 이미 격정적으로 욕망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복에 대한 성적 판타지는, 제복이 상징하는 이성의 통제, 그리고 잠시 동안 환상 속에서만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억제되지 않는 성욕 사이의 격차에서 비롯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의사나 간호사부터 투자상담사나 세무사에 이르기까지)은 우리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곳이 젖거나 딱딱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에게 별 관심도 없거니와, 우리를 위해 일부러 진료를 중단하거나 회의를 취소할 만큼 신경을 써줄 턱도 없다. 이런 사무적인 무관심 앞에서 우리는 간혹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모욕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환상이라는 특별한 힘에 기대면, 일상을 뒤집고 삶의 우선 순위를 바꿀 수 있다.

 

현실에는 격식을 갖춰야 하는 상황이 많다. 그런데 그런 수많은 격식들은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게 뜻밖의 성적 판타지를 싹틔울 여지를 허락한다. 규칙을 깨는 연상작용에 의해 제복이 성욕을 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 잘 안 띄는 도서관 구석이나 고급 레스토랑의 화장실, 또는 열차의 객실 안에서 섹스하는 상상 역시 그와 비슷한 이유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성적 판타지나 동경은 격식과 친밀감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사회적 통제에서 벗어나는 경이로운 느낌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서 관습에 대해 각성해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새로운 누군가와 첫날밤을 보낸 기억은 그런 대조가 가장 생생할 때 호소력이 있다. 또한, 슬픈 얘기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누드 해변에서는 성적 자극이 떨어진다. 미친듯이 좋아할 때는 언제고, 그새 배은망덕하게 식상해져버릴 위험이 다분한 오래된 연인 사이에서 알몸을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요받는다. 보통은 공격성, 무분별함, 탐욕, 경멸 등 우리의 내면에 도사린, 의심의 여지없이‘악한’본성을 꾹 참고 억누르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관심이나 애정을 얻지 못한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거리낌 없이 모조리 드러내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런 까닭에 섹스를 통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내 보이고 또 인정받게 되는 순간, 우리는 성적 흥분(정확히 말하면 감정적 만족)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선량한 본성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누군가와 있을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창피해서 보여줄 수 없는 모습까지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욕하기 딱 좋을 듯한 말이나 몸짓도 과감히 내보이게 되는 것이다. 가령 침대에서 파트너의 뺨을 세게 때리거나, 두 손으로 목을 살짝 조르는 것을 애정표현으로 여기는 일면까지 내보일 수 있다. 그러면 파트너는 그에 대해 확실한 의사표시를 해준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선량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에게 어두운 일면들이 있다는 것이 파트너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상적인 부모가 그러하듯, 우리의 전체적인 모습을 균형 있게 바라보면서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선하다는 것을 알아봐준다. 그리고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관대한 연인으로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을 말하거나 행동하도록 유인해준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각별한 기회를 선물로 받는다.

한편, 이런 식의 과격함과 무례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면 어떨까? 그렇더라도 상대에 못지않은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무례함, 상처, 굴욕을 어느 정도, 혹은 어떤 수준으로 당할 것인지를 스스로가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칼자루를 쥔 것과 같은 우쭐한 감정까지도 누릴 수 있다.

살다보면 일상에서 남들에게 냉대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상사의 악의적인 결정을 억지로 따라야 할 때도 숱하게 많다. 그런데 무례함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을 통해 힘의 역학을 드라마틱하게 바꿔본다면 어떻게 될까?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설계한 환경에서, 그것도 마침 본질적으로 착하고 선량한 누군가의 앞에서,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복종시킴으로써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

 

연인 사이의 충성스러운 애착은, 무례함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거대하고 비판적인 사회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 무례함이 더 놀랍고 경악스럽게 여겨질수록, 연인들끼리는 두 사람만이 승인한 낙원을 짓는 듯한 기분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무례함은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심리학의 프레임을 통해 들여다봐야만, 따귀를 맞고, 숨이 반쯤 넘어가도록 목이 졸리고, 침대에 묶여 강간당하다시피 다루어지는 그런 행위가 일종의 승낙의 증거라는 사실이 차츰 이해된다.

섹스는 고통스러운 이분법, 즉 우리 모두가 유년기 이후에 익숙해지는‘불결함’과‘순수함’의 이분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준다. 섹스는 우리의 자아 중에서 가장 명백하게 더럽혀진 측면을 그 과정에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그 불결한 측면을 가치 있는 것으로 거듭나게 해주며, 결국 우리의 자아를 정화시켜준다.

그런데 여기서 자아를 정화시켜준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이렇다. 얼굴, 그러니까 우리 몸에서 가장 공개적이고 고상한 부분인 얼굴을 연인의 가장 은밀하고 ‘불결한’부분에 가져다 대고 열정적으로 키스하고 빨고 혀를 집어넣으면서, 상징적으로 연인의 자아 전체를 받아들여줄 때가 바로 그런 정화의 순간인 셈이다. 가톨릭 사제가 죄를 참회하는 수많은 고해자의 머리에 순결한 입맞춤을 해줌으로써 그를 가톨릭 교회의 품안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처럼.

 

알고 보면 누구나 이런저런 식으로 페티시스트다. 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성향이 다소 온건한 편이어서, 애착을 느끼는 그 대상물에 의지하지 않고도 성관계를 잘 해내는 것뿐이다.

 

플라톤의《향연》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만찬 자리에서 벌인, 사랑에 대한 유명한 토론이 나온다. 의도치 않게 불쑥 나온 말인 듯싶긴하지만, 어쨌든 그 토론에서도 페티시에 대한 흥미롭고도 돌발적인 설명이 나온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자신의 대변자로 삼고 훗날 ‘사랑의 사다리Ladder of Love’라고 일컬어지는 이론을 설파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시각을 통해 마음이 끌리는 것은(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으로 단순한 시각의 차원이나 물질의 차원을 넘어서, 플라톤이 말하는 이른바‘선Good’이라는 더 폭넓고 긍정적인 범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물질세계를 관념과 미덕의 세계로 이어주는 이런‘사랑의 사다리 오르기 이론’은 페티시에 구원의 빛줄기를 던져준다. 단지 성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찮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받아온 페티시를 우울한 해석에서 해방시켜준 것이다.

 

커플이 절정의 순간에 이르며 즐기는 오르가슴은 단순히 육체적인 감각만은 아니다. 단지 종의 번식을 명하는 생물학적 명령에 따라 두 성기가 서로 마찰하고 누름으로써 일어나는 감각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섹스를 통해 얻는 쾌감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 그리고 행복한 삶의 요소들을 인정하고 확실히 받아들이는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적 흥분이란, 자신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찾는 순간 느끼게 되는 흥분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자신에게 ‘섹시하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주의 깊게 분석할수록 더 확실하게 이해된다.

오르가슴 자체는 고독과 소외가 극복되는 짧은 순간에 최고조에 이른다. 연인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든, 그러니까 그것이 연인의 말이든, 연인이 신고 있는 신발이든, 연인의 눈이나 눈썹에서 풍기는 분위기이든 간에, 모두 다 쾌감의 정수distillation 속에 함께 녹아들면서 상대에게 마음이 사르르 녹아 퐁당 빠져버리는 것이다. 매번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처럼 새롭게.

물론, 상대방과 함께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방법으로 오르가슴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섹스의 진정한 목적을 배반하는 셈이다.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자위를 한 뒤에 대개 공허하고 외로운 느낌이 뒤따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아주 극단적인 사례라면 수간, 강간, 아동 성폭행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 격분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은 하나같이 한 쪽이 상대에게 취하는 쾌감에서 상호성이 지독히 결여되어 있으므로, 격분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섹스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와 일상의 현격한 대비가 문제다. 섹스는 특유의 다정함, 격렬함, 열정, 쾌락이 지배하는 반면, 삶의 일상적인 측면들은 반복, 지루함, 억압, 어려움, 냉담함으로 가득하다. 이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다.

 

섹스는 단순히 육체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 하지만 그것은 심리적인 측면을 간과한 얘기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은 우리의 마음속 열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행위는 서로의 성기를 마찰시키는 행동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흥분은 천박한 생리학적 반응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한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느끼게 되는 엑스터시ecstasy다. 그 특별한 누군가는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줌은 물론이요, 공통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삶을 나누는 것까지도 함께 꿈꿀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Chap 2. ‘섹시함’은 심오해질 수 있는가?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는 이유는 뭘까? 매력적인 사람들에게 매료당하는 진짜 이유는 뭘까?

이 대목에서도 진화생물학은 다시 한 번 설득력 있고 그럴듯한 답을 제시해준다. 진화생물학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아름다움에 끌리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다. 아름다움은 곧 건강함을 보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아름다운’사람이라고 말할 때, 혹은 더 허물없는 감정 그대로 ‘섹시한’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의 본질에는 그 사람이 강한 면역체계와 넘치는 스태미나를 가진 건강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는(혹은 노골적으로 말해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흥분시키는’ 이유는), 그런 사람들과 짝을 이루면 이론적으로 건강하고 생명력이 강한 자손을 생산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직관은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것으로, 한눈에 보고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게 해주는 중요한 생존본능이다.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진화생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남녀 모두‘섹시한’사람으로 분류되는 기준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얼굴의 좌우가 대칭적으로 일치하고 균형과 비율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용모라는 것이다.

 

사실 대칭과 균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대칭과 균형이 맞지 않는 경우, 즉 얼굴이 심하게 비대칭이거나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 자궁 속에서 혹은 생후 수년 이내에, 즉 자아의 대부분이 아직 형성되지 못한 시기에 병에 걸렸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태아일 때 DNA가 세균에 감염되거나, 임신 초기에 엄마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으면, 얼굴의 생김새에 이런 불운의 흔적이 그대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외모는 우리의 유전적 운명을 보여주는 지침인 셈이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고대로부터 발달되어온 생존에 집착하는 뇌 영역에게 외모의 아름다움은 건강의 궁극적 보증마크다. 사실 이 이론은 반박하기가 힘들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이와 같은 과학적 궁지를 풀어줄 기막힌 명언을 남겼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열대 조류들의 경우, 깃털의 상태는 흡혈기생충의 존재 유무를 암시하기 때문에 짝이 될지 모를 상대에게 깃털로 건강에 대한 메시지를 단박에 전해준다. 패션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멀리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지만, 어쨌거나 패션도 더러 생물학적 건강상태를 부각시켜주는 특정 신호에 초점을 맞추게 해준다. 특히 다리, 엉덩이, 가슴, 어깨를 강조하거나 과장하는 패션일수록 더욱 그렇다.

 

건강상태를 부각시켜 보여주는 것이 패션의 임무 중 한 가지가 될 수도 있겠지만, 패션은 예술의 한 형태로서 좀 더 야심찬 임무도 맡고 있다. 여자들에게 다양한 의상을 제공해줌으로써, 흥미나 호감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지원해준다는 것이다. 무한한 변신이 가능하다는 패션의 특성을 통해, 의상은 그 혹은 그녀 나름의 가치관, 윤리관, 심리적 성향 등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상이 주는 메시지에 대해 호감을 느끼느냐 거부감을 느끼느냐에 따라 ‘아름답다’거나 ‘보기 싫다’고 판단한다. 어떤 옷차림을 ‘섹시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이 건강한 자손을 많이 낳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옷이 대변하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철학에 흥미가 끌린다고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Chap 3. 나탈리냐, 스칼렛이냐?

미술사학자들이 오래전부터 풀지 못해 애를 태워온 질문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왜 특정 화가를 다른 화가보다 더 열렬히 선호하는 걸까? 똑같이 위대한 걸작을 탄생시킨 거장으로 추앙받는 두 화가를 놓고도 한쪽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의아한 일이기는 하다.

 

이 수수께끼를 풀어줄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독일의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가 〈추상과 감정이입Abstraction and Empathy〉이라는 제목으로 190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보링거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성장하면서 내면의 무언가가 결여되기 마련이다. 부모님이나 성장환경이 늘 완벽할 수는 없으므로, 거기에서 저마다 나름의 좌절을 경험하고, 어느 부분이 취약하거나 불안정한 상태로 성격이 형성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약점과 결함이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갖는 호감과 반감의 취향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미술 작품에는 특유의 심리학적, 도덕적 분위기가 담겨 있다. 그림에 따라 평온하거나 불안하거나, 과감하거나 조심스럽거나, 절제되거나 대담하거나,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거나, 세속적이거나 고상하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들 중에서 우리가 어떤 분위기를 선호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의 심리적 내력이 거기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내면의 취약한 부분이나 결핍된 요소가 무엇인지에 따라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결함을 보상해주고 건강한 상태를 되찾도록 도와줄만한 속성이 담긴 작품을 갈망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미술 작품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결여되어 있는 특정한 속성이다. 그래서 어떤 작품이 심리적으로 결핍된 가치를 채워줄 때 우리는 그 작품을 보고‘아름답다’고 감탄한다. 반면 위협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나 고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을 대할 때는 ‘보기 싫다’는 반감이나 거부감을 갖는다.

 

칸타타 ::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보통 독창(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중창 ·합창으로 이루어졌으나, 독창만의 칸타타도 있고 또 처음에 기악의 서곡이 붙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가사의 내용에 따라 세속(실내)칸타타와 교회칸타타로 대별된다. 칸타타는 17세기 초엽 이탈리아에서 생겨나 오페라에서 발달한 벨칸토 양식의 아리아와 서창풍(敍唱風)의 레치타티보를 도입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왕후 ·귀족들의 연희용으로 작곡된 독창의 실내 칸타타가 중심을 이루고 카리시미, 체스티, 로시 등을 거쳐 나폴리악파의 대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정형은 ‘레치타티보-아리아-레치타티보-아리아’라는 4악장 형식으로, 아리아에서는 화려한 콜로라투라의 기교가 구사되었다. 독일에서도 텔레만, 헨델이 이탈리아 형식의 실내 칸타타를 많이 작곡하였다.
프랑스의 칸타타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오페라풍의 양식을 따랐으며 캉프라가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있으나 이탈리아나 독일처럼 성하지는 못하였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아리아와 레치타티보가 교체되는 독창 칸타타를 길러낸 독일은 18세기에 들어 그리스도교의 교회음악으로서 독일 특유의 칸타타를 발전시켰다. 그것들은 17세기 이래의 교회합창곡과 오페라풍의 아리아 ·레치타티보를 융합한 것으로 가사로는 자유로운 종교시에 성서의 구절이나 찬송가(코랄)를 곁들인 것들이 많다. 특히 중요한 것은 찬송가의 가사와 선율을 바탕으로 한 코랄칸타타이다. 이러한 독일의 교회칸타타는 매 일요일의 예배나 특정한 축제일에 교회에서 연주되었던 것으로 그날 낭독되는 성서의 구절이나 목사의 설교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북스테후데, 크나우, 텔레만 등이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기고 있으나 독일 교회칸타타의 절정을 이룬 것은 약 200곡에 이르는 바흐의 작품들이다. 형식과 내용의 다양성에 있어서 그것들은 바흐음악의 정수라고 부를 만하다. 그의 칸타타의 가장 전형적인 형식은 처음에 기악의 서주를 지닌 규모가 큰 대위법적인 합창곡을 두고 거기에 몇 개의 아리아 ·레치타티보 ·중창이 이어지며 단순한 코랄합창이 전곡(全曲)을 맺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칸타타는 바흐 이후에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프로코피예프, 베베른 등에 의해 작곡되었으나 칸타타의 전성기는 바흐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해도 무방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칸타타 [cantat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예술작품에 대한 위와 같은 풀이는, 섹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해볼 수 있다. 선천적으로 문제가 있었거나, 혹은 성장과정에서 뜻밖의 사건을 겪었다고 치자. 그로 인해 우리는 불균형한 상태로(어딘가가 과도하거나 취약한 상태로) 성인기에 이르렀다. 마음속의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넘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부족해졌다. 걱정이 너무 많거나 지나치게 침착할 수도 있고, 너무 독단적이거나 너무 수동적일 수도 있으며, 너무 현학적이거나 너무 실용적일 수도 있고, 너무 남성적이거나 너무 여성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상대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보완적인 특징을 찾아냈을 때, 그 사람을 ‘섹시하다’고 느끼고, 우리 자신의 불균형적인 측면을 더 자극하는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갖게 된다.

 

심기증 :: 심기증 환자는 자기 자신의 심신상태에 끊임없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고, 기능의 이상을 병적으로 의심한다. 마음속에는 ‘나는 병에 걸려 있다’라는 지워버릴 수 없는 관념이 간직되어 있어, 사소한 이상이라도 알아차리게 됨으로써 더욱 주의를 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심기증의 호소는 극히 다양하다. 그 고통의 정도도 경우에 따라 변동한다. 신경증 ·신경분열증 또는 조울증 같은 여러 가지 증상이 일어나기 쉽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기증 [hypochondria, 心氣症]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전인적 자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예술과 섹스 둘 다 꼭 필요한 요소이므로, 서로 보완의 메커니즘이 유사하다면 이처럼 이유가 비슷 한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아름답다’거나‘섹시하다’고 느끼는 특성들은, 우리 스스로의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해 절실히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해준다.

사랑에 빠지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약점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희망의 승리다. 섹스도 그와 같은 의미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Part 3. 섹스의 골칫거리들

Chap 4. 사랑과 섹스

두 사람은 내심 희망한다. 속마음을 정직하게 털어놓지 않아도 어떻게든 그 바람대로 이루어지기를.

하지만 이런 애매한 태도는 결국 배신으로 끝나거나 헛된 기대만 키우다가 허무하게 엇갈려버리기 일쑤다.

 

누구에게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섹스보다 사랑을 더 원한다고 해서(혹은 섹스를 배제한 사랑 을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훌륭하거나 더 나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주면 된다. 각자의 감정과 욕망으로 엮어내는 레퍼토리 속에서, 두 사람 모두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위 사람들은 도덕적인 잣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제단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제는 섹스에 대한 욕망과 사랑에 대한 욕망이 평등한 지위를 갖고, 도덕적 허식을 걷어치울 때다. 사랑과 섹스는 누구나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욕망이며, 동등한 가치와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랑이든 섹스든, 상대 이성에게 그 욕망을 갈구하기 위해 억지로 거짓을 꾸미는 일은 없어야 한다.

 

Chap 5. 이성에게 거절당한다는 것

이성에게 거절당할 때 생기는 고통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곳엔 그 거절을 ‘도덕적 판단’으로 해석해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우연’에 불과할 수 있는 일(거절당한 일)을 두고 괜한 고문을 하는 셈이다. 이런 자기 고문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잘 풀리지 않았던 그 밤의 일을 사소한 불운의 하나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우리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불운 때문에 연애의 들판에 홍수가 나고, 불어난 흙탕물에 사랑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성냥개비처럼 휩쓸려 가버린 것이다.

 

고통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믿기 힘들겠지만, ‘No’가 그냥 ‘No’일뿐일 때도 있다.

 

Chap 6. 욕망의 결핍

성욕이란 단순히 옷을 벗고 있는 것과는 별로 상관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흥분의 기대심리로부터 생겨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런 흥분은 옷을 벗고 침대에 같이 누운 부부에게는 일어나지 않지만, 반대로 두꺼운 스키복에 장갑과 모자로 몸을 꽁꽁 가린 채 리프트를 타고 산비탈을 오르고 있는 연애 초기의 커플에게서는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가 섹스를 회피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섹스가 주는 쾌락이, 그 이후에 부과될 가정생활과 일상의 까다로운 요구들을 견뎌낼 인내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1912년에 발표한 〈사랑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대상 천시의 경향에 대하여On the Universal Tendency to Debasement in the Sphere of Love〉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프로이트는 환자들에게서 너무 자주 목격한 가슴 아픈 딜레마를 이렇게 요약했다.

‘그들은 사랑하면 욕망이 없어졌고, 욕망을 느끼면 사랑할 수 없었다.’

프로이트의 추정에 따르면, 우리의 성생활은 성장환경과 관련된 두 가지 사실에 큰 영향을 받는다. 피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의 성생활은 점차 피폐해지게 마련이다.

첫째는, 유년기에 성관계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관계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성인이 되면 특정한 부분에 대해 어린 시절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과 닮은 사람을 연인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한데 섞이면서 수수께끼 같은 희한한 현상이 벌어진다. 즉, 가족 이외의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될수록 유년기에 느꼈던 가족 간의 친밀감이 더 강하게 상기되며, 그로 인해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상대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에 대해 구속을 받게 된다. 원래 근친상간의 금기는 근친번식의 유전적 위험성을 제한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그것이 가까운 관계의 사람과 섹스를 즐기지 못하도록 막고, 종국엔 관계를 완전히 파탄 낼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상대가 아니다. 친밀한 상대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때 인식의 초점은, 배우자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아니라 배우자의 ‘있는 그대로’의 실제다.

 

평생에 걸쳐 만족스러운 성관계가 몇 번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성관계를 무조건 자주 갖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생각이 과연 옳을까? 섹스와 결혼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가장 좋겠지만, 바란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헛된 기대를 고쳐먹고, 비현실적 환상을 버려야 하는 것 아닐까? 소위 ‘무능’이라는 오명을 털어버리면서 말이다.

 

Chap 7. 더 이상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발기불능’이라는 말은 단순히 신체적인 불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도덕적인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즉, 체면과 남성성을 조롱하고, 파트너의 인격과 외모를 모욕하는 비극적인 단어다. 인류의 비극은 수없이 많지만, 커플이 섹스를 시도하고 또 시도해보는데도 남자가 발기가 안 되어 침대에서 맞이하는 그런 비극보다 더 지독한 비극도 찾기 힘들다. 그 순간엔 심지어 자살 충동이 들 수도 있다.

발기불능의 진짜 문제는 성적 쾌감의 상실과는 별 상관이 없다. 성적 쾌감은 마스터베이션을 통해 쉽게 보상받을 수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파트너와 본인, 두 사람 모두의 자존심에 가해지는 상처와 충격이 더 큰 문제다. 무기력이 무엇인지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발기불능이 비참한 것이다.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 :: 아시아 남서부 요르단에서 아프리카 동남부 모잠비크까지 뻗은 세계 최대의 지구대. 화산작용으로 생성됐으며 동서 2열로 나뉨. 동쪽엔 사해 · 아카바 만 · 홍해 및 에티오피아 · 케냐 · 탄자니아의 수많은 호수가 있고 서쪽엔 앨버트 · 에드워드 · 키부 · 탕가니카 · 니아사 호 등 여러 큰 호수가 있음. 아프리카에선 곳곳에 고원도 형성. 중력 · 지자기의 이상이 뚜렷하고 지진이 잦음.
[네이버 지식백과] 그레이트리프트밸리 [Great Rift Valley] (세계인문지리사전, 2009. 3. 25.)

 

수천 년 동안 본능은 이성으로부터 이렇다 할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전철학과 유대교 및 기독교 윤리의 영향이 예수의 사후 100여 년 동안 일반 대중들 사이에 침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황금률(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고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성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문명civilization이다. 인권을 중시하고 인간의 친절과 도덕적 교양을 존중하는 우리의 문명 말이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과 상냥함의 능력이 진보할수록, 그것이 도리어 우리를 너무 과민하게 만들어 이성을 유혹하려는 시도를 주저하게 만들 수도 있다니.

문명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 관대함, 세심함, 평등의식, 공평한 가사 분담과 같은 굉장한 미덕을 가져다주었다. 그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문명화가 우리의, 아니 적어도 남자들의 성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막무가내로 요구하거나 거칠게 밀어붙여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을 단지 우리 자신의 욕구충족과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파트너 앞에서 주저하고 쩔쩔매는 것이 선의의 행동일 수도 있고, 또 지극히 친절한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자칫하면 가망성 있는 기회마저 멀쩡히 눈 뜨고 빼앗길지 모른다.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발기불능은 지나친 존중이 병이 되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파트너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무례를 범하거나 파트너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해서 불쾌감을 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파트너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곧잘 멍하고 우울해져서 잠자리를 피할 때가 많다. 이런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다.

첫째, 화가 치밀어 오른 구체적 사건들이 너무 정신없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우다. 화가 났는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자신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할 때라든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와중에, 혹은 점심시간에 시끄러운 쇼핑몰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화살이 날아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는데도, 그 화살이 갑옷의 어느 위치를 어떻게 뚫었는지 정확히 눈치 챌 경황도 여력도 없는 상황이다.

둘째, 분노를 알아차린 경우 더라도 그 화난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말하자면 기분을 상하게 만든 일들이 너무 사소한 일이라면 입 밖에 꺼내어 따져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 대부분은 내가 너무 까다롭거나 별나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나고, 상대방은 어처구니없어한다. 따지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봐도 무안하고 머쓱해지는 그런 경우다.

이를테면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파트너가 눈치 채지 못하거나,바게트를 자를 때 빵 전용 도마를 쓰지 않아서 부스러기를 여기저기 떨어트릴 때, 혹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별일 없었는지 묻지도 않고 곧장 텔레비전 앞으로 갈 때 정말 속상하다. 하지만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건건이 불평하기에는 어쩐지 좀 민망하다.

 

섹스란 일단 화가 나면 건네주기 쉽지 않은 선물이며, 자신이 화가 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유대인들의 금요일 저녁식사 :: 유대인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한다.

 

이런 심리치료사는 새로운 종류의 성직자에 포함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인 용서와 내세를 믿지 않지만, 여전히 현세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본질이 절실하다. 이 시대의 심리치료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성직자다.

 

오늘날 대다수의 직장에서는 직원들 간의 인간관계에 심각한 반목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와 절차 들을 마련해놓 았다. 반면 현대의 연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관계에 모범적인 실천 방법을 응용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감정’이 피어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더 발전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그리고 끊임없이 하는 것만이 서로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지켜줄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 사실은 이미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우리 시대의 남녀관계를 지배하는 통념은,‘이상적인 사람을 찾는 것이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Chap 8. 포르노

금융분석가들은 온라인 포르노 산업의 가치를 연간 100억 달러로 평가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 실질적 규모를 가늠하기에 어림없는 수치이거니와, 인력의 낭비에 대해서는 간과한 평가다. 사이트에 힐끗거리며(혹은 푹 빠져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에 새로운 교제, 자녀양육, 암 치료, 걸작 집필, 다락방 정리 같은 다른 활동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를 따져보면 연간 2억 인시人時로 추산된다.

 

인시(人時) ::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일하였을 때의 일의 양을 나타내는 단위.
[네이버 국어사전] 인시[人時]

 

사드 후작 :: 인류역사상 최고의 변태성욕자로 거론되는 논쟁적 인물로 가학 음란증을 뜻하는 사디즘(sadism)을 유래시킴
정식 이름은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로 2014년 12월 2일자로 사후 200주기를 맞았다.
백작 아들로 태어나 후작 지위까지 얻었던 그는 사후 100년이 넘도록 금기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23세에 결혼한 사드는 32세 때 매춘부 독살 시도(실제론 최음제를 몰래 먹인 것) 및 남색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4년여 도피 끝에 37살에 체포돼 사형은 면했지만 5년 넘게 옥고를 치른 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풀려난다. 잠시 혁명위원으로 활동하다 1793년 반혁명 혐의로 다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또다시 처형을 면했고 이후 1801년 외설 작가로 체포됐다. 그가 남긴 대표작 <소돔의 120일>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을 묘사한 책으로 전체 4부 중 1부만 완성됐고 나머지(2, 3, 4부)는 핵심 줄거리만 적힌 미완성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드 후작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과거에는 오락거리라고는 걸어서 20분 거리에 사는 이웃과 잡담을 나누는 것뿐이었다. 그 시절엔 은은한 촛불 아래에서 체호프의 단편 소설에 빠져들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 모니터를 두 대 연결해, 왼쪽에는 치어리더들의 나체 사진들을 쭉 늘어놓고, 오른쪽에는 MSN 메신저를 띄울 수 있다. 메신저 대화창에서 십대 레즈비언 행세를 하면서(호기심은 있지만 경험이 없는 척하면서) 성적 자각의 세계로 첫발을 떼어보라고 은근히 유혹하는 몸매 좋은 스물 다섯 살의 봉 댄서(실제로는 피부가 축 늘어진 53세의 남자 트럭 운전사)와 실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체호프 같은 고즈넉한 작가들이 우리의 관심과 흥미를 자극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현대 세속사회의 배경을 이루는 지적 체계는 존 로크John Locke나 볼테르Voltaire 같은 17~18세기의 사상가들에 의해 처음 다져졌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바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이상이 있었다. ‘좋은 사회’란 시민들이 무엇이든 읽고 싶은 것을 읽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어떤 신이든 숭배할 수 있도록 간섭받지 않는 사회라는 이상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다고 여겼다. 쉽게 말해, 이웃의 목숨을 빼앗거나 재산을 강탈하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제외하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개인의 자유’에 대한 기본원칙 중에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1859년에 발표한 논문 〈자유론On Liberty〉에서 제기한 주장이 가장 유명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자유란, 남들의 자유를 빼앗거나 남들의 자유 실현을 방해하려 들지 않는 한,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다. 우리의 신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지키는 데 타당한 적임자는 바로 각각의 개인 자신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특별하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할 때면, 우리는 주저 없이 자유를 꼽는다. 자유의 이상에 대한 이런 무의식적 옹호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에 따른다.

첫째는 경계심리의 발동이다. 우리는 어떠한 식으로든 국가가 개인의 삶을 간섭할 경우,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것은 그로부터 얻게 될 잠재적 이득보다 그 자체에 내재한 위험이 훨씬 크다고 여긴다. 쉽게 말해 남의 삶에 간섭하거나 내 삶을 간섭당하는 것은 불행을 초래할 위험이 크므로, 그런 위험을 무릅쓰느니 자신의 구제는 각자 알아서 하도록 맡기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근거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들러붙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히틀러나 스탈린의 망령을 심심찮게 거론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최선책을 안다고 판단할 경우에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우리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두 번째 근거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숙하고 이성적인 동물이므로 지나친 보호가 없어도 자신의 욕구를 무난히 가늠하고 자신의 이익을 보살피면서 혼자 힘으로 아주 잘 지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무엇을 보든 읽든 듣든, 그것에 지나친 영향을 받을 염려가 별로 없으므로 어떤 것에 노출되는지 감시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인간은 책이나 그림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일도 없고, 피 튀기는 장면이 계속되는 잔인한 소설을 읽고 잔인하게 변할 리도 없으며, 고작 영화나 사진 때문에 도덕감각을 잃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적 평정심이 이 모든 것들보다 더 강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인간은 압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지는 않으므로, 자유언론이나 민주주의적 이상과 더불어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요,

 

섹스에는 분명히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외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한 유혹의 힘을 제대로 걱정하고,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종교계뿐이다. 종교는 섹스 자체를 잠재적 위험성을 가진, 경계해야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세속적인 세상은 검열에 대한 저항의식이 투철하고 인류의 성숙함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이슬람교가 여성들에게 히잡과 부르카 착용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비난하지 않는 걸까? 여자들에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조리 가려야 한다고 강요하는 취지는, 남자 신도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져 알라에 집중하지 못할까 봐서 그렇단다.

 

이성적인 성인 남자가 여성의 요염한 무릎이나 팔꿈치를 흘끔 쳐다봤다고 해서 정말로 큰일이 날 만큼 어마어마한 정신적 혼란에 빠지겠는가? 그리고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반라로 해안가를 거니는 도발적인 십대 소녀들을 보고 큰일 날 만큼 흥분 하겠는가?

세속 사회는 비키니나 성적 도발을 거북해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성적 관심과 매력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자들은 요염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온라인상에서나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지만, 그런 후엔금세 별일 없었던 것처럼 하던 일을 계속한다.

 

욕망과 지성 사이에서 냉혹하게도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그런 포르노가 아닌, 새로운 유형의 포르노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말하자면 성적 욕망으로 우리의 고결한 가치관을 손상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지하도록 도와주는 포르노 말이다. 사실 그런 유형의 포르노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분야가 이미 존재하기는 한다. 설마 싶겠지만, 정말 의외로, 기독교 미술 분야가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 미술은 과거 어느 짧은 시기 동안 성적 욕망이 반드시 선에 맞서는 적敵이 될 필요가 없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제대로만 인도한다면 선을 북돋워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성전의 제단 뒤쪽을 장식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나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그림들을 보면, 그림 속의 성모 마리아는 황홀한 배경 속에서 아름다운 의상을 차려입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단순히 고혹적인 수준을 넘어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섹시하기까지 한 경우도 많다. 미술사학자들의 논의나 미술관 카탈로그에서 통상적으로 거론될 만한 주제는 아니지만, 어쨌든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에게는 확실히 사람을 흥분시킬 만한 뭔가가 있다.

의도적으로 이런 효과를 연출했던 당대의 기독교 화가들은, 성욕에 대한 교계의 통상적 경계를 위반하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욕이 어느 특정한 순간에 기독교의 과제인 교화의 촉진을 유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그 누구보다 고결한 인간임을(인자함, 자기희생, 온화함, 선의 화신임을) 설득시킬 수 있다면, 지극히 잠재의식적이고 미묘한 방식을 통해 성모 마리아를 성적으로 꽤 매혹적인 여인으로 묘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 교화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결한 인간 본성의 다른 일면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일깨워주는 맥락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포르노의 이상적인 미래상이다. 이를테면 위트나 친절함, 기발함, 성실한 노동윤리 같은 고결한 인간 본성을 일깨움으로써, 성적 흥분을 통해 행복한 삶을 이루는 섹스 외의 다른 요소들에까지 존경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욕이 어리석음, 잔인함, 집착, 착취와 한통속으로 취급받으며 욕먹어온 수모를 벗어나, 우리 내부의 가장 고결한 가치들의 그룹에 포함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Chap 9. 외도

아무리 초범이어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시체를 그냥 물속에 던지지는 않는다. 부대에 넣고 최대한 많은 돌멩이들을 함께 담은 후에 버린다. 그래야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 지식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마찬가지로 짐은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데이지에게 굳이 이메일을 보내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비즈니스 때문에 밤늦은 시간에는 통화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미리 말해둔다. 길고 긴 밤이 될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살인자의 돌멩이처럼.

 

그 나이가 되어 가끔씩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내 인생에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까?’하는 초조함 때문에 대범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짐도, 젊은 독신 남자였을 때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삶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을 것 같아서 수줍음과 부끄러움이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탈선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오히려 이치에 어긋나고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므로, 이상할 뿐만 아니라 심오한 의미에서 볼 때 ‘잘못된’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외도의 가능성을 전혀 즐길 줄 모른다면, 그것은 심각한 상상력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서 할당받은 애처롭도록 짧은 시간에 대한 심술궂은 태연함이자, 우리 몸이 가진 영광스러운 육욕적 본성에 대한 푸대접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유혹에 굴복할 권리를 부인하다니, 이런 거부는 그 자체로 일종의 배신이 아닐까? 바람을 피우는 것에 단 한 번도 구미가 당겨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그를 과연 믿어도 될까?

 

경우에 따라, 배신한 사람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보다 배신당한 사람이 오히려 먼저 사과할 수도 있다. 현재의 자신에 대해서,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때때로 지루해지는 것에 대해, 진실의 장벽을 높게 쌓은 것에 대해, 배우자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쌀쌀맞은 것에 대해, 그리고 (남녀가 그것을 하는 한) 인간인 것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들은 외도를 저지른 배우자가 무조건 다 잘못했고, 정절을 지킨 배우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너무도 쉽게 단정한다. 하지만 이것은‘잘못’의 의미를 일부분만 이해한 반쪽짜리 판단이다. 확실히 외도는 조간신문 톱 기사감인 것은 맞지만, 배우자를 배신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다른 종류의 배신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외도에 못지않은 충격과 실망을 주는 배신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를테면 배우자와의 대화에 인색하게 구는 것,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 괜히 성질을 부리는 것,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데 노력하지 않는 것 등등.

 

이런 상황에서 진짜 큰 잘못은 도덕주의적 결혼관습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든 욕구에 대해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평생의 해결사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러한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결혼제도의 비상식적인 야심과 고집이 진짜 문제다.

 

결혼에 대한 이 새로운 이상의 탄생과 옹호는, 특정 사회계층, 즉 부르주아 계층에 의해 거의 독단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계층의 자유와 억압의 조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과거 프랑스 서정시인 같은 충분한 여유도 없었다.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3주 내내 사랑하는 사람의 눈썹을 찬미하는 편지만 쓰면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그들과는 달랐던 것이다.사업을 운영하고 창고를 관리해야 했으니까.

그런 데다 부르주아 계층은 귀족 계층의 자유사상가들처럼 사회적인 오만도 부릴 처지가 못되었다. 귀족들은 힘과 지위가 있었으므로 남들의 마음을 찢어놓는 말든, 가족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든 말든, 뻔뻔스럽도록 무관심할 수 있는 배짱이 있었고, 자기들이 벌인 해괴한 짓으로 궁지에 몰리더라도 수습해낼 수단이 있었다. 하지만 부르주아들은 처지가 달랐다.

쉽게 말해, 부르주아는 낭만적인 사랑의 호사를 누릴 시간이 1초도 없을 만큼 혹사당하며 팍팍하게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에로틱하고 감상적인 관계를 마음껏 누릴 만큼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파트너와 법적으로 평생 지속되는 관계를 맺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충족감을 얻으려는 생각은, 감정적 욕구와 현실적 구속 사이에 놓인 그들 특유의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나름대로는 가장 좋은 해결책인 셈이었다.

 

부부 사이가 뜨뜻미지근한 것, 외도, 발기부전 등이 이제는 새롭고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애정이 없거나 서로 무관심한 결혼생활로 들어선다는 것은, 부르주아 계층이 생각하기엔 더없이 끔찍한 저주였기 때문이다. ‘외도를 하지않는다’는 생각이 자유사상가에게 그러했을 만큼.

 

보바리 부인 :: 1857년 간행. 부제는 '지방 풍속'으로 되어 있다. 각고의 집필 5년 만에 완성된 작자의 대표작이며 초기작품이다. 평범한 시골 의사 보바리의 아내 에마는 다정다감하고 몽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홀아비 지주인 로돌프, 공증인사무소 서기인 레옹 등과 정사를 거듭하게 되는데, 남편 몰래 빚이 늘어나 진퇴유곡에 빠지자 마침내 비소를 먹고 자살한다는 이야기이다.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노골적인 묘사로 여주인공의 행동을 서술한 이 소설은 잡지에 연재되는 동안 화제가 되었으며, 그해 풍기문란 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으나, 결국 무죄로 판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플로베르의 이름은 일약 유명해졌으나, 그보다 이 작품의 진가는 엄격한 문체상의 연마와 긴밀한 구성에 있으며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의 첫 걸작으로 꼽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바리부인 [Madame Bovary]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이라는 환상이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능하긴 하지만 아주, 아주 드물어서 우리의 애간장을 녹인다.

 

어쨌든 우리는 이러한 비참한 진실을 냉정하게 마주봐야 한다. 삶이 특유의 잔인한 방법으로, 그리고 언제 어느 때고 자기 멋대로 우리에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기 전에.

 

결혼을 사랑, 섹스, 가족이라는 우리의 모든 희망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으로 보는 것이 순진한 착각이라면, 마찬가지로 외도가 결혼생활의 모든 좌절을 해소해줄 효과적인 해결방법이라는 생각도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는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간다.

 

결혼생활에서 우리가 원하는 세 가지 요소, 즉 사랑, 섹스, 가족은 서로에게 잔인한 영향력과 피해를 입히는 관계다.

 

결혼생활은 침대 시트와 비슷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네 귀퉁이가 반듯하게 펴지지 않는다. 한쪽을 제대로 펴놓으면, 다른 쪽이 더 구겨지거나 흐트러지고 만다. 그러므로 완벽을 추구하면 곤란하다.

 

부부가 자신들의 삶이 결혼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외도의 충동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도 두 사람 모두가 날마다 감사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기적이다.

 

 

 

Part 4. 맺음말

성욕이란 게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살아가는 동안 거의 평생을 성욕 때문에 골치를 썩고 괴로워해야 하니까 말이다. 성욕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그것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혐오감과 죄책감뿐이다.

 

성욕이란 게 없었다면 우리가 할 일은 훨씬 적어질 것이다. 어느누구도 굳이 보석점을 열거나, 레이스를 짜거나, 은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오거나, 열대의 석호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수상호텔을 지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추동력이나 조직이념으로 작용해줄 성욕이 없다면, 우리 경제의 상당 부분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증권거래소의 열광적인 에너지, 본드 가Bond Street 디올 매장의 탈의실(푹신한 패드가 깔려 있고 벽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몰리는 관람객, 스카이라운지 일식 레스토랑의 은대구 요리…. 창문 밖으로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갈 때, 두 사람이 어두운 방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섹스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인류의 지난 과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대 로마와 중국 명나라는 확실히 달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엔 그 이질성이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똑같이 붉은 뺨과 미끈한 발목에 끌렸을 테니까. 멕시코의 목테수마Moctezuma 1세의 통치기나 이집트의 프톨레미Ptolemy 2세의 통치기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든, 누군가와 한 몸이 되어 헐떡이며 밀착될 때의 그 느낌은 똑같았을 것이다.

 

성욕이란 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너무 안전해서 탈이었을 것이다. 가령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거절과 치욕에 대해 절절히 깨우쳐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고상하게 나이 들며 평온한 삶에 길들여져서 세상사를 훤히 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숫자와 단어에 매몰된 메마른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성욕은 힘, 지위, 돈, 지력에 따른 통상적 위계를 무너뜨리고 혼란을 야기한다. 반드시 필요한 혼란이 생겨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농장 일꾼에게 여자 교수가 무릎을 꿇고 채찍질을 해달라고 사정하게 만든다. 

또한 굴지의 기업 CEO가 어느 여자 인턴사원 때문에 이성을 잃기도 한다. 그 CEO는 수백만 달러를 가졌고 여자는 지하 단칸방에 살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안겨줄 쾌감뿐일 테니까.

 

지독한 성적 욕망을 겨냥해 경멸적인(하지만 온당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그 욕망을 칭송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우리가 실체적인 인간으로서 호르몬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을 며칠 씩이나 잊고 지내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성적 욕망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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