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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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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의 길
『축적의 길』은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핵심이 시행착오의 축적을 통한 고도의 경험지식 확보에 있다는 진단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축적의 시간》후속 작으로, ‘어떻게 축적할 것인가’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는 5가지 축적의 전략을 소개하며, ‘착각에서 축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아울러 선진 기술을 모방하여 추격하는 단계에서 체화된 사고방식과 관행이, 시행착오의 축적을 통해 세상에 없던 제품과 서비스를 정의하고 만들어내는 개념설계 역량의 확보에 어떻게 걸림돌이 되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지금 한국의 산업계는 전례 없는 미시감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기존에 하던 대로, 기민하게 선진국과 선진기업, 선진시장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벤치마킹하고 있다. 저성장 시대니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더 열심히 대책을 마련하고, 성장 정체 현상의 돌파를 외치고 있는데, 두 다리는 점점 더 흐르는 모래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처럼 경계를 허무는 융합적 기술혁신이 달려들고 있다. 이제까지 편안하게 느껴졌던 관행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새로운 관행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축적의 길을 나서는 우리의 첫걸음은 우리를 눈부신 성공으로 이끈 바로 그 관행과 결별하는 쉽지 않은 일에서 시작된다.
저자
이정동
출판
지식노마드
출판일
2017.05.03

 

머리말

타이거 마스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특이한 마술사가 있었다. 밸 발렌티노Val Valentino가 본명인데, 90년대 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장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마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마술사가 수년간 애써 만든 환상적인 마술의 비밀을 대중에게 폭로하는 것이다.

 

당연히 동료 마술사들로부터는 온갖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환상적인 마술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논리의 연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기술혁신’이라는 키워드에 몰두하는 연구자로서 나는 늘 이 타이거 마스크처럼 되는 것이 소망이다. 아이폰과 앱스토어라는 개념이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게 뭐지?’라는 느낌으로 어안이 벙벙한 채 놀라워 했고, 스티브 잡스는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결코 넘볼 수 없는 다른 차원에 사는 창조적 인물로 간주되었다. 마치 상상도 못했던 참신하고 놀라운 마술을 눈앞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기술혁신 연구자인 나는 바로 이즈음에 홀연히 나타나서, 그 혁신이 천상계의 주술 덕분이 아니라 사실은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과정의 필연적 결과라는 점을 일러주고 싶다. 혁신의 비밀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아하, 그렇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티브 잡스와 같은 혁신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돕는 것이 소망이다.

 

선진국의 기술혁신 이론이나 지겹게 듣던 글로벌 혁신기업의 사례가 우리 기업들에게는 잘 적용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한국의 산업과 기술은 지난 반세기 동안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왔다. 바로 그 유례없는 속도 때문에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습관을 체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일 쇼크 :: 원유 값이 급등하여 전 세계 각국에 경제적 타격을 준 석유파동을 말하며,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2차례의 석유파동은 각각 1973과 1978년에 일어났다.
제1차 석유파동은 1973년 10월 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된 사건이다.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에서 원유 고시가격을 17% 인상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서,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하여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1973년 초 배럴당 2달러 59센트였던 중동산 기준원유 값은 1년 만에 11달러 65센트로 무려 4배 가까이 올랐다. 제1차 석유파동은 석유가 싼값으로, 필요한 양이 공급된다고 안이하게 믿어 왔던 석유수입국들에게 석유공황이라고 할 만한 사태를 초래하였다. 각국 정부는 여러 업종에 대한 전력ㆍ석유의 공급 삭감, 민간인에 대한 에너지 절감요청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세계경제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져 1975년에는 서방 선진국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되었고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으며 국제수지도 각국은 대폭적인 적자를 기록하였다. 이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OPEC는 국제석유자본(Oil Major)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석유파동은 1978년 일단 진정되었으나 1978년 말 이란의 국내 혼란과 1979년 초의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다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세계 석유 공급의 15% 수준을 점하고 있던 이란은 석유의 전면 수출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여기에 석유업자들의 매점매석과 투기성 시장 조작까지 횡행하면서 국제석유시장은 급격히 혼란에 빠져들었다. 1980년 8월 이란ㆍ이라크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는 기준원유가도 30달러를 돌파하였으며 1981년 10월 34달러 선에서 단일화되었다. 1978년의 12달러 70센트에서 무려 168% 오른 것이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는 제1차 석유파동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 하락과 소비자 물가의 급상승 등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 때에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 제2차 석유파동 때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경제 체질 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화학공업 중심의 확대정책에 중점을 둔 것에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이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일쇼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더 걱정스러운 것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의 모습을 가늠할 혁신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비록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어디에서든 새로운 도전적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계획하고, 또 시도하고 있다면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 도전의 결과가 반드시 좋다고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는 상태보다는 절반의 가능성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나,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을 목표로 도전해보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는 이야기는 오늘의 청년들에게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내리막이란 한번 겪어볼 만한 인생 경험이 아니라 아예 다시 회복할 수 없는 파국으로 가는 길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실제로 재도전과 재재도전을 찾아보기가 아주 어려운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 실패 없는 곳을 찾아가는 것은 오늘날 청년들의 품성이 도전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획기적인 신상품 개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담대한 도전 스토리는 한국말로 번역된 경영전략서에 잔뜩 소개되어 있지만, 모두 잘 나가는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이야기, 즉 바다 건너 남의 동네 이야기일 뿐이다. 도전의식 대신에 내 손 안에 현금을 쥐고 어떻게든 소나기를 피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가득하다. 오늘 혁신에 도전하지 않는 기업들의 분위기에서 내일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탄생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래저래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 더 걱정이다.

 

다소 어둡게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결국 밝은 해법으로 끝내기 위한 복선이다.

 

우리 산업이 시행착오 경험을 꾸준히 쌓아나가기 위한 ‘축적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전형적인 산업기술 분야가 아닌 법조, 언론, 교육, 문화 등 다른 분야에서도 축적이 부재하다는 점에 대해 공감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산업과 기술이 사회와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한국사회가 가진 관행이 한국산업의 현재 위기에 철저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한국산업의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도 산업계 내부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변화를 함께 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

 

 

 

PART 1. 대전환: 착각에서 축적으로

1장. 고도 상승을 멈춘 로켓

ο 중간소득함정을 돌파한 대한민국

 

‘중간소득함정(Middle Income Trap)’의 핵심적인 내용은,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 국가의 경제가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 성공적으로 경제개발을 시작하더라도 ‘중간소득’ 수준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성장이 서서히 멈추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중간소득 수준이 얼마인가는 연구자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일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7,500달러에서 15,000달러 사이 정도로 이야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2년 발간된 세계은행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60년대 시점에서 중간소득 수준에 들어간 101개 국가 가운데 대부분의 국가가 2008년의 시점, 즉 48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중간소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가장 널리 언급되는 원인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소위 ‘후발자의 이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경제개발을 처음 시작한 후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점이 있다. 우선 농업 등 생산성이 낮은 전통적인 분야에 생산가능인력이 많이 몰려 있는데, 공장이 들어서고 제조업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하면 이들이 노동시장에 낮은 임금으로 대량 공급된다. 미취업 상태인 여성인력이 산업인력으로 대규모 공급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선진국에서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검증된 기술을 중고장비의 형태로 싼값에 도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비용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인력이나 자본, 기술의 측면에서 경제개발 초기에 누리게 되는 이점을 후발자의 이득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쓰이지 않던 자원을 활용하게 되고, 선진국의 기술에 무임승차하면서 얻는 공짜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비용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후발자의 공짜 이득을 무한정 누릴 수는 없다. 농촌의 유휴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면 임금이 오르기 시작한다. 선진국도 무작정 기술을 내어놓지 않게 되면서 기술적으로도 한계에 직면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는, 더 최근에 출발한 후발 개발도상국이 비슷한 방식이지만 더 값싼 노동력과 더 최신의 장비로 무장하고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수출시장에서의 상대적인 경쟁력이 점차 약화되고, 그 결과 경제성장률도 서서히 낮아진다. 그렇게 해서 중간소득 수준에서 로켓의 고도 상승이 서서히 멈추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개발경제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중간소득 함정’ 이야기다.

 

중국은 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연평균 성장률 10% 수준에서 줄기차게 성장을 거듭하여 2015년 일인당 국민소득 10,057달러의 중간소득국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 그래프에는 중간소득함정을 돌파한 예외적인 국가, 즉 1960년에 중간소득 수준에 있었으나 48년 후에 고소득 국가로 올라선 성공적인 국가들이 한국을 포함해 13개인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모두 그래프의 가운데 위 박스에 모여 있다. 이들 나라의 이름은 모리셔스, 적도기니, 홍콩, 싱가포르,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푸에르토리코, 대만, 이스라엘, 일본, 한국이다.

 

모리셔스Mauritius는 아프리카 동부 인도양의 남서쪽에 있는 섬나라로 주요 조세피난처 중의 하나이며, 관광산업이 주 소득원이다. 적도기니Equatorial Guinea는 서울시의 송파구 인구보다 조금 많은 80만명 규모의 인구를 가진 아프리카의 작은 국가인데, 1996년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면서 갑자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3위의 산유국이 되어서 잘 살게 된 경우다. 당연히 이 두 국가는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홍콩이나 싱가포르는 어떨까? 물리적으로 작은 도시국가들이고, 제조업이 있다고는 하지만, 항구도시로서의 특성상 중계무역과 물류가 강하다. 역시 벤치마킹 대상이라 하기에는 적용할 만한 교훈이 크지 않다.

13개 예외 국가 가운데는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유럽 4개 국가가 포함되어 있다. 이 4개국은 일단 유럽연합으로 묶인 거대 경제권역에 속해 있고, 거기에서 대체로 관광이나 서비스업 영역을 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유럽 전체가 쌓은 경쟁력에 숟가락을 얹어서 고소득 국가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들 네 국가의 머리글자를 따서 PIGS, 즉 유럽의 돼지들이라고 조롱 섞인 표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하나같이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재정적자가 심화되면서 유럽의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역시 벤치마킹 국가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푸에르토리코는? 이 나라는 아예 이름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일 정도로 미국경제와 묶여 있어 경제적인 독립국가로서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기에 적절하지 않다. 이스라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기존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국제적인 유대인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면서 단시간 내에 고소득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다른 나라가 배워서 써먹을 수 있는 복제 가능한 교훈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이들 10개 나라를 제외하면 한국, 일본, 대만이 남는다. 일본에 대해서 산업기술의 관점으로만 한정해서 보면,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기술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가, 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이후에 다시 고소득 국가의 지위에 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경제발전을 시작하여 고소득 국가에 이른 나라로서는 적절한 사례라 할 수 없다. 대만은 어떨까? 대만은 분명 좋은 벤치마킹 사례인데 다만, 화교망과 중국 본토 경제권의 힘을 연계하여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전략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따져보면, 중간소득함정을 돌파한 예외적인 국가로 세계은행이 손꼽은 13개 국가 중에서, 정말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출발해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하게 고소득 국가의 수준에 올라선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벤치마킹 대상 국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중간소득함정에 관한 많은 보고서들의 결론은 예외 없이 한국을 좋은 학습 대상으로 꼽는다. 한국이 어떻게 중간소득함정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안다면,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훌륭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한때 유럽 수준의 고소득 선진국으로 성장할 것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은 60년대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한국의 신임 고위공무원들이 해외연수를 받으러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당시 우리가 벤치마킹하던 나라였다.

 

세계은행의 일인당 국민소득 통계에 의하면 아르헨티나는 1960년 당시 한국보다 3.4배 잘 사는 국가였으나 2014년 말 기준으로 보면 거꾸로 한국이 3.2배 더 잘 산다. 필리핀은 우리와 비슷했지만, 지금은 한국이 14.8배 더 소득이 높다. 한때 아시아의 4마리 용 가운데 하나로 칭송받던 말레이시아에 비해서도 지금은 한국이 3.3배 더 잘 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 출발한 85개 신생독립국 가운데 한국과 같은 놀라운 성장을 기록한 국가는 단연코 찾아볼 수 없다.

한국산업의 발전은 무엇보다 천연자원과 같은 자연적 혜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룩한 것이기에 더욱 빛난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국가들과 달리 역사적으로 근대 과학혁명이나 산업혁명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지식을 흡수하면서 이룩한 성과이기 때문에 더 독특하다. 식민지와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모든 산업기반이 완전히 파괴되어 글자 그대로 부스러진 흙덩어리만 손에 쥐고 시작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산업발전의 결과를 놓고 보면, 농업기반이었던 상태에서 경공업, 중화학 공업, 그리고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 이르기까지 빠른 속도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바꾸어 왔는데, 이 또한 다른 나라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세계은행의 자료에 의하면 1960년의 신생아 일천명당 영아사망률은 80.2명이었지만, 2015년에는 2.9명으로 급격히 줄었다. 평균기대수명 역시 1960년의 약 53세에서 2014년 약 82세로 크게 늘었다.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한국의 눈부신 성장은 명백한 사실이고, 충분히 자랑스러운 것이다.

 

ο 식어가는 성장엔진

한국경제가 일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돌파한 시점이 2006년인데, 10년이 넘도록 여전히 2만달러 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성장 추세가 계속되면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데자뷔Deja vu(기시감)가 아닌가 걱정하는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온 지 오래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기업들의 수익성도 지난 30년 동안 경기 사이클에 따라 약간의 등락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60년대의 10%대에서 2010년 이후 5% 이하로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고, 최근 들어서는 수익률 하락 추세가 경쟁국가들 가운데 가장 빠른 실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성과의 하락이 최근 수년 안에 갑작스럽게 나빠진 것이 아니라 지난 20-30년간 조금씩 나빠져 온 추세적 하락이라는 데 있다.

 

불행하게도 지난 20년 동안 한국산업의 주력 수출상품 순위에서 윗자리는 늘 선박, 자동차,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석유화학제품이 차지한 채 변화가 없었다. 기업 순위에서도 지난 20년간 거의 같은 기업들이 순위만 조금씩 바꾸어가며 여전하게 자리하고 있다.

경기가 늘 좋다가 최근 들어 갑자기 나빠졌다면 단기적으로 발생한 문제 때문일 것이므로, 그 원인을 찾아 급히 고치면 된다. 그러나 수십년간 추세적으로 나빠져 온 것이라면, 접근방법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우선 현재의 위기상황을 단기적으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 최소 20년간 지속되어온 근본적인 관행과 루틴의 문제에 대해 천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몸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갑작스레 독감에 걸리거나 느닷없는 교통사고를 당하면 그 원인을 찾기가 쉽고, 치료하기도 쉽다. 그러나 좋지 못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하루 이틀 사이에는 문제가 없는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조금씩 건강이 나빠지고, 어느 순간에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만다. 이런 습관의 문제는 생활의 일부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져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부정적인 영향을 누적하게 된다.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느닷없이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긴 듯 보인다.

 

현재의 위기는 짧게는 지난 20년간, 길게는 지난 50년 이상 우리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모종의 관행에서 내생적으로 배태된 것이다. 너무 오래되고, 익숙해져서 그것이 우리 산업계의 고유한 문제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다. 이제 단기적인 처방을 넘어서 그토록 익숙해져버린 잘못된 습관이 무엇인지, 그것으로부터 야기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정면으로 마주하여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는 이른바 뉴노멀 시대가 본격화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다. 세계은행의 경제성장률 DB에 의하면, OECD 국가들의 경우, 1960년대 평균 성장률이 5.61%였던 것에 비해, 1990년대는 2.59%, 2010년대의 평균 성장률은 1.84%로 하락하고 있다. EU 회원국가들의 경우에도, 1960년대 평균 성장률이 5.04%였던 것에 비해, 1990년대는 2.16%, 그리고 2010년대는 1.23%로 하락하고 있다. 특히 경제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장벽은 날로 높아지고, 신흥시장의 성장세가 둔화하면서 대외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산업에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4차 산업혁명도 문제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은 우리 산업이 채 대비하기도 전에 불쑥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아직 3차 산업혁명도 채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빅데이터, 플랫폼, 공유, 연결, 경계의 소멸 등 낯선 단어들을 익히는 데만도 시간이 바쁠 지경이다.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기술혁신의 물결은, 장기적인 문제를 풀기에 고심해야 할 한국산업계의 어깨에 무게를 더할 것이다.

우리 내부의 문제도 작지 않다. 우선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른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현재의 출산율과 고령화 속도를 감안한다면, 그 부정적인 효과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확대될 전망이다. 단적으로 2017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가 줄기 시작하고, 2030년에는 경제활동 가능인구(생산가능인구) 3명이 1명의 고령인구를 부양하게 될 것이다. 늘어나는 복지 부담으로 내일의 경제기반을 뒷받침할 투자여력이 줄고, 그에 따라 경제의 활력은 가속적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도전의식, 기업가정신의 쇠퇴이다. 2016년도 9급 공무원시험 응시자가 22만 2천650명에, 경쟁률은 54대 1이었다. 청년 취업준비생의 35%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기업들은 창의적인 제품과 서비스에 승부를 걸기보다 각종 제도적 장벽으로 보호받는 독과점적 지대 추구Rent-Seeking 비즈니스에 사운을 걸고 있다. 모두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움츠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내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는 터널의 입구에 막 들어섰다.

 

1단 엔진을 분리했어야 할 고도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연료를 거의 다 쓴 1단 엔진을 붙들고 여전히 가동하고 있는 상태다. 2단 엔진을 점화하려는 시도가 몇 번 이루어졌으나 아직은 완전히 불이 붙지 않은 상태다. ‘1단 엔진 분리 실패와 2단 엔진 점화 실패’. 이것이 우리 산업의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는 비유다.

 

• 첫째, ‘1단 엔진이 무엇이고, 왜 잘 작동하였는가’라는 질문은 고도 성장기의 성공적인 루틴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해당한다.

• 둘째, ‘2단 엔진이 무엇이고 왜 점화가 잘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기술 선진국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 셋째, 가장 중요하게는 ‘지금껏 참으로 유용하였지만, 이제 그 쓸모가 다한 1단 엔진을 왜 버리지 못하는지’를 묻는 것은 개발도상국에서 기술 선진국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다.

 

 

2장. 한국산업의 위기: 개념설계 역량이 없다

ο 개념설계: 백지 위에 밑그림 그리기

한국산업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다’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

 

초고층빌딩의 ‘건축설계’는 미국의 초고층 전문 건축설계업체인 KPF사가 담당하였고, 완공시 75만톤에 달하는 건물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토목설계’는 영국의 ARUP사가 주도했다. ‘구조설계’ 부분은 미국의 LERA사가 담당하였고, 초속 80m의 강풍을 견딜 수 있는 ‘풍동설계’의 컨설팅 및 검증은 캐나다의 RWDI사가 맡았다. 이 기사에서 제시된 건축설계, 토목설계, 구조설계, 풍동설계 등은 단어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초고층빌딩 건설에 필요한 상세 분야의 설계, 즉 분야별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점을 알아차리는 것이 핵심이다.

초고층빌딩 하나를 짓는 과정을 정말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백지 위에 건물의 밑그림을 그리고(설계), 필요한 자재를 산 다음(구매), 설계도대로 터를 파고, 사온 자재를 이용하여 실제로 짓는 것(시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설계 - 구매 - 시공의 이 모든 절차는 최초의 그림 한 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절차를 한번 더 단순화해서 두 단계로 표현하면, 설계하는 ‘밑그림 그리기’와 그 밑그림대로 구매, 시공하는 ‘실행하기’로 나눌 수 있다.

건물을 짓는 것뿐만이 아니다.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포함한 모든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밑그림을 그리는 부분과 그려진 그림에 따라 실행하는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제품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앞 단계의 밑그림 그리는 부분을 ‘개념설계Concept Design’라고 하고, 밑그림대로 시행한다는 의미에서 뒤의 단계를 ‘실행Implementation’이라고 한다. 모든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개념설계와 실행으로 이루어진다.

 

개념설계는 미국, 일본, 유럽 등 기술 선진국의 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 세계 최고 수준의 빌딩을 지었다고 자랑하는 기사가 결과적으로 중요한 개념설계는 모두 글로벌 선진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홍보하는 기사가 된 셈이다. 이 이야기를 뒤집어서 해석하면, 우리 기업들은 단지 선진기업들이 그려준 그림을 충실히 실행하는 단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고층빌딩 분야로 한정해서 보면, 한국산업의 기술 수준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고, 실행 역량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기업을 두 종류로 나누라고 하면 개념설계를 하는 회사와 개념설계를 받아와서 실행하는 회사로 나눌 수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개념설계를 하는 국가와 개념설계를 도입해서 실행하는 국가로 나눌 수 있다.

 

(주)홍길동사는 1조원 규모의 플랜트 공사를 수주해서 축제 분위기다. 먼저 선진국의 설계회사에 1,000억원을 주고 검증된 개념설계를 부탁해서 받아온다. 이제 남은 9,000억원으로 싸고 좋은 자재를 구매하고, 빠르고 실수없이 시공을 해서 이윤을 남길 각오를 단단히 한다. 그런데 자재 중에 가장 핵심적이고 비싼 것을 구매하려고 설계도를 펼쳐보니 글로벌 선진기업에서만 공급할 수 있는 자재를 쓰도록 개념설계가 작성되어 있어 난감해졌다. 분명히 더 싼 자재를 대신해서 써도 될 법한데, 쓸 수가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개념설계에서 지정한 대로 구매해서 문제가 생기면 개념설계를 한 회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내 마음대로 다른 자재로 대체해서 썼다가 문제가 생기면 ㈜홍길동사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000억원이면 충분할 것 같은 핵심자재인 줄 뻔히 아는데도 불구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6,000억원에 글로벌 선진기업의 자재를 살 수밖에 없다. 1조원 공사를 땄다고 좋아했는데, 1,000억원을 (글로벌 선진 설계기업에게) 설계비로 떼어주고, 6,000억원을 (글로벌 선진 부품기업에게) 핵심자재 구매비로 지출하고 나니 결국 3,000억원만 남았다. 이 예산으로 나머지 일반자재를 싸게 구매하고, 사람들을 동원해 땀 흘려 가며 시공해야 한다. 속이 쓰리다.

 

백지 위에 밑그림을 그리는 역량이 충분하지 못한 탓에 핵심자재와 공법을 내 판단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글로벌 선진기업이 그려준 개념설계도에 써진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문이 박한 시공 부분만 남게 된다.

 

ο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조건: 개념설계 역량

모든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개념설계와 실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념설계 없는 제품은 존재할 수 없다. 운동화에서 인공위성까지 제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념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개념설계를 하는 기업과 실행을 하는 기업이 같은 기업일 수도 있고, 다른 기업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이라는 생산모델은 개념설계와 실행을 완전히 분리한 대표적인 사례다. 애플이 아이폰을 ‘개념설계’ 하면, 이것을 받아 대만의 폭스콘Foxconn이라는 기업이 ‘실행’을 하는 것이 대표적인 OEM 방식의 사례이다. 나이키가 운동화를 개념설계 하고 인도네시아의 기업이 실행을 하는 것이나, 생산공장이 없는 퀄컴Qualcomm이라는 팹리스Fabless(반도체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설계 및 기술 개발만 하는 회사) 반도체회사가 차세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칩셋을 ‘개념설계’ 하면, 대만의 파운드리Foundry(반도체 제조과정만 전담하는 회사) 반도체기업인 TSMC가 설계도대로 ‘실행’하는 것도 모두 같은 예다. 당연히 개념설계와 실행을 같이 하는 미국의 인텔이나 우리나라의 삼성전자 같은 회사도 있다. 어쨌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제품은 누군가 개념설계를 하고, 누군가는 실행을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OEM :: 우리나라가 해외의 국제적 브랜드를 가진 대기업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생산 방식으로, ‘주문자위탁생산’ 또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이라 한다. 유통망을 구축하고 있는 주문업체에서 생산성을 가진 제조업체에 자사에서 요구하는 상품을 제조하도록 위탁하여 완성된 상품을 주문자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방식을 취한다.   
즉, 생산설비만 있는 기업이 주로 다른 나라 기업으로부터 주문받은 상품을 만들어 납품할 때 이용한다. 상표권, 영업권은 주문업체가 갖고 납품업체는 생산만 한다. 외국의 경우 대형소매점이 자사 상표(PB)로 TV나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또 우리나라 수출상품의 경우도 국내업체가 생산했으면서도 외국 유명상표를 달고 외국에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높은 인건비로 인해 가격경쟁력을 상실한 경우가 많아, 인건비가 비교적 저렴한 동남아시아나 중국 등지에 공장을 세우거나 현지의 제조공장에서 OEM 방식을 이용하여 제품을 생산하여 제3국으로 수출한다. 이는 생산은 다른 업체에서 했으나 브랜드는 자사의 것이므로 브랜드를 신뢰하고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가능하다. OEM 판매 방식은 이미 경쟁기업에서 기존 고객층을 확보한 시장에서도 매출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생산자의 경우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할 수 있다. 또 주문자는 제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고, 생산원가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OEM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TV의 예능 프로그램도 먼저 개념설계를 하고, 그에 맞추어 실행을 해야 한다. 이때 예능에서의 개념설계는 포맷이라고도 한다. 최근 한국의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 포맷이 중국과 미국으로 수출되어, 중국판 OOO, 미국판 OOO로 만들어진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서비스도 개념설계가 선행되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비즈니스 모델이나 조직구조 등까지도 포함해서 사람이 만든 모든 것에는 항상 개념설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완전한 종업원 지주제를 구현하고, 돌아가면서 사장을 맡는 중국의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 화웨이Huawei의 독특한 조직구조도 따지고 보면 기업 조직 및 운영방식에서 새로운 개념설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웨이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일하게 하기 위해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해서, 8만400명 직원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고, 최대주주인 런 회장의 지분은 1.4%에 불과하다. 독특한 멘토링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선배가 3개월간 모든 면에서 멘토 역할을 하면서 신입사원이 실적을 낸 만큼 인센티브를 나눠가지는 구조다. 또한 화웨이는 리더 한명의 잘못이나 실수가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제한하기 위해서 3명의 부회장이 6개월마다 돌아가면서 CEO를 맡는 순환 CEO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런 회장은 이들 CEO의 멘토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개념설계를 ‘존재하지 않던 그 무언가를 그려낸다’는 것으로 일반화시켜 생각한다면, 설계회사만 개념설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마케팅 등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서 유통하는 모든 단계에서 개념설계를 하는 회사를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도요타 자동차는 1970년대 저스트-인-타임Just-In-Time이라는 생산방식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제조공정에서 20세기초 만들어진 포드시스템을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설계로 볼 수 있다. 1991년 창립된 IDEO라는 미국의 디자인 회사는 물건의 외양을 만들어 준다는 전통적인 디자인의 개념을 뛰어넘어 조직을 설계해주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주는 등 사실상 모든 것을 백지 위에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바탕에는 디자인 자체에 대한 설계, 즉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있는데, 이것 역시 명백하게 디자인 분야의 새로운 개념설계라고 할 수 있다.

 

JIT :: JIT(Just-in-time)는 적기공급생산 또는 적시생산방식으로 불린다. 이는 재고를 쌓아 두지 않고서도 필요한 때 적기에 제품을 공급하는 생산방식이다. 즉, 팔릴 물건을 팔릴 때에 팔릴 만큼만 생산하여 파는 방식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체제구축 요구에 부응, 적은 비용아래 품질을 유지하여 적시에 제품을 인도하기 위한 생산방식이다. JIT는 자동화와 함께 도요타 생산방식의 축을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JIT [Just-in-time] (매일경제, 매경닷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술혁신도 따지고 보면 모두 새로운 개념설계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초고층빌딩의 설계, 새로운 휴대폰 기능의 고안, 못 보던 비즈니스 모델의 제안이 모두 새로운 개념설계다. 결국 혁신적인 기업은 개념설계를 제시하는 기업이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가장 큰 특징은 제품과 서비스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데 있다. 2007년 6월 애플은 아이폰이라는 새로운 제품과 함께 전화, 인터넷, 컴퓨터를 하나의 기기로 통합하고, 앱스토어라는 장터를 만들어 이용자들이 생산자로서 참여하는 거대한 어플리케이션 생태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동통신 분야에서 그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개념설계를 제시한 셈이다. 아이폰이라는 개념설계와 함께 애플은 통신 분야의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되었다. 최근 중국의 드론회사인 DJI도 드론을 이용한 어플리케이션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터라는 개념을 확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DJI는 드론을 하드웨어로서 정의하고 비즈니스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플리케이션 장터와 함께 돌아가는 앱스토어 중심의 생태계라는 개념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드론업계의 새로운 개념설계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DJI가 드론 분야의 글로벌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은 새로운 개념설계를 제시하면서 사실상 비즈니스 혹은 산업을 새롭게 정의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새로운 산업을 스스로 창출하고, 스스로 독점사업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념설계를 제시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매번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정의하는 제품의 개념을 뒤따라가며 열심히 해석하고,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내야 한다. 그러다가 또 개념설계가 바뀌면 다시 새로운 문제에 적응하느라 허둥대는, 바쁘기 그지없는 일상을 반복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시장 독점을 누리는 이유는 바로 개념설계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홍길동화학’에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유형의 플랜트를 지을 계획을 세웠고, 늘 그랬듯이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글로벌 챔피언 설계회사로부터 라이센스 형태로 설계도를 받아왔다. 개념설계에 충실하게 설치해서 잘 운영하던 ‘(주)홍길동화학’에서 어느날 효율을 개선할 수 있는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발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설계 자체를 라이센스로 받아왔기 때문에 플랜트를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 개선 아이디어를 허락 없이 적용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설계회사가 아니라 ‘(주)홍길동화학’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선 아이디어를 원래의 설계회사에 보내서 허락을 구한다. 설계회사는 그 아이디어를 시험하고, 평가해보면서 적절한지 여부를 꼼꼼히 분석한 다음에야 허락한다. ‘(주)홍길동화학’은 아이디어대로 플랜트 설계를 조금 바꾸어 적용하였고, 10%의 효율 개선 효과를 보았다.’

이 이야기는 개념설계를 받아 실행한 기업의 실력이 좋아져서 스스로 개선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제로 개선의 효과를 누린 훈훈한 이야기로서 그리 놀라울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뭔가 묘한 포인트, 즉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힘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비밀이 들어 있다. ‘(주)홍길동화학’이 찾아낸 개선 아이디어가 결과적으로 누구 손에 남아 있는가? 게다가 이 글로벌 설계회사가 유사한 설계에 관한 라이선스를 전 세계 여러 기업에 주었다면? ‘(주)홍길동화학’의 경우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전 세계 여러 기업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개선 아이디어가 설계회사의 엔지니어 책상 위에 올라와서 검토를 기다리고 있다면?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개념설계 역량을 쌓기는 어렵지만, 한번 그 역량을 얻고 나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념설계 역량을 가진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따라갈 수 없게 된다.

비즈니스를 정의할 수 있는 개념설계 역량은 결국 높은 수익으로 귀결된다. 2016년 애플이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물량 기준으로 14.5%의 점유율을 기록했지만, 영업이익은 전체의 79.2%를 차지한 것은 바로 개념설계를 제시하여 시장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율주행자동차는 차가 아니다. 바퀴 달린 컴퓨터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사고를 분석한 후 서로 연결된 모든 자동차의 소프트웨어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한다. 자동차와 컴퓨터, 인터넷이 결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이동수단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 사례와 같이 별도로 존재하던 개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혁신적 개념설계의 좋은 예다. 이런 개념설계를 ‘조합형 개념설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곳저곳에 있는 것을 모아 백지 위에 밑그림을 그린다.

다른 방식의 개념설계도 있다. 반도체회사가 이전과 다른 세대의 칩을 발표하고, 철강회사가 강도가 10배 높은 합금강을 만든다. 소프트웨어회사가 1,000배 더 빠른 속도의 연산을 가능케 하는 알고리즘을 발표한다. 이것저것 조합해서 새로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선하고 축적해서 결과적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수준의 그림을 그려낸 예들이다. 이전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던 기업들의 눈으로 보면, 새롭게 발표된 업그레이드 된 제품은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밑그림, 새로운 개념설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섞어서 만든 그림이 아니라 쌓아서 만든 그림이라는 뜻에서 ‘누적형 개념설계’라고 할 수 있다.

조합형 개념설계가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비즈니스 모델을 꿈꾼다면, 누적형 개념설계는 남들이 쫓아오지 못할 경지의 높은 품질 수준이 목표다. 놀라운 조합형 개념설계는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누적형 개념설계는 독일과 일본의 히든챔피언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율주행자동차는 운송수단과 통신, 그리고 컴퓨터를 결합해서 만든 새로운 조합형 개념설계로서 미국, 특히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상상의 개념설계가 물리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라이더LIDAR, 초음파 센서, 주행거리 측정센서, 중앙전자제어장치ECU, 영상 카메라 등의 각종 부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컨설팅 업계에서는 이러한 자율주행자동차 핵심 부품의 시장 규모가 2025년에는 420억달러, 그리고 2035년 77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바로 이 분야에서 누적형 개념계로 유명한 일본의 소재, 화학 기업들이 강력한 시장지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누적형 챔피언 기업’들이 만들어낸 세계 최고 수준의 재료들을 ‘조합형 챔피언 기업’들이 독창적인 방식으로 섞고 비벼서 새로운 제품과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새로운 제품이 자리잡게 되면, 그 자체로 수준이 다시 누적적으로 높아지면서, 또 다른 새로운 조합의 재료로 다시 사용된다. 이와 같이 기술 선진국의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개념설계들을 주고받으면서, 더 수준 높고 새로운 개념설계들을 만들어간다. 쉽게 말해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면, 독일과 일본의 기업들이 그것을 실현시킬 세계 최고 수준의 재료를 제공하는 구도다. 이 창조의 리그에 끼지 못한 후발국 기업들은 끊임없이 이들이 내놓는 개념설계를 이해하고, 받아서 실행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열심히 배웠다 싶으면 더 높은 수준의 상상도 못했던 조합의 개념설계가 불쑥 튀어나와 의욕을 꺾어놓는다.

 

ο 한국산업의 경로 이탈

우리 기업들은 그려준 그림, 즉 개념설계를 받아 실행하는 데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이 실행 역량은 개발도상국은 물론, 선진국까지 망라해서 전 세계 어느 국가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다. 그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고층빌딩 여러 개를 우리 손으로 지었다고 자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밑그림을 받아 와서 실행하는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초고층빌딩의 사례가 전해주는 뿌듯하지만 불편한 메시지가 이것이다.

개념설계는 설계도, 컨설팅, 자문 등의 지식재산권 형태로 전달되고, 받아올 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 OECD 통계를 이용하여 국가의 경제발전 수준과 지식재산 무역수지간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가로축은 일인당 국민소득(달러)을 나타내고, 세로축은 지식재산의 무역수지로서 플러스이면 지식재산의 수출이 수입보다 많기 때문에 지식재산의 순수출국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마이너스이면 반대로 지식재산의 순수입국이라는 의미다.

그림을 잘 살펴보면, 맨 왼쪽편의 저개발국 상태에서는 설계도와 같은 지식재산을 사올 것도 팔 것도 없어, 지식재산 무역수지가 0 수준에 있다. 혹은 지식재산권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어 값을 치르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산업이 서서히 성장을 시작하면 지식재산을 도입해야 하는데, 그 결과 지식재산 무역수지가 아래쪽(적자)을 향하기 시작한다. 산업이 더 발전하여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지식재산 도입에 대한 의존도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하고, 오른쪽으로 더 이동하면서, 즉 선진국 수준에 이르게 되면서 지식재산을 수출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경제성장과 지식재산 무역수지의 관계를 평균적인 추세선으로 그리면 그림에서처럼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그래프를 얻을 수 있다. 마치 왼쪽 입꼬리만으로 미소 짓는 모습과 비슷하니, 하프 스마일 커브Half Smile Curve라고 부르기로 하자. 참고로 이 하프 스마일 커브의 가장 오른쪽 위에 있는 나라, 즉 선진국이면서 설계도 값이나 로열티 등 지식재산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는 나라는 바로 스위스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까지 평균적인 경향을 따라간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지식재산 수입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기 시작했어야 할 2000년대 초반부터 오히려 의존도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림에서처럼 한국의 커브는 상승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치 경로를 이탈하는 것과 같은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1단 엔진은 실행 역량이다. 1단 엔진이 작동하는 동안은 선진국 기업들로부터 개념설계를 수입하여 실수없이 빠르게,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1단 엔진이 기대 이상 잘 작동하여 한국의 산업은 놀라운 속도로 고도 상승을 했다.

1단 엔진이 주어진 개념설계를 받아와 실행하는 역량이라면, 2단 엔진은 바로 개념설계를 만들어내는 역량이다. 한국산업의 경로 이탈을 보여주는 앞의 그래프는 중요한 시사점을 담고 있다. 시기적으로 외환위기 이후부터 1단 엔진을 분리하고 2단 엔진을 본격적으로 점화했어야 했다. 실행 역량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백지 위에 밑그림을 그리는 역량, 즉 개념설계 역량을 키우는 쪽으로 크게 방향 선회를 해야 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산업은 그 경로에서 이탈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산업의 위기는 최소 20년 전부터 그 전조가 시작된 셈이다. 1단 엔진 분리 실패, 2단 엔진 점화 실패라고 표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은 고도 상승의 속도가 늦어지고 있다고 걱정하는 수준이지만, 자칫하면 아예 고도가 떨어지는 사태를 걱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ο 착각의 시간, 축적의 시간

지금까지 하던 일을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더 악화될 따름이다. 톱날이 무뎌져서 톱질이 신통치 않을 때는 더 열심히 톱질할 것이 아니라 톱날을 새 것으로 갈아야 한다. 로켓의 1단 엔진과 2단 엔진은 역할과 구조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1단으로 2단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도약을 위한 모든 변화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개념설계 역량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실행 역량과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사람은 하나의 습관을 갖게 되면 그 틀로 모든 사물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실행 역량을 오래도록, 더구나 세계 최고로 평가받을 만큼 훌륭하게 길러왔다면, 바로 그 실행 역량의 프레임으로 모든 문제를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개념설계 역량이란 것도 실행 역량과 비슷한 특징이 있으려니 짐작하고 전략을 짜게 된다. 이런 사고의 오류와 착각이 오히려 우리 기업들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 착각을 벗어나야 그림을 적용하는 수준을 넘어 그림을 그리는 단계, 즉 진정한 글로벌 챔피언 기업으로 진화할 수 있다.

 

• 첫째, 한국산업계는 실행 역량은 강하지만,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다.

• 둘째, 개념설계 역량을 얻으려면, 도전적 시행착오 경험을 꾸준히 축적해야 한다. 그래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조차도 아주 낯선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왜 알면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을까? 핵심은 개념설계 역량의 특성, 그리고 도전적 시행착오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에 대한 착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착각들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 착각 1. ‘부족한 개념설계 역량은 사오면 된다.’

우리 기업에게 부족한 것이 개념설계 역량이라면 요즘 같은 개방형 혁신의 시대에 인수합병 하거나 기술 자체를 사오면 되지 않을까?

• 착각 2. ‘창의적 아이디어가 없어서 문제다.’

새로운 그림, 독창적인 개념설계가 없는 이유는 기가막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훌륭한 논문, 특허, 비즈니스 아이디어만 구할 수 있다면 개념설계에 대한 고민이 다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 착각 3. ‘생산은 개발도상국에서, 개념설계는 국내에서.’

지식집약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인 개념설계는 국내에서 하고, 이것을 실행하는 것은 개발도상국 기업에 맡기는 방식으로 국제분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글로벌 선진기업이 해온 OEM 모델이 그런 것 아닐까? 우리도 그렇게 개념설계를 하는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에 특화해야 하지 않을까?

• 착각 4. ‘천재는 어디에서나 탄생한다.’

창의적이고 놀라운 개념설계는 꼭 선진국이 아니어도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개발도상국의 신생 벤처기업가도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처럼 온 세계를 놀라게 하는 혁신적 기업가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 착각 5, ‘중국은 우리의 생산공장이다.’

중국은 선진국의 개념설계를 받아와 싸게 생산하는 데 특화된 생산기지가 아닌가? 일부 중국발 개념설계는 선진국 개념설계를 베낀 것 아닌가? 중국에 대한 두려움은 과장된 것 아닐까?

 

착각을 극복하고, 전략으로 다시 뒤집어서 쓰면 다음과 같은 축적의 전략, 축적의 길이 된다.

• 축적의 전략 1. 축적의 경험을 담는 궁극의 그릇, 고수를 키워라.

• 축적의 전략 2. 아이디어는 흔하다, 스케일업 역량을 키워라.

• 축적의 전략 3. 시행착오를 뒷받침할 제조현장을 키워라.

• 축적의 전략 4.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사회적 축적을 꾀하라.

• 축적의 전략 5. 중국의 경쟁력 비밀을 이해하고 이용하라.

 

 

 

PART 2. 축적의 전략: 축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3장. 축적의 전략 1. 시행착오 경험을 담는 궁극의 그릇, 고수를 키워라

ο 교과서가 없다

2009년 10월 개통된 인천대교는 국내에서 가장 긴 교량으로서 바다 위에 놓인 길이만 해도 12.7km에 이르고, 총사업비는 2조 4,680억원이었다. 이 공사 과정의 앞단, 즉 타당성 평가, 기본설계,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 소위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은 회사가 영국의 엔지니어링 회사인 ‘AMEC’와 일본의 설계회사인 ‘조다이’였다.

회사의 시스템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설계 때 얻었던 시행착오의 경험이 무엇이었고, 그 이후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설계에 참여했던 사람을 만나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다. 담당자가 두 명의 사원을 소개해 주었는데, 언뜻 보더라도 할아버지인 것에도 놀랐지만, 회사 작업복을 입고 막 근무를 하다 온 상태라서 더 놀랐다. 두 사람의 입사연도가 각각 75년과 76년이니 설계로 경력을 쌓은 햇수만 40년이 넘는다. 공사 경과를 담은 백서를 각각 펴놓고, 두 교량을 설계할 때 겪었던 이런 저런 특이한 공학적인 도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의 프로젝트에서 어려웠던 점으로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특이하게도 설계기간을 포함한 전체 공기를 단축하는 일이었다. 여러가지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두 사람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많은 의문들이 풀렸다. 창의적인 개념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량은 매뉴얼이나 교과서, 시스템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40년 넘게 전 세계의 특이한 프로젝트들을 경험하면서 쌓았던 시행착오의 경험들, 그 경험을 온몸으로 축적한 엔지니어 그 자체가 창조적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걸어다니는 교과서를 만난 셈이다.

 

반복경험학습Learning-by-Doing이라고 한다. 같은 실행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효율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생활의 달인과 인천 앞바다에 처음 와서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 긴 교량을 상상해내야 하는 조다이의 엔지니어는 무엇이 다를까? 결정적인 차이는 매번 같은 일을 하는가 혹은 매번 다른 일을 하는가에 있다. 개념설계를 해야 하는 엔지니어도 경력이 쌓이면, 새로운 환경에 접해서 문제의 핵심을 재빨리 분석하고, 유사경험을 더 폭넓게 활용하고, 보다 창의적이고 차별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이 커진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커진 역량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생긴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도전적 밑그림을 그려보면서 생긴 능력이므로 설계경험학습Learning-by-Building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더 빨리 하는 것, 즉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창의적이고 ‘차별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역량은 매뉴얼로 만들 수 없다. 직접 그림을 그려보고, 적용해보고, 안되는 경우를 경험해보고, 다시 그림을 고치는 과정을 반복해보아야만 길러지는 역량이다.

지식 가운데 매뉴얼이나 교과서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형식지Explicit Knowledge라고 한다. 반대로 직접 해본 경험과 기억의 형태로 되어 있어 교과서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한다. 기술이 발전해오면서 많은 암묵지가 형식지로 전환되어 왔다. 과거 장인의 손끝에서만 만들어지던 명품 도자기 굽는 과정도 매뉴얼화되고, 알고리즘으로 표현되어 결국 자동화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계속되어 대부분의 암묵지가 형식지로 바뀌겠지만, 끝내 바뀌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없던 밑그림을 그리는 개념설계 역량일 것이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가지고 있는 핵심역량이 바로 이 교과서가 없는 개념설계 역량이다. 그래서 혁신적인 시도로 유명한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나 스페이스엑스 같은 회사에서는 직접 쇠를 자르고 무언가를 만들어본 사람을 뽑겠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다. 테슬라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기자동차를 설계하면서, 유사한 자동차를 수없이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본 것도(테슬라 개발팀 45명이 라브4 시험용 차량 35대를 주당 2대씩 망가뜨리며 자동차 설계를 위한 암묵지를 확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교과서에 있는 공학적 수식만으로는 새로운 밑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형식지 :: 문서나 매뉴얼처럼 외부로 표출되어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으로 과학 원리, 수학 공식, 논리적 문장들과 같은 객관적이며 언어로 상술 가능한 지식. 예를 들어, 데이터베이스, 신문 등과 같이 어떤 형태로든 형상화된 지식으로서, 과학적 공동체에 의해 흩어진 지식과 지성이 모이고 공유되어 극대화된 가장 진보된 형태의 지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형식지 [explicit knowledge, 形式知]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암묵지 :: 헝가리 출신 영국의 철학자이자 물리화학자인 마이클 폴러니(Michael Polanyi)가 구분한 지식의 한 종류이다. 폴러니는 지식을 암묵지(암묵적 지식)와 명시지 또는 형식지(形式知)로 구분하였는데, 암묵지는 학습과 경험을 통하여 습득함으로써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을 말한다. 명시지(명시적 지식)는 암묵지와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언어나 문자를 통하여 겉으로 표현된 지식으로서 문서화 또는 데이터화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폴러니는 암묵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암묵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인간 행동의 기초가 되는 지식이 바로 암묵지이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이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체득한 지식이나 노하우가 여기에 속한다. 명시지는 이러한 암묵지의 기반 위에서 공유되는 것이며, 암묵지가 형식을 갖추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영학자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郎]는 이를 기업에 적용하여 지식은 암묵지와 명시지의 사회적 상호작용, 곧 경험을 공유하여 암묵지를 체득하는 공동화(共同化), 구체화된 암묵지를 명시지로 전환하는 표출화(表出化), 표출된 명시지를 체계화하는 연결화(連結化), 표출화와 연결화로 공유된 정신모델이나 기술적 노하우가 개인의 암묵지로 전환하는 내면화(內面化)의 네 가지 과정을 순환하면서 창조된다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암묵지 [暗默知]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ο 돈으로 사기 어렵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위해 상상을 뛰어넘는 투자를 하고 있다. 향후 10년간 1조위안(약 170조원)의 투자를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우한에 건설하고 있는 3차원 낸드플래시 공장에는 벌써 240억달러(약 27조원)를 투자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기계장비로는 구할 수 없는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기계와 장비에 체화된 지식은 모두 매뉴얼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형식지다. 그러나 새로운 공장, 특히 처음 시도하는 차세대 공장의 경우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처음 보는 문제에 대해서는 당연히 매뉴얼이 없으니, 그나마 유사한 경험을 많이 해본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다.

 

16세기와 17세기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박해받던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위그노라고 하는데, 이들은 당시 첨단산업이라고 할 모직물, 견직물, 제지, 시계 등의 산업에서 온갖 시행착오 경험을 온몸에 축적하고 있던 기술장인들이기도 했다. 168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 박해를 견딜 수 없었던 위그노 장인들이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오늘의 독일이 된 프로이센 등지로 이주했다. 스위스가 시계를 포함한 정밀기계산업의 메카가 된 것도 이 당시 시계 장인들이 프랑스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이 축적한 시행착오의 경험이 해당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것을 간파한 영국과 독일이 각종 혜택을 경쟁적으로 베풀면서 위그노들을 자국으로 유치하고자 노력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독일은 이 인재유치전에서 후발주자였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포츠담칙령을 통해 약 5만명의 위그노들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함부르크, 베젤, 쾰른 등으로 이주해서 양모, 실크, 레이스, 염색, 그리고 직물 마감작업 공장 등을 세웠다. 독일이 이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세금 면제 혜택을 부여하거나 설비와 자금을 파격적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이다. 영국도 특별이민법까지 제정해 위그노들의 정착을 도왔으며, 그들을 위해 특허 보호와 상공업 우대 정책을 시행했다. 위그노들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독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업혁명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반면 종교와 이념을 문제 삼아 위그노들을 쫓아낸 프랑스는 산업혁명의 물결에서 결정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결국은 사람에게 체화된 창조적 시행착오 경험이 중요한데, 이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매뉴얼, 교과서, 기계,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들도 모두 기술과 지식을 담고 있지만, 사람과는 달리 쉽게 옮길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창의적인 개념설계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조합해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창의적이면서도 색다른 경험을 가득 보유한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우연으로 말을 섞게 되는 것이 또 다른 새로운 밑그림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떤 분야의 초절정 고수와 차를 한잔 마시면서 나누는 이야기, 특히 회의가 아니라 이리저리 산책하면서 나누는 잡담이야말로 정말 새롭고 혁신적인 이야기의 우연한 출발이 된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오늘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학술회의, 창업경진대회, 포럼 등의 각종 자료와 동영상을 다 소화하지도 못할 만큼 구할 수 있는데, 왜 전 세계의 창조적 마인드들이 기를 쓰고 실리콘밸리에 자리를 잡으려고 할까? 물리적으로 서로 옆에 있기 위해서다. 휴스턴의 그 좁은 동네에 에너지나 해양 관련 플랜트 설계나 기술컨설팅 회사들이 그렇게 북적북적 모여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래서 글로벌화된 시대, 연결망의 시대, 구글링 하면 모든 것을 클릭 몇 번으로 알아낼 수 있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특정한 물리적 위치에 창의적인 사람들이 더 모이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인터넷에서 정보가 많이 공유되면 될수록, 그런 형식지 형태의 지식은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창의적인 시행착오의 경험은 암묵지로서 더욱 희소가치가 높아지게 된다. 바야흐로 거리가 소멸된다고 하는 인터넷 시대일수록 물리적 거리의 의미가 더 중요한 창의적 클러스터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핵심은, 개념설계 역량은 결국 교과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시행착오의 경험이라는 형태로 생채기처럼 체화된다는 것이다.

 

인수합병해서 내가 주인이 되었다고 해서 개념설계 역량이 곧바로 내 것이 되리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재무적으로 회사의 주인이 되는 것과 사람의 몸에 체화된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2006년도에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창의적인 개념설계를 제시하기로 유명한 픽사Pixar를 74억달러의 금액에 인수합병 하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협상 초기에 인수조건을 논의할 때 개념설계를 지휘해온 핵심인재들이 인수 후 회사에 남는다는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디즈니 이사회가 불만을 제기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창의적인 개념설계 역량이 핵심인재의 경험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디즈니가 74억달러로 얻고자 했던 것이 건물, 장비, 프로그램 혹은 이미 알려진 판권이 아니라 새로운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끊임없이 창조해나가는 개념설계 역량이었고, 바로 그 과정의 독특한 시행착오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2016년 중국 기업들에 의한 인수합병 규모가 2,070억달러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중국 기업들은 특히 기술 중심 기업을 인수할 때 인력에 관해 극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6년 5월 중국 가전제품 회사인 미데아Midea그룹이 독일의 산업로봇 생산업체인 쿠카KUKA를 인수했을 때, 2023년까지 기존 인력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처럼 최근 중국 기업들은 인수합병 후 인력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영리하게도 핵심 경험을 가진 인력을 잘 모시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귀중한 축적된 시행착오 경험을 담는 그릇이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개념설계 역량을 가진 기업을 인수합병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 시행착오의 흉터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 확보하고 대우할 것인가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인수합병 이후 개념설계의 경험이 부족한 우리 기업의 인력을 그들과 가깝게 붙여 바로 옆에서 같이 경험해나갈 수 있도록 해서, 흉터를 몸에 새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무엇보다 참을성있게 경험이 흡수되고, 이전되고, 축적되도록 기다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모터와 알고리즘으로 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의적 개념설계는 결국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거꾸로 말하면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있으면 창의적 개념설계는 다 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얼른 떠오른다.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 기업들이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찾아 공모전을 열고, 대학, 연구소, 벤처기업, 해외를 충혈된 눈으로 찾아다니고 있다. 블루오션을 열어줄 놀라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의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연구부서와 기획실 직원들은 오늘도 야근을 준비한다.

불행하게도 발견하자마자 놀라운 개념설계로 변신하는 그런 파랑새 같은 아이디어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도록 아이디어를 키워나가는 스케일업이란 과정을 버티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창의적 경험은 암묵지이기 때문에 결국 매뉴얼이나 교과서 혹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에게 쌓인다.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은 어디에 담겨 있는가? 결국 사람의 몸에 끈적한 형태로 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쉽게 분리해내기 어렵다. 쉽게 얻어지지도 않지만, 떼어내서 옮기기도 어렵다.

 

인력의 수명이 짧아 오래도록 경력을 축적한 소위 전문가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75년에 입사한 일본 조다이의 설계엔지니어 사례와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전문가 트랙이 형성되어, 순환보직하지 않고 한 분야에서 꾸준히 시행착오를 축적함으로써 고수가 된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우리 산업의 발전경로가 창의적인 밑그림을 그리기보다, 그려진 밑그림을 받아와서 빠르게 실행하는 모델이어서 그동안 시행착오를 축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행을 중심으로 할 때는 오랜 경험을 쌓은 프로가 아니라 이해력이 빨라 금방 벤치마킹을 할 수 있고, 야근을 하면서라도 많은 양의 일을 짧은 시간 안에 처리할 수 있는 인력, 그래서 항상 조기완수를 달성할 수 있는 인력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항상 당시의 젊고 똑똑한 인력을 선호하였다.

진정한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밑그림을 만들어 보기 위해 도전하고, 그 와중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시행착오를 사람에게 꾸준히 축적해나가는 전략적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 고수, 프로, 덕후, 능력자를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야 기술 선진국이 될 수 있다.

한편, 이런 이야기는 개인의 입장에서도 시사점이 있다. 남들이 갖지 못한 고유하고 도전적인 시행착오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사람, 즉 한 분야에서 프로로 인정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개인은 개념설계에 도전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남의 그림을 실행하는 단계를 넘어 계속 도전하고, 학습하고, 축적하는 고수, 능력자가 되도록 인생 전략을 짜야 한다.

 

4장. 축적의 전략 2. 아이디어는 흔하다, 스케일업 역량을 키워라

ο 스케일업, 아이디어를 혁신으로 완성하는 힘

애플세Apple Tax 논쟁이 있다. 논쟁의 핵심은 GPS나 터치스크린 기술처럼 애플의 제품에 탑재된 핵심기술들이 대부분 미국 정부의 세금으로 대학이나 공공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 있다. 스티브 잡스는 어떤 것은 무상으로 또 어떤 것은 유상이더라도 아주 헐값에 기술을 가져와서 사용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적인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엄청난 수익을 벌게 되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애플세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기술을 사실상 공짜로 가져가서 돈을 벌었으니, 영업 행위에 대한 법인세 외에 이 공짜 기술에 대한 대가를 미국사회로 다시 환원하라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애플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거두어들인 추가 세금을 미래 핵심기술을 개발하는 공적자금으로 다시 투입해서 혁신의 선순환을 만들어내자고 주장한다.

 

남의 아이디어를 가져다 쓴 것으로 따지자면 스티브 잡스는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겼다. PARC라는 약칭으로 잘 알려진 팔로알토연구소는 1970년에 복사기로 유명한 제록스의 부설연구소로 설립된 이래, 오늘날 정보통신산업의 기초가 된 혁신적 아이디어를 누에고치처럼 끊임없이 자아냈다. 마우스를 쓸 수 있도록 해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의 개념과 이를 이용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알토Alto를 만들어냈고, 근거리 네트워크 규약으로 이더넷Ethernet을 만들어 오늘날 인터넷의 기초를 제공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분산 컴퓨팅,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등 지금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변화의 많은 기초적 아이디어도 이 PARC에서 탄생했다.

애플이 2010년 아이패드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사실 그 19년 전인 1991년에 PARC가 이미 태블릿 PC 형태로 ‘파크 패드PARC PAD’라는 시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놀라운 아이디어들이 PARC 이곳저곳에서 소위 발에 채이면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그 가운데 몇 개를 헐값에 가져와 오늘날 인류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기술로 탈바꿈시켰다. 1984년 1월 24일 처음 출시된 매킨토시는 당시 유행하던 명령 줄 인터페이스(command line interface) 대신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 GUI)와 마우스 개념을 채용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였다. 마우스와 화면 안의 창(window)으로 구성되는 GUI는 Xerox의 PARC가 최초로 제시한 패러다임이었다.

 

이 사례들은 모두 ‘기가막힌 아이디어’란 것이 알고 보면 얼마나 흔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에디슨은 분명 천재다. 그런데 만약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면? 지금도 밤이면 촛불을 켜놓고 저녁밥을 먹고 있을까? 아니다. 에디슨의 생사 여부와 상관없이 백열전구의 아이디어는 현실화되었을 것이다. 당시 에디슨 말고도 최소한 5명의 발명가, 기업가들이 유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실험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 따르면, 2016년에 우리나라는 1만 5,560건의 국제특허PCT를 출원하여 미국, 일본, 중국, 독일에 이어 세계 5위에 올라 있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 스웨덴이 6위부터 10위까지를 차지하고 있는데, 최소한 양적으로는 아이디어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세계지적재산기구 :: 국제 연합(UN) 전문 기관의 하나로, 특허권 등 산업 재산권의 국제 조약인 파리 협약과 저작권의 2대 조약의 하나인 베른 협약의 사무국을 겸하고, 무체 재산(無體財産)의 중심이 되는 지적 재산권에 관한 국제 조약의 제정을 추진하는 기구. 한국은 1973년부터 참관자로 참석, 1979년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1996년 12월에는 이른바 인터넷 저작권이라고 불리는 저작권 조약 개정안을 채택하여 각국의 비준/가입을 요구한 바 있다. 이 새로운 조약은 인터넷 등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하여 공중에게 송신되는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의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저작권법의 2대 조약의 다른 하나인 만국 저작권 조약(Universal Copyright Convention)의 사무국은 세계 지적 재산권 기구(WIPO)와는 별도의 전문 기관인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UNESCO)이다. WIPO와 UNESCO는 합동 위원회 등을 구성하여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저작권 문제에 관하여 협력하고 있다. WIPO의 본부는 제네바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계 지식 재산 기구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世界知的財産權機構]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신제품을 만들거나,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거나 간에 아이디어가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다. 친구들과 치맥을 즐기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게 비즈니스 아이디어 아닌가. 소설 작법에 나와 있는 이야기 중에 진기한 소재,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찾는 데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소재주의를 경계하라’는 말이 있다. 아이디어를 눈앞의 현실로 바꾸어내지 못하면 모두 복덕방 난로 옆의 한가로운 방담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성능을 가진 플라스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실험을 한 후 저명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쓰고 미국특허도 획득했다. 이제 새로운 아이디어가 얻어진 셈이다. 이것이 아이디어를 얻는 단계, 즉 발명Invention의 단계다. 그러나 축하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이르다. 이것만 가지고는 돈을 벌 수가 없는데, 실제 공장 크기에서 물질들이 반응하는 환경은 실험실과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상 파일럿 플랜트라는 것을 짓고, 실제 생산과정과 유사하게 진행해 보면서, 어떤 문제가 없을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을 스케일업 과정이라고 하는데, 여기를 무사히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수백억원 혹은 수천억원을 투자해서 실제로 공장 건설을 시작할 수 있다. 이 스케일업 과정을 거치면서 교과서와 공식, 매뉴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업 고유의 끈끈한 암묵지가 생성된다.

다른 의미로 생각해보면, 스케일업은 교과서에 있는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인 실패 리스크가 가장 크게 작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위험 때문에 스케일업 과정이야말로 신사업 프로젝트를 담당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스케일업 과정에서 플랜트의 설계는 보통 라이센스 기술을 가진 글로벌 선진기업들에게 맡긴다. 선진기업들은 다른 회사들이 경험하지 못한 온갖 시행착오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아예 다른 기업이 스케일업을 완성해 놓은 플랜트를 나중에 사기도 한다.

SAP는 독일을 대표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로서 데이터베이스 분야의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다. 이 회사는 2011년말 HANA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제시하면서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덕분에 2015년 한해에만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추가로 올리고, 회사 전체 규모가 크게 성장하는 획기적 성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부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HANA라는 새로운 개념설계의 아이디어는 한국에서 나왔다. SAP HANA는 SAP가 2005년에 서울대 공대에서 출발한 TIM이라는 벤처회사를 인수한 후 개발한 인메모리 DB시스템 플랫폼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SAP의 입장에서 2005년에 훌륭한 아이디어를 구한 셈인데, 정작 시장에서 쓸 수 있는 새로운 개념설계로서 출시한 것은 2011년말이라는 점이다. 무려 6년의 기간 동안 이 아이디어가 실제로 쓸 수 있는 것인지, 검증하고 확장하고 다시 시험하는 소위 지난한 스케일업 과정을 거친 셈이다.

구글이 내놓은 모바일 운영체제 플랫폼인 안드로이드는 전 세계 모바일 운영체제의 87.5%를 장악하고 있고, 2008년 세상에 나온 이후 2016년 1월 시점에 310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고 알려진, 놀라운 개념설계다. 여기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2003년 앤디 루빈Andy Rubin이 창업한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벤처회사를 구글이 2005년 5천만달러(약 550억원)에 인수하였고, 지난한 추가 스케일업 노력을 더한 후 2008년부터 내놓은 플랫폼이다.

 

SAP와 구글은 HANA와 안드로이드 외에도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를 사고, 시험하고, 스케일업한다. 그중에서 많은 것은 실패하고,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행운이 겹쳐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 HANA이고 안드로이드였을 뿐이다. 분명 아이디어가 귀하고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년간 온갖 리스크를 무릅쓰고 집요하게 스케일업 해온 과정이 없다면 결국 꽃을 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

성적이 우수할 것 같은 학생을 골라 장학금을 주고 나서, 그 학생의 성적이 우수하면, ‘역시 장학금이 효과가 있었다’고 말하기 쉽다. 이런 경우를 통계학적으로 ‘선택편이Selection Bias’가 있다고 말하는데, 인과관계를 혼돈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오류다. 하나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새로운 개념설계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스케일업 과정은 위험이 크다. 그래서 기업들 혹은 더 정확하게는 기업 안에서 해당 프로젝트를 담당한 사람들은 대개 스케일업 과정을 싫어한다. 실패의 위험이 크고,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본인의 임기를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좀 더 비싸더라도 스케일업 과정을 다 거쳐서 완성된 설비를 사는 경우가 태반이다. 다른 사람이 다 스케일업 해놓은 제품이나 공정을 구입하는 것이니 당연히 비싸다. 값이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하게는 남이 스케일업을 다 했으니 이미 신사업이 아니라 구사업이 된 것을 사는 셈이 된다.

이처럼 스케일업 투자를 기피하고서는 ‘우리 회사는 왜 신사업이 없는가’, ‘신사업이 될 만한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없는가’라고 기획팀이나 연구개발팀을 탓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선택편이다.

 

선택편의 :: 조사대상으로 선정된 표본이 대표성이 결여되어 편의가 생길 수 있는데 이 편의를 선택 편의라 함.
[네이버 지식백과] 선택편의 [selection bias, 選擇偏倚, せんたくへんい] (농업용어사전: 농촌진흥청)

 

결론적으로 아이디어는 흔하다. 스케일업 과정을 버티지 못하면, 기가막힌 아이디어도 그냥 흘러가는 시간 때우기용 잡담에 불과하다.

개방형 혁신 시대에 인수합병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이 경우에도 완성된 사업체를 합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과 손을 잡은 다음 추가적인 스케일업 투자를 해나가는 A&D(인수후개발)가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진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힘은 아이디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케일업에 있다.

 

아이디어가 흔하다는 이야기는 원천적 발명, 최초의 아이디어가 가진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발명Invention과 혁신Innovation의 거리가 그만큼 멀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스케일업 역량이 강해야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울인 노력도 빛을 볼 수 있다.

 

ο 혁신은 축적의 결과

창의적인 것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것을 만날 때까지 많이 시도한 것이다.

 

구글이 비밀 연구그룹 구글X에서 개발하고 있는 10가지 주요 기술로는 무인자동차 프로그램(Waymo), 구글글래스, 안드로이드 앳홈, 우주 엘레베이터, 스마트워치, 삼킬 수 있는 진단용 알약, 무선인터넷 프로젝트, 안드로이드기반 비디오게임기, 차세대 구글 스마트폰, 재생에너지 사업 등이다. 이중 무인자동차 프로젝트는 2016년 12월 Waymo라는 독립회사로 전환되었다. Waymo에서는 2020년에 대중들이 무인자동차를 탈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구글X랩의 프로젝트는 ‘문샷’프로젝트라고도 불리는데, 월가의 애널리스트들이 추정하는 구글 문샷 프로젝트의 연간 손실액은 최소 5억 달러에서 최대 40억달러에 이른다.

 

흔히 ‘구글은 어떻게 이렇게 기가막힌 프로젝트들이 뜰지 미리 알고 투자를 해두었을까’라며 놀랍게 생각하지만,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많은 아이디어들을 검토하고, 투자하다 보면 그중에서 하나쯤 맞아 떨어지게 되어 있을 뿐이다.

 

스티브 존슨(2012)은 15,000곡의 고전음악을 분석한 결과 5년이라는 일정한 기간 동안 작곡한 작품의 수가 많을수록 음악가가 걸작을 작곡할 확률이 높았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짜르트는 600곡, 베토벤은 650곡, 바흐는 1,000곡 이상 작곡했고, 피카소는 유화 1,800점, 조각 1,200점, 도자기 2,800점, 드로잉 12,000점을 남겼다. 결국 훌륭한 예술가와 연구자는 많은 시도를 해본 사람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독창적이 되고 싶다면, 작업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들이다.

 

혁신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작은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하지만, 현실에서 쓸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여러가지 방식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해보면서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스케일업 역량은 바로 글로벌 챔피언의 개념설계 역량을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무기다.

 

많이 시도해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지속하는 것이다. SAP가 HANA 플랫폼의 아이디어를 완성하기까지 6년의 기간을 버틴 것은 분명 놀라운 이야기지만, 그리 드문 이야기도 아니다. 3M의 포스트잇도 예외가 아니다. 흔히 강한 접착제를 만들려다 우연히 접착력이 약한 물질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용도로 쓸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로 큰 성공을 거둔 이야기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8년에 이미 3M의 과학자였던 스펜서 실버Spencer Silver에 의해 포스트잇 아이디어의 원형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년이 지나서 상품 개발이 본격화되고, 최초 아이디어로부터 12년이 지난 뒤인 1980년이 되어서야 ‘포스트잇’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시되었다. 여기서 처음 아이디어가 나온 1968년이나 상업화가 완료된 1980년 시점이 아니라 이 두 시점 사이의 12년이라는, 시행착오를 축적한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오랜 시간의 시행착오를 견디고 하나의 아이디어를 완성하는 과정은, 사실 모든 혁신의 사례에서 시간을 거슬러 거꾸로 추적해보면 만날 수 있는 공통된 사실이다. 남들이 갖지 못한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오래도록 그 아이디어를 조금씩이라도 차별화되도록 갈고 닦아나가는 방법이 유일하다.

볼품없는 쇠붙이를 면도날로 만드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벼려서 어제와 다른 차별성을 만들되, 그 차별화의 과정을 지속하는 길 뿐이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용한 주술사가 기우제만 드리면 비가 온다는 것도 비슷한 원리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과 비유는 모두 혁신적인 개념설계라는 것이 반짝이는 아이디어의 산물이 아니라 오래도록 갈고 닦은 차이의 축적이고, 그 시간의 결과라는 것을 알려준다.

 

대부분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의 성공적인 다각화 경험을 돌아보면 비관련 다각화가 아니라 기존 사업에서 쌓은 노하우를 활용하는 연관다각화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존폐위기에 내몰렸던 필름업계의 제왕 후지필름은 필름사업으로 절정을 달리던 2000년 시점에 비해 현재 매출액이 1.7배 늘어난 것으로 보고될 정도로 완전히 부활했다. 그 이면에는 기존 필름사업을 하면서 축적해온 기초소재 및 정밀화학과 관련된 역량을 충실히 활용하여 제약, 화장품, 의료장비 등 헬스케어 분야의 신사업으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지필름은 필름 산업의 수요 급감으로 2006년과 2009년 두차례에 걸쳐 1만명을 감원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간 쌓인 화학 관련 핵심 기초역량을 활용하고, 연관 기업을 인수합병하여 2014년 기준으로 제약, 화장품, 의료장비 등 후지필름의 헬스케어 사업이 전체 매출 2조 4000억엔 가운데 16%를 차지할 정도로 새로운 기업으로 탄생했다. 후지필름의 2015년 매출액은 필름사업이 절정을 맞았던 2000년보다 170% 이상 증가해서 완전히 부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 가을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과 합병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몬산토Monsanto라는 글로벌 생명화학회사도 마찬가지다. 종자기업으로 출발하여 지금의 첨단 바이오기업으로 변신을 거듭해왔지만, 따지고 보면, 종자관리를 하면서 쌓은 화학 및 생물공학 관련 핵심사업 분야에서의 노하우를 계속 심화시키면서 발전해온 덕택이었다. 흔히 ‘변하려면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남들이 하지 못한 시행착오의 경험을 오래도록 축적할수록, 그래서 그 분야에서 초절정 고수가 될수록, 역설적으로 새로운 산업을 열어갈 힘이 커진다.

직접 시도를 해보고, 시행착오를 겪고, 그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중요한데, 문제는 그럴 ‘현장이 있는가?’이다. 시행착오는 상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해보고, 그 결과를 확인해야 하니까 당연히 현장이 필요하다.

 

결국 블루오션을 찾아다녀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여러번 오래도록 도전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쇠붙이에서 면도날을 만들어내듯, 시간을 들여 차별화를 지속하고자 노력할 때라야 비로소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개념설계에 이르게 된다. 블루오션 혹은 혁신은 그 자체를 찾거나 추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 축적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것도 확률적인 결과일 따름이다.

 

스케일업 역량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산업의 몇 가지 특징적인 관행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완성해가기보다 완성된 결과물을 도입하는데 익숙하다. 혹은 아예 스케일업이 필요 없는 사업, 즉 인허가권으로 보호받는 안전한 비즈니스를 찾기도 한다. 신성장 동력을 찾고자 노력하는 경우에도 늘 블루오션을 되뇌면서, 최신의 유행을 따라 본업과 상관없는 비관련 다각화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수합병을 하는 경우에도,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 안에 재무적 성과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부 정책도 스케일업 과정을 참아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거의 5년마다 혹은 그것보다 더 짧은 주기로 성장동력을 발표하고, 거기에 맞추어 정부재정을 조정한다. 이전에 조금 손을 대기 시작하던 프로젝트의 스케일업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이미 타깃이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들은 이렇게 하고 있더라’라는 벤치마킹 정보가 우리의 맥락과 상관없이 중요한 의사결정의 근거로 작용한다. 블루오션 집착증이다.

기업이나 정부 모두 신성장동력, 특히 지금까지 해보지 않던 기발한 아이디어와 키워드만 끊임없이 찾아나서는 노력을 그만두어야 한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올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벤치마킹하고, 거기에 맞추어 기존에 하던 일과 상관없이 쫓아가는 관행도 그만두어야 한다.

업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수준의 시행착오를 꾸준히 축적해서, 최소한 자신의 분야에서는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아이디어를 구하는 정성만큼이나, 쓸 수 있는 개념설계에 이르도록 꾸준히 참고 투자하고 장기적으로 키워나가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결과만 보면 언뜻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아도 그 힘은 느리고 꾸준한 축적에서부터 온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이것저것 뜬다는 키워드를 쫓아다니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만 머릿속에 잔뜩 넣어서는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전문가, 고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우연이든 어떤 계기로든 하나의 아이디어를 구하게 되었으면, 그때부터 꾸준히 남들이 겪지 못한 수준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혁신적 개념설계를 내어놓을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야 한다. 진정한 전문가에게는 스케일업 과정이라는 험한 바다를 건너온 깊이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있다. 재기 발랄하고 만물박사인 고수는 없다.

 

5장. 축적의 전략 3. 시행착오를 뒷받침할 제조 현장을 키워라

ο 왜 ‘메이킹 인 아메리카’인가?

사실 80년대부터 이미 개념이 완성되어 있던 3D 프린팅이 갑작스레 부각된 데는 미국 백악관의 노력이 주효했다.

2014년 백악관비서실에서 발간한 한 보고서는 ‘메이킹 인 아메리카Making in America’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강조한 포인트는 미국 제조업의 위기인데, 중국의 제조업에 밀려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식의 많이 듣던 식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제조업 기반이 사라지면서 기술혁신 활동이 약해지고, 제조업 분야의 창업도 줄고 있다는 우려가 주된 문제의식이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미국 안에서 제조기반 혁신과 창업활동을 진작해야 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조업 혁신과 창업에 소요되는 진입비용을 낮춰주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인프라가 있다면 무엇일까? 대표적인 수단 중 하나가 시제품을 만드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기 위해 3D 프린터 산업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보고서에 인용된 예만 하더라도 포드사가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복잡한 부품 하나를 새롭게 만든다고 할 때, 기존의 방식대로 형틀을 만들고, 재료를 녹이고 부어 만드는 몰딩방식으로 시제품을 만들 경우 50만달러의 비용에 4개월이 소요되지만, 똑같은 시제품을 3D 프린터로 만들 경우 3천달러의 비용에 4일만에 뚝딱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몰딩방식과 달리 한번만이 아니라 원할 때까지 계속 변형시켜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장점까지 있다. 보고서는 3D 프린팅 뿐만 아니라 이들을 묶어 제조업 붐을 조성하기 위해 지원하고 있는 테크샵Techshop 등 미국 전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제조업 살리기 활동도 소개하면서, 향후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계획도 밝히고 있다. 그 직후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 갑자기 3D 프린터와 관련한 뉴스, 포럼, 태스크포스, 정책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 백악관 보고서의 제목은 시기적으로 조금 앞서 2013년 11월 MIT가 내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정식 제목은 ‘메이킹 인 아메리카: 혁신에서 시장까지Making in America: From Innovation to Market’다.

 

MIT가 내어놓은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제목과 핵심 메시지를 받아 대통령 비서실이 널리 소개하고, 지원하는 보고서를 쓴 것이다.

 

핵심은 그동안 혁신활동은 미국 내에 남겨두고 제조활동은 개도국, 특히 중국으로 내보내는 소위 오프쇼어링Off-shoring 모델이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는 지적이다. 제조활동만 내보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혁신활동도 같이 나가더라는 것이다. 세계의 공장으로만 알고 있던 중국산업에서 미국이 깜짝 놀랄 정도의 혁신성과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제조현장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관찰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거나 컴퓨터 앞에서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는 직접 만들어보고, 다시 고치고, 또 만들어보는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고유한 개념설계가 탄생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오프쇼어링 :: 기업업무의 일부를 해외 기업에 맡겨 처리하는 것. 업무의 일부를 국내기업에 맡기는 아웃소싱의 범주를 외국으로 확대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오프쇼어링 업무의 범위는 확대되는 추세에 있어 초기에는 정보기술(IT) 지원이나 콜센터 등에 한정됐던 것이 지금은 디자인, 회계 등 고도의 핵심 업무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 아웃소싱,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 (Business Process Outsouring) 등으로도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프쇼어링 [off-shoring] (한경 경제용어사전)

 

중국에서 생각하는 방식은 일단 시도해 보고, 한계까지 밀어부쳐 보라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실수를 발견하고 고쳐보라는 것이지요. 독일 사람들은 이런 불확실성을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중국식 시스템의 장점 한 가지는 아주 빠르게 실행하고, 또 그만큼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생산Production 혹은 제조Manufacturing 활동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머릿속에만 있던 새로운 혁신적 아이디어가 그 물리적 생명을 얻는 따끈따끈한 모태다. 그래서 일자리를 위해서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다시 혁신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특히 떠오르는 중국에 대비하여 혁신 역량으로 더 확고한 리더십을 장악해 나가기 위해서, ‘제조업 살리기’를 하고, ‘공장 다시 불러 들여오기’, 즉 리쇼어링Reshoring 전략을 펴나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3D 프린팅 기술은 처음 본 하이테크 기술이 아니라 견본품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드는 미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 중의 하나로서 소개된 것일 뿐이다.

그즈음에 미국에서 제시된 산업공동기반Industrial Commons을 지키자는 주장도 유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핵심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가령 디스플레이 패널 제조공장이 하나 문을 닫으면, 그 공장에 납품을 하거나 그 공장의 제품을 납품받던 가치사슬에 있는 공장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같은 디스플레이 패널 분야에 있는 경쟁회사들도 부정적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이 공장에 들어가는 특수한 소재를 공급하던 공장이 따라서 문을 닫거나 옮겨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 전문인력들의 노하우가 사라지게 되는 것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따라서 공장 하나는 단순한 물리적인 시설이 아니라 수직, 수평적 가치사슬로 얽혀 있는 기업 생태계 전체의 기술 역량과 암묵적인 노하우를 담는 그물망의 한 결절점으로 보아야 한다. 산업공동기반이라는 표현은 쉽게 말해 제조업 기반을 의미하는데, 제조공장이 단순히 생산 역량이 아니라 혁신적 지식을 담고 있는 기반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면 된다. 앞서 ‘메이킹 인 아메리카’ 이야기와 함께 이 산업공동기반을 살리자는 주장도 모두 ‘제조업이 없으면 혁신도 없다’는 미국 산업계와 오피니언 리더들의 절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시대라고들 한다. 공장자동화를 넘어 극단적으로 개별화된 제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스마트팩토리가 대세다. 빅데이터 플랫폼 등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정보통신 분야 첨단기업들 역시 큰 그림을 그리면서 글로벌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종이 위에 그린 밑그림들이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신호를 받는 센서가 있어야 하고, 신호에 반응해 움직이는 엑추에이터Actuator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누가 공급할까? 현재 핵심적인 고기능 센서 및 엑추에이터는 대부분 일본과 유럽, 특히 독일 기업들의 몫이다. 그렇게 보면, 미국 첨단 정보통신 기업들과 일본, 독일의 부품소재 기업들이 서로 끌거니 밀거니 하면서 4차 산업혁명의 붐을 만들기도 하고, 방향을 몰아가기도 한다.

 

개념설계 하는 회사와 핵심부품 회사 두 곳이 부가가치의 대부분을 가져가고, 이윤이 거의 없으면서도 일은 많은 나머지 시공부분(실행)을 이름없는 개도국 회사들이 수행하는 전형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70년에 1달러 당 약 360엔이던 환율이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지금의 100엔 정도까지 4배 가까이 절상되었다. 1985년 9월 플라자합의Plaza Accord 이후에는 환율이 1달러 당 237엔에서 1988년 128엔까지 올랐는데, 불과 3년 사이에 거의 두 배로 평가절상된 셈이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3년 전에 개당 100원을 들여 만들던 물건을 이제 개당 50원의 비용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설계를 완전히 새로 하거나, 공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 그런 시련 속에서 일본산업은 살아남았다. 모두 강력한 현장의 축적된 노하우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제조현장에서 문제를 발굴하고 개선하면서, 경쟁력을 축적해나가는 힘을 모노즈쿠리もの造り 정신이라고 한다. ‘만들기 정신’ 정도로 단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더 넓어서, 끊임없는 개선과 혁신의 시도 그리고 시행착오 경험의 조밀한 축적에 가깝다. 일종의 습관이자 사고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모노즈쿠리 혼’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CMOS :: 상보형금속산화반도체. 소비 전력이 매우 적다는 이점을 가지며 휴대용 계산기, 전자시계, 소형 컴퓨터 등에 널리 채용되고 있다. 부가적인 내용으로 소형 컴퓨터에서 말하는 CMOS 셋업이란 어떤 하드디스크가 장착되어 있는지, VGA 카드를 사용하는지 등 사용자의 손을 통해서 CMOS에 저장하여 컴퓨터에게 어떤 주변기기들이 장착되어 있으며 어떻게 제어를 해야 할지 알려주는 절차이다. 보통 다음과 같은 경우에 CMOS 셋업이 필요하다. 하드디스크를 추가·변경할 경우, 디스크 드라이브를 추가·변경할 경우 CMOS 셋업이 필요하다. 초창기에는 디스크에서 파일 형태의 셋업 프로그램을 실행하였으나 현재는 CMOS 셋업 프로그램을 바이오스에 내장하고 부팅할 때 실행하는 형태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CMOS (매일경제, 매경닷컴)

 

독일과 일본 기업들이 최근에 첨단공장, 특히 최신 세대의 공장은 자국 내에 두자는 리쇼어링 전략을 강력하게 펼치고 있는데, 그 이유도 축적된 노하우의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다.

 

역설적으로 21세기 첨단의 혁신을 담는 그릇이 바로 제조현장이기 때문이다. 일자리 때문에 제조업을 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는 혁신이 살아 숨쉬도록 하기 위한 물리적 실체를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의 관점에서 보면 한가로운 논쟁에 불과하다.

 

ο 현장 없이 혁신 없다

아두이노(Arduino) :: 오픈 소스를 지향하는 마이크로 컨트롤러(micro controller)를 내장한 기기 제어용 기판. 컴퓨터 메인보드의 단순 버전으로 이 기판에 다양한 센서나 부품 등의 장치를 연결할 수 있다. 컴퓨터와 연결해 소프트웨어를 로드하면 동작을 하게 되므로 제어용 전자 장치부터 로봇과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 '오픈소스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에서 출발한 오픈 소스라는 개념을 하드웨어 부문까지 확산시킨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두이노 [Arduino]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우선 상상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춤을 추는 자동차건, 떼를 지어 나는 드론이건 일단 아무런 자기 검열없이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새로운 백지 위의 밑그림으로서 개념설계의 출발이다. 이제 상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손으로 만들어봐야 한다. 그리고 혁신의 결과물이 완성될 때까지 시행착오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버텨야 한다. 그 과정에서 특정 부분에서 이미 시행착오 경험을 축적한 전문가와 네트워킹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과정을 여러번 반복하다 보면, 이제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상상의 폭이 대담해지고, 실패에 대한 내성도 생겨 시행착오를 오래 버텨내는 끈기가 길러진다.

 

결국 도전, 네트워킹, 시행착오 축적의 단계를 거쳐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역량이 길러지는 것이다.

 

혁신적 제품이 되었건,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건 반드시 현장을 옆에 두고, 직접 적용해보고, 시행착오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밑그림을 고치는 반복적 순환과정을 거쳐야 새로운 개념설계가 완성된다. 이 현장 적용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시행착오, 그것을 극복하면서 얻게 되는 지식을 끈적한 지식Sticky Knowledge이라고 하는데, 이는 얻기도 힘들지만 배우기도 힘들다.

 

대만의 전자제품 조립기업인 혼하이鴻海는 아이폰을 전량 위탁생산해주고 있는 유명한 폭스콘Foxconn의 모회사다. 최근 이 혼하이의 성장세가 놀라울 정도다. 2016년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에서 삼성전자는 매출 1,774억달러로 13위를 차지했는데, 혼하이는 1,412억달러로 25위를 차지했다. 전자산업으로 분야를 한정하면 삼성전자 바로 다음 글로벌 순위가 혼하이일 정도다. 최근 일본의 샤프Sharp를 인수하여 삼성 타도를 외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혼하이는 자신의 제품이 아니라 다른 전자회사의 제품을 위탁생산해주는 것을 전문으로 하면서 성장했는데, 대표적으로 노키아의 휴대폰을 전량 생산했고, 지금은 애플의 아이폰을 전량 위탁 생산해주고 있다. 전 세계 메이저 전자회사와 거래를 하면서, 휴대폰에서 디스플레이 패널 조립까지 대부분의 영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도전은 심상치 않다. 2013년 자체 브랜드로 스마트폰을 출시한 바 있고, 2014년에도 자체 브랜드의 태블릿PC 생산을 추진한 바 있다. 최근에는 모바일 기기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 설계업체인 영국의 ARM과 손을 잡고, 사물인터넷 기반의 반도체 설계 사업에 진출할 것으로 알려져 업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미 독자적인 휴대폰 모델이나 칩 설계에 나설 준비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실행 역량을 갖추었으니, 개념설계에 나설 경우 그 파괴력이 작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혼하이가 최첨단의 제품 영역에서 개념설계에 도전하는 단계에 이른 것은 우선 세계적 수준의 실행 역량, 즉 현장 제조 역량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회사의 설계도를 받아 생산해주는 을의 위치에 있으나, 납기를 짧게 하고, 금형을 스스로 만들고, 원청업체와 치열하게 논쟁하고 부대끼면서 공정 재설계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등 품질과 원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거듭해왔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남들이 갖지 못한 경험을 축적하게 되었고, 낮은 수준에서 개념설계를 시도하고, 곧바로 실행해 보는 실험을 반복해왔다. 이제 혼하이에서 개념설계를 한 전자제품, 핵심부품들을 눈으로 보게 될 시점이 머지않았다. 모두 만드는 현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제조기반의 현장 실행 역량이 개념설계를 담는 그릇이라는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바로 현장 실행 역량이 있어야 개념설계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제조 역량이 고도로 성숙한 상태, 즉 메뉴팩처링 엑셀런시Manufacturing Excellency를 갖추지 못한 회사는 개념설계를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제조 역량은 개념설계의 필수적인 선행조건이다.

 

가치사슬을 잘게 나누어 고부가가치 부분은 어떻게든 자국 내의 연관기업들에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잣대로 보더라도 한국 제조업의 품질, 속도, 비용 경쟁력은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 제조 역량이 개념설계의 선행조건이라면, 한국산업은 1단계를 무사히 통과했고, 이제 2단계의 개념설계에 도전해볼 수 있는 수험표를 얻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뿌듯한 일이다. 로켓의 1단 엔진이 너무 잘 작동해서 분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겪고 있긴 하지만, 1단 엔진이 아예 작동하지 않거나 힘이 미약했다면 2단 엔진 문제가 제기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행착오의 경험은 개인이나 개별 기업 내부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도 축적된다.

 

제조현장 없이는 새로운 개념설계도 없다. 그래서 미국, 일본, 독일 등 기술 선진국들, 그리고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이 기를 쓰고 첨단의 공장을 자국 내에 만들거나, 심지어 개도국으로 나간 공장을 다시 들여오는 리쇼어링 전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일자리 문제가 아니라 혁신적 개념설계를 선도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생산활동은 개도국에서 하고, 국내에서는 개념설계를 하는 방식으로 국제분업을 하자’는 이야기는 대표적인 착각이다. 생산, 제조현장이 없어지면 개념설계 역량도 사라진다.

현장의 힘은 사람을 키울 때도 중요하다. 학교 교육에서도 교과서와 공식을 넘어 직접 상상하게 하고, 만들어보고, 수정해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마일 커브 :: 제품의 연구개발에서 생산, 마케팅에 이르기까지의 부가가치를 나타내는 곡선. 상품개발에서 부품·소재의 생산, 제조, 판매와 A/S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가치사슬)에 따라서 각 단계의 부가가치를 그려보면, 최고의 부가가치는 핵심 부품과 소재 및 마케팅 서비스에서 나오고 그 중간단계인 제조의 부가가치는 가장 낮다는 개념. 단계별로 부가가치의 정도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웃는 모양을 나타내는 곡선이 나오는데 이를 본따 스마일 커브라고 부른다. 핵심부품·소재 산업의 중요성과 지적재산과 같은 소프트 산업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마일 커브 [smile curve] (한경 경제용어사전)

 

제품이 나오는 단계를 설계, 생산, 판매처럼 나누어서 생각할 때 가운데의 생산단계 보다 앞단계의 설계와 뒷단계의 판매가 더 부가가치가 높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쓰는 개념이다. 부가가치를 세로축으로 하여 그래프를 그리면 양쪽 꼬리가 올라간 입모양처럼 되니 스마일 커브라고 한다. 주장의 핵심은 우리가 스마일 커브의 가운데, 즉 부가가치가 가장 낮은 생산단계에 머물러 있으니 한국산업도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인 설계나 판매와 같은 영역으로 빨리 이동하자는 데 있다.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라는 것도 모두 제조업이라는 현장이 있을 때 경쟁력을 갖는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자동차를 만들지 않는다고 하면, 과연 자동차 디자인 분야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혹은 자동차를 만드는 그 어떤 나라의 자동차기업이 한국 기업에게 자동차 디자인을 맡길려고 할까?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 축적의 힘을 보유한 현장을 살리는 것이 혁신의 모판을 가꾸는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 그래서 어렵지만, 제조현장을 유지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 국가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

 

6장. 축적의 전략 4. 고독한 천재는 없다, 사회적 축적을 꾀하라

ο 혁신은 조합이다

윌리엄 캄쾀바William Kamkwamba는 아프리카의 최빈국 말라위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14세에 돈이 없어 결국 중학교를 중퇴하게 되는데, 어느날 우연히 발전기의 원리를 설명한 대중용 책을 한 권 얻게 된다. 전기공학은 고사하고 물리학에 관한 기초지식도 없던 캄쾀바는 느닷없이 그림으로 나와있던 풍력발전기를 만들기로 작정한다. 여기서부터 그의 놀라운 인생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리저리 주워듣고, 주변 폐차장을 뒤져 부품을 구한다. 구석진 길모퉁이에 뒹굴고 있던 망가진 자전거 바퀴도 중요한 부품으로 등장한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꿈의 풍력발전기가 완성된다. 정말 볼품없는 모양이지만, 발전기 실물을 한번도 본 적 없는 곳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 그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2007년 마침내 유명한 글로벌 지식공유 프로그램인 TED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캄쾀바는 일약 혁신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010년에 ‘바람의 소년The Boy Who Harnessed the Wind’이라는 책도 써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캄쾀바의 발전기가 기술혁신 관점에서 첨단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캄쾀바의 도전정신은 참으로 갸륵하고 놀랍지만, 주변에 이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보완적 지식이 축적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풍력발전기를 꿈꾸었을 때 전력시스템 분야에서 시행착오를 축적한 전문가는 고사하고 기계장비, 재료 등 보조적인 지식과 재료조차 전혀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얼기설기 만든 풍차다.

 

제아무리 기가막힌 현대식 기관총을 가지고서 통일신라시대로 간들, 고장난 총을 수리할 수 있는 금속 기술, 기계 설계와 제작 기술, 총탄을 만들 수 있는 화학 기술 등, 총 한자루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설비, 인력이 없는 조건에서는 곧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대 사회가 축적한 지식과 경험의 수준에 적합한 수준으로만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첨단의 가스터빈만 평생 만들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고수에 오른 사람이 로마시대에 뚝 떨어져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뜨거운 물을 좀 더 오래 담아둘 수 있는 주전자나 만들어내는 정도일 것이다. 캄쾀바 이야기는 아무리 천재적인 개념설계의 아이디어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에 축적된 지식이 없으면, 구현되는 결과물은 볼품없을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결국 주변에 축적된 지식의 양과 수준에 의해 개념설계의 도전 수준이 결정되는 셈이다. 혁신적 아이디어든 천재든 외로우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2015년 12월 21일 스페이스엑스SpaceX사가 발사한 인공위성의 1단 엔진이 지정된 장소에 정확히 출발할 때의 자세로 다시 착륙했다. 이렇게 별탈없이 깨끗하게 다시 착륙한 1단 엔진은 약간의 수리와 검사를 거친 후 다시 연료를 주입해서 재활용할 수 있다. 인공위성 발사에서 대부분의 비용이 1단 엔진을 만드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이 재활용 로켓 발사 개념이 안정화된다면 기존 비용을 10분의 1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스페이스엑스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혁신적 위성발사 시스템을 더 발전시켜, 화성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많은 짐을 우주공간에 올려놓아야 하는데, 현재처럼 한번 발사할 때마다 1단 엔진을 버리는 방식으로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이 일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화성 정착촌 이야기는 약간 의심스럽지만, 이 재활용 로켓 개념이 완성되면 미국이 다시 상업용 위성 발사 시장에서 유럽과 러시아를 제치고 리더십을 발휘하게 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쉽게 말해 비즈니스 기회가 보이는 것이다.

 

이후로도 2016년 말까지 6회 이상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시험적 모델에서 검증된 모델로 성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혁신적인 모델의 성공을 진두지휘한 일론 머스크는 사실 로켓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창업한 페이팔Paypal이라는 온라인 결제서비스 회사를 2002년 이베이eBay에 매각하여 벼락부자가 된 전형적인 실리콘밸리의 청년 갑부였다. 전공으로 따지자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정도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 사람이 로켓 발사의 새로운 모델을 성공시켰다는 이야기는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혁신적인 모델을 시도해 보자며 의기투합하여, 스페이스엑스를 창업하던 2002년 무렵 함께 참여했던 전문가들의 면면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보잉Boeing과 나사NASA 등 로켓 관련 회사와 조직에서 로켓 제조, 발사, 제어, 유도, 신뢰성 검증, 소재 등 각 분야별로 수십년간 시행착오의 경험을 온몸으로 축적한 초절정 고수들이 함께 한 것이다.

 

추진체 엔지니어로서 스페이스엑스의 창립과 함께 한 톰 뮐러Tom Mueller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뮐러는 어린 시절부터 추진체에 관심을 갖고 뒷마당에서 추진체 모형을 만들면서 컸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 추진체에 관한 기초지식을 더 심화시켰고, 결국 추진체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TRW의 개발엔지니어로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15년간 여러 추진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시행착오의 경험을 쌓았고, 전문가로서 성숙해갔다.

흥미로운 것은 추진체 관련 공부를 하고 추진체 회사에서 근무하면서도, 일과 시간 외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추진체 관련 민간동아리 활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퇴근 후 자신의 차고에서 본인이 직접 설계한 로켓 엔진을 만들고, 주말에는 민간 로켓 마니아 클럽인 ‘RRSReaction Research Society’ 멤버들과 함께 모하비 사막에서 실험을 거듭하는 식이었다. 회사에서는 관료주의 때문에 시도해볼 수 없었던 새로운 추진체 아이디어를 동호회를 통해 마음껏 시도하였다. 결국 동호회 단체에서 만든 것으로는 세계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액체연료 로켓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일론 머스크가 그를 찾아가 영입한 것이다. 이처럼 오로지 그 분야에서 아직 개척되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찾아 끊임없이 시도하고, 그 경험을 축적한 사람이야말로 새로운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다.

 

윌리엄 캄쾀바와 일론 머스크는 공통적으로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시각에서 볼 때 놀라운 도전을 시도했고, 젊기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끈기로 시행착오를 버텨내면서, 혁신의 결과물을 성공적으로 얻었다는 점까지도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윌리엄 캄쾀바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풍력발전기를, 일론 머스크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재활용 로켓 발사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바로 주변에 동원가능한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 얼마나 되는지가 차이를 만들었다. 같은 꿈을 꾸어도 주변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이처럼 다르다.

거꾸로 생각하면, 주변에 무엇이 있느냐가 꿈의 크기와 종류를 결정하기도 한다. 말라위의 가난한 마을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화성행 로켓 발사를 꿈꾸는 청년을 만나볼 수 없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서는 자기집 뒷마당에서 뚝딱 뚝딱 태양광 발전기를 만들어보는 초등학생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혁신은 조합이다. 따라서 어떤 조합의 재료들이 있는가에 따라 나오는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1455년 구텐베르크가 서양에서는 최초로 금속활자를 이용해서 근대적인 의미의 인쇄물을 출판한다.

그 이면에 최소한 3가지의 핵심적인 축적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먼저 활판을 고르게 압착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당시 그가 살던 마인츠는 포도주의 주산지로서 포도 압착기 기술이 세계 최고로 발달해 있었다. 또한 금속활자를 정밀하고도 대량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다행히 당시 독일은 금속 가공 기술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종이도 문제였다. 성경 1권이 대략 2,000쪽인데 8쪽마다 양 한 마리에서 나올 만큼의 양피지가 들어갈 정도이니 양질의 종이를 다량 구할 수 없었다면, 인쇄술도 무용지물이 될 뻔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로 맞은편에 있는 도시 프랑크프루트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통해 당시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종이를 원없이 구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를 해보아야 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더라도 주변에 이러한 축적된 자산들이 없었다면, 그저 아이디어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거나, 캄쾀바의 풍차처럼 수준이 낮은 상태로 만들어져,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또 다른 기술적 진보를 기다려야 했을지 모른다.

 

자전거가 없었으면 비행기도 영원히 땅 위에서 뜨지 못할 뻔했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포인트가 엔진의 추력이 아니라 자세의 제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근육이 울퉁불퉁한 보디빌더가 힘차게 던지나 코흘리개 유치원생이 가볍게 던지나 종이비행기의 비행거리가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좋은 엔진을 만들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자세를 제어하는 것이라는 점을 파악했고, 이 제어 부문에 집중한 끝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자세 제어의 핵심은 넘어지는 방향으로 자세를 따라 움직여야, 추락하지 않고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자전거의 원리와 정확히 같다. 라이트 형제의 성공은 당시 절정에 이르렀던 자전거 기술을 접목한 덕분이었다. 여기서 반전 포인트는 라이트 형제가 자전거포를 운영했던 초절정 자전거 전문가였다는 점이다. 자전거 고수로서의 축적된 경험이 없었다면 비행기라는 혁신적 개념설계가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혁신의 역사를 새롭게 쓴 제품과 서비스가 아이디어 하나로 성공한 것이라기보다 이웃에 있는 보완적 기술이 함께 발전하면서 비로소 꽃피우게 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실제로 모든 혁신의 뒷이야기를 살펴보면 보완적 지식이 있고 없고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큰 기준이 된다. 따라서 어떤 혁신 사례에서라도 조금만 조사해보면 핵심이 되었던 보완적 자산을 금세 발견할 수 있다.

 

유튜브나 스카이프나 아이디어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전송 속도와 압축기술이라는 보완적 자산이 충분히 성숙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공했던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도 같은 이야기다. 아이디어나 시제품은 이미 70년대에 등장했지만 그 영향은 미미했다. 그러다가 메모리 칩, 특히 낸드플래시메모리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비용은 하락하고, 용량은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고화질의 사진을 대량으로 저장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디지털 카메라는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되었다.

기술 선진국이란 달리 말하면, 이런 혁신을 위한 보완적 지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고, 축적된 경험이 모여 있는 곳이다. 따라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혁신적인 개념설계는 아무데서나 탄생하지 않는다. 억울하지만 선진국에서만 탄생한다. 그런데 이런 기술 선진국이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게 문제다.

 

ο 오래된 사회적 축적, 기술 선진국의 비밀

‘묵은 별빛’이란 시적인 표현이 있다. 지금 밤하늘에 반짝이는 저 별빛도 알고보면 수백, 수천년 전 출발한 빛이다.

 

우리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혁신도 따지고 보면 하늘에서 느닷없이 툭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래된 것들이 모이고, 다시 조합되고 쌓여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혁신은 묵은 별빛이다.

20대 초반의 더벅머리 청년이 어떤 회사 앞에 자전거를 뉘어놓고는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을 들어선다. 조금 있다가 현관문을 다시 열고 나오는 청년은 수백억원에 자신의 회사를 팔아넘기고 백만장자가 되었지만, 다시 슬리퍼에 자전거를 끌고 유유히 사라진다. 이처럼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잭팟을 터트린 청년 사업가의 이미지는 실리콘밸리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대표적 이미지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사실 대중조작에 가깝다. 실리콘밸리야말로 대표적으로 오래된 축적의 허브다.

스탠포드 대학 공대 학장이던 프레데릭 터먼은 1940년대부터 스탠포드 대학의 젊은 인재들과 당시 떠오르던 전자산업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1956년에는 실리콘밸리의 미항공우주국NASA 센터 인근에 잠수함 탑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는 ‘록히드 미사일 및 우주’ 분사가 설립되었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 자체도 돈 호플러라는 칼럼리스트가 1971년에 전자업계의 주간지인 ‘일렉트로닉 뉴스Electronic News’에 ‘실리콘밸리 USA’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실리콘밸리 이곳저곳에는 길게는 수십 년씩 경험을 축적한 기업과 전문가들이 가득하다. 미디어를 통해 각색된 이미지를 가진 젊은 청년 창업가는 축적된 전문가들이 함께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계기를 제시했던 것에 불과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런 축적된 고수들이 청년 기업가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구글에서 72세된 엔지니어가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이런 축적된 고수가 구글이라는 조직을 통해 활약할 공간을 얻은 셈이다.

이곳저곳에 축적된 경험과 지식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클러스터 내 다른 곳에서 의외의 열매를 맺기도 한다. 팔로알토에 있는 제록스 연구소PARC의 아이디어가 길을 건너 애플에서 꽃을 피운 것도 좋은 예다.

 

혁명이라는 표현을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변화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지만, 알고보면 연관된 아이디어들이 중첩되고 쌓이면서, 수십년에 걸쳐 개념설계가 조금씩 축적되어 온 결과이다.

 

인공지능만 하더라도 1956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의 존 매카시John McCarthy 교수가 주도한 회의에서 명칭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70년대 한계에 부딪혀 인공지능 연구가 거의 사라지는 빙하기에 들어간다. 80년대 의사결정을 보조하는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들이 발달하면서 다시 한번 부활했으나, 역시 또다른 한계로 빙하기를 맞이한다. 인공지능은 2000년대 들어 검색엔진의 등장과 빅데이터, 강력한 컴퓨팅 파워가 합쳐지면서 머신러닝 혹은 딥러닝이라는 키워드를 달고 다시 등장한다. 이처럼 빙하기와 해빙기를 거듭해가면서, 느리지만 조금씩 전진하는 밀물처럼 꾸준하게 시행착오를 축적하면서 성숙해가고 있다. 따라서 하사비스의 알파고가 갑작스럽게 4차 산업혁명을 몰고 온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최소 60년 전에 출발한 별빛이 한발씩 공간을 건너와 지금 눈에 보이게 된 것일 따름이다. 아직도 많은 새로운 개념설계들이 쌓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벌써부터 또다른 인공지능의 빙하기를 예상하는 전문가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이런 전문가들이 다가올 인공지능 기술의 빙하기에 대해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는 것도 이런 밀물과 썰물의 누적 과정이 당연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혁신이 성장하는 과정은 누적적 조합의 과정이다. 먼저 기존의 재료로부터 다양한 조합이 생기고, 그 가운데 시장에서 선택된 극소수의 혁신이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것들은 다음 단계의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도전적 조합의 귀중한 재료가 된다.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누적해나가면, 과거와 다른 차원의 혁신적 제품과 서비스를 얻게 된다. 타임슬립을 해서 2017년의 서울시내 한복판에 떨어진 신라시대 사람처럼 혁신적 조합과 누적의 중간과정을 보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최근의 혁신 결과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마술로 보일 수밖에 없다. 기술 후발국의 입장도 이와 같다. 끊임없이 놀라운 혁신으로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분야별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 그리고 그런 기업들을 잔뜩 보유하고 있는 기술 선진국들은 후발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듯한 경이로운 수준에 오른 국가다. 그러나 그 비밀은 복잡하지 않다. 바로 도전적 시행착오 경험의 축적을 다른 국가보다 먼저 시작했을 따름이다.

 

우리 눈앞에 있는 그 어떤 반짝이는 혁신 결과라도 잘 분석해보면 오래 묵은 조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정보통신기술의 구체적인 연원은 200년도 훨씬 더 넘은 옛날에 시작된다. 1800년대 초반에 현대적인 컴퓨터의 기본 개념을 제시한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부터 미분해석기를 고안한 배니버 부시Vannevar Bush, 범용 컴퓨터의 개념을 제시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최초의 컴퓨터 컴파일러를 개발한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 프로그램 저장식 컴퓨터의 가능성을 제시한 폰 노이만von Neumann, 인텔이라는 위대한 기업을 만든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와 고든 무어Gordon Moore 그리고 앤디 그로브Andy Grove, 인터넷 프로토콜을 완성한 빈트 서프Vinton Cerf와 밥 칸Bob Khan을 거쳐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름들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Bill Gates,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 구글의 래리 페이지Larry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까지 계속 연결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앉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에이다 러브레이스 :: 1815년 12월 10일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1788~1824)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1835년 윌리엄 킹 러브레이스와 결혼했으며 결혼 3년 후 남편이 작위를 받으면서 그녀 역시 백작 부인이 되었다. 
평범한 귀족부인으로 살면서 무료함을 느껴가던 중 발명가이자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찰스 베비지(Charles Babbage, 1791~1871)의 발명품 소개회에 참석하면서, 그의 후원자 겸 동료가 된다. 당시 베비지는 모든 종류의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계산기계인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을 설계 중이었다. 에이다는 베비지의 해석기관이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설정된 조건을 만족하는 한 같은 계산이 반복되도록 하는 ‘루프(loop)’, 전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필요할 때마다 사용한 공식을 다시 사용하는 ‘서브루틴(subroutine)’, 구문을 건너 뛰어 실행하는 ‘점프(jump)’, 조건식이 달린 구문인 ‘if’ 등의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1842년 베비지와 함께 해석기관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베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분석(Observations on Mr. Babbage’s Analytical Engine)>을 출판하게 된다. 특히 베비지는 에이다의 재능에 감탄해 그녀를 '숫자의 마술사(enchantress of numbers)'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러브레이스는 찰스 배버지의 기계인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에 관한 노트를 남겼는데, 그 노트는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적은 최초의 '알고리즘'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러브레이스는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명성을 후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도박에 빠져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1852년 36세의 나이에 자궁암으로 사망했다.
한편 생전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녀의 이름은 10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75년 미 국방부는 서로 난립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들을 통합하기 위한 작업을 완료한 뒤 이 언어를 ‘에이다’라고 명명해, 에이다를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인정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이다 러브레이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강철의 재료적, 구조적 속성은 오래전부터 희미하게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산업 혁신의 재료로서 사용할 지식이 축적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세계 최초의 철교는 1779년 영국 콜브룩데일Coalbrookdale에 건립된 강철교량이니, 거대 구조재료로서 철강이 가진 특성은 최소한 그 이전부터 탐색된 셈이다. 참고로 이를 우리나라 역사연표로 따지면 정조가 즉위(1776)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혁신 또는 혁신적 개념설계의 발현과정은 자연 상태에서, ‘시간’이라는 모태 속에서 아주 느리게 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같다.

 

독일의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지역에서는 수백년 전부터 시계를 만들어온 클러스터가 조성되어 계승되어 왔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계산업 자체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연관산업인 의료공학 분야, 특히 외과용 기구 제작 분야에서 활동하는 기업만도 400개가 넘을 정도로 성업 중이고, 모두 글로벌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히든챔피언들이 되었다. 이 외과기구 제작에는 정밀기계 기술 역량이 핵심인데, 바로 클러스터에서 시계를 만들면서 쌓은 노하우가 바탕이 된 것이다. 심지어 카를 라이빙어 메디친테히닉Karl Leibinger Medizintechnik사처럼 아예 명시적으로 시계 제조업으로부터 시작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관찰들을 종합하여 지멘스의 한 이사는 “독일은 21세기에 성공을 구가하기 위해 중세에 기원을 둔 기술적 기반을 활용한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100년이 넘도록 축적된 시행착오의 힘으로 세계시장의 표준을 선도하는 제품을 내놓고 있다. 이것이 잃어버린 20년이 지나고도 일본 산업이 망하지 않는 이유, 4차 산업혁명의 한가운데에서도 일본 기업들이 당황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 시점에서 바로 우리 옆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중국의 전략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진국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시행착오 경험을 희한하게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법이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룬 부의 상당 부분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가 벌어준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현대의 기술혁신이 가져다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모두 과거로부터 이어진 오래된 축적의 혜택을 은연중 누리고 있는 셈이다.

 

천재 혹은 놀라운 혁신은 아무곳에서나 탄생하지 않는다. 반드시 주변에 축적된 지식이 있을 때 탄생한다. 기술 선진국의 참모습은 각 분야에서 오랜 시행착오의 경험을 축적한 고수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다. 이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혁신적 조합이 생기고, 이 조합의 결과가 다시 다음 단계 혁신적 조합의 재료로 활용되면서 혁신은 누적적으로 진화한다. 혁신은 소걸음으로 걷는다. 그러나 원래 컸던 거인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며 진격의 거인이 되어, 천천히 걸어도 후발주자와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기술 선진국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기술 선진국에 있는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오랜 축적의 시간, 그 끝에서 개념설계 역량이 숙성되고 쌓여야 한다.

 

가령 청년 벤처들이 너무 가벼운 비즈니스 모델에 매달리는 경우를 보면서 혁신적 아이디어에 도전하지 않는 청년 사업가들의 박약한 도전의지를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변에 축적된 자산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연결이 쉽지 않다면,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의 청년 사업가들은 윌리엄 캄쾀바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 기업가정신은 충만하지만, 결국 기특하거나 기발한 모델, 그러나 남들도 따라하기 쉬운 가벼운 비즈니스 모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의지를 탓할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 글로벌 수준에 이른 대기업들이 실리콘밸리의 기업과 손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의리 없다고 뒷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도 축적된 시행착오의 허브와 연결해서 더 높은 수준의 개념설계에 도전해야 하는 대기업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아주 합리적인 노력이다.

 

한국의 산업계에는 축적된 자산이 적고, 그래서 벤처의 아이디어는 가벼울 수밖에 없다. 천신만고 끝에 글로벌 수준에 오른 대기업이 기술 선진국 벤처기업들과 손을 잡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 시간 격차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선진국의 축적에 연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 ‘글로벌로 가야Go Global’ 한다. 전 세계 이곳저곳에 쌓여있는 시행착오를 찾아 열린 자세로 연결하고 배워야 한다. 우리가 가든 데리고 오든 가릴 일이 아니다. 벤처든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마찬가지다. 개방하고 나가고 또 들여와야 한다.

우리 안에서 그나마 연결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연결해서 새로운 조합의 빈도를 높이는 것도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라도 축적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해야 한다.

 

7장. 축적의 전략 5. 중국의 경쟁력 비밀을 이해하고 이용하라

ο 우리가 아는 ‘메이드 인 차이나’는 더 이상 없다

아르헨티나의 국토면적은 대한민국의 약 28배에 이르고, 그곳의 팜파스 초원은 아르헨티나 국토면적의 20%에 이를 만큼 드넓다. 오랫동안 소를 방목해서 키우던 이 초원 지역의 64%가 현재 콩 재배지로 바뀌었다. 바로 중국인의 못 말리는 돼지고기 먹성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 돼지의 절반인 4억 7천만마리를 사육하고 있고, 2012년 한 해 동안 5,300만톤의 돼지고기를 소비했다. 돼지의 체중 1kg을 불리기 위해서는 3kg의 곡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중국은 세계 콩 수출량의 60%인 6,500만톤을 수입한 세계 1위 콩 수입국이다. 중국이 수입하는 콩의 상당부분은 바로 아르헨티나 팜파스에서 건너온다. 놀라운 숫자는 계속된다. 13억 5천명의 인구, 6천만개의 기업, 인구 천만 이상의 도시 13곳, 연소득 3만달러 이상의 중산층 인구 3억명, 현금으로만 10억원 이상을 가진 자산가 240만명, 자동차 판매 세계 1위 등등. 개혁개방 이후 지금까지 연평균 10% 가까운 성장을 지속했는데, 1억 이상의 인구를 가진 단일국가가 이렇게 오랫동안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한 경우는 없다. 덕분에 일인당 국민소득이 80년 1,000달러가 되지 않던 수준에서 경상달러 기준으로 10,000달러 수준에 이르렀다.

 

팜파스 :: 인디오 말로 평원(平原)을 뜻한다. 브라질 최남부 리오그란데두술주에서 아르헨티나의 중심부와 우루과이에 걸쳐 있는 넓은 지역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반지름 600∼700km 범위에 전개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그란차코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파타고니아 대지에 연결된다.팜파스는 아르헨티나 총면적의 1/5 가량에 불과하나, 전 인구의 약 3/4이 밀집해 있다. 이 평원은 대부분 해발고도 150m 이하의 구릉으로 된 대초원인데 토양은 대부분이 비옥한 롬층으로 되어 있다.
팜파스는 주로 강수량에 의하여 중심지역을 지나가는 서경 62°선을 기준으로 동서로 2등분된다. 대서양 연안에 가까운 동부는 연강수량 500mm 이상으로 습윤(濕潤) 팜파스, 서부는 건조 팜파스라고 한다. 여름은 상당히 덥고, 초여름에는 강수량이 많으며 세계적인 대농목지대를 이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습윤 팜파스에서는 옥수수, 아마인유(亞麻仁油)를 짜기 위한 아마 ·해바라기 ·유채(油菜) 등의 채유식물(菜油植物)이 재배되고, 건조 팜파스에서는 밀을 재배한다.팜파스의 개척은 1870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목양(牧羊)이 성하였으나, 그 후 냉동업의 발달과 목초 앨팰퍼(alfalfa)의 보급으로 육우(肉牛)의 사육이 발달하였다. 근년에 밀 재배지가 확장되면서 목양은 건조 팜파스 지역으로 밀려났고, 목우(牧牛)는 습윤 팜파스 지역으로 집중되었다. 또한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방사상의 철도망(鐵道網)이 발달하여 팜파스 개발에 큰 공헌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팜파스 [Pampa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경공업, 중화학공업, 정보통신산업처럼 전통적인 산업 발전의 순서를 무시하고, 단계를 생략하면서 발전하는 전략이 중국산업의 또 다른 특징이다. 정보통신 인프라의 경우에도 유선전화, 무선전화, 인터넷 데이터통신으로 단계를 밟아 가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인터넷부터 시작한다.

 

2016년 11월 11일 중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인 광군제光棍節, Single’s Day에서 알리바바는 단 하루 동안 21조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하루 동안의 매출 규모도 놀랍지만, 3만개 이상 브랜드 600만종 이상의 상품이 거래되고, 수억명이 결재 클릭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거래체결이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광군제 이후 수일간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물류가 놀라운 규모와 속도로 무사히 이루어졌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6년 광군제 총 매출액은 1,207억 위안(한화 20조 6,723억 원)을 기록하였으며 52초 만에 10억 위안을 기록하고, 6분 58초 경과 후, 100억 위안(1조 7천억 원)을 돌파했다. 광군제 당일부터 20일까지 200편의 고속철을 배송에 긴급 투입하여 하루 평균 2억개의 택배를 소화했다.

 

광군제 :: 중국에서 11월 11일을 가리키는 말로, 독신절(솔로데이)이라고도 한다. ‘광군(光棍)’은 중국어로 홀아비나 독신남, 또는 애인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1’자의 모습이 외롭게 서 있는 사람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솔로를 챙겨주는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혼자를 의미하는 '1'이 두 개가 겹친 1월 1일을 소(小)광군제, 세 개인 1월 11일과 11월 1일은 중(中)광군제, 4개가 겹친 11월 11일은 대(大)광군제라고 부른다. 이날은 젊은 층의 소개팅과 파티, 선물 교환 등이 주요 이슈를 이룬다.
특히 2009년 광군제를 맞아 중국의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그룹이 자회사인 타오바오몰을 통해 독신자를 위한 대대적 할인 행사를 시작하면서 광군제는 중국 최대 쇼핑일로 탈바꿈했다. 이후 대부분의 온라인 쇼핑몰이 이 할인 행사에 동참하면서 미국의 최대 쇼핑시즌인 '블랙 프라이데이'나 '사이버 먼데이'를 능가하는 최고의 소비 시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군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중국 선전은 1980년 중국 최초 경제특별구역으로 지정된 이래 발전을 거듭해왔고, 최근 혁신적 창업의 전진기지이자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인사업자를 포함한 기업 수는 인구 1000명 당 73.9개사로 베이징의 71.7개사를 넘어 중국 전체 1위이며, 중국 대도시 중 창업자 배출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이다. 2014년 선전시의 IT산업 생산액은 1조3829억 위안으로 중국 IT산업 총 생산액의 1/7을 차지하고, IT제품 수출액은 1,347억 달러로 중국 IT제품 총 수출액의 1/6을 차지하는 등 선전은 중국 IT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전 소재의 14개 기업이 2014년 중국 100대 IT기업에 새로 진입했으며, 58개 기업이 국가중점기업으로 선정되었고 2013년 3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신규기업 68.8만개, 신규 개인사업자 54.3만명으로 급속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기술 선진국의 비밀을 살펴보면서, 혁신적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역량은 적어도 2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축적한 끝에 생기는 것이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발 개념설계가 등장할 수 있을까? 중국이 근대산업의 패러다임으로 시행착오를 축적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더 엄격하게는 78년 개혁개방 이후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독창적인 개념설계를 할 수 있다면, 지금껏 기술 선진국의 비법으로서 축적의 시간을 강조해온 것이 오히려 잘못된 주장이 아닐까? 아니면 혹시 중국이 축적의 시간을 압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ο 공간의 힘으로 축적의 시간을 압축한다

중국은 분명 후발주자인데도 기술 선진국이 독점적으로 수행해오던 개념설계를 시도하고 있고, 또 국제입찰에서 자체적인 기본설계를 바탕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것도 역시 후발주자로서 경험을 축적할 시간은 짧았지만, 반대로 짧은 시간에 그 어떤 나라도 경험해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시행착오의 양을 축적한 덕분이다. 아직까지도 이런 성공사례를 중국 정부의 외교적 힘이 작동한 결과라거나 공기업 체제 때문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기술혁신의 진화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부러 현실을 외면하려는 안타까운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중국발 개념설계의 비밀은 넓은 내수시장, 즉 공간의 힘으로 시행착오를 빠르게 축적하면서 개념설계 역량을 기르는 데 필요한 시간을 압축한다는 데 있다. 공간의 힘은 많은 시행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또한 풍부한 니치마켓을 제공해서 다양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된다. 중국산업계에는 휴대폰이나 모터사이클을 만드는 회사가 수백 개가 넘기 때문에 한 기업이 중국시장 전체를 차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TV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지역별, 내용별로 극단적으로 차별화되어 있기 때문에 1%의 시청률을 확보하면 유례없는 성공으로 일컬어질 정도다. 소비재(B2C)뿐만 아니라 생산재(B2B)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시장이 차별화되면, 특이한 개념설계를 시도한 기업이라 하더라도 작은 니치에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 임계규모의 시장을 확보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시장이 크고 극단적으로 차별화되어 있으면, 다양성이 높아지게 되고, 그 결과 이들을 재료로 해서 예상치 못했던 혁신적 조합이 탄생할 확률도 높아진다. 풍부한 니치마켓이 다양한 조합의 수를 늘리고, 시행착오의 보존 가능성을 늘려, 축적의 시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넓은 공간의 힘으로 시간을 압축해나가는 한편, 기술 선진국이 오랜 시간 쌓아놓은 축적을 중간 단계에서 이전해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전략이 기술 중심의 글로벌 챔피언 기업과 협력관계를 구축하거나 아예 인수합병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중국 기업이 이런 개념설계 역량을 보유한 기술기업을 인수합병하고 난 후 공격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하지 않으며, 특히 고도의 경험을 축적한 전문가들을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대우한다는 점이다. 개념설계를 위한 시행착오의 경험이 결국 사람에게 축적된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마치 여우같은 호랑이의 행보다.

 

해외에서 귀한 시행착오 경험을 축적하며 성장한 중국계 인재들을 데려오고 연계하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다. 예를 들어 샤오미의 공동창업자 7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초절정 고수들이다. 회장으로서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린빈Lin Bin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하여 윈도우2000 개발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골드스타상GoldStar Award을 수상하기도 한 최고급 엔지니어였다. 다른 창업자들도 각 분야의 프로들이기는 마찬가지다. 퍼듀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황장지Kong-Kat Wong 부사장은 린빈 사장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였다. 조지아 공대를 졸업한 저우광핑Guangping Zhou 부사장은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모토로라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홍펑Feng Hong 부사장 역시 퍼듀 대학 출신으로 구글에서 4년간 근무하면서 구글맵의 3D 지도 개발을 주도했다. 류더De Liu 부사장은 미국 아트센터 컬리지 오브 디자인을 졸업한 뒤, 베이징과학기술대 공업디자인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리완치앙Wanqiang Li 부사장도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가다. 이런 축적된 경험을 가진 고수들이 샤오미의 혁신적 도전을 뒷받침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해외에 진출하여 글로벌 챔피언 기업에서 시행착오의 경험을 쌓고 있는 중국계 인재들이 중국 안과 밖에서 만나 서로의 독특한 경험을 공유하고 조합하면서, 개념설계의 수준도 날이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인재 영입 과정을 가속화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백인계획, 천인계획, 만인계획 등을 통해 글로벌 인재로 성장한 중국계 전문가를 유치하고 국내 인재와 섞어가는 전략을 국가 차원에서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90년대 백인계획 당시 귀국하는 과학자에게 정착금조로 1994년 기준으로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500배가 넘는 금액을 파격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천인계획에서는 정착금과 함께 주택, 의료, 교육 등 12가지 파격적인 혜택을 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해외의 중국 유학생 404만명 중 222만명이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귀국유학파들이 현재 중국의 혁신을 이끄는 리더로 성장하고 있다. 2000년 바이두를 창업한 리옌훙 회장, 화웨이의 최고기술책임자 리싼치, 샤오미의 린빈 회장도 대표적 귀국유학파다.

도전적 시행착오 경험의 압축을 촉진하기 위한 국가정책도 눈여겨 볼 만하다. 과학기술 및 인적자원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현대 중국의 성립 이래 공산당 정부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입장인데, 그 방침에 따라 미국보다 많은 공학 분야 석박사를 배출하는 고등교육 시스템을 일구어 냈다. 시행착오를 쌓아나갈 인재의 모판을 만드는 것이다.

공산당 정부가 산업정책에서 실험과 실패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실용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점도 도전적 시행착오의 축적에 도움이 되고 있다. 국토 전체에 전화선을 까는 대신 일부 지역에라도 광케이블을 설치하겠다는 과감한 정책적 의지도 이런 실용주의적 태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도전이다. 즉, 단계를 생략하는 과감한 국가적 도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를 무릅쓰고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고 있다. 설사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또 다른 정책으로 해결하고 수정하면서 앞으로 나가겠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으니, 도전의 목표가 높고, 계획 기간 자체가 길게 설정될 수 있다.

 

한국 내 발전설비 총량이 최근 100GW를 조금 넘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중국은 2015년 한해에만 143GW 용량의 신규 발전설비를 증설했다. 한국이 지난 수십년 간 누적해온 총 발전설비 용량보다 더 큰 용량의 설비를 매년 한 번씩 짓는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셈이다.

 

시행착오를 오래도록 축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참아주는 금융의 역할도 중요한데, 메이저 은행인 중국은행, 중국공상은행, 중국건설은행, 중국농업은행 등이 혁신적 도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인내심 있는 금융Patient Capital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파산으로 인해 금융부실이 누적되거나, 부정부패에 의해 의사결정이 왜곡되는 문제가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중국 정부의 실용주의적 원칙 하에 문제를 발굴하고, 고치는 활동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중이다. 중국이 가속적 축적을 할 수 있는 배경 중 하나가 이런 실용적이고 중장기적인 시각을 가진 정부 정책이다.

 

기술 선진국들이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축적하면서 개념설계 역량을 키워왔다면, 중국은 넓은 공간을 이용해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시행착오를 축적하면서, 축적에 필요한 시간을 압축하고 있다. 전통의 기술 선진국들이 1년에 1번씩 100년에 걸쳐 100번의 시행착오를 축적해왔다면, 중국은 1년에 10번씩 10년만에 100번의 시행착오를 축적하는 셈이다. 

지금껏 한국산업의 발전모델이 기술 선진국의 개념설계를 받아와서 빠르고, 실수없이 실행하는 것이었다면, 가까운 미래에 가장 우려스러운 경쟁구도는 중국이 개념설계를 제시하고, 한국이 실행하는 모델이다.

 

 

 

PART 3. 축적에서 길을 찾다

8장. 성장 정체의 진정한 원인

ο 기술 역량이 발전하는 단계: 출발 - 실행 - 개념설계

저개발국의 상황은 대체로 이렇다. 대부분의 노동인구가 크지 않은 농토에 묶여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의 농업활동을 수행한다. 문맹률은 높고 부의 편중이 극심하다. 농업을 제외하면 소수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필품을 생산하거나, 소소한 물건들을 유통판매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기술혁신 역량의 관점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가 로켓 발사로 비유하면 아직 출발 전 대기 상태다.

이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산업발전이 시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농업기반의 저개발국 상태에서도 제도적, 문화적 맥락이 촘촘히 얽혀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신분제도나 종교적 억압이 있는 경우도 있고, 전통적 관행이나 이를 정당화하는 각종 법과 제도들이 나름 형성되어 있다. 인간사회에서 제도적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유무형의 제도적 맥락은 곧 이해관계자들의 관계망에 투영되는데, 그 결과 현재의 저개발 상태를 지속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게 작용한다. 대체로 저개발국일수록 소수의 특권층이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있는 빈곤국가 상태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절로’ 산업발전이 시작되는 행운은 ‘병풍에 그린 닭이 우는’ 확률만큼이나 낮다.

국가적 규모의 자연재해나 정변, 혹은 기타의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의 관계망이 해체되는 일시적인 진공상태가 만들어지면 새로운 제도적 맥락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지금 선진국들의 발전 사례를 참조하면, 이 단계에서는 대체로 국가 정책 차원의 의지와 개입에 의해 발전의 씨앗이 형성된다. 미국의 독립 이후 국부이자 초대 재무장관인 알랙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1791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미국 산업화의 출발을 위해서 유치산업 보호와 같은 국가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일이나,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가 1841년 보고서에서 독일 산업의 추격을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정부의 지원과 보호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처음에 산업발전이라는 거대한 바퀴가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출발하도록 만드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일단 일인당 국민소득을 증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천연자원의 수출에 의존하거나, 산업의 외형적 규모를 빨리 키워야겠다는 욕심에서 외국인 직접투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산업은 기술 역량이 거의 없는 속빈 강정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국가들은 저개발국 상태일 때보다 오히려 소득불균형도 더 커지고, 성장잠재력도 없는 발전불능의 상태에 빠지기 쉽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 몽고와 같은 체제이행국가(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몽골 등 80년대 후반부터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한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체제전이국가라 한다), 남미의 대부분 국가들이 일단 경제발전은 시작했지만, 여전히 기술 역량을 거의 축적하지 못한 낮은 수준의 개발도상국으로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1단 엔진의 단계에서는 제조업 기반을 마련하고, 수출을 장려하고, 인내심있는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조업 생산을 시작하게 되면, 설계도를 해석하고 실행하는 산업 활동의 기본적 역량을 축적할 수 있다. 수출을 통해 다양하고 까다로운 수요를 접하면서 실행 역량을 더 높여나갈 수 있고, 산업친화적이고 인내심 있는 금융시스템을 통해 중장기적 설비투자와 다음 단계를 위한 혁신 투자의 기반을 얻을 수 있다. 이 모두는 중진국 수준까지 ‘실행 역량’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고, 서로 강화하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에 더해서 한번 해보자는 국민적 공감대까지 더해지면, 저개발국 산업은 자갈밭에서 처음 바퀴를 굴리기 시작하는 단계로 들어서며, 비록 덜컹거리긴 하지만 로켓은 출발한다.

 

후발 개발도상국이 더 최신의 장비와 거기에 따라 붙어있는 최신의 매뉴얼을 들여오고, 다소 절박감이 떨어진 선발 개발도상국보다 더 열정적으로 학습과 효율개선의 의지를 불태운다. 더 높은 실행 역량으로 무장한 후발 개도국에 비해 선발 개도국은 상대적으로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선발 개도국의 고도 상승은 서서히 멈춘다. 이 가운데서도 작게나마 개념설계에 도전하고, 그 경험을 쌓아나간 운좋은 일부 국가가 선진국으로 가는 좁은 경로를 타고 고도 상승을 다시 시작한다. 이 경로를 한번 타기 시작한 극소수의 선진 국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개념설계 역량이 강화된다.

그러나 기술 선진국이 되었다고 영원히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념설계 역량은 현장과 사람에 암묵적으로 체화되는데, 현장, 즉 산업의 물적 기반을 잃어버리거나 창의적 도전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도가 하락한다. 그나마 쌓아두었던 실행 역량으로 근근이 버티기는 하겠지만, 산업기반이 사라졌기 때문에 경쟁력은 날로 하락한다. 유럽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PIGS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이탈리아는 70년대 현대의 포니 자동차를 디자인해 주었을 만큼 발달한 기계산업을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은 지금도 에어버스Airbus 제조에 참여하고 있을 만큼 개념설계 역량이 세계적 수준이었다(에어버스는 유럽 각국이 미국 보잉에 대항하기 위해 컨소시엄 형태로 1970년 세운 여객기 제작회사로서 독일·프랑스가 각각 38%, 영국 20%, 스페인 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는 조종석과 바퀴, 독일은 전후방 동체, 영국은 엔진, 주날개와 수직날개, 스페인은 꼬리날개 및 일부 부품을 개발·생산하고, 프랑스·독일·스페인에서 최종 조립하는 형태로 분업화돼 있다). 그러나 산업기반이 소실되면서 개념설계 역량도 동시에 사라지고 있으며, 현장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실행 역량마저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숙련된 기술자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념설계 역량이란 것이 한번 확보되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량을 보관하고 있던 저장고가 없어지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PIGS :: 유럽 국가 가운데 심각한 재정적자를 겪고 있는 포르투갈(Portugal), 이탈리아(Italia), 그리스(Greece), 스페인(Spain)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조어다. 2008년 7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왜 돼지(PIGS)는 날지 못하나'라는 기사를 통해 처음 사용했다. 이후 유럽 언론들이 아일랜드(Ireland)도 PIGS 국가에 포함시키면서 PIIGS라는 용어를 쓰는 곳도 있다. PIGS 국가는 금융위기 이후 경기부양을 위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 재정상태가 나빠졌다.
한편, 극우 정부가 집권해 난민을 거부하고, 과도한 나랏빚에 시달려 유럽연합(EU)을 위기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은 폴란드(Poland), 헝가리(Hungary), 이탈리아(Italia), 그리스(Greece), 스페인(Spain) 등 5개국을 가리켜 PHIGS라고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PIGS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0세기가 밝기 전에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배워온 지식과 수입한 기계로 섬유공장을 시작하던 정도의 일본이었는데, 20세기 중반이 되면 어느 순간 세계적인 수준의 기계와 전자기술을 보유한 기술 선진국으로 탈바꿈해 있다.

 

ο ‘실행’의 프레임과 ‘개념설계’의 프레임

프레임이나 패러다임이나 모두 같은 말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는 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를 골라내는 기준, 그 대안들을 적용했을 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하는 방법을 묶어놓으면, 그것이 프레임이자 패러다임이 된다. 세상을 보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새로운 개념설계를 만들어낼 때와 만들어진 설계도를 충실히 실행할 때의 프레임은 완전히 다르다. 실행과 개념설계는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질문의 대상이 다르다. 실행이 중심일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가 관심사이지만, 개념설계를 해야 할 때는 ‘왜’ 하는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독창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래서 실행 역량을 노우-하우Know-how라고 한다면, 개념설계 역량은 노우-와이Know-why라고 한다.

어떤 행위가 바람직한지를 판단하는 기준도 다르다. 실행에서는 무엇보다 효율성Efficiency이 기준이다. 같은 산출을 얻는다면 보다 적은 투입, 같은 투입을 한다면 더 많은 산출을 얻어내는 대안이 효율성 측면에서 더 바람직한 것으로 선호된다. 그러나 ‘개념설계’에서는 차별성Differentiation이 기준이다. 자원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상관없이 남들과 얼마나 다른 밑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시행착오에 대한 관점도 다르다. 이미 그려진 밑그림을 효율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관점에서 보면 시행착오란 가능하면 피해야하는 부정적 사건이다. 따라서 크던 작던 실패가 발생하면 일벌백계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 조직 전체에 실패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반면 개념설계를 할 때는, 처음 접하는 도전적 과제일수록 시행착오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시행착오를 빨리 많이 할수록 더 독창적인 밑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심지어 빠른 시행착오를 조직적으로 장려하기도 한다.

필요한 지식의 표현 방법도 크게 다르다. 실행에 필요한 지식은 대체로 매뉴얼이나 교과서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명시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지 않더라도 선임자, 코치, 교사, 지도자가 말이나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방식으로라도 가르쳐줄 수 있다. 주된 획득 방법은 반복적 실행에 의한 학습이다. 이에 반해 개념설계에 필요한 지식은 새로운 문제를 풀거나 문제 자체를 제기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정의상 매뉴얼이 있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개념설계를 해 본 사람의 몸에 체화된 경험, 그리고 유사 사례를 담은 데이터베이스가 전부다. 주된 획득 방법은 여러번 시도해보면서 직접 체득해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반복적 설계에 의한 학습이다.

 

한국의 직장인 약 4만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인데, 그 가운데 ‘당신이 속한 조직이 얼마나 혁신적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취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흥미롭다. 이 질문을 앞에 놓고 50대 이상의 직장인은 상당히 혁신적이라고 대답한 반면, 20대 직장인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답하고 있다. 같은 조직을 두고 나이 많은 직장인과 젊은 직장인의 평가가 엇갈린다. 무엇보다 나이가 많을수록 직장이 더 혁신적이라고 느낀다는 점이 의아하다.

 

본인이 이끌고 있는 조직구성원들에게 이제 개념설계에 도전할 때가 되었으니 ‘창의적이 되라’, ‘도전하라’고 말하면서, 혹시 평생 몸에 밴 프레임대로 ‘실수없이, 6개월 안에’ 창의적인 결과를 내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레임 전환이 없으면 문제를 왜곡해서 해석하고, 오히려 해가 되는 처방을 찾게 된다. 기술 선진국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경영전략서들이 한국산업의 실정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블루오션이나 퍼스트 무버라는 처방도 그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보아야 한다.

 

흥미롭게도 정작 퍼스트 무버는 혁신의 역사에서 대부분 실패했다. 퍼스트 무버의 성과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조사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타자기, 공기타이어, 자기테이프 등 대부분의 주요한 혁신 사례에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최초로 그 개념을 제시하거나 시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통계로 보면, 후발주자의 실패율은 8%에 불과했지만 선도자의 실패율은 47%에 달했다. 시장점유율도 선도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살아남아도 평균 10%를 점유하는 데 그쳤지만, 후발주자는 평균 28%의 점유율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발주자가 되면 불리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이 이 통계가 전달하는 메시지다. 멀리 볼 것도 없다. MP3 기술을 담은 음악 재생 장치를 처음으로 만든 기업은 애플이 아니라 한국 기업이었다. 동창회를 포함하여 친한 사람들과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회관계망서비스의 원형적 모습 역시 한국 기업에서부터 나왔지만, 정작 새로운 개념설계로 승화시킨 것은 선진국 기업이었다.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이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꾸준히 축적하면서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스케일업해서 마침내 완성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서 축적의 전략들을 살펴보면서 이미 확인한 원리다.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행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개념설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ο 실행에서 개념설계로 프레임 전환이 어려운 이유

태국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1960년대 중반 자동차산업을 시작했다. 2015년 현재 연간 260만대 이상을 생산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자동차 생산의 허브기지로 자리잡았다. 자동차산업이 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서 GDP의 12%를 차지하고, 직접고용 인력만 55만명이 넘을 정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태국은 진정한 의미의 독자적인 자동차 모델이 없다. 태국의 자동차 생산 상위 업체는 도요타, 포드, 마츠다, 미쓰비시, 이스즈, 혼다, 닛산, GM, 스즈키, BMW, 벤츠, 타타인데, 모두 다국적 기업이 직접투자 형태로 만든 자회사들이다.

기본적인 생산 방식은 대부분 CKDComplete Knock-Down, 즉 완전조립생산에 가깝다. 예를 들면, 도요타의 일본 본사에서 디자인한 설계도를 받아오고, 핵심부품 역시 수입해서 태국에서는 조립을 하는데 집중한다. 쉽게 말해 태국 전체가 거대한 자동차 조립공장인 셈이다. 이 기본구도는 지난 50년 동안 거의 변한 적이 없다. 세계 10위권의 자동차 생산국가이면서도 자동차와 관련된 중요한 특허가 나오지 않고, 관련 인력이 배출되지도 않고 있다.

 

CKD :: Complete Knock Down의 약자로 반조립제품을 말한다. 부품들을 그대로 수출해서 목적지에서 조립되어 완성품으로 판매되는 방식이다. 개발도상국에 자동차를 수출할 경우 CKD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완성품을 수입하는 것보다 CKD방식이 자국의 공업화발전 등에 기여할 수 있으며, 수출국은 완성품을 수출하는 것보다 관세가 싸고 현지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반조립수출의 경우, 완제품에 비하여 비교적 낮은 수준의 관세를 부과받는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CKD [Complete Knock Down] (시사경제용어사전, 2017. 11., 기획재정부)

 

해답은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진 데서 찾아야 한다. 자동차산업의 시작 초기 태국의 기업가들과 정책담당자들은 자동차산업을 빠르게 육성하여 일찍 성과를 얻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 가장 빠른 방법으로서 다국적 기업의 설계도와 부품을 도입해서 조립하는 현재의 모델을 선택했다. 그 결과 기대했던 것처럼 산업의 기반이 아주 빠르게 형성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국적 기업들이 앞 다투어 제조공장을 짓고, 이미 검증된 차종들을 빠르게 생산하기 시작했다. 저임금이면서, 잘 훈련된 인력과 저렴한 토지 등의 조건을 갖춘 저비용 생산기지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던 다국적 자동차회사들의 입장에서도 기술 이전 부담이 없는 완전조립생산 모델이 입맛에 잘 맞았다. 주는 측과 받는 측의 이해가 딱 맞아 떨어지면서 태국에서는 겉보기에 훌륭한 자동차산업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술적 측면에서는 전혀 진전이 없어 반세기 동안 실행 역량으로만 버티는 속빈 강정 꼴이 되었다.

 

실행만을 오래 하다 보면, 교육체제도 실행에 적합한 인력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형성된다. 연구개발 활동도 효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기업 관계도 납품 조건을 잘 맞추는 데 초점을 두게 된다. 성과관리를 포함한 경영스타일도 단기적으로 확인가능한 성과 위주로 형성되고, 대체가능한 업무가 많기 때문에 근무연수도 상대적으로 짧으며, 순환보직이 일상화된다. 정부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태국의 자동차산업을 둘러싼 각종 시스템이 실행의 효율화를 지원하는 형태로 형성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각 부문별로 이해관계자망이 끈끈하게 고착되면서, 루틴을 바꾸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물론 최근 태국 정부에서도 친환경 자동차 등 차세대 기술에 대비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이렇다할 만한 혁신적 도전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실행 중심으로 강고하게 형성된 망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단지 낯선 것이 아니라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퍼즐 조각들은 다 잘 맞아서 불만이 없는데, 한두 퍼즐 조각만 그 경계가 도드라져 튄다면, 그 몇 개의 불편한 퍼즐들을 교체하거나 모서리를 깎아 맞추는 것이 퍼즐판 전체를 바꾸는 것보다 당연히 손쉽다. 실행 중심으로 국가의 기술혁신체제가 형성되어 있으면 교육, 금융, 기업 관계, 정부 정책 등 모든 퍼즐 조각도 거기에 맞추어 형성되고, 서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화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개념설계 중심의 새로운 틀로 이동하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진다. 모든 관계가 유기적으로 탄탄히 맞추어진 현재의 상태가 너무 편안하기 때문이다.

프레임대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한 프랑스 신사가 프랑스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을 거듭하다가 ‘프랑스어만이 유일하게 사람이 생각하는 순서대로 어순이 형성되어 있는 언어라서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놀랍지만 어리석은 깨달음을 얻는다. 프랑스어로 늘상 생각하고 말해왔으니, 다른 나라 언어의 어순과 문법이 불편하고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이 비유는 하나의 프레임에 푹 빠져 있을 때는 자신이 거기에 빠져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 속에 있는 것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성장이 정체되는 이유는 혁신 역량의 중심이 실행에서 개념설계로 전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프레임 전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설계도를 받아와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서 산업이 어느 정도 발달하고, 그 덕분에 중간소득 수준에 오른다. 그러나 결국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실행을 넘어 개념설계에 도전해야 하는데, 두 프레임 간에 관점 전환이 쉽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혁신역량 전환의 실패라는 점을 강조하여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중간혁신함정Middle Innovation Trap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중간소득함정은 중간혁신함정의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따름이다. 많은 국가들이 이 중간혁신함정에 빠지고, 그 결과 중간소득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은 실행에서 개념설계로 전환하는 과정이 그만큼 어렵고 저항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축적에 성공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 와중에 상당수 후보 국가들이 떨어져 나갔다. 게다가 많은 인류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식민지라는 시행착오를 담아낼 수 있는 물리적 기지도 교묘하게 활용했다.

앞서 살펴본 중국은 기술 선진국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즉 넓은 공간의 힘으로 시간을 압축하면서 중간혁신함정을 성큼성큼 축지법으로 넘어가고 있다. 중국이 지금처럼 효과적인 공간기반 축적 전략을 잘 활용한다면, 머지않아 전 세계를 선도할 개념설계로 승부할 때가 올 것이다.

 

실행의 습관을 가지고 개념설계에 도전하게 되면, 실수없이 창의적이 되고자 노력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선진국의 개념설계를 받아와서 성공적으로 실행하면서 산업을 성장시킨 개발도상국이 결국 정체 상태에 빠지는 것은, 실행 역량의 효과가 다한 상태에서 개념설계 역량 중심으로 시스템을 전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혁신 역량의 프레임 전환 실패, 곧 중간혁신함정이 중간소득함정의 진정한 원인이다.

 

9장 ‘메이드 인 코리아’, 반 잔의 물

ο 놀라운 실행 역량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란 표현은 원래 1887년 영국이 독일산 상품을 수입하면서 열등한 곳에서 생산된 상품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도입한 표시다. 쉽게 말해서 싸구려 제품이라는 뜻이다. 19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영국은 산업 선진국이었지만 독일은 이제 막 산업화에 접어든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산업의 초기 발전모델을 가장 잘 요약한 표현은 ‘대기업 중심의 조립상품 수출’이다. 수출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저가의 대량생산 제품을 목표로 하고, 선진국에서 수입한 설계, 장비, 부품소재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수행하며, 대규모로 인력과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대기업을 앞세우고, 국가 주도로 될 산업을 선택해 자원을 몰아주는 정책주도형 모델이다. 기술 역량의 관점에서 보면 이 초기 발전 단계에서는 수입된 기계장비가 돌아가도록 만드는 운영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기계장비와 함께 따라 들어온 매뉴얼과 이 매뉴얼을 설명해주는 외국 기술자들이 중요한 지식의 창구였다.

70년대부터 기술적 난이도가 좀 더 높은 중화학공업을 시작하는데, 전 세계 전문가들은 걱정 반 조롱 반을 섞어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예를 들어 세계은행은 74년도 보고서를 통해 막 도전을 시작한 철강산업 대신에 당시 명백한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던 직물산업에 집중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회의적인 시각을 뒤로하고 한국산업의 포트폴리오는 80년대까지 철강, 자동차, 조선, 전자 등으로 계속 확장, 심화되어 나갔다. 기술 역량의 관점에서 보면, 턴키베이스Turnkey Base로 시설장비 일체를 도입하던 방식에서 조금씩 벗어나 선진국이 제시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되, 상세설계와 같은 현장의 맥락에 맞게 소화하는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면서 역량을 고도화해 나갔다. 그 결과 운영기술은 전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특히 품질관리 역량은 선진국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세계적 수준의 실행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다. 1단 엔진이 대단한 기세로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선진기술을 배우는 경로는 외국인직접투자, 설비나 장비같은 자본재 수입, 그리고 기술 라이센싱의 3가지가 대표적이다. 다만 경제개발의 초기 단계에는 주로 외국인직접투자와 자본재 수입이 활용된다. 거의 모든 개발도상국들이 이 두 가지 경로 가운데 외국인직접투자를 받아들이면서 경제발전을 시작한 것과 달리 한국은 산업의 초기 발전과정에서 외국인직접투자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외국인직접투자는 사실 산업을 일으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시장과 생산 기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선진 기업들이 자본과 기술을 직접 가져와서 공장을 짓도록 허용하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국내 기업과 인력이 참여하면서 선진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논리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도국, 특히 중국의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 채택한 중요한 전략이기도 하다.

한국의 산업은 특이하게도 외국인직접투자가 아니라 외국에서 돈을 빌려, 설비와 장비를 직접 구입해서 설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장비를 직접 설치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함께 따라 들어온 매뉴얼을 교재로 삼아 선진기술 학습을 시작했다. 이 전략은 외국인이 모든 것을 결정해주는 외국인직접투자와 달리 무엇을 할지를 스스로 정하고, 시설, 장비, 기술의 종류를 선택하며, 운영의 성과도 스스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능동적인 학습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초기 투자자금을 구하기가 어렵고,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더라도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어쨌든 한국의 산업은 자본재 구매를 통해 성공적으로 기술 역량을 학습해 나간 특이한 경우다.

산업 개발 초기 단계에서 서비스업이 아니라 제조업에 집중한 것도 한국산업의 기술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반대의 예는 말레이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의 유명한 페트로나스 트윈타워의 주인인 아난다 크리슈난Ananda Krishnan은 말레이시아의 두 번째 부호다. 그러나 경마, 통신서비스, 방송, 경마장 재개발사업 등 제조업과 상관없이 제도로 보호된 이른바 지대 비즈니스로만 돈을 벌었고, 지금도 그렇다. 개인 재산만 15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트윈타워의 설계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들어간 강철과 통신기지국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해외에 의존했다고 비판받고 있다. 말레이시아 제1의 부호로 크리슈난보다 재산이 1조원이나 더 많은 곽렁찬Quek Leng Chan도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제조한 것이 기껏 밀가루 포대자루 뿐이라고 놀림을 받고 있을 정도다. 그 덕분에 말레이시아는 아직도 외국인직접투자 형식으로 들어온 다국적 기업 말고는 제조업 기반이 취약하고, 여전히 중간소득함정에서 헤매고 있는 중이다.

 

관광이나 물류, 쇼핑몰과 수퍼마켓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술 역량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언가를 만들고, 품질을 관리하고, 부품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지식이 이후 산업 발전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제조업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한국산업의 기술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한 또 다른 핵심 요인을 꼽으라면 수출시장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수출시장에 무언가 하나를 내어놓고 팔 수 있으려면, 일단 국내시장보다 높은 품질 수준을 맞춰야 한다. 아주 초기에는 바이어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듣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겨우 품질기준을 맞췄다 싶어 내보내도 무수히 많은 클레임이 들어오고, 그 원인을 찾느라 밤을 꼬박 샜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현장의 힘이 길러지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제품을 수출하는가도 중요하다. 너무 극단적이라 적절한 사례가 아닐지 모르지만 다이아몬드, 석유, 커피와 나무를 수출하고, 그 덕분에 국민소득을 올린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기술 역량을 높이지 못한 것은 기술적 도전이 전혀 없는 수출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재 도입과 제조업기반, 그리고 수출이라는 전략적 키워드를 바탕으로 실행을 통한 학습이 이루어졌고, 실행 역량을 축적하면서 세계적 수준의 제조 역량, 이른바 메뉴팩처링 엑셀런시Manufacturing Excellency가 길러졌다.

 

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을 시작한 개도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일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고지를 넘어 섰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85개 신생국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고소득 국가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ο 개념설계에 도전한다

기술혁신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만들어 낸 알파엔진은 도전과 시행착오의 축적이라는 전형적인 개념설계 창출의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1983년 일인당 GDP가 2,000달러 수준(2015년 고정달러 기준)에 불과했을 때 독자적으로 가솔린 엔진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시작된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엔진을 만들어보지 않은 국가 가운데 독자 엔진 개발을 시도한 국가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성공이 의심스러웠고, 거꾸로 그만큼 담대한 발상임에 틀림없었다. 영국의 엔진설계회사 리카르도Ricardo와 손을 잡고 엔진 설계의 과정을 곁눈질로 간접 체험하는 것을 시작으로, 비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듯 지난한 시행착오 과정을 밟아나갔다. 최초로 모델개발에 성공한 1992년, 그리고 실질적인 상용화에 돌입한 1993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터보차저 엔진을 만들기까지 97개, 내구성 개선을 위해 53개, 차형 개발을 위해 88개, 트랜스미션 개발을 위해 26개 및 기타 검사를 위해 60개 등 총 324개의 테스트 엔진을 만들고 또 부수었다. 200개 이상의 트랜스미션과 150개의 완성차 모델 변경은 논외로 하고서 엔진 부문에서만도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표준과 세대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순 조립만 하던 반도체 산업에서 64K D램의 독자적인 설계에 도전해보자고 나선 1983년 이래 10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하였고, 마침내 1993년 64M D램 메모리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설계와 양산에 성공했다.

 

세계적으로 플래시 메모리(반도체)가 처음 상용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초였다. 우리나라가 반도체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이 즈음이었다. 1983년 4월,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의 첫 번째 아이템으로 D램을 선정했다. 자체적으로 첨단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미국에 현지법인을 세웠고 해당 분야 연구개발에 종사 중이던 글로벌 인재 영입에도 활발하게 나섰다. 1983년 12월 12일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반도체통신 이상준 박사 팀은 64K D램 개발 생산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였다. 삼성은 마이크론 사에서 64K D램 칩을 제공받은 후, 이를 하나하나 재구성 및 재현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중략)... 조립생산 기술이 어느 정도 정립된 이후 삼성전자의 연구진은 웨이퍼 가공에 관한 기술을 개발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모두 309가지에 달하는 공정개발도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는 등 제품개발 과정은 순탄치 않았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제대로 된 생산조건을 확립하고, 불량의 원인을 밝히는 데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였다. 결국 삼성은 착수 6개월만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하였다. 6년 만에 개발에 성공한 일본과 비교해 볼 때 당시 삼성의 성공은 전후무후한 사건이었다. 새로운 반도체를 양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현장에서의 실습이다. 이를 위해 삼성에서 실시한 회의가 매일 밤 11시에 열린 이른바 ‘일레븐 미팅’이었다. 신제품을 개발하는 인력과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인력이 매일 밤 11시에 만나는 이 회의에서는 하루의 성과와 진척도를 점검하고, 다음날 진행해야 할 부분을 토의하고 결정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일레븐 미팅은 삼성이 D램 반도체에 진출한 초기 몇 년간 지속되었고, 관련 기술이 축적되면서 모임은 11시에서 9시, 그리고 7시로 앞당겨졌다. 삼성의 또 다른 반도체 개발회의는 1989년 4월부터 시작된 ‘수요 공정회의’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반도체연구소의 관련 임원과 간부들이 참석하는 이 회의는 최첨단 기술을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1998년까지 무려 400회가 열렸다. ...(중략)... 이러한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기술은 1989년 일본을 거의 따라잡은 후, 1992년 삼성이 6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일본을 추월했다. 2년 뒤인 1994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해 확실한 기술 우위를 입증했다. 삼성이 치고 나간 6개월에서 1년 후, 일본 업체들이 쫓아왔다. 하지만 그땐 이미 삼성이 시장 대부분의 수익을 거둬간 이후였다.

 

조선산업도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진행할 정도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대부분 설계도를 받아와서 시공에 집중하던 단계를 넘어 1980년대 후반에 고부가가치 화학선체인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결국 전 세계 LNG 운반선 신규 발주 물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89년에 시작하여 1996년에 성공한 세계 최초의 CDMA 이통통신 상용화 기술개발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실행을 넘어 개념설계에 도전한 것은 도전의 크기와 성공 여부를 떠나 개발도상국 수준에서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예를 들어 비슷한 시기에 자동차산업을 시작한 태국은 엔진은 고사하고, 아직 자체 브랜드로 디자인한 차를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한국산업의 개념설계 성공사례들은 도전적 목표 설정, 혁신 네트워크 형성, 시행착오의 축적이라는 혁신적 개념설계 창출의 핵심요소들로 설명이 가능하다.

 

Nelson and Winter(1982) 등 진화경제학에서 정립된 일반적인 기술진화의 논리는 변이창출(variation), 선택(selection), 전승(retention)의 3 요소로 구성된다.

새로운 개념설계의 창출이라는 목적에 비추어 이 논리를 변형하면 도전, 네트워킹, 그리고 축적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진화의 요소를 조금 변형시켜 살펴보면, 실증사례 분석에서 기업가 및 기술자 등 혁신 주체의 능동적 역할을 좀 더 분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 도전적 목표 설정

• 혁신 네트워크 형성

• 시행착오의 축적

 

한국산업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개념설계들도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적인 개념설계들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즉 한국의 성공스토리는 특수하지 않고, 설명이 가능한 논리적 과정의 결과였다.

 

자동차, 조선, 전자, 통신산업처럼 대체로 자본집중적이고 중후장대한 산업에서, 그리고 대기업 주도 하에 나타난 개념설계 성공사례라는 점이 공통이다. 무엇보다 오래전의 이야기라는 것도 공통적으로 눈에 띈다. 아주 걱정스러운 점은 이 오래전의 성공적 도전의 결과 덕분에 지금도 우리 경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서는 이런 개념설계에 도전하는 일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ο ‘메이드 인 코리아’, 고도 상승을 멈추다

기술혁신의 관점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증상 중 하나는 새로운 제품, 서비스, 그리고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지 않는 생명체는 성장은커녕 생존조차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산업도 새로운 제품과 기업이 끊임없이 생겨나서, 낡은 제품과 기업을 몰아내는 이른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멈추면 곧 쇠락하기 마련이다. 상위 100대 기업의 리스트가 변하지 않고 있고, 자산순위 100위권 안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 사라지고 있는 상태는 마치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는 산업생태계를 연상케 한다.

 

글로벌 수준의 대기업들은 새로운 개념설계에 도전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실리콘밸리, 유럽 및 일본의 챔피언 기업들과 손을 잡아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참으로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오히려 국내의 기업들과 손을 잡을 기회도, 국내에 투자할 여분의 자원도 부족해지고 있다. 혁신 역량의 양극화라고 할 만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물론 글로벌 대기업의 혁신 역량을 끌어내려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들은 더 글로벌로 나가게 하고,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의 혁신 역량을 어떻게 글로벌 수준으로 높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전자산업에서 일본의 원천기술 경쟁력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빠르고 과감한 투자 의사결정, 즉 경영의 속도와 과단성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 전략으로 시장을 선도해나갔다는 것이 기본 논리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변했다. 한국 기업의 투자 의사결정 속도가 날이 갈수록 느려지고, 투자 분야도 보수적으로 변해간다는 비판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기업 의사결정의 보수화는 기업 부문의 유보금이 커지고, 면세점 등 제도적 독점이라 할 수 있는 사업에 많은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을 통해 일부 드러난다. 똑똑한 학생들이 의사와 변호사가 되는 길로 몰리는 현상을 보며 청년들을 향해 도전하지 않는 세대라고 혀를 끌끌 차지만, 기업들의 안전한 투자 성향을 보노라면 마치 거울 이미지를 보는 듯하다. 반면 일본의 높은 기술경쟁력, 개념설계 역량은 일본 기업이 부활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이 되고 있다. ‘빨리 빨리’가 ‘꾸준함’을 이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착각이었던 셈이다.

 

한국 제조업체의 해외 생산 비중은 2003년 4.6%에 불과했으나, 2013년 18.4%까지 늘어났다.

최근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해외로 나간 공장을 본토로 돌아오게하는 리쇼어링을 추진하고 있으나, 한국의 경우 유턴 기업의 수가 2013년 37개에서 2016년 9개로 줄어들고 있다.

 

결국 현장이 없어지면서 개념설계를 그려낼 창의적인 인력도 잘 양성되지 않거나, 그나마 길러진 인력도 해외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2013년 미국 NSF 조사에서 미국 내 한인 박사 중 60%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밝히고 있고, 현재 국내에서 일하는 이공계 박사 중 36%는 이민 또는 장기체류를 통해 해외로 나가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적이라는 표현 역시 다시 반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귀하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으니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계속 반복할 수 있으면 기적이 아니지 않은가.

 

기적은 착시다. 한국산업의 기적적 성공은 기적이 아니라 탁월한 실행 역량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바로 그 실행 역량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지금껏 한국산업이라는 로켓을 힘차게 밀어 올렸던 바로 그 1단 엔진이 아직도 분리되지 않은 채 한국산업의 2단계 발진을 가로막고 있다.

 

ο 한국산업은 중간혁신함정에 빠져 있다

한국산업은 중간혁신함정에 빠져 있다. 빨리 빨리, 실수없이, 벤치마킹하면서, 유량Flow 중심으로 일시에 자원을 동원해서 해결하고 타깃을 재빨리 옮겨가는 실행자 루틴에 빠져 있다. 실행의 습관에 오래 빠져 있다 보니, 산업을 둘러싼 모든 제도와 문화가 이를 지원하거나 강화하는 방향으로 퍼즐처럼 맞추어져 있다.

모 일간지에 언급되어 화제가 된 중학교 2학년 가정 교과 시험 문제는 우리의 루틴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잘못 서술된 조리법을 맞추는 것이 문제인데, 4가지 선택지문 중에서 하나의 답을 골라야 한다. 같이 한번 답을 맞추어보자.

① ‘깍두기를 담글 때 무는 3cm 크기로 팔모썰기를 한다.’

② ‘미역국을 끓일 때 미역은 찬물에 불려 4cm 길이로 썬다.’

③ ‘도라지 오이생채에 들어가는 도라지는 6cm 길이로 얇게 찢어 소금을 넣고 주물러 씻는다.’

④ ‘감자볶음을 할 때 감자는 0.5cm, 당근과 양파는 0.3cm 두께로 채썬다.’

정답은 1번이란다. 깍두기는 2cm로 썰어야 하고 미역국의 미역은 4cm가 맞다고 교과서에 나와 있다. 2017년의 중학교 가정 교과서를 펼쳐보면 여전히 도마 위에서 미역을 써는 사진이 있고, 그 밑에 분명히 4cm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는 1970년대가 아니라 2015년에 중학교 교육 현장에서 출제된 문제 중 하나다. 아마도 이 교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모범생은 교과서에 나와 있었을 음식 재료의 길이를 정확히 암기하기 위해 몇 시간을 들여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이 사례는 우리 교육체제의 초점이 새로운 개념설계에 도전하고,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끈질기게 버텨내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직도 수입된 개념설계와 매뉴얼에 따라 성실히, 의견 제시하지 않고, 실수없이, 빠르게 실행할 수 있는 역량과 마음의 자세를 가진 인재를 기르는 데 매몰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금융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금융의 본원적 기능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위험이 큰 기업가적 도전을 뒷받침하는 자본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프로젝트별로 고유한 기술적, 사업적 위험을 분석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새로운 개념설계에 도전하는 혁신적 벤처 프로젝트의 경우 벤치마킹 사례가 없기 때문에 고유한 위험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적 전문성이 필요하다. 기술 선진국에서 프로젝트 파이낸싱, 벤처캐피탈, 투자은행, 위험평가 전문기관과 이들을 지원하는 기술표준 제정 및 인증 기관들이 강력한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한국 금융시스템은 혁신적 개념설계를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그런 전문적 역량을 위해 투자해나갈 인센티브도 크지 않다. 지금까지 한국산업은 대부분 수입된 개념설계의 실행을 담당했기 때문에 위험이 그리 크지도 않았고, 따라서 평가할 기술적 전문성을 키울 필요도 크지 않았다. 쉽게 말해 금융시스템 전반이 실행 역량을 지원하는 관행에 익숙해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경제 규모도 커졌고, 이에 따라 금융산업 전반도 커졌지만, 여전히 아파트 담보에 근거한 소매대출이 은행권 대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기형적 형태가 되었다. 세계경제포럼(2016)의 ‘Global Competitiveness Report 2015-2016’에 따르면, 혁신적이나 위험이 존재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벤처자본의 확보 용이성을 평가하는 ‘Venture capital availability’ 항목에서 조사 대상 138개국 중 76위에 머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종합적으로 한국의 금융시장 성숙도는 80위에 기록되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관련 규제에 그런 서비스를 직접 언급한 조항이 없어 시도해볼 수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산업간 전통적인 경계를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이런 혁신적 시도들은 대부분 관련 규제조항에 묶여서 ‘해도 된다’는 허가를 얻기 위해 수년간을 보내야 한다. 그 동안을 버티지 못한 벤처들은 소리없이 사라지거나, 해외로 아이디어가 팔려나간다. 기술 선진국들은 아무도 해보지 않아서 벤치마킹 사례가 없는 새로운 개념설계를 끊임없이 만들어왔기 때문에 ‘이것만은 하지 마라’, 혹은 거꾸로 읽으면, ‘이것 빼놓고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라는 식의 네거티브 형태의 규제체제를 가지고 있는 반면, 실수없는 실행에 익숙한 한국산업의 규제체제는 ‘이것은 할 수 있다’, 혹은 거꾸로 읽으면, ‘이것 빼놓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식의 포지티브 형 규제체제를 가지고 있다.

 

기술혁신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여러 퍼즐 조각들이 실패를 무릅쓴 도전이 아니라 실패 없는 안전한 실행 중심으로 서로간의 모서리 모양을 정확히 공유하면서 짜 맞추어져 있다.

최근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논의가 활발하지만, 이 새로운 기술혁신의 흐름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패턴을 보더라도, 전형적으로 실수없이 벤치마킹하는 실행자 루틴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속하게 4차 산업혁명 관련 태스크포스를 만들고, 선진국과 챔피언 기업들의 동향을 비교표로 만들고, 우리의 현황과 대비하여 장단점과 위기, 강,약점 및 기회위협요인SWOT분석을 통해 대응전략의 우선순위를 빨리 정한다. 비전, 목표, 실행전략을 하나의 그림으로 요약하고, 예산을 긴급히 조정 편성해서 일단 자원의 플로우를 재조정한다. 관련 조직이나 기관을 급히 신설하고, 다른 업무에 있던 사람을 순환보직시켜 배치한다. ‘1년내 100개 완료’처럼 단기적으로 확인 가능한 가시적 목표를 설정하거나 ‘한국형 개발’처럼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기술 선진국의 개념설계를 변형시켜 유사한 버전 개발을 목표로 제시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간이 조금 지나 4차 산업혁명이라는 키워드가 시들해지고 다른 키워드가 떠오르면, 지금까지의 일들은 없던 것으로 하고, 위의 여러 가지 일들을 새로운 키워드에 맞추어 다시 반복할 것이다.

 

SWOT 분석 :: 기업의 내부환경과 외부환경을 분석하여 강점(strength),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협(threat) 요인을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기법으로, 미국의 경영컨설턴트인 알버트 험프리(Albert Humphrey)에 의해 고안되었다. SWOT 분석의 가장 큰 장점은 기업의 내 · 외부환경 변화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내부환경을 분석하여 강점과 약점을 찾아내며, 외부환경 분석을 통해서는 기회와 위협을 찾아낸다.
- 강점(strength): 내부환경(자사 경영자원)의 강점
- 약점(weakness): 내부환경(자사 경영자원)의 약점
- 기회(opportunity): 외부환경(경쟁, 고객, 거시적 환경)에서 비롯된 기회
- 위협(threat): 외부환경(경쟁, 고객, 거시적 환경)에서 비롯된 위협
SWOT 분석은 외부로부터의 기회는 최대한 살리고 위협은 회피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강점은 최대한 활용하고 약점은 보완한다는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SWOT 분석에 의한 경영전략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SO전략(강점-기회전략): 강점을 살려 기회를 포착
- ST전략(강점-위협전략): 강점을 살려 위협을 회피
- WO전략(약점-기회전략): 약점을 보완하여 기회를 포착
- WT전략(약점-위협전략): 약점을 보완하여 위협을 회피
SWOT 분석은 방법론적으로 간결하고 응용범위가 넓은 일반화된 분석기법이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SWOT분석 (시사경제용어사전, 2017. 11., 기획재정부)

 

마치 자동차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마부가 말의 머릿수를 강박적으로 늘려가는 것과 같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마차를 개량해서 100마리 말이 끌도록 만들어도 그것으로는 100마력짜리 자동차에 맞설 수 없다. 이제는 퍼즐판에 있는 퍼즐 조각 한두 개가 아니라 판 전체를 동시에 바꿔야 할 때다.

 

국민소득에 대한 IMF의 2016년 4월 발표 자료에 의하면 대체로 20위 정도에 해당한다. 특이한 것은 한국보다 앞선 나라들은 일본을 제외하고 모두 서구의 국가들이고, 르네상스 이래 축적해온 근대산업의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공유한 국가들이라는 점이다. 전 세계 모든 인구가 가난한 순서대로 1시간 내에 행진한다고 하면, 한국인들은 52분이 넘어서야 지나갈 정도로 잘 산다. 전 세계 평균에 해당하는 소득을 가진 사람을 170cm 정도의 키를 가진 사람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은 4m가 훌쩍 넘는 거인이다.

 

 

한국산업의 성공이 놀랍기는 하지만 기적은 아니다. 특수하지도 않다. 모든 국가의 발전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물론 압축의 전략은 달랐지만.

전략을 요약하면 설비를 도입하고, 매뉴얼을 학습하면서, 실행 역량을 확보하는 것으로 산업발전을 시작했다. 나아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드물게 개념설계에 도전하고, 시행착오를 버티면서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만든 사례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27,000달러가 넘는 일인당 국민소득을 달성했다. 그러나 성장이 멈추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도전이 사라지고 시행착오를 두려워하면서, 20년 전 성공한 혁신적 도전의 잔상으로 버티고 있다.

불행하게도 현재 한국산업에는 도전적 시도와 시행착오의 축적을 가로막고 있는 루틴들이 가득하다. 마치 충실한 실행 중심으로 교육, 금융, 정책, 문화 등 모든 퍼즐들이 맞춰진 것과 같다. 그래서 어느 한 곳에서 변화를 꾀하고자 해도 나머지 퍼즐과 맞대고 있는 모서리의 귀퉁이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다.

 

10장 기술 선진국의 비전과 축적의 길

ο 축적의 길로 가는 4개의 열쇠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집은 다 엇비슷하지만, 모든 불행한 집은 서로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첫 문장으로부터 유래한 이야기가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다(‘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은 문화인류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그의 책 ‘총, 균, 쇠(1997)’에서 가축화에 성공한 동물과 그렇지 못한 동물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실패하는 것에는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고, 무언가 하나의 성공적인 사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조건들이 다 갖추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기술 선진국들의 모습은 모두 한가지로 엇비슷하다. 도전적인 시행착오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 경험이 꾸준히 축적되면서 더 혁신적인 시도의 재료로서 재조합된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혁신 생태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개념설계 역량을 가진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이 가득하고 또 이런 혁신 기업들의 도전을 뒷받침하는 사회시스템을 가진 국가가 기술 선진국이다. 이런 기술 선진국이 ‘안나 카레니나’의 행복한 집이다.

 

기술 선진국은 다음의 다섯 가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첫째, 다양한 분야에서 시행착오를 축적한 고수들이 많다.

• 둘째, 다양하고 탐색적인 도전을 많이 하면서, 꾸준히 아이디어를 키워나가는 스케일업 전략이 몸에 배어 있다.

• 셋째, 도전적 시도를 실험해 볼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현장이 있다.

• 넷째, 사회 곳곳에 축적된 시행착오의 경험이 존재하고, 이들이 활발하게 조합될 수 있는 개방적 네트워크가 잘 발달되어 있다.

• 다섯째, 시행착오의 위험을 공유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과 시행착오를 장려하는 문화가 뒷받침되어 있다.

 

기술 선진국들의 오늘날 모습은 판박이처럼 비슷하지만, 지금의 경지에 이른 과정은 모두 다르다.

 

한국산업의 현재 관행과 기술 선진국의 모습을 비교하고, 개념설계 역량이 가진 특성을 고려할 때, 변화를 위한 핵심 열쇠는 다음의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고수의 시대(축적의 형태)

• 스몰베팅 스케일업 전략(축적의 전략)

• 위험공유 사회(축적지향의 사회시스템)

• 축적지향의 리더십(축적지향의 문화)

 

4자기 영역별 열쇠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축적의 형태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고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시행착오의 귀한 경험이 결국 ‘사람’에게 차곡 차곡 쌓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간 자본 투자와 매뉴얼 학습, 벤치마킹에 치중되어 있던 관점을 전면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축적의 전략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스몰베팅 스케일업 전략’을 모든 의사결정의 기본틀로 삼아야 한다. 혁신적 개념설계는 작은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하지만, 많은 시도와 지속적인 스케일업 투자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즐겨 사용했던 선택과 집중, 일시적 단기동원과 같은 의사결정 방식을 버려야 한다.

셋째, 축적을 뒷받침할 사회시스템의 측면에서는 ‘위험공유 사회’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도전적 시행착오의 경험이야말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공재이고, 따라서 그 위험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같이 나누어 감당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넷째, 문화의 측면에서는 ‘축적지향의 리더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현재의 한국산업처럼 실행지향의 틀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시행착오를 품어주고, 장기적 시각으로 축적을 장려하는 리더십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산업사회 구성원 모두의 동시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ο 열쇠1. 고수의 시대

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있다. 프로그래머의 꿈을 키워온 의욕있는 신입사원들이 입사한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 가운데 우수한 프로그래머는 과장으로 승진한다. 이제 과장은 프로그램 짜는 일보다 관리업무에 시간을 좀더 쓰게 된다. 우수한 프로그래머가 과장으로 승진했으니 정작 프로그램은 평균 이하의 실력을 가진 사원들이나 신입사원들이 맡는다. 또 몇 년이 지나면 과장 가운데 우수한 인재는 다시 부장으로 승진하고, 이제는 영업까지 맡게 되어서 프로그램 개발과는 더욱 멀어진다. 부장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가 임원으로 승진하는데, 이제는 보고서를 교정하고 사장에게 보고할 발표자료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렇게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는 어느새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그냥 일반관리자가 되어 있다. 회사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프로그램 개발은 여전히 가장 역량이 떨어지는 사람이 담당하고, 각 직급에는 승진할 사람 몇을 빼고는 승진하지 못한 평균 이하의 역량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진다. 이런 상황이 얼마동안 계속되다 보면 회사에는 전문가가 사라지고, 모두 평균 이하의 관리자만 남게 된다. 이런 회사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아키텍처가 나올 수 없다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소프트웨어 개발보다 영업과 관리가 회사의 핵심 역량이 될 수밖에 없다.

 

순환보직 시스템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직원들이 이 분야, 저 분야로 보직을 옮겨 다니면서 승진을 하게 되면, 직급이 올라갈수록 전문성이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거의 모든 직급에 비전문가만 가득차게 된다. 이런 순환보직형 조직에서도 새로운 개념설계에 도전하는 사례를 만나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 어떤 상황이건 전문가를 키워내지 못하는 조직에서는 개념설계가 탄생하지 않는다. 개념설계란 그 속성상 시행착오의 경험을 온몸으로 축적한 고수가 절박한 심정으로 문제풀이에 매달려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개념설계는 거의 예외없이 서로 다른 분야의 고수들이 만나 새로운 조합을 시도할 때라야 만들어지는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념설계 역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든 기업과 산업사회 전반에 고수가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현재 평균적인 한국 기업의 문화는 제너럴리스트 중심 체제로 고착화되어 있다. 전문직제가 정착되어 있지 않고, 순환보직 시스템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무엇보다 전문가로서의 직업적 수명이 짧다는 점이 흔히 관찰되는 현상 중 하나다. 전문성이 없는 상태에서 연차가 올라가면서 점차 대체 가능한 관리형 인재가 되고, 따라서 쉽게 도태된다. 그 결과 깊이 있는 전문가 혹은 수석 엔지니어Chief Engineer를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조직 내에 고수가 없기 때문에 조직 차원에서 개념설계에 도전하기보다 빠르게 벤치마킹하는 안전한 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빠르게 벤치마킹하는 전략이 그동안 비용효과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에 고수를 키우고 유지하기보다, 젊고 눈썰미가 빠른 사람을 채용하는 데 더 주력해온 측면도 있다.

고수를 키우지 않는 조직환경에서는 단지 나이가 많고, 근무연차가 높고, 그 분야에 오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우받고자 하는 문화가 생긴다. 도전하지 않으면서 연차가 올라가면 축적이 아니라 오히려 퇴적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젊은 고수는 자랄 수 없다.

고수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 과정에서도 축적된 경험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가 아니라 오로지 단기적, 금융적 손익만을 기준으로 삼아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고수가 가득한 사회는 다양성이 높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고수는 자기의 분야에서 도전하면서 시행착오를 쌓아가고, 고유의 기술과 실력이 높아가는 것을 보면서 뿌듯해하기 때문에 모두 저마다의 모습으로 행복하다. 새로운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에 도전하는 고수는 새로운 미술양식에 도전하는 고수를 시기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승진하면서 전문성이 점점 더 약해지는 시스템에서는 승진만이 성공의 증표가 되고, 그렇지 못한 경우 루저로 취급된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조직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오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행한 낙오자이고 루저가 된다. 그 결과 역량과 상관없는 줄서기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프로로서의 직업적 수명은 점점 더 짧아진다.

 

국가 정책, 특히 교육의 차원에서는 정해진 기간 동안 교과서로 굳어진 지식을 전수하는 형태의 ‘교육’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평생 도전하고 스스로 축적해나가는 ‘학습’이라는 개념을 전면적으로 채택해야 한다.

 

사회문화적으로는 고수, 괴짜, 능력자, 덕후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한편, 고수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창발적 조합의 가능성이 열리도록 다양한 네트워킹을 촉진해야 한다.

 

ο 열쇠2. 스몰베팅 스케일업 전략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1995년 스탠포드 대학에서 조별 프로젝트를 하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웹사이트의 페이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정도를 바탕으로 검색결과를 정렬해서 보여주자는 아이디어였다. 돈이 없어 레고블록으로 서버의 겉을 감싸야 할 만큼 장난감 같던 서비스가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용량이 넘쳐 학교 밖으로 나가게 된다. 남의 집 창고를 빌려 조그맣게 회사를 차리고, 엔젤투자자 앤디 벡톨샤임Andy Bechtolsheim으로부터 최초로 10만달러를 투자받는다. 그후 한두 명씩 투자자를 더 붙여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2016년 2월 시가총액이 690조원에 달해 드디어 애플을 제치고, 전 세계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회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국에서 알파고로 게임을 한 이후 58조원이 더 불어났고, 지금도 계속 기업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나는 기업은 없다. 아이디어가 처음 세상에 나오자마자 1조원씩 투자를 받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개념설계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투자가 이루어지고 성공과 실패를 확인해가면서, 비로소 아이디어가 완성된 형체를 갖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가 매일매일 소리없이 사그라들고, 구글처럼 아주 극소수의 운 좋은 것들만이 살아남아 다음 하루치만큼의 성장 기회를 누리게 된다.

하나의 개념설계가 탄생하는 과정은 전형적으로, 여러번 소총을 쏘면서 매번 쏠 때마다 과녁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체크한 다음, 쏘는 방향을 조금 조정한 후 다시 쏘는 과정을 되풀이 하며 과녁에 접근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스몰베팅 스케일업 전략이다. 모두 과녁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밑그림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반대 전략은 정밀하게 조준을 하고 모든 자원을 모아 단 한번 발사로 명중을 노리는 대포와 같은 선택과 집중이다. 이른바 빅베팅 전략이다. 물론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실행의 문제에서는 빅베팅 전략이 스몰베팅 전략보다 비용이나 효과 측면에서 우월하다. 그러나 정답이 없는 문제일 때는 스몰베팅 스케일업 전략이 당연히 더 우월하다.

 

한국의 산업계는 오랫동안 개념 설계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불확실성이 낮은 실행에 특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선택과 집중’이라는 키워드에 익숙해졌다. 벤치마킹을 바탕으로 성공가능성이 높은 분야와 아이템을 신중하게 선택한 후 일거에 투자하고, 조기에 수익을 창출하는 전형적인 빅베팅 전략의 프레임이다. 그 연장선에서 신성장동력이나 블루오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위 뜰 분야를 선정하는 데 집착해왔고 전략 과잉이라고 할 만큼 컨설팅에 의존하는 현상을 낳았다.

선택과 집중에 기초한 빅베팅 전략이 습관화되면서 단기적, 가시적 성과를 선호하게 되고, 너무 많은 것을 걸었기 때문에 실패의 비용이 커져서 자연스럽게 시행착오를 용인하기 어려운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스스로 단계별로 리뷰하고, 성공이든 실패든 그 과정에서의 경험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남기기보다, 그 시점에서 가장 주목받고 떠오르는 벤치마킹 정보를 컨설팅 받고 빠르게 찾아내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스몰베팅 스케일업 전략은 산업사회 전반에 다양성이라는 부가적인 혜택도 준다. 즉, 스몰베팅을 해나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중간 단계에서 실패한 아이디어를 많이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이 작은 실패들은 산업생태계 어딘가에 남아 전혀 다른 목적의 개념설계를 만들 때 중요한 재료로 다시 활용할 수 있다. 한국산업계에 부족한 다양성을 높여주는 긍정적 역할도 하는 셈이다.

 

개념설계에 도전하고자 하는 기업은 무엇보다 파일럿 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 동시에 단계별로 투자해 나가는 스케일업 투자 전략에 익숙해져야 한다. 또한 인수합병 후 바로 결과를 묻기보다 개념설계 역량을 흡수하고, 아이디어를 키워나가는 인수 후 개발 전략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한편 이런 스몰베팅을 해볼 수 있는 글로벌 수준의 제조현장 경쟁력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산업계의 개념설계 역량을 돕기 위한 정부 정책도 선택과 집중형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성장동력을 찾고, 일시적으로 자원을 집중 동원하다가 또 다른 신성장동력으로 옮기는 방식은 축적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해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도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거의 모든 정부부처들로부터 긴급하게 대응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단기성과 위주의 선택과 집중형 사고방식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기술혁신과 관련한 규제를 선제적으로 완화하고, 표준이나 인증 인프라를 강화하여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은 스몰베팅형 실험들이 많이 일어나도록 혁신의 놀이터를 정비하는 일이 정책적으로 더 중요하다.

 

ο 열쇠3. 위험공유 사회

도전적 시행착오 경험이야말로 사회구성원 모두가 같이 쓸 수 있는 공공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위험을 개인이 모두 떠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부담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기술 선진국일수록 도전적 혁신의 시도를 지원하는 공공정책 메커니즘이 잘 발달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도전하거나, 나아가 세상에 없던 첨단제품의 설계에 도전하는 일은 여럿이 함께 위험부담을 나누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을 뒷받침했던 크라우드 펀딩 시스템에서부터, 오늘날 기술 선진국을 뒷받침하고 있는 벤처캐피탈, 프로젝트 파이낸싱, 투자은행 시스템까지 민간 차원에서 위험을 공유하기 위한 금융시스템이 끝없이 역량을 키우면서 산업과 함께 발전해왔다. 그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생각만 해볼 수 있는 도전적 시도를 기술 선진국에서는 직접 해볼 수 있다. 사실 서구의 산업발전 역사는 이러한 위험공유 장치의 발전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시행착오의 위험을 개인 기업가가 모두 감수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담을 여러 사람들이 같이 나누어지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야 사회 전체의 시행착오 총량이 늘어날 수 있다.

 

혁신에 수반되는 위험을 분산 공유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역량은 그 혁신적 시도의 위험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산업과 기술에 대한 이해력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금융시스템은 산업현장에서 시도하는 기술혁신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지 못했다.

 

기업 전략의 측면에서 위험공유를 위한 최선의 전략은 단연 네트워킹이다. 단 한명의 전문가, 단 한개의 기업과 연구소라도 더 교류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국내외를 가릴 일이 아니고, 이름값이 높고 낮음을 따질 계제도 아니다. 시행착오 경험을 보유한 그 누구와도 겸손하고 열린 자세로 손을 잡고, 그 경험을 배워야 한다.

 

ο 열쇠4. 축적지향의 리더십

이것을 딜레마라고 하는 이유는 제3자가 보기에는 두 마리 모두 함께 건너기로 작정만 한다면 공동체 전체로는 더 많은 풀을 먹을 수 있는 바람직한 상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의사결정에 맡겨두면 결국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어리석은 상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친구가 나설 것으로 짐작된다면 나는 나서지 않는 게 좋다. 반대로 만약 친구가 나서지 않는 전략으로 나온다면, 나도 나서지 않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이렇게 따져 보면, 친구 얼룩말이 나서거나 나서지 않거나 나는 머무는 게 좋은 전략이다. 얼룩말의 입장이 되어보면 전혀 어렵지 않은, 아주 쉽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다.

혁신도 이와 같다. 실패의 위험이 가득한 새로운 개념설계에 도전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의 의사결정을 앞에 두고 기업가는 혼자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회사가 옆에 있고, 납품받는 회사와 납품해주는 회사가 아래위로 있다. 정부가 공공정책으로 개입하거나 지원하고, 은행이나 교육기관이 자금과 사람을 책임지고 있다. 사회 안의 모든 주체들이 서로 연계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개별 기업가가 결정할 때는 산업 내에 존재하는 여러 주체들이 집단적으로 어떤 결정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나만 혼자 혁신에 도전하면, 그 위험을 혼자 모두 떠안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으니 안전하게 머물러 있자는 결론에 쉽게 이르게 된다. 문제는 모두가 동일하게 복지부동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사회는 혁신 없는 정체의 늪으로 급속하게 빠져들게 된다는 데 있다.

 

마지막 방법은 제3자가 나서서 모두에게 바람직한 선택의 결과를 비전으로 제시하고, 공동의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의견을 모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리더십의 역할인데, 특히 새로운 개념설계에 도전하는 혁신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혁신적 개념설계에 도전하다보면 실패의 위험이 수반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기업이나 사회는 흔히 안전지대에 머무르는 의사결정을 하기 쉽다. 그러나 안전지대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금세 정체와 후퇴라는 늪과 같은 상황으로 연결된다. 이런 상황을 탈출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혁신이 왕성한 조직과 사회의 모습을 스스로의 비전으로 삼고, 거기에 맞추어 모두가 서로 어깨를 걸고 함께 도전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진정한 혁신의 리더라고 부른다. 기술혁신의 역사,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역사, 그리고 기술 선진국이 형성되어 온 역사에는 이런 혁신 리더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찍혀 있다.

리더십이 발현되기 위한 사회문화적 환경도 중요한데, 그 가운데서도 신뢰기반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키워드이다. 리더를 포함해서 조직 구성원간에 신뢰가 없을 때는 그 누구도 과감하게 도전에 나서지 않는다.

 

실행 중심의 산업계에서 리더십의 전형은 빨리 벤치마킹하고, 조기에 계획을 수립한 다음, 빠르고 충실한 실행을 지시하고 감독하는 것이다. 총력동원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서 동질성과 일사불란함을 요구한다.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조기에 성과를 확인하고자 하며, 가시적으로 쉽게 체크가 가능한 정량적 성과지표를 선호한다. 당연하게도 위험이 큰 과제는 아예 피하거나 미루게 된다.

이런 몇 가지 특징은 개념설계에 도전하고 있는 일부 기업들을 제외하고, 평균적인 우리나라 조직의 리더십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한국의 산업사회에서 리더십의 위험기피 현상과 단기성과주의의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데는, 무엇보다 사회 전반의 성과평가 잣대가 단기적?가시적 결과를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리더십의 재임기간이 짧아 멀리 보고 나무를 심는 숲의 주인이 아니라 이미 자란 나무를 흔들어 과실을 챙겨가는 수렵인처럼 조직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설계를 가져와서 충실히 실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루틴이 궁극적인 원인이다.

 

지금은 리더들이 도전을 외치더라도, 조직구성원들은 반대로 제너럴리스트가 되어 안전하게 승진하는 경로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개념설계를 지향하는 리더십의 요체는 긴 안목을 갖고 꾸준히 시행착오를 축적해나가는 마인드다.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감추지 않고 도전의 경험을 기록하고 나누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구체적인 매뉴얼을 내려주기보다, 문제 발굴 과정을 함께 해나가는 탐색의 마인드가 중요하다.

 

신뢰는 사실 앞서 이야기한 여러 요소들, 즉 고수를 소중히 하고, 아이디어를 꾸준히 키워가는 습관을 가지며, 위험을 나누어지고, 시행착오를 격려해주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쌓여 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맺음말

기시감의 반대말은 미시감이다. 늘 익숙하게 반복되던 일이었는데, 갑자기 처음 접하는 일처럼 생경하고 낯설게 느껴질 때 자메뷔Jamais vu, 즉 미시감未視感이라는 말을 쓴다. 기존에 늘 접하던 상황이라 똑같이 하던 대로 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올 때 갑자기 느끼는 선연한 깨달음, 느닷없는 소외의 느낌, 이것이 미시감이다.

지금 한국의 산업계는 전례 없는 미시감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기존에 하던 대로, 기민하게 선진국과 선진기업, 선진시장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벤치마킹하고 있다. 저성장 시대니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더 열심히 대책을 마련하고, 성장 정체 현상의 돌파를 외치고 있는데, 두 다리는 점점 더 흐르는 모래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에는 위기를 맞아서 조금 더 빨리 발을 움직이면 확실히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더 열심히 달릴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 전개에 당황하고 있다.

 

자메뷰 :: 이미 경험하거나 잘 알고 있는 상황을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느끼는 기억의 착각현상을 이르는 말로, 보통 몽환 상태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처음으로 경험한 것들이 이미 과거에 체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데자뷰(deja vu)' 현상의 반대 개념이다. 우리말로는 '미시감(未視感)'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전에 알고 있던 것들이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기시감(旣視感)'의 반대 현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메뷰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인터넷에서 유명한 영상 중에 ‘벼룩 길들이기Training Fleas’라는 제목을 단 4분 안쪽의 짧은 동영상이 있다. 높이뛰기 선수로 유명한 벼룩이라 하더라도 뚜껑을 덮은 유리병 속에 한동안 가두어 놓으면, 뚜껑을 제거하고 난 다음에도 병의 높이 이상을 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영상이다. 뛰다가 유리병에 머리를 부딪치는 아픔을 여러 번 느끼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된 한계가 생겨 부딪치지 않을 만큼만 뛰게 된다는 이야기다. 더 높이 뛸 수 있고, 더 높이 뛰어도 되고, 심지어 이제는 뛰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습관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행동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유명한 과학계의 에피소드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 기존의 신념에 부합되는 정보나 근거만을 찾으려고 하거나, 이와 상반되는 정보를 접하게 될 때는 무시하는 인지적 편향을 의미한다.
확증편향은 인지적 편향의 일종으로, 기존에 형성된 사고나 가치, 신념에 일치하는 정보들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경향을 뜻한다. 신념과 객관적 사실이나 상황이 배치되어 내적인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반대로 기존의 관념을 유지한 채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태도를 보인다. 인지부조화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확증편향이 후자에 해당한다. 확증편향은 정보선택 뿐만 아니라 정보해석에 대한 편향적 태도까지 포함한다.
확증편향은 외부로부터 입력되는 수많은 정보들을 빨리 판단하고 처리하기 위한 인지적인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있다. 기존의 신념에 부합되는 정보는 취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들은 걸러냄으로써 개인은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랜시간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하여 위험 요소를 차단하고자 하는 생존전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지적 유능감이나 자존감 유지를 위한 노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이를 지지하는 정보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이 타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지적 능력이나 자존감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확증편향은 빠른 의사결정과 효과적으로 정보처리를 돕기도 하지만, 성급한 결정과 선입견의 강화는 객관성이 결여된 의사 결정으로 귀결되고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정보를 균형있게 검토하고 해석해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확증편향으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에서는 합리적 의사결정과 위험요인 분석, 각 직군 종사자들의 전문성 고양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확증편향 [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산업혁명 이전의 독일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신뢰가 부족하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함께 새로운 문화를 의도적으로 ‘형성’한 결과 현재는 신뢰와 정확성의 상징이 되었다.

 

‘진리는 상상의 문제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진정한 도약을 위한 축적의 길 앞에 서 있다. 도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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