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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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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골격은 ‘검은 머리 귀여운 후배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어수룩한 선배 남학생의 안타까운 분투기. 하지만 무대가 되는 교토의 마을과 대학 등을 독특한 공간으로 변환시키고 여기에 애니메이션풍의 유쾌하고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을 대거 등장시켜 현실과 가상을 주물럭주물럭한, 아주 뛰어난 ‘망상력’이라는 엔진을 달고 질주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나’는 한 여자에 대한 뜨거운 연정으로 가슴을 태우며 고뇌하고 있다. 그녀는 윤기 있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아담한 체구의 귀여운 ‘아가씨’. 그녀는 문자 그대로 ‘아가씨’의 속성을 다 갖추었다. ‘여성’으로서의 성적 이미지보다는, 어디까지나 맑고 깨끗하고 천진난만한 캐릭터다. 이 책은 바로 이 세상 남자들의 이상형을 그대로 구현한 것 같은,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아가씨’에 대한 망상 가득한 한 남자의 짝사랑이라는 그 전형적인 시추에이션을 발판으로 하여 독자들을 단번에 이야기 속 망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공중부양을 하는 대학생 히구치, 악덕 수집가에게 책을 빼앗아 세상에 돌려보내는 헌책시장의 신,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일 년 동안 팬티를 갈아입지 않은 ‘빤스총반장’, 고약한 고리대금업자이자 사랑스러운 술꾼 이백 씨, 그리고 길가의 구르는 돌멩이처럼 그녀라는 성 주위의 해자를 착실히 공략하는 주인공 ‘나’까지 현실과 망상이 뒤섞인 캐릭터들이 즐비한 이 소설은 주인공 ‘나’와 그녀의 관계 이외의 모든 것들을 판타지적 상상력으로 눙쳐내어 독자들을 꿈과 현실 속에서 기분 좋게 몽롱하게 만든다.
저자
모리미 도미히코
출판
작가정신
출판일
2017.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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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든 현실이든 그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내 재능의 보물 상자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지만, 아직 나에게는 재능 하나가 남아 있다. 망상과 현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버리는 재능!”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배우들로 가득 찬 이 세상, 모두들 주역을 못 맡아서 안달하는데 그녀는 전혀 의도하지 않는 사이에 그 밤의 주역이 되었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고, 아직도 모를 것이다.

이 글은 그녀가 알코올에 잠긴 밤의 여로를 위풍당당 끝까지 걸어간 기록이자 주역은커녕 길가의 돌멩이로 만족해야 했던 나의 쓰디쓴 기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뺨에 어쩔 수 없이 철권을 날려야 할 사정이 되어 주먹을 굳게 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주먹을 잘 보길 바란다. 엄지손가락이 주먹을 밖에서 휘감아 싸는데 그건 다른 네 손가락을 무쇠로 잠그는 것과 같다. 그 엄지손가락이야말로 우리의 철권을 철권이게 하여 상대의 뺨과 긍지를 무자비하게 뭉개버리는 것이다. 폭력이 더한 폭력을 부르는 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필연이니 엄지손가락에서 생겨난 증오심은 요원의 불길처럼 세계로 퍼져 나가 드디어 다가올 혼란과 비참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남김없이 변기에 흘려보내게 되리라.

그러나 여기서 일단 그 주먹을 풀고 다른 네 손가락으로 엄지손가락을 휘감듯이 쥐어보자. 이렇게 하면 남자 주먹 같던 울퉁불퉁한 주먹이 분위기를 싹 바꾸어 자신 없어 보이는, 마치 마네키네코(한쪽 앞발로 사람을 부르는 시늉을 한 고양이 장식물─옮긴이)의 손같이 앙증맞아진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주먹에는 온몸의 증오를 담을 수 없다. 이리하여 폭력의 연쇄는 미연에 방지되고 세계가 조화로워지는바, 우리에게 아직 약간은 아름다운 것이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엄지손가락을 남몰래 안으로 숨기면 굳게 쥐려고 해도 쥐어지지 않아요. 그 살짝 숨긴 엄지손가락이야말로 사랑이에요.”

 

마네키네코 :: 한쪽 다리를 위로 올리고 있는 모습을 한 고양이 상(像)을 말한다. 사람을 부르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에 손짓하는 고양이라는 의미로 마네키네코(招き猫)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객이나 행복, 돈을 불러 모으는 행운의 장식품으로 여겨져 음식점 등에 놓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마네키네코의 유래에 관해서는 몇 가지의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에도시대 히코네번(彦根藩, ひこねはん)의 영주가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토쿠지(豪徳寺, ごうとくじ)라는 절 앞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 그 절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부르는 듯한 손짓을 하고 있었기에 절에 들러 휴식을 취했더니 때마침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비를 피할 수 있었다는 고사(故事)라고 한다.
마네키네코는 현재도 인기가 있어서 외국인에게 보내는 기념품이나 휴대폰 장식 등으로도 사용된다. 일본에서 고양이를 키웠다는 기록은 아주 오래되었는데, 헤이안시대의 귀족이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우고 있었음은 당대의 대표적인 고전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げんじものがたり)』등에도 묘사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대 일본과 정신세계 (사진 통계와 함께 읽는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2011. 9. 5., 정형)

 

“알겠니. 여자란 시도 때도 없이 철권을 휘둘러서는 안 돼. 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 성인군자는 그야말로 한 줌, 남은 건 썩은 못된 놈이든가 멍청이든가, 아니면 썩은 못된 놈이면서 멍청이야. 그러니까 때로는 그러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철권을 휘두르게 되지. 그럴 때는 내가 가르쳐준 친구펀치를 써. 굳게 쥔 주먹에는 사랑이 없지만 친구펀치에는 사랑이 있어. 사랑이 가득 찬 친구펀치를 구사하며 우아하게 살아갈 때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생이 열린단다.”

 

바깥 풍경도 따스해 보였지만 안은 더욱 따스했다. 오히려 더웠다.

 

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열기는 순식간에 참석자들을 새카맣게 탄 누룽지로 만들었다.

 

화기애애하게 2차로 흘러가려는 사람들 속에 끼어서, 나는 그녀와 나를 묶는 빨간 실, 천생연분 인연의 실이 혹시 길 위에 떨어져 있지나 않은지 찾아보기 위해 안광을 번득였다.

 

붙잡은 줄로만 알았던 기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슬처럼 사라졌다.

이리하여 나는 일찌감치 무대에서 퇴장하고 그녀는 홀로 밤의 여로를 더듬어 갔다.

 

그곳은 세상의 모든 칵테일이 단돈 삼백 엔, 나처럼 지갑에 대한 신뢰에 일말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을 위해 신이 마련해준 술집이었습니다.

 

“저기, 아가씨,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그렇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민이 없었으니까요.

 

체구는 호리호리했고, 긴 얼굴에 자란 수염을 깎지 않아서 오이 꽁지에 쇳가루를 묻힌 것 같았습니다.

 

도도 씨는 쭈글쭈글 갱지를 뭉친 얼굴을 하고 웃었습니다.

 

나는 거듭 사양했지만, 도도 씨가 모처럼 베푸는 친절을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짜보다 싼 건 없다는 생각에 그냥 받기로 했습니다.

도도 씨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는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느니 차라리 전기밥솥을 바라보는 편이 즐겁고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될 텐데요. 나는 딩동 소리를 내는 전기밥솥보다도 풍류를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광란의 버블 경제의 막이 가차 없이 내린 이후로 밀려왔다가는 빠져나가는 호황과 불황의 파도를 도도 씨는 비단잉어들과 함께 타고 넘었지만 올해 들어 연속해서 액운이 닥쳤습니다.

 

때마침 서쪽 하늘에서 강렬한 석양이 주위를 비추는 가운데, 도도 씨가 가장 사랑하는 비단잉어들이 비늘을 찬란히 빛내며, 마치 ‘멋진 용이 되어 돌아올게요’ 하는 것처럼 저녁 하늘로 날아 올라갔습니다.

 

도도 씨는 그 재앙으로 결국 빚더미에 올라앉은 채 이렇게 밤거리를 방황하며 인생의 다음 한 수를 암중모색하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대학생,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들,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으며 지나갔습니다.

 

“젊은이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늘 그걸 물으며 살아야 해. 그렇게 살 때 비로소 인생이 의미를 갖게 되지.”

 

“이렇게 지나쳐 가는 사람과 친구가 되어 그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이것이 내 행복일지도 몰라.”

 

용문(잉어가 이곳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는 중국 황하 중류의 여울─옮긴이)

 

“밤거리에서 만난 수상쩍은 사람에게는 결코 방심해선 안 돼. 물론 우리 같은 사람에게도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지.”

 

고래술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말 미인의 뱃속에 고래 한 마리라 할 만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맥주를 꿀꺽꿀꺽 마셔대는 모습을 세련된 무예를 감상하듯이 바라보았습니다.

 

텐구(天狗. 얼굴이 붉고 코가 길며 대체로 잘난 척하기를 즐기는 날아다니는 요괴─옮긴이)

 

그의 처지를 고려해볼 때 겨우 나의 가슴 하나 둘쯤이야, 물론 두 개밖에 없는 거긴 해도, 어쨌든 그 정도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배포가 왜 내겐 없는 걸까요.

 

“우리를 너무 믿으면 안 돼. 우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야.”

“‘우리’라는 말 함부로 쓰지 마.”

 

환락가인가 싶다가도 그 사이로 민가의 빨래건조대가 작은 외딴 섬처럼 불쑥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마치 비밀기지 같아 보였습니다.

 

“나는 유실물을 주운 것뿐이야.”

히구치 씨는 태연히 반론했습니다. “파출소에 가져다줄 건데 손에 들고 가기는 성가시니까 입고 가는 거야.”

 

젠장 할. 그녀가 유쾌하게 밤을 보내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결국 길가의 돌멩이로 끝날 팔자였던 거다.

 

불문곡직 :: 아닐 불 不, 물을 문 問, 굽을 곡 曲, 곧을 직 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마구 처리함'을 뜻함
<사기(史記) 열전(列傳) 이사전(李斯傳)>에 실린 것으로, 이사(李斯)라는 초 나라 사람이 진 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진나라의 종실 사람들과 대신들이 진 나라 출신을 제외한 다른 제후국 출신의 신하들은 신뢰할 수 없으므로 쫓아내야 한다는 '축객(逐客)'의 상소를 진시황에게 올렸다. 이사는 자신도 그 명단에 포함된 사실을 알고 진시황에게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음악을 즐길 때는 좋기만 하다면 다른 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사람을 쓰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가부를 묻거나 곡직을 가리지도 않고 진 나라 출신이 아니면 떠나게 하고 객들은 내쫓으려 한단 말입니까? 백성을 경시하고 재물과 즐거움만을 중시하는 것은 천하와 제후를 다스리는 어진 방책이 아닙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문곡직 [不問曲直]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올려다보니 좌우 양쪽으로 육박하듯 늘어선 처마 사이로 좁게 밤하늘이 보였고 그것을 가로질러 수많은 전선이 뻗어 있었습니다. 요정 2층에는 발이 늘어졌고 그 틈새로 술좌석의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녀와 해후하는 건 꿈속에서도 또 꿈이려나

 

“뭐가 조사단이야…… 요컨대 변태들의 모임이잖아.” 내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이놈 봐라. 이런 걸 두고 문화유산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사는 보람이기도 하지.” 도도가 말했다.

 

영겁회귀 :: 영원회귀라고도 한다. 영원한 시간은 원형(圓形)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히 되풀이되며,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내용이다.
이 사상은 얼핏 보기에 ‘권력에의 의지’ 사상과 모순되는 결정론(決定論)처럼 생각되지만, 영겁회귀를 자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 똑같은 생(生)이 무한히 되풀이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의지가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운명애(運命愛:아모르 파티), “이것이 생(生)이었더냐,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친 생에 대한 강력한 긍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상은 신(神)이나 도덕, 그 밖의 일체의 피안적(彼岸的) 요소를 부정한 니체에게 있어 ‘아마도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의 공식’이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겁회귀 [Ewige Wiederkunft, 永劫回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젊음은 없고 고민뿐이라니. 지옥이 아닌가.”

 

“생각하면 신기하지 않나.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우리는 먼지였어. 죽어서 다시 먼지로 돌아가. 사람이라기보다는 먼지인 쪽이 훨씬 길어. 그렇다면 죽어 있는 것이 보통이고 살아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예외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니 죽음을 무서워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라고.”

 

술집 한쪽이 조용해지자 마치 타이타닉호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템스 강의 안개 같은 짙은 보라색 연기가 피어올라 호박색 불빛이 비치는 카운터까지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마트료시카 :: 대표적인 러시아의 민예품이다. 인형의 몸체는 상하로 분리되고, 인형 안에 크기가 더 작은 인형이 3~5개 반복되어 들어 있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로 만들어지기 위해 인형의 팔다리는 없으며, 5중 이상으로 인형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인 형태는 보통 모난 부분 없이 머리부터 둥근 원통형이다.
마트료시카라는 명칭은 러시아 여성 이름인 마트료나(matryona)에서 유래했다. 본래는 여성의 모습으로 인형을 만들었으나 유명인이나 동물 등 여러 가지 캐릭터로 된 마트료시카 또한 많다. 안의 인형이 점차 작아질수록 섬세하게 그리는 기술이 필요하여 인형의 예술성은 정교한 손재주로 평가된다.
 최초의 마트로시카 인형은 1890년 러시아 아브람체보(Abramtsevo)의 공예가인 세르게이 말루친(Sergey Malyutin)이 디자인한 것을 바즐리 지뵤즈도흐킨(Vasily Zvyozdochkin)이 조각하였다고 알려져있다. 말루친은 일본의 목각 인형인 고케시 인형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말루친의 후원자였던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의 아내가 마트료시카를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고 동메달을 수상함을 계기로, 러시아 각지에서 다양한 마트료시카 인형을 만들게 되었다.
전통적인 제작방식으로는 가장 큰 바깥쪽의 인형은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의 형상으로 만들고, 안의 인형은 성별이 달라지게 하며, 가장 작은 인형으로는 아기가 나오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인형의 개수를 홀수로도 만드는 지금과 달리 인형의 총 개수가 짝수가 되도록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1900년대에 들어서는 러시아 지도자들을 그린 마트료시카가 무척 인기가 높았다. 현재의 마트료시카 제작 공예가들은 다양한 주제로 인형을 만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트료시카 [Matryoshka dol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처마 모양을 따라 잘린 좁은 밤하늘로 가지가지 남녀의 자태가 날아오르다 차례차례 돌이 깔린 보도 위로 내려왔습니다. 그것들은 좁은 골목 안에서 춤을 추다가 이내 어디론지 모르게 흩어져 날아갔습니다.

 

“인생을 논한다고 이 막다른 골목을 벗어날 수 있겠나?”

 

우키요에(에도시대에 발달한 민중적인 풍속화─옮긴이)

 

우키요에 :: 일본 에도시대(江戶, 1603~1867)에 서민계층을 기반으로 발달한 풍속화. 우키요에의 ‘우키요’는 덧없는 세상, 속세를 뜻하는 말로 미인, 기녀, 광대 등 풍속을 중심 제재로 한다. 목판화를 주된 형식으로 대량 생산하여 서민의 수요를 충당했다. 근대 풍속화의 시작이라고 할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는 출판 문화의 흥행에 따라 소설 삽화에 판화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삽화에서 점차 목판화로 독립, 단일색의 수미주리(墨摺)는 목판화의 각선이 갖는 견고함과 더불어 대중적인 취향 때문에 서민에게 환영을 받았다. 우키요에는 붉은색의 간결한 채색과 역동적인 탄에(丹繪), 검정색에 광채의 금속분을 첨가한 우루시에(漆繪), 그리고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는 목판 채색의 베니주리에(紅摺繪) 등으로 발전해 갔다. 1765년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가 다색 목판화인 니시키에(錦繪)의 기법을 개발한 뒤 우키요에의 판화 기법은 정점에 달했다. 목판에 의한 명쾌한 색면 배치와 조각도의 생생한 각선의 표현은 일본의 미니어처라 불릴 만한 독특한 미적 형식을 개척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키요에 [浮世繪]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팔랑팔랑 흩날리며 난간에서 떨어지는 도도 씨의 행복, 그것을 나는 공중에서 움켜쥐었습니다.

 

오늘 밤 만난 것도 어떤 인연.

 

반야 :: 대승 불교에서,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 온갖 분별과 망상에서 벗어나 존재의 참모습을 앎으로써 성불에 이르게 되는 마음의 작용을 이른다.
[네이버 국어사전] 반야 [般若]

 

가짜 전기부랑을 처음으로 입에 댔을 때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가짜 전기부랑은 달지도 않고 독하지도 않았습니다. 혀 위에 번개가 달리는 것 같을 거라고 상상했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은은하고 좋은 향을 지닌 무미한 음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본래 맛과 향은 뿌리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술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입에 머금을 때마다 꽃이 피는데 그것은 입 안에 아무 맛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뱃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작은 따스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깜찍해서 마치 뱃속이 꽃밭이 되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시고 있는 동안 뱃속에서부터 행복해지는 거예요. 술 마시기 시합을 하는 나와 이백 씨가 계속 싱글벙글 웃었던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과장되게 말하는 걸 용서해주신다면, 그때의 가짜 전기부랑은 마치 내 인생을 밑바닥부터 따스하게 만드는 맛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냥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지.”

“맛있게 술을 마시면 돼. 한 잔, 한 잔, 또 한 잔.”

 

갑자기 내 주변에서 현실의 소란스러움이 되살아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행해온 평소의 선행이 드디어 약발을 받는구나

 

애초에 내가 왜 이와 같은 밤의 여로에 나서게 됐는지, 그때의 나는 이미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매우 신나고 배울 게 많은 밤이었기 때문이겠지요. 뭔가를 배웠다는 것은 단지 나의 느낌일 뿐일까요? 그런 건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병아리 똥같이 작은 나는 어쨌든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생을 목표로 앞을 향해 걸어갈 것입니다.

 

 

 

심해어들

한없이 달려 나가는 상상 속의 로맨틱 엔진을 멈출 수가 없어서 결국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머지 코피를 내뿜었다.

 

야부사메(말을 타고 달리면서 세 개의 과녁을 차례로 쏘는 경기─옮긴이)

 

사람들은 많은데 떠들썩함이 없었다. 주위를 의식하듯 속삭이며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흡사 요괴들의 집회에 온 느낌이었다.

 

무료함을 물리치기 위해 그녀와 같은 책에 동시에 손을 뻗는 연습을 반복하다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술에 숙달되어갈 뿐인 자신에게 화가 끓어올랐다.

 

나에게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현실의 윤택함부터 달라. 지

식은 그런 뒤에 줘도 된다.

 

저 땀으로 끈적거릴 손을 꽉 잡고 돌아다니는 젊은 남녀의 모습은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를 더 덥게 만들었다.

 

한 헌책방 앞에서 손에 든 문고본을 찬찬히 읽고 있는 자그마한 여성의 뒷모습. 여름에 맞춰 짧게 자른 검은 머리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그녀가 클럽 후배가 된 이후로 자진해서 그녀의 뒤를 따르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지 어언 몇 달, 이미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라 할 만하다. 그런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그녀다!

 

책 읽는 모습이 매력적인 건 그 책에 폭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폭 빠진 아가씨는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중학생 때부터 갖고 싶었던 책이 백 엔짜리 동전 한 개라니! 지갑에 대한 신뢰에 일말의 그림자가 드리운 우리들에게는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바쁘다는 사람치고 정말 바쁜 사람 못 봤어. 한가한 게 미안하니까 괜히 바쁜 척하려는 거지. 정말로 바쁜 사람이라면 헌책시장이나 어슬렁거리겠어? 택도 없지.”

 

망중한忙中閑이 있고, 한중망閑中忙이 있는 법이야.

 

망중한 :: 바쁜 가운데 잠깐 얻어 낸 틈.
[네이버 국어사전] 망중한 [忙中閑]

 

한중망 :: 한가한 가운데도 바쁨.
[네이버 국어사전] 한중망 [閑中忙]

 

아니, 우리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건 복잡하게 얽힌 인과의 끈을 못 봐서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책을 둘러싼 우연에 마주쳤을 때 실로 나는 운명 같은 뭔가를 느낍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믿고 싶은 사람입니다.

 

“출판된 책은 누군가에게 팔림으로써 한 생을 마감했다가 그의 손을 떠나 다음 사람 손으로 건너갈 때 다시 살아나는 거야. 책은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다시 소생하면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지. 신은 나쁜 수집가의 손에 갇혀 있던 헌책을 세상에 풀어줌으로써 다시 생명을 갖게 해주는 거야. 그러니 마음씨 나쁜 수집가들은 마땅히 헌책시장의 신을 두려워해야 해!”

 

방금 전까지 끝없이 밝던 여름 하늘이 흐렸다 맑았다 했다.

짙은 회색 솜 같은 구름이 나뭇가지 끝으로 머리를 내밀면서 무더위가 한층 심해졌다. 소나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초조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를 찾아내지도 못한 채 비와 눈물에 젖을 것이다.

 

박람강기(널리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옮긴이)

 

박람강기 :: 널리 읽고 잘 기억한다는 뜻으로 견문이 넓고 독서를 많이 하여 지식이 풍부함을 이르는 말이다.
博 : 넓을 박 覽 : 볼 람 强 : 강할 강 記 : 기억할 기
《예기(禮記)》〈곡례(曲禮)〉 상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양하며, 몸을 수양하고 말을 실천하기를 힘써서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博聞强識而讓, 敦善行而不怠, 謂之君子.]”
〈곡례〉편에는 인재의 표상인 군자의 행동거지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예에 맞는 언행의 규범이 담겨 있다. 이 구절에서는 두루 배우고 읽어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겸손하게 부족한 듯이 여겨 더 배우려고 하는 태도와 바른 행동을 하려고 늘 노력하는 것이 옳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두루 보고 듣고 잘 기억한다는 뜻의 박람강기(博覽强記)가 유래하였으며, 박문강식(博聞强識), 박문강기(博聞强記), 박문강지(博聞强知), 박학다식(博學多識)이라고도 쓰인다.
비슷한 뜻으로 매우 박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인 무불통달(無不通達), 무소부지(無所不知), 무불통지(無不通知)가 있다. 반대말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뜻하는 성어인 목불식정(目不識丁), 일자무식(一字無識), 어로불변(漁魯不辨), 불변숙맥(不辨菽麥)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람강기 [博覽强記]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일기일회(일생 한 번의 인연─옮긴이)

 

두 번 다시 생각해내고 싶지 않은 고등학교 시절의 부끄러움 범벅의 첫사랑도 생각났고, 그러다가 결국은 지금 여기서 내가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방황하는 근본적인 이유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추억에 대해서는 무척 맷집이 좋은 나도 결국은 뻗고 말았다.

 

두랄루민 :: 구리와 마그네슘 및 그외 1∼2종의 원소를 알루미늄에 첨가하여 시효경화성(時效硬化性)을 가지게 한 고력(高力) 알루미늄 합금으로 1906년 9월 독일인 A. 빌름이 발명하였다. 두랄루민은 일반적으로 사용해 온 두랄루민과 초(超)두랄루민 및 초초(超超)두랄루민으로 구분된다.
독일인 A. 빌름이 1906년 9월 발명하였으며, 그가 소속된 뒤렌(Düren)금속회사의 이름과 알루미늄에서 이름을 따서 두랄루민으로 명명하였다. 그 후 각종 새로운 강력합금이 발명되었다. 가공용 알루미늄 합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두랄루민계인 알루미늄-구리-마그네슘계, 알루미늄-아연-마그네슘계와 내식성 합금(耐蝕性合金)인 알루미늄-망가니즈계, 알루미늄-마그네슘계, 알루미늄-마그네슘-규소계이다. 두랄루민을 세 가지로 나누면 일반적으로 사용해 온 두랄루민과 초(超)두랄루민 및 초초(超超)두랄루민으로 구분된다.
주요 특징은 시효경화성을 가진 점이다. 시효경화란 두랄루민을 500∼510℃ 정도로 가열한 후 물속에서 급랭시켜 매우 연한 상태로 만들고, 이것을 상온에 방치하면 시간이 경과할수록 경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시효경화가 상온에서 일어나면 강도는 철재(鐵材) 정도가 된다. 비중이 2.7이어서 철강의 1/3밖에 되지 않으므로 중량당(重量當)의 강도는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비행기의 재료로 많이 사용된다.
두랄루민이 비행기 재료로 사용된 후 두랄루민의 개량은 비행기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빌름의 두랄루민보다 강력한 초두랄루민이 여러 종류 개발되었다. 초두랄루민 중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24s는 미국에서 개발한 것으로, 빌름이 발명한 두랄루민보다 마그네슘이 1% 정도 많으며, 불순물로 함유된 미소한 규소는 경화에 관계되는 경우도 있고, 인장강도(引張强度)는 빌름의 것보다 20% 정도 높아 항공기 바깥면의 재료로서 사용된다.
그러나 두랄루민은 구리가 섞여 있어 알루미늄 합금 중에서도 내식성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에는 표면에 얇은 알루미늄을 포개서 합판(合板)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초초두랄루민 중 ESD는 1930년대 말에 일본에서 연구 개발된 것이다. 8%의 아연, 1.5%의 구리, 1.5%의 마그네슘을 가하여 아연이 섞여 있는 합금의 결점인 응력부식(應力腐蝕)을 크로뮴과 망가니즈를 0.25% 가하여 방지한 것이다. 미국에서 발명된 75s라는 재료는 이것과 같은 계열의 합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랄루민 [Duralumi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모른다니까요, 농담 말아요.”

“그야 농담이면 곤란하지.”

 

나는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며 성실함이 내면으로부터 마치 국물이 끓어 넘치듯 끓어 넘쳐 그것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그 헌책방 주인은 나를 불쌍한 소년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귀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아이는 맑고 깨끗하다는 망상과, 아름다운 아이는 더욱 맑고 깨끗할 거라는 망상이 가져온 결과다. 지저분한 청춘의 한가운데에 선 채 꼼짝 못 하는 이 대학생이 실은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하다는 진실은 늘 외면당한다.

 

와카 :: 중국에서 온 한시(漢詩)와 대조되는 것으로 일본 고유의 시를 이르는 말.
이 말은 《만요슈[萬葉集]》에서 처음 쓰였는데 거기서는 화답(和答)하는 노래라는 뜻으로 썼으나 여기서 말하는 ‘와카’는 이와는 별도이다. ‘와카’는 한시에 대항하는 뜻이 강했으나 그 후 한시를 초월하여 대표적 문예로서 정립하게 되자 그와 같은 의식은 점차 가셔졌고 근세 하이쿠[俳句] 등과 더불어 시가(詩歌)의 한 장르의 명칭으로 발전하였다.
처음 ‘와카’는 단카[短歌] ·죠카[長歌] ·세도오카[旋頭歌] 등 여러 가체(歌體)를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단카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와카’는 주로 5 ·7 ·5 ·7 ·7의 5구절 31음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므로 ‘31 글자’라고도 부르며 적당히 종합된 내용과 리듬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서인지 일본인의 감각에 호소하기 쉬운 시형(詩形)으로 존속되어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카 [わか, 和歌(화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종이에 각인된 기억은 모두 헌책이 되는구나.

 

헌책시장의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대신 숨이 콱 막힐 것 같은 헌책 냄새가 주위를 메웠다. 걸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양쪽 책꽂이에 꽂힌 책은 갈수록 더 헌책이 되어갔고 결국에는 변색된 종이다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문 저편에서는 마치 지옥의 가마솥에서 뿜어져 나온 것 같은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경매 장소에 발을 들이민 사람들 모두가 둔기로 후두부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신음소리를 냈다.

 

무시무시한 골동품들을 비추면서 방의 더위를 물리적이고도 문화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천장에 샹들리에 대신에 매달린 화로였다.

 

탕파(뜨거운 물을 넣어서 몸을 데우는 기구─옮긴이)

 

정수리를 뚫고 나갈 것 같은 자극적인 냄새가 피어오르는 냄비 속에서는 정체 모를 버섯류와 채소가 든 홍백의 수프가 칸막이를 경계로 나뉘어 지옥의 열탕처럼 끓었다.

 

혀 위에 퍼지는 그 맛은 맛이라기보다는 거칠게 깎은 몽둥이로 한 대 두들겨패는 통증이었다. 시모가모 신사를 중심으로 반경 2킬로미터 내에 존재하는 ‘매운 맛’이라는 개념을 모조리 주워 담아서 끓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웠다.

 

하얀 수프는 혀를 쉬게 해주는 건가 하고 먹었으나 마찬가지로 매웠다. 어차피 매워 죽겠어서 매운 맛 사이에 무슨 섬세한 차이를 느낄 여유도 없었으니, ‘왠지 멋있게 보인다’는 문화적 사정을 빼면 홍백으로 나눌 이유가 없는 수프였다.

 

아, 한 방의 역전 홈런을 날릴 희망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나의 로맨틱 엔진이여.

그녀와 같은 책에 손을 뻗겠다는 것은 지금 와서 보니 가소롭기 그지없는 계획이었다. 나비효과처럼 빙 에둘러 가는 그런 연애 프로젝트는 저기 사랑에 빠진 중딩에게나 줘버려야지. 남자는 어디까지나 직구 승부라고 나는 단정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아직 어리고 귀여운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그림책이 내 눈앞에 있었다. 만일 그녀가 이 책을 본다면 그리움이 치솟아 기절하고 말 것이다. 이 책이야말로 천하유일의 보배이며 또한 나의 미래를 열어줄 하늘이 내린 한 권의 책이리라. 이것을 입수한다는 건 그녀의 처녀마음을 내 손에 쥐는 것과 같고,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보장받는 것과 같으며, 나아가 그건 만인이 부러워할 영광의 미래를 약속받는 것과 같다.

제군. 이론이 있는가. 있다면 몽땅 다 각하다.

나는 승리를 향하여 포효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땀에 젖은 미끈미끈한 다섯 개의 얼굴은 이제 막 자궁에서 튀어나온 새끼 괴물들 같았다.

 

내 순서가 돌아와 냄비 속의 건더기를 꺼내 먹을 때마다 몸 안에 들어찬 열에 또다시 열이 더해졌고 혀는 불탔다. 입을 열면 화염이 나왔다.

 

현묘불가해한 물체

 

현묘 :: 이치나 기예의 경지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함.
율과 여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율려가 되어, 심원하고 그윽한 현묘에 이르듯이….
[네이버 국어사전] 현묘 [玄妙]

 

불가해 :: 이해할 수 없음.
불가해의 사건.
[네이버 국어사전] 불가해 [不可解]

 

정신과 육체 간의 치열한 전투가 눈에 보였다.

 

브리프(몸에 착 붙는 남성용 아래 속옷─옮긴이)

 

“죽고 싶은가?”

“죽고 싶진 않아.”

게이후쿠전철은 거의 떼를 쓰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갖고 싶어!”

 

각시탈 ::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전승되어오는 민속 가면극이다. 이 가면극은 약 500년 전부터 음력 정월 2일에 부락민의 무병과 안녕을 위하여 마을의 서낭신에게 제사지낸 부락제 때 하던 놀이이다. 각시탈은 이 탈놀이에 등장하는 10여 등장인물이 쓴 탈 가운데 하나이며, 그 가장 오래 된 원형의 탈은 다른 10점의 하회탈과 함께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의 각시탈은 첫째 마당 ‘각시의 무동’ 마당에 출연한다. 여기에서 각시는 꽹과리를 들고 무동을 타고 구경꾼들 앞을 돌면서 걸립(乞粒)을 한다. 이 걸립은 탈놀이 전 마당을 통하여 행하여지는데, 이렇게 해서 모은 전곡(錢穀)은 모두 별신굿 행사에 쓰고, 남으면 두었다가 다음 행사 때 쓴다.
한편 주지(住持)·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 다른 하회탈과 함께 국보 제121호로 지정, 보존 되어 있는 각시탈은 마을굿에 쓰인 신성가면(神聖假面)의 성격을 지니면서 예능가면으로도 쓰인 것이다. 가면제작의 수법으로 보아 그 제작연대는 고려 중엽, 즉 11~12세기로 추정한다. 만듦새를 보면, 오리나무로 얼굴 윤곽을 만들고 두 겹, 세 겹 옻칠을 한 뒤 색칠을 하여 얼굴 모양을 완성하였다. 하회리에서 신성시되는 하회탈 중에서도 이 각시탈은 특히 서낭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때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어볼 때에는 반드시 산주(山主)가 고사를 지내야 한다. 실눈을 반개(半開)한 각시탈의 얼굴은 익살스런 다른 탈과는 달리 표정이 없으나, 완전히 한국화한 탈로 지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각시탈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빨간 수박을 씹어 먹는 이백 씨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머리에는 뿔도 났다. 흔들리는 촛불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마왕 그 자체였다.

 

저마다 주마등을 바라보았던 것. 우리는 모두 저승으로 건너가는 강물에 한쪽 발을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에요.” 히구치 씨가 말했다. “이미 저승길을 생생하게 보셨을 것 같은데요?”

“말해주지…… 나는 저승길에 가지고 갈 선물이 필요해…….”

 

“그림책에게는 그림책이 놓일 장소가 있잖아. 그런 것도 몰라?”

 

 

 

편리주의자 가라사대

계절은 만추.

지평선 위에 크리스마스 시즌의 기운이 아른거리기 시작할 때면 가슴이 어수선한 남자들이 바야흐로 의도 명백하고 의미 불명한 언동을 하며 내달리는 암흑의 계절이 도래하노니,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 바로 대학축제다.

광란의 대형 무대에 올려진 대학축제라는 연극에서 우리는 그것이 내 입맛에 맞는 결말로 막을 내리길 꿈꾸면서 마구 탈선을 해댄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어쨌든 막을 내리자─단 가능한 한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라는 나 편리대로라는 집념이다. 그때 우리는 편리주의자가 된다.

 

그렇다. 신이나 우리나 모두 편리주의자다.

 

임시가게에서, 강의실에서, 특설 무대에서, 그들은 관객들에게 무엇을 주려는 걸까. 그곳을 찾은 사람들이 보게 되는 건 할 일이 없어 남아도는 시간과 무익한 정열, 봐봤자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즉 혐오해 마땅한 ‘청춘’뿐이었다.

‘대학축제는 좌판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청춘을 강매하는 청춘 암시장이다!’

 

나는 국가의 장래와 나 자신의 장래를 구별 없이 걱정하며, 매일을 오로지 사색에 잠겨 영혼을 단련하는 남자다.

 

우리 주위를 보면, 국면 타개를 위해 조바심치며 먹구름에 싸인 성으로 돌격하다가, 결국은 옥쇄(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짐─옮긴이)하고 마는 바보들이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은 분명 사랑스러운 남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용은 있어도 용기는 없는 남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이성과 신념을 지니고 자신을 바로잡아 착실히 성 둘레의 해자를 메워가는 지리한 작업을 참아내는 기백이다. 우선은 그녀가 나라는 보기 드문 존재에 익숙해져야 한다. 본체 공략은 그 뒤다.

 

변재천(말재주, 음악, 재복, 지혜를 주관하는 인도의 여신─옮긴이)

 

변재천 :: 항상 비파(琵琶)를 들고 다니는 음악의 여신이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특징에서 변재천(辯才天)이라는 이름을 따왔다. 아름다운 비파 연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뛰어난 말솜씨로 불법(佛法)을 널리 전한다. 또 중생들에게 복덕과 지혜를 전해주는 행복의 여신이자 지혜의 여신이다. 원형은 힌두교 예술과 학문의 여신인 사라스바티(Sarasvati)다. 얼굴이 희고 2~8개의 팔이 있는 젊은 미인으로 묘사된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에 밀교가 전해지면서 일본에서도 불교의 신으로 편입되어 지혜, 예능, 재복의 수호신이자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숭배된다. 사라스바티의 음역인 살라살벌저(薩囉薩伐底)를 비롯해, 대변천(大辯天), 대변공덕천(大辯功德天), 대변재공덕천(大辯才功德天), 미음천(美音天), 묘음천(妙音天) 등 여러 이름이 있다. 본래 물의 여신이기도 해 물이 풍부한 하천과 호수 근처에서 그에 대한 제사가 이뤄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재천 [Sarasvati, 辯才天]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라쿠고(일본 전통의 1인 소극─옮긴이)

 

라쿠고 :: 골계스런 내용을 재미있게 이야기하여 청중을 즐겁게하는 일본 특유의 예능의 하나이다. 오늘날에도 높은 시청률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방영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일본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연기 방식은 라쿠고를 전문으로 하는 예능인인 라쿠고가(落語家)가 기모노를 입고 방석에 앉아 부채나 수건을 이용하여 해학적인 이야기를 한다. 주로 골계가 중심인 회화 위주의 이야기로, 한 명의 라쿠고가가 여러 인물의 목소리를 내며 손짓·몸짓·표정 연기 등으로 관중을 즐겁게 한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의외의 결말을 뜻하는 오치(落ち)가 있어서 효과적이고 문학적인 마무리를 던져준다.
라쿠고는 에도시대에는 이야기를 뜻하는 하나시(はなし, 噺,咄), 오토시바나시(落しばなし), 가루쿠치(軽口), 골계바나시(滑稽ばなし)라고도 불리웠는데, 메이지시대에 들어서서 라쿠고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그 시작은 중세말 영주나 쇼군 곁에서 말상대를 하던 재담가인 오토기슈(御伽衆)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17세기 초 여러 단편 이야기를 모아 간행한 『세이스이쇼』(醒睡笑)에는 라쿠고의 원형을 이루는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에도시대 전기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거리에 서서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하여 구경꾼이 던져주는 돈을 받는 예능인이 오사카·교토·에도 등의 근세도시에 나타났다. 이것이 본격적인 라쿠고의 시작으로, 재담·만담·야담 등을 들려주는 상설 옥내 공연장인 요세(寄席)가 발달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직업적인 라쿠고가가 등장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다. 이들 라쿠고가를 지탱하는 것은 입장료를 지불하며 요세를 찾는 서민층이었다. 이미 서민의 오락으로 정착하여 에도에만 백여 곳의 요세가 번영하였고, 덴포 개혁으로 탄압을 받아 일시 쇠퇴하지만 다시 부흥하여 메이지시대에는 더 큰 전성기를 누린다.
특히 근대 라쿠고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는 산유테이 엔초(三遊亭円朝)는 뛰어난 연기력과 창장력을 발휘하여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괴담 모란등롱」을 비롯한 엔초의 라쿠고 상연을 그대로 필록한 속기록이 간행되어 메이지기의 언문일치 운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근대 최초의 언문일치에 의한 사실주의 소설 『우키구모』(浮雲)를 쓴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가 엔초의 속기록을 높이 평가 하였음은 라쿠고와 근대소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실이라 할 것이다.(최관)
[네이버 지식백과] 라쿠고 [落語]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그런 활동을 인정받아 3학년이 된 지금 ‘막노동계의 총수’라고 자조하면서도 ‘대학축제 사무국장’의 직책을 손에 넣은 것이다.

 

“해자만 계속 메울 거야? 언제까지 메울 작정이야? 사과나무를 심고 오두막이라도 지어서 거기 살 작정이야?”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깨버릴 정도의 신중성이 필요하다구.”

“아니야. 넌 해자를 메운 땅에서 무사태평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성으로 돌격했다가 쫓겨 오는 게 무서우니까.”

“잔인하게 정곡을 찌르는군.”

 

“어째서 머리가 그렇게밖에 안 돌아가는 건지…… 정말 넌 바보야. 그런 점이 좋긴 하지만.”

 

그때 나는 화를 내는 사무국장의 말을 이미 귓전으로 흘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막 운동장 밖으로 나가려는 한 사람의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 순간 바보들의 제전을 가득 채웠던 소란스런 소리들이 귓속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온 세상이 오로지 내 시야를 가로지르는 그 사람 그림자 하나로 모아졌다. 맥박이 뛰었다. 그 날씬한 작은 몸, 반짝반짝 윤이 나는 짧게 자른 가지런한 검은 머리, 고양이같이 변화무쌍한 걸음걸이……. 그녀의 뒷모습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내가 잘못 봤을 리 있을까. 그럴 리 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운동장 밖으로 나가려는 그 인물이야말로 얕은 것 같으면서도 깊은 바깥 해자를 메우고 또 메워왔던 지난 반년, 내가 충혈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좇아왔던 바로 그녀였다.

 

평소 면학에 여념이 없던 강의실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를 맞았습니다. 재능 있는 청춘들이 이루어놓은 땀과 눈물의 결정체, 온갖 지혜와 멋이 녹아든 공작물들이 화려한 두루마리그림같이 차례차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곳은 진정한 청춘극장이었습니다. 대학에서의 첫 축제이니만큼 나는 퐁당 빠져들었습니다.

 

히구치 씨라면 늘 낡아빠진 유카타를 걸치고 다니는, ‘직업은 텐구’라고 자칭하는 사람이지요. 대학에 입학해서 내가 만난 사람들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순서대로 북에서 남으로 줄을 세운다면 히구치 씨는 그 요상한 행렬의 최북단에 설 거예요.

 

“그는 일 년 전에 어떤 사정이 있어서 소원 성취를 결심하고 요시다 신사에 가서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빤스를 갈아입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굳은 결심으로 달려들면 귀신도 내빼고 어리석은 사람의 일편단심이면 바위도 뚫는다는 말이 있어. 그는 결국 모든 클럽과 서클의 빤스반장들을 제치고 역대의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영광스러운 빤스총반장이 된 거야.”

 

“이 로망이 이해가 안 돼?”

“그런 불결한 로망을 이해하라니 말이 돼?”

 

뭉실뭉실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몇 번쯤 진입을 시도해보았습니다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때마다 밀려났습니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묻자, 그들은 하나같이 사랑의 시작을 떠올리게 하는 꿈꾸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떼구름처럼 생겨나는 즉석 연적들 때문에 점점 더 초조해져서 그들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그녀는 너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라고 선언하고 싶었으나, 상대에게 내뱉는 독설의 화살은 더 큰 기세로 내 쪽으로 튕겨 돌아오리란 것을 알기에 “젠장, 나 역시 아직 그녀의 안중에 없어!” 하고 나 홀로 신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는 강의 둔덕을 쓰다듬는 봄바람같이 부드럽게 웃었습니다.

 

나는 코끼리 엉덩이란 게 이다지도 까칠한 거였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유머러스한데, 실상은 어설픈 예상을 깨며 어금니를 드러내고 달려들어 무는 흉포한 엉덩이였습니다. 나는 코끼리의 엉덩이를 여러 번 쓰다듬어 내 손바닥에 현실의 혹독함을 각인시켰습니다.

 

세상의 바보들아 여기를 주목하라! 그렇게 말할 만했다.

 

내가 개탄 속에서도 전시품을 자세히 점검하며 호연지기를 배양하고 있는데,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날이 저물면서 기온이 더 떨어졌다. 나는 고독한 겨울 냄새를 맡았다.

어차피 올해 겨울도 칙칙한 거리를 지나가는 북풍이 헐벗은 내 영혼을 철저하게 상처 입히고, 나는 홀로 외로이 감기에 걸릴 것이다. 해마다 그랬다. 아주 정해놓고 그랬다. 그리고 어느 날 고열에 들뜬 몸을 이끌고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나간 내 앞을 시끌벅적 들뜬 파렴치한 놈들이 케이크이니 치킨이니를 영차 영차 어깨에 메고 지나갈 것이다. 거리를 수놓은 장식 전구가 고열로 흐려진 내 눈에 아름답게 비칠 때면 거리가 왜 이렇게 반짝반짝거리는 걸까 하고 하숙으로 돌아오는 언덕길을 오르다가, 나는 졸지에 알아차릴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오늘 밤이 크리스마스이브로구나.

 

“수상쩍은 것의 그늘에는 거의 히구치 씨가 있군요!”

“이봐 이봐, 칭찬은 그만둬.”

 

나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수없이 봐왔다. 그러나 그때의 그처럼 도취된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놀릴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는 말하자면 ‘온몸으로 연애 중’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빤스총반장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거야.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지. 남자 중의 남자야.”

“인간으로서 주력해야 할 바를 완전히 착각하고 있군요.”

 

뜻은 멋있고 아름다운데 목적지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전력 질주한다는 인상이 짙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칭찬하고 악수를 청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그 방식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고양이 혀 :: 猫舌(네코지타).
뜨거운 것을 잘 못 먹는 체질을 가리키는 일본어. 일본어 관용구로써 쓰이는 말이다.
고양이가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한다는 일본 속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틀린 사실은 아니지만, 비단 고양이뿐만 아니라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음식을 가열하여 먹는 습성이 없기에 고양이를 포함하여 동물 대부분은 원래 뜨거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다만 반복적으로 뜨거운 먹이를 주면 점점 적응해나간다는 듯. 마찬가지로 인간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뜨거운 음식을 먹지 못하면 뜨거운 음식을 잘 못 먹게 된다.
뜨거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은 초딩입맛의 한 부류로 생각되면서 한국이든 일본이든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사실 뜨거운 것을 못 먹는 사람이 오히려 건강에 이득이 된다는 WHO의 발표가 나왔다. 국제보건기구 WHO에서 65도 이상 온도의 음료나 음식을 섭취할 경우 식도 조직 손상으로 식도암 발병율이 높아진다고 발표했다.
영미권에서 자주 사용되는 'cat got your tongue'(고양이가 네 혀 가져갔구나)은 우리나라로 치면 꿀먹은 벙어리로서 할말을 잃어 우물쭈물하는 모양을 뜻한다.
[나무위키] 고양이 혀

 

많은 학생들이 일치단결하여 제각각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짜내어 대학축제라는 엉뚱한 축제를 신나게 만들었습니다. 훌륭한 일입니다. 멋진 일입니다.

 

크레이프 :: 프랑스 거리를 걷다 보면 우리나라의 호떡만큼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바로 ‘크레페(Crepe)'이다. 바닥이 비칠 정도로 얇게 구워낸 반죽에 다양한 재료를 넣고 싸먹는 크레페는 맛과 먹는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 크레페의 영향으로 디저트로만 알고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한 끼 식사로도 대용될 만큼 매력적인 음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크레페 - 언제부터 먹었을까? (푸드스토리, 김한송)

 

“하지만 그렇게 나 편한 대로 일이 풀릴 것 같지는 않네요.”

 

브리프 :: 바짓가랑이가 없고 다리에 꼭 맞도록 디자인된 남녀 공통의 속옷.
팬츠 또는 팬티라고도 한다. 브리프는 짧은, 간단한이란 뜻이다. 재료는 면메리야스 ·나일론 ·레이온 ·견 등이 쓰이며, 특히 여성용은 자수 ·레이스 ·리본 등으로 장식된 것도 있다. 때때로 남자의 속옷을 자키 쇼츠(jockey shorts)라고도 하는데, 자키는 쿠퍼사(Coopers社)가 독점적으로 만든 브리프의 상품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브리프 [brief]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오, 이 땅에는 신도 부처님도 없다는 얘긴가!

 

그건 대학축제 사무국 놈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질풍노도처럼 사는 학생들의 천적, 어떻게든 파도를 멈춰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무사안일주의자, 그들은 대학축제의 막을 무사히 내리기 위해 대학축제 테러리스트라 해 마땅한 괴팍왕을 어디론가 끌고 가 감금한 것입니다.

 

그럼 부디 자비를. 모든 것은 변덕쟁이인 운명의 여신의 장난, 나는 어쩌다가 악역을 맡게 된 불쌍한 남자.

 

우연한 운명에 희희낙락하며 편승해놓고 전세가 불리하다 싶으니까 운명의 여신을 핑계 삼다니

 

시작부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상대를 마구 헐뜯어대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갖은 악담을 던지는 건, 스모 선수가 부정을 씻기 위해 서로에게 소금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밥이든 빵이든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 굳이 밥파와 빵파로 갈라서서 논쟁을 해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나는 빵도 밥도 다 좋아합니다. 기회주의자라서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그녀가 사과 엿을 샀다는 말을 듣고 그녀와 사과 엿의 배합이 너무나도 매력적이라 견딜 수 없어 나도 사과 엿을 하나 사서 핥으며 걸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뭔지 몰라도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하고 생각했다. 아직 바깥 해자도 다 메우지 못했는데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더 멀어질 작정인가. 운명의 장난아, 짓궂도다. 그녀는 뭔가 큰 역할을 맡았거늘 나는 그저 여기서 찬 바람을 맞으며 길가의 돌멩이처럼 구르고만 있구나…….

 

폭풍을 만난 배의 선실처럼 아수라장인 사무국에서 선장인 대학축제 사무국장이 마침내 분노를 폭발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현실 속의 인간이 “끼이이익”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그는 일어서서 아무도 듣지 않는데 허공을 향해 연설했다.

“우리도 말이지! 그저 맹목적으로 이건 안 돼, 그건 안 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말이 많은 것은 다 난폭해지려는 사람들의 청춘을 어떻게든 현실로 연착륙시키기 위해서라고. 무사히 대학축제의 대단원을 내리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그런데 뭐야! 누구 한 사람, 칭찬하는 놈이 없어! 이 얼마나 손해 막심한 역할이냐! 이놈 저놈 다 저 하고 싶은 대로야!”

그는 주먹을 추켜올리며 외쳤다.

 

비스코티(두 번 굽는다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 과자─옮긴이)

 

해가 지는 중이라 쓸쓸함이 더한 건지, 나는 사람이 그리워졌습니다.

 

악의 제왕을 자칭하는 나에게 새삼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악담을. 봄바람만큼도 느낌이 없구나.

 

하찮은 정의를 내세우며 북방쇠박새같이 소란을 떠는 게 고작이면서 대학축제 테러리스트라니 지나가던 강아지가 웃을 일. 정의는 늘 나와 함께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허무한 꿈. 여기서 단번에 끝내주는 것이 자비라 할 것이다!

 

이렇게나 심오한 축제가 해체되고, 대학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울적해졌습니다. 초등학교 때 운동회가 끝나갈 무렵에 느꼈던 슬픈 감정이 내 가슴을 적셨습니다.

 

거대한 지도를 앞에 두고 팔짱을 끼더니,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사건을 분석하는 셜록 홈즈같이 까다로운 얼굴을 했습니다.

 

나는 소도구 담당 여학생의 뺨에 웃음이 번지는 걸 보았습니다. 국장이 돌아보자 물이 모래에 스미듯이 그녀의 웃음은 사라졌습니다.

 

그 소리에 나의 연기자로서의 혼이 되살아났습니다. 겨우 반나절의 일시적인 혼이 아닙니다. 이래 뵈도 어린 시절에는 정석대로 『유리가면』(연극계를 묘사한 인기 순정만화─옮긴이)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미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었다. 볼 만한 게 하나도 없는 공허한 대학축제의 막이 내리는 걸 바라보며 ‘이제 인사人事를 다했으니 슬슬 천명天命이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남은 ::
1. 열이 조금 넘는 수.
그날 회의에는 회원이 여남은밖에 모이지 않았다.
2. 열이 조금 넘는 수의.
여남은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네이버 국어사전] 여남은

 

규방조사단원 한 명이 골판지 상자를 펼쳐 의도적으로 도색 자료를 떨어뜨렸다. 사무국원 여럿이 “오오! 이 젖가슴 좀 봐!” 하고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외침을 내지르며 핑크빛 보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를 뒤따라온 건 사무국장이었다. 우리는 목적은 크게 달랐으나 쫓는 것은 같았다. 그는 대학축제가 무사히 막을 내리게 하기 위해, 나는 새로운 미래의 막을 올리기 위해. 우리는 말없이 나란히 뛰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괴팍왕〉의 최종 막을 연기하기 위해 사무국에서 탈출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어떠한 운명의 장난으로 그녀가 그 역을 맡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국장이 그녀의 커다란 꿈을 막으려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녀의 벗은 나의 적, 그녀의 적도 나의 적, 어제의 벗은 오늘의 적.

 

“말도 안 돼, 우린 친구잖아!”

“용서하라. 벗이여.”

나는 말했다. “그녀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

 

시간이 마구 지나가 주위는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차가운 저녁 바람이 부는데 이마에는 땀이 솟았습니다.

 

마침내 그녀를 따라잡은 것은 옥상이었다. 지은 지 삼십 년, 비바람에 삭은 콘크리트 옥상은 황량한 모습이었다. 아래로는 정말로 대단원을 맞이한 대학축제가 쪽빛 땅거미에 잠겨갔다. 서쪽 하늘 한 귀퉁이에 희미하게 남은 분홍빛을 빼고는 하늘은 전체적으로 검푸른 빛으로 맑게 빛났고 거뭇거뭇 늘어선 건물 건너편의 시계탑은 문자판을 번쩍이며 하늘을 찔렀다. 찬 바람에 땀으로 젖은 몸이 시원하게 식었다.

 

나는 지금 이곳,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괴팍왕〉 최종회의 막은 어디서 오르는가.

무엇보다도 우리의 해피엔드는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그런 건 없는 게 아닐까. 나는 결국 막이 내릴 때까지 길가의 돌멩이로 남아야 하는가.

 

“알아” 하며 돌아보는 순간, 나는 옥상 가장자리의 움푹 들어간 곳에 발을 헛디뎠다. 그대로 천천히 뒤로 쓰러지는 내 몸. 왼손에는 불이 붙은 불꽃, 오른손에는 달마오뚝이 목걸이. 왼쪽 눈에는 바야흐로 사라지려 하는 장밋빛 미래, 그리고 오른쪽 눈에는 최후의 광경이 비쳤다.

 

막상 생의 마지막에 직면하면 주마등처럼 살아온 인생이 뇌리를 스쳐간다는데, 확실히 인간의 뇌라는 것은 묘한 작용을 한다. 나는 그 순간의 광경을 명료하게 기억한다. 느릿느릿, 그러나 분명하게 나는 이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이렇게 열심히 애를 썼는데 그녀가 꿈에서조차 모를 곳에서 나는 이렇게 떨어진다. 안녕, 혐오해 마땅할 청춘이여. 안녕, 영광의 미래여.

 

내 눈에 한 점의 빨간 빛이 꼬리를 끌며 검푸른 하늘로 올라가 작렬하는 것이 보였다.

 

한순간 나는 널려 있던 하얀 옷들과 셔츠들과 나란히 공중에 매달려, 부모님이 보내준 학비로 태평스레 뒹굴며 생활하는 얼간이 학생처럼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런 학생도 결국에는 자신의 손으로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손을 놓지 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손을 놓을 여유 따위가 내게 있을 리 없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고 발밑을 보니 5층 창에서 굵은 밧줄이 뻗어 나와 있었다. 그건 옆 건물 옥상에 있는 급수탱크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손을 뻗으면 어찌어찌 닿을 듯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빨래널이대에서 손을 놓고 일단 공중에 떠야 했다. 그런 배짱이 나에게 있다고 보느냐. 나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곤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실로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평소 육체적 단련과는 아무 인연 없이 살아온 나에게서 영화의 스턴트맨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한 열혈 액션이 나오다니. 더구나 그 덕에 살아남기까지 하다니.

 

불굴의 투지로 완전 무의미한 죽음의 심연에서 뜻밖에 되살아난 나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나의 개인사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양의 아드레날린이 내 뇌를 가득 채웠다. 그녀를 이 가슴에 안고 내 손으로 해피엔딩을 만들어야지. 태어나서 뭔가를 위해 이만큼 애써본 일이 없지 않은가.

 

무슨 근거로 당신이 그런 큰 역할을? 하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하고 대답하겠다. 해피엔딩을 내 손으로. 비록 편리주의적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괴로움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찢어질 뿐. 당신이 어둠 속에 있을 때 내 마음도 역시 어둠 속에 있었답니다.

 

비단실처럼 가는 실마리를 더듬어 마침내 이곳으로.

 

내가 믿는 길을 걸으려 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당한 성과 없는 투쟁, 또 투쟁. 활이 꺾이고 화살이 바닥나 만신창이가 되고, 결국 이 불모의 캠퍼스에 나는 풀썩 무릎을 꿇었소.

 

당신이야말로 바보들의 황야에서 방황하는 내 앞길을 비추는, 단 하나의 등대라고.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한 데다 대본에서 지시하는 대로이긴 하지만 그녀를 이 가슴에 끌어안은 덕에, 나는 치사량에 가까운 행복을 맛보았고, 새삼스레 아슬아슬 죽을 지경이었다. 감격한 나머지 그럴듯한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괴팍왕의 대사에 내 마음을 모두 담았다. 그녀도 감격했으리라 믿었다.

 

“일기일회라는 말 알아? 그것이 우연의 스쳐 지나감이 될지, 아니면 운명의 만남이 될지, 모든 것은 자신이 하기에 달렸어. 나와 그녀가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일은 운명의 만남이 되지 못한 채 허망하게 날아갔어. ‘생각해보니 그게 계기였어’라고. 어느 날인가 그녀와 함께 다시 생각할 특권을 나는 그만 허무하게 날려버린 거야. 그 기회를 잡을 재주도 배짱도 없었기 때문이야!”

 

“난 술을 못 하지만 이참에 마시지, 뭐. 이야기하고 나면 편해지는 것도 있어.”

 

하누키 씨는 옥상 끝에서 내려뜨린 다리를 흔들며 “대단원! 대단원!”이라고 불시에 외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축지법 고타츠 위에 있던 달마오뚝이 여러 개를 밤하늘로 집어던졌다. 달마오뚝이들은 가볍게 하늘로 올라 차례차례 학교 건물 사이사이로 날아가 제각각 떨어졌다. 그중 두 개의 달마오뚝이가 빤스총반장과 노리코 씨의 머리에 맞아 툭 하고 튀었다.

솔직히 나는 눈물이 났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부러웠기 때문이다.

 

비와호 :: 면적은 673.9km2, 길이는 63.5km, 최대너비는 22.lkm, 최대수심은 103.6m이다. 단층함몰호(斷層陷沒湖)로 동쪽 연안은 유입 하천이 많아 호안평야가 발달하였으나, 서쪽 연안은 아도강[安曇川] 하류의 삼각주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산지가 호안까지 뻗어 있다. 현(縣) 전역의 물을 받아들여, 남단부에서 요도가와강[淀川]의 상류 세타강[瀨田川]을 통해 오사카만[大阪灣]으로 배수한다. 
호수에는 어패류가 풍부하여 어획량이 많고, 전국 하천에 방류하기 위한 새끼 은어 및 민물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호수의 물은 연안평야의 관개용수로 이용되며, 비와호 용수로에 의해 상수도 ·발전 ·공업용수로 이용되어 하류의 게이한신[京阪神:京都 ·大阪 ·神戶]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호수와 연안 일대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사적 ·명승 ·문화재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경승지로 알려져 왔고, 가장 먼저 국정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와호 [Lake Biwa, 琵琶湖(비파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차가운 저녁 어스름 속에서 대학축제는 해체되어 작디작아졌고, 그 쓸쓸한 어둠의 중심에서, 쌓아올린 장작에 불이 붙었습니다. 확 타오른 따뜻한 불이 운동장에 모여든 사람들을 비췄습니다.

 

“신도 우리도, 이놈도 저놈도 다 편리주의자야.”

 

 

 

나쁜 감기 사랑 감기

맑은 하늘과 비 오는 하늘의 경계점을 본 적이 있는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물방울이 지면을 때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고 앞을 바라보면 몇 발자국 앞에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지면은 바싹 말라 있다. 눈앞에 맑은 하늘과 비 오는 하늘의 경계점이 있는 것이다.

 

한 마리 젖은 쥐가 차가운 빗속을 달린다. 그건 물론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맑은 하늘 아래로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 맑은 하늘이 마치 여름의 아지랑이처럼 저 멀리 도망치다 사라지다를 반복한다. 저쪽 햇볕 속에 서 있는 것은 내 마음속의 사람, 검은 머리의 아가씨다. 그녀 주변은 따뜻하고 평온하고 신의 호의로 가득하다. 아마도 좋은 향기도 날 것이다. 그에 비해 내 몸은 어떠한가. 내 주위는 신의 호의는커녕 서툴게 분투하는 나 자신을 한탄하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휘몰아치는 사랑의 폭풍우가 몸을 때린다.

 

나는 감기의 신에게 한방 먹었다. 그래서 고열과 심한 기침, 폐가 비틀리는 고통에 시달리며 생전 개는 법 없는 요 위에서 몸을 움츠리고 지내야 했다. 그녀를 뒤쫓지도 못하고 망상에 골몰할 뿐. 나는 결국 주역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길가의 돌멩이 신세에 감지덕지하며 외롭게 한 해를 넘길 신세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생전 개지 않는 요 위에서 일어났다.

이건 그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운명의 편리주의에 의해, 마침내 길가의 돌멩이가 잠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해 가을, 대학축제에서의 나의 분투는 칭찬받을 만했다. 신의 편리주의에 의존했다는 걸 옆으로 제쳐놓는다면, 우선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교토시청 앞 광장에서 바니걸들에게 둘러싸여 시장에게 표창을 받아도 마땅한 노력을 한 셈이었다.

 

애초부터 나는 결정적인 수단을 쓰는 걸 피했다. 하지만 쓸데없이 멀리 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다수의 의견은 일단 각하하겠다.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해볼 일이다.

어쨌든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과연 나를 한 남자로서, 아니, 한 사람의 대등한 인간으로서라도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걸 잘 알 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일격을 망설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다른 재미있는 것들에 푹 빠져서 남녀가 서로 밀고 당기는 일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 거는 폼 나게 차려입은 어른 신사숙녀가 성대한 가면무도회의 한쪽 구석에서 벌이는 놀이일 뿐 나 같은 아이와는 인연이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 몸은 상대의 마음은커녕 솜과자처럼 애매모호한 나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잊히지 않는 것은 대본의 지시대로 선배에게 안겼을 때의 묘한 느낌입니다.

대학축제가 끝난 뒤에도 나는 불쑥불쑥 그때의 일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어쩐지 멍~해지는 거예요. 물론 나는 보통 때도 정신을 갈고닦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멍~’은 ‘멍~’ 중의 ‘멍~’, ‘멍하게 굴기 세계선수권대회’ 같은 것이 있다면 틀림없이 국가대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본격적인 멍~이었습니다. 그런 멍~한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마음이 들뜬 나머지 방에 있는 비단잉어 인형을 푹푹 치거나 꽉 눌러버리거나 했습니다. 불쌍한 건 비단잉어였습니다. 정말로 미안한 일입니다. 비단잉어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한 다음에는 언제나 몸이 녹초가 됐습니다.

 

굶주린 들개처럼 우걱우걱 먹었습니다.

 

작은 방은 예쁘게 정돈되어 있었고 하얀 사각 가습기에서는 증기가 보드랍게 올라왔습니다.

 

“히구치 군이 감기에 걸리지 않는 건 스트레스가 없든가 아니면 바보이기 때문이야.”

 

“어이 어이, 나한테 뭘 기대했다면, 그건 오버야.”

 

저녁 어스름 속에 빛나는 전구를 올려다보면 초라한 기분이 든다.

 

기대란 어그러지기 쉬운 법.

 

사랑은 인간이 걸리는 온갖 병에 들지 않는 병이라, 갈근탕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그녀라는 성의 바깥 해자를 메우는 데만 몰두했던 요 반년 동안 오로지 영혼의 원거리 연애에만 몸부림쳤으니, 상사병에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갈 곳 잃은 정열이 몸 안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핑글핑글 소용돌이쳤다. 그래서 이렇게 열이 나는 거다. 그렇고말고.

 

흐린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이 마룻바닥에 희미하게 양지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좀처럼 감기에 걸리지 않는 아이였는데 그래도 몇 번쯤 아버지의 차를 타고 주치의의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왠지 그때도 이렇게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햇빛을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윤폐 :: 폐의 기운을 원활히 해줌.
[네이버 지식백과] 윤폐 [潤肺] (약과 먹거리로 쓰이는 우리나라 자원식물) 

 

가모가와 :: 지바현[千葉県] 보소반도[房総半島]의 남부에 있다. 동쪽으로 태평양에 면한다. 서부로는 나가사평야[長狭平野]가 펼쳐진다. 해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관광업이 발달했다. 
1954년 7월 1일 가모가와정[鴨川町], 다하라촌[田原村], 사이조촌[西条村], 도조촌[東条村]이 통합하여 가모가와정[鴨川町]이 되었다. 1971년 3월 31일 가모가와정[鴨川町], 에미정[江見町], 나가사정[長狭町]이 통합하며 시제시행을 통해 가모가와시[鴨川市]가 되었다. 2005년 2월 11일 아마쓰코미나토정[天津小湊町]과 통합해 새로운 가모가와시[鴨川市]가 탄생했다.
주요산업은 어업으로 가모가와어항[鴨川漁港], 고미나토어항[小湊漁港], 아마쓰어항[天津漁港]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철도는 JR우치보선[内房線], JR소토보선[外房線], 도로는 국도 128호, 국도 410호 등이 지난다. 이 지역 교육의 중심지로는 조사이코쿠사이대학[城西国際大学],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도요대학[東洋大学]이 있다. 명소로는 가모가와시월드[鴨川シーワールド], 니에몬지마[仁右衛門島], 가모가와온천[鴨川温泉], 다이노우라[鯛の浦] 등이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1971년 야마나시현[山梨県] 미노부정[身延町], 1997년 11월 지바현[千葉県] 기미쓰시[君津市], 2004년 12월 20일 사이타마현[埼玉県] 사이타마시[さいたま市], 해외에서는 1993년 11월 8일 미국 위스콘신(Wisconsin)주 매니토웍(Manitowoc)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모가와 시 [Kamogawa, 鴨川市(압천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추위가 더 혹독해지자 하숙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불 속에서 지냈다. 이불 속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이불 속에서 밥을 먹고 이불 속에서 공부하고 이불 속에서 생각에 잠기고 이불 속에서 조니를 달랬다. ‘생전 개지 않는 이부자리’야말로 내 혐오스런 청춘의 주 전쟁터였다. 그날도 서둘러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더러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나왔다. 관절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더니 몸이 늘어지면서 마치 이불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축제 때의 추억을 담아놓았던 내 마음의 보석 상자를 열고 그녀의 가는 어깨를 안았을 때의 감촉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그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명료했던 그녀의 감촉은 점점 옅어져갔다. 내 팔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의 얼굴도 흐려져갔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었을까?

 

멍청히 그것을 바라보다 보니 그때 내 주위에 깔렸던 땅거미가 다시 나를 감쌌다. 나는 유난히 맑은 쪽빛 하늘 아래서 그녀를 찾아 달렸다. 올려다본 하늘이 거뭇거뭇한 학교 건물에 잘려 보인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어서 빨리 그녀를 쫓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옥상은 관객으로 가득 차 도떼기시장 같았다. 그 혼잡 너머로 ‘풍운괴팍성’이 솟아 있고 난립한 굴뚝에서 하얀 김이 뭉게뭉게 뿜어져 나와 저녁 어스름 속으로 사라졌다. 연극을 보러 온 관객과 상연을 중단시키려는 사무국원들이 서로 밀거니 밀치거니 하는 사이로 주역을 맡은 그녀가 관객들의 보호를 받으며 무대로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 내가 ‘풍운괴팍성’에 도달하기 전에 최후의 막이 올라갔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열광하는 관객들에게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했다. “지나가게 해줘!” 하고 외치는 내 노력은 허망했다. 나는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하지만 검은 산을 이룬 사람들의 무리가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고 그녀에게 닿기는커녕 그녀가 선 무대조차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대에 올라갔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를 내팽개쳐놓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괴팍왕의 팔에 안기는 걸까. 저기서 그녀를 안으려는 건 누군가?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귄가? 그게 왜 내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분한 나머지 발밑에 구르던 달마오뚝이를 주워 던졌다. 달마오뚝이는 크게 곡선을 그리며 저녁 어스름 속을 날았다. 주위에 서 있는 관객들이 비난 섞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홀로 멈춰 섰다.

사랑의 바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질투로 불타버린 가슴 위를 쓸고 지나갔다.

 

‘철학의 길’을 따라 심어놓은 벚꽃 가로수도 겨울바람에 잎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 사탕과자같이 만개했던 봄날의 벚꽃은 상상으로라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방은 병문안 온 사람들이 가져온 물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정작 사무국장 본인은 구석에 몰려 있었습니다. ‘대학축제 사무국장’이라는 요직을 맡을 정도의 큰 인물이 지닌 인망 덕이지요. 지진이라도 한번 일어나는 날에는 무너지는 ‘인망’에 생매장될 거예요.

 

계속해서 사랑 바람에 시달린 나머지 사랑 감기에 걸렸나 했다. 이것으로 나도 전통 있는 ‘상사병’을 앓는 남자의 반열에 올랐군, 하고 한동안 흐뭇해했는데 허심탄회하게 병상을 관찰해보니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건 단순한 감기였다. 사무국장한테서 옮은 게 분명했다.

 

마치 그릇에서 물이 넘쳐나는 것처럼 콧구멍에서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도 기침이 심해 피를 토할 것 같았다. 몸이 말 그대로 납처럼 무거워서 이불에서 기어 나와 학교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다. 코를 너무 많이 푼 탓인지 입술 위에 종기까지 부풀어 올랐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인 이때에 너무하다면 너무한 처사였다. 신도 부처님도 없는가!

이래 뵈도 자신에게 엄한 나는 이것도 수행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단호히 학교에 나갔다.

 

마른 잎이 떨어지는 학교 구내를 걸어가자니 겨울의 추위와 감기의 오한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내 숨통을 끊어놓기라도 할 기세로 일제 공격을 가해왔다.

 

나는 감기의 신과의 전투 준비를 위해 강변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렀다. 유령 같은 발걸음으로 드링크제와 포카리스웨트와 과자빵과 어육햄버거와 휴지를 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걷자니 눈앞에 숨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코카콜라 대자 병을 끌어안고 무슨 생각인지 손에는 생강 봉지를 꽉 쥔 채, ‘이성이 마비됐어’ 하고 말하려는 듯 눈을 반쯤 감았다. 머리는 푸석푸석했고 몸은 희미하게 떨렸다. 감기에 걸린 게 분명했다.

 

그녀를 병문안 오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직접 “병문안 오게나” 하고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건 신사의 방식이 아니다. 궁리 끝에 “감기로 쓰러져 괴로워하고 있는데, 가능하다면 후배인 검은 머리 아가씨가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소문을 클럽 동료들에게 흘리기로 했다.

그렇게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보내고 나서 삼십 분을 넘게 기다렸는데 아무도 답메일을 보내오지 않았다. 마치 허공에 돌을 던진 것 같았다. 답이 없는 이유로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는 다들 나와 연루되는 것이 싫어 모르는 척하는 것.

또 하나는 하나같이 감기로 쓰러진 것.

“후자가 낫겠군” 하며 나는 잠이 들었다.

 

부드러운 사과를 숟가락으로 떠서 호믈호믈 먹을 때의 입속 감촉을 생각하면 감기 걸려 학교를 쉬고 누워 있던 조용한 오전, 괴롭지만 신나기도 했던 그 달콤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감기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었던 내게는 무척 소중한 추억입니다.

 

병문안을 온 사람이 환자보다도 더 숨이 가쁜 게, 언뜻 보기에도 심한 감기를 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부옇게 김이 어린 찬 유리에 이마를 대고 눈이 내리는 동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더러운 천장을 스크린 삼아 미래의 비전을 비추어보는 것도 여의치 않았고 두 평 남짓한 방구석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도 귀찮아졌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몸을 둥글게 말아 내 몸을 끌어안았다. 내가 안아줄 사람도 나를 안아줄 사람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자급자족해야지. 그녀 생각이 났다.

나는 꼼짝도 않고 이불 속의 어둠을 응시하며 근본적인 문제에 도전했다. 그녀를 만난 지 반년이 넘는 동안 나는 바깥 해자를 메우는 기능에만 특화되어 ‘바깥 해자 메우기 영구기관’으로 전락했다. 나의 사랑은 어쩌다 이렇게 옆길로 새게 되었나? 그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그녀에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당히 물어보지 못하는 혐오해 마땅한 겁쟁이라는 것. 이건 체면에 관계되니까 일단은 부정해두자. 그렇다면 답은 남은 한 가지다. 나는 실제로는 그녀에게 반하지 않은 게 아닐까.

세상에는 대학생쯤 되면 연인이 있어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대학생쯤 되면 연인이 있다’라는 편견에 등 떠밀린 어리석은 학생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신분을 번지르르 치장한 결과 누구에게나 연인이 생기는 괴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편견을 조장한다.

허심탄회하게 나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나 또한 그 편견에 등 떠밀린 건 아닐까. 고고한 남자임을 내세우면서 실은 유행에 취해 사랑을 쫓아다닌 것은 아닐까. 사랑을 탐하는 아가씨는 귀엽기나 하지. 하지만 사랑, 사랑, 하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남자들의 그 으스스함이란!

도대체 나는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눈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바라본 뒤통수 외에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반했다고 하는가. 근거가 불분명하다. 그건 단지 내 마음의 공허에 그녀가 어쩌다 빨려 들어온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녀의 존재를 이용하여 내 마음의 공허를 메우려 했다. 애초부터 이토록 연약한 영혼이 문제였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녀에게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한다. 안이한 해결을 도모하려 들기 전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꼬락서니를 들여다보자. 벽을 향해 달마오뚝이같이 얼굴을 붉히고 뚱 하니 부풀어 있어야 한다. 그 역경을 발판으로 삼아야만 ‘인간적 완성’이 가능하리라.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승마장이 북쪽에서부터 서서히 호수에 가라앉듯 그림자에 잠겨왔다. 위를 올려다보자 갑자기 물을 듬뿍 머금은 듯한 회색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소나기를 예감케 하는, 숨 막힐 듯 달콤한 냄새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몸은 괴로운 법

어쩔 수 없이 기다리는 건 더욱 괴로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기다림도, 스스로 하는 기다림도 없이

홀로인 이내 몸은 어찌하리오.

 

왜 나는 이토록 그녀를 쫓고, 이토록 매번 홀로 남겨지는 걸까. 이 몸이여, 이 몸이여, 무슨 연유로 그토록 헛되이 달리는가?

 

나는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그 전차를 혼자서 배웅했다.

홀로.

“홀로인 이내 몸은 어찌하리오!”

나는 한 번 더, 외쳤다.

 

상한론 :: 《금궤요략(金匱要略)》과 함께 한방(韓方)의 쌍벽을 이루며, 한의학의 중요한 원천이다. 한의학을 상한론의학이라고 일컬을 정도이며 그 연구서목만도 500종을 넘는다고 한다. 중국의학에서 약물요법의 대성자라고 지목되는 후한(後漢)의 장중경(張仲景)이 저술한 것이라 전하며, 원래는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이란 이름으로, 급성열성전염병과 그 밖의 질환에 대한 치료법을 나타낸 것이었다. 3세기 말에 진(晉)의 왕숙화(王叔和)가 이것을 상한(傷寒)과 잡병으로 나누어 하나는 《상한론》, 또 하나는 《금궤요략》이라 개정(改訂)하였다 한다. 이 책은 수(隋) ·당(唐)의 의서에도 인용되고 있으나, 중요시하게 된 것은 북송(北宋) 이후의 일이다. 송나라 초기에는 국가에서 직접 개정출판하여 총 10권 22편으로 된 이른바 송본(宋本) 상한론이 나왔는데 모두 397조로 기재되고 처방수(處方數)는 중복된 것을 제외하고도 112종에 이른다. 그러나 이 송대의 실본(實本)은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은 후세의 번각본(飜刻本)이다. 상한이란 외감(外感)을 원인으로 하는 병의 총칭이며 책의 내용은 이들 각종 병증(病症)에 대하여 경험상 알려진 약재의 처방법을 지시한 것으로 어디까지나 실용 위주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한론 [傷寒論]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스페인독감 :: 스페인독감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은 1918년 여름 악성 독감이 동시 다발적으로 유행하고, 첫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독감 이름을 스페인독감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독감이 처음 보고된 것은 1918년 초여름이다.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던 미군 병영에서 독감 환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특별한 증상이 없어 별로 주목을 끌지는 못하였다. 같은 해 8월 첫 사망자가 나오고, 이 때부터 급속하게 번지면서 치명적인 독감으로 발전하였다.
곧이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귀환하면서 9월에는 미국에까지 확산되었다. 9월 12일 미국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지 한 달 만에 2만 4000명의 미군이 독감으로 죽고, 총 50만 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1919년 봄에는 영국에서만 15만 명이 죽고, 2년 동안 전 세계에서 2500만~5000만 명이 죽었다. 조선에서도 740만여 명이 감염되었으며 감염된 이들 중 14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바이러스를 분리·보존하는 기술이 없어 그동안 스페인독감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2005년 미국의 한 연구팀이 알래스카에 묻혀 있던 한 여성의 폐 조직에서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를 분리해 재생하는 데 성공하였다. 재생 결과 이 바이러스는 인플루엔자 A형(H1N1)으로 확인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페인독감 [Spanish flu/ Spanish influenz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우리와는 상관없는 외국의 전통이야. 하지만 신난다는 건 좋은 거지!”

 

주인이 라디오를 끄자 기둥에 걸린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이런 시내인데도 거실의 유리문 건너에는 조그마한 마당이 있고, 거기에는 마치 철사 세공같이 생기가 빠진 나무가 심겨 있었습니다. 아주 조금 남은 나뭇잎이 회색 하늘 아래서 흔들렸습니다.

 

내 세계는 고양이 이마만큼이나 좁아졌을 거예요.

 

“으음. 그건 맛있었지” 했습니다.

“맛있다니. 죽는 줄 알았구먼.”

“그랬었나? 잊었어.”

 

나는 여지없는 고양이 혀라 ‘불냄비’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혀끝이 아릿아릿 아려왔습니다.

 

열 때문에 내 눈에 비치는 주변 경치가 술에 취했을 때처럼 윤곽을 잃고 흔들거렸다.

 

내가 바라는 건 그냥 죽지 않을 정도로 영양을 취하고 이부자리에 눕는 것뿐이었다. 의지가 너무 약하지 않느냐고 반성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부자리 안의 어둠을 향해 기침을 하고 “기침을 해도 혼자”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약해진 몸으로 이 생각 저 생각 옮겨 다녀봤자 제대로 된 생각이 날 리 없었다.

입학 이후 결코 올라간 적 없고 앞으로도 전혀 올라갈 기미가 없는 학업 성적. 취직 활동은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구실을 높이 내건 채 뒤로 미룰 뿐. 융통성도 없다. 재능도 없다. 저축한 돈도 없다. 완력도 없다. 근성도 없다. 카리스마도 없다. 사랑스러워 뺨을 갖다 대고 비비고 싶어지는 새끼 돼지 같은 귀염성도 없다. 이렇게 ‘없다, 없다의 행렬’이 이어져서는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너무나도 초조한 나머지 이부자리에서 기어 나와 한동안 두 평 남짓한 방 안을 탁탁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돌아다니면서, 어디 귀중한 재능이 굴러다니지 않나 살폈다. 그러다 문득 1학년 때 ‘능력 있는 매는 발톱을 숨긴다’는 말을 믿고 ‘재능의 저금통’을 옷장 속에 숨겼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있었어! 오오, 그거야!” 하고 나는 신이 났다.

 

그 속에서 꺼낸 ‘재능의 저금통’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마치 내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나는 저금통을 거꾸로 들고 미친 듯이 흔들어보았지만 나온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꾸준히’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만 이부자리에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면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내 생활은 궁리에 궁리만 거듭하다가 내딛어야 할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 채 주저앉기로 일관한 무익한 세월이 아니었는지. 그녀라는 성의 해자를 메우겠다고 하다가 그저 피폐해지기만 한 지금도 그 상황에는 변화가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뭔가를 결정하고 행동해야 할 때면 다수의 내가 일제히 나서서 서로 싸우며 길을 막는다.

 

“분명 외설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온통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것들도 여러 가지 있다! 좀 더 아름다운 것들 말이다!”

“그러면 묻겠다. 혹시라도 그녀와의 첫 만남이 실현됐다고 하자. 그리고 만에 하나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에도 성공했다고 치자. 그날 밤 그녀가 다가온다면 너는 어떻게 대처할 셈이냐?”

“그녀는 즉석라면 같은 여자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가정을 해서, 그녀가 그날 밤 자, 가슴을 만져줘, 하면 너는 그걸 거절할 수 있냐?”

나는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거절 안 해. 거절 안 한다고! 하지만…….”

“봐라, 뻔하지 않느냐. 여지없는 변태 자식. 그녀에게 사과해라. 무릎 꿇고 사과해. 그리고 길에 굴러다니는 고무공이나 주무르며 자족해라!”

 

“그렇게 모든 걸 다 고려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남녀가 서로 교제를 시작할 수 있겠는가. 제군이 요구하는 것 같은 순수한 연애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온갖 요소를 검토하고 자신의 의지를 남김없이 뜯어봐야 한다면 우리는 허공에 멈춰 선 화살처럼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지 않겠는가. 성욕이든 허영이든 유행이든 망상이든 멍청이든, 그 무슨 말을 듣더라도 다 인정하겠다. 모두 다 맞겠지. 하지만! 비록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실연이라는 나락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순간이 있지 않겠는가. 지금 여기서 뛰어들지 않으면 미래영겁을 어두컴컴한 청춘의 한구석에서 뱅글뱅글 배회하며 보내게 되지 않겠는가. 제군이 바라는 게 그건가.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채 이대로 내일 홀로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말할 자 있는가? 만약 있다면 한 발 앞으로!”

 

희뿌옇게 밝아오는 창문을 바라보니 정말로 겨울 아침 같은 기분이었다. 운치가 있었다.

오늘이 동지인가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사람이 사이좋게 감기에 걸렸는데 도대체 왜 나만 혼자 멀쩡한 걸까요? 어쩐지 식구들이 다 잠든 한밤중에 홀로 잠자리에서 눈을 뜬 아이와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눈앞에 두고 흥청거려야 할 거리를 감기의 신이 유린하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쾌재를 외쳤다. 홀로 외로이 감기를 앓느라 괴로운 몸을 앞에 놓고 크리스마스이브라니. 감기의 신이여, 신난다고 거리로 나가려는 괘씸한 족속은 한 명도 남김없이 걷어차서 도로 집 안으로 넣어주길.

 

크리스마스를 맞아 화려하게 장식된 거리는 있어야 할 인기척이 없는 바람에 쓸쓸하다 못해 으스스할 지경이었다. 마치 유령의 거리 같았다.

리포터는 세계대전 후에 살아남은 사람을 찾듯이 거리를 헤매다 한 통행인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었다.

 

점포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때때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소리에 묻혀버렸습니다. 바람은 빌딩 틈새를 빠져나와 마치 그 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괴수가 울부짖기라도 하는 듯 큰 소리를 냈습니다. 도대체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걸까요. 나는 크리스마스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바람 속을 걸어 마침내 가비서방에 도착했습니다.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니 헌책방 안은 그곳에 쌓인 책들이 바깥세상의 소리를 다 흡수한 듯이 고요했습니다.

 

쓸쓸한 거리로 나오자 바람에 휴지 조각이 미끄러져 날았습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깃발 같은 것이 구름 틈새로 겨우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가와라마치 빌딩 사이를 춤추듯 날아갔습니다.

 

“왜 이렇게 고요한 거야?”

“엄청난 감기가 돌고 있대요.”

“내가 누워 있는 동안에 세계가 멸망했나 했어.”

 

폐허가 된 전차는 숨을 쉬는 것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습니다. 섬뜩할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나 싶다가도 엄청나게 거센 바람이 차 안에서 불어 나오면 바로 힘을 잃은 듯 어두워졌습니다. 그건 병에 걸려 자리보전하고 있는 이백 씨의 고통스러운 숨결 같았습니다.

 

공중을 돈 순간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 건 ‘만약 정말로 그녀가 거기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건가’ 하는 생각이었다. 요전번에 뇌 중앙의회에서 쏟아져 나왔던 분분한 의견은 내 연설로 잠재워버렸다. 눈을 질끈 감고 영광의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고 나는 착지점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망설였다. 만약 그녀가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찌푸리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자식’ 하는 표정을 지으면 어쩌나. 내 자긍심이 그 굴욕을 견딜 수 있을까. 그 순간 나는 모든 희망을 잃고 발가벗겨지는 것이 아닐까.

리얼한 고민이 몰아닥쳤다. 더 이상 날 수 없었다.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추락한 곳은 옥상의 오래된 연못이었다. 오래된 연못, 내가 뛰어드는 풍덩 소리(“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퐁당 소리”라는 일본의 유명한 단시가 있다─옮긴이).

 

“쓸쓸한 겨울밤에 홀로 누워 있으면 의지할 데 없이 불안해져. 어쨌든 내겐 아무도 없거든……. 난 혼자야. 열에 들떠 잠 못 드는 밤에 눈을 뜨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먼 옛날 잠자리에서 홀로 눈을 떴을 때는 엄마를 불렀지.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없어…….”

“제가 있어요.”

 

“그래도 말이야, 아무리 밤이 길더라도 새벽은 오고야 말겠지.”

 

꿈이든 현실이든 그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내 재능의 보물 상자는 확실히 바닥을 드러낸 듯했다. 하지만 아직 나에게는 전무후무한 재능 하나가 남아 있었다. 망상과 현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버리는 재능!

이 위기의 상황에서 그녀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 영광의 새 지평을 열 수가 있을 텐데.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불이 붙은 내 망상을 어디서 멈춰 세워야 좋을지 모르는 채,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노벨상 수상에 이르기까지의 내 인생의 미래에 있을 장면들을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머리에 떠올렸다. 땅에 발이 닿지 않는 화려한 미래에 펼쳐질 인생의 여러 컷들이 내 뇌의 깊은 계곡을 메워갔다. 헬륨을 불어넣은 듯 몸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웃음 지었고 소리가 되지 않는 소리로 “또 만나네요” 했다. 나도 소리가 되지 않는 소리로 “어쩌다 지나가는 길이었거든” 하고 대답했다.

 

포효하는 회오리바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용돌이치는 대기의 격류를 헤치고 어둠 속을 나아갔다. 순간 갑자기 우리를 가둬놓고 있던 어둠이 끊기고 시계가 열렸다. 휘몰아치는 폭풍에서 해방되어 정신을 차리니 우리는 맑은 하늘을 미끄러지듯이 날고 있었다.

굳게 손을 마주 잡은 우리가 본 것은 눈 아래로 펼쳐진 교토 시내였다.

교토 시내를 둘러싼 산에 안개가 희미하게 끼었다.

대학축제가 있었던 대학의 교정, 헌책시장이 열렸던 다다스 숲, 긴 밤을 걸었던 본토초, 오피스가와 가모가와와 절과 신사, 고궁이 있는 숲, 요시다 산, 다이몬지 산, 그리고 운명의 실로 맺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와 맨션과 민가의 지붕. 그것들은 남색 아침 안개 속에 가라앉은 채 조용히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온몸이 얼어붙을 듯 무섭게 찬 공기를 가르며 동 트기 전의 거리를 향해 내려갔다.

 

쪽빛 아침 이슬에 가라앉은 거리 위로 새로운 아침이 마치 도미노처럼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아니, 그녀가 오도카니 정좌를 하고 내 손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하얀 아침 햇살이 그녀의 검은 머리를 비췄다. 그녀는 조금 젖은 아름다운 눈동자로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나를 걱정했다고 말하는 듯했다.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때 기억났다. 내가 그녀에게 진심으로 반한 건 밤새 본토초를 걷고 난 그 새벽, 오래된 연못가에 쓰러져 하늘에 침을 뱉으려던 나를 그녀가 위에서 들여다본 그 순간이었다. 그 후로 반년, 생각하면 멀리도 왔다.

나는 성욕에 휩쓸렸다, 나는 세상의 풍조에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홀로 지내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에 오갔으나 그것들은 결국 덧없이 사라져버리고, 그저 살짝 젖어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와 그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아름다운 뺨의 인상만이 남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아직 열이 내리지 않았는데 그녀의 찬 손바닥이 내 이마를 식혀주었다. 손이 찬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고들 한다.

 

“이백 씨의 감기가 나으면 둘이서 함께 가서 축하해주자.”

불현듯 내가 그런 말을 꺼내다니, 아직 열이 높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향기 진한 물엿을 먹고 머리로 피가 몰려 코피가 터지려 했기 때문일까.

“함께요?”

“함께.”

나는 덧붙였다. “그런 김에 재미있는 헌책방까지 가르쳐줄게.”

그녀는 쿡쿡 웃으며 “같이 갈게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멍~했기 때문에 ‘멍하게 굴기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면 곧바로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백 씨의 쾌유 축하 파티는 오후 6시부터 다다스 숲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오후 4시에 그녀와 만나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늦지 않기 위해 오후 2시에 하숙을 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전 7시에 일어나야 했다. 옷을 빨아 말리는 데 몇 시간,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 데 한 시간, 이를 닦는 데 오 분, 머리를 가지런히 하는 데 삼심 분, 그리고 그녀와 나눌 대화를 예행연습하는 데 몇 시간이 필요했다. 다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아왔던 교토 시내의 익숙한 풍경이건만, 표백된 듯 하얀 겨울 햇살이 내리비쳐서 그런지 시원스런 새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납을 먹은 것처럼 위가 무거웠다. 그녀가 오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고 그녀가 왔을 경우를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랐다. 세상의 남녀가 단둘이서 만날 때 그들은 무슨 말을 할까. 설마 쭉 노려보기만 하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고 인생과 사랑에 대해 열띤 논쟁을 펼칠 리도 없었다. 어쩌면 거기에는 내가 감당 못할 섬세 미묘한 밀고 당기기가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조금 멋 부린 조크로 상대를 웃기면서도 그저 그런 수다스런 남자로 전락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로 그녀를 뇌쇄시킨다.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명랑유쾌하고 재치 있는 남자가 아니므로 별볼일없는 이야기를 하며 커피나 축낼 것이다. 그러는 게 즐거울까.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즐겁다 쳐도, 그녀도 그것만으로 즐거울까. 그녀의 귀중한 시간을 악귀처럼 먹어버리기만 한다면 그녀에게 미안한 일이다. 실로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역시 얌전히 성의 해자를 메우던 시절이 마음 편하고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아, 정말 난감하다. 해자를 메우던 시절이 그립다. 그 영광의 나날로 돌아가고 싶다.

 

조금 기분이 가벼워진 나는 유리창 너머로 이마데 강가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오후의 햇살을 받아 주위가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이 기념할 만한 순간부터 나는 바깥 해자를 메우는 일을 마치고 한층 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한다.

독자 제현, 용서하기 바란다.

그리고 다시 만날 날까지 잘 있기를.

안녕히, 바깥 해자를 메우던 나날이여─.

 

인사人事를 다하고 천명天命을 기다려라(진인사대천명).

 

긴장하면서 커피숍의 유리문을 밀어 열자 별세계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나를 맞았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마치 봄날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선배는 그 햇살 속에서 턱을 괴고 앉아 어쩐지 낮잠 자는 고양이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배 밑바닥에서부터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공기처럼 가볍고 작은 고양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초원에 누운 기분이랄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역자 후기

이야기의 줄기는 짝사랑이지만 그 줄기 위에 자라난 이파리는 아무 거침없이 전개되는 몽환적 판타지라, 사랑 이야기가 판타지 속에 묻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를 반복한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들은 힘들게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늘 머릿속에서 넘쳐나 그걸 모두 소설에 이용하려 들면 소설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기인들과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상천외한 사건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천리만리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차츰차츰 좁혀 들어가 드디어 대미에서는 조용한 찻집에서 두 주인공이 얼굴을 마주 대고 가까이 앉기에 이른다. 이 치밀하게 구성된 역삼각형 구조로 인해 읽는 이는 뒤로 가면 갈수록 더 가까워지는 두 변 사이에서 몰입의 진동수가 높아져 더 깊이 소설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짝사랑하는 남자의 심리묘사, 주변 배경의 묘사는 아주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처리하면서도 작중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활약과 사건들은 현실을 과감히 벗어나게 함으로써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이 사실주의와 판타지의 마술적인 조화야말로 작가가 추구하는 미학의 핵심이자 이 작품이 주는 재미의 밑거름이 아닐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앞에 두고 이것저것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공허해진다. 그냥 ‘읽어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무책임한 의무의 방기가 아니다. 손끝에 닿는 기묘한 감촉, 혹은 이 혀끝의 촉감을 직접 맛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내 쪽에서 “어때? 어때?” 하고 빙긋이 웃으며 물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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