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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축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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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축일기
이력서를 내는 날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언젠가 그 손으로 같은 회사에 사표를 내리라는 것을. 입사한 첫날은 모른다, 언젠가 도무지 출근하고 싶지 않아 미칠 것 같은 아침이 오리라는 것을. 즐거운 환영 회식이 끝난 저녁은 알지 못한다. 비밀을 털어놓던 동료와 의지하던 선배가 어느 날부터 숨소리조차 듣기 싫은 ‘화상’이 된다는 사실을. 사축(社畜)이란, ‘회사의 가축처럼 일하는 직장인’을 뜻한다. 일본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유행하게 된 이 단어는 주인에게 길들여진 가축처럼, 직장인은 회사에 길들여졌다는 자조를 담은 말이다. 우리나라의 직장인들 역시 크게 공감했던 것일까. ‘사축’이라는 키워드는 소개된 즉시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르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축일기』는 사축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한마디로 ‘웃프게(웃기면서도 슬프게)’ 보여주는 글을 담은 책으로 회사생활에서 생기는 고충을 주로 이야기한다. 세상 모든 ‘을’들의 ‘지금’을 시처럼 혹은 노래가사처럼 길지 않은 분량으로 톡톡 튀면서도 어둡지 않게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에게‘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라는 공감과 위로, 연대감을 갖게 해준다.
저자
강백수
출판
꼼지락
출판일
2015.11.01

 

작가의 말 -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주머니에 안주를 넣어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요즘도 습관처럼 술자리에 갈 때마다 주머니에 넣어오는 것들이 있다. 나처럼 취한 친구들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생활에 대한 푸념이라든가, 누구에 대한 욕이라든가, 일상에서 생기는 권태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글을 쓰고 노래를 지어 부른다. 이제 겨우 서른 해 남짓 살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가 않다. 책 한 권, 정규앨범 한 장 내고 나니 그런 것들은 거의 소진되어버리고 이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다 써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것들을 읽고 들어줄 이들은 대부분 해가 뜨면 출근이 두렵고 해가 지면 퇴근이 그리운 평범한 사람들. 그렇기에 나는 술에 취한 와중에도 그들이 하는 말의 편린이나마 주워다 호주머니에 구겨넣고 돌아오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수집된 모든 이야기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도, 에세이도, 노래도 되지 못한 채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둔 흔하지만 생생한 이야기들. 그냥 그렇게 두기에는 아까워서 예쁘게 펼쳐서 전시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창작이라기보다 큐레이팅에 가까웠다. 구해다놓고, 보여주고, 설명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이 책에 가득 담긴 해결책 없는 갑갑한 이야기들은 모두 나의 친구들, 그리고 당신들로부터 왔다. 안아주고 싶은 많은 인물들이 당신들을 많이 닮았길 바란다. 정말로, 당신들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하나 펼쳤다.

 

그들의 삶을 마음껏 표절하도록 합의해준 많은 친구들의 이름을 모두 밝히고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지만 그것이 행여 그들의 직장생활에 불편함을 초래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생략하기로 하고, 대신 맛있는 안주와 소주를 대접할 것이다. 월급날이 없는 내게 번번이 그들이 해준 것처럼 말이다.

 

 

 

우리 회사의 7대 불가사의

1 월급이 적을수록 업무량이 많다.

2 일을 빨리하면 퇴근이 늦어진다.

3 일을 못하면 회사 생활이 편하다.

4 일을 너무 잘하면 욕을 먹는다.

5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쟤가 입사를 했다.

6 저 인간이 팀장이고

7 저 인간이 부장이다.

 

 

 

9호선

정장 재킷이 빳빳할 필요가 없다.

구두에서 광이 날 필요가 없다.

얼굴이 보송보송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나는 매일 아침 일곱시 반의 9호선을 탄다.

 

때로는 안 만졌는데 변태 취급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 만지고 싶은데 닿아서 변태 취급 당하기도 하고

그렇게 세탁기에 잔뜩 우겨 넣은 빨래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회사에 도착하면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은

이게 출근하는 꼴인지

야근하다 퇴근하는 꼴인지.

 

 

 

도시락을 싸다가

사장한테 깨진 부장은 팀장한테 지랄이고

부장한테 깨진 팀장은 대리한테 지랄이고

팀장한테 깨진 대리는 나한테 지랄인데

대리한테 깨진 나는 왜 엄마한테 지랄일까

 

도시락통에 엄마가 보내주신 무말랭이를 담다가

어제 엄마 전화를 그따위로 받은

내가 너무 미워진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대체 여길 어떻게 알아낸 거지?

당황한 눈동자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고 헤맨다.

뇌가 렉이라도 걸린 듯 멈춘다.

한숨이 나온다.

떨리는 손이 전화기 액정을 향하다가

다시 멈춘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본다. 그

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다시 용기를 내고 버튼을 누른다.

“수락”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이곳은 더 이상 나의 안식처가 될 수 없다.

불편한 마음을 숨긴 채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부장님이 페이스북을 시작하셨다.

 

 

 

맑은고딕 vs HY중고딕

인턴 생활 7개월 차, 이제야 내 업무를 조금씩 찾아서 하고 있음에 안도할 무렵, 여전히 남아 있는 가장 큰 난관이라면 서식, 서식, 서식! 김대윤 대리는 또 그놈의 서식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는 맑은고딕체를 만든 사람과 정략결혼이라도 한 것일까, 다른 폰트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맑은고딕체로 기안서를 쓰지 그랬냐고? 일이 그렇게 심플하다면 나도 소원이 없겠다.

우리 부서에는 대리가 둘이다. 맑은고딕체 성애자 김대윤 대리, 그리고 그의 동기 노호연 대리. 둘 다 과장 승진이 임박해 있는 상태여서 그들 사이의 경쟁 구도는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내 첫 멘토는 노호연 대리였고, 그가 작업한 문서는 모두 HY중고딕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대리님, 같은 폰트로 작성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그러라고 했고, 그 이후 나도 모든 서류를 HY중고딕으로 작성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내 보고서를 받은 김대윤 대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이거 폰트 뭐냐?” “HY중고딕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이걸 썼냐고, 내 책상에 이딴 폰트 붙어 있는 거 본 적 있어?” “아니 저는 노호연 대리님께서 이걸로 하면 된다고 하셔서….” “내가 노호연이야? 너 노호연이랑만 일해? 응?!”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자, 보자.. 이게 맑은고딕이고 이게 HY중고딕. 이걸 구분해내는 것도 기가 막히고, 다르게 썼다고 저 지랄을 해대는 것도 기가 막힌다. 무슨 변태새끼들도 아니고.

어쨌거나 우리 가련한 열 명의 인턴들은 오늘도 두 대리의 눈치를 보며 맑은고딕과 HY중고딕 사이를 황망히 헤맨다. 1, 2년 후에 과연 맑은고딕과 HY중고딕 중 어떤 폰트가 살아남아 이 부서를 지배하게 될 것인가. 다음 과장은 김대윤인가 노호연인가. 우리들 중 일곱 명은 그 결과를 보지도 못한 채 5개월 뒤 쫓겨난다.

 

 

 

게임을 하다가

비싼 칼

비싼 갑옷

비싼 액세서리

 

내 옷은 비싼 걸 사봐야

입고 나가 놀 시간이 없고 기운도 없고

너라도 좋은 걸 입고 다녀라.

 

학생들은 누리지 못하는 캐시템의 혜택.

직장인이 그나마 이런 메리트라도 있어야지.

 

 

 

천하무적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말 내내 우리 팀은

저자가 싼 똥을 치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는 소개팅을, 김 대리님은 데이트를

부장님은 따님과의 놀이공원 약속을 취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저자를 나무라지 않는다.

누구도 저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단지 저자의 아침 인사에 웃는 얼굴로 화답할 뿐이다.

별을 먹은 슈퍼마리오처럼 종횡무진,

천하무적 저자는 바로 사장님의 아들이다.

 

 

 

그리 알아요

지난 주말

여자친구와 싸웠다.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면서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새로 맡게 된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이

주말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울었다. 그렇게 일이 좋으면 일이나 하지 왜 나왔냐고.

그녀가 가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일을 했다.

그리고 방금 과장님이 오셔서 내게 말씀했다.

“정환 씨, 그 프로젝트 그냥 진행하지 않기로 했어요.

오늘부터 김 대리 서포트해요.

윗선에서 내린 결정이니 그리 알아요.”

 

여자친구는 아직도 카톡 답이 없는데

나는 그냥 그리 알면 되는 것이다.

 

 

 

우짜란 말이고

가시나야, 솔직히 말해보자. 내가 직장 없이 논다고 했어도

네가 나랑 소개팅했을까? 너 만날 때마다 좋은 거 먹이고

좋은 거 사주고 안 했어도 네가 날 사랑했을까?

회사 안 다녔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제 와서

일밖에 모르는 남자는 싫다고

헤어지자고.

 

 

 

인턴들의 혈액형은 모두 A형이다

아까 한 말을 대리님이 언짢아하신 것 같고

비품 하나 빌리러 갈 때도 조마조마하고

사수의 한숨 하나하나가 나로 인한 것이 아닐까 겁나고

내 이름만 불려도 혹시 뭘 잘못한 걸까 싶고

심지어 복사기가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소리만 내도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원래 난 O형인데

친구들 앞에서 까불대고

남들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데

 

이 회사 인턴이 된 날 이후로

한없이 쪼그라들고

한없이 소심해졌다.

A형이 되어버렸다.

 

 

 

진로 특강

모교 교수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학과 후배들에게 진로 특강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강의실에 들어가니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회사라도 들어오고 싶어 하는 후배들이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의 궁상맞던 취업 준비는 어느 새 영웅담이 되었고, 우리 회사는 그들의 이상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러분, 그렇게 회사생활이 즐겁지만은 않아요”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녀석들은 연신 “우와~” 해대고.

사실 이러네 저러네 얘기는 했지만 나도 잘 몰라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난 아직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원일 뿐인걸. 어제의 특강을 위해 연차를 쓰려고 내가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그리고 오늘 출근해서는 얼마나 사소한 이유로 대리에게 깨졌는지 후배들은 모른다. 특강이 끝나고 몇몇 후배들에게 술을 사면서 얼마나 그 돈이 아까웠는지, 사실 나도 양주는 비싸서 잘 안 먹는다는 것도 녀석들이 알 리가 없다. 사실은 그냥 계속 몰랐으면 좋겠다.

 

 

 

신개념 리더십

리더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을 얼마나 단합시키는가가 아닐까.

새로 부임한 무능한 최 팀장은

그런 면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를 제외한 모든 팀원이 그의 무능함을 씹다가

대동단결하게 되었다.

이것을 의도했다면 그는 어쩌면 천재!

 

 

 

메르스

“선생님, 제가 이상하게 입맛이 없구요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몸도 쑤시구요

기운도 없고 우울하고 소화도 안됩니다.”

 

“MERS입니다.”

 

“메르스요?”

 

“Monday, Everybody wants to Return to Saturday.

주말이 되면 다시 나을 겁니다.”

 

 

 

필수 스펙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는 필수다!”

 

그래서 토익에 토익스피킹에

HSK 점수까지 따왔건만

외국인 바이어는 언제 만나는 건데?

해외 출장은 언제 가는 건데?

언제까지 거래처 부장님이랑 앉아서

폭탄주만 말고 있어야 하는 건데?

 

 

 

롤모델

야근보다

박봉보다

주말 근무보다

회식보다

접대보다

더 회사에 다니기 싫은 순간은

 

이 회사에는 도저히 ‘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문득 깨달을 때.

 

 

 

사원과 바다

어부 산티아고는 바다에 나간 지 30일째 되던 날 ‘급여일’에

도착했다. 그날 오후 그는 낚시를 쳤고 마침내 ‘급여’라는

이름의 청새치 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녀석을 잡는 일은 사투에 가까웠다.

그는 끝내 싸움에서 승리하고 녀석을 보트에 매달았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부모님 선물, 갖고 싶었던

플레이스테이션을 상상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보트에 달린 급여를 상어 떼들이 노리고 있었다.

어느 밤, 상어 떼들이 그의 급여를 습격했다.

 

집 주인 아줌마가 방세 50만 원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10만 원

관리비 5만 원

한국장학재단에서 학자금 대출금 25만 원

통신사에서 휴대폰 요금 10만 원

헬스장에서 운동비 10만 원

은행에서 후불교통카드 10만 원

큰맘 먹고 산 노트북 할부금 10만 원

앙상해진 급여와 함께 집에 돌아왔지만

누구도 그가 얼마만큼의 급여를 잡았는지 알지 못했다.

통장에만 작은 흔적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는 깊은 잠에 들었다.

 

 

 

심청전

배가 인당수에 도착하고 심청은 뱃머리에 올랐어요.

뛰어내리려니 무섭기도 하고 지나간 삶이 아쉽기도 했어요.

심청은 잠시 생각했어요.

‘공양미 300석, 그냥 일해서 갚을까….’

 

300석은 600가마니. 한 가마니에 80kg. 총 48,000kg.

요즘 이천쌀 10kg에 3만 원.

공양미 300석 가격은 1억4400만 원.

1억4400만 원이 원금인데, 심지어 사채빚이에요.

버는 것보다 이자 붙는 게 빨라요.

 

심청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답니다.

 

 

 

호랑이와 곰

인턴 기간 만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호랑이는 말했어요.

“빌어먹을, 더는 못해먹겠어. 언제까지 겨우 이런 걸

받아먹으면서 견디라는 거야! 난 나가야겠어.

그래, 차라리 대학원에 진학하겠어!”

같은 인턴인 곰의 생각은 조금 달랐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버틴 게 아깝지 않아?

난 조금 더 견뎌볼 거야.”

그런 곰을 비웃으며

호랑이는 결국 굴을 떠나버렸어요.

그렇게 약속된 기간이 지나고 환웅 사장님이 나타났어요.

“그래요, 그동안 수고했어요. 곰 인턴.

이제 이 경험을 살려 원하는 좋은 곳에 취업하길 바랄게요.

응원합니다! 파이팅!”

 

“네? 사장님, 정직원 프로모션은요?”

“100일간 쑥과 마늘을 먹으며 버티면 정직원 프로모션의

‘기회를 준다’고 했지, 정직원 프로모션을 ‘시켜준다’고는

안 했는데요? 곰 인턴은 어디서든 잘할 수 있을거라 믿어요. 파이팅!”

 

그렇게 곰은 다시 백수가 되었어요.

아마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 마늘과 쑥을 먹기 시작할 거예요. 네? 호랑이요? 물론 대학원생이 되었지요.

그러나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2년 뒤엔 호랑이도 다시 마늘과 쑥을 먹어야 하거든요.

 

 

 

어린왕자와 신입사원의 별

“거기서 뭘하고 있나요?”

어린왕자가 신입사원에게 말했어요.;

신입사원은 서류 한 무더기와 유에스비가 꽂힌 컴퓨터를;

앞에 놓고 말 없이 앉아 있었어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지.”

신입사원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어요.

“일을 왜 하나요?”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야.”

어린왕자는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어요.

“왜 대출을 했나요?”

신입사원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고백했어요.

“대학교 학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야.”

“왜 대학을 나왔는데요?”

어린왕자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어요.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야!”

신입사원은 말을 끝내고 입을 꼭 다물어버렸어요.

어린왕자는 당황해서 그 별을 떠났어요.

 

 

 

이런 신발

구두는 두 켤레

운동화는 다섯 켤레

 

두 켤레 구두는 일주일에 닷새를 신고

다섯 켤레 운동화는 일주일에 이틀밖에 못 신는다.

 

이런 신발.

 

 

 

복사기님

“저 없는 동안 바쁘셨죠? 죄송합니다!”

“아니야, 무리 없었어. 휴가는 재밌게 보냈고?”

“네, 덕분에요.” “그래, 근데 혹시 복사기 좀 볼 줄 알아?”

“복사기요?”

“응, 아까부터 저게 먹통이라 다들 업무를 못 보고 있어.

사람은 불러놨는데 오는 데 좀 걸릴 것 같다네.”

복사기 업체 직원이 도착하기까지는 두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우리 부서의 업무는 큰 지장을 받았다.

내가 없는 일주일 동안은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던 업무가 말이다.

 

나보다는 복사기가 일을 잘한다.

 

 

 

어린왕자와 여우

“입사한다는게 뭐지?”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면접관 여우가 답했다.

“관계를 만든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구직자들과 다를 바 없는 한

구직자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여긴 너에겐 수많은 다른 기업과 똑같은 한 기업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입사하게 된다면 이곳은 너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직장이 될 거야.” “

나도 소중하고 특별한 사원이 되는 거고?”

어린왕자가 묻자 여우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애들은 넘쳐나. 자, 토익은 몇 점이지?”

 

 

 

이상적인 미래

“나 사원 때는 인마.”

김영택 부장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원은 사원 시절의 김영택

김영택 부장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대리는 대리 시절의 김영택

김영택 부장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과장은 과장 시절의 김영택

김영택 부장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차장은 차장 시절의 김영택

그런데 김영택 부장은 행복해 보이지 않아.

 

필사적으로 김영택 부장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원이 되고

필사적으로 김영택 부장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대리를 지나

필사적으로 김영택 부장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과장을 거쳐

필사적으로 김영택 부장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차장이 되어도

 

나는 끽해야 김영택 부장 정도 되어 있겠지.

 

 

 

나는 무슨 죄

후배 녀석은 드라마 주인공처럼 호기롭게 사직서를 꺼냈다.

사직서를 읽은 팀장의 얼굴을 보니 대충 내용은 짐작이 간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하기는 좀 민망하네요.

안녕히 계십쇼, 팀장님.”

쿨하게 인사하고 떠나간 그의 뒷모습은 진정한 사나이

 

같기는 무슨.

갑자기 결원이 생기는 바람에 나만 죽어나고 있다, 이 자식아.

 

 

 

체온계

어제도 두시까지 접대를 했고

네 시간 반을 자고 일어났다. 그런데…

 

머리가 아프다. 얼굴이 뜨겁다.

체온계를 집어드는 마음은 너무나 간절하다.

암시를 건다.

나는 아프다. 나는 아프다. 나는 환자다. 지독한 몸살에 걸렸다.

‘38.4도’

 

할렐루야!

 

 

 

공범

오늘도 왕창 깨졌다.

팀장이 시킨 일을 기한 내에 다 못했다.

나는 무리라고 했고 팀장은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기한을 못 맞춘 건 내 잘못이다.

 

내가 무능한 것이라면

무능한 내게 기한 내에 못할 일을 준 건 팀장 잘못이다.

무능한 내가 이 팀에서 일하는 게 잘못이라면 그것은

나를 이 팀에 배치한 인사팀 잘못이다.

어쨌거나 기한을 못 맞춘 건 내 잘못이다.

같이 잘못했는데 나만 깨진다.

 

 

 

자랑

이 대리의 한 달 용돈은

후불 교통카드 요금을 제외하고 30만 원.

그의 부인이 추가로 지원해주는 돈은 경조사 축의금 정도.

이번에 회사 워크숍 노래자랑에서 우승한 그는

상금 30만 원을 벌었다.

평소에 갖고 싶었던 스피커를 샀고

와이프에게는 상금이 아니라 상품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다며 자랑을 한다.

그깟 스피커, 그의 한 달 월급으로 열 개는 살 수 있을 텐데

신나서 자랑을 하는 그가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귀엽다고 해야 하나.

 

사람 사는게 다 그렇지 뭐.

 

 

 

한마디

야근을 시키는데도

주말 출근을 시키는데도

기획안을 집어 던지는데도

등산을 가자고 하는데도

약속 있는 날 회식을 잡는데도

자기가 잘못해놓고 나한테 짜증을 내는데도

후배들 보는 앞에서 갈구는데도

 

“그래도 수고했다”

“그만하면 잘했다.”

“애쓰고 있는 것 안다”

가끔 보내주는 문자에 눈물이 핑 도는 나는 진짜 바보 같은 놈.

 

 

 

영양제 말구요

점심시간에 식사를 포기하고 엎드려 자는 나를 보고

안쓰러웠는지 부장님이 영양제를 건넨다.

“야근도 많고 술도 자주 먹는 우리 같은 사람은

간이 튼튼해야 돼 간이. 이거 한 통 먹어봐. 괜찮아.”

 

부장님, 회식을 안 하면 됩니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안 깬다.

 

 

 

통화 괜찮아?

금요일,

이태원,

제일 친한 친구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첫 잔을 부딪힌다.

짠!

 

그 순간

‘까똑’

팀장의 메시지.

‘정환 씨, 지금 통화 괜찮아?’

여러가지 생각이 스친다. 아까 낸 보고서? 주말 근무? 복귀 요청?

 

자, 이 순간 휴대폰을 못 본 척해야 하나

아니면 전화를 걸어야 하나

 

당신의 선택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에 대한 고찰

 

 

 

하면 된다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업무를 지시하고는

 

하면 된다!

불가능은 없다!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모든 실패의 이유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던 김 부장님은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 정기인사에서도 임원 승진에 실패했습니다.

정년이 다가옵니다.

 

 

 

겁이 나

‘회사 때려치우고 저거나 해볼까’

리스트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오늘 안 사실, 그러한 이유로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사람이

나 말고도 몇 명이나 더 있다는 것.

그런데 솔직히 겁이 나.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디 다니는 사람인지를 더 궁금해 해.

사실 나도 어디 가서 '어디어디 다니는 누구입니다' 라고밖에

자기 소개를 해본 적이 없지.

명함에서 회사 로고를 지우고

부서명을 지우고, 회사 주소와 전화번호를 지우고

내 이름 석 자와 휴대폰 번호만 덩그러니 남아버린다면

그때에도 나라는 인간이 여전히 가치 있는 인간일 수 있을까.

그게 겁이 나.

 

 

 

내 말이

“고객 맘을 이렇게 몰라서야 원. 거 사람들 만나서

얘기도 좀 듣고 그래요. 그렇게 꽉 막혀서 무슨 일을 하겠어.”

그러니까 퇴근 좀 시켜주세요….

 

“정환 씨는 그런데 만나는 사람 없나?

슬슬 장가갈 나이 됐잖아? 허허, 한잔 받지!”

그러니까 집에 좀 보내주세요….

 

“아니 무슨 회사만 나오면 그렇게 꾸벅꾸벅 조나?

도대체 밤에 뭐하는 거야?”

그러니까 야근 좀 시키지 말아주세요….

 

 

 

커피 마니아

“형, 요새 퇴근하고 맨날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통 맥주 한잔하기가 힘드네.”

“나 사실 요새 뭐 배우러 다녀.”

“뭐요?”

“커피. 혹시 아냐?”

 

형 말고도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사람을 몇 명 더 봤다.

사실은 나도.

뭐 당장에 카페 같은 걸 차리겠다는 게 아니라

그럴 돈도 없고.

형 말대로 혹시나 해서.

 

왜 그렇게 커피를 좋아하냐고?

왜 그렇게 회사를 싫어하냐고 물어봤어야지.

 

 

 

천 원만

“미안한데 천 원짜리 하나 있어?”

박영진 대리가 또 천 원을 꿔갔다. 아니 삥 뜯어갔다.

휴대폰 메모장을 보니 이번 주에만 벌써 세번째, 총액 이천오백원. 이게 뭐라고 찌질하게 적어두나 싶기도 하지만, 오죽하면 이러겠나. 자판기에 갈 때마다 천 원씩, 오백 원씩 꿔간 돈이 아마 몇 만 원은 될 거다.

 

박 대리는 “번번이 미안해. 내가 현금을 잘 안 가지고 다녀서. 밥 살게!”라고 하고, 실제로 예전에 저녁도 한번 산 적이 있지만 그게 더 싫다. 친하지도 않은 남자 둘이 왜 식사를 해야 하는가. 돈은 돈대로 뜯기고, 불편한 밥까지 먹느니 그냥 그깟 천 원 주고 말지 싶다가도 짜증은 치밀어 오르고.

아니 왜 한 이만 원을 천 원짜리로 바꿔다 서랍 안에 넣어둘 생각은 못하는 것인가.

 

예전에 회식에서 그는 마누라가 한 달에 용돈을 30만 원밖에 안 준다고 푸념을 한 적이 있다. 잠시 측은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내가 지 마누라도 아니고. 칠백 원짜리 음료수를 뽑아 먹고 그는 삼백 원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에게 플라스틱 컵을 내밀었다.

“박 대리님, 잔돈 여기에 모으세요.”

박 대리는 나를 센스쟁이라고 칭찬했다.

얄미운 놈이 눈치까지 없다.

 

 

 

5년 전

5년 전 나의 장래 희망은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나의 장래 희망은

출근을 안 하는 것이다.

 

 

 

그가 울었다

우리 팀의 마지막 회식.

그가 울었다.

 

‘멍부’야 말로 최악의 상사라 했던가.

멍청한데 부지런해서 많이도 욕을 먹었던 그가

일은 더럽게 못하는 주제에 갈구기만 했던 그가

 

월요일부터는 새로운 팀에서 각자 건승하자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울었다.

 

 

 

사축으로서의 재능

대학 동기 중에 그렇게 나이트와 클럽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녀석이 있었다. 끝내 취업하지 못하고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는 그 녀석이 차라리 내 업무에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녀석이 노는 동안 나는 성실하게 취업 준비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기울여야 했던 대부분의 노력은 지금의 나의 업무와 거의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업무와 무관한 전공과 교양 과목을 최소 A0 이상의 학점으로 이수해야 했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토익 점수를 받아야 했다. 대기업에서 열정페이를 받으며 대학생 홍보단, 대학생 자원봉사단, 대학생 서포터 따위를 해야 했다. 각종 자격증은 옵션.

접대와 회식이 주 업무인 요즘 내게 절실한 것은 아부할 능력과 높은 주량, 탬버린 스킬. 이것들은 나보다는 차라리 나이트에서 여자를 꼬시고 다니던 그 녀석이 훨씬 더 열심히 연마해오던 것들이다. 상사와 거래처 사람들에게 낯간지러운 아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는 담대한 마음과, 소주와 맥주와 폭탄주의 공습에도 굳세게 버텨줄 수 있는 튼튼한 간과, 누가 어떤 노래를 불러도 분위기를 록 페스티벌 못지 않게 띄워줄 수 있는 현란한 탬버린 스킬. 그 세 가지만 있다면 나는 무적의 사축이 될 수 있을 텐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다들 용케도 취업을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만 녀석들의 머리 위로

예상되는 연봉이 보인다.

쟤는 3600, 쟤는 2800, 쟤는 3200.

다들 어디 다니는지 아니까, 얼마 버는지도 뻔하다.

나도 거기에 원서를 써봤거든.

녀석들도 내가 얼마 버는지 말하지 않아도 대충 알 것이다.

보통 많이 버는 놈의 하루는 덜 버는 놈의 하루보다

고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버는가’는 ‘얼마를 버는가’보다 추상적이니까 내 눈에는 자꾸 녀석들의 연봉이 보인다.

제일 많이 버는 놈이 자기도 그걸 아는지 술값 계산을 한다.

제일 조금 버는 놈이 자기도 그걸 아는지 잠자코 있는다.

 

우리는 그냥 친구들, 저마다의 삶의 빡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누구는 이상하게 의기양양하고

누구는 이상하게 위축된다.

 

 

 

노안도 경쟁력

그러니까 입사 일 년 만에 후배가 하나 들어왔거든요.

저랑 동갑이거든요.

그런데 이 녀석,

성장 과정 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본인 말로는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가서 고생을 많이했다나

얼핏 봐도 우리 과장님보다 형님으로 보이고

아니 어쩌면 우리 차장님 중학교 동창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아요.

스테이플러 하나를 빌리려 해도 조심스럽고

업무 지시를 할 때는 죄책감마저 들어요.

녀석이 사고를 쳐서 갈궈야 할 일이 생겼을 때에도

어쩐지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아 꾹 참아야 했어요.

 

문제는 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대리님도, 과장님도 여전히 막내에게 시킬 심부름이 있으면

저를 부른다는 말입니다.

“과장님, 이제 창식이가 막내니까 비품 심부름은 창식이에게….”

“아, 그렇지. 허허, 자꾸 잊어버린단 말야.

자네가 어려 보여서 그래!”

 

물론 녀석의 M 자 탈모나 칙칙한 피부가

부럽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이건 뭔가 잘못되었어요.

그래요. 뭔가 잘못되었어요.

 

 

 

사수의 숙명

“죄송합니다.”

하나도 죄송하지 않지만,

사실은 저 새끼가 죄송해야 하는 거지만 사

과는 언제라도 주저 없이 능숙하게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수의 숙명.

 

여기서는

죄송할 때 죄송한 게 아니라

죄송해야 할 때 죄송한 것이다.

이런 내 맘… 넌 알까?

알면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새끼야.

모르면 좀 물어보고.

 

 

 

팀장님, 사랑합니다

팀장님, 사랑하는 팀장님.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십시오. 분명 그러실 겁니다. 욕 먹으면 오래 산다지요, 제가 오늘도 팀장님의 수명을 꾸준히 늘려드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주 그냥 불로장생을 하실 겁니다. 암요!

 

 

 

비타민 그녀

“진경 씨, 뭐야? 울어?”

신입 진경 씨의 환영회를 겸한 회식 자리. 갑자기 그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낙지가 불쌍해요. 이잉.”

아, 그러니까 자기 환영회 때, 그다지 권하지도 않은 술을 잔마다 원샷으로 비우다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연포탕에 들어간 낙지가 불쌍해서라고? 그렇다기엔 너무 잘 먹고 있는 것 같은데?

“허허, 진경 씨가 아주 귀여운 면이 있구만. 아주 사무실에 비타민이 되겠어! 비타민!”

그때까진 부장님도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녀가 부장님의 곁에 가 앉기 전까진.

“어? 부장님 아이폰6네요! 이거 셀카 진짜 이쁘게 나오는데에~ 저랑 셀카 찍어요!”

휴대폰을 집어든 그녀의 손이 미끄러지고, 부장님의 새 휴대폰은 연포탕 국물에서 반신욕을 시작했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그녀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부장님 죄송해요! 흐엉 진짜 죄송해요~.”

잠시 뒤 사라진 그녀는 자리를 파할 무렵 가게 화장실 변기에 앉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

인 줄 알았는데, 다음 날 그녀는 우리 사무실의 비타민답게 “선배님 굿모닝! 어제 제가 너무 취했죠~ 제가 술이 약해서, 호호. 실수한 거 없었죠? 있었어도 이쁘게 봐주세요~”라며 비타민 음료를 건넸다.

이번 기수 신입사원들이 그렇게 쟁쟁하다더니,

어떤 의미로는 그 말이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절대 못 그만둘 거야

동네 친구와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내가 진짜 이제는 못 참는다. 이번엔 진짜 그만둘 거야.”

“내가 먼저 그만둘 거야. 두고 봐라.”

“내가 먼저 그만둘걸? 나 지금 완전 확고해.”

“나도 그래.”

“그래, 뭐 입에 풀칠 못하겠냐. “ “

그렇지. 그나저나 너무 늦었다. 이제 들어가자.”

“그래, 나도 내일 일찍 출근해야 돼.”

 

다음에도 우린 아마 같은 얘길 할 거다.

지난번에도 그랬으니까.

우리의 모든 푸념은 그만두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사축 소설 1 - 영업 2부 표류기

“죄송합니다.”

저 죄송하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다. 아무 도움도 안 되고 그저 모면하기 위한 저 말. 대꾸하기도 귀찮다.

 

황 차장은 그런 부장의 오른팔을 자처하고 있다. 영혼의 절반 이상은 부장에게 바친 것처럼 부장의 일거수일투족에 불꽃 같은 리액션으로 화답한다. 부장이 폭탄주를 말며 물에 젖은 티슈를 던져 천장에 붙이면, 마치 방청객 아르바이트를 통솔하는 방송국 직원처럼 호응을 유도하는 역할이 바로 그의 몫이다. 어젯밤은 그들에게는 꽤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술을 많이 먹은 다음 날엔 항상 이런 민망한 기억들이 있다.

 

“야, 우리가 말야 그 섬에서 나왔다곤 해도, 아직도 우리는 계속 표류하고 있는 중인지도 몰라. 더럽고 거지같아도 우리는 결국 회사에서 못 벗어나. 생각해봐.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간 것 같지? 아니야. 그냥 다들 가니까 들어간 거야. 그냥 바닷물에 쓸려서 우리가 그 섬에 간 것처럼. 그리고 거기서 우린 못 나와. 나는 그냥 또 다른 섬에 간 거고. 김 대리는, 아니 수진이는 그냥 또 하나의 섬을 만든 거고. 회사생활이 그냥 표류야, 표류!”

 

 

 

사축 소설 2 - 시간을 달리는 신입사원

모든 아침이 그랬듯 5분이 아쉬웠습니다. 알람을 5분 간격으로 네 개나 맞춰두고 잠이 들었지만 또 5분이 더 필요했고 그렇게 세 번, 15분을 더 잔 겁니다.

 

사실 회사생활 한 달 반 동안 업무도 손에 안 붙고 뭘해야 할지조차 몰라서 하루종일 눈치만 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퇴근하기를 반복했습니다. 회사에 나가기가 겁이 납니다. 하루만, 단 한 번만 나도 스스로 뭔가 잘해냈다는 생각을 갖고 깔끔한 기분으로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래처 근처 오리고깃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수고 많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동안 신입으로서 받아야 했던 부담과 설움은 오늘을 위한 레슨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겨우 몇 마디 핀잔을 듣는 것이 무엇이 대수냐고, 그걸 참아내는 것도 다 사회생활이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보지만, 지금 당장 괜찮아도 이런 생활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매번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 오답이라면 무엇이 정답이었지는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오늘처럼 정답은 ‘답 없음’. 언제까지 이렇게 답 없는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까요? 나는 직장생활을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요? 아니,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에필로그 - 어느 밤, 사축 J의 일기

돌이켜보니 내 인생은 그럭저럭 순탄한 편이었다. 십대 시절 나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애는 아니었다. 그럭저럭 공부하면 그럭저럭 점수가 나왔고, 그럭저럭 나온 점수로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럭저럭 술을 먹고 놀다가 남들 군대 갈 때 군대 가고, 다녀와서는 남들 하는 취업준비들—이름도 기억 안 나는 공모전 몇 개와 그런게 있었나 싶은 자격증—에 매달렸다. 그럭저럭 괜찮은 이력서를 만들어 여기저기 뿌려댄 결과 다행스럽게도 딱 한곳에서 나를 합격시켰다. 아니, 불합격시키지 않았다. 딱히 동경하던 회사는 아니었고, 이력서를 넣은 대부분의 회사들이 그렇듯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곳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출근을 하게 되어 오늘까지 다니고 있다.

 

출근은 언제나 하기 싫지만 회사에 딱히 어떤 끔찍한 것이 있어서는 아니다. 못하면 갈구고 잘하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조금 짜증나는 상사가 있고, 언제나 빡세고 귀찮게 수습 가능한 선에서 사고를 쳐주는 막내가 있고, 그들 사이에 그들을 조금씩 닮은 내가 있을 뿐이다. 퇴근은 언제나 간절하지만 그 이후에 딱히 어떤 대단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집에 와서 텔레비젼 예능 프로나 철 지난 영화를 보면서 잠이 들거나, 가끔 친구를 만나 당구를 치거나 맥주를 마실 뿐이다. 조금 지겹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월급도 그럭저럭 받잖아.

 

긍정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서점의 책들은 마치 종종 푸념하고 투덜거리더라도 큰 문제 없이 살고자 한 내 선택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티비에는 대성공을 거둔 사람들과 대실패를 거둔 사람들이 나온다. 드라마 주인공은 엄청나게 부자이거나 엄청나게 가난하다. 뉴스는 대단히 위대한 사람과 대단히 나쁜 놈들의 소식을 전한다. 내 주변은 죄다 나처럼 그럭저럭 살고 있는 사람들 뿐인데, 항상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나와 내 친구들 같은 사람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한편으로 변두리에 있는 기분이다.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되니까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내게 그렇게 살기를 권장한 것 아닐까.

 

 

 

추천사

그때도 그랬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고 자신만의 노래가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경험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점을 갖고 있다. 미시적인 디테일을 살리면서 거시적인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듣다보면 킥킥대면서 웃다가 짠해지는, 엉덩이에 털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강백수는 장점이 많은 남자다. 아니, 장점보다 매력이 더 많은 남자다.

 

강백수의 조성을 감히 분석하자면 첫번째로 ‘허세’를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극단적인 자기 자랑과 함께 타인에 대한 모멸로 연결되는 흔한 허세가 아니라 일단 무독성 친환경 허세라고 할 수 있다. 그 허세는 강백수의 외피를 구성한다. 한때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노스페이스 패딩재킷처럼 한껏 부풀어오른 강백수의 허세는 본인을 눈에 띄게 만들고 더 커 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뿐만이 아니다. 일단 복어처럼 부풀어오른 다음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면서 실제 자신과 패딩재킷 사이의 간극을 메꿔나간다.

 

그의 두번째 장점은 솔직함이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것, 생각하는 것을 나타내고 이야기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종종 발칙함과 솔직함이 혼동되는데 다시 말하지만 그는 발칙한 것이 아니라 솔직하다. 청자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하되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훼손되는 것을 극히 두려워한다. 그의 노래 가사에서는 그런 고뇌가 느껴진다. 몇 번이나 다시 고쳐 썼을까.

 

40년 넘게 살면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봤다. 너무 눈이 부셔서 가까이 가면 타버릴 것 같은 사람들도 많이 봤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빛나는 재능을 너무 믿은 나머지 일찍 사라져갔다. 성실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백수는 그런 면에서 환한 빛을 내면서도 에너지 효율이 좋은 저전력 에너지 시스템을 닮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같은 곳으로 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런 생활 패턴을 보이는 생명체는 지구에서 오직 인간밖에 없다. 그런데 사축 즉, 정규직 노예의 삶도 부럽다고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 엄청난 경쟁을 뚫고 입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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