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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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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제목에서부터 다소 도발적이고 비장함이 느껴지는 이 책은 현직 대학 시간강사가 쓴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삶, 그리고 우리나라 대학 사회의 적나라한 맨얼굴을 고스란히 담은 보고서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에 연재되기 시작해 큰 관심을 얻은 동명의 에세이 연작을 다듬어 엮은 책으로 지방대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시간강사로 살아가고 있는 저자가 자신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고자 쓰기 시작했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는 이때에 제도권에서 살아가는 이 청년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그래서 8090세대 청년들에 대한 세대성의 가슴 서늘한 기록이 된다. “젊을 땐 좀 아파도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불평만 한다”는 식의 기성세대의 일갈에 대한 답으로서, 꿈을 가진 한 청년이 얼마나 ‘노오력’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꿈 때문에 현재를 얼마나 처절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지 담백하고 절제된 문장들의 사이에서 읽어낼 수 있다.
저자
309동1201호(김민섭)
출판
은행나무
출판일
2015.11.06

 

프롤로그 - 안녕, 나의 모든 것
‘교수’, ‘연구자’라는 알량하고 모호한 이 한 단어의 인간이 되기 위해 무엇과 작별하며 살아왔는가, 생각하니 비로소 한없이 부끄러웠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안녕 나의 모든 것, 하고 용서를 빌며 너의 손을 잡을 것이고 안녕히 나의 모든 것, 하며 아카데미의 삶과 온전히 이별을 고할 것이다.

 

강의실에서는 허울 좋은 젊은 교수님이지만, 4대 보험조차 보장되지 않는 4개월짜리 비정규직 노동자다.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는 이미 공고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가속화해온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다. 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조교가 받는 거의 모든 보수는 학비 감면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조교 장학금은 등록금의 인상 폭에 관계없이 10년째 그대로다. 교직원과 함께 일하거나 교직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지만, 최저 시급, 주휴 수당, 초과 수당, 4대 보험 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기본적인 안전망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대학은 학생의 노동력으로 행정 공백을 채우고, 그들이 내야 할 수업료를 일부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인건비 지출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동네 편의점도 노동부의 눈치를 보며 최저시급과 주휴 수당을 챙겨주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 대학은 거리의 편의점만도 못하다.

 

내부 고발이나 처우 개선 요구와 같이 거창하거나 감당 못할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이렇게 살아가는 한 세대가 있음을 기록하고자 했다. 동정이 아닌 공감을 이끌어내고 싶었고, 허울 좋은 ‘교수님’이나 ‘연구자’가 아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사회인’이자 ‘노동자’로서 내 삶을 규정해보고 싶었다. 그러면 한발 더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나를 아프게 한 것은 주변이 아닌 대학이 만들어낸 구조 그 자체에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내 처지와 생계에 대해 도움을 줄 만큼 여유 있는 노동자는 대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을’로서 살아간다. 원망도, 아쉬움도 모두 버리고, 먼저 손을 내미는 다정한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내가 이후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 나의 과거를 미화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썼다.

 

나는 이미 물결에 흽쓸려 가고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누군가를 뒤돌아볼 여유를 갖는 것조차 사치에 가깝다. 하지만 적어도 인문학을 가르치는 강의실에서만큼은, 어떻게든 역행하고 싶다. 지금의 사회는 인간을 갑과 을로, 다시 병으로, 정으로, 무한히 분류해내고 있지만, 강의실은 어떠한 위계 없이 ‘갑’만 존재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강의실에서는 나도, 학생도, 모두가 갑이다.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그러한 사유가 ‘명문’과 ‘지잡’의 분류를 넘어 거리로 확장될 수 있길 바란다. 나의 제자들이 인간의 가치를 수직적으로 분류해내지 않기를,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자기 안으로 초대할 수 있는 다정다감한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부. 지방시 첫 번째 이야기, 대학원생의 시간

“그냥 연구소 잡일 돕는 아이입니다” - 연구소 조교 생활

첫 회의 때 모두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고 내가 남았는데, 저건 누구지 하는 표정을 몇몇 운영위원들이 지었다. 회의를 진행하려던 연구소장은 아, 저기는 그냥 연구소 잡일 돕는 아이입니다 회의 시작합시다, 라고 했다. 잠시 호감의 눈빛을 보이던 운영위원들은 곧 아 그래요, 하는 표정으로 회의 자료를 들추었다. 그것으로 내 포지션은 확실히 정해진 셈이었다. “잡일 돕는 아이”, 그것만큼 내 석사 시절을 잘 나타내는 표현도 없었다. 연구소의 무급 연구원으로 등록된 박사과정 선배에게 이 일화를 전하자 그는, 내가 잡일을 하고 너는 잡일하는 나를 돕고 있으니까 그건 정말이지 정확한 비유다, 라며 나를 쉽게 납득시켜주었다.

 

그가 ‘대단하다’라고 표현한 것이 그때는 그저 도와줘서 고마워, 하는 식으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대단함’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위하지 못한다면” - 과정생의 노동과 처우

누군가의 일을 돕다가 크게 다쳤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교수든 강사든, 그 누구든 나에게 전화해 많이 다쳤는지, 몸은 좀 어떤지, 자신의 일을 도와주다 그랬으니 정말 유감이라든지, 그러한 말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모든 치료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했고, 여름 내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곳이 내 직장이라면, 내 청춘을 바치고 있는 곳이라면, 나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해주길 바랐다. 군대에서 작업하던 이등병이 다쳐도, 일용직 노동자가 현장에서 다쳐도, 사람을, 노동자를,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는다. 내가 연구실 이전에 기꺼이 응한 것은 물론 그러한 ‘잡일’이 관행이기는 했으나, 제자의 도리라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학과 교수님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여름에 나는 너무나 외로웠다.

 

지금 나를 사회적으로 보장해주는 명목상의 직장은 대학이 아닌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다. 대학은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에게 각각 행정과 강의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을 ‘노동자’로 대우하지 않는다. 대학원생과 시간강사는 대부분 지역 가입자로, 혹은 부모님의 피부양자로 건강보험에 등록되어 있다. 오히려 패스트푸드점에서 건강보험을 포함한 4대 보험을 모두 등록해주었다. 내가 흔치 않은 직장 가입자가 된 것은 맥도날드에서 월 60시간 이상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들어오세요, 하자 두 분은 무척 반가워했다. 대학에서 이제 건강보험을 해주는 거냐, 물으셔서 나는 지도 교수님이 연구원으로 등록해주어 그동안 건강보험료가 나올 거예요, 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도저히 저 맥도날드에서 일해요, 하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한평생 열심히 일해 모든 가족을 피부양자로 든든히 품어준 내 아버지를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서럽고…… 그저 너덜너덜하다.

언젠가 12,000원의 건강보험료를 내며 30대를 보낸 이 시기를 내 후배들에게 웃으며, 술자리 안주 삼아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내 후배들은 적어도 부모님의 든든한 부양자가 되어 웃으며 건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위하지 못한다면, 참 슬픈 일이다.

 

대학 시간강사 K께

서른 이전까지 ‘건강보험’의 개념을 거의 모르고 살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주민등록번호를 적으면 원무과에서 아버님 성함이 Y가 맞나요, 하고 물었고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렇게 그저 몇 마디 주고받는 것으로 그간 건강보험 혜택을 받아온 것은 온전히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께서 직장 건강보험을 통해 저를 ‘부양’하는 동안, 저는 ‘피부양자’ 자격으로 30년을 살았습니다. 스무 살부터 본가를 떠나 홀로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사회적 어른’이었던 적이 없고, 아버지는 여전히 나의 든든한 보호자이자 울타리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노동하고 있으되 노동자로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은, 노동하는 한 인간이 응당 가져야 할 정체성과 자존감을 무너뜨립니다.

 

“여기서 혼자 할 일 없는 놈” - 내 부모의 보호자가 되지 못하는 현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직장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는지 물으셨다. 아버지 퇴임 후 두 분을 피부양자로 등록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좋은 대답을 드릴 수 없었다. 한평생 한 가정을 훌륭하게 먹여 살린 내 아버지가 퇴임을 앞두고 계신데, 다음 세대인 나는 부모님을 ‘부양’할 수 없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피부양’ 상태이며, 내 부모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은, 나를 무척 주눅 들게 만들었다.

 

내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이전과 달리 사회구조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열없이 주워섬기면, 어머니는 측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언제나처럼 한마디,  

“노력하면 되는 거 아니니?”  

언젠가부터 나타난 많은 ‘힐링 전도사’들은 ‘꿈’, ‘도전’, ‘열정’과 같은 단어들을 청년의 미덕으로 제시한다. 듣기엔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구축한 ‘청년론’은 젊은 세대들의 아픔을 그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규정해내기에 문제가 된다. 이 마법의 논리를 구성하는 핵심은 바로 ‘노력’이다. 취직하지 못하는 것, 연애하지 못하는 것, 그 어떤 모든 것들이 기성세대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청년 세대를 위한 위안이나 동기부여가 되지 못한다. 그저 자기혐오감을 증식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들여다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기성세대는 스스로의 역할을 뒤돌아보는 대신 그저 청년의 노력을 심사하는 엄격한 평가자가 된다. 결국,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시대적 계발의 논리는 기성세대를 위한 것도, 청년 세대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세대 갈등을 더욱 심화하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 앞에서 아들 세대의 ‘아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아픈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책에 빠져 살던 어린 시절, 종종 네가 원하면 언제까지나 공부할 수 있게 해줄게, 집을 팔아서라도 그렇게 해줄게 공부만 하렴, 하고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 목소리를 사랑스럽던 마음, 질감 그대로 기억한다. 하지만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염치는 없어서, 일그러진 얼굴로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 고작이다.  

 

“너 그러다 늙겠구나” - 그리고……

돌이켜 보면 온전히 내가 갚아야 할 몫인 것을, 나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받는 데에만 익숙했다.

 

석사학위를 받았을 때, 할머니는 이제 선상님이 된 거냐, 그런 거냐, 하고 물으셨다. 나는 아직 학생이에요, 하고 답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했을 때는 언제 선상님이 되는 거냐, 하고 힘겹게 물으셨다. 나는 곧 될 거예요, 하고 어렵게 답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너 그러다 늙겠구나…… 하셨다. 그때 이미 귀가 어두워 몇 번이고 크게 반복해 말해야 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나는 병원에서 차게 식은 할머니를 붙들고 미안해 할머니 하고 엉엉 울었다. 이런저런 감정들보다도, ‘선상님’이 되어 용돈 한 번 드린 바가 없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의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학자금 대출을 갚는 것조차 버거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저도 손자 노릇 할게요, 했던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너 그러다 늙겠구나, 라는 한탄에서의 주체는 오히려 당신이었던 것이다. 그걸 알아차리는 데에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의 첫 성묘를 가는 길에 국화를 사 꽃잎을 뿌려드렸다. 그것이 내가 할머니께 드린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야 그만 좀 얻어먹어 인마” -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친구들

고향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와 단절된다는 말과도 같다.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었을 여러 인연들과 나는 점차 이별했다.

 

서울의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져갔다. 서로 연락하다가, 서로 연락이 뜸해지고, 내가 몇 번을 먼저 하다가 그나마도 어색해지고, 나중에는 내가 죽으면 이 친구가 오기는 할까, 아니 알고 찾아올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사이가 많아져갔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여전히 대학원생으로 자리를 지켰고, 친구들은 ‘사회인’이 되어갔다. 노동하고, 그에 준하는 월급을 받았다. 그 차이는 ‘친구’라는 단어로 쉽게 메꿔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만나 적은 돈을 나눠 삼겹살에 소주 한잔으로 즐겁던 녀석들이 갑자기 ‘좋은 회’를 먹자거나, ‘양주’를 먹자거나, 오늘 내가 살게, 하는 말을 꺼냈다. 처음 한두 번은 너 인마 좋은 직장 잡은 걸 보니 정말 좋다, 오늘은 내가 얻어먹고, 내가 교수 되면 너희들 다 모아서 파티 한번 할게, 하는 식으로 그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떤 벽이 점차 쌓여갔다. 그것은 오래된 친구, 좋은 친구, 막연한 친구를 가리지 않았다. 친구들은 직장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들과 경쟁하듯 서로를 페이스북에 ‘태그’하기 시작했고, 내게는 서울에 언제 오는지 영혼 없는 인사치레를 하다가 곧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나’라는 사람의 자리는 점점 잊혀갔다.

 

이 친구도 취업을 하고 연봉이 이천이다 삼천이다 했다. 취업에 성공했을 때에는 내가 이 친구의 회사 앞까지 찾아가 참치회를 한 접시 얻어먹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할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주 만나지도 못하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나 내가 맥주를 한잔 사고 G가 2차를 가자며 어디론가 갔는데, 조금 취하더니 한마디했다. 야 그만 좀 얻어먹어 인마. 내가 산 맥주보다는 당연히 비싼 자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농담이었는지, 취해서 생각 없이 나온 말인지, 둘 다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이후로 G에게 차마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G는 연락하는 법이 잘 없었다.

 

그런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야, 하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름 굳건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이에 조금씩 벽이 쌓여가는 듯한 그 위화감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누구나 쉽게 말로 ‘진정한 우정’을 과시할 수는 있지만 정작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월과 거리가 벽돌을 쌓아가고, 그것을 치울 최소한의 시간 여유나 물질 비용이 없는 편이 항상 나 자신이라면, 정말이지 끔찍한 외로움이 몰려온다. 석사 1기부터 박사 4기를 수료하기까지, 참 많은 친구들이 내게서 멀어졌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아직도 내 곁에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비용을 대어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눈앞에 쌓인 벽돌을 치워주었다. 그마저도 내 자기 위안일는지 모르겠지만…… 감사한 일이다.

 

“나는 반사회적인 인간이다” -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시간강사와 사회인

어느새 갓 서른이 되어 있었다. 피어난 적 없는 내 청춘은, 이제 대학원 사회의 가장 밑 단을 넘어 ‘논문’, ‘연구’, ‘강의’와 같은 아카데미의 정글에 던져졌다.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적당히 나이를 먹고서도 제대로 사회인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볼품없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회인’의 거리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문법’이 있었다.

 

사회성의 결여, 사회에서 함께 동시하고 있으나 동시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동시성의 비동시성, 이러한 외로움은 연애나 우정이나 가족애 같은 것으로는 극복되지 않는다. ‘사회적’이지 못한 존재는, 외롭다.

 

“아직도 하고 있냐” -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 친구 허벌에게

이러한 친구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내색하지는 않아도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그때는 정작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추억 혹은 미화된다.  

허벌은 고등학교 졸업 후 한동안 소원했다가, 내가 대학원에 진입했을 즈음 연락이 왔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공부 중이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스물여섯이었다. 대부분의 또래들이 취업 준비에 바쁠 때, 나는 대학원에 갔고 그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우리는 아직 어렸고, 삶에 지쳐 그만둔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고, 그래서 큰 감흥 없이 서로를 격려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시 5년 만에 그와 통화하며 물었다. 첫마디는 살아 있냐, 하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아직도 하고 있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연히 아직 하고 있다, 고 대답했다. 나는 정말 기뻐서 야 이 미친놈아, 했고 만나서 더 이야기하자, 했다. 그 친구도 나에게 아직 글 쓰냐, 해서 아직 쓰고 있다 하니 역시나 너도 미친놈이네, 했다. 서른이 넘어 아직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격려받을 만한 일이었다.

 

자신이 청춘을 바친 곳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성과를 내었다는 자체로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어찌 되었든 그가 서른둘이 되는 동안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버텨냄’처럼 힘든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지난 석사 1기부터 박사 4기, 수료 후 강사 생활 등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한 친구와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정말 오랜만에 고양과 행복을 주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2011년에 통과시킨, 제일 마음에 드는 논문을 한 편 선물했다. 서로 무언가 청춘을 바쳐 얻어낸 어떤 결과물을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혹은 누군가 아직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줄 수 없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버텨냈고, 버텨내고 있으니까…….

 

《무정》을 쓴 이광수다. 그는 고아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홀로 유학했는데, 그의 필명은 항상 ‘고주(孤舟)’, ‘외로운 배’라는 뜻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겪었을 생활고와 그에 따른 외로움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과정을 통해 1917년 <매일신보>에 소설 《무정》을 연재할 기회를 얻는다. <매일신보>는 당시 조선이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신문 매체였다. 어째서 이광수가 그런 축복을 받았는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결과물을 생산하고 유통해 최초의 장편소설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즈음 그의 필명, 아이디는 ‘외로운 배’에서 ‘봄의 정원’으로 바뀐다. 춘원(春園),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이다. 그토록 외로웠던 한 인간이, 버티고 버텨 청춘의 결과물을 내놓으며 그만큼 행복에 고양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광수는 조선 최고의 소설가로 우뚝 서고, ‘춘원’은 그를 대표하는 아이디가 된다.

 

100년이라는 세월 이전의 인간과 이렇게 교감할 수 있는 청춘이라는 것도, 좋지 않은가 싶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외로울 것이다. 현실은 계속해서 돈으로, 세월로, 그 무엇으로 압박할 것이고 부모님의, 친척들의, 친구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만든 따뜻한 정원 안으로 모두를 초대할 날을 기다린다. 조금씩 나무를 심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물길을 내면, 그렇게 논문을 쓰고, 좋은 강의를 하고, 혹은 그림을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면 나의 정원이 완성될 것이다. 나무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실망스러운 곳일지라도, 괜찮다. 계속해서 그곳을 가꿨다는 자체로 존경할 만한 정원사다.  

함께 꿈꾸던 친구들은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난 자리에서 보통 자신의 과거를 철없던 행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 ‘취미’로 ‘꿈’을 격하한다. 괜찮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비난할 만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인’이 되었음을 축하해야 한다. 하지만 허벌과 같은, 혹은 제도권에 한 발 걸치고 있지만 여전히 반사회적 인간인 나와 같은 인간들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철없음으로 여기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그것은 서로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아직도 후진 기어를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진행형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도 어쨌든 자신이 선택한 도로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언제 다시 만날지는 기약이 없고, 서로 힘든 삶을 살아갈 것도 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버텨낼 것이라고 믿는다.

 

“발표가 이제는 좀 들을 만하네, 좋아요” - 그렇게 대학원생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석사과정에 할당된 발표는 대부분 기존의 연구사를 요약하거나 간단한 자료를 보고 나름대로 정리하는 것이었고, 박사과정의 경우는 주로 소논문의 각 챕터를 완성해 학기 말에 완성된 한 편의 논문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수강생의 발표로 90% 이상이 구성되는 것은 어느 수업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이 있다. 좋은 수업을 하는 교수는 수강생의 발표 수준에 맞춰 그에 따른 피드백을 해준다. 분야의 권위자와 주목할 만한 신진 연구자를 소개해주고, 학계의 최신 동향을 일러준다. 어느 부분을 수정하면 어느 학회에 투고할 만한 수준의 논문이 될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포착해 조언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수가 더 많다. 그저 대학원생의 발표에 전적으로 의존해 수업을 진행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의미 없는 발표가 이어진다. 제대로 된 피드백도 없이 그래 고생했어요 이 책은 다 읽어봐야죠, 하는 식으로 수업이 끝난다. 자신이 장악하지 못한 텍스트를 과제로 내고 함께 토론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대학원생의 시각에 끌려다니기도 한다. 이건 아래에서 주도하는 학술 세미나지, 더 이상 학기에 500만 원씩 지출하며 듣는 대학원 수업이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최악의 교수는 자신이 쓴 논문과 관련 자료를 들고 와서 수업을 진행했다. 논문을 정말 못 썼던지라 석사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비싸게 주고 산 자료라며 바리바리 들고 와 만져보게 했는데, 이게 조선시대에 직접 유통되던 물건들의 목록이에요, 했다. 그게 도대체 연구 자료로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종강할 때까지도 듣지 못했다.

대학원 수업을 학부 수업보다 편하게 여기는 교수들이 많다. 어떤 교수는 대학원 수업인데 담배 한 대 태우면서 편하게 합시다, 하기도 했고 또 어떤 교수는 지방대까지 출강이 힘들다며 격주로 수업하는 것이 어떤지 묻기도 했다. 이런 것은 ‘편함’이 아니라 ‘우스움’이다. 학생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석사 3기생만 되어도 첫 주차에 오간 몇 마디로 교수에 대한 내부 평가가 끝난다. 그가 해당 분야의 권위자인가, 주목할 만한 신진 연구자인가, 혹은 그에 준하는 성과를 곧 낼 만큼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우리와의 수업에 진지하게 임할 것인가. 둘 모두라면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고, 하나만 충족해도 그런대로 좋은 일이고, 모두 아니라면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자네, 혹시 삼계탕 좋아하나” - 학위논문 자료를 수배하다

괜한 시간 낭비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청춘을 바쳐 쓰는 한 편의 승부인데, 작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걔들도 힘들었대, 하고 적혀 있었다” - 학위논문을 쓰다

나는 모니터를 끄고 ‘읽기’를 시작했다.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 조금씩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다지 잘난 것 없는 내 머리로만 논문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야 할 곳은 내 머리가 아닌 ‘그들’의 목소리였다.

 

뿌듯함은 잠시이고 부끄러움, 아쉬움, 안타까움, 이런 감정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누구나 정규직을 원하고,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가 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러한 꿈을 이루기까지는 계속…… 대학에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자네 살 만했지?” - 연구원 등록이라는 ‘희망 고문’

나를 세워놓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주먹에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학자금 대출 이자를 갚고 어떻게든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물류 창고 아르바이트, 중학생 내신 과외,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다. 그러면서도 학과 대소사의 잡일은 언제나 나와 대학원생들의 담당이었다. 영수증 증빙을 위해 찍은 행사 사진의 한편에는 어김없이 내가, 그리고 내 또래의 대학원생들이, 귀퉁이의 어느 부분에서 후줄근한 모습을 하고 있곤 했다. 이런 내 생활을 교수들이 응원하거나 격려하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서른이 다 된 제자의 이러한 삶에 연민과 동정을, 무엇보다도 내색하지 않는 공감을, 응원을 마땅히 보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그래도 자네 살 만했지,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나를 지탱해온 어느 한 부분을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그다지, 살 만하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정말로요.  

 

제 욕심이지만 어느 날 제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선생님도 알아, 그래도 잘했어, 고맙다, 이렇게 한마디 해주시면…… 좋겠어요.

 

“결국 나도 비겁한 인간인 것이다” - 내가 만난 학부생 조교들

나는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구조의 밑바닥에 있는 ‘개인’이었고, 조직의 관행과 싸울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서 그저 아 그렇네요, 하고 마는 것이 고작이었다.

 

S에게 근로 규정집을 보여주고 우리 연구소의 근로 방침을 함께 말해주었다. 나는 근로 규정에 따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공강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근무를 서야 한다는 관행을 이겨낼 수가 없다, 그래서 너에게 최저 시급 이하의 근무를 강요할 수밖에 없다, 싫다면 그만두어라, 미안하다, 했다. S는 공강 시간에 딱히 갈 데도 없고 연구소에서 공부하며 근무를 서겠다고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고,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몹시 부끄럽다. 잘못된 것을 알고도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고, 나를 믿고 함께 일하겠다고 온 학부생 조교에게 관행을 강요했다. 조금 한가한 날 오늘은 일찍 퇴근해,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결국 나도 비겁한 인간인 것이다.

 

어느 부처를 가도 먼저 인사하는 것은 학부생 조교들이다. 이걸 왜 이 아이들이 하고 있지, 싶은 일도 한다. 도서관의 서가마다 책을 나르고 정리하는 역할 역시 학부생들이 도맡는다. 사무실, 연구소, 기숙사, 대학의 어디를 가든 학부생 근로 장학생들이 있다. 결국 값싼 학부생의 노동력으로, 대학 사무의 최전선이 지탱되고 있는 셈이다.

 

그 물결 안에서 나는, 함께 일한 학부생 조교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방관하는 가해자였고, 학부생 조교들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을 떠안았다. 수료 후 시간강사가 된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용기를 내지 못한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미안해 꾸마우더리” - 학자금 대출

너무도 초라한 인생이다, 싶었다. 매뉴얼에 따라 일괄적으로 전화하며 벌어진 일이겠지만, 그래서 전화 주신 분께 대한 원망은 전혀 없었지만, 그저 조금 서글펐다. 서른이 넘은 한 인간이 1,600원의 이자 때문에 독촉 전화를 받는 것은 아무래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인생인지 의심스러워서, 사실 ‘좀 많이’ 서글펐다.

 

나는 석사과정 수료 후, 2년 넘게 네팔의 ‘꾸마우더리’라는 어린아이를 정기 후원해왔다. 치킨 한 마리 덜 먹고 무언가 보람된 일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문득 시작한 일이었다. 대출 이자가 밀려도 후원금만큼은 제때 내기 위해 노력했다. 2년 동안 몇 번이고 내게는 사치스러운 자기 위안이다 싶어서 후원 중단 버튼을 클릭할 뻔했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연구실 책상 한 켠에 붙여둔 아이의 사진과 언젠가 온 그림 편지를 보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 독촉 전화가 걸려왔던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몇 번의 클릭을 하는 것으로 2년간 이어왔던 일방적인 인연을 역시나 일방적으로 단절해버렸다. 어떤 이유로 후원하시나요, 라는 질문에 정말이지 두 시간 가까이 고민하다가 저를 위해서 후원합니다, 라고 적었던 기억인데, 어떤 이유로 후원을 중단하시나요, 하는 질문에 그저 정말 미안해요, 하고 짧게 남기고 창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아이의 사진과 편지를 떼어 연구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 어딘가에 넣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후원을 받았다면 아이는 좀 더 자랄 때까지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감당하지 못할 내 욕심 때문에 지구 반대편 어느 아이가…… 아팠다. 그날은 혼자 술을 많이도 마셨다.

 

학자금 대출 제도 덕분에 젊은 날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었기에 원망이라든가, 불만이라든가 하는 감정은 없다. 하지만 졸업하고도 이자를 갚기 벅찬 삶은, 스스로를 서글프게 한다.

 

“내 몸에 그저 미안하다” - 수료, 그리고 대학원생의 몸

몸이 망가진 만큼 좋은 연구 성과를 내었는가 생각해보면, 내 몸에 그저 미안하다.

 

어느 날의 일기: 노동한다는 것의 의미

잠시 침대에 누우면, 몸이 그대로 녹아드는 기분입니다. 온몸의 근육이 뒤틀린 것 같기도 합니다.

 

모두 존중할 만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자각, 이것은 몸을 수고롭게 해 ‘노동’하지 않았다면, 아마 느껴보지 못했을 경험이자 감정입니다.

 

얼마 전, 어떠한 다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후 어떠한 삶을 살든, 몸이 허락하는 적당한 ‘육체 노동’을 반드시 하며 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지금의 성찰이 그저 일시적 감정에 그치지 않도록, 값싼 자기만족이나 허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 뒤늦게나마 글이 아닌 몸으로 배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2부. 지방시 두 번째 이야기, 시간강사의 시간

“연구만 하고 강의는 안 할 수 없을까” - 강의 수임을 거절하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의미로 생존의 문제였다.

 

호승심 :: 반드시 이기려는 마음.
젊은 사람들은 종종 호승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는 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호승심 [好勝心]

 

“네, 할게요, 고맙습니다” - 30인의 지도 교수를 만나다

네가 10년 가까이 해온 공부인데 준비되지 않았다는 건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너 스스로도 그렇고 너를 가르친 선생님들께 부끄럽고 죄송한 일이다

 

그 어떤 좋은 수업도 50분이 넘어가면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세 시간의 연강을 강행하거나, 쉬는 시간을 무시하는 교수자들이 많다. 강의의 맥을 끊기 힘든 부분이 있을 테고, 자신의 강의에 도취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조절하는 것 역시 중요한 능력이다. 열정으로 미화하면 안 된다.

 

학생들이 가벼운 농담처럼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강의실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러한 가벼움에서 무거움을 찾아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큰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단순히 강의 자체를 두려워하는 나의 ‘나약함’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강의를 거듭할수록 두려움의 감정이 더욱 커져갔다. 강단에 서는 것은 마치 30명의 지도 교수와 대면하는 것과도 같았다. 학생들은 내가 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문제를 대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냈다. 지금에 와 굳이 규정해보자면 그것은 평범한 집단 지성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다양성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기 위해,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내가 학생들을 존중하고 두려워하는 만큼, 그들은 나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여러분은 저보다 더욱 좋은 선생님입니다” -학생들에게 배운 인문학

역설적으로, 대학 제도권의 글쓰기 양식을 충실히 가르치고자 했다. 학생들은 신문, 잡지, 댓글, 웹툰 등의 매체와 텍스트를 통해 이미 ‘시대의 글쓰기’에 노출되어왔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단어, 문장, 문단 구성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작문법에 익숙해져온 것이다. 그것을 보다 세련되게 체계화한 것이 대학의 글쓰기다. 대학이 만들어온 학문적 글쓰기의 양식을 가르치기 위해 대학 국어 강의가 필요하다고, 나는 판단했다.

 

가르치러 와서 오히려 배우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이상하게도 너무나 가벼웠다.

 

어느 날 문득 ‘교학상장’이라는 단어를 기억해냈다.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한다”라는 의미의 사자성어다.

 

교학상장 :: 敎 : 가르칠 교 學 : 배울 학 相 : 서로 상 長 : 길 장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이 모두 자신의 학업을 성장시킨다는 말이다. 중국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좋은 안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먹어 보아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극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배워 본 이후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 가르친 후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배움이 깊을수록 겸허해진다는 뜻으로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학문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가르쳐 보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자는 《논어(論語)》〈자한(子罕)〉 편에서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을 했다. 즉 후진자는 젊고 기력이 왕성하므로 쉬지 않고 배우니 그 진보의 깊이는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젊은 사람들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서경(書經)》〈열명(說命)〉의 하편에 보면,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재상 부열(傅說)이 '교학상장'과 같은 뜻으로 '효학반(斅學半:가르치는 것은 배움의 반이다)'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학상장 [敎學相長]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굳이 어려운 철학책을 애써 들추어보거나 하버드 교수의 강의록을 곁에 두지 않아도, 인문학은 언제나 내 주변의 평범한 집단 지성 안에 있음을 나는 믿는다.

 

“You are very hard teacher” - 강의실에서의 내 첫 번째 지도 교수에게

넌 다 나쁜데 그게 제일 나빠, 하는 핀잔을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열정적인 교수자들은 대부분 ‘혼자’ 열정적이었다. 비로소 미카가 말했던 ‘hard teacher’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알았다. 나는 나 혼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예문을 더 만들고 단어 시험을 한 번 더 보는 대신, 천천히 말하기, 가장 쉬운 단어로만 말하기, 모든 것을 가르치려 하는 대신 하나라도 제대로 가르치기,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기, 무엇보다 쉬는 시간 지키기, 같은 것에 집중했다. 그때부터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교재 연구에만 매진하거나 쉬는 시간을 잡아먹는 대신, 그들의 입장에 서서 교수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옳았던 것이다.

 

나는 강단에서 언제나 뜨거워야 하지만, 동시에 가장 차갑게 사유해야 하는 존재다.

 

“당신은 나를 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강단에서의 시야

초등학교 시절, 교무실에서 언젠가 교사들의 대화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6학년 3반의 S 학생은 참 수업 태도가 좋아요”, “네 3반은 S 학생만 보고 수업하면 되니까 참 편하죠.” 서른이 넘어서도 어떤 오래된 상황이나 대화가 그 분위기와 질감까지 선명히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겐 이것이 그중 하나다. S는 무척 우수한 학생이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어머니께서는 녹색어머니회의 회장직을, 아마 맡고 계셨다. 키도 크고 예쁘게 생겨서, 많은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의 나는 그저 나도 S 같은 학생이 되어야지, 하고 속 좋게 넘겼던 것 같다.  

강단 위에 서보니, 실제로 S와 같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 학생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대개 앞자리에 앉았고,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들었고, 내가 질문하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나를 향한 호감의 눈빛도 아낌없이 주었다. 강의하는 입장에서 무척 사랑스러운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 적극적인 태도를 존중하며, 나는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기대고자 한다면 강의는 쉽게 풀어나갈 수 있겠지만 그 순간 강의실은 그저 몇몇 특정 학생을 위한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도 눈에 먼저 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들의 성실함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성실함이란 강의실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사유하는가의 정도로 측정되어야 한다. 강의실에 앉은 그 누구라도, 들러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강의실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 내가 어느 특정 학생들에게 집중한다면 그것은 노골적인 ‘편애’가 된다. 학생 간 갑과 을의 위계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강사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그러면 강의실은 더 이상 집단 지성의 실험실이 아니며, 틀에 박힌 죽은 공간이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을’로 밀려나 들러리가 된다. 강의실에는 ‘갑’만 존재해야 한다.

 

강의실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학생들이 ‘반짝반짝’할 때다. 좁은 시야에 갇힌 몇몇이 아닌 모든 학생들의 반짝임을 내가 느낄 수 있을 때다. 그것은 어떤 감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가능성을 자각하고, 치열하게 사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모두를 반짝이게 하는 것이 나의 일이고, 모두를 갑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별 과제에 불만이 많던 학생은 강사가 되어 강단에 섰다” - 평범한 집단 지성의 인문학

어떤 교수들은 16주 강의 중 8주 이상을 학생들의 발표로 구성했다. 심지어는 전반부의 3주차가량을 강의하고서는 나머지 주차를 모두 조별 발표로 채우기도 했다. 발표 이전까지 그 어떤 피드백이 없기도 했고, 발표 이후에도 별다른 코멘트가 없었다. 토론도 그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주어진 특정 주제를 두고 학생들이 공부해 발표하고, 교수는 그것으로 그들을 평가한다. 학생들이 강의를 책임지고 교수는 방관자가 되어버리는 주객전도, 스무 살의 어린 학생이 보기에도 그것은 명백한 ‘직무 유기’였다.

60대의 어느 노교수는 자신의 학부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느 날 교수님이 오지 않고 조교가 들어오더라고, 그런데 교수님이 개인 사정으로 못 오시니까 라디오로 대체합니다, 하더니 교수님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 라디오를 틀어주고 나갔어, 한 학기 내내 교수님 얼굴을 못 보고 라디오로 목소리만 들었는데 그때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지 허허. 그는 그 경험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했지만 그 역시 16주 중 12주 가까이를 학생의 발표로 채우고 다음 주에 봅시다, 하는 피드백만 거의 하던 인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역시 누군가의 무용담이 될 것이다.

 

주변의 가장 작고 가벼운 문제를 무거운 영역으로 치환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인문학적 성찰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조별 발표와 토론을 통해, 나는 평범한 집단 지성의 힘을 항상 확인한다.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어린 학생들은 스스로 훌륭한 인문학을 생산해냈다. 여기에는 명문대생도 지방대생도 없고, 건강하게 사유할 줄 아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이 나름의 성찰에 이르고 웃음 짓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강의실에서 당당해졌다. 내게 더없이 좋은 ‘선생님’인 그들에게 언제나 무한한 존경을 보낸다.

 

“나는 학생들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강의실에 언제나 옳은 존재는 없다

‘교학상장’,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하는 관계에 있다. 그러니까, 교수자도 학생도 모두 부족한 존재인 것이다. 모두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서 채워나가야 한다. 어느 한편이 자신과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혹은 사유하기를 멈춰버리면 그곳은 더 이상 강의실이라고 할 수 없는 죽은 공간이 될 것이다.

 

나는 학부생 시절 거의 모든 엠티에 참여했다. 첫 엠티에서 어느 여학생과 함께 강가에 앉아 말없이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좁은 방에 둘러앉아 즐겁게 했던 여러 게임의 분위기와 질감이, 아직 생생하다.

 

어느 연구자께서 “나는 학생들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고 연락해 왔다. 나 역시 그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도 언제나 옳은 존재가 아니다. 나는 강의실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존재도, 그른 존재도 없다고 생각한다. 교수와 학생은 서로에게 ‘을’이 아니다. 상대방을 ‘갑’으로 존중하며 지식과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자유롭게 펼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러한 성숙한 인간으로 강의실에 서고 있는가는 스스로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야 한다고 믿으며 오늘도 강의실의 문을 연다.

 

“교수님 일베 하세요?” - 강의실 안에서의 ‘정치적인 것’

각 개별 주체의 정치성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너와 나의 다양성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 역시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이 있다. 어떤 ‘주의’를 끌어와 포장해내지 않더라도, 모두의 일상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어떤 현상을 보고 누군가는 편안함을, 다른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한 즉각적 반응 역시 모두 저마다에게 내재된 정치성에 따른 바다.

최근의 학생들이 재편해낸 ‘정치성’이라는 것은 이전과는 달리 ‘합리성’에 더욱 기초해 있다. 어느 학생은 내게 “김관진 국방장관 같은 진보적 인물이 참 좋아요”라고 말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왜 그를 진보적 인물로 생각하니?” 하고 묻자, 그는 “군 가산점 제도에 대해 찬성하잖아요” 하고 답했다. 그러니까 그는, 군 가산점 제도에 찬성하는 행위를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더 이상 진영의 논리나 그간의 ‘주의’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이 상식과 합리라 믿는 것들을 모두 수용해내는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김관진과 안철수는 ‘진보주의자’가 된다. 많은 학생들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성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사상사적 학습에 노출될 일이 적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성이 세대에 따라 부분적으로나마 재편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강의실의 학생들이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강단 위에 선 교수자가 자신의 정치성을 드러내는 것은 옳은 방법론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것은 학생들을 사유의 주체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주체로 두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교수자를 존경하고 신뢰하는 만큼, 학생들은 어떠한 고민이나 성찰 없이 그에 이끌리게 된다. 혹은 학점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것은 건강한 토론이나 교육이 아니라 그저 ‘강요’가 될 확률이 높다. 교수자는 자신의 말을 줄이고, 학생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세월호의 선장을 비난하는 것으로 1차적 사유가 끝나서는 안 되고, 나는 한 사람의 선장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처럼 강박에 가까운 자기 검열을 거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강단에 선 한 인간이 짊어져야 할 무게일 것이다.

 

언젠가 학생이 내게 “교수님 일베 하세요?” 하고 추궁하듯 물었다. ‘일간베스트’와 ‘오늘의 유머’, 두 인터넷 커뮤니티를 주제로 조별 발표를 하겠다기에 “제가 혹시 일베나 오유 유저라도 괜찮겠어요?” 하고 농담 삼아 한마디 했더니 그는 그렇게 반응했다. 민감한 주제가 될 것임을 조언해주려고 가볍게 꺼낸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아도 명백한 나의 실수다. 내가 어느 쪽의 유저든 그런 것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앞장서서 그들의 가능성을 박탈해버렸다. 그들은 결국 발표 주제를 바꾸었다. 일베의 객관화는 그에 대한 옹호로 비추어질 수 있고, ‘일베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 두렵다고 했다. 나의 발언과는 관계없는 변덕이었겠으나, 나는 못내 아쉬웠다.

 

나는 학생들이 그를 통해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가 될 수 있길 바란다. 모두의 정치적 좌표는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정치성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어떤 진영 논리를 펴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사유와 성찰을 통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무한한 존경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작은 배의 ‘선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 논문도 검색해주세요” - 강의와 연구 사이의 균형 찾기

많은 시간강사들에게 강의는 부족하나마 당장 오늘의 생계를 해결해주는 수단이고, 연구는 내일의 생계를 위한 희망이 된다.

 

보기 안쓰러워 논문 마감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적당히 해요, 하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하면 그래도 할 건 해야지, 하며 한숨인지 뭔지 모를 담배 연기를 함께 내뱉는다.

 

내 연구가 학술진흥재단 등재지에 게재 판정을 받고 좋은 연구자의 논문에 피인용된 것을 봤을 때 느끼는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에게 연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숭고’가 아닌 ‘생계’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래야 강의에 충실할 수 있다.

 

교수님의 논문도 검색해주세요, 하는 학생의 요구를 누군가는 무례함이나 당돌함으로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몇 년간 한 편의 논문도 쓰지 않고 강의실에 서는 행위가 오히려 학생들에게 무례한 것이다.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은 시간강사의 삶이건만, 강의실과 연구실에서만큼은 ‘노동자’로서, 존재하고 싶다. 특히 강의실에서 느끼는 당당함도, 부끄러움도, 대학 인력시장의 이력서에는 남지 않겠지만, 스스로의 이력서에는 남는다.

 

“지몽미 그게 뭐야” - ‘신종족’과 소통하는 ‘젊은 교수님’

언젠가 학생들과 일상어로 소통이 되지 않는 때가 반드시 오겠구나, 싶었다. 그것은 내 노력으로 극복하기 힘든 세대적 경계선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젊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산인지 느꼈고, 동시에 곧 상실하게 될 ‘젊음’이 애틋해졌다.

 

지금 가능한 세대적 소통과 교감은 감사하지만, 그것을 당연함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나의 능력이나 특별함이 아니라, 나의 젊음에 대한 학생들의 호감과 그로 인해 적절히 무화된 세대적 경계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젊음은 나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존재했던 것이고, 동시에 누구나 상실하는 것이다. 그 어떤 노교수에게도 지금의 나와 같은 젊음의 시기는 있었다.

 

“여러분 마음속으로 제게 에프를 주세요”- 학생들 앞에 부끄럼이 없도록, 진심 어린 사과하기

그동안 나는 사과를 할 때면 ‘그런데’라는 부사를 말미에 붙여 내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고, 변호해왔다. 결국 “그게 사과야?” 하는 반응을 이끌어내고, “미안하다고 했으면 됐지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해?” 하고 적반하장으로 맞받아쳤다. 지금까지 나는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변명’을 했고 ‘핑계’를 대온 것이다. 나의 잘못된 발화에 상처받았을 이들이 점점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사과를 하는 데에는 ‘미안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하는 두 마디면 충분한 것이다.

 

특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는 구절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참 비겁한 표현이다. “미안하다”라고 하면 될 것을, “-하게 생각한다”라고 해서 사과하는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니까 자신을 행위의 주체가 아닌 제3자로 묘사해 뒤로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자기 정당화의 과정을 반드시 거치고, 공익 또는 국익을 위한 결단이었다거나 하는 갖은 핑계를 더해, 당위성의 확보까지 스스로 이끌어낸다. 우리는 ‘사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사과에 목말라 있다. 나 역시 ‘미안’과 ‘죄송’의 수사가 없는 자기 보호를 위한 사과만 해온 인간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태만함에서 비롯된 일이 된다. 물론 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닌 이상, 앞으로도 학생들에게 사과할 일은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겸허히 나의 잘못을 성찰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최선을 다해 고쳐나가려 한다. 그렇게 조금씩 어제보다 나은 인간으로 강의실에서, 연구실에서,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의 제자들이 ‘죄송’과 ‘미안’의 수사로써 사과할 수 있는 존재로 함께 성장해준다면, 기쁜 일이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 맥도날드에서 배운 인문학

책을 덮고 강의실 밖으로 나와 보니, 그 문법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사용하도록 권장되고 있었다. 카운터를 마주하며 손님은 ‘갑’이 되고 아르바이트생은 ‘을’이 된다. 나는 맥도날드에서 노동하기 이전까지 대개의 경우 갑의 공간에 존재하면서 어떤 냉소만을 보내왔다. 강의실의 문법을 적용하며 아르바이트생의 무식을 탓했고, 혹은 어떤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을의 공간에서 바라본 풍경은 많이 달랐다.

을의 공간은 사람을 무척 작아지게 만들었다. 어떤 말썽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고, 그에 따라 손님에게 최상급의 존대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나 역시 언젠가부터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하고 있었다. 그 잘못된 문법은 오히려 더욱 자연스럽게 갑에게 가서 닿았다. 그러고 보면 카운터 위에서 갑의 소유가 된 햄버거 역시,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갑과 을 사이에 끼어든 ‘갑의 소유물’은 어떻게든 을보다는 높은 자리를 점유했다. 그래서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하고 외치며 갑의 소유물마저 높여주고 나는 그 아래로 자진해서 내려간다. ‘갑 ≥ 갑의 소유물 > 을’이라는 구도가 마련되는 것이다. 카운터 위의 햄버거를 높이는 문법의 오류는 역설적으로 최상급의 존대어를 만들어냈다. 강의실의 문법과 거리의 문법에는 이처럼 차이가 있었다.

지난해 우리 사회는 ‘갑질’ 논란으로 뜨거웠다. 땅콩 회항이나 백화점 모녀 사건이 모두 ‘갑질’이라는 신조어로 요약되었다. 그런데 맥도날드의 노동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 역시 갑질의 주체였음을 알았다. 나는 갑의 공간에서 을의 입장이 되어 사유해본 바가 없었다. 그들에게 잘못된 문법을 강요한 것은 누구인지, 지금의 시대는 대체 어떤 관념에 포위되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안에 내재된 ‘갑’을 발견하게 해준 공간은, 강의실이 아닌 맥도날드였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존대하는 노동자를 탓하는 대신, 어째서 그러한 시대의 문법이 구축되었는가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돌아보고 싶다. 저마다에 내재된 갑의 실체와 마주하도록 돕고, 누군가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을 성찰할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싶다. 갑질은 대기업, 재벌, 점주 등 어떤 특별한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로 흔히 인식되기 쉽지만, 우리는 여러 가면을, 저마다의 페르소나를 쓰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갑과 을의 공간을 넘나든다. 그 움직임을 인식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좌표를 명확히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스스로가 혐오해 마지않았던, 갑질의 주체가 되기 쉽다. 학생들이 자신의 주변을 살피고, 자신을 성찰하고, 건강한 갑으로 사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의 삶과 계속 즐겁게 마주하려 한다. 앞서 말했듯,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가든 몸이 허락하는 만큼의 육체노동을 반드시 해나갈 것이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렵게 배운 삶의 태도를 곧 잃어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 삶을 자랑스럽게, 누구나 성장을 위해 겪어야 할 ‘아픔’으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 젊어서 아파봐야 성장할 수 있다는 닳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 대신 내가 뒤늦게나마 배운 연구실과 거리의 인문학을 함께 전하고 싶다. 자신의 주변을 돌아본 학생들이 맥도날드의 인문학보다 더욱 나은, 저마다의 인문학을 마련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면 갑의 자리에 섰을 때 단순히 을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넘어 그를 자신에게 초대할 수 있는, 그렇게 손을 내밀어 다정다감함을 나누어줄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일도 다시 맥도날드에 출근한다.

 

“교수님은 무척 행복해 보이세요” - 나의 구원자, 학생들

어느 학생이 내게 이건 대체 왜 하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그는 시작부터 뭔가 불만에 찬 얼굴이었고 그다지 의욕이 없었다. 나는 딱히 답해줄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 스스로 ‘면담’이라는 행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다. 어떠한 비판 없이 선배의 조언을 수용한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싫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학생에게 나와 ‘면담’할 것을 강요했고, 이것은 원하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엄연한 폭력이었다. 모두가 원하고 있을 것이며 시간을 내주는 쪽은 나다, 라며 시혜적인 행위로 스스로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영부영 학생을 보내고 무척 부끄러웠다. 좋은 인문학 수업을 만들어가자고 다짐해놓고, 조별 과제 때를 비롯해 실수를 거듭하고 있었다. 가장 반인문학적 인간은 어쩌면 강사인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보통은 이럴 때 힘내라는 말을 해주곤 하는데 사실 그건 너무 뻔하고 내게 가장 힘이 되었던 어느 선생님의 말을 네게 전해줄게. 내가 고등학교 때였는데 방송국에서도 온 무척 큰 행사가 있었어. 전교생이 모두 강당에 모였지. 그런데 어느 젊은 선생님께서 나중에 내게 그러시더라고. 수백 명의 학생이 모여 있는데 이상하게 그중에 너만 눈에 들어오더라, 반짝반짝하고 말야. 내가 무언가 눈에 띄는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어,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이지. 그런데 나는 그때부터 내가 평범한 한 인간이면서 자아를 가진 무척 특별한 인간이기도 하구나, 하는 걸 알았어. E, 너에게 이 말을 해주는 건 강의실에서 가장 반짝반짝하는 게 바로 너이기 때문이야. 너는 내가 가장 먼저 이름을 외운 학생이야. 너는 특별하단다.”

 

이렇게 굳이 두 번째 이야기를 쓴 것은, 지금의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학생들은 나를 구원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사유와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것이 언젠가 젊은 날의 추억이나 감상이 되지 않기를, 계속해서 내 삶의 실재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언제까지 어떠한 방식으로 대학에 남아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지방시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후회하지 않으시나요?” - ‘헬조선’에서 꿈꾼다는 것

가끔은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자기소개서를 들고 주말에 집 앞까지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면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사주며 첨삭에 반나절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그러한 요청이 번거롭거나 무례하다기보다는, 그저 감사하다. 종강하는 날 나는 언제나 “인생에서 글쓰기가 간절히 필요한 어느 날이 생기면 제가 돕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핸드폰 번호를 공개해왔다. 한 학기 강의로 만난 인연일 뿐이지만,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들이 조금 더 나은 자기소개서를 완성해 자신의 꿈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나는 그에게 네가 관심이 있는 학문을 선택하렴, 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 될까 싶어 그만두었다. L은 문학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 문학을 전공하면 어떠니, 하고 말하려다가 그것은 더욱 무책임한 말이 될 것이 분명해 역시 그만두었다.

 

인문학, 실업자, 전과, 교직 과정, 이러한 단어들이 의미 없이 계속 흩뿌려졌다.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고, 교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에 온 건 아니잖니, 고작 이런 말을 열없이, 하곤 했다.

 

“교수님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후회하지 않으시나요?”

스무 살 학생의 질문이지만, 나는 여기에 어떠한 가식이나 자기 검열 없이 성실하게 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질문에는 그만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마음의 깊은 어딘가를 쿡, 하고 찌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후회라면 어제도 했고, 그제도 했다. 면담을 진행하는 중에도 했는지 모른다.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후회한단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L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는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돌이켜 스무 살의 나에게 어느 길을 걷겠니, 하고 다시 묻는다면, 역시 죽을 만큼 고민할 거야. 지금 행복하냐고 물으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어……. 그런데 적어도 나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는 않았단다. 그래서……”

나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남은 한마디를 하려 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 않으면……” 하고 말을 이으려는데 L이,  

“그러면 버틸 수 있다는 거군요.”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가 답을 내주었다. 나는 어제 후회했고, 오늘 후회하고, 내일도 후회할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건 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했기 때문, 인가 보다. L은 그 말을 끝으로 고맙습니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에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가 너의 결정을 존중할 거야, 스스로 많이 고민하고 선택하렴, 하고 함께 일어섰다.

 

어린 학생들에게 너희의 ‘꿈’이 있잖니, 하고 싶은 것을 하렴, 하고 말하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나 가혹하다.

 

“인간이 환생을 할 수 있다면 다음 생에는 공부가 아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할 수 있는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  

나는 잠시 ‘좋아하는 게 있으면 젊으니까 한번 해보면 되잖아’ 하고 생각하다가, 몹시 부끄러워졌다.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뭐가 다른가 싶었다. 그러고 보면 꿈꾸기조차 쉽게 용납되지 않는 시대다. 나는 힐링을 내세운 많은 ‘꿈 전도사’들이 사실은 젊은 세대에게 끊임없이 실체 없는 ‘노오력’을 강조해왔음을 잘 안다. 그 과정에서 기성세대는 스스로를 ‘노오력한 자’로 규정 짓는 동시에 청년들을 ‘노오력하지 않는 자’로 격하했다. 이것은 오로지 기성세대를 위한 힐링이며 청년을 향한 채찍질이었다.

청년들에게 ‘좋아하는 일’은 다시 태어나야 한 번쯤 선택해볼 만한 일이 되었다. 젊은 세대들은 미리 쓰는 유언장에서조차 자신의 꿈을 고이 접어두고 만다. 인생을 두 번 선택할 수 없는 이상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꿈꾸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 그래서 지금은 ‘헬조선’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꿈꾸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할 것이고, 스스로 답을 낼 것이다. 누군가는 현실을 선택한 그들을 비난할지 모르지만, 괜찮다. 꿈은 버리거나 짓밟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손을 내밀어 잡을 수 있도록, 이전보다 조금 멀게 곁에 두는 것이다. ‘헬조선’에서도 누구나 그렇게 꿈을 꾼다.

L은 고민 끝에 교직 과정이 있는 인문학 전공을 선택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덜’ 후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스무 살 그의 미래에 건투를 빈다. 면담을 통해 계속 대면하게 될 또 다른 L에게도, 모든 청춘에게도, 부디 건투를 빈다.

그리고 나에게도 부디 건투를, 빈다.

 

 

 

에필로그 - 그 어디에도 지방시는 있다

나 홀로 박복한 청춘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뿐 아니라 우리 사회 그 어디에도 지방시는 있다. 이것은 ‘헬조선’이나 ‘갑질’이라는 신조어의 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나 역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청춘일 뿐이다.

 

지방대는 좌절과 자기 검열, 무력감의 재생산이 일상화된 공간이다. 그만큼 우리는 임의의 선을 긋고 그 아래를 모두 ‘잉여’나 ‘루저’로 규정해내는 데에 이미 익숙하다.

 

단순히 ‘명문’과 ‘지잡’의 분류를 넘어, 우리 사회는 자본, 세대, 지역 등으로 자격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밀려난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루저로 규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밑으로 새로운 선을 긋는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갑과 을로, 다시 병으로, 정으로, 무한히 수직적으로 분류된다. 우리 사회의 ‘갑질’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자격을 정할 자격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나는 그저 흔한 인문학 교양 수업 하나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의 인문학에는 늘 감명받는다. 학생들은 내가 약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나와는 다른 시각의 훌륭한 인문학을 생산해냈다. 그래서 강의실은 교수 혼자 가르치는 공간이 아닌, 서로가 가르치고 배우는 집단 지성의 실험실이 된다. 교학상장,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성장한다는 말을 언제나 실감한다. 학생들은 언제나 나에게 ‘갑’이 되고, ‘지도 교수’이자 ‘구원자’가 된다. 강의실은 갑도 을도 없는, 위계가 없는 공간, 말하자면 ‘갑갑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나와 제자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우리를 포위한 시대의 분류법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길 소망한다.

삶의 가치 판단을 할 자격은, 그리고 자격을 정할 자격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행복을 정할 자격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은 이미 모두가 혐오해 마지않는 ‘갑질’이 될 뿐이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격을 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내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훌륭한 논문을 쓰는 좋은 대학의 연구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연구를 어떻게 했지, 하고 감탄하거나 나는 언제쯤 이렇게 쓸 수 있을까, 하고 패배감을 느끼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실에 앉아 읽고, 쓰고, 다시 읽고, 쓴다. 나는 성골, 엘리트, 천재, 그런 뛰어난 인간은 못 되지마는 지금까지 버티어냈다. 평범한 연구자로서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스스로 당당하다면 그것으로 내일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삶의 자격을 증명해나가려 한다.

지방시 이전과 이후의 내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이 사회의 무수한 지방시 중 하나일 뿐이다. 많은 ‘선’들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내 주변의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하며, 이전보다 조금 더 열심히 강의하고 연구하려 한다. 그리고 강의실에서만큼은 그러한 선들을 잘라내는 작업을 지속하고 싶다. 그렇게 ‘갑’이 된 학생들이 강의실 밖으로 나가 모든 타인을 갑으로 존중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나가며, 그러한 사유로서 시대와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면 모두의 의식에 내면화된 어떤 ‘괴물’이 균열을 보일 때, 함께 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료 연구자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후속 세대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그리고 모든 청춘이 더 이상 아픔이나 노력을 강요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지방시로 묵묵히 아픔을 감내하고 있을 모든 청춘들을 위해, 이 글을 바친다. 마지막으로,

“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으니까, 모두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이처럼 아팠음을 모두 기억하고 바꾸어나갈 수 있기를.”

 

 

 

감사의 말

나의 젊음이 거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장 행복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그 안에서 모두 겪었다. 지방시의 시간을 묵묵히 함께 감내해주었던 내 소중한 공간에게 가장 먼저 감사함을, 그리고 부끄러움을 함께 전한다.

 

그들의 삶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못하고, 나 홀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생각했던 것이 몹시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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