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s

기업의 시대

728x90
 
기업의 시대
『기업의 시대』는 중국 CCTV 다큐 제작팀이 기업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를 조망한 10부작 다큐멘터리를 한 권에 담아낸 책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기획에서 제작까지 2년여에 걸쳐 만든 대큐모 프로젝트로, 2010년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세계 역사 속에서 기업이 어떻게 진화해왔고 또 어떻게 세상을 바꿔왔는지 되짚어본다. 처음 기업이 생겨나기 시작한 먼 과거에서부터 오늘날의 글로벌기업까지, 역사 속에서 기업이 쇠퇴와 번영 사이에서 부침을 겪어온 여정은 책 속에서 한 장면 한 장면 생생하게 펼쳐진다. 세계 각국에서 기업이 직면했던 역사적 사건들, 성공적인 이력을 만든 기업들의 비밀,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많은 기업과 기업인들의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저자
중국 CCTV 다큐멘터리 제작팀
출판
다산북스
출판일
2014.04.25

 

머리말 - 먼 과거를 돌이켜볼 수 있다면, 먼 미래도 내다볼 수 있다

먼 과거를 돌이켜볼 수 있다면 먼 미래도 내다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제1장 | 세상을 바꿔온 힘, 기업

01. 세계 어디에나 있는 조직

1858년 4월 10일, 런던 템스 강변에 95미터 높이의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는 무게 13.5톤에, 분침 길이만 4미터가 넘는 영국 최대 크기의 시계 ‘빅벤Big Ben(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즉위를 기념하여 엘리자베스타워로 개명되었다)’이 설치되었다.

이 빅벤이 등장하면서 최신 시간 개념인 표준시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도회사들이 생겨나면서 변함없이 이어지던 자연법칙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각 기차역마다 태양의 움직임에 맞춰 울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시간을 맞춘다면 열차 운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것이었다.

 

국토가 넓은 미국에서는 표준시 도입이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 1883년 11월 18일,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국의 열차 시간표가 통합되었다. 통합 첫날 낮 12시, 미국 동부의 시계는 똑같은 시각에 맞추어졌다.

 

기업 :: 기업이란 주주가 자본을 투자해 영리를 목적으로 법률에 따라 설립한 일종의 조직 형태다. 기업은 민사권을 행사하고 민사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주주는 출자한 액수나 소유 지분의 한도 내에서 기업에 대해 책임을 지고, 기업은 전체 자산의 한도 내에서 기업의 채무를 책임진다.

 

2009년에 기업은 세계 인구의 81퍼센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었고 세계 경제력의 90퍼센트를 형성했으며, 전 세계 GDP의 94퍼센트를 창출했다. 그해 세계 100대 경제주체 가운데 51개가 기업이고 49개가 국가였다. 세계 161개국의 재정수입을 합쳐도 월마트 한 곳의 수입에 미치지 못하고, 세계 10대 기업의 총 매출액을 합하면 세계에서 가장 작은100개국의 GDP를 전부 합친 것보다 많다.

 

준칙주의(법률이 지정한 요건만 갖추면 자유롭게 기업을 설립할 수 있는 자유설립주의)

공시주의(제3자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의 경우 제3자가 알 수 있도록 공시하는 것)

 

애덤 스미스는 “거래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며 언어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했다.

 

현대적인 의미의 주식회사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사이에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등장했지만, 그 원형은 고대 로마와 중세 서유럽에서 이미 나타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고대 로마의 상업조직은 개인이 자본을 출자해 동업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방식은 법이 있으면 곧 사회가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발전시킨 것이다.

 

고대 로마의 상업조직은 동업자들이 공동 출자한 뒤 관리자를 선출해 경영을 하는 형태였는데 직원이 100명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현재와 비교하면 여러 가지로 큰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로마 시대에 확립한 법률 원칙이 훗날의 기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법률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소유권을 확실히 규정한 것은 자유 거래와 시장 형성의 전제였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학자들은 최초로 기업을 만든 것이 로마인이라고 보고 있다.

 

시장처럼 중요한 풍향계는 없다.

 

대항해시대로 촉발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수천 년 동안 친족이나 이웃에 의지해 유지되던 전통적인 상업조직으로는 충분한 인력과 자금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혈연과 지연, 인격과 친분을 뛰어넘는 상업적 협력이 필요해졌다.

 

오페레타(19세기 후반 발달한 대중적인 음악 희극. 희가극 또는 경가극이라고도 한다)

 

19세기 중엽 주식회사는 마침내 제도화되어 법률로 굳어졌다.

 

기업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유한책임제, 투자와 권익의 자유로운 양도, 법인의 지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기업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주식회사의 등장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낯선 타인과의 협력이 가능해졌다는 점에 있다.

 

주식회사 :: 기업의 조직 형태로서 일정한 수 이상의 주주들이 공동으로 발기하고 조직하며, 전체 자본금을 지분으로 나누어 갖고 주주들은 그 지분의 한도 내에서 회사에 책임을 진다. 대부분의 경우 주식은 공개 발행하며 자유로운 양도가 가능하다.

 

02. 근대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도 “그저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비누를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다들 씻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고 했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업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데 있다.

 

1882년 에디슨이 미국 최초의 발전소를 세운 후 인류는 지구의 자전주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기업은 근대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기업이 없었더라면 증기기관과 전력이 이렇게 중요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기업은 전통적인 관념을 깨뜨리고 평등을 실현했다. 부자나 귀족들만 누리던 생활 방식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게 된 것도 그중 한 예다.

 

인도는 1991년부터 기업 설립과 경영에 관한 허가 제도를 단계적으로 폐지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700개가 넘는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인도를 세계 제2위의 소프트웨어 수출대국으로 성장시켰다. 중국은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정식으로 확립했고, 그 후 중국 기업들은 이른바 중국 특색의 발전 노선을 걷고 있다.

 

기업의 제도는 낙후되었는데 경제는 발전했다거나, 시장이 낙후되었는데 국가가 발전한 예는 지금까지 없었다. 현대사회에서 부의 창출이나 국민들의 부 축적, 시장경제와 기업의 발전은 사실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0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70년대, 미국 제약회사 업존Upjohn의 신약 파날바Panalba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런데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이 약의 부작용으로 사람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발표를 했다. 업존은 특별이사회를 열고 이 문제를 두고 논의를 벌였으나 결국 약을 계속 판매하고 법정에서 자사의 입장을 변호하기로 결정했다. 약의 회수를 최대한 지연시켜야 매달100만 달러는 더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사회 전체가 경악했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의 J. 스콧 암스트롱J. Scott Armstrong 교수는 이 사건을 두고 모의실험 연구를 실시했다. 먼저 피실험자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97퍼센트가 약을 시장에서 회수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피실험자들에게 업존의 임원 역할을 맡긴 역할 실험에서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업존의 임원이 된 피실험자들은 모의이사회에서 매우 흥미로운 행동을 드러냈다. 그들은 사직서를 내겠다고도 하고, 의기소침해 머리를 싸매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언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끝내 약을 회수하기로 결정한 실험 조는 하나도 없었다.

여러 국가에서 100차례 가까운 모의실험이 실시되었지만 결과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의이사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것이 주주의 이익 극대화라는 기업의 본분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기업들이 고민하는 것은, 정작 자신들에게 필요한 건 사람의 두 손뿐인데, 그 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통째로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탐욕이 인간의 본성인 것은 기업의 탓이 아니지만, 기업은 그 탐욕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익을 좇는 욕망과 이기적인 동기는 재앙과 위기의 근원인 동시에 기업에 무한한 활력을 불어넣는 원천이기도 하다. 사실 기업의 공로와 과오는 그 출발점이 같다고 할 수 있다.

 

미국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Bradford Delong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부터 기원후 2000년까지 250만 년의 시간 가운데 99.4퍼센트를 차지하는 기원전 1만 5000년까지 세계 인구의 1인당 GDP는 국제 기어리-카미스Geary-Khamis 달러•기준으로 90달러였고, 그 후 전체 시간의 0.59퍼센트인 기원후 1750년까지의 GDP는 180달러였다. 그런데 1751년부터 2000년까지, 즉 역사의 0.01퍼센트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의 GDP는 6600달러로 무려 37배나 증가했다. 다시 말해 인류가 가지고 있는 부의 97퍼센트가 인류 역사의 불과 0.01퍼센트인 25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그 250년 동안 급속한 부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바로 시장경제였으며, 기업은 시장경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다.

199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널드 코스Ronald Coase는 1937년 ‘거래비용’ 이론을 내놓았는데, 이는 기업이 시장의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시장의 거래비용이 기업 내부의 관리비용보다 높을 경우 기업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아직까지 기업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했다. 시장지향형 경제에서 기업을 대신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대체품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장지향형 경제를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찾지 못했다.

 

미국 <포브스>가 선정한 2009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명 중 5명이 기업인이었다.

 

04. 기업은 과거이자 미래다
역사를 돌아보면 중대한 위기 다음에는 항상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세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 큰 시련이 세계를 또 어떤 방향으로 인도했는가? 이 시점에서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있는 기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기업이든 사회를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기업은 존재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업은 존재했고, 우리가 죽고 나서도 기업은 계속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기업은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다. 우리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훨씬 더 긴 생명을 누릴 이 기업이란 명제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 과거를 돌아볼 수 있다면 먼 미래도 내다볼 수 있다.

 

Interview inside 인터뷰 인사이드

기업이 등장하면서 투자를 자극했으며, 투자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부를 창출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시장에서 경제활동을 할 때 기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또 시장지향형 경제 시스템을 대체할 만한 것도 찾지 못했죠. 사실 기업도 부단히 진화하고 있습니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기업 제도의 본질적인 특징은 ‘유한책임’과 ‘법인’에 있다. 기업을 설립할 때 주주는 자신이 출자한 한도 내에서 기업에 대해 책임을 지고, 법인은 전체 자산만큼 기업의 채무에 대해 책임을 진다. 유한회사는 투자자들을 책임에서 해방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자본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기업은 인간의 이기심과 동업 방식이 절묘하게 결합된 산물인 셈이다. 16세기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등이 이 기업 제도를 통해 세계 강국으로 우뚝 섰다.

 

주식회사는 이익 추구와 리스크 방어, 즉 인간이 경제생활을 통해 얻고자 하는 두 가지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켰다.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의 매출이 증가하고 기업의 몸집이 불어나면 자산이 늘어나는 만큼 리스크도 커지기 마련이다. 이 리스크를 방어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바로 주식 공개를 통한 리스크 분산이다. 리스크를 분산시키면 기업이 순조롭게 확대될 수 있다.

시장으로 인해 생겨난 기업이 다시 시장을 부단히 확대하고 있다. 기업은 시장경제의 세포다. 기업은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하기도 하지만 생산을 통해 수요를 창출하는 경우가 더 많다.

 

IPO(주식공개상장) :: 어떤 기업의 주식이 증권시장에서 공식적으로 거래되기 위해서는 우선 상장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업이 주식을 상장하는 방법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IPO인데 IPO는 `Initial Public Offering`의 약자로 우리나라 말로는 기업공개라고 한다.즉 외부 투자자가 공개적으로 주식을 살 수 있도록 기업이 자사의 주식과 경영 내역을 시장에 공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식을 공개한다는 것은 기업의 주식을 증권시장에 공식적으로 등록하는 것을 말한다. IPO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IPO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대규모 자금 조달이 가능해진다. 또한 IPO를 통해 기업의 정보자료가 공시되므로 기업 홍보 효과가 있다. 그리고 엄격한 상장심사를 통과한 만큼 해당 기업의 신뢰와 평판이 상승할 수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IPO란 말 그대로 기업의 소유권(주식)이 시장에서 매매 대상이 되는 만큼 경영권이 분산될 위험이 있다. 또한 IPO를 수개월 동안 준비하면서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IPO [Initial Public Offering] (매일경제, 매경닷컴)

 

기원전 594년, 아테네에 일상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최고행정기관인 400인회가 설립되었다. 400인회는 아테네의 네 개 부족에서 각 부족별로 100명씩 인원을 선출해 협상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이었다. 이런 민주적인 전통이 주식회사의 탄생에 사회적 기초를 닦았다.

그 후 로마 시대에는 법률 원칙을 확립해 개인의 권리 보호를 강조하고 소유권을 명확히 구분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거래와 시장의 형성에 전제가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로마인들이 기업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중세 후반 르네상스와 계몽운동이 확산되면서 미신과 노예, 특권 사상이 붕괴되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이성이 주도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자유, 평등, 경쟁의 관념과 윤리 도덕을 사람들에게 주입시켰고 이를 통해 상업 문명의 탄생을 위한 걸림돌이 모두 사라졌다.

1215년에 선포된 영국대헌장Magna Carta에는 “자유인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적법한 판결이나 법의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으며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법률적 보호권을 박탈당하지 않고, 또 기타의 방법으로 침해되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런 계약과 법률에 대한 관념이 그 후 수 세기를 거치며 보편화되어 영국인들의 사상적 전통으로 굳어졌다. 이런 전통적인 관념이 없었다면 훗날 주식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을 것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무렵, 네덜란드와 영국 등은 낯설고 광활한 바다로 눈을 돌렸다. 그리하여 왕권 행사와 상인들의 이익이 일시적인 타협점을 찾아 주식회사라는 새로운 형태의 상업조직을 탄생시켰다. 정부 기관의 성격이 짙은 ‘동인도회사’가 바로 그것이다.

 

전 세계 인구가 보유한 부 가운데 97퍼센트가 약 250년 동안 창조되었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의 0.01퍼센트에 불과한 시간 동안 인류가 가지고 있는 부의 97퍼센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막대한 부를 창조해낸 가장 큰 주역이 바로 기업이다.

 

각 업종에서 사용되고 있는 표준의 거의 대부분은 기업에 의해 만들어졌다.

 

강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가 국가의 힘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제2장 | 무한한 시장을 향한 대장정

1874년 1월, 274년간 이어져온 영국 동인도회사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다.

 

01. 특권 기업들의 무역 전쟁

향료 제도Spice islands(당시 서양인들이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 Moluccas’를 부르던 말)

 

몰루카 제도 :: 인도네시아 동쪽 끝에 있는 제도. '향료의 제도'로 알려져 있다. 중심 도시는 암본(Ambon)이다. 구조적으로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와 환태평양 조산대의 접합점에 해당하여 많은 화산 활동이 있었다. 1512년 포르투갈 인이 남쪽의 암본에 처음 도착한 이후로 에스파냐, 영국, 포르투갈 등의 쟁탈지였다. 향신료로 반다와 테르나테에서 육두구(肉頭寇)가 대량으로 생산된다. 현재는 코프라의 산지로 유명하다. 현지에서는 말루쿠(Maluku) 제도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몰루카 제도 [Molucca Is.] (세계지명 유래 사전, 2006. 2. 1., 송호열)

 

경쟁에 새로 뛰어든 영국 상인들은 원양 무역에 필요한 자원과 자본을 모으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공동 출자 방식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유한책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장이 열렸다.

 

기업의 가장 큰 특징은 유한책임의 개념에 있다. 이 개념은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기업을 설립할 때 이사들은 유한책임만 지도록 한 것이다. 기업은 이런 방식으로 자금을 모아 설립되며 주주들은 각기 자신이 투자한 금액만큼만 책임을 진다.

 

이는 개인의 신용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 재산을 잃을 일도 없었다. 가령 기업에 10파운드를 투자했다면 최대 손실액도 10파운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투자의 위험성을 크게 낮춘 ‘주식회사’ 덕분에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도 계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의 신용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계약을 하려면 국가의 신용을 담보로 해야 했다. 따라서 400여 년 전에는 누구나 주식회사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국가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1599년 9월 24일, 80여 명의 런던 상인들이 시청에 모였다. 후추 가격의 급격한 폭등으로 분노한 그들은 회사 설립을 위한 특별 허가와 동방무역의 독점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들에게 특허장letters patent을 주었다. 그러면 왕실이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상인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지만 상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일종의 거래였다. 국가가 기업에게 신용을 팔았던 셈이다.

중상주의가 성행했던 당시에는 부의 총량을 수치화했다.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는 “금과 은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다른 나라에 비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부유한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무역을 장악하는 나라가 더 많은 금과 은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상업 발전을 추진하고 보호하기 위해 국왕은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바로 상업의 독점이었다. 즉, 큰 기업들에게 대외무역의 독점권과 특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1600년 12월 31일, 영국 왕실로부터 향후 15년 동안 동인도에서 독점으로 무역할 수 있는 특허권을 부여받은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이 회사에는 많은 투자자가 몰려 첫 번째 항해를 위한 자금이 무려 7만 2000파운드나 모였다. 이는 오늘날의 가치로 3500만 달러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의회 의장의 제창으로 작은 회사 6개가 모여 국가의 지원을 받는 커다란 주식회사로 재탄생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특정인들만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았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모든 시민들에게 주식을 발행했다. 사실상 세계 최초의 상장회사였던 셈이다. 암스테르담에서만 1143명이 주식을 구입했다. 상인, 선원, 기술자, 심지어 시장의 하녀까지도 이 회사의 주주가 되었다. 이런 융자 방식을 통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경쟁국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훨씬 앞질렀다. 투자 금액이 가장 많았을 때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10배에 달하기도 했다.

 

동인도회사 :: 16세기 초 포르투갈에 의해 인도양을 지나 인도로 항해하는 뱃길 무역이 거의 독점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수입되는 후추로 유럽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이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도로 향하는 해상무역에 직접 나서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바닷길을 개척하여 인도로 진출은 영국이 앞섰지만 해상무역은 네덜란드가 체계적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당시까지 영국은 약탈에 의존하였고 네덜란드는 아시아와 상업적인 거래를 통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동인도회사를 먼저 설립한 곳은 네덜란드이며 동인도의 특산품인 후추·커피·사탕·쪽·면직물 등을 수입하였다. 하지만 여러개 무역회사가 경쟁적으로 무역에 나서자 가격이 폭락하고 회사들 사이에 경쟁은 치열했다. 그로인해 여러개의 회사를 하나로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는데 세계최초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인도로 향하는 해상무역은 중상주의를 내세운 유럽 여러 나라의 사활을 건 상업전(商業戰)의 일환을 이루고 있었다. 1602년 이전까지는 개별적인 무역회사들이 설립되었다가 1602년 3월 네덜란드에서는 여러개의 무역회사를 하나로 통합하여 국가가 관리하는 동인도회사를 출범시켰다. 영국에서도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으며 본격적인 무역에서는 네덜란드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604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무역에 나서지는 못했고 17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해상무역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의 여러 섬을 정복하고 직접지배 또는 그 지역의 지배세력을 통한 간접지배를 행했다. 이를 통해 특산품을 강제로 재배하게 해서 사들여 이 땅의 향신료무역을 독점했다. 그러나 1652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영국-네덜란드전쟁이 계속 되었고, 여기에서 심한 타격을 입은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상업전쟁에서도 지게 되었다. 또 18세기 이후 향신료무역이 부진하게 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경영을 주로 하게 되었으며, 1799년에는 영토를 본국정부에 이양하고 해산했다.
쪽·면직물을 중심으로 한 인도무역에 주력을 쏟아온 영국 동인도회사는 1600년 설립되었으며 18세기 유럽에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항쟁에 규제되면서, 인도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1604년 설립, 1664년 재건)와 격렬하게 다투게 되었다. 결국 플라시전투를 계기로 하여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무역을 거의 독점함과 동시에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사적 독점상업회사(私的獨占商業會社)인 동인도회사에 대해 영국 국내에서 비판이 일어나고, 또 경영난에 빠진 회사가 영국정부의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으므로 1773년 노스규제법에 따라 본국 정부의 감독하에 놓이게 되었다. 1833년에는 무역독점권이 폐지되고, 1858년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뒤에는 인도가 영국 국왕의 직접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어, 동인도회사는 기능이 정지되었다.
결국 동인도회사는 중상주의 시대의 전근대적 독점상업조직으로,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과 산업자본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그 역할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따른 이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본의 본원적축적(本源的蓄積)에 크게 공헌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874년에 국유화되고 2년 후인 1876년에 해산한다. 1978년부터 영국 문장원에서 문장사용 허가를 얻어, 현재의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져 홍차 회사가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 東印度會社]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그렇게 생겨난 증권거래소와 은행을 통해 네덜란드인들은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은 영국해협 건너편으로 급속하게 퍼졌다. 영국 동인도회사 역시 주식을 공개 발행했다. 이로써 자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기업의 세력도 끊임없이 확장됐다.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ies(영국 왕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조직된 식민지 건설회사로 런던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의 합자회사)는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영국 식민지를 설립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인디언들에게 현재 가치로 24달러 상당의 물품을 주고 맨해튼 섬을 사서 ‘뉴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뉴욕이다.

 

이것은 국가와 기업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방법이었다. 정부는 직접 식민지를 관리할 필요 없이 특권 기업에 담당자 몇 사람만 배치하면 기업이 국가를 대신해 식민지를 관리했다.

 

1757년, 32세의 영국 동인도회사의 직원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용병 3000명을 이끌고, 기병 2만 명, 보병 5만 명으로 구성된 인도 군대를 격파했다. 그때부터 기업 정부와 이 오래된 제국 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기업의 해외 확장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과 네덜란드는 교전권, 협상권, 사법권, 행정권 등 여러 가지 국가 권력을 자진해서 기업에게 내주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전성기에 보유했던 병력은 30만 명이 넘었는데, 이는 당시 영국 정규군의 두 배가 넘는 수였다. 기업은 국가 권력을 바탕으로 식민지에서 참혹한 전쟁을 일으켰고, 현지의 자원을 약탈하고 점유했다. 기업은 특권의 결합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02. ‘황금 알을 낳는’ 주식회사

존 로John Law는 스코틀랜드의 한 금세공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유럽의 각 대형 금융기관을 드나들었다. 여행을 통해 쌓은 해박한 지식과 천부적인 수학적 재능 덕분에 그는 곧 은행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은행가들이 보수적인 데 반해 존 로의 사생활은 방탕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젊고 아름다운 미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여자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와 결투를 벌이다가 그 남자를 죽여 수감되었고 사형 판결을 받고 말았다. 그러나 존 로는 죽음을 기다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탈옥해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의 열띤 분위기는 도박을 좋아하는 존 로를 흥분시켰다. 은행가인 그는 주식의 호황과 은행의 지원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존 로의 눈에 비친 네덜란드인들은 너무 보수적이었다. 그는 남다른 직감으로 국가의 신용이 지폐의 발행을 담보한다면 경제활동의 범위를 무한대로 빠르게 확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곧 특권을 가지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존 로는 자신의 생각을 시험해볼 나라를 물색했다.

1715년, 세계를 바꾸겠다는 야망을 품은 존 로는 조심스럽게 프랑스로 건너갔다. 마구잡이로 무력을 휘두르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그해 사망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프랑스의 10년 치 재정수입보다도 많은 거액의 빚뿐이었다. 어린 루이 15세의 섭정왕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Philippe II d’Orléans도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그는 조급한 나머지 도박판에서 알게 된 금융의 귀재 존 로를 떠올렸다.

 

미시시피 회사 :: 18세기 프랑스가 설립한 회사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무역과 지역 개발 등 상업 활동을 벌였다.1717년 8월 존 로가 인수했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25년 동안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경영권을 얻었다. 미시시피 회사는 막강한 재력을 앞세워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은행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존 로는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를 사들여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독점 무역권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는 기업을 경영해 돈을 벌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적은 기업을 통해 정부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당시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있었다. 은행이 발행한 지폐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채로도 주식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 국채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미시시피의 주식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미시시피의 주식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 배당금이 4퍼센트로 프랑스 국채 수익률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최소 30만 명이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사들였고, 그 결과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가 수십 배로 뛰었다.

그 후 존 로는 프랑스 국가은행을 설립해 프랑스의 세수 전체를 통제하고 재정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그는 거대한 도박을 시작했다.

 

존 로는 현재 프랑스 은행의 전신인 방크 제네랄Banque Generale을 장악했다. 그는 지폐 발행량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주식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지폐를 찍어냈다. 중앙은행의 지폐 발행 시스템을 이용해 미시시피 회사의 높은 주가를 계속 유지시켰던 것이다.

 

존 로의 조종으로 프랑스 경제는 1717년부터 3년 연속 고속 성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번영’은 전쟁으로 거액의 빚에 허덕이고 있던 영국 정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은 국채를 기업 주식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남해 회사South Sea Company를 낙점했다. 남해 회사는 1711년에 설립되었으며 왕실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중남미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 기업 설립의 목적이었다. 1720년 초, 영국 정부로부터 인수한 국채 3000만 파운드를 기반으로 남해 회사의 새 주식이 발행되었다. 그 결과 이 회사의 주가는 불과 몇 달 만에 125파운드에서 1000파운드로 치솟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주식회사’를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해 한 해 동안 영국에서 202개의 주식회사가 생겨났다. 이에 따라 증시의 거품은 계속 커져만 갔다.

1720년 4월, 영국 의회는 남해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거품법Bubbl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의회의 법안이나 특허장 없이 기업의 명의로 주식을 발행하거나 지분을 양도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법안은 정부가 기업의 과열 양상을 억제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법안을 발의한 의회 의원들 중에는 남해 회사의 이사와 주주들도 많았다. 사실 이 법안은 ‘남해 회사 거품’이 붕괴하기 전에 통과된 것이며 다른 기업의 투자자들을 남해 회사로 끌어들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거품법 :: 거품법은 영국 기업 제도의 성장을 100년 넘게 후퇴시켰다. 거품법은 국가와 법률이 기업 제도의 형성을 촉진할 수 없고 오히려 파괴적인 힘을 가할 수 있으며, 개인의 자발적인 이익추구 행위만이 기업 제도를 형성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거품법은1825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거품법이 제정된 뒤 많은 주식회사가 사라졌고, 그에 따라 투자자들의 신뢰도 깨졌다. 남해 회사는 의원들이 생각한 것만큼 더 많은 투자자들을 유치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주가는 기존의 10분의 1로 급락했다. 주식 때문에 파산한 수많은 영국인들 중에는 왕립 조폐국장이었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도 있었다. 그는 주식으로 2만 파운드를 날렸는데 이는 그의 10년 치 월급과 맞먹는 것이었다. 이 위대한 과학자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예측할 수가 없구나”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남해 회사와 마찬가지로 존 로의 미시시피 회사도 붕괴하고 있었다. 프랑스 투자자들은 5억 리브르(옛날 프랑스의 화폐 단위로, 5억 리브르는 당시 프랑스 1년 국가예산보다 많다)를 잃었고, 존 로는 허겁지겁 도피 길에 올랐다.

 

주식의 거품이 꺼진 후 영국과 프랑스는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후 처리를 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주식회사의 설립을 엄격히 금지했던 것이다.

 

사실 영국에서 다시 합법적으로 기업이 설립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 중엽이었다.

 

03. 산업혁명 그리고 시장의 승리

1765년, 영국 정부는 적자를 메우기 위한 자구책으로 동인도회사에 벵골 지역 총독의 지위를 부여하고 토지세 징수를 허가했다.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인도 바라나시에서 일하는 영국인의 연봉은 약 1000파운드였지만 실제 수입은 4만 파운드에 달했다. 월급 이외의 수입은 갖가지 뇌물과 약탈로 얻어낸 것이었다.

 

특권 기업은 ‘양서류’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간에 끼어 있었다.

 

적자 상태에 있는 동인도회사를 살리기 위해 1773년 영국 의회는 하는 수 없이 ‘차 조례Tea Act’를 통과시켜 북미 식민지의 차 독점 무역권을 동인도회사에 부여했다. 하지만 이런 ‘특허정책’은 기업을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불러왔다. 식민지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지키기 위해 무력으로 식민국에 대항했던 것이다.

 

동인도회사가 차 무역 독점권을 얻어낸 1773년, 영국 스태퍼드셔 주의 웨지우드 도자기 공장은 모험이라고 할 수도 있는 주문을 받았다.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흰색 식기 952점을 주문한 것이다. 1년 후 이 공장은 1244개의 그림이 그려진 완벽한 식기를 만들어 납품했고, 이 일로 이 공장의 주인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는 큰 명성을 얻었다.

도공 출신인 웨지우드는 15년 전인 스물아홉 살 때 공장을 처음 세웠다. 그는 생산과정을 혁신해 원래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하던 도자기를 10개의 과정으로 분업해서 제조하도록 했다. 그 무렵, 수력방적기를 발명한 아크라이트Arkwright는 세계 최초로 현대적 의미의 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영국에서 20세 이상 남성의 약 40퍼센트가 상업과 제조업에 종사했는데 그들이 바로 훗날 세계를 바꿔놓은 산업혁명을 일으킨 주역들이다.

 

1776년 3월 8일, 영국 버밍엄에서 두 동업자의 이름을 딴 볼턴앤드와트Boulton&Watt라는 회사가 고객들에게 새로 개발한 발명품 ‘증기기관’을 선보였다. 원시적인 형태이기는 했지만 사람 100명분의 작업을 할 수 있는 기계였다.

 

당시 영국 정부가 기계 설비의 해외 수출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볼턴앤드와트가 증기기관을 발표한 지 나흘째 되던 날, 글래스고대학의 교수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국가의 힘으로 화폐와 부를 벌어들이는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평등한 계약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자유무역을 제창했다.

 

국부론 :: 애덤 스미스(1723~1790)는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경제학 학설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철학과 구분된 학문으로 정립했다. 『국부론』은 세계 최초로 유럽의 산업 및 상업의 발전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후대 경제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이지 않는 손’의 영향으로 수많은 영국 기업들이 제1차 산업혁명을 추진했다. 국가가 강제로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방직, 기계, 제철 등 각 업종에서 국가의 특허를 받아야 설립할 수 있는 주식회사는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산업혁명 시기에 활약한 기업들은 거의 모두 가족기업이라고 불리는 영세한 규모의 기업들이었다. 동업자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작은 기업들은 저마다 이익을 내기 위해 바쁘게 활동했고 새로운 제품을 발명해냈다. 그리고 이들의 이익추구 활동은 사회 전체의 경제력을 성장시켰다. 이런 경제적 성장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업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중상주의 시대와 비교하면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대량 생산성을 보유한 기업이 기존의 상업 무역회사들을 대신해 경제 무대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이다. 19세기 초, 이 새로운 기업들은 유럽과 북미에서 생산되는 원단의 63퍼센트, 석탄의 54퍼센트, 그리고 강철의 58퍼센트를 생산해냈다.

 

1815년, 영국의 웰링턴 공작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했다. 유럽을 누비던 나폴레옹 황제는 자신이 ‘작은 가게 주인’이라고 조롱했던 영국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국력은 단순히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력의 우위와 선진화된 경제 제도가 국력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결과에 대해 어떤 이는 “이 전쟁의 승리는 단순히 영국군의 승리가 아니라 시장경제의 승리이기도 하다”라고 평가했다.

워털루 전투가 발발하기 2년 전인 1813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가지고 있던 인도 독점 무역권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아직 국유기업 경영에 힘쓰고 있을 무렵, 영국 정부는 점차 그 역할을 바꾸어서 기업을 시장에 돌려주었던 것이다.

1830년 9월 23일, 간밤에 내린 비가 새벽까지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에서 맨체스터까지 48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도 변에 2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세계 최초의 공공철도 개통을 직접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기차의 등장과 함께 과거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천당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주식회사’도 새로운 부활의 기회를 맞이했다. 철도 건설을 비롯해 운하 건설 등 대규모 공사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문제는 어디에서 자금을 조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주식회사는 투자에 대한 불안감이 적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투자를 촉진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설령 투자에 실패하더라도 손실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제1차 산업혁명 :: 영국은 제1차 산업혁명의 발원지다. 제1차 산업혁명은 1760년대에 시작되어 1840년대에 거의 완성되었다.

 

산업혁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현대적 기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현대적 기업이 존재하고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산업혁명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1862년, 영국 의회에서 지난 20년간의 관련 법안을 모은 ‘회사법’이 통과되었다. 영국 무역국은 “1825년 이전에 기업의 설립을 법률로 금지한 후 지금까지 기업 설립은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것이 일종의 권리로 바뀌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영국의 '1862년 회사법' :: 세계 최초로 제정된 회사법 가운데 하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법은 현대 기업의 출생증명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이 제정되기 전, 수 세기 동안 기업은 국가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기업 설립은 소수 특정인들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1862년의 회사법은 ‘기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한 시장 조직일 뿐이며 기업을 설립하는 것은 모든 국민이 누리는 권리’라고 명시했다. 이 법률에는 현대 기업의 바탕에 깔린 다음의 세 가지 관념이 모두 포함돼 있다. 첫째, ‘법인’은 인간과 똑같이 경제활동을 할 능력이 있다. 둘째, 모든 투자자에게 거래가 가능한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셋째, 투자자는 유한책임만 지므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투자 원금의 한도 내에서만 손실을 입는다.

 

그 후 기업 설립에는 더 이상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7명이 조직의 규정에 서명하고 영업장 소재지에서 등기를 마치면 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 법안은 훗날 세계 각국에서 생겨난 ‘회사법’의 원형이 되었다.

 

기업 설립은 마침내 ‘특허제’에서 자유로운 ‘등록제’로 바뀌고, 유한책임도 ‘특권’에서 평등한 ‘권리’로 전환됐다. 이에 따라 시장도 독점에서 경쟁으로, 폐쇄적 형태에서 개방적 형태로 바뀌었다.

 

특권 기업의 부패와 윤리적 타락이 ‘유한책임’과 ‘주식제도’라는 형태가 아니라 권력과 돈의 유착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Interview inside 인터뷰 인사이드

문화도 한 국가의 역사

 

중국의 거대한 상단이 수 세기 동안 인도양을 누비며 활발하게 무역을 펼치기는 했지만, 중국은 내수 시장에서 자급자족하는 것만으로도 국가가 충분히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영토가 워낙 넓으니까요.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외에 중요한 시장이 있다고 해도 내수 시장만으로도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었죠. 그에 반해 영토가 작은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는 경제 개념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중상주의 아래에서는 국력 강화를 위해 정부가 국가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17세기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바로 정부로부터 독점권을 부여받은 특권 기업이었다. 이는 국가와 기업의 결합이자 권력과 돈의 유착이었다. 기업은 주주에게 이익을 창출해줘야 할 임무 외에도 국가를 위한 식민지 개척의 사명까지 함께 지고 있었다.

 

기업과 정부의 특수한 관계 덕분에 프랑스의 미시시피 회사, 영국의 남해 회사 등은 사람들이 정부 발행 국채를 주식으로 바꿀 수 있도록 허용했고, 이는 광적인 주식 열풍을 불러와 증시에 점점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 얼마 후 주식 투자자들이 이성을 되찾고 기업의 수익 구조와 능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주식회사는 줄줄이 무너졌다.

 

1688년 일어난 영국의 명예혁명은 기업 발전의 역사에 이정표 같은 사건이다. 명예혁명을 기점으로 정부의 재정권과 경제권이 의회로 옮겨가고 경제 분야에서 정부의 권력이 서서히 퇴장했다. 이는 마침내 기업이 시장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신흥 상공업 계층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정치와 경제가 결합한 중상주의도 점차 쇠퇴했다. 1862년 영국에서 ‘회사법’이 통과되고 기업의 설립이 ‘특허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는 혁명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1874년 1월, 274년간 위세를 떨치던 영국 동인도회사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기업의 특권 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그때부터 기업 설립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로 자리 잡았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20세 이상 남성의 약 40퍼센트가 상업과 제조업에 종사했다. 일반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기술혁명은 생산 과정의 표준화를 촉진했고, ‘공장화’된 새로운 생산방식이 출현해 기술과 생산, 시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으며 노동의 효율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것이 바로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중대한 역사적 전환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사실상 발명가와 기업가들의 공동 작품이다. 1769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증기기관을 발명했지만 훗날 증기기관을 현실적인 생산력으로 전환시킨 것은 제임스 와트의 아들 제임스 와트 주니어였다. 와트 주니어는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기술 전문가이자 기업가였다. 그는 상인 매튜 볼턴Matthew Boulton과 공동으로 주조공장을 설립했고, 대량생산을 통해 증기기관을 시장에 판매했다.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19세기 유럽에서 개방경지나 공유지, 황무지에 울타리나 돌담을 둘러쳐놓고 사유지로 삼은 운동)

 

인클로저 운동 :: 중세 말부터 19세기까지 유럽, 특히 영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제1차 인클로저운동은 15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까지 주로 지주들이 곡물생산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양모생산을 위하여 경지를 목장으로 전환시킨 운동으로, 농민의 실업과 이농(離農), 농가의 황폐, 빈곤의 증대 등을 야기시켰다. 제2차 인클로저운동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수요의 격증에 대해 합법적인 의회 입법을 통해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농민의 임금 노동자화를 촉진시켰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지주ㆍ농업자본가ㆍ농업노동자의 삼분제를 기초로 하여 자본제적 대농 경영이 성립되었고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클로저운동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국부론』은 현대 경제학의 탄생을 의미했으며, 이와 함께 유럽에서 약 300년 동안 유행해온 중상주의도 점차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제3장 | 부를 이룬 영웅들의 전성시대

1776년 미국이 독립되기 몇 달 전, 2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의 책이 공개되자 미국 대륙이 술렁였다. 제목은 『상식』, 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쓴 책이었다. 그는 폭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미국 독립이 가져올 이익을 역설했고, 『상식』은 독립전쟁 기간 동안 『성경』 다음으로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보통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능력만 있다면 특별한 사람이 될 권리가 있다. 기회를 추구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국가의 비호 아래 보장된 삶을 사는 국민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타인에게 무시당하는 일이고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는 의미 있는 모험을 할 것이다. 내게는 꿈이 있고 나는 창조를 원한다. 나는 실패도 성공도 모두 맛보고 싶다. 나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며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용감하게 이 세상과 맞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신의 도움으로 나는 이미 성공했다고.”

 

01. 신대륙의 급부상과 기업가의 출현

1862년, 68세의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는 42년 동안 몸담아온 해운업과 작별하고 철도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68세에 업종을 바꾸는 것은 큰 모험이지만 밴더빌트에게는 무모한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200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미국 최대 해운업자였고 미국 6대 부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810년, 당시 열여섯이던 밴더빌트는 어머니로부터 빌린 100달러로 낡은 배를 사들여 뉴욕 만灣을 오가는 운수업을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빌린 돈이었지만 그는 원금을 철저히 상환했을 뿐 아니라 10퍼센트의 이자까지 지급했다. 채무 계약에 있어서 자신은 아들이 아닌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고 평등하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수로 운송이 황금기를 누리던 1824년 가을, 벤더빌트의 회사를 비롯한 여러 해운회사들에게 영업정지 조치가 내려졌다. 법원에서 뉴욕의 증기선 독점 운영권이 리빙스턴 가족에게 있다고 판결한 것이었다.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은 뉴욕 최초의 대법관으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취임식을 주재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워싱턴으로 가서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를 자신의 변호사로 고용했다. 웹스터는 미국 초기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변호사였다. 밴더빌트는 그를 통해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미국 최초로 대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된 상업 관련 소송이었다.

 

밴더빌트는 무려 5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결국 대법원은 뉴욕 주가 뉴욕과 뉴저지 사이의 운송업을 독점하도록 규정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인해 각 주 간에 상업 거래를 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벤저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미국에서 처음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Poor Richard’s Almanac』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기존의 규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았다. 이제 사회는 계급이 아닌 계약으로 거래하는 ‘계약사회’였다.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 1733년에서부터 1758년까지 펜실베이니아에서 해마다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식민지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연보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며 달력, 일기 예보, 충고, 기타 유용한 지식들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 실린 금언, 격언, 잠언 중에는 프랭클린이 직접 창작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이 책을 통해 프랭클린 특유의 실용주의적이고 너그럽고 온화한 명언들이 널리 알려졌다.

 

“시간은 금이요, 신용도 금이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 북미 지역에서 기업을 설립하려면 식민국과 총독, 의회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독립 이후 중앙 정부는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을까? 1782년 제헌의회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대표들이 논쟁을 벌였다.

마침내 미국의 헌법은 중앙 정부가 각 주 사이의 무역을 관리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각 주 정부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권력을 통제할 수 있었다.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이 결합된 형태를 통해 미국 기업들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

 

지방분권을 실시해 각 주가 서로 경쟁하고 있고, 이는 상업의 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각 주들은 잇따라 회사법을 개정하고 앞다투어 기업에 대한 통제를 완화해 기업의 진출 문턱을 낮췄다.

 

영국에서는 수백 년간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얻어낸 제도가 미국에 도입된 후에는 전통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광활한 시장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1830년에 약 8000개의 기업이 등록했고, 1860년에는 약 2만 5000개에서 2만 6000개의 기업이 등록했다. 미국은 기업화된 최초의 국가였다.

 

링컨 대통령은 국가 분열의 위기 앞에서 노예제의 존폐는 중요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의 통일과 그에 수반되는 시장의 통일이었다.

1862년 7월 1일, 링컨 대통령은 ‘태평양 철도법Pacific Railroad Act’에 서명했고, 이에 따라 정부의 위탁을 받은 두 회사가 최초의 북미횡단철도를 부설했다. 이 법안은 그 유명한 ‘노예해방선언’보다 두 달하고도 21일 먼저 서명되었다.

 

태평양 철도 :: 북미 대륙을 관통하는 총 거리 3000킬로미터 이상의 철도로 미국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철도가 현대 미국을 창조했다고도 할 수 있다.

 

통일된 거대한 시장은 분열된 국가를 다시금 하나로 통합시켜주었다.

 

어디든 철도가 들어서면 곧 발전하기 시작했다. 운수업, 제조업, 백화점 등 각 업종에서 기업의 규모가 점점 커져 국가와 개인의 생활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1864년, 스물넷의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저축한 돈 4000달러를 밑천으로 정유공장을 차렸다.

 

스탠더드오일 :: 1863년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모리스 B. 클라크(Maurice B. Clark), 새뮤얼 앤드루스(Samuel Andrews)와 함께 클리블랜드에서 정유사업을 시작한 것이 이 회사의 기원이다. 1865년 클라크는 지분을 록펠러에게 넘기고 회사를 떠났으며, 2년 뒤 헨리 M. 플래글러(Henry M. Flagler)가 들어왔다.
1870년 이들 3인은 클리블랜드 최대의 정유공장을 운영하였으며 이들 및 관계 시설을 바탕으로 하여 같은 해 법인으로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하였다. 1880년에는 다른 회사를 합병하고 경쟁사들이 물리치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 90∼95%의 정유를 처리하였다.
1882년 석유의 생산·정유·판매에 관여하던 스탠더드오일 및 계열사들은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로 통합되었다. 이 트러스트는 록펠러를 비롯한 9명의 트러스트가 서명한 약정서에 의해 탄생되었다.
1899년 뉴저지의 스탠더드오일이 지주회사로 법인화되어 이전에 트러스트에집약되어 있던 모든 자산 및 주식이 뉴저지의 회사로 이관되었다. 이 통합으로석유제품을 대규모로 생산하고 배급하게 되었지만, 경제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문제점도 발생하였다. 1906년 반트러스트법인 셔먼법에 따라 고소를 당하였고, 반트러스트법 위반혐의로 최고재판소의 해산명령을 받아 1911년 33개 가량의 주요 회사가 해체되었다. 이후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에 속하였던 몇몇 회사들은 각기 모빌오일(Mobil Oil Corporation), 콘티넨털오일(Continental Oil Co.), 아모코(Amoco Corporation), 엑슨모빌(Exxon mobil Corporation) 등의 회사를 차려 사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회사들은 20세기 후반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탠더드오일 [Standard Oil Co.]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트러스트 :: 동일산업 부문에서의 자본의 결합을 축(軸)으로 한 독점적 기업결합.
기업합동·기업합병이라고도 한다. 카르텔보다 강력한 기업집중의 형태로서 시장독점을 위하여 각 기업체가 개개의 독립성을 상실하고 합동하는 것을 말한다. 트러스트라는 용어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성행한 기업합동의 하나의 특수형태에서 유래한다. 즉, 당시의 기업활동에서는 기존의 여러 기업의 주주가 그들이 소유한 주식을 특정의 수탁자(受託者:trustee)에 위탁함으로써 경영을 수탁자에게 일임하는 형식으로 실현되었다. 이 같은 방법에 의존할 때, 수탁자는 자기자금을 거의 준비하는 일 없이, 다수 기업의 관리를 한손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고전적 트러스트 외에 기업합동의 형태로는, 기존의 여러 기업의 주식 중에서 지배가능한 주수(株數)를 매수함으로써 지배권을 집중화하는 지주회사 형식, 기존의 여러 기업이 일단 해산하고 자산을 새로 설립된 기업에 계승시키는 통합형식, 또는 어떤 기업이 타기업을 흡수·병합하는 형식 등이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트러스트로 불리지 않으나, 통상은 이러한 형식까지를 포함한 기업합동을 트러스트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러스트 [trust]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누가 네게 일자리를 주는 것일까? 네가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누구일까? 누가 네게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일까?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란다.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갖느냐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단다.”

 

훌륭한 기업가인 록펠러는 신흥 산업에 대한 수요가 나타나고 있음을 간파했다.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산업들이었으므로 정부가 그런 기업을 설립할 리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업가의 몫이었다.

 

록펠러는 “나는 타고난 운명에 따라 살지 않는다. 내 계획에 따라 운명이 뻗어나간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1870년, 서른한 살의 록펠러는 정유공장 두 곳과 석유수출상사를 합병해 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을 설립했다. 그때부터 그의 사무실 벽에는 모든 정유업체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가 붙었다. 그는 1872년 2월 17일부터 3월 28일까지, 불과 39일 만에 22개의 경쟁업체를 인수했다. 48시간 동안 6개의 정유공장을 사들인 적도 있었다.

 

카네기와 록펠러, J.P. 모건이 당시 미국 경제를 이끄는 삼두마차였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가난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타락이라고 했다.

 

카네기는 생산과정을 다시 정비했다. 철광석의 채굴에서부터 최종 제품의 출하까지를 단일한 생산라인 체제로 만들었다. 카네기의 공장은 세계에서 최초로 일관된 생산라인 방식을 확립한 기업이었다. 20년도 채 되지 않아 카네기는 철강 가격을 1톤당 100달러에서 12달러로 낮출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록펠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록펠러 역시 철광석 광산을 대량으로 매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카네기는 자신의 적수인 록펠러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 이렇게 제안했다. “철강업에 진출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보유한 모든 철광석을 사겠소.”

카네기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록펠러는 자신이 가진 철도와 선박으로 철광석을 운송한다는 것을 교환 조건으로 내걸었다. “나보다 더 강한 상대와는 싸움이 아닌 협상을 해야 한다.” 이것은 카네기가 평생 동안 지킨 신조였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도 다음의 글을 남겨달라고 유언했다.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들을 잘 활용한 사람이 여기에 잠들다.”

 

02. 독일 기업의 추격

평로 제강법(OHF, open-hearth furnace) :: 제강법의 일종. 평로에 의해 스크랩과 선철로 강을 용제하는 방법으로 노내의 장입물은 표면상의 연소가스의 흐름에 의해 직접 가열됨과 동시에, 천장벽돌로부터의 반사열에 의해서도 가열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평로제강법 [open-hearth steel making process] (철강용어사전)

 

독일이 통일되기 전 프로이센 정부는 지멘스 같은 이들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일은 교육 지원이었다. 산업체 학교와 직업 학교의 발전을 적극 지원해 관리자와 기술자를 양성하고 이로써 기업의 노동력 수준을 높였다.

 

1872년 뮌헨대학의 화학연구원은 영국 모든 대학의 화학연구원을 합한 수보다 많았다. 또 베를린대학 안에도 공장을 설립하고 경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2년제 과정이 개설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과학과 연구개발, 생산이 처음으로 결합된 것이다.

 

1847년 10월 12일, 지멘스는 요한 게오르그 할스케Johann G. Halske와 함께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20년 후, 그는 자신이 발명한 기술을 이용해 기계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전환시켰다. 기업의 노력 덕분에 세상에 전기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독일에서 경제 발전에 기여한 기업가들은 높은 지위를 누렸다. 1889년 독일 황제는 지멘스에게 직접 귀족 작위를 하사했다. 여러 나라에서 귀족이 상인으로 변하고 있을 무렵, 독일에서는 상인을 귀족으로 떠받들고 있었던 것이다.

 

1913년 미국이 만든 상품이 전 세계 산업 생산의 36퍼센트를 차지했고 독일은 16퍼센트를 차지했지만, 영국은 14퍼센트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03. 무너진 자유경쟁의 원칙

“미국은 사업을 하는 국가다. 그러므로 사업에 협조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공장을 짓는 것은 교회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예배를 보는 것과 같다”

 

19세기 말, 미국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경제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도약했다. 당시 미국은 약 50개 대기업이 제품과 서비스의 6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상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하고 있었다.

 

1902년 사회비리를 파헤치는 <맥클루어스McClure’s>라는 잡지에 ‘스탠더드오일의 역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록펠러가 어떻게 경쟁사를 하나씩 패배시키고 비정하게 그들의 자산을 집어삼켰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소개되었다. 피해자 중에는 록펠러의 친동생인 프랭클린도 끼어 있었다. 매각을 거부하거나 자신들의 방법으로 경영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기업이 있으면 록펠러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상대를 제거했다.

 

친동생 프랭클린은 몇 차례나 공개적으로 자기 형을 비난했고, 어려서 죽은 두 자식의 유골을 가족묘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까지 했다. 훗날 자신의 형인 록펠러와 절대로 같은 묘지에 묻히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친형제가 철천지원수가 된 것이다. 록펠러는 친동생인 프랭클린에게 다른 경쟁자들과 똑같이 대했다. 혈연이나 우애 때문에 특별히 관용을 베푸는 일은 없었다.

 

당시 미국 경제에는 규칙이 없었고 정부의 힘이 약했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기업계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정유 사업에 진출한 사람들은 록펠러와 경쟁하거나 퇴출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1898년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의 생산량은 미국 전체 석유 생산량의 84퍼센트에 달했고, 석유 운송량의 약 90퍼센트를 차지했다. 록펠러는 동업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값 싸고 좋은 석유를 영원히 공급하기 위해 계속 노력합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10년 동안 석유 산업을 장악하면서 그는 석유 가격을 80퍼센트나 낮추었지만, 독점이 시장의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점은 간과했다.

 

1911년 5월 11일,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오일이 ‘반독점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하고 기업을 34개의 회사로 분리하라고 명령했다.

 

반독점법 :: 기업의 불공정한 독점을 막기 위한 미국의 법률로, 독점금지법이라고도 한다. 1890년 제정된 셔먼법(Sherman Act), 1914년의 클레이턴법(Clayton Act), 연방거래위원회법 등 3개 법령과 판례로 구성돼 있다. 소비자 이익 보호와 공정한 상거래 질서 확립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공정거래법과 비슷하다.
19세기 미국은 당시 석유, 철도 등의 주요 산업에서 소수의 대자본가가 시장 내 독점적 지위를 차지할 목적으로 상호 결합했던 기업연합에 의해 독과점이 극단화되었다. 석유왕 존 록펠러가 1870년 설립한 석유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은 철도업체와 결합해 석유수송망을 장악한 후 차별적 운송요금을 적용하는 방법으로 경쟁 업체들을 무너뜨렸다. 19세기 말에는 미국 석유시장의 90%를 장악했으며 석유가격 횡포로 소비자와 중소업체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1890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인 존 셔먼(John Sherman)은 스탠더드 오일을 겨냥해 "정치체제로서 군주를 원하지 않듯 경제체제로서의 독점을 원치 않는다."고 주창, 셔먼 반트러스트법(Sherman Antitrust Act)을 제정하였다. 셔먼법은 동종업종의 '카르텔(기업연합)'과 '트러스트(기업합병)'가 형사 처벌 대상이었다. 특히 소수 동종업종의 모든 기업에 대한 의결권 독점(voting trust)이 문제시되었는데, '반독점(antitrust)'이란 용어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903년에는 법무부 내의 독점금지국(반독점국)이 설립되었다. 결국 1911년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을 30개로 분할할 것을 명령했고, 이후 사회적으로 독점규제 분위기가 고조돼 그해 미국 담배시장의 95%를 독점했던 '아메리칸 토바고'도 16개 회사로 분리됐다.
'경쟁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로 불리는 셔먼법은 국내외 거래를 제한할 수 있는 생산주체 간 어떤 형태의 연합도 불법이며, 미국에서 이뤄지는 거래 또는 통상에 대한 어떤 독점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등의 2가지 핵심조항을 담고 있다. 독점을 기도하거나 이를 위한 공모에서부터 가격담합, 생산량 제한 등 불공정행위를 포괄적으로 금지하였고, 위반 시 법원이 기업 해산명령 및 불법활동 금지명령을 내리거나 벌금ㆍ구금에 처할 수 있으며, 불공정행위의 손해 당사자들이 손해액의 3배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시행 단계에서 문제점을 노출하며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이를 보완해 민사적 규제수단까지 인정한 클레이턴 반트러스트법(Clayton Antitrust Act)이 1914년 제정되었으며, 이는 1936년 로빈슨 패트먼법(Robinson-Patman Act)으로 확대ㆍ수정됐다. 이 법은 가격 등 각종 수단으로 소비자를 차별하는 것, 경쟁을 현저히 감소시킬 우려가 있는 기업의 합병 또는 회사 상호 간의 주식취득을 금하고 있다.
1914년에는 연방거래위원회법 또한 제정되었는데, 연방거래위원회(FTC : Federal Trade Commission)는 기존 미 법무부(DOJ : Department of Justice)의 업무를 보완해 반독점행위의 규제만을 전담하는 독립위원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독점금지법의 시행기관으로는 법무부 산하의 반독점국과 독립기관인 FTC가 있으며, 상호 보완적인 활동을 통해 자체 제재와 법정기소를 병행한다. 반독점국은 셔먼법ㆍ클레이턴법을 소관하며, 형사ㆍ민사문제를 모두 다루고 형 집행에 치중한다. 반면에 FTC는 클레이턴법ㆍ연방거래위원법을 소관하며, 민사문제를 중심으로 예방 활동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편 지난 1977년에는 AT&T가 반독점 제소를 당해 7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시내전화 부문을 22개 지역전화회사(베이비 벨)로 분리시키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국의 반독점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저렴한 상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경쟁에 참가할 기회를 주는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등한 기회는 록펠러의 화려한 성공이 시작된 출발점이기도 했다.

 

반독점법 :: 1890년 7월 2일 미국 연방의회가 ‘불법적인 제한 및 독점으로부터 거래와 상업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이를 셔먼 법Sherman Antitrust Ac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법을 통해 제한적인 거래와 독점거래 행위가 금지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성공을 방해할 권리는 없었다. 또한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자유를 통해 발전한 기업이 다른 기업의 자유를 억압할 권리도 없었다. 누구든 자유를 억압한 자는 결국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상처를 입힌다.

 

스탠더드오일의 해체 :: 1890년,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는 결성된 지 8년 만에 원유 채굴에서부터 정유, 운송, 수출, 부산물 가공에 이르는 미국의 석유 산업 전체를 거의 장악했다. 세계적으로도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러시아가 세계 석유 시장의25~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나머지 70퍼센트가 넘는 시장을 스탠더드오일이 점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미국에서 ‘반독점법’이 통과되었고, 1900년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탠더드오일을 해체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에 착수했다. 마침내 1911년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오일이 ‘반독점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하고 기업을 34개의 회사로 분리할 것을 명령했다.

 

카네기는 한 기금모금회에서 “내가 죽은 뒤, 평생 동안 했던 일을 가지고 신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면 나는 무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인해 이 세상이 내가 처음 알았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기업가가 없는 국가는 부유할 수 없고, 위대한 기업가를 배출해내지 못한 시대는 창조력을 가질 수 없다.

 

1937년 5월 23일, 98세의 록펠러는 자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품 중에는 초등학교 동창들의 단체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록펠러가 몹시 아꼈던 그 사진 속에 록펠러 자신은 없었다.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겨져 있다. 어린 시절 록펠러는 사진 찍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단체사진을 찍던 날 그는 몹시 흥분해 사진 찍을 때 어떤 미소를 지을지 연습까지 했다. 그런데 사진을 찍기 직전 그의 선생님과 사진사는 그의 옷차림이 너무 남루하다는 이유로 그를 단체사진에서 제외시켰다. 아마도 당시 사건이 록펠러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막대한 재산이 그의 상처를 달래주었을지, 아니면 그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어주었을지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Interview inside 인터뷰 인사이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에는 연방 정부나 주 정부가 기업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래서 기업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업의 힘이 너무 커져서 정부와 맞먹는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는 독점 정책을 개혁해 초대형 기업을 분리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J. P. 모건J. P. Morgan이 각 분야의 기업을 합병해 거대 기업을 설립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죠. 마침내 1901년 자본금이 14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 기업 US스틸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이 탄생했습니다. 미국 최초로 자본금이 10억 달러가 넘는 기업이었죠. 그해 미국 정부의 한 해 예산이 약 5억 달러였으니까 한 기업의 자본금이 정부 예산의 약 3배에 달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더욱 긴장시켰습니다. 당시 J. P. 모건은 카르텔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트러스트의 또 다른 명칭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러자 루스벨트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결과는 루스벨트의 승리였습니다. 카르텔 형성은 실현되지 못했고, 그때부터 미국 연방 정부는 기업의 규모를 과도하게 확대하거나 특정 업종에서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소송으로 인해 발생하는 법률 비용이 결국에는 소비자들에게 전가되니까요.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시장이 확대되면 기업도 성장한다. 1865년 미국이 남북통일을 이루자 거대한 시장이 탄생했다. 밴더빌트의 철도망이 미국 시장을 통일시켰고 사회분업이 확산되었으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봇물 터지듯 증가했다. 카네기의 제철소는 20년 동안 철강 가격을 1톤당 100달러에서 12달러로 낮추었고, 록펠러의 정유공장은 10년 동안 유가를 80퍼센트나 떨어뜨렸다. 대기업은 규모의 장점을 이용해 원가를 낮추었고 거대한 시장의 자유경쟁 역시 가격을 떨어뜨렸다. 각 업종마다 대기업들에 의해 새로운 표준이 생겨났다.

 

연방 정부의 권위가 강하지 않고 각 주들이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기업에 대한 통제를 완화했다.

 

1860년 무렵 미국은 계급사회를 벗어나 거의 계약사회로 전환되었으며 기업화된 국가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중국에서도 개혁개방이 실시된 후 30년 동안 지역 간 경쟁이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중앙집권 체제 속의 지방분권이자, 통제 밖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개혁개방 시기의 모습이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밴더빌트는 모든 철도를 다 건설하지 않고 단거리 철도를 사들여 서로 연결하는 것만으로 전국적인 철도망을 탄생시켰다. 각기 다른 주인이 운영하고 있는 철도를 서로 연결하고 열차시간표와 운임을 통일했다는 점에서 밴더빌트의 놀라운 창의력이 드러난다. 철도망을 갖추자 당시에 수익률이 가장 낮았던 철도 업종에서 천문학적인 수익이 창출되었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이 카네기와 록펠러를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기업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그들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도서관이나 대학, 재단 때문이다.

 

 

 

제4장 | 성장 이면의 모순과 갈등

기업의 역사에서 1886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해 미국 대법원은 기업이 헌법의 보호를 받는 자연인이며 ‘권리장전’에 의해 전면적 보호를 받는다고 선포했다.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19세기 100년 동안 세계에 나타난 변화는 과거 3000년 동안의 변화를 훨씬 능가했다.

 

01. ‘영혼 없는 리바이어던’이 된 기업

1885년 철골 구조로 된 빌딩이 세계 최초로 건설된 후 도시화의 중요한 상징인 마천루가 인류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894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시카고에서는 경축행사가 열리지 않았다. 철도 노동자 12만 5000명이 파업을 벌이고 있었고, 기관총을 소지한 연방 군대가 파견됐다. 군대와 노동자의 충돌로 노동자 13명이 사망했다. 노스웨스턴 철도회사의 변호사 클라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는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곳은 파업 현장이 아니라 선혈이 낭자한 학살 현장이었다.

 

평범한 노동자에서 시작해 백만장자가 된 풀먼은 아메리칸드림의 전형적인 주인공이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열악한 환경의 침대열차를 탄 뒤 밤새도록 멋지고 편안한 신형 침대열차를 구상했다. 또 철도회사를 설득해 자신의 특허를 사용하도록 만들어 미국의 철도 수송 시스템을 점차 바꿔놓았다.

19세기 후반에 풀먼식 기차는 미국 산업 발전의 성과를 대표하는 단어였다. 비행기가 등장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 거리를 기차로 이동했는데, 침대칸에 타는 것은 매우 호화로운 여행이었다. 그 객차를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침대칸이란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었다.

 

경제 불황이 진행되고 있던 1893년, 풀먼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임금을 빈곤선 이하로 삭감했다. 하지만 풀먼 단지에 위치한 사택의 집세는 내리지 않았다. 노조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풀먼은 단칼에 거절했다. 양측의 갈등이 확대되어 결국 독립기념일에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리바이어던 :: 성서(聖書) 속에 나오는 아훼(Yahweh)에 의해 물리쳐진 바다의 괴물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행정학적으로는 거대한 관료제를 지닌 전체주의 국가를 지칭한다. 홉스(Thomas Hobbes)의 1660년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바이어던 [Leviathan] (행정학사전, 2009. 1. 15., 이종수)

 

기업의 법률적 권리 :: 미국 헌법 제14조 개정안은 원래 자유를 얻은 흑인 노예들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그 후 판결을 통해 이 법률을 ‘명실상부하게 상업에 충성한 대헌장’으로 둔갑시켜버렸다. 1886년 기업의 주권을 지지하던 이들이 마침내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서던퍼시픽레일로드Southern Pacific Railroad의 피소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개인기업은 미국 헌법의 보호를 받는 자연인이다”라고 선포했다. 그 후 법원은 이를 “기업이 ‘권리장전’에 의해 완전히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 무렵, 미국과 영국, 독일의 많은 대기업들도 풀먼 단지와 유사한 기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기업주들은 이것이 산업화로 인해 나타난 도시의 각종 병폐를 치료하고 사기 진작과 윤리 보호를 위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업주들은 왜 노동자들의 가난한 현실은 전혀 동정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풀먼은 “노동자들에게 돈을 얼마나 주는가는 순전히 기업이 결정할 일이다. 노동자들에게는 관여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풀먼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당시 기업과 개인의 권리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그러했다.

‘노동력도 상품이므로 시장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작업환경이 열악하고 임금이 너무 적다면 노동자가 일을 안 하면 그만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중후반 많은 기업주들의 논리였다.

 

02. 공평과 효율의 게임

영국 노동자계습의 상태 ::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엥겔스가 1844년 9월부터1845년 3월까지 저술한 책이다. 엥겔스는 이 책에서 약 60년 동안의 영국 산업발전사를 되돌아보고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간의 계급투쟁이 형성되고 발전한 과정을 연구했다. 그는 또 영국 노동자계급의 빈곤과 저항 상황을 묘사하고 폭력혁명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탐욕스런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윤이 10퍼센트라면 자본은 여러 곳에서 쓰이게 되고, 이윤이 20퍼센트라면 자본은 적극적이 된다. 50퍼센트의 이윤이 보장되면 자본은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100퍼센트의 이윤이 있으면 자본은 인간의 모든 법률을 무시하며, 300퍼센트의 이윤이 있으면 어떠한 범죄도 서슴지 않는다.”

 

1854년,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어려운 시절Hard Times』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주인공 그래드그라인드는 항상 주머니에 줄자와 저울접시, 곱셈표를 넣고 다니며 인간 본성의 어떤 부분이라도 잴 수 있다고 말했다. 디킨스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풍자하려는 것은 숫자와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네. 그들은 가장 비열하고 무서운 대표적인 악인이지.”

 

찰스 디킨스 :: 해군 경리국에 근무했던 하급관리의 아들로 남영국의 포츠머스 교외에서 출생하여 후에 런던으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호인이었으나 금전관념이 희박하여 디킨스는 소년시절부터 빈곤의 고통을 겪었으며, 학교에도 거의 다니지 못하고 12세 때부터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연소자의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의 모순과 부정을 직접 체험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자력으로 노력하여, 15세 때 변호사 사무실의 사환으로 일하였고, 이듬해 법원의 속기사, 그리고 신문사의 통신원이 되어 풍속(風俗)의 견문(見聞) 스케치를 써서 보내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모아 단편소품집 《보즈의 스케치》를 1836년에 출판함으로써 문학가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37년에 완결시킨 장편 《피크위크 페이퍼스》는 전작(前作)의 확대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이어 《올리버 트위스트》(1838)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작가로서 위치가 확고해졌다. 그 후 《니콜라스 니클비 Nicholas Nickleby》(1838∼1839) 《골동품 상점 The Old Curiosity Shop》(1840∼1841) 《크리스마스 캐럴》(1843) 《바나비 러지 Barnaby Rudge》(1841) 《돔비와 아들 Dombey and Son》(1846∼1848) 등의 장편·중편을 발표하여 문명(文名)을 더욱 떨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된 사회 밑바닥의 생활상과 그들의 애환을 생생히 묘사하는 동시에, 세상의 모순과 부정을 용감하게 지적하면서도 유머를 섞어 비판한 데에 있다.
1850년에 완결된 자서전적인 작품 《데이비드 코퍼필드 David Copperfield》를 쓸 무렵부터 그의 작품의 경향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여 디킨스 후기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다음 작품 《황폐한 집 Bleak House》(1853)이 그 좋은 예로서, 그의 전기작품(前期作品)에서처럼 한 사람의 주인공의 성장과 체험을 중심으로 쓴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회의 여러 계층을 폭넓게 바라보는 이른바 파노라마적인 사회소설로 접근해 갔다. 개인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사회의 벽에 직면하여, 그의 자랑거리인 유머도 그 빛을 잃고 무력감과 좌절감이 전편(全篇)을 흐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은 조금도 쇠퇴되지 않아, 공장직공의 스트라이크를 다룬 《고된 시기 Hard Times》(1854), 프랑스혁명을 무대로 한 역사소설 《두 도시 이야기 A Tales of Two Cities》(1859), 그리고 다소 자서전적인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1860∼1861) 등의 작품 이외에도, 대단히 많은 단편과 수필을 썼으며, 한편 잡지사의 경영, 자선사업에의 참여, 소인연극(素人演劇)의 상연, 자작의 공개낭독회, 각 지방의 여행 등, 참으로 쉴사이 없는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으므로, 그의 건강상태는 나빠졌지만 쉬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1858년에는 20년 이상 함께 살아 왔고 10명의 아이를 낳은 부인 캐서린과 별거하는 등 정신적인 고통도 겹쳐, 1870년 6월 9일 추리소설풍의 《에드윈 드루드 Edwin Drood》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계의 각계각층의 애도 속에 문인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의 소설은 지나치게 독자에 영합하는 감상적이고 저속한 것이라는 일부의 비난도 있지만, 각양각색의 인물들로 가득찬 수많은 작품에는 심각함에서 우스꽝스러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태가 다 묘사되어 있고, 그의 사후 1세기를 통해 각국어로 번역되어 셰익스피어 못지않은 명성을 누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찰스 디킨스 [Charles John Huffam Dicken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차티스트운동 :: 노동자들은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서도 선거권을 얻지 못하자, 1830년대 중반부터 경제적 ·사회적으로 쌓여온 불만과 함께 선거권 획득을 위한 요구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우선 1836~1837년에 런던에서는 W.오언을 고문으로, W.러벗을 지도자로 내세워 런던 노동자협회를 결성하였고, 버밍엄에서는 은행가 T.애트우드의 노력으로 버밍엄 정치동맹을 이루었으며, 북부와 서부에서는 노동자들의 운동을 활발히 추진하면서 F.E.오코너가 《노던 스타》지를 발간하여 이를 지도하였다.
이와 같은 각지의 노동자 조직이나 운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하여, 1837년 초에 러벗 등은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을 작성하여 다음해 5월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 헌장이 실현되도록 국민청원 서명운동과 그를 위한 전국 조직 결성을 확대하여, 각지에서 집회를 갖고 행진을 했다. 그리하여 1839년 2월에는 런던에서, 그리고 5월에는 버밍엄으로 옮겨 통일대회를 열었는데 오코너 등 급진파와 러벗 등 온건파가 대립하여 결말을 짓지 못한 채 6월에 120만 명의 서명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벗 등은 체포되고, 런던 대회의 파업 결의도 취소되는 등 관헌의 탄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9월에는 해산하였다.
그 후 1840년 오코너는 맨체스터에서 전국헌장협회를 설립하고 1842년에 325만 명의 서명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해 버밍엄에서도 정치동맹 대신에 완전선거권동맹을 조직하고 역시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다시 모두 거부되어 동맹은 깨지고 러벗도 물러났으며 차티스트 지도 아래 북부에 퍼졌던 파업운동도 무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오코너는 그래도 《노던 스타》 및 전국헌장협회를 통해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서 G.J.하니가 지도자가 되어 마르크스 ·엥겔스와 협력하여 1845년에 설립한 우애(友愛)민주주의협회를 기반으로 노동자 조직을 호소하였다.
1848년의 프랑스 2월혁명으로 전유럽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세 번에 걸친 570만 명의 청원 서명을 모아, 4월 런던에서 대청원 시위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무력에 의해 억제되고, 청원은 하원에 전달되었으나 역시 부결되었다. 그 후 지도자들의 체포 ·투옥이 계속되고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한 재건의 노력도 헛수고로 돌아가 1858년의 대회 후 소멸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차티스트운동 [Chartism]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896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 인구의 12퍼센트가 전체 부의 약 90퍼센트를 갖고 있었다. 19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특히 미국 남북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빈부 격차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888년에서 1908년까지 미국에서 산업 관련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가 70만 명이 넘었다. 매일 약 100명씩 사망한 셈이다. 1901년 한 해에만 철도 노동자 26명 중 한 명은 부상당했고, 399명 중 한 명은 작업 중 사망했다.

 

세계는 이런 상황에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20세기를 맞이했다. 세기가 바뀌는 길목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찬란한 물질적 성과가 아니라 당혹감과 혼란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그만큼 많은 문제가 새로 나타났고, 분쟁이 잠잠해지고 나면 또 그만큼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03. ‘밀림의 법칙’을 버리다

1903년 2월, 대로우는 이렇게 변론했다. “미국의 문명이 광부와 노동자들의 굶주림으로 이루어지고 겨우 열두서너 살 된 아이가 먼지 날리는 무연탄 광산에서 석탄을 주워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면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이 문명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문명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류에게도 좋은 일이다.”

 

누구나 행복과 평등,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런 기본적인 신념과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보장은 절대 흔들릴 수 없다. 기업의 권리가 인권보다 크거나 인권과 기업이 효과적인 평등을 이루지 못한다면 문명의 발전은 지장을 받게 된다.

 

대로우의 변론을 두고 “곧 막을 내리는19세기에 대한 추모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먼로주의 ::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과 독립 직후의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대한 유럽으로부터의 간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국이 공동선언을 제의한 데 대하여 미국이 독자적으로 선언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국무장관 J.Q.애덤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발표되었다고 한다. 먼로주의의 근원은 대통령 G.워싱턴 이래의 고립주의(孤立主義)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을 더욱 명확하게 하여, ① 미국의 유럽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② 유럽의 미국 대륙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③ 유럽 제국에 의한 식민지건설 배격의 원칙 등 3개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먼로주의는 미국 외교정책의 일방적 표현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국제법과 같은 강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충분히 있었고, 또 각종 사건에 의하여 국제적으로도 사실상 이를 승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국경분쟁에서 국무장관 오르니가 먼로주의에 기초를 둔 강경한 의견을 제시한 데 대하여 영국이 그것을 인정한 점 등이다. 대통령 T.루스벨트는 이러한 외교방침을 더욱 확산시켜, 미국이 서반구에서 국제경찰력을 행사할 것을 주장하였고, 카리브해 지역으로의 진출을 정당화하였으며, 미국 이외의 나라가 영토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배척하였다. 1930년대 대통령 F.D.루스벨트는 선린외교정책을 내세우면서 먼로주의를 아메리카주 전체의 외교정책으로 삼을 것을 제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먼로주의 [Monroe Doctrin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03년 3월 21일, 판결문이 발표되었다. “노동자들의 하루 노동 시간을 9시간으로 단축하고 임금은 10퍼센트 인상한다.” 이로써 163일 동안 계속된 파업이 끝났다. 회사는 중재안을 수용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화를 통한 협상을 성사시킨 것은 기업도, 개인도 아닌 제3자인 정부였다.

 

사회보장제도 수립 :: 독일 법률에는 근로자가 손실을 입었을 때 고용주가 배상하고 고용주와 근로자가 건강보험 비용을 분담해야 하며, 정부가 노령 및 장애 연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독일의 사회보험정책은 세계 최초로 정부가 통일적으로 보험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사회보험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 이어 덴마크도1893년에 전국적인 노령연금제도를 수립해 서방국가의 사회보험제도 수립의 서막을 열었다.

 

독일 정부가 사회보장 계획을 수립한 것은 한 기업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836년 독일의 기업가인 알프레드 크루프Alfred Krupp는 회사 직원과 그 가족이 질병에 걸리거나 사망했을 때 보험금을 지급했다. 

원대한 안목을 지닌 기업들은 이미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1815년에 발생한 화약 폭발 사고 이후 듀폰은 사망 근로자의 가족에게 노령연금을 지급했다. 듀폰은 미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근로자들에게 시간외 수당과 야근 수당을 지급했으며, 처음으로 직원들을 위한 저축계좌를 개설했다. 직원이 100달러를 예금하면 연말에 기업이 6퍼센트의 이자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직원들을 위한 일이었다. 듀폰은 미국에서 최초로 근무 중에 다친 직원들을 치료하기 위해 외과 의사를 고용한 기업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과 미국의 관련 제도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산고를 겪은 후에 탄생한 것이다.

 

업튼 싱클레어 ::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1878~1968)는 1878년 9월 20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가계는 남부의 몰락한 귀족 집안으로 아버지는 주류 판매업자였다. 10살 때 뉴욕으로 이사, 15살 때부터 돈벌이용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 불우한 작가는 뉴욕 주립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는데 싸구려 소설로 학비를 충당했다. 1901년부터 몇 편의 소설을 발표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06년 시카고 식육 공장 지대의 비인간적 상황을 리얼리즘 기법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정글(The Jungle)』을 출간해 일약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정열적인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정글』의 성공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뉴저지 주 잉글우드에 Helicon Home Colony를 세우고 이상주의적 공동체를 실험했으나 화재 사고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어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한 뒤 미국 상ㆍ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번번이 낙선했다. 사회 활동 중에도 식지 않는 창작열로 소설 『King Coal』(1917), 『Oil!』(1927), 『Boston』(1928) 등을 발표했다. 대공황기에는 ‘캘리포니아 빈곤추방운동(EPIC, End Poverty in California)’을 조직해 활동하면서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선전했으나 역시 낙선하고 말았다.
1940년대 이후 활발히 창작 활동을 재개하고 20세기 전반기 서구 정치사를 망라하는 대작 『Lanny Budd』(시리즈 11권)을 펴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며 21개국에 출간되는 기염을 토했고, 이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인 『Dragon’s Teeth』(1942)로 194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사회 문제를 다룬 여러 평론집을 비롯해 90여 권이 넘는 저서가 있으나 어떤 작품보다도 대표작 『정글』의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업튼 싱클레어 [Upton Beall Sinclair] (해외저자사전, 2014. 5.)

 

정글 :: 『정글』은 최초의 머크레이커 소설은 아니지만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친 20세기 작품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소설로 인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식품의 약법 및 육가공감독법의 의회 통과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 소설은 190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도살장 노동자 파업을 바탕으로 한 노골적이고 역겨운 연대기이다.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한 마니페스토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썩어버린 아메리칸 드림을 가차없이 파헤친다. 싱클레어는 축복처럼 여겨져왔던 미국의 신화를 갈가리 찢어냄으로써 자유를 숨쉬고자 하는 웅크린 대중의 지치고 가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신 부패와 탐욕이라는 기름을 친 자본주의의 톱니바퀴가 무력한 이민자들을 삼켜버리고, 저임금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명백한 사명(미국이 북미 전체를 지배할 운명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지닌 황금의 땅은 악몽이 되었다.
이 소설은 흥미롭고도 비참하다. 리투아니아에서 갓 이민 온 유르기스 루드쿠스는 이 약속의 땅에서 가정을 세우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원시적인 육가공 공장의 쓰레기와 악취, 입에 풀칠하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다. 당연히 루드쿠스와 그 가족의 꿈은 구조적으로 붕괴되고, 가족에게 가해진 잔혹한 범죄에 절망한 그도 서서히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소설은 사회주의라는 희망의 횃불로 끝난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시카고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라는 외침이다. 이보다 더 사회적으로 중대한 소설은 상상하기 힘들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2007. 1. 15., 피터 박스올)

 

포드자동차는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줄이고 매일 5달러의 임금을 지급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5달러는 기존 임금인 하루 2.34달러의 2배가 넘는 액수였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매년 직원들을 위해 1000만 달러를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데 당시 포드자동차의 한 해 수익도 1000만 달러를 갓 넘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한 경제학자는 “포드가 성경의 정신을 기업에 가져다 붙이고 박애주의라는 깃발을 흔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고 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헨리 포드에게 주목했다. 노조의 파업이나 폭력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기업가가 자진해서 근로자의 임금을 두 배로 올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말 그대로 파격이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임금 인상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자선 행위가 아님을 여러 번 강조했다. 또한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기 때문에 근로자들이 자신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해 연말 포드자동차의 수익은 3000만 달러로 급증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포드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것은 전통 관념을 완전히 뒤집는 발상이었다.

 

헨리 포드는 소비경제를 굳게 믿었다. 그는 미국의 미래와 보통 사람들의 복지, 소비자의 풍족한 생활이 서로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동차, 특히 모델 T를 평범한 사람들에게 보급하고 싶어 했다. 모델 T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그 차를 살 수 있기를 바란다는 유명한 말도 했다. 소비시장은 생산력보다 구매력에 제일 먼저 의존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헨리 포드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100년 전 디킨스가 한 말을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 시대는 최고의 시대이면서 최악의 시대이기도 하다. 희망으로 가득 찬 봄날인 동시에 절망적인 겨울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다 있지만 또한 아무것도 없기도 하다.”

 

Interview inside 인터뷰 인사이드

사회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개혁을 어떻게 시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1890년 미국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부유층의 소득이 빈곤층 인구 절반의 소득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었다.

 

1900년 미국의 도시화율이 39.7퍼센트까지 상승했다.

 

악의 꽃 :: 근대시의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초판은 1857년 간행되었는데 서시(序詩) 외에 100편의 시를 수록하였고 〈우수(憂愁)와 이상(理想)〉(77편), 〈악의 꽃〉(12편), 〈반역〉(3편), 〈술〉(5편), 〈죽음〉(3편)의 5부로 나뉘어 있다. 출판 직후 종교와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재판소동이 벌어졌는데 결국 6편의 시는 삭제 명령을 받고 작자와 출판사 책임자에게는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4년 후인 1861년에 문제의 6편을 빼고 신작 35편을 추가하여 재판했는데 부(部)의 구성도 시편의 배열도 초판 때와는 많이 달랐고, 새로 제2부에 〈파리 풍경〉(18편)이 들어갔다.
작자가 죽은 다음해인 1868년에 제3판이 간행되었으나 이 개정판은 작자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결국 재판을 결정판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시집은 시인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읊고 있으며 전체가 하나의 대건축처럼 일관된 의도를 가지고 구성되어 있다. 원죄의식에 바탕을 둔 고뇌와 회한, 이상적 순수미를 추구하는 의욕과 붕괴와 하강에의 취미, 신에 대한 숭배와 저주, 이와 같은 복잡한 근대인의 심리가 에로티시즘과 플라토닉러브가 한데 어울려 수없이 많은 연애시를 펼쳐 놓았다. 또한 시각과 청각과 후각의 세 가지 다른 감각을 하나로 뒤섞는 만물조응(萬物照應)의 수법은 상징주의의 선구로서 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기간부터 미국은 ‘보이는 손’을 내밀어 대기업의 ‘과도한 권력’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대대적으로 발생했고, 1883년부터 1889년까지 비스마르크 총리의 주도로 서방 시장경제 국가들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질병, 사고, 노후 및 장애 등을 보장하는 사회보험제도를 수립했다.

 

1914년 1월, 포드자동차는 직원들의 근로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단축하고 임금을 하루 2.34달러에서 5달러로 인상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회적으로 큰 반향이 일어났다. 그 결과 포드자동차의 결근율은 10퍼센트에서 0.5퍼센트로 크게 하락했다. 헨리 포드는 줄곧 자동차 가격을 낮춰 보급률을 높이고자 노력했지만 오히려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새로운 소비혁명을 불러일으켜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수익을 증가시켰다. 듀폰 또한 대기업으로는 최초로 사망한 근로자의 유족들에게 연금을 지급했고, 직원들을 위한 의료보험도 최초로 만들었다.

 

 

 

제5장 | 번영 뒤에 찾아온 재앙

1929년 미국의 생산능력은 영국, 프랑스, 독일 3개국의 생산능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허버트 후버 제31대 미국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국은 빈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머지않아 미국에서 빈민굴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01. 전 세계를 휩쓴 악몽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거래소의 개장을 울리는 벨소리와 동시에 매도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오까지 시가총액 중 95억 달러가 사라졌다. 1928년 미국 GDP의 8분의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1907년,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미국 경제가 갑자기 곤두박질쳤다. 증시가 출렁이고 예금 인출자가 속출했다. 그때 나타난 구원자가 JP모건의 창업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이었다.

 

막대한 자산을 가진 JP모건과 은행장들은 결국 1907년의 경제 위기에서 미국을 구해냈다. 기적을 창조한 존 피어폰트 모건은 미국의 산업을 현대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산업계의 다른 기업가들과 달리 그는 월 가의 은행과 증권 시장을 이용해서 거대한 산업을 창조해냈다. 모건은 1901년 카네기의 철강왕국을 인수한 후 US스틸을 설립했다. 당시 이 회사의 시가총액이 14억 달러였는데 그해 미국 연방 정부의 재정수입이 5억 8600만 달러였다.

미국의 한 역사학자는 “월 가의 은행가들이 미국을 산업화했다면 뉴욕 증권거래소는 이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혈액을 공급했다”고 말했다. 

 

금융은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투자를 원하는 이들에게 자금을 얻을 수 있다. 은행과 주식시장은 이 메커니즘의 일부이며 월 가는 그 엔진이다.

 

1893년 미국의 산업 생산액은 세계 1위였지만 이렇게 크고 강력한 경제를 관리하기에는 정부의 힘이 너무 약했다. 미국 연방 정부는 경제 분야에 대해 줄곧 자유방임적 태도를 취했고, 심지어 70년 넘게 중앙은행도 설립하지 않았다. 따라서 1907년의 위기를 겪고 난 후 존 피어폰트 모건을 비롯한 민영기업들이 최종 대부자의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월 가 :: 월 가는 뉴욕 시 맨해튼 남부 브로드웨이에서 이스트 리버에 이르는 거리로 총 길이 500미터, 폭 11미터밖에 되지 않는 곳이다. 1792년 5월17일 브로커 24명이 한 카페 입구에 있는 버튼우드 나무 아래에 모여 버튼우드협정Buttonwood Agreement을 맺은 것이 뉴욕증권거래소의 시작이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시가 폭락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당시 JP모건이 했던 방식대로 한다면 분명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번에 그들이 구세주로 여기는 사람은 존 피어폰트 모건의 아들 잭 모건이었다.

잭 모건은 증권거래소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주식시장에 유동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주가 폭락과 투자자들의 주식 투매 현상이 정상 수준을 회복하기를 기대했다.

 

한 달 사이 1800억 달러가 공중으로 사라졌다. 1930년까지 미국에서 총 1352개의 은행이 파산하고 2만 6355개의 기업이 도산했다.

1930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이날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그해 원자재 가격이 1913년 수준으로 떨어지고 노동력 과잉과 임금 하락으로 인해 실업자는400만 명에 달했다.

 

3년 사이 미국의 GDP가 3분의 1이나 줄고 투자는 87퍼센트가 감소했으며 실업률은 25퍼센트 상승했다. 농업, 부동산, 금융업 등 미국의 산업 전체가 깊은 수렁에 빠졌다.

 

1920년에서 1929년까지 미국의 노동생산성은 55퍼센트 증가했지만 근로자의 임금은 단 2퍼센트 오르는 데 그쳤다.

 

미국에서 일반 근로자나 시민들이 물건을 살 돈이 없다면 미국 경제도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산업화를 통한 대량생산의 시대에 제품의 생산자는 곧 그 제품의 소비자이기도 하다. 수많은 일반 근로자의 소비 능력과 소비 수요가 기업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기업은 부의 효과적인 창조자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분배자는 아니다.

 

02. 전염병처럼 번진 ‘대공황’

1929년 여름, 다우존스 지수는 10년 사이 400퍼센트 가까이 올랐지만 같은 기간 미국의 GDP는 약 50퍼센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물론 이것을 탐욕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탐욕은 모든 경제활동의 기반이다.

 

윌 가의 전형적인 주식 투기 :: 1927년 미국의 비행 영웅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가 단독 비행으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자 사람들은 항공 산업의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하지만 당시 항공회사들은 대부분 항로를 단 하나도 개통하지 못한 곳이었다. 바로 그때 주식 시장에서 씨보드에어라인Seaboard Air Line이라는 회사의 주가가 급등했다. 하지만 그 회사는 항공회사가 아니라 철도회사였다. 회사의 명칭 외에는 항공 업계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실크 판매로 성공한 영국 기업 클라렌스 헤이트리Clarence Hatry는 창업 후 불과 몇 년 만에 산업 및 금융의 제국을 이룩했다. 그 위세가 월 가마저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이 회사가 1929년 9월 주식거래증명서를 위조해 거액의 손실을 숨겨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런던과 뉴욕 증시가 공황에 빠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일곱 명의 이사진(의장과 부의장 각 1명, 이사 5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사진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 상원의 동의를 거쳐 결정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①세 가지 주요 수단(공개시장 활동, 은행의 지급준비율 결정, 각 연방준비은행이 요구한 재할인율 비준)을 통한 통화정책 이행 ②각 연방준비은행의 활동에 대한 감독 및 지도③미국 본토에 있는 은행 및 회원 은행의 해외 활동, 외국 은행의 미국 내 활동에 대한 관리 및 감독 ④각 연방준비은행의 예산 및 지출에 대한 비준⑤국가지불 시스템으로서의 권력 행사 ⑥소비자 금융과 관련된 법률의 이행 보장.

 

1907년의 위기를 겪은 후 능력 부족을 느낀 미국 정부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 FRB를 설립한 바 있었다. 하지만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1929년 월 가의 위기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국인 대다수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균형을 되찾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30년 6월, 미국 의회는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한 보호무역 법안을 통과시키고 1125개 제품의 관세율을 조정했다. 그중 관세를 올린 제품이 890종에 달했다. 미국 기업을 보호한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이다.

 

스무트 홀리 관세법 :: 미국이 1930년 대공황 당시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마련한 관세법으로 공화당의 리드 스무트 의원과 윌리스 홀리 의원이 주도해 스무트·홀리 관세법이라고 부른다. 주요 골자는 2만여 개의 수입품에 평균 59%, 최고 40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1920년대 미국 경제의 거품으로 1929년 10월 29일 뉴욕증시가 대폭락하면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됐다. 당시 후버 행정부는 증시가 급락하는 것이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마련했다. 당시 1000명 이상의 경제학자들이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게 이 법을 거부하라고 요청했으나 후버 행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1930년 6월 이 법을 적용했다. 이로 인해 미국 수입관세율이 59.1%까지 높아졌다. 그렇지만 이 법은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의 보복관세 조치와 일부 국가의 환율 통제, 수입 제한 등으로 이어지면서 무역 거래가 급감해 대공황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한편, 미국 경제학자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부활시켜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스무트·홀리 관세법과 유사하다며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무트·홀리 관세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실업자는 많고 기업은 적자였으며 경쟁 환경이 악화되자 사람들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보호를 받는 유일한 방법은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도 가끔 그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놀라울 만큼 큰 폭의 관세 인상률이었다. 과거 100년간 전례 없던 최대 인상폭이었다. 미국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자 다른 국가들도 그 보복으로 무역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결국 자유무역은 붕괴되었고 인플레이션과 맞물려 경제 대공황이 더욱 심각해지고 말았다.

 

보복 조치가 이어졌다. 캐나다는 미국산 제품 16종에 대한 관세율을 30퍼센트 올렸고, 이탈리아는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율을 100퍼센트까지 올렸다. 영국은 자국 상품을 차별하는 모든 국가의 제품에 100퍼센트의 보복관세를 부과했다. 1년 사이 약 60개국이 보호무역법안을 내놓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으로 제정된 각종 법률들로 인해 유럽의 무역액은 3분의 1이나 감소했고, 미국 제품의 수출도 82퍼센트나 감소했다.

 

전 세계 무역액이 60퍼센트 줄어들었다.

 

03. 정부의 ‘보이는 손’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 ~ 1945) :: 미국 제32대 대통령. 미국 역사상 유일한4선 대통령이다.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학자들이 선정한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3인 중에 포함되었다.

 

1933년 봄, 모건 그룹에 소환장이 도착했다. 의회 청문회에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독촉 속에서 의회 상원의 은행위원회는 은행들의 비리 및 그로 인한 폐해 조사에 나섰다. 이는 월 가에 대한 전면 조사를 의미했다. 그때까지 월 가는 미국,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금융의 중심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백만장자와 금융 브로커들의 사적인 클럽이었던 만큼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의회와 청문회 :: 미국 의회에는 외교위원회, 사법위원회 등 각종 상설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국내외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의회의 관련 상설위원회가 당사자를 조사할 수 있고 조사 과정에서 청문회를 실시할 수 있다. 의회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청문회에 출석해 질의에 답변해야 하며 출석을 거부하면 사법 처리를 받는다.

 

미국 정부는 이 일을 계기로 자본시장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1933년 5월 27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방증권법’에 서명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증권시장을 규제하는 법률이었다. 6월 16일 의회는 ‘1933년 은행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따라 거대한 모건 그룹이 둘로 나뉘었다.

연방증권법은 자본시장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새로운 법률을 통해 기업을 규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업에 거래정보 공개를 요구할 수 있었다.

 

1930년대의 경제 위기를 경험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고, 이것은 자본 성장 과정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 각국 경제에서 감독과 관리라는 말이 새롭게 등장했다. 정부는 경제 체제와 관련해 자유방임주의를 버리고 그 대신 혼합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이때 고전경제학의 고향인 영국에서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존 케인스John Keynes가 전통적인 사상을 완전히 뒤엎는 이론을 발표했다. 케인스는 1936년에 출간한 책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에서 국가의 간섭을 핵심으로 하고 경제 위기와 실업 극복을 목표로 하는 이론체계를 구축했다.

 

존 케인스(1883 ~ 1946) :: 현대 경제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 그가 확립한 거시경제학은 프로이드가 확립한 정신분석,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이론과 함께 20세기 학계의 3대 혁명으로 불린다. 1929년 경제 위기가 발생한 후 케인스는 기존 경제이론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경제이론을 확립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으며, 1933년 마침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모은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을 출간해 경제학 분야에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다.

 

그의 이론은 당시 100년 넘게 뿌리 내리고 있던 인식, 즉 오로지 시장만이 경제를 조절한다는 인식을 바꾸었다.

 

자유시장에는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매우 많다. 자유라는 말을 사용한 것부터 문제가 있다. 자유라는 말이 듣기에는 좋지만 자유시장이 반드시 좋은 시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35년 미국 인구는 1억 명에 불과했지만 영화관의 좌석 수는 1100만 개가 넘었다.

미국 시장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지만 불황의 늪에 빠졌던 독일 정부는 위기 극복 과정에서 오히려 극단으로 치달았다.

 

독일의 기업과 대다수 국민들은 독일 경제 부흥의 희망을 히틀러에게 걸고 있었다.

 

독일은 거액의 융자를 통해 고속도로 등 대규모 인프라 건설 계획을 세우고 무기도 대량 제작했다. 일련의 조치들에 힘입어 1933년 이후 독일 경제는 큰 성과를 거두었고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 위기에서 벗어난 국가가 되었다.

 

나치독일 :: 제3제국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적으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강력한 파시즘 통치가 실시된1933~1945년 시기의 독일을 지칭한다. 파시즘fascism은 나치즘Nazism이라고도 한다. ‘나치Nazi’는 독일어로 ‘국가사회주의자National Sozialist’의 줄임말이며, 본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노동당 당원과 옹호자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현재 유럽(특히 독일)에서는 극우파시스트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국가주의와 이윤지상주의에 물든 독일 기업들의 성적은 화려했다. 1939년 기업들은 국가를 위해 2년 치 식량, 돼지기름, 베이컨, 버터 27만 톤을 비축했으며, 각종 전함 170척, 신형 탱크 3350대, 전투기 8295대를 제작하고 병사 140만 명을 동원했다. 정부의 주문에 힘입어 크루프 그룹의 순이익은 6년 동안 무려 18배나 증가했다.

 

04. 새롭게 재편된 시장경제

1933년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이 제정된 후 기업들은 시장경제를 고수할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이 법안의 내용 중에는 근로자의 주당 최대 근로시간과 최저임금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헨리 포드를 포함한 당시 미국의 많은 대기업 총수들은 이 조치에 적극 반대했다. 그들은 임금이 시장에서 결정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전국산업부흥법 :: 1933년 6월 16일, 미국 의회가 ‘전국산업부흥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에 따라 미국 정부는 전국부흥국(NRA)을 설치하고 노사 양측이 각 산업별 ‘공정경쟁규약’을 제정하도록 유도했으며 정부가 생산 규모, 제품 가격, 시장 분배, 근로자들의 임금 및 근로시간 기준 등을 규정함으로써 고용주와 근로자, 소비자가 공동으로 생산을 감독하도록 했다. 기업이 법규를 위반할 경우 대통령은 경영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국가가 직접적으로 경제에 관여해 산업 생산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이 법률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는 생산관계에 대한 국지적인 조정을 의미했다. 루스벨트는 이 법률을 “미국 의회가 제정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법률”이라고 평가했다. 

 

전국산업부흥법 :: 같은 해 3월에 시작된 초기 뉴딜 정책의 중심을 이루는 법률이다. 대공황으로 파멸에 직면한 산업의 부흥과 실업자 구제를 목표로 한 것으로 공정경쟁규약 작성과 그것을 위한 전국부흥국(NRA) 설치, 공공실업대책을 시행하는 공공사업국(PWA)의 설치를 정하였다.
규약은 500명 이상의 각 산업체마다 노사공대표(勞使公代表)가 생산량·가격·임금·노동시간 등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단결권 ·단체교섭권이 인정되고 기업에는 일종의 카르텔이 용인되었다. 각 규약제정까지의 일반규약이 정부에 의해 제시되고 표준적인 노동조건을 정했다. 이것을 지키는 기업에는 청취기장(靑鷲記章)이 교부되며 이를 위한 국민운동이 전개되었다.
1935년 5월 최고재판소에서 이 법은 주내통상(州內通商)에서의 연방법 부적용(不適用), 입법권 부당위임(不當委任)으로 위헌판결을 받아 소멸되었다. 그러나 그 일부는 와그너법과 기타 법규에 계승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국산업부흥법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全國産業復興法]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전국산업부흥법에 대한 논란은 2년 동안 계속되었고, 1935년 미국 대법원에서 8대 1로 위헌 판결을 받아 결국 폐지되었다. 그해 대법원은 새로 제정된 11개의 법률을 모조리 폐지했다.

경제 위기가 발생한 뒤 몇 년 동안 정부는 실업자 구제와 고용 안정을 위해 3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상반기 정부 예산과 맞먹는 돈이었다. 대규모 국책사업이 실시되고 비영리 국가기관이 설립되자 불과 몇 년 사이에 국채가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세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세금 인상 정책은 헨리 포드와 많은 기업인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정부는 세금을 올리는 한편 공공지출도 대규모 삭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경제가 바닥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정부가 시장에서 손을 떼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세금이 인상되자 많은 기업들이 부득이하게 직원 수를 감축해야 했고 공공지출 삭감으로 많은 사람들이 밥그릇을 잃었다. 실업은 경제 위기 때마다 직면하게 되는 난제이지만 일자리는 시장이 회복돼야만 공급될 수 있는 법이다.

1939년 미국의 실업률은 또다시 17퍼센트를 넘어섰다. 막 회복 조짐을 보이던 경제는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1935년 미국은 사회보장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정부가 기업에 고용된 미국 국민들의 정보를 모두 저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기계의 수요가 대거 창출되었다.

 

IBM의 주력 제품은 근퇴 기록기였다.

 

IBM의 창업자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도 자신만만했다. 그는 “우리는 앉아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일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왓슨은 생산규모를 축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생산을 늘리고 팔리지 않은 제품들은 비축해두었다. 1930년에서 1933년 사이 IBM의 생산력은 30퍼센트 증가했고 1933년에는 세계적인 최첨단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기술 연구개발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경제 위기가 연구개발에는 오히려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시장이 통합된다. 다시 말해, 경쟁력이 약한 기업은 사라지지만 강한 기업은 생산과 경영을 합리적으로 배치하기 위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1935년 미국 정부는 근로자 2600만 명의 자료를 가지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 바로 IBM이었다. IBM이 개발한 천공카드시스템과 전동타자기가 즉시 현장에 투입되었다. 이듬해 IBM은 총 2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직원 수가 9142명까지 늘어났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IBM은 컴퓨터의 대명사가 되었다.

피터 드러커는 “우리가 변화를 관리할 수는 없다. 다만 변화에 앞서 나갈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경제 위기는 시장이 재편되는 과정이다. 풍부한 창의력을 가진 기업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다.

 

1930년대 듀폰이 발명한 폴리클로로프렌polychloroprene이라는 합성고무는 기존의 자동차 타이어를 대체했고, 크라이슬러의 신차는 자동차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를 경신해 명실상부한 고속도로의 시대를 열었다. P&G는 일일 연속극에 비누 광고를 내보내 일일 홈드라마를 뜻하는 ‘소프 오페라soap opera’라는 단어를 탄생시키며 자사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소프 오페라 :: 초기의 소프오페라는 집안에 있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속극으로 주로 낮시간대에 방송되는 라디오방송이었으나, 1952년에 TV매체에 등장하였다. '소프 오페라'라는 명칭은 이 드라마가 비누회사의 광고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KBS라디오의 <청실홍실>(1956)이 방송됨으로써 시작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프오페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Interview inside 인터뷰 인사이드

1929년 경제 대공황이 발생했을 당시 미국 정부는 두 가지 잘못된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나는 정부와 중앙은행이 시중 은행들의 도산을 방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잘못입니다. 이로 인해 실물경제가 훨씬 큰 타격을 입었고 사람들은 은행에 맡겨둔 돈이 무사히 지켜질지 불안에 떨었습니다. 또 다른 잘못은 위기가 계속되고 있을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인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상과 완전히 상반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 두 가지 잘못된 판단이 서로 맞물리면서 심각한 경제 위기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자본주의 국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등장하면서부터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의 ‘국유화’가 경제 위기에 대한 대처방법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제6장 | 누가 기업을 지배하는가?

01. ‘기업 왕조’의 세대교체

산업 경쟁력이 전쟁의 승부를 결정했다. 미국의 군수물자 공급량은 독일과 일본의 공급량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았으며 여기에는 대기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8년 전 세계 자동차의 절반은 모델 T였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포드자동차의 매출과 이익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시장에서는 소비자들의 수요가 다양화되고 있었지만 포드자동차는 18년 동안 오직 검정색 모델 T 한 가지만 생산했다. 모델 T에 대한 헨리 포드의 애정은 매우 각별했다. 그는 모델 T가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믿었다. 헨리 포드의 아들 에셀Edsel이 신차 개발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모든 권력을 쥔 포드는 이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헨리 포드는 아들과 한 차례 격렬한 다툼을 벌인 후에야 신차 개발을 통해 기업의 경영 상황을 개선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했다.

 

기업과 정부가 과거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에는 왕이 나라를 관리하지만 왕의 능력이 부족하면 유능한 사람이 대신 관리하게 되고 입법 기관이 더욱 전문화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포드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은 68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 하락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 달 적자가 900만 달러에 달해 파산 직전까지 갔다.

 

1860년 미국에서 제일 큰 기업의 종업원 수가 4000명이었지만 1900년에는 6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02. 전문경영인의 화려한 등장

1945년 9월, 헨리 포드 2세는 회사를 완전히 계승했다. 이듬해 봄, 그는 어니스트 브리치Ernest Breech를 부사장으로 영입해 경영을 전적으로 일임했으며 브리치는 곧바로 경영진 15명을 외부에서 영입했다. 이후 포드자동차는 단 1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는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브리치와 경영진들은 모두 포드자동차의 경쟁사인 GM 출신이었다. 당시 GM은 놀라운 성장을 거쳐오며 20년 동안 자동차 산업을 선도하고 있었다. 

 

GM의 지분 개혁 :: GM은 1923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했다. 고위 경영진이 분할 납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GM의 지분을 인수했으며 지분 보유량은 직급과 성과 기여도에 따라 결정됐다. 전문경영인의 등장과 함께 혈연으로 이어진 경영 체제는 사라졌으며 직원 선발과 승진 등 내부 인사는 개인의 실적을 기준으로 결정되었다. 

 

GM은 각 소비계층을 겨냥해 다양한 브랜드를 내놓았다. 평범한 서민에게는 쉐보레chevrolet를, 부자에게는 캐딜락cadillac을, 비교적 풍족하지만 신중한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올즈모빌Oldsmobile을, 상류층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뷰익Buick을, 그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폰티악pontiac을 선보였다.

 

포드자동차와 GM은 성향이 매우 다른 기업이다. 하나는 개인을 중심으로 구축되었고, 다른 하나는 시스템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사실 어느 쪽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인 변화일 뿐이다. 개인이 이끌어가는 기업은 기업 발전의 초기 단계에는 적합했지만, 현대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관리가 다양화된 기업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다.

 

슬론의 의사결정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회의가 아주 쉽게 끝이 났다. 임원진 전원의 의견이 모두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회의를 마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슬론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모두 같은 의견입니까?” 임원들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자 슬론이 말했다. “그러면 이 문제는 오늘 결정하지 말고 일단 보류해두었다가 반대 의견이 나오면 그때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철저한 논쟁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의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알 수 없으니까요.”

 

챈들러와 기업사 연구 :: 미국 경영사학자 챈들러는 기업사 연구를 창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챈들러가 기업사 연구를 시작했을 때 미국에서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는 13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하던 2007년에는 이 분야의 연구자가 1300명에 달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관리학에 이상적인 조직 모델을 제공했다고 한다면, 챈들러는 관리학에 조직 변화의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슬론이 퇴임하기 1년 전 GM의 생산액은 10억 달러를 돌파해 세계 경제사에 신기록을 세웠다.

 

베를린에 위치한 독일노동총동맹은 1949년에 설립되었다. 그 전신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한 조직이며 현재는 독일 기업의 권력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어 있다. 회사의 규모에 따라 근로자 대표와 노조 대표가 감독위원회의 의석 중 절반 또는 3분의 2를 차지하고 회사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이는 자본의 소유자와 노동의 공급자가 함께 회사를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을 여러 가지 자원을 보유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한다면, 경영이란 같은 무대에서 각종 권리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는 것이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조직의 목적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레닌은 사회주의를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들이 모인 조합이라고 정의했는데, 그가 꼽은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이란 소비에트와 프로이센의 철도 관리, 그리고 미국의 현대 산업이다.

 

MBA :: MBA 교육은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매년 전 세계 유명 경영대학원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있다. 경영 교육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실질적인 전문지식보다는 개인적인 인격과 기품을 더 강조했기 때문에 기업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경영 교육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기업계에서 경영 교육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기 시작한 1920년대 초의 일이다. 

 

토머스 왓슨 주니어가 IBM을 이끌 때 회사에는 40만 명의 중간 관리자가 있었다. 직원들은 규정에 따라 검정색 양복에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그들은 회사의 사가社歌를 부르며 물건을 팔고 열심히 일했다. 그들은 ‘컴퍼니맨Company Man’이라고 불렸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런 컴퍼니맨들을 흔히 만날 수 있었다.

 

20세기 중반 대기업은 미국 산업의 기반이 되었고, 100대 제조업 기업의 자산이 미국 제조업 자산 총액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03. 방대한 조직이 불러온 병폐

엔론 사태 :: 엔론은 세계 최대 에너지기업으로 2000년 총수입이 1010억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2001년 10월 16일 엔론은 2001년 2분기 실적 보고를 통해 적자액이 6억1800만 달러라고 발표했다. 약 두 달 뒤인 12월 2일 엔론은 정식으로 파산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파산 신청서에서 엔론이 밝힌 총 자산이 498억 달러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기업 파산이었다. 수백 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기업이 파산하면서 오랫동안 회계부정이 있어왔다는 사실도 폭로됐다.

 

세상에는 언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가장도, 절대 권력자도 없다. 기업은 해방되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확실한 책임자를 잃었다. 소유권이 점차 대주주와 소액주주들에게 분산되는 상황에서 주주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주식 가격이지 기업 경영이 아니다.

 

기업을 오래 유지하려면 사람보다는 제도가 더 믿을 만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하고 영원한 제도란 없다.

 

“모든 탐색이 끝나면 모든 것이 처음 알았던 때로 돌아간다. 그는 지금도 탐색을 계속하고 있다.”

 

Interview inside 인터뷰 인사이드

슬론은 GM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기업 시스템까지도 변화시켰습니다. 슬론은 조립라인을 반드시 고객들의 수요를 겨냥해 설계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생산라인을 다양화해서 소비자들의 소득수준과 소비성향에 맞춰 여러 가지 모델의 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그는 또 기업 내부에 여러 개의 사업부를 설치해 각 사업부가 각기 다른 소비계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기업계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방식이었죠. 또한 다양한 사업부를 관리하기 위해 슬론은 재무 및 회계와 관련된 원칙을 세우고 투자수익률 같은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를 통해 각각의 사업부에 대한 투자액 규모를 결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제품 생산에 반영하기 위해 시장조사와 소비자 연구 등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당시 기업계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것들이었습니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고위층과 중간층이 모두 월급을 받고 일하는 관리자에 의해 통제되는 기업을 현대 기업이라고 부른다”

 

제도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가치관이다.

기업관리에 영원한 해답이란 없다.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면 새로운 이론이 필요한 법이다.

 

제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최고란 없으며 오직 최선만이 있을 뿐이다.

 

 

 

제7장 | 일본 성장의 비밀, 기업문화

과거에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일을 고려했지만 이제는 세계인의 시각에서 판단할 것이다.

 

01. 일본을 바꾼 ‘논어와 주판’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 ~ 1989) ::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일본의 기업가. ‘사업부제’, ‘종신고용제’, ‘연공서열제’ 등 중요한 기업 관리 제도는 거의 모두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소학교 4학년에 학업을 중단하고 오사카에 가서 도제 생활을 했다. 1918년 23세의 마쓰시타는 오사카에 마쓰시타전기기구제작소를 설립하고 배선기구, 전등, 전기다리미, 무고장 라디오, 진공관, 트랜지스터 등 우수한 제품을 개발했으며, 이에 힘입어 7년 후 그의 회사는 일본 내 최대 매출 기업이 되었다. 마쓰시타는 언제나 겸손했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경영 철학은 ‘타인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이었다.

 

당시 센바의 상인들 사잉에서는 삼방득리三方得利라는 말이 유행했다. 장사를 하면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사회 모두가 이익이므로 지속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인 1896년, 정부의 지원 아래 일본의 회사 수는 4596개에 달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주식회사였다.

 

현대화된 생산방식은 일본인의 시간관념을 바꿔놓았다. 일본어에 ‘지각’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 1858년 에도[江戶:현재의 도쿄]에 네덜란드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열고, 1860년 이후 바쿠후[幕府] 견외사절(遣外使節)로 3회에 걸쳐 해외를 여행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하였다. 1868년 학숙을 이전하면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기원이 되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의 초빙을 사양하고 교육과 언론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873년 메이로쿠사[明六社]를 창설한 후로는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실학(實學)을 장려하였으며, 부국강병을 주장하여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882년 《시사신보》를 창간하였고, 만년에는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에는 《서양사정》(1866) 《학문의 권유》(1872) 《문명론의 개략》(1875) 등 후쿠자와 3부작을 비롯하여 《복옹자전(福翁自傳)》 《신여대학(新女大學)》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후쿠자와 유키치 [Fukuzawa Yukichi, 福沢諭吉(복택유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인 게이오기주쿠대학은 설립 초기 문학, 이재理財, 법학 세 학과만 개설되어 있었다. ‘이재’가 경제 관련 학과다. 후쿠자와의 학교 설립은 그의 책과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책 『학문의 권유』 초판은 22만 부가 팔렸다. 당시 일본 국민 160명 중 한 명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의 권유』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된다.

 

시부사와 에이치(1840 ~ 1931) :: 일본 메이지 시대와 타이쇼우 시대의 대사업가로 메이지 정부 당시 재정대신에 임명되어 신정부의 화폐제도 개혁, 폐번치현廢藩置縣(지방제도의 개혁), 공채 발행 등 거의 모든 정책의 입안과 시행에 직접 참여했다. 33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일본 최초로 주식제 은행을 설립하고 기업가로서의 화려한 삶을 시작했다. 금융, 철도, 해운, 광산, 방직, 철강, 조선, 기계전기, 보험, 건축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일생 동안500여 개의 회사를 설립했고, 유학의 사상과 서구의 경제 윤리를 결합시켜 일본 경영사상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일본 근대산업의 선구자이자 근대 일본 상업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상업은 개인이 아닌 사회를 위한 것이다. 상업은 이상적인 인격에 위배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상적인 인격을 실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즉, 공익이 곧 개인의 이익이며 개인의 이익은 공익을 만든다”

 

1916년, 『논어와 주판』은 출간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한 권 가격이 1엔밖에 되지 않은 이 책은 일본 기업계의 바이블이 되었다.

 

논어와 주판 :: 시부사와 에이치가 집필한 책이다. 그는 공자는 상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를 저버린 부귀를 비판한 것이며 인의에 위배되지 않는 부귀라면 공자 역시 추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공자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음을 강조하며 백성을 부유하게 하려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강하게 하려면 공상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이것이 바로 부귀를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책 속에서 그는 일본 기업가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에 대해 ‘사혼상재士魂商才’, 즉 ‘선비’와 같은 절개와 도덕, 그리고 ‘상인’으로서의 재능과 실용주의 정신을 겸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1890년 ‘회사법’이 제정되고 일본 국회가 최초의 헌법을 반포했다. 헌법은 천황의 절대 권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모든 일본 국민은 소유권을 침해받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통해 국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유를 부여했다. 정부는 소유권을 보호하는 동시에 재산권도 조정해 경영이 부실한 공기업을 민영기업에 위탁하기도 했다. 또한 경제와 정치의 체제 개혁을 동시에 실시해 봉건 체제 하에서의 특권이 점점 붕괴되고 계급제도 와해됐다.

 

02. ‘서양의 얼굴’을 가진 ‘동양의 영혼’

1932년 5월 5일,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직원 168명을 모두 모아놓고 흥분된 목소리로 자신이 세운 회사의 사명을 선포했다. “우리가 수돗물처럼 물자를 끊임없이 생산할 수 있다면 제품 가격은 떨어질 것이다. 제품 가격이 낮아지면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편리하고 풍족해질 것이며 사회도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쓰시타전기의 직원 전체가 생존하는 이유이자 기업의 사회적 사명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수돗물 경영 철학’을 선포한 이날을 회사의 창립기념일로 정하고 1932년을 창업 원년으로 삼았다.

 

유럽과 미국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를 중시한다. 주주는 모두 하나의 개인이고, 경영자도 자기 자신과 개인의 발전에만 관심을 둔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회사가 커지면 자신도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회사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일본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아직도 모든 기업에 남아 있다. 일본 사회의 조직과 개인은 모두 국가의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갈망한다”

 

일본 직원들은 자신을 ‘마쓰시타맨’, ‘도요타맨’ 등 회사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이런 강렬한 귀속감을 ‘충성’이라고 불렀다. 일본인들에게 회사는 커다란 집과 같았다. 직원들도 사회도 그 집이 필요했다. 경영자는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 가정의 화목과 단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쓰시타가 최초로 고안한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제는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반영됐으며 일본 기업의 상징이 되었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도, 경영자도 아닌, 그 회사 직원들이라는 인식이 점차 형성되었다. 이것이 일본 기업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1930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일본까지 덮쳤다. 마쓰시타전기도 매출이 급감하고 창고에 재고가 가득 찼다.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자는 건의가 있었지만 마쓰시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직원을 한 명도 해고하지 않을 것이다. 근무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월급도 전액 지급하겠다. 그 대신 모두 재고품 판매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전 직원의 노력 덕분에 회사가 역대 최고의 매출을 올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쉽다고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문화는 조직이 실천하는 신앙이자 가치관이다. 문화는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문화는 기업의 매우 강력한 힘이다.

 

03. 성공을 이끄는 기업문화의 길

1946년에 발표된 일본의 ‘평화헌법’은 천황을 상징적인 의미로만 남겨두고 특권과 신분 제도를 철폐했으며 평등의 원칙을 명확히 규정했다. “재산권이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포함했다.

 

도요타자동차의 생산라인에는 ‘안돈andon’이라는 아주 특별한 경보기가 있었다. 누구든 생산라인에서 결함을 발견하면 스위치를 눌러 생산을 멈출 수 있었다. 불량품이 다음 생산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기업들은 마지막에 품질 관리를 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미국에서 품질 관리의 개념을 배워와 문제가 생기는 즉시 없애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직원들이 경보기를 눌러 생산라인을 중지시킬 수 있게 되자 직원들은 이제 단순히 생산라인의 작은 나사가 아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표준화된 부품이 되었다. 직원들이 독립적인 사고능력과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해 “오늘 무슨 문제 있어?”라고 물었을 때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아주 이상한 것이다. 문제는 분명히 있다. 문제가 없으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문제를 찾아내야 하고, 찾아낸 다음에는 또 해결해야 한다.

 

“우리의 적은 일본인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우리 기업 경영 문화의 한계다.”

 

Interview inside 인터뷰 인사이드

악기 제조업체 야마하Yamaha의 사장 가와카미 겐이치川上原一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회사의 휴무일로 정했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을 쉬기로 한 것입니다. 일요일에는 아버지들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하는 월요일에는 편하게 휴식을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직원들이 충분히 쉬어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야마하의 월요일은 ‘창의의 날’이었죠. 가와카미 겐이치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야마하는 계속해서 훌륭한 제품들을 생산해내고 많은 아이디어를 창조해냈습니다. 경영자의 철학을 매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일본 경영자들의 방식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경영자뿐만 아니라 전 직원이 공통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업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군자는 재물을 좋아하되 도리에 합당한 것만 취해야 한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일본 기업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집단주의 정신이다. 일본 기업들이 거의 완전한 근로계약 제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이익이 집단 이익의 부속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언제나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앞선다. 시부사와 에이치든 마쓰시타 고노스케든 모두 이런 이념을 기업계에 널리 전파시켰으며 또한 기업의 발전에 따른 이익은 궁극적으로 국가와 사회, 민중에게 적극적으로 환원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공익이 곧 개인의 이익이다”라는 이념이다.

일본 기업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직원들이 평생 동안 한 회사에 충성하고 기업은 직원들을 종신고용한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계에서 직원의 충성 여부와 충성도는 기업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또한 일본 기업들은 임금을 삭감할지라도 직원을 해고하지는 않는다. 이런 특징이 결합되어 나타난 산물이 바로 충성스러운 ‘마쓰시타맨’, ‘소니맨’, ‘도요타맨’ 등이다.

일본 기업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바로 ‘성실’이다. 시부사와 에이치를 비롯한 기업가들의 영향으로 일본은 서방 국가들의 기업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성실함과 근면함을 기업문화 속에 깊숙이 침투시켰으며, 성실한 사고방식과 습관을 기업 관리에 적극적으로 구현시켜 ‘일본식’ 품질관리를 창조해냈다. 

하지만 일본의 이런 방식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단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한 가치관이 개인의 능력 발휘를 억제해 기업의 혁신과 활력을 저하시켰다. 이 밖에도 계급 제도와 연공서열제, 중용을 중시한 이념, 남녀차별, 불합리한 상여금 제도 등이 일본의 기업문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몇 년 전 불거진 도요타 리콜 사태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은 일본 기업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키고 일본 기업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국화와 칼 ::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1887∼1948)가 쓴 일본연구서 고전으로,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 일본문화의 원형을 탐구한 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6월 미 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집필하였는데, 저자가 이 책에서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인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패턴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일본문화의 특성을 저자는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 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국민이 동시에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린다는 사실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으며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일본인의 경우 이러한 일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혀 있다.
이 책은 일본인의 외면적인 행동의 묘사와, 행동의 배후에 있는 일본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일본문화의 패턴)의 분석으로부터 시작되며. 외적인 생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떤 민족의 문화패턴은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다는 문화인류학적 신념으로 일관되어 있다. 분석 대상을 크게 전쟁 중의 일본인, 메이지유신, 덕의 딜레마, 인정의 세계, 자기수양, 패전 후의 일본인 등으로 나누어 깊이있게 탐구하였다.
한편, 이 책은 저자가 한번도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씌어졌다는 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는 학문적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菊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제8장 | 생존을 위한 숙명, 혁신

트랜지스터 :: 전류나 전압 흐름을 조절하여 신호를 증폭하고, 스위치 역할 등을 수행하는 반도체소자.
트랜지스터는 1947년 미국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Wiliam Shockley), 존 바딘(John Bardeen),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이 처음으로 발명하였다. 진공관을 대체 할 수 있는 반도체소자이며 크게 접합형 트랜지스터(BJT, Bipolar Junction Transistor)와 전기장 효과를 이용한 전기장효과 트랜지스터(FET, Field Effect Transistor)로 나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트랜지스터라고 하면 보통 접합형 트랜지스터를 의미한다.
트랜지스터 구조
트랜지스터는 규소나 저마늄으로 만들어진 p형 반도체와 n형 반도체를 세 개의 층으로 접합하여 만들어진다. 'E'로 표시되는 이미터(emitter)에서는 총 전류가 흐르게 되고 얇은 막으로 된 베이스(B: base)가 전류 흐름을 제어하며 증폭된 신호가 컬렉터(C: collector)로 흐르게 된다. 접합의 순서에 따라 pnp형 혹은 npn형 트랜지스터라 명명한다. npn형인 경우 전류는 이미터 쪽으로 흐르고, pnp형인 경우 반대로 이미터에서 나가는 방향으로 전류가 흐른다.
트랜지스터의 전원연결
트랜지스터의 전원 연결은 이미터 쪽에 그려진 화살표 방향으로 전류의 방향이 되도록 연결한다. 기본적으로 p-n접합이 양쪽에 있는 형태이므로 다이오드에서와 같이 접합면에서 전자의 확산에 의해 공핍층이 생기고 그 결과로 공핍층 전기장이 생겨 더 이상의 전자 확산을 막게 된다.
베이스와 이미터 간에 전원이 없이 연결된 상태에서는 베이스와 이미터가 같은 전위이므로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 베이스 간에 전원에 의한 전기장 방향(+에서-전압 방향)이 공핍층 전기장 방향과 같은 역방향 바이어스이므로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 베이스와 이미터 간에 공핍층 전기장에 반대 방향의 순방향 전원을 연결하면 전자가 움직이게 된다.
한편, 베이스와 컬렉터 사이에는 공핍층과 같은 방향의 역방향 전기장이 형성되어 컬렉터 부분의 n형 반도체의 다수 캐리어인 전자는 움직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베이스와 이미터 간의 순방향 전원에 의해 이동된 전자에 대해서는 베이스와 컬렉터 사이의 전기장 방향이 순방향 바이어스가 되어 이미터에서 이동한 전자들이 컬렉터 쪽으로 흐르게 된다. 이때 컬렉터로 흐르는 전류는 베이스로 흐르는 전류에 비해 증폭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므로 트랜지스터는 증폭기로 사용된다.
트랜지스터의 활용
트랜지스터 그 자체가 소형이어서 이를 사용하는 기기(機器)는 진공관을 사용할 때 비하여 소형이 되며, 가볍고 소비전력이 적어 편리하다. 초기에는 잡음·주파수 특성이 나쁘고 증폭도 충분하지 못하였으나, 그 후 많이 개량되어 대전력을 다룰 수 있는 등의 장점이 생겼으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진공관을 대체하였다. 증폭작용과 전자신호를 위한 스위치나 게이트로서 역할을 하여 아날로그회로, 디지털회로 등 대다수의 전자회로에 사용된다. 집적회로는 작은 전자칩에 다수의 트랜지스터와 전자회로 구성요소를 집약시켜 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랜지스터 [transisto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7세기부터 1970년대까지 인류 생활을 변화시킨 160가지 물건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이 기업에 의해 창조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특허권의 70퍼센트와 연구 개발비의 3분의 2가 다국적기업에서 나온다. 2006년 미국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은 1320억 달러였지만 미국 기업들의 연구개발 예산은 2000억 달러에 달했다.

 

01. 연구개발의 선두에 선 기업

영국의 과학역사가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은 서양 문화의 두 가지 특징을 지적했다. 하나는 과학은 우주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을 약탈적 기술에 응용해 개인의 부 증대에 사용하는 것이 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험하는 데 수익의 15퍼센트를 사용하겠다. 당장은 수익을 내지 못해도 상관없다. 10년 동안 천천히 수익을 낼 것이다”

 

02. 과학기술 전쟁의 서막이 열리다

벨연구소는 노벨과학상 수상자 13명을 배출했다. 또한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회원 14명과 미국 공학한림원 회원 29명이 벨연구소를 거쳐갔다. 1934년부터 벨연구소의 서류에 연구개발을 뜻하는 새로운 단어 R&D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곳 연구원의 약 10퍼센트는 기초과학 연구에 종사하고 나머지 90퍼센트는 기술 개발을 진행했다.

 

“정보통신 산업은 전통 산업과 달리 기초연구에서 진전이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혁신을 이룰 수 있다. 트랜지스터의 탄생이 그것을 증명한다”

 

에사키 레오나 :: 오사카 출생. 1947년 도쿄[東京]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56~1960년 소니(주)에 근무하면서 다량의 불순물을 첨가해 만든 다이오드가 터널효과로 인해 음저항(陰抵抗)을 나타낸다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다이오드는 ‘에사키 다이오드(터널 다이오드)’라 불리고 있다. 1960년부터 미국에 건너가 뉴욕 요크타운에 있는 IBM 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니시나 기념상(1959), 아사히 신문상(1960), M.N.리브만 기념상(1961), 일본 아카데미상(1965), 일본 문화훈장(1974)을 수상하였다. 1973년 I.예이베르, B.D.조지프슨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사키 레오나 [Leo Esaki, 江崎玲於奈(강기영어나)]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일본 통산성은 일본 기업의 본부로서 전략적 업종을 선택하는 일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흐름을 결정한 이 기관은 미국의 선진 기술로 눈을 돌렸다. 통산성의 지휘 아래 미국 연구소의 발명 성과들이 일본 땅에서 하나둘씩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은 미국에서 기술과 특허를 사들였다. 단순히 복제하거나 재연을 한 것이 아니라 1달러에 특허를 사면 3달러 이상의 비용을 들여 기술을 혁신시켰다. 이런 기술 심화를 통해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2차 혁신 정신은 일본 경제 발전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많은 미국 기업들이 미국과 소련의 패권 경쟁에 필요한 군수물품을 생산하며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일본 기업들은 민간 전자제품 개발에 힘을 쏟았다. 유럽인들은 일본을 트랜지스터 판매원들이 모인 국가라고 비웃었지만 1960~1970년대가 되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1975년, 일본 통산성은 5대 전자회사를 연합해 IC회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기술 도입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일본이 자체 개발을 선언한 것이다. 1979년, 일본 기업들은 단숨에 미국 메모리칩 시장의 40퍼센트를 차지했다. HP의 시험 결과, 일본 메모리칩의 고장률은 미국 제품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일본 기업은 40억 달러를 쏟아부어 가격 전쟁에서 승리했고 미국 기업들은 메모리칩 분야에서 모두 철수했다. 이 사건은 실리콘밸리를 역사상 최악의 불황으로 몰아넣었다. 그 후 2년 동안 현지의 반도체회사 직원 5명 중 1명이 실업자가 되었고 HP와 애플마저도 일본에 메모리칩 공급 확대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이나 중국의 문화,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는 공감대 형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기준을 낮추어서라도 의견 일치에 도달하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미덕이자 가치관이다. 하지만 천지가 뒤바뀌는 혁신이란 서로 다른 관점들이 충돌하면서 촉발되는 것이다.

 

03. 기적을 실현하는 힘

미국의 특허 12건 중 1건은 이곳에서 나온다. 1980년대 실리콘밸리에는 3000개의 전자회사가 입주해 있었고, 1990년대에는 매주 평균 18개의 기업이 새로 탄생했다. 이곳에서 창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유럽의 12분의 1에 불과하고 필요한 자본도 유럽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혁신과 탐욕의 조합으로 실리콘밸리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스탠퍼드대학과 실리콘밸리 :: 스탠퍼드대학이 급부상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약33.104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드넓은 부지를 활용할 방안을 찾던 중 1959년 공과대 학장 프레드릭 터먼Frederick Terman교수가 한 가지 구상을 내놓았다. 이것이 바로 스탠퍼드대학의 전환점이 되었다. 대학 부지 가운데 약 4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저렴한 임대료를 받고 창업하려는 졸업생들에게 장기 임대하고 그들에게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제공하면서 실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스탠퍼드대학은 미국 최초로 학교 안에 산업단지를 설립했다. 산업단지 내에 속속 회사가 입주하면서 면적이 부족해지자 신생 회사들은 외부로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현재 전 세계 IT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실리콘밸리’다.

 

연방 정부가 대학에 과학연구비를 지원해도 연구 성과는 대학이 가진다는 것이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대학이 반드시 연구개발의 성과를 상품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기술 이전 방식을 통해 민간 및 개인기업에 제공함으로써 기업들이 계속해서 개발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종업원500명 이하의 소규모 기업을 최대한 배려하기를 바란다는 조항도 있었다.

 

20세기 말 과학기술은 자본보다 더 중요한 생산요소가 되었다.

 

벵갈루루 :: 데칸고원 남부산지의 해발고도 950m 지점에 있다. 오랫동안 옛 마이소르왕국의 수도로 번영하였으며, 1831~1881년에는 영국 통치부의 본부 역할을 했다. 1881년 인도국왕이 복위한 후 1947년 인도공화국에 통합될 때까지 영국의 통치부와 군대가 주둔했다.
시가지는 북과 남의 2지역으로 구분된다. 북구역에는 아름다운 왕궁과 인도과학연구소가 있다. 남구역에는 건물이 밀집된 구시가와 관공서·상업지역 등이 자리잡고 있다. 시가지는 도시계획에 의해 잘 정비되어 수많은 유럽계(系) 인도인이 거주하며, 이곳을 찾는 유럽인과 미국인 등 외국인이 많다.
항공기·전기기구·모직물·융단·피혁 등의 공업이 이루어지고, 주변 농경지에서는 기장·유료종자 재배와 소·양의 방목이 성하다. 벵갈루루대학(1964)·농업대학·라만과학연구소·국립항공학 연구실험실·마이소르 대왕 궁전·마이소르 정부박물관(1866)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벵갈루루 [Bengaluru]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세기 말 전 세계가 밀레니엄버그의 공포에 빠져 있을 때 제일 먼저 가장 완벽한 해결 방법을 생각해낸 것은 미국도, 일본도, 유럽도 아닌 인도 기업이었다.

 

벵갈루루 :: ‘삶은 콩’을 뜻하는 지명을 가진 이곳은 인도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16세기경에 건설되었다. 1985년에 미국 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가 벵갈루루에 디자인센터를 설립해 다른 다국적 IT업체들에게 인도라는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해주었다. 현재 벵갈루루는 이미 인도의 과학기술 중심지가 되어 있다. 인도 정부도 벵갈루루의 IT 산업 발전을 위해 충분한 정책적 지원을 제공했다. 1999년 인도는 정보기술부를 신설했다. 당시 세계적으로IT 전문 부처를 가진 나라가 많지 않았다.2000년 10월 17일 인도에서 IT 법안이 발효됨으로써 전자상거래 산업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한 법률적 보호 장치가 마련되었다. IT 산업의 발전은 벵갈루루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수요만 있다면 시장은 언제 어디서든 제 역할을 발휘할 수 있다. 일단 수요가 생겨나면 똑똑한 기업가들이 나타난다.

 

“새로운 제품, 새로운 기술, 새로운 시장은 새로운 조직을 탄생시킬 것이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기업들에게는 혁신적인 기술보다는 혁신적인 시장이, 혁신 능력보다는 혁신의 메커니즘이 더 중요하다. 혁신적인 기술은 혁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오며, 혁신적인 사고방식은 혁신적인 제도에서 나온다.

 

특허법의 원형이 된 ‘독점법Statute of Monopolies’이 1623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반포되었고, 훗날 미국도 특허권을 헌법에 포함시켰다.

 

기술은 생산비용을 낮추고 제도는 거래비용을 절감시킨다. 제도가 기술보다 우선한다.

 

 

 

제9장 | 신흥시장국가 중국의 야심

청나라 건륭 24년인 1759년, 중국 황제에게 서신 한 통이 전해졌다. 제임스 플린트라는 영국 상인이 보낸 것이었다. 중국 상인이 자신의 돈을 갚지 않아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그는 본국에 있는 ‘공반아’에서 자신을 베이징으로 보냈다고 밝혔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기업의 사무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다. ‘공반아’는 ‘기업’을 뜻하는 영어 단어 ‘컴퍼니’를 중국어로 음역한 말이다.

 

01. 전제정치 아래서 싹 틔운 최초의 기업 열풍

십리양장十里洋場(상하이 조계지의 번화한 거리를 이르는 말)’

 

개항 40년 후인 1882년, 한 중국 회사가 외국 회사들의 해운업 독점 구도를 깨뜨렸다. 바로 근대 중국 최초의 주식회사인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이다. 윤선초상국은 설립 10년 만에 해외에 여러 지사를 세웠으며 연 매출액이 은 160만 냥을 넘었다. 동인도회사에 의해 무력으로 강제 개항된 후 중국인들은 처음으로 자국 기업의 힘을 느꼈다.

 

1877년부터 1887년까지 10년 동안 영국에 등록된 주식회사가 1만 5165개에 달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던 미국과 독일에서 기업은 이미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어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다수의 대기업이 성장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통해 기업 제도가 처음 등장했다.

 

윤선초상국 :: 1870년대부터 개혁을 주장한 양무파는 국가를 부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수산업을 발전시키는 한편 교통운송, 광산, 철강, 방직 등 민간산업도 육성하기 시작했다. 1872년 이홍장李鴻章이 연해 지역의 해운업을 몰수하고 외국 선박의 침범을 막기 위해 거상 주기앙朱其昻과 주기소朱其詔 형제를 상하이로 보내 민간 투자금을 모집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설립한 회사가 ‘윤선초상공사輪船招商公司’였다. 이는 양무운동 중 군수기업이 민간기업을 겸하고, 관판官辦(정부가 직접 기업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방식)에서 관독상판 방식으로 전환한 첫 번째 사례였다. 윤선초상공사는 여객 운송과 조운漕運(현물로 거둬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수도까지 운반하는 것) 등 운송 업무에 종사했으며,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선박운송회사였다. 설립 직후부터 심각한 적자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7월 이홍장에 의해 윤선초상국으로 개편되었다.

 

양무운동 :: 자강운동自强運動이라고도 부른다. 1861년부터 1894년까지 청 정부 내의 양무파가 “서양 오랑캐의 장점을 배워서 그 힘으로 서양을 제압하자”고 주장하며 전국적으로 추진한 개량운동이다. 두 차례 아편전쟁을 겪으며 청 정부의 통치계급 내부에서 내우외환의 혼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양무파’와 ‘수구파’로 의견이 나뉘었다. 양무파는 관판과 관독상판, 관상합판官商合辦 등의 방식으로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켜 국력을 강화해 청 정부의 봉건통치를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무운동 :: 양무운동은 1861년부터 1894년까지 중국 청(淸) 나라에서 진행된 자강(自强) 운동이다. ‘양무(洋務)’란 다른 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관한 사무를 뜻하는 말이지만, 넓게는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양무운동이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군사적 자강과 경제적 부강을 이루려 했던 여러 정책들과 사회적 변동들을 나타낸다. 청(淸)의 동치제(同治帝, 1856-1874) 때 시작해 광서제(光緖帝, 1871-1908) 재임기까지 전개되어 이를 동치중흥(同治中興), 동광신정(同光新政)이라고도 하며, 일부 학자들은 자강운동(自强運動), 자강신정(自强新政) 등의 명칭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초기에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군수 공업의 육성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지만, 1870년대 이후에는 광공업이나 교육 등 다른 부문까지 근대적 개혁이 확산되었다.
양무운동은 함풍제(咸豊帝, 1831-1861)의 죽음 이후 중앙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공친왕(恭親王, 1832-1898)과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이홍장(李鴻章, 1823-1901), 좌종당(左宗棠, 1812~1885) 등의 한인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으며, 이들은 양무파로 불렸다. 공친왕은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의 대신으로 서양과의 협력 정책을 주도하며 양무 정책의 추진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태평천국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증국번 등의 한인 관료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정치를 확립해 중국의 영화를 되찾으려 했다. 서양의 무기와 군사 제도로 청군을 무장시키고, 근대적인 군수 공장을 세워 서양식 무기와 군수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민간 기업을 양성해 서양 상인에게 빼앗긴 이권을 되찾으려 했다.
양무론자들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을 내세우며 중국의 전통적 가치 체계와 서양 문물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중국의 전통적 가치는 도(道)나 체(體)에 해당하고 서구 문물은 기(器)와 용(用)에 해당하므로 서양 문물을 도입해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수구 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고 서양 문물의 수용을 통한 중국의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무운동은 19세기 중엽에 중국 청 왕조가 맞이한 안팎의 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들의 군사적 위협 앞에 무력감을 느껴 왔으며, 안으로는 1851년 봉기한 태평천국이 지배체제를 뒤흔들고 있었다. 마침내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北京]이 함락되었다. 피난을 간 함풍제가 병으로 죽자, 그의 동생인 공친왕(恭親王)은 정변을 일으켜 동치제의 생모인 서태후를 섭정으로 하며 실권을 장악하였다. 신유정변(辛酉政變, 1861)을 통해 새로 등장한 서태후 정권은 총리아문을 중심으로 서구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새로운 외교 관계를 추진했으며, 자강(自强)과 부국(富國)을 이루기 위해 서구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양무 신정(新政)을 추진하였다.
청 나라 정부와 관료들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을 겪으면서 서양의 근대적 무기의 우수함을 인식하였다. 때문에 양무운동에서 가장 먼저 추진된 것은 근대적 군수 공업의 육성이었다. 1865년 상하이(上海)에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 난징(南京)에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이 설립되었고, 1867년에는 톈진(天津)에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1860년대 초부터 서양식 총포, 탄약, 선박을 제조하는 군수공장들이 만들어져 1894년까지 전국에 모두 24개의 공장이 세워졌다.
이들 공장은 원자재를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하고 서양 기술자를 초빙했다. 기술 수준도 낮아 생산된 무기나 선박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 공장에 공급하기 위해 석탄, 철 등의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적 광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장에 부설된 번역관과 교육기관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 과학 기술 서적이 번역 보급되고, 새로운 기술 인력이 양성되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도 가져와 상선회사와 전보총국이 설립되었고, 석탄 운송을 위한 철도가 개설되었다.
이처럼 군수산업 부문에서 시작된 양무운동은 1870년대 이후 교육과 교통, 광공업 등의 부문으로 확산되었다. 방직(紡織)·제사(製絲)·제지(製紙) 등의 민생 공업 분야에서 상해기기직포국(上海機器織布局), 무창기기직포국(武昌機器織布局), 호북방적국(湖北紡績局) 등의 기업이 설립되었다. 양무기업들은 관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는 관판(官辦)도 있었지만, 관의 후원과 감독 아래 상인들이 자본을 모아 경영하는 관독상판(官督商辦)이 일반적이었다.
양무운동은 청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 사회에 근대적 변화를 가져왔다. 양무사업은 주로 개항지에서 추진되었는데, 그 결과 상하이와 같은 근대 도시들이 성장하였다. 광·공업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와 도시 노동자들의 성장을 가져왔으며, 농업에서도 양잠, 차 등 경제 작물의 재배가 늘어났다. 또한 서양의 학문과 언어, 기술을 가르치는 근대적 교육 기관이 설립되어 새로운 서구적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양무운동은 안팎의 여러 장애에 부닥쳐 제한된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양무운동의 가장 커다란 한계는 그것이 전국적 차원에서 통일된 계획 아래 추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양무파는 중앙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지 못했고, 개개인의 이해에 따라 독자적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공친왕은 서태후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1884년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탄핵을 받아 사임하였다. 그리고 양무파 관료들은 개인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지방 세력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들이 추진한 양무 정책은 지역적으로 편중되었고 효율성도 떨어졌다.
열강의 잇따른 침략도 청의 자강을 어렵게 하였다. 청은 양무운동 기간 중에 나타난 대만사건(1874), 청프전쟁(1884-1885), 청일전쟁(1894)에서 모두 일본과 프랑스에게 패배해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 베트남, 조선의 종주권을 잃었다. 이들 전쟁에서의 패배는 자강을 일차적 목표로 한 양무운동의 실패로 여겨졌고, 양무운동은 산업과 기술만이 아니라 정치·사회 제도의 근본적 개혁까지 이루어야 한다는 변법자강운동에 자리를 내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무운동 [洋務運動]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성세위언 :: 청(淸)나라 말기에 정관응(鄭觀應:1841∼?)이 중국 근대화를 논술한 저서.
14권으로 되었으며, 1895년에 완성하였다. 1898년의 16권본 등 몇 종류가 있는데, 판본(版本)에 따라서 내용에 차이가 있다. 저자는 청나라 말기의 개혁론자로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했고,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아편전쟁에 이은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되기 전에 영국·프랑스연합군이 광저우[廣州]를 공략하고 베이징[北京]까지 함락시키자 열강의 위협 속에서 중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군사(軍事)를 위주로 한 양무론에서 내정을 중시하는 변법론(變法論)으로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즉, 의회제도·산업·법률·교육 등의 제반문제에 대해서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세위언 [盛世危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04년 청 정부는 ‘흠정대청상률欽定大淸商律’을 반포했다. 중국에 최초로 회사법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황제 통치 체제하의 회사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보로운동 :: 1911년 5월,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과 4국 차관단의 차관에 의한 천한(川漢) 철도의 건설에 반대하는 쓰촨 성의 신상(紳商) 계층을 중심으로 한 회(會)가 조직되었다. 이 회는 각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파과(罷課), 파시(罷市) 운동을 주도하였다. 청이 이를 탄압하자 동맹회, 가노회 등 비밀 결사를 중심으로 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고, 이 운동은 곧 인근의 후난, 후베이, 광둥의 모든 성에 파급되어 신해혁명의 도화선인 우창 봉기에 연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로 운동 [保路運動]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강상원)

 

02. 거센 변혁의 물결

북양군벌 :: 이 정권을 베이양정부, 이 시대(1913∼28)를 베이양시대라 한다. 베이양은 선양[瀋陽] ·즈리[直隷:허베이] ·산둥[山東] 3성(省)의 총칭으로, 처음에는 즈리총독 룽루[榮祿]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즈리총독 겸 베이양대신(大臣)이 된 뒤로는 그의 사병적(私兵的) 색채가 짙어져, 신해혁명 및 그 이후 그의 정치적 책략은 이것에 바탕을 두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자 돤치루이[段祺瑞] 등의 안후이파[安徽派], 펑궈장[馮國璋] ·차오쿤[曹錕] ·우페이푸[吳佩孚] 등 즈리파[直隷派], 장쭤린[張作霖]의 펑톈파[奉天派]로 분열하였다. 안후이파 ·펑톈파는 일본, 즈리파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방의 혁명파나 서남군벌(西南軍閥)에 대항함과 동시에, 그들 상호간에도 베이징의 중앙정부와 지방의 지반에 대한 쟁탈전을 벌여 군벌혼전(混戰) 사태가 일어났다. 장제스[蔣介石]의 북벌(北伐)에 의해 어떤 것은 멸망하고, 어떤 것은 장(蔣)정권에 흡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이양군벌 [北洋軍閥(북양군벌)]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03. 본궤도에 오른 중국의 시장경제

향진鄕鎭기업(지방행정단위인 향, 진 주민들이 중소기업을 설립해 공동으로 생산, 경영하는 소규모 농촌기업)

 

도급경영 제도(국가가 기업과 도급계약을 체결해 국유기업의 경영권 및 사용권을 양도하는 제도)

 

1994년,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국가수출촉진전략’에 ‘이머징마켓emerging market 국가’, 즉 ‘신흥시장국가’라는 개념이 정식으로 등장했다.

 

이머징 마켓 :: '떠오르는 시장(emerging market)'이라는 뜻으로, 신흥시장이라고도 한다. 용어의 의미 그대로 금융시장, 그 중에서도 특히 자본시장 부문에서 급성장하여 떠오르는 시장을 가리키는데, 1981년 세계은행의 이코노미스트 앙투안 반 아그마엘(Antoine Van Agtmael)이 아시아 지역에 투자하기 위하여 조성한 사모펀드인 '이머징마켓 성장펀드(Emerging Markets Growth Fund)'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용어가 나오기 이전에는 '제3세계(Third World)' 또는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이라는 용어가 통용되었다.
아그마엘은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내외인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주식시장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으나, 이후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 가운데 상대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높고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국가의 시장을 통칭하게 되었다. 이머징 마켓은 해당 국가의 경제력이 빠르게 성장하고 개방화가 급진전되어 자본시장이 급성장하는 시장으로서, 국제자본의 관점에서는 고수익성을 노리는 금융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된다는 점에서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의 자본시장 발전 정도를 반영하는 척도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머징 마켓을 분류하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으며, 여기에 해당하는 국가들도 유동적이다. 각종 국제기구나 국제지수에서 거론하는 이머징 마켓 국가들로는 그리스·나이지리아·남아프리카공화국·러시아·루마니아·말레이시아·모리셔스·멕시코·방글라데시·베네수엘라·베트남·불가리아·브라질·아랍에미리트·아르헨티나·오만·우크라이나·이란·이스라엘·이집트·인도·인도네시아·중국·체코·칠레·카타르·콜롬비아·타이완·태국·튀르키예·파키스탄·페루·폴란드·필리핀·한국·헝가리 등이 있다.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나 넥스트 일레븐(Next Eleven:한국·멕시코·베트남·이란·이집트·튀르키예·인도네시아·필리핀·파키스탄·방글라데시·나이지리아) 등으로 거론되는 국가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의 경우, IMF(국제통화기금)에서는 선진 경제국,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와 세계은행에서는 고소득 국가군,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에서는 선진국에 해당하는 최상위국으로 분류된다. 또한 FTSE(Financial Times Stock Exchange) 지수와 S&P(Standard and Poors) 지수, 다우존스(Dow Jones) 지수 등에서도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MSCI(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지수와 러셀(Russell) 지수에서는 한국을 여전히 이머징 마켓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원인으로는 외국인투자등록제도 등으로 인하여 외국인 투자자가 금융시장에 접근하기 불편한 점, 원화가 국제화폐로 인정되지 않아 호환성이 결여된 점, 주식 양도나 장외시장의 편리성이 결여된 점, 선진국의 금융시장처럼 안정성을 갖추지 못하여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반면에 상당한 투자 위험을 감수하여야 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머징마켓 [emerging market]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93년 12월 29일 중국인민공화국 회사법이 제정되고, 1994년 7월 1일에 반포됐다. 기업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주체로서 처음으로 법률적 지위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제14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현대 기업 제도 채택이 건의되었다.

 

중국의 WTO 가입 :: 세계무역기구(WTO)는 유엔에서 독립된 영구적인 국제기구로1995년 1월 1일 정식 설립됐다. 세계경제 및 무역의 질서 유지를 담당하고 있으며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법인의 지위를 가진 국제기구로서 회원국 간의 분쟁 조정에 있어서 강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전신은 1947년 조인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다.

세계무역기구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과 함께 세계경제 발전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으로 불린다. 1995년 7월 11일, 세계무역기구 총이사회 회의에서 참관국 자격으로 중국의 가입을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이 1986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복귀를 신청한 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되기까지 15년의 세월이 걸렸다. 2001년 12월 11일, 중국은 세계무역기구의 정식 회원국 자격을 취득하고 143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렇게 끊임없이 더 높게, 더 멀리 날아야 하는 시대에는 평범한 사람들을 최대한 더 큰 무대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Interview inside 인터뷰 인사이드

중국 최초로 회사법이 제정된 것은 1993년 12월이었습니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외국 기업들이 상하이에 공장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시모노세키조약 :: 청·일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해 1895년 4월 17일 청국과 일본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체결한 강화조약.
조약의 배경
1894년 5월(고종 31) 조선은 동학농민운동(동학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고,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대립하였다.
1894년 5월 7일 조선은 동학농민군과 전주 화약에 합의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단 진정시켰다. 그리고 청과 일본에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 개혁이 필요하며, 동학농민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조선 역시 개혁은 일본의 철수 이후에 진행될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7월 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내세웠다. 또한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 선전포고 없이 아산 앞바다의 풍도(豊島)에 주둔하던 청 해군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7월 29일에는 성환(成歡), 9월 15~17일에 평양(平壤), 9월 17일 압록강 어귀 해양도 앞바다에서 청의 북양함대(北洋艦隊)와 일본 해군이 충돌하여 일본이 승리하였다. 10월에 일본은 만주로 진격하여 청의 금주성(錦州城), 11월에 여순(旅順)을 점령하였고, 1895년 1월 산둥성(山東省)의 위해위(威海衛)를 무너뜨려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조약의 체결
청은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나섰으나, 일본은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았다. 그러다 1895년 3월 24일 청의 전권대신(全權大臣) 리홍장(李鴻章)이 일본과의 협상 후 돌아가다가 일본인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한 일본이 본격적인 강화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본격적인 강화협상은 1895년 3월 30일부터 진행되었다.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3월 30일에 먼저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휴전 기간 동안 강화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議政書) 및 별약(別約), 2조항의 추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馬關條約]이라고 한다.
조약의 내용
시모노세키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②청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와 타이완[臺灣] 및 펑후섬[澎湖島]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③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兩)을 지불한다 ④청이 구미 열강과 체결한 통상 특권을 일본에게도 인정할 것 ⑤청의 사스[沙市]·충칭[重慶]·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의 개항과 일본 선박의 양쯔강[揚子江]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 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영업·무역의 자유를 승인할 것 등이다.
조약의 영향
1895년 4월 23일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은 일본이 청에게 할양받기로 한 랴오둥반도를 다시 청에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삼국간섭(三國干涉)]. 이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의 조치였다. 일본은 아직 3국과 겨룰 힘이 없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였고, 시모노세키조약의 랴오둥반도 반환은 취소되었다. 대신 일본은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 포기 대가로 3천만 냥의 추가 배상금을 받았고, 이는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군비 확장 등에 사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모노세키조약 [下關條約(하관조약)]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봉건 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당나라 때 시인 두목杜牧은 ‘아방궁부阿房宮賦’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진나라 사람들 스스로 슬퍼할 겨를이 없건만 뒷사람들이 그들을 슬퍼하도다. 뒷사람이 슬퍼하면서도 거울삼지 않는다면 그 뒷사람들 또한 후세 사람들을 슬프게 하리라.”

 

 

 

제10장 | 국경 없는 세계, 새로운 기업의 시대

01. 세계를 움직이는 다국적기업

염모제 :: 자연염료 또는 합성염료를 통해 모발의 화학적 성질을 이용하여 영구적 또는 준영구적으로 모발 색을 바꾸어 주는 염색제품.
기원
염모제는 1818년 프랑스 화학자 테나르(Thenard)의 과산화수소 발견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1860년 나폴레옹의 애인 코라 펄(Cora Pearl)은 과산화수소로 최초 염색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867년 화학자 티엘레이(E.H. Thiellay)와 헤어 디자이너 레온 휴고(Leon Hugot)는 과산화수소를 이용해 모발을 밝게 하는 법을 발견했다. 이후, 1863년 독일 의학자 호프만(Hoffmann)이 파라페닐디아민(paraphenylenediamine, PPDA) 을 발견하고, 1883년 파리 모네회사 사장이 이 PPDA를 염모제에 사용하는 특허권을 얻으면서 1907년 본격적인 상용화가 이루어졌다. 모네회사의 염모제 상용화를 바탕으로 1925년 프랑스 화학자 유진 슈엘러(EugeneSchueller)가 합성 염모제를 개발, 1935년에는 현대에 흔히 사용되는 크림 타입의 염모제가 출시되었다.
용도와 형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염모제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 기존의 염모제는 크림 타입으로써 바른 후 빗질을 해 주어 모발에 스며들 수 있도록 해야 했지만, 최근에는 거품형 염모제가 개발되면서 거품이 모발 안에서 크림 타입으로 변화해 자연적으로 모발에 침투하는 형태가 개발되었다.
원료 및 성분
산화염모제의 주요 성분은 색상에 따라 다양한 산화염료(검은색-파라페닐렌다아민, 흑갈색- 파라트리렌 디아민, 적색- 모노니트롤 페닐렌 디아민 등), 염료 침투를 용이하게 하는 알칼리제(암모니아, 계면활성제, 모노에탄올아민등), 염료 반응을 돕는 산화제(과산화수소, 과산화요소, 과붕산나트륨 등)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화학성분의 안전성, 피부 자극, 알레르기 부작용으로 천연이나 유기농, 저자극 염모제 성분이 사용되고있다. 인삼, 순수유기농 곡물, 식물성 섬유를 배합하고, 무암모니아 또는 천연 암모니아를 사용하거나 카모마일 추출물을 배합하기도 한다.
특징 및 효과
과산화수소와 알칼리제가 모발 안에서 만나 화학 반응을 통해 색을 변화시키는 염모제는 알칼리제의 종류 및 함량과 과산화수소의 농도에 따라 발색이 결정되지만 최근에는 두피 보호와 자연스러운 발색이 기본적으로 가능하다. 또한, 염색으로 인한 모발손상을 최소화하는 기능, 모발 보습효과, 자극적 향료의 감소, 모발 윤기 강화, 트리트먼트 등의 추가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염모제 [Hair Dye, 染毛劑]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로레알 전체 매출의 90퍼센트 이상을 프랑스 이외의 국가에서 거두어들였고, 50퍼센트 이상은 유럽을 제외한 나라에서 얻었다.

 

싱어 :: 1851년 미국인 발명가 아이작 싱어Isaac Singer가 손바느질을 대신할 수 있는 재봉틀을 발명했다. 싱어는 뉴욕에 공장을 설립하고 1853년 마침내 처음으로 재봉틀을 생산해냈다. 2년 후 싱어는 처음으로 분할납부 판매방식을 고안해 세계적으로 분할납부 방식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소비시장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1867년 싱어는 미국 공업회사로는 최초로 해외 공장을 설립하고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다국적기업으로 거듭났다. 현재 싱어는 브라질과 중국에 생산공장을 두고 있으며 전 세계 190여 개국에 판매망을 가지고 있다.

 

1991년 12월 25일 소련의 해체는 냉전의 종식을 의미하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냉전 종식의 중대한 의의는 바로 과거 전 세계의 시장을 가로막고 있던 정치 구조가 깨졌다는 데 있었다.

 

종합정보통신망(ISDN) :: ISDN의 구상은 국제전신전화자문위원회(CCITT)의 1980년 11월 총회에서 발표되었으며, 고도정보화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통신망으로서 한국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개발과 서비스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AT & T(American Telephone & Telegraph Co.)를 비롯하여 민간통신회사가 개별적인 디지털 통신망 구상의 실현을 도모하였으나, 한국과 유럽에서는 국가적으로 일원화된 시스템 건설을 지향하고 있다.영국에서는 영국통신회사(BT)가 시스템 X 교환망의 건설을 구상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텔레마티크 계획에 따라 국가적인 프로젝트로서 ISDN의 실현에 착수하고 있다. 독일은 텔렉스와 다텍스(데이터 통신망) 통합망 및 광섬유망(비그폰 계획)에 의하여 ISDN을 지향하고 있다. 한국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한국통신에서 ISDN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미 시범운영을 거쳐 1990년대 중반부터 사용 서비스를 하고 있다.
B-ISDN(broadband ISDN) 즉, 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은 간단한 데이터전송 또는 음성전송은 물론 영상전화, 영상회의, 고화질텔레비전(HDTV), 유선방송(CATV) 등 영상서비스와 정밀화면 컬러팩시밀리 등 다양한 고속전송 및 광대역전송을 가능하게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ISDN [integrated services digital network]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02. 소리 없는 글로벌 혁명

국가든 기업이든 역사적인 기회는 조용히 왔다가 금세 사라져버린다. 시대의 흐름을 이끄는 개척자만이 기회를 거머쥘 수 있다.

 

03. 문화의 충돌과 현지화 전략

2006년 5월, 코카콜라는 탄생 120주년을 맞이했다. 120년 동안 코카콜라의 배합법을 아는 사람은 10명을 넘지 않았다.

 

2006년 8월, 인도 대법원이 코카콜라에 배합법을 공개하든 판매를 중단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판결했다. 인도 과학환경센터에서 코카콜라의 잔여 농약성분이 기준치를 심각하게 초과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코카콜라의 아시아 사업은 일찍이 1925년 필리핀에서부터 시작됐다. 1929년 최대 해외시장은 상하이였다. 코카콜라의 다국적 경영은 매우 오래전, 아마도 다국적기업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코카콜라 :: 세계 최대 음료 기업인 코카콜라는 1892년 설립됐으며 본사는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위치해 있다. 코카콜라는 세계 음료 시장의 4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음료 시장 최다 판매량 3위 안에 드는 제품 가운데 두 가지가 바로 코카콜라(1위)와 다이어트콜라(3위)다.

 

1992년 코카콜라는 처음으로 글로벌 광고를 제작했고, 그해 열린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코카콜라의 CM송은 12개 언어로 전 세계에 방송됐다. 코카콜라는 세계 131개국의 38억 시청자가 이 광고를 시청했다고 밝혔다.

인도 경제가 개방되면서 코카콜라는 1993년 다시 인도 시장에 진출했다. 인도 정부가 자진해서 코카콜라의 진출을 요청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카콜라는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2006년 코카콜라의 위기는 양측의 화해로 마무리됐다. 11억 인구의 시장을 눈앞에서 포기할 기업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인도 정부 역시 과거 코카콜라의 철수로 22개의 콜라병 제조공장이 가동을 중단하고 수천 명의 실업자가 발생한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셜플랜Marshall Plan(1947~1951년 서유럽 각국에 대한 미국의 대외원조 계획)

 

마셜플랜 ::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6월, 황폐화된 유럽의 재건과 부흥을 위해 조지 마셜(1880~1959) 당시 국무장관이 하버드대학의 강연을 통해 처음 발표한 총 130억 달러 규모의 특별 원조계획이다. 공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이 계획은 2차대전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 경제를 재건, 민주주의 국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이루자는 것이 취지였다. 또한 마샬플랜의 목적은 서방 선진국의 경제성장 촉진과 공산주의의 확산을 억제하는 데 있었다. 이같은 미국의 의도를 간파한 소련은 1947년 6월 말 파리에서 열린 영국, 프랑스, 소련 외무장관 회담에서 이 계획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이 불참한 가운데 7월에 결성된 유럽경제협력위원회(CEEC)에 참가한 16개국이 유럽 경제재건안을 제출했고, 미국 의회는 이에 기초해 1948년 4월 유럽부흥계획을 승인하였다. 이 계획으로 유럽의 16개국이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형성하였고, 미국 무역에 대한 유럽의 의존성이 감소하게 되었다. 마샬플랜으로 마셜은 195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미국은 1948년부터 1952년까지 4년간 서유럽 16개국에 130억 달러를 무상 원조하였고, 이 금액은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였다. 원조의 대부분(90%)이 직접보조금이었으며, 10%만이 대출 형식이었다. 4년 뒤 유럽경제는 36%나 성장했고 선진국의 토대가 됐다. 유럽 산업 및 농업 생산이 회복되고 재정이 안정되었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네덜란드 등은 이 기간 동안에 국민총생산이 15~25%까지 증가하였다. 미국이 전후 유럽의 경제 부흥을 이끌고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마셜플랜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셜플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미국 기업은 유럽 반도체 산업의 50퍼센트, 컴퓨터 산업의 80퍼센트, IC회로 산업의 95퍼센트를 차지했다.

 

1989년 9월, 일본 소니가 콜롬비아영화사를 34억 달러에 인수했을 때 미국 여론이 들끓었다.

 

세계적인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문화적 특징이 너무 강한 제품을 수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내게는 재미있는 유머가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도 재미있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미국 정치계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 “모든 정치는 현지의 정치다.” 사실 정치뿐만 아니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내 집에 있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편안하다. 기업이 전 세계를 내 집처럼 만들 수 있다면 그 기업은 자연히 성공하게 될 것이다.

 

04. 세계라는 이름의 경제 무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2006년부터 매년 각 산업에서 새롭게 부상한 신흥업체들을 ‘글로벌챌린저 100대 기업’으로 선정한다. 인도, 브라질, 러시아, 중국 기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들 기업의 평균성장률은 세계 500대 기업의 약 3배에 달한다.

 

새로운 비즈니스의 축제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그 축제가 박수갈채만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재 글로벌 시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글로벌화된 통제 제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세계는 서로 같지도 않고 또 같아져서도 안 된다. 세계의 모습은 더욱 더 다양해져야 한다.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화이트헤드William Whitehead가 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전쟁의 용기는 무역으로 더 굳건해졌고 새로운 힘은 정복에서 나왔다. 지구의 유한한 자원과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충돌하는 한 투쟁과 충돌은 끝날 수 없다. 무역을 위한 전쟁은 무역으로 바뀌었고, 전쟁은 협상으로, 약탈과 점령은 협력과 상생으로 바뀌었다.”

 

역사는 뒤돌아보지 않으며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간다

 

미래는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Insight review 인사이트 리뷰

다이애나 전 영국 황태자비와 그녀의 이집트인 애인이 프랑스 파리의 한 터널 안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는 네덜란드인이 설계하고 독일에서 만든 것이었고, 운전기사는 벨기에 사람이었다. 사고 원인은 운전기사가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던 중 파파라치가 따라붙자 이를 따돌리기 위해 과속 운전을 한 것이었다. 당시 그들을 따라가던 파파라치는 이탈리아인이었으며 그가 타던 오토바이는 일본산이었다. 사고 후 다이애나는 미국인 의사에게 응급조치를 받았고 브라질산 약이 사용되었다. 한 중국인이 빌 게이츠의 제품을 이용해 이 소식을 친구에게 알리자 그 친구는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한 IBM 컴퓨터 앞에 앉아 그 메일을 읽었다.

 

15세기 중반 신대륙이 발견된 후 인류는 제1차 글로벌화를 경험했다. 1990년대부터 냉전 체제가 붕괴되고 신기술 혁명이 발생했으며 세계무역기구가 활동을 확대했다. 이로 인해 상품과 각종 생산요소들이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아 유통되고 배치되어 사상 최대 글로벌시장이 형성되었다.

 

글로벌화가 확대될수록 다국적기업들은 ‘현지화’라는 난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표준화’가 다국적기업들의 시장 개척에서 막강한 무기였다. 제품의 생산, 경영, 심지어 가격까지도 모두 통일시켰다. 하지만 글로벌화가 추진되면서 다국적기업과 현지 국가의 법률 및 규칙, 정부의 관리 제도 사이의 큰 차이로 인해 심한 충돌이 발생하고 말았다. ‘글로벌화’인가, ‘현지화’인가? 다국적기업들은 이 두 가지를 신중하게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5인 인터뷰 - 기업, 정부 그리고 시장경제의 미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여러 번의 경제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 위기가 지속된 기간은 평균 11개월이었고, 그 후6년간의 경제성장기가 찾아왔습니다. 길게는 경제 호황이 10년 동안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경제위기는 평균 지속기간의 두 배가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실업률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지요.

 

중국 경제는 지금까지 연평균 9퍼센트에 가까운 성장률을 유지해왔는데, 그중 6퍼센트 정도는 교육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나머지 3퍼센트는 어디에서 얻어졌을까요? 바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노동력입니다. 농업의 생산성이 높아지자 잉여 노동력은 1인당 생산성이 더 높은 제조업, 서비스업 등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런 산업에서 근로자 한 사람이 창출해내는 생산액은 농업에서보다 훨씬 많습니다.

 

‘인구 보너스(전체 인구에서 생산연령 인구인 15~64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해 노동력과 소비가 늘면서 경제성장을 이끄는 현상)‘

 

기업의 일상적인 경영은 기업 자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주주나 단체, 직원 등 관계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혼동하는 것이 바로 이익의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입니다.

 

공유지의 비극 :: 1968년 12월 13일자 <사이언스>에 실린 하딘의 논문에 등장하는 개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목초지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방목하는 소를 계속 늘릴 경우, 결국은 목초지가 황폐해져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이론.

 

 

 

후기 - 기업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생각하다

대국굴기 :: ‘대국이 일어서다’라는 뜻으로 2006년 11월 13일부터 11월 24일까지 중국중앙전시대 경제빈도(中国中央電視台 經濟頻道 : CCTV-2)를 통해 방송된 12부작 역사다큐멘터리. 스페인ㆍ포르투갈ㆍ네덜란드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일본ㆍ러시아ㆍ미국의 아홉 개 나라의 전성기와 그 발전 과정을 다루고 마지막에 결론인 대도행사(大道行思)를 넣어 12부작이 되었으며 중국민주법제출판사(中国民主法制出版社)는 동일 제목의 단행본판을 출간하였다.
주요 내용은 아홉 개 각 국가의 경쟁력과 권력 분점, 법치와 교육 등 제도적 강점을 집중 부각하여 매회 50분정도의 분량으로 편집되었다. 한국에서는 한국교육방송공사를 통하여 2007년 1월 29일부터 2월 10일까지 첫 방송을 하였고, 시청자들의 재방송 요구에 따라 2007년 6월 25일부터 7월 10일까지 재방송하였으며 단행본판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국굴기 [大国崛起, The Rise of the Great Nations, Dàguó Juéqǐ] (중국시사문화사전, 2008. 2. 20., 이현국)

 

첫째, 기업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 발전의 산물이며, 인류가 공유하는 문명의 성과다. 둘째, 아무런 문제도 없는 시대는 없으며, 영원한 해답도, 전지전능한 비결도 없다. 셋째,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분석하는 것이 매스컴의 본분이자 책임이다. 넷째, 이야기를 통한 서술이 필요하지만 줄거리 자체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 우리의 생명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우리보다 더 젊은 명제다.

 

헤겔은 “인간이 역사에서 얻은 유일한 교훈은 인간은 한 번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728x90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크로 위키노믹스  (0) 2023.06.21
월스트리트  (0) 2023.06.20
스티브 잡스  (0) 2023.06.18
한국 자본주의  (0) 2023.06.17
그로스 해킹  (0) 202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