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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월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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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양장본 Hardcover)
동양인의 시각에서 월스트리트의 역사를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월스트리트'의 동명 도서『월스트리트』.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공존하는 거리, 세계 금융의 명맥을 틀어쥐고 있는 거리인 월스트리트는 수차례의 전쟁과 테러의 세례를 겪은 후에도 여전히 세계 금융의 정상에 우뚝 선 채 끊임없이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 금융의 중심부로 깊이 파고들어 그 속의 비밀을 파헤치고 월 스트리트의 거물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투자의 신' 워렌 버핏의 독특한 투자 비결을 듣고 '공매도의 제왕' 제임스 채노스의 중국 기업 주식 공매도 계획을 엿듣고, 짐 로저스와 함께 오늘날 금융 위기의 실태와 향방에 대해 의논할 수 있다.
저자
CCTV다큐멘터리 월스트리트 제작진
출판
미르북컴퍼니(미르북스)
출판일
2011.03.22

 

역자서문

메이도프 ::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을 지낸 펀드매니저 버나드 메이도프(Bernard Madoff)가 고수익을 보장한다면서 미국, 유럽, 중동, 아시아 등의 개인 투자자로부터 신규 투자금을 유치해 그 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의 수익금을 지급한 금융사기 사건이다. 당시 메이도프는 매년 8~10%의 수익을 냈는데 이는 결국 폰지사기로 밝혀졌고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액은 650억 달러에 달한다.
애널리스트 해리 마코폴로스가 1999년 이 사건에 대해 사기 의혹을 제기하고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보했으나 무시당했고, 2005년과 2007년에도 증거를 제출했으나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전형적인 다단계 방식의 사기라는 것이 드러났으며 메이도프는 2008년 체포돼 15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이도프 폰지사기 사건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횡액(橫厄) :: 뜻밖에 닥쳐오는 불행.
사람은 좋은데 어쩌다가 그런 횡액을 만났을까.
[네이버 국어사전] 횡액[橫厄]

 

제현(諸賢) :: 여러 점잖은 분들.
학부형 및 동창 제현을 모신 가운데 본교 개교 5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 제현[諸賢]

 

 

 

추천사 

1981년 중국에서는 새로운 중국이 건국된 1949년 이후 최초의 국채가 발행됐다. 세계 최초의 채권이 발행된 지 무려 636년이나 지난 후였다. 이어 1991년에 상하이(上海)와 선전(深圳)에서 신 중국 최초의 주식이 발행됐다. 네덜란드에서 세계 최초의 주식이 탄생한 지 무려 389년이 지난 후였다.

 

긴 세월의 침묵 속에서도, 꽉 막힌 시공 속에서도 시대의 변화는 언제나 이뤄진다.

 

뉴욕의 옛 이름은 뉴 암스테르담이었다. 미국 초기의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고향을 그리면서 작은 어촌에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뉴 암스테르담에 중상주의 사상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고유의 금융 혁신 이념 역시 전파했다. 그러나 영국이 해상의 맹주로 군림하면서 뉴욕의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위협을 받게 됐다. 영국인들이 기선에 신기한 공산품과 신식 무기들을 가득 싣고 뉴욕 항에 정박하자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의 뉴욕 상륙을 막기 위해 허드슨 강 옆에 장벽을 쌓았다. 그러나 이 장벽은 영국인들의 상륙을 막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장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로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월스트리트이다. 월스트리트는 영어로 ‘Wall Street’, 다시 말해 ‘벽의 거리’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영어 발음을 본 따 ‘화얼제(華爾街)’라고 부른다.  

네덜란드인들이 뉴 암스테르담에 상륙했을 때 네덜란드의 경제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의 주식을 발행했을 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를 설립했다. 또 영국인이 뉴욕에 상륙한 무렵에는 대과학자 뉴턴이 금 본위제 연구에 몰입해 세계 최초의 국제화인 파운드화를 막 출범시키려는 시기였다.

 

“단일 자본이 충분히 성장하기를 기다려 철도를 건설한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세계에는 철도가 부설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식회사라는 수단을 통한 자본의 집중화(Centralisation)가 진행되는 짧은 시기에 철도망 구축을 가능하게 했다.”

 

“아무도 시장 경제가 완전무결하고 무소불능한 체제라고 단언하지 못한다. 시장 경제는 ‘좋지 않은’ 경제 형태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감히 단언하건대 시장경제는 인류가 지금까지 시험 삼아 실시해본 경제 제도 중에서 가장 ‘나쁘지 않은’ 일종의 시스템이다.”

 

 

 

01. 월스트리트

Chapter 1. 잠들지 않는 자본

뉴욕은 미국 최대 도시답지 않게 고작 5개의 구로 이루어졌지만 인구는 1800만 명으로 엄청나다. 그 중에서 맨해튼은 뉴욕시의 중심을 이루는 구로 면적이 고작 60km²에 불과하다. 하지만 뉴욕의 주요 상업, 무역, 금융, 보험 기업들 대부분이 이 맨해튼 섬에 집중돼 있다. 실제로 미국 500대 기업 중 3분의 1은 맨해튼에 본부를 두고 있다.

 

맨해튼의 남단은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금융 구역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취업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1km² 안에 무려 2000여 개의 금융 기관과 40여만 명의 금융 종사자들이 운집해 있다.

 

뉴욕은 미국과 세계를 연결시키는 끈입니다. 또 미국을 대표해 세계와 소통하는 관문입니다.

 

월스트리트와 은행업의 납세액이 뉴욕시 총 세수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승자는 생존하고 패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누구든 월스트리트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는 정글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토끼가 양으로 양이 늑대로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한 놈에게 잡혀 먹히고 맙니다.

 

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뉴욕 증권거래소는 줄곧 시대를 앞서가는 과학기술을 지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전보와 주가 표시기가 맨 처음 사용됐다는 점만 봐도 이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화가 발명된 다음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화기를 보유한 곳이 되었고 컴퓨터 응용 기술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에도 이곳에서는 이미 컴퓨터를 이용해 재래식 거래 방식을 변화시켰다.

 

지금은 유능한 트레이더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나 향후에는 보다 더 강력한 기술 개발 능력을 보유한 업체가 승자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자금 조달과 리스크 분담, 이 것은 할리우드가 월스트리트로부터 받을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다.

 

2008년의 경우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50여 개의 비교적 큰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발행해 1000억 달러의 자금을 조달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40%가 월스트리트의 뉴욕 증권거래소와 나스닥으로부터 조달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주요 자금원은 각종 저축입니다. 저축은 주로 연금기금과 보험회사에 집중돼 있습니다. 이 부분의 자금은 일정 수익이 보장돼야 합니다. 따라서 투자를 통한 가치 증식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저축액이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일부 자금이 월스트리트에도 흘러들었습니다. 이 거대한 자본 중에서 투자에 쓰는 부분은 흔히 개인의 저축이나 기업의 잉여 자금과 연결돼 있습니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가계 자산 중 평균 33~42%가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금융 시장에 투자된 것으로 분석한 것이다.

 

“미국의 실업률이 8.1%로 치솟았다. 이는 1983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최신 보도와 미국 노동부의 데이터에 의하면 2월에 또 6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 문제는 이제 국가의 핵심 과제로 대두됐다. 2007년 12월 금융 위기가 터진 이후 실업자 수는 450만 명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반수 이상이 지난 4개월 사이에 실업을 당했다.”

 

“투기가 모든 것을 압도하면 이미 잘못된 겁니다. 금전적 투자에는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투자 리스크를 최대화하면 재정 금융 체계와 은행에 반드시 위기가 발생합니다.”

 

가난한 국가는 월스트리트의 도움을 받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빈곤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러나 또한 부자가 가난뱅이로 변하게 되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합니다.

 

Chapter 2. 벽은 어디에

월스트리트는 처음에는 벽(Wall)이었다. 이곳에 맨 처음 온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나 식민지 개척자들과 전쟁을 벌일 때 이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저지대 국가로 유명하다. 전체 면적이 4만㎢에 불과하고 국토의 4분의 1 가량이 해수면보다 낮다. 이런 특수한 지리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농업을 크게 발전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바다를 막아 밭을 만드는 외에도 발전을 위한 다른 길을 반드시 개척해야만 했다.   

나막신을 신기 좋아하는 네덜란드인들은 13세기부터 바다에 눈길을 돌렸다. 해상무역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항은 400년 전부터 세계적인 항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암스테르담은 이 세계적 허브 항구를 발판으로 삼아 세계 최대 중계무역 시장으로 부상했다.

 

네덜란드는 1581년에 스페인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네덜란드 공화국이라는 독립적인 주권국가로 유럽 판도에 이름을 내밀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귀족과 평민의 엄격한 등급 구분을 없앴다. 또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의 정치, 경제 및 종교적 환경은 상당히 여유롭고 느슨해졌다. 유럽 각국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혹해 네덜란드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총 인구 중 반수 이상이 이민자들이었을 정도였다.

 

원항 :: ‘원양 항해’를 줄여 이르는 말.
풍어와 원항의 백일몽에 뱃삼처럼 한창 거리도 적막하다.
[네이버 국어사전] 원항[遠航]

 

네덜란드인들은 어떻게 이런 원항무역의 리스크를 해결했을까? 곧 이어 암스테르담에 등장한 주식회사가 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네덜란드에 주식회사가 생겨나기 20년 전에 영국에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영국의 주식회사는 엄격한 등급제도 하에서 몇몇 대주주가 자본을 합치는 방식으로 세운 것이었다. 자유와 평등의 국가인 네덜란드에서는 주식회사의 문이 누구에게나 다 활짝 열려 있었다. 귀족, 부자, 서민 심지어 노예를 막론했다. 누구나 다 주식회사의 주주가 될 수 있었다. 투자자들은 함께 리스크를 분담하고 이익을 공유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유한책임 회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일반인들이 힘들게 벌어 모은 돈을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맡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유한책임 주식회사는 지난 500~600년의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발명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발행한 세계 최초의 주식

 

훗날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을 세계 최초의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꼽는 이유도 모두 이런 역사적 사실에 연유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이 증권거래소는 역사상의 수많은 혁신을 이끌어냈다. 옵션, 선물, 증거금 거래, 주가지수 거래, 공매도 등 현대 금융시장의 전문용어들도 모두 이곳에서 생겨났다. 심지어 증시 개장을 알리는 종소리도 맨 처음 이곳에서 울려 퍼졌다.

 

네덜란드인들은 북미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1621년에 서인도 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새로 설립했다. 5년 후 서인도 회사는 60길더 가치의 천과 장신구를 인디언 추장에게 대가로 주고 맨해튼 섬을 매입했다.

 

북미 대륙과의 무역량 및 무역상들이 증가하면서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 남단에 영구적인 거주지를 건설했다. 그들은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도시를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인디언들과 기존의 다른 이민자들로부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뉴 암스테르담 북쪽에 높은 방벽을 세웠다. 월스트리트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다른 서구 국가의 이민자들은 북미 식민지를 종교와 정치적 박해를 피하기 위한 대피소로 생각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달랐다. 뉴 암스테르담을 북미 대륙 최대의 상품 시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네덜란드는 세계 금융에 두 가지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나는 주식을 발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환 은행을 설립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량의 외국 자본이 암스테르담으로 유입됐다.

 

네덜란드의 상징인 튤립은 사실 네덜란드의 특산물이 아니었다. 16세기 말 터키에서 네덜란드로 유입된 외래종이었다.

 

1630년대에는 진귀한 품종의 값이 살찐 황소 네 마리의 값과 맞먹었다.

 

네덜란드 튤립 가격은 1637년에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어 급락세로 돌변, 수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일부 품종의 가격은 심지어 최고가의 1000분의 1로 하락했다.

 

네덜란드 튤립 버블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금융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튤립버블 ::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에 대한 과열투기현상으로, 역사상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라 전해진다. 당시 네덜란드는 작물산업의 호황과 동인도회사 등에 기초한 풍부한 재정에 힘입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을 기록했고, 이로 인해 부에 대한 개인들의 과시욕이 상승하면서 튤립 투기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즉, 튤립시장은 전문가와 생산자 중심으로 거래가 형성되는 것이 정상이지만, 당시 귀족과 신흥 부자를 비롯해 일반인 사이에서도 튤립 투기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튤립 가격이 1개월 만에 50배나 뛰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내 가격은 형성되어 있는데 거래는 없다는 인식이 증가하였고, 법원에서 튤립의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버블이 순식간에 꺼졌으며, 튤립가격은 최고치 대비 수천 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이처럼 순식간에 버블이 꺼진 것은 꽃을 감상하려는 실수요보다는 가격 상승을 노린 투기 수요가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튤립버블은 정보기술(IT) 거품이나 부동산 거품 등이 부각될 때 거품의 역사적 선례로 많이 오르내리는 말로 등장했고, 최근에는 자산가격이 내재 가치에서 벗어나는 경제 거품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튤립버블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월스트리트 방벽은 인디언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해상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영국인은 막아내지 못했다. 1652년 해상 패권과 무역 항로를 차지하기 위한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전쟁이 드디어 폭발했다. 영국 해협과 양국의 식민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참패했다.

1664년 맨해튼 섬은 영국의 소유가 됐다. 영국 국왕은 뉴 암스테르담을 뉴욕으로 개명했다. 영국인의 맨허튼 섬에서의 지배 범위는 계속 커져갔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세웠던 방벽은 존재의 필요성을 잃게 됐다. 결국 방벽은 영국인에 의해 허물어졌다. 방벽이 서 있던 자리는 길이 됐다. 지금의 월스트리트이다.

 

네덜란드가 북미 대륙의 식민지를 영국에 빼앗긴지 얼마 안 돼 영국 본토에서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을 계기로 영국 런던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대체해 새로운 국제 금융 무역 중심으로 떠올랐다.

명예혁명은 영국 의회와 국왕 사이에 벌어진 권력 투쟁이었다. 1688년 영국 의회는 비밀리에 손을 써서 새로운 국왕을 옹립했다. 이어 이듬해에는 새로운 국왕의 권력을 제약하는 권리장전을 통과시켰다. 영국 왕실은 이후부터 제멋대로 조세를 부과하지 못했고 더불어 법률 집행이나 의원 선거에도 개입할 수 없었다. 명예혁명은 영국이 입헌군주제를 도입해 현대사회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됐다.

명예혁명 이후부터 영국의 정부 재정과 왕실 재정은 분리됐다. 영국 정부가 발행한 채권은 명실상부한 영국 국채가 됐다. 더 이상 왕실의 채무가 아니었다. 영국 국채는 의회의 담보를 바탕으로 신용도가 대폭 향상됐다.

 

명예혁명 :: 유혈(流血)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1685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로서, 가톨릭교 부활정책과 전제주의(專制主義)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종래의 심사율(審査律)을 무시하고 가톨릭교도를 문무(文武)관리로 등용하여 국민들이 싫어한 상비군(常備軍)을 설치하였다.
이어 1687~1688년에 선왕(先王)과 같이 신앙자유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실제로는 가톨릭교를 부활시키려는 의도였고, 1688년의 선언은 교회의 설교단(說敎壇)에서 이것을 낭독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해 캔터베리대주교를 비롯하여 7명의 주교가 반대청원을 하자, 왕은 그들을 투옥하였다.
이같은 폭정에 대해 국민들의 반감이 고조되던 중, 왕자 출생을 계기로 양측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원래 제임스 2세는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장녀인 프로테스탄트교도 메리에게 계승되리라고 기대하였으나, 1688년 6월 5일 왕자가 탄생함으로써 다음 치세에는 가톨릭교 정책개혁을 희망한 프로테스탄트교도의 꿈이 일시에 사라졌다.
따라서 왕에 대한 인종(忍從)의 의미가 없어지자, 의회에서는 토리당·휘그당의 양대 정당지도자가 협의한 끝에 6월 말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 윌리엄과 메리 부부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도록 초청장을 보냈다.
국내 귀족의 반란으로 소란한 가운데, 11월 윌리엄·메리 부부는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 남서부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하였다. 국내 귀족과 지방호족들도 잇달아 윌리엄·메리 부부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왕이 파견한 처칠도 왕을 배반하고 윌리엄 진영에 투항하고, 왕의 둘째딸 앤도 윌리엄군(軍)에 가담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은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왕비와 왕자를 프랑스로 도피시킨 뒤 자신도 탈출을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실패하였지만 윌리엄 부부의 묵인 하에 12월 도피에 성공하였다. 런던에 입성(入城)한 윌리엄 부부에게 1689년 2월, 의회에서는 ‘권리선언(權利宣言)’을 제출하여 승인을 요구하였다. 부부는 그것을 인정한 다음, 윌리엄 3세, 메리 2세는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권리선언’은 뒤에 ‘권리장전(權利章典)’으로서 재차 승인을 받았다. 이 장전의 원칙에 나타나 있듯이, 이 혁명은 17세기의 왕권과 의회의 항쟁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종래 의회의 권리를 수호함과 동시에 왕위계승까지도 의회가 결정할 수 있게 하여, 그뒤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예혁명 [Glorious Revolution, 名譽革命]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처럼 금융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유럽 각국의 상인과 은행가들은 런던으로 대거 이주했고 국제 무역과 금융 중심이 점차 런던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명예혁명을 계기로 영국 금융 지배권이 영국 국왕으로부터 의회 및 국민들에게 넘어왔습니다.

 

1694년 런던 상인들은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다. 또 영국 정부를 도와 국채를 발행했다. 잉글랜드 은행의 도움에 힘입어 영국 국채 발행량은 신속히 증가했다. 따라서 런던 금융시장의 발전을 위한 충분한 물량이 공급될 수 있었다. 나아가 영국의 해외 확장을 위한 전쟁 경비 역시 충분하게 조달할 수 있었다.   

이후 100년 동안 영국은 대외전쟁을 멈춘 적이 없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애초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전상을 하던 집안이었다. 가문의 창시자인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재산을 모으자 아들 다섯을 유럽 5개국에 각각 파견했다. 그 중 셋째 아들인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의 런던에 로스차일드 은행을 설립했다. 이후 영국의 부상과 더불어 로스차일드 가문의 사업 중심지도 런던으로 이전되게 됐다. 그들은 런던을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다국적 은행을 설립했다.

영국이 치룬 장장 100년 동안에 걸친 전쟁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1812년에 벌어졌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이 전쟁 자금을 지원한 영국군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크게 격파했다. 일설에 의하면 로스차일드 가문은 워털루 전투의 결과를 제일 먼저 알았고 이 정보를 통해 채권시장을 조작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제일 먼저 워털루 전투의 결과를 알고 영국 정부에 알려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시장을 조작하는 따위의 부정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근 1세기 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계 증권업의 3분의 1을 장악하게 됐다. 또 부동산업의 3분의 1 및 보석과 예술품 산업의 3분의 1의 자산을 소유하게도 됐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금융 제국은 영국의 세계 무역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더욱 확고하게 형성됐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채권은 전 세계에서 발행됐다. 그들은 각국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거나 각국 국채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얻었다.

 

19세기 중엽의 런던은 세계 산업, 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손색이 없었다. 당시 세계 국제무역 대금의 40%가 파운드화로 결제됐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영국의 해외 투자는 서구 열강들의 대외투자 총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영국 의회는 이 시기에 잉글랜드 은행에 중앙은행의 기능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은행은 이렇게 현대 중앙은행의 효시가 됐다.

 

주지하다시피 결과는 1783년 미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써 북미 13개 식민지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주권국가인 아메리칸 합중국으로 재탄생했다.

 

이 모든 것이 뉴욕에서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반드시 뉴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및 외국환 은행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고 영국인들은 국채, 다국적 은행 및 중앙은행의 개념을 개발했다.

 

Chapter 3. 두 갈레 길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 :: 1733년에 최초로 설립되었으나 1872년 보스턴 대화재시 일부가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렉터 필립스 브룩스(Rector Phillips Brooks, 1835-1893)와 헨리 홉슨 리차드슨(Henry Hobson Richardson)의 감독 및 설계로 재건축되었다. 재건기간은 1873년에서 1877년까지이다. 특히, 기와로 된 지붕, 다색장식, 거친 돌 쌓기, 대형 아치 등은 리차드슨 로마네스크(Richardson Romanesque) 양식의 시초가 되었다. 보스턴에서 유일하게 미국 건축가 협회(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 AIA)의“가장 대표적인 미국 건물 10위”에 선정되었다. 1885년 건축가들이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선정했고, 1970년 12월30일 국립사적지로 등록되었다. 지금도 일요일마다 하루에 4번의 예배를 보며, 9월에서 6월까지는 주중에도 3번의 예배가 있다. 예배뿐 아니라 지역 종교교육자 교육, 어린이 및 청소년 교육, 전 연령대를 위한 기독교 교육 등의 서비스를 실시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리니티 교회 [Trinity Church]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무엇 때문에 모든 잘못을 월스트리트 금융 기관의 탓으로 돌립니까? 위기는 그들이 만들어냈습니다. 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감독자들 역시 위기에 개입했을 것입니다. 국회가 행정부를 통해 빈민들에게 주택담보 대출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식 투자자들이 누구나 다 성공한다면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고 발전할 수 없습니다. 시장은 누군가 돈을 벌면 결국 어느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어 있는 곳입니다. 누구나 다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생활의 섭리입니다.”

 

1789년 4월 30일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뉴욕 증권거래소 건너편에 있는 페더럴 홀에서 취임식을 거행했다. 이어 뉴욕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상환 능력이 없으니 채무를 그대로 두자. 그러기는 하되 국가의 체통은 지키고 국가의 신용은 잃지 않는다”

지금도 미국의 금융 박물관에는 해밀턴이 24세이던 1781년에 했던 말이 수록돼 있다. “과도하지만 않다면 어느 정도의 채무는 국가에 축복이 될 수 있다.”

당시 재무부에 남은 것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화폐와 독립 전쟁 시기에 발행한 다양한 채권과 차용증뿐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밀턴 프로젝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재무부에서 새 지폐를 발행한다. 이어 기존 지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액면 가격에 따라 1대 1의 비율로 새 지폐와 바꾼다. 이 방법으로 기존 지폐를 시장에서 퇴출시키고 신용이 높은 새 지폐로 기존 지폐를 대체한다. 다음에는 정부에서 새 채권을 발행한다. 새 채권은 새 지폐로만 구매하도록 규정한다. 이 방법으로 새 지폐는 다시 재무부로 유입된다. 재무부는 이 자금으로 독립 전쟁 시기에 발행한 채권과 차용증을 회수한다. 이로써 낡은 채무는 청산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국가 신용을 잃지 않으면서 새 부채로 낡은 채무를 대체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해밀턴 프로젝트를 이른바 ‘회전문 프로젝트’라고 상징적으로 비유했다.

 

그들은 ‘회전문 프로젝트’가 의회를 통과하기 전부터 각 주를 전전했다. 액면가의 10분의 1의 가격으로 낡은 지폐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연방 정부와 같은 배를 탄 월스트리트 브로커들은 해밀턴 프로젝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실시되기만 하면 사재기한 낡은 화폐를 팔아 폭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아버지는 큰 부자였습니다. 제퍼슨은 네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이후 수백 명의 노예와 버지니아 주의 수천 에이커의 땅을 물려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젊은 시절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1776년 초 여름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의 주요 기초자의 신분으로 필라델피아 식민 정부 회의실 맞은편의 자그마한 여관에 투숙했다. 며칠 후 그곳에서 「독립선언문」 초안이 탄생했다.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에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 조물주가 부여한 인간의 권리 가운데는 생명,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썼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이 국가의 신용과 운명을 장악할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권리와 의무는 항상 공존한다

 

“제퍼슨은 해밀턴 프로젝트가 연방 정부에 너무 큰 공권력을 부여한 것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제퍼슨이 원하는 것은 ‘작은 정부’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해밀턴과 제퍼슨 이 두 사람의 분쟁이 지금의 미국 양대 당파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는 사실이었다. 더불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 역시 그때부터 시작됐다. 당연히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제퍼슨의 이상향은 젊은 농장주들이 다스리는 국가 내지 세계였습니다. 다시 말해 젊은 농장주들이 자체 농장을 경영하는 자영농들의 천국이었습니다.”

 

“해밀턴은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조업의 발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때문에 기업가와 공장에 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금융 시스템 구축을 제창했습니다.”

 

1790년 초여름 제퍼슨과 해밀턴은 모두 월스트리트에 있었다. 해밀턴은 국회에서 ‘회전문 프로젝트’를 통과시킬 수 있도록 계속 유세에 열을 올렸다. 반면 제퍼슨은 미국의 정치 중심지를 뉴욕으로부터 다른 도시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타협과 양보가 있어야 했다. 실제로 1790년 6월 20일 토머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 이 두 건국 지도자는 각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침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더불어 미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대화를 나눴다. 이어 한 달 사이에 대화의 가시적 성과가 나타났다. 해밀턴의 ‘회전문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국회를 통과했다.   

대신 1790년 8월 연방 정부는 뉴욕을 떠났다. 이때부터 월스트리트와 워싱턴 정부는 각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1793년까지 총 6420만 달러의 국채를 새로 발행해 묵은 빚을 완전히 청산했다. 해밀턴으로서는 “과도하지만 않다면 어느 정도의 채무는 국가에 축복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을 실천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채무는 해밀턴에 의해 새로운 금융 상품으로 둔갑해 월스트리트에 흘러들었다. 월스트리트의 브로커들은 국채 가격을 끊임없이 끌어올렸고 월스트리트는 자본 통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794년 미국의 국채는 유럽에서 최고 신용등급을 받았다. 이때부터 유럽 자본이 바다 건너 신생 국가 미국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해밀턴이 발행한 미국 국채는 미국 경제와 월스트리트를 소생시키는 전기로 작용했다.

 

“미국인들은 권력의 집중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느낍니다.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즉 1913년에 미국에 비로소 중앙은행이 탄생한 것도 모두 이런 두려움과 관계가 있습니다.”

 

2009년 2월 뉴욕 주 은행 감독국은 미국 실업률이 무려 10%에 육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극심한 경기 침체로 서민 경제가 신음하는 와중에도 월스트리트의 보너스는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무려 203억 달러로 2008년 대비 17%나 증가했다.

 

1792년 5월, 21명의 중개인과 3개의 중개 회사는 월스트리트 63번지의 종려나무 아래에서 역사적인 합의 하나를 이끌어냈다. 자기들끼리만 거래를 하되 외부인과 거래를 할 때에는 수수료를 받기로 하는 내용이었다. 일명 「종려나무 협의」로 불리는 이 합의는 월스트리트 최초의 자체 관리 시도로 알려져 있다.

 

1900년에 이르러 미국의 GDP는 처음으로 영국을 초월했다. 세계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국가가 됐다. 그 해 미국 증시의 시가 총액도 GDP의 3.2배인 600억 달러를 기록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잘못을 고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잘못을 범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1907년 10월 22일 미국 재무부 장관은 직접 모건 도서관을 방문했다. 모건은 재무부 장관에게 2500만 달러를 긴급 조성해 유동성을 늘일 것을 강조했다. 또 은행에 시민들의 예금 인출 필요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한 자금이 확보될 경우 사태는 바로 진정될 것이라고 조언을 했다. 처음 직면해본 위기 상황에서 그 누구도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당시 모건은 70세의 고령이었다.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은행가로 손꼽혔다.

 

“새벽 네 시에 모건이 성명서를 들고 방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한 은행 총재의 소매를 잡아 책상 앞에 끌고 가서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여기에 서명하시오. 펜은 여기에 있소’ 그 총재는 마지못해 성명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성명서에 서명했습니다.”   

모건의 진두지휘 하에 은행가들은 2500만 달러에 이르는 긴급 자금의 공급에 동의했다. 이처럼 1907년의 금융 위기가 장기간 지속되지 않고 더 큰 손실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모건의 덕택이었다.

 

“정부는 어떤 것이 합법적인 상업 행위인지만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도덕적이고 올바른 상업 행위인지는 업종 자체가 가르쳐줍니다.”

 

Chapter 4. 도금시대 (The Golden Age)

이리 운하 :: 길이 약 584km. 깊이 12m. 표면 너비 12m. 뉴욕주 북부의 개척사상 유명한 운하이며, 허드슨강 연안의 올버니에서부터 출발하여 모호크 계곡을 종관(縱貫)한 다음 버펄로 부근에서 이리호에 이른다.
1820년에 부분적으로 완성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1827년이다. 이 운하의 완성으로 대서양 연안의 뉴욕시와 5대호(湖)가 주운(舟運)으로 연결되었으며, 중서부와 서부의 개척 및 농작물 반출에 크게 이바지하고 운하를 따라 크고 작은 도시들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1850년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철도와 운영상의 부정 등으로 1882년에 이르러 그 기능이 정지되었다.
현재의 수운은 바지 운하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리 운하는 뉴욕주가 운하의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1905년부터 이리 ·섐플레인 ·오스위고 ·카유가세네카 등 4개 운하를 통합하기 시작, 13년 걸려서 완성한 것이며 이리 운하 부분은 이 운하망의 주요 간선이 되어 있다. 이리 운하의 일부는 사적(史蹟)으로서 보존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리운하 [Erie Cana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뉴욕은 세계적인 대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인구는 850만을 초과한다. 이 중 3분의 1은 이민자들이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무려 170종에 달한다.

 

세계 대도시 중에서 도시 역사가 1000년이 안 되는 대도시는 뉴욕이 유일하다.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전 세계 금융 자산의 40%를 장악하고 있다.

 

19세기 미국의 국토 면적은 지금의 2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애팔래치아 산맥이 당시 미국을 동과 서 두 부분으로 갈라놓았다. 뉴욕을 대표로 하는 동부 지역은 상업이 발달했다. 또 서부 지역은 전통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지금도 미국 서부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다. 일조량이 충분해 농업의 발전에 아주 적합하다. 따라서 미국의 중요한 곡창 지대일 뿐 아니라 동부 무역 지대의 물자 공급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 서부의 물자를 동부로 운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에는 서부에서 밀가루 1톤을 동부로 운송하는 데는 대략 20여 일이 소요됐다. 당시 밀가루 원가는 1톤 당 4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운임이 기가 막혔다. 무려 120달러나 됐다.

 

1817년 더윗 클린턴이 뉴욕 주지사로 당선됐다. 이 신임 주지사의 꿈은 미국 동부와 서부 사이의 운송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의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뉴욕에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풍부한 수자원을 자랑하는 오대호가 있다. 여기에 인공 운하를 건설해 오대호의 다섯 개 호수를 하나로 연결한다. 이어 뉴욕의 천연 항구로서의 우위를 이용할 경우 동부와 서부를 연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계와 통할 수 있는 수상 통로까지 개통이 가능하다.

 

운하는 뉴욕을 미국에서 제일가는 운송 허브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연방 정부의 연간 재정 지출 규모는 2000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클린턴 주지사가 제출한 이리 운하 건설 예산은 700만 달러였다. 연간 정부 지출의 3분의 1을 일개 주의 수상 통로 건설에 투입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연방 정부는 클린턴 주지사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뉴욕 주에서 거액의 자금을 급히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흥분했다. 당시 관례에 따라 1%의 위탁 수수료율을 적용해도 7만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7만 달러면 당시로서는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라 할 수 있었다.

 

뉴욕 주 정부는 갑문마다 톨게이트를 설치하고 통행세를 받았다. 놀랍게도 그 해 통행세 수입은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운하 건설에 투입된 자금은 불과 100만 달러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충분한 자금의 뒷받침이 이어지자 이리 운하 건설은 가속도가 붙었다. 원래 10년으로 계획했던 공사 기간이 2년이나 단축돼 드디어 1825년에 준공을 보게 됐다.

 

운하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과거 밀가루 1톤을 서부에서 동부로 운송하는데 드는 시간은 운하의 개통과 더불어 3분의 1로 단축됐다. 운임은 무려 4분의 3이 절감됐다. 이로써 서부의 농산물은 이리 운하를 타고 줄기차게 동부 시장으로 운송됐다.

 

이리 운하는 뉴욕에 미국의 다른 도시들과 차별화되는 절대적 우위를 부여했습니다.

이리 운하의 큰 성공은 이른바 기폭제가 됐다. 미국의 각 주에서는 앞을 다퉈 채권을 발행한 다음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840년까지 미국에서는 총 1억2500만 달러를 투자해 총 연장 5천km의 운하를 건설했다.

 

현재 뉴욕 증권거래소 거래장에서 근무하는 트레이더는 대략 3000명 정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5년 전에는 5000명, 10년 전에는 15000명의 트레이더가 있었다. 트레이더인 데이브 헨더슨의 말이 왜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를 웅변해준다.

 

뉴욕 증권거래소 역사상 첫 번째 강세 시장은 언제 찾아왔을까? 1830년대에 나타났고 이어 1835년에는 뉴욕 증시의 일일 거래량이 8500주에 이르렀다. 7년 사이에 50배나 증가한 것이다. 증시의 상승세를 이끈 일등공신은 바로 철도 테마주였다.

 

당시 철도 1마일을 건설하는 비용은 3만6000달러에 달했다. 이에 반해 미국 가정의 연 평균 소득은 100달러 남짓한 상황이었다.

 

드디어 1830년에 미국 최초의 철도가 개통됐다. 총 연장이 21km인 이 철도는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설된 철도였다.   

1835년까지 월스트리트에서는 3개 철도 회사의 주식만 거래됐다. 그러나 1850년에 이르러서는 월스트리트에 상장된 철도 회사는 38개로 늘어났다. 철도 테마주와 채권은 미국의 유통 가능한 증권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미국의 철도 총 연장은 1830년에 23마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1850년에 9012마일, 1860년에는 3만626마일로 늘어났다. 영국을 바로 추월했다.

 

1861년 4월 21일 남북 전쟁이 시작됐다.

 

1일 군비 지출은 100만 달러를 초과했다. 전쟁 초기에는 남군이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우세를 차지했다.

 

“전쟁은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하는 매매입니다. 중국 속담에는 ‘전쟁에 필요한 것은 돈과 총알이다. 항상 가장 부유한 쪽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매일 징병 광고가 실렸다. 그러나 군대에 가기 싫은 청년들은 300달러의 면제 비용을 내면 병역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했음에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연방 정부의 재정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전쟁 초기에 연방 정부의 채무는 이미 6000만 달러를 초과하고 있었다.

 

연방 정부가 은행가 제이 쿡을 찾아와 5000만 달러의 전쟁 채권 발행을 대행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제이 쿡은 연방 정부의 거래 제의를 받고 은근히 기뻤으나 걱정도 없지 않았다. 당시까지 월스트리트는 부자들끼리 서로 자금을 융통해서 쓰는 이른바 금전 클럽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자금 조달 능력이 제한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채권 마케팅 방식을 혁신해 분할과 일반 공모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미국 국채를 판매했습니다. 고액 채권을 소액으로 분할한 다음 사람들의 애국심을 자극해 국채를 매입하게 했습니다.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도 국채 매입이 애국과 횡재의 지름길이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소액 국채를 구매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으로 5000만 달러어치의 국채를 모두 팔았습니다. 따라서 일부 역사서에서는 그를 일컬어 ‘내전 금융가’라고도 합니다.”

제이 쿡은 국채 매입을 권유하는 광고에 자극적인 문구를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게 바로 “승리를 위해 전쟁 채권을 구매하십시오”라는 내용의 카피였다.   

제이 쿡은 대중의 애국심을 교묘하게 이용해 전쟁 채권의 발행에 성공했다. 순조롭게 전쟁 자금을 조달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채권 투자가 대중화 시대로 진입하는 첫 걸음이 됐다.

1860년대 미국에는 은행에 예금을 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또 주식을 보유한 사람도 1% 미만이었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여윳돈이 생기면 현금을 침대 밑에 감춰두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국민의 5%가 전쟁 채권을 구매했다.

“내전이 갓 시작됐을 때 6500만 달러의 국채를 발행했습니다. 그러나 내전이 끝난 후, 즉 4년 후에는 국채 규모가 27억 달러로 급증했습니다.”

 

1865년까지 연방 정부가 발행한 국채 규모는 27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미국 재정 수입의 7배, GDP의 27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월스트리트 금융가들은 4년 동안 북군에 충분한 전쟁 자금을 조달해줬다. 그러나 남부 농장주들을 대표로 하는 남군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재정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들은 연방 정부를 본받아 전쟁 채권을 발행하려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1864년 5월 남군이 투항을 선포하면서 미국 내전은 종식됐다. 미국은 남북 전쟁 기간에 총 150억 달러의 군사비를 쏟아 부었다. 북군과 남군은 합계 총 1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우리는 북군의 군사력에 패한 것이 아니었다. 자금력에 패했다.”

 

“전쟁 자금은 모두 월스트리트를 거쳐 조달됐습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는 별로 유명하지 않던 월스트리트가 일약 런던에 버금가는 세계 두 번째 금융 시장으로 부상했습니다.”

 

19세기 중엽 미국은 세계에서 경제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국가가 됐다. 그럼에도 1860년 미국이 세계 제조업 총 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8%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의 5.2%보다 훨씬 못했다. 부동의 1위는 32.9%의 중국이었다. 그러나 1900년에는 미국이 세계 1위를 차지하게 됐다.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8%였다. 영국과 중국은 각각 9.45%와 11.1%를 기록했다.

 

“미국의 첫 번째 인수, 합병 붐은 아마 1898년~1902년 사이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19세기 말 디플레이션의 발생으로 말미암아 기업 간 경쟁은 치열해졌지만 사실상 제 살 깎아먹기였습니다. 경쟁은 누구나 다 수익을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1882년 록펠러는 뉴욕에 세계 최초의 석유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1890년에 미국 전체 정유 물량의 95%, 송유 물량의 90% 및 원유 생산의 25%를 독점했다.

 

신디케이트 :: 참가기업은 생산면에서는 독립성을 유지하나 판매는 공동판매회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독점적 판매조직의 독점적 시장지배력을 향유할 수 있어,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중간형태라고 할 수 있다.
카르텔의 경우, 가격 ·수량협정 안에서 각 기업이 경쟁을 하게 되는데, 이같은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제품의 판매를 개별기업으로부터 공동판매 기관으로 옮기고, 생산 할당이나 합리화를 지도하여 시장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기업조합(企業組合)을 신디케이트라고 한다. 다만 판매에 관하여 갖는 구속력에 비하여, 생산단계에 대한 강제력은 상대적으로 작아서 그 면에서의 기업의 독자성은 유지된다. 또한 이같은 원래의 의미에서 전화(轉化)되어, 거액의 유가증권 인수시에 결성되는 일시적 조직으로서의 금융업자의 인수단체를 신디케이트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디케이트 [syndicat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모건이 우리 카네기 철강 회사를 사들일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인수 가격은 우리 쪽에서 결정하라고 합니다.”   

카네기는 24시간 후에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카네기는 종이에 그가 원하는 인수 가격을 적어 모건에게 보냈다.   모건은 4억 8000만 달러라고 적혀 있는 가격을 보고 흔쾌히 거래를 수락했다.   

월스트리트에 구전돼 내려오는 일화에 따르면 모건은 카네기 회사의 일부 지분을 인수한 다음 카네기에게 수표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축하합니다, 카네기 선생! 선생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셨습니다.”   

모건은 짧은 12주 사이에 카네기의 철강 제국과 몇몇 다른 철강 회사를 전격 인수했다. 이로써 14억 달러를 자본금으로 하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기업이 탄생했다. 당시 미국 정부의 연간 지출은 5억 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월스트리트에서는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에게 물었다.   

“누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학생이 대답했다.   

“BC 4004년에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서기 1901년이 돼 JP 모건이 세상을 바꿨습니다.”

20세기 초 월스트리트의 주도 하에 미국 전역에서 인수와 합병 열풍이 불었다. 이 열풍 속에서 해마다 3000개의 중소기업이 사라졌다. 대기업들은 미국 내 대부분의 시장을 점유하게 됐다. 1910년에 이르러 미국 트러스트 조직은 800개에 달했다. 또 72개 대기업의 시장 점유율은 40%에 달했다. 심지어 그 중 42개 대기업의 시장 점유율은 무려 70%에 이르렀다.

 

1913년 4월 30일 모건은 이탈리아에서 객사했고 그날 뉴욕 증권거래소는 반나절만 문을 여는 것으로 망자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다음날 신문은 모건이 남긴 유산이 6000만 달러라고 보도했다. 록펠러는 이 기사를 읽고 “모건은 부자가 아니었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석유 왕 록펠러의 자산은 10억 달러를 헤아렸다. 또 철강 왕 카네기의 자산은 4억 달러였다. 철도 왕 밴더빌트의 자산 역시 5억 달러 이상이었다.

 

모건이 살아 있을 때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다. 그가 사실상 혼자 힘으로 미국 중앙은행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1893년과 1907년의 두 차례 금융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를 도왔다.

 

1933년 미국 의회는 모건 하우스를 JP 모건과 모건 스탠리로 강제 분할시켰다. 모건의 금융 제국의 시대는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겉은 휘황찬란하나 속은 썩어 있다. 도덕이 상실되고 온갖 위기가 잠재돼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기간을 황금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속이 텅 비고 온갖 모순이 난무하는 도금시대일 뿐이다.”

 

뉴욕의 부자들은 19세기부터 월스트리트에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유럽 귀족들의 생활을 모방하는 행보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미국의 슈퍼 부자들이 개인 재산을 학교를 비롯해 병원, 박물관, 극장, 공공 도서관 및 자선기금 등에 기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후 미국에서 개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풍은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청나라 말엽인 1896년 직예총독(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 자리에 있던 리훙장(李鴻章)이 뉴욕을 방문했다. 뉴욕에 도착한 첫 날 그는 월스트리트의 증권가를 지나면서 수행한 미국 관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청나라와 유럽에서 이렇게 높은 초고층 빌딩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청나라도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과 유럽 자본의 중국 진출을 환영합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에는 해마다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비로소 중국의 자본 시장이 다시 가동된 것은 근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Chapter 5. 실리콘밸리 방정식

나스닥은 세계 최대의 장외 주식시장이다. 약 3000 개의 기업이 상장돼 있다. 하루 거래량은 25억 달러에서 4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 증시 거래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얘기이다.

 

1970년대 초 미국 증시는 인플레이션, 베트남 전쟁, 오일 쇼크 등 잇따른 악재로 인해 침체가 계속됐다. 월스트리트의 금융 기관들 역시 곤경에 빠졌다. 불확실성이 갈수록 가중되는 이 시기에 미국증권업협회(NASD)는 과감한 금융 혁신을 시도했다. 증권시장에 100% 전자화된 거래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1971년 2월 8일 한 노천의 공터에서 나스닥 증권거래소가 설립됐다. 성대한 설립 기념식은 없었다. 관심을 보이는 언론 매체 역시 없었다. 나스닥은 당시로서는 최신 첨단 전자 거래방식을 채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시장에서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잘 모르는 이른바 ‘무명주’만 거래된 탓이었다. 대부분의 주식 가격도 1달러의 8분의 1 내지 16분의 1로 매우 낮았다. 상장 기업들은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 자격을 갖추지 못한 소기업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뉴욕 증권거래소는 이미 180년의 역사를 자랑했다. 상장을 원하는 기업에 대해서도 가혹하리만치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따라서 미국의 중소기업들은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할 수가 없었다. 나스닥은 뉴욕 증권거래소 문밖으로 밀려난 이들 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초기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걸었다.

“나스닥은 모든 기업을 위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굳이 조건을 제시한다면 생존 기간이 12새월 이상인 기업은 모두 나스닥에 상장할 수 있습니다.“

 

나스닥 :: 세계 각국의 장외 주식시장의 모델이 되고 있는 미국의 특별 주식시장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벤처기업들이 자금조달을 위한 활동기반을 여기에 두고 있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반도체의 인텔, 매킨토시컴퓨터의 애플 등이 여기에 등록되어 있다.
1994년 7월 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처음으로 돌파했으며, 주식 매매량이 뉴욕증권거래소를 능가하고 있다. 1999년 상반기 현재 시가총액은 3조 2100억 달러에 달하며, 이 중 컴퓨터 관련기업 40%, 제조업 29%, 금융업 14%, 텔레커뮤니케이션산업 12%씩을 차지하고 있다. 1999년 12월 31일 나스닥지수는 4069.29포인트로 마감되어 최고치를 경신하였다.
나스닥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회사설립 초기 적자를 기록하는 기업에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어 기업들이 주식시장에 쉽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로서도 위험성은 뒤따르나 높은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매력에 끌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인텔 등이 회사를 뉴욕증권시장에 상장시킬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있는데도 나스닥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하이테크기업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점을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스닥 [NASDAQ]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나스닥은 오랫동안 찬밥이었다. 그러나 설립 15년 후 처음으로 월스트리트의 집중 관심을 받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때는 1986년이었다. 당시 31세의 한 젊은이(빌 게이츠)가 기업 설명회에서 자신이 직접 작성한 보고서를 읽었다.

 

“그때 당시 주가가 1주당 21달러였으니까 5주 구매 가격이 10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주의 시가가 3만4000달러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1986년 3월 13일 마이크로소프트가 나스닥에 상장됐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시자 빌 게이츠는 회사의 45%의 지분을 보유했다. 그 해 그는 3억1500만 달러의 재산으로 『포브스』가 선정하는 미국 최고 부자 반열에 올랐다.

 

빌 게이츠는 벤처 기업의 CEO로는 처음으로 『포브스』의 부호 랭킹 10위 안에 든 경우입니다.

 

1938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생인 빌 휴렛과 데이브 팩커드는 미래의 첨단 기술에 대한 설레는 동경과 발명 및 창조를 향한 부푼 꿈을 안고 실리콘 밸리에 HP사를 설립했다.

 

실리콘밸리 창업 실패율은 무려 30~40%에 이른다. 또 10년 이상 생존하는 기업은 겨우 10%에 불과하다.

 

15세기 말 한 젊은이가 스페인 여왕을 찾았다. 그는 황금과 향료가 많이 나는 동방을 목적지로, 다른 사람이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큰소리를 쳤다. 여왕의 금전적 지원을 요청한 것은 뻔한 수순이었다. 젊은이는 앞서 6년 동안 유럽 각국의 왕실 및 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탐험 계획을 설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끝내 자금을 얻어내지 못했던 터였다. 당시 젊은이의 탐험 계획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계약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모두 뒷걸음질 쳤다. 젊은이가 제시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투자자가 탐험 경비를 전액 부담한다. 탐험에 실패할 경우 탐험자는 투자자의 손실을 배상하지 않는다. 탐험에 성공할 경우 탐험자는 수익의 10%를 가지고 자신이 발견한 식민지의 총독 자리에 앉는다.”   젊은이와 스페인 여왕은 4년 동안 지루한 줄다리기를 했다. 그러나 끝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젊은이가 실망 끝에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국왕을 찾아가려고 할 때였다. 스페인 여왕이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젊은이를 다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젊은이의 요구에 따라 계약을 체결했다.

 

1882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매디슨 애비뉴에 위치한 한 호화 주택이 시민들에 의해 물샐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은 19세기 월스트리트 최고의 은행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그는 이날 자신의 저택에서 새로운 발명품인 백열등 전시회를 열었다.   모건은 이 전시회의 성패 여부에 따라 어떤 중요한 투자 여부를 결정할 요량이었다. 조명 시스템을 부설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었다. 1840년 이후부터 미국의 대, 중 도시 거주자 중 4분의 1은 가스등을 인공 광원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스등은 불빛이 불안정했다. 뿐만 아니라 연소 과정에 유독가스를 방출하는 단점 역시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에디슨은 가스등을 교체할 백열등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앞선 발명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으로 뉴저지의 멘로 파크(Menlo Park)에 실험실을 차리고 100명의 엔지니어를 모집해 본격적 개발에 착수했다. 실험실에 필요한 경비는 1주에 800달러에 달했다. 이는 당시 중산층 가정의 1년 소득에 맞먹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급기야 발명품이 탄생하기도 전에 재정이 바닥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에디슨은 모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모건은 에디슨에게 직접 투자하기에 앞서 테스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에디슨에게 “만약 당신이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이탈리아 풍의 호화 저택에 전등으로 환하게 불을 밝힐 수 있다면 투자 여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더불어 나는 당신이 이 테스트의 가치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해줄 것을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모건의 호화 저택에는 385개의 전등이 설치될 수 있었다. 에디슨은 모건의 요구대로 전등으로 저택의 구석구석을 환하게 밝혔다.

 

그는 200만 달러를 투자해 에디슨과 함께 전등 회사를 설립했다. 은행가와 발명가의 동업에 힘입어 에디슨의 전등 보급 계획은 일사천리로 추진됐다. 전등이 발명된 지 얼마 안 돼 미국 전역에는 전력 네트워크가 구축됐다.

 

모건은 에디슨의 전력 회사와 기존 라이벌 회사를 모두 인수해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다. 이어 신설회사의 상호에서 에디슨의 이름을 빼버렸다. 이 회사가 바로 지금까지도 유명한 제너럴 일렉트릭(GE)이다. 에디슨은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GE사의 문턱을 한 번도 넘지 않았다고 한다.

 

194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했다. 이 컴퓨터는 무게 30t에 크기는 170m²의 교실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엄청났다. 그야말로 거대한 기계였다. 오퍼레이터만 이 컴퓨터로 연산 작업이 가능했고 연산 결과는 며칠 후에 출력됐다.

 

우선 1971년에 인텔이 상장했다. 1986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상장에 성공했고 1990년에는 시스코가 상장됐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야후는 1996년에 상장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어 2004년에 드디어 구글이 상장을 통해 세상에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상장된 수천 개 기업 중 해마다 약 8%의 기업이 거래 정지 내지 상장 폐지 처분을 받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 인터넷 버블 붕괴 전까지는 5000여 개의 기업들이 나스닥에 등록돼 있었다. 하지만 버블이 붕괴된 후에는 약 반수의 기업이 나스닥 시장을 떠났다. 성공이냐 실패냐를 결정하는 것은 역시 시장이다.

 

저희는 시장의 학생입니다. 시장을 세심하게 연구하는 좋은 학생일 뿐입니다.

 

A주식(중국인 전용 주식-옮긴이), B주식(외국인과 기관 투자가 전용이었으나 지금은 중국인도 투자 가능-옮긴이), H주식(중국 국유기업의 홍콩 증시 주식-옮긴이)

 

스탠퍼드 대학의 이념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 자유의 바람’이다. 이 학교의 교수, 학생 및 졸업생들은 지난 50년 동안 실리콘 밸리에 1200여 개의 기업을 설립했다. 실리콘 밸리의 개발품 중에서 반수 이상이 그들의 기업에서 탄생한 것이다.

 

혁신은 영원한 과제입니다. 혁신은 현재도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가의 부는 자연 자원이 아닌 사람의 아이디어와 지혜에 의거해 창출돼야 한다.”

 

Chapter 6. 성공 투자의 길

미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투자가인 마크 트웨인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사람의 인생에는 투기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두 가지 있다. 그래도 될 때와 그래서는 안 될 때이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식은 지난 30년 동안 연 평균 20%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주식 중개인들의 연구 보고서를 읽지 말고 실제 데이터를 직접 연구하십시오. 잘못 산 주식은 거의 다 타들어가는 담배와 같습니다. 이 경우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그 주식을 신속하게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몇 모금만 피우면 다 타버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강세장을 상징하는 황소(Bull)는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환영받는 동물이다. 반면 자본 시장에서 황소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동물은 약세장을 상징하는 곰(Bear)이다.   

이 두 가지 동물은 1879년에 처음으로 주식 시장을 묘사한 유화에 등장했다. 이런 불 마켓과 베어 마켓의 유래에 관해서는 현재 다양한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물의 습성에 따른 해석이 아닌가 보인다. 황소는 싸울 때 머리에 난 뿔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듯 공격하기 때문에 그래프의 상승을 의미한다. 반대로 곰은 일어서서 앞발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듯 공격하기에 그래프의 하락을 의미한다.

 

동물원의 오랑우탄이 두 눈을 가리고 골라잡은 주식과 투자 전문가가 선정한 주식의 실적을 비교해봤습니다. 그 결과 실적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우존스 산업 평균지수는 최대 우량기업 주식 30개 종목을 표본으로 하여 이들 기업의 현황을 나타냅니다. 투자자는 다우존스 산업 평균지수를 통해 경제 전체와 증시에 대해 대체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다우존스지수에는 은행, 석유, 소매, 상품 등 서로 다른 산업을 대표하는 30개 종목이 편입돼 있습니다. 때문에 투자자들이 미국 경제의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데 참고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우존스지수는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 회사에서 개발해낸 것이다. 개발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14년 전이었다. 당연히 개발된 곳은 미국이었다. 20세기 이전까지도 사람들은 매일 변화되는 주식 가격을 칠판에 분필로 써넣는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했다. 따라서 전날 주식 가격과 다음날 주식 가격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일정 기간의 증시 흐름을 분석하기 위해 매일 주식 가격을 선으로 연결해 그래프를 만들었다. 이런 추세의 선을 처음 개발한 사람이 바로 찰스 다우라는 사람이었다. 금융 전문기자 출신으로 다우존스 회사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100여 년 전 찰스 다우는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멀지않은 한 건물 지하실에서 동업자와 함께 다우존스 회사를 설립했다. 1896년 5월 26일 이 회사는 뉴욕 증권시장에 상장된 12개의 업종 대표 기업을 선정해 이들 기업의 주가 평균치를 산정했다. 이어 이를 다우존스지수라고 불렀다. 최초의 다우존스지수는 고작 40.94포인트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자본 시장에서는 녹색이 가격 상승, 적색이 가격 하락을 의미한다.

 

“워런 버핏은 명석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부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5년, 10년 심지어 20년의 긴 투자에만 주력했죠.”   

 

세계 최초의 공매도 사례는 16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 발생했다. 공매도는 매우 오래된 투자 방법이다. 공매도 전문가는 주식이나 증시가 하락할 것이라고 예측되면 증권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주식 종목을 빌려와 매도한다. 이어 증시가 하락하기를 기다려 그 주식을 재매입해 빌려온 주식을 갚는 방식으로 차익을 얻는다.

 

공매도는 자본 시장에 형성된 거품을 빼서 실질 가격으로 회귀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공매도는 완숙한 시장에 없어서는 안 될 투자 방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1967년 12월 28일 뉴욕 증권거래소 거래장에 유일한 여성 트레이더가 나타났다. 1366명의 트레이더 가운데 홍일점인 이 여성이 바로 뮤리엘 시베트였다.

 

1960년대에 월스트리트에서 여성 인재를 초빙한 것은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것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원인도 있었다. 20세기 중엽부터 미국 자본 시장에서 개인 투자자가 줄고 기관 투자자가 증가하면서 금융 인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탓이다.

1929년의 대공황은 증시에도 대재앙이었다. 절대 다수 일반 투자자들은 본전을 잃었다. 그들은 유사한 재앙이 다시 닥칠 것을 두려워하며 앞다퉈 자본 시장에서 철수했다. 그러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전선에서 제대 군인들이 돌아왔다. 이들은 바로 가정을 이루고 후세를 양육했고 자녀 교육비와 노후 대비 자금을 예금하거나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투자 지식과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투자의 신중성을 기하기 위해 전문 투자 기관에 자금을 맡기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의 뮤추얼펀드는 1924년에 동부 도시 보스턴에서 설립됐다. 하버드 대학의 200여명 교수들이 5만 달러를 모아 매사추세츠 신탁기금에 맡긴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들은 당시 대리 투자비용을 자산의 5% 미만으로 통제할 것을 펀드매니저에게 요구했다.

 

오늘날 47%의 미국 가정에서는 증권 투자를 한다. 그 중 90% 이상은 기관투자자의 도움을 받고 있다.

 

1987년 10월 19일 미국에서 블랙 먼데이로 불리는 증시 폭락 사태가 터졌다. 그날 미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무려 5000억 달러 이상이나 줄어들었다. 이는 미국의 1년 GDP의 8분의 1에 맞먹는 액수였다.   

당시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였던 빌 게이츠 역시 하루 사이에 4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다행히 1987년의 증시 대폭락은 1929년처럼 대공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지 않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일반 투자자들이 자금을 기관 투자자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일반 투자자들은 증시가 하락하면 당황하여 손에 있는 주식을 염가로 처분한다. 그러나 적어도 기관 투자자들은 그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Chapter 7. 공정거래

다니엘 드루(가축 트레이더로 시작해 전설적인 시장 조작자가 된 사람-옮긴이)

 

폰지 사기 :: 폰지게임(Ponzi game)이라고도 한다. 찰스 폰지(1882~1949)는 이탈리아인으로 1903년 미국으로 건너온 뒤 허황한 꿈을 좇으며 도박과 낭비를 일삼다가 전과자가 되었다. 1919년 국제우편 요금을 지불하는 대체수단인 국제우편쿠폰이 당시 제1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크게 변한 환율을 적용하지 않고 전쟁 전의 환율로 교환되는 점에 착안하여 해외에서 이를 대량으로 매입한 뒤 미국에서 유통시켜 차익을 얻는 사업을 구상하였다.
폰지는 45일 후 원금의 50%, 90일 후 원금의 100%에 이르는 수익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고 투자자를 모집하였으며, 투자자들은 약정된 수익금이 지급되자 재투자를 하는 한편 자신의 지인을 2차 투자자로 모집하게 되었다. 이 소문이 미국 전역에 퍼져 더 많은 투자자들이 모여들어 투자 총액이 몇 달 만에 막대한 규모로 불어났다. 폰지는 몇 개월 만에 무일푼에서 갑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업의 실상은 나중에 투자한 사람의 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의 수익을 지급하는 금융피라미드였다. 여기에 보스턴우체국에서 폰지가 운영하는 방식의 국제우편 사업을 허용한 전례가 없으며, 국제우편쿠폰을 환전하는 데는 폰지가 투자자들에게 약정한 기일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는 등의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불안해진 일부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폰지의 사업은 순식간에 몰락하였으며, 1920년 8월 폰지는 결국 파산신고를 하고 사기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폰지는 1925년 플로리다주에 부동산 거품이 일 때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같은 방식의 사기 행각을 벌이다가 다시 체포되어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로부터 폰지는 이른바 금융피라미드의 원조로 언급되며, '폰지사기'는 다단계 금융사기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게 되었다.
2008년 12월 미국 나스닥증권거래소 회장을 지낸 버나드 매도프(Bernard Madoff)가 금융사기로 미국연방수사국(FBI에)에 체포되어 다시 한번 폰지사기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매도프는 1960년 자신의 이름을 딴 증권사 버나드매도프LLC를 설립한 뒤 20년 가까이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최대 65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사기 행각을 벌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폰지사기 [Ponzi Schem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햇빛은 최고의 살균제이다. 또 불빛은 가장 유능한 경찰이다. 공정거래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투명한 정보 공개이다.”

 

1790년 미국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필라델피아에서 문을 열었다. 1817년에는 뉴욕 증권거래소가 월스트리트에 설립됐다.

 

다니엘 드루는 한마디로 악덕 소장수였다. 소를 팔기 전에는 강가에 끌고 가서 물을 실컷 먹이고는 했다. 많은 물을 먹은 소는 몸무게가 크게 늘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살아 있는 가축의 가격은 몸무게로 정했다. 때문에 드루는 물 먹인 소 판매를 통해 큰돈을 벌었다. 이어 월스트리트의 투기꾼이 된 다음에도 이 사기 기술을 그대로 주식 시장으로 들여왔다. 일명 ‘주식 물 타기’라고 하는 이 방법은 간단했다. 우선 특정 회사 주식의 평균 매매 단가를 현 시세보다 높이고 그 회사의 주식을 대량 발행하여 결과적으로 큰돈을 버는 것이다.

다니엘 드루는 ‘주식 물 타기’를 통해 월스트리트에서 물만난 물고기처럼 활약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스트리트에서 대단한 금융가로 유명세를 떨칠 수 있었다. 1833년 미국 동부 이리 철도 회사의 대주주가 된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그러나 철도 경영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흥미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이리 철도의 주식을 비싼 값에 매도할 시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1863년에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 해에 철도 왕으로 불리는 밴더빌트가 이리 철도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밴더빌트는 증시에서 이리 철도의 대부분 주식을 구매하는 방법으로 회사를 인수하려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이리 철도의 대주주는 다니엘 드루였다. 밴더빌트는 자신의 자금력으로 다니엘 드루의 주식을 손쉽게 매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다니엘 드루는 끝이 없는 동굴처럼 주식을 한 없이 내놓았다. 다니엘 드루가 이리 철도의 주식을 얼마나 많이 보유했는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당시 대주주의 지분율은 필수 공개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니엘 드루는 밴더빌트가 요구하는 대로 주식을 내놓았다. 그래도 그에게 주식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밴더빌트가 거래장에서 주식을 매입할 때 다니엘 드루는 인쇄소에서 끊임없이 신주를 찍어내 발행했으니까 말이다.

다니엘 드루의 행태는 급기야 발각이 나고 만다. 격노한 밴더빌트는 다니엘 드루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다니엘 드루는 판사들에게 두둑한 뇌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얘기의 결과만 말한다면 다니엘 드루와 밴더빌트는 개인적으로 화해했다. 밴더빌트는 수백만 달러로 이리 철도를 인수하고 다니엘 드루는 70만 달러를 투자해 형사 재판을 피했다.

 

1882년 찰스 헨리 다우와 에드워드 존스는 다우존스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회사의 주요 업무는 비즈니스 정보를 수집, 정리해서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일이었다. 뜻밖에 이 사업은 월스트리트 기관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다우존스는 1884년부터 매일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 주식 중에 대표성이 큰 11개 종목으로 주가 평균을 산출해 신문에 발표했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을 바로 ‘다우존스지수’라고 한다. 매일 다우존스지수를 발표하던 신문은 후에 일간지인 『월스트리트 저널』로 발전했다.   

처음 『월스트리트 저널』의 지면은 네 개였다. 판매 가격 역시 2센트에 불과했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1792년에 24명의 중개인에 의해 처음 설립됐다. 당시 월스트리트에는 은행이 몇 개 없었다. 그러나 그 후 100여 년 동안 1000만 명 이상이 뉴욕에 진출했다. 그 가운데 금융업 및 금융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10%, 다시 말해 100만 명을 넘는다.

 

버나드 메이도프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동 시세 통보 시스템을 증권 거래에 도입한 이후 명성을 쌓았다.

메이도프는 어떤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971년에 컴퓨터가 발명됐습니다. 저와 제 동료들에게 기회가 온 것입니다. 저희는 자동화 거래 시스템을 장외 시장에 도입해 거래 투명성을 강화하기로 했고 창의력을 발휘해 컴퓨터를 이용한 거래 플랫폼인 홈 트레이딩 시스템을 개발해냈습니다. 이것이 나스닥의 시작입니다.”

 

찰스 폰지는 이탈리아계 투기꾼으로 1903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본격적인 활약은 유령 회사를 차려 투자자들을 모으기 시작한 1919년부터로 봐야한다. 폰지는 ‘90일 내 수익률 40% 보장’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많은 투자자들을 현혹시켰다. 이어 뒤에 들어오는 투자자들의 원금으로 앞사람의 이익을 챙겨주는 돌려막기 식으로 일정 기간 동안 자금의 흐름을 유지했다. 짧은 7개월 사이에 3만 명의 투자자들이 그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1년 후 새로운 투자자를 찾지 못해 폰지의 자본은 바닥이 났다.

 

메이도프는 ‘폰지 사기’ 수법을 약간 변형했다. 그 후 미국 각지의 부자들을 찾아다니면서 ‘폰지 스타일의 모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폰지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사기 행각을 벌였다. 투자자들은 적어도 100만 달러 이상을 갖고 있어야 그에게 투자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다. 또 그나마 믿음직한 사람의 추천을 통해야 돈을 받아줬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연 10%의 수익률은 문제없다고 장담하고 다녔다. 그 시기 미국의 평균 투자 수익률은 고작 3%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2008년 금융 위기가 발발했다. 그러자 유럽의 한 투자자가 메이도프에게 70억 달러의 투자 자금 상환을 요구했지만 그는 그 돈을 돌려줄 능력이 없었다. 그의 치밀한 사기 행각은 드디어 꼬리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그날, 2009년 6월 16일에 그는 15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물론 미국 역사상 최대 금융 위기가 도래한 때는 2008년이 아니었다. 그보다 80여 년 이전인 1929년에 폭발했다. 실제로 1929년부터 1932년 사이에 뉴욕 증권거래소의 시가 총액은 890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미국 국회는 1933년에 이 문제와 관련한 청문회를 열었다. 또 대공황 이전에 증시가 활기를 띠었던 원인으로 증권 회사들의 허위 정보를 이용한 주가 조작, 대량의 내부자 거래 등을 꼽았다.

 

1933년 미 국회는 ‘증권법’을 통과시켰다. 증권 발행 시장의 정보 공개 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증권법’은 기업이 투자 설명서에 반드시 명시해야 할 정보 내용 및 1단계 정보 공개에 대해 부담해야 할 법률 책임 등을 상세하게 규정했다. 1934년에는 이어 ‘증권 거래법’이 발표됐다.

 

1888년에 미국의 이 철도 총 연장은 유럽 전역의 철도 총 연장보다 2만 6080마일이나 더 길었다. 이어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미국의 경제 총량이 영국을 추월했다.

 

1879년 록펠러는 석유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아이다 타벨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소형 석유회사는 록펠러의 석유 트러스트에 의해 점차 시장에서 밀려났고 마지막에는 파산하고 말았다.

 

당시 그녀는 『매클루어 매거진』의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파산을 보고 자신의 직업적 특성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록펠러 석유회사에 대한 깊이 있는 조사에는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투자됐다. 그녀는 드디어 록펠러의 비리를 파헤친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시리즈 기사를 15회에 걸쳐 연재했다.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는 확실한 데이터와 감화력 있는 문장을 통해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의 글은 급기야 부정 경쟁에 대한 전 사회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로 인해 1911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역사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됐다. 스탠더드 오일의 독점 행위가 법을 위반하고 자유 경쟁의 원칙에서 벗어나 경제 질서를 왜곡시켰다고 판결하여 록펠러에게 기업 분할을 명령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언론 매체와 개인이나 기업 간에 벌어진 소송은 대체로 일방적으로 결론이 난다. 언론 매체의 승소율이 92%에 이른다.

 

2001년 11월 8일 엔론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 수익을 5억 5200만 달러나 과다 계상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2월 2일 급기야 엔론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 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2001년 초에 최고 90.75달러를 기록하던 엔론의 주가는 파산 신청 당시 50센트로 폭락했다.

 

사베인스-옥슬리법 :: 사베인스-옥슬리(Sarbanes-Oxley)법은 2002년 7월 제정된 미국의 기업회계개혁법으로, 회계부정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장기업 회계개혁 및 투자자보호법으로 법안을 제출한 폴 사베인스와 마이클 옥슬리 하원 의원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2001년 발생한 엔론, 월드컴 등의 대형 회계부정사건으로 인해 기업회계기준과 회계투명성을 엄격히 규정해 2002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법안 내용에는 기업이 회계상태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투자자들을 속이는 행위를 할 경우 강력한 제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포함시켰다. 극히 일부 기업들의 재무제표를 조사하는데 그쳤던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대부분 대기업들의 재무제표를 감사할 수 있으며 CEO들은 고의적으로 사실과 다른 재무제표를 인증할 경우 형사처벌을 받게 되었다.아울러 소환 권한을 갖고 회계감사 업체들에 대한 감독 업무를 담당하는 기업회계감독위원회(PCAOB)를 신설했으며, 회계업체들이 회계감사 대상 업체들에 대해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이 위원회는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기업들의 회계를 감사하고 윤리 규정을 채택토록 종용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회계법인에 대한 사찰도 가능하며 특정 기업의 회계 법규 위반시 조사권을 갖는다.
한편, 사베인스-옥슬리법은 미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상장사에서 회계문제가 발생할 경우 증권거래위원회가 해당기업의 회계·감사를 담당한 외국계 회계법인에 대해서도 서류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 다른 나라에 대한 '주권침해'에 해당된다며 물의를 빚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베인스-옥슬리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사반스 옥슬리법」은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재무제표에 서명토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들의 책임을 강화하고 회계 장부의 진실성을 담보해주기 위해서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기업은 「사반스 옥슬리법」을 방해물이나 걸림돌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바뀌었습니다. 예컨대 지난 2~3개월 사이에 중국 대기업들이 앞을 다퉈 미국 증시에서 IPO에 나서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엄격한 감독과 규제가 이뤄지는 미국 증시에 진출할 경우 자신들의 신용도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투자자들은 감독과 규제가 혹독한 시장에 진출한 기업들의 재무제표와 기업정보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구나 금융 위기가 발발한 환경에서는 기업의 신뢰성과 신용도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기업의 신뢰성과 신용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감독과 규제가 혹독한 시장에 진출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1820년에 집단 소송 사례가 있기는 했다. 또 1833년에 집단 소송 관련 법률이 출범하기도 했다. 지금은 당연히 많이 달라졌다. 집단 소송 건수가 매년 200여 건에 달할 정도이다. 다시 말하면 해마다 100개의 상장 기업 중 2개꼴로 집단 소송에 휘말린다는 얘기가 되겠다.

 

투자자들이 미국이나 중국 시장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이나 중국이 시장에 대한 감독과 규제가 잘 정비돼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뉴욕에는 30만 명 이상의 인재들이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양측에 사무실을 두고 이들 금융 종사자들을 감독하는 사람은 이보다 더 많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월스트리트에는 탐욕과 공포 두 가지 심리만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심리는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 때에는 탐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공포에 맞닥뜨리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시장에서 철수합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Chapter 8. 금융혁신

혁신은 새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좋은 일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전 세계 여성들에게 있어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아마 재봉틀일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 잡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1860년대의 재봉틀을 일컬어 ‘쟁기 다음으로 인류의 가장 축복받은 도구’라고 극찬했습니다.”

 

당시 재봉틀 한 대의 판매 가격은 약 100달러였습니다. 1851년 미국의 연 평균 가계 총 수입은 500달러에 불과했죠.

 

1851년 미국의 재봉틀 생산량은 70만 대에 이르렀다. 시계 다음으로 생산량이 가장 많은 제품이었다.

 

싱어 미싱은 바로 이런 시기 직후인 1853년에 설립된 재봉틀 전문 업체였다. 1856년 싱어 미싱의 동업자이자 변호사인 클라크는 재봉틀 판매와 관련된 대담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즉 미국 여성들에게 할부 방식으로 재봉틀을 공급한다는 아이디어였다.

 

클라크는 일시불, 1주일 무이자 할부, 1개월 무이자 할부 등의 여러 가지 방식을 정해놓고 구매자들이 필요에 따라 선택하도록 했다. 1주일 무이자 할부의 경우 구매자들은 1주에 1달러씩만 지불하면 됐다.

 

실적은 정말 놀라웠다. 1890년 말까지 전 세계에 총 100만 대의 미싱을 판매하게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완전히 천문학적인 판매량을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라이벌 기업들 역시 앞다퉈 할부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신용 소비의 첫 단계에서 판매자는 스스로 채무를 처리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판매자는 다른 제 3자, 예컨대 금융회사 등에 채무를 양도했습니다. 이것은 1920년대의 일이었죠. 세 번째 단계인 1970년대 이후부터는 채무의 증권화를 통해 전 세계 금융 시장에서 채무를 부담했습니다.”

 

대공황 기간에 형성된 이 같은 신용 소비 방식은 대공황이 끝난 다음 미국 사회의 주류 소비문화로 정착됐다.

 

2006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은 1인당 평균 5장의 신용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른 신용 카드 채무는 가구당 평균 7000달러에 이르렀다. 2010년에 이르러 미국의 소비성 대출 규모(주택 담보 대출 제외)는 2조 4000억 달러에 달했다.

 

현재 미국의 GDP 중 70%는 민간 소비로 이뤄져 있다. 이는 소비성 대출이라는 상품이 출시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890년에 이르러 유니온 도살장의 노동자수는 2만 명에 이르렀다. 연간 도살하는 가축의 양은 900만 마리에 이르렀다. 미국 육류 제품의 82% 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됐다.   농축산물은 계절성이 매우 강하다. 가축 가격도 자연적 요인의 영향을 받아 파동이 심하다. 시카고 유니온 도살장의 사업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시중 가축 가격의 미세한 변화 역시 도살장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가축이 출하되기 전에 미리 가축 사육장 측과 미래의 가축 매매 가격을 정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가축이 다 자라 출하될 때 시중의 가축 가격과 상관없이 양측이 미리 약정한 가격에 따라 거래하는 방법이었다. 바로 선물 거래였다.

 

1840년을 전후해 시카고는 농축산물의 무역 중심지로 부상했다. 특히 이 시기에 독일계 이민자인 헨리 리먼이 형제들과의 동업을 통해 시카고에서 농산물 선물 거래 및 중개업에 나섰다. 훗날 월스트리트의 제 4대 투자은행으로 성장한 리먼 브라더스는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설립됐다.   

1848년에는 82명의 상인들이 시카고에 모이는 역사적인 회동이 있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세계 최초의 선물 거래소로 일컬어지는 시카고 선물 거래소를 설립했다.

1898년에는 시카고 버터 및 달걀 거래소가 설립됐다. 주된 거래 품목이 버터와 달걀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1919년에 시카고 버터 및 달걀 거래소 명칭은 시카고 상품거래소(CBOT)로 바뀌었다.

 

시카고거래소 :: 시카고선물거래소라고도 한다. 회원조직의 비영리 특수법인으로 1848년에 창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래량이 많은 선물거래소이다. 시카고는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광활한 중서부 농경지에서 산출되는 곡물의 집산지이다. 그러나 가을의 수확기에는 입하가 집중되어 농민은 제값을 받지 못했고,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단경기(端境期)에는 곡물 부족으로 값이 터무니없이 상승했다.
곡물매매자들은 이같은 가격의 변동을 극복하기 위해 선도계약(先渡契約:先物去來)을 고안했으며, 이로써 농민은 사전계약으로 안심하고 생산에 임할 수 있었고, 상인은 계획된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도계약은 시카고의 상인들에 의해 제도화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시카고의 상인 82명이 사우스 워터 스트리트에 거래소를 설치한 것이 오늘날 세계 제일의 규모를 갖추게 된 시카고거래소의 기원이다.
이곳에서 형성되는 옥수수·보리·콩 등 미국을 대표하는 농산물 가격은 국제적 지표가 된다. 처음에는 신용을 바탕으로 거래되었으나 1965년 선도계약의 담보로서 증거금제도(證據金制度)를 채택함으로써 근대적 상품거래소로 발전했다. 1922년 곡물선물거래법의 제정·공포에 따라 법률에 의한 지정상품의 선물거래시장으로 지정되었는데, 동법은 1936년 현행 상품거래소법으로 확대·강화되었다.
초창기에는 곡물 거래가 주가 되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곡물중심 거래소에서 종합상품 거래소로 변모했다. 1973년 CBOT 회원들에 의해 CBOE(Chicago Board Option Exchange:시카고옵션거래소)가 설립되었다. 현재 상품거래소법에 의한 지정상품인 밀·귀리·쌀보리·옥수수·콩·콩기름·콩가루·목화·정선수소[精選牡牛] 등 비(非)지정상품인 은·합판 등 48개 종목이 상장되어 선물과 옵션 거래된다. 또한 2000년부터는 전자상거래를 시작했다. 회원은 거래소에 상장된 품목의 전부 또는 일부 거래유형에 따라 분류되며, 현재 3,600여 회원이 있고, 1999년의 총거래량은 25억 달러 이상이었다.
CBOT의 건물은 북관·남관·서관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규모와 건축 디자인으로도 유명하다. 1930년에 건축된 북관은 44층이며, 남관은 1982년에 22층으로 건축되었다. 1997년에 4층으로 건축된 서관은 일반 건축의 10층에 상당하는 높이이다. 건물은 서관을 제외한 많은 부분이 임대되고 있다. 시카고 거래소는 본사 외에 워싱턴 디시에 지방 거래소를, 그리고 국제적인 투자자들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와 영국 런던에 각각 지사를 두고 있다. 본사 소재지는 미국 시카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카고거래소 [Chicago Board of Trade, ─去來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06년 시카고 상업거래소(CME)는 시카고 선물거래소를 인수, 합병했다.

 

영국의 베어링 은행은 2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은행이었다. 하지만 1995년에 닉 리슨이라는 직원의 선물 거래 손실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닉 리슨은 1992년부터 투기성 선물 거래를 했고 3년 사이에 베어링 은행에 무려 14억 달러의 손실을 초래했다. 결국 베어링 은행은 파산했고 닉 리슨 역시 6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퀀트(Quant. 금융시장 분석가)’

 

퀸트 :: quantitative(계량적, 측정할 수 있는)와 analyst(분석가)의 합성어. 수학·통계에 기반해 투자모델을 만들거나 금융시장 변화를 예측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컴퓨터 알고리즘을 설계해 투자에 활용한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기반한 퀀트 투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헤지펀드들이 더 많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고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퀀트 [quant] (한경 경제용어사전)

 

1938년 루즈벨트 정부는 연방전국모기지협회(Fannie Mae)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미국의 민간 금융 기관들이 저소득층 가정을 대상으로 주택 담보대출을 적극 제공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패니메이의 당시 취지였다.

 

미국의 부동산 가격은 2000년부터 폭등했다. 이 해에 인터넷 버블이 붕괴되자 투자자들이 부동산 시장에 대량의 자금을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FRB는 국내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총 17차례의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우리 미국의 선진적인 생산력과 자유경제 시스템을 질투해 테러를 통해 미국 경제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음모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가서 마음껏 쇼핑하고 소비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집을 사고 여러분들이 부러워하던 자동차도 사십시오. 여러분들의 친구들을 데리고 나가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십시오.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휴가를 떠나십시오. 이렇게 해야만 우리가 테러의 충격으로 무너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자,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국민 여러분, 오직 소비만이 살길입니다. 소비는 우리 모든 국민의 미룰 수 없는 책임입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9·11테러의 여파 속에서 국민들에게 전한 메시지였다.

 

대출 중개인이 발행한 대출 채권을 구매해 월스트리트의 투자 은행에 팔아넘기는 일이었다. 이런 사업은 1981년 미국 의회가 은행이 상업용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고 나서 그 대출을 증권화해 투자자들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허용한 탓에 가능하게 됐다.

 

2004년 미국 시사 잡지 『타임』은 그를 일컬어 ‘지난 75년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혁신자’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그를 2008년 금융 위기의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모기지 저당증권(MBS) :: 일반적으로 모기지(Mortgage)로 잘 알려져 있다. 은행이 발행하는 MBS는 주택자금 대출에 따라 생긴 저당권이나 대출채권을 근거로 한다. 은행은 이 증권을 발행,매각함으로써 자금을 회수하고 다른 사람에게 또다시 주택자금 대출을 해준다. 주택구입자에게 보다 쉽게 장기자금을 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측면이 있다. 또 투자자(증권매입자)입장에선 간접적이지만 주택 담보를 갖고 자금을 굴릴 수 있는 잇점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주택저당증권은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요즘 국내은행들이 부실자산을 처리하는데 활용하는 ABS(자산담보부증권)중 주택부문에 특화시킨 것으로 보면 된다. 올 하반기 리츠회사가 등장하면 국내에도 주택저당증권시장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택저당증권 [Mortgage Backed Securities] (한경 경제용어사전)

 

MBS도 장점이 많습니다. 우선 주택담보 대출시장 규모를 확대시켰습니다. 더불어 대출 금리를 낮췄습니다. 따라서 미국 서민들도 혜택을 봤고 금리가 하락하면서 시장 유동성이 증가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미국의 상업 은행 등 금융 기관이 주택담보 대출을 전부 회수하는 데에는 20년 내지 30년이 걸린다. 심지어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모기지의 증권화 방식을 통하면 증권 시장에서 빠른 시간 내에 한꺼번에 주택담보 대출을 전액 현금화해서 회수할 수 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자금 유동성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수십 년에 걸쳐 회수해야 할 대출을 순식간에 회수할 수 있으니 은행에 유동 자금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출자의 대출 자격을 엄격하게 따지는 기관이 갈수록 적어졌고 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마구 대출을 내줬다.   

2002년에는 정책이 한층 더 느슨해졌다.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게까지 서브 프라임 모기지가 제공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서브 프라임 모기지를 증권화한 상품도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은행들은 당연히 신용 등급은 낮으나 일정한 상환 능력이 있는 저소득층에게도 주택 자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이 주택담보 대출상품이 바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서브 프라임 모기지와 우량 모기지를 적절히 섞은 부채 담보부 증권(CDO)이 출시됐다.

신용 등급이 낮은 서브 프라임 모기지가 섞여 있는 CDO 상품은 마치 나쁜 사과와 좋은 사과를 한 박스에 넣어 판매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구매자들이 무턱대고 이 사과를 사는 것은 아니다. 여러 박스 중에서 고르고 골라 가장 좋은 사과 박스를 구매한다. CDO 상품을 고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CDO 상품에 대해 등급을 매겨 그 중에서 리스크가 가장 적은 상품을 고른다. 그러나 CDO에 담겨 있는 모기지 가운데 일부가 부실해도 그 묶음들인 CDO는 안전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괜찮은 모기지 묶음이 신용등급 평가 기관들에 의해 고평가돼 수많은 투자자들에게 판매됐다는 사실이었다.

 

부채담보부증권 :: 영문 첫글자를 따서 CDO라고도 한다. 회사채나 대출채권 등 기업의 채무를 기초자산으로 하여 유동화증권을 발행하는 금융기법의 한 종류이다. 수익을 목적으로 발행하는 것(Arbitrage CDO)과 신용위험을 투자자에게 전가하기 위하여 발행하는 것(Balance Sheet CDO)으로 구분된다. 회사채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경우에는 회사채담보부증권(CBO;Collateralized Bond Obligation), 대출채권인 경우에는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Collateralized Loan Obligation)이라고 한다.
신용등급을 높이기 위하여 채권보증업체(모노라인)들이 보증을 서기도 하며, 신용등급이 상대적으로 낮은 채권들을 섞어 새로운 신용등급의 CDO를 만들기도 한다. 신용등급에 따라 다시 최우량CDO·우량CDO·비우량CDO·에쿼티(equity)로 구분된다. 그러나 어떤 채권이 담보로 편입되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데다가 담보로 사용된 회사채나 대출채권이 제때 상환되지 않을 경우에 최우량CDO라 하더라도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처음 등장한 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발행 규모가 증가하였으며, 2006년 미국 등지에서 1조 달러 규모의 CDO가 발행될 정도로 성행하였다. 미국의 모기지 전문 대출기관들은 부동산 활황을 틈타 대출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모기지 채권이나 모기지담보부증권(MBS)를 대량으로 발행하였고, 투자은행들이 이를 사들여 합성한 뒤 발행한 채권이 바로 CDO였다. 2007년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높아지면서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벌어져 채권 가격이 폭락함으로써 주요 금융회사 등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입고 미국의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채담보부증권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負債擔保附證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 묶음 상품들은 그저 투자자들의 눈에 안전한 투자 수단으로 인식되게끔 정교하게 포장되고 고평가됐을 뿐이었다.

 

미국 양대 국책 모기지 기관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Freddie Mac, 연방 주택담보 대출공사) 역시 이 거대한 이익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기지 저당증권 발행 및 담보 행렬에 가담하여 가뜩이나 과열된 시장에 자금을 보태준 것이다. 2006년에 이르러 급기야 이 양대 회사가 발행한 모기지 저당증권 규모는 4조 달러를 넘어섰다. 당시 미국 국채 규모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대출 문턱이 낮아지자 부동산 투자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더 크고 좋은 집을 사기 위해 앞다퉈 대출을 신청했다. 부동산 가격 역시 2000년 이후부터 상승하기 시작했다.

 

1994년의 경우 64%였으나 2006년에는 69%로 증가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가 주택을 보유한 가정은 900만 가구, 1인당 주거 면적은 60평방미터에 달하게 됐다.   

부동산 가격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1년부터 2006년 사이에 무려 13%나 상승했다.

 

박스 안에 나쁜 사과만 남았을 때는 더 골라봤자 의미가 없다.

 

2006년 미국 부동산 업종지수는 처음으로 하락했다. 첫 번째 도미노가 드디어 넘어진 것이다. 부동산 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투자자들은 탈출을 위해 필사적으로 가격을 낮췄다. 거대한 부동산 버블이 순식간에 붕괴됐다. 그래도 부동산 가격은 계속 하락했다. 사람들이 한 때 앞을 다퉈 구매하던 모기지 저당 증권은 완전히 찬밥 신세가 돼버렸다. 금융업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됐다. 2008년 9월 15일 드디어 100년 전통을 가진 미국 4위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해 파산했다.

 

위기가 지난 후에는 항상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Chapter 9. 위기를 극복하라

인류 역사상 최초의 치명적인 금융 위기는 300여 년 전의 네덜란드에서 발생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주가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1주일 사이에 77%나 폭락했다. 또 회사의 시가 총액도 112억 달러에서 25억 달러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리먼 브라더스가 곧 파산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도 리먼 브라더스의 CEO는 기업이 벼랑 끝에 서 있다는 현실을 한사코 부인했다.

 

캘리포니아 주는 미국에서 경제 총량이 가장 많은 주로 유명하다. 심지어 GDP 규모가 세계 대부분 국가의 GDP를 초과할 정도이다. 또 천혜의 지리적 환경에 힘입어 농업이 매우 발전해 있다. 할리우드와 실리콘 밸리가 모두 캘리포니아 주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 공황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그 여파는 거의 10년이나 계속됐다. 그 시대에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기이한 현상도 나타났다. 미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가려는 인구가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려는 인구를 초과한 것이다.

 

그 해 대출 1달러 중 40센트가 증시에 유입될 만큼 투기가 성행했다.

 

당시에는 구두닦이 소년에게도 주식을 팁으로 줄 정도였습니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 증시는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무너졌다. 주식 가격은 하루 사이에 3분의 1 폭락했다. 이날 11명이 투신자살했다. 사람들은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을 가리켜 ‘검은 목요일’이라고 불렀다.

 

“후버는 자유 시장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가급적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시장이 스스로 알아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심지어 증시가 폭락하는데도 ‘차라리 잘됐다. 투기꾼들은 손해를 좀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건국 초기, 특히 1790년부터 1933년까지는 금융 시장에 대한 감독과 관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은행 시스템은 자체 힘으로 대부분 경제 위기를 스스로 극복했습니다. 따라서 사회 경제도 곧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35년에 미국 사회 입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사회보장법」을 출범시켰다. 이 법안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제정한 뉴딜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뉴딜 ::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수정을 하였던 점으로 미국사상 획기적 의의를 가진다. 1929년 10월 24일에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을 계기로 시작된 경제불황은 미국 전역에 파급되고, 그것이 연쇄적으로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확대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H.후버(재임 1929∼1933)의 필사적인 방지대책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계속 폭락, 1932년까지 국민총생산(GNP)을 1929년 수준의 56%로 떨어뜨리고, 파산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따라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 1,300만 명에 이르렀다.1932년의 대통령선거는 이와 같은 심각한 불황 속에서 시행되었는데, 민주당에서는 당시의 뉴욕 주지사로서 불황 극복에 착실한 업적을 올리고 있던 루스벨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루스벨트는 경제사회의 재건, 빈궁과 불안에 떠는 국민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한 새로운 정책,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함으로써 공화당의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 후 1933년 3월 루스벨트는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6월 16일까지의 100일 동안, ‘백일의회(百日議會)’라고 불리는 특별회기내에 적극적인 불황대책을 정부 제안의 중요 법안으로서 입법화하였다.
뉴딜 제법안의 작성에 대통령 측근의 경제·법률 분야에서 진보적인 학자와 전문가 그룹, 즉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가 기용된 사실은 유명하다. 이렇게 하여 1933년에 입법화된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① 긴급은행법(緊急銀行法)을 제정하여 재기 가능한 은행에는 대폭적인 대부(貸付)를 해줌으로써 금융공황으로부터 은행을 구출하여 은행업무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② 금본위제(金本位制)를 폐지하고 관리통화법(管理通貨法)을 도입하여 통화에 대한 정부의 규제력을 강화하였다. ③ 농업조정법(農業調整法)을 제정하여 농업의 구제를 도모하였다. 이것은 주요 농산물의 생산제한으로 과잉생산을 없애고 농산물가격의 하락을 방지하여 균형가격(均衡價格)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 농민에게 자금원조를 해줌으로써 농업구제에 대한 시도를 하였다. ④ 전국 산업부흥법(産業復興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각 산업부문마다 공정경쟁규약(公正競爭規約)을 작성하게 하여 지나친 경쟁을 억제시켰으며, 생산제한·가격협정을 인정하고 적정한 이윤을 확보시키는 한편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최저임금과 최고노동시간의 규정을 약속하여 노동자에 대한 안정된 고용과 임금을 확보하게 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었다. ⑤ 테네시강(江) 유역 개발공사(開發公社)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이 지역의 발전(發電)과 치수관개용(治水灌漑用)의 다목적댐을 건설하여 종합적인 지역개발을 실행하려는 것으로서, 정부에 의한 전력(電力)생산사업이라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⑥ 자원보존봉사단(資源保存奉仕團)·연방임시구제국(聯邦臨時救濟局)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정부자금에 의한 실업자와 궁핍자(窮乏者)의 구제책으로서 설립한 것으로, 지방자치단체의 구제활동을 연방정부가 원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34년의 중간선거는 뉴딜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경기회복과 함께 대자본가측으로부터의 뉴딜정책에 대한 비판이 커져 갔다. 루스벨트는 33년의 대통령 당선 초에는 대자본가들도 포함한 전계급적인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는 자세를 가졌으나, 이때부터는 노동자 ·농민 ·도시거주자의 복지를 우선으로 하려는 자세로 방향전환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35년에 제정된 전국노동관계법(全國勞動關係法)과 사회보장법(社會保障法)은 그와 같은 전환을 보인 대표적 정책이었다.
전국노동관계법은 최고재판소의 위헌판결(違憲判決)을 받은 전국산업부흥법에 대체되는 것으로서 제정되었는데, 이것은 1938년에 제정된 공정기준법(公正基準法)과 함께 노동자의 보호정책 확립의 기반이 되었으며, 사회보장법은 실업보험·노령자부양보험·극빈자와 장애자에 대한 부조금제(扶助金制) 등을 규정한 것으로, 사회보장제도 확립의 기반이 되었다. 36년 대통령으로 재선된 루스벨트는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기준이다”라고 주장하여 뉴딜의 방향전환을 분명히 밝혔다.
뉴딜은 구제 ·부흥 ·개혁 등을 목적으로 하고 연방정부의 기능과 대통령의 권한확대를 실현하면서 적극적으로 구제정책(救濟政策)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또한 뉴딜은 대공황으로 마비상태에 빠진 미국의 자본주의와 혼란해진 사회의 재건을 위하여 새로운 정책을 잇달아 실험하였다.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가 포기되고, 정부권력에 의한 통제가 행하여졌으며, J.M.케인스의 경제학을 받아들여 미국 자본주의를 수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7년의 장기간에 걸친 뉴딜은 단순한 경제정책(經濟政策)에 그치지 않고, 정치 ·사회 전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미국의 항구적인 제도로서 확립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도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뉴딜 [New Dea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입니다. 두려움을 멈추십시오’

 

취임 8일 째 되는 1933년 3월 12일 그는 미국의 6000만 청중들을 대상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노변담화」를 발표했다.

 

당시까지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기껏해야 1주일에 200통 정도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노변담화」를 실시한 이후 무려 50만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일단 국민들의 신임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 바로 이 때문에 여세를 몰아 위기 극복을 위한 뉴딜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

 

노변담화 :: 루스벨트는 불황(不況)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정책을 국민에게 약속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가 취임한 1933년 처음으로 당시에 이미 널리 보급된 라디오를 통하여 국민에게 소신을 피력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졌다. 그 프로그램에서 그의 다정한 음성과 힘찬 어조는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많은 여론을 환기시키면서 그의 노변담화 시간은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1940년 12월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으로 구성된 추축국(樞軸國)에 대항하여 미국이 ‘민주주의의 무기창’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러한 노변담화를 통해서였다. 정치학적으로 보면 이는 라디오를 통한 여론조작(輿論操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변담화 [fireside chat, 爐邊談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루즈벨트는 우선 전국의 모든 은행의 영업을 정지시켰습니다. 우리는 그걸 ‘은행들이 휴가를 받았다’라고 농담조로 말하고는 합니다. 그는 곧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많은 은행이 곧 문을 열 것이고 새로 문을 연 은행은 믿어도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원래 은행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은 대통령의 말을 믿고 다시 은행에 돈을 예금하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에 월스트리트 등 자본 시장의 질서 확립과 규제를 위해 증권거래법에 의해 설립된 증권거래위원회(SEC)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말대로 직접 SEC 초대 위원장을 선발했다. 그가 ‘SEC 위원장 적임자’로 지목한 사람은 월스트리트의 투기꾼 조셉 케네디였다. 미국 제 35대 대통령을 지낸 존 케네디의 아버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대공황이 터지기 전 주가 조작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터진 금융 위기는 그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조셉 케네디를 사기꾼이라고 매도하는 강경파도 있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사기꾼이 사기꾼을 잡을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

 

“현대적 의미의 증권 시장 규제 규정, 은행 감독 및 관리 규정 등이 대부분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출범된 것입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통해 많은 은행들을 재조직하고 증권 시장을 재편성했습니다. 이를 위해 증권거래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자본 시장 규제를 위한 이같은 조치들은 예상했던 효과를 거뒀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시장, 은행과 증시에 다시 신뢰를 가지게 됐습니다.”

 

루즈벨트는 의회 연설에서 네 가지 자유에 대해 천명했다. 그 가운데 하나인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정신적 기반이 됐다. 이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으로 탄생한 법령이 다름 아닌 「사회보장법」이었다.

 

Chapter 10. 자본의 흐름

1860년대 중반기까지 중국에 지점을 설립한 은행은 10개에 이르는 외국계 은행들이었다. 대략 40여 개의 지점을 설립했다. 그 중 한 개가 프랑스 은행, 나머지는 모두 영국계 은행이었다.

 

1850년에 이르러 영국은 세계 석탄 생산량의 60.2%, 철 생산량의 50.9%, 목화 가공량의 46.1%를 담당했다. 철도 총연장은 1만km에 이르렀다. 영국은 완전히 전성시대에 진입했다고 해도 좋았다. 이 시기에 개최된 가장 중요한 이벤트로는 1851년에 열린 제 1회 세계 박람회를 꼽을 수 있다. 이 박람회는 런던의 크리스털 궁전에서 개최된 탓에 ‘크리스털 엑스포’로도 불린다.

 

1803년 미국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를 매입했다. 이는 지금까지 세계 역사를 통틀어 최대 규모의 토지 매입사건이다. 이로써 미국 영토는 2배로 확장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토지 매매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협의를 계기로 미국은 영국의 영원한 해상 라이벌로 부상할 것이고 언젠가 영국은 오만한 머리를 숙이게 될 것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영토 매입 자금이 부족했다. 따라서 국채를 발행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자금을 마련해 준 은행은 다른 은행이 아니었다. 바로 영국 런던의 베어링 은행이었다.

 

19세기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채무 중 75% 정도는 런던 금융 시장에서 조달한 것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는 각 국가마다 황금, 백은 등 서로 다른 금속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게다가 화폐의 품질과 무게도 제각각이었다. 이로 인해 영국 공산품이 세계 각지에서 판매되면서 상인들은 다양한 화폐 간 환전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됐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통용 가능한 화폐를 만드는 것이 영국 상인과 통치자들의 급선무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 출범한 것이 바로 금본위제이다. 영국의 대과학자 뉴턴은 이 제도를 개발한 공로로 세계의 금융 역사에 기록되기도 했다. 실제로 뉴턴은 생의 마지막 60년 중에서 첫 30년은 자연과학 연구에 바쳤으나 나머지 30년은 금융 개혁을 위해 바친 인물로 유명하다.

1717년 영국 정부는 뉴턴의 건의에 따라 민간인들이 가지고 있는 황금을 조폐창에 가져가 정부에서 규정한 무게의 화폐를 주조하도록 허용했다. 이로써 황금과 파운드화 사이에 안정적인 교환 비율이 확립됐다. 파운드화가 황금과 똑같은 신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수립된 금본위제는 그 후 200년 동안 계속 실시됐다.

영국 국권을 상징하는 파운드화는 곧 황금을 대체해 전 세계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주권의 성질을 가진 국제준비통화가 생겨난 것이다.

 

금본위제도 :: 화폐 한 단위의 가치가 일정량의 금 가치에 결부되어 있는 화폐 제도.
이 경우 화폐가치는 금가치에 의해 제약되며 금 가치를 규정한다. 따라서 화폐 한 단위와 금 일정량과의 등가관계(等價關係)가 어긋나게 되면 금은 화폐로 또는 화폐는 금으로 전환하게 되고 이 전환을 통해 화폐수량은 증감한다.
이리하여 화폐의 가치는 일정량의 금의 가치에 접근되는데, 이 화폐 한 단위와 금 일정량과의 등가관계가 유지 가능한 것은 화폐와 금과의 자유로운 상호전환, 즉 금화 주조의 자유와 은행권태환의 자유, 금 수출입의 자유를 통해서만 보증된다.
그러므로 금본위제도를 존속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금준비를 필요로 하며 만일 금준비가 고갈되면 자유전환은 인정할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을 금본위제정지 또는 붕괴라 한다.
금본위제도는 그 구체적인 법제와 운용의 실제에 있어서 몇 가지로 나눠진다.
즉 금화가 주조되어 그것으로 태환(兌換)이 보증되는 금화본위제도(gold coin standard)와 금화 대신 금괴로의 태환에 응하는 금괴본위제도(gold bullion standard)가 있으며, 또 다른 금본위국에 대해 발행된 금환 또는 그로부터 발행된 금환을 일정한 시세로 매매하는 것을 수단으로 국내화폐의 1단위와 금 일정량과의 사이에 등가관계를 확보하려는 금환본위제도(gold exchange standard)가 있다.
금괴본위제도와 금환본위제도는 금이 핵심으로서만 존재하고 국내에는 유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금핵본위제도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본위제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금본위제 확립을 계기로 화폐의 자유로운 주조, 유통 및 환전이 가능해졌습니다. 일종의 국제화폐 체계가 구축된 것입니다. 이는 국제 환율의 통일과 글로벌 시장 형성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영국이 이처럼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 부상할 때 중국 역시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 세계 최대 GDP 및 세계 인구 3분의 1을 보유하고 있었다.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 1872년 이홍장(李鴻章)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설립한 중국 최초의 근대적 윤선회사.
1840년 개항 이후 외국인이 중국의 하천과 바다의 항운업을 독점하여 운수업을 생계로 하는 내수의 소선박호와 상인을 파산하게 했을 뿐 아니라 청조의 조운(漕運)도 위기에 빠졌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고 서양 상인들과 영리를 다투기 위해 이홍장의 주청으로 절강(浙江) 해운 위원 주기앙(朱其昻)에게 윤선초상국을 설립하게 했다.
자금은 상인 주식과 관에서 조달하여 중국에서 관판(官辦)에서 관독상판(官督商辦)으로 바뀐 최초의 민수기업이 되었다. 설립 자금은 47만 냥이었고, 배는 최고 30여 척에 이르렀다. 여객 운수뿐 아니라 정부의 조운과 관물(官物)의 운수 업무도 담당하였다. 또한 내지의 하천 운수뿐 아니라 해운 항만업도 병행하는 중국 최초의 근대적 윤선회사였다.
윤선초상국의 설립으로 외국의 중국 항만업에 대한 독점도 타파되었다. 1879년 설복성(薛福成)의 《주양급의(籌洋急議)》에 따르면, 초상국이 설립된 6∼7년만에 이미 운송비 수입이 약 2000만 냥이 되어 중국 항운업 이권의 약 5분의 3을 회수하였다. 이 때문에 영국의 태고(太古), 이화(怡和) 등의 회사는 운임을 낮추어 초상국을 파산시키려 하였다. 영국이 모두 피해를 입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중국의 윤선초상국은 1877년부터 189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태고, 이화 등과 가격 통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초상국은 결국 경쟁력이 외국에 비해 떨어졌으므로 1873년에서 1879년 사이 초상국의 일본, 싱가포르, 필리핀, 그리고 미국 등지로의 운항 선박은 외국과의 경쟁에서 패하여 운항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초상국은 다른 민수기업에 비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선초상국 [輪船招商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윤선초상국 설립 후 10년 사이에 중국에서는 무려 15개 기업이 잇따라 주식을 발행했다. 이들 기업의 주식은 상하이 거리와 찻집에서 거래됐다.

 

양무운동이 시작된 지 35년 만인 1896년 이홍장은 유럽과 미국 7개국을 방문하는 행보에 나섰다.   

그는 서구 국가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초고층 빌딩을 비롯해 전보, 전화 등 산업화의 성과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영국 의회의 참관을 요청받았을 때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중국의 사회 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은 그저 서구의 선진 기술만 배우면 된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 국가의 기술 발전에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중국에 현대적 의미의 금융 위기가 처음 나타난 것은 1883년부터 1884년까지입니다. 당시 중국 증시는 완전히 밑바닥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대부분 주식의 가격은 80~90% 하락했습니다.”

 

1906년에는 중국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상해중업공소(上海衆業公所)가 설립됐다. 이어 중화민국이 건국되는 1912년이 도래했다. 이때 상하이는 중국에서 서구의 현대적 산업 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도시가 됐다.

이로부터 7년 후인 1919년 미국의 한 아이스크림 상인이 상하이에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가 바로 훗날 전 세계 보험업계를 대표해 온 글로벌 보험회사인 AIG이다.   

1929년에는 「회사법」이 개정되고 「증권거래법」이 출범했다. 1933년 반포된 미국의 「증권거래법」에 비하면 4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현대 금융 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할만한 정치, 경제적 제도가 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서구의 주식제를 아무리 도입해봤자 자본 시장이 강대해질 까닭이 없었다. 오히려 외국계 은행들이 물밀듯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19세기 말엽에는 서구 국가들이 중국의 경제 명맥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1914년 11월 뉴욕 내셔널 시티 은행이 아르헨티나에 지점을 설립했다. 미국 은행 중 처음으로 외국에 지점을 낸 사례에 해당한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의 몰락 가속은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런던이 19세기에 세계 금융 센터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영국의 고정 자산 중 절반이 해외 식민지에 투자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영국의 해외 투자는 지나치게 늘어난데 반해 국내 투자는 심각한 부족 현상을 겪게 된 것이다. 경제 성장의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은 무기 구매에 필요한 황금을 충분히 보유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 황금의 대외 유출을 엄격하게 금지하기도 했다. 나아가 파운드화와 황금의 자유로운 환전도 중지시켰다. 이는 영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금과 파운드화의 연계는 끊어졌다. 파운드화의 신용은 급속도로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차 세계 대전 기간에 파운드화의 가치는 60%나 하락했고 파운드화의 국제적 지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반면 미국 경제는 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 덕에 뉴욕 증권거래소도 일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 최대의 증시로 부상했다. 항상 유럽의 뒤를 따르던 뉴욕 증권거래소는 드디어 세계 자본 시장의 풍향계로 자리를 잡았다.

 

2차 세계 대전 기간에 일개 기업인 미국의 포드 자동차는 이탈리아가 생산한 전투기보다 더 많은 전투기를 만들어냈다. 단 한 번 조선업에 종사하지 않은 자동차 부품업체도 전함을 제조해냈다. 심지어 미국의 한 목재 가공 공장은 63초에 한 대 꼴로 폭격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원자탄과 항공모함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1944년에 열린 브레튼우즈 회의를 계기로 미국은 영국을 완전히 제치고 새로운 금융 대국으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한걸음을 내디뎠다.   

브레튼우즈는 미국 동북부 뉴 햄프셔 주의 워싱턴 산에 있는 삼림이다. 1944년 6월 한 무리의 무장 군인들이 브레튼우즈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브레튼우즈체제 :: 2차 세계대전말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1944년 서방 44국 지도자들이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우즈에 모여 만든 국제통화체제. 미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국제 결제 시스템인 달러화 금태환제의 도입, IMF(국제통화기금) 및 세계은행(IBRD) 창설 등이 핵심 내용이다. 베트남 전쟁에 따른 막대한 전쟁비를 이유로 미국이 1971년 달러 금 태환제를 포기하면서 사실상 붕괴됐지만 여전히 국제금융의 기본틀로 남아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브레튼우즈체제 [Bretton Woods System] (한경 경제용어사전)

 

1944년 6월 30일 연합국 44개국과 각 국제기구의 대표 730명이 2차 세계 대전 후의 세계 금융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곳 브레튼우즈에 모였다.

 

“브레튼우즈 회의의 목적은 20여 년 동안 지속된 혼란스러운 국제 경제 및 금융 질서를 바로잡는 데에 있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즉 1918년부터 사람들은 국가 간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국제기구를 설립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습니다. 또한 국제 연맹에 경제 위원회가 있었으나 큰 역할을 하지 못했죠.”

주지하다시피 이보다 전인 1929년에 대공황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세계 각국은 자국 제품의 수출을 늘리기 위해 앞을 다퉈 자국 화폐를 평가 절하했다. 그 결과 국제 경제와 금융 시장이 혼란에 빠졌고 나아가 국제 무역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궁극적으로는 2차 세계 대전을 불러온 것이다

 

브레튼우즈 회의는 대국들이 전후 금융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인 현장이었다. 회의의 양대 주역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과 영국이었다.

 

브레튼우즈에서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던 그 해 미국의 GDP는 영국의 4.7배, 1인당 국민소득은 1.7배였다. 또 미국은 전 세계 황금의 60%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브레튼우즈 회의에는 앞서 언급했듯 44개 대표단의 730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최종 협상을 벌인 골드 하우스에는 14명만이 들어가 최종 협상을 벌였다.   

 

3주 동안의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달성된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달러와 황금의 환율을 고정시켰다. 그 외에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시켰고 이로써 달러화가 파운드화를 대신해 세계 기축 통화로 자리 잡게 됐다.   

IMF의 설립이 결정되고 세계 각국이 변동 환율제를 실시하지 못하도록 감독이 이뤄졌다. 또한 세계은행(World Bank)의 설립 역시 합의됐다. 이를 통해 세계 2차 대전 후 각국의 경제 재건을 위해 필요한 자본을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이 협정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브레튼우즈 협정」이다.

「브레튼우즈 협정」을 계기로 달러화 중심의 국제 통화 체제가 형성됐다. 이때부터 미국은 영국을 대신해 세계 금융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치적, 경제적으로 미국에 필적할만한 나라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미국이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더불어 월스트리트 역시 세계 금융의 센터가 됐다.

 

1945년 12월 영국 정부는 경제적 원조를 얻기 위해 다시 한 번 케인스를 미국에 파견했다. 당시 영국은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재정이 바닥난 상태에 있었다.   

영국 의회는 당시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한 영국의 중요한 역할을 미국이 인정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무상 원조를 제공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케인스에게 차관만 제공할 수 있다고 못을 박았다. 영국 의회는 그 사실을 알고 분노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영국 의회는 미국으로부터 44억의 차관 제공을 약속받은 다음 「브레튼우즈 협정」에 서명했다.

 

미국은 영국이 「브레튼우즈 협정」에 가입하지 않으면 차관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1945년 12월 29일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브레튼우즈 협정」에서 탈퇴할 것을 결정했다. 그의 탈퇴 결심은 회의석상에서 미국과 영국의 치열한 국제 금융 패권 쟁탈전을 직접 목격한 다음에 내려진 것이었다.

 

“사실 소련은 처음부터 IMF에 가입하려고 했지만 줄곧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들은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서구 국가 주도 하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새로 독립한 러시아는 6개월 동안의 노력을 통해 마침내 IMF 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

 

중국은 이 회의에서 IMF의 네 번째 회원국 및 세계은행의 12개 이사국 중 하나가 됐다.

 

상하이 와이탄의 외국계 은행들은 1940년대 말에 거의 다 중국에서 철수해야 했다.

 

「브레튼우즈 협정」은 1945년부터 26년 동안 유지됐다. 그러다 1971년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미국 정부에 의해 붕괴됐다.

 

 

 

02. 월스트리트 맨들과의 맨투맨 대화

세계적 투자자 워런 버핏

“가장 좋은 투자는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은 그를 교문 밖으로 밀어냈지만 월스트리트는 그에게 문을 열어줬다.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의 재능에 투자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많은 사람과 인맥을 쌓으면서 재능을 더 크게 키울 경우 향후 진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구도 여러분의 재능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가장 좋은 투자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유명한 투자가짐 로저스

누군가가 사업에 실패해 파산하면 능력 있는 다른 누군가가 실패한 기업의 자산을 인수해야 한다.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경제의 올바른 운행 방식이다. 그러나 최근 20년 동안 월스트리트 기업들은 위기에 빠질 때마다 FRB에 도움을 청했고 그것은 아예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나아가 그럴 때마다 FRB는 어김없이 구제 금융을 제공했다.

 

FRB :: FRB(Federal Reserve Board of Governors or Board of Governors of the Federal Reserve System), 즉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의 중추적 기관으로, 1914년 발족하였다. 본부는 워싱턴 D.C.에 있다.미국의 경제·금융 정책의 결정과 실행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기구로서, 특히 FRB의 금리정책은 전세계 통화의 시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주요임무는 미국 전역의 12개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s)들을 총괄하여 감독하는 일로, 공정할인율, 예금준비율의 변경 및 공개시장 조작, 연방준비권의 발행과 회수 감독 기능을 한다. 또, 재할인율 등의 금리 결정, 지급준비율 조절을 통한 통화량 결정, 달러 발행, 주식거래에 대한 신용규제, 가맹은행의 정기예금 금리 규제 등의 권한을 행사한다.
여타 국가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는 연방준비은행들을 관할하는 기관이지만 실제로는 미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민간기관이다.
FRB는 7명의 이사로 구성되며, 임기는 14년(2년에 1명씩 교체, 재임불가)이다. 이사들은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에서 승인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한편 의장과 부의장의 임기는 4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FRB [Federal Reserve Board of Governor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FRB는 월스트리트의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들을 구제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20년 동안 버블이 끊임없이 커졌다. 제 2, 제 3의 버블 역시 이로 인해 생겨났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FRB는 시장이 고유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지 못하게 했다. 즉, 기업의 실패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정적인 잘못을 했는데도 그것이 실패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게 된다. 이어 그것이 쌓이면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 이 이치는 너무나 당연하다. 시장은 사람들이 실패하도록 내버려둔다. 또 실패한 자들을 도태시킴으로써 내재된 폐단을 없애버린다. 그러나 FRB는 “친구들이 실패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시장은 스스로 자체 결함을 극복하면서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FRB가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을 막아버렸다. FRB가 기업이 파산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큰 실수였다. 그 대가를 지금 우리가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의 파산은 오히려 세계에 이득이 될 수도 있다. 전체의 시스템은 새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패한 자는 도태되고 성공한 자는 살아남는 것, 이것이 바로 시장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성공한 자를 희생시켜 실패한 자를 구해준다.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성공한 자가 실패한 자를 위해 실패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시장은 누군가 돈을 벌면 결국 어느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돼 있는 곳이다.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인생의 섭리이다.   

실패를 허용해야 한다. 한 사람의 실패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 유익한 경험과 교훈이 될 수 있다.

 

경제 위기의 잘못을 모두 글로벌화에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경제 위기는 인간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다.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도 있다. 그러나 과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반드시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 문화에는 음양(陰陽) 사상이 있다. 중국어로 위기라는 단어는 음양이 상생하듯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의미한다. 부언하건대 위기는 기회이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상생한다.

 

공매도의 달인 제임스 채노스

키니코스 :: 견유학파(犬儒學派)·시니시즘이라고도 한다.
이 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극기적인 철학의 일면을 계승하여 덕(德)만 있으면 족하다 하여 정신적·육체적인 단련을 중요시하였으며, 쾌락을 멀리하고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족자제(自足自制),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의지의 우월성을 존중하였으며, 권력이나 세속적인 일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원하였고, 세계시민으로 자칭하여 헬레니즘 세계로 설교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키니코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안티스테네스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가 아테네 교외의 키노사르게스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시노페의 디오게네스(BC 412?∼BC 323)로 대표되는 ‘개와 같은 생활(kynicos bios)’에서 유래한 듯싶다. 가진 것이라곤 남루한 옷과 지팡이, 목에 거는 수도사의 주머니밖에 없으며, 나무통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거지 철학자는 스스로 ‘개와 같은 디오게네스’라고 이름하였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의 특징이며,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신에 가까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버릇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거지처럼 살고 있는 디오게네스에게 필요한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디오게네스는 햇빛을 가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사회적인 습관은 물론, 이론적 학문이나 예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옛 사람은 그들의 이러한 점을 평하여, 키니코스주의라는 것은 ‘덕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이 키니코스라는 말에 어원을 둔 cynical이라는 형용사는 ‘냉소적인’ ‘조롱적인’의 뜻을 가진다. 이것은 디오게네스의, 세상의 모든 질서에 대한 철저한 조소적 자세에서 유래한다. 대낮에 디오게네스는 등불을 켜 들고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방황하였다고 한다.
이 학파의 생활방식은 나중에 스토아학파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학파는 BC 3세기경에 융성하였고 그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나 로마제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1세기경에 다시 융성하였다.
루키아누스(Lucianus)는 키니코스학파 사람들의 거지와 같은 생활 태도나 무교양을 비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니코스학파 [Cynic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공매자가 증시 하락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다. 증시 하락의 원인은 경제, 금융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공매자들은 그저 특정 기업의 문제점을 발견하거나 지적할 뿐이다.

 

공매자는 탄광의 위험을 알려주는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

 

나는 투자자들이 공매자보다 무책임한 기업 CEO들 때문에 훨씬 더 큰 손실을 입는다고 생각한다. 도산하기 직전의 리먼 브라더스와 베어 스턴스의 레버리지율은 40배에 달했다. 총자산이 40달러라고 가정하면 그 중에서 자기 자본은 1달러밖에 안 된다는 얘기이다.

 

CDS(Credit Default Swap, 신용 파산 스왑. 신용파생상품의 일종-옮긴이)

 

신용부도스와프 :: 영문 첫글자를 따서 CDS라고 하며, 부도의 위험만 따로 떼어내어 사고파는 신용파생상품이다. 예를 들면, A은행이 B기업의 회사채를 인수한 경우에 B기업이 파산하면 A은행은 채권에 투자한 원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된다. A은행은 이러한 신용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C금융회사에 정기적으로 수수료를 지급하는 대신, B기업이 파산할 경우에 C금융회사로부터 투자원금을 받도록 거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용파생상품은 1990년대 중반 투자은행들이 신흥 경제국에 투자하는 데 따르는 신용위험을 다른 투자기관으로 이전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며, 2004년 이후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채무자로서는 자금을 조달하기 쉽고, 채권자로서는 일종의 보험료를 지급하면서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채무자인 기업이 부도가 날 경우 보증인 격인 금융회사에 손실이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금융회사가 부실해지면 채권자인 은행도 연쇄적으로 부실화된다. CDS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경우 자금조달 시장이 마비될 우려가 있으며, 실제로 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미국의 금융위기를 증폭시킨 요인으로 지적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부도스와프 [Credit Default Swap, 信用不渡-]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공매도의 대표적인 사례는 보험이다. 보험과 공매도는 성격이 같다. 보험은 장래에 어떤 보상 내지는 수익을 얻기 위해 미리 일정한 보험료를 적립해두는 방식이다.

 

미래에 어떤 것을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미리 대금을 받는 모든 거래를 공매도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공매도 사례는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 발생했다. 당시 사람들은 주가 상승이 예상될 때에는 콜옵션을 매수하고 주가 하락이 예상될 때에는 풋옵션을 매수하기로 서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최초의 공매도 방식이었다.

 

벌크스톡(Bulk Stock. 대량 상품의 의미-옮긴이)

 

95%의 공매도는 이미 투자한 자본의 손실을 헤지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전환 사채는 보통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사채이다. 전환 사채 매입자는 전환 전에 사채로서의 확정 이자를 받을 수 있고 전환 후에는 주식으로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전환사채 :: 일정한 조건에 따라 채권을 발행한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으로서 전환 전에는 사채로서의 확정이자를 받을 수 있고 전환 후에는 주식으로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채와 주식의 중간 형태를 취한 채권이다.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전환사채 발행 당시에 미리 결정해 두는데, 보통 채권과 주식을 얼마의 비율로 교환할 것인가 하는 '전환가격'을 정해두게 된다. 이때 전환사채의 주식으로의 전환은 통상 사채 발행후 3개월부터 가능하다. 
예를 들어 A사가 1년만기 전환사채를 발행하면서 전환사채 만기보장 수익률이 8%, 전환가격이 1만 원이었다고 하자. 만약 향후 1년 동안 A사 주가가 1만 원에 못 미치게 될 경우 만기까지 보유했다가 8%이자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A사 주가가 급등해 2만 원이 됐다면 당연히 전환해 주당 1만 원에 이르는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다.
이처럼 전환사채 보유자는 주식시장이 활황을 보여 주가가 전환가격을 웃돌게 될 경우 주식으로 전환해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다. 
반면 주식시장 침체로 주가가 전환가격보다 낮아지게 되면 만기까지 보유해 발행회사가 발행 당시 확정한 만기보장수익률만큼의 이자를 지급받게 된다. 이때 이자율은 일반적으로 보통 회사채에 비해 낮은 편이다. 
다만 만기보장수익률은 회사의 신용도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신용도가 좋은 회사의 전환사채는 수익률이 낮은 반면 그렇지 못한 회사의 전환사채는 수익률이 높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정기간 후 전환사채를 일정 가격에 팔 수 있는 풋옵션(put option)과 발행회사가 전환사채를 되살수 있는 콜옵션(call option)의 발행조건이 붙기도 한다.
전환사채는 발행회사의 입장에선 낮은 이자를 지급하고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주식 활황기 때 자금조달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전환사채는 일반사채와 같이 이사회의 결의로 발행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주주를 보호하기 위해 전환사채 인수권을 주주에게 먼저 주고, 그렇지 않은 경우 정관에 특별한 규정이 없으면 주주총회의 특별결의를 거쳐 결정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환사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글라스 스티걸법 :: 1933년 미국에서 은행개혁과 투기규제를 목적으로 제정한 법으로, 핵심 내용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이다. 1999년 폐지되었다.
1933년 재무장관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원 카터 글라스(Carter Glass)와 민주당 하원의원으로 은행·통화위원장을 맡았던 헨리 B. 스티걸(Henry B. Steagall)이 공동으로 제안한 법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글라스 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이라 불렀다. 공식 명칭은 ‘1933년 은행법(Banking Act of 1933)’이다.
1929년 발생한 주가폭락과 그에 이은 대공황의 원인 중 하나가 상업은행이 고객의 자산을 이용하여 일삼은 무분별한 투기 행위였다는 판단에서 ‘은행개혁’과 ‘투기규제’를 목적으로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의 핵심 내용은 상업은행은 여·수신 업무만 하고, 투자은행은 증권 업무만 하도록 업무를 분리하여 상업은행이 고객의 예금으로 주식 투자를 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 법을 통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를 설립하여 은행예금을 보장하는 연방예금보험제도를 창설하고, 금융에 대한 연방준비제도의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저축예금 이자상한제를 실시하고, 연방공개시장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부터 미국에서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영역이 엄격히 분리되어 골드만삭스·리먼브러더스 등은 투자은행으로, 뱅크오브아메리카·시티뱅크 등은 상업은행의 선두주자로 성장하였다.
1999년 11월 금융산업 경쟁력을 명분으로 내세운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과 월스트리트 상업은행들의 로비력이 맞물리면서 상업은행의 주식 투자를 허용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그램 리치 블라일리법(Gramm-Leach-Bliley Act)이 제정됨으로써 글라스 스티걸법은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글라스 스티걸법 [Glass-Steagall Act]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리스크가 클수록 수익률도 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실패하면 모두가 함께 그 손실을 부담해야 한다. 개인의 리스크가 전체에게로 이전되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로스차일드家 첫 비혈족 CEO 나이젤 히긴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정부보다 24시간 먼저 워털루 전투의 결과를 알아내고 이 정보를 영국 정부에 알려줬지만 영국 정부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돈을 벌었다. 그것은 워털루 전투가 끝난 후의 일이었다. 영국군이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영국 정부에 대출을 제공해서 돈을 번 것이지 결코 워털루 전투를 이용해서 돈을 번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게 하라. 그것이 안 되면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게 하라” 이 말은 지난 200년 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의 신념이 됐다.

 

모건의 증손자 로버트 펜노이어

1906~1907년에 경제 공황이 발생했을 때 그는 정부를 도와 금융 위기를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굳은 일념으로 다른 은행의 총재들을 불러 자신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다. 당시 그는 아예 방문을 잠가버렸다. 그런 다음 자리에 모인 은행 총재들이 돈을 내놓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방문을 열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다.

 

1935년 잭 모건과 파트너는 시련에 직면했다. 미국 정부에서 투자 은행과 상업 은행을 분리시키는 법을 출범시켰던 것이다. 결국 JP 모건은 상업 은행, 모건 스탠리는 투자 은행으로 각각 독립했다. 상업 은행은 전통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모건 스탠리는 증권 발행, 신규 기업의 자금 조달 등의 업무를 책임지게 됐다.

 

중국 국무원발전연구센터 연구원 우징롄

제 1차 산업혁명 이전까지 경제 성장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때까지 경제 성장이 토지 등 자연 자원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토지는 유동성이 매우 낮은데다 그때는 아직 화폐화가 되기 전이었다. 그런데 제 1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경제 성장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주요 원인은 자본이 토지를 대체해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가 됐던 탓이다. 자본은 곧 돈, 다시 말해 화폐를 의미한다. 따라서 금융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됐다. 이후 런던이 세계 최초의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다. 런던을 중심으로 금융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미국 경제 역시 더불어 빠르게 성장했다.

 

월스트리트의 세계 금융 센터로서의 지위와 역할이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한 것이지 이곳에 양질의 인재들이 집중된 탓에 월스트리트가 세계 경제 센터로 부상한 것은 아니다.

 

월스트리트는 원래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네덜란드인들이 산업혁명 이전에 수립한 비즈니스 문화를 월스트리트에 전파한 것이 오늘날 월스트리트의 비즈니스 문화를 만들었다.

 

국가의 부는 저축과 이를 이용한 투자 및 소비 등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이 두 부분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경제는 제대로 돌아간다.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후 달러화는 황금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오히려 더 강세를 나타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금 1온스는 35달러의 비율로 고정돼 있었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달러화로 FRB의 금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 달러화는 금과 아무 관계도 없이 돼버렸다. 나아가 FRB는 마음대로 달러를 발행할 수 있게 됐다.

 

예일 대학 경영대학원 금융학 종신 교수 천즈우

런던은 세계 금융 센터가 되기에 앞서 먼저 유럽의 금융 센터가 됐다. 이와 관련해서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1688년에 명예혁명이 끝난 다음 영국 정부는 1691년을 전후해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을 출범시켰다.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해 영국 해군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은행의 역할은 한 마디로 영국의 지속적인 해외 확장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포한 후 1783년까지 독립전쟁을 치렀다. 전쟁 중 재정의 곤란으로 공채를 발행했다. 이로 인해 거액의 채무를 짊어지게 됐다.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해밀턴 미국 재무부 장관은 1790년에 금융 개혁을 단행했다. 해밀턴의 개혁방안에는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 시장 구축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건국 초기에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따라서 화폐 거래량과 공급량이 매우 크면서도 대단히 활성화된 자본 시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당시 해밀턴이 발행한 세 종류의 국채 및 미국 최초의 은행 주식 이 네 가지 증권이 1790년 이후부터 1800년까지 미국의 자본 시장, 금융 시장 및 월스트리트의 기원이 됐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미국 뉴욕의 금융 시장과 자본 시장에서는 미국 국채 위주로 증권 거래가 이뤄졌다.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런던의 자본 시장에서 정부 공채가 주로 거래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1720년 영국 의회는 「버블 방지법」을 출범시켰다. 이 법안은 런던 주식거래 시장의 발전을 지연 내지 정지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법안에 따라 영국의 유한책임 주식회사는 주식을 공개 발행할 때 반드시 영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 탓이다. 이는 기업의 증시 상장을 사실상 제한한 것이다. 따라서 1720년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영국에 신규 상장 기업은 하나도 없었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 하에서 뉴욕 자본 시장에서는 19세기 상반기부터 연방 정부 공채 이외의 주식도 거래되기 시작했다. 먼저 은행과 보험 회사들이 주식을 발행했다. 곧이어 소수의 제조업체들이 뉴욕 증시에 상장됐다. 그러나 뉴욕이 영국 런던을 대체해 세계 금융 센터 및 세계의 가장 주요한 자기자본 조달 시장이 되기까지에는 1850년부터 1860년을 전후해 형성된 철도주의 거품과 매우 큰 관계가 있다. 1890년을 전후해 미국의 통신회사 AT&T와 대중에게 익숙히 알려진 제너럴 일렉트릭(GE)이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곧 이어 1900년 제너럴 모터스(GM)도 뉴욕 증시에 상장됐다. 1850년부터 1929년까지 많은 기업들이 뉴욕 증시에 신규 상장되면서 뉴욕은 점차 세계 최대 증권 시장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뉴욕의 금융 시장과 과거 런던의 금융 시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따로 있다. 뉴욕이 19세기 후반기부터 새로운 글로벌 금융 센터로 성장하게 된 것은 지분 거래 분야에서 새롭고 폭넓은 발전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 제26대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하비 피트

아더 앤더슨 :: 1913년 아서 앤더슨(Arthur Andersen)이 시카고에서 설립하였다. 앤더슨은 시카고 교외에 있는 대학의 교수였으며 공공회계 부문을 연구하였다. 그후 회사는 성장을 거듭하였다.
1947년 앤더슨이 사망한 후 한때 해체위기에 직면하였으나, 제자인 레너드 스파섹(Leonard Spacek)의 노력으로 세계적인 컨설팅 서비스 조직체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주요 업무는 기업과 같은 영리기관은 물론 정부·교육 기관 등의 비영리기관에 대한 중장기전략 수립, 프로세스 혁신, 인사·조직전략 수립 등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2001년까지 전 세계 84개국 385개 지사에서 7만여 명의 직원이 근무할 정도로 큰 성장을 거두었고 한국에는 1986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2001년 회계감사를 담당하였던 미국 최대의 에너지 회사인 엔론의 분식회계 사실이 적발되면서 해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서앤더슨 [Arthur Anderse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워싱턴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위기를 해결하려 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한 종류는 위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었다.

 

9·11테러 사태는 심각한 위기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또 우리가 많은 잘못을 고치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나를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두 번 속으면 속은 내가 바보라고 해야 한다.”

 

네이키드 쇼트셀링(Naked Short Selling) :: 공매도의 일종으로 현재 주식을 갖고 있지 않거나 청산일까지도 주식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가 하락을 노려 매도 주문을 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지되어 있지만 미국에서는 증거금만 있으면 네이키드 숏셀링도 무제한 가능했다. 한편 주식을 빌려서 매도하는 공매도 기법을 커버드 쇼트 셀링(covered short selling)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키드 숏셀링 [naked short-selling] (한경 경제용어사전)

 

네이키드 쇼트셀링은 주식을 빌리지 않고 매도부터 하는 공매도 기법을 가리킨다. 실물 주식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매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수자들은 가끔 주식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네이키드 쇼트셀링은 자본 시장을 도박장으로 만든다.

 

금융역사학자 존 스틸 고든

미국은 19세기까지 전국 인구의 85%가 농업에 종사했을 정도로 공업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20세기에는 50%의 인구가 농업, 나머지 50%의 인구가 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했다. 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농업인구가 총인구의 25% 정도로 줄어들었다. 현재는 농업 인구가 1.9%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 최대 농축산물 수출국이다. 미국은 육류와 쌀 생산량이 매우 높기 때문에 수출량도 다른 국가들을 압도적으로 초과한다.

현재 미국 가정의 60% 이상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이는 다른 국가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1930년대까지는 겨우 5%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앞서 말한 대로 60%로 증가했다.

 

현대 자본주의는 네덜란드에서 기원했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세계 최초의 보험회사, 또 세계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은행가들이 모두 네덜란드에서 탄생했다. 네덜란드인들은 1625년에 미국에 와서 뉴 암스테르담을 세웠다. 네덜란드인들이 미국에 온 목적은 다른 식민주의자들 대부분이 종교적 원인으로 미국에 온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청교도는 매사추세츠 주, 천주교도는 메릴랜드 주, 공의회는 펜실베니아 주에 각각 정착했다. 다른 식민주의자들이 신앙을 위해 북미 대륙에 왔다면 네덜란드인들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뉴욕에 왔다. 그들은 17년 동안 교회를 하나도 짓지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많은 돈을 벌었다.

 

영국은 1694년에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다. 미국의 알렉산더 해밀턴 재무부 장관은 1790년에 국채 발행 방안을 제안했는데 이것도 역시 영국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당시 미국은 자국 화폐를 발행하지 못했다. 대신 스페인 화폐, 영국 화폐 및 프랑스 화폐를 유통시켰다. 미국이 자국 화폐를 발행하려고 하자 영국이 다시 막아 나섰다. 따라서 당시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시스템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국이 미국의 경제 발전을 방해하면서 결국 미국 독립전쟁을 야기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당시 영국은 서구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이에 반해 미국은 재정이 텅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화폐 시스템조차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은 프랑스, 네덜란드로부터 대규모의 차관을 빌려 필요한 무역 자금을 해결했다. 때문에 미국의 각 주와 연방 정부에서는 모두 채권을 발행했다. 그러나 연방 정부의 채권 발행량은 많지 않았다. 대륙 의회는 독립전쟁의 자금을 조달하고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이른바 대륙 화폐(Continental currency)를 남발했다. 당연히 나중에 화폐 가치가 폭락해 휴지 조각이 돼 버렸다. 그 후 미국은 약 100년 동안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대륙 화폐 때문에 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다행히 연방 정부 설립 초기에 알렉산더 해밀턴이 금융 개혁을 통해 시중의 대륙 화폐를 모두 회수했다.   

미국의 국채 발행은 알렉산더 해밀턴이 제안한 계획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터진 후 알렉산더 해밀턴은 거액의 전쟁 경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국채 발행을 제안했다. 국채는 재원 조달 부담을 미래에 전가시키는 기능을 한다. 내전이 갓 시작됐을 때 미국의 국채 규모는 6500만 달러로 당시에도 그다지 많지 않은 액수였다. 그러나 내전이 끝난 후, 즉 4년 후에는 국채 규모가 무려 27억 달러로 급증했다. 국채를 판매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일은 모두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이 담당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별로 유명하지 않던 월스트리트가 일약 런던에 버금가는 세계 2위의 금융 시장으로 부상하게 됐다.

영국 투자자들은 18세기 말부터 주로 미국 주식을 구매하는 방법으로 미국에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뉴욕을 세계 금융 센터로 부상시킨 획기적인 계기는 1차 세계 대전이었다. 1차 세계 대전 초기 유럽 각국들은 미국의 자본을 이용해 전쟁 비용을 충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유럽 부자들은 앞을 다퉈 모아뒀던 금과 자산을 뉴욕에 가져다 보관했다. 지금도 FRB 건물의 지하 85피트 되는 지점에 금괴 보관소가 있다. 어쨌거나 미국 역시 1차 세계 대전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에 수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 과정에 자본의 필수 경유지인 월스트리트도 크게 성장, 발전했다. 1915년에 다우존스지수는 연 85%의 상승률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다. 1차 세계 대전 종식 후 영국과 프랑스는 파산했다. 그러나 미국은 오히려 더 부유해졌다. 또 전쟁 물자를 공급하면서 국력 역시 한층 더 강해졌다. 뉴욕은 이렇게 세계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다.

 

월스트리트는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기업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회계 준칙을 제정하도록 요구했다. 아울러 독립 회계 법인이 이들 기업에 대해 회계 감사를 실시해 기업 장부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 한 마디로 기업 회계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월스트리트가 기업들에게 제안한 것이지 정부가 제안한 것이 아니었다.

1860년대까지 미국에는 사기 행위를 단속하는 법률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고 관련 단속 기관이나 직책도 없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1860년대 말까지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포괄적인 규정을 만들어 증시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은 1811년에 미국 정부에 의해 폐지됐다. 중앙은행이 없어지고 다시 다른 은행(미합중국 제 2 은행)이 생겼으나 20년이 지난 후 역시 1836년에 문을 닫았다. 따라서 미국에는 1930년대까지 중앙은행이 없었다.

 

연방 정부가 금융 화폐 시스템을 구축,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남북전쟁이 시작된 후부터였다. 그전까지 미국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화폐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연방 정부는 돈을 생산하기는 했으나 화폐를 인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 의회는 국가은행 업무 시스템을 확립하고 국책 은행들만 국가 화폐를 발행하도록 승인했다.

 

스무트 할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 :: 미국이 1930년 대공황 당시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마련한 관세법으로 공화당의 리드 스무트 의원과 윌리스 홀리 의원이 주도해 스무트·홀리 관세법이라고 부른다. 주요 골자는 2만여 개의 수입품에 평균 59%, 최고 40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1920년대 미국 경제의 거품으로 1929년 10월 29일 뉴욕증시가 대폭락하면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됐다. 당시 후버 행정부는 증시가 급락하는 것이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마련했다. 당시 1000명 이상의 경제학자들이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게 이 법을 거부하라고 요청했으나 후버 행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1930년 6월 이 법을 적용했다. 이로 인해 미국 수입관세율이 59.1%까지 높아졌다. 그렇지만 이 법은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의 보복관세 조치와 일부 국가의 환율 통제, 수입 제한 등으로 이어지면서 무역 거래가 급감해 대공황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한편, 미국 경제학자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부활시켜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스무트·홀리 관세법과 유사하다며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무트·홀리 관세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입니다”

 

까놓고 말하면 미국의 ‘뉴딜 정책’ 창시자는 루즈벨트가 아닌 후버였다. 루즈벨트는 후버의 ‘뉴딜 정책’을 한층 더 계승, 발전시켜 성공을 이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다양한 개혁 조치를 과감하게 단행했다. 우선 증권거래위원회를 설립했다. SEC는 월스트리트의 증권 시장을 규제하기 위해 창립된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지금까지 그 역할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다. 그는 또한 연방 준비은행에 더 큰 권력을 부여하고 조직과 기구를 효율적으로 재편성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미국 정부의 국채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대량의 국채를 발행하는 목적은 경제 위기나 군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누구에게나 ‘노’라고 해야 하는 어려운 결정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의 재정 예산은 경제 성장이 가장 빨랐던 지난 40년 동안 줄곧 적자만 기록했다. 현재 미국 국채는 GDP의 약 80% 정도 차지한다. 이는 1950년대보다 더 높은 수준이다.

 

16세기 스페인은 중남미 지역을 지배하면서 이들 국가로부터 매년 수백 만 불의 금은을 약탈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의 외채를 빌렸다. 따라서 17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은 과중한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유럽의 맹주’ 자리를 프랑스에 내주고 말았다. 비록 신대륙에서 엄청난 양의 재화를 얻었으나 여전히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세계 최초의 채권은 중세기 때 이탈리아 베니스, 플로렌스 등 도시 국가에서 발행됐다. 13세기 베니스에서 20세기 초 런던에 이르기까지 채권은 대부분 전쟁자금 조달을 위한 목적으로 발행됐다.

 

미국 정부는 근현대에 이르러 국채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도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국채를 발행했다.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 후 미국은 전쟁 기간에 진 빚을 모두 상환했다. 1830년에 이르러 미국은 ‘채무 제로’ 상태가 됐다.

 

1990년대에 미국의 재정 상황이 호전돼 90년대 말에는 또 다시 ‘채무 제로’ 상태가 됐다. 모두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덕분이었다.

 

선물 거래는 19세기 미국의 시카고에서 시작됐다. 당시 누군가 농민들이 수확기에 수확하게 될 농작물을 미리 특정 가격에 사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선물 거래의 기원이다. 당시 농산물 가격은 매우 불안정했다. 19세기에는 농산물 가격이 하락세를 나타내 농민들의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따라서 가격 변동이 심했던 곡물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선물 거래 계약서의 표준 양식이 만들어졌다. 또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도 설립됐다.

 

선물 거래에도 모험은 따른다. 투자자들은 선물 거래를 하기 전에 먼저 향후 가격의 변화 추세를 예측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석유 가격이 상승할 것을 예상하고 선물 거래로 배럴당 100 달러로 거래 계약을 한 경우를 보자. 1년 후 인도 시점에 이르러 석유 가격이 60 달러로 하락해도 여전히 배럴당 100 달러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이와 같이 가격 변화에 따르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옵션거래이다. 옵션거래는 선물 거래와는 달리 사고팔 수 있는 ‘권리’를 거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석유 가격을 배럴당 100 달러로 예상했다고 치자. 그러다 가격이 60 달러로 하락한 경우에는 권리를 포기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수요가 있는 곳에 혁신도 있다. 훌륭한 혁신은 더 높은 수익으로 연결된다.

 

서구 경제사를 살펴보면 금융 혁신의 대부분이 기업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택담보 대출의 개념은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극소수만 자신들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0년부터 영어권 국가의 정치인들은 서민들도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매하도록 적극적으로 격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국민 모두가 자신들의 주택을 보유하면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사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자기 집을 구매한 사람들은 우파로 바뀌어 사상이 보수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주택대출 금리에 대해서는 세제 혜택이 주어지지만 다른 대출에는 세제 혜택이 없다.

 

패니 메이(Fannie Mae) :: 패니메이는 프레디맥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모기지 대출 전문 금융회사다. 1938년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졌다. 패니매, 혹은 연방주택저당공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을 겪으면서 정부의 시장 개입을 금기시하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시장 경제 이론이 무너졌다. 1933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정부가 시장경제에 직접 개입하는 뉴딜 정책을 시행했다. 패니메이가 정부의 지원 아래 세워진 것도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덕분이었다. 패니메이는 연방주택국이 보증하는 대출 증서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주택산업을 부양하는 역할을 맡았다. 패니메이는 1968년 민영화됐다. 2년 뒤인 1970년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은 프레디맥이 세워졌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이후 미국 모기지 대출 분야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패니메이의 주력 사업과 역할은 금융기관으로부터 저당권(모기지)을 사들여 주택 대출을 확대하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직접 대출하지는 않지만 대출기관인 금융권의 채권을 매입함으로써 금융권이 주택대출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돕는다. 패니메이가 은행에서 저당권을 사들이는 순간, 대출한 돈을 받을 권리와 그 돈을 받지 못할 위험은 모두 패니메이가 떠안는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정부의 보호 아래 성장을 거듭했다. 2007년 12조 달러에 이르는 미국 전체 모기지 시장의 절반에 가까운 5조 5000억 달러의 모기지를 두 회사가 보증할 정도였다. 2007년 이후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이 된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론(subprime mortgage loan) 사태가 일어났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로 불리는 서브프라임모기지론은 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담보 대출을 말한다. 금리가 급등하면서 이자를 갚지 못하는 저소득층이 늘어나 사태가 악화됐다. 주택담보대출을 주도해온 패니메이는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 이후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몰렸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경영난이 심해지자 미국 정부는 2008년 2000억 달러의 공적 자금을 투입, 지분을 대거 사들이며 사실상 두 기업을 국유화했다. 패니메이의 본사는 워싱턴DC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패니메이 [Fannie Mae Company]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프레디 맥(Freddie Mac) :: 프레디맥의 전신은 1970년 세워진 연방주택담보대출공사(Federal Home Loan Mortgage Corporation)다. 프레디맥은 연방주택저당공사로 불리기도 하는 패니메이(Fannie mae company)와 함께 미국 주택담보대출 분야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대형 금융기관이다. 애초 의회의 승인을 받은 국영기업으로 출발했으나 미 정부가 보유 지분을 줄이면서 단계적으로 민영화됐다. 프레디맥은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저당권(모기지)을 사들이는 등의 방식으로 주택 대출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은행에서 저당권을 사들이는 순간부터 대출을 받을 권리와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 위험까지 모두 프레디맥이 떠안는다. 프레디맥과 패니메이는 정부의 보호 아래 성장을 거듭했다. 2007년 12조 달러에 이르는 미국 전체 모기지 시장에서 절반에 가까운 5조 5000억 달러의 모기지를 두 회사가 보증할 정도였다. 2007년 이후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이 된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론(subprime mortgage loan) 사태가 일어났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로 불리는 서브프라임모기지론은 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담보 대출을 말한다. 금리가 급등하면서 이자를 갚지 못하는 저소득층이 늘어나 사태가 악화됐다. 주택담보대출을 주도해온 프레디맥은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 이후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몰렸다. 프레디맥의 경영난이 심해지자 미국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하며 프레디맥 지분 80%를 인수해 회사를 다시 국유화했다. 그러나 프래디맥은 2009년 4분기 65억 달러, 이듬해인 2010년 4분기 1억 1300만 달러의 적자를 나타내는 등 쉽게 경영을 정상화하지 못했다. 2009년에는 금융위기와 관련해 법무부의 조사를 받던 프래디맥의 데이비드 켈러만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본사는 버지니아 주 매클린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레디맥 [Freddie Mac Company]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벤저민 그레이엄과 워런 버핏의 전기작가 재닛 로우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투기와 인맥 관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달랐다. 그는 증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기업들의 수익률을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레이엄의 기업 가치 이론이며 월스트리트 맨들이 그레이엄을 배워야 할 점이기도 하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런던 증권거래소와 월스트리트의 뉴욕 증권거래소는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됐다. 그레이엄이 월스트리트에 진출했을 때에는 모든 거래소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증시에서는 개인 대 개인의 소액 거래만이 가능했다. 당시 거래소들은 거의 1년 동안 개장을 못했다.

 

‘가치 투자’라는 용어는 그레이엄이 처음부터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훗날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전문용어가 됐다. 그레이엄은 대공황 시기에 적지 않은 손해를 봤다. 그는 자신에게 자금을 맡긴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으나 1929년에 바닥까지 추락한 증시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연속 7년 동안 한 푼의 수익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안간힘을 써서 겨우 투자자들의 자금을 대공황 발생 초기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또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해서 돈을 벌었다. 한 투자자가 그레이엄의 강의 내용과 수업 토론 내용을 기록하여 학기가 끝난 후 그레이엄과 함께 『증권 분석』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은 투자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그레이엄은 그 후부터 강의와 집필을 통해 가계지출 비용을 마련했다. 그레이엄은 『증권 분석』을 통해 가치 투자 이론을 확립했다. 『증권 분석』은 1934년에 초판 발행 후 1~2년에 한 번씩 추가 인쇄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그레이엄은 뛰어난 투자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미국 보험회사인 가이코(GEICO)에 공격적인 투자를 해서 큰 수익을 올린 것은 가장 좋은 증거가 아닐까 싶다. 가이코의 창업자는 텍사스인 부부였다. 그들은 직업이 안정적이고 신용도가 높았다. 사고 발생 가능성이 적은 정부 공무원과 군인들에게만 보험 상품을 팔았다. 때문에 가이코는 상당히 높은 수익을 내는 기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업의 창업자인 부부는 나이가 들면서 가이코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대부분 월스트리트 맨들은 이 기업에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부부는 벤저민 그레이엄을 찾아 가이코 인수 의사 여부에 대해 물었다. 그레이엄은 한참 분석한 끝에 이 기업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레이엄의 투자 회사가 가이코를 통째로 인수할만한 자금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이엄은 생각 끝에 가이코를 증시에 상장시켜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가이코는 상장기업으로 변신했다.   

가이코는 증시에서도 놀랄만한 파워를 보였다. 가이코의 주가는 1년 사이에 700% 상승했다. 이로 인해 그레이엄은 큰 수익을 얻었다. 가이코는 그 후 일련의 등락을 반복하다 그레이엄이 죽고 기업 경영자와 주주들이 바뀌면서 경영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주가도 대폭 하락했다. 이때 워런 버핏이 나타났다. 그는 가이코의 주식이 폭락한 기회를 이용해 대량 매수, 가이코의 대주주가 됐다. 워런 버핏의 도움으로 가이코는 경영 상황이 호전돼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워런 버핏은 그 후에도 꾸준히 가이코에 투자하다 나중에는 이 기업을 완전히 인수해버렸다.

 

처음에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재무와 상업 경영에 대해 배우다 고향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못 참고 네브래스카 대학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학사 학위를 땄을 정도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금융과 관련해 석사 과정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에 지원했지만 시험에서 떨어졌다. 결국 그는 컬럼비아 대학을 선택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19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레이엄의 『증권 분석』을 비롯해 다른 저서들을 두루 다 읽는 공부를 했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도 그레이엄이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대학원에서 워런 버핏은 그레이엄의 과목을 수강했다.

 

그레이엄은 얼마 후 은퇴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다. 그때쯤에는 워런 버핏도 출중한 재능으로 높은 실적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이엄은 은퇴하면서 자신의 고객들에게 자금을 워런 버핏에게 맡기도록 권유했다. 당시 워런 버핏은 오마하 시에 있었다. 반면 그레이엄의 투자자들은 대부분 뉴욕에 있었지만 그들은 그레이엄을 믿었던 만큼 워런 버핏도 믿었다.

 

JP 모건 전기 작가 진 스트로스

‘절제, 절약, 공정’

 

“돈은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말아라. 빌려주면 돈과 사람을 잃고 빌리면 절약하는 습성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라”

 

모건은 또 다른 은행들과 공동으로 새로운 은행 조직인 신디케이트를 설립했다. 신디케이트는 정부로부터 구매한 채권에 약간의 마진을 붙여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신디케이트 방식은 더 많은 채권을 더 쉽게 투자자들에게 판매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일반 투자자가 많지 않았다. 그저 소수의 매우 부유한 개인이나 기업만이 채권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은행가들은 가끔 손에 있는 채권을 제때에 팔지 못해 손실을 입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시장이 짧은 침체기를 거쳐 다시 회복되기에 은행가들은 채권을 장기 보유함으로써 자금이 묶이는 경우가 적었다.

 

모건은 일생동안 제너럴 일렉트릭(GE),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US스틸 등의 기업을 설립했다. 또 AT&T의 전신인 벨 전화회사를 탄생시켰다. 대부분 사람들은 모건이 이들 기업들을 소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JP 모건은 기업을 설립한 후 기업 주식과 공채를 모두 투자자들에게 매도하고 그 본인은 주식을 얼마 보유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먹고 이 기업들을 소유했더라면 아마 훨씬 더 큰 부자가 됐을 것이다. 그는 남북전쟁 후 연방 정부의 채권을 인수해 정부의 채무를 상환해줬으나 그 채권을 보유하지 않고 모두 팔아버렸다. 그가 직접 철도 회사들을 연결시켜 현대화 시스템으로 만든 철도 트러스트도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JP 모건은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할 수 있다고 장담한 1878년부터는 아예 줄곧 에디슨의 발명 계획을 전격 지원했다.

 

1892년 그는 에디슨 전기회사와 최대의 라이벌 회사인 톰 휴스턴 전기 회사를 모두 인수해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가 바로 지금까지도 유명한 제너럴 일렉트릭(GE)이다. 그는 1901년부터는 철강업 통합 조정에 착수, 잇따라 앤드류 카네기의 철강 왕국과 일련의 철도, 토지, 광산 등을 매입했다. 당시 그는 4억8000만 달러의 가격에 카네기 철강 회사를 인수했는데 이 중 약 2억4000만 달러가 카네기 본인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그는 짧은 12주 사이에 카네기의 철강 제국과 몇몇 다른 철강 회사를 인수해 14억 달러의 자본금으로 미국 역사상 최대의 기업을 탄생시켰다. 아무도 상상 못했던 일이었다. 사람들은 US 스틸사의 엄청난 규모를 보고 놀라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미합중국 제 2 은행도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836년에 앤드류 잭슨 대통령에 의해 폐지됐을 정도였다. 또 FRB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9개월이 지난 1913년에 설립된 것이다.

 

1907년에 미국에 경제 위기가 터졌다. 그러나 국가에는 구제 금융을 제공할만한 자금이 없었다. 또 재무부 장관도 입법권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능력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때 그가 나섰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한 무리의 은행가들이 장장 두 주일동안 노력해 겨우 공황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JP 모건은 즉시 대형 은행 총재들을 자신의 사무실에 소집해 10분 내에 2000만 달러의 자금을 조성하라고 했다. 은행 총재들은 그의 요구에 따라 2000만 달러의 긴급 자금을 조성해 뉴욕 증권거래소에 보냈다. 그렇게 해서 확산될 뻔했던 금융 공황이 겨우 잠잠해졌다. 뉴욕 시가 직원 임금조차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재정이 텅텅 비어 하마터면 파산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그가 나서서 도와주었다.

 

1907년 미 의회는 ‘국가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ly Commission)’라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아울러 몇 년 뒤에는 연방준비제도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의 경제 위기 대처 방법 및 시장 조절 방법에 대해 규정한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취임하자마자 JP 모건이 이끄는 철도 트러스트인 노던 시큐러티스를 반독점법 위반혐의로 기소해 버렸다. 노던 시큐러티스는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모건 시대에는 FRB도 증권 수수료 제도도 시장 감독 기관도 없었다. 그는 순전히 혼자 힘으로 중앙은행 역할을 한 셈이다. 일개 개인 은행가가 그토록 큰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다.

 

 

 

추천사

“월스트리트, 이 위대한 ‘대국장’에서 승부를 펼치는 대국자들은 위대하면서도 보잘 것 없고 고귀하면서도 비천하다. 총명하면서도 아둔하고 이기적이면서도 사심이 없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이들 모두가 일반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쇠퇴하지 않고 오랫동안 번창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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