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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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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는 완벽에 대한 열정과 맹렬한 추진력으로 IT혁명을 일으킨 창의적인 기업가 '스티브 잡스'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과 그의 불같이 격렬한 성격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의 웹사이트 기반이 아닌 애플리케이션 기반의 디지털 콘텐츠로 새로운 시장의 문을 연 스티브 잡스. 매킨토시,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그는 세상을 변혁하는 제품을 내놓았고 '애플'이라는 지속 가능한 기업을 창출했다. 이 책은 부모 집의 조그마한 차고에서부터 시작해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된 애플의 놀라운 성장 비밀, 애플 I에서 시작해 매킨토시와 토이 스토리를 거쳐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이르는 혁신적 제품들의 탄생 비화,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전설의 프레젠테이션 준비 과정, 그리고 극도의 절제와 완벽주의로 상징되는 경영 비법까지 스티브 잡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20장과 40장에는 그동안 자세히 드러난 적 없는 그의 복잡한 가족사와 연애사들이 총망라되어 있고, 40장과 41장에는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저자
월터 아이작슨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1.10.24

 

추천의 글

아무도 쉽게 따라갈 수 없었던 그의 진정한 재능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것에 고도로 집중하는 열정이었다.

 

지금 자신의 허름한 차고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위대하게 만드는 힘, 바로 열정과 도전 정신일 것이다.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게 없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애플의 1997년 광고 "다른 것을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서문 - 이 책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나는 그때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스티브의 반응은 의외였다. 집필 과정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해서는 안 되며 사전에 보여 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는 조건에 선뜻 응하는 것이었다. “이건 당신 책이니까요. 읽어 보지도 않겠습니다.”

 

열두 살 때 주파수 계수기를 만들고 싶은 생각에 전화번호부에서 HP 사의 창업자 빌 휼렛을 찾아 직접 통화한 끝에 부품을 구했던 얘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항상 저 자신이 인문학적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자공학도 무척 맘에 들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영웅 중 한 명인 폴라로이드 사의 에드윈 랜드가 한 말을 읽었어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의 중요성에 관한 얘기였는데, 그걸 읽자마자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했지요.”

 

가끔은 애플의 오랜 동료들이 스티브의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라 칭하던 일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때로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기억 세포의 의도치 않은 기능 부전으로 인해 나타났고, 또 때로는 그가 현실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그 자신과 내게 주입하는 바람에 발생했다.

 

‘라쇼몽 효과’(주관적인 기억의 잣대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현상—옮긴이)

 

 라쇼몽 효과 :: 라쇼몽 효과는 같은 사건을 두고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 사실을 달리 해석하는 현상으로,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Kurosawa Akira) 감독의 1950년작 영화 <라쇼몽(羅生門)>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똑같은  사건이라도 관점의 차이에 따라 서로 해석이 달라지면서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영화 ‘라쇼몽’은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두고, 이 죽음을 둘러싼 네 명의 진술이 모두 엇갈리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죽음을 당한 사무라이(영매사의 몸에 빙의해 진술), 사무라이를 죽인 산적, 사무라이의 아내, 그리고 이들을 목격한 나무꾼은 사무라이의 죽음에 대해 다른 진술을 한다. 아내는 능욕을 당한 후 남편의 경멸에 찬 눈빛을 견디지 못해서, 산적은 살아남는 사람을 따라가겠다는 여인의 유혹에 정당한 결투 끝에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말하며, 영매사 몸에 빙의한 사무라이는 아내가 그녀를 능욕한 산적에게 추태를 보이는 모습을 보고 치욕감에 자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는 네 사람 모두 자신의 명예를 위해 행동을 정당화한 것이 드러나면서, 네 명이 진술이 제각기 달랐던 이유를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쇼몽 효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그는 21세기에 가치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과 창의성을 연결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엔지니어링의 놀라운 재주에 상상력의 도약이 결합되는 회사를 세웠다. 스티브와 애플에 있는 그의 동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포커스 그룹을 토대로 제품의 진보를 일궈 낸 게 아니라, 소비자들이 미처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완전히 새로운 기기와 서비스 들을 개발해 낸 것이다.

 

“오! 번개처럼 번쩍이는 뮤즈여, 가장 밝게 빛나는 창조력의 천국으로 나를 이끌 불의 뮤즈여.”

 

 

 

1. 어린 시절 - 버려지고 선택받다

버림받음과 선택받음 사이에서

“그러니까 너네 진짜 부모님은 널 원하지 않았다는 얘기야?” 여자아이가 물었다. “오오! 머리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어요.” 잡스가 말한다. “집으로 뛰어 들어갔던 기억이 나요. 울면서 말이죠. 그러자 부모님이 말씀하셨어요. ‘아니야, 그게 아니란다.’ 부모님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했지요. ‘우리가 너를 특별히 선택한 거란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천천히 반복해서 말해 주셨어요. 단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가면서 말이죠.”

 

“버림받은 사람이었기에 버릴 수 있었던 겁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뛰놀다

디아블로 가(街) 286번지에 위치했던 잡스의 집과 그 일대의 집들은 모두 부동산 개발업자 조셉 아이클러가 지은 것들이었다. 그의 회사는 1950년에서 1974년까지 캘리포니아 곳곳의 분양 택지에 1만 1000채의 집을 세웠다. 아이클러는 미국의 모든 ‘보통 사람들’에게 심플한 현대식 주택을 제공하고자 했던 로이드 라이트의 비전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면 유리 벽과 탁 트인 바닥, 노출된 기둥, 콘크리트 바닥, 유리 미닫이문 등을 특징으로 한 저렴한 주택들을 지었다.

 

잡스는 아이클러 주택에 대한 호감과 존경으로 인해 깔끔한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 대중 시장에 공급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1938년 데이비드 패커드와 그의 아내가 팰러앨토의 창고 딸린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을 때, 그리고 곧 그들의 친구 빌 휼렛이 그 창고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집에는 차고가 있었는데, 패커드와 휼렛은 그곳에서 기계를 만지작거리다 그들 최초의 제품인 오디오 발진기를 개발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공대 학장 프레더릭 터먼은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상업화할 수 있는 민간 기업들을 위해 대학 부지에 280만 제곱미터 상당의 산업 구역을 조성했고, 덕분에 그 지역은 기술 혁명의 요람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뉴저지의 벨 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인물 중 한 명인 윌리엄 쇼클리는 그곳을 나와 마운틴뷰에 자리를 잡고는 1956년 실리콘을 이용해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회사를 세운다.(당시에는 값이 더 비싼 게르마늄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쇼클리는 점점 변덕스러운 행태를 보이다가 실리콘 트랜지스터 프로젝트를 폐기해 버린다. 그로 인해 그 밑에서 일하던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등 여덟 명의 엔지니어들은 회사를 나와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직원 1만 2000명을 보유하는 규모까지 성장하지만, CEO 자리를 놓고 벌어진 권력 다툼에서 노이스가 패하자 1968년 분열되고 만다. 노이스는 고든 무어를 데리고 나와 ‘집적 전자 회사(Integrated Electronics Corporation)’라는 이름의 기업을 세운다.(그리고 얼마 후 기발하게도 회사 이름을 ‘인텔(Intel)’로 줄인다.) 그 회사에 합류한 세 번째 구성원이 바로 앤드류 그로브이다.(그는 1980년대에 사업의 초점을 메모리 칩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옮김으로써 회사를 급성장시킨다.) 불과 몇 년 후 그 지역에는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가 50개 넘게 들어선다.

 

1965년 그는 칩 하나에 담을 수 있는 트랜지스터 수를 토대로 집적회로의 발전 속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그렸다. 그는 그 수가 2년마다 두 배로 증가할 것이며 그러한 추세가 꾸준히 지속될 거라고 주장했다.(이른바 ‘무어의 법칙’의 탄생이다.) 이 이론은 1971년 인텔 사가 중앙처리장치(CPU) 전체를 ‘인텔 4004’라는 이름의 칩 한 개에 담는 데 성공함으로써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 :: 연산을 미리 확립된 순서에 의해 체계적으로 실행할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각 장치에 제어 신호를 제공하는 제어장치를 1개의 작은 실리콘 칩에 집적시킨 초대규모 집적회로로 이루어진 처리장치이다. 내부는 산술논리연산기, 레지스터, 프로그램 카운터, 명령 디코더, 제어회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주기억장치에 저장되어 있는 명령어를 인출하여 해독하고, 해독된 명령어를 실행하며 실행 결과를 다시 주기억장치에 저장할 수 있는 기능 등을 자동으로 수행함과 동시에 입출력 장치들과도 데이터 교환을 수행한다.
반도체 기술은 지난 20여 년 동안 실로 혁명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여 현재는 대규모 집적회로(LSI)와 초대규모 집적회로(VLSI)의 집적도는 1개의 작은 실리콘 칩에 500만 개 이상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할 수 있다. 반도체 집적 기술의 이와 같은 발달로 컴퓨터 시스템의 크기가 작아졌을 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신뢰도와 동작 속도가 크게 개선되었고 전력 소비도 많이 줄었으며 가격 또한 매우 저렴해졌다.
현재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마이크로컴퓨터에는 물론 군사용 무기와 일반 가정에서 사용되는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또한 공정 제어 분야와 사무자동화기기 등에도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또한 여러 반도체 회사에서 앞을 다투어 개발하고 있어 성능이 우수하면서 가격이 매우 저렴한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많이 나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크로프로세서 [microprocesso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반도체 칩 산업은 그 공업단지에 ‘실리콘밸리’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안겨 주었다. 1971년 1월 업계 주간지 《일렉트로닉 뉴스》의 칼럼니스트 돈 호플러가 「실리콘밸리 USA」라는 칼럼을 연재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남부에서 팰러앨토를 거쳐 새너제이까지 이어지는 65킬로미터 길이의 산타클라라밸리, 그곳의 상업적 근간은 엘카미노레알이었다. 한때 캘리포니아의 선교 교회 21개를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던 이 도로가 이때부터 회사들과 벤처기업들의 연결로로 변모하며 현재 매년 미국 벤처 투자 총액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혁신의 중심가로 성장한 것이다.

 

교실 밖에서 만난 학교

“학생이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한다면 그건 선생님들 잘못이지요.”

그는 종교가 교리 수용보다는 영적인 체험을 강조할 때 최상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신앙보다는 예수님처럼 살거나 예수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하는데 오히려 신앙 그 자체만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기독교가 핵심을 잃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말한다. “각 종교는 동일한 집에 들어가기 위한 각기 다른 문이라고 생각해요. 어떨 때는 그 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또 어떨 때는 안 그래요. 엄청난 미스터리지요.”

 

LSD :: 1943년 알버트 호프만이 맥각균에서 합성한 물질로서 무색·무미·무취한 백색 분말이다. 강하고 기묘한 정신적 이상을 일으키고 시각과 촉각 및 청각 등 감각을 왜곡시키는 강력한 물질이다. 특히 액체 상태로는 체중의 7억 분의 1의 양으로도 효과를 나타난다. 정제나 캡슐·액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유통되며, 주로 각설탕이나 껌·과자·압지·우표의 뒷면 등에 묻혀서 사용되고 주사로도 사용된다.
환각은 사용한 뒤 30분 후부터 나타나며 10시간까지 지속된다. 환각상태에 빠지면 즐거운 상상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으나 대개는 몸이 조각나는 공포감, 두려움, 불안 등을 느끼게 된다. 남용하면 뇌와 염색체에 손상을 일으키며 눈동자가 풀리고 창백해지며 심박동과 혈압이 빨라지고 수전증이나 오한 등을 일으킨다.내성이나 심리적 의존현상은 있지만 신체적 금단현상은 일으키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용자의 경우에는 사용하지 않아도 환각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것을 플래시백(flash back)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LSD [lysergic acid diethylamid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잡스는 전자신호 펄스를 초 단위로 측정하는 주파수 계수기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려면 HP가 만드는 부품 몇 개가 필요했다. 그는 전화기를 들고 HP의 CEO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는 모든 번호가 전화번호부에 실리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팰러앨토에 거주하는 빌 휼렛을 찾아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죠. 그가 전화를 받았고 우리는 20분 동안 대화를 나눴어요. 그는 부품들을 구해 줬을 뿐 아니라 주파수 계수기를 만드는 공장의 일자리도 주었지요.”

 

테슬라코일(불꽃 방전으로 생기는 고주파 진동 전류의 전압을 높이는 간단한 장치로, 미국의 발명가 테슬라가 발명한 특수 변압기.—옮긴이)

 

테슬라 코일 :: 고주파 진동 전류를 공심(空心) 변압기로 승압하여 교류의 고전압을 발생하는 장치를 말하고, 또 테슬라 변압기라고도 한다. 그림의 왼쪽에서 전지 또는 교류 전원에 의해 축전기 C를 충전하면 불꽃 갭 G에 방전이 일어나고 그때 1차 회로에는 고주파의 진동 전류가 발생한다. 2차 회로의 권선수는 많아지므로 그 코일의 인덕턴스와 분포 커패시턴스 때문에 일종의 공진 변압기로 작용하게 되어 권선비 이상의 고전압을 얻을 수 있다. 고압 절연 시험 또는 진공도 검출의 가이슬러관용 전원으로 많이 사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테슬라 코일 [Tesla coil, Teslasche Spule] (화학대사전, 2001. 5. 20., 세화 편집부)

 

 

 

2. 뜻밖의 커플 - 두 명의 스티브

또 다른 스티브

불 방식(조지 불이 창안한 개념으로, 컴퓨터와 전자공학에서 참과 거짓을 나타내는 숫자 1과 0만을 이용하는 방식.—옮긴이)

 

그에게는 그렇게 노는 것이 회로를 설계하는 일보다 더 복잡해 보였다.

 

메트로놈 :: 1812년 네덜란드의 빈켈이 발명하고, 다시 1816년에 독일의 멜첼이 개량해서 특허를 받았다. 시계추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약 15cm의 흔들이[振子] 아래쪽 끝에 추(錘)가 달려 있고, 진동 주기는 위쪽에 있는 추를 오르내려 조정하며, 태엽장치로 흔들이를 진동시킨다. 흔들이는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어 박(拍)을 새기고 벨을 울려 박자를 알린다. 이것을 작곡의 속도지시에 사용한 것은 베토벤과 체르니가 처음이다. 이와는 달리 전기의 발진장치에 의한 메트로놈도 있다. 피아노연습에는 필수적인 기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트로놈 [metronom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당시에는 거대한 메인프레임컴퓨터 하나를 다수의 사용자가 공유하는 타임 셰어링 방식으로 컴퓨터를 이용했다. 단말기 역할을 하는 텔레타이프를 전화선에 연결해 메인프레임 기기에 접속했으며 사용한 시간만큼 돈을 냈다.

 

메인 프레임 컴퓨터 :: 기억 용량이 크고 많은 입출력 장치를 신속히 제어함으로써 다수의 사용자가 함께 쓸 수 있는 대형 컴퓨터. 주로 대기업이나 은행의 업무 처리, 대학교나 연구소 등의 실습이나 연구에서 다량의 단말기를 연결해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전산실에 설치되어 있으며, 각 단말기를 통해 입력되는 자료와 작업을 처리한다. 근래에 마이크로컴퓨터가 일반화됨에 따라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으나, 아직도 대규모 전산 시스템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메인 프레임 컴퓨터를 통해 처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인 프레임 컴퓨터 [main frame computer]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파트너십의 시작

프리커(전화를 도용하거나 불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은어. 한때는 호기심이나 탐구심의 결과로 인정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범죄로 간주되고 있다.—옮긴이)

 

 

 

3. 자퇴 - 환각과 성찰

방황의 시작

인내는 결코 잡스의 덕목에 속하지 않았다.

 

선불교와 채식주의, LSD로 영혼을 물들이다

선불교 :: 선불교(禪佛敎)는 일체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깨치신 불법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는 이심전심으로 전해져 왔다. 선불교는 먼저 치열한 자기응시에서 비롯하여 마음의 깨달음을 궁극으로 삼는다. 선불교는 사제지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에 건너온 보리달마는 9년의 침묵 속에서 깨달음을 언표하기를 거부했다. 보리달마는 29조 혜가와의 문답에서 문제를 만들어낸 우리 자신이 스스로 문제해결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자신의 문제는 우리의 분별망상에 의해 이원적인 착각구조를 드러낸다. 보리달마는 이러한 착각구조의 실체를 투시하고 안심(安心)을 체득하는 깨달음의 선불교를 제시했다. 선불교는 화두를 참구하는 문답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의 방편에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두 가지 방편이 거론된다. 다시 말하면, 돈오돈수(頓悟漸修)의 ‘돈오’와 돈오점수(頓悟頓修)의 ‘돈오’는 그 차원이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돈오점수의 돈오는 ‘도리를 깨달아 아는’ 해오(解悟)이며 돈오돈수의 돈오는 증오(證悟)라고 한다. 돈오점수의 돈오가 궁극적 깨달음이 아닌 반면, 돈오돈수의 깨달음은 ‘궁극적 깨달음(究竟覺)’이라고 한다. 따라서 궁극적이지 못한 돈오점수의 돈오는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며, 돈오돈수만이 진정한 깨달음으로 간주되어 돈오점수를 비판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선불교는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설명체계가 종파마다 차이가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돈오돈수에 대하여 보조(普照)선사는 수심결(『修心訣』)에서 ‘돈오돈수 시최상근기득입야(頓悟頓修 是最上根機得入也)’라고 말하면서 과거 전생까지 비추어서 볼 때, 깨달은 후 닦은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돈오돈수를 돈오점수에로 회통시킨다. 보조지눌이 돈오점수를 선택한 데는 최상승근기보다도 중하의 근기(根機)를 더욱 의식하여 그들을 배려하기 위한 논리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선불교에서 궁극적 깨달음은 화두(話頭)에 의한 참구와 이에 따른 의식전환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화두는 육조이후 임제가풍에서 강조되며 궁극은 삼매의 경지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종교현상 구조는 의식전환의 양태해명과 화두에 대한 구조이해로 파악되는 특징이 있다.
『현수 기신론별기』(『賢首 起信論別記』)에 의하면 번뇌 망상을 두 가지 양태로 나누고 있다. ‘근본 무명이 진여본성을 움직여 세 가지 미세한 망상을 이루는 것을 ‘아뢰야’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경계를 반연하여 망식(妄識)의 업해(業海)를 움직여 여섯 가지 번뇌를 다시 일으키니 이를 의식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번뇌 망상에는 분별이 없는 ‘세 가지 미세한 것’과 분별이 있는 ‘여섯 가지 거친 것’이 있어서 팔만사천의 한없는 번뇌를 파생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써 우리는 세 가지 미세한 번뇌와 여섯 가지 거친 번뇌가 생멸의 상대적 세계를 형성함을 보게 된다.
『현수 기신론별기』에는 ‘모든 생명체 가운데 칠지(七地)이하의 중생은 여섯 가지 거친 번뇌 속에 있고, 팔지(八地) 이상의 자재보살(自在菩薩)은 미세한 번뇌 가운데 있다.’고 주장한다.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번뇌를 제거하여야 되며, 여섯 가지 거친 번뇌만 제거하고, 세 가지 미세번뇌가 그대로 남아있으면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아니하며 자재보살의 경계에 머물러 있다. 세 가지 미세 번뇌는 제8아뢰야식의 번뇌 망상이 제거되지 아니하였음을 말한다. 그런데 여섯 가지 거친 번뇌의 지상(智相)은 칠지(七地)에서 그 미혹을 벗어나게 되고, 세 가지 미세 번뇌의 마지막 업상은 십지의 마지막인 금강유정(金剛喩定)에서 제거되는 것으로 예정된다. 그러므로 몽중일여(夢中一如 : 꿈속에서 一如)인 화엄칠지는 아직 여섯 가지 거친 번뇌의 영역이고, 숙면일여(熟眠一如)인 자재위(自在位)는 세 가지 미세한 번뇌의 영역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미세한 번뇌를 타파해야 결코 무심(無心)에 이를 수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아무리 지견이 높다 하더라도 깊은 잠에 들어가서 여전히 캄캄하면 이는 망식의 작용이지 실제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나 깨나 한결같은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를 투과할 과제가 남는다. 오매일여는 몽중일여와 숙면일여의 두 종류가 있다. 꿈속에서 하나인 몽중일여는 화엄칠지에 해당되고, 꿈이 없는 깊은 잠에서의 일여인 숙면일여는 팔지 이상의 자재보살에 해당된다.
선불교에서 화두를 놓치지 말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근본미세무명(根本微細無明)을 영단(永斷)하여 여래의 진여일여(眞如一如)에 이르기 까지 깊이 있게 참구하고 마침내 안팎이 환히 밝은 ‘내외명철(內外明徹)의 견성에 이를 필요성을 강조하며, 선불교의 목적은 근본 깨달음인 무상정각(無上正覺)과 ‘대무심지(大無心地)’를 깨닫는 데 있다.
화두를 참구할 때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인 행주좌와 어묵동정으로 선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화두를 들 때는 화두전체를 살피는 것에 요체가 있으며, 화두전체가 분명한 가운데 부분적으로 의심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화두를 살피고 의심을 하고, 그렇게 계속하면 마침내 ‘참 의심(眞疑心)’이 발동한다. 이는 곧 생활 가운데 가지가지 습기에 의해 이루어진 업장을 소멸하는 힘을 갖는다. 이러한 경우 화두를 굳이 다시 살필 필요 없이 참 의심이 돈발(頓發)하여 ‘일념무심삼매(一念無心三昧)’에 이르게 된다. 선불교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최상승법으로 간주하며, 간화선의 선불교의 특징은 정진하면 견성이 가능하여 반드시 본래성품을 깨달아 묘각(妙覺)에 이른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불교의 특징 (문화원형백과 승려의 생활, 2005.,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대표적인 책이 바바 람다스(본명 리처드 앨퍼트)가 쓴 『지금 이곳에 존재하라』였다.

 

스즈키 순류의 『선심초심(禪心初心)』,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어느 요가 수행자의 자서전』, 리처드 모리스 벅의 『우주 의식』, 초감 트룽파의 『마음 공부』 등이 그것이다.

 

크리그스필 :: 19세기 독일식 체스 게임. 대국자가 각각 자신의 체스판과 말들을 갖고 서로 등을 맞댄 채 상대의 체스판은 보지 않고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다. 중재자가 참여해 대국자가 두려는 수가 적합한지 알려주는 방식이라 대국자는 상대방 말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써야 한다.

 

인생의 첫 번째 구루를 만나다

로디지아(아프리카 남부의 옛 영국 식민지로, 독립 후 잠비아와 짐바브웨로 나뉘었다.—옮긴이)

 

로디지아 :: 남로디지아는 27만 명의 영국계 백인이 620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을 지배하며 극심한 인종차별 정책을 취하였다. 영국은 인종차별철폐와 다수흑인 지배로의 이행을 요구하였으나, 총리 스미스가 이끄는 소수백인 정권은 이를 거부하고 1965년 영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은 경제제재를 단행하고 교섭을 벌였으나, 스미스 정부는 1970년 신헌법을 공포하고 오히려 소수백인 지배를 강화하였다. 1975년 로디지아 제헌의회가 열렸으나 백인 정권의 강경한 태도와 흑인세력의 분열로 중단되었고, 1976년 영국과 미국의 제안으로 다시 제네바에서 제헌의회가 열렸으나 결렬되었다.
1978년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ZANU-PF)의 게릴라투쟁이 강화되는 가운데 스미스 정부는 흑인 온건파인 무조레와 ·시토레 ·치라우 등과 협정을 맺고, 1979년 신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무조레와를 새 총리로 하는 신국가 짐바브웨가 탄생하였으나,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영국은 남로디지아 전당사자회의를 소집하고 독립헌법안을 제안하여 1980년 2월 다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애국전선이 압승하여 4월 총리 무가베가 이끄는 신국가 ‘짐바브웨공화국’이 탄생, 로디지아문제가 해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디지아 문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궤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눈뜨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도 몰랐고, 대학이 그걸 알도록 도와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평생에 걸쳐 저축한 돈만 축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퇴하기로, 그래도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으로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멋진 무언가를 창출하는 것,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역사의 흐름과 인간 의식의 흐름 속에 되돌려 놓는 것이 중요하다.

 

 

 

4. 아타리와 인도 - 게임 설계 기술과 선(禪)

아타리에서 새로운 역할 모델을 만나다

《새너제이 머큐리》 

 

“제가 빛난 유일한 이유는 다른 모두가 그처럼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아타리 게임들의 단순함이 지니는 가치를 직관적으로 알아보았다. 그 게임들에는 설명서가 필요 없었다. 마약에 취한 대학 1학년짜리조차 쉽게 사용법을 알 수 있었다. 아타리에서 나온 ‘스타 트렉’ 게임의 유일한 사용 설명문은 “1) 25센트 동전을 넣으시오. 2) 클링온(동명의 미국 드라마 「스타 트렉」에도 등장하는 외계 종족.—옮긴이)들을 피하시오.”였다.

 

자신이 5만 달러를 빌려 올 수 있으니 슬롯머신을 설계해 판매하는 일을 같이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론 웨인은 이미 사업으로 큰 아픔을 경험한 터여서 제안을 거절했다. “그건 5만 달러를 날리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해 줬어요.” 웨인의 회상이다.

 

“그럼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 웨인은 이렇게 답했다. “네가 아름다운 말을 봤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느낌이지. 멋지다는 건 인정하지만 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는 것 말이야. 아름다움 자체만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거지.”

 

“아타리에서는 아무도 몰랐고, 평생 동안 손가락, 발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에게만 밝힌 사실이었어요.”

 

인도 순례 여행

아시람(힌두교도들이 수행하며 거주하는 곳—옮긴이)

 

스승을 만나고 깨달음을 얻다

 반야(般若) :: 범어로는 프라즈나(prajna)이며,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한다. 보통 말하는 판단능력인 분별지(分別智, vijnana)와 구별짓기 위하여 반야라는 음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며, 달리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한다. 이 반야의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확립된 것이다.
대승의 반야는 법(法, 진리)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서부터 비롯된다. 소승불교가 가졌던 법에 대한 객관적 해석과 이론적 분석태도를 지양하고, 스스로의 체험과 실천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법의 있는 그대로를 체득하는 자각[般若]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법이란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선정(禪定)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반야의 자각을 통하여 인생의 근본 의혹이 해소되는 것이고, 인간과 만물의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법의 주체적인 체험을 통하여 얻는 깨달음의 내용을 반야의 지혜로써 강조하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주객의 대립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의식이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지식과는 명확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반야의 지혜는 선정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므로, 반야의 입장에서는 이 선정의 체험이 재평가되고 나아가 선종(禪宗)의 조사선(祖師禪)까지도 이 반야에 근거를 두게 된다.
이 반야의 지혜는 반야부 계통의 모든 경전에서 여러 가지로 해설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찬술한 반야부 계통의 주석서에서도 반야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결국 불교의 목적은 반야의 완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공(空)으로서 파악되었고, 반야를 얻기 위해서는 집착해서는 안 될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타파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공사상이 크게 부각되었다. 결국, 공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자연히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는 사상이 일관되게 전개되는 것이다.
또, 주객이 분리된 입장에서가 아니라, 분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되는 반야의 지혜는 현실사회 속에서 자비(慈悲)로서 작용해야만 한다. 교리적으로는 이것이 지혜와 자비의 상즉(相卽)이라는 형태로 해설되는 것인데, 불교적 체험을 얻은 사람이면 저절로 생겨나게 되는 보시(布施)의 정신이 여기서 비롯된다.
반야의 지혜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다시 반야의 몸으로 현실 속에 되돌아와서 보시라는 형태의 갖가지 자비를 베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반야는 선정과 불도(佛道) 및 열반(涅槃)에 대한 여러 가지 집착을 소멸시키고 성불할 수 있게 하는 주문으로까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반야는 2반야·3반야·5종반야 등으로 분류된다. 공반야(共般若)와 불공반야(不共般若)로 구분되는 2반야는 ≪지도론 智度論≫에서 주장한 것으로, 천태종에서 이 설을 많이 따르고 있다. 공반야는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의 삼승(三乘)을 위하여 설한 반야의 법문으로, ≪반야경≫ 등의 여러 대승경전이 이에 속한다. 불공반야는 일승(一乘)의 보살만을 위하여 말한 것으로, ≪화엄경≫이 이에 속한다.
≪화엄경≫은 부처의 지혜를 모두 표출한 경전이기 때문에 성문이나 연각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뜻에서 불공이라고 한 것이다. 3반야는 문자반야(文字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이다. 반야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채택될 뿐 아니라, 우리 나라 원효(元曉) 등의 고승들은 이에 대해 깊이 있게 해석하고 있다.
문자반야는 방편반야(方便般若)라고도 한다. 이는 부처님이 설하여 문자화된 경·율·논을 전부 통칭한 것으로, 문자도 반야를 나타내는 방편이 될지언정 반야 자체가 될 수는 없지만, 문자로 말미암아 반야의 뜻을 전할 수 있으므로 문자반야라고 한다.
관조반야는 경·율·논의 글자나 말에 의하여 진리를 알아내고 이 진리에 의해서 수행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 관조반야의 진실한 지혜는 반드시 무념무분별(無念無分別)이다.
실상반야는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진리이며, 관조반야를 통하여 체득되는 궁극이다. 천태종에서는 이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이치를 깨닫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였고, 신라의 원효는 여래가 감추어진 중생이 곧 이것이라 하여, 실상반야가 곧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놀랄 만한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야 [般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가만히 앉아서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산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잠재우려 애쓰면 더욱더 산란해질 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속 불안의 파도는 점차 잦아들고, 그러면 보다 미묘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는 여백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직관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보며 현재에 보다 충실하게 됩니다.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고 현재의 순간이 한없이 확장되는 게 느껴집니다. 또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는 밝은 눈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수양이며,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일본의 영평사(永平寺)에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내 영적 스승이 그냥 이곳에 있으라고 조언했습니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거라면 그곳에 가도 역시 구할 수 없을 거라면서 말입니다.

 

프라이멀 요법(유아기에 억압된 감정을 해소함으로써 심신을 회복하는 치유법—옮긴이)

 

해낼 수 있다고 믿게 하라

와이어래핑(도선(導線)을 모가 난 단자(端子)에 단단히 감아 붙이는 방식.—옮긴이)

 

 

 

5. 애플 Ⅰ - 켜고 부팅하고 교감하라

반문화와 기술의 교차점에 서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

 

알테어 :: MITS社가 1975년에 개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초기 개인용 컴퓨터 알테어 8800은 ENIAC 등 초기 컴퓨터에 비해 훨씬 작고 이동이 간편하였다. 출시 당시 전자 전문 잡지 「Popular Electronics」의 커버스토리로 다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당초 예상보다 몇 배를 웃도는 판매고를 기록하였다. 이 알테어 8800 의 성공은 곧바로 개인용 컴퓨터 산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알테어 8800에는 키보드와 모니터가 없다. 대신 사람이 직접 원하는 명령어를 이진수로 계산하여 본체 전면부의 스위치를 조작하여 데이터를 입력해야만 했고, 계산 결과는 모니터 없이 오직 LED 램프가 깜빡 거리며 출력된다. 따라서 이진수 명령어 체계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집에서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명령어를 손쉽게 입력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이 컴퓨터는 미국의 공학도들 사이에서 최고의 워너비 아이템으로 통했다. 이 때 알테어 8800에 열광했던 공학도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빌 게이츠(Bill Gates)와 폴 앨런(Paul Allen)이다. 그들은 이 컴퓨터에 구동되는 BASIC 언어(Altair BASIC)을 개발하여 출시함으로써 Microsoft社를 창업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테어 8800 (넥슨컴퓨터박물관)

 

알테어 :: 보드에 납땜으로 부착해야 하는 부품들의 조립식 세트로서 495달러였고 당시에 이 기계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이 소식을 접하고 알테어를 위한 베이식(BASIC, Beginner’s All-purpose Symbolic Instruction Code의 약어로 아마추어 사용자들이 다양한 플랫폼에서 호환이 가능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쉽게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프로그래밍 언어)을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이 베이식의 성공으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옮긴이)

 

홈브루 컴퓨터 클럽

홈브루 컴퓨터 클럽 :: 실리콘밸리에서 생겨난 초기 컴퓨터 취미 동호회로 1975년 3월에서 1977년경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전자 공학에 열광하는 사람들로서 MITS사의 알테어8800은 이들의 핵심교재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부품, 회로, 컴퓨터 장치 등을 혼자서 조립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교환했으며 정기적인 공개 포럼을 유지했다. 애플의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을 포함해, 매우 높은 수준의 해커들과 IT 기업가들이 이 클럽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Home Brew - 홈브루 (지형 공간정보체계 용어사전, 2016. 1. 3., 이강원, 손호웅)

 

D램(임의접근기억장치인 램의 한 종류로, 저장된 정보가 시간에 따라 소멸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재생시켜야 하는 특징을 지닌다. 구조가 간단해 집적이 용이하므로 대용량 임시 기억장치로 사용된다.—옮긴이)

 

인쇄 회로 기판(PCB) :: 절연물인 판에 얇은 구리박을 씌운 기판을 회로도에 따라 불필요한 구리박을 떼어내고 전자 회로를 구성한 것, 절연물로는 베이클라이트 종이에 에폭시를 스며들게 한 것, 유리 섬유 등이 쓰인다. 최근에는 좀더 소형화하기 위해 얇은 기판을 여러 장 맞붙여서 일체화한 적층(積層) 기판이 쓰이고, 또 플라스틱 필름에 구리박의 패턴을 씌운 플렉시블 기판도 쓰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쇄 회로 기판 [printed circuit board] (컴퓨터인터넷IT용어대사전, 2011. 1. 20., 전산용어사전편찬위원회)

 

애플의 혁명적 탄생

“마침 그때 저는 과일만 먹는 식단을 지키고 있었어요. 사과 농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요. ‘애플’은 재밌으면서도 생기가 느껴지고 또 위협적인 느낌이 없었지요. ‘애플’이란 말은 ‘컴퓨터’란 말의 강한 느낌을 누그러뜨려 주잖아요. 게다가 ‘애플’은 전화번호부에서 ‘아타리(Atari)’보다 먼저 나올 수 있고요.”

 

자신이 설계하는 새로운 컴퓨터가 애플 사의 자산이 된다는 데 동의한 이후에도 워즈는 그것을 자신이 몸담은 HP에 먼저 제공해야 한다고 느꼈다. “HP에 소속되어 있는 동안에는 제가 개발한 내용을 HP에 말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옳은 행동이고 윤리적인 태도니까요.” 그래서 워즈는 1976년 봄에 HP의 직장 상사와 경영진에게 자신의 고안물을 보여 주었다. HP의 경영진은 큰 인상을 받았지만 HP에서 상품으로 개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컴퓨터광이 취미 생활로 만들 법한 물건에 불과하고, 또 HP가 타깃으로 삼는 고품질 시장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워즈는 회상한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러고나니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애플에 합류할 수 있었어요.“

 

웨인은 잡스가 보다 많은 사업 자금을 확보할 방안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 자신이 슬롯머신을 만들며 실패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그런 실패를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잡스와 워즈는 이렇다 할 개인 자산이 없었지만 웨인은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식회사 형태가 아니라 합자회사 형태로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각 사업 파트너들은 회사 부채에 대한 책임을 떠안아야 했다. 웨인은 혹시라도 나중에 자신이 엄청난 부채를 짊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세 사람이 계약서에 서명한 지 11일 만에 ‘파트너 사퇴서’와 합자 사업 계약서 수정본을 들고 잡스와 워즈를 찾아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모든 계약 당사자의 재평가에 기초하여 웨인은 하기와 같이 ‘파트너’의 자격을 갖지 아니하기로 한다.” 그는 회사 지분 10퍼센트를 포기하는 대신 800달러를 받았고, 나중에 1500달러를 추가로 받았다.

만일 웨인이 그때 10퍼센트 지분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2010년 말 무렵 그의 지분 가치는 약 26억 달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10년 무렵 네바다 주 파럼프에 있는 조그만 집에 거주하며 종종 카지노에서 슬롯머신 게임을 즐기는 한편 정부 연금으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웨인 자신은 그때의 결정에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결정이었습니다. 두 스티브는 열정에 휩싸인 젊은이였고 저는 그들의 열정에 동참할 배짱이 부족했으니까요.”  

 

차고의 일당들

론 웨인은 회사 로고를 디자인했다. 펜으로 그린 선화(線畵) 스타일의 화려한 로고에 사과나무 아래에 앉은 뉴턴의 모습을 담았으며, 시인 워즈워스의 말을 인용해 “생각의 신비로운 바다를 영원히 홀로 항해하는 정신”이라고 적었다. 애플 컴퓨터보다는 론 웨인 자신의 이미지에 더 어울리는, 다소 생뚱맞은 모토였다. 아마 그보다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열정을 노래한 워즈워스의 다음 시구가 더 어울렸을 것이다. “그날 새벽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고/ 젊다는 것은 천국 그 자체였다네!” 훗날 워즈가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햇단느 사실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역사상 이제껏 없던 커다란 혁명에 참여하고 있었다. 내가 그 혁명의 일부로서 동참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행복했다.”

 

그는 자신들이 만든 제품에 제작비의 세 배쯤 되는 소매가를 정하여 테럴이나 다른 상점에서 지불하는 500달러 납품가에 33퍼센트의 이윤이 붙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책정된 가격이 666.66달러였다.

 

두 사람은 ‘666’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라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곧 가격의 숫자가 불길하다는 사람들의 불만을 듣게 되었다. 특히 1976년인 그해에 「오멘」이라는 영화가 히트해 666이라는 숫자가 널리 알려지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애플 I 컴퓨터는 201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무려 21만 3000달러에 팔렸다.)

 

 

 

6. 애플 Ⅱ - 새로운 시대의 여명

최초의 통합 패키지형 컴퓨터

코모도어 :: 70년대말 코모도어 VIC-20을 발표하여 많은 판매량을 보였고, 80년대 나온 아미가(Amiga) 컴퓨터도 성공적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코모도어 사 [Commodore Business Machines Inc.] (컴퓨터인터넷IT용어대사전)

 

홀트는 기존의 선형 전원 장치 대신에 오실로스코프를 비롯한 여러 기기에서 사용되는 스위치식 전원 공급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1초당 60회가 아니라 수천 회나 전원을 개폐하기 때문에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전력을 저장하고 따라서 열도 그만큼 적게 발생시켰다. 잡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스위치식 전원 공급 장치는 애플 II의 로직 보드(머더보드)만큼이나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역사책에서는 이 장치에 관한 로드의 공로를 제대로 쳐주지 않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모든 컴퓨터가 스위치식 전원 장치를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다 로드의 설계에서 유래했지요.”

 

애플의 마케팅 철학 - 공감, 집중, 인상

“두 젊은이가 이발을 좀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금세 잊었어요. 그 차고에서 목격한 광경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발이야 언제라도 하면 되는 거니까요.”

 

1977년 1월 3일, 드디어 애플 컴퓨터 주식회사가 공식 출범했다. 이 회사는 9개월 전 잡스와 워즈니악이 설립한 합자회사를 인수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는 절대로 돈을 벌겠다는 목표로 회사를 차려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쏟아부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 오래도록 생명력을 지닐 회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요.

 

마쿨라는 ‘애플의 마케팅 철학’을 종이 한 쪽으로 정리했다. 이 문서에서 그는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공감’이었다. 즉 고객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고객과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고객의 욕구를 진정으로 이해한다.” 둘째는 ‘집중’이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일을 훌륭하게 완수해 내기 위해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서 눈을 돌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원칙은 ‘인상’이었다. 사람들이 기업이나 제품이 전달하는 신호와 분위기를 토대로 그 기업이나 제품에 대해 특정한 의견을 갖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원칙이었다. “사람들이 책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기준으로 삼는 것은 표지다. 우리가 최고의 제품, 최고의 품질, 가장 유용한 소프트웨어를 갖추고 있다 해도 그것을 형편없는 방식으로 소개하면 그것은 형편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창의적이고 전문가다운 방식으로 소개하면, 그것이 최상의 품질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게 된다.”

 

“단순함이란 궁극의 정교함이다”

매케나는 애플 II 팸플릿 상단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문구를 찍어 넣었다. “단순함이란 궁극의 정교함이다.”

 

애플 II, 세상 밖으로 나오다

애플 II를 세상에 선보이기로 한 자리는 1977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제1회 서부 연안 컴퓨터 박람회였다.

 

사람들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김으로써 훌륭한 회사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새로운 제품을 소개할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 마쿨라의 조언이었다. 잡스는 애플 부스의 전시 공간을 꾸밀 때도 이 점을 명심했다. 다른 회사들은 대개 간이 테이블과 포스터보드를 활용한 표지판으로 전시 공간을 구성했다. 하지만 애플은 카운터에 검은색 벨벳을 우아하게 둘렀으며, 커다란 플렉시 유리판에 자노프가 디자인한 새 로고를 그려 넣고 뒤에서 조명을 비추었다. 또 애플 II 컴퓨터 세 대를 설치했다. 실제로 완성된 것은 그 세 대뿐이었지만 수량이 충분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뒤쪽에 빈 박스를 잔뜩 쌓아놓았다.

 

박람회장에서 애플은 300대의 주문을 따냈다. 또 잡스는 미즈시마 사토시라는 일본인 섬유 업자를 만났는데, 그의 회사가 애플의 첫 번째 일본 거래처이자 중개업체가 되었다.

 

새로운 사장을 영입하다

PC를 위한 최초의 인터랙티브 스프레드시트(여러 가지 도표 형태의 양식으로 사무 업무를 자동화한 소프트웨어.—옮긴이)인 비지칼크(VisiCalc)를 내놓았는데, 한동안은 애플 II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애플 II는 향후 16년간 다양한 모델을 출시하며 600만 대 가까이 판매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컴퓨터가 PC 업계를 탄생시킨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워즈는 이 놀라운 회로 기판과 관련 운영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역사적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나 워즈의 고안물을 전원 장치와 근사한 케이스까지 갖춘, 사용자 친화적인 패키지로 변신시킨 인물은 바로 잡스였다.

 

“워즈는 놀라운 기계를 설계했지만, 스티브 잡스가 없었다면 아마 그 물건은 지금도 컴퓨터 애호가들이 드나드는 상점에만 남아 있었을 겁니다.”

 

 

 

7. 크리스앤과 리사 - 자신이 버림받은 사람이었기에……

그는 어느 순간 상대방에게 완전히 몰두하다가도, 또 어느새 차갑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오싹할 만큼 냉정한 면이 있는 친구였지요.

 

그녀가 정말 스스로 결정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그녀를 대신해 결정해 준 것 같으니까요.

 

그는 대단히 깨어 있는 존재였지만 한편으론 잔인했어요. 정말 기묘한 조합이었죠.

 

옳은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보다는 현명하게 행동할 겁니다.

 

 

 

8. 제록스와 리사 -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애플 II를 이을 새 생명 프로젝트

애플의 매출은 급격하게 상승 곡선을 타서, 1977년에 2500대였던 컴퓨터 판매량은 1981년에 21만 대로 늘어났다.

 

전원 장치에서 케이스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조립형 컴퓨터로 만들기 위해 그가 아무리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들 애플 II는 언제나 워즈의 작품으로 여겨질 것이었다. 잡스는 ‘잡스의 컴퓨터’라고 인정받는 컴퓨터를 갖고 싶었다. 또 그것을 뛰어넘어 ‘우주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더 혁신적인 컴퓨터를 만들고 싶었다.

 

“잡스의 딸 이름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리사가 어떤 어구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인지 생각해 내야 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 중의 하나가 ‘지역 통합 시스템 아키텍처(Local Integrated Systems Architecture)’였다. 별다른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말임에도 그들은 이 어구를 리사의 공식적인 뜻으로 삼았다. 하지만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리사는 ‘리사: 엉터리로 창조한 머리글자(Lisa: Invented Stupid Acronym)’로 통했다. 훗날 내가 그 이름에 대해 물어보자 잡스는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분명히 그건 딸 이름을 딴 겁니다.”

 

“우리는 미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파도의 높은 물마루에서 서핑을 한다고 생각해 봐요.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짜릿하겠습니까? 반면 파도가 다 지나간 물살 끝에서 개헤엄을 치는 걸 생각해 봐요. 아무런 재미도 흥분도 없지요. 우리 회사에 와서 세상을 바꿔 봅시다.”

 

 파스칼 :: 1970년경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니클라우스 워스(N. Wirth) 교수가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 파스칼이란 이름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수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파스칼 언어는 다양한 제어 구조와 데이터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구조적 프로그램 작성(programming)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원래 학생들에게 프로그램 작성을 가르칠 목적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전산학 교육과 연구에서 널리 사용되며, 실무적인 용도로도 많이 사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스칼 [Pascal]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1979년 가을 무렵 애플 사는 애플 II의 뒤를 이를 세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나는 나중에 참담한 운명을 맞는 애플 III였다. 또 하나는 리사 프로젝트였는데, 이 역시 잡스를 실망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잡스의 레이더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저가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은밀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애니(Annie)’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프로젝트

 

제록스 PARC에서 컴퓨터의 미래를 보다

제록스의 팰러앨토 연구 센터(PARC)는 첨단 기술과 디지털 아이디어를 개발한다는 목표로 1970년에 설립되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최고의 방법은 스스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하드웨어를 만들어야 한다.” 케이는 아이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소형 PC인 ‘다이나북’을 구상했다. 이후 PARC의 엔지니어들은 사용하기 까다로운 도스(DOS)의 명령어 입력 방식을 대체할 수 있는 사용자 친화적인 그래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구상한 개념이 바로 지금의 데스크톱 컴퓨터에서 우리가 접하는 것들이다. 즉 모니터 화면에 많은 서류 파일과 폴더가 보이고, 마우스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방식 말이다.

이와 같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약어로 ‘GUI’이며 ‘구이’로 발음한다.)의 개발을 촉진한 것은 PARC의 또 다른 선구적인 개념, 즉 비트맵을 이용한 디스플레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컴퓨터들은 문자 중심이었다. 다시 말해 키보드의 문자를 두드리면 컴퓨터가 그 문자를 화면에 띄우는 방식으로서, 대개 검은 화면에 초록색 디스플레이를 제공했다. 문자와 숫자, 도안의 수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컴퓨터 코드나 고출력 프로세싱 파워가 필요 없었다. 반면 비트맵 방식에서는 화면상의 각 픽셀이 메모리의 비트에 의해 통제된다. 화면에 무언가(예를 들어 문자)를 나타내기 위해서 컴퓨터는 각 픽셀에 밝기의 정도를 명령하고, 또는 컬러 디스플레이의 경우에는 특정한 색깔을 지정한다. 이런 방식에는 고출력 컴퓨팅 파워가 필요했지만, 그 반면에 화려한 그래픽과 폰트, 다채로운 디스플레이를 구현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밉상’과 ‘천재’로 나누는 잡스의 세계관에서 후자에 속했다.

 

1979년 여름 제록스의 벤처 투자 부문이 2차 자금 조달을 진행하던 애플에 투자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잡스는 이런 제안을 했다. “PARC의 핵심 기술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애플에 100만 달러를 투자할 수 있게 해 주겠습니다.” 제록스는 그 제안을 수락하여, 애플에 PARC의 신기술을 보여 주는 데 동의하고 1주당 10달러로 애플 주식 10만 주를 구매했다. 1년 후 애플이 기업공개를 했을 때 제록스가 사 두었던 100만 달러어치 주식은 무려 1760만 달러 가치의 주식이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더 큰 이익을 얻은 쪽은 애플이었다.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애플이 PARC의 기술을 가져다 쓴 것은 IT 업계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도둑질로 간주되곤 한다.

 

“피카소는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시인 엘리엇도 말했듯이, 구상과 창조 사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마련이다. 혁신의 역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는 전체 그림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잡스와 애플 팀원들은 PARC에서 목격한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현저하게 개선했다. 그리고 제록스가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것을 실제 제품에 구현했다. 예를 들어 제록스의 마우스는 버튼이 세 개였고 조작하기 복잡했으며 단가가 300달러나 됐다. 또 부드럽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PARC를 두 번째로 방문하고 며칠이 지난 후, 잡스는 한 산업디자인 회사를 찾아가 회사의 공동 창업자인 딘 허비에게 버튼이 하나인 마우스를 15달러에 만들어 달라고 했다.

 

PARC의 마우스는 모니터 화면상의 창을 끌어서 이동시킬 수 없었다. 애플의 엔지니어들은 창이나 파일을 끌어서 이동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폴더 안에 집어넣을 수도 있는 인터페이스를 개발했다. 제록스 시스템에서는 무언가를 실행하려면(예컨대 창의 크기를 변경하거나 파일의 확장자를 바꾸려면) 명령어를 선택해야 했다. 애플 시스템에서는 직접 해당 대상을 가리키거나 조작하고 혹은 끌어다가 위치를 바꿀 수 있게 함으로써, 데스크톱 메타포(책상 위의 전형적인 환경.—옮긴이)를 가상현실로 구현했다.

 

훌륭한 실행이 훌륭한 아이디어 못지않게 중요하다

 

1981년, 그러니까 애플의 리사나 매킨토시가 나오기 전에, 제록스는 제록스 스타라는 컴퓨터를 출시했다. 이 컴퓨터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마우스, 비트맵 디스플레이, 창 기반의 방식, 데스크톱 메타포 등을 통합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이 제품은 투박하고 느렸으며(용량이 큰 파일은 저장하는 데 몇 분씩 걸렸다.) 가격이 비쌌고(소매가 1만 6595달러) 주로 네트워크 환경이 갖춰진 사무실을 타깃 시장으로 삼았다. 스타는 시장에서 실패했다. 판매량은 겨우 3만 대에 불과했다.

 

WYSIWYG(‘위지윅’으로 발음한다.) 이것은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의 줄임말로서,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는 내용과 동일한 인쇄 출력 결과를 얻는 방식이다.

 

 위지윅 :: 위지윅은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의 약칭으로 사용자가 현재 화면에서 보고 있는 내용과 동일한 출력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개념이다. 실제 인쇄할 대상을 화면으로 보면서 작업하므로 인쇄하기 전에 인쇄되는 형태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다.즉, 어떤 문서편집기를 이용하여 문서의 편집이나 문서형태를 화면으로 확인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서 편집기들은 한글과 컴퓨터사의 아래아한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워드, 매킨토시의 나이서스 등이 있다. 문서편집기 뿐만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한 편집 시스템에서는 위지윅 기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자 정보를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또한 친근감을 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문서의 구도를 적절하게 설정하여야 하는데,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문서 편집기를 이용하여 문장을 작성할 때 단락 구분을 위해 줄 간격과 단락 앞머리에 공백을 주어 다른 단락을 쉽게 구별되도록 한다거나, 새로운 장이나 절의 시작을 표시하는 문장은 글씨 크기를 크게 한다거나, 그림이나 도표를 적절하게 배치시키는 등의 구도 작업은 화면에서 보이는 상태가 인쇄되기 전에 미리 인쇄 결과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위지윅 개념을 도입한 시스템은 인쇄할 때와 화면에 보여 줄 때에 사용하는 글자체가 다르고, 또한 인쇄기의 해상도와 모니터의 해상도가 서로 달라 인쇄기로 출력한 문서와 화면에서 보는 내용이 꼭 같지는 않으나, 구도나 자료의 배열 위치등은 그대로 볼 수 있어 위지윅 개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지윅 [WYSIWYG]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앳킨슨의 놀라운 업적 가운데 하나는, 화면상으로 ‘맨 앞의’ 창이 그 ‘뒤에’ 있는 창들 위로 겹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지금의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앳킨슨은 마치 책상 위의 서류들을 옮기거나 뒤섞는 것처럼 사용자가 화면의 창들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즉 겹쳐 있는 창들 가운데 맨 앞의 창을 이동하면 뒤에 있는 창들이 보이거나 가려졌다. 물론 컴퓨터 화면에 픽셀들이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맨 앞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창 뒤에 실제로 다른 창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창이 겹쳐 보이는 화면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영역’이라는 것과 관련된 복잡한 프로그램 코딩이 필요했다. 앳킨슨은 이것을 성공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PARC를 방문했을 때 분명히 이 기능을 목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PARC 연구원들은 이러한 창 겹침의 구현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그들은 앳킨슨이 해낸 걸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그에게 말했다. 앳킨슨은 회상한다. “모르고 덤비는 도전이 지닌 힘을 깨달았어요. 불가능하다고는 아예 생각조차 안 했기 때문에 결국 해낼 수 있었던 거지요.”

 

아울러 단순히 상하좌우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든 커서를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마우스도 구상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것처럼 휠이 두 개 달린 마우스가 아니라 볼을 사용하는 마우스가 필요했다. 애플의 한 엔지니어는 앳킨슨에게 그런 마우스는 상업적으로 도저히 제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앳킨슨이 잡스와 식사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고, 다음 날 출근한 앳킨슨은 잡스가 그 엔지니어를 해고한 사실을 알았다. 후임으로 온 엔지니어가 앳킨슨을 만났을 때 처음 한 말은 “저는 그 마우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였다.

 

 

 

9. 기업공개 - 부와 명성을 모두 얻은 남자

애플의 기업공개와 스톡옵션

1977년 1월 마이크 마쿨라가 잡스와 워즈에게 합류해 애플 컴퓨터 주식회사를 출범시켰을 때 회사의 가치는 5309달러였다. 그로부터 채 4년도 되지 않아 그들은 기업공개를 결심했다. 애플의 기업공개에는 1956년 포드 자동차의 공모 이래 가장 많은 투자자들이 몰렸다. 1980년 12월 말 애플의 기업 가치는 무려 17억 9000만 달러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백만장자를 300명이나 탄생시켰다.

대니얼 콧키는 그 300명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는 대학에서, 인도에서, 그리고 올 원 팜에서 잡스와 많은 시간을 보낸 절친한 친구였으며 크리스앤 브레넌이 임신했을 때 한 지붕 아래서 살았던 친구였다. 콧키는 잡스의 차고 시절부터 애플에 합류했으며 기업공개 무렵에도 애플의 시급제 직원으로 계속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업공개 이전에 주어지는 스톡옵션을 받을 만큼 높은 직위는 아니었다.

 

콧키에게 스톡옵션이 돌아가지 않은 공식적인 이유는 그가 연봉제 직원이 아니라 시급제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창업 멤버라는 점을 감안해 ‘발기인주’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잡스는 사업 초창기 시절을 함께했다는 감상적인 이유로 지분을 주지는 않았다.

 

스위치식 전원 장치를 개발했던 엔지니어인 로드 홀트는 상당한 스톡옵션을 받았다. 홀트는 잡스를 설득해 보려고 했다. “오랜 친구인 대니얼을 좀 생각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홀트는 자신과 잡스가 각각 소유한 옵션에서 조금씩 떼어 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당신이 주는 만큼 나도 똑같은 양을 주겠어요.” 그러자 잡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좋소. 나는 그에게 내 지분의 0퍼센트를 주겠소.”

워즈는 잡스와 정반대였다. 주식공개를 하기 전에, 그는 자신이 가진 2000주를 중간급 직원 40명에게 아주 낮은 가격에 팔기로 했다. 그들 대부분은 나중에 집을 장만할 정도로 많은 돈을 손에 쥐었다.

 

또 워즈는 콧키, 페르난데스, 위긴턴, 에스피노사를 비롯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직원들에게 자기 지분을 무상으로 나눠 주었다.

 

이에 비해 잡스는 상당히 약삭빠른 편이었다. 그는 크리스앤 브레넌의 부양과 관련해 그녀와 딸에게 지급해야 하는 비용을 기업공개 이전에 정하고 서명까지 받아 두었다.

 

애플은 1980년 12월 12일 아침 주식시장에 기업을 공개했다. 투자은행들이 결정한 공모가는 주당 22달러였다. 첫날 이 주가는 29달러까지 올라갔다.

 

스물다섯 살의 잡스는 무려 2억 5600만 달러의 자산을 가진 거부가 되었다.

 

거부의 대열에 합류한 히피

부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태도는 상당히 이중적이었다. 그는 반(反)물질주의를 지향하는 히피였지만, 설계한 기계를 무료로 나눠 주고 싶어 하는 친구의 고안물들을 상업적으로 활용했다. 또 선불교 신봉자로서 인도 순례 여행에도 다녀왔지만 그 후엔 사업체를 설립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판단했다.

 

셰이커교도(기독교의 한 종파로, 금욕적이고 단순한 생활양식을 추구했으며 장식을 배제하고 본래 의도에 충실한 소박한 가구를 즐겨 썼다.)

 

셰이커교도 :: 지복천년설(至福千年說)을 믿고 공산공유(共産共有)의 종교적 사회를 형성하여 독신으로 지낸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조직되었으나 박해를 받아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여기에서 퀘이커교와 제휴하여 발전하였는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앙부흥운동의 물결을 타고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셰이커란 '몸을 흔드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예언자는 몸을 흔들어서 예언을 얻었다고 믿고, 이 동작을 그들의 예배의식에 받아들인 데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 하느님을 유성(有性)으로 보는 이 교리는 기성교단들로부터 이단시(異端視)되어 현재는 아주 쇠퇴하였지만, 그들이 제작한 공예작품과 가구 등은 미국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셰이커교도 [Shaker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걸프스트림 :: 플로리다주 남동쪽에 있으며, 1925년 공식적인 마을로 승격되었다. 북쪽으로 약 25km 거리에 팜비치카운티의 행정중심지인 웨스트팜비치(West Palm Beach)가, 남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플로리다 남동부 최대 휴양지인 마이애미(Miami)가 있다. 1A번 주립도로가 지나고, 인근에 95번 주간고속도로와 1번 US고속도로, 804번, 806번 주립도로가 있다. 북서쪽으로 약 21km 거리에 팜비치 국제공항(Palm Beach International Airport)이, 남서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곳에 팜비치카운티 파크공항(Palm Beach County Park Airport)이 있다.
휴양지 및 명소로는 걸프 스트림 공원(Gulf Stream Park)이 있으며, 주변 명소로는 북동쪽의 오션리지 해먹 공원(Ocean Ridge Hammock Park) 및 보인턴비치 공원(Boynton Beach Park), 남쪽의 앵커 공원(Anchor Park), 북서쪽의 포레스트힐 공원(Forest Hill Park)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걸프스트림 [Gulf Stream]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60년대를 휩쓸었던 이상주의 바람은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저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속에는 그 바람이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10. 맥의 탄생 - 혁명을 원한다고 말하라

래스킨과 잡스의 맥 프로젝트

일반 대중을 위한 저렴한 컴퓨터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은 래스킨은 1979년에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던 ‘애니’ 프로젝트의 책임자 자리를 맡겨 달라고 마이크 마쿨라에게 요청했다. 래스킨은 컴퓨터에 여성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성차별주의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로젝트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되 자신이 좋아하는 사과 품종인 ‘매킨토시(McIntosh)’에서 따오기로 했다. 하지만 제품명 때문에 오디오기기 회사인 매킨토시 래버러토리와 충돌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철자를 약간 다르게 했다. 그래서 결정된 이름이 ‘Macintosh’였다.

 

“퍼스널 컴퓨터가 진정 ‘퍼스널’해지려면 무작위로 선택한 어떤 집에도 컴퓨터가 놓여 있어야 할 것이다.”

 

너프볼(폴리우레탄 재질의 물렁물렁한 장난감 공.—옮긴이)

 

“욕심나는 기능부터 선정하고 작업에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먼저 가격 목표와 일단의 핵심 기능들에 초점을 둬야 한다. 그리고 현재 및 가까운 미래에 가능한 기술에 주목해야 한다.”

 

래스킨이 물러난 것은 불공정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매킨토시의 운명이라는 면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래스킨은 적은 메모리와 빈약한 마이크로프로세서, 카세트테이프와 최소한의 그래픽을 갖추고 마우스는 없는 컴퓨터를 만들고자 했다. 그의 계획대로 1000달러 정도의 맥을 만들었다면 애플의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데는 기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잡스가 해낸 일을 그는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즉 PC 업계를 완전히 재편하는 제품을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란 얘기다. 사실 우리는 나중에 보면 ‘가지 않은 길’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추정할 수도 있다. 이후 래스킨은 캐논 사에 고용되어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했다.

 

스티브는 리사보다 훨씬 야무진 맥을 탄생시켰습니다. 단순한 소비자 전자 기기가 아니라 컴퓨팅 플랫폼을 탄생시킨 겁니다.

 

잡스의 승리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맥 팀이에요. 빨리 따라오세요.”

허츠펠드는 당시 붙들고 있던 애플 II 작업을 마무리할 시간이 며칠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매킨토시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허츠펠드는 작업 중인 애플 II 도스 프로그램을 웬만큼 마무리해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것 아니냐고 상황을 설명했다. 잡스는 말했다. “시간 낭비일 뿐이오! 애플 II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는 거요? 애플 II는 몇 년 안에 사장될 모델이란 말이오. 애플의 미래는 바로 매킨토시에 있소. 그러니 당장 맥 팀으로 갑시다!” 그러면서 허츠펠드가 작업하고 있던 애플 II의 전원 코드를 홱 잡아당겨 뽑아 버렸다. 그 바람에 허츠펠드가 작성하고 있던 코드가 다 날아갔다. “자, 어서! 앞으로 일하게 될 새 자리를 알려 주겠소.”

 

잡스가 그를 맥 팀으로 불러오려고 막 시도할 무렵 워즈가 큰 사고를 당했다. 산타크루스 근처에서 그가 자신의 단발 엔진 비행기인 비치크래프트를 타고 이륙을 시도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워즈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을 겪었다. 잡스는 많은 시간을 워즈의 병실에서 보냈다. 하지만 퇴원한 이후 워즈는 애플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버클리를 중퇴하고 10년이 지난 뒤였지만,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남은 공부를 마저 하고자 로키 라쿤 클라크라는 이름으로 복학했다.

 

예전부터 그는 여러 인터뷰 자리에서 컴퓨터를 “정신을 위한 자전거”라고 표현해 온 터였다. 인간이 자전거를 발명한 덕분에 독수리보다 더 빠르면서도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듯이, 컴퓨터는 인간 정신의 능력 및 효율성을 한층 높여 줄 것이라는 논리에서였다. 그래서 어느 날 잡스는 이제부터 ‘매킨토시’라는 이름 대신 자전거라는 뜻의 ‘바이시클’을 써야 한다고 선언했다. 팀원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한 달도 안 되어 ‘바이시클’ 아이디어는 폐기되었다.

 

“그는 언제든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었어요.”

 

 

 

11. 현실 왜곡장 - 자신만의 규칙을 고집하는 보스

“그래서 그의 비전을 믿도록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자기 자신은 이미 그러한 비전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 내면화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왜곡한다. 잡스의 경우, 그것은 종종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라스푸틴(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배후에서 폭정을 일삼은 신비주의 성직자.—옮긴이)

 

라스푸틴 :: 러시아의 수도사. 시베리아의 빈농의 아들. 1904년에 고향을 떠나 신비적인 편신교(鞭身敎)의 일파에 가입, 각지를 순례하고, 농민으로부터 성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1907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방문, 황후 및 니콜라이 2세의 총애를 얻고 궁정에 세력을 가진 후, 종교 및 내차ㆍ외교에 관여했다. 그 생활이 몹시 방종해지자, 드디어 그 악영향을 제거하려는 귀족의 일단에 의해 1916년 가두에서 암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스푸틴 [Grigorii Efimovich Raspu´tin]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디아길레프(러시아의 미술 평론가이자 발레 뤼스의 설립자.—옮긴이)

 

디아길레프 :: 러시아의 발레단(團) 주재자(主宰者)ㆍ예술비평가. 노브고로트의 귀족 출신. 페테르스부르크 음악 학교를 졸업, 친구와 함께 《미술 세계 Mir Isksstra》 지(誌)를 간행(1898~04), 또 미술전을 주최하여 러시아의 예술계에 혁명적 신풍(新風)을 가져왔다. 1899년 페테르스부르크의 제실(帝室) 극장의 특별 조수가 되었으나 1901년 사임, 뒤에 홍행사가 되었다. 1906년부터 파리에 진출, 러시아 가극을 소개하여 성공을 거두고(1908), 발레단 <발레 류스(Ballet Russe)>를 창립(1909). 매년 정기 공연을 파리ㆍ런던에서 했다. 혁명(1917) 후는 파리ㆍ몬테 카를로 등을 근성(根城)으로 하여 많은 신작(新作) 발레를 카르사비나ㆍ나진스키 등을 비롯한 다수 무용가들에 의해 소개했다. 그는 무대의 지도, 대본(臺本)의 선정, 작곡가ㆍ장치가의 선정ㆍ무용가의 교육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또 드뷔시ㆍ라벨ㆍ오릭ㆍ사티ㆍ스트라빈스키ㆍ프로코피에프 등에게 발레 음악의 작곡을 의뢰했다. 1929년 런던 공연 후 베네치아에서 사망. 그는 발레를 음악과 미술과의 높은 종합 예술까지 끌어 올리고, 근대 발레를 확립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아길레프 [Sergei Pavlovich Dia´ghilev]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한번은 제가 생각하던 아이디어를 그에게 얘기했더니 미친 소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다음 주에 찾아와서는 ‘이봐, 굉장한 아이디어가 있어.’라면서 제가 얘기한 아이디어를 들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지적하면서 ‘스티브, 일주일 전에 제가 얘기한 거잖아요.’라고 했더니 그는 ‘그래, 그래, 그래.’ 하고는 그냥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트레이드오프(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부득이 다른 목적을 희생해야 하는 거래 또는 교환.—옮긴이)

 

트레이드 오프 :: 완전고용의 실현과 물가의 안정이라는 두 목표는, 실업률을 저하시키면 물가가 상승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려 하면 실업이 증가하는 이율배반의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두 목표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이 경우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쪽을 희생시키는 것을 트레이드 오프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레이드오프 [trade off]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적당하면 충분한 것이다. 다른 건 전부 잉여다.”

 

하루는 잡스가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개발하고 있던 엔지니어 래리 케니언의 작업 공간으로 찾아갔다. 그러고는 부팅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케니언이 변명을 하려고 하자 잡스는 그의 말을 끊었다. “만약 그걸로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부팅 시간을 10초 줄일 방법을 찾아볼 의향이 있는가?” 그가 물었다. 케니언은 그럴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잡스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더니 만약 맥 사용자가 500만 명인데 컴퓨터를 부팅하는 데 매일 10초를 덜 사용한다면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시간이 연간 3억 분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100명의 사람들의 일생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 “래리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고, 몇 주 후에 보니 부팅 시간을 28초나 앞당겨 놓았어요.”

 

루이스 티파니 :: 루이 컴포르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는 1848년 2월 18일 뉴욕에서 티파니앤코(Tiffany & Co.)의 설립자인 찰스 루이스 티파니(Charles Lewis Tiffany)의 아들로 태어났다. 티파니는 14세의 나이에 이글스우드 육군 사관학교(Eagleswood Military Academy)에 입학하여 3년간 다녔다. 또한 티파니는 이글스우드(Eagleswood)에서 풍경화가 조지 이네스(George Inness, 1825년~1894년)와 사무엘 콜만(Samuel Colman, 1832년~1920년)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후 18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870년대 초반 사이에 티파니는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등을 여행하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티파니는 모로코의 탕헤르(Tangier)와 이집트의 카이로(Cairo) 등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그림으로써 이국적인 예술과 건축에 대한 관심을 내비췄다. 1870년대 후반부터 티파니는 화가로서 활동하기보다는 장식 미술과 인테리어 분야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티파니의 첫 번째 인테리어 디자인 프로젝트는 뉴욕의 벨라 아파트(Bella Apartments)의 최상층에 있는 자신의 집이었다. 그후 티파니는 사무엘 콜만과 함께 후원자인 루이진 해브메이어(Louisine Havemeyer, 1855년~1929년)와 헨리 오스본 해브메이어(Henry Osborne Havemeyer, 1847년~1907년)의 뉴욕 저택을 장식하기 위한 가구와 인테리어를 디자인했다.
이외에도 티파니는 헨리 필드(Henry Field, 19세기 활동)의 미망인을 위해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Art Institute of Chicago)의 갤러리를 디자인하는 등 수많은 고객을 위한 개인 및 공공 공간을 디자인했다.
1892년에 티파니는 티파니 유리 및 장식 회사(Tiffany Glass & Decorating Company)를 설립하였다. 티파니 유리 및 장식 회사는 1902년에 티파니 스튜디오(Tiffany Studios)라는 이름으로 상호가 변경되었으며 티파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1938년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실내 장식에 대한 관심으로 성장한 티파니는 티파니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조명 기구, 유리 모자이크, 꽃병, 보석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혀갔으며 퍼브릴(Favrile)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유리를 개발하고 생산하였다.
구체적으로 티파니 스튜디오는 1898년에 조명 기구라는 또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각기 다른 색상과 밀도를 가진 유리 조각을 선별하여 제작된 스탠드는 티파니 스튜디오만의 독자성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티파니는 사업을 유리 모자이크(Mosaic)로 확장했으며 1899년에는 에나멜 세공술을 도입하여 티파니 스튜디오의 고유한 방식으로 만든 명판과 꽃병을 선보였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꽃병'(Vase, 1900년), '꽃병'(Vase, 1900년), '꽃병'(Vase, 1915년), '꽃병'(Vase, 19세기경), '꽃병'(Vase, 20세기경)을 들 수 있다. 이 5점의 꽃병은 다양한 색조가 자연스럽게 처리된 표면 위에 무지개빛 효과를 내는 유리와 금속의 혼합물을 코팅하여 완성되었다.
한편 1902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루이는 티파니앤코의 아트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티파니는 아버지의 회사인 티파니앤코를 포함하여 정기간행물, 국제 박람회 등을 통해 보석 트렌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티파니가 초기에 디자인한 보석은 1904년 루이지애나 국제 박람회(Louisiana Purchase Exposition)에서 전시되었고 동시대의 예술 비평가들로부터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루이 컴포르트 티파니는 티파니 스튜디오와 티파니앤코에서 일하다가 1933년 1월 17일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루이 컴포르트 티파니 [Louis Comfort Tiffany] (김달진미술연구소)

 

‘어차피 뭔가를 만들 거라면 이왕이면 아름답게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지난 수년 동안 배운 것은, 정말로 훌륭한 직원들이 있다면 그들을 어린애처럼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잡스가 설명한다. “그들이 대단한 일을 성취하리라 기대함으로써 실제로 그렇게 해내도록 만들 수 있지요. 첫 번째 맥 팀을 통해 A+ 수준의 직원들은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하고 B 수준의 성과를 용인하길 싫어한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맥 팀의 팀원 누구에게든 물어보세요. 그들이 치른 고통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얘기할 겁니다.”

 

 

 

12. 디자인 - 진정한 예술가는 단순화에 목숨 건다

바우하우스의 미감을 따르다

“신은 디테일 속에 존재한다.”

 

“적은 게 많은 것이다.”

 

‘미래는 더 이상 과거의 미래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위대하진 않습니다.

 

“단순함이란 궁극의 정교함이다.”

 

매킨토시 디자인은 포르쉐처럼

“위대한 예술품은 사람들의 취향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확장시키지.”

 

“그 세월 동안 선은 더 부드러워졌지만 디테일은 오히려 부각되었지요.”

 

하루는 빌 앳킨슨이 몹시 흥분한 상태로 텍사코 타워스에 불쑥 찾아왔다. 그는 스크린에 원과 타원을 손쉽게 그릴 수 있는 훌륭한 알고리즘을 막 생각해 낸 터였다. 일반적으로 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곱근을 계산하는 수학적 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68000 마이크로프로세서는 그러한 능력을 지원하지 않았다. 앳킨슨은 연속되는 홀수들의 합이 연속되는 일련의 완전제곱들을 만든다(예컨대 1+3=4, 1+3+5=9…….)는 사실에 기초하여 해결 방법을 찾아냈다. 허츠펠드는 앳킨슨이 데모를 시연하는 동안 잡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회상한다. “글쎄, 원과 타원은 좋다 이거야.” 잡스가 말했다. “하지만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을 그리는 건 어쩌잔 말이야?”

“그건 꼭 필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앳킨슨이 말했다. 그는 어차피 거의 불가능한 거니까 시도해 볼 필요도 없다고 설명했다. “저는 그래픽 루틴을 간소화해서 실제로 꼭 수행할 필요가 있는 근본적인 것들만 갖추도록 제한하고 싶었어요.”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소!” 잡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을 내며 말했다. “이 방 안을 둘러보라고!” 그는 화이트보드와 테이블 위, 그리고 모서리가 둥근 다른 직사각형의 물체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바깥을 내다보면 더 있소. 거의 보는 곳마다 다 있다고!” 그는 앳킨슨을 이끌고 산책을 하며 자동차 창문과 게시판, 거리의 표지판 등을 보여 주었다. “세 블록 왔는데 열일곱 가지 예를 찾았어요.” 잡스가 말한다. “그가 완전히 납득할 때까지 여기저기에서 다 찾아냈지요.”

“그가 마침내 주차 금지 표지판에 다가갔을 때,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네, 회장님 말씀이 옳아요. 제가 졌습니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허츠펠드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빌은 다음 날 오후 만면에 웃음을 띠고 텍사코 타워스로 돌아왔어요. 그의 데모는 이제 모서리가 둥근 아름다운 직사각형들을 굉장한 속도로 그릴 수 있게 되었지요.” 리사와 맥, 그리고 이후 거의 모든 컴퓨터의 대화 상자와 창 들은 둥근 모서리를 가지게 되었다.

 

맥 컴퓨터는 비트맵 방식이었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배열의 폰트(우아한 것부터 엉뚱한 것까지)를 만들어 픽셀 단위로 섬세하게 화면에 띄울 수 있었다.

 

매킨토시의 다채로운 폰트 모음은 레이저프린터 및 훌륭한 그래픽 기술과 결합해 데스크톱 기반의 출판 산업을 낳았고, 애플의 손익계산서에도 큰 이익을 안겨 주었다. 또한 고등학생 저널리스트들에서부터 학부모회 뉴스레터를 편집하는 어머니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반인들이 다양한 폰트를 활용하는 독특한 재미를 알게 되었다. 이전에 폰트는 인쇄업자들이나 머리가 하얗게 센 편집자들, 그리고 옷에 온통 잉크 때가 묻은 여타 불쌍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잡스는 창과 문서, 화면 등의 상단에 위치한 제목 표시 줄에도 똑같은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것들의 디자인에 대해 고뇌하면서 앳킨슨과 케어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수정하게 만들었다.

 

앳킨슨은 회상한다. “그가 만족할 때까지 아마 스무 개가 넘는 제목 표시 줄 디자인을 만들었을 거예요.” 어느 시점에서 케어와 앳킨슨은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잡스 때문에 제목 표시 줄에 사소한 수정을 가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잡스가 폭발했다. “그걸 매일 쳐다봐야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소?” 그가 소리 질렀다. “사소한 게 아니야, 제대로 해야 하는 거라고.”

 

워즈의 젊은 조수 중 한 명이었던 에스피노사는 잡스에게 설득당해 버클리 대학교를 중퇴했다. 잡스는 그에게 공부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지만 맥 컴퓨터를 개발할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에스피노사는 자발적으로 컴퓨터에 계산기를 추가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가 모인 가운데 크리스가 잡스에게 계산기를 보여 주었고, 숨을 죽인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지요.” 허츠펠드가 회상했다.

“뭐, 출발은 좋아.” 잡스가 말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별로야. 배경 색이 너무 어둡고, 굵기가 너무 두꺼운 선도 있고, 버튼들도 너무 커.” 에스피노사는 매일 잡스의 평가를 바탕으로 계산기를 수정했지만, 그럴 때마다 새로운 비판을 들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잡스가 찾아왔을 때, 에스피노사는 며칠을 고심한 끝에 찾아낸 해결책을 공개했다. 그것은 바로 ‘스티브 잡스 자신만의 계산기 만들기’ 세트였다. 사용자가 스스로 선의 굵기나 버튼의 크기, 그림자, 배경, 여타의 특징들을 바꾸고 개별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잡스는 그저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 바로 자리에 앉아 계산기의 모양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만들며 놀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흐르자 그가 원하는 모습이 완성되었다. 그때 그가 만든 디자인이 맥 컴퓨터에 적용되어 15년 동안 표준이 된다.

 

“형태는 감정을 따라간다.”(“형태는 기능을 따라간다.” 라는 금언의 변형이었다.)

 

에슬링거의 프로그디자인 회사는 애플과 120만 달러 상당의 연간 계약을 맺고 1983년 중반 팰러앨토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모든 애플 제품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되다(designed in California)”라는 자랑스러운 문구가 포함되었다.

잡스는 열정적인 장인 정신의 특징은 숨어 있는 부분까지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철저를 기하는 것임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이 철학의 가장 극단적이고 두드러진 실천 사례는 잡스가 칩과 다른 부품 들을 부착하고 매킨토시 내부 깊숙한 곳에 들어갈 인쇄 회로 기판을 철저하게 검사한 경우였다. 어떠한 소비자도 그걸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잡스는 인쇄 회로 기판을 심미학적인 토대로 비평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그게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 하는 겁니다. PC 회로 기판을 들여다볼 소비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잡스는 전형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대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해. 박스 안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말이야. 훌륭한 목수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장롱 뒤쪽에 저급한 나무를 쓰지 않아.”

 

“아름다운 서랍장을 만드는 목수는 서랍장 뒤쪽이 벽을 향한다고,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싸구려 합판을 사용하지 않아요. 목수 자신은 알기 때문에 뒤쪽에도 아름다운 나무를 써야 하지요. 밤에 잠을 제대로 자려면 아름다움과 품위를 끝까지 추구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표지를 보고 책을 평가한다. 그래서 매킨토시의 박스와 패키지 전체에 컬러 디자인을 적용했고, 거듭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세상에 그걸 50번이나 수정하라고 시켰어요.” 조애나 호프먼과 결혼한 맥 팀의 일원 알랭 로스만이 회상한다. “소비자가 열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릴 박스나 패키지의 외양에 집착에 가까운 정성을 기울였다니까요.” 로스만이 볼 때 이는 균형이 맞지 않는 행태였다. 메모리 칩에는 돈을 절약하려고 그렇게 애쓰면서 값비싼 포장에 돈을 낭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스는 매킨토시를 굉장한 컴퓨터로 만들고 겉모습도 그렇게 보이게 하려면 디테일은 필수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디자인이 완성되었을 때, 잡스는 매킨토시 팀을 모아 자축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진정한 예술가들은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그가 말했다. 그러곤 제도용지 한 장과 펜을 꺼내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쓰게 했다. 그들의 서명은 모든 매킨토시 내부에 새겨질 것이었다. 내부를 들여다볼 일이 있는 수리공이 아니라면 아무도 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팀원들은 모두 자신의 서명이 컴퓨터 속에 들어 있음을 알았다. 회로 기판이 최대한 아름답게 설계되었음을 알듯이 말이다. 잡스는 그들을 한 명 한 명씩 호명했다. 버렐 스미스가 먼저였다. 잡스는 45명의 차례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종이의 정중앙에 여백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소문자로 근사하게 휘갈겼다. 그러고 나서 샴페인으로 건배를 제안했다. 앳킨슨은 말한다. “바로 그런 순간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작품을 예술로 보도록 한 겁니다.”

 

 

 

13. 맥 만들기 -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

골리앗 IBM에게 도전장을 내밀다

그들의 건방진 자신감을 반영하듯, 애플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전면 광고를 냈다. “IBM, 잘 만났다. 진심으로.” 그들은 영리하게도 미래의 컴퓨터 전쟁이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애플과 업계의 골리앗 IBM 양자 간의 경쟁이 될 것처럼 구도를 잡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애플만큼이나 잘나가고 있던 코모도어나 탠디, 오스본 같은 회사들을 별로 비중 없는 소수 세력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영리한 그는 다가올 전쟁이 단순히 비즈니스 경쟁이 아니라 마치 종교전쟁이라도 되는 듯 몰아갔다.

 

잡스는 실제로 매킨토시를 리사와 경쟁하는 저가형 모델로 만들었다. 둘은 소프트웨어가 호환되지 않았으며, 더욱 심각했던 것은 두 기기 모두 애플 II와도 호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전체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부재한 애플은 고삐 풀린 잡스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엔드투엔드(end-to-end) 통제

그는 컴퓨터가 진정 위대하려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들에서도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들에 문호를 개방하면 결국 고유한 기능성 일부를 희생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가 생각할 때 최고의 제품은 엔드투엔드로 설계된 ‘위젯(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고 결과를 화면에 표시하는 작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도구.—옮긴이)들의 완전한 결합체’였다. 결국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에, 그리고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에 최대한 적합하게 맞춤 제작되어야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매킨토시가 나중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창출한 환경과 따로 놀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매킨토시는 자신의 하드웨어에서만 돌아가는 운영체제를 보유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는(나중에는 구글의 안드로이드도) 다른 다양한 회사들이 만든 하드웨어에서도 구동될 수 있었다.

“잡스는 고집이 센 엘리트주의 예술가이며, 자신의 창작물이 형편없는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제멋대로 수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지디넷》의 편집자 댄 파버는 이렇게 썼다. “그에게 그것은 마치 거리의 누군가가 피카소 그림에 붓질을 몇 차례 더하거나 밥 딜런의 노랫말을 임의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초의 맥부터 최신의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잡스의 시스템은 소비자들이 만지작거리고 수정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늘 굳게 닫혀 있었다.”

사용자의 경험을 통제하려는 잡스의 욕구는 과거 워즈와 벌인 논쟁에서도 핵심 문제였다. 애플 II를 개발할 때 둘은 확장 슬롯을 만들어 놓을 것인지, 즉 사용자가 컴퓨터의 머더보드에 확장 카드를 결합하여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수 있도록 구멍을 설치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에서 워즈가 이겼고, 애플 II는 결국 여덟 개의 슬롯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워즈가 아니라 잡스의 기계를 만드는 문제였다. 매킨토시는 한 개의 슬롯도 없이 제작되었다. 케이스를 열고 머더보드에 접근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마니아나 해커 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조치였다. 하지만 잡스는 매킨토시가 대중을 위한 제품이 되길 바랐다. 그는 그들에게 통제된 경험을 제공하고 싶어 했다. 누군가가 임의의 회로 기판을 확장 카드 슬롯에 쑤셔 넣어 자신의 우아한 디자인을 망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일반적인 드라이버로는 매킨토시 케이스가 열리지 않도록 특수한 도구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잡스는 매킨토시 키보드에 커서 화살표 키도 넣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커서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우스를 통하는 것뿐이었다. 구식에 물든 사용자들이 포인트앤드클릭(point-and-click) 방식을 익히도록 강요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여타의 제품 개발자들과는 달리, 잡스는 고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우스 사용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틀린 것이었다. 이는 잡스가 위대한 제품을 만들려는 자신의 열정을 고객의 필요에 영합하려는 욕구보다 중요시한 또 하나의 사례였다.

커서 키를 없애는 데는 또 하나의 장점(그리고 단점)이 따랐다. 이러한 조치는 외부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 맥 운영체제만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특별히 설계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다양한 컴퓨터에 돌릴 수 있는 범용 소프트웨어들을 추구하는 개발자들은 얼씬도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덕분에 잡스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와 운영체제, 그리고 하드웨어 장치 간의 밀접한 수직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올해의 인물'과 '올해의 기계'

1982년이 끝나 갈 무렵, 잡스는 자신이 《타임》의 ‘올해의 인물’에 선정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잡스는 결국 표지에 실리지 못했다. 그 대신 《타임》은 연말 호의 주제로 ‘컴퓨터’를 선정했고, 그것을 ‘올해의 기계’로 칭했다. 메인 스토리와 함께 잡스의 프로필이 소개되었는데, 모리츠의 취재 원고를 바탕으로 《타임》에서 록 음악 기사를 주로 담당하던 제이 콕스가 작성한 기사였다.

 

잡스에게는 낭패스럽게도, 《타임》은 그가 버린 딸 리사 브레넌의 존재까지 공개했다. “확률상 미국 남성들의 28퍼센트가 그녀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라던 잡스의 말이 인용된 것도 바로 이 기사였다.(크리스앤 브레넌은 이 기사를 보고 크게 분노했다.)

 

미디어는 어차피 서커스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사실 모리츠가 질투를 했다거나 의도적으로 원고를 불공정하게 썼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잡스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올해의 인물’ 후보로 뽑힌 적도 없다. 그해 《타임》 편집자들은(당시 나는 신입 편집자였다.) 사람 대신 ‘컴퓨터’를 선정하기로 일찌감치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잡지 표지에 싣기 위해 이미 수개월 전에 유명한 조각가 조지 시걸에게 작품을 의뢰해 놓았다. 당시 잡지의 편집장은 레이 케이브였다. “우리는 결코 잡스를 고려한 적이 없어요. 컴퓨터를 의인화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요. 생명이 없는 물체를 선정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시걸에게 조각 작품을 의뢰해 싣자는 결정이 나온 겁니다. 표지에 싣기 위해 누군가의 얼굴을 찾으러 다닌 적은 없어요.”

애플은 맥이 준비되기 정확히 1년 전인 1983년 1월 리사를 출시했다.

 

잡스는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독점 인터뷰를 할당하는 방법을 자신의 홍보 컨설턴트 레지스 매케나에게서 배워 둔 터였다. 유명 언론사들의 각 기자들이 한 시간으로 마련된 잡스와의 인터뷰를 위해 순서에 따라 칼라일 호텔로 안내되었다. 방 안 탁자 위에는 꽃으로 주변을 치장한 리사 컴퓨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홍보 전략에 따르면 잡스는 리사에만 초점을 두고 매킨토시는 언급하지 말아야 했다. 매킨토시에 관한 추측들 때문에 리사의 가치가 하락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스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날 그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대부분의 기사들(《타임》, 《비즈니스 위크》, 《월스트리트 저널》, 《포춘》)에는 매킨토시가 언급되었다. “올해 말 애플은 리사의 저가형 버전인 매킨토시를 출시할 예정이다. 파워를 줄이는 대신 가격을 낮춘 버전이다.” 《포춘》은 이렇게 보도했다. “잡스가 그 프로젝트를 직접 감독했다고 한다.” 《비즈니스 위크》는 그의 말을 인용했다. “세상에 나오면, 맥은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컴퓨터가 될 것입니다.” 그는 맥과 리사가 호환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도 인정했다. 마치 리사를 죽음의 키스와 함께 출시하는 것과 같았다.

리사는 실제로 서서히 죽어 갔다. 2년도 채 안 되어 생산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잡스에게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깃들기도 했다. 리사 출시 수개월 만에 애플은 매킨토시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다.

 

게릴라 정신과 잡스의 해적단

일정에 따른 개발 완료일을 언급하며 잡스는 팀원들에게 “잘못된 제품을 출시하느니 일정을 어기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의 트레이드 오프는 기꺼이 수용하는 다른 성향의 프로젝트 매니저였다면 특정 날짜를 기한으로 못 박고 이후로는 어떤 수정이든 허용치 않으려 했을 터였다. 하지만 잡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다른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출시 전까지는 완성된 게 아니다.”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 그는 맥 팀이 고귀한 임무를 맡은 특별 부대라고 강조하기를 좋아했다. 언젠가 모두 함께 보낸 시간을 돌아보며,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잊어버리거나 웃어넘길 것이고 그때를 황홀했던 절정기로 여기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프레젠테이션 말미에 그가 물었다. “멋있는 거 하나 보여 드릴까요?” 그러고는 탁상용 수첩만 한 크기의 기기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키보드와 화면이 공책 모양으로 연결된, 무릎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크기의 모형 컴퓨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1980년대 중후반에 제가 완성하길 꿈꾸는 컴퓨터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은 미래를 창조할 지속 가능한 기업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여기 모인 50명이 하는 일이 우주 전체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만, 그래도 이것은 지금까지 제가 살면서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신나는 일입니다.” 수년 후, 그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함께 일하는 게 그리 쉽지 않았던” 일화들을 웃어넘기며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신났던 일”이라는 데 동의하게 된다.

 

잡스는 연설에서 ‘매킨토시(Macintosh)’ 제품명을 사용하는 문제와 관련해 ‘매킨토시(McIntosh)’ 오디오 회사와의 논쟁을 해결했노라고 선언하며 직원들을 열광시켰다.(사실 그 문제는 아직 협상 중이었지만, 그때는 오래된 현실 왜곡장의 힘이 조금 필요한 순간이었다.)

 

“해군이 되느니 해적이 되는 게 낫다.”

 

몇 주 후 팀원들은 잡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애플 본사로 향하는 도로 옆에 세워진 광고판 하나를 빌렸다. 그리고 거기에 이렇게 적었다. “스물여덟 번째 생일 축하해요, 스티브.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해적들.”

맥 팀에서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프로그래머 중 한 사람인 스티브 캡스는 해적기를 걸어 이 새로운 정신을 공식화하기로 결정했다. 검은 천 조각을 준비한 그는 케어에게 해골과 교차된 대퇴골을 그리게 했다. 해골의 한쪽 눈에 붙인 안대에는 애플 로고를 집어넣었다. 캡스는 일요일 밤늦게 새로 지은 밴들리 3동의 옥상으로 기어올라 건설 노동자들이 놔두고 간 발판용 막대기에 깃발을 걸었다. 해적기는 몇 주 동안 자랑스럽게 펄럭였다. 하지만 어느 날 야간 습격을 통해 리사 팀의 일원들이 깃발을 훔쳐 가서는 라이벌인 맥 팀에 몸값을 요구했다. 캡스는 깃발을 되찾기 위해 급습을 주도했고, 리사 팀을 대신해 깃발을 지키고 있던 한 비서와 몸싸움을 벌여 다시 빼앗아 올 수 있었다.

 

맥 팀의 베테랑들은 잡스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펴는 게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대로 알고 하는 얘기이기만 하면 잡스는 직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허용했고, 미소를 지으며 존중해 주기까지 했다. 1983년쯤 되자 그의 현실 왜곡장에 익숙해진 직원들은 또 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필요하다면 그가 지시한 것을 조용히 무시해도 좋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옳았던 것으로 드러날 경우, 잡스는 그들의 반항아적인 태도와 권위를 무시하는 의지를 높이 샀다. 결국 자기 자신 역시 그런 부류였으니 말이다.

잡스의 이러한 성향을 가장 잘 보여 준 사례는 매킨토시용 디스크드라이브를 선택할 때였다. 애플에는 기업용 대용량 기억장치를 제조하는 부서가 있었는데, 코드명 ‘트위기’라는 디스크드라이브 시스템을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나이가 조금 든 독자들(트위기 모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디스크드라이브 시스템은 얇고 예민한 5.25인치 플로피디스크에 데이터를 저장하고 읽어 오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983년 봄 리사의 출하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트위기에 종종 버그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리사에는 하드디스크 드라이브가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재앙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드디스크가 없는 맥으로서는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허츠펠드는 말한다. “팀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플로피디스크를 사용하기 위한 단일 트위기 드라이브를 채택한 데다가 따로 의지할 하드디스크가 없었던 겁니다.”

그들은 1983년 1월 캐멀에서 있었던 수련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데비 콜먼은 잡스에게 트위기의 실패율에 관한 데이터를 제시했다. 며칠 후 잡스는 트위기의 제조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새너제이의 애플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공정 각 단계에서 절반 이상이 불량품으로 드러났다. 잡스는 폭발했다. 그는 달아오른 얼굴로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을 전부 해고하겠다고 고함치며 침을 튀겨 댔다. 결국 맥의 엔지니어링 팀장 밥 벨빌이 그를 주차장으로 부드럽게 데리고 나가 산책을 유도하며 대안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벨빌이 고려하던 한 가지 가능성은 소니가 개발한 신형 3.5인치 디스크드라이브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디스크는 좀 더 견고한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있었고 셔츠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애플 II의 디스크드라이브를 공급했던 일본의 소규모 공급 업체 알프스 전자에 의뢰하여 소니의 3.5인치 디스크드라이브의 클론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알프스 사는 이미 소니 기술의 라이선스를 획득해 놓은 상태였고, 그들이 제시간 안에만 클론을 만들어 낸다면 비용이 훨씬 더 적게 들 터였다.

잡스는 벨빌과 애플의 고참인 로드 홀트(애플 II의 첫 전원 공급 장치를 설계하기 위해 잡스가 고용한 직원)를 대동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도쿄에서 ‘총알’ 열차에 올라 알프스 사의 생산 시설을 방문했다. 그곳의 엔지니어들은 작동하는 원형 제품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단지 조잡한 모형만 하나 갖고 있었다. 잡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당히 좋아했지만 벨빌은 마음이 무거웠다. 알프스 사가 1년 안에 맥을 위한 디스크드라이브를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다른 일본 기업들을 방문하는 동안 잡스는 최악의 행동 방식을 보였다. 일본인 경영자들이 어두운 정장을 입고 참석하는 회의에 그는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그들이 관습에 따라 공식적인 선물을 주자 그것을 놓고 나오기도 했으며 답례도 하지 않았다. 줄지어 선 엔지니어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며 그들의 제품을 점검해 달라고 정중하게 제안했을 때도 코웃음만 쳤다. 잡스는 그들의 제품과 고분고분한 태도 모두가 맘에 들지 않았다. “이건 뭐하러 보여 주는 겁니까?” 어느 제품 앞에서 그가 쏘아붙였다. “이거 완전히 쓰레기잖아! 애들도 이거보다는 더 나은 드라이브를 만들겠네.” 안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크게 당황했지만 일부는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잡스의 무례한 태도나 건방진 행동 방식에 대해 말로만 듣다가 직접 경험하게 된 걸 재밌어하는 투였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도쿄의 칙칙한 외곽 지역에 위치한 소니 공장이었다. 잡스에게는 그곳이 혼란스럽고 비용만 많이 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작업의 상당 부분이 수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잡스는 그것도 말에 들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벨빌은 소니의 디스크드라이브로 하자고 주장했다. 주문만 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반대했다. 그는 알프스와 계약하여 자신들만의 드라이브를 만들 것이라고 결정했고, 소니와는 모든 거래를 중단하라고 벨빌에게 지시했다.

벨빌은 잡스를 부분적으로 무시하는 게 최선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마이크 마쿨라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마이크는 제시간에 디스크드라이브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하라고 조용히 지시했다. 잡스에게는 얘기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일급 엔지니어들의 지원을 받은 벨빌은 매킨토시가 사용할 디스크드라이브를 준비해 달라고 소니의 임원에게 요청했다. 알프스가 시간 안에 제품을 공급하지 못할 경우 거래처를 소니로 바꿀 계획이었다. 소니는 드라이브의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 고모토 히데토시를 애플로 보냈다. 퍼듀 대학교 출신이었던 그는 다행히 이 비밀 임무를 재미있게 생각했다.

잡스가 자신의 사무실을 나와 맥 팀의 엔지니어들을 방문하러 올 때마다(거의 매일 오후였다.) 그들은 고모토가 숨을 만한 곳을 서둘러 찾아야 했다. 한번은 잡스가 쿠퍼티노의 한 신문 가판대에서 고모토와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잡스는 그를 일본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긴 했지만 의심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가장 아슬아슬했던 순간은 어느 날 잡스가 맥 팀의 작업 공간에 예기치 않게 들이닥쳤을 때였다. 그때 고모토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맥 팀의 엔지니어 한 명이 그를 붙잡고는 청소 도구 보관실을 가리켰다. “어서, 보관실에 숨어요! 당장!” 허츠펠드의 기억에 따르면 고모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한다. 그는 잡스가 떠날 때까지 5분 동안 보관실에 숨어 있어야 했다. 맥 팀의 엔지니어들이 그에게 사과하자 그는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미국의 비즈니스 문화, 정말 이상해요. 정말로.”

벨빌의 예측은 들어맞았다. 1983년 5월, 알프스 사는 소니 드라이브의 클론을 생산하려면 적어도 18개월은 더 걸릴 것이라고 통지해 왔다. 파하로 사구에서 열린 수련회에서 마쿨라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잡스를 다그쳤다. 결국 벨빌이 끼어들어 알프스 드라이브에 대한 대안을 곧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잡스는 잠시 동안 어리둥절해하다가, 왜 소니의 일급 디스크 디자이너가 쿠퍼티노에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 망할 자식!” 잡스가 말했다. 그러나 분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얼굴은 커다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벨빌과 다른 엔지니어들이 자신 몰래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게 된 순간, 허츠펠드에 따르면 스티브는 “자존심을 억누르며 자기 말을 무시하고 옳은 일을 해 준 데 대해 고맙다.” 하고 말했다. 자신도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4. 스컬리를 영입하다 - 펩시 챌린지

“설탕물이나 팔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까?”

펩시 챌린지 캠페인

 

“우리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식에 변화를 일으킬 계획입니다.”

 

첨단 기술에 관심이 있는 척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는 마케팅쟁이였으니까요. 원래 마케팅쟁이들은 돈을 받고 가식을 파는 사람들 아닙니까.

 

잡스의 행동은 이제 조심스러운 구애에서 맹목적인 로맨스로 바뀌었다.

 

‘설탕물이나 팔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꿀 기회를 붙잡고 싶습니까?’

 

이윤 대 혁명적 제품

“애플과 보이스카우트의 차이점이 뭔지 아십니까? 보이스카우트에는 애들을 통제하는 어른 감독이 있다는 거죠.”

 

한번은 잡스가 맥 팀이 일주일에 90시간을 일한다고 자랑스럽게 뽐내듯 말하자 데비 콜먼이 “주 90시간 근무, 너무 행복하다!”라고 적힌 단체 후드 티셔츠를 제작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리사 팀은 “주 70시간 근무, 제품을 출시하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만들었다. 또 꾸준하게 수익을 내고 있던 애플 II의 팀원들은 “주 60시간 근무, 리사와 맥을 먹여 살리다.”

 

“우리가 이 지구에 머무는 시간은 아주 잠깐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물론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젊음을 아직 잃지 않았을 때 많은 걸 이뤄 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스티브는 스컬리가 스스로 특별하고 비범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어요. 스컬리는 전에는 스스로를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었죠. 그러니 스티브의 칭찬에 혹해서 취해 버린 거예요.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 이런 점이 뛰어나다, 존경스럽다 하면서 스티브가 스컬리에게 없는 성격이나 장점들을 투영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스티브가 비행기를 태워 주니 스컬리가 홀랑 넘어간 겁니다. 그렇게 투영한 이미지들과 스컬리의 실제 모습이 모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질 수밖에 없었죠. 결국 현실을 왜곡하려는 스티브의 경향이 파국을 초래한 겁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크게 충돌한 것은 매킨토시의 가격을 책정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애초에는 1000달러 정도로 구상된 컴퓨터였지만, 잡스가 디자인을 변경하는 바람에 비용이 올라가서 1995달러로 판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매킨토시 출시 및 마케팅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스컬리는 맥 가격을 500달러 더 올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케팅 비용이 생산비 못지않게 들어갈 것이므로 그 비용도 제품 가격에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잡스는 강하게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지향하던 신념이 완전히 깨집니다. 나는 맥으로 이윤을 짜내고 싶은 게 아니라 혁명적인 제품을 선보이고 싶은 거라고요.” 스컬리는 잡스에게 맥 가격을 1995달러로 책정하는 것과 마케팅 비용을 들여 대대적인 출시 행사를 하는 것, 둘 중에 선택하라고 말했다. 둘 다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하지만 결국 맥 가격을 둘러싼 갈등에서는 스컬리가 승리했다. 25년이나 지난 후에도 잡스는 그때를 떠올리면 속이 부글거리는지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 비싼 가격 때문에 매킨토시 판매량이 지지부진해지고 결국 마이크로소프트가 시장을 지배하게 된 겁니다.” 이 일로 잡스는 자신이 제품과 회사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있다고 느꼈다.

 

 

 

15. 매킨토시 출시 - 우주에 흔적을 남기자

진정한 예술가는 작품을 출하한다

새로운 표준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약간 다른 제품으로는 안 됩니다. 진정 혁신적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1년 전인 1982년 애플 II의 판매량은 27만 9000대였고 IBM PC와 IBM 클론의 판매량은 24만 대였다. 하지만 1983년에 이 수치는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애플 II는 42만 대, IBM PC와 클론은 130만 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애플 III와 리사는 참담하게 실패한 상태였다.

 

“진정한 예술가는 작품을 출하한다.”

 

이 시대 최고의 광고가 탄생하다

과거 많은 젊은이들, 특히 반문화 운동 지지자들에게 컴퓨터는 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전체주의적인 정부나 거대 기업이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이르자 컴퓨터를 개인의 자유를 증진해 줄 물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스킨헤드 :: 1960년대에 영국에서 형성되어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된 문화 양식으로, ‘스킨헤드’라는 명칭은 피부가 드러날 정도로 빡빡 깍은 머리를 특징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문화 양식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나 그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며, 이들을 ‘스킨헤드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발을 특징으로 했던 히피(hippie)와는 반대로 기존의 사회와 체제에 저항하는 의미로 짧은 머리나 삭발을 하며,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군화 모양의 작업화·항공점퍼·멜빵·티셔츠·색이 바랜 청바지 등을 특징으로 한다. 1980년대 이후 백인우월주의자나 신(新)나치주의자들(네오나치즘)에게서 이러한 양식이 주로 나타나므로 폭력적인 성향의 ‘극우 인종주의자’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스킨헤드(Skinheads Against Racial Prejudice, SHARP)’처럼 백인우월주의나 네오파시즘(neo-fascism)에 반대하는 스킨헤드도 있다.
문화 양식으로서의 스킨헤드는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출현했다. 그것은 학생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청년문화인 히피와는 달리 도시 노동자 집단의 청년문화로 나타났으며,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관습에 저항하던 모즈(Mods)와 길거리 폭력배를 본뜬 자메이칸 루드보이(Jamaican rude boys) 양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펑크 록(Punk Rock)의 유행과 함께 점차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노동자 집단의 반체제적인 하위문화의 성격이 강했던 스킨헤드는 1980년대 이후 점차 정치적 의미를 지닌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구조조정의 과정을 겪으면서 지위가 열악해진 노동자 집단 내부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가 확산되었는데, 스킨헤드는 이러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상징하는 양식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스킨헤드가 백인우월주의를 상징하는 양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뒤인 1990년대에 들어서 러시아와 독일, 동유럽 국가들에서 신나치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스킨헤드는 폭력적인 인종주의를 상징하는 양식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유럽에서는 신나치주의와 결합한 백인우월주의적인 극우 스킨헤드 집단이 커다란 사회문제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킨헤드 [skinhead]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어느 날 저녁 워즈가 매킨토시 팀의 사무실에 들렀다.(그는 비행기 사고 이후에도 애플에 완전히 발길을 끊지는 않고 종종 드나들었다.) 잡스는 워즈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여기 와서 이것 좀 봐.” 그는 VCR을 작동해 광고를 보여 주었다. 워즈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정말 죽이는 광고였거든요.” 잡스는 이사회가 슈퍼볼 중계 때 이 광고를 내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워즈는 그 광고 시간대의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다. 잡스는 80만 달러라고 말해 주었다. 평소 감정에 끌려 선의를 베풀곤 하던 워즈는 그 자리에서 즉석 제안을 했다. “그래? 내가 절반을 부담할 테니 절반은 네가 맡아.”

결과적으로 워즈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샤이엇데이는 30초짜리 광고 시간은 다른 곳에 넘겼지만 소극적인 반항의 일환으로 60초짜리는 팔지 않았던 것이다.

 

“1월 24일,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왜 우리의 1984년이 오웰의 ‘1984년’과 다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광고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저녁 전국으로 전파를 타는 주요 방송사 세 군데와 지역 방송국 50개에서 이 광고를 다룬 보도를 내보냈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 이는 애플의 광고를 반복적으로 대중에 노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광고는 결국 《티브이 가이드》와 《애드버타이징 에이지》가 뽑은 이 시대 최고의 광고로 선정된다.

 

1984 혁명, 매킨토시의 극적인 등장

“나는 당신을 워즈나 마쿨라와 똑같이 생각합니다. 당신은 회사 창업자들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회사를 만들었지만 당신과 나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으니까요.”

 

“지금의 패자는 훗날 승자가 되리.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니.”

 

1958년에 IBM은 제로그래피라는 신기술을 개발한 유망한 회사를 인수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제록스가 탄생합니다.

 

잡스가 매킨토시를 세상에 선보인 그날 《파퓰러 사이언스》의 기자 하나가 어떤 방식으로 시장조사를 했느냐고 잡스에게 물었다. 잡스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시장조사 같은 걸 하고 전화를 발명했습니까?”

 

 

 

16.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 두 궤도의 교차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연성계(連星系)

천문학에서는 두 별이 중력의 상호작용 때문에 궤도가 서로 얽히는 것을 가리켜 연성계라 한다.

 

블루 박스를 만들어 전화 회사를 갈취한 잡스와 달리, 게이츠는 자신의 학교를 위해 수업 일정을 짜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덕분에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이 신청한 과목을 파악해 수강할 수 있었다.) 지역의 교통 엔지니어들을 위해 통행량 측정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했고, 결국 학교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정했던 것도 인도의 구루에게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기 위해서였다.

 

아스퍼거 증후군 :: 1944년 오스트리아 의사인 아스퍼거(Hans Asperger, 1906~1980)가 처음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아스퍼거인은 사회적 상호교류에 어려움을 겪고 관심사가 제한되어 있으며 행동에 장애가 나타나지만, 다른 자폐성 장애와는 달리 언어지체나 인지발달 지연은 발생하지 않는다. 구체적 증상으로는 변화를 싫어하거나 불편해하며, 동작이 서툴러서 몸놀림이나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 소리나 맛ㆍ냄새ㆍ시각 또는 감정에 예민하거나 둔감한 경향을 나타내고, 특정한 주제에 흥미가 생기면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외관상으로는 언어발달 지연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억양에 문제가 있고 현학적이거나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실제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다. 사람과 눈을 맞추지 않고,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사만 하고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많다. 사교력이 떨어져서 또래의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스퍼거증후군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30년 후, 게이츠는 인색하게나마 잡스의 훌륭한 점을 인정했다. “그는 기술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지만, 무엇이 통하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놀라운 직감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잡스는 결코 게이츠의 장점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으로 화답하지 않았다. “빌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이 없고 뭔가를 창안한 적도 없지요. 그래서 이제 기술보다는 자선 활동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잡스는 다소 불공정하게 말했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저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도용하기만 했지요.”

 

1984년 애플의 연매출은 15억 달러에 달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고작 1억 달러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임무 완수를 위해 상당한 규모의 팀을 꾸렸다. “맥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잡스 쪽보다 더 많았지요.” 게이츠가 말한다. “그쪽은 14~15명이었고 우리는 약 20명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진정 맥에 목숨을 걸었던 겁니다.”

 

결국 잡스는 엑셀에 홀딱 반해 게이츠와 비밀 협상까지 맺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2년 동안 엑셀을 오로지 매킨토시에만 독점 제공하고 IBM PC 버전은 만들지 않는다면, 애플에서 베이식의 매킨토시 버전을 개발하는 팀을 없애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베이식에 대해 무기한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게이츠는 현명하게도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프로젝트가 취소된 애플의 팀원들은 분노했고, 향후 각종 협상에서 마이크로소프트가 칼자루를 쥐게 되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매킨토시에 실리는 엑셀과 차트, 파일 등과 같은 마이크로소프트 응용 프로그램들은 애플 로고를 달고 번들로 딸려 나가야 했다. 잡스는 박스에서 꺼내자마자 사용할 수 있는 엔드투엔드 시스템을 추구했고, 애플이 개발한 맥페인트와 맥라이트 소프트웨어도 번들로 묶을 생각이었다. 게이츠는 말한다. “컴퓨터 한 대에 포함되는 응용 프로그램 하나당 10달러를 받기로 했죠.” 하지만 이러한 계약은 로터스 사의 미치 케이퍼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 업계의 경쟁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부 프로그램들이 기한보다 늦게 완성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맺은 계약의 해당 조항을 내세우며 그들의 소프트웨어를 번들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의 소프트웨어를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할 제품으로 유통할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게이츠는 큰 불평 없이 잡스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미 잡스가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번들에서 제외되는 것이 마이크로소프트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우리 소프트웨어를 독립적으로 판매하는 게 더 큰 이득을 얻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적정 수준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할 자신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나았거든요.” 마이크로소프트는 결국 소프트웨어를 다른 다양한 플랫폼들에 판매했고, 더 이상 IBM PC용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를 개발하는 것과 같은 속도로 매킨토시 버전을 개발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번들 조건을 철회하기로 한 잡스의 결정은 마이크로소프트보다는 애플에 더 큰 타격을 입혔다.

 

마이크로소프트가 IBM PC용 엑셀도 만들 예정이냐는 질문을 받자, 게이츠는 잡스와 맺은 거래를 공개하는 대신 그저 ‘때가 되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잡스가 마이크를 잡더니 농담을 던졌다. “‘때가 되면’ 우리 모두 죽어 있을 텐데요, 뭐.”

 

GUI 전쟁

애초의 계약 조건은, 1983년 1월 매킨토시가 출시되면 이후 1년이 지날 때까지 마이크로소프트는 누구에게도 그래픽 기반 소프트웨어를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애플은 매킨토시의 출시가 1년이나 지연될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따라서 1983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가 IBM PC를 위해 윈도(창과 아이콘, 그리고 포인트앤드클릭 내비게이션을 위한 마우스를 갖춘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라는 새로운 운영체제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을 때, 게이츠로서는 자기 나름의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었다.

 

“글쎄요, 스티브, 이 문제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둘에겐 제록스라는 부유한 이웃이 있었는데, 내가 텔레비전을 훔치려고 그 집에 침입했다가 당신이 이미 훔쳐 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어, 이건 저쪽하고 계약한 내용을 위반하는 거 아니오?‘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 대신 이렇게 말했지요. ‘이거 완전 쓰레기구먼.’“ 게이츠는 잡스를 잠시라도 진정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기뻤다. “그래서 저도 대답했지요. ‘그래요, 근사한 쓰레기들이죠.’“

 

나중에 스컬리가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했을 때, 마이크로소프트는 워드와 엑셀 그리고 여타 응용 프로그램들의 매킨토시 버전을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위협하며 대응했다. 그렇게 되면 애플은 끝장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스컬리는 굴복에 가까운 거래에 합의하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곧 출시될 윈도 소프트웨어에 애플의 그래픽 스타일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마이크로소프트에 제공하는 데 동의한 것이다. 그 대가로 마이크로소프트는 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를 계속해서 만드는 한편, 엑셀은 일정 기간 독점 제공하기로 했다. 이 기간 동안 엑셀은 매킨토시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고, IBM과 호환되는 다른 PC들에서는 쓸 수 없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예정을 훨씬 넘긴 1985년 가을이 다 되어서야 윈도 1.0의 출하 준비를 완료했다.

 

애플이 제록스 PARC가 개발한 것들에 대한 사용권 계약을 맺긴 했지만, 다른 회사들이 유사한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애플이 나중에 깨달았듯이, 컴퓨터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모습과 느낌’은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보호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가장 품질이 높고 가장 혁신적인 제품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17. 이카로스 - 올라가는 것은……

멈추지 않는 고공비행

키스 해링 ::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쿠츠타운(Kutztown)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닥터 수스(Dr. Seuss)와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만화영화를 즐겨 보며 그림 그리기에 흥미를 가졌다. 1976년 피츠버그의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1978년 뉴욕으로 옮겨 와 시각예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해링은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었다. 다운타운의 활기찬 에너지와 신선한 기운 속에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지의 벽은 이제 그의 캔버스가 되어 지나가는 평범한 행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즉, 그만의 예술언어로 도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빈번히 공공기물 훼손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은 해링의 독특한 이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픽토그램(Pictogram) 같은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에서 단번에 그의 재능을 간파한 딜러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는 자신의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을 기획하였다. 해링은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그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해링은 다른 낙서화가들과 다르게 인종차별 반대, 반핵 운동, 동성애자 인권운동, 에이즈 교육 등의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그의 작품은 거리와 지하철을 벗어나 티셔츠와 배지, 벽화, 공익광고와 포스터 등으로 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그의 이미지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탄생과 죽음, 사랑과 섹스, 전쟁과 평화 등의 우주관을 담고 있다.
1990년 2월 16일 해링은 뉴욕에서 만 서른 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주요 작품에는 《무제 Untitled》(1982), 《앤디 마우스-뉴 코크 Andy Mouse-New coke》(1985), 《무지=공포 Ignorance=Fear》(1989)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스 해링 [Keith Haring]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마치 연말에 함께 연하장을 고르러 나온 고등학생 연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알렉산더 콜더(모빌 조각으로 유명한 미국의 조각가이자 화가.—옮긴이)

 

알렉산더 콜더 :: 어머니는 화가였고,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1915~1919년 스티븐스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으며, 1919~1921년에는 자동차 기술자, 도안사, 능률기사, 보험회사 조사원, 기계 판매원, 지도 제작자, 기계 디자인의 식자공으로 뉴욕·코네티컷·미주리·오하이오·버지니아 주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923년 뉴욕의 미술학교 아트스튜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하였으며, 1926~1936년에는 주로 파리에 머물면서 P.몬드리안, J.미로, J.아르프, M.뒤샹과 사귀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27년에 스튜디오에서 철사·나무조각·종이·가죽 등 여러 재료로 만든 서커스 단원과 동물들로 매주 4일 서커스 공연을 연출하였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마루바닥에 앉아 장난감 동물들과 곡예사들의 묘기에 폭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는 레제·르 코르뷔지에·몬드리안 등이 있었다. 특히 몬드리안에 압도된 그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고, 그 구체적 표현이 ‘움직이는 조각(mobile)’이었다. 그의 모빌은 조각을 대좌(臺座)에서 해방시켰고, 양감에서도 해방시켰다.
1935년 이후의 모빌은 모터보다는 기류(氣流)에 의해 움직이는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것은 가는 철사에 연결된 철판으로 된 형태들이 기류를 따라 또는 상호 균형의 원리를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조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낳은 훌륭한 조각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1952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전람회에서 조각대상을 받았다. 1960년대 이후 대형조각 붐이 일어나면서 그의 작품들은 비행장·미술관·광장 등에 세워졌다.
그의 업적은 움직이는 미술인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선구자였다는 데 있으며, 그 이후 J.탱글리, J.리키 등의 조각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Stirling Calde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공장을 깨끗하게 유지할 만한 규율이 없다면 그 기계들을 모두 제대로 돌릴 규율도 없는 거지요.

 

프랑스의 사회주의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의 미국 공식 방문에 동행한 영부인이자 쿠바에 대해 모종의 동경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다리외 미테랑이 공장을 견학했을 때는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잡스는 조애나 호프먼의 남편 알랭 로스만에게 통역을 맡겼다. 미테랑 부인은 자신의 통역사를 통해 공장의 근로 조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반면 잡스는 첨단 로봇공학과 기술에 대해 계속 설명하려고 했다. 잡스가 팔릴 물건을 팔릴 때 팔릴 만큼만 생산하는 적기 공급 생산 스케줄에 대한 얘기를 끝내자마자 그녀는 초과 근무 수당에 대해 질문했다. 짜증이 난 그는 미테랑 여사가 좋아할 주제가 아니라는 걸 빤히 알면서 공장의 자동화 덕분에 노동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 “일이 고된가요?” 그녀가 물었다. “휴가는 얼마나 되죠?” 잡스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근로자들의 복지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 언제든 와서 직접 일해 보라고 해.” 그가 미테랑 부인의 통역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통역사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로스만이 프랑스어로 끼어들었다. “잡스 씨가 영부인께서 이렇게 방문해 주시고 공장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잡스도 미테랑 부인도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지만 그녀의 통역사는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걷잡을 수 없는 추락

1984년 후반기부터 맥의 판매량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문제는 근본적인 데 있었다.

 

매킨토시의 장점은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기분 나쁘게 떨리는 녹색 글자와 썰렁한 명령어로 이루어진 어두침침한 화면이 아니라, 햇살이 가득한 놀이방 느낌을 준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강점이 가장 큰 약점이 되기도 했다. 텍스트 기반의 디스플레이에서는 글자를 표시하는 데 1바이트 미만의 코드가 소요되었지만, 맥에서는 사용자가 원하는 우아한 폰트를 픽셀을 통해 표시하려면 그보다 20배 혹은 30배의 메모리가 필요했다. 리사는 1000킬로바이트 램을 내장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매킨토시는 128킬로바이트 만을 가지고 버텨야 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내장 하드디스크 드라이브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애나 호프먼이 그러한 저장 장치를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잡스는 그녀를 “제록스 맹신자”라고 불렀다. 매킨토시는 단 하나의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만을 보유했다. 데이터를 복사하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드라이브에 플로피디스크를 넣었다 뺐다 하다가 팔꿈치에 관절염이 생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매킨토시에는 냉각 팬도 없었다. 잡스의 독단적인 고집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팬은 조용한 컴퓨터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되었다. 결국 그로 인해 여러 부품들이 쉽게 고장 났고, 매킨토시는 ‘베이지색 토스터’라는 별명을 얻었다.(맥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론 맥은 처음 몇 달 동안 그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잘 팔려 나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맥의 한계를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매출도 줄기 시작했다.

 

1984년 말, 리사의 매출이 사실상 전무하고 매킨토시의 매출은 월 1만 대 미만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잡스는 절박한 심정에 어설프고도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리사 재고품에다 매킨토시를 모방한 프로그램을 깔아 “매킨토시 XL”이라는 새로운 제품으로 판매하자는 것이었다. 리사의 생산은 이미 중단되었고 또 재개될 가능성도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는 잡스가 타당성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 보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맥 XL은 진정한 제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크게 화가 났어요.” 호프먼은 말한다. “단순히 재고로 남은 리사들을 처분하려는 의도였어요. 잘 팔리긴 했지만 그 끔찍한 속임수를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불길한 분위기는 1985년 1월에 내보내기 위해 만든 광고에서도 드러났다. 이 광고의 의도는 큰 반향을 일으켰던 ‘1984’ 광고의 반(反)IBM 정서를 다시 한 번 연출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첫 번째 광고는 영웅적이면서 낙관적인 느낌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리 클라우와 제이 샤이엇이 ‘레밍스’라 이름 붙인 그 새로운 광고의 스토리보드에는 검은 정장을 입고 눈가리개를 한 기업 간부들이 절벽으로 행진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잡스와 스컬리는 처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광고가 애플에 대한 긍정적이고 영광스러운 이미지를 전달하기보다는 IBM 컴퓨터를 구입한 모든 기업 간부들을 모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잡스와 스컬리는 다른 아이디어를 요구했지만 광고대행사 직원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작년에도 처음에는 ‘1984’ 광고를 안 쓰려고 했잖아요.”

 

서른, 기로에 선 잡스

“힌두교 경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첫 30년 동안은 당신이 버릇을 형성하고, 인생의 마지막 30년 동안은 버릇이 당신을 형성한다.’“

 

사람의 생각들은 머릿속에 마치 임시 구조물을 세우는 것처럼 모종의 패턴을 형성합니다. 사실은 화학약품으로 패턴을 에칭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레코드판의 홈과 같은 그런 패턴에 끼어서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나는 항상 애플과 연결돼 있을 겁니다. 인생 전체에 걸쳐 나의 ‘인생의 실’과 ‘애플의 실’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융단을 만들어 내길 바랍니다. 한동안은 애플을 떠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다시 돌아올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나에 대해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아직도 학생이고, 아직도 훈련병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술가로서 창의적인 방식으로 삶을 살고 싶다면 너무 자주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동안 무엇을 해 왔든, 어떤 사람이었든 다 버릴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바깥세상이 당신에게 ‘이게 바로 너’라는 식으로 모종의 이미지를 강요할수록 예술가는 본연의 자세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지요. “안녕, 나 이제 가야 돼. 나 미칠 거 같으니까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그러고는 어딘가로 가서 은둔해 버립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중에 약간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수도 있지요.

 

지각변동과 대이동

“여기 남는다면 주식 1만 5000주를 주겠소.” 혼이 제안을 거절하자, 잡스는 자신의 따뜻한 일면을 드러냈다. “그럼 포옹이나 한번 합시다.” 그렇게 그들은 포옹하고 헤어졌다.

 

애플 II는 1984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회사 매출의 7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의 효자 상품이었다.

 

흥분한 그는 심지어 자신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일까지 했다. 스컬리에게 전화를 걸어 잡스와 매킨토시 부문에만 너무 많은 관심을 쏟아붓는다고 힐난한 것이다.

불만을 품은 워즈는 회사를 조용히 떠나 자신이 발명한 만능 리모컨 기기를 만드는 새로운 기업을 출범하기로 결심했다. 그 발명품은 간단한 버튼 몇 개만 설정하면 텔레비전과 스테레오, 여타의 전자 기기들을 한꺼번에 조종할 수 있는 리모컨이었다. 그는 애플 II 부문의 책임자에게 퇴직을 알렸다. 보고 체계를 벗어나 잡스나 마쿨라에게 그 사실을 직접 알릴 만큼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지 않았다. 잡스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그 뉴스가 새어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소식을 접했다. 기자가 워즈에게 전화를 걸어 질문하자, 성격이 솔직한 워즈는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를 얘기했다. “그래요. 저는 애플이 애플 II 부문을 소홀히 대한다고 느꼈어요. 애플은 지난 5년 동안 대단히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레이건은 러더퍼드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전화기를 보고 했던 말을 인용했다. “놀라운 발명품이긴 하오만, 과연 누가 사용하려고 할까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그런 그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요.”

 

워즈는 그들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끝맺고 싶었다. 그게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 2만 달러의 급여를 받는 애플의 파트타임 직원으로 남기로 했고, 행사나 박람회가 있을 때면 회사를 대표해 참가하기로 했다. 이 상태를 유지하다가 서서히 결별했다면 아름다운 마무리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기어이 사고를 쳤다. 함께 워싱턴에 다녀온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토요일, 잡스는 하르트무트 에슬링거가 팰러앨토에 새로 낸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에슬링거의 회사 프로그디자인이 애플을 위한 디자인 작업을 보다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그곳으로 이전한 터였다. 잡스는 그곳에서 워즈의 새로운 리모컨 기기를 위해 마련된 스케치들을 우연히 보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프로그디자인과의 계약서에는 다른 컴퓨터 관련 프로젝트들을 금지할 수 있는 애플의 권리를 명시한 조항이 있었다. 잡스는 그것을 들이댔다. “워즈와 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지요.”

 

“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잡스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얘기했다. 그는 단지 워즈의 리모컨이 애플 제품과 똑같이 디자인되는 것을 막으려 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디자인 방식이 다른 제품에 적용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워즈는 자신만의 공급자를 찾아내야 해요. 애플의 공급자를 활용해선 안 됩니다. 그를 특별하게 봐줄 순 없습니다.”

잡스는 프로그디자인이 워즈를 위해 이미 진행한 작업에 대해 개인적으로 보상해 주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프로그디자인의 경영진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워즈를 위해 제작한 스케치들을 넘겨주든가 폐기하라는 잡스의 요구를 거부했다. 잡스는 그들에게 계약서상의 권리를 상기시키는 편지를 보내야 했다.

 

화가 났을 때조차도 곰 인형처럼 온순했던 워즈는 다른 디자인 회사를 찾고 나서도 계속 애플의 대변인 역할을 맡기로 했다.

 

1985년 봄 최후통첩을 듣다

1985년 봄 잡스와 스컬리 사이에 균열이 생긴 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일부는 사업과 관련된 단순한 의견 불일치였다. 예를 들어 스컬리는 매킨토시의 가격을 높게 유지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한 반면, 잡스는 좀 더 저렴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일부는 알 수 없는 심리적 요인들이었다. 그것은 둘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에게 가졌던 정열적이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호감에서 비롯했다. 스컬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잡스의 애정을 갈망했고, 잡스는 인생의 멘토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한 둘 사이에 열정이 식기 시작하자, 감정적인 반발이 형성되었다. 핵심을 보면, 그들의 갈등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각자에게 하나씩 해당되었다.)

잡스의 경우, 스컬리가 제품을 최우선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애플이 만들고 있는 것들의 우수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어 보였다. 반면 스컬리는 사소한 기술적 변경 사항과 디자인의 디테일에 대한 잡스의 열정에 강박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경력 전반에 걸쳐 탄산음료와 간식을 팔아 왔던 그에게 제품의 제조 방법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제품에 대한 천성적인 열정이 없었고, 그것은 잡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저주스러운 죄였다. 잡스가 나중에 술회했다. “엔지니어링의 디테일에 대해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지요. 하지만 그는 제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러다 언젠가부터 말싸움이 돼 버리곤 했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과정에서 역시 제 관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품이 모든 것이라는 것 말이에요.” 잡스는 스컬리가 우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스컬리가 계속 잡스의 애정을 갈망하며 서로가 매우 비슷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히자 잡스는 점점 더 스컬리를 경멸하게 되었다.

스컬리의 경우, 잡스가 상대를 회유하거나 속이려는 마음이 없을 때는 종종 불쾌하고 무례하게 대하며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군다는 게 문제였다. 기숙학교와 기업의 영업 팀에서 세련된 사교술을 익힌 스컬리는 잡스의 천박한 행동 방식을 용인하기가 힘들었다. 제품 디테일에 대한 열정이 없는 스컬리를 잡스가 용인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컬리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배려가 많았으며 예의가 발랐다. 잡스는 그렇지 않았다.

 

매킨토시의 실적이 계속해서 실망스러운 수준에 머무르자(1985년 3월의 매출은 예상했던 수치의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잡스는 사무실에 들어앉아 혼자 씩씩대거나 아니면 복도를 배회하며 문제의 원인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에게 있다고 힐난을 퍼부어 댔다.

 

잡스가 팰러앨토 인근의 우드사이드 디자인이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평면 스크린 기술에 매료되면서 모종의 가능성이 움텄기 때문이다. 그 회사는 괴짜 엔지니어 스티브 키친이 운영하고 있었다. 잡스는 또한 마우스 없이 손가락으로 제어할 수 있는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신생 기업에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 두 가지를 활용하면 ‘책 크기의 매킨토시’를 만들고자 하는 잡스의 비전이 이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번은 키친과 산책을 하던 잡스가 멘로파크 인근에서 건물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용화할 비밀 연구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연구소의 이름은 ‘애플랩스’로 하고 운영도 잡스 자신이 직접 맡겠다고 했다. 소수 정예 팀과 새롭고 위대한 제품을 만들던 즐거운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스컬리는 이사진과 개별적인 자리를 갖자마자, 일종의 최후통첩을 던졌다. “여러분이 저를 지지하면 저는 회사 운영을 제대로 책임지겠습니다. 만약 저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새로운 CEO를 찾아야 할 겁니다.” 그는 자기에게 권한을 부여한다면, 갑작스럽게 움직이기보다는 몇 개월의 시간을 두고 잡스가 새로운 역할로 순조롭게 옮겨 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스컬리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는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된다면 언제든 잡스를 이동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마지막 항전

잡스와 스컬리는 부문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놓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잡스는 매킨토시를 최대한 많이 파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스컬리는 애플 전체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항상 그랬듯이 부문 간의 협력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탓에, 매킨토시 팀은 애플 II 부문에서 개발하고 있는 것과 다른 종류의 새로운 디스크드라이브를 준비하고 있었다.

 

애플은 수개월 전 중국에 컴퓨터를 수출할 권리를 취득한 참이었고, 잡스가 메모리얼 데이(미국 전몰자 추도 기념일.—옮긴이) 주간의 주말에 중국으로 출장 가 인민대회당에서 계약을 맺기로 돼 있었다. 스컬리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상의하자 그는 자기 혼자 가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잡스로서는 거기에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스컬리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1985년 5월의 그 일주일

잡스가 자신이 스컬리보다 회사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스컬리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 문제를 참석자들의 투표에 부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바라보면 영혼이 보여요. 그런데 당신의 눈을 보니까 끝도 없는 구덩이, 텅 빈 구멍, 암흑만이 보이는군요.”

 

밥 딜런이 노래했듯 “구르는 돌처럼“

“지금의 패자는 훗날 승자가 되리…….”

 

트로츠키 :: 본명은 브론슈타인(Leib Davidovich Bron-stein). 러시아혁명 당시에 기회주의자, 반혁명분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최근에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학생 시절에는 나로드니키에 참가하였으나, 후에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제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했을 때는 후자에 속하였다. 1905년 제1차 혁명 당시에는 레닌의 혁명 방침, 즉 노동자 계급의 지도에 의한 노농동맹에 입각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전화라는 방침에 대립하여 '영구혁명론'을 주장, 1912년에는 8월 블록을 조직하여 볼셰비키에 대항하였다.
1917년의 10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에 가입. 일국(一國)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혁명의 성공 후에 외무 인민위원으로서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하여 소비에트 정권의 위기를 가져왔다. 그 후에도 끊임없이 '세계혁명론'을 주장하며 스탈린과 대립하였다.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 즉 러시아만 가지고도 세계혁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고 트로츠키는 러시아는 후진국이기에 소비에트 독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럽의 혁명을 지원하여 세계 혁명을 해야한다고 주장, 그후 1927년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27년에 국외로 추방되어, 국외에서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하여 반소ㆍ반혁명 음모 활동을 하다가 1940년에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로츠키 [Trotskij, Leon] (철학사전, 2009., 임석진, 윤용택, 황태연, 이성백, 이정우, 양운덕, 강영계, 우기동, 임재진, 김용정, 박철주, 김호균, 김영태, 강대석, 장병길, 김택현, 최동희, 김승균, 이을호, 김종규, 조일민, 윤두병)

 

 

 

18. 넥스트 -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해적들, 배를 떠나다

1983년에 브라운 대학교의 컴퓨터 과학 학부를 방문해 매킨토시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했을 때, 대학 연구소에는 그보다 훨씬 더 고성능의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고성능 개인용 워크스테이션을 보유하는 것이 대학 연구소 과학자들의 꿈이었다. 매킨토시 부문의 리더로서 잡스는 그런 컴퓨터인 빅 맥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유닉스 운영체제를 탑재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매킨토시 인터페이스를 갖출 계획이었다. 그러나 1985년 여름 잡스가 매킨토시 부문에서 쫓겨난 이후 그 뒤를 이어 매킨토시 부문 운영을 맡은 장루이 가세가 빅 맥 프로젝트를 폐기해 버렸다.

 

“그는 이사회 앞에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새 회사 설립을 구상 중이라고 했는데 사실상 이미 회사를 차린 상태였어요. 또 하급 직원 몇 명을 데리고 나간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중요한 인재들이었고요.” 마쿨라는 차분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역시 감정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리 은밀하게 핵심 팀원들과 입을 맞춘 뒤에 그들을 빼 갔습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야비한 행동이었어요.”

 

잡스의 사임이 공식 발표되자 애플의 주가는 거의 7퍼센트 올라 상한가를 쳤다.

 

당시 잡스는 애플 주식 650만 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애플 전체 주식의 11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으로 1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지분을 매각하기 시작했다. 5개월도 안 되어 그는 보유 지분을 딱 한 주만 남겨 놓고 전부 헐값에 처분했다. 한 주를 남겨 둔 것은 자신이 원할 때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남자가 첫사랑 여인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언제나 애플을 기억할 것이다.”

 

“직원 4300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규모의 기업이 청바지나 걸치고 다니는 여섯 명과의 경쟁을 두려워하다니, 말도 안 된다.”

 

워즈는 잡스가 새로운 회사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자신에게 연락을 했다고 밝히면서(워즈의 합류는 애플 경영진을 한 방 먹이는 교활한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런 게임에 끼고 싶지 않았으므로 잡스에게 회신 전화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독립, 그리고 새 출발

인생 3막에서 빛나는 성공의 주인공이 되도록 그를 단련한 것은, 애플이라는 인생 1막에서 추방당한 사건이 아니라 바로 2막에서 경험한 화려한 실패였다.

 

잡스는 여러 개 중에서 고를 수 있도록 다양한 시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랜드는 고객을 위해 ‘여러 가지 시안’을 만들지는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고 당신은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입니다. 내 디자인을 쓰든 안 쓰든, 그건 당신 마음이오. 하지만 난 여러 시안을 만들진 않습니다. 그리고 내 디자인을 쓰든 안 쓰든,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당히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다. 군소리 않고 무조건 10만 달러를 지불할 테니 죽이는 로고를 ‘하나만’ 디자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표지를 보고 책을 판단한다. 따라서 뛰어난 회사라면 첫 인상에서부터 사람들을 강렬하게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넥스트의 정육면체 컴퓨터는 “기능은 형태를 따라간다.”라는 잡스식 관점이 담긴 대표적인 사례였다. 바우하우스와 여러 기능주의적 디자이너들의 관점인 “형태는 기능을 따라간다.”와 반대였던 것이다.

 

완벽한 정육면체를 제작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주형(鑄型)을 이용해 만드는 부품은 대부분 옆면과 밑면의 각도가 정확한 90도보다 약간 크다. 해당 부품을 주형과 분리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팬의 옆면과 밑면의 각도가 90도보다 약간 크면 케이크를 꺼내기 쉬운 것과 같은 이치다.)

 

케이스에 주형 때문에 긁혀서 생긴 가는 선이라도 발견되면(다른 컴퓨터 회사들은 이런 긁힘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그는 바로 시카고로 날아가 주조 담당자를 설득해 다시 완벽하게 만들게 했다.

 

잡스는 언제나 제품에서 잘 보이는 앞면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의 완성도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는 철칙을 고수했다. 그의 아버지가 장롱의 보이지 않는 뒤쪽에도 질 좋은 목재를 써야 한다고 가르쳤던 교훈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넥스트에서 그런 성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컴퓨터 안에 들어가는 볼트에도 비싼 도금을 했다. 심지어 케이스의 안쪽도 바깥쪽과 똑같이 무광택 검은색을 입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컴퓨터 수리공 이외에는 아무도 볼 일이 없는 부분임에도 말이다.

 

잡스의 변함없는 현실 왜곡장

나중에 출시된 넥스트의 컴퓨터에는 전자사전과 시소러스(동의어, 반의어, 어원과 활용을 보여 주는 어휘집.—옮긴이), 옥스퍼드 인용구 사전도 포함되어, 검색 가능한 전자책의 초기 개념을 구현했다.

 

1985년 말 페블 비치에서 열린 넥스트의 첫 번째 수련회에서 직원들은 그의 현실 왜곡장을 경험했다. 잡스는 넥스트의 첫 번째 컴퓨터가 18개월 후에 출시될 것이라고 직원들에게 선언했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좀 더 현실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여 출시 시점을 1988년으로 잡는 게 어떠냐는 어느 엔지니어의 제안을 무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1988년에 출시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세상은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며 기술 세계는 우리를 못 보고 지나쳐 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합니다.”

 

구원자의 등장

노몬 록웰 :: 189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뉴욕 체이스 아트스쿨에 입학해 미술공부를 시작했고, 이어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다. 18세 때에는 이미 전업화가가 되어 『보이스 라이프 Boys' Life』에서 일하게 되었다. 『보이스 라이프 Boys' Life』는 미국의 보이스카우트에 관한 도서를 출판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그는 청소년 출판물에 들어가는 다양한 삽화를 그리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노먼 록웰은 1916년 그의 나이 22세 때부터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The Saturday Evening Post』에 표지 그림을 그렸다. 이 잡지는 당시 미국 최대의 판매부수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록웰은 변모하는 20세기 미국사회와 미국인의 일상을 밝고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록웰은 47년 동안 이 잡지를 위해 322점의 표지를 그렸다. 그 외에도 수많은 광고와 초상화, 포스터 등을 그려 미국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43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의회 연설에 영감을 얻어 '네 개의 자유'에 대한 그림을 그렸고, 그것들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유명한 에세이와 함께 게재되었다. 그가 그린 《언론의 자유》, 《예배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는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이 작품들은 미국 전역에서 전시되며, 전쟁 자금으로 1억 3천만 달러의 후원금을 모으기도 했다. 
록웰은 1963년부터 이후 10년 간 『룩 Look』이라는 잡지에 삽화를 기고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소박하고 정겨운 미국을 그려왔던 록웰은 이때부터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시민의 권리, 인종차별문제, 빈곤의 문제, 그리고 우주 탐험 등과 같이 당시 그가 관심을 가졌던 문제들을 주제로 다루었다. 
1977년 록웰은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인물'로 선정되어 '대통령 자유 메달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했다. 그리고 1978년 84세를 일기로 스톡브리지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 미국 메사추세츠주(州) 스톡브리지에는 노먼 록웰 박물관이 있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록웰의 원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작품에는 《언론의 자유 Freedom of Speech》(1943), 《탈주자 The Runaway》(1958), 《삼중 자화상 Triple Self-Portrait》(1960), 《미술품 감식가 The Connoisseur》(1962), 《우리 모두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 The Problem We All Live With》(1964)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먼 록웰 [Norman Rockwel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빌 게이츠의 독설

 잡스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통합된 엔드투엔드 방식을 선호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제품과 호환이 되지 않는 컴퓨터를 만들었다. 반면 게이츠는 여러 회사들이 서로 호환이 가능한 제품들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었으며 또 그런 관점 덕분에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그는 서로 다른 회사들이 만든 하드웨어가 표준 운영체제(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탑재하고 모두 똑같은 소프트웨어(마이크로소프트 워드나 엑셀)를 구동하여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을 지향했다.

 

협상, 또 협상

넥스트스텝 :: 애플 컴퓨터 회사의 공동 설립자인 스티븐 잡스(Steven Jobs)가 1985년 설립한 넥스트사(Next Inc.)에서 개발한 객체 지향형 운영 체계. 넥스트 워크스테이션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유닉스 계통의 운영 체계로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마우스 조작에 의한 그래픽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객체 지향형 기능을 제공하므로 프로그램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넥스트스텝 [NextStep]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새로운 기술에 회사의 운을 걸어 보다

에즈라 파운드의 조언에 따라 「황무지」를 공들여 수정했던 시인 T. S. 엘리엇처럼 말이다.

 

에즈라 파운드 :: 아이다호주(州) 출생.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909년 영국으로 건너가, 언제나 이미지즘과 그 밖의 신문학 운동의 중심이 되어 T.S.엘리엇과 J.조이스를 세상에 소개하였다. 상징파(象徵派)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싫어하여, 언어를 조각과 같이 구상적(具象的)으로 구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집에는 《가면(假面) Personae》(1909) 《휴 셀윈 모벌리 Hugh Selwyn Mauberley》(1920) 《캔토스 The Cantos》(1925∼1959) 등이 있다. 특히 《캔토스》는 엘리엇의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1922)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동시에 구사한 신화적 방법으로 장편시(長篇詩)를 시도한 것이다. 그 연작(連作)의 하나인 《피산 캔토스 Pisan Cantos》(1948)에 의해서 보링겐상을 받았다.
또 번역가로서는 이탈리아의 카바르칸티, 로마의 시인 프로페르티우스 이외에도 E.F.페놀로사의 번역을 토대로 한 이백(李白)의 영역(英譯) 《The Ta Hio》(1928) 등 다방면에 걸쳐 우수한 번역을 남겼다. 동서 문학에 관한 깊은 조예는 《문학안내》(1931) 《문화로의 길잡이》(1938)에 응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미활동의 혐의로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연금되었으나, 시인들의 운동으로 1960년 석방되어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즈라 파운드 [Ezra Loomis Pound]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설령 그물망 없이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해도 그는 현장에서 실제 시연을 하기로 결정했다.

 

바티칸 공의회 :: 바티칸에서 열리는 가톨릭 교회의 중요 결정사항을 토의하기 위해 소집된 전체 회의. 역사적으로 2차례 열린 바 있는데,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1869년 교황 비오 9세(Pius IX)가 소집하여 다음해까지 개최되어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가지는 절대권에 대한 교황수위권(敎皇首位權)과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황이 교의(敎義)에 대한 결정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 등 신앙상의 주요 결정을 내렸다. 교황무오설은 교황무류성(敎皇無謬性), 불가류성(不可謬性) 등으로도 불린다.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대 사건 중에 하나로 평가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트리엔트공의회)는 1962년 요한 23세가 소집하였으나 공의회 도중 교황이 사망하면서 바오로 6세가 이를 계승, 65년까지 회의를 주재했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개혁 및 현대화, 신앙의 자유, 세계 평화, 교회 합동 등을 논의했다. 논의 결과, 제2차 공의회 이후부터 라틴어로만 봉헌되던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서 각 나라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1517년 종교개혁 이후 분리된 개신교를 형제로 인정하는 등 교회 화해의 길을 모색했으며, 그리스도 복음 전파에 대한 종교관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티칸공의회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잡스의 철학 가운데 하나는, 때로는 모험적인 마인드로 새로운 아이디어나 최첨단 기술에 ‘회사의 운명’을 걸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앨리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자, 하얀 여왕이 이렇게 응수한다. “나는 때때로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여섯 가지나 믿어 버렸단다.”

 

“고급 교육 시장을 타깃으로 한 이 제품 한 대의 가격은 6500달러입니다.” 넥스트 제품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앉은 곳에서 드문드문 박수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대학 측 관계자들은 오래전부터 2000~3000달러 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연히 잡스가 그 정도 가격을 책정하리라고 믿었다. 대학에서 나온 사람들 중 일부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다가 프린터 가격 2000달러는 별도였으며, 느린 속도의 광디스크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2500달러짜리 외장 하드디스크를 구입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어느 기자가 잡스에게 컴퓨터 출시가 왜 그렇게 늦어지는지 묻자 잡스는 이렇게 답했다. “늦은 게 아닙니다. 이 컴퓨터는 시대를 앞서서 5년이나 빨리 나오는 셈입니다.”

 

여피족 :: 고등교육을 받고, 도시 근교에 살며, 전문직에 종사하여 고소득을 올리는 일군(一群)의 젊은이들로서 1980년대 젊은 부자를 상징한다. 여피란 젊은(young), 도시화(urban), 전문직(professional)의 세 머리글자를 딴 'YUP'에서 나온 말이다.
여피족은 너나없이 베이비붐으로 태어나 가난을 모르고 자란 뒤, 고등교육을 받고 도시 근교에 살면서 어떤 전문직에 종사하여 높은 수입을 보장받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 가치관 등에는 기성세대의 그것과는 물론, 같은 세대에 속한 다른 젊은이들의 그것과도 크게 다른 데가 있다.
우선 이들은 개인의 취향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며, 매사에 성급하지 않고 여유가 있다. 또 모든 행동거지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으며, 대인관계에서는 부족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깨끗하고 세련된 인간관계를 추구한다.
이밖에도 이들은 사회적 광장(廣場)에 중점을 두는 전통적인 규범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밀실(密室)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독존적(獨尊的)인 가치관은 '1970년대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가치관으로, 풍요로운 토양 위에서만 싹틀 수 있는 귀공자풍 가치관'이라고도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피족 [yuppies, ―族]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89년 중반 드디어 넥스트 컴퓨터가 정식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을 때 넥스트의 공장은 한 달에 1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춰 둔 상태였다. 하지만 실제 판매량은 한 달에 약 400대 수준이었다. 공장에 있는 근사한 로봇과 기계 들이 대부분 놀았다. 그리고 넥스트는 계속해서 큰 적자를 내며 재정난에 시달렸다.

 

 

 

19. 픽사 - 기술과 예술의 만남

할리우드 문화와 과학기술이 공존하는 곳, 픽사

렌더링(2차원의 화상에 광원, 위치, 색상 등으로 사실감을 불어넣어 3차원 화상을 만드는 과정을 뜻하는 컴퓨터 그래픽 용어.—옮긴이)

 

잡스는 하드웨어와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도 전문가들만을 위한 제품이 아니라, 대중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기업 시장이나 고급 전문 시장만을 목표로 삼는 것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유서는 깊지만 점차 쇠락해 가고 있는 회사의 애니메이션 부문을 되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로이 디즈니가 진행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자동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고, 결국 픽사가 그 계약을 따냈다. 픽사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CAPS)이라는 맞춤 제작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개발했다. 그것은 1988년 「인어 공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트리톤 왕이 아리엘에게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다.) CAPS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핵심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자, 디즈니는 픽사 이미지 컴퓨터 수십 대를 사들였다.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애니메이션

원래 픽사의 디지털 애니메이션 사업은 단지 부업에 불과했다. 짤막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던 팀의 주된 목적은 회사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에 대한 잡스의 애정

고전적인 장난감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장난감 1인 밴드의 멤버 티니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가 애정을 품은 동시에 무서워하기도 하는 아기가 등장한다. 아기를 피해 소파 밑으로 숨은 티니는 겁을 먹고 숨어 있는 다른 장난감들을 만난다. 나중에 아기가 머리를 부딪히고 울자, 티니는 다시 밖으로 나와 아기를 달래 준다.

 

「틴 토이」는 198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컴퓨터로 제작된 영화로서는 최초였다.

 

“디즈니로 이직하면 감독이 될 수 있겠지만, 여기 남으면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잡스는 자비 5000만 달러를 픽사에 쏟아부은 상태였다. 애플에서 나올 때 현금화했던 자산의 절반이 넘는 돈이었다. 그는 넥스트에서 여전히 손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잡스는 냉철하게 대처했다. 1991년 그는 개인 자금을 한 번 더 투자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픽사의 전 직원들이 스톡옵션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1937년(월트 디즈니가 「백설 공주」에 생명을 불어넣은 시점) 이후로 애니메이션 영화계에 가장 의미 있는 변혁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잡스는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이 더 지혜로웠다면, 픽사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 신경 쓰는 대신 애니메이션에 더 일찍 집중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수익을 안겨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픽사를 인수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20. 보통 남자 - 사랑이라는 두 글자

존 바에즈와의 연애

“그는 로맨틱하면서 동시에 로맨틱해지는 걸 두려워했어요.”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많이 좋아하기만 했던 것 같아요.”

 

잡스의 딸, 리사

“아버지는 훌륭한 수확은 척박한 자원에서, 즐거움은 절제에서 비롯한다고 믿었어요.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공식을 알고 있었어요. 모든 것에는 반대급부가 따른다는 것 말이에요.”

 

낭만주의자 스티브 잡스

상처를 받았다고 야심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나 자신이 정의되는 거야.”

 

목적 없이 게임 그 자체를 즐기는 어린아이들처럼 말이야.

 

우리의 담대한 미래가 우리를 현실로 돌려놓기 전까지, 당신이 주저하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 찰나와 같은 시간 동안에 우리는 그러한 단순한 삶을 살며 평화로운 노년에 이르는 행복을 누린 셈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프랑스 남부의 농장에서 손주들과 함께 조용히 우리의 나날을 보내며, 마치 신선한 빵처럼 따뜻하고 완전하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인내와 친숙함이라는 향기로 채우면서 말이야.

 

“스티브는 사람들에게 미적 감각을 가르치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게 뭘 좋아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녀는 회상한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우리가 서로의 내면에 깊이 귀 기울이면, 우리가 이미 갖추고 있는 참다운 것이 우러나오게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인생의 반려 로렌 파월을 만나다

돈에 대해서도 저는 그것이 자립하는 데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 보금자리와 잡스의 세탁기 구매 철학

미션식(단순한 구조와 자연재 사용이 특징인 건축 양식.—옮긴이)

 

테라코타 :: 원어는 구운 흙[粘土]을 뜻하나, 일반적으로는 미술적 조각 작품의 소재를 말한다.
테라코타의 유래는 매우 오래 되어, 석기시대에 이어서 또는 그것과 병행하여 발명된 것으로 생각되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지방, 소아시아·이집트 등의 유적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테라코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대 그리스의 타나그라 지방의 고분에서 발굴된 타나그라 인형이라고 불리는 소상군(小像群)이다.
테라코타는 점토로 조형한 작품을 그대로 건조하여 굽는 것으로 쉽게 만들 수가 있으나, 이 방법은 극히 작은 작품에 한정되며, 조금만 커지면 점토층이 두꺼워져서 구워낼 때 갈라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고대인도 일찍부터 형틀로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즉, 돌·나무·점토 등의 재료로 원형의 외형을 만들고 거기에 점토를 채우되 내부를 공동(空洞)으로 하고, 점토벽을 얇게 만들어 건조시킨 후 외형을 벗기고 구워내는 방법이다. 현재 외형은 주로 석고를 사용하나 옛날에는 점토제나 돌을 조각한 석형(石型) 등도 있었다. 테라코타는 현재도 조각작품의 소재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테라코타 [terra-cott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딸 리사와 함께 살다

‘라이트 페인팅’(어둠 속에서 빛을 이용해 형상을 만드는 사진 기법.—옮긴이)

 

“그는 변기 물을 내릴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남자였다.”

 

 

 

21. 토이 스토리 - 버즈와 우디 구조대

두 명의 독재자

존 래시터가 제안한 작품에는 「토이 스토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어떤 제품이든 그 나름의 본질적 역할, 다시 말해 만들어진 목적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었다.(이는 래시터와 잡스가 공유한 생각이었다.) 만일 어떤 물건이 감정을 지닌다면 그 감정은 자신의 본질적 역할을 완수하고 싶은 욕구를 토대로 형성된다. 예컨대 유리컵의 목적은 물을 담는 것이다. 만약 유리컵에 감정이 있다면 유리컵은 물이 가득 차 있을 때는 행복한 감정을, 물이 비어 있을 때는 슬픈 감정을 느낄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의 본질적 역할은 사람과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이다. 외발 자전거의 본질은 서커스에서 누군가를 태우는 것이다. 장난감이 만들어진 목적은 아이들이 갖고 놀기 위해서다. 따라서 장난감은 새로운 장난감에게 밀려나 주인의 사랑을 빼앗기거나 버려질 때 존재론적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토이 스토리」는 바로 그런 장난감의 이야기였다. 오래된 장난감과 세련된 새 장난감이 짝을 이루는 버디 무비, 이것은 본질적으로 드라마 요소를 내포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주인에게서 외면당한 장난감이라는 주제까지 합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이 작품의 오리지널 트리트먼트(등장인물, 플롯 등을 상세하게 기술한 일종의 제작 기획안으로서 시나리오의 토대가 된다.—옮긴이)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 장난감을 잃어버리고 가슴 아파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 즉 어린이의 품을 잃고 그것을 다시 되찾으려 애쓰는 장난감이다. 주인의 사랑을 받는 것은 모든 장난감의 존재 이유이다. 주인에게 받는 사랑은 장난감이라는 존재가 느끼는 감정의 토대가 된다.”

 

컷! 제작 중단

잡스는 그해 11월로 예정된 「토이 스토리」 개봉과 때를 같이하여 픽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평소 기업공개라면 열정적으로 달려들던 투자은행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잡스의 그런 생각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픽사는 지난 5년간 적자를 낸 회사였기 때문이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토이 스토리」는 개봉 첫 주말에만 미국 내 수익 3000만 달러를 거둬들이며 제작비를 뽑아냈고, 계속 흥행 가도를 달려 미국에서 1억 920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3억 62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배트맨 포에버」와 「아폴로 13」을 제치고 그해 최고 수익을 거둔 영화가 되었다. 영화 리뷰 웹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토이 스토리」에 대한 비평 73개 모두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픽사는 「토이 스토리」가 개봉되고 정확히 일주일 후에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잡스는 「토이 스토리」가 대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의 그런 모험적인 베팅은 엄청난 성공으로 되돌아왔다.

 

원래는 초기 공모가를 약 14달러로 책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22달러를 고집했다. 주식 공모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만 하면 픽사에 훨씬 더 많은 자금이 확보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잡스의 기대까지도 뛰어넘는 대성공으로 드러났다. 픽사의 주가는 그해 가장 놀라운 성과를 보여 준 넷스케이프의 기업공개 주가도 뛰어넘었다. 거래 개시 30분 만에 픽사의 주가는 45달러까지 올라갔다. 매수 주문이 너무 많이 몰리는 바람에 거래가 잠깐 지연되기도 했다. 주가는 장중에 49달러까지 올라갔다가 39달러로 마감했다.

그해 초에 잡스는 픽사를 인수할 구매자를 찾으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픽사에 쏟아부은 5000만 달러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기업공개를 한 날 주식시장이 마감되었을 때 잡스가 보유한 주식(픽사 지분의 80퍼센트를 갖고 있었다.)의 가치는 20배 이상 불어나 무려 12억 달러가 되었다. 이는 1980년 애플이 주식을 상장했을 때 그가 소유하게 된 부의 약 다섯 배였다.

 

아이스너는 픽사가 향후 작품 제작비의 절반을 부담하고 이윤의 절반도 가져가기로 한다는 데 동의했다. “마이클은 우리가 히트작을 별로 많이 만들어 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디즈니 측이 자금 부담을 던 거라고 믿었지요.” 잡스는 말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우리한테 커다란 성공과 결실을 가져다준 계약이었습니다. 이후 픽사는 크게 히트한 애니메이션을 연이어 열 편이나 탄생시켰으니까요.”

 

이제 잡스는 업계에서 곤꼽히는 최고의 기업 두개, 즉 애플과 픽사를 탄생시킨 인물이 되었다.

 

22. 잡스의 재림 - 마침내 사나운 야수가 돌아오다

데스크톱 시장의 암흑기가 시작되다

“업계가 호환 가능한 시스템을 지향하는 이때 넥스트는 다른 컴퓨터들과 호환되지 않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넥스트에서 구동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별로 없기 때문에 고객들을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넥스트는 자기 위치를 퍼스널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새로운 범주의 리더로 재설정하기 위해 애썼다. 워크스테이션의 성능과 PC의 친근함을 동시에 원하는 고객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객들은 이제 급속도로 성장하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컴퓨터를 사고 있었다. 1990년 넥스트의 매출은 2800만 달러였지만, 선은 25억 달러였다. IBM은 넥스트 소프트웨어의 라이선스를 사겠다는 거래를 취소했고, 잡스는 결국 자신의 천성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통합적으로 연결돼야 한다는 깊은 신념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2년 1월 넥스트스텝 운영체제가 다른 컴퓨터들에서도 구동되도록 라이선스를 판매하는 데 동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거의 아무런 혁신도 시도하지 않으면서 시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애플이 졌습니다. 데스크톱 시장은 암흑기에 접어든 겁니다.”

 

애플의 추락

“그들은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돈을 버는 데 관심이 더 많았어요. 물론 애플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주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그랬지요.”

 

마이크로소프트가 매킨토시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모방하는 데는 몇 년이 소요되었다. 결국 1990년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장착한 윈도 3.0이 출시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데스크톱 시장 지배를 위한 행진이 시작되었다. 1995년 8월에 출시된 윈도 95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운영체제가 되었고, 반대로 매킨토시의 매출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1996년, 1980년대 말 최고 16퍼센트까지 올랐던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이제 4퍼센트로 떨어져 있었다.

 

잡스는 매킨토시 시대는 이미 지났으며, 이제 애플이 맥만큼이나 혁신적인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코플랜드’ :: Mac OS 8 이전에 개발해오던 운영 체제의 개발 코드. 스케줄이 지연되고 NeXT사가 매수하자 개발이 중지되었다. 파워 PC의 성능을 갖는 파워 PC 네이티브 코드를 대폭 도입하였다. 운영 체제가 인터럽트를 발생시켜 태스크를 교환하는 다중작업(선점형 멀티태스크)을 실현한다. 아이콘이나 버튼을 입체화하는 등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개량을 시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코플랜드 [Copland] (컴퓨터인터넷IT용어대사전, 2011. 1. 20., 전산용어사전편찬위원회)

 

현실은 풍자를 현실화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다시 쿠퍼티노를 향해

“내가 인생에서 만난, 진정 사악하다고 할 만한 소수의 인간들 중 한 명입니다. 지난 1985년에 내 등에 칼을 꽂았잖아요.” 스컬리는 최소한 가슴에 칼을 꽂는 신사다움은 보였던 것이다.

 

“있잖아 래리, 당신이 애플을 사지 않고도 내가 애플로 돌아가서 지휘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엘리슨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더군요.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하게 만든 다음 이사회에 합류해서 추이를 보다가 CEO 자리에 앉으면 된다, 이렇게 말이에요.” 엘리슨은 잡스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티브, 이해 안 되는 게 하나 있어.” 그가 말했다. “우리가 회사를 인수해야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거잖아. 그런 식으로 팔려 가서 무슨 돈을 번다는 거야? 지분을 최대한 확보하지 않으면 어떻게 돈을 버느냐고?”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얼마나 다른지 나타나는 대목이었다. 잡스는 엘리슨의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는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그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래리, 돈이 중요한 게 아냐.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친구라는 사실이 진정 중요한 거고. 돈은 더 벌어서 뭐하려고 그래?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많으면서.”

엘리슨은 자신의 대답이 투정에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글쎄, 내게 돈이 더 필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돈이 어떤 금융회사의 펀드매니저에게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잖아? 왜 우리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 돈을 가져가야 하느냐고?”

“내가 애플로 돌아가도 회사의 지분을 전혀 보유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거야.” 잡스가 대답했다.

 

 

 

23. 부활 - 지금의 패자는 훗날 승자가 되리니

되찾은 왕국

“30대 혹은 40대에 들어선 예술가가 뭔가 놀라운 기여를 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서른 살에 접어들면서 잡스가 했던 말이다.

이 말은 잡스의 30대 시절, 즉 1985년 애플에서 퇴출된 후 10년의 기간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1995년 마흔 살이 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날아올랐다. 그해 「토이 스토리」가 개봉했고,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하면서 잡스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잡스는 애플로 돌아가 마흔이 넘은 사람도 최고의 혁신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줄 터였다. 20대에 PC를 변혁시킨 그는 이제 뮤직 플레이어, 음반 업계의 사업 모델, 휴대전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태블릿 컴퓨터, 출판, 언론 등의 분야에 혁신을 불러일으킨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삼촌이 첫 데이트에 나갈 때 입을 법한 차림새였다.”

 

“엘비스가 돌아왔다 해도 그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화면에 무언가를 적으려면 스타일러스(PDA 등의 기기 화면에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펜.—옮긴이)나 펜을 사용해야 하는 방식을 경멸했다. “신은 우리에게 스타일러스 열 개를 주셨어.” 그가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말하곤 했다. “그런데 한 개를 더 창조하자고?”

 

결국 뉴턴은 이후 1년에 걸쳐 무덤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나, 애플은 한 척의 배와 같아요.” 아멜리오가 말했다. “그 배는 보물로 가득하지만 문제는 배에 구멍이 나 있다는 거예요. 내 역할은 모든 직원들이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도록 만드는 거지요.” 그러자 스미스가 물었다. “구멍은 어떡하고요?” 그때부터 엘리슨과 잡스는 그 사건을 ‘배의 비유’라고 부르며 아멜리오를 놀려 댔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이 세 번째로 “늑대다!”라고 외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애플을 인수하겠다는 엘리슨의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그게 이득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게 그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와의 귀환

잡스는 가족들과의 시간을 즐겼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여유 시간이 많다 해도 ‘올해의 아버지 상’을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임 요청을 받은 사람 중에는 마이크 마쿨라도 있었다. 1976년 젊은 벤처 투자가로서 잡스의 창고를 방문했을 때, 그는 작업대 위에 놓인 미완성 컴퓨터와 사랑에 빠져 25만 달러의 여신 한도를 보장했고, 새로 창업한 애플의 세 번째 파트너이자 지분의 3분의 1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이사회에 계속 몸담았고, 여러 명의 CEO를 맞이하고 내보냈다. 그는 잡스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1985년의 대결에서 스컬리 편을 들어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잡스와 충돌하기도 했다. 잡스가 돌아오기로 한 이상 자신이 떠날 때가 됐음을 그는 알았다.

 

잡스는 오래도록 존속할 회사를 구축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그래서 마쿨라에게 그러기 위해 필요한 공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쿨라는 오래 지속되는 회사들은 스스로를 재창조할 줄 안다고 답했다. 예컨대 HP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했다. 음향 발진기 회사로 시작해 계산기 회사로 탈바꿈했고, 그다음에는 컴퓨터 회사가 되었다.

 

“회사를 재창조해서 뭔가 다른 것을 하게 만들어야 해. 다른 소비자 제품이나 전자 기기 같은 것 말이야. 나비처럼 탈바꿈을 하는 그런 조직이 돼야 해.”

 

'우리'의 애플

잡스가 이제 애플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여타 사례들이 알려진 덕분에 애플의 주가는 7월 한 달 동안 13달러에서 20달러까지 올라갔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수의 저작권 및 특허권 문제로 10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의 디자인과 느낌을 도용했는지 여부와 관련된 문제였다. 1985년 잡스가 애플에서 퇴출당할 무렵, 존 스컬리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다소 불리한 협상을 맺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 GUI의 라이선스를 받아 윈도 1.0에 사용하는 대신, 엑셀을 2년 동안 오직 맥에만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1988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 2.0을 출시하자 애플은 소송을 제기했다. 스컬리는 1985년에 맺은 협상이 윈도 2.0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윈도에 추가된 개선 사항들(빌 앳킨슨이 개발한, 다수의 창들을 겹쳐서 띄우는 기술을 차용한 것 등이다.)로 인해 그들의 계약 위반이 더 분명해졌다고 주장했다. 1997년 애플은 그 재판과 여러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소송 몇 개가 아직 진행 중이었고 새로운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다.

 

빌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그러고는 내가 상황을 완전히 바꿔 놓을 거라고 말했지요. 빌은 늘 애플에 신세 진 게 있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를 응용 프로그램 소프트웨어 사업에 끌어들인 것이 우리였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초로 개발한 응용 프로그램도 맥을 위한 엑셀과 워드였으니까요. 그래서 전화를 걸어 도움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어요.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의 특허들을 깔아뭉개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소송을 계속 벌여 나가면 몇 년 후에 우리가 10억 달러 규모의 소송 하나 정도는 이길 수 있다. 이 사실은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전쟁을 벌이면 애플이 그때까지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 점을 나는 잘 안다. 그러니까 문제를 즉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 두 가지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계속해서 맥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만든다고 약속하고, 애플의 성공에 이해관계가 걸리도록 마이크로소프트도 애플에 투자해라.”

 

“애플이 매킨토시의 디폴트 브라우저를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하기로 했다.”

 

잡스가 열정을 가지고 돌아왔을 뿐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와 협정까지 맺었다는 소식은 애플이 그토록 필요로 했던 추진력을 안겨 주었다. 그날 장을 마감했을 때 애플의 주가는 6.56달러(33퍼센트)나 상승해 26.31달러가 돼 있었다. 아멜리오의 사임 당일에 기록한 주가의 두 배였다. 그날 하루의 상승으로 애플의 시가총액에 8억 3000만 달러가 추가되었다.

 

 

 

24. 다른 것을 생각하라 - iCEO 잡스

미친 자들을 위한 축배를

“다른 것을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잡스와 클라우는 제품을 소개하는 식의 광고가 아니라 강렬한 브랜드 이미지를 전달하는 캠페인을 만들기로 했다. 애플 컴퓨터의 기능과 장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사람이 컴퓨터를 이용해 성취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는, 그런 광고 말이다.

 

“미친 자들을 위해 축배를.”

 

미친 자들을 위해 축배를. 부적응자들. 반항아들. 사고뭉치들. 네모난 구멍에 박힌 둥근 말뚝 같은 이들.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은 규칙을 싫어합니다. 또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그들을 찬양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천재로 봅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자들……. 바로 그들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싹이 바로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애플은 틀을 깨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 컴퓨터를 사용해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회사입니다.”

 

different라는 말이 동사 think를 수식하려면 부사가 되어야 하므로 ‘think differently’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잡스는 ‘different’를 명사처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think victory(승리를 생각하라)’나 ‘think beauty(아름다움을 생각하라)’ 같은 문장처럼 생각하자고 말이다. 또 ‘think different’는 ‘think big’처럼 일상적인 구어체 표현이었다. 잡스는 그때를 떠올리며 회상한다. “우리는 그 카피가 올바른 것인지를 놓고 많은 의견을 나눴습니다.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생각해 본다면, 그건 문법에 어긋나지 않는 표현입니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조금 다른 것이든 많이 다른 것이든, ‘다른 것’을 생각하라는 메시지이거든요. ‘Think differently(다르게 생각하라)’로는 그 느낌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게 제 판단이었습니다.”

 

“내 목소리를 사용할 경우, 사람들이 그게 내 목소리인 걸 알고 나면 결국 나에 대한 광고라고 느낄 겁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이건 애플의 광고니까요.”

 

“사람들이 포르쉐, 페라리, 프리우스 같은 자동차를 갖고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모는 차가 나를 말해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애플 제품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끼지요.”

 

iCEO

창의적인 사람 한 명보다 체계를 갖춘 훌륭한 기업이 훨씬 더 커다란 혁신을 일궈 낼 수 있다.

 

엔드투엔드로 돌아가다

워즈는 회상한다. “애플은 그 어느 회사보다 뛰어난 운영체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운영체제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회사 제품의 두 배 가격을 주고 애플의 하드웨어를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건 실수였어요. 애플은 운영체제 라이선스를 적절한 가격에 제공했어야 옳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의 라이선스를 제공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인 빌 게이츠는 1985년 잡스가 사임하자 애플 역시 그런 방식을 취할 것을 애플 측에 강력히 권한 바 있었다. 게이츠는, 설령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를 쓰던 고객들 일부를 애플에 빼앗긴다 할지라도 마이크로소프트가 매킨토시 및 매킨토시 호환 제품 사용자들을 위한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워드나 엑셀 등)를 만들어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현재 컴퓨터 업계의 상황과 지형도를 감안할 때, 애플이 다른 컴퓨터 제조사들의 지지와 신뢰 없이 자신의 혁신적 기술력만으로 업계 표준을 창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1994년에 CEO 마이클 스핀들러가 두 회사(파워 컴퓨팅과 래디우스)에 매킨토시 호환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했다. 1996년 CEO 자리에 오른 길 아멜리오는 모토로라에도 호환 제품 제작을 허용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업 전략은 미덥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애플은 판매되는 컴퓨터 한 대당 80달러의 라이선스 수익을 올렸지만, 애플의 시장이 확대되는 대신에 호환 제품들로 인해 대당 500달러까지 수익을 안겨 주는 애플의 고급 컴퓨터들이 덜 팔리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가 중시하는 핵심 철학 하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밀접하게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제품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길 원했고 이를 위해서는 엔드투엔드 접근법으로 사용자 경험을 창출해야 했다.

그래서 잡스는 애플에 복귀하자마자 매킨토시 호환 제품 생산을 중단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플랫폼이 폐쇄되면 끝나 버리는 겁니다. 끝장이라고요. 폐쇄적인 시스템은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형편없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회사들에게 우리 운영체제를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결국 우리 판매량을 깎아 먹게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초점의 회복과 집중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판단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을 판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이것은 회사 차원에서도, 제품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머리를 써서 생각하지는 않고 슬라이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에 저는 반대합니다. 프레젠테이션 가지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더 생기지요. 슬라이드만 잔뜩 들이대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끈질기게 논의해서 결론을 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에겐 파워포인트 같은 게 필요 없습니다.”

 

애플의 매킨토시 버전은 10여 개에 달했고, 그 각각에는 1400이니 9600이니 하는 식으로 버전 번호들이 복잡하게 붙어 있었다. “그것에 대해 3주 동안 직원들한테 설명을 들었는데도 이해가 안 가더군요.” 잡스의 말이다. 마침내 그는 이런 식으로 간단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떤 걸 내 친구들한테 사라고 하면 좋을까?”

질문만큼이나 간단하고 쉬운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잡스는 제품 모델들을 과감하게 없애 버렸다. 곧 제품 종류의 70퍼센트가 없어졌다. 그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똑똑한 인재들이에요. 그런 시시하고 형편없는 제품에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됩니다.”

 

그는 사각형 위쪽에 ‘소비자용’, ‘프로용’이라고 적었다. 사각형 왼쪽에는 ‘데스크톱’, ‘휴대용’이라고 적었다. 잡스는 도표를 가리키면서 각 사분면에 해당하는 네 가지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애플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길은 회의 때마다 제품 개발을 더 많이 승인해야 한다고 종용했습니다. 애플의 제품 종류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늘 말했거든요. 하지만 애플에 돌아온 스티브는 제품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는 사분면으로 이뤄진 도표를 그려 놓고는 ‘바로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곧 애플이 프린터나 서버 같은 다른 사업 부문에서 손을 뗀다는 의미였다.

 

잡스가 내린 가장 인상적인 결정은 필기체 인식 기능을 갖춘 PDA 뉴턴의 생산을 완전히 중단하기로 한 것이었다. 잡스가 뉴턴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는, 그것이 스컬리가 열정적으로 지지했던 제품이었고 기능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잡스가 스타일러스를 사용하는 기기를 원래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집중해야 할 곳에 집중한다는 접근법이 애플을 구해 냈다. 복귀 첫 해에 잡스는 3000명 이상을 해고했으며 이는 애플의 수익성을 되살리는 데 기여했다. 잡스가 임시 CEO가 된 1997년 9월에 끝난 회계연도 동안, 애플은 10억 4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파산에 이르기까지 90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잡스의 회상이다. 1998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행사에서 잡스는 아멜리오가 1년 전 크게 망친 바로 그 무대에 올랐다. 보기 좋게 턱수염을 기르고 가죽 재킷을 입은 잡스는 애플의 새로운 제품 전략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One more thing. 훗날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을 끝낼 때 이 문구를 애용한다.) 이날 잡스가 덧붙여 강조한 ‘한 가지’는 바로 “이윤을 생각하라(Think Profit)”라는 문구였다. 잡스의 입에서 이 문구가 나오자 청중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2년간 끔찍한 적자에 시달린 끝에 애플은 1997년 마지막 분기(회계연도상의 첫 분기) 동안 4500만 달러, 1998년 전체 회계연도 동안에는 3억 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다.

 

 

 

25. 디자인의 원칙 - 잡스와 아이브의 스튜디오

제품의 본질을 담지 않으면 디자인이 아니다

‘더 적게 그러나 더 낫게’

 

잡스가 만들 애플의 첫 브로슈어가 “단순함이 궁극의 정교함이다.”라고 선언했을 때부터, 잡스는 복잡성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얻는 단순성을 추구했다.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해당 제품의 본질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디자인은 단순히 어떤 제품의 표면적 모습이 아니었다. 디자인은 제품의 본질을 반영해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디자인은 ‘겉모습’을 뜻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디자인의 의미와 정반대입니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작물의 근간을 이루는 영혼입니다. 그 영혼이 결국 여러 겹의 표면들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겁니다.”

 

아이브와 잡스의 아이디어 놀이터

2011년 초까지 그는 212개의 특허에 이름을 올렸으니 발명가라 해도 무방하다.

아이브와 잡스는 제품의 포장에도 엄청난 관심을 쏟았고 특허까지 출원했다. 예를 들면 2008년 1월 1일 승인된 미국 특허 D558575호는 아이팟 나노의 박스에 대한 것이다. 포장을 열면 아이팟이 박스에 어떤 방식으로 들어가 있는지 보여 주는 네 개의 그림이 있다. 2009년 7월 21일에 승인된 특허 D596485호는 튼튼한 뚜껑과 내부에 광택 나는 작은 플라스틱 받침대를 갖춘 아이폰 포장에 대한 것이다.

마이크 마쿨라는 일찍부터 잡스에게 “가치를 귀속하라.”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겉모습만 보고서 내용까지 판단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애플 제품의 모든 외면과 포장 뒤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숨어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라는 것이었다. 아이팟 미니든 맥북 프로든, 애플 고객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박스를 개봉해 유혹하듯이 자리 잡은 제품을 발견하는 그 느낌을 안다.

 

 

 

26. 아이맥 - 반가워 (다시 만나서)

백 투 더 퓨처

디자인 면에서 잡스와 아이브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최초의 성과는 아이맥이었다. 1998년 5월에 등장한 아이맥은 가정 소비자 시장을 노린 데스크톱 컴퓨터였다. 잡스에게는 이 컴퓨터의 사양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있었다. 키보드, 모니터, 컴퓨터가 하나의 유닛으로 결합된 올인원 제품, 상자에서 꺼내자마자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 브랜드 헌장(기업의 비전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짤막한 문구.—옮긴이)을 구현하는 독특한 디자인의 제품을 개발한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가격은 1200달러 정도로 책정했다.(그 무렵 애플의 컴퓨터 중에는 2000달러 이하의 제품이 없었다.)

 

아이스하키 스타 웨인 그레츠키의 격언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퍽이 있던 곳이 아닌 퍽이 이동할 곳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케이스의 가격은 개당 60달러로, 보통 컴퓨터 케이스에 비해 세 배나 비쌌다. 다른 회사였으면 반투명 케이스가 추가 비용을 정당화할 만큼 매출을 늘려 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프레젠테이션과 연구를 수차례 실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그와 같은 분석을 요구하지 않았다.

디자인의 마무리는 아이맥의 상단에 자리 잡은 손잡이였다. 기능성보다는 상징성과 장난기가 강했다. 이 제품은 데스크톱 컴퓨터였다. 실제로 컴퓨터를 들고 다닐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아이브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첨단 기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걸 건드리지도 않겠지요.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여기에 손잡이를 달면 사람들이 이 컴퓨터와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되겠구나 하고요. 손잡이에 다가가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보면 무엇인지 바로 알 수도 있고요. 만져도 된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손잡이를 만드는 데는 돈이 많이 듭니다. 예전의 애플이었다면 저는 제 주장을 관철할 수 없었을 겁니다. 스티브가 정말 대단한 것은 이 손잡이를 보자마자 “아주 멋진데!”라고 반응하며 즉각 승인했다는 겁니다. 저는 제 생각을 다 설명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직관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손잡이가 아이맥에 담긴 친근함과 재미의 일부분임을 곧바로 간파한 거죠.

 

쇼는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 경쟁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이맥을 스타일 측면에서만, 겉으로 드러난 외관 측면에서만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형편없는 컴퓨터를 놓고서 거기에도 색깔만 좀 칠하면 아이맥이 될 거라고 말하지요.”

아이맥은 1998년 8월 1299달러의 가격으로 시판되었고, 처음 6주 동안 27만 8000대, 그해 말까지 80만 대가 팔리며 애플 역사상 가장 빠르게 판매된 컴퓨터가 되었다. 주목할 점은 매출의 32퍼센트는 컴퓨터를 처음 구매하는 소비자가 차지했으며, 12퍼센트는 윈도 PC를 쓰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브는 본다이 블루 외에 추가로 매력적인 색깔 네 가지를 만들어 냈다. 같은 컴퓨터를 다섯 가지 색깔로 제공하려면 제조와 재고 관리, 유통 등에 큰 어려움이 생길 게 뻔했다. 이런 경우 예전의 애플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업은 연구와 회의를 통해 비용과 수익을 따져 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새로운 색깔을 본 순간 완전히 들떠서 다른 경영진을 디자인 스튜디오로 소집했다. 그는 흥분에 차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색깔 전부를 사용할 겁니다!” 그들이 떠난 뒤 아이브는 놀란 얼굴로 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브는 회상한다. “대개 기업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는 수개월이 걸리잖아요. 스티브는 그걸 30분 만에 끝냈어요.”

잡스가 아이맥에서 꼭 개선하고 싶어 하던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남았다. 바로 그가 혐오하던 CD 트레이였다. “소니의 고급 스테레오에 슬롯 드라이브가 장착된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드라이브 제조 업체를 찾아가 9개월 뒤 출시할 아이맥 새 버전에 사용할 슬롯 드라이브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요.” 루빈스타인은 잡스를 설득해서 슬롯 드라이브 장착을 막으려고 했다. 그는 장차 재생뿐만 아니라 음악을 CD에 구울 수 있는 CD 드라이브가 나올 것이며, 그런 드라이브는 슬롯보다는 트레이 형태에서 먼저 이용이 가능해질 것이라 예상했다. “슬롯 방식을 택하면 우리는 최신 기술에 뒤처질 겁니다.” 루빈스타인의 주장이었다.

“상관없어요. 난 슬롯을 원하니까.” 잡스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스시 바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잡스는 잠시 산책을 하며 대화를 계속하자고 했다. “슬롯 드라이브 쪽으로 갑시다. 내게 베푸는 개인적 호의라고 생각해 줘요.” 물론 루빈스타인은 잡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루빈스타인의 예측이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파나소닉에서 읽고 쓰기가 모두 가능한 CD 드라이브가 출시되었는데 초기에는 구식 트레이 로더가 달린 컴퓨터에서만 쓸 수 있었다. 이 일은 향후 몇 년에 걸쳐 애플에 흥미로운 영향을 미쳤다. 슬롯 드라이브를 채택한 애플은 음악을 선별해 CD로 굽고 싶어 하는 사용자들의 요구에 신속히 대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애플은 경쟁자를 뛰어넘을 수 있는 창의적이고 대담한 길을 찾아야 했고, 잡스는 마침내 음악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27. CEO - 그렇게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유별난

막후의 관리자 팀 쿡

잡스의 경영 좌우명은 ‘집중’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제품 라인을 정리하고 애플이 개발 중이던 새로운 운영체제에서 필요 없는 기능을 제거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품을 꼭 자사 공장에서 제조해야 한다는 과도한 통제 욕구를 버리고 회로 기판부터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과정을 외부 업체에 위탁했다. 그러고는 공급 업체들에 엄격한 규정을 적용했다. 그가 애플의 경영권을 넘겨받을 당시, 창고에는 2개월분 이상의 재고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는 업계의 회사들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이었다. 달걀이나 우유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역시 유통기한이 짧은 제품이다. 따라서 이 재고가 수익에 미치는 타격은 최소 5억 달러에 달했다. 1998년 초, 잡스는 재고를 절반으로 줄여 1개월분만 보유했다.

 

“엔지니어들은 분석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도록 교육받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본능이나 직감에 기댈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쿡은 애플의 핵심 공급 업체를 100곳에서 24곳으로 줄였다. 공급 업체들은 거래를 지속하기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해야 했으며, 그의 설득에 따라 회사 위치를 애플의 공장 옆으로 옮긴 업체도 다수 있었다. 또한 쿡은 애플의 창고 19개 가운데 10개를 폐쇄했다. 쌓아 둘 공간을 없앰으로써 재고를 줄인 것이다. 잡스는 1998년 초에 2개월분의 재고를 1개월분으로 줄였다. 그해 9월, 쿡은 그것을 6일분으로 줄였으며 이듬해 9월 무렵에는 놀랍게도 2일분으로 줄였다.(때로는 단지 15시간분만 남겨 놓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컴퓨터 제조 공정도 4개월에서 2개월로 단축했다. 이 모든 조치 덕분에 비용이 절감되었음은 물론, 새 컴퓨터를 한 대 한 대 생산할 때마다 최신 부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모크 터틀넥과 팀워크

1980년대 초, 일본을 방문한 잡스는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에게 회사 공장의 전 직원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무척 부끄러워하면서, 전후에 다들 입을 옷이 없다 보니 소니 같은 회사가 근로자들에게 입을 것을 줘야 했고 그게 전통으로 굳어졌다고 이야기했지요.” 이와 같은 유니폼은 시간이 흐르며 그 회사만의 특징적인 스타일로 발전해(특히 소니 같은 경우가 그랬다.) 근로자와 회사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잡스는 말했다.

 

그는 파워포인트를 비롯한 격식 차린 프레젠테이션을 질색했다. 그래서 직원들로 하여금 탁자에 둘러앉아 각 부서의 다양한 관점과 견해를 바탕으로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결론을 내리도록 했다.

잡스는 애플의 중요한 강점이 디자인,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을 아우르는 제품 전체의 통합성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부서가 동시에 협력하여 일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그가 이용한 문구는 ‘깊은 협력’과 ‘동시 공정’이었다. 제품이 엔지니어링, 디자인, 제조, 마케팅, 유통 단계를 순차적으로 통과하는 공정이 아닌, 이들 여러 부문이 동시에 협력하는 공정을 원했던 것이다.

 

삶에서 만나는 것들은 대부분 최고와 평범함 사이의 차이가 30퍼센트 정도입니다. 최고의 항공 여행, 최고의 식사, 이런 것들은 평범한 항공 여행이나 식사에 비해 30퍼센트가량 더 낫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저는 워즈에게서 평범한 엔지니어보다 50배나 뛰어난 엔지니어를 봤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회의를 열 수도 있는 인물이었지요. 맥 팀은 그와 같은 완전한 팀, 즉 A급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였어요.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사이가 안 좋을 것이며, 함께 일하는 걸 싫어할 거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저는 A급 선수들과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들은 단지 C급 선수들과 일하는 걸 싫어할 뿐이지요. 픽사는 온전히 A급 선수들로만 이루어진 회사였습니다. 애플로 복귀하면서 저는 그걸 다시 시도해 보기로 작정했어요. 그러려면 협력적인 채용 절차가 필요했지요. 우리는 직원을 채용할 때면 설사 그가 마케팅 부문에 합류할 예정이라 하더라도 디자인 부서 사람들이나 엔지니어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 역할 모델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였습니다. 그가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위해 찾았던 사람들의 유형에 관해 읽었거든요. 저는 결코 오펜하이머만큼 잘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그게 바로 제가 하려던 것이었지요.  

 

애플이 새로운 운영체제에 사용할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할 사람을 구할 당시, 잡스는 한 젊은이에게 이메일을 받고 그를 회사로 불렀다. 하지만 면접 결과는 좋지 않았다. 지원자가 너무 긴장했기 때문이다. 그날 늦게, 잡스는 낙담에 빠져 로비에 앉아 있던 지원자와 마주쳤다. 그는 잡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한번 봐 달라고 청했고, 잡스는 어도비 디렉터로 제작된 짤막한 데모를 보았다. 매킨토시의 화면 하단 독(dock)에 더 많은 아이콘을 집어넣는 방법을 보여 주는 데모였다. 그가 독 안에 빽빽하게 들어찬 아이콘 위로 커서를 옮기자, 커서가 확대경처럼 변하며 하나하나의 아이콘을 크게 부풀렸다. “저도 모르게 ‘이런, 세상에!’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그 자리에서 그를 채용했습니다.” 잡스의 회상이다. 이 기능은 맥 OS X의 매력적인 일부가 되었고, 그날 채용된 디자이너는 이후 멀티터치 스크린용 관성 스크롤(화면에서 손가락을 뗀 다음에도 잠시 동안 스크롤이 계속되는 재미있는 기능) 등을 고안했다.

 

러닝 개그(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코믹한 요소를 계속 되풀이하는 것.—옮긴이)

 

그는 탁월한 수준이 되지 못하면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iCEO에서 CEO로

계속 연봉 1달러에 제로 스톡옵션을 고집하여 모든 이들을 당황시켰다. 그는 이렇게 농담했다. “50센트는 출근한 대가로 받고, 나머지 50센트는 성과에 따라 받는 겁니다.” 1997년 7월 그가 복귀할 당시 14달러가 채 안 되던 애플의 주가는 이후 계속 상승해 인터넷 거품이 절정에 달한 2000년 초에는 102달러를 넘어섰다. 울러드는 1997년 당시에 잡스에게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주식을 좀 받으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잡스는 이를 거절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애플에 돌아온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잡스가 그때 주식을 받았더라면 그 가치는 4억 달러에 달했을 것이다. 주식을 포기한 결과, 그는 같은 기간에 애플에서 고작 2.5달러를 벌었다.

 

브러시드 메탈(솔질을 해서 표면에 자잘한 흠집을 낸 듯한 질감의 금속.—옮긴이)

 

”여러분이 그렇게까지 반겨 주시니 쑥스럽군요. 저는 날마다 회사에 나가 세상에서 재능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일합니다. 애플에서도, 픽사에서도 그렇지요. 하지만 그 일들은 모두 팀 스포츠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환호는 제가 애플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받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28. 애플 스토어 - 회청색 사암과 지니어스 바

이해하고 유혹하라

바이트 숍의 시대는 저물었다. 컴퓨터 판매는 동네 컴퓨터 전문점에서 대형 체인점 및 할인점으로 중심을 옮겨 가고 있었다. 그런 대형 매장의 종업원 대다수는 애플 제품만의 독특한 특징을 설명할 지식도 의욕도 없었다. “그 판매원들이 신경 쓰는 건 50달러의 판매 수당뿐이었어요.” 잡스의 말이다. 다른 컴퓨터들은 다들 비슷비슷했지만 애플 제품에는 혁신적인 기능이 있었고 가격도 더 비쌌다. 그러나 아이맥은 통상 델 컴퓨터와 컴팩 컴퓨터 사이에 진열되었고, 애플에 대한 지식이 없는 종업원이 각 컴퓨터의 사양을 읊어 대는 게 전부였다. 이는 잡스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매장에서 고객에게 우리 메시지를 전할 길을 찾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될 상황이었어요.”

 

그는 애플이 성공하려면 혁신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데 고객과 의사소통할 길이 없으면 혁신으로 승리할 방도가 없다고 했어요.

 

“컴퓨터처럼 자주 사지도 않고 살 때 목돈이 드는 물건을 구입할 때는 소비자들이 다소 불편한 곳에 위치한 매장도 기꺼이 찾아간다는 게 통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 매장은 이런 쇼핑몰보다 더 임대료가 저렴한 지역에 주로 자리를 잡습니다.” 잡스는 그러한 통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애플 스토어는 임대료가 아무리 비싸도 대형 쇼핑몰과 시내 중심가에, 즉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한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소비자들이 1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와서 우리 제품을 사게 해서는 안 되지요. 열 걸음 정도 걸어오게 해야 합니다.” 특히 윈도 PC 사용자들을 노릴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들이 매장 근처를 지나간다면, 그리고 우리 매장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면 그들은 호기심을 느껴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그렇게 우리 제품을 보여 줄 기회만 얻는다면 분명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

 

“좋은 회사는 제품과 서비스에 가치를 귀속해야 한다.”

 

제품 종류가 많지 않아 전통적 구조의 매장 선반을 꽉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그것은 약점이 아닌 강점이었다. 그들은 제품 수가 적어서 오히려 더 유리한, 기존과는 다른 유형의 매장을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미니멀하고, 넓고 쾌적하며, 사람들이 제품을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는 매장을 구상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애플 제품을 모릅니다.” 존슨은 말한다. “그들에게 애플은 모종의 컬트입니다. 애플은 이제 컬트적인 것에서 멋진 것으로 변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직접 제품을 만져 보며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 있는 근사한 매장이 생기면 그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재미있고, 쉽고, 세련되고, 창의적인 제품, 최첨단의 세련됨과 다가가기 어려운 낯섦 사이의 경계선에서 긍정적 부분만을 취한 제품. 애플 스토어에는 이와 같은 애플 고유의 특성들이 고스란히 담길 터였다.

 

애플 스토어의 탄생

그들은 애플의 주요 제품들을 중심으로 매장을 구성했다. 즉 매장 내부가 파워 맥 구역, 아이맥 구역, 아이북 구역, 파워북 구역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잡스는 ‘모든 디지털 활동의 허브가 되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 컴퓨터로 카메라에 든 사진이나 동영상을 다루고, 언젠가는 뮤직 플레이어와 노래, 책, 잡지 등도 컴퓨터를 통해 이용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날 새벽녘에 존슨은 매장을 네 개의 컴퓨터 제품군 중심으로 구성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행위 중심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예를 들면 영화 구역을 마련해서 그곳에 아이무비 소프트웨어가 구동되는 여러 대의 맥과 파워북을 설치하고, 사람들에게 비디오카메라의 영상을 컴퓨터로 불러들여 편집하는 과정을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지요.”

 

“뭔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때 그것을 묵살하거나 나중에 고치겠다고 미루어 두면 안 됩니다. 그건 다른 회사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애플의 문제는 치즈와 크래커에 충분히 만족하는 세상에서 아직도 캐비어를 대접하는 것이 성장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과 미학, 열정으로 지은 꿈의 매장

2001년 5월 19일, 첫 번째 애플 스토어가 버지니아 주의 대형 쇼핑몰 타이슨스 코너에 문을 열었다.

 

과거 게이트웨이 매장은 일주일에 평균 250명 정도의 방문객이 찾았다. 2004년 무렵 애플 스토어를 찾는 방문객 수는 매주 평균 5400명 정도를 기록했다. 그해에 애플 스토어는 연 매출 12억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소매업계 사상 첫 10억 달러 돌파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각 매장의 매출은 엘리슨의 소프트웨어를 통해 4분마다 표로 작성되었다. 덕분에 애플은 즉각적인 정보를 활용해 제조와 공급, 판매 채널을 원활하게 통합할 수 있었다.

 

존슨은 이틀간 팀원들과 함께한 워크숍에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팀원들 모두에게 이제까지 받아 본 최고의 서비스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거의 모든 팀원이 포 시즌스 호텔이나 리츠칼튼 호텔에서의 멋진 경험을 언급했다. 이에 존슨은 당시 처음으로 임명된 애플 스토어 매니저 다섯 명을 리츠칼튼으로 보내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시키는 한편, 그곳의 서비스를 모방하여 안내 데스크와 바의 중간쯤 되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계획을 구상했다. “매장 안에 바를 만들고 맥에 능통한 직원들을 배치하면 어떨까요? 이름은 ‘지니어스 바’라고 하고요.” 그가 잡스에게 말했다.

잡스는 그 아이디어를 정신 나간 짓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이름조차 싫어했다. “그들을 천재(지니어스)라고 할 수는 없지. 컴퓨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그 지니어스 바라는 데서 발휘할 대인 관계 기술도 없고.” 존슨은 결국 아이디어가 묵살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튿날 존슨과 마주친 애플의 법률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스티브가 방금 나한테 지니어스 바라는 이름에 대해 상표등록을 하라고 하더군요.”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문을 여는 이 매장은 개점 첫 해에 매주 5만 명의 방문객을 끌어들임으로써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 매장을 여는 전략이 타당했음을 입증했다.(게이트웨이의 방문객 수가 일주일에 250명이었음을 상기하라.) “이 애플 스토어의 제곱미터당 수익은 세계 그 어느 상점보다 높습니다.” 잡스가 2010년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제곱미터당 수익이 아닌 총수익 면에서도 뉴욕의 어떤 상점보다 높아요. 삭스나 블루밍데일스를 포함한 모든 매장 가운데서 말이지요.”

 

최초의 매장이 문을 연 지 10년 만인 2011년 현재, 애플 스토어 수는 317개이다. 가장 규모가 큰 매장은 런던 코번트 가든에 있고, 높이로 볼 때 1위 매장은 도쿄 긴자에 있다. 매장 한 곳당 평균 방문자 수는 일주일에 1만 7600명이고 평균 수입은 3400만 달러이며, 2010 회계연도의 순매출 총액은 98억 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애플 스토어의 성과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애플 스토어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애플 총수익의 15퍼센트에 불과하다. 하지만 애플 스토어가 창출하는 화제와 그로 인한 브랜드 인지도 증대는 애플이 하는 모든 일에 힘을 실어 주는 간접 효과를 발휘한다.

 

오토클레이브(고온, 고압에서 합성, 분해, 승화, 추출 등의 화학 처리를 하는 내열, 내압성 용기.—옮긴이)

 

오토클레이브 :: 고압반응솥이라고도 한다. 교반장치(攪拌裝置)·진동장치, 그 밖에 회전장치를 수반하는 것이 많다. 재질은 저탄소강·크로뮴·니켈·몰리브데넘 등 합금강이 사용된다. 용기 내의 온도는 150~600℃이고, 기압은 250∼1,200atm이며, 공업용인 것에는 5,000atm 이상인 것도 있다. 반응에 의한 온도·압력의 변화, 가스 누출 등에 의한 폭발, 안전밸브·압력계·기밀성 등 보안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토클레이브 [autoclav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9. 디지털 허브 - 아이튠스에서 아이팟까지

미래 혁신을 향한 태동

잡스는 1년에 한 차례씩 가장 소중한 직원 100명을 뽑아 휴양지로 데려간다. 그는 그들을 ‘톱 100’이라 부른다. 선발 기준은 간단하다. 새로운 회사로 떠난다고 가정했을 때 ‘구명보트’에 꼭 태우고 싶은 사람들만 가려내는 것이다.

 

“PC는 이제 완전히 성숙하여 따분한 물건이 되었다.” 게이트웨이 CEO 제프 바이첸은 “우리는 이제까지의 PC 중심 노선에서 확실히 벗어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잡스가 애플을, 그리고 기술 산업 전반을 변화시킬 원대한 전략에 착수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는 PC가 주변부로 밀려나리라 생각지 않았다. 잡스가 보기에 앞으로 PC는 뮤직 플레이어에서부터 비디오 레코더, 카메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기들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디지털 허브’ 역할을 할 터였다. 사용자는 이 모든 기기를 컴퓨터에 연결하여 동기화하고 컴퓨터를 통해 음악, 사진, 동영상, 정보 등 잡스가 ‘디지털 라이프스타일’이라 명명한 모든 측면을 관리할 것이다. 이러한 잡스의 비전에 따라 이후 애플은 단순히 컴퓨터 회사의 범주에 머물지 않게 되며(실제로 회사 이름에서 ‘컴퓨터’라는 말이 사라지게 된다.) 매킨토시는 새롭게 등장할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놀라운 기기들의 허브가 됨으로써 최소 10년간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그가 다른 누구보다 앞서 새로운 시대의 디지털 혁명을 구상하고 수용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늘 그랬듯 그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었다. 그는 음악, 그림, 영상을 사랑했다. 그러면서 컴퓨터도 사랑했다. 디지털 허브의 본질은 창조적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을 훌륭한 엔지니어링과 결합하는 데 있다. 언젠가부터 잡스는 제품 프레젠테이션 말미에 간단한 슬라이드 한 장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슬라이드에 담긴 것은 ‘인문학’과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의 거리가 만나는 교차로를 표시한 도로 표지판이었다. 그곳이 바로 그가 머무는 곳이었다. 또한 그것이 바로 그가 일찌감치 디지털 허브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었던 이유다.

둘째, 완벽주의자인 잡스는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 콘텐츠,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제품의 모든 측면을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스크톱 컴퓨터 영역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다른 회사들에 개방하는 마이크로소프트나 IBM의 접근법을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 허브 영역에서는 컴퓨터와 기기, 소프트웨어를 통합해서 통일성을 부여한 애플 같은 회사가 그들보다 유리했다. 즉 애플의 경우, 동일 계열의 컴퓨터로 모바일 기기에 담긴 콘텐츠를 막힘없이 매끄럽게 제어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의미였다.

셋째, 그에게는 단순미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었다. 2001년 이전에도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나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디지털 라이프스타일 제품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기존의 다른 회사 제품들은 모두 복잡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익히는 것이 집에 있는 VCR을 다루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 제품들은 아이팟이나 아이튠스가 아니었다.

넷째, 그는 큰 리스크를 감수하고 새로운 비전에 모든 것을 걸, 그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농장이라도 걸” 의지가 충만했다. 닷컴 붕괴로 말미암아 업계 내의 다른 회사들은 신제품 개발에 투자를 줄였다. “다른 모든 이들이 투자를 줄일 때 우리는 투자를 통해 침체기를 돌파하기로 했지요. 우리는 연구 개발(R&D)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며 많은 것을 고안해 내기로 결정했어요. 침체기가 끝났을 때 경쟁자들보다 한참 앞서 나가기 위해서였지요.” 그의 회상이다. 덕분에 애플은 오늘날의 그 어떤 기업이 이룬 것보다 위대한 지속적 혁신의 10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진화가 시작되다

파이어와이어 :: 미국 애플 컴퓨터 회사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사가 공동으로 제창한 고속 직렬 데이터 버스 규격. 케이블의 전기적 특성이나 접속기의 형상 등 물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결정된 규격으로, 후에 IEEE 1394로 규격화되었다. IEEE 1394는 주로 PC와 AV 기기의 접속을 상정한 통신 규격으로서 디지털 동화상 전송 등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다. ‘Fire-Wire’라는 명칭은 ‘불에 타서 연기가 올라가는 만큼 빠른 속도’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이어와이어 [FireWire]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파이어와이어는 동영상과 같은 디지털 파일을 다른 기기로 옮길 때 사용되는 고속 직렬 포트였다.

 

잡스는 이것을 1999년 10월에 출시될 아이맥 새 버전에 포함하기로 했다. 파이어와이어가 카메라에서 컴퓨터로 동영상을 옮겨 편집하고 배포하는 시스템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실현되려면 아이맥에 훌륭한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이 있어야 했다. 잡스는 어도비(디지털 그래픽 회사로, 출범할 때 잡스의 도움을 받았다.)의 오랜 친구들을 찾아가 윈도 컴퓨터에서 인기를 끌던 어도비 프리미어의 맥 버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어도비의 경영진은 그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여 잡스를 아연케 했다. 그들은 매킨토시 사용자가 너무 적어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했다.

 

어도비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포토샵 같은 다른 인기 프로그램들의 맥 OS X 버전도 만들지 않기로 했다. 디자이너를 비롯해서 이들 프로그램으로 창조적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킨토시의 인기가 높았는데도 말이다. 잡스는 어도비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10년 뒤, 그는 아이패드에서 어도비 플래시를 구동할 수 없도록 조치함으로써 이 회사와 공개적인 전쟁에 들어갔다.

잡스는 어도비를 통해 귀중한 교훈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시스템의 모든 핵심 요소를 엔드투엔드 방식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 “1999년에 어도비 때문에 낭패를 봤을 때 제가 가장 절실히 깨달은 바는 어떤 사업이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를 통제할 수 없다면 뛰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지요. 그러지 않으면 우리 머리통이 날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디지털 허브라는 아이디어는 급속히 구체화되었다. “캠코더를 쓰면서 처음 이 개념을 이해했지요.” 잡스는 말한다. “아이무비를 이용하면 캠코더가 열 배는 더 유용해집니다.” 덕분에 예전 같으면 절대 끝까지 보지 않고 묵혀 두었을 몇 시간짜리 원본 영상을 컴퓨터에서 편집하고, 우아한 오버랩 장면을 만들고, 음악을 삽입하고, 제작 책임자란에 사용자의 이름을 넣은 크레디트 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창의성을 발휘하고, 자신을 표현하고, 감성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 있었다. “PC가 새로운 무언가로 변신하리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 바로 그때였어요.”

잡스는 여기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컴퓨터가 허브 역할을 하면 휴대용 기기는 더욱 단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휴대용 기기에 영상 및 사진 편집 등과 같은 다양한 기능을 담아내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화면이 너무 작아서 각종 기능으로 가득한 메뉴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컴퓨터에서는 그런 기능들을 사용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잡스는 모든 것(각종 기기, 컴퓨터,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 파이어와이어)이 견고하게 통합되었을 때 디지털 허브가 최상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엔드투엔드 솔루션을 제공해야 한다는 믿음이 이전보다 한층 더 깊어졌지요.”

이 깨달음이 특히 중요했던 이유는 그처럼 통합된 접근법을 취하기에 유리한 회사가 오직 애플 한 곳뿐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고, 델과 컴팩은 하드웨어를 만들었고, 소니는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생산했고, 어도비는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전부 다루는 회사는 애플밖에 없었다. 잡스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운영체제 등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는 회사는 우리뿐입니다. 우리는 사용자 경험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지요.”

디지털 허브 전략의 첫 번째 대상은 동영상이었다. 맥 사용자는 파이어와이어를 통해 동영상을 컴퓨터로 옮기고, 아이무비로 그것을 편집하여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는? 아마 영상을 DVD에 구워서 친구들과 함께 텔레비전으로 감상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이브 제조 업체와 장기간에 걸친 공동 작업으로 DVD를 구울 수 있는 드라이브를 탄생시켰지요. 업계 최초로 DVD라이터를 출시한 겁니다.” 잡스의 말이다. 늘 그랬듯, 잡스는 제품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것이 곧 성공의 열쇠였기 때문이다. 애플에서 소프트웨어 설계를 맡고 있는 마이크 에반젤리스트는 소프트웨어 인터페이스의 초기 버전을 잡스에게 보여 주었던 때를 기억한다. 일련의 스크린 샷을 본 잡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커 펜을 집어 들고 화이트보드에 단순한 직사각형을 하나 그렸다. “이게 새 애플리케이션이오.” 잡스가 말했다. “창은 딱 한 개. 동영상 파일을 이 창으로 끌어다 넣고 그런 다음 ‘굽기’ 버튼을 클릭한다. 그걸로 끝. 프로그램을 이렇게 만들란 말이오.” 에반젤리스트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iDVD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잡스는 ‘굽기’ 버튼의 아이콘 디자인에도 기여했다.

 

혁신적 기업의 특징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남보다 먼저 내놓을 뿐만 아니라, 남보다 뒤처졌음을 깨달았을 때 크게 도약할 줄도 안다는 것이다.

 

아이튠스 - 리핑하고, 믹싱하고, 구워라

2000년 무렵에는 CD에 든 음악을 컴퓨터로 추출하거나 냅스터와 같은 파일 공유 서비스를 통해 음악 파일을 다운로드 한 뒤 공CD에 구워서 듣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그해 미국에서 판매된 공CD 수는 3억 2000만 장이었다. 미국 인구가 2억 8100만 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잖은 사람들이 CD 굽기에 푹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애플의 미래를 바꿀 아이팟 프로젝트

디지털 허브 전략의 다음 단계는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잡스는 애플이 아이튠스 소프트웨어와 연동하는 뮤직 플레이어를 개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튠스에 연계하면 기기는 더욱 단순해질 수 있을 터였다. 복잡한 작업은 컴퓨터에 맡기고 간단한 것만 기기에서 처리하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도시바와의 정례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엔지니어들이 그해 6월에 완성될 신제품을 언급했다. 크기가 아주 작은 1.8인치 드라이브로(1달러 은화 크기다.) 용량은 5기가바이트였는데(음악 파일로 치면 약 1000곡을 넣을 수 있다.)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도시바 엔지니어들이 가져온 그 드라이브를 보는 순간 루빈스타인은 즉시 그걸로 뭘 할 수 있을지 깨달았다. 주머니 속에 1000곡의 노래를 넣고 다닌다! 완벽했다.

 

“이것은 애플을 탈바꿈할 프로젝트입니다. 앞으로 10년 후면 애플은 컴퓨터 회사가 아닌 음악 회사로 바뀌어 있을 겁니다.”

 

“바로 그거야!“ - 트랙휠의 탄생

“소니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아요.”

 

‘슬라이드가 있어야 설명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뜻이오.’

 

“저는 부품들을 가지고 다른 것도 조립하며 좀 더 뜸을 들이고 싶었지만 스티브는 즉시 우리가 만든 모형 그대로 하드 드라이브 방식을 택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파델의 회상이다. 그는 잡스의 반응에 다소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저는 필립스에서도 일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이런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수많은 회의가 필요합니다.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을 몇 번이고 거듭하다가 결국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돌아가곤 하지요.”

 

그의 주된 요구 사항은 “간단하게 만들라!”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화면 하나하나를 점검하며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예컨대 노래든 기능이든 클릭 세 번 이내에 찾아지고 실행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클릭은 직관적이어야 했다. 만약 뭔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쉽게 이해가 안 되거나 세 번 이상의 클릭을 필요로 하면 그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잡스의 핵심 아이디어 중 하나는 되도록 아이팟이 아닌 아이튠스에서 기능이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논쟁을 많이 했던 부분인데요, 아이팟을 정말 사용하기 쉽게 만들려면 기기 자체의 기능에는 제한을 둬야 했지요. 그 대신 우리는 컴퓨터에서 구동하는 아이튠스에 많은 기능을 부여했어요. 예를 들면 아이팟에서는 재생 목록을 만들 수 없도록 했습니다. 우선 아이튠스에서 재생 목록을 만든 다음, 그것을 아이팟과 동기화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리오를 비롯한 다른 기기들이 사용하기 골치 아팠던 이유는 너무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기들은 자체적으로 재생 목록 작성 등의 기능을 지원해야 했지요. 컴퓨터의 주크박스 소프트웨어와 통합이 되어 있질 않았으니까요. 반면 아이튠스 소프트웨어와 아이팟을 가지고 있으면 컴퓨터와 기기가 서로 공조하게 만들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기기의 복잡성을 떨쳐 낼 수 있었던 겁니다.

잡스가 요구한, 동료들을 경악케 했던 단순성은 아이팟에서 전원 스위치를 제거한다는 결정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는 이후 애플 기기 대부분에 적용되었다. 잡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전원 스위치는 전혀 필요가 없는 장치다. 그것은 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조화롭지 못하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자동으로 ‘동면’ 상태에 들어갔다가 사용자가 아무 버튼이나 누르면 다시 깨어나도록 만들면 된다. 굳이 기기를 꺼내고 버튼을 눌러서 ‘작별을 고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갑자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며 조화를 이루었다. 1000곡을 담을 수 있는 칩. 1000곡을 손쉽게 탐색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와 스크롤 휠. 1000곡을 10분 내로 옮길 수 있는 파이어와이어 연결. 1000곡을 재생하는 내내 지속되는 배터리까지. 잡스는 회상한다.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지요. ‘이거 정말 멋진 물건이 되겠는데.’ 얼마나 멋진 제품인지 알 수 있었어요. 우리도 개인적으로 꼭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개념 자체도 아름답다고 할 만큼 단순해졌지요. ‘1000곡의 노래를 주머니 속에.’”

 

잡스는 아이팟의 동기화를 한 방향으로만 작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즉 사용자가 컴퓨터의 음악을 아이팟으로 옮길 수는 있지만 아이팟에 든 음악을 컴퓨터로 옮길 수는 없도록 한 것이다. 이는 아이팟에 음악을 채운 다음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마구 복사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조치였다. 또한 잡스는 아이팟의 투명 플라스틱 포장에 다음과 같은 간단한 메시지를 넣기로 했다. “음악은 훔치는 게 아닙니다.(Don’t Steal Music.)”

 

순백색의 특별한 무게감

잡스는 애플이 컴퓨터, 소프트웨어, 디지털 기기가 통합된 시스템을 보유한 덕분에 누리는 또 다른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팟의 판매가 아이맥의 판매를 촉진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곧 애플이 아이맥 광고에 투입하던 7500만 달러를 아이팟 광고 쪽으로 돌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이팟 광고는 다수의 신인 밴드들이 유명해지는 데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밴드가 블랙 아이드 피스였다. 그들의 노래 「헤이 마마(Hey Mama)」가 삽입된 광고는 실루엣 장르의 고전이 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전자 제품 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의론이 일기도 했다. 특히 399달러에 달하는 가격에 대해 그랬다. 블로그 커뮤니티에서는 아이팟이 ‘바보들이 우리의 기기에 가격을 매긴다.(Idiots Price Our Device.)’의 약자라는 농담도 유행했다.

 

애플은 원조 맥이 회사를 미래로 이끈 명확한 제품 비전을 제시한 이래 처음으로 아이팟을 통해 그에 비견될 성과를 거두었다. “만약 누군가가 애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이 제품을 들어 보이겠습니다.” 당시 잡스가 《뉴스위크》의 스티븐 레비에게 한 말이다. 애플의 통합 시스템에 대해 오랫동안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워즈니악도 자신의 철학을 수정했다. “와, 이런 걸 만들 회사는 애플뿐이라는 말이 이제 이해가 갑니다.” 워즈니악은 아이팟의 등장에 열광했다. “결국, 애플의 전체 역사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두 가지가 결합하면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결과를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30. 아이튠스 스토어 - 피리 부는 사나이

불법 다운로드보다 매력적인 합법적 대안을 궁리하다

음반사들이 합의에 성공하여 음악 파일의 복제 방지를 위한 코덱을 표준화했더라면 다수의 온라인 스토어가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애플이 아이튠스 스토어를 만들어 음악 파일의 온라인 판매를 지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소니는 2002년 1월의 쿠퍼티노 회의를 마친 뒤 논의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함으로써 그러한 기회를 잡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소니는 자사의 독점적 포맷을 고집했다. 거기서 발생하는 로열티를 노렸던 것이다.

 

소니는 애플 대신 유니버설과 손잡고 ‘프레스플레이’라는 가입형 서비스를 개발했다. 한편 AOL 타임 워너, 베르텔스만, EMI는 리얼네트웍스와 협력하여 ‘뮤직넷’을 만들었다. 양자 모두 자신이 보유한 음악을 상대방이 서비스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각자 실제로 제공하는 것은 출시된 음악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또한 양쪽 다 가입형 서비스였던지라 고객이 스트리밍되는 음악을 들을 수는 있어도 음악 파일을 소유할 수는 없었으며, 가입 기간이 끝나면 음악에 접근할 권한도 사라졌다. 그들의 서비스에는 복잡한 제약이 많았고 인터페이스 역시 투박했다. 실제로 그들은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지 못한 채 한데 묶여 《PC 월드》에서 선정한 ‘역대 최악의 기술 제품 25선’에 9위로 선정되었다. 이 잡지는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들 서비스가 제공하는 놀랄 만큼 멍청한 기능들은 음반사들이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음악을 훔치는 사람들의 80퍼센트는 그런 행동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단지 합법적 대안이 없어서 그럴 뿐이지요.”

 

음반사들은 앨범 단위가 아닌 곡 단위로 개별 판매가 이루어진다는 점과 가격 모델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잡스는 아이튠스 스토어가 시장 점유율 5퍼센트에 불과한 매킨토시에서만 서비스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이 큰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도 아이디어를 시험해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애플의 낮은 시장 점유율을 이점으로 내세웠어요. 아이튠스 스토어가 실패로 끝나더라도 업계 전체가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잡스는 디지털 음악을 곡당 99센트에 판매하자고 제안했다. 소비자들이 선뜻 구입에 나설 만한 가격이었다. 음반사의 몫은 70센트였다. 잡스는 이 방식이 음반사가 선호하는 월 단위 가입형 모델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노래를 빌리기보다는 ‘소유’하고 싶어 했다.

 

또한 잡스는 앨범 전체가 아닌, 한 곡 한 곡을 개별적으로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음반사와 잡스 사이의 가장 큰 갈등 요인이 되었다. 그동안 음반사는 2~3개의 멋진 곡과 10여 개의 그저 그런 곡으로 앨범을 채워 돈을 벌었다. 소비자가 원하는 곡을 들으려면 그 곡이 들어 있는 앨범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앨범을 해체하려는 잡스의 계획에 몇몇 뮤지션이 아티스트적 입장에서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앨범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는 겁니다. 각각의 곡들이 서로를 지원하도록 앨범을 꾸민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제가 음악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에는 현실적 타당성이 부족했다. “불법 복제와 온라인 다운로드로 말미암아 이미 앨범은 해체된 상태였지요. 음악을 개별 곡 단위로 팔지 않는 한 불법 복제와 싸우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잡스의 회상이다.

 

음악 산업의 역사적 전환을 이끌다

소니는 결코 따르지 말아야 할 선례를 애플에 보여 주었다. 소니에는 세련된 제품들을 생산하던 소비자 가전 사업부와 밥 딜런 등의 인기 아티스트들을 보유한 음악 사업 부문이 있었다. 하지만 각자 자기 부문의 이익만 지키려 들다 보니 회사가 하나의 통합체로서 역량을 집중하여 엔드투엔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었다.

 

랙은 소니가 대형 음반사 가운데 애플을 거부하는 유일한 회사이며, 다른 음반사의 지지 없이는 협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잡스는 애플의 마케팅 영향력이 발휘하는 매력과 듣기 좋은 말을 이용해 다른 음반사들을 자기편으로 삼았다. “업계 전체가 단결했더라면 로열티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필요로 하던 이중 수입원을 확보했겠지요.” 랙은 말했다. “우리는 분명 아이팟의 판매에 기여하고 있었어요. 로열티를 받는 것이 공정한 일이었지요.” 그것은 분명 잡스가 구상한 엔드투엔드 전략의 장점 중 하나였다.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음악을 판매하면 아이팟의 판매가 늘고 이는 다시 매킨토시의 판매로 이어질 터였다. 랙을 더욱 화나게 한 것은 소니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소니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콘텐츠 부문 간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실패한 상태였다.

 

“저는 컴퓨터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에게도 계속 그렇게 말했지요. 하지만 그의 얘기는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어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지요. 잠시 후 저는 컴퓨터가 아닌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열정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지요.”

 

잡스는 무대를 천천히 거닐며 냅스터가 “인터넷이 음악 전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냅스터에서 파생된 카자가 사람들에게 노래를 공짜로 제공했음을 지적했다. 이들과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그는 이들 무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따르는 부정적 측면을 설명했다. 이들 서비스는 신뢰도가 낮았고 파일의 품질이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지원되는 파일 중 다수는 일곱 살짜리 애들이 인코딩한 것입니다. 파일이 제대로 만들어졌겠습니까?” 더구나 그 파일들은 미리 들어 볼 수도 없었고 앨범 커버도 없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러한 다운로드가 도둑질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쁜 업보를 쌓아 좋을 일은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불법 복제 사이트가 급증한 이유는 무엇인가? 잡스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죄수복을 입은 수감자의 모습이 담긴 슬라이드를 보여 주며 프레스플레이와 뮤직넷 같은 가입형 서비스가 “사용자를 범죄자 취급”한다고 했다. 이어서 밥 딜런의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그는 “음반사들과 많은 협상을 벌인 결과 그들도 우리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킬 뭔가를 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아이튠스 스토어는 20만 곡을 보유한 상태에서 서비스를 시작할 것이며 곡을 날마다 늘려 갈 것이라 했다. 아이튠스 스토어 사용자는 원하는 노래를 소유하고, CD에 굽고, 신뢰할 수 있는 고품질 파일을 다운로드 하고, 구매하기 전에 미리 노래를 들어 보고, 아이무비와 iDVD를 이용해 ‘인생의 사운드트랙’을 만들 수 있었다. 가격은? 겨우 99센트로, 스타벅스 라떼 가격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아이튠스 스토어가 가치 있는 이유는? 카자에서 제대로 된 음악을 구하려면 15분이 걸리지만 아이튠스에서는 1분이면 충분했다. 그는 잠깐 계산을 하더니, 4달러도 채 안 되는 돈을 아끼기 위해 한 시간을 들이는 것은 “최소 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이튠스를 이용하면 여러분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한 업보를 쌓는 것이지요.”

그 말에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친 것은 앞줄에 앉은 음반사 대표들이었다. 그 자리에는 더그 모리스와 언제나처럼 야구 모자를 쓴 지미 아이오빈, 워너 뮤직 사람들이 참석해 있었다. 아이튠스 스토어 담당자 에디 큐는 6개월 뒤면 100만 곡이 판매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이튠스 스토어는 단 ‘6일’ 만에 100만 곡을 판매했다. 잡스는 선언했다. “아이튠스 스토어는 음악 산업의 전환점으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윈도용 아이튠스 출시

아이팟을 윈도 PC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애플이 윈도 PC 버전의 아이튠스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잡스는 언제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이팟이 제공하는 사용자 경험은 컴퓨터에 설치된 아이튠스 소프트웨어와 아이팟 사이에 완벽한 동기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이었다. 실러는 반대했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윈도 소프트웨어를 만들지 않으니까요.” 그는 회상했다. “하지만 스티브는 ‘일을 하려거든 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사용자 경험의 커다란 부분을 다른 누군가가 좌우하도록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이튠스를 윈도에 이식한다는 것은 곧 모든 음반사와 다시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초 음반사들이 애플과의 거래에 동의했던 것은 아이튠스 스토어가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소수 소비자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옥이 얼어붙었다.”(이글스가 해체하면서 “지옥이 얼어붙어야 재결합할 것.”이라 했던 데서 유래한 표현으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 ‘해가 서쪽에서 떴다.’와 비슷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옮긴이)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6년 11월이 되어서야 마침내 아이팟에 대한 저 나름의 대답을 내놓았다. 제품의 이름은 ‘준’이었다. 아이팟보다 다소 투박하긴 했지만 외관은 비슷했다. 출시된 지 2년이 지난 뒤에도 이 제품의 시장 점유율은 5퍼센트가 안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동기부여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합니다. 준이 시시한 이유는 마이크로소프트 사람들이 음악이나 예술을 우리처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한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음악을 사랑해서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아이팟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위해, 또는 절친한 친구나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한다면 결코 게으름을 피우며 대충대충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든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는 뭔가를 할 때는 특별히 더 노력하거나, 주말에 일을 더 하거나, 현재 상태에 과감히 도전하려 애쓰지 않겠지요.

 

자기 잠식을 두려워 말라

소니는 워크맨을 만들어서 휴대용 음악 시장을 개척했고, 거대 음반사를 보유했으며, 오래전부터 아름다운 소비자 기기를 제조해 왔다. 소니는 잡스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기기, 콘텐츠 판매 통합 전략에 맞서는 데 필요한 모든 강점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왜 실패했을까?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AOL 타임 워너와 마찬가지로 소니도 독자적 손익 구조를 갖춘 다수의 사업 부문(이 말 자체가 불길하다.(부문을 뜻하는 단어 ‘division’에는 ‘분열’이라는 뜻도 있다.—옮긴이)으로 조직된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각 사업 부문이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라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구조의 기업에서 사업 부문 간의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기란 대개의 경우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잡스는 결코 애플에 준(準)자치적 사업 부문을 편성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부문을 가까이에서 관리했으며 그들이 결속력 있고 유연한, 단일 손익 구조를 갖는 하나의 조직으로서 일하도록 했다. “애플에는 독자적으로 손익계산을 하는 사업 부문이 없습니다.” 팀 쿡은 말한다. “우리는 회사 전체적으로 손익 계정을 하나만 운용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소니는 자기 잠식 효과(기능이나 디자인이 더 뛰어난 후속 제품이 나오면서 같은 기업이 먼저 내놓은 유사 제품의 매출을 잠식하는 현상.—옮긴이)를 두려워했다. 뮤직 플레이어와 다운로드 서비스를 개발해 디지털 음악 파일의 공유를 손쉽게 만들면 음반 부문의 매출에 피해를 안길 수도 있었다. 이 점 때문에 소니는 망설였다. 잡스의 사업 원칙 중 하나는 결코 자기 잠식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잡아먹을 겁니다.” 아이폰이 아이팟의 매출을 잠식하고, 아이패드가 랩톱의 매출을 잠식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잡스가 계획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소프트웨어 공학의 한 분야로,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을 역추적해 처음의 문서나 설계 기법 등의 자료를 얻어 내는 일을 말한다.—옮긴이)

 

아이팟 미니가 출시되고 18개월 만에,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 시장에서 애플의 점유율은 31퍼센트에서 74퍼센트로 치솟았다.

 

루빈스타인과 파델은 작고 저렴한 플래시 드라이브 방식의 제품 개발을 진행하며 화면을 더 작게 만드는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잡스가 와서 놀라운 제안을 했다. 화면을 제거하라는 얘기였다. “뭐라고요?” 파델이 물었다. “화면을 아예 없애자고요.” 잡스가 말했다. 파델은 그러면 사용자들이 어떻게 노래를 찾느냐고 물었다. 어떤 사용자들은 노래를 찾을 필요를 못 느끼리라는 게 잡스의 생각이었다. 노래를 무작위로 재생하면 그만이었다. 기기 안에 든 노래는 어쨌든 전부 사용자가 고른 것이었다. 당장 듣고 싶지 않은 노래가 나올 때 다음 곡으로 넘어가게 하는 버튼만 있으면 화면이 불필요했다. “불확실성을 수용하라.” 이것이 아이팟 셔플의 광고 문구였다.

 

2007년 1월, 아이팟 매출로 발생한 수익이 애플 전체 수입의 절반에 달했다.

 

2003년 4월 첫 등장 이후 6일 만에 100만 곡을 판매한 이 스토어는 결국 그해에 7000만 곡을 판매했다. 2006년 2월에는 마침내 10억 번째 곡이 판매되었다. 미시간 주 웨스트블룸필드에 사는 알렉스 오스트롭스키라는 16세 소년이 다운로드한 콜드플레이의 「스피드 오브 사운드(Speed of Sound)」라는 곡이었다. 잡스는 그에게 축하 전화를 걸고 아이팟 열 대와 아이맥 한 대, 1만 달러 상당의 아이튠스 상품권을 수여했다. 100억 번째로 판매된 곡은 2010년 2월, 조지아 주 우드스톡에 사는 루이 설서라는 71세 남성이 다운로드 한, 조니 캐시의 「게스 싱스 해픈 댓 웨이(Guess Things Happen That Way)」였다.

아이튠스 스토어의 성공으로 애플이 얻은 이득 가운데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었다. 2011년이 되면서 중요한 새 비즈니스가 부상했다. 사람들이 맡긴 온라인 신원 정보 및 결제 정보를 바탕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었다. 애플은 아마존과 비자, 페이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그리고 다른 몇몇 서비스 업체와 협력하여 이메일 주소 및 신용카드 정보를 의탁한 고객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쇼핑의 안전성과 편리함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 데이터베이스 덕분에 애플은 자사 온라인 스토어를 통해 잡지 구독권 등을 판매할 수 있었다. 즉 잡지사가 아닌 애플이 독자와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아이튠스 스토어가 구독권과 동영상, 앱까지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데이터베이스의 규모도 확대되어 2011년 6월 무렵에는 2억 2500만 사용자의 정보가 축적되었다. 이로써 애플은 차세대 디지털 상거래에 대비하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31. 뮤직 맨 - 그의 인생이 담긴 사운드트랙

당신의 아이팟에는……?

“삶이 저 태평스러운 거리처럼 편안해 보일 때, 당신의 집 문간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요.”

 

나는 그에게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중 어느 쪽이 좋으냐는 진부한 질문을 던졌다. “금고에 불이 나서 마스터 테이프를 단 한 개만 꺼낼 수 있다면 저는 비틀스를 택할 겁니다. 정말 어려운 문제는 비틀스와 딜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지요. 롤링 스톤스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딜런이나 비틀스가 될 수는 없어요.” 잡스는 자라면서 이들 모두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우리는 진정 행운아라는 평을 덧붙였다.

 

밥 딜런

그는 자신의 인생과 곡을 쓰는 일에 관해 들려줬어요. 이런 말을 했지요. “음악이 그냥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내가 곡을 반드시 써야만 한다, 뭐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젠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나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곡을 쓰지 못해요.”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가 특유의 쉰 듯한 목소리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그래도 아직 그 노래들을 부를 수는 있지요.”

 

과거에는 광고에 유명인을 출연시키려면 그들에게 거액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2006년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거물급 아티스트들이 아이팟 광고에 출연하길 ‘먼저 원했던’ 것이다. 아이팟 광고 출연은 성공이 보장되는 길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출연료가 아닌, 애플이 뮤지션에게 제공하는 기회에 대해 강조해야 합니다.

 

이 광고는 아이팟 마케팅의 후광 효과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덕분에 딜런은 젊은 팬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팟이 애플 컴퓨터에 젊은 고객을 끌어다 준 것처럼 말이다. 광고에 힘입어 딜런의 새 앨범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아웃캐스트를 밀어내고 발매 첫 주에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딜런이 1위를 한 것은 1976년에 「디자이어(Desire)」를 발표한 이후 30년 만에 처음이었다. 《애드 에이지》는 딜런을 새롭게 띄운 애플의 역할을 크게 조명했다. “아이튠스 광고는 대형 브랜드가 유명인에게 거액의 출연료를 주고 그 스타의 가치를 이용해 제품을 홍보하는 지극히 평범한 광고와 다르다. 이 광고는 기존 공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전지전능한 애플 브랜드는 딜런이 젊은 청중에 다가서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가 포드 정부 시절 이후로는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도록 도왔다.”

 

비틀스

처음 갈등이 시작된 것은 애플 컴퓨터가 설립된 직후인 1978년으로, 애플 코퍼레이션이 비틀스의 이전 음반사 이름이 애플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상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이 소송은 3년 뒤 애플 컴퓨터가 애플 코퍼레이션에 8만 달러를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합의문에는 “비틀스는 앞으로 컴퓨터 용품을 전혀 제조하지 않을 것이며, 애플은 음악과 관련된 어떤 제품도 판매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당시로서는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이는 조항도 들어갔다. 비틀스는 합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들 중 누구도 컴퓨터를 만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플은 결국 음악 사업에 손을 댔다. 맥에 음악 파일 재생 기능이 생긴 1991년, 그리고 아이튠스 스토어가 출범한 2003년에 애플은 재차 고소를 당했다. 비틀스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변호사 한 명은, 잡스는 지켜야 할 법적 합의는 생각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간의 법적 문제는 2007년에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마침내 타결되었다. 애플은 세계 어디서든 그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얻는 대가로 애플 코퍼레이션에 5억 달러를 지급하되, 비틀스가 음반이나 비즈니스에 애플 코퍼레이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려면 다시 애플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합의한 것이다.

 

보노

U2는 오랫동안 광고 출연을 거부해 왔다. 2300만 달러짜리 제안도 일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이팟 광고에 무료로(또는 적어도 서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거래 조건으로) 출연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는 아티스트에게 로열티를 지급하는 선례가 생겼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잡스는 새로운 텔레비전 광고와 특별한 아이팟을 공개하기 위해 새너제이의 고급 극장을 빌렸다. 보노와 에지가 잡스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다. U2의 신보는 발매 첫 주에 84만 장이 판매되었고 《빌보드》 차트 1위에 등극했다. 보노는 언론에, 출연료를 받지 않고 광고에 출연한 이유는 “U2도 이 광고를 통해 애플 못지않게 큰 가치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미 아이오빈은 광고 덕분에 U2가 “젊은 팬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주목할 점은, 어떤 록 밴드든 컴퓨터 및 전자 기기 회사와의 제휴가 젊은 층에 어필할 세련된 이미지를 확보하는 최선의 길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술의 임무는 추함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프로덕트 레드(Product Red) 캠페인 :: '레드(RED)' 재단은 에이즈 퇴치 운동의 일환으로 프로덕트 레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기업이 프로덕트 레드 캠페인에 참여해, 레드의 이름을 붙인 빨간색 제품을 내놓으면 판매 수익금 일부가 에이즈 퇴치 운동 기금으로 쓰이게 된다. 애플은 이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로덕트 레드 - 에이즈 퇴치하는 영리한 기부 (용어로 보는 IT)

 

요요마

“당신의 연주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군요. 인간 혼자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니까요.”

 

 

 

32. 픽사의 친구들 - ……그리고 적들

벅스 라이프

「벅스 라이프」는 미국에서 1억 6300만 달러, 세계적으로 3억 6300만 달러로 「개미」의 두 배 수익을 기록했다.(「이집트 왕자」도 물리쳤다.)

 

“스티브 자신의 영화“

1999년 11월에 나온 「토이 스토리 2」는 미국에서 2억 4600만 달러, 세계적으로 4억 85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훨씬 더 크게 흥행했다.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혹은 어쩌면 그것의 고립 가능성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잡스는 직접적인 만남을 열렬히 신봉했다. 그는 말했다. “이런 네트워크 시대에는 이메일이나 아이챗을 통해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창의성은 우연한 만남이나 무작위적인 논의에서 나오는 겁니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 일의 진행 상황을 묻고 진심 어린 반응을 보여 주다 보면 곧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들로 요리를 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는 픽사 건물이 우연한 만남과 임의적인 협력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설계되도록 했다. “건물이 그런 것을 독려하지 않으면 뜻밖의 발견으로 야기되는 혁신과 마법을 상당 부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나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서로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들과 중앙 안뜰에서 섞이도록 건물을 설계했지요.” 현관문들과 주요 계단들 및 복도들이 모두 안뜰로 이어졌고 안뜰에는 카페와 우편함들이 설치되었으며 회의실 창문들은 안뜰을 내려다보았고 600석짜리 극장과 그보다 좀 더 작은 상영관 두 개 모두 안뜰로 출입구를 냈다. 래시터는 회상한다. “스티브의 이론은 첫날부터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몇 달 동안 못 만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마주쳤거든요. 그렇게 협력과 창의성을 독려하는 건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잡스는 심지어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을 커다랗게 하나씩만 만들어 역시 안뜰과 연결되게 하라고 지시했다. 픽사의 본부장 팸 커윈이 회상한다. “아주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우리 중 몇몇은 너무 심하다고 느꼈죠. 한 임산부는 10분이나 걸어서 화장실에 갈 수는 없다고 반발했고 그래서 큰 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래시터가 잡스의 뜻을 거스른 몇 안 되는 경우들 가운데 하나였다. 결국 그들은 타협에 도달했다. 건물 두 개 층 모두 안뜰을 기준으로 양측에 남녀 화장실을 한 쌍씩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위대한 두 회사

픽사는 디즈니와의 계약에 따라 네 번째 영화 「몬스터 주식회사」를 제작한 상태였다.(이 영화는 결국 세계적으로 총 5억 25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픽사 사상 최대의 성공을 기록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중 최악은 디즈니가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픽사는 연이어 훌륭한 작품들을 내놓으면서 디즈니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쇄신해 주었다는 점이었지요. 디즈니 CEO라면 픽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궁금해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20년간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가 픽사를 방문한 시간은 다 합쳐 봐야 대략 두 시간 반 정도입니다. 그것도 축하 연설을 하러 온 거지요. 그는 절대 궁금해하지 않았어요. 놀라웠지요. 호기심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니모를 찾아서」는 픽사의 (그리고 디즈니의) 역대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 이는 그때까지 애니메이션 영화 사상 최고의 성공작으로 꼽히던 「라이온 킹」도 쉽게 물리쳤다. 미국 내 수익은 3억 4000만 달러, 세계적으로는 8억 68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또한 2010년까지 DVD 판매량이 4000만 장에 달하면서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DVD가 되었고, 디즈니 테마파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 기구 몇 개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풍부한 질감 표현과 섬세함, 깊은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예술 작품으로서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상을 받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이 사라지면 우리 회사도 사라집니다. 히트 애니메이션 한 편은 커다란 파도가 되고 그에 따른 잔물결이 우리 사업의 각 부분으로, 즉 퍼레이드 캐릭터에서부터 음악과 테마파크, 비디오게임, 텔레비전, 인터넷, 소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으로 흘러갑니다. 파도를 일으키는 게 없으면 우리 회사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체결한 거래는 디즈니가 픽사를 주식으로 74억 달러에 인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잡스는 디즈니의 주식을 대략 7퍼센트 보유하게 되며 디즈니의 최대 주주가 되는 것이었다. 아이스너의 1.7퍼센트, 로이 디즈니의 1퍼센트와 비교할 때 엄청난 지분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픽사 밑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합쳐진 기업은 래시터와 캣멀이 함께 운영을 맡을 예정이었다. 픽사는 그 자체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그 스튜디오와 본사는 에머리빌에 계속 남으며 심지어는 이메일 도메인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술과 기술을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얘기했다. “애플에서 그렇듯이 그것은 우리 문화의 핵심입니다.”

 

“나의 목표에는 언제나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위대한 회사를 세우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그것을 해냈지요. 그리고 그때 우리가 그 합병에 응함으로써 우리는 픽사를 위대한 회사로 유지하는 동시에 디즈니 역시 위대한 회사로 남도록 도왔습니다.”

 

 

 

33. 21세기 맥 - 애플을 차별화하는 것

조개, 아이스 큐브, 해바라기

“사려 깊은 외관을 가진 무언가를 보면 우린 이렇게 말하지요. ‘와, 틀림없이 내부도 정말 사려 깊을 거야.’ 우린 많은 것을 생략함으로써,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진보합니다.”

 

애플의 매킨토시 디자인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돌아보면 지나치게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컴퓨터 제조사들은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 컴퓨터는 혁신이 기대되는 산업인데도 저렴하게 디자인된 따분한 상자 모양이 업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잡스와 연봉 1달러

언더워터(시세가 하락하여 스톡옵션의 매입 가격이 시가보다 높아진 상황.—옮긴이)

 

백데이팅(옵션과 관련해 주가가 낮은 시점으로 일자를 소급 적용해 부당 이익을 취하는 것.—옮긴이)

 

2003년 3월이 되자 심지어 새로 받은 옵션도 큰 폭으로 언더워터에 빠져 잡스는 옵션 일체를 7500만 달러 상당의 주식 무조건 증여로 전환했다. 이렇게 되면 잡스는 1997년 복귀한 이후부터 2006년 부여 종료 시점까지 매년 약 830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SEC :: 1934년 미국 증권거래법 제4조에 의해 증권시장을 규제하고 일반 투자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창립된 대통령 직속의 독립된 증권감독관청이다. 위원은 상원의 의견과 권고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며, 의장 아래 비서·심문검사관 및 의견조사실이 있다. 사무기구는 위원회 산하에 기업재무국, 시장규제국 등 11개 부·국이 있다. 지방조직은 9개 지방국이 있으며 그 밑에 8개 지국이 있다.
주요업무는 1933년 증권법, 1934년 증권거래법을 중심으로 하는 6개의 증권 관련법의 실시 및 감독, 기업공시의 철저한 이행, 증권거래소 증권업자 투자고문의 규제 등 광범위하며 준사법적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 1985년부터 증권시장의 국제화에 부응하여 각국 증권거래소 및 증권회사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미국 증권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지향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SEC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34. 1라운드 - 메멘토 모리

“육체는 영혼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스티브는 세상이 자신이 의도한 방식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그게 효과가 없을 때도 있지요. 현실은 가혹하거든요.” 맹렬히 초점을 맞추는 그의 경이로운 능력 이면에는 자신이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걸러 내고자 하는 무시무시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비약적 발전들 가운데 다수로 이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연설을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제가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강의는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지만 이야기는 누구나 좋아한다. 그것이 잡스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는 이렇게 연설문을 시작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인생 이야기 세 편을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그뿐입니다.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냥 세 가지 이야기만 들려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리드 대학교를 중퇴한 이야기였다. “저는 더 이상 재미없는 필수 과목들을 듣지 않고 훨씬 더 흥미로워 보이는 수업들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는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득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성공한 사람이라는 무거움이 다시 모든 것에 대해 확신이 없는 초보자라는 가벼움으로 대체되었지요.” 잡스의 머리 위에서 그에게 ‘모든 전자 폐기물을 재활용하라.’ 하고 촉구하는 현수막을 단 비행기가 맴돌고 있었는데도 학생들은 이례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매료시킨 것은 그의 세 번째 이야기였다. 그것은 암 선고와 그것이 가져다준 깨달음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은 인생의 중대한 선택들을 도운 그 모든 도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외부의 기대와 자부심, 망신 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퇴색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더군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아까운 게 많다고 생각하는 덫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몸입니다. 가슴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유럽 재건 계획을 선언한 1947년 조지 마셜의 하버드 연설처럼 더 중요한 연설들은 있을지 몰라도 이보다 더 우아한 연설은 없을 것이다.

 

쉰 살의 사자

쿠스쿠스(밀을 쪄서 고기와 야채 등을 곁들인 북아프리카 요리.—옮긴이)

 

자유로운 담화의 주요 발생지는 월요일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서너 시간씩 이어지는 중역 회의였다. 쿡이 10분 동안 차트를 보여 주며 전반적인 사업 상황을 설명하고 나면 회사의 제품 각각에 대해 광범위한 토론이 이어졌다. 초점은 언제나 미래였다. 각 제품이 앞으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며 어떤 제품이 새롭게 개발되어야 하는가? 잡스는 이 미팅을 활용하여 애플의 모두가 사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화했다. 이를 통해 통제력을 중앙에 모으고(이는 훌륭한 애플 제품만큼이나 회사가 철저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창출해 주었다.) 통제력이 분산된 기업들이 겪는 부문 간 갈등을 예방할 수 있었다.

잡스는 또한 이 회의를 이용해 초점을 강화했다. 로버트 프리들랜드의 농장에서 그의 임무는 사과나무들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가지를 쳐 주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그의 가지치기는 애플로 이어져 계속되는 셈이었다. 잡스는 여러 그룹이 제각기 마케팅을 고려해 제품 라인을 늘리도록 허용하거나 수백 가지 아이디어들이 꽃을 피우도록 방치하기보다는 애플 전체가 한 번에 두세 가지 우선순위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장했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 승리한 장군이 거리를 행진할 때면 때때로 그에게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를 반복해서 말해 주는 역할을 전담하는 하인이 뒤에 따라붙었다고 한다.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영웅으로 하여금 주변을 꾸준히 반추하고 겸손한 태도를 갖도록 도운 것이다.

 

스탠퍼드 연설에서 암시했듯이 그의 병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전속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지옥 불에 빠진 사람한테 얼음물 한 잔 끼얹어 준 셈이지요.”

 

각각 서로를 보며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을 받고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난 스티브의 미의식을 가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겠습니다.” 게이츠가 대답했다. 불안한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10년 전에 잡스가, 마이크로소프트가 싫은 것은 미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 화제가 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이츠는 진심이라고 했다.

 

그는 엔드투엔드 방식의 통합적인 제품을 구축하는 애플의 기술과, 자사 소프트웨어에 대해 경쟁 하드웨어 제조사들에게 라이선스를 제공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개방성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설명했다. 음악 시장에서는 (아이튠스/아이팟 패키지가 보여 주듯이) 통합적인 접근 방식이 더 나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PC 시장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분리된 접근 방식이 더 성공적이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러고는 다소 오만하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휴대전화 시장에서는 어떤 접근 방식이 더 나을까요?”

 

 

 

35. 아이폰 - 혁신 제품 세 가지를 하나로

아이팟으로 통화를?

2005년 무렵 아이팟의 매출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05년 판매량은 무려 2000만 대로, 전년도의 4배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아이팟은 애플의 매출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며 2005년 수익의 45퍼센트를 책임졌고, 세련된 회사 이미지를 부각해 맥의 판매를 가속화했다.  

 

“우리의 밥그릇을 빼앗을 수 있는 기기는 바로 휴대전화예요.” 그는 이사들에게 휴대전화마다 카메라가 장착되어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휴대전화 제조업자들이 전화기에 뮤직 플레이어를 장착하기 시작한다면 아이팟도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휴대전화는 누구나 갖고 다니는 거니까 아이팟이 쓸모없는 기기가 돼 버릴 수도 있다고요.”

 

그는 모토로라의 CEO로 새로 취임한 에드 잰더와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디지털카메라 겸용 휴대전화인 모토로라의 인기 모델 ‘레이저’에 친구를 만들어 주자며 그와 논의를 시작했다. 여기에 아이팟을 탑재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록커’였다. 

 

《와이어드》는 2005년 11월 표지에서 이렇게 비꼬았다. “이것이 미래의 전화기라고?”

 

“자신이 쓰고 싶은 물건을 만든다는 것, 그것이 최고의 동기부여라 할 수 있지요.”

 

2005년 휴대전화는 초등학생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8억 2500만 대 이상이 판매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제품이 허접쓰레기였으므로 과거에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 시장이 그랬듯 최신 고급 제품이 들어갈 여지가 충분했다.

 

처음에 그들은 아이팟을 변형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트랙휠을 이용해 전화기의 기능을 훑어보고 (자판 없이) 숫자를 입력하는 방식을 구상해 보았다. 하지만 그리 적절하지 않았다.

 

당시 애플에서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비밀리에 태블릿 컴퓨터가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5년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태블릿 컴퓨터 관련 아이디어들이 휴대전화 기획 과정으로 흘러 들어갔다. 다시 말해 아이패드 관련 아이디어가 사실상 아이폰이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오히려 아이폰의 탄생을 돕기까지 했다는 얘기다.

 

“이게 바로 미래야!”

“태블릿 컴퓨터를 만듭시다. 단, 키보드나 스타일러스가 딸려 있어선 안 됩니다.”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터치해 입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입력을 처리할 수 있는 이른바 ‘멀티터치’ 기능이 스크린에 갖춰져야 했다. “멀티터치, 터치 감지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 있겠지요?“ 그가 물었다. 약 6개월이 걸린 끝에 결국 그들은 조악하게나마 제대로 작동하는 원형을 고안했다. 잡스는 그것을 애플의 또 다른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에게 건넸고, 한 달 후 그 사람은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가로지르면 이미지가 마치 물리적인 사물처럼 움직이는 관성 스크롤 아이디어를 갖고 왔다. “완전히 푹 빠졌지요.” 잡스의 회상이다.

조니 아이브는 멀티터치 개발 과정을 다르게 기억한다. 그의 디자인 팀이 이미 애플의 맥북 프로 트랙패드를 위해 멀티터치 입력 방식을 작업하고 있었으며 그 기능을 컴퓨터 스크린으로 옮기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었다고 한다.

 

잡스는 곧 그것이 고민 중이던 휴대전화용 인터페이스 제작에 따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태블릿 컴퓨터의 개발을 보류하고 일단 멀티터치 인터페이스를 휴대전화 스크린 크기에 맞게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이 프로젝트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화기에서 작동되면 다시 돌아가서 태블릿 컴퓨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핑거웍스라는 델라웨어의 작은 회사가 이미 일련의 멀티터치 트랙패드를 만들고 있었다. 델라웨어 대학교의 두 학자 존 일라이어스와 웨인 웨스터먼이 창업한 핑거웍스는 멀티터치 감지 능력을 가진 태블릿 컴퓨터를 몇 가지 개발했으며 꼬집기나 밀기 등의 다양한 손가락 제스처를 유용한 기능으로 전환하는 방법에 대해 특허를 취득한 상태였다. 2005년 초 애플은 핑거웍스와 그들이 소유한 모든 특허 그리고 두 창업자까지 비밀리에 인수했다. 핑거웍스는 자사 제품의 판매를 중단하고 애플의 이름으로 새로이 특허를 출원하기 시작했다.

참석자 중 두 명은 블랙베리의 인기를 고려하면 키보드를 장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잡스는 거부했다. 물리적인 키보드는 스크린이 차지할 공간의 일부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으며 터치스크린 키보드처럼 유동성과 적응성이 높지 않을 거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말했다. “하드웨어 키보드가 쉬운 해결책처럼 보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러면 제약이 많아집니다. 키보드를 소프트웨어로 스크린에 넣으면 또 어떤 혁신들을 구현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요. 거기에 승부를 걸어 봅시다. 제대로 돌아가게 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 결과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싶으면 숫자판이 뜨고, 글을 입력하고 싶으면 글자판이 뜨며, 특정한 기능에 필요한 버튼들이 나타났다가 동영상을 볼 때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기기가 탄생했다. 소프트웨어로 하드웨어를 대체함으로써 유동적이고 융통성 있는 인터페이스가 가능해진 것이다.

 

지금은 간단해 보이는 많은 기능들이 그러한 창의적인 브레인스토밍의 결과였다. 예를 들어, 그들은 주머니에 넣은 전화기가 어쩌다 잘못 눌려 음악을 재생하거나 임의로 전화를 걸면 어쩌나 걱정했다. 잡스는 천성적으로 전원 버튼을 싫어했다. “세련되지 못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한 해결책이 바로 ‘밀어서 잠금 해제’였다. 스크린에 휴지 상태의 기기를 활성화하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슬라이더를 설치한 것이다. 또 하나의 혁신은 사용자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음을 감지하여 귓불로 무심코 다른 기능을 활성화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장치였다. 물론 아이콘은 모두 그가 제일 좋아하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빌 앳킨슨으로 하여금 첫 매킨토시 소프트웨어에 넣게 한 그 디자인, 바로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었다.

팀원들은 잡스와 함께 세부 사항 하나하나에 몰두해서 회의를 거듭하며 다른 휴대전화들이 복잡하게 만든 것들을 단순화하는 방법을 파악해 나갔다. 전화를 대기시키거나 다자간 통화를 돕는 바를 추가하고, 이메일을 쉽게 검색하는 방법을 찾고, 수평으로 화면을 넘겨 여러 가지 앱을 이용할 수 있도록 아이콘들을 만들었다.(이 모든 것을 하드웨어에 장착된 키보드 대신 스크린에 띄운 시각적 이미지로 이용할 수 있어 더욱 간편했다.)

 

얇은 것이 아름답다

잡스의 완벽주의뿐 아니라 통제 욕구까지 반영된 한 가지 측면은 바로 기기를 완전히 봉해 버린 점이었다. 아이폰의 케이스는 심지어 배터리를 바꿔 끼우기 위해 여는 것도 불가능했다. 1984년 원조 매킨토시가 그랬듯 잡스는 사람들이 그것을 열고 속을 뒤적거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실제로 애플은 2011년에 외부 수리점들이 아이폰 4를 열어 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은 나사들을 시중의 드라이버로는 열 수 없는, 즉 임의 변경을 가할 수 없는 오각 꽃 모양의 펜타로브 나사로 교체했다. 배터리를 교체하지 않게 함으로써 아이폰은 훨씬 더 얇아질 수 있었다.

 

'예수 폰'

그로스먼은 사실상 아이폰이 새로운 기능을 많이 창조한 것은 아니며 다만 기존의 기능들을 훨씬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기사를 썼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대개 도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자신을 탓한다. 자신이 너무 멍청하거나 사용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손가락이 너무 굵어서 그런 거라고 말이다. (중략) 도구가 고장 나면 우리 자신이 망가진 느낌이 든다. 그래서 누군가가 제대로 된 도구를 쥐어 줄 때 우리가 좀 더 완전해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이폰은 순식간에 블로거들 사이에서 ‘예수 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애플의 경쟁사들은 500달러는 너무 비싼 가격이라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비싼 전화기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티브 발머는 CNBC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게다가 자판이 없어서 비즈니스 고객들에게는 호소력이 떨어질 겁니다.” 이번에도 마이크로소프트는 잡스의 제품을 과소평가한 셈이었다. 2010년 말까지 애플은 아이폰을 무려 9000만 대나 판매하면서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창출된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거둬들였다.

 

 

 

36. 2라운드 - 암의 재발

2008년의 전투

어느 정도는 잡스의 체중 감소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애플의 주가는 2008년 6월 초 188달러였던 것이 7월 말에는 156달러로 떨어졌다. 8월 말 《블룸버그 뉴스》가 미리 써 놓은 잡스의 부고 기사를 실수로 유출하여 그것이 결국 고커 사이트에 게재되고 만 것도 주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잡스는 며칠 후 애플의 연례 뮤직 이벤트에서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여 상황을 정리했다. “나의 사망 보도는 대단히 과장된 뉴스입니다.” 새 아이팟 라인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수척한 모습은 결코 사람들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10월 초가 되자 주가는 97달러까지 하락했다.

 

블로고스피어에는 그의 건강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고 그중 상당수는 진실의 악취를 담고 있었다.

 

글루카곤 :: 1920년대에 킴볼(Kimball)과 멀린(Murlin)은 이자추출물을 연구했고 그 결과 고혈당(hyperglycemia)을 야기하는 물질을 발견했다. 이것이 글루카곤이다. 그 후 글루카곤의 아미노산 서열은 1950년대에 밝혀졌다. 체내에서 하는 기능과 관련된 질병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밝혀졌다.
이자에 있는 내분비선 조직인 랑게르한섬(langerhans)에 있는 알파세포(α-cells)에서 만들어지고 분비된다. 혈당량이 낮을 때 분비되서 혈당량을 높이는 기능을 하여 혈당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작동기작은 다음과 같다. 간세포(hepatocyte)에 있는 글루카곤 수용체(glucagon receptor)와 결합하여 간세포로 하여금 저장해둔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분해해서 혈액으로 분비하게 한다.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분해하는 과정을 글리코겐분해(glycogenolysis)라고 한다. 저장해둔 글리코겐이 바닥나면, 글루카곤은 간으로 하여금 글루코네오제네시스(gluconeogenesis)를 통해 포도당을 만들게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포도당도 마찬가지로 혈액으로 분비된다. 이 두 과정을 통해 글루카곤은 간에서 포도당을 분비하게 하고, 저혈당을 막는다. 글루카곤과 마찬가지로 이자에서 분비되는 인슐린(insulin)과 반대 작용을 하며, 인슐린과 함께 혈당량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또한 요소 생산과 혈중 유리 지방산(free fatty acids), 케토산(ketoacids)의 농도를 증가시킨다.
[네이버 지식백과] 글루카곤 [glucago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펩타이드 :: 2개 이상의 아미노산이 주로 α-카르복시기와 α-아미노기로 사슬모양 또는 고리모양으로 펩티드 결합을 하여 형성된 화합물. 아미노산의 결합수에 따라서 디펩티드, 트리펩티드, 테트라펩티드 혹은 올리고펩티드나 폴리펩티드로 분류된다. 올리고펩티드(결합 아미노산수 2~10개)나 폴리펩티드(10~50개인 아미노산)의 수는 반드시 결정되어 있지는 않다. 생물체에는 여러 가지 펩티드가 있으며 대사조절이나 호르몬작용 등의 생리적 활성을 나타내는 것이 있다. 항생물질이나 곰팡이독 또는 식품의 맛성분으로도 작용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펩타이드(펩티드) [peptide] (영양학사전, 1998. 3. 15., 채범석, 김을상)

 

이사들에게는 정보가 온전히 공개되지 않았으며 주주들에게는 처음부터 잘못된 정보가 제공되었다. 이로써 약간의 법적 논쟁이 제기되자 SEC는 애플이 주주들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은폐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만약 애플이 허위 정보 유포를 허용했거나 회사의 재정 전망과 관련 있는 진실을 은폐했다면 그것은 증권 사기로서 중죄가 될 수 있었다. 잡스와 그의 마법이 애플의 재건과 거의 완전히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그의 건강 문제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애매한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CEO의 사생활 보호 권리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멤피스에서 이식수술을 받다

캘리포니아 간 이식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적절한 시기에 간을 이식받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혈액형이 같은 기증자가 적은 데다, 미국의 해당 정책을 정하는 미국 장기 이식 센터의 기준으로는 암 환자보다 간경변증이나 간염 환자에게 우선권이 부여되었다. 

아무리 잡스처럼 부유한 사람이라고 해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새치기’를 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결코 새치기를 하지 않았다. 간 이식 수혜자는 호르몬 수치 검사를 통해 이식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결정하는 MELD(말기 간 질환 모델) 점수와 그동안의 대기 기간을 토대로 선발된다. 모든 기증은 면밀한 감사를 거치며 공식 웹사이트(optn.transplant.hrsa.gov)에서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은 언제든 자신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접 계산해 볼 수 있어요. 제가 해 봤는데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6월이 지나야 기증을 받을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의사들은 그의 간이 4월쯤이면 기능을 멈출 거라고 했죠.” 그래서 그녀는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고, 동시에 두 개 주의 대기자 명단에 오르는 것이 허용되며 잠재 수혜자의 약 3퍼센트가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두 개 이상의 주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정책상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일부 사람들이 부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제도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요 요건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수혜자가 여덟 시간 안에 지정 병원에 도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잡스는 전용기가 있었으므로 이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요건은 환자를 대기자 명단에 올리려면 해당 주의 병원 의사들이 환자를 직접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월의 광란(전미 대학 체육 협회 주최의 대학 농구 선수권 대회.—옮긴이)

 

3월의 광란 :: 미국 대학스포츠연맹(NCAA;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이 주최하는 미국 대학농구선수권 대회를 가리키며, 매년 3월에 열려 전국을 대학농구의 열기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미국프로농구(NBA)가 한창인 3월에 한 단계 아래인 대학농구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연고 지역을 대표하는 팀이 있기 때문이다. 또 1,200여 개 팀 간의 경쟁을 뚫고 올라온 68개 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박진감 넘치는 단판 승부를 펼치는 데다가 이변이 속출하는 것도 큰 이유이다.
1939년 8개 팀의 토너먼트로 출범하여 1985년 64강 체제가 구축되었고, 2001~2011년 65개 팀을 거쳐 2012년부터 68개 팀으로 개편되었다. 참가하는 팀은 우선 32개 컨퍼런스에서 우승한 32개 팀에 자동출전권이 주어지고, 나머지 36개 팀은 토너먼트선정위원회에서 각 팀의 시즌 전적과 RPI(Rating Percentage Index) 등을 고려하여 선정한다. NCAA는 1982년부터 여자 대학농구선수권 대회도 주최하고 있는데, 1994년부터 64개 팀이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가린다.
경기는 동부·서부·남부·중서부의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선정된 팀들은 4팀씩 16개 시드에 배정되어 4개 권역으로 분산되며, 각 권역에서 1번 시드와 16번 시드, 2번 시드와 15번 시드가 맞붙는 방식으로 토너먼트를 치른다. 토너먼트는 68개 팀 가운데 최하위 8개 팀이 맞붙는 '퍼스트 포(First Four)'라는 명칭의 1라운드 경기로 시작되어 4개 팀이 64강 대진에 합류한다. 이후의 16강을 스위트 식스틴(Sweet Sixteen), 8강을 엘리트 에이트(Elite Eight), 각 권역별 우승팀끼리 겨루는 4강을 파이널 포(Final Four), 결승을 챔피언십(Championship)이라고 칭한다.
기본적으로 아마추어 경기이므로 20분씩 전후반 경기를 치르지만 일반 경기 규칙과는 다른 독특한 룰이 있다. 먼저 경기를 시작할 때와 연장전을 시작할 때를 제외하고는 점프볼을 하지 않으며, 헬드볼 상황에서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번갈아가며 공을 소유한다. 자유투는 팀파울 6개부터 9개까지 원앤드원(one and one)을, 10개부터는 2개를 준다. 단, 슛 동작에서 파울이 발생하면 팀파울에 상관없이 2개를 준다.
공격 제한시간은 남자의 경우 35초이며 여자는 30초이다. 지역방어도 허용되며 3점슛 라인은 6.02m로 일반 농구경기(6.25m)나 NBA(7.23m)보다 짧다. 또 일반 아마추어와는 달리 코트에서 뛰는 선수도 작전시간을 요청할 수 있다. 팀당 20초 3회와 풀타임(75초) 2회가 주어지는데, 선수나 코칭 스태프가 착각을 해서 타임아웃을 더 부를 경우 상대팀에게 2개의 자유투가 주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3월의 광란 [March Madness, 三月─狂亂]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한번은 잡스가 강한 진정제를 투여받은 상태일 때 폐 전문의가 그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우려 했다. 그러나 잡스는 그것을 벗겨 내고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쓰기 싫다고 투덜거렸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마스크를 다섯 가지쯤 가져오라고, 그러면 자신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겠다고 지시했다. 의사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파월을 보았다. 결국 파월이 잡스의 주의를 돌리고 그 틈을 타서 의사들은 간신히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또한 손가락에 끼운 산소 모니터도 못마땅해했다. 너무 볼품없고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좀 더 단순하게 디자인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체액에 따라 사람의 기질을 구분했는데, 이 중 담즙질은 열정적이고 급하며 능동적이고 의지가 강한 성격을 나타낸다.—옮긴이)

 

잡스가 돌아오다

잡스도 팰러앨토로 돌아온 후 기분이 우울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애플의 주가는 그가 없는 동안 적절한 궤도에 올랐다. 2009년 1월 병가를 발표할 때 82달러였던 것이 5월 말 복귀 무렵에는 140달러까지 올라 있었다. 잡스가 병가를 낸 직후에 분석가들과 가진 화상회의에서 쿡은 평소의 침착한 스타일을 버리고 잡스가 없어도 애플은 계속해서 고공 행진을 할 것임을 열렬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가 훌륭한 제품들을 만들기 위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러한 믿음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혁신에 주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잡성이 아닌 단순성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제품을 뒷받침하는 주요 기술들을 소유하고 통제해야 하며 우리가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시장에만 참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수천 가지 프로젝트들을 거부해야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극소수의 프로젝트에 주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각 부문 간의 깊은 협력과 교류를 믿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혁신을 이루도록 도와주지요. 사실 우리는 사내의 모든 팀이 탁월해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틀렸을 때 그것을 인정하는 정직성과 변화를 꾀하는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관이 회사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저는 누가 어떤 직무를 맡든 애플은 극도로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잡스가 할 법한 말을 그대로 옮긴 연설이었지만(그리고 실제로 잡스가 한 연설과 유사해 보였지만) 언론은 그것을 ‘쿡 독트린’이라고 불렀다. 잡스는 특히 마지막 문장 때문에 괴롭고 우울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상처를 받아야 하는가. 그가 CEO에서 물러나 회장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통증을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을 하도록, 그리하여 건강을 회복하도록 그를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37. 아이패드 - 포스트 PC 시대로

혁명을 원한다고 말하라

태블릿 PC는 연례 ‘톱 100’ 휴양 수련회에서 거의 매번 미래의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로 논의되었다.

 

태블릿 PC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떠오른 것은 2007년 잡스가 저가 넷북 아이디어를 검토하면서부터였다. 어느 월요일 경영진 브레인스토밍 회의에서 아이브는 왜 꼭 키보드를 스크린에 경첩으로 연결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비용도 많이 들고 둔해 보인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멀티터치 인터페이스를 사용해 키보드를 스크린에 넣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잡스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넷북 설계보다는 태블릿 프로젝트를 부활시키는 쪽으로 자원이 집중되었다.

 

늘 그랬듯이 잡스는 되도록 가장 순수한 단순함을 요구했다. 그러려면 해당 기기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해야 했다. 그 답은 디스플레이 스크린이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스크린을 따르게 한다는 것을 주요 원칙으로 삼았다. “어떻게 하면 디스플레이를 방해하는 기능들과 버튼들을 피할 수 있을까요?” 아이브가 물었다. 매 단계마다 잡스는 제거와 단순화를 강요했다.

어느 순간 잡스는 모델을 보면서 어딘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꼈다. 자연스럽게 집어 올려 휙 가져갈 만큼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브가 지적한 문제도 결국 그것이었다. 충동적으로 한 손에 집어 들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점. 조심해서 들어 올리지 않고 편안하게 휙 집어 올리려면 가장자리의 밑면이 약간 둥글어야 했다. 그러려면 엔지니어링 부문은 필수적인 연결 포트와 버튼 들을, 밑면이 부드럽게 감춰질 정도로 충분히 얇은 하나의 단순한 테두리 안에 설계해야 했다.

 

SoC(system-on-a-chip: 시스템 전체를 담는 칩.—옮긴이)

 

SoC :: SoC는 한 개의 칩에 완전 구동이 가능한 제품과 시스템이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가 명령어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하드웨어 컴포넌트를 하나의 칩에 포함하고 있는 데 비해, SoC는 그 컴퓨터와 필요한 모든 부수적인 전자 부품들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통신에 사용되는 SoC에는 마이크로프로세서, DSP, 램과 롬 등이 함께 포함될 수 있다. 즉 정보통신 기기의 핵심 기능을 하는 칩으로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부, 디지털 및 아날로그 신호를 제어·가공·처리하는 프로세싱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스템 기술과 반도체의 설계·제조 기술들이 융합되고 종합된 IT 핵심기술의 결정체이다.
SoC 설계기술의 핵심은 수천만 개에서 수억 개가 넘는 트랜지스터로 구성된 복잡한 SoC의 설계·검증·테스트로 통신·컴퓨터·정보기기의 시스템 기술과 집적회로 설계 및 검증 등 반도체 기술이 융합되어야 개발이 가능하다. SoC을 이용하면 일반적으로 시스템의 크기가 작아지며, 조립 과정도 단순해 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스템온칩 [System on Chip] (손에 잡히는 IT 시사용어, 2008.02.01)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마법 도구

“역사상 이렇게 대단한 흥분과 환호를 불러일으킨 태블릿은 두 개인데, 하나는 그 옛날 모세가 들고 나온 십계명이 적힌 석판이고, 다른 하나는 잡스가 들고 나오는 아이패드다.”

 

아이폰과 노트북 사이에 물음표가 있는 화면을 띄워 놓았다. “질문 하나 드리지요. 이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웹 브라우징과 이메일, 사진, 동영상, 음악, 게임, 전자책 등을 적절하게 소화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넷북’ 개념에 비수를 꽂았다. “넷북은 이 중 어떤 것도 더 잘해 내지 못합니다.” 초대받은 손님들과 직원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갖고 있습니다. 우린 그것을 ‘아이패드’라고 부르지요.”

 

마지막 슬라이드에서 잡스는 아이패드가 구현하는 그의 인생 테마 한 가지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과학기술’ 거리와 ‘인문학’ 거리의 교차로를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애플이 아이패드 같은 제품들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늘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아이패드는 창의성이 생활 도구들과 만나는 곳, 즉 ‘더 홀 어스 카탈로그’를 디지털로 구현한 것이었다.

 

아이패드라는 이름도 블로고스피어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어 여성용 위생용품과 맥시 패드와 관련된 불쾌한 언급들이 떠돌았다. 아이패드를 패러디한 이름 ‘아이탐폰’은 그날 트위터 인기 토픽 3위를 차지했다.

 

빌 게이츠의 의견도 빠질 수 없었다. 그는 브렌트 슐렌더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목소리와 펜, 진짜 키보드의 혼합체, 그러니까 다시 말해 넷북이 주류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이폰이 나왔을 때처럼 ‘세상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목표를 충분히 높게 잡지 않았어.’라고 한탄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패드는 멋진 독서 기기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 저런 건 마이크로소프트가 해냈어야 하는 건데.’라고 말할 만한 게 아이패드에는 없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타일러스 입력 방식이 이길 거라고 주장했다. “나는 수년 동안 스타일러스를 사용하는 태블릿을 예상해 왔습니다. 결국 내가 옳은 것으로 드러날 겁니다. 이건 목숨을 걸고 장담하지요.” 그가 내게 한 말이다.

 

“애플 제품에 대한 기사를 쓸 때 어려운 점은 그것이 엄청난 과대 선전을 등에 업고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애플 제품에 대한 기사를 쓸 때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가끔은 그런 과대 선전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로스먼이 우려한 한 가지는 사실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이었다. “아이패드는 콘텐츠를 소비하기에는 매력적인 기기이지만 콘텐츠 제작을 용이하게 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패드는 콘텐츠 제작에서 콘텐츠의 단순한 수용 및 조작으로 중점을 바꾼다. 그저 입을 다물고 다른 이들의 작품을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라는 얘기다.”

 

“아이패드의 위대한 점을 꼽으라면? 모든 것.”

 

“필요성조차 못 느끼다가 어느 순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기기들이 있다. 그는 이런 기기들을 요리해 내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졌다. 애플은 기술과 선(禪)이 결합된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를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폐쇄형 시스템일 것이다.”

 

세그웨이(전기모터를 이용한 바퀴 두 개짜리 1인용 운송 수단.—옮긴이)

 

노어가 콜롬비아의 보고타 북부 시골 지역에 있는 어느 낙농장에 머무르고 있을 때 겪은 일이었다. 그가 아이패드로 공상과학소설을 읽고 있는데 마구간을 청소하는 가난한 여섯 살짜리 소년이 다가왔다. 호기심이 생긴 노어는 소년에게 아이패드를 건네주었다. 전에 컴퓨터를 본 적도 없는 이 소년은 설명서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화면을 밀고 앱들을 작동해 보더니 핀볼 게임을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는 여섯 살짜리 문맹 소년도 아무런 설명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컴퓨터를 설계했다. 그것이 마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가 쓴 글이다.

한 달도 채 안 돼서 애플은 아이패드를 100만 대 판매했다. 아이폰의 두 배 속도였다. 시판 11개월 후인 2011년 3월까지 아이패드는 총 1500만 대가 팔렸다.

 

애플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

아이팟은 ‘1000곡의 노래를 주머니 속에’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금세 실루엣 광고를 생각해 낼 수 있었지요. 하지만 아이패드가 무엇인지는 설명하기가 힘들더군요. 컴퓨터로 보이는 것은 싫고 그렇다고 귀여운 텔레비전 같은 부드러운 이미지도 싫었어요. 처음에 만든 일련의 광고들은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모른다는 느낌을 주었지요.

 

“성명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종의 선언이 되어야 해요. 이건 대단한 거니까요.” 그는 아이패드가 세상을 바꿀 거라고 선언했다. 그러니 이 선언을 보강하는 광고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1년쯤 후면 다른 회사들이 모방 태블릿들을 내놓을 게 분명하니 사람들에게 아이패드가 원조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이룩한 것을 부각하는 광고, 그것을 선언하는 광고를 만들어야 돼요.”

 

“아이패드는 얇다. 아이패드는 아름답다.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마법이다. 비디오다. 사진이다. 평생 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책이다. 그것은 이미 혁명이다. 그리고 그 혁명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그들은 깨끗한 흰색 배경에 ‘아이패드는……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특징과 아이패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클로즈업해서 보여 주는 광고로 다시 돌아갔다.

 

아이폰에서 시작된 앱 현상

이러한 앱 현상은 아이폰에서 시작되었다. 2007년 초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사용자들은 외부 개발자들의 앱을 전혀 구입할 수 없었고 잡스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외부 개발자들이 아이폰용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들이 아이폰을 망쳐 놓거나 바이러스에 감염시키거나 통합성을 오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외부의 앱 제작을 허용하되 여기에 엄격한 기준을 부여하고 애플의 시험과 승인을 거쳐 오직 아이튠스 스토어를 통해서만 판매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이폰의 통합성과 단순한 고객 경험을 보호하도록 통제할 수 있는 동시에 소프트웨어 개발자들 수천 명에게 권한을 주는 데 따르는 이점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스위트 스팟(야구 배트, 라켓, 클럽 등의 최적 타격 지점.—옮긴이)에 맞히는 마법 같은 해결책이었지요. 엔드투엔드 통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개방에 따르는 이점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아이폰 앱 스토어는 2008년 7월에 아이튠스에 문을 열었고 그로부터 9개월 후에 10억 번째 다운로드가 이뤄졌다. 2010년 4월 아이패드가 시판될 무렵, 이용 가능한 아이폰 앱은 무려 18만 5000가지에 달했다. 대부분은 아이패드에서도 사용이 가능했지만 커다란 스크린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5개월도 채 안 되어 개발자들은 2만 5000개의 아이패드 전용 앱을 개발했다. 2011년 6월경,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위한 앱은 합쳐서 42만 5000개에 달했고 다운로드 횟수는 140억 회를 넘어섰다. 

 

‘배를 불태운다.’(코르테스가 멕시코 땅을 밟은 뒤 부하들이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내린 명령.—옮긴이)

 

초창기 1980년대만 해도 온라인에 들어가려면 주로 AOL이나 컴퓨서브, 프로디지 같은 서비스에 전화로 접속해야 했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콘텐츠가 채워져 있고 주의 깊게 벽이 둘러쳐져 있으며 좀 더 용감한 사용자들에게는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 출구가 몇 개 딸린 정원을 제공하는 셈이었다. 1990년대 초에 시작된 두 번째 단계는 브라우저의 출현이었다. 이로써 수십억 개의 사이트들을 연결하는 월드와이드웹 하이퍼텍스트 전송 규약(HTTP)을 사용하여 누구나 인터넷을 자유롭게 서핑할 수 있게 되었다. 야후와 구글 같은 검색엔진들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원하는 웹사이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이패드의 출시는 새로운 모델을 예시했다. 앱들은 벽이 둘러쳐진 초창기의 정원과 흡사했다. 앱 개발자들이 해당 앱을 다운로드 한 사용자에게만 더 많은 기능을 제공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앱의 증가는 또한 웹의 연결성과 개방성이 희생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앱은 쉽게 연결되지도, 검색되지도 않았다. 아이패드는 앱과 웹 브라우징의 사용을 모두 허용한다는 점에서 웹 모델과 대립 선상에 섰다고 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콘텐츠 개발자와 콘텐츠 소비자 모두에게 대안을 제공한 셈이었다. 

 

출판과 저널리즘

잡스는 아이팟으로 음악 사업을 변모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패드와 앱 스토어로 출판부터 저널리즘, 텔레비전,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디어에 변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이튠스 스토어의 경우, 잡스는 모든 곡에 똑같이 저렴한 가격을 매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그 가격은 99센트였다.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는 전자책에 대해 최고가를 9.99달러로 책정할 것을 주장하며 이와 비슷한 접근 방식을 취하려 시도했다. 그러던 중 잡스가 전자책 시장에 끼어들었고, 그는 음반사들에 제안하지 않았던 것을 출판사들에 제안했다. 아이북 스토어의 판매 가격을 출판사들이 직접 책정하되 애플이 수입의 30퍼센트를 갖겠다는 제안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이러한 방식을 취할 경우 아이북 스토어의 책값이 아마존의 책값보다 높아질 게 분명했다.

 

아마존이 망쳐 놓았어요. 그들은 일부 책들에 대해 도매가를 지불해 놓고 원가 이하인 9.99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지요. 출판사들은 그런 관행을 싫어했어요. 그렇게 되면 하드커버 책을 28달러에 판매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래서 애플이 끼어들기 전에도 일부 책 판매자들은 아마존에 책을 넘기지 않으려 들었습니다. 우리는 출판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는 대리점 모델로 가겠습니다. 당신들이 가격을 정하면 우리가 그중 30퍼센트를 가져가는 거지요. 물론 고객들의 부담이 조금 더 커지겠지만 어쨌든 그게 당신들한테도 좋은 방식 아닙니까?” 단, 우리보다 더 싸게 파는 곳이 있으면 우리도 그 가격에 팔도록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랬더니 그들은 아마존에 가서 “대리점 계약에 서명하지 않으면 책을 공급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지요.  

잡스는 책과 음악에 대해 모순된 방식을 시도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음반사들과의 거래에서는 대리점 모델을 제안하지도 않았고, 그쪽에서 가격을 정하는 것도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은 그럴 필요가 있었다. “책 사업은 우리가 최초가 아니었어요. 기존의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 최선은 이런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대리점 모델로 가자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결국 해냈습니다.”  

 

신문업자들은 그의 구명줄을 의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익의 30퍼센트를 애플에 지불해야 한다는 점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주들이 그의 시스템을 따르면 더 이상 구독자들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걱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애플의 시스템을 취하면 그들은 더는 구독자들의 이메일 주소와 신용카드 번호를 확보할 수 없었고, 그러면 구독자들에게 대금을 청구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신제품을 마케팅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 대신 애플이 고객을 소유하고 대금을 청구하며 고객 정보가 애플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될 것이었다. 게다가 사생활 보호 정책 때문에 애플은 고객이 명시적으로 허락하지 않는 한 이러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독자들에게 요청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구독자들이 자진해서 내주지 않는다고 해서 저를 탓해선 안 됩니다. 그게 싫으면 우리를 이용하지도 말아야 하고요. 여러분들이 이런 난국에 처한 건 제 탓이 아닙니다. 지난 5년 동안 온라인으로 신문을 무료 배포하면서 신용카드 정보를 수집하지 않은 게 누군데 그럽니까?”

 

오늘날의 주요 양대 진영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건설주의와 파괴주의이지요. 당신은 파괴적인 사람들에게 주사위를 던졌습니다.

 

“스티브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건 아주 훌륭한 경험입니다. 동네 레스토랑들이 문을 닫기 전에 나올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38. 새로운 전투들 - 그리고 예전 전투들의 메아리

구글 - 개방 대 폐쇄

“원만한 관계를 이어 간다면 구글이 아이폰에 접근하도록 홈 스크린에 아이콘 한두 개를 넣을 수 있게 보장해 주겠다고 했지요.” 잡스의 회상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구글이 계속해서 안드로이드를 개발하고 멀티터치 같은 아이폰의 기능들을 도용한다면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다. 처음에는 구글도 특정 기능들을 모방하는 것은 피했다. 그러나 2010년 1월 대만 기업 HTC가 멀티터치를 비롯해 여러 가지 면에서 아이폰의 외관과 느낌을 가진 안드로이드 폰을 출시했다. 이것이 바로 잡스가 구글의 ‘사악해지지 말자’ 슬로건이 “헛소리”였다고 선언한 정황이었다.

그리하여 애플은 자사의 특허 20개를 침해했다며 HTC를(나아가 안드로이드를) 고소했다.

 

이 분쟁의 저변에는 훨씬 더 기본적인 문제, 엄청난 역사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개방형’ 플랫폼으로 내놓았다. 안드로이드의 오픈소스 코드는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그들의 휴대전화나 태블릿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잡스는 애플이 그 운영체제와 하드웨어를 철저히 통합해야 한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고수했다. 1980년대 애플은 자사의 매킨토시 운영체제에 대해 라이선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여러 하드웨어 제조사들에게 자사 운영체제의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잡스의 생각으로는) 애플의 인터페이스를 벗겨 먹음으로써 지배적인 시장점유율을 확보했다.

1980년대에 마이크로소프트가 행한 일이 2010년 구글이 시도한 일과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분쟁을 유발했다는 점에서는(그리고 누군가를 격노케 했다는 점에서는) 매우 흡사했다. 그것은 폐쇄냐 개방이냐, 또는 (잡스의 논리로는) 통합이냐 분열이냐에 대한, 디지털 시대 대논쟁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애플의 믿음대로, 그리고 잡스의 통제 완벽주의가 요구하듯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관리를 깔끔한 단일 시스템으로 통합해 단순한 사용자 경험을 보장하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고 다른 기기들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들어 사용자들과 제조업자들의 선택 폭을 넓히고 또 다른 혁신의 여지를 터놓는 것이 나은가?

 

“폐쇄적인 것에도 어느 정도 이점은 있습니다. 사용자 경험을 상당 부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지요. 그는 분명히 때때로 그런 이점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애플 iOS(애플의 모바일 운영체제)의 라이선스 제공을 거부한 것은 안드로이드 같은 경쟁 제품에 더 큰 몫을 차지할 기회를 준 셈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그는 다양한 기기 및 제조사 들 사이의 경쟁은 소비자 선택의 증대와 더 큰 혁신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게이츠는 PC의 개선 가운데 대부분은 소비자들이 많은 선택권을 가졌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며 언젠가는 모바일 기기 세상에도 이런 원리가 적용될 거라고 지적했다. “결국 개방이 성공할 겁니다. 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요? 장기적으로 볼 때 통합성, 그것으로는 버틸 수 없습니다.”

 

“나는 사용자 경험 전체에 대해 책임지고 싶어요. 우린 돈을 벌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안드로이드 같은 쓰레기가 아닌 훌륭한 제품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지요.”

 

자유로운 혁명가 대 오만한 독재자

심지어 그는 플래시 코드를 번역해 애플의 iOS와 호환해 주는 어도비의 컴파일러를 사용하는 앱들도 금지했다.

 

애플이 마크 피오레의 풍자 애니메이션을 보여 주는 앱을 거부하면서 불거졌다. 애플은 부시 행정부에 대한 마크 피오레의 풍자 공격이 명예훼손 규정을 위반한다는 이유로 거부 조치를 취했다. 피오레가 4월에 시사만화로 2010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자 애플의 이러한 결정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조롱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애플은 어쩔 수 없이 입장을 바꾸었고 잡스는 공개 사과를 했다.

 

아이패드나 아이폰 사용자들이 보거나 읽는 앱의 종류까지 통제하려 드는 것은 지나친 망상이 아니냐는 세간의 우려를 자극했다. 잡스는 애플의 ‘1984’ 매킨토시 광고에서 그가 멋지게 깨부순 오웰의 빅 브라더가 될 위험에 처한 듯했다.

 

“만약 딜런이 지금 스무 살이라면 당신의 회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이패드가 눈곱만큼이라도 ‘혁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혁명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뜻밖에도 몇 시간 후 자정이 지나 잡스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래요. 자유지요. 당신의 개인 정보를 훔쳐 가는 프로그램들로부터의 자유. 당신의 배터리를 축내는 프로그램들로부터의 자유. 포르노로부터의 자유. 그래요, 자유가 본질입니다. 시대는 변해 갑니다. 전통적인 PC 종사자들은 그들의 세상이 끝나 가고 있다고 느끼지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유가 아니라 애플이 사용자들을 위해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겁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어떤 대단한 일을 이루셨습니까? 무언가를 만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비판하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분입니까?”

테이트는 솔직히 감명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런 식으로 고객이나 블로거와 일대일로 맞붙는 CEO는 드물다. 잡스는 그의 회사가 그토록 우수한 제품들을 만들었다는 점뿐 아니라 전형적인 미국 기업가의 틀을 깼다는 점에서도 크게 인정받을 만하다. 잡스는 디지털 생활에 대한 아주 확고한 견해들을 토대로 회사를 세우고 재건했을 뿐 아니라 기꺼이 공공연하게 그것들을 옹호한다. 격렬하게, 솔직하게. 그것도 주말 새벽 2시에 말이다.” 블로고스피어의 많은 이들이 이에 동의하며 잡스에게 호전성을 칭송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잡스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음란물을 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더러운 섹스광들이다. 아니면 그저 봐야 할 것과 봐선 안 되는 것을 기술 독재자가 결정하지 않는, 검열 없는 개방적인 사회의 개념을 향유하고 싶은 사람들일 뿐이거나.”  

그 무렵 잡스와 애플은 어느 운 나쁜 애플 엔지니어가 술집에 놓고 간 비공개 아이폰 4의 테스트 버전을 손에 넣은, 밸리웨그의 제휴 사이트 기즈모도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애플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해당 블로거의 집을 급습하자 기즈모도는 이제 통제 편집증에 오만까지 결합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여러분은 반항아였습니다. 대의를 가슴에 품은 약자였잖아요. 그런데 이제 사악한 지배자가 되려는 겁니까? 1984년에 빅 브라더를 타도하던 그 놀라운 광고는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거울을 보십시오!”

 

애플이 호전적인 약자였을 때에는 그러한 오만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애플은 모바일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안테나게이트 - 가장 잡스다운 대응 전술

마이클 패러데이가 입증했듯이 전자파는 금속 표면을 관통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돌아간다. 따라서 전화기에 금속 테두리를 두르면 이른바 ‘패러데이 상자’가 발생해 신호의 출입이 방해를 받을 수 있다. 원조 아이폰은 하단에 플라스틱 띠를 두르는 것으로 출발했지만 그것이 디자인의 통합성을 망친다고 생각한 아이브는 전체를 알루미늄 테두리로 둘러야 한다고 고집했다. 결국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자 아이브는 아이폰 4를 강철 테두리로 디자인했다. 강철은 구조적 지지대가 될 뿐 아니라 맵시 나는 외관을 완성해 주며 전화기 안테나의 역할을 일부 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는 중요한 난제가 따랐다. 이 강철 테두리가 안테나 역할을 하려면 작은 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용자가 손가락이나 땀이 난 손바닥으로 그 틈을 막으면 신호가 다소 차단될 수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이를 예방하기 위해 금속 위에 투명 코팅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이번에도 아이브는 그것이 브러시드 메탈 외관을 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잡스도 미팅에서 수차례 이 문제에 대해 들었지만 그는 엔지니어들이 양치기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고 어쨌든 그들은 해냈다.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온전히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2010년 6월에 출시된 아이폰 4는 멋진 외관을 자랑했지만 곧 한 가지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화기를 특정한 방식으로 들면, 특히 왼손을 사용해서 손바닥으로 작은 틈을 막으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대략 통화 100번에 한 번꼴로 나타났다. 잡스는 출시 전 제품에 대해 철저히 비밀 유지를 고집했기 때문에(심지어 기즈모도의 블로거가 술집에서 주운 전화기도 가짜 케이스에 싸여 있었다.) 아이폰 4는 대부분의 전자 기기들이 밟는 실용 실험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그래서 대대적인 구매 러시가 시작되기 전에 결함이 포착되지 않은 것이다. 훗날 토니 파델은 말했다.

“문제는 엔지니어링보다 디자인을 중시하는 것과 제품 출시 전에 철저한 비밀 유지를 고수하는 것, 이 두 가지 정책이 애플에게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전반적으로는 그렇지만 성능 검증까지 생략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죠.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애플의 아이폰 4가 아니었더라면, 즉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제품이 아니었더라면 두세 번 전화가 끊기는 문제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테나게이트’로 불렸고, 6월 초에 《컨슈머 리포트》가 몇 가지 엄격한 테스트를 해 본 후 안테나 문제 때문에 아이폰 4를 “추천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그냥 진실을, 데이터를 보여 주시죠. 오만해 보이라는 게 아니라 단호하고 자신감 있게 보이라는 겁니다.”

 

“기자회견 할 때 꼬리를 내려선 안 됩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세요. ‘휴대전화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완벽하지 않지요. 우리도 인간입니다. 우린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데이터입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휴대전화는 완벽하지 않지요. 우리 모두 그걸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사용자들을 만족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휴대전화를 환불해 가거나(아이폰 4의 환불 비율은 결국 아이폰 3G나 다른 대부분의 전화기들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애플에서 나눠 주는 무료 범퍼 케이스를 받아 가라고 했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다른 휴대전화도 비슷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는 데이터를 제시했다. 그것은 온전한 사실은 아니었다. 애플의 안테나 디자인은 이전 버전의 아이폰을 포함해 대부분의 다른 전화기들에 비해 문제가 조금 더 심각했다. 그러나 아이폰 4의 끊김 현상에 대해 언론이 지나치게 광분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과장된 겁니다.” 그가 말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그가 용서를 빌거나 리콜을 단행하지 않았다는 데 경악하기는커녕 그가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매진된 아이폰 4의 대기자 목록은 2주 분량에서 3주 분량으로 늘어났다. 아이폰은 여전히 애플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리는 제품이었다. 미디어 논쟁은 잡스가 다른 스마트폰도 동일한 안테나 문제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여부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 답이 ‘아니오.’라고 해도 어쨌든 그것은 아이폰 4가 불완전한 실패작인가의 여부보다는 훨씬 더 다루기 쉬운 문제였다.

 

다른 CEO 같았으면 굽실거리며 사죄를 하고 대대적인 리콜을 단행했겠지만 잡스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반적이고 따분한 진실처럼 유머를 죽이는 것은 없으니까.

 

 

 

39. 무한대를 향해 - 클라우드, 우주선 그리고 그 너머

아이패드 2

사람들이 사용하는 케이스들이 아이패드의 아름다운 선을 덮고 스크린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점이었다. 더욱 얇아져야 할 것이 케이스 때문에 오히려 뚱뚱해졌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마법이 되어야 할 기기에 단조로운 망토를 입히는 꼴이었다.

 

아이브의 팀원 한 명이 자석 경첩으로 연결할 수 있는 분리형 커버 제작 방법을 연구해 냈다. 커버를 열면 마치 간지럼을 타는 아기 얼굴처럼 갑자기 스크린이 활성화되고, 사용할 때는 커버를 따로 접어서 지지대로 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첨단 기술은 아니었다. 그저 물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혹적이었다. 또한 그것은 엔드투엔드 통합에 대한 잡스의 열망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이기도 했다. 커버와 아이패드는 자석과 경첩이 모두 이음새 없이 연결되도록 함께 설계되었다. 아이패드 2에서는 많은 점들이 개선될 예정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미소를 자아낼 요소는 대부분의 다른 CEO들은 굳이 생각하지도 않을 법한, 이 건방진 작은 커버였다. 

 

그는 새로운 커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아이패드 2의 시연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케이스와 제품이 함께 디자인되었습니다.” 그가 설명했다. 그런 다음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에 한동안 그를 괴롭힌 한 가지 비판으로 논의의 주제를 바꿨다. 바로 원조 아이패드가 콘텐츠 제작보다는 콘텐츠 소비에 더 적합하다는 비판이었다. 이 때문에 애플은 매킨토시에 탑재되는 최고의 애플리케이션인 개러지밴드와 아이무비를 개조해 강력한 아이패드용 버전을 만들었다. 잡스는 새 아이패드를 사용해 작곡이나 편곡을 하는 일, 홈비디오에 음향효과와 특수 효과를 넣는 일, 그러한 창작물을 게시하거나 공유하는 일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또 한 번 인문학 거리와 과학기술 거리의 교차로를 보여 주는 슬라이드로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진정한 창조성과 단순성은 전체 위젯(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콘텐츠와 커버와 판매원들까지)을 통합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 윈도 PC들의 세상에서처럼 그리고 이제는 안드로이드 기기들이 그러하듯 열고 분해하도록 허용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자신의 신조를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표현했다.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그 철학은 애플의 DNA에 내재해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결과를 내는 것은 인문학과 결합된 과학기술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포스트 PC 기기들이 그것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이 태블릿 시장으로 몰려들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서로 다른 회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것을 차세대 PC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우리 온몸이 그것은 적절한 접근 방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포스트 PC 기기들은 PC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사용이 용이해야 하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와 애플리케이션이 PC에서보다 훨씬 더 매끄러운 방식으로 서로 엮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제품들을 구축하기에 적절한 아키텍처를 단지 실리콘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직에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애플이 만든 아키텍처가 그의 영혼에까지 뿌리내리다

“이런 상태에서는 대개 1년 이상의 계획은 세우지 못하는데, 그건 좋지 않습니다. 억지로라도 수년을 살 것처럼 계획을 세워야 해요.”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지요. 우리는 모두 가운을 입었고 그들은 우리에게 터키 커피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곳에서는 커피가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진다고 교수가 설명하더군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무리 터키에 산다 한들 젊은이들이 터키 커피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나는 그날 온종일 이스탄불의 젊은이들을 보았습니다. 다들 세상의 다른 모든 젊은이들이 마시는 것을 마시고 있었고, 갭에서 산 듯한 옷을 입고 휴대전화를 쓰고 있었지요. 다른 곳의 젊은이들과 똑같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젊은이들에게는 이제 전 세계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제품을 만들 때에도 터키 전화기라거나 터키 젊은이들이 특별히 원하는 뮤직 플레이어 같은 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세상이지요.  

 

괜히 포기했다가 2년 후에도 살아 있으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죽고 로렌에게 만들다 만 배를 남겨 줄 수도 있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손을 놓으면 내가 곧 죽는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요.”

 

아이클라우드

2001년에 잡스는 모종의 비전을 품었다. 바로 PC가 뮤직 플레이어와 비디오 레코더, 전화기, 태블릿 컴퓨터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기기들의 ‘디지털 허브’ 역할을 할 것이라는 비전이었다

 

2008년까지 잡스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파장에 대한 비전을 키웠다. 미래에는 데스크톱 컴퓨터가 더 이상 콘텐츠의 허브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고, ‘클라우드’(인터넷 기반의 가상 서버.—옮긴이)가 그러한 역할을 대신할 거라고 그는 믿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콘텐츠를 자신이 신뢰하는 회사가 관리하는 원격 서버에 저장해 두고 어떤 장소에서 어떤 장치로든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러한 비전을 적절히 구현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실수를 저질렀다. 2008년 여름에 그는 주소록과 문서, 사진, 동영상, 이메일, 달력을 클라우드에 원격으로 저장하고 어떤 기기와도 호환되게 해 주는 값비싼(1년에 99달러) 서비스 ‘모바일미’를 출시했다.

 

복잡할 뿐 아니라 기기들이 제대로 동기화되지 않았으며 이메일과 다른 데이터들이 ‘하늘’에서 무작위로 길을 잃었다.

 

“모바일미가 뭐 하는 건지 누가 좀 말해 줄 수 없나?” 팀원들이 답을 내놓자 잡스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데 왜 그런 제 기능을 못하는 거야?”

 

우린 고객과 클라우드의 관계, 즉 음악과 동영상을 스트리밍 하고 사진과 정보, 심지어는 의료 데이터까지 저장하는 그 관계를 관리하는 회사가 되어야 합니다. 컴퓨터가 디지털 허브가 된다는 통찰력을 처음으로 가진 것은 애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포토와 아이무비, 아이튠스 같은 애플리케이션들을 만들어서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기기들과 결합했지요. 아주 효과적이었어요. 하지만 앞으로 몇 년에 걸쳐 컴퓨터에서 클라우드로 허브가 바뀔 겁니다. 디지털 허브 전략은 똑같지만 허브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언제든 자신의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고 동기화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변혁을 꾀해야 하는 것은 클레이턴 크리스텐슨이 말한 ‘혁신자의 딜레마’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처음 고안한 사람들은 대개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의미지요.

 

“새벽 2시에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상황을 논의했지요. 우리는 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니까요.”

 

물론 그 모든 게 막힘없이 이뤄지려면 사용자가 애플 기기를 사용하고 애플의 폐쇄적인 정원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 그것은 애플에게 또 하나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고객의 이탈을 막는다는 점이었다. 아이클라우드를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킨들이나 안드로이드 기기로 옮겨 가기가 힘들었다. 음악과 여타 콘텐츠가 호환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예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30년간 개방형 시스템을 피해 온 노력의 정점인 셈이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잡스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설계도를 자랑했다. 리드는 위에서 본 모습이 꼭 남자의 성기 같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10대 아이들이나 하는 생각이라며 아들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건축가들에게 그 얘기를 전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얘기는 한 번 들으면 절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지요.” 내가 다음번에 그를 찾아갔을 때 건물 모양은 단순한 원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버레이(두 개 이상의 사진이나 영상을 겹쳐서 비교, 검토하는 것. 또는 그렇게 겹쳐진 모양.—옮긴이)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

 

“그래요. 정말 그 여정에서 몇 가지 대단한 걸 배웠지요.”

 

 

 

40. 3라운드 - 말기의 분투

가족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에린에게 “아버지가 왜 차에 번호판을 달지 않는 것 같니?” 하고 물었다. 에린은 “반항아가 되려고.”라고 대답했다. 내가 나중에 잡스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가끔 나를 따라옵니다. 번호판을 달면 내가 어디 사는지 알아낼 겁니다. 하지만 이제 구글 맵이 있으니 그것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냥 달기 싫어서 안 다는 거라고 해야 옳겠지요.”

 

나중에 잡스는 아들을 창고로 데려가서 자신이 다시는 타지 못할 자전거 두 대 가운데 한 대를 가지라고 했다. 리드가 이탈리아제 자전거는 게이들이나 타는 것처럼 보인다고 농담하자, 잡스는 그 옆에 있는 단색 8단 기어 자전거를 가지라고 했다. 리드가 그럼 아버지한테 빚을 지는 거라고 다시 농담을 건네자 잡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이건 빚이 아니야. 너는 내 DNA를 물려받았잖아.”

 

사이호지(西芳寺) :: 교토시 서부에 위치한 사원으로 사원 내에 마치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120여종의 이끼가 덮고있어, '이끼 절'이라는 뜻의 고케데라[苔寺]라고도 불린다. 나라 시대에 세워진 고찰로, 1339년에 조원(造園)에 뛰어나기로 유명한 임제종의 승려인 무소 소세키[夢窓 疎石]가 정원으로 조성하면서 부흥시켰다. 
사원 내 정원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윗쪽은 고산수정원[枯山水庭園, 가레산스이]으로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 등으로 일본의 전통적 산수 풍경을 표현하였으며, 아래쪽은 지천회유식정원[池泉回遊式庭園, 치센카이유시키정원]으로 큰 연못에 작은 섬·다리·돌 등을 배치하고 연못 주변에 산책로는 만들어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사원 동쪽에는 큰 연못을 중심으로 이끼 정원이 형성되어있고 본당·서원 등이 있으며, 정원 내에는 중요문화재인 소난정[湘南亭]을 비롯한 3개의 차실(茶室)이 있다. 사원 북쪽에는 고산수 정원 양식의 돌 등이 배치되어있다. 
사이호지의 정원은 국가지정사적이자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사원은 1994년에 일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고대 교토의 역사기념물[古都京都の文化財]'의 일부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이호지 [Saihō-ji, 西芳寺(서방사)]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그들의 작은 딸 이브는 에린과 사뭇 달랐다. 이브는 용감하고 자신만만하며 아버지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브는 승마를 좋아해서 승마로 올림픽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지 코치가 알려 주자 이브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주세요. 그럼 그걸 할게요.”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많은 위인들이 그렇듯이 그도 모든 영역에서 비범하진 않아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거나 하는 사회적 배려는 없어요. 그 대신 인류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일이나 인류의 진보, 인간의 손에 훌륭한 도구를 들려 주는 일에 깊이 관심을 쏟죠.”

 

오바마 대통령

“나라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논의하러 왔잖아요. 저 사람은 왜 자기한테 유리한 제도에 대해서만 떠들고 있는 겁니까?”

 

“대통령은 아주 똑똑합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무언가가 왜 불가능한지를 설명하려고 들었지요. 저는 그게 화가 납니다.”

 

2011년 세 번째 병가

그는 세계 최초로 자신의 정상 DNA뿐 아니라 암종의 유전자까지 모두 염기 서열을 분석한 20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것은 당시 비용이 10만 달러 이상 드는 과정이었다.

 

분자 표적 치료 :: 최근 사람세포의 생명과학(bioscience)연구의 발전에 기초하여 세포의 기능을 보다 명확하게 질환에 관여하는 유전자와 유전자산물을 표적으로 특이성인 작용을 하는 약제를 창생(蒼生)하여 치료에 공헌하려고 하는 약제이다. 이 약제가 분자표약제이고 그것을 사용하는 치료를 분자표적치료라고 한다. 분자표적치료에서는 치료제를 목적인 표적에 작용하여 효과를 내고 있다는 증거제시가 바람직하다.
또 분자표적치료에서는 그의 분자표적이 정상조직에 있는 경우에는 부작용을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치료에는 특이성이 높은 것을 기대하여 특히 표적이 높게 발현하고 있는 증례의 진단이 선행한다면 보다 유효한 치료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치료법은 질병지향(disease oriented)이 아니고 표적지향(target oriented)이기 때문에 표적이 존재하는 여러 가지 질환에 유효하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분자표적치료 [molecular-target therapy, 分子標的治療] (생명과학대사전, 초판 2008., 개정판 2014., 강영희)

 

이 표적 치료는 묘책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묘책에 가까워 보였다.

 

그중 한 의사는 잡스에게, 그의 암이나 유사한 다른 암들이 머지않아 쉽게 다룰 수 있는 만성질환으로, 즉 다른 원인으로 사망할 때까지 목숨을 앗아 가지 못하도록 통제할 수 있는 질환으로 간주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암을 이겨 낸 최초의 인물이 되거나 이런 암으로 죽은 마지막 인물이 되겠지요.”

“해안까지 성공적으로 헤엄쳐 오는 최초의 사람들에 속하거나 물에 버려지는 마지막 사람들에 속하게 된다는 얘기지요.”

 

그를 찾아온 사람들

내가 가장 강조한 것은 집중이었습니다. 구글이 어떤 회사로 성장하길 바라는지 파악해라, 구글은 이제 전 세계 어디에든 존재한다, 당신이 가장 집중하고 싶은 다섯 가지 제품은 무엇인가? 나머지는 모두 제거해라, 그렇지 않으면 구글은 쇠약해질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되고 말 것이다, 적당할 뿐 훌륭하지는 않은 제품들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저 말라리아 같은 병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는데 스티브는 여전히 놀라운 신제품들을 내놓고 있군요.” 그는 아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도 그 게임에 남아 있었어야 했나 봅니다.” 그는 그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혹은 적어도 절반은 농담이라는 것을 내게 분명히 알리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날이 왔습니다.

나는 “아버님께서 당신을 자랑스러워하셨을 것 같네요.” 하는 식의 말을 웅얼거렸다. 그러자 잡스는 나의 말을 고쳐 주었다. “자랑스러워하셨어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이 책의 집필을 의뢰하고 협조하기로 한 결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정말 걱정됐거든요.”

“그런데 왜 전기를 써 달라고 했죠?” 내가 물었다.

“우리 아이들이 나에 대해 알았으면 했어요.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항상 곁에 있어 주진 못했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그 이유를 알기를, 내가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프기 시작하니까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한 책을 쓸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그들이 뭘 알겠습니까? 제대로 된 책이 나올 수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직접 내 얘기를 들려주어야겠다 싶었지요.”

 

 

“저는 오래전부터 제가 더 이상 애플의 CEO로서 의무와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는 날이 오면 여러분에게 먼저 알려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날이 왔습니다.”

 

태블릿 컴퓨팅으로 주제가 넘어가자 몇몇 사람들은 HP가 아이패드와 경쟁할 수 없어서 갑자기 태블릿 분야를 포기했다며 승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잡스는 우울해지더니 그것이 사실은 슬픈 일이라고 선언했다. “휼렛과 패커드는 훌륭한 회사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맡겼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금 HP는 분해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건 비극입니다. 애플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그보다 좀 더 강력한 유산을 남긴 거라면 좋겠군요.”

 

 

 

41. 유산 - 가장 밝게 빛나는 창조력의 천국

실리콘밸리의 잊지 못할 창조 신화, 영원한 혁신의 아이콘

이러한 맹렬함은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부추겼다. 그의 동료들은 영웅과 얼간이 두 부류로 나뉘었다. 상대는 영웅이 아니면 얼간이였고 때로는 하루에도 영웅이 되었다가 얼간이가 되기도 했다. 제품과 아이디어, 심지어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사상 최고의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조악한 것, 쓰레기, 못 먹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결함이 인지되면 그것은 고함으로 이어지곤 했다. 금속 조각의 마무리, 나사못 대가리의 곡선, 케이스의 파란 색조, 내비게이션 화면의 직관적 느낌 등에 대해 “완전히 형편없다.”라고 선언했다가 갑자기 “정말 완벽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예술가였으므로 예술가 기질에 탐닉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자연은 단순성과 통합성을 사랑한다.”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통합적인 시스템을 선호하는 본능으로 인해 그는 디지털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분열, 즉 ‘개방 대 폐쇄’의 분열에서 한쪽 끝에 당당히 서게 되었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이어져 내려온 컴퓨터광 정신은 개방적인 접근법을 선호했다. 이는 통합적인 통제가 거의 없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변경하고, 코드를 공유하고, 개방형 표준에 맞게 코드를 작성하고, 독점적인 시스템을 피하고, 다양한 기기 및 운영체제와 호환되는 콘텐츠 및 앱 들을 가질 수 있는 방식이었다. 젊은 시절의 워즈니악은 이러한 방식을 지지했다. 그가 설계한 애플 II는 쉽게 열 수 있었고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뭔가를 꽂을 수 있도록 슬롯과 포트가 많이 갖춰져 있었다. 매킨토시가 나오면서 잡스는 반대 진영의 창시자가 되었다. 매킨토시는 마치 가전제품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서로 조밀하게 엮여 있어 변경이 불가능했다. 매끄럽고 단순한 사용자 경험을 창출하기 위해 컴퓨터광 정신이 희생된 것이다. 

이후 잡스는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다른 회사의 하드웨어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와는 반대 전략을 따라 윈도 운영체제의 마구잡이식 라이선싱을 허용했다. 이러한 전략은 그리 고상한 컴퓨터를 양산하진 않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체제 세계를 지배하도록 이끌었다. 애플의 시장점유율이 5퍼센트 아래로 떨어지자 PC 업계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접근법에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잡스의 모델이 다소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컴퓨터 제조사들은 평범해지는 반면 애플은 시장점유율이 낮은데도 높은 마진 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2010년 PC 시장의 총매출에서 애플의 몫은 7퍼센트에 불과했지만 그 영업이익이 차지한 몫은 35퍼센트에 이르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엔드투엔드 통합에 대한 잡스의 고집 덕분에 2000년대 초반에 애플이 데스크톱 컴퓨터를 다양한 휴대용 기기들에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는 디지털 허브 전략을 유리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이팟은 철저히 통합적이고 폐쇄적인 시스템의 일부였다. 아이팟을 사용하려면 애플의 아이튠스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콘텐츠를 다운로드 해야 했다. 그 결과, 뒤를 이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와 마찬가지로 아이팟은 매끄러운 엔드투엔드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는 불편한 경쟁 제품들과 반대로 고상한 즐거움을 주는 제품이 되었다.

이 디지털 허브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2000년 5월에 애플의 시장가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20분의 1이었다. 2010년 5월 애플은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기술 회사 마이크로소프트를 뛰어넘었고 2011년 9월에는 마이크로소프트보다 70퍼센트 더 가치 있는 회사가 되었다. 2011년 첫 분기에 윈도 PC 시장은 1퍼센트 줄어든 반면 맥 시장은 28퍼센트 성장했다.

 

잡스는 통합적인 접근법을 믿는 것이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하는 이유는 통제광이라서가 아닙니다. 훌륭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서, 사용자들을 배려해서, 남들처럼 쓰레기 같은 제품을 내놓기보다는 사용자 경험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이 제일 잘하는 일을 하느라 바쁘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 역시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해 주길 바라지요. 사람들의 삶은 복잡합니다. 컴퓨터와 기기 들을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나와 대화를 하는 동안 그는 스스로 무엇이 자신의 유산이 되길 바라는지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다음은 그러한 생각에 대해 잡스 자신이 직접 쓴 글이다.      

내 열정의 대상은 사람들이 동기에 충만해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영속적인 회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모두 2순위였다. 물론 이윤을 내는 것도 좋았다. 그래야 위대한 제품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윤이 아니라 제품이 최고의 동기부여였다. 스컬리는 이러한 우선순위를 뒤집어 돈 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미세한 차이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어떤 사람들을 고용하는가, 누구를 승진시키는가, 미팅에서 무엇을 논의하는가 등등 모든 것을 결정한다. 

“고객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우리의 일은 고객이 욕구를 느끼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원할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헨리 포드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고객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고객은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들은 직접 보여 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내가 절대 시장조사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이다. 아직 적히지 않은 것을 읽어 내는 게 우리의 일이다. 

폴라로이드의 에드윈 랜드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그 교차점을 좋아한다. 거기에는 마법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 혁신을 꾀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따라서 그것이 내 경력의 주요한 차별성은 아니다. 애플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이유는 우리의 혁신에 깊은 인간애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훌륭한 예술가들과 훌륭한 엔지니어들이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실제로 원조 맥 개발에 참여한 최고의 인물들 가운데는 시인이나 음악가로 활동해도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1970년대에 컴퓨터는 자신의 창의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은 과학에도 능통했다. 미켈란젤로의 경우, 조각하는 법뿐 아니라 채석 방법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돈을 내고 그들을 대신해 여러 가지를 통합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온종일 이것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제품을 생산하는 일에 극도의 열정을 부린다면 그러한 열정은 우리가 통합성을 추구하도록, 즉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관리를 연결하도록 독려한다. 신천지를 개척하고 싶다면 직접 그것을 해야 한다. 당신의 제품이 다른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 개방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비전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 

과거 여러 시점에 실리콘밸리의 귀감이 된 기업들이 존재했다. 오랫동안 HP가 그 자리를 지켰다. 이후 반도체 시대에는 페어차일드와 인텔이 그랬다. 한동안은 애플이 그러다가 퇴락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다시 애플과 구글(애플만큼은 아니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애플은 시간의 시험을 견뎌 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한동안 주류에서 벗어나 있기도 했지만, 현재는 흐름을 선도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분명히 지배적인 위치에서 추락했다. 그리고 상당 부분 시대에 뒤진 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달성한 것들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이 몹시 힘든 과정을 이겨 내고 이룬 성과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들은 사업적인 측면에 매우 강했다. 하지만 제품과 관련해서는 마땅히 가져야 할 야망을 품지 않았다. 빌은 제품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묘사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사업가이다. 그에게는 사업에서 승리하는 것이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그는 결국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으니,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면 분명 목표를 이룬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나의 목표는 아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의 목표이긴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나는 그러한 기업을(정말 멋진 기업이다.) 세운 그를 존경하며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고 실제로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의 DNA에는 인간애와 인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맥을 보고도 그것을 제대로 모방하지도 못했다.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IBM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들이 쇠퇴하는 이유에 대해 나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 이러한 기업은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혁신을 꾀하고 독점 기업 또는 그에 가까운 기업이 되는데, 그러고 나면 제품의 질을 경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훌륭한 세일즈맨들에게 가치를 두기 시작한다. 수익의 바늘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제품 엔지니어나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에는 세일즈맨들이 회사를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IBM의 존 에이커스는 똑똑하고 언변이 뛰어난 환상적인 세일즈맨이었지만 제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제록스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세일즈맨들이 회사를 운영하면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소 경시되기 시작하고 그렇게 되면 그중 상당수가 흥미를 잃는다. 나의 실수로 스컬리가 영입되었을 때 애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고 발머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맡았을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애플은 운이 좋아서 재기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발머가 운영하는 한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업을 시작했다가 매각이나 기업공개를 통해 현금이나 챙기려고 애쓰면서 스스로를 ‘기업가’라고 부르는 이들을 나는 몹시 경멸한다. 그들은 사업에서 가장 힘든 일, 즉 진정한 기업을 세우는 데 필요한 일을 할 의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일을 수행해야만 진정한 기여를 할 수 있고 이전 사람들이 남긴 유산에 또 다른 유산을 추가할 수 있는데 말이다. 한두 세대 후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표상하는 회사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월트 디즈니, 휼렛과 패커드, 인텔을 구축한 사람들이 해낸 일이다. 그들은 단순히 돈을 버는 기업이 아니라 영속하는 기업을 구축했다. 애플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사람들을 함부로 다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형편없으면 그저 면전에 대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뿐이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의 일이다. 나는 내 말의 논지를 놓치는 법이 없으며 대개는 내가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내가 조성하기 위해 노력한 문화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혹할 정도로 솔직하며 내가 엉터리라고 생각하면 누구든 내게 그러한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나 역시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이따금 서로에게 소리를 질러 가며 떠들썩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내게는 그것이 최고의 순간들 가운데 몇몇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론, 매장이 개똥 같아 보여.”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 혹은 책임자를 앞에 두고 “세상에, 우리 이 제품 엔지니어링이 엉망진창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그 방에 들어오는 데 필요한 입장료인 셈이다. 아주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 말이다. 물론 더 좋은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모두가 넥타이를 매고 지식인의 언어와 부드럽고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는 신사들의 클럽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캘리포니아 출신의 중산층이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모른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을 냉정하게 대했다. 필요 이상으로 냉정했을 것이다. 리드가 여섯 살 때 일이다. 누군가를 해고하고 집에 왔는데 어린 아들을 보니까 가족과 어린 아들에게 일자리를 잃었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괴로웠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팀을 탁월하게 유지하는 것은 항상 나의 몫이기 때문에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혁신을 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밥 딜런은 그저 저항 가요나 계속 불러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발전을 꾀해야 했고, 그리하여 1965년에 일렉트로닉으로 변화를 시도해 발전을 꾀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1966년 유럽 투어는 그의 가장 훌륭한 공연이 되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먼저 일련의 어쿠스틱 기타 곡들을 들려주었다. 청중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러면 그는 훗날 ‘더 밴드’가 되는 백 밴드를 소개했고 그들은 일렉트로닉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청중들은 여기저기서 야유를 보냈다. 한번은 그가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을 부르려고 하는데 청중석에서 누군가가 “유다 같은 배신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딜런은 말했다. “열라 크게 연주해!” 그들은 그렇게 했다. 비틀스도 똑같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나아가면서 그들의 예술을 갈고닦았다. 진화, 바로 그것이 언제나 내가 노력하며 시도한 것이다.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딜런이 말했듯이 태어나느라 바쁘지 않으면 죽느라 바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게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창의적인 사람들은 이전의 다른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 고마움을 표한다. 나는 지금 사용하는 언어나 수학을 고안하지 않았다. 내가 먹는 음식을 직접 만드는 일도 거의 없으며 내가 입는 옷도 직접 만들지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노고와 우리가 올라설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 준 사람들의 성과에 의존한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들 역시 인류에게 무언가 기여하기를, 그러한 흐름에 무언가 추가하기를 바란다. 이것의 본질은 우리가 각자 알고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우리는 밥 딜런의 노래를 쓰거나 톰 스토파드의 희곡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을 사용해 깊은 감정을 표현하고 이전 시대에 이뤄진 모든 기여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 흐름에 무언가를 추가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나를 이끌어 준 원동력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전원 스위치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딸깍!’ 누르면 그냥 꺼져 버리는 거지요.” 

그는 또 한 번 멈췄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그래서 내가 애플 기기에 스위치를 넣는 걸 그렇게 싫어했나 봅니다.”

 

 

 

후기

책의 출간을 미루고 추이를 지켜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가 답했다. “아닙니다. 만약 내가 또 다른 무언가 놀라운 일을 해낸다면 그때 가서 2권을 쓰시면 됩니다.” 그는 그 생각을 하며 미소를 띠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니면 적어도 꽤 긴 후기를 쓰시게 되겠지요.”

 

잡스가 타계했다는 소식에 전 세계 사람들이 강렬한 감정을 분출했다. 모종의 성지와 같은 추모지가 즉흥적으로 수백여 도시와 마을에 조성되었다. 심지어 억만장자 기업가들의 비행을 성토하는 ‘월가 점령’ 시위가 열리던 주코티 공원에도 추모 장소가 생겨났다. 결코 생뚱맞다거나 부적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 세계인이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토해 내는 것은 약물에 찌든 록스타나 파란만장한 삶을 산 공주가 죽었을 때나 나오는 것으로 여겨지던 터여서, 한 기업가를 열렬히 기리는 모습을 보고 모두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스티브가 제게 자신의 장례식에서 첼로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행사가 시작되자 요요마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저는 그보다는 제 장례식에서 스티브가 추도사를 해 주면 좋겠다고 답했지요. 늘 그랬듯 스티브는 또 이렇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요요마는 바흐 조곡을 연주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중간에 죽기 마련입니다. 어떤 이야기의 중간에. 많은 이야기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들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천재로 봅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자들……. 바로 그들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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