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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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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
유쾌한 인문학자로 돌아온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한마디로 ‘편집’이라고 정의한다. ‘에디톨로지(edit+ology)’는 ‘편집학’이다. 그러나 단순히 섞는 게 아니다. 그럴듯한 짜깁기도 아니다. ‘에디톨로지’는 인간의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편집 행위에 관한 설명이다. 즉, 즐거운 창조의 구체적 방법론이 바로 ‘에디톨로지’인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마우스라는 도구의 발명이 인간 의식에 가져온 변화를 중심으로, 지식과 문화가 어떻게 편집되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2부에서는 원근법의 발견이 가져온 공간 편집과 인간 의식의 상관관계를 다룬다. 3부는 심리학의 본질에 관한 부분으로, 심리학의 대상이 되는 인간, 즉 개인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는가 등을 살핀다.
저자
김정운
출판
21세기북스
출판일
2014.10.24

 

0. 프롤로그 - 편집된 세상을 에디톨로지로 읽는다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라는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여행자유화에 관한 임시 법안을 발표할 때였다. 독일어에 서툴렀던 외국 기자가 언제부터 그 법안이 유효하냐고 묻자, 샤보브스키는 아무 생각 없이 “바로(sofort)” “즉시(unverzüglich)”라고 대답했다. 아주 사소한 말실수였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 있던 기자들은 “지금부터, 즉시 서독 여행이 가능하다!”라는 기사를 송고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동베를린 주민들은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관문인 ‘체크포인트 찰리’로 몰려나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던 경비병들은 결국 주민들의 요구에 굳게 닫힌 철문을 열어주고 뒤로 물러났다.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황당한 말실수로 무너진 것이다.

 

 사실 객관적 척도가 있을 수 없는 인문학적 주장은 듣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가 결정적이다. 말하는 이에 대한 기본적인 ‘리스펙트respect’가 없으면 아무리 우겨도 안 듣는다.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은 디자인이나 비전이 아닌, 기존의 제품을 개량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편집 능력에 있다.

 

 ‘창조는 곧 편집’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일본 문화를 ‘저수지 문화’라고 표현한다. 모든 문화가 저수지의 물처럼 밀려와 고인다는 이야기다. 고진은 “일본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들인다!”라는 기막힌 문장으로 일본 문화를 정의한다. 일본이 사용하는 문자도 한자, 히라가나, 가타카나 세 종류다. 세 문자의 구성 원리는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들어온 의미 체계는 한자로, 서구에서 들어온 의미 체계는 가타카나로,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형성된 자신들의 의미 체계는 히라가나로 각 맥락에 맞게 표기한다. 그 원칙도 때에 따라 달라진다. 문자가 그렇다 보니 문법도 당연히 간접화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느 맥락에서 온 것인지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을 말할 때도 단언하는 법이 없다. 항상 “~라고 생각합니다~(と思います)”라는 표현을 쓴다. 자신의 생각조차 상대화시키는 것이다. 이래저래 일본은 편집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Karatani Kojin, 1941~) ::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현재 컬럼비아대학 객원교수로 있다. 그는 문예비평(문단비평)이라는 협소하고 자족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근현대 철학 사상과 끝없이 투쟁하면서 <자본주의=민족(Nation)=국가(State)>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라는 실천적 통로 찾기 위해 지금도 계속 이동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Karatani Kojin] (해외저자사전, 2014. 5., 교보문고)

 

 마츠오카 세이고(松岡正剛)는 아예 일본을 ‘편집 국가’로 정의한다. 아기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절에서 하는 일본은 세계의 모든 종교가 공존하는 나라다. 뿐만 아니다. 세계의 좋은 것은 죄다 모아다 놓는다. 에펠탑을 흉내 낸 엉성한 도쿄 타워가 에펠탑보다 더 높다고 자랑한다. 도쿄의 대규모 인공섬 오다이바에는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축소해 만들어놓고 좋아라 한다. 한국에서라면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을 일들이 일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그게 일본이다.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 즉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는 일본식 문화 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세이고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아예 ‘방법으로서의 일본’을 주장한다. 일본 문화에는 특별한 주제가 없다는 거다. 따라서 특별한 내용의 일본 정체성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것들이 대립이나 갈등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바로 그 편집 방법에 일본의 정체성이 있다는 거다.

 

 책을 비롯한 모든 문화 콘텐츠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쓸 까닭이 없다.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어야 진짜 실력이 있는 거다. 아무도 못 알아듣게, 어렵게 쓰는 것이 가장 쉽다.

 

 

 

PART 01.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01 왜 에디톨로지인가?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인간도 동물이다. 그러나 동물과 달리 인간은 매일매일이 발정기다. 존재 자체가 성욕 덩어리다. 밤낮으로 섹스만 생각한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기회만 나면 상대방의 성적 매력을 탐색한다. 옷을 다 입고 있어도 어떻게든 찾아내 상상한다. 하물며 나체를 본다면 어떨까? 남자나 여자나 이성의 벗은 몸을 보게 되면, 성기 쪽으로 시선이 가게 되어 있다. 저항할 수 없는 동물적 본능이다. 그 위에 아이팟을 올려놓은 것이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무서운 광고다.

 ‘24시간 발정기’ 말고도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생식기 결합이 갖가지 상징으로 매개된다는 사실이다. 에로티시즘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인간 미학은 바로 이런 내면화된 발정기 때문에 나타났다. 즉, 시도 때도 없는 성욕의 ‘기호학적 매개(semiotic mediation)’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극의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고 한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 창조적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가 벌어진다. 창조적 인간은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확 잡아챈다. 위대한 창조는 그렇게 사소하게 시작된다.

 정신질환도 마찬가지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을 둘러싼 자극 가운데 부정적인 자극만 받아들인다. 자신에 관한 긍정적 자극은 건너뛰고, 부정적인 자극만 자꾸 보게 되는 것이다. 안 보면 또 불안해진다. 한번 빠져들면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악순환의 덫이다.

 

 보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무주의 맹시(無注意盲視, 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현상이 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무주의 맹시 :: 눈이 특정 위치를 향하고 있지만 주의가 다른 곳에 있어서 눈이 향하는 위치의 대상이 지각되지 못하는 현상이나 상태.
[네이버 지식백과] 무주의 맹시 [inattentional blindness] (실험심리학용어사전, 2008., 시그마프레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이렇다. 피험자들에게 검은 옷의 선수 세 명과 노란 옷의 선수 세 명이 서로 농구공을 주고받는 짧은 동영상을 보여준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선수들 사이로 공의 움직임을 좇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때 피험자들에게 노란 옷의 선수들이 패스를 몇 번 하는지 정확히 세어보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진짜 실험은 다른 쪽에서 시작된다. 선수들이 공을 주고받는 동안, 커다란 고릴라가 화면 오른쪽에서 천천히 나타난다. 가운데로 걸어 나온 고릴라는 정면을 바라보며 가슴을 두드린다. 그러고는 서서히 왼쪽으로 걸어가 사라진다. 화면이 정지된 후, 사람들에게 노란 옷의 선수들이 몇 번이나 공을 주고받았는지 물어본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원래 의도했던 질문을 던진다. 

 “화면에 나타난 고릴라를 봤는가?”

 실험 결과는 놀랍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고릴라를 못 보았다고 답한다. 인종, 성별, 직종, 계층에 상관없이 매번 5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지식을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이 첫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이나 ‘무주의 맹시’와 같은 왜곡된 현상들이 이미 나타난다. 받아들인 자극은 정보를 구성하고, 그 정보는 서로 연합하여 지식으로 발전한다.

 

 창조는 편집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한마디로 ‘편집’이라고 정의한다.

 비슷한 개념은 많다. 통섭, 융합, 크로스오버, 최근엔 콜라보레이션까지. 에디톨로지와 유사한 이런 개념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너무 세분화되어 서로 전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다. 거의 바벨탑 수준이다. 세상을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최소 단위로 나누고, 각 부분을 자세히 분석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근대의 해석학은 그 한계를 드러낸 지 이미 오래다. 오늘날 통섭, 융합을 부르짖는 이유는 이 낡은 해석학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얼리버드(early bird)론’은 콩쥐팥쥐 이야기만큼이나 식상한 전설이 되었다.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설사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치자. 그럼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뭔가. 일찍 잡혀 먹히기밖에 더하겠냐는 거다. 그러는 거 아니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도 없다! ‘창조는 편집이다.’

 

 

 

02 창조의 본질은 낯설게 하기다 

 

 의문은 의미를 부여하려는 행위다. 의문이 생기는 순간 그림의 자극들은 ‘정보’의 수준으로 올라온다. 의문을 가져야 ‘지식’ 구성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질문 없는 삶이 가장 한심한 거다. 도무지 알고 싶은 게 없으니 그 어떤 의미 부여도 안 되는 까닭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각 자극들 간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 부여가 불가능하니, 자극에서 정보로의 전환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자극이 정보로 전환되지 않으면 지식은 절대 구성되지 않는다. 그저 자극들의 집합일 따름이다.

 

 배가 나올 대로 나온 아저씨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면 대부분 어리둥절해한다. 이 분야에 대해 이제 별로 설레는 것도 없고, 더 이상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저씨들의 삶이 그토록 우울한 거다. 그 어떤 에로틱한 상상력도 불가능한 순간, 삶은 바로 맛이 간다. 한 방에 훅 간다. 그저 한순간이다.

 

 ‘지식-정보-자극’, 에디톨로지는 이 세 가지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서 출발한다. ‘지식(knowledge)’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다. 새로운 지식이란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 구성된 지식은 또 다른 지식과 연결되어 ‘메타 지식(meta-knowledge)’을 구성한다. 전문가들끼리의 이야기는 이 메타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어려운 거다. 공부한다는 것은 이 메타 지식의 습득을 뜻한다.

 ‘정보(information)’는 ‘의미가 부여된 자극(stimulus)’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극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지각한 자극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해석은 곧 의미 부여의 행위다. 이렇게 해석을 통해 의미가 부여된 자극을 정보라고 부른다. 정보는 혼자서 해석될 수 없다. 반드시 다른 정보와 관련되어 설명된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은 생각해낼 수 없다!

 인간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창조(creation)’는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인간은 그저 신의 흉내만 낼 따름이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creative)’, 즉 ‘창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창의성(creativity)’이라 해야 옳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지식인(?)인 ‘네이버지식인’

 

 생각이라는 우리의 인지 과정 자체가 그렇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 상상도 못하는 것은 절대 생각해낼 수 없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들, 들은 적 있었던 것들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인지발달 심리학자 피아제(Piaget)는 생각의 본질을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presentation’, 즉 ‘보여주다’라는 의미에 반복을 뜻하는 ‘re-’가 붙은 것이다. ‘다시 보여주다’라는 뜻이다. 생각이란 어디서 한 번은 본 것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의 생각은 ‘그림’인가, 아니면 ‘문장’인가? 심리학의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갑론을박 끝에 심리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대충 이렇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어려울 때는 문장으로 생각한다. 그림으로 생각하는 것을 ‘심상(image)’이라고 한다.  

 이미지, 즉 심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문장은 그 다음이다. 복잡한 일이 있을 때만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생각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가 있다. 문장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사유(思惟)는 언제나 2차적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진 다음에 난다’는 헤겔의 주장은, 문장으로 구성되는 논리적 사유는 항상 2차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이가 도대체 언제부터 생각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피아제는 ‘지연모방(deferred imitation)’이라는 개념을 끄집어낸다. 흉내를 내기는 하되, 한참 지난 후에 하는 것을 뜻한다. 내적 표상을 끄집어내 모방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을 그 자리에서 바로 흉내 내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는 신경세포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런 본능적인 모방 행위는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상대방의 정서를 흉내 내며 의사소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후 약 1년이 지나면, 아기는 지연모방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언젠가 봤던 상대의 행동을 머릿속에 사진처럼 저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상징으로 매개되는 생각, 즉 표상이 가능해지는 시기다. 이때부터 아기의 본격적인 인지 발달이 시작된다. 그 이전의 단계는 진짜 생각이 아니다. 그래서 피아제는 ‘감각운동적 지능(Die sensomotorische Intelligenz)’이라는 묘한 표현을 쓴다. 생각을 하기는 하되, 감각운동기관을 통해서 생각한다는 거다. 아주 원시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의 본질이 ‘어디선가 본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면, 창의적 사고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창의적 사고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단계부터 다르다.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Shklovsky)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창조적이고 싶다면 무엇보다 이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낯설게 해야 한다.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다.

 

 창조는 아주 미학적인 개념이다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호한 창조 개념 때문이다. 어떤 개념이 명확치 않을 때는 개념의 구성사를 살펴봐야 한다. 도대체 언제부터, 왜 이 개념이 쓰이기 시작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개념을 둘러싼 사회 상황과 시대정신의 맥락을 읽어내면,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분명해지는 까닭이다.

 

 한자로 ‘창조(創造)’라는 표현은 언제부터 쓰인 것일까? 창조는 1867년 일본에서 간행된 『게이오재판영일대역사전(慶応再版英和対訳辞書』에서 처음 나타난다. ‘creativity’의 번역어였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한국도 창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919년, 당시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던 김동인, 주요한 등이 만든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 이름도 《창조(創造)》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를 벗어나 60~70년대에 이르면, 한국의 학계는 미국이나 유럽의 학문을 직접 수입할 수 있는 인적·물적 토대를 확보하게 된다. 당시 한국 학계는 일본식 조어인 창조보다는 ‘창의(創意)’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게 된다. 특히 미국식 심리학·교육학이 한국 교육계 일반에 확대되면서 창의라는 표현이 대세가 된다. 일본의 경우 창의는 ‘originality’에 대응하는 번역어다. 

 한국에서 창의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 또 다른 이유는 창조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의미 때문이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신의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특히 기독교의 영향이 동양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강했던 한국에서 창조를 일상어 혹은 학술어로 사용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한동안 종교적 어휘로만 쓰이던 창조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창조산업(creative industry)’이나 ‘창조경제(creative economy)’라는 단어가 문화콘텐츠산업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창조라는 표현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심리학·교육학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creativity’의 번역어로 창조보다는 창의를 사용한다. 창의력, 창의성과 같은 단어가 이미 학술적 어휘로 깊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의 독일어의 ‘Kreativität’, 영어의 ‘creativity’가 일상적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다. 물론 ‘신의 행위’로서의 ‘창조(creatio)’는 원시 기독교에서부터 사용되어왔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서의 창조는 17세기에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폴란드의 미학자 타타르키비츠(W.Tatarkiewicz)는 자신의 책 『여섯 가지 개념의 역사Geschichte der sechs Begriffe』에서 17세기 폴란드의 사르비에브스키(K.M.Sarbiewski)가 시인의 행위와 관련해 ‘새롭게 창조한다(de novo creat)’라는 표현을 제일 먼저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사르비에브스키의 창조 개념은 시에만 국한된다. 즉, 미술이나 조각과 같은 여타 예술은 대상을 모방할 뿐이지만, 시인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 신의 방식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외부 대상의 모방 혹은 재현(representation)과 창조의 개념적 구분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보다 확실하게 자리 잡는다.

 19세기 말 인상파로부터 20세기 초반의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추상회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천 년간의 회화 표현 방식이었던 재현의 해체가 시작된다. 더 이상은 외부 대상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구상회화의 포기는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예술’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예술과 연관해 사용되기 시작한 창조의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들어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창조의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을 잘 분석해보면 주로 미학적 차원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롭다’혹은 ‘창조적이다’라는 표현은 주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 가리켜 독일의 사회학자 레크비츠(A.Reckwitz)는 창조경제의 핵심은 ‘미학적 자본주의(Ästhetischer Kapitalismus)’에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경제를 경영학적·경제학적 혹은 사회학적 개념으로만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미학이 빠져 있는 창조는 막힌 길이다. 창조경제는 곧 미학인 것이다. 

 

 

 

03 지식권력은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 

 요즘 애들은 참 문제라며 혀를 찬다면 당신은 정말 늙은 거다. 정보를 얻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정보의 조합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 또한 전혀 다르다. 이런 방식이라면 그들이 구성해갈 미래 역시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맘에 안 들어도 할 수 없다. 미래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그들이다.

 

 편집자에게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

 더 이상 정보 자체가 권력이 아닌 세상이다. 정보 독점은 이제 불가능하다. 세상의 권력은 정보를 엮어내는 편집자들의 몫이다.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에 올라가는 기사를 선택하는 권력은 전국 종이 신문 데스크 권력을 다 합친 것보다 강하다.

 정보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다. 다양한 방식의 편집이 가능한 지식 편집의 시대다.

 

 정보가 부족한 세상이 아니다. 정보는 넘쳐난다. 정보와 정보를 엮어 어떠한 지식을 편집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세상이다. 예전에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었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다. 천재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이란, 단어 뜻 그대로 세상의 모든 지식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는 뜻이다. 이 그물망에는 계층적으로 체계화되어 있거나 조직화되어 있는 지식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물 위의 한 ‘노드(node)’, 즉 ‘마디’를 누를 때라야 비로소 권력의 중심이 생겨난다. 

 몇 개의 지식이 경쟁할 경우, 그물의 마디를 보다 강하게 누르는 쪽으로 권력이 몰리게 되어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모든 지식들은 다시 편집되며 하나의 지식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편집된 지식은 수시로, 그리고 아주 빨리 바뀐다.

 

 본질은 지식권력의 이동이다!

 대학은 계층적 지식의 생산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곳이다. 대학의 지식권력은 각 전공의 커리큘럼, 논문, 학위, 학회와 같은 제도를 통해 유지된다. 대학의 지식권력은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Science Citation Index)’ :: 미국 톰슨사이언티픽(Thomson Scientific)(구 ISI)가 과학기술분야 학술잡지에 게재된 논문의 색인을 수록한 데이타베이스. 
톰슨사이언티픽(Thomson Scientific)사는 1958년 설립된 학술정보전문 민간기관으로서 매년 학술적 기여도가 높은 학술지를 엄선하고, 동 학술지에 수록된 논문의 색인 및 인용정보를 데이터베이스(SCI DB)화하여, 이를 필요로 하는 수요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SCI에는 설립초기부터 현재까지 구축한 천만건 이상의 과학기술정보가 수록되어 있으며, 특정 논문이나 책 등이 얼마나 많이 인용되었는지, 또 어떤 다른 논문에 인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톰슨사이언티픽(Thomson Scientific)사는 매년 전 세계에서 출판되고 있는 과학기술저널 중에 자체 기준과 전문가의 심사를 거쳐 등록 학술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SCI의 등록여부는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학술지 평가기준이 된다.
또한 톰슨사이언티픽(Thomson Scientific)에서 선정한 학술지에 수록된 논문은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SCI의 인용도에 따라 과학논문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SCI의 수록 논문수 및 인용도는 국가 및 기관간의 과학기술 연구 수준을 비교하거나 연구비 지원, 학위인정 및 학술상(Award) 심사 등의 반영자료로도 활용된다.
한편, 톰슨사이언티픽(Thomson Scientific)사는 SCI외에 '사회과학논문 인용색인(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 '예술 및 인문과학논문 인용색인(A&HCI:Art and Humanities Citation Index)' 등도 제공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 [SCI]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황우석 논문의 문제를 파해친 곳은 대학이 아니다. 한국 최고의 대학교수들이 공동저자로 집단 등장하고, 세계적인 잡지의 전문 심사위원들이 검증하고 인정한 논문을 허위로 밝혀낸 곳은 인터넷 취미 공간이었다. 

 한국 사회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다들 그의 논문이 참인지 거짓인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국가적 자존심의 훼손만 걱정했다. 그러나 황우석 사건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지식권력이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여태까지의 지식은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지식은 대학이 정한 절차에 따라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교수는 지식을 심사하고, 그 결과에 권위를 부여하는 지식권력 시스템의 최정점이었다.

 이 같은 국가 공인의 지식권력이 보장하고, 세계적 지식권력에 의해 검증된 국가적 자부심인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에 의해 처절하게 붕괴된 것이다. 지식 편집의 독점권을 가진 대학의 붕괴가 황우석 사건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교수들만 모른다. 이제 지식권력은 대학에 있지 않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한국에도 경제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경고의 글이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에 나돌기 시작했다. 교수를 비롯한 경제 전문가들은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기고한 100여 편의 글들은 한국의 환율변동, 주가지수의 변화에 관해 기막힌 예언을 내놓았다. 희한하게도 그의 글들은 실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다들 미네르바의 정체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대학교수나 유명 경제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추측했다. 남의 칭찬에 참으로 인색한 대학교수들조차 미네르바야말로 최고의 경제 전문가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네르바의 주장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심상치 않자, 국가 경제를 책임지는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나서서 반론을 제기했다. 결국 ‘허위사실 유포’라는 아주 황당한 죄명으로 미네르바를 잡아들였다. 그런데 그 범인(?)을 잡고 보니 상황은 더 황당해졌다. 미네르바의 정체는 대단한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다. 교수도 아니었다. ‘전문대 출신의 무직자’였다.

 

 충격의 핵심은 그가 어떻게 그토록 정확하게 경제 변동을 예측할 수 있었는가가 아니었다. 그가 전문대 졸업자라는 사실이었다. ‘고작’ 전문대 출신이 그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정작 미네르바 자신은 인터넷의 잡다한 지식을 짜깁기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짜깁기가 아니었다. 실제 경제 현실에 적용하여 검증된, 아주 정당한 ‘지식 편집’이었다. 그 어떤 경제 전문가보다도 훌륭한 지식 편집이었다. 대학에서 인정하는 논문과 학위 시스템에서만 가능했던 지식 편집이 이제는 인터넷상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에 기존의 지식 권력자들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나 정도의 지식을 갖춘 익명의 지식인은 인터넷 공간에 수두룩하다.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독일 박사 학위라는 권위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내 얄팍함이 느껴질 때마다 참으로 비참해진다. 대학의 지식권력이 아직까지 유지되는 이유는 오로지 학위 때문이다.

 

 미네르바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은 미네르바가 ‘전문대졸 무직자’라는 사실만을 이야기 한다. 지식 권력의 붕괴를 은폐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 편집의 독점적 권한이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 엄청난 충격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은 지금도 미네르바가 가짜라고 주장한다. 석·박사 학위 없이 인터넷 검색만으로 그 엄청난 지식을 축적할 수는 없다는 거다. 

 황우석 사건과 미네르바 사건은 지식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종이 위에 쓰인 텍스트 중심의 논문식 지식 편집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A4용지에 글자 크기를 정하고, 각주·미주·참고문헌의 작성 요령에 따라 쓰인 텍스트로서의 논문을 심사하고, 폼 나는 가운의 석·박사 학위를 주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대학의 지식 편집권력은 이미 끝났다.

 

 하이퍼 텍스트 :: 파생텍스트라고도 한다.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Theodore Nelson)가 'hyper(건너 편의, 초월, 과도한)'와 'text'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 용어이다.
일반 문서나 텍스트는 사용자의 필요나 사고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계속 일정한 정보를 순차적으로 얻을 수 있지만, 하이퍼텍스트는 사용자가 연상하는 순서에 따라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즉, 문장 중의 어구나 단어, 그리고 표제어를 모은 목차 등이 서로 관련된 문자데이터 파일로서, 각 노드(node)들이 연결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효율적인 정보검색에 적당하다. 여기서 노드는 하이퍼텍스트의 가장 기초적인 정보단위를 말한다.
하이퍼링크(hyper link)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것으로 독자들이 기존 텍스트의 선형성(線形性)·고정성·유한성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개념이다.
실제로 독자들은 한 텍스트 안에서 건너뛰어 읽거나 각주(脚註)로 옮겨가거나 다른 텍스트를 참고하려고 읽기를 멈추거나 아니면 다른 텍스트가 더 좋을 듯 싶어 읽기를 포기하는 일 등을 언제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컴퓨터와 현대적인 소프트웨어가 많이 도입되면서 텍스트의 이동능력, 즉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옮겨가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미국 작가 조지 P. 랜도(George P. Landow)는 저서 《하이퍼텍스트 Hypertext》(1992)에서 탈중심화(decentering)의 기획,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개념, 쓰기 좋은 텍스트(writerly text), 선형적·고정적 텍스트의 탈피 등과 같은 이론적 개념을 기술적으로 보완한다고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이퍼텍스트 [hypertext] (두산백과)

 

 

 

04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쥐 때문이다! 

 천재의 생각은 날아갔다 다시 돌아오고 ‘또라이’는 그냥 쭈욱 날아간다!

 천재의 생각은 날아다닌다. 그러나 그 날아다니는 생각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날아다니는 생각은 천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라이’의 특징이기도 하다.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천재는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또라이는 그렇지 못하다. 생각이 그냥 계속 날아간다. 자신의 생각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마구 날아간다.

 오늘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보통사람들도 천재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쥐’ 때문이다. 그건 컴퓨터의 ‘마우스’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생각을 날게 하는 도구를 갖게 된 것이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관심 있는 곳을 클릭하면 생각은 바로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방금 전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다. 이건 엄청난 혁명이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은 도구에 의해 매개된다. 숟가락을 들면 ‘뜨게’ 되어 있다. 젓가락을 손에 쥐면 ‘집게’ 되어 있다. 포크를 잡으면 ‘찌르게’ 되어 있고, 나이프를 들면 ‘자르게’ 되어 있다. 평생토록 하루에 세 번씩 ‘뜨고’ ‘집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의 의식과 ‘찌르고’ ‘자르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의 의식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서양인이 동양인에 비해 훨씬 공격적인 이유다.

 구 소련의 심리학자 레온티예프(Leontjew)의 ‘활동 이론(Tätigkeitstheorie)’이다. 인간 의식은 행위가 일어나는 물질적 맥락에 따라 형성된다는 주장이다. 활동 이론은 인간 의식의 ‘외화(外化,Veräußerung)’ 혹은 ‘대상화(Vergegenständlichung)’를 다룬 독일 관념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심리학적으로 보완하려던 교조적 이론이기도 하다.

 

 인간 의식의 외화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상세계의 ‘내면화(Verinnerlichung)’도 당연히 일어난다. 의식의 내면과 대상세계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심리학과 여타 사회과학 사이의 긴장 영역이다.

 

 마우스의 발명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을 넘어선다!

 20세기 말, 마우스의 발명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을 뛰어넘는 엄청난 혁명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 드디어 수천 년간 인간 의식을 옥죄고 있던 ‘텍스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이와 텍스트, 그리고 인쇄의 발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해준 엄청난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한 시대를 열었던 혁명은 그다음 시대로의 이행을 막는 반혁명적 장애물이 된다. 역사의 변증법이다.

 종이 위에 써야 하는 텍스트의 공간적 범위는 기껏해야 A4용지 크기를 벗어나기 힘들다. 인간 의식의 크기가 A4용지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거다. 또한 좌에서 우, 혹은 우에서 좌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써 나가야 한다. 이 같은 텍스트의 2차원적 한계는 종이라는 매체를 버리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A에서 D로 가려면 반드시 B와 C를 거쳐야 한다. 건너뛰거나 날아갈 수 없다. 서술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으면 텍스트로 인정받기 어렵다. 논리의 비약은 바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날아다니는 생각을 대상화해 논리적 텍스트로 구현하는 순간, 창조적 내용은 사라지고 만다. 인간 의식의 대상화가 필연적으로 끌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헤겔식 ‘자기소외’ 현상을 피할 수 없다.

 끝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창조적 사유가 좁디좁은 사각형의 2차원적 공간에 갇혀버린다. 이 같은 텍스트가 가진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 있다. 소수의 사람이 정해진 장소에서만 이 방법을 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바로 대학이다. 대학에서 논문을 쓸 때만 텍스트의 한계를 벗어나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각주’와 ‘미주’다. 상하좌우의 직선적 흐름에 구속된 텍스트의 한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은 논문을 쓰며 각주와 미주를 사용하는 것이다.

 국가 공인의 지식 편집권력 기관인 대학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논문이라는 독특한 지식 편집 시스템을 개발했다. 지식 편집 방법으로 각주, 미주, 색인, 참고문헌, 인용의 원칙 등을 개발해 지금까지 그 독점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학위 논문을 쓸 때, 지도 교수의 논문지도란 대부분 인용부호, 각주, 미주, 그리고 참고문헌과 관련되어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논문은 인간의 창조적 생각을 대상화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그 엄청난 지식 폭발을 논문만으로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논문 쓰기로 지식 편집권력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마우스는 그냥 쥐가 아니다!

 텍스트의 한계는 ‘타자기’라는 매체 때문에 더욱 치명적이 된다. 인류가 손글씨를 포기하고 타자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객관성과 정확성 때문이다. 타자기로 규격화된 텍스트는 정보를 보다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타자기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타이피스트라는 직업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각광받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전쟁에서 요구되는 의사소통이란, 개인의 느낌과 생각을 가능한 한 배제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1868년 크리스토퍼 숄스(Christopher Sholes)가 특허 낸 쿼티(QWERTY) 자판은 오늘날의 컴퓨터 키보드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쿼티 자판에서는 많이 쓰는 자판일수록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자주 쓰는 타자기 자판의 키들이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서로 엉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오늘날 컴퓨터 키보드에서 키가 엉키는 일은 절대 없다. 그런데도 150여 년 전에 개발된 타자기식 쿼티 자판의 배열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이버스페이스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컴퓨터의 용량과 데이터의 처리 속도 또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그 컴퓨터와 인간이 만나는 ‘인터페이스’, 즉 키보드는 어찌 그리 원시적이냐고 이어령은 『디지로그』에서 묻는다. 

 그동안 자판 배열을 바꾸려 했던 수많은 시도는 모두 좌절되었다. 그런데 이 컴퓨터 자판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위대한 발명품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마우스다. 마우스는 1968년 스탠퍼드 연구센터의 연구원이었던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의 발명품이다. 당시 연구소의 ‘인간 지능 확장’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마우스는 만들어졌다. 컴퓨터 화면에 ‘커서(cursor)’를 그래픽으로 작동시켜, 생각하는 대로 화면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1979년 제록스(PARC)에서 PC의 효시인 알토(ALTO)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마우스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던 스탠퍼드 연구센터는 마우스의 활용분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수년 후, 고작 4만 달러를 받고 애플 사에 마우스의 특허권을 넘겨버린다. 잡스가 위대한 것은 아무도 몰랐던 그 엄청난 발명품의 진가를 알아보았다는 거다.

 

 마우스를 이용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를 통해 이제 보통사람들도 천재처럼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관심을 ‘클릭’하면 바로 ‘링크’된다. 귀찮게 논문의 각주, 미주의 번호를 일일이 찾아 읽지 않아도 된다. 클릭하면 다 나온다. 드디어 하이퍼텍스트의 시대, 즉 탈텍스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클릭이 터치로 바뀌면서 디지털 기기는 인간적이 된다

 잡스가 애플에 다시 복귀하면서 마우스를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을 꺼내든다. ‘터치(touch)’다. 더 정확히 말하면 터치가 가능한 아이팟이다. 아이리버는 아이팟에 꼼짝없이 당했다.

 사람들은 애플의 디자인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팟이 너무 예뻐서 그렇다는 거다. 아니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 디자인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냐는 거다. 

 터치다. 만지는 거다! 애플 아이팟의 성공은 만지는 데 있었다. 아이팟 1세대는 기계식 ‘스크롤 휠’을 달고 나왔다. 예쁘기는 했지만 그리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2002년에 ‘터치 휠’을 달고 나온 아이팟 2세대부터 열풍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세상의 모든 디지털 기기는 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그런데 만지고 문지르는 디지털 기기가 나온 것이다. 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르기만 해도 아이팟은 바로 반응했다. 드디어 ‘인간의 얼굴을 한 디지털 기기’가 탄생한 거다.

 ‘누르기’와 ‘만지기’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자판을 두드리거나 버튼을 누르는 것은 지극히 공격적인 행위다. 아이팟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부드럽게 만지면 된다.

 터치 휠을 달고 나온 아이팟 2세대 이후 10년 동안, 애플은 수없이 많은 기기를 매년 새로 발표했다. 모델도 바뀌고, 기능도 바뀌었다. 그러나 최신 아이폰, 아이패드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기능이 하나 있다. 터치다. 

 손가락으로 눌러서 반응하는 ‘감압식(減壓式)터치’와 살짝 문지르면 반응하는 ‘정전식(靜電式)터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마우스를 사용하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제일 먼저 개발했지만, 빌 게이츠의 윈도우즈에 형편없이 무너졌던 스티브 잡스는 터치라는 개념을 통해 디지털 시장을 다시 완벽하게 지배하게 된다.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그래서 아무도 만져주는 사람 없고, 만질 사람도 없는 이 땅의 중년 사내들이 요즘 시간만 나면 스마트폰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렇게들 사랑스럽게 문지르고 있는 거다.

 

 

 

05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지식욕도 일종의 허영이다. 한번 폼 나고 싶은 거다. 사람은 남들에게 폼 나 보이고 싶을 때 성장한다.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 :: 헤겔『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편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다. 자기의식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가 ‘욕구하는 자기의식’에서 ‘인정하는 자기의식’으로의 이행이다. 헤겔은『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편에서 타자를 자아로서 의식하지 않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자아로서 충분히 자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자기 확신’이라고 부르고 있고 또 욕구의 경험과 결부시키고 있는 자기 의식의 초보적 형태는 자기 의식의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불충분하다. 그리하여 ‘욕구하는 자기 의식’은 이제 ‘다른 자기 의식’을 전제해야 하는 단계로, 즉 ‘인정하는 자기 의식’의 단계로 이행, 또는 고양하게 된다.
이제 하나의 자기 의식에 대하여 또 하나의 자기 의식이 있다. 양자는 우선 직접적으로는 타자 대 타자의 관계에 있다. 자아는 그 타자가 나를 자립적인 가치로 인정해 주기를 의욕하며, 그가 나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인정해 주기를 의욕한다. 여기에는 인정에 대한 욕구가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정 과정은 투쟁, 그것도 생사를 건 투쟁이다. 그러나 만약 자기 의식의 부정이 단지 죽음을 의미하게 된다면, 그것은 어떠한 발전도 가져오지 않는 결말을 맞게 된다. 부정이 타자의 단순히 죽음을 의미하게 된다면 이는 자기 의식에 대한 자신의 확신마저도 부정하게 된다.
생사를 건 투쟁에서 한편의 자기 의식의 죽음은 다른 한편의 자기 의식의 확신까지도 부정하게 되므로 두 자기 의식은 각자 타자의 승인 혹은 인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승인, 인정은 ‘하나의 자기 의식’에서 보자면 타자가 보존되는 가운데에 타자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고 ‘그’ 하나의 자기 의식을 승인,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본질적 두 계기가 드러나는데, 하나는 ‘순순한 자기 의식’이요, 다른 하나는 ‘물성의 형태를 띠고 있는’ 대타적 의식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기는 일단 서로가 불평등한 대립적 관계’에 있다. 하나의 자기 의식은 자아를 끝까지 고수하고 다른 자기 의식은 생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종결됨으로써 전자는 자립적 자기 의식의 지위를 유지하고 후자는 비자립적 의식이 된다. 전자는 주인이고 후자는 노예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단’이라는 말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 관계는 곧 역전되기 때문이다.
인정투쟁을 핵심 개념을 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귀결은 주인과 노예 쌍방에 있어서 자기 의식의 불충분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쌍방은 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자기실현을 충분히 달성하기 위하여 순순한 사유라는 내적 세계로 후퇴함으로써 자신들의 결함을 보충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헤겔은 금욕주의(스토아주의),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으로 이어지는 서양 고대와 중세의 역사를 통해 예증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정투쟁 [Anerkennungskampf, recognition struggle, 認定鬪爭]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토록 그리웠던 ‘공부하는 캠퍼스의 냄새’였다. 지식을 폼 잡을 수 있었던 그 허영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 쓴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인문·사회 과학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쓰는 경우는 없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전형으로 여겨진 후, 인식주체인 ‘나’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사라졌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주체가 배제된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가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누가 실험해도 같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객관성(objectivity)’,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신뢰성(reliability)’,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는가의 ‘타당성(validity)’, 그리고 그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가의 ‘표준화(standardization)’ 및 ‘비교 가능성(comparability)’이다. 

 과학적 주장이란 그 누구도 주관적 의견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주관성은 과학성의 최대 적이다.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 이 자연과학적 과학성이 어느 순간부터 인문·사회과학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학문의 주어가 생략되어버린 것이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 또한 객관화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같은 객관성의 신화가 구체화되고 제도화된 결과가 바로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신념의 결과다. 그래서 심리학과에 들어가면 통계학과 자연과학적 실험방법론을 필수로 배워야 한다.

 

 20세기 후반, 인문·사회과학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포스트모던 논쟁을 거치면서 ‘객관성의 신화’는 무너진다. 자연과학에서조차 그러했다. 하이젠베르크(W.K.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의 핵심은 객관성의 해체다. 객관성 개념 대신 이제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란 개념이 사용된다. 주체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유효한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상호주관성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에 계몽이나 강요가 설 자리는 없다.

 서구 객관성의 신화에 억눌린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기 이야기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김용옥은 달랐다.

 그는 ‘내 이야기’를 했다. 그가 쓴 글의 주어는 대부분 ‘나’였다.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가다머(H.G.Gadamer) :: 해석학을 발전시킨 현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로 활약했다. 고전 연구를 진척시키고 원전 해석의 문제를 추구하면서, 그의 저서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 1960)에서 철학적 해석학을 전개했다.
그가 말하는 '영향사적 의식'이란, 역사 이해가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여기서 이해되는 것과의 사이에서 서로 지평의 융합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인데, 이때 원전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스스로의 편견을 깨우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또 새로운 편견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가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다머 [Gadamer, Hans—Georg]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크로스 텍스트는 텍스트를 떠나지 못한다

 같은 이야기도 콘텍스트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편집된다는 말이다. 해석학의 본질은 ‘에디톨로지’다.

 한양대 정민 교수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해석의 근거가 무한하다. 고전을 다룰 줄 아는 이는 기본적으로 한 자락 깔고 들어가는 거다.

 나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모두 내 머릿속에서 나와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한두 번 반복하면 ‘자기표절’이라고 욕먹는다.

 난 그래서 앞뒤 꽉 막힌 ‘한글 전용론자’들이 몹시 원망스럽다. 한글의 의미론적 배후에는 죄다 한자가 숨어 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고전 해석학은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과거’가 만나는 곳이다. ‘과거라는 해석의 콘텍스트’ 속의 ‘현재의 텍스트’와 ‘현재라는 해석의 콘텍스트’ 속의 ‘과거의 텍스트’가 서로 교차한다는 뜻이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는 이 ‘과거의 현재’ 혹은 ‘현재의 과거’라는 해석학적 맥락과 아울러 ‘동양의 서양’ 혹은 ‘서양의 동양’이라는 해석학적 맥락이 이중적으로 교차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래서 남들은 전혀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한계도 있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는 반드시 텍스트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를 떠나면 ‘순 구라’가 되는 까닭이다. 개신교 목사나 가톨릭 신부가 『성서』라는 텍스트를 떠나면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콘텍스트를 바꿔가며 한 이야기 또 해도 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김용옥의 정치적 발언들이 조마조마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크로스 텍스트의 숙명이다.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유학을 다녀온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수들에게는 누구나 자기 전공이 있다. 흥미롭게도 다 위대한 서구 학자를 전공했다. 헤겔 전공, 마르크스 전공,?하버마스 전공 등등. 나 또한 비고츠키(L.S.Vygotsky)를 전공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상하다. 그럼 헤겔은 누구 전공인가? 마르크스나 하버마스는 대체 누구를 전공했단 말인가?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도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증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 국내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옳은 소리다. 깜냥도 안 되는 미국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들이 수십만 달러씩을 받고 한국 사회에 대해 아는 체하며 훈수 두는 것보다 훨씬 정직한 태도다.

 한국의 콘텍스트에서 새로운 텍스트가 가능하려면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해야 한다. 텍스트의 해체와 재구성은 김용옥 식 크로스 텍스트로는 불가능하다. 탈텍스트, 즉 하이퍼텍스트가 가능해야 한다.

 

 ‘IT 혁명’이라며 다들 ‘디지털’을 이야기하고 흥분할 때,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인 ‘디지로그’를 이야기했다. 디지털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다. 비데가 나왔다고 화장실 휴지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휴지는 더 고급이 되어야 한다.

 이어령이 말하는 디지로그 개념의 핵심은 디지털의 발전이 아날로그의 변화를 가져오고, 아날로그는 여전히 디지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폰의 터치다. 앞서 설명한 대로 디지털을 쓰다듬고 만지는 아날로그적 행위가 아이폰의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이다.

 

 실존철학 :: 20세기 전반에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간의 현실적 존재로서의 본래적 자기, 즉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적 사조를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실존철학 (매일경제, 매경닷컴)

 

 변증법의 핵심 개념으로 ‘지양(止揚)’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식 번역으로는 아주 폼 나 보이고 그럴 듯하다. 도무지 못 들어본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양’은 독어의 ‘Aufheben’을 번역한 것이다. 독일어로는 지극히 단순한 단어다.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나사처럼 돌면서 위로 올라간다는 변증법적 역사 발전의 메타포를 헤겔은 ‘들어올린다’는 의미의 ‘Aufheben’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번역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적 ‘들어올림’, 이렇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문화·언어적 콘텍스트를 생략하고 헤겔 철학을 읽으려니 그토록 어렵고 힘든 것이다. 그 따위 어설픈 일본식 번역에는 기죽어 지내면서 자기 언어로 학문하려면 그렇게들 폄하한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의심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라

 도대체 그런 새로운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어령은 아주 단순하다고 했다. 그는 기호학적 개념인 ‘선택(paradigmatic)’과 ‘결합(syntagmatic)’의 구조를 설명했다.

 

 음악을 작곡할 때, 작곡가는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 중에서 한 음을 뽑고, 이어지는 음 또한 7음 중에서 또 하나를 뽑는다. 처음에 ‘레’를 뽑았다면, 다음에는 ‘솔’을 뽑고, 그 다음에는 ‘도’를 뽑는 식으로 멜로디를 만들어나간다. 이때 각각의 7음 중에서 한 음을 뽑는 것은 ‘선택’이다. 그리고 이렇게 뽑힌 각각의 음들을 이어가는 것은 ‘결합’이다. 

 음악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려면 현존하는 음악의 선택과 결합 구조를 해체하면 된다. 즉, 각각의 음들이 어떻게 선택되었고, 왜 그러한 순서로 결합되었는가를 의심해보면 된다는 말이다. 바흐의 대위법,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은 모두 그런 식으로 창조된 것이다.

 

 코스요리를 먹는다 치자. 애피타이저를 먹을 때, 메뉴에 있는 여러 가지 애피타이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수프도 하나를 고르고, 이어 샐러드를 고르고, 메인 메뉴를 고른다. 마지막으로 디저트를 고른다. 새로운 메뉴는 선택의 종류를 달리하고, 그 선택의 순서를 바꾸면 가능해진다. 창조적 셰프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주어, 술어, 목적어 등으로 구성되는 문장의 결합 구조를 해체하면 된다. 동시에 주어, 술어, 목적어가 선택된 각각의 맥락에서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고민한다는 말이다.

 

 양주동 :: 호는 무애(无涯). 황해 개성 출생. 1914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보(平壤高普)에 입학했으나, 곧 자퇴하고 한학과 한시에 몰두했다.
1920년 상경하여 중동학교(中東學校) 고등속성과에 입학, 1년 동안 중학 전과를 마치고 도일,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다. 1923년 유엽(柳葉)‧이장희(李章熙)‧백기만(白基萬) 등과 시동인지 『금성(金星)』을 발간, 서시 「기몽」및 「영원한 비밀」을 발표했다. 1928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 1929년에는 『문예공론』을 발간하고 여기에 「조선의 맥박」 등 일련의 시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문예상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1929)를 발표함으로써 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절충주의적 문학론을 폈다.
그 요지는 “민족을 떠난 계급이 없고, 계급을 떠난 민족도 없다. 형식을 떠난 문학도 없고, 내용이 없는 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제일주의와 계급제일주의는 서로 절충, 조화되어야 하며, 내용과 형식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930년 시집 『조선의 맥박』을 간행했고, 1935년경부터 신라향가(新羅鄕歌) 연구에 전심하여, 1937년에는 『청구학총(靑丘學叢)』 19호에 「향가의 해독-특히 ‘원왕생가(願往生歌)’에 취(就)하야」를 발표, 그때까지 향가해독의 독무대를 차지했던 경성제대 교수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소론을 논박하였다. 1942년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공동 간행했으며, 1947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 1946년에 고려가요의 연구저서 『여요전주(麗謠箋注)』를 간행하였다. 1956년에는 『T. S. 엘리어트 시전집역(詩全集譯)』을 간행한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주동 [梁柱東]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이어령은 의문 없이 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가 『천자문』을 배우며 품었던 의심은 이렇다. 

 다들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의 순서로 외운다. 그러나 이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적 독해는 각각의 단어가 ‘선택’되는 그 기호학적 구조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일단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할 때, 왜 하늘을 검다고 하는가에 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하늘이 파란 것을 안다. 그런데 왜 다들 ‘하늘은 검고……’라고 『천자문』을 외우는가.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첫 문장부터 이상한 『천자문』을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1000년 이상 동안 죽어라 외우기만 하느냐는 거다. 이어령은 이런 의심이 가능해야 동양사상에 숨겨져 있는, 방향과 색깔의 연관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렇게 해체할 수 있어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재구조화, 즉 편집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어령의 질문은 계속된다. 왜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순서인가를 의심해야 한다는 거다. 왜 ‘천(天), 현(玄), 지(地), 황(黃)’이라 하지 않는가. ‘천(天)과 지(地)’를 함께 묶고, ‘현(玄)과 황(黃)’을 차례로 묶어내는 이 결합 구조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의심을 할 수 없으면 새로운 생각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어령은 자신의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의 핵심은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고전(古典)’의 ‘전(典)’ 자는 책을 받들고 있는 모양을 상징화한 것이다. 다들 책, 즉 텍스트를 받들고만 있을 때, 자신은 이 텍스트를 해체하는 일부터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로 납득이 안 되면 일단 들이받았다. 텍스트의 선택과 결합 구조를 해체하는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적 사고는 이해 안 되는 것을 묻는 데서 시작한다.

 

 

06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 

 “네 이론은 뭔가?” 독일 지도 교수는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Was ist deine Theorie?(네 이론은 뭔가?)”

 면담 신청을 하고, 몇 달을 기다려 겨우 만난 지도 교수는 내게 물었다. 내가 펼쳐 놓은 논문 계획서는 읽어보지도 않았다. 

 없다고 했다. 당신의 이론을 배우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나가라고 한다. 석사·박사 논문을 쓰겠다는 학생이 어찌 자기 생각이 없을 수가 있느냐는 거다.

 

 한국 학생들은 노트를, 독일 학생들은 카드를 쓴다

 독일인들은 정리에 대한 집단 강박이 있다. 어디든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너무 불안해한다. 거의 공포 수준이다. 사람이 다치면 달려가 “Alles in Ordnung?”이라고 물어본다. 의역하면 “괜찮습니까?”란 뜻이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모든 것이 다 잘 정리되어 있습니까?”가 된다. ‘괜찮은 상태’란 ‘정리가 제대로 된 상태’를 의미한다. 독일 사람들은 죽어라 정리만 한다.

 

 ‘노트’와 ‘카드’, 이 둘 사이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편집 가능성(editability)’이다. 카드는 자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편집이 가능한 반면, 노트는 편집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프로이트의 책을 읽으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을 카드에 정리한다. 카드 맨 위에는 키워드를 적고, 그 밑에는 그것과 연관된 개념요즘 식으로 인터넷의 ‘연관 검색어’을 적고, 출처와 날짜 등을 차례로 적는다. 그리고 카드의 앞·뒷장에 그 내용을 빼곡히 요약한다. 피아제, 비고츠키, 융과 같은 심리학자의 책을 읽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정리해나간다. 이렇게 모인 카드는 주로 알파벳순으로 정리한다.

 독일 학생들은 모은 카드를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시 편집한다. 편집할 수 있기 때문에 카드를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발달’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프로이트, 피아제, 비고츠키, 융의 이론을 자기 기준에 따라 다시 정리한다. 이때 정리는 그저 알파벳순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설정한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카드를 편집하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된 카드가 바로 자신의 이론이 된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엄청난 양의 노트를 보며 달달 외운다. 그러나 자신의 목록을 별도로 만들 방법이 없다. 일일이 뜯어내지 않는 한, 노트를 재구성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남의 이론을 익히고 외울 뿐이다. 그러나 독일 학생들은 카드 목록을 재구성하며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간다.

 남의 이론을 많이,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편집할 수 있는 카드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다. ‘실력이 있다’는 것은 편집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카드로 축적된, 편집 가능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database)’라고 한다. 예전에는 일일이 책을 읽으며 옮겨 적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검색하고, ‘Ctrl,C’ ‘Ctrl,V’ 하면 된다. 이제 실력은 ‘잘 찾아내는 것know-where’에 있다. ‘검색’이 곧 실력이라는 이야기다.

 

 다음 카페와 네이버 지식인의 결정적 차이

인터넷 공간 어딘가에 떼로 모여 놀기는 하는데, 도무지 어디에 있는가를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공간이 아닌 공간’, 즉 ‘가상공간(cyberspace)’인 거다.

 구체적 장소성이 부재하는 새로운 공간적 경험에 매료된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다음(Daum)’이라는 포털 사이트가 나타난다. 그리고 떼로 모여 놀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준다. 바로 ‘카페’다. 다음은 카페를 만들며 사이버 스페이스의 춘추전국시대를 단번에 평정해버렸다. 다음 이전의 컴퓨터 통신은 오프라인에서의 모임을 준비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느닷없이, 내키면 모이는 ‘번개’가 유행했다. 미리미리 약속을 잡아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생략된 것이다.

 다음의 카페가 생기자, 사이버 스페이스상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준비 과정이 아니었다. 온라인 자체만으로도 존재해야 할 충분한 의미가 생긴 것이다. 자기 관심사에 따라 언제든 떼로 모여 놀 수 있고, 놀아도 된다는 이데올로기가 가능해졌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음에 카페를 꾸미고, 전혀 모르는 이들과 떼로 모여 놀기 시작했다.

 

 ‘재미 공동체’의 시작이다. 그러나 다음의 시대는 거기까지였다. 다음은 도대체 왜 사람들이 떼로 모여 놀려고 하는가에 관한 ‘집단 심리학적 동기’에 대해 무지했다.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네이버가 나타난다.

 네이버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막연히 원하는 것을 구체화했다. 왜 사람들이 카페를 만들고 모이려 하는지, 그 무의식적 동기를 시스템적으로 구현했다. 지식을 찾고, 제공하고, 공유하는 ‘지식 검색’이다. 네이버의 지식 검색은 무한한 편집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아울러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데이터베이스를 각자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포스팅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블로거들의 세상이열린 것이다. ‘재미 공동체[다음]’에서 ‘지식 공동체[네이버]’로의 이동이다.

 

 

 

07 편집 가능성이 있어야 좋은 지식이다

‘권력’도 지식이다. 대통령이 새로 선출되면 각 부처의 장을 새로 임명한다. 단순히 부처의 장을 바꾸는 데 멈추지 않는다. 아예 없던 부처가 생기고, 멀쩡하던 조직이 사라지기도 한다. 심심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이전의 권력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권력을 재편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에 따라 조직을 편집한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 생긴 부처는 ‘국토해양부’였다. 이전의 건설교통부가 확대 개편된 것이다. 반면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정보통신부’는 해체되어 지식경제부로 흡수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서도 컴퓨터 문서로 작성할 정도였다.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가 생긴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부처 개편은 이명박 대통령의 경력을 안다면 당연한 결과다. 그는 현대건설 사장 출신이다. 그가 아는 토목 건설 지식에 따라 정부를 편집한 것이다. 4대강 사업과 같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 사업들은 그의 토목 건설 지식이 국토해양부라는 구체적 조직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계층적 지식과 네트워크적 지식

 ‘기업’도 지식이다. 기업의 각 세부 조직은 시장에 대응하는 경영자의 지식이 반영된 결과다. 조직 개편은 그 지식의 재구조화다.

 정부나 기업의 조직이 전제하고 있는 이 같은 지식은 계층구조를 가진 권력 지향적 지식이다. ‘트리(tree)’식 계층구조로 되어 있는 지식 체계, 즉 ‘계층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을 제작한 디드로(D.Diderot)는 인간 정신의 기능을 ‘기억, 이성, 상상력’으로 나눈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분류에 따라 인간의 지식을 분류했다. 기억에는 역사를, 이성에는 철학과 과학을, 상상력에는 시와 예술을 대응시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이 세 분야의 하위 분과에 배치했다. 백과사전의 본질 또한 트리식 분류에 따른 계층적 지식이란 뜻이다.

 

 듀이십진분류법(Dewey Decimal Classification, DDC) :: 1876년에 멜빌 듀이가 고안한 도서 분류 체계이다. 이후 확장, 수정을 거듭해 가장 최근 2011년의 제23판에 이르고 있다.
000 – 컴퓨터 과학, 정보, 총류 (Computer science, information & general works)
100 – 철학, 심리학 (Philosophy & psychology)
200 – 종교 (Religion)
300 – 사회 과학 (Social sciences)
400 – 언어 (Language)
500 – 과학 (Science)
600 – 기술 (Technology)
700 – 예술, 레크리에이션 (Arts & recreation)
800 – 문학 (Literature)
900 – 역사, 지리 (History & geography)
[위키백과] 듀이십진분류법 (Dewey Decimal Classification, DDC)

 

 트리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계층적 지식에는 항상 권력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과장보다는 부장이 힘이 세고, 부장보다는 이사, 부사장이 높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보다 상위 지식 체계를 다룬다. 지식의 체계적 관리를 담당하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다. 힘이 있는 만큼 아는 것이 많아진다.

 최고 책임자는 언제라도 조직도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은 트리식 조직도로 구현되는 계층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적 지식의 탄생, 폭소노미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은 정서 공유를 통한 상호작용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가장 큰 동기는 관심의 공유, 즉 지식과 정보의 공유다. 쉽게 말해, 공부하고 싶다는 거다. 

 ‘학교(school)’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스콜레(scole)’다. 스콜레는 ‘여가를 즐기는 것’ ‘교양을 쌓는 것’ 등을 뜻한다. 그러니까 공부한다는 것은 본래 ‘삶을 즐기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것’을 뜻한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현대인에게 온라인은 새로운 학습 공간이 된다. 물론 대부분은 허접한 놀이로 인터넷 공간을 채운다.

 지식을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는 혈연, 지연, 학연을 떠난, 진정한 의미의 ‘지식 공동체’가 된다. 포털 사이트는 이러한 지식 공동체를 시스템적으로 구현해 놓은 곳이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포털 사이트 곳곳에 올려놓는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올려놓으면, 그 자료를 퍼가는 이들로부터 감사와 찬사를 받는다. 새로운 형태의 인정투쟁이다. 가끔은 ‘파워블로거’가 되어 온라인상의 ‘지식권력자’가 되기도 한다.

 포털 사이트는 각 블로거들이 올려놓은 온갖 종류의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한다. 마치 미국의 심리학 교과서가 한국 심리학자들에게 지식권력의 표준이 되는 것처럼, 포털 사이트에서 체계화된 지식은 새로운 권력이 된다. 열성 블로거들은 자신의 글이 쉽게 그리고 자주 검색되도록 하기 위해 ‘태그(tag)’를 붙인다.

 포털 사이트는 이 태그들을 모아 각 태그들이 겹치는 지점을 찾아낸다. 그 결과,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지식의 새로운 분류법이 생겨난다. ‘폭소노미(folksonomy)’다. 폭소노미는 ‘folk’ ‘order’ ‘nomous’의 합성어로 ‘사람들에 의한 분류법’이란 뜻이다. 소수 전문가들에 의한 분류법을 뜻하는 ‘탁소노미(taxonomy)’에 빗댄 표현이다.

 트리식 계층구조의 지식은 권위적이고 권력적이다. 변화도 아주 느리다. 폭소노미의 지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하이퍼텍스트식의 탈(脫)중심화된, 상호 텍스트 구조로 편집된다. 한마디로 ‘네트워크(network)’적이다.

 오늘날 대학의 교과서나 브리태니커와 같은 계층적 지식권력이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 빈틈을 뚫고 네이버나 구글, 위키피디아와 같은 네트워크형의 새로운 지식권력이 나타났다.

 네트워크적 지식의 등장은 계층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구조의 변화를 가속화한다. 계층적 지식이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완고하게 버틸 수는 없다. 지식권력의 변화는 순식간에, 자주, 그리고 매우 혁명적으로 일어난다.

 

 새로운 지식권력은 편집 가능성에서 나온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계층적 지식과 네트워크적 지식이 공존하는, 이제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지식 편집 구조를 경험하게 된다. 변혁의 시작은 ‘검색(search)’이었다. 트리식 계층구조를 위로부터 일일이 헤집고 찾아 들어가지 않아도, 그저 간단한 단어의 입력만으로 원하는 지식을 죄다 건져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검색된 정보들을 편집해 새로운 지식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처리 가능한 데이터베이스가 크면 클수록, 편집의 범위는 넓어진다. 이제까지 전혀 관계없어 보였던 정보와 정보들 간의 새로운 연관 관계가 발견된다. ‘검색엔진’이 ‘발견 엔진’으로 승화하는 순간이다.

 논리적 사유의 전형적 형태인 연역법(deduction)과 귀납법(induction)은 순환논리다. 주어진 법칙을 통해 사례를 설명하는 연역법은 설명적 추론(explicative inference)이다. 현상을 기존 법칙으로 설명할 뿐, 새로운 인식과는 상관없다. 그 반대인 귀납법도 마찬가지다. 사례에서 법칙을 이끌어내는 귀납법은 평가적 추론(evaluative inference)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연역법은 그 현상이 ‘반드시(must)’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귀납법은 그 현상이 ‘실제로actually’ 그렇다는 것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미국의 논리철학자 퍼어스(C.S.Peirce)는 창조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제3의 추리법을 주장한다. 유추법(abduction)이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아마도(may be)’의 창조적 추론(innovative inference)을 뜻한다. 검색이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아마도’의 질문 때문이다. 

 1960년대 미국 하버드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마사 매클린톡(Martha McClintock)은 기숙사 근처 상점에 생리대를 사러 가면 매번 물건이 동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평소 매대에 가득했던 물건이 자신이 필요할 때면 꼭 다 팔렸다는 것이다. 단지 우연의 일치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 의문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그녀는 ‘생리 주기 동조화 현상’을 1971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함께 생활하는 여학생들의 생리 주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비슷해지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매클린톡 효과(McClintock effect)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의 발견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에 관한 ‘아마도’라는 창의적 추론에서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의 의문을 갖고 검색하는 것은 능력이고 실력이다. 검색창에 단어를 마구 쳐넣는다고 창조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카우보이’ 서재원은 자신의 검색 방법을 ‘서핑(surfing)’이라 부르면 불쾌해한다. ‘딥 다이브(deep dive)’라는 거다.

 

 단순한 검색이나 서핑과 구별되는 발견 과정을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이라고 부른다. 사방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축적된 디지털 데이터들을 어떻게든 연결시켜 의미 있는 해석방법을 찾아내려는 시도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데이터들의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빅 데이터 큐레이터(big data curator)’라는 새로운 직업이 미래의 유망 직종으로 점쳐지기도 한다.

 데이터마이닝 혹은 데이터큐레이팅의 대부분은 상당히 심리학적이다. 애플의 아이팟 셔플의 성공 비결도 각 개인에게 맞춤화된 심리학적 데이터마이닝에 있다. ‘셔플(shuffle)’, 즉 교묘하게 뒤섞는 기능을 가진 성냥갑만 한 아아팟 셔플은 중독성이 강하다. 자신의 기분에 맞는 음악을 귀신같이 알아준다고 해서, ‘아이팟 고스트 신드롬’까지 생겨났다. 아이팟 셔플은 음악을 단순히 섞어서 들려주는 여타 MP3 기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이팟 셔플은 그날그날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이미 저장된 내 음악 취향과 청취 방식에 맞춰 메인 컴퓨터로부터 선별해 옮겨준다.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포스팅된 글을 통해 글쓴이의 심리 상태나 생활 패턴을 데이터마이닝해서 병원 마케팅에 응용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인터넷상에서의 ‘감정 전염(emotional contagion)’은 의외로 빠르고 치명적이다. 인간에게 파괴적 감성을 심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디지털 바이러스’도 방역 대상이다.

 계층적 지식과 네트워크적 지식의 편집 가능성(editability)이 지식의 효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애플이 구글을 이기기 어렵다는 예언은 바로 이 편집 가능성 때문이다. 단지 스티브 잡스가 죽어서가 아니다. 잡스가 고집한 애플 생태계의 폐쇄적인 구조로는 데이터의 축적과 편집 가능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검증 가능성 – 반증 가능성 – 편집 가능성

 과학과 비과학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성(verfiability)’을 주장한다.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이론만이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포퍼(Karl R.Popper)는 인간의 경험은 시공간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며 논리실증주의의 검증 가능성을 비판한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의 기준으로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을 내세운다. ‘백조는 희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백조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검은 백조 한 마리만 발견되어도 그 가설은 틀린 것이 된다. 모든 지식은 이렇게 반증의 사례가 발견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옳은 것이고, 과학적 지식은 이렇듯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포퍼에 따르면 마르크스 이론이나 프로이트 이론은 비과학적이다. 반증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논리 구조는 그럴듯하지만,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가능성 자체가 아예 닫혀 있다. 그러나 포퍼의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반증 가능성에는 시간이라는 요인이 빠져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고, 변화하는 ‘구성주의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먼, 낡은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변종이다. 주체적 행위의 개입이 불가능한, 인식의 주체와 개체가 철저하게 격리된 세계관일 따름이다.

 21세기에는 지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증명해야 하고, 확인해야 할 ‘객관적 세계’에 관한 신념 자체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옳고 그름보다는 ‘좋은 지식’과 ‘좋지 않은 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좋은 지식의 기준은 ‘편집 가능성’에 있다. 현재진행형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적 행위가 가능한 지식이 좋은 지식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는 지식이 좋은 지식인 것이다.

 

 

 

08 예능 프로그램은 자막으로 완성된다 

 TV 예능 프로그램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예능은 원래 예술적 능력을 지칭하거나 연극, 영화, 음악 등의 영역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의 뜻으로만 쓰인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예능 프로그램이고, 어디부터가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 것일까?

 ‘자막’이다. TV의 자막 유무가 예능과 여타 프로그램을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사실 기원을 따져 보자면 자막은 철저히 교양적이다. 뉴스 등의 중요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청각 장애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도입된 보조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자막이 쇼·오락 프로그램에 마구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많은 자막의 정보를 화면과 동시에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몰입한다.

 자막의 주체는 장면을 편집하는 PD일 수도 있고, 시청자일 수도 있다. 자막은 그 상황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일 때도 있고, 의성어나 의태어일 수도 있다.

 

 사실 영상과 음악의 편집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음악이 빠진 영상이 오히려 낯설다. 그러나 자막은 다르다. 이렇게 ‘난삽한(!)’ 예능 프로그램식 자막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영상과 음악만 편집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PD와는 달리, 예능 프로그램의PD는 자막이라는 또 다른 편집 수단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재미를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상에 실제 나오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공의 목소리를 창조해내는 것은 바흐친 소설 미학의 ‘폴리포니(polyphony, 다성성, 多聲性)’의 영상적 재창조라고 할 수?있다. 바흐친의 폴리포니란 음악에서 2성부 이상의 선율이 서로 대위법적으로 얽혀 들어가며 이제까지 없었던 음악적 감동을 창조해내는 것처럼, 소설 또한 무수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서로 맞부딪치며 갈등과 화해의 화음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은 출연자의 멘트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막을 정신없이 좇아가야 한다.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이는 PD의 편집 화면은 시청자로 하여금 TV 안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는 소설, 음악, 영상의 재미가 포괄적으로 편집된, 총체적 경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시청자가 독일의 시청자에 비해 훨씬 뛰어난 영상 독해력과 이해력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문화 소비에 있어 TV 의존도도 높아진다. 그렇다 보니 독일과 달리 한국에서는 연극, 음악회, 미술관 같은 다른 문화 영역이 거의 죽을 쑤고 있다.

 

 자막의 시작은 만화의 말풍선이다

 예능 프로그램식 자막 편집은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나타난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다. ‘예능(藝能)’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렇다. 일본에서는 쇼나 오락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을 통틀어 ‘게노우진(げいのうじん, 芸能人)’이라 부른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게노우진의 숫자는 엄청나다.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거의 수십 명씩이다. 이들 각자가 내는 목소리는 대위법적 폴리포니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다. 거의 소음 수준이다. 게다가 출연자들의 목소리만큼이나 다양한 자막이 화면 상하좌우를 날아다닌다. 자막의 크기나 색깔, 모양 또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 자막은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느껴질 정도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이 이토록 ‘화려한(?)’ 까닭은 자막의 기원이 일본 만화, 즉 ‘망가(漫畵)’의 말풍선이기 때문이다.

 

 우키요에(浮世繪) :: 일반적으로는 목판화(木版畵)를 뜻하며 그림내용은 대부분 풍속화이다. 그러나 우키요에라는 말은 일본의 역사적인 고유명사로, 보통명사로서의 풍속화와는 구별된다. 전국시대를 지나 평화가 정착되면서 신흥세력인 무사, 벼락부자, 상인, 일반 대중 등을 배경으로 한 왕성한 사회풍속·인간묘사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성행하여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가쓰가와 슌쇼[勝川春章]·도리이 기요나가[鳥井淸長]·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우타가와 도요하루[歌川豊春] 등 많은 천재화가를 배출시켰다.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에 들어서면서 사진·제판·기계인쇄 등의 유입으로 쇠퇴하였으나, 당시 유럽인들에게 애호되어 프랑스 화단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키요에 [Ukiyo-e, 浮世繪(부세회)] (두산백과)

 

 망가의 특별함은 ‘화면(畵面)편집’에 있다. 원근법을 무시한 우키요에의 화면 편집이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일본 망가는 화면 편집상의 특별함으로 세계의 만화 시장을 제패할 수 있었다.

 미국 만화의 화면 편집은 단순하다.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장면 수가 거의 정해져 있다. 한 페이지를 비슷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분할한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말풍선 속에 들어 있는 글자 크기도 거의 통일되어 있다. 읽어야 하는 텍스트의 양도 상당하다. 그림이 만화의 중심이라기보다는, 말풍선 속의 텍스트가 중심인 듯하다. 정보 처리의 부담이 책을 읽는 것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본 망가는 다르다.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장면의 수가 제각각이다. 페이지를 빨리 넘겨야 할 만큼 내용이 다급하게 전개될 때는, 장면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한 페이지가 하나의 장면으로 채워지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읽어야 할 텍스트도 거의 없다. 아주 간단한 의성어, 의태어인 경우가 많다. 독자의 마음도 급해져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도 덩달아 빨라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화면이 차분해진다. 망가 주인공들의 대화가 길어진다.

 말풍선 안의 글을 꼼꼼하게 다 읽어야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미국 만화에 비해 일본 만화는 영화를 보듯, 그저 화면만 넘기면 된다. 몰입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같이 독특한 화면 편집으로 일본 망가는 독자들의 정서를 휘어잡을 수 있었다. 미국 만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서적 경험과 몰입을 가능케 하는 화면 편집 방식을 통해 일본 망가는 세계 만화 시장의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망가가 영상적 편집 방식을 만화에 도입했다고 한다면, 요즘의 예능 프로그램은 만화적 편집 방식을 TV 화면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영상과 만화, 텍스트의 ‘에디톨로지’가 21세기 대중매체의 특징이다. 도무지 경계가 없다. 이는 만화나 예능 프로그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09 연기력이 형편없는 배우도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이유 

 예전에는 누가 주연배우인가가 영화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했다. 감독이 누구인가에 관해 사람들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감독이 누군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감독했다면 일단 믿고 본다. 감독의 역량이 영화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을 대중들도 알게 된 것이다.

 ‘작가주의’는 영화감독이 영화의 주체, 즉 영화의 창조자임을 분명하게 한다. 소설 창작의 주체가 소설가이듯, 영화 창작의 주인은 감독이다. 배우나 스토리 작가가 아니다. 감독이 영화의 실체를 구성하는 편집권을 전적으로 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질은 ‘에디톨로지’다.

 

 몽타주 기법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없다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다. ‘몽타주(montage) 기법’ 때문이다. 서로 다른 맥락의 화면을 이어붙이는 방법을 뜻하는 몽타주 기법은 미술에서 나타난 ‘콜라주(collage) 기법’의 연장선에 있다.

 

 브라크 :: 프랑스의 화가.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큐비즘)를 창시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에 최초로 그림 속에 알파벳과 숫자를 그려 넣었고,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는 오려낸 종이 조각들을 캔버스에 붙이는 ‘파피에 콜레’ 기법을 처음 시도했다. 비록 카리스마 넘치는 피카소의 그늘에 가리긴 했지만, 입체파 초기의 혁명적인 실험 정신은 그에게서 나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두산백과)

 

 미술에서의 몽타주 기법은 서로 관계없는 여러 장면, 사진 등을 한 화면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시간의 흐름을 잡아내는 영화에 적용되면서 인류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 영화가 발명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흐르는 시간을 화면에서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어제 일어난 일을 오늘 화면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감격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 스토리 없는 화면은 곧바로 지루해졌다.

 영화 제작자들은 연신 하품을 해대는 관객들을 사로잡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각기 다른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면 새로운 정서적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각기 다른 카메라로 잡힌 화면들의 편집은 다양한 시선의 편집을 의미한다. 세상을 보는 각기 다른 시선이 하나의 시간적 시퀀스로 이어져 편집될 때, 앞서 설명한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처럼 아주 흥미로운 ‘폴리포니’ 효과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영화에서는 몽타주 기법이라고 부른다.

 

 폴리포니 :: 음악의 선율 유형을 나타내는 말.
'폴리포니(polyphony)'는 '다수'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polys'와 'phonos'를 합성한 말로서, 여러개의 선율이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적으로 결함되는 짜임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폴리포니는 결국 2성부 이상의 선율을 독립적이고 선적인 구성으로 다루는 선율 양식, 혹은 음악적 짜임새를 의미한다. 폴리포니는 2개 이상의 독립적 선율의 배합에 기초를 둔 대위법의 성립과 함께 가장 일반적인 양식이 된 것으로, 폴리포니의 음악을 대위법적 음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폴리포니는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음악에 현저하게 이루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폴리포니 [polyphony]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몽타주 :: 몽타주(montage)는 프랑스어 ‘montor(모으다, 조합하다)’라는 뜻에서 사용되어 온 건축용어였으나, 초기 영화에서 필름의 단편들을 조합하여 한편의 통일된 작품으로 엮어내는 편집작업의 총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몽타주는 '편집(editing, cutting)'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으며, 장면분할의 의미로 사용되는 '데쿠파주(decoupage)'도 몽타주와 유사한 개념이다.
이러한 '영화 편집'이라는 개념의 몽타주는 러시아의 영화 이론가이자 감독인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Eizenshtein)에 의해 체계화된 영화의 구성과 기술에 대한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몽타주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몽타주 이론의 틀을 제시한 예이젠시테인은 몽타주는 '단순한 쇼트(shot, 프레임의 연속된 단위)의 결합이 아니라 쇼트와 쇼트가 충돌하여 제3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정의 하였다.
몽타주 이론은 영화는 촬영되는 것이 아니라 조립되는 것, 다시 말해서 원래 따로따로 촬영된 필름의 조각들을 창조적으로 결합해서 현실과는 다른 영화적 시간과 영화적 공간을 구성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 리듬과 심리적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데서 영화의 예술성이 성립된다고 보고 그 방법을 명확하게 하려는 이론이다. 예이젠시테인은 헤겔의 변증법을 몽타주의 기본 구조와 주제의 원리, 그리고 영화 전체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활용하였다. 각 쇼트, 씬, 시퀀스 등을 변증법적 방법으로 배열하여 변증법의 반(反)이론, 즉 제3의 어떤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정반대의 주제를 충돌시키는 방법을 활용하였다.
최초의 몽타주 기법은 러시아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쿨레쇼프(Lev Kuleshov)와 그의 제자인 예이젠시테인과 푸돕킨(V.Pudovkin)  등에 의해 시작됐다. 쿨레쇼프는 프랑스의 실험적인 무성영화들과 미국 그리피스(Griffith)의 영화편집 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그는 이전까지 시간과 공간에 충실하게 연결되었던 영화의 쇼트들을 충돌 병치시킴으로써 똑같은 필름이라도 관객에게 전해지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였던 예이젠슈타인은 《전함 포템킨(1925)》, 푸돕킨은 《어머니 Mother(1926)》 등의 영화에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였고, 몽타주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급하였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의 몽타주는 미장센(mise en scene)과 대비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많이 쓰인다. 즉, 몽타주가 쇼트와 쇼트의 결합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면, 미장센은 단일한 쇼트로써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을 의미한다. 몽타주를 선호하는 제작자는 화면을 여러 프레임으로 편집해서 그것들의 의미를 전달하려 하고, 미장센을 선호하는 제작자는 화면의 전체를 구상한 다음 그것을 하나의 프레임에 다 담아서 보여주고 싶어 한다. 사실주의 영화의 옹호론자인 프랑스의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은 '몽타주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세계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사실주의 정신과는 배치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몽타주 [montage] (두산백과)

 

 쿨레쇼프 :: 쿨레쇼프(Lev Vladimirovich Kuleshov)는 20년대 소련 무성영화 형성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이다. 배우·정치가 등을 거쳐 영화감독이 되었고, 러시아혁명 때는 카메라를 가지고 적군(赤軍)에 참가하여 단편 극영화와 뉴스영화 등을 촬영했하였다. 1924년에 발표한 《볼셰비키국가에서 웨스트씨의 모험 (1924)》은 소련영화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영화를 실험적이고 이론적으로 적극 연구하였고 거대한 표현가능성의 예술로서 인식하면서 영화에서 배우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문법을 창조하였다. 미국 감독 D.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의 영화를 연구하여 영화적인 표현기술을 분석하여 소련에서의 몽타주이론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러시아혁명 이후 국립영화학교(현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서 푸돕킨(Pudovkin) 등과 함께 다양한 영화 실험을 진행하였고, 자신의 학생들과 함께 다큐멘터리 촬영수법과 극영화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기능공 프라이트의 계획(1917)》,《붉은 전선에서(1920)》등을 제작하였다. 그는 실험을 통해 필름 하나하나는 아직 영화가 아니고 그 소재에 불과하며, 영화예술은 이 필름들에게 순서를 부여했을때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창조적인 순서의 차이에 따라서 영화는 온갖 결과를 낳게 되는데, 이것이 몽타주이며,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쿨레쇼프의 영화 실험은 영화배우 이반 모주킨(Ivan Mosjoukine)과 함께 한 실험에서 시작됐다. 쿨레쇼프는 모주킨의 무표정한 얼굴을 각각 아이의 관, 소녀, 식탁에 놓인 음식의 장면과 함께 붙여놓고 각 장면에 따른 의미의 변화를 살폈다. 아이의 관이 찍힌 장면을 함께 편집했을 때는 모주힌의 얼굴이 슬퍼 보이고 소녀의 모습이 담긴 장면 붙였더니 기쁜 듯 보이고 음식 장면과 편집했을 때는 배가 고파 보이는 정서적 효과가 얻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을 통해 쇼트(shot)와 쇼트를 병치시키는 편집에 의해 색다른 의미와 정서적인 효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한 '몽타주' 기법을 영화예술표현방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화적 표현술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증명하였고 이러한 이론은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 또는 '이반 모쥬킨 실험(Ivan Mozhukin experiment)'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쿨레쇼프의 몽타주는 이후 푸돕킨과 예이젠시테인(Eizenshtein)에 의해 완성되어 1920년대 소련 무성영화의 중흥기를 가져왔으며 문화예술로서의 영화가 혁신적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쿨레쇼프 [Lev Vladimirovich Kuleshov] (두산백과)

 

 쿨레쇼프 효과(Kuleschov effect) :: 구 소련의 영화감독 겸 이론가였던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가 주창한 쇼트 편집의 효과. 쇼트와 쇼트를 병치시키는 편집에 의해 색다른 의미와 정서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한 이론이다. 1920년대 모스크바국립영화학교(VGIK)에서 쿨레쇼프가 영화배우 이반 모주힌(Ivan Mosjoukine)을 데리고 한 실험에서 시작됐다. 쿨레쇼프는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각각 아이의 관, 소녀, 식탁에 놓인 음식과 병치시켜 의미의 변화를 살폈다. 아이의 관과 편집했을 때는 모주힌의 얼굴이 슬퍼 보이고 소녀의 모습을 편집했더니 기쁜 듯 보이고 음식과 편집했을 때는 배가 고파 보이는 상이한 정서적 효과가 얻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같은 실험에 의해 쿨레쇼프는 문맥에 의한 쇼트의 연결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화적 표현술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쿨레쇼프의 실험은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의 기초적인 개념을 제공했다. ‘쇼트의 충돌이 새로운 의미를 빚어낸다’는 소비에트 몽타주의 원리는 바로 여기서 기원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쿨레쇼프 효과 [Kuleshov effect, -效果] (영화사전, 2004. 9. 30., propaganda)

 

 쿨레쇼프는 소비에트의 유명한 배우인 모주힌(Mozzhukhin)의 무표정한 얼굴이 찍힌 화면에 각기 다른 세 가지 화면을 이어붙였다. 하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또 하나는 관에 누워 있는 여인, 마지막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였다. 흥미롭게도 관객들은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그 뒤에 이어진 화면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수프가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주힌이 배고파하며 수프를 먹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느꼈다. 관에 누워 있는 여인이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주힌이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가 이어진 장면에서는 아이를 예뻐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동일한 배우의 표정이 어떻게 편집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똑같이 ‘객관적인’ 자료 화면이지만 만든 사람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취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기 때문에 형편없는 배우도 여전히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몽타주 기법의 핵심은 ‘A 장면’과 ‘B 장면’의 합은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데 있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동일하다. 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전혀 다른 형태(Gestalt)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완결성의 법칙(law of closure)’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폐쇄성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이 완결성의 법칙은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간 중간이 떨어져 있는 원 모양의 띠를 완벽하게 이어져 있는 원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불완전한 정보 자체를 간은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몽타주 기법은 불연속적인 정보,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관객의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재미있는 이뉴는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몽타주 기법과 같은 상호작용적 방법론이 극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음악이라는 또 다른 편집 수단을 가지고 있다. 화면과 음악의 에디톨로지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거다. 화면이 커서가 아니다. 영화관을 꽉 채우는 영화음악 때문이다. 음악은 공간이 악기다. 어느 공간에서 연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이 된다. 사실 화면에서 진행되는 스토리에 몰두하느라 관객들은 배경음악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영화음악이 중요한 거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배경음악으로 완성된다. 바로 이 부분이 눈에 띄지 않는 감독의 에디톨로지적 역량이다. 화면과 화면의 편집을 통한 몽타주 기법, 그리고 화면과 음악의 편집을 통한 총체적 에디톨로지로서의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 가상현실과 영화, 게임 등이 편집되면 또 어떤 에디톨로지의 세계가 펼쳐질까 아주 궁금해진다.

 

 

 

10 클래식을 좋아한다면 절대 카라얀을 욕하면 안 된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을 노래하던 매체도 바뀐다. 시를 쓰고 읽어야 할 젊은이들은 이제 랩을 노래한다. 21세기의 랩은 20세기의 시다.

 

 게반트 하우스 :: 1781년 ‘양복조합 회관’에서 악사를 고용해 음악회를 연 것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효시다. 1884년에 새 음악당을 지었다. 음향이 뛰어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보스턴 심포니홀이 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1977년 아우구스트 광장의 라이프치히 오퍼 맞은편에 1,905석 규모의 현대식 음악당이 들어섰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콘서트홀은 (음악회 가려면 정장 입어야 하나요, 2012. 5. 31.,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12년에 레트빙카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914년에 처음으로 피아노 공개연주를 했는데,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권유에 따라 지휘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1927년에 최초로 《피델리오》를 연습지휘했다. 1927년부터 29년까지 빈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29년 3월 3일에 울름 시립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여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하여 데뷔했다. 1935년 27세 때 아헨 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는데, 독일에서 가장 젊은 음악감독이었다. 1937년 6월 1일에 빈 국립가극장에서 처음으로 지휘했다. 1938년에 베를린 필하모니를 최초로 지휘했고, 9월 30일에 할레 관현악단에서도 지휘했다. 1939년에는 독일 그라모폰 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1941년에 할레 관현악단으로부터 국가지휘자 시타츠카펠마이스터의 칭호를 받았다.
1946년에 빈 악우협회의 종신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동년 1월 18일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최초의 연주회를 가졌다. 1948년의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독일 오페라 담당 수석지휘자로 취임했다. 1950년에는 영국 레코드회사 EMI가 녹음을 위해 창설한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1951년에 제2차대전 초의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니벨룽겐의 반지》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지휘했다. 1956년에 베를린 필하모니의 종신 예술감독에 취임했고, 동년 3월 이후 4년간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예술감독에 취임하라는 계약을 체결했고, 6월 14일 빈 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에 취임했다. 1964년에는 빈 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을 사임했다. 1956년에 TV를 위한 영화의 개발과 제작 및 판매를 주목적으로 하는 회사 코스모텔을 설립하여 제1작으로 《라 보엠》을 지휘 완성했다. 이어 프랑스의 영화감독 앙리 크루조와 협력하여 콘서트 영화를 만들었다. 1967년 3월 잘츠부르크 이스터 음악제 제1회 공연을 열어 《발퀴레》를 자신이 연출 지휘하여 상연했다.
1968년 10월에 보다 음악적인 감각을 획득하기 위한 과학을 장려할 목적과 젊은 지휘자를 위한 콩쿠르를 개최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재단>을 발족시켰다. 1969년 2월에 프랑스 문화상 앙드레 말로의 제창으로 1967년에 창설된 파리 관현악단의 예술감독에 취임했다. 1973년에 잘츠부르크 성령 강림제 콘서트를 시작했다. 1977년 5월 13년만에 빈 국립가극장에 복귀하여 《트로바토레》, 《피가로의 결혼》, 《라 보엠》을 지휘했다. 카라얀의 연주의 특징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라얀이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갈고 닦은 지휘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베를린이라는 정상의 무대에 등장하기까지는 울름, 아헨 등 독일의 중소도시의 가극장에서, 대가극장에서는 생각지 못할 악조건과 싸우며 갖가지 작품을 다루었다. 여기서 젊은 카라얀은 가수나 오케스트라의 악단원 등을 상대로 하여 지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현역 지휘자로서 카라얀처럼 중소의 가극장에서의 지휘 경험을 가진 지휘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왕년의 많은 지휘자들은 중소 가극장에서 이를테면 수업시대의 경험가들이었다. 이런 뜻에서 카라얀은 낡은 타이프의 지휘자라고 할 수도 있다. 현대의 지휘자는 콩쿠르에서 우승하거나 혹은 어떤 기회에 편승하여 수업기간을 거치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편 카라얀 그의 나이로 보아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레코드의 유효성에 주목했다. 그래서 1939년에 독일 그라모폰과 계약한 이래 오늘날까지 실로 방대한 레코드 녹음을 했다. 1960년대까지는 연주자들이 레코드를 경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 시대부터 그는 줄곧 레코딩을 계속해왔다. 레코드에 수록되는 연주는 실제의 연주회장에서의 연주 이상으로 그 완전성이 요구된다. 레코드는 감상자에 의해 되풀이해서 감상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레코드 녹음을 다른 어떤 지휘자보다도 적극적으로 행한 것이 카라얀의 연주에 미묘하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이상 두 면, 즉 카라얀이 중소 극장에서 경험을 쌓은 지휘자라는 것과 일찍부터 적극적으로 레코딩을 해 온 지휘자라는 것을 무시하고 카라얀의 연주를 생각할 수 없다. 카라얀 연주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섬세하고 치밀하며, 더구나 흐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1996. 9. 10., 한국사전연구사)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시간의 편집자다

 사실 오케스트라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바로크시대 이후에 오케스트라의 기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해서 18세기 후반인 모차르트, 베토벤의 시대에 이르러 2관 편성 이상의 대형 오케스트라를 이루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듯 베를리오즈를 ‘근대 오케스트레이션의 아버지’로 본다면, 오케스트라는 19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초기의 지휘자는 지팡이로 바닥을 치는 식의 기본 박자만 잡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작곡자가 대부분 지휘자를 겸했기 때문에 지휘자의 곡 해석이 필요한 경우도 별로 없었다. 오늘날과 같이 ‘마에스트로’라고 불리며 음악을 해석하여 재생산하는 적극적인 역할의 지휘자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가능해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한 지휘자 이름이 모두 20세기 이후의 인물인 것도 그 때문이다.

 

 오늘날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전근대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다. 지휘자의 지휘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연주자는 없다. 아무리 잘해서 수석 단원이 되어도 지휘자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오직 지휘자의 뜻에만 따라야 한다.

 관객은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되어 있는 본능을 억누르고 지휘자의 뒤통수만 바라봐야 한다. 지휘자만 혼자 신난다. 춤추고, 발을 구르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온갖 폼 나는 동작을 혼자만 취한다. 클래식이 망해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휘자는 ‘시간의 편집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지휘의 에디톨로지를 아무도 상상치 못한,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킨 이가 바로 카라얀이다. 지휘의 에디톨로지를 시간의 편집에서 이미지의 편집으로, 혁명적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이다.

 

 최초의 뮤직비디오 제작은 카라얀이었다

 모든 예술 작품은 내가 느낀 것이 바로 진리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화려한 카라얀의 동작과 표정이 음악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음악을 들을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정서적 경험은 하나의 감각기관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흐릿한 방 안을 보기도 하고,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절대 음악에만 집중할 수는 없다. 음악은 절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안대로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고 음식을 먹으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연구 결과가 부지기수다. 인간의 모든 감각적 경험은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적이다.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카라얀은 음악과 영상의 편집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카라얀이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 제작자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당시 기껏해야 공연 실황으로 연주되던 클래식 공연을 카라얀은 다양한 영화적 기법을 동원해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던 것이다. ‘눈으로 보는 음악’을 창조해낸 카라얀의 업적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대중음악 뮤직비디오는 카라얀의 뮤직비디오가 제작된 후 한참 뒤에 만들어졌다. 대중음악계에서는 1975년 퀸의 가 최초의 뮤직비디오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대세가 되어버린 뮤직비디오 전문 채널 MTV의 개국은 1981년의 일이다. 10여 년을 앞서 클래식 음악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카라얀의 혜안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PART 02.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 

01 관점의 발견과 서구 합리성의 신화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을 배우는 일이다. 세상을 ‘좌’ 아니면 ‘우’로만 보고, 내 편이 아니면 바로 적이 되어버리는 형편없는 시대이기에 인문학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인문학은 나와 다른 시선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전제로 한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기술이란 효율성과 같은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되었다. 이젠 아니다.

 

 다들 관점을 바꾸라고 한다

 우리는 한순간에 모든 정보를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순서가 있다. 인간 문화는 대부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도록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일상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 쪽이 유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래쪽 얼굴을 더 행복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표정을 볼 때, 왼쪽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을 먼저 보고 그 인상을 전체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오른손잡이 문화의 특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습관의 차이가 문화의 차이로 발전한다.

 

 일본 책의 구성은 우리와 다르다.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 본 사람들이 그토록 순종적인 거다. 책을 읽을 때,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내 가설이다.

 사람들에게 헤드폰으로 어떤 정치적 주장을 듣게 했다. 이때 그룹을 둘로 나눠, A그룹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게 했다. B그룹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듣도록 했다.

 다 끝난 후, 헤드폰으로 들었던 그 정치적 주장에 얼마나 동의하는가를 물어보았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었던 A그룹의 사람들이 그 주장에 훨씬 더 많이 동의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끄덕거리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동의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순종적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책을 항상 끄덕거리고 읽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성경이나 불경이 위에서 아래로 읽게 되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뭐, 순전히 내 생각이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순서가 다르다는 뜻이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향과 순서에 차이가 있다는 의미다. 단순히 관점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화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문화가 다른데, 어찌 몇 주 혹은 몇 달 애쓴다고 관점이 바뀔 수 있을까. 그래서 어설픈 자기 계발서는 읽고 나면 허탈해 진다. 읽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점을 영어로 찾아봤다

 관점은 영어로 ‘퍼스펙티브perspective’다. 어떤 개념이든 문화적 배경을 갖게 되어 있다.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어원을 살펴봐야 한다. 퍼스펙티브는 ‘원근법’ 혹은 ‘투시법’과 그 어원이 같다.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보는 위치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점, 즉 원근법을 바꾼다는 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이라는 서구의 과학적 사고는 원근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소실점은 객관성과 합리성의 기준이 된다.

 인류 역사에서 서구 문명이 지난 세기처럼 압도적이었던 적은 없다. 이 같은 서구 중심주의는 근대사에만 해당된다. 왜 서구 문명이 느닷없이 이토록 강해졌을까?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원근법의 발견 때문이다. 서구 과학문명은 바로 이 원근법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말하는 원근법이란 ‘선원근법(線遠近法)’을 뜻한다. 동양에도 다양한 원근법적 원리가 있었다. 그러나 선원근법은 서구 르네상스의 산물이다. 근대 이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서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몰락했던 이유는 다들 이야기하듯 과학기술의 발전이 늦었기 때문이다. 기차, 배, 대포, 총을 만드는 능력이 뒤처져서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설명하고 끝내면 안 된다. 도대체 동양은 왜 과학기술의 발전이 늦었냐는 거다.

 과학적 사고의 부재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는 ‘객관성’과 ‘합리성’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은 원근법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세계의 구성 원리의 전제가 된다.

 

 서구 원근법의 전제는 두 가지다. 첫째, 세상을 보는 눈은 하나여야 한다. 소실점에 대칭되는 위치의 시선이다. 바로 이때부터 서구 ‘객관성의 신화’가 시작된다. 세상을 보는 눈은 오직 하나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보는 사람마다 세상이 매번 달라져서는 안 된다. 서구 원근법은 모든 사람의 관점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 관점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편하려는 시도다. 오늘날 다양성과 상대성을 뜻하는 관점, 즉 퍼스펙티브의 시작은 이렇게 ‘독점적’이고 ‘권력적’이었다. 둘째, 3차원 세상은 소실점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비례하여, 2차원의 평면에 그대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합리성의 시작이다. 하나뿐인 소실점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물체는 ‘거리의 비례’에 따라 객관적 좌표가 정해진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합리적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이라는 서구의 과학적 사고는 이렇게 원근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서구 객관성과 합리성의 신화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소실점, 즉 객관성과 합리성의 기준이 철저하게 ‘자의적’이고 ‘권력적’이라는 사실이다. 소실점을 누가 찍느냐에 따라 2차원에 투사된 결과물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무지 이 소실점의 위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교육받는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철저히 권력적이다. 서구의 과학적 사고는 바로 이 권력을 아주 은밀하게 은폐하는 데서 출발한다.

 

 

 

02 우리는 윈도(창문)로 세상을 개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원근법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유리로 된 창문’의 발견과 기원이 같다. ‘환기를 목적으로 하는 창문’ 혹은 ‘외부의 빛을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한 창문’과 ‘밖을 내다보기 위한 창문’의 철학적 근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은 창밖의 3차원 세계를 유리벽이라는 2차원의 세계로 환원시킨다. 동시에 3차원적 경험을 그대로 간직한다.

 왕과 귀족, 그리고 중세 교회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스테인드글라스는 원래 세상을 보는 기능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이용해 창의 주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공간 내부에 일방적으로 전달할 뿐이었다. 그러나 외부를 내다볼 수 있는 창의 탄생은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명확히 가르는 문화혁명이었다. 그래서 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건축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는 1435년에 출판한 『회화론』에서 “그림이란 ‘열린 창’과 같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창문은 3차원 세상을 2차원으로 재편집하는, 회화와 동일한 기능을 한다. 2차원이지만 3차원의 입체적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해야 한다. 알베르티가 말하는 창문은 세상을 보는 눈과 창밖의 사물 사이를 잇는 가상의 여러 직선을 수직으로 자른다. 이 점들을 연결하면 우리가 창문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 느낌의 입체적 회화를 그릴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의 ‘선원근법’의 발견은 르네상스 이후 서구 세계관의 핵심인 객관성의 신화로 자리 잡는다.

 

 브루넬레스키 :: 1377년 피렌체에서 출생하였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양식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차남인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는 대신 금속 공예의 기술을 익혀 조각가가 되려고 하였다. 1401년 피렌체세례당 출입문의 양각(陽刻) 콩쿠르에 응모하여 L.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과 끝까지 경쟁한 결과, 결국 기베르티의 작품이 최종안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당시 시작품(試作品) 《이삭의 희생》(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은 하나하나의 조각상이 매스로서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고, 또 그것들이 극적으로 힘차게 구성되어 있어서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의 목각상 《그리스도의 책형(磔刑)》(1409?)과 더불어 브루넬리스키는 조각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콩쿠르에 낙선한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건너가 고대 로마건축을 연구하면서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다시 유명해진 것은 피렌체로 돌아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델피오레대성당의 커다란 돔(1436 낙성식) 제작을 의뢰받고, 이를 성공적으로 건축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架構)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새로운 구성미를 만들어내었으며 피렌체에 새로운 미술을 기운을 북돋는 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피렌체의 첫 사회시설인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고아양육원: 1421∼1444)에서는 9단의 계단 위에 연속된 아케이드의 전망 효과를 노리고 있으며, 명쾌하고 새로운 율동감을 주고 있다. 또한 산로렌초성당(1418 이후)과 산토 스피리토성당(1436 이후)에서는 저마다 질서 있고 지적(知的)인 공간구성이 특색이다. 후자의 본당에서는 집중식 형태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는데 이는 산로렌초성당의 성기실(聖器室: 1428), 파치가(家)의 예배당(1429 기공),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1434 기공) 등에서 실현되고 있다. 특히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은 순전히 집중식 형태를 노려서 건립된 것으로 그의 건축양식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1437년에 공사가 중지되어 지금은 1층 벽면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위대성은 전통에서 계승한 구조방식을 여러 군데에 수시로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구축(構築)의 미적 법칙을 거기에서 이끌어내고 실현한 점에 있다. 부르넬레스키는 이런한 건축의 업적이외도 회화에서 원근법(perspective)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미술의 발전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두산백과)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화가들은 알베르티의 회화론과 브루넬레스키의 선원근법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다. 누가 더 정확하게 3차원 느낌이 나도록 그릴 수 있는지가 화가의 실력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그림이 나타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수태고지(受胎告知)>다. 

 

 <수태고지>의 마리아는 원래 가제트 형사였다?

 

 다 빈치의 <수태고지>에는 아주 이상한 점들이 있다. 중요한 네 가지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마리아 앞쪽에 있는 식탁을 보자. 마리아의 손이 닿기에는 식탁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제대로 그렸다면 지금 위치보다 훨씬 더 마리아의 몸 쪽으로 식탁이 붙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두 번째 문제가 생긴다. 마리아의 팔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팔이 왼팔보다 훨씬 더 길다. 

 세 번째는 문제가 좀 더 심각하다. 마리아 뒤쪽에 있는 벽돌의 각도다. 벽돌들의 각도가 수렴되는 소실점의 위치가 일치하지 않는다. 마리아 바로 뒤 쪽의 벽돌 방향과 조금 떨어져 있는 바깥쪽 벽돌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다. 각각의 방향으로 선을 쭉 이어보면 두 벽돌의 소실점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천하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규칙인 선원근법을 어긴 것이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고 심각한 오류다.

 네 번째는 그림 왼쪽의 천사다. 맥락상 천사라니까 천사로 보는 거지, 뭔가 아주 어색하다. 너무 살찌고, 자세도 영 어색하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이 그림이 잘못된 그림이라고 했다. 다빈치가 처음 그린 대작이었기에 원근법을 충분히 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제자들과 함께 여럿이 그려 이런 오류가 생겼다는 설도 있다. 다 빈치가 근시였기 때문에 그랬다는 황당한 설명도 있다.

 아니다. 이 그림의 ‘실수’는 다 빈치가 아주 ‘의도적’으로 한 것이었다.

 <수태고지>에 숨겨진 비밀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소실점이 변한다’는 것이었다. <수태고지>를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 끝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 그림의 소실점은 하나로 일치한다. 마리아의 왼팔과 오른팔의 불균형도 사라지고, 식탁은 적당한 위치를 찾는다. 살찐 비둘기 같던 천사도 아주 날씬해진다.

 

 원래 이 그림은 큰 성당의 앞쪽 높은 벽에 걸려 있었다는 거다. 아무도 그 그림을 정면에서 볼 수 없었다. 앞쪽에는 제단이 있어 접근 불가능했다. 오른쪽 아래에서 그림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 빈치는 ‘이 그림을 누가 어디서 보는가’를 고려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서 그림을 올려다봐야 하는 위치에 그림을 걸도록 되어 있는데, 왜 항상 정면에서 보도록 그림의 소실점을 정해야 하느냐는 다 빈치의 문제 제기다. 이는 원근법적 전제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소실점으로 수렴하도록 만든 원근법의 객관성이란, 이 그림을 보는 주체를 반드시 전제한다는 인식론적 통찰이기도 하다.

 <수태고지>에는 ‘객관성은 주관성을 전제로 한다’는 변증법적 모순이 숨겨져 있다.

 

 원근법은 객관성의 약속인 동시에 주체성의 발견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림을 항상 정면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화가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림은 항상 정면에서 봐야 한다는 전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해답은 아주 단순하다. 정면에서 그리기 때문이다. 그리는 사람이 정면에서 그리니까, 당연히 정면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객관적·합리적 사고의 시작을 알리는 원근법의 발견이 주체와 객체의 문제, 주체들 간의 소통 문제로 그 논의가 확대되는 것처럼,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관계는 철학적 인식론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인문학을 아주 치밀하게 공부해야 하는 거다.

 원근법의 발견은 객관성의 발견이 아니다. ‘주체’의 발견이다. 인식하는 주체, 즉 ’주관성’의 발견이라는 뜻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원근법이 동시에 주체의 발견을 포함한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 서로 모순관계인 객관성과 주관성이 함께 구현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 개의 축이 생기려면 반드시 다른 쪽의 축이 생겨야 한다. 서로 모순되는 양극단의 성립 과정을 서양철학에서는 ‘변증법’으로 설명하고, 동양철학에서는 ‘음양의 원리’로 설명한다.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joint-attention)’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 대체한다.

 

 원근법 회화에서 소실점의 위치는 화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관찰자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지점에 소실점을 맞춰야 한다고 우기는 태도는 지극히 권력적이다. 문제는 이처럼 ‘권력이 은폐된 소실점’을 사람들은 여전히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03 원근법은 통제 강박이다 

 그렇게 철이 없었으니 탁월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과 공간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문화가 생겼다

 좌표가 잡히지 않는 공간은 ‘공포’다. 도무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은 더 큰 공포다. 공간은 발이라도 붙어 있지만, 시간은 그저 붕 떠 있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은 ‘불안’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하이데거의 ‘세계-내(內)-존재(In-der-Welt-Sein)’란 시간과 공간에 아무 대책 없이 ‘내던져짐(Geworfenheit)’을 의미한다. 내던져짐을 한자로 표현하면 ‘피투성(被投性)’이다. ‘아무 곳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없다’라고 하는 불안의 존재는 피투성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해 인간은 ‘여기와 지금(here and now)’이라고 하는, 존재의 확인을 위한 좌표를 정하기 시작한다.

 시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시간을 ‘분절화’한다. 시간을 숫자로, 마치 셀 수 있는 물체처럼 만든 것이다. 일단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갠다. 하루는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된다. 그리고 365일이 모여 1년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1년이 매번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아니, 반복된다고 믿는 것이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다.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공간에 대한 공포는 시간에 비해 휠씬 구체적이며 감각적이다. 인간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공간의 저항은 매순간 경험된다.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내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면서부터 무한한 공간에 대한 공포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어느 순간부터 인류는 공간에 대한 공포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재현(representation)’이다. 재현의 대부분은 3차원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무한한 공간’을 통제 가능한 ‘유한한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자리 지도, 땅의 지도를 갖게 되면서 인간은 무한한 공간의 공포에서 마침내 해방된다. 지구상 어느 곳에 떨어져도 지도상의 좌표만 분명하면 원래 위치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을 위도와 경도라는 규칙 안에 재현하기 때문이다. 규칙이 있으면 통제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 어떠한 공간도 가로, 세로의 질서가 세워져 있는 지도로 나타내면 두렵지 않다. 더 이상 무한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에 질서 세우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지도의 원형은 ‘문양(文樣)’이다. 지도를 갖기 훨씬 전, 인류는 자기 소유의 대상에 문양을 넣었다. 선사시대 인류의 생활용품에 새겨진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견된다.

 원시인류는 대상에 문양을 그려넣으면서 통제 가능한 세상을 꿈꿨다. 문양은 규칙적이기 때문이다. 규칙이 있는 한 두렵지 않다.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고대 인류는 왜 사물마다 문양을 그려넣은 것일까? 대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세계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 문양은 언제나 대칭적이고 규칙적이다. 내 소유의 물건은 내 통제하에 있다는 권력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문양이 가지고 있는 규칙성과 대칙성으로 인해 인간이 경험하는 질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된다. 문양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아주 단순한 모양의 규칙성과 대칭성의 확장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하학적 문양이 구체적 대상을 묘사한 문양에 비해 훨씬 먼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재현 가능성’ 때문이다. 비대칭적인 것들은 재현하기 어렵다. 동물이나 식물을 흉내 낸 구체적인 문양도 재현하기 어렵다.

 

 재현 가능성이란 반복 가능하다는 뜻이고, 반복 가능성은 곧 통제 가능하다는 뜻이다. 규칙과 질서를 부여해 무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시도는 시간과 공간, 두 영역 모두에 해당된다. 그러나 시간의 경우, 달력의 규칙성과 반복성만으로 시간의 공포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달력이 반복될수록 늙어가고,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달력은 어설픈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간과 관련된 축제와 제의가 그토록 요란한 것이다. 그만큼 두렵기 때문이다.

 시간과 비교하면 공간에 대한 공포는 비교적 쉽게 극복된다. 2차원적 환원을 통해 규칙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질서 잡기가 훨씬 구체적이며 분명하고 간단하다. 재현은 단순히 공포 극복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3차원 공간의 2차원적 재현이 가능해지면서부터 인류의 창조성은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인간도 신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권력은 원근법으로 공간을 편집한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소유한 땅에 문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공간적 규칙이 구현된 ‘정원’이다. 자기 소유의 땅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궁전에는 항상 정원이 있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엄청난 규모의 정원은 왜 만들었을까? 단순히 절대권력의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다. 불안해서 그렇다. 언제 절대권력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그 엄청난 정원을 만든 것이다.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의 구조는 철저하게 대칭적이다. 작은 도자기나 천 조각에 문양을 만들어 ‘소심’하게 권력을 확인했던 고대인들과는 달리, 절대권력은 자신의 눈이 닿는 공간의 끝까지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문양을 그려 넣었다.

 절대권력의 정원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원근법적 원리까지 적용하여 자신의 성이 소실점의 정 반대편에 위치하도록 했다. 대칭과 균형의 정점에 자신의 시점을 위치하도록 한 것이다. 자신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자기 권력 안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시도다. 흥미로운 것은 3차원을 2차원으로 축소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르네상스 원근법적 원리를, 절대권력은 3차원의 공간에 다시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보르비콩트 성 :: 프랑스 일드프랑스 넓은 동쪽 지역 센 에 마른(Seine et Marne) 데파르트망의 맹시(Maincy)에 위치하고 있는 오래된 성이다. 퐁텐블로 성(Château de Fontainebleau)과도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55km 떨어져 있다.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 통치 시기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재무상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 1615~1680)를 위해 17세기 중반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다. 고전양식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건축가 루이 르 보(Louis Le Vau, 1612~1670)가 전체적인 설계를 맡았다. 공사는 1658년 시작되어 1661년 끝이 났는데 중앙의 거대한 돔이 인상적인 호화스런 건물이 만들어졌다. 내부는 당대 유명 화가이자 예술가였던 샤를 르 브륑(Charles Le Brun, 1619~1690)에 의해 채색벽화와 금도금, 조각, 천장화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조경전문가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 1613~1700)의 손에서 탄생한 성 주변의 기하학적 정원은 일드프랑스 지역 최고의 정원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처럼 성은 니콜라 푸케의 바람대로 매우 화려한 외관과 내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는 왕궁으로부터 크게 비난받고 감옥에 갇혔으며 재산까지 몰수당했다. 주인 니콜라 푸케가 믈륑(Melun)과 보(Vaux)의 자작(Vicomte)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 르 비콩트 성(Château de Vaux le Vicomte)'으로 불렸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 르 비콩트 성 (두산백과)

 

 동전의 양면인 권력과 불안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원형은 ‘보 르 비콩트 성(Château de Vaux-le-Vicomte)‘이다. 루이 14세의 재정을 담당했던 니콜라 푸케가 지었다. 성이 완공된 후 열린 화려한 연회에 참석한 루이 14세는 보 르 비콩트 성의 원근법적 정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연회가 끝난 후, 질투와 분노를 참지 못한 루이 14세는 푸케를 체포하고 종신형에 처한다. 국왕만이 할 수 있는 공간과 시선의 지배를 자신의 부하에게 허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 왕정은 무너졌지만 권력은 계속된다. 프랑스혁명과 반혁명, 승전과 패전의 기억을 위해 권력은 수도인 파리 한복판에 개선문을 세우고, 그 개선문을 중심으로 파리 시내 공간을 재편한다. 특히 나폴레옹 3세 때 이뤄진 오스망(B.Haussmann)남작의 도시계획은 근대 권력의 공간적 완성이다.

 오스망 남작은 철저하게 원근법적 원리에 의해 도시를 재편집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대로를 내고, 길 양쪽에는 가로수를 심었다. 시선을 가리는 것들은 모두 제거했다. 보 르 비콩트와 베르사이유의 모든 기술을 도시 전체에 확대 적용한 것이다. 또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혁명과 바리게이트를 원천 봉쇄하려고 골목길을 없애고 대로를 냈다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런 목적은 2차적이다. 공간 편집을 통한 권력의 시선 확보가 오스망식 도시 개혁의 목적이었다.

 

 관점은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모더니티의 강박

 동양 회화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의 원근법을 볼 수 있다. ‘역원근법(逆遠近法)’이다. 선원근법에 따르면 가까운 물체는 크게, 멀리 있는 물체는 작게 그려야 한다. 그러나 역원근법은 말 그대로 정반대다.

 서양의 선원근법과 동양의 원원근법의 차이는 단순한 회화 기법의 차이가 아니다. 인식론의 차이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시선, 혹은 제3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역원근법은 지금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반대편의 시선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내게 가까울수록 작아지고, 내 반대편에 있는 타인의 시선에 가까울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동양 회화에 나타나는 관점은 제3의 초월적 시선을 전제로 한다. 많은 경우,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감도(鳥瞰圖)’의 형태를 취한다. 그림 속의 관점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이 섞이게 된다.

 동양화에는 3~4개 이상의 시선이 숨겨져 있다. 비합리적이고 미개해서가 아니다. 그림의 관점은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근대 권력의 강박이 없기 때문이다. 동양화에는 시선이 하나여야 한다는 근대 권력의 강박이 없다.

 

 에마키 :: 두루마리로 된 일본의 이야기 그림. 에마키모노(繪卷物)라고도 하는데, 《회인과경繪因果經》등 중국의 불교회화에 그 유래를 두고 있으며 일본의 문학, 특히 소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였다. 가로로 긴 두루마리, 즉 마키모노(卷物) 형식이 이용되는데, 대개 이야기와 그에 관한 삽화가 같은 두루마리 면(面)에 나타난다. 가장 오래된 에마키는 735년에 그려졌다고 하나 현존하는 100여개의 에마키 조(組)는 대개 12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에마키로는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소설을 도해(圖解)한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源氏物語繪卷》가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후키누키 야다이(吹拔屋臺;하늘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다 보는 듯한 투시법)나 히키메 가기하나(引目鉤鼻;찢어진 듯한 눈과 갈고리 같은 코), 미묘하고 섬세한 필선과 상징적이고 서정적인 채색은 여성적이고 귀족적인 헤이안(平安) 시대의 에마키를 대표한다. 한편 승려 묘렌命蓮의 전설을 그리고 있는 《시기산엔기에마키信貴山緣起繪卷》는 보다 대중적이고 희화적이며 생기발랄한 표현기법에서 전자와 대조되는 양식을 보여주는데 양자는 이후 에마키 발전의 두 가지 방향을 예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모노가타리(物語)나 엔기(緣起)말고도 와카(和歌)나 불경(佛經), 고승(高僧)의 전기(傳記)나 역사기록 등이 에마키로 활발히 제작되어 당시대인들의 생생한 현실생활을 보여주고 있으나 14세기에 들어와서는 에마키를 그리는 어용화사(御用畵師)를 후원하였던 황실과 귀족계급이 정치경제적으로 몰락함에 따라 함께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러나 문학적 주제의 에마키는 이후 오토기 조시(御伽草子)라는 형태의 대중 미술을 낳았으며, 그 서정적 장식적 미감은 15세기 이후의 도사파土佐派로 계승되고, 17세기의 린파琳派 및 우키요에(浮世繪)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일본화의 역사적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마키 [繪卷]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일본에서는 ‘후키누키야다이(吹拔屋臺, 하늘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다보는 투시법)’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을 정확히 그리는 게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그린다. 3차원을 2차원으로 편집하는 방법은 문화적으로 아주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이는 단순한 회화 기법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세계관의 차이다.

 어떤 규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다.

 르네상스 선원근법의 확립 이후, 서구에서 구성된 모더니티의 핵심은 바로 관점의 통일’에 대한 강박이다. 이는 객관성, 합리성, 표준, 통일성의 철학으로 전개해나간 근대 서구 사상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오면 서구의 이 같은 세계관은 권력과 맞물리며 ‘식민지주의’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다. 시선 자체가 권력이 된다.

 

 

 

04 권력은 선글라스를 쓴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화면을 기준으로 정반대편에 있는 화가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 물론 이 시선은 단 하나다. 그러나 이 같은 화가의 시선은 아주 은밀하다. 그림의 관찰자들은 소실점의 전제가 되는 화가의 시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화가가 정해놓은 위치에서 그림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유명 미술관의 세계적인 작품 앞에는 사람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느라 아주 부산하다. 부자가 그 엄청난 돈을 주고 그림을 사는 이유는 이 자리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다.

 관점의 권력적 속성이 제대로 드러나는 개념은 ‘시선(gaze)’이다. 20세기 후반, 페미니즘 이론의 대부분은 남성적 시선의 은폐된 권력을 드러내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객관성을 가장한 남성 중심주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백인 남성 중심주의 비판이다.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여성들의 몸을 옥죄는 남성적 시선을 분석하는 페미니즘 비판은 필연적으로 ‘객관적 관점’의 모더니티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시선은 철저하게 권력적이다

 근대성, 즉 모더니티는 권력의 시선을 숨긴다. 원으로 둘러싸인 죄수들의 모든 방을 간수가 한가운데서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푸코의 원형 감옥 파놉티콘은 이 모더니티의 ‘간지(奸智, 간사한 지혜)’를 잘 설명해 준다. 죄수들은 간수가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이 항상 관찰당하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당연히 감옥 안의 규율을 스스로 알아서 다 지킬 수밖에 없다.

 외적 규율의 내면화다. 근대적 주체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모더니티의 전제가 되는 이성적 주체란 외적 강제의 자발적 복종’에 불과하다는 푸코식 모더니티 비판이다.

 시선은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만이 시선을 소유할 수 있다. 고궁에 들어가 보면, 왕의 의자는 항상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각종 국가 행사에서 대통령의 의자는 가장 높고, 정 가운데 있다. 원근법의 소실점처럼 모든 절차의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권력자의 위치는 행사장의 모든 상황을 시선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는 참석한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돈이 생기면 좋은 곳에 별장을 짓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선을 소유하기 위해서다. 먹고살기 바쁠 때는 시선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삶의 여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시선을 구매한다. 오늘날 ‘조망권(眺望權)’이라는 애매한 권리가 법적 다툼이 되는 이유는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별장도 없고, 풍광 좋은 조망도 소유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주말마다 산에 오른다. 단순히 건강에만 좋으라고 산에 오르는 게 아니다. 그저 건강만 생각한다면 산 중턱까지 오르락내리락하지, 뭐하러 매번 죽어라 정상까지 오르겠는가?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냥 오르는 게 아니다. 시선을 소유하고 싶어서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그 절대적 시선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세상을 전부 소유하는 것 같은 그 시선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산에 오르는 거다. 물론 이는 ‘세속적 권력’과는 질적으로 다른 ‘미학적 권력’이다. 칸트는 이를 ‘장엄의 미학(Ästhetik des Erhabenen)’이라고 정의한다.

 

 장군은 라이방을 썼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연출’이었다. 당시 박정희 장군의 라이방이 주는 메시지는 확실하고 단순했다. 또한 강력했다. 

 ‘나는 너희들을 본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볼 수 없다.’

 

 근대 권력의 시선은 사람들의 삶을 아주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지배한다. 시선의 지배가 구체화된 공간이 바로 감옥, 학교, 군대, 병원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있었다. 신(神)의 시선을 의식해 규율, 의무, 책임이 체계적으로 작동했던 수도원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을 의식해 만들어진 수도원의 규율과 의무는 근대 이후 감옥과 학교, 군대로 그대로 옮겨온다. 학교의 시간표, 군대의 일과표를 기억해보라. 근대 교육은 이 외적 규율과 의무를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도덕, 자발적 의무와 같은 근대적 주체의 조건은 그 본질에 있어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한 것에 불과하다.

 타율적 규제의 내면화는 방학 생활 계획표로부터 시작한다. 생활 계획표는 학교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졌던 타율적 규제를 방학 동안 자율적으로 실시하는 훈련이었다. 근대 교육의 목표가 되는 ‘성장’과 ‘성숙’ 혹은 ‘발달’의 본질은 타율적 규제의 내면화에 있다.

 

 동양에서 모더니티 형성이 늦은 이유는?

 동양은 서양에 비해 근대가 늦었다. 상당히 늦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늦은 게 아니다. 달랐을 뿐이다. 동양에는 서양의 절대왕정에 비해 훨씬 더 일찍 집중된 권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선원근법과 같이 단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사회의 모든 문화와 가치가 회귀하는 전방위적인 단일 체계는 아니었다. 동양의 시선은 서양 근대의 ‘싱글 퍼스펙티브(single perspctive)’, 즉 과학주의나 객관주의와는 전혀 다른 문화심리적 구성 체계에 근거한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ctive)’였다.

 싱글 퍼스펙티브에 대립하는 멀티플 퍼스펙티브의 예는 몇 년 전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에 들어 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인지발달 이론에서 아주 유명한 피아제(Jean Piaget)의 ‘세 산 실험(three-mountains-experiment)’이 있다. 추상적·개념적 사고가 어려운 ‘전조작기(pre-operational stage)’의 아이들은 자기가 현재 보고 있는 산의 모양은 정확히 찾아내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이는 산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조작기의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상호 관계의 맥락에서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있을 때, 즉 ‘형식적 조작기(formal operational stage)’에나 그와 같은 추상적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피아제의 이론이다.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에서 추상적 사고는 대략 11세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본다. 최근에는 훨씬 일찍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이론이 나오기도 한다.

 피아제의 ‘세 산 실험’은 주체적 관점이 오직 하나여야 한다는 이론적 강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와 같은 경우, 주체의 관점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다. 사방 어디서 보더라도 인지적 혼란이 없도록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구의 싱글 퍼스펙티브는 주체의 관점이 하나이며, 변함없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 기원은 소실점이 오직 하나뿐인 원근법이다. 관점이 항상 싱글 퍼스펙티브일 수밖에 없는 서구의 원근법에는 주체의 관점이 동시에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각기 다른 관점들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권력투쟁의 문제로 환원된다. 관점이란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그리고 한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동양의 편재적 관점, 즉 멀티플 퍼스펙티브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관이다.

 

 

 

05 시대마다 지역마다 달라지는 객관적(?) 세계지도

 낯선 곳에서 공간적 좌표마저 상실하게 되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일은 없다. 시공간에 대한 근원적 불안이 관계의 불안과 맞물려 몰려오는 것을 견디는 일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지도의 중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투영법 (projection) :: 투영법은 도법이라고도 한다. 지구표면의 상태를 될 수 있는 한 오차를 줄이면서 평면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말한다. 지구의 표면은 구면(球面)이므로 이를 평면으로 나타낼 경우에는 실제 상황과 비교하여 면적 ‧ 각도 ‧ 거리 ‧ 방위 ‧ 형태 등에서 오차가 생긴다. 따라서 이들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지도는 제작할 수 없으므로 지도의 목적에 따라 한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지도를 투영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의 정확성에 따라 각각 정적(正積)도법, 정각(正角)도법, 정거(正距)도법, 방위(方位)도법, 정형(正形)도법으로 분류한다. 
투영면의 종류에 따라서는 평면도법(방위도법), 원통도법, 원추도법으로 구분된다. 특히 투영면을 지구에 접하게 하는지 또는 교차하게 하는지에 따라 접(接)원추 ‧ 원통도법, 할(割)원추 ‧ 원통도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도법을 분류하는 경우에 이용되는 또 하나의 요소로 투영법과 지축(地軸)의 관계가 있다. 평면 ‧ 원추 ‧ 원통의 경우에 그 수선(垂線)이 각각 지축과 일치하는 것을 정축(正軸), 90°의 각을 갖는 것을 횡축(橫軸), 그 이외의 것을 사축(斜軸)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투영법 [投影法, projection] (자연지리학사전, 2006. 5. 25., 한울아카데미)

 

 '곰 한 마리가 A 지점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1킬로미터 걸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1킬로미터 간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시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1킬로미터 걸어갔다. 그랬더니 출발점인 A 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곰은 무슨 색일까?'

 난센스 퀴즈가 아니다. 수학자 폴리아(G.Polya)가 진지하게 낸 문제다. 답은 ‘흰색의 북극곰’이다. 지구가 둥근 입체가 아니라 평면이라고 생각하는 맹점을 걸고 넘어지는 문제다.

- 북극점에서는 왼쪽 오른쪽 앞쪽 뒤쪽 어느 쪽으로 가도 남쪽이다. 

 

 지도 투영법의 전제가 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애초부터 3차원 공간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클리드가 생각하는 공간이란 비어 있고, 어느 방향으로나 질적으로 동일하며, 평평하다. 따라서 공간을 원, 삼각형, 평행선, 수직선으로 단순화해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와 같은 구면체를 평면에 정확히 투영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1820년대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C.F.Gauss)는 지구의 모양을 왜곡하지 않고 고정된 축척으로 평면에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태평양이 가운데 있는 지도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16세기 말 중국에 포교하러 온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작품이다. 그가 중국의 황제와 귀족들에게 선물하려고 본국에서 가져온 지도에는 중국이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재빨리 동경 170도 부근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이 더 크게 보이도록 확대해 중국인들을 안심시켰다. 그 후로 아시아에서는 태평양이 가운데 있는 지도를 사용하게 된다.

 

 마테오 리치 ::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파한 선교사이다. 마테오 리치의 한자 이름은 이마두(利瑪竇)다. 1571년에 예수회에 들어가 해외 선교의 뜻을 세웠고, 10여 년 뒤인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를 익힌 후, 중국에 들어가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중국 광동성에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지배자의 허락을 받아 선교를 시작했으며 이어 1599년 난징을 거처 1601년 수도 북경으로 나아갔다. 그는 명나라 황제에게 자명종(탁상시계)과 대서양금(피아노의 전신), 자신이 저술한 <만국도지(萬國圖志)> 등을 선물하였으며, 그 덕분에 북경에서 자리를 잡고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 오기 전 로마대학에서 천문학과 천문기구 제작법, 지리학과 지도학, 수학 등을 교육받았는데, 그의 수학 교수 중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클라비우스(1537~1612)도 있었다. 그는 종교적 교리보다 이런 과학적 지식을 포교의 수단으로 삼았는데, 중국에 살면서 중국 방식을 존중하고 혼천의, 지구의, 망원경 등 서양의 발명품들을 소개함으로써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양의 과학지식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그들에게 소개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번역서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과 세계지도 위에 지리학과 천문학적인 설명을 덧붙여 놓은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이다. 또 천주교 교리를 중국어로 번역한 <천주실의>를 완성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립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서양인들의 친구 간의 우정과 사고방식에 대한 격언 등을 한자로 서술한 <교우론(交友論)>(1595) 등이 있으며, 또 다른 세계지도인 <여지산해전도(與地山海全圖)>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서양에 처음 서양문물을 소개하면서 천주교를 전파한 인물이면서 또한 공자와 유가사상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가 도입한 서양학으로 인해 서광계, 이지조 같은 관료는 서양의 과학지식을 배우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선교 활동을 도왔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다 1610년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지도에 나타난 유럽의 크기는 엄청나게 과장되어 있다

 메르카토르 투영법 :: 네덜란드의 지도학자인 메르카토르(G. Mercator)가 1569년에 고안한 도법으로 원통도법의 하나이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각도인 타각(舵角, compass bearing)을 따라 항해하면 목적항구에 도착할 수 있어 항해용지도(航海用地圖) 제작에 많이 이용된다. 즉 수평의 위선과 그 위선에 수직되는 경선으로 구성되며, 정각성(正角性)의 특징으로 인하여 지도 상에서 출발점과 목적지점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이 항정선(航程線)을 따라 항해하면 목적항구에 도착할 수 있다. 이 도법은 거리 등에서 왜곡이 크고 항정선이 지도 상의 실제거리보다 길게 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메르카토르도법은 적도 부근은 정확하게 투영되지만 고위도로 갈수록 면적이나 형상이 크게 왜곡되어 극에서는 무한대로 된다. 즉 60° 부근에서는 2배, 80° 부근에서는 5.8배, 89°에서는 57.3배로 확대되어 방위가 실제와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 지도의 축척은 위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작도(作圖)가 용이하며 극지방을 제외한 지구의 대부분을 장방형으로 전개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전도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르카토르도법 [-圖法, Mercator's projection] (자연지리학사전, 2006. 5. 25., 한울아카데미)

 

 유럽 대륙의 실제 크기는 남아메리카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두 배의 크기로 그려져 있다. 거대하게 그려진 그린란드는 아프리카 크기의 14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메르카토르식 지도에는 그린란드와 아프리카는 서로 비슷한 크기로 그려져 있다.

 이를 처음으로 비판한 사람은 독일의 역사학자 아르노 페터스(Arno Peters)였다. 페터스가 제기한 메르카토르식 투영법의 가장 큰 문제는 지도에 나타난 적도의 위치였다. 지도상의 중심선이 되어야 할 적도가 메르카토르식 지도에서는 중심보다 훨씬 아래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대신 유럽을 지나는 위선(緯線)이 지도의 중심에 오도록 되어 있다.

 메르카토르식 지도의 좌우 중심선 또한 유럽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결국 가로세로의 중심선이 모두 유럽으로 모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백인들이 사는 유럽이 과도하게 부각되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대륙은 엄청나게 축소되어 버린 것이다.

 메르카토르식 투영도법의 또 다른 문제는 자오선을 직선으로 펴고, 적도에서 멀어질수록 위선의 간격이 길어지게 한 데 있다. 위도와 경도가 만나는 각 부분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원칙 없는 직사각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위도가 높은 지역의 크기가 과도하게 왜곡되어 보이게 되었다.

 

 이 같은 메르카토르식 투영법에 대한 페터스의 비판은 사실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지도의 중심선이 적도가 아니라 유럽을 지나가도록 한 것은 당시 선원들이 다니던 유럽 주변의 뱃길을 보다 자세히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유럽 중심주의와는 별 상관없다는 이야기다.

 자오선을 직선으로 펴고, 위선의 간격을 적도에서 떨어질수록 크게 한 것도 아주 실용적인 목적이었다. 메르카토르는 둥근 지구를 평면에 펴서 묘사할 때, 생길 수밖에 없는 면적의 왜곡을 받아들였다. 대신 자오선을 직선으로 펴고, 위선의 간격을 넓혀서 방위선이 직선으로 유지되도록 했다. 그렇게 해야만 항해사들이 지도 위에 정확한 방위각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공 모양의 지구를 정확하게 평면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정확하고 안전한 항해를 위해 메르카토르는 지구 표면을 원통형이 되도록 해 지구의 위아래를 넓게 그리는 투시도법을 선택한 것이다.

 

 페터스 투영법’은 모든 대륙의 크기를 정확하게 반영한 ‘정적도법(equal-area projection)’에 기초하고 있다. 

 

 정적도법 :: 면적이 정확하게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 도법으로 경위선의 간격을 조절함으로써 얻어진다. 지도 상에서 일정한 간격의 경위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은 어디서나 지구 상에서의 해당 부분과 비교할 때 면적의 비율이 동일하며, 정적성(正積性)이 지도 전체에 적용된다. 그러나 정적도법에서는 주변부로 갈수록 각도의 왜곡, 즉 형태가 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형태의 왜곡이 심하지 않은 중심부는 국가 및 대륙의 일반도 제작에 이용되기도 하며, 각종 현상의 세계적인 분포도 작성에 필요불가결한 도법이다. 정적도법의 종류로는 정적원추도법, 정적원통도법, 본느도법, 몰바이데도법, 아이토프도법, 정적방위도법 등이 포함된다. 적당한 곳에서 단열을 하면 단열 몰바이데도법 등이 되며, 등면적도법, 등적도법(等積圖法)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적도법 [正積圖法, equal-area projection] (자연지리학사전, 2006. 5. 25., 한울아카데미)

 

 면적 왜곡’을 고치기 위해 세로 길이를 늘이고 가로 폭을 줄인 페터스의 지도에는 ‘형태 왜곡’이라는 또 다른 결함이 나타난 것이다. 즉, 남반구 지역들은 길고 가늘게 나타나고, 캐나다와 아시아 지역은 실제보다 압축되어 뚱뚱해 보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메르카토르식 투영법의 유럽 중심주의를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지도가 그리니치를 지나는 본초자오선(prime meridian)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설득력 있는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못했다. 

 

 본초자오선 :: 런던의 구(舊) 그리니치천문대(현재 케임브리지로 이전)의 자오선을 말한다. 구 그리니치천문대의 자오선은 1884년 국제협정에 의해 지구의 경도의 원점으로 채용되었으며, 또 1935년부터 이 자오선을 기준으로 하는 그리니치시(時)가 세계시로서 국제적 시간계산에 쓰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본초자오선 [prime meridian, 本初子午線] (두산백과)

 

 페터스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지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주의적·실증주의적 인식론을 여전히 고집했다. 지도는 각 시대의 문화적 가치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유럽 중심주의적 메르카토르 지도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지도만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모순적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3차원 공간의 2차원적 재현은 객관성의 딜레마뿐만 아니라 관점의 딜레마로부터도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재현의 시대에서 편집의 시대로

 재현의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영역은 회화였다. 르네상스 이후, 선원근법을 사용해 3차원의 대상을 평면 위에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인간은 드디어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그 후로부터 수백 년 동안 원근법을 통한 재현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개세였다. 그러나 원근법적 회화 또한 ‘재현의 한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다. 회화에서는 ‘주체’의 문제가 지도의 경우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지도의 경우, 지도 제작자의 시선은 은밀하게 숨겨진다. 이 숨겨진 시선의 문제를 페터스는 아주 정확히 지적했다. 그러나 회화의 경우는 달랐다. 원근법 자체가 처음부터 주체의 시선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원근법적 재현의 중심이 되는 소실점은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주체의 시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림 반대편에 서 있는 화가의 시선을 전제해야만 소실점이 성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회화에서 ‘객관적 재현’이란 ‘주관적 시선’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의미다. 다들 의심하던 이 같은 ‘벌거벗은 임금님’ 문제를 본격 제기한 것은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 미네르바는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그리스 신화에선 아테네)으로 황혼녘 산책을 즐기며 그때마다 부엉이를 데리고 다닌다. 부엉이가 아니라 올빼미라는 사람도 있지만 박쥐인들 어떠랴. 프리드리히 헤겔이 『법철학』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는 말을 쓴 이후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철학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보통 역사연구에서 ‘거리두기’의 지혜를 의미한다. 아침부터 낮까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그 즉시 관찰해선 모든 걸 제대로 알기 어렵다. 일이 끝난 황혼녘에 가서야 지혜로운 평가가 가능해진다는 주장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갖게 된 지혜의 가치를 역설할 때에 쓰이기도 한다.
예컨대 『한겨레』 논설위원 김지석은 2006년 11월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 재개 합의와 관련,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지혜의 여신)는 밤이 돼야 날기 시작한다고 했다. 6자 회담 참가국들은 지난 몇 해 동안 실패를 거치면서 충분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선까지 왔다. 이제 올빼미가 마음껏 날 수 있게 할 때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하루를 한 시대로 여겨, 적어도 한두 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객관적인 역사 기록과 평가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고수하고 있다. 더 독한 사람들도 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주은래)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에 관한 질문에 대해 “아직 얘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답했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춘추전국시대에 관한 평가인들 이르지 아니하랴.
한양대 사학과 교수 김현식은 ‘미네르바의 부엉이’ 담론엔 가치중립의 공정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한 지혜가 있는 양 보이지만 ‘궤변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거리의 유지가 객관성의 의미가 아닐뿐더러 이러한 논리에 따르자면, 역사가가 다루는 사건의 종결성 여부가 역사가의 공정성과 공평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네르바의 부엉이 (선샤인 논술사전, 2007. 12. 17., 인물과사상사)

 

 학자는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다르다. 먼저 느끼고, 먼저 표현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무모하고 학자는 비겁한 거다.

 소실점으로 환원하는 회화 공간이 실제를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는 원근법적 신념을 포기한 인상파 화가들은 주관적 느낌을 보다 과감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회화에 비해 훨씬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사진이 실용화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재현 예술’로서의 회화, 즉 원근법적 재현에 기초한 ‘정확한 회화’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피카소의 위대함은 ‘관점의 해체’에 있다. 통일되고 일관된 시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저항은 사실 제한적이었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재현은 포기했지만, 시각적 재현의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달랐다. 시각적 재현의 근거가 되는 관점을 과감하게 해체했다. 그래서 피카소가 위대한 거다.

 

 큐비즘(cubism) :: 20세기 초 회화를 비롯해 건축, 조각, 공예 등 국제적으로 퍼져 전파된 미술 운동.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 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운동이다.
세잔(Paul Cezanne)의 3차원적 시각을 통해 표면에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종래 원근 법칙의 기본 원리는 포기하면서 동일한 사물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주고 있다. 1909년 피카소(Picasso)와 브라크(Braque)에 의해 주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큐비즘 [cubism] (색채용어사전, 2007., 도서출판 예림)

 

 여기에는 ‘자연을 원통, 원추, 구체(球體로 다루겠다)’고 선언한 세잔의 생각이 큰 영향을 미쳤다. 원통, 원추, 구체는 대상의 재편집을 위한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가 된다. 

 드디어 ‘재현의 시대’가 끝나고 ‘편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재현의 예술’에 머물렀던 회화가 산업자본주의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예술과의 단절을 뜻하는 제체시온(Sezession)이 바로 그것이다. 예술과 산업의 편집 가능성을 탐색하는 아르누보(Art Nouveau), 유겐트 양식(Jugendstil)과 같은 새로운 예술 형식도 나타났다. 이 모든 변화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된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인류 최초의 창조 학교’에 깔때기의 물처럼 몰려 들어갔다. 

 

 제체시온(Sezession) :: 1897년 빈에서 시작되었고, 분리파(分離派)라고 번역된다. 과거의 예술 전반에서 분리하여 건축 ·공예 ·회화 ·조각 등을 새로운 시대에 즉응(卽應)한 예술로서 만들어내려고 하는 종합적 운동으로, 건축가 J.올브리히, J.호프만, 조각가 메슈트로비치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 영향을 받아서 독일 ·오스트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분리파 운동이 행하여졌으며, 그 중에서도 다름슈타트의 제체시온이 이름 높다. 이것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일련의 건축, 공예미술의 혁신운동, 즉 파리의 아르누보, 영국의 미술공예운동, 독일의 유겐트스틸 등과 본질을 같이하는 것이며, 근대 디자인 혁신의 계기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체시온 [Sezession] (두산백과)

 

 아르누보 (Art Nouveau) :: 대략 1890년에서 1910년 사이 서구제국(諸國)을 중심으로 개화한 예술운동 양식의 총칭. 명칭은 ‘신예술’의 뜻으로 1895년 파리에서 개점한 빙 상점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외에 모던 스타일(영), 유겐트슈틸(독, 오스트레일리아), 스틸레 리바티(이) 등 나라에 따라 각양각색의 이름이 있다. 장식미술, 건축을 중심으로 회화, 조각에서 일상풍습에까지 파급하여 다양한 표현을 전개. 식물적 모티브에 의한 곡선의 장식가치를 강조하여 장식과 평면(공간)과의 유기적 연관성을 추구하여 그래픽(비아줄리), 입체디자인(반 데 벨데, 갈레, 티파니), 건축공간(오르타, 매킨토시, 가우디)등에 있어서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다. 1870년대에 이론적, 사회적으로 영국의 아트 앤드 크래프트 운동의 영향을 받고 갈레 등 낭시파의 흐름도 합쳐서 세기말 상징주의와 나비파(派)에 평행하여 발전. 대소 예술 및 각 장르의 총합, 절충적 역사주의에 근거를 두지 않는 신양식의 창출을 기획, 신소재를 도입하여 일상생활 환경과 배경의 혁신을 지향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유미적(唯美的)이고 개인주의적 경향이 있어 기능 및 기계생산에 진정한 대응을 못한 채 금세기 초 상업주의의 비속화 속에서 자멸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독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이는 기하학적 구성(에크만[Otto Eckmann, 1865~1902], 요셉 호프만, 클림트)은 직접적으로 20세기의 원천이 되며, 운동 전체가 20세기 건축 · 디자인에 미친 의의와 영향은 매우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르누보 [Art Nouveau]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바우하우스 :: 1919년에 그로피우스에 의해 바이마르에 창설된, 새 ‘건축술’의 확립과 건축가 육성을 목적으로 한 종합조형학교겸 연구소. 1925년 정치적 압박으로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이전, 다음 해 26년 그로피우스 설계의 새 건물에서 수업을 재개, 기능주의적 색채가 보임. 1928년에는 한네스 마이어, 1930년에는 미스 반 데르 로에가 소장에 취임. 1932년 9월, 주(州) 정부의 압력으로 폐쇄되어 베를린에 옮겨 사립 학교로 재발족했으나 1933년 3월 ‘문화 볼셰비즘의 소굴’로 간주, 또 나치스에 폐쇄 해산됨(⇒퇴폐예술). 그로피우스가 말한 ‘건축술’은 협의의 건축기술이 아니고 건축, 건물공간, 가구조도(家具調度)를 포함한 인간환경 전체의 조형을 뜻하여, 중세의 대성당과 같이 건축을 현대의 종합예술로 차원을 높이는 것이 그 목표였다. 그 때문에 ‘모든 예술창조를 모든 공작기술, 공학적 훈련과 함께 건축으로 재통일하는’ 신조형교육의 시스템이 실시됐다. 기초과정의 설치,마이스타(제자중에서 우두머리란 뜻)에 의한 지도제의 채용 등이 그것임. 초빙된 조형교수(포룸 마이스타)에는 시기,임기의 차이는 있으나, 파이닝거,마르크스 (Gerhard Marcks,1889~1981),클레,슈렘머,칸딘스키,모흘리 나기,이텐, 알버스,바이어가 있고,바우하우스 해산 후에 그 이념은 이 예술가들을 매개로 하여 세계각지로 퍼져,모던 디자인 육성의 기초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우하우스 [Bauhaus]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 독일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베를린에서 출생, 미국으로 귀화하여 보스턴에서 사망했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사이 유럽 예술의 흐름을 이끈 바우하우스 운동의 창시자이다. 뮌헨 및 베를린에서 건축교육을 받고, 1907년부터 베렌스의 사무실에 근무했으며 1910년 독립, 아르페르트의 파그르 신공장(1911)과 쾰른의 독일 공작연맹전의 모델공장(1914)에서 근대양식을 확립했다.
1919년 반 데 벨데의 뒤를 이어 바이마르 미술학교의 교장으로서 모든 디자인의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는 바우하우스를 설립, 25년에 데사우에 이전, 직접 설계한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사(1925~1926)는 근대건축의 모범으로 간주되었다. 1928년 교장을 사직, 베를린의 지멘스슈타트 단지(1929~1930)를 세운 후 나치스 정권을 기피하여 1934년 영국으로 망명, 프라이(Edwin Maxwell Fry, 1899~1987)와 협동해서 케임브리지 근교의 인핀튼 빌리지 칼리지(1936)를 설계했다. 1937년 미국으로 옮겨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대학원장을 역임했다. 1945년 새로운 설계조직의 모델로서 젊은 건축가들과 '건축가공동체(TAC)'를 결성, 하버드 대학원 센터(1949~1950), 매코믹 빌딩(1953), 베를린 한자 지구의 인테바우전(展)의 아파트(1957) 등을 세웠다.
사상적으로 윌리암 모리스의 정통적 후계자로 디자인과 공업사회와의 조화를 지향하는 근대 디자인 교육의 기초이론을 확립하고 실천했으나, 만년에는 자기 이상과 새로운 산업사회의 전개와의 거리감에 깊은 실망을 품고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바우하우스에서 시작된 혁명적 변화의 21세기적 완성’이라고 해도 좋다. 바우하우스는 재현의 시대에 얻어진 인류의 모든 성과를 해체하고, 창조적 편집 가능성을 모색하는 ‘편집 학교’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조의 시대, 에디톨로지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06 공간 편집에 따라 인간 심리는 달라진다! 

 강의실과 세미나실에서의 학생들의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 토론식 수업이 불가능한 이유는 강의실의 구조 때문이다. 강의실에 앉으면 학생들은 앞쪽 칠판만 바라보게 되어 있다. 학생들끼리의 상호작용은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다. 강의실(講義室)이란 이름부터 ‘강의하는 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어찌 배우는 학생들끼리의 토론이 가능하겠는가?

 독일 대학의 세미나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수업 시작 전, 학생들은 수업에 참여하는 인원에 맞게 그리고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언제든 공간을 바꿀 수 있다. 책상을 배치하는 과정, 즉 ‘공간 편집’의 과정에서 학생들끼리의 소통은 이미 시작된다. 학생들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앉게 되면,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학생들 간의 소통은 계속된다. 수업 내용에 대한 다른 학생들의 표정과 자세를 언제든 살펴볼 수 있다.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동료 학생들과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수업 참여의 큰 동기가 된다.

 세미나실의 책상 배치가 교육의 내용을 결정한다. 한국의 진정한 교육개혁은 교실의 공간 편집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의 교실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그래야 교사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산만해도 된다. 어린아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집중하는 것이 더 이상한 거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강의실까지 죄다 앞의 선생님만 바라보게 되어 있는 구조로는 경쟁 일변도의 교육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획일화된 교실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면 ‘창조 사회’는 꿈도 꿀 수 없다.

 

 인간 의식에 공간이 미치는 영향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근대 이후, 인류는 ‘시간’에만 주목했다. 근대는 ‘역사의 발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공간’은 잊혀갔다. 공간을 바꾸면 생각이 바뀐다.

 천장의 높이만 조금 더 높여도 창조적이 된다. 미네소타 대학의 마이어스-레비(J.Meyers-Levy)교수는 천장 높이를 30센티미터 높일 때마다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공간의 형태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의 관점이 거시적이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 반면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에서는 사물을 꼼꼼하게 바라보게 되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창조적인 행위는 놀이다. 놀이터처럼 사무 공간도 즐거워야 창조적 사고가 가능해진다. 

 

 문화는 ‘공간 편집’이다

 공간 편집, 그 자체가 문화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Hall)’은 사는 공간의 크기나 구성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거리도 문화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점에 주목한 홀은 ‘프록세믹스(proxemics, 근접학)’라는 개념으로 사람들 사이의 거리와 상호작용의 양상을 분류한다.

 프록세믹스에 따르면 상호작용의 내용을 결정하는 사람 간의 거리는 다음 네 가지로 나뉜다.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공적 거리(public distance)’.

 홀의 프록세믹스는 아주 구체적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이 친밀한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아주 불쾌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 뒤로 물러나게 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권력자와의 물리적 거리 또한 ‘실세’의 척도가 된다. 권력자가 암묵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허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 곁에 누가 앉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거리뿐만이 아니다. 앉는 위치와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에 따라서도 상호작용의 내용이 달라진다.

 

 독립된 침실 공간으로 오늘날의 부부 탄생

 유럽 각국의 궁전을 구경하다 보면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공간이 문으로 다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복도가 따로 없다. 방들이 그저 쭉 이어져 있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계속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침실이나 식당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유럽의 주택에 복도라는 공간이 생겨 각 방이 독립된 것은 18세기 이후다. 그전까지는 다른 방으로 가려면 반드시 가운데 방을 지나가야만 했다. 다 들여다보며 다녔다. 부부의 은밀함이란 상상할 수 없었다.

 외부인이 방문하면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부부의 사생활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는 구조였다. 실제로 침실, 거실 같은 주택 내부 공간을 지칭하는 개념이 나타난 것은 18세기 이후라는 것이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의 주장이다.

 

 아리에스는 주택의 공간 편집과 ‘아동’ 혹은 ‘따뜻한 가족’이라는 개념이 아주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18세기 이후, 주택 내부에 복도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매번 이 방, 저 방을 거쳐 이동할 필요가 없어진다. 외부 방문객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따뜻한 가족은 바로 이러한 독립된 가족의 사생활이 가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식당(dining room)과 침실(bedroom)이라는 명칭이 다른 방(room)들과 구별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외부로부터 단절된 공간에 부모와 자식만으로 구성된 단란한 가족만이 살게 된다. 이제 가족 구성원의 모든 관심은 어린아이에게 집중된다. ‘보호받고 양육되어야 할 존재’로서의 ‘사랑스러운 아이’는 이러한 공간 편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독일의 문이나 창문은 그렇게 튼튼할 수가 없다. 독일만큼이나 장인정신으로 인정받는 일본이지만, 문 만드는 기술만큼은 죽었다 깨어나도 독일을 따라가지 못한다. 일본 문은 아주 엉성하고 부실하다. 그러면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독일 문보다 더 궁금해진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다들 그렇게 조용조용 사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에드워드 홀은 아주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다. 독일의 창문과 문이 그토록 튼튼한 이유는 ‘사적 공간’에 대한 독일인 특유의 편집증 때문이라는 거다.

 

 우리가 문화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공간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각 문화의 특징을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은 해당 문화의 공간 편집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다. 결국 문화를 바꾸는 것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공간 편집을 달리하면 된다. 공간의 구조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출입문의 위치만 바뀌어도 사람들의 동선이 바뀌고, 공간 내의 상호작용 양상이 변화한다. 문화는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작동한다.

 

 

 

07 독일인들의 공간 박탈감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다! 

 히틀러의 레벤스라움과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은 어원이 같다

 밀집된 공간에서 자신의 영역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때, 새끼를 죽이고 더 이상 교미를 하지 않고 서로 잡아 먹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동물들의 이상행동을 존 캘혼(John B.Calhoun)은 ‘행동 싱크(behavioral sink)’라고 정의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밀집된 공간에 들어가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개인도 이렇게 무서운데, 집단이 그런 행동을 보이면 얼마나 살벌해질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뤄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일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납하는 등 영토의 13퍼센트를 잃었다. 

 바로 이때 히틀러가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타났다. 1924년 뮌헨 반란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집필한 『나의 투쟁』에서, 독일 민족은 유럽 전체를 독일의 레벤스라움, 즉 독일의 생활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히틀러는 주장한다. 그가 사용한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이 ‘Leben(생활)’과 ‘Raum(공간)’을 합쳐 만든 조어다. 다윈의 진화론을 국가에도 적용해, 국가도 다른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먹고, 자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국경은 생명체의 피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우스호퍼 :: 뮌헨 출생.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세계적 규모로 보는 정치지리학(지정학)의 각종 문제에 착안하여 1924년 《지정학보 Zeitschrift für Geopolitik》를 창간하였으며, 1930년 뮌헨대학교 지정학연구소에서 지정학을 강의하였다. 1931년경부터 국가사회주의 경향을 보이던 그는 나치스의 외교 고문이 되어 그 대외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치스의 침략정책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패전 직전에 아들 A.하우스호퍼가 히틀러암살미수사건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1946년 3월 전쟁범죄자로 조사 받던 중 자살하였다. 저서에 《태평양의 지정학 Geopolitik des Pazifischen Ozeans》(1924)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우스호퍼 [Karl Ernst Haushofer] (두산백과)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나치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리기가 된다. 하우스호퍼는 독일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두 나라의 제국주의가 닮은 꼴이 되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그를 흉내 낸 개념도 만들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히틀러가 부르짖은 레벤스라움의 변종이라는 이야기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를 빼앗긴 독일은 인구에 비해 영토가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국민을 먹여 살릴 충분한 영토를 얻기 위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 사는 슬라브인들의 땅을 빼앗아야 한다고 선전한다. 그들은 독일의 아리안 민족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 독일 영토가 지난 수백 년간 어떻게 줄어들었는가를 보여주는 하우스호퍼의 지도는 독일의 레벤스라움이라는 생명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1926년 출판된 한스 그림(Hans Grimm)의 『공간 없는 민족(Volk ohne Raum)』은 당시 독일의 모든 사회문제는 ‘공간 부족’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독일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간 확장밖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한다. 당시 독일인들에게 이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공간적 전환은 새로움 문화 담론이다

 독일 나치즘의 레벤스라움으로 인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간에 관한 담론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잔재라는 편견이 생겼다. 그 후 사회과학에서 공간은 더 이상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 빈자리에 ‘역사’와 ‘발전’이라는 시간에 관한 담론이 자리 잡는다. 마르크스주의야말로 역사와 발전의 개념을 통합한 가장 폼 나는 이론이었다.

 한동안 ‘시간’을 논해야만 폼 나는 시절이 계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 시간 담론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는 제한된 시간을 사는 불안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실존주의와는 또 다른 축에 ‘역사 발전’과 관련된 시간 담론이 자리 잡는다. 역사 담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발전하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역사 발전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아울러 그 변화의 양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합리적 사유에 대한 신뢰 또한 확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 편집’의 시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합리적 사유의 한계에 관한 ‘포스트모던 담론’은 역사와 발전이라는 거대 담론을 기초부터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였다. 현실사회주의(Real Socialism)가 몰락하자 대안 없는 미래로 인해 인류는 맥이 빠졌다.

 인간이 사는 사회는 어느 곳이든 동일한 원리에 의해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이제까지의 사회과학 이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아주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더 이상 미래를 계획하며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오늘날까지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혼란을 뭉뚱그려 학자들은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라고 일컫는다. 어디서나 동일한 ‘사회(society)’ 개념으로 시간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려던 보편 이론의 포기이기도 하다.

 독일의 문화학자 도리스 바흐만-메딕(Doris Bachmann-Medick)은 이 문화적 전환의 내용을 크게 다음의 여섯 가지로 요약한다. ‘해석학적 전환(interpretive turn)’ ‘행위적 전환(performative turn)’ ‘반성적 전환(reflexive turn)’ ‘탈식민주의적 전환(postcolonial turn)’ ‘번역학적 전환(translational turn)’ ‘공간적 전환(spatial turn)’ ‘도상적 전환(iconic turn)’.

 바흐만-메딕의 분류에 따르자면 공간적 전환은 문화적 전환의 한 영역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나 공간적 전환을 이끌고 있는 독일의 역사학자 칼 슐뢰겔(Karl Schlögel)은 공간의 의미를 그릇처럼 어떤 것을 ‘담는 용기’의 이미지로 해석하면, 공간 논의가 지리학적인 영역에만 국한된다고 경계한다. 공간의 구성을 다양한 문화적 실천이 일어나는 사회적 과정으로 이해할 때, 공간적 전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공간적 전환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사이버공간(cyberspace)’이다. 낡은 시대의 공간 이해로는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아주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속화되는 ‘세계화(globalization)’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지역화(localization)’, 그리고 이 두 과정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지화(glocalization)’의 과정 또한 새로운 공간 개념을 요구한다. 그래서 ‘공간 편집’이다.

 

 

 

08 19세기 프로이센 군대와 축구의 공간 편집 

 축구의 본질은 놀이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땅따먹기’ 놀이다!

 축구는 놀이다. 다 큰 어른 스물두 명이 사람 머리만 한 공을 정신없이 쫓아다니며 공을 발로 차서 골 포스트 안으로 넣어야 하는,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놀이다. 손을 쓰면 벌까지 받는다. 아무리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엄청난 월드컵 경기라 해도 축구의 본질은 아주 ‘유치한 놀이’다. 그 유치한 놀이에서 이기려면 완전히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운다는 것도 사실은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국가끼리 싸우는 척하는 ‘가상 놀이(as-if)’일 뿐이다. 세계 각국의 자국 내 축구 리그가 지역 연고를 갖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축구는 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둑과 같은 ‘공간 편집 놀이’다. 감독은 축구 경기장을 4-2-3-1 혹은 4-3-3과 같은 다양한 포메이션으로 나눈다. 각 팀의 공간 편집 방식이 서로 부딪힐 때, 축구는 인지적 몰입을 동반하는, 바둑과 같은 아주 수준 높은 두뇌 게임이 된다.

 공격은 고참들만 하고 수비는 쫄따구들만 하는, 그리고 아주 가끔, 게으른 고참도 수비하는 군대식 ‘뻥축구’가 재미없는 이유는 이런 공간 편집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기장의 모든 움직임을 해석하며 예측하는 인지적 참여가 있어야 진짜 축구팬이다. 축구 해설자의 역할은 그 해석의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이러한 축구의 역동성을 좌우하는 공간 편집은 감독 고유의 영역이다. 감독의 전술이란 선수들 개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능력을 고려한 공간 편집 능력을 의미한다.

 

 오프사이드 규칙은 동네 조기 축구처럼 선수들이 상대편 골대 앞에만 몰려 있는 것을 막기 위해 1863년에 처음 도입됐다. 그 후 1925년에 규칙이 수정된다. 골대와 공격수 사이에 상대편 수비 선수가 세 명이 있어야만 오프사이드가 아닌 것으로 판정했던 것을 두 명만 있어도 오프사이드가 아닌 것으로 규칙을 바꾼 것이다. 그 결과, 공격수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확연하게 늘어났다. 한 번에 길게 골대 앞으로 공을 찔러주는 롱패스의 쾌감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축구 중흥 방법은 축구 중계를 폼 나게 하면 된다!

 세련된 오프사이드 규칙이 도입된 후, 축구는 세계인을 사로잡는 스포츠가 되었다. 공간을 편집하는 다양한 포메이션 전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오프사이드 규칙은 축구가 공간 편집 놀이임을 분명히 한다.

 오프사이드 규칙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감독의 공간 편집 전략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 매체다. 축구가 전 세계인의 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TV 중계 때문이다.

 축구가 재미있는 것은 축구 중계 때문이다. 다양한 각도로 설치된 카메라가 잡아내는 장면의 편집이 축구를 재미있게 한다. 축구의 재미와 중계에 동원된 카메라 숫자는 비례한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그,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이탈리아의 세리에와 같은 유럽 리그의 경기를 세계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중계 화면은 거의 월드컵과 같은 수준이다. 그렇게 화려한 화면을 보다가 K리그의 성의 없는 화면을 보려니 다들 짜증내며 돌아서는 거다. 한국 축구의 문제는 선수들 잘못이 절대 아니다. 동기부여가 안 되는 시스템 탓이다.

 축구를 보여주는 방식이 바뀌면, 선수들의 경기 내용도 달라진다. 공간을 읽는 축구를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축구팬들의 태도도 바뀐다.

 

 군대는 왜 죽어라 제식훈련만 시킬까?

 텅 빈 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공간에 아주 작은 점 하나라도 찍혀야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그러나 공간에 점을 하나 찍는 것만으로 의미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두 개 이상의 점을 찍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점과 점 사이를 연결하는 심리적 선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공간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별자리가 그 예다. 그 무한한 공간에,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해 사람들은 별자리를 만들어냈다. 하늘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지자, 사람들은 그 막막하고 캄캄한 밤하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점과 선을 통한 공간 편집을 가장 진지하게, 목숨 걸고 했던 조직은 군대다. 군대는 군사들의 위치를 연결하여 대형을 유지하며, 공간을 통제하는 전략·전술을 발전시켜왔다. 축구는 이러한 군대의 공간 편집을 일상의 놀이로 변형시킨 것이다. 축구의 포메이션은 군대의 전투대형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대형을 갖춘 집단은 무섭다. 무기를 들고 대형을 갖춘 군대는 더 무섭다. 아무리 병사 개개인이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대형을 갖춰 움직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군대가 대형을 갖춰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기 때문이었다. 무기의 효과적인 운용을 위해 대형을 유지해야 했다. 무기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 편집 방식이, 지휘관이 운용하는 전술의 실제 내용이었다.

 1575년 6월 29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나가시노(長篠)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 군단에 맞서 산단우치(三段擊ち) 혹은 삼단철포(三段鐵砲)라고 불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당시 조총을 장전하고 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러한 조총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산단우치란 일종의 3열 발사 전법을 사용했다. 군사들을 세 줄로 나눈 뒤 순서대로 총을 장전하고, 화약에 불을 붙이고, 발사하도록 한 것이다. 삼단철포 전략 덕분에 노부나가의 군대는 대승을 거뒀고, 이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물론 전설 같은 이야기라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다.)

 노부나가와 비슷한 시기에 네덜란드의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도 삼단철포와 같은 전략을 구사했다. 마우리츠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소총의 느린 장전 속도를 보완하기 위해 군사들을? 3열로 배치해 열을 바꿔가며 번갈아 사격하도록 하는 일제 사격법(volley)을 개발했다.

 

 조총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해 군사들은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발사 대형을 유지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바로 제식훈련이다. 

 기관총이 발명된 후로, 군대는 더 이상 대형을 갖춰 진군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니, 대형을 갖춰 진군했다가는 그대로 몰살이다. 

 기관총이 나오자 군대는 참호를 파고 지하로 들어간다. 참호전의 시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 같은 참호전이었다. 그러자 땅 속에 숨어 있는 군인을 잡으려고 수류탄을 던지고, 공기보다 무거워 지면으로 가라앉는 독가스를 사용했다.

 

 무기의 양상이 현저하게 달라진 현대 군대에서 이제 제식훈련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물론 군대 전술·전략의 본질은 여전히 공간 편집에 있다. 비행기, 탱크, 대포의 운용으로 공간 편집이 이뤄지는 전술·전략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런데도 신병훈련소에서는 여전히 제식훈련을 한다.

 규칙과 규율의 내면화를 위해서다. 규율 없는 군대는 성립 불가능하다. 강제된 규율을 익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09 제식훈련과 제복 페티시 

 지휘관의 명령에 부대가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일사불란함을 위해서도 이 같은 제식훈련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전투 시 밀집대형을 유지할 필요가 전혀 없는, 현대식 무기를 사용하는 오늘날에도 제식훈련은 계속되는 거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 조선사절단 파견을 둘러싼 집권부 분열(메이지 6년 정변)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에게 밀려 정계에서 물러난 뒤, 향리인 가고시마에서 사학교(私學校:일종의 군사학교)를 세우고 사족의 자제를 모아 교육에 힘썼다. 그러자 폐번치현(廢藩置縣) 후 영주제(領主制) 폐지 등 근대화의 정책 시행으로 봉건적 특권을 잃고 몰락일로에 있던 사족의 반정부 분위기가 사학교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1877년 이 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사이고를 앞세우고 거병, 1만 3000여 명이 구마모토진대[熊本鎭臺]를 포위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사이고 등 지도자는 대부분 자결하였다. 이 싸움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초기 사족의 최대·최후의 반란이었는데, 정부는 이 반란을 제압함으로써 권력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후의 반정부운동의 중심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이난 전쟁 [西南戰爭(서남전쟁)] (두산백과)

 

 메이지 유신의 핵심 인물이었던 다카모리는 권력에서 소외되자, 지방의 사무라이들을 동원해 자신이 세웠던 메이지 정부의 군대와 맞선다. ‘프로 싸움꾼’ 사무라이들과 징병된 평민들 간의 전쟁이었다. 누가 봐도 다카모리 쪽의 압도적인 승리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다카모리의 반군은 대부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다카모리는 동굴에 들어가 자결하고 만다.

 아무리 용맹하고 개개인이 뛰어난 사무라이라 할지라도, 절도와 규율을 훈련받고 대열을 유지하는 메이지 정부의 신식 군대에는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다카모리가 메이지 정부에 반기를 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징병제(徵兵制)때문이었다. 징병제의 도입은 전문 싸움꾼인 사무라이의 밥줄을 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앞서 일본 군국주의는 이렇게 징병제라는 근대식 군대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고는 훈련된 군대를 앞세워 단기간에 청나라와 러시아를 꺾고, 아시아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야스쿠니 신사 입구에 하늘 높이 세워진 동상의 주인공이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즉 징병제를 주장하다가 사무라이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오늘날 일본과 독일이 사뭇 비슷한 이유는?

 제식훈련을 통한 대형 유지라는 군대식 공간 편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징병제가 필수적이다. 장기적이고 반복적인 훈련을 위해 평상시에도 군사들을 병영에 주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병사들은 매번 바뀌어도 지휘 체계의 연속성은 유지되어야 한다. 군인을 평생 직업으로 하는 장교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귀족이 급하게 장교복으로 갈아입고, 평민을 동원해 전쟁에 내모는 방식으로는 군대의 대형이 유지될 수 없다. 군대에는 ‘직업군인’이 있어야만 한다.

 제식훈련과 징병제 그리고 직업군인, 이 세 가지는 근대적 군대 시스템의 필수 조건이다. 이 세 요소는 네덜란드 마우리츠의 군대 개혁에서 시작되어,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의 군대를 거쳐 프로이센 군대에서 완성된다.

 마우리츠의 군대 개혁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에 이르러 빛을 발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마우리츠의 군대 시스템을 받아들여 명령과 규율,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대열 유지를 특징으로 하는, 강하고 민첩한 프로이센 군대를 육성했다. 이후 북부 유럽의 보잘것없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프랑스에 버금가는 강력한 나라가 되고, 비스마르크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갖게 된다.

 

 프로이센 군대가 여타 유럽 국가의 군대에 비해 월등했던 이유는 장교, 즉 직업군인의 탁월함에 있었다. 직업군인들의 전문 조직인 작전참모 제도는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전쟁은 무기의 특성으로 인해 대형을 유지한 채 사격 하면서 진군하는 방식이었다.

 작전참모는 군대의 행군로를 탐색하고, 전투 지역을 결정하고, 숙영지를 선택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작전참모의 임무는 군용 지도 제작, 작전 계획 및 전투 지휘 체계의 수립, 전투력 유지를 위한 병참 등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한마디로 프로이센 군대의 작전참모는 공간 편집을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전문가였다.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 파르힘에서 태어났다. 근대적 참모제도의 창시자이며 대(大)몰트케로 불린다. 덴마크의 귀족 출신으로서 1822년 프로이센군(軍)에 들어가, 1858년에 참모총장이 되었다. 전략의 천재로서 대(對)덴마크 전쟁(1864),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및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을 지도하여 승리를 가져왔다. 그는 참모본부를 단순한 군사기술기관에서 탈피시켜 군대의 중추가 되도록 하여, 통수권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 고려에서 작전에 개입하려고 하던 비스마르크와 대립하였다. 1870년에 백작(伯爵), 1871년에 원수(元帥)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헬무트 폰 몰트케 [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 (두산백과)

 

 독일어에는 지금도 ‘generalstabsmäßig(작전참모적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정확히 실천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단어다. 정확, 신뢰, 규율과 성실, 충직과 같은 단어는 독일 문화의 긍정적 측면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이러한 가치들이 바로 이 프로이센의 작전참모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민족국가 성립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뒤처진 독일로서는, 이제까지 제각기 흩어져 산 게르만 민족을 ‘독일 국민’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낼 필요가 있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제일 먼저 흉내 낸 것은 바로 이 프로이센의 군사 제도였다. 일본 군국주의가 근대 일본 문화에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근면, 성실, 신뢰’와 같은 가치들을 독일과 일본이 서로 유사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실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 지도자들은 프랑스 군대 시스템과 프로이센 군대 시스템 가운데 어느 쪽을 흉내 낼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프랑스식 군대 쪽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일본의 젊은 장교들이 구미 시찰을 돌다가 목격하게 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프로이센 군대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다.

 프로이센의 몰트케 참모총장은 자신의 부하인 클레멘스 빌헬름 야콥 메켈(Klemens Wilhelm Jacob Meckel)이라는 장교를 일본에 파견해 일본 군대의 근대화를 구석구석 지도했다. 특히 일본 군대는 프로이센의 참모본부를 그대로 흉내 내, 군령을 총괄하고 작전 계획을 체계적으로 입안하는 참모본부를 설치했다.

 뿐만 아니다. 일본 군대는 폼 나는 프로이센의 제복도 그대로 흉내 냈다.

 

 그래서 한국 아저씨들은 ‘빳빳하게 서 있는 것’을 좋아한다

 현대 일본 자위대의 군복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식이다. 그러나 학생 교복은 다르다. ‘가쿠란(学ラン)’이라 불리는 일본 남학생 교복에는 메이지 시대에 들여왔던 프로이센 군복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검정색 바탕에 굵은 띠 모양의 목칼라, 금색 단추로 장식된, 단순하지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는 복장이다.

 일본 학생 교복의 시작은 군국주의 일본이 학생들에게도 프로이센식 군복을 입히면서부터다. 목을 꽉 조여 어깨를 펴도록 하는 군복 형태의 교복을 당시 일본인들은 ‘쓰메에리(詰襟)’라고 불렀다. 교복의 특이한 목 밴드칼라 때문이었다. 여학생들은 해군 복장을 변형한 ‘세일러복’을 입었다.

 80년대 교복 자율화 이전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한국의 중장년 사내들도 죄다 이 ‘에리(목칼라의 일본식 표현)’의 교복을 입었다. 

 중국의 인민복도 사실은 이 프로이센 군복을 흉내 낸 학생복에서 유래한다. 손문이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교복의 간편함에 반해 스스로 디자인해 입은 것이 인민복의 시작이다.

 

 오늘날 일본은 여전히 제복문화가 지배하는 나라다.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제복을 즐겨 입는다. 일본인에게 제복은 존재 확인의 수단이다.

 제복은 ‘심리적 대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군대식 공간 편집이 제복을 통해 심리적 공간 편집으로 이식되는 것이다. 군대와 학교는 이 같은 규율의 내면화라는 모더니티가 체계적으로 실시되는 공간이다. 이때, 제식훈련과 제복은 필수다.

 ‘페티시(fetish)’란 인간 이외의 사물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제복 페티시는 왜곡된 권력에의 충동이다. 타인을 완벽하게 제압하거나, 반대로 타인의 통제에 완벽하게 제압될 때 성적으로 흥분한다. 현실에서 권력 충동이 좌절되고 억압될 때, 제복만 보면 흥분하는 제복 페티시가 나타난다. 이러한 제복 페티시가 더 전개되면 사디즘, 마조히즘이 된다.

 

 

 

10 분류와 편집의 진화, 백화점과 편집숍 

 백화점은 상품의 도서관이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라고 하는 프랑스 파리의 봉 마르쉐(Le Bon Marche)는 1852년에 세워졌다. 일본에는 미쓰코시(三越)가 1904년에 처음 생겼고, 한국에는 2년 뒤인 1906년에 미쓰코시 서울 지점이 최초의 백화점으로 문을 열었다.

 ‘수백 가지 제품을 판다’는 의미의 ‘백화점(百貨店)’은 ‘department store’의 일본식 한자 번역이다. ‘백화점’의 번역은 많이 엉터리다. ‘department store’는 ‘부서’가 나뉘어 있는 매장을 뜻한다. 즉 상품의 분류와 전시가 체계적으로 되어 있는 매장을 뜻한다.

 백화점이 생기기 전, 물건을 사려면 제각각 흩어져 있는 가게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다. 구매 방식도 지금과 달랐다. 주인이 왕이었다. 사고 싶은 물건을 주인에게 말하면, 주인이 창고로 가 그 물건을 찾아왔다.

 백화점이 가져온 문화 충격은 진열과 전시 방식에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백화점의 문화 충격은 ‘상품 분류’에 대한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물건이 이토록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공간적으로 분류되어 자리 잡고 있음에 감동했다. 산업사회가 가져온 대량생산과 그 기초가 되는 표준화의 결과였다.

 

 근대는 ‘분류의 체계화’로 완성된다. 상품 생산과 소비의 모더니티를 대표하는 백화점의 본질은 분류다. 백화점이 나오기 전까지의 분류는 도서관, 박물관 등과 관계된 일부 특권층만 경험할 수 있는 특권적 지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중도 세상의 모든 상품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분류 체계를 백화점이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분류 체계를 손에 넣는 순간 권력이 생긴다. 고객은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계층적 분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공간의 주인이 된다. 드디어 고객이 왕이 된 것이다.

 세계 어느 백화점에 가도, 원하는 물건을 못 찾아 헤매는 경우는 없다. 백화점의 공간 자체가 계층적 분류 체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 고객은 ‘책상마다 조직도가 깔려 있는 관청의 최고 책임자’처럼 백화점이라는 소비 공간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백화점은 계층적이고, 편집숍은 네트워크적이다

 백화점이 생기기 전, 구식 매장의 권력은 주인에게 있었다. 백화점이 나오면서부터 권력은 고객에게 넘어갔다.

 

 계층적 분류 체계와 달리, 네트워크적 지식은 각 정보들의 관계가 고정적이지 않다. 유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 맥락에 따라 관계가 매번 달라진다. 

 편집숍의 네트워크적 전시와 백화점의 계층적 분류가 서로 모순관계이기는 하지만, 적대적 모순은 아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마오쩌둥은 이를 ‘비적대적 모순’이라 했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그곳의 분류ㅣ, 전시의 에디톨로지를 즐기는 데 있다. 백화점과 편집숍의 비적대적 모순관계를 통해 다양하게 진화라는 ㄱ숙내 상품 분류, 전시의 에디톨로지를 지켜 보는 일은 아주 즐겁다. 

 

 

 

PART 03.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 

01 개인은 편집된 개념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의 대표작 『아동의 탄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동은 없없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고, 걱정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철저하게 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편집되었다는 이야기다.

 일단, 아동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표상 자체가 철저하게 근대적 산물이라는 것이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근대 이전의 가내수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가족은 재화의 생산을 위한 ‘경제단위’일 뿐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목적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화심리학자 비고츠키(Lev Semenovich Vygotsky)는 일부일처제에서의 ‘사랑과 질투’의 감정과 일부다처제에서의 ‘사랑과 질투’의 감정이 질적으로 다른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아동에 대한 부모의 사랑 또한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달리 편집되는 감정이다.

 

 요즘처럼 아이를 겨우 한둘 낳고 사는 핵가족 시대에, 아이는 언제나 가족의 중심이다. 모든 관심과 사랑이 아이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는 아프리카, 남미의 가난한 나라에서 아이의 존재는 전혀 다른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은 나라에서는 ‘모성’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런 나라에서 ‘모성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형제가 다섯, 여섯은 기본이었던 우리의 부모 세대만 봐도 알 수 있다. 아기는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애초부터 부모가 그리 큰 정서적 몰입을 할 여유가 없었다. 물론 아이가 아프면 부모의 마음은 괴로웠고, 아이가 죽으면 못 견디게 슬펐다. 그러나 그 슬픔은 바로 잊어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정서’였다. 한 아이가 죽어도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먹고, 입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부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오늘날 지극히 당연한 ‘사랑=결혼’이란 등식 또한 근대 들어 새롭게 나타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오늘날 여성 잡지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주제인 ‘사랑과 섹스의 관계’ 또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적 편집물이다. ‘사랑해야 섹스한다’라는 강박은 ‘생산 단위로서의 가족’이 해체되고, 새롭게 편집된 ‘애착 관계로서의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동양에는 ‘개인’과 ‘사회’가 없었다

 서구의 근대를 가능케 한 ‘culture’ ‘society’ ‘individual’에 조응하는 개념이 과거 동양에는 없었다. 이들 개념의 번역인 ‘문화’ ‘사회’ ‘개인’과 같은 단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만들어냈다. 이 개념들을 오늘날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은 고작 100여 년에 불과하다.

 일단 문화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문화(文化)’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명개화론(文明開化論)’의 축약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화와 문명화를 동일시했다. 문명의 발달을 일원론적으로 해석한 서구 문명화 개념을 단순 수입해 문명개화론을 주장했다.

 문화는 그나마 쉬운 개념이었다. 일상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문명(文明)’과 문화(文化)‘의 한자는 어느 문헌 한구석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社會)‘와 ’개인(個人)‘은 달랐다. 

 영어로 된 문헌에서 아주 자주 등장하는 ‘society’라는 단어를 일본의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은 처음에는 ‘인간교제’ ‘사(社)’ ‘회(會)’ 등으로 번역했다. 중국에서 사용한 결사 조직의 이름인 ‘백련회(白蓮會)’ ‘백련사(白蓮社)’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사(社)’와 ‘회(會)’가 서로 달라붙어 ‘사회(社會)’가 된 것이다. ‘individual’의 번역은 더 어려웠다. 주체 성립의 서구 근대사가 이 한 단어에 다 수렴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과 사회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것이 도대체 상상이 되는가? 개념이 없다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관한 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말이다.

 

 싸울 때마다 “너 몇 살 처먹었어?”라고 하는 이유

 ‘society’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시대 초기의 지식인들은 거의 모든 서구 문헌에 등장하는 ‘individual’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몰라 헤맸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 주체로서의 개인을 의미하는 ‘individual’에 대응하는 개념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individual’을 독일개인(獨一个人), 독일개인(獨一個人), 독일자(獨一者), 일척수(一隻獸), 일체(一體), 일물(一物) 혹은 히토리(ひとり)혼자 등으로 제각각 번역했다. 그중에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처음 사용한 ‘독일개인(獨一個人)’이 주로 사용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독(獨)’이 먼저 떨어져나가고, 이어 ‘일(一)’까지 탈락되어 오늘날 ‘개인’이 ‘individual’의 번역어로 자리 잡게 된다.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는 ‘individual’을 ‘일신의 품행’으로, ‘society’는 ‘동료와의 교제’로 번역했다. 서구 근대 문명을 구성하는 두 개의 큰 개념축인 사회와 개인의 편집 과정을 고려한다면 시케키의 번역이 화용론적 맥락에 더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개인이란 ‘문명화 과정의 개별적 반복’, 즉 발달과 성장의 산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문명화(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은 원래 ‘예절 바른’을 뜻한다. ‘사회적인(social)’이라는 단어와는 거의 동의어로 쓰였다. 문명화란 말 그대로 품위 있고, 예의바른 행동으로의 발전을 뜻한다는 이야기다. 문명화 과정의 핵심 내용인 ‘합리화(rationalization)’란 본능적 감정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세련된 표현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다.

 

 합리적인 문명사회는 각 개인이 예절 바른 교양인이 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서구 근대에서 아동 개념의 탄생은 이러한 교양 교육의 맥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그저 ‘작은 어른’일 따름이었던 아이들이 별도의 교육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원시적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합리적 성인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리적인 성인으로 발달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를 ‘아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자기통제가 가능한 성인이 되도록 콜레주(college)나 아카데미와 같은 교육기관이 아동의 양육을 책임졌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입어야 했던 옷은 군대 제복과 비슷했다. 이는 교육목표인 자기통제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아동 개념이 형성되고, 이에 상응하는 아동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근대 교육 이데올로기는 점차 세련되어졌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연령에 맞춰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령에 따라 학급을 분류하고, 각 학급의 수준에 맞는 발달 목표도 제시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을 무조건 한 학급에 모아 동일한 발달단계를 거치도록 하는 근대 교육원리는 매우 무모하고 성급한 일반화다.

 근대 이전의 문헌에서 각 개인의 연령이 정확히 기록된 경우는 거의 없다. 개인의 나이 따위는 한 개인을 설명하는 데 그리 중요한 카테고리가 아니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이는 윤리적 범주였을 뿐,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문서에 가장 먼저 나이를 기록해야 한다.

 근대 이전의 개인은 항상 어떤 집단에 속한 개인이었다. 그러나 단독자(單獨者)로서의 개인은 연령으로 구별할 수밖에 없었다. 집단에서 분리된 한 개인을 달리 특징지울 방법이 없었다. 특히 성인이 되기까지 아동의 아이덴티티는 오직 연령으로만 확인되었다. 연령에 따라 모든 상호작용의 내용도 결정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동의 연령 구분은 더욱 세분화된다. 아동과 성인 사이에 ‘청소년(靑少年)’이란 또 다른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청소년은 처음부터 ‘비행 청소년’이었다!

 영어의 ‘adolescence’ 혹은 ‘youth’를 번역한 ‘청소년’은 ‘청년’과 ‘소년’의 합성어로, 주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다. 일본에서는 ‘청년(靑年)’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사용한다. 보다 일상적인 개념으로는 ‘사춘기(思春期)’ 혹은 ‘청춘(靑春)’과 같은 개념이 있다. 인생을 사계에 빗대어 설명하는 중국 고전의 ‘청춘(靑春)’, ‘주하(朱夏)’, ‘백추(白秋)’, ‘현동(玄冬)’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그러나 봄으로 비유되는 청춘이나 청년의 개념은 서구적 단선론적 발달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겨울이 봄에 비해 더 처지거나 발달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동 개념에 이어 청소년 개념을 만들어 심리학의 발달 모델에 포함시킨 이는 하버드 대학 교수를 거쳐 클라크 대학의 학장을 역임한 스탠리 홀(Stanley Hall)이다. 그는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 유학을 가, 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로부터 발달과 성장이라는 심리학적 근대 이념을 배웠다. 미국에 돌아온 후, 스탠리 홀은 헤켈(Ernst Haeckel)의 발생반복설(recaptulation theory)에 근거한 진화론적 발달론을 ‘발달심리학’의 이름으로 구체화한다. 미국식 발달심리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동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또한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아주 다르다. 아동 개념에는 그래도 ‘사랑스러움’이나 ‘귀여움’과 같은 긍정적 정서가 동반된다. ‘사랑과 관심의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표상(social representation)에는 항상 아동이 부부 사이에 있다. 그러나 청소년은 달랐다.

 

 청소년은 처음부터 불량한 개념이었다. 청소년의 또 다른 이름 ‘juvenile’은 거의 ‘청소년 범죄(juvenile delinquency)’의 축약어로 쓰인다. 스탠리 홀은 이 청소년기를 ‘질풍노도(Strum und Drang)’의 시기로 명명하며 그 불안정한 특징을 더 노골화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 개념을 편집할 사회구조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산업화 때문이다. 일단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를 위해 훈련된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소규모 도제제도와 같은 교육 방식으로는 당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 노동력을 키워낼 수 없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가족 또한 더 이상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가족에서 교육의 기능이 떨어져나갔다. 교육은 모두 학교에 맡겨졌다.

 학교는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교육의 필요성을 정당화해야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불안하고, 위험하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의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청소년은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이기에 반드시 학교에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한국에서의 청소년 개념도 비슷한 경로로 자리 잡았다. ‘청소년 지도’, ‘청소년 상담’, ‘비행-청소년’, ‘청소년-문제’와 같은 개념은 ‘청소년은 반드시 지도와 상담이 필요한 불안한 존재’라는 근대적 표상을 전제하고 있다. 

 

 아동과 청소년의 개념은 근대 이후 탄생한 ‘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편집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근대적 주체가 그 산업사회적 존재 양식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객체화’라는 ‘소외(Entfremdung) 현상’을 동반하듯, 근대적 개인은 각 연령에 따라 아동, 청소년과 같은 각 발달단계로 귀속되어 또 다른 형태의 소외된 아이덴티티를 얻게 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또 다른 연령대의 개인이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했다. ‘노인’이다. 이제까지의 발달은 성인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 생산활동을 하다가 은퇴하면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평균수명이 그만큼 짧았다. 더 이상의 발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은퇴한 이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 평균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지고 있다. 개인의 발달이 성인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편집의 내적 필연성이 생긴 것이다. 계속 발달하지 않으면 죄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가 되기 때문이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는 비행 청소년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래서 요즘의 발달심리학에서는 ‘전생애발달(life-span-development)’을 이야기한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발달해야 한다는 거다. 근대 이후 생겨난 개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편집의 과정을 겪고 있다.

 

 에디톨로지의 원조 이론가, 엘리아스(Elias)와 아리에스(Aries)

 ‘개인은 편집된 것’이라는 인식을 가능케 한 대표적 이론가로는 『문명화 과정』을 쓴 독일의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와 프랑스의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를 들 수 있다. 

 

 엘리아스 :: 독일/영국의 사회학자이다. 브레슬라우 하이델베르그에서 공부한 후, 나치가 정권을 잡기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만하임(Mannheim)의 조교로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파리로 이주했다가 다음에 영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전쟁이 끝난 후 리세스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0년대에는 독일과 네델란드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사회학의 '형태(Figurational)'학파의 주요한 지적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주요 저작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독일에서 출판되거나 재판되었으며, 후에 영어권에 알려졌다. 『문명의 과정』(2권, 1939)에서 그는 서구 유럽의 국가 형성에 관한 상세한 이론을 제시하며 어떻게 수세기를 걸쳐 오랜 기간의 사회구조의 발전과정이 개인의 퍼스낼리티 구조의 변화를 가져 왔는가를 보여 준다. 
사람들은 더 큰 자기통제능력을 얻게 되고, 행동은 더욱 '문명화'되었다. 이 이론은 다른 연구를 위한 패러다임으로 활용되어 왔다. 엘리아스 자신은 특히 많은 논문들에서 그 함의를 발전시켜 왔다. 지식과 과학 사회학에 관한 그의 다른 저작으로는 『기성질서와 이방인』(1965), 『궁정 공동사회』(1969), 『사회학이란 무엇인가?』(1978)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사회학사전, 2000. 10. 30., 사회문화연구소) 

 

 엘리아스와 아리에스는 ‘발달’이란 서구 역사에서 구성된 아주 우연적인 개념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을 가능케 하는 각종 근대적 개념이 역사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편집되었다는 것이 에디톨로지적 인식론이다.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역사관과, 역사의 내용은 언제나 편집되고 구성된다는 에디톨로지적 인식론은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이다.

 역사적 사건은 물론 인식을 가능케 하는 정신의 도구, 즉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다는 관점을 갖게 되면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구성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서술은 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의 근본 전제를 상대화하는 메타적 방법론이다. 개념들의 ‘생성’에 관한 엘리아스와 아리에스의 메타적 편집 테크닉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식계보학 혹은 지식고고학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리에스가 쓴 『죽음 앞의 인간』은 서구 사회에 죽음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근대 이전에 인간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공개되고,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경험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처음부터 죽음, 시체, 해골 등을 무서워한 게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근대 이후, 죽음은 은폐되고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된다. 그 결과, 죽음은 일상의 삶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되어버렸다. 이 같은 한 죽음의 개인화는 성장과 퇴화에 관한 근대의 단선론적 발달관과는 아주 긴밀한 이념적 연관이 있다는 게 내 문화심리학적 추론이다.

 엘리아스는 아리에스의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의 개인화’는 죽음의 공포, 죽음의 고통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공포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통해 매개되고 재생산되는 죽음에 관한 다양한 두려움은 결국 역사적 편집의 결과라는 이야기다.

 

 

 

02 ‘나’는 내 기억이 편집된 결과다! 

 상황이 달라지면 ‘내가 기억하는 나’는 달라진다!

 ‘텍스트(text)’는 항상 해당 ‘콘텍스트(con-text, 맥락)’에서 기록된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는 반드시 그 텍스트가 쓰인 문화적·역사적 콘텍스트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경력·학력을 제외하고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학력·경력 없이도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깊은 자기성찰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명함을 내보이지 않고 자신을 얼마나 자세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서술할 수 있는가가 진정한 성공의 기준이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일리’있다!

 자신에 관한 텍스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 즉 기억으로 구성된다. 나는 ‘과거 기억의 편집’이다. 문제는 그 기억이란 항상 자의적이고 편파적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중요한 순간만 기억한다. 그 ‘중요한 순간’조차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만 기억에 포함시킨다.

 뿐만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구체적 내용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콘텍스트에 따라 ‘전혀 다른 나’가 편집된다는 소리다.

 

 ‘어떤 나’는 진실이고, ‘어떤 나’는 거짓일 수 없다. 나에 관한 텍스트는 다 ‘일리(一理)’가 있다. 단지 서로 다른 콘텍스트에서 편집된 결과일 뿐이다. 모든 콘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 관해 하는 이야기가 모두 ‘진리(眞理)’일 수는 없단 거다.  그래서 가장 성숙한 의사소통 방식은 상대방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일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이른바 ‘일리의 해석학’이다. 이를 내러티브 심리학에서는 베리시밀리튜드(verisimilitude)라고 정의한다. 국어로는 여실성(如實性) 혹은 핍진성(逼眞性)으로 어색하게 번역된다. ‘아주 그럴듯하다’는 뜻이다. 상담이나 정신치료에서 이야기하는 ‘래포(rapport)’의 본질도 바로 이 일리의 해석학에 있다. 

 

 상대방의 일리를 이해하려면 상대방이 처한 콘텍스트에서 구성되는 텍스트 형성 과정에 관한 이해와 통찰이 있어야 한다.

 현대 심리학의 ‘일관된 자아’에 대한 요구는 자아 구성 과정에 관한 무지에서 나온다. 

 

 스티브 잡스 이야기가 빌 게이츠 이야기보다 훨씬 재미있다!

 예술가나 혁명가의 내러티브는 불연속적이고,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로 충만하다. 그러나 과학자의 내러티브는 연속적이고, 일관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내러티브는 진리를 강요할 뿐, 일리(一理)의 해석학이 빠져 있다. 반면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상호작용적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잡스의 정서적·모순적·자극적 내러티브는 듣는 이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주체적으로 편집해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남이 만들어주는 의미는 전혀 의미 없다.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03 우리는 왜 백인에게는 친절하고, 동남아인에게는 무례할까? 

 근대 해석학이란, 주체 형성에 따른 공간적·시간적 좌표 설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어 시간의 축에서 일어나는 세상의 변화를 주체의 행위에 의한 발전 과정으로 해석하는 단선론적 역사 발전의 세계관이 나타났다. 이때 ‘의도성(intentionality)’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각 개인의 행동은 역사 변혁을 위한 혁명적 행위이거나 반동적 행위로 설명된다.

 사람들은 역사란 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이 같은 ‘단선론적 발달관’이란 이 세계의 모든 변화가 단 하나뿐인 시간의 축에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인류 역사를 봉건주의,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해간다고 해석하는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전형적인 단선론적 발달관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마르크스식의 구체적 발전 단계는 거부한다. 그러나 역사를 뒤로 돌이킬 수 없는 ‘합리화(rationalization)’ 또는 ‘지성화(intellectualization)’의 과정으로 파악한 그의 몰가치적 사회학 또한 단선론적 발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관성과 연속성에 기초한 ‘하나의 역사’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 :: 독일의 경제학자 및 사회학자. 그의 연구범위는 경제사 및 경제정책, 경제학 내지 사회과학의 방법론, 종교사회학, 사회학 등에 널리 미쳤다. 제1차 대전 후 청년층으로부터 지도자로 추앙 받으며 부르조아 자유주의사상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민족국가를 최상의 권위로서 승인하고 사회과학은 그 권위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요구와 과학적 인식의 보편적 가치의 조화가 그의 학문적 과제였다. 국가는 직접 과학적으로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그 이전의 국가와는 달리 신비적인 힘 대신 합리적인 구성과 기능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시민사회의 발전 때문이다. 이 합리화 과정에서 국가나 세계의 합리화를 위한 길이 트인다. 그러므로 학문은 국가의 비합리성의 성립을 밝히고, 이것이 합리화되어 가는 과정을 규명하여야 한다. 이 과제를 준 것이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3 Bde., 1920~1921)이다. 여기서 그는 동서양의 세계종교와 그 사회와의 관계를 밝히는 자리에서 근대유럽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신앙이 얼마나 자본축적의 의욕을 긍정 · 촉진했는가를 해명했다.
한편 그는 당위(Sollen)와 존재(Sein)를 엄밀히 구별하여, 이론적 과학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정책적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가치판단의 도입을 물리치고 과학자는 단지 사상(事象)의 인과관계의 분석 또는 목적과 수단과의 적합성의 추구에만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몰가치성 또는 가치로부터의 자유(Wertfreiheit)론이다. 역사학파에 대한 비판으로서 출판된 이 「가치로부터의 자유」에 의하면, 정책의 의무는 어떤 주어진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떠한 합리적인 수단이 있는가를 추구하는 데 그치고, 생각할 수 있는 많은 수단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은 오로지 각 개인의 주관에 맡겨, 학문의 영역 밖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목적에 대한 수단의 적합성을 알기 위해서는 어떤 보조적인 인식수단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을 위해 그는 이념형(Idealtypus)이라는 개념을 구상하였다. 또한 그는 역사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경제사의 연구를 행하여 사적유물론에 반대하였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입장을 의식적으로 취한 그의 사회과학방법론은 오늘날의 구미, 특히 미국의 사회과학에 강한 영향력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버 [Max Weber] (경제학사전, 2011. 3. 9., 경연사)

 

 사회인가, 문화인가?

 ‘사회(Gesellschft)’와 ‘문화(Kultur)’의 개념 차이 또한 역사적 시간을 단수로 보느냐, 복수로 보느냐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사회라는 개념은 시간의 복수성을 제거한 개념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방식은, 보편적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각 사회의 발전 수준은 동일한 시간의 축에서 그 위치가 정해진다.

 그러나 문화는 이러한 보편성을 제거한 개념이다. 보편성을 전제로 하는 사회라는 개념 자체가 또 하나의 문화적 특수 사례일 뿐이라 추론이 가능해 진다. 

 각 나라의 문화나 국가는 역사 발전 단계의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으며, 그 수준의 차이는 쉽게 비교될 수 있다는 단선론적 발달관은 근대 이후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발달의 정점에는 미국과 일본, 유럽 국가들이 있고, 중간 어딘가에 한국이 있다. 그리고 가장 밑에는 동아시아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근대 서양인들이 일방적으로 한 줄로 세워놓은 단선론적 발달단계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부를 문화적 수준과 동일시하고, 세계의 나라들을 일렬로 세우는,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세계관이다.

 

 서구 사회과학에는 두 방향의 상반된 이론적 흐름이 존재한다. 한쪽에는 ‘발달(Entwicklung)’ 개념에 기초한 ‘사회(Gesellschaft)’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구성(Konstruktion)’ 개념에 기초한 ‘문화(Kultur)’가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방식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사회 변화를, 합리성으로의 발전이라고 규정하는 사회 개념은 ‘역사 발전’이라는 근대 이념과 깊은 상관이 있다. 반면 서구 문화의 변화 양상이야말로 특수한 것이며, 각 문화의 삶의 방식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하는 문화구성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 효용성이 사라지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사회과학적 논의의 중심에 선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다양한 삶의 내용과 의미들을 해석하는 것은 이 구성주의적 문화 연구의 중심 내용이 된다.

 

 인지발달이론과 헤겔의 발생반복설에 숨겨진 폭력

 ‘사회는 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총론 차원의 단선론적 발달관은 피아제(Jean Piaget)식 발달심리학에서 각론이 완성된다. 피아제의 발달심리학,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인지발달심리학’은 근대 발달 이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피아제의 심리학은 정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다룬다고 해도 인지 과정과 관련될 때만 다룬다. ‘정서는 비합리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문 사회과학에서 제외되었던 비합리적 인간관의 복원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이후로, 인간의 정서 영역은 통제되지 않으면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불명확한 감정의 영역을 파고드는 프로이트 이론이 불편하게 여겨져 강단 심리학에서 소외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문명화 과정이란 이 위험한 정서나 감정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과정이라고 엘리아스는 설파한다. 원시적 감정을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스리는 다양한 의례가 문명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문명화 과정을 통해 수립된 정서의 외적 통제 방식을 각 개인이 내면화하는 것이 각 개인의 사회화 과정이라고 엘리아스는 주장한다. 정리하자면, 집단적 정서 통제가 문명화 과정이고, 개인적 정서 통제가 사회화 과정인 것이다.

 피아제는 이 위험하고 비합리적인 정서나 감정의 영역을 인지 과정의 종속변수로만 다룬다. 예를 들어, 도덕성 발달을 ‘규칙을 인식하는 수준’과 같은 인지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대신 각각의 문화적 환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동의 보편적 인지 발달을 주장한다.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된다. ‘감각 운동기-전조작기-구체적 조작기-형식적 조작기.’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에 따르면 추상적 사고, 보편적 사고가 가능한 형식적 조작기는 15세 정도에 완성된다. 대략 이 수준에는 올라야 문명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을 따르자면, 문화적 차이는 인지 발달 수준의 차이가 된다. 열등한 문명과 고등 문명의 차이는 인지능력의 차이로 설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등 문명은 열등한 문명을 계몽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무지한 자를 깨우쳐줘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으로까지 이어진다.

 서구의 식민지 지배의 윤리적·논리적 정당성은 이런 식으로 간단히 획득된다. 피아제식 발달론의 원형은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의 “개체의 발달 과정은 계통의 발달 과정을 반복한다(Ontogeny recapitulates phylogeny)”는 ‘발생반복설(recapitulation theory)’이다.

 

 발생반복설 :: 반복설 또는 생물발생원칙이라고도 하며, 생물의 개체 발생에 관하여 헤켈(Ernst Haeckel Haeckel, 1834∼1919)이 제창한 생물의 개체 발생에 관한 학설이다. 그에 의하면 “한 생물의 개체발생이 그 개체가 속한 그룹의 계통발생의 반복이기 때문에 생물은 그 조상을 닮은 연속적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 이론은 한때 계통발생학과 비교발생학을 연구하는 데 많은 관심을 끌었으나 현재는 반론의 여지가 많은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복발생설 [反復發生說, recapitulation theory] (지구과학사전, 2009. 8. 30., 북스힐)

 

 헤켈의 발생반복설은 아주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있다.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면, 도대체 ‘새로운 것’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헤켈의 발생반복설과 찰스 다윈(C.R. Darwin)의 자연선택설에 기초한 진화론을 자주 헷갈려한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헤켈의 이론에는 발달 방향이 정해져 있는 반면, 다윈의 진화론에는 발달이 어느 방향으로 이뤄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헤켈은 배아의 발달이 인간의 전체 진화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헤켈은 배아의 발달 과정에 물고기 아가미나 원숭이 꼬리 같은 것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헤켈이 실제로 그러한 장면을 확인한 적도 전혀 없고, 그림도 제멋대로 조작했다는 사실이 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04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편집될 뿐이다!

 오늘날은 더 이상 위대한 개인의 시대가 아니다. 다들 일찍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기 때문이다. 영웅이 되려면 무조건 일찍 죽어야 한다.

 세계사의 모든 영웅은 일찍 죽었다. 큰 업적을 남기고는 바로 죽어야 영웅이 된다. 멀리는 알렉산더 대왕부터 가까이는 이소룡과 스티브 잡스에 이르기까지, 죄다 일찍 죽었다. 늙은 영웅은 없다. 일찍 죽어야 사람들은 영웅의 느닷없는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불완전하게 끝난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길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방식으로는 절대 영웅이 될 수 없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할 이야기도 없다. 결말이 뻔하다. 전혀 재미없다.

 만약 오래 살면서도 영웅이 되고 싶으면, 말년에는 사람들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도록 은둔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니면 넬슨 만델라처럼 젊어서는 죽어라 고생하고, 늙어서는 위대한 일을 하든가.

 

 천재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편집된 개념이다

 천재도 그렇다. 뭔가 결핍되어야 한다. 대부분 천재의 삶에는 행복이 빠져있다. ‘행복한 천재’는 없다. 대신 유명하다. 행복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수식어다.

 정규 과정을 그대로 학교에 다니고,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졸업했다는 천재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없다. 체계화된 정규교육을 충실하게 받으면서, 동시에 천재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정상 분포 곡선의 평균치에 가장 근접해있는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정상 분포 곡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재의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재나 신동은 타고난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천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들의 특별한 능력이 사회적 요구와 맞물려 빛을 발할 수 있어야 천재가 되는 것이다.

 

 데마고그(demagogue) ::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과 민중지도자를 가리키는 데마고고스(domagogos)가 데마고그의 어원이다. 당대에는 비난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현대에는 대중의 감정과 편견에 호소하여 권력을 취하려는 정치가를 의미한다. 오늘날처럼 개인의 가치체계의 안정성이 불명확한 현대 대중사회에서 데마고그는 굉장히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데마고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돌프 히틀러를 들 수 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을 가지고 선동적으로 벌이는 허위선전을 '데마고기(demagogy)' 또는 줄여서 '데마'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데마고그 [demagogue]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천재는 사회·문화적 편집의 결과다. 천재의 사회·문화적 필요가 극대화된 시기가 바로 단선론적 발달관이 형성되던 근대 초기다. 봉건으로부터 시민사회로의 이행기는 성숙한 주체, 능력 있는 개인에 대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위대한 개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역사 발전은 이 같은 위대한 개인에 의해 이뤄진다고 믿었다.

 개인’과 ‘발달’은 함께 시작된 개념이다. 위대한 개인, 주체의 특별한 완성을 뜻하는 천재가 전제하고 있는 개념적 전제 또한 발달이다. 이때 천재는 일반인들과 다른 특별한 발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새로운 발달의 지향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천재에게는 특별한 시대적 과제가 주어진다. ‘계몽(Aufklärung)’이다. 발달단계에서 뒤처진 이들을 끌어올리는 역할이다. ‘발달-계몽(또는 교육)’의 개념적 긴장 관계에서 천재는 탄생하는 것이다. 

 계통발생, 즉 문명 발달의 단선론은 계몽으로 이어지고, 개체발생의 단선론은 근대 교육제도의 확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헤켈의 ‘발생반복설(recaptulation theory)’에 근거한 근대의 발달 개념에는 천재는 설 자리가 없다.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순환론에서 ‘아주 새로운 존재’인 천재가 도대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빠져나갈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생물학적 환원론이다. 천재는 유전자가 다르다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기 시작하면 이미 발생반복설은 폐기된 거다. 

 

 계몽주의 시대의 편집된 천재, 모차르트

 천재의 시대적 맥락이 따로 있다는 것을 엘리아스는 자신의 저서 『모차르트』에서 아주 흥미롭게 보여준다. 물론 모차르트에게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가 유년기의 연주 여행에서 보여주었던, 뛰어난 즉흥연주 기술이다. 그러나 그 정도 능력은 사실 당시 음악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었다. 단지 모차르트는 다른 이들에 비해 월등히 어렸기 때문에 신기했을 따름이다.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이 처음에만 인기를 끌고, 두세 번째 연주 요청은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맨 처음에만 신기했다는 뜻이다. 원래 모차르트는 한때 반짝하다 사라지는, 요즘의 아이돌 스타 같은 운명이었던 거다.

 신동 모차르트의 이런 즉흥연주 능력 또한 생득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엘리아스의 주장이다. 일단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아들에게 아주 혹독한 도제식 훈련을 받게 했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유럽의 유명하다는 선생은 다 만나게 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던 시민사회에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길 원했다. 음악가였던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궁정 사회의 하인 신분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아들이 똑같이 반복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한 어린 모차르트의 성격도 한몫한다. 모차르트는 누구에게나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 혹독한 훈련도 견뎌낼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애정 결핍에 시달린 모차르트의 성격적 특징은 방탕했던 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와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동 모차르트가 성인이 되어서도 천재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수공업자의 예술’에서 ‘예술가의 예술’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적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통찰이다.

 

 바흐나 헨델의 경우를 보자. 교회나 궁정의 음악가였던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숙련된 수공업자에 불과하다. 그들이 작곡한 음악도 자율적 주체의 ‘창조적 행위’라기보다는 교회나 궁정의 의례에 맞춰 끊임없이 생산해야 하는 ‘수공업적 행위’의 결과였다. 바흐의 ‘푸가(fugue)’와 같은 다양한 대위법 형식만 하더라도, 보다 쉽게 작곡하기 위한 일종의 ‘스킬’이었다. 좀 더 효율적인 음악 생산을 위해 고안된 수공업적 ‘꼼수’였을 혐의가 짙다는 거다. 물론 내 가설이다. 그래서 바흐나 헨델을 천재라고 부르기가 좀 어색한 거다. 게다가 그들은 아주 오래 살았다.

 좌우간 오래 살면 천재고 영웅이고 다 포기해야 한다. 후세의 사람들은 아주 오래 산 그들을 차마 천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런 호칭은 순전히 일본인들의 농간이다. 독일에서 그런 호칭은 들어본 적 없다. 그런 식으로 호칭을 붙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럼 ‘음악의 고모’는 누구고, ‘음악의 외삼촌’은 누구인가?

 

 베토벤을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데 약간 주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57년을 살았으니 요절한 것도 아닌 데다, 베토벤은 출판과 연주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예술가의 예술’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베토벤은 “사람들은 이제 나와 흥정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요구하면 그들은 지불한다”며 자신의 확립된 예술가적 위상을 자랑하기도 했다.

 반면 모차르트의 사정은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는 궁정 사회에서 인정받고, 재정적 후원을 받기 위해 귀족들의 주문에 맞춰 작곡해야 하는 수공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런 이중적 삶이 모차르트를 천재로 만들었다.

 결국 신동 모차르트가 천재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절대군주제에서 시민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사회·문화적 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안정된 사회에서 천재는 나타나기 어렵다. 안정된 사회란 발달 과정이 정형화된 사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천재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기에 집중해서 나타난다. 피카소의 천재적 예술 작품은 ‘표상(representation)’으로서의 미술이 사진이라는 기계적 수단에 의해 위협받던 시대의 산물이고, 스티브 잡스와 같은 천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가 아주 우연하게 한 개인에게 깔때기처럼 모인 결과다.

 천재는 사회 문화의 변동이 한 역사적 개인에게 편집되어 나타나는 우연적 결과다

 

 

 

05 미국은 국가(國歌)로 편집되는 국가(國家)다

 한국의 신도시를 볼 때마다 서구인들이 보이는 놀라움 뒤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다. 문화는 그렇게 인위적으로 갑자기 만들어 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근대를 지나며 세계사를 이끌었던 유럽식 자부심이다. 오만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보다 훨씬 앞서 정말 황당한 짓을 꾸민 나라가 있다.

 미국이다. 거긴 한국처럼 도시 몇 개의 수준이 아니다. 그 엄청난 대륙에 그 어떤 문화적 족보도 없는 ‘제국’을 만들었다. 오늘날 유럽의 나라들은 미국 문화의 천박함을 비웃는다. 그러나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미국식 랩을 흥얼거리고,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하는 자신의 젊은 세대를 보며 많이 씁쓸해한다.

 

 ‘민족’의 개념 없이 만들어진 국가, ‘미쿡’

 미국은 근대 서구 문명의 실험장이었다. 유럽 근대화의 모든 유산이 신대륙으로 몰려가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은 유럽과는 전혀 다른 토대에서 출발해야 했다. 일단 유럽의 근대국가 형성을 가능케 했던 ‘민족’이라는 개념이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성립 불가능했다.

 민족은 근대 이후에야 기능하기 시작한 가공의 이념이다. 그 이전에는 왕의 국가, 신의 국가였을 따름이다. 절대왕권이 사라진 이후, 국가를 지속하게 할 이념으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1900년대 이후에나 민족 개념이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저항의 이념으로 우리의 ‘민족’ 개념은 편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상상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민족 개념 자체가 부정적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그 화용론적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다. 당시 독일인들은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장벽 앞에서 외쳤다. 그러나 통일되기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동독 사람들은 동독 공산당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우리가 바로 그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고 외쳤었다. 공산당의 주체인 바로 그 ‘인민(Volk)’이라는 주장이다.

 유독 우리나라만 여전히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이다. 남북 분단 때문이다. 

 헤어졌던 가족이 다시 만난다고 바로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와 같은 옛날이야기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 다른 방식의 ‘지지고 볶는’ 삶이 시작될 뿐이다.

 민족 통일의 기쁨은 아주 추상적이고, 체감하는 현실은 지극히 구체적이다. 독일의 민족 개념이 변증법적 해체의 과정을 걷는 것처럼 민족이라는 낡은 이념도 발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이 낡은 ‘민족’ 개념의 해체를 위해서다.

 

 지난 세기에 미국이 잘나간 것은 바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만들어진 나라다. 민족의 이념으로 도무지 묶이지 않는다. 혈연, 지연을 떠난 새로운 인간관계에 대한 이념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국의 국가적 표어가 1955년까지 ‘에 플루리부스 우눔(E Pluribus Unum)’이었다. 1781년 미국 의회가 채택한 것으로,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the one from many)’라는 뜻의 라틴어다.

 1956년부터는 국가적 표어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로 바뀌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후, 이 국가적 표어를 이전 것과 혼동하는 바람에 미 하원에서 국가적 표어를 재확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 민족의 국가가 아닌 또 다른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구체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방법론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이나 역사 등의 문화적 배경과는 무관한, 독립된 개인을 연구하는 ‘미국식 심리학’은 아주 유능한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바로 ‘행동주의(behaviorism)’다!

 

 인간 심리의 광대한 편집 실험실, ‘미쿡’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을 연구하는 대신 ‘자극(input)’과 ‘반응(output)’이라는, 눈에 보이고 통제할 수 있는 요인만을 심리학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왓슨(J. Watson)이나 스키너(B.F. Skinner)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통제할 수도 없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요인을 건드리면 어떤 행동이 나오는가만 알면 된다.

 

 행동주의는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의 그 유명한 ‘침 흘리는 개’를 획기적으로 변형시킨 이론이다.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듣게 하면, 나중에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그 파블로프의 개는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다. 그저 묶여서 먹이를 받아먹고, 종소리를 들을 따름이다. 침도 가끔 흘리고.

 반면 ‘스키너 상자’에 갇힌 쥐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벽의 지렛대를 눌러야만 먹이를 얻어먹을 수 있다. 먹이를 먹으려면 반드시 주인이 원하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상과 처벌이라는 ‘강화(reinforcement)’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유기체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확립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스키너의 이 같은 행동주의를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라고 하여,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Classical Conditioning)’와는 확실하게 구별한다.

 스키너의 행동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암묵적 토대가 된다. 즉, 성과에 따른 보상과 처벌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오늘날 경영학의 중요 영역인 인사관리·평가 시스템이란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스키너의 행동주의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미국에서 꽃피운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증명할 수 없는 가설들로 인간 심리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확실한 방법론을 찾아내려 했을 따름이다. 인간 행동을 수치화하고, 실험실 조작을 통해 행동을 관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계량화된 방법론이다.

 

 어린 아들이 엄마를 차지하려고 아버지와 경쟁하려 한다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같은 프로이트의 ‘구라’와 한번 비교해보라.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한가. 또한 얼마나 실용적인가. 아울러 내가 의도하는 대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라. 전제군주식 억압이나 파시즘의 천박한 선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세련된 방법이다. 

 실험심리학 방법론에서는 실험실에 인간이 살고 있는 실제 사회를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 심리학은 아예 전제를 뒤바꿔버린다. 사회를 축소하여 실험실로 들여오는 대신, 실험실을 확대하여 사회 전체를 아예 심리학 실험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심리학 방법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당시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밟고 있었다. 당시의 미국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문제가 나타났다. 게다가 미국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의 나라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도 엄청났다. 

 미국식 심리학은 이를 극복해낼 방법론을 개발해나간다.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야기된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문제를 개인의 정신병리적 차원으로 환원한다. 임상심리학, 상담심리학 분야가 미국에서 급속히 성장한 이유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는 병사들을 평가하고 진단하는 심리검사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개발된다. 

 객관화, 표준화, 합리화라는 유럽식 모더니티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내면을 평가하고 측정하는 미국식 심리학 방법론에서 활짝 꽃피게 된 것이다. 통계학이 심리학의 필살기로 자리 잡게 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인간이 복잡한 내면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이제부터 인간의 마음은 얼마든지 통제 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 스포츠 등을 통해 반복되는 미국식 의례는 그 어떤 민족주의보다도 확고한 ‘국가주의’로 무장한 ‘아메리칸’을 양산한다. 전 세계에 미국인들처럼 시도 때도 없이 국가를 부르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야구, 미식축구 등 모든 운동경기는 반드시 국가를 부르고 시작한다. 이 같은 대중심리학적 조작은 그 어떤 세뇌 방법보다도 강력하다.

 미국은 심리학으로 흥한 나라다. 이제 그 막강한 문화 권력을 통해 전 세계인을 ‘미국인화’하고 있다. 

 

 

 

06 심리학의 발상지 독일에서 심리학은 흥행할 수 없었다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로 시작된 근대 심리학이 독일의 대표학문이 되지 못하고, 미국에서 꽃피운 이유도 갈국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결정의 결과였다.

 당시 독일 학자들은 ‘근대적 개인’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당시 독일의 지식인 사회에는 개인의 내면에 일어나는 정신적 과정을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틀로 접근하기보다는 기존의 철학이나 사회학으로 충분히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험심리학의 창시자인 빌헬름 분트조차 자신이 속한 라이프치히 대학에 심리학가가 신설되는 것을 반대했다. 철학이면 충분한데 구태여 심리학과의 신설이 필요하겠냐는 것이다.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 독일의 심리학자, 생리학자, 철학자.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 심리학 연구에서 실험실을 설치하여 심리현상의 실험적 연구를 하고, 실험심리학을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심리학에서는 개인의 심리현상이 단순한 각종 요소의 결합, 요컨대 연합과 통각(統覺)의 법칙을 갖는다고 하여 이 연구를 둘러싸고 구성적 심리학이라 불리우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경우에 각 요소의 결합에 새로운 내용이 나타나기 때문에 결합을 하게 하는 정신의 창조작용이 존재한다고 하여, 그것을 의지(意志)의 기능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철학상 의지를 기본으로 하는 견해, 즉 주의설(主意說)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는 개인심리 외에도 민족심리의 연구를 중시했다. 언어ㆍ풍속ㆍ신화ㆍ종교ㆍ법률 등은 정신의 표현인데, 여기에서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 민족심리학이다. 한편 과학을 분류해 보면, 우선 형식과학(수학)과 경험과학으로 분류되며, 후자를 연구 대상의 기준으로 하여 나누면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으로 분류되고, 철학은 이런 여러 과학의 인식론적 기초를 명백하게 하는 동시에 여러 과학의 종합이라고 생각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분트 [Wundt, Wilhelm Max]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독일, 프랑스 등의 지식인 사회의 철학적 깊이와 권위에 눌린 당시 미국이라는 후진국의 유학생들에게 신설 학문인 심리학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유럽 대륙의 개념적 사고를 좇아가기보다는 실험을 통해 확인된 ‘팩트’와 숫자를 논하는 것이 훨씬 간단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의 미국 자본주의는 심리학과 같은 개인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학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심리학은 당시 미국 사회의 이런 요구를 아주 적절하게 채워줬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심리학으로의 과감한 선택이 오늘날의 미국사회를 가능케 했다는 거다. 미국식 경영학이 오늘날 이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심리학주의’로의 과감한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식 경영학은 심리학적 지식의 실천적 변용이다.

 모든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는 미국식 심리학 전성시대는 오늘날 ‘피로사회(Mü digkeitsgesellschaft)’라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으로 이어진다.

 

 나치의 역사 때문에 다르게 편집되어야만 했던 독일의 ‘개인’

 20세기 전반에 걸쳐 독일 학계가 신흥 학문인 심리학을 도외시하고 여전히 사회학, 철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나치즘이다. 

 나치즘은 절대 개인의 심리로 환원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홀로코스트라는 만행이 히틀러와 같은 정신병자의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살인사건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면, 또 다른 병적 개인의 출현은 언제든 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치즘의 심리학이 환원주의적 설명은 독일인들에게 또 다른 문제를 제공하고 있다. 그 치욕스러운 과거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독일인들 각자에게 도덕적·윤리적 책임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독일 지식인들은 나치즘을 주로 정치·경제와 연관된 사회구조적 문제 혹은 사회·문화적 문제로 설명했다. 산업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독일이라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모여 나타났다거나, 독일의 독특한 권위주의적 문화가 나치즘의 원인이었다고 규명하는 방식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아버지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독일식 권위주의적 가족 문화가 위기의 시대에 히틀러라는 권위주의적 인물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전후 독일 사회는 모든 종류의 권위주의를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일단 다양한 국가적 행사, 집단적 세리머니가 사라진다.

 심지어 학교에서 아이들이 모여 함께 노래하던 합창 시간도 사라진다. 대신 리코더와 같은 아주 ‘착한’ 악기의 합동 연주가 합창을 대신한다. 독일의 68세대는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가족조차 해체하려 했다. 권위주의적 사회의 기원이 권위주의적 가족제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 이런 시도들이 어느정도 성공하는가 싶던 즈음, 갑자기 대니얼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의 박사 논문 『히틀러의 자발적 학살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 출판된다. 홀로코스트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독일인들 각 개인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골드하겐 논문의 직접적 모티브는 1992년 발간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Ordinary Men)』이다.

 브라우닝은 폴란드에 투입돼 수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에 대한 자료를 아주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저지른 이들은 나치의 친위대도, 열혈당원도 아닌 아주 평범한 일반 병사들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브라우닝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거나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한 사람들이 일으킨 집단 범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똑같은 ‘상황’이라면 101예비경찰대대의 대원들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결론이다. 범죄를 저지른 각 개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상황론이다. 이 같은 브라우닝의 상황론적 결론에 골드하겐은 정면으로 반박한다.

 홀로코스트는 절대 상황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다. 아주 평범한 독일 국민들 각 개인의 적극적 가담의 결과라는 거다. 이런 골드하겐의 주장을 당시 독일 언론은 아주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도했다. 전후 수십 년간 노력해왔던 홀로코스트의 사회구조적 설명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의 독일적 트라우마는 이렇게 모든 종류의 심리학주의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다. 독일의 지식인들은 20세기 후반, 세계의 지성계가 몸살을 앓았던 포스트모던 논쟁에서도 한 발짝 비껴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칸트적 선험성에 대한 포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포기할 경우,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하버마스 같은 학자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근대의 프로젝트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완성되지도 않았기에 해체될 수도 없다는 거다. 오히려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양 축에서, 도구적 합리성의 일방적 질주로 인한 탈균형이 근대사회의 근본 문제라는 주장이다.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자기 착취의 편집 구조

 근대적 개인의 문제가 심리학의 본고장인 독일에서는 연전히 사회구조적·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논의되는 동안, 미국 심리학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사회·문화적 구조와는 동떨어진 ‘진공상태의 개인’을 전제로 하는 패러다임이다.

 심리적 과정을 사회·문화적 과정과 역사적 경험의 내면화로 설명하려는 독일식 설명과는 달리, 미국식 심리학에서 전제하는 개인은 지극히 개별화된 주체다. 또한 이 개인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뤄낼 수 있는 전능한 주체’다. 근대 독일식 ‘규제 사회’와는 구별되는 미국식 ‘성과 사회’에 지극히 잘 어울리는 주체다. 미국식 개인주의 심리학에서 극대화되는 후기 근대적 개인의 본질을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병철 교수는 ‘긍정성 과잉’으로 설명한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핵심을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고 규정한다. 근대 후기의 성과 사회는 각 개인을 끊임없는 자기 착취의 나르시스적 장애로 몰아넣는다. 타인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 착취’다.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주체는 죽을 때까지 안정된 자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후기 근대적 주체의 미완결적 성격은 자신을 태워버리는 ‘번아웃(burn-out)’과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프로이트적 억압은 타율적 규율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정성’이다. 슈퍼에고의 본질은 사회적 규율의 내면화다. ‘~을 해서는 안 된다’ ‘~을 해야만 한다’는 타율적 규제, 억압, 강제로 인해 주체는 끊임없이 불안함을 느낀다. ‘독일식 개인’의 모습이다. 반면 주체의 자율성이 극대화된 성과 사회의 본질은 ‘긍정성’이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미국식 개인’이다. 미국식 개인에게 나타나는 능력의 무한 긍정은 독일식 개인의 금지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 한병철 교수의 주장이다. 끝 모르는 자기 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어디까지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인가. ‘넌 뭐든지 할 수 있어’는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와 같은 뜻이다. 결국 한도 끝도 없는, 이런 종류의 자기 긍정성은 우리 모두를 피로하게 만들고 맥 빠지게 한다.

 근대적 개인의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에 관한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후기 근대적 ‘우울함’이다.

 

 자신 있는 사람은 이야기가 짧다. 좌우간 이야기든 책이든, 쓸데없이 길면 뭔가 의심해야 한다.

 

 

 

07 프로이트는 순 사기꾼이었다! 

 얼마든지 가짜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는 정신분석학적 최면이나 상담 요법을 이용해 억압된 기억을 되살리는 ‘기억회복치료RMP; recovered-memory theraphy)’가 크게 유행했다.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겪게 되면, 당사자는 그 사건 자체를 기억에서 아예 지워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억압된 기억은 또 다른 심리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기억회복치료란 이 억압된 기억을 되살려 그 사건을 정면으로 맞부딪쳐 해결하도록 하는 심리 치료다.

 기억회복치료는 주로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의 억압된 기억을 되살리는 데 사용되었다. 1988년에 엘렌 바스(Ellen Bass)와 로라 데이비스(Laura Davis)는 이런 임상사례들을 정리해서 『치유할 수 있는 용기(The Courage to Heal: A Guide for Woman Survivors of Child Sexual Abuse)』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기억회복치료는 당시 미국 사회에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바스와 데이비스는 미국의 전체 여성 중 3분의 1가량이 유년 시절에 이런 성폭행을 경험했을 것이라고까지 추정했다.

 

 다른 한편에서 아동 성폭력에 대해 현재 미국 사회가 너무 과도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자녀를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고소당한 부모들과 이들의 소송 대리인들, 인지심리학자들은 ‘기억 왜곡 증후군 재단(FMSF; False Memory Syndrome Foundation)’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정신과 의사 집단이 심리 치료를 빙자해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기억회복치료란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가짜 기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가장 앞장선 심리학자가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다.

 ‘잘못된 정보 효과(misinformation effect)’라고 불리는 실험은 이런 식이다. 자동차 사고 화면을 보여주고, 한 그룹에게는 “차가 부딪혔을 때 속도가 어느 정도였나?”라고 물어본다. 그리고 다른 그룹에게는 “차가 ‘쾅’ 하고 부딪혔을 때 속도가 어느 정도였나?”라고 물어본다. ‘쾅’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사고 낸 차의 속도를 훨씬 빠르게 추정했다. 사건에 대한 정보나 설명이 사건에 대한 기억 자체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로프터스는 아이에게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가짜 기억’을 주입하는 사례까지 보여주었다. 피험자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친척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내용 중에는 쇼핑몰에서 가족을 잃고 헤맸던 일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후에 피험자들에게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확인해보면, 쇼핑몰에서 엄마를 잃어버려 헤맸던 기억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억의 편집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오히려 불완전한 기억 때문에 인간이 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떡국’ ‘윷놀이’ ‘친척’과 같은 단어들을 쭉 들려주고, 나중에 들려준 단어들을 기억해보라고 한다. 그러면 전혀 언급한 적이 없는 ‘설날’이라는 단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떡국’ ‘윷놀이’와 같은 구체적 단어들을 ‘설날’이라는 추상적 단어로 서로 연결시키는 추상화 혹은 개념화가 일어난 것이다.

 추상화야말로 인간의 가장 창조적인 능력이다. 인간의 생각이 대상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편집해낼 수 있는 것은 추상화 능력 덕분이다.

 기억 왜곡은 추상적·개념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기억 편집’의 또 다른 측면이다. 기억 왜곡이 있기 때문에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기억 편집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선택적 기억’을 통한 추상화와 개념화야말로 인간 문화의 본질이다.

 

 기억력이 감퇴한다고 사유 능력까지 퇴보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 ‘노인학(gerontology)’의 주장이다. 전체 맥락을 읽어내는 추상적 사유 능력과 개념적 사유 능력은 오히려 커진다는 것이 최근 노인학의 연구 결과다. 이를 ‘지혜’라고 한다.

 

 프로이트 전쟁(Freud wars) 

 ‘잘못된 기억 논쟁(false memory debate)’의 불똥은 그 후 이상한 쪽으로 튀었다. 프로이트 비판이다. 최면이나 상담을 통해 억압된 기억을 불러내는 기억회복치료의 이론적 근거는 대부분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트의 ‘유혹이론(Verf hrungstheorie)’이야말로 기억회복치료를 통한 기억 왜곡을 정당화하는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이라고 비난한다. 유혹이론은 아동, 특히 여아가 경험한 성추행이나 성폭행에 관한 억압된 기억이 대부분 아버지나 남자 형제, 가정교사 등의 성적유혹 때문이며, 이는 아이가 성장한 후 히스테리나 강박신경증의 원인이 된다는 프로이트의 초기 가설이다.

 세상의 모든 유명인에 대한 비판이 그렇듯, 여자관계에 대한 비난이 가장 먼저 나왔다. 처제인 민나 베르나이스(Minna Bernays)와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다. 사실 프로이트 불륜설은 빈의 정신분석학파에서 쫓겨나듯 밀려난 칼 융(C.G. Jung)이 제일 먼저 제기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프로이트의 불륜설은 융의 치졸한 복수로 여겨졌다.

 2006년 스위스 한 호텔의 숙박부에서 프로이트의 자필 서명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Dr. Sigm Freud u Frau(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와 부인)’라고 쓰여 있다. 처제 민나와의 둘만의 여행이었다. 그런데 호텔 숙박부에 자신의 부인이라고 쓴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적으로 참 치사했다

 빈의 내과 의사 요제프 브로이어(Joseph Breuer)는 프로이트에 앞서 최면술을 이용해 심리적 트라우마를 해결하면 히스테리가 치료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프로이트에게 ‘카타르시스(katharsis)’ 이론을 전수하기도 했다. 

 

 카타르시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제6장 비극의 정의(定義) 가운데에 나오는 용어.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술어로도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에 대해서는 이 구절의 표현이 불명료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설(異說)이 분분한 채 오늘에 이르지만, 요컨대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중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되고,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론가 순화된다고 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昇華作用)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마음의 상처나 콤플렉스를 말 ·행위 ·감정으로써 밖으로 발산시켜 노이로제를 치료하려는 정신요법의 일종으로, 정화법(淨化法) ·제반응(除反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음의 상처 ·응어리는 상기하거나 말하기가 괴롭고, 전혀 생각나지 않는 수도 있다(抵抗). 이 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J.브로이어는 이 저항을 완화하기 위해 최면술을 사용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마취제(아미탈 ·펜토탈)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麻醉分析).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라도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마음의 연결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문제아의 치료에 쓰이는 유희요법(遊戱療法)도 카타르시스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블로일러에 의한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발견은 정신분석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타르시스 [katharsis] (두산백과)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의 환자였던 안나 O.를 치료하며 정신분석학의 기초가 되는 『히스테리 연구』를 썼다. 거기다 브로이어에게서 재정적 도움까지 받았다. 그때 빚진 돈을 죽을 때까지 다 갚지도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브로이어가 유아의 성욕에 관한 자신의 가설에 동조하지 않는다며 비겁하다고 비난한다. 결국 친구로서의 관계도 끝내버린다.

 융이나 아들러(A. Adler), 오토 랑크(Otto Rank) 같은 제자들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거나, 독자적인 가설을 세우려 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내친 프로이트의 인간성을 생각할 때, 브로이어에 대한 배신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진짜 문제는 정신북석학의 학문적 성과다. 일단 프로이트의 사례연구에는 거짓말이 많다는 비판이다. 정신분석학적 치료의 대표 사례로 프로이트가 평생 언급한 안나 O.의 사례도 실은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는 자료가 속속 나타났다.

 안나 O.의 본명은 베르타 파펜하임(Berta Pappenheim)이다. 그녀는 1936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삶을 추적해보니, 1882년에 완치되었다고 프로이트가 자랑스럽게 보고한 후에도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계속 치료를 받았던 것이 밝혀졌다.

 

 정신분석학의 핵심 개념인 ‘무의식(Das Unbewusste)’이 프로이트 자신의 개념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영국의 교육학자 가이 클랙스턴(Guy Claxton)은 2005년에 발간한 『다루기 힘든 마음(The Wayward Mind)』이란 책에서 당시 빈의 지식인 사회에서 ‘무의식’은 상식처럼 인용되는 개념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무의식은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세련됐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우아한’ 대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이 ‘상식적 개념’을 자신만의 것으로 가로챘다는 비판이다.

 과감하고 용감해 보이는 프로이트의 성(性)에 대한 주장 또한 당시 빈에서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프로이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빈을 대표하는 화가 클림트(Gustav Klimt)나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그림에 나타난 과감한 성적 묘사를 살펴 보면, 성에 대한 당시 빈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미셀 옹프레(Michel Onfray)는 『우상의 추락』이라는 책에서 프로이트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생각을 슬금슬금 훔쳐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책을 전혀 안 읽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다며, 아주 음흉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08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위대한 편집자였다! 

 인류 역사상 인간의 마음을 프로이트처럼 다양하게 편집해 설명한 사람은 없다. 프로이트 이후, 인류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모든 모순적 내용에 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터부는 사라졌다.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처한 역사적·사회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편집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인간 심리의 ‘편집 가능성(編輯可能性, editability)’을 열어놓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위대한 이유는 일단 인간의 마음을 ‘이드(Das Es)’ ‘자아(Das Ich)’ ‘초자아(Das Über-Ich)’로 나누고, 맥락에 따라 각각 달라지는 마음의 현상학을 이들의 역동적 관계로 설명했다는 데 있다. 인간 심리에 관한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를 만든 것이다.

 사실 근원적 욕망을 나타내는 ‘이드(id)’혹은 ‘그것(Es)’또한 프로이트의 창작물이 아니다. 이 역시 ‘무의식’의 경우처럼 남의 것을 가져다 쓴 것이다. 그러나 이드의 경우에는 원래 누구의 개념인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드 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이는 바로 프로이트를 열렬히 추종하던 게오르그 그로데크(Georg Groddeck)라는 의사였다.

 

 그로데크는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을 막연한 ‘그것(Es)’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한국어로 하자면 ‘거시기’쯤 되겠다. 그는 프로이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것’에 과ᅵᆫ한 자신의 생각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 간의 유사점을 정리했다. 그 결과를 1923년 『그것에 관한 책 (Das Buch vom 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불과 몇 주 후, 프로이트도 ‘그것’에 관한 책을 낸다. 10여 년 넘게 프로이트가 구상해왔던 심리의 편집 구조를 설명한 『자아와 이드(Das Ich und Das Es)』라는 책이다. 물론 그로테크의 책과 프로이트의 책은 내용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의 ‘그것’은 ‘자아’와 ‘초자아’라는 또 다른 구성물과의 다이내믹한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각 개념들에 정관사 ‘das’를 붙였다. 그러나 그로테크의 ‘그것’은 그야말로 막연한 개념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프로이트 또한 자신의 ‘그것’과 그로데크의 ‘그것’의 개념적 차이를 의식한 내용의 편지를 그와 주고받기도 했다. 열 받은 그로데크는 프로이트에게 자신은 그저 ‘쟁기’일 뿐이고, 프로이트는 그 쟁기를 이용하는 농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자아와 이드』에서 프로이트는 심리의 정신분석학적 편집 구조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그림으로 자신의 개념들을 묘사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그림에서 아직 ‘초자아(Das Über-Ich)’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단지 왼쪽 윗부분에 ‘귀’처럼 네모나게,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 부분이 초자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원본에서 ‘akus. W’로 표현된 이 부분은 ‘청각적 지각(akustische Wahrnehmung)’의 약자로, ‘타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부모나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귀로 듣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초자아에 관한 프로이트의 설명은 오락가락하며 혼란스러웠다. 본문에도 ‘초자아(Das Über-Ich)’와 ‘이상적 자아’를 의미하는 ‘Ich-Ideal’이 개념적으로 함께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드-자아-초자아’로 구성된 심리의 편집 구조는 1933년에 펴낸 『정신분석학 입문을 위한 새로운 연속 강의(Neue Folge der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라는 책에 그려져 있다.

 이전에 바깥의 작은 귀 모양으로 그려졌던 사회의 도덕적 규율은 이제 초자아라는 개념으로 의식 안에 명확하게 자리잡고 있다. 타자가 내면화된 것이다. ‘이드(Es)’가 ‘무의식(Unbewusste)’에서 ‘전의식(Vorbewusste)’을 거쳐 ‘의식(Bewusstsein)’으로 올라가거나, 일부는 ‘억압(verdrängt)’되는 과정 또한 알기 쉽게 그려져 있다. 

 흔히 생각하듯 무의식과 이드는 같은 것이 아니다. 무의식은 이드뿐만 아니라 자아, 초자아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프로이트는 그림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이드의 밑 부분이 열려 있는 것은 통제할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한가지 오류가 있다면 이드의 영역이 자아나 전의식에 비해 ‘훨씬 크다’고 서술괴어 있으나, 그림에는 그 크기가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미국식 심리학’의 좁디좁은 과학성을 기준으로 파악하자면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그따위 과학적 심리학의 좁은 범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유 체계가 아니다. 심리학, 정신의학, 철학, 문학, 사회학의 범주를 포괄하는 메타의 영역이다. 뿐만 아니다. 프로이트의 개념은 끝없이 편집되고 재편집되면서 진화한다. ‘편집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말이다.

 미국에도 프로이트와 비슷한 심리의 편집 구조를 구상한 이가 있었다.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ek. 그러나 ‘주체적 자아(I)-객체적 자아(Me)’로 이뤄지는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단순한 편집 구조와 비교해보면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더욱 분명해진다. 동시대를 살았던 프로이트와 미드였지만, 개념 체계의 수준이 이처럼 차이가 난다. 그래서 학자에겐 지적 ‘풍토(milieu)’가 그렇게 중요한 거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유럽의 그 풍요로운 지적 풍토를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좋은 시절’이었다는 거다. 이 풍요로움을 한 번에 박살낸 인간이 히틀러다. 그 후 유럽의 지적 리더십은 미국으로 넘어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거세 콤플렉스’ ‘나르시시즘’ ‘억압’ ‘트라우마’ ‘리비도’ ‘투사’ ‘치환’등과 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데 아주 풍요로운 이론적 토대가 된다. 

 

 해체는 편집의 조건이다. ‘편집의 단위’를 뽑아내는 해체가 있어야 편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이후, ‘심리의 문화·사회적 편집 가능성’에 관하여

 현대 심리학이 전제하는 과학적 기준으로 보면 정신분석학은 절대 과학이 될 수 없다. 소위 ‘과학적 심리학’은 있는 현상만을 다루는 ‘존재(being)’의 학문이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becoming)’의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좁은 과학성의 틀에 맞추느라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의 편집 가능성이 축소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 愛着理論)’이다.

 프로이트 사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이 주로 철학적 영역에서 개념 편집이 이뤄졌다면, 영국에서는 발달심리학과 연관되어 이론적 편집이 이뤄졌다.  프로이트의 내재화된 초자아 개념을 초기 영유아 발달 개념과 편집하여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theory, 對象關係理論)’을 발전시킨다. 이후 대상관계이론은 애착 이론으로 바뀌면서, 애초의 정신분석학적 발달심리학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대상관계이론 :: 마음은 바깥으로부터 획득한 요소들, 즉 다른 사람의 기능 측면들이 내재화된 것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심리학적 설명 체계를 말한다. 이러한 마음의 모델은 내재화된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마음의 기능을 설명한다.
많은 이론들이 이 개념에 부합한다. 그것들은 대체로 (1)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동기가 존재한다는 이론, (2) 유아기의 원시적인 관계 맺기로부터 성인의 복잡한 정신기능과 관계 능력에 이르기까지 발달 과정이 존재한다는 이론, (3) 개인의 특성을 결정짓는 관계의 구조적 측면 또는 지속성을 지닌 고유한 관계 유형에 관한 이론 등을 포함한다. 클라인(Klein), 페어베언(Fairbairn), 위니캇(Winnicott), 발린트(Balint) 등의 연구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들의 대상관계 이론은 영국학파를 형성하였다. 이외에도 컨버그(Kernberg), 뢰발트(Loewald), 마이쓰너(Meissner), 모델(Modell), 셰이퍼(Schafer), 스톨로로우(Stolorow), 코헛(Kohut), 샌들러(Sandler) 등이 대상관계 이론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이론은 자아 발달에 대상이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찰로부터 나왔으며, 일부 이론가들, 특히 컨버그는 대상관계 이론의 다양한 측면들을 고전적 프로이트 이론과 통합시키려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상관계 이론 [OBJECT RELATION THEORY] (정신분석용어사전, 2002. 8. 10., 서울대상관계정신분석연구소[한국심리치료연구소])

 

 애착이론의 과학적 증명을 위해 메리 에인스워스(Mary Ainsworth)가 고안한 ‘낯선 상황(the strange situation)’ 실험은 부모와 유아의 애착 관계를 분류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론으로 크게 각광받는다. 낯선 상황이란 유아가 부모와 떨어져 혼자 있게 하거나 낯선 사람이 접근하게 하는 등 아동을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고, 이때 유아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하는 방법이다. 

 낯선 상황에서 아동이 보이는 행동을 ‘애착 유형’이라 하는데, 이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뉜다. B유형: 안정 애착(secure attachment), A유형: 불안정-회피 애착(insecure-avoidant attachment), C유형: 불안정-저항 애착(insecure-resistant attachment).

 

 실험 초기에 애착 이론가들은 불안한 상황에서도 부모를 찾지 않고, 부모가 돌아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불안정-회피 애착을 가장 정상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A유형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양육 방식에 문제가 있는 유아들에게 A유형이 많이 나타나자 이론을 수정한다. 

 부모가 사라지면 불안해하는 B유형을 건강한 애착 유형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애착 이론의 구성 과정 자체가 상당히 어설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객관적 관찰’과 ‘반복을 통한 동료 학자들 간의 검증’이 가능한 ‘낯선 상황 실험’이 각광받게 되면서, 애착 이론은 정신분석학적 개념과는 거리가 먼, 아주 편협한 과학적 발달심리학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20분에 불과한 낯선 상황 실험으로 부모-유아의 애착 관계를 서너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해버리는 애착 이론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뭔가 답답하다.

 확실한 방법론을 원하는 ‘불안한 심리학자’들에게 애착 이론은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이론 구성으로는 인간 심리에 관한 새로운 편집 가능성은 전혀 열리지 않는다. 좋은 방법론일 수는 있어도 훌륭한 이론은 절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엄마야말로 가장 위대한 편집자다!

 애착이론과 달리 대니얼 스턴(Daniel Stern)의 정신분석학적 발달 이론은 편집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는 이론이다. 

 발달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접합점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외부의 타자가 어떻게 자아 구성과 관계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핵심은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이 없다면 자아도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20세기 후반, 발달심리학 분야에서 일어난 피아제의 ‘인지발달 패러다임’에서 비고츠키의 ‘문화·사회적 발달 패러다임’으로의 전환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스턴은 유아가 어머니를 비롯한, 타자와 맺는 초기의 상호작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아의 심리로 내면화되는가를 추적한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편집해낸다. ‘활력 정서(vitality affects)’와 ‘정서 조율(affect attunement)’이다. 이제까지 심리학에서 정서 이론이 덜 발달한 이유는 다윈의 ‘범주적 정서(categorial affects)’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턴은 비판한다. 범주적 정서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기쁨, 슬픔, 분노 등을 지칭한다. 정서의 내용을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경우다.

 

 활력 정서는 정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서가 표현되는 형식과 관계된다. 몸짓, 표정, 말투의 속도나 리듬 혹은 목소리의 높낮이 등이다. 인간의 모든 범주적 정서는 활력 정서를 동반한다. 그러나 모든 활력 정서가 범주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 그 아기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 즉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범주적 정서는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아기의 성별에 따라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활력 정서는 전혀 다르다.

 부모들은 보통 아들에게는 훨씬 빠르고 강한 톤의 몸짓과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딸일 경우, 부모의 목소리는 느려지고 부드러워진다. 몸짓도 훨씬 조심스러워진다. 남녀의 문화적 차이가 이미 이 단계에서 부모의 활력 정서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이를 ‘문화 학습(cultural learning)’이라고 한다.

 개인 내면의 정서적 상태를 표현하는 범주적 정서에 비해 활력 정서는 본질적으로 상호작용적이다. 활력 정서는 상대방의 행동과 정서에 즉시 영향을 미치며, 상대방에게서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활력 정서가 교환되는 상호작용을 가리켜 스턴은 ‘정서 조율(affect attunement)’이라고 개념화한다. 기타나 바이올린 줄을 서로의 음높이에 따라 조율하듯, 인간의 모든 상호작용은 서로의 활력 정서를 조율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상대방의 정서 표현을 그대로 흉내 내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의 작용이다. 거울 뉴런은 인간의 공감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의 기본이 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정서를 공유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은 정서를 공유하고 시선을 공유하는 기초적인 소통에서, 의미를 공유하는 고차원적 소통으로 발전한다. 스턴의 정서 조율은 바로 이 거울 뉴런의 구체적 작동 방식에 대한 설명이다. 생득적 기제와 문화적 상호작용을 편집하는 개념인 것이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목소리, 몸짓, 표정을 통해 쉬지 않고 자신의 활력 정서를 표현한다. 아기의 모든 움직임은 정서적 표현이다. 여기에 엄마도 활력 정서로 반응한다. 그러나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아기의 표정이나 몸짓이 바뀌면, 엄마는 거기에 맞춰 목소리의 높낮이로 표현한다. 아기가 내는 소리에는 약간 빠르게 몸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엄마의 활력 정서 표현에 아기도 마찬가지로 반응한다. 정서의 내용은 같지만, 정서의 표현 양식을 서로 바꿔가며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스턴은 이렇게 주고받는 아기와 엄마의 정서 조율의 양상을 ‘강도(intensity)’ ‘시간(time)’ ‘형태(shape)’의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아기가 표현하는 활력 정서의 강도, 지속 시간, 형태에 대응해 엄마의 활력 정서도 다양하게 표현된다. 표현 양식은 달라져도 둘 사이의 정서 표현에는 일정한 통일성이 유지된다. 서로 다른 존재가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는 느낌이다. 표현 방식이 달라도 같은 내용의 정서를 서로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야말로 가장 위대한 ‘편집자’인 것이다.

 아기는 자신이 느끼는 정서가 엄마를 통해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알게 된다. 동일한 정서가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느끼며, 아기는 자신이 엄마와는 다른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자아’, 즉 주체의 탄생이다. 상호작용이 먼저고, 주체는 나중이다. 프로이트가 초자아의 개념구성 과정에서 그토록 곤혹스러워했던 유아 발달 초기의 상호작용 내용을 스턴은 이토록 깔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스턴과는 전혀 다른 이론적 배경을 갖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èbvre)도 ‘리듬 분석(Elements de rythmanalyse)’을 남겼다. 르페브르의 ‘리듬’과 스턴의 ‘활력’은 개념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이렇게 정신분석학과 철학이라는 전혀 다른 사유체계가 아주 엉뚱한 곳에서 만난다. 현대 ‘과학적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만남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스턴의 활력 정서와 정서 조율을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과 연결시킨다면, 음악과 심리학, 철학, 사회학이 서로 교차 편집되는 아주 흥미로운 영역이 창조될 것이다. 이런 식의 ‘학제적(inter disciplinary)’에디톨로지를 통해 급격히 꺼져가는 정신분석학의 편집 가능성을 되살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09 항문기 고착의 일본인과 구강기 고착의 한국인 

 러브호텔의 문화심리학

 일본열도의 북쪽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가옥은 여름을 시원하게 견디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의 가옥은 얇은 벽, 그리고 통풍이 잘되는 창문 등이 특징이다. 그래서 일본 집들은 언뜻 보기에도 그토록 가볍게 느껴지는 거다.

 일본 집들의 벽이나 창이 유난히 얇고 가볍기 때문에 생기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소리다. 도무지 프라이버시라고는 없다. 그래서 생긴 게 러브호텔이라는 것이 가설이다. 집에서는 도무지 맘 놓고 뭘 해볼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한국의 가옥은 일본에 비해 소리를 훨씬 더 잘 차단하게 되어 있다. 온돌이나 두꺼운 벽을 치는 방식으로 추위에 단단히 대비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콤플렉스’라는 합리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참 불행했을 것이다

 ‘콤플렉스(Komplex)’라고 독일어로 이야기하면 아주 폼 나 보인다. 그러나 이 단어의 뜻은 아주 단순하기 그지없다. 말 그대로 그냥 ‘복잡한 것’이다. 한마디로 분명히 정의하기 힘든, 이것저것이 마구 섞인 심리 상태다. 그런데 이 복잡한 것이 내면에 숨어 있어 수시로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수천 년간 지속된 인간의 이 괴로운 심사를 콤플렉스라는 단어로 깔끔하게 설명해낸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다.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프로이트의 창작물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함께 여성 히스테리를 연구한 요제프 브로이어(Joseph Breuer)라는 정신과 의사가 사용한 개념이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적극 사용한 이는 프로이트의 제자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다.

 인류 문명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다. 이 가족 내의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것’을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 개념으로부터 인류 문명사는 물론 개인의 성장 과정을 일괄해서 설명하고 있다. 세상에 이토록 흥미진진한 ‘구라’는 없다.

 

 개념과 실재는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는, 상호 구속의 해석학적 맥락에서만 성립한다.

 실제로 언어철학에는 객관적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언어(혹은 개념)는 이 객관적 현상을 ‘표상(representation)’할 뿐이라는 실재론적 입장과, 각 언어나 개념에 대응하는 독립적인 실재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 이론이 양극단에서 대립한다.

 특히 소쉬르에서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은 ‘언어 없는 실재는 없다’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는 그 어떠한 내재적 필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철저하게 사회·문화적인 약속일 뿐이라는 전제로부터 소쉬르의 ‘기호학(semiology)’은 출발한다.

 

 명절에 식구들끼리 모여 고스톱을 칠 때, 직접 돈을 주고받는 모양새가 안 좋아 바둑알로 현금을 대신하는 경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바둑알과 돈 사이에는 그 어떤 내재적 필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고스톱 판에 참여한 이들끼리의 약속일 따름이다. 급할 때는 이쑤시개가 부족한 흰 바둑알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 사이의 지극히 인위적인 사회적 약속이 언어의 본질이라는 거다.

 표시와 의미의 결합은 사회·문화적 약속이라는 기호학적 전제를 바탕으로 심리학의 역사를 재구성해보면 ‘심리학 개념의 편집사’가 한눈에 보인다. 이런 메타적 관점으로 살펴보면 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근대 심리학에서 쫓겨났는가도 알 수 있다.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이란 ‘이드(Das Es)’와 ‘나(Das Ich)’ 그리고 ‘위의 나(Das Über-Ich)’가 충돌하며 편집된 결과다. 그러나 이 편집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난 ‘복잡한 것(Komplex)’들이 잠재해 있다가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또다시 근사한 개념들로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지평을 넓힌다. ‘구강기 고착’ ‘항문기 고착’ ‘남근기 고착’ 등이다.

 

 일본의 청결한 문화는 ‘항문기 고착’의 결과다!

 일본인들은 청결에 엄청난 강박이 있다. ‘항문기 불안’이다. 앞의 러브호텔 경우처럼 일본의 독특한 가옥 구조에서 문제가 또다시 시작된다. 유난히 길고 습한 여름을 견디기 위해 통풍이 잘되는 문과 창문, 곰팡이가 슬지 않는 벽, 그리고 시원한 다다미 등으로 집을 짓는다. 이번에는 다다미 바닥이 문제다. 일본 주택의 다다미 바닥은 아이들 양육에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다미에 습기가 차는 것처럼 일본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일은 없다. 벌레가 생긴다. 뿐만 아니다. 젖은 다다미는 금방 썩는다. 썩은 다다미는 거의 퇴비 수준이다. 따라서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는 다다미에 치명적이다. 어느 한구석에 오줌이라도 지려놓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배변 훈련을 시킨다.

 

 지나친 배변 훈련은 아기에게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상처를 남기게 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리자면, ‘항문기 고착’이라는 퇴행 현상이다. 일본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청결에 대한 이 집요한 강박은 결국 항문기 고착의 성격적 특징이라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이런 항문기 고착의 성격은 별로 볼 수 없다. 장판 문화이기 때문이다. 똥오줌을 아무리 싸도 그냥 걸레로 한 번 슥 닦아내면 된다. 도무지 심각할 이유가 없다. 대신 한국인들은 ‘구강기 고착’의 성격인 듯하다. 입이 거칠다는 말이다. 목소리도 크고, 담배도 많이 피운다. 욕도 정말 다양하게 잘한다.

 실제로 한국 욕의 종류를 정리해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이나 독일의 욕은 몇 개 안 된다. 미국 사람들도 가만 보면 나름 한다는 욕이 매번 ‘shit’ ‘fuck you’가 전부다. 한국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욕설은 세계사의 유례가 없다.

 

 한국인들에게는 왜 이런 구강기 고착의 퇴행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난 세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세월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입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경험이 박탈된 것이다. 빈곤에 의한 구강기 고착 현상은 지형이 거칠고 풍요롭지 못한 지역의 욕이 훨씬 더 다양하고 화려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요즘 북한 사람들의 욕을 생각해보라.

 

 수많은 문학과 문화 비평에 프로이트의 개념이 반복되어 사용된다. 정작 ‘과학적 심리학’에서는 설 자리를 잃어가지만, 문화 해석과 관련해서는 무궁무진한 편집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10 책은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데이터베이스’ 관리다

 ‘공부는 데이터베이스(database)관리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검색하면 관련 데이터들이 마구 올라왔다. 그 테이터를 정리하다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곤 했다. ‘내트워크적 지식’의 생성이다.

 

 메타언어 :: 대상을 직접 서술하는 언어 그 자체를 다시 언급하는 한 차원 높은 언어.
고차언어(高次言語)라고도 한다. 이런 경우 차원이 낮은 제1의 언어를 대상언어(對象言語)라고 한다. 가령 ‘4+4=8’은 수(數)라는 대상에 관해 말한 대상언어이나, ‘4+4=8은 산수의 명제이다’는 메타언어이다. 
이 양자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메타언어라 할지라도 보다 높은 메타언어에 대해서는 대상언어가 될 수 있다. 
메타언어는 모리스가 명명한 기호론(記號論)의 3분야, 즉 문장론(syntactics) ·의미론(semantics) ·어용론(語用論:pragmatics)에 따라서 유형화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타언어 [metalanguage] (두산백과)

 

 내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사용 가능한 데이터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자유롭게 연결할 때 얻어지는 메타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축적한 데이터를 꼭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데이터들에 관한 메타 언어를 익히게 되면 데이터베이스의 일차적 목적은 달성된 거다. 이를 나는 ‘커닝 페이퍼 효과’라고 부른다.

 커닝 페이퍼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그 내용을 다 숙지하게 된다. 정작 커닝 페이퍼를 사용할 필요는 없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며 나름의 개념 체계를 만들다 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 읽는 것이 아니다!

 책은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 오늘날의 책은 더 이상 두루마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긴 종이로 이어진 두루마리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 중간을 건너뛰고 끝까지 갈 수는 없다. 그러나 요즘 책은 다르다. 책이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가 된 것은 아무 데나 펼쳐 읽기 위해서다.

 인류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codex)’, 즉 책의 형식으로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경부터다. 파피루스에 비해 경제적이기도 했지만, 코덱스를 사용한 이유는 원하는 내용을 빨리 찾기 위해서다. 페이지를 후딱 넘겨,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찾아내, 골라 읽기 위해서다.

 코덱스는 데이터베이스의 초기 형태였다. 바꿔 말하면 책은 그 본질이 데이터베이스란 이야기다. 데이터가 그리 많지 않을 때면, 처음부터 끝까지 느긋하게 다 읽어도 큰 상관이 없다. 그러나 데이터가 쌓이면 한가하게 다 읽을 수 없는 노릇이다. 발췌해서 내가 읽고 싶은 것만 찾아 읽어야 한다. 문제는 내가 읽고 싶은 것이 뭐냐는 거다. 내 질문이 없으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것이다. 내 질문이 없고 내 생각이 없으니,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있는 것이다. 

 억지로 책을 다 읽다 보면 내 생각은 중간에 다 날아가 버린다.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면 뭣 때문에 책의 편집자가 그토록 친절한 목차를 만들까? 찾아보기란 이름으로 그렇게 자세한 키워드 리스트를 만들고, 해당 페이지를 일일이 넣는 이유는 또 뭘까?

 저자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읽기 바쁜 사람에겐 목차든, 찾아보기든 아무 필요 없다. 그런 식의 독서법이라면 매번 저자의 이론을 따라가는 데 급급한 수준을 죽을 때까지 뛰어넘지 못한다. 창조적인 ‘내 생각’이 절대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독서는 내가 가진 개념과 저자의 개념이 편집되는 에디톨로지 과정이다. 그래야만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나는 갤럭시 노트와 에버노트를 쓴다, 물론 아이폰도 쓴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분류의 변신과 합체가 언제든 가능하다. 원고를 써야 할 때는 각 노트북과 노트북 안에 들어 있는 각 ‘노트’들이 재편집된다. 검색으로 각 데이터들을 불러내 새로운 분류를 만든다. 네트워크적 지식의 생성이다. 

 글 쓸 아이디어가 부족할 때면 이런저런 검색 놀이로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일부 살아남기도 하지만, 바로 지워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어령 선생과 대화하다 보니, 선생의 에버노트에는 1만 4000개의 노트가 저장되어 있단다. 팔십 노인의 데이터베이스다. 

 데이터 공유 기능을 이용해 자료를 서로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하면 시간만 절약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집단 지성’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눈으로 보게 된다. 지식 경영이란 이와 같은 구체적 데이터 공유를 통해 가능해진다.

 

 자신의 생각을 풍요롭게 편집하려면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유로워야 한다. 고작 영어 자료 하나 소화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기 때문이다. 

 

 두 개 이상의 외국어와 데이터베이스 관리 습관을 갖추면, 뭘 하든 그리 두려울 게 없다.

 

 

 

+. 에필로그 -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아주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아주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 하나도 외롭지 않으면서 풍요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은, 처음 만난 여자가 예쁘다고 그녀의 주스 잔에 수면제 타는 것과 마찬가지다. 몹시 나쁜 생각이라는 거다. 뭔가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지금 손에 있는 것 꽉 쥔 채 새로운 것까지 손에 쥐려니, 맘이 항상 그렇게 불안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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