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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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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는 서양의 대표 철학자 40명의 생애를 살펴보며 사상의 흐름과 철학의 핵심 개념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철학 입문서다. 조국 아테네의 부패한 현실을 바꾸고자 했던 플라톤의 ‘철인 통치론’에서 니체의 남성 콤플렉스가 낳은 ‘초인 사상’까지, 하나의 사상이 어떻게 탄생해 그 뿌리를 내렸는지 살펴본다. 때로는 괴짜 같고 때로는 친구 같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한 편 한 편 즐기다 보면, 골치 아프던 철학용어들이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 이 책은 2007년에 출간된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웅진지식하우스)의 개정증보판입니다.
저자
안광복
출판
어크로스
출판일
2017.02.17

 

0. 여는 글 

 “문제를 풀려면, 문제만 바라보지 마라.”

 못이 박이도록 들은 선배 선생님들의 충고다. 아이의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고 싶은가? 손톱을 깨무는 습관 자체에 매달리면 결과는 100퍼센트 실패다. 벌주고 야단칠 때는 잠깐 그치겠지만, 조금만 관심이 소홀해져도 아이의 손톱은 다시 입술에 가 있을 테니까.

 문제를 잡으려면 아이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이가 불안한가? 부모와의 사이는 좋은가? 성적은 기대만큼 나오는가? 제일 큰 고민은 무엇인가? 하나하나 살피며 학생과 함께 고민을 갈무리하다 보면, 어느새 손톱 물어뜯는 습관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손톱이 맛있어서 쩝쩝 씹어대는 사람은 없다. 이런 행동은 마음에 쌓이고 썩은 고민들이 바깥으로 나타난 ‘증상’일 뿐이다. 그러니 문제를 풀려면, 문제만 바라보지 마라. 사람을 알면 이해 못할 문제는 없다. 문제가 이해되면 답도 저절로 얻어질 테다. 

 

 

 

1. 철학의 출발 – 탈레스

 탈레스(Thales)는 흔히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탈레스는 살아 있을 대 이미 고대 그리스의 7현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 받았다.

 

 7현인 ::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7현인의 명부는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에 나오는데, 그 후로 4세기경까지 7현인으로 꼽힌 사람은 20여 명에 이른다. 7현인의 명부가 생긴 것은 BC 6세기 후반경으로 여겨지는데, BC 1세기 말의 역사가 디오도로스와 2세기의 여행가 파우사니아스 등에 의하면, 탈레스 ·비아스 ·피타코스 ·클레오브로스 ·솔론 ·킬론 ·페리안드로스(플라톤에서는 뮤손)라는 거의 동시대(BC 7~6세기)의 일곱 사람이다.
7이라는 숫자는 7수 숭배에 따른 것이며, 정치적 혼란에 시달린 후세 사람들이 일찍이 사회적 ·정치적 활동과 업적에서 탁월한 사람 7명을 골라 이상적 인물로 뽑았다고 한다. 따라서 명부 작성자에 따라 7현인은 달라지나, 탈레스 ·비아스 ·피타코스 ·솔론의 4명은 거의 확정되어 있었다.
7현인의 일화나 명구(名句)는 그리스인의 정신적 지주로서 전승되어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리스7현인 [Seven Wise Men of Greece, ─七賢人] (두산백과)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느라 하늘을 보면서 정신없이 걷다가, 그만 발밑의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하고 꼴사납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이것을 본 트라키아(발칸 반도 남동부 지역) 출신 하녀가 큰 소리로 비웃으며 말했다.

 “우주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분이 발밑의 웅덩이도 못 보다니요!”

 

 탈레스는 밀레투스(Miletus) 사람이었는데, 밀레투스는 그리스 본토가 아닌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방) 개척지에 있던 도시 중의 하나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보다는 새롭게 태어난 도시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법, 밀레투스에서는 인습에 얽매인 그리스 본토 도시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생활과 사고가 이루어졌다. 

 그뿐 아니라, 밀레투스는 다양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항구도시이기도 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무역 중심지로 물자가 풍부했고 엄청난 부자도 많았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여유(scholē)’를 꼽았다. 밀레투스의 경제적 성공은 이러한 ‘여유’를 가능하게 했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세상사를 신에게 기대어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밀레투스 사람들은 스스로 곰곰이 생각하여 일어난 일들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구하곤 했다. 이처럼 철학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일 만한 근거와 증명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려한 밀레투스 사람들 특유의 비판적인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밀레투스 :: 소아시아 서안(西岸)의 이오니아에 위치한 그리스의 고대도시. 고대 그리스의 도시였으나 현재는 터키령. 지금은 해안선에서 9km 떨어진 내륙에 있으나, 고대에는 마이안도로스강이 흘러들어가는 만내(灣內)에 돌출한 곶(串)에 건설된 항구도시였다. 호메로스는 갈리아인(人)의 도시라고 하였으나, 미케네시대에는 그리스인의 상업거래소가 설치된 듯하다. BC 11세기부터 도리스인에게 추방된 본토 그리스인을 맞아 이오니아 식민시(植民市)가 되나, 초기의 사정은 확실하지 않다. BC 8세기까지 이오니아의 중심지로서 해외무역이 번성하였고, BC 7세기 동지중해 ·흑해 연안에 70여 곳의 식민시를 건설하였다. 이집트의 나일 델타에도 상업식민시 나우크라티스의 기초를 쌓는 등, 그 부(富)와 인구는 그리스 세계에서 으뜸이었다.
흑해 ·동방무역의 전개는 외부세계, 특히 오리엔트의 풍부한 경험적 지식 정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오니아 자연철학’ 탄생을 촉진하였고, 아울러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헤카타이오스 등 밀레토스파(派)의 철학자를 배출하여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BC 6세기 중엽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 번영을 회복하였으나, BC 499년 이오니아 반란의 중심이 된 것이 원인이 되어, BC 494년 페르시아인에게 함락되고 주민은 노예가 되었다. BC 479년 페르시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미칼레전투 뒤, 히포다모스의 도시계획으로 재건되어 델로스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레투스 [Miletus] (두산백과)

 

 페니키아 :: 오늘날 레바논을 중심으로 하여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의 고대 지명. 페니키아는 본래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B.C. 1500년 경까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B.C. 14세기에 들어 히타이트와 아모리인(Amorites)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페니키아는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독자적인 해양 세력으로 성장했다. B.C. 1250년경에 이미 페니키아는 동지중해연안과 에게해 연안을 장악했으며, 티레, 시돈, 트리폴리, 아라두스, 비블로스 등의 도시 국가들이 크게 발전했다.  
B.C. 12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약해지면서,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스스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이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디니아, 이베리아 반도 등을 식민지화 한 것은 물론이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오늘날 알파벳의 모태가 되는 페니키아어 알파벳이 발명·보급 되었다. 
그러나 B.C. 9세기에 이르러 아시리아 세력이 팽창하면서 페니키아의 독립성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기원전 538년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4세기 무렵 그리스가 성장하자 페니키아는 B.C 350년에 시돈이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리스의 한 속주가 되었다. 특히 티레는 B.C. 333년 ~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B.C. 64년 페니키아 전역이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편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리스의 통치 하에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니키아 [Phoenicia] (두산백과)

 

 철학의 아버지라는 그가 남긴 철학적 주장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와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 마디뿐이다.

 그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한 말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주장이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은 의미 없는 엉터리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 역사로 볼 때 이 주장은 매우 가치 있다. 철학 역사에서 최초로 던져진, 눈에 보이는 여러 사물과 변화를 넘어 세계는 과연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답하는 본질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오케아노스 ::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양(大洋)의 신. 천공(天空:우라노스)과 대지(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신족(神族)의 한 사람이다. 고대의 그리스인(人)들은 세계를 편평한 원형의 대지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는 이 대지의 끝을 둘러싸고 흐르는 대하(大河)의 신이었다. 이 신은 대지 서쪽 끝에서 누이동생인 테티스를 아내로 삼아 함께 살고 있어 올림포스산(山)에서의 신들의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온세계의 모든 바다와 하천의 신이었던 3,000명의 아들과, 바다나 하천 또는 샘의 요정(妖精)이 된 3,000명의 딸 오케아니데스가 태어났다. 후에 오케아노스는 차차 지리적인 개념으로 변하여 지중해에 대해서 대륙을 둘러싼 대양(大洋)을 뜻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케아노스 [Oceanos] (두산백과)

 

 탈레스는 ‘철학자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사업을 벌였다. 한겨울에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를 모조리 싼값에 빌린 것이다. 사람들은 오리브 수확철도 아닌 한겨울에 기름 짜는 기계를 빌리는 덜 떨어진 인간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 큰 풍년이 들어 기름 짜는 기계의 임대료가 크게 올라 탈레스가 큰 이익을 보자, 사람들은 그의 식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 탈레스는 큰곰자리를 보고 항해를 하던 그리스 뱃사람들에게 작은곰자리가 방향을 잡는 데 더 낫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도 했다. 이것은 천문학과 기상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아가 탈레스는 기하학과 수학을 연구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재기도 했다. 이때 그는 그림자의 높이와 실제 사물의 크기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치적으로도 대단한 수완가여서,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연합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2. 최초의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 헤라클레이토스 & 파르메니데스

 상황이 바뀌면 자신의 철학적 견해도 그에 걸맞게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기 견해에 따라 현실을 뒤엎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앞의 사람은 현실주의자이고, 뒤의 사람은 이상주의자이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라는 철학의 원형을 만든 사람들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밀레투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최대의 무역 도시였던 에페소스(Ephesos)에서 태어났다. 끊임없이 물자와 인구가 움직이는 에페소스의 환경은 ‘만물은 흐른다’라는 유명한 그의 철학적 결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에페소스 ::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던 이오니아의 고대도시. 터키 이즈미르의 남서쪽 약 50km 지점으로, 양항(良港)을 끼고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BC 620년경 이곳에 세워진 아르테미스신전(神殿)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많은 순례자를 끌어모았다.
이곳은 BC 7세기∼BC 6세기가 최성기(最盛期)로서,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 페르시아전쟁으로 해방이 된 뒤에는 그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 뒤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경이롭게 부흥하였다. 1세기 성 바울로는 이곳에 그리스도교를 전하였으며(54, 55∼57), 또한 로마에서 이 지방 신자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이 도시의 폐허에서는 수많은 유적이 발굴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페소스 [Ephesos] (두산백과)

 

 헤라클레이토스는 제사장 자리를 대대로 물려받을 만큼 대단했던 에페소스 명문가 출신이다. 그는 무지한 민중에 대한 혐오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었으니 당시 에페소스의 민주적인 정치 제도를 곱게 보았을 리 없다. 맏이였던 그는 당연히 물려받아야 할 최고 제사장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아이들과 주사위 놀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 놀이가 정치보다 더 제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나중에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가 될 만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첫째, 귀족이었던 그는 생계 걱정에서 벗어나 조용히 사색할 여유가 있었다. 둘째, 세상일에서 한 발 물러서 있었으므로 당장의 이해관계를 떠나 모든 일의 근본을 깊이 바라볼 수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파악한 세계의 본질은 ‘만물은 흐른다’라는 것이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강물도 흘러가지만 나도 또한 변한다.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

 게다가 그는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는 말도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대립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의미를 갖는다. 피곤이 휴식을 즐겁게 하고 배고픔이 없으면 배부름도 없다. 이렇듯, 모든 것은 대립되는 다른 쪽과의 투쟁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세상은 타오르는 ‘불’과 같다. 움직이지 않는 불은 생각할 수 없듯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며 움직이고 있다. “세계는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져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말이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렇게나 서루 싸우며 흘러가지는 않는다. 무질서하게 흘러가는 듯한 세상일도 우주의 섭리, 곧 로고스에 따라 이루어진다.

 세상이 이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이성을 통해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 더미 같은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이치, 곧 로고스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알게 될 것이다. 로고스의 관점에서, 곧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상은 언제나 선하고 정의롭다.

 

 로고스 ::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신학의 기본 용어.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는 보편적인 법칙,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 이 법칙과 준칙을 인식하고 이를 따르는 분별과 이성(理性)을 뜻한다. 파토스(pathos)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본래는 고전 그리스어로 ‘말하다’를 뜻하는 동사 ‘legein’의 명사형이며 ‘말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로고스’는 많은 종류의 파생적 의의를 낳아 고대철학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고대철학은 대개 ‘로고스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고스 [logos] (두산백과)

 

 변하는 현실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정의로움과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세,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강조하려는 바였다. 최초의 현실주의자.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당연하다. 하지만 다음 말은 충격적이다. ‘없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사실 우리는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없다’의 형태로 어림짐작할 뿐, ‘없음 자체’를 머리에 그릴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없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는 있는 것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여러 개 있으려면 있는 것 사이에 허(虛), 곧 없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에는 하나의 있는 것, 곧 ‘일자(一者)’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운동과 변화도 있을 수 없다. 허공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법, 하지만 앞서 논변이 증명하듯 허공은 없다. 그렇다면 운동도 없다.

 그의 논증은 존재론이라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를 낳았으며, 그 뒤 2500여 년 동안 수많은 논쟁을 불렀다. 결국 파르메니데스가 이 논증을 통해 보여 주려 했던 것은, 세상의 참모습은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냉철한 논리의 눈으로 볼 대 세상은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존재론 :: 존재자(存在者) 일반에 관한 학문. 철학의 일부분으로 존재학(存在學)이라고도 한다. 라틴어로는 'ontoligia'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어의 'on(존재자)'과 'logos(논)'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데카르트파의 철학자 J.클라우베르크(1622∼1665)가 처음으로 썼다. 이 말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없으나 존재 및 존재자의 탐구는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최초의 철학자가 모든 사물의 시초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사물의 존재에 선행(先行)해서 존재하는 사물 이외의 힘(신들)에 의해 사물의 존재를 설명(신화적 해석)하지 않고, 사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전체적인 추구라고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존재론 [ontology, 存在論] (두산백과)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항상 변하는 세계를 진짜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은 단순한 믿음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허위라는 의미다. 진리의 길을 따라 냉철한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계는 결국 커다란 존재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눈앞에 보이는 세계를 거짓이라 규정하며 눈을 감아 버린다. 그리고 이성과 논리를 통해 파악된 세계가 진짜라고 굳게 믿는다. 이 점에서 그를 세상을 자기 생각에 맞추려는 사람, 곧 이상주의자라고 여겨도 좋을 듯싶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철학 역사에서 줄곧 라이벌 관계였다. 헤라클레이토스 계통은 변화와 감각을 중시하는 쪽으로, 파르메니데스 계통은 영원불변한 진리와 이성을 절대시하는 쪽으로 생각을 넓혀 갔다.

 

 

 

3. 지혜를 낳는 산파 –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Socreates)만큼 못생긴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가 살던 시대에도 ‘소크라테스를 닮았다’는 말은 대단히 못생겼다는 뜻이었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한 젊은이가 이 말을 듣고 정색하며 반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소크라테스는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펴낸 적이 없다. 시장 거리를 누비며 끊임없이 사람들과 대화라며 사색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자신이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따름이다. 철학을 하는 목적은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지식과 신념이 과연 제대로 되었는지, 의미 있는지를 검토하며 마음 깊숙이 박힌 독단과 선입견을 제거하는 데 있다.

 

 아버지 소프로니코스는 석공이었고 어머니 파이아레테는 아이를 잘 받기로 유명한 산파였다. 아테네 군대에서는 시민인 병사들이 필요한 장비를 자기 돈으로 사서 갖추어야 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말을 사서 기병으로 출전했다. 그보다 못한 중산층은 갑옷과 투구를 사서 중장갑 보병으로, 그것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돌팔매질하는 병사로 전쟁에 나갔다. 소크라테스는 주로 중장갑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볼 대, 맨발에 초라한 옷차림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고유 복장은, 가난이 아니라 욕심 없는 생활 태도에서 비롯된 듯하다.

 

 페리클레스 ::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군인. 평의회 ·민중재판소 ·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해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외교상으로는 강국과는 평화를 유지했고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했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는 아테네의 최성기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리클레스 [Pericles] (두산백과)

 

 소피스트 ::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그리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철학사상가이자 교사들이다.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논변술을 강조하였으며, 진리와 정의를 상대적인 기준으로 바라보았다.
소피스트(Sohist)는 ‘지혜로운 자’ 혹은 ‘현명하고 신중한 자’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본래는 현인이나 시인, 장인, 철학자들에게 존중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말이었으나 웅변술과 상대주의를 설파하는 교사의 강연이 인기를 누린 기원전 5세기 말부터는 교육자를 뜻하는 말로 고착화되었다. 그들은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지식과 재주를 가르치고 보수를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피스트 [Sophist] (두산백과)

 

 소피스트는 변호사와 논술 강사, 철학자를 합쳐 놓은 듯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재판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나 연설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쳤으며, 때에 따라서는 법정에 직접 서기도 하면서 돈을 벌었다. 이들에게 진리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돈을 주는 쪽에 따라 어느 경우에는 갑이, 어느 경우에는 을의 입장이 진리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따라서 소피스트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란 아예 없거나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소피스트들의 생각을 잘 드러내 준다.

 

 프로타고라스 ::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상대주의를 표방한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다. 최초의 소피스트라 불리는 인물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말로 진리의 주관성과 상대성을 설파하였다.
프라타고라스의 사상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그의 말로 함축할 수 있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나 해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의 진리 또는 사물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 개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에 대해서》란 책에서 '신들에 관하여, 나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 신들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을 어렵게 하는 방해물은 수도 없이 많다. 이 문제는 너무나 불명확한데 비해 인생은 짧다.'라는 말로 진리라 불리는 답을 얻는데 따르는 어려움과 진리의 주관성 및 상대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에 주목하여 그를 ‘최초의 소피스트’라 부르기도 한다. 인간에 주목하고, 주관성이 농후한 인간 사유의 한계를 비판하고, 감각의 기만성을 자각하고, 상대성으로 인한 윤리적 기준을 고심하고, 결론적으로 논변술과 설득을 중요시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소피스트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으며, 퍼디낸드 실러(Ferdinand Canning Scott Schiller)를 비롯한 후대 실용주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두산백과)

 

 아낙사고라스 :: 기원전 5세기경 활동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천체 현상을 비롯한 세상만물을 자연적 방법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원소들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여 만물을 이루게 하는 정신이자 운동 원리인 누스(Nous)를 강조했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대표적인 자연철학자이다. 이들은 세상을 신화나 초자연적 존재의 작용으로 치부하지 않고 나름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밀레토스 학파나 고대 원자론자들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원소를 가정하여 우주의 양적 다원성을 설명하려고 했다면 아낙사고라스는 원소들의 질적 다양성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누스(Nous, 지성(知性))’는 아낙사고라스 철학의 고유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핵심 용어이다. 그는 무거운 흙은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불은 위쪽으로 물과 공기는 그 중간에 있다고 설명하였으며, 이는 독립적이고 이성적이며 전능하고 순수한 동시에 비인격적인 누스의 운동 원리가 작용한 결과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본래는 뒤죽박죽으로 혼란스러웠던 우주의 원소들이 누스가 가한 충격을 받고 이상적인 질서를 찾아 나간다. 또한 아낙사고라스는 신을 우주에 가해진 ‘최초의 활력’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 안에서는 정신이 물질에 질서를 부여했다. 이에 주목해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자 티몬(Timon of Phlius, BC320?~ BC230?)은 “아낙시고라스가 무질서한 만물에 질서를 부여했다.”고 평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낙사고라스 [Anaxagoras] (두산백과)

 

 소크라테스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법정과 시장 거리를 누비며 소피스트들의 논변을 듣고 배웠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자연철학자인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에게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인간의 일을 판정할 때의 기준이 왜 자연을 연구할 때처럼 절대적이지 않은지를 고민한 것은 당연했다. 만약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판정해 줄 절대적 진리가 있다면, 나아가 그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훨씬 행복해질 터다. 소크라테스가 알고 싶어했던 것은 바로 이런 진리였다.

 

 델피 신전 :: 기원전 8~6세기 폴리스 성립기에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된 곳.

 

 델피 신전의 기둥에는 ‘너 자신을 알라(Gnoti seauton);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 명구는 소크라테스가 왜 가장 현명한 사람인지를 꿰뚫어 설명해 준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한 사실은 ’자신이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현명해 보이는 이들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몰랐지만,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포티다에아 공략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전우를 구출해 냈으며, 일리온 전투에서는 다른 병사들이 모두 도망친 가운데 병사로서는 유일하게 남아 장군과 함께 태연하게 전쟁터를 걸어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처럼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연하거나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보았을 뿐이다. 그는 정의와 경건함과 용기 등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모순된 것이며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학자들은 논박술(혹은 반어법)이라 부른다.

 논박술은 소크라테스가 직접 상대방에게 틀렸음을 가르쳐 주지 않고, 상대방 스스로 생각하게 하여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혜를 낳는 산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산파는 산모가 아이를 쉽게 낳도록 도울 뿐,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도 지혜를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지혜를 깨닫도록 도와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산파술’이라고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 :: 고대 그리스의 최대 희극 시인으로 최초의 작품 《연회의 사람들》 이래 시종 신식 철학, 소피스트, 신식 교육, 전쟁과 데마고그(선동 정치가) 등을 비난하고 풍자하였다. 그 밖에 《개구리》, 《복신》 등의 작품에서 일반적인 화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파네스 [Aristophanes] (두산백과)

 

 아리스토파네스의 유명한 희극 《구름》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당시 희극의 풍자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이 희극에서 소크라테스는 헛소리를 떠들어대는 사기꾼으로 그려진다.

 

 크산티페 :: 소크라테스가 BC 399년 형사(刑死)하였을 때, 두 아들 소프로니스코스와 메네크세노스가 아직 어렸던 것으로 미루어, 만년의 소크라테스와 결혼한 듯하다. 후처였다고도 전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아내로서 남편의 언동(言動)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항상 상스러운 말로 욕하는 등 남편을 경멸하여, 악처의 대명사가 되었다. 
어느 날 그녀가 소크라테스에게 호통치며 물벼락을 안기자, 소크라테스는 "저것 봐, 천둥 뒤에는 항상 소나기가 쏟아지는 법이야" 하면서 시치미를 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악처 노릇에 대해서는 후세사람들의 과장이 심하여 확실하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크산티페 [Xanthippe] (두산백과)

 

 소크라테스는 날이 갈수록 괴짜 수준을 넘어서 권력자들에게 위험한 인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젊은이들에게 권력자의 권위에 물음을 던지며 비판할 능력을 키워 주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세 명의 시민에게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여 500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사실 고소한 이들이 소크라테스를 굳이 처벌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 주거나, 고소당했다는 사실에 놀라 가르침을 자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그는 결코 눈물로 애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때 그의 변론 내용이 제자인 플라톤의 기록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바로 그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보여 준 당당한 모습에 반감을 느꼈는지, 어리석은 아테네 사람들은 그에게 180대 220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형량이 내려질 때에도 소크라테스는 관대한 처벌을 빌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은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영빈관에서 평생 식사를 제공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배심원들에게 더 큰 분노를 샀다. 결국 이번에는 더욱 압도적인 차이로 사형을 언도받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사형을 당하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의 유명인들은 보통 뇌물을 써서 탈출하곤 했으므로, 사형 선고는 단지 망신 주기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절친한 친구인 크리톤을 비롯해 여러 친구가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돈을 모아 간수를 매수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의 탈출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평생 다른 이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한 자신이 스스로 법을 어길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그는 독약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최초의 순교자였다.

 

 소크라테스가 평생 동안 자신이 확실히 안다고 주장했던 것은 ‘나는 진리를 모른다’라는 말뿐이었다. 그의 시대나 지금이나 대부분 사람들은 수많은 편견과 선입관 속에서 자신의 지식이 옳다고 믿으며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살아간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편견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의미 있고 올바른 것인지 묻도록 권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술

 소크라테스는 논쟁의 달인이었다. 그의 논박술(elenchos)은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간단한 원칙에 기대어 있다. 상대방은 ‘예’. ‘아니오’라는 짤막한 대답으로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답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주장이 어그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4. 플라토닉 러브, 이데아를 추구하라 – 플라톤

 플라톤은 아테네 최고의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플라톤은 레슬링 대회에서 세 번이나 우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운동에도 능했다. 플라톤이라는 이름은 ‘넓은 어깨’를 뜻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귀족 청년은 소크라테스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같다’는 말이 곧 못생겼다는 뜻으로 통할 정도로 외모가 추했는데도 말이다.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는 말은 남녀간의 정신적인 사랑을 뜻한다.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이 말은 지적으로 성숙한 성인에 대한 소년의 정신적인 동경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플라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가장 정의로운 이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다수의 어리석은 통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였던 자신의 안전도 안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도망쳐 나와 방랑길을 떠났다.

 

  솔론 :: 아테네의 시인이자 정치가로 7현인 중 한 사람. 채무 때문에 노예가 된 시민들을 해방시키고, 인신 담보의 대부를 금지시켰던 솔론은 정치적으로도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정치적 특권을 배분했다. 부유해진 평민이 참정권을 요구하자, 솔론은 배타적인 귀족 정치를 종식시키고, 재산의 소유 정도에 따라 평민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솔론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그치지 않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하여 민주 정치의 기반을 닦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솔론 [Solon] (Basic 중학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2007.7.10., (주)신원문화사)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 수학자들과 다른 여러 학자들을 만나면서 유명한 이데아(Idea)론을 만들어 갔다.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추구했지만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않았던 절대 진리를 ‘이데아’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던 것이다.

 이데아란 수학적 진리를 모든 사물에 확장시킨 것이다. 즉, 이데아란 객관적이고 불변하며 완전한 사물의 본질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사물에는 각각 이데아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사물들은 이데아를 대충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지식은 이성을 통해 이데아를 알았을 때에야 얻어진다.

 구체적인 사물만이 아니라 ‘정의’나 ‘올바름’같은 추상적인 것에도 이데아가 있다. 어떤 행동이 정의로운지 아닌지는 이익을 계산하거나 투표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행동이 정의로움의 이데아를 따르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유익함과 올바름의 이데아, 곧 선(善)의 이데아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기에 따라 통치를 할 때 정의로워진다. 

 선의 이데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철학자이다. 올바름의 이데아를 알고 있는 철학자가 권력을 쥐고 통치할 때에만 비로소 사회는 정의로우며 이상 국가에 다다른다. 플라톤의 이런 생각을 ‘철인(哲人) 통치론’이라 부른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 기개(氣槪), 욕망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성과 기개, 욕망이 제각각 역할을 다했을 때, 지혜, 용기, 절제의 덕(德)이 만들어 진다. 이 세 가지 덕이 이루어져 질서가 잡힐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해진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에서 이성에 해당하는 것은 통치자 계급(철인 왕)이며, 기개는 수호자 계급(군인), 욕망은 생산자 계급(농민 등)이다. 인간의 영혼처럼 국가도 이 세 계급이 질서를 찾을 때 정의가 실현된다. 이럴 대, 통치자 계급은 생산자 계급을 지배하고 수호자 계급은 통치자 계급을 따른다.

 그는 사회가 썩는 이유를 사람들의 욕심 탓이라 보았다. 악은 아예 뿌리부터 잘라 버려야 한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만큼은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아니, 가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재산은 공동 소유여야 한다. 여기에는 우생학적인 배려도 있었다. 뛰어난 사람이 자손을 더 많이 남기도록하기 위해 아내 공동 소유를 내세우기까지 했다. 심지어 플라톤은 장애인과 허약한 아이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선언하기조차 했다. 이런 주장들은 지금도 플라톤을 ‘독재자’로 비난하는 좋은 근거가 된다.

 

 4주덕 :: 그는 개인의 확대로 나타난 것이 '국가'라고 봤으며, '지혜'를 가진 통치자 계급과 '용기'를 가진 방위계급(군인), '절제'하는 생산자 계급(상민)들이 모두 타고난 기질을 알고 거기에 대한 역할을 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4주덕이라고 하는데, 4주덕에 맞는 각각의 신분이 각자 맡은 일을 해야만 그것이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플라톤 [Platon]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12.20, (주)신원문화사)

 

 기원전 387년, 마흔 살의 플라톤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시험할 기회가 찾아왔다. 시라쿠사(시칠리아 섬의 동해안에 있는 곳으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였음)의 통치자 디오니소스 1세의 처남 디온이 플라톤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그를 초청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디오니소스 1세에게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시라쿠사의 독재자에게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나 보다. 그는 결국 강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노예로 팔려 갔다가 극적으로 구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뒤 플라톤은 두 번이나 더 시라쿠사에 찾아갔지만, 철인 통치론이 이 도시에서 실현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두 번의 방문 모두 추방으로 끝났을 따름이다.

 시라쿠사에서 쫓겨난 뒤, 플라톤은 12년의 유랑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 근처 아카데모스 숲에 최고의 인재를 기를 학교를 열었다. 지역의 이름을 따서 학교의 이름을 ‘아카데메이아(Akadēmeia)’라고 했는데, 학술 기관 이름에 곧잘 쓰이는 ‘아카데미’라는 이름의 원조가 이 학교이다. 아카데메이아의 전통은 그 뒤로 90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학교 정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올 수 없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카데메이아에서 플라톤은 주로 대화를 통해 기하학, 철학 등을 가르쳤다. 그의 교육 목표는 철인 통치자를 기르는 데 있었다. 정신을 흐트러뜨리며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이나 시는 많이 가르치지 않는 편이 좋다. 예술은 온화한 성격을 기르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플라톤은 신체 단련과 현실 참여도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한마디로 플라톤의 교육관은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지향했다고 할 만 하다. 이런 그의 교육관은 서양의 학교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화편 :: 크게 ‘전기 대화편’과 ‘후기 대화편‘으로 나뉜다. 전기 대화편에는 《파이돈》, 《향연》, 《국가》 등이 있으며, 후기 대화편에는 《소피스테스》, 《정치가》, 《티마이오스》, 《법률》 등이 있다.

 

대화편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저작은 스스로의 철학을 바탕으로 엄밀하게 이론을 전개시켜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실존을 생생하게 재현하였다. 소크라테스적 대화편은 크세노폰, 아이스키네스, 안티스테네스, 파이돈 등도 저술하였으며, 플라톤의 제자도 대화편을 썼다. 로마시대에는 키케로가 플라톤을 본받아 대화로써 이론을 심화시켰고, 플루타르코스는 에세이 양식으로, 루키아노스는 소크라테스적 대화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풍자(諷刺)를 주로 한 대화편을 썼다. 근세에도 N.말브랑시, D.디드로 등에게서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화편 [dialogues, 對話篇] (두산백과)

 

 화이트헤드 ::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런던의 대학 교수. 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되었다(1924~1938). 러셀과 공저로 수학적 논리학에 관한 기초적 저작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 1910~1913)를 펴냈다. 그는 물리학에 대변혁이 이루어진 금세기 초두 이래의 자연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자연을 '과정'(process)으로 이해, 이것을 '경험'이라고 규정하며 신실재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 후에 그는 객관적 관념론으로 전환하여 세계의 '과정'은 '신의 경험'이라 하면서 이것이 세계의 본원적 자연이고 이로부터 결과로서 나타난 자연, 물질적인 것이 나온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플라톤의 이데아계로부터 감성적인 현실 세계가 나온다는 것과 비슷한 구성이다. 사회에 관해서는 뛰어난 인물 '과학적 인간'이 세계를 지배해야 하고, 그에게 절대적인 역할이 할당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역사의 추진력이라는 것은 '신의 경험'으로서의 관념을 인식하는 것에 있고 그것은 우수한 인물에게만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이트헤드 [Whitehead, Alfred North]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부제(副題)를 달고 있는 플라톤의 《국가》는 분량이 600여 페이지가 넘는다. 롤즈(J. Rawls)의 《정의론》도 800페이지에 달하는 긴 호흡의 글이다. 그만큼 정의라는 주제가 다루기 까다롭고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플라톤은 서양 사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큰 뿌리라는 뜻이다. 또한, 《국가》는 플라톤 철학의 고갱이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의 주제가 정의라는 점은 이 문제로 인류가 부대끼는 고민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한다.

 《국가》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트라시마코스라는 열혈 청년의 분노에 찬 연설로 시작된다. 그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힘센 자들이 자신들의 몫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정의를 앞세웠다는 뜻이다. 《국가》는 3~4쪽 정도 되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정교한 반론이라 보아도 좋다. 그 반론은 600여 쪽이 넘을 만큼 방대해져 버렸다. 그만큼 정의는 철학자들에게 어렵고 힘든 화두이다.

 

 고담준론 :: 고상하고 준엄한 논의. 잘난 체하고 과장하여 떠벌리는 말.
[네이버 지식백과] 고담준론 [高談峻論] - (높을 고, 말씀 담, 높을 준, 논할 론) (고사성어랑 일촌 맺기, 2010.9.15., 서해문집)

 

 트라시마코스 :: 그리스의 철학자, 소피스트. 소크라테스(Socrates)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플라톤(Platon)의 『국가론』에 대화자로 등장한다. 법률과 힘을 동일시하고 둘 다 강자의 권리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논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라시마코스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5. 행복과 중용, 극단을 피하라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상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비판했다. 나아가, 그의 사상은 서양 중세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뿐 아니다. 뉴턴과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박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그리스 북부 스타기라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인들은 자기들 세계 바깥쪽 사람들을 모두 야만인으로 보았는데, 스타기라는 문명 세계보다는 야만 쪽에 가까운 촌동네였다.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어이였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이어받곤 했다. 어린 시절 아리스토텔레스도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 ::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의술(醫術)의 신(神). 라틴어로는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라고 한다. 호메로스에서는 인간이며 의사라고 되어 있으나 훗날의 전설에서는 아폴론의 아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케이론 밑에서 자라면서 의술을 배워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제우스는 인간이 그를 통하여 불사(不死)의 능력을 얻을까 두려워하여 번개를 쳐 그를 죽였다. 그러나 아폴론의 요청으로 제우스는 그를 별로 바꾸어 오피우커스(Ophiuchus:뱀주인자리)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뱀은 약초를 발견하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믿어졌고, 아스클레피오스와 관계 깊은 신성한 동물로 보아 뱀을 위하여 수탉이 제물로 바쳐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스클레피오스 (두산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려 20여 년 동안 플라톤 곁에 머물며 공부했지만, 결국 이 아카데메이아의 정신은 플라톤의 최대 맞수가 되고 만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격과 삶에서 서로 많이 달랐다. 플라톤은 명문 귀족의 후손이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유했으나 평민 출신이다. 또, 수학과 기하학에 몰두한 플라톤은 수학과 같이 완벽하고 정교한 세계를 이상적인 세상으로 꿈꾸었다. 반면, 의사의 아들로 생물학과 자연 현상에 익숙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현재 삶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다. 플라톤이 이상주의자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였던 셈이다.

 플라톤은 죽을 때 아카데메이아를 가장 뛰어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자신의 조카에게 물려주었다. 이 사실을 보면, 둘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없지는 않았나 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조카가 아카데메이아를 인수하자마자 주저 없이 아테네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다. 남아 있는 그의 저서 어디에도 플라톤에 대한 과격한 공격은 찾아볼 수 없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전(全) 10권.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서이다. 학두(學頭:교장)시대의 강의 초고(講義草稿)이며, 그의 만년의 가장 원숙한 사색을 나타낸 책이다.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원리론(제1권∼제3권 5장)과 덕의 현상론(제3권 6장∼제10권)으로 이루어졌다.
윤리학은 모든 행위가 목적으로 하는 선(善)을 연구하는 것인데, 최고선(最高善)은 국가(폴리스)의 목적이므로, 정치학(폴리티케)과 직결된다. 인간적인 선은 개연적(蓋然的)이므로, 윤리학도 자연학이나 형이상학(形而上學)과는 달리, 개연적인 결론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학문의 청강자는 교육의 경험이 있는 자라야 하며, 너무 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한 선은 행복이라는 논리에 따라 우선 행복이 우선 논의된다(제1권 4장 이하와 제10권). 행복이란 자족적(自足的)인 작용, 즉 덕(德)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을 가리킨다. 윤리적으로는 초과와 부족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 상태, 즉 중용(中庸)을 본질로 하고, 용감 ·절제(節制) ·정의 기타 여러 가지 중용의 표본을 들어 현실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제6권에서는 지성적 덕(知性的德) 중에서 이성(理性)이나 지혜(知慧)와는 다른 사려(思慮:프로네시스), 특히 정치적 사려를 강조했다. 제7권 후반과 제10권 전반에서는 쾌고(快苦)와 선악(善惡) 및 덕의 관계를 보다 발전한 형식으로 논하였으며 인간의 쾌(快)는 지복(至福)한 사람의 활동을 완전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제8,9권의 우애론(友愛論:필리아)은 덕론(德論)을 보충하고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T.아퀴나스 등)에 영향을 주었다. 또 제10권 종장(終章)에서 청소년의 덕의 지도에서 법률의 필요성을 말한 점도 주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코마코스윤리학 [─倫理學] (두산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를 떠나 아스소스로 여행을 떠났다. 이곳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결혼이었다. 신부는 아스소스 군주의 딸이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사십 줄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죽을 대까지 자상하고 친절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는 아내와 자식, 심지어 부리던 노예들에게까지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행복한 삶이란 결코 쾌락적이고 무절제하지 않다. 무절제한 삶은 결국에는 더 큰 고통만을 가져다준다. 행복은 쾌락과 도덕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 데서 온다. 이런 태도는 ‘중용’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중용을 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이성적인 판가름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도덕적이고 행복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꾸준한 노력과 의지로 중용의 태도가 몸에 배게 해야만 인간은 행복에 이른다. 즉 추상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탐구뿐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만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

 

 기원전 343년, 42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열세 살 난 황태자 알렉산더의 스승이 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저는 권력이나 영토를 넓히는 일보다는 선을 아는 데서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단다. 하지만 이는 인사치레의 말 정도였던 듯하다. 절절한 고백이 무색하게도 알렉산더는 나중에 권력과 영토 확대에 더 관심이 많은 대왕이 되었으니까. 어쨌든 3년 뒤, 알렉산더는 정치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도 자연스럽게 끝났다.

 

 플루타르코스 :: 고대 로마의 그리스인 철학자·저술가. 그는 플라톤 철학을 신봉하고 박학다식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작활동은 매우 광범위하여 전기·속윤리(俗倫理)·철학·신학·종교·자연과학·문학·수사학에 걸쳐 그 저술이 무려 250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의 카이로네이아 출생. 영어식 이름은 플루타크(Plutarch). 그리스의 카이로네이아의 명문가 출신으로 일찍이 아테네로 가서 아카데메이아에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고, 다시 자연과학과 변론술을 배웠다. 그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방문, 로마에서는 황제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과 깊은 친교를 맺어 아카이아주(그리스 본토) 지사에 임명되었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얻었다. 만년에는 델포이의 최고신관(最高神官)으로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그리스인으로서 대지의 중심인 델포이의 아폴론 신역의 황폐화를 염려하여 그 부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최후의 그리스인'으로서 고전 그리스 세계에 통달한 일류 문화인이었다. 플라톤 철학을 신봉하고 박학다식한 것으로 유명하며, 저작활동은 매우 광범위하여 전기·속윤리(俗倫理)·철학·신학·종교·자연과학·문학·수사학에 걸쳐 그 저술이 무려 250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작품은 《전기》 《영웅전(플루타크영웅전)》 《윤리론집》(모두 그리스어로 씌었다)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플루타르코스 [Plutarchos] (두산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는 어느 정도 재산과 상식을 가진 사람들, 즉 중산층이 다스리는 ‘중산(中産) 정치’라고 주장한다. 그의 중용은 정치 철학에도 통했다. 즉 지나친 부와 가난은 모두 극단적인 것으로, 정치를 할 대 올바로 판단 내리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그 중간의 형태가 현실에서는 가장 바람직하다.

 

 알렉산더의 스승 자리에서 물러난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는 양데를 보호하는 신인 리케이오스를 모시는 신전 근처에 ‘리케이온‘이라는 학당을 열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정원과 숲 속을 거닐면서 학문을 했다. 여기서 그와 그의 제자들에게 ’소요학파(逍遙學派)‘라는 별명이 붙었다. 오래지 않아 학생들이 너무 많이 몰려든 까닭에 소요학파 무리는 한가롭게 거닐기를 포기하고 교실에 앉아서 수업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제자인 알렉산더는 스승의 연구비로 800달란트를 주었는데,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그는 온갖 탐구를 했다. 리케이온은 수많은 연구원을 거느린 ‘아리스토텔레스 연구 센터’였던 셈이다. 의사의 아들답게 해부와 생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고, 나일 강 홍수의 원인을 찾으려고 대규모 탐사단을 보내기도 했으며, 천체에 대한 탐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빈약한 과학 기술과 관찰 도구는 많은 오류를 낳았다. 그는 인간의 감정은 심장에 있으며 두뇌는 피를 식히는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묘한 결론을 내놓았다. 생쥐들은 소금 통을 핥기만 해도 새끼를 밴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그가 발견한 과학적 사실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의 연구 자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 목적은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늘어놓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사실들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밝히려고 했다. 

 그는 세상이 단순히 기계적인 물리 법칙에 다라 움직인다고 보지 않았다. 인간 삶뿐만 아니라 세계도 의미와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 예컨대, 세포 하나의 활동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한 생명체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지와 목적 아래서 움직인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목적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리케이오스 :: 그리스 모든 신들 중 가장 널리 숭상되고 영향력 있는 신인 아폴론의 별칭. 이 별칭은 아마 그가 늑대에게서 양떼를 보호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리케이온에서의 평온하고 안정된 연구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아테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친마케도니아 세력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다. 그에게 씌워진 죄목은 일찍이 소크라테스에게 주어졌던 신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철학을 다시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탈출했다. 하지만 탈출한 지 2,3개월도 못 되어 평생 따라다니던 위장병이 도져서 죽음을 맞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이후 유럽에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그의 사상은 10세기경 아라비아로 수출되어 오히려 그곳에서 더 활발히 연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유럽 무대에 등장한 것은 1225년,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그의 책이 다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걸출한 기독교 학자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유럽 지성사의 기둥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근대 자연과학은 세계를 이용 가능한 물질로만 보았다. 환경오염 등 수많은 문제는 그래서 생겼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세계 전체에서 사물 하나하나, 생명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녔는지를 따진다. 시대를 뛰어넘어 오랜 기간 살아남는 사상에는 그 나름의 진리가 담겨 있다.

 

 

 

6. 금욕하는 쾌락의 정원 –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Epikouros)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삶의 자세를 가르쳤다. 나아가 그는 사람들에게 나무에는 올라가 뭐 하냐고 묻기까지 한다. 그는 빵과 물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상의 욕심은 쓸데없으며 고통만 안겨 줄 뿐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어떤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을 뿐더러 뒤에도 항상 ‘나의 스승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에게는 당시의 유명한 철학 사상들이 탐탁지 않았을 터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보여 주듯, 아테네 학교들 대부분은 인간은 결국 폴리스(도시국가)의 삶 속에서 완성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덕목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심각한 혼돈 상태에 빠진 도시국가들은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이 아니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품었던, 갈고 닦은 인격을 사회에서 실현하겠다는 이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단지 혼란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숨어 지내면서 수양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새로운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에피쿠로스도 이런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던 사람이다.

 

 라미아 전쟁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인 BC 323∼BC 322년에 아테네가 그리스의 다른 여러 도시와 함께 마케도니아에 대하여 일으켰던 전쟁. 그리스의 군세(軍勢)는 마리스 지방의 도시 라미아에서 마케도니아군(軍)을 포위하여 한때 우세하였으나, 점차 패퇴하여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이후 아테네의 독립은 상실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미아전쟁 [Lamian War, ─戰爭] (두산백과)

 

 소아시아 ::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 흑해 ·마르마라해 ·에게해 ·지중해 등에 둘러싸인 반도. 면적 약 78만 5760 km2. 동서길이 약 1,000 km, 남북길이 400∼600 km. 아나톨리아(Anatolia)라고도 한다. 터키어로는 아나돌루라고 하는데,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톨레(anatole)’이며 ‘태양이 떠오르는 곳’ 또는 ‘동방의 땅’을 의미한다.
터키 영토의 97 %를 차지하며, 동쪽 및 남쪽으로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과 접한다. 북쪽 흑해 연안에는 폰투스산맥, 남쪽 지중해 연안에는 토루스산맥이 동서로 뻗으며, 그 사이에 평균 해발고도 800 m인 아나톨리아고원이 내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동부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등 두 강의 수원과 아라라트산(5,185 m)이 있다. 중앙부의 고원지대는 스텝 또는 사막성 기후이며, 여름이 짧고 겨울은 몹시 춥다. 흑해 연안지방은 기온 변화가 적으며, 연간 비가 잦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이며, 생활하기에 가장 알맞다.
이 지방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민족이동의 통로이자 식민활동의 무대였으며 예로부터 갖가지 문명이 꽃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아시아 [Asia Minor, 小─] (두산백과)

 

 에피쿠로스는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에 깊이 빠져 들었다.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보았던 키레네학파의 사상에 몰두하기도 했다. 도시국가의 몰락과 혼란을 몸으로 경험한 에피쿠로스는 더 이상 정의ㆍ도덕과 같은 명분을 믿지 않았다. 그는 거창한 명분에 비추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끌어 내지 않았다. 거꾸로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모습에서 출발하여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세우려 했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크게 필수적 욕망,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공허한 욕망으로 나누었다. 필수적 욕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음식ㆍ의복ㆍ집 등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를 말한다.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은 맛있는 음식, 좋은 옷, 쾌적한 집 등에 대한 욕망이다. 마지막으로 공허한 욕망은 명성이나 인기 같은 것들에 대한 욕심이다.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과 공허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것들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채워질수록 기대 수준이 점점 더 높아져 결국 고통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필수적인 욕망뿐이다. 이것은 많은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을뿐더러, 일단 채워지면 더 이상 고통을 낳지 않는다. 나아가 에피쿠로스는 필수적인 욕망에 철학과 우정에 대한 욕망도 넣었다. 철학을 함으로써 불필요한 욕망을 없애고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며 소박하게 산다면, 어떤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고통도 없는 상태인 아타락시아(ataraxia)에 이를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 :: 기원전 5세기 말부터 기원전 4세기 초까지 활약한 고대 그리스 사상가이다. 원자론을 체계화하였으며 유물론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레우키포스를 고대 원자론의 창시자라 한다면 데모크리토스는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그는 레우키포스처럼 우주의 시작을 허공(케논, Kenon)과 이를 채우고 있는 원자(아톰, Atom)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는 그 내부에 빈 공간이 없는 충만하고 꽉 찬 것이며, 따라서 생성이나 소멸을 겪지 않는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이는 원자를 세상 만물의 구성 원리로 보고 영원하며 불변하는 존재로 파악한 엘레아학파의 관점과 상통한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는 빈 공간을 거부하고 물체의 운동을 감각의 오류라고 주장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나 제논(Zenon of Elea)과는 달리 빈 공간인 허공도 우주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원자의 운동과 다원성을 거부하지 않았다. 충만한 존재인 원자들이 허공에서 계속해서 모였다 흩어짐을 반복하며 집적하고 여기에서 불, 물, 공기, 흙이 탄생한다. 그는 엘레아학파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변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로 세상만물을 설명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의 원자론은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는 유물론(唯物論)의 고전적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물질에 앞서는 정신인 누스(Nous)를 강조한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와 데모크리토스의 불편한 관계를 암시하는 기록들은 이러한 양자의 사상적 차이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한편, 쾌락을 강조한 그의 윤리학은 원자론과 적절하게 융화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데모크리토스 [Democritos] (두산백과)

 

 키레네학파 :: 창시자는 북아프리카의 키레네에서 태어난 아리스티포스이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하여 소(小)소크라테스학파의 하나로 꼽힌다.
이 학파의 특징은 쾌락주의로서, 쾌락을 선(善)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창시자인 아리스티포스는 현재의 육체적인 쾌감을 쾌락이라고 하면서도 쾌락의 대부분은 불쾌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려(思慮)로써 쾌락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스는 쾌락이란 것은 사려에 의한 즐거운 기분이라 하였고, 안니케리스는 우애나 조상에 대한 사랑, 조국애 등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헤게시아스는 불쾌를 수반하지 않는 쾌락은 없다고 생각하여 생활에 무관심한 태도를 현명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생활에 무관심할 수 없을 바에는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여 자살 권유자(페이시타나토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쾌락주의가 이와 같이 염세관으로 귀착한 사실은 역설적이며, 이 학파는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레네학파 [─學派] (두산백과) 

 

 아타락시아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말한 정신적 평정의 상태를 뜻한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등은 우주를 잘 인식하여 일체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에 의해 이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했으며, 현자가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특히 에피쿠로스는 일체의 종교적 미신을 척결하고 이성의 인식에 입각한 곳에 아타락시아가 있다며, 이것을 쾌락이라고 불렀다. 
회의론자인 피론 등은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되면 이러한 상태가 회득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또 스토아 학파가 말한 아파테이아(그리스어 apatheia, 영어 apathy)와도 통한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모든 감각에서 야기된 격정과 욕망을 탈피하여 이성적인 냉정을 유지하는 것을 아파테이아라고 하고 이러한 상태에 이르도록 권장하였다. 그러나 모든 이러한 상태는 행동을 억누르고 정관(靜觀)에 가치를 두는 견해에 불과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타락시아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사람들은 흔히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쾌락주의라 부른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철학은 가늘고 모질게 살라고 강요하는 금욕주의에 더 가깝다.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아테네 교외에 있는 정원을 사들여 그곳에 숨어 소박하게 살며 두터운 우정을 나누는 철학 공동체를 만들었다.

 ‘정원 공동체’를 만든 뒤 에피쿠로스는 수많은 스캔들에 시달렸다. 정원 공동체에는 오해를 살 만한 점이 많았다. 에피쿠로스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애(Philanthropia)’를 강조했다. 그렇기에 뜻만 같다면 노예나 여자, 심지어 매춘부들까지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에피쿠로스가 줄곧 은둔 생활을 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상이 제대로 전달되었을 리 없다.

 

에피쿠로스의 이름에서 비롯된 식도락가라는 뜻의 ‘epicure’라는 낱말이 있다. 

 

 젊은 시절 깊이 빠져들었던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처럼, 에피쿠로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들의 집합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을 대에는 우리에게 없으며,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우리가 흩어지고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냥 생각일 뿐이다.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이야기한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네 가지 덕(4주덕)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즉, 불안과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일은 모두 원자들의 집합과 해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지혜를 실제 삶에 적용시키는 데에는 용기와 절제가 요구된다. 나아가 이웃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롭게 살려면 나 자신부터 정의로워야 한다.

 

 

 

7. 섭리를 따르는 삶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사상 스토아 철학만큼 당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념은 드물다.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에픽테토스 같은 노예 출신도 있었고 세네카 같은 정치인도 있었으며,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같은 황제도 있었다. 노예에서 황제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던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진정한 강자로 만든 숨은 힘이었다.

 

 스토아학파 :: 기원전 3세기 제논에서 시작되어 기원후 2세기까지 이어진 그리스 로마 철학의 한 학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주요 학파이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탄생해 절충적인 모습을 보이며, 유물론과 범신론적 관점에서 금욕과 평정을 행하는 현자를 최고의 선으로 보았다.
스토아철학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토대를 다졌으나 주요 철학자들 대부분은 시리아나 로마 출신이었다. 또한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성장한 사상이기 때문에 그리스와 비(非)그리스적 요소가 거의 대등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스토아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끌어들이면서도 이전 시기 고대 그리스 철학과는 다른 독특한 측면을 지닌다. 스토아철학의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파악할 수 있는 범주는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토아학파 [Stoicism, ─學派] (두산백과)

 

 에픽테토스 ::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이다. 노예 출신이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가가 되었다. 인간의 내적 자유에 대한 고찰로 스토아 철학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자연을 인식하고 의지를 그것에 일치시키기 위한 수련(修鍊)이 철학이라고 했다.
루키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와 함께 대표적인 후기 스토아 철학자로 꼽힌다. 그가 남긴 저서는 없으나 제자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Flavius Arrianus)가 정리한 《담화록(Discourses)》과 《편람(Encheiridion)》, 그 외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관련 사상이 전해진다.
9세기 말 편찬된 대백과사전 《수다(souda)》의 기록에 따르면 에픽테토스는 어린 시절 네로 황제(Nero)의 신하 에파프로디토스(Epaphroditos)의 노예가 되어 로마로 건너갔다. 에픽테토스의 삶은 스토아 철학자였던 스승 무소니우스 루푸스(Musonius Rufus)을 만나면서 크게 바뀌었다.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에픽테토스는 노예상태에서 풀려나 로마에서 철학자로 활동하였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스토아 철학의 근간을 세우고 중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를 발전시켰다면,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토아 철학 이론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해 나갈 것인지를 고심했다고 할 수 있다. 에픽테토스 역시 지식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고,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이권을 누린 다른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욕심 없고 절제된 삶과 소박한 가르침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고자 했다.
외적조건보다 내면의 정신적 자유를 강조한 에픽테토스의 사상은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그는 인간은 자연에 따라 살아갈 때 진정 행복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의 자연은 신과 인간의 이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신이 원하는 것이 더 낫다. …나의 뜻은 신과 함께 한다.”는 에픽테토스의 말은 종교적이기 보다는 다양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부여해준 이성을 통해 신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우주와 비교했을 때 인간은 작은 존재이지만 인간의 이성은 신보다 작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신에게서 받은 이해하는 힘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한편,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철학적 모델로 삼은 에픽테토스는 대화를 통해 얻는 깨달음을 중시했으며 난해하거나 화려한 수사어구를 쓰기보다는 쉬운 말로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제자들과 논의한 철학적 주제들 상당수가 주로 결혼, 가정, 우정, 질병 등 일상 소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사상은 후대 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의 저작을 자주 인용하였다. 중세 신학자들은 에픽테투스의 사상을 기독교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픽테토스 [Epictetus] (두산백과)

 

 세네카 :: 고대 로마제국 에스파나 코르도바 출생. 후기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유명한 변론술학자(辯論術學者)를 아버지로 둔 그는 젊은 시절부터 웅변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 후 정계(政界)에 투신하였지만 유형(流刑)에 처해지는 등 많은 파란을 겪었다. 말년에 황제 네로의 교사가 되었지만, 후에 황제복멸(皇帝覆滅)의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자살을 명령받았다. 
그는 세속에 물들면서도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 때문이라는 것과 유일의 선(善)인 덕(德)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는 스토아주의를 역설하고 모순과 불안에 찬 생애를 보냈다. 그의 스토아 윤리에는 이처럼 인간미와 비조(悲調)가 첨가되어 있으며 영혼을 육체와 구별하여 육체보다 우위에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네카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하드리아누스 :: 아우렐리우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와 더불어 ‘로마 5현제’로 불린다. 이들은 로마제국 전성기에 잇달아 군림한 훌륭한 황제로, 이들이 다스렸던 시기에는 정치는 물론, 경제도 안정되어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을 3번이나 지냈던 명문가였다. 꼬마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금욕적인 태도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마음에 꼭 들었다.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여 ‘베르시무스(Versimus)’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는데, 듯을 풀자면 ‘정말 진국인 아이’ 정도 될 듯싶다.

 황제는 아우렐리우스를 교육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 꼬마 철학자가 최고의 선생에게 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아우렐리우스를 가르쳤던 스승만도 1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황제는 그를 후계자 감으로 여겼던 듯하다. 이 점은 하드리아누스가 명문가의 딸과 그를 약혼시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 꼬마 철학자가 하드리아누스 다음의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 현명한 황제는 후계자로 52세의 안토니누스를 지명하고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다. 단, 안토니누스가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들이는 조건에서였다. 이로써 조금 해괴한 가족이 생겨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나이 차가 열 살밖에 안 났다. 또한, 새 아버지는 새롭게 얻은 아우렐리우스가 마음에 들어서 할아버지가 맺어 준 약혼을 깨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버렸다.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숨을 거두었다. 마흔 살의 아우렐리우스가 그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철학자 제논에 의해 출발한 사상이다. 원래 스토아 철학은 혼란한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 ‘은자(隱者)’의 사상이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지나친 욕심과 쾌락 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 Apatheia)을 강조한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 로고스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일은 마음의 평온을 깨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발휘하여 우주적 이성의 깊은 뜻을 깨달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의 평화, 즉 부동심을 찾아야 한다.

 

 제논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그의 철학은 절욕(節慾)과 견인(堅忍)을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자연과 일치된 삶’이 그 목표였다. 또한 그의 철학은 윤리학이 중심이며, 인생의 목표인 행복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이성 즉 로고스를 따르는 일이다.
키프로스섬 키티온 출생. 페니키아인(人)의 혈통으로 추정된다. 30세경에 아테네로 가서, 각 학파의 여러 스승에게 배운 뒤에, 독자적인 학파를 열어 아고라(agora:집회장, 중앙 광장)에 있는 이른바 ‘채색 주랑(彩色柱廊)’이라고 불리는 공회당(公會堂)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주랑(여러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운 복도)을 스토아라 하므로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의 철학은 절욕(節慾)과 견인(堅忍)을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며, 다른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빼앗기지 않는 행복을 얻는 힘을 부여하는 철학이었다. ‘자연과 일치된 삶’이 그 목표였다. 전통적인 여러 철학의 학설을 종합하여 풀이하였기 때문에 절충(折衷)의 흠은 있지만, 그 설의 근본에는 동방(東方)의 요소가 있다고 믿었으며, 이 독자성 때문에 순수한 그리스인 이외의 제자들을 많이 모아, 새로운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그의 철학은 윤리학이 중심이며, 인생의 목표인 행복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神)의 이성(理性) 즉 로고스를 따르는 일이었고, 이로써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 ·수사학에 대해 많은 논문을 썼으나, 현재는 인용(引用)에 의해 그 단편이 알려질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논 (두산백과)

 

 팍스 로마나 :: BC 1세기 말 제정(帝政)을 수립한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부터 5현제(五賢帝) 시대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평화. 원어명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변경의 수비도 견고하였고, 이민족(異民族)의 침입도 없었으며,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 ·물자의 교류도 활발하였고, 로마제국 내의 각지에서 도시(都市)가 번영하여 전국민은 평화를 구가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팍스로마나 (두산백과)

 

 파르티아 :: 고대 이란의 왕국(BC 247∼AD 226). 왕조의 창시자 아르사케스의 이름을 따 아르사크왕조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안식(安息)이라고 불렀다. 시리아 국왕 안티오코스(2세)가 이집트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 전쟁의 기회를 타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왕국은 카스피해(海)의 남동지방을 본거지로 하였으나, 차차 북동 이란으로 영토를 신장시켜, 수도 헤카톰필로스의 이름이 서방에 알려졌다. 미트라다테스 1세가 나오면서부터 박트리아·바빌로니아·메디아 등을 정복하여 대제국(大帝國)이 되었으며 미트라다테스 2세 때에는 아르메니아와 북방 인도를 추가하였다. BC 129년 크테시폰이 새 도읍으로 조영(造營)되어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파르티아가 발전함으로써 동서의 대국(大國)인 중국과 로마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고, 중국과 파르티아 사이의 대상로(隊商路)는 훗날 ‘실크 로드’로서 동서를 잇는 대로(大路)가 되었다.  
미트라다테스 2세는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서아시아 지역을 두고 로마와 경쟁했으나, B.C. 92년에 재상 오로바제(Orobaze)를 대사로 보내어 유프라테스 강에서 로마 장군 루시우스 코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와 우호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로마는 시리아 지역을 차지했으며, 이후 얼마간 평화기가 있었으나, 양국의 서아시아에 대한 주도권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파르티아의 국력은 피폐해져, 226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파르티아는 기본적으로 봉건국가였으나, 행정제도의 대부분은 주로 시리아 왕국 시대의 것을 답습하였고, 대국이 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국가이념을 가지게 되었다. 문화면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미트라교(敎)와 아나히타 여신교(女神敎)가 전국을 휩쓸었으나, 왕국의 말기에 와서야 본래의 이란적(的) 마즈다교(敎)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르티아 [Parthia] (두산백과)

 

 무어인 :: 711년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아랍계(系) 이슬람교도의 명칭. 에스파냐에 투우를 전한 사람들은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이슬람의 무어인이라고 전해진다.
마우레인 또는 모르인이라고도 한다. 사하라 사막 서부의 모리타니로부터 모로코에 걸쳐 살며, 아라비아인 ·베르베르인 ·흑인의 혼혈로 구성된다. 그 기원은 남방설(南方說)보다는 북방설(北方說)이 유력한데, 일찍이 11세기에 북아프리카에서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나 18세기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인종 ·언어적으로는 니그로보다는 아랍 요소가 더 강하다. 유목을 생업으로 삼고, 자존심이 강하며 용감하지만, 연대감은 비교적 약하다. 무어인이란 인종학적인 명칭이 아니므로 북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이슬람교도에게도 적용되며, 필리핀에도 모르족이라고 불려지는 종족이 있는 등 무어인의 개념은 명확하지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어인 [Moors, ─人] (두산백과)

 

 아우렐리우스는 부족한 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거나 침략을 통해 약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자선 바자회라 할 만한 것을 열었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보석부터 일상에서 쓰던 가구까지 모두 거리에 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위기에 부딪혔을 때 국가 지도자가 제일 먼저 앞장선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겠지만, 로마 시민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크게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그의 관대함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 이 이성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적 이성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지닌 사람은 피부가 하얗건 검건, 라틴어를 쓰건 게르만어를 쓰건 간에 모두 존중해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이 존엄하다는 사실도 당연하다.

 로마가 내세웠던 세계 시민주의는 바로 이 같은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이성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이 만든 법도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본래 있는 법칙이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자연법사상 :: 16-17세기부터 전개된 사회사상의 하나로 근대사회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사상적 역할을 했다. 그로티우스, 홉스, 로크, 루소 등 차이는 있으나 자연법사상을 주장했다. 자연법에서는 인간이 가지는 본능, 본성을 중시해 경제적 제 사실, 관습, 작위적인 실정법과 대립시킨다. 즉 근대 이전의 왕권, 교회권에 대해서, 개개인의 인간이성을 강조하는 데에 중점이 있었다. 이 자연법사상은 고대그리스, 중세로마에서도 존재했었다. 민족ㆍ사회ㆍ시대를 초월해 영구불변의 보편타당성을 지닌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연법사상 [the principle of natural law] (사회복지학사전, 2009.8.15, Blue Fish)

 

 코모두스 :: 로마 제정(帝政) 때 5현제(賢帝)의 전성기 다음에 즉위한 황제(재위 180∼192). 잦은 이민족의 침략과 재정적 문란, 화폐의 악질화, 물가 등귀 등으로 로마 제국이 쇠퇴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이다. 부친의 재위 때부터 여러 형태로 부황제(副皇帝) 역할을 했으며, 게르마니아 등 여러 지방에서 참전했다. 180년 3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단독 지배자가 되었으나, 근위군사령관 등의 중신들이 권력을 남용하였으며, 제권(帝權)과 원로원 간의 암투가 계속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고, 대내적으로는 재정적 문란, 화폐의 악질화, 물가 등귀가 심각하여 로마 제국이 쇠퇴하였다. 온갖 잡기에 탐닉하고 종교에 의탁하였으나, 192년 황제답지 못한 그의 태도를 혐오하는 사람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코모두스 [Lucius Aelius Aurelius Commodus] (두산백과)

 

 그대는 이 거대한 국가-세계-의 시민으로서 살았다. 그 기간이 5년이든, 100년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세상의 법은 그대뿐 아니라 그 누구도 공정하게 대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불만을 품는가?

 그대를 이 세계에서 몰아내는 자는 폭군도, 부정한 재판관도 아니다. 그대를 세상에 보낸 자연이다. 자연은 배우를 섰다가 다시 무대 밖으로 나가게 하는 연출자와 다르지 않는다. “저는 5막짜리 연극에서 3막까지만 출연했습니다.” 그대는 이렇게 하소연하고 싶은가? 인생은 3막만으로도 완전한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연극을 언제 끝낼지를 결정하는 분은 당신을 처음에 고용했고, 지금은 당신을 내모는 자연이다. 따라서 이런 결정은 그대가 상관할 것이 아니다. 만족하는 마음으로 물러서라. 그대를 떠나보내는 자연도 그대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명상록》 제12권 중에서

 

 

 

8. 기독교 신앙의 주춧돌 – 아우구스티누스

 밀라노 칙령 :: 313년 2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칙령(勅令)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와 빼앗은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밝혔다.
313년 2월 로마제국의 공동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80?~337)와 리키니우스(Licinius, 270?~325)가 메디오라눔(Mediolanum, 지금의 Milano)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칙령(勅令)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포함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여,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보호되고 장려되는 계기가 되었다.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든 다른 종교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 제의(祭儀)에 참여할 자유를 지닌다고 선언하여 종교의 자유와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寬容)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교도 그러한 자유를 지닌다고 강조하여 각 지역의 총독들에게 박해의 중지를 지시하였다. 또한 국가나 개인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교회와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반환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계기로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기반을 넓히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최대한 장려하였다.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각종 특권을 주었고, 각지의 교회 설립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를 열어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라노칙령 [Edict of Milan, ─勅令] (두산백과)

 

 다른 종교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이론을 세우고 정리한 성직자들이 ‘교부(敎父)‘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대표적인 교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마니교에 빠져 방황했을 뿐 아니라, 세속적인 성공과 쾌락을 겪어 본 사람이기도 했다.

 사정 모르는 이들은 그를 타락한 시절을 보내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신에게 귀의한 ‘돌아온 탕아’로 그리곤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에서 죄책감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본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의식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그는 방탕한 생활에 좀처럼 만족할 수 없었다. 쾌락은 순간의 기쁨을 주지만 결코 삶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어떤 올바른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백록 ::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종교적 모색을 기록한 책. 흔히 루소의 《참회록》, 톨스토이의 《나의 참회》과 함께 서양의 3대 참회록으로 일컬어진다.

 

 마니교 :: 3세기에 페르시아 왕국에서 마니가 창시한 고유의 이원론적 종교이다. 마니교는 그리스도교 혹은 조로아스터교의 이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일관된 교리, 엄격한 제도, 조직을 갖춘 하나의 종교로 자리잡았다.
마니교는 3세기에 '빛의 사도' 또는 최고의 '빛을 비추는 자'로 알려진 예언자 마니(Mani : 210? ~ 276)가 페르시아에서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운동에서 시작했다. 마니의 활동 초기에는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이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에서 파생되고, 그 교리가 일관되고, 체계가 확실히 잡혀가며 고유한 종교로 자리잡았다.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는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24세가 되던 해에 계시를 받아 대중들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붓다, 예수, 조로아스터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또한 종교적 진리는 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라 여겨 선교 초기부터 전세계를 개종시키고자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마니의 선교 활동은 초창기에는 방해를 받지 않았으나, 후에 페르시아 왕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수감되었다. 그 후 마니교도들이 '빛을 비추는 자의 고통' 또는 '마니의 수난'이라 부르는 26일 간의 재판을 받은 뒤 제자들에게 최후의 메시지를 남기고 죽었다.
마니교에는 간명한 교의(敎義)와 예배 양식, 엄격한 도덕계율이 있었다. 그 교의는 광명·선과 암흑·악의 이원론(二元論)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영지주의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다른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처럼 마니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영혼 또는 지혜가 이를 해방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은 신화를 통해 설명되며, 신화는 다음의 3단계로 구분된다.
 ①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실체, 즉 영혼과 물질, 선과 악, 빛과 어둠이 분리되는 과거의 시기
 ② 두 실체가 혼합되는 현재
 ③ 원래의 2원성이 재설정되는 미래. 신화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지만 간음·출산·소유·경작·추수·육식·음주 등의 육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의 저주를 받게 된다. 마니교 공동체는 교리에서 주장하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따를 수 있는 ‘선별된 자’와 노동과 기부를 통해 그들을 돕는 ‘듣는 자’로 나눈다. 마니교 성례의식의 요소는 기도·자선·단식이며, 죄의 고백과 찬미도 공동체 생활에서 중요시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니교 [Manichaeism, 摩尼敎] (두산백과)

 

 수사학 :: 그리스 ·로마에서 정치연설이나 법정에서의 변론에 효과를 올리기 위한 화법(話法)의 연구에서 기원한 학문. BC 5세기경에 주로 아테네에서 이러한 수사학의 지도를 담당한 사람들은 소피스트(sophist:그리스어로 賢人의 뜻)라 불리고, 시민생활에 있어서 계몽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는 궤변을 늘어놓고, 단순히 입신출세의 방법을 말하는 자도 있었다. 
그 후 수사학은 키케로 등을 거쳐 단순한 웅변술보다 훨씬 넓은 전인교육의 기초로서 대학의 7개 교과목(음악 ·산술 ·기하 ·천문 ·문법 ·논리 ·수사)에 포함되어 중세에 크게 발달하였다. 
현대의 수사학은 교육의 실제면에서 문장법에 가까운 의미로 작문법과 함께 고려되는 일이 많다. 또 한편으로는 철학적 문학비평의 입장에서 사유(思惟)와 표현을 함께 고찰하는 문체론적 연구가 종래의 수사학에 대신하고 있다. 즉, I.A.리처즈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신비평가(新批評家)들은 수사를 의미론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문학과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본다.
수사학의 중요 분야는 다음과 같다. ① 직유(直喩:simile) ·은유(隱喩:metaphor) ·환유(換喩:metonymy), ② 활유(活喩, 擬人法:personification) ·과장법(誇張法:hyperbole) ·돈호법(頓呼法:apostrophe) ·현재법(現在法:historical present), ③ 대조법(對照法:antithesis) ·점층(漸層:climax) ·반복(反復:repetition) ·도치(倒置:inversion) ·반어법(反語法:irony) ·완곡법(婉曲法:circumlocution) ·수사의문(修辭疑問:rhetorical question) ·영탄법(詠嘆法:exclamation)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사학 [rhetoric, 修辭學] (두산백과)

 

 키케로 :: 고대로마의 문인 ·철학자 ·변론가 ·정치가. 보수파 정치가로서 카이사르와 반목하여 정계에서 쫓겨나 문필에 종사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 안토니우스를 탄핵한 후 원한을 사서 안토니우스의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수사학의 대가이자 고전 라틴 산문의 창조자이다.
기원전 106년 1월 3일 라티움의 아르피눔에서 출생하였다. 로마와 아테네에서 공부하였으며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로 정치가, 변호사, 철학자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 그는 보수파 정치가로서 활약하였으며, 집정관이 되어 카틸리나의 음모를 타도하여 ‘국부’의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와 반목하여 정계에서 쫓겨나 문필에 종사하게 되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 안토니우스를 탄핵하였기 때문에 원한을 사게 되어 안토니우스의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수사학의 대가이자 고전 라틴 산문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완성자라고 불리며, 그리스의 웅변술과 수사학 소양(素養)에서 우러나온 문체는 도도하게 흐르는 대하에 비유된다. 그의 철학은 절충적인 처세 도덕론에 불과하지만 그리스 사상을 로마로 도입하고 그리스어를 번역하여 새로운 라틴어를 만들어 그가 최초로 라틴어를 사상전달의 필수적인 무기로 삼은 공적은 참으로 큰 것이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카틸리나 탄핵 In Catilinam》 외 58편의 연설과, 《국가론 De Republica》 《법에 관하여》 《투스쿨라나룸 담론(談論)》 《신에 관하여 De natura deorum》 《의무론 De officiis》 등의 철학서와 《노년론》 《우정에 관하여》 같은 소품, 그리고 친구인 아티쿠스 등에게 보낸 서한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두산백과)

 

 베르길리우스 :: 로마 최고의 시인으로 북이탈리아의 만투아 태생. 크레모나와 밀라노에서 교육을 받고 16세 때 로마로 나아가 에피쿠로스파의 철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의 일생은 마침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한 로마 통일과 번영의 시기에 해당한다. 그는 문예 보호자로서 유명한 마이케나스에게 발견되어 조용히 시작에 힘쓸 수 있었다.
그가 〈농경시〉(37-30 B.C.)를 쓴 것은 이 마이케나스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이 시는 날씨, 수학, 가축, 양봉 등을 노래한 농업시로 그 기교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후의 걸작 〈아이네이스〉를 훨씬 능가한다고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이즈음 이미 아우구스투스의 직접 권고로 후세에 남길 만한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로마 제국을 기리는 서사시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여생의 11년간은 대작 〈아이네이스〉에 몰두해 기원전 20년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풍물을 직접 보려고 그리스로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 발병하여 미완의 대작을 가슴에 품은 채 남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의 항구에서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길리우스 [Publius Vergilius Maro]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002.4.1., 가람기획)

 

 호라티우스 :: 고대 로마의 시인으로 공화제(共和制)를 옹호하는 브루투스 진영에 가담하였다가 패한 뒤 하급관리를 지내며 시를 썼고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정책에 뜻을 같이하였다. 작품은 《서정시집》 4권과 《서간시》 2권등이 남아있다.
남부 이탈리아 베누시아에서 해방노예(解放奴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아테네로 건너가 아카데미아의 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카이사르 암살 후 로마의 내란이 그리스에도 파급되자 공화제(共和制) 옹호를 내세운 브루투스 진영에 가담하여 필리피(Philippi) 군단사령관이 되어 싸웠으나 안토니우스군에 패하였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은사(恩赦)를 받아 로마로 돌아온 후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시인 베르길리우스 등의 소개로 문인 보호자 마에케나스를 만났다. 이 때 그는 정치에 대하여 절망을 느끼고 있었으나, 악티움 해전무렵부터 차차 옥타비아누스(후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정책에 공명해 갔다. BC 17년의 세기제(世紀祭)에는 그가 지은 합창가가 봉납(奉納)되어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비서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거절한 것으로 전한다.
작품으로는 먼저 아르킬로쿠스를 모방한 반항과 비판의 시 《에포디》와 루키리우스의 전통을 계승한 《풍자시》 2권이 있는데, 그의 공격은 특정 개인보다 전형(典型)을 향한 문명비평적인 것이 되었으며, 또 에피쿠로스적인 슬기에 바탕을 둔 충족자(充足者)의 행복이 거론되었다. 알카이오스를 모방한 《서정시집》 4권은 최고의 기교와 정선된 언어를 동원, 여러 신(神)과 아우구스투스 ·친구들 ·주연(酒宴) ·여자 ·전원생활 등 다채로운 주제를 노래한 대표작이다. 《서간시(書簡詩)》 2권은 인생철학이나 문학문제를 풍자시 형식으로 다룬 수상시(隨想詩)이며, 근세까지 작시법(作詩法)의 성전(聖典)이 되었던 《시론 Ars poetica》은 그 중 1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라티우스 [Quintus Horatius Flaccus] (두산백과)

 

 아우구스티누스가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왜 세상은 이토록 고통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였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해야만 이 엉망인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얻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 물음에 처음으로 해답을 준 사상은 유행하던 마니교였다. 마니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설명한다. 현실 세계는 선악이 대립하고 싸우는 곳이다.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 인간은 영혼으로 있으면 신이지만, 육체로 존재할 때는 하나의 물질이다. 그런데 악은 욕구를 일으키는 육체에서 비롯된다. 선은 우리의 순수한 영혼에서 온다. 선이 승리하여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는 육체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이성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마니교는 그의 의문을 완전하게 풀어 주지는 못했다. 죄악이 악한 신으로부터 비롯된다면, 악한 짓을 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을까? 그는 단지 신의 명령에 다라 행동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하고 행동한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선하고 전능한 분이다. 이런 신이 만든 세상은 행복과 사랑이 가득한 곳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왜 고통과 절망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것은 교리 연구자들이 해결할 수 없었던 커다란 문제였으며 이교도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중요 포인트이기도 했다.

 이 문제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없으며 선의 결핍일 뿐’이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신이 만든 세상에서는 무엇도 악하지 않다. 예컨대, 물건을 훔치고 집에 불을 지르는 일마저도 모두 선한 행동이다. 다만, 이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주는 작은 선이다. 반면, 훔치고 불 지르고픈 욕망을 참는 인내는 더 큰 선이다. 보복을 피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전과 평화라는 선을 주기 때문이다.

 

 원죄 :: 창세기 성서에 등장하는 아담이 선악을 구분하는 열매를 먹으면서 발생하였다는 죄. 원죄의 개념은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Adamah)과 이브(Eve)의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면서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으며 그의 아내인 이브와 함께 축복받은 땅인 에덴동산에 살았다. 하지만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의 권유를 받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생기는 나무열매를 먹게된다. 선악과(열매)는 하느님이 먹지못하게 금지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먹음으로써 하느님께 죄를 짓게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죄이며 그로인해 모든 인간은 때어날 때부터 원죄를 짓고 있다고 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그 이후 힘든 노동을 하는 삶과 고통과 죽음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죄 [original sin, 原罪] (두산백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이 180도 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이른바 ‘밀라노 정원에서의 체험’이라 불린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감명 깊은 설교와 마니교에 대한 회의로 방황하며 정원을 거닐던 어느 날, 이웃집에서 그에게 말을 거는 듯한 어린아이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성경》을 읽어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말은 신의 계시처럼 다가왔고, 가까이 있던 《성경》을 집어서 아무 곳이나 정신없이 펴 보았다. 그의 눈에 마침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장 13~14절)라는 구절이 들어왔다.

 

 410년, 서고트의 침략으로 마침내 서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가 함락되고 만다. 그는 기울어가는 조국 서로마제국을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재무장시켜, 새로이 일으켜 보겠다는 생각에서 유명한 《신국론(神國論)》을 쓴다. 

 이 책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지상의 나라’와 ‘신의 나라’가 벌이는 투쟁의 기록이다. 지상의 나라는 잔인하고 오만하며 방탕하지만 신의 나라는 믿음과 희망과 자비로 가득 차 있다. 지상의 나라 사람들은 부를 쌓고 안정된 정치 제도만 갖춰지면 삶이 충만하고 완성되리라 믿는다. 진정한 행복은 신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사람들은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만을 바란다. 그 속에서만 진정한 정의와 복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지상의 나라와 신의 나라의 싸움은 결국 최후 심판의 날, 신의 나라의 승리로 끝을 맺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겸허한 신앙심으로 신의 은총을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서고트족 :: 민족 대이동 시대에 활약한 게르만의 한 부족으로 고트파의 분파.
원래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거주하였으나, 남하하여 타키투스 시대에는 비스툴라 하구(河口) 지역에, 2세기 중엽부터 3세기에는 다뉴브 북안과 흑해(黑海) 북안에 정주하였다. 이 중에서 다뉴브 북안에 정주한 것이 서고트족으로 3세기 중엽 이래 자주 로마령 내에 침입하기도 하고 소아시아까지 약탈행위를 하였으나 4세기 후반에는 동고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370년 무렵 훈족의 서진으로 동고트는 그 지배하에 복속하고 서고트의 대부분은 프리티게른에 인솔되어 376년 로마령인 모에시아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이 민족대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주 후 로마의 압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378년의 아드리아노플전투에서 비잔틴제국 황제 F.발렌스(재위 364∼378)를 패사시켰으나, 다음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의 화친정책에 따라 로마의 동맹자로서 트라키아 지방에 정주하였다. 황제의 사후 다시 로마와 적대하였다. 알라리크(370∼410)를 왕으로 선출하여 그리스 각지를 황폐하게 한 후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싸웠다. 알라리크의 사후에는 의제(義弟)인 아타울프가 왕위를 이었고 412년 남(南)갈리아를 정복하였다.
또한 에스파냐 북부에 침입하여 왈리아왕 시대에는 로마로부터 정식으로 아키타니아 지방을 양도받아 여기에 서고트왕국을 세우고 남갈리아에서 에스파냐의 대부분에까지 영토를 넓혔다. 훈족의 왕 아틸라의 갈리아 침입 때에 국왕 테오도리크는 아틸라를 격파하였고 또한 유리크왕은 로마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서고트법전 Lex visigothorum》을 편찬하였다. 507년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왕 클로비스(재위 481∼511)에게 패퇴되어 아키타니아·남갈리아를 잃었으나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크왕국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동고트의 국왕 테오도리크의 사후 서고트왕국은 다시 고립되어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남부 에스파냐를 빼앗겼고 국내에서도 귀족층의 봉건화가 진행되었다. 
레오비길드왕(재위 568∼586)은 국내 귀족층을 억압하고 남부 에스파냐를 탈환하여 왕국의 번영을 회복하였다. 다음 왕 레카레드는 아리우스파(派)의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고트인이 로마 주민과 융합할 것을 진행시켰으나 711년 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서고트왕국은 멸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고트족 [Visigoth, 西─族] (두산백과)

 

 서로마 제국 ::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후, 큰아들인 아르카디우스(재위 395∼408)가 동(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데 대하여,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가 서방의 황제로서 서로마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은 국력이 약하여 내외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476년 게르만인 용병대장(傭兵隊長) 오도아케르에게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자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동쪽과 분리된 서로마제국은 동로마제국에 비하여 그 국력이 훨씬 약한 데다가 게르만인 스틸리코를 처형한 뒤로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게르만인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그것이 국력 쇠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브리튼섬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고, 갈리아 지방에는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이 침입하였으며, 에스파냐는 수에비족·반달족 등에게 점령되었다. 410년 로마시마저도 알라리크 1세(재위 395∼410)가 인솔한 서고트족에게 강탈되었다. 이어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의 모후(母后)인 가라 프라키디아와 무장 아에티우스 등이 국운(國運)의 재건을 도모하여 451년 훈족의 왕 아틸라를 카탈라우눔전투에서 격파하였으나, 455년 로마시가 재차 반달족의 게이세리쿠스(재위 428∼477)의 습격을 받아 황폐하게 되었다.
이처럼 서로마제국의 영토가 게르만인의 침입으로 유린당하거나 그들이 정착함으로써 국고(國庫) 수입이 격감하고 국가재정의 유지도 곤란하게 되었다. 이로써 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소진(消盡)하여, 실질적으로도 제국의 해체 때에는 야만인들 무장(武將)의 지배하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로마제국 [Western Roman Empire, 西─帝國] (두산백과)

 

 반달족 :: 게르만족에 속하는 루기족(族)을 중심으로 한 혼성부족. 1세기 무렵 오데르강(江) 상류에 거주하였으며, 3세기 후반 도나우강(江) 중하류로 이동하였다. 4세기경 이후에는 로마의 주권하에 판노니아에 정주하였고, 409년 민족대이동기 때 왕 고데기젤이 부족을 거느리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를 침략, 이동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에스파냐를 침략한 서고트족의 압력으로, 429년 왕 게이세리쿠스이 전부족을 모아 아프리카를 침입하여 로마 총독 보니파키우스를 살해하고 아프리카 정복을 완성한 뒤,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왕국을 세웠다. 게이세리쿠스은 다시 지중해에 진출하여 제해권을 장악, 로마시를 약탈하는 등 맹위를 떨쳤다. 뒤를 이은 군다문트 ·트라사문트는 평화정책을 취하였고, 5대왕 힐데릭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극단적인 친(親)로마 정책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자의 반감이 폭발하여 왕위를 사촌 겔리메르에게 빼앗겼다.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달 왕국 내의 세력 대립을 이용, 534년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보내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달족 [Vandals, ─族] (두산백과)

 

  

 

9. 신앙과 이성, 신에게로 가는 두 갈래 길 – 토마스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독일의 스콜라 철학자.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수학 ·자연학 ·형이상학 등에 관하여 폭넓은 교양을 지녔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라틴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 하였다. 즉 신학과 철학 사이에 명백한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철학이 지니는 자율적인 가치를 분명히 하였다.
슈바비아주(州) 라우잉겐 출생. 도미니코회(會)의 수도사였으나, 도중에 약 10년간 교회의 요직에도 있었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쾰른 ·파리 등 많은 도시에서 교육에 바쳤다. 신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수학 ·자연학 ·형이상학 등에 관하여 폭넓은 교양을 지녔으며,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서유럽으로 이입(移入)되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라틴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의도에서도 분명하듯이, 당시 가장 심하게 논란되었던 그리스철학과 그리스도교 관계의 문제에서, 전자의 특징인 이성적 탐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즉, 신학과 철학 사이에 명백한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철학이 지니는 자율적인 가치를 분명히 하였다.
이성(理性)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면서도 이성의 한계를 깨달았던 그는 철학 분야에서는 이성으로 탐구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즐겨 자연을 택했다. 이를테면,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광물학 ·연금술 ·의학 등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으며, 그의 사고방식에는 경험에서 우러난 귀납적인 특징이 명백하게 보인다. 쾰른에서 가르치던 때의 제자 중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는데, 그는 스승이 마련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Albertus Magnus] (두산백과) 

 

 당시 유럽은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고 있었다.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말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시대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보여준다. 신앙은 모든 논리적인 사고 위에 있었다. 신과 세계에 대해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따져 묻는 일은 신앙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지곤 했다. 나아가 일상의 세계는 죄악으로 가득 차 보잘것없으며, 진정한 세상은 하늘나라이고 오직 정신적인 것만이 가치 있게 여겨졌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경험도 정신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나아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탐구로도 신과 세계를 바로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이단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럼에도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도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성과 신앙은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를 보완한다. 신이 우리에게 준 이성을 최대한 발휘한다면 믿음이 더욱 강해져 구원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르투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강한 감명을 받았다.

 

 알베르투스가 속해 있던 도미니코 수도회와의 만남도 아퀴나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탁발 수도회로 학문적 수련을 바탕으로 청빈과 고행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퍼트리려 했다. 1244년, 스무 살의 토마스는 마침내 도미니코 수도회에 평생을 바치리라 결심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토마스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그의 부모가 바랐던 권력과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가난하거나 몰락한 가문 사람들이나 입회하던 곳이었다. 이런 단체에 훌륭한 귀족 집안의 아들이 가입한다는 사실은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가족들은 토마스를 납치하여 성에 가두어 버리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쓰게 된다. 

 감금 기간은 1년 넘게 계속되었지만 토마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를 설득하려고 초강수를 썼는데, 젊은 여자를 토마스 혼자 있는 방에 밀어 넣은 사건은 유명하다. 스무 살의 나이에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이러한 방법도 토마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탁발 수도회 :: 청빈과 엄격한 규율을 신앙이념으로 삼아 13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널리 유행한 수도회. 탁발수도회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1210년 무렵 프란체스코가 창설한 프란체스크 수도회요, 다른 하나는 1216년 도미니쿠스가 창설한 도미니크 수도회이다.
특히 '탁발(托鉢)'이란 개념은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한 수도생활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이 두 사람이 죽은 후 유럽 전역과 아시아로 급속하게 전파되어 13세기에 이미 서유럽 각지에 수도회가 설립되고, 수사(修士)의 수도 수만 명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을 이어받아 수도사들 자신이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탁발에 의존하였으나, 수도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동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게 되자 갈수록 탁발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후 탁발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과 화해를 거듭하면서 정주적(定住的)·관상적(觀想的) 생활을 버리고 탁발 행각에 나섬으로써, 설립 당시의 기본 이념은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시민 속에 파고들어가 시민과 더불어 일체가 되려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13세기 중엽, 파리대학교에서 수도사들의 진출과 그들이 누리는 특권에 반발해 생타무르의 A.기욤 등이 반대운동을 일으키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이밖에 카르멜 수도회, 삼위일체 수도회, 튜튼 기사단, 하복회 등이 대표적인 탁발수도회로 이름을 떨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탁발수도회 [Ordines mendicantium, 托鉢修道會] (두산백과)  

 

 토마스는 자신의 높은 학식을 감추는 겸손한 마음을 지녔다. 파리 대학 시절에는 각 종단 간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지내야 했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에는 교황과 로마 황제가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활동해야 했다. 토마스는 현실 상황에 관심을 보이거나 직접적으로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그 정도로 항상 중용의 태도를 지켰다.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국가는 인간에게 자연스럽다. 국가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얻기 위한 기준을 마련해 준다. 그런데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이란 신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신이 세상에 심어 놓은 자연법을 깨닫고, 이에 따라 선을 좇고 악을 피하는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자연법에 따라 사람들을 다스리고 행복으로 이끌 때 사회의 공동선을 이룰 수 있다. 

 반면, 교회는 국가가 이루려는 공동선보다 더 소중한, 신에게로 나아가는 초자연적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종교적 구원이나 신에 관한 문제에서는 국가는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

 

 토마스의 글씨체는 ‘판독 불가능’이라고 불릴 정도의 악필로 유명하다. 책을 쓰는 작업은 그가 내용을 불러 주면 몇 명의 수사들이 받아 적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영원히 계속될 듯했던 그의 집필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미사를 드리던 도중, 그는 이상한 변화를 느꼈다. 신을 깨닫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것이다. 그 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저술할 것을 부탁했는데도 “나는 못해, 나는 못해.”라는 말을 되뇌며 완전히 붓을 꺾어 버렸다. ‘내가 보고 내게 계시된 내용에 비하면 내가 그동안 쓴 것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게 이유였다.

 

 공의회 :: 전세계의 가톨릭 교구 지도자나 그들의 위임자 및 신학자들이 모여 합법적으로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를 의논 정의 결정하는 회의.
이러한 공의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권위 있는 의회집단으로, 그 기원은 초대교회의 사도(使徒)들이 공식적인 사도회의를 가졌던 데서 비롯된다. 초대 그리스도 교회가 형성된 후 교회는 외부로부터의 종교 혼합주의적인 날조된 신앙의 침투를 방어해야 했으며, 내부로부터는 여러 이단설과 분열과 오류를 제거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2세기부터 사도성전(使徒聖典) 원리의 정확한 해석과 성서 정전(正典)의 확립을 위해 주교들의 공동심의를 통하여 이를 다루었다.
325년 로마 전제국의 주교들이 모인 니케아공의회는 최초의 공적인 공의회라고 볼 수 있다. 그후 1564년 교황 피우스 비오 4세 때에 열린 트리엔트공의회는 교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룰 만큼 확대되었다. 당시의 공의회는 교회재판소의 기능과, 신자들의 결혼문제 등을 다루고 각 교구에 대한 주교들의 보고도 첨가되었다.
현재의 공의회는 재속사제단(在俗司祭團)의 원칙에 대한 자문을 하고 있으며, 세속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회의 구체적인 전례(典禮)나 단식·극기·본당 활동·신심단체(信心團體) 등에 관한 교회적 개념의 문제를 결정·지도·감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토의 검토된 율령(律令)은 반드시 교황의 확인과 인가가 있어야 발표 시행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의회 [Councils, 公議會] (두산백과)

 

 토마스의 가장 큰 기적은 맹목으로 흐르기 쉬운 신앙에 대해 이성적 사유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10.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보존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값싼 도덕심과 동정 따위는 때로 던져 버리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단테 ::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예언자, 신앙인으로서,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 《신곡》을 남겼다.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였다. 주요작품은《신생》,《농경시》,《향연》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리기에리 단테 [Alighieri Dante] (두산백과)

 

 메디치 가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명문가로 두 차례의 짧은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약 300년간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방을 지배했다. 4명의 교황을 배출했고, 유럽의 여러 왕가와 혼인을 맺었다.

 

 사보나롤라 ::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자 종교개혁가이다. 민주정치와 신재정치(神裁政治)를 혼합한 헌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 했으나 교회 내부개혁에 과격한 방법을 취함으로써 크게 반감을 샀다.
북이탈리아 페라라 출생.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하고, 1491년 피렌체의 성마르코수도원장이 되어, 교회혁신을 위한 설교와 예언자적 언사로써 신도들을 지도하여, 시민의 정신적 지도자와 같은 지위에 올랐다. ‘하느님의 노여움’이라고 그가 예언한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신벌(神罰)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프랑스인들은 이와 결탁하여 민주정치와 신재정치(神裁政治)를 혼합한 헌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고 하였다.
교회 내부개혁에는 많은 사람이 동조하였으나, 1497년의 사육제(謝肉祭)에서는 시민의 사치품과 이교도적 미술품 및 서적을 불태운 이른바 ‘허영의 소각’을 비롯한 과격한 방법을 취함으로써 크게 반감을 샀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반대세력이 우세해지고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의 불화, 프란체스코회와의 대립 등으로 지지 기반을 잃어 다른 2명의 도미니크회 성직자와 함께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주요 저서에 《십자가의 승리 Triumphus crucis, ‘Compendium revelationum’》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두산백과)

 

 인간이란 ‘두려움을 주는 자보다 사랑을 주는 자에게 해를 끼치기를 덜 주저하는 사악한 존재다. 정치는 이 같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강제 장치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사람들은 마키아벨리가 눈을 뜨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서양의 전기를 읽어 보면, 눈을 뜨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로 생애가 시작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보통 이런 일화는 소크라테스나 볼테르처럼 세상의 본질을 냉철하게 꿰뚫어 본 위인들에게 붙곤 한다. 

 1498년,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제2 서기관으로 임명된다. 피렌체는 내세울 만한 영토도 군사력도 없었다. 그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외교술이라는 잔머리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절 프랑스의 고위 관리가 “피렌체인들은 전쟁을 몰라.”라고 했더니, 마키아벨리가 “프랑스인들은 정치를 모릅니다.”라고 맞받아쳤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확실히 베니스나 피렌체같은 상업 도시국가들은 정치ㆍ외교적인 잔머리 쓰는 데는 천재적이었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 현실에서 잔머리는 한계가 있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일반적으로 군대를 갖기보다 용병을 쓰곤 했다. 인구가 적은데다가, 군대를 만들면 그만큼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 국가 수입원인 상공업에 타격을 받는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용병이 잘 싸워 준 것도 아니다.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로서는 목숨 걸고 전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편도 용병, 적도 용병이다 보니 수만 명이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도, 정작 전사자는 말에서 실수로 떨어진 한둘에 그치는 예술 전투가 흔했다.

 1500년, 마키아벨리가 속한 군사 위원회는 피사를 공격하기로 한다. 피렌체는 내륙의 상업 도시라 경제활동을 위해서는 항구가 꼭 필요했다. 얼마 전 피렌체에서 독립해 나간 항구 도시 피사를 되찾는 일은 나라의 흥망을 걸 만큼 절실했다. 이 전쟁에서도 용병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들 때문에 피렌체는 큰 낭패를 보았다. 피사의 성벽을 무너뜨리고도 시가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철수해 버린 것이다. 단순히 돈 때문에 싸우는 그들로서는 위험 부담이 큰 시가전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결국 피렌체는 용병을 댄 프랑스 왕에게 돈만 날린 골이 되고 말았다. 힘이 없었던 피렌체는 사기를 당하고도 프랑스에 감히 항의할 엄두도 못 냈다. 마키아벨리가 국민 군대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그의 ‘국민 군대 창설안‘이 실현된 때는 이로부터도 6년이 지난 1506년이었다. 그만큼 피렌체 지도층은 우유부단했고 자신감이 없었다. 어찌되었건 1509년, 농민군이 주축이 된 피렌체 군은 숙원 사업이었던 피사 입성에 성공한다.

 

 1502년,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만난다. 무섭게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20대 후반의 젊은이 보르자는 피렌체에 큰 위협이었다. 그의 세력을 무마하려고 파견된 마키아벨리는 그에게서 약육강식인 현실에 맞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발견한다. 뒷날 보르자는 마키아벨리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군주론》의 모델이 된다.

 보르자는 냉혹한 인간이기도 했다. 화해의 모임을 갖는다는 핑계로 반란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뒤 몰살시켰고, 가장 아끼는 부하에게 누명을 씌워 죽여서는 광장에 전시해 국민들의 동요를 가라앉히기도 했다. 끔찍한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그에게, 마키아벨리는 혐오감을 느끼기는커녕 탄성을 지른다.

 

 체사레 보르자 :: 이탈리아의 정치가 추기경(樞機卿).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태어나 문예 부흥기의 정치적 분쟁 중에 정치적 재간을 드러내고 아버지를 도와 중부 이탈리아를 경략, 교황령을 확장하고 1501년 로마니아공이 되었다. 그 뒤 중부 이탈리아의 제 도시, 제 지방을 정벌하였다.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즉위하자 그와 충돌, 체포되었으나 도망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잔인, 책략에 능하여,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전제 군주라고 추칭(推稱)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르자 [Cesare Borgia]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통치자가 최고의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면 도덕이 항상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군주가 국가를 지키려 한다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진실과 자비, 인간애와 종교에 반하여 행동할 필요가 있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모든 일을 이성적인 대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분명 폭력은 짐승에게나 어울릴 수단이지만, 군주는 때때로 짐승이 되어야 한다. 곧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교함을 갖추어야 한다. 한 번의 단호한 폭력으로 더 많은 폭력과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 군주는 당연히 짐승의 수단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군주론》의 핵심이다. 숱한 생명이 걸린 군주의 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가 아니라 좋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1512년, 프랑스 군대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끄는 신성 동맹의 군대에 밀려 이탈리아에서 철수한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피렌체 공화정은 힘을 잃고 교황의 지원을 받는 메디치 가가 다시 복귀한다. 마키아벨리는 옛 정권에 충성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한 뒤 추방된다. 그 이듬해 피렌체 출신의 교황 레오10세가 즉위하자 그는 특별 사면되지만 공직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로마시론》, 《정략론》 등을 살펴보면 마키아벨리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공화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고대 로마를 이상적인 국가로 본다. 그는 지배자가 존경 받고 명예와 영광을 차지하며 민중의 삶은 사랑과 신뢰로 가득 찬 세상을 꿈꿨다. 이런 세상을 위해서는 법의 지배가 필수적이고, 권력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라도 시민들 간의 갈등과 균형이 필요하다. 《군주론》에서 엿보이는 잔인한 군주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국가 수호자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그도 법이 지배하는 민주적인 국가를 이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율리우스 2세 :: 르네상스기의 대표적인 교황(1503∼1513)으로 교회국가의 재건과 확대에 노력하였다. 정치 외에 학문 ·예술의 진흥 ·보호에도 힘써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델라 로베르가(家) 출신으로 원 이름은 줄리아노 델라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로, 아비뇽의 대주교 ·추기경 등을 거쳐, 비오 3세의 짧은 재임 뒤에 교황이 되어 교회국가의 재건과 확대에 노력하였다. 베네치아로부터 영토를 빼앗기 위하여 1508년 프랑스 ·독일과 캉브레동맹을 맺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세력이 증대하자 베네치아 ·에스파냐 등과 신성동맹(神聖同盟)을 맺었다.
이 동맹이 성공하여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세력은 쇠퇴하고 그 뒤로는 에스파냐의 세력이 증대되었다. 그는 정치 외에 학문 ·예술의 진흥 ·보호에도 힘써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특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보호하고, 성베드로대성당을 재건한 것은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율리오 2세 (두산백과) 

 

 신성 동맹 ::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프랑스의 위협에서 이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교황의 후원 아래 조직된 두 차례에 걸친 유럽 동맹.

 

 신성 동맹 :: 1815년 9월 26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파리에서 체결한 동맹.
국제평화와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제안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이다. 알렉산드르 1세는 먼저 프로이센 왕과 오스트리아 황제를 설득하여 조인에 참가시키고 터키를 제외한 유럽의 전(全)군주에게 가맹장을 보냈다.
이 동맹의 골자는 ‘각국의 군주가 성서 말씀을 바탕으로 서로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서로 돕고, 자기 나라의 신민(臣民)에 대해서는 가부(家父)와 같이 동포애의 정신에 따라 이를 지도하며, 신앙·평화 및 정의를 옹호한다’는 내용의 지극히 관념적·비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알렉산드르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터키 황제와 로마 교황, 그리고 영국 왕 이외의 모든 유럽의 군주가 이 동맹에 참가했다. 영국의 섭정(뒤에 조지 4세)은 그 취지에 찬성하지만 영국의 국법이 대신의 부서(副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유로 가맹하지 않았고 로마 교황은 가톨릭과 합치하지 않는 신교(新敎) 제파(諸派)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가맹을 거절했다. 터키 황제는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참가를 요청받지 않았다. 이렇게 이루어진 신성동맹은 제창자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군주들은 그 실효성을 의심하였다. 메테르니히는 빈 체제 유지를 위해 4국동맹(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영국 사이의 동맹)과 함께 신성동맹을 이용하여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이 동맹은 먼로 선언과 중남미 여러 나라의 독립으로 타격을 받았으며, 그리스 독립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 대립으로 1825년 전유럽적 체제로서의 동맹은 와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성동맹 [Heilige Allianz, 神聖同盟] (두산백과)

 

 1520년, 메디치 가는 마침내 쉰한 살의 마키아벨리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낸다. 그는 몇 가지 외교적인 임무를 맡기도 했고 점차 커져 가는 전쟁의 위협에 대비한 성벽 보강 작업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1527년, 메디치 가의 후원자였던 교황이 몰락하고 스페인 군대가 전주하자 피렌체는 다시 공화제로 복귀한다. 마키아벨리는 제2 서기관으로 복귀하기를 원했지만, 이번에는 메디치 가의 가신으로 간주되어 선거에서 큰 점수 차로 떨어지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반 마키아벨리론》을 써서 정직과 도덕이 정치의 제1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역사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어느 마키아벨리주의자보다도 기만과 술수에 능했고 폭력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프리드리히 대왕 :: 프로이센의 국왕(재위 1740~1786).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여 오스트리아의 제위상속(帝位相續)을 둘러싼 분쟁에 편승,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의 관계가 악화되자 영국 ·프랑스 간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제군주로 평가된다.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이라 불린다. 소년시절에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아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여 독일문화를 경멸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문학과 플루트 연주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그를 엄격한 무인(武人)으로 키우려는 부왕(父王)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노여움을 샀으며, 18세 때 어머니의 친정인 영국 궁정으로 탈주하려고 하다가 잡혀 감금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형집행을 면한 일도 있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결혼하였으나, 이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평생토록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이 무렵에 라인스베르크별궁(別宮)에서 독서와 음악으로 울분을 달랬고, 프랑스의 볼테르와 서신 왕래를 하며, 그의 지도하에 《반(反)마키아벨리론(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준열한 현실 정치가, 엄격한 군인의 일면을 발휘하여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풍부한 국고와 방대한 군대를 활용하여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오스트리아의 제위상속(帝位相續)을 둘러싼 분쟁에 편승하여 슐레지엔 전쟁(제1차, 제2차)을 일으켜서 경제적으로 요지인 슐레지엔을 병합하고 그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였다.
그 무렵 베를린에 학사원(學士院)을 부흥시키고,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을 조영하여 내외의 학자 ·문인들을 초청, 학문 ·예술을 토론하였다. 볼테르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대왕과 충돌하고 3년 후에 떠나가 버렸다.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의 탈환을 꾀하여 숙적인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러시아 여제 엘리자베타도 대왕을 미워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은 고립상태에 빠졌다. 때마침 영국 ·프랑스 간에 식민지 전쟁이 일어나자 대왕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기선을 잡아 작센에 군대를 침공시킴으로써 7년전쟁(1756∼1763)이 일어났다.
대왕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의 3대 강국을 상대로 잘 싸웠으나 군사력의 부족으로 전황이 불리해졌고, 영국의 원조마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몹시 궁지에 몰렸으나, 1762년 러시아의 앨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는 표트르 3세가 즉위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자,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 후 폴란드분할(1772)에 참가하고, 바바리아 계승전쟁(1778)에 참전한 외에는 대외 평화정책을 지키면서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대왕은 ‘군주는 국가 제1의 머슴’이라는 신조하에 국민의 행복 증진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그 정치가 전제정치였음은 그 시대의 다른 군주들의 경우와 다름이 없었으며, 계몽전제군주의 한 전형(典型)이었다. 다만, 종교면에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두산백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나라일수록 오히려 통치는 더 불안하고 위태롭다는 사실이다. 페르시아 궁정에서는 경비를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왕에 대한 암살이 끊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왕을 죽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11. 지식은 힘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흔히 서양의 17세기는 천재들의 세기라 불린다. 이 천재들이 튼튼하게 자라는 데 걸맞은 사상적 토양과 환경을 만든 학자들이 있었다. 이성의 힘을 세상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고, 경험에 바탕을 둔 학문 탐구 전통을 세웠던 근대 철학자들이다. 미신과 신앙을 과학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적 풍토가 계속되었다면, 17세기 천재들의 학문 업적은 결코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터다.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은 근대 철학의 선두에 서서 과학 시대를 이끈 사람이다. 그는 지식이란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새로운 학문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성경》의 권위와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 분위기를 뚫고 근대의 파릇한 새싹들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사상의 토양을 일구었던 셈이다.

 적을 이기려면 먼저 상대를 잘 알아야 하는 법, 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만들려면 먼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잘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는 공허한 사색보다는 관찰과 실험에 바탕을 두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 시기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들을 흔히 ‘영국 경험론자’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 추구와 실생활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 가운데 철학 하는 것을 생계로 삼은 직업 철학자는 없었다. 외교관, 정치인, 관료 등 다른 직업 활동을 하면서 철학을 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 잉글랜드의 여왕(재위 1558∼1603)으로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국교의 확립을 꾀하고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으며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빈민구제법에 의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를 방지하였고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두산백과)

 

 스콜라 철학 :: 교부철학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논증하고 이해하려 했던 중세 철학 흐름이다. 중세 사람들의 사유와 삶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의 사상 발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을 통하여 입증하고 이해하려 했던 중세 철학이다. 철학을 신학을 위하여 사용했다는 점에서 교부철학까지 포함한 전반적인 기독교 철학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나 구체적인 내용과 시기에서 교부철학과 차이가 있다. 신학을 뛰어넘어 중세 지식인들의 사유와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근대 철학의 발달에 밑바탕이 되었다. 신앙과 철학을 포함하여 중세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현실문제와도 깊게 관여했기 때문에 ‘스콜라 주의(Scholasticism)’라는 넓은 의미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콜라철학 [Scholasticism, ─哲學] (두산백과)

 

 밀턴 :: 《실낙원(失樂園)》의 저자로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 평가되는 영국 시인. 최초로 영어로 쓴 걸작시 《그리스도 강탄의 아침에》는 종교적 주제에 있어서나 기교적 원숙에 있어서 성년에 도달하였고 또 그의 장래의 방향을 선언한 작품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존 밀턴 [John Milton] (두산백과)

 

 베이컨은 과시와 사치를 즐기는, 출세욕과 권력욕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베이컨이 바라던 관료로서의 성공은 제임스 1세가 즉위한 뒤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왕과 의회 사이의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그가 왕의 편에 섬으로써 확실하게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독신이라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왕이 죽은 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 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었다. 그는 가톨릭을 탄압했으며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세력을 키워 온 칼뱅파 청교도를 박해하였다. 이대부터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해졌다.

 

 칼뱅파 ::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칼뱅(Jean Calvin)파를 말한다. 어원적으로는 맹약자(특히 스위스연방의 맹약(盟約))를 의미하는 독일어 Eidgenosse의 스위스계 프랑스어 Huguenot에서 유래하며 카톨릭 측에서의 칼뱅파에 대한 명칭으로서 1560년 이후 사용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루터적 복음주의나 인문주의적인 성서주의 등에 비해 프랑스의 개혁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칼뱅이며 1559년 파리에서 개최된 개혁파의 제1 전국교회총회에서 채택된 '프랑스 신조'는 칼뱅의 교리를 가장 잘 요약한 것으로 평가된다. 1562년 시작된 카톨릭 측과의 종교전쟁(위그노 전쟁)은 내정상의 항쟁과 신구 양파의 신앙상의 대립이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전유럽 규모의 카톨릭대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의 대립항쟁의 양상을 띠며 위그노에 대한 '성(聖) 바르트로마이의 학살'(1572)에서 정점에 달한다. 전란(戰亂)은 《낭트의 왕령》(1598)의 종교적 관용책에 의해 일단 종결되어 위그노는 신교의 자유를 얻지만 그 후에도 루이 14세에 의한 이 왕령폐지에 의한 다수의 국외 망명 등으로 그 세력이 약해져 소수파로서 프랑스 혁명까지 치열한 상황을 견디어 내었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위그노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개혁파라고 한다. 그 세력은 약 40만 명, 프로테스탄트 전체에서도 80만 명 정도의 소수파에 그치지만 국가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그노 [Huguenot] (21세기 정치학대사전, 2010.1.5., 한국사전연구사)

 

 청교도 :: 16~17세기 영국 및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칼뱅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일컫는 말.
‘퓨리턴’이라고도 한다. 1559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고 국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로마가톨릭적인 제도 ·의식(儀式)의 일체를 배척하며, 칼뱅주의에 투철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엄격한 도덕, 주일(主日:일요일)의 신성화 엄수, 향락의 제한을 주창하였다.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에 비국교도로서 심한 박해를 받고 네덜란드와 기타 지역으로 피해 갔다. 그 중에서도 신대륙의 플리머스에 식민지를 개척한 메이플라워호(號)의 ‘필그림 파더스’는 유명하다. 청교도는 점차로 절대왕정에 대한 정치적 요구와 결부하여 의회에서 유력해지고,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교도 내부에서도 크게 장로파(長老派)와 독립파(獨立派)로 분열하였다. 청교도 문학으로는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이 대표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교도 [Puritan, 淸敎徒] (두산백과)

 

 제임스 1세 :: 스튜어트 왕가 출신의 최초의 영국 왕으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일을 추구하여 스스로를 그레이트브리튼의 왕이라고 칭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기를 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국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름은 찰스 제임스 스튜어트(Charles James Stuart)이며,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1세(Mary I of Scotland)와 단리 경(Lord Darnley) 헨리 스튜어트(Henry Stuart)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리 1세가 영주들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1567년 7월 24일 돌이 갓 지난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James VI)로 불렸다.
그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기초해 왕은 의회의 조언이나 승인이 없이 자유롭게 법률이나 칙령을 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로 가서 그해 7월 25일 왕위에 올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공동 왕이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고 불렸는데, 스튜어트 왕가에서는 처음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앤(Anne) 여왕 때인 1707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가 될 때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공통의 왕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의회와 정부를 가지고 있어 ‘왕관연합(Union of the Crowns)’이라고도 불리는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일을 추진했다. 스스로를 그레이트브리튼의 왕(King of Great Britain)이라고 불렀으며, 유나이트(the Unite)라는 공동화폐를 만들어 통용시켰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국기인 성 조지의 십자가(St. George's Cross)와 스코틀랜드의 국기인 성 앤드류의 십자가(St. Andrew's Cross)를 합하여 유니언 잭(Union Jack)이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영국의 국기를 만들어 통일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회의 완강한 반대에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편, 그는 1604년 국교회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성경을 영어로 만들라고 지시하여, 1611년 오늘날 킹제임스 번역본(King James Version, KJV)이라고 불리는 <흠정역 성서(欽定譯聖書)>를 간행했다. <흠정역 성서>는 19세기 말까지 영국 국교회에서 사용된 유일한 공식 영어 성경이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의회와는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다. 그는 의회의 특권과 관행을 무시했고, 사사건건 의회와 대립했다. 1622년 화이트홀 궁전(Palace of Whitehall)을 확장하는 등 재정 지출을 늘려 의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가톨릭과 청교도를 억압하여 국교회로의 개종을 강요하였다. 그는 1604년 국교회와 청교도 등의 종교계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가톨릭과 청교도의 양극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그는 가톨릭과 청교도의 반감을 사서,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 Guido Fawkes라고도 함) 등의 가톨릭 세력이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적대적 관계를 가져왔던 에스파냐와 화해하면서 유럽에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는 적국의 배를 공격하여 화물을 약탈하는 사략선(私掠船, privateer)의 활동을 금지시켰고, 반(反)-에스파냐 동맹 관계에 있던 오스만제국과는 단교(斷交)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방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의 거센 반발로 국가가 부담하던 대사관 경비 등을 상인들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제국과의 국교는 유지하였다.
아메리카대륙에 대한 개척이 시작된 것도 그의 재위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1607년 5월 14일 북아메리카에 영국인의 정착지가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이곳은 그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Jamestown)이라고 불렸다. 1620년에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불리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집단 이주하기도 했다.
제임스 1세는 1625년 3월 27일 하트퍼드셔(Hertfordshire)의 시어볼즈 별궁(Theobalds House)에서 병사했으며, 그의 둘째 아들인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임스 1세 [James I] (두산백과)

 

 찰스 1세 :: 스튜어트왕조의 영국 왕(재위 1625∼1649). 악정(惡政)으로 의회에서 권리청원이 제출되어 비난당하자 의회를 해산하고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반란처리 비용을 위해 의회를 소집하였다가 의회와 정면대립, 청교도 혁명으로 확대되어 결국 처형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찰스 1세 [Charles I] (두산백과)

 

 그는 평생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모든 학문은 실생활에 유용한 것이어야 하며, 이럴 때에만 지식은 곧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목적은 결국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꿰뚫어 알고 지배할 수 있는 거대한 학문 체계를 새롭게 구상하려 했다. 이 엄청난 시도는 《신기관(新機關)》으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기관(organon)’이란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를 말하는데, 스콜라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논리학을 뜻한다. 당시의 논리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뜻했다. 학자들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성경》과 과거의 권위 있는 이론에서부터 논리학을 통해 연역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베이컨은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 연역법이 아닌 귀납법을 썼다. 그는 일상적인 경험에 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지식과 법칙을 이끌어 내려 했다. 경험을 바탕으로 올바른 지식을 만들어 내는 귀납법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연역법 :: 이미 증명된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명제를 전제로 하여 새로운 명제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연역(演繹, deduction)이라하며, 이러한 연역적 추리의 방법과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을 연역법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역법 [deductive method, 演繹法] (두산백과)

 

 귀납법 :: 개별적인 특수한 사실이나 원리로부터 그러한 사례들이 포함되는 좀 더 확장된 일반적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을 귀납(歸納, induction)이라 하며, 이러한 귀납적 추리의 방법과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을 귀납법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귀납법 [inductive method, 歸納法] (두산백과)

 

 베이컨은 편견을 뿌리 뽑을 목적에서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는 유명한 ‘4대 우상론’을 내세웠다.

 종족의 우상이란,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는 편견을 말한다. 우리 정신은 울퉁불퉁한 거울과 같아서, 자연현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항상 인간과 관련 지어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번개가 치는 이유를 우리가 벼락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라 보는 오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편견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우리 속담은 이 우상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 준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에서 생기는 잘못된 생각이다. 증권시장에서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입 소문만으로도 시세가 올랐다가 내렸다 한다. 마찬가지로, 행운의 여신, 봉황 같은 말들도 실체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시장의 우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기존 이론이나 종교의 권위에 기대는 오류를 말한다. 잘 차려진 무대 위에서는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보이듯, 그릇된 많은 학설들이 기득권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내세우며 우리의 판단을 어지럽힌다.

 

 베이컨에게 학문의 적은 없었지만, 정치세계에서의 적은 너무나 많았다. 그의 성공은 의회와 왕이 갈등하는 상황에서 왕을 강력하게 옹호했기에 가능했다. 의회가 그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적들은 마침내 그를 제거할 꼬리를 잡았다. 대법관 베이컨이 재판 과정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당시에는 재판관이 피고에게 돈을 받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그는 의회의 고소에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그는 ‘나는 지난 50년 동안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었지만, (자신을 몰아내는) 이 판결은 최근 200년 동안 의회가 내린 가장 공정한 판결이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처벌을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관직에서 쫓겨나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를 찍어 내기 위한 정치적 술수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정치에 더 이상 뜻이 없음이 확인되자 곧 풀려났을 뿐더러, 베이컨에 대한 재판이 다시 열리지도 않았다. 그 뒤 그는 런던 외곽에 은둔하며 학문 탐구에만 전념했다.

 

 그가 철학에서 세운 가장 큰 업적은 《성격》의 권위와 미신에 주눅 들어 있던 인간 이성에 자신감을 회복시켜 준 일이다. 그가 강조한 경험에 기초한 이성적 사고 덕택에, 사람들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베이컨의 4대 우상론

 ‘종족의 우상’은 인간성 자체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의 감각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주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터다. 이는 물론 잘못된 주장이다. 인간의 모든 지각은 감각이든 정신이든 우주가 아닌 인간 자신을 준거로 삼기 쉽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말이다. 매끄럽지 못한 거울은 사물을 비틀리게 비춘다. 인간의 지성도 그렇다.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들이 가진 우상이다. 사람들 하나하나는 자연의 빛을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는 동굴들을 제 나름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마다의 개성이거나, 교육이나 다른 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거나, 읽은 책이나 존경하여 떠받드는 사람의 권위, 첫인상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 정신은 각자의 성격에 따라 변덕이 심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은 넓은 세계가 아닌, 상당히 좁은 세계에서 지식을 구한다‘라고 했다. 이는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또한,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만남에서 생기는 우상이 있다. 이는 의사소통과 만남에서 생기므로 ‘시장의 우상’이라 할 만하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을 나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을 따라간다. 잘못 만들어진 말은 우리의 생각을 심하게 방해한다. 학자들은 자신을 지키려고 새로운 정의나 설명을 내놓곤 하지만, 상황을 더 낫게 하지는 못한다. 언어는 여전히 생각을 어지럽히고, 모든 것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헛헛한 논쟁이나 하며 수많은 오류에 부딪힌다.

 마지막으로, 여러 학문과 잘못된 증명 때문에 생기는 우상이 있다. 이를 나는 ‘극장의 우상’ 이라고 부른다. 철학 이론이란 무대의 세계를 꾸리는 각본과 같다. 각본은 수없이 만들어져 무대에 오른다. 이때 오류의 종류는 아주 다르지만 그 원인은 대부분 같다.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고리타분한 관습과 태만이 일상화된 다른 분야들도 마찬가지다.

- 프란시스 베이컨, 《신기관》

 

 

  

12. 평화를 사랑한 야수 – 토머스 홉스

 무적함대 ::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편성한 대함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뒤로 에스파냐는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펠리페 2세의 후반기에는 해외 무역에서 영국이 대두하고, 국내의 정치와 경제도 쇠퇴하였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전함 127척, 수병 8000명 등을 거느린 대함대를 만들어 영국을 공격하였는데, 결국 패하여 해상 무역권을 영국에 넘겨 주었다.

 

 에우리피데스 ::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는 신들을 한층 인간적인 빛 아래서 묘사했고, 특히 사랑의 정열을 묘사함으로써 비극을 보편화하고 또한 세속화했다. 그의 관심은 인간 대 인간의 갈등이었고, 고뇌하는 인간을 묘사하지만 교훈과 위안을 시도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을 취급하는 점은 심리적으로, 3명의 비극시인 중 가장 근대적인 정신의 소유자로 평가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극의 결말을 짓기 위하여 종종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고대극에서 극의 종결을 맺음에 있어 '기계 장치의 신'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극의 내적 필연성에 말미암지 않은 의외의 결과에 대해 일컫는 말)에 의존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92편의 작품을 썼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메데이아(Mēdeia)〉(431 B.C. 상연),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Iphigeneia he en Taurois)〉(413경 B.C. 상연) 등 18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우리피데스 [Euripidēs]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002.4.1., 가람기획)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같은 가난한 집안의 수재에게 문학적 자질과 우수한 외국어 실력은 출세 길을 여는 열쇠와 같았다. 이런 재능은 고급 지식의 최대 소비자였던 귀족들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귀하신 몸으로 태어났을 뿐, 뛰어난 능력까지 타고나지는 않았다. 귀족들 대부분은 부족한 자신들을 대신해 품위 있게 편지를 써주고 외국의 명사들과 만날 대 통역을 해 줄 전문 비서가 절실했다.

 스무 살 나이에 입사한 데번셔 백작 가문은 홉스에게는 평생직장이 되었다. 그는 장장 70여 년 동안 무려 4대가 바뀐 이 집안의 주인을 모신 충실한 비서이자 가정교사였다. 이런 비서직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주인의 일과를 하나하나 챙기고 보조해야 했으므로 결혼이 사실상 어려웠다. 홉스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백작이 다른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찬가지로 상당한 지식인이었을 다른 귀족의 비서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사회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대여행(Grand tour)’이라 불리는 1610년의 첫 여행은 홉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유럽은 종교 전쟁의 뒤끝이라 매우 혼란하고 어지러웠다. 구교와 신교 사이의 오랜 다툼은 유럽사회를 지탱하던 도덕, 특히 기독교 윤리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경건한 신앙을 강조하며 올바른 태도와 생활을 외치던 구교와 신교는, 숱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참담한 현실은 종교에서 말하는 성인군자 같은 삶이 생활에서는 얼마나 불가능한 이야기인지를 보여 주었다.

 홉스는 국제 관계를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세계로 본다. 이런 시각을 갖게 된 데는 여행에서 얻은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을 터다. 세상에서 확실한 사실은 사람들이 제각각 갖고 있는 살아남으려는 절실한 욕구, 곧 ‘자기보존욕’ 뿐이다. 개인이 모인 국가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살아남으려는 욕심 외에 나머지는 모두 허구와 거짓이다. 이러한 ‘자기보존욕’은 이후에도 홉스 사상 전체를 꿰뚫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홉스는 한 치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확실하고도 엄밀한 수학 체계에 끌렸다. 그리하여 도덕 윤리도 수학처럼 정확한 연역을 통해 누구나 옳다고 인정하는 ‘윤리 과학(Ethical Science)’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지 궁리했다.

 

 종교 전쟁 :: 유럽에서 16, 17세기에 종교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전쟁으로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 전쟁, 30년 전쟁 등이 속한다.

 

 30년 전쟁 :: 1618∼1648년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 최대이자 최후의 종교전쟁으로 기간은 대체로 4기(期)로 구분되는데 전반의 2기는 종교적 색채가 짙고 후반의 2기는 정치적 색채가 짙다.
이를 통해 독일 제후국 내의 가톨릭·루터파·칼뱅파는 각각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30년전쟁 [ Thirty Years' War , 三十年戰爭 ] (두산백과)

 

 강력한 대영제국을 이룬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예전처럼 강력한 왕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왕당파와 의회 중심의 시민 계급이 권력을 쥐어야 한다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다. 홉스는 자신이 봉사하는 귀족 계급 편에 섰다. 당연히 그는 절대적인 왕의 통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홉스가 살던 시대에는 오랜 종교 전쟁으로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사람들이 《성경》보다 객관적인 관찰과 논리적 설명에 더 믿음을 갖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왕권신수설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논리가 아니었다. 왕과 의회의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갔다.

 1640년, 홉스는 통치자의 권리와 백성의 의무에 관한 논쟁으로 조국이 청교도 혁명으로 치닫고 있을 때 갑자기 프랑스로 망명해 버린다. 권력을 잡은 의회가 왕당파를 처벌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청교도 혁명 :: 1640∼1660년 영국에서 청교도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최초의 시민혁명.
영국의 절대주의는 튜더왕조 최후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 치세 중에 이미 청교도의 국교회 비판이나 의회에서의 절대주의 비판 등이 있었지만, 당시의 절대주의는 별다른 파탄을 보이지 않고 다음의 스튜어트왕조로 넘어갔다. 그런데 제1대 왕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서 영국의 의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의회 그 자체를 부정하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창하였다. 한편 국민측에서는 법률가 E.코크가 ‘법의 우월’을 주장함으로써, 왕은 법 위에 선다는 제임스 1세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의회는 양측의 충돌 장소로 되어 어수선하였다. 
다음 왕 찰스 1세는 절대주의를 한층 더 강화하여 의회의 승인도 없이 관세를 징수하고, 선박세를 부과하였으며, 헌금과 공채(公債)를 강제해서, 응하지 않는 자를 투옥하였다. 또한 병사를 민가에 무료 숙박시키고, 군법을 일반인에게까지 적용시켰다. 의회에서는 1628년 코크 등이 중심이 되어 인민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권리청원’을 기초하여 왕에게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29년 의회가 해산되고, 왕은 40년까지 11년간이나 의회 없는 정치를 하여야만 하였다. 왕은 측근에 W.로드 대주교와 Th.W.스트래퍼드백(伯)을 두고 성실재판소(星室裁判所)와 고등종무관(高等宗務官) 재판소 등을 이용하여 청교도를 탄압하고, 의회 없이 수입을 얻기 위하여 국왕의 대권을 남용하였다. 그런데 왕은 장로파가 우월한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려 함으로써 전쟁의 위기를 자초하고, 전비를 얻기 위하여 40년 소위 장기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교도혁명 [Puritan Revolution, 淸敎徒革命] (두산백과)

 

 올리버 크롬웰 :: 영국의 정치가. 귀족 출신. 엄격한 청교도의 가정 교육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운 뒤 케임브리지의 대표로 의회에 나가 정치 활동에 들어갔다. 1642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자 의회군에 소속되어 철기대(鐵騎隊)ㆍ신모범군을 편성, 1645년 국왕군을 격파. 1648년 내란이 재발하자 스코틀랜드 군 및 반대파를 진압하고, 1649년 찰스 1세를 사형시킨 뒤 공화제를 시행, 1651년 항해 조례(航海條例)를 발포하여 네덜란드 무역을 압박했으며, 에스파냐와 싸워 자메이카를 획득, 영국 해외 발전의 기초를 열어 주었다. 1653년 호국경(護國卿)이 되고, 신흥 시민 계급을 기초로 군사 독재를 강행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 1년 만에 왕정은 복고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크롬웰 [Oliver Cromwell]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홉스는 인간에 대한 깊은 분석에서 출발하여 당시의 사회 혼란을 잠재울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탄생한 책이 《리바이어던》이다.

 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나오는 ‘누구도 감히 맞설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수중 괴물’을 말한다. 이상적인 국가란 바로 이 괴물과 같아야 한다. 누구도 반항을 꿈꾸기조차 못할 만큼 국가는 무시무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대기 위해 홉스는 자연 상태를 설명한다. 자연 상태란 국가가 생기기 전의 인간 모습을 말한다.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홉스는 이러한 자기보존욕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즉 ‘자연권’이라 부른다. 그런데 살아남으려면 경쟁자들을 누를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결국,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서로서로 싸움을 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계속된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전하게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는 계약을 맺는다. 이것이 생존을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맺어진 최초의 법, 즉 ‘자연법’이다.

 그러나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고 한 계약이 반드시 지켜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계약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를 강제적으로 지키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 국가는 이때 등장한다. 계약을 어겼을 때 상대를 무자비하게 처벌하여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도록 하는 힘, 그것이 바로 ‘국가’다.

 국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항해서는 안 된다. 만약 국가가 무너진다면,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는 계약을 지키게 하는 힘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면 사회는 다시 생존을 위해 서로 끝없이 싸움을 거는 무시무시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강력한 국가가 주는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따라서 국가는 리바이어던 같은 괴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

 홉스의 생각은 왕권신수설을 대신해 왕의 권력을 지지하는 새로운 이론으로 환영받았다.

 

 1640년, 왕당파를 처벌한다는 의회의 으름장에 놀라 파리로 도망갔던 홉스는, 동료인 왕당파들이 자신을 몰아세우자 왕의 목을 자른 원수인 올리버 크롬웰에게로 피신했다. 그러다 1660년, 공화정이 무너지고 다시 영국이 왕이 통치하는 국가로 돌아가자 일흔두 살의 홉스는 귀국하는 찰스 2세를 궁정 문 앞에서 기다리며 환영했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평화를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따라서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기에 따르고 굴복하는 것이 백성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그럴까? 그냥 기회주의자 같은데.

 

 찰스 2세 :: 영국 스튜어트왕조의 제3대 왕(재위 1660∼1685). O.크롬웰이 사망하고 호민관 정치가 붕괴하자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실현하였다. 가톨릭 부활을 위한 전제정치를 펼쳤고 의회는 심사율 ·인신보호법을 제정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찰스 1세의 아들. 청교도혁명 중인 1646년에 국왕파의 패배로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1650년에 스코틀랜드의 반(反)공화국 반란에 호응하여 그곳으로 가서, 이듬해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대관하였으나, 공화국군에게 패배하여 다시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그 후 독일 ·네덜란드 등지를 전전하였다. O.크롬웰이 사망하고 1660년에 호민관(護民官) 정치가 붕괴하자, 멍크의 교섭을 받고 브레다선언을 발표한 뒤에 귀국하여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실현하였다.
1670년에는 가톨릭국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도버조약을 체결, 군사비를 담당하는 대가로 프로테스탄트국가인 네덜란드와의 개전을 약속하였으며, 1672년에는 신앙자유 선언을 발표하여 가톨릭의 부활을 꾀하였고, 또한 두 차례나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렀다(제2 ·3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
이와 같은 가톨릭적인 전제정치에 대하여 의회도 심사율(審査律, 1673) ·인신보호법(人身保護法)으로 대항하였고, 또한 1680년에는 가톨릭교도인 왕의 아우 요크 공작(후의 제임스 2세)을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왕위배제 법안을 상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의 만년의 4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의회와의 대립을 심화시킴으로써 명예혁명의 한 요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왕의 만년에는, 의회에 청원자당(請願者黨)과 기탄자당(忌憚者黨)의 두 당파가 생겨, 후에 이것이 각각 휘그당과 토리당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그의 치세에는 혁명기의 청교도에 대한 반동으로 상류사회에는 프랑스류의 화려한 풍조가 팽만하였던 점 등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찰스 2세 [Charles II] (두산백과)

 

 맥도날드 햄버거가 있는 나라끼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황금 아치 이론(The Golden Arche Theory, 맥도날드의 상징인 M 모양의 황금 아치)’이다. 현대사를 뒤적여 보면 과연 그렇다. 맥도날드가 있는 나라들끼리는 갈등은 있을지언정 전쟁가지 벌이는 일은 없다. 미국 코드에 잘 길들여진데다가 서로 의존하는 고리가 많기에 싸우면 손해가 더 큰 탓이다. ‘황금 아치 이론’은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펼치는 독창적인 견해다.

 

 

 

13. 이성이 중심이 된 세상을 열다 – 데카르트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자신을 소개할 때 관직이나 작위를 붙이는 대신 그냥 신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1604년, 라 플레슈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들어간 데카르트는 여러 가지 특혜와 함께 아침 11시까지 자고 싶은 만큼 자도 괜찮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상을 휩쓸다시피 했으니,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서 사색하는 습관이 그에게는 수업보다 도움이 되었던 셈이다. 그 뒤 늦게 일어나는 것은 데카르트의 습관으로 굳어졌고, 이 습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당시는 교회와 《성경》이 온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여서, 어떤 이론이 참인지 아닌지는 객관적인 사실과 일치하는 지보다 《성경》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니 다양한 독서를 통해 조금씩 싹트던 과학 정신에 물든 그에게 당시 학문은 부실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그의 까다로운 학문 기준을 만족시킨 분야는 수학뿐이었다.

 

 그는 엉뚱하게도 직업 군인의 길을 택했다. 물론 전쟁이 좋아서 군대에 간 것은 아니었다. 군대에서도 아침 11시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하니 성실한 군인도 아니었던 듯싶다. 그는 상관에게 얽매이지 않으려고 월급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어떤 직위도 맡지 않았다.

 그에게 군대란 세상을 배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데카르트는 군대를 좇아 보헤미아, 헝가리,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곳곳을 다니며 ‘세계라는 큰 책’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견문을 통해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그 어떤 이상한 관습과 사고방식에 물든 사람일지라도 똑같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은 그에게 새로운 학문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점점 발달하는 자연과학과 부패한 성직자의 모습은 무지한 민중을 서서히 깨우치고 있었다. 때마침 일어난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30년 전쟁은 더 이상 교회와 《성경》이 확실한 삶의 잣대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다툼을 멈추게 할 만큼 명료하고 확실한 삶의 기준이 있었다면 싸움으로 상대를 누르려는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터다. 이제 삶의 잣대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이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1628년, 서른두 살의 데카르트는 마침내 방랑을 접고 정착할 결심을 했다. 학자들은 건강이 좋지 않은 데카르트가 굳이 네덜란드를 택한 데에는 ‘학문의 자유’가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한다. 예나 지금이나 소수자들에게 관대한 네덜란드에서는 교회와 다른 주장을 내세운다는 이유로 종교 재판을 받거나 화형 당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21년 동안이나 은둔 생활을 했는데, 그의 철학 작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나왔다.

 

 《방법 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첫째, 분명하게 참인 것만 받아들일 것, 둘째, 문제를 다루기 쉽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검토할 것(분석), 셋째, 분석으로 밝혀진 단순한 진리에서 순서를 좇아 복잡한 것에 이를 것(종합), 넷째, 혹시 빠트린 점이 없는가를 검토할 것.

 모든 앎의 출발점이 될 확실한 지식을 발굴해 내고, 여기에서부터 세계에 대한 지식을 다시 구성하려 한 것이다.

 그러면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될 가장 확실한 지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그는 그 방법으로 ‘방법적 회의’를 전개한다. 의심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지식을 얻기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해 보아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이 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꿈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2+3=5‘가 거짓인데 악마가 참이라고 나를 속이고 있다 해도, 속고 있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이끌어 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성찰》에서 그는 이 확실한 명제에서 출발하여 신과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시금 구성한다. 신은 완전하다. 반면, 인간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것을 상상하고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완전한 신이 있다는 생각은 신에게서 나왔다. 따라서 신은 있다.

 이어 그는 세상의 다른 존재도 증명해 낸다. 완전한 신이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속이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몸이 있으며, 그런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과 ‘2+3=5’ 같은 지식은 참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그의 증명은 순전히 이성의 힘에 의존해 논리적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내가 존재한다’라는 필연적이면서도 절대 확실한 명제를 토대 삼아 다른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론 방법을 연역법이라 부른다)

 

 가생디 :: 프랑스의 물리학자ㆍ수학자ㆍ철학자. 샹테르시에 출생. 어릴 때부터 수재라는 이름을 얻고, 엑스(Aix)의 대학에서 신학 및 철학을 배웠다. 디뉴의 학원 교장 겸 수사학 교수, 이어서 그 곳의 사제(司祭)가 되었다. 1613~23년에 엑스 대학에서 신학 및 철학을 교수하고 뒤에 파리 국립 학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1645). 1648년 폐환(肺患)으로 엑스에 귀환했으나 1653년 다시 파리를 방문, 병중에도 저작 활동에 종사하다 그곳에서 사망. 그는 철학자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반대하고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취했다. 즉 원자(原子)와 공허한 공간(空間)을 주장했는데, 그 점에서 데카르트의 반대자였으며 1641~46년까지 계속된 데카르트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인식론적으로는 로크 및 콩디야크의 근대 경험론의 선구(先驅)가 된 감각론을 제창했다. 과학자로서는 천체의 관측 및 지중해의 수로도(水路圖)의 작성에 유니크(Unique)한 업적을 보였고 지동설에 관하여는 갈릴레이 및 코페르니쿠스에 동조(同調)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상디 [Pierre Gassendi, Gassend]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교회는 데카르트의 주장 속에 숨어 있는 위험 요소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세상이 확실성이 신이나 《성경》에서 나오지 않고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실에서 나온다면, 신은 인간보다 더 불확실한 존재로 떨어지고 만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두둔하는 변신론을 주장하는 듯 보였지만, 실은 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며 합리적 사고에 바탕한 자연과학이 설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가 죽은 뒤 교황청이 그의 저작들을 금서로 지정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변신론 :: 악(惡)의 존재가 창조주인 신(神)의 의지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론.G.W.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한 말로, 신의론(神義論)·호신론(護神論)이라고도 번역한다. 서양어에서의 ‘변신’은 그리스어(語)의 theos(神)와 dikē(正義)의 합성어(合成語)인데, 그것을 변신·호신 또는 신의(神義)로 번역한다. 변신은 글자 그대로 신에 대한 변명이고, 변명이란 곧 신을 옹호하는 것인데, 그 옹호는 신이 올바르고 의롭다는 데에 있다. 변신론은 신의 본성과 신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문제로 삼는다. 여기에서의 신은 권위의 존재이며, 현명하고 선(善)한 존재이다. 따라서 변신론은 이런 입장에서 신의 세계의 관리를 옹호하고 그의 영원한 섭리(攝理)를 주장하며, 신의 내림(來臨)을 입증하는 자리에 선다. 변신론은 신학적(神學的) 합리주의(合理主義) 시대에 훌륭하게 그 목적을 달성하여 회의주의(懷疑主義)의 사조를 막아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신론 [theodicy, 辯神論] (두산백과)

 

 1649년,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는 명성을 얻고 있던 데카르트를 자신의 철학 과외 선생으로 초청했다. 여왕은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려고 데카르트에게 새벽 5시에 철학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아침 11시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습관에 평생 길들여진 그에게 북국의 차가운 새벽 날씨는 독약과 같았다. 이내 폐렴에 걸린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쉰네 살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근대 서양 사상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진리의 근거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사고에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이 명제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봄으로써, 자연 속의 그 어떤 것보다 한 차원 높은 위치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동물을 비롯한 다른 존재들은 단순한 물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것들은 태엽으로 움직이는 시계와 같이 정교하게 움직이는 자동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여느 존재보다 존엄하다. 

 이런 그의 생각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요약되는 서양 근대 문명의 뿌리, 곧 합리론이라는 사상의 흐름을 낳았다. 근대 문명은 인간의 합리적 판단을 믿고 불합리한 권위에 맞선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인류 역사를 한 발 진보시켰다.

 

 포스트모더니즘 :: 1960년에 일어난 문화운동이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는 한 시대의 이념. 이 운동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 ·여성운동 ·흑인민권운동 ·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그리고 해체(Deconstruction) 혹은 후기구조주의 사상으로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 점검과 반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두산백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더 이상 이성과 합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자연을 단순히 이용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육체적인 욕구도 이성으로 억눌러야 할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와 자동 기계

 데카르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프란시스라는 아이였는데, 5살 대 그만 병으로 죽고 말았다. 데카르트는 무척이나 슬퍼했다. 전설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딸의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항상 옆에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인형은 무척이나 정교해서 사람과 거의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덴마크로 떠날 무렵, 선원들은 데카르트의 배낭에서 인형을 발견했다. 불길하게 여긴 뱃사람들은 인형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말았다.

 데카르트는 동물은 자동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으며 나머지는 그냥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랬던 그가 왜 인형을 만들었을까? 철학 훈련은 감정을 잘 다스리게 한다. 하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아픔에는 논리로 해결 못할 그 무엇이 있다.

 

 

 

14. 다락방의 합리론자 – 스피노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는 남달리 총명하고 신앙심이 깊어 유대인 사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장사와 종교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사회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갔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엘리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유대 청년이 사후 세계에 대한 신앙을 의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가 혹독한 비판을 받고 파문당한 것이다. 교회는 그 청년을 교회 입구에 엎드리게 하고 신자들이 그를 짓밟고 들어가게 했다. 청년은 육체적 고통보다 모욕감을 참지 못한 나머지, 박해자들에게 보내는 준엄한 항의 편지를 남기고 자살해 버리고 만다. 이 사건은 스피노자의 신앙심을 흔들어 놓았다. 유대교 경전에 회의를 품고 어떤 모순이 있지 않은지 의심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이었는지 1652년, 스물한 살 청년 스피노자는 이단이라 여겨지던 신학자 반 덴 엔덴이 운영하는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라틴어, 신학,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데카르트 철학 등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공부했다. 결국 1656년 7월 유대 교회는 스피노자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파문으로 유대인 사회에서 쫓겨남은 곧 생계 수단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누구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주로 다락방을 세내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다락방의 합리론자’라는 별명은 여기서 나왔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그는 죽을 때까지 하숙생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은 결코 인간처럼 감정적으로 분노하고 기뻐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이성 자체여야 한다. 그리고 그 이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이성이며 정신이고 곧 신이라 생각했다.

 세계가 곧 신인 이상,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신의 섭리이다. 예컨대, 지진이 나서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 불행이 일어났다 해도, 그것은 이미 신의 섭리에 따라 결정되어 있던 일일 뿐이다. 따라서 신(자연)의 섭리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비통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지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 세상 만물 속에 나타난 신의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올바르고 도덕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는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성경》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시대에 이러한 생각은 무신론, 심지어는 악마의 사상으로 여겨졌다. 무신론자라는 비난과는 반대로, 세상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는 그의 범신론 때문에 그는 신에 미친 사람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범신론 :: 신(神)과 전우주(全宇宙)를 동일시하는 종교적·철학적 혹은 예술적인 사상체계.
신과 전우주 사이에 질적인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신론과는 다르다. 범신론은 신비적인 종교감정이나 자연에 전하는 시인의 감정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논리정연한 이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J.톨런드에 의하여 도입된, 그리스어(語)의 '전체'를 의미하는 pan과 '신(神)'을 의미하는 theos를 결합한, pantheism이라는 술어의 번역어이지만, 신에 대한 세계의 상대적 독립을 인정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두 가지 범주(範疇)로 나누어진다. 
즉 도가(道家) 사상이나 스토아학파 철학에서처럼 독립을 인정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범신론과, 《우파니샤드》나 스피노자의 경우처럼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좁은 의미에서의 범신론이 그것이다. 역사상 가장 일관성(一貫性) 있는 전형적인 범신론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신론 [pantheism, 汎神論] (두산백과)

 

 에티카 ::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주요 저서. 정확하게 번역하면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이다. 1675년에 완성되어 저자가 죽은 후 1677년에 간행되었다. 신(神)과 세계와의 관계를 ‘창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 곧 자연’이라는 형태로 파악하는 범신론적 체계로 설명함으로써 신의 내적 필연에 의해 일체의 사물이 생긴다고 하는 결정론을 취하였다. 따라서 신과 개개의 사물과의 관계는 ‘영원의 상(相) 아래서’ 고찰된 관계라고 하여 R.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에 대하여 심신평행론(心身平行論)을 주장하였다. 인식으로써 정념(情念)을 극복하고 일체가 바로 신 그 자체임을 직관하는 것, 즉 ‘신에 대한 지적(知的) 사랑’을 최고의 선(善)으로 인정하였다. 신에 취(醉)한 무신론자라고 표현된 그의 철학은 오랫동안 관심을 끌지 못하였으나 그가 죽은 지 약 100년 후 괴테가 그 진가를 인정하면서 독일 관념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티카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두산백과)

 

 《신학 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국가의 목적은 실제로는 자유라고 하면서, 국가는 교회의 지나친 간섭을 막고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교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자유를 억압하던 권력자들에게는 심한 모욕이었다.

 그가 유대 교회와 카톨릭 교단, 칼뱅파, 루터파 등 당시 모든 교파로부터 비난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허용한 언론 자유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1673년, 마흔 두 살의 스피노자는 팔라티나 영주에게서 파격적인 제의를 받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 정교수로 초빙을 받은 것이다. 영주는 그에게 철학에 대한 완벽한 자유를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단, 이러한 자유로 공인된 교회를 혼란시키지 않는다라는 조건으로 말이다. 여기에 대한 스피노자의 대답은 ‘심사숙고 끝의 거절’이었다. ‘나의 정신적 자유를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라는 게 이유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의 명언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의 출처를 찾기는 어렵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 목사가 이 말의 ‘원조’라는 주장도 있다. 

 스피노자가 했건 안 했건, 이 명언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잘 압축해서 보여준다.

 

 

 

15. 합리주의의 절정 – 라이프니츠

 서양의 17세기는 천재들의 세기라고 불린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는 그 천재들의 세기의 완결판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어지간한 종합대학 교수들 전부가 100년 동안 매달려도 하기 힘든 일들을 혼자서 이루어 냈다. 그가 생전에 출판을 목적으로 쓴 글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대신 무려 600여 명이 넘는 유명 인사들과 1만 5000여 통에 이르는 서신을 교환했는데, 이 편지 속에 그의 주요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담겨 있다.

 유명 사상가들의 저작은 대개 후대 연구자들이 한데 모아 전집으로 출판하기 마련이다. 그의 글 모두를 담은 ‘라이프니츠 전집’은 아직까지 세상에 나온 적이 없다. 그의 저작들은 아직까지도 발굴 중이다. 그만큼 그는 학식이 매우 깊고 넓은 학자였다.

 

 수리논리학 :: 언어를 사용하는 일반 논리학과 달리 기호를 사용하는 논리학, 현대 논리학을 전통적 논리학과 구별할 때 자주 쓰이는 말로, 기호논리학이라고도 한다.

 

 기호논리학 :: 일반 논리학이 언어를 사용하는 데 반해 기호를 사용하는 논리학.
현대논리학을 전통적 논리학과 구별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며, 수학적논리학 또는 수리논리학이라고도 한다. 현대논리학의 특징의 하나가 기호를 많이 사용하는 데서 유래된 명칭이지만, 전통적 논리학에서도 3단논법(三段論法) 분석(分析) 등에 기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현대논리학에서도 기호를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고 보통 언어로써 쓰인 문장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경우가 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독일의 철학자 G.W.F.라이프니츠는 매우 깊은 기호논리학의 구상을 하였으나, 그의 연구과업을 직접 계승해서 발전시킨 사람은 없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수학의 발전 영향 아래에서 논리학을 새로운 견지에서 만들려는 시도가 영국의 수학자 드 모르간, G.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해석학의 엄밀한 기초확립이나 집합론의 창설 등을 전후해서 이 방면의 연구는 큰 발전을 거듭했고, 1879년 독일의 수학자 G.프레게에 의해서 기호논리학의 체계는 일단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 논리학이 분석한 논증을 포함하고 더욱 광범위한 논증의 형식을 기호를 사용해서 엄밀하게 표현하는 방법이 거의 확립된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컴퓨터의 기초이론과 기호논리학 사이에 밀접한 교섭이 있음이 밝혀졌다. 응용분야가 넓어서, 역사는 짧으나 큰 전망을 가진 학문으로 지금도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호논리학 [symbolic logic, 記號論理學] (두산백과)

 

 라이프니츠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는 논리학에서 상당히 업적이 될 만한 생각을 해냈다. 그는 인간의 사고를 분석하여 생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밝혀내고 이들이 서로 결합하는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유를 전부 파악할 수 있을뿐더러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인간의 생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인간 사고의 알파벳이라 할 만한 것으로, 그가 평생을 걸쳐 추구했던 ‘보편 기호학’의 근본이 된다.

 당시 뉴턴이 관찰과 실험으로 자연의 법칙을 밝히려 했다면, 라이프니츠는 사고 실험을 통해 물질의 결합 법칙을 밝히려 했던 듯하다.

 

 사고 실험 ::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진행하는 실험. 실험에 필요한 장치와 조건을 단순하게 가정한 후 이론을 바탕으로 일어날 현상을 예측한다. 실제로 만들 수 없는 장치나 조건을 가지고 실험할 수 있다.
실제의 실험장치를 쓰지 않고 이론적 가능성을 따라 마치 실험을 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결과를 유도한다. 실험실에서 실제로 하는 실험에는 여러 가지 오차가 포함되지만, 사고실험에서는 실험을 단순화하여 이상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물리량을 정의하는 수단으로써 이용되거나 이론체계 속에 있을 수 있는 모순을 검토하는 데 이용된다. 20세기 초반에는 여러 가지 사고실험이 고안되어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유명한 예로 W.K.하이젠베르크의 선현미경이나 E.슈뢰딩거의 고양이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고실험 [thought experiment, 思考實驗] (두산백과)

 

 루이 14세 ::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643~1715). 절대왕정의 대표적인 전제군주이다. 재상제를 폐지하고 파리고등법원을 격하시켰다. 베르사유궁전을 지어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신교도를 박해하였고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 결핍을 초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루이 14세 [Louis XIV] (두산백과)

 

 호이겐스 ::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천문학자. 토성이 고리를 가진 것을 발견하였으며, 탄성체의 충돌문제, 진자운동을 연구하여 운동량보존법칙, 에너지보존법칙에 해당하는 이론을 전개, 역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빛의 파동설을 수립하고 '하위헌스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레이덴대학을 나온 뒤 영국·프랑스·독일 등지에 유학하였다. 1655년 형인 콘스탄틴과 굴절(屈折)망원경을 공동 제작, 토성(土星)이 고리를 가진 것을 발견하고, 토성의 위성을 관측했다. 또 1656년 진자시계(振子時計)를 발명했다.
1666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가 창립되자, 파리로 초청되어 최초의 외국인 회원이 된 후 1681년까지 중심적 인물로 활약했다.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박해가 시작되어 낭트칙령이 폐지되기 전에 귀국하였다.
역학(力學) 부문에서는 탄성체의 충돌문제, 진자운동을 연구하여 운동량보존법칙, 에너지보존법칙에 해당하는 이론을 전개, 역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비유되기도 하는 저서 《진자시계》(1673)에서는 진자시계의 제작에서부터 진자운동의 이론적 연구로 단계를 높인 뒤, 사이클로이드에 따른 운동으로 등시성(等時性)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밖에도 원뿔진자, 주기의 공식, 원심력의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광학(光學) 부문에서는, 데카르트·훅 등의 생각을 출발점으로 하여 복굴절(複屈折) 및 빛의 전파속도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기초로 빛의 파동설(波動說)을 수립했다. 매질 에테르를 통해 전도되는 파동으로서의 빛을 포착하고 파면(波面)의 전파를 구면파(球面波)의 중첩으로 보는 ‘하위헌스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저서 《빛에 관한 논술》은 1678년 완성되어 1690년 출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위헌스 [Christiaan Huygens] (두산백과)

 

 호이겐스의 원리 :: 파동의 전파를 설명하는 원리로서, 파면 위의 모든 점들은 새로운 점파원이 되고 이 점파원에서 만들어진 파들의 파면에 공통 접선이 새로운 파면이 된다. 이 원리를 발표한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호이겐스의 이름을 따 호이겐스의 원리라고 한다.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 찬 세계를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고 결론지었다. 세상을 이루는 가장 단순한 요소들을 나열하면 우리는 가능한 여러 세계를 만들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가운데서도 최선의 세계이다. 왜냐하면 완전하고 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경험 없는 사람이 고르는 것보다는 경륜 있고 유능한 사람의 선택이 더 믿을 만하듯, 완벽한 신이 선택한 세상은 가장 좋은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악이 있기에 세상은 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대답한다. 예를 들어, 목마른 고통이 있는 탓에 우리는 시원한 물을 마실 대 더 큰 쾌락을 느끼지 않는가? 오직 선만 있는 것보다는 악과 고통이 있는 세상이 더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주장이다.

 

 1675년경 그는 수학의 미적분을 발견했다고 공개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뒤 그는 자신도 미적분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뉴턴과 누가 원조인지를 놓고 지루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는 결국 독일과 영국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논쟁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느 한쪽이 표절한 것이 아니라 두 천재가 제각각 발견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레벤후크 :: 네덜란드의 현미경학자·박물학자. 상업에 종사하면서 렌즈연마술·금속세공술 등을 익혀 확대율 40∼270배의 현미경을 만들었다. 직접 제작한 현미경이 400개 이상이다. 자신의 현미경으로 원생동물·미생물 등을 관찰하여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생물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현미경으로 원생동물 ·미생물 등을 관찰하였으며, 그 결과가 R.흐라프에 의해 영국 왕립협회에 소개됨으로써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생물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연구 결과가 최초로 발표된 것은 1673년이며, 1675년에는 적충류(滴蟲類)를 관찰하였고, 1680년에는 그의 업적이 인정되어 영국 왕립협회 회원으로 천거되었다.
이 밖에도 가로무늬근, 곤충의 복안(複眼), 동물의 정자 등을 관찰하였으며 생물의 발생에서는 정자를 중시하는 전성설(前成說)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현미경으로 밝혀진 자연의 비밀》(4권, 1695)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톤 판 레이우엔훅 [Antonie van Leeuwenhoek] (두산백과)

 

 러셀은 《서양 철학사》에서 라이프니츠가 ‘돈과 관련해서는 조금 치사했다’라고 혹평했는데, 확실히 그는 자신의 몸값에 민감했던 듯싶다. 한때는 무려 다섯 왕가에서 제각각 최고 기술자의 봉급을 받아 낸 적도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monad)이론과 예정조화설을 체계화 했다. 모나드는 일종의 원자 개념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원초적인 요소다. 그러나 모나드는 지금의 원자 개념과는 다르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며 물리학의 질점(물체의 질량이 총집결했다고 간주되는 점)과 같이 관념적인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만약 모나드가 물질이라면 아무리 작은 단위까지 쪼개도 그보다 더 작은 단위가 있을 수 있기에 가장 근원적인 요소까지 다다를 수 없다. 따라서 세상 만물을 이루는 모나드는 물질이어서는 안 된다. 모나드는 살아 있는 영혼과 같다. 세상이 활력과 움직임은 각각의 모나드에서 나온다.

 그런데 모나드는 제각각 완전한 존재이다. 완전하기에 서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을 끌어들인다.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 시계들이 똑같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듯이, 신은 모나드들이 나름대로 정확하게 움직이도록 예정해 놓았다. 예를 들어, 내가 축구공을 차서 공이 날아갔다 해도, 축구공은 내가 찼기에 날아간 것이 아니다. 예정조화설에 따르면, 발로 찬 행위, 공이 날아간 사건은 제각각 독립적으로 신이 예정해 놓았다. 두 사건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이어서 일어나기에 우리는 발로 차서 공이 날아갔다고 생각하게 된다.

 

 모나드 :: '모나드'란 라이프니츠(1646~1716)가 만년에 저작한 『모나드론』(La Monadologie)에서 분석한 핵심 개념으로, 원래 '1'(the one) 또는 '단위'를 뜻하는 그리스어 모나스(monas)에서 유래한 말이다. 모나드는 형이상학적으로 실재성의 측면에서 하나이고 자기자신과 동일하며 부식하지 않는 이데아를 가리키기 위하여 플라톤에 의하여 사용된 용어이지만, 라이프니츠에 의해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다시 활용된 개념이다.
모나드는 모든 존재의 기본 실체로서 단순하고 불가분(不可分)한 것이며, 원자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실체로서 그 본질적인 작용은 표상(表象)이다. 표상에는 의식적인 것 외에 무의식적인 미소표상(微小表象)도 포함된다. 표상이란 외부의 것이 내부의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 모나드는 이 작용에 의해 자신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다양성에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모나드에 의해 표상되는 다양성이란 세계 전체를 말한다. 모나드는 '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이라고도 하며, '소우주'를 이룬다. 이들 모나드는 각기 독립되어 있고 상호간에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또한 입구와 창(窓)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나드가 각각 독립적으로 행하는 표상간에 조화와 통일이 있는 것은 신(神)이 미리 정한 법칙에 따라 모나드의 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정조화(豫定調和)의 사고에 따라 라이프니츠는 지각과 욕구를 지닌 모나드들을 구별하는데, 식물처럼 기억이 없는 모나드들, 동물처럼 기억을 지닌 모나드들, 인간처럼 이성과 통각, 즉 반성된 의식을 지닌 모나드들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반사하는 세계의 조화를 파악할 수 있어서, 자신을 창조한 자의 관념에까지 스스로를 고양할 수 있다. 모나드는 자신에게 속해질 수 있는 모든 속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속성들이 실재화하여 표출된다. 주관적으로 보면 속성이 표출된다고 할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 모나드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가령 봉오리만 가지고 있던 장미가 꽃을 피는 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꽃피움'이라는 속성이 실재화하는 것이지만, 밖에서 볼 때에는 장미가 꽃을 피우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나드 [Monad]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국학자료원)

 

 철학자로서 라이프니츠는 합리주의의 절정이라고 평가받곤 한다. 합리주의란 면밀한 이성과 냉철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철학 사조를 일컫는 말이다. 합리주의자들은 이성과 논리로 세상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어지러운 세상을 질서 있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헤겔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미묘한 허구’라고 깎아내렸다. 이성과 논리가 극도로 실현됐을 때 그 자체로는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가장 기괴한 허구가 될 수 있기도 하다.

 

 라이프니츠는 팔방미인이었다. 인성과 예술과 품위는 기본, 여기에 풍부한 전문 지식까지 갖추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부른다. 라이프니츠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형 인간의 대표로 세울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 시대에는 지식의 양이 많지 않았다. 수십 권의 책만 읽었어도 ‘석학(碩學)‘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지금은 다르다. 엄청난 분량의 정보가 날마다 쏟아지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르네상스형 인간’이 필요하다. 학문 간의 통섭, 여러 학문의 융합은 학계와 산업계의 큰 화두다.

 

 

 

16. 왕이 왕답지 못하면 엎어 버려라 – 로크

 로크(John Locke)는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신중해지라고 당부한다. 우리 이성에는 한계가 있기에 누구도 확실하게 내 의견이 곧 정의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상식에 비추어 살며 상대방을 존중하고 관용하라’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왕과 의회 사이의 갈등으로 내전, 곧 청교도 혁명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의회 쪽 군대의 기병 지휘관으로 참전했는데, 이것이 로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말았다. 전쟁에서 별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상관이 자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로크를 귀족이나 부유층 자제만 입학하던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추천했던 것이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시골 유지의 똑똑한 아이에 불과했던 로크는 웨스트민스터에 들어갈 수 없었을 터다. 그는 웨스트민스터를 발판으로 사회의 주요 인사가 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시대가 만들어낸 철학자인 셈이다.

 

 로크는 자신의 주된 강의 과목이었던 고전어나 논리학보다 새롭게 대두되던 자연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증명되지 않은 편견과 환상에 의지해 서로를 증오하던 세상에서, 관찰과 실험이라는 객관적인 잣대로 지식을 검증하려는 자연과학적 방법이 그에게는 이상적인 진리 탐구 방법으로 보였던 듯싶다.

 당시 대학에서 연구를 허용한 자연과학 분야는 의학뿐이었으므로, 그는 의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대학의 의학 수준이란 아리스토텔레스나 히포크라테스 같은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권위 있는 책들에 환자의 증상을 끼워 맞추는 데 불과했다.

 로크는 경험에 기초한 사실 확인과 해석을, 편견과 혼란을 없애고 확실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매력적인 진리 탐구 방법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1665년, 서른 세 살의 로크는 합리적 추리와 이성에 기초하여 진리를 추구하던 데카르트 철학에 깊이 빠져 들었다.

 

 히포크라테스 :: 인체의 생리나 병리(病理)에 관한 그의 사고방식은 체액론(體液論)에 근거한 것으로, 인체는 불·물·공기·흙이라는 4원소로 되어 있고, 인간의 생활은 그에 상응하는 혈액·점액·황담즙(黃膽汁)·흑담즙(黑膽汁)의 네 가지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네 가지 액(液)의 조화(調和)가 보전되어 있을 때를 그는 ‘에우크라지에(eukrasie)’라고 불렀고, 반대로 그 조화가 깨졌을 경우를 ‘디스크라지에(dyskrasie)’라 하여, 이때에 병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는 임상(臨床)에서 관찰을 자세히 하고, 병이 났을 때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 즉 증세, 그중에서도 발열(發熱)을 반응현상(反應現象)이라 생각하여 그것은 병이 치유로 향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병적 상태에서 회복해가는 것을 ‘피지스(physis)’라고 불렀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라고 하는 설을 세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 피지스를 돕거나 또는 적어도 이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치료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증후학(症候學)·예후학(豫後學)에 대한 연구도 깊었던 그가 특히 빈사환자(瀕死患者)의 얼굴표정에 대하여 한 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의사의 윤리에 대하여도 중요한 설을 말하였고, ‘의학의 아버지’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라리사(Larissa)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며, 사망 당시 나이는 약 85~90세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히포크라테스 [Hippocrates] (두산백과)

 

 1667년, 서른다섯 살의 대학 강사 로크에게 엄청난 인생 전환기가 찾아왔다. 장차 영국 정치계의 주요 인사가 되는 섀프츠베리 백작의 주치의이자 정치 자문으로 스카우트 된 것이다. 그는 섀프츠베리 경의 간 종양 제거 수술을 성공리에 해냄으로써 생명의 은인으로 백작에게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백작이 정치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 따라 로크의 활동과 관심 분야도 점점 넓어졌다.

 

 《관용에 관한 에세이》는 정치 갈등의 주된 명분이었던 개신교와 가톨릭, 성공회 간의 반목과 대립에 대해 서로 관용하라고 권하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엉뚱하게도 경제 활성화라는 목표를 위해 쓰였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네덜란드에서 자유 무역이 번성한다는 사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던 탓이다.

 이 책에 다르면, 인간에게 확실한 지식이란 ‘1+1=2’처럼 직관적으로 아는 것, 그리고 경험과 합리적인 추론에 의한 것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도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신에 대한 지식은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아니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각에 확실한 근거를 댈 수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지식은 단지 믿음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누구의 믿음이 더 그럴듯한 지는 가릴 수 있다. 종교인들은 서로 대화하면서 누구의 믿음이 더 그럴듯한지를 밝혀 나가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확실한 지식을 갖지 못하는 만큼,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관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섀프츠베리 :: 17세기 영국 혁명기 때의 정치인. 1660년 왕정 복고에 공을 세워 5인으로 구성된 카발(CABAL) 내각의 대신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고, 요크공 제임스에 대한 왕위배제법안의 제출을 주도하며 휘그파(Whigs)의 형성을 이끌었다. 로크의 후원자로도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초대 섀프츠베리 백작 [1st Earl of Shaftesbury] (두산백과)

 

 시간이 갈수록 섀프츠베리 백작은 점점 정치계의 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찰스 2세가 프랑스와 손잡고 가톨릭 신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면서, 그의 앞날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찰스 2세와 의회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백작은 의회주의자들의 선봉에 서서 탄압받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백작은 악명 높은 런던탑에 갇혔다가 결국 1682년에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병으로 죽고 만다.

 로크의 《정부론》은 이런 배경 속에서 쓰였다. 로크에 따르면 왕이 될 권리는 왕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신이 부여하지 않았다. 왕은 사람들이 계약을 통해 복종하리라 맹세했기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려고 로크는 왕도 정부도 없는 상태, 즉 자연 상태를 가정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연법에 따라 자유롭게 평화롭게 자연권을 누린다. 자연권이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권리를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뿐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물건들에 대해서도 자연권을 행사한다. 자연법이란 곧 우리의 이성이다.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누구라도 상대를 쓸데없이 공격하고 해치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법에 따라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사람들 간의 충돌과 다툼은 언제나 일어나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다른 이의 자연권을 침해했을 대 이를 막아 주고 정당하게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연 상태는 폭력과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될 터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법에 다라 사회를 관리하는 통치자를 세우기로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이 통치자는 각각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연법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고 자연권을 지켜 준다.

 그런데 만약 통치자가 사람들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주어진 권력을 이용하여 착취하고 괴롭힌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해서 로크는 단호하게 말한다. 개인의 자연권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통치자는 폭력으로 쫓아내야 한다. 즉 혁명을 통해서라도 통치자를 바꾸라는 뜻이다.

 

 1683년, 섀프츠베리 백작의 숨통을 조이던 권력의 추적은 로크에게까지 다가왔다. 이제 로크는 더 이상 영국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네덜란드로 망명해 버렸는데 새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네덜란드 정부에 정식으로 그를 체포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수많은 가명을 사용하면서 숨어 지내야 하는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이 힘든 시기에 대표작인 《인간 오성론》을 썼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빈 서판(글씨를 쓰는 판)’과 같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어지며,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진리나 절대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경험을 통해 참, 거짓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로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근거 없는 믿음을 권위에 기대어 강요하는 전통을 경계한 것이다.

 

 1688년, 이른바 명예혁명이 일어나 로크를 탄압하던 제임스 2세가 권력을 잃었다. 영국은 왕이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의회 중심의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절대 왕권에 반대하던 역적 로크는 이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새롭게 추대된 왕 윌리엄 3세와 같은 배를 타고 귀환했다.

 

 명예혁명 ::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시민혁명. 유혈(流血)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1685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로서, 가톨릭교 부활정책과 전제주의(專制主義)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종래의 심사율(審査律)을 무시하고 가톨릭교도를 문무(文武)관리로 등용하여 국민들이 싫어한 상비군(常備軍)을 설치하였다.
이같은 폭정에 대해 국민들의 반감이 고조되던 중, 왕자 출생을 계기로 양측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원래 제임스 2세는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장녀인 프로테스탄트교도 메리에게 계승되리라고 기대하였으나, 1688년 6월 5일 왕자가 탄생함으로써 다음 치세에는 가톨릭교 정책개혁을 희망한 프로테스탄트교도의 꿈이 일시에 사라졌다. 
따라서 왕에 대한 인종(忍從)의 의미가 없어지자, 의회에서는 토리당·휘그당의 양대 정당지도자가 협의한 끝에 6월 말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 윌리엄과 메리 부처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도록 초청장을 보냈다.
국내 귀족의 반란으로 소란한 가운데, 11월 윌리엄·메리 부처는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 남서부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하였다. 국내 귀족과 지방호족들도 잇달아 윌리엄·메리 부처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왕이 파견한 처칠도 왕을 배반하고 윌리엄 진영에 투항하고, 왕의 둘째딸 앤도 윌리엄군(軍)에 가담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은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왕비와 왕자를 프랑스로 도피시킨 뒤 자신도 탈출을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실패하였지만 윌리엄 부처의 묵인 하에 12월 도피에 성공하였다. 런던에 입성(入城)한 윌리엄 부처에게 1689년 2월, 의회에서는 ‘권리선언(權利宣言)’을 제출하여 승인을 요구하였다. 부처는 그것을 인정한 다음, 윌리엄 3세, 메리 2세는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권리선언’은 뒤에 ‘권리장전(權利章典)’으로서 재차 승인을 받았다. 이 장전의 원칙에 나타나 있듯이, 이 혁명은 17세기의 왕권과 의회의 항쟁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종래 의회의 권리를 수호함과 동시에 왕위계승까지도 의회가 결정할 수 있게 하여, 그뒤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예혁명 [Glorious Revolution, 名譽革命] (두산백과)

 

 권리장전 :: 1689년 12월에 제정된 영국 헌정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의회제정법.
미국 등의 다른 권리장전과 구별하여 영국권리장전(English Bill of Rights)이라고도 한다. 권리청원(權利請願)이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관련된 인권선언인 데 대해서, 권리장전은 명예혁명의 결과 이루어진 인권선언이다.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와 가톨릭 신앙에 반대하여 일어난 명예혁명은 1688년 12월 23일 국왕이 프랑스로 도망하고, 그 이듬해 2월 13일 국민협의회가 윌리엄 3세를 국왕으로 추대함으로써 무혈혁명으로 끝났다. 이때 의회는 새 왕을 추대하면서 왕관과 함께 권리선언(權利宣言)을 제출하여 그 승인을 받았고, 이 선언을 토대로 89년 12월 16일 ‘신민(臣民)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계승을 정하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의회제정법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이 곧 권리장전이다.
주요내용은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12개조로 열거하였고 의회의 동의 없이 왕권에 의하여 이루어진 법률이나 그 집행 및 과세의 위법, 의회의 동의 없이 평화시에 상비군의 징집 및 유지의 금지, 국민의 자유로운 청원권의 보장, 의원선거의 자유 보장, 의회에서의 언론 자유의 보장, 지나친 보석금이나 벌금 및 형벌(刑罰)의 금지 등이었다.
이러한 권리장전은 영국의 의회정치 확립의 기초가 되고, 영국의 절대주의를 종식시켰다는 점에 영국 헌정상 큰 의의가 있다. 또 영국의 권리장전은 영국 헌정상뿐만 아니라 미국의 독립선언, 버지니아 권리장전, 매사추세츠 권리선언 등에도 영향을 주었고, 이들을 통하여 다시 프랑스 인권선언에도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권리장전이라는 말은 일반화되어, 각국의 헌법전 속에 규정된 인권을 보장하는 조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 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는 한국의 권리장전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리장전 [Bill of Rights, 權利章典] (두산백과)

 

 기징 건전하고 올바른 지식은 폭넓은 관찰과 경험, 그리고 부단한 반성과 숙고에서 나온다.

 

 

 

17. 철학은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 흄

 흄(David Hume)에 따르면 철학의 의미는 ‘일상을 반성케 하여 이따금 생활 태도를 교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직업 철학자들은 정교한 논리 싸움에 몰두하여,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인간 능력으로는 밝히지도 못할 거창한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다.

 

 신경쇠약 :: 내외의 자극에 대하여 보통 사람과 달리 과민하게 반응하여 초조해지기 쉽고, 피로해지기 쉬운 증후군. 1869년 G.M.비어드에 의하여 이름지어졌으며, 원인은 신체적·정신적 과로에 의한다고 하여 한때 대단히 유행했던 말이지만, 현재는 과로에 의한 신경쇠약증세는 곧 회복되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의학자는 비어드의 설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신경질’이 주로 체질성인 것을 가리키는 데 대하여 ‘신경쇠약’은 획득성(獲得性)인 것을 뜻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경쇠약 [neurasthenia, 神經衰弱] (두산백과)

 

 그는 《인간본성론》으로 뉴턴이 자연과학에서 거둔 성과를 이성과 도덕 분야에서 이루어 내려고 노력했다.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지를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 이성의 구조를 탐구하면서 《성경》이나 권위 있는 이론에 기대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지식,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밝히려 했다.

 우리의 지식은 대부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경험들일 뿐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결코 밝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 여기서 밥을 먹는 것은 원인이고 배가 부른 것은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얻는 경험은 ‘밥을 먹었다’는 사실과 ‘배가 부르다’는 사실뿐이다. ‘밥을 먹어서 배가 부르다’라는 인과관계 자체는 결코 경험되지 않는다.

 ‘내일 해가 뜬다’는 명백해 보이는 사실도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그동안 매일 매일 해가 떴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내일도 해가 뜬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사실이다. 어려운 말로 한다면, 우리의 삶은 경험을 통한 ‘귀납추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것은 생각만큼 확실하지 않다. 이성을 통해 귀납추리의 확실성을 증명할 수도 없다. 우리 지식은 그만큼 불확실한 상태로 항상 열려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밥 먹으면 배가 부르리라는 믿음을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습관과 관습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이 각각의 경험들을 원인과 결과로 묶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확신은 거기까지이다.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과관계를 얻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 얻어지지만, 경험은 결코 인과 관계 자체에 대한 지식을 주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인과관계를 기초로 얻어진 우리의 모든 지식과 학문 역시 확실하지 않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발전하는 자연과학에 힘입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밝혀내리라는 오만함이 팽배해 있었다. 이런 자신감에 흄은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 본성론》에서 영혼의 존재까지 거부한 까닭에,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며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회의론자일뿐더러 영혼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귀족의 작위체계

 귀족의 작위는 본래 왕의 친구들에게 토지의 소유권 개념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봉지를 성씨로 쓰는 풍습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초기, 프랑크 제국이 건설되고 나서 왕은 봉신들에게 병역의무의 대가로 토지를 내려주었습니다. 봉신들은 이 토지에서 나오게 되는 재산으로 자신과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왕이 소집할 경우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것이 봉건제의 시작입니다. 이 당시 토지는 봉신의 죽음과 함께 다시 왕에게로 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관습적으로 죽은 신하의 아들이 충성심을 표시하는 경우 그에게 다시 주어졌고, 시대가 흘러가면서 점차 토지와 작위는 계승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중세 유럽의 작위는 국가와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작위가 잘 체계화 되어 있던 프랑스를 기준으로 볼 때 귀족에는 크게 9가지 단계가 있었습니다.

  작위 프랑스 영국 독일
0. 귀족의 혈통을 가진 자 - "마크 오브 노빌리티"를 소지한 자
(성씨 앞에 드de, le, von, van 등이 붙는 사람)
1. 기사 Chevalier/Dame Knight/Dame Ritter/Frau
2. 남작 Baron/Baronne Baron/Baroness Freiherr/Freifrau
3. 자작 Viscomte/Viscomtesse Viscount/Viscountess Landgraf/Landgrafin
4. 백작 Comte/Comtesse Earl (U.K.) Count/Countess Graf/Grafin
5. 후작 Marquis/Marquise Marquis/Marquise Markgraf/Markgrafin
6. 공작 Duc/Duchesse Duke/Duchess Herzog/Herzogin
7. 공작/왕자 Prince/Princesse Prince/Princess Prinz/Prinzessin
8. Roi/Reine King/Queen Konig/Konigin
9. 황제 Empereur/Imperatrice Emperor/Empress Kaiser/Kaiserin

* 엄밀히 따지자면 0과 1, 그리고 8과 9는 '귀족 작위Noble Title'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저렇게 많은 작위를 모두 사용하는 곳은 몇몇 국가뿐입니다.

예를 들자면 옛 영국(앵글로-색슨 족이 지배하던 시기)에서는 위의 표에 대치시켜보면 1, 2, 4, 7, 8에 해당하는 작위들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국가에 따라서는 저 작위들 사이에 추가로 들어가는 작위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핀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기사의 종자도 귀족에 준하는 신분으로 대접받았습니다. 또, 영국에서는 국가 재정을 늘이기 위해 남작 아래에 준남작(Baronet)이라는 귀족신분을 만들기도 했으며, 스페인에서는 '식민지 총독'을 공작과 왕족 사이의 귀족으로 대접했고, 독일에서는 후작(변경백=Markgraf)과 공작(Herzog)사이에 Furst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복잡하죠? 작위 체계는 국가에 따라서 단 3가지(기사, 백작, 왕)만 있는 곳에서 열 가지 정도로 복잡하게 나뉜 곳까지 다양합니다. 본래 백작(Count)의 부관지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자작(Viscount) 계급이 없는 국가가 많은 편입니다.

귀족의 작위라는 것은 절대왕정 시기 이전까지는 그 귀족의 권력과 반드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백작이 공작과 대등하게 권력다툼을 하거나, 엄청난 부를 가진 남작에게 후작이나 공작이 돈을 빌리러 오는 일도 흔했죠.

우리나라에서는 작위를 번역하면서 중국식 오훈작(공/후/백/자/남) 체계에 맞추어 번역하는 일이 다보니, Prince와 Duke 를 번역할 때처럼 의미가 잘못 전달될 수 있는 부분도 종종 생깁니다. 본래 Prince 라는 말은 '왕자' 뿐만이 아니라 공작위를 나타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지배자, 군주라는 의미를 갖기도 하거든요.

예를 들어 Prince of Wales 라고 하면 '웨일즈 왕자'가 아니라 '웨일즈의 지배자', '웨일즈 공작'으로서 대대로 영국황태자에게 수여되는 작위입니다. 어느 영화에서는 이걸 '웨일즈 왕자'라고 번역해서 사람들의 빈축을 산 일이 있죠. ^^

(월간 GAMERZ 2005년 12월 "판타지 지식KIN")

 

 기번 :: 영국의 역사가. 아버지는 하원 의원, 어렸을 때는 병약했다. 1752~53년 옥스퍼드에서 배우다가 종교 문제로 중퇴, 로잔에서 칼뱅파의 교육을 받고 5년 후 귀국했다. 한때 군대 생활을 하고 1764~65년 프랑스ㆍ이탈리아에 여행, 《로마 쇠망사》를 저술할 생각을 품었다. 1774~83년 하원 의원을 지내고 1783~93 로잔에 정주(定住), 고전적인 명저 《로마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6권(1776~88)》를 완성했다. 이는 계몽주의의 입장에서 로마사를 고찰, 그 몰락은 기독교의 흥기에 의한다고 한 것. 사실(史實)의 종합적 파악력과 명문(名文)으로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번 [Edward Gibbon]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1년에 한 세기를 써 내려가는 속도’로 집필한 《영국사》는 기번이 쓴 《로마제국쇠망사》와 함께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가 죽은 지 100년 뒤까지도 이 책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도 대영 도서관 저자 분류표에는 흄이 ‘역사가’로 기록되어 있다.)

 

 《도덕 원리에 대한 논고》에서 그는 새롭고도 획기적인 도덕 이론을 내세웠다.

 먼저 그는, 우리의 도덕은 이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성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알려 줄 뿐, 무엇이 덕이고 악덕인지 알려 주지는 못한다. 이를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가슴이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공감하고, 감정을 통해 무엇이 인간적이고 도덕적인지를 판단한다.

 나아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려면 안정된 법질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법률에만 복종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설사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지라도 전체에 이익이 된다면 이를 받아들일 줄 아는 공감 능력이 있다. 이 때문에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을 넘어서 도덕적일 수 있다.

 그는 종교나 철학 이론에 기대지 않고 인간이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 지식과 도덕을 새롭게 세우려고 했다.

 

 그가 의심하고 회의했던 것은 일상생활이 아니었다. 베이컨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이 알 수도 없는 문제들에 대해 경탄할 만한 학문의 거미줄을 짓고 있는’ 학자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 낸 학문은 결코 확실할 수 없으며 의미도 없는 작업이다. 철학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신과 영혼, 진리같이 인간이 알 수 없는 문제들에 굳이 철학자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

- 데이비드 흄

 

 가장 완벽한 사람은 가장 불완전한 사람이다. 완벽함이란 더 이상 발전은 없고 현상 유지나 퇴보만 남았다는 뜻인 까닭이다.

 

 흄은 영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영혼을 느낀다’는 말은 문학적 표현일 뿐이다. 자기 영혼을 보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자신이 지금 뭘 보고 느끼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영혼 자체를 느낄 수는 없다. 기껏해야 ‘아프다’, ‘뭉클하다’, ‘가슴 벅차다’등의 느낌이 다가올 뿐, 영혼 자체는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흄은 말한다. 영혼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지각의 다발’일 뿐이다.

 

 

 

18. 파렴치를 분쇄하라! - 볼테르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의 글재주를 알아본 이웃의 부유한 부인이 책값에 쓰라고 2000프랑을 물려준 점을 보면 확실히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그는 온갖 특권을 누리던 귀족들에 대한 시민들의 심정을 적절하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대변해 주었다. 한 예로 섭정이 예산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왕실 마구간의 말을 절반으로 줄이자, 볼테르는 ‘차라리 궁전에 가득찬 바보들(귀족들을 말함)을 반쯤 쫓아내는 편이 낫다’라는 말로 빈정댔다. 섭정은 그를 바스티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희곡 《오이디푸스》를 쓰는데, ‘아루에’라는 본명을 버리고 ‘볼테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바스티유 감옥 :: 루이 14세 때 정치범을 가두었던 감옥으로 과거 프랑스 전제 정치를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본래는 1370년대 샤를 5세의 명령으로 파리의 생탕트완 교외에 지어진 요새였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점령하여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절대주의의 상징물이었던 데 비하여 혁명이 일어날 당시 이 곳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은 고작 7명으로 죄명도 화폐 위조범, 정신병자 등이었다. 그 뒤 감옥은 혁명 정부의 명령으로 철거되었고 오늘날 그 자리에는 바스티유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52미터의 7월 혁명 기념탑이 있고 이 탑 밑에는 1830년 7월 혁명 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가 묻혀 있으며, 청동 기둥에 그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238 계단을 올라가 정상 부근의 전망대에 서면 에펠 탑, 상젤리제 거리 등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사전] 바스티유 감옥 [Bastille 監獄] (Basic 고교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2006.10.30., ㈜신원문화사)

 

 볼테르는 3년여 동안의 영국 생활에서 크나큰 문화 충격을 경험했다. 영국은 왕의 목을 자르고서라도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다. 절대 군주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비교해 볼 때 영국은 자유의 나라 그 자체였다. 그는 왕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 영국 의회와 언론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조너선 스위프트와 뉴턴을 만난 것도 모두 이 무렵 일이다. 특히 뉴턴은 볼테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조너선 스위프트 :: 영국 풍자작가 겸 성직자 이자 정치평론가. W.템플의 비서로서의 생활은 후년의 풍자작가 스위프트의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정계와 문단의 배후 실력자적 존재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걸리버 여행기》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너선 스위프트 [Jonathan Swift] (두산백과)

 

 그는 《찰스 7세의 역사》에서 당시 관행과 달리 ‘신의 뜻이 역사를 이끌고 있다’라는 식으로 글을 써 나가지 않았다. 왕을 중심으로 써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소설 같은 문체로 사실의 전후 관계에 기초해 인간 정신의 발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볼테르는 그 뒤에도 《러시아사》, 《프랑스사》, 《루이 14세》등 여러 역사책을 썼는데, 이 속에서 그는 역사 철학이라 할 만한 새로운 탐구 방법을 세웠다.

  볼테르는 역사를 꿰뚫어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를 예술과 정신의 진보에서 찾았다. 아울러 볼테르는 역사 연구의 관행에서 벗어나, 중국ㆍ페르시아ㆍ인도도 역사에 포함시켰다. 이는 우리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생각으로 유럽의 역사만 다루었던 당시 교회의 역사 해석에 맞서는 도전이었다.

 

 예카테리나 :: 러시아의 여황제. 스스로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라 대제라 불렀다.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 협력체제를 강화하였으며 영토를 크게 확대하고 농노제를 확장하였다.
프로이센 슈체친 출생. 독일의 작은 공가(公家)에서 태어났다. 1745년, 후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3세에게 출가한 뒤 남편의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즉위한 지 얼마 안되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대제(大帝)라 불렀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유하였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았다. 특히, 1767년에 소집한 사회 각층의 대표로 이루어진 법전(法典)편찬위원회에 새로운 정치원리를 해설하는 유명한 훈시를 함으로써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법전의 편찬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775년의 지방행정 개혁, 1785년의 귀족 특권 인가장 등으로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하였다. 만년(晩年) 특히 프랑스혁명 발발 뒤에는 반동화하여 자유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외정(外政)면에서는 두 차례의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투르크 전쟁)과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등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아들 파페르와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를 편애하여 자유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음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냈다. 가까운 여러 총신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함으로써 농노제(農奴制)를 확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카테리나 2세 [Ekaterina II] (두산백과)

 

 기전체 ::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재로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되어 중국·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정사(正史) 서술의 기본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기(紀)’는 제왕의 정치와 행적을 중심으로 역대 왕조의 변천을 연대순으로 서술한 것이다. ‘표(表)’는 각 시대의 역사의 흐름을 연표(年表)로 간략히 나타낸 것이며, ‘지(志)’는 제례(祭禮)나 천문(天文), 경제(經濟), 법률(法律) 등의 문물과 제도에 관해 항목별로 연혁과 변천을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문화사(文化史)나 제도사(制度史)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사기》에서는 ‘서(書)’라고 분류되었지만, 반고(班固, 32~92)의 《한서(漢書)》부터 ‘지(志)’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전(傳)’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기(紀)’는 ‘본기(本紀)’, ‘전(傳)’은 ‘열전(列傳)’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전체(紀傳體)는 단순한 연대순의 서술이 아니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각 시대의 주요한 신하와 인물의 전기, 제도와 문물, 경제 실태, 자연 현상 등을 분류하여 서술하여 시대의 특징과 변동을 유기적이고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각 시대에서 활동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좀더 생생하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기전체(紀傳體)는 왕조 전체의 체제와 변동을 서술하기 위한 정사(正史)의 기본 서술 체재로 자리잡았으며, 그 때문에 정사체(正史體)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전체 [紀傳體] (두산백과)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으로 프러시아 궁정으로 간다. 프리드리히는 그를 비롯한 소수의 지식인들과만 저녁 만찬을 즐겼는데, 이는 볼테르에게도 큰 즐거움이었던 듯하다. 볼테르는 ‘50년 동안 폭풍우 속을 헤매다가 간신히 항구를 발견했다’며 기뻐했다. 사상의 왕과 현실의 왕은 둘 다 재치 넘치고 지성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오해가 이 둘의 관계를 이내 틀어 놓았다. 볼테르는 황제가 금한 책을 사서 분노를 샀고, 급기야 황제가 금지한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프러시아에서 추방되고 만다. 조국 프랑스에서도 이미 쫓겨난 그는 갈 곳이 없었다. 1758년 예순 네 살의 볼테르는 마침내 스위스 국경 지대 시골 마을 페르네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리스본 대지진 :: 1755년 11월 1일 아침 세 차례에 걸쳐 포르투갈 ·에스파냐 및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를 강타한 대지진.
9시 40분경 처음에 일어난 지진이 가장 큰 것이었다. 재해가 심하였던 곳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그 날이 바로 만성절(萬聖節:All Saints’ Day)이어서 시민의 대부분이 교회에 모여 있다가 약 23만 5000명 중 3∼7만 명이 사망하였다.
처음에 일어난 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졌고, 두 번째 지진으로 많은 시민이 피난하고 있던 항구의 새 부두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재해를 더욱 크게 하였다. 최고파고(最高波高) 15 m에 이르는 큰 해일을 수반하였으며, 이 해일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10시간이 지난 후에 서인도제도에 도달하였다. 감진지역(感震地域)은 영국 본토, 아일랜드 남동부, 덴마크 남부, 오스트리아 서부 등에 걸치고, 그 면적은 육상에서만도 128만 km2에 이르렀다. 여진(餘震)은 본진(本震) 후 6개월 동안 약 250회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스본지진 [Lisbon earthquake, ─地震] (두산백과)

 

 캉디드 :: 1759년 발간. 부제목 ‘낙천주의(樂天主義)’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라이프니츠 등의 낙천적 세계관을 조소하고 사회적 부정 ·불합리를 고발하는 철학적 콩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캉디드는 숙부인 남작의 저택에서 팡그로스 박사의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 즉, 현재의 상태는 가장 옳다는 주장을 믿는 순진한(프랑스어로 ‘캉디드’) 청년이다. 사촌 큐네공드를 연모했다가 숙부에게 쫓겨난 그는 가는 곳마다 전쟁 ·병고 ·조난 ·지진 ·종교재판 ·고문 ·폭행 등을 겪는다. 방랑 중 팡그로스 박사를 만나 숙부의 집이 병화(兵火)에 소실되었음을 알게 된다.
포르투갈에서 큐네공드를 만나 두 사람은 남아메리카로 향했으나, 여기서도 재난을 만나 헤어지게 된다. 캉디드는 도원경(桃源境:앨 드라드)에 당도하나, 큐네공드를 잊을 수 없어 그녀를 찾아 대륙으로 돌아간다. 고난을 겪어 추악하고 성미가 까다로워진 큐네공드와 여전히 낙천주의를 고집하는 팡그로스와 재회하여 자그마한 농장을 꾸려나간다.
그의 비참한 체험과 온갖 사회적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무위(無爲)나 염세사상에 빠지지 않고 인간사회의 개선에 의욕을 잃지 않는 정신을 “그러나 내 밭을 일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명한 맺음말로써 잘 나타내었다. 웃음을 통해서 지성에 호소하는, 명쾌하고 신랄하여 템포가 빠른 문체가 매력인 볼테르풍의 전형적인 풍자소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캉디드 [Candide] (두산백과)

 

 볼테르는 파리로 귀환한 지 1년 만인 1778년 여든네 살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는 신에 대한 맹세를 거부했으므로 기독교 의식에 따라 묻힐 수 없었지만, ‘천재에게는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린 시골 신부의 배려로 성지에 매장돼었다. 뒷날 그의 유해는 프랑스 혁명의 주체 세력들에 의해 프랑스 국가 영웅들의 묘지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팡테옹 :: 원래 루이 15세가 자신의 병이 치유된 것을 신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생트 준비에브(Saint Jenevieve) 교회로 지었으나 뒤에 나라에 공헌한 위인들이 묻히는 국립묘지 팡테옹(Pantheon)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1758년에 건물 기초가 세워졌고 프랑스혁명이 시작되던 1789년에 완성되었다. 기둥이 있는 돔의 모양은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건물 지하에는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등의 무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팡테옹 (두산백과)

 

 안타깝게도 그의 저서는 더 이상 널리 읽히지는 않는다. 대부분이 그 당시에만 해당되는 시사적인 내용인 탓이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서 주인공 캉디드는 순진하고 착한 소년이다. (프랑스 어로 캉디드는 ‘순진하다’는 뜻이다) 그는 팡글로스 박사에게 교육을 받는다. 박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있을 수 있는 세계 중 최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경제학에서 ‘팡글로스 밸류’는 팡글로스 박사에서 나온 말이다. 관료나 학자들이 장밋빛 전망으로 예상 결과를 부풀렸음을 비꼴 때 쓰곤 한다. 팡글로스의 낙천주의에 따라 캉디드는 세상을 모험한다. 하지만 악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경험하고 난 캉디드는 팡글로스의 계속된 가르침에 이렇게 대꾸할 뿐이다. “이제는 정원이나 가꾸어야죠.”

 끊임없는 의심과 검토는 성공을 가져온다. 반면, 낙천적인 예상은 방심과 실패를 낳는다.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팡글로스 박사들이 있는가?

 

 

 

19. 자연으로 돌아가라 – 루소

 열여섯 살부터 서른이 넘을 때까지,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떠도는 보헤미안의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는 방황을 시작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참회록》의 고백을 그대로 믿는다면, 청교도가 뿌리내린 제네바에서 나고 자란 루소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는 순전히 배가 고파서란다. 가톨릭교회는 개종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무료로 제공했다.

 

 디드로 :: 프랑스의 철학자·문학자.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주의 사상가이다.《맹인서간》에는 무신론의 경향을 나타내었다.《백과전서》의 편찬에 평생을 바쳤다. 대표작은《달랑베르의 꿈》,《수도녀》등이다.
랑그르 출생.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이다. 랑그르와 파리의 예수회(會)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후, 파리대학교에서 인문학·철학 등을 고학으로 전공했다. 1745년경부터 철학적인 저서를 쓰기 시작했다. 회의사상(懷疑思想)에서 출발했으나 샤프츠베리의 영향을 받아 계시(啓示)를 인정하는 이신론(理神論)으로 옮겼으며, 《맹인서간(盲人書簡) Lettre sur les Aveugles》(1749)에서는 무신론(無神論)의 경향을 짙게 나타내었다. 이 때문에 즉각 3개월 정도 투옥되었다.
이보다 앞서 1746년경 어떤 출판업자가 영국의 W.체임버스(1800∼1883) 백과사전의 프랑스어(語) 번역을 그에게 의뢰하였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백과전서 Encyclopedie》를 출판할 것을 제안하고 이에 착수하였다. 과학아카데미의 J.R.달랑베르를 감수자로 하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J.J.루소 등 당시의 계몽사상가들을 총동원하여 1751년에 제1권을 내놓았고, 21년이 지난 1772년에 본문 17권, 도판(圖版) 11권의 전서를 완성하였다. 이 《백과전서》의 내용은 종교·교회의 비판, 중세적 편견의 타파, 전제정치의 비판 등을 반영한 것이어서 도중에 수많은 탄압과 발행정지 명령을 받았으며, 1759년 이후에는 비밀리에 편집·인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이 사업에 바쳤다.
사상적으로는 18세기의 가장 철저했던 유물론자로서, 최신의 생물학이나 화학을 도입한 그의 사고 속에는 이미 진화론이나 변증법이 예고되었음을 알 수 있고, T.레싱, J.W.괴테 등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두산백과)

 

 1745년, 파리로 돌아온 루소에게는 별로 희망이 없어 보였다. 이미 서른셋이 된 감수성 풍부한 청년이 삶은 결국 가정교사로 겨우 연명하는 지식인 건달로 끝날 듯 보였다. 이즈음 그는 평생 반려자가 된 테레즈 르 바쇠르를 만난다. 테레즈는 그가 파리로 돌아와 묵었던 여관의 하녀였다. 처음에 그는 단순히 즐길 생각으로 그녀와 사귀었지만, 곧 그녀의 선하고 따뜻한 성품에 반하여 동거에 들어갔다. 정작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23년이나 지난 뒤, 그것도 둘 사이에 얻은 다섯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맡기고 나서였다. 

 

 근대 교육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루소가 다섯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보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 그가 《에밀》을 집필하게 된 동기로는 먼저 자신이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론 연구에 뜻을 두었고, 그 결과 이상적인 교육,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을 그려 냈다는 견해가 있다. 또 다섯 명의 자식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참회하는 의미로 《에밀》을 집필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주장을 입증할 만한 근거는 없다.

 

 1749년, 서른일곱의 루소에게 비로소 성공이 찾아왔다. 그는 거침없는 비판으로 감옥에 갇힌 디드로를 면회하러 가던 길에 디종 아카데미 현상 논문 공고를 우연히 발견했다. 아카데미가 내건 논문 주제는 ‘예술과 학문의 발전이 도덕의 향상에 기여하는가?’였다. 이 주제에 대한 대답은 뻔했다. 근대 과학이 싹트고 합리적 사고가 맹목적 신앙을 점차 대신하던 계몽 시대, 당연히 ‘인간의 도덕심을 향상시킨다’가 정답일 터였다. 그럼에도 루소는 정반대의 답변을 펼쳤다. 예술과 도덕은 인류에게 해악만 끼쳤다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자연 속에서 소박하고 순수한 삶을 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술과 학문은 인간을 본래의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치와 무절제로 몰아넣었다. 예술과 학문을 하는 이들은 남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물자로 한가하게 지내며 사색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예술과 학문의 결과물은 자신들의 게으름을 정당화했다. 예술과 학문은 사람들을 게으름과 무절제 속으로, 인류를 점점 더 큰 사치와 방탕으로 몰고 갔을 뿐이다.

 

 목가극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 국왕 루이 15세 앞에서 공연되기도 하였다.

- 루소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1753년, 마흔한 살의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또 하나의 문제작을 내놓았다. 짤막한 이 논문은 그해 디종 아카데미가 내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은 왜 생기며 이는 자연적인가?’라는 현상 논문 공모에 대한 응모작이었다. 이번에는 상을 타지 못했지만, 이 글은 지식인 사회에서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글에서 루소는 처음으로 자연 상태를 설명했다. 자연 상태란 문명사회가 등장하기 전의 인류 상태를 보여 주는 일종의 가설이다. 인간 사회가 왜 지금처럼 불평등과 부정의로 가득 차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에 의해 타락하기 전 인류의 모습을 먼저 가정해 보는 것이다.

 사회가 등장하기 전 인간의 생활은 ‘한 그루 떡갈나무 밑에서 배를 채우고, 시냇물을 발견하면 갈증을 풀며, 양식을 주는 바로 그 나무 밑에서 잠을 자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는 육체적 능력에서만 약간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은 없었다. 인간은 거친 자연에 맞서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성을 발휘하여 집단을 이루었고, 그 순간 불평등이 생겨났다. 우월한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열등한 자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여러 가지 제도와 관습을 만들어 냈다. 우월한 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더 큰 이득을 얻었고, 사회의 불평등은 더욱 커졌다. 결국 이성과 문명은 인류를 불평등과 부정 속으로 타락시켜 버렸다.

 

 루소는 자연 속에 은둔하며 사색에 집중할 수 있는 전원생활을 끊임없이 그리워했다. 1761년, 연애 소설 《신 엘로이즈》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루소가 이 집을 찾아오던 한 백작부인에게 느낀 연애 감정을 소설화한 것이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황홀경 속에서 쓰인’ 이 책은 나오자마자 프랑스 귀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 사고, 감정의 절제가 미덕이던 시대, 루소는 애절하고 강렬한 감정을 거침없이 분출했다. 이로써 이제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은 수치라기보다 유해이 되었다. 루소가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대접받는 이유이다.

 

 1762년 일종의 교육 성장 소설인 《에밀》이 나왔다. 이 책은 루소가 20년간의 성찰과 3년의 집필 끝에 이루어 낸 역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에밀’이라는 가상의 학생을 등장시켜 ‘자연주의 교육론’이라 할 만한 것을 내세운다. 소설 속에서 에밀은 태어날 때부터 루소가 경멸하는 대도시의 해로운 사회 풍속과 완전히 떨어져 자연과 벗하며 자란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 규칙 외에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15년간 에밀의 곁을 떠나지 않은 선생은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지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한다’. 《에밀》은 2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육체의 단련, 심신의 조화, 강제보다는 자율에 입각한 교육을 지향하는 혁신적인 교육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 계약론》에서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처럼 자연 상태에서 출발하여 정당한 국가 권력은 어떤 모습인지를 펼쳐 보인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선하고 자유로우며 행복하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으므로 계약을 통해 국가를 만든다. 계약상 국가는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이를 ‘일반의지‘라고 한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국가를 위한 일은 곧 시민들에게도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모두를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들만을 위한 독재를 하기도 한다(이것이 ’전체의지‘다). 이때, 국가는 소수를 위한 착취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시민들은 이러한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 한다. 이러한 루소의 생각은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정부에 저항할 권리를 깨닫게 해 줌으로써, 나중에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반의지 :: 루소의 저서 「사회계약론」[1769]에 나타나 있는 공익의 핵심적 개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루소(J.J. Rousseau)에 의하면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 개개인의 자유의사(自由意思)의 상호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그 계약에 의거하여 성립된 공적 인격(公的人格)의 의사가 곧, 일반의지(또는 일반의사)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일반의지란 이기적인 개인으로서의 독립성과 사익성(私益性)을 버리고 사회계약의 당사자가 되는 공적 주체(公的主體)로서의 시민의 의지, 즉 시민에 의해 제정된 각종 법규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반의지의 개념은 공익에 관한 적극적 인식(→실체설)의 입장에서 파악한 것이다.
이 의지는 각각 특수한 이해에 입각한 개개인의 의지(특수의지)의 총합에 불과한 전체의지와 구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반의지 [一般意志, general will, volonte generale] (이해하기 쉽게 쓴 행정학용어사전, 2010.11.23., 새정보미디어)
[네이버 지식백과] 일반의지 [一般意志]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그는 생전에 ‘온갖 불쾌한 일은 글쓰기에서 비롯되었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는데, 확실히 자연 속의 고독을 사랑하던 그에게 책은 모든 논쟁과 비난을 불러일으키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1778년, 농원으로 이사한 지 6주쯤 되던 날, 루소는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농원 근처의 평화로운 호숫가에 묻혔다가, 프랑스 혁명이 끝난 뒤인 1794년에 프랑스의 국가 영웅들이 묻힌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루소는 정치사상 측면에서 국민주권과 저항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은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은 이성과 합리의 잣대로 모든 일을 평가하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진정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해준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길들여져 왔다. 명예, 도덕, 수치심 등은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나의 욕구를 재단하는 도구들이다. 이것들은 삶에 질서를 주고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듯 보인다. 반면, 필요 없는 열등감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나의 삶을 억누르고 왜곡하며 비굴하게 만들기도 한다. 루소는 합리적이면서도 도덕적으로 보이는 사회의 가치 규범들이 사회와 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지를 되묻는다. 그러곤 타락한 문명 이전의 자연 상태로 상징되는 이상적이고 선한 인간의 본성을 제시함으로써, 제대로 된 삶과 사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신은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였으나 인간의 간섭으로 악하게 되었다. 인간은 어떤 땅에 다른 땅의 산물을 낳으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다른 나무의 열매를 맺으라고 이 나무에게 강요한다. 편견이나 권위, 필요와 같은 모든 사회제도는 우리들의 본성을 억제하여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살릴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 본성은 길에 난 묘목처럼 사람에게 짓밟히고 꺾이어 이내 시들어 버린다. 식물은 재배로써, 인간은 교육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대한 능력도 그 사용 방법을 모르면 무용하다.

- 루소, 《에밀》제1부 중에서

 

 

 

20.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 도덕 법칙 – 칸트

 칸트(Immanuel Kant)는 1724년 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동프로이센의 수도이긴 했지만 인구 5만 명 안쪽의 조그마한 도시였다. 칸트는 이 도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신앙심을 가지고 살긴 했지만 혐오감 탓에 교회에는 충실하지 않았다.

 

 경건주의 :: 17세기 말경 독일 루터파 교회의 정통주의적 고정화(固定化) 경향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프로테스탄트적 종교운동.
P.J.슈페너와 A.H.프랑케가 주창하였다. 슈페너는 영국의 퓨리턴(청교도)과 제네바 개혁파교의 영향을 받아 1675년에 《Pia desideria》를 저술, 그리스도교는 지성(知性)의 영위이기보다는 심정(心情)의 영위라고 하면서, 당시 루터교회의 지성주의를 공격하였다. 
경건주의는 교회에 전면적인 개혁을 가져오지 못하였으며 그 결점은 개인주의에 기울고 조직이 결여된 데 있었으나, 루터파 신학의 약점을 드러내고 18∼19세기 신학 부흥에의 길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성서주의, 엄격한 종교생활, 금욕적 도덕의 실천 등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건주의 [pietism, 敬虔主義] (두산백과)

 

 사강사(私講師) :: 독일의 고유한 제도로 정부에서 주는 정기적인 급료 없이 수강료와 학생 지도비만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대학 교원을 말한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밖으로 나가 보지 않았지만, 엄청난 독서와 상상력으로 어떤 탐험가보다도 세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런던에 쓰레기통이 몇 미터 간격으로 놓였는지까지 꿰고 있어 런던 출신으로 오해를 받았다.

 강사 일을 하면서 칸트는 독특한 교육 원칙을 하나 세웠다. 중간 수준의 학생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바보는 도와줄 길이 없고 천재는 자기 힘으로 해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유명한 하루 시간표는 다음과 같다. (칸트는 일생에 단 두 번 일과표에서 벗어났다. 한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또 한번은 프랑스 혁명 소식이 실린 신문 기사를 읽다 일과표를 어겼다.)

 4시 55분, 하인 람페가 ‘일어나실 시간입니다.’라는 말로 칸트를 깨운다. 칸트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들어주지 말라고 명령했기에, 그가 일어나기 전까지 람페는 절대 자리를 뜨지 못한다. 5시 기상, 홍차 두 잔을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잠옷, 덧신, 수면용 모자를 쓴 채 강의 준비를 한다. 7~9시, 정장을 입고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한다. 9시~12시 45분, 집으로 돌아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집필을 한다. 12시 45분, 점심시간에 초대한 손님들을 작업실에서 맞는다. 다시 정장차림. 오후 1시~3시30분, 점심시간이자 하루 중 유일한 식사시간. 오랜 시간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오후 3시 30분, 산책을 간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변함이 없다. 마을 사람들은 칸트의 산책 시간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 저년, 여행기 등 가벼운 책을 읽는다. 오후 10시, 절대적 안정 속에 잠자리에 든다.

 

 칸트의 시대는 교회 권위에 억눌려 있던 과학이 비로소 꽃피던 시기였다. 과학의 빠른 발전은 신과 교회를 위협했다.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합리론은 신이 아닌 인간 이성이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준다고 장담했다. 경험론은 관찰과 경험에 의한 과학이 세계를 정확히 알려 주리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흄의 회의론은 이런 밝은 전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인간 지성을 분석하여 이성과 경험은 신학적 지식만큼이나 믿을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먼저, 합리론이 주장하는 이성적 지식은 결코 그 자체로 확실하지 않다. 이성적 지식은 전부 경험에서 추상 작용을 거쳐 이끌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성적 지식의 근거가 되는 관찰과 경험도 정확하지 않다. 경험이란 항상 틀릴 수 있지 않은가. 인과 법칙조차도 그렇다. 그렇다면 과학이 근거하는 이성과 경험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칸트는 흄의 사상 덕분에 이성의 합리성이 세계의 모든 것을 밝히리라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흄의 회의론을 극복하고 과학의 확실성을 세우기 위해 무려 11년 동안 고민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781년, 51세의 나이에 《순수이성비판》을 펴냈다. 

 

 멘델스존 :: 독일의 계몽사상가, 통속철학자,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대표자의 한 사람. 음악가 멘델스존의 조부(祖父). 스피노자, 로크, 샤프츠베리, 라이프니츠, 볼프 등의 철학을 연구했으며, 레싱과 교우하고 칸트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계몽주의자로서의 그는 종교상의 차이로 시민적 평등을 침해하는 것에 반대하고 신앙의 자유를 옹호했다. 철학의 과제는 일반인이 올바르다고 하는 것, 그 중에서도 특히 신의 존재, 영혼의 불멸을 이성에 의해서 엄밀하게 증명하는 것이고, 볼프의 견해에 따라서 세계의 모든 것이 다른 것, 주로 인간의 수단으로서 존재한다는 초월적 합목적성을 신의 존재(및 위대함)에 대한 증명이라고 간주했다. 
또한 그는 사유와 의지 외에 감각(감정 Empfindung)을 제3의 능력으로 내세우고, 슐처(J.G. Sulzer, 1720~1779)를 따라서 정신능력 삼분설의 단서를 이루었다. 1763년에는 칸트와 경쟁하여 베를린 아카데미의 현상논문에서 이겼는데, 이윽고 칸트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는 칸트'라고 평하기에 이르렀다. 야코비, 레싱의 평신론 논쟁에 있어 레싱을 옹호했다.
손자로 음악가 멘델스존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멘델스존 [Moses Mendelssohn]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흄의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한 칸트의 작업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흄이 무너뜨린 경험의 확실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에 맞서 신과 신학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세계를 과학의 세계와 과학이 밝힐 수 없는 세계로 나누었다. 과학의 세계에서 칸트는 인간의 경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흄이 무너뜨린 경험의 확실성을 다시 세웠다. 흄은 경험의 확실성을 바깥 대상에 두어서 회의론에 빠졌다면, 칸트는 그 확실성을 우리의 정신 경험을 만들어 내는 구조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의 경험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만들어지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경험을 만들어 낸다. 똑같은 장미꽃이라도 딱정벌레와 토끼에게 장미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눈의 생김새와 두뇌 구조가 다른 탓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과 열두 개의 범주라는 지성의 구조를 사용하여 인간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열두 개의 범주라는 지성의 구조를 사용하여 인간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 지성의 구조는 경험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여기서 경험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경험도 확실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흄이 일으켰던 이성과 경험의 위기, 과학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이와 반대로 칸트는 신과 종교는 과학이 밝힐 수 없는 세계에 있다고 함으로써 과학의 위협으로부터 신을 지켰다.

 

 쉰한 살에 《순수이성비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칸트의 글쓰기는 《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을 거치며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책들에서 칸트는 과학 시대의 윤리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다.

 과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인과 법칙에 따라 설명한다. 따라서 돌이 날아가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 돌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 돌은 인과 법칙에 따라 그렇게 움직였을 뿐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인과 법칙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이다(칸트는 자연현상이나 과학에 대해서는 인과 법칙을 적용했다). 그래서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인간이 자유로운지, 왜 도덕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지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다. 자유와 도덕은 신과 종교가 있는 세계, 즉 과학이 밝힐 수 없는 세계에 있는 까닭이다. 신에 대해 과학적 질문을 던질 수 없듯, 도덕에 대해서도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한다. 이익과 이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양심이 시키는 의무에 따라 해야 한다는 거다. 이런 칸트의 윤리학은 의무의 윤리학이라고 불린다.

 인간에게는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답하는 이성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실천이성이다. 실천이성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의무 의식이다. 의무 의식에 따라 행동의 결과에 관계없이 규칙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주위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단지 동정심이 일어서, 남을 돕는 게 좋아서 돕는 일은 참된 도덕적 행동이 아니다. 종점심도 없고 기쁨도 얻지 못하지만 도와야 한다는 의무 의식에 따라 남을 돕는 행위가 참된 도덕적 행동이다. 도덕적 행위의 원칙인 도덕 법칙은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도 없이, 다만 ‘...해야 한다’라는 정언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정언 명령 :: 칸트 철학에서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을 가리킨다. 칸트는 의지에 주어지는 모든 명령을 두 가지 종류, 즉 가언적인 것과 정언적인 것으로 구별한다. 가언적 명령이,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다른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이라면, 정언적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이다.
즉 가언 명령이 기술적인 숙련의 규칙이거나 실용적인 영리함의 충고라면, 정언 명령은 그 자체로 윤리성의 법칙이다. 법칙의 보편성과 이 법칙에 맞게 행위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포함하고 있는 정언 명령의 순전한 개념이 자신의 정식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언 명령 [kategorische Imperativ, categorical imperative, 定言命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정언 명령 :: 행위의 결과에 상관없이 행위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도덕적 명령. 나 자신의 격률 즉 생활 신조가 모든 사람의 것이 되어도 좋다고 인정될 때 그것이 곧 도덕 법칙이 되는 것이다. 정언 명령에 반대되는 것이 조건부 명령 즉 가언 명령이다. 예를 들어 ‘상을 받고 싶으면 어려운 친구를 도와라’처럼 ‘...한다면’이란 조건이 없으면 명령이 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의 묘비에는 《실천이성비판》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적혀 있다.

 더욱 빈번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그 두 가지 것은 나의 심정을 경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운다. 즉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

 

 칸트는 자연과학과 윤리를 완전히 다른 길로 나눈다. 인간의 윤리 의식은 자연법칙을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동물은 자연이 준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생존 본능조차 뛰어넘어 윤리를 좇기도 한다. 전철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뛰어드는 이들을 떠올려 보라. 이들의 행동은 자기보존이라는 생물학의 상식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과학과 윤리 의식은 같이 나아가는 측면이 있다. 평등이나 인권 개념도 그렇다. 원시 부족사회에서 인권 의식이 있었을 리 없다.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라고 말한다. 물질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도덕 윤리도 따라 변한다는 뜻이다. 

 

 

 

21. 절대정신의 철학자 – 헤겔

 질풍노도 운동 :: 1770년에서 1780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운동.
‘질풍(疾風)과 노도(怒濤)’로 번역된다. 이 명칭의 유래는 F.클링거의 동명(同名) 희곡(1776)에서 온 것이다. J.헤르더를 지도자로 하여 계몽주의 사조에 반항하면서 감정의 해방 ·독창 ·천재를 부르짖은 이 젊은이들에 의한 운동은 사회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었던 까닭으로 그 영역은 문학분야에만 한정된 채 단기간에 소멸되는 길을 걸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 문학운동의 주요한 장르는 시와 희곡이었으며, 작가로서는 괴테, 실러, J.렌츠, 클링거, 바그너, F.뮐러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 실러의 《군도(群盜)》(1781) 《간계(奸計)와 사랑》(1784)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슈투름 운트 드랑 [Sturm und Drang] (두산백과) 

 

 헤겔(G. W. F. Hegel)은 대부분의 책을 독일어로 썼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그의 책은 ‘헤겔어’로 쓰여졌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한다. 그만큼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셸링 :: 독일 고전철학의 대표자 중 하나. 예나, 뮌헨, 베를린 등의 대학교수를 역임. 피히테의 자아를 기초로 하는 주관적 관념론에 대하여, 근원적인 '절대자'를 인정하는 범신론적인 객관적 관념론을 주장. 무의식적-정신적 절대자에서 정신과 자연의 구별이 나타나는 것은 이들 양극이 양적 차이를 가졌기 때문이며 이것을 포텐츠(독 Potenz)라고 하는 동일철학(同一哲學)적인 생각을 보였다. 정신으로 나타나는 절대자(絶對者)에 관해서는 선험적 관념론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며, 신비적인 지적 직관의 대상인 예술철학을 최고봉에 놓았다. 
또 자연으로 나타나는 절대자에 관해서는 자연철학(自然哲學)이 성립한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극히 신비적이고 관념론적인 형태로 체계화했다. 그러나 자연의 무기물에서 생명에로의 발전과 관련을 통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은 정당성이 있다. 후기의 그의 사상은 중세적인 신화와 계시의 종교 철학으로 퇴화하였고, 당시의 반동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셸링 [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횔덜린 :: 독일의 시인. 잃어버린 황금시대에 대한 한탄하고 암흑시대에 신의 재림을 믿으며 신들의 재림을 노래한《엠페도클레스의 죽음》(1797∼1799), 《디오티마》 등의 걸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횔덜린 (두산백과)

 

 이 시절 헤겔의 관심은 전공인 신학보다는 조국 독일의 낙후된 현실에 있었다. 혁명의 새 시대가 왔는데도 독일은 자유, 평등, 박애 같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수백 개의 제후국으로 나뉜 후진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바람직한 상태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에 이르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고민 끝에 쓴 책이 《민족 종교와 기독교》이다. 이 책에서 그는 민족정신을 아들에 비유했다. 그리고 민족정신의 아버지는 시대ㆍ역사이며, 어머니는 정치이다. 유모, 곧 아들의 교육자는 종교이고 예술은 유모의 보조 역할을 한다. 그는 이런 비유를 통해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철학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히테 :: 1792년에 예나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793년 한(Johaanna Hahn)과 결혼하고 1797년에 ‘지식학(知識學:Wissenschaftslehre)’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논고를 발표하였다. 1798년 《철학잡지》에 포르베르크의 논문에 서문으로 발표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무신론이라는 의혹을 받아, 유명한 무신론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다음 해 예나대학교를 물러났다. 그 후 베를린에서 슐레겔 형제를 비롯하여 낭만파 사람들과 교유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신비적·종교적 색채를 더해 갔으나, 동시에 시국(時局) 정치문제에도 활발한 발언을 시도하였고, 특히 나폴레옹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의 위기에 처하여 행한 《독일국민에게 고함》(1807∼1808)이란 강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종군간호사가 된 부인에게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다.
피히테의 철학은, 칸트가 아직도 통일을 얻지 못한 이론이성(理論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을 오로지 후자에 중점을 둠으로써 통일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실천적·주관적 관념론이며, 프랑스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근대적 자아를 자율적인 형이상학적 원리에까지 지양하였다. 그것은 또 F.W.J.셸링에서 G.W.F.헤겔로 계승된 독일 관념론의 발전의 길을 터놓는 계기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히테 [Johann Gottlieb Fichte] (두산백과)

 

 실러 :: 독일의 시인·극작가.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재학중에 쓰기 시작한 《군도(群盜)》를 극장에서 상연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었고, 이는 독일적인 개성 해방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독일의 국민시인으로서 괴테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문학의 2대 거성으로 추앙받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리드리히 실러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두산백과)

 

 대표작 《정신 현상학》에서 헤겔은 논리학, 과학, 신학을 꿰뚫는 거대한 철학 체계를 구상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과 다르게, 프랑스 혁명을 ‘어떤 내실도 갖추지 못한 죽음, 분열이고 양배추 대가리를 둘로 동강 친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그가 비판한 것은 현실로 나타난 무질서였을 뿐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혁명의 의미도 모르고 날뛰며 약탈과 착취를 일삼았고, 혁명이 가져올 사회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흥분하고 열광했다. 하지만 헤겔은 혁명의 본질적인 면을 파악하려 애썼다.

 모든 사건에는 본질적인 면이 숨겨져 있다. 헤겔에게 그 본질적인 면이란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이고, 인간의 역사는 이 절대정신이 그 본질을 점차 분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절대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다. 역사는 이성적인 자유를 점차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고대 국가에서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서양 중세에는 군주뿐만 아니라 봉건 제후들도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발전은 절대정신이 아닌, 몇몇 뛰어난 영웅들의 활약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웅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절대 정신이 이들을 조정하고 있다. 즉 헤겔은 절대정신이 영웅을 선택해 자신을 실현시킨다고 본 것이다.

 《정신 현상학》이 완성될 무렵, 나폴레옹의 군대가 예나를 침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 예나에 입성하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감격에 겨워 ‘말을 탄 절대정신(세계정신)을 보았다’라고 적었다.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로 확대한다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등에 업은 나폴레옹은 그에게 절대정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모든 현실과 역사의 전개 과정을 ‘유(有)-무(無)-생성(生成)’의 원리인 변증법으로 파악하면서 독자적인 이론을 펼쳤다.

 변증법은 정(긍정)-반(부정)-합(부정의 부정)의 형식이다. ‘이 컵이 둥글다’가 정명제라면, ‘이 컵은 둥글다’와 ‘이 컵은 둥글지 않다(장방형으로 보인다)’는 반명제가 된다. 마침내 ‘이 컵은 둥글다’와 ‘이 컵은 둥글지 않다(장방형으로 보인다)’는 ‘이 컵은 원통형이다’라는 합명제가 된다. 정명제는 반명제에 의해 부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명제가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반명제는 오히려 정명제를 더욱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합명제는 정명제와 반명제의 내용을 종합하여 더 확실한 사실을 보여 준다. 변증법의 성격은 이렇듯,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며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세 번째 대표작 《엔치클로페디》는 영어로 ‘encyclopedia’ 즉 백과사전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헤겔은 절대정신과 변증법의 논리로 그 당시에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학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철학 체계를 완결 지었다.

 

 베를린 대학 교수 시절의 헤겔은 프랑스 혁명에 열광하던 청년 시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혁명 이후 계속된 혼란을 바라보며 공허한 자유 이념의 한계를 깨닫고, 시대를 구원할 대안을 국가에서 찾았다. 헤겔은 당시 출현한 시민 사회의 혼란은 이념ㆍ정신의 부재 탓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시민 사회에 부족한 이념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국가라고 생각했다. 

 헤겔에게 이상적인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가 함께 실현되는 사회이다. 그는 이 공동체를 ‘인륜(sittlichkeit, 人倫)’이라 불렀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과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데서 최고의 인륜이다. 국가는 나아가야 할 이념을 제기하면서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가 인륜이 되는 모델을 프로이센에서 찾고, 인륜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입헌군주제를 제안했다.

 

 입헌군주제 ::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일정한 제약을 받는 정치체제. 제한군주제라고도 하며, 절대군주제·전제군주제와는 대립되는 개념이다. 군주제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된 통치형태이다. 시민혁명 이전에는 모든 국가에 있어서 군주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시민계급의 대두로 막강한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투쟁이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왕권과 의회라는 두 국가기관의 병존·타협의 형태로 입헌군주제가 출현하였다. 그러므로 입헌군주제는 각국의 근대국가 형성기에 있었던 역사적·정치적 상황과 그 후의 군주와 의회와의 역학관계의 차이에 따라 국가마다 그 내용과 성격을 달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입헌군주제 [constitutional monarchy, 立憲君主制] (두산백과)

 

 ‘진리는 언제나 여러 가지로 이야기 된다.’

-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의 한 사람으로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지니고 국가에 공헌하였다. 123편의 작품을 씀으로써 비극 경연대회에18회나 우승하였고 대표작은 《아이아스》, 《안티고네》 등이 있다. 상연 형식도 연구하였으며, 합창단과 배우의 수를 늘려 성격을 부각시킴으로써 비극적 긴박감을 높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포클레스 [Sophocles] (두산백과)

 

 역사란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

 헤겔의 주장은 한마디로 ‘역사란 절대 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조각 작품을 예로 들어 보자. 처음에 조각 작품은 예술가의 머릿속에만 있다. 그러다 예술가가 돌덩어리에 칼을 대는 순간부터 상상에 지나지 않았던 작품은 점점 눈에 보이는 실체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절대정신의 자기실현’도 이와 똑같다. 절대정신이란 ‘신의 섭리’와 비슷하다. 절대정신은 처음에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역사를 통해 점점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간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추상적인 이상이 역사를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사례였다. 이와 같이 절대정신은 마치 조각가가 머릿속의 구상을 돌덩이를 파내며 구현해 나가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모습을 역사 속에 점점 더 완선해 나간다. 조각가는 결국 처음 상상했던 모습대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와 똑같이 절대정신도 마침내는 변화와 투쟁의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완성시킬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정신이 역사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바동거리고 살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시저,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영웅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이성의 간교한 지혜(간지, 奸智: 간사한 지혜)가 작용한 결과다. 월급쟁이는 먹고살기 위한 자신의 고단한 일이 세계 경제 변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 그래도 변화는 이런 세세한 작업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때가 맞지 않으면’ 결코 영웅이 출현할 수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절대정신은 개개인과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거다.

 

 

 

22. 지극한 사랑이 낳은 염세주의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이름 앞에는 보통 염세주의자라는 말이 붙는다.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의 태도가 원만하지 못한 가정 분위기와 어머니와의 잦은 불화에서 출발했으리라 추측하곤 한다.

 어머니와의 잘못된 관계 때문인지 그는 여자를 경멸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여자란 불행의 근원이며 참된 감정이나 이해력을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보았다.

 

 슐체 :: 독일의 동물학자·세포학자. 1861년 세포의 근대적 개념을 확립하여 ‘세포는 핵을 가지는 원형질의 덩어리이다’라는 정의를 제출하였다. 또 척추동물 신경계의 발생학적 연구, 조직학 연구 방법의 진보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프라이부르크에서 출생. 베를린대학을 졸업, 1854년 본대학 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현미경적 연구에 뛰어나 1861년에 세포의 근대적 개념을 확립하여 ‘세포는 핵(核)을 가지는 원형질(原形質)의 덩어리이다’라는 정의를 제출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의 F.뒤자르댕이 1835년에 “세포내용물에 사르코드(sarcode:筋肉樣物質)가 있다”고 하였고, 독일의 H.von 몰은 “식물에서도 세포가 생명의 중심이며 그 내용은 원형질이다”라고 하였는데, 슐체는 사르코드와 원형질은 동일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밖에 척추동물의 신경계의 발생학적 연구, 그리고 조직학 연구방법의 진보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또 그는 예술가적인 면도 있어서 젊었을 때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현미경 곁에는 항상 바이올린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구더기류, 물고기의 발전기, 망막(網膜)의 해부생리, 원생동물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주요저서에 《근족충(根足蟲) 및 식물세포의 원형질》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막스 슐체 [Max Johann Sigismund Schultze] (두산백과)

 

 쇼펜하우어는 슐체를 통해 ‘신과 같은 플라톤과 경탄할 만한 칸트’의 사상을 알게 되었고, 플라톤과 칸트는 그 뒤 평생토록 그를 인도하는 두 별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이며 진정한 지식은 이데아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플라톤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진정한 진리를 알려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를 넘어 세상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칸트에게서는, 우리의 지식과 삶에 대한 태도는 외부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거나 결정되지 않으며, 주체인 인간 의식과 태도에 따라 달라짐을 알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 :: 슐레지엔 브레슬라우 출생. '근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개혁파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명을 따라 소년시절 헤른푸트 형제단(兄弟團) 학교에 입학, 경건주의적(敬虔主義的)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 형제단의 신앙에 회의를 품고 1787년에 할레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2년간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다음 동 프로이센 슈로비텐의 도나 백작(伯爵)집 가정교사가 되었다.
5년 후 베를린의 자선병원 목사가 되어 의사인 마르크스 헤르츠의 살롱에 출입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낭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종교론》(1799)을 썼다. 이 책은 '종교 멸시자 중의 교양인에게 부치는 강연'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듯이, 당시 교양인들의 종교적 무관심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서, "종교는 사유(思惟)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며, 우주의 직관(直觀)이고 감정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형이상학과도 다르고 도덕과도 다른 특이한 독자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였다.
1804년 할레대학교 교수로 초청되었으나, 얼마 후 나폴레옹군(軍)의 침입으로 대학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베를린으로 가서 훔볼트 형제와 J.G.피히테 등과 더블어 베를린대학교 창립에 진력하고, 이 대학 신학부의 교수로 끝까지 머물러 있었다. 이 시기의 그의 대표적 저작으로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일명 신앙론)》(1821∼1822)이 있는데, 여기서는 종교의 본질을 절대적 의존감정으로 규정한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교 교의학(敎義學)을 전개하였다.
그는 교편을 잡는 한편, 설교가로도 활약하였는데, 특히 해방전쟁 때는 설교를 통하여 민족주의를 고취하여 애국설교가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는 또한 루터파와 개혁파의 통합운동에도 힘써 신학분야뿐만 아니라, 철학·교육학·미학 등의 영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주요저서에 《독백록(獨白錄)》(1800) 등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두산백과)

 

 ‘만약 그대가(쇼펜하우어) 자신의 가치를 즐기고자 한다면, 그대가 먼저 세계가 가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괴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 자체로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당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이 세계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학문은 이것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인간은 점점 더 행복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는 결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움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다르면, 우리 인간의 신체도 객관화된 의지일 뿐이다. 자연과 인간을 움직이는 의지는, 비록 겉으로 볼 때 그 차이점을 잘 알 수 없지만 원리적으로는 모두 같다. 의지란 곧 충동과 욕망을 뜻한다. 식물이 자라고 돌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고, 동물이 살기 위해 투쟁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맹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해 세상 모든 것들은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충동과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의지(욕망)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므로, 채우고 도 채워도 여전히 생겨난다. 인간은 그렇게 충족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늘 고통을 받는다. 따라서 그는 삶은 맹목적인 의지일 뿐이고 세계는 근원적으로 악하며 인생살이는 결국 고통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세상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에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결심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충동과 욕구를 거스르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면 인간은 점점 더 행복해지리라 믿었던 과학 기술적 세계관에 대한 최초의 반성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의 성공은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닌, 사상 전체로 본다면 부록에 가까운 얇은 책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 책 제목도 《부록과 보유》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의 성공으로 사람들은 거구로 그의 대표작을 읽게 되었고 비로소 쇼펜하우어가 하나의 사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역설적으로 인간이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높은 기대치에서 나온다. 염세주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비판 정신에 바탕을 두어야만 의미가 있다.

 

 가로막는 장애가 없는 한, 강물은 조용히 흘러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나 동물도 의지라는 장애물이 없다면 삶을 의식하지 않고 생명을 느끼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갈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주목하고 또 그것을 생각하는 까닭은 우리의 의지가 장애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건강할 때 우리는 몸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구두가 작아 발을 죄면 그 아픔은 금방 느낀다. 또, 사업이 순조로울 때는 별 생각이 없지만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작은 일에도 신경이 쓰인다. 이처럼 편안함과 행복은 우리에게 소극적이지만 괴로움은 적극적이다. 이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다면, 남을 잡아먹는 동물의 쾌감과 남에게 잡혀 먹히는 동물의 불쾌감을 견주어 보면 될 것이다.

- 쇼펜하우어, 《부록과 보유》1장에서

 

 

 

23. 보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 – 콩트

 허수아비는 아무리 때려도 저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대상을 세워 놓고 마구 공격하는 것을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한다.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실증주의의 창시자로 불린다. 실증주의란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것만 탐구하려는 학문적 견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증적인 것만을 중시하는 과학 문명은 환경 파괴 등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모든 것을 측정 가능한 형태로 계량화하려는 실증주의는 도저히 점수화할 수 없는 많은 가치들을 망가뜨리는 폐해의 근원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 파리에 있다가 1976년 팔레조(Palaiseau)로 이전되었던 프랑스 국방부 산하의 공업대학.
파리공과대학·국립이과학교라고도 한다. X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의 국가 엘리트 양성코스인 그랑드 제콜(grandes ecoles)의 하나로, 국방부 산하의 교육기관이다. 1794년 프랑스혁명 정부 인사인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와 가스파르 몬제(Gaspard Monget)가 기술계 고급장교를 배출하기 위해 'Ecole centrale des travaux publics'라는 이름으로 설립, 1년 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1805년 나폴레옹 1세가 파리 중심부에 있는 파리의 문교(文敎)지구인 라틴구(區) 카르티에 라탱(Quartier Latin)에 'Ecole centrale des travaux publics'를 모체로 하여 군사학교인 'Montagne Sainte-Genevieve'로 다시 설립하였다. 1970년 국방부 산하의 국립 민간교육기관이 되었고, 1972년 처음으로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였다. 1976년 캠퍼스를 파리 교외의 팔레조(Palaiseau)로 이전하고 2000년 기존의 3년 교육과정을 4년으로 바꾸고 군사훈련 기간을 단축하는 내용의 새로운 커리큘럼을 발표하였다.
프랑스의 수재들이 모이는 대학으로, 교훈은 '조국, 과학, 영광을 위하여'이다. 고급 국가공무원, 간부급 경영인이나 엔지니어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지망하며, 나폴레옹 시대부터 기술계 장교들을 우대하던 전통에 따라 재학생들은 매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 기념일 행사 때 각군 대표와 사관생도의 선두에 서서 행진을 한다. 2004년 영국의 《타임스》지가 선정한 세계대학 순위에서 27위를 차지하였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베크렐과 푸앵카레,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모누리, 전 프랑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 우주비행사 장 프랑수아 클레뷔 등이 졸업하였다. 졸업생은 'X1978'와 같이 대학교의 별명인 X가 붙은 고유의 졸업연도를 부여받는다.
교육과정은 10개 학과와 23개 실험실로 이루어진다. 고등학교에서 10%의 우수학생이 그랑드 제콜 준비반(Prepa:프레파)에 진학하고, 그 중 10%만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학생들은 장교의 신분으로 1학년 때 8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은 후 2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전공과정을 밟고 4학년 때는 회사에 들어가거나 다른 대학교에서 PhD 프로그램 등을 이수한다. 면적은 54만 4764㎡이다. 국방부 산하조직이므로 교장도 현역 대장 중에서 국무회의를 거쳐 임명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콜폴리테크니크 (두산백과)

 

 콩트는 실증적인 과학 정신을 프랑스 혁명으로 어지러워진 사회를 다잡을 원리로 삼았다. 전에는 《성경》말씀이나 피의 순수성이 사회의 지도 원리였다면, 이제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생각이 사회를 이끌어 갈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 시몽 ::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가. 역사는 지속적으로 진보한다는 역사의 발전적 전개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비산업 계급과 산업 계급이 투쟁하던 과거를 개선, 양자가 협력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주요 저서에 《산업론》등이 있다.
파리 출생. 백작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달랑베르를 비롯한 계몽주의사상가들의 영향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미국독립전쟁에 참가하여 프랑스의 육군 대령이 되었다. 종군중에 미국의 산업발전을 몸소 보고 충격을 받아, 귀국 후에는 군적에서 떠났고, 프랑스혁명 때에는 자발적으로 작위를 포기하였다.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반혁명파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총재정치 시대에 석방되었다. 그 후, 국유지 매매로 거부가 되자 이 재산으로 과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재산을 탕진, 만년의 20년간은 빈곤 속에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부단히 진보하는 것으로 보고, 새로운 사회체제는 선행하는 사회체제보다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역사의 발전적 전개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비산업 계급인 봉건영주와 산업적 계급의 투쟁으로 점철된 과거 수세기의 프랑스사(史)를 개선하여, 그 양자가 협력 ·지배하는 계획생산의 새 사회제도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자기의 학설을 ‘신그리스도교’라고 부르고 새로운 사회는 설득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실증적인 사회연구 태도는 제자인 콩트에 의해 계승되어 실증주의 사회학으로서 결실을 맺었고,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로 《산업론 L’Industrie ou Discussions politiques, Morales et philosophiques…》(1817)《정치론》(1819) 《산업체제론 Du systeme industriel》(1821∼1822) 《신(新)그리스도교 Nouveau Christianisme》(1825)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클로드 생시몽 [Comte de Saint-Simon] (두산백과)

 

 푸리에 ::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 오웬과 함께 3대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한 사람. 자유롭고 합리적인 것이라 생각되었던 시민사회가 프랑스 혁명이 실현되자마자 여러 가지 모순을 드러냈다. 이것은 근로자에게는 부자유스럽고 불합리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는 자기의 생활 체험을 토대로, 이 자본주의 사회의 각종 모순, 특히 상업이 갖는 허위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가 본 바로는 봉건제는 타도되었지만, 상업적 봉건제는 만연하여, 그는 상업을 흡혈박쥐, 독수리라 부르고, 그것을 문명 사회의 약점이라 보았다. 그는 프랑스 유물론으로부터, 환경이 인간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을 받아들여 이상적인 사회를 조화주의의 사회라고 생각, 농업을 기초로 한 공산주의적 생산협동제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800인을 단위로 한 팔랑즈(phalange)라 불리웠다. 그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은 날카로운 것이었으나, 그것은 오로지 유통 부문에 머물렀고, 생산 과정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통찰도 결여되었으며, 이상사회의 실현도 교양 있는 계급의 자각을 기대한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푸리에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1826년, 스물여덟 살의 콩트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실증철학 강의를 열었다. 이미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한 뒤라 파리 지성인들 사이에서 그는 유명 인사였기에, 푸리에 등 최고의 석학들이 강의에 몰려들었다. 이후 1842년까지 실증철학 강의는 계속됐고, 그때마다 책이 한 권씩 나왔다. 그 내용은 최종적으로 6권으로 된 《실증철학 강의》로 출간되었는데, 여기에 콩트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콩트는 인간 정신의 발전을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번째 단계는 ‘신학적 단계’다. 이 수준에서 인간은 자연현상을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 식으로 한다면 무당 말만 믿고 병 치료를 위해 푸닥거리하는 것과 같은 단계가 될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형이상학적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이성이 신앙을 대신한다. 그러나 증명할 수 없는 법칙, 허구적인 논리가 세상을 지배할 뿐 진정한 과학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세 번째 단계는 ‘실증과학의 단계’다. 비로소 인간은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며, 어떤 현상이 반복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법칙을 끌어낸다.

 콩트는 세상의 모든 것은 실증과학의 단계에 이르러서만 제대로 설명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학문을 수학ㆍ천문학ㆍ물리학ㆍ화학ㆍ생물학ㆍ사회학 순으로 배열했다. 이 순서에서 앞의 것은 뒤의 학문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곧 수학이 있어야 천문학이 있으며, 화학과 물리학이 뒷받침되어야 실증적인 생물학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콩트는 이런 식으로 쌓아 가다 보면 정신이나 종교에 기대어 설명하던 사회와 삶의 원리도 실증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회는 이런 실증과학 정신으로 무장한 산업적 엘리트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45년 제자인 막시밀리앙 마리를 만나러 갔다가 그의 여동생인 클로딜드 드 보와 열렬한 연애에 빠졌다. 안타깝게도 콩트가 더없이 좋은 해라고 부른 이 행복한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보와의 사랑과 그녀의 죽음은 콩트의 사상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과학적 분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른바 ‘인류교(L’Humanite)’를 구상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런 믿음은 후반기 사상의 결정판이자 현대 사회학의 뿌리가 되는 《실증 정치학 체제》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과거에는 교회와 종교적 믿음이 유럽 사회를 통합하는 원리였다고 말한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교회의 권위는 흔들렸고, 더 이상 종교는 사회의 지도 원리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콩트는 새로운 종교를 내세웠는데, 비판자들이 하느님 없는 가톨릭교라고 비아냥거리는 인류교가 그것이다.

 인류교에서 그는 하느님의 자리를 ‘대존재(大存在)‘로 대신했는데, 그 대존재란 바로 인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른바 실증적 신앙을 강조하여, 사회는 과학에 의해 설계되고 이끌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역할을 할 사람들은 산업적 엘리트들이다. 한편 그는 남을 위한 삶을 산 사람들만 인류에 포함시켰고, 이기적인 자들과 자살자들은 기생충의 범주에 넣고 비난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개인들은 인류 공영이라는 큰 가치를 지향한다. 콩트는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높은 가치는 사랑과 봉사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빈축을 샀지만, 그의 실증주의 이론만큼은 널리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은 영국에까지 알려져, 공리주의자인 밀도 콩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사상사 계보를 그릴 때 반드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윤리 책에 등장하는 공리주의ㆍ실용주의 같은 주요 사상들은 모두 그의 실증적이고 사회 지향적인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사상은 그 시대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철학자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기독교의 《성경》은 사막 문명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막의 음침한 골자기’라는 구절을 예로 든다. 우리에게 골짜기는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곳이다. 결코 죽음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더구나 쉽게 썩지 않는 사막의 기후는 모든 것은 태어나서 자라고 죽음으로 끝난다는 직선의 시간관을 낳았다. 반면, 따뜻한 지방에서는 태어난 모든 것은 죽고 썩어서 다시 새로운 생명을 위한 양분이 된다. 윤회라는 순환하는 시간관을 갖게 되는 이유다. 

 

 

 

24.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 벤담

 블랙스톤 :: 영국의 법학자, 왕좌(王座)재판소·민소 재판소의 재판관. 산업혁명 이전까지의 영국법 전반을 체계화하고 해설한 《영법석의(英法釋義)》를 써서, 영국법학의 학문성을 높이고, 독립전쟁 전후의 미국법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고, 1746년 변호사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이 크게 발휘된 것은 1758년 모교에서의 영국법 강의에서였으며, 이 강의를 바탕으로 《영법석의(英法釋義) 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1765∼1769)를 저작 ·출판하였다. 이 책은 산업혁명 이전까지의 영국법 전반을 체계화하고 해설한 것인데, 이로 인해서 영국법학의 학문성이 높아졌고 또 독립전쟁을 전후한 미국법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 책이 획기적이며 권위 있는 전적(典籍)으로 평가되는 까닭도 바로 그런 점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윌리엄 블랙스톤 [William Blackstone] (두산백과)

 

 벤담(Jeremy Bentham)은 블랙스톤의 법률 이론이 단지 현상 유지를 위한 것이라 비판한다. 법률은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바뀌어야 한다.(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리킨다)

 

 셸번 :: 영국의 정치가. 미국독립전쟁 말기인 1782년 내무장관에 이어 수상이 되면서 전쟁을 종식시켰으나, 이듬해 2월 정적의 공격을 받고 실각하였다. 1784년 후작이 되었다. 미술품, 고본의 수집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J.프리스틀리, J.벤담과 깊은 교유를 갖는 등 매우 진보적인 정치가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윌리엄 셸번 [2nd Earl of Shelburne] (두산백과)

 

 뒤몽 :: 스위스의 정치가·저술가. 제네바 출생. 1782년 보수파의 압박으로 고향을 떠나, 페테르스부르크를 거쳐 1786년 런던에 건너갔다. 1789~1790년 파리에 머물다가 프랑스혁명에 관계하고, 잡지를 편집하며 H.미라보를 도왔다. 1814년 제네바로 돌아와 시의회(市議會) 지도자로서 법제정비(法制整備)에 힘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에르 에티엔 루이 뒤몽 (두산백과)

 

 뒤몽은 비밀선거, 보통 선거 등을 주장하는 벤담의 사상이 상당히 혁명적임을 간파하고, 나중에 벤담의 저작을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프랑스에 전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벤담의 사상은 뒤에 프랑스 혁명을 통해 유럽에 알려졌다.

 

 《고리 대금을 위한 변론》은 주로 돈을 빌려 주고 받는 이자 수입에 대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자 수입을 죄악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벤담은 이자를 노리는 금융 거래는 오히려 경제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 이자율을 제한하려는 의회의 법안은 부결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그에게 자신의 전집을 선물하기도 했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입문》에서 벤담은 공리주의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인다.

 벤담의 철학은 쾌락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쾌락주의에 다르면 사람들의 행동은 쾌락과 고통이 지배한다. 쾌락은 곧 선이며 행복이다. 반면, 고통은 악이고 불행이다. 올바른 행위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양을 늘리는 것이고, 잘못된 행위는 쾌락의 양을 줄이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는 쾌락을 계산해 밝힐 수 있다. 그 기준은 강도,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지속성, 순수성 등 6가지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머니가 참고서를 사라고 주신 5000원으로 책을 안사고 게임을 하는 데 썼다고 해 보자. 이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이유는, 이 행동이 더 작은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게임을 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쾌락의 강도는 8점, 확실성은 9점, 쉽게 할 수 있다는 점(근접성)에서는 8점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쾌락은 다른 쾌락을 낳지는 않는다. 그래서 생산성 면에서는 0점이다. 그리고 지속적이지도 않다(지속성에서도 0점). 곧 후회가 밀려올 테다. 또 어머니에게 꾸중 듣고 공부에도 지장이 오는 고통이 따르므로 순수성에서도 0점이다.

 반면, 참고서를 샀을 경우에는 쾌락의 강도 면에서는 떨어질지 몰라도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지속성, 순수성 면에서는 모두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참고서를 사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올라 새로운 쾌락이 생기고(생산성), 어머니에게 야단맞는 고통이 생기지 않을뿐더러(순수성), 성적이 오르면 그 기분 좋은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어머니 말씀대로 참고서를 사는 것은 게임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쾌락을 주기에 더 윤리적이다.

 벤담은 여기에다 쾌락의 일곱 번째 기준으로 범위를 추가한다. 사람에게는 이기적 쾌락뿐만 아니라 ‘인애(仁愛)‘라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얻는 쾌락도 있다. 따라서 더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다. 윤리적 행위란 결국 그 집단의 최대 행복이다. 벤담은 이것을 ’공리성의 원리‘, 또는 ’최대행복의 원리’라고 불렀다(‘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유명한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모든 법률에는 개인의 쾌락과 집단 전체의 쾌락이 조화되어야 한다.

 

 벤담은 원형 감옥(Pan-opticon)이라는 새로운 감옥 구조를 고안했다. 벤담의 원형 감옥은 감옥 가운데 커다란 홀을 만들고 감방을 모두 벽 쪽으로 빙 둘러놓은 모양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간수가 홀 가운데 서서 둘러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해도 감옥 전체를 한눈에 꿰어 볼 수 있다. 관리와 통제가 매우 효과적이기에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죄수들에게 잔인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런 감옥 구조는 우여곡절 끝에 근대적 감옥 구조로 정착되었다.

 

 말년의 벤담은 밀의 영향으로 점점 민주주의자가 되어 갔다. 벤담은 처음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하려면 군주제가 민주주의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군주도 다수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쾌락에만 집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진정한 개력을 위해서는 권력이 민중에게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 방법으로는 보통선거, 비밀선거의 도입 등을 주장했다. 나아가, 군주제와 영국 국교의 철폐 등 매우 혁명적인 주장까지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벤담주의는 곧 과격 급진파를 뜻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했다.

 

 

  

25. 돼지의 철학에서 인간의 철학으로 – 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자서전》에서 ‘나에게는 소년 시절이 없었다’고 말한다. 정말 그의 어린 시절에서는 아이 같은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는 아버지의 배려로 거칠고 충동적인 또래 집단과 어울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어릴 대부터 만나고 어울렸던 사람들은 주로 사회 유명 인사들이나 학자들이었다. 이 조숙한 아이는 일직부터 아버지의 학술 원고를 편집하고 수정하더니, 열여섯 살 때 이미 신문에 글을 내는 등 자신의 사상적 견해를 내세울 정도가 되었다.

 이 시기 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가 존경하고 따르던 벤담이었다.

 

 벤담의 견해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에 따르면 윤리적 행동이란 신의 명령이나 옛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선이란 곧 쾌락이고 악은 고통이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쾌락을 준다. 반면, 옳지 못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당시 벤담주의는 급진주의로 통했다. 벤담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는 존재로 본다. 이는 왕실과 귀족들은 존엄하며 따라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 시대의 상식을 무시한 것이다. 그뿐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쾌락을 좇을 권리를 지녔다는 주장은 왕정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강하게 옹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벤담이 내세운 사회 개혁안들은 보통선거, 비밀선거와 같이 당시로 보았을 때 대부분 파격적이었다.

 그렇지만 벤담주의는 쾌락에서 어떤 것이 더 고상하고 저급한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단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쾌락을 주는지만을 잣대로 삼아 행위가 윤리적인지 아닌지 판가름했다. 그래서 ‘돼지의 철학’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흔히 벤담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한다고 해서 공리주의라 불리는데, 이 명칭도 열여섯 살 소년 밀이 주도한 공리주의자 협회라는 학습 모임을 통해 퍼져 나갔다.

 

 스무 살에 밀은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부딪히고 만다. 그는 사회적인 출세는 곧 행복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런 밀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어느 순간 완벽히 이루어진다 해도 과연 행복할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묻게 되었다. 밀은 자신이 ‘결코 나무 둥치나 돌덩이가 아니며, 여전히 내면의 감정이 살아 있음을 깨닫고’ 정신적 위기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밀은 그토록 신봉하던 벤담주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전히 그는, 선은 곧 쾌락이고 고통은 악이며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쾌락을 주는 행위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공리주의자였다. 하지만 단순히 양적으로 더 많은 쾌락이 곧 행복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쾌락에는 질적으로 더 높은 인간의 쾌락과 더 낮은 동물의 쾌락이 있다. 인간은 본성상 고귀한 것을 사랑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쾌락과 동물의 쾌락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큰 쾌감을 준다 해도 선뜻 동물의 쾌락을 선택하지는 않을 터다. 또한 인간은 정신적인 쾌락을 좇을수록 덕을 기르게 되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이익이 된다. 반면, 물질에 대한 욕심, 지배욕과 같은 동물의 쾌락은 얻으려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따라서 질적으로 더 높은 인간의 쾌락이 그보다 못한 동물의 쾌락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다. 결국,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사람이 더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학자들은 밀의 공리주의를 단순히 쾌락의 양만을 추구했던 벤담의 공리주의와 비교하여 ‘질적 공리주의’라 부른다. 밀의 철학이 이같이 정리된 것은 그의 삶에서 훨씬 뒤의 일이지만, 적어도 이때부터 밀은 벤담과 거리를 두었던 듯하다. 그는 단순히 행복의 증가에만 신경 쓰지 않고 인간다운 품위를 갖춘 사람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밀은 사상의 구름에만 머무는 사유 기계가 아니었다. 그도 여느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처럼 사회 활동과 개혁에 열심히 뛰어들었다. 1865년, 그는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런데 그가 내세웠던 선거 공약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당선되어도 지역구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겠다’, ‘당선 뒤에도 소속 당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하지는 않겠다’, ‘선거 운동에 돈을 쓰지 않을 것이며, 선거 운동도 안 할 것이다’라는 공약은 언론에서 ‘신이라도 이런 조건으로 당선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밀은 당당히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정치적 인기와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정치인으로서의 밀은 젊은 시절만큼이나 급진적이었다. 여성 차별이 일반적이었던 세상에서 남녀평등을 강하게 부르짖었고, 노동자 계층의 권리와 평등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밀의 정치적 입장은 지금까지도 민주주의 입문서라고 평가받는 그의 《자유론》에 잘 드러나 있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권력에도 강하게 반대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를 발전시키는 이들은 주어진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웃사이더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주장을 하는 듯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발전은 이런 견해조차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할 수 있을 때에 이루어진다. 물론, 이러한 자유는 개인들이 충분히 교육 받고 성숙한 도덕을 갖추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좋은 사회는 국민들을 교육하고 향상시키는 데 진지하게 참여하는 철학자들의 정부가 이끌 때 이루어진다.

 

 여론에 따라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여론에 반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더 나쁘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르게 생각한다 해서, 그 사람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어떤 한 사람이 자신과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사상에 대한 억압이 심각한 문제인 가장 주된 이유는, 그 의견에 찬성하는 이에 대해서건 반대하는 이에 대해서건, 그런 행위가 지금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패악을 끼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억압은 오류를 밝히고 진리를 드러낼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 된다. 설령 그 견해가 잘못되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서 

 

 

 

26. 신 앞에 선 단독자 – 키에르케고르

 1960년대 유럽 사람들은 인류를 전쟁의 재앙으로 몰아넣은 정의와 진보 같은 장밋빛 이념에 환멸을 느꼈다. 이념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며, 진정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과 자유임을 깨달았다. 이 시기에는 개인의 체험과 자유를 강조하는 새로운 철학이 유행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 :: 개개인의 실존을 중시하는 철학적 입장을 말한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실존철학이 인간의 개별적인 현실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뒤로 ‘현실 존재’를 줄여서 ‘실존’이라는 말로 쓰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S. A. Kierkegaard)의 아버지는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키에르케고르가 뒷날 ‘나에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다’라고 할 만큼 아들에게 신앙에 따른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아버지의 엄숙함은 자신의 죄의식 탓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만한 일을 두 가지 저질렀다. 하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어머니와 결혼한 일이다. 교회법은 재혼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 결혼은 아버지에게는 두 번째였다. 그는 첫째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병으로 죽자, 자기 집 어린 하녀와 재혼했다. 그 하녀가 바로 키에르케고르의 어머니였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결혼한 뒤 두 달 만에 첫아이를 낳았다. 교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결혼했던 상황, 그리고 두 달 만에 낳은 아기는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남겼다.

 다른 하나는, 젊은 시절 양치기를 할 때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하늘에다 대고 신을 저주했던 일이다. 아버지는 이 사건이 자신의 삶을 재앙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82세까지 살았다. 아버지는 긴 생애 동안 두 명의 부인이 죽고 8남매 중 6명이 죽는 것을 차례로 바라보며 괴로워해야 했다. 그의 장수는 저주에 가까웠다.

 나중에, 코펜하겐 대학 신학과 학생이던 스물두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비밀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하면서 방탕과 절망의 길로 빠져 들었다. 키에르케고르도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신의 저주가 자신의 집안과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고 확신했다. 그 뒤로 키에르케고르의 삶에는 항상 ‘죄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행복하고 안정된 삶 앞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주저하며 물러서 버린다. 자신의 집안 내력과 방탕했던 과거로 볼 때, 자기는 순결하고 명랑한 올젠과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탓이다. 파혼이란 여성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씌우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러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자신이 굉장한 바람둥이인 양 떠벌리며 공개적으로 올젠을 모욕하곤 했단다.

 3년 뒤,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올젠과 파혼에 이른다. 이러고서도 그는 진정 그녀를 사랑했나 보다. 헤어진 뒤에도 그의 일기장은 올젠에 대한 애정과 배려로 여전히 넘쳐났다. 2년 뒤 그녀가 자신의 친구와 결혼했을 때, 키에르케고르는 큰 충격을 받고 베를린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 버린다.

 스스로 실연 당한 키에르케고르의 행동은 기이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실존철학자로서 키에르케고르의 특징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는 남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았고, 생각 없이 눈앞의 행복을 움켜쥐지 않았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선택하는 도덕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려 했던 거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그는 인간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미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평생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만 하며 지낸다면, 삶이 과연 행복할까? 이때 인간은 바라보고 즐기기만 할 뿐 자신을 바꾸려고 애쓰지 않고 책임도지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삶의 결과는 권태와 절망뿐이다. 쾌락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단계’에 따른 삶을 산다. 쾌락만을 좇아 살지 않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한다는 뜻이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산다.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도덕군자처럼 살아도 인간은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리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윤리적 인간이 되려는 노력도 허무하게 느껴지고, 인간 존재마저 허무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인간은 이 불안과 절망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 신을 믿고 따르리라 결단을 내릴 때, 비로소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 버린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 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결단과 도약이 필요하다. 키에르케고르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라고 외친다. 신이 나와 모든 행동과 말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나 외의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릴 수 없을 터다. 이런 기분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결단하고 노력하며 살라는 뜻이다.

 

 ‘대중은 늘 정의롭지 못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모두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결코 이 병을 이겨 낼 수 없기에, 절망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 병들어 있는 사람은 의사가 진단 내리기 전까지 자신이 건강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절망 상태임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환자는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의사를 찾아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얼마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절망에서 빠져나올 길도 찾게 될 터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이 절망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에 따라, 절망의 정도를 나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다. 이는 마치 알코올 중독자 같은 상황이다. 술꾼은 맨 정신으로 있을 대가 가장 괴롭다. 그래서 자신이 취해 있음을 잊기 위해 더욱더 퍼마신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삶이 무의미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개는 고민을 잊기 위해서 또 다른 즐거움에 눈을 돌릴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현명한 충고와 처세술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쾌락과 안락함을 끊임없이 좇지만, 결국 절망감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들 터다. 늘어난 아파트 평수와 차의 배기량이 주는 행복감이 얼마나 빨리 증발해 버리는지 생각해 보라.

 이보다 나은 절망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는 절망’이다. 이 단계에 이른 자들은 삶의 허무함과 고통을 더 이상 바깥에서 찾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괴로움이 돈 없고 일이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덧없고 무의미한 삶 자체에서 비롯됨을 깨달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절망 안에서 주저앉아 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신은 죽어 사라져 버려 의미 없을 우리네 삶을 비로소 가치 있고 영원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절망은 변증법적이다.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그 대문에 비로소 거짓 생활을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고난이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깨우칠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가장 높은 단계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믿음을 통해 완성된다.

 

 ‘믿음은 절망에 대한 안전한 해독제’ 해독제는 자신이 독에 물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27.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 마르크스

 하루 12시간 이상씩 고되게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심지어 네 살배기 어린아이조차도 일을 해야 했다. 노동자의 평균 수명은 28세, 불결한 환경과 부실한 영양 탓에 아기들은 10명 중 9명꼴로 죽어갔다. 아이들의 얼굴은 힘든 노동으로 노인처럼 주름졌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없었다. 그저 힘겨운 삶을 견디어 내는 것뿐...

 

 철학은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사상이 한 시대의 철학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왜 이런 가난과 사회 갈등이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이를 해결할지가 바로 그 시대에 맞는 철학의 고민거리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마르크스(Karl Marx)는 ‘시대의 철학자’였다. 그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현실의 문제가 어디서 생겨나는지 적극적으로 밝히고 해결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 이론을 무기로 삼아 모순에 찬 현실을 변혁하려 한 혁명가였다.

 

 랍비 :: 유대교에서 율법사에게 쓰는 존칭

 

 헤겔의 사상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지만, 이성적인 법칙과 법률의 질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이다. 그래서 헤겔의 추종자들은, 헤겔 이론에서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찾으려 하는 청년 헤겔파와, 반대로 변혁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려는 노장 헤겔파로 나뉘었다. 마르크스는 청년 헤겔파에 속했고,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이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는 수업을 단 한 번도 듣지 않고 철학 박사 논문을 제출해 학위를 받았다. 1842년, 스물 네 살의 젊은 마르크스는 급진적인 <라인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다. 국왕은 신문을 ‘라인 강의 창녀’라고까지 몰아세우며 폐간을 명했다. 그가 편집장을 맡은 지 1년 만이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모젤 지방 포도 재배 업자들의 궁핍한 생활을 다룬 기사였는데, 뒤에 학자들은 이 기사가 마르크스가 순수 철학과 정치 문제에서 경제 문제로, 다시 사회주의로 눈을 돌린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때 마르크스는 현실적인 경제 문제 해결에 헤겔의 관념론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고, 서서히 청년 헤겔파 동료들과 멀어졌다.

 

 마르크스는 공산 사회의 특징을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라고 명확히 한 바 있다. 많은 사상가들이 ‘빈익빈 부익부’로 요약되는 심각한 사회 갈등과 노동자ㆍ농민의 궁핍한 삶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유행하던 여러 사회주의 논의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자본주의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 이상을 밝히고 있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러 공상적 사회주의와 구분한다. 즉 그는 관념적, 추상적 논의가 아닌, 사회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공산 사회를 현실에서 이루는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으려고 했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모르고 있어도, 역사는 어떤 정신적인 힘에 의해 하나의 이상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고 있다는 거다. 마르크스도 역사가 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간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발전의 종착점은 모두가 같이 일하고 똑같이 잘사는 공산 사회다. 

 하지만 그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에 대해서는 헤겔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이 아니라, 경제적ㆍ물질적인 발전이다. 맷돌이 봉건영주의 사회를 만들고 증기기관이 산업자본가의 사회를 가져오는 것이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정신적인 힘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는 ‘철학은 이제 거꾸로 세워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신적인 기준이 아닌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기준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역사를 물질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유물론자(唯物論者)라 불린다.

 또한, 마르크스는 인간도 물질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 아닌 ‘노동’에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노동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예컨대 자기 당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은 농부는 자신의 노동으로 키운 작물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노예는 다르다. 노예는 죽지 않기 위해 일하므로 노동은 그저 고통일 뿐이다. 산업사회는 사람들의 노동을 노예의 노동같이 만들어 버렸다.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건은 대부분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살 수도 가질 수도 없다. 노동은 다만 생계를 위해 치러야 하는 고통일 뿐이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노동에서 소외되어 있다.

 나아가 산업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소외시켜 버린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으로만 여긴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은 결코 사람답게 살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이런 비인간화된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유 재산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삶과 노동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사회는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서로 다르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엥겔스 :: 맑스의 친구. 맑스주의의 최초의 유포자. 엥겔스라는 이름은 언제나 맑스와 나란히 언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맑스 사후에 『자본』의 제2권과 제3권을 편집, 가필한 사람이 엥겔스였다는 점, 또한 절판되어 있던 맑스의 저작이나 소책자, 입수하기 어려운 신문기사를 복원, 편집했을 뿐만 아니라 가필, 수정, 해설을 했다는 점, 더 나아가서는 맑스 저작의 번역에 대한 감시, 맑스의 유고와 장서에 대한 관리를 했다는 점에 있다. 
맑스주의의 파수꾼으로서의 엥겔스는 그야말로 맑스의 망령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또한 맑스주의가 사람들 입에 회자되게 된 것은 엥겔스의 시대가 되고서부터였다는 점도 있고 해서 엥겔스라는 이름은 맑스와 한 몸을 이루는 인물로서 말해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엥겔스는 한 사람의 독립된 사상가인바, 맑스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른 생활을 하고 다른 사상을 지녔던 인물이기도 했다는 점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엥겔스 [Friedrich Engels] (맑스사전, 2011.10.28, 도서출판 b)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끝나는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국가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누르기 위한 착취의 도구라고 보고 모든 노동자가 단결하여 투쟁하라고 호소한다.

 

 2월 혁명 :: 1848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는 중도적인 군주제를 표방하였다. 이것은 강력한 자유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1840년대 중반 이후로 경제불황의 여파로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치열해졌으며 선거권 확대에 대한 요구도 거세졌다. 
1848년 2월에 파리에서 열린 공개토론회가 갑자기 정치적 시위로 번졌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루이 필리프는 영국에 망명하였다(2월혁명). 
그 무렵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공화주의파와 루이 블랑 등의 사회주의파가 대립하였다. 1848년 4월 말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실시했는데,  이 때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낙선하였다. 1848년에 6월, 정부가 국립작업장을 폐쇄하자 많은 노동자들이 바스티유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카베냐크(Cavaignac) 장군을 보내 시위를 무참히 진압하였다(6월항쟁).
그 동안에 은행가 ·대지주 ·산업자본가들이 힘을 되찾아 질서당(秩序黨)을 결성, 온건한 헌법을 의회에서 승인하게 하였다. 헌법에 따라 보통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이 때 남성 보통 선거가 도입되어 농민들이 대거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나폴레옹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승리하며 제2공화정이 성립되었다. 농민들은 나폴레옹1세의 영광을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재현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2월혁명 [Revolution of February, 二月革命] (두산백과)

 

 《자본론》은 전체 3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마르크스가 직접 완성한 것은 제1권뿐이다. 나머지 2, 3권은 그가 죽은 뒤 엥겔스가 남은 원고를 정리해 발표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왜 자본주의가 반드시 몰락하고 공산 사회가 올 수밖에 없는지를 철학ㆍ경제학 이론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한다. 경쟁이 심해지면 강한 기업만 살아남고 약한 기업은 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강한 기업은 경쟁자들이 하나씩 없어짐에 따라 점점 더 강해진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제일 강한 기업 하나만 시장에 남을 것이다. 그런데 경쟁이 심해지고 망하는 기업이 늘어날수록 이익은 점점 줄어든다. 많은 기업이 도산함에 따라 실업자가 점점 늘어나면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적어진다. 그러면 물건 자체도 팔리지 않게 된다. 기업이 줄어든 이익을 보충하는 유일한 수단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아서 생산 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떨어질수록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더 궁핍해지고 물건을 살 능력도 더 떨어지기에 이익은 다시 더 줄어든다. 그럴수록 기업은 임금을 더 깎게 된다. 이렇게 악순환이 계속된다. 악순환은 파탄 상태에 이른 대다수 노동자들이 극소수로 줄어든 기업주들을 폭력 혁명으로 제거하여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같이 《자본론》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을 통해 역사가 발전하며 끝내는 공산주의에 이른다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철학ㆍ경제학 이론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이로써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과학적’이 되었다.

 

 많은 자료에서 마르크스의 최후를 매우 비참하게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아닐수도?) 1864년, 마흔여섯 살 때 마르크스는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인 안정을 되찾았다. 몇 년 뒤에는 등록금이 비싼 사립학교에 딸들을 진학시켰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대 그의 말년은 알려진 바처럼 비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자본론》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가난과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지칠 줄 모르는 이념을 향한 사회 활동 때문이었다.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제1인터내셔널 등 사회주의 운동을 열심히 하느라 책을 쓸 시간이 없었던 거다.

 

 제1인터내셔널 :: 정식 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1864년 9월 28일에 런던에서 창설. 그 지도적 중심인물은 마르크스였다.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발전ㆍ확립됨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증가하고, 착취와 억압 중에서 생활과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조직이 각지에 생겨나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명확해진 시대였다.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사회변혁에의 요구가 거세어져 각종의 사회주의 이론이나 집단이 출현하는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시대였다. 이러한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걸친 노동자 계급의 최초의 국제적 대중 조직으로서 제1인터내셔널이 출현하였다. 
창립선언과 규약에 명시된 원칙은 자본가에게만 부(富)가 축적되고 있는 데 반하여 노동자는 점점 궁핍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고, 노동자의 전국적ㆍ국제적 단결이 필요하다는 것,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모든 계급 지배의 철폐를 목적으로 하며, 경제적 해방과 정치투쟁을 통일시키는 것 등이다. 제1인터내셔널은 그 투쟁과정을 통하여 많은 중요한 문제에 관한 토의나 결의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는 노동시간의 단축ㆍ부녀자 및 청소년 노동자 문제ㆍ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또는 국제적 신용기관의 설립ㆍ전쟁과 민족문제ㆍ노동자의 정치권력ㆍ당(黨) 등등의 문제가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아직 역량이 미약한 각국의 노동자나 초기적인 운동 단계에 있는 각종 노동자 계급을 공동 행동으로 끌어들이면서 여러 비(非)과학적 사회주의를 비판, 극복하고 노동자 계급 속에 마르크스주의를 보급하고, 노동운동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결합을 진전시켰다. 사회주의에는 각종 형태의 공상적 사회주의ㆍ급진적 부르주아 공화주의ㆍ우익 노동조합주의ㆍ프루동의 쁘띠 부르주아 사회주의ㆍ라살레의 국가사회주의, 또한 바쿠닌의 무정부주의 등이 있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출발시대에 그 역사적 임무를 기본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는데, 파리코뮨(1871) 실패 후의 정세 하에서 1872년 9월 총평의회의 소재지를 미국의 뉴욕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1876년 7월에 해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1인터내셔널 [The First International]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제2인터내셔널 :: 정식 명칭은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Inter-national Socialist Congress). 엥겔스의 제창으로 제1인터내셔널 해산 후 13년 만에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7월 14일에 파리에서 결성되었다. 그것은 제1인터내셔널의 전통을 소생시켰으며, 또한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성장하여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새로이 고양된 결과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는 자본주의가 상대적인 안정을 이루면서 진행하는 중에, 자유경쟁의 단계에서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창립 당시에는 이 인터내셔널은 엥겔스의 지도 하에 있었으나 그 진영 내에서 점차로 우익 기회주의 경향이 강해졌고, 특히 엥겔스의 사후에 베른슈타인은 공공연히 수정주의를 주창하였다. 다가오는 제국주의 전쟁 직전에 그 지도는 우익 기회주의자의 손에 넘어갔으며, 베른슈타인에 반대했던 카우츠키의 '정통파'도 실제로는 사회민주주의라는 기회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1914)과 함께, '조국방위'라는 이름 하에 자국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하기에 이르러 제2 인터내셔널은 사실상 붕괴하였다. 
이와 같이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원리는 시회민주주의였고 중심적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이에 대신하여 1919년에는 제3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는데, 이것에 대립하여 1920년에는 여러 국가의 우익 기회주의자들에 의하여 제2인터내셔널이 부활되었고, 또한 1921년 9월에는 제2½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린 조직(정식명칭은 사회당 국제노동동맹, International Working Union of Socialist Parties)이 빈에서 결성되어 제2인터내셔널을 비판하였는데, 또한 제3인터내셔널에도 대립하여 마침내 1923년에는 제2인터내셔널에 합병되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자본주의, 그 지배계급을 측면에서 원조하면서 반(反)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2인터내셔널 [The Second International]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제3인터내셔널 :: 정식 명칭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Kommun-istische Internationale), 간단하게 코민테른(Komintern)이라고 한다.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후, 1919년 3월 6일,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제창 하에 창설된, 세계 각국 공산당의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에 기초한 국제조직이다. 이 조직의 기본 방향은 제2인터내셔널의 활동성과를 수용하면서 그것의 기회주의적ㆍ사회배외주의적ㆍ부르주아적ㆍ쁘띠 부르주아적 오점을 떨쳐버리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레닌). 
제3인터내셔널은 좌우의 기회주의, 부활된 제2인터내셔널, 제 2½인터내셔널의 우익기회주의에 대한 투쟁, 연륜이 짧은 당에서 나타난 좌익 소아병적 오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레닌주의적 원칙의 확립을 수행함과 동시에,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단계에서의 민족ㆍ식민지 문제, 노농동맹 및 통일 전선문제,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를 이론적ㆍ실천적으로 추구, 발전시켰다. 그것은 세계 각국의 레닌주의 당의 결성을 원조하고 노동운동ㆍ공산주의 운동ㆍ식민지 해방투쟁의 발전을 지지하여, 제7차 대회(1935)에서는 파시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통일전선과 인민전선의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때는 세계 76개당이 가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1943년 5월 15일에 정세변화를 이유로 그 임무를 끝내고 해산을 결의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3인터내셔널 [The Third International]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러시아 혁명 :: 1905년과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보통은 1917년의 혁명을 가리킨다. 러시아 혁명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구분된다.

2월 혁명
제1차 세계 대전의 장기화로, 제정 러시아의 여러 가지 모순이 표면화하여 제정은 붕괴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노동자 · 군사 대표인 소비에트와, 국회를 기반으로 한 임시 정부가 성립, 그 뒤 노동자, 농민과 부르주아, 지주 등 양자에 대표되는 세력의 대립 항쟁이 계속되었다.

10월 혁명
전쟁을 속행하는 임시 정부에 대하여,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대중을 볼셰비키(소비에트 내의 레닌을 중심으로 한 세력)가 주도하였다. 볼셰비키 세력을 확대하여 10월 말, 무장 봉기로써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혁명 [Russian Revolution, -革命]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9.25., (주)신원문화사)

 

 철학은 시대의 산물이다. 마르크스가 아니더라도, 다수가 소외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고민을 거듭하여 현실을 변화시키는 사상을 만들어 낼 터다.

 

 마르크스는 《세계 공산당 선언》에서 ‘가장 선진화된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일반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선진국의 국가 아젠다’인 셈이다.

 1) 모든 토지를 몰수하고, 모든 지대(地代)를 국고에서 지급

 2) 누진세의 세율을 높이는 것

 3) 상속권의 전면 폐지

 4) 망명자들과 반역자들의 재산 몰수

 5) 시장을 국가가 독점, 국가 신용을 국립 은행에 집중시킴

 6) 운송수단의 국유화

 7) 국영 공장 확대, 공동 계획에 따른 토지 개간

 8) 모두에게 평등한 노동 의무를 부과, 산업과 농업을 위한 군대 육성

 9) 농업과 공업을 통합,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 해소

 10) 모든 아동에 대한 사회적 무상 교육, 아동들의 공장 노동을 폐지. 교육 활동과 생산 노동의 결합

 

 

 

28. 허무를 딛고 일어선 초인 – 니체

 아포리즘 ::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따위를 가리킨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아포리즘은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와 파스칼의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은 가장 널리 알려진 아포리즘의 한 예이다. 문예 또는 철학적인 아포리즘을 모은 책으로는 라 로슈푸코의 《잠언집》, 콜리지의 《내성(內省)의 안내》, 니체의 《서광(曙光)》 등이 있다. 
아포리즘은 일견 ‘이언(俚言)’이나 ‘속담’ ‘처세훈’과 흡사하지만, 이언이나 속담은 널리 유포되어 사용되면서도 작자가 분명하지 않으나 아포리즘은 작자의 독자적(獨自的)인 창작이며 또한 교훈적 가치보다도 순수한 이론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점이 ‘처세훈’과는 다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포리즘 [aphorism] (두산백과)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태어난 지 다섯 해 만에 아버지가 숨을 거두고 연이어 어린 남동생도 병으로 죽었다. 그 바람에 니체는 완고한 할머니와 고모들, 어머니와 여동생 등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라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뒤 심해진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뿐 아니라, 여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크고 작은 갈등은 니체를 힘들게 했다. 그의 사상에 줄곧 나타나는 강인함, 힘 같은 남성다움에 대한 동경은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듯싶다.

 

 리츨 ::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자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이다.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시키는 데 그리스도교의 사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베를린 출생. 본대학의 강사 ·교수를 거쳐 1859년 본대학 정교수가 되고, 1864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바울이 지도하는 튀빙겐학파에 속하여 교회사가(敎會史家)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거기서 이탈하여 주저 《의인(義認)과 속죄(贖罪):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ohnung》(3권, 1870∼1874)를 발표한 이후로는 조직신학으로서 독자적 신학사상을 전개, 많은 추종자를 모아 리츨학파를 형성하였다. 그의 사상의 특색은 신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종교적 인식을 이론적 인식과 다른 가치판단으로서 특징지었으며, 경건주의 ·신비주의를 비판하고 그리스도에서의 역사적 계시를 강조하였던 점, 특히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시키는 데 그리스도교의 사명이 있다고 강조하여 하나의 윤리적 또는 문화적 그리스도교를 제창한 점에 있다. 리츨학파에 속한 사람으로는 W.헤르만, J.카프탄, A.하르나크 등이 있었다. 주요저서에 《경건파의 역사:Die Geschichte des Pietismus》(3권, 1880∼1886)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브레히트 리츨 [Albrecht Ritschl] (두산백과)

 

 1876년, 니체는 군 복무를 위해 포병 기마대에 입대했다. 훈련 도중 말에서 떨어져 가슴에 중상을 입는 바람에 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것은 더 절실하게 마련이다. 니체의 사상에는 무사적 기질, 잔혹성, 엄격한 자기 규제와 인내 등 군대 냄새 풍기는 개념들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이 짧은 군생활이 어린 시절부터 품어 온 남성다움에 대한 동경을 더욱 강하게 해 주었으리라.

 

 1871년, 스물일곱 살에 발표한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밝히려는 문헌학적 저술이다. 그는 그리스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누었다. 태양신 아폴론은 질서와 조화, 명석한 이성과 합리성을 상징한다. 반면,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는 자유분방함과 도취, 격정과 황홀감을 나타낸다. 원래 그리스 예술에는 아폴론적인 이성과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이 잘 조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합리성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소크라테스 이후,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이를 죄악으로 여겼다. 냉철하고 건조한 이성만을 중시했을 뿐, 열정과 도취, 쾌락이 삶에 주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니체는 논리적 사고와 합리성만을 강조할 때, 유럽 문명은 병들고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건강한 생명력을 회복하려면 잊혀져 왔던 디오니소스적인 자유로움과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렇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음악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 프로이센의 지도하에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난 전쟁.
직접적인 계기는 에스파냐 국왕 선출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분쟁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엠스전보(電報)사건은 사건의 연출자인 비스마르크의 예견대로 프랑스와 프로이센 양 국민을 격앙케 하여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군비가 우세한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제국뿐만 아니라, 남독일 제국의 지지까지 얻어서 병력을 더욱 증강하여 참모총장 몰트케의 작전에 따라 프랑스 국내로 쳐들어갔다.
전황은 프로이센 독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독일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계속 다시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에서는 공화제 국방정부가 조직되어 프랑스 국민은 더욱 완강하게 독일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9월 말에 스트라스부르, 10월 말에는 메츠 요새가 함락되어 파리도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성문을 열고 말았다.
2월 베르사유에서 평화협정,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의 대부분을 할양하였다. 또, 파리 개성(開城) 직전인 1월 18일, 베르사유에서 독일제국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로이센-프랑스전쟁 [Franco-Prussian War, -戰爭] (두산백과)

 

 1879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교수직을 그만 둘 때까지 니체의 건강은 빠른 속도로 나빠졌다. 특히 두통, 경련, 시력 감퇴가 두드러졌다. 니체 특유의 아포리즘이 나타난 시기도 이때이다. 눈이 아파 오래도록 책을 보거나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건강을 위해 쾌적한 곳을 찾아 끊임없이 여행을 해야 했다. 그래서 긴 주장보다는 짤막한 경구 위주로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즈음 니체는 그토록 의지하고 좋아했던 바그너와도 결별하고 만다. 여러 가지 미묘하고 개인적인 오해와 갈등이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바그너가 기독교 정신을 찬양하는 <파르시팔>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했기 때문이다. ‘꼬마 목사’였던 니체는 성인이 된 뒤 기독교를 누구보다도 증오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그에 따르면 겸손, 순종, 친절, 동정 등 우리가 품고 있는 ‘선함’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에 의해 왜곡되었다. 이는 노예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일 뿐이다. 주인의 도덕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주인은 밝고 당당하며 거침이 없고 냉혹하다. 주인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주인이 된 사람들조차도 지금은 노예들의 도덕을 따르고 있다. 아무리 영리하고 강하다 할지라도 노예처럼 자신의 힘을 감추며 겸손하지 않은 인간은 약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으로 평가받는 탓이다. 도덕은 강자를 약자처럼 만들어 버렸다. 약한 자의 품성과 덕목이 강한 자의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약자의 원한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말이다.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 주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불구자, 악한, 부끄러운 병을 앓는 자, 구제할 길 없는 범죄자들을 모두 주인과 같은 인간으로 보고 사랑하라고 했다. 그 결과, 인류는 모든 기준을 열등한 인간에 맞추어 버리고 말았다. 인류에게 중요한 과제는 모든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뛰어나고 강한 인간을 길러 내는 것이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 독일의 작가. 평론가. 많은 소설과 수필, 심리학의 논문 등을 썼다. 릴케와의 교제가 특별해 주요 저서에는 《릴케》(1928) 《프로이트에 대한 감사》(1931) 등이 있다.
상트페테부르크 출생. 프랑스계의 제정(帝政) 러시아 장군인 V.잘로메의 딸로 태어나 취리히대학을 나왔다. 로마에서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와 알게 되어 구애(求愛)를 받았으나, 1887년에 독일의 동양학자 F.K.안드레아스 교수와 결혼하였다. R.M.릴케, 니체 등과 친하였고, S.프로이트와도 학문상의 교제가 있었다. 릴케의 가장 좋은 이해자이며, 비호자의 한 사람이었고, 많은 소설과 수필, 심리학의 논문 등을 썼다. 주요저서에는 《릴케 Rainer Maria Rilke》(1928) 《프로이트에 대한 감사 Mein Dank an Freud》(1931) 등이 있으며, 죽은 뒤에 자서전 《인생회고》가 출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루 잘로메 [Lou Andreas Salome] (두산백과)

 

 1885년, 그는 인류의 기념비적 저작이라고 할 만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펴냈다.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를 독일어 식으로 읽은 말이다. 이 책의 차라투스트라는 실제 조로아스터교와는 별 상관이 없다. 요새 표현으로 한다면, 유명인의 이름만 빌린 일종의 패러디 작품이다.

 책에서 그는 ‘최후의 인간’과 ‘초인(超人)’을 대비시킨다. ‘최후의 인간’은 쾌락과 만족에 빠져 지내며 종족을 남기겠다는 생각조차 잊을 정도로 모든 창조력을 잃어버리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반면, 초인은 지성과 긍지로 가득 찬 사람이며, 넘치는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며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다. 그는 투사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 그는 소심하지 않고 끝없이 위대함을 갈망한다. 주인의 도덕을 다루는 그에게는 선과 악 조차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사다리이며, 인류의 역사는 초인의 탄생을 향한 역사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모두를 위한, 그러나 아무도 위하지 않는 책’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인류 전체를 위해서는 위대한 예언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엄청난 내용이라 받아들여지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교 :: 고대 이란의 종교인 조로아스터(Zoroaster, B.C. 660~583)를 시조로 삼는 고대 종교. 아후라 마즈다(Ahura-Magda)를 최고신으로 숭배하기 때문에 마즈다교라고도 하고, 배화(拜火)의례가 있기 때문에 배화교라고도 한다. 5세기경 중국에 전해져 요교(敎)로 불리었다. 시조인 조로아스터는 서부 이란, 지금의 아젤바이쟌에서 출생하여, 30세 때 하늘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로서 원시 이란 종교의 신(神) 관념을 토대로 유목민족에 대한 농목민족의 투쟁을 반영한 인물이었다. 
광명과 선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암흑과 악의 신, 앙그로 마이뉴(Angro Mainyu)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 이 세계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우주관에 입각한 교의를 설파하였다. 동부 이란의 박트리아 왕의 보호 하에 이란에서 서아시아 각지까지 교세가 확장되어 고대 이란제국의 국교가 되었다.(B.C. 5세기). 특히 사산왕조 시대(3~7세기)에는 교리도 체계화되어 성전 『아베스타』(Avesta)가 완성되었다. 『아베스타』에 의하면 선과 악의 두 원리가 대립, 투쟁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빛과 선의 신이 승리하며, 인간이 선의 신 편에 서서 싸운다면 최후의 심판에 따라 천국에 태어난다고 한다. 
천국에는 아후라마즈다 아래 6개의 선령(善靈)이 있고, 그 아래에 태양ㆍ달ㆍ별 등 다수의 선령이 있어, 이원론적이면서,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하는 일신교적 성격과 함께 다신교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특히 불은 아후라 마즈다의 아들로서 신성시되어, 악을 태워 깨끗이 하는 의례가 중시되었다. 인도의 베다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유태교, 기독교와의 유사점도 지적되고 있다. 이 종교를 모태로 미트라교(Mitra敎)나 마니교(Mani敎)가 생겨났는데, 조로아스터교 자체는 이란이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정복됨에 따라 거의 멸망하였다. 지금은 인도에 파르시교도로 불리는 수만 명의 신도가 있을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로아스터교 [Zoroaster]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이 사람을 보라》에 그는 ‘나는 왜 이리 영리한가’,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이가’라는 엄청난 소제목들을 붙였으며, 스스로를 인류 역사를 뒤바꿀 초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1889년, 니체는 파국에 이른다. 광장에서 마부에게 매를 맞고 있는 말을 끌어안고 울다가 갑자기 졸도해 버렸다. 그는 마침내 미쳐 버렸고 1900년, 쉰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의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미친 니체를 돌보았는데, 이 누이는 니체를 유명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녀는 신속하게 ‘니체 문헌 보관소’를 만든 뒤, 니체의 글을 체계적으로 모으고 편집하여 출판했다. 그녀는 니체의 글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과장함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입맛에 맞추어 내놓았다. 비로소 니체는 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현대의 니체 연구자들은 그의 책들이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에 의해 상당수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엘리자베트는 말년에 히틀러를 ‘초인의 전형’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인종차별주의와 엘리트에 의한 독재를 정당화해 주는 이론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를 적으로 여기게 했고, 도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그를 타락하고 비윤리적인 철학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은 도덕의 파괴도, 인종차별주의도 아니었다. 니체가 강조한 점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주어진 규범에 주눅 들지 말고, 삶을 긍정하면서 주어진 운명을 꿋꿋하게 개척해 나가라는 것이었다.

 

 생철학 :: 19세기 실증과학에 대립해, 비합리적인 충동적 삶을 중시한 철학사조
현재의 삶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한계상황의 극복을 위해 생의 의의, 가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엽에 성행한 현대철학의 한 경향이다. 지성보다는 감정을,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을, 개념보다는 직관과 체험을, 기계적 필연보다는 자유로운 창조를 존중한다. 계몽철학의 주지주의와 헤겔의 이성주의에 반대한 생철학은 실존철학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A. 쇼펜하우어, F. W. 니체, H. 베르그송, W. 딜타이, G. 지멜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생철학 [生哲學, philosophy of life]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생철학 :: 계몽철학의 주지주의와 헤겔의 이성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고 비합리적인 것과 의지를 중시한 사상. 생철학자들은 ‘생(生)’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직관적이며 비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생의 의의나 가치 또는 본질을 찾으려 하였다.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고,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다.”

- 아인슈타인

 

 

 

29. 지식은 도구다 – 듀이

 실용주의 :: 19세기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철학 사조이다. 그 근본 사상은 진화론(進化論)을 출발점으로 하여 19세기에 발달한 생물학·생리학·심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철학의 기초를 구체적 경험에 두고 있기 때문에 관념론의 아프리오리즘(a-priorism, 선천주의)과는 대립된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의 pragmata는 그리스어로 실행·실험의 뜻으로, 여기에 ism을 붙인 것이다. 이 사상은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적 경험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주지주의(主知主義)를 배격한 것이다.
대표자로는 C. 퍼스, W. 제임스, J. 듀이 등이 있다. 듀이는 도구적 실용주의를 발전시켰고 정신의 과정을 시행착오로 생각했다. 문제 해결은 이것저것으로 노력해서 혹은 성공하고 혹은 실패하는 것이다. 장애물에 의해서 방해도 받고, 때로는 오히려 분발해서 그 난관을 극복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진리·이론·관념·개념 등의 정신 내용은 현실적 활동의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좋은 결과는 좋은 도구를 써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도구는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부적당한 도구는 도태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자연과학의 실험에서 가장 명백히 예증(例證)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진리·논리·개념·관념은 그 도구적 성격으로 채택되고 폐기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실용주의 [實用主義, pragmatism]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12.20., (주)신원문화사)

 

 90여 년의 긴 생애 동안 존 듀이(John Dewey)의 철학과 교육관은 미국 전체에 널리 영향을 미쳤고, 그의 말과 행동은 곧 미국의 국가철학이다시피 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가장 미국적인 철학을 만든 미국의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식료품 상인의 아들 듀이는 어린 시절부터 농장 일과 신문 배달 목재 세는 일 등을 해야만 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 형편이었는데, 듀이는 자신의 처지에 전혀 불만이 없었던 듯하다. 뒷날, 그는 삶을 배우는 데는 그 같은 환경이 이상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생계의 일부를 떠맡으면서 일찍부터 책임감과 성실함을 기른다는 게 그 이유다. 이처럼 ‘책임을 통한 학습’을 강조하는 듀이의 교육관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도한 그는 일하지 않고 책만 보는 책벌레들을 싫어했다. 진정한 학문과 삶의 가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노동을 나눈 때 얻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헤겔주의 :: 1870년대에서 1920년대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두드러졌던 관념철학이다. 독일 관념론의 완성으로서 G.F.W.헤겔의 절대적 체계적 철학 및 그것에 의거하는 헤겔학파는 헤겔이 죽은 후(1831) 자연과학의 발달, 사회문제의 발생에 따르는 실증론, 유물론으로부터의 공격, 특히 헤겔좌파에 의한 철저한 비판을 받아 급속히 붕괴했다. 그러나 헤겔철학은 독일에서 19세기 후반에도 W.딜타이 등의 역사주의에 계승되었다. 특히 20세기 초반부터 전세기 이래의 객관적 정신의 학문으로서뿐만 아니라, 논리학 ·형이상학으로도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것이 철학사에서 일컫는 헤겔철학의 부흥 움직임이다. 
공식적으로 헤겔주의의 부흥을 선언한 것은 W.빈델반트의 1910년 아카데미 강연이었다. 신헤겔주의의 기본 경향은 무엇보다도 헤겔철학을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이라는 의미에서 재생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헤겔철학의 혁명적 계기인 변증법적 방법을 제거하고자 했으며, 헤겔이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사실을 부인하고 더 나아가 헤겔의 전 저작을 초기의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대표적인 독일의 신헤겔주의 철학자는 H.라손, R.크로너, H.글로크너, 빈터, 라렌츠, 로젠츠바이크, F.E.E.슈프랑거 등이다. 
신헤겔주의는 이탈리아, 네덜란드에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과 미국에서 부흥했다. 영국의 신헤겔주의는 원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토머스 칼라일의 반대중적 작업을 자연스럽게 계승하면서 발전했다. 신헤겔주의자들은 당시 유행하던 유물론과 공리주의에 대한 반감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미국의 신헤겔주의는 보스턴 선험론자들의 작업에서 시작되어 윌리엄 토리 해리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 밖에 신헤겔주의자로는 찰스 샌더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헤겔주의 [Neo-Hegelianism] (두산백과)

 

 세계의 지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고 진보한다는 헤겔의 이론에서 감명을 받았다.

 학자들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듀이는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 이 주장의 실제 가치는 사실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라는 주장보다 더 이로운 결과를 낳느냐에 있다. 한마디로 지식은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도구일 때만 가치가 있다. 이처럼 지식을 그 자체로 추구하지 않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여기는 듀이의 견해를 ‘도구주의’라고 부른다.

 도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선되고 진보하게 마련이다. 지식이라는 도수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으로 참되고 변하지 않는 지식이란 없다. 지식은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한다. 다라서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의 노력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이런 헛된 노력을 버리고 생활에 더 유익한 더 나은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듀이의 지식관은 과학 지식을 강조하는 그의 교육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듀이의 지식관은 윤리에 대한 견해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철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선이란 무엇인지, 윤리적인 사람이란 과연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러나 윤리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윤리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또 절대적으로 윤리적이고 선한 것이란 없다. 윤리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다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윤리적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각각의 상황에서 나 자신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윤리적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1894년 듀이는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교육학 세 학과를 합친 학부의 학장으로 취임했다. 이대부터 그는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듀이의 최고 관심사는 교육이었다. 그는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대학 안에 ‘실험학교(Laboratory School)’을 열었다. 당시 미국의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었다. 학생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니 교실에서 선생님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듀이는 ‘아동 중심 교육’을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의 경험이다. 학생은 스스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존재다. 진정 효과적인 교육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일방적으로 외우게 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주고 이를 통해 학생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듀이의 교육관은 ‘학생은 태양이고 다른 것은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도 학교도 아닌, 스스로 경험을 통해 깨달아 가는 학생이다. 

 또한 듀이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그는 개인과 사회의 발전은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는 학교를 ‘(사회를) 가장 단순화한 현실’로 보았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사회생활에 필요한 의사소통 방법과 윤리적 가치를 체득하게 하여 민주 사회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교육을 통해 사회의 점진적 개혁을 시도했던 셈이다.

 

 헐 하우스 :: 1889년 아담스(Addams, J.)에 의해 시카고에 설립된 미국의 대표적인 인보관(Settlement House)을 말한다. 토인비 홀(Toynbee Hall)의 영향을 받은 아담스가 이민자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엘렌 스타(Ellen Starr)와 협력하여 부흥시켰다. 노동조합운동, 평화운동, 아동 복지운동과 결부되어 활동한 것에 사회적 의의가 있고 사회사업뿐만 아니라 사회개량의 근대화에 커다란 터전이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헐 하우스 [hull house] (사회복지학사전, 2009.8.15, Blue Fish)

 

 베이징 대학에서 주는 명예박사 학위는 기꺼이 받았지만, 당시 제국주의적 침략을 거듭하던 일본 정부가 학술 훈장을 주려 하자 그는 일본이 ‘민주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듀이는 철학자의 진정한 역할은 공허한 관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듀이는 자신이 필요한 사회 문제에는 언제든지 뛰어들었다.

 

 1952년, 듀이는 92세의 긴 생애를 마치고 눈을 감았다. 그는 분명 ‘유용성의 강조’로 요약되는 ‘가장 미국적인 철학을 만들었던 미국의 철학자’였다.

 듀이는 실용성을 내세우면서도 끊임없이 인간 지성에 대한 믿음과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담긴 민주주의의 신념을 강조했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 없는 사회’를 주장한다. 그에게 학교는 전혀 쓸모없는, 부작용만 낳는 기관일 뿐이다. 학교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노예로 길들인다. 학업성취도에 따라 계급이 주어지고, 여기에 순종하도록 교육 받는다. 그런데 성적은 예나 지금이나 가진 것 많은 가정이 아이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학교란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명문 학교 졸업장은 계급이 사라진 사회에서 새로운 귀족계급을 나타내는 증명서처럼 쓰인다.

 앨빈 토플러도 《부의 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학교는 100마일로 달리는 변화라는 고속도로에서 10마일의 속도로 거치적거리는 존재일 뿐이라고.

 

 

 

30.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 러셀

 퍼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러셀의 패러독스로 잘 알려진 뛰어난 수학자였다. 또한 철학자로서 논리학을 통해 수학의 기초를 세우려 했을 뿐더러, 거꾸로 수학적 방법을 논리학에 도입하여 기호논리학이라는 분야에 큰 공헌을 남겼다. 20세기 철학계에는 언어의 엄밀한 분석과 정의를 통해 신과 자유, 존재 등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을 풀어 보려는 분석철학(언어철학)이 크게 유행했다. 분석철학을 한 폭의 그림에 비유한다면, 러셀은 논리학과 언어 분석 작업을 통해 그림이 그려질 도화지를 펼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러셀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사회 활동가, 문필가, 방송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러셀의 패러독스 :: 러셀이 1901년에 주장한 집합론의 모순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느 시골 마을에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깎지 않는 모든 마을 사람들의 머리만 깎아 주는 한 이발사가 있다고 치자. 이 이발사는 자신의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이발사가 자신의 머리를 깎는다면 그는 자신의 머리를 깎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머리를 깎을 수 없다. 만일 자기 자신의 머리를 깎지 않는다면 그는 그가 깎아 주어야 할 마을 사람들의 집합에 속한다. 결국 어느 경우든지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다.

 

 분석철학 :: 현대 영국 및 미국의 철학상 주요한 조류의 하나로, 다른 자본주의 여러 나라에서도 유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다. 크게는 영국의 일상언어분석학파(옥스포드 학파)와 미국의 인공언어학파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무어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영향 아래 발전한 것으로, 대표적인 학자로는 라일을 들 수 있다. 후자는 논리실증주의에서 발전한 것으로 다수파의 대표자는 카르납이었지만, 근래에는 논리실증주의 이후의 내부의 이단자인 코퍼의 명성이 높다. 분석철학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다양성을 지닌 철학운동이지만, 이를 분석철학으로 총괄할 수 있도록 하는 공통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철학의 임무란 체계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지식이나 각종 과학ㆍ철학에서의 개념과 명제ㆍ이론 등의 의미ㆍ구조ㆍ사용법 등을 분석하고 해명하는 것이다. 또 경험론 내지 실증주의의 경향을 띠는 반(反)유물론이고, 언어분석 내지 논리분석을 애호하며, 특히 인공언어학파에서는 형식(기호) 논리학을 절대시하는 반(反)변증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분석철학자들은 세계와 인생에 대하여 특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사람들의 언어방식의 분석에 종사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예를 들면, 그들은 물(物)이 존재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반드시 일의적(一義的)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지각언어'(知覺言語)를 채용하여 '눈에 보이고 있다'라는 조건을 현실적으로 만족시키고 있는 사실만이 지금 존재하고 있고, 이 사물도 시계에서 벗어나면 즉시 소멸하며 다시 시야에 들어오면 그 찰나 재생하는 것이라고 하여도 좋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에도 사물은 존재하고 있다는 약속을 도입하여도 좋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물의 존재'를 둘러싼 유물론과 관념론의 끊임없는 논쟁은 조정되어 결국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외적 자연의 '선재성'(先在性)을 뒷받침하는 여러 자연과학의 훌륭한 증거들이 무시되고, 나아가 버클리류의 주관적 관념론이 유물론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입장인 양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분석철학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과학적 세계관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의 '대항사상'(對抗思想)으로서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수행하는 '비(非)과학적 철학'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분석철학 [Analytic philosophy, 分析哲學]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러셀은 1872년 영국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귀족이긴 했지만 그의 가문은 반골의 색채가 강했다. 멀게는 17세기 스튜어트 왕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월리엄 러셀 경이 그의 선조이고, 가깝게는 1892년, 왕권을 견제하는 민주적 선거법 개정을 추진한 존 러셀 경이 그의 할아버지이다. 집안 전통에 따라 정치계에 뛰어든 러셀의 아버지도 결코 무난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앞선 두 사람만큼의 비중은 없었지만, 그 또한 진보적인 언행으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보수적인 영국 정치계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적극 지지했을 뿐더러, 당시에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민감한 문제였던 피임 허용을 지지했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집안을 보면 대개 그 사람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러셀 가문 내력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의 극단적이고 진보적인 정치 사회적 언행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대는 나쁜 짓을 하려고 군중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 :: 보통선거나 의회를 통한 정치적 평등에 이어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것으로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운동ㆍ체제원리이다.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폐기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와는 달리 20세기 이후의 사회민주주의는 국가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을 통하여 사회를 ‘계획’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시장기구가 낳은 불평등이나 불안정한 경제질서는 ‘아마추어’ 의회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어 국가가 사회에 부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실질적인 평등ㆍ공정을 달성하고자 한다. 즉, 이 체제는 국가나 통치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의존을 전제로 한다.
사회목표로서는 경쟁보다 협조, 대결보다 관용, 위험 회피를 위한 단체적 참여 등이 중시된다. 한편, 본래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표상하는 ‘공공성’은 국가에 수렴되어 과학적 합리성 신앙을 갖는 중앙관료에 의한 사회의 획일화ㆍ관리화라는 성질이 강해진다. 이것은 사회의 다양한 자율성의 장애가 되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위협하게 된다. 또한 경제적 효율이나 비용의식이 희박해 짐으로써 국가 행정조직의 비대화를 초래한다.
서유럽 사회주의를 원류로 하면 미국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주의의 20세기를 계기로 하지만 냉전종언 후의 오늘날 폭력혁명이나 계급적 독재가 아니라 절차상으로 의회를 통한 소득의 재분배에 의해 공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 방임된 시장이 낳은 경제ㆍ환경위기를 피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 널리 채용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체제로서의 일반성과는 반대로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등을 제외하면 다른 강력한 대항원리를 갖지 않는 이 체제의 오늘날 의미부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회민주주의 [social democracy, 社會民主主義] (21세기 정치학대사전, 2010.1.5., 한국사전연구사)

 

 사회민주주의 :: 기존 정치 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직적인 사회 변화를 주장하는 정치 이념. 19세기 사회주의와 마르크스 및 엥겔스의 사상을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는, 공산 사회 건설을 위한 혁명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기본 원리에서 벗어난 수정주의로 알려져 있다.

 

 주세페 페아노 :: 이탈리아의 수학자 ·논리학자. 기하학의 공리화(公理化)를 시도하여, 정의 ·공리 ·미정의어(未定義語)의 선택과 채용을 확립하여 일종의 수학적 논리학을 의도하였다. 기호논리학의 개척자로도 꼽히며, 일종의 국제어인 ‘굴절 없는 라틴어’를 창안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세페 페아노 [Giuseppe Peano] (두산백과)

 

 러셀은 《수학의 원리들》이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그 주된 내용은 ‘수학과 논리학은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10년 동안, 그는 수학은 순수한 논리적 전제들에서 나오며, 단지 논리적인 용어들로 정의 가능한 개념들만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방대한 작업에 몰두했다. 화이트헤드의 도움을 받아 매년 8개월 동안 하루 14시간씩 작업한 끝에 마침내 1910년, 화이트헤드와의 공동 저작 형식으로 수학적 지식의 근본에 관한 기념비적인 저서를 내놓았다. 그 책이 바로 유명한 《수학 원리》이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수리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열렸으며, 기호논리학이 학문의 새로운 방법으로 정착되었다.

 

 수리철학 :: 수학(數學)의 방법, 대상, 명제 등에 관한 철학적 고찰 및 연구를 하는 사변적(思辨的)인 학문.
정신적인 것과 비슷하나 감정이나 상념(想念) 등과 같이 마음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주관적인 것과는 다르다. 특히 수에 관한 진리의 체계로서의 수학은 객관적인 학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것에 관한 학문인 신학이나 철학에는 엄밀한 객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학은 자연과학을 능가하는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수에 관해서 수의 본질은 무엇인가, 수학과 다른 학문과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수학의 연구대상은 존재의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가 등을 연구하는 것이 수리철학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리철학 [mathematical philosophy, 數理哲學] (두산백과)

 

 그는 세계와 언어는 각각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최소의 단위(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두 세계는 서로 대응 관계에 놓여 있다는 내용의 ‘논리적 원자론’을 발전시켰다. 명제를 분석하여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술 이론’을 개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두 이론은 분석철학계에 강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이론이다.

 ‘논리적 원자론’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명제는 세계와 1대 1로 대응하기에 의미를 갖는다는 이론이다. 즉, 언어는 명제라는 최소의 단위(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명제가 나타내는 최소의 사실(원자)과 1대 1의 관계에 있다. 예컨대, ‘철수는 키가 크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철수가 키가 크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므로 의미 있다. 여기에서부터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몇몇 분석철학자들은, 이와 같이 사실과 1대 1의 대응 관계에 있는 주장들의 구조를 완벽하게 알아낸다면, 세상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세웠다. 이로써 철학의 관심은 한동안 언어에 대한 탐구 쪽으로 몰렸다.

 ‘기술 이론’이란 다음과 같다. 때때로 주장의 주어가 우리로서는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는 대상인 경우가 있다. 예컨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어떤 철학자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신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둥근 사각형까지 있다는 기묘한 결론에 다다를 터다.

 이러한 어려움을 러셀은 ‘기술 이론’이라는 독특한 이론으로 간단히 풀어 버린다. 언어를 분석해서 주장 속에 담긴 존재에 대한 기술을 드러냄으로써 기묘한 주장을 없애 버린 것이다. 그는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예를 든다. 이 말은 사실, 첫째, ‘프랑스 왕이 있다’, 둘째, ‘그는 대머리이다’라는 두 명제가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주장은 대상의 존재를 나타낸다. 이것이 참이어야만 전체 명제가 의미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현재 프랑스 왕은 없으므로 주장 전체는 거짓이다.

 논리적 원자론과 기술 이론만큼이나 러셀은 두려움 모르는 사회 활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쏟아지는 찬사만큼이나 비난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1920년, 러셀은 중국 베이징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기관지염을 무척 심하게 앓은 적이 있는데, 그때 영국에서는 러셀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러셀은 병이 다 나은 뒤 어떤 종교 신문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도한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의 내용은 이랬다. ‘러셀의 죽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리라’

 

 그는 형의 시골집을 빌려서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작은 실험학교를 열었다. ‘규율 속의 자유’를 내세운,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이 학교는 오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학교를 운영할 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性)과 도덕, 종교에 대한 러셀의 자유분방한 태도도 학교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낳는데 한몫했다. 

 러셀의 실험학교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번은 목사가 이 학교를 방문했다가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로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 맙소사!’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다가와 당당하게 ‘하느님은 계시지 않아요’라고 대꾸했단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러셀이 피임과 성교육을 과감히 옹호하는 데서 생긴 변태성욕자라는 악평과, 그에게 쏟아진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잘 섞어서 지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러셀은 결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그가 종교 자체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종교가 자신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라는 데 있었다.

 

 러셀은 인류를 파멸 시키는 전쟁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했다. 그러나 방향은 전쟁 자체를 반대하던 제1차 세계 대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번에 그는 나치의 반인륜적 정치사상을 비판하면서 연합군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에게 이번 전쟁은 ‘정의를 위한 투쟁’이었다. 연합군 측은 러셀을 유용한 정치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 투옥되고 감시를 받았던 1차 세계 대전 때와 달리, 러셀은 어디를 가나 환영받고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 시작된 냉전 체제에서도 러셀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것도 서방 국가들이 이용하기 좋은 카드였다. 꼭 이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러셀은 학문적, 사회적 업적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1949년에 영국 최고의 영예인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상을 탄 데에는 그에게 호의적이던 서구 세계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모든 일을 정리할 나이에 핵무기 개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또다시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핵무기가 가져올 인류의 재앙을 끊임없이 경고하였으며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친 탓에 그는 1962년, 아흔 살에 도 한 번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70년 아흔여덟 살의 나이로 눈을 감기 전가지 잔혹한 학살극이 될 것이 분명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을 폈다.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사로잡았던 것은 ‘사랑에 대한 동경, 지적 욕구,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었다고 고백한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은 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적 분노’라고 말해지는 보복 감정은 잔인성에 다름 아니다. 범죄자에 대한 가학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섬세한 교육으로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당연히 그 방법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교도소가 죄수에게 무료로 좋은 교육을 제공할 만큼 인간적이라면 사람들이 거기 들어가려고 고의로 범죄를 저지를지 모른다. 당연히 감옥은 자유보다 즐거워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감옥의 시설을 나쁘게 하는 것보다는, 자유를 지금보다 좀더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인 처벌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제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에서

 

 

 

31.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 비트겐슈타인

 과학이 발전을 거듭하며 점점 첨단으로 치닫던 20세기 초, 일부 학자들은 철학을 과학에 밀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학문으로 여겼다. 이들의 눈에 철학은 더 이상 세계의 모습을 밝히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학문이 아니었다. 이런 일들은 이제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에 넘겨주어야 한다.

 이들은 또한 신, 존재, 진리, 삶의 의미와 같은 철학의 고유한 과제들을 단지 우리의 생각이나 언어 습관 속에서 나타나는 오류 탓에 생긴 사이비 문제 정도로 보았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에게 남은 일이란 이런 오류들이 왜 생겨나는지를 밝혀서 철학적 문제들을 청소해 버리는 것뿐이다.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인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철학은 효용을 다하고 사라져 버릴 터다. 철학자들은 결국 자신의 일을 끝장내는 것을 목표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던 거다.

 이 시기 철학자들 사이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우리가 쓰는 언어를 정교하게 하는 일이었다. 논리는 우리의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논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오류 없는 정교한 언어를 만든다면 결국 우리의 생각도 오류가 없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프레게가 구체화한 이 같은 관심은 결국 오류 없는 완전한 언어, 즉 인공언어(Artificial Language)를 만들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이제 철학의 종말은 눈앞에 다가온 듯 보였다.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 Wittgenstein)은 이러한 작업에 마침표를 찍은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고,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이 철학을 끝장냈다고 생각하여 젊은 시절 홀가분하게 철학계를 떠났다. 나중에 비트겐슈타인도 자기주장에 중대한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다시 철학계로 돌아왔다. 그가 해소했다고 믿었던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 철학자 중 일부는 아직도 철학적 작업을 ‘논리와 언어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소하는 것’이라 여긴다. 이들은 흔히 ‘분석철학자’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프레게 :: 독일의 수학자, 논리학자. 수학은 논리학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라는 이론주의에 기초하여 자연수론의 엄밀한 도출을 시도하고 그것을 위한 필요로부터 명제 논리학 과 술어 논리학의 엄밀한 정식화를 수행하였다. 러셀은 기수를 '집합의 집합'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 정의 방법은 프레게에서 유래한다. 그는 의미론의 분야에서도 수학에 관련하여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하고 현대 의미론의 기초를 이루지만 그의 저작은 독특한 기호를 사용한 난해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인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후설, 러셀,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레게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비트겐슈타인은 성년이 되었을 때 교향곡 전 악장을 통째로 외워서 휘파람으로 정확히 불어 내고 클라리넷도 수준급으로 연주할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놀랍게도 빈의 명문가 자녀들이 다니는 문법학교와 인문계 고등학교(김나지움)에 진학하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진학하던 기술학교에 입학했다.

1906년에 란츠 실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베를린 공대에 진학했고, 이어서 1908년에 항공공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영국 맨체스터로 유학을 떠났다. 1910년에는 제트 엔진에 대한 특허를 내기도 했다. 항공공학에는 수학이 필수다. 그는 자연스럽게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수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러셀의 《수학 원리》와 프레게의 문제의식을 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12년, 스물세 살의 비트겐슈타인은 대담하게도 자신에게 철학적인 자질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예나 대학에 있던 프레게를 직접 찾아갔다. 프레게는 그에게 러셀에게 배우라고 충고했다. 이에 따라 그는 철학을 배우기 위해 러셀이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러셀은 이 젊은이의 비범함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러셀은 친구에게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은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정신적 경험’이었다고 했으며, 그를 ‘완벽한 천재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비트겐슈타인이 공식적으로 철학을 공부한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러셀에게 배운 세 학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는 일반적인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스승’처럼 여겨지는 측면도 있었다. 러셀은 논리학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되레 감명을 받았으며, 그에게서 영감을 얻곤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주저 없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1918년, 제국이 패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포로가 되기까지 전쟁터에서 보낸 5년 동안, 그는 철학적 작업을 계속하여 한 권의 책을 써냈다. 이 책이 그 유명한 《논리철학 논고》다.

 이 책은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주된 관심은 당시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던 ‘언어’였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림 이론’이라고 불리는 주장을 내세웠다. 파리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에 관한 재판 기사가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재판에서는 사건 현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모형 차와 인형 등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그 모형들을 가지고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각각의 모형들이 실제의 차와 사람 등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이와 같다. 언어가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쓰이는 말들이 실제 상황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명제로 이루어져 있고, 세계는 가능한 상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명제들과 상황들은 각각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으며, 똑같은 논리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그려 주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언어를 이런 식으로 본다면,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해 왔던 신, 자아, 도덕의 근거 등에 대한 논의는 뜻 없는 말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들이 의미하는 대상은 세상에 없다. 따라서 이런 논의들은 말이 안 되는 말을 끊임없이 내뱉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언어란 과학처럼 실제 세계를 설명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신, 자아, 도덕 등의 문제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가 세상을 그리는 ‘그림’이라면, 이것들을 말로 표현하거나 설명하는 방법은 없다. 이런 문제들은 삶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는 신비한 것들이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그는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문제를 언어로는 말할 수 없을뿐더러 논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정리해 버렸다.

 

 《논리철학 논고》를 쓴 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에게 더 이상 철학을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철학의 모든 문제도 자신의 책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자원하여 가장 낙후되고 외진 시골의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1926년, 사소한 체벌이 문제가 되어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교사직에서 물러났다. 1929년, 마흔 살의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철학을 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갔다. 이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논리철학 논고》의 영향으로 학자들이 그의 복귀를 끊임없이 요청했을 뿐더러,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 책에서 자신이 내세운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와 몇 편의 짧은 글을 빼고는 생전에 낸 책이 거의 없다. 완전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기 때문에 책을 출판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던 탓이다.

 

 무어 :: 영국의 철학자. B.러셀, L.비트겐슈타인 등과 케임브리지 학파를 대표한다. 《마인드 Mind》지(誌)에 발표한 《관념론 논박(論駁)》에서 관념론을 비판하여 20세기 실재론(實在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지 에드워드 무어 [George Edward Moore] (두산백과)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철학적 탐구》가 발간되었는데, 이 책은 또 한 번 철학자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책은 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자아비판을 담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언어는 《논리철학 논고》에서처럼 세상의 무엇을 가리킴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망치!’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망치를 지시하기 때문에 뜻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망치 좀 갖다줘!’라는 뜻으로도, ‘저기 망치가 있어!’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언어가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을 지칭하기 때문이 아니라, 게임의 법칙을 따르듯, 제각각 말이 사용되는 다양한 ‘삶의 양식’ 속의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사이의 명확한 관계를 밝혀서 오류가 없는 이상적인 언어를 만들려는 작업은 무의미하다.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말들이 쓰이는 각각의 삶의 상황을 드러내고 보여 줌으로써 오류를 줄이는 일뿐이다. 우리는 이제 이상적인 언어를 만들려는 ‘사상누각’을 버리고 일상의 언어라는 ‘거친 대지’로 돌아와야 한다.

 

 언어와 논리 분석에 주된 관심을 두는 20세기의 분석철학은, 오류가 없는 완벽한 언어를 찾아보려는 ‘이상 언어학파’와, 일상 언어의 쓰임새를 면밀히 검토하는 ‘일상 언어학파’로 나뉜다. 이 둘은 각각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격이 다른 두 학파가 모두 한 사람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은 수많은 위인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히틀러와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철학자 포퍼와는 몇 블록 떨어진 거리에 살았다. (물론 둘은 서로를 몰랐다.) 프로이트도 20세기 초 빈에서 활동을 했고, 건축가 로스, 비평가 크라우스도 빈이 주된 활동 무대였다.

 

 

 

32. 판단 중지, 다시 생활 세계로 – 후설

 현상학 :: 현상학은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에 의해 창시된 철학운동의 하나이다. 현상학은 세계와 그 내부의 다양한 실재적 또는 상상적인 대상의 존재를 세계가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들에게 나타내고 있는 현상 그 구조를 통하여 연구해 간다. 여러 가지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이 우리들에게 어떠한 대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 즉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역으로 사물을 경험한 우리들의 의식측면에서 보면 의식이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의식의 방향을 후설은 ‘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계의 존재구조에 대한 물음은 세계를 실제로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하고 있다는 지향성의 전체 연관으로의 물음일 뿐이며 또한 그 경우에 의식과 그 대상인 세계는 서로 실체적으로 분리된 두 항으로서가 아니라 지향성이라는 동일한 하나의 연관 속에서 서로 교차하면서 연관하는 두 계기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점에서 세계의 현상을 분석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세계의 현상의 장이라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의식이라는 장이 《초월론적 주관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론적 주관성의 분석은 의식 내부의 구조분석에 그치지 않고 그 때마다의 대상의식과 동시에 이른바 잠재적. 익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다양한 ‘지평(地平)’의 분석 또는 의식의 발생적인 ‘역사’로 확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 《신체성》, 《간(間)주관성》, 《수용성》더 나아가 자신을 시간 과정으로서 구성하는 주관성의 《시간화》의 작용과 《생활세계》라는 세계 개념 등이며 후설에 이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슈츠(Alfred Schutz) 등의 현상학자가 이러한 주제나 개념을 존재론 또는 언어, 지각, 타자 경험의 분석을 통하여 의식이나 주관성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을 능가하는 형태로 발전시켰다. 그들의 성과는 데리다(Jacques Derrida)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라는 현대 프랑스 사상, 사회학, 정신의학을 비롯한 20세기의 과학연구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상학 [phenomenology, 現象學, Phanomenologie] (21세기 정치학대사전, 2010.1.5., 한국사전연구사)

 

 현상학에 대해 어렴풋이 정의를 내리자면, ‘인간의 의식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현상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밝히는 학문’ 정도가 될 듯싶다.

 사실 현상학자들 사이에서조차 현상학의 명확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흔히 비슷한 성향을 지닌 학자들의 무리를 가리켜 ‘~학파’라고 부르지만, 유독 ‘현상학파’라는 말은 없다. 단지 뭉뚱그려 ‘현상학 운동’이라는 표현을 쓸 따름이다. 그 이유는 현상학 자체가 체계적으로 확립된 이론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학술 운동 쪽에 더 가까운 탓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현상학을 가리켜 천의 얼굴을 한 프로메테우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현상학은 다양한 뜻을 지닐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학문’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후설(Edmund Husserl)은 현상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시킨 사람이다. 후설 이후에 현상학은 20세기를 주도한 철학 사조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 당시는 ‘심리학주의’가 수학과 철학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다. 심리학주의란 ‘수학이나 논리의 법칙은 모두 심리학으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2+3=5‘와 같은 수학식도 결국 반복되는 경험과 습관을 추상화해 얻은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학문의 기초는 심리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는 얘기다. 1891년에 발표된 후설의 저서 《산술의 철학》은 그가 이러한 심리학주의적 사고에 이끌리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독일의 수학자 프레게가 《산술의 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자, 후설은 자기 사상의 오류를 인정하고 철저하게 전향해 버린다. 프레게에 따르면, 심리학주의는 모든 진리를 확실하지 않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이를테면 ‘2+3=5’가 경험과 습관을 단순히 추상화해서 얻은 법칙에 지나지 않는다면, ‘2+3’의 값이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5’라는 사실은 입증할 수 없다. 사람마다 경험은 모두 다른 까닭이다.

 따라서 프레게는 ‘수와 수학적 진리는 인간의 심리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수학책 밖에서도 참이다. 개나 소 등이 살아 숨 쉬는 자연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며, 더 나아가 우주 어디에서건 참이다. 그렇다면 수와 수학적 진리는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1900년에 《논리 연구》를 출간한다. 이듬해에는 《논리 연구》 제2편을 내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현상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후설은 프레게처럼 수학이나 논리가 만들어 낸 진리가 우리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지향성’이라는 용어를 끌어들인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항상 어떤 것에 쏠리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제 비로소 현상학의 대상인 현상의 의미가 분명해 진다. 현상이란 곧 ‘우리의 의식이 떠오르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우리가 파악하는 수학적 법칙이나 논리적 진리는 우리의 의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한에서만 진리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이야말로 이러한 진리들이 언제나 진리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의식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의 현상학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경험에 앞선다. 후설의 현상학을 ‘선험적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911년, 후설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 《엄밀한 학(學)으로서의 철학》이 출간된다. 후설에게 철학이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가장 궁극적이고도 확실한 근거를 발견하는 학문이다. 그는 ‘현상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그 근거를 발견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일단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판단 중지(epoche)를 내린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우리의 의식은 지식을 형성하는 의식 구조로 향할 수밖에 없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노에시스(noesis)-노에마(noema) 상관관계’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스어로 ‘사유’란 뜻인 노에시스는 ‘생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노에마는 그리스어로 ‘사유된 것’이란 뜻으로, ‘생각의 대상’을 가리킨다. 이 둘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밀접하게 붙어 있으며, 이 같은 구조에서 세상의 모든 지식이 생겨난다. 후설은 바로 이러한 순수 의식의 구조를 밝힘으로써 모든 학문을 엄밀하게 만들 수 있는 기초를 세우려 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역사와 실존 양면에 걸쳐 언어를 통해 인간 중심의 본질을 밝히려는 해석학의 입장을 빌려 와, ‘해석학적 현상학’이란 방법론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순수 인식은 불가능하다.

 

 후설은 77세 되던 해인 1936년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현상학적 철학 입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유럽이 정신적 위기를 겪게 된 것은 생활 세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때 생활 세계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세상을 뜻한다. 과학 문명은 생활 세계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실제 삶보다는, 과학이라는 잣대로 측정하고 수치화한 자료를 더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 문명은 ‘과학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과학이 만들어 낸 지식은 생활 세계를 수치화ㆍ법칙화한 것일뿐, 생활 세계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지식을 추구하기 전에 그것이 우리의 삶, 곧 생활 세계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야 대상을 과학의 잣대로만 판단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성을 짓밟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 후설은 생활 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과학의 비인간성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후설이 죽자, 나치는 4만 장이 넘는 그의 원고를 모두 없애버리려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원고는, 후설을 연구하기 위해 방문한 어느 신부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 원고들을 보관하기 위해 벨기에의 루벵 대학에는 ‘후설 문서 보관소’가 설립되었고, 이 자료들을 기초로 1950년대부터 《후설 전집》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상학은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후설이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전문가들은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등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철학자들에게서 후설의 영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메를로 퐁티 :: 프랑스의 철학자. E.후설의 후기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활세계의 현상학적 기술(記述)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기도한 저서 《지각의 현상학》를 썼다. 사르트르, S.de 보부아르 등과 더불어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이론가가 되었다. 나중에 용공적인 정치적 태도를 취하게 된 사르트르와 사상적으로 결별하였다.
라 로세르 근처 로쉬포르 쉬르 메르 출생.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사범대학)를 졸업, 여기에서 J.P.사르트르를 알게 되었다. 1945년 리옹, 1949년 소르본대학을 거쳐 1952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E.후설의 후기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활세계의 현상학적 기술(記述)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기도한 주저 《지각의 현상학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1945)에 의하여, 사르트르, S.de 보부아르 등과 더불어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이론가가 되었고, 실존주의적 양의성(兩義性)의 입장이 철저해졌다.
그의 주저는 신체 ·지각을 중심으로 주체와 객체, 나와 남의 문제를 논하였고, 사르트르와 같이 대자(對自) ·즉자(卽自)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고 양자를 불가분의 통일 속에 포착하려고 하는 양의성을 내세웠다.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트르에 앞서 공산주의자에게 동정을 표하였다. 그러나 한층 더 용공적인 정치적 태도를 취하게 된 사르트르의 철학을 울트라볼셰비즘이라고 단정, 비판하며 비공산주의로 전환하고, 《변증법의 모험》(1955)에서는 사르트르를 신랄하게 비난하여 사상적 결별을 고하였다. 저서로는 《행동의 구조 La Structure du comportement》(1942) 《휴머니즘과 테로르》(1947)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두산백과)

 

 후설은 확실한 것은 객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내면에 있는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객관적이고 수치화된 세상에 끼워 맞추려는 과학 문명에 맞서, 주체적인 이성과 인간성의 가치를 강조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로프>의 상영 시간은 80분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보다 영화를 더 길게 느낀다. 어떤 이가 죽음을 당하고, 시체가 숨겨진 후 칵테일파티가 열리는 모든 과정이 담겨 있다. 관객들은 3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간을 80분 안에 압축해서 느낀다. 어떤 과정도 생략되거나 줄어들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히치콕은 장면 곳곳에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장치들을 심어 놓았다. 살인할 때는 벌건 대낮이었다가, 마지막 건배를 할 때는 창밖에 맨해튼 건물의 불빛이 반짝이는 식이다. 중간 중간 노을이 물드는 장면을 보여 주기도 한다.

 우리의 두뇌에는 시간을 느끼는 특별한 부분이 없다. 뇌는 여러 가지 정보에 기대어 시간을 추측해 낼 뿐이다.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이유다.

 

 

 

33.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 – 하이데거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20세기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하이데거는 2000년까지, 칸트와 헤겔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연구된 철학자다.

 

 하이데거는 브렌타노의 제자였던 후설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19년, 후설의 조교가 되어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같은 해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사강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스승과 제자는 둘 다 성실한 학자였으나 성격은 아주 달랐던 듯싶다. 이 점은 강의 스타일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후설이 자기 사색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었던 데 비해, 하이데거는 철저하게 학생 위주의 강의를 했다. 그는 매우 주도면밀하게 수업을 계획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졌으며, 학생들이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토론에 참여하기를 끊임없이 권했다. 인간을 다른 인간 존재와 ‘더불어 있는 존재’로 파악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탐구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존재’자체이다.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연구했다. 세상에는 돌, 꽃, 나무, 동물 등 수많은 ‘존재자’가 있다. 이런 것들은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오로지 인간만이 존재에 대해, 즉 ‘있음’과 ‘없음‘을 구별할 수 있으며 왜 자신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런 뜻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존재자, 즉 ’현존재(Da-Sein)’라도 보았다. 존재에 대해 밝히려면 바로 존재를 알고 있는 존재, 즉 현존재인 인간을 탐구해야 한다.

 인간은 나무 한 그루, 돌덩이 하나, 개 한 마리가 존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에 존재한다. 나무나 돌덩이, 동물들은 그냥 주어진 대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 결단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해 가며 산다. 이를 하이데거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떠맡는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살아간다. 이런 식의 삶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삶’이라고 한다. 이 같은 비 본래적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최종적인 가능성인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이것 때문에 ‘본래적 삶’을 살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상의 쾌락, 다른 이들과의 관계 등에 몰두하면서 계속 비본래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라고 역설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인간은 삶의 매 순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미리 경험해 본 죽음이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삶을 반성하게 만들고 스스로 결단하여 새 삶을 기획하도록 만든다.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미래가 현재 나의 삶을 바꿔 놓는다. 오직 인간에게만이 이처럼 있지도 않은 미래가 현실을 규정한다.

 

 《존재와 시간》으로 유명해진 하이데거는 1928년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그리고 1933년 나치의 명령에 따라 이 대학 총장으로 부임했다. 이 사실 때문에 하이데거는 지금까지도 ‘나치 협력자’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학자적인 순진함으로 나치 독일이 ‘죽음으로 향해 가는 인간 현존재의 영웅적인 인내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었다. 즉, 나치의 국가사회주의가 무의미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현해야 할 이상을 제시해 주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해 주리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순진한 생각이 나치 정부와 들어맞았을 리 없다. 그는 유태인 반대 포스터를 대학 교내에 못 붙이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나치 정부와 실랑이를 벌였다. 급기야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총장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런데도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은 나치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하이데거의 공식적인 강연을 금지했다.

 

 해석학 :: 문헌의 올바른 이해를 중심 과제로 삼는 학문. 해석학은 르네상스 시기에 그리스 고전에 대한 문헌학적인 연구와 《성경》의 통일된 해석을 위한 하나의 기술로 여겨졌다. 그러다 슐라이어마허에 이르러 학문적인 틀을 갖추었으며, 하이데거와 그의 제자인 가다머에 와서 더욱 심화, 발전되어 ‘해석학적 철학’이 성립되었다.

 

 ‘독일 교수 출신’ 철학자들은 여느 나라의 철학자들과 분명하게 다른 스타일을 보인다. 철학의 역사에서 직업이 ‘철학자’였던 사람들은 많지 않다 (소크라테스도 원래는 목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왕의 가정교사 등등의 직업을 함께 가졌음을 유념해 보라). 그러나 칸트 이후로 독일 철학자들은 ‘철학 교수’라는 직업을 갖고 철학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네들의 철학은 대단히 정교하다. 생각을 철학 고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까닭이다. 반면, 그만큼 세상 물정에도 어둡다. 그래서 ‘독일 철학자답다’는 표현에는 ‘생각이 대단이 정교하다’, ‘내용이 무지하게 어렵다’, ‘세상 물정에 어둡다’라는 의미가 묻어 있다.

 

 

 

34. 사상계의 제임스 딘 – 사르트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사상계의 ‘제임스 딘’이라고 할 만한 인물로, 구속받기를 싫어했고 자신과 사람들을 얽매려는 모든 것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는 파격적인 계약 결혼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저서조차 따로 보관하지 않을 정도로 재산에 무관심했으며, 한편으로는 죄책감 없이 쾌락을 누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히피 :: 196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청년층을 주체로 하여 시작된, 탈사회적(脫社會的)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이듬해에 뉴욕·로스앤젤레스·버클리·워싱턴 등의 대도시로 퍼져 나갔으며, 파리·런던까지 파급되었다.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해피(happy:행복한)에서 나왔다는 설, 히프트(hipped:열중한, 화가 단단히 난)에서 나왔다는 설, 재즈 용어인 힙(hip:가락을 맞추다), 엉덩이를 뜻하는 힙(hip), 갈채 등을 보낼 때의 소리 '힙,힙'등에서 나왔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행복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진부한 물질문명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며, 비틀스나 도어스 등에 심취하고, 항의집회에서 뜨겁게 기세를 올리며, 발가벗고 인간성을 찾는 시위를 하므로, 어느 설이든 부분적으로는 히피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처럼 많은 어원이 지적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복잡성을 말해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사랑을 찾고, 비둘기의 힘, 꽃의 힘(평화의 상징)을 사랑하며,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한다. 체질적으로는 외면적·기성적인 것에 만족할 수 없으며,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만들고 있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차림새는, 남성은 장발·수염투성이에 펜던트(목걸이)와 굵은 벨트에 부츠를 신었고, 여성도 장발·미니스커트에 샌들 또는 맨발이다. 그들은 대도시 안에서나 교외에 히피 빌리지를 형성하는데, 그러한 곳에는 젊은이들의 탈사회적 생활방식에 공감하는 사람들(diggers)의 기부금 등으로,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시설까지 마련되어 있다.
또, 인간성을 압살(壓殺)하는 물질문명이나 국가·사회제도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징병기피·반전·인종주의에의 반항 등을 내세운 캠페인을 벌이며, 기관지도 발행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히피 [hippie] (두산백과)

 

 레이몽 아롱 :: 프랑스의 정치 사회학자로 전후 J.P.사르트르 등과 함께 잡지 《현대》를 창간하고, 《콩바》, 《피가로》 등 잡지의 논설 기자로 활약하였다. 주요 저서에 《지식인들의 아편》등이 있다.
파리 출생. 1924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런던에서 드골의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운동에 참가, 같은 이름의 기관지 주필이 되었다. 전후 J.P.사르트르 등과 함께 잡지 《현대 Les Temps modernes》(1945)를 창간하고, 《콩바 Combat》 《피가로 Le Figaro》 등 잡지의 논설 기자로 활약하였으나, 후에 사르트르와 결별하고 반마르크스주의로 일관하였다. 1957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어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경제사관의 비판, 공업화사회의 분석 등에 관한 저서를 발표하였다. 주요저서에 《현대독일사회학 La Sociologie allemande contemporaine》(1935) 《지식인들의 아편 L’Opium des intellectuels》(1955)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Democratie et totalitarisme》(1965)《회고록》(1983)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레몽 아롱 [Raymond Aron] (두산백과)

 

 레비스트로스 :: 현대 프랑스의 문화인류학(민족학)자, 사회학자, 브라질의 상파울로 대학 교수(1935~ 1938).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 1940~1947년 미국에서 지내고 주미 프랑스대사관의 문화 관계 참사관으로도 근무했다. 1959년 이래,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 그의 학설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켕, 모스(M. Mauss)와 미국의 문화인류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보아스(F. Boas, 1858~1942), 크로버(A.Kroeber, 1876~1960) 등의 사상과 연결된다. 그의 연구는 '구조주의'의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근년에는 그의 전문영역뿐 아니라, 철학이나 예술 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레비 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시몬 드 보부아르 :: 프랑스의 철학자, 소설가이며 행동과 사상 두 영역에서 공헌을 한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로서 페미니즘의 고전적 텍스트 『제2의 성』 외에 소설 『초대받은 여자』, 『위기의 여자』 등 다양한 책들을 집필하였다.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의 장녀로 태어나 카톨릭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교육자로 지내다가 소설가가 되었다.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하기도 했던 보부아르는, 처음에는 사회주의자로 일관했으나 가장 혁명적인 좌익 사회에도 성적 불평등이 존재함을 알고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표적 활동으로 1972년에 '여성해방운동(M.L.F.)'을 창설한 것을 들 수 있다. 1947년 '여권연맹(La Ligue du droit des femmes)'을 창설하고 'S.O.S. 매맞는 여성들'을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1971년에는 법 개정을 요구하는 페미니스트 그룹 '선택'을 조직하는 한편, 잡지 『페미니스트 문제』의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1974년부터 '여성의 권리동맹' 의장을 역임했다. 1986년 죽을 때까지 급진적인 활동가로 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5.22., 휴머니스트)

 

 철학자인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기 위해 독일에 머물렀던 짧은 기간을 빼고는, 자유인 사르트르는 1938년까지 고등학교 교사라는 소시민으로 살았다. 그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구토》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다에 돌을 던지는 아이들 흉내를 내려고 돌을 집다가 구역질을 한다. 그 뒤 그는 마로니에 나무 뿌리를 보고도 구토를 하는 등 여러 사물들 앞에서 토기를 느끼지만 이유를 알지 못한다.

 사르트르는 다양한 구토 경험을 통해 세상 모든 존재의 본모습을 보이려 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따지고 보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있을 뿐이다.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져 있다는 느낌과 무의미에서 오는 허무감, 주인공이 구토를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인간이 놓인 극단적인 허무의 현실을 완전한 긍정으로 탈바꿈시켰다. 1943년에 발표한 《존재와 무》에서,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져 목적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오히려 그 때문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창조적 존재로 거듭난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도구에는 나름의 본질이 있다. 예를 들면, 톱의 본질은 썰기 위한 것이다. 이런 본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톱을 만든다. 썰지 못하는 톱은 톱이 아니다.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물에서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반대다.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 인간은 세상에 그냥 던져져 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사물과 달리,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이 극단적인 허무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펼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를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짐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짐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갈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이다.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한편으로 자유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자유로운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에 늘 고민과 불안에 싸여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려 한다. 군인ㆍ공무원 등 사회가 주는 역할에 안주하며 무한한 자유가 주는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의미를 좇음으로써 스스로 삶을 결단해야 하는 불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자기기만’으로 본다.

 진정한 인간,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다른 것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주변과 상황을 핑계 대지 않고 항상 주체적으로 살기에 긍정적이며 도전적이다. 진정한 인간 실존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사르트르의 관심을 다른 사람과 사회로 돌려놓았다. 전쟁이라는 집단적 폭력 앞에서 그는 ‘앙가주망(Engagement)’, 곧 참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하지만 자유를 억누르는 세력과 집단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 모든 세력에 대항해 싸우리라 결심한다.

 

 자유의 투사였던 사르트르도 마르크스 이론에 동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사회는 역사의 법칙에 따라 점차 평등한 쪽으로 나아가며 인간 개개인은 이를 위한 도구라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의 자유는 무엇에 대해서도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처음부터 공존하기 어려웠다. 결국 1956년,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부당하게 체코를 침략하자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와 결별을 선언했다.

 그 뒤로도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투쟁했다. 알제리 전쟁, 미국의 베트남 참전, 드골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프랑스의 68 혁명 등 굵직한 역사적 투쟁의 중심에 항상 그가 있었다. 심지어 1970년대에는 시인 김지하가 독재 정눡에 맞서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알제리 전쟁 :: 1954년부터 8년간에 걸쳐 프랑스와 벌인 알제리의 독립전쟁.
1954년 11월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이 무장봉기를 함으로써 시작되어 각지로 무장투쟁이 확대되었고, 1958년에는 그 병력이 13만 명을 넘는 인민전선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는 80만의 병력과 5조(兆) 프랑의 군사비를 투입하여 철저한 진압작전을 전개, 알제리 인민 약 100만이 죽고 70만이 투옥되었으며 프랑스군도 1만 2000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민족전선을 진압할 수는 없었으며, 1960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도시의 정치투쟁과 결합되었다. 이 투쟁의 발전을 토대로 FLN은 58년 가을 카이로에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 아랍제국과 사회주의 국가의 승인과 광범한 국제적 원조를 얻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58년 2월에 성립된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병력을 증강하여 군사탄압을 강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 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 여름부터 메룬·에비앙 등에서 비밀교섭을 벌인 결과, 1962년 3월 에비앙 협정이 성립되어 전쟁은 막을 내리고, 7월 1일에 행한 국민투표에 의하여 알제리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9월에 선출된 의회는 알제리의 공화제를 선언하고, 26일에는 A.벤 벨라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제리전쟁 (두산백과)

 

 68혁명 ::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근로자들이 일으킨 사회변혁운동으로 5월혁명이라고도 한다. 1968년 3월 미국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그 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지면서 발생하였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학교와 직장에서의 평등, 미국의 반전, 히피운동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 확산됐다. 시위대는 정부가 대학교육문제와 유럽공동체체제하에서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68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독일 등 국제적으로 번져나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68혁명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프랑스 내에서도 ‘사르트르는 철학자로서는 메를로 퐁티에 못 미치고 작가로서는 알베르 카뮈에 뒤지며, 역사적 판단에서는 레이몽 아롱에 밀린다’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의 구체적 진실에 대한 탐구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지식인이 자신의 직업에서 피해야만 할 가장 큰 위험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너무 조급히 일반화하려는 자세다. 지식인은 ‘일반화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개달아야 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아직 일반화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반화된 인간이란 ‘이루어 나가야할 존재’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이비 지식인은 진정한 지식인처럼 ‘아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아니다. 하지만...’, 또는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라고 말할 뿐이다.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중에서

 

 

 

35. 모든 물음은 가치가 있다 – 하버마스

 논쟁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다. 논쟁을 할 대는 상대의 설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능력과 자세가 더 중요하다. 물론 명쾌한 논리로 상대를 입도 뻥끗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상대방은 수긍한다기보다 짓눌려 있을 분이다.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 분노는 더욱 커지다가 언젠가 폭발하여 다시금 갈등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열다섯 살에, 당시 또래들처럼 히틀러 소년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뉘른베르크 나치 전범재판에 대한 기록영화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일어났던 엄청난 죄악을 알지도 못했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정치와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 ::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E.프롬, H.마르쿠제 등과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루었다. T.W.아도르노와 함께 한 인종적 편견의 연구를 담은 5권의 저서《편견연구(偏見硏究)》가 남아있다.
서독 슈투트가르트 근교 주펜하우젠(Zuffenhausen)에서 유태인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하여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한스 코르넬리우스(Hans Cornelius) 교수를 만나 경제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추천으로 훗설의 지도를 받았으며 1925년 I.칸트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중 우연히 아도르노를 만나 알게되었으며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형성하였다. 1924년 《실천철학과 이론철학의 연계로서 칸트철학의 비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교수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철학교수가 되어 대학 부속 사회문제연구소장을 지냈으며, E.프롬, H.마르쿠제 등과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루었다. 나치스 정권 수립 후에는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미국으로 망명,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 되돌아왔다. 미국 체류 중 T.W.아도르노와 함께 한 인종적 편견의 연구는, 인종적 편견을 의식의 심층에까지 추구한 점에서 사회심리학사상 하나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연구의 성과는 5권의 《편견연구(偏見硏究)》에 나타나 있다. 사상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자이며, 학문적으로는 헤겔철학의 소양과 정신분석학의 지식을 결합시킨, 현대의 특색 있는 사회과학자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두산백과)

 

 아도르노 ::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음악에 주요한 저술을 남겼으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190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한 아도르노는 1924년 철학학위를 취득하여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2년간 강의한 바 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4년 영국으로 도피하여 옥스퍼드 대학과 이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강의하였으며, 이후에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주도한 사회 연구에도 참여한 바 있었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동료인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와 함께, 1949년 프랑크푸르트대학으로 돌아와 사회과학 연구소를 재건하고 비판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에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을, 1949년에 『현대 음악 철학』을, 1966년에는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ctics)을, 1970년에는 『미적 이론』을 출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도르노 [Theodor Wiesengrund Adorno]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비판 이론’또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부르는 학풍의 제1세대들이다. 이들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간의 이성은 인류를 야만에서 해방시키고 발전시킨 듯 하지만, 사실은 재앙으로 떨어뜨렸을 뿐이다.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 제1, 2차 세계 대전과 같은 엄청난 재앙은 결국 과학 문명이 낳은 결과다. 그럴듯한 명분과 고상한 말을 내세우지만 이성으로 무장한 인류가 저지르는 폭력은 그 어떤 야만인의 행위보다 가혹하고 잔인하다.

 자연은 이제 인간의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나아가 과학이라는 잣대가 다른 모든 가치보다 중요해지면서, 사람을 평가할 때도 얼마나 도덕적이고 인간적인지보다, 무슨 능력이 얼마나 있고 어떤 쓸모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사람들 스스로도 상대를 이용과 억압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비판 이론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원인을 인간의 이성, 곧 합리성의 근본적인 결함에서 찾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 M.호르크하이머가 지도하기 시작한 후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참가한 여러 학자들과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재건된 동 연구소에서 배출된 제2세대의 연구자를 포함한 총칭(總稱).
T.W.아도르노, H.마르쿠제, W.벤야민, E.프롬, F.L.노이만 등을 비롯하여 제2세대 연구자인 J.하버마스, A.슈미트 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반대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든 마르크스의 동기(動機)를 계승, 그것을 S.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미국 사회학의 방법을 결합시켜 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비판이론을 전개하였다.
나치스로부터 탈출,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기관지 《사회연구》를 통하여 파시즘에 대한 사상적 저항을 관철하였고, 《권위와 가족》(1938) 《권위주의적 퍼서낼리티》(1950) 등의 뛰어난 공동연구를 이룩한 외에, 서유럽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省察), 예컨대 《계몽의 변증법(辨證法)》(1948)을 시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관리사회(管理社會)의 문화라든가 지배적인 실증주의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고, 1960년대의 국제적인 학생소요 때에는 마르쿠제를 비롯하여 신좌익적(新左翼的)인 현대사회비판론(現代社會批判論)으로 일약 각광을 받았다.
아도르노의 《부정적 변증법》(1966),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노이만의 《비히모스》(1942),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1964), 하버마스의 《이론과 실천》(1963) 《인식과 관심》(1968) 등은 이들 연구성과의 일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랑크푸르트학파 [Frankfurter Schule, ─學派] (두산백과)

 

 비판 이론가들은 이성을 매우 비관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그럼에도 하버마스는 정반대로 합리성에서 인류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을 찾았다. 

 그가 쓴 《이론과 실천》과 《인식과 관심》에는 그의 생각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일단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들처럼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펼친다.

 자연과학은 우리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물질문명은 과학적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수치로 판단할 수 없고 무엇에 유용한지를 알 수 없는 것들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종교나 도덕규범, 인간관계 등은 과학적 잣대 앞에서 맥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과학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사물을 연구하듯 사람을 연구 대상으로 세우고 관찰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나와 상대방이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 역시 전통적인 가치를 무너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도덕규범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설사 물질적인 풍요와 평등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런 이론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물질적인 문제만 해결될 뿐, 서로가 서로를 이용 대상으로 바라보고 억압하는 상황은 여전히 계속될 터다.

 하버마스는 단순히 빈곤만 사라진 상황을 인간의 진정한 해방으로 보지 않았다.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가 가능해야만 비로소 해방된 사회다. 이미 절대 가난이 사라진 1960년대 유럽에서 비판 이론이 사회적 대안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이다.

 하버마스는 제1세대 거장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견해를 폈다. 그는 이런 해방된 사회는 이성을 통한 논쟁과 가르침, 곧 계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비판 이론가들이 비난을 퍼붓던 인간의 합리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물질문명의 여러 문제들은 이성 자체의 결함에서라기보다, 아직 이성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은 탓에 생긴 것으로 보았다.

 

 하버마스는 지금까지 어떤 폭력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를 마조히즘이라 비난하고, 학생운동을 좌파 파시즘이라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는 이내 극렬 학생 운동권들의 적이 되었다. 이들에게 ‘부르주아 반동 지성인’으로 매도당하는 현실에서, 하버마스는 더 이상 대학에 머물며 학생들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부터 하버마스는 연구소에 파묻혀 10여 년간 오직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그는 억압 없는 해방된 사회를 위해 이상적인 언어 모델에 주목했다. 언어도 하나의 행위다. 예를 들어, ‘내일 그곳에 갈게’라는 말은 그렇게 하겠다는 행동의 약속을 담고 있다. 이 약속이 지켜지는 이유는 서로가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그 말이 진실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인류의 해방을 향한 열쇠를 발견한다. 그는 합리성을 단순히 논리적 사고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에서 찾는다. ‘의사소통의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이성의 잣대를 세운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항상 억압을 낳는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짓누르고 위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낳는 까닭이다. 하지만 진정한 진리는 대화와 합의 속에서 나온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토론 가운데서 최선의 결론을 맺을 수 있다.

 그는 올바른 대화의 기준으로, 서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고, 말하는 내용이 참이어야 하며, 상대방이 성실히 지킬 것을 믿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평등하고 수평적이어야 함을 든다. 이렇게 이루어진 토론에서 우리는 서로가 합리적이라고 인정하는 최선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렇지 못한 대화는 폭력일 뿐이다. 그는 대화 속에서 이성의 새로운 역할을 찾는 독창적인 철학의 장을 열었다. 나아가 하버마스가 추구한 대화의 윤리, 곧 ‘담론 윤리학’은 현대 민주 사회에 도덕과 근거를 제시해 주는 이론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1996년, 하버마스가 한국을 찾았을 때, 시간에 쫓긴 진행자가 청중이 쏟아 놓은 수없이 많은 질문을 정리해서 몇 가지만 묻겠다고 하자, 하버마스는 ‘모든 물음은 저마다 가치가 있다’라며 일일이 답변을 해 주었다. 그것도 물음이 분명치 않으면 질문자에게 몇 번이고 되물으면서 말이다.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올바른 대화의 기준을 세웠다. 첫째, 서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그 내용은 참이어야 한다. 셋째, 상대방이 성실히 지키리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평등하고 수평적이어야 한다. 

 

 

 

36. 문명의 비밀코드 – 광기, 성(性), 병원, 감옥 – 미셸 푸코

 철학자들은 모든 시대를 설명해 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론을 꿈꾼다. 하지만 푸코(Michel Paul Foucault)는 거꾸로 한 시대나 개별적인 사건에 주목했다.

 

 하루 종일 고독하게 지내다가 친구들에게 야유를 보낼 대만 말을 하고, 남들과 어울려야 하는 식사 시간에는 누구든 공격하고 아무하고나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 강의실에서 칼로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괴짜라기보다는 정신병자에 가까울 듯싶다. 

 사이코 같은 행동도 수재들에게는 ‘천재의 행동’으로 정당화되는 법. 푸코 역시 그랬다.

 

 박사 학위 논문인 《광기의 역사》에서 그는 ‘광기’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 당시 서구인들이 갖고 있던 지배적인 생각을 분석하고 해부했다.

 푸코는 역사를 철저하게 분석하여 실증적인 문헌을 들이대며 철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기의 광기란 이성과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었다. 귀신 들린 사람의 이미지에서 느껴지듯, 신비롭고 이성으로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을 주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17~18세기에 들어오면서 광기는 반사회적인 범죄로 여겨졌다. 미친 사람들은 거지, 범죄자, 게으름뱅이와 함께 감금당했고 처벌받았다. 푸코는 그 이유를 노동력을 중시했던 당시의 직업관에서 찾는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곧 죄인으로 여겨졌다. 광기도 이런 측면에서 교정해야 할 죄악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의 산업 발달로 일손이 달리자, 더 이상 광인을 범죄자나 거지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지 않게 된다. 광인을 제외한 사람들은 일을 시키기 위해 석방되었던 것이다. 이제 수용소에는 광인들만 남았고 광기는 비로소 치료 받아야 할 질병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모든 광기를 질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야나 고흐, 니체에게서 보듯, 광기는 이성을 뛰어넘는 혜안을 주기도 한다. 광기를 배제한 우리의 문명은 이성 혼자서 독백하는 것과 같다. 이성적인 것이 곧 최선이고 바람직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광기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통제하기에 앞서, 우리는 광기 앞에서 우리의 이성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푸코는 광기와 같은 소소한 소재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의 사유 구조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밝히려 했다.

 

 당시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현상학 운동이 크게 유행하던 때였다. 지식이란 이성적인 인간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믿음이 확고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푸코는 구조주의에 가까운 견해를 폈다. 곧 지식은 개개인의 이성보다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인식 구조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거다.

 길거리를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모두가 벌거벗은 공중목욕탕에서는 옷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이 정신병자다. 예전에 어떤 재벌 총수는 천천히 식사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시간은 곧 금이니, 그보다 더 늦게 수저를 내려놓는 이는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서구인의 만찬에서 이렇게 먹었다가는 야만인으로 몰릴 게 뻔하다. 이처럼 상식은 어떤 ‘장(場)’에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이다.

 지식도 그렇다. 신앙이 지배했던 중세 사회에는 전후 관계를 따져 정확한 수치를 들이대는 과학적 해석이 오히려 납득하기 힘든 설명이었다. 그때에는 《성경》에 비춘 해석이 진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요새처럼 자연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신의 뜻에 기대어 만사를 풀려 한다면 비웃음만 사게 될 터다.

 이처럼 각각의 시대에는 우리네 앎을 만드는 거대한 인식의 틀이 있다. 이를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ēmē)’라 한다. 푸코는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듯, 수많은 구체적인 문헌 자료들을 통해 각 시개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 곧 에피스테메의 모습을 밝히려 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분석하며 시작되는 이 두껍고 난해한 《말과 사물》은 르네상스부터 근대까지의 시대별 에피스테메를 드러내 보여 주었다.

 

 에피스테메 :: 푸코(Michel Foucault)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에피스테메라 칭했다. 철학용어로서 에피스테메는 실천적 지식과 상대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지식, 또는 감성에 바탕을 둔 억견(臆見: doxa)과 상대되는 '참의 지식'을 말한다. 독사와 에피스테메의 구별은 이미 파트메니데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구별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에피스테메는 이데아를 파악하는 개념적인 진정한 인식을 뜻하며, 독사는 피스테메에 비해 감성적·주관적인 낮은 인식을 뜻한다. 한편 에피스테메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능력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피스테메 [Episteme]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국학자료원)

 

 《감시와 처벌》에서 그가 감옥을 분석한 의도는 점점 치밀해지고 강해지는 권력의 모습을 해부하듯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 있었다.

 과거의 권력은 잔인한 공개 처형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 대중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권력 행사는 그만큼 큰 저항을 불러올 여지가 있다. 

 현대의 권력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게 개개인의 행동을 통제하고 규제한다. 그 방법은 바로 ‘규율과 지도‘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학교에서 세세한 규율에 따라 수업 시간의 예절, 복장, 태도 등을 지도 받는다. 그리고 각각의 내용은 기록되고 관리된다. 모든 행동은 세밀하게 규정된 규칙에 따라 나뉘며,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에 복종하도록 길들여진다. 즉, 권력은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개인을 서서히 통제해 나간다.

 게다가 권력의 통제는 점점 더 효율적이 되어 간다. 푸코는 벤담이 제안한 감옥 설계 방법인 ‘일망 감시 체제’에 주목했다. 예전의 감옥은 죄수들은 한데 모여 있고 간수는 따로 떨어져 있느 ㄴ형태였다. 이러한 감옥에서는 죄수들이 공모하여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일망 감시 체제에서ㅤㅡㄴ, 간수는 가운데 있는 홀에 있다. 그리고 벽에 붙은 방 하나마다 따로따로 갇혀 있는 죄수들을 한눈에 감시한다.

 점점 더 발달하고 있는 정보 통신 기술은 권력에 일망 감시 체제와 같은 효과적인 감시 체계를 선물해 주었다. 권력자가 한눈에 모두를 감시하며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하게 되었다.

 

 푸코는 관면의 세계를 공허하게 헤매는 여느 철학자들과는 무척 달랐다. 그는 치밀한 사료 수집과 역사 분석으로 한 시대나 사회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새로운 철학 방법론을 펼쳐 보였다.

 현실에 기초한 자료, 섬세한 분석에서 이끌어 낸 이론은 가장 과학적이고 사실적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편견에 치우친 것일 가능성도 높다. 모래의 모습을 잘 분석한다고 해서 모래사장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지오웰의 《1984》는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반공 소설’로 읽혔다. 조지 오웰도 과거 소련 같은 사회주의 국가를 자신의 작품 모델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1984》는 ‘정보화 사회 비판’으로 읽힌다. ‘빅 브라더’는 점점 개인을 옥죄는 정보 통신 기술로 해석된다.

 작품의 해석은 왜 이리 극적으로 바뀌었을까? 시대가 달라진 탓이다. 신사임당은 과거 이상적 여성상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이를 여필종부(女必從夫)에 집착한 봉건적 여인으로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 또한 시대가 달라진 탓이다.

 

 

 

37. 열린 사회를 꿈꾼 비판적 합리주의자 – 포퍼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보여 준 명쾌한 자본주의 분석과 급진적 사회 개혁론에 깊이 빠져 들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에 만연한 고통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착취하는 탓으로 본다. 정부는 권력과 돈을 움켜쥔 소수, 즉 부르주아들이 다수의 인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 즉 프롤레타리아들이 힘을 합쳐 일어나 부르주아들을 폭력으로 쫓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모두가 평등하고 인간다운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포퍼는 시위 도중에 한 학생이 경찰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꾸었다. 아무리 좋은 목표와 명분이라 해도 개인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무가치하게 파멸시키는 이념이아면 올바를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포퍼는 항상 전체보다는 개인을, 화려한 청사진에 기댄 혁명보다는 다수의 동의에 기초한 점진적인 개혁을 중요하게 여겼다.

 

 쇤베르크 :: 오스트리아 태생의 작곡가. 표현주의 음악가인 쇤베르크는 실제로 표현주의 회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표현주의 화가이기도 하였으며 칸딘스키와는 절친한 친구사이기도 하였다. 표현주의 음악은 표현주의 회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예술가 자신의 감정(무의식적인 충동이나 욕망)의 주관적인 표출을 중요시한다. 표현주의 음악은 당시 기계문명과 1차대전 직전의 불안 등을 극단적인 높은 음역이나 낮은 음역의 연속적 사용, 자유로운 박자와 리듬, 극단적인 강약의 교체, 불협화음의 빈번한 사용 등을 통해서 표현했다. 표현주의 음악은 반음계의 지나친 사용 때문에 조성의 안정감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조성의 구속을 받지 않는 무조(無調)음악이 나타나게 된다. 
쇤베르크의 가장 큰 업적은 무조음악의 한 작곡기법으로서 '12음기법'을 창시한 데 있다. 12음기법은 좀더 '조직적'으로 무조음악을 만들어내는 작곡기법인 것이다. 즉 조성음악에 존재했던 으뜸음을 전혀 인정치 않고 1옥타브 안의 12개음(흰건반7개, 검은 건반 5개)에 모두 동등한 자격을 주어 이를 일정한 산술적 규칙에 따라 배열 진행시키는 음악이다.12음 음악은 원칙적으로 작곡가가 미리 정해놓은 12개의 음렬을 되풀이 해서 계속함으로써 구성되는 데 한 음이 연주된 경우 나머지 11개의 음이 연주되지 않고는 그 음으로 다시 되돌아 올수 없는 식이다. 이 규칙에다가 12음렬의 역행렬, 반행렬, 다시 반행렬의 역행렬등으로 변화시켜 하나의 음렬로부터 총 48개의 다른 음렬을 만들어낼 수 있게된다. 이렇게 12개의 음을 조직적으로 균등하게 사용함으로써 조성 또는 선법에 입각한 음악과는 다른 체계를 만들어낸다.
쇤베르크는 후기 낭만파 분위기의 초기 작품들인 <정화된 밤(1899년)> 등에서 부분적인 반음계주의를 사용하였으며 무조음악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12음 기법에 다다른다. 12음기법이 사용된 최초의 것은 1925년에 작곡된 op.25의 <피아노 모음곡>이다. 그가 12음 기법을 창시한 1925년 무렵에는 그의 음악을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나, 그의 제자인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와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에 의해 더욱 발전하여 하나의 기법으로 정착을 보았다. 2차대전 이후 테이프, 레코드 등 매스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확산되면서 급격하게 지지자들을 확보하였고, 20세기 후반기 작곡가들에게 그의 기법은 작곡의 상식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쇤베르크 [Arnold Schonberg]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베베른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독자적인 작풍을 추구하여 무조적(無調的)인 작품을 발표하고 12음기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적 의식은 스승 쇤베르크 및 동문 A.베르크보다 진보적이었고 본질만을 말하려는 정밀한 기법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빈 출생. 빈대학 철학과에서 음악학을 전공하고 1904년 이후는 A.쇤베르크 밑에서 작곡을 공부했으며, 1908년을 끝으로 스승과 함께 조성(調性)을 버리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 무렵부터 지휘자로 활동하는 한편, 독자적인 작풍을 추구하여 무조적(無調的)인 작품을 발표하고, 1924년부터는 12음기법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9년 오스트리아에 나치스정권이 생긴 뒤로는 공적 활동을 못하고, 1945년 잘츠부르크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점령군인 미국 병사의 오해를 받아 사살되었다. 12음기법의 확립자인 스승 쇤베르크 및 동문 A.베르크와 함께 그가 이룬 업적은 20세기 최대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음악적 의식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었으며, 본질만을 말하려는 정밀한 기법은 전자음악의 탄생을 촉진하는 등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는 현악 4중주곡 《바가텔》(작품 9) 《작품 28》, 관현악곡 《교향곡》(작품 21) 《변주곡》(작품 30), 칸타타 《작품 29》 《작품 31》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톤 폰 베베른 [Anton von Webern] (두산백과)

 

 포퍼의 《탐구의 논리》에 따르면, 이론은 반증 가능성이 있을 때 진정 과학적이다. 즉 어떤 주장이 틀릴 수 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대에만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천문학자들은 혜성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한 가설을 제안한다. 점성술사도 마찬가지로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혜성의 움직임을 예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문학을 ‘과학’으로 보지만, 점성술은 ‘미신’으로 여긴다. 둘 다 정교한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고(제대로 된 점성술사가 되기는 천문학 박사가 되기만큼이나 어렵다). 별의 움직임을 상당 수준까지 정확히 맞힐 수 있다. 게다가 별점이 맞는 경우도 꽤 많다. 반대로, 직접 별을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천문학의 예측이 실현되는 것을 경험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런데도 왜 천문학은 과학이고 점성술을 미신에 불과할까?

 포퍼의 반증 가능성은 이를 설명해 준다. 미신, 또는 사이비 과학은 예측이 틀리는 경우나 맞는 경우나 객관적인 토론과 설명이 불가능하다. 혜성의 움직임이 예측과 어긋났을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점성술사들이 곰자리의 기운이 처녀자리보다 강해져서 그렇게 됐다고 설명한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토론을 해 봐야 납득할 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천문학은 그렇지 않다. 과학자들이 태양 인력의 영향을 고려하지 못한 계산 결과라고 이야기한다면, 다른 증거를 들이밀며 반론을 펴는 등 객관적인 토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내놓기에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틀릴 수 있고(반증이 가능하고),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계속 성장ㆍ발전하며 좀 더 올바른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부단한 토론과 이성적인 반증이 가능한 가운데서 과학은 성립된다.

 

 ‘열린 사회’는 ‘닫힌 사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닫힌 사회에서, 사회의 도덕과 법률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절대적이어서 비판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닫힌 사회는, 역사란 법칙에 따라 어떤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역사주의에 기초해 있다. 국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알고 있다. 일상생활에 빠져 지내는 개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국가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기에, 국가는 개인들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한다. 또한, 대화보다 힘의 우위에 의한 폭력과 제재가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라 믿는다.

 닫힌 사회와 달리 열린 사회에서는 도덕과 법률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경되는 약속 같은 것으로 본다. 또한 열린 사회는 역사를 정해진 방향에 따라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점차 개선될 수 있다. 경험 부족 탓에 많은 혼란과 실수가 일어날 터다. 그럼에도, 열린 사회 사람들은 토론을 통한 세세한 조정들을 통해 오류를 점차 제거하며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열린 사회는 개인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에 귀 기울인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인류는 발전한다. 불완전하기에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으며, 노력에 의해 우리는 진리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서로의 뜻과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제도가 필요하게 된다. 자유와 평등은 이런 믿음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또한, 열린 사회는 닫힌 사회와 같이 이상과 계획에 따라 개인들을 억누르고 희생시키면서 사회 전체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열린 사회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한다. 개인들이 이성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며, 사회의 지배적인 견해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대 사회는 비로소 점진적으로 발전해 간다.

 

 현실에서는 모든 일이 합리적 대화로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약자들이 강자의 권력과 기득권에 맞서 자기주장을 합리적으로 내세워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선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포퍼가 자본가들의 옹호자로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열린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 높아지기 위해, 다른 이들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한다. 반면, 하나의 생명체 안에서는 계급투쟁과 같은 것이 없다. 유기체의 세포나 조직이 영양분을 얻기 위해 경쟁할 때는 있다. 하지만 다리가 머리가 되고자 하거나, 몸의 한 부분이 배가 되려 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생명체 속에는 열린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구성원 사이의 지위 다툼이 없다.

 반면, 닫힌 사회에서는 구성원 간의 다툼이 많지 않다. 사회 계급 등, 닫힌 사회의 제도는 신성불가침한 영역이다. 유기체 이론은 여기에 잘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를 유기체-하나의 생명처럼 보려는 시도는 거의 다 부족주의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선언과 같다. 열린 사회는 하나의 생명체 같은 모습이 없으므로 내가 ‘추상적 사회’라 부르는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열린 사회는 구체적이거나 실제적인 인간 집단이 갖는 특성은 많이 잃어버릴 것이다.

-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중에서 

 

 

 

38. 이해는 역사적이다 – 가다머

 가다머(Hans-Georg Gadmer)sms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쓴 《진리와 방법》역시 현대 해석학의 기초를 다진 저술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언젠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철학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정답을 바라지 않고 던지는 질문은 더욱 깊고 넓은 사고를 이끌어 내는 법이다. 우리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그렇다면 삶에 대해 설명하는 철학에서도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와 답변이란 별 의미가 없겠다. 끊임없이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고 음미하며 평가하는 가운데 삶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가는 것, 그것이 가다머가 해석학을 통해 진정 이루려 했던 일이다.

 

 하이데거는 흔히 ‘존재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우리 문명의 코드인 과학적 사고는 인간의 잣대로 세상의 존재들을 해석하고 평가하려 한다. 따라서 세상 존재들은 이성적으로 얼마나 잘 파악될 수 있느냐에 따라 객관성과 엄밀성이 결정되며, 여기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이 나닌 세상 존재 그 자체에 더 가치를 둔다.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이미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정신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가 우리의 정신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가 《진리와 방법》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48년이었지만, 출판이 된 것은 1960년이었다. 그는 ‘좋은 책은 최소한 9년간 숙성시켜야 한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는데, 자신의 말처럼 이 책은 충분한 사색과 검토를 거친 끝에 탄생했다. 이 책은 철학적 해석학의 기반을 닦은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해석학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맞서 제안된 정신과학의 탐구 방법이다. 자연과학은 객관성과 엄밀성을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하지만 사람의 삶은 이 같은 자연과학의 잣대로만 평가될 수 없다.

 문제는,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황산벌 싸움이라는 사건이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갈 리는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떤 시대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하나의 사건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가다머가 ‘이해는 역사적’이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게다가 우리는 결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선입견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는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를 배경으로 세상일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대상의 의므를 다루는 정신과학의 연구 방법은 자연과학과 같을 수 없다. 자연과학이 관찰을 통해 하나의 법칙을 만들어 다양한 의미를 하나의 설명 원리로 단순화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정신과학은 거꾸로 한 사물 뒤에 숨어 있는 무수한 의미들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처럼 가다머는 인간의 이해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정신문화가 과학적 방법에 귀속될 수 없음을 보이려 했다.

 

 해체주의 :: 서구 형이상학을 해체하고자 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사상.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이를 해체하고자 한 사상으로, 1960년대 현대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가 주장했다.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 지속돼 온 서구 형이상학을 육체보다 정신, 문자언어보다 음성언어가 중시된 이성중심주의로 보았는데, 이 안에 모순이 감추어져 있다고 보았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서구 형이상학의 해체작업이자 일종의 자기비판으로서 의의를 가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해체 [解體, deconstruction]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데리다 :: 프랑스의 철학자.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을 배운 후, 구조주의의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였다. 언어의 기호체계(記號體系)가 자의적인 것이라는 인식에서 언어 위에 조립된 논리학을 재검토하였다. 특히 서기언어(書記言語) 에크리튀르가 수행하는 역할을 중시하였다.
1930년 7월 15일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던 알제리 엘비아르에서 출생하였다. 알제리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였고 19세가 되어서야 프랑스에 처음 입국했다. 파리의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교수자격(아그레가시옹)을 얻었다. 1965년부터는 자신의 모교인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쳤다.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을 배운 후, 구조주의의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였다. 언어의 기호체계(記號體系)가 자의적인 것이라는 인식에서 언어 위에 조립된 논리학을 재검토하였다. 전통적인 서구철학에 대한 구조해체를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헤겔 뿐만아니라 훗설, 하이데거 등 모든 철학적 전통을 형이상학이라고 규정하였고 새로운 해석을 위해 해체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1968년 5월 사건 이후 프랑스 보수정권에 반기를 들었고 특히 철학에 대한 억압정책에 저항하여 철학교육연구그룹(GREPH)를 결성하였다. 1977년 《누가 철학교육을 두려워하는가?》라는 공동저서를 발표하였다. 미테랑 정권이 들어서자 철학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제철학학원을 설립하였으며 그 책임자가 되었다. 저서에 《근원 저편에 De la grammatologie》(1967), 《에크리튀르와 시차성 L’平criture et la difference》(1967) 등이 있다. 2004년 10월 지병인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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