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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미학 오디세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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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
저자
진중권
출판
휴머니스트
출판일
2003.11.25

 


 

0. 글머리에

 에셔 :: 네덜란드의 판화가. 기하학적 원리와 수학적 개념을 토대로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 공간을 표현했다. 평면의 규칙적 분할에 의한 무한한 공간의 확장과 순환, 그리고 대립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며, 모호한 시각적 환영 속에 사실과 상징, 시각과 개념 사이의 관계를 다뤘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Maurits Cornelis Escher] (두산백과) 

 

 별밭을 우러르며

 뒤러의 하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두 발로 설 수 있게 만든 건, 별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카시오페이아 :: 그리스신화에서 에티오피아 왕 케페우스의 비(妃). 헤르메스의 아들 알보스의 딸이며 케페우스(세페우스라고도 함)와의 사이에서 안드로메다를 낳았다. 허영심이 많아 자신의 미모가 바다의 님프인 네레이스들보다 뛰어나다고 뽐내었다. 또는 딸 안드로메다의 미모가 네레이스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랑했다고도 한다. 
네레이스들이 분한 마음에 해신 포세이돈에게 고해 바치자 네레이스의 하나인 암피트리테와 결혼한 포세이돈이 노하여 홍수를 일으키고 괴물 고래를 보내 에티오피아를 파괴했다. 케페우스는 재난을 막기 위하여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바쳤는데, 페가소스를 타고 날아가던 페르세우스가 그녀를 발견하고 괴물을 처치한 뒤 결혼하였다.
포세이돈은 카시오페이아와 케페우스가 죽은 뒤에 괴물 고래와 함께 하늘의 별자리가 되게 하였다. 카시오페이아자리는 카시오페이아가 의자에 앉은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인데, 이는 그녀가 허영심으로 나라를 어지럽힌 데 대한 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시오페이아 [Cassiopeia] (두산백과)

 

 피타고라스의 하늘

 피타고라스 학파는 사실 학파라기보다 오르페우스교라는 신비주의 신앙을 가진 하나의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매우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지켰고, 무엇보다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피타고라스가 살던 당시 그리스에서는 막 철학적 사유가 싹트고 있었다. 당시 철학계에서는 이 세상의 다양한 사물과 변화무쌍한 현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어떤 근본적인 것(arche)을 찾는 게 유행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물’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불’이라 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특이하게도 그런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 곧 ‘수(數)‘가 만물의 근원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수를 연구하는 게, 곧 존재의 가장 깊은 비밀을 탐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수학 연구는 피타고라스 교단에서 지켜야 할 계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피타고라스가 신봉하던 오르페우스는 인류 최초의 음악가였다. 그들은 물론 음악에서도 수적 비례를 찾아냈다. 음의 높이는 현(絃) 길이의 비례 관계로 설명된다. 현의 길이를 3분의 1 줄이면 음은 정확하게 5도가 올라가고, 반으로 줄이면 한 옥타브 올라간다.

 하늘에도 수의 조화가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별들이 현악기 속에 각자의 음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 교단의 교리에 도통한 사람은 이 우주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오르페우스교 :: 오르페우스가 신의 계시에 따라 창시하였다고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의 밀의적(密儀的) 종교.오르피즘이라고도 한다.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영혼이 영적 존재로서 불사와 영원의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기본종지(宗旨)로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의(敎義)에 바탕을 둔 계율에 따라 엄격한 수행과 특별한 제의(祭儀)를 행하였다. BC 7세기경 디오니소스 숭배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나, BC 6세기에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 본토와 남이탈리아 각지로 퍼졌다. 플라톤이나 핀다로스의 저서 등에서도 이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르페우스교 [orphism, ─敎] (두산백과)

 

 

 

1. 원시 예술 – 가상과 현실

 벌거벗은 눈

 19세기 말에 구석기인들의 동굴 벽화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그림이 위작(僞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1만 5000년 전 구석기 시대의 미개인들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히 묘사해낼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예술사에서 이 정도의 표현을 찾아보려면 한참이나 뒤로 내려와야 한다. 그 뒤 유럽과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도 놀라운 사실성을 보여주는 벽화들이 발견되었다. 덕분에 이 그림들은 위작이라는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신석기인들은 분명 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정신 능력을 지녔지만, 자연주의적 묘사를 더 발전시키기는커녕 관습화한 기하학적, 추상적 양식으로 후퇴(?)하였다.

 유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 1909~2001)dp 따르면,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는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게 된다. 말하자면 시지각(視知覺) 자체가 벌써 개념적 사유라는 색안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린이의 그림에서 벌써 우리는 시지각에 미치는 이런 개념적 사유의 영향력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결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크게 그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작게 그리거나 과감하게 빼버린다. 그들은 ‘아는 대로’ 그리는 셈이다.

 그러나 구석기 시대 원시인들은 아직 개념적 사유가 시지각을 지배할 정도까지 발달하진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개념적 사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었다. 개념적 사유로 무장하지 못한 이 ‘벌거벗은 눈’이야말로 그들의 놀라운 자연주의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구석기인의 ‘높은’ 수준의 자연주의가 그들의 ‘낮은’ 수준의 지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역설에 이르게 된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면 사정은 달라진다. 농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농경은 인간의 사유 능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도의 추상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연 현상에 대한 최초의 추상은 ‘사계절의 순환’이라는 관념이었을 것이다. 농경은 인간이 이미 변화무쌍한 현상들 속에서 어떤 ‘운행 질서’를 발견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이미 변덕스럽고 혼란스런 자연 현상에 사계절이라는 ‘도식’으로 질서를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계절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눈ㆍ비ㆍ더위ㆍ추위ㆍ서리ㆍ가뭄ㆍ우박ㆍ태풍ㆍ홍수 등 시시각각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연 현상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 현상들이 수천, 수만 번 반복되고 교차하는 가운데, 점차 그들은 이 현상의 파노라마 속에 어떤 공통성이 있음을 깨닫고, 거기서 ‘사계절의 순환’이라는 ‘개념’을 뽑아냈다.

 그 뒤 인간들은 외부세계를 파악하고 정복하기 위해 점점 더 추상적인 사유에 의존한다. 해마다 나일 강이 범람하여 토지의 경계선을 지워버리는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발전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추상적, 기하학적 사유는 곧 자연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므로, 그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더욱더 두터워졌다. 그럴수록 그들은 저 구석기인들이 가졌던 ‘벌거벗은 눈’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눈은 점점 더 개념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럴수록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아는 대로’묘사하게 되었다.

 선사 시대부터 우리는 벌써 두 가지 대립되는 재현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적 양식과 신석기 시대의 기하학적 양식이 그것이다.

 

 유희, 노동, 주술

 유희

 ‘유희 기원설’이라 할 수 있는 이 가설에 따르면, 벽화나 집단무(集團舞) 같은 원시 예술은 ‘남아도는 에너지의 방출 통로’다. 말하자면 근질거리는 몸을 풀기 위한 한가한 소일거리라는 얘기다. 이 고상한 소일거리는 사실 동물의 세계에서 물려받은 거라고 한다. 실제로 몇몇 동물은 영양 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놀이를 하는데, 원시 예술은 결국 여기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엔 커다란 문제가 있다. 과연 구석기인의 생활이 남아도는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해 안달할 정도로 편안했을까? 자연의 횡포 앞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이들의 삶이?

 

 노동

 여기서 다른 가설이 나온다. 예술은 노동에서 비롯되었다. 수렵 단계의 구석기 벽화에는 사냥감이 되는 동물만 나타난다. 하지만 농경이 시작되는 신석기 벽화에는 동물 대신 나무나 농작물, 해와 달처럼 농경과 관계가 깊은 자연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예술은 유희가 아니라 노동에서 비롯된 게 틀림없는 것 같다. 가령 원시인들의 수렵무는 배가 불러 에너지가 남아돌 때가 아니라, 오히려 짐승을 잡지 못해 오랫동안 굶주렸을 때 추는 거라고 한다. 말하자면 힘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서 춤을 추었단 얘기다. 하지만 이 설명도 아직 충분한 것 같지는 않다. 왜 원시인들은 그 힘겨운 삶 속에서도 예술을 해야만 했을까? 벽화를 그리거나 수렵무를 춘다고 짐승이 더 잡히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주술

 동굴 벽화엔 대개 창이나 도끼로 가격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은 왜 애써 그린 그림을 거리낌 없이 훼손했을까? 그건 그림 속의 들소를 죽임으로써 살아 있는 들소를 잡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술이라는 쓸모없는 짓거리에 귀중한 시간과 정열을 투자한 것은, ‘가상’을 통해 ‘현실’의 소망을 이루려는 주술적 신앙 때문이었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 나오는 수우족의 한 인디언은 어느 탐험가가 들소를 스케치하는 걸 보고 이렇게 불평했다. - “저 사람이 들소를 여러 마리 자기 책 속에 넣어 갔다. 그때부터 우리는 들소를 구경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가령 그림을 그린다고 들소의 수가 늘거나, 수렵무를 춘다고 들소가 더 잘 잡힐 리는 없다.주술의 효과가 먹히지 않는 경우를 여러 번 당했다고 하자. 그럼 무지한 구석기인들도 차차 의심을 품고, 결국 엄청난 시간과 정열을 잡아먹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이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 시대에 동굴 벽화는 원시인들이 경험에서 얻은 동물에 관한 모든 지식을 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동물의 동작과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지식, 가령 급소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들은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지식이었다. 

 수렵무도 마찬가지다. 이 춤을 통해 그들은 사냥의 절차와 테크닉을 반복 학습할 수 있었다. 또 언제나 승리로 끝나는 극의 구조는 사냥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격렬한 동작은 사냥에 필요한 신체 단련을 대신해 주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그들의 주요한 경제 활동이었던 수렵에 필요한 모든 지식, 모든 정신적, 신체적 준비와 훈련이 바로 이 예술 형태 속에 집약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이 신비한 효과를 영험한 주술의 힘으로 설명하고, 또 그렇게 믿었다. 그때는 예술이 주술이고, 주술이 예술이었다. 둘 사이엔 아무런 구별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로서는 유일한 지식 체계이자 정보 저장과 전달의 수단이었다.

 

 황금가지

 인간들 신을 살해하다

 원시인들은 사계절의 순조로운 운행을 위해 자연 현상을 주술로 재현했다. 먼저 자연의 생장력을 상징하는 사람을 뽑는다. 물론 젊고 건강해야 한다. 그는 사제이고 왕이고 수목의 정령이자, 무엇보다도 신이다. 이제 원시인들 특유의 은유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이 젊고 건강한 동안, 대지는 겨울의 차가운 힘을 몰아내고 들판에 푸른 물결을 가져온다. 그러나 신이 늙고 병들면, 대지는 봄을 부를 수도, 풍요로운 결실을 보장할 수도 없다. 때문에 신과 동침한 아내가 남편의 몸이 전과 다르다고 보고하는 날엔, 즉시 그의 목을 베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새로이 신으로 선출했다. 흉작이나 재앙이 닥쳐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엔 이렇게 인간이 신을 죽였다. 처음 신을 죽인 건 니체가 아니다.

 

 비극의 탄생

 아무리 영예로운 자리라 할지라도, 조만간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누가 신이 되려 하겠는가. 때문에 이런 야만적인 관습은 점차 완화되기 시작한다. 적어도 신에게 자기 방어의 권리는 주어야 한다. 만약 신이 젊은 도전자와 싸워 그를 물리친다면, 아직 그에게 신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 셈이 아닌가?

 그 뒤 서서히 사제의 권력이 증대하자, 이제 그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가령 그의 아들)이 죽어간다. 원시인들의 논리를 이용하면, 목숨을 내놓기 싫은 사제가, 자기 아들이 사실 가지랑 다를 바 없음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소년 살해 이야기는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술에 취해 자기 아들을 찢어 죽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디오니소스 축제도 갈가리 찢겨 죽은 디오니소스를 추모하는 행사였다.

 신이 살해되면, 그 시체를 뜯어먹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신의 육신을 먹으면 신의 영험함이 자신에게 옮아온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신 또는 그 대리자의 목을 벤 날엔 흥겨운 축제가 벌어졌다. 디오니소스도 그렇게 뜯어 먹혔을 게다. 유럽에서 초봄에 행해지는 ‘카니발’(글자 그대로 하면 인육을 먹는다는 뜻이다)의 원형이 바로 이거다.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 1872~1945)에 따르면, 이와 유사한 관습이 중세까지, 그것도 기독교 신앙 아래 버젓이 행해졌다 한다. 성자의 유골이 영험하다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은 가끔 성자를 죽여, 그 시체를 끓는 물에 푹 고아 뼈와 살을 분리한 다음, 그 뼈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한다. 

 그 뒤로는 인간 대신에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이 죽어갔다. 여기서 신이 양으로 바뀌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동물을 숲이나 들판 생장력을 상징하는 정령으로 여기는 관습은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때 신과 동물이 혼동되곤 한다. 가령 포도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때론 양과 동일시 된다. 이제 사람들은 인육 대신에 양고기를 뜯으며 즐거워한다. 그리스의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불렀던 노래 <디튀람보스>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또 비극이란 말의 어원, ‘트라고에디아(tragoedia)’는 원래 양을 뜻하는 말이었다 한다. 비극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탄생했다.

 

 신상의 탄생

 유럽의 여로 곳엔 추수가 끝난 뒤 가장 마지막으로 벤 볏단으로 인형을 만들어 텅 빈 들판의 한구석에 세워두는 관습이 있다. 이 인형은 이듬해 봄 떠들썩한 축제 때 목이 베어진다. 목을 벤 뒤 사람들은 이 인형에 불을 질러 강물 속에 던져버리거나, 그 재를 받아 들판에 뿌리곤 했다. 그럼 다음해 농사는 어김없이 풍작이었다. 이 인형은 수목의 정령이었다. 아득한 옛날엔 인형 대신에 산 사람의 목을 베었으리라. 파르테논 신전에 금박과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대리석 신상들도 원래는 겨우내 들판 한구석에 외로이 서 있다 봄에 가차없이 목이 잘렸던 그 초라한 밀짚 허수아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피그말리온

 예술, 종교, 철학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는 주술의 발전이 극에 달한 어느 원시 부족의 얘기를 전하는데, 거기에선 터부를 깨지 않고는 숨도 못 쉴 정도로 모든 생활이 터부로 규제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세계를 이해하고 개조하려는 인류 최초의 시도가 좌절하여 오히려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질식시킬 때, 인간은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대안을 찾는다. 주술로 소망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인간은 이제 신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이 위대한 존재의 권능에 매달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종교가 발생했다. 이제 신은 끝없이 위대해지고, 그럴수록 인간은 끝없이 초라해진다. 예전엔 인간이 신을 죽였지만, 이제 신이 인간을 살리고 죽인다.

 물론 다른 길로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주술이나 신화가 사물들 사이의 비유적 연관을 설정하는 데 반해, 이들은 비유를 벗겨내고 사물들의 진짜 연관을 알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철학이 생겨난다. 철학은 오늘의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을 감싸안은 것의 이름이었다. 과거에 주술은 사물에까지 영혼을 부여했지만, 우리의 과학은 영혼까지도 사물화 한다.

 주술적 기능에서 풀려나자, 예술도 이제 주술이 아니게 된다. 예술은 ‘현실’과 ‘가상’이 분리되는 순간에 탄생한다. 가령 디오니소스의 제의(祭儀) 참가자들에겐 제의 속에서 재현되는 사건이 곧 현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신은 그 자리에 그들과 함께 있었다. 신이 그 자리에 ‘재림(represent)’한 거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제의 속의 사건을 한갓 ‘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신이 그 자리에 재림한 게 아니다. 극 속의 신은 분장한 인간, 즉 신의 ‘재현(represent)’일 뿐이다. 신성한 사건이 한 편의 재미있는 연극이 된다. 제의가 예술이 된 거다.

 이제 주술은 서서히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상징 형식으로 나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가상

 예술은 이렇게 주술이 ‘가상’으로 여겨지는 순간에 탄생한다. 하지만 가상으로 탄생하는 순간부터, 예술은 자신을 변명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가상을 만듦으로써 현실의 소망을 이룰 수 없다면, 이 가상이 도대체 어디에 필요하단 말인가? 가상은 글자 그대로 ‘가짜’가 아닌가. 그러니 인류 최초의 미학(플라톤)이 예술에 부정적 태도를 보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거짓이며, 얄팍한 눈속임이며, 진리의 왜곡이며 등등.

 하지만 아무리 악담을 퍼부어도 ‘예술’은 플라톤의 ‘인생’보다 더 길었다. 혹시 이 가상이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예술과 진리를 연결하는 것 – 이게 바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미학적 변주곡의 중심 테마다.

 

 이카루스의 추락

 이제 우리는 예술의 비밀을 찾아 미학사의 복잡한 미궁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어떻게 하면 길을 잃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을까? 테세우스처럼 붉은 실을 따라가면 된다.(아리아드네의 실) 그 붉은 실은 무얼까? 바로 ‘가상’과 ‘진리’라는 개념이다.

 가상과 진리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대략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이달로스 :: ‘명장(名匠)’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대장간의 신(神) 헤파이스토스의 자손이다. 여신 아테네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건축과 공예의 명인으로서 각지에서 존경받았다. 도끼·송곳·자 등 많은 연장을 발명하였고, 그가 만든 조상(彫像)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조카인 탈로스를 제자로 삼았으나, 후에 그의 뛰어난 솜씨를 시기하여 죽였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고 크레타섬으로 도망쳤다. 여기서도 그의 기술이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인정을 받아, 흰 소를 사랑한 미노스왕의 아내 파시파에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을 때, 이 괴물을 가두기 위한 미궁(迷宮) 라비린토스를 지었다. 또한 테세우스를 사랑한 그의 딸 아리아드네를 위하여 미궁으로 들어갈 때 몸에다 매주려고 실을 뽑았었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다이달로스 자신도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라비린토스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다이달로스는 날개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과 아들의 어깨에 밀[蠟]로 붙이고 함께 날아올라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태양 가까이로 너무 접근하였기 때문에, 태양열에 밀이 녹아 날개가 떨어져 나가면서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혼자 하늘을 날아 시칠리아로 도망친 다이달로스는 시칠리아의 왕 코카로스의 보호를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이달로스 [Daedalus/Daidalos] (두산백과) 

 

 

 

2. 고대 예술과 미학 – 가상의 탄생

 인간들의 삶 속에 저렇게 현실과 가상이 분리되면, 드디어 문명이란 것이 시작된다.

 

 오시리스의 땅

 거꾸로 흐르는 땅

 그러니까 약 3000년 전 일이다. 이집트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 당도했을 때 크게 놀랐다고 한다. 강물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이라곤 나일 강만 보고 살아왔던 그들에게, 강이라면 마땅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야 했다. 근데 이 강은 뻔뻔스럽게도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잖은가! 하류에서 상류로 흐르는 이 괴상한 강에 깊은 인상을 받은 투탕카멘 1세는 친히 비석에 이런 글귀를 새겨, 유년기 인류의 미숙함을 영원히 기념하게 된다. - “유프라테스 강은 물의 흐름을 일변하여 거꾸로 상류로 향한다.”

 이 시기 이집트의 아침은 동쪽 창을 여는 의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신관(神官)이 동창을 열지 않으면 해가 하늘에 입장할 수 없다고 믿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아침에 해가 뜨리라는 기대는 이제까지 매번 그랬기 때문에 생긴 습관일 뿐,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18세기에 가장 개화된 나라에 살았던 철학자조차 내일 아침 해가 뜰 것을 보장하지 못했는데, 그보다 몇 천 년을 덜 산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리. 세계 최초로 기하학을 만든 이집트인들의 추상 능력에도 이런 한계가 있었다. 

 

 영원을 향하여

 이집트 예술은 그리스 예술과는 전혀 딴판이다. 이집트의 벽화나 회화에 그려진 인물은 대개 머리는 옆으로 향하고, 상체는 앞을 향하며, 다시 발은 옆을 향한다. 연못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묘사되고, 노니는 물고기는 옆으로 누워 있다. 이런 특이한 묘사 방식에 학자들은 ‘정면성의 원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원리가 노리는 건 뭘까? 사물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측면에서 묘사하여, 되도록 사물의 형태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인간의 얼굴은 옆에서 볼 때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 반면 가슴은 앞에서 봐야 거기에 달린 두 팔이 보일 거다. 한편 발은 정면보다는 옆에서 볼 때 그 특징이 훨씬 잘 드러난다. 또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볼 대, 물고기는 누워 있을 때, 그 형태가 온전히 드러난다.

 이집트인들은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그리는 데에 별로 관심이 없었나 보다. 그들은 사물을 묘사할 대, 그들이 이미 여러 각도에서 보았던 시각적 정보를 분석하여 그 사물의 본질적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하나의 그림 안에 시각적 종합을 제시했다. 우연적이며 일시적인 인물의 동작이나 자세는 그들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건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물의 모습을 제시하는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예술은 하나의 시각적 추상인 셈이다.

 하지만 추상은 차갑다. 가령 우리집 뽀삐는 귀엽게 짖지만, 개라는 ‘개념’은 결코 짖지 않는다. 시각적 추상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인물은 개념만큼이나 차갑게 나타난다. 또 모든 추상은 일반적이다. 가령 개의 ‘개념’은 우리집 뽀삐와 악명 높은 쌀집 도사견을 구별하지 않는다. 둘 다 ‘개’다. 마찬가지로 시각적 추상도 일반적 특징을 보존하기 위해 사물의 개별적이며 개성적인 측면을 제거한다. 때문에 거기서 인물은 구체적인 어떤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일반으로 나타난다.

 

 추상과 감정 이입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 1881~1965)라는 사람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처럼 축복받은 땅에선 인간과 자연 사이에 행복한 범신론적 친화 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때 사람들은 ‘감정 이입 충동’을 갖게 되고, 그 결과 그리스 예술처럼 유기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양식이 발달한다. 하지만 이집트처럼 자연 환경이 척박한 곳에선 광막한 외부세계가 인간에게 끊임없이 내적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사람들은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 충동’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추상적ㆍ기하학적 양식이 발달한다. 보링거는 그리스나 이집트 예술은 물론이고, 인류의 모든 예술이 이 두 가지 충동의 소산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동그라미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이 두려움을 이기려면 한가운데 점을 찍으면 된다. 그러면 동그라미의 정체가 밝혀진다. 동그라미란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다. 이게 바로 이집트인들이 사막 한가운데에 피라미드를 세운 이유라고 하는데, 사막 한가운데 피라미드를 세움으로써 그들은 그 막연한 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었다는 거다.

 

 사자의 서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적 관념과는 달리, 그들은 영혼이 부활하려면 그것이 깃들일 육체가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자의 몸을 미라로 보존하려 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라는 파손되기 쉬웠고, 때문에 나중에 조상(彫像)이나 회화로 대체된다. 이때 조상이나 회화는 죽은 자의 신체를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해야 한다. 한 팔이 몸총에 가려 안 보이면, 그 사람은 영원히 외팔이로 살아야 할 테니까.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

 그리스에도 솔거 뺨치는 화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오스(Parasios)가 유명한데, 둘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예술에서만큼은 한 치도 양복하지 않는 팽팽한 경쟁자였다. 이 두 사람이 드디어 어느 날 그림 솜씨를 겨룬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먼저 제욱시스가 그림을 덮고 있던 막을 들추었다. 포도 넝쿨이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새들이 넝쿨에 달린 포도송이를 따먹으려고 날아들었다. 물론 그림에 부딪혀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운명했을 거다. 새의 눈을 속일 만큼 감쪽같은 그림 솜씨는 사람들의 감탄을 사기에 충분했다. 의기양양해진 제욱시스는 파라시오스에게 다가가, 그에게 그림의 막을 들추라고 했다. 그러자 파라시오스는 이렇게 얘기했다. “잘 보게. 자네가 나보고 들추라는 그 막이 바로 내가 그린 그림일게.” 제욱시스는 자신의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고 한다. “난 새의 눈을 속였지만, 자네는 새를 속인 화가의 눈을 속였으니까.”

 

 제욱시스 :: 고대 그리스의 화가. 헤라클레아 출생. 아테네의 아폴로도로스의 제자이다. 스승의 작풍을 계승 발전시켜 빛과 그림자의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사용에 의하여 대표적인 음영화가(陰影畵家)가 되었다. 작품은 현존하지 않지만 고문헌에 의하면 《켄타우로스의 가족》과 남이탈리아의 크로톤 헬라신전을 위하여 그린 《헬레나상(像)》 등의 걸작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욱시스 [Zeuxis] (두산백과)

 

 파라시오스 :: 고대 그리스의 화가. 고대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 때 회화 기법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으며 사실적 묘사 능력이 뛰어났다. 레우카디아의 헤르메스상 등에 특징적인 선묘가 잘 나타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라시오스 [Parrhasios] (두산백과)

 

 시각적 환영

 암포라 ::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몸통이 불룩 나온 긴 항아리 형식. 목부분[頸部]은 원통형을 이루고 받침부분이 안정되어 있으며 항아리의 목 부분에서 몸통에 걸쳐 세로로 2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또한 대부분이 동그란 손잡이가 붙은 뚜껑이 덮여 있다. 물 ·기름 ·술 등을 담아두는 외에도 곡식 ·물고기 등의 식료품을 저장하는 데 쓰인 듯하며, 당시의 도기 중에서는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특수한 형식으로는 ‘판아테나이아’의 제전에 사용된 바닥이 뾰족하게 생긴 것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암포라 [Amphora] (두산백과)

 

 단축법 :: 그림에서 어떤 물체가 비스듬히 놓였을 때 그 물체는 실제의 길이보다도 짧게 보이는데 그러한 현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는 회화기법. 그려진 물체는 그 정도가 심할수록 보는 사람에게 강한 현실감을 주는 효과가 있다. 고전주의적 회화에서는 개체를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게 전형적인 형태로 묘사하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단축법을 자제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 기법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1508∼11512)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인체 그림에서 유독 극적인 표현을 중시한 마니에리스모에서 바로크시대까지의 회화, 특히 천장화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축법 [foreshortening, 短縮法] (두산백과)

 

 영원한 미소

 그리스 예술도 처음엔 딱딱한 기하학적 양식에서 출발했다. 거기서 벗어나 찬란한 고전기에 이르기까지를 보통 아르케익 시대라 부르는데, 이 시기는 확실히 이집트 예술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시기의 조각상의 인물은 오히려 이집트 조각상보다 더 딱딱해 보이는데, 그건 시각적 환영의 효과보다 신체 부분들 사이의 기하학적 대칭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도형에 의해 인물의 자연성이 억압되어 있고, 단지 입가에 떠오른 신비한 미소(‘아르케익 스마일’)만이 생기를 느끼게 해줄 뿐이다. 독일 비평가 빙켈만은 이 시기를 ‘고대 양식’이라 부르며, 그 특징을 ‘엄격함’과 ‘딱딱함’으로 규정했다.

 

 아테나 팔라스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동양의 전제주의를 물리친 이 시기(마라톤 전투)에 그리스 예술도 오리엔트의 지배에서 벗어나 찬란한 고전기를 맞는다.

 페이디아스의 시대를 빙켈만은 ‘숭고 양식’이라 불렀다. 이 시대 조각가들의 주요 관심은 ‘위대함(Grossheit)’에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려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위대함은 말 그대로 ‘거대함’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페이디아스를 유명하게 만든 그 신상들은 모두 10m가 넘는 거상(巨像)들이었다.

 

 마라톤 전투 :: 마라톤 전투의 발발 배경은 기원전 511년, 아테네인들이 여러 해 동안 참주(僭主)로 도시를 지배했던 히피아스를 몰아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히피아스를 복위시키려 하자, 아테네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이오니아 식민지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 일으킨 반란에 가담한다.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는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군사를 보내 그리스와 그 동맹 에레트리아를 정복하게 한다. 지원 함대는 폭풍에 휘말려 파괴되었으나, 이듬해에는 막대한 수의 새 함대가 에우보이아에 도달해 본토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숙적 스파르타에 전령을 보내 원조를 요청했지만, 스파르타는 종교 축제 기간이라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며 거절했다. 작은 도시 플라타이아 외에는 아테네를 도울 지원 세력이 없었다. 아테네의 장수들은 공격을 해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었다. 결국 그들은 용감하게 침략자를 맞아 북쪽을 향해 행군해 갔다.
양군은 아테네 북쪽의 마라톤 평원에서 만났다. 만 명도 채 안 되는 아테네의 보병대는 2만 명에서 5만 명가량의 페르시아군과 맞섰는데, 페르시아군은 바다를 등지고 있었다. 페르시아 기병대가 전장을 비웠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테네의 장군 밀티아데스는 기습 공격을 가해 페르시아군을 혼란시켰다. 압도당한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싸여 함대로 도망쳤다. 아테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아테네 측 인명 손실은 고작 192명이었던 반면 페르시아군은 6,4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는 페르시아가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맛본 최초의 커다란 패배였으며, 아테네의 자긍심과 세력을 크게 드높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테네군이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하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8.20., 마로니에북스)

 

 페이디아스 :: BC 5세기 고전 전기의 숭고양식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아테네 출생. 카르미데스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회화를 공부하였으나 조각가를 지망하여 아르고스의 하게라이다스에게서 배웠다. 조각가로서 재능이 뛰어나 우수한 많은 신상(神像)을 제작하여 당시 ‘신들의 상 제작자’로 칭송되었다. 작풍은 단순·명료하면서도 어느 것이나 개개의 감정을 초월한 높은 정신성을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이디아스 [Pheidias] (두산백과)

 

 창을 든 사람

 아르케익 시대의 조각이 좌우의 기계적 대칭을 특징으로 한다면, 여기선 그것이 긴장과 이완의 교묘한 역학적 균형으로 대체되어 있다. 신체의 왼쪽, 오른쪽 절반의 구별은 근육 하나 하나에까지 나타나 있는데, 이렇게 비대칭이면서도 몸 전체는 균형을 이룬다. 이런 자세를 ‘콘트라포스토’라 한다.

 이 시대의 조각가들은 동시에 인체 비례를 완성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가령 몸 전체는 정확하게 머리 길이의 여덟 배가 되어야 하며, 팔과 다리는 머리의 몇 배가 되어야 하며... 하는 식이다. 특히 폴리클레이토스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카논’)를 완성함으로써 ‘비례의 입법자’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인물들은 여전히 딱딱해 보인다. 그래서 이 시기를 빙켈만은 ‘숭고함’과 ‘딱딱함’으로 특징지었다.

 

 폴리클레이토스 :: 시키온 출생. 고대 아르고스의 하게라이다스(아게라이다스)에게서 배웠고, 나중에 아르고스의 시민권을 얻었다고 전한다. 페이디아스와 함께 고전 전기(BC 5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서 남성입상 조각의 이상상을 만들었다. 인체 각부의 가장 아름다운 비례를 수적(數的)으로 산출하여 그것을 《카논 Canon》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저술하였다. 유명한 《도리포로스(창을 든 청년)》 《디아두메노스(승리의 머리띠를 맨 청년)》는 그러한 비례를 기초로 하여 제작된 걸작이다. 인체의 가장 아름다운 비례는 머리가 전신장의 7분의 1이 된다. 오늘날 그의 저술이나 청동상의 원작은 없어지고, 겨우 몇 가지 로마시대의 대리석 모각(模刻)이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청동조각에 뛰어났으며, 유명한 아르고스의 헤라신전의 《헤라상》은 금과 상아로 된 것이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폴리클레이토스 [Polykleitos] (두산백과)

 

 콘트라포스토 :: 미술에서 인체를 표현할 때 무게를 한쪽 발에 집중하고 다른 쪽 발은 편안하게 놓는 구도. 이탈리아어로 '정반대의 것'이라는 뜻으로, 미술에서 '대칭적 조화'를 의미한다. 한쪽 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다른 쪽 발의 무릎은 자연스럽게 약간 구부려서 전체적으로 완만한 에스(S)자 모양이며, 얼굴·가슴·대퇴부 등 신체 각 부위의 정면이 조금씩 틀어져 있는 자세이다.
이 구도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인물상을 조각할 때 두 다리에 몸무게가 똑같이 실리는 정적인 정면 자세에 대한 대안으로 고안하였으며, 이로써 인물 조각의 표현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BC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는 콘트라포스토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종전까지 엄격하게 지켜지던 정면 자세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하였으며,《밀로의 비너스》도 이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도나텔로는 콘트라포스토를 재발견한 조각가로 평가되며,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에서 보여 준 콘트라포스토 구도는 바로크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조각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콘트라포스토 구도가 사용되었는데,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콘트라포스토 [Contraposto] (두산백과)

 

 벨베데레의 아폴론

 그건 수학적으로 정확한 비례가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가령 수학책 속의 도형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사물이 아름다우려면 엄격한 비례 속에 약간의 빗나감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프락시텔레스(Praxiteles)는 엄격한 비례에 이런 우연적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미(優美)의 아버지’가 된다. 숭고 양식에선 정신의 숭고함이 물질을 억누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정신과 물질이 행복한 조화를 이루어, 비로소 인물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양식을 빙켈만은 ‘아름다운 양식’이라고 부르며 ‘우미’로 특징지었다. 비로소 그리스 예술은 정점에 도달한다.

 

 프락시텔레스 :: BC 370∼BC 330년 무렵에 활약하였으며, 아테네 사람으로 조각가 케피소도토스의 아들이다. 고전 전기(BC 5세기)가 ‘숭고양식(崇高樣式)’을 낳은 데 대하여, 그는 섬세하고 우미(優美)한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신상(神像)을 많이 제작하여, 고전 후기(BC 4세기)의 ‘우미양식’을 창조함으로써, 페이디아스가 죽은 후의 아티카파의 대표적 조각가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그를 불후의 조각가로 만든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바티칸미술관 등에 로마시대의 模刻이 있다)를 비롯하여, 《헤르메스》(올림피아미술관) 《도마뱀을 죽이는 아폴론》(바티칸미술관:로마시대의 모각) 등이 있으며, 모두 우아한 형태와 여성적인 감미로운 감정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는 여신을 전라(全裸)로 표현한 최초의 모뉴먼트로, 그 후 여성의 나체표현의 원형이 되었다. 올림피아미술관의 《헤르메스》는 1877년에 올림피아의 헤라신전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그의 우미한 양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원작이다(모각설(模刻說)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락시텔레스 [Praxiteles] (두산백과)

 

 예술의 종말?

 빙켈만은 고대 예술의 역사를 유기체의 삶으로 간주했다. 예술은 탄생하고 성장하여 이제 완숙기에 도달했다. 그 다음엔? 물론 죽어야 한다. 그는 이 사멸의 단계를 로마 예술에서 보았다. 여기에 빙켈만은 ‘모방자의 양식’이란 경멸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보잘 것 없음’으로 특징지었다. 사실 로마 시대의 조각들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있다. 그건 대개 그리스 조각에서 동작이나 자세 또는 모티프를 따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마인들은 수많은 그리스 조각의 모작을 만들어냈는데,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조각들은 대부분 진품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모작이다.

 빙켈만은 예술이 그리스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후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완전한 모범을 모방하는 것뿐이다.

 

 라오콘

 <라오콘>은 헬레니즘 예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의 몰락기로, 빙켈만의 시대 구분에 따르면 대충 ‘미의 양식’과 ‘모방자 양식’ 사이의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시기의 조각은 아주 역동적이고 극적인 성격을 띠는데, 이런 특징이 <라오콘>에서도 잘 드러난다. 라오콘은 원래 트로이의 신관으로, 목마를 성 안에 들여놓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가, 하늘의 비밀을 누설한 죄로 두 아들과 함께 신들이 보낸 뱀에 휘감겨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빙켈만은 이 작품 속에서 그리스 예술의 본질적 특징을 복, 그걸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특징지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걸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자세나 표정에 나타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다.

 

 빙켈만의 시대 구분

 1.고() 양식  페이디아스 이전(아르케익)  엄격함, 딱딱함
 2. 숭고 양식  페이디아스와 동시대인 미론, 폴리클레이토스  숭고함, 딱딱함
 3. 미의 양식  프락시텔레스, 뤼시포스 아펠레스  우미
 4. 모방 양식  그 뒤 예술의 멸망까지(로마)  보잘 것 없음

 

 아테네 학당

 동굴 속의 죄수들

 플라톤 : ‘레테(망각)’라는 강이 있다더군.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시는데, 그럼 이데아의 세계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나?

 비록 우리가 이데아 세계를 까맣게 잊어버려도, 이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가 아닌가? 그러니 이 세상의 사물을 보면, 어디서 본 듯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어렴풋이 그 이데아가 떠오르게 되는 거지.

 아리스 : 결국 피타고라스 선생이 불완전한 삼각형에서 완전한 개념을 뽑아낼 수 있는 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데아를 봤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이군요.

 

 모방의 모방

 플라톤 : 가령 장인이 침대를 만든다 하세. 먼저 뭐가 필요하지? (설계도)

 장인의 머릿속 설계도를 침대의 이데아라 부르기로 하세. 장인은 이 설계도에 따라 평생 수백, 수천 개의 침대를 만들어낼 걸세. 물론 침대들은 모두 이데아의 모방이겠지?

 자, 이제 어떤 환쟁이가 붓과 물감으로 이 침대를 그린다고 하세. 그건 뭘하는 걸까?

 아리스 : 당연히 침대를 모방하는 거죠.

 플라톤 : 그나마 또 한번 불완전하게 말일세. 결국 예술이란 가상의 가상, 그림자의 그림자란 얘기 아닌가? 이렇게 예술은 진리의 세계에서 두 단계나 떨어져 있는 거라네. 

 

 가상과 진리

 아리스 : 파라시오스는 아프로디테를 그릴 때 여섯 명의 모델을 놓고 아름다운 부분만 따서 그렸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그림은 비록 현실의 모델들을 모방했지만, 그 모델들보다 훨씬 더 완전한 게 아닐까요?

 플라톤 : 물론 나도 예술이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네. 하지만 거기에 실물처럼 보이게 하려는 눈속임은 필요 없어. 예술이 진리를 전달하려면, 모름지기 시시가각 변하는 덧없는 외관이 아니라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낚아채야지.

 가령 이집트나 우리나라 아르케익 시대의 조각을 보세. 거기엔 실물 같은 착각을 주는 얄팍한 눈속임 따위는 없어. 인물들은 일시적이며 우연적인 모습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영원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지. 형태는 시하학적으로 단순하고, 비례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학적으로 정확하고 말일세. 바로 이거야말로 이데아 세계의 모습이 아닐까? 이렇게 이데아 세계를 상기시켜준다면야...

 

 미와 에로스

 플라톤 : 인간은 누구나 미를 사랑한다네. 그걸 ‘에로스’라 부르세. 에로스는 슬기로운 아버지(아레스)와 무식하고 아둔한 어머니(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미와 덕과 지혜를 온전히 갖추지 못했어. 말하자면 반쪽이인 셈이지. 그래서 그는 항상 나머지 반쪽을 갈망한다더군.

 에로스의 충동에 따라 우리는 먼저 인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네. 하지만 육체의 아름다움보다야 영혼의 아름다움 쪽이 훨씬 더 고상하지 않겠나?

 다음으로 우리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알아야 하네. 텅텅 빈 머리통에 얼굴만 잘생긴 사람보다야 좀 안 생겼어도 고상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해야겠지?

 다음은 미(美)의 이데아야. 이거야말로 감각적인 게 하나도 안 섞인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사실 이걸 불완전하게 흉내낸 거지.

 마침내 에로스의 운동은 여기서 가장 높은 목표에 도달한다네. 이때 우리 마음엔 엑스터시에 가까운 벅찬 기쁨이 솟아오르는데, 이건 폴리클레이토스의 조각이 주는 감각적 쾌감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지. 이렇게 감각적 요소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적 세계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육체에 사로잡힌 영혼을 정화하여 영원한 삶에 다다르는 거야.

 

 척도와 비례

 플라톤 : 미의 이데아가 현상 세계에서 나타날 때,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나?

 그건 바로 정확한 ‘척도와 비례’야.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들, 예를 들어 직선이나 원, 그리고 이것들을 이용해 자로 잰 듯이 만들어낸 평면이나 입체, 이거야말로 미의 이데아에 가장 가까운 순수한 형태들이지.

 아리스 : 하지만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으로 너무 정확한 형태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던데요. 가령 프락시텔레스는 폴리클레이토스의 엄격한 인체 비례에 약간의 일탈을 줌으로써 비로소 ‘미의 양식’을 낳지 않았습니까? 우리 건축가들이 신전 기둥의 3분의 2 지점에서 일부러 도들림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구요. 수학적으로 정확한 비례는 아주 차갑고 딱딱해 보인다나요? 정보 이론에선 이걸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 관계’라고...

 

 그리스의 예술가들이 일부러 기하학적 정확성에서 일탈한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인간의 둥근 눈엔 정확한 직선이 오히려 휘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건물의 선을 일부러 곡선으로 만들었다. 둘째는 기하학적 정확성이 뭔가 딱딱하고 죽은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영감에서 테크네로

 우리는 예술을 정서나 감수성 따위와 관련짓지만,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예술은 테크네, 곧 합리적 규칙에 따른 활동이었다. 따라서 당시엔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합리적 제작 규칙을 가진 모든 활동, 즉 의자나 침대를 만드는 수공 활동과 학문까지도 예술(테크네)로 간주했다. 한편 시는 음악과 무용, 연극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었는데, 재미있게도 시는 예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왜? 시는 ‘영감’또는 ‘광기’의 산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한 것으로 유명한데, 사실 플라톤이 시를 모조리 광기의 소산으로 본 건 아니다. 그도 ‘광기’의 시와 ‘기술적’ 시를 구분한다. 뒤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써서, 시에도 합리적인 제작 규칙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비로소 시는 어두운 마술의 세계에서 벗어나 테크네가 될 수 있다.

 

 제의에서 비극의 탄생

 비극의 기원은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불리던 합창가다. 지휘자와 합창단이 주고받는 대화가 점차 발전해서 극적인 대화가 된 거다. 아이스킬로스(Aeschylos)는 배우의 수를 둘로 늘리고 코러스를 줄여 대화가 극의 중심이 되게 했고, 이어서 소포클레스(Sophocles)는 배우의 수를 셋으로 늘리고 무대 배경을 도입했다 한다. 과거 합창가 속의 신화적 사건들은 참가자들에 의해 현실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아이스킬로스에 이르면 이미 디오니소스 숭배와의 연결고리는 끊긴다. 말하자면 제의가 예술이 된 거다. 

 

 3대 비극 시인 ::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빙켈만은 그리스 예술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특징지었다. 니체는 그리스 예술의 이런 특징에 ‘아폴론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예컨대 그리스의 조형예술은 이 밝고 명랑한 아폴론 정신의 산물이다. 그는 그리스 예술을 지탱해준 또 하나의 힘을 찾아낸다. 그게 바로 저 깊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광포한 힘, 바로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조형예술의 맑고 투명한 정신인 아폴론과, 깊고 어두운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정신 디오니소스! 그리스 예술, 아니 인류의 모든 예술이 서로 대립하는 이 두가지 충동으로 말미암아 발전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태초에 커다란 덩어리가 있었다. 이걸 ‘의지’라 부르자. 물론 이건 무지무지하게 큰 의지, 거대한 세계의지다. 어느날 이 근원적인 일자(一者)가 조각조각 잘려, 그 조각들이 내가 되고 네가 되고 그가 된다. 이걸 ‘개체화’라 하자. 이 개체화한 의지들은 이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행동하는 이 조그만 욕망 덩어리들이 모여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룬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근원적인 세계의지 위에 세워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한 세계다. 이 덧없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마야의 세계라 부른다.

 마야의 세계 속에서 이 의지들은 저마다 욕망을 좇으며 살아간다. 결국 어렵게 욕망을 이루고 행복을 손에 넣는 순간, 갑자기 운명의 가혹한 힘이 들이닥친다. 이 운명의 힘은 어김없이 그를 찾아와 파멸시키고, 그가 애써 이룬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이 순간 그는 깊은 꿈에서 때어나 눈앞에 들이닥친 가혹한 삶의 진리를 보게 된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이 세상이 하룻밤의 꿈에 지나지 않다니, 나도 꿈이고 너도 꿈이고 모든 세계가 꿈이라니...

 

 디오니소스적 지혜

이렇게 세계 자체가 한 편의 거대한 비극이다. 무대 위의 비극은 이 우주적 비극의 반복일 뿐이다. 아폴론은 극 속의 마야 세계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생에 취하듯이, 우리는 극 속에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가상에 매혹된다. 아폴론은 이렇게 덧없는 현세를 긍정함으로써 ‘개체화 원리의 장렬한 신상’이 된다.

 하지만 아포론적 가상은 디오니소스적 세계 위에 드리워진 얇은 베일일 뿐이다. 이 베일 뒤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비극의 주인공을 여지없이 파멸로 몰아간다. 아폴론이 개별화로 생긴 세계를 긍정하면, 디오니소스는 개체를 파괴하여 원래의 근원적 존재의 품안으로 되돌린다. 이때 무서운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개체화 자체가 고통이다. 이 땅에 행동하는 개체로 태어난 것부터가 고통의 근원이다. 비극이 주는 지혜는 바로 이 가혹한 삶의 진리다. 이 디오니소스의 지혜를 아폴론의 아름다움으로 감성화한 것 – 그게 바로 비극이다. 비극 속에서 전혀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그리스인들의 두 주신(主神)은 이렇게 한몸이 된다.

 

 고뇌하는 디오니소스

 이 땅에 행동하는 개체로 태어나기 전, 너와 나는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비극의 주인공도 사실은 하나다. 오이디푸스든 오레스테스든 배우의 얼굴을 덮고 있던 그 가면을 벗겨내면, 비극의 유일한 주인공의 얼굴이 드러난다. 바로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야 말로 참으로 실재하는 유일한 자이며, 그가 분투하는 주인공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거다. 이 근원적 일자는 이제 개체화하여 여러 개의 개별적 의지가 된다. 오이디푸스든 오레스테스든 그물에 걸려 괴로워하는 여러 인물들은 사실 이 근원적인 일자가 개체화한 거다. 

 

 오레스테스 :: 아가멤논의 아들. 불륜(不倫)한 어머니의 손에 부친이 살해될 때 누이인 엘레크트라의 주선으로 멀리 피난한다. 성장한 뒤 귀국하여 복수심에 불타는 누이와 부친의 묘소에서 만나 어머니와 그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Aigisthos)를 죽이고 옛날의 약혼자 헤르미오네를 맞아 스파르타의 왕위(王位)를 계승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레스테스 [Orestes]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엘렉트라 :: 트로이 원정의 총지휘관이며 그녀의 아버지인 아가멤논은 10년의 출타 끝에 고향으로 개선하였으나, 그날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의 손에 살해된다. 아버지의 살해자들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던 엘렉트라와, 조국을 떠나 망명 중에 있던 동생 오레스테스가 힘을 합쳐 복수를 한다.
에우리피데스 작품 《엘렉트라》에서 그녀는 가난한 농부와 강제로 결혼하게 되어 어머니를 더욱 미워한다. 귀국한 동생과 다시 만나, 동생은 아이기스토스를, 엘렉트라는 어머니를 유인하여 직접 살해한다. 이같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집념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는 훗날 ‘엘렉트라콤플렉스’라는 말을 낳게 하였다. 따라서 E.오닐의 《상복(喪服)에 걸맞은 엘렉트라》에서도, 딸의 그같은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를 묘사하고 있다. 이 밖에도 대양(大洋)의 신 오케아노스와 그의 자매인 테티스 사이에 난 딸 및 거인 아틀라스와 오케아노스의 딸 플레이오네 사이에 난 딸 등, 동명의 여신이 나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엘렉트라 [Electra] (두산백과)

 

 디오니소스적 도취

 그런데 디오니소스제의 광란의 분위기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왜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정신 나간 듯 웃고 떠들고 노래하며 춤추는가? 이 황홀한 도취는 모든 개인이 다시 집단으로 돌아가는 경험에서 나온다. 개체들은 서로 가르던 선이 깨지고, 그들이 너나없이 집단 속에 녹아 있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른다. 디오니소스적 황홀함이 바로 여기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비극의 음침한 그림자에도 이 황홀한 도취가 남아 있다. 비참하게 몰락하면서 주인공은 복잡하게 얽힌 운명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쓰라린 깨달음은 근원적인 존재와의 합일이 부활한다는 즐거운 예감이기도 하다. 몰락하여 근원적 일자와 다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개체화의 괴로움, 영원한 윤회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해탈에 이르게 된다. 쓰라린 파멸 뒤에 숨어 있는 이 무한한 희열의 세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비극을 바라보면서도, 그리스인들이 은밀하게 즐긴 건 바로 이 황홀한 기쁨이 아닐까?

 

 원형 극장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우리는 진실처럼 느껴지는 거짓말을 하는 데 도통했다.”

- 헤시오도스 

 “원한다면 진리를 이야기하는 데도 도통했다.”

 아리스 : 시는 이런저런 성격을 가진 인간이 ‘개연적’ 또는 ‘필연적’으로 (아마도 또는 반드시) 이러저러하게 행동할 거라는 걸 보여줍니다. 시는 이렇게 보편적인 걸 말하죠. 반면 역사는 어떻습니까? 고작 한 번 일어났던 개별적 사건을 말할 뿐 아닙니까?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고. 그래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겁니다. 철학이란 본래 보편적인 진리 아닙니까.

 

 시의 본질은 모방이다

 아리스 : 저는 무엇보다 시의 본질이 ‘모방’이라고 봅니다. 이건 서사시든 비극이든 피리 연주든 모두 마찬가지죠.

 진리를 말하기 위해...

 플라톤 : 하지만 그 점에 관한 한 철학을 따라잡을 순 없지.

 아리스 : 하지만 모방된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게 인간의 본성 아닐까요?

 플라톤 : 그건 대개 ‘난 모르겠다’는 말의 점잖은 표현이지.

 아리스 : 우리가 모방한 걸 보고 쾌감을 느끼는 건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재인식’하기 때문이죠. 이거야말로 고상한 지적 쾌락이 아닐까요?

 

 비극, 연민과 공포의 카타르시스

 아리스 : 비극은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흥분시킴으로써 오히려 그걸 진정시키고 정화합니다. 비극을 봄으로써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공포를 배설해버리고, 후련해진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되죠.

 

 비극의 생명은 플롯이다

 아리스 : 비극은 플롯, 성격, 사상, 대사, 노래와 장면이라는 6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플롯이 비극의 생명이자 영혼이죠.

 플라톤 : 줄거리 말인가? 줄거리랄 게 뭐 있나, 그냥 주인공을 파멸시키면 되지.

 아리스 : 글쎄요, 만약 천하의 악당이 주인공이라면요. 그의 파멸이 연민을 불러일으킬까요? 사람들은 오히려 고소해 할걸요?

 플라톤 : 그럼, 도덕적으로 아주 고결한 자가 불행해지는 얘기는 어떨까?

 아리스 : 그건 남 얘기 같지 않을까요?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만큼 거룩한 사람이라면, 누가 그의 얘기에 공감하겠습니까?

 플라톤 : 그럼, 우리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을 파멸시키지 뭐. 그럼 비극이 되나?

 아리스 : 아직요. 그 사람이 못된 짓을 저지르다 불행해졌다면, 사람들은 그의 불행을 마땅하다고 생각하겠죠?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악행이 아니라 악의 없는 중대한 ‘과오’의 대가로 불행해져야 합니다. 가엾다는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고, 두려운 감정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니까요.

 

 플롯의 세 요소는 급전, 발견, 파토스다

 아리스 : 플롯은 다시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급전과 발견, 파토스죠.

 급전이란 사태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했던 오이디푸스가 이젠 왕위에서 쫓겨나 앞도 못 보는 거지 신세가 되었잖습니까. 지금 그가 당하고 있는 찢어지는 고통이 바로 파토스죠.

 발견은 말 그대로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걸 뜻합니다. 가령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아비를 죽였다는 걸 깨닫는 거죠. 이 순간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급전을 읠으킵니다. 이처럼 발견이 급전을 동반할 때,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죠.

 

 플롯의 통일성

 아리스 : 하지만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그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말하자면 앞서 일어난 사건의 필연적 또는 개연적 결과라야 하는 거죠.

 한 사건이 다른 사건 ‘ 때문에’ 일어나는 것과 그 사건에 ‘이어서’일어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단 말입니다.

 

 삽화적 플롯 :: 서로 관계없는 사건들을 늘어놓는 방법. 예를 들어 서사시에서 서로 관계없는 에피소드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리스 : 비극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주인공의 운명이 급전되기 전까지를 ‘갈등’이라 하고, 그 뒤를 ‘해결’이라 하죠. 그런데 ‘갈등’을 아주 훌륭하게 짜놓고 ‘해결’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때 복잡하게 얽힌 갈등을 풀기 위해 갑자기 신이 나타납니다.

 하늘에서 신이 기중기를 타고 내려와, 실타래처럼 얽힌 갈등을 해결해 주는 거죠. 신이 내려왔는데 해결 안 될 일이 어딨겠습니까? 이 웃기는 수법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부릅니다. ‘기계 장치를 타고 내려오는 신’이라는 뜻이죠. 에우리피데스가 종종 써먹었죠.

 가령 난데없는 우연적 사건으로 극이 해결하는 작품을 종종 볼 수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런 작품을 욕할 때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 :: 고대 그리스극에서 자주 사용하던 극작술(劇作術).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이다. 라틴어로 ‘기계에 의한 신(神)’ 또는 ‘기계장치의 신’을 의미하며, 무대 측면에 설치한 일종의 기중기(起重機) 또는 그 변형으로 보이는 시올로가이온(theologeion:theologium)을 움직여서 여기에 탄 신이 나타나도록 연출한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수법을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이 에우리피데스이다. 그의 걸작 희곡 《메디아》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시학(詩學)》에서 “이야기의 결말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그 자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기계장치와 같은 수단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시학》이 저작되기 100여 년 전 이러한 비극이 상연될 당시에는 무대에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어서, 무대에 신이 갑자기 나타나게 하는 연출방법이 관중에게 특별한 효과를 발휘하였을지도 모른다. 이 수법은 나중에 중세의 종교극에서 자주 활용하게 되었으며, 그 후 더욱 일반화되어 몰리에르의 《타르튀프》 제5막에서와 같이 단순한 기계적인 시추에이션을 예측치 못한 구조의 손길에 의하여 일거에 해결한다는 통속적인 것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데우스엑스마키나 [deus ex machina] (두산백과)

 

 아나그노리시스

 플라톤 : 자넨 모방의 쾌감이 재인식의 쾌감이라 했지?

 비극도 모방 아닌가? 그럼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재인식하는 거지?

 아리스 : 그건 우리 인간의 운명 아닐까요? 운명이란 처음부터 정해져 있어, 그가 아무리 애써도 정해진 방향으로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걸 인간은 모르죠. 그래서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그는 더욱더 불행의 수렁에 빠져들고...

 결국 비참하게 몰락해가면서 비로소 주인공은 복잡하게 얽힌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아까 말한 발견, 이른바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란 거죠. 이때 관객들도 운명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결국 사람들이 이처럼 극장에 몰리는 건 비극을 봄으로써 운명에 대한 근원적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아나그노리시스 ::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詩學)》에서 '페리페테이아'와 함께 본격적인 비극의 가장 감동적인 구성요소의 하나로 여긴 개념. 보통 페리페테이아가 역전(逆轉:reversal)이라고 번역되어 극중 인물의 운명이 갑자기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장면을 이르는 데 반하여 이것은 인지(認知:recognition)라고 번역되며, 대개 페리페테이아가 일어나는 계기로서 극중 인물의 신분이 분명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眞意)는, 페리페테이아가 의도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행동으로서 인간의 맹목(盲目)에 바탕을 둔 것인데 대하여, 그 눈이 열리고 무슨 일이든지 사물의 진상이 명백해지는 것을 말한 것 같다. 이것이 빨리 일어나면 행복한 종말을 가져오지만 이미 때가 늦으면 파국(破局)의 양상을 깊게 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리페테이아와 함께 이의 유무(有無)에 따라 비극을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나그노리시스 [Anagnorisis] (두산백과)

 

 아직 배우가 없던 시절엔 코러스가 동그란 마당(오케스트라)에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종합적 연기를 했다. 연극은 이때 코러스와 지휘자가 주고받던 대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여기서 배우를 둘로 늘려 대화가 극의 중심이 되게 한 게 바로 아이스킬로스다. 뒤에 있는 건물(프로스케니온)은 배우들이 분장을 하거나 무대 그림을 걸어놓는 곳이었는데, 나중에 배우들이 아예 저 위에 올라가 연기를 하게 된다. 오늘날 무대를 가리키는 ‘플로시니엄’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한편 관객석은 ‘테아트론’이라 하는데, ‘티어터(theater)’란 말이 여기서 나온 거다. 비극 속의 공간은 배우와 코러스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구분은 여기에 착안한 거다. 코러스는 등장인물에게 지혜와 신탁의 말을 던져주는데, 이는 물론 디오니소스적 제의의 흔적이다. 하지만 발전할수록 코러스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나중엔 완전히 사라진다. 이는 연극에서 제의적 기능이 완전히 없어지는 걸 뜻한다.

 

 

 

3. 중세 예술과 미학 – 가상을 넘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의 첫 구절을 번역하던 파우스트는 ‘말씀’이라는 단어에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로 옮기고 비로소 만족해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이라는 단어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 사이에 유사성을 발견하고서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중세인이었다. 이렇게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라톤주의가 몇 백 년 동안 중세 미학의 골격이 된다. 중세가 저물어갈 무렵 토마스 아퀴나스가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즐겨 읽었던 그의 미학은 중세 초의 미학보다 훨씬 더 경험적인 양상을 보인다. 중세 예술의 특징은 감각세계의 ’가상‘을 포기하고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빛과 어둠

 일자와 유출

 태초에 근원적인 일자(一者)가 있었다. 일자는 선(善)이자 미(美) 그 자체다. 여기서 밝은 빛이 흘러나온다. 이 빛이 흘러나와 정신(nous)이 된다. 이건 우리들 개인의 정신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 비슷한 거다. 여기서 다시 빛이 흘러나와 영혼(psyche)이 된다. 이것도 우리들 개인의 영혼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령(世界靈) 같은 거다. 영혼은 정신세계(누스)의 형상을 본떠 우리가 보는 자연(physis)을 만들어낸다. 영혼은 이 자연 속에 들어가, 식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인간이 된다. 그 바깥엔? 물론 컴컴한 어둠, 곧 형태 없는 물질의 심연이 있을 뿐이다.

 플라톤은 레테의 강으로 이데아 세계와 감각세계를 완전히 분리시켰지만, 플라티노스(Plotinos)는 이 두 세계를 서서히 번져가는 빛의 유출로 연결한다. 이 ‘유출’과정의 반대편엔 거꾸로 물질에서 근원적 일자로 돌아가려는 ‘상승’운동이 있다.

 

←상승(인식론)

 일자 정신  영혼  자연

→유출(존재론)

 

 플로티노스 :: 유럽 고대 말기를 대표하는 그리스의 철학자·신비사상가. 후세에 그는 신(新)플라톤주의자라 불렸다. 그의 철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학파 등의 영향도 컸다. 그 시대의 일원적·종교적 경향에 부응하여 영혼의 해탈을 목표로 하는 구원의 철학이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플로티노스 [Plotinos] (두산백과)

 

 프시케와 에로스

 어둠 속에서 우리를 밝은 세계로 이끄는 게 바로 에로스, 즉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가 보는 자연 속에 희미하게나마 일자의 빛이 비친다. 이게 바로 아름다움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건 이렇게 그 속에 비치는 근원적 일자의 빛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감각세계보다 더 아름답다. 일자에 더 가까우니까. 물론 정신은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가장 아름다운 건 빛 그 자체, 아름다움 그 자체인 일자다. 에로스의 충동에 따라 우리 영혼은 감각적 세계의 아름다움에서 점점 더 높은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보는 데로 올라간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걸 볼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과 비슷해야 한다. 가령 우리가 태양을 볼 수 있는 건 우리 마음속에 태양과 비슷한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름다움을 보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아름다워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감각세계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해 일자를 보는 데로 올라간다면, 우리는 동시에 자신을 물질로부터 ‘정화’하여 점점 더 높고 완전한 존재가 되는 거다. 우리 영혼은 물질의 껍데기를 벗고 나비처럼 날아올라 마침내 몰아의 경지(엑스터시) 속에서 저 밝은 근원적 일자와 합일에 도달한다.

 

 빛의 상징주의

 플라티노스가 보기에 미는 균제(symemmtria)가 아니다. 균제란 원래 부분들 사이의 수적 관계를 말한다. 아름다움은 ‘수적’ 관계가 아니라 ‘질적’ 성질에 있는 거다. 비례나 균제 자체는 미가 아니다. 미란 바로 그 속에서 빛나는 어떤 질적인 것, 굳이 말하자면 어떤 정신적인 빛이다. 여기서 플로티노스의 이론은 ‘빛의 상징주의’가 되는데, 이는 뒷날 중세 미학과 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영혼의 거울

 예술은 미메시스(모방)가 아니다. 조각가나 건축가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모방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영혼은 정신세계 속의 ‘원형’을 보고 그것에 따라 창작한다. 그는 이 ‘원형(형상)’을 무정형적인 ‘질료’에 부여해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만약 예술 작품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가시적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예술가의 내면에, 더 나아가서는 원래 정신세계에 있던 거다. 예술가는 이렇게 질료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에 모자란 것을 보충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예술가는 창조자다.

 이 때문에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처럼 예술을 이데아 세계와 감각 세계 다음에 놓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은 감각세계와 정신세계 중간에 있다. 예술은 감각세계보다 일자에 더 가깝다. 그래서 그는 예술을 우리 영혼이 감각세계에서 일자로 올라가는데 딛고 서야 할 계단으로 본다. 그에게 예술은 영혼의 거울이다.

 가령 플라톤은 페이디아스의 <제우스상>이 가시적 세계를 모방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저속한 눈속임, 저급한 가상이라 비난했다. 플로티노스는 다르게 생각한다. 페이디아스는 ‘눈에 보이는 대로’ 제우스를 묘사한 게 아니다. 오히려 ‘제우스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을’ 그런 모습으로 <제우스상>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감각적인 게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모습으로 제우스를 묘사했다는 거다.

 

 미와 예술

 페이디아스의 <제우스상>이 아름다운 건 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은 예술가가 거기에 부여한 ‘형상’에서 나오는 거다. 원래 이 형상은 예술가의 내면에 있던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는 정신세계에 있던 걸 예술가의 영혼이 직관한 거다. 따라서 예술미의 근원은 결국 정신세계에 있는 순수한 예술의 정신, 말하자면 예술 그 자체다. 굳이 존재론적 서열을 따지면, ‘예술 자체→예술가 내면의 심상(心象)→예술 작품’의 순서가 된다.

 플로티노스의 독창성은, 이렇게 예술가가 사물의 외관을 모방하지 않고 내면의 형상에 따라 창작을 한다고 본 점에 있다. 

 

 두라 에우로포스 :: 유프라테스 강 위로 솟은 벼랑 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두라 에우로포스는 시리아 동쪽 국경에 있는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외딴 방어 도시이다. 두라는 셈 고어로 '요새'를 의미하며, 에우로포스는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렸던 마케도니아의 장군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의 탄생지였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처음으로 차지했던 두라 에우로포스는 군사 주둔 기지로 사용되었으며, 기원전 303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헬레니즘 도시로 재건되었다. 기원전 113년에는 파르티아 왕국의 국경 요새가 되었으며 이후 서기 165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었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는 두라 에우로포스가 서쪽으로 세력을 펼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서 256년에 이 도시를 점령하여 파괴해 버렸다.
두라 에우로포스는 지금껏 알려진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회와 시나고그가 있는 장소로, 시나고그의 기원은 아람어로 된 비문에 의해 서기 24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약 성경의 장면들을 묘사한 시나고그의 프레스코화는 오늘날 다마스쿠스의 국립 박물관에 있다. 예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도 한 교회 벽화들은 가장 초기 기독교 예술에 속한다. 
두라 에우로포스의 고고학 유적 중에는 신전, 궁전, 목욕탕, 그리고 원형 극장 하나도 있다. 이리저리 날리는 모래에 묻혀 숨겨져 버린 이 유적지는 1920년 영국 군인이 재발견했다. 훌륭하게 보존된 고고학 유적들, 이 장소에 깃든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벼랑 위라는 놀라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덕분에 시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라 에우로포스 [Dura Europos]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1.20., 마로니에북스)

 

 절대자의 신성한 빛

 사실 플로티노스가 자신의 예술이론의 모범으로 삼은 건 페이디아스와 같은 고저 시기의 그리스 조각이었다. 더구나 그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기독교 사상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예술론은 오히려 그의 적수들에 의해 발전되어 중세 미학의 핵심이 된다. 특히 비잔틴 예술은 그의 예술 강령의 완전한 실현이다.

 물질세계의 재현 대신에 인간의 ‘영혼’과 초월적인 ‘신성(神性)함’을 표현하려 했던 비잔틴 예술(과 서유럽의 중세 예술)의 정신은 바로 기독교식으로 해석된 플로티노스의 정신이었다.

 

 아뉴스 데이

 교부 철학

 처음 발생했을 당시 기독교 교리는 명확한 이론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는 일약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있었다. 이젠 교회와 국가의 운영, 개인적인 영혼의 구제 등 모든 문제에 관해 체계적 이론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성서에서 수미일관한 신학 체계를 구축하는 건 사실 큰 문제였다. 

 거기엔 성서 이외에 또 다른 지적 전통이 필요했는데, 이때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초기의 교부(敎父)들은 고대의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눈에 보이는 세계 저편 피안의 세계(이데아 세계)가 있다고 가르친 플라톤주의는 쉽게 기독교와 융합될 수 있었다. 몇 백 년이나 떨어진 플라톤주의를 당대의 기독교에 전해준 건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였다.

 일자  일자, 정신, 영혼  일자의 빛  영혼의 정화
   성부, 성자, 성령  신의 빛  영혼의 구원

 

 전체성의 미학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독특한 점도 있다. 그건 추(醜)도 아름다움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 효과다. 이렇게 추는, 비록 그 자체론 아름답지 않아도 전체적으론 미를 한층 복잡하고 풍부하게 해 주는 요인이 된다. 이 생각은 사실 일종의 변신론(辯神論), 곧 신을 변호하는 논리다. 생각해보라. 신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했는데, 거기 왜 추한 것이 끼어 있을까? 난처해진 신을 위한 고전적 변명은 이거다. -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은 부분적으로 추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전체적으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상승의 미학

 아우구스티누스도 플로티노스처럼 진정한 미는 복합적인 게 아니라 단순한 성질이라 생각한다. ‘부분들의 조화’는 감각적 세계의 미의 원리일 뿐이고, 초감각적 세계엔 또 다른 원리가 적용된다. 말하자면 그는 이중 기준을 갖고 있는 셈이다. 플로티노스를 생각해보자. 진정한 미는 빛으로 상징되는 근원적 일자에 있지만,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가시적인 세계에선 수적 비례(균제)로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도 똑같다.

 신이야말로 모든 미의 근원이자 ‘미 그 자체’다. 존재론적으로 신적인 아름다움은 감각적 미의 원천이다. 그게 세상 모든 것에 아름다움을 나눠주니까. 한편 인식론적으로 보면 감각적 미는 초감각적 미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 된다. 미를 파악하는 건 감각이 아니라 ‘정신’이다. 미를 파악하려면 감각과 연을 끊고, 물질적인 것에 묶여 있는 우리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 이때 신의 빛은 우리의 길을 밝혀 준다.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따라 상승하는 과정은 ‘구원을 향한 영혼의 여정’이다. 하지만 인간의 힘만으론 근원적 존재에 이를 수 없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신의 은총이니까.

 

 가상의 진리

 플로티노스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예술은 모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물들도 모방을 하지만 예술을 갖고 있진 못하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있던 형상을 실현한 거다. 결국 예술이란 예술가의 발명, 그의 상상력의 산물이란 얘기다. 하지만 예술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는 ‘거짓’이 아닌가? 아니다. ‘거짓’은 남을 속일 의도가 있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령 무언극이나 시는 거짓말로 가득하지만, 그 목적은 남을 속이는 게 아니라 즐겁게 하는 데 있으므로, 그걸 ‘허위’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배우는 배역상 가장 훌륭하게 속일 때 가장 참되다.

 

 아뉴스 데이

 중세 예술의 임무는 감각적인 것으로 ‘초월적 진리’를 표현하는데 있었다. 물론 감각적 매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선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알레고리다. 중세 회화에 등장하는 양은 그냥 양이 아니라, 아뉴스 데이(신의 어린 양),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알레고리에서 눈에 보이는 형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알레고리는 글자 그대로 ‘다른 걸 말하는’거니까. 중요한 건 이 가시적 형체가 말하는 ‘다른 것’,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의 신성함이다.

 

 돌로 된 스콜라 철학

 무덤을 깨고

 로마는 원래 화산 지대라 천연 동굴이 많다. 물론 이 동굴들은 용암이 흘러나간 통로로, 당시엔 기독교도들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한다. 박해받던 시기에 기독교도들은 이곳을 은밀한 회홥 장소로 사용하곤 했는데, 이 동굴들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미로를 방불케 했기 때문이다. 거기선 종종 기독교도들을 잡으러 들어갔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로마 병정들의 뼈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 지하 무덤을 카타콤(Catacomb)이라 하는데, 여기엔 아직도 초기 기독교도들이 그린 벽화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중세 예술은 애초부터 고대 예술과 전혀 다른 ‘정신’에 뿌리박고 있었다. 문제는 능력(Konnen)이 아니라 의지(Wollen)다. 중세인들이 고대인들처럼 그릴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럴 의도가 없었단 얘기다. 중세 예술은 예술사의 퇴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가치를 지닌 예술이다.

 

 바실리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어두운 지하 묘굴에서 나왔을 때, 예배를 드릴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스의 경우 신전 한복판에 거대한 신상이 모셔져 있고 의식은 밖에서 행해졌지만, 신상이 되기를 거부한 야훼는 다른 건축 양식을 요구했다. 이때 사람들은 로마의 공회당 ‘바실리카’의 형태를 빌려 최초의 성당을 짓게 되는데, 이는 뒷날 서유럽 성당 건축의 바탕이 된다. 

 

 바실리카 ::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집회장으로 사용된 건물이며 교회건축 형식의 기조를 이루었고 로마네스크와 고딕식 성당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 왕궁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바실리케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는 가톨릭 성당의 원형에 해당하는 바실리카식(式) 성당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4세기 이후 로마의 바실리카 형식과 구조를 기조로 하여, 카타콤 안의 예배소나 로마인의 저택 일부 등을 도입하여 성립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실리카 [basilica] (두산백과)

 

 로마네스크:신의 성채

 서유럽 건축은 11세기에 이르러 로마네스크라는 독자적인 건축 양식 속에 닻을 내린다. 바실리카식 성당엔 고대식의 기둥이 사용되었지만, 로마네스크 성당에선 아치 공법이 사용된다. 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신랑(身廊)은 한 줄로 이어진 아치로 되어 있다. 교회의 평면도는 라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세의 상징주의를 엿볼 수 있다. 머리 부분에 둥글게 반원형으로 튀어나온 방들은 기도실이다. 그 안엔 그 성당이 자랑하는 성물(聖物)이 보존되어 있다.

 로마네스크 성당은 아주 육중해서 마치 성채처럼 보인다. 건물 전체가 두껍고 견고한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부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당시 사람들은 교회를 ‘신의 성채’라고 불렀다.

 

 고딕:거룩한 성

 중세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고딕이라는 위대한 양식을 낳는다. 이 변화의 토대는 늑재 궁륭(ribvault)이라는 기술이었다. 늑재란 갈비뼈란 뜻이다. 고딕 성당에 들어가면 건물의 골격과 추력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둥근 아치는 끝이 뾰족한 첨두형 아치로 바뀌고, 덕분에 건물은 더욱더 날씬해진다. 건물 내부의 두꺼운 벽이 사라지고 건물이 하늘 높이 치솟다 보니, 건물 내부에 빛을 받아들이는 부분도 넓어진다. 이 채광층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진다.

 로마네스크 성당이 악의 무리로부터 보호받는 안전한 피난처였다면, 고딕 성당은 사람들에게 물질세계를 초월한 별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꺼운 벽은 이제 보석처럼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바뀌고, 성당 내부는 온통 찬란한 금빛으로 빛난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내리는 천상의 빛과 성가대석에서 흘러 내리는 천사의 합창. 이 정도면 하늘나라를 믿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을까?

 

 마음이 가난한 자의 성서

 중세의 조형예술은 독자적인 의의를 갖지 못하고 성당 건물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성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당시에 성직자말고는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조형예술은 글을 모르는 민중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빛의 상징주의

 중세 예술의 미학은 플로티노스에서 유래한 ‘빛의 상징주의’였다. 플로티노스에게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단일한 속성이었다. 그건 부분들 사이의 양적 비례 관계가 아니라 어떤 질적인 것, 말하자면 초월적인 존재(일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비잔틴의 모자이크, 금박으로 장식된 필사본 성서와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묘한 빛 속에서, 우리는 이 ‘빛의 미학’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색채의 효과는 중세 회화의 아주 중요한 특징이다. 색채란 빛이 어둠을 극복하고 떠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의 재현을 포기하고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담으려 했다. 이 생각 역시 모방론이라는 고대의 관념을 저버린 플로티노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연 모방이란 관념에서 해방된 탓으로, 중세 회화는 대상이 가진 원래의 형태와 색채에서 과감히 벗어나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구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세 예술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사실 대상에서 해방된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구성은, 곧 현대 회화의 원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처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형체로 ‘정신’의 계기를 강조하고, 밝은 빛과 화려한 색채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비스런 ‘관조’를 표현하는 게 바로 중세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여기서 중세 미학은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로티노스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상주의와 자연주의

 13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고딕 예술은 이제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묘사는 과감하게 자연주의적 경향을 띠기 시작한다. 실제로 고딕 후기의 조각 작품은, 르네상스의 조각과 구별이 잘 안 될 정도다. 중세 후기 예술에 나타난 이 새로운 경향을 흔히 ‘고딕 자연주의’라 부른다. 

 드보르자크는 중세 예술을 이상주의와 자연주의의 대립으로 설명한다. 중세 초기엔 이상주의적 경향이 우세했다. 이 기독교 이상주의 때문에 비잔틴과 로마네스크 예술은 물질세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후기에 이르면 물질세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철학은 현실세계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했다. 이제 교회는 물질세계를 소극적으로 무시하지 않고, 그걸 신의 섭리를 실현하는 장(場)으로 바라본다. 이 세상은 신이 창조한 거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물 속에 창조의 질서가 들어 있다. 따라서 신이 지으신 세계를 묘사하는 건, 곧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걸 의미한다. 고딕 자연주의는 이런 사회적, 철학적 분위기에서 나왔다.

 

 중세의 가을

 물론 고딕에서 자연주의적 요소를 과대 평가하면 안 된다. 그건 어디까지나 기독교 이상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자연주의일 뿐이니까. 그래서 고딕은 르네상스 자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고딕은 자연주의적 요소를 기독교 이상주의 테두리 안에 끌어들여 물질세계에까지 이상주의적 원칙을 관철하려는 시도지만, 르네상스의 자연주의는 기독교 이상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성당에서

 점은 길이가 없는 ‘위치’, 선은 넓이가 없는 ‘길이’

 

 플라톤의 사주덕(四主德) :: 정의, 절제, 지혜, 용기

 무지카 스피리투알리스 :: 영적인 음악

 데미우르고스 :: 조물주

 

 플라톤과 기하학적 원자론

 플라톤의 얘기 가운데 ‘기하학적 원자론’이란 게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두 개의 직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하나는 정삼각형을 반으로 자른 것(30도, 60도, 90도)이고, 다른 하나는 정사각형을 대각선으로 자른 것(45도, 45도, 90도)이다.

 정사면체는 불, 정육면체는 흙, 정팔면체는 공기, 정이십면체는 물.

 

 칼레이도치클루스 :: 아름다움(kalos)+형상(eidos)+원(zyklus), 아름다운 형상으로 이루어진 고리. 닫혀있는 무한한 우주(에셔, 평면분할로)에서 우주를 공모양이 아닌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나타낸 도형

 

 태초에 말씀이

 데미우르고스 :: 그리스어로 '제작자'(製作者)라는 의미. 플라톤은 자신의 『티마이오스』 편에서 세계를 만드는 거인에게 이 이름을 부여했다. 세계를 무(無)로부터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전능한 신과는 달리, 이 데미우르고스에게는 세계를 만드는 데 있어서의 표준(이데아)과 재료(장소)가 미리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작업(일)에는 한계가 따른다. 그러나 플라톤 이전의 이오니아의 자연철학 및 동시대의 원자론이 유물론의 입장에 서서 세계의 존재와 사물의 운동ㆍ변화ㆍ발전에 대해 우주론적인 사고를 전개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플라톤의 이 구상은 신화적 우주발생설로의 후퇴이며 관념론의 입장에 선 유물론에 대한 반동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데미우르고스 [dēmiourgos]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성자의 유혹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 1450?~1491)의 <성자의 유혹>을 볼 때마다, 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젊은 시절을 생각한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아퀴나스는 일찍이 성자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의 형들은 그가 성직자가 되는 걸 반대했다. 그래서 형들은 어느 날 그를 납치해서 가두고는, 그날 밤 창녀를 들여보냈다. 풍만한 육체를 가진 여인과 단 둘이서 보낸 그 긴긴 밤 동안, 아퀴나스는 머릿속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쨌든 젊은 아퀴나스는 신앙의 힘으로 이 유혹을 이겨냈고, 그 뒤로도 평생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의 존재 증명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살았다. 이미 중세적 사고방식은 해체되고 있었고, 교회는 점차 발전하는 자연 과학과 상대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싸움을 피할 수 있을까? 아퀴나스의 해결책은 ‘이성’과 ‘계시’를 아예 분리하여,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양자를 교차하지 않는 두 개의 동그라미로 나누어버리는 거다. 그럼 싸울 일도 없잖은가. 과학은 과학이고, 신앙은 신앙이니까. 적어도 신의 계시라는 이름으로 과학적 발견을 단죄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오직 계시를 통해서 알려지는 그런 종류의 진리였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다섯 가지 신의 존재 증명이 나오는데 좀 각색해서 얘기하면 이런 식이다. 내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먹은 음식에서. 그 음식에 들어 있는 에너지는? 태양에서. 태양의 에너지는? 이렇게 계속 나가다보면 언젠가 끝이 있어야 한다. 그 끝에 있는 존재가 바로 신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증명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주저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1부 2문 3항에서 다섯 가지 신존재증명(quinquae viae : 직역-다섯 가지 길)을 제시하였다. 다음은 신학대전에 등장한 그의 증명들을 요약한 것이다.

① 운동을 통한 증명 (via ex motu).
⦁ 모든 사물은 운동한다.
⦁ 운동하는 사물(res in motu)은 운동하도록 만드는 자(movens)에 의해서 운동한다.
⦁ 운동하도록 만드는 자의 무한퇴행(regressio ad infinitum)은 불가능하다.
⦁ 따라서, 모든 운동이 시작되는, 즉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움직여지지 않으면서(a nullo movetur) 다른 모든 것을 운동하도록 만드는 제일의 원동자 즉 운동을 하도록 만드는 첫 번째 것(primum movens)이 존재한다.
⦁ 이 존재가 신이다.

② 능동 원인을 통한 증명 (via ex causa efficientis).
⦁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원인이 있다.
⦁ 모든 것은 그것과 구분되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생겨난다.
⦁ 원인의 무한퇴행은 있을 수 없다.
⦁ 따라서, 모든 것을 있도록 한 제일의 혹은 첫 번째 능동 원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제일의 능동 원인이 신이다.

③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통한 증명 (via ex possibilii et necessario).
⦁ 세상에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물들이 있다. 이런 것을 우연적인 존재(esse possibilis)라고 한다.
⦁ 그런데 만약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이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느 한 시점에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무에서 무언가가 생성될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세상의 사물이 우연적일 수는 없으며 이런 우연적 사물들의 근원이 되는 필연적인 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 그런데 필연적인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즉 다른 것에게 필연성의 원인을 둠으로써 필연적이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 그런데 필연성의 원인을 소급해가는 과정은 무한퇴행이 불가능하다.
⦁ 따라서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에 필연성의 원인을 두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필연적인 하나의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 이러한 존재를 신이라고 한다.

④ 사물들이 드러내는 완전함의 등급에 의한 증명 (via ex gradu rei).
⦁ 우주에는 다양한 등급의 완전함(perfectio)이 존재한다.
⦁ 완전함의 등급은 어떤 가장 완전한 것과의 가까움과 멂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 이 다양한 양상과 등급으로 드러나는 다른 모든 완전함의 기준이 되는 가장 완전한 존재로서 완전함의 정점이 신이다.

⑤ 목적론적 증명 혹은 사물의 지배를 통한 증명 (via ex fine sive ex gubernatione rerum).
⦁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어떤 목적에 따라(혹은 목적을 향해) 활동한다.
⦁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거의 항상 그것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그런데 목적에 따라(혹은 목적을 향해) 활동하는 것은 지적인 능력을 부여받음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고 그 목적에 따라 활동하거나, 이런 지적인 능력을 부여받지 못한 경우 지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 그들에게 각각 목적을 정해주고 그에 따라 활동하도록 질서를 갖게 됨으로써 목적에 따라(혹은 목적을 향해) 활동하게 된다.
⦁ 그러므로 모든 사물들을 목적에 따라(혹은 목적을 향해) 활동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지적인 능력을 부여하거나 혹은 목적을 정해주고 이들을 이끎으로써 목적에 부합하는 질서를 통해 활동하도록 만드는 어떤 지적인 존재(aliquid intelligens)가 존재해야 한다.
⦁ 이 존재가 신이다.
[위키백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증명

 

 완전, 비례, 명료

 아퀴나스는 신플라톤주의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아주 경험적인 성격을 띠는데, 이는 그의 미학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중세에 살았으므로, 그의 미학도 중세 미학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불완전한 ‘감각세계의 미’와 완전한 ‘신적인 미‘를 나누고 신적인 미를 감각적 미의 원천으로 본다든지, 혹은 미를 ’완전‘, ’비례‘, ’명료(claritas)’와 같은 성질로 설명하는 거 말이다.

 중세의 미는 대상의 객관적 속성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에 즐거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미란 ‘보아서 즐거운 것’이다.” 말하자면 미는 바라보는 사람(주관)의 즐거운 감정과도 관계가 있단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아퀴나스가 주관주의자였던 건 아니다. 그에게도 미는 여전히 대상이 가진 객관적 속성이었다. 당시엔 미가 곧 신의 속성이었는데, 그걸 감히 우리 주관이 만들어낸다고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즐거움’이 미를 낳는 건 아니더라도, 어떤게 아름다운지 판정하는 기준은 될 수 있다는 얘기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즐거움을 주는 게 모두 다 아름다운 건 아니다. 사물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즐거움을 준다. 푹신푹신한 침대는 우리에게 대단한 즐거움을 주지만, 그 침대가 꼭 아름다우라는 법은 없다. 미는 본디 유용성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다. 미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거다.

 

 주관에 동화

 미를 인식할 때 우리는 왜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 고전적인 답변은 ‘주관과 객관의 일치’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감각은 비례를 좋아한다. 그건 우리 주관 속에 이미 비례와 비슷한 성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 속에서 비례를 볼 때, 우리는 이 비례가 마치 우리 내부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바로 이때 쾌감이 생긴다. 

 말하자면 외부의 형상과 내부의 형상이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부드럽게 맞아떨어질 때, 미적 쾌감이 생긴다는 얘기다. 그는 이렇게 미에 대한 인식을 ‘대상을 주관에 동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는데, 뒤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시각과 청각

 아퀴나스가 ‘즐거움’을 얘기할 때, 그건 감각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 즐거움에 가까운 거다. 가령 어려운 수학 문제의 해답이 갑자기 눈에 들어올 때 느끼는 그런 기쁨 말이다. 이렇게 미를 지적 인식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미적 주지주의’는 고대와 중세는 물론, 르네상스까지 이어지는 유서 깊은 생각이다.

 우리는 미를 ‘느끼지만‘, 당시 사람들은 미를 ’인식‘했다. 아퀴나스가 우리의 감각기관 가운데 특히 ’시각‘과 ’청각‘을 최고로 치는 것도 사실 이 때문이다.

 

 사르트르 성당에서

 아리스 : 혹시 형상 따로 질료 따로가 아니라, 사물 속에 형상과 질료가 통일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만약 세상이 이렇게 생겼다면, 그림을 그릴 때 형상을 찾아 굳이 저 하늘 나라로 올라갈 필요가 없겠죠? 신의 섭리는 이미 사물 속에 들어 있으니까요.

 그림을 기하학적 도형부터 시작할 필요도 없겠죠.

 

 모방론의 부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예술을 모방으로 본다. 예술은 신의 예지에 의해 창조된 질서정연한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는 모방이다. 따라서 예술에는 자연의 질서가 반영된다. 또 예술은 자연에서 표현 수단과 방법을 빌려온다. 이건 대단한 변화다. 왜냐하면 중세는 ‘자연의 모방’이란 생각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술을 신의 창조와 비교한다. 신은 자연의 ‘내적’ 원리에 따라 ‘창조’를 하셨지만, 예술가는 자연의 ‘외적’ 원리에 따라 ‘모방’할 분이다. 예술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낼 수 없고, 단지 신이 창조한 자연 속에서 형상을 인식하여 그걸 모방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신의 창조보다 저급하다.

 

 고딕 자연주의

 플라톤의 이데아는 피안의 세계였다. 때문에 플라톤적으로 해석된 과거 기독교는 신을 세계 밖에 서 있는 존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 감각적 자연을 묘사하는 건 별 의미가 없고, 이 세상을 넘어선 초자연적 신성을 표현하는 게 문제가 된다. 실제로 중세 예술은 몇 백 년 동안 그랬다.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자주 사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초월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형상’은 사물 자체 속에 ‘질료’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해석된 기독교는 자연 그 자체 속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럼 감각적 자연의 묘사가 곧 신성의 묘사가 된다. 이게 바로 고딕 자연주의를 낳은 힘이다.

 

 신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

 웃지 않는 그리스도

 진리와 선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다.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웃음은 악마다. 그리스도는 결코 웃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지와 말장난도 진실을 드러내는 수단이며, 웃음도 진리 전파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웃음은 권위를 비판하고 경건함을 조롱하며 절대성을 파괴한다.

 

 두려움을 감추는 기술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야기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의 창출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씻어낸다. 희극은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한다. 인간은 하고많은 동물 가운데서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코미디’, 즉 ‘희극’이라는 말은 ‘코마이’, 즉 ‘시골 마을’이라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희극이라는 것은 시골 마을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흥겨운 여흥극인 것이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왜곡시켜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하지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봅니다. 거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실상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런데 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하던 비유를 통해 실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검증하게 하고,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 준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총 26장 까지 있는데 모두 비극론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비극론이 있었다면 희극론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장미의 이름』을 썼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발견된 바는 없다.

 

 월리엄과 말라키아

 윌리엄 오컴(William Ockham, 1285?~1349?)은 중세의 형이상학적 신학자들이 쓸데없는 사변을 일삼는 데 반발하여, 불필요한 사변적 개념들을 철학에서 도려낼 것을 주장했다(오컴의 면도날).

 아퀴나스는 미의 조건으로 그 유명한 세 가지 조건(완전, 비례, 명료) 외에 ‘적절성’을 들었다. 즉 모든 사물은 제 모양을 제대로 갖추고 있을 때에만 아름답다는 거다. 결국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우스꽝스런 모습들은 아름답지 못하단 얘기다.

 

 오컴의 면도날 :: 필요없이 많은 전제를 설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른바 사고 경제를 존재 문제에까지 적용한 유물론의 격언을 말한다. '존재는 필요 이상으로 수를 늘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명제. 스콜라 철학자 오컴이 애용한 원리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유물론에게는 개별적 사물의 존재 이외에 보편적 존재는 인정되지 않으며, 보편적 존재는 사고를 혼란하게 하는 무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에만 의지해 존재를 설명하고, 보편과 개개 사물의 변증법적 실재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일면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컴의 면도날 [ Occam's razor ]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히에로니무스 보슈 ::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적으며, 연구자의 추정에 의하면 지금의 네덜란드 스헤르토헨보시에서 태어나 대부분 그곳에서 제작활동을 계속했을 것이라 한다. 작품은 후기고딕의 전통에서 출발한 초기의 그리스도 수난도(受難圖) 등 종교적 제재로부터 중기 이후에는 종교적 ·비유적 제재로 나아갔으며,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결부된 경이적 환상세계를 전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히로니뮈스 보스 [Hieronymus Bosch] (두산백과)

 

 

 

4. 근대 예술과 미학 – 가상의 부활

 중세의 예술은 감각 세계의 ‘가상’을 포기했지만, 새로운 시대는 ‘가상’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스케치에는 해골에 조그만 구멍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구멍은 20세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해부학자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장인적 예술에서 인문학으로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예술’이란 말은 기술과 학문을 포함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조형예술은 아예 여기에 끼지도 못했으며, 설사 거기에 끼었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천대받던 장인적 예술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 들어오면 조형예술은 ‘자유 교양(liberal art)’, 말하자면 학문으로까지 승격된다. 물론 조형예술이 인문학에 끼려면 어떤 식으로든 양자가 ‘같음’이 증명되어야 했다. 이때 양자의 같음을 보장해준 게 바로 ‘원근법’이었다. 원근법은 기하학을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원근법을 이용해 3차원의 자연을 평면에 옮겨놓는 작업은 곧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찰이라는 거다.

 

 학문의 여왕

 다 빈치에게 회화와 과학 사이엔 아무런 중요한 차이도 없었다. 우리는 예술과 과학을 전혀 다른 활동으로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에겐 하나였다. 실제로 그는 모든 자연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그의 그림 속엔 원근법은 물론이고 해부학, 생리학, 광학론, 색채론 등 온갖 자연과학이 다 들어 있다. 그가 보기에 회화는 심지어 과학보다도 뛰어나다. 과학은 사물들의 ‘양적’ 관계만을 인식하지만, 회화는 ‘질적’ 관계까지 인식하니까. 그러므로 회화야말로 학문의 여왕이다.

 이어서 그는 회화를 다른 예술과 비교한다. 조각은 아예 인문학에 끼지도 못한다. 조각은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육체노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회화는 음악보다 뛰어나다. 음악은 시간 속으로 흘러가버리지만, 회화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예술이니까. 회화는 시보다도 뛰어나다. 세상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있지만, 회화는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이든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묘사의 생생함으로 보아도 시는 회화를 따라갈 수가 없다. 회화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다.

 그에게 회화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가시적 세계를 인식’하는 데 있었다. 회화가 인식의 기능을 발휘하려면, 자연을 뜯어고치려 해서는 안 되며, 되도록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물론 그러려면 자연과학만큼이나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예술엔 무엇보다도 창의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물론이다. 다 빈치도 창의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모방과 창의력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그에게 창의력이란 ‘재현의 규칙을 발견하는 능력’이었으니까. 실제로 그의 작품은 자연 모방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지만, 어쨌든 이론상으로는 그는 역사상 가장 강한 형태의 모방론을 고수했다.

 

 스푸마토 :: '연기처럼 사라지다'라는 뜻의 'sfumare'에서 유래했다. 회화·소묘에서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운 색의 변화를 표현할 때 쓰는 음영법이다. 물체의 윤곽선을 마치 안개에 싸인 것처럼 사라지게 하는 기법이다. 전체적인 정경은 독특한 분위기에 온화하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와 조르조네(Giorgione)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으며 플랑드르 미술(Flemish art)이나 베네치아파(Venetian school)에 의해 뚜렷한 효과를 보였다.
다 빈치는 기하학적 원근법의 견고성이 화면의 조화를 해친다고 보고, 윤곽을 분명히 하지 않고 오히려 없애거나 아주 연하게 하였다. 이 섬세한 명암법은 원거리감과 공간감을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화면 전체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낳았다. 즉 회화의 소재가 화면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푸마토 [sfumato] (두산백과)

 

 점, 선, 면, 체

 화폭 위에서 자연 현상이 발생하는 데엔 법칙이 있다. ‘점, 선, 면, 체’가 바로 그것이다. 점이 이어져 선을 이루고, 선이 합쳐져 면을 만들어내고, 이 면들이 입체를 이루고, 이 입체가 어우러져 화면 속에 또 하나의 자연이 탄생한다. 이는 모든 사물이 네 가지 원인에 의해 생긴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기하학적 변형이라고 한다. 

 그는 감각기관 가운데 ‘눈’을 가장 믿었다.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눈은 기만당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란다. 눈은 10가지 기능을 갖고 있는데, 명ㆍ암ㆍ색ㆍ입체ㆍ형ㆍ위치ㆍ원ㆍ근ㆍ운동ㆍ정지 등이 그것이다. 이 10가지 기능 가운데 회화 속에선 7가지가 실현되고, 조각에선 5가지(입체ㆍ형ㆍ위치ㆍ운동ㆍ정지)만 실현된다. 그러니 회화는 다시 한 번 조각보다 뛰어나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다 빈치가 회화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면,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oti, 1475~1564)에게는 조각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었다. 다빈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과학적 관찰과 실험에 관심이 있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다 빈치가 자신을 합리적 규칙에 따라 작업하는 과학자라고 생각했다면, 미켈란젤로는 영감에 따라 작업하는 고독한 천재로 의식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한 차례 정면 대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피렌체 시가 두 천재에게 시의회 대회의실의 벽면에 각각 시의 역사에 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던 거다.

 

 프레스코 :: 인류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의 기술 혹은 형태로 여겨진다. 본래 뜻은 회반죽이 마르기 전, 이탈리아어로 프레스코(신선)할 때 물로 녹인 안료로 그리는 기법으로 그려진 벽화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회반죽이 마른 후 그리는 기법을 세코(Secco), 어느 정도 마른 벽에 그리는 것을 메초 프레스코(Mezzo Fresco)라고 부르지만 이들 기법은 확실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제작과정은 회반죽으로 미리 벽에 초벌질을 하고, 그 위에 실제치수의 소묘를 그린다. 채색할 때에는 아침에 완성 가능한 부분에만 마무리칠의 회반죽을 칠한다. 이어 내(耐)알칼리성 토성안료를 물에 개어 그림을 그린다. 정해진 시간에 다 채워질 수 없을 때는 말라버리므로 그 부분의 회반죽을 긁어내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수정이 불가능하므로 숙련을 필요로 하는 기법이다.
기원전 약 3,000년에 미노스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의 벽화는 프레스코의 기술로 그려졌으며, 기원전 5세기 이래 중국, 한국, 일본에서 그려진 불교 대부분의 벽화 역시 프레스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삼한시대의 고분벽화 역시 프레스코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레스코 [Fresco Painting]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눈의 판단

 다 빈치는 예술엔 반드시 따라야 할 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믿었지만, 미켈란젤로가 보기에 그런 보편적 규칙이란 없다. 예술가는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눈의 판단’에 따른다. 예술가는 미리 존재하는 법칙을 지키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법칙을 부여한다. 그를 이끌어주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 아니라 눈의 판단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가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 관념을 만나게 되는데, 미켈란젤로 자신이 바로 그런 예술가였다. 미에 보편적 법칙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 바로크나 로코코 예술과 관련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미 바로크로 넘어가는 시기에 살고 있었다.

 

 미는 내면에

 다 빈치는 예술의 목적을 외부세계의 과학적 인식에 두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아름답다고 항상 좋은 건 아니다”고 까지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게서 예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의 창조’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미와 예술을 밀접히 결합시켰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아름다움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미가 순전히 주관적 현상이란 얘기는 아니다. 예술가의 내면에 있는 미는 어떤 신비적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초개인적이며 객관적인 아름다움이다. 예술의 목표는 미의 창조에 있으므로, 예술은 자연을 충실히 모방하기보다는 내면에 있는 미를 실현해야 한다. 

 

 카라라의 채석장에서

 미켈란젤로는 돌덩이들 속에 이미 형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만 잉여인 것을 제거할 뿐이다. 조각상은 거기에 그렇게 있다.” 그에게 조각이란, 곧 쓸데없는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돌 속에 갇혀 있는 그 형상들을 해방하는 작업이었다.

 

 뒤러의 실험실

 아리스 :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비밀은 눈꼬리와 입가에 있죠. 거기를 살짝 그림자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그림자에 묻힌 입가와 눈꼬리의 모습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상상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야말로 인간의 표정을 좌우하는 부분이니, 사람들은 거기서 저마다 다른 표정을 보게 되는 거죠.

 

 평면에 깊이를

 아리스 : ‘원근법’을 이용하면 평면에 ‘깊이’를 줄 수 있죠.

 대상의 크기를 거리와 반비례로 줄여나가는 겁니다. 그럼 평면에 공간이 생기죠. 이걸 원근법적 단축이라 합니다.

 그림 속으로 뻗은 선들을 보시죠. 점점 좁아져 결국 한 점에서 만나잖습니까? 그 점을 소실점이라 하는데, 거기가 바로 보는 사람의 눈의 위치죠. <최후의 만찬>에서는 예수의 머리.

 원근법을 몰랐던 중세 화가들은 중요한 인물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크게 그렸죠. 주관적 가치 평가 때문에 실제 크기를 왜곡한 셈이죠. 하지만 원근법을 이용하면 주관에 좌우되지 않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답니다.

 

 묘사의 객관성

 플라톤 : 선들은 결국 소실점에서 만나게 되겠지. 하지만 실제론 어떤가? 방이 세모가 아닌 이상, 그 선들은 사실 평행을 이루고 있을 걸세. 물론 결코 만나는 일도 없을 테고. 안 그런가?

 그런데 왜 만나지도 않는 선을 마치 만나는 것처럼 그리냐는 얘기야. 그거야말로 ‘주관적’ 묘사의 극치가 아닐까? 말하자면 세상 만물을 자기 눈을 중심으로 정돈한 거란 말일세. 마치 세상 모든 게 자기 눈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어쩌면 중세인들의 그림이야말로 객관적인지도 몰라. 생각해보게. 인물이 눈에서 멀어진다고, 실제로 그 사람의 키가 줄어드는가? 

 결국 중세의 장인들이 원근법을 무시할 때, 그들은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셈이지. 이거야말로 ‘객관적’ 묘사가 아닐까?

 

 히에로니무스 :: 영어 이름은 Jerome. 필명은 Sophronius. 달마티아 스트리돈 출생. 로마에서 공부하였으며 19세 때 세례를 받았다. 교황 다마소 1세의 비서였으며, 교황이 죽자 베들레헴으로 가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암브로시우스·그레고리우스·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라틴 4대(四大) 교부로 일컬어진다. 
당시의 교부(Church Father)들 중에서 히브리어 원본의 성경을 연구한 성서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리스어 역본인 70인역성서를 히브리어 원문과 직접 대조하면서 《시편》 등의 라틴어 역본(불가타성서)을 개정한 일이다.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중심으로 번역하였으나 히브리어와 아람어 성서를 대조·확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약성서(The New Testament)는 그리스어로 쓰여졌으나 구약성서(The Old Testament)는 본래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졌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히에로니무스 [Eusebius Hieronymus] (두산백과)

 

 히에로니무스는 중세 초의 성인으로 히브리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어느 날 밤에 가시가 박혀 고생하던 사자를 보고, 발에서 그 가시를 빼주었다. 그 뒤 사자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는 늘 탐구적인 자세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르네상스인들의 이상이 되었다.

 

 실험실을 나서며

 플라톤 : 다 빈치의 말에 따르면, 영혼이 죽어야 우리 육신이 분자 상태가 되어 영원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더군.

 자넨(아리스토텔레스) 형상이 질료 속에 들어 있다고 했지. 만약 자네 말대로 형상이 질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면, 육신이 죽으면 마땅히 육신의 형상(영혼)도 존재할 수 없는 게 아닌가.

 

 3차원 환영의 파괴

 원근법의 본질은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을 창조하는 데 있다. 그게 가능한 건 우리의 망막이 평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망막에 비친 2차원의 상을 다시 3차원의 상으로 구성하는 데엔 이성적 사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각은 단순한 감각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크의 거장

 <플란다스의 개>의 네로가 죽어가면서 바라보던 그림이 뭔지 아는가? 그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그림이었다. 원작에 따르면, 안트웨르펜 대성당엔 루벤스의 작품이 세 점 있었다. 그 가운데 <성모 승천>은 공개되어 있지만, <예수 승천>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는 늘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한다. 네로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그림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였다.

 

 푸생과 루벤스

 17세기 예술을 바로크 예술이라 부른다. 사실 바로크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좁은 의미로는 전통적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루벤스풍의 역동적이며 격정적인 그림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17세기 회화 전체를 가리킨다. 물론 이 경우에 바로크는 플랑드르(플란다스)의 루벤스, 푸랑스의 푸생(Nicolas Poussin, 1594~1645), 스페인의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등 매우 다른 흐름들을 모두 포괄한다. 

 (좁은 의미의) 바로크 예술은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와 매우 다르다. 윤곽은 뚜렷하지 않고, 묘사는 격정적이며, 구도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독일의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rin, 1864~1945)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의 변화를 시형식(視形式, Seh-form)의 변화, 즉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변화로 설명했다. 그는 이걸 다섯 개의 개념 쌍으로 요약했다.

 ①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② 평면에서 깊이로

 ③ 닫힌 형식에서 열린 형식으로

 ④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⑤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

 

 시형식의 변화

 르네상스의 회화는 ‘선적(線的)’이다. 그래서 드로잉을 가장 중요시한다. 거기서 대상들은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배경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회화는 촉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윤곽은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어서 파악할 수 있는 거니까. 반면 바로크 회화는 ‘회화적’, 곧 시각적이다. 중요한 건 더듬어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의 고정된 윤곽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의 외관이다. 때문에 윤곽선은 희미해지고 종종 흐르다 끊기곤 한다. 

 르네상스의 화화는 ‘평면적’이다. 말하자면 그림 속의 인물들이 거의 같은 깊이에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바로크 회화는 겹침을 강조한다. 그건 인물들이 ‘깊이’에 따라 배열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는 사람은 마치 자신의 눈이 앞뒤로 움직이는 듯이 상상하게 된다. 사실은 좌우로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말이다.

 르네상스 회화는 ‘닫힌 형식’을 갖고 있다. 가령 대상들은 안정된 건축적 구조를 이루며 그림 안에서 완결되어 있다. 반면 바로크 예술은 ‘열린 형식’을 가지고 있어, 뭔가 그림이 완결되지 못하고 바깥으로 열려 있는 느낌을 준다. 가령 인물의 배치가 삼각형의 구도를 이룬다 하자. 르네상스 회화에선 삼각형이 전부 그림 속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바로크 회화에선 종종 꼭지점들이 그림 바깥으로 벗어나 있어, 그림이 바깥으로 무한히 연장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르네상스 회화는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즉 대상들은 뚜렷한 윤곽선에 의해 배경과 뚜렷이 구별된다. 반면 바로크 회화는 ‘단일성’이 특징이다.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보니, 대상들은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전체 속에 녹아들어 있다. 르네상스 회화에선 독립성을 가진 각 부분들의 조화로 통일성이 이루어진다면, 바로크 회화에선 각 부분이 독립성을 잃고 전체 테마에 합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르네상스 회화는 ‘명료성’을 갖고 있다. 그림의 각 부분들은 뚜렷한 형태를 갖고 있고, 거기에 모호함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바로크 회화에선 형태들이 ‘불명료’하다. 형태들은 온전한 모습으로 전개되지 않고, 본질적인 것만 나타내며 그걸로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전체의 효과이므로 명확한 디테일 묘사는 의미가 없다. 구도, 빛, 색채도 더 이상 형태를 분명히 나타내는 데 사용되지 않고, 그 자체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정적(靜的)이다. 이 작품은 모든 게 완결되어 있는 자기 완결적인 작품이다(닫힌 형식). 베르니니의 <다윗>은 훨씬 더 역동적이다. 이 작품은 작품 밖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방금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로써 우리는 저 조각상 밖에 골리앗이 있고, 또 그의 이마로 날아가는 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작품 속의 상황은 작품의 테두리 밖으로 연장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열린 형식).

 

 푸생이냐, 루벤스냐

 이 시기 프랑스에선 푸생이 활약하고 있었다.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경향을 띠고 있었다. 푸생의 꿈은 고대와 르네상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크 취향이 유럽을 휩쓸던 17세기에, 프랑스에선 난데없이 고전주의로 ‘리바이벌’이 일어난다. ㅎ이는 아마 데카르트 철학과도 관계가 있을 거다. 데카르트는 기하학처럼 명확하고 뚜렷한 지식을 추구했는데, 고전주의 예술이야말로 데카르트 철학의 예술적 구현물이니까. 푸생은 자기가 철저하게 ‘이성’에 따랐다고 믿고 있었다.(J’ai des raison pour tout).

 고전주의 미학은 르네상스 미학과 큰 차이가 없다. 미는 질서, 비례, 척도로 표현된다. 미를 보는 건 ‘눈’이지만 미를 평가하는 건 ‘이성’이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며, 자연은 예술의 모델이다. 예술은 과학이기에 이성과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 예술은 중요한 주제와 그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주는 명료한 형식을 취해야 한다. 따라서 예술의 생명은 디자인 또는 드로잉이다.

 17세기 유럽엔 이렇게 서로 다른 두 흐름이 있었다. 고전주의 예술이 데카르트적 ‘이성’의 예술이라면, 바로크는 무엇보다도 ‘감정’의 예술이었다.

 

 에스테티카

 17세기엔 봉건 세력과 부르주아 세력이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양자의 대립이 파국으로 흐르는 걸 막으려면, 절대권력을 가진 자가 가운데서 양자의 대립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절대왕정이 등장한다. ‘이성’과 ‘신’의 선한 의지에 양다리 걸치는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 이중 권력의 철학적 반영이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봉건 세력은 몰락하고 있었고, 부르주아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 부르주아지는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자신의 권력을 잡기를 꿈꾼다. 이 부르주아 드림이 바로 ‘계몽주의’다. 그들은 진리의 근원을 인습이나 권위가 아니니 인간의 ‘이성’에서 찾았고, 이성이 인간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굳게 믿었다.

 미학도 실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물론 미와 예술에 대한 고찰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체계를 갖춘 어엿한 ‘학문’이 된 건 이 시대의 업적이다. 이 시대에 미학은 두 갈래로 나뉘어 발전한다. 하나는 대륙의 합리론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경험론적 흐름이다.

 

 데카르트 정신에서 탄생한 근대 미학

 독일의 철학자 알렉산더 바움가르텐(Alexander G. Baumgarten, 1714~1762)은 ‘미학(aesthetica)’이란 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처음으로 인간의 ‘감성’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가령 인간의 ‘지성’은 인식론에서, ‘의지’는 윤리학에서 연구해왔다. 하지만 이제까지 인간의 감성을 연구하는 학문은 없었다. 여기서 바움가르텐은 새로운 학문을 생각해내고, 거기에 감각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스테시스(aesthetics)’를 본떠 ‘에스테티카’란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예술이 감성의 문제라 생각하나,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예술은 이성적 작업이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예술과 과학 사이에 아무 차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바움가르텐은 적어도 예술이 감성의 문제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성은 오랫동안 정신을 현혹하고 진리를 왜곡한다고 매도되어왔다. 어떻게 하면 감성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을까? 두 가지 길이 잇다. 감성을 이성 ‘아래’ 포섭하든지, 아니면 낭만주의자들처럼 아예 이성 ‘위’에 올려놓든지. 그는 전자의 길을 택했다. 감서도 일종의 이성으로 봄으로써, 감성을 복권시키려 했던 거다. 근대 미학은 이 데카르트 정신에서 탄생했다.

 

 바움가르텐 :: 독일의 철학자. 독일 미학의 창시자. 볼프 학파 중 최대의 철학자로 1735년 할레 대학의 강사로 시작하여 1740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교수가 되어 종신했다. 그는 라이프니츠ㆍ볼프의 학설을 기초로 철학을 상급의 오성적 인식에 의한 논리학과 하급의 감성적 인식에 의한 미학으로 구분, 처음으로 미학을 철학 속에 포함시킨 미학상의 큰 공로자이다. 그에 의하면 참(眞) 이란 논리적 완전성을 표현하는 데 대하여, 미는 감성적 완전성을 표현하는 혼란된 진리이다. 그는 또 사유(思惟)의 최고 원리는 모순율(矛盾律)로서 충족 이유율(充足理由律)을 비롯한 다른 원리는 다 이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노력으로 감성론을 비롯한 주관ㆍ객관 등의 많은 철학 용어가 정해지고 철학이 체계화되어 칸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움가르텐 [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감성적 인식의 학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의 이상은 당연히 기하학처럼 ‘명확하고 뚜렷한’ 지식의 체계를 세우는 거다. 원래 ‘명확’하다는 건 어떤 개념이 외적으로 다른 개념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뜻이며, ‘뚜렷’하다는 건 그 개념의 내용이 내적으로 명확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명확함을 위해선 개념을 분류하고, 뚜렷함을 위해선 개념을 정의한다. 그림에 비유하면, 명확함은 대상의 윤곽이 배경과 뚜렷이 구별되는 걸 말하고, 뚜렷함은 대상을 이루는 부분들의 묘사가 명확한 걸 말한다. 

 명석한 관념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석’하면서도 ‘판명’한 관념이다. 기하학이나 논리학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명석’하나 아직은 ‘혼연’한 관념인데, 미와 예술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명석(clara) - 판명(distincta), 혼연(confusa)

 모호(obscura)

 

 명석과 혼연

 당신은 어떤 게 아름다운지 금방 알아낸다. 가령 전철에 탄 수많은 ‘안 아름다운’ 아가씨들 가운데서 당신의 예리한 눈은 실수 없이 예쁜 아가씨를 찾아낸다. 이렇게 미의 관념은 ‘명석’하다. 하지만 막상 ‘아름다움’이 뭐냐 물으면, 아마 당신은 대답하지 못할 거다. 어떤 게 아름다운지 잘 알면서도, 정작 그게 아름다운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미의 관념은 ‘혼연’하다. 미에는 항상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이 남기 마련이니까.

 여기서 바움가르텐과 17세기 고전주의 미학의 차이가 드러난다. 고전주의자라면 미와 예술까지도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 속에 집어넣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차이를 과장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감성을 일종의 이성으로, 즉 ‘유사 이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비록 미와 예술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일이지만, 이 감성 자체가 일종의 불완전한 이성이라는 거다.

 

 감성적 인식

 그 결과 미와 예술은 일종의 인식이 된다. 그건 감성적 인식이다. 감성적 인식의 토대를 이루는 건 상상, 기억, 감정 등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감성을 인간 정신을 현혹하는 것으로 매도했다. 바움가르텐이 감성의 권리를 복권시키려 했을 때, 합리주의자로서 그가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그걸 ‘인식’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와 예술이 일종의 하위 인식 능력이 되었다. 물론 이성에 비하면 이 뚜렷하지 못한 인식은 차원이 낮다. 하지만 이 저급한 인식에도 어떤 법칙이 있어, 그걸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가 있다. 그게 바로 미학이다. 

 

 외연적 명석함

 바움가르텐이 보기에, 이 하위의 인식 능력은 이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이성적, 논리적 인식은 추상적 인식이다. 추상이란 글자 그래도 ‘상(象)’을 뽑아낸다는 뜻이다. 우리가 ‘개’라는 개념을 추상할 때, 우리는 현실에 있는 수많은 개가 가진 공통성을 뽑아낸다. 물론 그때 개들이 가진 개성(個性)은 삭제된다. 그러므로 추상은 곧, 사상(捨象)이기도 하다. 대상이 가진 개별적 성질이 모두 사상되므로, 추상적 인식엔 ‘생생함’이 없다. 그러므로 추상이란 상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때 감성적 인식은 명석함을 높여줌으로써 이러한 ‘상실’을 보완한다. 관념의 명석함을 높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관념의 의미(내포)를 분명히 드러내는 거다. 이를 ‘내포적 명석함’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그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외연)을 제시하는 거다. 사실 인간이 뭔지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보다 그림 한 장 보여주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은가. 이게 바로 ‘외연적 명석함’이다. 예술은 이 외연적 명석함을 가지고 이성적, 논리적 인식의 추상성을 보완한다.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

 바움가르텐은 미를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감성적 인식을 시(詩)에서 찾았다. 아마도 시인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희미한 느낌, 연상, 감정을 완전한 형태로 다듬어 독자에게 제시하기 때문일 거다. 어쨌든 그는 고대 수사학의 전통을 따라 시를 1) 감성적 표상, 2) 이 표상들의 연쇄, 3) 분절화한 음성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분하는데, 시는 이 세 부분이 모두 완전할 때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 그게 감성적 인식의 완정성이다.

 

 감성적 표상

 ‘감성적 표상’이란 대충 말하면 시가 전달하는 관념이다. 한 편의 시를 읽고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계의 생생한 표상들 말이다. 바움가르텐에 따르면 시인은 꼭 ‘현실세계’만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세계’까지도 묘사한다. 말하자면 그는 ‘허구’의 가능성을 인정한 거다. 하지만 예술은 어느 가능 세계에서도 불가능한 것(‘부재적 허구’)을 묘사해선 안 된다고 한다. 가령 ‘동그란 삼각형’같은 거 말이다. 그건 논리 법칙을 깨는 명백한 ‘오류’니까.

 

 표상들의 연쇄

 한 편의 시를 이루려면, 수많은 부분적 표상들이 전체 속에 질서정연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시가 불러일으키는 많은 표상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바로 ‘주제’다. 주제는 시의 목적이다. 라이프니츠(G. Wilhelm von Leibniz, 1646~1716)의 ‘충족 이유율’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시 속의 모든 표상은 주제와 관련을 맺어야 하며, 주제를 명석하게 드러내야 한다. 주제와 관련 없는 표상들은 시 속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시의 주제는 단 하나여야 한다.

 

 분절화한 음성

 시가 되려면 표상들의 연쇄가 시인의 머릿속에서 나와 분절화한 음성, 즉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는 이를 의미론과 음향론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의미론에선 ‘시의 어휘’라고 할 수 있는 은유, 비유, 알레고리 같은 문제를 다루고, 음향론에선 운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사유의 조화, 질서의 조화, 기호의 조화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감성적 인식(시)은 완전성(미)에 도달한다.

 

 인식이냐 유희냐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인식으로 간주함으로써 감성을 복권시켰다. 바움가르텐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술이 가진 이 ‘인식적 기능’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데 있다. 예술을 ‘진리’의 전달 매체로 보는 근대 ‘진리 미학’의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어 헤겔에게서 완성된다. 하지만 예술을 ‘인식’으로 보는 건 어딘가 문제가 있다. 과연 우리는 뭔가를 인식하려고 시를 읽는가? 

 여기서 또 하나의 노선이 나온다. 이 노선은 영국의 취미론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완성된다. 이들에 따르면, 미는 ‘인식’이 아니라 ‘쾌감’이며, 예술의 본질은 ‘진리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이런 생각을 ‘형식미학’이라 부르기로 하자.

 

 파리스의 심판

 아폴로 산꼭대기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세 여신이 살았다. 제우스의 부인 헤라, 그의 딸 아테나와 아프로디테다. 어느 날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를 놓고 싸움이 붙었다. 평소 여성의 속성을 잘 알고 있던 제우스는 현명하게도 이 논쟁에 말려들기를 거렸다. 대신에 그들에게 미적 안목이 높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를 추천했다. 물론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치열한 로비가 있었다. 헤라는 재산을, 아테나는 도시를,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주겠노라 약속했다. 파리스는 아름다운 여성 쪽으로 결정 했다. 아프로디테가 미의 여신이 된 데엔 이런 흑막이 있다.

 이제 아프로디테가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한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게 신의 불문율이었으므로, 그녀는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렌을 유혹하여 함께 도주하도록 도와준다.

 이에 격분한 메넬라오스의 형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로 진격한다.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의 여인》에서 트로이의 멸망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도상학 :: 도상학은 미술작품을 단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에 준하여 연구하는 미술사학의 한 특수 분야이다. 그것은 작품 속에 구현된 이념을 그 내용과 기원, 더 나아가 전개 과정 차원에서 분석하여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한다. 또한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고 어떠한 이념을 함축하는 기호적 의미를 지닌 구상 미술 작품에 한해서만 적용할 수 있다. 어떤 그림이 단지 형태만을 드러내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단순한 장식적 요소와 의미 함축적인 기호를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도상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것이다.
도상학은 그림, 이미지들을 분류하고 서술하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상학 [圖像學, Iconography]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국학자료원)

  

 미의 자율성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처럼 미를 선(善)이나 진(眞)에, 예술을 도덕이나 종교 또는 철학에 종속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즐거움 때문에 예술을 감상한다. 하지만 수 천 년동안 사람들은 ‘순수 예술’, 즉 진리나 도덕적 교훈을 주지 않는 예술은 타락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이상한 생각에서 예술을 해방시킨 사람이 칸트다.

 소크라테스는 미를 ‘유용성’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겐 화려한 황금 방패보다 튼튼한 강철 방패 쪽이 더 아름다웠다. 플라톤은 ‘선(善)’의 이데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고대인은 미와 선을 아예 하나로 합쳐 삶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게 바로 ‘칼로카가티아(善美)’다. 한 편 근대인들은 미를 ‘인식’이라고 생각했다. 다 빈치에게 예술은 과학이었고, 바움가르텐에게는 감성적 인식이었다.

 

 미적 무관심성

 취미판단(미에 대한 판단)은 인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는 사물의 객관적 성질이 아니니까. 가령 장미꽃을 보고 내가 “이 꽃은 빨갛다”고 말하면, 당신은 군말 없이 동의한다. 하지만 “이 꽃은 아름답다”고 하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건 미가 사물의 객관적 속성이 아님을 보여준다. 어떤 사물을 아름답다고 할 때, 그건 그 사물이 모양이나 색과 함께 ‘미’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게 맘에 든다’는 얘기일 뿐이다. 취미 판단은 한갓 ‘주관’의 쾌ㆍ불쾌에 대한 판단일 뿐, ‘대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인식이란 어디까지나 사물의 객관적 성질을 파악하는 거니까.

 미는 선(善)도 아니다. 유용성도 아니다. 쓸모 있다고 다 아름다운가? 칸트는 취미 판단의 이런 특성을 멋있게 ‘미적 무관심성’이라고 불렀다.

 

 주관적 보편타당성

 미적 판단은 ‘단칭 판단’이다. ‘아름답다’는 말은 장미 ‘일반’이 아니라, 항상 어떤 구체적인 장미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거니까. 가령 우리는 “모든 장미는 꽃이다”라고는 해도,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고는 않는다. 

 하지만 그건 문제다. 취미 판단에 보편타당성이 없다면, 피카소의 작품과 이발소 그림을 구별할 기준도 없어질 테니까. 

 따라서 취미 판단은 동시에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 보편타당성 때문에 우리는 마치 미가 대상의 객관적인 속성인 양 얘기하는 거다.

 가령 우리는 “저 꽃은 내게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저 꽃은 내게 장미다”라고 하지 않듯이. 하지만 주관에 달려 있다는 미적 판단이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한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다. 모두 한마음이니 같은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취미 판단의 보편성은 결국 ‘주관적’ 보편타당성이다. 말하자면 그건 인간 ‘주관’의 구조가 똑같은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

 다양한 감각 자료를 모아 하나의 표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생산적 구상력(상상력)’이라 한다. 구상력은 감각 자료를 뜯어맞춰 표상을 만든 뒤 이를 오성으로 가져간다. 그럼 오성은 이걸 개념의 상자 속에 집어 넣어 판단을 내린다. 이들은 그 유명한 그리스의 ‘삼미신(三美神)’이다.

 이렇게 상상력과 오성이 딱 맞아떨어져 하나의 개념(삼미신) 속에 쏙 들어갈 때, 인식이 성립한다. 취미 판단은 본디 인식이 아니다. 여기서 상상력과 오성은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에 구애받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유로이 ‘유희’하는 상태에 들어간다.

 우리는 그저 놀이하듯 그 조화를 즐기면 돈다.

 

  오성 :: 고대에 플라톤은 이데아를 지적 직관으로 포착하는 이성에 대하여 논증적ㆍ개념적 능력을 로고스라 하였는데, 오성이 바로 로고스에 해당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지성ㆍ사고의 능력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감성에 대립한다는 점에서는 이성과 동일하고 때때로 혼용되기도 한다. 칸트는 감성적 소여에 대하여 과학적 인식을 성립시키는 능력을 오성이라 하고, 플라톤의 생각을 이어받아 이성은 초감각적인 통일체(이데아)를 파악하려고 하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헤겔은 오성을 고정된 추상적 개념을 부여하는 사고로 본 반면, 이성은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성 [Understanding, 悟性]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삼미신 :: 〈삼미신〉은 우미의 세 여신을 가리키며, 고대 헬레니즘 이후 미술의 역사에서 여성 누드의 가장 오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제우스와 에우리노메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매는 제각기 에우프로시네, 탈리아, 아글라이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기쁨, 축제의 즐거움, 광휘를 의미하며, 로마 시대에는 자비의 세 단계로 삼미신을 읽기도 한다. 베풀고, 받고, 되돌림으로써 나눔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형 예술에서도 삼미신은 상대방의 어깨에 팔을 걸치거나 손을 맞잡는, 셋이 연결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미신 [Les Trois Graces]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

 아름다움은 사용 ‘목적’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다. 미가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면, 단 하나 우리 마음에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거다. 칸트는 이를 역설적으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불렀다. 미에는 목적이 없다. 다만 우리 마음에 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아름다움은 형식에, 말하자면 선들이 그려내는 형태에 있다. 나도 루벤스와 동일한 주제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렇다고 내 그림이 그의 작품만큼 아름답겠는가? 따라서 미는 ‘형식’에 있는 거다. 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로운 ‘드로잉’과 구성이다. 여기서 칸트는 완전히 새로운 미학, ‘형식 미학’의 선구자가 된다.

 

 공통감

 미는 개념이 아니므로 어떤 게 아름다운 건지 판정할 보편적 규칙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이 타인에게도 필연적으로 똑같은 만족을 주리라 믿는다. 우리 모두가 어떤 공통적인 능력, 곧 ‘공통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공통감이란 심리 구조의 공통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심리 구조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현실에서 미적 판단이 종종 어긋나는 건 이 때문이다. 칸트는 공통감을 ‘이념’으로 요청한다. 쉽게 말하면 공통감이 ‘있다’가 아니라,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다.

 

 자연의 총아

 천재는 자연의 총아다. 자연은 천재를 통해 예술에 규칙을 부여한다. 천재는 독창적이어서, 미리 존재하는 규칙에 따르지 않는다. 그는 예술에 자신의 규칙을 부여한다. 천재의 규칙은 후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지만, 그걸 논리 법칙처럼 일반화, 개념화할 수는 없다. 그건 일회적인 규칙이라서 배우거나 가르칠 수도 없다. 실제로 천재들 자신도 자신들이 어떻게 작품을 만드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예술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적인 재능(천재)의 산물이다.

 

 고전주의와 취미론

 고전주의자에게 미는 ‘완전성’에 있다. 완전한 인간상을 추상하여 이걸 이상적인 ‘인체 비례’로 정한다. 수치로 표현된 이 비례에 얼마나 가까운가 하는 게, 곧 미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이건 사실 미적 판단이라기보다는 논리적 판단에 가깝다. 평균치를 구해 근삿값을 고르라는 수학문제랑 뭐가 다른가? 칸트가 보기에 이건 미를 ‘개념’으로 착각하는 거다. 미는 개념이 아니므로, 어떤 걸 ‘미’라고 판정하게 해주는 보편적인 규칙은 없다. 삼각형은 그런 식으로 판정할 수 있어도, 미는 그런 식으로 판정할 수 없다. 미는 ‘느낌’으로 판정하는 거다. 이렇게 느낌으로 판정하는 능력을 ‘취미’라 한다.

 

 장인이냐 천재냐

 고전주의자들은 그림도 그런 식으로 그렸다. 그들은 이상적인 비례를 정해놓고, 그걸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카논)으로 삼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안 된다. 그러니 예술가의 자유가 숨 쉴 자리가 없다. 하지만 칸트가 보기에 예술은 그런 게 아니다. 물론 예술도 일종의 기술이므로 거기에도 지켜야할 규칙이 있다. 하지만 이 규칙이 예술가의 자유를 억눌러서는 안 된다. 

 예술을 천재의 소산으로 봄으로써 그는 고전주의 미학과 대립되는 새로운 미학에 길을 열어준다. 바로 ‘낭만주의 미락’이다. 예술가는 더 이상 규칙을 습득하여 자연을 모방하는 ‘장인’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내는 ‘천재’다.

 

 유리알의 유희

 우파니샤드 :: 산스크리트어로 '(사제 간에) 가까이 앉음'이란 뜻으로, ‘(스승의 발 아래에) 가까이 앉아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는 신비한 지식’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원뜻처럼 문헌 대부분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철학적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천계서(天啓書)로 신성시되었다. 브라만교(波羅門敎)의 성전(聖典) 《베다》에 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기 때문에 '베단타(Vedānta:《베다》의 끝·결론)'라고도 한다.
현재 200개 이상의 문헌이 전해지지만 《묵티카 우파니샤드(Muktikā Upanishads)》에서 108개 《우파니샤드》 목록을 나열했기 때문에 힌두교 전통에서는 108개만 인정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10여개는 《고(古)우파니샤드》, 또는 《무키아 우파니샤드(Mukhya Upanishads)》라고 하며,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경 전후에 성립된 것이다. 이후 10세기를 넘어서 만들어진 것을 《신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
인도의 정통 브라만 철학의 연원으로서, 철학·종교 사상의 근간·전거(典據)가 되었다. 근본 사상은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Ā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외부가 아닌 내면에 있는 신을 찾고 의례적인 제식이 아니라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만을 찾으라는 가르침이 핵심이다.
이러한 사상의 형성 배경에는 창조관과 동치(同置:upāsana)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창조의 의미로 사용되는 스리스티(srsti)는 최고신의 2분에 의하여 자신의 일부를 방출(esj)함으로써 창조자와 피조물이 동질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주적 실재와 개인의 구성요소를 대응시켜 불사(不死:amta)를 탐구했던 동치의 논리는 범아일여사상의 원형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인간은 업(業)에 따라 윤회를 반복하지만 선정(禪定:dhyāna)·고행(苦行:tapas)을 통해 진리의 인식(brahma-vidyā)에 도달하여 윤회에서 해탈하고 상주·불멸의 범계(梵界:brahma-loka)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대표적인 사상가로서는 아트만을 만물에 편재하는 내재성으로서의 유(有:sat)로 주장하는 우달라카 아루니(Uddālaka Āruni)와 아트만을 인식주관으로서 불가설·불가괴(不可壞)한 것으로 주장한 야즈나발키아(Yājnavalkya) 등이 있으며, 전자의 ‘네가 그것(아트만)이다(tat tvam asi)’, 후자의 아트만은 부정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는 뜻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neti, neti)’라는 말은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파니샤드 [Upaniṣad, 奧義書] (두산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

 과학의 경우엔 최종 생산물이 반드시 세계의 구조와 일치해야 한다. 그래야 인식이 성립한다. 하지만 예술에선 그럴 의무가 없다. 예술가에겐 맘대로 ‘구성’할 자유가 있다. 예술은 인식이 아니므로,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진 않는다. 다만 우리 마음에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를 불러 일으켜서 미적 만족을 줄 뿐이다.

 하지만 재수가 좋으면 이게 학적 발견을 낳기도 한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연구를 위해 주로 예술적 상상력에 의존했다. 가령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한 건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놓을 경우에 지동설 쪽이 훨씬 더 명확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미적 상상력이 우연히 세계의 구조와 딱 맞아떨어진 경우다. 멘델레프는 원소 주기율표를 작성하다가, 칸이 하나 비는 걸 발견했다. 이 칸만 메우면 표는 비례를 이룰 텐데. 여기서 그는 장차 이 빈 칸에 들어갈 새로운 원소가 발견 될 거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이 근거 없는 예언은 결국 적중했다. 아인슈타인도 과학적 발견엔 일종의 예술성이 있다고 말했다.

 

 마법의 루네 문자

 유리알 유희는 처음엔 개개의 학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모든 학문을 포괄함으로써 보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려고 애썼고, 이 새로운 정신적 체험을 파악하고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보편언어를 꿈꿨다. 

 여러 학문에서 얻은 모양들 사이에서 ‘유사’ 또는 ‘대조’의 관계를 찾는 거다. 가령 자기한테 돌아오는 헤겔의 절대정신과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오는 소나타 사이엔 어떤 유사성이 있다. 이런 공통적인 요소가 바로 유리알 유희의 어휘를 이루는데, 아마 도형이나 곡선과 같은 상형어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다. 노발리스(Novalis, 1772~1801)가 말한 마법의 루네 문자처럼 말이다. 유리알 유희자는 이 어휘들을 신비한 문법에 따라 연주한다.

 

 노발리스 :: 본명은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Friedrich von Hardenberg)이다. 오버비더슈테트 출생.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엄격한 경건주의적(敬虔主義的) 가정교육을 받고, 예나·라이프치히·비텐베르크대학에서 법률·철학·역사학·자연과학을 배웠다.
그 사이 F.실러, F.슈레겔 등과 접촉하여, I.칸트와 J.G.피히테의 철학과 친숙하였다. 졸업 후 행정사무 견습을 거쳐 제염소에 있으면서 J.L.이티크 등 낭만파 시인들과 교류하며, 문학활동을 벌였으나, 29세 때 폐결핵으로 요절하였다.
1798년 연인 조피 폰 퀸의 죽음을 계기로(이른바 조피 체험) 발표된 일련의 시 《밤의 찬가 Hymnen an die Nacht》(1800)와 미완(未完)의 장편소설 《푸른 꽃 Heinrich von Ofterdingen》(1802)이 특히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발리스 [Novalis] (두산백과)

 

 유리알 유희 입문

 이처럼 유리알 유희를 하면 모든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 칸딘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색깔은 피아노의 건반이고, 눈은 줄을 때리는 망치이며, 심성은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는 심성에 진동을 일으키도록 합목적적으로 건반을 두드려 연주하는 손과 같다.

 

 극장에서

 대위법 :: 독립성이 강한 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기법.
'음표 대 음표'를 뜻하는 라틴어 푼크투스 콘트라 푼크툼(punctus contra punctum)에서 유래하는 말로, 음악은 단선율의 경우를 제외하면, 음의 수직적 결합(화음 ·화성)과 수평적 결합(melody)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겸비하고 있는데, 어느 것이 우위에 있는가에 따라서 동성음악(homophony:호모포니)과 다성음악(polyphony:폴리포니)으로 대별된다. 그리고 전자의 기법이 화성법, 후자의 기법이 대위법이다. 그 때문에 다성음악을 대위법적 음악이라고 부를 때도 많다.
대위법에서는 각 성부가 명료하게 식별할 수 있는 선율적 독립성을 지니며, 또한 여러 성부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되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서양음악의 역사에서는 16세기 말까지가 다성음악의 시대이며,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가 화성음악의 시대에 해당하고, 17·18세기 및 20세기는 양자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연대의 길이로 보아서도, 대위법은 서양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기법·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위법 [counterpoint, 對位法] (두산백과)

 

 화성법 :: 대위법(對位法)이 선율 대(對) 선율이라는 생각을 기초로 한 작·편곡 기법인데 비해, 화성법은 화음의 연결에 관해서 해명한 작·편곡 기법을 말한다. 조성에서 각 화음의 기능이라는 생각이 이론적 근거가 되며, 재즈, 파퓰러의 편곡 이론에서는 코드 프로그레션(코드 진행법)이 화성법 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높이가 다른 두 개 이상의 음이 동시에 울리면서 생기는 화음을 기초로 하여 선율을 조직하는 기법. 화성은 가락, 리듬과 함께 음악의 3요소를 이룬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성법 [Harmonik, 和聲法] (용어해설)

 

 테크네냐 광기냐

 플라톤 :: 예술은 무엇보다 ‘광기’의 산물. 옛사람들은 예술이 뮤즈가 내린 영감의 산물이란 걸 잘 알고 있었지. 신들린 상태에서 만들어내는 작품이야말로...

 

 천재의 비밀은 어디에

 신동이었던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마리아 테레지아의 궁전에 자주 드나들며 그녀를 즐겁게 해주곤 했다. 어느 날 거기서 장난을 치다 넘어진 그를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 일으켜주었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즉석에서 공주에게 결혼 신청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그녀는 이웃 프랑스의 왕비로 시집을 가게 되고, 결국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다. 이 비운의 왕녀가 바로 루이 16세의 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정신의 오디세이

 정신의 오디세이

 아주 오랜 옛날, ‘이념’아라는 어떤 커다란 정신적 존재가 살았다. 어느 날 이 절대자가 갑자기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어진다. 몰론 자신의 모습을 바깥으로 투사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바깥으로 쏟아 부어 – 이걸 ‘외화(外化)라고 한다 – 자기가 아닌 다른 게 된다. 이게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결국 절대자의 다른 모습인 셈이다. 

 이념은 자신을 쏟아 부어 물리화학적, 생물학적 자연을 만들고, 마침내 그 창조의 정점에서 인간을 낳는다. 인간은 특이한 동물이어서 정신을 갖고 있다. 결국 자연 속에서 다시 정신이 탄생하는 셈이다. 인간의 정신은 발전하여 마침내 사실은 자연이 이념의 다른 모습이며, 이 모든 게 절대자가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이때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이념은 원래의 자기로 복귀한다. 이때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이념은 원래의 자기로 복귀한다. 이렇게 자신을 인식하려고 스스로 다른 게 되었다가 다시 자기한테 돌아오는 ‘정신의 오디세이’, 이게 바로 우주의 역사다.

 

 논리, 자연, 정신

 헤겔은 이 과정을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논리학’은 이념이 아직 자신을 바깥으로 쏟아 붓기 전의 상태를 다룬다.

 이념은 자신을 외화해 ‘자연’이 된다.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그걸 밖으로 끄집어내, 자기 아닌 타자(他者), 즉 자연이 된다. 당신이 거울 속에서 또 다른 당신을 마주보듯, 이념은 자욘 속에서 대상이 된 자기 자신과 마주보게 된다. ‘자연철학’에선 이념이 바깥으로 빠져나와 시공간을 이루고, 그 속에 역학적ㆍ물리적ㆍ유기적 자연을 창조하는 과정을 다룬다.

 유기체의 정점엔 인간이 서 있다. 인간은 정신을 가진 존재로, 그의 몸 속에서 정신과 물질은 통일을 이룬다. 인간의 역사는 정신 발전의 역사이며, 이 역사 속에서 절대자는 오랜 항해를 마치고 마침내 다시 자기한테 돌아간다. ‘정신철학’은 이 과정을 다루는데, 여기에도 세 단계가 있다.  먼저 ‘주관 정신’이다. 이건 개인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된다. 이어서 개인을 초월한 ‘객관정신’이 등장한다. 이건 어떤 사회적인 정신 원리, 말하자면 도덕이나 법이나 인륜 따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종합을 이루는 곳에서 마침내 ‘절대정신’이 탄생한다. 여기서 이념은 더 이상 출발하기 전의 추상적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실현한 구체적 존재가 된다. 

 

 예술, 종교, 철학

 절대정신은 다시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헤겔에 따르면, 이 가운데서 예술은 이념을 ‘감각’의 형태로 드러내고, 종교는 ‘표상’의 형태로 드러내며, 철학은 ‘개념’의 형태로 드러낸다. 마치 몸이 크면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절대정신도 성장함에 따라 감각과 표상과 개념으로 옷을 갈아입고 등장한다. 이 운동의 마지막 단계인 철학에서 마침내 이념은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자기한테 돌아가게 되는데, 헤겔은 이 여정이 자기 머릿속에서 끝났다고 믿었다. 자기가 절대지(絶對知)에 도달했다는 거다.

 논리학 – 유론, 본질론, 개념론

 자연철학 – 역학, 물리학, 유기체론

 정신철학 – 주관정신, 객관정신, 절대정신:예술, 종교, 철학 

 

 이념의 감각적 현현

 예술은 절대적 전리를 드러내는 매체다. 헤겔은 이렇게 이념이 예술 속에서 감각적 형태로 드러난 게, 곧 ‘미’라고 보았다. 진정한 미란 곧 예술미다. 물론 예술 밖에도 미는 있다. 가령 자연의 아름다움 말이다. 하지만 헤겔이 보기에 자연은 이념의 그림자일 뿐 아직 주관성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은 완전한 게 못된다. 이런 자연미의 결함에서 예술미의 필연성이 나온다. 예술은 자연미의 결함을 제거해 완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특히 (이념에 합치하지 않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형상(Gestalt) 속에서 이념이 빛날 때, 헤겔은 이를 ‘이(념)상’이라 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가령 파라시오스는 <아테나상>을 만들 때, 6명의 아름다운 여인을 모델로 삼아, 각 사람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부위를 따왔다고 한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현실의 모델에겐 어딘가 불완전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현실의 모델이 가진 결함을 제거하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형태를 창조할 수 있었다.

 

 상징예술, 고전예술, 낭만예술

 상징예술은 이념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아 물질적 매체에 압도당할 때 발생한다. 고대 동방과 이집트의 조각들이 바로 이 시기에 속한다. 영혼은 아직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명을 두루 불어넣을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때문에 체격은 근엄함을 띠지만 다리는 자유롭지 못하고, 팔과 머리는 몸체에 붙어 있어 생동감이 없다. 내용과 형식이 통일을 이루지 못해 예술은 뭔가 ‘숭고’한 느낌을 준다.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이념은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어렴풋하게 암시만 할 뿐이다. 때문에 예술은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띠고 일종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이념이 더 성숙하면 상징예술은 종말을 고하고 고전예술이 시작된다. 이제 이념은 충분히 구체적으로 되어, 감각적 형태 속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이념은 감각적 매체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이 시기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 시대다. 헤겔은 이상적 아름다움이 그리스 조각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그리스 예술에서 예술은 정점에 도달했다는 거다. 여기서 헤겔 미학의 고전주의적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는 아마 빙켈만의 영향 때문일 거다. 사실 상징예술에서 고전예술로의 변화를 설명하는 헤겔의 논리도 빙켈만의 얘기와 똑같다.

 정신은 더욱더 성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물질적 매체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이제 이념은 너무 자라서 형상과 조화로운 통일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물질적 매체는 더 이상 이념을 드러내기엔 적합하지 않다. 여기서 이념과 형상의 통일은 다시 한 번 파괴된다. 이념은 감각적 매체 속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표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예술은 바깥세계에서 서서히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로 옮아간다. 이때 기독교적 근대의 낭만적 예술 형식이 탄생한다. 여기서 말하는 낭만예술은 특정한 예술 사조로서 낭만주의가 아니라, 중세는 물론이고 고전주의, 바로크, 낭만주의 등 고대 그리스 이후의 모든 예술 사조를 다 가리킨다. 예술의 시대는 저물어가지만, 정신은 한층 더 높은 단계에 이른다.

 

 예술의 체계

 건축은 대표적인 상징예술이고, 조각은 전형적인 고전예술이며, 회화와 음악과 시는 낭만예술의 주요 장르라고 한다. 이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실제로 고대 동방 예술은 주로 건축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그리스 예술은 조각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회화와 음악과 시는 근대에 들어와 뚜렷한 발전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런 걸 유식한 말로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통일’이라 부른다.

 
 
 음악
 
 회화
 낭만적 예술
 
 조각
 고전적 예술
 
 건축
 상징적 예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물질적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정신적 내용을 표현하는 능력이 커진다. 가령 상징적 예술 형식인 건축은 물질에 압도당해 있어, 정신적 표현의 여지가 많지 않다. 고전적 예술 형식인 조각의 경우엔 물질적 형태와 정신적 표현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여기가 바로 예술의 정오(正午)다. 하지만 낭만적 예술 형식에 이르면, 서서히 물질을 포기하고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회화는 조각의 3차원에서 1차원을 사상함으로써 바깥세계에서 인간 내면에 접근하고, 음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공간성 자체를 사상하고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전달한다. 낭만적 예술의 최종 형태인 시에선 낱말의 ‘의미’가 표현을 담당한다. 말하자면 이미 ‘감각’이 아니라 ‘의미’라는 관념적 ‘표상’이 예술의 표현 수단이 되는 셈이다.

 

 예술의 종언

 헤겔은 이념과 매체가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던 그리스 시대 이후, 예술은 내리막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다. 낭만예술에 이르면 이미 내용과 형식의 행복한 조화가 깨지고, 예술은 서서히 저물어간다. 낭만적 예술 다음엔? 예술의 미래는 ‘종교’에 있다. 가령 그리스의 신들은 조각 속에 자신을 드러냈지만, 기독교의 신은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다. 기독교의 진리는 더 이상 감각적 매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이제 이념은 ‘감각’이 아니라 ‘표상’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이미 시는 관념적 표상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종교는 다시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카페 앞에서

 아리스 : 선생님은 감각적인 걸 무조건 배척하시잖습니까? 그래서 감각적인 게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좋아하시고요.

 하지만 헤겔이 볼 때, 선생님의 이데아처럼 감각세계를 거치지 않은 이념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데아가 진정으로 자기완성에 도달하려면, 감각세계를 거쳐야 한다는 거죠.

 때문에 헤겔의 이데아는 감각적인 걸 자체 내에 포괄하게 됩니다. 이데아가 그렇게 감각적인 것과 통일을 이룬 상태,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얘기죠.

 플라톤 : 하지만 예술의 종말을 얘기하는 건 좀 과격한 결론 아냐?

 아리스 : 만약 예술의 본질이 ‘진리’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보면, 결국 헤겔과 똑같은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데엔 철학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5. 아름다움에 관하여 – 아름다운 가상

 비너스와 네페르티티

 네페르티티 :: 이집트 제18왕조의 왕 아크나톤의 왕비. 이집트의 귀족 출신으로 추측되는데, 왕과 똑같이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숭배하고 아톤 신앙을 찬미하여 이에 귀의하였다. ‘미녀는 오다’라는 뜻의 이름대로 1914년에 페루 텔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석회석 채색 흉상(베를린 달렘 미술관 소장) 및 미완성의 두상(이집트박물관 소장) 등이 그 미모를 실증하고 있다. BC 1367년 왕의 총애를 잃고 왕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네페르티티 [Nefertiti] (두산백과)

 

 황금분할

 고대인들은 미가 대상의 ‘객관적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모양이나 무게처럼 대상이 미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거다. 가령 황금분할이란 게 있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대충 0.618 : 0.382의 비례를 말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 비례야말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인체와 신전 건축에 널리 사용했다.

 놀랍게도 이 비례 관계는 소라고둥이나 꽃잎 등 여러 자연물에서 널리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비례는 원래 자연물 속에 있다가 인간의 머릿속에 들어온 거다. 그렇다면 미란 사물의 객관적 송성이다. 따라서 사물의 무게를 달고 길이를 잴 수 있듯이, 미도 수학적으로 측량할 수 있다. 그래서 폴리클레이토스는 가장 아름다운 인체 비례를 수치로 표시할 수 있었던 거다.

 만약 이처럼 아름다움이 수학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객관적 속성이라면,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데 별도의 감각이 필요하진 않다. 그저 수학 문제를 풀 수 있을 정도의 머리만 있으면, 어떤 게 아름다운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따라서 미를 파악하는 건 하나의 ‘인식’이다. 르네상스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미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고, 근대 이후에도 고전주의자들은 여전히 이 믿음을 고수했다.

 

 알 수 없는 그 무엇

 과연 수학적 비례만으로 미를 창조할 수 있을까? 그리스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스 건축가들은 의도적으로 엄격한 수학적 비례에서 벗어나 일탈을 즐겼다. 가령 기둥이 탄력있어 보이게 하려고, 그들은 곧게 뻗은 도라스식 기둥의 3분의 2쯤 되는 곳에 일부러 도들림을 주었다. 만약 기둥을 기하학적으로 정확하게 만들었다면, 기둥은 아마 차가운 느낌을 주었을 거다. 조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락시텔레스는 폴리클레이토스의 엄격한 인체 비례에 약간의 일탈을 가함으로써, 비로소 조상(彫像)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이렇게 대이론이 한계를 드러내는 곳에서 ‘취미론’이 등장한다. 대상이 아름다우려면 수학적으로 정확한 비례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물론 이 플러스 알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플러스 알파를 그냥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이라 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플러스 알파를 파악하는 데는 ‘이성’말고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그 특별한 능력이 바로 ‘취미’다.

 고전주의자에게 아름다움은 대상의 객관적 성질이었고, 그걸 판단하는 근거도 대상에 있었다. 하지만 푸생과 루벤스파의 논쟁 이후로 사람들은 이미 미적 취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이 의식은 바로크와 로코코를 거치면서 더 분명해졌을 거다. 이제 미는 서서히 주관화하기 시작한다. 취미론은 주관과 객관에 양다리를 걸친다. 가령 미는 ‘감각을 매개로 주관에 쾌감을 주는 사물의 속성’이라는 식이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미의 존재 근거는 대상에, 판단 근거느 ㄴ주관에 있다니.

 

 뮐렌도르프의 비너스

 <뮐렌도르프의 비너스>. 구석기 원시인들은 이런 여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2차 성징인 가슴과 엉덩이가 무지하게 큰데, 이건 물론 다산(多産)과 관계가 있다. 당시엔 유아의 생존율도 낮았고 숫자가 곧 생산력이었으므로, 애 잘 낳는 여자야말로 최고의 미인이었을 거다.

 미의 비밀은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먹기에 따라선 모든 게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오리냐 토끼냐

 취미론은 애매한 이중 구조를 갖고 있어 자연스러빚 못하다. 그래서 현대에 들어오면 미는 아예 완전히 주관화하기 시작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게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대상이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 따져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문제는 주관이 어떤 상태에 있을 때 대상이 아름답게 보이느냐다. 과거에 사람들은 ‘무엇이 아름답냐’고 물었지만, 이제 사람들은 ‘언제 아름답냐’고 묻는다.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범한 대상일 수도 있고, 미적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나르키소스

 테오도르 립스(Theodor Lipps, 1851~1914)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감정이입설’이라는 걸로 유명한데, 이는 현대의 주관주의적 미이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객관화한 자기 향수’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감정을 자연 속에 집어넣은 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거다. 자연의 아름다운 사물은 실은 우리가 그 속에 집어넣은 우리 감정이다.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도취해 한 송이 수선화가 되었던 나르키소스. 그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율배반

 황금분할 혹은 황금비율이란 대략 1:1.618의 비례를 가리킨다.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 비율은 소라의 나선무늬 등에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황금비율은 미가 사물의 객관적 속성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1:1.618의 황금비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은 그 안에 정사각형과 다시 황금비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그 직사각형은 정사각형과 황금비를 가진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작게 그리면서 정사각형의 마주보는 두 지점을 원으로 연결하면 소라의 나선무늬가 얻어진다. 

 

 미적 범주들

 범주란

 모든 판단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을 ‘범주’라 한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판단의 바탕에 열 개의 범주가 있다고 했다. 

실체 : 소크라테스
성질 : 철학자
분량 : 5피트 8인치의 키
관계 : 플라톤의 스승
장소 : 아고라에서
시간 : 정오에
위치 : 가만히 서서
양상 : 허술한 옷차림으로
능동 : 얘기하다가
수동 : 비웃음당함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표가 난지도에서 쓰레기 줍듯 주워 모은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아주 깔끔하게 12개의 범주를 제시했다. 

 

 어느 게 옳을까

 미적 판단에도 범주가 있다. 가령 미, 우미, 숭고, 비극성, 희극성 등이 그것이다.

 가령 그리스 예술에선 ‘미’라는 범주가 우세했다. 반면 중세 예술은 철두철미하게 ‘숭고’의 예술이었다. 중세에는 희극성을 허락하지 않았고, 저 천상의 ‘미’와 지상의 ‘추’를 대비시켰다. 한편 고전주의 예술은 ‘미’를 추구했지만, 바로크 예술은 ‘극적인’묘사를 추구했고, 로코코는 ‘우미’의 예술이었다. 고전주의자는 예술에 ‘추’를 그리는 걸 일절 허락하지 않았지만, 낭만주의자는 오히려 허울 좋은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추함’을 폭로하는 걸 즐겼다. 미적 범주의 가능성은 이렇게 시대마다, 유파마다 달라진다.

 

 미적범주와 예술의 관계는

 미적인 것과 예술의 관계는 서로 교차하는 두 개의 원으로 표시할 수 있다. 동그라미 두 개가 완전히 겹치면 유미주의적 예술관,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생각이 나온다. 이때 예술은 오로지 미적인 기능만 가지니까. 이게 바로 칸트의 생각이기도 하다. 예술은 오로지 미적 효과만을 추구해야지, 그 밖의 어떤 도덕적, 철학적 또는 정치적 목적과 관련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거다.

 반면 동그라미가 서로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때 예술은 미적인 효과 이외의 다른 목적에 종속된다. 가령 톨스토이는 《예술론》에서 하나의 오페라를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고생을 하는지 장황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결론은 예술이 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예술이 기껏 ‘미’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집어삼켜서야 되겠는냐는 얘기다. 예술은 그보다는 좀 더 높은 목표를 가져야 한다. 그 지고한 목표를 그는 예술이 가진 도덕적 교화 기능에서 찾았다.

 물론 이건 두 개의 극단적인 경우다. 미적인 것과 예술의 관계는 교차하는 두 개의 원으로 봐야 한다.

 

 유클리드와 산책을

 기찻길은 두 번 만난다

 나 : 요즘은 기하학도 여러 가지랍니다. 리만(Georg F. B. Riemann, 1826~1866)이란 사람은 지구 같은 플러스 곡면의 기하학을 만들었고, 로바체프스키(N. I. Lobachevskii, 1792~1856)는 말안장 같은 마이너스 곡면의 기하학을 만들었죠.

 

 리만 :: 독일의 수학자. 복소함수의 기하학적인 이론의 기초를 닦아 주었으며, 리만적분을 정의하고, 리만공간의 개념을 도입하여, 리만공간의 곡률(曲率)을 정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게오르크 리만 [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두산백과)

 

 로바체프스키 :: 러시아의 수학자. 유클리드기하학의 기초공리를 검토하여 유클리드기하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하학의 성립 가능성을 상정(想定)하여,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창시하였다. 그 외 ‘로바쳅스키 방정식’으로 불리는 대수방정식의 수치해법을 행하는 등 폭넓은 연구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콜라이 로바쳅스키 [Nikolai Ivanovich Lobachevskii]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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