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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미학 오디세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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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2
-
저자
진중권
출판
휴머니스트
출판일
2003.11.25

 


 

0. 글머리에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건 한갓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 훈데르트바서

 

 훈데르트바서 :: 본명 프리드리히 슈토바서(Friedrich Stowasser). 오스트리아의 화가, 건축가, 생태주의자. 빈 출생, 빈 미술학교 중퇴 후, 유럽, 아프리카 각지를 방랑. 시레와 클림트의 양식, 기법의 영향하에, 원색을 병치한 강렬한 색채효과와 대담한 장식화에 의한 독자적 추상화풍을 수립하였다. 폭스 등과 함께 『Pintorarium Manifest』, (1959, 핀토라리움 선언)를 출판. 대표작 『눈속의 집들』(1962, 뉴욕, 요아힘, 아바버크 화랑). 1973년부터 건축에 관심을 보여 오스트리아 수도 빈 도심에 집합주택 훈데트르바서하우스(1985, Hundertwasser Haus)를 지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훈데르트밧서 [Hundertwasser]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원래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첨부되는 게 아니라 형식 속에 침전되는 법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의 세 가지 주제 :: 인간의 조건, 사물의 교훈, 말과 사물

 

 마그리트 ::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을 예기치 않은 공간에 나란히 두거나 크기를 왜곡시키고 논리를 뒤집어 이미지의 반란을 일으켰다. 장난기 가득하고 기발한 상상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관습적인 사고의 일탈을 유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르네 마그리트 (두산백과)

 

 굿모닝 헤겔

 예술이 종말을 고할 거라고 예언하셨는데, 유감스럽게도 선생(헤겔)의 예언은 빗나간 거 같군요.

 

 내가 예술의 종말을 얘기했을 때,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자취를 싹 감춘다는 뜻이 아니었소. 내 말은 예술이 더 이상 진리가 생기는 결정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었소. 그리스 시대는 예술의 시대, 그 이후는 종교의 시대, 그리고 근대는 철학의 시대였소.

 이렇게 진리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주요한 상징 형식은 시대마다 달라지는 거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인간의 사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거요.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선생(헤겔)과 반대로 ‘철학의 종언’을 얘기하더군요. 예술이야말로 진리가 발생하는 장소라나요? 그래선지 요즘 철학자들은 모두 시인을 닮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철학은 시(詩)가 되고..., 외려 지금이야말로 예술의 시대가 아닐까요?

 

 

 

1. 현대 예술 – 가상의 파괴

 현대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대상성’이 파괴된다는 데 있다. 이제 그림은 현실에 있는 어떤 것의 ‘재현’이기를 그친다. 파울 클레는 “현실이 끔찍해질수록 예술은 더욱더 추상적으로 된다”고 했다. 이제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이기를 포기한다. 이제 예술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세잔의 두 제자

 현대 예술은 세잔(Paul Cezanne, 1839~1906)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세잔의 모순

 사실 세잔의 생각은 전혀 현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복고적이었다. 그가 꿈꾼 것은 당시 주류였던 인상주의에서 다시 과거의 고전주의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단, 그는 고전주의로 돌아가려고 하면서도 인상주의의 성과를 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인상주의자들은 사물이 아니라 빛을 그리려 했다. 사물은 빛의 상태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색으로 보인다. 그래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리곤 했다. 하지만 세잔은 빛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바로 ‘그 대상 자체’를 그리려 했다. 동시에 인상주의의 빛나는 ‘표면’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지각의 혼란스러운 것

 세잔은 인간의 지각이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은 투시원근법처럼 소실점을 중심으로 모든 걸 질서정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고 한다. 시시각각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단편들은 산만하고 혼란스럽다. 어떻게 하면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여 이것들을 하나의 구조적 전체로 통합시킬 수 있을까? 세잔은 시각적 단편들을 마치 모자이크 단편처럼 취급하여, 그림 속에 이 조각들을 하나의 구조적 전체로 짜맞추려고 했다.

 

 피카소

 모자이크 단편을 쌓아올려 대상을 구성하는 세잔의 방법은 입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입체주의자들은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해체해서 다시 종합하려 했다. 그들을 입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세잔의 방법을,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입체주의자들은 사물을 여러 시점(가령 전후좌우)에서 본 시각적 단편들을 모아 그것들을 하나의 평면에 재조립하려고 했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그림을 보라.

 물론 이는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의 말대로, 세잔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사실 세잔이 화면을 모자이크처럼 구성한 것은 지각 자체가 원래부터 혼란스럽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2차원과 3차원 공간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사물의 표면 너머에 있는 ‘사물 그 자체’를 그리는 데 있었다. 때문에 혼란스러운 지각의 편린들을 질서정연하게 정돈해 ‘사물’을 드러내는 것 – 이게 바로 세잔이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세잔은 혼란스런 단편들을 건축적으로 구성해서 ‘대상’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피카소는 대상을 제시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이 보인다. 대상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형태의 배열! 여기서 우리는 피카소가 현대 추상예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다.

 

 허버트 리드 ::영국 시인 ·예술 비평가. 예술을 과학이나 철학과 같이 유익한 지식의 자주적 형식이라고 논했으며, 그의 저작은 강한 철학적 경향과 예술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론적이고 정열적인 접근을 특징으로 한다. 주요저서로는《벌거벗은 용사》,《예술의 의미》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허버트 리드 [Herbert Read] (두산백과)

 

 그리고 마티스

 피카소가 세잔에게서 평면을 기하학적 단편들로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면,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세잔에게서 또 다른 측면, 즉 풍부한 색채와 빛나는 표면을 발견하였다. <모자를 쓴 여인>에서 커다란 모자 밑으로 왼쪽 머리카락은 붉은색이고, 얼굴 오른쪽의 머리카락은 푸른색이다. 그녀의 얼굴엔 연보라색, 푸른색, 파란색 줄무늬가 그려져 있다. 

 정말로 그녀의 얼굴이 그런 색일까? 물론 그럴 리 없다. 때문에 이 그림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수많은 욕설을 들어야 했고, 결국 그 욕설 중 하나가 그가 속한 그룹의 이름이 되어버린다. 야수파(fauvisme). 대상의 원래 색에 관계없이 강렬한 원색 위주의 색채를 구사하는 마티스가 그들에겐 지승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마티스는 현대 추상예술에 또 하나의 특징을 보탠다. 이제 색은 더 이상 대상에 종속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대상에서 해방된 색채의 자유로운 배열!

 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다. 마티스는 거기서 색체를 해방시켰다.

 

 추상, 표현, 레디 메이드

 모더니즘 예술의 세 가지 현상을 흔히 추상, 표현, 레디 메이드라고 한다. ‘추상’예술은 대상의 구체적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말한다. ‘표현’계열의 예술은 대상보다는 주관의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 두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물론 피카소와 마티스다. 한편 ‘레디메이드’란 글자 그대로 ‘기성품’으로, 가령 시장에서 산 물건에 사인을 해서 예술 작품이라 우기는 거다. 이 방법은 다다이스트들이 즐겨 사용했다. 또, 하나의 흐림이 있다. 전통적인 화법으로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를 그리려 했던 초현실주의.

 

 데 스틸 :: ‘양식(the style)’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이 그룹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강력히 옹호하고 새로운 조형예술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가한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데 스틸 운동은 단순히 회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각, 건축, 디자인 등 각 분야에 걸쳐 신조형주의의 원리를 넓히려 했으며,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양차 대전 사이에 유럽 예술 전체의 동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20년경에는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와 상호 협력하였으며, 그 결과 산업 디자인, 상업미술 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데 스틸 [De Stijl]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다다이즘 :: 제1차세계대전(1914~19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다이즘 [dadaism] (두산백과)

 

 추상의 끝은? 검은 사각형. 형태의 추상은 가장 단순한 사각형에 이르고, 색채의 추상은 검은색에 이른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창작에 ‘절대주의(suprematism)’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상의 파괴

 현대에 들어오면 예술은 더 이상 무언가의 가상이기를 그친다. 이제 그것은 다른 것이 된다.

 

 회화

 대개의 경우에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당연히 ‘무엇을 그린 것인가’하고 묻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습관에 따르면, ‘그리다’라는 동사 자체가 이미 그려지는 대상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우리는 그림을 현실 혹은 허구 속의 대상과 동일시(identify)한다 - ‘이건 테이블이다’ 혹은 ‘최후의 만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만으로도 ‘재인식’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형태와 색채의 해방

 대상성의 파괴는 형태와 색채의 해방을 가져온다. 이제 형태와 색채는 대상을 재현할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하게 된다.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작품에서 중요한 건 재현 대상과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이다. 1910년의 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자연과 자연 연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구통 속의 내용무렝 대한 화가의 태도다.”

 예술의 과제는 더 이상 자연을 정확히 재현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색조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화구통 속의 내용물(물감)을 어떻게 조합하느냐다.

 

 음악을 향하여

 대상성에서 해방되어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배열이 될수록, 회화는 점점 더 음악을 닮아간다. 음악 역시 전혀 현실을 묘사하지 않는 음표들의 자유로운 배열이니까.

 칸딘스키의 저서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그는 회화를 두 부류로 나누면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순한 형태에 종속되는 단순한 구성으로, 나는 이를 선율적 구성이라 부른다. 둘째는 복합화된 구성으로 이는 주요 형태에 여러 형태들이 종속된 구성이다. 이 복합화된 구성을 나는 교향악적 구성이라 부른다.

 

 오브제로

 칸딘스키에 따르면 점, 선, 면은 회화의 세 가지 요소다. 다 빈치는 점, 선, 면, 체(體)를 얘기했다. 칸딘스키의 얘기엔 ‘체’가 빠져 있다. 더 이상 점, 선, 면이 합하여 구체적 형체를 이룰 필요가 없다! 대상을 재현하려 했던 고전적 회화는 재현 대상을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였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은 더 이상 그 무언가의 ‘기호’이기를 그친다. 기호의 성격을 잃은 이상, 작품은 논리적으로 일상적 사물과 구별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objet)이 되어버린다.

 원래 ‘오브제’란 예술에 일상적 사물을 그대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는 침대를 그리는 대신, 실제 침대에 페인트칠을 해 벽에 걸어놓았다.

 

 로버트 라우션버그 :: 미국의 화가. 추상표현파의 영향 아래 참신한 작품을 발표했으나 오브제를 이용한 콤바인 회화를 만들어 추상표현파에서 독립했다. 이어서 실크 스크린에 의한 시사적 화제의 이미지를 배합한 화면에 오브제를 첨가하는 독특한 표현법으로 팝 아트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버트 라우션버그 [Robert Rauschenberg] (두산백과)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e) :: 발견된 사물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우린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 속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이게 바로 그 작품의 ‘의미 정보’다. 이제 이 내용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나아가 그림 속에 보이는 형체들이 인물이며, 나무며, 들판이라는 사실까짇 잊어버려라. 그럼 그림 속에 순수한 형태와 색채만 남는다. 이게 바로 작품의 ‘미적 정보’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 회화에선 형태나 색채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전람회에서

 팔레트 위의 물감

 플라톤 : 가령 어느 화가가 자기가 매일 쓰는 팔레트를 그림으로 그렸다 하세.

 팔레트는 원래 물감을 담는 도구니까, 물론 그 그림 속의 팔레트에도 물감을 그려넣아야 겠지?

 그럼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네. 논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지시’라는 현상 말일세.

 물감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순수한 물질이야. 하지만 이 물감이 일단 그림에 사용되면 더 이상 물감이 아니겠지?

 아리스 : 그건 벌써 그림이죠.

 플라톤 : 그림은 이제 현실속의 대상을 가리킬걸세.

 하지만 팔레트 그림을 생각해보게. 물감은 자신을 부정해서 그림이 되고, 이 그림은 다시 자신을 부정해서 현실의 물감, 결국 자기 자신을 가리키게 되지. ~(~A)=A!

 가령 라우션버그의 <침대>도 마찬가지지. 페인트칠한 침대를 벽에 걸어놓음으로써, 침대는 예술 작품이 되고...

 아리스 : 이 예술 작품은 다시 침대를 가리킨다?

 플라톤 : 자기를 가리키는 사물. 이게 바로 현대 예술이란 얘길세.

 

 물감은 물감이다

 플라톤 : 예술의 오브제화란 예술에 일상적 사물을 끌어들이는 것만을 얘기하는 게 아냐. 예술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 된다는 얘기지.

 가령 고전적인 회화의 경우엔 이런 기호학적 절차를 거치게 되지. 물감→그림→대상.

 현대회화는 그림→대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네. 그게 가리키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지. 물감→그림→물감!

 아리스 :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A=A?

 작품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니까. 그건 그냥 물감일 뿐이야. 그러니 그저 물감의 색과 형태 배열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면 되는 거야.

 

 아름다운 물건

 플라톤 :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이상 현대 예술은 더 이상 ‘기호’라고 할 수가 없어. 그건 그냥 하나의 아름다운 물건일 뿐이지.

 기호의 본질은 원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물을 대신하는 데 있는 거야. 

 이제 ‘발견된 오브제’라는 생각이 나오게 된 이유를 알았나?

 아리스 : 예술은 사물이 되고, 사물은 예술이 되고...?

 플라톤 : 예술을 굳이 힘들게 할 필요가 없어. 예술은 길바닥에서 줍는 거야.

 

 가상의 파괴

 플라톤 :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 기하학적 형태에 삼원색... 세상의 모든 형태를 추상하면 기하학적 형태에 도달하고, 모든 색채를 추상하면 삼원색에 도달하니까. 그건 바로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이기도 하지. 

 예술은 더 이상 ‘가상’이 아냐. 그건 또 하나의 현실이지. 멋있지 않나? 가상 대신에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Merde :: 뜻이 배설물인데 shit 정도?

 

 

 

2. 위로부터의 미학 – 인간의 조건

 철학의 영원한 주제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다. 현대 철학도 다르지 않다. 현대 미학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자들의 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모델

 모든 소통엔 두 개의 끝이 있다. 정보를 보내는 발신자와 그것을 받는 수신자다. 두 사람을 매개해주는 매체도 필요하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해주는 매체를 전언(message)이라 부른다. 

발신자→전언→수신자

 전언을 만들 때 우린 어떤 약속에 따르는데, 이 약속을 약호(code)라 한다. 약호를 사용해 전언을 짜는 작업을 약호화(encode)라 한다. 반면 약호로 이 전언을 푸는 것을 해독(decode)이라 한다.

발신자→약호화→전언→해독→수신자

(약호)--(약호)--(약호)--(약호)--(약호)

 

 아스키코드 :: 미국에서 표준화가 추진된 정보교환용 7비트 부호로 PC를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사용된다. 컴퓨터에서 처리하기 용이한 8비트 데이타를 이용하기 위하여 숫자, 문자, 특수문자에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1963년 미국표준협회(ANSI)에 의해 결정되어 미국의 표준부호가 되었다. 미니컴퓨터나 개인용 컴퓨터(PC)와 같은 소형 컴퓨터를 중심으로 보급되어 현재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아스키는 128개의 가능한 문자조합을 제공하는 7비트(bit) 부호로, 처음 32개의 부호는 인쇄와 전송 제어용으로 사용된다. 보통 기억장치는 8비트(1바이트, 256조합)이고, 아스키는 단지 128개의 문자만 사용하기 때문에 나머지 비트는 패러티 비트나 특정문자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컴퓨터는 데이터를 8개의 비트 단위로 묶어 한 번에 처리한다. 비트는 2진법의 0과 1 가운데 하나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즉, 1비트는 0이 될 수도 있고, 1이 될 수도 있다. 비트 8개를 모아 놓은 것을 바이트(byte)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1바이트로 표시할 수 있는 최대 문자의 수는 256조합이 된다. 따라서 컴퓨터에서는 8비트씩을 묶어 처리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예컨대 7개 비트 이하로 묶을 경우에는 표현 가능한 수가 128개 이하가 된다. 그러나 이 숫자로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는 모든 숫자·국가언어·기호 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반면에 9비트 이상일 경우에는 512개 이상이나 되어 필요없는 영역이 많이 생기게 된다. 이 때문에 256가지의 영역마다 어떤 원칙에 의해 표현 가능한 모든 숫자·문자·특수문자를 하나씩 정해 놓은 것이 곧 아스키코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스키코드 [American Standard Code for information interchange] (두산백과)

 

 예술의 커뮤니케이션모델

 예술가는 ‘발신자’다. 그는 먼저 머릿속으로 작품을 구상한다. 이 구상을 디자인(design)이라 부르자. 이어서 그는 이 디자인을 물감, 음향, 신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물질적 형태로 구현한다. 이를 퍼포먼스(performance)라 부르자. 이는 일종의 ‘약호화’로 볼 수 있다. 작품이 완성되면, 작가는 이를 ‘청중, 관객, 독자에게 발송한다. 이때 작품은 예술가가 전달하려는 예술적 정보의 담지체, 즉 ’전언‘인 셈이다.

 작품을 감상(지각)하는 건 일종의 정보 ‘해독’이다. 이럭저럭 여기에 성공할 경우 예술가의 머리에서 떠난 정보는 마침내 목표인 ‘수신자’의 머리에 도달하고, 이로써 예술적 소통은 완수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수신자가 예술언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술적 소통에 사용되는 ‘약호’다. 약호를 모르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

 비평은 예술적 소통 체계의 방향을 조정하는 일종의 피드백(feedback)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다. 

-(예술언어)-            -(예술언어)-

 예술가→창작과정→작품→지각과정→수용자

-------------(비평)-------------

 

 세잔의 회의

 세잔의 회의

 하나의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 그는 100번의 작업을 필요로 했고, 하나의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150번이나 자리에 앉게 했다. 우리가 그의 작품이라 부르는 것도 사실은 세잔 자신에겐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습작에 불과했다. 그는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의 대립을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뚜렷한 윤곽과 고유색을 가진 대상의 항구적인 모습을 포착하라는 고전주의의 요구와, 대상에 반사된 빛이 눈에 부딪힐 때의 순간적 인상을 포착하라는 인상주의의 요구를 어떻게 일치시킨단 말인가.

 생애 중반에 그는 인상주의에 심취한다. 인상주의자들은 빛의 시각적 효과를 위해 캔버스에 어두운 색을 몰아냈다. 어둠이 없으니 화면은 깊이가 사라져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색이란 곧 반사된 빛이다. 사물의 색은 빛의 조건에 따라 항상 달라진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의 고유색이라는 생각도 없애버렸다. 이제 사물의 항구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시시가각 달라지는 표면만 남는다. 빛은 사물을 차별하지 않기에, 대상과 배경을 뚜렷이 구분해주던 윤곽선도 사라진다. 이렇게 빛의 효과를 담으려다 보니, 중량감이 사라져 사물이 마치 물 위에 뜬 그림자처럼 보이게 되었다. 흐물흐물...

 하지만 사물은 어디까지나 사물이다. 그러므로 사물에 마땅히 원래의 실체감을 돌려주어야 한다. 여기서 세잔은 인상주의의 빛나는 표면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물에 실체감과 입체감을 준다는 목표를 세운다. 말하자면 사물의 ‘겉’과 ‘속’을 동시에 그리려 했던 거다. 하지만 과연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그는 같은 그림을 수십, 수백 번 고쳐 그려야 했다.

 

 원초적 지각

 본다는 것은 인상주의자들이 생각한 망막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외부세계와 물리적, 정신적으로 관련을 맺는 복합적 과정이다. 지각은 순전한 정신 작용도 아니고, 물론 순전한 신체 운동도 아니다. 그 속엔 양자가 미처 분리되지 않은 채 융합되어 있다.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1908~1961)에게도 가장 큰 문제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극복하는 거였다. 그의 방법은 주관과 객관이 미처 분리되지 않은 지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원초적 지각 속엔 신체와 정신, 주관과 객관이 함께 녹아 있으므로. 거기선 주객의 대립이 원초적으로 극복되어 있다. 

 

 메를로 퐁티 :: 프랑스의 철학자. E.후설의 후기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활세계의 현상학적 기술(記述)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기도한 저서 《지각의 현상학》를 썼다. 사르트르, S.de 보부아르 등과 더불어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이론가가 되었다. 나중에 용공적인 정치적 태도를 취하게 된 사르트르와 사상적으로 결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두산백과)

 

 체험된 원근법

 고전주의는 ‘사유’의 그림이고, 인상주의는 어디까지나 ‘보는’ 그림이다. 고전주의의 투시원근법은 논리적 ‘판단’의 산물이지만, 인상주의의 빛의 효과는 ‘감각’의 산물이다. 하지만 사유와 감가깅 나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진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가? 물론이다. 바로 원초적 지각의 세계다. 메를로-퐁티가 세잔을 좋아한 건, 세잔이 추구하는 예술세계가 그가 말하는 반성(지각의 체험을 돌이켜 생각함) 이전의 지각세계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들이 실제로 지각하는 원근법은 기하학적 원근법도 아니고, 사진기의 원근법도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지각 속에서 ‘체험하는 원근법(perspective vecue)’은 투시 원근법과 상당히 다르다. 가령 <노란 등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을 보라. 부인의 배경에 양쪽으로 검게 그려진 벽지의 줄무늬가 보일 거다. 자를 대보면 양쪽 끝이 직선을 이루지 않고 상당히 어긋나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건 실수가 아니다. 심리학에 따르면, 일상적 지각에선 직선의 가운데를 물체로 가리면 선의 양쪽 끝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말하자면 오히려 세잔이야말로 정확히 보았던 거다.

 

 신체의 코기토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지각의 주체는 ‘사유’가 아니라 혼탁한 ‘신체’다. 따라서 지각이 데카르트의 ‘사유’처럼 맑고 투명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투명한 지각이야말로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근원적인 것은 데카르트식의 명석판명한 ‘사유’가 아니다. 근원적인 것은 오히려 불투명한 인식 주체인 ‘지각하는 신체’다.

 세잔에게도 근원적인 것은 지성, 관념, 과학, 원근법 따위가 아니었다. 그에게 더 근원적인 것은 과학의 세계 이전의 자연적 세계, 말하자면 원초적 지각의 세계였다. 세잔은 그림을 통해 이 자연적 세계를 표현하려 했던 거다. 

 

 코기토 ::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기본 철학원리인, 라틴어로 ‘cogito, ergo sum’의 의미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에서의 코기토로, 데카르트는 「성찰(省察)」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에 속아도 '내(我)’가 사유(思惟)하고 존재하는 것만은 불가의(不可疑)한 진리라 하고 이것을 철학의 원리로 하였다. 코기토는 라틴어로 '나는 사유한다’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데카르트 이후 ‘사유하는 나’를, 더 나아가 인식주관이나 인격주체를 의미하는 명사로서 사용되어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코기토 [Cogito] (21세기 정치학대사전, 2010.1.5, 한국사전연구사) 

 

 세계는 단백질?

 신체의 코기토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건 어째서일까? 그건 신체와 세계가 똑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공통의 재료를 메를로-퐁티는 ‘살(chair)’이라 부른다. 메를로-퐁티는 이 말을 안과 밖이 하나로 겹쳐져 있는 존재 방식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우리 신체는 정신과 겹쳐 있다. 정신은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신체의 이면(裏面)이다. 정신과 신체는 안과 밖의 관계로서, 밖인 신체는 정신에 속해 있고, 동시에 안인 정신은 신체에 속해 있다. 가령 지각 속에선 신체 운동과 정신 작용이 분화되지 않은 채 통일되어 있지 않은가. 데카르트는 신체와 정신을 칼로 자르듯이 나누었다. 그 결과 신체와 정신,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에 빠져버렸다. 메를로-퐁티는 ‘살’ 속에 양자를 녹여버림으로써, 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한다.

 신체가 이면에 정신을 감추고 있듯이, 사물 역시 겉의 ‘표면’과 실재성의 ‘깊이’를 갖고 있다. 사물도 이렇게 안과 박이 겹쳐진 존재다. 

 신체는 세계 속에 들어 있다. 종시에 신체는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에 사물을 붙잡아놓고 있다. 그러므로 사물은 신체 자체의 부가물이거나 그 연장이다. 우리의 신체가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우리 신체와 세계가 ‘살’이라는 공통의 재료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체와 세계는 지각 속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이 ‘신체의 살’과 ‘세계의 살’의 원초적 만남, 세잔이 추구한 조형세계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연은 내면에 있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을 사물의 상이 신체 속에서 반복되는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지각이 이루어질 때, 사물의 ‘외적인’ 가시성은 신체 속에 들어와 ‘내적인’ 가시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각이 가능한 것은 사물들이 내 속에 그들의 내적 등가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물은 내 속에 그들의 현존에 관한 ‘육화(肉化)’의 공식을 새겨놓고 있다. 그래서 세잔은 “자연은 내면에 있다”고 말했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모든 회화는 우리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이 비밀스럽고 열광적인 사물의 발생을 탐구하는 것이다. 세잔뿐만 아니라 모든 회화는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 만남인 지각의 체험이다. 화가는 이 지각을 가시적인 것으로 화면에 옮겨놓는다. 이 화상 속에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묘사하는 것과 묘사되는 것이 하나로 융합된다.

 

 철학의 자살

 메를로-퐁티는 주관과 객관, 신체와 정신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대립이 생기기 이전의 지각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럼으로써 그는 주관과 객관, 신체와 정신, 감각과 사유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려 했다. 세계와 신체, 신체와 정신, 감각과 사유 – 이 모든 것이 그의 철학 속에선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융합되어 잇다. 말하자면 전통 철학이 이들 사이에 그어놓은 구별을, 그는 애써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의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당시 사람들에게 세잔의 ‘자살 행위’로 여겨졌듯이, 전통적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메를로-퐁티의 시도 역시 철학적 ‘자살 행위’일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세잔의 그림처럼 메를로-퐁티의 철학도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을 ‘애매성의 철학’이라 하는 건 이 때문일 거다.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세잔의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은 단 하나의 시점으로 그려진 게 아니다. 각 부분마다 시점이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각 부분들은 교묘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다. 하나의 그림 안에 여러 개의 시점이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림은 전체적으로 애매모호한 모습을 띠게 된다. 부분마다 시점이 달라지다 보니,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보는데도 마치 테이블 주위를 돌면서 보는 효과가 생긴다. 

 

 인간의 조건

 가짜 거울

 메를로-퐁티의 방법. ‘안’과 ‘밖’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이전의 ‘원초적 지각’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했다. 지각이 이루어지는 순간엔 신체(눈)와 정신이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와 세계가 구별되지도 않는다. 거기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한 몸이 된다.

 

 위조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바깥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메를로-퐁티의 방법은 ‘살의 존재론’이다. 그가 말하는 ‘살’은 안과 밖이 겹쳐진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세계가 애초부터 안팎이 겹쳐져 있다고 보면, ‘안(의식)’이 어떻게 ‘밖(객관 세계)’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안’과 ‘밖’이 겹쳐진 애매한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거다.

 

 예술가의 직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해선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을 거다. 이 그림이 그려질 때의 이야기다. 그림 제작을 맡아 이곳에 온 다 빈치는 여러 날 동안 붓도 대지 않고, 그림을 그릴 벽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의아하게 생각한 수도원장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 “원래 고상한 천재성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외부적인 작업을 거의 안 할 때 사실은 가장 활발하게 발명을 해내는 법이오.”

 이 말보다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ce, 1866~1952)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건 없다. 그에게 예술 작품은 우리 눈앞에 있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그건 예술가의 머릿속에 있다. 르네상스인들이 ‘디자인’이라 불렀던 것, 말하자면 예술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구상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예술 작품이다. 이를 물질적 매체로 옮기는 육체적 작업(퍼포먼스)은 부차적일 뿐이다.

 

 베네데토 크로체 :: 이탈리아의 철학자 ·역사가. 파시즘 시대에 정부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반(反)파시스트 지식인의 의견을 대변하였다. 망명 ·추방 ·투옥된 파시즘 반대자들을 돕기도 했다. 크로체는 자신의 철학을 ‘정신의 철학’이라고 불렀는데, 예술과 논리, 경제와 윤리 등에 관해 고찰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네데토 크로체 [Benedetto Croce] (두산백과)

 

 예술은 직관

 크로체에 따르면, 예술은 관조활동, 일종의 인식이다. 예술적 구상을 물질로 구현하는 건 예술과는 무관한 것이다. 예술은 상상력을 이용한 ‘직관적’ 인식이다. 그건 지성을 이용한 ‘논리적’ 인식과 구별된다. 논리적 인식(학문)은 보편자를 인식하지만, 직관적 인식(예술)은 개별자를 인식한다. 논리적 인식이 ‘개념’을 생산한다면, 직관적 인식은 개개사물의 ‘이미지’를 산출한다.

 하지만 ‘직관’이 도대체 뭔가? ‘지각’? 아니다. 지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파악하는 걸 말한다. 가령 책을 지각했다는 건, 곧 눈앞에 책이 있다는 걸 안 거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는 지각 될 수 없다. 하지만 직관에선 실제와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다. ‘감각’? 이것도 아니다. 감각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질료로, 수동적인 것이다. 그건 짐승에게도 있다. 감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뿐, 이미지를 산출하진 못한다. 하지만 직관은 능동적으로 이미지를 산출한다. 직관은 이렇게 위로는 개념과 아래로는 감각과 구별된다.

 직관은 ‘표상’ 혹은 ‘이미지’다. 철학적으로 표상이란 더 이상 감각은 아니지만 아직 개념이 아닌 이미지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감각의 수준을 넘은 ‘정신적’, ‘관념적’인 것이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몇 초만 힐끗 보고도 대가의 작품 전체를 기억하고 똑같이 조각할 수 있었다 한다. 그런 미켈란젤로보다도 당신의 눈은 더 좋을지 모른다. 좌우 1.5로.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그보다 사물을 더 잘 본다고 할 수 있을까? 직관은 감각을 넘어선 어떤 ‘정신적’능력이다. 크로체가 직관을 ‘인식’으로 보는 건 아마 이 때문일 거다.

 

 직관은 표현

 그런 직관을 기계적, 수동적, 본능적 감각과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진정한 직관은 곧 ‘표현’이라는 거다. 직관활동은 더도 덜도 아니고 자기가 표현하는 만큼의 직관만을 갖는다. 표현은 직관을 객관화하는 능력을 말한다. 표현으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건 이미 직관이 아니다.

 여기서 표현으로 객관화한다는 건 예술적 착상에 물질적 외투를 입히는 ‘육체’ 노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그건 중요하지 않ㄴ다. 크로체는 표현을 물질적 구현(퍼포먼스)과 철저하게 구별한다. 퍼포먼스는 관조가 아니라 실천 활동이기 때문이다. 진짜 화가는 원래 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법이다. 일단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면 거기에 물질적 외투를 입히는 건 저절로 따라온다. 표현은 머릿속에서 완성되며,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그림(표현)이야말로 어떤 외적인 찌꺼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예술 작품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아름다움이다. 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표현이며, 표현은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표현은 양식

 표현(expression)은 질료, 즉 외계에서 받아들이는 감각 자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를 인상(impression)이라 부른다. 그럼 미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인상에 표현을 덧붙이면 예술이 되는가? 물론 아니다. 표현은 단순히 인상에 덧붙여지는 게 아니다. 예술가는 막대한 양의 인상들을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거기서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만들어낸다. 표현은 이렇게 무정형한 인상에 ‘형식’을 주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은 질료가 아니라 ‘형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표현을 통해 인상을 극복함으로써 우리는 인상에서 해방된다. 동물들은 인상에 얽매이지만, 우린 인상들을 객관화함으로써 그것들을 우리와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지배한다. 예술엔 이렇게 해방과 정화의 기능이 있다. 표현은 해방자로, 외계에 대한 우리의 수동성을 제거해준다. 크로체는 창작의 과정을 4단계로 나눈다. 먼저 1)감각기관이 인상을 받아들이면, 2)예술가는 이것을 미적으로 종합하여 표현을 만들어낸다. 3)이때 즐거움(미적 쾌)이 뒤따른다. 4)마지막으로 그는 이 표현을 물리적 현상(소리, 색)으로 변환한다.

 

 정신철학의 체계

 하지만 예술적 직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일상적 직관이 곧 예술적 직관이다. 따라서 일상적 직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어느 정도는 예술가다. 

 예술적 직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므로, 예술적 직관에 관한 학문은 일상적 직관에 관한 학문과 같다. 따라서 미학은 누구나 갖고 있는 일상적 직관을 연구한다. 크로체는 미학을 토대로 ‘정신철학’의 체계를 쌓아올린다. 미적 인식, 즉 직관적 인식은 모든 인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우리에게 현상의 세계를 제공하며, 개념은 예지계 즉 정신을 제공한다. 그러나 개념은 언제나 직관에서 출발하고, 또 그 안에 언제나 직관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예술, 인류의 모아

 크로체에 따르면 예술뿐만 아니라 언어도 표현이다. 따라서 언어는 곧 예술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언어 표현은 예술성을 띠고 있다. 시는 인류의 모어다. 실제로 인류가 최초로 언어를 만들어냈을 때 그건 거의 시에 가까웠을 거다. 가령 인류의 유년기에 가까운 인디언의 언어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친구’를 ‘나의 짐을 대신 져주는 자’라 부른다. 어느 인디언 추장은 부족의 땅을 팔라는 제안을 받고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땅을 팔라는 귀하의 제안을 저는 정중히 거절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땅을 팔 수가 없습니다. 그건 땅이 우리에게 속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대지를 스치는 바람, 흐르는 강물을 어떻게 돈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 울창한 숲과 바위, 바위 하나하나에 서린 조상의 추억, 부족의 역사를 어떻게...”

 

 예술의 자율성과 모더니즘

 크로체의 예술론은 형식주의적인 순수 예술, 바로 현대의 모더니즘 예술이다.

 예술=직관=표현=미=언어. 사실 이 무차별적 동일성의 명제는 신(新)헤겔주의자라는 명칭에 걸맞이 않게 비(非)변증법적이다. 크로체의 미학이 현대 예술에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이론의 정교함이라기보다는 그의 미학이 대변하는 시대정신 때문이었을 거다. 그는 현대의 예술 상황이 아는 최초의 현대 미학자로, 그의 미학은 현대 ‘표현론’의 예술적 강령이 된다. 생각해보라. 현대 예술은 더 이상 외부세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의 출발점은 예술가의 내면이다. 현대 예술은 내면의 직관을 밖으로 표현하는 데서 성립한다.

 

크로체의 정신활동체계

  논리적 인식
(보편의 인식) 
도덕적 활동
(보편적 이익) 
 
       
  직관적 인식
(개체의 인식) 
경제적 활동
(개별적 이익) 
유용성 
  관조활동  실천활동   

직관에서 논리적 인식으로, 다시 여기서 실천으로...

 

 신의 그림자

 ‘창조’하는 신, ‘창설’하는 인간

 크로체는 관조와 실천을 나눔으로써 예술을 정신의 감옥에 가둬버렸다. 하지만 에티엔 수리오(Etien Souriau, 1892~1979)는 예술을 조용한 ‘관조’가 아니라 역동적인 ‘활동’으로 본다. 왜? 어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 사물을 만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때문에 그는 제작하는 활동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고 본다.

 이 실천적인 제작 활동을 수리오는 ‘창설(instauration)’이라 부른다. 그가 둑이 이 낯선 개념을 쓰는 건 신의 ‘창조’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신의 창조는 그야말로 크레아티오 엑스 니힐로(creatio ex nihilo), 즉 무(無)로부터의 창조다. 신은 모든 걸 자기 속에서 끄집어내서 창조하며, 창조하는 데에 자기 외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의 그림자인 인간은 자기 창조를 할 수 없다. 그는 미리 존재하는 질료에 미리 존재하는 형(形)을 부여할 뿐이다. 그는 다만 발견하고 실현할 뿐이다.

 

 형상적 완전성을 향하여

 창설이란 잠재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옮기는 거다. 여기서 수리오는 완벽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이 고대의 철학자는 사물의 생성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변화로 설명했다. 가령 한 알의 씨앗은 가능태다. 그럼 현실태는? 한 그루의 늘씬한 나무! 질료는 가능태다. 현실태가 되려면? 거기에 형상을 부여하면 된다. 그는 오직 질료가 적절한 형상을 갖춘 상태(entelecheia)만을 진정한 존재로 보았다. 수리오 역시 실현되지 않은 것에 존재의 자격을 주기를 거부한다. 존재하는 건 실현된 거다. 실현되지 않은 건 존재하지 않는 거다. 결국 존재하려면,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여 그걸 현실태(엔텔레케이아)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수리오의 얘기는 오히려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에 더 가깝다. 카라라의 채석장에 있는 미켈란젤로를 생각해보라. 그는 채석장에 널려 있는 대리석 덩어리들 속에 이미 형상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이 대리석은 장차 다비드 상이 될 예정이다. 적어도 그에게 그 돌은 다비드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잠재적인 형상을 현실태로 옮기는 셈이다. 이제 그 대리석은 충만한 구체성을 가진 진정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무정형적 사물(un etre)을 형상적 완전성을 가진 진정한 존재(I’Etre)로 끌어올렸다. 이게 바로 존재의 ‘창설’이다.

 

 창설의 예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존재의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상승하는 역동적 도약 속에 있다. 이렇게 도약하는 존재를 생생한 현장에서 포착하는 가장 좋은 방법, 아니 유일한 방법은 완전성을 향해 ‘존재’를 직접 ‘창설’하는 거다. 인간은 도약의 각 단계를 밟아가며 직접 존재를 창설하나. 가장 낮은 존재의 층에서 점점 더 높은 존재의 층으로.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상승의 변증법’이다. 하나씩 상승할 때마다 우리에겐 존재의 비밀이 한 꺼풀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술은 ‘창설의 예지’다. 가령 돌덩어리에서 어떤 형상이 문득 떠올랐다면, 그건 신의 창조의 비밀이 우리에게 계시된 거다. 창설의 영감은 곧 절대자의 나타남이다. 창설을 함으로써 비로소 우린 이 존재의 신비, 신의 창조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의 존재

 예술 작품의 첫 번째 존재층은 ‘물리적 존재’다. 이건 모든 예술 작품을 지탱하는 작품의 신체로, 예컨대 조각의 돌, 회화의 안료, 음악의 진동하는 공기 같은 거다. 크로체는 작품의 물리적 존재를 예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에게 순수한 예술은 예술가의 내면에 떠오른 직관(표현)이었다. 하지만 수리오는 작품의 물리적 존재를 작품의 구조에 포함시킨다. 작품은 자신의 물리적 현전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거다.

 둘째는 ‘현상적 존재’다. 이건 작품이 가진 순수한 감각절 질(質)로, 수리오는 이걸 ‘칼리아(qualia)’라 부른다. 가령 선, 볼륨, 색, 소리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조야한 감각이 아니라 이미 예술적 가공을 거친 것이다. 가령 기본음 ‘A’는 자동차 소음과 달리 순수하게 음악적인 소리다. 말하자면 질적으로 순수하고 양적으로 명료한 음을 찾은 결과다. 

 셋째는 ‘사물적 존재’다. 이건 작품 속에 재현된 세계다. 가령 <사모트라스의 니케>를 보자. 현상적 존재의 층에서 그건 볼륨이라는 감각적 질이었지만, 사실적 존재의 층에선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신체다. 하지만 음악과 같은 비(非)재현적 예술은? 거기에도 사싫적 존재의 층위가 있다. 바흐의 푸가를 보자. 실제 세계의 재현은 하나도 없지만, 거기에도 어떤 이야기가 있다. 먼저 동기가 제시되고, 주제가 도입되고, 잠시 후에 대위 주제가 도입되고, 그것들이 서로 교체되면서 펼쳐지는 드라마...

 넷째는 ‘초월적 존재’다. 이건 예술 작품 속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걸 넘어선 어떤 신비스런 느낌이다. 눈에 보이는 것의 배후에 은밀히 드러나는 존재, 어떤 신비스런 후광(le halo mystique), 이게 바로 초월적 존재다. 이걸 말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이야말로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거다. 예술 작품이 주는 깊은 감동은 바로 여기서 흘러나온다고 한다.

 

 물리적 존재 → 현상적 존재 → 사물적 존재 → 초월적 존재

 예술의 본질은 효과를 내도록 꾸며진 물리체에 지탱하여, 감각적 질(質)의 조화로운 놀이라는 유일한 수단으로, 예술이 보여주는 사물과 세계를 지시하면서, 초월에 대한 인상을 향해 우리를 끌어 올리는 데 있다. 

 

 신의 그림자

 이처럼 4계층을 밟아 초월적 존재로 상승하는 가운데, 형태도 없었던 물질 덩어리가 형상적 완전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가 된다. 존재가 창설된 거다. 물론 이건 글자 그대로 존재를 창조한 건 아니다. 그건 오직 신의 능력에 속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다만 미리 존재하는 형태적 전형을 발견하여 그걸 현실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자연이 채 완성하지 못한 것을 완성했다. 그건 곧 세계를 완전하게 만들려는 신의 작업을 우리가 돕고 있는 거다. 예술은 신과 인간의 공동 작업이다. 인간은 ‘신의 그림자’다. 이 그림자는 언제나 신을 따라다니며, 그와 함께 세계를 완성한다. 예술을 통해서.

 

 폭포 옆에서

 대응설

 ‘진리대응설’ 진리를 ‘인식과 사물의 일치’로 보는 견해.

 한계 – 은행나무는 노란색. 그런데 색맹이 볼 때는?

 대응설 :: 진리(眞理)는, 신념이나 판단이 사실(事實)과 일치하느냐의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주장. 대응설은 상식적인 생각을 반영하면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유력한 진리론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주로 인식론적으로 경험론(經驗論)의 입장을 지키는 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어 왔다. 이것은, 대응설 자체가 세계의 모든 실체(實體)는 인간의 감각(感覺) 혹은 지각(知覺)에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실재론(實在論)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응설은, 논리학이나 수학의 명제 등, 엄격히 말해서 대응하는 실체가 없는 명제의 진리 여부를 따지는 데는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응설 [對應說, correspondence theory]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합의설

 ‘진리합의설’ 다수결의 원칙.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한계 – 천동설

 

 정합설

 ‘진리정합설’ 삼단논법.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아무 모순없이 꼭 맞는다는 것을 의미. 각각의 명제들이 부속품처럼 맞아 떨어지는 진리론.

 한계 – 논증에 사용된 명제가 ‘참’임을 입증해야 한다. 논증의 타당성 자체가 결론이 참이라는 걸 보장해주지는 못 한다. 

 정합설 :: 진리의 준거(準據)에 관한 학설. 이 학설에 의하면 진리란, 어떤 신념 혹은 판단이 다른 신념 혹은 판단과 모순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체제 속에 논리정연하게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즉, 진리는 명제들이 서로 응결되어 있는 체제로 이해되며, 이렇게 볼 때 정합설은 단편적 신념이나 지식이 아닌 학문을 구성하는 지식의 입장에서 중요한 원리가 된다. 정합설에 따르면 한 명제가 그 체제 속에서 정합(整合)하는 정도에 따라 “보다 더(혹은 덜) 참이다”라고 할 수 있으며, 명제가 허위일지라도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 체제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진리의 준거로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학설은 스피노자(B. Spinoza)·헤겔(G.W.F. Hegel) 등으로부터 시작되어 브래들리(F.H. Bradley)·카르납(R. Carnap)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합설 [整合說, coherence theory]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전건긍정 :: 전건 긍정의 형식(前件肯定形式) 또는 전건긍정식은 고전논리학의 단순하고 유효한 논증식 중 하나이다. 라틴어로 modus ponendo ponens라고 하며, 줄여서 modus ponens 또는 MP라고 한다. 후건 부정의 형식(modus tollens)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건 긍정의 형식은 아주 흔히 쓰는 추론 규칙의 일종으로 그 형태는 다음과 같다.:
 만일 P 이면, Q 이다.
 P 이다.
 따라서, Q 이다.
[위키백과] 전건긍정의 형식

 

 후건부정 :: 후건 부정의 형식(後件否定形式) 또는 후건부정식은 고전논리학의 단순하고 유효한 논증식 중 하나이다. 라틴어로 modus tollendo tollens라고 하며, 줄여서 "모두스 톨랜스"(modus tollens)라고 한다. 전건 긍정의 형식(modus ponens)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음과 같은 논증식을 가진다.
 만일 P 이면, Q 이다.
 Q 가 아니다.
 그러므로, P 가 아니다.
[위키백과] 후건부정의 형식

 

 아담의 언어

 하와 :: 이브, 에바라고도 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아내이자 인류의 어머니이다. 뱀의 꼬임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남편과 나누어 먹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제2의 하와'라고 일컫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와 (두산백과)

 

 예술,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정립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예술 작품 속에서 아담의 언어를 본다. 아담의 언어가 사물의 참모습을 보여주듯, 예술 작품은 존재자의 진리를 보여준다. 그에게 예술의 본질은 존재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데(Sich-ins-Werk-Setzen) 있다. 예술 작품은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를 표출하는 장(場)이며, 이 장 속에서 존재의 진리가 일어난다.

 

 알레테이아,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

 하이데거에게 진리란 사실과 인식의 일치(대응설)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은 진리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 불렀다. 이 말은 원래 ‘비은폐성’, 즉 감추어진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진리란 사물의 감추어지지 않은 참모습이었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란 진술의 속성 혹은 지식의 올바름이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낸 사물의 본래 모습을 말한다. 

 당신은 진리란 인식과 사실의 일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인식이 사실에 일치하는지 확인하려면, 그 전에 먼저 사실이 그 자체로서 드러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당신이 말하는 진리엔 더 근본적인 전제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게 바로 알레테이아다.

 그럼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정립’이란 말은 결국 예술 작품 속에선 사물의 가려지지 않은 참모습이 드러난단 말이 된다.

- 3권, 고흐 <구두>, 이것이 말을 했다

 

 아름다움, 진리의 일어남

 우리 일상 생활에서 구두는 한갓 유용한 물건일 뿐이다. 즉 구두는 발을 보호해주는 도구다. 구두라는 존재자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간단하다. 아래 창과 윗가죽을 실로 꿰매는 데에. 모든 게 이렇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걸로 구두의 존재가 모두 밝혀진 건가? 아니다. 예술 작품은 구두라는 존재자의 더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시하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 구두창 아래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깃들여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진리의 일어남[生起]을 ‘미’라 부른다. 작품 속에서 진리가 빛나는 거,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란 얘기다.

 

 작품, 세계와 대지의 투쟁 

 진리는 비진리다. 진리라는 개념은 이미 ‘은폐’라는 특징을 전제한다. 진리가 모든 은폐를 툭툭 털어버린다면, 진리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눈만 뜨면 지천에 널린 게 진리인데, 진리는 원래 이렇게 ‘밝힘’과 ‘가림’의 투쟁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생성된다. 거기엔 몇 갈래의 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예술 작품이다. 위에서 진리는 ‘밝힘’과 ‘가림’의 투쟁이라 했다. 그럼 예술 작품은 이 둘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것(‘투쟁의 투쟁화’)다. 이 투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비은폐성, 즉 진리가 쟁취된다. 예술 작품 속에서 이 ‘밝힘’과 ‘가림’의 투쟁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예술 작품은 한갓 사물이다. 고흐의 그림은 한 조각의 아마포에 화학 물질(물감)을 발라놓은 거다. 그럼에도 이 물질 덩어리는 다른 것을 말한다(allo agoreuei). 그러므로 작품은 알레고리(Allegoris). 즉 비유다. 작품은 사물적인 것을 넘어서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고,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이처럼 예술 작품이 표현하는 의미 내용 혹은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 이게 바로 ‘세계’다. 그리고 ‘대지’란 대강 작품의 밑바탕이 되는 소재와 질료를 말한다. 결국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란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와 작품의 질료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작품은 세계를 건립하고...

 여기에 신전이 있다. 신전은 아무것도 모사하지 않고 그냥 건물일 분이다. 아무것도 모사하지 않는 이 건물이 하나의 세계를 세운다. 인간과 신이 자유롭고 우호적인 동반자로 살아가던 그리스 민조그이 독특한 생활 세계. 당신 눈엔 안 보여도, 그리스인은 신전에 기거하는 신의 체취를 느꼈다. 그들은 인생과 역사, 온 우주를 이 신전 속에 기거하는 신들의 이야기로 해석하고 설명했다. 이게 바로 그리스인이 살아가던 생활 세계다. 마치 중세인들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세계 속에서 살았고, 우리가 휘어진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신이 그리스인이 살아가던 세계의 중심이었다면, 그 중심을 있게 한 건 바로 신전이었다. 신전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신이 신전 속에 존재하게 되니까. 신전은 그리스인들의 모든 생활 방식과 사회관계를 자신의 둘레에 모으고, 그것들에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그들의 모든 삶의 행위는 바로 이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신전을 지음으로써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인 삶의 세계를 건립한 것이다. 사실 올림푸스의 신이 없었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그리스인의 위대함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대지를 설립한다

 예술 작품은 세계를 건립하면서 질료를 소멸시키지 않고, 오히려 처음으로 질료를 그 자체로서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 질료는 자연 상태보다 본래의 모습을 더 잘 보여준다. 가령 채석장에서 갓 캐어낸 대리석과 다듬어진 신전의 기둥을 비교해보라. 대리석 고유의 성질을 더 잘 보여주는 건 어느 쪽일까?

 바로 이게 작품 속에서 세계가 드러서는 토대, 즉 대지이다. 대지는 모든 밝힘을 거부한다. 돌을 저울에 달아보라. 추상적인 숫자 속에 돌의 육중함이 사라질 거다. 색채를 파동수로 분해해보라. 색채 자체는 없어진다. 음향을 진동수로 분해해보라. 음향은 울려퍼지기를 그친다. 대지는 모든 해명을 거부한다. 대지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건 대지가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보존될 때뿐이다.

 신전은 하나의 세계이자 동시에 한 무더기의 대리석이다. 여기엔 두 가지 대립하는 힘이 작용한다. 하나는 대리석 덩어리에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그걸 다시 대리석으로 되돌리려 한다. 대지를 설립하는 건 후자의 힘이다. 즉 대지는 신전이 한 무더기의 대리석으로 되돌아 갈 때 설립된다. 말하자면 하나의 신전이 돌의 묵직함과 육중함으로, 하나의 동상이 청동의 견고함과 광택으로, 한 폭의 그림이 색채의 명암으로, 하나의 음악이 음향의 울림으로 되돌아갈 때, 이 때 대지가 설립된다.

 예술 작품은 세계를 건립하면서, 동시에 대지를 설립한다. 세계는 열리려 하고, 대지는 닫으려 한다. 진리는 이렇게 세계와 대지 사이의 밝힘과 가림의 투쟁으로 존재한다. 작품은 바로 이 팽팽한 대립 속에 닻을 내리고 안식한다.

 

 대지와 세계의 균열은 형태를 낳는다.

 창작 과정에서 소재를 자유자재로 다루려는 시도와, 소재와 질료의 저항, 즉 세계와 대지의 대립에서 균열(Riβ)이 생긴다. 이 균열이 하나의 윤곽(Umriβ)을 낳으며, 이 윤곽이 형태(Gestalt)를 가져온다. 독일어의 Umriβ라는 단어는 ‘주위를 둘러서(Um) 찢는다(Riβ)’는 뜻이다. 가령 대리석 덩어리의 주위를 둘러 찢으면 형태가 나타난다. 대리석 덩어리와 형태를 나누는 그 찢겨진 선이 바로 균열이다. 이 균열이 인물의 윤곽을 이루고, 이 윤곽이 형태를 낳는다.

 

 시는 과학보다 위대하다

 시(예술)는 과학보다 위대하다. 어떤 인식이 사실에 일치하려면, 먼저 사실이 그 자체로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술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얘기할 수 있다. 예술에서는 그와 같은 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 즉 근원적인 진리가 일어난다. 반면 과학은 진리의 근원적 일어남이 아니며, 다만 이미 알려진 영역을 사후에 정비하는 데 그칠 뿐이다. 헤겔은 예술의 종언을 얘기했다. 그에게 예술은 더 이상 역사전 현존재를 위한 결정적 진리가 일어나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거꾸로 철학의 종언을 얘기한다. 예술은 철학보다 위대하다. 예술은 존재의 진리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시, 예술 중의 예술

 하이데거에게는 언어 자체가 시다. 그가 보기에 언어는 단순한 매개물이 아니라, 존재자를 존재자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를 질료로 하는 포에지(oesie, 즉 시를 모든 예술의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말과 사물

 사물을 가리키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이름 붙이기’와 ‘그리기’. 칼리그램에선 이 둘이 하나가 된다. 여기서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동시에, 사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칼리그램 :: 글자로 만든 그림

 

 렘브란트의 자화상

 직물조합의 간부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 van Rijn, 1605~1669)가 살았던 당시의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곳이었다. 영국의 크롬웰에게 제해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이 조그만 나라는 세계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막강했던 가톨릭 교회의 권위도 신교도의 집합소인 이곳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사회를 주도하던 건 무역으로 돈을 번 상공업 부르주아지였다. 때문에 이 조그만 나라가 당시 유럽에선 정치적, 사상적으로 가장 자유로울 수 있었다. 스피노자 같은 범신론자가 살았던 곳도 여기다. 적어도 여기선 범신론(변장한 유물론!)을 주장한다고 화형을 당하진 않았다. 램브란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화가가 되었다.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하던 루벤스는 여전히 신화적, 종교적 제재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건 여전히 귀족들이다. 그러나 같은 바로크 시대를 살았던 렘브란트의 그림에선 새로운 제재, 새로운 인간이 등장한다. 그건 바로 뒷날 제3신분이라 불리는 시민, 즉 부르주아지였다. 귀공자가 환쟁이가 될 수 있었던 곳, 이곳에서 비로소 ‘직물조합의 간부들’도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 사회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범신론 :: 세계의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인격적인 신을 인정하지 않고 신을 세계와 동일시하여 세계가 즉 신이라는 신의 비인격화를 말하는 주장. 이에 따르면 자연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뿌리도 신의 형상인 것으로, 유신론에 대립한다. 이 사고 방식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이를 이어받은 스토아 학파, 또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의 세계관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중세 이후의 유럽 사상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거기에는 가톨릭 교회의 전형적인 유신론의 정통 신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대결하는 주장이 포함되며, 봉건제에 대항하는 사회세력의 발전에 따라 기독교 교의를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표명되었다.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가 보인 범신론은 교회를 개입시키지 않고 신과 직결하려는 하층 민중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르네상스기에는 교회 개혁을 추구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도 지동설을 주장한 브루노 등의 범신론이 있고, 또한 봉건적ㆍ가톨릭적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투쟁을 하여 유럽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을 실현시킨 17세기 네덜란드의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잘 나타난다. 스피노자가 명확히 보여 주듯, 범신론은 실질적으로는 신학의 옷을 입은 유물론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범신론은 세계가 신 속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이에 의해 종교를 과학과 조정하기 위해 주장되는 관념론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신론 [Pantheism, 汎神論]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우리를 위한 존재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우리를 위한(fur) 존재, 우리에 대한(fur) 존재다. 말하자면, 감상하는 우리가 없으면, 그림은 그냥 물질 덩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우린 이런 물질 덩어리를 예술 작품이라 부르진 않는다. 그러므로 지각하고 관조하는 활동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예술 작품은 ‘작품’으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지만, 작품은 분명히 우리의 머리 ‘밖’에 있는 ‘대상’으로 다가온다. 관조하는 의식이 없으면 물론 그림은 물감 묻은 천쪼가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림 속 대상은 분명히 우리의 머리 ‘밖’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 이상하긴 하다. 의식과의 바깥에 존재하는 그림이 왜 의식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단 말인가? 이 애매모호한 견해를 ‘관계주의’라 부른다. 어쨌든 관계주의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주관과 객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그럼 예술 작품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는 ‘대상’과 ‘의식 작용’을 모두 밝혀야 한단 얘기가 된다. 객관주의는 ‘대상 분석’만 요구한다. 반면 주관주의는 ‘작용 분석’에만 치중한다. 하지만 관계주의는 이렇게 대상 분석과 작용분석이라는 두 방향을 모두 필요로 한다. 

 

 야경

 고전주의 회화에선 대상의 윤곽이 뚜렷해야 하므로, 모든 대상이 밝은 빛 속에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거기엔 어둠 속에 감추어지는 부분이라곤 없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야경(야간순찰)>을 보라. 여기엔 강렬한 명암 대비가 있다. 중앙에 서 있는 인물들은 쏟아지는 하이라이트를 받는 반면, 양 옆과 뒤에 있는 인물들은 희미하게 어둠 속으로 잠겨버린다. 이 강렬한 명암 대비는 화면 전체에 심원한 깊이를 부여한다. 이 찬란한 빛의 효과 때문에, 이 바로크의 거장은 흔히 빛의 화가라고 불려진다.

 

 살아 있는 정신, 지각과 관조

 관계주의는 작용 분석과 대상 분석의 두 방향을 모두 필요로 한다. 먼저 작용 분석, 하르트만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객관화된 정신, 말하자면 작가의 ‘살아 있는 정신’에서 빠져나간 내용이 물질 속에 들어가 하나의 대상이 된 거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물질적 바탕’과 ‘정신적 내용’이란 두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두 계층은 현상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 바탕에서 정신적 내용이 현상한다(나타난다). 물질에서 정신적 내용이 현상하는 데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수용자의 관조 작용이다. 예술 작품은 죽은 정신일 뿐이다. 이 죽은 정신은 우리의 살아 있는 정신에 힘입어 비로소 부활한다.

 물질적 기체 ▶ 살아 있는 정신 ▶ 정신적 내용

(지각)             (관조)

 예술 작품이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수용자의 살아 있는 정신 역시 거기에 맞추어 서로 다른 두 개의 계기로 이루어진다. ‘지각’과 ‘관조’가 그것이다. 지각은 감각 기관을 통해 작품의 물리적 특징을 감지하고, 관조는 거기에서 정신적 내용을 직관한다. 지각이 검고 흰색을 감지하면, 관조는 이걸 렘브란트 특유의 빛의 효과로 파악한다.

 

 상품 생산자로서의 예술가

 바로크는 절대왕정의 시대였다. 절대왕정은 알다시피 경찰과 상비군을 가진 본격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절대왕정이 없었던 네덜란드에선 국가에 소속된 군대 대신에, 돈 많은 상인이나 상업 부르주아지가 각출한 돈으로 운영되는 민병대가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야경>의 인물들은 바로 그 민병대원들이다.

 렘브란트는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최초의 자본주의적 화가였다. 이전의 화가들은 대개 국가나 귀족들에 의탁해 살면서, 그들의 위탁을 받아 작업을 했다.

 사실 <야경>의 경우에도 말이 많았다. 어둠 속에 묻혀버린 인물들은, 똑같은 돈을 지불하는데 왜 자기들만 어둠 속에 묻어버렸나며, 돈을 못 내겠다고 버텼다.

 

 순라군 :: 조선시대에 도둑 ·화재 등을 경계하기 위하여 밤에 궁중과 도성(都城) 안팎을 순찰하던 군인.
[네이버 지식백과] 순라군 [巡邏軍] (두산백과)

 

 작품의 전경과 후경

 하르트만은 이어서 대상 분석으로 넘어간다. 예술작품의 물질적 기체를 그는 ‘전경’이라 부르고, 이 전경에서 떠오르는 정신적 내용을 ‘후경’이라 부른다. 예술 작품의 구조는 전경과 후경의 두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하이데거의 관심은 예술에서 열리는 존재자의 진리에 있었다. 그래서 ‘대지와 세계’라는 개념은 예술 작품의 구조보다는 오히려 진리의 존재 방식, 즉 알레테이아의 ‘가림과 밝힘’에 더 관계가 깊었다. 하지만 하르트만이 노르는 건 본격적으로 작품의 존재론적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후경은 여러 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진 중층적 구조를 이룬다고 한다.

 

 초상과 개인주의

 렘브란트는 탁월한 초상화가이기도 했다. 원래 ‘초상’이라는 장르는 개인주의를 전제로 한다. 개인의 초상은 있어도, 인간 일반의 초상은 있을 수 없으니까. 때문에 초상은 역사상 개인주의가 발달하는 시대에 번성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개인주의가 발달한 네덜란드에서 초상이란 장르가 번성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당시 사람들은 단체 사진을 찍듯이 집단 초상화를 그려 관공서나 건물의 벽에 걸어놓기를 좋아했다. 원래 초상은 인물의 겉모습만 그리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을 뚫고 들어가 그 속에 감추어진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가시적인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데에 렘브란트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후경 분열의 법칙

 후경은 하나의 계층을 이루는 게 아니라 여러 계층으로 분열한다. 이 계층들은 서로 현상 관계에 있어, 하나의 계층이 다른 계층을 나타나게 하면, 이것이 다시 또 다른 계층을 나타나게 한다. 물론 이 현상 자굥은 작품의 맨 마지막 층위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대충 일반화하면 후경은 대개 4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전경에서 먼저 ‘물적 계층’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작품 속의 공간을 본다. 여기에서 다시 ‘생명의 계층’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린 등장인물과 그들의 외모를 본다. 다음 이 계층에서 ‘심리의 계층’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인물의 외면을 통해 그의 성격이나 심리같은 내면적 요소가 나타나는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이념의 층위’가 나타난다. 작품에 담긴 어떤 커다한 정신적 내용, 굳이 표현하자면 작가의 철학적, 이념적 사상 같은 거다.

 사슬처럼 묶여 있는 연결된 이 계층들은 차례차례 연속한다. 따라서 만약 어느 하나의 사슬이 끊어지면, 그걸 뛰어넘어 다음 사슬로 넘어갈 수 없게 된다. 그럴 경우엔 당연히 후경의 제일 마지막 층위인 예술적 이념의 층위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그럼 작품에 담긴 심오한 정신적 내용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후경 분열의 법칙 :: 관조(전경→후경)와 창작(후경→전경)은 역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약호화와 해독은 항상 역방향으로 이루어지니까.

 

 노년의 자화상

 하르트만의 미학을 <자화상>에 적용시켜, 이 작품의 복잡한 계층 구조를 분석하기로 하자.

 ① 지금 당신 눈앞엔 2차원의 화폭과 그 위에 발라진 색채가 보인다. 이게 작품의 전경이다.

 ② 이 전경에서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말하자면, 2차원의 화폭에 3차원의 공간이 나타나는 거다. 물론 실제의 공간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공간 속엔 빛과 윤곽이 들어 있다. 어떤 사람이 빛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게 후경의 제1단계인 외면적ㆍ물적 계층으로, 여기서부터 후경의 분열이 시작된다.

 ③ 여기서 다시 운동이 생동하는 신체성이 나타난다. 얼굴에 주름살이 잡힌 걸로 보아 지긋이 나이가 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살짝 돌려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가볍게 다문 입가에 어린 담담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④ 이 외면적 모습에서 다시 그의 내면적 면모가 드러난다. 가령 그의 정신과 성격, 성공과 실패, 그리고 운명 같은 거 말이다. 물론 이런 게 직접 눈에 보이는 건 아니다. 화가의 길을 가느라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한 이 고집불통의 노인네에겐 이제 가진 거라곤 붓 몇 자루밖에 없다. 그의 얼굴엔 노년을 괴롭힌 이 비애와 운명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삶의 괴로움과 외로움의 그늘을 보라. 이게 바로 심리의 계층이다. 

 ⑤ 여기에서 이념의 계층이 나타난다. 이 계층은 ‘있는 그대로의’ 개인이 아닌 ‘마땅히 있어야 할 대로의’ 개인을 보여준다. 렘브란트는 그냥 행복한 부르주아지로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외로운 골방에서 혼자 죽어갈 운명에 처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고뇌와 고독 속에서도 그는 예술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거친 세파에 지친 표정도, 예술을 향해 불타오르는 이 노인네의 의지를 가릴 수는 없다. 이게 렘브란트라는 인간의 ‘개인적 이념’, 즉 마땅히 그래야 할 렘브란트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에겐 자신의 개인적 이념이 드러나는 행복한 순간이 있다. 물론 당신에게도. 화가는 이 순간을 포착하여 표현한다.

 ⑥ 여기에서 또 다른 층위가 나타난다. 이 층위에선 모든 사람에게 관계있는 어떤 것이 나타난다. 즉 그림을 보면 누구나 자기 것이라고 느끼게 되는 어떤 인간 보편적인 것 말이다. 이 인간 보편적인 것은, 사람마다 다른 개인적 이념과는 구별된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추구하며 살다간 한 화가의 삶이 전 인류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듣는다. 하나의 그림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 계층이다. 이 계층 때문에 한 개인의 기록일 뿐인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감동을 주는 거다.

 

 4성 대위법

 4성 대위법

 바흐가 살던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다성 음악이었다. 말하자면 하나의 멜로디가 진행되고 그 밑에 반주가 받쳐주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개의 멜로디가 진행되는 형태였다. 물론 여러 개의 멜로디를 동시에 무리 없이 진행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위법이라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는데, 여기서 단연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은 바흐였다.

 그는 이전의 선적(線的) 대위법에 화성을 가미하여, 따로따로 진행하는 서로 다른 멜로디들이 매순간 화성을 이루게 했다. 하나의 멜로디만 있는 단성 음악에서 반주는 멜로디를 화성적으로 받쳐줄 뿐,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의미를 갖기 못한다. 하지만 바흐의 대위법에선 각각의 멜로디가 모두 독립적인 의의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전체적인 화성 효과를 낸다.

 

 다성음악 :: 다성음악(多聲音樂), 또는 복음악(複音樂). 자의상(字義上)으로는 그레고리오성가와 같은 단선음악(모노디)을 제외한 현대까지의 유럽음악을 모두 폴리포니라고 할 수 있다. 레보비츠도 그의 저서 《쇤베르크와 그 악파》에서 폴리포니라는 말을 이러한 뜻으로 쓰고 있다. 관용으로서의 폴리포니, 즉 다성음악을 가장 좁은 뜻으로 말하면 대위법적 기술을 사용해서 만든 음악을 가리킨다. 그러나 대위법이라는 말은 작곡기술적으로 말하면 비교적 좁은 뜻밖에 지니지 않는다. 즉 병행 오르가눔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악파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대위법기술의 전개에 이르기까지에는 갖가지 다성음악의 단계가 있다. 따라서 폴리포니를 완전히 표현하려면 2개 이상의 독립된 성부에 의해서 구성되는 악곡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
[네이버 지식백과] 폴리포니 [polyphony] (두산백과)

 

 순수지향적 대상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을 미학에 본격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그의 제자 로만 잉가르덴(Roman Ingarden, 1893~1970)이었다. 그런데 그의 진짜 관심은 사실 예술이 아니었다. 그의 스승인 후설은 말년에 선험적 관념론으로 기울어져, 칸트처럼 모든 게 의식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잉가르덴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후설과는 다른 길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의 전략은 우리 의식 속에 떠오르는 대상을 ‘실재적(지향적) 대상과 ’순수지향적 대상‘으로 나누는 거다. 예술 작품은 물론 이 중에서 ’순수지향적 대상‘,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순수한 허구다. 하지만 모든 지향적 대상이 허구인 건 아니다. 예술이 아닌 다른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적 대상‘이다. 

 

 노에시스 :: 이 말은 플라톤이 초감각적 진리, 즉 이데아의 인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였으며 감각적 사물에 대한 지식인 독사(doxa, 억견)에 대립시킨 개념이다. 이것과는 달리 후설(Husserl)의 현상학에서는 노에시스를 노에마(독 noema, 내재적 존재)와 대립시켜, 노에시스는 의식의 기능적ㆍ작용적 측면을 뜻하며, 이것은 의식이 지향성을 가짐으로써 되돌아오는 것인데, 이 작용의 대상적 측면이 노에마이다. 
거기에서 의식에 있어서의 소재(그리스어 hule)가 작용인 노에시스에 의하여 노에마(노에마의 핵이라고 그가 말한)로서 의미ㆍ내용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예를들면 그는 의식을 지향성으로 파악하고, 지향하는 작용(노에시스)과 지향되는 대상(노에마)으로 나누어, 그것으로 인식, 기타 의식의 존재방식(감정ㆍ의욕ㆍ시행 등) 등을 설명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에시스 [Noesis]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휠레(hyle) : 바깥으로 표출되는 것.

 노에마(noema) :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의식 내면에서의 객관적 측면. 의미체.

 노에시스(noesis) : 휠레와 노에마 사이에 있는 무엇으로, 의식작용을 뜻함. 의식의 기능적, 작용적 측면.

 

 문학 작품의 4계층

 잉가르덴도 문학 작품을 계층적 구조로 설명한다. 문학 작품은 4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각 층이 다음 셰층이 나타나는 토대가 된다.

 문학 작품의 첫 번째 층은 ‘언어적 음성 형상의 층’이다. 언어음성이란 의미를 담는 그릇을 가리킨다. 가령 라틴어 ‘Amo’라는 음향은 ‘사랑해’란 의미를 담은 그릇이다. 언어 음성은 문학 작품의 단단한 겉껍질을 이룬다.

 두 번째 층은 ‘의미단위의 층’이다. 이 층위는 전체 작품의 구조적 골격이 되는 가장 중요한 계층이다. 여기서 비로소 무의미한 음향들은 의미를 지닌 문장들로 나타난다. 이게 없으면 작품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문장으로 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의미단위(문장)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기획한다. 물론 문학 작품 속의 문장은 진짜 판단이 아니라 의사(擬似, 실재와 비슷하다) 판단이다. 문장이 기획하는 사건은 실재하는 게 아니니까.

 세 번째 층은 ‘묘사된 대상성의 층’이다. 여기서 비로소 작품 속의 인물과 사물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사건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있다고 느끼는 건 바로 여기서 부터다. 하지만 여기선 아직 인물과 대상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가 없다. 소설은 시공을 초월한 이데아 세계에서 펼쳐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려면 또 하나의 층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마지막 네 번째 층인 ‘도식화 시점의 층’이다. 여기서 비로소 인물과 사건은 우리에게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감각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 층은 이미 ‘묘사된 대상성의 층’에 포함되고 준비 되어 있다.

 

 규정되지 않은 빈 곳과...

 소설 속의 대상은 실재적 대상과 구별된다. 실재적 대상은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고, 그 속성들은 모두 규정되어 있다. 가령 내 눈 앞의 이 컵은 컵이 가져야 할 모든 성질을 다 갖고 있다. 빨간색, 10cm의 높이, 둥근 모양, 200g의 무게 등등. 그 성질들은 무한히 많고 모두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 ‘갈색 커피잔’이 나온다고 하자. 이 잔은 ‘색깔’만 가지고 있을 뿐 크기, 무게 모양 등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채워 넣으면 된다고? 수백 페이지를 묘사한들 커피잔의 모든 성질을 다 나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많은 형용사를 동원한다 해도 문학 작품에선 여전히 규정되지 않은 부분이 남기 마련이다. 이 빈 곳을 ‘바규정 장소(Unbestimmtheitsstellen)’라 하는데, 이곳은 당신 스스로 알아서 채워넣어야 한다.

 

 채워지지 않은 성질

 문학 작품은 이렇게 유한한 수의 규정된 장소와 무한히 많은 빈 곳을 가진 도식적 형상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철근 골조만 서 있는 건물이다. 무학 작품이 가진 도식적 성격은 ‘도식화 시점의 층’에서도 나타난다. 이걸 ‘채워지지 않은 성질(unerfullte Qualitat)이라 부른다.

 가령 소설 속의 인물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간다고 하자. 멍청한 작가가 아니라면 경부선을 타고 부산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여정을 묘사하진 않을 거다. 서울에서 기차에 오르는 한 장면, 부산에서 내리는 한 장면이면 충분하다. 물론 불연속하는 이 두 시점 사이에 있는 무수히 연속하는 시점들 역시 당신이 알아서 채워넣도록. 시점엔 시각적 시점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엔 청각적, 촉각적 시점도 있다. 이 시점들의 빈 곳 역시 당신이 채워넣어야 한다. 이렇게 실재적 대상엔 빈 곳이 없다. 하지만 순수지향적 대상은 빈 곳 없인 존재할 수 없다. 문학 작품은 바로 이 점에서 실재적 대상과 구별된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도 후설은 양자를 ‘부당하게(sic!)’ 동일시했던 거다.

 

 구체화

 순수지향적 대상이 드러내는 빈 곳을 채워넣는 작업을 ‘구체화’라 부른다. 구체화를 통해 비로소 규정되지 않은 빈 곳이 채워지고, 균열 상태로 해체되어 있는 시점들이 하나의 연속된 시점으로 연결된다. 독자는 멍하니 책을 읽는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다 동원하여 문학 작품의 앙상한 도식의 빈 곳을 능동적으로 채워야 한다. 이 구체화의 작업을 통해 문학 작품의 앙상한 도식은 비로소 아름다운 미적 대상으로 탄생한다.

 ① 언어적 음성 형상

 ② 의미 단위

 ③ 묘사된 대상성 – 도식 ▶ 구체화 ▶ 미적 대상!

 ④ 도식화한 시점 - 도식 ▶ 구체화 ▶ 미적 대상!

 

 예술 작품의 삶, 그리고 자기동일성

 구체화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문학ㆍ예술 작품은 또한 시대마다 다르게 구체화된다. 구체화되지 않으면 작품은 죽은 도식적 구조물일 뿐이므로, 문학ㆍ예술 작품은 이 상이한 구체화들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작품의 삶은 변화를 겪는다. 언젠가는 읽혀지기를 멈추고 사망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 뒤에 다시 부활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시대마다 달라지는 구체화 가운데 도대체 어느 게 예술 작품일까? 설사 기준이 있어 작품을 망치는 그릇된 구체화를 뺀다 하더라도, 적절한 구체화가 꼭 하나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 모두? 작품이 읽은 사람의 수만큼 있다니, 좀 이상하다.

 잉가르텐은 문학 작품의 구조 속에 상수(常數)로 주어진 부분에 기댄다. 가령 문학 작품의 의미단위의 층은 비교적 상호주관적(누구나 동의하는) 동일성을 갖는다. 이 계층이 ‘적절한’ 구체화의 범위를 설정해줌으로써 작품의 상호주관적 구체화의 가능성을 보장해준다. 이 범위 내에서 문학 작품은 동일성을 잃지 않고도 변화를 겪을 수 있다. 그는 이걸로 작품의 주관화의 위험에서 구출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미적 가치 성질의 다성악

 앞에서 얘기한 문학 작품의 4계층은 단지 다음 층을 위한 발판에 불과한 게 아니다. 문학 작품의 각 층엔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미적 성질이 있다.

 먼저 언어적 음성 형상의 층엔 어떤 미적 성질이 있나? 낱말의 발음이 주는 감정적 뉘앙스(‘아름답다’, ‘추하다’), 낱말들 사이의 대조와 대립, 리듬과 템포, 압운 등이다. 이런 미적 성질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건 문학 작품을, 특히 시를 외국어로 번역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의미단위의 층엔 ‘의미 내용의 미’라는 게 잇다. 작가가 쓴 문장은 그 의미가 명료할 수도, 애매모호하고 다의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문장의 미적 성질도 달라진다. 가령 고전주의 작품은 명료한 의미를 지닌 문체에 높은 미적 가치를 둔다. 반면 인상주의나 낭만주의 작품은 오히려 의미의 다의성과 모호성을 노린다. 의미단위의 층은 이런 양식미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도식화한 시점의 층에도 미적 성질이 있다. 가령 어떤 작품은 정신적 사건을 드러내는 데 ‘외적’ 시점에 의존하고, 다른 작품은 ‘내적’ 시점을 이용한다. 사실주의자는 인물의 정신을 드러내기 위해 외모와 행동을 묘사한다. 반면 도스토예프스끼의 《죄와 벌》은 처음부터 끝까지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 독백으로 일관한다. ‘시각적’ 시점과 ‘청각적’ 시점의 차이도 있다. 가령 ‘그는 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와 ‘꽝! 소리가 들렸다’는 미적 효과가 전혀 다르다. ‘익숙한’ 시점과 ‘새로운’ 시점의 대립도 미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시점의 미적 성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건 아마 예술 사진일 거다. 여기선 앵글을 어떻게 잡느냐가 미적 가치를 판가름하니까.

 마지막으로 묘사된 대상의 층, 앞의 세 층은 결국 이 계층을 드러내는 데 봉사하므로, 이 세 번째 층을 마지막으로 돌렸다. 이 세층이 협동해서 묘사된 세계를 구성하면, 거기서 형이상학적 특질들이 드러난다. 이 계층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형이상학적 성질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가령 숭고한 것, 무서운 것, 충격적인 것, 거룩한 것, 기괴한 것 등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성질들 말이다.

 각 계층의 미적 성질은 각자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매순간 이 4대의 목소리는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낸다.

 

 화랑에서 

 세계 – 속의 – 존재

 아리스 :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가 사실은 세계의 일부다’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져 있죠. 따라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세계 속에 있는 지식 체계나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마련이죠.

 플라톤 :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단 얘긴가?

 아리스 : 바로 그겁니다. 우린 단지 세계 속에서 배운 대로 볼 뿐이죠.

 

 맨눈으로 바라본 세계

 아리스 : 만약 우리가 세계에서 배운 모든 것을 지운다면, ‘객관적으로’는 고사하고, 우린 아예 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가령 우리 망막에 맺힌 상이 ‘사람’이라는 것도, 저 친구가 바라보는 게 ‘예술 작품’이라는 것도, 저기가 ’화랑‘이라는 것도. 나아가 저 친구가 그림을 보러 화랑에 온 문화적 맥락도 알 수 없게 되는 거죠.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 이전에 저 그림에서 3차원 공간을 보는 것조차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2차원의 평면을 3차원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도 우리가 오랜 기간에 걸쳐 알게 모르게 습득해온 거니까요.

 

 여러 개의 세계

 아리스 : 결국 선입관(선이해)이 없으면 우리는 아예 세계를 볼 수가 없게 되죠.

 플라톤 : 세계 속에서 배운 방식대로 세계를 본다?

 아리스 : 그걸 해석학에선 ‘지평’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이해하려면, 그걸 지평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지평이 없으면, 우린 아예 사물을 이해할 수 없게 되죠.

 시대가 바뀌면 지평도 바뀌고, 그럼 세계를 다른 모습으로 보게 되죠.

 플라톤 : 시대마다 달라지는 세계 중 어느 게 세계의 올바른 모습인가?

 아리스 : 물론 다죠. 저마다 다른 지평으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밝혀주니까요. 

 플라톤 : 중세인들의 지평에서 바라본 세계에선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었다네. 하지만 이 시대의 지평에서 바라보면 거꾸로지. 그럼 이 두 가지 세계가 모두 옳단 얘긴가? 태양은 지구를 돌고, 동시에 지구는 태양을 돈다?

 

 이상한 고리

 플라톤 : 지평과 이해가 ‘폐쇄 회로’를 이룬다면, 이 회로를 순환한다고 이해가 풍부해질 수 있을까? 결국 회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게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아리스 : 하지만 외부에서 입력되는 자료를 ‘맨눈’으로 볼 수는 업죠. 우린 그걸 지평 위에 올려놓고, 지평에 맞게끔 재단을 하는 겁니다.

 플라톤 : 하지만 자넨 지평이 시대마다 달라진다고 했잖나.

 아리스 : 개별적 이해가 쌓이고 쌓여 지평의 변화를 낳는 거죠.

 플라톤 : 개별적 이해는 지평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며? 어떻게 지평을 벗어날 수 없는 이해들이 모여 지평을 변화시킨단 말인가?

 따라서 지평이 변화한다는 것은, 곧 ‘지평을 반박하는 이해’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결국 자네는 자네 얘기를 스스로 반박하는 셈이지. 모든 이해는 지평에 따라 이루어진다. 하지만 지평을 반박하는 이해도 있다?

 

 놀이와 미메시스

 시인이 국경으로 간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미메시스(모방)로 보았다. 우리가 아는 한 신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다. 있지도 않은 사건을 어떻게 ‘모방’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비극이 모방이라 생각했다. 그들에겐 신화가 과거에 엄연히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우린 어쩔 수 없이 예술 작품을 보며 고대인들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며, 거기서 다른 의미를 끄집어낸다. 만약 그렇다면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린 당시 사람들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할 거다.

 

 찌그러진 안경

 해석학에 따르면 그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시대의 ‘선입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입관(Vorurteile)이란 글자 그대로 선(先)판단이다. 그건 우리 사회가 이제까지 쌓아왔고, 또 당신이 성장하면서 배워온 어떤 지적 전통, 세계관, 가치관 따위를 말한다.

 물론 선입관이 항상 옳으란 법은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선입관을 지운다면, 그 순간 당신의 머리는 백지가 되고 만다. 텅 빈 머리로는 ‘객관적으로’는 고사하고, 도대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선입관이야말로 오히려 이해의 전제 조건이다.

 

 이해의 지평

 이 선입관의 체계를 ‘이해의 지평’이라 부르자. 이 이해의 지평 위에 올려놓아야 비로소 우린 사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시대는 저마다 이해의 지평을 갖고 있다. 시대가 달라지면 이해의 지평도 달라진다. 같은 작품이라도 그 작품이 놓여지는 이해의 지평이 바뀌면, 그 해석도 달라진다.

 작품에 대한 유일한 ‘객관적’ 해석은 있을 수 없다. 결국 여러 시대의 다양한 해석이 다 나름대로 ‘참 된’ 해석이란 얘기가 된다.

 

 지평의 뒤섞임

 과거에 씌어진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지평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린 우리 시대의 지평을 떠날 수 없다. 우린 언제나 현재의 지평에서 과거를 볼 따름이다. 그 결과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에게선 과거와 현재의 ‘지평의 융합’이 일어나게 된다. 작품을 ‘이해’한다는 건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전승 과정 속에 들어가는 걸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과거와 현재의 지평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간극이야말로 적극적이며, 생산적인 역할을 한다. 바로 이 간극이 우리로 하여금 시대마다 작품을 새로이 해석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텍스트를 ‘더 잘 이해(Besserverstehen)’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작품은 더 잘 이해되어야 할 ‘객관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의미의 이해란 곧 독자가 작품을 자신에게, 말하자면 그 의 현재와 미래에 관련시키는 거다. 따라서 그건 매번 ‘다르게 이해하는 것(Andersvestehen)’이다. 작품의 의미는 시대마다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다. 예술 작품은 완제품이 아니다.

 

 놀이로서의 예술

 그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은 ‘놀이’와 비슷하다. 가령 모든 놀이엔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일단 놀이 속에 들어가면, 우린 이 규칙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규칙을 준수하면서 우린 동시에 다양한 상황을 창조한다. 예컨대 바둑을 둔다고 생각해 보자. 몇 가지 규칙을 가진 그 놀이로 얼마나 많은 판을 펼칠 수 있는가.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다. 일단 예술 작품이란 놀이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텍스트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하여 다양한 독해를 할 수 있다.

 놀이처럼 예술 작품도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다. 즉 작품의 텍스트 자체는 닫혀 있어 그 누구도 그걸 변경할 수 없지만, 그 완결된 텍스트에서 저마다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낸다. 작품은 ‘작가-텍스트-독자’의 게임이다. 이 삼각형의 게임 속에서 독자는 늘 바뀐다. 물론 그때마다 게임의 내용과 의미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작품의 삶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다. 작품은 후세의 해석에 열려 있다. 따라서 작품이 가진 ‘근원적’ 의미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시대마다 열어주는 각각의 의미가 다 근원적이다.

 

 미메시스로서의 예술

 하이데거처럼,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famer, 1900~2002)도 예술 작품이 진리를 열어준다고 본다. 하이데거에게서 진리는 정립의 주체이자 객체였다. 그 진리는 독자는 물론 작가조차 넘어서 있었다. 하지만 가다머에게서 작품의 근원적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진리는 시대마다 독자에게 새로이 열린다. 이렇게 시대마다 새롭게 열리는 여러 진리들이 다 근원적이다.

 그건 하이데거가 얘기한 존재의 탈은폐(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다. 말하자면 예술은 사물의 은폐된 참모습을 보여준다.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는 안개 낀 바다 풍경의 묘사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의 안개는 무심코 지나치는 하찮은 존재 혹은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터너가 안개 낀 바다 풍경을 화폭에 옮겨놓자, 사람들은 비로소 안개의 시각적 효과, 안개 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바다 풍경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안개를 ‘보게’ 해주고, 감추어져 있던 안개의 참모습을 드러내준 거다. 

 가다머는 예술을 미메시스(모방)으로 본다. 예술은 ‘재현’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재현이란 사물의 외관을 그대로 본뜨는 게 아니다. 예술은 거울처럼 사물을 그대로 비추는 게 아니라, 사물의 본질적이며 의미 있는 측면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예술적 재현이란 진리, 즉 사물의 은폐된 참모습의 재현이란 얘기다. 

 

 가다머 :: 해석학을 발전시킨 현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로 활약했다. 고전 연구를 진척시키고 원전 해석의 문제를 추구하면서, 그의 저서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 1960)에서 철학적 해석학을 전개했다. 
그가 말하는 '영향사적 의식'이란, 역사 이해가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여기서 이해되는 것과의 사이에서 서로 지평의 융합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인데, 이때 원전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스스로의 편견을 깨우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또 새로운 편견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가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다머 [Gadamer, Hans—Georg]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상기와 재인식

 예술을 진리와 연결시키는 건, 곧 예술을 인식으로 보는 거랑 같다. 가다머는 예술적 인식을 플라톤을 따라 ‘상기(anamnesis)’로 설명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재인식(anagnorisis)’으로 규정한다. 가령 예술 작품을 통해 우린 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다. 터너의 그림을 통해 우린 안개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인상파의 회화를 통해 대상과 빛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배우며, 입체파의 회화를 통해 파편화된 현대 세계를 경험한다.

 이렇게 예술 속에서 우리는 현실의 잡다한 사물들 속에 감추어진 사물의 참모습을 본다. 마치 플라톤이 이 세상의 사물을 보고 그것들의 이데아를 떠올리는 것처럼. 하지만 문득 우리는 그것들이 사실 우리가 늘상 보아왔건 바로 그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걸 새롭게 인식한 거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재인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모방으로 보고, 모방의 본질을 ‘재인식’의 쾌감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재인식의 즐거움은 이미 알고 있던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새로 아는 데 있다.

 

 형식미학과 진리미학

 칸트는 예술을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로 보았다. 그는 예술을 내용에서 분리시켜 ‘형식’으로 환원해버렸다. 그에게 예술의 목적은 진리가 아니라 감각적 쾌감을 주는 데 있었으며, 예술은 자연의 총아인 천재의 소산이었다. 그럼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건, 곧 천재의 체험을 수용자가 그대로 따라서 체험하는 게 된다. 이 형식주의적, 주관주의적, 쾌락주의적 노선이 바로 칸트 이래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서구 미학의 주된 노선이다.

 가다머는 바로 이 노선에 대항하려 한다. 그는 예술을 다시 진리와 연결시킨다. 예술은 존재의 탈은폐로서의 진리를 열어준다. 예술은 순수한 상상력, 한갓 공상이 아니라 사물의 참모습의 ‘미메시스’다. 따라서 예술 작품이 주는 즐거움은 감각적 쾌감이 아니라 재인식의 즐거움이다. 도 예술 작품의 해석은 작가인 천재의 의도를 그대로 재구성하는 게 아니다. 예술 작품은 독자가 참가해야 비로소 성립하는 ‘놀이’로, 이 안에서 독자는 텍스트의 규칙을 지키는 가운데 나름대로 의미를 끄집어낸다.

 

 인간의 조건

 세계 속의 존재 

 이해의 전제 조건이 되는 이 선이해의 체계를 이해의 ‘지평’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지평’은 어디서 나오는가? 물론 그건 수많은 개별적 사실의 이해로 구성된다. 하지만 그 이해들은 어떻게 얻어졌는가? 그 전의 지평을 통해서. 다시 그 지평은...?

 

 알렉산더의 노동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상한 고리’와 마주치게 된다. 지평이 없으면 사물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없는 한 지평을 구성할 수 없다! 이건 악순환이다. 하지만 해석학은 이 ‘이상한 고리’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전체적 지평과 개별적 이해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우리의 세계 이해는 점점 더 완전해진다는 거다. 이걸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한다. 지평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지평을 낳고?

 

 내포된 독자 

 헤겔에게 예술은 진리가 감각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고전주의적 예술관에 따르면, 진리는 예술 작품 속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한다. 그럼 수용자는 예술가가 작품에 담아놓은 진리를 ‘원형 그대로’ 발굴해야 한다. 따라서 예술가가 품고 있던 상은 언제나 수신자의 머릿속에서 구성되는 상과 일치한다.

 고전주의적 예술관은 수용자에게서 작품을 주체적으로 해석할 권리를 빼앗는다. 수용자는 작품이 던져주는 의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작품으로 만드는 건 독자다. 무슨 권리로 수용자에게서 작품 해석의 자유를 빼앗는단 말인가. 더구나 고전 예술과 달리 현대 예술에선 애매성이 오히려 미덕이다. 오늘날엔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예술적’이라고 여겨진다. 바로 여기서 독자를 예술의 중심에 놓는 ‘수용미학’이 등장한다.

 

 수용과 영향

 사실 예술에서 독자가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는 건 수용미학이 발견한 게 아니다. 가다머는 예술 작품을 작가 – 텍스트 – 독자라는 삼각형의 ‘놀이’에 비유하였고, 잉가르덴은 텍스트는 오직 독자의 구체화 작업을 통해서만 ‘작품’으로 탄생한다고 말했다. 수용미학의 주요 논점은 사실 가다머와 잉가르덴에서 나왔다. 또 야우스(H. R. Jauß, 1921~ )는 가다머의 ‘영향사 이론’에, 이저(W. Iser, 1926~2007)는 잉가르덴의 ‘구체화 이론’에 빚지고 있다.

 물론 그들이 보기에 가다머와 잉가르덴은 철저하지 못했다. 야우스에 따르면 가다머는 작품이 매 시대에 끼치는 ‘영향’만을 중시하고, 독자의 능동적인 ‘수용’의 측면을 무시했다. 여기서 영향이란 텍스트에 의해, 그리고 수용은 독자에 의해 제약되는 측면을 가리키는데, 야우스에 따르면 수용 과정은 이 두 측면이 역동적으로 어우러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거다.

 

 야우스 :: 독일의 문학이론가, 프랑스 문학자. 하이델베르크, 뮌스터, 기센 대학을 거쳐, 1966년부터 콘스탄츠 대학의 문예학 교수. 본래 중세 프랑스 문학의 연구자지만, 동료인 이저와 함께 수용미학을 제창하여 현대 독일의 문학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우스 [Hans Robert Jauß] (현상학사전, 2011.12.24, 도서출판 b)

 

 이저 :: 독일의 영미문학, 비교문학자. 1967년부터 콘스탄츠 대학 교수.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도 겸했다. 동료인 야우스와 함께 수용미학을 제창하고, 나아가 독자적인 미적 작용 이론을 전개했다. 특히 문학 텍스트에 본래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독자의 역할을 중시하고, 그 독서 행위론에 기초하여 구조 전환한 유럽 사회에서의 문학의 새로운 기능을 재구축하고자 했다. 슈츠의 현상학적 지식사회학이나 루만의 시스템 이론의 영향도 크며, 텍스트를 둘러싼 미적경험을 생활세계에서의 경험 일반 안에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저 [Wolfgang Iser] (현상학사전, 2011.12.24, 도서출판 b)

 

 상상적인 것의 체험

 이저도 잉가르덴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 잉가르덴은 이렇게 생각했다. 텍스트는 도식적 구조다. 그 안엔 독자가 채워넣어야 할 빈 곳이 있다. 빈 곳이 있다는 점에서 순수지향적 대상(허구)은 실재적 대상과 다르다. 실제의 대상엔 빈 곳이 없으니까. 잉가르덴은 이렇게 ‘빈 곳’을 실제의 대상과 허구를 구분하는 데 써먹는다.

 하지만 이 경우에 독자는 텍스트를 읽으며, 자기가 채워 넣어야 할 빈 곳을 보고, ‘아, 이건 허구로구나’하고 확인할 뿐이다. 결국 잉가르덴은 실제와 허구를 구별하려다 보니 양자의 차이만 강조하게 된 셈인데, 이저가 보기에 이건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적어도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그것들이 마치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문학 텍스트를 읽는 것 자체가 실은 실재 세계의 ‘경험 구조’를 갖고 있다. 문학에선 허구가 사실로, 즉 문학 텍스트 속의 상상적인 것이 살아 있는 존재로 경험된다. 이렇게 예술의 본질은 생생한 ‘경험’을 매개하는 데 있다. 어떤 완성된 진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내포된 독자

 잉가르덴은 독자의 구체화를 통해서만 텍스트라는 앙상한 도식적 구조물이 피와 살을 가진 작품으로 탄생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사람마다 구체화가 달라질 가능성을 애서 없애려 한다. 잉가르덴식의 구체화는 작가의 약호와 일치할 걸 요구한다. 하지만 이 경우엔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불가능하고, 작가와 독자 사이엔 일방적 관계만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이저는 ‘내포된 독자’라는 걸 내세운다. 즉 텍스트 속엔 이미 독자가 발휘할 역할이 들어 있다는 거다. 텍스트와 작품을 구별할 때, 흔히 텍스트는 독자와 만나기 전의 것을, 작품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비로소 구성되는 걸 가리킨다. 하지만 이저에 따르면, 이미 텍스트의 구조 속에 독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물론 텍스트에 ‘내포된 독자는 잉가르덴처럼 이상적 독자가 아니다. 그가 누구며, 어떠한 역할을 발휘할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앟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구체화는 독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독자는 이미 텍스트의 개념(Konzept) 속에 들어 있다. 그러니 텍스트의 ’내용‘ 자체도 독자에 따라 다르게 구체화된다.

 

 미적 효과 이론

 잉가르덴에게 규정되지 않은 ‘빈 곳’은 채워져야 할 공백에 불과하다. 그것도 되도록 원작의 원래 의도에 맞게끔. 하지만 이저는 이 ‘불확정성’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가해서 그걸 문학적 효과의 조건으로 본다. 말하자면 이 불확정성 때문에 문학이 오히려 미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잉가르덴에게 미적 효과를 내는 건 텍스트의 구조(4계층)였지, ‘빈 곳’은 아니었다.

 이저에 따르면 원래 미는 어떤 내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미가 가리키는 게 있다면 그건 자기 자신이다. 말하자면 미의 본질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디언 부족은 이걸 다르게 말할 줄 안다. - “내 마음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도다.”

 텍스트는 ‘불확정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오히려 독자에게 텍스트의 내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할 자유를 준다. 말하자면 텍스트의 내용(‘무엇’)을 ‘어떻게’ 구체화하느냐가 독자에게 맡겨지는 셈이다. 독자는 책을 읽는 가운데 텍스트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미적’으로 구체화하게 된다. 독서 행위는 단지 텍스트의 내용만 파악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독서는 동시에 미적인 행위다. 문학 작품을 구체화하는 건 ‘의미의 구성’이자 동시에 ‘미적 구체화’다. 문학 텍스트를 미적으로 구체화할 때, 텍스트의 ‘효과 구조’와 독자의 ‘반응 구조’는 상호 작용을 하게 된다. 문학 작품의 본질은 텍스트 속에 감추어진 의미가 아니라, 바로 이 두 가지 구조가 발휘하는 힘에 있다.

 

 작가에서 수용자로

 이제까지의 미학은 주로 ‘작용미학’이었다. 즉 주로 작품이 독자에게 끼치는 영향력만을 강조해왔다는 얘기다. 하지만 수용미학은 거기에 독자의 적극적인 ‘수용’의 측면을 결합하여,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수용자 중심의 예술론을 만들어냈다. 이제 예술 작품은 ‘텍스트가 독자의 의식 속에서 재정비되어 구성된 것’으로 규정된다.

 

 정신병원에서

 철학은 정신병?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 J. Wittgenstein, 1889~1951)은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의 사용법을 오해한 데서 생긴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착각에서 비롯된 ‘사이비 문제’라는 거다. 따라서 만약 애매모호한 일상언어 대신에 의미가 분명한 인공언어를 만들어 사용한다면, 철학적 문제들은 아예 제기될 수조차 없다는 거다. 이렇게 그는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아예 ‘해소’해버리려고 했다.

 이 생각은 뒤에 ‘논리실증주의’라는 흐름을 낳는데, 이들은 ‘검증 가능성’이란 기준을 갖고 철학에서 검증할 수 없는 명제들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그런 명제들은 언어의 용법을 착각한 ‘헛소리’다. 말할 수 없는 것, 검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린 침묵해야 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은 이를 무시했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정신병이다. 이걸 치료하려면 유리처럼 맑고 명확한 인공언어를 만들어, 병의 원인인 일상언어의 애매함을 제거해야 한다. 그럼 철학은 제정신이 들 거다.

 

 병실을 지나며

 ICU :: 병원 내의 일정한 구역에 설치한 특수치료시설.집중치료시설·집중감시시설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의료설비로는 충분히 관리할 수 없는 중증환자나 대수술 후의 환자를 대상으로 24시간 계속 감시하여 필요에 따라서 신속한 구급조치를 하기 위한 것이다. 혈압·맥박·심전도·호흡수·요량(尿量) 등을 지표로 삼아 환자의 전신상태를 주야로 파악하는 한편, 이들 정보를 바탕으로 한 호흡·순환관리·영양·체액 균형유지 등의 대책을 집중적으로 시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ICU (두산백과)

 

 파동방정식

 숫자와 기호로 표시된 언어를 ‘인공언어’라 한다. 우리의 일상언어는 한번에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어 혼란을 낳는다. 때문에 자연과학에선 인위적으로 만든 형식언어를 상요한다. 여기서 모든 숫자와 기호는 분명하게 정해진 의미를 갖고 있어, 애초에 혼란을 낳을 소지가 없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런 언어로 이루어진 철학을 꿈꾸었다. 

 

 알렉산더의 노동

 하지만 인공언어는 어떻게 의미를 갖는가? 가령 E=mc²을 보자. 이 공식은 그 자체로선 아무 의미도 없다. 이게 의미를 가지려면 번역이 되어야 한다. 가령 여기서 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광속도다. 기호들은 이렇게 물리학의 개념들로 번역된다. 그럼 에너지는 뭐고, 광속은 뭘까? 사전을 찾아보면 된다. 에너지란 ‘~다’. 물론 이 따옴표 안은 결국 일상언어들로 채워져야 한다. 이렇게 끝없이 물어보라. 결국 인공언어는 학술 용어에, 이는 다시 애매하기 그지없는 일상언어에 뿌리박고 있음이 드러난다.

 인공언어도 의미를 가지려면 결국 자연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인공언어를 가지고 자연언어를 베어내려는 꿈도 결국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검증 가능성

 논리실증주의자에 따르면, 의미 있는 명제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동어 반복인 명제. 가령 “삼각형은 뿔이 세 개다.” 이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왜냐하면 ‘뿔이 세 개’라는 건 이미 삼각형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검증 가능한 명제. 가령 “피사의 사탑에서 공을 떨어뜨리면 공은 9.8m/sec의 속도로 낙하한다.” 이 명제는 검증 가능하다. 공을 떨어뜨리고 시간을 재면 되니까.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검증 불가능하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이런 명제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그냥 헛소리일 뿐이다.

 

 자기를 베는 도끼

 플라톤 : 자네들의 기준은 결국 이거 아닌가. ‘유의미한 명제는 동어반복이거나 검증 가능한 명제다.’

 하지만 ‘유의미한 명제가 검증 가능해야 한다’는 명제 말일세. 이 명제는 동어반복인가? (no)

 그럼 검증 가능한가? (no)

 결국 자네들의 규칙도 ‘헛소리’ 아닌가.

 

 뒤샹의 샘

 철학의 문제를 ‘해소’해버린 뒤 비트겐슈타인은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며 지냈다. 초야에 묻혀 지내던 그가 어느 날 철학계로 돌아왔다. 아직 철학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는 초기의 견해를 포기해야 했을까? 그 중 하나는 그의 철학이 가진 묘한 역설 때문이었을 거다. 그 역설이란 자연언어의 결함을 제거하려 한 그의 작업도 결국 자연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사다리에 비유하며, 일단 지붕 위에 올라간 다음엔 그 사다리를 치워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일은 이미 사다리를 치우기 전에 벌어진 거다.

 

 말과 사물

 초기에 그가 구상한 이상언어는 세계의 거울이었다. 그 속에선 말과 사물이 일 대 일 대응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후기 철학에서는 말과 사물 사이에 이 거울 같은 반영 관계가 끊어진다. 말은 사물의 본질을 거울처럼 비추는 게 아니다. 말과 사물은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관련된다. 

 ‘게임’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여러 가지를 가리킨다. 가령 운동경기, 전자오락, 카드놀이, 술래잡기 등. 하지만 이 모든 ‘게임들’에 공통된 특징이 있는가? 혹시 두 편으로 나뉘어 승부를 가린다는 특성을 들지도 모르겠다. 그럼 마라톤처럼 두 편으로 나뉘지 않는 경기들은 게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어차피 승부를 가리는 게 아니냐고? 그럼 OK 목장의 결투도 게임이라고 해야 한다.

 

 가족 유사성

 여기에 어느 가족이 있다. 아빠와 아들은 눈이 닮았고, 아들과 엄마는 입이 닮았다. 그럼 이 세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특징은? 없다. 그들 사이엔 단지 서로 엇갈리는 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교차하는 공통성을 근거로 우린 이들이 한 가족임을 알아낼 수가 있다.

 말의 사용도 이와 비슷하다. 일상언어에서 대개 하나의 낱말이 성질이 다른 여러 사물을 동시에 가리킨다. 물론 그 사물들 모두에 공통되는 특징(본질)은 없다. 하지만 그 사물들 사이엔 서로 엇갈리는 공통성이 있어 이를 근거로 우린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낱말로 지칭할 수가 있다. 언어가 가진 이런 특성을 비트겐슈타인은 ‘가족 유사성’이라 불렀다. 

 

 본질은 없다

 미국의 미학자 웨이츠(M. Weitz)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잘못된 거다. 가령 ‘예술’이라는 말은 음악, 무용, 영화, 소설, 조각, 회화 등 여러 가지 예술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에 공통된 성질이 있을까? 이들 사이엔 단지 가족 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본질이 없는데 본질이 뭐냐고 묻는 건 난센스다. 웨이츠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이 뭐냐고 물으며 출발했던 전통적 미학은 모두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다고 한다. 이걸 ‘본질주의의 오류’라고 한다.

 

 열린 개념

 예술에 본질이란 게 없다면, 물론 예술은 정의할 수도 없다. 예술은 정의할 수 없을뿐더러, 정의할 필요도 없다. 

 예술의 개념을 정의함으로써 개념을 닫아버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개념을 열어두는 편이 예술의 창조력을 위해 더 낫다는 거다.

 

 L.H.O.O.Q.

 마르셀 뒤상(Marcel Duchamp, 1887~1968)을 다다이스트라고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고, 다다의 활동 무대는 유럽(취리히와 파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샹의 작업은 여러 면에서 다다이스트와 비슷하기 때문에 대개 다다를 언급할 때 함께 언급되곤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다이스트들은 문명을 조롱하고 전통을 파괴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아온 모든 가치를 전복하려고 했다. 그 가치들 속엔 물론 예술도 포함된다. 그들은 예술까지도 조롱했고,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 ‘애들 장난감(다다)’으로 만들어버리려 했다. 다다가 종종 ‘반(反)예술적’이라 불리는 건 이 때문이다.

 뒤샹의 작품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려넣고, 거기에 <L.H.O.O.Q.> 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글자를 프랑스어 발음에 따라 ‘엘 아 쇼 오 퀴’로 읽으면 이런 심오한 문장과 발음이 같아 진다. - Elle a chaud au cul(그녀의 엉덩이가 뜨겁다).

 

 모더니즘

 웨이츠의 얘기는 물론 모더니즘의 예술 실천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의도적인 무질서, 대상성의 파괴, 오브제의 도입, 창작의 우연성 등 모더니즘 예술은 전통적 예술 관념에 따르면 도저히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전통적 예술 관념을 깨는 게 오히려 모더니즘의 본질이었으니까.

 여기서 만약 ‘예술은 이런 거다’하고 정의함으로써 예술의 개념을 닫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모더니즘처럼 새로운 예술 작품이 나타났을 때 이를 무시하고 억압하게 될 거다. 실제로 모더니즘 예술은 당시 대중의 몰이해와 비평가의 비난에 얼마나 시달려야 했던가. 그러니 차라리 예술의 개념을 정의하지 않은 채 열어놓는 게 예술의 발전을 위해 낫지 않을까?

 

 다시 비트겐슈타인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구상한 이상언어에서 낱말은 현실의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여기서 사물과 낱말은 일 대 일 대응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기서 한 낱말에 의미를 주는 건 그 낱말이 가리키는 사물이었다. 하지만 자연언어에선 대개 이러한 일 대 일 대응 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선 하나의 낱말이 여러 대상을 가리키기도 하고, 여러 낱말이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럼 여기서 낱말이 어떻게 의미를 갖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낱말을 사용하는 것을 ‘게임’에 비유한다. 게임엔 규칙이 있고, 게임을 하려면 이 규칙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말을 사용하려면, 그것의 용법을 알아야 한다.

 상황에 따라 같은 낱말도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진다. 낱말의 의미는 이처럼 다양한 언어 상황 속에서의 그 말의 쓰임새(용법)에 있다.

 

 예술은 관습

 초기 비트겐슈타인에게 말에 의미를 주는 것은 그것과 대응하는 사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말에 의미를 주는 것은 그것의 ‘용법’이다. 용법이 먼저고, 이 용법에 따라 비로소 말은 다양한 사물을 가리키게 된다. 따라서 게임을 하려면 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하듯이, ‘말놀이’를 하려면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말의 용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말의 용법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관습이다. 결국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말의 용법에 관련된 관습이란 얘기가 된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말의 의미도 순전히 관습(코드)의 문제가 되었다.

 

 뒤샹의 샘

 “예술가가 뱉어놓은 모든 것은 예술이다.”

- 슈비터스 (독일의 화가)

 같은 재료로, 같은 공장에서, 같은 날 만들어진 수많은 변기 중에서 유독 뒤샹의 <샘>만 ‘예술 작품’인 이유는 무얼까? 한 가지 분명한건, 그 이유를 변기의 물리적 속성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거다.

 

 제도로서의 예술

  변기 ‘밖’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의 분석 미학자인 조지 디키(George Dickie)는 그걸 ‘예술계’라는 제도에서 찾는다. 우리 사회엔 ‘예술계’라는 세계가 있다. 말하자면 예술가, 비평가, 화상(畵商) 등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 말이다. 이 예술계에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한 대상이 바로 예술 작품이라는 거다.

 <샘>이 다른 변기들과 달리 예술 작품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예술계가 <샘>에만 특별히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실 세상에 있는 어떤 물건도 예술계가 거기에 자격을 부여하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다시 뒤샹의 샘

 사실을 말하자면, 당시의 예술계는 이 작품에 예술의 자격을 부여하기를 거부했다. 작품의 심사를 맡은 예술계의 시민들에게 이 작품은 아무래도 좀 너무한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결국 이 작품을 예술로 간주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 변기를 일단 전시실 한 켠에 걸어놓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아마 뒤샹이라는 인물이 워낙 거물이었기 때문일 거다. 단, 이 작품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채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한다. 원래 그 변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가 나중에 다시 제작한 작품들 중의 하나다.

 

 뒤샹이 창조한 것은? 

 뒤샹이 창조한 것은 바로 ‘코드(code)’, 즉 하나의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다. 그가 <샘>을 전시회에 보냈을 때, 사회에는 아직 변기에 예술 작품의 자격을 부여하는 관습(코드)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커튼이 드리워져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술계는 분명히 이 작품에 예술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 차이를 낳은 것은 무엇일까? 물론 변기를 전시회에 보낸 뒤샹의 장난이다. 이 장난을 통해 결국 그는 새로운 코드를 창조했다. 

 

 예술의 본질은 코드에

 ‘예술계’에 관한 디키의 얘기는 현대 예술의 어떤 경향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물의 오브제화, 즉 명명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예술이 되는 경향 말이다. 만약 어떤 사물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게 그 사물의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예술계라는 제도라면, 결국 예술의 본질은 ‘코드’에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느 대상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코드다. 예술의 본질은 이제 코드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는 손

 왜 예술계는 어떤 사물엔 예술의 자격을 부여하고, 다른 사물엔 부여하지 않는가? 그 기준은 무엇일까? 디키는 이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다. 기준을 제시하려고 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이상한 고리에 빠져들게 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물론 ‘예술계에서 자격을 부여한 대상’이다.

 문제는 ‘예술계’라는 말이다. 예술계란 무엇인가?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예술’이란 말이 아직 정의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예술은 무엇인가?

 

 말과 사물 

 말과 사물

 “사물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건 아니다.”

- 마그리트

 

 수도원에서

 의미는 사전 속에

 플라톤 : 자넨 낱말이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사물을 ‘가리킨다’고 했지?

 아리스 : 낱말은 의미를 매개로 해서 사물을 가리키게 되죠. 의미 삼각형이란 게 있습니다. (의미 – 낱말- 사물)

 플라톤 : 하지만 낱말은 어떻게 의미를 가질까? 가령 내가 ‘사과’를 모른다 하세.

 ‘사과’ = ‘열매’의 일종, ‘열매’ = ‘과실’, ‘과실’ = ‘식물의 꽃이 피었다 진 뒤에 맺히는’ 것, ‘맺히다’ = ‘열매 따위가 생기다’ 열매=과실=맺히는 것=열매 따위가 생기는 것이라? 

 모든 낱말은 이렇게 사전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데, 그게 어떻게 바깥의 ‘사물’을 가리킬 수 있는 걸까? 

 

 손가락 끝에 있지 않음이여...

 아리스 : ‘사과’라는 낱말과 함께 사과를 하나 보여주는 겁니다.

 플라톤 :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어느 원주민이 달려가는 토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가바가이’라고 했다고 하세. 그게 무슨 뜻일까?

 아리스 : ‘토끼’라는 뜻이겠죠.

 플라톤 : ‘달려간다’는 뜻일 수도 잇잖나? 아니면 그 손가락의 끝일 수도 있고.

 사물이 가진 속성은 원칙적으로 무한하기 때문에 손가락이 그 가운데에 어느 걸 가리키는지 아는 건 불가능하단 얘기일 뿐이야.

 아리스 : 그래도 우린 결국 단어의 뜻을 알아내지 않습니까.

 플라톤 : 하지만 그건 단지 확률적인 추측에 불과한 거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아리스 : 그 단어를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나 잘 관찰하면, 그게 뭘 가리키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가령 ‘가바가이는 풀을 뜯는다’라고만 해도.

 플라톤 : 그러려면 우선 ‘풀’이라는 단어와 ‘뜯는다’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어야지. 가령 그 문장이 그 부족 말로 ‘가바가이 파릇파릇 와삭와삭.’ 여기서 ‘파릇파릇’은 뭘 가리키고, ‘와삭와삭’은 뭘 가리키지?

 아리스 : 그것도 문맥 속에서 사용되는 걸 관찰하면...

 플라톤 : 다시 그 문맥 속에 들어 있을 새 낱말들은 어쩌고?

 결국 여기서도 다시 한번 돌고, 돌고, 또 돌아여 하겠지.

 아리스 : 그래도 우린 이럭저럭 말을 배우고, 그걸로 이럭저럭 의사소통을 하잖습니까?

 플라톤 : 그러게 말일세. 얼마나 신기한가. 

 

 

 

3. 아래로부터의 미학 – 허공의 성

 달리의 꿈

 이드, 자아, 초자아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성(人性)은 세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가장 아래층은 이드(Id)다. 이드는 원초적 본능으로 무의식의 바다에서 물고기처럼 퍼덕이는 욕망 덩어리다. 이드는 원초적 주체로 아직 논리나 이성, 도덕이나 윤리를 모른다. 그는 다만 쾌락 원리에 따라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키려 할 뿐이다. 이드는 꿈으로 소망을 실현하기도 하나, 아직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는 못한다.

 두 번째 층은 자아(Ego)다. 여기서 꿈과 현실은 분리된다. 진짜로 욕망이 실현되는 건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다. 이제 자아는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구별하고, 현실에서 욕망을 실현할 방도를 찾는다. 자아는 현실을 인식하고 지각, 기억, 사고를 발전시킨다. 그는 현실 원리에 따라 행동한다. 욕구를 만족시킬 실제 대상을 발견할 때까지, 자아는 이드를 억제한다. 이드는 욕망을 참지 못하나, 자아는 진정한 만족을 위해선 때론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세 번째 층은 초자아(Superego)다. 초자아는 인성의 도덕적 측면이다. 자아가 현실 원리를 대표한다면, 초자아는 이상(理想)을 대표한다. 초자아는 당신이 바깥 세계에서 받아들여 내면화한 도덕률로, 쾌락이나 현실이 아니라 완전성을 지향한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선악에 대한 관념을 받아들여 우리 내부에 초자아를 형성한다. 초자아는 사회화의 원리로, 양심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행동이 사회 규범에 어긋나지 않게 감시한다. 

 이 세 개의 층이 하나가 되어 우리의 인성을 이루며,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가운데서 양자를 적절히 통제한다. 그리하여 세 층이 조화를 이룰 때 당신은 원만한 인격을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신경증에 시달리게 된다.

 

 욕망의 승화

 이드는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나, 현실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게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다. 어떻게 하나? 이드는 방법을 안다. 공상을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는 거다. 적어도 공상 속에선 현실 원리의 속박을 벗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물론 공상을 통한 만족은 진정한 만족이 아니다. 우린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야무진 꿈을 고스란히 품고 현실로 돌아오는 길이 있다. 바로 예술이다. 예술가들은 공상을 통해 바람을 이루려 한다. 그들이 이루지 못한 꿈, 이루지 못한 욕망을 ‘승화’시킬 때 예술이 탄생한다. 

 만약 그 바람이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이라면, 교묘히 변형시켜 금지된 원천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다. 혹시 너무 개인적이라 반감을 살 만한 내용은 다듬어서 다른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게 해야 한다. 교묘한 형태로 욕망을 담고 있기에, 사람들은 예술가의 작품에서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의 대가로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그 결과 예술가는 오직 꿈속에서만 가능했던 것을 현실에서 이루게 된다.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여자도 얻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린 이 작품에서도 감추어진 성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초자아의 검열을 피해 교묘한 형태로 위장이 되어 있지만.  

 이 모티프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도 볼 수 잇다. 햄릿은 우유부단함으로 유명하다. 괴테는 햄릿을 생각이 너무 많아(정신 광잉) 행동이 결여된 인간 유형으로 보았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햄릿의 우유부단함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햄릿》에선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햄릿 자신이 아니라 그의 숙부다. 그러나 여기서 숙부는 햄릿 자신의 은밀한 바람을 대리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숙부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햄릿 자신의 욕망의 화신이다. 하지만 그의 초자아는 아버지의 원수를 즉시 처치하라고 명령한다. 어찌 고민스럽지 않겠는가.

 

 꿈의 법칙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에도 법칙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응축이다. 이는 여러 사물이 꿈속에 하나가 되어 나타나는 거다. 가령 꿈속에 A라는 인물을 보았지만 잠시 후 문득 그 자가 B임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한 사람 속에 두 인물이 응축되어 있었던 거다. 가령 반잉반양의 사티로스,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는 응축의 산물이다. 다른 하나는 전이다. 이는 어떤 사물이 모양이 비슷한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거다. 가령 꿈에서 남성의 성기는 막대기, 수도꼭지, 권총 등으로 대체되고, 여성의 성기는 동굴, 서랍, 냇물 등으로 나타난다.

 

 달리의 꿈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의 발견을 열렬히 환영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발견한 기묘한 세계가 그림의 주제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또 초현실주의 작품을 본 후에는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자들 쪽에선 그가 발견한 새로운 세계에 열광했고, 이 세계를 화폭에 옮겨놓는 걸 아예 창작의 목표로 삼았다.

 초현실주의의 대표자인 살바도르 달리는 대낮에도 종종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앙드레 브르통 ::  초현실주의의 주창자로 14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보들레르, 말라르메, 위스망 등 상징파 시인에게 열중했으며 발레리와도 사귀었다. 의학생(醫學生)으르 파리대학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각지의 육군병원 정신과 및 신경과에 근무하면서 프로이트의 저서를 애독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를 통하여 계발된 인간정신의 무의식 영역에 관한 인식은 후일 그가 초현실주의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17년 이후는 아폴리네르, 아라공, T.수포, P.차라 등과 지내면서 오토마티슴(自動記述法)에 의한 작품 《자장(磁場)》(1921)을 수포와 함께 지었으며, 다다이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앙드레 브르통 (두산백과)

 

+ 한 부랑자가 ‘저는 앞을 못 보는 맹인입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목에 걸고 길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적선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곤 부랑자가 목에 걸고 있던 팻말을 뒤집어 뭔가를 써놓고 자리를 떴습니다. 깡통에는 순식간에 동전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네요.’ 팻말에 글을 써준 사람은 앙드레 브르통, 프랑스의 시인이었습니다.

 

 예술과 실어증

 언어의 두 가지 축

 하나는 여러 종류의 낱말을 가리키는 ‘어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어휘의 결합 규칙인 ‘문법’이다. 

 가령 ‘송아지’하면 떠오르는 건? 엄마 젖, ‘젖’이랑 가까운 말은? 빤다. 망아지 하면? 풀. 그다음엔? 뜯는다. 이처럼 낱말의 결합은 그것들 사이의 인접성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런 두뇌작용을 ‘접근 연합’이라 부른다 한편 낱말의 대치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송아지’하면 ‘망아지’가 생각난다. 발음이 비슷하므로. 아니면 ‘아기’도 괜찮다. 아기도 송아지처럼 젖을 빠니까. 물론 송아지의 반대말인 ‘엄마 소’가 떠오를 수도 있다. 낱말의 대치는 이렇게 낱말들 사이의 발음 혹은 내용의 등가(이는 유사성과 상반성을 모두 포함한다)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를 ‘유사 연합’이라 부른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아인슈타인)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이며,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 (칸트)

 

 실어증의 두 유형

 로만 야콥슨은 실어증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유사성 장애’로, 선택축이 망가져 도대체 낱말을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다. 그거 있잖아? 왜, 겉옷을 벗기면 하얀 속옷이 나오고, 그걸 벗기면 검은 게 나오고, 그 가운데에 구멍이... 레코드를 가리키는 데 이렇게 힘이 든다. 심할 경우엔 문장에서 거의 모든 낱말이 사라지고, 낱말을 대신하는 대명사나 접속사만 남는다. 어젯밤 난 그녀랑 그거 하러 갔는데, 그거해서 잠만 잤어.

 또 하나는 ‘인접성 장애’라는 증상인데, 이것은 낱말들을 연결시키는 결합축이 망가진 경우다. 이땐 문장 속에서 접속사, 조사, 활용 어미와 같은 연결어들이 전부 사라진다. 결국 문장은 낱말의 무더기, 전보(電報)처럼 되어버린다. 어젯밤, 나 그녀, 연주회, 피곤, 잠... 증세가 심하면 모든 문장이 한 낱말로 줄어든다. 

 

 은유와 환유

 어떤 사람에게 유사성 장애가 있다 하자. ‘칼’을 가리키려는데, 낱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때 그는 대신 날카로운 것, 찌르는 것, 사과껍질 벗기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칼이 지닌 성질이 칼 자체를 대신하는 셈이다. 이건 일종의 ‘환유’다. 가령 누군가 다가올 때, 환유는 ‘발자국이 다가온다’고 표현한다. 다가오는 사람이 그의 발에 묻어오는 발자국 소리로 대체되는 거다.

 반대로 그에게 인접성 장애가 있다 하자. ‘칼’이 어떠냐 물으면, 그는 ‘날카롭다’라는 말 대신에 ‘송곳이다’, ‘가위날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칼의 성질인 ‘날카롭다’가 비슷한 성질을 가진 다른 사물로 대체된 셈이다. 이건 일종의 ‘은유’다. 은유는 하나의 사물을 비슷한 성질을 가진 다른 것으로 표현한다. 예컨대 아름다운 그녀는 ‘한떨기 꽃’이다.

 이처럼 유사성 장애가 있는 사람의 반응은 환유적이고, 인접성 장애가 있는 사람의 반응은 은유적이다. 현란한 은유는 특히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시에 잘 나타난다. 반면 사실주의 문학에선 환유가 우세하다. 은유는 시에, 환유는 산문에 적합하다. 어쩌면 한 시인이 되느냐, 소설가가 되느냐는 언어 적성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환유 :: 어떤 하나의 사물 또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과 관련이 깊은 다른 사물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붓을 들다'는 '글을 쓰기 시작하다'의 의미인데, 이 경우 글 쓰는 사람이 꼭 붓을 사용해야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환유 [換喩]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2006.11.5, (주)신원문화사)

 

 은유 :: 사물과 사물이 지닌 속성의 유사성을 연결하여 나타내는 비유를 말한다. '같이', '처럼', '듯이' 등의 연결어를 사용해 명백한 비교를 통해 드러내는 직유(直喩)와는 달리 연결어가 없어지고 둘 사이의 관계가 'A는 B다', 또는 'A의 B'와 같은 형태를 취하는 비유를 말한다.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시키는 비유 방식이다. 
예를 들어 "호수와 같은 내 마음"은 직유이며 "내 마음은 호수"는 은유이다. 이처럼 간결하고 암시적이기 때문에 은유는 그 관계나 의미를 파악하기에 까다로운 경우도 있으며, 시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운 요소의 하나가 된다. 반면에 그만큼 풍부한 뜻과 묘미를 발휘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유 [metaphor]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2006.11.5., ㈜신원문화사)

 

 환유의 축, 입체파

 널리 알려진 것처럼 입체파 화가들이 그리려 했던 것은 3차원의 환영이 아니었다. 그들은 2차원의 화폭에 정말로 3차원 공간을 담으려 했다. 이때 입체파 화가들은 종종 대상을 제유법으로 변형시킨다. 쉽게 말하면 S자 모양의 곡선 하나로 기타를 나타내고, 흰 면에 음표 몇 개로 악보를 나타낸다. 이건 물론 일종의 환유다.

 

 제유 :: 본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물로 대신하는 비유이므로 제유와 환유를 모두 포괄하여 대유라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약주를 많이 하셨다'라고 할 때 약주란 술의 일종이라기보다는 어떤 종류이든 술 전체를 의미한다. 이처럼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일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방식을 제유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유 [提喩]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2006.11.5., ㈜신원문화사)

 

 은유의 축, 초현실주의

 입체파 화가들이 환유의 축에 서 있다면, 초현실주의자들은 언어의 또 다른 축(은유)에 서 있다. 

 

 예술과 정보

 정보란 무엇인가?

 불확실성을 ‘엔트로피’라 부른다. 사건이 예측하기 힘들수록 엔트로피는 커지고, 그럴수록 정보도 커진다.

 

 예술과 엔트로피

 작품을 참신하게 하려고 엔트로피를 늘리는 건 사실 예술이 오랫동안 써먹어온 해먹은 수법이다. 

 

 미의 척도

 하지만 무조건 복잡하다고 좋은 작품은 아니다. 예측 불가능성이 너무 크면 정보 쇼크를 주게 된다. 가령 변주곡이 지나치게 복잡하면 청중은 곡의 주제를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사건이 너무 복잡하게 꼬이면 독자는 사건의 줄거리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 작품은 혼란스럽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복잡성 속에서도 질서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줄거리를 쉽게 따라가면서도 예상 못한 일탈에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미국의 수학자 버코프(G. D. Birkhoff, 1884~1944)는 M=O/C라는 공식을 제시했다. 여기서 M은 ‘미의 척도(aesthetic measure)’를 가리키고, O는 ‘질서(order)’, C는 복잡성(complexity)’의 약자다. 말하자면 미란 질서와 복잡성의 함수란 얘기다. 쉽게 말하면 아름다움은 질서 또는 예측 가능성*네그엔트로피)과 예측 불가능성(엔트로피)의 함수 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정보 이론에선 미를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optical) 관계’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일탈과 질서, 예측 불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이 적절한 비례를 이룰 때, 사물은 가장 아름답다는 얘기다.

 일탈이 그림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리스인들이 도리스식 기둥 3분의 2 지점에 의도적으로 도들림을 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제미니아니 ::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스승 코렐리의 바이올린 주법을 영국에 전하며 하이포지션의 주법, 더블스토핑의 기법 등을 개척하였다. 근대 바이올린 주법의 기초가 되는 교본을 남겼으며 바로크 양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바이올린소나타와 합주협주곡을 작곡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미니아니 [Francesco Saverio Geminiani] (두산백과)

 

 의미 정보와 미적 정보

 미적 정보는 수학자 버코프의 공식에서 ‘복잡성’에 해당한다. 반면 의미 정보는 ‘질서’에 해당한다.

 작품이 불확실할 때 우리는 ‘미적 쾌감’을 느끼고, 작품이 질서정연하고 에측 가능할 때 우리는 작품의 ‘의미’를 이해한다. 따라서 미적 정보는 엔트로피와 일치하고, 의미 정보는 네그엔트로피와 일치한다. 

 당신이 지금 여러 서체로 된 서예 작품을 보고 있다고 하자. 글자꼴이 분명할수록 의미 정보가 증가하고, 글자가 자유로이 제 꼴을 벗어날수록 미적 정보가 증가한다.

 

 고전 예술과 현대 예술

 의미를 중요시한 고전주의 예술에선 대상의 형태가 가장 중요했다. 색채는 단지 대상의 형태를 분명히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대 예술에선 대상성이 사정없이 파괴된다. 형태와 색채는 대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구성을 이룬다. 결국 고전주의 예술은 의미 정보를 추구한 반면, 현대 예술은 의미 정보를 단순화하는 가운데 미적 정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물의 교훈

 죽은 사물의 부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린 친숙한 사물엔 주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무의식중에 흘러가버리는 ‘죽은’ 사물이다. 죽은 사물을 ‘되살릴’ 수는 없을까?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그걸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술은 사물의 참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망각된 존재를 일깨워준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도 예술로 죽은 사물을 부활시키려 했다. 하지만 거기엔 어떤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낯설게 하가! 사물을 낯설게 만들 때 비로소 우리는 거기에 주목하게 된다. 이때 죽었던 사물들은 찬란하게 부활한다.

 

 낯설게 하기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마그리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여기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①고립 ::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 걸 말한다. ex) 육지에 있는 물고기 (숲속의 참치? ㅋ)

 ②변경 :: 사물이 가진 성질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것이다. ex) 무거운 바위에서 중력을 제거한다. 

 ③잡종화 :: ex) 물고기의 상체에 사람의 하체를 결합한다, 성과 나무 밑둥을 결합한다.

 ④크기의 변화 :: ex) 집채만한 사과

 ⑤이상한 만남 :: 평소엔 만날 수 없는 두 사물을 나란히 붙여 놓는 거다. ex) 연기가 나는 거대한 시가 위를 달리고 있는 자전거

 ⑥이미지의 중첩 ::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거다. 프로이트는 응축을 꿈의 경제성과 연결했다. 즉 동일한 길이 안에 되도록 많은 정보를 담는 방법이라는 거다. 이는 물론 작품이 가진 정보량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⑦패러독스 ::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 안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한다. ex) 가을 숲을 지나는 남자와 봄의 여신.

 

 래프 위에

 몬드리안

 플라톤 : 몬드리안은 사물을 추상하면 사물의 감추어진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더군. 

 아리스 :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으로 될수록, 그림은 의미 정보의 복잡성을 잃어가게 됩니다.

 동시에 혼란한 색채와 불분명한 형태가 삼원색과 간단한 도형이 되어가면서 작품이 지닌 미적 정보의 복잡성도 줄어들게 되죠.

 

 신지학 :: 보통의 신앙이나 추론(推論)으로는 알 수 없는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神秘的)인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에 의하여 알게 되는 철학적 ·종교적 지혜 및 지식.
[네이버 지식백과] 신지학 [theosophy, 神智學] (두산백과)

 

 폴록

 아리스 : 알아먹을 수 있는 대상이 하나도 없으니 의미 정보의 복잡성은 0에 가까울 테고, 색채들이 극도로 혼란한 걸 보아 미적 정보는 극대화한다고 할 수 있죠.

 

 바로크 회화는 등장인물의 수가 늘어나고, 화면이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의미 정보의 복잡성이 증가하는 셈이다. 동시에 윤곽이 흐려지고 터치와 색채의 회화적 효과가 강조됨으로써 미적 정보의 복잡성도 증가한다.

 

 엔트로피와 오브제화

 플라톤 : 자연적 과정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인공적 과정은 거꾸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네

 저 자동차를 보게. 차체는 금속으로 되어 있지. 그 금속 원소들은 사실 철광 속에 다른 원소들과 무작위적으로 뒤섞여 있었지.

 아리스 : 말하자면 엔트로피가 큰 상태였다는 말씀이겠죠?

 플라톤 : 그걸 인간이 캐내서, 그 원소만 골라서 철광을 만든 뒤, 제련해서 저 자동차의 차체로 만들었단 말일세. 사실 자연 속에서 수십억 개의 금속 원소들이 저 차체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겠나?

 결국 인간이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배열을 가진 금속 원소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질서정연한 배열을 가진 차체로 만든 거지. 쉽게 말하면 인간이 차체를 만드는 인공적 과정은 원소 배열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과정이다. 하지만 저 차체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겠나?

 아리스 : 녹슬고 닳고 바람에 날려, 결국 닷 땅으로 돌아가겠죠.

 플라톤 : 결국 원래의 무질서한 상태로 돌아가는 거지. 이게 바로 자연적 과정일세. 자연적 과정은 이렇게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네.

 

 엔트로피(무질서)  인공적 과정→  네그엔트로피(질서)
 ←자연적 과정

 

 플라톤 : 무언가를 전달할 의도를 갖고 있다면, 그림은 어떤 질서를 갖게 될걸세. 말하자면 물감의 배열이 일정한 네그엔트로피, 즉 질서도를 갖게 되는 거지.

 하지만 폴록이 물감을 뿌려댈 때, 그 색점들의 배열은 어떻게 될까?

 아리스 : 우연하며 무질서한 배열을 띠게 되겠죠.

 플라톤 : 결국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얘기지.

 아리스 : 결국 예술 창작이 자연적 과정을 닮아간다는 얘기가 되나요?

 

 추상, 표현, 레디 메이드

 플라톤 : 모더니즘의 3대 현상이라는 추상, 표현, 레디 메이드가 결국 한 방향이 되는 셈이지.

 아리스 : 추상은 차가운 이성의 산물이고, 표현은 뜨거운 감정의 표출 아닙니까?

 플라톤 : 추상의 극한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 Malevitchm 1878~1935)의 <검은 사각형>이고, 표현의 극한은 폴록의 물감 뿌리기지. 하지만 그 결과, 두 경우 모두 구체적 대상성과 기호성을 잃고 하나의 ‘사물’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아리스 : 하지만 레디 메이드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건 오히려 구체적 대상에 무한히 가까워지니까요.

 플라톤 : 하지만 너무 가까워져 결국 예술이 그냥 ‘사물’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대상에서 무한히 멀어지든, 무한히 가까워지든 결과는 마찬가지야.

 

 정보필터링

 대개의 예술 작품은 의미 정보와 미적 정보를 모두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양자를 분리하는 방법이 있다. 가령 그림의 경우에는, 부분을 안 보이게 가려서 그 그림이 뭘 그린 건지 못 알아보게 하는 거다. 그럼 관람자는 그림의 의미는 모른 채 오직 색채와 형태 그 자체만을 보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를 추출할 수가 있다. 

 음악의 경우엔 레코드를 거꾸로 돌리는 거다. 그럼 청중은 소나타인지 론도인지 모른 채 음향이 가진 아름다움만을 듣게 된다. 말하자면 미적 정보만 걸러낼 수가 있다는 얘기다. 이걸 정보 필터링(filtering)이라 한다.

 

 믹스투어

 플라톤 : 고전적 음악 형식은 소나타면 소나타, 론도면 론도,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어서, 대강 곡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 있거든. 근데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의 곡은 한 음 다음에 도대체 어떤 음이 나올지 감을 못 잡겠더군. 

 한 20분을 퉁탕퉁탕거리더니, 잠깐 쉬었다가 이번엔 악보를 뒤에서부터 거꾸로 연주하더군.

 의미 정보를 포기하는 건 현대 음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의미 정보가 아예 없다면, 앞에서 뒤로 연주하나 뒤에서 앞으로 연주하나, 뭐 다를게 있겠나?

 아리스 : 칸딘스키던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림이 거꾸로 달려 있더랍니다. 그걸 보는 순간, 이 친구는 ‘바로 이거다’라고 했다나요?

 

 슈톡하우젠 :: 독일의 작곡가이자 이론가. 쾰른의 서부독일방송국에서 전자음악의 실험적 제작에 성공하였고 부정기 음악잡지 《라이에》의 공동편집인으로서 현대음악에 대한 계몽활동도 추진하였다. 《10악기를 위한 대위법》, 《전자음향,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접촉》등 독자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을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Karlheinz Stockhausen] (두산백과)

 

 소나타 :: '악기를 연주하다'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의 동사 수오나레(suonare)가 어원으로, 처음에는 칸타타(cantata)에 상대되는 말로 쓰였다. 16세기 후반에 다성적(多聲的) 성악곡 칸초나를 기악화한 것을 칸초나 다 수오나레(canzona da suonare)라고 했는데, 이것이 칸초나소나타로 바뀌고, 이윽고 '소나타'로 불리게 되었다. 곡명으로서 사용된 것은 1561년에 출판된 고르차니의 《류트를 위한 소나타》가 최초이다.
16세기 후반 이후 소나타라는 이름은 극히 다양한 형식의 악곡에 대하여 쓰였는데, 예외를 인정하면, "소나타란 기악을 위한 독주곡 또는 실내악으로, 매우 규모가 큰 몇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지며 일반적으로 진지한 내용과 절대음악적인 구성을 가진다"고 정의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나타 [sonata] (두산백과)

 

 칸타타 :: 17세기 초엽에서 18세기 중엽까지의 바로크시대에 가장 성행했던 성악곡의 형식.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보통 독창(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중창 ·합창으로 이루어졌으나, 독창만의 칸타타도 있고 또 처음에 기악의 서곡이 붙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가사의 내용에 따라 세속(실내)칸타타와 교회칸타타로 대별된다. 칸타타는 17세기 초엽 이탈리아에서 생겨나 오페라에서 발달한 벨칸토 양식의 아리아와 서창풍(敍唱風)의 레치타티보를 도입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칸타타 [cantata] (두산백과)

 

 론도 :: 클라브시니스트 롱도*에서 태어난 음악의 병렬형식. 자주 반복되는 주요 주제부(리프레인)와 그 사이에 나타나는 삽입부(쿠플레)로 이루어진다. 고전파나 초기낭만파의 론도는 대개 쿠플레가 3개로 제한되고 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소나타 협주곡에서는 비르투오소적이고 밝은 끝악장에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피아노 작품에는 단일의 독립된 곡에도 쓰인다. 이른바 론도 소나타형식은 론도 소나타형식의 영향이 작용한 것이다. 제2쿠플레가 전개부적인 역할을 하고 마지막의 쿠플레에서 처음 쿠플레의 주요 재료를 다루어 재현부의 작용을 지니게 한 것이다.
 〔론도형식〕 ABA C ABA
[네이버 지식백과] 론도 [rondo] (파퓰러음악용어사전, 클래식음악용어사전, 2002.1.28., 삼호뮤직)

 

 푸가를 만드는 기계

 푸가를 만드는 기계

 생성 미학 :: 컴퓨터로 예술 작품을 생성

 

 범인은 당신

 프랑스에 ‘울리포(Oulipo)’라는 연구 집단이 있다. ‘울리포’란 ‘잠재된 문학을 연다(Ouvrir de Literature Potentielle)’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수학적 집합론을 이용해 새로운 문학 작품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단체다. 최근에 이들은 추리소설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입력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가, 독자를 범인으로 삼는 책은 아직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다. 범인은 독자다. 문제는 독자를 어떻게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냐인데, 아무리 머리를 사매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컴퓨터 에디드 아트

 컴퓨터 예술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컴퓨터를 단지 창작의 도구로만 이용하는 거다. 이걸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예술이란 의미에서 컴퓨터 에디드 아트(computer aided art)라고 부른다. 이 경우에 창작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예술가이고, 컴퓨터는 단지 붓이나 캔버스와 똑같은 도구에 불과하다. 컴퓨터 그래픽은 이 분야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크로체형 예술가

 이쯤 되면 크로체형 예술가가 등장할 거다. 손재주 없이 창조적 직관만 가진 예술가 말이다. 상상력만 있으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누구든지 집에서 작품을 창작하고, 그러는 가운데 잠자고 있던 자신의 창조력을 사정없이 발전시킬 수 있다.  

 사실 일생을 공장에서 보내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바흐와 피카소 뺨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났다는 사회학적 우연과, 거기서도 돈 없는 부모를 만났다는 생물학적 우연이 겹쳐, 실현할 기회를 못 찾았을 뿐. 하지만 만약 컴퓨터가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진짜로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정보 이론 모델

 원래 컴퓨터 예술이란 컴퓨터가 스스로 창작한 예술을 가리킨다. 1960년대 초 소련의 콘드라토프의 컴퓨터는 찬가(讚歌)를 생성하는 데 성공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기존의 찬가들을 분석해서 한 음 다음에 이어지는 음의 확률을 구하는 거다.

 그리고 이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음들을 이 발생 활률에 따라, 그러나 무작위로 발생시킨다. 물론 생성되는 각각의 음은 바로 앞의 음에 확률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가령 앞의 음이 ‘도’라면 함께 으뜸 화음을 이루는 ‘미’나 ‘솔’이 나올 확률이 다른 음보다는 좀 높을 거다. 

 여기서 각 음은 다음에 나올 음을 확률적으로 구속하는 고리를 이루는데, 이걸 ‘마르코프 체인’이라고 한다. 바로 앞의 ‘한’ 음과의 확률만 따지는 경우, 이를 1연 마르코프 체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다연(多連) 마르코프 체인을 이용하면, 더욱더 인간의 것과 비슷한 곳을 생성할 수가 있다. 즉 선행하는 두 개 이상의 음의 확률을 구하는 거다. 체인의 수가 늘어날수록 곡은 더 그럴듯해진다.

 하지만 체인의 수를 아무리 늘ㄹ도 엔트로피가 감소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체인의 수를 늘려도 어느 정도를 넘으면 더 이상 자연 찬가와 비슷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더욱이 마르코프 체인이 너무 늘어나면 그 결합의 확률을 구하는 건 슈퍼 컴퓨터로도 힘들다.

 

 마르코프 체인 :: 소련의 수학자 마르코프(Andrei A. Markov, 1856- 1922)가 도입한 확률 과정의 일종으로, 각 시행의 결과가 바로 앞의 시행의 결과에만 영향을 받는 일련의 확률적 시행을 말한다. 마르코프 과정(Markov process)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르코프 체인 [Markov chains] (행정학사전, 2009.1.15, 대영문화사)

 

 변형 생성 모델

 컴퓨터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사전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문장을 발생시키는 거다. 그럼 어순이 엉망인 무의미한 문장이 나올 거다. 아무리 마르코프 체인을 늘려도 엉터리 문장이 나오는 걸 막기엔 턱도 없다. 이게 정보 이론 모델의 한계이며, 여기서 노암 촘스키(A. Moam Chomsky, 1928~ )의 언어 이론을 이용한 변형 생성 모델이 나온다.

 말을 배울 때, 어린아이는 유한 수의 문장을 듣고 무한 수의 문장을 만드는 능력을 습득한다. 촘스키는 여기에 주목한다. 사실 아이들은 문장을 달달외워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은 할 수 없을 거다. 문장을 들을 때, 아이는 바탕에 깔려 있는 문장 생성의 규칙을 배운다. 일단이 생성 규칙만 파악하면, 다음부터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문장을 만들 수가 있다.

 아이의 두뇌를 컴퓨터라고 생각하자. 컴퓨터가 문장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문장을 다 입력할 필요는 없다. 유한한 수의 문장 생성 규칙만 입력하면 된다. 그럼 컴퓨터는 미리 입력된 낱말을 가지고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들어 낼 거다.

 다 됐나? 아니다. 아직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있으니까. “선생님, 순이 언니가요. 떡두꺼비를 낳았대요.” 이 문장은 문법적으론 온전하지만(well formed) 의미가 없다. 우리 컴퓨터가 맹구 수준을 넘어 서려면 의미와 무의미를 구별할 기준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컴퓨터에게 ‘상식’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자면 컴퓨터에게 엄청난 양의 ‘지식’을 입력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을 거다.

 

 예술의 문법

 이제 컴퓨터가 이럭저럭 유의미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자. 그럼 소설도 쓸 수 있을까? 아직 아니다. 소설의 ‘문법’을 입력해서, 문장들을 하나의 ‘텍스트’로 조직해야 한다.

 러시아의 프로프(V. Y. Propp)라는 사람은 100여 개의 러시아 민담을 분석해서, 그것들이 사실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말하자면 등장인물과 상황 설정만 좀 다를 뿐이지, 이야기의 골격은 같다는 거다. 가령 1) 어떤 왕이 영웅에게 매를 한 마리 준다. 매는 영웅을 싣고 이웃 나라로 간다. 2) 어떤 노인이 스텐코에게 말을 한 필 준다. 그 말은 그를 어느 이웃 나라로 싣고 간다. 3) 어느 마법사가 이반에게 배를 한 척 준다. 그 배는...

 이야기는 다 달라도 그 배후에 어떤 공통적인 모티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공통적인 구조적 골격이 바로 이야기의 생성 규칙이다. 이 규칙들만 파악해서 입력하면, 컴퓨터는 비슷한 얘기를 무한히 생성할 수 있을 거다.

 

 일리악 조곡

 문학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는 어떤 문법이 있다. 가령 소나타 형식의 음악이라면 처음에 제시부가 나와 주제를 제시하고, 다음 전개부에선 주제를 단편적으로 동기화해서 여러 가지 변형을 가하고, 마지막 재현부에선 다시 한 번 제시부의 내용이 재현된다. 물론 문법은 장르마다 다르다. 가령 론도는 소나타와 다른 문법을 갖고 있다. 이 상이한 문법들을 모두 입력하면, 컴퓨터는 여러 형식의 곡을 작고할 수가 있을 거다.

 실제로 미국의 힐러(L. A. Hiller, 1924~ )는 1960년대에 ‘일리악’이라는 컴퓨터로 <일리악 조곡>이라는 곡을 생성하는 데 성공했다.

 

 가엾은 살리에리

 생성미학은 우리가 예술에 대한 얻은 지식의 척도다. 말하자면 우리가 생성해낸 예술 작품이 진짜와 비슷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예술의 비밀에 접근한 거다. 하지만 어디까지? 만약 낭만주의자들의 말대로 예술이 법칙을 초월한 어떤 알 수 없는 힘(영감)의 산물이라면, 생성미학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열린 예술 작품

 슈톡하우젠

 슈톡하우젠의 <피아노곡 제11번>은 재미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커다란 악보에 일군의 악구들이 제시되어 있어, 연주자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마음대로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연주자는 미리 제시된 악구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곡을 일단 시작한 뒤, 계속 악구를 선택하면서 곡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렇게 연주자가 자유로이 악구들을 몽타주 할 수 있으므로, 연주할 때마다 그 곡은 상이한 악구들의 콤비네이션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연주자는 폭넓은 곡 해석의 자유를 갖게 된다.

 

 매일 지어지는 교실

 이탈리아 카라카스 대학의 건축과는 “매일 새롭게 발명해야 하는 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건 이 학과의 강의실 벽이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어, 학생들이 그날그날 벽을 움직여 건물의 내부를 새롭게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건물 구조가 어때야 하는지는 강의 내용이 결정한다. 그날 다루어지는 건축학적 문제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건물 구조는 그날 강의 내용에 가장 알맞은 형태로 다시 지어진다.

 

 세계가 되고자 한 책

 “세계는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존제한다.”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는 한 권의 ‘책(Livre)’을 쓰는 걸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

 원래 ‘책’은 움직이는 건축물이 될 예정이었다. 말하자면 ‘책’ 속의 페이지들은 정해진 순서를 갖고 있지 않아, 독자는 ‘환입(permutation)’의 규칙에 따라 마음대로 그 순서를 바꿀 수 있다. 그럼 한 권의 책에서 거의 천문학적 숫자에 가까운 조합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물론 환입을 할 때마다 매번 의미 있는 얘기가 산출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록 환입의 가능성이 통사론적으로 제한된다 하더라도,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의미한 배열순서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거다. 그렇다면 책 읽기는 마치 한 조각 한 조각퍼즐의 그림을 짜맞추어나가는 것과 비슷할 거다. 단, 이 경우에 미리 완성된 단 하나의 그림이 나오는 게 아니다. 몇 개의 퍼즐 조각에서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스테판 말라르메 :: 19세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그 상징적 시풍(詩風)은 차차 인정을 받게 되어, 젊은 예술가들이 매주 화요일 밤이면 그의 집에 찾아들었다. 그의 ‘화요회’에서 20세기 초 활약한 지드, 발레리 등이 배출되었다. 장시 《목신의 오후》(1876),《던져진 주사위》등이 있다. 프랑스 근대시의 최고봉으로 인정 받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테판 말라르메 (두산백과) 

 

 열린 예술 작품

 현대 예술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작품의 완성을 독자의 손에 맡기는 데 있다. 오늘날의 예술에선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문을 열어놓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 예술 작품은 완성품의 형태로 독자에게 배달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열려 있다. 이런 특징을 에코는 ‘개방성’이라고 부른다. 열린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일률적으로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독자는 작품 속에 들어가 작품을 스스로 완성하는 가운데, 거기서 무한히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움직이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키네틱 아트(Kinetic art)라는 흐름이 있다. 키네틱이란 원래 ‘움직임’이란 뜻이다.

 

 알렉산더 콜더 :: 미국의 조각가로 움직이는 미술인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선구자이다. "몬드리안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조각(mobile)'을 제작함으로써 조각을 대좌(臺座)와 양감에서 해방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Stirling Calder] (두산백과)

 

 열린 텍스트

 가다머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사실 모든 예술은 독자의 해석에 열려 있다. 일상의 의사소통에선 전언들은 되도록 분명하고 일의적이어야 한다. 가령 교통표지판이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된다면, 도로는 금방 카오스로 변할 거다. 하지만 예술적 전언은 대개 다의적이어서 독자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거기에 예술적 전언의 특징이 있다. 이렇게 일상적 전언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예술적 전언의 개방성을, 그는 ‘제1도의 개방성’이라 부른다.

 현대 예술은 예술적 전언의 고유한 성질인 이 제1도의 개방성을 극단적으로 확장하여 전언을 일부러 애매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제1도의 개방성을 의도적으로 극단화하는 경향을, 움베르토 에코는 ‘제2도의 개방성’이라 부른다.

 가다머가 말하는 개방성은 어디까지나 제1도의 개방성, 즉 해석의 개방성이었다. 그에게서 텍스트만큼은 ‘놀이의 규칙’으로서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비록 독자가 다양한 놀이 상황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놀이의 규칙(텍스트)만큼은 마음대로 변경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2도의 개방성에선 독자가 놀이의 규칙까지도 변경한다. 가령 슈톡하우젠이나 말라르메의 작품에서, 독자는 텍스트 자체의 구조를 자유롭게 변경한다. 여기선 텍스트 자체가 열려 있다.

 

 작품이 열리기까지

 현대 예술을 특징짓는 건 물론 제1도의 개방성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가 제2도의 개방성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다. 예술사에서 개방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물론 현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가령 우린 이런 경향을 바로크 회화의 ‘열린 양식’속에서도 볼 수 있다. 뚜렷한 윤곽을 가진 르네상스 회화와는 달리, 바로크 회화는 대상의 일부분이 어둠 속에 묻혀버리거나 윤곽선이 중간에 끊겨버리곤 해서 보는 사람이 대상의 형태에 관해 다양한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또 묘사가 역동적이어서 보는 사람이 수시로 관점을 바꾸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경향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건 상징주의 시인들, 특히 말라르메부터였다. 이때부터 예술가들은 의식적으로 작품을 열린 구조로 만들기 시작한다. 상징주의 시는 매우 애매해서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젠 하나의 작품에서 얼마나 많은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아예 예술성의 기준이 되어 버린다. 이제 예술가의 임무는 수많은 의미가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여 그걸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다.

 

 정보량의 확장

 에코는 현대 예술이 추구하는 제2도의 개방성을, ‘전언이 가질 수 있는 의미의 증가’로 규정한다. 현대 예술의 개방성을 ‘정보량의 증가’로 규정한다.

 

 열린 인간

 제임스 조이스(James A. A. Joyce, 1882~1941)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經夜)》는 원을 그리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갖고 있다. 에코는 이 작품에서 비로소 아인슈타인의 우주가 예술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망원경으로 보면 제 뒤통수가 보인다는, 무한하면서 닫힌 우주 말이다. 에코는 이 작품을 열린 예술 작품의 가장 훌륭한 예로 본다. 이 작품 속에선 한 낱말이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고 수많은 의미의 결절점이 된다.

 에코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다가치적이며 다의적인 작품의 세계를 코스모스와 카오스를 합쳐 카오스모스(chaosmos)라 부른다. 무한히 많은 뜻을 지니면서도 닫혀 있는 작품, 무한하면서도 닫혀 있는 우주. 어쨌든 카오스모스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열린 예술 작품은 현대 사회의 어떤 징후를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건 세계관과 가치관의 중심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혼란스런 상황의 반영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 원리는, 세계를 확실하고 고정된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현대 예술이 확실하고 고정된 필연성에서 도피하고 다의성을 띠는 경향은,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위기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열린 작품이 부정적 측면만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린 그 속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잇다. 그건 바로 새로운 인간 유형의 가능성이다. 자신의 삶과 인식의 도식을 혁신하는 데로 열려 있고, 자기 능력의 발전과 지평의 확대에 대해 생산적인 인간 유형 말이다. 

 

 제임스 조이스 :: 아일랜드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20세기 문학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작가이다. 37년간 망명인으로서 국외를 방랑하며 아일랜드와 고향 더블린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집필하였다. 대표작에 《더블린의 사람들》, 《율리시스》 등이 있다.
마지막 작품 《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1939)는 진일보한 실험적 작품으로서 《율리시스》에서 사용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 종횡으로 구사되었다. 오늘날의 소설은 매스컴에 용해되어 있으나, 조이스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최후의 예술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시인적 작가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임스 조이스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두산백과)

 

 연못가에서

 작품은 어디에?

 플라톤 : 작품은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걸까, 아니면 머리 ‘밖’에 있는 걸까?

 아리스 : 예술 작품 = 형상 + 질료, 형상은 질료 속에 있고, 질료는 분명히 의식 밖에 있으니까, 예술 작품은 머리 ‘밖’에 있는 게 아닐까요?

 플라톤 : 하지만 그림은 캔버스에 발라놓은 물감에 불과하다네.

 아리스 : 어쨌든 그 물감은 머리 ‘밖’에 있잖습니까.

 플라톤 : 설마 물감의 아름다움에 반한 건 아니겠지?

 자네 머리 ‘밖’에 있는 건 캔버스와 물감뿐이야. 자네가 머리 ‘속’으로 구성해 낸 거라니까.

 캔버스는 분명히 2차원의 평면일 뿐이야. 2차원의 평면에서 자넨 3차원 공간을 보고, 심지어 그 안에 들어 있는 대상에 경탄까지 하고 있잖나. 근데 자네가 경탄을 보내는 그 3차원 공간은 어디에 있나?

 캔버스는 평면일 뿐이잖아. 그러므로 공간은 자네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해야겠지.

 

 우리는 어디에

 플라톤 :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상황은 이 책 속에서 일어나는 걸까? 아니면 책을 읽는 독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걸까?

 대화를 나누는 우리가 책 속에 발라진 잉크 속에 들어 있단 얘긴가?

 말을 영어 알파벳으로 표기한다고 가정해보세. 그럼 지금까지 한글로 쓰인 우리의 대화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아리스 : 그냥 백지에 찍힌 잉크 얼룩에 불과하겠죠.

 플라톤 : 그럼 그 잉크 얼룩에도 우리의 대화가 들어 있을까?

 똑같은 잉크 얼룩인데, 어느 때엔 우리의 대화를 담고 있고, 어느 때엔 안 담고 있다?

 

 다시 우리는 어디에

 아리스 : 만약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독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거라면, 독자들이 왜 비싼 돈을 주고 이 책을 사겠습니까?

 저 연못에 비친 아름다운 불빛이 수용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거라면, 마그리트는 저 그림을 창조하는 대신에 마땅히 수용자의 머리를 창조했어야 하죠.

 

 ~S∩~O∩~(S∩O)∩~(~S∩~O)

 플라톤 : 예술 작품은 머릿‘속’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안’과 ‘밖’에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리스 : 그렇다고 작품이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는 것도 아니고...

 

 

 

4. 인간의 조건 – 헤겔의 방학

 괴델, 에셔, 바흐

 크레타의 거짓말쟁이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 에피메니데스

 참이면 거짓이 되는 이 현상은 후에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이라 불린다. 오랫동안 역설은 한갓 재미있는 말장난 정도로 취급되어왔다. 하지만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집합론을 구성하는 가운데 이 문제에 부딪힌 이후로, 이게 심각한 문제란 걸 깨달은 논리학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자기를 벤 면도날

 전통적인 미학이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 말이다. - “모든 의미 있는 명제는 분석적으로 참이거나 검증 가능해야 한다.”

 미국의 철학자 월러드 반 콰인(Willard Van Quine, 1908~2000)에 따르면, 이 논리실증주의의 근본 명제 자체가 스스로 모순된다고 한다. 즉 이 명제는 ‘삼각형은 세모’라는 명제처럼 분석적으로 참(동어반복)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얘기도 아니다. 결국 이 명제 자체가 자기 자신에 따르면 헛소리가 된다. 철학에서 헛소리를 도려내려던 이 면도날이 제일 먼저 베어야 했던 것,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악마의 고리

 악순환(Teufelskreis). 글자 그대로 옮기면 ‘악마의 고리’란 뜻이다. 

 어쩌면 악마의 고리는 인간 지성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해석학에선 아예 이 숙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생각이 나온다. 우린 의미와 지평, 전체와 부분 사이의 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 순환의 고리를 도는 가운데, 우리의 지식은 더욱더 풍부해진다. 그럼 하이데거의 말대로, 문제는 순환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순환 속에 ‘올바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괴델

 괴델은 젊은 나이에 ‘불완전성의 정리’란 걸 발표하여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이는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이론 중 하나로 손꼽힌다. ‘불완전성의 정리’의 내용은 이렇다. - “모든 정합적인 형식 체계 속에는, 그 내부에서 진위가 결정될 수 없는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형식 체계는 공리와 정리로 이루어진다. 공리란 너무나 자명해서 구태여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령 A=A처럼 말이다. 반면 공리가 아닌 모든 명제는 증명을 필요로 한다. 증명된 명제 중에서도 매우 중요해서 다른 명제의 증명에 자주 사용되는 기본적 명제를 ‘정리’라 부른다. 가령 ‘피타고라스의 정리’같은 거 말이다. 모든 형식 체계는 이렇게 ‘공리→정리→명제’의 서열로 이루어진다.

 좀더 나가보자. 여기 단 하나의 공리로 이루어진 형식 체계가 있다 하자. 이 공리에선 2개의 정리가 도출되고, 또 거기에서 다시 각각 2개의 명제가 연역된다. 그럼 1개의 공리, 2개의 정리, 4개의 명제로 이루어진 간단한 형식 체계가 탄생한다. 이 체계는 정합적, 즉 논리적으로 수미일관하다. 말하자면 4개의 명제 모두가 공리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동시에 이 체계는 완전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거느린 명제들을 증명하는 데 다른 체계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델이 그의 ‘정리’를 통해 증명한 건, 이런 체계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 체계 속의 4개의 명제 중 적어도 하나는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다. 어떠한 형식 체계도, 만약 그것이 정합적이라면,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즉, 그 안엔 진위가 결정될 수 없는 명제(헛소리)가 섞여 있기 마련이다.

 

 “두뇌는 합리적일지 모르나, 정신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 호프스태터

 

 괴델 :: 미국의 수학자·논리학자. 수학기초론이나 논리학의 방법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많은 '괴델의 정리'를 발표하였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1931년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쿠르트 괴델 (두산백과)

 

 괴델의 불완전성정리 :: 이 정리가 발표되기 이전까지 B.러셀과 A.N.화이트헤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논리학자들은 주어진 수학적 명제의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침이 있다고 믿었다. 즉, 참인 모든 명제는 증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괴델은 참이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식을 제시하여 그렇지 않음을 보였다. 괴델은 산술을 형식화한 형식체계에서 그 체계가 무모순적인 한,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문장(논리식)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괴델의 제1불완전성정리이다. 제1불완전성정리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어떠한 형식체계도 그 체계가 무모순적인 한, 그 체계 안에서 주어진 공리와 규칙들만으로는 그 일관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제2불완전성정리이다. 이 정리는 튜링 기계(Turing machine)와 처치 설정(Church thesis), 괴델의 무모순성(consistency)정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괴델의 불완전성정리 [─不完全性定理] (두산백과)

 

 에셔

 모든 정합적인 체계엔 그 체계의 기준으로 진위를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그 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증명할 수 있게 체계를 좀더 확대하면 어떨까? 가령 그 명제를 증명해줄 공리를 하나 더 도입하는 거다. 그러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새로 도입된 공리라고 어디 홀몸이겠는가? 그것 역시 자기 정리와 명제를 갖고 있을 게다. 물론 거기엔 다시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끼어 있을테고, 체계를 아무리 확장시켜도, 결국 불가능한 명제들은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우린 우리의 지식을 확실한 토대 위에 세워놓아야 한다. 만약 우리 지식 중 한 부분이라도 증명되지 않은 명제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지식 체계 전체가 불확실해 진다.

 

 로저 펜로즈의 삼각형 :: '펜로즈의 삼각형'이란 막대 세 개로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의 도형으로 3차원의 공간에서 불가능하지만 2차원의 평면에 가능한 것처럼 그려 놓은 도형이다. 
1958년 영국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 1931~ )의 삼각 막대기는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그려놓은 것인데, 삼각형의 각 부분에서는 오류를 발견할 수 없으나 실제로는 만들 수가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펜로즈의 삼각형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그리고 바흐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 체계에 도달하는 것, 논리적으로 수미일관하면서도 완전한 철학 체계를 구축하는 것, 이것은 오랫동안 철학의 이상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만약 괴델의 ‘정리’가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형식 체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식 체계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거라면(이건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진 생각은 결국 어딘가에서 악순환에 빠져 있는 셈이다.

 

 엑스 리브리스

 책 밖으로

 ‘EX LIBRIS’라는 라틴어 관용구는 “~라는 책에서”라는 뜻으로, 다른 책을 인용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라 한다. 라틴어 접두사 EX가 ‘밖으로’란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럼 ‘엑스 리브리스’는 ‘책 밖으로!’가 되기도 한다. 난 이 책에서 얘기하는 작품들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난 다만 그것들에 관한 책을 읽었을 뿐이다. 따라서 내 책은 미와 예술이 아니라, 책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과연 다른 책들이라고 미와 예술을 논하고 있을까? 십중팔구 그것들 역시 다른 책들을 보고 쓴 챇일 거다. 그럼 그 책들은... 결국 우린 책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책은 현실이 아니라 책에 대해 말할 뿐이다. 책이 책을 말한다. 과연 우리가 돌고 도는 책들의 고리를 끊고, 바깥 세계를 볼 수 있을까?

 

 신의 눈

 <그리는 손>에서 밖에 그걸 그리는 에셔의 손이 있다는 걸 기억하라. 서로를 그리는 듯이 보이는 두 손은 사실 그림 밖에 있는 에셔의 손이 그린 거다. 따라서 서로를 그리는 두 손이 만들어내는 이율배반은 한갓 가상일뿐이다! 

 헤겔은 ‘절대정신’ 속에서 주관과 객관을 통일시키려 했다.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란 한갓 그림, 즉 가상에 불과하다. 양자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뿐, 더 높은 관점에서 보면 양자는 통일되어 있다. 가령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있는 2차원의 불개미들은 ‘안’이 곧 ‘밖’이 되는 고리 속에서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3차원에 사는 우리에게 뫼비우스의 띠는 딜레마가 아니다. 띠를 한 번 꼬아서 양끝을 이어 붙이면 되니까. 마찬가지로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빠진 딜레마는 한갓 가상에 불과하다. 헤겔은 자기가 그림 절대적 관점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그가 절대적 관점을 얘기할 때, 그는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불행히도 그림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림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우린 그림 속의 존재다. ‘밖’에서 보는 건 오직 ‘신의 눈’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헤겔이 절대정신 속에서 주관과 객관을 통일하려 할 때, 그는 사실 ‘신의 눈’을 참칭(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 이름)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우리가 죽였잖은가.

 

 그림 속으로!

 하지만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는 거다. 펜 끝에서만큼은 아직 그리는 손과 그려지는 손, 즉 주관과 객관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원초적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여기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게 바로 메를로-퐁티가 나아간 길이다. 메를로-퐁티는 이 문제에 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오히려 거기에 만족하는 듯이 보인다. 그가 보기에 진리는 어떤 절대적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눈’들이 애매모호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 곳에 있었다. 애매성의 철학.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인간에게, 진리는 오히려 애매함에 있는 게 아닐까?

 

 에셔와 마그리트

 대개 에셔의 패러독스는 ‘통사론적’ 규칙을 깨는 데서 비롯된다. 문장에 비유하자면, 애초에 문법 자체가 틀린 그림이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대개 ‘의미론적’ 차원의 것이다. 말하자면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의미가 이상하다는 얘기다. 가령 ‘물고기는 다리가 둘이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올바르지만 현실에선 이상한 의미를 갖는다.

 에셔의 패러독스는 인간 사유의 문법, 즉 논리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형식’에 들어 있는 패러독스인 셈이다. 반면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사유의 내용, 즉 의미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내용’이 가진 패러독스인 셈이다. 에셔는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형식 체계에 관심이 있었고, 마그리트는 철학, 특히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심이 있었다.

 

 음운론은 음운 즉, 자음, 모음, 비분절적 음운 등을 다루는 어학 부문입니다. 음운의 성질, 음운 변동 등을 다루죠. 자음동화, 모음동화, 된소리되기 등을 다룹니다.

 통사론은 문장의 구조나 그 구성 요소들 사이의 관계 및 기능과 배열 따위를 연구하는 언어학의 한 분야를 말합니다. 문장성분, 문장의 종류 등을 다룹니다. 주어, 서술어, 주어부, 서술부, 홑문장, 겹문장 등을 다룹니다.

 형태론은 형태소의 특성과 그 배합 관계, 단어의 어형(語形) 변화 등을 다루는 문법학의 한 부분을 말합니다. 실질형태소, 형식형태소, 자립형태소, 의존형태소 또는 품사 또는 단어의 형성(단일어, 파생어, 합성어)을 다루는 분야입니다.  

 

 그림 속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아리스 :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라니, 그건 모순 아닙니까? A=~A?

 플라톤 : 하지만 ‘이것’이라는 말이 꼭 파이프를 가리킬 필요는 없지

 만약 ‘이것’이 자기 자신, 즉 ‘이것’이라는 말을 가리킨다고 해보세.

 아리스 : ‘이것’이라는 말은 파이프가 아니다.

 플라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문장은 이렇게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수가 없어. 거짓이면서 동시에 참이라.

 

 대상언어와 메타언어

 아리스 : 문제는 ‘이것’이라는 말이 애매하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를 구분하면 그런 역설을 피할 수 있죠.

 현실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을 대상언어라 하고, 다시 이 대상언어를 가리키는 말을 메타언어라 합니다.

 ceci n’est pas une piple           False (대상언어)

 /ceci/ n’est pas une piple           True (메타언어)

 역설은 여기서 ceci라는 말을 동시에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죠.

 (그려진 그림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거짓

또는

 (‘이것’이라는 말은) 파이프가 아니다 - 참

 역설은 여기서 ‘or’를 ‘and’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 겁니다.

 

 전체는 헛소리다?

 플라톤 : 우리의 지식 체계를 이루는 개개의 명제들은 다 참일지 몰라도, 그 명제들로 이루어진 체계 자체는 무의미한 헛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참인 명제들이 참인 이유는, 그게 우리가 정해놓은 어떤 진리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진리 기준 자체가 참이라는 걸 도대체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때문에 헤겔은 ‘진리는 전체’라고 했지만, 어쩜 그 반대인지도 몰라.

 말하자면, 우리의 지식 체계를 이루는 부분들은 진리이지만, 지식 체계 전체는 헛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얘길세, 이렇게 말일세.

 

    참      참                  참참                  참참참참참   참      참    

참참참참참  참            참    참                            참   참     참참

 참   참    참             참        참              참참참참참   참     참참

참     참 참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                   참참참참참   참

       참   참       참참참참참참참참참참참                    참      참

     참  참

    참    참

 

 다시 그림 속으로

 율리시즈 :: 1922년 발표된 제임스 조이스의 장편소설. 『율리시즈』는 영문학 사상 가장 독특한 작품 중 하나이다.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자면 이 소설은 스티븐 디달러스와 레오폴드 블룸이라는 두 주인공이 더블린에서 하루 동안 겪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위에 삶, 죽음, 섹스 같은 보편적인 주제부터 아일랜드의 시대 상황과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이르는 온갖 주제에 대한 “관념의 흐름”을 올려놓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또한 이 책은 율리시즈의 방황을 다룬 원조격인 호머의 『오디세이』를 수차례 인용하기까지 한다. 이런 인용은 때로는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스티븐과 블룸의 시간을 마냥 잡아먹으면서 그들의 야망과 목적을 계속 흩트려뜨리는 사소하고 지저분한 화제들을 상쇄하기 위해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은 더블린을 세밀하게 현실화하고 있지만, 사실 그 풍부한 디테일은 틀렸거나 적어도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마음의 내면 활동을 탐구하기 위한 배경으로 쓰일 뿐이며, 마음이란 것 역시 고전 철학처럼 단정하고 확실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조이스는 생각 자체가 매우 드문 길을 재현하려 하고, 인생에는 곧고 확실한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율리시즈』는 소설 쓰기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도덕 규범들이 사실 완전히 사고나 우연, 그리고 마음의 샛길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특별히 아일랜드만의 상황인지, 아니면 전 세계의 보편적인 역경인지는 확언할 수 없는 섬세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블룸이 유태인이고 그가 고향이라고 여기는 도시와 나라에서 이방인처럼 느끼고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율리시즈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2007.1.15,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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