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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미학 오디세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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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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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진중권
출판
휴머니스트
출판일
2004.03.22

 

 


 

0. 글머리에

 피라네시 :: 이탈리아의 판화가이며 건축가이다. 고대 로마의 예술에서 자극을 받아 판화와 건축으로 표출하였다.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작품으로《카르체리 Carceri》와 몰타 여자수도원 등이 있다.
메스트레 출생. 고대 로마의 폐허와 유적에 정열을 쏟아 명암(明暗)을 대비시켜 극적인 효과를 동판(銅版)에 새겼으며, 자유분방한 구상력에 따른 건축물은 신비한 몽환적(夢幻的)인 세계를 재현하였다. C.로랑(1600∼1682)의 풍경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의 낭만적인 풍경화의 패턴이 되었다. 작품은 고대 로마예술로의 단순한 복고(復古)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해석을 전개시켜 유럽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의 건축 ·장식예술, 그리고 낭만주의 문학에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카르체리 Carceri》와 《로마의 경관 Vedute di Roma》 등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며, 건축가로서는 몰타 여자수도원의 설계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반니 피라네시 [Giovanni Battista Piranesi] (두산백과)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 ::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의 측근이었던 김수온(金守溫)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부처가 나서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라는 뜻으로, 상·중·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歌詞)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 (두산백과)

 

 일본의 대사가 중추절을 맞아 서양의 외교관들을 ‘달맞이’행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자연에 대해 우리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진 이 합리주의자들이 풍류라는 말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이 이국적인 가든 파티에 나타난 서양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천체 망원경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 썰렁함이 달을 ‘관찰’할 줄만 알았지 ‘볼’줄은 모르는 어느 문명의 못 말릴 습성이다.

 조선 시대의 일이다.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의 천체 망원경을 처음 본 왕이 “그게 뭐에 쓰는 물건이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천체를 관찰하는 데에 쓰는 도구”라고 대답하자, 왕은 그 요상한 오랑캐 물건을 물리며 “태양은 역시 맨눈으로 볼 때 아름답다”고 말했다. 군주의 이 미학적 태도에서 우리는 서양과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동양의 자연관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은 그 ‘밖‘에서 관찰할 대상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그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할 분위기인 것이다.

 

 해는 달에게 빛을 주나, 달은 해에게 그림자를 준다. 가끔 일식이 일어날 때면 해는 달이 된다.

 

 카메라 옵스쿠라 :: 라틴어에서 따온 말로서 원뜻은 ‘어두운 방’이라는 뜻. 일정한 사물이나 정경의 상을 넓은 종이나 유리 등에 투사시킴으로써 그 상의 윤곽을 정확히 그려내는 데에 사용하던 기구를 말한다. 빛을 투사할 수 있는 조그만 구멍을 가진 밀폐된 방이나 상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멍을 통해 투사된 빛이 반대편 벽면에 사물의 역전된 상을 재역전시키기 위해서 흔히 거울을 사용하는데, 이럴 경우 그림자는 원물체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이며, 중세 때는 천문학자들이 이 원리를 이용하여 일식 현상을 관찰하기도 했다.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의 문헌을 보면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berti(1404~1472)가 이와 비슷한 기구를 작품 제작에 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나오며, 고우잉L. Gowing이 쓴 《베르메르》(1952)에는 베르메르가 이 기구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 상세히 분석되고 있다. 특히 18세기에는 이것이 성행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메라 옵스쿠라 [camera obscura]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1. 현대인의 세계 감정 – 사람짐의 미학

 시뮬라크르Ⅰ

 원상(이데아)-복제(현실)-복제의 복제(그림)

 플라톤 : 복제들은 그나마 이데아의 속성을 나눠갖고 있어. 하지만 복제의 복제들은 그 주제도 못된다네. 

 아리스 : 이데아의 속성이 전혀 없으면서, 마치 그걸 가진 양 흉내만 내는 복제의 복제들.

 

 시뮬라크르 :: 현실을 대체하는 모사된 이미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생생히 인식되는 복제물을 가리킴.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Deleuze)가 확립한 개념으로 포스트 구조주의의 핵심 이론 중 하나다. 이는 원래 플라톤이 정의한 개념으로 그는 이 세계를 원형(이데아), 복제물(현실), 복제의 복제물(시뮬라크르)로 정의하였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데아의 복제물인데, 복제는 언제나 원형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복제하면 할수록 원형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실재하지 않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의 개념과는 달라서,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을 가진 개체로 보았다. 
즉, 원형을 단순히 흉내낸 가짜가 아니라 원형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로 여긴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쟝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도 나온 바 있다. 여기서는 주로 대중과 미디어, 소비사회에 대한 개념으로 쓰였는데, 현대사회에서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혹은 아주 생생히 인식된다. 또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실재가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을 뜻한다.
한편 현대인들은 주로 대중매체 등에서 만들어지는 가상실재인 시뮬라크르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재현과 실재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뮬라크르 [Simulacre]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디오게네스 ::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라고도 한다. 가짜 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고향인 시노페에서 쫓겨나 아테네에 와서 안티스테네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으며,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反)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몸소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自足) 생활을 실천하였다. 노미스마(nomisma:通貨)의 개주자(改鑄者)는 노미스마(관습)의 개혁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찾아와 곁에 서서 소원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그곳을 비켜 달라고 하였다는 말은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은 “내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오게네스 [Diogenēs] (두산백과)

 

 사라진 성당

 모네의 정원 :: 1883년 모네는 북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지베르니에 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지베르니에 정착한 뒤 모네는 곧바로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여 잔디와 정원수를 심고 화려한 색채의 꽃밭을 만들었다. 이 정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모네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정원을 보여주며 기쁨을 느꼈고, 그림으로도 여러 차례 표현하였다. 현재 모네의 정원은 복구 공사를 거쳐 지베르니미술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베르니의 정원 [─庭園] (두산백과)

 

 오랑주리 미술관 :: 프랑스 파리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에 있는 미술관.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 한쪽에 자리잡아 오르세 미술관(Orsay Museum)과 센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1927년에 개관하였으며, 예술가들의 후원자이자 화상이었던 폴 기욤 (Paul Guillaume)과 기욤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인이 재혼한 건축가 장 발터(Jean Walter)가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주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클로드 모네의 대표작인 <수련> 연작 중 가장 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본래 튈르리 정원 안의 식물원이었으나 모네의 <수련>을 전시할 목적으로 1999년부터 2006년까지 6년 동안의 건물 개조공사를 한 뒤 다시 문을 열었다. 1층에는  <수련> 연작 <해질녘>과 <해뜰녁> 8점을 2개의 타원형 방 둥근 벽에 전시하고 있는데, 길게 펼쳐진 대작을 자연 채광 속에서 시간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밖에 세잔, 마티스, 모딜리아니, 피카소, 르누아르, 루소 등의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랑주리미술관 [Musee de l'orangerie] (두산백과)

 

 물의 요정

 요정이 깃들여 있다고 ‘님페아(nymphea)’. 잠을 자고 깨느라 봉오리를 접었다 편다고 수련(垂蓮). 

 가까이 다가서면 꽃은 거친 물감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보라. 모네가 남긴 것은 오직 거친 터치의 흔적을 머금은 물감 덩어리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 우리 눈에 비치는 수련은 무엇이란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수련의 허깨비, 캔버스의 사막 위에 아른아른 증발하는 수련의 신기루일 뿐이다. 모네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수련의 형상은 화가의 붓끝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서 완성된다.

 르네상스의 화가들, 가령 꽃을 브뤼겔이 그렸다면, 멀리에서 보나 가까이에서 보나 변함없이 수련일 게다. 그들은 정말로 꽃을 그렸다. 그때 그림은 자연의 모방, 꽃의 복제였다. 그럼 모네는 무엇을 그렸을까? 그가 그린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꽃이 아니다. 꽃의 시각적 인상이다. 모네는 화면 위에 현실에 존재하는 꽃을 복제한 게 아니다. 우리의 눈에 복제된 꽃의 인상을 또다시 복제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저 연꽃은 반영의 반영, 복제의 복제인 셈이다.

 

 현대인의 눈

 당신이 지금 소읍의 찻집에 앉아 저 멀리 동네 어귀로 들어오는 낯선 이를 본다고 하자. 이때 당신은 그의 모습을 또렷이 인지할 게다. 자, 이제 장면이 바뀌어 당신은 대도시의 카페에 앉아 횡단보도 맞은편의 군중들을 보고 있다. 신호가 바뀌자 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이때 당신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어떤가? 아마 뚜렷한 윤곽이 아니라 얼룩덜룩한 색덩이로 다가올 게다. 이게 도시적 지각이다. 인상주의는 이 도시적 지각의 구현이다.

 과거의 화가들은 달리는 마차 바퀴의 살을 또렷이 그려넣었다. 때문에 달리는 마차도 그 자리에 멈춰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달리는 마차 바퀴살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상주의 화가라면 마차의 바퀴살을 일일이 그려넣지 않고, 그 부분을 슬쩍 흐릴 게다. 그럼 마차는 실제로 달리는 양 속도감을 갖게 된다. 인상주의는 이런 도시적 속도의 구현이다.

 과거의 화가들은 사물을 ‘있는 대로’그렸다. 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그렸다. 과거의 화가들이 ‘객관’을 지향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관’을 지향했다. 과거의 화가들이 ‘대상’을 그렸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대인의 ‘시각’을 그리려 했다. 모네는 수련을 그린 게 아니라, 도시인의 눈에 비친 인상을 그렸다. 모네가 그린 것은 수련이 아니다. 모네는 결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모던의 지각을 그렸다.

 

 루앙 성당 앞에서

 인상주의의 신조에 따르면 색이란 반사된 빛이다. 그런데 빛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따라서 성당의 제 색을 표현하려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좇아서 여러 번 그릴 수밖에. (루앙 성당)

  과거에도 계열적인(serial) 작업을 한 화가들은 있었다. 그래서 똑같은 그림에 종종 여러 개의 버전이 있다. 가장 적확한(정확하게 맞아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다.) 표현을 얻기 위해 화가가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린 결과다. 이렇게 탄생한 버전들 사이에는 모종의 위계질서가 있다. 말하자면 그 중에서 대상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했다고 여겨지는 하나가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버전이 화가의 대표작이 되어 ‘원작’행세를 하게 된다. 

 하지만 모네의 성당들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루앙 성당의 진면목은 하나의 그림 안에 남김없이 현현(顯現)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차이의 놀이 속에, 말하자면 조금씩 달라지며 끝없이 이어지는 저 계열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현실의 사라짐

 그림을 인쇄하려면 색 분해를 해야 한다. 총천연색의 그림은 빨강, 파랑, 노랑, 그리고 그림에 명암을 줄 검정, 네 장의 필름으로 분해된다. 이것들을 인쇄기에 걸어놓고 순차적으로 네 번 인쇄하면 비로소 종이 위에 총천연색의 그림을 얻는 것이다.

 그림들 속에서 견고한 물성(物性)은 느껴지지 않는다. 성당은 돌이라는 석재의 견고함을 잃어버리고 마치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처럼 어른거릴 뿐이다. 저것은 성당이 아니라 성당의 인상이다. 물(物) 자체가 아니라 화가의 눈에 맺힌 인상일 뿐이다. 성당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이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을 괴롭힌 문제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인상주의가 사물을 가라지게 하는 것을 못 견뎌 했다. 모네의 작품 속에서 돌로 지어진 견고한 성당은 물성을 잃어버린 채 ‘차이’의 놀이들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원본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의 놀이가 들어선다. 세계는 더 이상 단 하나의 그림 안에 한꺼번에 재현되지 않는다. 현실은 사라졌다.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은 사라졌다. 이제 세계는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무한히 이어지는 시뮬라크르의 놀이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게 현실이며, 이게 현대의 지각이다. 모네는 이 현대인의 눈을 가지고 시뮬라크르의 놀이 속으로 현실의 견고함을 사라지게 한 최초의 화가다.

 

 조지 가모프 :: 러시아 출신의 이론물리학자.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수학.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 워싱턴 대학, 콜로라도대학 교수를 지내며 미국에 영주했다. 물리, 우주, 생물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썼으며, 과학의 보급을 진력함으로써 유네스코의 칼리건 상을 받았다(1956년). 양자역학에 의하면 에너지가 낮은 입자가 퍼텐셜 장벽을 넘어서는 것을 제창(터널 효과), α 붕괴를 설명했으며, 또한 별 속에서의 열핵반응론을 구축했다. 우주의 배경복사의 존재를 예언하기도 했으며(1946년),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시우주 초기에서의 원자핵 생성(αβr 이론, 1948년) 등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과학 전반에 폭넓은 흥미를 지녔으며, DNA암호에 대한 고찰 등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모프 [George Gamow] (천문학 작은사전, 2002.6.20, 가람기획) 

 

 알렙

 세속적 천지창조

 조지 가모프(George Gamow, 1904~1968)라는 이름의 러시아 태생 미국 천체 물리학자가 내놓은 ‘빅뱅‘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200억 년 전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응축된 하나의 점에서 탄생했다. 

 거대한 우주를 토해놓은 그 점을 ‘우주의 특이점’이라 부른다. 어떤 이론에 따르면 최초의 폭발이 일어난 단 1초 사이에 우주의 크기가 10억×10억×10억×10억 배로 팽창했다고 한다. 

 

 검은 사각형

 과거 예술이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면, 현대 예술은 세계를 빨아들여 블랙홀이 되려는 모양이다. 1915년에 열린 어느 전시회에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는 이제까지 없었던 하나의 극단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화면 위에서 모든 것을 추방하고, 하얀 바탕 위에 달랑 검은 사각형 하나만 그려 넣었던 것이다. 세잔 이후에 시작된 구상의 사라짐이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갈 수가 없는 하나의 절대적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때부터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은 서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아이콘으로 통하게 된다.

 화면에 가시적 대상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비대상적 세계’, 즉 아무 대상도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자신의 예술적 실천을 그는 ‘절대주의(supremarisme)’라 불렀다.

 절대주의는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처럼 상을 통해 모든 대상의 바탕에 깔려 있는 근원적 형태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또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처럼 자유로운 구성을 통해 형과 색의 미적 유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회화에서 정신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레비치가 ‘절대주의적 형태’라 부른 사각형, 동그라미, 십자가는 복잡한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하여 얻어낸 시각적 추상이 아니며, 형과 색의 자유로운 미적 구성과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저 무거운 검은 침묵으로써 그저 대상이 사라진 근원적인 무(無)의 상태를 가리킬 뿐이다.

 

 형상의 금욕주의

 회화에서 대상성이 사라지면서 전통적인 ‘진리미학’은 힘을 잃게 된다. 고전 회화와 달리 현대 회화에는 도대체 ‘내용’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대상성이 사라진 추상회화 앞에서 사람들이 의존할 유일한 이론은 칸트의 ‘형식미학’이었다. 이제 예술의 본질을 내용의 올바름이 아니라 형식의 아름다움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추상이 ‘절대주의‘의 단계에 도달하면, 그때는 형식미학도 더 이상 우리를 돕지 못한다. 형과 색의 자유로운 유희도 저 검은 사각형 안에서는 갑자기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즐거움을 준다. 추상이든 구상이든 미적 쾌감을 주는 한, 여전히 미적 쾌락주의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검은 도형을 보라. 거기 어느 구석에 아름다움이 있단 말인가. 형을 보는 쾌감, 색이 주는 쾌감은 외려 금지된 것처럼 보인다.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은 미적 쾌감을 주지 않는다. 거기서 우리는 외려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미적 금욕주의다. 감각적 쾌락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정신적 열락(delight)이다.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지향한다.

 《구약성서》<출애굽기>에서 신은 인간들에게 십계명을 내려 명하기를, 이 세상의 어느 것이든 눈에 보이는 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헬라의 신들은 아름다운 형태의 유한성 속에 갇혀 기꺼이 조각이 되었으나, 히브리의 신은 자신의 무한성을 유한한 형태에 가두어놓기를 거부했다. 절대주의는 이 ‘형상금지(Bildverbot)’의 세속적 형태다. 비트겐슈타인(Lugwig Wittgenstein, 1889~1951)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레비치의 사각형은 고귀한 침묵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집어삼키며, 그 검은색으로서 세계의 죽음을 애도한다.

 

 있음과 없음

 쇼펜하우어(Arther Schopenhauer, 1788~1860)에 따르면 원래 세상에는 ‘하나’의 거대한 의지가 있었다. 이 의지가 개별화 원리에 따라 갈라져 우리가 보는 이 표상의 세계가 탄생한다. ‘의지’라는 근원적 존재에서 갈라져 나온 파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들은 조그만 ‘의지’의 파편들, 뭔가 하려고 하는 조그만 욕망의 조각들이다. 각자 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기에 개별 의지들은 서로 부딪혀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얽히고설킨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표상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부른다. 우리가 저 근원적 의지 속에서 하나였을 때, 우리들 사이에는 갈등이 없었다. 그때는 ‘나’도 없었고, ‘너’도 없었고, ‘세계’도 없었다.

 일자(一者)가 개별 의지들로 갈라질 때 표상의 세계가 탄생하고, 의지들의 차이가 지워질 때 그 세계는 한때 그것을 뱉어놓았던 존재의 영점(零點)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차이들을 낳을 때에 세계가 탄생하고, 차이들을 지울 때 세계는 사라진다. 말레비티는 사각형으로 모든 형의 차이를 지우고, 검은 색으로 모든 색의 차이를 무효로 만든다. 이렇게 모든 피조물들의 차이를 지울 때 그의 캔버스는 세계 전체를 들이마시는 블랙홀이 된다.

 

 감옥

 참을 말하는 것은 간단하나, 거짓을 참으로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고양이 없는 웃음

 사라짐의 미학

 루앙 성당은 사라져버렸다. 묵직한 돌로 된 성당이 필름을 닮은 단색의 웃음들 속으로 흩어져버렸다. 이것이 현실을 사라지게 하는 모네의 방식이다. 현실이 해체된 자리에 남은 것은? 서로 조금씩 차이를 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시뮬라크르들. 모네에게서 성당의 정체성(identity)은 수많은 ‘차이들(differences)’ 속으로 해체된다.

 말레비치는 다르다. 그는 거꾸로 모든 차이들을 지움으로써 세계를 사라지게 한다. 이 경우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검은 사각형 외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텅 빈 캔버스다. 세상에 존재하는 형태들의 차이는 사라져 사각형으로 환원되고, 그 형태들이 가진 다양한 색의 차이 역시 사라져 검은색으로 돌아간다.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속에서 사물들의 차이는 사라지고, 세계 전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우주의 특이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말레비치에게서 차이들(difference)은 무차별적인 동일성(identity)으로 돌아간다.

 

 매체와 숭고

 모네는 세계의 동일성(identity)을 물그림자 같은 환영들(differences)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했다. 말레비치는 세계의 그림을, 말하자면 캔버스 위에서 대상들의 재현을 사라지게 했다. 이로써 자연의 모방, 세계의 거울, 현실의 재현이라는 고전 회화의 원리는 무너진다.

 이것이 현대인의 세계 감정이다. 19세기 카메라가 발명됨으로써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사진이 떠맡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사물의 영원한 상을 담은 회화가 아니라 순간적 인상을 낚아챈 사진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본다.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게 넘겨준 회화는 이제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재현(representation)할 의무에[서 벗어나, 점점 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근원적 ‘존재’를 현시(presentation)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클레(Paul Klee, 1879~1940)의 말대로 “현대 회화는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20세기 예술은 “형상금지(정신화)와 영상의 홍수(기술복제)라는 양면으로부터 협공”당하고 있다.

 

 색면추상 :: 1940년대와 50년대에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한 흐름. 색면추상화가들은 전쟁의 허무감을 극복하기위해 실존적 입장에서 좀더 근원적인 상징물이 필요함을 자각하여 우연과 임의보다는 그들의 철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단순하고 강렬한 색면 회화를 추구한다. 
색면회화는 원시미술과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강렬하고 단순한 색채를 통하여 그들이 도달하고자한 숭고의 이미지를 넓은 색면 위에 나타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색면추상 [Color-Field Abstract]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모노크롬 :: 다색화(polychrom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일한 색조를 명도와 채도에만 변화를 주어 그린 단색화. 색채뿐만 아니라 내용, 주제, 선, 형태를 거부한 모노크롬은 구성의 질서를 추구하는 전통적 미술 개념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어 전체주의적(wholistic)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노크롬 [monochrome]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세계의 웃음

 더 이상 우리는 세계를 맨눈으로 보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대부분 신문, 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세계는 이제 육안으로 본 게 아니라 기술복제된 영상들로 구성된다.

 

 존재와 무

 소리와 영상과 화상의 차이를 지우면 문자로 된 명령어들이 나타난다. 바로 이것이 모니터 위에 소리와 영상의 환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명령어들은 다양한 기호와 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의 차이도 지우자. 그 문자들의 바탕을 이루는 ASCⅡ 코드는 0과 1의 디지털 코드로 이루어진다. 결국 모니터 위의 그 근사한 환영은 0과 1의 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1비트짜리 정보들의 조합이 세계의 환영을 만들어낸 것이다. 등의 점멸(點滅). 하양과 검정. 말레비치의 작품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컴퓨터 모니터는 ‘검은 바탕 위의 흰 사각형’이다.

 

 

 

2. 근대에서 탈근대로 – 모던 타임스

 창조의 언어

 에쉬(불), 마임(물), 루아흐(공기), 아파르(흙)

 

 세계의 책

 야훼는 오직 ‘말’로써 천지를 창조하지 않으셨던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세기> 1장 3절)

 <창세기>는 거대한 책을 쓰는 과정이다. “빛이 있으라.” 먼저 불을 켜고, 하늘과 땅을 갈라 책을 펼친다. 이어 그 페이지 위에 세계의 저자가 날짐승, 들짐승, 물짐승, 그리고 산천초목을 적어 넣는다. 얼마나 멋진가? 신의 피조물은 원래 ‘말’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본디 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글자가 우리의 입에서 나와 물질로 응결된 음성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신의 입에서 밖으로 나와 물질로 기록된 ‘말’이다.

 말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게 실은 말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 안에 언어적 본질을 갖고 있어, 아득한 옛날에는 소리 없는 자연도 그것에 힘입어 인간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리고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그 소리 없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합리적 사고를 하게 되면서, 인류는 소리 없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자연은 말 못하는 죽은 대상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주체’ 자연은 ’객체‘아 된다. 인간은 1인칭(나), 사물은 3인칭(그것)이 된다. 이렇게 양자는 지배-피지배의 관계에 놓인다. 이게 바로 ’근대’라는 이름의 문명이다.

 

 아담의 언어

 신은 흙으로 빚어 만든 자식에게 당신이 지은 책 속의 사물들을 명명하게 하셨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세기> 2장 19절) 이로써 인간의 언어가 탄생한다.

 인간의 언어는 이름하는 언어(namensprache)다. 사물은 목소리가 없기에, 인간이 대신 그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는 바로 이 체험을 가리킨다.

 유년기 인류는 자연을 쓰고 버리는 도구로 보지 않았다. 말 못하는 자연에서 언어적 본질을 보고, 그것과 평등하게 소통하려 했다.

 

 바벨의 언어

 바벨탑 이전의 언어는 우리 것과 달라, 그 낱말만 들으면 사물의 본질이 저절로 떠올랐다. 애초에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고 음성에 사물의 본질을 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벨탑을 쌓은 죄로 인간은 아담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언어는 더 이상 이름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기호가 되어버린다. ‘자의적’이라는 말은 ‘제멋대로’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바벨의 언어는 제멋대로 붙인 딱지이기에, 그 음성을 들어도 그 안에 사물의 본질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담의 언어에서는 음성과 사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있어,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물의 참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진리는 직관적이었다. 하지만 바벨의 언어는 다르다. 여기서 이름과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그러니 이름을 아무리 들어도 사물의 본질이 보일 리 없다. 이 언어는 ‘주어(S) + 술어(P)’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주어(=이름)만으로는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기에, 그것을 여러 가지 술어로 보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진리도 주어 + 서술어의 형태로만 주어진다. 이를 철학에서는 ‘명제’라 부른다.

 

 침묵하는 자연

 바벨의 언어는 사물의 고유성을 지우고 그것을 획일적인 개념의 감옥에 넣어 분류한다. 개념적 판단에 의존할수록 개별자의 고유성을 보는 우리의 ‘직관’ 능력도 사라진다.

 프레이저(James Frazer, 1854~1941)의 《황금가지》에 따르면 유년기의 인류는 추수를 할 때 곡식이 낫에 베여 쓰러지며 지르는 비명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오래전에 이 미메시스(mimesis)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자연을 말 못하는 사물로 간주하자, 자연도 우리에게 말 걸어오기를 멈추었다. 그리하여 “그 모든 애도 속에서 자연은 말이 없으려고 한다.”

 

 미메시스 :: 모방이라는 뜻. 플라톤은 감성계의 개별적 사물은 참된 실재인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하고 이데아보다 낮은 차원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예술도 모방으로 이해하여 이데아의 영상이라고 하고 감성계의 모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예술을 멸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술을 모방이라고 하였지만, 언어, 리듬 등을 매개로 하여 모방을 하는 예술(서사시, 서정시, 비극, 희극, 무용, 음악 등)은 '성격이나 정서나 행위', 요컨대 인간의 마음의 내부를 모방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사태를 재현하는 경우에도 역사와는 달리 '개연적으로든지 필연적으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개별성은 보편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예술의 멸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모방하는 것과 모방된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서 예술의 유래를 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메시스 [mimēsis]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닮기와 되기

 합리적 사유에는 이렇게 자연이 말 못하는 ‘객체(=대상)’으로 여겨진다. 합리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철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표상’하고, 예술은 자연을 대상으로서 ‘재현’한다. 그리하여 학문은 ‘자연의 거울’,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된다. 이게 근대 철학이며, 근대 예술문화다.

 우리는 자연이란 ‘자원의 보고’라 배웠다. 한마디로 인간이 맘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재료들의 창고라는 얘기다. 그런 문명의 폐해를 우리는 시커멓게 죽어가는 자연 속에서 보고 있다. 옛사람들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돌 한 조각, 벌레 한 마리도 대화의 상대로 여겼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까지도 그들은 영혼을 부여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던가? 거꾸로 영혼이 있는 생명가지도 사물화(事物化)하고 사물화(死物化)하여, 결국 사물화(私物化)하지 않는가. 이게 타락한 바벨의 언어로 만든 자본주의 문명이다.

 

 모방에서 미메시스로

 아담의 언어를 되찾을 수는 없을가? 놀랍게도 이 시대에도 축복받은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디에? 예술 속에. 

 마티스, 클레, 칸딘스키의 작품이 어디 구체적인 대상을 모방하고 있던가?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은 보편적으로 이해가 된다. 왜? 미메시스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물의 외양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아담이 사물의 언어를 인간의 음성으로 옮기듯이, 그들은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언어적 본질을 듣고, 그것을 회화의 언어로 옮겨놓았을 뿐이다. 아담의 언어에서 낱말과 사물이 ‘보이지 않는 유사성’으로 묶여 있듯이, 이들의 작품에서 형상은 사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으로 묶인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이에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어느 유명한 영화배우에게 들은 얘기다. 언젠가 그는 미국의 연기 스쿨에서 주최한 워크숍에 참가했다. 그때 선생이 그에게 ‘파도’를 연기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이윽고 두 손으로 파도가 출렁거리는 모습을 그렸다. 파도의 외양을 ‘모방(재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 온 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은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사지를 뒤틀며 온몸으로 연기했다. 파도를 모방하는 게 아니라 아예 파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미메시스’다.

 

 골렘의 반란

 오래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는 민족이 위험에 처하면 골렘이라는 인조인간이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하임 블로흐(Hajim Bloch)의 《골렘의 창조》에서 골렘은 유대인들을 위험에서 지켜주고 나서 다소곳이 흙으로 돌아간다. 단지 한 번 랍비 뢰우가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잊고 자리를 비웠을 때, 뭘 할지 몰라서 가벼운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을 뿐이다. 골렘이 프랑켄슈타인처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사람을 해치는 괴물로 묘사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이렇게 골렘이 위험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기독교적 해석을 통해서라고 한다. 하긴, 골렘을 창조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감히 신의 창조를 흉내 내는 불경의 죄가 아닌가.

 골렘에 대한 신학적 불안감은 기술문명에 대한 현대인들의 불안감을 반영한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미쳐 날뛰는 골렘은 인간에 대한 로봇들의 반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술의 반란을 상징한다. 바벨탑을 쌓아 신에게 도전하려는 인간들을 벌하셨듯이, 그 반란은 골렘을 만들어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들에게 내리는 신의 형벌일지도 모른다. 말씀으로 창조를 하는 것은 오로지 신에게만 있을 뿐, 인간에게 허용된 것은 오로지 이름하는 것뿐이다.

 

 벤야민 :: 유대계의 독일 평론가. 보들레르, 프루스트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한편, 1925년부터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주요 저서로 《계몽》(1961), 《역사철학의 테제》 등이 있다.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좌익 학생운동을 하였고 나중에 시오니즘운동에 관계하였으며 형이상학 요소를 사적 유물론과 결합시킨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와 교류했던 학자로 아도르노, 블로치, 브레히트 등이 있다.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제출한 논문은 <독일 낭만주의에서 예술비평 개념>(1920)이다. 그리고 대학교수 자격 취득을 위한 박사 학위 논문 <독일 비가극의 기원: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1928)이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거부되자 교수를 단념하고 문필생활로 들어갔다. 보들레르, 프루스트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한편, 1925년부터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매우 개성적인 그의 사상은 당시의 현상학(現象學)과 신(新)헤겔주의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의 유저(遺著)인 《역사철학의 테제》에는 종말론적 역사관이 보인다. 나치스에게 쫓겨 망명 도중 자살하였다. 저서로 《괴테의 친화력》(1924~1925)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1936) 《계몽》(1961)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두산백과)

 

 

 에셔의 건물은 처음 볼 때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그는 자기가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지 의식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피라네시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작품은 첫눈에는 얼마든지 가능해 보인다. 그는 저 상상의 감옥이 실제로는 건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되도록 감추려 한다.

 

 토라

 토라 (torāh) :: 유대교에서, ‘율법’을 이르는 말.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용어이다.

 

 기원전 3세기경. 헬레니즘 제국의 유대인들은 벌써 헬라인이 되었다. 그들에게 히브리어는 이미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토라’를 못 읽는데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 위기를 맞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토라’를 헬라어로 번역하기로 하고, 프톨레미 3세에게 도움을 청한다.

 왕의 사신은 유대인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여섯 명의 현자를 선출해, 이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온다. 이들의 지혜를 시험해보고 만족한 프톨레미 3세는 파로스 섬에 건물을 짓고, 그 집의 일흔 두 칸 방에 이들을 들여보내 각자 ‘토라’를 번역하라고 명한다. 약속한 72일이 지나 이들이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이 들고 나온 72개의 번역이 놀랍게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했던 것이다.

 

 최종 권위

 왜 이런 전설이 필요했을까? 번역에 원본의 신성함을 주려고 그랬을 게다. 72명이 따로 번역한 게 글자 하나 틀리지 않았다면, 이는 인간의 번역이 아니라 신의 번역이다. 신의 염감으로 씌여진 책이 신의 영감으로 옮겨졌다. 성령으로 씌어진 책을 성령으로 옮겼다면, 결국 번역이 곧 원전이요, 사본이 곧 원본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리하여 헬라어 성경은 이 전설에 힘입어 히브리어 원전과 똑같은 ‘최종 권위’를 누리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그리스 정교회는 이 ‘70인역’을 사용한다.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70인역은 권위를 의심받기 시작한다. 시중에는 벌써 라틴어 번역들이 어지럽게 떠돌았으나 대개 헬라어 성경을 중역한 것들이었다. 교회로부터 통일된 라틴역을 의뢰받은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347?~419/420)는 직접 히브리어 원전을 대본으로 삼는다. 교부들은 반발했다. 70인역을 읽고 개종한 이들이라, 그것의 오류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불가타 성서’는 곧 로마 교황청의 유일한 성경으로 최종 권위를 인정받는다.

 다시 천 년의 세월이 흘러, 독일의 사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한다. 교황청을 불신하는 그가 불가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할 리 없었다. 라틴어 성경을 제쳐두고 그는 히브리어 구약 성서와 헬라어 신약 성서를 번역의 대본으로 삼는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루터 성경’. 이후 여기저기에서 유럽의 각국어로 번역된 성경들이 나타난다. 과거에 성경해석의 권리는 로마 교회가 독점하고 있었다. 지방어 성서들은 이 최종 권위를 간단히 해체해버렸다. 권위를 잃은 교황청은 권력도 잃게 된다.

 

 불가타 성서 :: 라틴어로 번역된 성서. 382년 교황 다마소의 명으로 성 히에로니무스가 편찬하였다. 복음서는 384년에 마쳤고, 신약 전체는 386년경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Chapman의 설). 그리고 구약까지 포함해서 완성한 것은 404년이다. 근본 목적은 재래의 라틴어역 성서의 원본에 차질이 심하여 이것을 통일하고 개정하자는 데 있었다. 구약 원본을 라틴어로 개역함에 있어서, 그는 《시편》부터 착수하였다.
초기 교정본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고 주로 70인역(LXX)에 의존했다. 그러다 제2교정본(Gallican Psalter)에서는 전적인 개역을 시도하였다. 그의 헤브라이어 연구가 성장하면서 종래의 70인역에 의존하던 것을 지양하고 헤브라이 원전에서 직접 개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15년간의 노력으로 구약 전체를 개역했는데, 이것은 헤브라이 원전에서 직접 옮긴 것으로, 여기에 수록된 《시편》도 제3교정본(Hebrew Psalter)이 포함되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의 성서개역사업을 과소 평가하였으나, 중세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최초의 인쇄판이 1456년에 나왔는데, 이것을 《마자랭 성서 Mazarin Bible》라고 불렀다.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개정을 제의한 바 있었으나, 학자들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1590년 교황 식스토 5세의 주관하에 개정본이 나왔고, 1592년 클레멘스 8세에 의하여 다시 개정본이 나오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표준성서로 공인되었다. 1908년 비오 10세는 새로운 개역을 지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가타성서 [Vulgata, ─聖書] (두산백과)

 

 번역의 전쟁

 랍비들은 원래 ‘토라’의 번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헬레니즘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고, “헬라어 외에는 번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것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다시 라틴어 이외의 번역을 금했다. 하지만 이 금기를 깨고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17세기에 이르면 꽤 권위 있는 영어 번역본도 등장한다. 그렇게 번역된 성경들은 저마다 자신만이 원본 성서와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성경의 최종 권위가 곧 교회와 세속에서 최고 권력을 의미했기 때문이리라.

 번역본들 중 가장 권위 있는 것은 어느 것인가? 당연히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리라. 그 기준이 되는 원본은 무엇인가? 히브리어로 된 ‘맛소라 성경’이라고 한다. 히에로니무스가 왜 헬라어 70인역에 만족하지 못했겠는가. 맛소라 성경과 불일치를 드러내는 부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자들은 로마교회의 불가타 성서를 버리고 어디로 돌아갔던가. 역시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이었다. 이렇게 성스런 진리는 히브리어 원전 안에 있다. 사본에 최종 권위를 주는 것은 이 맛소라 원본과의 일치 여부이다.

 

 원본과 사본

 그 많은 사본의 홍수들 속에서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크게 맛소라 성경, 사마리아 오경, 70인역 성경의 세 흐름을 구별한다. 헬라어 번역도 히브리어 원전과 동등한 자격을 갖는 원본이라는 얘기다. 심지어 예수의 사도들도 구약 성서를 인용할 때 헬라어 70인역을 사용했다. 한마디로 구약 성서의 번역이 신약 성서의 원전이 된 것이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모든 사본의 근원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왜? 성서는 처음부터 하나의 원전이 아니라 다양환 사본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사본들은 1세기경부터 서서히 통일성을 띠기 시작해, 1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로 완벽한 일치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원본에서 사본이 나온 게 아니다. 사본에서 원본이 나온 거다. 하나의 원본을 베껴 다양한 사본들을 얻은 게 아니다. 다양한 사본들을 정제하여 하나의 원본을 얻어낸 거다. 그렇게 사본을 통해 얻은 원본이 그저 ‘맛소라 성경’판본에 가장 가까웠을 뿐이다. 모세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단 ‘하나’의 원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성과 차이

 벤야민은 언어의 타락을 그저 신의 형벌로 보지는 않았다. 바벨의 언어들로 갈라졌다고 근원적인 언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변했을 뿐이다. 타락 이후에 근원적인 언어는 더 이상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수많은 바벨의 언어들 여지저기에 제 흔적을 파편처럼 흩어놓는다. 따라서 한 낱말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려면,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그 낱말의 여러 역어(譯語)들을 함께 모아야 한다. 그러면 서로 차이가 나는 역어들의 파편 속에서 불현 듯 그 낱말의 근원적 의미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바벨의 낱말들은 그 어느 것도 저 홀로 저 신적 의미를 온전히 모시지 못한다. 그럼 신이 발화한 낱말의 근원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차이’ 속에 있다. 그것은 저 바벨의 시뮬라크르들 속에 파편들처럼 흩어져, 그들 사이의 차이 속에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 낸다.

 유대인들의 레헴, 그리스인들의 아르토스, 로마인들의 파니스, 독일인의 브로트. 같은 밀가루로 만들었어도 그 모양이 서로 다를 것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그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떡’. 얼마나 다른가? 맛이나 모양만 다른 게 아니다. 그 문화 속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도 저마다 다를 게다. 이 모든 차이들의 총체. 저 신적 낱말의 근원적 의미는 바로 그 속에서 번뜩이는 것이다. 번역이 의미의 손실을 가져오는 게 아니다. 외려 다양한 번역 속에서만 비로소 우리는 저 근원적 의미로 상승할 수 있다.

 

 결코 씌어지지 않은 것

 사물은 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언어의 타락은 사물의 타락이다. 이 타락에서 사물을 구하려면 아담의 언어를 되살려야 한다. 침묵하는 사물들 속에서 저 근원적 언어의 흔적을 다시 보고, 그 이름을 다시 불러주어야 한다. 사물은 문자가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때문에 글자처럼 읽을 수가 있다. 이렇게 “결코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는” 것이 벤야민의 과제다. 그는 사물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듣고 그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것을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하려 한다. 이것이 이른바 ‘구제비평’이다.

 현대 예술에는 ‘형식’만 남았다. 내용이 없기에 예술은 말을 잃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언어적 본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평은 ‘형식’ 속에서 언어적 본질을 보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옮겨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구제한다. 이렇게 비평은 아담의 눈과 귀가 되어 말을 잃은 예술에 말을 되돌려준다. 말을 잃은 현대 예술은 우리에게 불현 듯 자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어떤 ‘깨달음’을 준다.

 번역을 통해 “신의 말씀의 궁극적 명료함”으로 상승하듯이, 비평 역시 사물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옮김으로써 근원으로 상승한다.

 

 신의 글

 창조의 말씀이 있고, 그것이 사물 속에 흩어져 내린다. 그 파편들을 별자리를 짜듯이 배열하고, 그로써 결코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재난에서 세계를 구원한다.

 

 진리의 신전

 존재 사건

 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했는가? 그 꽃이 제아무리 아름다운들 불과 며칠 수엔 초라하게 시들어버릴 것이다. 얼마나 허무한가. 저 빛나는 아름다움의 순간을 붙잡아둘 수는 없을까? 왜 없겠는가.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 꽃을 그림으로 옮기면, 그 아름다움은 영원에 도달하게 되니까.

 하지만 정말로 한 송이 꽃을 위해 세상의 시간이 멈추는 경우가 있다. 어느 시인이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그만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갇혔다. 그때 그는 감옥 창문 쇠창살 아래에 핀 자그만 들꽃을 보고, 그 생명의 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충격과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 꽃의 모양과 색깔을 즐길 때, 우리는 그 꽃을 ‘존재자’로 대하는 것이다. 반면 시인의 체험은 분명 꽃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를 전율에 빠뜨린 것은 도대체 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바로 ‘존재’의 체험이다. 과거의 예술은 존재자를 모방하려 했다. 하지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모방이나 재현에 있는 게 아니다. 예술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사건을 일으키는 데에 있다. 즉 모든 존재자의 아래에 묻혀 잊혀진 존재의 체험을 일으켜, 우리를 존재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에 있다.

 

 존재망각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자기 “사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린” 어떤 웃음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 웃음은 보르헤스의 텍스트에서 나온다. 이 눈먼 작가가 《중국의 한 백과사전(cierta enciclopedia china)》을 인용하는 대목이다.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 황제에 속하는 동물, (b) 향료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c) 사육 동물, (d) 젖을 빠는 돼지, (e) 인어, (f) 전설상의 동물, (g) 주인 없는 개, (h)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 광폭한 동물, (j) 셀 수 없는 동물, (k) 낙타털같이 미세한 붓으로 그릴 수 있는 동물, (l) 그 밖의 동물, (m) 물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n) 멀리서 볼 때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

 

 재현에서 현시로

 고흐 <구두>의 진리가 기껏 ‘이것은 구두다‘라는 데에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게다. 그 작품은 적어도 하이데거에게는 어떤 장(場)을 열어주었다. 이때 작품과 철학자 사이의 공간(space)은 어떤 특별한 장소(place)로 변한다. 이렇게 “작품 앞에서 우리는 통상 있던 곳이 아닌 어떤 다른 데에 있게 된다.” 그 순간 구두 역시 통상 보아 오던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으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저 작품 앞에서 우리는 구두를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로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감추어지고 잊혀졌던 구두의 진정한 의미. 그게 작품 앞에서 불현 듯 열리는 체험. 하이데거는 이를 구두라는 도구의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이라 불렀다. 고흐 작품 앞에서 구두를 바라보는 우리의 일상적 시각은 깨지고,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자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존재체험, 이런 존재 사건을 일으키는 게 예술 작품의 본질이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존재’의 현시(presentation)에 있다.

 

 알레테이아

 여기 낡은 ‘칼’이 하나 있다 하자. 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그 칼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걸로 물건을 자르기도 한다. 이게 칼을 하나의 존재자로 대하는 우리의 통상적인 태도다. 하지만 그 칼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면 거기서 존재체험을 할 수도 있다. 즉 익숙함 아래로 감추어졌던 사실이 불쑥 드러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칼의 재질을 통해 그게 어느 시대에 속하며, 문양을 통해 어느 문화에 속하며, 나아가 장식을 통해 당시의 사회 구조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칼’이라는 도구 하나로 그것이 속한 문화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다.

 ‘도구’는 그저 눈앞에 달랑 놓인 물건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다가, 볼 줄 하는 자의 눈앞에 그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감추어진 것, 평소에 우리에게 망각된 것을, 에술 작품은 불현득 우리 눈앞에 열어 보여준다. 이렇게 작품의 진리는 개시(開示)의 진리, 즉 은폐(lethe)를 들춰내고(a), 망각(lethe)을 일깨우는(a) 탈은폐(aletheia)로서의 진리다.

 작품은 제 앞의 공간을 어떤 특별한 장소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문득 어떤 다른 곳에 있게 된다. 그때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나타난다. 사물을 보는 일상적 시각이 무효가 되면, 이대 감추어졌던 사물의 진정한 의미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구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고흐의 작품 속에서, 구두는 그저 신고 다니다가 버리는 물건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것은 촌 아낙네가 밟고 다니던 농촌의 대지와, 그 위에 세워진 농민들의 삶의 세계를 품고 있다가 불현 듯 우리 눈앞에 열어 보여준다.

 

 세계의 개시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이는 현대 예술만이 아니라 실은 모든 예술에 해당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할 때조차 예술은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게 된다. 가령 터너(J. M. E. Turner, 1775~ 1851)의 풍경화를 생각해 보라. 터너는 눈에 보이는 안개를 재현함으로써 동시에 그때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안개의 아름다움을 보게 했다. 이렇게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 그뿐인가? 그 아름다움을 얻게 되자, 거추장스럽기만 했던 안개가 영국인들 삶에 비로소 참되게 자리잡는다. 이렇게 예술은 없던 것을 ‘있게 한다’.

 예술은 재현이 아니다. 진리는 모델=그림의 ‘일치’가 아니다. 진리는 더 근원적인 것이다. 예술의 진리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는’ 개시이며,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정초(定礎)다.

 신상은 그 어떤 것의 모방도 아니다. 그리스인들은 먼저 신이 있기에 그것을 모방해 신상을 만든 게 아니다. 그들은 신상을 만듦으로써 비로소 신을 ‘있게 했다‘. 먼저 신이 있기에 신전을 지은 게 아니다. 그들은 신전을 지음으로써 비로소 신을 그 장소에 ’있게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 민족의 ‘세계’를 세우는 원리였다. 신들이 떠난 그리스 문화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신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던가. 시, 조각, 건축과 같은 예술적 형상을 빌려 존재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예술은 신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로써 한 민족에게 ‘세계‘를 열어준다.

 

 대지의 산출

 건물을 하나 세운다는 것은 하나의 문화(nomos)를 세우는 동시에, 감추어져 있던 자연(physis)을 드러내는 것이다. 신전은 그리스인들에게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우는 동시에, 저 자연으로부터 ’대지’를 퍼다가 우리 앞에 펼쳐준다.

 모리야 바위는 사실 이 돌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그 바위가 언덕 위에 놓여지고, 코발트 색 하늘과 순백의 빛이 그 위에 드리워지는 순간, 이 도시는 거룩한 모습이 되어 사람들을 끌어안는다. 예루살렘은 새벽에 가장 신비한 모습이 된다. 이른 아침의 빛이 언덕을 비추기 시작하고, 그 위의 바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면... 하늘과 바위와 언덕이 함께 창조주께 고요히 경의를 표한다. 그 언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저절로 신이 이 도시를 만들었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계의 붕괴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가면 헬레니즘 신전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원래 그것은 그리스 도시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것이다. 그 제단이 통재로 뜯겨져 우중충한 게르만의 하늘 아래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언젠가 그 신전은 그 땅에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었을 것이다.

 그곳에 꿋꿋이 서서 작열하는 태양의 색채와 몰아치는 폭풍의 소리로써 ‘대지’의 존재를 드러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맥락에서 뚝 떨어져 나와 박물관에서 하나의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 관람자들은 그것을 보며 기껏 헬레니즘 양식의 미적 특성을 논할 뿐이다. 이로써 ‘세계’는 붕괴되고, ‘대지‘는 사라진다.

 신상도 마찬가지다. 한때 그것들은 각자 자기가 서 있던 곳을 어떤 특별한 장소로 바꾸어놓으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박물관이라는 세속적 공간 속에, 여기저기서 온 다른 신상들과 함께 나란히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관람자들은 여러 장소에서 떼어온 신상들을 바라보며, 거기서 그저 미적 특성이나 양식의 발전만을 본다. 한때 세계를 열어주었던 신상들이 한갓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혹은 예술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세계는 붕괴되고, 예술 작품이 열어주었던 진리도 사라진다.

 신상을 만든 장인들은 근대의 예술가들이 조각상을 만들 듯 그렇게 작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창작은 경건한 ‘봉헌(weihen)’이었다. 신상을 바라보던 고대인들은 근대의 관람자들이 조각상을 바라보듯 그렇게 감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감상은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를 ‘보존(bewahren)’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고대인들은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처럼 그것을 한갓 미적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작품이 열어주는 진리를 진리이게 했다.

 

 페르가몬 박물관 :: 페르가몬 박물관(독일어: Pergamonmuseum)은 베를린의 박물관 섬 안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알프레트 메셀과 루트비히 호프만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10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내부에는 제우스의 대제단 (또는 '페르가몬 제단')을 비롯한 밀레토스의 시장문, 이슈타르 문 등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유적지 현지에서 출토된 그대로 옮겨져, 실제 크기로 재건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전시품의 소유권에 관한 국가간 법적 논쟁에 휘말려 있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로마 유물 및 중동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과 이슬람 유물들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추산으로 매년 85만명이 방문하고 있으며, 2006년 현재 독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섬에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현재의 보데 박물관)이 개관할 당시, 식민지에서 출토된 고고학 유물들은 전시될 공간을 찾지 못해 독일 내의 여러 박물관으로 분산된 상황이었다. 유적 발굴은 바빌론, 우루크, 아슈르, 밀레토스, 프리에네 및 이집트 등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나, 독일 내 박물관들의 크기가 워낙 작아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양의 유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전시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1907년 초,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의 관장이던 빌헬름 폰 보데는 고대 유물들을 수용할 새 박물관을 건설할 계획을 제출한다.

새 박물관의 기획은 1907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설계가 한창이던 1909년에 알프레트 메셀이 사망하고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루트비히 호프만이 이어 받는 등의 일 때문에 실제 착공은 1910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박물관 건설 작업은 세계 제1차 대전과 1920년대의 대공황 속에서도 계속되다가, 마침내 1930년에 이르러 개관되었다.

페르가몬 박물관은 제2차 세계 대전 말미에 일어난 베를린 공방전 당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시품들 중 다수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으며, 이관이 불가능한 거대 전시품의 경우 가벽을 설치해 보호하기도 했다. 1945년,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유물 보호'를 내세워 많은 전시품을 수거하였으나, 이는 허울일 뿐 실제로는 다수 전시품이 전리품처럼 여겨졌다. 이들 중 많은 수가 1958년까지 동독에 인양되었으나, 가치가 현격한 것들은 여전히 러시아의 푸시킨 박물관이나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에 보관되고 있었다. 이에 독일의 반환요구가 거세지자, 러시아는 독일과 조약을 맺어 나머지 전시품의 반환을 약속했으나 2003년 6월, 이 조약이 러시아 국내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머니의 태도

 <최후의 만찬> 원작은 어느 수도원의 식당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안다. 거기에 걸려서 수도사들의 식사를 예수의 마지막 만찬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만찬>을 르네상스 양식의 예로 보아, 예수의 머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삼각형에서 원근법을 찾아내지만, 원래 그 작품이 열어주는 진리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작품의 진리는 식당이라는 세속적인 공간을 예수의 마지막 만찬이 이루어지는 성스런 장소로 변용(變容)시키는 데에 있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변경하기 위해 《예술 작품의 근원》을 썼다고 했다. 실제로 근대에 들어서면서 예술 작품은 더 이상 교회의 필요가 아니라 세속의 필요에 따라 제작되기 시작한다. 성당에 걸려 있던 그림들마저 점차 그 공간적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박물관에 수집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작품은 한갓 미적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게 근대의 예술 문화다. 하지만 이렇게 작품을 미적 대상으로 격하할 때 작품의 진리는 사라지고, 그것이 열어주는 세계는 붕괴한다. 그래서 작품을 대하는 현존재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변화된 태도를 가지고 작품을 볼 때, 작품은 존재자의 모방이 아니다. 그곳은 존재의 진리가 일어나는 신전이다.

 

 신전 앞에서

 모방의 진리

 디오게 : 자네는 예술을, ‘모방’으로 규정했지?

 그럼 예술의 진리는 모방의 진리가 되겠지?

 근데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베껴서 뭐하나?

 아리스 : 재인식을 위해서지요. 가령 그림을 보고 “아, 이것은 말이구나” 하고 깨닫는 기쁨...

 디오게 : 대체 말 그림이 말을 가리킨다는 게 무슨 진리인가? 무의미한 동어 반복이지...

 

 개시의 진리

 디오게 :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야 말로 ‘진리’라 불려질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삶이 삶이고, 죽음이 죽음이라는 것이 뭐 대단한 진리인가? 그런 것을 논리학에서는 ‘동어 반복’이라 하지. 

 예술이 하는 일은 감추어져 우리가 잊고 지내던 것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아우라의 파괴

 디오게 : 벤야민이라던가? 그 친구가 말했지. 현대의 지각은 아우라(Aura)를 파괴한다고.

 저 신상과 신전이 신을 비로소 존재하게 하여 민족의 세계를 열어주었다는 것은 물론 올바른 지적이지.

 아리스 : 그럼 그 진리가 진리일 수 있게 함께 ‘보존’하셔야지요.

 디오게 : 그게 자네의 한계야. 신상과 신전은 세계를 한 번 열어주었을 때나 진리지. 내 참, 대체 언제까지 진리 행세를 해야 하나? 진리가 자신을 ‘보존’하기를 요구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겠지.

 그것은 이미 낡은 가치관이 되었으니까. 실제로 저 신전과 신상이 열어준 진리는 이미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공유한 사회적 통념이 되지 않았나?

 그런데 몇 백 년 묵은 그 통념을 ‘보존’하라고 요구하면 뭐가 되겠나?

 

 도발의 진리

 디오게 : 언젠가 한 똑똑한 철학자가 “말들이 신상을 만들었다면, 신의 모습을 말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지?

 이렇게 자기들에게 익숙한 통념을 깰 때, 사람들은 짜증을 내기 마련이라네.

 낡은 세계 안에 사는 그들의 보수적 머리를 대려,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해주는 거지.

 

 불꽃의 유토피아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 궁전. 무엇보다도 그 정원예술이 인상적이다. 충격적인 것은 나무들의 배열. 그 많은 나무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로 잰 듯이 일렬로 정돈되어 있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이 정원은 거대한 인공 자연이다. 신은 세상을 창조하였다. 인간은 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뜯어고쳐 다시 지었다.

 이 정원은 17세기 데카르트 합리주의의 미학적 표현이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정신의 파악에 적합하게끔 다시 배열된다. 정신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은 제거되고, 모든 것이 직선이나 방사선의 기하학적 형태 속에 정돈된다. 그리하여 정신의 눈에 일목요연하게 들어온다. 합리주의적 이간은 이렇게 자연을 제 보기에 좋게 뜯어고쳐야 비로소 미적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자연을 보는 눈이 좀 달랐던 걸까? 유럽에서는 프랑스 정원의 인공미에 종종 영국 정원의 자연미를 대립시킨다.

 

 자연의 결함?

 르네상스 화가들은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다.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1483~1520)는 현실에서 완전한 미를 갖춘 모델을 찾기 어렵다며, 종종 머릿속의 ‘아이디어’에 따라 작업했다고 한다. 그의 화폭은 현실의 모델보다 외려 그의 머릿속의 아이디어, 즉 이데아에 조응했던 것이다. 풍경화도 마찬가지다. 고전주의적 풍경은 실제의 자연이 아니라 화가의 머릿속에 든 ‘이상미’에 가깝다. 실제의 자연이 화폭에 옮겨지는 과정에서 미의 이상에 맞게끔 적절히 수정되는 것이다.

 베르사유 정원은 고전주의 미학의 실천적 극한이라 할 수 있다. 이론적 영역에서 그 극한에 해당하는 것을 찾는다면 아마도 헤겔(Friedrich Hegel, 1770~1831)의 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감히 자연의 결함을 얘기한다. 자연미는 불완전하다. 완전한 아름다움에 도달하려면 그것을 뜯어고쳐야 한다. 그래서 예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르네상스 화가들은 예술미가 자연미를 모방한 것이라 굳게 믿었다. 아직 자연의 우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이 관계를 뒤집는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정신(idea)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제 자연미는 예술미의 모범이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재료일 뿐이다. 이 관계의 역전에서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는 병적 징후를 본다. ‘자연미의 결함’ 운운하는 헤겔의 논리는 근대의 자연정복 이데올로기의 미학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정신의 동일자

 헤겔은 자연이 거대한 정신에서 나왔다고 믿었다. 우리가 제 모습을 보려고 거울에 자신의 상을 투사하듯이, 정신도 자신을 인식하려고 자기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자연이라는 것이다. 거울을 처음 본 아기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타인으로 보듯이, 정신도 처음에는 제 앞에 선 자연을 ‘타자(他者)’로 본다. 그러다가 점차 그 낯섦을 극복하고 그게 자신의 외화(外化), 즉 자신의 다른 모습임을 개닫게 된다. 그 개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세계의 역사이자, 철학의 역사다.

 정신은 자연에서 제 모습을 본다. 언뜻 보기에 자연은 그저 혼란스런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 정신적 원리가 들어 있다. 그 원리를 우리는 흔히 ‘법칙’이라 부른다. 자연의 혼돈 속에서 법칙을 발견할 때, 혼란스런 물질 덩어리는 조화로운 원리의 체계로 나타난다. 바로 이때 정신은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마치 나르키소스처럼 제 모습에 취해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법칙을 이용해 인간은 자연을 수정한다. 제 보기 좋을 대로, 혹은 제 살기 편할 대로 뜯어고쳐 인공의 환경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연을 억지로 인간에 동화시키는 것을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의 인간화’라 불렀다. 마르크스 같은 이도 이를 ‘진보’라 부르며 축성했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보기에 자연의 인간화란 결국 ‘자연의 탈자연화’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자연이 더 이상 자연이 아니게 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의 타자

 자연에서 정신만을 보는 헤겔처럼, 근대 자연과학자들도 자연에서 거대한 수학책을 보았다. 그리고 수로 파악되지 않는 자연의 질적 측면은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자연의 정말 자연다운 부분은 수식으로 씌어질 수 없다. 빛이 ‘룩스’로 표기될 때 빛남은 사라진다. 소리가 ‘헤르츠’로 측정될 대 울림은 사라진다. 무게가 ‘킬로그램’으로 계산될 때 묵직함은 사라진다. 이렇게 자연의 고유한 질적 측면은 결코 정신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합리주의적 정신은 신비가 존재하는 것을 못 견뎌 한다. 그래서 그 비밀을 밝혀내 굳이 자연의 ‘아우라’를 깨뜨리려 한다. 아우라를 잃은 자연은 숨쉬기를 멈추고 한갓 양적 계량의 대상, 기술적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과학이 밝혀낸 것, 그게 자연의 전부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숲의 숨결을 느끼는 체험을 과학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자연은 정신이 아니다. 과학이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양적 측면일 뿐이다. 과학이 신비를 폭로해도, 자연의 질적 측면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비밀로 남는다. 자연의 정말 자연다운 부분은 과학의 추적을 따돌리고, 이성의 저편에서 끝내 정신의 ‘타자’로 남는다. 끝없이 달아나며 신비함을 보존하는 자연.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연의 이 끝없는 탈주를 미메시스한 것이 바로 현대 예술이라고 한다.

 

 관리되는 사회

 기술합리성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도 지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엄청난 효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기서 아도르노는 어떤 전체주의적 위험을 본다. 가령 우리 앞에 연필과 공책이 있다고 하자. 둘은 사용가치가 다르다. 어느 게 더 귀중한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이다.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사물들을 약분(約分) 가능하게 만든다. 가령 사물의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수(數)가 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사물의 고유한 질을 지우고, 그것들의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킨다.

 자본주의는 인간마저도 획일화한다. 사회를 보라. 어디를 가나 인간은 번호가 매겨진 개인 정보의 더미로 처리되어 합리적으로 관리되지 않는가. 아예 태어나자마자 국가로부터 열세 자리의 숫자를 나눠받지 않는가. 권력은 자신의 관리 대상이 감시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어둠에 묻히는 것을 싫어한다. 권력은 모든 인간의 위치가 명석판명이라는 합리주의적 이상 아래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어야 비로소 안심한다. 권력을 안심시키기 위해 인간은 ‘번호’가 되어 합리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하나의 ‘코드’로 수많은 복제들을 찍어낸 게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이다. 때문에 자본은 인간마저도 제 버릇대로 ‘코드’로 찍어내려 한다. 자본은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런 획일적인 틀 속에서 관리된 인간들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비합리성이다.

 

 안정과 질서. 독재자들이 좋아하는 두 단어.

 

 타자의 미학

 제 언어적 본질이 부정당하자 자연은 애도의 침묵을 지켰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에 항의하기 위해 예술은 이 침묵을 미메시스한다. 현대 예술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왜? 소통은 ‘코드’를 전제하고, ‘코드’는 획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 안에 통용되는 ‘코드’를 거부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예술은 평균적인 대중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는 현대 예술이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에 항의하는 방식이다.

 고전 예술은 대중과 ‘코드’를 공유했다. 현대 예술은 일부러 그 공통의 ‘코드’를 개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오직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 낸다. 현대 예술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왜 현대 예술은 사회에 널리 공유되는 코드를 거부하고 굳이 이해되지 않으려 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문화산업은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 아무리 난해한 작품도 대중이 이해하는 코드로 번역해 상품으로 판매한다. 한때 충격을 주었던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칸딘스키의 작품도 오늘날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때문에 예술은 끝없이 자신을 혁신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상투적 코드 안에 가두려는 문화산업의 추적을 피해 끝없이 탈주하며,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이성의 타자로 남으려 한다. 자연을 전혀 닮지 않으면서도 현대 예술은 이렇게 자연을 미메시스한다.

 

 가상의 파괴

 예술의 탈주는 혁신(innovation)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코드를 개고, 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아방가르드는 이렇게 낡은 ‘아름다움’대신에 형식의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제 예술은 내용 없는 형식이 된다. 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진리는 형식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안에‘ 침전되는 소리 없는 목소리로 존재한다.

 현대 예술은 추하다. 왜 그래야 할까? 생각해보라. 과거의 예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탄생한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예술과 사회, 이상과 현실은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화해가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왜? 사회가 추할대로 추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를 정직하게 증언하려면 현대 예술은 추해져야 한다.

 현대 예술은 추상적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인간들의 관계 자체가 추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물의 질적 측면들을 사상하고, 거기서 교환가치의 양을 추상해낸다. 인간들 사이의 협력도 화폐라는 추상적 관계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적 노동은 그 자체가 추상적이다. 농부의 노동은 유기적 전체이지만, 공장 노동은 무기적 파편이다. 피카소와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의 작품은 그 파편적 형식으로써 불구화된 노동을 기린다.

 현대 예술은 고통스럽다. 고전 음악을 듣는 것은 미적 향유라 할 수 있지만, 현대 음악을 듣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다. 예술은 이렇게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서 사물과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체험에 우리를 동참시킨다. 현대 예술은 사회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발하지 않으나, 갈기갈기 찢겨진 그 형식 속으로 우리 사회의 어떤 부정적 상태라 침전되어 들어온다. 이렇게 현대 예술은 사회를 재현하지 않고도 사회의 고통을 미메시스한다.

 

 가상의 구제

 ‘보편성의 폭력 앞에서 개별자로 남으라.’ 이것이 오늘날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다. 예술은 바로 그 참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반면 철학은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참을 가질 수는 없다. 이 시대의 참은 개별성에 있는데, 철학은 보편적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술과 철학은 서로 상보적 관계를 이루게 된다. 오늘날 전시회 카탈로그에 철학적 담론이 난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대 예술은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내용 없는 형식, 새로운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벤야민의 얘기대로 말 없는 사물에도 언어적 본질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현대 예술의 추함에서 우리 사회의 추함을 보고, 예술의 추상성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추상성을 읽고, 예술이 주는 고통 속에서 불구화된 개별자들이 지르는 비명을 들었다. 철학은 이처럼 말 못하는 예술의 참을 인간의 언어로 옮겨놓는다. 이렇게 말 없는 사물의 참을 구원하는 작업을 우리는 ‘비평’이라 부른다.

 하지만 개별자의 참을 보편적 개념에 담는 게 가능할까? 물론 불가능하다. 개별자의 참은 결코 온전히 개념에 담길 수 없다. 현대 예술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철학이 작품에 대해 하나의 해석을 내놓으면, 작품은 거기서 달아나버린다. 작품의 참을 쫓는 철학도 결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뒤로 수많은 해석만 남기게 된다.

 해석은 작품의 언어적 본질을 개념이라는 바벨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이다. 하지만 번역이 의미의 손실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무한히 펼쳐지는 번역들을 통해 외려 우리는 근원적 언어로 상승한다. 바로 이것이 보편적 개념으로 된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개별자의 참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일 게다.

 

 예술의 존재미학

 위험에 처한 자연을 구원하는 것은 미메시스다. 우리를 계몽시켜 자연의 폭압에서 해방시킨 합리성이 오늘날 자연을 총체적으로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그래서 이제 합리성도 계몽되어야 한다. 합리성을 계몽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미메시스뿐이다.

 관리되는 사회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탈주’의 실천이다. 개별자의 고유성을 지우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사회.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는 거기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단독자로 남는 것이다. 자신을 쫓아오는 모든 동일성의 폭력에서 끝없이 벗어나는 것. 바로 그것만이 이 사회에서 인간이 참되게 존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 존재미학도 소통을 거부하는 현대예술에서 배웠다.

 

 불꽃놀이

 고전 예술은 전체주의적이다. 그 속에서 요소들은 전체 효과를 위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토리 진행에 필요 없는 삽화들은 생략하라고 가르쳤다. 현대 예술의 ‘구성‘은 다르다. 그것은 개별 요소들의 존재를 배려하며, 그것들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을 통해 전체로 종합한다.

 

 타블로 :: 살아 있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정지된 화면. 캔버스나 종이에 그린 평면그림을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영화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뤼미에르형제(Auguste et Louis Lumiere) 와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의 초기영화에서부터이다. 1900년대 초 아직 편집기술이 발달되기 이전의 영화들은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움직이는 피사체를 기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회화나 연극처럼 고정된 화면을 배경으로 배우가 혼자 연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와 같은 연유로 이 당시의 화면을 타블로(tableau)라고 일컬었는데, 이후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들은 움직이는 쇼트를 시각적으로 대조하거나 형식적인 딱딱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의로 타블로를 사용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블로 [tableau] (두산백과)  

 

 타블로 :: 원래 벽이나 천장 등에 고정되어 있는 회화에 대하여, 이동할 수 있는 판화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는 고대 말기의 미라(mirra) 초상, 비잔틴 미술의 이콘, 중세, 르네상스의 제단화가 이에 해당되나, 오늘날에는 캔버스나 화지에 그린 그림을 말한다. 보통 액자에 넣어 독립된 회화공간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 경우 에튀드나 밑그림 등은 포함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완성된 회화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때는 ‘회화 작품’이라는 뜻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블로 [tableau]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삶의 예술

 디오게 : 예술이 행위의 ‘모방’이라고?

 예술은 그냥 ‘행위’인 것이야.

 예술은 삶의 재현이 아니라, 그냥 삶 자체라는 얘기지.

 “이제가지 철학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다. 문제는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

 

 재현과 현시

 디오게 : ‘퍼포먼스(performance)’

 자네 것이 일어날 법한 행위를 재현한다면, 내 것은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을 처음으로 일으킨다는 뜻이지.

 

 보편자와 개별자

 디오게 : 자네의 연극에는 대본이 있겠지. 

 내 것은 대본이 없어. 상연한 다음에 누군가가 그것을 기록하는 일은 있어도. 게다가 아예 반복이 불가능하고...

 삶의 예술이니까. 자네 것은 한 예술가의 주관의 허구지만, 내 것은 객관적 현실이 아닌가. 현실이 맘대로 움직여주던가? 현실의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하나씩 일어나는 ‘사건’, 그게 내 작품이지.

 아리스 :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의 작품이라...

 디오게 : 자네의 진리는 보편을 지향하는군. 내것은 개별자를 지향하지.

 

 유토피아 

 디오게 : 유토피아의 희망 없이는 도한 살 수가 없으니까. 다만 그 희망을 간직하되, 그것을 화폭에 고정된 그림이 아니라 허공을 스쳐 지나가는 불꽃처럼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얘기지.

 유토피아는 고정되는 순간 거짓말이 되어버리거든...

 

 고전예술과 현대예술

 디오게 : 자네가 낳은 고전주의 미학은 작품의 모든 요소에 위계질서를 만들지 않나. 가령 색은 형에 종속되고, 형은 제재에 종속되고, 제재는 주제에 종속되고...

 게다가 《시학》에서 뭐라고 말했나? 전체 줄거리의 진행에 관계없는 삽화들은 빼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게 사회의 구성원리라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개인은 배제되어야 한다, ‘반동분자’ 혹은 ‘반국가분자’로...

 현대 예술에서 일단 형과 색은 자율성을 얻지 않았나? 게다가 현대 예술의 ‘구성(composition)’은 요소들의 개별성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동시에 화면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네...

 

 국카스텐(Gukkasten) : 만화경. 그림을 상자 속에 끼워넣고 그 뒤로 형형색색으로 채색된 투명한 원반형의 셀로판지를 받쳐넣은 후에 이를 돌리면서 촛불로 비추면 영롱한 불꽃놀이의 영상을 얻을 수 있다.

 

 

 

3. 포스트모던의 미학 – 숭고와 시뮬라크르

 미네르바 :: 여신 미네르바는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에 해당하며, 지혜와 기술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그녀에 관한 전설도 거의 대부분 그리스 신화와 동일하다.
로마 신화에서 이 여신은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편에 가담한 것으로 나온다. 고르곤의 방패를 들고 전쟁에 참가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가 건국된 후에는 로마를 수호하는 여신이 되었다.
트로이의 최대의 적 중 하나였던 그녀가 어떻게 로마의 수호신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의 우수한 점을 흡수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그리스의 신들을 아무런 저항 없이 자신들의 신으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는 올리브를 그리스인에게 건네줌으로써 번영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진다.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도 마찬가지였는데, 올리브나무는 '미네르바의 나무'라고 불리며, 평화를 상징한다.
로마에 도착한 아이네아스는 현지 원주민들에게 우호의 증표로 올리브 가지를 바쳤다고 한다. 이는 '평화롭게 살겠다'는 의도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네르바는 어깨에 올빼미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로마에서 올빼미는 지혜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소중하게 취급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네르바 [Minerva] - 올빼미와 올리브 (여신, 2002.6.10., 들녘)

 

 바벨의 도서관

 세 개의 미로

 고전적 미로의 구성은 간단하다. 하나의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언젠가 중심에 도달하고, 거기서 뒤돌아 걸으면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된다. 문제는 길을 찾는 것보다 외려 중심에 사는 괴물을 처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적 미로는 원시 사회의 성인식 비슷한 영웅들의 ‘통과의례‘라는 의미를 갖는다. 중세적 미로도 형태는 동일하다. 다만 의미가 변했을 뿐이다. 성당 바닥에 그려진 미로는 속(俗)에서 성(聖)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의 의미를 갖는다.

 근대적 미로는 다르다. 여기서는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오직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이는 고대와 달리 근대 사회가 괘 복잡해졌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미로에서 나오는 데에 영웅적 용기만 필요했다면, 이제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미로’라는 이름의 미혹에서 인간을 이끄는 빛은 ‘이성’이라 할 테고, 좀 더 종교적인 사람이라면 세상의 미로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신의 ‘은총’이라 믿을 것이다.

 또 다른 미로가 있을까? 실제로 지어진 적이 없는 가상의 미로가 있을 수 있다. 고전적 미로든 근대적 미로든, 입구나 출구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입구나 출구가 있다는 것은 안과 밖이 있으며, 안에서 밖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입구도 출구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고, 그리하여 빠져나올 가능성도 없는 어떤 미로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 ‘탈근대적 미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결코 지어질 수 없는 피라네시의 상상의 ‘감옥’이 바로 그런 미로 중 하나가 아닐까?

 

 아르아드네 ::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파시파에의 딸. 미노스는 아내 파시파에가 황소와 관계하여 낳은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미궁, 즉 라비린토스에 가두고 해마다 아테네의 소년 소녀 7명씩을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이에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없애려고 제물로 거짓 꾸미고 크레타섬에 왔다. 테세우스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아리아드네는 그의 몸에 실을 묶어 주었다. 미노타우로스를 없앤 테세우스는 그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와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크레타섬을 떠났는데,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아테네로 가는 도중에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낙소스섬에 버리고 떠나자 실의에 빠진 그녀를 디오니소스가 발견하여 아내로 삼았다고도 하고, 테세우스가 그녀를 디오니소스와 결혼시켰다고도 한다. 또는 테세우스가 임신중인 그녀를 버렸으며 이로 인해 출산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버림받은 뒤 실의에 빠져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와 결혼하면서 금관을 선물로 주었다. 아리아드네가 죽은 뒤에 그 금관을 하늘에 던져 별자리가 되게 하였는데, 이것이 북쪽왕관자리라고 한다.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으며,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1912)도 그 중 하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아드네 [Ariadne] (두산백과)

 

 바벨의 도서관 

 보르헤스는 벌집처럼 육각형의 방이 무한히 이어지는 ‘바벨의 도서관’에 대해 얘기한다. 이 도서관의 책장은 알파벳의 가능한 모든 조합으로 이루어진 일정한 길이의 책들로 가득 차 있다. 책들은 알파벳의 무작위적 조합이므로, 그 중 어떤 것들은 의미 없는 헛소리를, 어떤 것들은 시시껄렁한 잡설들을, 또 어떤 것들은 해석할 수 없는 문장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육각형의 방들 가운데 어딘가에, 그 책 더미들 속에, “나머지 모든 책들의 암호”이자 “동시에 그것들의 완전한 해석”이 되는 책이 감추어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한 사서가 우연히 그 ‘책 중의 책’을 발견하여, 그걸 읽고 신과 같아졌다고 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의 상징이다. 모든 인간은 그 속을 헤매는 “불완전한 사서들”이다. 그들은 신이 된 전설의 사서를 좇아 육각형의 방을 순례하며 일생을 보낸다. 이 책의 단서를 통해 저 책으로, 그 책에서 단서를 찾아 또 다른 책으로, 그렇게 무한히 옮겨다니며 언젠가는 전설 속의 사서가 봤다는 ‘책 중의 책’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을 실천한다.

 근대인들은 그 사서가 되려고 하였다. 유감스럽지만 오늘날 그런 최종적인 책(우주의 최종 진리)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깨졌다. 이로써 미로에서 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도서관은 한계는 없지만 주기적이다.

 최종적인 책이 사라진 세계. 궁극적인 진리의 믿음이 무너진 세계. 그 우주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다. 바벨의 도서관으로 상징되는 미로의 이미지는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에 꼭 들어맞는다. 이 모든 연상들은 제각기 옳다. 보르헤스를 포스트모던의 선구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리라.

 

 리좀(Rhizome) :: '리좀'은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et Felix Guattari)가 그들의 명저 『천의 고원(Mille Plateaux)』(1980)의 입문적 표제어로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 말을 '수목형'(樹木型)과 대비적으로 사용한다. 리좀형과 수목형은 '관계 맺기'의 두 방식을 가리킨다. 더 정확히 말해, 리좀형과 수목형이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리좀형에 좀더 많은 규정들이 들어갈 경우 수목형으로 화하고 반대의 경우(규정성을 줄어들 경우) 리좀형으로 화한다. 즉 리좀형과 수목형은 상관적 정도(correlative degree)를 형성한다.리좀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보다 자유로운 쪽으로 갈 때 성립하고, 수목형은 관계 맺는 방식이 이항대립적(binary) 방식으로 화할 때 성립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좀 [Rhizome]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영겁회귀 :: 독일의 철학자 F.W.니체가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내세운 사상. 영원회귀라고도 한다. 영원한 시간은 원형(圓形)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히 되풀이되며,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내용이다.
이 사상은 얼핏 보기에 ‘권력에의 의지’ 사상과 모순되는 결정론(決定論)처럼 생각되지만, 영겁회귀를 자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 똑같은 생(生)이 무한히 되풀이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의지가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운명애(運命愛:아모르 파티), “이것이 생(生)이었더냐,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친 생에 대한 강력한 긍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상은 신(神)이나 도덕, 그 밖의 일체의 피안적(彼岸的) 요소를 부정한 니체에게 있어 ‘아마도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의 공식’이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겁회귀 [Ewige Wiederkunft, 永劫回歸] (두산백과)

 

 이것이 말을 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함으로써 탈근대의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도 데리다가 보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고흐의 <구두>를 보고 하이데거가 한 얘기가 있다. 그는 이게 자기가 꾸며낸 얘기가 아니라, 그림에게 직접 들은 것이라 잘라 말했다. “이것(=그림)이 말을 했다.”

 닳아 삐져나온 신발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노동을 하는 발걸음의 힘겨움이 굳어 있다.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 무르익은 곡식을 대지가 조용히 선사함, 그리고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경지에서의 대지의 설명할 수 없는 거절... 빵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에 대한 불평 없는 근심, 궁핍을 다시 넘어선 데에 대한 말 없는 기쁨, 출산이 임박함에 따른 초조함,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의 전율... 대지에 이러한 도구가 귀속해 있고 농촌 아낙네의 세계 안에 이 도구가 보호되어 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Meyen Schapiro, 1904~1982)에 따르면 그림 속의 구두는 촌 아낙네가 아니고 고흐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 샤피로의 추정에 따르면 저 그림을 그릴 당시 고흐는 파리에 살았다. 그럼 저 구두는 농촌의 들판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수도로 통하던 대도시의 아스팔트를 밟고 다닌 셈이다.

 

 농촌과 도시

 먼저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반박한다. 저 구두가 촌 아낙네의 신발이라고 단언할 근거는 없다.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지 않았던가. “어디에 이 신발이 속할 수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없고, 불특정한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그게 농민 아낙네의 구두로서 농촌에 속한다고 말한다. 고흐의 그림에는 농민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 많다. 그것들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선입관을 가졌던 게 아닐까?

 그렇다고 샤피로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다. 당시 고흐가 파리에 있었다 할지라도, 저 구두가 고흐 자신의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고흐는 자신을 일종의 농부라 생각했고, 평소에 자신의 힘든 작업을 농부의 고된 노동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딱히 그 구두가 농촌에 속한다고 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재현과 개시

 샤피로는 그림을 재현으로 본다. 그래서 그 모델이 된 주인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에게 작품의 진리는 재현의 올바름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비판은 철저히 근대 미학의 틀에 갇혀 있다. 하지만 그 틀을 하이데거는 이미 넘어섰다. 이 철학자에게 예술의 진리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의 구두를 재현했느냐’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샤피로 역시 제 비판이 사소하다는 것을 안다. 하이데거는 그 구두가 실은 고흐의 ‘다른 자아(alter ego)’라는 점을 놓쳤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흐는 장갑이나 파이프 같은 개인 소지품을 즐겨 그렸다. 이 정물들은 일종의 제유법으로서 화가 자신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 구두 역시 잘려나간 그의 왼쪽 귀처럼 화가 자신을 암시하는 일종의 초상화로 봐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철저하게 근대 미학의 한계에 갇혀 있다. 작품의 진리를 예술가의 주체성의 표현에서 찾기 때문이다. 이게 ‘주체(subject)’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근대 형이상학의 한계다. 하이데거는 작품의 본질을 화가의 주체성에서 찾지 않는다. 작품이 열어주는 진리는 한갓 화가라는 한 주체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객관적 사태, 어떤 절대적 진리의 일어남이다. 작품을 통해 말하는 것은 화가가 아니다. 말을 하는 것은 작품 그 자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말을 했다.”

 

 제유법 :: 비유법 중에서 사물의 명칭을 직접 쓰지 않고 사물의 일부분이나 특징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을 일컬어 대유법(代喩法)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환유법(換喩法)과 제유법이 있다.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지만(예:금수강산→대한민국, 요람→탄생, 무덤→죽음),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어느 한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시인 이상화(李相和)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은 국토의 일부로서 ‘국토’를 나타내고, ‘강태공’은 낚시를 좋아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낚시꾼’ 전체를 의미하며,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에서 ‘빵’은 식량의 일부로서 ‘식량’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쓰인 것 등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유법 [synecdoche, 提喩法] (두산백과)

 

 파토스 :: 파토스(Pathos)는 철학에서 로고스(logos)와 상대되는 말로, 정념(情念) 충동 정열 등으로 풀이된다. 넓게는 어떤 사물이 받은 변화상태를 의미하고, 좁게는 밖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아서 생기는 인간의 감정 상태를 말한다. 즉, 로고스가 이성을 의미한다면 파토스는 감성을 의미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토스 [Pathos] (용어해설)

 

 다시 미로 속으로 

 예술의 진리를 ‘존재자의 재현’에서 찾은 샤피로와 달리 하이데거는 ‘존재와 개시’로서의 진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이다. 하지만 샤피로와 똑같이 작품의 최종적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근대의 한계에 머문다. 데리다는 이마저 해체하려고 한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하나의 작품에 최종적 해석이 있다는 믿음, 누군가 그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풀어주고, 그것을 무한히 전개시키는 것이다. 최종적 해석은 이 창조적 놀이를 중단시키고, 그 결과 진리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럼 작품에 대한 데리자 자신의 해석은 어디에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데리다는 에세이가 끝나도록 어떤 해석도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능한 해석을 암시한다.

 샤피로와 하이데거의 우주는 ‘근대적 미로’다. 이 미로는 선형적(線形的)이다. 미로 안에서 바깥 출구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이 존재한다. 샤피로는 합리적 시행착오를 통해서, 그리고 하이데거는 존재의 계시를 통해 출구를 발견한다. 그들의 해석은 문제 상황에서 해결에 이르는 선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데리다의 우주는 ‘탈근대적 미로’다. 이 미로는 리좀이다. 그 안에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나무뿌리의 조직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길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 길들 중 어느 것도 우리를 출구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왜? 그것은 안과 밖,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한 미로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호르헤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도서관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본뜬 것이다.

 우주는 무한한 미로다. 안과 밖이 없기에 그 안의 모든 길, 모든 해석은 출구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옳지도 않고, 그리지도 않다. 아니, 옳으면서 동시에 그르다.

 

 하지만 미로 속에서 현명하게 길을 잃는자,

 구원의 길을, 진리의 길을 발견하리니...

(다니엘 카스파 로헨슈타인, <어느 미로의 명문>)

 

 유사와 상사

 졸(卒)은 병사, 마(馬)는 말, 성(城)은 요새, 왕비는 고귀한 여인의 형상을 닮았다. 다만 사라진 ‘왕’대신에 올려놓은 로션 뚜껑만이 원기둥의 기하학적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왕을 닮지 않은 로션 뚜껑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으며, 왕 없는 장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K는 말들의 역할은 ‘닮음’이 아니라 다른 말들과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말들이 실제 형상을 안 닮아도 놀이를 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도 없다. 그저 말들의 형태에 ‘차이’만 난다면, 졸은 병사를 닮지 않고도 졸의 역할을 하고, 마는 말과 비슷하지 않아도 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느 하나의 말이 장기판에서 맡는 역할은 장기판 ‘밖’의 현실과의 ‘닮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역할은 장기판 ‘안’에서 말들이 서로 갖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 예로 K는 중국 장기의 말은 모두 납작한 원기둥 모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체스와 언어

 과거로 올라갈수록 체스의 말은 구체적 형상을 띤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상이 단순해지더니 점점 기하학적 형태에 가까워진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20세기에 들어와 대상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추상화되었다. 문자라고 다르겠는가. 최초의 문자들은 그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문자는 닮음을 잃어버리고 추상적 기호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기호들이 더 이상 세계를 닮지 않았는데, 그것들로 어떻게 세계의 그림을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파괴된 칼리그램

 이 불안감에서 나온 것이 칼리그램(Calligram)은 낱말로 한 번 대상을 가리키고, 그림으로 지시를 또 한 번 반복한다. 도상과 문자라는 두 개의 끈으로 ‘대상과 기호’ 사이를 단단히 동여매려는 것이다.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보자. 그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분명히 파이프다. 그런데도 문자는 잘라 말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전통적인 칼리그램에서는 문자와 도상이 협력하여 이중으로 대상을 지시하나, 여기서는 문자와 도상이 서로 충돌하고 이 싸움 때문에 기호(문자+도상)는 현실을 가리키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마그리트의 세계에서 ‘유사성’은 현실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 안에서 파이프의 그림은 더 이상 파이프를 가리키지 못한다. 이렇게 그는 칼리그램으로 칼리그램을 파괴한다. 이로써 그는 근대적 사유와 예술의 종언을 말한다. 그의 파괴된 칼리그램은 텍스트를 ‘자연의 거울’로 만드는 재현적 인식론과, 작품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려는 재현적 예술론의 죽음을 암시한다.

 

 재현의 파괴

 재현회화는 두 가지 원칙 위에 서 있다. 첫 번째 원칙은 도상과 문자가 하나의 화폭에 함께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중세의 <수태고지>에서는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의 입에서 띠가 흘러나오고, 이 녹음 테이프 위로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말이 적힌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는 가시적 공간의 재현을 목표로 삼게 된다. 그 결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말은 화폭에서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문자는 밖으로 나아가 제목이 되거나, 굳이 그림 안에 등장하려면 묘비의 명문, 책 위의 글자, 아니면 악보 위의 음표와 같은 형태로 그려져야 한다.

 재현회화의 두 번째 원칙은 ‘유사의 원리’다. 그림은 되도록 실물을 닮아야 하고, 그 닮음으로써 그 대상의 기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사와 상사

 ‘유사의 원리’에 따른 재현회화를 파괴하고, 마그리트는 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미셸 푸코가 보기에 마그리트의 작품은 유사(類似)의 의무를 포기하는 대신에 상사(相似)의 놀이를 지향한다. ‘유사’와 ‘상사’, 둘 다 ‘비슷하다’는 듯을 갖은 낱말이나, 실은 명확히 구별되는 두 개의 개념이다. 유사의 관계에는 원본(아비)과 복제(아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다. 아들이 아무리 아비를 빼닮아도 아비보다 더 아비처럼 생길 수는 없지 않은가. 반면 상사의 관계에는 그런 위계질서가 없다. 장자의 얼굴이 막내 얼굴의 원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사’의 원리가 포기되면 남는 것은 ‘상사’의 놀이뿐이다. 유사의 원리는 원본과 복제의 ‘동일성’에 집착하나, 상사는 그 집착에서 벗어나 복제들 사이의 ‘차이’를 전개시킨다.

 

 데칼코마니

 유사의 진리는 동어 반복이다. 반면 상사에 입각한 전사(轉寫)는 우리의 눈을 상투성에서 해방시켜, 일상 사물들 속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보게 한다. 이게 바로 마그리트가 추구하는 상사의 진리다.

 

 캠벨

 마그리트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는 현대 회화의 과제를, 닮음을 통해 닮음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상사의 원리는 곧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들의 놀이다. 그 점에서 마그리트의 작업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 워홀의 작업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시뮬라크르의 창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실물을 복제한 사진을 다시 복제하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필름을 화폭 위에 영사해놓고, 그는 연필로 그 이미지의 윤곽을 뜬 후에 거기에 채색을 하여 작품을 얻어낸다. 한마디로 복제의 복제, 즉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 작품은 저 유명한 대중문화의 우상을 얼마나 닮았느냐에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다 아는 상투적 사실을 반복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유사의 진리가 아닌 상사의 진리, 즉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내며,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 번 반복할 때 얻어지는 어떤 시각적 효과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원본 없는 복제, 원본과의 일치가 필요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의 놀이가 되는 셈이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원작을 생산했다면, 워홀은 자신의 작품이 저 캠벨 깡통처럼 하나의 코드로 찍어낸 대량소비 사회의 복제들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유사의 원리’로 자연의 거울이 되려고 했다면, 워홀은 ‘상사의 놀이’로 현대적 지각의 특성을 드러내려 한다.

 

 그림자 놀이

 1789년 대혁명으로 쫓겨난 구체제의 왕당파들 사이에는 그 억울함을 잊기 위해 은밀히 어떤 체스 놀이가 행해졌다. 그 놀이의 정치적 의미는 말들의 형상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종종 어두운 곳에서 촛불을 켜서 체스의 말을 벽에 비추곤 했는데, 그렇게 얻어진 그림자의 실루엣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상을 닮았다. 저 구체제의 왕당파들은 이 위대한 황제의 초상을 하필 ‘왕’이 아닌 ‘졸’의 형상에다가 감추어놓았던 것이다.

 그림자(현실)와 그림자의 그림자(시뮬라크르)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인들은 장기의 졸에 해당하는 폰(pawn)이나 비숍(bishop)에 나폴레옹의 실루엣을 감추어 놓곤 했다. 그것은 나폴레옹을 ‘졸’로 보기 위함이었다. ‘비숍’의 프랑스어 이름은 ‘fou’도 ‘바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마콤

 오시안 :: 3세기경의 고대 켈트족의 전설적인 시인이자 용사로 1765년 J.맥퍼슨의 시집을 통해 이름이 알려졌다. 시는 우울한 낭만적 정서를 담고 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고지지방에 살았으며 그의 부친인 영웅 핀(핀골이라고도 함)이나 크프린을 노래한 시를 썼다고 전한다. 호메로스나 영역 성서를 연상시키는 격조 높고 낭만적인 서사시에 속한다. 오시안이라는 이름은 1765년 영국 시인 J.맥퍼슨이 그의 시를 수집하여 영역본(英譯本) 《고지방수집 고대시가 단장(高地方蒐集古代詩歌斷章)》(1760) 《핑갈 Fingal》(1762) 《테모라 Temora》(1763) 등 3권을 발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S.존슨은 맥퍼슨의 자작시라고 단정하는 등 논의가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맥퍼슨이 옛 자료에 의하여 저작하였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창작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 시는 우울한 낭만적 정서를 담고 있으며 18세기 후반의 풍조에 영입되어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였다. 독일의 헤르더, 괴테, 실러, 영국의 워즈워스, 프랑스의 샤토브리앙 등 낭만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시안 [Ossian] (두산백과)

 

 미와 숭고

 오랫동안 예술의 전범이었던 그리스 조각을 생각해보라. 형상화를 거부했던 히브리의 신과 달리, 그리스 신들의 숭고함은 형상의 아름다움 안에 갇혀버렸다.

 

 호렙 :: 이집트의 시나이 산은 신과 인간이 만난 것으로 유명한 산이다. 바로 여기서 모세가 신을 직접 대면했다. 신은 모세에게 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의 일부에 기록된 율법을 주었다.

구약성서는 그 산의 이름을 시나이와 호렙의 두 가지로 쓰고 있어 혼란을 빚는다. 아마 같은 장소가 두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신은 호렙 산의 불붙은 떨기나무 속에서 나타나 모세에게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라고 명했다.

수백 년 뒤 시나이/호렙은 또다시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선지자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려 한 사악한 여왕 이세벨에게서 도망쳐 그곳으로 갔다(열왕기상 19). 엘리야가 산에 있을 때 한바탕 지진, 강풍, 불이 일어나더니 신의 음성이 '미세한 소리'로 들려왔다. 신은 낙담한 엘리야에게 아직 이스라엘에 선한 사람들이 있으니 좌절하지 말라고 일렀다.

이 극적인 사건으로 시나이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멀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여기까지 순례를 하지 않았다. 반면 그리스도교도들은 그곳을 순례했다. 이집트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뒤 2500미터의 바위투성이 제벨 무사('모세의 산')의 기슭에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아랍인들은 그 산이 시나이라고 믿는다. 

 

 마콤

 뉴먼이나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와 같은 색면화가들은 미를 포기하고 의식적으로 숭고(崇高)의 효과를 추구했다. 이렇게 뉴먼이 색면추상으로 돌아서게 된 데에는 어떤 우연한 사건이 있었다. 화가들은 종종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캔버스를 단색으로 칠해두곤 하는데,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칠한 텅 빈 캔버스에 그만 스스로 사로잡히고 만다. 이 기이한 충격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아 오랫동안 사색을 한 끝에, 드디어 그의 예술 인생을 결정할 첫 작품이 탄생한다.

 단색의 캔버스 위에 그어진 수직선. 이를 뉴먼은 ‘짚(zip)’이라 불렀다. 수직선은 흔히 하늘과 땅, 신성과 세속의 연결을 상징한다. 

 우리의 몸속으로 전율을 유도하는 수직선을 제외하면 화면에 남은 것은 텅 빈 색면뿐이다. 이는 모든 존재를 머금은 부재, 세계 창조를 위한 여백이라 할 수 있다. 아직 공간이 없던 지점이자 아직 시간이 없던 시점. 그러나 동시에 모든 공간을 포괄하는 지점이자 모든 시간을 응축한 시점. 이처럼 모든 존재자의 근원이 되는 하나-성(性)(one-ment)은 예부터 신성의 상징이었다. 보르헤스는 이를 ‘알렙’이라 불렀고, 뉴먼의 친구인 한 유대인 비평가는 이를 유대교의 ‘마콤’이라 불렀다. 마콤은 신성함을 접하는 체험의 장소이자 동시에 그 자체가 신이다.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알라.”

 

 숭고의 부정적 묘사

 료타르(Kean-Francois Lyotard, 1924~1998)에 따르면 숭고를 묘사하는 데에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한다. 하나는 낭만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방법으로, 화폭의 기준이 되는 인간을 가능한 한 왜소하고 미약하게 묘사함으로써 그것과의 콘트라스트를 통해 상대적으로 자연을 크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숭고의 간접적 묘사’라 부른다.

 하지만 형상이란 유한하고 신성은 무한하기에, 애초에 무한한 신성을 조각이나 회화 안에 담기란 불가능하다. 숭고는 원래 묘사가 불가능한 것이다. 야쉐가 인간에게 내린 계명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숭고를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즉 야훼가 명한 대로 아예 형상을 묘사하기를 포기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료타르는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부른다.

 료타르는 현대 예술에서 대상성이 사라지는 것을 이와 연결시킨다. 과거의 예술이 유한한 대상의 미를 재현하려 했다면, 현대 예술은 무한한 대상의 숭고를 현시하려 한다. 현대 예술은 형상을 지움으로써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떠올릴 수 없는 것, 그릴 수 없는 것, 한마디로 형상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미가 아니고 숭고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화면은 점점 아름다운 대상을 게워내고 그 극한에서 마침내 텅 빈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존재 사건

 하이데거처럼 료타르에게도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재현’이 아니라 ‘존재의 일어남’에 있다. 예술은 우리에게 낯익은 세계의 재현을 파괴함으로써 그 뒤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낯선 세계를 드러낸다.

 숭고의 체험은 모순적이다. 낯익은 존재자의 세계가 파괴될 때 사람들은 ‘놀라게’ 되고 ‘현기증나게’ 되고 ‘경악하게’ 된다. 존재의 체험은 그 낯섦 때문에 처음에는 우리에게 이렇게 불쾌감(displeasure)을 준다. 사실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게 또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이를 일단 극복하면, 곧이어 더할 나위 없는 열락(delight)이 찾아온다. 어려움을 극복함으로써 얻어지는 인식의 확장, 존재의 확장에서 오는 기쁨 말이다. 료타르에 따르면 이렇게 ‘존재를 강화’하는 데에 숭고의 본질, 즉 현대 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한다.

 

 숭고

 빙켈만 :: 독일의 미학자이자 미술사가로 귀족의 도서실 사서로 일하며 고대 그리스 문화를 연구하였다. 로마의 고대 유품(遺品)과 각지의 유적에 대한 조사연구 및 저술 활동을 하며 바티칸 도서관 서기, 고미술 보존감독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독일 북부의 슈텐달 출생. 매우 가난하여 고학으로 할레대학교·예나대학교 등에 다녔으며, 귀족의 도서실 사서(司書)로 일하면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연구하였다. 드레스덴으로 옮긴 후에 《회화 및 조각에 있어서의 그리스 미술품의 모방에 관한 고찰》(1755)을 출판하여, 그 당시 일고 있던 고전주의(古典主義) 사상의 선구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같은 해 로마로 간 뒤부터는 그곳에 수집되어 있던 고대 유품(遺品)과 각지의 유적에 대한 조사연구 및 저술 활동에 전념하면서, 그 동안에 바티칸 도서관 서기, 고미술 보존감독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764년에 주요 저서 《고대예술사》를 출판하였으며 1768년에 독일을 여행하던 중 트리에스테에서 강도의 칼에 쓰러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한 빙켈만 [Johann Joachim Winckelmann] (두산백과)

 

 그리스의 이상이 ‘아름다움’이라면, 로마의 이상은 ‘숭고함’이다. 그리스 예술의 전형이 조각이라면, 로마 예술의 전형은 건축이었다.

 

 감각의 제국

 등을 창고 벽에 기댄 채 장작더미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는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단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오다가 뚜껑에 덮인 것처럼 지붕 밑에 갇혀서 그를 감싸고 있는 나무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 냄세에 빠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땀구멍 깊숙한 곳까지 전부 나무 냄새로 가득 채운 그는 그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버렸다. 그러고는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그 장작더미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한참 뒤,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나무.”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 1949~ )의 소설 《향수》. 거기서 소년 그르누이는 ‘나무’라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배운다. 우리에게 ‘나무’라는 말은 바벨의 언어, 즉 텅 빈 보편 개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년의 것은 다르다. 그의 ‘나무’는 냄새가 물씬 나는 감각적인 질로 충만하다. ‘나무’가 진정으로 무엇인지 알기 위해 소년은 ‘나무-되기’를 행하여 단백질로 된 살을 마침내 피노키오처럼 나무의 상태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이로써 ‘나무’라는 말을 아담의 언어로 되돌려 놓는다.

 

 아이스테시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감각보다 이성에 의존하게 되면서 원초적인 감각 능력은 서서히 퇴화해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이다.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 역시 감각을 이성에 비해 열등한 능력으로 배제해왔다.

 소위 문명은 인간의 감각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길들였다. 오늘날 우리는 감각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며, 그 종류를 대개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순서로 나열하곤 한다. 잘 살펴보면 정신에 가까운 순서임을 알 수 있다. 시각은 사물의 형상을 봄으로써 정신의 기관이 된다. 청각은 목소리를 듣는 능력으로 인해 영혼의 귀가 된다. 반면 후각-미각-촉각은 정신보다는 육체에 속한다. 특히 성적 쾌락과 결부된 촉각은 어쩌면 육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서구 문화를 낳은 헬레니즘 문명은 시각 문화였다. 빛나는 그리스의 조형 예술을 생각해보라. 플라톤에게 진리의 세계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진정한 형상의 세계였다. 서구 문화의 또 하나의 기둥을 이루는 헤브라이즘은 청각 문화였다. 유대의 신은 보이는 것의 형상을 금지하고 자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간들에게 그는 오로지 목소리만 들려줄 뿐이다. 여기서 진리는 ‘듣는’ 것이다.

 

 헬레니즘(Hellenism, 그리스), 헤브라이즘(Hebraism, 유대)

 

 지각에서 감각으로

 미학(Aesthetics)이라는 말 속에는 ‘감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이스테시스(aisthesis)’가 들어 있다.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감각을 오류와 타락의 원천이라 하여 철학의 밖으로 배제했다. 미학은 이렇게 버려진 감각을 철학적으로 복권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이때 복권된 감각은 엄밀한 의미에서 감각이 아니었다. 복권된 것은 그저 정신에 의해 길들여진 감각, 정신과 관계되는 한에서의 감각, 말하자면 ‘지각’이었을 뿐이다.

 감각과 지각은 다르다. 감관이 받아들인 자료가 정신으로 올라가 인식의 재료가 될 때, 그것을 ‘지각(perception)’이라 부른다. 검은 색깔, 구수한 향기, 뜨거운 느낌. 이렇게 자료가 입력되면 정신은 그것에 입각해 판단을 내린다. ‘이것은 커피다.’ 반면 그 자료들이 몸으로 내려가 생리적 현상이 될 때, 그것들은 ‘감각(sensation)’이 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육체의 몫이다. 뜨거운 액체의 맛과 감촉과 온기. 몸이 느끼는 이 감각의 질은 말로 대체할 수 없는 어떤 원초적인 느낌이다.

 근대 예술 문화는 ‘지각’이라는 정신주의적 틀 위에서 전개되었다. 예술이 다섯 감각 중에 유독 시각과 청각만을 사용해온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시각에서 촉각으로

 그리스인들은 인체를 이상화하여, 그 아름다움의 극한에서 그것을 신의 형상으로 만든다. 인간이 신이 된 것이다. 베이컨은 이와 정반대로 나아간다. 그는 인간의 신체를 난도질하여 푸줏간의 고기 덩어리로 끌어내린다. 이때 인간은 한갓 육체적 존재, 한 마리의 동물로 전락하게 된다.

 베이컨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그 색덩이로 유사를 파괴하고, 그것을 둥근 트랙 안에 고립시켜 스토리텔링을 못하게 막는다. 이로써 ‘재현(닮음)’과 ‘서사(연관)’라는 구상회화의 두 원리는 무너진다.

 그렇다고 베이컨이 추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추상은 기하학적이기 때문이다. 기하학은 정신의 산물이다. 회화는 정신을 거치지 않고 직접 몸의 신경세포에 작용해야 한다. 그것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촉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촉각적’충격을 노린다. 저 잔혹한 형과 색의 폭력을 휘둘러 몸을 자극하려 한다.

 

 기관 없는 신체

 문명화된 몸은 기관으로 분화되어 있다. 그 몸은 이성의 지배 아래 엄격한 위계질서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감각의 위계를 세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문명화한 몸을 이론화한 최초의 철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문명화된 몸의 어두운 안쪽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신체가 웅크리고 있다. 이 원초적 신체를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라 부른다.

 실제로 기관 없는 신체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머리도, 신경도, 가슴도, 위도 장도 없다’고 느낀다. 마약 중독자의 몸은 ‘입이나 항문 대신 먹고 싸는 것을 동시에 하는 하나의 다기능적 구멍’을 갖고 싶어한다.

 자극이 기관으로 분화된 몸을 통해 정돈되어 들어올 때, 기관 없는 신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발작을 일으킨다. 그것을 ‘히스테리’라 부른다. 합리주의 문명은 이들을 ‘환자’내지 ‘변태’라고 경멸하나, 이들은 그저 남보다 감각에 민감한 것일 뿐이다.

 베이컨은 자신의 작품을 우리 신경세포 위에 직접 작용하게 만들려 한다. ‘회화의 폭력’을 휘둘러 우리의 감각을 고도로 민감하게 만들고, 그로써 합리적인 몸 아래 웅크린 우리의 원초적 신체를 되살리려는 것이다. 

 

 공감각

 ‘기관 없는 신체’는 부화하다가 만 알과 같은 것이다. 가령 부화를 시작한 지 보름 정도 지난 알을 깨뜨린다고 하자. 껍질 밖으로 나온 내용물은 아직 유체 상태일 것이다. 거기서 기관들은 미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서로 겹치거나 서로 경계를 넘나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화하다가 만 알과 같이 생긴 신체 속에서는 ‘하나의 색, 맛, 촉각, 냄새, 소리, 무게 사이에 존재론적 소통’이 일어난다. 이를 우리는 흔히 ‘공감각’이라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들이 겹치는 비이성을 극도로 경계했다. 기관들의 횡단은 명석판명이라는 합리주의 이상과도 정면 배치된다. 정신의학에서도 공감각을 일종의 정신착란으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에서 이 공감각의 능력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알고 있다. 가령 알파벳에서 색깔을 느끼는 랭보, 회화에서 음악을 듣는 칸딘스키, 음악에서 색채를 느끼는 스크랴빈을 생각해보라. 20세기를 전후하여 러시아 예술은 아예 공감각의 실현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얼굴에는 오감의 기관이 모두 모여 있다. 그래서 베이컨은 얼굴을 지워버린다. 기관을 지운 얼굴은 그냥 머리가 된다. 시각이나 청각 없는 동물은 있어도 촉각 없는 동물은 없다. 다른 감각은 모두 촉각에서 분화되어 나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촉각이야말로 기관 아닌 기관, 공감각의 기관이라 할 수 있다.

 베이컨의 회화는 지각이 아니라 감각을 표현한다. 가시적 대상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를 가시화한다.

 

 동물-되기

 근대 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했다. 거기서 이성을 빼면? 감각이 남는다. 감각의 주체로서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종종 인간은 동물과 하나가 된다.

 이성을 해체시켜 인간을 동물로 되돌리는 것은 단순한 ‘퇴화’가 아니다.

 

 신성한 짐승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은 폴리스 안에 사는 존재였다. 폴리스 밖에 사는 것은 동물 아니면 신들뿐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는 데에도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신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이 되는 것이다. 고전 예술은 미의 완성을 통해 신이 되려는 그리스 예술을 모범으로 삼아왔다. 반면 베이컨은 여기서 거꾸로 나아가 짐승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이는 진화의 순서를 거스르는 퇴행이 아니라 들뢰즈의 말대로 ‘창조적이며 동시적인 역행’이다.

 합리주의 철학이 유럽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는 도축된 짐승을 그린 정물화가 유행했다. 동시에 그 시기는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수를 하루 종일 고문하다가 죽이는 공개 처형이 널리 행해지던 시기였다. 도축당하는 가축과 처형당하는 인간. 비슷하지 않은가? 인간이 가장 동물적인 순간이 바로 비명을 지르는 순간이라고 한다. 비명은 분절화된 정신의 소리가 아니라 동물적인 몸이 내지르는 소리다. 

 17세기에 그려진 도축된 가축의 정물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준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전통적인 십자가책형의 모티브를 쏙 빼닮았다. 사실 예수도 사형수가 아니었던가? 신의 아들이었던 그도 십자가 위에서는 도축되는 짐승과 다름이 없었다. 베이컨이 저 짐승의 형체를 종교예술의 형식인 ‘트립티콘(삼단제단화)’에 담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른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동물이 됨으로써 비로소 신의 아들이 될 수 있었다.

 

 성스런 짐승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기원전 384년 전의(典醫)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관습은 의사의 가문은 의학 및 해부의 기술을 그들의 자손에게 계속 교육시켰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과 과학일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싹이 터있었다.  기원전 4세기의 철학에서는 과학전체를 아울렀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이해하고 통합하며 조직화하여 나름대로의 철학을 완성하여 그는 눈부실 정도의 학문적 성공을 이루어내 크게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왕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기 아들인 왕자(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된)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여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어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Alexander)대왕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승은 제자가 너무 지나치게 여인에 빠져 학문을 소홀히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여색에 빠지면 정신건강에 해가 되어 남자답지 못하게 되며 학업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하고 여인과의 관계를 삼가라고 했다. 이것으로 보아 알렉산더 왕자가 절세의 미인 필리스(Phyllis)라는 고급접대부(헤타이라,hetaira)를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던 모양이다.

여자를 멀리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당연히 필리스의 귀에는 곱게 들릴 수 없었다. 앙심을 품은 필리스는 자신과 대왕을 떼어놓으려는 철학자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그 빼어난 자태와 교태로 이 노(老) 철학자를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뜨거운 육체로 무장한 사랑의 공세가 과연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된 철학자를 정복할 수 있을까 하였는데 승부는 이외로 빨았다. 제자에게는 여자를 멀리하라고 가르쳤던 대철학자가 스스로는 사랑에 눈이 멀어 여인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부탁을 받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체면을 내던지고 기꺼이 그녀의 소원대로 그녀를 태우는 말이 되어 주었다. 이로써 필리스의 복수는 멋지게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필리스의 복수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고 교묘한 계략으로 알렉산더 왕자가 이 장면을 엿보도록 손을 써 놓았다. 자신에게 여자를 멀리하라고 가르쳤던 점잖은 스승이 여자의 노예가 되어 네발로 땅을 기는 모습을 보게 하면 왕자의 마음은 돌아설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를 골탕 먹이는 데에는 성공하였을지라도 알렉산더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철학의 대명사로 통하던 스승의 이성마저도 한 여인네의 공세 앞에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고, 오히려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이 정말 옳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알렉산더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필리스를 완전히 멀리했고 스승을 더욱 종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던 역사적 실화가 아니다. 

이 전설을 추적해 올라가면, 13세기 프랑스의 ‘앙리 당들리’라는 작가가 남존여비의 제창자이며 철저한 남성우월론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詩)를 기초해서 꾸며 낸 이야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중세의 작가가 왜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실을 꾸며냈는가 하면 당시 사회의 성적인 풍기가 하도 문란하니 도덕적인 경고로 ‘여자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 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여자를 경계하며 그 앞에서 금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철저히 중세적이다. 고대인들은 여자의 유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중세인들 만큼 금욕적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필리스의 보복사건 (2012.09.01. MD저널)

 

 필리스 :: 트라케 왕의 딸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시톤(Sithon), 필레우스(Phyleus), 키아소스(Ciasus), 리쿠르고스(Lycurgus) 등 판본마다 매우 다양하다. 
전승에 따르면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Theseus)의 아들이자 뛰어난 용사인 데모폰(Demophon, 혹은 그의 형제 아카마스)은 트로이의 전쟁이 끝난 뒤 아테네로 귀향하는 중 갑자기 몰아친 폭풍우로 인해 트라케의 스트리몬(Strymon) 강 근처에 표류했다. 트라케의 왕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안정을 취한 후 아테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이 과정에서 트라케의 공주 필리스(Phyllis)는 궁정에 머물던 데모폰과 사랑에 빠졌다. 왕은 기꺼이 자신의 왕국을 딸의 지참금으로 주며 둘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고국이 그리웠던 데모폰은 아테네에 잠시 다녀올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다. 필리스는 ‘아홉 번의 길(Ennea Hodoi)’이라 불리는 곳까지 따라가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였다. 그리고 레아(Rhea)의 성물이 들어있다는 작은 상자를 그에게 주며 자신에게 돌아올 가망이 전혀 없어지면 열어보라고 했다. 이후 데모폰은 그녀를 버리고 크레타 섬(혹은 퀴프로스 섬)의 공주와 결혼했다. 약속한 기한이 지나도 데모폰이 돌아오지 않자 크게 낙심한 필리스는 그를 저주하며 목숨을 끊었다. 일설에는 그녀가 그를 배웅했던 항구에 아홉 번 나가 배를 기다렸다고 한다. 어느 날 데모폰은 필리스가 한 말이 생각나 상자를 열보았다가 갑작스런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말에서 떨어졌고 자신의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필리스 [Phyllis] (두산백과)

 

 유기체

 디오게 : ‘사회유기체설’이란 거 들어보았나?

 사회가 거대한 유기체라는 주장일세. 개인들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기관에 불과하다는 거지.

 

 기관 없는 신체

 디오게 : 칸트를 생각해보게. 그는 인간의 인식 능력들이 일 안하고 놀 때 예술이 탄생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아리스: 그랬지요. 오성과 감성이 인식을 낳지 않고 자유로이 유희할 때 미적인 상태가 된다고...

 

 놀이

 13세기 카스틸리엔(kastilien)이라는 곳에 알폰소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전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다양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는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알폰소의 표>라는 성좌도를 만들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그 유명한 항해를 할 때 사용했던 게 바로 그 성좌도라고 한다.

 오래된 책에 이르기를, 인도에 한 임금이 있어, 현자들을 사랑하는 고로 늘 그들을 곁에 두고 사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설명하기를 요구했다. 그 현자는 세 사람이었는데, 견해가 서로 달랐다. 그 중 한 사람은 이성이 운수보다 더 귀하다고 말했다.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을 질서정연하게 처리하고, 그래서 설사 손실을 입더라도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닌데, 그가 늘 대체적으로 옳고 적절한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르기를, 운수가 이성보다 더 귀한데, 그 이유는 ‘운수’가 이득이나 손해를 가져오는 것은 그 어떤 이성으로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세 번째 현자가 말하기를 이성과 운수, 이 두 가지를 모두 즐기는 사람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성이 너무 많으면 모든 일을 올바로 처리하느라 걱정이 많아지고, 반면 운수에 맡기면 맡길수록 위험이 더 커지는 바, 그것은 행운이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다라서 이성이 장점이 될 것 같으면 이성을 사용하고, 운수 앞에서는 그것을 잘 활용하되 가능한 한 해(害)를 예방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자기 생각을 다 얘기하자 왕이 이들이게 명하기를, 각자 자기 말을 뒷받침할 증거를 가져오되, 기한은 마음대로 정하라 일렀다. 그러자 이들이 자리에서 물러나 각자 자기들의 견해에 따라 책을 읽으며 연구를 했다. 이윽고 약속한 시한이 되자 이들은 각자 증거물을 지참하고 왕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성이 중요하다고 했던 현자는 장기판을 내놓으며 가장 똑똑하고 주의 깊은 자가 상대방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운수가 중요하다고 말했던 두 번째 현자는 주사위를 내놓았다. 판돈을 건 주사위 던지기 내기가 보여주듯이 이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운수만이 귀하다는 것이다. 이성과 운수를 함께 택해야 한다고 말했던 세 번째 현자는 말판, 숫자를 맞추어 가지런히 상자 안에 넣은 말들, 그리고 이 말들을 움직이게 해주는 주사위를 내어놓았다. 훌륭한 경기자는 주사위를 던져 뜻하지 않게 불리한 결과가 나와도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그 해(害)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덱스 알폰소(Codex Alfonso)에서

 

 놀이의 세 가지 유형

 ‘라플라스의 악마.’ 그의 두뇌는 무한대의 용량과 무한대의 처리 능력을 갖고 있어,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원자)의 운동량과 위치값을 입력, 연산하여 그 결과를 출력할 수 있다. 이 무한한 용량의 두뇌를 가진 악마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우주에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진행을 남김없이 예언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이것이 근대인들이 보는 우주의 모습이다. 그들의 우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필연적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거대한 코스모스였다.

 하지만 현대 과학자들은 이렇게 우주의 진행을 남김없이 예언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잃었다. 우주의 진행에는 필연만이 아니라 ‘우연’도 개입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우연은 그저 ‘아직 인식되지 않은 필연’에 그치는 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인식될 수 없는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주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확정되지 않은 거대한 카오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술은 당시의 세계상을 반영했다. 세계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구조화된 우주(코스모스)로 여겨지던 시대에, 예술 역시 질서와 조화(코스모스)를 구현한 작은 우주로 간주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이 코스모스로서의 우주라는 관념이 무너진 후, 예술 역시 더 이상 아름다운 ‘조화’를 추구하는 대신에 매우 난해하고 혼돈스런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현대 세계상의 그림인 셈이다.

 

 라플라스의 악마 ::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1814년 고안한 가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존재.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는 가설 속의 존재를 후대의 작가들이 악마로 이름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이 초기 조건만 알면 모든 일을 예상할 수 있다는 사고를 오늘날 라플라스 세계관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플라스의 악마 [-惡魔, Laplace’s demon] (과학용어사전, 2010.4.14., 뉴턴코리아)

 

 놀이와 세계상의 유사성

 후이징가(Johan Huizinga, 1872~1945)는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 문화의 바탕에는 ‘놀이’의 원리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에도 놀이의 원리가 깔려 있다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놀이’와 ‘예술’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가령 놀이와 예술은 둘 다 어던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아울러 놀이와 세계와 예술의 세계는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갓된 허구도 아닌 제3의 영역을 이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은 거짓말을 통해 참말을 말한다.”고 했을 때, 그는 예술적 가상이 갖는 이 애매모호한 측면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과 놀이는 한갓 하릴없는 장난이면서 동시에 현실 못지않게 진지한 세계다.

 놀이는 진지하게 보지 않으면 성립할 수가 없다. 놀이에 열중한 사람들은 놀이 속의 적대자보다, 그 놀이 바깥에서 그것이 실없는 짓이라고 말하며 분위기를 개는 사람을 더 싫어한다. 그런 사람을 흔히 ‘놀이를 망치는 자(Spielverderber)’라 부른다. 한편 놀이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봐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카드 놀이나 장기를 두다 말고 서로 멱살 잡고 싸우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너무 하릴없지도, 너무 진지하지도 않은 중간의 영역, 그곳이 놀이의 영역이며 동시에 예술의 영역이다.

 

 예술 속에서의 놀이

 전통적인 회화는 그림 속의 형상이 이성에 따라 배치되는 필연의 예술이었다. 여기서는 예술가가 창작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이성적으로 통제했다. 일단 드로잉이 끝나면, 그림은 완성될 때까지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고, 따라서 거기에 우연한 형태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림 속의 모든 형태에는 존재할 필연적 이유가 있었고, 그런 이유가 없는 형태는 그림 속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림 속에 우연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그리하여 화가 자신도 그림을 시작하는 순간에 그 작품이 마지막에 어떤 형태로 실현될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예술가는 우연을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창작 과정을 더 이상 의식적ㆍ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된다. 화폭에는 그의 의지와 관계없는, 그리하여 그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형상들이 발생한다.

 놀이에도 세 가지 유형이 있듯이, 현대 예술에도 세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몬드리안의 추상과 같은 ‘필연’의 예술이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세계를 닮은 듯한 기하학적 추상은 사물이 가진 우연적ㆍ가변적 측면을 제거하고 사물의 불변적ㆍ필연적 본질을 드러내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회화는 전혀 다른 것 같아도, ‘코스모스’의 미적 이상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실은 매우 전통적인(?) 회화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화폭에 물감을 뿌리는 잭슨 폴록의 ‘드리핑’처럼, 과감하게 예술에 우연을 도입하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길이 1미터짜리 실을 화폭에 떨어뜨린 후 그것을 그대로 접착시켜 작품으로 제출했다.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 음표를 무작위로 추출하여 그것으로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창작 과정의 전부 혹은 일부를 ‘우연’에 맡겨버리는 것을 예술학에서는 알레아토릭(aleatorik, 주사위 던지기)이라 한다.

 한편, 아일랜드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판 놀이처럼 작품 속에 우연과 필연을 결합시킨다. 그는 일단 드로잉 없이 그림을 시작한 후, 중간에 손으로 뭉개거나 솔로 문지르거나 혹은 물감을 뿌리는 식으로 화폭에 우연을 도입한 수, 그렇게 발생한 형상 속의 내적 필연성을 쫓아서 다시 형상을 완성해나간다. 덧칠을 한 후 긁어내 얻어지는 우연적인 문양으로 풍경을 연출한 에른스트의 작품에서도 우연과 필연은 하나로 결합된다.

 예술이 놀이이고, 놀이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면, 예술가들은 화판에 그림을 그리면서 실은 각자 제 취향에 맞는 자기의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몬드리안은 장기를 두고, 폴록은 주사위를 던지며, 베이컨은 말판 놀이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놀이 속에서 세계는 필연의 코스모스로, 우연의 카오스로, 그리고 대로는 우연과 필연이 결합된 카오스모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4. 미디어의 미학 – 다시 가상과 현실

 사진과 영화는 어디까지나 원본 다음에(nach) 온다. 그렇지만 텔레비전의 생중계와 함께 원본과 복제 사이의 시간차도 사라진다. 원본과의 시간차를 없애버린 복제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점차 스스로 원본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원본과 복제는 서로 자리를 바꾼다. 컴퓨터와 인터넷과 더불어 가상은 마침내 현실이 된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꿈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 꿈은 이루어졌다. 

 

 원작과 복제

 원작의 예술, 복제의 기술

 ‘모던’이라는 시대는 이렇게 형상의 싸움으로 열렸다. 예전에 형상이란 곧 원작회화를 가리켰다. 그림이 곧 원작이었을 때 그림은 원작만큼 귀했다. 하지만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주위를 돌아보라. 신문, 잡지, 방송, 광고 등 도처에 그림이 넘쳐흐른다. 그 모두가 원작이 아니라 복제된 영상이다. 기술 복제된 영상으로 지어진 이 세계의 창세기는 사진술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정지된 사진은 곧 달리기를 배우고, 얼마 후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연극의 위기가 찾아온다.

 예술을 몰아내는 이 새로운 기술에 보수주의자들은 격렬한 반감을 드러냈다. 신을 닮은 인간의 형상은 오직 신적 영감을 받은 예술가들에 의해서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벤야민은 이 새로운 사진과 영화의 기술적 가능성에 열광했다. 새로운 생산력이 낡은 생산관계를 무너뜨리듯이, 이 새로운 미디어들이 보수적 예술관념의 질곡에 억눌린 인간의 창조력을 해방시키리라는 것이었다.

 

 시뮬라크르

 복제는 물론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사진과 영화는 목판ㆍ동판ㆍ석판 같은 전통적 매체와 차원이 다르다. 전통적 복제에서는 원상과 모상 사이에 인간의 손이 개입한다. 반면 사진의 경우 원상과 모상의 닮음을 만드는 것은 ‘카메라 옵스쿠라’라는 자연현상이다. 그리하여 렌즈를 보는 눈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있는 자, 그 누구라도 자연의 모상을 뜰 수 있다. 기술이 예술을 대체해버리는 것이다.

 사진은 시뮬라크르다. 가령 화가가 제작한 판화에는 번호가 붙는다. 1/100, 2/100, 3/100, ...99/100, 100/100. 복제조차도 원판에 가까운 순서로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매체는 다르다. 거기에 원작은 없다. 혹은 모든 게 원작이다. 사진과 영화는 원작과 복제의 구별을 모른다. 처음부터 복제된 상태로 원작이 된다. 이렇게 원본 없는 복제를 우리는 ‘시뮬라크르’라 불렀다.

 사진과 더불어 복제기술은 발전의 ‘새로운 수준’에 도달한다. 복제가 원작을 베끼는 데서 벗어나 거꾸로 창작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복제가 원작을 베꼈다면, 이제는 거꾸로 원작이 복제를 베낀다. 

 

 크로노포토그래피 :: 과학적 연구를 위해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찍은 사진.
1870년대의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와 1880년대 프랑스의 머레이(Jules Marey)가 선두적인 활동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크로노포토그래피 [Chronophotography] (만화애니메이션사전, 2008.12.30.,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아우라의 파괴

 원작회화는 ‘지속성’을 갖는다. 현재부터 탄생가지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다. 이 선이 도중에 끊기면 진품성을 의심받게 된다. 원작은 ‘일회성’을 갖는다. <모나리자>의 복제는 수없이 많아도, 원작은 세상에 딱 하나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원작은 분위기를 갖는다. 그래서 바로 앞에 있어도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의 분위기, 즉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 할 수 있다.

 복제영상은 어떤가? 웬만한 집에는 적어도 하나쯤 저 멀리 유럽의 박물관에 있는 원작의 복제가 걸려 있을 게다. 대대손손 물려줄 게 아니라면 머잖아 그 사진은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거기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방을 또한 장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복제는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다. 복제의 체험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가까운 것의 반복적 나타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아무리 먼 것이라도 복제해 가까이 놓으려 한다. 현대인의 지각은 이렇게 사물에서 아우라를 벗겨내는 특징이 있다. 왜 그럴까? 이미 세계가 ‘시뮬라크르’로 변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장인적 생산이 유일물의 생산이었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하나의 코드로 대량의 상품을 찍어내는 재생산, 즉 복제의 성격을 띤다. 시뮬라크르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는 당연히 사물을 보는 인간들의 시각도 바뀌지 않겠는가.

 

 예술의 기능 변화

 원작에 들러붙은 ‘아우라’는 예술이 아직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던 시절의 흔적이다. 그리스의 신상, 중세의 교회, 근대의 성화는 원래 예배를 위해 제작된 것이다. 하지만 아우라를 파괴하는 현대인의 지각은 그것을 한갓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예배가치를 잃은 원작은 이제 전시가치만을 갖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한탄한다.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의 붕괴’를 비난하며 작품의 예배가치를 ‘보존’하라고 현존재의 태도 변화를 요청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아우라의 파괴를 긍정한다. 예술이 예배가치에서 전시가치로 기능 변화를 겪는 것은 진보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대중

 원작은 ‘지금, 여기’의 현존성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원작을 보러 다니는 것은 종교적 순례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복제예술은 원작의 현존성(presence)을 파괴한다. 언제 어디에라도 원작의 모상을 갖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작은 귀하다. 그래서 과거의 예술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복제는 흔하다. 복제예술은 그 흔함 대문에 역사상 최초로 ‘대중’을 예술 수용의 주체로 만들어 주었다. 벤야민이 아우라의 파괴를 긍정적으로 본 것은, 거기에 내재된 이 혁명적 변화를 읽었기 때문이다.

 원작과 복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르다. 원작회화는 보는 이를 빨아들인다.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그림 속에 들어가 영원히 나오지 않았다는 전설 속의 중국 화가가 된다. 복제된 영상은 다르다. 여기서는 영상이 보는 이에게로 빨려 들어온다. 전시회에서 주눅이 드는 사람도 영화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회화에 대해 입도 뻥끗 못하는 이들도 영화에 대해서는 저마다 한마디씩 할 줄 안다. 이렇게 복제기술은 “피카소를 보는 보수적 태도를 채플린을 보는 진보적 태도”로 바꾸어 놓는다. 매체는 대중을 주체로 만든다.

 배우과 관객, 저자와 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대중매체는 관객을 배우로, 독자를 저자로 만든다.

 

 산만한 검사자

 새로운 미디어는 전통적인 장르에도 변화를 강요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입각한 전통극은 무대 위에 ‘가상’을 만들어 놓고 그리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이때 대중의 비판의식은 마비된다.

 가령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연극배우에게는 인격의 아우라가 있다. 하지만 기계(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영화배우는 아우라를 가질 수 없다. 은막 위의 배우는 관객과 눈을 마주칠 수도 없기에 관객이 극중 인물로 감정을 이입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영화의 대중은 배우들의 연기를 더 냉정하게 보고, 더 비판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게다가 영화는 몰입을 막는다. 움직이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1초에 스무 번 변하는 영상에는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몰입이 불가능하기에 관객은 자연히 영화 속 현실에 비판적 거리를 취한다. 영화의 지각은 산만하다. 산만한 것은 오락이다. 대중은 영화를 오락으로 즐긴다. 하지만 그 ‘산만한’ 오락이 대중으로 하여금 극중 현실에 넋을 잃지 않고 거기에 늘 깨어 있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대중은 ‘산만한 검사자’다. 

 

 시각에서 촉각으로

 브레히트는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시학》의 이상을 파괴했다. 영화는 그가 기법으로 실현한 것을 기술적으로 해결한다. 영화는 연극과 조직의 원리가 다르다. 연극이 기승전결의 유기적 총체라면, 영화는 잘라낸 쇼트들의 기계적 파편이다. 연극이 푸생의 회화라면, 영화는 다다의 콜라주 작품이다.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마저 비로소 ‘조립’되는 어떤 것이 된다.

 전통적인 예술이 전체상을 제시하려 한다면, 영화 예술은 사물의 부분을 클로즈업하여 분석적인 상을 제시한다. 카메라의 앵글은 수시로 바뀌며 시각적 이미지의 단편들을 전달한다. 카메라는 육안으로 못 보는 동작도 잡아낸다. 낯익은 대상도 카메라를 거치면 낯설게 나타난다. 이로써 우리는 늘 보고 지나치면서 의식하지 못했던 세계를 알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정신의 무의식적 층위를 드러냈다면, 영화는 이렇게 시각의 무의식적 층위를 보여준다.

 무대라는 한계를 가진 연극과 달리, 영화에는 공간의 제약이 없다. 대문에 영화의 관객은 가만히 앉아서도 그 몸이 카메라를 따라 움직이게 된다. 연극을 보는 것이 건물을 밖에서 조망하는 것이라면, 영화를 보는 것은 건물 안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내부의 구조를 몸에 기억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영화의 몽타주는 ‘쇼크’ 효과를 내지 않는가. 가령 텔레비전의 광고가 아기들의 눈을 잡아끄는 것을 생각해보라. 영화는 이렇게 현대인의 지각을 시각에서 촉각으로 바꾸어 놓는다.

 시각은 정신의 관조를 요구하나 촉각은 몸 훈련의 문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컴퓨터 자판은 어느새 손가락 끝에 기입된 몸의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다. 영화처럼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는 대도시의 지각은 산만할 수밖에 없다. 몰려오는 인파들, 달려드는 자동차들, 수시로 바뀌는 신호등으로 가득 찬 세계 속을 지나려면, 매 순산의 대응이 몸에 ‘익숙함’이라는 형태로 기입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영화는 현대적 삶의 요구에 조응하도록 우리의 몸을 ‘훈련’시킨다.

 

 오지 않은 혁명

 이렇게 벤야민은 새로운 미디어가 대중의 지각을 훈련시키고, 그들의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며, 그들을 예술적 수용과 예술적 연출의 주체로 세울 것이라 보았다. 나아가 집단적인 수용을 요구하는 영화가 파편처럼 흩어져 사는 대중 사회의 원자들을 모아, 정치의식을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해줄 것을 기대했다.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혁파할 새로운 생산력이 사진과 영화라는 미디어의 형태로 등장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그가 내세운 개별적 주장들은 지나친 낙관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미디어가 사회와 인간과 예술을 변화시킨다는 핵심적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타당하다. 그의 말대로 미디어는 세계를 구성하고, 이간의 지각을 변화시키며, 나아가 원작의 생산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계단

 건축과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둘 다 ‘기술’이라는 점이다. 회화는 예술이나, 영화는 기술이다. 조각은 예술이나, 건축은 기술이다. 빙켈만의 그리스인들은 ‘예술’을 갖고 있었다. 피라네시의 로마인들은 ‘기술’을 갖고 있었다.

 

 영화관에서

 파편 

 디오게 : 예술 작품은 ‘유기적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했나?

 영화의 ‘몽타주’ 원리는 바로 그것을 파괴한다네.

 몽타주란 영화의 ‘커팅’을 말한다네.

 그렇게 잘라낸 단편들을 조합해서 얻어지는 예술적 효과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

 아도르노던가? “미시적인 구조로 볼 때 새로운 예술은 모두 몽타주라 할 수 있다.”

 아리스 : 그게 고전 예술과 현대 예술의 차이인가요?

 디오게 : 그렇다네. 유기적 통일성에서 몽타주의 파편성으로.

 

 폐허

 디오게 : 플롯을 짜는 법에 관해 《시학》에서 뭐라 그랬지?

 아리스 : “한 사건에 이어서 다음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 한 사건의 결과로 다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다르다.”

 디오게 : 자네의 연극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전제하고, 그것의 충실한 가상을 만들어내려 한다면...

 아리스 : 영화는 그렇게 만든 세계의 가상을 파괴한다.

 

 쇼크

 아리스 : 아름다움으로 쾌감을 주고, 가상으로 재인식을 주지 않는다면, 뭐하러 예술을 하나여?

 디오게 : 쾌감 대신 쇼크를 주고, 재인식 대신 인식을 준다고 할까...

 

 몽타주

 아리스 : 모든 인식은 재인식 아닌가요? 인식이란 결국 의식의 거울 위에 현실의 올바른 모상을 띄우는 것이니까.

 디오게 : 자네의 ‘재’인식이야 이미 아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데에 불과하지.

 진정한 인식은 늘 쇼크를 동반하지. 익숙함이 깨질 때의 충격을,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절대성이 무너지는 굉음을...

 몽타주란 이미지 a와 이미지 b가 부딪칠 때 발생하는 제3의 이미지 c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팬텀과 매트릭스

 인쇄된 사진과 글자는 실제 사물보다 훨씬 사실적이었지요. 그래서 단지 인쇄매체를 통해 공표된 것만이 진실했다고나 할까요?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진으로 찍혀야 한다는 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유일무이한 개념이었지요.

- 권터 안더스, 《지친 자의 유토피아》

 

 지친 자의 유토피아

 맥루안(Marshall McLuhan, 1911~1980)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며 그것이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켜줄 것이라고 본다. 안더스는 거꾸로 나아간다. 인간은 머잖아 미디어의 노예가 될 것이다. 기술은 급속히 발달하는 반면, 인간의 자연적 능력은 그렇게 빨리 발달할 수 없다. 이 격차 때문에 인간은 언젠가 제가 만든 것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을 것이다.

 벤야민은 집단적 수용을 요하는 미디어가 산업사회의 원자들을 묶어 공적 대중, 즉 정치적 계급으로 조직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개별적 수용을 요하는 텔레비전의 시청자는 탈정치화된 사적 대중일 뿐이다.

 벤야민은 미디어가 비판적 수용을 촉진한다고 본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수용은 무비판적이어서, 시청자는 편집된 영상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인다. 벤야민은 산만함을 현대적 지각의 특징으로 본다. 안더스에게 그것은 그냥 정신사나움일 뿐이다. 벤야민은 미디어가 감각을 발달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외려 감각을 퇴화시켜, 시청자를 영상의 요리를 입에 넣어줘야 비로소 오물오물 씹어먹는 구강기의 유아로 전락시킨다.

 벤야민은 미디어를 우리를 “모험에 가득 찬 여행”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시청자는 실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가 설사 진짜 여행을 떠나는 일이 있어도, 거기서 그가 보게 될 원본은 텔레비전에서 본 영상만 못할 것이다. 텔레비전이 센세이셔널한 영상을 보여주려 안달하는 노출증 환자라면, 시청자는 브라운관이라는 구멍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며 은밀히 즐거워하는 관음증 환자로 전락한다.

 

 팬텀

 앗제(Jean Eugene Atget, 1857 ~ 1927)의 사진 중에는 유령을 담은 게 있다. 노출 시간을 길게 하다 보니 움직이지 않는 건물은 뚜렷한 형태로 찍히고, 그 사이를 걷는 인간은 희미한 흔적만 남게 된 것이다. 물론 의도했던 효과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의식적으로 그 효과를 노린 작품이 적어도 하나가 잇다. 그의 자화상이다. 저기서 앗제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스스로 거리의 유령이 된다. 이 작품은 복제영상의 어떤 존재론적 특성을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다. 저 사진 속에서 앗제는 존재하는가? 부재하는가?

 안더스는 텔레비전으로 전송되는 복제영상을 ‘팬텀(Phantom)’이라 부른다. 그것은 가상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특히 이는 실시간 중계를 할 때 뚜렷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9ㆍ11 테러 때 우리는 쌍둥이 빌딩이 불타는 것을 CNN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 거대한 빌딩이 방 안에 들어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에 쌍둥이 빌딩은 정말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동시에 ‘실재’다.

 독일어로 모상을 ‘나흐빌트(nachbild)’라 한다. 여기서 ‘나흐(nach)’는 ‘뒤에‘ 혹은 ’따라서‘라는 뜻이다. 모상은 이렇게 원상의 뒤에, 원상을 따라서 만들어지는 형상이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영상에는 원상과 모상을 가르는 이 시간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상과 원상, 복제와 원본, 가상과 실재를 가르는 기준도 모호해진다. 그래서 그것은 가상도 실재도 아닌, 제3의 존재층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가상도 실재로 아닌 이 팬텀이 되어간다.

 

 매트릭스 

 벤야민은 영화의 몽타주 기법을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탁월한 방식으로 보았다. 하지만 안더스는 몽타주라는 편집기술에서 외려 탁월한 조작의 수단을 본다. 소위 편집의 예술이라는 게 있다. 동일한 영상의 요소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그것들의 전체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편집자를 세계의 건축가로 만드는 이 편집의 틀을 안더스는 ‘매트릭스’라 부른다. (내가 아는 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권터 안더스다.) ‘팬텀’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라면, ‘매트릭스’는 그 재료로 세계를 짜는 활판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의식이 시공의 형식에 따라 구성한 것이라는 얘기다. 편집의 몽타주도 마찬가지 아닐까? 신문을 짜는 원리는 세계를 짜는 원리다. 과거의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거나, 해석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조작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더 중요한 조작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조선일보의 기사와 한겨레의 기사 차이. 

 

 위계의 전복

 존재한다고 사실이 아니다. 일어난다고 사건이 아니다. 사실이 존재하려면 보도가 되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나려면 카메라에 복제되어야 한다. 미디어로 복제되지 않는 한 사실은 존재할 수 없고, 사건을 일어날 수 없다. 사실과 사건을 있게 하는 것은 미디어다. 그것이 비로소 사건을 사건으로,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실이 원본의 형태로보다 복제의 형태로 더 중요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는 복제가 현실을 베끼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이 복제를 베끼는 사태가 벌어진다. 

 실제로 카메라가 없었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카메라가 현실을 복제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연출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매트릭스, 리로디드

 시뮬라크르는 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이며, 시뮬라시옹이란 그 재료로 세계를 구성하는 활판이라 할 수 있다.

 권터 안더스는 아직 현실의 이름으로 가상을, 진리의 이름으로 허구를 비난했다. 여기에는 현실이 있고, 그것의 존재를 가상이 위협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에게서는 이 관계가 거꾸로 뒤집힌다. 그에게는 가상이 있고, 그것의 존재를 현실이 위협한다. 한마디로 현실을 위협하던 가상이 어느새 현실을 잡아먹고, 주변으로 밀려난 현실이 가끔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디즈니랜드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그 유명한 디즈니랜드 성은 실은 독일의 어느 성을 베낀 것이다. 하지만 복제가 어디 디즈니랜드에만 있던가? 유럽의 유명한 건축물을 베낀 건물은 미국 곳곳에 널려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유럽 문명의 복제로 출발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인 셈이다. 디즈니 랜드는 이를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 유치함은 디즈니랜드에만 있고, 그 밖의 세계는 마치 유치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듯이...

 하지만 미국이 거대한 가상이라 함은 단지 이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거대한 시뮬라시옹이고, 그 자본주의가 가장 급진적인 곳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은 하나의 코드로 같은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재생산(복제)의 체제다. 여기서 사물은 곧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런 자본주의 하에서도 예술은 유일물을 만드는 장인적 생산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아성을 무너뜨리고 캠벨 깡통, 브릴로 박스, 만화의 커트가 예술 작품이 된 곳이 바로 미국이다.

 자본주의는 사물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한 상품과 다른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 사물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인간이 상품과 상품 ‘사이’를 소비하고 그 ‘차이’를 지불하기 위해 일하는 거대한 꿈의 세계, 어른들의 디즈니랜드다.

 

 워터게이트

 과거의 조작은 사실의 날조, 해석의 왜곡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안더스는 가장 중요한 조작은 카메라로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비추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때부터 일어난다고 했다.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날의 조작은 아예 거대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그 안으로 현실이 침입해 들어와 이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과거에는 가상이 현실을 위협했다. 이제는 현실이 가상을 위협한다. 여기서 현실은 프로그램에 미리 입력되지 않은 ‘버그’의 신세가 된다.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 버그는 발견되고, 추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여기서 왜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드리야르의 책이 등장하는지 알 수 있다. <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와 그의 친구들이 바로 프로그램을 망치는 이 버그이기 때문이다. 스미스 일당은 이 버그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제거하려 한다. 

 

 하이퍼리얼리티

 벤야민은 복제가 원본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했다. 안더스는 영상이 실물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했다. 보드리야르에게서 가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실재가 된다. 이렇게 현실보다 더 실재적인 가상의 세계를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라 부른다.

 사실주의자는 복제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인정하나, 하이퍼리얼리스트들은 그 위계를 전복시킨다. 그들은 사진으로 회화를 복제하는 게 아니라 회화로 사진을 흉내낸다. 이를 위해 슬라이드 필름을 화폭에 비추어놓고 그대로 본을 뜨는가 하면, 아예 화폭에 인화물질을 발라 캔버스 자체를 거대한 인화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플갱어

 똑같은 책이라도 시대가 바뀌어 해석의 지평이 달라지면 새로운 책이 된다.

 

 두 개의 예술사

 들뢰즈의 말대로 “모든 위대한 화가는 자기만의 미술사를 갖고 있다.” 위대한 화가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미술사를 요약한다. 그렇게 요약한 미술사의 연장선 위에 제 작품을 올려놓고, 그것과 기존의 것들 사이에 획을 긋는다. 여기에 성공하면 소위 ‘획기적’인 작품이 되고, 그 작품을 만든 화가는 위대해진다.

 뉴먼의 위대함은 텅 빈 그림이 아니라 거기에 결부시킨 꽉 찬 이론 안에 있을 게다.

 

 두 개의 숭고

 “역사적 진실이란 단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다고 판단하는 행위”에 있다. 단지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숭고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일어났다고 판단을 내리는 이론이 그것을 일으키는 것이다.

 예술은 미술관에 소장된 물리적 현실의 총체가 아니다. 예술의 현실은 그 대상들 위에 유령처럼 덧붙여지는 해석들, 비평들, 이론들의 총체다. 이것들이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고? 그렇지 않다. 동일한 물리적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도 거기에 덧붙여지는 해석, 비평, 이론 등에 따라 실제로 다른 액수의 돈이 지불된다. 이만큼 현실적인 게 또 어디에 있는가? 가상이 그저 가상에 불과한 게 아니다. 하구가 그저 허구에 불과한 게 아니다. 가상이나 허구는 이미 현실이 존재하는 방식이 되었다.

 

 예술의 종언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에게 그림 하나를 보여주며, 작품성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얼룩덜룩 물감이 묻은 작품이었다. 대부분의 평론가가 그 작품에 비교적 호평을 했고, 그 중 하나는 이 무명 작가의 작품에 관한 평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모두 몰래 카메라에 담겼다. 이것을 보며 미국 시청자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작품은 인류의 소산이 아니라 그의 유전적 조상(원숭이)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보드리야르는 <르몽드(Le Monde)>와의 인터뷰에서 “현대 예술은 무가치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무가치한 것이 그렇게 높이 평가되고,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일까?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공모’의 결과다.

 

 예술의 공모

 한 화가가 실수로 캔버스에 칼 자국을 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에 제법 괜찮다. 그는 원래의 작업을 포기하고 이 작품(?)을 그대로 출품하기로 한다. 전시회 관계로 비평가가 그의 아틀리에에 들른다. 비평가는 그게 별것 아님을 뻔히 안다. 혹평을 해서 나무랄까? 아니면 그것을 미술사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줄까?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작품의 속성이 아니라 그 작가가 그에게 베푸는 대접의 함수다. 그날 분위기, 괜찮았나 보다. 다음 날 신문 문화란에는 이런 평이 실린다.

 21세기 화단의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작가 J씨. 회화의 형을 탐색하는 데에 주력해왔던 그가 최근 형을 초월하여 형이상으로 비약하고 있다. 화폭에서 보이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날카로운 칼 자국뿐이다. 여성의 성기를 닮은 저 캔버스의 틈은 언젠가 모든 존재자를 낳은 세계의 자궁이다. 찢어진 틈으로 입을 벌린 저 어두운 존재의 심연을 보라.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가 저기에서 충격적으로 시각적 직관성에 도달한다.

 물론 비평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쓴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긴, 원숭이 그림도 이해가 되는데 사람이 쓴 글이 왜 이해가 안 되겠는가. 깊은 형이상학적 감명을 받은 변호사 K씨. 작품을 구입하기로 마음먹는다. 예술가는 그에게 5천만 원을 요구했고, 그는 한 푼도 깎지 않고 선선히 수표를 끊어준다. 마침내 이 ‘공모’의 희생자가 생겼다. 5만 원짜리 캔버스를 졸지에 5천만 원을 주고 산 변호사 K씨.

 하지만 K라고 인생을 허투루 살겠는가. 그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 그 역시 평론가의 말이 허튼소리에 불과함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미술 바닥에서 저 유명한 비평가의 말은 헛소리도 곧 현실이다. 게다가 그 작품은 신문에 났던 것. 그것만으로도 상징자본이 붙는다. 게다가 그가 작품을 산 더 절실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더 높은 값에 되팔 수 있다면, 5만 원짜리 캔버스라도 얼마든지 5천만 원주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술계라는 시뮬라시옹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이 때문일까?

 

 가치의 황홀경

 모더니즘은 ‘차이’의 생산이었다. 현대 예술은 재현을 포기했다. 때문에 ‘얼마나 진실하게 묘사했느냐’가 아니라, ‘다른 작품과 얼마나 다른가’가 작품성의 기준이 된다. 덕분에 우리는 무한히 다양한 예술언어를 갖게 됐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다르다’는 것도 어떤 한계 내에서다. 그 도를 넘어서면 ‘다르다’는 것도 의미를 잃게 된다. 저마다 모두 다를 때, 남과 다르다는 것은 외려 남과 같다는 뜻이 된다. 왜? 남과 ‘다르다’는 것이 모든 이의 특징이니까.

 차이의 생산이 극에 달하면 외려 모든 가치가 소멸한다. 이 역설이 일어나는 지점을 보드리야르는 “가치의 황홀경”이라 부른다. 현대는 이미 개별자의 차이가 지워져 거대한 일자로 합류하는 디오니소스의 황홀경에 있다. ‘차이’의 생산을 원동력으로 삼았던 ‘모던’은 종말을 고하고, 사회는 이미 동일자를 무한 증식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가 있다는 것이다.

 

 초(超)미학

 과거에는 예술과 현실, 작품과 사물의 구별이 비교적 분명했다. 하지만 뒤샹이 변기를 들여오고, 워홀이 브릴로 박스를 들여온 후, 두 세계를 구별해주던 기준도 사라졌다. 미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 보니 어느 새 가치의 황홀경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드리야르는 뒤샹과 워홀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의 작품은 그가 진단한 어떤 시대적 징후의 예술적 증언이기 때문이다. 특히 워홀의 작품은 같은 이미지를 수없이 반복하는 동일자의 무한 증식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워홀은 동일자의 무한 증식을 ‘증언’했다. 하지만 그 뒤의 작가들은 그저 동일자의 무한 증식을 ‘실천’할 뿐이다. 말하자면 뒤샹과 워홀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작가들은 하나도 새로운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 자체가 동일자의 무한 증식에 불과하다. 어쩌면 뒤샹과 워홀은 ‘차이’를 생산한 마지막 작가일지도 모른다. 미술관에서는 변기를 두 개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평범한 것과 미적인 것, 둘 사이의 구별이 지워지는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초미학’이라 부른다. 미적인 것이 극점에 달하면 그것은 외려 사라진다. 모든 게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술은 또한 모든 것이 되고 잇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도시 풍경, 예술을 방불케 하는 기발한 상업광고, 작품을 연상케 하는 멋진 상품들, 예술은 현실로 실현되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술에 종언을 고한다.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

 

 예술의 종언

 예술이 아직 재현이었을 때, 현실은 원상이고, 그림은 모상이었다. 모상의 진리는 원상과의 일치에 있다. 복제는 원본과 일치할 때에만 참된 존재다. 원본과 다른 사본은 사기다. 실재는 실재, 허구는 허구. 이때만 해도 모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예술은 재현을 포기했다. 예술 과제는 있는 현실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비로소 있게 하는 현시(presentation)가 되었다. 작품의 진리는 있는 현실의 정직한 증언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만드는 창조의 힘에 있다. 한 세기 동안 우리는 그 창조의 즐거움을 만끽해왔다.

 하지만 없는 현실의 창조란 있는 현실의 조작일 수도 있다. 예술이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힘이라면, 우리의 현실은 허구다.

 우리의 문제는 이것이다.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기준 역시 가상이며, 현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마저 허구일 수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가상인가? 대체 어디까지 현실이며 어디부터 가상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라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예술이 종언을 고할 때 사라지는 것은 외려 현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허구와 실재가 복잡하게 뒤엉킨 새로운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원형의 폐허에서

 그림자의 진실

 플라톤 : 시뮬라크르는 거짓말을 한다네.

 디오게 : 아니, 그 그림자야말로 허식을 뒤집어쓴 저자들의 본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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