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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있어 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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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있어 곁이니까
아이를 갖기 시작한 한 사내의 소심한 시심 『자고 있어, 곁이니까』. 김경주 시인이 남자에서 아버지가 되어가는 40주 동안의 마음의 파동을 기록한 책이다. 생명의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 태내에 보내는 편지이자 태내를 간직한 산모에게 보는 편지, 아기의 신체가 생겨나는 동안의 시간과 변이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감수성, 한 사내로서의 감수성, 아기를 상상하며 태내를 떠올리는 무의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는 저자와 아내의 현실성에 관한 기록이자 변화를 준비하는 삶의 고백이기도 한 저자의 고백을 들어볼 수 있다. 40주 동안 저자가 느낀 숭고와 불안, 고독과 자책, 헌신과 감동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으로 출산 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는 우주의 섭리에 근거해 시와 편지, 에세이와 동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신비와 두려움의 속내를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아이를 낳는 일의 희망과 아이를 낳는 일의 절망을 함께 말하며 태아의 심장박동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는 운명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전한다.
저자
김경주
출판
난다
출판일
2015.11.13

 

0. 서문

 내게 잊히지 않는 순간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내 아이의 탄생일 것이다. 분만실에서 아내의 산통을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뜨거움을 느꼈다. 말을 조금 보태면 나도 분명 태어날 때 내 어머니와 함께 분만을 겪었을 텐데, 그 기억은 지금 온전히 내 경험의 목록에서 잊혔을 텐데, 내 몸의 일부로 빚어진 아이를 기다리면서 그러한 경험을 상기해볼 수 있었다. 그 뜨거움은 책이나 글쓰기로는 체험해보지 못한 혈액 같았다. 진통 끝에 아내 배 속의 혈관을 타고 흘러나오는 아이의 첫 머리를 보았다. 간호사가 아내의 배 위로 알몸의 아이를 올려주자 울음을 멈추고 다근다근 숨 쉬는 아이의 풍경 앞에서 나는 울컥했다. 내가 묘사할 수 없는 혈액이 내 눈앞에서 나를 닮은 눈을 갖고, 나를 닮은 입술을 갖고, 나를 닮은 숨을 쉬고 있었다. 오직 숨으로만 가득한 아이의 몸은 앵두처럼 붉고 맑았다. 그 숨소리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오랫동안 나는 내 글의 바깥에서 그 삶의 순간을 이해하기 위해 숨을 쉬었을 것이다.

 

 

 

1. 태동

 네 심장 크기가 양귀비 씨앗만하다고 했다

 배아 :: 식물의 경우에는 씨앗에서 영양분 부분을 제외한, 나중에 뿌리ㆍ줄기ㆍ잎으로 발달할 부분을 뜻하며, 동물에서는 수정 후 첫 난할 이후부터 완전한 개체가 되기 전까지의 생명체를 뜻한다. 완전한 개체의 시점은 명확하지 않지만 인간의 경우는 보통 임신 8주 전까지를 배아라고 하며 그 이후부터는 태아(fetus)라고 정의한다. 배아 시기에 난할부터 시작하여 모든 기관의 분화가 일어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배아 [胚芽, embryo]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간호사가 기분이 어떠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잠시 멍했다. 그 순간을 어떻게 명명해야 하는 것일까? 상상력이 닿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허약해지는 것인가를 느낀다.

 

 아마 너라는 하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내내 그렇겠지만 그동안 글을 쓰면서 내가 지속해온 관성, 즉 언어로만 길들여온 세계를 가지고서 내가 느끼고 있는 이 환희와 몽롱한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밀해진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우리의 눈들이 서로를 조금씩 알아본다는 거야.

 

 당신은 지금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습니다

 삶이 남기는 다양한 비밀은 저마다의 시차를 갖고 있다고 믿는 게 나인데, 때론 그 시차를 내 언어로 길들이고, 때론 다른 시차 속으로 비우고자 하는 게 내 시의 세계였는데.

 

 당신의 몸은 두 개의 심장이 나누는 대화일 것입니다. 사내인 나는 그 대화를 엿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황홀한 경이와, 때로는 두서없이 나타날 불안의 감정들 또한 두 개의 심장이 보여주는 태동일 것입니다. 두 개의 심장이 나누는 그 태동은 불현 듯 우리 앞에 삶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정말이지 나는 인간은 모두 태내에 있는 동안 두 개의 심장으로 지내는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경이를 품고 있습니다.

 

 당신은 산모입니다

 당신이 산모가 될 때 당신은 이제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여인이 되고, 당신이 산모라는 단어로 누군가에게 발음될 때 당신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보살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예감합니다.

 

 아이의 이름을 지으며 세상의 모든 단어들을 다시 배워가는 느낌입니다

 “난 요즘 아이의 이름을 지어보며 세상의 모든 단어들을 다시 배워가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함께 입덧을 앓고 있습니다

 자다가 당신이 울면서 깨어날 때, 혹은 내가 자다가 혼자서 흐느끼고 있을 때,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서로가 어떤 존재로 나타날지 나는 자주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라캉이 말하길 증상이란 무의식의 세계에서 실재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라고 했는데, 프로이트 이전의 마르크스는 실재의 세계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신호로서 증산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나는 그저 나와 당신의 무의식이 억압된 상태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물론 이런 정신분석학적 접근으로 우리들의 꿈을 전적으로 해석하기란 불가능하겠죠. 아이러니하게도 정신분석학이 인간에게 유의미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학문이나 과학보다 인간의 개별적 특수성에 주목한다는 것일 테니 우리를 쉽사리 그들의 예지몽이나 히스테리의 범주에 가둘 순 없을 것입니다.

 

 악몽은 불안하고 힘든 경험입니다. 악몽이란 분명 몸으로 경험하는 사실이면서도 눈앞의 사실이 아니니까요. 악몽은 뜬 눈 앞의 사실이 아니라, 감은 눈 안의 사실이니까요.

 

 몇 개월 후 태어날 아기의 중얼거림을 알아듣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잠시 멀미(입덧)를 하고 있는 겁니다.

 

 라캉 ::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하여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말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언어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것은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크 라캉 [Jacques Lacan] (두산백과)

 

 오늘도 나는 입덧을 공부합니다

 입덧 :: 어원은 ‘아침의 구역질(morning sickness)’

 

 체내에서 아기를 기르는 포유류들에게는 대체로 입덧이 존재한다고 하네요. 고양이는 새끼를 가지면 구토를 억제하기 위해 생선보다는 풀을 뜯어먹는다고 해요. 개나 원숭이도 임신을 하면 냄새가 나는 것들을 피한다고 해요. 체내에 생명이 생기면 몸의 호르몬이 새로운 상태와 조건을 만들기 위해 조절을 하기 시작하는 데서 오는 것이 입덧이라는데, 아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라고 여기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는데, 당신도 입덧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문명에 의해 나는 길들여졌지만 아직 나는 모성으로 인해 이 문명을 견디고 있어요.

 

 너의 태명, 두유(do you)?

 사람들이 자신의 태내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리워하는 것이 모성이듯이, 자신의 최초로 머물던 공간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경험은 이 세상을 공간의 형태로 연민하게 되는 습관을 가지게 한단다. 가령 자신이 살았거나 머물렀거나 하는 공간이 무척이나 다정하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오게 되지.

 

 이제 네게 눈꺼풀이 생겼단다

 내가 너와 가장 함께하고 싶은 여행은 언제나 음악으로의 여행이란다. 음악은 삶을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싫을 때 그것을 비밀스럽게 해주고, 삶이 잔인하게 너를 데리고 비탄을 보여줄 때도 네 옆의 천사가 되어줄 유일한 친구라고 믿게 한다. 음악은 너를 잃으면서도 너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혼잣말이 되어줄 테니까.

 

 대하를 처음 보았어요

 기억하나요? 언젠가 당신과 심하게 다투었던 날, 나는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어요. “난 신경질을 마음껏 피우고 싶어 문학을 하는 거라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렇게 살 순 없으니 내 문장 안에서는 마음껏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고.” 그로부터 며칠 후 당신에게 “그렇다면 당신의 문장들은 당신의 신경들이겠군요. 그럼 난 그 신경들을 만지고 살래요”라는 메시지를 받았죠. 그때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대하 :: 그 성분은 주로 외음부에 있는 피지선, 땀, 바르톨린선에서 분비되는 점액, 자궁경부에서 소량 나오는 점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분비물은 월경 주기에 따라서 약간씩 그 점액 정도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배란기에 즈음에는 좀 더 끈적거리기도 한다. 정상적인 경우는 점막에서 자체의 분비물이 나오지만 생식기 밖으로는 흘러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분비물 양이 많아지거나 생식기 내부가 병적인 상황이 되면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것을 냉증 또는 대하증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하 [leukorrhea, 帶下] (두산백과)

 

 아내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 라는 말속에는 엄청난 은유가 담겨 있는 듯해요.

 

 네가 곧 딸꾹질을 할 거라는데

 피아졸라 :: 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온 연주자이자 탱고 작곡가. 자신만의 새로운 탱고 스타일을 만들며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1992년 《다섯 개의 탱고 센세이션》을 발표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탱고의 황제'로 불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스토르 피아졸라 (두산백과)

  

 

 

2. 태담

 밤마다 나의 침대는 당신에게 이륙합니다

 음악은 살아가면서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수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눈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닐는지요.

 

 언제나 공항은 설레는 공간이지만 아무도 없이 혼자 남은 공항은 참 외로운 공간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가장 먼저 상대의 눈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무섭습니다. 하나의 이불 속에서 손을 잡고 잠드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일어나서 서로의 눈을 확인하는 것처럼 오늘밤 당신은 내 옆에 없습니다.

 

 당신을 ‘환자’라고 생각해서 돌보랬어요

 임신선 :: 임신 개월수가 더할수록 임부의 배와 유방이 팽창하여 과도하게 늘어나게 되는데, 피부 밑 조직이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작은 혈관이 터져서 생기는 선이다. 또는 피부의 급격한 내부 변화에 자극을 받아 발생하는 색소침착의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임신 7개월 무렵에 배 중간쯤, 곧 명치 아래에서 배꼽 밑으로 치골까지 세로로 나타나며, 붉은 기가 도는 보라색을 띤다. 배 이외에 유방에도 나타나고 허벅지나 엉덩위 주위 등에 나타나기도 한다. 비만이나 피부가 약한 사람에게 더 잘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출산 후에 점점 옅어지기는 하지만 엷은 백색의 자국이 남는다. 갑자기 체중이 불어나지 않도록 유의하고, 임신 4~5개월부터 오일 등으로 꾸준히 마사지를 하면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신선 [striae gravidarum, 姙娠線] (두산백과)

 

 며칠 후면 아이의 기형검사를 하러 가는데 걱저앟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내가 당신과 아기를 평생 돌볼 거니까요.

 

 상실감이 너무 큰 단어, 유산

 태반 ::  태아와 모체 사이에서 태아의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물질교환을 매개하는 구조물이다. 태아를 밖에서 싸고 있는 장막의 일부가 모체의 자궁내막에 접착하여 형성된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한 후 영양아층을 형성하고, 이것이 양막을 형성한 후 장막으로 바뀌는데, 이 장막의 일부가 모체의 자궁내벽과 합쳐져 태반을 형성하는 것이다. 태반은 태아에게 필요한 가스교환, 영양소 교환, 호르몬분비 등의 기능을 한다.모체의 자궁 내벽에 붙어 태아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으며 태반의 자궁 내 위치는 앞, 뒤, 기저부 등 어느 곳에도 위치할 수 있으며 이때 자궁 입구를 완전히 막거나 근처에 있는 경우 전치 태반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반 [placenta] (서울대학교병원)

 

 유산을 두 번째 경험한 그 친구는 차라리 자신이 아이를 갖고 싶다며 흐느끼더군요. 그래도 그가 아내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다행입니다. 아마도 그는 아내의 몸으로 들어가 여러 번 아이를 안아주었을 거예요. 밤마다 아이가 사라진 자궁의 그 빈 공간으로 들어가서 웅크린 채 울고 있을 거예요. 아내의 몸을 대신해서 그는 울어주고 싶을 테니까요. 그는 아직도 자신의 아이를 돌보고 있어요.

 

 돌본다는 말

 돌본다는 말에는 애정을 넘어선 어떤 숭고한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돌봄이라는 단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봄이라는 단어를 사랑하는 자들은 우리말의 ‘물둥지’나 ‘얼’이 뜻하는 단어가 모두 돌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 물을 담는 그릇(물둥지)이 물을 돌보는 형태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람의 내면과 정신을 돌보는 기운으로서 ‘얼’이라는 단어도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월령 :: 달의 위상을 1일 단위로 표시한 것이지만, 역서에서는 소수점 첫째 자리까지 기록한다. 합삭에서 시작하여, 7일경 상현(上弦), 15일경 보름, 22일경 하현(下弦), 그리고 다시 합삭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령 [lunar phase, 月齡] (두산백과)

 

 엄마는 모든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본단다

 다운증후군 :: 다운 증후군은 가장 흔한 염색체 질환으로서, 21번 염색체가 정상인보다 1개 많은 3개가 존재하여 정신 지체, 신체 기형, 전신 기능 이상, 성장 장애 등을 일으키는 유전 질환이다. 신체 전반에 걸쳐 이상이 나타나며 특징적인 얼굴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지능이 낮다. 출생 전에 기형이 발생하고, 출생 후에도 여러 장기의 기능 이상이 나타나는 질환으로서 일반인에 비하여 수명이 짧다. 출생 시부터 사망 시까지 폭넓은 의료 및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운 증후군 [Down syndrome] (서울대학교병원)

 

 다운증후군 아이들의 목이 일반인보다 훨씬 두껍다.

 

 당신의 낮, 나의 밤

 우리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 아침밥을 먹습니다.

 안에서 점심으로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밖에서 저녁으로 내가 무엇을 먹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살이 트고 있다는 걸 알아요

 블랑쇼 :: 프랑스의 작가ㆍ비평가. 캉에서 출생. 1940년까지 신문ㆍ잡지 등의 기자. 후에 문필생활에 들어갔다. 처녀작 소설 《수수께끼의 사나이 토마(1941)》 및 《아미나다브(1942)》는 철저한 반(反)리얼리즘성으로 주목을 끌었다. 평론집 《헛디딤(1943)》 에서 종래의 문학 비평의 기축(機軸)을 전환시킨 독백의 비평 형식을 확립했다. 그 후 그는 두개의 장르에 걸친 작품을 계속 발표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문학이란 인간 존재의 원질적(原質的) 심부(深部)를 탐구하는 데 있으며, 내면의 밑바닥에서 또 하나의 밑바닥에 접근하려는 정신운동이라고 했다. 이 난해(難解)한 그의 사상은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서서히 착실히 스며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블랑쇼 [Maurice Blanchot]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산책이 너무나 귀하고 고와 보이는 저녁에

 언젠가 내가 아는 한 목수 형이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단다. 해 지는 서쪽 하늘이 왜 아름다운지를 아는 사람은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만 미워한다고...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구나. 그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지는 날, 너도 외롭겠지만 네 언어를 가지고 싶은 날, 서쪽 하늘이 왜 붉은지에 대해 고민해보길 바란다. 중얼거림이 네 삶의 일부처럼 느껴질 때, 삶이 서러워서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네가 가진 마음의 초록이 세상의 풍진에 한기가 들 때, 너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거나 누군가 너로 인해 숨이 가쁘다는 것에 또한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에 대하여...

 

 이게 내가 아는 연분입니다

 나는 청각이 민감하고 당신은 후각이 예민하지요. 나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서 당신은 늘 내가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할 때 조심스럽게 나를 배려하곤 햇어요. 나 역시 당신이 후각에 예민하다는 걸 알아서 집 안의 물건 하나를 살 때에도 냄새나 향을 가장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생기고 있어요. 비누를 고를 때나 책을 고를 때에도 나는 냄새를 맡는 일이 좋아요. 어떤 경우에는 향이 나지 않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곤 해요. 가령 칫솔이나 두루마리 화장지 같은 것을 살 때, 컵을 살 때 혹은 노트를 살 때, 심지어 운동화를 살 때에도 나는 습관처럼 어떤 향이 나는지 코를 대어봅니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워 보이기도 할 테지만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 나는 다정해지는 기분입니다. 당신은 나의 다정한 사람이니까요.

 

 우리들은 포옹을 멈출 수 없는 인간입니다

 내게 조금 외로운 포옹이 있다면 당신이 잠들고 난 후 등 뒤로 내 손을 넣어 조심히 머리를 받친 후 다시 내 베개 쪽으로 당신을 돌려눕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삽십여 년이 넘게 나는 네 어머니를 그렇게 내 쪽으로 돌아눕히곤 했단다. 자랑할 건 못 되지만 그게 네 엄마 몰래 내가 할 수 있는 참 근사한 일이었던 것 같다”라고.

 

 네가 사내아이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어젯밤엔 이런 꿈을 꾸었다. 난 휠체어를 타고 물속 한가운데 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였다. 나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는데, 묶여 있지 않았는데도 휠체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수영이라도 하면 되련만 내 다리는 언제부터 마비가 되었는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멀리서 태양의 흔적인 희미한 물빛만 어른거릴 뿐 점점 그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이 어느 대양의 한가운데인지, 내가 왜 지금 여기 물속 한가운데 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나는 이번엔 두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려 아래로 내려가보았다. 거대한 선박처럼 보이는 아주 커다란 배 한 척이 심해에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 심해에 박혀 있었는지 선체는 심하게 부식되고 이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갑판에 내려앉았다. 휠체어 바퀴를 굴려 선실의 내부로 가보고 싶었다.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선미 쪽으로 돌아가 볼 생각이었다. 둥그런 선실 창이 보였다. 바퀴를 멈추고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수십 마리 원숭이들이 엄청나게 커다란 바나나를 손에 쥔 채 먹고 있었다. 원숭이의 눈동자는 하늘색이었다. 바나나의 크기는 거의 제 몸만큼이나 커보였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워서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그들은 이 심해의 밑바닥에서 바나나를 먹고 있었던 것일까?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원숭이들이 모여 있는 빈 구석에 휠체어들이 부서진 채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공포감이 밀려왔다. 저들에게 내 존재를 들키면 큰일나겠구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나지 않게 휠체어 바퀴를 굴리기 사작했다. 선미 쪽으로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때 원숭이 하나가 나를 발견하곤 버럭 날아와 창문에 달라붙었다. 나머지 원숭이들도 내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 원숭이들은 웃겨서인지 놀라서인지 낄낄대는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잡혀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으나 순간 바퀴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바닥의 바나나 껍질에 휠체어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휠체어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내 몸은 그대로 갑판에 쏟아졌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내 하반신을 끌어당겼다. 기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제야 나는 바닥 위 깨진 유리조각을 통해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 얼굴엔 털이 북슬북슬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바나나를 먹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원숭이들이 다가와 내 성기를 마지며 낄낄거렸다. 이들은 나를 놀리는 걸까, 아니면 나를 위협하는 것일까. 나는 무섭기도 했으나 왠지 자꾸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어디선가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깔깔거리고 나를 위협하던 원숭이들이 하나둘씩 그대로 쓰러져 잠들기 시작했다. 나는 묘한 안도감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곧 졸음이 쏟아졌다. 기어서 휠체어까지 가 앉아야 하는데... 거기 다시 앉기만 한다면 정말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조금씩 그쪽으로 기어갔다.

- 그때, 어른거리는 물빛 사이로 휠체어 하나가 선박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아무렴

 네가 만일 사내아이라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넌 어떻게 할까?

 네가 만일 딸아이라면 누군가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날 어떻게 봐줄까?

 

 네가 만일 사내아이라면 어떤 방법으로 세상이 건네는 수치심을 극복하려 할까?

 네가 만일 딸아이라면 어떻게 세상이 주는 모욕으로부터 웃을 수 있을까?

 

 네가 만일 사내아이라면 사랑을 잃고 난 뒤 한 여자의 손을 다시 잡는 방법에 대해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네가 만일 딸아이라면 사랑을 잃고 난 뒤 한 사내의 손바닥에 다시금 어떤 글씨부터 써나갈 수 있을까?

  

 네가 만일 사내아이라면 견고한 이 세상이 옥죄어올 때마다 어떻게 소리칠까?

 네가 만일 딸아이라면 먼 여행을 다녀온 후 어떤 힘으로 다시금 이 세상살이를 시작할 까?

 

 있지, 

 있잖니,

 

 네가 만일 사내아이라면 내 발들에 네 발을 올려놓고 길고 긴 아름다운 여행에 대해 평생 얘기해줄 참이야.

 네가 만일 딸아이라면 처음 네 몸을 씻겨줄 때 가장 부드럽게 거품을 내던 비누처럼 평생 너에게만은 언제나 미끄러질 참이야.

 

 태동을 느꼈어요, 처음 

 이 모든 걸 다 기억하나요? 나는 기억이란 늘 미처 도착하지 못할 때 그것을 예감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기억은 사실을 떠올리기보다는 그 느낌을 다시 예감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생각을요.

 

 음악이 태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태아일 때 심장이 좋은 음악에 의해서 성숙해지는 과정은 과학적이면서 인체의 신비에 해당하는 물리적인 사실이지만, 문득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단다. 음악과 심장의 성숙도라는 관계는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심장은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식으로 성숙하는 걸까? 그렇다면 가령, 우리는 성인이 된 뒤 제아무리 음악을 들어도 더 이상 심장은 성숙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역으로 좋은 음악을 반복해서 다시 들으면 태아의 심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일까? 아직 덜 성숙한 심장일 때, 우리의 심장은 가장 음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아기집이라는 시(詩)

 “언제나 시작되기만 하는 것의 확실함이면서 언제나 반복되기만 하는 것의 불확실함.” 불랑쇼는 모든 것에서 물러나 자연으로 돌아가 고백을 통한 글쓰기를 시작했던 루소의 모습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나만의 태교 음악

 Grave (40)  매우 느리게  Moderato (90)  보통 빠르기로
 Largo (50)  아주 느리게  Allegretto (110)  조금 빠르게
 Adagio (60)  느리고 평온하게  Allegro (130)  빠르게
 Larghetto  Largo보다 조금 빠르게  Vivace (150)  아주빠르게
 Adagietto  Adagio보다 조금 빠르게  Presto (170)  매우 빠르게
 Andante (70)  느리게  Vivacissimo  Vivace보다 빠르게
 Andantino (80)  Andante보다 조금 빠르게  Prestissimo  Presto보다 빠르게

 숫자는 1분에 4분 음표를 몇 번 연주하는지 나타냄.

 

 국악 빠르기 :: (늦음) 진양조 -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 – 휘모리 (빠름)

 

 아가야, 동화란 슬픈 세계란다

 동화란 언제나 슬픈 세계야. 동화의 세계에서 우리는 현실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란다.

 

 동화란 언제나 슬픈 세계야. 동화의 세계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꾸고 있는 악몽을 이야기 속에 절대 보여주어서는 안 되거든. 언제나 필요 이상의 희망이 필요하고 언제나 필요 이상의 삶이 그곳에 존재해야 하거든. 자신의 동화를 읽는 사람이 얼마나 희망을 원하는지, 얼마나 삶을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야.

- 피로사회?

 

 아내는 요즘 고백의 제왕이다

 검사를 받고 온 아내는 초음파 사진을 보며 태어나서 ‘정상’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이렇게 눈물 난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소뇌 정상. 뇌실 정상. 정상에 가본 적이 없지만 내 아기의 몸이 모두 정상이라니 나는 정상에 오른 기분이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 아직은 자신의 일부인 – 몸과 나누는 대화라는 점에서는 독백에 가깝지만 곧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갈 몸과의 대화라는 점에서 산모의 독백은 고백에 가깝다.

 

 태담은 단순한 애정표현이 아니라 고백이다. 절망이 금지되어 있는 고백.

 

 네 첫 생일선물은 당나귀야

 나귀는 당나라에서 왔다고 해서 당나귀로 불린다.

 

 당신의 산모수첩을 훔쳐보는 밤

 내 아내의 산모수첩엔 아가가 숨어 산다.

 내가 모르는 비밀이 많을 것 같아 

 어젯밤엔 산모수첩을 몰래 훔쳐보았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보아도 아기의 숨소리만 들렸다.

 

 갓 태어난 아기는 둥긂만 인지한대요

 갓 태어난 아기는 태어나서 둥긂만 인지한대요. 미약한 시선으로 엄마의 둥근 눈동자와 둥근 젖꼭지를 알아본대요. 이 둥근 두 가지만 있어도 신생아는 산다고 해요.

 

 네 뼈는 혈액공장이래

 네 혈액은 뼈에서 만들어진대. 네 뼈들은 아직 너무나 작아서 희고 딱딱한 네 뼈 틈에 피가 들어 있대. 사람들은 그걸 골수라고 불러. 네 골수에서는 매일 이천 억 개의 적혈구가 만들어 지고 있다고 해. 어른이 되면 두개골과 흉골, 척추골, 늑골에서만 혈액이 만들어 지지만 너는 지금 엄마 배 속에 있는 동안 어서어서 성장해야 하니까 네 몸의 모든 뼈에서 피가 만들어진대.

 

 골수 :: 뼈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부드러운 조직이다. 적혈구나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혈액세포를 만들어 공급하는 조직이다. 많은 줄기세포가 있고, 이들이 계속 분열하고 발달하여 혈액세포가 된다. 또한 뼈를 구성하는 줄기세포도 가지고 있다. 면역체계를 담당하고 있는 백혈구를 생산하기 때문에 면역체계에도 매우 중요한 조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골수 [bone marrow, 骨髓] (두산백과)

 

 우주비행사들은 무중력 상태에 있으면 뼛속의 칼슘이 다 날아가버린다고 하는데, 그래서 몸이 금방 가늘어져 버린다.

 

 곁에 몸은 벗어두고

 어쩌면 아기는 세상의 언어들을 배우기 전 모든 언어를 갖고 태어나는 것일지 몰라요. 조금씩 불필요한 언어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태어나는지도. 망각은 우리를 불안한 다른 곳으로 데려다놓지만 지금 아기에게 그 망각은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하고 부드러운 체험일지도.

 

 온도야말로 진실된 여행가죠. 세상의 모든 공간과 몸을 드나들 수 있으니까.

 

 아기들은 태어나면 몇 달 동안 뇌가 자고 있고 몸이 깨어 있는대요.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 갑자기 우는데 그게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래요. 그걸 논렘수면이라고 하나 봐요.

 

 렘수면 :: 수면의 한 형태. 렘수면·속파(速波) 수면 또는 파라(para) 수면이나 능동적 수면이라고도 한다. 수면 중에 급속한 안구 운동(rapid eye movement REM)을 하는 시기가 있다. 이 시기에는 근육의 긴장은 없어지거나 안면 근육, 손가락 근육 등이 갑자기 수축을 일으키며, 심장 박동, 호흡, 혈압 등의 자율 기능도 불안전하고 동요한다. 깊은 잠에서는 의식이 전혀 없는 데도 뇌파는 깨어 있을 때와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또 이 시기에는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시기 이외의 수면을 비역설수면이라고 한다. 잠을 잘 때는 역설수면과 비역설수면이 반복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설수면 [逆說睡眠] (과학용어사전, 2010.4.14., 뉴턴코리아)

 

 몸은 자고 있으나 뇌는 깨어 있는 상태의 수면을 말한다. 파라(para)수면, 속파(速波)수면이라고도 하며, 논렘(non REM)수면과 대응한다. 렘수면은 이 수면의 특징적인 현상의 하나인 급속안구운동(rapid eye movement)에서 따온 말이다. 대부분의 꿈은 렘수면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렘수면 [REM sleep] (사이언스올 과학사전)

 

 우중산책

 “아무도 모르는 빗방울처럼 그대의 창에 매달려 있고 싶은 밤입니다.”

 

 

 

3. 태교

 여행은 잠들기 전이 가장 외로운 거야

 출판사는 나의 달콤한 자장가에 잠들 생각을 안 하더구나. 이미 어른이 다 되어버린 출판사들은 아기를 재울 수 있는 이야기 따위엔 관심을 안 가지거든. 그들은 하나같이 꿈꾸는 아이를 깨운 후 성장시킬 생각만 하고 있었어. 필요하다면 자는 아이의 뺨을 때려서라도 말이야.

 

 나는 세상의 어떤 시도 자장가만큼 부드럽고 싶은 곳까지 흘러가지 못했다고 생각한단다. 우리가 왜 이 세계에 대해 피로를 느끼고 우리가 왜 상처받고 있는지에 대해 아무리 무의식에 관해 떠들고 분석하려 해도 잠을 한 번 자는 것만 못하듯이 말이야.

 

 여행은 잠들기 전이 가장 외로운 거야. 네 눈으로 찾아오는 많은 밤들을 너는 달래야 하니까. 자신만의 자장가가 필요할 거야. 여행은 자신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는 법을 배워가면서 조금씩 자신의 꿈속으로 초대받는 일이거든.

 

 우리를 한데 잠들게 할 자장가를 기다리며

 “때로 세계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우정으로 찾아온다.“

- 로맹 가리

 

 로맹 가리 :: 러시아 태생의 유태계 프랑스 작가 겸 영화감독이자 전 외교관. 에밀 아자르(Emile Ajar)라는 필명으로도 유명함
[네이버 지식백과] 로맹 가리 [Romain Gary]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약국에 들러 손목보호대를 골랐어요

 소양증 :: 소양(가려움)을 주증세로 하는 피부병.
[네이버 지식백과] 소양증 [pruritus, 搔痒症] (두산백과)

 

 내가 어릴 적 아기였을 때 엄마에게 달려가 상처를 자랑하듯이, 한편으로는 동정을 바라고 밖에서 얻어온 손바닥의 상처를 보이며 물끄러미 눈망울을 멈추고 섰을 때, 내 어머니는 거리에서 주워온 무쇠솥과 그릇을 마당에서 닦고 계셨죠. 그 차갑고 커다란 무쇠솥에 머리를 숙인 채 나에게 말씀하셨어요. “냉장고에 있는 딸기를 먹어라.” 차갑고 딱딱한 솥 안 어둠 속에서 울려오던 어머니의 냉랭하고 건조한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딸기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었는데.

 

 예비부모학교의 학생이던 날

 당신의 눈동자에서 어린 시절 운동회 때 하루 종일 교문을 쳐다보며 오지 않을 부모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내 간절함의 순간을 재차 떠올릴 수 있었어요.

 

 J, 그녀는 아주 작은 발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방해받고 싶지 않은 작은 순간들이 있단다. 그리고 사람은 남몰래 자신만의 고요를 하나 만들기 위해 평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단다.”

 

 연민은 언제나 나와 가장 닮은 부위에서 생겨나는 참혹입니다.

 

 하루 한 번 나는 당신의 젖을 만져주는 사내입니다. 

 울혈 :: 몸속 장기나 조직에 피가 모인 상태. 심장기능 장애 등으로 전신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정맥의 협착과 혈전 등에 의해 국소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울혈이 생긴 부분은 검푸른색을 띠며 부어오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혈 [congestion, 鬱血] (두산백과)

 

 인간은 소젖으로도 키울 수 있지만 소는 인간의 젖으로 기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젖은 인간에게만 닿을 수 있는 ‘흐름’인가봅니다.

 

 모성의 정의

 아기는 젖꼭지가 뺨에 닿으면 반사적으로 입을 가져간다. 그걸 루딩반사라고 한다.

 

 네가 살아갈 세상이란 말이지

 내비게이션의 주인공 여자의 목소리 질감은 어쩌면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보이스 퀄리티를 표본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도의 무감각, 무심함, 절대 개별자에게 밀착하지 말 것, 같은 브리핑을 신입사원들은 준비하게 되었지. 그래서 농담처럼 남자들은 술자리가 끝나기 전 더치페이를 하면서 이 세상에 믿어야 할 여자 목소리는 내비게이션과 엄마 목소리밖에 없다고 하게 된 것도 같다.

 

 사이드 와인더 :: 미국 해군이 개발한 적외선 패시브호밍(passive homing-열추적) 방식에 의한 공대공(空對空) 미사일.
[네이버 지식백과] AIM-9 [AIM-9 Sidewinder] (두산백과)

 

 배냇저고리를 짓고 있는 당신

 배냇저고리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입을 옷인데, 아마도 배 속과 가장 닮은 옷이라는 뜻일 테지요.

 

 이 세상 여성의 모성이라는 것은 생후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아로 태내에 있을 때부터 만들어진 자신의 자궁 안에 마련된 생에 대한 존엄한 태도 같아 보입니다.

 

 장난감 가게를 지나치며

 지하철 개찰구를 나와 약속 장소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문득 장난감 가게가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천진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지요. 장난감을 사달라고 부모를 졸라대는 녀석도 보였고 오로지 노는 일에만 집중한 채 부모가 어디로 가는지도 궁금해하지 않는 아이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내 눈엔 가게 유리문 밖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아이가 앞서 들어왔습니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사내아이는 왜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걸까? 누가 저 아이를 가게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을까? 물건을 구입하지 않아도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껏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는 있을 텐데, 몇 시간이고 놀다보면 금방 질려 처음의 마음이 사라지기도 할 텐데 무엇이 저 아이로 하여금 가게 입구의 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은 것일까? 나는 두리번거리며 혹시 저 아이의 부모가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 확인해보았습니다. 십여 분이 지나도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한 사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둘의 얼굴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지요. 유리문 앞에서 손가락으로 열심히 장난감들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흥얼거리며 놀던 아이는 등 뒤에선, 자신의 눈앞 유리에 비치던 아버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마치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고 의연하게 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급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어느 장난감 가게 앞에 서서 또 아이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침을 흘려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그 아이 아버지의 두 손엔 털 빠지고 닳아 해진 곰인형이 하나 쥐여 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이 세계가 하나의 고약한 장난감처럼 보였습니다.

 

 수술실 문이 닫혔습니다 

 당신이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기다릴 거야. 이 문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둘이 함께 나올 때까지, 한 명만 나오면, 나머지 한 명이 나올 때까지, 평생, 기다릴 거야.”

 

 

 

+. 책갈피

 만일 먼 훗날 내 기억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를 나에게 읽어주세요

- 영화 <노트북>중 ‘엘리의 노트’에서

 

 아직 나는 혼자 외롭게 걸어가고 있을 때에도 주변의 인기척을 믿는 편이다. 글쟁이로서 “당신의 책을 읽고 있으면 당신이 근처에 있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져요”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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