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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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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우리 시대의 재담꾼 이기호의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 제11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을 비롯한 여덟 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작가는 기억과 기억 사이의 공백을 이야기로 보수해가면서 삶과 이야기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을 규명하는 데 주력한다. 또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색조를 유지하면서도 서사와 문장의 열기를 유연하게 다스리고 있다. 대학 본부의 임시직 남녀, 우직한 노총각 삼촌, 임용고시 준비생, 각막이식을 받을 전도사, 제자를 구명하려는 교수, 개명을 신청한 어머니와 그 아들, 현대판 노예, 제대한 백수 등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정쩡한 삶 속에서 허둥거리다 넘어지고 만다. 표제작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교원임용고시에 실패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아 두려운 화자가 김 박사라는 인물과 상담을 주고받으며 전개되는데, 마지막에 김 박사가 누구인지 빈칸을 채워보라는 여백을 제시하는 독특한 형식이 돋보인다.
저자
이기호
출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2013.04.15

 

1. 행정동

 창과 창틀은 서로의 경계를 지운 채 검게 변해 있었고, 짝수 층마다 앞으로 길게 뻗어 나와 있는 난간들은 그림자처럼 벽에 스며들어, 자신들의 폭과 너비를 감추고 있었다.

 

 해수 :: 기침을 한방에서 이르는 말.

 

 산세비에리아 :: 외떡잎식물 아스파라거스목 아스파라거스과 한 속의 총칭. 천년란이라고도 한다. 여러해살이풀로 뿌리는 짧고 두껍다. 잎은 좁고 긴 모양이며 뱀가죽같이 생긴 것도 있다. 잎에서 질기고 탄력이 있는 흰 섬유를 빼내어 쓴다. 건조에 강하고 고온성이어서 겨울에도 15℃ 이상에서 재배한다. 번식은 6∼9월에 포기나누기 등으로 한다.
아프리카와 인도 원산이며 60여 종이 있으나 10종 정도를 재배한다. 다육식물이며 원산지에서는 중요한 섬유자원의 하나이나 기타 지역에서는 관상수로 더 많이 가꾸고 있다.
한국에서는 관상용으로 주로 실내에서 가꾼다. 꽃말은 ‘관용’이다. 잎에서 추출한 섬유로 로프나 활시위 등을 만든다. 한국·인도·열대아프리카 등지에 분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세비에리아 [bowstring hemp] (두산백과)

 

  아무래도 그녀의 작업이란 오타나 오기가 나와야지만, 그래야지만 스스로에게 초라해지지 않고, 또 스스로에게 초라하다는 기분 따위를 잊게 해줄 수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더 오랜 시간, 남들보다 더 꼼꼼하게, 기를 쓰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것이 아닐까...?

 

 함박눈이었다. 바람 없이 내리는 눈은 마치 이제 막 출발선상을 떠난 마라톤 주자들처럼 서로서로 간격을 지우고, 가벼운 몸짓으로, 사방에서 우르르 떠밀려 떨어지고 있었다. 눈 때문인지 사위는 더 어두워진 것 같았고, 주변은 조금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오재우는 한참 동안 여자의 보풀이 인, 눈송이들이 포도알처럼 잔뜩 매달린, 낡고 오래된 회색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어둠이 물러갈 시간이었다. 또 어느 누군가는 벌써 일어나, 출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터였다. 오재우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 무언가 오타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명백한 오타였다.

 

 그는 그제야 원래 학적부 속 숫자들 또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류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서류란 사실이 필요해서, 사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작성된 것이니까.

 

 

 

2.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스리 도어 :: 해치백을 가진 2도어 자동차를 말하며, 해치백을 제3의 도어로 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리 도어 차량 [three door car] (자동차 용어사전, 2012.5.25., 일진사)

 

 옥니 :: 안으로 옥게 난 이.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삼촌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우리 동네 목욕탕들이 죄다 찜질방으로 상호를 바꿀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트렁크가 뒤로 삐죽 튀어 나와 있는 세단 모델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처음 보는 해치백 스타일의 자동차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뒤에서 차가 받으면 운전자가 즉사한다는 둥, 트렁크엔 도시락 하나 실을 수 없을 거라는 둥, 기름통이 너무 작아 오토바이랑 다를 바 없을 거라는 둥, 앞에 손잡이만 하나 달면 딱 리어카라는 둥, 대부분 무시와 비하의 말들이 주를 이뤘다.

 

 2004년 4월이면 내가 운전면허를 딴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았던 때인지라, 세숫대야만 봐도 무작정 이리저리 돌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버스 좌석에 앉아도 오른쪽 발바닥을 살짝 세워 허공을 지그시 밟아대던, 그런 시절이었다. 호시탐탐 아버지의 소나타를 노리다가 좌측 사이드 미러와 뒷범퍼를 전부 교체하게 만들었던 것도 그맘때였고, 인터넷으로 밤새 중고 마티즈 시세를 알아보다가 다시 학원 파트타이머 강사 자리를 알아보다가, 또다시 아반떼의 할부금리를 알아보던 시절이기도 했다. 차가 꼭 필요한 이유를 대라면 당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차를 몰고 다니는 친구들은 주위에 넘치고 넘쳐났기에, 나는 종종 까닭 없이 불행하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불편도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불행이란, 곧잘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아마 그즈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왜 초보들은 운전대를 잡기만 하면 꼭 조수석에 누군가를 태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이는지, 나 역시도 그날 프라이드를 몰고 집 앞 골목길을 빠져나오자마자 자연스럽게 한 여자아이부터 떠올렸고, 그래서 곧장 강변북로로 접어들고 말았다. 학교 신문사 간사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여자 후배였는데, 딱 한 번 단둘이 술자리를 가졌다가 엉망으로 취해 잠자리까지 하게 된 사이였다. 그렇다고 그 뒤 정식으로 사귀게 된 것은 또 아니었는데, 나야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여자 후배의 입장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이, 그거야 어디 사람끼리 잔 건가, 술끼리 서로 잔 거지. 여자 후배는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면서 내 어깨를 퉁, 치기도 했다. 그러니, 나 역시도 별수 없이 퉁, 여자 후배의 어깨를 치며 그러게, 왜 술을 섞어 마시냐, 라고 웅얼거릴 수밖에.

 그러니까 내가 그날 일산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가 ‘어머, 이게 웬 똥차예요?’라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글쎄 말이야, 귀찮게 삼촌이 잠깐 맡아달라고 해서... 한강에 바람이나 쐬러 갈까?’ 운운했던 것은, 실은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남아서, 더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프라이드의 문제를 먼저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그녀의 속내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채, 낑낑, 계속 기어만 앞으로 뒤로 옮기다가, 결국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른 문제는 전혀 없었다. 오직 단 하나, 기어를 ‘R’에 놓고 아무리 액셀 페달을 밟아도, 밟고 또 밟아도, 프라이드는 요란한 소음만 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지금이야 물론 그럴 경우, 기어를 중립에 놓고 재빠르게 운전석 밖으로 나가 차가 들어갈 공간을 나름 머릿속에 그리며 적절한 세기로 차 트렁크를 두 손으로 밀어 신속하게 주차를 끝냈겠지만, 그때야... 더구나 당시 나는 운전 경력이라곤 고작 아버지의 소나타를 야밤에 세 번 훔쳐 몰아본 게 전부인, 그 세 번 중 두 번은 전봇대와 담벼락에 각각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말 그대로 전진과 후진만 아는 운전자였다. 한데, 그중 후진이 안 되는 경우이니...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황해서, 더 집착하게 되었다. 주차가 제대로 안 되면 대강 천천히 그 일대를 드라이브하면서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때는 생각이 미처 거기까진 닿지 못했다. 그저, 계속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겼다가 풀었다가, 시동을 껐다가 켰다가, 기어를 ‘R’에서 다시 ‘D’로, ‘D’에서 다시 ‘N’으로, 옮기고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여자 후배는 조수석 문을 열고 나가 혼자 한강변을 걸어다니기 시작했고, 그걸 빤히 보고도 나는 계속 바퀴에 뭐가 낀 게 아닐까,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쭈욱 프라이드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혼자 한강변을 돌아다니다가, 매점에 들러 콜라까지 사 마시고 돌아온 여자 후배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운전석에 앉아 기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내 어깨를 퉁, 치며 말했다.

 “에이, 차만 똥차인 줄 알았더니, 선배도 만만치 않네. 다 봤으니까, 이제 가요.”

 

 센터페시아 :: 대시보드 중에서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컨트롤 패널 부분을 말한다. 대시보드와 시프트레버가 수직으로 만나는 부위로, 이곳에는 오디오·에어컨·히터의 컨트롤러, 내비게이터, 송풍구, 시거잭과 재떨이, 컵홀더 따위를 설치한다. 또한 이것은 센터콘솔과 함께 운전석과 조수석을 구분하는 벽의 역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센터페시아 [center fascia] (두산백과)

 

 나는 그에게 차 키를 건네받으면서 ‘사실 이건 내 차가 아니라 우리 삼촌 찬데, 삼촌이 하도 귀찮게 해서...’ 운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도 아니면 어떤 반발심리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뒤로는 못 가는 자동차이니, 어쨌든 앞으로는 최대한 멀리, 최대한 빨리 가보자는... 고속도로는 후진할 수 없는 길이니까, 무조건 앞으로만 나가야 하는 길이니까... 그러면서 나는 얼핏얼핏 삼촌도 나와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토록 오랜 세월 프라이드에서만 머문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달리다 보니까 돌아갈 곳을 아예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일종의 당혹감 같은 것 말이다.

 

 “야 야, 자냐? 넌 어떻게 된 애가 나이가 들어도 그렇게 초저녁잠이 많냐?”

 나는 할머니 쪽으로 모로 누우면서, 자정이 초저녁이면 도대체 진짜 저녁은 몇 시냐며, 할머니는 어떻게 된 게 연세를 그렇게 잡수셔도 말이 그리 많냐고, 그러다가 틀니도 다 달아나버린다고, 버릇없이 놀렸다.

 “야 야, 암 맞다지? 암이라지?”

 할머니는 내 쪽으로 고개를 조금 더 내밀면서 물었다.

 “응, 암 맞대. 한데, 아직 콩알만 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대.”

 나는 할머니의 링거를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야 야, 불쌍해서 어쩌냐? 불쌍해서 어째?”

 “누가? 할머니가? 아직 콩알만 하다는데 뭐... 약 먹으면 된대.”

 “아니, 아니, 나 말고, 암 말이야, 암. 하필 다 늙은 몸에 들어와서... 야 야, 늙은 몸에 들어온 암은 기력이 없어서 잘 자라지도 못한단다. 왜 거 덕적골 덕형이 할머니도 여든넷인가에 암에 걸렸는데 아흔 다섯에 갔잖아. 암만 죽어난 거지.”

 

 조세희 :: 등단한 것은 1960년대 중반의 일이지만, 문단의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5년 난장이 연작의 첫 작품인 《칼날》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1976년 난장이 연작 《뫼비우스의 띠》《우주여행》《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을 발표하였으며, 1977년 역시 난장이 연작 《육교 위에서》《궤도회전》《은강 노동가족의 생계비》《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등을 발표하였다. 
1978년 《클라인씨의 병》《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에필로그》를 이전의 난장이 연작과 함께 묶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작품집을 출간하여, 문학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함께 이룬 문제작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난장이 연작은 197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에 정면으로 접근하고 있다. 여기에서 난장이는 정상인과 화해하며 살 수 없는 대립적 존재로 등장하고 있으며, 1970년대 한국사회의 최대 과제였던 빈부와 노사의 대립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적 접근을 통해 한국의 1970년대가 이 두 대립항의 화해를 가능케 할 만큼의 성숙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세희 [趙世熙] (두산백과)

 

 그건 또한, 당연히 고모의 잘못도 아니었다. 고모는 그때 스물세 살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돌아가지 않는 게 당연한 스물세 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걸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픈 스물세 살, 하루하루만 의미 있는 스물세 살, 그 스물세 살 말이다. 

 

 “한데, 그거 아슈?”

 차 키를 건네받고 돌아서는 나에게 사장이 물었다.

 “이 차는 그래서 지금까지 굴러가게 된 거라우. 후진이 안 되니까.”

 나는 다시 사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건 또 왜 그렇죠, 라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엔진에 무리가 덜 가지 않았겠수? 원래 잡다한 기능들 때문에 제 기능들이 망가지는 법이라우.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지.”

 

 그사이 나는 연애도 하게 되었는데, 상대는 예전 한강시민공원에 함께 갔던 바로 그 여자 후배였다. 후배는 그동안 학교를 졸업하고 광고대행사에 취직을 했는데, 일곱 번째인가 여덟 번째인가, 내가 계속 집 앞으로 찾아가자 못 이기는 척 프라이드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후배는 내게 ‘통차를 오래 타고 다니는 걸 보니까 그래도 뭐, 딴짓은 안 하겠네’라고 말했다. 물론 내 어깨를 한번 퉁, 치면서 한 말이었다. 나는 후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한강시민공원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기어를 중립에 놓고 운전석에 내려 신속하게 주차를 마쳤다. 그땐 이미 빈자리를 한번 쓱 바라만 봐도, 어느 정도 세기로 밀어야 하는지 답이 나올 정도였으니, 후배 혼자 한강변을 돌아다니게 하는 일은 만들지 않았다. 나는 그날 후배와 프라이드 안에서 정식으로, 첫 키스를 하기도 했다. 

 

 나는 가끔씩 삼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나는 삼촌에 대해서, 또한 프라이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모든 건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삼촌은 다시 저만큼 달아났고, 무언가 흩어진 퍼즐을 거의 다 맞췄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모양의 조각이 튀어나와 그림을 한순간에 원점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내가 알 수 있는, 삼촌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아닐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일이 아닐까, 지레짐작 손쉽게 생각해버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 속에 한 가지씩 여백을 두고, 그 여백을 채우려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법인데, 그게 이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자리인데, 그때의 나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모부만 해도 그렇다. 내가 고무부에 대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마 그 부분이 내겐 여백과도 같은 부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같은 것...

 

 생각해보면 그 또한 다 이야기의 운명이었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때 내가 고모의 심부름으로 사촌들에게 김치를 가져다주러 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만약 그때 고모부가 혼자 마루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혀 다른 색깔로 마무리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이 이야기는 어쩌면 프라이드를 위해, 삼촌의 이야기를 모두 여백으로 돌리고, 계속 한강시민공원 주위를 맴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운명이다. 이제 그 여백을 채워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스물세 살, 당시 고모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 바로 고모부였다는 사실, 그때도 고모부는 경찰관이었다는 사실, 바로 그 여백말이다. 

 

 85년 이후부터 현장 실천을 내세우고 각 사업장마다 대학 졸업생들이 위장 취업을 하는 일들이 빈번히 발생했는데, 그 때문에 사업주나 관할 경찰서 형사들은 골머리를 썩어야만 했다. 그나마 사업주의 입장은 좀 나은 편이었건 게, 그때는 아직 복수 노조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인지라 대부분 노조 집행부 인원들을 주임 승진 대상자나 반장 출신들로 미리 채워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사들이 바빠진 건 오히려 그 때문이기도 했다. 합법적 민주 노조를 세울 수 없게 된 학출들은 그 대신 지역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모임을 설립, 그 안에서 문화운동과 의식 교육운동을 병행해나갔는데, 그로 인해 형사들의 감시 대상은 각 단위 사업장뿐만 아니라 구로동 전체로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야, 야, 이러니까 꼭 옛날 생각난다. 옛날에 네 삼촌도 나랑 논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꼭 리어카를 이렇게 밀었거든. 끌지 않고, 꼭 뒤에서 밀었어. 이 할미 얼굴 계속 바라보면서 말이야...”

 

 

 

3. 김 박사는 누구인가?

 기출문제 오답노트와 서브노트들만 대충 쓱 훑어보아도 저절로 눈앞에 어떤 도표들이 보였고, 핵심단원 목표들은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척척 줄지어 나오는 벽돌들처럼, 제목만 봐도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었어요.

 

 그런 게 처음 그 목소리가 주었던 정서는 마치 고전시가에서 ‘에헐질번하괘라’ 같은 어휘들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생경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강의실엔 3백 명도 넘는 수강생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어요. 통로에까지 가방을 깔고 줄지어 앉은 사람들로 인해 마치 피난민을 가득 태운 화물선 같았죠.

 

 허리를 숙인 채 통로에 앉은 사람들 사이사이를 헤집고 나가는 저를 보고 ‘일타 강사’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요.

 “쟨, 뭐지요? 경쟁률 줄어드는 소리 들리나요, 여러분! 자, 박수!”

- 장동민, 대학 축제 불꽃놀이 보면서 “여러분 등록금이 타고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 우리의 모든 행동과 의식에는 다 그만한 기원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우리의 작은 손짓 하나, 말실수 하나, 생각 하나, 모두 우연히,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학습의 결과이든, 경험의 산물이든, 유전의 측면이든, 어떤 인과관계의 법칙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깨지는 순간이 바로 기적이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우리 사회에 종교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인과관계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최소연 씨는 ‘난생처음 듣는 욕’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영화에서든, 소설에서든, 언젠가 한 번쯤 최소연 씨가 ‘경험’한 것들이 되살아난 경우일 것입니다.

 

 그걸 지금까지 왜 잊고 살았는지 모르겠지만(아마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나 봐요), 한 번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니까 이제는 차르르르, 영사기 돌아가듯 당시의 일들이 또렷하게 눈앞에 떠오르게 되었어요.

 

 그것을 본 순간 차르르르,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한 거였죠.

 

 ‘어려울 때는 과거를, 즐거울 땐 현재를, 어떤 일을 할 때는 미래를 떠올리거라.’

 

 최소연 씨는 지금 누구보다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터널은 최소연 씨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더 음습한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심장박동 소리와, 숨소리와, 발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사실 터널의 어둠보다도, 그 울림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모든 것들은 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자신을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속으로만 계속 그 감정들을 쌓아두면, 그 두께만 더 늘어날 뿐입니다.

 

 욕도 어디에, 무엇과 함께 배치하느냐, 에 따라 의미가 확 달라지는 거 같아요. 강아지에게 ‘개새끼’라고 하면 욕 같지 않고,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욕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게 무엇과 결합해 있느냐, 가 문제지...

 

 스타카토 :: 악보상에서 음을 연주하거나 부를 때 한 박자를 절반 정도의 길이로 끊어서 연주하거나 부르도록 하는 지시표를 말한다. 음표 바로 위나 아래에 작은 점(ㆍ) 또는 쐐기꼴(∨)을 붙여서 표시한다. 스타카토의 단계는 스타카티시모ㆍ스타카토ㆍ메조스타카토 정도로 구분한다. 음과 음 사이를 끊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어서 연주하거나 부르도록 하는 레가토(legato)에 대비되는 지시표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타카토 [staccato]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아무리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어선 안 됩니다. 노력이라는 말 속엔 이미 이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두려움보다는 분노가, 치유에 있어서는 훨씬 더 수월할지 모릅니다. 분노라는 감정에는 어쨌든 애정이라는 요소가 일정 부분 포함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 그것만큼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데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돌아보니,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는 거예요. 사회적으론 한 학교의 교감선생님이고, 가정에선 따뜻한 엄마이자 예의 바른 아내였지만, 그 이상 제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물론 엄마의 성격이 어떻고, 혈액형은 무엇이고,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건 한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잖아요? 누구나 다 알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니까 맨홀 뚜껑 옆에 핀 잡초를 볼 때 엄마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 15층이나 17층처럼 높은 건물 유리창 앞에 서면 엄마는 어떤 기분이 드는지, 맑은 날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갈 때 엄마는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지, 그런 것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단어 뜻 그래도, 엄마이기만 했던 거지요. (물론 변명을 할 수도 있어요. 어쩌면 엄마나 아빠는, 제가 단어 뜻 그대로만 당신들을 이해하고 바라봤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집에서도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아빠나, 저와 목욕탕 한 번 가지 않은 엄마나, 모두 따뜻했으나 그러나 때론 저에게도 선생님이었으니까요.)

 

 저는 다시 한 번 차르르르,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말을 했어요. 아빠의 얼굴을 살피지도 못한 채, 계속 영사기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거죠.

 

 죄책감의 무게는 차오르는 달처럼 점점 무거워지고만 있고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단 하나의 과제였던 것뿐이지요. 

 

 

 

4.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집사 :: <기독교> 교회의 각 기관의 일을 맡아 봉사하는 교회 직분의 하나. 또는 그 직분을 맡은 사람.

 간증 :: 1.<기독교>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 2.<법률>예전에, 남의 범죄에 관련된 증인.

 소경 :: 1.‘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2. 세상 물정에 어둡거나 글을 모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2 ;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 마가복음 8 ; 22 – 26

 

 바디메오 (디메오의 아들) :: 예수님이 여리고성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뛰어나와 구원을 청한 소경으로 눈 고침을 받았다

 

 지금 같은 속도라면 12년 정도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그는 조금 놀랐으나, 그러나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다다음 월드컵은 볼 수 있는 거 맞지요? 그는 일부러 얼굴 주름을 더 많이 만들어 웃었지만, 마음은 씁쓸했다. 그건 그에게 잡히지도 않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삶에 대해선 서운했지만, 또 한편 익숙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아내가 누구보다 더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아내 역시 신앙의 힘으로, 성경에 나오는 구절로써만,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당황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불을 끄고 있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던 아이의 목소리와, 외삼촌이 설득하고 있다는 최 간호사의 목소리, 그 목소리와 목소리들이 함께 뒤엉켜 그의 머릿속에 여러 모양의 점자들을 또각또각 찍어나갔다. 그가 한 번도 만져본 적도 없는, 위아래로 계속 휘어지는 점자들이었다.

 

 성경역사 한 장면 가운데, 베드로의 통곡 (마태복음26:69-75)에 관한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밤, 멀리서 예수님을 쫓아온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까지 이른다. 예수님이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사이, 베드로는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기 위해 바깥뜰에 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앉는다.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본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당황한 베드로가 부인한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앞문 쪽으로 향하는 베드로를 이번에는 다른 여종이 알아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린다. "이 사람도 분명히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베드로가 맹세하며 부인한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잠시 후,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 곁으로 다가온다. "당신 정말 예수와 한패 아냐? 그 갈릴리 사투리를 들으니 틀림없는 것 같은데?"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외친다. "난 정말로 그 사람을 모릅니다!"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닭이 운다. 그 소리에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한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

 

 “그래서 하필 들어온 곳이 하나님의 품 안이었다는 거지요. 전도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게 학생한텐 중요하다는 거예요. 우리 삶은 늘 그렇게 느닷없이 변하곤 하니까요.”

 

 보이지 않게 되어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이 아닌가, 그건 그저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말들이 아닌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5. 탄원의 문장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 예상 때문에 그 예상과는 다른 일들이 더 크게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이 소설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라면, 차근차근 플롯을 뒤집어보면서 빗나간 예상들을 이해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의 우리는 언제나 허둥거리다가 자신이 무엇 때문에 놀랐는지도 모른 채 또 다른 예상 속으로 빠져버리기 일쑤다.

 

 나는 그 대목에서 짧게 한숨을 한 번 내쉬었지만... 한숨은 한숨이었을 뿐, 마음가지 내려앉지는 않았다.

 

 담쟁이넝쿨들은 하루가 다르게 붉은색 벽돌들을 지워가며 좌우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레스코프 :: 고로호브 출생. 중학을 중퇴하고 키예프의 징병국에 근무, 후에 영국인 숙부가 경영하는 상회의 영업사원으로 러시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풍속에 대한 깊은 지식을 쌓았다. 186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수도원에서 나와 문학의 길로 들어섰으나 급진적인 지성을 꼬집은 초기의 장편 《종말 Nekuda》(1864) 《칼 위에서》(1870∼1871)가 고의적으로 사회운동을 비난하였다고 하여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 후 정치문제와 인연을 끊고 사제의 생활(작가의 조부가 사제였다)이나 민간전설에 의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문재(文才)를 인정받게 되었다. 장편 《수도원의 사람들 Soboryane》(1872) 《봉인(封印)된 천사》(1874) 《사제의 생활 단편》(1880)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밖에도 L.N.톨스토이로 하여금 마술사와 같다고 경탄하게 한, 분방하고 다채로운 문체를 구사한 중 ·단편 작품 《무첸스크군(郡)의 맥베스 부인》(1856) 《매혹당한 나그네 Ocharovannyi strannik》(1874) 《가발의 미술가》(1883)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콜라이 레스코프 [Nikolai Semyonovich Leskov] (두산백과)

 

 카버 :: 《대성당》(1980)으로 전미비평가 그룹상, 퓰리처상 후보에 오른 미국의 소설가. 단순, 적확한 문체로 미 중산층의 불안감을 표현하였다. 영화《숏 컷》은 로버트 앨트먼이 그의 작품들을 조합하여 만든 것이다.
《대성당》이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알코올로부터 벗어나고, 불화를 겪었던 아내와의 이혼으로 정신이 안정되면서 작품 세계도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대변하는 듯한 단순하면서도 적확한 문체로 미국 중산층의 불안감을 표현한 그의 작품의 특성은 감독 로버트 앨트먼(Robert Altman)이 그의 단편소설을 여러 편 조합하여 만든 영화 《숏 컷 Short cuts》에 잘 나타나 있다. 말년에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의 영예를 누리다가 1988년 8월 2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arver] (두산백과)

 

 피츠제럴드 :: 미국의 소설가. 술의 밀조로 거부가 된 주인공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린《위대한 개츠비》(1925)로 유명하다. 그 외 할리우드를 다룬 《최후의 대군》, 전후 1920년 새로운 세대의 선언이라 할 만한《낙원의 이쪽》이 있다.
전후(戰後) 1920년 새로운 세대의 선언이라고도 할 만한 처녀작 《낙원의 이쪽 This Side of Paradise》이 출판되자 문학비평가들이 일제히 그것을 인정해 주었고, 많은 독자를 얻어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타고난 외모와 부(富)와 재능에 걸맞게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처녀작이 크게 성공하자 그 여세를 빌려 단편집 《말괄량이와 철인(哲人) Flappers and Philosophers》(1920)을 비롯하여, 장편 《아름답게 저주된 것 The Beautiful and Damned》(1921), 단편집 《재즈 시대의 이야기 Tales of the Jazz Age》(1922),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1925), 장편 《밤은 부드러워 Tender Is the Night》(1934), 《최후의 대군(大君) The Last Tycoon》(未完:41) 등 많은 작품을 써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로스트제너레이션'의 인기작가를 받아들이는 단계를 넘어섰고, 알코올중독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재기(再起)를 위하여 《최후의 대군》을 집필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사후에 친구 윌슨과 에드먼드의 편집으로 그 작품과 유고집이 출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두산백과)

 

 형용사 하나 없이, 시간대별로 주어와 목적어와 술어로만 나열한 그 문장들은, 오로지 입증 가능한 사실들로만, 누군가가 술을 마시게 하고 또 누군가 그 술을 마시고, 또 누군가 그 술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결론들을 향해서만, 무정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문장들이 답답했고, 또 한편 불편했다. 내가 답답했던 이유는, 그 안에 P가 그즈음 겪었던 실연과, 그로 인해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과, 치기와 분노와 우울의 기록들이 모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입증 불가능한 세계이니까, 법의 이름 아래 고려되지 않고 모두 배제된 것들이었다.

 

 커피 전문점 안은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어디론가 떠밀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여전히 최를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에겐 너무 힘든 일이 될 거라는 예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더더욱 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탄원서는 아마도 드레퓌스 사건 때 에밀 졸라가 『로로르』지에 발표한 「나는 고발한다」일 것인데, 거기에 나와 있는 문장들을 살펴보면 대개 이런 것들이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대통령 각하, 정직하게 살아온 한 시민으로서 솟구치는 분노와 더불어 온몸으로 제가 이 진실을 외치는 것은 바로 당신을 향해서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밝히고 더불어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과 그에 동조한 군부 세력들을 고발하는 내용이 담긴 에밀 졸라의 글은, 읽다 보면 탄원서라기보단 어쩐지 격문이나 선언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문장과 문장들이 대부분 단언과 확신, 정보들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에밀 졸라는 그 글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고, 3년 뒤에는 의문의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드레퓌스는... 그 후로 2년이나 더 감옥에 갇혀 있었고, 법정에서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고 난 다음에야 가까스로 사면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갈등이나 고민의 시간을 짧았고, 문장은 그에 비례해 더 짧아지기만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입증 불가능한 것들은, 어쩌면 입증 가능한 사실들로부터 나오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것은 ‘발견’의 영역이지, ‘발명’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사실들과 사실들 틈 사이에서 불가능한 것들은 시작되고 피어난다는 것, 그래서 숙명적으로 사실들의 세계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최의 탄원서는 시작되었다.

 

 바로 그 여학생이 한 말, ‘이 선배가 왜 이렇게 자꾸 술만 따라 주실까?’라는 말, 그 말이 저를 계속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를 괴롭힌 것은 ‘술’ 뒤에 붙은 ‘만’이라는 보조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왜 이 아이는 ‘선배’라는 단어 앞에 ‘이’라는 지시관형사를 붙였을까? 그것들이 궁금했던 것이지요. 만약 그것이 제 추측이나 의심처럼 쓰인 것이 맞다면, 그러면 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아이에게 P가 그냥 선배가 아닌 ‘이’ 선배로 다가왔다면,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날들이 많았다면, 그렇다면 그날 그때 그 아이 앞에 놓인 술잔은 또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확인하러 해남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그 ‘이’가 단순한 ‘이’가 아닌 하나의 커다란 고유명사로 다가와, 그 안에 붙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간다 하더라도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아무것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꼭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6. 이정(而丁) -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

 그녀는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두 달 후, 자신이 또다시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 두 달 후, 그녀는 후회와 미련 때문에 죽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도 :: 1.[같은 말] 부처1(1. ‘석가모니’의 다른 이름). 2.고승(高僧)의 사리를 안치한 탑. 3.[같은 말] 중1(절에서 살면서 불도를 닦고 실천하며 포교하는 사람).

 

 이현상 :: 공산주의 운동가.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다가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하였다. 6·25 전쟁 때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고, 남한 빨치산의 조직인 남부군(南部軍)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휴전 이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때 사살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현상 [李鉉相] (두산백과)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화엄사를 초토화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당시 한 경찰관의 항변이었다. 8월21일 오후 구례 화엄사 경내. 고(故) 차일혁 경무관(1920∼1958)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지난 1998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월주스님과 호남 교구본사 주지 스님들이 화엄사에 공적비를 세운지 15년만이다.
이날 화엄사에 세워진 공덕비는 최근 차 경무관의 공적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전 화엄사 주지 종삼스님과 현 주지인 영관스님이 조성한 것이다. 원래 있던 공적비는 후손인 차길진 법사가 차일혁 기념사업관으로 옮겨 그 뜻을 기리게 됐다.
차일혁은 1951년 5월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그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과 암자를 불태우라는 상부명령을 받자 화엄사 각황전의 문짝 만을 떼어내 불태우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리고는 상부에 “문짝만 태워도 빨치산의 은신처를 없앨 수 있다”고 보고하며 천년고찰을 지켜냈다.
그는 작전명령을 어기며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경찰공무원으로는 처음으로 2008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경찰청도 뒤늦게 그의 업적을 조명하며 2011년 8월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했다. 또한 2012년에는 국가보훈처가 한국전쟁 영웅으로 선정했으며 올해에는 전쟁기념사업회 호국의 인물로 이름을 올렸다.   
전북 김제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광복 후 귀국해 일본 고등계 형사 사이가 쓰보이를 저격하는 등 일제 잔당을 청산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유일한 발전소인 전북 정읍 칠보발전소 탈환과 지리산을 장악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 사건은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지난 1951년 당시 18전투대대 대대장이었던 차일혁은 전투대원 75명의 수적 열세를 딛고 국가기관시설인 발전소를 점령하기 위해 대치하던 2500여명의 빨치산을 응징하며 칠보발전소를 사수했다.
1953년 총경으로 승진한 그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돼 그해 9월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연상을 사살하며 사실상 토벌작전의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이현상을 사살한 후 인간적인 연민으로 시신을 거둬 화장한 뒤 골분을 섬진강에 뿌리고 장례를 치러 주기도 했다.
그는 ‘이현상 토벌’이라는 혁혁한 전공(戰功)에도 불구하고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총경직에서 승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공적을 인정한 조계종 초대 종정인 효봉스님은 1958년 5월 감사장을 수여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는 3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높이 2.97m, 너비 3m의 이 공덕비는 기단은 화강암으로 상단은 대리석으로 제작됐으며, 고은 시인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차 경무관의 아들인 차길진 법사가 썼다.
비문에는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 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치를 돌에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며 공적을 기렸다.
[불교신문] 6·25 당시 화엄사 지킨 故차일혁 경무관 공덕비 제막 (2013.08.22.)

 

 박헌영 :: 본관 영해(寧海), 호 이정(而丁),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났다. 1919년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그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고, 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하여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때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그후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후 평안북도 철산(鐵山)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헌영 [朴憲永] (두산백과)

 

 패혈증 ::  곪아서 고름이 생긴 상처나 종기 따위에서 병원균이나 독소가 계속 혈관으로 들어가 순환하여 심한 중독 증상이나 급성 염증을 일으키는 병.

 

 그녀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 고통스럽기보단 오히려 후회스러웠는데, 그것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아들의 통증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아들에겐 오직 통증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동의서에 적어놓은 자신의 이름을, 후회했다. 아들이 자신으로 인해, 받지 않아도 되는 고통가지 묵묵히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아들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들의 고통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8월 테제 :: 해방 직후 박헌영에 의해 제시된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 정식제목은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8월 20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자리에서 박헌영이 제시, 향후 조선공산당의 잠정적 정치노선으로 채택된 것으로, 그 주요내용은 「조선해방은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인 소·영·미·중 등 연합군에 의해 실현되었다. 현재 조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있으며, 앞으로 제2단계인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주된 과업은 민족의 완전독립,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다. 우리의 임무는 과거 혁명운동의 파벌을 극복하고 대중운동 전개, 노동자·농민 중심의 조직사업, 좌우 기회주의와의 투쟁,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민족통일전선에 의한 인민정권 수립투쟁이다」라고 밝혔다. 재건준비위원회의 발족과 <8월테제> 발표로 인해, 이미 공산당 재건을 선언했던 장안파는 8월 24일 당해체를 결의,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재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8월테제 [八月 These]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9.10., 가람기획)

 

 그곳에서 내가 의지를 갖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단식뿐이었는데, 그것도 매번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지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돌아봐주지 않는 그것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어야 하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아마 짐작도 못할 거요. 허기가 무서운 게 아니라 침묵이 더 고통스러웠으니까.

 

 9ㆍ28 :: 1950년 9월 28일 6ㆍ25 중 서울 수복

 

 어쩌면 수환 학생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 뒤의 것들, 그 뒤의 것들, 우리의 과거가 아닌, 이야기의 끝이었는지도 모르겠소. 거기에서부터 수환 학생의 궁금증이 시작됐을 테니까...

 

 나는 내가 돌덩이가 되었다고 믿었는데... 사실 그건 내 착각이었던 거 같소. 돌덩이가 된 것은 내 상처지, 내 마음은 아니었던 게요...

 

 "언젠가 수환 학생이 이정 선생의 이름을 처음 말하면서 그게 '고무래가 되겠다'라는 뜻 아니냐고 물어왔던 적이 있소. 나는 그 때 그런 뜻도 있지만 그건 그냥 글자 모양 그대로 보는게 맞을 거라고 말해주었고. 그러니까 쇠스랑(而)과 망치(丁)가 맞을 거라고... 우린 해석하기보단, 보이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망치 : 노동자, 낫 : 농민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와 유리창을 한차례 흔들고 지나갔지만, 그녀와 노인은 말없이 굳은 듯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앉아 있었다. 곧 어둠이 내리고, 별이 먼 곳으로부터 흘러들어왔다.

 

 

 

7. 화라지송침

 이건 뭐,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마음까지도 괜스레 엠보싱만큼이나 우둘투둘해질 수밖에...

 

 그래서 나는 사심 없이, 거의 유니세프와도 같은 마음으로, 그를 도와주려 노력했다.

 

 나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짐작과 진실 사이엔 그리 큰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짐작이란, 어쩌면 진실을 마주 보기 두려워서, 그게 무서워서 바라보는 그림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갖게 되었다. 

 

 처음엔 빨래를 개키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내가 흠칫, 낯설었지만, 이젠 뭐 욕실 수납장에 차곡차곡 개켜 있는 수건들만 봐도 마음 한구석이 절로 뻐근해지곤 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뭐, 도박 같은 거일 수도 있잖아?’였다. 아내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남자라고! 남자! 그것도 아주 젊은 남자!’라면서 평소 아내답지 않게, 거의 울먹이듯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게, 그 젊은 남자랑 도박을 했나, 속으로 웅얼거리면서.

 

 건초염 :: 힘줄 윤활막염(힘줄을 싸고 있는 막에 생기는 염증)

 치발기 :: 입에 무는 어린 아이 장난감

 

 이 근거 없는 자존감은, 그러나 집에서 살림하는 남자에겐 커다란 힘이 된다.

 

 는적는적 :: [부사] 물체가 힘없이 자꾸 축 처지거나 물러지는 모양.

 

 ‘이제 괜찮아요, 내가 몹쓸 양파들을 모두 물리쳤어요! 다음부턴 몹쓸 양파 대신 꼭 정의로운 피망을 넣을게요!’

 거기에다 대고 대뜸 ‘양파 따위를 무서워하다니, 어서 두 눈을 부릅뜨고 몹쓸 양파들과 정면승부를 해!’ ‘이렇게 계속 양파를 무서워하면 넌 앞으로 삶은 달걀도, 감자도, 고구마도 두려워하는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 거야!’ 따위의 당위를 강요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긴커녕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일이 될게 뻔했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나는 욕실 바닥을 세제로 벅벅 문지르다가 말고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더불어 나 또한 어떤 무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세제 거품만큼이나 몽개몽개 마음 저편에서부터 피어올랐다. 

 

 “또 어딜 가나요? 전, 괜찮은데요.”

 나는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벤치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켰는데, 기지개를 켜는 그 짧은 순간, 마치 낮술을 마신 것처럼 귓바퀴에서부터 뒷목 부위까지 벌겋게 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말하자면 ‘또 어딜 가나요?’란 의문문과, ‘전, 괜찮은데요’라는 평서문 사이의 간격이, 그 격차가 만들어낸 열기 같은 것이었는데, 그건 도저히 배롱나무 핑계를 댈 만한 여지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대흥종합관리 소장과 통화한 후, 다시 정 과장에게 전화를 건 것은 어쩌면 그런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수습해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짐작 속엔, 기종 씨가 ‘또 어딜’ 가더라도 ‘괜찮’지 않을 거란 예단이, 무슨 엉겅퀴 뿌리처럼 돌아보면 다시 삐죽삐죽 솟아났고, 그걸 정 과장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해결해주길 바란 것이었다. 어쨌든 기종 씨는 ‘또 어딜’ 가야 하는 사람이 맞았으니까...

 

 정서(情緖)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언제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스피노자였다. 그는, 사람들의 결함과 어리석은 행동들을, 슬픔과 조롱과 한탄과 우울 들을, 마치 선, 면, 물체처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도달한 결론은 ‘인간의 모든 정서에는 각각의 원인이 있다’는 것, ‘그것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혼란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

 

 아내는 잠든 기종 씨의 머리맡에 등을 보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그런 아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어깨가 작게, 아파트 외관 네온사인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ㄹ’자를 억지로 펴 놓은 듯한 보도블록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짐작은 생각처럼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지날수록 침묵과 당혹감만이, 마치 밑바닥을 온전히 다 드러낸 저수지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 가로 놓이게 되었다.

 

 나는 어쩐지 나 또한 그를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 알량한 선의의 전부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지금 참아내고 있는 그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거절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망상을 참아내는 사람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기도 한다. 누가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참아내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말해주는, 숨겨진, 또 하나의 눈금일 것이다.

 

 아내나 나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는 선에서,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그게 조금 쓸쓸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게 또 우리였으니까.

 

 성황당 :: <민속> ‘서낭당(서낭신을 모신 집)’의 원말.

 

 

 

8.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가끔 밥상에 마주 앉을 때마다, 내 속에서 어떻게 저런 게 나왔는지, 하는 자조와 탄식을 내 숟갈 위로 수북이 얹어주던 아버지였다.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만 것을 어떻게 하느냐, 나는 될 수 있는 한, 낙천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담배를 피우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니... 담배부터 사기로 한 것이었다.

 

 말이 슈퍼지, 구멍가게 위에 간판만 큼지막하게 매달아놓고 무조건 슈퍼라고 우기는, 그 허다한 영세 상점 중 하나였다.

 

 그날의 불행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오해가 오해를 부르고, 그러다 보면 정말 무엇이 오해이고 진실인지 엉망으로 뒤섞여버리는 날. 그날이 바로 그랬다.

 

 

  

9. 해설 – 이야기의 경계를 넘어, 이야기 되지 않는 삶을 찾아서_김동식

 이야기는 삶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외부의 이야기는 삶을 규정하고 구속하는 상징구조이다. 이기호의 소설에서는 아버지와 국가의 요구(명령)로 표상되며, 주민등록이나 학적부와 같은 공식문서로 제기된다. 따라서 외부의 상징구조와 삶의 내밀한 이야기 사이에는 서열적인 또는 억압적인 구조가 형성될 수밖에 없고, 삶이란 아버지와 국가의 요구를 ‘입증’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해당한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의 여러 작품들이 ‘이름’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름이야말로 외부의 상징구조와 삶의 내밀한 이야기 사이의 서열적ㆍ억압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아버지에 의해 부여되고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기호인 동시에 삶의 고유성에 대한 이야기를 욕망하는 기호이다. 이름에는 아버지 – 국가의 명령(요구)과 삶의 고유한 이야기가 교차한다.

 

 공식 기록이나 문서에서 삶의 내밀한 세부는 입증되지 않는다. 공백으로 남을 뿐이다. 

 

 한편으로 그는 학적부의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삭제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출퇴근 기록은 학교에 의해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었다.

 

 학적부에서 삭제된 항목들은, 역설적으로 삶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시하는 기호 또는 흔적이기도 하다. 공적 기록이 기록하지 못했거나 기록할 수 없었던 삶의 내밀함과 고유함이, 삭제를 통해 마련된 공백 속에서 너울대고 있다.

 

 이름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공적 기록에 등재된 기호이자, 개인적 삶의 내밀함과 고유함을 이야기하는 기호. 이름은 공적 기록과 삶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이며, 공적 기록 아래에 삶의 이야기가 여백으로 배치되는 장소이다.

 

 ‘나’의 탄원서가 P와의 ‘친밀성’에 근거해 있는 것과 달리, 최의 글은 박수희의 ‘고유함’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적부나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고유성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변별성의 최소지표로 기능한다.

 

 ‘나’는 법원의 판결문이 배제해버린 P의 개인적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나’의 탄원서는 또 다른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실의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입증’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판결문과 탄원서는 등가이다. 달리 말하면 ‘나’의 탄원서는, 그 의도의 순수성에도 불구하고, 판결문에 내재된 입증에의 요구를 연장하거나 반복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어투를 빌려서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야기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삶의 고유함은 이야기될 수 없고 다만 지시될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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