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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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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 안도현의 시작법 詩作法』. 시를 가슴으로 쓸 것인가, 손끝으로 쓸 것인가? 손끝의 문학을 먼저 배운 안도현. 손끝으로 시를 만드는 일을 회의하게 된 그가 시를 쓰려거든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쓰고, 엉덩이로도 쓰라고 말한다. 가슴으로 붉고 뜨거운 정신으로 시를 쓰는 안도현의 시 쓰는 법을 소개한다. 이 책은 ‘시와 연애하는 법’이라는 타이틀로 2008년 6개월 동안 <한겨레>에 연재했던 원고들을 대폭 손질하고, 내용을 보강해 묶은 책이다. ‘좋은 시는 어떻게 태어나는지’, ‘좋은 시는 어떻게 쓰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시작법 책인 동시에 오랜 세월 시마와 동숙해 온 시인 자신의 시적 사유의 고갱들이 담겨 있다. 상투적이지 않으면서도 친숙하게 핵심을 짚어주는 안도현의 시작법론은 ‘시가 탄생하는 순간’에 대한 시인의 경험이 자연스레 묻어난다. 시인 자신의 시 창작에 얽힌 사연과 경험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인 것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시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 시와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도 좋을 책이다.
저자
안도현
출판
한겨레출판사
출판일
2009.03.03

 

0. 머리글 – 영혼의 생산자로서 시인이 된다는 일

 나는 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으므로 다만 ‘시적인 것’을 탐색하는 것으로 소임의 일부를 다하고자 한다. ‘시적인 것’의 탐색이야말로 시로 들어가는 가장 이상적인 접근 방식이라 믿는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담론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시의 성채를 위해 ‘시적인 것’을 반죽하거나 구부러뜨릴 수도 있다.

 

 

 

1.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술ㆍ연애ㆍ시집

 다독(多讀)ㆍ다작(多作)ㆍ다상량(多商量), 즉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歐陽脩)가 남긴 말이다.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고 한다.

 첫째, 술을 많이 마셔라. 그렇다고 혼자 마시면 안 된다.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당신은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 함께 마시는 사람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다만 빗금을 긋는 자임을 명심하고 마셔라.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그렇다고 해서 술이 깨지 않은 비몽사몽의 시간에 펜을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있어도 ‘취중진문’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금도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말로 학생들을 꼬드겨 술잔을 권한다(단,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권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하고는 상종할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둘째, 연애를 많이 하라.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연애감정도 없이 시를 쓰려고 대드는 일은 굳은 벽에 일없이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담쟁이넝쿨을 생각해보라. 담쟁이넝쿨은 담을 어루만지며, 담에 매달리며,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셋째,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기 전에, 많이 생각하기 전에,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

 

 “오천 권의 문자가 가슴에 있어야 한다.” 

- 추사 김정희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가장 먼저 뿌리를 북돋우고 줄기를 바로잡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고 나서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면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나무를 애써 가꾸지 않고서 갑작스레 꽃을 얻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를 북돋아주듯 진실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쏟고, 줄기를 바로잡듯 부지런히 실천하며 수양하고, 진액이 오르듯 독서에 힘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듯 널리 보고 들으며 두루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것을 헤아려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이요,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은 성급하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정약용, 『국역 다산시문집』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다.

 

 소리로 세상 읽기

 시를 쓰는 일은 세상을 두루 공부하는 일이다. 습작(習作)이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연습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부단히 배우고 익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習’은 새의 날개깃을 뜻하는 ‘羽’와 태양을 뜻하는 ‘日’의 결합이다. 즉 새가 햇볕 아래 날아오르기를 연습하는 형상이다. 또 해가 떠오를 때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둥지를 떠나가려 한다는 뜻도 된다. 어떻게 해석하든 ‘習’이란 어린 새가 여러 번 반복해서 날아오르기를 준비하는 과정을 말한다. 여태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으로 인해 ‘習’은 “학습, 공부하다, 배우다”의 뜻으로 의미가 파생되었다. 미숙한 것에서부터 익숙하게 이해하는 과정의 의미로 “숙련되다, 익숙하다, 능하다”의 뜻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어린 새가 둥지 바깥으로 날아오르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습작도 노력을 거듭해야 하는 고통스런 작업이다.

 

 

 

2. 재능을 믿지 말고 자신의 열정을 믿어라

 타고난 시인은 없다

 천부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란 애초부터 없다. 어떤 시인의 재능에 대한 찬사는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찬사이지 인간으로서의 천재성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랭보 :: 프랑스의 시인. 베를렌ㆍ말라르메와 함께 프랑스 상징파 시인의 대표. 극히 조숙한 천재로 일찍부터 시작(詩作)을 시작, 15세에 《감동 Sensation》ㆍ《오펠리 Ophelie》 등의 가편(佳篇)을 냈다. 17세 때 파리에 나가(1871)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의 전렬(戰列)에 참가했으나, 야성(野性)의 시인 베를렌을 만나 곧 그에게 경도, 공동 생활을 시작하고 베를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뒤에 시집 《Illuminations(1886)》에 수록된 시들을 이 무렵 작시(1872~73), 독자적인 시의 세계와 기교를 창조했다. 이어서 베를렌과 함께 런던ㆍ벨기에에 여행했으나 브뤼셀에서 베를렌이 그에게 권총 발사를 하여(1873) 둘 사이의 우정은 끝났다. 한때 어머니 있는 곳에 귀환, 이 때까지의 생활의 결산이라고도 할 만한 산문시 《지옥의 계절 Une saison en enfer(1873)》을 발표함과 동시에 붓을 버리고, 16세에서 19세까지 짧은 문학 생활의 막을 내렸다. 이후 20년간은 유럽 각지, 서 아시아ㆍ아프리카ㆍ남양 등지를 방랑, 교사ㆍ지원병ㆍ행상인ㆍ탐험가 등이 되었으나 최후에는 마르세유에서 성체(聖體)를 수령(受領), 사망했다. 그의 시는 반역 정신으로 충일, 그 시형 또한 전통에 반역하고, 근대 자유시의 창시자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랭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책에서는 예술가란 자신의 직업을 지속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 즉 중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 자들이라고 규정한다. 예술창조에 대한 지속성이 곧 예술적 재능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얼마나 되는지 걱정하는 것보다 더 쓸모없고 흔한 에너지 소모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즉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지 않으면 눈부신 천성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의 깊게 볼 것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배워나가며 발전한다”는 대목이다.

 

 시인으로서 타고난 재능에 기대어 시를 기다리지 마라. 그리고 재능이 없다고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지도 마라. 그렇게 하면 시는 절대로 운명의 조타수가 되어주지 않는다. 시인 역시 시의 길을 여는 조타수가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열정을 믿어야 한다. 이광웅 시인은 「목숨을 걸고」라는 시에서 “뭐든지/진짜가 되려거든/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열정의 노예가 되어 열정에 복무할 때 우리는 그 열정에 대한 신뢰를 가까스로 재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몰입의 기술

 감성이 무뎌졌다 싶으면 나이를 원망하지 말고, 부단히 감성을 훈련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를 탓하라. 청년에게는 청년의 감성이 있고, 노년에게는 노년의 감성이 있는 법이다. 감성이란 또 여성의 전유물도 아니어서 남성적인 감성도 얼마든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열정을 품고 감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라.

 

 특정한 제재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중국의 시인 아이칭(艾靑)이 그의 『시론』에서 한 말은 음미할 만하다. “제대를 완전히 장악해야 비로소 예술세계의 통치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무릇 당신이 눈동자로 본 것, 귀로 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당신의 사상체계 속에 잘 짜 두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감각과 사유가 한 제재로부터 습격을 당할 때, 한바탕의 격투를 치르게 하라. 그 제재가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게 하라.

 

 아이칭 :: 본명 장하이청[蔣海澄]. 저장성[浙江省] 출생. 항저우[杭州] 예술전문학교에서 회화(繪畵) 공부를 한 후 프랑스로 유학하였다. 1932년 귀국하여 반(反)파시즘 시인으로 데뷔, 좌익작가연맹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었다. 출옥 후 상하이[上海]에서 시작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이 시기의 작품에는 상징주의적인 것이 많다. 항일전쟁 개시 후에는 중국 각지를 방랑하면서 민중과 결합하여 민중의 고통과 반발을 직접 호소하였다. 중공 정권수립 후에는 전국문학예술계 연합회의 요직을 맡았으나, 1957년 반당분자로 비판받았다. 작품에는 시집 《대언하(大堰河)》 《오만유(吳滿有)》 《북방(北方)》 등이 있고, 그 밖에 《시론(詩論)》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이칭 [艾靑(애청)] (두산백과)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그 손을 놀리고, 어깨를 받치고, 발로 딛고, 무릎을 굽히는 모양이나 또 쪼록쪼록 싹싹 하는 칼 쓰는 소리라든지가 모두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몸놀림은 상림의 춤과 어울리고, 그 칼 쓰는 소리는 경수의 장단과도 맞았다. 문혜군이 이를 보고 감탄했다.

 “아 참으로 훌륭하구나. 기술이 대체 이렇게까지 미칠 수 있는 것인가?”

 포정은 칼을 놓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도로서, 그것은 기술에 앞섭니다. 옛날 내가 처음으로 소를 잡기 시작할 때엔 눈에 보이는 것이 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삼 년이 지난 뒤에는 소를 본 적이 통 없었고, 지금에는 오직 마음으로 일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곧 손발이나 눈 따위의 기관은 멈춰버리고 마음만이 작용합니다. 소 몸뚱이 속의 자연스런 본래의 이치를 따릅니다. 뼈와 살이 붙어 있는 큰 틈바귀를 젖힐 때나, 뼈마디가 이어져 있는 큰 구멍에 칼을 넣는 일들은 모두 소가 생긴 그대로를 좇아 하기 때문에 내 기술은 아직 한 번도 뼈와 살이 맺힌 곳에서도 칼이 다치지 않도록 합니다. 하물며 큰 뼈다귀이겠습니까? 솜씨 있는 백정은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요, 보통 백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다귀에 부딪혀 칼을 부러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칼은 이제 십구 년이나 지났고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는데도 그 칼날이 막 숫돌에 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집어넣기 때문에 넓고넓어 칼날을 놀리는 데에 충분한 여유가 있습니다.

-『장자』

 도가 기술에 앞선다는 말은 기술의 숙련과 연마가 도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이다. ‘소가 생긴 그대로’를 따라 칼을 움직이기 때문에 두께가 없는 칼은 뼈마디와 살 사이의 틈을 여지없이 찾아낸다. 이것은 잡다한 사념을 벗어던지고 육체와 정신을 오로지 한곳으로 집중할 때 이르게 되는 경지라 할 것이다.

 

 

 

3. 시마(詩魔)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똥하고 친해져야 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산에서 똥을 누는 사람이 되었다. 아, 나는 그 아침의 오묘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똥 혼자서만 풍기는 냄새가 아니었다. 흙과 똥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기막힌 화음이었다. 도시의 화장실은 똥을 감추고 그 냄새를 지워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흙은 숨기지 않고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양변기에 눈 죽은 똥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흙 속에 눈 똥은 쉽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흙 속에서 똥은 오롯이 살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시적인 순간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첫 생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동안 당신이 겪어온 감정과 사건과 정보가 밑바탕이 되어 발산되는 것이기에 엄청난 에너지에 물들어 있다.” 

-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4.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하라

 상투성의 그물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마음의 독버섯과 같다. 겉은 멀쩡한데 우리의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재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인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죽은 인식은 죽은 언어를 불러온다. 시인의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죽은 언어를 구별하여 과감히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다.

 

 세계와의 불화

 토끼는 (        ) 뛰어간다.

 물론 정답은 ‘깡충깡충’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 중에 과연 토끼가 깡충깡충 산을 뛰어오르는 모습을 본 아이가 몇이나 될까? 아이들은 대부분 동물원이나 토끼장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토끼를 본 게 전부일 것이다. 이런 기계적인 동시교육은 ‘시냇물은 졸졸졸’ ‘새싹은 파릇파릇’ ‘흰 눈은 소복소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시라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표현의 경직성은 사고의 경직성으로 옮아간다.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딱딱하게 만드는 이런 나쁜 동시교육을 이제는 한시바삐 집어치워야 한다.

 

 “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 

- 보들레르 (프랑스 시인)

 

 당신이 늘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 소소한 것에서부터 삶의 기미를 포착하고 파악하는 습관을 길러라. 사물을 반듯하게 보지 말고 거꾸로 보라. 세상을 걸어 다니면서 보지 말고 때로는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라. 지금부터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을 선언하라.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미적 인식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동심론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이지(李贄)는 ‘동심설’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글은 모두 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는데, 이 앎이 동심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입된 도리와 견문으로 이름을 얻게 되면서 동심을 잃어버리고, 좋지 않은 명성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 데 불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러운 이름을 덮으려고 하면서 또 동심을 잃게 된다고 이지는 경고한다. 동심을 잃게 만드는 도리와 견문은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말한다. 혹은 구태의연한 사고, 인습적 가치관의 뜻으로 바꿔 읽어도 좋을 것이다. 

 

 시인의 동심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물고기 비늘이 반짝이는 이유는 물고기가 바다에 떨어진 별빛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애인이 만들어준 뜨개질 목도리를 하고 있으면 애인이 등 뒤에서 목을 감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아욱을 씻다가 어머니에게 느닷없이 오르가슴을 느껴본 적 있느냐고 물어본 적 있다고... 

 

 

 

5. ‘무엇’을 쓰려고 하지 마라

 본 것, 가까운 것, 작은 것, 하찮은 것

 무엇을 쓸 것인가?

 첫째,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써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 책을 읽어서 알게 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경험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직접적인 경험만큼 생생하지는 않다. 남의 입을 통해 빠져나온 말을 받아 적다보면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게 될 우려가 있고, 책으로 얻은 지식과 지혜를 말로 옮겨 적다보면 현학이나 지적 허영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내리는 집 

- 김용택, 「그 여자네 집」부분

 서정시로는 매우 긴 편에 속하는 이 시 중에 나는 이 부분을 유독 좋아한다. 속눈썹에 걸린 눈과 붉은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하얀 눈은 시인의 경험적 발견이 없이는 이렇게 생생하게 재현될 수 없다. 김용택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시를 쓴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시를 쓴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면서,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나는 그것을 쓰겠다’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그래도 적었더니 시가 되더라는 말도 했다. 이때의 ‘어머니의 말씀’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의미다.

 둘째,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써라. 이정록의 말을 잠시 경청해보자.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전화를 화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가이 있는 것을 말해보라고 한다. 그걸 쓰라고 한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고 한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안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 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그는 ‘문지방 삼천리’라는 말로 기발하게 압축했다. 삼천리는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다 둘러보지 못한다. 애써 둘러볼 필요도 없다. 문지방 안에 삼천리가 다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를 찾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더 귀띔한다. “오래 들여다보면 모두 시가 된다”는 말도 했다. 역시 이정록의 어록이다. 기억해두자.

 백 대쯤

 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 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 이정록,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전문

 이 시는 시적 대상을 오래 들여다본 결과물이다. 논을 갈던 암소가 고개를 꺾을 때 생기는 목주름과 노인의 이마 주름의 대비, 소의 굵은 눈망울과 젖은 해 두 덩이의 비유가 더없이 적절하다. 이러한 관찰이 시적 기교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말 없는 짐승과 인간을 한 식구로 동일화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시인이 대상을 오래 들여다본 만큼 당신도 이 시를 오래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면 이 시에서 시간의 유한성과 삶의 무상을 함께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당신은 이미 훌륭한 독자다.)

 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려면 당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젊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부터 읽어라. 젊은 시인의 시는 교과서요, 늙은 시인의 시는 참고서다. 우리나라 시인의 시는 한 끼의 밥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시는 건강보조식품이다. 제발 릴케와 보들레르와 엘리엇을 읽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 두보와 이백을 앞세우지 말라. 볼썽사납다. 그들 대가의 시집은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라.

 셋째,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쓰지 말고, 낮은 곳에서 돌아앉아 우는 것에 대해 써라. 시는 절대로 ‘초월한 자의 향기’가 아니다. ‘고귀한 사랑’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아니다. ‘고행을 이겨낸 구도자의 경지’가 아니다. 시는 초월하지 못한 인간의 발가락에서 나는 냄새고, 지저분한 사랑이며, 인간과 자연의 불화이며, 한 시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번 돈 3천 원이다. 당신도 최영미처럼 “나는 내 시에서/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시(詩)」)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시를 쓰려거든 두꺼운 문학이론서 독파에 연연하지 말라. 창작보다 고매한 철학적 사유로 무장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론이나 세계관이 시를 낳는 게 아니다. 당신의 시가 당신의 이론과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믿어라.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이다.” 

- 김상욱, 『다시 쓰는 문학에세이』

 넷째,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을 써라. 나의 경험 중에 행복했던 시간들이 남에게도 반드시 행복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과 충족은 남의 불행과 결핍의 증거임을 잊지 말라. 장미와 백합의 우아한 향기에 취하지 말고, 저 들판의 민들레와 제비꽃의 무취에 취하라. 금메달을 목에 건 승리자의 영광보다는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의 실패를 경배하라. 성형수술 한 처녀의 얼굴을 경멸하고 주근깨로 뒤덮인 소녀의 얼굴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라.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단 한 번도 목욕탕에 가지 못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목욕탕에 갈 때마다 부자끼리 서로 등을 밀어주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등을 바라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원망도 했다. 아버지는 늙었고, 어느 날 쓰러져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 병원 욕실에서 늙은 아버지를 씻겨드리다가 아들은 아버지의 등에 낙인처럼 박혀 있는 지게자국을 보고 말았다. 시인은 그 지게자국을 보고 울컥, 하는 사람이다. 손택수의 시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손택수, 「아버지의 등을 밀며」부분 

 박미라는 『치유하는 글쓰기』에서 이른바 ‘미친년 글쓰기’를 주창한다. 미친년 글쓰기의 전제는 ‘상처를 통해 이야기하기, 흉터를 감추지 않고 말하기, 자신이 미쳤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이다. 내 속에 숨은 광기를 끄집어내는 것, 즉 시작이란 광기의 언어화 과정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광기를 샅샅이 검색하라. 그리고 드러내어라. 미셸 푸코의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광기는 가두고 감추는 게 능사라는 게 통념이다. 그러나 가두고 감춤으로써 오히려 광기를 지닌 대상을 심각하게 왜곡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광기의 역사』)

 당신의 상처와 흉터와 광기와 결핌과 불행에 주목하라. 시를 쓰는 동안은 당신이 받은 훈장과 상장을 반납하고, 행운과 행복과 영광을 외면하라. 당신이 자랑하고 싶은 것들과는 이별하고, 당신이 부끄러워하는 것들과 손잡고 결혼하라. 당신이 두고두고 치욕스럽게 여기는 것, 감춰 두고 싶은 것, 그래, 그것을 꺼내 써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시적 경험은 나의 경험의 일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시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시의 소재로서 한 알의 사과가 있다. 당신에게 이 한 알의 사과에 대해 시를 쓰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적어도 다음에 제시하는 열 가지 정도의 행동을 수행하거나 사유를 움직여야 한다.

 1) 사과를 오래 바라보는 일

 2) 사과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

 3) 사과를 담은 접시를 함께 바라보는 일

 4) 사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뒤집어보는 일

 5) 사과를 한입 베어 물어보는 일

 6) 사과에 스민 햇볕을 상상하는 일

 7) 사과를 기르고 딴 사람과 과수원을 생각하는 일

 8) 사과가 내 앞에 오기까지의 길을 되집어 보는 일

 9) 사과를 비롯한 모든 열매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일

 10) 사과를 완전하게 잊어버리는 일

 이렇게 해야 당신은 비로소 시의 첫 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6.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하라

 필사의 즐거움

 오송회 사건 ::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 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을 ‘오송회(五松會)’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이들의 모의 내용과 학생들을 교사(敎唆)한 발언을 열거했으며, 증거물로 월북시인 오장환(吳章煥)의 시집 「병든 서울」 필사본과 시인 김지하의 ‘오적’이 게재된 일본 잡지 ‘불귀’ 등을 제시했다.
경찰은 내사를 시작했고 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황윤태, 이옥렬 등 군산제일고 교사 5명이 ‘5ㆍ18 위령제’를 갖고 평소 자주 모여 ‘정부 비판’ 발언을 했음을 알았다. 이들은 평소 뜻이 맞는 교사들끼리 독서모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걸리를 사들고 학교 뒷산에 올라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추모의식을 가지고 시국토론을 한 것이 전부였다. 경찰은 이러한 일들을 엮어 ‘군산제일고 교사 고정간첩단’으로 몰기 위한 계획을 만들었다. 5명이 소나무 숲에서 모였다며 ‘오송회’란 이름을 지어냈다.
피해자들은 법정에서 고문당했다고 밝혔으나 1심에서 9명의 피고인 중 이광웅(징역4년), 박정석(징역3년), 전성원(징역1년) 3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6명은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교사들은 선고유예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했다. 광주고법의 2심은 “대학 교육을 마치고 교사로 재직하는 이들이 공산주의 사회를 동경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 없이 변명만 한다”며 이광웅(징역7년) 등 3명의 형량을 대폭 늘리고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던 6명도 징역 2년6개월~1년씩 선고하여 모두 법정구속했다. 1983년 12월 대법원도 고법의 형을 그대로 확정했다.
사건 발생후 16년이 지난 2008년 11월 25일 광주고등법원은 오송회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관련자들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 피해자 및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150억여원의 배상액을 확정했다.
[위키백과] 오송회 사건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들과 그즈런히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 백석, 「산숙」전문

 백석이 1938년 『조광』에 발표한 시다. 나는 이 시 한 편으로 30년대 산골의 전형적인 풍경과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 여기에서 아주 인상적인 것은 ‘목침’이다. 이 오래된 목침에는 새까만 때가 올라 있다. 화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백석의 매력이 숨어 있다. 그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라는 서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밋밋하고 시의 산문적 서술에 기여하는 말이 ‘생각한다’이다.

 그런데 이 말이 아프다.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이 누구이겠는가? 목침에 때를 올린 사람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산골의 광산촌을 떠돌거나 만주 등지로 길을 떠나던 30년대 후반의 우리 민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때 묻은 목침 하나를 통해 대다수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현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7.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시가 서 있어야 할 자리

 간살 :: 간사스럽게 아양을 떠는 태도.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감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 이덕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 중국의 고승 임제의 화두다. 무슨 말인가?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말이고,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말이며,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라는 것이다.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

 그레고르 잠자 :: 카프카(1883-1924)의 단편소설 『변신』의 주인공.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그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한 마리의 갑충으로 변해있다. 처음에 가족들의 관심과 보호를 받다가 결국 가족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잠자, 그레고르 [Gregor Samsa] (카프카전집사전, 2005.12.27., 솔출판사)

 

 사랑의 표현

 작은 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려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려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 한다 한다.

 엄마는 새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 배한권, 「엄마의 런닝구」전문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뜻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롭트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낳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누군가 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시는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면 다 좋은 시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 하면서 고개를 흔들 것이다. 또 누군가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한마디 보탤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쓰려면 ‘사랑’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말아야 한다고, 제목으로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사랑’이라는 말을 아예 잊어버려야 한다고 훈수를 할 것이다.

 

 

 

8. 빈둥거리고 어슬렁거리고 게을러져라

 발효와 숙성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매혹적인 제목의 글에서 버트란트 러셀이 한 말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그는 노동이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루의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파격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하루에 4시간만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을 불성실하게 보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나머지 시간에 지금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리도록 더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

 적막에 사로잡힌 적막의 포로가 되라. 적막 속에서 빈둥거리다가 보면 문득 소란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세상의 소란 속으로 단번에 뛰어들지 말고, 가능하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라. 그러다보면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하기 힘든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技癢, 지니고 있는 재주를 쓰지 못하여 안달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란 말로 표현했다. ‘양’이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있다. 그것이 바로 기양이다.”

 

 

 

9. 감정을 쏟아 붓지 말고 감정을 묘사하라

 함축인가, 비유인가

 시에서 함축은 긴 내용을 ‘줄여 말하기’가 아니라 ‘비유해서 말하기’다. 길이의 단축이 함축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의 함축은 오히려 ‘감추어 말하기’에 가깝다. 독자의 입장에서 함축의 의미는 ‘시인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즉 함축이란 겉으로 드러난 언어의 뜻을 좇는 게 아니라 언어가 내포한 속뜻과 암시하는 바를 살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다.

 

 고백ㆍ감상ㆍ현학

 감정을 드러내고 쏟아 붓는 일은 시작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당신이 보고 싶다거나,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고백’이나 ‘넋두리’ 혹은 ‘하소연’이라고 부른다. 그런 것들이 시의 일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시의 모든 것은 아니다.

 

 시가 고백적 양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게 세 가지가 있다. 당신은 시를 쓰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이것들을 과감하게 배척해야 한다.

 첫 번째는 과장이다.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우습다.

 두 번째는 감상(感傷, 하찮은 일에도 쓸쓸하고 슬퍼져서 마음이 상함. 또는 그런 마음)이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그런 것들은 역겹다.

 세 번째는 현학이다.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기이한 시어를 주워와 자랑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그런 것들은 느끼하다.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감정의 정화조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여과시키는 일이 바로 시인의 몫이다.

 

 묘사의 힘

 두말할 것도 없이 묘사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낮추거나 무릎을 구부릴 줄 알아야 한다. 옛 시인들이 산정에 올라 천하를 둘러보며 호연지기를 노래했던 일은 감정의 움직임에 충실한 것이었다. 현대의 시인들은 그걸 따라 흉내 내면 안 된다. 산에 오르기 전에 눈에 띄는 식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귀에 들리는 새소리를 언어의 그림으로 그릴 준비를 해야 한다.

 

 내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까발려 드러내면 시가 추해진다. 내 마음을 최대한 정성을 들여 그려서 보여주기, 그게 시다.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10. 제발 삼겹살 좀 뒤집어라

 묘사는 관찰로부터

 공수(拱手) :: 1. 절을 하거나 웃어른을 모실 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포개어 잡음. 또는 그런 자세.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놓고, 여자는 오른손을 왼손 위에 놓는다. 흉사(凶事)가 있을 때에는 반대로 한다. 2. 팔짱을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음.

 

 “명태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물고기도 없다. 북어(北魚), 동태(凍太), 황태(黃太)는 흔한 이름이고 잡힌 상태와 시기, 장소, 가공방법 등에 따라 30여 가지가 넘는다. 명태의 상태에 따라 갓 잡아 얼리지 않은 것은 생태, 꽁꽁 얼린 것은 동태, 한겨울 찬바람 속에 내걸어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며 말린 황태, 절반쯤 말린 코다리, 완전히 말린 북어, 명태 새끼는 노가리, 내부에서 나오는 ‘명란’과 ‘창란’등으로 구분된다. 또 황태를 말리 때 일교차가 심해서 하얗게 되면 백태, 기온 변화가 적어서 검게 되면 흑태, 또는 먹태라 한다. 내장을 꺼내지 않고 통째로 말린 것은 통태, 소금에 절여 말린 건 짝태, 잘못 말려 속이 붉고 딱딱해진 것은 골태 또는 깡태, 대가리 떼고 말리면 무두태, 손상된 것은 파태, 날씨가 따뜻해서 물러지면 찐태, 고랑대에서 떨어진 것은 낙태라 하고 기계로 급속 건조한 최하품은 에프태, 귀해서 비싸지면 금태라고도 불린다. 잡는 방법에 따라서도 이름이 달라지는데, 유자망으로 잡은 것은 그물태 또는 망태라 하고, 낚시로 잡은 것은 낚시태 또는 조태라고 한다. 잡힌 곳에 따라 원양에서 잡은 것은 원양태, 근해에서 잡힌 것은 지방태, 연안태라 하고, 그중 강원도에서 나는 것은 강태, 특히 고성군 간성 앞바다에서 잡히는 진태는 간태라고 부르며 품질을 더 높게 치기도 한다. 또 봄에 잡히는 것은 춘태, 오월에 잡히는 건 오태, 가을에 잡히는 것은 추태라 이른다. 사란을 하고 나서 뼈만 남은 것은 꺾태라 하고 아주 큰 명태는 왜태라 한다.”

 

 묘사는 개념을 해체한다. 밤은 어둡다. 여름은 덥다, 꽃은 아름답다, 개나리는 노랗다와 같은 문장은 고정관념이 만든 개념적 표현이다. 묘사의 개념을 구체화하거나 해체하는 데 기여한다. 예를 들면 “시장에는 배추, 시금치, 상추가 많다”고 쓰기 시작해야 문장에 조금이라도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대상과의 거리 두기

 ‘작은 짐승처럼 말없이 앉아서’ 구름 속을 거니는 꿈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과의 거리 두기라는 것이다.

 

 

 

11. 체험을 재구성하라

 시적 허구

 페르소나 :: 원래 뜻은 고대 희랍 무대에서 배역들이 썼던 가면을 지칭하나, 오늘날엔 배우가 연기 생활을 하면서 맡았던 여러 배역의 인격으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생활의 요소를 가지고 개발한 자아상(自我像)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르소나 [persona] (선샤인 지식노트, 2008.4.25, 인물과사상)

 

 오규원의 말대로 “시 속의 ‘나’는 현실 속의 ‘나’가 아니다. 시 속의 ‘나’는 허구 속의 존재이며, 어디까지나 창조적 공간인 작품 속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 ‘나’는 객관화된 ‘나’이며 화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어떤 국면 속의 형식화된 인간으로서의 ‘나’이다. 따라서 일상의 경험을 시로 표현할 때는 일상 속의 ‘나’가 아닌, 구체적 경험 속의 ‘나’를 그리는 시인의 형상적 시각이 필요하다. 시인은 현실 속에 ‘나’를 죽이고 구체적 경험 속의 또 다른 ‘나’를 살려 형상화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형기는 『시란 무엇인가』에서 “사실의 세계가 신의 창작물이듯 허구의 세계는 인간의 창작물”이라고 했다. 이말을 조금 바꾸면, 신은 ‘사실’을 만들고 인간은 ‘진실’을 만드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사실보다 진실에 복무하는 자라는 말이다.

 

 화자의 뒤에 숨은 시인

 정보경찰 :: 국가의 안전을 침해하는 개인이나 단체 등의 불법행위를 예방수사하는 경찰을 말한다.
즉, 자국의 국체에 대한 안전보장과 사회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헌정의 부정, 소요, 폭동, 국체의 부인·파괴·변혁 등의 일체의 불법적이고 불순한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경찰활동이다. 정보경찰은 국가의 안전과 사회공공의 질서유지를 그 목적으로 하는 점에서, 사회의 안녕과 국민의 생명·재산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경찰작용보다 차원이 높다. 따라서 정보경찰은 보다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깊은 배려와 충성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에 따른 사후적 결과책임을 져야 하는 중대한 사명의식을 가져야 하는 경찰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보경찰 [情報警察, intelligence police] (경찰학사전, 2012.11.20., 법문사)

 

 척왜척화(斥倭斥和) ::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국을 배척하고, 그들과의 화친도 배척함.

 

 

 

12. 관념적인 한자어를 척결하라

 일상어와 시어

 - 니, 오늘 외박하나?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아배 생각」부분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두 번째 행위는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이때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에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째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摘出)의 힘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는 중력의 힘이다.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 데,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옥타비오 파스

 

 옥타비오 파스 :: 멕시코의 시인이자 비평가. 외교관으로 세계 각지를 다니며 시작(詩作)에 열중하였고 파리에서 쉬르리얼리즘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 시집으로 《동사면(東斜面)》 등이 있으며 199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두산백과)

 

 머큐로크롬(mercurochrome) :: 빨간약. 일본식 발음으로 ‘아까징끼’

 

 진부한 말이 진부한 생각을 만든다

 언뜻 보면 2음절의 관념적 한자어(ex. 갈등, 오만, 희망 등)는 매우 심오한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언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어휘들은 구체적인 실감을 박제화하고 개념화함으로써 스스로 진부하게 되어버린 말들이다. 사전에는 단어로서 버젓이 실려 있고 일상생활에서도 가끔씩 사용되는 말이지만 시에서는 죽은 언어와 다름없다.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시에만 관념어가 시를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13. 형용사를 멀리 하고 동사를 가까이 하라

 한심한 언어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쓴 동시 한 편을 읽어보자. 어느 어린이 글짓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동시를 쓴 아이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런 유형의 동시를 보면 화가 난다. 한숨이 절로 쏟아진다. 이 동시를 쓴 아이 때문이 아니다. 이런 동시를 쓰게 하고, 심사를 해서 상을 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는 어른들이 함심해서다. 좀더 과격하게 말한다면 이 작품은 동시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커다란 황금물감 푹 찍어

 가을들판에 가만가만 뿌려놓았다

 탱글탱글 누우런 벼이삭

 살랑살랑 가을바람 불어오면

 빠알간 고추잠자리

 두둥실두둥실 흥겨운 춤사위

 참새친구 멀리 이사 가도

 외롭지 않은 허수아비

 허허허 허수아비의 정겨운 웃음소리에

 농부아저씨 어깨춤 덩실덩실

 우리는 이 동시를 읽으며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아니, 의문을 가져야 한다). 물감을 과연 커다랗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물감을 강하게 ‘푹’ 찍었는데 왜 조심스럽게 ‘가만가만’ 뿌리는가? 그렇게 물감을 뿌리는 주체는 누구인가? 호두나 감자도 아닌 벼이삭의 생김새를 ‘탱글탱글’로 표현하는 게 맞는가? 고추잠자리의 비행이 일정한 격식을 갖춘 춤사위라고 할 수 있는가? 허수아비와 참새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참새를 쫓기 위해서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서 있어야 할 허수아비가 왜 웃는가?(실성을 했나?) 농부아저씨는 추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어깨춤을 추시는가?(낮술이라도 한잔 드셨나?)

 제목은 「가을맞이」다. 왜 그냥 「가을」이라고 하지 않고 「가을맞이」라고 했을까? 이 동시는 가을의 일반적인 풍경을 그저 평이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가을을 맞이하는 그 어떤 적극적인 자세도,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색도 없다. ‘가을’이라고 하면 맨송맨송해서 다만 무엇인가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맞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면 왠지 시적인 표현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는 으레 꾸미고 몇 글자 덧붙이는 것이라는 잘못된 의식이 시 아닌 것을 시로 행세하게 만들고 있다.

 글을 아름답게 하려고 다듬고 꾸미고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일을 수사(修辭)라고 한다. 이 동사는 온전히 수사의 기술로 쓴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쓰인 시어 중에 명사는 모두 10개다. ‘황금물감ㆍ가을들판ㆍ고추잠자리ㆍ춤사위ㆍ참새친구ㆍ이사ㆍ허수아비ㆍ웃음소리ㆍ농부아저씨ㆍ어깨춤’이 그것이다. ‘이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교롭게도 두 개 이상의 단어가 결합한 복합어의 형태다. 이 명사들은 가을을 피상적으로 바라본 결과로서 그 스스로 빛나는 시적 영감을 던져주지 못하고 시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에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포함한 부사가 ‘푹ㆍ가만가만ㆍ탱글탱글ㆍ두둥실두둥실ㆍ멀리ㆍ허허허ㆍ덩실덩실’등 7개이고, 색깔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로 ‘커다란ㆍ누우런ㆍ빠알간ㆍ흥겨운ㆍ정겨운’ 같은 말들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부사와 형용사를 빼고 이 동시를 한 번 읽어보자.

 황금물감 찍어

 가을들판에 뿌려놓았다

 벼이삭

 가을바람 불어오면

 고추잠자리

 춤사위

 참새친구 이사 가도

 허수아비 

 허수아비의 웃음소리에

 온부아저씨 어깨춤

 이렇게만 해도 작자가 형용사를 통해 대상을 간섭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기회가 대폭 줄어든다. 엘리엇은 일찍이 시가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고 정서로부터의 도피’라고 강조하면서 시에서 감정의 직접적인 표출을 경계했다. 형용사는 시인의 감정을 직접 노출시키는 구실을 한다. 쉽게 시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는 형용사가 유리한 것이다.  

 

 동사의 역동성과 종결어미의 변화

 그러나 형용사의 과도한 사용은 시의 바탕이라 할 은유와 상징이 설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미지가 들어앉을 자리를 형용사가 차지하고 있으면 그 시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내용이 없고, 그 뜻은 쉽게 드러나지만 깊이가 없어 천박해진다. 사물의 핵심을 표현하는 데 게으른 시인일수록 형용사를 애용한다. 그가 제시한 형용사를 따라다니다보면 독자는 상상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문장에서 형용사는 뒤에 오는 말(명사)을 치장하는 역할을 한다. 쓸데없는 치장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특히 형용사 중에 색채를 표현하는 ‘빨갛다ㆍ파랗다ㆍ노랗다ㆍ하얗다’와 같은 감각형용사는 아예 잊어버려라. 조지훈이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노오란 민들레꽃 한송이도/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민들레꽃」앞부분)라고 했더라도, 서정주가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국화 옆에서」일부분)라고 했더라도 당신은 ‘노오란’이라는 말이 아예 한국어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라. 우리는 그동안 ‘노오란’을 시에 너무 많이 동원했고, 혹사시켰다. 제발 ‘노오란 개나리’ ‘빨간 장미’ ‘빠알간 고추잠자리’ ‘파란 바다’ ‘파아란 가을하늘’ ‘검은 밤’ ‘ 하얀 백지’ ‘하아얀 눈송이’라고 쓰지 마라. 그 색채 형용사들을 쉬게 하라. 색채 형용사들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동사의 역동성으로 채워 시를 살아 꿈틀거리게 하라. 기어가게 하라. 뛰어가게 하라. 날아가게 하라.

 형용사가 사물의 성질, 감각, 색깔, 시간, 수량 등 정지 상태를 표현하는데 반해서 동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어휘다. 동사가 움직이는 선이라면 형용사는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가능하면 형용사를 미워하고 동사를 사랑하라. “동사는 경험과 실질의 세계다. 동사는 감각의 세계다. 동사는 우리가 사는 얘기다. 자고, 먹고, 누고, 낳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고 하는 게 다 동사로 표현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동사가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 잘 자, 많이 먹어, 이리 와, 빨리 가, 울지 마, 웃어 봐, 때리지 마, 안아줘...”

 한국어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국어의 언어적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말은 조사의 종류가 많고 어미의 변화가 매우 다영한 언어다. 당신은 반드시 조사와 어미의 변화에 주목하라. 토씨, 즉 조사 하나가 시의 어조와 호흡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14. 제목은 시 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음식점 간판과 음식의 맛

 제목을 정할 때 몇 가지 유의할 점

 첫째, 본문의 주제나 내용과 일정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 둘째, 너무 거창하거나 추상적인 제목은 피할 것, 셋째, 본문의 내용을 모두 풀어 제시하는 제목은 피할 것 등이다. 

- 강연호 외, 「주제의 구현과 제목 붙이기」『시 창작이란 무엇인가』

 

 제목을 붙이는 방식

 김춘수는 시인이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따라 시인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를 쓸 대 제목을 붙이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미리 제목을 정해 두는 것, 둘째는 시를 완성한 뒤에 제목을 다는 것, 셋째는 처음부터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타일리스트답게 시의 의미와 내용을 중시하는 휴머니스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한다. “제목이 정해져야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내용에 결백한 나머지 시의 기능의 중요한 면들을 돌보지 않는 일”이 있다며 시의 형식에 따라 내용이냐 제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 김춘수, 『시의 이해와 작법』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낙타는 전생부터 지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닌다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듯

 육신의 정상에

 고통의 비계살을 지고 다닌다

 전생부터 세상을 알아차렸다는 듯

 안 봐도 안다는 듯

 긴 속눈썹을 달고 다니므로

 오아시스에 몸을 담가 물이 넘쳐흘러도

 낙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는다

 전생부터 지 수고를 알아차렸다는 듯

 고통 받지 않기를 포기했다는 듯

 가능한 한 가느다란 장딴지를 달고 다닌다

 짐이 쌓여 고개가 숙여질수록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

 짐이 더욱 쌓여 고개가 푹 숙여질수록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이는 세상

 오 그러다가 고꾸라진다

 과적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최후로 덧보태진, 그까짓, 비단 한 필 때문이라는 듯

 고꾸라져도 되는 걸 낙타는 

 이 악물고 무너져버린다

 죽어서도

 관 속에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들어간다 

– 김종식,「완전무장」전문

 이 시는 낙타라는 시적 대상을 통해 주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경우다. 낙타의 힘겨운 일생을 낙타의 숙명적인 외모와 오버랩시키면서 삶 속에 도사린 고통과 죽음을 그리고 있다. 내용을 읽기 전에 「완전무장」이라는 제목을 먼저 접한 독자는 이 제목이 결국 시인의 반어적 표현임을 알아차리고 무릎을 치게 된다.

 

 

 

15.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한 채의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계도면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수행할 인부와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확보해야 하고, 충분한 공사기간이 있어야 한다. 시가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행을 바꾸거나 연을 나눌 때에도 시인의 의도가 충분히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계획과 의도 없이 절대로 행을 당신 마음대로 바꾸지 마라. 시의 리듬을 고려해 행을 바꾸었다고 구차하게 변명 좀 하지 마라.

 예컨대 최근에 당신이 10편의 시를 썼다고 치자. 그 시행의 길이가 다 고만고만하고, 각각의 시의 길이가 모두 비슷비슷하다면 당신의 시작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라. 그때 당신의 flame은 기계적인 리듬이어서 아무도 당신의 리듬에 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리듬뿐만 아니라 시의 내용도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은 백번 옳다. 

 

 행갈이의 힘

 박노해 :: 본명은 기평.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섬유, 화학, 건설, 금속, 운수 노동자로 일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1년부터 1998년까지 복역하였다. 
1983년 『시와경제』에 「시다의 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노동의 새벽』(1983), 『머리띠를 묶으며』(1991), 『겨울이 꽃핀다』(1999), 『참된 시작』(1999) 등과 수필집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 『오늘은 다르게』(1999) 등을 간행한 바 있다. 『머리띠를 묶으며』에 이르기까지 초기 시 세계는 현실의 사회 제도와 이념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투쟁적이고 선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수필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후에는 생명과 포용과 화해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예술성과 정치성을 겸비한 대표적 노동자 시인으로 일컬어져왔으나,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후 그의 세계관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노해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김춘수는 『시의 이해와 작법』에서 시행 구분의 원리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제출한 적이 있다. 그는 일본 시인 기다조노 가즈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의 각 행은 ‘사상의 분량’ ‘의미의 분량’ ‘이미지의 분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것만 봐도 계산된 의도 없는 시행 바꾸기가 시를 얼마나 허약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시가 잘 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써야 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형식을 변화시킬 만한 에너지를 행 바꾸기에서부터 찾아라. 습관적으로 바꾸고 나눠왔던 행과 연에 변화를 도모하라.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 수를 바꿔보라. 시의 길이를 지금보다 길게 늘이거나 대폭 줄여보라. 모두들 긴바지를 입는 겨울에 시인은 반바지를 입고 뚜벅뚜벅 바깥으로 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산문시와 짧은 시

 오규원은 『현대시작법』에서 “시행이 산문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리듬이나 이미지보다 전체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산문시는 시의 고유 영역인 행과 연을 스스로 반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립해야 하는 양식이다. 행과 연이 주는 단절을 산문 형태로 극복하고자 할 때 시인은 자연히 말과 말 사이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의미나 정서를 한통속으로 묶는 일이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산문시가 의미나 정서를 한통속으로 묶는 일이 수월할 때도 있다. 형태상 산문시는 하나의 행을 이루고 있으므로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의미나 정서를 비벼내는 데 수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의(시니피에), 기표(시니피앙) :: 언어에 사용되는 기호 의식 사실(意識事賁 fait de conscience)과 청각영상(聽覺映像 image acoustique)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언어기호는 음성과 그 음성으로써 표시되는 의미로 성립되는데, 소쉬르는 일정한 개념(의식사실)과 연합(聯合)된 청각 인상(음성 형식)을 언어 기호의 시니피앙(signifiant), 이 시니피앙에 연합된 의식 사실(의미 내용)을 언어 기호의 시니피에(sianifie)라고 하였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은 언어 기호 뿐만 아니라 도로 표지판이나 신호등과 같은 모든기호의 양면(兩面)인 내용과 형식으로서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가령 국어의 '사람'이라는 기호는'人'이라는 시니피에와 /sa:ram/ 이라는 시니피앙이 연합된 것인데, 이 시니피에 '人'은 중국어의 /jən/, 일본어의 /hito/, 영어의 /men/, 불어의 /ɔm/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시니피앙과도 /sa:ram/ 못지 않게 잘 연합될 수 있는 것이며, '人', /sa:ram/ 사이에는 하등의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언어 기호의 자의성(恣意性 arbitrariness)이라 하며, 이러한 특징이 언어 기호의 시대적 · 언어적 · 방언적 차이 등을 허용하는 것이다. 
언어 기호는 자의성과 함께 관습성이라는 다른 한 면을 함께 가지는 것이며, 언어가 사회 제도로서 유지되는 것이며, 언어가 사회 제도로서 유지되는 것은 언어 기호의 관습성 때문이다. 언어 기호는 한 언어에 속하는 모든 언어 기호는 상호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다. 언어 기호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다른 기호와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며, 이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언어 기호가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 기호는 불연속성(不連續性 discreteness)을 가진다. 
현실 세계는 연속이나 언어 세계는 불연속이다. 가령 프리즘에 나타난 광선은 보라와 빨강을 양극으로 하여 그 사이는 경계가 없는 연속체를 이루고 있지만 언어는 이를 연속체로 묘사할 수 없으며, 보라 · 파랑 · 초록 · 노랑 · 주활 · 빨강 등 그 언어의 관습에 따라 몇 개로 분할하여 나타내어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언어 기호 [linguistic sign, 言語記號]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다른 사람의 심장을 뚫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도 않는

 시나 화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 『수바시따』(인도의 고대시가)

 

 일본의 전통 시가인 ‘하이쿠’는 5-7-5의 음수율을 가지고 있는 정형시다. 하이쿠는 17자의 짧은 형식 속에 인간 존재의 근원과 자연의 거대한 질서를 기막히게 압축해 놓아 아직도 일본인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양식이다. 류시화가 엮은 『한 줄도 너무 길다』에 실려 있는 다다토모의 절창이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숯은 고체(생나무)와 기체(연기) 사이에 머물러 있는 존재다.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와도 같다. 그 숯에게도 흰 눈을 온몸으로 받던 생나무의 시절이 있었다는 것, 언젠가는 다 타버리고 재로 사라져갈 운명이라는 것을 이 시는 한꺼번에 말한다. 일체의 상념을 벗어던지고 공(空)의 상태로 돌아가기 직전의 숯을 통해 시인은 삶을 돌아보고, 또 관조한다. 우리의 현대 시인들 중에 단시의 촌철살인의 묘법을 가장 많이 활용하 시인은 역시 고은이다. 그의 시집 『순간의 꽃』에 박혀 있는 시 한 편.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아무렇지도 않은 듯, 중얼거리듯 말하는 이 발견 속에 생의 비의가 숨어 있다. 이것은 원래 있던 것을 보지 못하는 눈에 대한 자책이면서 새로운 눈을 갖게 된 후에 터져 나오는 환호의 소리이다. (이 짧은 시에 설명을 덧붙이는 건 군더더기!)

 

 하이쿠 :: 5·7·5의 17음(音)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원래 일본에는 중세 무렵부터 조렝카[長連歌]라는 장시(長詩)가 있었는데, 15세기 말부터 이 조렝카는 정통(正統) 렝카[連歌]와 서민생활을 주제로 비속골계화(卑俗滑稽化)한 하이카이렝카[俳諧連歌]로 갈리었고, 에도시대에 이르러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같은 명인이 나와 하이카이렝카는 크게 유행하였다. 이 하이카이렝카의 형식이 제1구(句)는 홋쿠[發句]라 하여 5·7·5의 17음으로 이루어지고, 제2구는 7·7의 14음, 제3구는 다시 5·7·5의 17음 등, 장·단이 교대로 엮어져 많은 것은 100구, 짧은 것은 36구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이쿠 [俳句(배구)] (두산백과)

 

 와카 :: 이 말은 《만요슈[萬葉集]》에서 처음 쓰였는데 거기서는 화답(和答)하는 노래라는 뜻으로 썼으나 여기서 말하는 ‘와카’는 이와는 별도이다. ‘와카’는 한시에 대항하는 뜻이 강했으나 그 후 한시를 초월하여 대표적 문예로서 정립하게 되자 그와 같은 의식은 점차 가셔졌고 근세 하이쿠[俳句] 등과 더불어 시가(詩歌)의 한 장르의 명칭으로 발전하였다.
처음 ‘와카’는 단카[短歌] ·죠카[長歌] ·세도오카[旋頭歌] 등 여러 가체(歌體)를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단카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와카’는 주로 5 ·7 ·5 ·7 ·7의 5구절 31음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므로 ‘31 글자’라고도 부르며 적당히 종합된 내용과 리듬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서인지 일본인의 감각에 호소하기 쉬운 시형(詩形)으로 존속되어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카 [和歌(화가)] (두산백과)

 

 문장의 빛깔과 무늬

 시가 마련한 공간 속으로 독자를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놀이터를 마련해 놓고 마음껏 놀아 보라는 식이다.

 

 

 

16. 창조를 위해 모방하는 법부터 익혀라

 통변의 기술

 인간의 욕망 자체에는 불순한 전염병 같은 본질적 모방 경향이 내재해 있다고 한 사람은 프랑스의 문화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다. 그는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모방본능은 동질성의 본능과 통한다고 하였다. “자기가 지향하는 존재를 발견할 때마다 그 추종자는 타인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을 욕망함으로써 그 존재에 도달하려고 애 쓴다”는 것이다. 뛰어나거나 잘난 상대방과 유사해지려는 욕망은 본능적으로 언어 표현이나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루쉰 :: 《광인일기》,《아큐정전(阿Q正傳)》등을 쓴 중국 문학가 겸 사상가. 특히 대표작 《아큐정전(阿Q正傳)》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며 후에 그의 주장에 따른 형태로 문학계의 통일전선(統一戰線)이 형성되었다. 그의 문학과 사상에는 모든 허위를 거부하는 정신과 언어의 공전(空轉)이 없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루쉰 [魯迅(노신)] (두산백과)

 

 문심조룡 :: 10권 50편(篇).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문(詩文) 평서로서, 양(梁)나라의 유협(劉勰)이 제대(齊代) 말인 499∼501년에 저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前半) 25편에서는 문학의 근본원리를 논술하고, 각 문체(文體)에 관한 문체론을 폈다. 후반(後半) 25편에서는 문장 작법과 창작론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전체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미문(美文)으로 씌었으며, 문학이란 내용이 충실해야 하고 그로부터 자연히 꽃피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며, 당시 기교에만 치우친, 내용 없는 미문 위주의 경향을 비판하였다. 같은 시대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문선(文選)》과 함께 중국 문학론 연구에 중요한 원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심조룡 [文心雕龍] (두산백과)

 

 전고를 활용하는 것을 모방의 한 방식이라고 본다면, 송대의 황정견(黃庭堅)을 필두로 한 강서시파는 이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단 한글자도 출처가 없는 것이 없다(無一字無來處, 무일자무래처)”고 하면서 옛사람의 시를 많이 읽고, 학식을 바탕으로 시를 지어야 한다고 하였다. 황정견은 시를 쓰는 방법으로 두 가지 유명한 이론을 제시했다. 옛사람의 시원찮은 말을 빌려 써 시를 돋보이게 한다는 ‘점철성금법(點鐵成金法)’과 옛 시인의 뜻과 표현을 빌려 새로운 시를 낳는다는 ‘환골탈태법(換骨奪胎法)’이 그것이다.

 

 모방할 줄 모르는 바보

 옛글을 활용하는 ‘용사(用事)’에 대해 이병한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용사’라는 표현을 ‘모방’으로 바꾸어 읽어보자.

 첫째, 용사를 위한 용사를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작품의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되지 않거나 현학하는 자세로 용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구마다 내력이 있어야 한다면 이는 ‘전고를 늘어놓은’ 것이나 ‘죽은 시체를 쌓아놓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억지로 용사를 하여서는 안 된다. 용사에 있어서는 ‘자기화’가 중요하다. “누에가 뽕잎을 먹되 토해내는 것은 비단실이지 뽕잎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이 용사를 빌어 활용하되 자신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처럼 정태(情態)를 모두 드러내야 한다.

 셋째, 용사를 융화시켜 매끄럽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용한 전고와 상황이 전체 작품의 예술 형상과 완전히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이는 ‘물 속에 소금을 넣어 그 물을 마셔봐야 비로소 짠맛을 알게 되는 것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窮卽變 變卽通 通卽久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주역』

- 궁하면 변화하게 되고, 변화하면 통하게 되며, 통하면 오래갈 수 있다

 

 연암 박지원도 소위 ‘법고(法古)’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게 병이고, ‘창신(創新)’한다는 사람은 정상적인 법도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이라면서 ‘법고’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얼마든지 소담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패스티쉬라는 개념은 패러디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희극적인 불일치의 느낌은 수반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만큼 패스티쉬는 별스러울 정도로 포스트모던한 종류의 ‘무표정한 패러디’이다. 

- 조셉 칠더즈ㆍ게리 헨치, 『현대 문학ㆍ문학 비평 용어사전』

 

 혼성모방 :: 다른 작품으로부터 내용 또는 표현양식을 빌려와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기존 작품의 모방이라는 측면에서는 패러디와 비슷하나, 패러디가 풍자적ㆍ희극적 측면이 다분한 반면 패스티시는 단순 모방짜집기라는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패스티시 [pastiche]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김춘수는 모방을 일삼는 사람들은 아류라는 말로 평가절하한다. 아류란 스타일과 소재를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는 어떤 시인의 뒤만 따라다니며 남이 입다가 낡아서 벗어던진 헌옷만을 주워 헐값으로 팔아서 퍼뜨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박성을 통박하면서도 그는 습작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모방하게 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 발 물러선다. 그러나 ‘습작이란 남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작업’이므로 남의 아류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고 하면/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땅의 논리” 

- 정희성, 「아버님 말씀」부분

 

 하지만 당신은 모방을 배워라. 모방을 배우면서 모방을 괴로워하라. 모방을 괴로워할 줄 아는 창조자가 되라. 모방의 단물 쓴물까지 다 빨아들인 뒤에, 자신의 목소리를 가까스로 낼 수 있을 때, 그때 가서 모방의 괴로움을 벗어던지고 즐거운 창조자가 되라. 모든 앞선 문장과 모든 스승과 모든 선배는 당신이 밟고 가라고 저만큼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징검돌 삼아 그들을 밟고 뚜벅뚜벅 걸어가라. 시인은 모든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이 구성할 임무를 타고난 사람들이므로.

 

 

 

17.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

 서정과 서사의 결합

 서정과 서사의 결합, 즉 시에다 이야기를 담는 우리 시의 전통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에 대하여 김기진은, 이 작품이 “생생한 소설적 사건”과 “현실, 분위기, 감정의 파악이 객관적, 구체적”임을 근거로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현실을 형상화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창작방법론으로 이 용어를 제시한 것이다.

 

 시에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어앉히는 이 방법은 1970년대 김지하에 의해 ‘담시’라는 형식으로 발전했고, 신경림의 『농무』를 거쳐 1980년대에는 최두석 등이 ‘이야기 시’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서 정리한 바 있다.

 

 시에 숨어 있는 기승전결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 황인숙, 「삶」전문

 단 석 줄로 삶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이 시는 자꾸 읽어볼수록 아프다. 문장의 끝에 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 그리고 마침표를 유심히 보기 바란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두 번째 행의 말줄임표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의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체념, 혹은 그래도 살아가야 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따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 외상값의 의미도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빚,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빚, 이웃에 대한 빚... 그런 외상값 때문에 사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렇듯 아무리 짧은 시라도 한 편의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사건의 전개와 인물의 배치에 관심을 두는 서사지향의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관념이나 순간적인 이미지의 포착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시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장악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다. 감정을 구성한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은 감정의 순서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시도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하며 시에도 기승전결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18.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진정성이냐, 기술이냐

 ‘이마’라는 말도 그 무렵(고등학교 시절) 나를 사로잡은 말 중 하나다. 어느 날 이 말이 나를 강타했다. 이마는 “얼굴의 눈썹 위로부터 머리털이 난 아래까지의 부분”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 나를 설레게 했다. 이마는 때로 ‘밝다’라는 형용사의 변형된 명사형이었고, 햇빛이 비치는 아침의 연못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찰랑이는 머리카락이었다. 언어가 아니라 마치 무슨 환상의 기호 같았다. 나는 말에 사로잡혀 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작가 활석영이 한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은 “소설을 엉덩이로 쓴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작가가 소설에 투여하는 집중적인 시간과 인내의 중요성을 말한 것일 터이다. 어찌 소설뿐이랴. 시를 쓰려거든 당신은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쓰고, 엉덩이로도 쓴다고 생각하라. 가슴으로는 붉고 뜨거운 정신을 찾고, 손끝으로는 푸르고 차가운 언어를 매만질 것이며, 엉덩이를 묵직하게 방바닥에 붙이고 시에 몰두하라. 

 감성을 앞세워 쓸 것인지, 지성을 바탕으로 쓸 것인지도 고민하지 마라. 김춘수는 “일상 속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느끼느냐 하는 능력”을 감성이라 하고, “비교하고 대조하는 작용”을 지성이라 한다면 그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당신은 감성이 녹슬지 않게 신체의 감각기관을 항상 활짝 열어두고, 지성이 바닥나지 않게 책읽기를 밥 먹듯이 하라. 그리하여 시를 쓸 때는 감성과 지성이 비빔밥이 되도록 골고루 비벼라.

 시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도 끝까지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문장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형식을 배우라고 권한다. 그는 문체의 종류를 ‘신(神)ㆍ리(理)ㆍ기(氣)ㆍ미(美)ㆍ격(格)ㆍ율(律)’의 여덟 가지로 나누면서 앞쪽의 넷이 문장의 내용을 이루고 나머지 넷이 형식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문장을 배우는 자는 옛사람의 글에서 처음에는 형식을 만나고 중간에는 내용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내용에 따라 형식을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형식이라는 틀을 버릴 수 있을 때까지 형식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몸의 시학

 기성자라는 사람이 임금을 위해서 싸움닭을 기르는데, 열흘이 되자 임금은 물었다.

 “이제 싸울 만한가?”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 한창 되지 못하게 사나워, 제 기운을 믿고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 임금은 다시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도 다른 닭소리를 듣고 그림자만 보아도 곧 달려들려고 합니다.”

 열흘이 지나 임금은 또 물었다.

 “아직 안 되었습니다. 다른 닭을 보면 눈을 흘기고 기운을 뽐내고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 임금은 또 물었다.

 “이제는 거의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소리를 쳐도 아무렇지도 않아서, 마치 나무로 만든 닭과 같습니다. 그 덕이 온전하기 때문에 다른 닭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달아나버리고 맙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미혹에 빠지지 말고 필요 없는 기운을 버려야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실현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정신을 한곳으로 모으면 외부의 어떠한 간섭에도 흔들리지 않는 창조적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또 『장자』에는 한 사람의 목수가 자신의 뛰어난 솜씨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말하는 고사가 나온다. 목수 경(慶)이라는 사람이 나무를 깎아 거(鐻, 종이나 북을 거는 나무)를 만드는데 그 솜씨가 마치 귀신의 솜씨 같았다. 무슨 기술로 그렇게 신묘하게 만드는가 하고 노후(魯候)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목수라 무슨 술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 거를 만들려고 할 때에는, 아직 한 번도 기운을 감손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재를 마치면, 누구의 상이나 벼슬을 바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그 다음 닷새 동안 재를 마치면, 남의 비방이나 칭찬이나 잘되고 못되는 것을 걱정하는 생각이 없어지며, 그 다음 이레 동안의 재를 마치면, 문득 내게 사지(四肢)나 몸뚱이가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에는 나라나 관청을 위한다는 생각조차 없어져서, 안으로는 기술이 온전하고 밖으로는 물(物)의 어지러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비로소 산으로 들어가 나무의 천성을 살펴보아서 모양이 갖추어진 나무를 본 뒤에는, 장차 되어질 것을 눈앞에 그리어보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손을 대어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나무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만두는 것이니, 이것은 곧 하늘로써 하늘에 합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물건이 신의 솜씨가 아닌가 의심되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하늘로써 하늘에 합한다’는 말은 자신의 천성을 나무라는 자연의 천성과 합치시킨다는 뜻이다. 비유와 과장의 힘을 빌린 고사이기는 하지만 예술적 창조에 이르기 위해 시인이 지녀야 할 자세를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는 이야기다. 유리 문학사에서 시 쓰는 자가 취해야 할 태도를 가장 통쾌하게 정리한 시인은 김수영이다. 저 유명한 ‘온몸의 시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이렇게 자신을 연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생활을 경허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아직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은 시가 무엇인지 규정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김수영 식 비판이다. 그는 시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데서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고 믿었다. 시인이란 끊임없이 이탈하는 자임을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그 어느 문법에도 갇히지 않는 변화와 갱신의 의지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어 말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준다면 -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작(詩作)은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 김수영은 시인의 창작행위가 어떠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역설한다.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이 창조의 주체임을 깨닫고 철저히 인식의 전복을 꾀하는 일이 ‘온몸의 이행’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육체를 모두 대지와 신께 바치는 오체투지의 자세와 다를 바 없다. 시를 창작하는 일은 온몸으로 하는 반성의 과정이며, 현재진행형의 사랑이며 고투이기에 김수영의 말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예술과 생활이 통일과 조화를 얻도록 노력하기 위하여, 시인들은 항상 현실과 이상의 중간에 자신을 던져 놓아, 마치 물 따라 나아가는 배가 그에 거슬러 거꾸로 부는 바람의 시련에 저항하듯, 자신의 생명을 불안정과 흔들림 속에서 나아가게 한다.

 아이칭의 시론 중 한 구절이다. 시인에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끝없이 긴장할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는 오늘의 한국시단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19.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비유의 덧칠

 비유는 일상적 언어 규범에서 일탈해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언어 용법이다. 은유ㆍ직유ㆍ제유ㆍ환유의 뒷글자인 유(喩)는 “말하다”는 뜻의 ‘구(口)’와 “옮기다”는 뜻을 가진 ‘유(俞)’의 결합이다. 즉 비유란 말의 원래 뜻을 옮겨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나리꽃은 노랗다’는 일상 언어를 ‘개나리꽃은 병아리 부리다’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바꿔보자. 이 ‘병아리 부리’ 속에는 노란 색깔 이외에도 개나리꽃의 모양, 꽃잎의 연약함, 봄의 이미지 등이 첨가된다. ‘노랗다’는 일상 언어의 평이함이 전면 확장되어 의미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비유법(譬喩法)

(1)직유법(直喩法) : 'A는 B와 같다.'식으로, A사물을 나타내기 위해 B사물의 비슷한 성질을 직접 끌어다 견주는 것.(A = 원관념, B = 보조 관념)

형식 : 마치 ···과 같다, 꼭 ···같다, ···과 비슷하다, ···처럼, ···인 양, ···같이, ···듯.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원관념=꽃, 보조관념=누님)

* 꽃처럼 귀여운 우리 아가야(원관념=우리 아가, 보조관념=꽃)

* 어머니의 손은 고목껍질같다(원관념=어머니의 손, 보조관념=고목껍질)

(2)은유법(隱喩法) : 'A는 바로 B다.' 식으로 표현 속에 비유를 숨기는 기법. 모양이나 성질의 연관성을 찾아 연상 작용에 의하여 새로운 관념을 지니게 되며,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형식 : ···은/는 ···다

* 내 마음은 호수요(원=내 마음, 보조=호수)

* 봄은 천지의 소녀(원=봄, 보조=소녀), 소녀는 인생의 봄(원=소녀, 보조=봄)

*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다(원=오월, 보조=계절의 여왕)

* 침묵은 금이다(원=침묵, 보조=금)

(3)풍유법(諷諭法) : 은연중에 다른 사물을 가리키면서 다만 비기는 낱말만 내세워서, 숨은 뜻을 읽는 이가 알아내도록 독립된 문장이나 이야기 형태를 취하는 기법.

형식 : 우화, 교훈담, 속담, 격언 등

* 금강산도 식후경

* 도마에 오른 고기

* 빈 수레가 요란하다

* 등잔 밑이 어둡다

(4)대유법(代喩法) : 사물의 한 모퉁이나 어느 한 특징을 보임으로써 전체를 대신하는 기법. 사물의 일부를 보임으로써 전체를 나타내거나, 소속물로 주체를 나타내는 기법.

   (가)제유법(提喩法) : 일부로써 전체를 대표하게 하는 경우

   *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빵 - 먹을 것의 일부)

   * 약주를 잘 드신다 (약주 - 술의 일부)

   (나)환유법(換喩法) : 어떤 사물을 그와 관련 있는 다른 사물을 빌어 나타내거나, 기호로써 나타내는 것을 대신하거나, 소유물로써 주인을 알게 하는 등의 기법.

   * 금테가 짚신을 깔본다. ('금테(안경)'는 도시인의 속성으로 '신사'를, '짚신'은 시골 사람의 속성으로 '시골뜨기'를 가리킨다. )

   * 샤일록만 사는 마을이다 (샤일록 = 구두쇠)

   * 내가 바지저고리로 보이냐(바지저고리 = 얼간이)

(5)활유법(活喩法) :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무생물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기법

* 으르렁거리는 파도

* 목마른 대지

* 잠자는 바다

* 꼬리를 감추며 멀어져 가는 기차

(6)의인법(擬人法) : 사물의 움직임이나 모양, 추상적 관념 등을 사람의 동작처럼 나타내는 기법. 즉,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 활유법의 한 갈래. 반드시 활유법과 구분할 필요는 없다.

*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 웃음짓는 샘물

* 위엄 있는 바위

(7)의성법(擬聲法) : 표현하려는 사물의 소리를 음성(의성어)으로 나타내고, 또 그것을 연상하도록 표현하는 기법. 의성어에 의한 표현법.(청각적 심상)

* 화살이 휙휙 스쳐간다

* 으르렁, 콸콸 물 흐르는 소리

* 물이 설설 끓는다

(8)의태법(擬態法) : 사물이나 행동의 모양, 상태 등을 흉내내어(의태어), 그 느낌이나 특징을 드러내는 표현 기법. (시각적 심상)

*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 힐끔힐끔 눈치를 본다

* 야금야금 혼자 먹는다

의성법과 의태법의 구분은 '소리','모습'에 적용시킴.

(9)중의법(重義法) : 하나의 말이 둘 이상의 뜻을 나타내게 하는 기법.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워라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하리 <황진이>

(벽계수=사람 이름과 시냇물, 명월=밝은 달과 황진이의 기명)

 

 여러 가지 비유 중에 은유는 차별성 속에서 동일성을 찾는 수사법 중의 하나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시는 대립적인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누가 뭐래도 시는 은유의 덩어리다. 은유적 표현을 한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양식이 은유에 기대어 태어났고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때로 은유의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도 우리의 흥미를 끌어당긴다. 구모룡의 『제유의 시학』에 따르면 근대적 개념인 세계의 자아화나 동일성으로만 시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정이라는 것이 근대의 산물인 자아중심주의의 발현이라는 생각에 회의를 품는다. 은유는 다른 대상을 자기화하는 수사학이어서 대상과 대상을 강제적으로 연결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은유적 욕망이 근대에 와서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이처럼 타자에게 폭력적인 은유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론을 바탕으로 하는 제유 시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시를 쓰기 위해 책을 뒤져 억지로 은유를 배우지 마라. 은유를 잘못 배우면 말을 요리조리 비틀고 무슨 문장이든 꾸미려 하고 교묘하게 꼬는 일이 시의 존부인 줄 알게 된다. 말을 비틀고 교묘한 표현을 일삼는 이들에 대한 비판에 일찍이 허균도 가세했다. 그는 문장과 도리가 둘로 쪼개져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꾸미는 일을 개탄하면서 그것이야말로 ‘문장의 재앙’이라고 했다.

- 고전연구회 사암 엮음,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소를 들어올린 꽃

 내 늙은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대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 서정주, 「내 늙은 아내」전문

 

 “언어에는 무슨 본질, 깊이,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언어는 오직 교통을 위해 잠시 빌려 쓰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에 언어를 버림으로써 자유로운 정신에 도달하게 된다. 

- 이승훈, 『현대시의 종말과 미학』

 

 

 

20. 없는 것을 발명하지 말고 있는 것을 발견하라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바꿔보면, 가장 중요한 진실은 사막의 우물처럼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봄날에 눈부시게 피어난 꽃잎을 보며 경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꽃잎의 눈부심을 위해 혹한의 겨울, 꽃잎의 언저리로 눈보라가 지나갔음을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의 눈은 꽃피우지 못한 나뭇가지의 꽃도 피운다. 동아시아의 시학도 이 마음의 눈을 강조한다. 사물의 껍질보다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다. 이른바 ‘관물론(觀物論)’이 그것이다.

 관물론은 사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거기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지나치면서도 간과하고 마는 일상 사물에 담기 의미를 읽어 낯설게 만들기, 나아가 그 낯설음으로 인해 그 사물과 다시금 새롭게 만나기,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格物)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는 의미를 늘 깨어 만날 수 있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새로워야 한다. 

- 정민, 『한시미학산책』

 

 “좋은 그림은 그 물건과 꼭 닮게만 하는 데 있지 않다.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고는 훌륭한 그림이랄 수 없다. 잣나무를 그리려거든 잣나무 형상에 얽매이지 마라. 그것은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마음속에 푸르른 잣나무가 서 있지 않고는 천 그루 백 그루의 잣나무를 그려 놓더라도 잎 다 져서 헐벗은 나목과 다를 바가 없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워라. 마음의 눈으로 보아라.” 

-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

 

 시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발명가’가 아니라 ‘발견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라. 이미 이 세상에 와 있으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들이 있다. 보물인데도 보물로 보지 못하고, 숨겨진 의미가 있는데도 의미를 찾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머리를 굴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시를 기다리지 마라. 발명하려고 하지 말고 발견하도록 애써라. 살갗을 보지 말고 뼛속을 보라.

 

 포구는 평소에도 시끄럽습니다. 딱딱한 길을 버리고 출렁거리는 길로 넘어가는 곳이라 그런가봅니다. 고체의 길이나 액체의 길 중 한길을 택해야 하는 곳이라 그런가 봅니다. 포구는 섬의 문입니다. 섬의 끝이며 바다의 시작이고 바다의 끝이고 섬의 시작입니다. 뭍에서 포구로 가는 길은 이 길 저 길이 부챗살처럼 모여들고 바다에서 포구로 돌아오는 뱃길은 깔때기처럼 모여집니다. 포구는 뱃사람들이 회사인 바다로 출근하는 길이며 퇴근하는 정문입니다. 

-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 김명수, 「발자국」전문

 

 

 

21. 퇴고를 끊임없이 즐겨라

 문을 밀까, 두드릴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퇴고(推敲)’라는 말은 당대의 시인 가도(賈島)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가까운 데 이웃이 적어 한가로운데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풀숲의 길은 황량한 들판으로 들어가네.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새들은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들고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이 시의 마지막 행 두 번째 글자인 ‘고(敲)’는 “두드리다”는 뜻이다. 시인은 애초레 이 글자가 들어간 자리에 “민다”는 뜻의 ‘퇴(推)’를 썼다고 한다. 스님이 문을 민다고 해야 할지, 두드린다고 해야 할지 고심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 날 노새를 타고 가면서도 ‘퇴(推)’로 할지, ‘고(敲)’로 할지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길을 지나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고관 앞에 끌려간 가도는 글자 한 자를 결정하지 못해 실수를 범했노라고 아뢰었다. 그 고관은 당시의 최고 문장가 한유(韓愈)였다.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퇴(推)’보다는 ‘고(敲)’가 낫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부터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 이후 글을 수정할 때 퇴고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 한유는 왜 ‘퇴(推)’보다 ‘고(敲)’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취향에 의한 단어 선택의 문제로 보면 곤란하다. 새들도 잠든 한가하고 고요한 밤에 스님이 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도 사건도 등장인물도 필요 없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거처이므로 스님은 발 닦고 이불 펴고 잠들면 그만이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해도 주인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으므로 거리낌 없이 들어가면 될 뿐이다. 긴장이 없는 정황은 울림이 없는 시를 만들고 만다.

 그러나 스님이 낯선 집의 대문을 두드리게 되면 그 대문까지 걸어온 탁발의 고된 길이 보이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개를 푸덕이는 소리가 들린다. 또 집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와 스님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 시가 역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참담한 기쁨을 느낄 때까지

 “아마 조선문단 전체로도 이대로 3년이면 3년을 나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년 동안 퇴고를 해 놓는다면 그냥 나간 3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단이 될 것이다.” 

- 이태준, 『무서록』

 

 처음에 떠오른 ‘시상’ 혹은 ‘영감’이라는 것은 식물로 치면 씨앗에 불과하다. 그 씨앗을 땅에 심고 물을 주면서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일, 햇볕이 잘들게 하고 거름을 주는 일, 가지가 쑥쑥 자라게 하고 푸른 잎사귀를 무성하게 매달게 하는 일, 그 다음에 열매를 맺게 하는 일... 그 모두를 퇴고하고 생각하라.

 

 소월도 3년 동안 고쳤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1922년 7월 『개벽』에 처음 발표되었다. 이 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진달래꽃」하고 상당히 다르다. 1925년 12월에 출간한 시집 『진달래꽃』을 준비하면서 소월은 3년 동안 시를 퇴고한 것이다.

 

 시를 고치는 일은 옷감에 바느질을 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고치되, 그 바느질 자국이 도드라지지 않게 하라. 꿰맨 자국이 보이지 않는 천의무봉의 시는 퇴고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22.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화장실에서의 메모

 배춧잎을 갉아먹고 사는 애벌레를 잡지 않는다면 그 애벌레들은 틀림없이 나비가 될 것이었다. 나는 한 평 남짓한 땅에 배추를 키우지만, 애벌레는 배춧잎의 넓이만큼만 몸을 움직이며 먹이를 구하지만, 나중에 나비가 되면 애벌레는 배추밭 둘레 허공을 다 차지하고 날아다닐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배추를 한 평 키우는 게 아니라 나비를 한 평 키우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갈 수 있는 허공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나중에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키운 나비가 날아갈 그 허공은 모두 나의 것이기도 했다. 이런 욕심이나 호기는 얼마든지 부려도 좋지 않겠는가. 나비를 키움으로써 나는 경계도 말뚝도 박아 놓지 않은 그 허공을 차지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내 소유의 허공!

 

 쩨쩨하고 치사한 시 쓰기

 줄탁동기(啐啄同機) ::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줄탁’은 어느 한쪽의 힘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야만 병아리가 온전히 하나의 생명체로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만약에 껍질 안의 병아리가 힘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껍질 바깥 어미 닭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껍질을 경계로 두 존재의 힘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를 불가에서는 참다운 사제지간의 관계를 말할 때 곧잘 인용하곤 한다.

 

 

 

23.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인식, 새로운 감동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시는 그 낡은 기준에 갇혀버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다. 시가 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양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감히 정리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여기에다 시인의 시작 태도가 공자의 말씀대로 ‘사무사(思無邪)’ 바로 그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무사 ::  ≪詩經(시경)≫에 나오는 詩(시)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 奸邪(간사)스럽거나 아주 못된 마음이 없는 것이라는 말. 출전 論語(논어)
[네이버 지식백과] 사무사 [思無邪]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2.15, 이담북스)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서로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

 1854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인디언 부족에게 백인 대표단을 보내 인디언 보호구역을 제공할 테니 땅을 팔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에 인디언 추장 시애틀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는 없다는 매우 시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시애틀 추장의 연설 –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이다. 

- 김종철, 『녹색평론 선집1』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내 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불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대를 들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대들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출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 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독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 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 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이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석어 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 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날들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 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에 슬퍼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간다. 자기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전화선)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이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이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시의 네 가지 높은 경지

 중국 송대의 시인 강기(姜夔)는 그의 시론집 『백석도인시설』에서 시에는 네 종류의 높은 경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치가 높은 경지요, 둘째는 뜻이 높은 경지요, 셋째는 상상력이 높은 경지요, 넷째는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가 그것이다. ‘시적인 것’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꽤 유익한 사색을 제공해주는 시론이다.

 그는 먼저 “막혀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통하는 것을 이치가 높은 경지”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치란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섭리를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경융합(情景融合)을 중요한 시의 가치로 여긴 동아시아의 시학과 동일성의 미학을 강조한 서양의 시학이 모두 이런 경지를 향한 시적 모색이라 할 수 있겠다.

 천둥번개 지나간 곡우날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쳐 살아 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막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 이안, 「숨길1」전문

 우박은 꽃잎을 찢는 공격적 주체가 아니고, 꽃잎은 우박에 찢어지는 방어적 객체도 아니다. 엄연한 자연의 질서 앞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박은 꽃잎을 깨우고 꽃잎은 우박을 맞이할 뿐이다. 낯선 우박과 꽃잎 사이의 작지만 소중한 소통의 숨길이 우주 전체의 봄을 불러온다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시다. 이때 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으로도 분명‘설레설레’ 봄의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두 번째로는 “표현해낸 것이 표면적인 의미를 초월하게 되는 것을 뜻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몽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 

– 문태준, 「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전문 

 표면적으로 써레질이 끝난 뒤 흙물이 가라앉는 모습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흙물이 그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이라고 말하는 것도 범상하지 않지만, 그것을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으로 확장하는 상상력은 놀랍다. 그리하여 ‘우레와 침묵 사이에’ 있는 존재의 고독과 무상함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황새는 단순한 조류가 아니라 드높은 정신주의의 한 표상으로 읽힌다. (‘써레’와 ‘우레’라는 유사한 음성기호가 동일한 의미로 나란히 서 있는 언어유희도 볼 만하다.)

 세 번째로 “깊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연못이 맑아 밑바닥이 다 보이듯이 훤하고 분명하게 써내는 것을 상상력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가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 나희덕, 「누에」전문

 두 딸과 곱추인 어미 사이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실을 이토록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부조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이다. 그 실은 급기야 모녀를 바라보는 화자에게까지 연결되고,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사람이 시인이다.

 다음 시에서도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된 실을 본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 김종삼, 「장편(掌篇)2」전문

 일제 때 10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밥 한 상에 10전이라니 그리 많지는 않은 액수였을 것이다. 분명 구걸로 얻게 되었을 10전짜리 두 개를 부모의 생일 밥값으로 당당하게, 그러나 가련하게 내미는 어린 소녀의 손목이 보일 듯하다. 그 눈망울도 보일 듯하다. 이렇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시를 읽다가 보면 사랑이니 효도니 인정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낡고 뻔뻔한 소리인지 깨닫게 된다. “특이하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으면서 문채를 벗어 떨치고, 그것이 오묘하다는 것만을 느낄 뿐 그 오묘하게 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을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24.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시인

 시인이 애초부터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자이다. 시인이 불씨를 살려 강철을 구부리고 녹여 만들어낸 연장을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시에서 상상력은 비유를 동반할 때가 많다. 바슐라르가 『촛불의 미학』에서 “불꽃은 우리에게 상상할 것을 강요한다”고 말할 때 당신도 무작정 상상을 강요당하고 싶은 적이 있는가? 그가 “불꽃은 젖어 있는 불이다”라거나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라고 했을 때 당신은 그 매혹적인 은유 앞에서 금세 시인이 된 듯 착각에 바진 적이 있는가? 그리고 또 그가 “불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아편을 먹는다. 그리고 불꽃은 아무 말 없이 죽는다. 그것은 잠들면서 죽는다”라고 강렬하게 외칠 때, 시의 불꽃에 타서 죽고 싶은 적이 있는가?

 

 시적 상상력과 창의성

 현대창의성연구소 소장 임선하 박사에 의하면 창의적 사고의 기능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 된다.

 첫째, 민감성이다. 주변의 환경에 대해 예민한 관심을 보이는 능력을 이른다. 자명한 듯한 현상에서도 문제를 찾아보고, 나와 친숙하지 않은 이상한 것을 친밀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그렇다.

 둘째, 유창성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이다. 초기의 아이디어가 최선의 아이디어인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보다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들로부터 많은 것을 연상하기, 문제 상황에서 가능한 해결방안을 있는 대로 많이 찾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융통성이다. 고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시각 자체를 변환시켜 다양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상투적이고 고정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전혀 관계없는 사물들의 유사점을 찾아본다든지, 사물의 구체적인 속성에 주목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넷째, 독창성이다. 기존의 것에서 탈피하여 참신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이다.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나만의 것을 찾고, 기존의 생각이나 가치를 부정하는 사고를 말한다.

 다섯째, 정교성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기존의 아이디어를 보다 치밀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이다. 헝클어지고 조잡한 생각을 다듬고 그것의 실제적인 가치를 고려해서 발전시키는 활동이다. 

 이와 함께 이 책에서는 창의적 사고의 성향을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자발성, 독자성, 집착성, 호기심이 그것이다. 이런 용어는 ‘상상력ㆍ독창성ㆍ확산적 사고ㆍ창조성ㆍ발명ㆍ직관ㆍ모험적 사고ㆍ창출ㆍ탐구ㆍ창안’과 더불어 시를 읽고 쓰며 상상력을 공부하는 우리의 잠든 의식을 적절하게 자극한다.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 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 고영민,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전문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체 게바라

 

 

 

25. 경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시인으로서의 고뇌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 왕부지(王夫之)

 

 몇 가지의 시작법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이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을 탄생하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긴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가는 것!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보라고 한다.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26. 시를 완성했거든 시로부터 떠나라

 시를 간섭하지 않는 시인

 고등학교 시절, 여학교 시화전에 가기 전에 문예반 선배들은 우리를 세워놓고 이렇게 명령했다. 

 “반드시 여학생 하나를 울리고 와야 한다.”

 선배들의 사주를 받은 우리는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럴싸하게 악동의 표정을 연기했다. 시에 대해 질문이 있다는 핑계로 한 여학생을 불러놓고,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그 여학생의 시를 집요하게 칼질했다. 여학생은 도마 위에 올려진 한 마리 가여운 생선이었다. 악동들의 파상적인 질문 공세에 파들파들 떨다가, 주춤거리며 대답하다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학생이 운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울음을 끄집어냈던 것이다. 시화전시장을 상갓집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 우리는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차라리 그 여학생,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더라면 악동들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친절한 여학생은 자신의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설을 하면서 우리들의 마수에 걸려들었던 것. 이 시를 쓴 계기가 무엇이라거나, 무엇을 집중적으로 표현했다거나, 시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그 여학생은 순진하게 진술했을 것이다. 분명히 자신의 시에 대한 겸손하고 친절한 답변을 통해 그 시의 감동을 높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시의 감동이 아니라 시의 몰락을 불러오는 변명이고 화근임을 여학생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시 속에 다 있어요.”

 그냥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 쌀쌀하게 돌아섰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뻘쭘해진 우리 악동들이 오히려 두 손 들고 줄행랑쳤을 것을!

 

 말라르메는 시인이 언어를 소유해서 부리는 게 아니라 시인 자체가 언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언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자일 뿐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에서 저자의 권위를 빼앗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된느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말라르메 :: 19세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그의 ‘화요회’에서 20세기 초 활약한 지드, 발레리 등이 배출되었다. 장시 《목신의 오후》(1876),《던져진 주사위》등이 있다. 프랑스 근대시의 최고봉으로 인정 받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테판 말라르메 (두산백과)

 

 한편의 시는 한 사람의 시인이 쓴 것이지만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인은 우주가 불러주는 감정을 대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침묵도 말이다

 득어망전(得魚忘筌) ::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는다. ① 사소한 일에 얽매여 큰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② 목적을 달성하면 그동안 쓰이던 사물이나 사람은 무용지물이 됨. ③ 학문이 성취되면 책이 무용하게 됨을 이름. 轉(전)하여 근본을 확립하면 지엽적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음의 뜻.
[네이버 지식백과] 득어망전 [得魚忘筌]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2.15, 이담북스)

 

 토득이망제(得兎而忘蹄) :: 토끼를 잡고 나서는 올무를 잊으라. 토끼를 잡고 나서는 올무를 잊는다.

 

 막스 피카르트는 “형상은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침묵의 세계』에서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형상, 즉 이미지는 ‘말하는 침묵’이다.

 

 글이 잘되고 못되고는 내게 달려 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귀가 울리고 코를 고는 것과 같다. 한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제 귀가 갑자기 울리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기뻐하며, 가만히 이웃집 아이더러 말하기를, 

 “너 이 소리 좀 들어봐라. 내 귀에서 앵앵 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

 하였다. 이웃집 아이가 귀를 기울여 맞대어 보았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자, 안타깝게 소리치며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찍이 어떤 촌사람과 동숙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우람하여 마치 토하는 것도 같고, 휘파람 부는 것도 같고, 한탄하는 것도 같고, 숨을 크게 내쉬는 것도 같고, 후후 불을 부는 것도 같고, 솥의 물이 끓는 것도 같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것도 같았으며, 들이쉴 땐 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내뿜을 때는 돼지처럼 씩씩대었다. 그러다가 남이 일깨워주자 발끈 성을 내며 “난 그런 일이 없소”하였다.

 아,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가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있는데 더욱 심할 따름이다.

 연암 박지원의 한탄이다. 자신이 써놓은 글에 스스로 도취해 남들더러 제발 알아달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은 이명이 있는 아이요, 글의 결점을 남들이 진지하게 알려줘도 버럭 화를 내기만 하는 사람은 코를 고는 시골 사람인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보더라도 분명히 당신의 시임을 알게 하는 게 최선임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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