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s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728x90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칼럼니스트인 노엘라의 그림과 음악 이야기『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더 많은 사람들과 일상 속 예술을 공유하고 소통하길 바라온 저자가 음악과 그림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차분히 이야기한다. 유명한 화가들과 음악가들이 그림과 음악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했던 내면의 이야기를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일상의 감정들로 풀어내고 있다. 단순히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설명하는 대신, 예술가들이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겪고 이겨내야 했던 역경과 삶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을 자신의 에피소드와 일상의 감정들을 덧붙여 들려준다.
저자
노엘라
출판
나무수
출판일
2010.03.22

 

0. 프롤로그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음악에는 레가토, 스피카토, 마르텔레, 데타쉐 등의 연주법이 있다. 바이올린의 경우 활로 표현하는 기법인데 학생들은 좀처럼 이것을 소화해내지 못했다. 아무리 보여주고 들려줘도 어려워하는 그들에게 나는 이해하기 쉬운 비유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이렇게 말했다. “think of it(bow) as a paint brush(활이 붓이라고 생각해보렴).” 학생들의 눈망울이 호기심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나는 그들에게 악기를 내려놓고 종이와 연필을 꺼내게 했다. 그러고는 종이는 캔버스, 연필은 붓이라 생각하고 레가토, 스피카토 등 앞서 말한 여주기법을 그리게 했다. 학생들은 이것에 재미가 붙었는지 시끌벅적 떠들며 종이에 하나하나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림 그리기를 끝내고 나서 나는 학생들에게 연주를 다시 해보라고 했다. 놀랍게도 학생들의 기법은 한층 늘어 있었다. 소리를 시각으로 표현하니 이해가 더 잘됐나 보다. 그중 몇몇 학생은 수업시간에 그린 그림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었다고 했다. 

 그림과 음악은 이렇듯 통하는 것이 많다. 종종 함께 보고 들으면 감정이 배가되는 것을 발견한다.

 

 ⓐ 레가토···음정이 다른 일련의 음을 끊임없이 부드럽게 한 번의 활로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 데타셰···레가토와는 달리 각 음마다 활을 바꾸어 내는 주법을 말한다. 활의 중앙에서 약간 위쪽을 사용하는 작고 빠른 데타셰가 가장 흔히 사용된다. 
 ⓒ 마르털레···활을 현에서 떼지 않고, 확실하고 두드러진 멈춤에 의해, 앞의 운궁과 그 다음의 운궁이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활대에 센 압력을 걸고, 활을 위 내지는 아래로 움직임과 동시에 그 압력을 줄이면 마르털레를 얻을 수 있다. 
 ⓓ 스타카토···마르털레는 비교적 느린 템포를 전제조건으로 하지만, 템포가 빠른 경우는 일련의 음표를 한 활로 연주해야만 한다. 그것을 스타카토라고 한다. 스타카토에는 올림활과 내림활의 스타카토가 있다. 
 ⓔ튐활과 뜀활···튐활은 활을 현에 부딪치는 주법이고, 뜀활은 활 중앙부 중심(中心)으로 활을 뛰게 하면서 켜는 주법이다. 모두 활은 현에서 떨어진다. 템포가 느린 경우는 튐활이 되고, 빠른 경우는 뜀활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이올린 주법 [violin playing] (파퓰러음악용어사전, 클래식음악용어사전, 2002.1.28, 삼호뮤직)

 

 레가토 :: 음악에서 계속되는 음과 음 사이를 끊지 말고 원활하게 연주하라는 표. 레가토로 연주되어야 할 음표에 이음줄을 걸치거나 legato라고 나타내거나, 혹은 양쪽을 같이 써서 명시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레가토 [legato] (두산백과)

 

 스피카토 :: 활의 중앙부를 현 위에서 도약시켜 연주하는 주법이다. 짧은 등음가(等音價) 음표가 빠르게 연속되는 악구(이를테면 16분음표의 연속)에 사용되며 기보(記譜)는 스타카토와 마찬가지로 음표 위나 아래에 점을 찍어 표시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피카토 [spiccato] (두산백과)

 

 

 

1. 모네 & 드뷔시

 가까이에서 봤을 때는 그저 형체를 알 수 없는 물감 덩어리라고만 생각했다.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들끼리 서로 몸을 맞대고 있다. 물감들은 때론 홀로, 때론 섞여서 색을 빛내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형태를 만들어낼지도 모른 채 물감들은 캔버스 위에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마냥 행복해 보였다. 그러다 한 발짝 물러서서 모네의 그림을 보니 그제야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모네는 지식이 아닌 느끼는 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그렸다. 장시 많은 화가들은 하늘은 파란색, 나무는 녹색, 흙은 갈색처럼 물체 본래의 색을 아는 지식대로 그리는 데 충실했다. 하지만 모네가 본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빛에 반짝이는 나무는 때로는 녹색이 아닌 하얀색으로 보이기도 했고, 하늘은 파란색이 아닌 노란색으로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모네가 ‘빛의 화가’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이유는 바로 빛에 의해 사물의 색이 변하는 당연한 이치를 화폭에 그대로 담았기 때문이다. 빛을 사랑한 모네는 빛을 따라서 야외로 나갔다. 그러고는 그의 눈에 보이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녘에서부터 석양이 질 때까지 변해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빠르게 캔버스에 그려나갔다. 모네는 밝은 빛에 의해 사물이 몽롱하게 보이면 몽롱하게, 비가 내리거나 안개에 덮여 희미하게 보이면 희미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그렸다. 하지만 태양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시적인 순간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 모네에겐 빠른 스피드가 필요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네는 빠른 붓 놀림으로 단숨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을 수가 없었다. 그는 팔레트가 아니라 캔버스에서 물감을 섞어 사용했다. 캔버스 위에서 물감 고유의 색은 더욱 선명해졌고, 생동감까지 더해져서 그림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그는 34세가 되는 해인 1874년, 파리에서 열리는 한 전시회에 <해돋이 인상>이라는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지만 그 당시 전문가들은 이 작품을 보고 형태를 구분할 수 없는 무질서한 그림, 정신병자의 그림이라고 크게 비난했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비롯된 말인 인상주의라는 말은 모네를 비롯해 새로운 시도를 했던 화가들을 통틀어 비아냥거리기 위해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

 

 모네는 같은 대상을 여러 번 반복해서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바로 빛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순간순간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린다 하여 연작이라고 불리는 모네의 작품 중 <루앙 대성당>은 스물일곱 번이나 그려졌다고 알려져 있다. 모네는 이 그림을 위해 오전, 오후, 해 질 녘까지 햇빛의 양의 변화를 끊임없이 관찰하여 매순간을 포착하였다고 한다. 같은 모습의 루앙 대성당은 그의 그림에서는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없으며, 모두 다른 인상을 보여주며 각기 다른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모네는 평생 사랑했던 아내 카미유가 죽는 순간까지도 아내의 안색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드뷔시는 모네와 동시대를 산 인상파 작곡가다. 드뷔시는 피사로,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시인 말라르메의 집에 모여 예술에 대해 자주 토론하고 의견을 나눴다. 그의 음악을 인상파라 부르는 것은 바로 그의 음악이 이들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데서 유래된 것. 

 

 

 

2. 실레 & 베르크

 ‘애증‘하면 떠오르는 화가가 있다. 바로 표현주의 화가 실레다. 그가 그린 누드는 모두가 뒤틀리고 비틀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그린 육체에서는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이 풍겨 나온다. 실레의 그림은 분명 성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성이 아니다. 깊은 두려움이 깔려 있는 애증의 성이다. 성병에 걸려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두었던 실레에게 성이란 두려우면서도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실레는 또한 어린 소녀의 누드를 주로 그렸는데, 여기서 그는 그가 성장기에 느꼈던 성에 대한 호기심, 혼란, 통념에 대한 반항, 잠재의식 속의 세계 등을 표현하고 있다. 1912년, 그는 어린 소녀들을 유인해 외설적 누드를 그린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판사는 그가 아끼던 그림을 불에 태워버린다. 

 

 성은, 특히 어린 시절의 성은 가보지 못한 곳, 금지된 곳을 모험하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다. 실레는 그의 그림 속에서 적나라하게 하지만 왜곡된 모습으로 성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본능적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는 성에 대한 욕구와 성병에 걸려 죽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운 기억. 이 두 가지는 끊임없이 그의 내면에서 공존하고 대립하며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실레에게 성이란 욕망으로 가득 찬 애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그린 작품에는 베르크의 오페라 《룰루》가 있다. 자살, 살해, 동성애, 매춘, 탈옥, 사랑 등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뱀으로 소개되는 룰루라는 여인을 둘러싼 남자들, 그리고 레즈비언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내용이다. 음산함과 에로티시즘이 공존하는 이 오페라는 룰루를 사랑한 대가로 파멸에 이르는 남자들과 남자들을 파멸로 이끈 대가로 매춘부로 전락, 끝내는 살해되고 마는 룰루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베르크가 한나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깊은 열애 끝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헬레나와 결혼한 상태였다. 하지만 한나의 등장으로 그의 헬레나에 대한 맹세는 끝이 난다. 그리고 아내에게 평생 애인의 존재를 숨긴 채 위험한 사랑을 키워 나간다. 베르크의 <서정 모음곡>이란 곡은 이들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대변하고 있다. 자신과 그녀의 이름의 이니셜에 해당하는 음들을 모아 작품의 모티브로 사용한 것이다. 일종의 사랑의 암호였던 셈이다. 이렇듯 오로지 음악을 통해서만 이들의 관계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베르크는 감춰야만 했던 자신의 이중적 사랑에 평생 괴로워 했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한나. 하지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버릴 수 없었던 아내. 스스로 ‘이중인격자’라고 말할 만큼 떳떳하지 못했던 사랑의 슬픔, 그리고 아내와 세상을 속여야만 했던 고통. 어쩌면 오페라 《룰루》에서 베르크는 한나에 대한 죽을 만큼 힘겨운 사랑과 그녀를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욕망 또 이중인격으로 살아야만 하는 자괴감 등을 여러 남자의 모습을 빌려 나타낸 것이 아니었을까?

 

 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실레에게도 사랑하는 두 여자가 있었다. 한 명은 자신의 모델이자 스승인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이고, 또 한 명은 중산층의 안정적이고 이성적인 여인 에디트였다.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발리와 연인관계에 있을 때 실레는 에디트를 만나 결혼을 약속한다. 그리고 실레는 발리에게 자신이 에디트와 결혼한 후에도 연인관계를 지속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발리가 아내와 애인을 둘 다 곁에 두고 싶은 실레의 마음을 받아들일리 없다. 발리는 이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실레의 곁을 떠난다.

 

 

 

3. 들라크루아 &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은 베를리오즈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헤리어트 스미드슨에 대한 그의 광적인 러브스토리를 담고 있다. 베를리오즈는 1827년, 파리에서 공연을 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오필리어 역과 줄리엣 역을 맡은 스미드슨을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이후 끊임없이 구애를 하지만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집착은 광기에 가까웠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이 작품은 그녀에 대한 열망을 그리고 있다.

 

 고정악상 (idee fixe) :: 표제음악에서 어떤 고정된 관념을 나타내는 선율. 전곡을 일관해서 중심이 되는 동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기보다는 길고 주제는 못 되는 것으로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L.H.베를리오즈의 대표작 《환상교향곡》(1830)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곡은 5개의 악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주인공이 사랑하는 연인을 상징하는 고정악상이 각 악장마다 변형되어 나타나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교묘하게 표현함으로써 전곡의 극적 진행을 통일시킨다. 이 곡은 이러한 새로운 착상으로 표제음악 분야를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정악상 [固定樂想] (두산백과)

 

 베를리오즈와 동시대를 살았던 19세기 로맨티시즘을 대표하는 화가 들라크루아의 작품 <사르다나팔루루스의 죽음>은 바이런의 희곡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사르다나팔루스는 적들에게 성을 함락당하게 되자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죽이라 명하고 자신도 분신자살을 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이다.

 

 표제음악 :: 제목과 줄거리에서 곡의 내용을 알 수 있고, 문학적, 회화적, 극적 내용을 지니는 음악.

 

 

 

4. 모로 & 바그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별은 과거의 별이다. 저 멀리 반짝이며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는 북극성의 밝은 빛은 그곳에서부터 여기까지 800년을 날아왔다. 빛의 속도로 800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거리. 과연 북극성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까? 우리가 매일 만나는 태양은 8분19초 전, 달은 1초 전의 모습이다. ‘우리가 거기에 있다’라고 믿고 있는 별은 지금이 아닌 과거의 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눈으로 보는 것을 믿는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지금 당신의 삶은 지난날 당신이 한 생각들이 현실에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다.”

- 론다 번, 『시크릿』 

 

 “현재의 나는 내 생각의 소산이다.”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 계속해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태초에 이르게 되고 태초 인간의 탄생은 신화, 경전, 전설 또는 성경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유일 것이다.

 라이트 모티브 (leitmotiv) ::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또는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특정한 악구를 만들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

 

 바그너의 대표작 《트리스틴과 이졸데》는 중세 유럽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오페라다. 바그너가 이 곡을 작곡한 배경에는 마틸데라는 한 여인이 있었다. 마틸데는 바그너의 스폰서였던 베젠동크의 아내였다. 그는 베젠동크 부부와 자주 교류하면서 마틸데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멈출 수 없는 사랑을 시작한 바그너와 마틸데.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그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슬퍼하며 죽음으로서 사랑을 완성한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기에 이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 원래의 트리스탄 이야기는 프랑스어로 쓰였기 때문에 여주인공 이졸데는 이죄(Iseut) 또는 이졸드(Isolde)라고 불러야 옳다. 켈트인(人)의 옛 전설을 소재로 하여 12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이야기로 엮어졌는데, 그 사랑과 죽음의 강렬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거의 전(全)유럽에 보급되어 서구 연애문학의 전형이 되었다. 로누아의 왕자 트리스탄은 태어나기 이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콘월의 왕인 백부 마르크 밑에서 지용(智勇)을 겸비한 젊은 기사로 성장한 그는 아일랜드의 거인 몰오르트를 쓰러뜨리고 국난을 구했다. 백부의 아내가 될 미녀를 찾아 아일랜드에 가서 용을 퇴치하고 왕녀 이죄를 데리고 개선하는 도중, 해상에서 시녀의 실수로 마르크와 이죄가 마셔야 할 ‘사랑의 음료’를 마심으로써 트리스탄과 이죄가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사랑과 죽음의 음료로, 이를 마신 자는 하루를 못 만나면 병이 나고 사흘을 못 만나면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죄는 마르크왕의 왕비가 되었으나 연인인 트리스탄과 항상 만나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일이 발견되어, 두 사람은 처형을 피하여 깊은 숲 속으로 도망쳤으나 3년 뒤에 왕과의 화해가 성립되어 이죄는 궁정으로 돌아오고 트리스탄은 추방된다. 트리스탄은 이죄를 사모하여 브르타뉴에서 이죄와 같은 이름의 아내를 얻었으나, 연인을 잊을 수 없어 병상에 눕게 되며, 연인을 데리고 올 사자(使者)를 보내 놓고 그녀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마침내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직후에 이죄는 도착하지만 그녀도 슬퍼한 나머지 죽고 만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두산백과) 

 

 오르페우스는 태양과 음악의 신 아폴론과 현악과 서사시의 신 칼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부모의 재능을 이어받아 뛰어난 음악가였던 오르페우스는 나무의 요정 에우리디케와 결혼한다. 그런데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던 중 아내 에우리디케가 그만 뱀에 물려 죽고 만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저승으로 내려가 그녀를 구해오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에겐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그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러고는 그의 아름다운 선율로 저승의 왕 하데스를 감동시키는 데 성공하고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지상에 닿을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희망에 찬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구해 그녀의 손을 잡고 저승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 볼 수 없었던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무사한 것을 목소리만으로 확인했다. 이제 조금만 가면 지상에 도착할 수 있다...... 드디어 지상에 먼저 발을 디딘 오르페우스는 곧바로 에우리디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아뿔싸! 에우리디케는 아직 지상에 발을 디디기 전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바로 눈앞에서 다시 사랑하는 아내를 저승으로 떠나보내고만 오르페우스. 다시금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다. 아내를 잃은 잘생긴 오르페우스를 다른 여자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트로이카 처녀들은 앞 다퉈 그에게 구혼하지만 그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다. 이에 분개한 그녀들은 오르페우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잔인하게 죽이고 만다. 처참한 고통 속에 죽었을 오르페우스. 하지만 이제 그는 죽어서라도 아내에게 갈 수 있게 되었다.

 

 세멜레는 주피터(제우스)가 사랑했던 여인으로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임신 중에 있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에 화가난 주피터의 아내 헤라는 둘 사이를 갈라놓기로 맘을 먹고 세멜레의 유모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찾아간다. 헤라의 꼬임에 넘어간 세멜레는 주피터를 의심하게 되고 주피터에게 자신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주피터는 그 소원이 무엇이든 다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세멜레는 다음에 만날 때는 천상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달라며 자신의 소원을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켜야 했던 주피터는 빛나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고, 세멜레는 주피터의 불에 타 죽게 된다.

 

 

 

5. 부그로 & 브람스

 비블리스 :: 아폴론과 아카칼리스의 아들인 밀레토스는 크레타섬에서 소아시아로 건너가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국가를 세우고, 강의 신의 딸 키아니에와 결혼하여 쌍둥이 남매인 카우노스와 비블리스를 낳았다. 비블리스는 오빠 카우노스를 이성(異性)으로 사랑하여 애태우다가 마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전하였다. 놀란 카우노스는 비블리스가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을 알고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카리아라는 곳에 가서 새 도시를 건설하고 살았다. 비블리스는 그래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카우노스를 찾아 여러 지역을 헤매고 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렐레게스인들이 사는 땅에 이르러 탈진하여 쓰러졌다. 이에 그곳의 요정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마르지 않는 샘이 되게 하고 그 이름을 비블리스샘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블리스 [Byblis] (두산백과)

 

 부그로는 생전에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며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모네, 마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반대하며 고전주의를 고집했고 그는 그들로부터 비인간적이며 기계적이라는 이유로 끊임없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인상주의 및 상징주의 화가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그가 죽은 후 그의 그림은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동안 인정받지 못하며 역사의 그림자 속에 묻혀 사라졌다. 하지만 1970년대 우연한 계기로 그의 작품이 다시 발견되었고 한 치의 허점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테크닉과 사진보다도 더욱 사실적인 인물 묘사는 다시금 그를 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화가로 올려놓았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음악계에서는 브람스가 고전주의 형식을 고집했는데 그는 음악 역사상 베토벤에 이어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고 있다. 당시 유럽에는 바그너리즘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바그너가 예술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부그로가 개혁파 화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것처럼 브람스 역시 바그너, 리스트, 베를리오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독일학파’ 음악가들로부터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진부한 음악이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곤 했다. 브람스는 자신이 작곡한 수많은 곡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불태워 버릴 만큼 완벽을 추구한 완벽주의자였다고 한다. 

 

 부그로와 브람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와 같은 철학가와 상징파 시인인 말레르메, 랭보, 낭만주의 문학가인 바이런, 디킨스, 괴테를 비롯하여 미술계에는 세잔느, 마네, 모레, 르누아르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 그리고 음악계에서는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스트와 같은 낭만파 작곡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이들이 살았던 19세기는 이성과 감성, 자융와 억압 등이 대립하며 혼란을 거듭하던 시대였다. 또한 이러한 혼란의 형태는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고전주의에서 벗어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됐다.

 

 “숙련된 기술이 없는 영감은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것이다.”

- 브람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슈만과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함과 동시에 슈만의 아내였던 클라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작곡됐다고 한다. 평생 자신의 은인이었던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사랑했던 브람스. 슈만 부부와 함께 생활했던 브람스는 클라라를 향한 그의 사랑을 감춰야만 했다. 이 곡은 부그로의 작품처럼 절제된 틀 안에서 인간 내면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며 죽음을 넘어선 신비감을 경험하게 한다.

 

 

 

6. 클림트 & 시마노프스키

 여성의 누드를 즐겨 그린 화가 클림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붓으로 그림 속 여자를 애무한 듯한 에로틱함이 한껏 뿜어져 나옴을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에게 모델은 단순히 그리기 위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모든 모델들과 육체적 관계를 즐겼다. 모델들에게 그의 화실은 성적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의 작품은 에로틱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수많은 여자들과 정사를 즐긴 클림트는 ‘빈의 카사노바’라는 그의 별명답게 14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다나에는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오스는 어느 날 자신의 외손자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두려움에 싸인 그는 다나에와 남자들이 접촉을 못하도록 그녀를 탑에 가둔다. 다나에가 아이를 임신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다나에를 본 제우스는 그녀에게 반하게 된다. 그러나 헤라의 질투가 걱정된 그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 아닌 황금비로 변신하여 다나에에게 다가간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몰래 들어가 사랑을 나눈다. 이렇게 해서 다나에는 임신을 하게 되고 페르세우스를 낳아 신탁은 현실이 된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성욕임을 우회적으로 나타낸 스토리가 아닌가 싶다.

 

 니체는 주관적인 견해 없이 사회가 정해놓은 도덕을 관습적으로 따르는 사회 풍토를 비난했다. 그는 또한 우리 사회에는 아폴론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적절히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인 아폴론은 도덕과 질서, 즉 종교적인 이념을 상징하고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혼란과 탐욕, 쾌락과 즐거움을 상징한다. 그는 이와 동시에 어느 정도 깊이 괴로워하느냐 하는 것이 인간의 위치를 결정한다며 고뇌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니체는 인간의 평등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으며 같은 맥락에서 여성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성향을 보였다.

 

 시마노프스키는 클림트와 동시대를 살았고 클림트와 마찬가지로 비잔틴과 그리스 문화 그리고 동양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표현력에서도 클림트와 공통점을 지니는 작곡가다. 시마노프스키의 곡은 클림트의 그림처럼 관능적이고 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타란텔라 :: 이탈리아 나폴리의 민속무곡과 그 무용. 어원은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타란토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과 독거미(이탈리아 남부에 서식) 타란튜라에 물리면 이 춤을 추게 된다는 데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란텔라 [tarantella] (두산백과)

 

 

 

7. 터너 & 슈만

  터너가 그린 풍경화는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깊이 자극하고 나의 눈과 마음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흡입력이 있다. 터너는 단순히 자연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려 했다. 자연을 바라보고 느낀, 또는 그 풍경 속에서 직접 경험한 감정들을 그림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터너는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눈보라가 치던 어느 날, 두 눈으로 직접 눈보라를 관찰하기 위해 배를 타고 성난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목숨을 건 시도였다. 그는 폭풍우에 날아가지 않도록 배의 기둥에 자신의 몸을 꽁꽁 묶었다. 그러고는 거세게 불어오는 폭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자연을 관찰했다. 터너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눈보라>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낭만주의 작곡가 슈만의 클라라를 향한 사랑은 심한 역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슈만은 자신의 스승인 비크의 달이었던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꿈꿨다. 그러나 스승인 비크의 반대에 부딪힌다. 손가락을 다쳐 피아니스트로서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었던 데다 정신분열적 성향마저 가지고 있었던 슈만을 사위로 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정소송까지 가게 된 이들의 사랑을 향한 열정은 결국 슈만과 클라라의 승리로 끝났고, 그들은 힘겹게 결혼을 이루어냈다.

 

 레안드로스와 헤로 :: 그리스 신화에서 헬레스폰투스 해를 사이에 두고 비밀리에 사랑을 나눈 연인으로, 레안드로스가 폭풍에 의해 등불이 꺼져 방향을 잃고 바다에 빠져 죽자 헤로가 연인을 뒤따라 죽었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터너는 죽기 전 “태양은 신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8. 칼로 & 뒤 프레

  내가 바이올린을 선택했다고 말하고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난 무언가를 선택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는 나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비브라토 :: 기악, 성악에서 음을 가늘게 떨어서 내는 기법

 

 뒤 프레는 근육이 천천히 마비되어 죽게 되는 다중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려 너무도 일찍 화려했던 연주생활을 중단해야 했다. 15년간 투병을 하다 4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그녀의 삶. 그녀는 사랑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뒤프레는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듯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남편은 뒤 프레에게 무리한 연주 스케줄을 요구하고 그녀가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완벽한 연주를 하기를 원했다. 뒤 프레는 남편의 이런한 숨막히는 기대와 요구에 지쳐 급기야는 우울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무렵 그녀는 한동안 그녀의 언니 힐러리의 동의 아래 힐러리의 남편 즉, 그녀의 형부와 연인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연주생활로 극도로 외롭고 우울했던 뒤 프레에게는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명성도, 돈도, 명예도 아닌 평범한 남편이 필요했던 것이다. 뒤 프레의 절실함을 안 힐러리는 이렇게 남편을 빌려주는(?) 극단적인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힐러리의 이러한 행동은 뒤 프레에게 잠시나마 안정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힐러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 프레는 1973년 마지막 연주 후 14년 동안 서서히 근육이 마비되는 고통스러운 병과 싸우다 급기야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1987년,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아플 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건 명의가 내린 처방전도 아닌, 어떤 위대한 사람의 조언도 아닌,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또 다른 이를 만났을 때인 것 같다. 동질감.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나의 외로움은 위안을 받는다.

 

 프라다 칼로는 뒤 프레와 마찬가지로 평생 고통 속에서 인생을 보낸 화가다. 18세가 되던 해 그녀는 극심한 교통사고를 당한다. 척추, 쇄골, 갈비뼈, 골반이 부러지고 오른쪽 다리는 열한 군데가 골절되었으며 오른쪽 발은 짓이겨졌다. 쇠파이프는 그녀의 복부와 자궁을 뚫고 나갔다. 이로 인해 그녀는 서른다섯 번이라는 참기 힘든 수술을 거친다. 이 대형 사고는 그녀를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학교에도 갈 수 없었던 칼로를 위해 그녀의 아버지는 천정에 거울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에 누워 거울 속 자신을 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작품이 모두 자화상일 만큼 자신의 모습을 수없이 그린 그녀는 “나는 혼자 있을 때가 많기에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는 나이기에 자화상을 그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의 자화상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변한다. 피 흘리는 전신, 온몸에 박힌 못과 화살 등 참혹스러운 표현을 서슴지 않았던 칼로는 상처받은 아픈 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자신의 그림을 초현실주의라고 평가한 것에 대해 그녀는 “나는 절대 꿈이나 악몽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해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칼로는 뒤 프레와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고통만큼이나 힘겨운 사랑을 했다. 그녀는 멕시코의 유명 화가 리베라와 열렬한 사랑 끝에 결혼한다. 하지만 바람기가 많았던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칼로는 평생 리베라의 외도로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았다. 칼로 역시 남자뿐만 아니라, 동성들과의 외도로 리베라의 질투심을 사곤 했는데 안정되지 못했던 이들의 결혼생활은 리베라와 칼로의 여동생과의 애정행각이 밝혀지며 극에 달한다. 또한 아이를 간절히 원했던 그녀의 반복된 유산은 그녀를 더욱더 심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불안한 결혼생활로 그토록 힘겨워하면서도 그에게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그녀의 사랑은 그림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칼로는 1953년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끝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거치고 두어 번의 자살시도 끝에 심한 폐렴으로 47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사인은 약물과용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쓴 마지막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내가 떠나는 이 길이 기쁨이었으면.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기를.......”

 

 

 

9. 뭉크 & 쇤베르크

 쇤베르크는 숫자 13공포증에 시달렸다. 그는 9월 13일생으로 13일에 태어났는데 자신은 언젠가는 13일에 죽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심지어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스펠링이 Moses and Aaron으로 13글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Aaron의 A를 빼, 글자 수를 12개로 맞출 정도로 그는 13에 대한 공포가 심했다. 그는 76세가 되는 해 (7+6=13)이자 동시에 13일의 금요일이 있는 1951년 7월13일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11시 45분, 쇤베르크는 끝내 13공포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쇤베르크는 작곡가이기 이전에 화가였다. 그가 가진 13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그가 그린 자화상 중 하나인 <붉은 응시>는 잔뜩 공포에 질린 느낌을 준다.

 

 “질병과 정신병 그리고 죽음은 나의 요람에서부터 나를 평생 따라다니는 천사이다.”, “나의 썩은 몸뚱이에서 꽃이 피어나고 나는 그 안에 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세계이다.”라고 말한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평생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뭉크는 그의 정신병을 ‘예술의 영감’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고 이러한 느낌을 나의 작품에서 표현하려 했다. 아픔과 불안함이 없었다면 나는 방향키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라고 말해 그의 예술의 근원이 ‘불안한 정신’에 있음을 나타낸다.

 

 조성 :: 음악에서 으뜸음에 의하여 질서와 통일을 가지게 되는 여러 음의 체계적 현상.
[네이버 지식백과] 조성 [tonality, 調性] (두산백과)

 

 무조성 :: 조성(토낼리티)을 부정하는 음악 형태. 보다 자유로운 발전을 목표로 하여 안정된 조성 음악의 틀을 깬 결과, 프리 재즈 등과 같은 무조(無調) 수법이 출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조성 [atonality, 無調性] (파퓰러음악용어사전, 클래식음악용어사전, 2002.1.28., 삼호뮤직)

 

 

 

10. 프리드리히 & 슈베르트

 ‘고독’하면 생각나는 작곡가가 있다. 바로 가난과 고독 속에 짧은 생을 마감한 ‘가곡의 왕’, 슈베르트다. 아이러니하게도 슈베르트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성악가 미하엘 포글, 화가 폰 슈빈트, 그리고 시인 쇼버 등이 그들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매일 밤 만나 친분을 쌓고, 슈베르트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힘썼다. 모임의 이름을 ‘슈베르트의 밤’이라고 부를 정도로 슈베르트를 사랑했던 친구들이었다. 이처럼 친구가 많은 슈베르트였지만 인간은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증명하듯 그의 음악에선 언제나 고독함이 묻어난다. 특히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에게 죽음에 이르는 길은 더더욱 외로운 것이었을 테다.

 

 슈베르트는 25세쯤 친구 쇼버와 어울리다 그만 매독에 걸리게 되고 이로써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두게 된다. 자신의 병을 알고 몹시 괴로워했던 슈베르트는 자신이 20세 즈음 만들었던 가곡인 <죽음과 소녀>를 현악 4중주 14번 2악장의 모티브로 사용하여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을 만들어낸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인생을 젊은 나이에 마쳐야 한다는 안타까움과 두려움 그리고 고독함이 묻어나는 작품으로 말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겨울과 방랑자의 모티브를 연결시킨 그의 최고의 걸작품이다. 가난으로 사랑하는 여인마저 보내야 했던 슈베르트의 심정과 죽음이라는 춥고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이 작품은 슈베르트가 죽기 바로 직전에 쓴 곡이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우울하기 그지없는 이 작품은 사랑과 희망을 잃고 생명마저 잃어가는 나그네의 심경을 노래한다.

 

 슈베르트의 음악적 주제였던 죽음, 방랑자 그리고 겨울은 독일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뒷모습의 화가’ 프리드리히에게도 모티브가 되었다. 슈베르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 프리드리히는 7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후 형제 3명마저 잃게 된다. 특히 형제 중 한 명은 프리드리히와 함께 얼음판에서 놀던 중 얼음판이 깨지면서 익사를 하게 되고, 프리드리히는 이를 목격하는 아픈 경험을 한다. 이렇듯 어릴 적에 겪은 가족의 죽음이 그를 우울증과 은둔적 생활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행복이란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상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 슈베르트

 

 

 

11. 알마 타데마 & 생상스

 

 헬리오가발루스 :: 고대 로마의 황제(재위 218∼222). 태양신의 대신전을 건립하고 그 음란한 축제를 로마로 옮겨 궁정생활이 문란해지고 음모가 무성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엘라가발루스 [Elagabalus] (두산백과)

 

 장미 같은 아름다움으로 삼손을 유혹하고 결국 파멸로 이끈 델릴라는 손꼽히는 팜므파탈 중 하나이다. 델릴라의 표적이었던 삼손, 그는 델릴라의 유혹에 이끌려 자신의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의 비밀을 알려주고 만다.

 

 생상스와 알마 타데마는 여러 공통점을 지녔다. 그중 하나는 자신보다 15세 이상 차이 나는 어린 소녀와의 결혼이다. 알마 타데마는 35세에 자신의 제자인 19세 소녀와 재혼했고 생상스는 40세에 19세의 아내와 결혼했다. 하지만 생상스는 동성애자였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 자신의 제자인 포레와 각별한 관계를 오랜 기간 유지했다는 것이 이 의혹에 한몫하고 있다. 둘 다 유아기에 부친을 잃은 점, 자녀를 일찍 잃은 점 등은 또 다른 공통점이다. 또한 둘 다 영화제작에도 큰 기여를 했다. 생상스는 최초로 영화에 곡을 붙인 작곡가로 영화 <기즈공의 암살>의 음악을 맡았다. 한편 고대신화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던 알마 타데마의 그림은 초기 할리우드 영화제작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하바네라 :: 쿠바의 무곡. 정확히는 아바네라로 발음한다. 보통 템포에 의한 4분의 2박자의 곡으로 2종의 리듬형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 에스파냐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하며 특히 19세기 중엽 에스파냐의 작곡가 세바스티안 이라디에르가 쿠바 체류 중에 작곡한 《엘 아레글리토》와 《라팔로마》에 의해 일약 유명해졌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과 라벨의 관현악곡 《스페인광시곡》 등에도 이 형식을 도입한 걸작들이 있다. 하바네라는 현재는 그다지 연주되지 않는 편이나 아르헨티나탱고 등의 무곡의 모체를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바네라 [habanera] (두산백과)

 

 

 

12. 미켈란젤로 & 데 프레

 중세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신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 존재감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당시 유럽은 십자군 전쟁의 패배를 잇따라 겪으며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고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독교 이전의 고대 로마나 그리스의 인간 중심의 문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예술에서도 고스란히 표현됐다.

 이 같은 인본주의와 더불어 르네상스는 창조의 시대였다. 새로운 발상, 시도들이 일어나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분석하고 실현했다. 인쇄술, 나침반 등을 포함한 과학기술이 발달하였고 화약이 발명되었으며 지도제작 기술의 발달로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했다. 예술가들은 더 이상 엄격한 규율과 과거의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키워나가며 인간 중심의 예술을 만들어나갔다.

 

 “조각이란 돌을 깎아내 형상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미리 숨겨진 형상을 조각을 통해 해방시키는 일이다.”

-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의 모든 작품은 인간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는 모두 340여 개의 인물이 나타난다. 모두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미켈란젤로 이전 시대의 그림들은 인물 중심보다는 신을 중심으로 한 성스럽고 경건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게다가 중세기대의 그림들은 사람의 인격이라든지 감정을 나타낸 표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오로지 신앙심을 표현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당시 성서에 나오는 장면에서 인간들이 실제 느꼈을법한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성경의 고귀함이나 꾸며진 성스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림 속 인물들은 다양한 표정을 통해 많은 감정들을 담고 있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명력을 담은 표정들 말이다.

 같은 예배당 안에 그려져 있는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의 말기 작품으로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참혹함과 무시무시함을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 벽화는 미켈란젤로가 생각하는 신은 신약에 나오는 ‘사랑의 신’이 아닌 구약에 나오는 ‘심판의 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유럽은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교와 구교로 나뉘면서 매우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대였다.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종교적 갈등은 온 사회에 혼란을 가져왔다.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혼란과 격동의 시대에 <최후의 심판>벽화를 그렸다. 그림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은 신의 구원의 손길을 찾아 모여든다.

 

 <최후의 심판>에서 눈길을 끄는 건 인간의 가죽을 들고 있는 바르톨로메오다.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칼에 의해 살가죽이 벗겨지는 혹형을 당했던 순교자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바르톨로메오는 미켈란젤로의 가죽을 들고 있다. 그는 왜 자기 자신을 가죽이 벗겨진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아바타>의 제이크가 마지막 장면에서 아바타의 몸으로 새 생명을 얻기 위해 기존의 몸을 버린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그림 안에서 자신의 가죽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혹시 불완전한 육체라는 인간의 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꿨던 것은 아닐까?

 

 미켈란젤로와 동시대를 살았던 조스캥 데 프레는 당시 미켈란젤로처럼 생전에 최고의 음악가로 인정받으며 후세에는 ‘음악계의 미켈란젤로’ 또는 ‘르네상스의 모차르트’라 불린 천재 작곡가다. 당시 그는 ‘음악의 아버지’로 불렸던 마틴 루터로부터 ‘음표의 주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토록 데 프레가 추앙을 받았던 이유는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인 중세의 음악에서 음악은 신을 찬양하는 기능 이외의 다른 기능은 가질 수 없었다. 당시의 음악은 인간의 음악이 아닌 단지 신을 위한 음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 프레는 가사에 감정을 불어넣음으로써 한층 더 풍부하고 감성적으로 음악을 그려냈다. 이는 기존 음악에서는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표현기법은 그림을 그리듯 가사를 표현했다고 하여 ‘워드 페인팅’, 또는 볼 수 있는 음악이란 뜻으로 ‘아이 뮤직’이라고도 불리는데 데 프레는 이런 기법을 가장 잘 사용해 가사의 감정을 살려낸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데 프레는 또한 멜로디를 제외한 나머지 성부는 반주 정도의 기능만을 갖추게 했던 기존의 음악과는 달리 4성부 모두에게 중요한 멜로디를 주는 캐논을 만들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만의 표정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그의 음악에서는 모든 성부가 비슷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각 성부들은 음악의 감정을 더욱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다. 교회의 권위 아래 만들어졌던 중세시대의 음악과는 달리 4성부 모두가 동등하다는 걸 나타내고 있는 이러한 작곡 기법은 바로 데 프레의 인본주의를 표방하고자 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에게 이런 음악은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가히 획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새로운 시각, 창조적인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있었다.

 

 

 

13. 로트레크 & 비제

 비제의 인생에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한 명은 비제의 집에서 일을 하던 하녀 마리 레텔로였고, 두 번째 여인은 창녀에서 백작부인으로 그리고 작가로서의 인생을 살았던 세레스트 모가도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의 스승이었던 알레비의 딸 주느비에브와 결혼한다. 결혼 전 하녀와 창녀라는 낮은 신분의 두 여인을 사랑했던 비제. 어쩌면 이런 경험은 그로 하여금 집시를 주인공으로 한 《카르멘》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작품을 낳게 했는지 모른다. 매혹적인 집시여인 카르멘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이 오페라는 초연 당시 큰 실패를 맛보았다. 이 오페라의 줄거리와 집시, 밀수업자, 여직공들과 같은 등장인물들의 신분 때문이었다. 주로 전설이나 신화를 바탕으로 한 상류층의 이야기를 다뤄온 기존 오페라의 내용과 달리 《카르멘》은 미천한 집시가 주인공이다. 비제의 《카르멘》은 한동안 큰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비제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오페라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비제는 안타깝게도 그 성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세상을 마감한다. 

 

 로트레크는 그의 포스터에 강한 캐릭터인 리타(연극<집시>의 주인공)의 실루엣을 어두운 배경을 바탕으로 흰색과 검정색을 대비시키며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리타의 고객를 젖히고 웃고 있는 얼굴에서 사랑을 쟁취한 그녀의 자신감과 성취욕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전체의 내용과 분위기를 한 장면으로 압축하여 포스터에 담아낸 로트레크의 예술성으로 그는 포스터라는 장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한다.

 

 로트레크는 귀족출신으로 귀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적 두 번에 걸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부터 몸의 성장이 멈춰 결국 그의 신장은 1.5미터에서 그치게 된다. 이러한 신체적 불구와 더불어 허약했던 건강상태는 귀족가문이었던 부모의 근친상간에 의한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남들과 다른 신체조건 때문에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한다. 그리고 가정을 떠나 파리의 뒷골목으로 들어가 하층민들과 함께 인생을 보낸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창녀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위안을 얻는다. “물론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은 좋지 않지만 자주는 마셔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술을 즐긴 그는 파리 뒷골목에서 술과 창녀들 사이에 둘러싸여 짧은 인생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이상이 아닌 진실을 그린다.”라고 말하며 창녀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그려냈다.

 

 

 

14. 발라동 & 말러

 발라동은 수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모델이자 화가였다. 르누아르, 드가, 샤반, 로트레크가 즐겨 그렸던 그녀는 이미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발라동은 이 화가들의 모델임과 동시에 연인이었다. 그녀는 몽마르트에서 많은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사랑을 나눴고 모델로서 영감을 주었으며 그들에게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서커스에서 곡예를 하다 공중그네에서 떨어지는 아픔을 겪은 후 직업모델로 전환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그녀의 모습은 여러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연인 사이이기도 했던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우리는 발라동의 매혹적인 눈빛과 몸짓, 아름다운 미소와 화사함을 볼 수 있다. 한편, 하층민의 인생을 이해하고 공감했던 로트레크의 그림에선 그녀는 르누아르와는 놀랍도록 대조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허름한 셔츠에 멍한 표정으로 술에 취한 듯 보이는 그녀는 삶이 주는 고통의 무게를 끌어안은 채 우수에 차 있다. 또한 고통스런 삶을 헤쳐 나가는 강인한 의지의 여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한 여인의 첫인상은 두 그림 안에서 너무도 다르게 느껴진다.

 

 미술계의 발라동처럼 음악계에는 알마 말러라는 여인이 있었다. 발라동과 동시대를 살았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그녀 역시 발라동만큼이나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아갔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였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도 염문을 뿌렸던 알마. 치명적일 정도로 매혹적이었던 그녀를 위해 구스타프 말러는 <교향곡 8번>을, 알반 베르크는 오페라 《보체크》를 헌정했고,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는 그녀와 자신의 사랑을 그린 대작, <바람의 신부>를 그렸다.

 

 코코슈카는 평생 말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말러가 그의 곁을 떠난 후 그는 그녀와 똑같은 사이즈의 인형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인형에 옷을 입혀 그녀 대신 인형을 데리고 나녔으며 심지어는 같이 잠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토록 많은 예술가의 마음을 불태우고 수많은 영감을 불어넣었던 말러 자신도 재능 있는 작곡가였다. 그녀는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 이후 그의 반대로 작곡을 잠시 중단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금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작곡활동을 재개한다. 그녀의 작품 중 14개는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발매되었고, 죽은 후에도 3개가 더 발견되어 현재까지 약 17개의 작품이 남아 있다.

 

 문학에서는 루 살로메라는 유명한 여인이 있다. 그녀도 발라동, 말러와 마찬가지로 니체, 릴케 그리고 프로이트의 연인으로 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예술가의 탄생은 자유로부터 시작된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정신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재능, 그리고 열정은 하나의 완전한 예술작품으로 이어진다.

 

 

 

15. 고야 & 베토벤

 베토벤과 고야가 살았던 당시 유럽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나고 있었다. 프랑스의 혁명으로 민주주의 의식이 생겨났고 시민들은 자유를 부르짖었다. 이 가운데 베토벤과 고야는 예술계의 혁명을 일으키며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들어서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베토벤은 이전의 음악과는 달리 음악 안에서 극과 극의 감정을 표현해냈다. 피아노와 포르테 간의 일정 간격을 유지했던 기존 음악과는 다르게 베토벤의 음악은 강약의 변화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음악은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악장 자체가 길고 관현악 곡의 경우 구성 자체가 방대했다. 특히 불협화음의 사용과 강약의 다양한 변화는 듣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풀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의 관중들은 이런 음악에 익숙하지 않았다. 생소한 불협화음과 멜로디 역시 제한적이어서 베토벤 음악은 따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그의 음악은 단순히 듣고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음악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관중들은 이런 음악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들은 베토벤의 음악을 ‘기이’하고 ‘광적인‘음악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음악, 그의 음악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미술계의 혁명을 일으킨 고야의 그림 역시 보고 즐기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고야의 작품은 기존의 아름다운 그림들과 달리 공포와 긴장감, 두려움과 혼동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무시무시함과 잔인함, 피와 뜯겨나간 살점 등을 그리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그림들을 통해 인간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비난하고 세상의 폭력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베토벤의 음악처럼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베토벤의 혁명적 작풍은 그의 세 번째 교향곡 <영웅>에서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곡은 당시에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제1악장은 15분에 달하는 긴 악장으로 기존 교향곡의 전 악장을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긴 길이로 관중을 놀라게 했다.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의 영웅 나폴레옹에게 이 곡을 헌정한다. 그러나 민중의 혁명가라고 여겼던 나폴레옹이 추후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베토벤이 나폴레옹의 이름이 적힌 악보를 찢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세상을 바꿀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에 대한 심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이후 주변 국가들을 혁명이란 이름하에 점령하기 시작한다. 1808년, 그는 스페인을 점령하고 그의 형 조세프를 왕위에 올린다. 이에 스페인 민중들은 반발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에 이른다. 고야는 이 끔찍한 장면을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을 통해 재현하고 있다. 프랑스 군대의 잔인함이 고스란히 보이는 그림이다. 이 작품에서 고야의 초기 작품 성향인 로코코 양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이 참혹한 현장을 실제로 목격하고 사실 그대로 고발한다.

 

 베토벤은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인 26~28세에 청력을 잃기 시작해서 38세에는 완전히 청각을 잃는다. 고야 역시 47세에 심한 열병을 앓고 난 뒤 청각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불안한 사회와 함께 그들의 청각장애는 내면의 심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인간의 내면을 더욱더 적나라하고 심도 있게 바라보게 했을 것이다.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신이다. 어느 날, 사투르누스는 자식에 의해 지배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이후 그는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 자식을 잡아먹기에 이른다.

 

 <검은 그림> 연작 :: 고야 만년의 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1819년, 완전히 귀머거리가 된 고야가 또다시 빈사의 중병에 걸려 마드리드 근교에서 유폐생활에 들어갔을 때, 통칭 ‘귀머거리의 집’(La Quinta del Sordo[스페인어])의 식당과 살롱의 네 벽에 그린 작품군으로, 고야가 완전히 자유롭게 표현한 고백적인 화면들이다. 1819~1823년의 제작으로, 현재는 벽면에서 화포로 옮겨져 있다. 전14매,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흑, 백, 세피아의 3색을 기조색으로 한 환상적인 화면으로 마녀라든지 사티로스, 순례하는 군중을 때로는 엄지손으로, 때로는 헝겁, 해면까지 사용하면서 격렬한 터치에 의해 표현주의적으로 그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검은 그림 [Las pinturas negras]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6번 Op.135의 마지막 악장의 악보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의 문구가 남겨져 있다.

 “어려운 결심, 꼭 그래야만 하는가? 꼭 그래야만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베토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문구를 적어 넣었는지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지만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어쩌면 우리가 인생의 고비마다 되새겨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16. 폴록 & 케이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곡은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무대에 등장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곡이다. 그동안 관객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 이런저런 ‘소리’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소리’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우연의 ‘소리’들은 바로 <4분 33초>라는 음악작품이 된다. 케이지는 “세상에 빈 공간이나 빈 소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엔 언제나 볼 것이 있고 들을 것이 있다. 아무리 고요함을 만들려고 노력해 봐도 완전한 고요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듣지 않으려 해도 세상이 존재하는 한 어떠한 소리든 들리게 되어 있다는 자연의 섭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2분이 지난 후에도 무언가가 지겹다고 느껴진다면 2분이 아니라 4분 동안 똑같은 일을 해보라. 만약 그래도 지겹게 느껴진다면 4분이 아니라 8분 동안 반복하라. 그래도 지겹다면 16분 동안, 그래도 지겹다면 32분 동안 반복하라. 그러면 결국엔 그 일이 더 이상 지겹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존 케이지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곡의 조성과 화음, 멜로디, 템포 그리고 악기의 구성 등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낸다. 하지만 <4분 33초>에는 단지 고요함 속에서 만들어지는 소음들만이 있을 분이다. 케이지는 “나는 소위 말하는 ‘음악‘을 들을 때면 마치 누군가가 그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 나에게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길거리의 소음들을 들으면 소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리의 움직임을 사랑한다. 나에게 얘깃거리를 들려주는 음악은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기존의 음악들은 언제나 정해진 이야기만을 들려주지만 소리는 언제나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리들은 특정한 감정이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듣는 이에 따라 해석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잭슨 폴록은 어느 날 물감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우연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우연적 실수를 예술로 승화시켜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는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 낸다. 액션 페인팅이란 페인트를 캔버스에 떨어뜨리거나 뿌리거나 문지르는 즉흥적인 행위들을 통해 얻어지는 그림이란 뜻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에 더 비중을 둔 그림을 만ㄹ한다.따라서 이러한 기법은 우연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과 닮아 있다.

 하지만 폴록은 자신의 그림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림을 그리기 전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끄집어내기 위해 그림과 자신의 내면을 연결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그 연결이 조화롭게 이루어졌을 때 하나의 온전한 작품이 완성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 그림은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케이지가 아무 의미 없는 소리들을 의미 있는 음악으로 끌어내듯 폴록은 우연적으로 떨어지는 물감들을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와 조화시킴으로써 하나의 생명력을 지닌 예술작품으로 새롭게 탄생시킨다.

 

 우연. 우리가 우연이라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우연이 아닌 평소 우리의 생각으로 인하여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일 수도 있다. 진정으로 원하고 그리면 이루어진다. 무의식의 세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무의식 속에서 우연을 끌어내고 우연은 필연이 되고, 필연은 운명이 된다.

 

 폴록은 케이지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이 저마다 자신의 생각대로 작품을 해석하길 바라는 뜻에서 그림에 제목 대신 숫자를 부여했다.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의 제목에 따른 선입견을 갖지 않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는 액션 페인팅 기법을 사용한 후기 작품에는 <No.5>, <No.31>과 같은 무의미한 숫자를 부여함으로써 그림에 대한 느낌과 해석은 관객의 주관적인 견해에 맡기기 시작했다. 

 케이지가 그의 음악이 어떠한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소리’로 들리기를 원했던 것처럼, 폴록 역시 자신의 작품에 관객들 스스로 각자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비춰볼 수 있길 원했던 것이다.

 

 

 

17. 칸딘스키 & 스크랴빈

 신비주의란 자연의 본질을 인지하고 신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는 일종의 종교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사상이었다.

 

 칸딘스키는 “예술은 정신적인 세계에 속한다.”며 “모든 예술작품은 우주가 창조되듯이 서로 다른 세계들이 충돌함으로써 작품이 생성된다.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것은 마치 세상이 최초로 형성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술이란 외적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내면과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스크랴빈은 이보다 더 나아가 음악을 통해 신의 경지에까지도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스크랴빈은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신비주의 화성이라는 독창적인 화음을 만들었는데 이 화음은 ‘도-파#-시b-미-라-레’로 구성돼 있다. 이는 도의 자연적 배열음 중에서 여섯 음을 선택해 4도 관계로 재구성한 것이다.

 

 신비주의 화성과 더불어 스크랴빈은 <불의 시>에서 각각의 음정에 색깔을 지정하고 의미를 부여해 음악과 미술을 통합시키는 종합예술을 시도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악보에 ‘luce’, 즉 빛이라는 파트를 만들어 음 하나하나에 색을 입히는 작곡을 시도했다. 무대조명 색깔을 음악의 흐름에 따라 변하도록 작곡한 것이다. 스크랴빈은 ‘도’는 빨간색을 나타내고 인간의 의지와 격렬함을 표현한다고 했으며, ‘레’는 노란색이며 환희를, ‘미’는 하늘색이자 꿈을, ‘파#’은 보라색이며 창의력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사람에게는 모두 영혼의 색깔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 색깔은 그 사람 주위에 아우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색체는 건반이고 그것을 보는 눈은 하모니이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이며 예술가는 영혼을 울리기 위해 그것을 연주하는 손의 역할을 한다.”

- 칸딘스키

 

 색을 통해 감정의 표현을 시도한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화실에서 정말 아름다운 그림을 한 폭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이었다고 한다. 순간 그는 그림이 뒤집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어도 색과 구성만으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구체적인 형태를 그리지 않고도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그는 감정과 느낌만을 표현하기 위한 추상미술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로 칸딘스키의 <최후의 심판>은 도저히 최후의 심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을 잡을 수 없는 그림이다. 기존의 <최후의 심판>에서 그려지는 신의 모습이라든지 최후를 맞이하며 공포에 떠는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알 수 없는 모습을 한 색깔이 있을 뿐이다. 바로 칸딘스키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최후의 심판의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최후의 심판에서 느껴지는 감정이었던 것이다.

 

 

 

18. 드가 & 푸치니

 19세기 말 이탈리아에서는 성경도, 그리스 신화도, 귀족의 이야기도 아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뒷골목 빈민층, 돈이 없어 몸을 파는 창녀들, 온실 속 장미가 아닌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들꽃 같은 서민들의 현실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베리모스 운동(진실주의, 사실주의)이 한창이었다.

 오페라 무대에는 곱게 화장을 하고 반짝이는 보석과 레이스로 우아하게 치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후줄근한 옷을 입고 생계를 위해 몸을 팔거나 공장, 시장, 술집 등에서 일하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베리스모 오페라의 중심에는 파리 뒷골목 보헤미안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삶의 애환을 그린 《라보엠》이 있었다. 푸치니는 자신의 가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오페라를 완성한다.

 

 드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림을 위해 연출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거나 아픈 다리를 주무르거나 하품을 하는 등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드가는 마치 사진의 스냅샷을 찍듯 이러한 장면들을 보이는 그대로 화폭에 담아냈다.

 그는 특히 발레하는 무희들을 즐겨 그렸다. 그 당시 무희들은 대부분 노동자 계층의 여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지금의 발레리나와는 개념이 많이 달랐다. 이들은 공연하는 것 외에도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파는 일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습장소에는 언제나 돈 많은 스폰서들이 드나들었다. 무희들은 한껏 치장을 하고 이들의 눈에 띄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스폰서들은 그녀들과 가격을 흥정했다. 드가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발레리나들은 지켜보고 있는 남자들이 바로 이 스폰서들이다. 드가는 이렇듯 매춘부와 다를 바 없었던 무희들을 그의 작품 속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이렇게 수많은 발레리나를 그렸던 드가. 얼핏 생각하면 여자를 상당히 좋아했을 것 같은 그이지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게다가 그는 여자에게는 좀처럼 관심이 없어 성생활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여자란, 그의 또 다른 주제였던 경마장의 말처럼 단순히 그리기 위한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 화가가 그린 여성의 몸은 관능적이거나 매혹적으로 혹은 우아하게 그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드가가 그린 여성들은 남자의 눈으로 본 관능의 대상이 아닌 여자 그 자체였다. 그의 그림 속 여자들은 꾸며지지 않은 진실된 여자의 몸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선입견이 섞이지 않은 ‘진실’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는 여자들의 목욕 장면을 마치 ‘열쇠 구멍을 통해 들여다본 것’처럼 그렸다. 따라서 드가의 그림 속 여자들은 일상에서 흔히 하는 행동들이기는 하지만 남을 의식했다면 나오지 않았을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들은 쪼그리고 앉아 비누질을 하거나 손이 닿지 않는 자신의 등을 어렵사리 수건으로 닦고 있다. 드가는 목욕하는 여자들을 보고 “마치 고양이들이 자신을 핥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그 정도로 여자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그의 냉담한 시각은 그로 하여금 여인을 미화시키거나 가공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있게 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그린 여성의 모습은 더더욱 진실되게 다가왔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푸치니에게는 그의 바람기 때문에 의부증까지 얻은 질투심 넘치는 아내 엘비라가 있었다. 어느 날 푸치니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그의 간호를 맡기 위해 드리아라는 16세의 소녀가 그들의 인생에 등장하게 된다. 푸치니의 여성 편력으로 가슴앓이를 했던 엘비라는 드리아와 남편이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끊임없는 의심은 엘비라로 하여금 드리아를 모욕하고 마을에서 몰아내는 등 온갖 심한 행동들을 일삼게 만들었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드리아는 끝내 자살을 택하게 된다. 그녀가 죽은 후 결백이 드러났지만 이미 드리아는 세상에 없었다. 이 사건은 푸치니의 바람기를 단편적으로 드러낸 아주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렇듯 여성에 대한 풍부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이성 심리를 탁월히 묘사할 수 있게 했다.

 

 진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든 진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

 

 “진실을 아는 것만이 인간에게 올바른 힘을 부여해준다. 그것이 설령 어떤 모습의 진실이라 해도.”

- 무라카미 하루키, 『1Q84』

 

 

 

19. 뒤샹 & 사티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오프라가 “만약 당신이 뚱뚱하고 튼 살이 있고 이혼을 한 여자라면 모리타니아로 가세요! 우리를 위한 세상이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소린가? 뚱뚱하고 이혼녀라면 모리타니아로 가라니? 내용을 자세히 보니 이 프로그램은 세계 각국의 미의 기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모리타니아라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이 나라에서는 뚱뚱하면 뚱뚱할수록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단다. 그래서 엄마들은 자녀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토할 때까지 먹게 하고 다 토하고 나면 또 먹이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경악할 일이다. 게다가 이곳의 여자들은 살을 찌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데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낙타용 식욕촉진제까지 복용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살을 강제로 찌우다 보면 살이 트기 마련인데 이런 튼 살은 모리타니아의 여성에게는 섹시함의 상징이라고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것에선 여자가 이혼을 하면 성대한 파티를 연다. 이혼을 한 여자는 인기가 한없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자면 뚱뚱하고 만약 이혼까지 두 번 이상한 여자라면 어디에서나 환대를 받는 최고의 인기녀라는 것이다.

 날씬하고 매끈한 피부를 유지해야 하고 이혼을 하면 마치 여자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긴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리타니아에서는 “뚱뚱하고! 튼 살이 있고! 이혼을 한 여자!”가 인기를 끌고 있다.

 

 뒤샹의 <샘>은 일반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뒤샹은 미국의 ‘앙데팡당 전’에 일반 남성용 변기를 뒤집어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해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또한 그는 자전거바퀴, 의자, 새장, 막대설탕, 온도기 등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기성품들을 가져다 놓고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뒤샹은 기성품도 그 기능을 요구하는 곳으로부터 분리시켜 놓으면 그 물건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그 사물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기성품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훗날 팝아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앙데팡당 :: 1884년 프랑스 관전인 살롱 데 자르티스트 프랑세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여 개최된 무심사 미술전람회.
[네이버 지식백과] 앙데팡당 [Independant] (두산백과)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 대한 반기를 들기 위해 뒤샹은 기존 예술을 패러디 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적인 패러디 작품으로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 한 <L.H.O.O.Q>rk 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넣고 남자의 모습으로 변신을 시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제목을 <L.H.O.O.Q>라고 지었다. 이 제목을 프랑스어로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라고 발음이 된다. 이 작품은 예술작품 역사상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던 다빈치의 모나리자 즉, 과거의 예술, 권위주의적 사고방식, 고정관념 등에 대한 조롱이며 반발이었다. 이 충격적인 작품은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킴과 동시에 새로운 관점과 시각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음악계에서는 사티가 아카데미즘을 반대하고 전통예술을 조롱했다. 그는 고전주의 작곡가 클레멘티의 곡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 하고 <관료적인 소나티네>라는 새로운 제목을 붙인다. 뒤샹과 마찬가지로 사티는 이 곡을 통해 관료적인 사회와 형식을 중요시했던 전통예술에 대한 풍자를 표현하며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사티는 그의 곡들에 <바싹 마른 태아>, <지긋지긋한 고상한 왈츠>, <차가운 소품집>,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등 기이하고 풍자적인 제목을 붙이고, 연주자들에게 연주법을 표시해 주는 주석에는 ‘잠시 홀로되기’, ‘마음을 열고’, ‘치통이 있는 나이팅게일 새처럼’등 난해하고 신비로운 표현들을 써놓았다.

 

 또한 사티는 뒤샹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의 소재를 예술로 끌어들여 새로운 예술의 범위를 정의하게 되는데, <파라드>라는 발레 음악에서 타자기, 사이렌,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 등이 등장한다. 그는 이상의 소음들을 음악에 접목시킴으로써 음악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이러한 소음에 대한 시각은 훗날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 존 케이지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다다이즘(모든 사회적, 예술적 전통을 부정하고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한 예술 운동)은 제1차 대전 말기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예술운동이다. 다다이스트들은 당시 사회의 관습, 이성, 권위적인 분위기를 비판하고 거부함과 동시에 기존의 예술 또한 부정하고 반대했다. 이들은 이성적으로 계획되고 짜인 형식보다는 우연성, 무의식적인 것과 무의미함에 더욱더 그 가치를 두었다.

 

 사티 역시 뒤샹이 일상생활의 기성품도 모두 예술작품이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선보인 것처럼 음악도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가구처럼 애써 집중해서 들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백그라운드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사티는 ‘가구 음악(furniture music)’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는데, ‘가구 음악’이란 가구처럼 그 공간에 그저 존재하는 음악, 굳이 집중해서 들으려 하지 않아도 되면 듣고 싶으면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이란 뜻을 지닌다. 이는 전통적인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개념으로 훗날 공간의 분위기를 창조하는 ‘공간 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된다.

 

 뒤샹은 자신의 작품 <샘>을 리처드 무트라는 이름으로 출품했고, ‘사랑, 그것이 인생이다’라는 뜻을 지닌 에로스 세라비라는 가명으로 여장을 하고 나타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티 역시 비르지니 르보와 프랑수아 드 폴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기고했다고 한다.

 

 “나는 사람들이 왜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에겐 오히려 고정관념이 더욱 무서운 존재이다.”

- 존 케이지

 

 

 

20. 위홀 & 번스타인

 20세기 중반, 미술계에서는 팝과 예술을 혼합시키는 ‘팝아트’라는 장르가 만들어졌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가가 바로 앤디 워홀이다. 워홀은 ‘I Miller’제화에서 신발 일러스트를 그리고 ‘RCA’에서는 음반의 표지를 디자인하는 상업미술가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상업미술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올라선 이후 <마릴린 먼로 두폭>과 <100개의 수프 깡통>, <100개의 코카콜라 병> 등을 전시하게 된다. 이 작품들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술의 주제로서 절대 적합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일상용품을 작품 소재로 삼다니, 그것도 슈퍼마켓에서 흔히 구입할 수 있는 수프 깡통, 콜라 병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준 그는 콜라 병을 주제로 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국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본질적으로 똑같은 물건을 구매하는 관례를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TV를 보다가 코카콜라를 보면, 당신은 대통령도 코카콜라를 마시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코카콜라를 마시고, 당신도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것을 알 수 잇다. 콜라는 콜라일 뿐이다. 돈이 많다고 길모퉁이의 부랑자보다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 모든 콜라는 다 똑같고 콜라는 다 맛있다. 그것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알고, 대통령도 알고, 부랑자도 알며, 당신도 안다.”

 

 워홀은 자신의 작업공간을 ‘factory’, 즉 공장이라고 불렀다. 상업주의적 사회에서의 소비문화를 대변하듯 소비자의 욕구에 따라 많은 물건을 생산해내는 공장에 비유한 것이다. 그는 “기계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며 그의 작품들을 실크 스크린 기법을 사용하여 기계처럼 찍어냈다. 소재 또한 앞서 말한 코카콜라 병, 캠벨 수프 깡통, 달러사인 등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비롯하여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등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유명인들을 선택했다. 이로써 그는 대중들의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클래식 지휘자였던 번스타인의 지휘는 전통 지휘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근엄하고 진지했던 기존 지휘자들과는 달리 무대에서 춤추고 기뻐 날뛰며 모든 감정을 몸으로 드러냈다. 그는 관중과 대화했고 관중을 이해시켰다. 또한 그는 콘서트홀에 머물지 않고 TV속으로 뛰어 들었다. TV라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먼저 다가가고 친분을 쌓았다. 번스타인은 더 이상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전통예술가가 아니었다. 대중 속에 파고들어 대중을 이해하며 대중과 함께 숨 쉰 ‘스타’였던 것이다.

 

 위홀과 번스타인은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미국적인 아티스트다. 하지만 그들은 각각 미국이 아닌 체코슬로바키아와 러시아의 이민자 2세로 태어났다. 각개각국의 인종들과 여러 문화가 혼합되어 재탄생된 미국 문화 속에서 이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내며 미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우뚝 서게 된다.

 

 워홀은 미국 흑인 화가 바스키아의 활동을 도우며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 워홀이 죽은 뒤 슬픔에 젖은 바스키아가 마약에 의존하는 빈도수가 높아져 곧 사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예술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한다. 시대는 이제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 매스미디어는 대중문화를 바꿔버렸다. 예술은 이제 대중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워홀과 번스타인처럼 전통예술의 형식과 틀을 고집하지 않고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시대의 공감을 얻어내는 예술. 그것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728x90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이트의 의자  (0) 2023.05.19
머리를 9하라  (1) 2023.05.18
컨버전스 컬처  (3) 2023.05.16
예능력  (0) 2023.05.15
철수 사용 설명서  (2) 202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