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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철수 사용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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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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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전석순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1.07.01

 

1. 사용하기

 취업 모드

 취업 모드를 사용하려면 전원 버튼을 누른 후 희망 회사명을 입력하십시오. 이력서, 자기소개서, 최종 학력 증명서, 토익 성적표 등의 구비 서류를 넣은 후 동작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서류 전형에 응시하면 자동적으로 취업 모드가 시작됩니다. 동작 중 회사명을 변경하거나 자격증 사본 등의 서류를 더 넣으려면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응시 후에는 변경 조건이 좀 더 까다롭습니다. 희망 회사는 복수 선택이 가능합니다. 단, 스트레스로 인한 성능 저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회사를 선택하기 전에 반드시 입사 가능한 회사인지 아닌지 확인해 주십시오. 철수의 역량 범위 내에 있는 회사 목록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변동이 심한 부분이오니 최신 버전을 확인해 주십시오. 취업 모드에서 추가로 선택 가능한 것은 대학원/ 자영업/ 사업/ 유학 등입니다. 다른 모드와 동시 사용할 경우 기능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그 나이 먹도록 아직 백수니?” 하고 좀 더 다그쳐서 성능 향상을 유도할 수도 있으나, 부작용의 우려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만약 기능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청년실업대책위원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없던 기능을 새로 추가하긴 어려워도, 있던 기능을 다소 향상시키는 건 그나마 쉽다.

 

 처음에는 다리미에서 스팀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스팀다리미가 등장하자 생각은 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다리미의 기본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스팀이 나오지 않는 다리미를 보고 “이게 정말 다리미예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쯤엔 철수를 보고 “이게 정말 구직자예요?” 할 것이다.

 

 어떻게든 회사에 들어갔던 친구들은 인턴 기간을 채우자마자 회사를 나왔다. 말하자면 “신제품 체험 사용 기간 동안 써 보니 별로네.”였다. 그러니 나왔다는 것보다는 쫓겨났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회사는 의무 사용 기간이 끝났다는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주변에서는 체험 사용 기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철수를 대할 때마다 빨래를 하지 못하는 세탁기나 바람이 나오지 않는 선풍기 보듯 했다. 철수는 아버지에게 고장은 났지만 버릴 수도 없는, 어디에 써야 할지 막막한 물건이었다. 아직 의무 사용 기간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몸에 남아 있던 숨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누군가 물으면 철수는 늘 충전 중이었다. 충전만 완료되면 휴일도 없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매일 야근을 하더라도 건강하게 잘해 낼 수 있을 것처럼 말했다. 사실은 세탁도 잘 되고 바람도 시원하게 나오는데 아직은 필요할 때가 아니라 충전 중인 것처럼. 그럴 때면 목소리도 마치 회사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마련해 둔 비장의 제품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여름이 되어도 선풍기는 돌아가지 않았고, 빨랫감이 잔뜩 쌓여도 세탁기는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부채를 찾거나 손빨래를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작동이 잘될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 ‘언제가’는 늘 가까이 있을 것 같았지만 아직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대로 작동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부채를 쓰거나 손빨래를 좀 하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은 아예 없어 보였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모델이 있다. 회사마다 선호하는 신입 사원도 따로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맘에 들지 않는 제품을 사서 고쳐 쓸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넘쳐 나는 게 제품이므로 그들이 원하는 제품도 분명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굳이 원하지 않는 모델을 살 이유도 없었다. 결국 원하지 않는 모델을 원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제품이 선택되기 위해 제일 마지막에, 자못 진지하게 내리는 결정은 하나뿐이다. 바겐세일. 아니,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창고 정리 초특가 바겐세일. 어쨌든 기간 내에 팔지 못하면 이후로는 더 어려워질 게 분명하다. 더 좋은 신제품은 계속 쏟아져 나올 테니까. 게다가 안 팔고 있으면 보관비만 늘어날 뿐이다. 땡처리라도 일단 팔고 보는 게 이득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철수는 희망 연봉을 너무 높게 잡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제품이 더 쏟아져 나오기 전에 팔아 버리는 편이 여러 모로 더 낫다. 이제는 나이 제한도 간당간당했다. 연봉은 회사의 결정에 맡겨도 괜찮을 것이다. 또 모르지 않는가? 완성된 사용 설명서를 보고 나면 숨어 있던 의외의 다양한 기능들에 놀라 연봉을 올려 줄지도.

 

 철수는 딱 한 번 서류 전형을 통과해서 면접을 본 적이 있었다. 면접을 본다고 생각하니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세탁 기능을 배우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헹굼이나 탈수 기능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탁기 같았다. 철수는 “세탁만 자라면 되는 거 아니었어?”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이미 향균 기능에 삶음 기능까지 갖춘 세탁기들이 바글바글했다.

 

 제품의 성능 테스트는 보통 최악의 조건에서 진행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을 듯한 테스트를 실시한다. 그것에 통과된 제품만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테스트 내용은 고스란히 광고에 쓰였다. 손목시계가 수심 100미터까지 진입을 할 것이며, 코끼리만 한 무게로 또 누가 침대를 짓누르겠는가.

 그런데 이런 시험을 거친 모델은 소비자에게 더 큰 신뢰를 받았다. 그런 환경에서도 고장이 없으니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오죽 잘 되랴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테스트를 실제로 해 볼 수 있는 소비자는 없다. 철수가 수심 100미터에서 버틸 수 있다고 한들 누가 그걸 테스트할 수 있을까.

 

 “그래도 노래는 제법 잘하네. 회식 때 쓸 만하겠어. 그만 나가 봐도 좋습니다.”

 그 말은 꽤 괜찮은 위안이었다. 텔레비전에게 “화질은 별로지만 그래도 음향은 괜찮네.”라고 하거나 세탁기에게 “때도 안 빠지고 시끄럽긴 해도 탈수 하나는 끝내주네.” 하는 정도는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회식 자리를 위해 철수를 뽑진 않을 것이다.

 

 테스트는 제품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의심에서 시작한다. 사랑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테스트 자체가 사랑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면접자의 질문은 쓸 만한 정도를 파악하려는 게 아니라 철수가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철수의 감지 센서는 아직 살아 있었다. 철수의 면접 결과가 궁금하긴 한데, 대놓고 물어보기가 뭐해서 술이나 한잔하자며 부른 듯했다. 만약 그녀의 감지 센서도 제대로 작동 중이었다면 철수가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것쯤은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빈약한 주량은 그나마 평소만큼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두 개가 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다른 표정이 겹쳐지면서 일순 환해지기도 했다.

 그녀가 철수를 바라보았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설마 이런 제품이 아직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나, 의아해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사실 흑백텔레비전은 박물관에나 있어야지 일상에서 쓸 물건이 아니다.

 

 전기다리미가 사실 자기는 스팀이 나오지 않는다고 고백하기란 쉽지 않다. 다들 요즘 나오는 다리미라면 스팀 정도야 기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요즘 세상에 술 한 잔 못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데 세상에는 스팀이 나오지 않는 다리미도 있고, 플래시가 터지지 않는 카메라도 있으며, 온풍만 나오고 냉풍은 나오지 않는 드라이어도 있다. 사용자가 그걸 몰랐을 뿐이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학습 모드

 철수는 비교적 철저한 계획 하에 학습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공부 전용으로 출시된 모델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오늘 해야 할 분량이나 기간 설정만으로는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다음 주 기말고사 성적 평균 80점 돌파 또는 워드프로세서 2급 자격증 필기시험 합격 등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가 학습 기능을 수행하는 데 훨씬 유익합니다. 그저 “열심히 해라.”나 “이번엔 잘할 수 있지?”와 같은 불분명한 지시로는 원활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단, 철수는 외관상의 특별한 문제점 외에는 경쟁의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제품과의 비교를 통해 능률을 올리려는 시도는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작업 수행을 위해 철수가 요구하는 환경은 매번 차이가 날 수 있으며, 사용자에 따라 기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목욕탕에서 돌아온 엄마에게 당장 그 말을 전했지만, 엄마는 “행여나, 피아노도 못 치는 게 영어라고 잘할 리 있겠어?”라고 대꾸했을 뿐이다. 철수는 피아노와 영어가 무슨 관계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못 받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옆에서 누나가 “헬로랑 땡큐는 요즘 지나가는 개들도 다 해요.”하고 엄마를 거들었다.

 

 아버지의 말이 마치 텔레비전에게 “네가 처음부터 식빵을 굽지 못했던 건 아니란 말이지.”하는 것처럼 들렸다. 종일 켜 둔 텔레비전 위에 식빵을 올려놓으면 열기 때문에 조금 따뜻해질 수는 있다. 줄곧 영어를 붙잡고 있는데도 토익 점수가 좀체 오르지 않자 텔레비전이 토스터를 흉내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하면 조금 따뜻해지기야 하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인 것처럼 철수의 점수도 아주 조금씩 오르다가 어느 지점에서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게 텔레비전이 식빵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온도인 것 같았다.

 

 철수는 지금도 헛갈렸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는데,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이렇게 고장인 채로, 쓸모없는 제품인 채로 남아 있게 된 것일까. 아니면 철수가 정말 다른 제품이었는데 사람들이 잘못 사용한 것일까. 사용 설명서에는 노력해서 되는 것과 노력해도 안 되는 걸 구분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철수 자신도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사용 후기

 품질보증 기간도 지났는데 반품할 수도 없고 교환할 수도 없고 답답했죠. 그나마 큰돈 들어가는 고장이라도 없으니 다행이었어요. 그냥 어서 자라서 다른 사용자에게 넘겨주는 게 유일한 희망이에요. 설마 평생 제가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아, 아닐 거예요. 의무 사용 기간이 평생이라뇨... 사실 할 수 있는데 철수가 일부러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철수가 못하는 것만 골라서 보니까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다 싶고요. 그런데 철수가 잘하는 것도 있긴 하더라고요. 저는 하나도 없는 줄 알았거든요. 이게 사용한 사람마다 말하는 게 다 달라서 뭐가 맞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다양하게 사용해 볼 걸 그랬어요. 어쩌면 잘하는 걸 더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있는데 제가 못 본 것일 수도 있고요. 사용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제 탓이 큽니다. 그냥 사용하다 보면 기능이나 용도가 저절로 습득될 줄 알았죠. 누가 요즘 사용 설명서 같은 걸 일일이 다 읽나요? 그냥 되는 대로 쓰지. 그런데도 그게 아니더라고요. 사용 설명서를 읽고 썼다면 철수가 가진 여러 가지 기능을 좀 더 사용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땐 사용 설명서라는 게 아예 없었다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웃기죠. 제품만 있고 그걸 설명해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있었어도 읽지 않았을 거예요. 휴,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요. 지금이라도 읽어보는 게 나을까요?

 

 거기엔 철수 같은 아이들이 대여섯 명쯤 더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철수는 피아노를 치라고 만들어진 손을 가진 아이들이 한동네에 그렇게 많다는 게 놀라웠다.

 

 사실 성적이 오른 것도 한 과목 있었는데 엄마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자레인지가 우유를 잘 데우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넘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전자레인지가 우유를 잘 데운다는 것에는 아무도 주못하지 않으니까. 모두들 제대로 하지 못할 때만 주목하곤 했다.

 

 도대체 올림픽 국가 대표가 중학생 때 음악 성적 형편없었다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 아, 시상대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 좀 필요하려나.

 

 다리미를 아무리 수리해 봐야 음악을 들을 수 없고, 라디오도 빨래를 할 수는 없다. 차라리 오디오와 세탁기를 사는 편이 모두에게 낫다. 철수는 엄마에게 나 말고 누나에게 기대를 하든지, 아니면 공부 기능을 갖춘 아이를 새로 낳아 보는 게 어떠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철수는 엄마에게 제품 보증기간이 훨씬 지나서 환불도, 반품도 할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도 그 정도의 상황 감지 센서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가끔씩 철수는 사람들이 망가진 제품을 만나길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결함이 있거나 이상한 사람을 만나길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자신은 상대적으로 정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잘못된 거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갓 구워 낸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니까.

 

 연애 모드

 텔레비전에서 새로 나온 세탁기 CF를 방영하고 있었다. 광고 모델이 “빨래별 맞춤 세탁 기능, 이제 빨래에 따라 세탁 방법도 다르게.”라고 발랄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이렇게 못하는 건 이제 더 이상 세탁기 아니잖아요.”란 말을 포함한 것처럼 들렸다.

 

 기능이 부족해서, 혹은 외관상 어느 부분이 모자라서라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철수가 변한 게 아니라 사랑이 변한 것이다.

 

 밀크 커피를 누르면서 오늘 내 기분을 안다면 당연히 블랙커피를 내놓겠지, 하고 기대한다면 과연 어느 자판기가 그걸 맞출 수 잇겠는가. 하긴 요즘 같은 추세라면 그런 자판기가 생기지 말란 법도 없다. 아니, 어딘가에 이미 있을지도 모른다. 사용자의 기대가 신제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뭐든 자꾸 진화하여 그걸 따라가지 못하면 기존 제품은 죄다 고장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어제까지는 분명 평범했던 자판기가 오늘은 고물 취급을 받기도 한다.

 

 몇 대 맞고 나면 철수도 텔레비전처럼 한동안은 잘 나왔다. 곧 화면이 찌그러질지라도.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해결책에 지나지 않았다. 계속 반복했다가는 자칫 영원히 폐기 처분돼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자꾸 때리기만 하는 엄마에겐 과연 어떤 오류가 있는 걸까.

 

 엄마는 과외 선생을 철수의 공부 기능을 보완해 줄 수리 기사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철수에게 있지도 않은 기능을 새로 만들어 장착해 줄 마법사가 되어야만 했다. 냉장고가 다림질을 하게 만들려면 마법사가 필요한 것이다.

 

 과외 선생은 수업 시작과 끝에 매번 “아자, 할 수 있다!”라며 철수의 손을 잡고 외쳤다. 지나가는 강아지를 붙잡고 “아자, 날 수 있다!”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너 혹시...”

 누나는 마치 수리 기사마저 포기한 제품을 보는 것처럼 철수를 노려보았다. 혹시, 라는 말 뒤에 얼마나 많은 불량 요소가 머릿속을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철수의 입술이 닿은 후 잠시 멈칫했던 그녀는 상황 파악을 끝내자마자 철수를 밀쳐 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원래 힘이 센 사람이었는지 헛갈렸다.

 

 철수는 그녀에게 공정 과정을 몇 단계쯤 빼먹고 출시된 제품이 되어 버렸다.

 

 20몇 년 만에 처음으로 비디오와 연결되는 텔레비전 같았다. 화면이 제대로 나오기는 할까. 비디오가 전달하는 신호를 잘 알아챌 수는 있을까. 시원찮은 화면이라도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만 수북이 쌓여 갔다.

 

 여자의 한쪽 손이 철수의 엉덩이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한 것도 같았지만, 철수의 엉덩이가 여자의 손을 만진 것인지 여자의 손이 철수의 엉덩이를 만진 것인지 좀 헛갈렸다.

 

 그때는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헛갈렸는데, 사실 헛갈린다는 자체가 사랑은 아니란 뜻이죠.

 

 오류 하나는 제거했는데 그러느라 다른 오류가 생겨 버렸다.

 

 엄마는 매번 “잘 보이는 눈을 왜 수술해?”라며 받아쳤다. 철수가 “그럼 잘 돌아가는 세탁기는 왜 바꿨는데?”라고 했다가 ‘버르장머리 없음’이란 매우 치명적인 품질 저하 요소가 추가되었다.

 

 엄마에게는 아버지도 그다지 잘 산 제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목이 부러져 계속 쓰기는 뭐하지만 그런대로 바람은 잘 나와서 버리기는 아까운 선풍기처럼,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온 지 너무 오래된 제품이라 애프터서비스를 받기도 어렵고 맞는 부품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름 막바지에 선풍기를 새로 사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새로 사 봐야 얼마 쓰지도 못할 걸 선풍기를 사러 돌아다니는 수고가 아까웠다.

 애프터서비스를 받는다고 아버지가 나아지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30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제 와서 내다 버리는 것도 적당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참고 쓰는 게 여러모로 나아 보였다. 이제는 아버지도 일단 버려지고 나면 다시 사용될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을 테고.

 

 사랑은 일회용이 아니라 충전식이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철수는 언제나 일회용이었던 것 같다. 마치 휴대폰을 쓰다가 배터리가 나가면 더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휴대폰을 찾아 떠나는 것처럼, 그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는 늘 배터리가 금방 닳아 버리는 철수에게 있었다.

 

 아무도 충전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충전이 완료되면 사용자는 이미 떠난 후였다. 그새 새로운 휴대폰을 장만해서 성능을 점검해 보고 있었다. 가끔은 이 기회에 아예 휴대폰을 없애 버리는 그녀도 있었다. 떠난 그녀들은 세상의 모든 휴대폰이 다 일회용인 줄 알았던 게 아닐까. 충전하면 더 오래 쓸 수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러니까 비어 버린 사랑을 다시 채울 수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녀들이 조금쯤은 더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배터리는 소모품이라서 충전을 하면 할수록 그 양도 줄어들 것이다. 사용자도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그래도 잘만 하면 죽을 때까지 충전하면서 잘 쓸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그녀들은 사랑을 충전해서 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한 것일 수도 있다. 그냥 쉽게 다른 제품을 선택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기존 제품의 성능 저하를 이유로 들면 그만일 테니까.

 

 진열대의 휴대폰은 모두 안이 텅 비고 껍데기만 똑같이 생긴 모조품들이었다. 휴대폰을 구입하기 전에, 먼저 실물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잠깐 만져 보는 것 말이다. 진짜 제품은 창고 속에 쌓여 있었다.

 그녀들이 철수에게 머무른 진짜 이유는, 제품을 구매하기 전에 잠깐 만져 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발열 반응을 보이자마자 고칠 생각은 전혀 않고 바로 다른 제품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 아니었을까.

 사실 정말 사고 싶었던 것은, 정말 사랑했던 것은 마음 속 어디에 이미 따로 있었던 건 아닐까.

 

 가족 모드

 어디에 내놔도 빠질 게 없는 아들은, 그래도 어딜 가나 중간쯤은 가는 아들로,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엔 그래도 꼴찌는 아닌 아들로 변해 갔다. 그나마 꼴찌의 기준이 전국이 아니라 전교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이후엔 그래도 나쁜 사람만 아니면 뭐든 괜찮다는 식이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철수의 성적표를 받아 보았을 때는 “너 실수한 거지?”라고 물었다. 철수가 대답하지 않자 “그렇지?”라고 한 번 더 물었다. 질문인데도 마치 “그렇다!”라고 확신에 찬 득한 목소리였다. 엄마에게는 질문 안에 원하는 대답을 미리 집어넣는 기능이 있었다.

 

 엄마가 말한 나쁜 사람이란, 어쩌면 성적이 나쁜 사람인지도 몰랐다.

 

 뉴스에는 행복한 가족보다는, 저런 가족들은 도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싶은 이상한 사람들만 골라서 나왔으니까. 뉴스만 보고 있으면 우리 가족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뉴스의 가장 큰 기능은 위로가 아닐까. 몇 가지 소식만 들어도 “내가 아니라 참 다행이야.” 또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야.”하는 식의 위로가 가슴 깊은 곳에서 진하게 우러나오곤 했다. 인생이 우울하고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뉴스를 보세요! 아마도 모든 사용 설명서의 공통 사항이 아닐까. 아버지가 계속 뉴스를 본다면 철수가 위험한 제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내 자식만 저런 건 아니구나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집안 어른들 모이는 장소에 가면 괜히 걱정만 끼치다가 불량품이 될 게 뻔했다. 그렇다고 가지 않으면 이번엔 또 예의가 없다고 불량품이 될 판이다.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묻던 결혼식장은 결국 품평회 자리로 변했다. 몸 어딘가에 바코드라도 입력한 것처럼 눈으로 그걸 찍는 순간 상세한 정보가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마치 세상 모든 부모들이 이런 자리를 위해 지금껏 자식을 낳아 기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자식 키운 보람을 과연 어디서 느낄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전까지야 어떻든 상관없이, 오직 그날의 품평회 결과 하나만으로 그동안 잘 살아왔는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 몇 번 인사를 나누다 보면 출시 가능한 제품과 연기할 제품, 폐기 처리할 제품 등이 자연스럽게 분류되었다. 물론 그 기준을 명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나 딱 보면 견적이 나오는 기준이기도 했다.

 사실 정말로 심각한 오류가 있는 제품이라면 그런 자리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는 더 좋은 제품이 되기 위해 유학 중이기도 했는데, 사용자들은 다음 품평회에서는 자기 제품이 분명 최고가 되리라 확신했다.

 

 졸업하고 뭐 하느냐는 말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하면 누구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미 훌륭한 완제품으로 분류된 이상, 테스트를 계속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철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취업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못 했는지에 따라 상대방을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고장이라는 건 결국 정상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고장 나는 게 사실은 정상이 되는 길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서 고장 난 제품이 되겠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결혼 안 할 건데요.”라고 대답하면 “그럼 넌 왜 태어났는데?”하고 물어볼지도 몰랐다. 아마 정수기가 “정수는 못하지만, 저 정수기 맞아요.” 할 때와 비슷한 반응 되겠다.

 

 서른이 내일모레라고 하면 상대방도 일단 부담스러워 했다. 부담감이란 이유도 모호하고 형체도 불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부담스러워하세요?”하고 물으면 “다들 그런데요, 뭐.”라는 애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완고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사실 선택을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선택된 순간부터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선택되어 구매가 이루어지는 순간 제품은 중고가 된다. 중고 제품은 기능에 별 문제가 없더라도 잘 팔리지 않는 법이다. 반값으로 할인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떻게든 버림받지 않는 게 중요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알려 주는 등급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최고 등급을 제외한 나머지 등급 모두가 결국 얼마나 쓸모없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려 주는 등급이었다.

 게다가 최고 등급도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지도 몰랐다. 신제품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쏟아질 테니까. 올라갈 곳이 없다는 건 떨어질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걸까.

 

 그나마 떨어질 등급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최저 등급이라서 그대로인 줄도 모르고 매년 등급을 유지는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문득’은 우연이라기보다는 그럴 만한 때가 되니까 자연스레 느껴지는 것이다. 선풍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여름이 되어 문득 알게 된 것처럼. 어차피 다른 계절에는 선풍기를 쓸 일도 없으니 고장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별거 아닌 듯싶다가도 다른 것과 비교하면 어느새 큰 결점이 되어 버리곤 한다. 잘만 나오기만 하면 텔레비전에 리모컨이야 있든 없든 상관없을 것 같지만, 정작 다른 텔레비전들이 그게 다 기본 구성품이라고 하면 결점이 돼 버리는 건 순식간인 것처럼.

 

 냉장고랍시고 사 온 게 사실은 음식을 냉장 보관할 생각이 전혀 없는 제품이었다는 걸 비로소 알아챈 듯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언젠가는 제 기능을 다하겠지, 얼음을 얼릴 날도 올 거야, 같은 막연한 기대를 해 왔지만 결국 이렇게 돼 버린 것이다.  “제가 냉장이나 냉동 기능은 없는데요. 그냥 찬장으로 써 주시면 안 될까요?” 냉장고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교환이나 환불 시기는 이미 지났다. 어쩌면 품질보증 기간마저 한참 지나고 난 후일지도 모른다.

 

 누나는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절대 낳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결혼한다고 한 것만으로도 많이 양보한 것이다. 세탁기가 “그래요, 빨래 기능까지는 어떻게든 해 보죠. 하지만 건조 기능은 절대 안 돼요.” 정도는 될 것이다.

 

 

 

2. 관리하기

 설치 방법

 사용 설명서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점점 더 두꺼워 졌다. 철수가 그만큼 완벽해져 가는 것도 같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만큼 더 이상한 제품이 되어 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청소 방법

 철수에 대한 지적이 좀 더 적나라해진 것은, 엄마 따라 다니던 여탕을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남탕 출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말하자면 전문가에게 맡겨진 셈이었다.

 

 

 

3. 주의하기

 어떤 잘못이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써야 했다. 그건 수리 기사가 문제를 찾아내기 전에 제품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도록 요구하는 것과 비슷했다. 숨기고 있는 제품보다는 스스로 드러내서 수리를 받은 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다짐하는 제품의 선호도가 더 높았다.

 

 철수는 이렇데 많은 잘못이 안에 있었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놀란 것까지 잘못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주의 사항

 철수가 아이였을 때는 어른들이 다 올바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이 들고 보니, 어쩌면 아이들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제품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죄다 정신 상태가 썩었군.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싹 개조해 주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신 상태가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그렇다고 하니 곧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아무도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두들 자신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명문 대학에 다니다 온 사람도, 결혼해서 애가 하나 있다는 사람도, 기술을 배우다 들어온 사람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조교는 깐깐한 사용자였다. 설령 전자레인지를 샀다고 해도 맘에 안 들면 기필코 정수기로 만들고야 마는 사용자. 냉장고든 세탁기든 원하는 목적에 맞춰 제품을 개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냉장고도 물을 끓일 수 있고, 텔레비전도 다림질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무엇이었는지, 밖에서 무엇이었는지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 똑같아져야만 했다. 어쩌면 단 하나의 사용 설명서만 있다 해도 충분할지 몰랐다.

 

 라디오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개조하다 보니, 나중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처럼, 처음에 발견된 문제점은 사용 설명서를 한번 읽어 보는 걸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버튼 하나만 제대로 눌러 주면 되는 문제였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고치면 고칠수록 라디오는 점점 라디오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철수는 아직 무슨 제품인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철수의 사용 설명서가 완성되어 갈수록 보다 뚜렷해 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점점 더 알 수 없는 제품이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엄마도 더는 철수를 나무라지 않았다. 철수가 정상이 되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제 철수는 온전한 불량이었다. 아닐 거라고 아등바등하고 혹시 고장일까 싶어 불안해하던 때보다 오히려 나은 듯도 했다. 철수는 확실히 고장 났다. 

 사용 설명서를 읽지 않고 무작정 철수를 사용했던 모두에게는.

 

 표준은 시시했지만 오류는 언제나 생생했다.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오류는 늘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진짜 기능은 표준에 꿰맞추는 과정에서가 아니라 오류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과정에서 나왔다.

 

 고장은, 그러니까 사용했던 사람들이 말했던 고장은, 사실 철수의 잘못만은 아니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절반쯤은 사용 설명서도 읽지 않고 철수를 사용했던 사람의 잘못일 수도 있었다.

 

 

 

+. 작가의 말

 최고의 제품이라고,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불량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사실 나는 불량이거나 반품으로 들어온 것일 수도 있음을. 혹은 이미 고장이거나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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