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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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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욕망해도 괜찮아』. <헌법의 풍경>, <불편해도 괜찮아>의 저자 김두식이 창비문학블로그 ‘창문’에서 ‘색, 계 : 대한민국 아저씨들의 욕망과 규범’ 코너를 통해 연재했던 내용들을 엮은 책이다. 청춘에게는 희망을, 중년에게는 공감을 선사하는 단비 같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평생 욕망을 억누르고 규범의 세계에서 살아온 저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욕망의 건강한 고백을 시도한다. 신정아의 <4001>의 재미와 의미, 학벌이 불 지르는 희생양의 메커니즘, 사람들 사이의 궁합, 위인전 과잉의 부작용, 영화 ‘색, 계’에 대한 이야기 등의 스캔들, 학벌, 중산층문화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현상을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처럼 욕망에 대한 개인적 고백을 통해 우리 모두의 욕망을 이야기 하며 욕망을 인정할 때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저자
김두식
출판
창비
출판일
2012.05.18

 

0. 프롤로그 - 색, 계:욕망과 규범의 갈림길에서

지학순 :: 한국의 가톨릭교 주교, 민주화·평화·인권 운동가. 평생을 지역사회 문화활동, 노동자 교육, 반독재 및 부정부패 척결운동, 양심수 석방 및 민주화운동, 인권보호운동 등에 힘썼다. 특히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후,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이 만들어져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학순 [池學淳] (두산백과)

 

김용철 :: 김용철(金勇澈, 1958년 3월 27일~ ) 대한민국의 검사를 역임한 변호사이다. 특수부 검사로 일하다 쌍용 김석원 회장의 비자금 수사로 인해 검찰을 떠나 삼성그룹의 법무팀장으로도 근무하였으며, 삼성을 나온 3년 뒤 이건희 일가의 비자금을 폭로했다.

[위키백과] 김용철 [金勇澈]

 

고백이 없는 사회는 억압이 활개치지 좋은 토양입니다.

 

‘불면 혹 날아가는 나이가 불혹(不惑)‘

 

세상에는 5퍼센트의 멘토와 95퍼센트의 ‘꼰대’가 있습니다. 꼰대일수록 스스로 멘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즐겨하고, 부탁받지 않아도 서둘러 ‘멘토질’을 자처합니다. 5퍼센트 안에 드는 진짜 멘토가 되고 싶다고요? 멘토와 꼰대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아무리 좋은 멘토라도 한발 삐끗하면 곧장 꼰대로 추락합니다. 그 추락에 걸리는 시간은 0.1초입니다. 웬만하면 위험한 멘토 노릇은 안 하는 게 낫습니다. 저는 멘토가 아닙니다.

 

 

 

1. 거울부터 들여다보기 - 욕망의 인정

오버하는 아저씨들의 숨길 수 없는 욕망

‘어쩌면 인간 남성은 인간 여성보다 침팬지 수컷에 훨씬 더 가까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듣보잡'의 하루

책을 몇 권 쓰고 나서 저를 존경한다는 이메일을 가끔 받습니다. 대개는 저를 알지 못하고 글로만 접한 분들의 메일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글을 쓰다보면 누구라도 자기를 포장하기 마련입니다. 글 속에 그려진 저하고 실제 저는 많이 다릅니다. 저는 전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외 없이, 겸손하신 걸 보니 진짜로 존경스럽다는 답장이 날아옵니다. 물론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정말 당혹스럽기만 할까요? 아니죠. 솔직히 기분 좋습니다. 세상이 그런 독자들로만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습관처럼 겸양을 떨지만, 실은 그런 겸양을 떨어야 존경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겸양 떠는 것 말고 다른 반응을 배워본 적도 없습니다. 나이 먹어가면서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겸양 떠는 기술만 늘어갑니다.

 

“인간은 강렬하게 욕망하면서도,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존재이다.”

- 르네 지라르

 

삽질에 가까운 간접 자랑질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쓰기 싫으면 쓰지 마. 다 그만두고 쉬다보면 또 쓰고 싶을 때가 생겨. 그때 쓰면 돼.”

 

정직하게 거울을 들여다보면

누구도 자기 몸에 오물을 묻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지려면 선거도 치러야 하고 인사청문회도 나가야 하고 자기 약점과 오류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권력의지가 없다는 말은 그 과정을 피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깨끗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정말 권력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정직하게 그런 고백을 하는 분들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권력’은 얻고 싶어도 ‘권력의지’는 숨겨야 합니다. 권력의지를 숨길 때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모여들지만,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2. 욕망을 통해 스캔들이 왔다 - 학벌문제와 희생양 사냥

신정아 『4001』의 재미와 의미

어떤 책에서든 배울 점이 있다.

 

서점 나들이가 취미인 저는 『4001』(‘신정아‘가 쓴 책)이 나온 직후 재미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그 책이 놓인 곳 주변을 빙빙 돌면서도 막상 책을 집어 들지 못하는 독자들이 참 많더군요. 더러운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흘끗흘끗 훔쳐보다가 책을 들고 인상을 찡그리며 읽는 분들도 봤습니다. 지식인들 중에는 그런 책을 사보지 않겠노라고 선언한 분도 있습니다. 출간 2주 만에 10만부를 팔았다는 책인데, 누구도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호기심은 있어서 몰래 사보면서도, 그 사실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우리 모두가 지닌 그런 이중성은 신정아씨 사건뿐 아니라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모니카 르윈스키 ::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는 대통령의 불륜에 초점을 맞추어 1998년 9월 대통령의 위증과 권력남용이 탄핵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는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하원은 1998년 12월 19일 본회의를 열어 대통령탄핵안과 견책안에 대한 토론을 벌인 끝에 투표에 들어가 견책안은 부결되고 탄핵안은 228대 206으로 가결시켜 상원으로 회부했다. 상원에서는 1999년 2월 12일 앤드루 존슨 대통령 이후 두번째로 131년 만에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투표를 실시했으나, 하원과 달리 민주당보다 공화당 의석이 많은 상원은 위증과 사법방해 등 2개항의 탄핵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이로써 클린턴은 성추문으로 초래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클린턴성추문사건 (두산백과)

 

짐 베이커 :: 1989년 사기죄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 신우파주의자.

[네이버 지식백과] 신우파와 전통적 가치 (미국사, 2009.4.20, 미래엔(구 대한교과서))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

르네 지라르가 볼 때 욕망은 타고난 본능이나 충동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도 인간은 늘 뭔가를 강렬하게 욕망하는데 그 욕망은 자기 고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욕망은 다른 사람(모델)의 욕망을 흉내 낸 것입니다.(『폭력』219면)

진로상담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지닌 목표 또는 욕망의 상당부분은 부모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서울대에 가고도 남을 실력이 있었다. 그런데 집안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 너는 할 수 있다. 공부를 위해서라면 너에게 무슨 지원이든 아끼지 않겠다.” 많은 학생들이 이런 장탄식을 듣고 자라면서 은연중에 부모의 욕망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부모의 욕망도 오롯이 부모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엄친아’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십시오. 자녀의 대학진학을 걱정하는 부모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친구나 이웃의 공부 잘하는 아이입니다. 누구네 딸은 신문에 딸려온 전단지만 보고 혼자 한글을 익혔다더라, 누구네 아들은 전교 1등이라더라, 이런 이야기가 부모의 욕망에 불을 지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응, 우리 애는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라며 무심한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안타까움의 쓰나미가 몰려옵니다. 한마디로 이웃이 없으면 욕망도 없습니다.

모방욕망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결정적 요인입니다. 인간은 욕망이 모방적이지 않고 어린아이들이 주변사람을 모델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언어도 문화도 없을 테니까요.(『사탄』30면) 본질적으로 모방욕망은 자유와 발전을 만들어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가 경쟁과 폭력을 낳는 까닭입니다.

모방욕망은 전염병과 같아서 순식간에 사람들을 동일한 욕망으로 몰아넣습니다. 일단 동일한 욕망에 사로잡히고 나면 그 욕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앞사람의 욕망을 따라 전진할 뿐입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선망하면서 동시에 그를 미워합니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다 못해 빼앗고 싶다는 욕망을 갖습니다. 방해물이 있으면 이 욕망은 더욱 강화됩니다. 경쟁자가 있으면 욕망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욕망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모방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모방을 강화합니다. 무제한의 야망과 과도한 경쟁은 사회를 파괴합니다.

이 같은 사회 파괴는 고대사회에서 흔히 기아, 홍수, 가뭄 같은 재앙으로 연결됩니다. 때로는 정체 모를 전염병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런 자연재해조차 실은 사회적 불안이 극대화되어 무질서가 창궐하는 상황을 고대인의 부족한 언어로 묘사한 것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뭄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랜 기간 비가 오지 않아 땅은 마르고 먹을 것은 부족합니다. 공포, 분노, 적대감에 빠진 사람들은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가뭄이라는 눈앞의 현상은 모방욕망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가뭄으로 증폭된 갈등과 분노는 끝없는 모방경쟁의 결과입니다. 작년이나 재작년에 겪은 물 부족보다 올해의 가뭄이 특히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방욕망과 과도한 경쟁이 낳은 폭력성의 증대는 협동을 통한 정상적인 농사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생산성을 급격히 떨어뜨려 평범한 물 부족도 심각한 기근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갈등과 불안이 계속 고조되지만 어디에서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위기가 절정에 달해 모두가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만장일치의 폭력이 시작됩니다. 평소에는 의견이 달랐던 사람들도 누군가를 죽여 위기를 해소해야 한다는 데 쉽게 합의합니다. 마녀사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가뭄이 극심한 상황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왕의 목을 치기도 합니다.

이 같은 만장일치적 폭력에는 희생자의 제자나 신하까지 배신을 통해 묵시적으로 가담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현장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그런 예입니다.(『희생양』175면) 예수를 죽일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했던 유명한 말은 만장일치적 폭력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당시 유대사회를 대표하던 인물(모델)이 경건한 확신을 갖고 만장일치적 폭력을 유도하는 것입니다.(『희생양』186면) 만장일치적 폭력이 시작되면 공격자들은 희생자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듭니다. 분노와 두려움이 낳은 놀라운 폭력성으로 희생자를 문자 그대로 찢어 죽이고 때로는 그 시체를 잘근잘근 씹어 먹습니다. 르네 지라르는 이 같은 엽기적인 폭력을 묘사하기 위해 ‘린치’(lynch)라는 영어 표현을 빌려옵니다.(『사탄』87면)

이런 폭발적인 폭력과 희생을 통해 사회는 질서와 평화를 되찾습니다. 왕의 멱을 따는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며 비가 펑펑 내리기 시작합니다. 희생양이 죽으면서 페스트는 치유되고, 자연재해는 물러가며, 혼란은 가라앉고, 막혔던 것은 통하고,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희생양이 진짜로 페스트를 치유하거나 자연재해를 물리치지는 못하지만, 개인 사이에 극대화되었던 불화를 정리함으로써 위기를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희생양』77면)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에 대해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한 개인을 의심하여 살해하고 추방한 사람들이 이제 그 억울한 개인에 대해 과도한 숭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신화화(神話化)의 과정을 거쳐서 신적인 존재로 부활합니다. 이게 바로 서양의 여러 신화에서 시작되어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신화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종기가 생겨 터지기까지의 과정과 비슷합니다. 몸이 피곤할 때 피부의 어떤 한 부분이 점점 붉게 부어오르면서 고통을 느낄 때가 있죠. 처음에는 꽤 넓게 분포되어 있던 붉은 기운이 서서히 기분 나쁜 검붉은 색으로 변하면서 크기는 조금씩 작아집니다. 그러면서 중앙에 하얀 색깔의 농이 고이기 시작하죠. 이때가 고통이 극대화되는 시기인데, 모방욕망으로 고조된 위기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집단 전체의 폭력성이 한 사람의 희생양에게 집중되는 것은 농양이 중앙에 뭉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농양이 터져서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순간, 고통이 사라지고 이제 살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처럼, 희생양을 통해 집단은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게 되죠.

- 폭력은 성스럽다. (르네 지라르)

 

학벌이 불 지르는 희생양 메커니즘

“보수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고 진보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는다. 우파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생이 되길 소망하고, 좌파 부모는 아이가 좌파적인 일류대생이 되길 소망한다.”

- 김규항 (칼럼니스트)

 

최근 인기를 끄는 다큐멘터리 방식의 짝찾기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들을 정리하는 기본 프로필은 딱 두 가지입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두 번째 프로필은 가끔 어떤 부모를 두었느냐 따위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첫 번째 프로필은 빠지지 않습니다. ‘남자 1호’ ‘여자 2호’ 하는 방식으로 이름을 빼앗고 번호를 부여하면서도 학벌만은 생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희생양 변양균과 제사장의 윤리

변양균 실장이 특별교부세 대상이 아닌 흥덕사와 보광사에 특별교부세를 지원하도록 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유죄가 인정된 부분은 변실장에 대한 공소사실의 핵심이 아니었습니다. 검찰이 이것저것 쑤시는 과정에서 밝혀진 지엽적인 과오였습니다. 변양균 실장에 대한 공소사실의 핵심은, 그가 성곡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신정아씨의 입지 강화를 위해 온갖 대기업 대표나 경영자들에게 영향력 행사하여 미술관 협찬 요구함으로써 제3자 뇌물 수수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를 범하고, 기획예산처 장관의 지위를 이용하여 동국대 총장에게 신정아씨의 교수 임용을 부탁하며 뇌물을 수수했으며, 광주 비엔날레 예술 감독 선정에 관여하여 업무방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담은 공소사실은 그동안 언론이 앞 다투어 보도했던 각종 의혹들의 결정판입니다. 그런데 법원은 이들 대부분이 증거가 없거나, 사실이라 하더라도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변양균 실장이 대부분의 공소사실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어떤 신문, 방송도 그의 무죄사실은 열심히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희생제사가 끝난 후 그 고기는 원래 제사장들의 몫입니다. 만장일치적 폭력이 끝나고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제사장들은 희생양의 고기를 뜯어먹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에게는 일반인보다 엄격한 윤리가 요구되며, 거룩한 제물을 상하지 않게 할 의무가 부과됩니다. 희생양을 잡아먹는 대신 그들을 보호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레위기』21, 22장)

 

 

 

3. 사랑에 빠진 아저씨 - 제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의 열정

'상하이 스캔들'에서 '돼지들에게'까지

2011년 3월 우리나라는 또 하나의 스캔들로 떠들썩했습니다. 중국 상하이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다가 2010년 11월 국내로 조기 소환된 영사 한 명이 ‘덩 여인(덩신밍)’이라는 중국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이른바 ‘상하이 스캔들’이었습니다.

 

스캔들은 ‘스칸달론(skandalon)’이라는 헬라어 명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길을 가다가 ‘부딪히면 넘어지는 돌’이라는 원뜻을 갖고 있습니다. 쉽게 피할 수 있는 일반적인 장애물이 아니라, 거의 피할 수 없는 기묘한 장애물입니다. 르네 지라르는 ‘스캔들’이 모방적 경쟁 상태와 그 결과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사탄』30면)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 자주 나오지만 우리말 성서에서 다른 단어들로 번역되어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8장의 한두 구절에서 스캔들이라는 원어 표현을 살려보면 이렇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스캔들에 몰아넣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스캔들에 몰아넣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태복음』 18:8~9) (번역본에서는 ‘스캔들에 몰아넣거든’ -> ‘범죄하게 하거든’) 아주 유명한 구절인데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지요?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라는 원뜻을 곱씹으면, 스캔들이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상하이 스캔들’은 상하이 영사관에서 비자담당 업무를 맡고 있던 허아무개 영사가 33세의 덩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중비자를 내주고 덩씨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불법으로 비자를 발급해 준다는 소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뒤이어 국무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에는 다른 영사들도 덩씨와 부적절한 관계가 의심된다는 제보가 접수되었습니다. MB정권 200여명의 휴대전화 번호 등 각종 문건이 덩씨에게 유출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만일 이 번호가 외국 정보기관으로 넘어가면 통화내용이 도청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른바 ‘전문가’의 말이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한국판 색, 계’ 따위의 선정적인 제목이 신문에서 춤을 추었지만, 누가 봐도 간첩사건으로 비화될 내용은 아니었지요. 정부 합동조사단이 중국에 파견되는 등 소란을 떤 끝에 사건은 곧 스파이 사건이 아닌 영사들간의 단순 ‘치정’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덩씨에게 유출된 자료들은 주로 법무부 소속의 허 영사가 넘겨준 것이고, 일부는 다른 영사들이 유출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덩씨의 정체는 비자 브로커로 발표되었습니다. 조사 후 이어진 징계에서 총영사는 해임되었고 일부 영사는 감봉 처분을 받았습니다. 허 영사는 이미 퇴직했기 때문에 징계를 받지 않았지요. 시끄러웠던 시작에 비해 용두사미로 흐지부지 종결된 스캔들이었습니다. 허 영사 외에는 어느 누구의 부적절한 관계도 확인된 적이 없습니다. 언론의 과장된 보도 때문에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난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머니가 털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

그날 이후 열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쳤댔다.

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나는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꺽었다.

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인 없는 꽃밭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 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

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티는 계속되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 최영미, 「돼지들에게」

 

세계를 해석하는 입들은 지치지도 않네.

마이크 앞에서 짖어대는 늙고 노회한 여우와

그를 따르는 어리고 단순한 개들.

善을 말하는 입은 惡을 말하는 입보다 삐뚤어지기 쉬우니,

기름기 흐르는 입술로 아름다운 말들로

대중을 속이는 당신.

박수소리에 도취해, 자신의 위대함에 속아

스스로에게도 정직하지 못한 예언자.

겸손한 문체로 익명의 다수에게 다정한 편지를 띄우지만,

당신처럼 오만한 인간을 나는 알지 못하지.

당신보다 차가운 심장을 나는 보지 못했어.

계산된 ‘따뜻’에 농락당했던 바보가 탄식한다.

늦었지만,

순진을 벗게 해줘서 고마워.

선생님.

- 최영미, 「하늘에서 내려온 여우」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 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 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 나는 슬프다.

- 최영미, 「돼지의 변신」

 

진짜 진주는 자신이 진주임을 모른다.

뭇 구슬들이 시기하고

뭇 돼지들이 탐내는 보석,

진주는 자신의 빛나는 몸을 가리는 외투가 없다.

자신을 보호할 껍데기가 없는 진주는

심심한 돼지와 한가한 여우들이 즐기는 간식,

돼지들의 노리개가 되지 않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진주는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 년이 못 되어

자신의 단단한 성이 답답했다.

깊은 산중에서 혼자 지내다 병에 걸린 진주는

도시로 나왔다. 하룻밤 잘 곳이 없어 찾아간 진주를

하나뿐인 친구는 병원 냄새가 난다며 밖으로 내쫓았다.

밖은 찬바람 이는 겨울.

붕대를 맨 진주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믿었던 친구에게 버림받은 그날 저녁,

진주는 여우를 만났다.

- 최영미, 「비극의 시작」

 

짐승 중에 가장 인간에 가깝다는 여우선생이

제과점에서 진주와 마주앉아 우유를 마신다.

여우는 진주의 목도리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고

진주는 여우의 목소리가 근사하다고 답례하고

가볍게 날씨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은 일어선다.

오후 다섯시,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어디 가서 무얼 먹을까 마실까?

망설이던 진주에게 여우 선생이 불쑥 제안한다.

우리, 버스정류장에 가서 아무 버스나 탈까?

네?

여우와 진주는 버스를 타고 교외로 소풍을 간다.

나란히 앉은 여우의 손이, 우연인 듯 진주의 손을 스쳤다.

그래서…… 여우와 진주의 러브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찻집에 들어가 서먹서먹 차를 마시고

서울로 귀환해 휘황한 길모퉁이에서

여우는 진주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했다.

사소한 친절이었지만 진주는 감격했다.

추위로 얼어붙은 진주의 빰에서

눈물이 고드름처럼 녹아 흘렀다

진주의 눈물을 보고 여우는 흐뭇해했다.

(이제 진주가 곧 내 것이 되겠군)

여우는 진주에게 몇 가지 작은 친절을 더 베풀었다.

그 다음은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그대로다.

- 최영미, 「여우와 진주의 러브스토리」

 

제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의 열정

이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계(戒)’, 즉 규범의 세계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늘 칭찬받았으며, 규범을 어긴 일이란 기껏 과속딱지 몇 번 끊은 게 전부입니다. 룸살롱을 찾아다니면서 몸을 함부로 굴린 사람들도 아닙니다. 법을 만들어 적용하고 집행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돼지나 여우 선생님처럼 진보 지식인으로 살아온 분들, 심지어 감옥에 다녀온 분들은 규범과 거리가 멀지 않냐고요? 겉모습이 달라 보일 뿐, 남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교하며 살아왔다는 점에서 이들도 본질적으로는 ‘계’에 속합니다.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훌륭한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깊은 내면에서 이들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입니다.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에너지’이기도 하며,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트(S. Freud)가 말하는 ‘이드(id)’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색(色)’,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 10대 중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소년은 남성의 내면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조물주의 설계에 따르자면 바로 그 즈음에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하는 에너지입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그랬던 것처럼 주로는 섹스를 통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욕망을 찍어누른 사람만이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는 엉뚱하게도 도서관, 고시원, 영어학원에서 대부분 소비됩니다. 그런 에너지 소비가 ‘건강한’ 것으로 권장되기도 합니다. 남녀 불문하고 다들 비슷한 형편이라 어차피 연애할 상대방도 시간도 공간도 찾기 어렵습니다. 취직, 고시, 유학 준비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더욱 ‘계’에 속한 인간으로 변해갑니다. 그런 극심한 경쟁을 거쳐서 겨우 결혼할 여유를 갖게 되었을 때, 상대방을 고르는 기준도 ‘색’보다는 ‘계’에 속한 것들입니다. 어떤 집안 출신인지,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 직장은 어디인지, 얼마나 장래성이 있는지, 건강한지, 품성이 안정적인지 등등을 빼놓은 배우자 선택이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계’에 속한 청년들은 이 모든 것에 외모를 더하여,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괜찮은’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합니다. 한눈에 반했다거나, 불꽃같은 연애를 했다는 사람들도 이런 기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강한 끌림, 성적 매력 같은 것을 배우자 선택의 기준으로 삼으면 덜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입니다. 연애와 결혼은 구분된다는 가치관도 결국 ‘색’에 대한 ‘계’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할 뿐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규범적인 ‘계’의 남자들은 좋은 직장과 안정된 가정을 지닌 사회지도자로 자리잡습니다. 원래는 에너지를 충분히 사용하고 누린 다음에야 어른이 되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만이 ‘훌륭한 어른’이 됩니다. 그저 ‘어른 행세’하는 법만 배운 소년들이 ‘훌륭한 어른’타이틀을 거머쥐는 셈이죠. 인간이 평생 써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볼 때, 지랄이라는 실탄을 거의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겉은 멀쩡한 어른인데 마음 깊은 곳 감성의 어느 한구석은 텅 빈 소년들입니다. 갈 곳을 잃은 ‘색’은 마음 한구석의 더 어두운 공간으로 숨어들어갑니다. 잠복할 것일 뿐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소년이 어느날 소녀를 만납니다. 일 때문에 우연히 만난 여성이 덥석 소년의 손을 잡는 순간, 평생 ‘계’의 세계에서 살아온 이 규범남은 거짓말처럼 우르르 무너집니다. 그리고 일순간 ‘색’의 세계로 몸을 던집니다. 좋게 보면 순수하고, 나쁘게 보면 한없이 유치한 사랑놀이가 시작됩니다. 상대방과 나 사이의 자아경계가 무너지는 상태를 뒤늦게 경험합니다. 그녀 앞에 서면 어린아이가 됩니다. 남이 보면 유치해서 쓰러질 편지를 쓰고, 낯 뜨거운 애칭을 부르며 서로를 갈망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 사랑의 결과 많은 것을 잃기도 합니다.

대체로 이들이 갈구하는 것은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문자 그대로 ‘색’입니다.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있고, 이미 성경험을 할 만큼 한 사람들인데 이상하게도 육체적인 사랑에 매몰됩니다.

 

일탈의 길과 사냥꾼의 길

일탈의 길에 빠져든 소년들의 반대편 극단에 ‘사냥꾼이 된 소년’들이 존재합니다. 사냥꾼이 된 소년들은 ‘계’에 속한 남성의 결정판입니다. 이 소년들은 남의 사생활에 유난히 관심이 많습니다. 억눌린 욕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엿보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늘 차가운 눈을 번뜩이며 ‘주변에 누가 혹시 남몰래 행복한지’ 감시합니다. 다른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스캔들을 들으면 그 이야기를 보물처럼 간직하며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풀어놓습니다. 회사에도 교회에도 온통 이런 사람들이 넘쳐나서 굳이 예로 들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스캔들을 보면서 눈을 번뜩이는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은 과연 스캔들 당사자의 욕망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을까요?

 

똥아저씨(변양균), 허 영사 등은 소년 중에서 어쩌면 가장 순수한 축에 속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에도 그런 소년이 존재함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침팬지와 나의 유사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침팬지보다 인간에 훨씬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누구나 정신승리는 필요하다 - 욕망의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

그들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는, 결코...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서 치른 첫 번째 모의고사에서 저는 반에서 4등인가 5등인가 했습니다. 영어는 절반도 맞히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볼 때마다 “너 무슨 일 있니? 어떻게 된 거야?” 물으며 걱정했습니다.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들도 “이게 뭐야?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하며 혼을 내셨습니다. 교무실에도 여러 번 불려갔습니다. 복도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은 “열심히 해야지. 다음번에는 제자리 찾을 거지?”하시며 동네북처럼 제 머리를 툭툭 치셨습니다. 선생님과 전교생이 모두 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절망이 엄습했습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시절이었지만 가슴은 쓰렸습니다. 영어, 수학이라는 게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있는 과목이 아니었으므로 역전의 가망성도 없었습니다.

까딱하면 정신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머리를 처박고 엎드려 있는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주 사소하고 돌발적인 의문이었지만, 그 질문은 제 인생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답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죠. 복도에서 제 머리를 치는 선생님들, 제 처지를 걱정해주는 친구들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보았지만 그중에 저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까지 김두식 학생의 운명을 염려하는 선생님이 한분이라도 있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자기 인생이 바쁘고 절박해서 제 인생까지 따로 걱정해줄 여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복도와 교실에서 그렇게 깊은 관심을 표시한 이유는 뭘까요? 그 답도 분명했습니다. 서로 할 말이 없었던 거죠. 복도에서 스쳐지나가는 어색한 순간을 대우기 위해, 그 짧은 시ㄷ간에 없는 애정을 억지로 표시하기 위해 선생님들은 제 머리를 툭툭 치신 겁니다. 친구들 역시 고3 초창기 음울한 분위기에서 뭔가 안주처럼 씹을 이야기가 필요했을 뿐이고요. 돌아서서 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순간 그들의 머리에서 저라는 존재도 자동으로 사라졌을 게 틀림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깨닫자 이상하게도 제 마음에 깊은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민감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만난 거죠.

 

명절 때면 만나는 친척들의 질문도 뻔하지 않습니까? “공부는 잘하니? 몇 등이나 하니?” “어느 대학 갈 거여? 무슨 과를 목표로 하니?” “취직은 했나? 청년실업이 요즘 큰일이라던데.” “시집은 언제 가? 사귀는 사람은 있어?” “지난번 사귄다던 사람이랑은 어떻게 됐어? 결혼 안 해?” “좋은 소식 없어? 결혼한 지 벌써 1년이잖아?” 이렇게 추궁하고 또 추궁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결국 다시 한 바퀴 돌아 이제는 똑같은 질문이 자녀에 대한 것으로 형식만 약간 바뀝니다. “애는 공부 잘하니? 몇 등이나 하니?” “그 집 애는 어느 대학가요? 무슨 과가 목표예요?” 결국 답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간 때우기용 질문들입니다. 친척이나 친지 관계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주는 무한순환 질문일 뿐이죠. 무의미한 질문인 만큼 그저 최대한 무의미하게 답하면 그만입니다. 어차피 상대방이 나의 답변을 기억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 명절이면 또 똑같은 걸 물어볼 게 틀림없습니다.

 

사람 사이에는 궁합이 있다

어디를 가나 청중과 독자의 반응은 10퍼센트의 과도한 호감, 10퍼센트의 과도한 비난, 그리고 80퍼센트의 무덤덤함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교수가 노동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발언을 했다고 칩시다. 그 발언의 구체적인 어떤 부분에서 숨겨진 우월감 또는 편견을 발견하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빨리 사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명문대 교수 노릇하며 온갖 기득권을 누린 사람이 왜 노동 이야기까지 하면서 잘난척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빨리 사과하되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는 게 좋습니다. 지금 와서 그의 과거 또는 존재 자체를 모두 바꿀 방법은 없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이 너무 집요하게 내 존재를 물고 늘어질 때는 자연스럽게 그의 욕망이 문제가 아닌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뭐든 너무 집요해질 때는 집요한 사람 자신의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가볍게 털고 자리를 피해야죠. 가끔 조심해야 할 때도 있는데, 상대방이 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내 똑똑함을 알아주세요“ ”사랑해주세요“인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죽자 하고 논쟁을 벌이거나 너무 빨리 자리를 피했다가는 그와 좋은 관계를 만들 아까운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놀라운 관점, 총명함을 그냥 칭찬해주면 되는 건데, 방어적으로 칼을 휘두르다가 상대방을 다치게 해서는 곤란하지요.

여기까지 살펴봐도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궁합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 잘못도 그의 잘못도 아닌, 그냥 안 맞는 관계인 거죠.

 

싸우지 않고 조용히 손을 터는 것도 지혜이자 용기입니다. 자신과 안 맞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절교할 용기, 살벌한 눈빛을 간직하기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일 겁니다.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한때는 교과서에도 실렸을 만큼 대표적인 성서 구절이지요. 그런데 세계적인 신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는 그의 책 『예수와 비폭력 저항』에서 여기 나오는 오른편, 왼편 뺨의 순서에 주목합니다. 먼저 얻어맞은 뺨은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 뺨입니다. 누군가 나의 오른편 뺨을 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왼편 손바닥이겠지요. 하지만 예수시대의 유대사회에서는 공적인 상황에서 왼손의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뺨을 때릴 때도 왼손은 쓸 수가 없었습니다. 마주본 상태에서 상대방을 때리려면 오른손을 써야 합니다. 오른손으로 오른편 뺨을 때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른편 손바닥이 아니라 오른편 손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을까요?

오른편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은 상해를 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남편, 노예주인, 상관 같은 윗사람이 아내, 노예, 부하 같은 하급자에게 모욕을 주면서 ‘너는 나에게 꼼짝 못하는 존재이고, 나는 네 주인’이라는 걸 일깨워줄 때 오른편 손등을 사용합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층민중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데 익숙했습니다. 오른편 뺨을 맞는다는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는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나약하게 “나를 한 대 더 때려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왼편 뺨을 때리려면 주인은 오른편 손바닥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른편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때리는 것은 대등한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의미합니다. 즉 노예가 주인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때릴 때 때리더라도 나를 더 이상 노예로 보지 말고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해 달라는 반항입니다.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은 역시 목숨을 건 결기입니다. 노예가 되지 않고 당당한 인간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평화적인 저항수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사라진 세상에서 굳이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지만, 이런 결기, 눈빛, 에너지는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중요합니다.

 

 

 

5. 중산층의 은밀한 욕망 - ‘사(士)’자 가족 vs. ‘사자 가죽’(Lion’s Skin)

가족 이야기를 꺼내기 전의 안전판 하나

계간 『창작과비평』2009년 여름호에는 시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국민일보』정철훈 문학담당 기자의 글이 실렸습니다. 「잉여인간」(1958)으로 유명한 소설가 손창섭(1922~2010)의 마지막 나날들을 추적한 글입니다. 손창섭은 1973년 일본인 아내를 따라 도일한 후 소식이 완전히 끊겨 한국현대문학사상 가장 극적인 증발사례가 됩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 문단에는 그가 주일 한국대사관 앞에서 가끔 통곡하다가 돌아간다든지 동서고금의 명언명구를 베껴 쓴 ‘구도원(求道院)‘이라는 전단지를 나누어준다든지 하는 소문만 떠돌았습니다. 그가 일본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서도 원고료가 넉넉하지 않아서였다든지, 유신체제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든지 하는 각종 미확인 주장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만큼 분명한 것이 많지 않은 안개 속의 작가였습니다.

정철훈 기자는 2009년 비로소 손창섭의 일본 주소를 알아내 그의 집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손창섭은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을 눈앞에 둔 상태였지요. 정 기자는 그의 아내 우에노 치즈꼬(上野千鶴子) 여사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에노 여사의 이야기는 손창섭에 대해 알려졌던 기존의 주장을 대부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우에노 여사는 손창섭의 도일이 유신체제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에노 여사가 일본에 나가 살 결심을 하자 손 선생이 따라왔을 뿐, 이념이나 정치적 이유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철훈 기자는 손창섭에 관한 우리 문단의 다른 오해도 하나씩 풀어갑니다.

손창섭에 대한 그동안의 오해는 대부분 손창섭 자신의 대표적 「신의 희작」(1961)에서 비롯됩니다. 「신의 희작」의 주인공 ‘시시한 소설가 S’는 열세 살 때 어머니의 외도현장을 목격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S를 버리고 그 남자와 만주로 도망가지요. 그렇게 버림받은 기억 탓인지 S는 성장한 후에도 늘 야뇨증에 시달리고, 자기 성기를 학대하며, 아무하고나 살기 넘치는 싸움을 벌이는 망나니생활을 합니다. 여성들과의 관계도 하나같이 강간을 통해서만 맺어집니다. 그야말로 인간 말종입니다.

그에게는 일본유학 중에 만나서 ‘어른들 몰래 건드렸다가’결국 아내로 맞아들인 일본인 처자가 있는데, 그 이름은 치즈꼬입니다. 치즈꼬와 동거 중에 아들을 낳고 둘째까지 임신시킨 상태에서 홀로 귀국한 S는 노숙자, 거지, 깡패, 얼치기 좌파 식객, 도둑 등 온갖 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전국을 유랑합니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부산에서 우연히 치즈꼬와 해후하지만, 그녀는 믿었던 S의 친구 기택에게 강간까지 당한 후입니다. 치즈꼬와 과거를 잊고 새롭게 출발하자고 약속한 후에도 S의 기행은 멈추지 않습니다. 50~60년대 작가답지 않게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넥타이도 매지 않으며, 남의 결혼식, 장례식, 졸업식, 수상식, 기념회에는 일절 참석하지 않고 문학하는 사람들과는 아예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신의 장난거리(戱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신의 희작」이 손창섭의 자전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에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다, 첫 줄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시한 소설가로 통하는 S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삼류작가 손창섭씨는, 자기 자신에게 숙명적인 유머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일직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개가했으며,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했고, 귀국 후 군밤장사, 넝마장사 등을 전전한 끝에 소설가가 된 손창섭의 이력도 이 소설을 자전적으로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가 소설에서 사용한 치즈꼬라는 아내의 실명도 그런 추측을 사실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지요.

그러나 정철훈 기자가 만난 우에노 치즈꼬 여사는 이 소설이 사실과는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손창섭이 세 살 때 어버지를 여읜 것은 사실이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머니가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를 종용해 재혼을 시켰을 뿐, 외도의 목격은 사실이 아닙니다. 평양 유곽거리에서 자라 야뇨증에 시달렸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손창섭은 할머니와 숙모의 손에서 별문제 없이 성장했고, 일본에서 만난 아내 치즈꼬와 부산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등단 후에는 부부가 함께 서울 흑석동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입양한 딸 외에는 혈육이 없습니다. 손창섭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지만 아내와 수양딸에게는 자상하고 섬세한 가장이었습니다. 결국 정철훈 기자가 전한 우에노 치즈꼬 여사의 목소리에 따르면, 소설의 모든 내용은 ‘민나 우소데스(전부 거짓말)’였던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반전입니다. 어차피 소설이란 처음부터 거짓말이라고 선언하고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만든 이도 읽는 이도 내용이 거짓임을 압니다. 그런데 손창섭은 거기에 버젓이 자화상이라는 부제를 붙였고, 자기와 아내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독자들이 자전소설로 믿도록 기묘한 장치를 붙인 거죠. 게다가 제목까지 ‘신의 희작’입니다. 소설 속의 S가 신의 희작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작품 자체가 신의 희작일 수도 있습니다. 우에노 치즈꼬 여사의 증언으로 진실이 밝혀진 걸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정철훈 기자는 우에노 여사의 말이 진실이라는 쪽으로 글을 썼지만, 고인이 된 손창섭의 소설보다 살아 있는 우에노 여사의 말을 믿어야 할 객관적인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의 불화

얼마 전 『왜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꿈꾸는가』라는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심리치료 전문가 에스더 페럴(Esther Perel)은 상담을 받고자 찾아온 제임스라는 남자에게 “어머니에 대해 들려주세요.”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제임스는 이렇게 답하죠 “우리 어머니요? 시간 낭비하시는 것 아닌가요? 몇 년 전에도 상당을 받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어머니 얘기를 묻더군요.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정신분석 또는 심리치료라는 게 늘 비슷하죠. 남자라면 어머니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어머니 이야기로 끝나고, 여자라면 아버지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아버지 이야기로 끝나는 게 보통이니까요. 프로이트 이후 너무 천편일률적인 경향이라서 이제는 지겹다 못해 “또 어머니 이야기를 하란 말입니까?”라고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죠. 그런 제임스에게 저자는 ‘근원지를 찾아 올라갈 필요’를 이야기합니다. 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해 처음 배우는 곳이 집이기 때문에 가족의 정서적인 의미는 친구, 풋수랑, 선생님, 애인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설득하지요. 그 뒤에는 “어머니의 기분이 나아지려면 족히 일흔두 가지나 되는 것이 필요했다.”는 제임스의 회고와, 어머니에게 하듯 매사에 아내의 기분까지 맞추려고 하다가 오히려 관계가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이어집니다. 이런 책들이 늘 그렇듯 원인을 밝히면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되고 대충 해피엔딩으로 사례가 마무리됩니다.

 

‘영어 못하는 한국인’인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영어 못하는 한국인’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겁니다. 미국인 앞에서 영어하는 게 훨씬 쉽습니다. 미국인은 알아서 제 영어를 듣고 이해해주니까요. 3인칭단수 뒤에 동사에 s 붙이는 걸 까먹은 실수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집어내는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라 ‘영어 못하는 한국인’입니다. 저도 그중의 하나라서 잘 압니다. 자기는 영어 한마디 못해도, 남의 영어 실수는 쉽게 잡아내듯이, 자신의 은근한 욕망은 몰라도 남의 은근한 욕망은 귀신처럼 잡아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은근한 자랑이 상대방에게 먹혀들기를 원하지만, 누구도 상대방의 은근한 자랑을 듣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은근해도 내 자랑이 상대방에게 순수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사자 가죽

벤자민 스포크 :: 벤저민 스폭(Benjamin Spock, 1903년 5월 2일 ~ 1998년 3월 15일)은 미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작가이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46년에 간행된 육아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42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5000만권 이상의 판매고를 보인 베스트셀러이다.

[위키백과] 벤저민 스폭 [Benjamin Spock]

 

써머힐 (Summer Hill) :: 영국의 교육자 니일(Neil)이 1921년 세운 대안학교로 어린이들의 자유의사를 최대한 키워주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음

 

「사자 가죽」(Lion’s Skin, 써머싯 몸(Somerset Maugham)의 소설)의 주인공, 1차 대전에 참전한 로버트 포리스티어 대위는 야전병원에서 근무하던 엘레노어를 만나 첫눈에 반합니다. 전선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사를 넘나들었다는 그가 야전병원에 입원한 이유는 사실 피부 종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포리스티어는 엘레노어와 결혼해 부자 아내의 재산에 얹혀 빈둥거리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서도 늘 “신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사람은 자기 계급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지요. 그의 자부심은 자신이 신사, 즉 젠틀맨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허세를 부렸건만, 이미 이웃사람들은 모두 포리스티어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웃집에 사는 아저씨가 오래전 인도에서 세차장 직원으로 일하던 포리스티어를 만난 적이 있었던 까닭이지요. 하층 계급이던 포리스티어는 전쟁의 혼란기를 이용해 일종의 계급세탁을 한 것입니다. 이웃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리스티어는 계속 신사 행세를 합니다. 다행히도 엘레노어는 남편의 전력을 알지 못한 채 신사 남편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결혼 생활이 16년차쯤 되었을 때 포리스티어 부부의 집에 불이 납니다. 외출 중이던 포리스티어 부부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불이 번진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저 망연자실, 화염 속에 무너지는 집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엘레노어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우리 개가 아직 집 안에 있어요!”그 소리를 들은 포리스티어는 주저없이 개를 구하기 위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합니다. 동네사람들은 너무 위험하다며 포리스티어를 붙잡죠. 지금 개를 구하러 들어가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 짓입니다. 그러나 포리스티어는 이렇게 말하며 만류를 뿌리치고 집안으로 뛰어듭니다. “무릇 신사가 뭔지를 당신들에게 보여주겠어!”

한시간 후 잿더미 안에서 포리스티어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그의 팔에는 개의 시신이 안겨 있었습니다. 포리스티어는 너무 오랜 세월 신사 행세를 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입니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채 콧노래를 부른 당나귀처럼요.(이솝우화) 그래서 진짜 시사들도 하지 않을 ‘신사다운’ 행동을 하다가 목숨까지 잃습니다. 진짜 신사들은 신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지키지 못할 규범은 적당히 무시합니다. 그런데 가짜 신사인 포리스티어는 머릿속으로 가상의 교범을 만들어 누구보다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런 가상의 교범에 적혀 있는 내용 중의 하나가 신사는 자기 개를 치누로 생각하고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신화였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짓 이미지를 믿고 자기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진짜 사자의 삶

신사, 즉 젠틀맨의 어원은 젠트리(gentry)입니다. 젠틀맨은 꼭 영국의 귀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상류층 남자를 일반적으로 지칭합니다. 그러나 신사가 좋은 교육을 받고 상류층이 될 수 있는 기반은 대부분 상속받은 땅입니다. 상속받은 땅을 가진 사람만이 소작인의 노동에 기반한 소출 위에서 공부도 하고 사회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제인 에어』『폭풍의 언덕』『오만과 편견』『채털리 부인의 연인』 등 어떤 작품을 봐도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의 영국신사들은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마크나 카르타(Magna Carta, 1215년 영국귀족들이 국왕 존(John)에게 강요하여 왕권의 제한과 제후의 권리를 확인한 문서. 영국헌법의 근거가 된 최초의 문서) 이후 헌법과 기본권이 크게 발전했지만, 프랑스처럼 혁명다운 혁명을 거치지 않은 까닭에 영국은 사회구조의 근본이 뿌리째 흔들려본 적이 없습니다.

 

요즘 무슨 유행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를 말하지만 영국 신사들의 ‘노블레스 오블루지’란, 세계대전 같은 엄청난 사건을 당대에 겪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식민지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시스템 안에서의 의무입니다. 규모를 유지하려면 유산이 가급적 한명의 아들에게 모아져야 하므로 아들들 중 일부가 전쟁터에서 죽어주는 것도 계급을 지키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아들 하나가 죽으면 노동력의 손실로 당장 먹고살 게 줄어드는 중산층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자 가족의 ‘사자 가죽’

최근 『헤럴드경제』는 1966~74년에 2차 베이비붐 세대로 출생한 사람들을 아예 F세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들은 최다 인구층(Formidable members)이면서도 주목받지 못한 ‘잊혀진(Forgotten) 세대’입니다. 신구세대의 가교(Fusion) 역할이 가능하며, 소셜미디어 장악(Facebook)을 특징으로 하지만, 이들의 내면에는 분노(Fire)가 자립합니다. 중요한 건 이 세대 대부분이 여전히 ‘자기’ 집 없이 전세, 월세, 사글세로 산다는 사실입니다. F세대 중 30대는 54.6퍼센트가, 40대는 43.3퍼센트가 제집 마련을 위해 빚을 진 상태입니다. 자녀교육에도 돈을 쏟아 붓느라 가계에는 주름 펼 날이 없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

 

우습게도 이 사회에서는 상류층 사자들이 중산층 당나귀에게 ‘사자 가죽’을 뒤집어쓸 것을 권유합니다. 당나귀들이 사자에게 요구되는 규범성을 갖추면, 진짜 사자 입장에서는 다스리기가 훨씬 쉽습니다. 사자에게나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자도 지키지 않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당나귀들이 실천하기 시작하면, 사자의 삶은 훨씬 편해집니다. 사자들은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상류사회에서 놀고먹으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면 됩니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들은 늘 자기가 더 열심히 살았어야 한다고 자책합니다. 진짜 사라들에게 뭘 요구할 생각을 못 합니다. 사자보다 열심히 ‘계’를 지키다 못해, 나중에는 더 못하는 빈곤층의 토끼나 양한테까지 그 ‘계’를 강요하는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합니다.

가끔 가다가 사자에게 불만을 느끼는 당나귀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당나귀도 ‘사자 가죽’이라는 규범의 틀만은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사자 가죽’을 쓴 논객 당나귀는 가끔 사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논객 당나귀가 가장 싫어하는 대상은 사자가 아니라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다른 당나귀입니다. “저 당나귀는 토끼와 양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사라를 위해 일하는 가짜”라고 서로 손가락질 합니다. 특별한 당나귀를 추종하면서 서로 패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게 사자가 만든 규범인 것도 모른 채, 그 규범을 손에 들고 끊임없이 다른 당나귀를 사냥합니다. 사자들은 날로 살찌고, 당나귀들은 날로 말라갑니다. 땅이 너무 황폐해지면 적절한 당나귀를 찾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위인전 과잉의 부작용

킹 목사는 그를 공산당으로 몰려 했던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의해 상시적으로 도청당하면서도 혼외정사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시민권운동 중에 그 많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섹스파트너와도 매일 만났습니다. 도청을 통해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던 린든 존슨 대통령같은 보수 지도자들은 킹 목사를 ‘위선적인 설교자’라고 맹비난했습니다. 시민권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FBI는 킹 목사에게 “당장 운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여자문제를 폭로하겠다”는 익명의 협박 메일을 보냈습니다. 킹 목사의 측근들도 그가 여자문제에 약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킹 목사의 위대함은 그런 개인적인 약점과 한계를 안고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위인전들은 당연히 그런 이야기를 소개하지 않고, 코레타 스콧 킹(Coretta Scott King) 여사와의 사랑과 우정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빠지고 날조된 신화만 넘치는 위인전들 덕분에 우리는 인생 선배의 삶을 통해 욕망과 조심스럽게 동행하는 길을 모색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한 인간이 지닌 이런 복잡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빠진 전기류들은 세상에 존재하기 힘든 가상의 위인들을 목표로 삼아 앞으로 달려 나가는 고된 삶을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그런 위인이 될 가능성은 0.0001퍼센트도 안 되는데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뛰는 꼴입니다.

 

 

 

6. 색의 인간, 계의 인간 - 성북동과 형

어느쪽 친구들과 놀 것인가

삼중당문고 :: 1975년 발행된 500권 문고집.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성취가 자기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은 재벌 2세도 그 이후 기업이 조금이라도 성장하면 자기 성과물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사법시험 합격을 ‘운’이라고 말하면서도, 거기 투자했던 노력만큼은 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모든 성취도 어떤 경계선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중산층의 재산적 여유가 확보해준 시간이 공부할 기회를 주었고, 중산층문화에서 비롯된 규범의식이 매사에 ‘선’을 넘지 않는 제 인격을 형성했으며, 배우자나 친구를 사귀는 범위도 그 경계선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 중에 유난히 ‘사’자 직업이 많이 나온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겁니다. 더 규범적인 모범생이 되는 것 말고는 딱히 ‘출세’의 길을 찾기 어려웠으니까요. 친구들도 저도 그런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사람이었습니다. 성급한 일반화는 곤란하겠지만, 친구 부모님들을 소득수준에 따라 한 줄로 세워본다면 그 자녀인 우리 세대의 순위도 거기서 크게 변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와 친구들이 태어난 공간적 위치가 우리 삶에 끼친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죠.

 

점점 강해지는 계층간 경계선

계층이 고착화되는 이런 암담함 상황에서 한두 가지 특이한 성공 사례를 들어 “더 큰 꿈과 비전을 가져라” “열심히 하면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메시지는 자칫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주머니만 살찌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샤론 레흐트) 같은 책이 독자들은 부자로 만들지 못하고, 저자만 부자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그런데 로버트 기요사키도 결국 파산했다.

 

우리 세대도 신분변화가 거의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적지 않은 좌절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얘기를 잘못 꺼내면 젊은 세대에게 “당신들 때는 취직이라도 되지 않았냐? 우리는 그것도 안 된다”고 비난받기 십상입니다. 부자동네 아이들은 빼놓은 채, 중산층동네와 산동네 아이들만 돌싸움을 벌이던 것과 비슷합니다. 계층간 싸움이 세대간 싸움으로 변질된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래도 불평등했던 사회가 더 불평등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네가 정말 걔 동생이니

에서 ::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으로 이삭과 리브가의 아들이다. 쌍둥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리브가는 그 쌍둥이의 후손들이 장차 두 나라를 이루어 서로 다투리라는 신의 말을 들었다. 쌍둥이 중 형이었던 에서는 창세기 25장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털북숭이였다고 한다. 성장한 뒤 에서는 늘 밖으로 나돌았고 이삭의 총애를 받았으며, 야곱은 집에만 틀어박혀 어머니의 귀여움을 받았다.

에서는 맏아들이었으므로 가장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야 했지만, 창세기에는 교활한 야곱이 에서를 속여 재산을 가로채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25장에서 사냥터에서 돌아온 에서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어리석게도 야곱이 끓이고 있던 죽과 상속권을 맞바꾼다. 또 창세기 27장은 에서가 아버지 이삭을 위해 열심히 사냥하는 동안 리브가와 야곱이 꾸민 음모를 소개한다.

리브가는 털이 없는 야곱의 팔에 염소 가죽을 씌워 에서인 것처럼 속이고 맹인에 가까운 아버지에게 보낸다. 책략에 넘어간 이삭은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고 맏이에게 내릴 축복을 야곱에게 내린다. 그 축복은 한 번 내려진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격노한 에서는 야곱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리브가는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오빠에게 보낸다.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창세기 33장에서 형제는 눈물로 화해한다.

에서는 에돔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어 그의 자손들을 에돔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이 리브가에게 한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에돔인들은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인들과 자주 싸웠다. 때로 그들은 이스라엘에 머리를 굽혔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짧은 분량의 오바댜서는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에돔인들이 바빌로니아를 도왔다며 맹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이다.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사이에 유대인들은 에돔인들을 제압하고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헤롯의 가문은 에돔인의 혈통이었는데, 유대인들이 헤롯 왕을 증오한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신약성서 시대에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을 에돔이라고 불렀다. 아마 로마인들이 알지 못하게 로마를 비판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서 [Esau, Edom] (『바이블 키워드』, 2007. 12. 24., 도서출판 들녘)

 

야곱 :: 훗날 이름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고쳤다. 침착하고 명상적인 사람으로 장막에서 지냈다. 이삭의 사랑을 받고 있던 쌍둥이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長子權)을 양수받고, 자기를 편애하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에게서 장자의 축복까지 받아냈다. 형의 보복이 두려워 어머니의 주선으로 외갓집이 있는 하란으로 떠났다. 20년이 지나 돌아오는 도중 꿈속에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김으로써 땅을 약속받았으며, 하나님의 인도와 번영된 삶을 보장받았다.

잠을 깬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겠다는 맹세와 함께 소산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곳을 베델(벧엘)이라 명명한다. 하란에서는 외삼촌 라반의 딸 레아와 라헬을 차례로 아내로 맞아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자식들은 이스라엘 12부족(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뒤에 그는 기근 때문에 식량을 구해 오도록 아들들을 이집트에 보냈는데, 어렸을 때에 팔려가 거기서 재상이 된 아들 요셉을 발견하였다. 야곱 일가는 그 요셉 덕분에 이집트로 이주, 행복한 만년을 보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곱 [Jacob] (두산백과)

 

매사 정확히 반대인 형

“흔히 조기교육, 영재교육이 우수한 과학자를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과학고도 만든 거고. 근데 그거 완전히 착각이야. 너 창의성이 뭔지 아니? 남과 다른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데 창의성이 과학고에서 만들어질 것 같아? 전혀 아니야. 창의성이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야. 자연과학의 세계에는 정치가 없을 것 같지?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아.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이론을 만들 때는 누구나 상상할 수 없는 저항에 부딪혀.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가 학계에서 매장당하는 경우도 많아. 『사이언스』나 『네이처』같은 학술지도 만찬가지야. 새로운 이론에는 늘 소극적이지. 창의적이 되려면 당연히 용기가 필요해. 그런데 조기교육, 영재교육이 그런 용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봐. 경기고 출신들이 그렇게 많은 우리 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못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야.”

 

 

 

7. 플레이보이 - 몸과 살의 소통

『플레이보이』와 자위행위

『플레이보이』는 그만큼 사기도 어렵지만 숨기기는 더 어렵고 버리기는 더더욱 어려운 잡지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든지 그 경험을 값지게 여길 거다. 그걸 문제삼을 사람이라면 그냥 헤어지는 편이 낫다.”

 

한 인간의 인격은 그가 살아온 과거 경험의 총합입니다.

 

선 하나를 넘다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 :: 캔자스

 

동성애자 기독교인이 어떻게 존재 가능하냐는 매우 공격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메즈 목사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자신은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알기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몸이다

여관이야말로 ‘금기에 대한 위반의 극대화가 이루어지는 곳, 행음의 제사가 드려지던 고대의 신전이 현대식으로 복원된 성소’

- 조성기, 『우리 시대의 사랑』 (173면)

 

친구는 가끔 커피숍에 갈 때마다 주변에 앉은 남녀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고 했습니다. ‘커피숍에 앉아 있는 남녀들의 성기 사이의 거리가 1미터를 넘지 않는구나. 그런데 참 용케도 그걸 감추고 살고 있구나.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결국은 그 거리를 마이너스 10센티미터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구나!’ 마이너스 10센티미터란 성기결합 상태를 설명하는 친구의 독특한 표현이었습니다.

 

살로 소통하기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수단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말과 글과 살입니다. 만약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매일 대화를 나누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눴다고 칩시다. 물론 기분 나쁘겠죠. 하지만 당장 이혼하자고 할까요? 대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말과 글을 그리 깊이 주고받은 관계는 아니지만 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죠. 모두들 말과 글의 소통이 살의 소통보다 중요하고 고상하다고 믿는 분위기지만, 실상 인생을 흔드는 것은 살의 소통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살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거죠.

 

여성의 성욕이 남성의 성욕보다 약하다는 속설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마스터즈(William Masters)와 버지니아 존슨(Virginia Johnson)의 연구가 그 속설에 도전한 지 벌써 50년이 다 되어갑니다. 흔히 여성은 포르노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질의 혈액흐름과 윤활작용을 과학적으로 관찰해보면 여성이야말로 거의 모든 성적 환상에 즉각적으로 생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예민한 존재라고 합니다. 이성애자 남성들이 주로 이성애 포르노에만 반응하는 반면에, 여성들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심지어는 보노보가 짝짓기하는 필름만 봐도 신체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남성은 오르가슴 후에 다시 발기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여성은 자극만 지속되면 얼마든지 오르가슴이 증가한다는 사실도 이제는 널리 알려져 있죠. 성적 욕망도 생리적 능력도 여성이 남성보다 한참 앞서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성의 성욕 부족이 아니라,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입니다.

 

보노보 :: 피그미침팬지(Pygmy chimpanzee)라고도 한다. 몸길이 70∼82㎝, 몸무게 30∼40㎏이다. 1929년에 처음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침팬지의 한 아종이었으나 1933년 독립된 종으로 분류되었다. 다른 침팬지들에 비해 다리가 길고, 어깨와 가슴 폭이 좁으며, 머리털이 길고 양쪽으로 갈라진다. 얼굴은 검은 편으로 이마가 높으며, 귀가 작고, 입과 턱부분이 덜 튀어나왔다. 털은 검은색이며, 꼬리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반점이 있다.

열대다우림에 살면서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에 활동하고, 주로 나무를 이용하여 움직인다. 보통 60∼100여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살며, 활동영역은 2,200∼5,800ha에 이른다. 잡식성으로서 과일·나뭇잎 등의 식물성 먹이와 흰개미·다람쥐 등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노보 [Bonobo] (두산백과)

 

‘순결’을 지키겠다는 결심도 가치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어야겠죠. 다만 그런 선택이 타인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8. 「몰락」의 규범, 규범의 몰락 - 의심하라

무너진 규범에 충성하는 사냥꾼들

「몰락」(Der Untergang, 2004)은 소련군에게 포위된 베를린의 벙커에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보낸 최후의 14일을 그린 독일영화입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개인비서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mge), 군의관으로 마지막까지 벙커에 남았던 친위대 대령 에른스트 귄터 솅크(Ernst-Gunther Schenck), 바주카포를 들고 소련군 탱크에 맞선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의 소년 페터(Peter, 가상인물) 등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지도자와 그 주변 인간 군상의 몰락을 섬세하게 묘사한 수작이지요. 독일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요아힘 페스트 (Joachim C. Fest)가 쓴 『히틀러 최후의 14일』(Der Untergang, 독일어 제목은 영화와 같습니다.)을 거의 그대로 영상에 옮겼다 싶을 정도로 기록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주변의 여비서나 요리사에게 따뜻하고, 애인 에바 브라운 (Eva Braun)에게 사랑받으며, 파키슨병, 과대망상, 편집증,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리는 히틀러의 인간적 면모를 그렸다는 이유로 개봉 직후 논란도 많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결단력 있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친위대 장군, 장교, 의사 들이 대부분 동부전선과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학살과 생체실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전력을 가졌다는 점도 논쟁거리였습니다. 신나치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독일의 현실에서 과연 이런 영화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비판이 이어졌죠.

 

‘아노미(Anomie)’란 그야말로 규범(nomie)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즉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a-) 상태를 의미합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자살론』(Le Suicide)을 통해 대중화한 용어죠.

 

2차 대전 당시 친위대와 히틀러유겐트는 세계적 디자이너 후고 보스(Hugo Boss)가 디자인한 깔끔한 군복으로 유명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조립식 장난감의 세계에서 독일군 병정이 미국군이나 영국군 병정보다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휴고 보스 ::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무명 재단사 휴고 보스가 1924년 자신의 이름을 따 독일 메칭겐에 설립한 패션회사다. 그러나 독일 경제 불황으로 인해 파산에 이르렀다가 1931년, 보스가 나치당에 가입하고 독일군의 군복을 납품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보스는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투표권과 사업운영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후 점차 쇠락해 가던 휴고 보스는 1967년 유에ㆍ조엔 홀리 형제가 경영권을 인수하고, 70년대 초부터는 남성복 생산에만 집중해 고급정장을 생산해내는 브랜드로 탈바꿈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휴고 보스 [Hugo Boss]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이근안 :: 군사독재시절 학생, 재야인사 등 민주화운동가들을 고문,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전 경기경찰청 공안분실장.

이근안은 공군헌병 출신으로 지난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고문 혐의로 잠적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대공(공산주의나 공산주의자를 상대하는 것을 뜻함) 분야에만 몸담은 공안통이었다. 경찰 재직기간 매번 특진으로만 고속 승진했고 재직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이 중에는 「간첩 검거 유공」이 4회나 포함돼 있고 지난 1981년에는 서울대생들의 무림사건 해결에 공을 세워 내무부장관 표창, 1982년에는 「국가안보 기여」로 9사단장 표창, 1986년 경찰의 날에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대공ㆍ공안 분야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근안은 고문기술로 ‘관절뽑기’에서부터 '볼펜심문'에 이르기까지 각종 고문에 통달해 있어 다른 기관에도 '고문출장'을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을 고문한 혐의로 지난 1988년 12월 24일부터 수배를 받아왔으며, 이외에도 1979년 남민전 사건, 1981년 전노련 사건, 1985년 12월 납북어부 김성학 간첩조작 사건, 1986년 반제동맹사건 관련 피의자를 고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근안의 수배령은 1998년 10월 서울고법 형사2부가 납북어부 김성학 등이 낸 재정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2013년까지 그의 공소시효가 연장되었으며, 12년째 검ㆍ경의 수배를 피해 도피해 오다 1999년 10월 28일 검찰에 자수했다. 그리고 1심, 2심, 3심을 거쳐 2000년 9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의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이근안은 이후 여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해오다 형기가 만료되어 2006년 출소하였으며, 2008년 목사가 됐으나 이 씨가 소속된 교단은 2011년 1월 그의 목사직을 박탈했다.

한편 2012년 11월 개봉된 영화 <남영동 1985>는 1985년 군사독재시절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22일간의 기록을 담은 실화로 고(故) 김근태 의원의 자전적 수기를 바탕으로 정지영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근안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나쁜 법도 무법보다는 낫다.

 

도대체 범죄란 무엇인가

살인죄를 규정한 형법 제250조 제1항에는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유명한 조항에서 “사람을 살해한 자는”이라는 앞부분은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뒷부분은 그 범죄에 대한 법률적 효과인 형벌에 해당합니다. 형법은 이렇게 각 조문에 있는 범죄 구성요건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범죄 ::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위법하고 책임있는 행위

- 해당, 위법, 책임 :: 범죄 성립의 3요소. 조각사유

 

남에게 해를 끼쳤는가

문명화된 공동체의 어느 한 구성원에게 그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타인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경우 밖에 없다. 한 사람의 행동 가운데 그가 사회에 책임을 지는 유일한 부분은 타인과 관련된 부분이다. 단지 그 자신만 관련되는 부분에서는 그의 독립성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그 자신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서는 그 개인이 주권자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On Liberty)

남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 외에 개인은 자유롭다.

 

퍼터널리즘 :: 가부장적 온정주의

 

간통죄 논란에 결혼제도, 선량한 성풍속, 도덕 같은 표현이 슬슬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논의가 일정한 국면에 이르면 개인에게 피해를 주었는가를 넘어 사회 전체 또는 국가 전체에 해를 주었는지가 문제됩니다. 이른바 ‘사회 유해성’기준이 나오는 거죠. 예를 들어 위조지폐의 경우, 당장 눈앞에서 피해를 보는 개인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화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켜 사회 전체의 뿌리를 흔들게 됩니다. 전방에 있는 탱크를 빼내 중앙청으로 몰고 오는 행위(쿠데타)도 명백하게 국가에 해를 끼칩니다. 간첩이 군사정보를 빼내는 것도 비슷하죠. 이런 행위를 처벌할 필요는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유해성 앞에 붙는 ‘사회’라는 수식어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처럼 자칫하면 개인의 자유를 마구 침범하면서 처벌범위가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사회적으로 유해할 수 있습니다. 밥을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제3세계의 난민들을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유해할 수 있고, 자녀를 낳지 않는 것도 국가생산력을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유해할 수 있으며, 우리가 먹고 싸는 일거수일투족이 후손들이 누릴 자연환경을 어느 정도 파괴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유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초 출발점이 된 ‘고전적 유해성’보다 ‘사회 유해성’을 끌고 들어올 때는 훨씬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유해성’개념은 법의 가면을 쓰고 윤리나 도덕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개연성이 워낙 크기 때문입니다.

 

범죄가 되려면 반드시 유해한 행위여야 하지만, 유해한 행위라고 해서 모두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해성은 범죄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닌 거죠. 그래서 유해성 기준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유해해야 범죄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해를 주느냐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해를 주느냐가 핵심입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기준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선 ‘얼마나’를 정하려면 유해성을 양적, 질적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통이라는 게 다 비슷한 것 같아도 개인별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옆 사람의 고통을 절대 내 것으로 느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머리털 하나 살짝 뽑는 것이 내게는 그저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되는 고통인데, 누군가에게는 비명이 나올 만큼 큰 아픔일 수 있습니다. 나와 같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지만, 내가 느낀 고통의 양과 질이 과연 친구가 느낀 것과 똑같은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해성의 양적, 질적 측정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백보 양보하여 유해성의 양적, 질적 측정이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과연 ‘얼마나’ 해를 입혀야 범죄가 되느냐는 문제는 그대로 남습니다. 여전히 불가능한 과제인 거죠. ‘남에게 해를 주는 행위는 범죄다’라는 그럴듯한 명제는 ‘남에게 해를 주는 수많은 행위 중에서 도대체 얼마나 해를 주어야 범죄가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은 ‘누가’ 그 기준을 만드느냐의 문제

국회는 다수결을 통해 그 사회 주류의 가치관과 믿음을 법률에 반영합니다. 물론 왕이 혼자 법을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고, 현재로선 더 나은 민주적 방식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늘 ‘왜’가 논의되기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다수’의 의지가 반영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뒤르켐 같은 학자는 범죄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집합의식의 침해’ 또는 ‘집단적 비승인’이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옵니다. 멋있게 번역해서 ‘집단적 비승인’이지, 쉽게 말하자면 그냥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싫어하는 정도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그게 범죄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처벌할 수 있는 만큼의 ‘사회 유해성’이 존재하는지도 결국엔 다수의 합의에 의해 결정됩니다.

 

1984년 12월 인도의 보팔(Bhopal)에서 다국적기업 유니온카바이드(Union Carbide)사 공장의 화학가스가 유출되어 첫 주에만 3000명이 죽고, 이후에 80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신체적으로 손상을 입은 사람은 50만 명이 넘습니다. 사고 전부터 가스누출 등 치명적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들이 곳곳에서 나타났지만, 수익에만 관심이 있던 미국 화학회사와 지역정부는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고의에 가까운 부주의가 낳은 엄청난 사고로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도 지존파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유니온카바이드사에서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건이 터지고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진상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고, 다우케미컬(Dow Chemical)에 인수된 유니온카바이드는 지금도 멀쩡하게 영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흉악한 범죄를 생각할 때 이런 끔찍한 사건을 지존파 사건보다 먼저 떠올리지 못합니다. 희생자 숫자가 수천배에 이르는데도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 1985년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권인숙(權仁淑)은 당시 노동현장에 참여하였던 대학생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휴학을 하고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학력을 낮춰 경기도 부천시에 있던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위장취업을 하였다. 이듬해 6월 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공문서변조혐의로 부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지하 조사실에서 문귀동(文貴童) 경장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6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문귀동은 위장취업과 무관한 이른바 5·3인천사태의 관련자 행방을 캐물으면서 반말과 욕설은 물론 여성으로서 가장 치욕적인 성적 고문을 자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 [富川警擦署性拷問事件] (두산백과)

 

왜 모텔이 들어오면 안 되는가

“그런데 교수님, 아파트단지 들어가는 길에 모텔이 들어서면 왜 안 되는 거죠?”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아이들이 늘 지나다니는 길목인데 거기 모텔이 들어서면 곤란하죠.”

“모텔이 들어서면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해가 있을까요?”

“모텔에 드나드는 남녀를 보게 되고, 당연히 교육적으로 좋지 않죠.”

“글쎄요. 애들이 보게 되는 것은 그냥 사람들이 모텔에 들어가거나 나오는 모습 아닌가요? 여행 다니면서 모텔에 묵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요. 그걸 본다고 왜 교육적으로 나쁜 거죠?”

“(아주 점잖고 합리적인 분인데, 표정이 서서히 짜증으로 바뀌면서) 아니 그럼 애들이 그런 걸 봐도 상관없다는 말씀인가요?”

“제 생각에는 그 자체로 문제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모텔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 대한 과도한 상상이 개입되지 않는 이상, 모텔에 드나드는 모습만으로 교육적으로 나쁠 일은 없으니까요. 애들이 물어보면 그냥 잠자는 곳이라고 설명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젊은 남녀가 대낮에 들어가는 건 어떻게 설명합니까?”

“관광 온 사람이 대낮에 들어가든 말든 애들이야 신경도 쓰지 않을 거고요. 오히려 이런 반대운동 때문에 애들이 모텔에 불필요한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은데요.”

 

개신교인들이 동성애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도 1)성서에는 오류가 없고, 2)그 성서에 동성애는 죄라고 적혀 있으니, 3)동성애는 죄라는 간단한 논법에 따른 것입니다. 이들이 볼 때 의심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입니다. 왜냐고 묻는 것은 불경한 태도고, 주어진 규범은 그저 순종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동성애를 죄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성서의 모든 규범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동성애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예수지만 이혼에 대해서는 명백한 금지를 선언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여성을 버릴 수 있던 당시의 잘못된 관행에 저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 공격에 열을 올리는 근본주의 교회는 이혼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교회 입구에 서서 “이혼 사실을 회개하기 전에는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막는 사람도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에게 “예수 믿으려면 그 죄악에서 분명하게 돌이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입니다.

 

남북전쟁 당시 성서 어디에도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다면서 노예제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남부 교회들의 신학적 입장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서에는 남성 주인이 여성 노예를 성적 노리개 또는 첩으로 삼아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내용이 많습니다. 똑같은 짓을 벌이던 남부 농장주들은 이런 구절들을 즐겨 인용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규정을 끌어다가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데 써먹기도 했습니다. 엄밀하게 다지면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미국인 모두가 이방인인데도, 슬쩍 백인들을 유대인의 위치에, 흑인들을 이방인의 위치에 갖다 붙인 것입니다.

 

의심하라!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성서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목사님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의심, 동성애가 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의심이 기독교 신앙과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1)만약 이런 의심 중 한 가지라도 사실이라면, 즉 성서에 오류가 있거나, 목사님에게 잘못이 있거나, 동성애가 죄가 아니거나,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면, 2)성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고, 3)성서가 진리가 아니라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으며, 4)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구원도 있을 수 없고, 5)구원이 없다면 나는 곧 지옥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의심이 곧 지옥행 특급열차라는 논리체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의 의심이라도 품으면, 그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고,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언제나 결론은 지옥입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처럼 어차피 번역된 성서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인데도,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앞서 설명한 순서에 따르자면 그런 작은 의심도 지옥행 특급열차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9. 고백은 나의 힘 - 욕망과 규범의 공존 또는 화해

영화 「색, 계」이야기

메소드(method) 연기 :: 단지 배역을 연기하기보다 배역 그 자체가 되는 기술을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라고 합니다. 정형화된 연기가 아니라 사실적인 배역 그 자체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면, 배우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이 바로 메소드인 것입니다.

[네이버 영화 매거진] 무비 QnA, 메소드 연기법이란 무엇인가요?

 

10여년 전만 해도 간통을 하면 무조건 구속됐습니다. 국회의원, 변호사, 의사, 기업인, 연예인, 가정주부 들이 간통현장에서 붙잡혀 망신을 당하는 일도 적지 않았죠. 간통죄의 남녀는 공범이기 때문에 수사기관에서는 둘이 말을 맞추지 못하도록 분리해서 피의자 신문을 합니다. 그런데 간통죄 피의자들에게는 일정한 패턴이 나타난답니다. 우선 호텔 객실에서 둘만 있다 붙잡혀도 처음에는 다들 “손만 잡고 있었다”며 부인한다고 하죠. 심지어 옷을 다 벗고 있다 붙잡혀도 “우리는 그냥 옷을 벗은 채로 손잡고 얘기하는 걸 좋아할 뿐이다”라며 버팁니다. 은밀한 공간에서 일어난 둘만 아는 진실이기 때문에 남녀가 끝까지 잘 버티면 실제로 무혐의로 풀려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호텔 장부를 비롯한 여러 증거를 들이대며 추궁하면, 한쪽이 먼저 자백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먼저 자백하는 쪽이 거의 예외 없이 여성이라는 겁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조사받으며 느낀 비루함, 덧없음 때문에 어느 순간 “그래,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다, 그래서 한번 했다, 처벌할 테면 하라”고 자백한다는 얘기죠. 그렇게 먼저 자백하고 나서는 모든 것을 털어낸 자유로운 모습, 당당하고 맑은 얼굴로 조사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와 반대로 남자들은 끝까지 “손만 잡았다,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오해다”라며 버티고, 나중에는 “저 여자가 유혹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너저분한 변명을 늘어놓는 경우도 많답니다.

 

자기 바닥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

‘인권법 캠프’에서 특강을 했습니다. 로스쿨 입학예정자 일흔명, 예비 사법연수원생 열 명에게 어떤 법률가가 될 것인지 이야기하는 자리였죠. 강의를 시작하면서 청중에게 먼저 “왜 공익변호사를 꿈꾸는가?” 물어봤습니다. 이런 질문에는 정해진 모법답안이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약자가 겪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 부모님이 겪었던 억울한 사건 등등 사법시험 수석합격자 인터뷰, 로스쿨 입시면접 등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답변이 그것입니다. 이런 뻔한 대답도 계의 세계에서 만들어낸 이상적인 틀에 자신을 꿰맞춘 이야기들이죠. 그래서 그런 뻔한 답변 말고 진짜로 왜 공익변호사를 꿈꾸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제 얘기를 좀 했죠.

저도 한때는 공익변호사를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지금 와서 제 마음의 바닥을 조용히 응시해보면 ‘뽀대가 나니까, 멋있어 보여서’가 가장 진실에 접근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지금 공익변호사를 꿈꾸는 후배들도 저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마음속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면 ‘취직이 어려운 판에 폼이라도 잡자’는 이상한 진심이 튀어나올 수도 있습니다. 제가 사법연수원 다닐 때 실제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동료들이 좋은 성적으로 판검사가 되겠다고 목숨 걸고 공부하는 꼴이 그렇게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나는 판검사로 임용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대학 후배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열심히 연애하며 연수원 2년을 보냈지요. 입으로는 “사법연수원이 정신병원 같다, 이 정도 성공했으면 됐지 뭘 더 성공하려고 발버둥을 치나”같은 얘기들을 하고 다녔지만, 저의 내면 제일 중심에 들어가보면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하기 싫어서 회피를 했던 거죠.

그런 기억 때문에 공익변호사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법률가의 최고 덕목은 첫 번째도 실력, 두 번째도 실력, 세 번째도 실력이고, 네 번째쯤 가서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나온다는 얘기했습니다. 교수 노릇하면서 뼈아프게 후회한 것이 사법연수원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거라서, 저와 비슷한 위험요인을 갖고 있을 후배들에게 좀 극단적인 조언을 한 겁니다.

거품을 거두고 자기가 정말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 살펴보는 건 공익변호사를 꿈꾸는 사람뿐 아니라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니까요.

 

거품을 걷어내면 생각보다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번은 평소 공익변호사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법연수원생이 어색한 표정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공익변호사를 꿈꾸었지만 막상 성적을 잘 받으니 판검사를 할지 변호사를 할지 고민된다는 얘기를 털어놓더군요. 자기 마음을 자기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판검사 할 성적이 됐는데도 변호사를 선택했다’는 소리를 죽을 때까지 안 하고 살 자신이 있느냐? 그럴 자신이 있으면 판검사 포기하고 변호사를 해도 된다. 그런데 입을 열 때마다 ‘나는 판검사 할 성적이 됐는데도 변호사를 선택했다’는 소리를 하며 남은 평생을 보낼 것 같으면 그냥 판검사로 가라. 주변사람들이 평생 그런 얘기를 듣고 사는 것도 정말 피곤한 일이다. 괜한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욕망, B형간염 바이러스 같은 것

수직감염 :: 모체로부터 아기에게 직접 이행하는 감염을 말하는데, 감염경로에는 경태반감염(經胎盤感染)·산도감염(産道感染)·모유감염 등이 있으나 사람의 경우는 주로 산도감염된다. 산도감염의 예로는 분만시 신생아가 산도에서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인데, 신생아의 임균성 결막염이 알려져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직감염 [vertical transmission, 垂直感染] (두산백과)

 

 

B형 간염 :: 혈청간염이라고도 한다. 바이러스성 간염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망 순위 9위를 차지하는 가장 흔한 감염 질환 중 하나이다. 약 3억 이상의 인구가 만성 B형 간염바이러스 보균자이며, 이로 인한 만성간염·간경변·간암으로 연간 100만 명 정도가 사망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보유 빈도가 높으며, 한국의 경우 전 인구의 5∼10%가 B형 간염바이러스 보균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B형간염 [Hepatitis B, ─型肝炎] (두산백과)

 

B형간염 바이러스 보유자가 병에 걸려 죽는 건 엄밀하게 말하면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평생 몸 안에 살면서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약해지면 면역체계가 어느 날 자기 옆에 있는 B형간염 바이러스를 자각하게 됩니다. 평생 동행해온 바이러스를 보고는 새삼스럽게 ‘어? 이 새끼는 뭐지?’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는 거죠. 우습게도 면역체계가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간세포도 함께 손상을 입어 간경화나 간암으로 진행되고 결국엔 사람이 죽게 됩니다. B형간염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B형간염 바이러스를 적대시하는 면역세포의 과도한 투쟁 때문에 사람이 죽는 셈입니다.

 

선, 넘을 수 없다면 넓혀라

남편에게 맞고 살면서도 자기 삶을 희생하면서 아들을 붙잡고 “너만이 나의 희망”이라고 말한다면, 그게 오히려 아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내 행복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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