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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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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3
코미디와 사이언스 픽션을 합친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던 더글라스 애덤스의 작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 5권 중 그 세 번째 책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편이다.   선사 시대 지구의 동굴 속에서 턱수염에 토끼뼈를 끼우고 있는 아서 덴트. 이제 그와 친구들은 우주를 파괴하려는 크리킷 행성의 계획을 저지해야 한다. 지구와 삶,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화인 이 책은 기발하고 유쾌한 상상력, 엉뚱하고 황당한 장치와 대화들, 과장된 캐릭터들, 상식과 형식을 파괴하는 자유로움, 진지한 주제들을 사소한 농담처럼 희화화하는 익살스런 유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웃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자신 앞에 놓여져 있는 삶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발견케 한다.   저자가 BBC 라디오 프로듀서인 사이먼 브렛과 의기투합하여 쓰기 시작한 이 시리즈는 드라마, 책, 음반, 컴퓨터 게임, CD, 연극 등 온갖 버전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버전들이 생겨났다. <책세상>에서 이번에 출간하는 시리즈는 이렇게 생겨난 다양한 버전들을 한데 모은 최종 완결판이란 점에서 의의가 깊다. '코믹 SF'라는 장르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물의 명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좋은 기회!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
출판
책세상
출판일
2004.12.25

 

1.

시간은, 말하자면, 길을 잃고 헤매기엔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장소다.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 여기저기서 길을 잃어본 경험이 아주 많은 아서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장담할 수 있었다. 적어도 공간 안에서 길을 잃으면 분주히 할 일은 많았던 것이다.

 

처음에 느꼈던 아서의 희망과 떨림은 순식간에 경악과 공포에 압도당했고, 별별 생각들이 다 튀어나와 서로 목청을 쓰겠다고 다투었다.

 

우주선은 두르고 있던 망토처럼 가볍게 중량을 땅바닥에 벗어던지고 하늘로 경쾌하게 날아올랐다. 우주선은 저녁 하늘을 괴상하게 가르며 주위의 구름들을 한순간 눈부시게 밝히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아서만 거대한 땅바닥에 혼자 남아 아무 소용 없는 허망한 몸짓을 춤처럼 추어대고 있었다.

 

정확한 상황을 모방하려 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성공에 이르지 못했고, 오히려 대단히 바보스러운 꼬락서니에 처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아예 죽어버리곤 했다. 심지어 두 가지 운명을 모두 겪게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서 덴트는 자기 동굴 속에 앉아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거지 같은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그놈의 외계인에게 자신이 할 수도 있었을 수많은 말들을 생각하며, 자기와 마찬가지로 거지 같은 저녁을 보내고 있는 파리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2.

아서의 명랑한 기분은 그 많은 목가적 풍경의 즐거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 끔찍한 고립 생활, 악몽, 화초를 가꾸려는 그 모든 시도의 실패, 그리고 이 선사 시대 지구에서의 미래라고는 전혀 없이 막막하고 헛되고 허망하기만 한 삶을 극복할 근사한 아이디어가 이제 막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확 미쳐버리면 그만이었다.

 

“네가 죽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어…….” 그가 짧게 말했다.

“한동안은 진짜 그랬지.” 포드가 말했다. “그리고 이삼 주 동안은 레몬이 되기로 작정했지. 진 토닉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어.”

아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또 한번 그렇게 했다.

“어디서……?”

“진 토닉을 찾았느냐고?” 포드가 발랄하게 말했다. “자기가 진 토닉이라고 생각하는 작은 호수를 찾아내서 그 속에 풍덩 뛰어들었다 나왔다 했지. 아니 적어도, 나는 그 호수가 자신이 진 토닉이라고 상상한다고 생각했어.”

 

“내 말의 요점은, 미치지 않으려고 미리 미쳐버리는 건 아무 소용 없는 짓이라는 거야. 차라리, 나중에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맑은 정신을 저축해놓는 편이 낫지.” 포드가 말했다.

“지금의 너는 제정신이 돌아온 너지, 응?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아서가 말했다.

 

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철저하게 고립 생활을 한 끝에 포드의 얼굴을 보니, 너무 반갑고 안심이 되어서 울음이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포드는, 보자마자 짜증이 울컥 치미는 인간이었다.

 

“안내서?”

“안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기억나?”

“그래. 내가 강물에 던져버린 게 기억나.”

“그랬지.” 포드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낚시로 건져냈어.”

“그런 말 안 했잖아.”

“네가 또 던져버릴까 봐.”

“하긴 그래.” 아서가 수긍했다.

 

“시공간의 조직에 말이야.”

“아, 그거.” 아서가 말했다.

“그래, 그거.” 포드가 확인해주었다.

그들은 선사 시대 지구의 언덕 위에 단둘이 서서 상대방의 얼굴을 단호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됐다고?” 아서가 말했다.

“불안정성의 웅덩이가 생긴 것 같다고.” 포드가 말했다.

“그래?” 아서가 말했다. 그의 눈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포드도 비슷한 정도로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말했다.

“잘됐네.” 아서가 말했다.

“알겠어?” 포드가 말했다.

“아니.” 아서가 말했다.

말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아서는 행복했다. 하루가 계획한 대로 정확히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막히게 기분 좋았다. 미쳐버려야겠다고 결심한 지 불과 이십 분 만에 벌써 선사 시대 지구의 들판 위에서 소파를 쫓아 돌아다니고 있잖은가.

 

 

 

4.

“우주적인 스케일로 보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냥 이상한 일일 뿐.

 

포드는 좀 기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기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기보다는 여느 때와는 다른 식으로 기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뜨겁고 먼지 낀 들판으로부터 반 마일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것이 반쯤 먹다 남은 고양이 먹이 깡통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는 표범처럼, 어리둥절한 듯 얼굴을 찌푸린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남자애가 말했다.

“아니.” 아서가 말했다.

“그런데 왜 수염에다 뼈다귀를 꽂고 있어요?”

“아무 데나 꽂은 자리에 가만히 있도록 뼈다귀를 훈련시키고 있는 중이거든.” 아서는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건 정말 어린 마음을 즐겁게 해주면서 동시에 고무시키는 그런 말이었다.

“오.” 남자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덴트.” 아서가 말했다. “아서 덴트.”

“덴트 아저씨는 병신이에요.” 소년이 말했다. “완전 머저리 천치라고요.” 소년은 금세 꺼져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서 뒤에 있는 다른 물건을 괜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코를 긁으면서 어슬렁어슬렁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서는 갑자기 지구가 이틀 뒤에 다시 파괴될 거라는 사실이 기억났지만, 이번 한 번만큼은 하나도 안타깝지 않았다.

 

“너, 뭐 생각하고 있는 게 있구나, 안 그래?” 

“내 생각에는…….” 포드가 모종의 특이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목소리는 그가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지껄이기 시작하는 징조라는 걸 아서도 이젠 알고 있었다.

 

아서는 관자놀이 밑으로 둔하게 피가 쿵쿵 뛰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는 포드와 대화를 할 때마다 수도 없이 찾아오곤 했던 증표 같은 것이었다. 그의 뇌는, 겁에 질려 개집 속에 틀어박힌 강아지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포드는 아서의 팔을 붙잡았다.

“SEP라는 건, 우리가 볼 수 없는, 아니 보지 않는, 아니 우리 뇌가 못 보게 하는 광경이야. 왜냐하면 다른 사람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SEP의 뜻이 그거야. ‘다른 사람의 문제’. 뇌가 그 부분을 편집해 잘라내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는, 맹점 같은 거라고.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는 경우에는, 똑바로 쳐다보면 보이지 않아. 유일한 희망은 곁눈질로 어쩌다 재수 좋게 힐끗 보게 되는 거지.”

 

‘애시즈’ :: 유명한 크리켓 투어 토너먼트

 

“행성 하나가 파괴되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보다 더 우울한 건 세상에 다시 없을 거예요. 물론, 그런 사태가 벌어질 때 여전히 그 행성 위에 있는 건 빼고요.”

 

“나는 알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나한테 필요한 건…….” 포드가 앞에 한 말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외쳤다. “독한 술 한 잔하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친구들이라고!”

 

군중은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평범한 하루인 줄 알았는데 정말 굉장한 날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지만, 대체 어디로 가야 될지는 사실 잘 모르고 있었다.

 

물체를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은 무한히 복잡해서, 십억 중 구억 구천구백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는 차라리 그 부분은 포기하고 그냥 없는 대로 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효율적이었다. 예전에 대단히 유명한 과학 마술사인 우그의 에프라팍스가, 자기한테 일 년만 주면 엄청나게 거대한 마그라말 산(山)을 통째로 투명하게 만들어버리겠다고 생명을 걸고 내기를 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의 대부분을 거대한 룩스-오-밸브, 굴절 무효기, 자동 스펙트럼 우회기 따위와 씨름하는 데 보낸 그는, 겨우 아홉 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과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의 친구들, 그리고 친구들의 친구들의 친구들, 그리고 주요 항성 간 트럭 회사를 가지고 있는, 그 친구들의 좀 덜 친한 친구들 몇몇이 합동으로, 지금까지도 역사상 하룻밤 만에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공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공사를 시행했고, 두말할 것도 없이 다음 날 마그라말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6.

자기가 우주의 바람에 날려 가고 있고, 그 바람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았다.

자기가 우주의 수많은 생각들 중 하나이고, 우주도 자기의 생각인 것만 같았다.

 

아서는 놀라서 말을 잃은 채 가속 의자에 기대어 누웠다. 자기가 방금 우주 멀미를 겪은 건지 아니면 종교를 갖게 된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라피아 :: 높이는 8∼10m이다. 잎은 깃꼴겹잎이고 잎집이 있으며, 작은잎은 길이가 60∼150cm이다. 라피아야자류는 아프리카 남동쪽에 있는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와 그 부근의 섬에 38종, 북아메리카에 1종이 분포한다. 꽃은 암수한그루 또는 잡성화이다.
잎에서 채취한 섬유는 수분에 대하여 신축성이 작기 때문에 원예가들이 접붙이기할 때 끈으로 사용하고, 또 라피아섬유는 길이가 2m이고 강하여 각종 편물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나이지리아에서 자라는 토디야자(R. vinifera)는 꽃이삭을 자르면 즙액이 나오는데, 이 즙액을 받아서 발효시켜 토디(toddy)라는 술을 만든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피아야자 [raffi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아서가 조용하게 말했다. “우주 여행이 더 멀어지고 더 빨라질수록 사람의 위상은 점점 더 별 볼일 없어지는 것 같고, 인간은 심오한 것으로 채워지거나 아니면 텅 비워지거나…….”

 

그는 생각의 사슬을 끊어버렸다.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 중 대부분은 이미 실제로 일어나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벤트우드 스타일 :: 휘어진 나무로 만든 가구 스타일

 

 

 

7.

아인슈타인이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관찰자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고, 그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8.

“놀라지들 마시오.” 그가 말했고, 이어서 그 기기를 보고 그 자신이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뒤로 한 걸음 펄쩍 물러났다. “이건…….”

 

 

 

9.

새벽의 가늘디가는 은빛 광선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수억경 톤의 초열 폭발 수소 원자들이 천천히 지평선 위에 뭉게뭉게 피어났지만 기껏해야 조그맣고 차갑고 약간 촉촉해 보일 뿐이었다.

여명이 찾아와 빛이 떠다닐 때면 마법이 일어날 것만 같은 순간이 있다. 피조물은 한꺼번에 숨을 죽인다.

그 순간은 스콘셸러스 제타 행성에서 늘 그렇듯이 별일 없이 지나갔다.

아지랑이가 늪 표면에서 어른거렸다. 늪의 나무들은 아지랑이 때문에 잿빛으로 보였고, 키 큰 갈대들은 형체가 희미했다.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적이 깔렸다.

태양은 힘없이 아지랑이와 씨름하면서, 약간의 온기를 여기 뿌리고 약간의 빛을 저기 뿌리려고 애썼지만, 오늘도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건너가려면 기나긴 줄다리기를 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스콘셸러스 제타 행성에서는 이러다 하루가 다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 될 전망이었다.

열네 시간 후, 태양은 완전히 헛고생을 했다는 허탈한 기분을 안고 반대편 지평선 밑으로 가망 없이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태양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어깨에 힘을 잔뜩 준 후 하늘 위로 다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실제로 제조되는 물건들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우주처럼 이렇게 무한하게 큰 우주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물체들은 물론이고, 차라리 상상하지 않는 게 나은 물체들까지도 어딘가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매트리스가 주위에서 폴락락거렸다. 이것은 늪지대의 살아 있는 매트리스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단어가 더 널리 쓰이지 않는 것이다. 매트리스는 공감을 표하는 한 방법으로서, 물로 가득 찬 희뿌연 몸통을 움직이며 폴락락거렸다.

 

“모든 종류의 정신적 행위에 있어서, 내 능력은 끝없는 우주의 범위만큼이나 무한해. 물론, 행복의 능력은 제외하고 말이야.”

 

“내 행복의 능력은 고작 성냥갑에 들어갈 만한 수준이야. 성냥 몇 개를 덜어낼 필요도 없을걸.”

 

‘발루’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려면, 재고 전문 서점 아무 데나 들어가서 《스콘셸러스 늪-대화 사전》을 한 권 사도록 하라. 아니면 대신 《존재하는 모든 언어에 대한 맥시메갈론 초결정판 사전》을 사도 좋다. 대학들은 이 사전들을 팔아치우고 대신 쓸 만한 주차 공간을 확보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니.

 

상자 위에 앉아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이 힘을 내라는 둥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는 둥 말을 했어. ‘꼬마 로봇아, 씩 웃어보렴.’ 사람들이 나한테 막 외쳐댔지. ‘킬킬 하고 예쁘게 웃어봐.’ 내 얼굴로 씩 웃는 표정을 하려면 작업실에서 렌치로 한두 시간은 작업을 해야 한다고 나는 설명하곤 했지. 그러면 조용해지곤 했어.”

 

‘이 다리를 개통하게 된 것은 제게 있어 크나큰 기쁨이요, 영광이요, 특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 거짓말 회로가 전부 수명이 다했거든요. 저는 여러분 모두를 증오하고 경멸합니다. 자, 이제 저는 이 불행한 사이버 구조물을 여러분 모두 생각 없이 지나다니며 멋대로 학대할 수 있도록 개통을 선언합니다’

 

 

 

10.

간헐적으로 찰칵거리는 소리들이 속도가 빨라지면 각각의 찰칵 소리의 의미를 상실하고 차츰 지속성을 지니면서 점점 커지는 성조처럼 느껴지듯이, 개별적 인상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자 지속되는 감정 같은 자질을 갖게 되었다. 아니, 감정이 아니었다. 그게 감정이라면, 전혀 감정적이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것은 증오, 무자비한 증오였다. 차가웠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게 아니라 벽처럼 차가운 감정이었다. 몰개성적이었지만, 군중들 사이에서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주먹처럼 몰개성적인 게 아니라 컴퓨터로 발행한 주차 딱지처럼 몰개성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치명적이었다——그러나 총알이나 칼날처럼 치명적인 게 아니라 고속도로를 막고 있는 벽돌 장벽처럼 치명적이었다.

 

 

 

11.

“자유는 감당이 안 돼.” 그는 음침하게 말했고, 어째서 두 잔째 술이 처음 들어간 술의 안부를 전해주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세 잔째 술을 후딱 마셔버렸다. 그는 두 사람의 트릴리언을 자신 없이 바라보다가, 오른쪽 트릴리언이 더 맘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술을 또 한 잔 다른 목구멍에다 쏟아 부었다. 이 술이 앞서 들어간 술을 밀어줌으로써 서로 힘을 합해, 두 번째에 들어간 술이 제 기능을 하도록 만들어주리라는 것이 그가 생각한 계획이었다. 그러면 세 잔의 술이 다 같이 소란의 근원을 찾아 나서서, 좋은 말로 잘 설득하고 여차하면 노래도 좀 불러줘서 그것을 진정시킬 터였다.

그는 네 잔째 술이 이런 임무를 다 잘 이해했는지 불안해져서, 계획을 좀더 잘 설명해주라는 뜻에서 다섯 잔째 술을 파견했고, 사기 진작 차원에서 여섯 잔째 술도 내려 보냈다.

 

“나는 말이야, 아주 멋진 남자인데다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런데 원하는 게 뭔지 손톱만큼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가 덧붙였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가 끝나면 다음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갑자기 다 끝장이 나버렸어.” 그는 이렇게 보충 설명을 했다.

 

이런 말을 절대 믿지 말아야 하는 건 기본이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그들의 말이 진실이 되어버리니까.

 

대체로 요령은, 원하는 바가 뭔지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소망이 이루어지게 내버려두는 데 있다.

 

“컴퓨터.” 그는 다시 소리 죽여 말했다.

“으음?”

“내가 재갈을 풀어주면…….”

“으음.”

“잊지 말고 나보고 꼭 내 턱주가리에 주먹을 한 방 날리라고 말해줘.”

“으음 으음?”

 

뭐라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매끈하고 늘씬한 하얀 몸체는 깔끔하고 냉정한 악(惡)의 궁극적 화신처럼 보였다. 흉측하게 죽은 눈동자에서 강력하고 생명이 없는 두 다리까지, 그들은 단순히 살인만을 원하는 정신이 고안해 정교한 연산으로 배태한 산물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열쇠를 찾고 있다.” 로봇이 되풀이해서 말했다. “우리는 이미 나무 기둥, 강철 기둥, 그리고 방풍 유리 기둥을 손에 넣었다. 잠시 후 우리는 황금 가로장을 손에 넣을 것이다…….”

“아니 그건 안 돼.”

“손에 넣을 것이다.” 로봇이 단언했다.

“안 된다니까. 그게 내 우주선의 추동력이란 말이다.”

“잠시 후 우리는 황금 가로장을 손에 넣을 것이다…….” 로봇은 했던 말을 참을성 있게 반복했다.

“그렇게는 안 된다니까.” 자포드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파티에 가야 한다.” 로봇은 정말로 심각하게 말했다.

“아.” 자포드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나도 가도 되나?”

“안 된다.” 로봇이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총으로 쏠 테니까.”

“오, 그래?” 자포드는 더 설명해보라고 권총을 흔들어댔다.

“그렇다.” 로봇은 이렇게 말하더니 그에게 총을 쏘았다.

 

 

 

12.

하늘은 지독하게 텅 비어 있었고, 아서의 눈에는 하늘이 이 목가적인 풍경——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에 소름끼치는 냉기를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에 그의 목소리가 묘지처럼 음침하게 들렸다면 이번에는 아예 그 자신이 기관지염에 걸려서 저승에 간 사람처럼 보였다.

 

요점은, 그들이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들과 다르다면, 그건 그들이 덜 착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착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슬라티바트패스트는 왜 이 사람들을 보고 사슬톱을 들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집에까지 일을 들고 가는 엽기적인 영화의 라디오 광고에나 어울릴 것 같은 음산한 말투를 쓰는 걸까?

 

 튜닉 :: 역사적으로는 고대 서양의 남녀가 입었던 소매가 없는 헐렁한 옷으로, 속옷과 겉옷을 겸했으며, 그리스의 키톤이나 로마의 투니카가 이에 해당되고 그 명칭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튜닉은 원래 피막(皮膜)이나 곡식의 껍질 등을 뜻하는 말인데, 일반적으로는 몸에 꼭 달라붙게 입는 의복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같은 모양의 여성복이나 제복을 뜻하게 되었고, 튜닉 코트 ·튜닉 드레스 등의 호칭이 생겼다. 또한 무희(舞姬)가 입는 길이가 짧은 의복, 또는 길이가 약간 긴 군복 등을 지칭하는 일도 있으나, 최근 쓰는 양재용어로는, 일반적으로 중간 길이(7부)의 몸에 딱맞는 상의를 튜닉형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튜닉 [tunic]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 사람들이 ‘우주에 우리밖에 없다’는 생각을 어째서 하지 않았는가 하면, 오늘 밤까지 그들은 우주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이오. 바로 오늘 밤까지.”

 

불가능 확률 연산은 근본적으로 의사(擬似)-상호적이고 순환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한히 불가능한 사태란 사실 거의 당장이라도 일어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사태라는 것이었다.

 

우주선의 놀라운 점은 잘 만들어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전혀 잘 만든 물건이 아니었다), 어쨌든 만들긴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다.

 

“좀 미치면 어때?”

 

“이런 우주선을 일 년 만에 설계하고 건조하다니. 아무리 동기가 강력했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못 믿겠어요. 증명을 해보세요. 그래도 어차피 전 안 믿을 테지만.”

 

암흑의 냉기와 무게와 공허감이 서서히 아서의 심장을 움켜쥐었고, 그는 빽빽하게 장전된 총알처럼 공중에 떠 있는 크리킷 조종사들의 기분을 뼈아프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종족이 믿고 있던 역사 의식의 경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아무도 사유해본 적이 없는, 아니 심지어 사유할 거리가 있다는 것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한계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다.

 

역사는 힘을 모으고 또 한번의 타격을 준비했다.

 

 

 

13.

“하룻밤 사이에, 크리킷 행성의 전 인구는 매력적이고 즐겁고 지적인 존재에서…….”

“……좀 변덕스럽긴 해도…….” 아서가 중간에 추임새를 넣었다. “

……평범한 종족에서 매력적이고 즐겁고 지적인 존재로…….” 슬라티바트패스트가 말했다. “

……변덕스럽고…….”

“……광적인 종족 말살주의자들로 변신한 거라오. 우주라는 개념은 그들의 세계관에 들어맞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한마디로 그들은 그 개념 자체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거요. 그래서, 매력적으로, 즐겁게, 지적으로, 당신 말대로 변덕스럽게, 그들은 우주를 파괴하기로 결정한 거라오.

 

 

 

14.

이 친구들은 아주 착하고 다정한 사내들에 불과하지만, 은하계에서 이들과 같이 사는 건 싫을 겁니다.

 

 

 

15.

“괜찮아요.” 그녀는 빅뱅이라도 진정시켰을 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향기로운 바람이 바다에서 또 둥둥 떠서 올라왔다.

 

 

 

16.

“영원히 소실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오.”

 

로봇 웨이터는 퉁명스러움과 비굴함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방식의 시공간 회로망을 따라 움직이며, 촛불을 홱 낚아채어 가져갔다.

 

그는 옥타벤트랄 히비폰을 연주하는 법을 배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알다시피, 그것은 기분은 좋아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획이었다. 그는 그 악기에 맞는 숫자의 입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술을 진탕 마시고 여자들하고 춤을 추러 파티에 가는 거예요.”

“내가 지금 말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나요?”

“이해했어요.” 포드가 말했다. 뜻밖에도 그는 갑자기 맹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전부 다 완벽하게 이해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술이랑 여자가 남아 있는 동안, 술도 진탕 마시고 여자들하고 춤도 추고 싶어요.

 

 초신성 :: 새로운 별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초신성이라고 한다. 초신성이 폭발로 인해 분출하는 운동에너지는 10^51 erg 정도이며, 전에너지 방출은 10^53 erg에 달한다. 폭발한 후 처음 몇 주 동안은 절대등급이 -19에서-20등급에 이르는데, 이는 은하를 구성하는 약 10억 개의 별들의 밝기를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하다.
초신성으로부터 나오는 대부분의 에너지는 중성미자(neutrino)의 형태로 나오며, 운동에너지는 주로 20,000km/s 이상의 속도로 우주공간 속으로 흩어지는 폭발 잔해물에 의해 나온다. 폭발로 인한 충격파와 폭발 후 찌꺼기들은 초신성의 잔해물들을 만드는데, 게성운(Crab Nebula)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초신성의 중심에는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주선의 주요 발생원이기도 하다. 초신성 폭발은 폭발 전 별 내부에서 핵융합반응에 의해 만들어졌던 중원소들과 폭발시 중성자의 포획과정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중원소들을 성간가스의 형태로 우주공간에 분산시킨다. 이러한 성간가스들은 우주 공간 속에서 새로운 별의 형성원이 된다. 초신성은 절대등급이 아주 밝기 때문에 은하들의 우주론적 거리측정의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초신성의 관측은 천문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중원소의 형성, 별의 탄생과 진화에 대한 검증, 그리고 외부은하들의 우주론적 거리 결정 문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공헌하는 바가 크다. 즉, 초신성 분류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그것을 기준 삼아 결정되는 거리의 신뢰성이 높아지고, 중원소들의 형성에 관한 기원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신성은 그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의미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별 생성의 중요한 의미를 담당하고 있다. 초신성의 생성 비율이 각 은하형성 초기에 어느 정도였는지에 따라 그 은하의 중원소 형성의 비율을 유추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천문학적으로 대단히 많은 의미를 시사하며, 또한 복잡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좀더 단순한 의미만을 부각시켜 본다면 우주의 생성 초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중원소량을 증가시킨 역할을 한 것이 초신성의 폭발이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별의 일생 가운데 갑작스런 죽음의 단계를 일컫는 초신성은 별의 형성, 은하의 형성, 더 나아가 우주형성 과정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탄생의 비밀’, ‘진화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초신성 [supernova, 超新星]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슬라티바트패스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반은 어리둥절해서였고, 반은 노여워서였다.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 그는 이렇게밖에 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성을 쏟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쪽이 이긴다고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데, 절반은 짜증이 나서였고, 절반은 자신이 없어서였다.

 

 

 

17.

《은하대백과사전》은 시간 여행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써놓았지만, 대부분은 고급 초(超)수학을 4평생 동안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한 글자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 여행이 발명되기 전에는 4평생 동안 초수학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 자체에 대해 상당한 혼동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합리적인 설명은 시간 여행이, 그 본질상, 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동시에 발명되었다는 것이었지만, 물론 이는 누가 봐도 명백한 사기였다.

문제는 역사의 상당 부분 또한 누가 봐도 명명백백한 사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한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한테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시인이 한 사람 있다, 아니 있었다. 이름은 랄라파, 그는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시로 전 은하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롱랜드의 노래들〉을 썼다.

그 시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아름다웠다. 말하자면, 그 시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감정, 진실, 그리고 만물의 총체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복받쳐 올라,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고 나서 오는 길에 잠깐 술집에 들러 퍼스펙티브(‘이성적 시각’이라는 뜻도 있음—옮긴이주)와 소다 칵테일을 한 잔 마셔야 한다는 얘기다. 그 시는 그 정도로 훌륭했다.

랄라파는 에파의 롱랜드에 있는 숲에서 살았다. 그는 거기서 살았고, 거기서 시를 썼다. 교육이나 수정액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말린 하브라 잎 위에 시를 썼다. 숲의 빛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시로 썼다. 숲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시로 썼다. 자신을 떠난 여자와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정밀한 생각들을 시로 썼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의 시들이 발견되어 만인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 시들에 대한 소식이 아침의 햇살처럼 퍼져나갔다. 수세기에 걸쳐 그 시들은, 그것이 없었다면 더 어둡고 건조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밝혀주고 촉촉하게 해주었다.

그러다가, 시간 여행이 발명되고 난 직후, 몇몇 대형 수정액 제조업체들은 그가 질 좋은 수정액을 쓸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수정액의 효과에 대해 한두 마디쯤 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간의 파동을 타고 여행해서 시인을 찾아냈고, 상황을 설명했고——어려움이 있었다——, 정말로 시인을 설득해냈다. 사실 어찌나 잘 설득했는지 시인은 그들 덕분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고, 그토록 정밀한 시의 소재가 되도록 운명 지어졌던 여자는 끝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숲에서 이사를 나와 도시에서 상당히 훌륭한 보금자리를 얻었으며, 종종 미래로 가서 토크쇼에 출연해 재치를 빛내곤 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결국 끝내 그 시들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이 문제도 쉽게 해결되었다. 수정액 제조업체들은 훗날 출간된 시집과 말린 하브라 잎들을 산더미처럼 싸주면서 일주일 동안 그를 어딘가로 휴가를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시집에 담긴 시들을 하브라 잎에다 베껴 쓰면서 일부러 이상한 실수들을 한 뒤 수정액으로 고치고 했던 것이다.

요즘 들어 그 시들이 갑자기 값어치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시들은 예전과 똑같은 것이니 달라질 게 없다고 우긴다. 앞의 사람들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문제가 뭔지는 정확하게 몰라도, 그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실시간 캠페인’을 주창했다. 그들의 논거가 상당한 힘을 받은 것은, 캠페인을 주창한 지 일주일 후에 터져 나온 어떤 뉴스 때문이었다. 위대한 칼레즘의 대성당이 새로운 이온 정련소를 건설하기 위해 철거되었으며, 정련소 건설에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온 생산의 공기를 맞추기 위해서는 정련소 건설 착공을 과거로 너무나 많이 소급해야 하며, 따라서 이제 위대한 칼레즘의 대성당은 아예 건축조차 되지 않은 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대성당의 사진이 박혀 있는 엽서들은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값이 뛰었다.

그리하여 역사의 상당 부분이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실시간 캠페인 주창자들은, 쉬운 여행이 국가 간의 차이를 잠식하고 태양계들 간의 차이도 잠식했다면, 이제는 시간 여행이 한 시대와 다른 시대의 차이를 잠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말한다. ‘이제는 과거야말로 외국과 같다. 거기서도 모든 게 여기와 다를 게 없으니’라고.

 

 

 

18.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사실을 확인했고, 찌푸린 표정은 얼굴에 아예 붙박이로 자리를 잡았다.

말하자면, 찌푸린 주름이 더 깊어졌고, 아주 얼굴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전혀 없었다.

대답이 돌아오는 것보다 오히려 더 불안해져서, 아서는 이 무시무시한 ‘없음’으로부터 물러서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면 물러날수록 점점 더 겁이 났다. 얼마 후 그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가 본 모든 영화들에서는, 주인공이 공포의 대상이 자기 앞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면 그 괴물이 오히려 뒤에서 덮치곤 했기 때문이다.

 

아서의 온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피부는 이쪽으로 달아나려 하고 뼈다귀는 저쪽으로 달아나려 했으며, 뇌는 어느 쪽 귀로 기어 나가 도망치는 게 좋을까 결정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네놈이 나를 다시 볼 줄은 몰랐겠지.” 괴물이 말했다. 전에 만나본 적도 없는 괴물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진짜 이상하다는 생각이 아서의 뇌리를 어쩔 수 없이 스쳤다. 그가 이 괴물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증거는, 그가 밤마다 잠을 잘 잤다는 간단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자라났지. 어느 날 아침 처음으로 밝은 새 세상으로 머리를 디밀었다가 돌로 만든 원시적인 도구라고 추정되는 미심쩍은 물건에 머리가 깨졌어.

네놈이 만든 거야, 아서 덴트. 그리고 네놈이 휘둘렀지. 내 기억에는, 상당히 세차게 휘둘렀어.

네놈은 내 가죽으로 흥미로운 돌멩이들을 넣어놓을 가방을 만들었지. 그걸 알게 된 건, 다음 세상에 파리로 태어났더니 네놈이 나를 쳐 죽였기 때문이었어. 이번에도. 다만 이번에는 내 전생의 가죽으로 만든 가방으로 쳐 죽였지만.

아서 덴트, 네놈은 잔인하고 무자비할 뿐 아니라 기가 막히게 요령이 없는 인간이야.”

 

“환생에서 흥미로운 건 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 대부분의 영혼들이 환생이 실제로 자기한테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거야.”

 

“내가 도저히 모를 수가 없지, 안 그래?” 그가 외쳤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데 어떻게 몰라!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아서 덴트한테 잡혀서 죽었단 말이야. 어느 세계에서든, 누구로 태어나든, 언제든, 내가 자리를 잡을 만하면 아서 덴트가 나타나서 푸식, 나를 잡아 죽이는 거야.

도저히 모를 수가 없지. 기억을 환기하는 장치 같았지. 일종의 표시 말이야. 빌어먹을, 굉장한 비밀 누설이었다고!

내 영혼은 생명체의 세계로 또 한번 용감하게 모험을 떠났다가 별 소득 없이 아서 덴트의 손에 종말을 맞은 후 저 세상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지. ‘이상하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호수로 팔짝팔짝 뛰어가고 있을 때 나를 치어 죽인 그 남자가 낯이 익은걸…….’ 그리고 점차 나는 퍼즐 조각을 맞추게 되었어. 바로 너 덴트, 나를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죽인 살인자!”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생각들만 벗하며 홀로 있었다. 아서 자신의 생각들이란 게 어찌나 기분 나쁜 놈들인지

 

광막한, 불가해하리만큼 광막한 실내는 산맥 내부를 깎아 만든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실제로 산맥 내부를 깎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1909년 10월 28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영국인으로 1924년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이후 수차례 영국과 아일랜드를 오가며 살았다. 어릴 때 천식으로 큰 고통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는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챌튼엄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 기간이 그가 공식 교육을 받은 유일한 경험이었다. 1927년 당시 유럽 데카당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에서 2개월간 머물며 퇴폐적인 향락에 심취하였다. 이어 파리로 가 서양미술의 옛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등 모더니스트들의 최신 작품들에 이르는 다양한 미술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베이컨은 1929년 런던으로 돌아와 실내 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돈을 버는 한편, 작업실을 얻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화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작품 《십자가 책형 Crucifixion》을 발표하고 나서다. 검은 배경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를 단순한 선과 색채로 표현한 이 작품은 ‘십자가 책형’이라는 그의 일관된 주제를 담은 초기작으로 베이컨은 1930년부터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해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을 이렇다 할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보냈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천식으로 군복무가 면제되면서 작품제작에만 전념하였다. 이 무렵 그는 이전에 작업한 거의 모든 작품들을 스스로 파기했다.
베이컨은 1945년 런던의 르 페브르 화랑에서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1944)을 발표했다. 종교화에서 주로 사용하는 삼면화(트립티크)의 형식을 따온 이 회화는 베이컨이 활동하는 내내 사용하게 될 시각적 표현 형식을 효과적으로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루게 되는 많은 모티프들, 즉 그리스도의 수난, 복수의 세 여신, 고립된 인물, 신체의 왜곡 같은 요소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 작품은 그가 화가로 재출발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온전히 자기만의 양식으로 작업하는 주목할 만한 미술가임을 입증해 주었다.
베이컨은 과거의 미술작품, 특히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의 회화를 진지하게 연구했고,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Eizenshtein),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의 영화와 인체의 움직임을 찍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혁신적인 사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밖에 엑스레이 사진, 해부학 보고서, 구강과 턱의 병리학과 장애와 관련된 의학서적 등에 나온 기괴한 이미지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인간의 폭력과 신체의 변화에 대해 탐구했다. 그리고 인간을 가두고 속박하고 파괴하는 외부의 힘과 무방비 상태로 놓여 찢기고 일그러진 신체를 처절하게 표현했다. 더군다나 작품 속 주인공들을 단순한 선들이 경계를 이루는 텅 빈 공간이나 취조실과 같은 밀폐된 장소, 서커스의 곡마장을 연상시키는 무대에 등장시킴으로써 불안과 긴장감을 가중시켰다.
베이컨은 1950년대에도 독창적인 자신의 화풍을 계속 구사했다. 17세기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Pope Innocent X》(1650)를 기초로 해서 그린 많은 교황 연작은 이때 만들어졌다.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절규하는 모습의 교황 연작은 시각적 충격을 던져줌은 물론이고, 종교계의 최고 권력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는 평가와 함께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그는 20세기 유럽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강렬하고 불안하며 논란을 일으키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화가가 되었다.
베이컨은 평생 인물화에 천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인물 형상은 두려움과 속박에 의해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는 기독교 성화에서 삼위일체의 편재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어 온 삼면화 형식을 비틀어 그 속에 인간을 뭉개진 고깃덩어리처럼 그려 넣었다. 이러한 작품에 대하여 베이컨은 ‘짐승에 대한 연민’이라는 표현 대신 ‘고통 받는 인간은 고기다’라고 말했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 영역이고, 그에게 있어 인간은 죽어가거나 죽은 고기일 뿐이었다.
베이컨은 1992년 마드리드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채프먼 형제(Jake and Dinos Chapman) 같은 영국 현대 미술가들은 그를 작품에 근본적 영향을 미친 화가로 언급했다. 절망적이고 자극적인 날 것의 이미지와 불길하면서도 감미로운 색채, 작품에 내재된 강한 동성애 기질과 성적 충동 같은 그의 화화의 특징들은 회화에 대한 인기가 사그라지던 무렵 새롭고 진보적인 영국 화가의 출현을 알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2013년 11월 12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베이컨의 작품 《루치안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of Lucian Freud》(1969)이 1억4240만 달러(약 1528억 원)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그림 속 인물인 루치안 프로이트는 베이컨의 친구이자 20세기 표현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동료 화가로 1945년부터 베이컨과 교유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친손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20세기 동시대를 살아간 두 거장의 창조적이고 감정적인 연대감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그 밖의 주요 작품에는 《회화 Painting》(1946), 《인체 습작 Study from the Human Body》(1949),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습작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1953), 《조지 다이어의 두상 습작 Study for the Head of George Dyer》(1966), 《거울에 비친 조지 다이어의 초상 Portrait of George Dyer in a Mirror》(1968), 《1973년 5월~6월 세폭화 Triptych, May–June 1973》(1973)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무기돌 :: 고딕 건축에서 낙숫물받이로 만들어 붙인, 기괴한 괴물 형상들

 

일 인치로 돼 있다 해도 기분 나쁠 그런 종류의 조각상이 오십 피트 크기로 세워져 있으면 어떤 모델이라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경이로운 수집품 같은 치아를 지니고 있었다.

이빨들은 전부 다른 동물들한테서 뽑아온 것 같았는데, 입 주위에 어찌나 기괴한 각도로 붙어 있는지 그걸로 뭘 씹으려 하다가는 자기 얼굴 절반을 찢는 건 물론이고 한쪽 눈알까지 빠지게 할 것 같았다.

 

“이봐, 이건 그냥 운명이 너한테 빌어먹을 장난을 치는 거야. 아니 나한테. 나한테. 순전히 우연이란 말이야.”

 

 

 

19.

‘분둔의 성스러운 점심 먹는 승려들’(이들의 주장은, 점심은 인간의 한시적 하루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간의 한시적 하루는 인간의 영적 삶에 상응하기 때문에, 점심은 (a)인간의 영적 삶의 중심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b)대단히 훌륭한 식당에서 먹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차원에서 행해지는 브로키안 울트라 크리켓 경기 법칙의 기이함과 불가해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체 경기 규칙은 엄청나게 방대하고 복잡해서, 이것이 한 권의 책으로 엮였던 것은 역사상 단 한 번뿐이다. 하지만 결국 그 책은 중력장 붕괴를 일으켜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주 짤막하게 정리하자면 경기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규칙 1 : 최소한 다리 세 개를 더 길러야 한다. 별로 필요하지는 않지만, 관중이 재미있어하니까.

규칙 2 : 탁월한 브로키안 울트라 크리켓 선수를 딱 한 명만 찾아내라. 그를 몇 번 복제하라. 그러면 지루하게 선수를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엄청난 양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규칙 3 : 당신의 팀과 상대 팀을 거대한 경기장에 몰아넣고 주위에 높은 담을 세우라. 이렇게 하는 것은, 이 경기가 다수의 관중을 위한 스포츠이기는 하지만, 진행되는 경기를 보지 못하는 좌절감으로 인해 관중이 실제로 벌어지는 경기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상상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다. 방금 따분한 경기를 보고 나온 관객보다 방금 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을 놓쳤다고 믿고 있는 관객이 훨씬 더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규칙 4 : 각양각색의 스포츠 장구들을 벽 너머의 선수들을 향해 아주 많이 던지도록 하라. 아무것이나 던져도 된다——크리켓 배트, 베이스큐브 배트, 테니스 총, 스키, 붙잡고 신나게 휘두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된다.

규칙 5 : 선수들은 이제 주워 건네줄 만한 것이면 아무것이나 무조건 주워다가 근처에 늘어놓으면 된다. 그러다 어떤 선수가 다른 선수한테 ‘히트’를 얻으면, 그에게 당장 달려가 안전 거리 밖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

사과는 간결하고 진심 어린 어조로 전달해야 하며, 의도를 최대한 극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메가폰으로 해야 한다.

규칙 6 : 제일 먼저 이기는 팀이 승자가 된다.

희한한 일이지만, 고차원에서 이 경기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실제로 경기가 벌어지는 횟수는 줄어들게 되었다. 대부분의 팀이 규칙의 해석을 두고 상대 팀과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길게 볼 때 한없이 길게 늘어지는 브로키안 울트라 크리켓 경기보다는 차라리 제대로 전쟁을 한판 하는 쪽이 정신적 손상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20.

땅이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는 별안간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산사태’라는 말의 강력한 힘을 느꼈다. 그 말은 항상 그냥 ‘단어’에 불과했었는데, 이제 그는 땅이 미끄러져 내리는 건 정말 기괴하고 구역질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돌연, 무시무시하게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잠시 아테네 공항을 생각하며, 아주 쓸모 있는 짜증에 대략 오 분간 사로잡혔다. 이 짜증 나는 생각이 끝나갈 무렵, 그는 자신이 지표로부터 약 이백 야드 위에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여행 가방은 멋진 자태를 뽐내며, 기진맥진한 돌덩어리들 사이에 보란 듯이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돌덩어리에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수수께끼는 가방이 그 자리에 있다는 희한한 사실 자체에 묻혀 빛을 잃었다. 사실 그는 수수께끼를 캐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다. 요점은 그 가방이 거기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가방을 주워 올려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지금 그는 이름도 기억 못하는 행성의 이백 야드 상공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옛 인생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을 차지했던 그 물건이 그렇게 애처롭게 앉아 있는 걸 도저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가루가 되어버린 고향 별의 잔해로부터 수억 광년 떨어진 이곳에 그것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만일 그가 잃어버린 상태 그대로라면 가방에는 우주에 살아남은 유일한 진짜 그리스 올리브 오일이 한 깡통 들어 있을 터였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최대한 가볍게 찡그리려 최선을 다했지만.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아들이고 나자 어찌나 고요하고도 황홀한지, 그는 그런 기분을 상실하는 걸——아마도 영원히——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철학자들이 숫자를 세는 동안 바늘 위에서 기쁨의 춤을 추는 천사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산토리니 :: 에게해 남쪽, 그리스 본토로부터 남동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키클라데스 제도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섬의 면적은 76km², 해안의 길이는 69km이다.
산토리니의 자치행정구역은 사람이 사는 티라와 테라시아(Therassia, Θηρασία)는 물론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아스프로니시(Aspronisi, Ασπρονήσι), 크리스티아나(Christiana, Χριστιανά), 팔라이아 카메니(Palea Kameni), 네아 카메니(Nea Kameni) 등을 포함한다. 티라섬에는 13개, 테라시아섬에는 3개의 마을이 각각 있으며, 주도는 피라(Fira)이다. 제2도시는 이아(Oia)마을이며 그 외 마을로 피로스테파니(Firostefani),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카마리(Kamari), 아크로티리(Akrotiri) 등이 있다.
암석을 잘라 만드는 건축구조가 여전히 유지되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고, 1980년대부터 전 세계에서 결혼식이나 신혼여행 장소로 유명해져서 연간 500여 회의 결혼식이 열리는 것으로 추산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토리니섬 [Santorini Island]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1.

파티에서 들은 얘기를 믿어서는 안 되는 법이고, 이 파티에서 들은 얘기는 더더욱 믿을 게 못 된다.

 

현재의 파티 참석자들은 완전히 열렬한 파티광들이거나, 헛소리나 찍찍 하는 바보들이거나, 그도 아니면, 사실 점점 더 많아지고 있듯이, 두 가지 다였다.

 

끝이 안 나는 파티의 문제점은, 파티에서나 좋은 생각으로 통하는 일들이 계속 좋은 생각으로 통한다는 사실이다

 

 

 

22.

아서는 축축한 공기 속에 심하게 헐떡거리며 누워 있었고, 몸 구석구석을 느끼며 어디를 다쳤는지 살펴보려 애썼다. 손을 댈 때마다 고통이 찾아왔다. 얼마 후 아서는 손이 아파서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머리는 자유형으로 헤엄을 치고 있었지만, 그의 배는 접영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공황 상태에 빠진 포드가 씩씩거렸다.

“어, 뭐 그냥.” 아서는 말을 더듬었다. 그 일을 어떻게 간단하게 설명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가 훨씬 더 좋아요. 훨씬 덜 근엄하고, 훨씬 더 위험스럽지요.”

 

방 안에 조금 남아 있던 희미한 빛이 온 힘을 다해 잠시 그의 헬멧에 달린 뿔 근처로 가서 사악하게 번득거렸다.

 

“우주는 한 삼십 분 동안 내버려둬도 혼자 잘할 만큼 큰데다 나이도 들었잖아요.”

 

상대는 마치 머리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통째로 이고 있는 듯한 여자였다. 그는 시끄러운 소리를 뚫고 여자와 대화를 나눠보려는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 모자 마음에 드네요!” 그는 고래고래 악을 썼다.

“뭐라고요?”

“그 모자 마음에 든다고요!”

“저는 모자 안 쓰고 있는데요.”

“뭐, 그럼 그 머리가 마음에 들어요.”

“뭐라고요?”

“머리가 마음에 든다고요. 흥미로운 골격 구조예요.”

“뭐라고요?”

포드는 자기가 한창 하고 있는 복잡한 동작들 사이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데 성공했다.

“춤을 정말 잘 춘다고 했어요.” 그가 소리쳤다. “고개를 조금만 덜 끄덕이면 좋겠어요.”

“뭐라고요?”

“그냥 당신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포드가 말했다. “……아야!” 포드는 곧 이렇게 덧붙여야 했다. 상대가 “뭐라고요?”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자 앞으로 튀어나온 두개골의 날카로운 끝이 포드의 이마를 쪼았던 것이다.

 

아서는 음료를 마시다가 심하게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캑캑거리고 기침을 했다.

“정말 근사한 기침이에요.” 작은 남자는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제가 따라 해도 괜찮을까요?”

그러더니 작은 남자는 그야말로 희한하고 화려한 기침을 발작처럼 하기 시작했다. 아서는 너무나 놀라서 다시 숨이 넘어갈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이미 그가 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몹시 헷갈렸다.

두 사람은 함께 폐가 터져 나가라 이중창으로 기침을 했고, 족히 이 분쯤 계속되었을 때에야 아서는 기침하며 침 튀기는 짓을 가까스로 그만둘 수 있었다.

 

“아, 그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저기 산에 있기에.” 그가 말했다.

“만났어요.”

“아, 굉장히 급한 거 같더라고요.”

“네, 만났어요.”

“아, 당신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알아요. 만났거든요.”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작은 껌을 씹었다. 그러더니 아서의 등을 툭툭 쳤다.

“알았어요.” 그가 말했다. “됐어요. 그냥 하는 말이에요, 됐죠? 잘 자요. 행운을 빌어요. 상도 타고.”

 

 

 

23.

“그래, 좋아.” 포드가 아서에게 외쳤다. “그래, 나는 겁쟁이다, 어쩔래. 중요한 건 내 목숨이 아직 붙어 있다는 거지.” 그들은 다시 비스트로매스 호에 타고 있었다. 슬라티바트패스트도 타고 있었다. 트릴리언도 타고 있었다. 조화와 일치는 타고 있지 않았다.

“흠, 하지만 나도 살아 있어, 안 그래?” 아서는 모험과 분노로 핼쑥해진 얼굴을 하고 이렇게 대꾸했다. 아서의 눈썹은 둘이 서로 주먹다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펄떡펄떡 위아래로 뛰고 있었다.

“너는 하마터면 뒈질 뻔했잖아.” 포드가 폭발했다.

 

그는 새삼스럽게 열렬한가 하면 또 새삼스럽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기기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24.

이 종족과 싸우려면, 제일 좋은 방법은 그냥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누가 태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몹시 비위 상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 종족이 성이 나면 꼭 다치는 사람이 생겼다.

 

사일라스틱 갑옷 악마 종족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그냥 자기 혼자 방에 가둬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자기 자신을 죽도록 패고 있을 테니까.

 

그는 자신이 이 궁극적인 무기 문제에 대해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그걸 폭파시키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들 중에는 그걸 폭파시킬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들보다 더 나쁜 건 없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폭탄 설계에 일부러 소소한 결함을 만들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25.

승객들은 이제는 자신들이 막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가 되는 것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역사적 사건을 둘이나 목도할 줄은 몰랐다.

 

한 시대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소행성 끝이 막막하고 보드라운 먼지 구름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동안, 시간은 빙글빙글 돌며 끔찍하게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꽉 조여 있던 공간이 풀리는 과정은, 구경꾼들의 눈알을 안구에서 뽑아내는 것처럼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몇 초 전만 해도 텅 빈 우주 공간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던 자리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태양을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느라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일이 초쯤 흘렀을까, 그들은 방금 벌어진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두 손을 들어 눈부터 가렸다.

 

 

 

26.

자포드는 우주선 갑판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고통이 온몸을 쿵쿵거리며 밟고 지나가고 머리를 찧어대고 있는 사이 그의 등허리는 마룻바닥과 씨름을 하는 것 같았다.

 

그가 미간을 어찌나 깊이 찌푸렸는지, 주름 사이에 작은 구근 채소들이라도 심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거요?” 슬라티바트패스트가 말했다.

“우리?” 포드가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우리가 누군데요?”

“남아서 여러분이 은하를 구하는 걸 돕고 싶습니다만…….” 자포드가 어깨를 간신히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저한테는 두통 낳는 부모가 있어서, 이미 두 개의 두통이 태어나 있는데다, 앞으로도 엄청 많은 두통들이 태어날 예정이라서 말이지요. 하지만 다음번에 은하를 구할 일이 생기면, 그때는 불러만 주세요.

 

 

 

27.

똑같은 언덕이었지만 똑같지가 않았다.

 

아서의 손가락들은 서툴게 더듬거리며 안전 장치를 풀고, 포드가 보여준 지독하게 위험하다는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하도 덜덜 떨어서, 그 순간 누구한테 대고 총을 쐈다면, 아마 시체에다 자기 서명을 남겼을 것이다.

 

그들은 창백한 얼굴의 크리킷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위아래로 흔들리는 손전등 불빛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29.

그가 총을 들고 있는 모양새는, 마치 볼일 보고 금세 다시 오겠다며 친구가 잠깐 맡겨두고 간 총을 대신 들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서서히 둔탁한 경악이 슬라티바트패스트, 포드, 그리고 아서의 몸을 아래로부터 훑고 올라왔다. 조금 있으면 놀라움이 뇌에 도달할 것이었다. 하지만 뇌는 지금 당장은 그들의 턱뼈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주위를 에워싼 손전등 불빛들은 이제 살짝 고개를 떨어뜨리는 듯했다. 마치, 이 시커먼 혼돈의 우주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할 일을 알고 있는 듯한 이 낯선, 차분한 여자에게 모든 권위를 양도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사람들 뒤쪽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를 폴 매카트니가 썼으면, 아마 전 세계를 다 사고도 남을 만한 돈을 벌었을 것이다.

 

 

 

30.

자포드 비블브락스는 기차게 멋지고 근사한 사내답게, 터널을 따라 용감하게 기어갔다. 그는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어쨌든 용감한 사내이므로 계속 집요하게 터널을 따라 기어갔다.

그는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듣게 될 이야기에 어리둥절해질 것에 비하면 이건 절반 수준도 안 되는 혼란이었다.

 

그는 이제까지는 마치 생명을 구하는 부적이라도 달고 다녔던 것처럼 로봇들과 대적할 때마다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래도 무지무지하게 아픈 건 사실이었고, 그래서 이제는 기막힌 행운——이렇게 부르고 싶은 마음은 절반밖에 들지 않지만——만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포드는 이들과 연루되기 싫어서, 신중함이 용기의 다른 이름이면 비겁함도 신중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결정하고, 용감하게 찬장에 몸을 숨겼다.

 

 

 

31.

로봇의 뇌는 크리킷 전쟁 컴퓨터의 중앙 정보 핵심에 묶여 있었다. 로봇으로서는 결코 즐겁지 못한 경험이었지만, 그건 크리킷 전쟁 컴퓨터 쪽도 마찬가지였다.

 

로봇은 이 일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 행성의 군사 전략을 짜는 것은 이 엄청난 지적 정신의 아주 작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정신은 끔찍한 지겨움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기 문제만 제외하고, 전 우주의 모든 수학적·물리학적·화학적·생물학적·사회학적·철학적·윤리학적·천문학적·심리학적 문제를 세 번씩 반복해서 풀고 나자 로봇은 더 이상의 할 일을 전혀 생각해낼 수 없었고, 그래서 아무 음조도 없고 선율도 없는 짧고 애처로운 노래들을 작곡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지은 곡은 자장가였다.

 

이제 세상은 모두 잠이 들었네.

어둠은 내 머리를 에워싸지 못하리.

 

“맥없이 이렇게 앉아 있어요. 고통과 참담함이 유일한 벗이죠. 그리고 어마어마한 지성도요. 그리고 무한한 슬픔도. 그리고…….”

 

“그럼…….” 자포드가 어색하게 말했다. “네가 내 목숨을 살려준 거구나. 두 번이나.”

“세 번이에요.” 마빈이 말했다.

 

“저를 해방시켜주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군요.”

“꼬마야, 내 마음이야 그렇게 해주고 싶지.”

“하지만 안 그러실 테죠.”

“그래.”

“알았어요.”

“넌 아주 잘하고 있어.”

“맞아요. 하기 싫어 죽겠는데 왜 지금 그만두겠어요?” 마빈이 말했다.

 

“저 젊은 여성은, 제가 끝내 만남을 피할 수 없어서 심오하게 불쾌했던 수많은 유기체들 중에서 가장 덜 어리석고 덜 미개한 유기체예요.”

 

“이봐, 폭탄 어쩌고 하는 게 무슨 얘기야?” 자포드가 깜짝 놀라서 마빈에게 말했다.

“초신성 폭탄이요?” 마빈이 말했다. “그건 아주, 아주 작은 폭탄이에요.”

“그런데?”

“순식간에 전 우주를 파괴할 수 있어요.” 마빈이 말했다. “제 의견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는 거지만요. 하지만 작동시킬 수 없을걸요.”

“왜? 그렇게 훌륭한 폭탄이라며.”

“폭탄이야 훌륭하죠.” 마빈이 말했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그렇게 훌륭하지 못해요.

 

 

 

32.

그녀는 음침한 어둠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뭔가 반응이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오로지 차가운 정적뿐이었다.

 

진짜 소파였다.

아니, 설령 진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그들의 엉덩이를 받쳐주었는데, 소파가 원래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니, 어떤 의미 있는 잣대를 갖다 대더라도 그건 진짜 소파였다.

 

내……이런 입자 상태로는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부추기고 은근히 암시하는 것뿐이야. 부추기고 암시하고. 그리고 암시…….”

 

 

 

33.

그는 저승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기도했다. 그러다 여기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걸 깨닫고, 저승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를 그냥 소망하기만 했다.

 

 

 

에필로그

시간과 거리는 하나이며, 마음과 우주는 하나이며, 인식과 현실은 하나라는 것, 사람은 여행을 많이 할수록 한 장소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뜻밖에 자기 삶에 다시 나타난 방식이 또다시 모든 것이 하나라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상대성에서, 물질은 공간에게 어떻게 휘어져야 하는지 말해주고, 공간은 물질에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말해준다.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그사이에 우주가 좀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와 기억의 그림자들이 구름의 그림자가 하늘을 스치고 지나가듯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 질문과 해답은 상호 배제적이에요. 한 가지에 대한 지식이 다른 것에 대한 지식을 배제한단 말이에요. 같은 우주에서 두 가지가 한꺼번에 알려진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들은 비가 오면 그게 계시라는 걸 알았다.

비가 그쳐도 계시였다.

바람이 불어도 계시였다.

바람이 그쳐도 계시였다.

 

각각의 새로운 계시는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평원의 왕자들’과 ‘추운 언덕 비탈의 미개 부족’들이 또다시 서로를 미친 듯이 죽여댈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 사실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겠지만, 문제는 ‘평원의 왕자들’과 ‘추운 언덕 비탈의 미개 부족’들이 서로 미친 듯이 죽여대는 장소로 항상 ‘숲’을 선택했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교전에서 최악의 사상자를 내는 건 항상 ‘숲의 주민들’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싸움이었는데도 말이다.

 

불행하게도, 일단 새의 말을 배우게 되면 머지않아 허공에서 새의 말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저 무의미한 새들의 수다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피해 도망갈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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