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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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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열린책들 세계문학 172)(양장본 HardCover)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로운 인생을 깊이 고민한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알베르 카뮈의 작품 『이방인』. 세계적인 거장들의 대표 작품부터 한국의 고전 문학까지 젊고 새로운 감각으로 고전을 새롭게 선보이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172번째 책이다. 1942년에 발표된 데뷔작으로, 그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수기 형식으로 들려주며 의미 없는 세상에서 죽음만이 인생의 목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삶이 의미 있음을 역설한다. 한여름의 강렬한 햇빛과 해변을 배경으로 부조리한 세상과 부조리의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삶과 죽음, 부조리와 반항,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상을 그린 소설이다.
저자
알베르 카뮈
출판
열린책들
출판일
2011.05.15

 

0. 서문

 전쟁과 부조리로 가득해 의미 없는 세상에서 <죽음만이 인생의 목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삶이 의미 있음을 역설한 작품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는 모든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그리고 특히, 있는 것 이상을,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관하여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1. 제1부

 1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엄마는 나와 한집에 살던 때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눈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뒤좇는 걸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후 양로원에 도착했을 때 처음 며칠간 엄마는 종종 울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동안 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다. 몇 달이 지나고 난 후 만약 누군가 엄마를 양로원에서 퇴원시켰다 한다면, 그땐 데리고 나갔다 해서 울었으리라. 역시, 습관 때문에. 내가 마지막 해에 양로원에 거의 들르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날이 급작스럽게 저물었다. 유리창 너머로 어둠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짙어졌다. 수위가 전등 스위치를 돌렸다. 갑작스레 퍼지는 빛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눈이 먼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난생처음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내 주의를 끈 점은, 눈은 간데없고 대신 주름이 자글자글한 구멍 한가운데에 흐릿한 빛만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모두들 입술이 빠진 입 속으로 말려 들어가 있어서, 나는 그들이 내게 인사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안면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내게 인사를 한 것이라 보는 쪽이 더 맞으리라.

 

 주억거리다 [주억꺼리다] :: [동사] 고개를 앞뒤로 천천히 끄덕거리다.

 

 그 여자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히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침묵이었다.

 

 그들은 그 소리를 듣지도 못할 정도로 자기들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심지어 그들 한가운데 누워 있는 이 망인이 그들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주변의 시골 풍경을 둘러보았다. 하늘 언저리 언덕에까지 줄지어 심긴 실편백들, 적갈색과 녹색을 띤 대지, 드문드문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집들을 통해 나는 엄마를 이해했다. 이 고장에서 저녁이란 마치 애수 어린 휴식시간과도 같았을 게다. 오늘, 끓어넘칠 듯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인해 일렁이는 풍경은 비인간적이고도 위압적이었다.

 

 그의 두 뺨 위에는 흥분과 고통이 자아낸 굵은 눈물 줄기가 흥건했다. 그러나 주름으로 인해, 눈물은 흘러내리는 대신 번지고 뭉쳐 그 엉망이 된 얼굴에 일종의 물의 유약을 씌워 놓았지.

 

 제라늄 :: 남아프리카 원산이다. 줄기는 높이 30∼50cm이고 육질이다. 잎은 부드러우며 자루가 길고 심장 모양 원형이며 극히 얕게 패어 있는 것과 더불어 톱니가 있다. 
꽃은 봄에서 여름에 걸쳐 피고 긴 꽃줄기 끝에 자루가 있으며 산형(傘形)으로 달린다. 꽃이 피기 전에는 꽃봉오리가 밑으로 처졌다가 위로 향하여 피며 꽃의 색깔은 품종에 따라 다양하다.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씩이고 수술은 10개이며 암술은 1개로서 5실의 씨방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라늄 [scarlet Geranium, malva] (두산백과)

 

 2

 어쨌든, 사람들은 언제나 약간씩은 잘못을 저지른다.

 

 구름장이 일종의 비의 약속을 남기고 지나간 후 거리는 한층 더 어두워졌다.

 

 하루의 정경이 또다시 약간 변했다. 지붕들 위로 펼쳐진 하늘은 불그스름해졌고, 저녁이 다가오면서 거리에는 활기가 살아났다.

 

 창문을 닫고 되돌아올 때 문득 거리에 비친 식탁 귀퉁이가 눈에 들어왔다. 알코올 램프가 놓여 있고 그 옆에 빵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식탁, 그러자, 언제나처럼 또 하루의 일요일이 지나갔고, 엄마는 이제 땅속에 묻혔으며, 나는 다시 일터에 나갈 것이고, 그리고 어쨌든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

 건물 안은 조용했고 계단 곬 깊숙한 곳에서부터 어둡고도 습한 기운이 새어 올라왔다. 들리는 것이라곤 귓전에서 웅웅거리는 나 자신의 피 도는 소리뿐이었다.

 

 4

 열어 둔 창문으로 스며드는 여름밤의 기운이 우리의 갈색 몸 위로 흐르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5

 사장은 내게 삶에 변화를 주는 데 큰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모든 삶이 어쨌든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법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삶도 내게는 전혀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또다시 잠깐 침묵하다가 내가 기묘한 사람이며, 아마도 자기가 지금은 그 점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언젠가는 내게 혐오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개가 피부병에 걸린 후로 살라마노는 매일 아침저녁 개에게 연고를 발라 주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 따르면, 개의 진짜 병은 바로 늙는다는 것이었다. 늙음에는 약이 없는 것이다.

 

 6 

 거리에 나서니, 피로하기도 하고 방 블라인드를 줄곧 내려 두었던 탓도 있어 이미 한창인 햇빛이 마치 내 따귀를 갈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뜨겁게 달궈진 모래밭이 이제 내 눈엔 붉은색으로 보였다.

 

 태양은 거의 우리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모래와 바다 위에 산산이 흩어져 내렸다.

 

 그러는 내내 우리 주변에는 태양과 침묵, 그리고 희미한 샘물 소리와 피리로 내는 그 세 개의 음정만이 맴돌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침묵과 열기 사이로 흐르는 희미한 샘물 소리와 피리 소리를 한 차례 더 들어 넘겼다.

 

 모든 것이 여기, 바다와 모래, 태양, 그리고 피리와 물이 만들어 내는 이중의 침묵 사이에서 멈춰 섰다.

 

 바다는 헐떡거리며 전력을 다해 모래 위로 작은 파도들의 밭고도 숨 막히는 호흡을 밀어냈다.

 

 훈영(暈影) :: 반사 광선(光線)에 의(依)한 사진면의 테두리. 헐레이션(halation).

 

 아까와 똑같은 태양, 똑같은 모래 위의 똑같은 빛이 그곳까지 이어져 들어왔다. 낮이 더 이상 꿈쩍하지 않은 지 벌써 2시간이나 되었다. 2시간 동안이나 낮은 끓어넘치는 금속의 대양 속에 닻을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줄곧 아랍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지라, 나는 수평선으로 작은 증기선이 지나가는 것을 대략 내 시선 끝에 잡히는 검은 점의 형태로 읽어 냈다.

 

 단검 위에서 빛이 분출했다. 번쩍이는 길디긴 빛의 날이 내 이마를 강태했다. 그 순간 눈썹에 모여 있던 땀이 단숨에 흘러내리며 내 두 눈꺼풀을 미지근하면서도 두터운 너울로 덮어씌웠다. 그 눈물과 소금의 장막 뒤에서 내 눈은 멀어 버렸다. 이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마에서 울려 대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 그리고 그것에 가세한 정면의 단검이 뿜어 대는 번쩍이는 빛의 칼날뿐이었다.

 

 나는 경련을 일으키며 권총을 쥔 손에 발작적으로 힘을 주었다. 방아쇠가 굴복하고, 나는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를 건드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무미건조한 동시에 귀를 찢는 듯한 그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방금 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고요를 파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꼼짝하지 않는 아랍인의 몸에 대고 또 다시 네 발을 더 쏘았다. 총알들은 바깥으로 흔적을 드러내는 대신 몸뚱이 깊숙이 박혀 들었다. 그 네 발의 총성이 내게는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았다.

 

 

 

 2. 제2부

 1

 아마 나도 엄마를 무척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든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기도 하지 않는가…….

 

 그의 방은 베일로 된 커튼을 그대로 뚫고 들어오다시피 하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 안은 매우 더웠다.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내내 우리의 대화를 뒤좇던 타자기 소리는 그 침묵의 순간에도 여전히 이어지며 대화의 맨 마지막 구절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2

 내게는 마리의 편지를 받던(그녀는 자신이 내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썼다) 그날부터 비로소 이젠 이 독방이 내 집이며 내 삶은 그 안에서 정지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진작부터 철책에 얼굴을 찰싹 붙이고 기다리던 마리는 나를 보자 있는 힘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리가 정말 예뻐 보였지만, 나는 그 말을 그녀에게 할 수 없었다.

 

 사람은 결국 무엇에나 적응하기 마련이다.

 

 내가 꼭 마리만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한 여자를, 여자들을, 내가 알았던 모든 여자들과 그녀들을 사랑했던 모든 상황들을 절실히 생각한 나머지 내 독방은 온갖 얼굴들로 채워지고 욕망으로 붐볐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나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그럼으로써 나는 시간을 때울 수 있기도 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때까지 내가 알지 못했거나 잊어버렸던 사실들을 점점 더 많이 기억의 편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가 지닌 추억의 양은 지루함을 재우기에 충분하리라.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특권이기도 했다.

 

 나는 예전에는 하루하루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긴 동시에 짧을 수 있는지 몰랐다. 살아 내기에는 길다할 수 있을 나날의 시간들은 늘어나고 또 늘어난 끝에 마침내 서로 범람하기에 이르렀고, 그럼으로써 제 이름을 잃고 말았다. 이제 내게는 어제나 오늘이란 단어만이 유일하게 의미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감옥의 전 층으로부터 저녁의 소리가 침묵의 행렬을 이루며 타고 올라오는 이름 없는 시간이었다.

 

 3

 바로 이것이 이 소송의 모습입니다. 모든 게 다 옳은 동시에 아무것도 옳지 않은 거죠!

 

 불행은 사람을 속수무책으로 만드니까요. 그렇습니다! 저에겐 이게 그냥 불행한 일입니다.

 

 법원에서 나와 호송차에 오를 때 나는 아주 잠깐 여름 저녁의 냄새와 색채를 알아보았다. 움직이는 감옥의 어슴푸레함 속에서 나는, 마치 내 피곤의 바닥에서부터 길어 올리듯, 내가 사랑했던 도시와 내게 흡족함을 안겨 주던 어떤 특정한 시각이 발산하는 온갖 친숙한 소리들을 하나하나 다시 발견했다. 이미 완만하게 누그러진 대기를 향해 솟아오르는 신문팔이들의 외침, 작은 공원에서 지저귀는 마지막 새들, 샌드위치 장수들이 손님 부르는 소리, 도시의 경사진 모퉁이를 돌아가는 전차들의 신음, 그리고 다리 위로 밤이 내리기 전 하늘에 번지는 저 수런거림…….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러나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맹목의 행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 때는 아주 오래전 내가 나 자신의 충만함을 느끼곤 하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그 시절, 그 시간대에 나를 기다리던 것은 언제나 가볍고도 꿈 없는 잠이었던가. 하지만 무언가가 바뀌었다. 다음 날의 예비와 더불어 내가 다시 발견한 것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었으니 말이다. 여름 하늘 속에 그어지는 친숙한 길들은, 그것들이 무구한 잠으로 이어졌던 것만큼이나 쉽사리 감옥으로도 다다를 수 있는 것이었다.

 

 4

 장광설 (長廣舌) [장광설] :: [명사] 1. 길고도 세차게 잘하는 말솜씨. 2.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

 

 나도 그때 오가는 말을 경청하고 있었던지라 그들이 나에 대해 영리하다고 판단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보통 사람에게 장점이 되는 특질이 어떻게 해서 죄인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그가 옳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한 행위를 그다지 후회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동안 내게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진정으로 후회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고 설명해주고 싶었다.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닥칠지, 항상 그 문제에 정신을 쏟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우리는 이 사실을 두고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피고 자신이 애시당초 획득할 수 없는 것을 놓고 그에게 그 자질이 결여되었다고 개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나, 이 같은 법정 안에서라면, 관용이라는 지극히 부정적인 미덕은 그보다 덜 용이하나 더 고차원적인 미덕인 정의로 전환되어야만 합니다. 더구나, 여기 이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텅 빈 심장이 자칫 한 사회를 무너뜨릴 심연이 될 수도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도덕적으로 자기 어머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세상 빛을 보게 해준 사람에게 살인자의 손길을 뻗치는 자와 동일한 자격으로 인간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법이었다.

 

 내 영혼의 문제를 논하던 그 끝없이 긴 나날들과 시간들로 인해 마치 모든 것이 무채색의 물로 변해 버리고 나는 그 속에서 현기증을 앓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장 사소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오래가는 기쁨을 안겨 주었던,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내게 속하지 않는 삶의 갖가지 추억들이 나를 엄습했다. 여름의 냄새들, 내가 좋아하던 거리, 저녁의 어떤 하늘빛, 마리의 웃음과 그녀의 원피스들……. 그러자 지금 이곳에서 내가 치르고 있는 이 모든 일의 부질없음에 대한 느낌이 목까지 차올라 왔다.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저녁의 감미로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내가 마리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리를 잊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나는 셀레스트와 레몽 사이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마치 <이제야>라고 말하듯 내게 작은 신호를 보냈다. 약간 수심 어린 마리의 얼굴이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너무나 굳어 버린 나머지 그녀의 미소에 아무런 화답도 할 수 없었다.

 

 5

 나의 하루하루는 낮으로부터 밤으로 이르기까지 하늘의 얼굴에 떠오르는 색채들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으로 지난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한 번쯤은 운명의 수레바퀴가 멈춰 서기도 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불가항력적인 사전 계획 속에서 우연과 기회가 단 한 번 무엇인가를 바꿔 놓았던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단 한 번!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 정도만으로도 이미 충분했을 거라 믿는다. 그러면 나머지는 나의 마음이 알아서 했으리라.

 

 그건 이성적이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런 식의 가정에 섣불리 몸을 맡기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러고 난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한기에 사로잡혀 담요 밑에 몸을 오그린 채 주체할 수 없이 이를 덜덜 떨어야 했기 때문이다.

 

 단두대의 칼날이 지닌 결함은 그것이 아무런 기회도, 절대적으로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바에 대해서는 언제나 과장된 생각을 지니기 마련이다. 반대로, 나는 모든 것이 그저 단순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내 심장의 소리를 들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쫓아다닌 이 소리가 영원히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전에 정말로 상상력을 발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그래도 이 심장 소리가 더 이상 내 머릿속으로 전달되지 않는 어떤 순간을 떠올려 보고자 했다. 헛수고였다.

 

 엄마는 종종 사람이 결코 완벽하게 불행해지는 법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늘이 채색되고 새 빛이 내 독방 안으로 스며드는 시간이 오면, 나는 나의 감옥에서 엄마의 말에 동의했다.

 

 삶이 그다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서른에 죽으나 일흔에 죽으나 별 중요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중 어느 경우가 됐든 다른 남자들과 다른 여자들은 여전히 살아갈 것이며,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일인 것이다. 결국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었다.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어쨌든 죽는 것은 항상 나였다. 다만 추론을 하면서 그 대목에 이르렀을 때 약간 곤란했던 것은, 앞으로 살 수 있을 20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어마어마한 흥분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그 20년을 살고 어쨌든 다시 이런 상황에 이르렀다 할 때, 그때 내 생각은 과연 어떠할지를 상상하며 흥분을 억누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람이 죽는 순간을 놓고 보면, 언제 어떻게 죽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나는 절망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다만 무섭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건 아주 당연한 일 아닐까요.

 

 내가 당신을 친구라 부르는 이유는 당신이 사형수여서가 아니라,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죽음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 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그건 같지 않다. 게다가 어떤 경우든 그것이 위로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도 동의했다.

 

 당신이 오늘 죽지 않는다 해도 나중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들의 정의는 아무것도 아니며 신의 정의만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에게 형을 선고한 것은 신의 정의가 아니라 인간들의 정의라는 점을 지적했다.

 

 내 미래의 깊은 곳으로부터, 이제껏 내가 살아온 이 터무니없는 생애 전체에 걸쳐, 아직 오지 않았던 세월을 거스르는 어둑한 바람이 내게로 불어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실감 나지 않는 저 무수한 세월과 함께 내게 약속된 모든 것들이 그 바람에 쓸려 가며 다 같은 것이 되어 버려.

 

 밤 냄새, 땅과 소금의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식혀 주었다. 이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마음속에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그 순간, 밤의 경계선을 타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세상을 향해 출발을 고하고 있었다.

 

 차츰차츰 생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주변에서마저도 역시 저녁은 애수 어린 휴식의 시간 같았지.

 

 

 

 +. 역자 해설 – 정직함, 또는 죽기로 하는 것

 앙드레 말로 :: 1901년 11월 3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동양어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북(北)라오스 고고학 조사단에 참가하여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갔으며, 도착 후에는 조사단과 헤어져 따로 크메르 문화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도굴 혐의를 받아 금고형이 언도되었으나, 지드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25년 다시 인도차이나에 가서 현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도와주고, 중국에 가서는 당시 공산당과 제휴하고 있던 광둥[廣東]의 국민당 정권에 협력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한 중국인과 한 프랑스인 사이의 왕복 서간(書簡) 형식을 취한 문명론적 작품 《서구(西歐)의 유혹》(1926)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광둥 혁명에서 취재한 《정복자》(1928), 밀림에서 크메르 문화의 유적을 찾는 모험을 테마로 한 《왕도(王道)》(1930), 장제스[蔣介石]가 공산당을 탄압한 상하이[上海] 쿠데타(1927)를 무대로 한 《인간의 조건》(1933) 등의 소설을 발표하여, 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전체주의가 대두하자 지드 등과 반(反)파시즘 운동에 참가하여, 반(反)나치즘적 소설 《모멸(侮蔑)의 시대》(1935)를 발표하였으며, 1936년에 에스파냐내란이 일어나자 공화파 의용군에 참가하여, 그 체험을 바탕으로 르포르타주 소설의 걸작 《희망》(1937)을 썼다.
1939년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이 체결되자 공산주의와 절연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부상으로 포로가 되었으나 탈주하여 항독(抗獨) 운동에 참가해 활약하였다. 그 동안에도 《천사와의 싸움》의 제1부 《알텐부르크의 호두나무》(1943)를 썼으나,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 후로 이 소설의 집필을 단념하였다. 1945년 드골의 신임을 받아, 그의 정권하에서 정보(情報)장관·문화(文化)장관을 역임하며 문화·교육 분야를 담당하였으며, 1969년에 드골이 은퇴하자 다시 저술생활로 돌아갔다. 정치활동 중에도 수많은 미술론을 발표했는데, 《예술의 심리》(3권, 1947∼1950), 그 개정판 《침묵의 소리》(1951)와 《신(神)들의 변모》(1957)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앙드레 말로 (두산백과)

 

 어떤 문제가 터무니없음과 당연성을 함께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말 그대로 더할 나위 없는 터무니없음이 된다.

 

 행복감이나 충만감과 달리 지루함이라는 것은 나와 세계, 혹은 나와 무수한 타인들 간의 어긋남이 감지되면서 그 어긋난 틈새로부터 퍼져 확산되는 기분, 또는 의식이 곧장 시간과 관계 맺으면서 그것을 느끼고 견디는 본연의 방식이다.

 

 언제나 출구는 없고 언제나 출발은 요구된다.

 

 카뮈는 스스로를 향해 <언제나 더 표현하기보다는 덜 표현하며 쓸 것>이라 적은 바 있다 (작가 수첩에 남긴 1938년 어느 날의 메모).

 

 에토스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인 <수사학(Rhetoric)>에서 '수사학이란 주어진 상황에 가장 적합한 설득수단을 발견하는 예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3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다.
로고스는 이성적ㆍ과학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고능력ㆍ이성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이성적인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설득하려는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토스는 로고스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감각적ㆍ신체적ㆍ예술적인 것을 가리키며 격정ㆍ정념ㆍ충동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인간은 이성과 감정을 함께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논리만으로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상대방의 감성에 호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파토스다. 인식의 방법으로서의 합리주의, 경험주의에도 대응한다.
그리고 에토스는 사람에게 도덕적 감정을 갖게 하는 보편적인 도덕적ㆍ이성적 요소를 말한다. 이는 화자의 평판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이 보기에 믿을 만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훨씬 신뢰감이 가서 설득이 잘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는 각각 논리학, 수사학, 윤리학으로 발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토스 [ethos]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곡언법 :: 곡언법의 어원은 '명백한'이나 '솔직한', '간단한'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litotes'이다. 곡언법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실제보다 훨씬 작거나 적게 표현하여, 말하고 싶은 내용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강하게 긍정하는 수사법을 말한다. 곡언법은 반의어의 부정을 통하여 강한 긍정을 유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곡언법 [曲言法, Litotes]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국학자료원)

 

 영성이 도덕을 거부하고, 행복이 희망의 부재로 태어나며, 정신이 자신의 이성을 몸에서 발견하는 독특한 순간 (......) 무릇 진실이 그 안에 환멸을 담고 있는 게 사실이라 한다면 모든 부정이 긍정의 개화를 포함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결혼(Noces)』중「사막」의 한 구절).

 

 현재는 의미와 판단을 추론의 결과물, 즉 과거로 정리해 두기 이전의 상태(감각은 계속된다는 한에서 언제나 <이전>일 수밖에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동시에, 임박하는 미래를 향해 계속적으로 열리는 의식의 한없는 진행을 의미한다.

 

 겟세마네 동산 :: 겟세마네(Gethsemane)라는 것은 헤브라이어로 <올리브유골 골짜기>를 의미하며, 그 이름대로 예루살렘 동쪽의 기드론 계곡을 가로 막은 올리브산에 있는 동산. 『마태복음』 26장 36절에 이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예수가 유대 교도들에게 잡히는 전날 밤 <땅에 엎드려서> 기도했다는 곳. 『요한복음』 18장 1~2절에 의하면 예수와 제자들은 가끔 이 동산에 모였다. 현재 부근에는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교회의 교회당이 세워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겟세마네 동산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살아 있는 인간의 편에 풍경은 언제나 대상이지만, 죽음은 목숨이 하나의 자리, 풍경이나 자연이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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