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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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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문

특히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였다.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1.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핌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경계성성격장애 :: 정서·행동·대인관계가 매우 불안정하고 변동이 심한 이상 성격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인격 장애. 자제력이 없고 매우 충동적이며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또 심한 정서적 불안정과 함께 자신의 자아상, 목표 등이 불분명하거나 혼란스럽고, 일반적으로 만성적인 공허감이 있다. 상대편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평가절하하는 등 격렬하고 불안정한 대인관계 때문에 반복적으로 정서적인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계성인격장애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境界性人格障碍] (두산백과)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던 것이다. 냉전 역시 이러한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지난 세기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자체가 철저하게 냉전의 어휘와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장치의 영향아래 놓여 있었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면역학의 근본 범주이다.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 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민자들”조차 오늘날에는 현실적 위험으로서 두려움을 느껴야 할 그런 강한 의미의 ‘이방인’, 또는 면역학적 ‘타자‘라고 할 수 없다. 이민자나 난민은 위협이라기보다는 짐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컴퓨터 바이러스 역시 이제는 그렇게 큰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문제가 아니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면역학적 예방법, 즉 예방 접종 역시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이 경우 면역 반응을 촉발하기 위해 다만 타자의 파편만이 자아 속으로 투입된다. 그리하여 부정의 부정은 치명적 위험 없이 이루어진다. 면역 저항체계가 타자와 직접 대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치명적일 수 있는 훨씬 더 큰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 ::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네이버 지식백과] 변증법 [dialectic, 辨證法] (두산백과)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 보드리야르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신경성 폭력 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2.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이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 알랭 에랭베르

 

긍정성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3. 깊은 심심함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깊은 심심함은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이다.”

- 발터 벤야민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 니체

 

 

 

4. 활동적 삶 (Vita activa)

란나 아렌트 – 스승 :: 하이데거

 

오라토리오 :: 17∼18세기에 가장 성행했던 대규모의 종교적 극음악. 보통 성담곡(聖譚曲)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성서에 입각한 종교적인 내용을 지녔으며 동작이나 무대장치가 따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오페라처럼 독창 ·합창 ·관현악이 등장하나 오페라에 비해 합창의 비중이 더 크며, 이야기의 줄거리는 내레이터가 낭송(朗誦)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라토리오 [oratorio] (두산백과)

 

오페라 : 노래, 연기, 의상, 무대 장치, 관현악을 포함하는 종합 예술

오라토리오 : 작은 규모의 오페라로, 성경 내용을 노래함

칸타타 : 작은 규모의 오라토리오로, 독창과 합창으로 이루어짐

[네이버 지식백과]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 노래와 연기가 함께하는 성악곡 (음악미술 개념사전, 2010.7.12, (주)북이십일 아울북)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 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유도 계산이라는 뇌의 기능으로 전락한다.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근대를 보는 아렌트의 관점이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 없이 영웅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다윈 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동물로 변신하려는 중일지도 모른다.”

- 한나 아렌트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진 것은 오늘의 삶이다. 호모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아감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 신분 증명 서류가 없는 사람들, 무법의 공간에서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산소 호흡기에 묶인 채 간신히 연명만 하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다. 후기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버린다면, 사회의 변방이나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배제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이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나치 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수감자들을 가리키는 말)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무젤만은 탈진하여 완전히 무력해진 수감자들로서, 극심한 우울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무감각상태에 빠져 심지어 육체적인 추위와 감독관의 명령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는 후기근대에 신경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노동하는 동물 역시 일종의 무젤만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강제수용소의 무젤만과 달리 영양 상태가 좋고 몸에 지방이 과다한 경우도 드물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 카토

 

 

 

5. 보는 법의 교육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아포리즘 ::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따위를 가리킨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아포리즘은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와 파스칼의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은 가장 널리 알려진 아포리즘의 한 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포리즘 [aphorism] (두산백과)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 주는 것이다.

 

힘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6. 바틀비의 경우

월 스트리트(Wall street)는 우연이 아니다. 벽(wall)은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다. 규율사회의 건축적 요소인 담장과 벽, 벽은 언제나 죽음을 연상시킨다.

 

 

 

7. 피로사회

핀다로스 :: 그리스의 서정시인으로 왕후와 귀족들을 위한 찬미의 시를 지었다. 이후 민주주의의 물결로 왕후와 귀족이 몰락하자 상실되었던 세계의 고귀한 혼의 부활을 절규(絶叫)하는 불후의 명시를 많이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핀다로스 [Pindaros] (두산백과)

 

오디세우스 ::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의 왕자로,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를 이용하여 적군을 속이는 작전을 생각해낸 뛰어난 책략가인 동시에 웅변가이다. 『오디세이아』에서는 수많은 모험을 겪는 용감한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오디세우스는 단순하고 한결같은 다른 영웅들과 달리 교활함과 잔인함을 겸비한 색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서사시로, 트로이 전쟁 이후 트로이에서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겪는 모험과 귀환 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디세우스 [Odysseus] - 그리스 서사시 속의 영웅 2 (영웅열전, 2001.9.15., 들녘)

 

나우시카 ::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제6권에 등장하는 처녀. 스케리아섬의 왕 알키노스의 딸로, 배가 난파하여 영웅 오디세우스가 벌거숭이로 스케리아섬에 표착(漂着)했을 때 나우시카는 아버지의 저택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용기와 품위를 함께 갖추고 있으며, 사려가 깊고 여자다운 부드러움을 지닌 여성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다. 헬라니코스에 따르면 나중에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이름으로 쓴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우시카 [Nausikaa] (두산백과)

 

에테르 :: 빛을 파동으로 생각했을 때 이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로 생각되었던 가상적인 물질이다. A.A.마이컬슨과 E.W.몰리에 의해 수행된 간섭계 실험을 통해 에테르의 존재는 완전히 부정되었다. 이를 밝혀내기 위한 많은 실험들을 통해 광학과 전자기학이 크게 발전하였으나 실재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논의되지는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테르 [ether] (두산백과)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오순절 ::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 가운데 하나로 팔레스티나에서 밀 수확기 끝 무렵에 거행했던 추수 감사절. 누룩 없는 빵을 바치는 무교절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누룩 있는 빵을 봉헌한다. 한편 그리스도교에서 오순절은 현재 성령 강림 대축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순절 [五旬節, Pentecost, Pentecostes] (미디어 종사자를 위한 천주교 용어 자료집, 2011.11.1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8. 우울사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주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자기 착취의 관계인 셈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자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그는 타자의 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명령하는 타자의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히스테리는 정신분석학의 성립 배경을 이루는 규율사회의 전형적 정신 질환이다. 히스테리는 심적 억압, 금지, 부인과 같이 무의식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부정성’을 전제한다. 무의식으로 치워진 충동의 표상들은 “변환”을 통해 한 인간을 뚜렷하게 특징짓는 신체적 증상으로 표출된다. 히스테리 환자는 ‘특징적 형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히스테리는 우울증과는 달리 형태학적 접근을 허용한다.

 

히스테리 환자가 이처럼 어떤 특징적 형태를 나타낸다면,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 없는 인간‘이다. 더욱 일반화하여 말한다면 후기근대의 자아는 성격이 없다. 카를 슈미트는 “진짜 적이 단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내적 분열의 신호라고 말한다. 이 말은 친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진정한 친구가 단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슈미트에 따르면 무성격과 무형태의 신호인 것이다. 슈미트가 살아 있다면 페이스북의 수많은 친구들은 그에게 후기근대적 자아가 성격 없고 무형적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여겨질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아준다면 성격 없는 인간이란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역할이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형성 내지 유연성은 높은 경제적 효율을 가능하게 한다.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록한다. 그러므로 정신 분석학으로 이런 병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증은 초자아와 같은 지배기관에서 오는 억압의 결과가 아니다.

 

“멜랑콜리가 비범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었다면 우울증은 비범한 것이 대중화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에 평등을 더한 것이며, 민주적 인간의 전형적 질병이다.”

- 알랭 에랭베르

 

우울증에 자주 선행하여 나타나는 소진(Burn out)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학적 결과이다.

 

폭력은 분쟁이나 갈등의 부정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의의 긍정성도 폭력의 원천이 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하지만 주체(예속)에서 프로젝트로의 전환으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 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본래 범죄 때문에 사회에서 추방된 자를 말한다. 호모 사케르에 대한 살인 행위는 처벌되지 않는다. 주권자는 기존 법질서의 효력을 해제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가진다. 그는 법을 제정하는 폭력, 법질서 밖에서 법질서에 관계하는 폭력을 체현한다. 즉 주권자가 법을 제정하는 데는 법이 필요 없는 것이다. 주권자가 법질서의 효력을 해제함으로써 예외 상태가 야기되는데, 이때 모든 개인에 대한 절대적 장악이 가능한 무법의 공간이 창출된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는 것은 바로 주권자 본연의 활동이다. 호모 사케르는 법질서 바깥에 있어서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벌거벗은 생명인 것이다.

 

호모 사케르는 신의 명령을 위반하여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자를 말한다. 예컨대 경계석을 옮긴 자는 경계의 수호신인 유피테르테르미누스의 보복의 손길에 내맡겨진다. 누구든지 처벌받지 않고 그를 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호모 사케르도 여러 역사적 단계를 거쳐 왔다. 12표법의 시대에는 호민관의 신체적 신성불가침성을 깨뜨린 자가 호모 사케르였다. 평민계급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본래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던 옛 관습을 활용한 것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의 역사적 발전을 완전히 무시한 채 평민 지배 시대의 호모 가케르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크라티오(sacratio, 범죄자를 호모 사케르로 선고하는 것)를 호민관이 누리는 신성불가침의 권능으로 소급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로써 사크라티오는 주권자의 권력과 직접 결합되며 그것의 종교적 기원은 무시되고 만다.

사람들은 신의 복수가 언제라도 호모 사케르에게 닥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한 죽음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때 살인자는 다만 신적 복수의 도구로 여겨질 뿐이다.

신은 죄지은 자가 온갖 종류의 괴롭힘을 못 견디고 자살하도록 몰아갈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우연으로 최후를 맞게 하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게 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어떤 인간에게 살인 무기를 쥐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저주받은 자(사케르)를 때려 죽인 사람은 설사 그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해도 주변 정황에 의해 신적 복수의 도구였음이 밝혀지는 순간 무죄로 인정되었다.

 

성과주체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로우며 그것에 의해 노동을 강요당하지도, 착취의 희생자가 되지도 않는다. 성과주체는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 지배기구의 소멸은 강제구조의 제게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자유와 강제의 통합을 가져올 뿐이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착취한다. 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착취는 지배 없이 관철된다. 여기에서 자기 착취의 효율성이 생겨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 자기 자신의 주권자,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는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밝혀진다. 성과 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도 주권자가 호모 사케르를 낳고 호모 사케르가 주권자를 낳는 역설적 논리가 성립한다.

 

 

 

+. 역자 후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푸코적 의미의 규율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복종적 주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그 자리에 성과사회, 성과주체가 대신 들어선다. 이러한 테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 포스트모던한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사회, 긍정성 과잉의 사회는 흔히 얘기되는 후근대적 사회, 즉 폭스트모더니즘적 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냉전의 종식, 다문화주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효과적 퇴치, 규제와 억압의 철폐와 개인적 욕망의 긍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관철되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포스트 모더니즘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한병철은 프로이트, 푸코, 아감벤의 사상이 금지, 억압, 규율, 감시, 주권자/희생자의 이분법과 같은 부정성의 패러다임 속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근대라는 시대의 산물로서 근대를 기술하는 이론이라 주장한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 (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재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북한을 타자로 위험시하고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적 부정성도 특히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왔다. 민족적 부정성을 앞세우며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을 부인하는 입장(조국은 하나)에 가까웠던 재야 운동가, 학생운동가 들이 제도권으로 진출하고 정치, 사회적 권력에 참여하면서, 북학을 이데올로기적 타자로 규정하는 전통적 반공주의는 급속도로 힘을 잃어갔으며, 햇볕정책도 그러한 토대위에서 실행될 수 있었다.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의 국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것도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 희미해져가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북한은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에게 (한병철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두고 말한 것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더 이상 위험적인 타자가 아니라 그저 짐스럽고 무관심한 타자로 여겨질 뿐이다.

 

‘더욱 생산적으로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복적 요구라면,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착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병철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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