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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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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아포리즘 『인간의 조건』. 에릭 호퍼가 1964년부터 1972년 사이에 집필한 책으로, 《맹신자들》 이후 연이어 발표한 주요한 저작들의 주제가 집약된 183개의 아포리즘 모음집이다.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본질과 조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이 책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의 창조성의 원천, 인간의 본성, 트러블메이커의 본질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아우른다. 호퍼는 자연이 ‘잘못’ 창조한 불완전하고도 매혹적인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본성을 평생 연구하였는데, 자연과 달리 인간은 치유할 수 없는 불완전함을 지닌 생명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힘인 ‘동정심’에 의지해야 하며, 또한 개인의 재능과 창의성에 수반하는 어려움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
에릭 호퍼
출판
이다미디어
출판일
2014.02.28

 

신이 진흙을 인간으로 바꾸었으니, 인간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진흙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행위인 것이다.

 

대중 운동은 비합리성을 이용해 지성을 차단하고, 사람을 예측 가능하며 비정한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스탈린과 히틀러 둘 다, 영혼을 기계화하는 도구로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했다.

 

절대 권력과 절대 신앙은 서로 닮은 점이 있다. 절대복종의 요구, 불가능한 것을 해보겠다는 각오, 매듭을 풀지 않고 아예 잘라버리는 단순한 문제 해결 성향, 타협을 항복으로 보는 태도, 사람을 조종하고 ‘피를 동반하는 실험’을 자행하려는 성향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 권력과 절대 신앙은 둘 다 비인간화를 위한 도구이다. 따라서 절대 신앙은 절대 권력과 똑같이 반드시 부패한다.

 

인간은 자기가 열망하는 것, 즉 자기의 이상형을 따라 신을 만들어낸 다음 그 형상을 모방하고 신과 경쟁하며 신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한다. 서구 세계에서 신에 대한 반항은 생각지도 못한 에너지를 방출했다. 현대 서양 사회와 개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한때 열광적으로 숭배했던 신의 거부와 그 권위의 찬탈이었다.

 

믿음은 버릴 수 있지만, 믿었다는 사실은 버릴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신을 만들었다. 악마는 어떤 형상을 따라 만들었을까? 발굽, 꼬리, 뿔을 갖춘 악마는 분명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한 야수이다. 그렇다면 악마는 자연을 인격화한 것인가? 한쪽에는 신과 인간이, 다른 쪽에는 악마와 자연이 자리한 채 서로 대적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자연을 경외하며 살아가고 자연을 변경이나 이해가 불가능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자연이 악마가 아닌 용으로 인격화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악마와 반대로 용은 야수의 모습을 한 인간인 것이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위대한 문화적 가치의 사악하고 불순한 기원에 너무 당혹한 나머지 마치 “신이 자신을 구현하기 위해 악마를 필요로 한” 것 같다고 기록했다.

 

오해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낸 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비롯된다는 설명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파스칼은 만약 인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아챈다면 세상에 친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파스칼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발효된 사악의 양조주釀造酒에서 자선의 충동이 증류되는 것은 신의 은총의 증거라고 보았다.

 

예정설 :: 인간 개개인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의지로 미리 정해진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 및 주장.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세계지배가 신약성서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구원으로 연결된 때, 이 교리가 생겨났다. 이 교리가 생겨난 전거(典據)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8:28~30)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1:3~5)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1:15)의 내용 등이다. 라틴 교부(敎父)들에 의해 이 논리가 발전,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서 신학이론으로 정립되었다. 여기에 보이는 예정론의 특질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에서의 예정신앙은 구원을 위한 예정이지 멸망을 위한 예정은 아니다. 그것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9∼11장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구원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같이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도 궁극적으로 멸망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26)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구원에의 예정’이 2중예정, 즉 구원과 멸망에의 예정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종교개혁자 칼뱅에 의해서였다. 칼뱅에 의하면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자와 멸할 자로 예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2중예정에는 두 가지 모티브가 작용한다. 하나는 하느님의 뜻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상인데, W.오컴이나 츠빙글리 등으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구원을 인간 쪽에 근거를 두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는 사상인데, 이는 루터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정설 [predestination, 豫定說]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선과 악은 같이 자라나고 서로 팽팽하게 묶여 있어 떼어낼 수 없다. 우리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은 균형을 선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이다.

 

알타미라 동굴 :: 길이 270 m. 산탄데르 서쪽 30 km 지점에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동굴벽화는 프랑스의 라스코동굴벽화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벽화는 1879년 우연히 8세의 소녀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진위(眞僞)를 놓고 학회나 언론에서 떠들썩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북에스파냐나 남프랑스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에서도 똑같은 벽화나 부조 등이 발견됨으로써 인류 최고(最古)의 경탄할 만한 미술이라는 것이 실증되었다. 오늘날에는 구석기시대 후기의 마들렌기(약 1만∼2만 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의 대부분은 천장에 그려져 있다. 매머드 ·토나카이 ·들소 ·사슴 등이 흑 ·적 ·갈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생생한 묘사, 아름다운 색채와 입체감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이 벽화를 통하여 당시의 예술활동뿐만 아니라 수렵의 방법이나 무기 ·신앙 등을 알 수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타미라동굴 [Altamira cav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인간은 필요에 쫓겨 하는 활동보다 놀면서 하는 활동을 통해 완성되었다. 인간의 독자성과 창조성의 원천은 어른 속에 있는 아이의 성향이며, 놀이터는 그 능력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교육은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는 배우는 사회이며, 그곳에서는 조부모도 부모도 자식도 모두 학생이다.

급변의 시대에 미래를 이어갈 사람은 계속 배우는 학습자이다. 배움을 끝낸 사람에게는 과거의 세계에서 살아갈 기술밖에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어디를 보나 새로운 것이 탄생하려고 한다. 수태하여 배가 부른 세상은 산고에 시달리고, 미숙한 돌팔이 의사들이 여기저기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흉내를 내고 있다. 이런 돌팔이 의사는 새로운 것을 꺼내기 위해서는 제왕절개를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이들은 세상의 배를 갈라 열어보기를 열망한다.

 

소외로부터 해방되려면 인생은 의미를, 역사는 목적을 가져야 하고, 만사가 자로 잰 듯 반듯해야 한다.

 

재능이 없는 자는 기회가 풍부한 사회보다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설득력 있는 구실을 부여해주는 사회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풍요로운 사회에서 권력을 요구하는 소외된 자들은 대부분, 전례 없는 자기실현의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고, 무력한 자기와의 대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무능한 사람들이다.

 

대중의 낙원인 미국을 ‘돼지의 천국’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대중이 떠난 유럽은 돼지우리이다.

 

지금 현재로 볼 때, 드러낼 진실이 있는 사람은 감출 거짓도 있는 것 같다.

 

재속(在俗)교회: 사제 혹은 평신도들이 속세에서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세상의 일상적 조건 속에서 생활하는 수도회.

 

불신不信을 이유로 개종하는 자는 기본적으로 믿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자유란 어떤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를 의미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인식 능력이 있는 사람 가운데 자신의 스무 살 시절을 기억하면서 창피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행동은 감정으로 촉발되고, 감정은 말로 선동된다. 그렇다면 행동이 일어나는 데 생각은 어떤 역할을 할까? 모두가 알다시피, 생각은 강력한 말을 만들어내는 도구이다.

 

성장이란 말에 대한 불신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귀에 들리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한다. 눈으로 본 증거에 어긋나는 말을 받아들일 때, 비합리성이 나타난다.

 

탈산업 사회 시대에 역설적인 것은 이 시대가 전지전능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원시 부족 못지않게 말과 마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이라는 언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공허한 말의 안개는 병든 도시의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런저런 몽상보다 이런저런 진부한 문구에 휩쓸려 다닌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자칭 ‘혁명가’는 존재하지만 혁명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가가 자국을 혁명화할 수 있는지는 실로 의심스럽다.

 

인내는 성장의 부산물이다. 우리는 성장하고 있을 때 기회를 기다릴 수 있다. 권력과 명성을 획득하거나 추구할 때는 인내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이 성장하려면 뿌리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인간은 성장하고 있을 때만 뿌리를 내린 채 세상에서 안주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충동은 자신의 창조력에 반비례한다. 창조력의 샘이 말라버렸을 때, 뒤에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의 중요성뿐이다.  

 

모든 장소는 천국으로부터 등거리에 있으며, 모든 시대는 영원을 기준으로 볼 때 다 같은 동시대라고 한다.

 

진짜 창조자는 그 자체로 생명이 있는 것을, 창조자 없이도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는 저술가, 예술가, 과학자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창조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코메니우스•의 말을 빌리면 창의적인 교사는 “덜 가르치면서도 학생이 좀 더 많이 배우게 하는” 사람이다. 창조적인 조직가는 자기 없이도 잘 굴러갈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낸다. 진짜 지도자가 자기 임무를 완수했을 때, 그를 따르는 지지자들은 “우리가 스스로 해냈다”고 말하고, 위대한 지도자 없이도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느낀다. 창조력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는 이와 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 하는 족족, 자기들이 없으면 안 되게끔 일을 만들어놓는다.

 

텅 빈 머리는 실제로는 텅 빈 게 아니라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텅 빈 머리에 뭔가를 집어넣는 일은 어렵다.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다. 답변은 소리나 몸짓으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말로 해야 한다.

 

대중은 온갖 재능이 풍부한 광산이다. 그 재능을 캐낼 전문 기술이 우리에게는 아직 없지만, 숨겨진 광맥에서 금덩어리가 떨어져 나올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혁명가와 창조적 인간은 둘 다 영원한 미성년자이다. 혁명가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하며, 창조적 인간은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다.

 

진짜 재능 있는 자는 아무리 기량이 부족해도 뭔가를 이루어낸다.

 

예보가 맞지 않을 때도 다음 예보를 묻는다. 우리는 마치 고대인이 닭의 내장을 해독하는 예언자를 보듯 그래프를 읽어내는 전문가를 바라본다.

 

절대 권력은 사람을 예측 가능한 생명체로 전락시킬 수 있다. 인간적 변수를 항수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영혼의 기술자는 역사를 엄밀한 과학, 즉 동물학의 한 분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역사란 그 자체로는 반복되지 않는다. 어떤 시기의 문학이나 예술이 다른 시기에 똑같이 재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에 다른 시대의 사건이 똑같이 반복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문학이나 예술의 탄생에 유리한 상황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따라서 사회의 활력, 정체, 안정, 동란 등을 일으키는 요인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꿈이 실현될 때 그 꿈은 악몽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드디어 이야기의 결말을 알게 되었는데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벽에 쓰여 있는 것은 모두 볼 수 있지만, 단 한 사람도 그것을 해독할 열쇠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목적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목적지에 도달하느니 차라리 끝없이 가기를 좋아한다. 수단이 주어지면 거기에 매달려 종종 목적을 잊어버린다.

 

인간사에 예측 불가능성이 내재하는 이유는 주로 인간적 과정의 부산물이 생산물보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천벌’이라는 단어는 많은 경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짓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저지른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뿐만 아니라 이들의 후회, 감수성, 감사, 애정, 증오 등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특수성을 돋보기를 통해 확대해서 본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볼 때, 자기 자신도 확대해서 본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극단적인 자질을 덧붙이는 것이다.

 

자신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주변 사람들을 매한가지로 대한다. 이런 사람은 인류 전체를 한 부류로 본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증오하는 사람, 고귀한 사람과 야비한 사람, 동정심이 있는 사람과 잔혹한 사람을 다 똑같이 경멸한다. 마치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사람을 인류로부터 단절시켜버리는 것만 같다. 이런 사람에게 인류는 이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일까? 혼자 있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순결한 마음 따위는 없다. 마음은 다른 마음과 만나면 장소를 불문하고 관계를 맺는다.

 

어떤 업적을 이루더라도, 우리가 자기 자신을 좋게 평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결점과 죄를 계속 기록해두는 마음의 재판관에 반박해서 증언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이 그렇게 나쁜 존재가 아니라고 확신시켜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찾는 사람은 자기에게 동조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좋게 생각해주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이런 사람을 소중하게 여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이상 찬양할 수 없다면, 이는 정신이 쇠퇴하고 있다는 징조다.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세상이 짜증 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 밟고 지나간 욕망의 길은 몇 번이고 다시 찾게 된다는 것이 진리이다. 우리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뿐 아니라, 더 이상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까지 계속 원한다.

 

우리는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인생의 목적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목적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목적만큼이나 고통받는 목적도 필요하다.

 

인간의 가슴은 죽어서 땅에 묻히기 훨씬 전부터 무덤이다. 젊음은 시들고, 아름다움과 희망, 욕망 역시 사그라진다. 인간이 땅에 묻히면 가슴이라는 무덤은 무덤 안에 또 묻힌다.

 

성취감을 맛보는 능력에 손상이 오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리 실패를 많이 해도 몇 번이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는 없는 법이다. 성공을 했지만 어떤 기쁨도 느낄 수 없는 경우에만, 아주 사소한 낙담에서도 영원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은 보통 인생을 충실하게 산다는 증거도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생기는 결과도 아니다. 그 반대로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을 때, 다른 일을 할 시간은 전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다.

 

성공은 저 스스로 말을 한다.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실패, 낙담, 의심이다. 우리는 과거의 어려움이나, 숱하게 일어난 잘못된 시작, 고통스러운 시행착오는 잊는 경향이 있다. 과거 자기의 성공은 거침없이 앞으로 추진한 최종 결과로 보지만, 현재 직면한 어려움은 쇠퇴와 부패의 징조라고 생각한다.

 

성장하고 있을 때, 우리의 행동은 일시적이며, 뒤에 남게 되는 디딤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장이 멈추면, 우리의 행동이나 사고는 우리 그 자체가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평범하게 되는 것이다. 노년은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태초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젊을 때 우리는 세계 최초의 젊은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개를 친다.

 

진정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성이 필요하다. 지성이 없는 사람은 그저 독선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확실히 모를 때 말을 가장 많이 한다. 할 말이 있을 때는 몇 단어밖에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가치는 현재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위상으로 나눈 값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해가 없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바쁜 것은 해롭다.

 

많은 경우, 희망의 좌절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실제로는 희망의 실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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