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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열한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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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계단(리커버 특별판)
“무슨 책을 읽고, 무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살아왔기에 오늘에 이르렀나요?”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필명의 첫 책으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저자 채사장이 지난 2년간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이에 저자는 ‘불편한’ 책을 권한다. 책이란, 많이 읽는 게 다가 아니라서 어떤 독서는 한 인간의 지평을 넓히지만 어떤 독서는 오히려 그를 우물에 가둘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식만이 내면에 균열을 일으켜 나를 ‘한 계단’ 성장시킬 수 있다. 꼴찌를 겨우 면하며 영혼 없는 아이로 지냈던 학창 시절부터, 깨달음과 그 깨달음의 균열을 반복하며 책과 더불어 보낸 20대 청춘. 그리고 커다란 교통사고. 매 시절의 굽이마다 저자의 내면에 어떤 고민과 사색이 있었는지 차례로 펼쳐진다. 그가 올라온 ‘불편한’ 계단은 문학, 종교, 철학, 과학, 역사, 경제학뿐 아니라 예술의 영역까지 아우른다. 저자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 동안, 독자는 아직 닿지 못한 계단의 질문들과 마주하며 자신이 갇힌 우물 밖을 조금씩 내다보게 될 것이다.
저자
채사장
출판
웨일북(whalebooks)
출판일
2016.12.10

 
책갈피
정보가 폐품처럼 쌓여가는 시대다.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의 과잉이 사람의 행동을 제약할 정도다.
 
어떤 지식은 한 인간의 지평을 넓히지만, 어떤 지식은 오히려 그를 우물에 가둘수도 있다. 불편한 지식만이 우물을 파는 광성을 멈추게 하고, 굳어버린 내면을 깨트리고, 나를 '한 계단' 성장시킬 수 있다.
 
 
 
저자의 말 - 당신이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삶을 살기를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처음, 소년 - 불편함의 계단 앞에 서다
불편함의 계단
당신이 모험가의 영혼을 가졌다면 이 여행이 마음에 들 것이다. 혹은 이미 계단의 끝에 도달한 성취한 영혼이라면 이 책은 당신이 성장해온 추억의 앨범이 될 것이다.
 
불편함에 대하여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익숙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와 관련된 좀 더 심도 있는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는 불편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 세계를 무너뜨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세계의 지평을 점차 넓혀가는 사람이 있다.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익숙한 세계의 깊이를 더하는 방법과 불편한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
 
불편한 책
인생의 여정에서 이런 책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왜냐하면 작은 불편함만 이겨낸다면 나는 이 책을 통해 아직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함은 나를 인도하는 하나의 문이다. 불편함을 꾹 참아내고 다른 종교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하면 곧 알게 된다. 당연히 거짓일 거라고 생각했던 불교나 힌두교의 내적 논리가 얼마나 탄탄한가를. 이제 한 계단을 오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도나 힌두교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드디어 종교인이 된다.
 
그래서 불편함은 설렌다. 어떤 책 속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방금 새로운 대륙에 도착했다는 존재론적 신호다. 이제 기존의 세계는 해체될 것이고, 새로운 세계와 만나 더 높은 단계에서 나의 세계가 재구성될 것이다. 하나의 계단을 더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불편함을 권한다.
 
불편함의 변증법
헤겔이 제시한 변증법적 과정이다. 그는 정, 반, 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정신이 성장해나간다고 생각했다. 헤겔은 변증법의 적용을 단지 개인의 정신에 한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물질적인 우주 역시 변증법의 원리에 따라 성장해간다고 믿었다.
 
 
 
첫 번째 계단, 문학 - 죄와 벌 : 열여덟,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
당신도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처음으로 목도했을 때를 말이다. 견고하던 세계에 균열이 생기고 삶의 방향을 크게 바꿔야만 했던 시점을.
 
공부 못하는 학생
반마다 그런 학생이 꼭 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노는 것도 아닌, 그냥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것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학생.
 
나는 학교에 자유롭게 방치되어 창밖으로 흘러가는 계절과 함께, 별다른 걱정 없이 천천히 성장해갔다.
 
인생의 첫 번째 책
스트레스는 없었다.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경주의 트랙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무한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칠흑 같은 내 영혼의 골방엔 깊은 균열이 생겼다.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무엇인가 잘못 건드렸다는 걸 강하게 느꼈다.
 
죄와 벌

신경쇠약 :: 내외의 자극에 대하여 보통 사람과 달리 과민하게 반응하여 초조해지기 쉽고, 피로해지기 쉬운 증후군.
1869년 G.M.비어드에 의하여 이름지어졌으며, 원인은 신체적·정신적 과로에 의한다고 하여 한때 대단히 유행했던 말이지만, 현재는 과로에 의한 신경쇠약증세는 곧 회복되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의학자는 비어드의 설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신경질’이 주로 체질성인 것을 가리키는 데 대하여 ‘신경쇠약’은 획득성(獲得性)인 것을 뜻한다.
불면·두통·피로·견통·현기증·귀울음·건반사항진(腱反射亢進)·지각과민·주의집중불능·기억력장애와 피자극성 항진 및 손가락·눈꺼풀의 떨림 등의 정신적·신체적 장애의 호소가 많고, 과장적이고 정세(精細)하지만 타각적인 것에 해당하는 소견이 인정되지 않는다. 신경쇠약은 자극성선약(刺戟性腺弱)에 있으며, 선천성과 후천성으로 나눈다. 급만성 전염병·기생충병·소화기질환·신진대사질환의 환자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여러 가지 정신병·뇌병의 전구증세(前驅症勢)로 나타날 때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경쇠약 [neurasthenia, 神經衰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세상을 구하는 방법에서 로쟈와 소냐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쟈는 다수의 선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소냐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다수의 선을 실현했다.
 
공부의 시작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은 이유는 반대로 그들이 너무나 성숙했기 때문이다. 성숙한 영혼이 받아들이기에 정규 교육의 단조로움은 너무나도 하찮다. 학생들은 똑똑하다. 그들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진리의 문제, 사회 정의의 문제, 존재의 문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은 놀랍도록 심오하다. 반면에 현행 교과는 그들이 바보가 되기를 원한다. 단순 암기와 기계적인 문제 해결 능력만을 강조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 넘어가면 학생들은 질문을 멈춘다. 그들은 실제 교과의 내용보다는 질문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른들에게서 더 많이 배운다.
 
건강한 보통의 학생들이 정규 교육 시스템에 적응해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혼에 어울리는 가치가 부여되어야 한다. 좋은 성적을 얻거나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혹은 좋은 직장을 얻고 먼 미래에 풍요롭게 살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이 성숙한 영혼들은 흉내만 낼 뿐 진심으로 공부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한 존재론적 가치가 부여되어야 이들은 비로소 움직인다.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해내기 위해 공부하고 있음을 학생 스스로가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 질문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을 공리주의적 문제로 쉽게 치환해서 생각한다. 즉 ‘노파를 살해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윤리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 번째 관점은 변하지 않는 도덕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이것을 ‘의무론적 윤리관’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윤리적 의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우리 모두는 그러한 윤리적 의무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관점이다.
두 번째 관점은 의무론을 거부하며 등장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도덕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이것을 ‘목적론적 윤리관’이라고 한다.
 
두 번째 질문
비범한 사람이 무조건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단지 비범한 사람이 모종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회의 관습, 도덕, 종교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현실의 장애물을 뛰어넘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전 인류의 구원이나 사회 전체의 도덕성 증진 등을 위한 자신의 사상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인 리쿠르고스, 아테네의 혁명가이자 개혁가인 솔론,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유럽을 정복했던 나폴레옹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당시 법과 관습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범법자나 범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그때까지 신성시되어온 오랜 전통을 파괴하고, 유혈 혁명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 피 앞에서도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리쿠르고스 :: 철학은 플라톤에게, 수사학은 이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아테네의 재정을 관장하면서 재능을 발휘, 군대조직을 개편하고 함대를 개조하였다. 데모스테네스의 동조자로서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아테네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며,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비극작가의 희곡을 사본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그의 연설은 너무 기교적이고 조잡하다고 하였으나, 개성이 강한 행동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연설문 중 완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은 <레오크라테스에 반대함>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쿠르고스 [Lykurgo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엘리트주의는 세상을 엘리트(elite)와 매스(mass)로 구분하고, 모든 권한과 권리를 엘리트에게 부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효율적인 동시에 대중의 이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첫 번째 계단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통해서 지향해야 하는 인물을 설정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로쟈보다는 소냐에 가까울 것이다. 로쟈는 결국 소냐를 통해 깨닫는다. 사상과 사유의 구름 속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두 번째 계단, 기독교 - 신약성서 :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펑펑 울었다
문학은 나를 흔들었다. 길을 찾는 사람처럼 문학의 세계를 이리저리 떠돌았다. 문학 속에서 찾고자 한 건 삶이었다.
 
재수생
기대하지 않았던 아들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모를 때였다.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마음이 쓰였던 건 작고 초라한 살림이 아니라, 밤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굽은 등이었다.
 
로쟈의 성서
왜 로쟈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부분을 듣고 싶어 한 것일까? 그것은 구원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라자로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처럼, 자신도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성서
구약은 신과 인간이 맺은 오래된 약속을 뜻하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된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약속이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종교적 시각으로 해석되어 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기록이다. 총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구성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 그리고 묵시록이다. 복음서는 4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1편으로, 사도들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서신은 총 21편으로, 사도들의 편지다. 마지막 1편은 묵시록으로, 요한이 계시에 의해 기록하였다.
 

복음서는 네 권이지만, 사실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다룬다. 예수의 생애를 네 가지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읽다 보면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서는 매우 유사한 반면 요한 복음서는 조금 다른 내용과 관점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대 복음서를 저술한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이 도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 기술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당시의 상황
예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전해 듣는다. 이후 약혼자였던 목수 요셉과 함께 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마구간에서 예수를 출산한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집트로 몸을 피한다. 이는 당시의 헤로데 대왕 때문이었다. 그가 유다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예언을 듣고 이스라엘 지역의 유아들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헤로데 대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에야 마리아와 요셉은 갈릴래아 지역으로 돌아와 나자렛에 정착한다.
 

 

사마리아 :: 사마리아라는 도시 이름은 땅주인 이름 셰메르에서 유래되었고 히브리어로는 쇼므론으로 불렸다. 후에는 므나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지역 전체를 일컫던 북이스라엘 왕국과 동일시된 지역 이름이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왕(기원전 876∼869)은 이 땅을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사서 요새 도시를 건설한 후 수도를 다르사에서 이 곳으로 옮겼다. 이 곳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고, 주변의 평지보다 100여m 솟아오른 해발 430m의 천연적 요새로서 아시리아 군대의 포위를 3년 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천혜의 요새 도시였다.
사마리아는 항상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세력 경쟁을 하였는데 초기에는 오므리왕이 패전하여 시리아 상인들에게 영업권을 내주기도 하였으나, 그의 아들 아함은 시리아의 공격을 물리친 대가로 다마스쿠스에서 무역시장을 개설하였다.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4∼748) 때에는 이스라엘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하여 사마리아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당시의 예언자 아모스가 사마리아 거주민의 사치를 비난할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734∼733년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 빌레셀의 침공으로 북이스라엘 영토의 많은 부분이 사마리아의 통치권을 벗어났으며, 기원전 721년에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는 도시를 함락하고 거주민들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정권의 한 식민지 구역의 수도로서 그들이 파견한 총독이 거주하였다. 기원전 332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들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기원전 108년에는 하스모네 왕조의 히르카누스가 도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노예시장에 팔기도 하였다. 기원전 30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사마리아를 하사받은 헤로데 대왕은 이를 기념하여 도시이름을 아우구스투스의 그리스 발음인 세바스테로 명명하였는데, 오늘날에도 근처의 아랍인 마을은 세바스티야로 불리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사마리아는 궁전과 신전 등이 있던 높은 지역의 아크로폴리스와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진 낮은 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구약시대의 유적들은 대부분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것들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마리아 [Samari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골고다 언덕 :: '해골'이란 뜻의 아람어 '굴굴타'의 헬라어 음역이다. 예루살렘 성 다메섹 문 북동쪽 230m 지점에 있는 약 20m 높이의 작은 언덕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처형 장소로 사용되어 해골이 많았거나 혹은 그 지형이 해골처럼 생긴 데서 이런 지명이 유래한 듯하다. 일명 '갈보리'(Calvary).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핏빛 역사의 현장이다(마27:33-35).
[네이버 지식백과] 골고다(언덕) [Golgotha]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2013. 9. 16., 가스펠서브)

 

본티오 빌라도 :: '창을 가진 자'란 뜻.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역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한(막15:15; 눅23:23; 행3:13; 13:28)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A.D.26-36년경, 눅3:1). 티베리우스 황제 때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 후임으로 파견되어 유대·사마리아·이두매를 다스렸으며, 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 지휘 아래 있었다.1
. 총독의 권한 - 당시 유대 총독은 유대인의 사형 집행권과 지방 법원(산헤드린 공회 등)의 결정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대제사장의 임면권을 가지는 등 군사·사법·종교를 두루 관장하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 빌라도의 로마 군영은 가이사랴에 본부를 두고 있었고, 민란 등을 염려하여 예루살렘 성전 내 안토니아 요새에 분견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주로 본부 가이사랴에 머물렀고 유월절 등 특별한 시기에만 예루살렘에 주둔하면서 군 병력을 강화하였다.
2. 고대 문헌 -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자'(Tacitus, A.D.55-120년경), '뇌물을 좋아하고 신을 모독하며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은 재판을 하고 근거에도 없는 중형을 내리기로 유명한 자'(Philo)로 소개된다. 또 빌라도는 부임 직후 황제의 흉상이 그려진 로마 군기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으며, 이를 5일간 밤낮으로 저지하는 유대인들에게 창검을 겨누고 학살을 명령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으나 결사 저지하는 유대인들의 기세에 눌려 가이사랴로 퇴각했다고 한다(Josephus).
또한, 예루살렘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한 수도 공사에 성전세를 유용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몽둥이로 때려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했다고 한다(눅13:1). 또 A.D.35년에 모세가 그리심 산에 성물을 묻어 두었다는 말에 현혹된 사마리아 사람들이 무장하고 그리심 산으로 모여들자 반란으로 오해하여 군대를 동원,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고 한다.
3. 최후 - 결국 빌라도는 로마로 소환되었는데,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가 소환 도중 자살했다 하고, 위경(僞經)에는 빌라도의 시신이 프랑스로 옮겨져 비엔나 인근에 매장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도 전해지는데,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가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애굽의 콥트 교회와 에티오피아 교회에서는 빌라도와 그의 아내 '프로쿨라'(Procula)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가스펠서브)

 
가르침의 시작
갈릴래아 지역의 작은 마을 나자렛에서 예수는 유년시절을 보낸다. 서른 살 무렵이 되면 그는 전도를 시작한다. 예수의 활동에 앞서 그의 등장을 예언하며 길을 닦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다. 요한복음서의 그 요한과는 다른 사람이다. 당시 요한은 흔한 이름이었다.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난 친척으로,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임을 알리며 요르단 강가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언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나타나 세상을 벌할 것이다. 둘째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가 죽게 될 것이다.
 

나사렛 :: 예루살렘 북쪽 91km, 갈릴리호(湖)에서 남서쪽으로 19km, 가나에서 남쪽으로 13km 지점에 위치한다. 해발 375m의 고지에 위치하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로 토질은 모래땅이다. 구약성서에는 기록이 없으나 신약성서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으로, 예수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에 갔다가 돌아와 30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 백성들이 예수를 미워하여 벼랑에서 밀어냈다고 하는 높이 10m에 이르는 절벽이 있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를 알렸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수태고지 교회', 요셉이 목수일을 하던 집터 위에 세워진 '성 요셉교회'등 예수에 관한 많은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주민 대부분은 아랍인(人)으로, 성지순례를 위한 관광객 상대의 상인들이 많다. 전체인구의 60%가 아랍계 천주교인이다. 도시 주변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가 아랍인의 거주지구를 둘러싸듯이 세워져 있어서, 이스라엘 국내의 복잡한 아랍민족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사렛 [Nazareth]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홀로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 이때 악마가 나타나 예수를 시험하려 했지만, 이를 물리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모으면서 본격적으로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첫 번째 질문

바리사이파 :: 율법의 세목(細目)까지도 철저히 지킨다는 형식적인 순수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우월적(優越的)으로 분리시켜 특수층으로 자처한 사람들이다. 그리스 시대의 경건주의자인 하시데아(하시딤)파(派)를 계승 ·발전시킨 일파로 알려졌다. 신약성서 시대에 바리새(바리사이)파는 사두가이(사두개)파와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두가이파가 천사나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구비전승(口碑傳承)도 부정한 데 반하여, 바리새 파의 가르침은 율법과 동시에 구비전승에 바탕을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 등을 믿었는데, 이런 내용들이 모세 오경(五經)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의 저작들과 구비전승에서 그 원천을 찾으려 하였다.
윤리면에서 바리새 파는 안식일을 엄격히 지킬 것과 십일조(十一租) 등을 가르쳤다. 이들의 엄격함과 결의론적(決疑論的)인 가르침은 때때로 참된 신앙심을 깨뜨리는 형식주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그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남았다. 그 후 몇 세기 동안 그들은 유대인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하였는데, 후대의 랍비들은 바리새 파를 이스라엘 율법과 전통의 진정한 옹호자로 찬양하였다. 《탈무드》의 랍비들은 바리새 파의 정신적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의 비난의 적(的)이 되었다. 예수가 바리새 파의 율법적인 전통의 많은 부분을 거부하고(마르 7:1∼23), 사람들을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주어(마태 11:28∼30), 그들에게 율법의 보다 심오한 의미를 가르치고자(마태 5:20∼48), 형식적인 신앙을 통렬히 비난하고(마태 6:1∼18, 23:5∼12), 예수 자신으로부터 구원이 성취되리라고 가르친(마르 10:45) 사실 등은 바리새 파와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은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운명을 자초하였다. 이 갈등은 예수의 사망 후 초대 교회신도들과 바리새 파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리새 파 [Pharisee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두 번째 질문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 계명이란 다음과 같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최후의 만찬
나는 반박할 수 없는 진리가 당연히 가장 위대한 진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는 진리를 원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반박할 수 없고 언제나 참인 진리가 가장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과월절 :: BC 13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축제일.
유월절(逾越節)이라고도 한다. 유월(逾越)이란 ‘지나치다’ ‘그냥 넘어가다’라는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야훼는 이집트인의 각 가정의 장남을 죽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여 그 표지가 있는 집 앞은 그냥 지나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본래는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축제는 농경적인 명절이고, 과월절 축제는 유목적인 명절이었다. 그런데 후에 이 둘을 합하여, 또 역사적인 의의가 첨가되어 깊은 뜻을 가지는 명절이 되었다. 그 기원과 의의에 변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월절은 민족의 해방을 의미하는 경축일이 되었으며, 하느님 은혜의 표징이 되었다.
유월절에는 니산월(유대력의 1월) 10일에 처음 난 어린 양을 골라 두었다가 14일 밤에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었다. 이튿날인 15일부터는 1주일을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절기로 지킨다(《출애》 12장, 《레위》 23장, 《민수》 9장, 《신명》 16장).유월절 어린 양은 인류를 죄에서 구하고, 참 자유를 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 예루살렘 성내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켰고,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 되었다. 예수를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과월절 [Passover, 過越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세 번째 질문
이타적인 삶을 살았는지의 여부보다는, 어쨌거나 궁극적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이 당신을 믿는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물론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음을 잘 압니다. 그리스도교 초기에 강력한 탄압이 있었고, 이 때문에 초기 신도들에게는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는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겠지요.
 
예수의 마지막
당시 유다 지역에는 명절이 되면 군중의 요구에 따라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다. 유다인들 간의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빌라도는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게 했다. 당시에 바라빠라고 하는 죄수가 갇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 역시 예수였다. 빌라도가 군중을 향해 물었다.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바라빠라는 예수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
군중들은 바라빠를 풀어주길 바랐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이 식민지에서 사용하는 처형 방식이었다. 죄인은 처형지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서 못 박히게 된다. 사실 십자가 전체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세로대는 이미 처형장의 땅에 박혀 고정되어 있다. 죄인은 가로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간다. 처형장에 도착하면 가로대에 죄인의 팔을 줄로 고정한 후 못을 박는다.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끌어올려져서 고정되어 있는 세로대에 얹힌다. 마지막으로 발목을 세로대에 못 박는다.
 

안식일 :: 유대교에서 지키는 1주일 가운데 제7일(토요일)의 명칭.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에 모든 일손을 쉬고 그들의 민족신(民族神) 야훼께 예배하였다. 이 기원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제1장의 천지창조의 과정 가운데 6일 동안에 우주창조를 끝마치고 제7일에는 쉰 데서 비롯되었다. 또 모세에게 준 십계명(十誡命)을 통하여 이 날에는 모두 쉬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전통이 있다. 물론 유대교에도 여러 종파가 있기 때문에 각 종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전통이 그리스도교·이슬람교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해 예수가 부활한 1주일의 첫날(일요일)을 안식일로 지정하고 있다. 하지만 제 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Seventh day Adventists) 등과 같이 일부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준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식일 [Sabbath, 安息日]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그 이후
때로는 멀리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세 번째 계단, 불교 - 붓다 :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순간을 만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나의 질문을 멈추게 했다. 세속의 그 어떤 논리와 비판도 그의 삶이 보여준 압도적인 숭고함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초월적인 거대함 앞에서 오히려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의심을 멈추고 그의 품에 안겨 쉬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는 질문이 자라났다. 정말 그것이면 충분한가. 믿음만 있으면 모든 죄는 용서받는가. 우리는 그렇게 구원되는가. 스스로 그렇다고 대답하면 할수록, 마음속에는 타자로부터의 구원에서 오는 초라함이 뿌리를 내려갔다. 인간은 그렇게 초라한 존재인가. 스스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일까.
 
대학 신입생
세상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하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세상과 대결해야 할 때 그 힘을 비축하게 하고, 세상에 무릎 꿇게 되었을 때에는 다시 일어서게 하는 자존감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사람들이다. 평생을 이상주의자로 살거나, 혹은 평생 한 번도 이상주의자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문제다. 전자는 미성숙해 보이고, 후자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찾을 수 없다.
 
몽골 여행

게르 :: 중국어로는 파오[包]라고 한다. 높이 1.2m의 원통형 벽과 둥근 지붕으로 되어 있다. 벽과 지붕은 버들가지를 비스듬히 격자로 짜서 골조로 하고, 그 위에 펠트를 덮어씌워 이동할 때 쉽게 분해 ·조립할 수 있다. 입구는 남으로 향하며 중앙에 화덕, 정면 또는 약간 서쪽에 불단(佛壇), 벽쪽에는 의장함 ·침구 ·조리용구 등을 둔다.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자리가 정해 있고, 안쪽에 가장(家長)이나 라마 승(僧)이 앉는 상석이 있다. 게르는 바람의 저항이 적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게르 [Ge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나는 단 한마디도 그를 가르치려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고맙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나의 불완전한 삶 전체에서 잠시나마 충만함의 기억을 선물해준 순간이었으니까.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니체는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하라.”
 
니체의 비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질문 중 나를 가장 괴롭힌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인가?”
내 삶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과 그리스도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 삶의 구체적 현실은 무엇인가. 주체적인 도덕성, 자기 극복의 의지, 저항의 가치. 이 모든 것은 단지 인간이 자만한 결과일 뿐인 건가. 실제로 교회는 인간에게 강요한다. 순종과 인내와 복종을 말이다. 인간 의지의 가치는 그렇게 하찮은가. 인간은 다만 종으로서, 노예로서 태어난 것일 뿐인가.
니체는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서구의 문화를 병들게 했다고 진단한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도덕성은 원한과 증오에서 출발한 노예의 도덕에 기반을 둔다.
 
니체는 그의 책 《도덕의 계보》에서 두 가지 가치 체계를 비교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가치 체계와 그리스도교의 가치 체계다. 우선 고대 그리스인들의 가치 체계부터 이야기해보자. 그들은 세상을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로 구분했다. 쉽게 말해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 우선 좋은 사람들은 고귀하고 강하며 우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인이다. 다음으로 이에 대비되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 좋지 못한 사람들. 저속하고 비천하며 열등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노예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인들은 주인으로서 ‘좋음’을 추구했다. 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덕목이 요구되었다. 주체성, 강인함, 자유,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 하지만 노예에게는 이런 덕목이 필요 없다. 노예에게는 노예로서의 덕목이 요구되었다. 순종, 복종, 겸손, 절제. 그들은 노예답게 행동할 때가 도덕적인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가치 체계는 노예의 도덕에서부터 기인한다.
 
노예들의 머릿속에서 주인은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신을 거역하는 죄 많은 존재로 변신한다. 노예들의 원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악으로 규정된 주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주인이 악이라면 노예인 자신은 무엇인가? 당연히 우리는 선이다. 이제 자신에게 강요되었던 덕목들의 가치는 변신한다. 나약함의 상징이었던 순종과 복종 그리고 겸손과 절제는 이제 선한 자의 덕목으로 그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가치는 전복된다. 주인의 ‘좋음’은 ‘악’으로, 노예의 ‘나쁨’은 ‘선’으로 뒤바뀐다.
이런 일은 실제 역사에서 발생했다. 고대 그리스 정신은 고대 로마로 이어졌다. 당시의 로마는 유럽사회의 점령자로서 주인이었다. 그들은 주인의 도덕을 가졌다. 광활한 세계 속에서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강하고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바였다.
반면 유다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노예였다. 오랜 기간 노예 상태로 지배받았던 무력감은 결국 유다인들의 영혼 속에 지워지지 않는 원한과 증오를 남겼다. 그리고 그러한 원한과 증오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정립되면서 새로운 도덕 체계로 탄생한다. 그것은 노예의 도덕, 원한과 증오의 도덕의 기원이다. 문제는 유다인의 가치 체계가 그리스도교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노예의 도덕은 오늘날 유럽인의 도덕 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니체는 근대 유럽사회를 진단한다. 그리스도교는 유럽을 병들게 했다. 노예의 도덕, 원한과 증오의 도덕이 유럽인들을 잠식하고 있다. 신에 대한 순종, 복종, 겸손, 절제라는 도덕 가치의 본질은 건강하지 않다. 이제 인간은 초라하고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존재가 되었다.
 
세 번째 계단 앞에서
붓다는 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닌, 스스로에 의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당시의 상황
고타마(Gotama)는 성이고, 싯다르타(Siddhrtha)는 이름이다.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 자’라는 뜻이다.
 
붓다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일반명사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붓다는 석가모니라고도 부르는데, 이 말은 ‘샤키야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아리안 :: 인도 · 유럽 어족에 속하는 인종을 통틀어 이르는 말. 원래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살다가 기원전 1500년 무렵 인도와 이란에 정착하였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 인들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농경과 목축 생활을 발전시켰으며, 갠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자연 현상을 신격화하여 신성이 있다고 믿었으며 신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였다. 이에 따라 제사 의식도 점차 체계화되었고, 제사를 주관하는 성직자인 브라만들을 중심으로 브라만교가 성립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아 인 (Basic 중학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2007. 7. 10., 임성재)

 
아리아인들은 펀자브 지방에 정착하여 ‘베다(Veda)’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베다란 신비한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성스러운 전승’ 혹은 ‘지식’이라는 뜻이다. 《베다》는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문서다. 특히 신들에 대한 의례 행위의 절차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의례 절차를 통해서 사람들은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청할 수 있었다.
의례를 통해서 신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의례를 주관하는 사제들의 가치를 높여주었다. 사제들은 ‘브라흐마나(Brahmana)’ 혹은 ‘바라문’이라고 불렸다.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고 지위인 브라만계급이 바로 이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더스 강 지역에는 《베다》의 전통이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동시에 윤회, 업, 해탈에 대한 《베다》의 관념도 인도인의 마음속에 깊이 안착했다. 반면 갠지스 강의 동쪽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베다》의 영향이 이곳까지 강하게 전파되지는 않았다. 브라흐마나 사제들은 동쪽의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믿기를 원했다. 하지만 동쪽 주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대로 사제들의 강요에 반발하는 다양한 스승들이 탄생했다. 이 스승들은 해탈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을 ‘슈라마나(Samana)’ 혹은 ‘사문’이라고 부른다. 출가, 고행, 명상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추구했던 이들이다.
 
어린 시절

룸비니 ::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평원에 있는 룸비니는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가 탄생한 곳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 첫 설법을 한 녹야원, 열반에 든 쿠쉬나가르(Kushinagar)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로, 1895년 독일 고고학자인 포이러(Feuhrer)가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언덕을 배회하다 석주 하나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전까지는 인도에서의 불교 쇠퇴와 함께 황폐해져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623년 샤카족의 왕비인 마야부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출산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 룸비니에 있는 무우수(無憂樹)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게 되고 그곳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된다. 그 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곳을 찾게 되었는데, 기원전 249년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도 이곳을 찾아 석가모니를 찬미하며 네 개의 불탑과 꼭대기에 말의 형상을 가진 석주 하나를 세웠다. 현재는 부러진 상태로 그 일부만 남아 룸비니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 이 석주에는 재위 20년에 석가모니가 태어난 성스러운 마을인 이곳을 찾았으며 룸비니 사람들은 세금을 감면받고 생산물의 8분의 1만을 징수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 장면을 묘사한 부조를 모시고 있는 마야데비(Mayadevi) 사원은 11세기에 지어져서 1943년에 재건된 곳이다. 그리고 이 사원 남쪽에는 싯다르타 연못 혹은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마야부인이 석가모니를 낳기 전 목욕을 하고 갓 태어난 석가모니를 목욕시켰다고 알려진 성스러운 곳이다. 이렇게 석가모니의 탄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룸비니는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룸비니 국제사원지구에는 한국사찰인 대성석가사(大聖釋迦寺)를 비롯해 각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살린 수많은 사원들이 건설되어, 전세계에서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며 석가모니의 자비와 형제애를 전하고 있다. 이 외에도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의 동전, 각종 종교 서적과 조각, 그리고 룸비니와 석가모니를 묘사한 방대한 양의 각국 우표가 전시되어 있는 룸비니 박물관과, 종교, 철학, 예술, 건축에 관련한 12,000여 권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룸비니 국제연구소(Lumbini International Research Institute)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룸비니, 부처의 탄생지 [Lumbini, the Birthplace of the Lord Buddh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전설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태어난 직후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다고 한다. 여기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여섯 단계의 윤회를 뜻한다. 즉 한 걸음을 더 나아갔다는 것은 윤회의 고리를 끊었음을 상징한다. 이어서 그가 외친 말의 의미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온 세상이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이를 평안케 하리라’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나’가 의미하는 것이 싯다르타 자신이 아니라 일반명사로서의 각각의 나를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있다. 각각의 개인이 소중하며, 그 고통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라는 것이다.
 
아시타는 아기의 얼굴을 보고 기쁨에 차서 이렇게 예언했다. “왕자님은 세속에 계시면 세계를 통일할 제왕이 되실 것이고, 세속을 떠나면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실 것이니 많은 이를 고통에서 구하실 것입니다.”
 
왕은 아시타의 이야기가 기뻤으나, 왕자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바라문들을 초청해서 아기의 장래를 예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라문들은 왕자가 자라서 네 가지를 보면 출가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네 가지는 늙은 이, 병든 이, 죽은 이, 출가 수행자다. 왕은 왕자가 절대 이러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호화로운 궁궐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성장했다.
 
출가

야쇼다라 :: 콜리(Koli)성의 공주로 샤카족 출신이다. 이름은 '영광을 가진 소녀'라는 뜻이다. 석가의 십대제자 중 한명인 아난다의 누이이며, 석가와의 사이에 아들 나후라를 두었다. 석가가 출가를 하자 그와 똑같은 생활을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후 석가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침상에서 휴식하지도 않고, 화장을 하거나 좋은 옷을 입지도 않았으며, 맛난 음식도 먹지 않았다. 12년이 지나 석가가 오자 숫도다나왕이 그녀의 생활을 전하였다.그러나 어떤 경전에는 이와 반대로 다른 여성들처럼 몸을 치장하였으며 석가를 만날 때도 여러 가지 향수를 뿌렸다고 한다. 나훌라를 6년 동안이나 잉태해 의심을 받았으며, 출가 뒤에도 깨달음이 늦었다고 한다.
출가한 것은 숫도다나왕이 죽은 뒤로, 왕비인 마하파자파티와 함께 코살라국의 사밧티까지 동행하여 출가하였다. 자신을 반성하는 데 엄격하였으며 신통력이 뛰어나 당시 비구니 중 제일인자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쇼다라 [Yasodhara, 耶輸陀羅]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싯다르타는 아들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다.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널리 알려진 건 ‘발목을 잡는 자’라는 뜻이다. 출가를 고민하던 싯다르타가 아기 때문에 자신이 가정과 속세에 묶이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하며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속세에 대한 미련은 싯다르타를 붙잡지 못했다. 29세가 된 싯다르타는 출가를 결심했다. 모두가 깊이 잠든 밤. 하인 찬나만 대동한 채 아끼는 말 칸타카를 타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성문을 빠져나오며 싯다르타는 맹세했다.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고행

마가다 :: 이 지방은 석가모니가 살아 있던 시대인 BC 6세기에 빔비사라와 아자타샤트루라고 하는 부자(父子)가 나타나서 강대한 왕국을 건설한 곳이다. 특히 아자타샤트루 때에는 이웃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고 서북의 강국(强國) 코살라를 무찔러, 갠지스강(江) 유역의 패권을 잡았다. 이 무렵에 불교 ·자이나교 등의 새로운 종교가 일어났고, 벼농사와 도시의 상업이 발달하여 마가다는 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샤이슈나가왕조, 난다왕조, 마우리아왕조, 굽타왕조의 중심지역으로 번영을 누리다가 굽타왕조가 멸망하면서 그 지위는 급속히 하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가다 [Magadh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당시 인도에는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가다에는 이런 수행자들이 다양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의 공동체를 ‘승가’라고 불렀다.
 
싯다르타는 ‘가야’라는 지방으로 내려갔다. 훗날 이곳은 붓다가 깨닫게 되는 곳으로, 이를 기려 ‘붓다가야(Buddha Gayā)’라고 불리게 된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만난 다섯 명의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고행자들은 육체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수행자들이었다. 그들은 옷을 입지 않고, 편안한 모든 것을 멀리했다. 싯다르타도 고행에 동참했다. 바로 앉은 자세를 극단적으로 유지하거나 가시덤불에 누웠다. 먹는 것도 극도로 피했는데, 하루에 한 집에서 단 한 입 먹을 분량만을 얻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보름에 한 번 찾아가는 것으로 대신할 때도 많았다.
고행은 6년 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깨달음
싯다르타는 쾌락과 고통의 중도(中道)로서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한다.
 
싯다르타는 적당한 크기의 보리수나무 아래 편안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평온한 몸과 마음으로 깊은 명상에 들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는 다짐했다.
깊은 선정에 들었을 때, 욕계의 왕 마라(Mara)가 찾아왔다. 마라는 세계를 다스리는 자로서 아름다운 외모의 세 딸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탐욕, 성냄, 욕망을 의미한다. 마라는 세 딸을 보내어 싯다르타를 유혹하게 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들을 깨우쳐 물리쳤다. 이번에는 마라가 위협적인 군대를 보내어 싯다르타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싯다르타의 선정을 방해할 수 없었다.
 
사성제(四聖諦)는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교리다. 고(苦), 집(集), 멸(滅), 도(道)라는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고’제는 고통을 말한다.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함을 직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집’제는 집착을 말한다.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이 집착과 욕망에 있다는 것이다. ‘멸’제는 소멸을 말한다. 집착을 멈춤으로써 고통을 없애는 깨달음의 목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도’제는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의 수행 방법인데,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고, 바르게 노력하여 마음을 닦고, 바른 신념을 갖고, 바르게 정진하는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세계의 본질을 설명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석가 초기의 가르침인 초전법률(初轉法輪)에 속한다.
이렇게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싯다르타는 드디어 스스로 눈뜬 자, 붓다가 되었다.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가르침의 전파
첫 번째 설법 이후, 붓다는 45년 동안 인도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의 가르침은 사후에 수많은 문서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붓다가 중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것이 붓다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어떤 죄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할 것.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정화할 것.’
 
우리는 보통 고정된 세계관과 고정된 자아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나의 영혼도 불변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믿음은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영원한 부를 쌓게 만들고,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찾아 종교에 매달리게 만든다.
하지만 실제 세상과 자아는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끝없는 변화의 상태에 놓여 있다. 세상은 고정되지 않고 ‘무상(無常)’하다. 그리고 불변하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는 ‘무아(無我)’를 말한다.

무상과 무아는 세계의 엄밀한 진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세계와 자아에 집착하게 되고 여기서 고통이 생겨난다. 변화하는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슬픔을 낳는다. 세계와 자아의 끝없는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집착과 욕망은 소멸하고 고통은 사라진다. 윤회의 고리는 끊어지고 우리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열반

대반열반경 :: 초기에 성립된 열반경을 흔히 소승열반경이라 하며, 대승불교 흥기 후 성립된 경전을 《대승열반경》이라 하나 두 경의 이름은 모두 《대반열반경》이다.
부처가 열반하였을 때의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된 이 경은 불신(佛身)의 상주, 열반의 상락아정(常樂我淨), 그리고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석가의 육신은 곧 법신으로서 상주하고 변하지 않으며 나타남이 아닌 데서 나타남이 있으며 육신의 모습에서 한량 없고 그지없는 법신을 보게 되고, 무아에 한정되지 않은 진아로서의 불성은 깨끗하며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중도관에 입각하여 일체 중생이 반드시 불성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집착이요, 없다고 하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하여 말할 수 없는 이러한 경계 자체는 있다고 하여 일체중생의 성불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한편 소위 《소승열반경》은 이러한 후기 대승교학과는 관계없이 석가의 유언으로 법과 율에 의지하라는 당부와, 게으르지 말고 자기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아난에 대한 충고가 주요내용이다. 이 초기경전은 발리어본으로도 남아 있으며 그 번역이 법현역의 《대반열반경》 외 두 종류가 있으며 《대승열반경》의 한역은 법현과 불타발타라 공역의 《대반니원경》 6권 18품, 북량 담무참 번역의 《대반열반경》 40권 18품, 그 후 위의 2가지 번역본을 종합하여 36권 25품의 《남본열반경》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반열반경 [大般涅槃經]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두 가지 길
구원이 반드시 타자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신을 비롯한 그 어떤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나 스스로에 의한 깨달음도 가능하다.
 
모든 결정의 권한은 나에게, 사람에게 있다. 심지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까지도 말이다.
 
 
 
네 번째 계단, 철학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집을 나와 세계를 떠돌았다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라는 주제는 나를 사로잡았다. 예수라는 ‘정’과 붓다라는 ‘반’은 나의 내면에서 구원이라는 주제로 종합되었다. 세상이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철학은 내가 보지 못한 절반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에 집중하느라 외면해왔던 구체적인 ‘현실’과 실존하는 ‘인간’의 존재였다.
 
동해 여행

침잠 :: 
1.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게 물속 깊숙이 가라앉거나 숨음.
2. 마음을 가라앉혀서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함.
자기 침잠의 세계.
3.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도록 성정이 깊고 차분함.
4. 분위기 따위가 가라앉아 무거움.
아득하고 무거운 침잠이 판철이와 이길수의 죽음을 생각나게 했다. 출처 <<한승원, 해일>>
[네이버 국어사전] 침잠 [沈潛]

 
철학에 대한 관심
거의 모든 철학 책은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철학과 관련된 책들을 꾸역꾸역 읽어갔다. 기대 때문이었다. 당시 나에게 철학이라는 분야는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미지의 대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는 진리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철학 수업은 놀랍고 재미있었다. 그것은 세계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존재론적인 재미였다. 수업을 듣고 강의실을 나설 때마다 기존에 내가 알던 세계는 철저히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토대로 재구성되었다.
 
“우리가 아무리 토론을 해도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안다. 인간의 삶의 형태는 보편적 진리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하기에 너무도 구체적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삶의 다양성과 해석의 주관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아쉽지 않은가. 이제 배움을 시작한 가슴 뜨거운 청년들이 오랜 시간 연륜을 쌓은 어른들처럼 세상에 정답이나 진리가 없다고 달관한 듯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다. ‘살다 보니 보편적 진리는 없었다’라고 선언할 기회는 청년들에게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네 번째 계단
여행을 통해 내가 보고 배운 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었다. 감추사에는 붓다가 아니라 주지스님이 있었고, 교회에는 신이 아니라 신자들이 있었으며, 시장에는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은 형이상학적인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체적인 삶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 자명하고 단순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역사 2000년 동안 철저하게 배제되고 잊혔던 절반의 세계. 현실과 신체라는 구체적 세계를 복원해내는 것이 니체의 계획이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하고 건강한 정신과 육체로 돌아올 때, 우리는 인간을 극복한 초인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측면을 다뤄보려고 한다. 그것은 ‘역사적 배경’과 ‘주요 개념’이다. 우선 역사적 배경을 알아본다. 일반적으로 니체는 근대를 마무리하고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니체가 해체하고자 했던 근대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다음으로는 주요 개념들을 알아본다. 특히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깊은 관계가 있는 세 가지 개념, 즉 ‘신의 죽음’, ‘초인’, ‘영원회귀’에 대해서 확인해본다.
 
서구 역사의 변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독일 작센 지방의 뢰켄에서 1844년에 태어나 1900년에 죽었다. 그가 1900년, 즉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근대의 문을 닫고 현대의 문을 열어젖힌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를 묶어서 현대 사상의 출발점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합리주의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합리주의는 근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인류 역사는 보통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한다.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진리’에 대한 관점이다.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세계관을 공유했는지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고대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다. 이때의 사람들이 공유하던 세계관으로서의 진리는 ‘신화’였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실제로 그리스의 신들과 함께 살았다. 현대인에게 신화는 단지 문학일 뿐이지만, 당시의 그리스인에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다음으로 중세가 되면 진리의 기준은 신화에서 ‘유일신’으로 바뀐다.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신인 야훼, 여호와, 알라, 하느님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중세는 기원후 4세기부터 대략 14세기 혹은 17세기 무렵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중세의 세계관은 현대인들에게도 익숙하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유대교의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전 세계 인구의 50퍼센트를 넘는다.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되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로 진리의 기준은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된다. 특히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사회를 장악한다. 근대인들은 과학과 기술로 사회가 진보할 것이고, 세계는 현실의 문제점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해가면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근대 합리주의 세계관 역시 우리에게 익숙하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할 때 가장 신뢰하는 것은 과학적 방법, 기술적 성과, 수학적 통계다. 오늘날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학의 성과에 의심을 갖지 않는다.
근대는 17세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대를 말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는 1945년까지를 일반적으로 근대로 구분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시기적으로 근대가 끝난 21세기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적 성과가 진리에 가장 가깝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시대적으로는 현대에 들어섰지만, 우리는 근대에 산다. 근대 합리주의가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가 여전히 우리의 발밑까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오래된 진리관은 이미 거짓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고 최신의 진리관은 가장 진보했으므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관점은 변화해가는 것일 뿐,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현대인도 신앙을 가질 수 있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신뢰할 수 있다.
 
세계대전과 함께 근대가 마무리되며 인류는 깨달았다. 종교나 이성과 같은 단일한 진리에 대한 믿음이 인류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현대는 새로운 진리의 기준을 세우는 대신, 지금까지 우리가 진리라고 믿었던 기준들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데 몰두한다. 현대는 근대의 이성중심주의에 반대하며 ‘반이성’을 주장하고, 근대의 합리주의에 저항하며 ‘비합리성’을 추구하고, 근대를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탈근대성’을 말한다.
 
‘근대성’은 근대 시대의 이념적 특성을 말한다. 누군가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하나의 시대를 말한다기보다는 근대성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근대성은 구체적으로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신뢰하도록 만들었다. 발전, 진보, 성장, 과학, 기술. 이러한 개념들은 근대라는 단어와 혼용된다.

다음으로 ‘탈근대성’은 현대의 이념적 특성을 말한다. 탈근대성은 근대성과 대비된다. 쉽게 말해서 근대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반대, 합리주의에 대한 저항과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대를 대표하는 개념은 다음과 같다. 반이성, 탈중심, 해체, 다원성. 이러한 개념들은 탈근대라는 단어와 혼용된다.
 
서구 역사에서 니체의 위치
니체는 근대의 끝과 현대의 시작 그 사이에 있다. 실제로 탈근대성의 탄생은 니체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니체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근대의 유럽인들이 병들었다고 진단했다. 병명은 나약함과 왜소함이다. 그에 따르면 중세와 근대의 2천년을 지나오면서 유럽의 문화와 사상은 타락했고 퇴폐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한 질병을 가져온 직접적인 요인은 바로 그리스도교와 이성중심주의다.
 
니체가 비판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와 이성중심주의 그 자체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두 가지 요인이 인류를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와 이성중심주의가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함을 밝힌다. 그 본질이란 ‘플라톤주의’다. 플라톤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세상을 둘로 나누기. 둘째는 둘로 나뉜 세계 중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를 강조하기.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세계를 양분한다. 그것은 이데아라는 개념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플라톤은 우선 근본적인 세계인 이데아의 공간을 상정한다. 다음으로 이데아의 모방이자 그림자인 현상세계를 분리해낸다. 이데아의 세계는 본질로서 불변하고 영원하며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실체다. 반면 우리가 존재하는 현상세계는 변화하고 유한한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둘로 구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분법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구분된 두 항 중에 하나의 항은 가치를 갖고, 나머지 항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실제로 플라톤에게 가치 있는 세계는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였다. 구체적인 현상세계는 무질서하고 변화하는 임의적인 세계일 뿐이다.
니체는 이 지점을 공격한다.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서구 사상의 주류가 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니체에게 그리스도교는 대중화된 플라톤주의에 다름 아니다. 천국과 인간 세계의 이분법적 구분의 토대는 이데아와 현상세계의 구분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천국은 유일하게 가치를 갖는 본질적 공간이 되었지만, 현상세계는 원죄와 타락으로 가득한 가치 없는 공간이 되었다.
근대 이성중심주의도 마찬가지다. 근대적 정신의 시작은 르네상스였고,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정신의 부활이었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플라톤은 서양 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근대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만이 강조되었다. 반대로 이성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배제되고 억압되었다. 감정, 욕망, 신체, 현실, 여성, 동양은 반이성적인 것들로 평가 절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는 이성적인 존재의 상징인 남성, 서양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플라톤주의가 절반의 세계를 억압한 것이 문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이념, 사유, 종교, 도덕만을 추구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실을 망각한 것이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니체는 근대를 끝내려고 한다. 플라톤주의를, 그리스도교를, 이성중심주의를,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끝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주요 개념 1 : 신의 죽음
차라투스트라는 실존했던 인물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에 고대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예언가다. 영어로는 조로아스터(Zoroaster), 독일어로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된다. 조로아스터교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 종교로, 선악 이원론을 기본 세계관으로 한다. 즉 선과 악의 기원은 아후라 마즈다의 두 가지 속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신의 죽음’은 니체의 여러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언급은 《즐거운 학문》에서였다. 대낮에 등불을 든 광인이 그를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신을 죽였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신의 죽음이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대신 근대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즉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종말, 그리스도교와 이성중심주의의 거부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라는 니체의 제안이다. 이상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주요 개념 2 : 초인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라고. 인간은 스스로 몰락해야 한다. 왜냐하면 초인으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초인은 독일어 ‘위버멘쉬(Übermensch)’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 슈퍼맨(Superman) 또는 오버맨(Overman)으로 번역하는데, 한국에서는 영어 번역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초인은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기 자신을 극복한 존재를 말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은 존재다. 그는 대지에 속해 있으며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다. 그리고 신이 죽은 세상의 허무를 긍정하는 주체적인 존재다.
 
인간의 정신은 세 가지 차원으로 변화한다.
첫 번째. 정신은 낙타가 된다. 낙타가 된 정신은 내면이 외경심으로 가득한, 인내심 많은 강인한 정신이다. 이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다. 
그는 사회, 종교, 도덕, 관습이 주는 의무에 순종하고 고통을 인내한다. 스스로를 금욕적으로 담금질한다.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달려간다.
두 번째. 고독한 사막 한 가운데서 정신은 이제 사자가 된다.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사막의 주인으로 서고자 한다. 이제 마지막 주인만 쓰러뜨리면 된다. 그것은 신이다.
‘너는 해야 한다’와 ‘나는 원한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이 의무라면, 뒤에 것은 권리다. 노예에게 주어진 의무와 주인에게 주어진 권리. 정신이 사자가 된다는 것은 종속적인 노예가 주체적인 주인으로 일어서려는 저항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자도 새로운 가치는 창조할 수 없다. 사자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조건을 획득하는 것뿐이다. 사자는 그 조건으로써 자유를 획득해낸다. 이제 자유를 획득했으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할 때다. 이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정신은 아이가 된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고 망각이다.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그리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다. 왜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아이만이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창조의 과정은 하나의 유희이고 동시에 긍정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긍정해야 하는가? 그것은 신이 죽은 허무한 세상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 근대, 현대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낙타의 인내가 중세 그리스도교의 도덕관을 반영한다면, 사자의 자유는 근대 이성의 주체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새로운 시대의 창조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플라톤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필요하다. 아이는 탈근대, 현대를 의미한다. 니체에게는 아직 오지 않았던 시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초인이 바로 아이인 것이다.
 
주요 개념 3 : 영원회귀
신이 죽은 세계.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세계의 창조 목적이나 방향성이 사라진 이 허무한 세계는,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니체는 하나의 세계를 제안한다. 그것은 ‘영원회귀’의 세계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팽창과 수축을 무한히 반복하는 세계. 영원회귀는 시작도 끝도 없이 똑같은 것이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돌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원회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라고 외치며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대지와 순간을 살기로 하다
찰나의 순간은 무한히 중첩된 내 삶의 한 지점을 강하게 꿰뚫고 있었다.
 
 
 
다섯 번째 계단, 과학 - 우주 : 하릴없이 사치스럽게 책을 읽었다
종교와 철학에 대한 나의 신뢰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종교와 철학이 말해주는 세계란 하나의 가정인 것은 아닌가. 나는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머물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객관적 세계가 필요했다. 내가 나의 주관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무게감 있는 대척점이 필요했다. 그리고 과학은 그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었다.
 
도서관
아무리 노력해도 잘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 그럼 굳이 읽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잘 읽히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되었거나, 반대로 그 책이 나를 설득할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의 흥미를 끌고 당신을 깨우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 읽히지 않는 책을 가볍게 지나치지 못하고 집착할 필요는 없다.
 
여행하는 영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왜 누구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지, 왜 평생을 소진하여 하나의 전문 분야를 가져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그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 특성, 즉 산업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산업화의 본질은 기계화와 분업이다. 특히 분업은 노동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산업화 이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전체적으로 조망했다. 농사를 짓거나 구두를 만들거나 베를 짜서 옷을 만들었다. 노동의 결과물은 노동의 주체를 소외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분업화된 환경에서 노동의 결과물은 노동자를 소외시킨다. 현대사회의 노동자는 일의 전체적인 전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신 세분화된 특정 분야에 숙달되어 있으면 충분하다.
효율성 때문이다. 노동의 주체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한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는 생산량의 극대화 때문이다. 각 분야의 노동자가 자신의 업무를 전문적으로 반복할 때, 사회의 전체 이익은 증대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명의 개인에게 전문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영혼을 고려해서가 아니다. 효율성과 전체 생산량 증대. 이것 때문이다.
 
만약 인간에게 원죄라는 것이 있고, 그 원죄가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것이라면, 원죄의 본질은 자녀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부모의 잔상이다.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노동자로 살기 위해 이곳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전문성의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노동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국가와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주체적인 존재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 계단 앞에서
여름이 가까운 봄의 끝자락은 늦은 시간이면 다행히도 아직 선선했다.
 
인간으로 운명 지어진 이번 삶 안에서, 우주의 경계에 닿는 경험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집 의자에 앉아 우주의 규모를 생각하고 우주의 탄생과 종말을 상상한다.
 
어쩌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것인지 모른다. 종교와 철학의 모든 논의는 디딜 수 있는 그 어떤 기반도 갖지 못한 채 어설프게 쌓아 올린 상상의 성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을 강하게 비판한다. 검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종교적 문제, 혹은 철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믿을 만한가
실험과 관찰로부터 이론을 도출하는 방법은 필연적인 한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귀납적인 종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개별적인 ‘특수한 사례’들로부터 일반화된 ‘보편 이론’을 도출하는 귀납법은 명백히 논리적 비약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들에 따르면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은 절대적인 진리를 결코 보장할 수 없다. 과학은 단지 실용적이고 임의적인 방법일 뿐이다.
이에 대비되는 두 번째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과학을 다른 학문 분야와 구별하려고 한다. 특히 과학적 방법론은 하나의 견해가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의 기본 토대가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고대와 중세에 인류의 진보가 더뎠던 것, 반대로 근현대에 이르러 인류가 급격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과학적 방법론의 유무 때문이었다. 특히 전근대 시대의 철학과 종교는 실험과 관찰이라는 기초적인 검증조차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 가득한 결론으로 인류를 혼란에 빠뜨렸다.
 

부르노 :: 이탈리아 르네상스 기의 자연철학자, 스콜라 철학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대자. 프랑스, 영국, 독일을 유랑한 후, 1591년 이탈리아에 귀국, 체포되어 종교 재판에 의해 1600년 로마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상은 유물론을 포함하여 고대 그리스의 철학 사상, 특히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범신론적 세계관을 지녔고, 무한히 넓은 세계는 우주 영혼에 의해 인도된다고 하였으며, 모든 것은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활동력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계는, 즉 자연이라고 하여 유물론적 견해를 보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브루노 [Bruno, Giordano] (철학사전, 2009., 임석진, 윤용택, 황태연, 이성백, 이정우, 양운덕, 강영계, 우기동, 임재진, 김용정, 박철주, 김호균, 김영태, 강대석, 장병길, 김택현, 최동희, 김승균, 이을호, 김종규, 조일민, 윤두병)

 
과학이 진리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학이 자신의 방법론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귀납으로서의 ‘경험’과 연역으로서의 ‘수학’이다.

 
과학의 역사와 수학
나에게 물리는 실제 세계의 물체와 관련된 학문이고, 수학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숫자들의 학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실제 세계의 구성요소인 공간, 시간, 속도가 수학을 통해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이런 것이었다니! 세계는 수학이었다!
 
오늘날 과학이 두 가지 방법론, 즉 귀납과 연역을 동시에 사용하게 된 기원은 갈릴레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의 귀납이란 관찰과 실험을 말하고, 연역은 수학적 적용을 말한다.
우선 갈릴레이는 귀납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망원경을 개량하거나 실험 도구를 제작하는 등, 구체적인 측정과 관찰을 기반으로 이론을 정립해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연역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자신의 이론을 수학의 한 분과인 기하학을 통해서 정립하려 노력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과학에서의 수학적 적용을 강조했으며, 실제로 1589년에는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갈릴레이는 천체와 물리적 사물들을 원과 삼각형, 사각형 등의 기하학적 대상으로 기술했다. 갈릴레이에 이르러 사물은 기하학이 되었다.
 

해석기하학 :: 즉, 공리(公理)와 정리(定理)를 적용하는 대신 좌표라고 하는 한 짝의 수를 변수로 하는 방정식의 형태로서 도형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들의 생각 중에서도 그 싹이 있었는데 17세기에 들어와서 P.페르마가 이것을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였고, R.데카르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즉, 페르마는 아폴로니오스의 《원뿔곡선론》을 상세히 연구하여 이것에 바탕을 두어 좌표의 개념을 확립했고, 데카르트는 1637년에 《기하학》에 의해 학문으로서의 체계화를 완성시켰다. 해석기하학의 창시는 미적분학의 확립과 때를 같이하는데 이 둘은 연결되어, 이에 이어지는 수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해석기하학 [analytic geometry, 解析幾何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대수학 :: 수학의 한 분야로 수 대신에 문자를 쓰거나, 수학법칙을 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방정식의 문제를 푸는 데서 시작되었다.
대수학은 영어로 'Algebra'인데 이는 'al-jabr'라는 아라비아어에서 유래했으며, 방정식의 이항을 의미한다. 대수학(代數學)의 대(代)자는 숫자에 문자를 대신 대입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유래했다.
수학의 분야를 크게 대수학, 해석학, 기하학으로 나눌 때, 그 중 한 분야에 해당한다. 대수학을 쉽게 말하자면, 방정식 문제를 푸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칙연산을 이용하여 x나 y의 해를 구하는 것, 복잡한 식들을 이항과 약분으로 간단하게 만드는 것, 소인수분해 등이 대수학의 시작이다. 대수학의 세부 분야로는 정수론, 선형대수학, 군론, 환론 등이 있다.
현대 대수학은 대수적 구조에 대해 주로 연구하며, 수학자 닐스 헨리크 아벨, 에바리스트 갈루아 등이 크게 공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수학 [algebra, 代數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으로 세계의 구체적 ‘존재’들은 수학적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수학화되지 않은 절반의 세계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관계’다. 세계란 존재와 관계로 구성되니까. 뉴턴은 물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인 ‘힘’까지 수학으로 설명하려 했다. 즉 ‘만유인력’을 밝히고 그것의 작용을 수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뉴턴은 모든 존재가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정리하고, 이를 수학적으로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은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비례해서 커지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작용한다. 생각해보면 상식적이다. 무거울수록, 가까울수록 끌어당기는 힘이 커지는 것이다.
 
뉴턴의 역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우리가 우주의 보편법칙을 찾았다는 것이다. 연필부터 태양에 이르는 모든 물체는 만유인력이라는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둘째, 그 보편법칙은 수학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에서 시작한 근대 과학은 뉴턴에 이르러 마무리된다. 우주 전체는 수학에 의해 빈틈없이 기술된다. 모든 물체와 힘, 다시 말해서 존재와 관계는 수학으로 환원된다.
 
서구 근대 인식론 철학의 두 뿌리가 되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방법론이 각각 귀납과 연역이라 할 때, 과학은 이 두 가지 모두로부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과학이 진리의 왕좌를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학의 역사는 어쩌면 세계의 수학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갈릴레이에 의한 존재자의 기하학화, 데카르트에 의한 존재자의 대수학화, 뉴턴에 의한 관계의 수학화 과정은 인류가 우리의 우주를 빈틈없이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상대성원리 :: 뉴턴의 운동법칙은 갈릴레이변환에 대하여 불변(不變)이며,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관성계(慣性系)에서의 모든 자연법칙이 로렌츠변환에 관하여 불변인 형식을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관성계라는 제한을 없애고, 모든 좌표계에서 물리법칙이 같은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였다.
상대성원리란 이와 같이 어떠한 좌표계(관측자)도 그 밖의 계와 비교하여 무슨 특별한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며, 법칙은 좌표계의 변환에 대하여 불변인 형식(또는 텐서형식)을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변환군(變換群)의 종류에 대응하여 여러 가지 상대성이론이 존재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대성원리 [principle of relativity, 相對性原理]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세계의 이면
지금 돌이켜보면 세계의 이면에 대한 이해는 내가 사유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유의 시작은 분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일했던 세계를 둘로 잘라야 한다. 세계를 표면과 이면으로 자르고, 현상과 본질로 자르고,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으로 자르고, 대지와 하늘로 잘라내야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사유의 시작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첫 번째 질문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뉴턴이 이야기한 것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야. 시공간의 휘어짐이지.
 
중력은 특정한 힘이 아니라, 시공간의 휘어짐이야. 예를 들어볼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우주의 공간을 상상해봐. 거기에 볼링공이 하나 생겼어.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제 자리에 정지해 있겠지.
먼저 뉴턴의 중력 개념에 의하면 이 볼링공은 어떤 중력도 갖지 않아. 왜냐하면 뉴턴 역학에서 중력은 두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힘이니까. 지금은 이 우주에 볼링공 하나밖에 없잖아. 게다가 뉴턴 역학은 도대체 왜 그러한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하는지 설명하지 못해. 이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는 게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야.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텅 빈 우주에 홀로 떠 있는 볼링공이라 해도 중력을 가져. 중력은 하나의 장(field, 場)으로서 작용해. 그래서 상호작용 해야 하는 또 다른 물체를 필요로 하지 않지. 이제 이 중력장을 상상하기 쉽도록 시각화해보자. 여기 매우 얇고 탄력이 뛰어난 사각형의 커다란 고무막이 있어. 이 고무막은 펼쳐져 있고, 네 귀퉁이는 팽팽하게 당겨져 고정되었어. 이 고무막 위에 볼링공을 올려보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 볼링공의 질량으로 고무막이 아래로 오목하게 휘어질 거야.

우리의 시공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돼. 질량을 가진 물체 주변의 시공간은 마치 고무막처럼 휘어지게 돼. 이게 중력장이지. 물론 차이가 있어. 고무막은 2차원의 평면이고, 실제 중력장은 공간의 3차원과 시간의 1차원이 합쳐진 4차원의 시공간을 휘어지게 하니까.
이 제 볼링공 근처로 야구공을 굴려볼 거야. 그럼 어떻게 될까? 굴리는 방향과 속력에 따라서 야구공은 볼링공 근처를 지나치면서 고무막의 곡률에 의해 진행 방향을 바꾸거나, 혹은 고무막의 곡률을 따라 빙빙 돌다가 볼링공에 가서 붙을 수도 있어.

만약 고무막이 완전히 투명해서 우리의 시각이 고무막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볼링공과 야구공의 운동은 어떻게 보일까? 마치 볼링공이 힘을 뻗어서 야구공을 끌어당긴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뉴턴의 중력 개념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야. 볼링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다만 볼링공의 질량이 시공간을 휘어지게 하고, 직선으로 움직이려는 야구공은 그 곡률을 따라서 최단거리로 움직였을 뿐이야.
 
물체의 질량이 시공간의 곡률을 결정하고, 이것이 중력의 크기를 결정해.
 
시공간의 곡률이 커지면 시간도 크게 휘어져. 즉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게 돼.
 

민코프스키 시공간 ::  아인슈타인이 1905년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의 기하학적 표현수단으로 1908년 수학자 H.민코프스키가 도입한 공간이다. 관성계의 좌표를 로렌츠변환하였을 때 3차원의 공간좌표와 1차원의 시간좌표를 허수를 사용하여 표현하면 4차원 공간내에서의 1차변환처럼 다룰 수 있다.
민코프스키공간 ·4차원공간(四次元空間) ·시공세계라고도 한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관성계(慣性系)가 로런츠변환(갈릴레이변환을 확장한 좌표변환)에 의해 규정된다고 한다. 로런츠변환은 진공 중에서 좌표원점으로부터 발하는 빛의 파면방정식(波面方程式) x^2+y^2+z^2-c^2t^2=0을 불변으로 하는1차변환이다. 여기서 x,y,z는 공간좌표이고, t는 시간좌표, c는 광속이다. 3차원 유클리드공간의 좌표 x,y,z 및 시간 t 대신 x1≡x, x2≡y, x3≡z, x4≡ict (단, i는 허수단위의 식)로 정의되는 4개의 좌표를 도입하면, 위에 말한 로런츠변환의 성질은 x1^2x+x2^2+x3^2+x4^2이라는 4차원공간 (x1,x2,x3,x4) 내에서의 1차변환과 다름없게 된다.
3차원 유클리드공간으로부터의 유추(類推)를 원용(援用)하면 이러한 종류의 변환은 좌표축(座標軸) 회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로런츠변환에 대한 물리법칙의 공변성(共變性)은 3차원 유클리드공간으로부터의 유추에 의해 벡터나 텐서를 써서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동시에 일반화하기가 쉽다. 단, 4개의 좌표계 내의 1개가 허수단위를 포함하기 때문에 길이의 제곱으로 주어지는 2차형식은 3차원 유클리드공간의 경우처럼 +값으로 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점에서 의사(擬似)유클리드공간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따라서 4차원의 민코프스키의 시공세계는 4차원의 의사유클리드공간으로서 도입되었으며, 그 후에 여러 가지 형태로 일반화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코프스키의 시공세계 [Minkowski's space-time world, ─時空世界]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극단적인 시공간의 곡률을 실제로 가진 천체가 블랙홀이야.
 
볼링공의 질량이 무한대가 됐다고 가정해봐. 시공간의 곡률도 무한대가 되겠지. 결국 그 곡률은 너무나 커져서 그 어떤 것도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게 돼. 빛조차 말이야. 멀리서 그 볼링공이 위치한 곳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볼링공은 거기 있겠지만, 우리는 그걸 볼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반사되는 것을 측정한다는 것인데,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반사되어 나오지 않거든. 우리에게는 그저 깊은 어둠만이 보일 거야. 그래서 이러한 천체를 ‘블랙홀(Black hole)’이라고 이름 붙인 거지. 하나의 천체가 블랙홀이 되기 위해서는 질량에 대비한 특정 크기로의 수축이 필요해. 이때 기준이 되는 건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이야. 쉽게 말해서 지구의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대략 1센티미터 정도가 돼. 지구를 이 정도의 크기 안에 구겨 넣으면 지구도 블랙홀이 되는 거야.
 
두 번째 질문
오늘날의 사람들은 누구나 우주가 특정 시점에서 팽창을 시작해서 지금도 팽창을 지속하고 있다는 걸 알아.
 
구체적으로 우주 팽창의 결정적 증거가 측정된 건 1929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은 은하들의 적색편이를 관측함으로써 지구에서 보이는 거의 모든 은하가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어. 여기서의 적색편이란 은하들이 내는 빛의 파장이 늘어져서 관측되는 현상을 말해. 빛의 파장이 늘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빛을 내는 대상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사실, 우주가 동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허블의 관측이 최초는 아니야. 1915년에 발표된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도 예견되는 것이었어. 일반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풀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거든. 엄밀히 이야기하면 아인슈타인 이전의 뉴턴의 중력 이론에서도 우주가 동적일 것이라는 사실이 추론돼. 왜냐하면 중력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방향으로만 작동하니까.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팽창한다는 결론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방정식을 임의로 손보기까지 했어. 우주상수를 추가해서 정적인 우주가 되도록 수식을 조정했던 거지. 무엇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정한 원천에서 나오는 힘이 있어서 우주의 팽창을 막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이후 아인슈타인은 허블의 관측 결과를 확인하고서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어. 그래서 우주상수를 도입했던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임을 시인했지.
 
은하들은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어. 중력에 의한 수축을 극복하고 말이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을 되돌려보면 은하들은 하나의 지점에 모이게 될 거고, 이러한 고밀도의 상태로부터 폭발이 있었을 것임을 추측해볼 수 있어. 그리고 실제로 1964년. 미국의 전파 천문학자 아르노 펜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이 우주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는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하게 되면서 우주가 초기의 뜨거운 고밀도 상태로부터 대폭발을 겪었다는 빅뱅 우주론의 결정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지.
 

적색편이 :: 천체의 스펙트럼선이 원래의 파장에서 파장이 약간 긴 쪽으로 치우쳐 나타나는 현상. 후퇴하는 천체들에서 도플러 효과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편이량을 조사하면 시선 방향의 후퇴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 즉 광속을 c, 원 파장을 λ, 적색편이량을 Δλ라 하면 후퇴 속도 Vr은 c×Δλ/λ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적색편이 [赤色偏移] (Basic 고교생을 위한 지구과학 용어사전, 2002. 4. 20., 이석형)

 

청색편이 ::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는 파동을 발생시키는 파원과 그 파동을 관측하는 관측자 중 하나 이상이 운동하고 있을 때 발생하는 효과로, 파원과 관측자 사이의 거리가 좁아질 때에는 파동의 주파수가 더 높게, 거리가 멀어질 때에는 파동의 주파수가 더 낮게 관측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여기서 파장이 짧아지는 경우를 청색편이(blueshift), 길어지는 경우를 적색편이(redshift)라고 한다.
청색편이는 천문학에서 천체 간의 상대 운동을 결정하는 데에 주로 사용된다. 안드로메다 은하의 스펙트럼에서 청색편이를 관측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 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플러 효과로 인한 청색편이 외에, 중력장의 영향으로 청색편이를 보이는 것은 중력청색편이(Gravitational Blueshift)라고 한다. 중력장 안에 놓인 광원(light source)으로부터 방출되는 전자기파를 그 광원이 있는 곳보다 중력이 강한 곳에서 관측할 경우 발생하게 된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에 관측되는 것을 중력적색편이(Gravitational redshift) 또는 아인슈타인 편이(Einstein shift)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우주론적 청색편이(Cosmological blueshift)가 있는데, 우주의 모형 중 한 점으로 수축하는 닫힌 우주로 대붕괴(big crunch)가 맞는 가설이라면, 우주 전반에 걸쳐 거시적으로 청색편이가 관측되게 되어야 하고 이를 우주론적 청색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주는 팽창하고 있고 이로 인해 실제로 관측되는 것은 우주론적 적색편이(Cosmological redshift)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색편이 [blue shift, 靑色偏移]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빅크런치(Big Crunch) :: 우주탄생의 대폭발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주 모형은 계속 팽창하는 열린우주, 팽창이 멈추게 되는 평탄우주, 그리고 한 점으로 다시 수축한다는 닫힌 우주가 있는데, 그 중 닫힌 우주에서 한 점으로의 수축하는 것을 대붕괴라고 한다. 우주의 종말을 나타내는 천문학 용어이다.
아인슈타인 중력이론을 균일등방인 우주모형에 적용하면, 우주의 팽창률은 그 속에 포함된 물질의 밀도와 공간의 곡률에 따라 결정된다. 곡률항의 부호에 따라 세 가지 경우가 나타난다. 부호가 음이면 팽창이 진행함에 따라 물질의 밀도는 희박해지지만 팽창은 곡률에 의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게 된다(열린 우주). 곡률항이 양이면 어떤 시점에 이르러 곡률항과 물질항은 값이 같고 부호는 달라 차츰 팽창을 감속하게 되며, 그후에는 수축하여 결국에는 모든 물질이 다시 한 점으로 모이게 되며, 이를 대붕괴라고 부른다(닫힌 우주). 중간 경우로, 곡률이 0이면 물질항만이 팽창을 유지시키므로 시간이 진행함에 따라 밀도가 감소하게 되어 차츰 팽창을 멈추게 된다(평탄 우주).
위의 모든 경우에 팽창의 시작은 대폭발이라고 부르는 밀도와 시공의 곡률이 무한인 점에서 시작하게 되며 초기에는 공간곡률보다는 밀도항이 우세하여 세 가지 경우가 모두 비슷하게 진행된다. 물질밀도와 팽창률의 관측으로부터 공간곡률을 측정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관측결과로는 열린 우주 쪽을 지지하지만 아직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붕괴 [big crunch, 大崩壞]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열린 우주 ::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를 가리키는 용어로, 시공간의 모습이 마치 말 안장의 표면과 같이 음의 곡률을 가진 우주를 열린 우주라고 한다.
과거에 열린 우주라는 용어는 단순히 우주에 있는 물질의 밀도가 너무 낮아서 중력이 우주의 팽창을 저지하지 못하는 우주를 나타냈었다.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우주는 영원히 팽창한다. 오늘날에는 이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우주를 구성하는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가 마치 말 안장(saddle)의 표면과 같이 음의 곡률(negative curvature)을 갖는 우주를 열린 우주라고 한다. 열린 우주에서는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보다 작으며, 만나지 않는 두 직선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도 않다. 중력의 힘이 약하므로 영원히 팽창하며, 그 팽창률이 점점 가속한다. 공간의 팽창이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종국에는 은하가 분해되고, 별이 분해되며, 모든 물질이 찢어지는 대파열(Big Rip)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이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열린 우주 [open univers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현재까지는 우주의 미래가 ‘열린 우주’의 형태일 거라는 전망이 우세해.
 
세 번째 질문
 

 

대통일이론(Grand Unified Theories) :: 대통일이론(grand unified theory, GUT)은 입자물리학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이론인데, 현재 실험적으로 검증이 완료된 표준 모형보다 더 근본적인 이론이다. 대통일이론에서는 자연을 기술하는 근본적인 네 가지 상호작용 중에서 중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인 전자기력,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한다. 여러 후보 이론이 제안되었지만 아직까지 성공적인 대통일이론은 없고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1970년대 초에 입자물리학에서는 자연을 기술하는 근본 이론으로 표준 모형이 완성되었다. 이 모형은 소위 게이지이론이라는 틀 안에서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약전자기 이론으로 성공적으로 통합했고 양자색역학으로 강한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었다. 양자색역학과 약전자기 이론은 이론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 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이론이다. 이에 따라 물리학자들은 세 힘을 하나로 통합하는 이론을 찾기 시작하였다.
만약 대통일이론이 존재한다면 우주 극초기, 혹은 에너지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 전자기력, 약한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의 세 가지가 높은 대칭성을 가지면서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그러나 에너지가 낮아지면 대칭성의 일부가 자발적으로 깨어지고 그에 따라 통합된 힘 중에서 강한 상호작용이 다른 두 힘과 분리된다. 이것이 현재 표준 모형에서 기술하는 상황에 해당한다. 그리고 에너지가 더 낮아지면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이 다시 분리되면서 강력까지 세 힘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된다.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하는 직접적 실험 증거는 아직 없지만 이론적으로 간접적인 정황은 있다. 예를 들어 세 힘의 결합상수를 이론적으로 계산하여 에너지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면 이들이 저에너지에서는 서로 완전히 다른 값을 갖지만 에너지가 높아짐에 따라 거의 한 값으로 모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모이는 곳의 에너지는 대략 10^16GeV 정도인데 우주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대폭발 후 10^−35초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른 것에 해당한다.
대통일이론에서는 표준 모형의 쿼크와 렙톤이 더 이상 다른 특성을 가진 입자가 아니고 하나로 통합되어 서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에 중입자수가 보존되지 않는다. 특히 가장 가벼운 중입자이므로 표준 모형에서는 수명이 무한대인 양성자도 더 이상 안정한 입자가 아니고 렙톤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양성자 붕괴는 대통일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므로 실험으로 이를 관측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대통일이론의 후보로 여러 가지 모형이 제시되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 유명한 모형은 1974년에 조자이(H. Georgi,1947-)와 글래쇼(S. Glashow,1932-)가 제안한 SU(5) 대통일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양성자의 수명은 대략 10^31년 정도인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실험 결과는 달랐다. 아직까지 양성자 붕괴를 관측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설령 양성자가 다른 입자로 붕괴하더라도 수명이 10^31년보다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SU(5) 대통일이론은 옳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여러 다른 대안 이론이 연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대통일이론이 제안된지 40년이 넘었지만 대통일이론이 정말 존재하는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며 입자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미해결 문제로 남아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통일이론 [Grand Unified Theory] (물리학백과)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 ::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많은 우주 중 적합한 조건을 갖춘 곳에서만 존재 가능하며, 생명체 존재를 위한 조건을 통해 다양한 물리적 법칙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원리이다.
정의
1974년 호주의 물리학자 브랜든 카터(Brandon Carter)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이며, 존 배로(John Barrow), 폴 데이비스(Paul Davies)와 같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입장은 지구가 인간을 비롯한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체가 생존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춘 것이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며, 현재와 같은 물리법칙이 적용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다양한 조건을 가진 우주가 생성되고 멸망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우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모든 조건들이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다.
관련 사례 및 가설
인류원리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사례로는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가 1987년 저술한 우주상수에 관한 논문을 들 수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우주상수가 지나치게 큰 양수일 경우 우주의 팽창이 가속되고 반대로 지나치게 큰 음수일 경우 중력수축을 시작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우주상수가 아주 미세한 값으로 조정되어 있으며,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우주상수가 이러한 미세조정값을 갖지 않았다면 어떠한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인류원리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또한 중력의 크기 역시 지금보다 컸다면 생명체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의 과학자 피터 워드(Peter Ward)와 도날드 브라운리(Donald Brownlee)는 2000년 저서 《희귀한 지구》를 통해 은하계에서 지구의 위치, 적절한 거리에서 항성을 항상 돌고 있는 점, 적절한 지구의 크기와 물의 총량, 바다와 육지의 적절한 비율 등을 근거로 지구가 결코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인류원리는 초끈이론과도 연관이 있는데, 이 이론에서는 만물이 1차원적인 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시공간이 10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잘 알려진 4차원 이외의 나머지 6차원은 매우 작은 영역에 국한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또한 인류원리는 빅뱅 이론을 비롯한 우주의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발생을 주장하는 기존의 과학 이론들과 달리 잘 기획된 설계에 의한 우주기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미국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 이론과도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 지적설계 이론에서는 우주의 법칙과 생명체의 탄생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목적과 의도를 가진 신의 설계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의의
인류원리는 아직까지 관찰과 실험에 의해 증명된 이론이나 법칙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차원의 신념에 가깝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 및 우주 탄생과 관련하여 진화론과 대비되는 견해를 보이며, 진화론 역시 과학적 차원보다 자연철학적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인류원리가 가지는 파급효과를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인류원리를 통해 생명체의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류원리 [Anthropic Principle, 人類原理]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인류원리란 현재의 우주가 왜 이러한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을 인간의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찾으려는 시도야.
 

플랑크상수 :: 플랑크상수(h)란 물질의 양자역학적 성질을 결정하는 기본 상수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 단위 에너지의 크기를 나타낸다. 이 상수를 도입한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따서 플랑크상수라고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플랑크상수 (매일경제, 매경닷컴)

 
20세기 미국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찰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이 말에 대해서 고전 물리학자들은 격렬하게 반대할 거야. 왜냐하면 고전 역학에서의 우주는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실체니까. 하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제야. 지적인 존재들로부터 완벽하게 은폐된 동시에 자기 충족적이고, 그 안에 어떠한 지적인 생명체도 보유하지 않은 우주를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도대체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여섯 번째 계단, 이상 - 체 게바라 : 이상적인 인간을 만났다
안 병장
이상적인 인간이 있다. 그런 이는 보통 숨겨져 있다. 극한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타인의 시선 때문에 허세를 부리던 사람들마저도 지쳤을 때, 누가 진짜 이상적인 인간이었는지가 밝혀진다. 그는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부조리에 불평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상적인 인간. 자기 삶의 입법자.
 

논리철학논고 :: 이 책은 1921년에 출간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논리학과 철학의 문제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원고를 완성하였고 석방된 뒤 B.러셀의 도움으로 출판하였다. 구성은 일련의 간결한 명제를 체계적으로 배열하고, 소수점을 사용해서 번호를 붙인 형식으로 되어 있다. 분량은 75쪽에 불과하지만 광범위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언어의 본성,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 논리학, 윤리학, 철학, 인과성과 귀납, 자아와 의지, 죽음의 신비, 선과 악이 주요 내용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논리를 오해하는 데서 발생하고, 철학은 과학이 아니라 해명과 명료화를 위한 활동이라고 보았다. 또한 세계는 대상이 아니라 사실로 이루어지며 명제의 참, 거짓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고 기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대상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대상은 세계의 부분이 아니라 세계의 실체로서, 만일 잘 만들어진 문장이 의미가 없거나 부족하다면 그 까닭은 그것을 이루는 기호 중 어느 하나에 의미, 즉 그와 관련이 있는 대상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책의 주장은 논리실증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고 20세기 영어권 철학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누구도 이 논리를 추종하거나 수용하지 않았으며 저자도 후기철학에서 자신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비트겐슈타인 연구가들은 이 책을 기점으로 해서 그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후기철학의 대표작으로는 제자들이 유작으로 출간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를 꼽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논리철학논고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論理哲學論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마치 오랜 타향 생활에 지쳐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우연히 고향친구에게 들켰을 때의 기분 같았다.
 
전투화
한 번은 그의 전투화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 병장의 전투화는 항상 깨끗했다. 당장 구보를 나갈 때도, 흙바닥에서 작업이 예정되어 있을 때도 그는 직전에 전투화를 닦았다. 내가 물었다.
“어차피 곧 더러워질 텐데,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닌가?”
안 병장이 경계근무명령서를 확인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저도 예전에는 안 그랬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군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되는 일도 없고. 왜 힘든지 생각했더랬지 말입니다. 생각하다 보니까 보람도 성취도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생각했습니다. 그럼 왜 보람도 성취도 없나. 그랬더니 제가 모든 걸 대충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군대 일이란 게 그렇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구색만 맞추려고 한 거지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군 생활 전체를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채우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역해서 사회에 돌아가면 지난 2년은 버린 시간이 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걱정이 됐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20대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찮은 시간으로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지 말입니다. 나한테 선물해야겠다, 군 생활의 2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선물해야겠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뭐, 구두부터 닦기 시작했습니다.”
경계근무자들이 돌아왔다. 반사적으로 안 병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서기 전, 나는 내 전투화를 내려다보았다. 흙투성이의 전투화는 내 발에 임시로 신겨져 있었다.
 
부대 평가
안 병장을 만나면 이런 것들을 말해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 모든 이유와 무관하게 옳다. 그는 자기 삶의 입법자이고, 자기 삶의 대지를 걸어가는 자가 아닌가.
 
이상적인 인간
상황실 텐트 안은 고요했다. 랜턴의 희미한 불빛만이 흙먼지로 범벅이 된 천막 안을 밝히고 있었다. 오래된 기름냄새, 흙냄새가 익숙했다.
 
이상적인 인간이 있지. 그런 이는 보통 숨겨져 있어서, 극한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타인의 시선 때문에 허세를 부리던 사람들마저도 지쳤을 때, 누가 진짜 이상적인 인간이었는지가 밝혀져. 그는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부조리에 불평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지.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상적인 인간. 자기 삶의 입법자.
 
어린 시절
‘체’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붙이는 말로, ‘어이’, ‘이봐’, ‘친구’, ‘동지’ 정도가 된다.
 

알베르토 그라나도 ::  남미 혁명가인 체 게바라의 친구로 체와 함께 남미 대륙 횡단 여행을 하며 혁명의 꿈을 꿨던 의사
아르헨티나 출신인 그라나도와 게바라는 각각 30살과 24살 때인 1952년, 8개월 정도 그라나도의 500㏄ 오토바이를 타고 칠레ㆍ콜롬비아ㆍ페루ㆍ베네수엘라 등을 함께 여행했다. 그들은 착취당하는 광산노동자, 박해받는 
공산주의자, 가난한 농부들의 모습을 보며 남미 대륙 전반에 팽배해진 사회적 불평등을 실감했다.
그라나도는 <체 게바라와의 여행>, 게바라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각각 여행기를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2004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한편, 멕시코에서 만난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혁명을 일으켜 성공한 게바라는 1960년 그라나도를 쿠바에 초청했고, 그라나도는 1961년 가족들과 함께 쿠바로 이주해 아바나대학에서 생화학을 가르쳤다.
2011년 3월 5일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베르토 그라나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남미 여행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 쿠바혁명의 전설적 혁명가 에르네스토 게바라(1928~1967)와 그의 친구이자 선배인 알베르토 그라나도가 라틴아메리카를 1951년 12월부터 1952년 8월까지 9개월 동안 여행하면서 세상에 눈뜨고 세상을 만난 여행기이다.
체('Che'는 동지·친구라는 뜻의 의성어로, 혁명을 하면서 얻은 별명)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상류 가정에 태어나 의학을 전공하가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세상의 모순에 눈을 떠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열정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23세의 청년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29세의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포데로사'(그라나도의 중고 모터사이클로, '힘센 녀석'이라는 뜻)라고 하는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친구에게 줄 '컴백'이라고 하는 강아지와 함께 무일푼의 여행을 시작한다. 아르헨티나를 떠나 칠레·페루·콜롬비아·미국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돌아오는 9개월 동안의 긴 여행을 통해 인간에 대한 연민과 라틴아메리카는 메스티소의 한 동족임을 깨닫게 됨을 일기 형식으로 담은 여행기이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여행일지는 1951년 12월 코르도바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1952년 1월 빌라게셀, 미라마르, 네코체아, 바이아블랑카, 콜레코엘, 산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 산 카를로스 드 바릴로체에 이른다. 2월 14일 칠레의 테무코, 라우타로, 로스앙헬레스, 산티아고데, 발파라이소, 안토파가스타, 바케다노, 아리카를 거쳐 3월 24일 페루의 타크나, 타라타, 푸노를 거쳐 티티카카호에서 배를 타고 줄리아카, 시쿠아니, 마추픽추유적을 둘러본 뒤, 우암보, 산라몬, 타르마, 리마, 푸칼파를 거쳐 아마존강의 지류인 우카얄리강을 따라 내려가 6월 1일 이퀴토스에 도착한다.
6월 6일 산파블로 나환자촌에 도착한 뒤 2주간 머물다가 아마존강을 여행한다. 6월 23일 콜롬비아 레티시아에 도착한 뒤 항공편으로 산타페데보고타, 쿠쿠타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베네수엘라로 이동하여 7월 14일 산크리스토발에서 머문 뒤 7월 17일 동료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헤어진다. 이후 미국의 마이애미를 거쳐 8월에 아르헨티나의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9개월 동안의 여행은 마무리된다.
같은 제목으로 《중앙역》을 만든 브라질의 영화감독 월터 살레스에 의해 2004년 영화화되었으며, 한국어 번역서는 2004년 11월 도서출판 황매에서 출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The Motorcycle Diarie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여행 이후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 :: 부패 등으로 인한 정국불안과 심한 대외 경제의존을 겪는 국가를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표현
본래 바나나 등 1차 상품의 수출에 의존하면서 서구자본에 경제가 예속된 국가들을 일컫는 말로, 냉전 시절 미국에게 휘둘리던 중미의 엘살바도르, 그레나다, 니카라과,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중남미 국가를 지칭하던 말로 사용됐다. 이들 국가는 바나나 같은 1차 상품이 국가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주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 의해 농업이 좌지우지된다. 이는 이들 국가의 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 기반시설들의 통제권을 미국 기업에 넘긴 결과다.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마지막 잎새>로 유명한 작가 오 헨리가 1904년 단편 <양배추와 왕들>에서 중남미의 온두라스를 빗댄 가상국가를 바나나공화국으로 지칭하면서부터다. 여기서 바나나공화국은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쉽게 썩는 바나나의 성질을 빗댄 말이다.
이처럼 미국 자본에 예속된 중남미 국가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던 이 용어는 이후 외국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은 물론 부패정치, 독재 등 정치적 불안정과 극심한 빈부격차로 구제불능 상태에 있는 국가를 경멸하는 표현으로 확대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나나공화국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피델 카스트로 :: 쿠바의 정치가·혁명가. 1959년 총리에 취임하고 1976년 국가평의회 의장직에 올랐다. 공산주의 이념 아래 49년간 쿠바를 통치하였다.
쿠바 동쪽 끝 올긴(Holguin) 주의 한 소도시에서 출생. 1945년 말 아바나대학교(University of Havana)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침공에 합류하였다.
1948년에는 콜롬비아 보고타(Bogota)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였다. 1953년 당시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Batista)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Santiago de Cuba)에 있는 몬카다(Moncada)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5월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바티스타 정권 타도 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Oriente) 주 시에라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몰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그해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쿠바 해안을 침공한 반혁명군을 격퇴하였으며, 5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하고, 7월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결성,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1962년 10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의 쿠바 반입을 둘러싸고 핵전쟁 위기로까지 발전하였으나 미국이 카스트로 정부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결되었다. 이듬해 제2차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65년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PCC(Communist Party of Cuba:쿠바공산당)로 개칭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초에는 중국이나 소련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자주독립이라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1972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가입한 후 점차 친소적(親蘇的) 성향을 띠게 되었다. 1976년 신헌법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국가체제 정비에 힘썼다. 1976년 12월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당·정부·군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 등 동구권의 민주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2006년 7월 장 출혈 수술을 받기 위해 친동생이자 공식 후계자인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국방장관에게 임시로 권력을  이양한 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사망설이 돌기도 하였으나, 10월 말 국영 텔레비전에 모습을 보이면서 사망설을 일축하였다. 2008년 2월에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사임하고 권력을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겼다. 2016년 11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 (Ruz)]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피델은 쿠바 정권을 공격할 부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토는 피델과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면 그것을 시작으로 남아메리카 전체의 해방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르네스토는 멕시코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쿠바 혁명군에 가담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게릴라 훈련을 받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군의관의 신분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결전의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에르네스토는 ‘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이제 체 게바라가 된 것이다.
 
쿠바 혁명
체는 목과 옆구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정부군이 바짝 뒤를 쫓고 한 손으로는 목을 지혈해야 하는 상황. 체의 앞에는 탄약상자와 구급상자가 놓여 있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한 개만을 집을 수 있는 선택의 상황이다. 그는 후에 이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의약품인가, 탄약인가? 나는 누구인가? 의사인가, 혁명가인가?” 체는 주저하지 않고 탄약상자를 선택했다.
 
혁명 이후
체의 꿈은 명확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이 회복된 세계를 만드는 것, 구체적으로는 남아메리카를 사회주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쿠바 혁명의 성공은 그러한 이상적 세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밟아가야 할 실제 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혁명 정부는 과거 청산에 들어갔다. 바티스타 정권과 결탁했던 수천 명의 범죄자, 정치범들을 처벌해야 했다. 피델이 스스로 수상 자리에 오르고 쿠바 통치를 위한 정치적 기반을 다져가는 동안, 체는 피델의 요청에 따라 숙청의 역할을 담당했다.
 
체는 세계적인 혁명을 원했지만, 피델은 쿠바의 안정적 통치를 원했다. 피델이 생각하기에 혁명 정부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미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로부터의 인정이 필요했다. 문제는 체가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급진파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피델은 민족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피델은 공산주의로 급격히 선회한다.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피델이 추진한 농지개혁법과 쿠바 내 미국계 기업들의 국유화 때문이었다. 담배농장, 정유회사, 은행 등 미국계 기업의 땅과 재산이 쿠바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당시 미국계 기업들이 입은 손실은 1조 달러에 이르렀다. 대대적인 숙청과 미국계 기업의 재산 몰수는 많은 수의 쿠바인을 미국으로 망명하게 했다.
미국의 보복이 시작됐다. 미국은 쿠바와의 외교를 단절하고,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동시에 쿠바 침공을 계획했다. 1961년 4월 17일. 미국에 망명한 1500명의 쿠바인들로 구성된 2506여단이 쿠바 남쪽 해안에 위치한 피그스 만에 상륙했다. 하지만 혁명 정부는 이미 이에 대한 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미국은 대패했다. 1113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쿠바 내에는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적 분위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피델과 체는 미국의 재침공을 우려했다. 미국과 단독으로 맞서는 것은 역부족이다. 혁명 정부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설치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소련은 이에 응했다. 제3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이르렀던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실제로 체는 핵무기를 이용한 미국 본토 공격을 공공연하게 주장해서 소련을 난처하게 했다. 실망한 체는 소련 이외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피델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소련에 실망했다 하더라도 쿠바의 경제가 실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소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체는 피델과 쿠바가 처한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아메리카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체는 떠날 때가 가까웠음을 느꼈다.
 
또 다른 혁명과 죽음
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가 이상주의자이며, 특히 인간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윤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깨달아 일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다. 노동과 헌신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주의 낙원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표 아래서 그는 절제를 강조했고 자신과 타인에게 엄격했다. 그는 구겨진 군복에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다녔고, 일을 하다가 그 상태로 사무실 바닥에서 잤다. 쉬는 날이면 공장이나 사탕수수 농장에 나가서 직접 땀 흘려 노동을 했다. 자신의 아내에게도 자가용을 타지 못하게 했다. 비싼 선물은 그대로 돌려보냈다. 체는 동지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해를 넘길수록 쿠바의 경제 상황은 악화됐다. 체는 이것이 전적으로 소련에 의존하는 경제 환경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또 소련 식 사회주의는 쿠바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공장 노동자와 군인들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쿠바는 대다수가 농민이다. 그래서 체는 농민이 중심이 되는 중국 식 사회주의에서 쿠바의 미래를 찾고자 했다.
체는 전 세계를 향해 미국의 제국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는 동시에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도 비판했다. UN총회와 알제에서의 연설이 대표적이다. 체는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가 아닌 제3세계들 사이의 연대를 추구했다. 이러한 공개적인 비난은 소련의 심기를 건드렸고 쿠바 혁명 정부를 난처하게 했다. 피델은 점차 체를 멀리했다. 체에 의한 경제 정책의 실패와 소련에 대한 눈치 때문이었다.
체는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피델을 보호하기 위해 쿠바 시민권을 포기한다.
 
그의 나이 38세 때인 1965년 4월. 체는 쿠바에서 자취를 감춘다. 소문이 무성했다. 자살, 피델에 의한 숙청, 소련에 의한 유배 등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체는 콩고로 향하고 있었다. 세계의 모든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 소수의 혁명군을 이끌고 게릴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콩고의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콩고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는 술과 매춘부에 빠져 있었고,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쿠바 혁명군이 입국했다는 사실을 안 콩고 정부군이 체의 캠프를 습격한 것이다. 체는 간신히 몸을 피했다. 피델은 특사를 파견해서 체에게 돌아올 것을 제안했지만, 체는 거절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결국 체는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쿠바가 아니라 볼리비아였다. 볼리비아에서 다음 혁명을 꿈꾼 것이다. 1966년 11월. 그는 변장한 채로 볼리비아에 입국했다.
 
쿠바와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볼리비아는 10년 넘게 추진된 농지개혁으로 자작농의 비율이 높았다. 그리고 민주제가 시행되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언론의 자유도 보장된 상황이었다. 아무리 정부가 부패하고 민중이 착취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보장된 사회에서는 혁명이 설 자리가 없다. 볼리비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해줄 세력은 농민이 아닌 도시 노동자였지만, 체는 이런 정보를 얻지 못했다.
 
이상적인 인간의 조건
“그래. 그런 이상적인 이들은 숨겨져 있어.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지. 왜냐하면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 외에는 타인을 평가할 줄 모르거든. 권력을 잡은 정치가나, 성공한 사업가나, 학벌이 높은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사람들이 보기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를 낸 사람들만이 칭송의 대상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이상적인 이들이 이상적인 이유는 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서가 아니야. 그들의 내면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지.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쿠바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는 성공보다 더 많은 실패를 했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는 참혹하게 패배했지. 마찬가지로 그가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야. 그가 군의관의 신분으로 쿠바에 상륙했을 때, 혁명군들은 그의 지위가 아니라 그의 용기와 신념을 알아보고 그를 좋아했어. 이상적인 인간은 대중의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해. 그런 사람은 각자 자기 세계의 범위 안에서 영웅이 되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자의 평가는 이상적인 인간에게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평가
갑자기 그의 전투화가 보고 싶어졌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장병들 사이에 있는 그의 전투화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의 전투화는 깨끗할 것이다.
 
군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은 점차 가까워오고 있었다.
 
 
 
일곱 번째 계단, 현실 - 공산당 선언 : 현실적인 인간이 되었다
군 생활동안 내가 배운 건 적응의 편리함이었다. 낯선 시스템에 던져진 초기에는 누구나 그 시스템의 단점과 문제점을 쉽게 발견한다. 열정적인 그는 저항하고 좌절하면서 내적인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시스템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곧 시스템이 생각보다 효율적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말한다. 단점과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시스템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때부터 그는 시스템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규칙성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새로운 신참내기가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의 연민과 안도감까지 얻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서글펐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성실한 청년이 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나의 영혼은 이미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사회인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모였다. 보자, 보자, 하면서도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친구 G가 중간에서 시간을 조율했다. 모두 아저씨 몸매가 되긴 했지만 옛날 그대로라며 서로를 반겼다. 소년들은 아저씨의 몸을 걸친 채,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됐다. 영업을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되었느냐며 친구들은 잔을 부딪쳤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었구나. 나는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변한 건 대화의 소재뿐이었다. 과거를 추억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시간에 더 마음이 쓰일 나이였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며 각자가 배워온 먹고사는 일에 대해 떠들었다.
 
과일을 파는 노점들은 리어카에 소쿠리를 뒤집어놓고 꽁꽁 싸맸다. 그 단단한 매듭에서 매일 반복되었을 노동의 시간들과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어쨌든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하지만 서글프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짝사랑이 서글펐다.
현관을 밀고 들어섰을 때, 불 꺼진 집안의 고요는 여전히 내 숨을 조여왔다. 긴 군 생활 동안 작은 집은 더 작은 집으로 옮겨졌다. 전역한 아들에 대한 반가움은 현실적인 궁핍 속에서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밤이 깊을 때까지 방 한 구석에서 어머니는 기도를 했다. 그녀에게 도피처란 현실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났다. 그딴 건 아무 소용도 없다. 종교는 현실을 구원하지 않는다. 신앙은 가난을 먹고살 뿐이다.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칠 곳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는 감옥같이 작은 내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잠을 청했다. 내 유일한 도피처는 꿈 속 뿐이었다. 나는 자고 또 잤다. 자다 보면 어느새 이번 인생도 끝나 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
돈이 되는 일을 따라다녔다. 조금이라도 더 돈이 되는 일이 있으면 가차 없이 자리를 옮겼다. 작은 회사에 취업해서 일하기도 하고, 의류와 화장품 관련 창업을 하기도 했다. 노량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전업 주식투자자 생활을 했고, 부동산 투자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 책과는 점차 멀어졌다. 사회생활을 하는 시간 동안 나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아니, 여유가 있었다 해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그런 책들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가는 친구들에 비해 나는 너무 늦지 않았는가. 나는 하루하루가 조급했다.
지금은 안다. 이렇게 불안하고 조급한 시간들도 개인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임을 말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있다. 내면의 성숙은 고결한 방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선입견.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어려운 철학책과 씨름하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사색하는 아름다운 방법만이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시간 속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절반의 배움이 있다. 고결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세계에서의 경험들. 부당함에 굴복하고, 부조리에 타협하고, 옳은 주장을 꺾고, 스스로의 초라함에 몸부림칠 때에만 얻게 되는 그런 배움이 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세계에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와 타인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부동산 투자
3억 원짜리 아파트를 구입한다고 해보자. 우선 은행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1억5천만 원을 연이자 3퍼센트로 대출받는다. 이후 반전세로 세입자를 구한다. 보증금 1억5천만 원에, 월세 40만 원으로.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대출금과 보증금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은행 대출금에 대한 1년 이자인 450만 원은 1년간의 월세 480만 원으로 갚으면 된다.

나는 내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아파트를 매입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여유 자금을 포함시키거나, 혹은 신용대출을 이용한다면 안정적인 월 수익까지 얻을 수 있다.
사실 이런 방식의 주택 구입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구매자에게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 아파트가 노후되면서 발생하는 감가상각, 2년마다 발생하는 중개수수료, 취등록세와 재산세 등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파트 가격 상승이 이 모든 비용을 상쇄하고 더 나아가 차익까지 보장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주택과 토지의 지속적인 가격 상승이 이어져왔다. 그런 까닭에 빚을 이용한 부동산 매입은 자산 증식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방법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과 같이 가계자산의 70퍼센트가 부동산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사회 전체의 집값 하락이 무수히 많은 가계를 파산시키고, 이로 인한 소비 저하를 일으켜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금융위기를 낳는다.
 
누나는 연신 동생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또 화를 낼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화가 많아졌다. 어설픈 것들, 비현실적인 것들에 진절머리가 났고, 그런 것들에 불같이 화를 냈다. 화를 낸 다음 날이면 위경련에 시달렸다. 누나는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분을 삭이며 말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
누나가 대답했다.
“그래, 사람들은 변하지 않지. 그런데 우리 동생은 그동안 많이 변했구나.”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의 시스템에 적응하는 어른이 되는 길이다. 둘째는 사회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어른이 되는 길이다.
 
《공산당 선언》의 의미
《공산당 선언》. 이 책은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을 목적으로 집필된 책으로, 1848년 1월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당시 마르크스가 30세, 엥겔스가 28세였다.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한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주위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한 권의 책이 갖는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유물론 ::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유물주의(唯物主義)라고도 한다. 정신을 바로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또는 물질(뇌)의 상태·속성·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등 여러 입장이 있다. 원래 철학용어로서는, 세계의 본성(本性)에 관한 존재론(存在論)상의 입장으로서 '유물론'과 '유심론(唯心論)'을 대립시키고, 인식의 성립에 관한 인식론(認識論)상의 학설로서 '실재론(實在論)'과 '관념론(觀念論)'을 대립시키는 것이 올바른 용어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물론'은 '관념론'의 대어(對語)로 사용된다. 그 까닭은 근본적으로 근세철학에서 유물론은 실재론적 입장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실체'에 근거를 두고 존재론이라는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해왔던 데 대하여, 관념론은 유심론적 입장이 '사고(思考)하는 우리'에게 근거를 두고 인식론적으로 전개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유물론'으로 19~20세기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엥겔스가 용어법으로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대어를 사용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계승한 레닌이 '오해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실재론'이라는 용어를 배척하였다는 사정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물론 [materialism, 唯物論]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반대로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한다. 이 책은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은 책은 전집의 가치를 갖는다. 이 책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문명세계에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를 지도한다.”
 
부르주아의 국가
공산주의의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부터도 이미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중략) 구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집권당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또 그 공산주의라는 비난의 낙인을 오히려 자기의 반동적 적들에게, 보다 진보적인 다른 반대당에게 돌리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그들이 국가 체제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판단하기에 국가가 민중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들의 것이 아니다. 국가는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보장한다. 즉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부르주아 계급만을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근현대 국가의 형성 자체가 부르주아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말이다. 국가가 부르주아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가 국가다.
근현대의 모든 국가는 단적으로 부르주아의 국가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공산당 혹은 공산주의가 국가에 반대한다고 할 때, 그때의 국가는 부르주아의 국가를 의미한다. 지금의 국가, 세계, 역사는 모두 부르주아의 것이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공산주의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주인공의 등장이다. 부르주아가 몰락하고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등장. 그리고 이들에 의한 국가, 세계, 역사의 완성이 공산주의가 원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생산수단
부르주아는 자본가를 말하고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를 말한다. 이들이 집단이 되면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데, 각각 ‘자본가 계급’, ‘노동자 계급’을 말한다.
 
엄밀하게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가 구분의 객관적 기준이 된다.
 
이제 또 다른 두 가지 질문이 해소된다. 첫째, 왜 사장은 저렇게 돈이 많은가? 공산주의자들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토대로 노동자들의 시간과 노력을 이용하고, 이로써 부를 획득한다.
둘째, 왜 노동자의 임금은 그들이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제공되는가? 공산주의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해서 자신의 몸을 팔아 생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부를 획득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게 종속된 듯 행동한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가 생산한 모든 생산물을 자신이 우선적으로 소유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노동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도에서만 대가를 지불한다. 임금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나의 월급이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월급은 내가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으로서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제공된 것이다.
 
부르주아의 탄생과 성장
피상적 이해에서 귀결된 해결방안은 역시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한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부자들에게 착취의 부도덕성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존에 수많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를 공산주의의 시작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가 계급투쟁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역사 발전의 동력이자 필연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역사적 측면에서 이해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프롤레타리아를 구제의 대상이 아닌, 혁명의 주체로서 파악할 수 있다.
 
공산주의 이론은 다섯 단계의 역사 발전 과정을 기본 전제로 한다. 각 시대의 이름은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사회, 근대 자본주의, 현대 공산주의다. 각 시대를 다음 시대로 발전시키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급투쟁이다.
 
변증법적으로 종합된 계급투쟁은 다음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된다. 구체적으로 고대에는 왕과 노예가 투쟁했고, 중세에는 영주와 농노가 투쟁했다. 근대에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투쟁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의 마지막은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끝난다.
 

변증법 ::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ē에서 유래하고, 원래는 대화술·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훌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I.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정립·반정립·종합, 또는 卽自·對自·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마르크스, F.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증법 [dialectic, 辨證法]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중세의 특징은 기독교와 계급이다.
 
상공업자들은 동업자 조직인 길드를 형성하고 있었다. 장인들은 길드에 소속되어 소량으로 물품을 생산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상공업자들과 농노 가운데서 초기 도시의 시민들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바로 이들이 부르주아의 기원이 되는 사람들이다.
중세에서 싹을 틔운 부르주아는 근대에 이르러 거대 자본가로 성장했다. 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사회적 생산방식의 변화였다. 단적으로 말해서 생산방식은 3단계를 거친다. 단순 협업, 공장 내 분업, 기계제 대공업. 이 단계를 거쳐 중세 상공업자들은 근대 부르주아가 된다.
 
노동은 이미 분업으로 단순화되어 있었으므로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쉽게 대체할 수 있었다. 기계의 놀라운 효율성은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드디어 공급량이 수요량을 넘어섰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산업이 시작되었다. 대량생산은 거대 자본을 소유한 진정한 의미의 부르주아를 탄생시켰다.
대량생산은 사회의 모습을 바꿨다. 부르주아는 필연적으로 세계화를 추진하게 된다. 대량생산으로 인한 초과 공급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르주아의 의의와 몰락
부르주아의 또 다른 혁명적인 역할은 그들이 복잡한 계급 관계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데 있다. 기존의 인류는 언제나 강력하고 세분화된 서열과 등급에 얽매여 있었다. 고대에는 왕, 귀족, 평민, 노예 등이 있었고, 중세에는 영주, 가신, 길드장인, 직인, 도제, 농노, 노예 등이 존재했다. 부르주아는 이렇게 복잡했던 계급 체계를 대립하는 두 가지 계급으로 단순화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단지 낡은 계급 대신에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 조건, 새로운 투쟁 형태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처럼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한 부르주아 계급 역시 필연적인 붕괴의 길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태생적인 모순 때문이다. 부르주아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다. 그런데 생산수단은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 하나는 앞서 살펴봤던 과잉생산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수단에 고용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등장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상황을 비유를 통해 제시한다.
“현대 부르주아 사회. 엄청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출현시킨 이 사회는 자기가 주술로 불러낸 암흑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도 같다.”
 
부르주아를 무너뜨리게 될 두 가지 모순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 모순은 과잉생산의 문제다.
두 번째 모순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등장이다.
 
“부르주아가 촉진시키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 결사로 인한 혁명적 연대를 가져온다.”
 
프롤레타리아의 등장과 공산주의 사회
공산주의 이론에 따르면 부르주아의 몰락과 함께 근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이제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그들은 역사의 종착점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이상 다른 계급을 착취하지 않는 까닭에 또 다른 계급투쟁을 낳지 않는다. 역사를 움직여나가는 힘이 계급투쟁이라 할 때, 이제 역사는 움직이지 않는 그 끝에 도달한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에 의한 수많은 저항과 투쟁이 그들의 노동 조건과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본질적인 구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공산당 선언》은 이러한 변혁의 과정 중 선진적인 국가들이 추진할 열 가지의 정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토지 소유를 금지한다. 모든 지대는 국가 경비에 충당한다.
2) 고율의 누진세를 적용한다.
3) 상속권을 금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모든 신용을 국가에 집중시킨다. 이를 위해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과 국가의 자본을 이용한다.
6) 운송 수단을 국가에 집중시킨다.
7) 국유화된 공장을 증설하고, 공동계획에 따라 토지를 개간한다.
8) 모두에게 동일한 노동 의무를 부과한다. 산업군대와 농업군대를 키운다.
9) 농업과 공업의 운영을 결합한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차이를 제거해나간다.
10) 무상 교육을 실시하고, 아동들의 공장 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물질적 생산을 결합한다.
 
아직 남은 것들
귀뚜라미가 우는 계절임을 새삼 깨달았다. 늦여름은 깊어갔다.
 
보통의 개인들은 너무나 다양한 성향을 갖고 있어요. 그들은 강력하게 조직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노동자 집단을 구성할 수 없어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순간이 가장 완벽한 순간임을. 더 이상 그렇게 행복한 순간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살아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무의미한 삶을 구차하게 끌고 간다는 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 싶다. 너무 오래 끌어가고 있다.
당시의 나는 한없이 나약해져 있었다.
 
 
 
여덟 번째 계단, 삶 - 메르세데스 소사 : 어느 날 갑자기 삶이 무겁게 정지했다
사고가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멈춰 섰다.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현실이 나를 걷어찬 것이다. 그런데 일상이 멈추자 고민도 함께 멈추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버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소사는 보여주었다. 추악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신과 세상을 지켜나가는지를. 놀랍게도 그 방법은 수용이었다. 고결한 이상도, 비루한 현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일까? 이상도, 현실도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치열한 고민도 모두 나의 것, 나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나는 조금씩 배워갔다. 나는 삶이라는 계단 앞에 섰다.
 
살아야 할 이유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은 자신의 운동 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이다. 즉 멈춰 있는 물체는 계속 멈춰 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외부에서 운동 상태를 바꿀 만큼 큰 에너지가 가해지기 전까지 물체는 현재의 운동 상태를 지속한다. 삶도 그렇다. 외부에서 어떤 에너지가 가해지기 전까지 우리는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며 유지한다.
 
입원

메르세데스 소사 :: 1935년 아르헨티나 투쿠만주에서 태어났다. 1950년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주최한 노래경연대회에서 우승했고, 방송국과 두 달간의 계약을 맺고 노래를 불렀다. 1962년 데뷔앨범 《라 보스 델 라 사프라(La Voz De La Zafra)》를 발표하며 음반활동을 시작했다.
1965년 아르헨티나의 민요를 모아 부른 두 번째 앨범 《칸시오네스 콘 푼다멘토(Canciones Con Fundamento)》를 출시했고, 1967년 미국과 유럽에서 공연을 펼쳤다. 1969년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아리엘 라미네즈(Ariel Raminez)와 시인이자 작사가인 펠릭스 루나(Felix Luna)가 협업한 작품들을 노래한 앨범 《무헤레스 아르헨티나스(Mujeres Argentinas)》를 출시했다. 1971년 칠레 가수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의 노래를 재해석한 앨범 《오메나헤 아 비올레타 파라(Homenaje A Violeta Parra)》를 발표했으며,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를 히트시켰다.
1976년 쿠데타로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사벨 페론(Isabel Perón)이 실각하고 호르헤 비델라(Jorge Videla) 군사평의회의장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좌파 성향의 메르세데스 소사는 활동에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공연과 노래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해외로 알렸다는 혐의를 받았고, 197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공연장 라 플라타(La Plata)에서 콘서트 도중 경찰에 체포된 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198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고, 그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오페라(Teatro Ópera)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 실황을 그해 말 라이브 앨범 《메르세데스 소사 엔 아르헨티나(Mercedes Sosa En Argentina)》로 출시했으며, 아르헨티나의 록 뮤지션 레온 히에코(León Gieco)와 함께 부른 <솔로 레 피도 아 디오스>를 히트시켰다. 이후 1985년 브라질 싱어송라이터 미우통 나시멩투(Milton Nascimento), 레온 히에코와 함께 만든 라이브 앨범 《코라손 아메리카노(Corazón Americano)》, 1997년 아르헨티나 록 뮤지션 찰리 가르시아(Charly García)와 함께 만든 듀엣 앨범 《알타 피델리다드(Alta Fidelidad)》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리엘 라미네즈가 1962년에 작곡한 토속 미사 음악을 노래한 앨범 《미사 크리오야(Misa Criolla)》로 2000년에 열린 제1회 라틴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포크 앨범(Best Folk Album)’ 부문을 수상했다. 2009년 카에타노 벨로소(Caetano Veloso), 조앙 마누엘 세라(Joan Manuel Serrat), 호르헤 드렉슬러(Jorge Drexler) 등 라틴 아메리카 음악인들이 참여해 만든 앨범 《칸토라(Cantora)》를 출시했고, 이 앨범으로 그해 열린 제10회 라틴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포크 앨범’을 포함한 2개 부문을 수상했다. 2009년 10월 4일 사망했다.메르세데스 소사는 아르헨티나의 민속 음악을 복원, 발굴하는데 앞장섰고,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 운동인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의 발전에 기여했다. 《무헤레스 아르헨티나스》(1969), 《메르세데스 소사 엔 아르헨티나》(1982), 《미사 크리오야》(2000) 등이 대표앨범으로 꼽힌다. 대표곡으로 <알폰시나 이 엘 마르>(1969),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1971), <솔로 레 피도 아 디오스>(1982), <토도 캄비아(Todo Cambia)>(1984), <라 페레그리나시온(La Peregrinación)>(2000)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사고
그게 힘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지루한 공포.
누군가의 죽음은, 영화에서는 너무도 선명하게 이해되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미동도 하지 않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그들이 다만 조금 크게 다쳤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구급차가 도착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래서 구급차 도착이 늦어지고 가장 적게 다쳤다고 생각했던 의식이 있는 분만을 우선적으로 데려갔을 때, 우리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왜 다른 분들은 데려가지 않느냐고. 살아남은 무력한 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분노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무사하다는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고는 긴 시간을 두고 수습되어갔다.
반년이 지났다. 사고라는 외부의 힘은 그동안 관성에 따라 날아가던 내 삶을 멈추게 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습관적으로 입에 붙이고 살았던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라는 말은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삶은 무겁게 정지했다.
 
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해 (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샛별 같은 눈동자를 주어
흑과 백을 온전히 구분하게 하고,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게 하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내 님을 찾을 수 있게 했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어
밤과 낮에 우는 귀뚜라미와 카나리아의 소리를 들려주었고,
망치 소리, 물레방아 소리, 개 짖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 귀에 새겨 넣게 했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소리와 문자를 주어
어머니, 친구, 형제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이가 걸어갈 영혼의 길을 밝혀줄 빛이 되었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내 지친 발을 이끌어
도시와 시골길, 해변과 사막, 산과 평야,
당신의 집과 거리 그리고 당신의 정원을 걸을 수 있게 하였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인간의 정신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악으로부터 선이 해방되는 것을,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 깊은 곳을 응시할 때,
내 마음 속에 요동치는 심장을 주었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웃음과 눈물을 주어 행복과 슬픔을 구별하게 했고,
나의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가 되게 했네.
이 노래가 그것이라네.
그리고 이 노래는 우리들 모두의 노래라네.
세상의 모든 노래가 그러하듯,
나에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이여,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
사람들은 만약 아메리카 대륙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소사의 목소리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누에바 칸시온 :: 1960~1970년대 라틴아메리카 민속 음악의 뿌리 찾기와 보존을 통해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과거 식민시대부터 이어온 경제 문화적 종속과 독재 정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문화 운동이자 음악 장르이다.
1960년대 안데스의 전통 리듬을 바탕으로 과거 식민시대부터 이어온 경제 문화적 종속과 독재 정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회참여를 이끈 문화운동이다. ‘새로운 노래’라는 뜻으로  1970~80년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인기를 끌어 사회적 자각에 영향을 끼쳤다. 특정 인물의 음악 이론이나 장르 또는 형식의 주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등의 싱어송라이터들이 처한 환경을 의식하여 노래를 만들면서 자연스레 전개되었다.
1940년대부터 아르헨티나인 아타우알파 유팡키가 지방을 돌며 전통 음악을 수집했다. 그는 이 운동의 선구자로 잉카제국 정복자인 유팡키와 잉카 최후의 왕 아타우알파의 이름을 합쳐 개명하였다.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는 1950년대 안데스 지역의 민속 음악을 연구하여 1960년대 상업적으로 변해버린 대중음악을 비판하고 현실에 저항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념적 바탕이 된 사건은 1959년 쿠바혁명이었으며, 음악가들은 사회적 억압 속에서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희망을 내포하는 음악을 선사하고자 했다.
1960년대 비올레타 파라의 정신은 빅토르 하라로 이어졌으며, 아타우알파 유팡키의 음악은 메르세데스 소사에게 계승되어, 1970년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시대에 저항성을 담아 민중을 대변하는 노래로 표출되었다. 우루과이 출신 다니엘 비글리에티(Daniel Viglietti)는 소작농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자는 내용을 담은 〈장막을 걷어라 A Desamlambrar〉(1969)로 투옥되었다가,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빅토르 하라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지지자로서,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 당시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던 중 총살되었다. 사후 미완성 앨범인 《시간은 변한다 Tiempos que cambian》를  재편집해 1974년 《성명서 Manifesto》를 유럽에서 발표하였으며 이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아르헨티나 호르헤 비델라 군사 정권 시절인 1979년 공연 도중 체포되어 망명했다가, 1982년 돌아와 비올레타 파라가 작곡한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1966)와 레온 히에코의 〈오직 신에게 바라는 것 Solo le pido a Dios〉(1978)을 불러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공연은 라이브 앨범 《아르헨티나,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 En Argentina》(1982)로 발표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누에바 칸시온 [Nueva Cancio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새로운 노래 운동
1960년대 중반의 아르헨티나에는 본격적으로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새로운 노래’라는 뜻의 이 운동은 남아메리카의 민속음악을 발굴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민중 스스로가 미국의 억압에 저항하게 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문화 운동이었다.
 

살바도르 아옌데 :: 칠레의 정치가. 칠레사회당의 서기장, 후생장관 등을 지내고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국내 대기업의 국유화 등 혁신적 정책을 추진하여 남아메리카에서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을 실현하였다.
발파라이소에서 출생했다. 칠레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정치운동에 참가하여, 1933년 칠레사회당 창당에 간여, 1942∼1943년 서기장이 되었으며, 1937∼1945년 하원의원, 1939∼1942년 후생장관, 1945∼1970년 상원의원을 역임하였다. 1970년 대통령선거에서 좌익통일연합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국내 대기업의 국유화, 농지개혁의 촉진, 쿠바·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국교 등 혁신적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남아메리카에서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의 실현에 성공하였으나, 1973년 9월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살과 타살로 의견이 엇갈렸으나, 2011년 칠레 법의학연구소의 부검 결과 자살로 판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살바도르 아옌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 칠레의 군인·정치가. 육군·해군·공군 및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신헌법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저항하다 대통령 집권연장찬반투표에서 패했다. 
1915년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나 1936년 산티아고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직업군인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을 지냈다. 1956년 미국 주재 대사관 무관에 이어 제6사단장, 1969년 육군참모장, 1973년 8월 대장으로 육군총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육군·해군·공군 및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군사평의회를 결성,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74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하고 1980년 9월 국민투표로 장기집권을 노린 신헌법을 성립시켜 1981년 3월 신헌법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후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한 채 독재정권을 휘두르다가 1986년 극좌단체에 의한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88년 10월 대통령 집권연장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여 1989년 12월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당선된 뒤 1990년 3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7년간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공식 보고된 숫자로만 3,197명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되었고, 수만 명이 감금된 채 고문 및 강제 추방당했다. 또, 1,000여 명이 여전히 실종 상태로 남아 있는 등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다. 이로 인하여 1998년 10월 런던에서 영국 사법당국에 의하여 체포되었으나 2000년 3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된 뒤 칠레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가택연금 상태에서 인권유린 등의 혐의로 300여 건의 기소를 당하였으나 형사 처벌을 받기 전에 2006년 12월 사망하였다. 장례는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고문으로 아버지를 잃은 바첼레트 대통령의 거부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지지 못하고 군장(軍葬)으로 치러졌으며, 피해자들에 의하여 훼손될 것을 두려워한 피노체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민중은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민중은 굴종과 박해를 허용해서는 안 되지만, 스스로를 학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빅토르 하라 ::  라틴아메리카 문화예술 운동인 ‘누에바 칸시온’의 기수로서 칠레의 민중 가수, 연극 연출가, 시인이다.  
1932년 칠레 산티아고 주의 론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가출했고, 어머니는 마을 행사에서 전통 민속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으나, 10대 시절 세상을 떠났다. 사제 공부를 시작했다가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중단 후 1951년 칠레대학 연극학부에 입학하여 연출 공부를 했다.
사회적인 주제를 가지고 하층민 생활의 역경을 그리는 극을 연출하면서 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민속 음악가 비올레타 파라의 영향으로 1950년대 중후반 민속 연구와 발굴을 위한 여행을 다녔다. 1958년 민요 보컬 그룹인 ‘쿤쿠멘(Cuncumen)’의 단원이 되어 1962년 민속 음악 노래집을 발표했다. 1961년 칠레대학 연극연구소 상임연출직을 맡았고, 1963년 민속 예술학교를 설립했으며, 1965년 칠레 연극비평가 대상을 수상했다. 라틴아메리카 민요에서 정체성과 민족 정신을 고취하자는 문화운동 '누에바 칸시온'에 참여하여 비올레타 파라, 아타우알파 유팡키, 파블로 네루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66년 첫 앨범 《인간에 대한 노래 Canto a lo humano》를 발표했으나, 보수주의자들의 반감으로 금지곡이 되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파 인민 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했다. 그의 음악은 전통 민속 음악에 좌익 정치 활동의 혼합 형태였다. 1970년 아옌데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하라는 국제적 음악가로 유명세를 떨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대표적인 노래는 <노동자를 위한 기도, Plegaria a un Labrador>(1969), <나는 당신을 기억해요 아만다, Te Recuerdo Amanda>(1969), 과 아옌데 캠패인의 주제곡인 <우리 승리하리라 Venceremos>(1970)등이다.
1973년 9월 칠레의 군사 쿠데타로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섰다. 수천명의 아옌데 지지자들과 함께 잡혀가 3일 만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칠레 민중문화 운동을 함께한 그의 아내 조안 하라는 탈출해 칠레의 민주주의와 피노체트 독채정권의 실상을 알리고, 1983년 영국에서 《빅토르 하라》를 출간했다. 2009년 칠레에 민주 정부가 들어서며 공식 장례식을 치렀다. 41년의 짧은 삶을 살면서 현실을 조명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노래하며, 민족성을 일깨우고자 노력한 칠레 문화 르네상스의 음유시인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빅토르 하라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망명과 귀국

호르헤 비델라 :: 부에노스아이레스주(州) 메르세데스 출생.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국방성 경비중대 중위로 부임하였다. 1951∼1954년 대위로서 국방대학에서 수학한 후 1956∼1958년 워싱턴 주재 대사관 부속무관실 고문관으로 있었다. 1962∼1968년 육군총사령부 참모, 1968∼1970년 제5보병여단 부여단장 겸 참모장, 1971∼1973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1973∼1975년 육군 참모장, 1975년 육군총사령관이 되었다. 1976년 3월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이사벨 페론을 축출하고, 군사평의회의 추대로 대통령에 취임하여 1981년까지 재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르헤 비델라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더러운 전쟁(Guerra sucia) ::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군부의 민주세력 탄압을 일컫는 말.
아르헨티나는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의 공포정치로 77년부터 이후 약 3년간 치욕적인 '더러운 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은 좌익게릴라 척결을 명분으로 반대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이 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는 아르헨티나 당국의 추정만으로도 약 8천∼1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유가족측은 이와 달리 그 수가 2만 5천∼3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74년 페론 대통령의 사망 후, 경제 위기와 더불어 정파들간의 내분이 심화되었다.
결국 1976년 3월 24일 육군 사령관 비델라(Jorge Rafael Videla)장군은 가톨릭 교회의 암묵적인 지원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델라는 아고스티 공군 사령관, 마세라 해군사령관과 함께 군사 평의회(Junta Militar)을 구성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 정당, 노동조합 활동을 중지시켰으며, 게릴라단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소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전개하여 페론주의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 등 정치적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1981년 비델라에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비올라(Roberto Viola)장군은 야당과의 대화를 약속하는 등 민주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나 군부 강경파인 갈티에리(Leopoldo Galtieri)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1982년 계속되는 경제 침체와 6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 그리고 '5월 광장 어머니회'를 비롯한 국내외 인권단체의 활동으로 군사정부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하자 갈티에리 정권은 3월 26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말비나스 제도(포클랜드 제도)를 점령,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말비나스 전쟁의 패배 책임을 지고 갈티에리 대통령이 사임하고 비뇨네(Reynaldo Bignone)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더 이상 군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비뇨네는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1983년 10월 30일)에 앞서 두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 피체포자와 실종자 관련 문서를 파괴하도록 비밀 명령을 내렸으며, 둘째 이른바 "더러운 전쟁"에 참가한 모든 군인은 사면한다는 자기 사면법(self amnesty law)을 제정하였다.
1983년 당선된 라울 알폰신 대통령은 전 정권의 인권유린 행위를 대대적으로 수사,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 군정 대통령 세 명과 장성·경찰 간부 등 3백70여명의 군정 인사들을 내란·인권유린 등의 혐의로 수감했다. 그러나 군부의 반발이 거세지며 쿠데타 기도가 잇따르자 알폰신 정부는 사면법을 제정했고, 추가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자신이 사랑해왔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빼앗아가는 삶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포클랜드 전쟁 :: 남아메리카대륙의 동남단, 아르헨티나의 대륙부에서 약 500km 떨어진 남대서양의 소도인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둘러싼 영국·아르헨티나 간의 분쟁.
실질적으로는 1833년 이후 영국령인 포클랜드에 대하여, 1816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시 그 영유권도 계승한 것으로 주장하는 아르헨티나(에스파냐어로는 Malvinas제도로 불리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흔히 아르헨티나 영토로 생각하고 있다)가 1982년 4월 2일 무력점령을 감행한 데서 발단되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은 근해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으며, 또 남극대륙에의 전진기지로서의 포클랜드 방위를 위하여 급거 기동부대를 파견, 4월 26일에는 포클랜드제도의 동남쪽 1,500km에 있는 남조지아섬을 탈환하였다. 5월 20일 유엔 사무총장의 조정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군은 포클랜드에 상륙, 75일간의 격전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이 전쟁은 ‘포클랜드 휴전과 아르헨티나군의 철수에 양측이 합의하였다’고 항복이라는 말을 빼고 발표된 아르헨티나측 성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한 채 원점으로 되돌아갔으며, 다시 유엔으로 넘겨진 포클랜드 영유권 문제의 타결에는 어려움이 많다.
한편, 이 전쟁이 남긴 교훈으로는 첫째, 무기현대화에 따른 전비(戰費)의 팽창이다. 영국은 사상자 452명과 항공기 25대, 함정 13척을 잃었으며 전비 15억 달러를 소비하였는데, 국위선양 등 작은 성과에 비하여 커다란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사상자 630명과 항공기 94대, 함정 11척을 잃은 GNP 600억 달러의 아르헨티나는 거의 국력을 총동원하는 모험으로 영국보다 더욱 많은 전비를 염출하여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몰렸다. 둘째는 이 전쟁을 통하여 드러난 유엔과 미국의 무능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개전 후에도 협상의 문호를 계속 개방하고 있었으나 유엔과 미국은 교전당사국의 이해조정에 실패하였으며, 특히 미국은 조급히 영국을 지원하고 나섬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제국의 반미감정만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에 전혀 기여하지 못함으로써 대미신뢰에 커다란 문제점을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클랜드전쟁 [Falkland Islands Wa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질문들 
몸이 아픈 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마음은 어때요?
억울하지요. 삶이 나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현실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삶은 그때마다 저에게서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요. 처음엔 제 이상을 빼앗아갔어요. 뭐 괜찮았어요. 세속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어요. 그런 느낌 아세요? 영혼이 늙어버린 느낌이요. 어떤 의욕도 다 사라졌어요. 어차피 삶은 제가 조금이라도 원하는 것들이라면 모두 가차 없이 빼앗아버릴 거예요. 제 인생은 망가졌어요.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죽을 거예요. 그러면 삶은 저에게서 어떤 것도 빼앗지 못하겠지요. 그게 제가 삶에게 할 수 있는 복수예요.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상태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삶에게 원인과 결과를 묻는 건 가능하지 않아요. 삶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만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받아들여 해석할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을 지속할 것인가
 
운 좋게도 멈춰 설 기회를 얻었으니, 뒤돌아 가서 놓고 온 것들을 챙기세요.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어가세요. 또 다시 허둥지둥 달려오면 안 돼요. 길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을 돌보면서 오세요. 그렇게 천천히 인생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이 당신에게 정말 주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에요.
 
그 사소한 것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맺지 못한 생각들을 꺼내었다. 묶인 것은 풀어주고, 풀린 것은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그 사소한 것들 (Aquellas Pequenas Cosas)
시간이 흐르면 잊히리라 생각하겠지만
떠나간 기차는 다시 돌아온다네.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건
언젠가 스쳐지나갔던 사소한 기억들.
함께 걷던 골목길에 핀 장미
낡은 서랍속의 편지
그것들은 마치 도둑처럼 문 뒤에 숨어 있다가
살그머니 우리 곁에 다가와서는
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흩날리듯
우리의 마음을 휘저어 놓겠죠.
그러다가 문득
그 기억들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면
더 이상 함께일 수 없는 우리는
눈물짓고 있겠죠.
 
 
 
아홉 번째 계단, 죽음 - 티벳 사자의 서 : 모든 것이 때마침 마무리된 날, 죽기로 결심했다
이상과 현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한 사람의 삶 속에서 통합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것이 삶이라면,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삶의 끝에 도달할 때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나.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연습해가기로 했다.
삶의 계단을 애써 오르자, 죽음의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점점 궁금해졌다. 삶을 넘어선 곳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혹시 삶의 의미라는 건 죽음 이후의 세계로부터 규정되는 것은 아닐까.
 
삶으로의 복귀
생각해보면, 세상에 정말 힘든 일 같은 건 없다.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충분한 시간과 집중할 수 있는 여건.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든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힘들지 않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주어질 때 발생한다. 정신은 분산되고 신경은 예민해진다. 간신히 처리하던 일들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도미노처럼 일들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모든 일에서 문제가 연쇄적으로 터진다. 관계된 사람들에게 습관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된다. 반대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쉽게 짜증을 내고 이것이 다시 원인이 되어 신경 쓸 일들이 더 늘어만 간다. 어느 순간 모든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러다가 이번 생에는 해탈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못살게 굴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일상을 꼬아댔다.
그날은 모든 일이 한 번에 마무리된 흔치 않은 날이었다. 꼬이고 꼬였던 일들이 동시에 해결되었다. 내가 벌여놓았던 회사 일이 마무리되었고, 불안함에 억지로 적을 걸어두었던 대학원의 학기도 끝이 났다. 약을 먹지 않기로 했고,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리던 사람을 보내주었으며,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기로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자리에 앉아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제 다 된 것이 아닌가. 무엇을 더 기대하고 있는 걸까. 다 늙어버린 영혼으로 무엇이 그렇게 아쉬워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려는 것일까. 어쩌면 오늘이 가장 적절한 날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때마침 마무리된 날. 이런 날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또다시 하나 하나 모든 것이 꼬여갈 것이다.
 
노량진역으로 걸었다. 표를 끊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그때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건. 고개를 들었다. 올겨울 첫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철길로 흩날리는 눈을 몰아내며 지하철이 빠르게 플랫폼으로 진입했다. 흔들리는 불빛들이 바람에 섞여 역사 안을 물들였다.
이 장면일까, 내가 세상에 온 이유가. 이 장면을 그렇게도 보고 싶어서, 나는 이렇게 번잡한 세상을 다시 한 번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일까. 이 순간의 불빛과 눈송이와 찬바람과 지하철과 아련함이 그리워서 생의 너절함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가려져 있던 삶의 비밀을 들춰본 듯한 기분이었다.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
텅 빈 방에는 침대만이 놓여졌다. 처음 며칠 밤은 침대에 누워 창밖의 네온사인이 천장을 물들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도서관이 더 많고 좋아졌으면 한다. 책은 더 많아지고, 자리는 더 쾌적해지고, 밥은 더 저렴해졌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를 앞에 두고 침묵 속에서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그들의 용기를 사회가 보호해주었으면 좋겠다. 도서관이 있다는 건 위안이 된다. 세상과 내가 빠르게 변해가는 동안에도 도서관은 변하지 않고 언제나 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익숙한 고요와 책 냄새.
 
미스터리 서가는 마치 쓰레기통 같다. 분류하기 애매한 모든 책은 여기에 모인다. 도저히 같이 있을 이유가 없는 책들이 함께 뒤섞여 꽂혀 있다. 사후세계와 UFO에 대한 서적이 도대체 왜 같이 있는 것인가. 이 서가로 책을 보낸 사서가 얼마나 난감해 하며 이 책들을 분류했을지 궁금해졌다.
 

임사 :: 죽을 때에 이름.
[네이버 국어사전] 임사 [臨死]

 
합리적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탐구를 죽음의 순간까지로 한정 짓는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한계가 죽음의 순간까지니까. 과학은 사망한 시점에 나타나는 뇌와 신체의 반응을 관찰하고, 철학은 죽음의 순간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분석한다.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장되는 모든 담론은 의심받아야 한다. 객관적 검증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 담론이 과학의 이름으로 포장되어서는 안 되며, 학문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현시대가 구획지어놓은 과학과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 머물며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놀라워하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 넣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 이후에 대한 논의가 미스터리 서가에 버려져 있는 것이 아쉽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죽음 이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앉아 죽음 이후에 대한 책들을 읽어나갔다. 그것은 마치 가보지 않은 여행지의 가이드북을 읽는 기분이었다.
 
《티벳 사자의 서》를 읽는 동안 나는 죽음의 세계를 방문했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 살아났다.
 
죽은 자를 위한 안내서
원래 제목은 ‘바르도 퇴돌’이다. ‘바르도(Bardo)’는 둘 사이를 뜻한다. 여기서는 삶과 삶 사이의 중간을 의미한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한 사람이 죽고 그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는 49일 간의 중간 세계를 거쳐야 한다. 이 중간 세계가 바르도다. ‘퇴돌(Thos-grol)’은 듣는 것을 통해 벗어남을 뜻한다. 이를 종합하면 ‘바르도 퇴돌’이란 ‘죽음 이후에 한 번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함’을 의미한다.
 
《바르도 퇴돌》은 죽은 자를 위한 안내서다. 구체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한 존재가 그 이후에 찾아오는 혼란 속에서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영원한 자유를 얻도록 돕는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본질적인 목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남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해탈하게 한다. 둘째는 차선의 목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남을 멈추지 못했을 때, 그나마 더 나은 삶으로 환생할 수 있도록 사자를 인도한다.
실제로 티벳인들은 죽음에 임박한 사람 옆에 앉아서 이 책을 읽어준다. 시신 옆에서 친지나 스승 혹은 동료들이 49일 동안 3회 혹은 7회 반복해서 읽어주는 것이다.
 

파드마삼바바 :: 8세기 경의 인도밀교의 행자. 생몰연대 미상. 인도의 탄트라 불교를 처음으로 티베트에 가져간 인물로서 상징적 존재. 그 계통을 이은 티베트불교 님마(고)파에는 그에 관해서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확실한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단, 오늘날의 연구에 의해서 산타라쿠시타의 제2회 입장시에 티베트에 들어가 기적을 행하여서 본 교도를 불교로 개종시키고. 775년의 삼예사(寺)의 정초에 입회하였으나, 그후 티베트를 떠났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드마삼바바 [Padmasambhava]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은둔자들의 나라 티벳에서 읽혀지던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진 건 20세기에 이르러서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종교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에반스 웬츠가 티벳의 학승 라마 카지 다와삼둡과 함께 1년 동안 이 책을 번역하고 편집해서 1929년에 서구사회에 출간했다. 이때 출간된 영문명이 ‘티벳 사자의 서(The Tibetan Book of the Dead)’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에반스 웬츠는 이 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바르도 퇴돌》은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대안이 될 것이다. 비록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책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책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물론 머나먼 동방의 종교라는 막연한 신비감이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한 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기독교가 보여주지 못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더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다. 서구의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가 《티벳 사자의 서》의 영향을 받았다. 심리학의 거장 칼 융은 이 책에 깊이 영향을 받고 ‘가장 차원 높은 정신과학’이라며 극찬할 정도였다.
 
이 책은 특정 종교의 옳고 그름만을 말하지 않는다. 불교 문화권, 기독교 문화권, 힌두교 문화권, 무신론적 문화권에서 태어나 죽은 이들이 다른 대우를 받지 않는다. 이들은 사후에 자신의 문화권에서 보았던 종교적 상징과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사후 세계에서 불교인들은 평화의 부처와 분노의 부처를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천사와 악마를 만나게 되는 식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후에 만나게 되는 다양한 존재들과 빛은 사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르도 퇴돌》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너무나도 지혜롭게 우리에게 일러준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단지 내 마음의 환영이다. 그리고 죽음과 삶은 동일하니, 삶의 세계도 사실은 내 마음의 환영일 뿐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 속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바르도 퇴돌》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다.
이 가르침은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사후에 겪게 될 구조적 특징에 대한 보편적 서술이다. 그런 까닭에 유럽의 칼 구스타프 융은 이 책이 놀라운 심리학적 저술이라고 극찬하였고, 미국의 티모시 리어리는 환각 체험의 보편성을 이 책을 통해 설명했으며, 오늘날 세계의 다양한 임사체험자들이 이 책의 내용과 너무도 유사한 보고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파드마삼바바
《바르도 퇴돌》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죽음의 순간을 지난 사자가 사후세계의 현상들을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환생에 이르기까지 49일간의 경험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크게 세 단계으로 나뉜다. 치카이 바르도, 초에니 바르도, 시드파 바르도가 그것이다.
우선 치카이 바르도는 ‘죽음의 순간’에 이른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다음으로 초에니 바르도는 ‘중간 상태’에 이른 사자를 존재의 근원으로 인도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시드파 바르도는 ‘환생’에 돌입하려는 사자를 막고 자궁의 입구를 닫는 방법을 제시한다.

 
죽음의 순간
《바르도 퇴돌》은 분명하게 밝힌다. 앞으로 3일 반, 혹은 4일 동안 나의 의식체는 신체와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기절한 상태에 처해 있을 것이다. 사후세계의 첫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 기간이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즉 치카이 바르도다.
모든 이가 이 기간 동안 기절해 있는 것은 아니다. 생전에 오랜 시간 수행을 해온 사람들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 기간을 맞이한다. 혹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깨어 있을 수도 있다. 티벳에는 육신과 의식을 분리시키는 ‘포와’라는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스승들이 있는데,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가능하다.
이제 투명한 빛이 밝아온다. 빛이 내 앞에 나타난다. 이 빛은 정광명(淨光明)이라 하는데, 영어로는 단순히 ‘Clear Light’로 번역한다. 말 그대로 순수한 빛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빛이다. 《바르도 퇴돌》에 따르면 사자는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빛을 흘려보내고 만다. 왜냐하면 기절해 있거나 혹은 자신의 카르마(업業)로 인해 빛의 본래적인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수행한 이와 포와 의식을 통해 깨어난 소수의 높은 수준의 의식만이 이 빛에 머무름으로써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된다.
《바르도 퇴돌》은 깨어나지 못하고 혼란 상태에 놓인 대부분의 사자들을 인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제 나의 시체가 누워 있는 방을 둘러보자. 거기에는 이미 내 숨이 끊어지기 전부터 나를 인도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생전에 나를 가르치던 영적 스승이나 함께 수행했던 형제들, 혹은 같은 종교를 믿는 학식 있는 사람들이다. 꼭 이런 사람들이 아니어도 괜찮다. 《바르도 퇴돌》을 바르게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들의 인도를 통해 나의 의식은 기절 상태로부터 깨어날 것이다. 그럼으로써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순수한 빛을 알아보고, 그 안에 머무르며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바르도 퇴돌》은 이때가 바르도 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때라고 말한다. 죽음의 순간이 깨달음을 통해 영원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회인 것이다. 나는 반드시 빛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궁금하다. 도대체 이 빛은 무엇인가?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빛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빛의 본질은 ‘나의 마음’이다. 《바르도 퇴돌》은 현명하게 밝힌다. 나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다. 본래 텅 비어 있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빛. 이러한 빛이 곧 나의 마음, 나의 ‘의식’이다.
 
의식은 지능, 감각, 인식, 정체성 같은 것이 아니다. 의식은 지금 당신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드러나는 열린 장이다. 당신의 눈앞에 놓인 것들은 당신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 내면에 놓여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의식’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나’와 ‘세계’의 관계를 통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믿는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난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 본래 텅 빈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붓다임을 깨닫고, 그것이 곧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임을 알 때, 그대는 붓다의 마음 상태에 머물게 되리라.”
여기서의 붓다가 종교적 측면에서의 싯다르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붓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탈, 깨달음, 무(無)의 상태를 말한다고 봐야 한다.
 
중간 상태
두 번째 바르도가 시작된다. 죽음 이후 약 4일에서 17일까지 지속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존재의 근원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환영들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이 기간을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 즉 초에니 바르도라고 부른다.
눈앞에 상징적인 환영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들은 평화의 신들과 분노의 신들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것들은 실체가 아니다. 이것들은 생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들과 행동했던 것들이 구체적인 영상이 되어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들은 나의 카르마가 만들어낸 환영들이다.
참고로 카르마(karma)는 업(業)을 말한다. 보통 이 단어는 선행과 악행에 대한 도덕적 응보 정도로 사용된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경험이 카르마라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에 잔상을 남긴다. 이러한 잔상들은 초에니 바르도에 이르러 내가 체험하게 될 환영들을 만들어낸다. 앞으로 만날 환영들은 내가 육체를 가졌을 때 경험했던 다양한 이미지들의 조합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생전에 불교도였다면 평화의 부처와 분노의 부처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교였다면 천사와 악마를 만나게 될 것이다. 초에니 바르도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는 나의 과거 경험이 결정할 것이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무섭고 두려운 어떤 환영이 눈앞에 나타날지라도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되어 나온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중요한 비밀을 잊지 말라.“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는 평화의 신들이 나타난다.
둘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며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평화의 신들이 나타나 갖가지 색깔의 빛을 뿜어대며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지만 동시에 윤회계의 어두운 빛들도 나를 유혹한다.
《바르도 퇴돌》에 따르면 이 일곱 신을 거치는 동안 많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고 영원한 자유에 이른다. 하지만 대다수의 존재들은 생전의 악행과 무지로 인해서 윤회의 세계를 맴돌게 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평화의 신들을 모두 놓치고 말았다. 이제 내 앞에는 분노의 신들이 나타난다. 화염에 휩싸인 분노의 신들이 나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 기간도 7일간 지속된다. 공포를 일으키는 기괴한 모습이지만 겁낼 필요는 없다. 이들은 사실 평화의 신들이 외형만 바꿔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해칠 수 없다. 그들을 신뢰하고 그 속으로 녹아들어야 한다고 《바르도 퇴돌》은 말한다. 또 다시 기회를 놓칠 경우 나는 점점 윤회의 길에 가까워질 것이다.
초에니 바르도는 여기서 끝난다. 14일 동안 나는 내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발현된 카르마의 현상들을 체험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공간과 다양한 존재들이 실제로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지금 신체를 벗어나서 외부의 저승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행은 나의 의식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여행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존재는 내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이제 나는 내가 죽었음을 확실히 안다. 돌아갈 육체가 없음에 슬퍼진다. 어떤 육체라도 소유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자란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 때문에 나는 몸을 찾아 헤매고, 결국 환생의 길을 찾는 마지막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제 시드파 바르도가 시작된다.
 
환생의 길
환영들은 사라졌다. 나는 육체를 찾아 떠돈다. 32일간 이어지는 이 기간을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 즉 시드파 바르도라고 한다. 《바르도 퇴돌》은 여기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는 자궁의 문을 닫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바르도 퇴돌》은 환생을 막는 방법을 알려준다. 둘째는 차선책이다. 내가 무거운 카르마의 힘을 피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환생해야만 한다면 그나마 괜찮은 환생의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다.
 
《바르도 퇴돌》에서 선한 수호령과 악한 수호령이 나와 함께 태어났다고 말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투영물이다. 내 외부에 실재하는 절대적 심판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행위를 평가하는 건 사실 자기 자신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무지한 중생들이 육도를 윤회하게 된다. 그것은 천신,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이다. 하지만 이것을 반드시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바르도 퇴돌》을 비롯한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죽음과 삶은 모두 내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육도는 당사자가 처한 특정한 심리 상태일 수 있다. 풍족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지옥이라면 나의 세계는 지옥일 것이다. 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천국이라면 세계는 천국일 것이다. 참고로 여섯 개의 세계는 각각 자만, 집착, 질투, 무지, 탐욕, 증오를 상징한다.
 
질문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것에 마음 쓰고 집착하며 가슴 졸이겠지만, 죽고 나면 어차피 사라질 거예요. 꿈이 아무런 기반도 없이 깨어남과 함께 사라지듯이, 삶도 아무런 기반 없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겠죠. 허망해요.
 
그렇다면, 삶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면, 그때에는 허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환생과 윤회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너의 의식이 끝없이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삶을 살아왔다면, 그때는 허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핑계를 대고 있다. 삶이 허망하다고 느끼는 건, 사후 세계의 유무가 결정해준 것이 아니라 너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만약 네가 영원한 존재라면,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그래서 수십억 년의 시간을 지속해온 존재라면 그때는 허망하지 않을 것 같으냐? 너는 그때도 허망하다고 말할 거다. 이 세상이 허망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너의 마음이다.
네 마음이 전부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가 있고 너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 세계를 그려낸다. 너의 바깥에 너의 존재와 독립된 외부 세계가 있을 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마치 꿈과도 같지. 꿈속에서 웃고 울고 마음 쓰지만, 실제로는 네 마음 외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실재라고 믿어왔던 이 세상도 그러하다. 모든 것은 네 마음의 반영이고,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내가 보고 듣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건 나 자신이죠. 칼 융은 《티벳 사자의 서》 해설을 쓰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요. “이 책은 그 첫 문장부터 모든 주어진 것의 ‘주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해낸 장본인이고, 모든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세상을 자신의 마음이 창조했다고 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관점의 대전환이 필요하며, 여기에는 많은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능은 환경의 창조자로서 자신을 보기를 거부하게 만든다.”
 
네가 느끼는 그 허망함도 외부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의 산물임을 이해하겠구나.
 
 
 
열 번째 계단, 나 - 우파니샤드 : 광장에 섰다
우리는 삶 속에서 나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이었는지도 모른다. 삶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안에 삶이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포괄하는 존재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육체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세계의 궁극적인 관찰자로서 나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의식이다. 개인의 내적 세계로서의 의식 말이다. 이 의식적 존재에 의해 세계는 구성되고 비로소 존재한다. 나와 세계는 구분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와 세계는 동일하다. 나는 세계 그 자체다.
 
동굴에서 광장으로
인간의 눈과 입은 원래가 모난 까닭에 가까운 대상일수록 쉽게 흠을 찾아내고, 쉽게 상처를 입힌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상처입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당신으로부터 밀어내야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뒷골목에서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신비는 단적으로 말해서 나와 세계의 ‘관계’다. 나는 누구인지, 세계는 무엇인지, 나와 세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작은 강연

베단타 철학 :: 베단타는 정통 인도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를 지은 학파로서, 베다의 궁극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개조는 바다라야나(Badarayana)로서, 미맘사 학파와 같이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고 제사를 강조하였지만, 그보다도 해탈을 얻는 최고의 길을 지혜에 있음을 강조한다.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세계의 창조자로서 그는 유희(遊戱)를 통하여 세계 창조 작업을 한다. 그는 창조의 과정 속에서 모든 사물에 내재해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창조물 속에는 브라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아트만(Atman, 나의 주체)이 궁극적 실체인 브라만과 같다는, 지혜를 통한 인식이 이 학파의 주된 목적이다.
이 여섯 개의 학파 중 미맘사와 베단타만이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특징을 갖추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두 학파 외의 나머지 네 학파는 자연계의 관찰과 경험적인 분석에 그 사상적 주안점을 두었다. 훗날에 들어서면서 베단타 학파는 나머지 학파에 타격을 가하고 그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게 되었다. 인도 사상에 있어서 베다는 모든 정통 사상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베다의 궁극적 완성을 의미하는 베단타는 인도 철학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으로 숨쉬고 있으며, 인도 철학을 연구하는 모든 외국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베단타 철학은 그 근간을 유지하면서 이슬람 교, 기독교, 그리고 그 밖의 유럽 사상과의 접촉을 통하여 그 사상적 내용을 살찌웠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인도 철학자들은 베단타 학파의 계보에 속하며, 설령 그 계보에 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베단타에 의해서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단타 학파 [Vedanta] (인도사, 2005. 2. 25., 정병조, 위키미디어 커먼즈)

 
힌두교가 베다철학을 대중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면, 불교는 베다철학에 대한 비판적 수용을 통해 발전한 것이죠.
 
두 문서(구약, 베다)의 공통점은 우리에게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우선 《구약》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적으로 파악합니다. 신은 신으로서의 역할이 있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 둘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으며, 반드시 구분되어야만 합니다. 신은 창조주로서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이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로서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신의 뜻을 따르고 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반면 《베다》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파악합니다. 이에 따르면 신과 인간은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신은 곧 인간이고, 인간은 곧 신입니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그것은 마치 강과 바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대지를 흐르는 수많은 강은 서로 저마다의 이름을 갖지만, 결국 바다에 이르러 개별적인 이름을 버리고 거대한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파니샤드 :: 산스크리트어로 '(사제 간에) 가까이 앉음'이란 뜻으로, ‘(스승의 발 아래에) 가까이 앉아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는 신비한 지식’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원뜻처럼 문헌 대부분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철학적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천계서(天啓書)로 신성시되었다. 브라만교(波羅門敎)의 성전(聖典) 《베다》에 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기 때문에 '베단타(Vedānta:《베다》의 끝·결론)'라고도 한다.
현재 200개 이상의 문헌이 전해지지만 《묵티카 우파니샤드(Muktikā Upanishads)》에서 108개 《우파니샤드》 목록을 나열했기 때문에 힌두교 전통에서는 108개만 인정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10여개는 《고(古)우파니샤드》, 또는 《무키아 우파니샤드(Mukhya Upanishads)》라고 하며,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경 전후에 성립된 것이다. 이후 10세기를 넘어서 만들어진 것을 《신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
인도의 정통 브라만 철학의 연원으로서, 철학·종교 사상의 근간·전거(典據)가 되었다. 근본 사상은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Ā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외부가 아닌 내면에 있는 신을 찾고 의례적인 제식이 아니라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만을 찾으라는 가르침이 핵심이다.
이러한 사상의 형성 배경에는 창조관과 동치(同置:upāsana)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창조의 의미로 사용되는 스리스티(srsti)는 최고신의 2분에 의하여 자신의 일부를 방출(ésj)함으로써 창조자와 피조물이 동질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주적 실재와 개인의 구성요소를 대응시켜 불사(不死:amta)를 탐구했던 동치의 논리는 범아일여사상의 원형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인간은 업(業)에 따라 윤회를 반복하지만 선정(禪定:dhyāna)·고행(苦行:tapas)을 통해 진리의 인식(brahma-vidyā)에 도달하여 윤회에서 해탈하고 상주·불멸의 범계(梵界:brahma-loka)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대표적인 사상가로서는 아트만을 만물에 편재하는 내재성으로서의 유(有:sat)로 주장하는 우달라카 아루니(Uddālaka Āruni)와 아트만을 인식주관으로서 불가설·불가괴(不可壞)한 것으로 주장한 야즈나발키아(Yājñavalkya) 등이 있으며, 전자의 ‘네가 그것(아트만)이다(tat tvam asi)’, 후자의 아트만은 부정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는 뜻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neti, neti)’라는 말은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파니샤드 [Upaniṣad, 奧義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우파니샤드》는 비밀스럽게 전수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우파니샤드’라는 단어 자체가 ‘스승과 제자가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서 전해지는 지혜’라는 의미지요.
 

범아일여 ::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인 브라만(梵, Brahman)과 개인의 중심인 아트만(我, ātman)이 궁극적으로 같다는 사상.
[네이버 국어사전] 범아일여 [梵我一如]

 
베다와 《우파니샤드》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아리아인(Aryan)들이 인도 북서쪽의 인더스 강 부근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펀자브 지방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베다’라는 문서를 기록했다. ‘베다’는 지식과 지혜를 의미한다. 영어로 번역하면 그저 ‘Knowledge’다. 아리아인들이 가졌던 신화, 종교, 철학이 총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다양한 신들에 대한 의례절차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를 누가 기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많은 사람이 문서 제작에 동참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된 시기에 있어서도 논란이 많다. 가장 오래전에 기록된 <리그베다>의 경우에는 대략 기원전 5000년부터 기원전 1200년 사이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베다의 전통은 뿌리내려갔고, 점차 그 주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업, 윤회, 해탈이라는 베다의 기본적인 세계관이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와 동시에 베다의 의례절차를 중시하는 분위기도 점차 강해져갔다. 의례를 전문적으로 진행하는 사제들을 ‘브라흐마나’ 혹은 ‘바라문’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지위는 점차 높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복잡한 의례를 절차대로 수행함으로써 신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라문이 신을 움직임으로써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해주기를 원했다. 이처럼 바라문이 중심이 된 종교를 ‘바라문교(Brahmanism)’라 부른다. 그리고 이 종교는 후에 힌두교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라문교의 형식주의적이고 기복적인 경향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우선 베다의 영향력이 동쪽으로 확대될 때, 동쪽 지역의 원주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베다를 비판하거나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스승들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새롭고 독창적인 가르침을 전파했다. 이러한 지식인들을 ‘슈라마나’ 혹은 ‘사문’이라고 불렀다. 사문들은 출가, 고행, 명상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추구했다. 고타마 싯다르타 역시 베다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본질을 되찾으려 했고 이를 위해서 베다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인간의 지향점은 사제나 신의 배려에 의존하는 기복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궁극의 지혜를 깨우침으로써 영원한 자유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인간의 유일한 목표다.
 
《베다》의 구성을 살펴보자. 크게 본문과 부속 문헌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문서는 네 가지인데 이를 ‘상히타’라고 한다. 《우파니샤드》는 부속문헌에 포함된다. 특히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결론, 베다의 최고, 베다의 끝이라는 뜻으로 ‘베단타(Vedanta)’라고 부른다. 베다의 정수가 여기에 기록된 것이다.

인도인들은 베다를 ‘슈루티(śruti)’와 ‘스므리티(smṛti)’로 구분하기도 한다. 구분의 기준은 문서의 기원이다. 우선 슈루티는 신으로부터 ‘들은 것’이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스므리티는 스승으로부터 전승되어 ‘기억된 것’을 뜻한다. 문서의 기원이 신인가, 인간인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슈루티에 해당한다.
 
불교와 《우파니샤드》
불교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업과 윤회 그리고 해탈에 대한 개념들은 사실 불교 고유의 사상이라기보다는 고대 인도의 베다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우파니샤드》와 불교는 기본적인 세계관을 공유한다.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우리에게 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너의 생각과 행위는 업을 만들어내고, 업은 너를 다시 윤회하게 할 것이다. 이번 생에서 욕망을 내려놓고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면 너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에 이르러 궁극적인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렇게 공통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지만,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입장 차이다. 우선 《우파니샤드》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고정불변한 자아를 상정하는 것이다. 만약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업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연속적이며 불변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교의 영혼과 같은 존재다. 그 영혼이 새로운 육체 속으로 옷을 갈아입듯 들어가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본질적인 자아를 ‘아트만(ātman)’이라고 부른다.
반면 붓다는 아트만을 부정한다. 우리가 윤회계를 떠도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은 아니다. 붓다는 무아(無我)를 주장한다. 영원한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여태껏 사람들이 품어온 가장 기만적인 망상이다. 이를 ‘아나트만(Anātman)’이라고 한다.
 
붓다에 따르면 고정된 자아나 영혼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행했던 업에 의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의 조합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밧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밧줄은 하나의 긴 끈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낱알의 짧은 실들이 서로서로 얽혀서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새롭게 탄생한 존재는 그전에 소멸한 존재와 완벽히 똑같지는 않지만, 또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존재는 영원히 변화하는 요소들의 연속체인 것이다.
 
구성과 주요 개념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신성한 언어로 받아들여진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어 있다.
 
궁극적인 지향점은 하나다. 그것은 범아일여 사상이다. 여기서의 ‘범’은 우주의 최고 원리인 ‘브라흐만’을 말하고, ‘아’는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을 뜻한다. 즉 범아일여란 우주의 원리와 개인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
자신이 바로 그것, 즉 아트만이고 또한 브라흐만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나는 세상에 던져진 그저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우주의 근원과 이어진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자아와 우주 그리고 이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철학서다.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우파니샤드》는 그것을 ‘마야(Maya)’라고 한다. 마야는 환영을 말한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세계 자체가 마야다. 즉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어왔던 눈앞의 세계가 단지 환영일 뿐인 것이다. 이 환영은 너무나 강렬해서 진실은 장막 속에 가려지고 헛된 것만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를 여럿으로 보고 내면을 외부로 체험한다. 인간의 이러한 상태를 ‘무지’ 혹은 ‘무명’이라 부른다.
깨달음이란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무지의 장막을 벗고 모든 것이 하나라는 궁극의 지혜를 얻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실체이고, 이를 통해 자아는 자유와 평온에 이른다.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

아그니 :: 고대 인도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아기니(阿耆尼)로 한역(漢譯)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불'을 의미하며, 라틴어 이그니스(ignis)와 어원이 같다. 고대 아리아인들의 아궁이 속 불에 대한 신앙에서 기원했다. 불을 관장하며 브라만교의 모든 제식에서 정화(淨化) 기능을 담당했다. 어둠을 밝혀 사람들에게 번영을 가져다주고 인간사회를 보호·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그베다》의 첫 번째 찬가(讚歌)의 주인공으로서 그 찬가의 수가 신들의 왕인 인드라(Indra) 다음으로 많다.
천공(天空)의 디아우스와 대지(大地)의 여신 프리티비의 아들로 여겨지고 있지만, 브라흐마(Brahma, 梵天)가 창조한 연꽃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중계자, 또는 신들의 안내자로 간주되며, 두 개 또는 세 개의 얼굴과 일곱 개의 혀, 빨간색 몸에 붉은 화염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보통 전차를 타지만 숫양이나 염소를 타기도 한다.
아그니는 불의 형태로 모든 가정에 거주하면서 가족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숭배된다. 베다시대 이후 현재까지 힌두교도들의 여러 제식과 결혼식에 중요한 희생물이자 증인으로 봉헌되어 왔다. 또한 ‘소화의 불’로서 인체에서 소화작용(消化作用)을 한다고도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힌두교 성지 바라나시(Varanasi)에 있는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 화장터에서는 아그니가 내려줬다는 신성한 불꽃을 수천 년 동안 보호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그니 [Agni]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불의 신 아그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당시 고대 인도에서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례 방법이 공물을 불 속에 던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의 공물이 불에 던져지면 그것은 사라지는 동시에 신의 세계로 가게 된다. 당시의 사람들이 보기에 불이란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처럼 느껴졌다.
 
“결국 죽음을 맞게 될 인간이 아트만에 대해 듣고 늘 마음속에 새기며, 아트만의 정체를 알아서, 그 아트만이 물질적 구성요소와는 비교될 수 없는 미세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면, 그는 지극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트만은 누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도, 누구에 의해서 죽게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근원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아트만은 태어난 적이 없으며 죽거나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아트만이 존재하는 곳은 세상의 모든 곳이며 동시에 지혜의 동굴인 인간의 마음속에도 머문다. 아트만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나’ 이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위대한 아트만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현명한 사람은 아무런 슬픔도 고통도 갖지 않는다.
 
“아트만을 알게 되면 그는 그 순간에 죽음에서 풀려나리라.”
 
“현세에서 마음속의 모든 매듭이 풀리게 되면, 그때 그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이게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이야기를 듣지만, 사실은 다른 영화, 다른 책, 다른 이야기를 봅니다. 그것은 각자가 가진 삶에서의 체험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이해의 시야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어디까지를 이해하는지 그 경계가 보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자신의 제한된 이해만으로도 만족스럽게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저에게는 영화나 책이나 다른 여러 텍스트를 접하게 될 때마다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칼 융이 《티벳 사자의 서》를 해석하며 붙인 말입니다. 그는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닫힌 책으로 시작해서 닫힌 책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영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열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닫힌 책으로 시작해서 닫힌 책으로 남는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리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를 꼼꼼하게 읽어간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텍스트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 지식에 대해 앞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언어화해줄 뿐입니다. 나의 체험을 벗어난 것들은 나에게 체험되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전제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질문이 도출됩니다. 만약 삶과 죽음이 연속된다면 그것을 관통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 주체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그 주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세상에 대한 관찰자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세계를 보고 있어야 하고, 죽음의 세계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관찰자는 보는 존재, 관조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관조는 순수해야 합니다. 어떤 다른 요소가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지능, 정체성, 기억, 인식능력, 해석능력 등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부수적입니다. 그저 보는 존재인 것이죠.
이제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본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이 있으면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아도 보고, 꿈을 꾸면서도 봅니다. 지금 눈을 감고 방금 보았던 강연장을 떠올려봅시다. 강연장이 있고 연단이 있고, 조명과 빛이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어디에 있으며, 또 당신은 무엇을 통해 당신의 기억을 보고 있습니까? 조금만 사유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본다는 것은 눈이라는 감각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둘째, 본다는 것은 외부 세계의 실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보는 존재입니다. 유일한 관조자. 그는 눈이 필요하지 않고 외부 세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면을 보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부에 있다고 믿어왔던 세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내 내면의 투영입니다. 물질세계도, 사후세계도, 꿈속에서의 세계도 보는 존재로서의 내가, 나의 외부에 있다고 믿는 내 내면의 세계인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나의 내적 세계와 외부의 현상 세계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우파니샤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자아와 세계를 섬세하게 관찰해왔던 당신과 같은 많은 사람이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해왔던 사실을 명료하게 언어화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일한 관조자요, 관찰자요, 보는 존재로서의 아트만과 그 아트만에 의해서 구성되는 외부세계인 브라흐만이 사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당연하고도 명료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눈앞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무지를 고대 인류는 ‘마야’라고 불렀습니다. 무지 혹은 무명의 상태입니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은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이 세계는 바로 당신의 세계입니다. 당신이 믿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공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열한 번째 계단, 초월 - 경계를 넘어서 : 여행이 시작되었다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내면세계의 유일한 관찰자. 그것이 하나의 의식으로서의 자아의 실체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자아의 외부로 나가본 적이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현실, 꿈, 사후의 현상은 다만 나의 의식에 의해 구성된 산물일 뿐이다. 세계란 내 마음의 반영이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나’라는 존재는 태생적으로 자폐아일지 모른다. 우리는 세계의 실체와 대면해본 적이 없고, 타자의 본질에 닿아본 적이 없다. 우리가 궁극에 이르러 하나의 의식으로 수렴할 때까지, 모든 나란 존재는 그렇게 홀로 무한한 시간 동안 세상을 여행할 것이다.
여행자. 그것이 모든 나라는 존재의 직업이고 숙명이다. 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고 즐기며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그러한 길고 긴 여행 중에서 우리는 운명처럼 성장할 것이다.
 
경계

코타키나발루 :: 옛 이름은 제셀톤(Jesselton)이다. 보르네오섬 북부에 있는 키나발루산(4,101m) 기슭에 위치한다. 19세기 후반, 북보르네오가 영국령(領)이 되면서 1899년부터 새로 건설된 항구도시로 목재·고무 등을 적출한다. 배후지가 비교적 넓은 것도 발전에 유리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일본군의 격전지가 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전후(戰後) 재건되었다. 사바주의 정치·상공업의 중심지로 경제적으로는 홍콩[香港]과의 유대가 깊으며, 주민의 1/3은 중국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코타키나발루 [Kota Kinabalu]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한국에 살면서 가장 아쉬운 건, 온전한 하늘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구름의 모습과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색채의 변화를 매일 관조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의 큰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향유하지 못했던 기쁨을 모두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사람처럼 열정을 불태우며 온종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수평선의 경계. 선명한 저 경계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경계까지 걸어가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고대의 인류는 낭떠러지와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을 상상했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안다. 어떤 경계에도 닿을 수 없음을. 수면은 모든 곳에서 이어져 있고, 경계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슬픔이 된다. 경계가 없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가 없으면 출구도 없다. 우리는 이 바다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해수면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의 경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아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열한 번째 계단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여기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편안함을 떨쳐내고 불편한 세계를 향해 한 발을 더 내디딜 것인지.
그리고 아마도 나는 다시 모험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마음이 끌려 불편함을 감내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될 것이다. 열한 번째 계단은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에 불과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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