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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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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문학성과 다양성, 참신성을 기치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의 작품을 엄선한 「오늘의 젊은 작가」의 일곱 번째 작품 『한국이 싫어서』. 사회 비판적 문제에서 SF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소재, 흡인력 있는 스토리 전개,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오쿠다 히데오에 비견되며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고 있는 작가 장강명이 이번에는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이민 간 사정을 대화 형식으로 들려준다.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 계나는 종합금융회사 신용카드팀 승인실에서 꾸역꾸역 근무하던 중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출퇴근의 지옥철은 더더욱 참지 못한 나머지 사표를 제출한다. 말리는 가족과 눈물로 호소하는 남자 친구, ‘외국병’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호주로 떠난 계나는 국수 가게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학원을 다닌다. 크고 작은 위기들을 극복하며 어학원을 수료한 뒤 회계학 대학원에 입학해 안정을 찾아 가던 계나는 남자 친구였던 지명으로부터 청혼에 가까운 고백을 받는다. 두 달 동안의 방학을 그와 함께 한국에서 지내게 된 계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남자 친구와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아파트까지, 많은 것이 갖추어진 생활을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호주행을 선택하는데……. 첫 번째 출국이 한국이 싫어서 떠난 도피의 길이었다면 두 번째 출국은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한 도전의 길. 계나는 점차 자신이 원하는 행복한 삶에 가까워진다.
저자
장강명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5.05.08

 

1. 터틀맨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태극기 한 장 태우지 않아.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한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 거야.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그렇게 고생하며 회사에 다니는 것도 예순부터 여든까지 좀 편히 살려고 그러는 거잖아.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친구들이 “자격증도 없이 어떻게 금융회사에 취직했어?”라고 많이 물었는데 어떻게 붙었는지는 나도 모르지. 우리 다들 자기가 회사에 어떻게 붙었는지, 아니면 왜 못 붙는지 모르잖아.

 

어쨌거나 대학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하게 돼 한숨 돌렸지. 거기 아니라 다른 데 붙었더라도 아무 데나 갔을 거 같아. 그러면 또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지. 나의 장기적인 커리어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냥 백수가 되지 않고 다달이 월급을 받는 게 중요했어.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아. 내가 어떤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서 그 톱니바퀴가 되었다 해도,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끼어 있고 이 원이 어떻게 굴러가고 이 큰 수레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그런 걸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난 내가 무슨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회사는 뭐 하는 회사인지 모르겠고, 온통 혼란스러웠달까. 아니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 중고생과 다름없었던 거 같아.

 

중년 남자들이 「빙고」를 부르는 이유는 다들 너무 힘들어서 아닐까. 다들 이 땅이 너무 싫어서 몰래 이민을 고민하는 거지. 그걸 억지로 부정하고 자기 자신한테 최면을 걸고 싶은 거야.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라고,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라고. 그런데 이민을 가면 왜 안 되지?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빙고」의 가사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어. 그 노래 마지막 부분이 이렇지 않던가? “이 내 삶이 끝날 그 마지막 순간에 나 웃어 보리라 나 바라는 대로.” 터틀맨은 마지막 순간에 과연 웃으며 눈을 감았을지 궁금하더라. 아니었을 거야, 아마…….

 

내가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런 거대한 톱니바퀴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거야, 아마…….

 

 

 

2. 별도령

차에서 운전자가 내리기에 한 소리 들을 걸 각오했지. 이렇게 실전 영어를 배우는 건가……. 그런데 승용차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아 유 오케이? 오케이?”라고 연신 물으며 내 안부를 살피더라.

 

두 시간 전에 말했던 내용과 달라진 게 없었지만 멤버가 늘었으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나 봐.

 

 

 

3. 도화살

말하자면 그때까지 우리 관계는 롤러코스터였어.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도 있고 탈선 위기도 겪었지만 어쨌든 같은 자리에서 함께 흥분하고 함께 소리를 질렀던 거야.

 

현실에서는, 교내 스터디 모임조차 걔를 끼워 주지 않으려 했어. 스펙을 철폐해야 한다느니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태가 잘못됐다느니 떠들어 대면서 정작 자기들은 스터디 멤버를 뽑을 때조차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더라니까.

 

남태평양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내게 튜브와도 같은 팁들이었지.

 

“아니, 난 우리나라 행복 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어.”

 

여기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거기 가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어.

 

“이상형을 너무 일찍 만나는 건 굉장히 안 좋은 일인 것 같아. 내가 지금 서른 중반이라면 아무것도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분명히 너랑 결혼해서 한국에 남는 편을 택했을 거야.”

 

“넌 다리가 짧아서 귀여워.”

니미 썅, 그게 칭찬이냐?

 

 

 

4. 신분 차이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그게 너희 가족 수준이야. 서양 부모들이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할까? 안 그럴걸? 서양 사람들은 자식의 이성 친구들에게 최근에 본 영화가 뭔지, 음악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혹시 재즈는 좋아하는지를 물을 거야. ‘누구를 좋아한다고? 나도 되게 좋아하는데. 공연 가 봤어?’ 그럴 거야.”

 

“야, 내가 거지인 줄 알아? 적선하냐?”

나는 갑자기 열이 올라서 그 봉투를 받아 그대로 좌악 찢어 버렸어. 봉투가 두툼했더라면 미련이 남았을 텐데, 다행히 봉투가 참 얇더군.

 

“인도네시아 사람들 생활수준이 한국보다 낙후된 건 맞는데, 그렇다고 생각이나 문화 수준까지 몇십 년 뒤떨어진 건 아니거든. 우리나라 사람들도 브리트니 스피어스 따라 부르고 콜드플레이 좋아해.”

 

“한국 애들은 제일 위에 호주인과 서양인이 있고, 그다음에 일본인과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지. 그 아래는 중국인, 그리고 더 아래 남아시아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사실 호주인과 서양인 아래 계급은 그냥 동양인이야. 여기 사람들은 구별도 못해. 걔들 눈에는 그냥 영어 잘하는 아시안과 영어 못하는 아시안이 있을 뿐이야.”

 

“이게 비즈니스 프러포절이라면, 거절한 뒤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난 더 권하지 않아. 너무 늦기 전에 답해 줘.”

 

지금 이 고통은 금방 잊힐 거라고. 기억에 남지 않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이를 얼마나 악물었던지 나중에는 턱이 다 아팠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멸치 똥을 떼어 내다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했어.

 

엄마는 거기서 말을 흐렸고, 나도 뭐라고 더 말을 하지 않았어.

 

뭐가 바뀌긴 했는데 나아진 건 아니었어.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 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5. 베이스 점프

“안 죽어. 그리고 죽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사실 지루한 얘기는 두 가지뿐이었어. 은혜 시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미연이 회사 이야기. 그런데 은혜랑 미연이 그 두 얘기를 너무 오래 하는 거야. 몇 년 전에 떠들었던 거랑 내용도 다를 게 없어. 걔들은 아마 앞으로 몇 년 뒤에도 여전히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을 거야. 솔직히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는 거지. 걔들이 원하는 건 내가 “와, 무슨 그럴 쳐 죽일 년이 다 있대? 회사 진짜 거지같다, 한국 왜 이렇게 후지냐.”라며 공감해 주는 거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냐. 근본적인 해결책은 힘이 들고, 실행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회사 상사에게 “이건 잘못됐다.”라고, 시어머니에게 “그건 싫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무서운 거야. 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나 소중해.

 

“네가 좀 올라가 봐라, 계나야. 너 예나랑 친하잖니.”

어릴 때 그토록 예나를 부려 먹고 혼내던 내가 어느새 우리 가족 중 예나랑 가장 친한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

 

애가 풀이 죽어서 내 눈치를 슬슬 살피더라고. 찬바람 부는 데서 떨어서인지 입술이 파랬어. 꿀밤 한 대 먹이고 싶은 마음도 들고, 꼭 안아 주고 싶은 마음도 들고…….

 

“예나야, 너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빌딩 꼭대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어느 게 더 위험한지 알아?”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몸이 땅에 부딪쳐 박살나 있는 거야.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그런 걸 베이스(BASE) 점프라고 한대. 빌딩(Building)이나 안테나(Antenna), 교각(Span), 절벽(Earth)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린다고.

 

낙하산 사고로 나는 알거지가 됐어.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거 안 해도 내 처지가 원래부터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신세였는데, 그걸 몰랐네.

 

“나도 네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안됐다고 생각해. 하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난 이미 책임을 치렀어. 재판을 받고 벌금을 냈거든.”

“하지만 너 때문에 난 집에서 쫓겨나게 됐다고! 4년 동안 모은 돈을 전부 다 날리게 됐어! 넌 미안하지도 않니?”

“물론 나도 그건 유감이야, 키에나.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뭘 더 해야 할 의무도 없어.”

“내 손해에는 네 책임도 있는 거잖아.”

“아니, 호주 법에 따르면 네 손해는 네 책임이야. 너희 집을 관리 감독할 의무는 내가 아니라 너한테 있었던 거라고.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래. 네 생각이 나와 다르다면 우리 중 누가 옳은지 법정에서 다퉈 볼 수 있겠지.”

 

난 대체 왜 태어난 거야? 고생하려고 태어났나?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 맞아?

 

내가, 사실 어디서 뭘 배우고 일을 해서 남들한테 인정을 받은 게 태어나서 처음이야.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거든. 남자들이라는 게 단순해. 회사에서 인정받으면 얼굴 펴지고 어깨 으쓱으쓱하고 그러는 게 남자들이야.

 

무슨…… 마치 자기를 구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하며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같았어. 낙하산을 멘 건지 아닌지도 몰라.

 

 

 

6. 파블로

“조금만 돈이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좋은 곳이 없어. 내가 평생 너 편하게 살게 해 줄게.”

 

자기소개서 쓰는데 진짜 내용이 너무 조악해서 손발이 오그라들더라. 한국에서 살기 싫어서 호주 갔다고 쓸 수는 없고, 그래서 쓴 말이 “글로벌 감각을 키우기 위해 어쩌고…….” 어휴, 됐어.

 

돈 걱정 할 일 없이, 주변에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 본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어.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

 

지금 내가 의대 가서 성형외과 의사 되면, 로스쿨 가서 변호사 되면, 본전 뽑을 수 있을까? 아닐걸?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직업이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전망 얘기하는 건 무의미한 거고, 내가 뭘 하고 싶으냐가 정말 중요한 거지. 돈이 안 벌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좀 덜 억울할 거 아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봤어. 나는 먹는 거에 관심이 많아서 맛있는 음식이랑 과자를 좋아하지. 또 술도 좋아해. 그러니까 식재료랑 술값이 싼 곳에서 사는 게 좋아. 그리고 공기가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동네가 좋아. 또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게 전부야. 그 외에는 딱히 이걸 꼭 하고 싶다든가 그런 건 없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 것까지 팔고 싶지는 않아.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야. 자존심 지켜 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 싶어.

 

우리는 뭐랄까, 전래 동화의 의좋은 형제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지. 지명이는 나를 아껴. 나도 걔를 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개선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밤에 서로 상대 몰래 볏짚을 나르느라 몸만 피곤한 상황이었지.

언젠가는 우리가 달빛 아래 볏짚을 든 채 마주치게 돼 있었어.

 

지명은 잠이 들어 있더라. 침대 위에서, 옷을 벗은 채로. 아기 같은 자세였어. 나는 잠옷을 입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침대에 앉았어. 조심조심 걔한테 이불을 덮어 준 뒤에 옆에 앉아 맥주를 마셨지. 걔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아주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잠에서 깨어나면 얘는 나에 대한 의무감으로 섹스를 하려 들 거야. 그러면 나 역시 의무감으로 걔를 맞이하겠지. 서로 연기 아닌 연기를 해야겠지. 그런 섹스, 너무 슬프지 않니.

걔 얼굴이 과로와 수면 부족 탓에 검고 거칠거칠했어. 입 주변이랑 턱에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올라와 있더라. 이불을 덮기 전에 본 배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었어. 얘가 아저씨가 됐네, 하고 정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더 짠하고 아프고 그렇더라고. 얘 이렇게 일하다 암 걸리는 거 아닌가 싶고, 내가 이 모습을 10년이고 20년이고 보다가, 그냥 얘는 매일 이렇게 열몇 시간씩 일하는 애다,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어떻게 하나 싶고……. 막 눈물이 날 것 같았어.

 

지명과 두 번째 이별을 결심할 때 고민을 많이 했지. 내가 얘랑 헤어진 다음에 후회하지 않을까 하고. 아마 후회할 거야. 내가 만난 남자들 중 지명이가 제일 괜찮은 애였는데, 하고. 그런데 걔랑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살아도 나중에 결국 후회할 거야. 그때 내가 호주로 떠나야 했는데, 하고. 나라는 인간은 뭔가를 이루겠다는 뚜렷한 목표 같은 건 없으니까, 아마 어떻게 살건 간에 내가 살아 보지 않은 길에 대해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영영 알 수 없겠지……. 어떤 선택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지를.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지명은 고개를 숙인 채 내 얘기를 들었어.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내가 오히려 묻고 싶었지. 너는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 거야? 나 따위가 뭐라고 나한테 평생을 걸어? 너무 고맙고 미안했어. 하지만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유로 내가 네 옆에 있을 수는 없어…….

 

공항으로 가는 길에 지금 내가 왜 호주로 가는 걸까 생각해 봤어.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 감정 없어…….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라면 더 쉬울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지나 봐야지. 내가 너를 잊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잊지 못하면 내가 호주로 가는 거고, 아니면 여기서 다른 사람을 새로 만날 수도 있고. 어쩌면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를 계속 기다릴지도 모르지.”

 

출국장에서 인사를 하고 보안 검색 구역으로 들어갔어. 난 도망치는 게 아니야, 행복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어. 이번에는 뒤돌아보지 않았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거든.

 

 

 

7. 남십자성

그런 일을 겪은 뒤 한국에 대한 고마움이 생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별로 그렇진 않았어. 선생님한테 혼난다고 부모님이 고마워지디?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내가 외국인을 밀치고 허둥지둥 지하철 빈자리로 달려가면, 내가 왜 지하철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는지 그 이유를 이 나라가 궁금해할까? 아닐걸? 그냥 국격이 어쩌고 하는 얘기나 하겠지. 그런 주제에 이 나라는 우리한테 은근히 협박도 많이 했어. 폭탄을 가슴에 품고 북한군 탱크 아래로 들어간 학도병이나, 중동전쟁 나니까 이스라엘로 모인 유대인 이야기를 하면서, 여차하면 나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눈치를 줬지. 그런데 내가 호주 와서 이스라엘 여행자들 만나서 얘기 들어 보니까 얘들도 걸프전 터졌을 때 미국으로 도망간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더구먼. 학도병들은 어땠을 거 같아? 다들 울면서 죽었을걸? 도망칠 수만 있으면 도망쳤을 거다. 뒤에서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러지 못한 거지.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회계 배울 때 경제학 원론도 같이 배우거든. 거기 비교우위론이라고 나와. 혹시 알아? 농사짓는 나라는 농사만 전문적으로 짓고, 고급 서비스 창출하는 나라는 고급 서비스에 집중하는 게 낫다는 내용인데. 수학적으로 그게 증명이 돼. 그런데 그 이론대로면 농사짓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농사만 지어야 하는 건가? 사람은 자기가 일하고 싶은 나라에서 일하지 못하게 하면서 물건 수출입만 자유롭게 허용하자는 주장 좀 이상하지 않아?  

 

비교우위론 :: 중상주의는 국가가 보유한 금·은과 같은 귀금속(화폐)을 국부로 간주했다. 따라서 국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외국의 귀금속을 획득했다. 또한 일단 확보된 귀금속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최대한 억제했다. 따라서 중상주의는 중금주의(bullionism)라고 불리기도 한다. 귀금속을 축적하기 위한 수단은 수출을 증대하고 수입은 최대한 억제하는 무역정책이다.
비싼 상품은 수출하고 수입은 원자재로 한정했다. 원자재를 제외한 수입품에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외국에서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라도 국내에서 비싸게 생산했다. 결국 중상주의 정책은 수출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 사이의 치열한 경쟁(cut-throat competition)으로 때에 따라서 국가 사이의 전쟁까지도 불사했다.
중상주의는 세계 전체로 보았을 때 금·은과 같은 귀금속이 한정되어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무역에서 한 나라가 이익을 얻으면 상대국은 그 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결국 중상주의 사고의 본질은 제로섬(zero sum) 개념인 것이다. 마치 현금상자에 보관중인 현금의 양이 일정한 경우에 한 사람이 돈을 더 가지면 다른 사람은 덜 가져야 한다. 따라서 중상주의를 ‘현금상자 사고(cash box thinking)’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중상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18세기 말 애덤 스미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스미스는 세계전체의 부가 일정하고, 부의 원천이 유통(무역)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간주한 중상주의의 기본적 시각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스미스(그의 사후에는 리카도)는 국부는 국가나 왕실 금고 속에 보관된 금·은과 같은 귀금속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가용한 상품과 용역이라고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시각이다. 이는 유통 부문에서 국부의 원천을 찾은 중상주의를 배격하고 제조업 생산 부문이 부의 원천임을 밝힌 것으로 당시 상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이 바람직함을 설파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스미스는 더 나아가서 국제무역이 치열한 경쟁을 필요로 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오히려 무역 당사자 양측 모두에게 혜택이 가는 포지티브섬(positive sum)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이론적 근거는 절대우위(absolute advantage)개념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교우위론 - 무역을 통한 이익 (경제학 주요개념, 김철환)

 

뭐라고 말하는지 정말 안 들리더라. 난 이제 알아. 평생 영어 배워도 이건 못 알아들어. 내가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영어를 하게 되는 날은 안 와.

 

“조금만 더…… 한국에서 조금만 더 해 보고요.”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하더라고. 내가 왜 지명이나 엘리처럼 살 수 없었는지, 내가 왜 한국에서 살면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나는 지명이도 아니고 엘리도 아니야.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어.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나는 이 나라 사람들 평균 수준의 행복 현금흐름으로는 살기 어렵다, 매일 한 끼만 먹고 살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는 걸.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 거랑 똑같지 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남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해. 가게에서 진상 떠는 거, 며느리 괴롭히는 거, 부하 직원 못살게 구는 거, 그게 다 이 맥락 아닐까? 아주 사람 취급을 안 해 주잖아.

난 그렇게 살지 못해.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정말 우스운 게, 사실 젊은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시를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공항을 나오니까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 불어. 햇빛이 짱짱해서 난 또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선글라스를 끼면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나 자신에게.

“해브 어 나이스 데이.”

그리고 속으로 결심의 말을 덧붙였어.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작가의 말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이라는 계나의 말은 영화 「람보 2」 마지막 장면에서 존 람보의 대사를 비튼 것입니다. “For our country to love us as much as we love it. That’s what I want.”라는 대사입니다.

 

 

 

작품 해설 - 사육장 너머로

1. 국민을 내쫓는 국가

경기도 화성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에 화재가 발생한 것은 1999년 6월 30일 새벽이었다.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불법 조립식 건물은 유독 가스를 내뿜었다. 화재경보기는 불량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신고가 접수되었고 소방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치원생 열아홉 명과 인솔 교사 네 명이 숨졌다. 여섯 살 된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한 어머니가 실신했다. 그녀는 전 필드하키 국가 대표 선수이자 88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였다. 세계에 한국을 자기 자신으로 자랑스럽게 표상하던 어머니는 조국을 신뢰했다. 그러나 정부는 사고 대책과 진상 규명 대신, 책임 회피와 사건 축소에 힘을 쏟았다. 더 이상 그녀는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해 11월 어머니는 뉴질랜드 이민을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국가 대표 선수로 딴 메달과 훈장은 국가에 반납했다. 이 나라가, 이 나라이던 어머니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을 저버린 쪽은 그녀가 아니라 한국이었다.

 

참척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감히 나는 말하지 못하겠다. 조금 헤아려 보려는 시도만으로도 슬픔과 분노를 도무지 참아낼 수가 없다.

 

참척 ::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
참척의 아픔.
[네이버 국어사전] 참척 [慘慽]

 

아무것도 색칠할 수 없는 흰 그림 같은 세상에서 청년 세대는 표백되어 간다. 그들은 본인의 피로 하얀 전쟁터를 물들인다. 오늘날 젊은 날의 초상은 스스로의 존재를 오직 죽음으로써만 선언하는 붓질로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당시 20대였던 나는 희망 없이 오래 살기보다, 절망 없이 일찍 죽어야겠다고 작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정글 - 축사 -한국

생득적인 재력이 전제되면, 사교육과 성형을 통해 학력과 체력은 후천적으로 쉽게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타고난 재력이 없다면, 나머지는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날이 갈수록 인생 역전을 빌며 매주 복권 사는 사람만 는다. 공정에 기댈 수 없는 사회에서, 우연에 기대는 현상의 증가는 필연이다.

 

그 안에서 각자 열심히 노력해 보라는 조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운을 빈다는 책임 없는 인사와 마찬가지다. 이는 계나의 말마따나 톰슨가젤한테 사자와 맞서 싸워 보라는 종용이다. 아니 톰슨가젤더러 어째서 너는 사자가 되지 못하느냐고, 환골탈태해서 사자가 되라는 불가능한 강요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는데, 이제는 육식동물이 아니면 아예 살아남을 수 없는 정글이 되었다. 여기에서 초식동물이 어떻게든 도망쳐 삶의 터전을 옮기려는 행동은 당연한 방어기제다. 초식동물이 사라지고 나면, 남은 육식동물끼리 잡고 잡아먹히는 대혈투가 벌어지리라.

 

진짜 까다로운 주체는 누구인가. 계나 스스로 자신을 까다롭다고 수긍하게 만든, 내면화된 ‘사육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소나 돼지인 양, 축사에 가두어져 주인이 주는 대로만 먹고 살다가, 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길들임의 체제가 한국에서 스스럼없이 작동하고 있다. 거기에서 창출된 이득은 주인에게만 온전히 돌아간다. 그러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가축인가. 외양만 보면 구별되지 않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사육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편이 주인이고, 사육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편이 가축이다. 배분되는 사료에 만족하라고,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가 바로 주인이자 거꾸러뜨릴 대상이다.

정글과 축사는 상반된 공간으로 간주된다. 정글은 경쟁하여 생존하는 장이고, 축사는 관리되어 생존하는 장이다. 그런데 정글의 법칙과 축사의 논리가 한국에서는 혼융되어 나타난다. 가장 부정적인 점만 취합한 방식이다. 본래 양자는 가치 판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가령 자연 상태에서 개체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적자생존을 도모하는 것(정글의 법칙)과, 인공 상태에서 특정 개체를 번식시켜 양적 생산을 증대하는 것(축사의 논리)은 좋고 나쁨·옳고 그름의 구별이 적용되지 않는다.

 

가까이에서 보면 정글이고, 멀리서 보면 축사인 장소가 한국이다. 치열하게 아귀다툼하는 사방에 커다란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이곳의 주인은 약자를 홀대하고 강자를 우대한다. 그는 차별적 포함과 배제의 메커니즘으로 담장 안쪽의 모든 이를 통제하고 순종시킨다. 자유를 영위하며 사는 줄 알았던 곳이 실제로는 거대한 사육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서의 탈출을 꿈꾸고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글 — 축사인 한국을 벗어나면 또 다른 정글 — 축사인 이국(異國)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출국해 호주로 귀국하며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라고 다짐한다. 이쯤에서 계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겠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 뭔가를 성취한 기억으로 조금씩 오랫동안 행복감을 느끼는 ‘자산성 행복’이든, 어떤 순간 짜릿한 행복감을 느끼는 ‘현금흐름성 행복’이든,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한 계나는 행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동생 ‘예나’가 사귀는,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는 남자 친구를 평가하는 그녀를 보라. 계나는 본인이 여태껏 냉소적으로 비판하던 사람들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진정한 탈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육장 내에서 가축이라는 포박을 풀어내는 데 달려 있다. 사육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사육장의 주인을 쫓아내야 한다.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맞짱뜨자는 게 아니야.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버리자는 거지.” 이것이 사육장 너머를 지향하는 내가 최종적으로 도출한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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