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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연금술

헬조선의 알파고 2023. 7. 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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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연금술(양장본 HardCover)
인간의 열정에 관한 아포리즘 『영혼의 연금술』. 이 책은 대중운동의 성격과 실상을 파헤친 에릭 호퍼의 대표작 《맹신자들》의 사상적 뼈대를 이루는 아포리즘 모음집이다. 전체주의와 미국의 대공황으로 인해 전 세계가 암흑으로 내몰린 시기에, 호퍼는 광기와 혼돈의 격류에 휩싸여 표류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대중운동에 쉽게 빠지는 인간의 유형과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광신 혹은 맹신, 열광을 의미하는 ‘파나티시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파나티시즘의 원천으로, 인간의 자기애와 사회적 약자, 개척자, 인간의 열정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한다. 대중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은 자기를 모르는 사람으로, 그 결과 가공의 자기, 지도자, 거룩한 대의, 집단적인 조직과 자기 자신을 일체화시키면서 자부심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호퍼는 이처럼 무의미한 자기로부터 도피하려는 열정이야말로 퇴행적 대중운동을 이끄는 힘의 원천이라고 단언한다.
저자
에릭 호퍼
출판
이다미디어
출판일
2014.02.28

 

열정적으로 일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가장 바쁘고, 정말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때 가장 탐욕스러우며, 결코 도달할 수 없을 때 가장 조급하고,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를 때 가장 독선적이다.

 

이것 또는 저것만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해지리라고 믿는 것은 우리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억누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강렬한 욕망은 모두, 기본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인간이 되려는 욕망이다. 절박하게 명성을 갈망하는 것도 아마 현실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리라.

 

많은 경우, 성자의 통찰은 죄인으로서의 경험에서 나온다.

 

내적 불만으로 인해 격해진 영혼은 에너지를 발산한다. 발산된 에너지가 불만이 될지, 욕망이 될지, 단순한 행동이 될지, 아니면 창조로 변신할지는 개인의 자질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가 알다시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충동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나 완벽을 위해 분투할 충동도 없는 것 같다. 완전한 사회는 결국 정체될 가능성이 항상 내재해 있다.

 

어떤 영혼의 천부적인 자질을 알고 싶을 때, 불만을 창조적 충동으로 바꾸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혁명가 못지않은 불만을 품고 있다. 하지만 똑같은 불만으로 각각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은 정말 판이하지 않은가!

 

흔히들 재능이 기회를 저절로 창출해낸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강렬한 욕망이 기회뿐 아니라 재능을 창출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실수로 생겨난 열성이라도 열정적인 진리 탐구로 바뀔 수 있다.

 

오로지 사회나 경제를 계속 지배하는 데만 몰두하는 급진주의는 더 이상 급진적이지 않다.메모보수이다

 

“좀 더!”라는 말은 불만의 이론가가 만들어낸 말 중 가장 효과적인 혁명 구호이다. 미국인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영원한 혁명가이다. 이들은 변화를 찬양하고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을 좇으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자기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

 

국민의 욕망은 일종의 활력이 되어 발현된다. 여기에는 부산함, 무모함, 혈기, 공격성이 있다. 어떤 것도 간절히 원하지 않을 때 그 나라는 ‘피로’하다. 이런 욕망의 둔화를 불러온 것이 포만감인지, 합리성인지, 환멸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피로한 국가에게 미래는 황무지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이런 황무지에서는 현재나 과거를 능가할 업적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혁명의 가장 큰 효과는, 욕망을 모르는 사람을 모조리 제거해버리고, 행동이나 권력 등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끝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행동하려는 성향은 내면의 불균형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균형이 잡혔다 함은 거의 움직임이 없다는 뜻이다. 행동은 결국 균형을 잡으면서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팔을 흔들며 허우적거리는 행위와 같다. 만약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카르노에게 썼던 것처럼, “통치의 기술이란 사람들에게 권태감을 품게 하지 않는 것”이며 균형을 깨뜨리는 기술이다. 전체주의 체제와 자유로운 사회 간의 결정적인 차이는 국민들을 계속 행동하고 분투하게끔 만들어주는 불균형의 창출 방법에 있을 것이다.

 

라자르 카르노 ::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1773년 메지에르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수비대 장교로 복무, 1783년 대위로 승진하였다. 1789년 상관에 대한 무고죄(誣告罪)로 육군감옥에 2개월간 투옥되었고, 그 해 혁명이 일어난 후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792년 국민공회(國民公會)의 의원으로 당선, 에스파냐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베욘에 파견되었다. 1793년 산악당(山岳黨) 의원으로서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동하고, 3월 이후 북방군에 파견되어 프랑스군의 패세를 만회하는데 공을 세웠다.
8월 공안위원회의 군사담당관으로 선임되어 국민공회에 보고서를 제출, 그에 따라 총원징집법(總員徵集法)이 가결됨으로써 50만 명의 신병이 징집되고, 연내로 11개 군단과 63만 명의 군대가 편성되는 한편 군수생산이 촉진되었다. 또한 공안위원회 우파로서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에 저항하였고, 1795∼97년 총재정부의 총재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1797년 쿠데타로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1800년 귀국하여 나폴레옹에 의하여 육군장관이 되었고, 1815년 내무장관이 되어 그 해의 워털루패전 후에도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정복고 후에 추방되어 독일의 마그데부르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르노 [Lazare Nicolas Marguerite Carnot]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오늘의 성공은 내일의 도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아무리 높은 곳에 머문다 해도, 인간은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창조적인 일을 하도록 격려와 자극을 받아야 한다. 이들의 신음과 비탄의 소리는 시대를 초월해서 메아리친다.

행동은 자신감과 자존심으로 통하는 확실한 길이다. 이 길이 열려 있을 때 모든 에너지는 이 방향으로 흘러들어간다.

 

재능과 젊음을 맘껏 펼칠 수만 있다면 그 사회질서는 안정적이다. 젊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재능이며, 그중에서도 부패하기 쉬운 재능이다.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주라. 그러면 이들은 빵과 물만으로 살 수 있고, 자신들의 착취자를 축복하며 심지어 그들을 위해 죽음도 불사할 것이다. 자기 포기는 일종의 물물교환이다. 우리는 자부심을 위해 인간의 존엄감, 판단력, 도덕적·심미적 감각을 넘겨준다.

자유롭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면, 우리는 자유를 위해 얼마든지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지도자와의 일체화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면, 우리는 나폴레옹 또는 히틀러, 스탈린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이들을 위해 얼마든지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고통 속에 특별함이 있다면, 우리는 숨겨진 보물을 구하기 위해 순교의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믿음과 공포는 둘 다 인간의 자존심을 말살하기 위한 도구이다.

 

믿음과 공포는 둘 다 인간이란 독립체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상태까지 전락시킨다.

 

인간은 실로 매혹적인 피조물이다. 치욕과 나약함을 자부심과 믿음으로 바꾸는 짓밟힌 영혼의 연금술만큼 인간에게 매혹적인 것은 없다.

 

흔히 권력은 부패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나약함 역시 부패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권력은 소수만을 부패시키지만 나약함은 다수를 부패시킨다. 증오와 악의, 무례함, 옹졸함, 의심은 나약함의 산물이다. 나약한 자의 분노는 자기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자각에서 생겨난다. 이들은 악의가 아닌 나약함을 증오한다. 나약한 자가 힘을 가지면 장소를 불문하고 보이는 대로 나약한 것을 파괴한다. 약자가 약자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의 그 비통함이란! 약자의 자기혐오는 나약함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일례一例에 지나지 않는다.

 

약자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준다고 그들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이들에게 탐욕과 분개만을 심어줄 뿐이다. 자기의 자부심이나 희망, 증오를 같이 공유해야만 약자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단지 권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공격성이 생기지는 않는다. 권력은 만성적인 두려움과 결탁할 때 비로소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바뀐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활동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분명 정신의 불균형이 필요하고,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공포의 불균형이 필요하다.

 

몽테뉴 :: 프랑스의 사상가 ·모랄리스트.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의 저자이다.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렸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성(Montaigne城:현재의 생 미세르 드 몽테뉴 마을) 출생.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 Les Essais》의 저자이다. 대대로 보르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상인 가문으로 에이퀨을 성으로 삼았다가 증조부 라몽 에이퀨 때 몽트라베르 남작령(男爵領)에 속하는 몽테뉴성과 그 영지를 매수하여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와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한 군인으로 문예 애호가이기도 하며, 만년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가계는 포르투갈계(系)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몽테뉴는 어려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1554년 페리그 재판소에 근무하여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관이 되었다. 그는 때때로 궁정에 찾아가 프랑스와 2세,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1565년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 156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번역한 15세기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을 1569년에 간행하였다. 1571년 37세로 법관생활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작 생활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신 ·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577년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1580년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수상록》(2권)을 보르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해 신장결석(腎臟結石) 치료를 겸하여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관광길에 올라 1년 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여행기 Journal de voyage》(1774)가 나왔다. 여행 중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된 것을 알고 1581년 말 귀국하였다.
1583년 보르도 시장에 재선되었으나 종교적 내란과 페스트의 유행 등 많은 난국을 맞았다. 1586년에 몽테뉴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다시 제3권의 수필을 새로 집필하여 1588년 파리에서 《수상록》(3권)을 출판하였다. 그가 ‘결연(結緣)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구르네와 알게 된 것도 이 해이다. 만년에는 앙리 4세로부터 궁정 출사(出仕)를 간청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수상록》 가필(加筆)에 착수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처음에 금욕적(禁慾的) 인생관에 호의를 가진 듯이 보였으나, 중도에는 온건한 회의론에 기울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루크레티우스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에도 공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르네는 그가 마지막 손질한 것을 기초로 하여 《수상록》의 신판을 펴냈다. 그는 이 《수상록》(3권)으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B.파스칼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을 관찰하는 점에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셸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새로운 것에 처음 달려드는 사람들은 부적응자나 실패자, 도망자, 추방자들이다. 이들이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미지의 것을 제압해서 길들인 후에야 강자가 와서 주도권을 잡는다.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것은 참기 힘들고 불쾌한 일상의 단조로움으로부터 도피하는 행위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말에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모든 약속에 매달리며, 구원자와 구세주 곁에 모이는 사람들은 약자들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나 모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는 바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한 영혼의 약점은 멀리해야 하는 진실의 수와 비례한다.

 

타협하지 못하는 태도는 강한 확신을 나타낸다기보다 오히려 마음속으로는 확신하지 못한다는 표시이다. 사람은 외부의 공격보다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의심에 대해 냉혹한 태도를 취한다.

 

자기 육신에게서 가장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말이다.

 

말이 전부인 시대는 위험한 시대이다.

 

우리는 강렬한 언어를 자주 사용하지만, 이는 강한 감정이나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그런 감정을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사람의 언어만이 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말로 설득해서 분노와 열정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때 목소리를 가장 크게 높인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에는 양심의 가책을 상당히 느끼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이 과연 진실을 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현재를 위조하지 않고서 우리는 열정적으로 미래를 꿈꿀 수 없다. 현재와 다른 것을 갈망함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절대 권력의 보유자는 예언을 할 수 있고 그 예언을 실현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말하고 그 거짓을 실현할 수도 있다.

 

공포와 희망은 둘 다 맹신성을 조장한다. 매혹적이지만 누가 봐도 불합리한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사람들 안에 조성하려거든, 희망을 전하는 동시에 불안감을 조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절대적으로 무기력하거나 절대적으로 강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우리의 맹신성이 자라난다.

 

자기 자신만이 유일한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진리에는 무관심하기 쉽다.

자기기만과 맹신성, 사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속성이다.

 

현대인은 죄의 무게보다도 책임의 무게에 더욱 짓눌려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짊어져주는 사람보다 자신의 책임을 대신 짊어져주는 사람을 구세주라고 생각한다. 결단을 내리는 대신 단지 복종하고 자기 임무만 마쳐도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구원이라고 느낀다.

 

우리 대부분의 마음속에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손아귀 안에 있는 도구로 보려는 강력한 갈망이 숨어 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의심스러운 성향과 충동으로 빚어진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강자와 약자 둘 다 이를 구실로 삼아 이용한다. 약자는 복종의 미덕 속에 자기의 증오를 감추면서, 명령에 복종해야 했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행위를 감수했다고 주장한다. 강자 역시 자기가 한층 고차원적인 힘(신, 역사, 운명, 민족, 인간성)에 의해 선택받은 도구라고 선포하면서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닥친 불행이 과거의 죄에 대한 일종의 응징이라고 생각하면, 많은 경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어려움이 과거에 발생한 일 때문이라고 갖다 붙일 수 있다면, 현재의 곤란함은 우리가 미숙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자기 자신감과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포는 불확실성에서 온다. 자기 자신의 가치감이든 무가치함이든 이를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으면, 우리는 공포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도 용기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생. 문학·철학, 특히 법률에 넓은 교양을 가졌으며, 저명한 법률가로서 활약하였으나, 로마의 그리스도교 박해에서 신자의 영웅적 순교에 감동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아내가 있었음에도 사제(司祭)가 되었다. 이교도(異敎徒)·유대인·이단자(異端者)들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지키기 위해 온 정력을 쏟았는데, 그 엄격한 성격 탓으로, 그 자신이 몬타누스파(派)의 이단으로 기울어졌다.
신학에 관한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특히 문장가로서, 교회의 신학과 법률을 위하여 뛰어난 술어(術語)들을 남겼다. 순수하게 신학적인 문제에 철학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며,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은, 그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저서에 《호교서(護敎書):Apologeticum》(197) 《헤르모게네스를 논박(論駁)한다:Adversus Hermogenem》(200/6) 《영혼의 증명에 대하여:Detestimonio animae》(197/200) 《마르키온을 논박한다:Adversus Marcionem》(207/8)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테르툴리아누스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때보다 그 사람의 정신을 파괴할 때 권력 의식을 강하게 느낀다. 사람의 마음은 어느 날 얻을 수도 있지만, 그다음 날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부심으로 가득 찬 정신을 파괴하면 최종적이고도 절대적인 것을 손에 넣는다.  

 

역설적이지만, 신앙으로 달성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은 극한의 경박함으로도 얻을 수 있다. 신앙이 현재를 거부한다면, 경박함은 현재를 경시하고 무시한다.

 

자기 자신을 심각하고 대단하게 여기지 않을 때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생각해보면, 이런 현명하고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경박해지는 것보다 심각해지는 것이 훨씬 쉽다.

 

행동은 자신이 쓸모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자신의 중요성과 목적의식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말뿐이다.

 

느긋한 사람은 자기의 장래와 의무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끊임없는 생과 사의 흐름인 영원성을 좀 더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경박한 사람은 지나치게 심각한 사람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한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미워할 때 다른 사람도 미워하며, 자신에게 관대할 때 다른 사람에게도 관대함을 보인다. 자신을 용서할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기 쉽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기 증오이다.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을 해도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낮추기는커녕, 오히려 그 기대를 높인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실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인류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는 사람은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는 열망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바꿔보겠다는 열망을 반영한다.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그 때문에 항상 변화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불만을 반영한다. 혁명 주동자는 세상과 전쟁을 치를 병사를 모집하기 전에 먼저 모든 사람들의 영혼 안에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개혁가가 변화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변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경시한다. 변할 수 있는 것은 부패하고 열등한 것뿐이다.

 

영혼이 병든 사람들은 인류 전체가 병들었으며, 자기들이 인류를 수술할 수 있는 의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세상을 하나의 병실로 바꾸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일단 인류를 수술대에 묶어놓으면 도끼를 들고 수술을 시작한다.

 

동료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의 간수가 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모든 부적응자들의 마음속에는 인류 전체를 부적응자로 만들려는 강하고 비밀스러운 갈망이 있다. 이들이 완전히 새로운 사회질서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갈망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야 할 때 모두 부적응자가 되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있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는 사실만큼 큰 위안이 또 있을까?

 

악의는 사회적 능력이다.  

 

진정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들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남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자존심을 얻을 수 없는 경우, 시기하는 마음이 욕망 대신 들어선다.

 

진짜 ‘가진 자’는 남에게서 빼앗지 않고도 자유와 자신감, 심지어는 부까지도 획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을 자기 잠재력을 개발하고 적용해서 얻는다. 다른 한편 진짜 ‘가지지 못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해야만 자유를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 공포심과 의존심을 퍼뜨려야 자신감을 느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야 부자라고 느낀다.

 

분노는 부당하다는 느낌보다는 약하다는 느낌에서 생긴다. 우리는 전혀 근거 없는 허위 비난보다도 오히려 얼마간 정당한 비난에 대해 더 분개한다.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은 아마 분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악행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악행 자체보다 어쩌면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과거의 죄악을 정당화하는 행위는 미래의 죄를 옮겨 심어서 경작하는 일이다. 실제로, 죄를 거듭해서 짓는 행위가 때로는 정당화의 수단이 된다. 우리가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는 이유는, 그 죄가 흔한 일이며 극악무도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이다.

 

놀라운 것은, 누군가를 미워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이유가 아무리 부당하더라도 그 사람이 싫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편견과 의심, 거짓말은 이런 힘을 가지고 있어서 영혼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강렬한 죄책감과 맹목적인 믿음은 거의 분간하기 힘들다. 똑같이 잔혹함과 집요함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신념의 격렬함과 집요함이 그 진실성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박해의 격렬함과 집요함도 그 정당성의 증거는 될 수 없다.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일수록 아주 쉽게 믿어버린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언급되는 것을 모두 바로 믿게 된다. 여기에서 아첨과 비방의 신비스러운 힘이 생긴다.

 

영혼의 그릇이 작을수록 감언이설에 넘어가기 쉽다.

 

두려움과 옹졸함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 좀처럼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창조한 것보다 모방한 것을 더욱 신뢰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에는 무엇이든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홀로 독립할 때 가장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모방할 때는 혼자가 아니다.

 

동정은 아마도 영혼의 유일한 항독소일 것이다. 동정심이 있으면 심지어 가장 악랄한 충동마저도 상대적으로 무해하게 된다.

 

인간 영혼의 화학작용에서 대부분의 고귀한 속성, 즉 용기, 명예, 희망, 신념, 의무, 충성 등은 무자비함으로 변질될 수 있다. 우리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악의 끊임없는 왕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은 동정뿐이다.

 

사심 없는 마음에 숨겨진 오점은 이 마음이 무자비함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열정조차 인간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어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 세대를 희생시키는 사람들은 인류의 적이다.

 

독선의 가장 큰 오점은 부당함이 아니라 둔감함이다. 맹목적인 독선과 비교하면 제멋대로 식의 자기 관대가 훨씬 무해하다. 독선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각 시대가 특정 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마도 맞는 말이리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멀리 하늘나라에 있는 신을 믿을 수 있는 시대가 있는 반면, 눈앞에 보이는 신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있다. 우리 시대는 히틀러든 스탈린이든 아니면 파더 디바인이든 눈에 보이는 신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파더 디바인(Father Divine, 1880경~1965): 1930년대 대공황기에 미국 전역에 퍼진 신흥 종교인 평화전도단의 창시자.

 

사람들이 경배할 우상을 필요로 하는 현상은 아마 우리 시대의 절망적 상황을 나타내는 징조이리라.

 

미래를 확신하지 못할 때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자기 인생을 재편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존재를 확고한 틀에 끼워 넣거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방어 수단을 쌓아올린다. 안전에 대한 갈망은 예측을 해야 할 필요성에서 생기며, 그 강도는 미래에 대한 확신과 반비례한다.

 

불만을 갖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갖는 것이다. 불만은 희망을 대신하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 희망에 굶주린 사람들이 불평불만거리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자유를 측정하는 기본적인 시금석은 아마 무엇인가를 하는 자유보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자유일 것이다.

 

자기 자신과 경쟁하고,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맞붙여놓을 때, 우리는 과거의 불행과 오점에서 용기를 얻는다. 게다가 자기 자신을 경쟁자로 삼으면 동료에 대한 박애심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는 행위는, 이들을 도와주든 방해하든, 사랑하든 미워하든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다. 묘하게도 다른 사람과의 경쟁, 즉 다른 사람을 앞지르기 위한 숨 막히는 경주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도주하는 행위이다.  

 

절제된 표현으로 명료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고는 과장하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의 지혜는 우리 자신의 피로 덧쓰지 않는 한 무미건조한 것으로 남는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이다. 세상에 먹히고 할퀴여야 비로소 세상을 의식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자기 혀만큼 단속하기 어려운 것은 없으며, 오히려 자기의 말보다 욕망을 더 쉽게 제어할 수 있다.”

 

인간은 희망을 위해 싸울 때조차 희망을 죽인다.

 

인생의 키를 잡는 것은 금고의 숫자를 맞추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이얼을 한 번 돌린다고 금고는 열리지 않는다. 전진과 후퇴 하나하나가 목표에 다가가는 발걸음이다.

 

척박한 급진주의자 역시 근본적으로는 보수적이다. 이들은 자기 인생이 공허하고 헛되게 비치는 것이 두려워 청년기에 알게 된 관념과 신조를 놓지 못한다.

 

우리는 대체로, 탁월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감히 꿈도 못 꾸는 문제에 대해 소리 높여 평등을 요구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갈망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람이 절대 평등을 주장하는 분야를 찾으면 된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공산주의자는 욕구가 좌절된 자본주의자이다.

 

우리는 선량하고 예의 바른 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 위선이 없다는 것은 가장 타락한 잔혹성을 드러낼 능력이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지금부터 한 달 뒤, 일주일 뒤 또는 심지어 하루 뒤에 찾아온다 해도, 내일만 아니라면 아무런 공포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단 하나, 내일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극단주의에 몸을 바치는 이유는 성장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성장할 능력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고독한 생활은 남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만을 보기 때문이다.

 

겸손은 자부심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자부심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절반짜리 진리에 독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절대 진리를 얻는다.

 

거대한 가면은 내면의 사악함이나 추함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서 필요하다. 존재하지 않는 것만큼 감추기 힘든 것은 없다.

 

어떤 사람에게서 증오를 빼앗으면, 그는 신념 없는 사람이 된다.

 

단순함을 이해하는 일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도피할 때 자유를 느낀다. 비록 프라이팬을 피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격일지라도.

 

우리는 함께 증오함으로써도, 함께 증오당함으로써도 하나로 뭉친다.

 

증오는 종종 희망의 언어를 말한다.

 

앞서가려는 열정은 때로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허위 선전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도록 도와줄 뿐이다.

 

혼자 살아가는 인간은 악한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실망은 일종의 파산이다. 즉 희망과 기대에 너무 많은 돈을 탕진한 영혼의 파산이다.

 

성인의 순진함은 보통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런 순진함이 허영심과 결탁하면 어리석음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행복의 추구야말로 불행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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