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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헬조선의 알파고 2023. 7. 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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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문학성과 다양성, 참신성을 기치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의 작품을 엄선한 「오늘의 젊은 작가」의 아홉 번째 작품 『보건교사 안은영』. 참신한 상상력과 따뜻한 이야기로 독자의 사랑을 받아 온 소설가 정세랑의 이번 작품은 수동적이지 않고 주체적이며, 감상적이지 않고 감각적인, 아는 형 삼고 싶은 사립 M고의 보건교사 안은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별한 것 없는 직업과 평범한 이름의 안은영은 보통의 보건교사가 아니다. 복 중의 복, 일복 하나는 타고난 그녀는 직업으로 ‘보건교사’ 역할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을 처치하고 쫓아내며, 또는 위로하는 ‘퇴마사’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여기에 사립 M고의 한문교사이자 학교 설립자의 후손인 홍인표에게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는 안은영의 활약을 돕는 필수적인 영양제 역할을 한다. 에너지(기)를 보충하기 위해, 학교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둘은 내 거 아닌 내 것 같은 사이가 되어 힘을 합한다. 둘 앞에 나타나는 기이한 괴물들, 학생들에게 보이는 미스터리한 현상들, 학교 곳곳에 숨은 괴상한 힘들…… 사립 M고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안은영과 홍인표의 썸(some)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저자
정세랑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5.12.07

 

사랑해 젤리피시

너한테 필요한 건 키만 크고 얼굴이 여드름 밭인 농구부 주장이 아니야. 매일 아침 눈빛만 봐도 네가 매점의 서른여섯 가지 간식들 중 뭘 먹고 싶어 하는지 아는 나라고.

 

벌써 늦었나. 10대 소년이 느끼기엔 다소 짙은 절망, 그 절망의 단내가 입안에 돌았다.

 

은영은 남학생의 목에서 뽑아낸, 동물성 물질을 내려다보며 작게 끓는 소리를 냈다. 욕이 되다 만 소리였다. 학교라서 매번 삼킬 뿐, 사실 은영은 욕을 잘하는 편이었다.

 

꼭 죽은 사람들만 보는 건 아니었다. 산 사람들이 더 기분 나쁜 걸 많이 만들어 낸다.

 

엑토플라즘 :: 영매(靈媒)의 몸에서 흘러나온다고 하는 일종의 물질.
이른바 교령회(交靈會)에서 일어나는 유령(幽靈)현상의 소재(素材)나, 테이블 또는 의자가 떠오르는 현상의 지지물(支持物)의 근원이 된다고 믿는 물질이다. 주로 영매의 입 ·귀 ·코 ·눈 등의 체공(體孔)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며, 무상(霧狀) ·유체상(流體狀) ·고체상(固體狀) 등 그 농도에 차이가 있고, 직접 만져지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의 생리학자 C.리셰가 명명한 이름으로서, 그 존재가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엑토플라즘 [ectoplasm]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사람이 직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직업이 사람을 고르는 것 같다. 사명 같은 단어를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수긍하고 받아들였다기보단 수월한 인생을 사는 걸 일찌감치 포기했다는 게 맞겠다.

 

곧 녹슨 사슬이 풀렸고, 오래 갇혀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은영에게 없는 건 많았지만 일복만은 항상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일해야 할 것이 뻔했다.

 

정작 혜현은 돌아보는 순간, 어느 때보다 시원하게 웃었다.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을 때는 무표정했는데 승권을 보자마자 그렇게나 풍부한 표정이 솟아났다. 승권은 그 눈만 봐도 혜현이 얼마나 자신을 반가워하는지 언제나 알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면 벌써 다 큰 것 같지만 그래도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어른들을 그만큼 잘 믿기도 힘들다. 믿지 말아야 할 어른들까지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한 표정과 열려 있는 눈동자가 선생님들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토요일의 데이트메이트

놀이터는 낡은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있다. 재개발 얘기가 계속 나왔지만 주민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대로 방치된 곳이었다. 놀이터의 상태는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요즘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시멘트로 통째 떠 낸 미끄럼틀이 육중하게 중앙을 차지했다. 미끄럽지 않기 때문에 미끄럼틀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구조물이었다. 코끼리를 어설프게 흉내 낸 미끄럼틀에 페인트가 알록달록 발려 있던 날도 있었지만 이제는 탁한 회색 말고는 남은 게 없어서 죽은 코끼리를 연상시켰다. 선 채로 죽은, 머리가 지나치게 큰 코끼리 말이다. 몇 년 전에는 심지어 바닥까지 시멘트였는데 그나마 그건 싸구려 모래로 교체되었다. 굵고 습한 모래 속에선 이물질이 끝없이 나왔다. 끊어진 그네, 축이 돌아간 시소, 녹이 슨 철봉. 한때 숱한 아이들을 다치게 했던 놀이터였지만 이제 아이들조차 보기 힘들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세계의 단단한 부분을 밟고 살아간다면 자신은 발이 빠지는 가장자리를 걸어야 함을 슬슬 깨달아 가던 중이었다.

 

아이들은 귀신보다 귀신같이 은영의 기묘한 부분을 알아챘다.

 

사람들은 정현을 무서워하지 않고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은영을 무서워했다.  

 

격하게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죽음도 있는가 하면 정현처럼 비누장미같이 오래 거기 있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엔 야경이 소원처럼, 사랑처럼, 약속처럼 빛났다. 언젠가는 소원을 훔치는 쪽이 아니라 비는 쪽이 되고 싶다고, 은영이 차창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럭키, 혼란

모기 퇴치 밴드를 얻긴 했어도 영 효과가 의심스러웠고, 뜯기다 못해 더 이상 어디가 간지러운지 간지럽지 않은지도 모를 상태로 새벽을 맞자 인증서 절도라는 범행을 감행한 것이다.

 

민우는 분명히 들었지만 듣지 못한 척 ‘으응?’ 하는 표정으로 혜현을 봤다. 그러자 혜현이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올 미래인데 조급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어째선지 모두가 자신을 지형의 수하쯤으로 여기는 게 민우는 늘 분했지만 지금은 분해할 여유조차 없었다.

 

울음의 동심원 안에 앉아 혼란스러워하는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훠궈 :: 야채, 고기, 해산물, 면류 등 다양한 재료를 넣고 데쳐먹는 중국의 전통 음식
신선한 재료를 끓는 탕에 넣어 살짝 익혀 먹는 중국의 전통 요리로 지방마다 탕과 익혀먹는 재료가 조금씩 다르다.
큰 세수대야처럼 생긴 커다란 용기에 태극 모양으로 한가운데를 나눠 한쪽엔 하얀 국물을, 한쪽엔 빨간 국물을 담는다. 하얀 국물(백탕)에는 돼지사골, 닭 등으로 우려낸 육수에 각종 약재를 넣어 끓이고, 홍탕에는 육수에 고추, 후추, 고추기름을 넣어 끓인다. 백탕은 담백한 맛, 홍탕은 매운 맛을 지니고 있는데, 이 육수가 끓으면 고기(주로 양고기), 야채(배추, 시금치, 팽이버섯, 감자 등) 등을 넣어 끓여 낸다.
훠궈의 유래는 원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나라 황제가 중원에서 전쟁하던 중 북방에서 먹던 양고기 요리가 생각나 이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때 적군의 진격이 시작됐다는 첩보가 왔고, 요리할 시간이 부족해진 주방장은 양고기를 얇게 썰은 뒤 끓는 물에 데친 뒤 황제에게 가져다주었다. 황제는 이를 급히 먹고 전투를 치렀는데, 전투가 끝난 후에도 주방장이 급히 건네 준 이 음식의 맛이 생각나 주방장에게 상을 내리고, 이러한 양고기 요리법에 쏸양러우(=훠궈)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훠궈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원어민 교사 메켄지

할아버지는 놀아 본 놈이 큰 사고는 안 친다고 하셨다.

 

사기라도 좋아. 속고 싶어. 그런 속마음을 앞머리가 들춰진 순간 다 들켜 버린 것만 같았다. 누가 유정을 위해 용기 있게 거짓말을 해 준 것으로 충분했고 게다가 거짓말 솜씨는 훌륭했다.

 

인표의 얼굴에 ‘웬일이야, 저 여자가 참치를 거절하고.’라는 자막이 지나가서 조금 기분이 상했다. 얼굴로 말하는 남자 같으니라고.

 

까먹은 채 구겨 놓은 영수증 같은 존재라고 여겼는데 한 번이라도 그렇게 구김살 없이 웃어 보고 싶었다.

 

MDF :: 톱밥과 같은 나무가루를 강력하게 압착 하여 만든 판자
[네이버 지식백과] MDF [medium density fibreboard] (남북 도로 용어집)

 

무리에서 가장 약한 동물, 무리가 사냥감이 되도록 두고 가는 동물, 결코 끝까지 무리에 속할 수 없는 동물은 항상 일정 비율로 태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태어난 게 나라는 걸 왜 인정하지 않을까? 그냥 무리에서 멀어지도록 좀 놔둬 주면 좋을 텐데.

 

조금만 마시면 기분이 좋을 텐데 꼭 그 조금을 지나쳐서 실수를 하고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하고 다음 날 껄끄러워진다.

 

은영은 죽겠다, 힘들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실은 의욕이 넘치는 보건교사였다.

 

기도 확보하는 법,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 흉골 압박 심마사지를 가르쳤는데 설령 태반이 까먹고 일부만이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중 한 사람이 언젠가 누군가를 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멀고 희미한 가능성을 헤아리는 일을 좋아했다.

 

은영은 ‘근거 없는 짝사랑 증후군’이라고 혼자 이름을 붙였다. 작은 친절에도 쉽게 반할 정도로 좋지 않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발생한다. 폭발적으로 증식하는 마음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면 본체는 점점 약해진다.

 

평소 매켄지가 구사하는 단어들은 그다지 인표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날따라 표적 가까이 꽂혔다.

 

문득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마음의 한 부분이 잠시 경련을 일으키듯 움직였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막상 학교에 나가지 않게 되자, 유정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 가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집에 있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보물을 얻기 위해 진물이 난 거라면 괜찮다 싶었다.

 

야차 :: 산스크리트 야크샤(Yak야차 본문 이미지 1a)의 음역으로 약차(藥叉)라고도 쓴다. 볼 수 없고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두려워할 귀신적 성격을 가졌는데, 공양(供養)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재보(財寶)나 아이를 갖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후에는 귀신(鬼神:羅刹)의 하나로 여겨졌고, 불교에서는 불교를 지키는 신으로 되어 있다. 《베다》에도 나타나지만 원래 비(非)아리안적(的) 민간신앙의 신으로, 야크샤는 남신(男神)이고 여성신 야크시니는 지모신(地母神) ·수신(樹神)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차 [夜叉]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어떤 나이에는 정말로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데 모두가 그걸 얻지는 못한다.

 

 

 

오리 선생 한아름

한아름은 붕어 사건 전에도 인기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다. 웬만해서는 인기가 있는 교생 때에도 그랬다. 아름의 반 아이들마저 교생실에 찾아와선 다른 선생님과 사진을 찍게 해 달라고 부탁할 뿐이었다. 단순히 외모의 문제는 아니었다. 외모와 다른 것들을 포함하는 매력의 문제였다. 아무도 교사가 매력을 활용하는 직업이라고 얘기해 주지 않았으므로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애초에 매력 있는 학생이 자라 매력 있는 선생님이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학생 때도 학교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교사가 된 스스로가 한심했다. 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분명히 간절하게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막상 되고 나니 2년 만에 그 간절함의 이유를 까먹고 말았다. 3년 전으로 돌아가 세 살 어린 자신의 멱살을 잡고 왜냐고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레이디버그 레이디

“식객 같은 거예요. 양반들이 사랑방에 손님 들이듯 아빠도 여러 사람 먹여 살려요. 스트리트 뮤지션들도 스트리트에서 잘 수는 없잖아요. 지붕 정도 빌려주는 거 선배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했어요.”

 

”손을 내밀면서 자꾸 피를 묻히려 해요. 내 옷에. 그거 말고는 없는데 눈빛이 기분 나빠요.”

그 정도면 20여 년 흩어지지 않은 유령치고 정말 숙녀지 싶었다.

 

그 나이는 그런 나이잖아요. 충동적이고 제정신도 아니고 그러면서 진지하지는 않은.

 

안은영은 얼굴 근육에 지시를 내렸다. 최대한 아가씨같이 웃어, 아가씨같이 친밀하게 웃으라고! 래디 엄마는 은영의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하여튼 퇴마사를 부르기 전에 병원이 먼저라고 이 사람들아, 의료인으로서 속상하기도 했다.

 

충전을 해 주기 위해 잠시 만난 인표가 말했다. 그게 당신의 부러워하는 얼굴입니까, 싶게 심상한 얼굴로 부러워했다.

 

은영은 자기도 모르게 쫄바지 앞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점프하는 발레리노의 그 부분을 자꾸 쳐다보게 되거나, 동물원에서 사자의 덜렁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밋밋하고 평평했다. 이 사람은 설마 어떤 영험한 거세를 통해 영원한 젊음을 얻은 건가.

 

이상한 게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하긴 했지만 매번 사람이었다. 이상한 곳에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자세로 있으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다 사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자나, 말도 안 된다 싶어 혹시 죽었나 확인도 해 보았지만 살아 있었다. 빈 맥주병이 발에 채어 무거운 소리를 내며 굴러가곤 했다.

 

궁금한 건 그냥 물어본다는 점에서 애들은 건강했다.

 

홍인표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예측하기 쉬운 생물이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서 은영으로선 언제나 조금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패션은 원래 어느 선을 지나면 더 이상 일반적인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니까요.

 

 

 

가로등 아래 김강선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휘두르는 폭력에는 원래 고등학생보다 중학생들이 더 능하기에, 아이들은 강선의 누나와 그 패거리를 무서워했다.

 

일부러 웃으며 물었고 강선이 없다고 대답했기 때문에 안심했다. 누군가를 남기고 죽기엔 좋지 않은 나이다. 그런 문제에 좋은 나이는 없지만.

 

심하게 덴 것은 아니었으나 까먹지는 못할 정도로 은근하게 이어지는 통증 때문에 은영은 저도 모르게 하루 종일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중학생이 소화하기에는 힘든 깨달음이었다.

 

강선은 강선대로 모른 척하는 은영을 다시 모른 척해 주었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답답한 성격이구나, 은영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은영은 묻지 못한 질문들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마음을 감쌌다.

 

—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 내가 너 어디가 예쁘다고 말해 준 적 있었던가?

“그 비슷한 말도 해 준 적 없어.”

 

강선이 말했을 때, 은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사실 빠른 철렁은 아니고 철 — 렁이나 처얼 — 렁에 가까운 편이었다. 느린 하강을 감지하는 마음이랄까. 부러지거나 휘거나 쓰러지지 않으려면 직장과 주거지를 계속 옮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날은 그 시기가 아직 먼 것 같았고, 가끔은 그 시기가 가깝게 느껴졌으며, 우울한 날은 이미 지난 것처럼도 여겨졌다.

 

— 나쁜 일들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곳이야.

“나쁜 일들은 언제나 생겨.”

 

강선과의 대화는 언제나 은영이 조금 바보가 되어 끝났다. 더 바보가 되어도 좋으니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 부서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강선이 방충망에 등을 기댔다. 천천히 망 사이로 조그만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고 나선 금방이었다.

빛나는 가루가 강선이 처음 서 있던 가로등 쪽으로 흩어졌다. 상자를 들고 달려가서 주워 담고 싶다고, 은영은 생각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

 

 

 

전학생 옴

볼 건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새로운 게 나타난다. 은영은 직업적 겸허함을 느꼈다.

 

역시 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구해 주러, 잘 버텼다고 칭찬해 주러 오지 않는다.

 

늘 꼴통이라고 생각했던 선생이었다. 왜 제일 꼴통이 법과정치를 가르치는 건가, 그런 과목일수록 좋은 사람이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 말이다.

 

모르는 적보다 아는 적이 그나마 나으니까.

 

송치 :: 암소 뱃속의 송아지.
농업이 기계화되기 전에 소는 농사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중요한 생산도구이자 재산이었고, 늘 사람과 함께하여 정이 듬뿍 든 식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송치는 옛사람들의 소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반영된 말이다. 워낙에 중요한 가축이다 보니 다른 짐승과는 다르게 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소중하게 여겨 별도의 이름으로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 사람 취기를 이해하게. 송치가 든 암소 고삐를 남의 손에 쥐여주는 그의 심사가 오죽이나 뒤틀리고 쓰렸겠는가? 모르긴 해도 다 키운 딸자식 여읜 듯했을 것이네.
[네이버 지식백과] 송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 말 풀이사전, 초판 1쇄 2004., 10쇄 2011., 박남일)

 

누군가는 매켄지의 변화를 두고 신수가 훤해졌다고 할 테지만 은영에겐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어마어마하게 탁해진 게 보였다. 선한 규칙도, 다른 것보다 위에 두는 가치도 없이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 특유의 탁함을 은영은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은영이 바늘 끝처럼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미워하는 마음에는 늘 죄책감과 자기 검열이 따르지만 매켄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매켄지를 미워하는 데에는 명쾌하고 시원한 부분까지 있었다.

 

살아간다는 거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구나. 욕심이 나는 거구나.

 

 

 

온건 교사 박대흥

교육을 자꾸 교육 아닌 것들이 방해하니 답답했다.

 

돌려서 잠그는 수도꼭지 같은 걸 풀리지 않을 때까지 잠근 것처럼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인표가 살짝 찌푸리며, 교장을 대놓고 욕하지 않는 선에서 은근한 불만과 동조를 표시해 왔다.

 

왜 역사는 역류 없이 흐르지 못하나요?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돌풍 속에 우리 둘이 안고 있었지

여기엔 잠시 있는 거예요, 라고 항상 내비치는 여자를 향해 감정적인 경계선을 넘기에는 인표가 너무 현명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별거 아닌 걸로 거짓말하는 사람들한테는 꼭 다른 꿍꿍이가 있어.”

“거짓말이 아니라 깃털 부풀리기 같은 거죠. 다들 하잖아요.”

 

은영은 자기 몸이 꼭 계획 없이 막 지어진 가건물이나 창고 같았다. 제 소유가 아닌 것들이 가끔 가득 들어찰 때도 있었으나 이내 빠져나가고 비바람에 시달리며 녹슬어 간신히, 안간히, 겨우겨우 서 있는 그런 슬레이트 건물 말이다.

 

마음속에서 부실한 선반 같은 것들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곳에서 낡은 나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려앉는 그런 소리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도 있을 듯한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이한 인기척, 불편한 웃음소리에 뒤돌아보았을 때 인표는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인표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던 학생이 깔깔거리며 도망쳤던 것이다. 도망치는 얼굴조차 웃고 있었다. 아이들만이 지을 수 있는 잔인한 웃음이었다.

 

레스보스 섬 :: 면적 약 2,100㎢. 인구 약 10만(1991). 주도(主都)는 미틸레네. 지형은 거의 삼각형을 이루나, 남안 중앙부에 칼로니만(灣)이 깊숙이 후미져 있으며, 섬의 최고점은 968m에 이른다. BC 7세기∼BC 6세기에 걸쳐 에게 문명의 한 중심지로서 번창하였다. BC 6세기에 활약한 이 섬 출생의 여류시인 사포가 남편과 사별한 후 소녀들을 이 섬에 모아 예술활동을 한 데서 ‘동성애의 여성’을 뜻하는 레즈비언(lesbian)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1462∼1913년에는 튀르키예가 영유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그리스령이 되었다. 섬 전체는 산지가 많으나 저지는 농경지로서 곡물 ·올리브 ·과일 ·아몬드 ·목화 등을 산출하며, 특히 포도주와 올리브유는 유명하다. 멸치 어업도 중요한 산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레스보스섬 [Lesbos I.]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인표는 이 갑작스러운 증오가 어디서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린 아이들을 다그쳤는데 그 나이 특유의 방어적인 얼굴로 한 아이가 말했다.

“더러워서요. 더러워서 때렸어요.”

더러운 게 뭔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게 교사로서 참담했다.

 

폭력이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맥상통하는 것이구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애초에 처음 한두 번을 용인해 주지 말았어야, 유야무야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을 문제였다.

 

그다음 주에는 지영이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만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사이, 띄엄띄엄 어색한 전화를 몇 번 걸었지만 전화 저편에서는 끊고 싶어 하는 기색이 분명했다. 얼마 안 있어 지영이 아예 전화를 받아 주지 않게 되었을 때는 인표도 아쉬움이 덜했다. 자연 소멸하는 태풍 같은 것, 가끔 경험해 보았으니까. 몇 주 설렜던 것으로 되었다 싶었다.

 

광개토대왕비를 흉내 낸 모양에 고전적인 서체로 ‘성실, 겸손, 인내’라고 쓰여 있었다. 셋을 합하면 결국 ‘복종’이 아닌가, 은영은 늘 끌끌 혀를 찼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대로 80년쯤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귀가 아파선지 은영은 자기 목소리가 꼭 남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오늘따라 잊지 않고 들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내일 버려야 한다 해도 다행이었다.

 

간만에 크게 절뚝이며 뛰어가는 인표의 뒷모습을 보자 은영은 약간 두근거림을 느꼈는데 두근거림인지 소화 장애인지 분명치는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용오름 :: 지표면과 높은 상공에서 부는 바람이 서로 방향이 다를 경우 아래위 부는 바람이 사이에는 회전하는 소용돌이 바람이 형성된다. 이때 지표면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상승하여 적란운이 형성되면 지표면 부근에 발생한 소용돌이 바람이 적란운 속으로 상승하여 거대한 회오리바람인 용오름(메조사이클론 Mesocyclone)이 형성된다. 이때 용오름은 상승기류의 통로가 되고 기압이 내려가게 된다. 이때 상승기류를 타고 상승하는 수증기들이 물방울이 되면서 구름으로 만들어져 깔때기 모양을 형성하게 된다. 이때의 구름을 벽운(碧雲)이라고 하는데 벽운은 점점 고도가 떨어지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지표면까지 내려와 소용돌이 구름을 만들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오름 [Mesocyclon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그때 인표에게도 기다렸던 순간이 찾아왔다. 하고 싶었던 말이 부스러져 안쪽으로 가라앉지 않고 확신의 총알이 되어 발사되는 순간이 말이다.

 

 

 

작가의 말

즐겁게 쓴 이야기라 영원히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또 이어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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