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공허한 십자가

헬조선의 알파고 2023. 7. 13. 00:00
728x90
 
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역대 최고의 문제작 『공허한 십자가』. 살인과 형벌, 속죄, 사형 제도의 존속, 생명의 소중함 등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를 다룬 이 작품은 속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숨 쉴 수 없을 만큼의 긴박한 전개, 자세하게 그려낸 주인공의 심정을 살펴보며 독자들이 책을 읽는 것에서 나아가 체험하게 해준다. 이를 통해 사형 제도와 속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어느 날, 프리라이터 하마오카 사요코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곧 마치무라 사쿠조라는 남자가 경찰에 출두, 돈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수하지만 이 사건에는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닌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나카하라와 그의 부인이었던 사요코. 그들은 강도에게 사랑하는 외동딸 마나미를 잃었다. 그 후 나카하라와 사요코 부부의 목표는 오직 범인의 사형뿐. 결국 범인은 사형을 당하지만, 부부는 서로 아픔만 껴안은 채 결국 이별을 선택한다. 딸을 잃은 지 11년 후, 한 형사가 나카하라를 찾아온다. 전 부인 사요코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사요코는 딸을 잃고 나카하라와 헤어진 후 최근까지 ‘사형 폐지론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사요코의 원고에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사요코의 취재 상대 이구치 사오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사요코를 죽인 범인 사쿠조의 사위 후미야와 그녀가 어린 시절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데…….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출판
자음과모음
출판일
2014.09.15

 

프롤로그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거절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순순히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비디오를 받았다.

 

즐거운 시간은 원래 순식간에 지나가는 법이다.

 

 

 

공허한 십자가

그 순간, 나카하라의 가슴속에서 새카만 구름이 뭉게뭉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꺼림칙한 기억이 되살아남과 동시에 불길한 생각이 솟구쳤다.

 

사요코는 울부짖으며 말을 토해냈다. 그러나 단지 단어를 늘어놓을 뿐, 문장을 만들지는 못했다. 지리멸렬한 단어의 나열에서 그는 어렴풋이 내용을 파악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상실감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이 상실감을 어떻게 뿌리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이없음이 지나쳐서 나카하라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나카하라 부부에게 범인이라는 증오할 만한 구체적인 대상이 밝혀진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재판관은 사형 판결을 피하기 위한 변명거리를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그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혼자 지옥에 떨어진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왜 내 딸이 죽어야 하는가.

 

가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과는 조금 다르다. 구태여 말하자면 허무함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위해서 헤어졌는데, 결국 좋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 다 행복해지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네 인생에는 밝은 빛이 비추지 않는다 — 운명을 관장하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행복의 절정에 있던 때이다. 아니, 당시에는 지금이 절정이라고 상상도 못 했다. 이 행복이 영원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딸을 잊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괴로운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즐거운 기억이 남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기묘한 대화였다. 아내가 잠시 친정에 가 있겠다고 했을 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것이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는 되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 같기도 하고,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던 말 같기도 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줘. 되도록 빨리 대답해줄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대답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놓고 아직도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자기혐오에 빠졌다. 자신은 아직 혼자 서 있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서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유영(遺影) :: 고인의 초상이나 사진.
그 사진은 할아버지에게 어떤 뜻을 지닌 것이었을까? 족보였을까? 훈장이었을까? 단순한 유영이었을까? 출처 <<박완서, 오만과 몽상>>
[네이버 국어사전] 유영[遺影]

 

그 애도 그렇게 말했지. 이 괴로움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아도 어쩔 수 없으니까 일단 앞을 향해 걸어가겠다고 말이야.

 

과학은 정말 무기력하고 진보도 너무 늦어.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야.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을음을 내고 있던 증오가 다시 새빨간 불길이 되어서 솟구치려고 했다.

 

“가령 사형 판결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유족의 승리가 아니다. 유족은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다만 필요한 순서, 당연한 절차가 끝났을 뿐이다. 사형 집행이 이루어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일도 없다. 그렇다면 사형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만약 범인이 살아 있으면 ‘왜 범인이 살아 있는가? 왜 범인에게 살아 있을 권리를 주는가?’라는 의문이 유족의 마음을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사형을 폐지하고 종신형을 도입하라는 의견도 있지만, 유족의 감정을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종신형에서 범인은 살아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매일 밥을 먹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어쩌면 취미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유족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번씩 끈질기게 말하지만, 사형 판결을 받는다고 유족의 마음이 풀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족에게 범인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흔히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말을 하는데,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의 죽음은 ‘속죄’도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곳을 지났다고 해서 앞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극복하고 어디로 가야 행복해질지는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통과점마저 빼앗기면 유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형 폐지란 바로 그런 것이다.”

 

사형도 나쁘지 않다는 건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 죽으니까, 그날을 누군가가 정해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사형을 형벌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지요. 재판을 통해서 그가 본 것은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가느냐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요. 그가 상고를 취하한 이유는 겨우 운명이 정해졌는데 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이제 모든 게 귀찮다,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형은 무력(無力)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재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절실하게 깨닫지 않았을까? 사형을 형벌로 여기지 않고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아무런 반성도 없이, 유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이, 다만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

 

애초에 교도소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갱생할 수 있을까?

 

가석방은 결국 교도소가 가득 찼다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무책임한 행위일 뿐이다.

 

대체 누가 ‘이 살인범은 교도소에 몇 년만 있으면 참사람이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살인자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겨우 손수건을 꺼냈지만 그보다 먼저 눈물이 땅에 떨어졌다.

 

다음 순간, 하나에의 몸속에 있는 모든 피가 술렁거렸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십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담배를 피우고 있다. 하루에 두 갑 피우는 일도 흔하다. 키스를 하다 담배 냄새가 난다고 손님이 화를 낸 적도 있다. 그런데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이상해진 것은 머리뿐이다. 담배가 수명을 줄인다면, 빨리 이 목숨을 빼앗아 가면 되지 않는가.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는 담배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고 다음 담배를 빼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꺼림칙한 예감은 계속 팽창되었다.

 

겨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신 담배를 빨아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담배를 끼운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을 구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어떤 대답을 찾고 있고, 그 대답을 찾는 데 내 경험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을래요?”

 

다른 가족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가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직감이 그녀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매우 평범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후미야는 사오리와 달리 오랜 세월에 걸쳐 평범한 가정을 쌓아 올린 것이다.

 

후미야는 팔짱을 낀 채 눈꺼풀을 꼭 감았다. 명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뛰어다니는 온갖 생각과 싸우는 것 같기도 했다. 나카하라는 그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미 각오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는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 그리고 왜 물건을 훔치게 되었는가. 사요코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사오리는 그 질문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사오리의 가슴에 박혔다. 칼끝은 마음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여 그동안 숨겨왔고, 이제 자신도 손을 댈 수 없는 오래된 상처에까지 닿았다. 그러자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잔물결이 순식간에 커다란 파도로 바뀌었다.

 

한편으로는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대로 멈추기를 바라는 복잡한 심경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자 사쿠조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 있는 수많은 주름도 일그러졌다.

 

분명히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평생 모른 채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실하게 사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특별히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죠.”

 

“난 당신 남편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겠지요. 지금의 법은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하니까요.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십자가라도, 적어도 감옥 안에서 등에 지고 있어야 돼요. 당신 남편을 그냥 봐주면 모든 살인을 봐줘야 할 여지가 생기게 돼요.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목소리의 톤이 계속 높아지면서 마지막은 날카로운 비명처럼 들렸다.

 

귀를 찢는 울음소리가 차가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당신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아마 이 의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겠지요. 이번에는 당신이 고민해서 내린 대답을 정답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노인도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도 역시 생과 사의 벼랑 끄트머리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미안함은 참담함으로 변했다.

 

 

 

옮긴이의 말

흔히 죄를 지은 사람은 평생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산다고 한다. 그런데 평생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은 살인자가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의 유족이 아닐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