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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영어 선생님

헬조선의 알파고 2023. 8. 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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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영어 선생님
저자는 평양과학기술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방북했다. 그러나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것은 하나의 구실이었다.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북한의 실상을 직접 보고 느끼고 그것을 글로 쓰는 것이었다. 수키 김은 왜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북한에 잠입했을까? 북한을 취재한 경험으로 미루어 수키는 북한 당국이 외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쓰는 조건으로 방북 취재를 허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키 김은 북한에 들어가서 살아 보지 않고는 북한에 관한 의미 있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국인 교수를 모집하는 평양과기대에서 가르치겠다고 신청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입국 허가를 받았다. [평양의 영어 선생님]은 그러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저자
수키 김
출판
디오네
출판일
2015.01.20

 

작가의 말

한국어판 작가의 말 : 이 책을 쓴 절실하고도 솔직한 이유

맥퀸-라이샤워 표기법(1937년 이래 미국에서 사용)

개정 로마자 표기법(남한의 공식 표기법)

 

옮긴이의 말 : 유려한 문장의 흔치 않은 북한 이야기

내가 번역을 하고 있다고 주변의 아는 분들한테 말하면 그들 대부분은 “연애 이야기, 사랑 이야기가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게 없으면 베스트셀러가 되기 어려울 것이란 농담도 했다. 수키 김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했더니 “제가 쓴 것이 모두 사랑 이야기인데요”라는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을 매우 사랑했으며 지금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프롤로그

그곳에서의 시간은 다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으면 하루하루가 그 이전의 하루와 똑같다. 이런 동일성은 영혼을 갉아 버려 인간을 해에 맞춰 깨어나고 어둠의 시작과 함께 잠이 드는, 단지 숨 쉬고 일하고 소비나 하는 사물쯤으로 만들어 버린다. 공허감은 느릿느릿한 하루와 함께 더 깊어져 가고 자신은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고 하찮아지게 된다. 그것이 내가 때때로 느꼈던 것이다. 계속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작은 벌레처럼. 그 냉혹한 진공 속에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소식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않았다. 누군가에 전화를 거는 일도,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는 일도 없었다.

 

텅 빈 평양 교외에서 밤낮으로 철저히 감시되는 캠퍼스로 위장된 감옥에 갇힌 우리에게는 서로들뿐이었다.

 

 

 

제1부. 반 아틀란티스

1

모든 비밀이 시대착오적이 돼 버린 세계적인 정보화 시대에 북한은 따로 떨어져 있다.

 

모든 이야기는 이전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결국 이곳과 고국을 갈라놓는 바다는 시간까지도 갈라놓는다.

 

“너 이런 식으로 계속 떠돌아다니다간 언젠가는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가 있게 될 거다.”

 

그 시절 한번은 이탈리아의 리구리아 해안에 머물렀는데 그곳의 진정한 느낌보다는 그냥 그런 곳에 있었다고 말하기가 더 좋은 곳이었다. 그곳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이상하게도 나를 감동시키지 못해 몇 년 뒤 나는 리구리아라는 단어를 대화 속에 집어넣을 기회를 찾곤 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원피스를 리구리아에서 지내던 가을에 자주 입었어” 또는 “나는 리구리아에서 쓰던 소설을 결국 마치지 못했어”라고 했다. 마치 내가 거기서 거의 두 달을 보냈던 것을 스스로 상기시키려고 하는 듯이.

어떤 경험들은 그렇다. 당신은 경험들을 통해 살지만 당신이 정말 거기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그 반대였다. 나의 첫 13년은 그 이후 어떤 것과도 다르게 내게는 현실로 남아 있었다.

 

그 자물쇠는 “열려라 참깨”가 통하지 않고 그래서 세계는 아마도 이것이 애초에 왜 단단히 잠겼는지, 그리고 누가 열쇠를 던져 버렸는지를 잊어버렸던 것 같다.

 

세계의 역사가들은 가끔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어떤 한국인도 그것이 잊혔다고 여기지 않는다. 한국 문화는 망각의 문화가 아니다. 전쟁은 현재 한국의 어디에나 있다.

 

평양은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약 190km 떨어져 가깝지만 만질 수 없는 그림자처럼 어렴풋하다.

 

상실은 치유가 안 되는 가슴앓이로, 마치 병처럼 기억되고 또 기억되며 당신은 그와 함께 누리기로 되어 있었던 공유하지 못한 삶을 혼자 남아 늘 생각한다.

 

장마 진 서울에서의 그해 여름 그의 e메일은 언뜻 보이는 태양 같았다.

 

2

그 소음 안에는 무시무시한 침묵이 있다. 수십 년간 모든 것을 입을 다물도록 했기 때문에 귀를 가까이 대 보면 고요함 뒤에 숨은 무언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다.

 

나의 피난처이자 감옥이 될 운명의 고립된 단지 건물들을 처음 보던 그 순간 두려운 감정이 나를 엄습했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나는 열세 살 때 뉴욕을 처음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처음 마주침은 역사도, 경고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밤새 나 자신이 지워져 버린 듯이 내가 알던 모든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뿌연 죽 또는 물기가 많은 삶은 쌀밥의 맛은 보이는 그대로였다.

 

우리는 함께 웃었지만 공허하게 느껴졌고 나의 불안감을 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서는 1953년에 누군가가 엄지로 정지 버튼을 누른 채로 학생들조차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3

대학 졸업 후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백 팩을 메고 홀로 떠난 떠돌이 생활 수년간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내 한계에 도전하면서 인생 모험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무언가에 쫓기듯 두려워했고 유럽과 중미를 넘나들며 우중충한 호스텔 방에서 명확한 이유 없이 울어 댔다. 그러나 세월이 마술을 부려 그 동떨어진 곳에서 그 당시 겁먹고 있던 소녀는 이제는 사라져 아주 가늘고 섬세한 실로 녹아들어 내 손에 만져지다가 다음 순간 놓쳐 버려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20년 뒤인 지금 그녀가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두려워하면서 다시 나타난 듯 느껴졌다.

 

그녀는 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결코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신은 인간들처럼 그녀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겐 사람의 고통에 대한 문턱은 저마다 다르다는 생각이 스쳤다.

 

케이티처럼 나도 나쁜 인연의 상처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수년간 그 고통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멀리 와 버리니 내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불행 속에서 못 떠나고 남아 있었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감옥 안에 오래 있을수록 담 너머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헤아리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우리가 만일 약속을 걸고 맹세했다고 해도 약속은 단지 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작가다. 언어가 흘러가는 시간의 불확실성을 가려 줄 뿐이라고 해도 나는 언어의 힘을 믿었다.

 

나는 전쟁 후에 국경의 양측에서 끝나 버린 과거의 연인들을 그려 보았다. 그 후 편지도 전화도 가능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신호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을 상상하였다. 나의 외할머니와 나의 대고모가 틀림없이 느꼈을 상실감과 갈망처럼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절망적으로 애타는 심정을 나는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연민과 정열은 이해하였고 며칠이 몇 주로, 다시 몇 년이 돼 가고 결국 나머지 인생 전부가 돼 가는 동안 국경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그들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나라 전체가 그리워하는 것을 상상하였다. 더 이상 이런 가혹한 장거리 연애는 없을 것이다. 영원한 기다림은 믿음의 시험대가 되었을 것이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오랫동안 한마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사랑은 모든 것을 치유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 죄로 처벌받았으니 강요된 이별은 그들의 심장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나는 이런 갇힌 마음이 펄펄 끓어올라 둘로 갈라져 병든 한반도의 공중으로 퍼지고 땅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것을 상상하였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필요로 해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를 원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4

거기에 그들, 나를 만든 사람들, 서로서로의 합침으로써 내가 그때 그곳에, 나의 역사에 설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집합체가 있었다.

 

역사란 수많은 그러한 비이성성의 기록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로는 1950년 6월 25일은 고요한 일요일이었다. 그녀는 마치 그것이 어제 벌어진 일인 것처럼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그녀 나이 겨우 네 살이었다. 그날 북한 포탄이 처음으로 서울에 떨어졌다. 그날은 미처 시작도 못 해 본 어머니의 유년시절의 끝이었다.

 

나는 이 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 눈 속의 두려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주의를 딴 데로 돌려서 비록 끝이 없는 이야기라도 그녀가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계속 질문을 한다. 원을 완성하지 않는 고리처럼.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틈처럼.

 

몽마르뜨 언덕 ::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 129m의 언덕을 이룬다. ‘마르스(군신)의 언덕(Mont de Mercure)’이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순교자의 언덕(Mont des Martyrs)’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1860년 파리에 편입되었다. 272년 성(聖)도니와 2명의 제자가 순교한 곳이며, 12세기에 베네딕트파의 수녀원이 건립되었다. 그 일부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생피에르 성당은 지금도 남아 있다. 2월혁명(1848) 전에 여기서 정치집회가 열렸으며, 파리코뮌(1871)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880년경부터 남쪽 비탈면에 카바레 등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기슭에 있는 클리시·블랑시·피가르 등의 광장 부근은 환락가가 되었다.
또한 근대미술의 발달을 촉진한 예술가들이 살았던 지역으로서도 유명하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래 고흐·로트레크를 비롯한 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들어 인상파·상징파·입체파 등의 발상지를 이루었으나, 20세기부터 점차 몽파르나스로 옮겨갔다. 그러나 언덕 위에 세워진 사크레쾨르 대성당(1910년 완성)은 순례지로서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아들고 있으며, 또 유서 깊은 저택과 물랭루주 등의 카바레가 있다. 그 외에도 옛집이 늘어선 거리는 19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아직도 화가들이 많이 찾아든다.
[네이버 지식백과] 몽마르트르 [Montmartr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사이폰 :: 용기를 기울이지 않고 높은 곳에 있는 액체를 낮은 곳으로 옮기는 연통관(連通管).
공기나 물체에 닿는 것을 기피하는 약액(藥液) 등을 옮기는 데 편리하며, 약액 등의 위에 뜬 맑은 액체만을 구분하여 옮길 수도 있다. 원리는 높은 쪽의 액면(液面)에 작용하는 대기압(大氣壓)으로 인해 액체가 관 안으로 밀어 올려지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낮은 쪽의 액면에도 대기압이 작용하고 있으나, 액체를 밀어올리는 힘은 액면 높이 차 h2-h1과 같은 높이를 가지는 액주(液柱)의 압력만큼 약하다.
또한 토목공학에 있어서는 관로(管路)의 대부분이 물매선 이상의 높이인 경우를 사이펀이라고 한다. 또한, 수증기 증류의 원리를 응용한 유리제의 커피포트(coffee pot)를 사이펀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이펀 [sipho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다시 마음이 원을 그리고 모든 길들이 1950년 6월 25일의 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를 잃은 어머니의 세대라면 인생은 영원히 ‘그날 이전’과 ‘그날 이후’로 나뉜다.

 

체념은 버릇이고 전염성이 있다.

 

이 젖가슴은 비록 다섯 아이만 남았지만 아홉 아기들에게 물렸던 것이다.

 

도원경 :: 桃 : 복숭아 도源 : 근원 원境 : 지경 경
동진(東晉) 때의 시인 도잠(陶潛:자는 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가다 보니 물 위로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오는데 향기롭기 그지없었다. 향기에 취해 꽃잎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앞에 커다란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양쪽으로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다.
수백 보에 걸치는 거리를 복숭아꽃이 춤추며 나는 가운데 자세히 보니 계곡 밑으로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그 동굴은 어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더니, 별안간 확 트인 밝은 세상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끝없이 너른 땅과 기름진 논밭, 풍요로운 마을과 뽕나무, 대나무밭 등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리번거리고 있는 어부에게 그곳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 모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부가 그들에게 궁금한 것을 묻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조상들이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식구와 함께 이곳으로 온 이후로 한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어부는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간을 머물렀다. 어부가 그곳을 떠나려 할 때 그들은 당부의 말을 하였다. "우리 마을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어부는 너무 신기한 나머지 길목마다 표시를 하고 돌아와서는 즉시 고을 태수에게 사실을 고하였다. 태수는 기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표시해 놓은 것이 없어져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유자기라는 고사(高士)가 이 말을 듣고 그곳을 찾으려 갖은 애를 썼으나 찾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곳을 찾으려 하지 않고, 도원경은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서양의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란 뜻이다. 도연명도 이상향으로 도원경을 그리며 인간이 찾을 수 없는 곳이라 말하고 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원경 [桃源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만약 그랬다면’이라는 주문이 다시 나온다. 나는 만약 그래서 다르게 펼쳐진, 사람 목숨이 구해지는 다른 운명, 다른 인생을 상상한다. 나는 그런 주문에 익숙하다. 이민자들에게 후회는 인생살이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어요?”

내가 묻는다.

얼마나 오래라야 충분히 오래된 것인가?

 

나는 자라면서 이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리고 늘 이야기가 다르게 끝나기를 바랐다. 다른 구성으로. 이 이야기는 나의 어머니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슬프고도 소름 끼치도록 흥분되었다. 하지만 훗날 나는 나의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가 수년간 했듯이 이것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 것이 일종의 치료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예순다섯이었다. 뇌졸중이 그녀의 영혼을 데려갔지만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의 영혼은 이미 오래전에 가 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5

그들은 늘 자신들이 최고라고 선언하면서 자신과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바깥 세계를 비교하였다. ‘최고’에 대한 집착은 이상하게도 어린아이 짓 같았고 ‘최고’와 ‘최대’라는 단어는 너무 자주 쓰여 그 의미를 점차 잃어 갔다.

 

우리는 늘 서로를 의심하였다. 경계선 주위로 끊임없이 돌면서 이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진이 빠졌다. 우리는 서로에 관해 알고 싶었지만 그런 정보를 우연히 발견하면 모두 얼어붙었다.

그것은 일종의 아슬아슬한 안무였다. 나는 그들을 더 밀고 나가고 싶었지만 너무 많이 나가지는 않았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유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나 유용한 사치품이었다.

 

6

삶이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들 사이에는 깊고 깊은 틈이 있었다.

 

특히나 우리들 인생이 큰 차이가 나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면 새롭게 연결된 연인들에게 떨어져 있는 두 달은 끝없이 긴 시간이었다.

 

우리는 온순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학대당하는 아이처럼 침묵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죄수가 되었는지, 얼마나 빠르게 우리 자유를 포기하였는지, 얼마나 빠르게 자유의 상실을 용인하였는지. 이 세상에서는 개인적인 요구는 없었고 모든 것에 대해 허가를 구하게 하는 것은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볍게 몇 마디를 하더니 우리에게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더 불안하게 하였다.

 

의심의 순간은 독과 같았다. 나는 그들이 누군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식을 겁내는 어머니 같은 마음이었고 극도로 나쁜 기분이었다.

 

7

그것이 특권계층의 자녀인 그들 미래의 지정된 항로였다.

 

8

그들은 무서워서 거짓말을 하고 수령의 위대성을 자랑하도록 강요받았거나 아니면 나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믿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중 어떤 것이 더 슬픈 현실인지 나는 정할 수 없었다.

 

9

그들은 신에 대한 깊은 믿음과 복음 전파의 열망 때문에 평양과기대에 왔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이 장소에 의해 마모돼 가고 있었다.

 

묘향산 :: 높이 1,909m이다. 묘향산맥의 중부에 있는 산으로 11세기 초부터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기는 산이라 하여 묘향산이라 불렀다. 예로부터 한국 5대 명산의 하나이자 조선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주고을에 속한 산이라 하여 연주산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려 중엽 이후에는 묘향산의 바위들이 희고 정갈하다는 뜻에서 태백산이라고도 하였다.
비로봉 북쪽인 희천시 부흥리·유중리(류중리)·향천리 지역에 속하는 반야골·원명골·향천골 일대를 구향산이라 하며 보현사가 있는 묘향천 골짜기 일대를 신향산이라고 한다. 지역적 개념에서는 신향산을 내향산으로, 구장군과 영원군 일대를 외향산이라 부른다. 묘향산이라 하면 흔히 풍치가 가장 뛰어난 신향산 일대를 말한다.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청천강 기슭까지, 동쪽으로는 대동강 기슭까지 뻗은 산들과 그 사이로 흐르는 묘향천·백령천·내창강·원명천 골짜기를 비롯한 수많은 골짜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봉우리는 진귀봉(1,832m)·원만봉(1,795m)·향로봉(1,599m)·오선봉(1,365m)·법왕봉(1,388m)·문필봉(1,531m)·백산(1,599m)·칼봉(1,530m)·형제봉(1,229m) 등이다.
중생대와 신생대 제3기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지각운동과 풍화작용으로 청천강 골짜기를 비롯한 주변지역이 내려앉으면서 비로봉 일대는 더 높이 솟고 골짜기들은 더 깊어져 지금의 산 모양을 이루었다. 기반암은 연화산암군에 속하는 흑운모화강암이며 주변에는 원생대의 퇴적암과 고생대 석회암이 분포한다.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바람이 세지 않으며 비교적 따뜻하다. 연평균기온은 8.3℃, 1월 평균기온은 -11.6℃, 8월 평균기온은 23.7℃이다. 특히 이 지역은 한국의 3대 다우지역에 속한다. 대표적인 하천은 묘향천으로 강선봉에서 발원하여 향산군 향암리에서 청천강으로 유입된다. 그밖에 외향산 일대에서 흐르는 백령천, 구양산 반야골에서 흐르는 부성천, 원명골에서 흐르는 원명천, 향천골에서 흐르는 진명천이 있으며 상원동과 만폭동 사이의 묘향천 기슭에 있는 묘향산약수가 유명하다.
저지대식물에서 고산식물에 이르기까지 식물분포가 다양하고 희귀한 동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북한에서는 묘향산 일대를 자연보호구로 지정하였다. 주요 수종은 소나무·참나무·신갈나무·찰피나무·물박달나무·전나무·종비나무·가문비나무·분비나무·눈향나무·눈잣나무·눈측백나무·만병초·들쭉 등이며 약초·산과일 등 임산물도 풍부하다. 동물로는 범·곰·산양·사향노루·산토끼·오소리·너구리·멧돼지 등 30여 종의 산짐승과 북한 천연기념물 제82호인 묘향산 파랑새(북한에서는 묘향산 청조)와 꿩·밀화부리·종다리·꾀꼬리·방울새·노랑할미새·딱따구리·뻐꾸기 등 130여 종의 조류가 서식한다.
묘향산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는 상원동·만폭동·천태동·칠성동·비로봉 등이 꼽힌다. 법왕봉과 오선봉 남쪽 사면에 있는 상원동에는 금강폭포·대하폭포·용연폭포(룡연폭포)·산주폭포·천신폭포 등과 인호대·용각석 등의 기암이 있다. 향로봉 남쪽 사면에 있는 만폭동에는 서곡폭포·무릉폭포·은선폭포·유선폭포·은정폭포·비선폭포·9층폭포·은하폭포 등과 만폭대·장수바위·비선대·단군대 등의 기암이 있다.
비로봉 일대에는 천태동과 칠성동 계곡을 비롯하여 삼경터·하비로암·금강암·보련대·강선대·천태폭포·이선남폭포·백운대·원만봉·진귀봉·만경폭포·수정소·사자폭포·비단폭포·은실폭포·칠성소·칠강협곡 의 명소가 있다. 외향산에는 석회암동굴인 용문대굴(룡문대굴)과 백령대굴이 있다.
묘향산에는 많은 사찰(360여 암자)이 있었으며 1592년(선조 25)에 왜적이 침입하자 승려 휴정이 묘향산을 중심으로 승병을 모아 의병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유적으로는 1028년 세워진 안심사와 1042년 세워진 보현사가 있다. 한국 5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보현사에는 대웅전·조계문·해탈문·천왕문·만세루·관음전과 보현사 9층탑, 보현사 8각13층석탑, 묘향산 보현사비 등이 있으며 상원암과 능인암 등의 부속암자가 있다.
그밖에 1947년 5월 건립된 묘향산역사박물관, 향산호텔 등이 있다. 묘향산 일대의 북한 천연기념물로는 묘향산 산뽕나무(88), 묘향산 들메나무(87), 상원암 은행나무(92), 묘향산 소나무(89) 등이 있다.
등산은 상원동·만폭동·비로봉 등산로를 이용한다. 또한 평양과 향산 사이에는 관광객을 위한 여객열차가 운행되며 관광도로도 건설되어 있다. 향산에서 묘향산까지는 관광버스가 다닌다.
[네이버 지식백과] 묘향산 [妙香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나는 그토록 소음이 전혀 없는 광경을 경험한 적이 없다. ‘소음’이란 문자 그대로 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소음, 닫힌 문 뒤에서 살아가는 삶의 증거를 말한다. 달려가는 개나 어린이들을 보지 못했고 굴뚝의 연기를 보지 못했으며 TV 수상기에서 나오는 번쩍거리는 빛을 보지 못했는데, 이것들이 나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내가 본 것의 진실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10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나는 바깥세상을 덜 생각했다. 그리움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접근이 완전히 불가능했으므로 오히려 내가 그것을 생각해 봤자 의미가 없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집은 이 캠퍼스와 이 나라 너머에 너무 멀리 있었다. 내 집은 이제 터무니없이 추상적인 것이었고, 비록 애인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때때로 고동치는 내 심장의 한구석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집에 나의 애인도 포함되어 버렸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나의 생존에 위험한 것이 됐다.

 

그들이 그런 거짓말들을 어릴 적에 들어서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그들이 터득한 생존 기술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들의 행위에 환멸을 느껴 가면서도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매우 쉬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많은 것을 공유했을 뿐 아니라 내가 훨씬 쉽게 서로를 믿는 세계에서 왔기 때문이었다.

 

불신은 더 큰 불신을 키웠다. 신뢰가 없는 관계는 성장할 수 없으며 학생들에 대한 나의 신뢰는 정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거짓말은 나를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함께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나는 사랑에서 동정으로, 혐오와 불신으로 갔다가 다시 공감과 사랑으로 돌아왔고 이런 감정의 전환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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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생들 누구나 8월이면 집에 간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런 척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우리만큼도 몰랐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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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름방학 때 계획이 뭐니?” 또는 “여자 친구 있니?” 하고 별 생각 없는 질문을 던지며 주변에서 해맑게 기웃거릴 때 그들은 죽음과 파괴를 준비하는 전쟁 때의 군인들 같이 교육되고 있었다.

 

프롬(Prom·졸업파티)

 

운동회 날 모든 어머니들이 모두 다르게 보이는 김밥을 싸 왔는데 어떤 것은 소용돌이 모양의 당근과 꽃 모양의 오이가 들어 있어 아주 공을 들인 것이었다. 어머니들도 마치 시합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게 영화였다면 남한의 예전 그 작은 소녀는 아마도 과거와의 어떤 합의를 찾았겠지만 감정의 연결 순간은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카프탄 :: 튀르키예 사람들이 입는 민족의상으로, 긴 소매에 앞 가락을 깊숙이 여며서 띠로 매어 입는 상의로, 양옆을 밑으로 길게 터 놓은 형태이다. 카프탄의 형태에 착안하여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1955년 가을에 발표한 양 옆을 길게 터놓은 코트 디자인을 '카프탄 코트'라고 불렀다. 서양에서는 관두의(貫頭衣)인 폰초식에 대응되는 말로서, 앞을 터놓는 식을 카프탄식 또는 카프탄형이라고 하며 의복의 기본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프탄 [caftan, kafta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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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자비란 없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지만 그렇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또다시 당황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는 침묵을 해석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들이 나의 침묵을 읽었듯 나는 그들의 침묵을 읽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들과 함께 영어로, 한국어로 이 노래를 불렀다. 그것이 내가 그들을 사랑했고 늘 그리워할 것이라는 걸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학생들만큼이나 말이 없었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할 때 “이 끔찍한 곳을 떠나라. 너희의 끔찍한 수령을 떠나라. 그것을 떠나거나 모두 개혁해라. 제발 무엇인가 하거라”라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울고 또 울다가 미소를 지었다. 학생들이 모두 나와 눈을 맞추고 미소로 화답했다. 그것이 우리의 작별인사였다.

 

“저희가 내일 배웅하겠습니다, 선생님.”

나는 그들이 “우리” 대신 ”나“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확보하기를 바랐지만 여기서는 ‘나’는 없었다. 위대한 수령의 허락이 없으면 ‘우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

 

다음 날 오전 6시 반, 나는 다른 교사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면서 교직원 기숙사 밖에 서서 그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내 학생들의 모습을 찾았다. 나는 여전히 어떤 예외가 만들어질 것이란 희망에 매달려 있었다.

 

 

 

제2부. 21세기의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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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는 우리가 상상한 것같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로 떨어져 있었서 우리가 치른 게 컸다.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였다. 우리는 간단하지도 않았고 쉽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자유세계는 도취시키는 불빛과 풍성함으로 나를 압도했으며 봄이 오는 방식은 매년 나를 멈추게 한다. 태양의 순수한 돌연함은 방해처럼 느껴지고 나는 그 몇 달의 대부분을 실내에서 지낸다. 나는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생명을 분출하는 것이 조심스러워 걸음마와 보고 느끼기를 배우는 아이처럼 머뭇거리게 된다.

 

강요된 검열은 이렇게나 빨리 자체 검열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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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에 밀리듯우연한 길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간 것들은 마구잡이식으로 경우에따라 제각각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부패는 도처에 있었다. 그들의 학점은 그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가끔은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나에게는 ‘시간 낭비’로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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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사라졌다는 공허함이 나를 흠뻑 적시더니 씻겨 나가지 않았다.

 

가끔은 그가 뉴욕에 사는 어려움에 관해 말했는데 그것은 나도 알았거나 과거에 알았었던 것이지만 그 ‘어려움들’이라는 것이 이제는 비현실적인 것 같아 보였다.

 

그로부터 연락받기를 갈구했으면서도 한동안 그가 메일을 쓰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졌다.

 

두 개의 한국 중 한쪽을 방문할 때 나는 항상 나의 뿌리를 찾아 헤매며 나의 과거에 관한 새로운 진실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리워했던 과거는 수많은 세월 동안 미국과 중국의 영향 아래 묻혔고 압도당했다는 생각이 지금 들었다. 내 상상 속의 한국은 그림과 역사책에, 나이 든 세대의 기억 속에, 그리고 묻혀 버린 시간으로부터 삐쭉 나온 유리 조각처럼 때때로 내가 언뜻 보았던 흔적들에나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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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구석으로 뒷걸음질친 나라였다.

 

18

그곳은 아름다웠지만 해변이나 물에 누구도 들어가도록 허가된 것 같지 않았고 그래서 으스스했다. 그 절대적인 진공상태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 ::  1960년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누린 듀오로, 특히 1968년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졸업(The Graduation)>의 사운드트랙으로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다 1970년에 발표한 앨범 를 마지막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뉴욕의 포레스트 힐이란 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낸 폴 사이먼(Paul Frederick Simon)과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이 결성한 듀오이다. 이들은 만화 영화에서 이름을 딴 '톰과 제리(Tom & Jerry)'라는 이름으로 1957년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때는 초기 로큰롤 스타인 에벌리 브라더스 스타일의 노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잠시 결별했던 둘은 1962년 재결합하여 1964년 데뷔 앨범인 ‘Wednesday Morning 3 A.M.’을 내놓았지만 큰 히트를 치지 못하면서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65년 탐 윌슨이라는 프로듀서가 그들의 노래 'Sounds of Silence'를 편곡하여 발표하였고 이 곡이 히트를 치게 되면서 재결합하게 되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이때부터 1970년에 발표된 앨범 <Bridge Over Troubled Water>에 이르기까지 약 7년간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1968년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졸업(The Graduation)>의 사운드트랙은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미국에서만 900만 장이 판매되었고 빌보드 앨범 차트 9주 연속 1위 기록), 같은 해의 <BOOKENDS> 앨범은 빌보드 차트 7주 연속 1위 기록은 물론 2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또 1970년 발매한 <Bridge Over Troubled Water> 앨범은 10주 연속 차트 1위와 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히트를 기록했고, 그래미상 수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사이먼 앤 카펑클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마지막으로 해체를 선언하면서 수많은 음악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후 10년 뒤인 1981년 일시 재결합해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라이브 공연을 갖기도 했으나 더 이상의 팀 활동은 하지 않았다.
이후 폴 사이먼은 솔로 뮤지션으로, 아트 가펑클은 가수 겸 평화운동가로 활약하며 각자의 길을 찾아갔다. 특히 폴 사이먼은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2003년 10월 사이먼앤 가펑클은 22년 만에 재결합하여 히트곡 'Old Friends'를 내걸고 2달 동안 북미 지역을 순회하며 대규모의 공연을 가졌으며, 2004년까지 약 1억 2,3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사이먼 앤 가펑클은 2003년 2월 그래미상 '평생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또 2009년 6월에도 다시 뭉쳐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호주와 일본 등에서 재결합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이먼 앤 가펑클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19

이제 돌아온 지 한 달이 넘어가자 항상 감시당한다는 기분에 나 자신도 지쳐 가고 있었다. 마치 모래가 얼굴에 부어지는 듯, 산 채로 묻힌 듯한 느낌이었다.

 

20

나는 점점 주의하지 않게 돼 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달이 지나니까 감옥이 때로는 집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불필요하게 거칠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 사이의 간격이 심연처럼 느껴졌다.

 

21

그들의 위대한 수령은 항상 태양에 비유되었다. 김일성의 생일은 태양절이었고 김정일은 “21세기의 태양”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태양에서 온기는 나오지 않았다.

 

22

처음부터 끝까지, 나아가는 것도 없고 걸어가는 것도 아닌, 제자리를 맴도는 음색만 나왔다. 시작도 끝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지 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와 살고 있었고, 우리가 숙제로 리포트를 써 오라고 하거나 식사 때 대화를 하면서 일부 지식을 알아 올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의 진공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불편함이 돼 가고 있었다. 서양 문화의 산물인 우리는 이러한 진공이 배움의 진정한 방해물이라는 점을 일깨워 줬다.

 

23

봉쇄된 국경은 38도선에만 있지 않았고 도처에, 개개인의 마음에서, 과거를 봉쇄하고 미래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내가 이 소년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또는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장벽은 무너뜨릴 수 없으며 그뿐 아니라 결국 영속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납득돼 가고 있었다.

 

24

너는 세계에는 한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네가 세계라는 걸 기억해라.

 

배는 천천히 떠난다. 그러니 나를 기다려 줘.

 

“듣는 모든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 버릇이 돼 버렸던 것 같습니다.”

 

25

모든 것이 당신을 예속시키기 위해, 당신의 의지를 붙잡아 두기 위해 설계되었다. 우리는 정부에 의해 조정되었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배신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고 나의 혼합된 충성심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26

우리는 밖이 더 밝아지기를 기다렸는데, 마술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마치 황폐한 땅에서 일어나려는 것들을 무엇이든 뒤덮으려는 듯 그 마지막 날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27

“이봐, 젠틀맨들. 나는 아직 가지 않았고 저녁에도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 그때 보자.”

그 말에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떠났고 우리들 중 누구도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란 걸 몰랐다. 최소한 그렇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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